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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지의 시」 中 "위기지학의 시"/ 이성복
시는 한 편 쓰나 천 편 쓰나 차이가 없어요. 한 편, 한 편에 천 편의 수준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한 편이 수준 미달이면 아무것도 안 쓴거나 마찬가지예요.
인간정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분야가 시와 수학과 음악이라고 하지요. 시 수학 음악 이 세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에요. 세 가지 모두 패턴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거예요. 시인이 하는 일도 일상생활 속에 숨겨진 패턴을 찾아내는 거라 할 수 있어요.
어떻든 모든 것의 궁극적 판단은 미추에 달려 있어요. 제일의 기준은 진이나 선이 아닌 미예요. 어떨 때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느냐 하면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것들 속에서 불현듯 패턴이 드러날 때예요. 패턴은 다른 말로 주제 테마 혹은 모티브라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바로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거예요.
시의 재료인 언어는 국가와 민족, 역사와 환경의 제약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실제적인 삶에 즉물적으로 즉자적으로 가장 가까이 다갈 수 있는 도구예요. 달리 말하면 언어는 우리 삶의 최전선이지요.
제가 앓고 있는 아픔은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아픔이 아니거든요. 인생이란 것 자체의 아픔이에요. 이 아픔은 치유될 수가 없는 거예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란 말도 있지만 이 아픔은 죽어서야 끝나요.
언제나 자신에게 질문해 봐야 해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이나 일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을. 가짜가 아닌 게 진실이지요. 진실은 아름다운 거예요. 거짓은 절대 아름다울 수 없어요.
예술가와 예수라는 존재는 참 가까운 거 같아요. 희망은 언제나 더 큰 절망에서 생겨요. 예수가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보다 크고, 또 그 아픔을 스스로 자진해 살아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저는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분들 마음 속에서 제가 그 자리(시의 자리, 시인의 자리)에 서 있는 한, 그 자리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꾸 자신을 돌아봐야 해요.
본립도생이라는 말이 있어요. 근본이 세워지면 길은 자연히 나온다는 거지요. 시는 써도 되고 안써도 되요. 내가 꼭 시를 써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기본이 안된 상태에서 쓰는 글은 쓰나 마나 한 글이고 써서도 안될 글이에요. 글쓰기에서 기본이란 대상과 독자에 대한 배려예요.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해 잠깐 눈을 감는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는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시력장애와 척추장애 남녀의 사랑을 다룬 다큐에서 나왔다는 이 말이 참 좋아요. 지금까지 제가 써온 자폐적인 글 말고 이런 게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문장을 보면 누구나 감동받게 돼 있어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안나푸르나 조난자 일기)". 저는 이글이 문학의 정수라고 생각해요. 문학을 한다는 건 그처럼 세상에 없는 길을 가는 거예요. 거미처럼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해요. 저는 이 글을 볼 때마다 나쓰메 소세키나 김수영을 생각하게 돼요. 그분들은 자기 자신을 소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글쓰기를 했어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길에서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거예요.
정말 좋은 문장은 눈물을 나게 하는 게 아니라 눈물이 깊은 속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거예요.
저는 문장을 어떻게 써야할 지 막막할 때 카프카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요. 카프카의 문장은 전부가 시예요. 거기에는 아무런 비유나 장식이 없지만 본질에 닿아 있어요.
시를 쓰려면 시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보다 좋은 시 읽는 것이 더 중요해요. 또 좋은 작가가 되기보다 좋은 독자가 되려는 게 글쓰기의 지름길이에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스승이 없으면 헤매게 돼요.
글쓰기에서 바른 길은 자기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 해요.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요. 결국 자기를 위한 공부(위기지학)을 해야 하는 거지요. 글 쓰기를 통해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돼요. 시가 뭔지, 시가 어디에 있는지 말이에요. 시는 각각의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즉 화자에게 있어요. 그 자리에 제대로 서면 모든 게 시가 돼요. 좋은 시는 언제나 독자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들어요.
어떻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헐벗고 누추한 것들의 유배지가 극지예요. 아무도 위안해 줄 수 없고 위로받을 수 없는 극지에서, 시 말고 무엇이 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주겠어요. 삶이 극지라면 당연히 시도 그래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에요. 극지의 시만이 희망이 될 수 있어요. 왜? 진실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야기하는 건 주제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에요.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는가의 문제예요. 그걸 알려면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그것을 자기 삶에 비추어 봐야 해요.
시는 바로 자신을 제물로 하여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이를테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위인지학은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이고, 밖에서 안으로 관심을 두는 위기지학은 성장이 무제한인 무한화서라 할 수 있겠지요.
전 우리시대 제일 뛰어난 시인은 황지우 최승자 박남철이라 생각해요. 황지우는 재능이 특별하고 최승자는 시에 순교했어요. 박남철은 뛰어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렇게 갈 줄 정말 몰랐어요.
남들한테 하는 배려는 자기 자신한테 하는 배려예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다치고 남도 다쳐요. 시는 "쓰는 사람"과 "대상"과 "읽는 사람"을 귀한 자리에 두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시를 믿어요. 믿고 싶어 믿는 게 아니라 믿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속절없이 바다에 내리는 눈이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ARENA」, 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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