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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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좋은 시

한국시 (7)(황광주 시)
2019년 11월 30일 11시 47분  조회:1793  추천:0  작성자: 륙도하
불랙커피 한잔이면 충분해


한기봉

어느 여행지 카페의 넓은 테라스
낡은 턴테이블의 음악에 몰입된 시간 너머
첫사랑 순정의 꽃잎이
잊힌 계절의 보푸라기처럼 나뒹군다.

퇴색한 잎의 주름위로
아직 다 피지 못한
국화꽃 한 무더기 실눈 뜨는 모습
애상에 눈을 뜬 연인들의 어깨너머로
반쯤 기운 가을의 어림이 애젓하다.

불에 탄 종이처럼
날리다 재가 되는 나뭇잎
따스했던 온기는 식어가고
울고 웃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

하얀 바람의 빗질에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의 처연한 이별쯤이야
낯선 여자의 향기와
블랙커피 한잔이면 충분하겠지

아,
가을보다 예쁜 애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주량

봉윤숙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처음 술을 마셨다
엄격한 손바닥 하나가 붉게 손상되자
자꾸 헛소리가 나왔다
아버지는 내 속에 들어와
비틀거리며 자꾸 울려고 한다
부계를 살피면 정승도 부자도 없지만
허름한 탁자와 술잔은 없다
술을 마시면 늘 친구를 잃어버리는 아버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어느 곳에 감춰놓고
밤새 마을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술 취한 자신을 친구라 굳게 믿었다
어쩌다 비틀거리는 비밀을 세상천지에 풀어놨을까
집안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졌지만
소주 하나에 안주 하나만 시켜놓으면
다 들통날 서글프고 빈약한 비밀들을
왜 함부로 들이켰을까
아버지에게 맡겨놓았던 미성년 찾아오던 날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나는 아버지를 못 견디고 결국 집 앞에 당도해
아버지를 토하고 말았다
누구나 어느 시절의 행동들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듯
비틀거리는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의
누추하고 쓸쓸한 주량 알 것 같다
아버지, 기분 좋았던 일생이
이렇게 허름한 가격이었다는 것
소주에 김치 쪼가리 하나밖에 안 되는
빈약한 가격이라는 것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주량이 있다

봉윤숙 시집 『꽃 앞의 계절』, 《한국문연》


 


애첩愛妾을 바꾸다

이인처럼


1

이제사 솔직히 고백하노니,

제법 아랫도리가 튼실해갈 무렵부터
곁에 애첩 하나 끼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늘 붙어 다니던
수족이나 다름없는 년이었지만

일갑자 나이를 넘기고서부터
노화가 안방마님처럼 퍼질러 앉아
벼라별 주접을 떨기 시작하더군

이목구비가 날로 쇠잔해진다 싶더니
오장육부도 따라 나서기 시작했고
팔 다리에 힘이 빠지니
윗도리 아랫도리 가릴 것 없이 신통찮아
년과 둘만 있는 시간이
거북해지고 성가신 생각마저 들게 했다네

더욱이 소일거리 삼아 새로 얻은
스마트한 색시에 빠지고나서 부터는
년은 내 안중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물론
가급적 기피하려는 중이기도 했지

차라리 가까운 일을 보는 것은 년이 없는 게
오히려 수월하고 맘이 더 편하더군

 


2

내 눈에 쏙 들어온 애첩을 새로 바꿔야했다
그녀의 허리가 졸지에 두동강나는 바람에

나에겐 수족이나 다를 바 없는 그녀도
난데없이 부러진게 아니라
주인인 나의 꼬락서니를 닮아
노화가 암암리에 진행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녀의 허리를 고쳐주려고 입원시켰다
완치하는데 한 보름 소요된다고
전문의(?)는 진단을 내렸고
나를 수발하느라 고생께나 한 그녀를
차마 헌신짝처럼 내동댕이 칠 수 없어
주저없이 수속을 끝냈다

아마도 그녀는 완치가 된다해도 약해빠진
그 허리로는 다른 년에게 쓸모가 밀려
본래의 제 기능이나 역할을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이제 권번에서 쫓겨난 퇴기처럼
유사시에만 내 눈을 시중들게 될 것이다

안경이라 불리는 그녀도
갈수록 신체기능이 떨어져 노화를 실감하는 나처럼
불현듯이 가버린 세월이 서러울까

생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서글픈 일이다




 

감자 송편 / 김 승

썩어야지 푹푹 썩어
무른 살은 악취와 함께 날아가고
곱게 부서진 뼈만 모여야지

꿈을 꿔야지
푹푹 썩고 난 뒤에 오는 세상을
그 아름다운 뼈들의 반란을

검은 뼛가루끼리 뭉쳐서
단단하게 뭉쳐서
넓은 세상을 만들고

살아서 허기진 배를
곱게 빻은 깨와 콩과
달콤한 설탕으로 가득 채워 봐야지
원 없이 먹어 봐야지

든든히 먹고
찜질방 같은 가마솥에 누워
다시 쓰는 역사를 꿈꿔야지



 

 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신용목

   비온 뒤 지구는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울고 난 뒤 너는 너만큼의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차 마실래?
  아니,
  아무도 저어주지 않아서
  물고기는 어항 속을 저 혼자 빙빙 돈다.

   물고기는 녹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입술에 물려주는 젖은 헝겊처럼 빨래가 널려 있다. 빨래는 어항 같다.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왔던 길을 가는 소리.
  물속처럼,
  너는 오후를 조용히 보낸다.
  후후, 불며 졸음이 졸음을 마시는 동안에도 옷은 조금씩 빨랫감이 되어간다.

  책을 펼치고 어떤 문장도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야기는 사막이거나 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는 낙타가 있고, 죽어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어느 모퉁이 식당에서 국수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책 속에도,
  책처럼 조용한 사람이 있다.
  끝.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간다.

  너머엔 학교가 있다. 여름이 운동장에 물길을 만들고 사라진 뒤 아이들은 다시 빗방울처럼 돌아올 것이다. 팔, 구, 사, 오, 전화번호를 크게 알리며 중고가전 수거 차량이 지나간다.

  어항은 식었다.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는 아닌데 / 황광주

모든 일들이 마음먹기 나름인데
마음한번 시원하게 갖으면 될 일인데
그게 그렇지 않은게 문제야.

모든게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상대방의 마음은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
그때가 되서야 조금 놓아주는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문제야.

요동쳤던 가슴들이 진정해야 할
그런 시간도 필요하고,
쓰리고 아프지만 덤덤한척
태연히 흘려보내야 할 시간도 필요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무심함에
나 혼자서 감내해야 할 짐을
나 혼자서 밖에 풀지 못한다는거
그게 혼자여서, 혼자여서라는게 문제야.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는 아닌데.




 

낙엽


엄마 아버지는 늘 타이른다
머리를 숙이고 살거라

하늘로 날아 갈 낼개가 있어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까닥은
땅이 하늘보다 가까워서가 아니다

유전자는 기계적 공식으로 대를 잇는다
가까운 것을 더 가깝게 번식시키는
하나의 죽은 방정식이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에 생기는 반골은
하늘이 가깝다고 고집해서 일까

고집이란 살아가는 유희이다
땅과 하늘의 거리에
기어코 고개숙이는 외로움도
햇빛과 아귀다툼한 것은 아니다

그냥 떨어지는 자유낙하에
풀어 버린 손맥에는 법이 따로 없다
김삿갓이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ㅡ ㅡ 생각없이 적어 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황광주

봄비 오는 아침에
길가 벚꽃나무는 벌써
꽃잎 젖어 떨어지더이다.
봄 기다리는 지친마음들이
어디 나 뿐이겠소만
봄이 왔어도 봄이 온 거 같지 않네.


 

나의 기도   / 황광주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심은,

아직도 젊은 마음으로
내일을 향해 걷고 있는 여린마음에
희망이 있다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삶을 재 인식하고
제게 주신 가치를 잊지않게 하심으로
앞으로의 삶 또한 더욱 더 소중히 하라는
깊은 뜻으로 믿습니다.

오늘을 함께 하고 있는
제 주변의 모든이에게 진정 감사하는
그런 하루가 되게 하소서.



 

추억이 내게 남은 방법 / 황광주

가 걸었던 그 길가에 나무들이
바람속에 흔들리며 손짓하네.
아련해진 기억들이 나뭇잎소리에
하나 둘씩 다시 찾아 오는데
초점없이 다가오는 낯익은 풍경은
나 어릴적 고향으로 변해가네.

내가 걸었던 그 길가의 추억들이
한자락꿈 기약없던 약속인데
이제와서 풋내나는 거친 숨소리로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네.
선명해진 기억들에 하나 더 있어
나 어릴적 동무의 반김이었네.

지금은 그 모두가 함께 하지 못하고
서로가 새롭게 만들었던 세상속에서
추억은 빛나는 별 하나로 남아있으리.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다고?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였다. 요조숙녀 새색시는 신혼생활 한 달여 만에 남편이 징용을 당했다. 한번 끌려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새색시는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을 당했다. 아이가 없어 외딴집에 혼자 사는 데, 선비차림의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문데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으니 헛간이라도 무방합니다.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데도 여인은 아녀자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여인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선비는 다시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외딴집에 혼자 사는 모양인데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외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사정을 말했다. 선비는 가지 않고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린들 무슨 소용이요. 우리는 아직 젊지 않습니까? 내가 책임을 질 테니 멀리 도망가서 함께 삽시다.”
 
사내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깊은 밤 인적도 없는 외딴집에서 여인 혼자서 뿌리치는 것은 무리였다.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며 조건을 걸었다. 그러자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여인은 일단 사내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부간에도 거역할 수 없는 정리가 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해서 그냥 당신을 따라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남편의 속옷을 싸 드릴 테니, 갈아입도록 전해주시오. 그리고 증표로 잘 받았다는 글 한 장만 받아 오십시오.
 
어차피 살아서 만나지 못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뜻으로, 내복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당신을 따라 나서면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만일 돌아오시면 평생을 당신에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사내는 내심 반가웠다.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그렇게 하시지요. 이들은 마침내 합방을 하였다.
 
흔드는 기척에 사내는 늦게야 잠에서 깨었다. 젊은 여자의 고운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선녀처럼 예뻐 보였다. 잠결에 보아도 양귀비가 따로 없다.
 
이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수 있다면, 하는 기대와 함께, 황홀감에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여인은 장롱 속에서 속옷을 꺼내 보자기에 싸서 사내 봇짐에 넣어주었다.
 
사내는 부지런히 걸어 부역장에 도착했다. 감독하는 관리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감독관이 말하기를, 옷을 갈아입히려면 그자를 공사장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한 사람이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동안 잠시 교대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사내는 관리가 시키는 대로 옷 보따리를 여인의 서방에게 건네주면서,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부인의 요청대로 편지 한 장 써서 주시고.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별 생각 없이 터벅터벅 난생 처음 보는 공사장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꼭꼭 접은 편지가 나왔다.
 
“아내 언년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를 받아들인 저를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옷을 갈아입은 즉시 집으로 돌아오시오.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어 저의 허물을 탓하시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으로 도로 들어가십시오.”
 
새 옷으로 갈아입은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아내에게 달려갔다. 다음 이야기는 말 안 해도 다 안다.
 
만리장성 공사현장에는 언젠가부터 실성한 사람 하나가 돌아다니는데.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하룻밤 밖에 못 잤는데, 하룻밤 밖에
못 잤는데...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



 

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  '피아노' 외 3편 / 최하연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놓고, 가만 귀 기울이고 있어요, 당신의 소원은 검은건반에서 뛰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 당신의 경전마다 엉터리 활자를 찍어놓고, 페이지를 봉인하고 있어요,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신발을 벗으며 '그것 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당신이 있던 그곳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당신의 멈칫함이 나를 일깨우는 바로 그 주문이길, 두들겨라, 두들겨라, (나의 건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의, 나를 위한 마침표는, 언제나 나의 시작 전에 찍히고 있어요, 도돌이표 마디마다 당신은 돌아오고 있겠지요, 가로지르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당신을 향한 나의 좌표를 잃게 만들고 싶어요, 당신은, 또다시 그 높은 절벽, 검은건반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있네요,


●  '물구나무의 태몽'

오사카에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다 심심해서 낚시를 했다, 강물은 묽은 색이었다, 낚시를 하던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오사카는 베를린에서의 추도식에 참가하기 위해 경유해야 할 곳, 오사카의 공원엔 오사카의 벚꽃이 피고 난 천삼백 원짜리 와플을 받아들고 비행기를 놓친다, 내 낚싯대엔 바늘이 없다

전화기를 열었다, 아무개 선생님 전화입니다, 지금 선생님은 베를린에 계신데 말씀을 남겨주시면, 성가대는 한 옥타브나 낮은 예배송을 불렀다,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합동 장례식이 추도식과 한 날 한 시에 열렸다, 낚시 동호회 사람들은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마침내 줄을 물고 올라온 물고기, 급하게 잡아 탄 택시엔 기사도 없고 안전벨트도 없고 이번에도 또 출발하지 못했다, 공항은 바다 건너 있고 램프 없는 대교 위에선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잡힌 물고기는 오래된 위생 랩을 친친 감고 있었다

랩을 푸는 동안 비행기가 왔다 가고, 할 일 없어진 나는 정성껏 랩을 풀어 물고기를 바다에 던진다, 용광로의 슬래그처럼, 물고기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이 전화기의 주인은 누구지? 생각하는 동안 네모난 집에서 나와 동그란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글루는 덥고 움막은 춥고 망루는 높아 스스로 동그란 집에서 쫓아낸다, 오사카엔 꽃이 피고 베를린에선 전화기의 주인이 아직도 참회 중이다

 
●  '물구나무 빌라'

어둠도 아래층에 있다 망치를 쥐고 무엇을 때려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버스를 풀어놓는다 어둠이 기워놓은 어둠을 입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둠을 세 논 주인을 만나야겠다 임시고정용 스프레이 풀과 색종이를 싸들고 소풍을 가야겠다 아래층 고양이 고양이는 밤눈이 어둡다

띄어쓸 수 없는 어둠도 있다 그 안엔 쉽게 잘라 쓸 수 없는 허방이 있다 허방 속엔 말라가며 비명 질는 치자꽃이 있다 가위를 들고 무엇을 잘라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수초들을 풀어놓는다 수초 속에는 눈먼 물고기들이 있다 내일은 수초의 망막을 제거해야겠다

갈아입을 옷 하나 없는 어둠과 아무것도 차리지 않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내가 삼키고 있는 어둠이 내 다리를 뜯는 어둠의 손을 꼭 잡고 있다 너무 먼 거리를 돌아와 쥐가 난 종아리가 그들의 위장 속에 있다 어둠 한 숟갈 덜어내고 남은 자리에 누워 어둠과 oo하고 싶다


● '포도밭' / 최하연

밤새 신발이 작아졌어
발이 자랐나봐
사원증을 단 여자 사람이
사원증을 단 여자 사람에게 말한다
신발이 작아진 것이 신발 탓이 아닌 세계로
신세계 식품관 봉투를 든 여자 사람이 들어온다
밤의 저수지엔 다리 저는 붉은 홍학이 살았고
저수지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엔
깊고 비린 어둠이 자라고 있었지
신발장 안에 저수지가 살아요?
그래서 목마른 짐승들이 신발장으로 모여드는군요
알에서 알이 깬다
와인에서 포도 싹이 난다
병아리들이 봉투에서 기어나와
옆자리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다
돌도끼를 든 사내들이 그 옆자리에서 튀어나와
포도밭으로 들이닥친다
까마귀가 사내들을 실어나른다
저수지 수면에 기록된 새떼의 표류기를
강독하는
우리 아빠가 마법사라구요?
객차와 승강장 사이가 멀어서
밤새 발이 자랐는데도
건널 수가 없다
새벽엔 몸이 무거워
관절은 관절마다 꺾이겠죠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사원증을 달지 않은 여자 사람이
사원증을 달지 않은 여자 사람에게 말한다
밤새 신발이 작아졌어
미친 거 아님?

⊙최하연/ 1971년 서울 출생. 2003년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피아노』(2007. 11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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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연은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시적 언어의 극한이 어디로 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이는 언어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 사이를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시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회의하는 일에서부터 비롯되거니와, 이러한 자의식으로 인해 시는 세계를 우리의 인식장 앞으로까지 내밀하게 당겨오는 언어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우리의 혀 바깥으로 밀어내는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끝없이 언어의 그물 바깥으로 도망치는 세계와 이를 포획하려는 언어 사이의 물고 물리는 추격전 도중에 최하연의 시는 돌연 어떤 특이한 영역으로 공간 이동을 감행한다. 그렇게 시가 도착한 곳은, 가장 가깝게 있다고 여겨진 대상이 실은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반대로 가장 멀리 존재한다고 느껴진 타자가 실상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갈비뼈 같은 곳에서 칼을 품고 있는(“너는, 다시, 내 늑골 깊숙이, 칼을 숨기고”), 치명적인 시공간이다.

이러한 괴이한 관계는 ‘언어’와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연인과의 사랑이 이와 닮지 않았는가. ‘피아노’는 이러한 언어의 문제를 사랑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킨 매력적인 시이다. 이 시에서 당신과 나는 각각 반음을 사이로 두고 피아노의 건반 위에 서 있다. 건반이라는 다분히 규정적인 세계 안에서 당신과 나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음과 반음 사이에는 또 다른 음의 분할선들이 무한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당신과 나 사이는 때로 “우주를 한 바퀴 돌아”야 할 거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가깝기에 도리어 그토록 아득한 너와 나 사이의 간격으로 인해, “그것 참”이라는 허탈한 고백을 내뱉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와 당신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망만은 지칠 줄 모르는 것이기에, 우리의 사랑은 “도돌이표”라는 법칙에 따라 오늘도 검은건반 위에 올라 기꺼이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이 영원할 것 같은 찰나의 낙차를 감당하려는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여, 두들기자, 두들기자.

 (강동호 문학평론가)



 

한계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소화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천양희, 「밥」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천양희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새로울 것 없는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 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아무리 가벼운 바람이라도
그 속에는 뼈가 있다고 말한 이는 또 누구더라

바람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같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새가 있던 자리 / 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 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을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
교통사고로 수차례 수술을 받은 후 느낀 삶의 아픔을 미술 작품으로 드러냄.
*『부서진 기둥』: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처절한 고통을
형상화한 작품.

 

우리 같은 사람들 / 천양희


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이
시집 한 권 달래서 드렸더니
우리 같은 사람들 얘기가 없다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
나는 놀라서
우리 같은 사람들 말고
울 같은 울타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고쳐 써 본다
어떤 울림이
울을 넘어 넘실거린다
몇 줄의 문장이
한 사람의 구구절절을 옮겨적는다
시 쓰는 동안
나는 아직 사람을 모른 것이다
인파 속에 사람이 부대끼는 줄 모르고
물결 속에 물방울이 흩어지는 줄 몰랐다
세상에는 좋은 일 나쁜 일이 있는게 아니라
이런 일 저런 일 있다는 걸 몰랐다
모르면서 모를 때마다
텅빈 몸이 텅텅거린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우리 같은 사람들이란 생각


『시로 여는 세상』 2018년봄호



글자를 놓친 하루 / 천양희


어느 시인의 시집을 받고
정진하기를 바란다는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
'ㄴ' 자를 빼먹고
정지하기를 바란다고 보내고 말았다
글자 한 자 놓친 것 때문에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졌다
'ㄴ'자 한 자가 모자라
신(神)이 되지 못한 시처럼

정진과 정지 사이에서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ㅤ하루

천양희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너에게 쓴다 -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추억 / 천양희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벼 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사람은 나이 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야기

일제시대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당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설에 의하면 그가 길을 지나가면 여인들이 자지러졌을 정도라 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기생 김영한 과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이나
가슴이 애린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하던 1936년, 회식 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잘 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백석은 이백의 싯귀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장애물이 등장한다.

유학파에, 당대최고의 직장인 함흥영생여고 영어선생 이었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 놓으려 한다.

백석은 결혼 첫날밤에 그의 연인 자야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것 없는 자신이 혹시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바로 만주로 올 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그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짓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즈녁히 와서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그러나 잠시동안 이라고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해방이되고  백석은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갔지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다.

그 후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백석은 평생을 자야를 그리워하며 북에서 1996년 사망한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자야는 대한민국의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한다.

훗날 자야는 당시 시가 1,000 억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이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자야는 폐암 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했는데 아깝지 않냐란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

고 하니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나 보다.

그리움이 가을잎을 발갛게 물들이는 날이 무수히 지나도, 부지런히 싸리빚으로 쓸어논 깨끗한 비탈길위에,
첫눈이 양탄자처럼 쌓이는 새벽이오면....응앙응앙 가픈숨 몰아쉬는 흰나귀 타고 찾아올 자야를 기다리던 백석의 사랑에 가슴이 아리다.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고
때론 그리워해도 만날수없는
 많은 사람들중에...
우린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있다는
큰 기쁨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더큰 욕심을 부리며 사는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오늘도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들~^^*


 

고향 ㅡ ㅡ 백석

나는 북관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편지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돌에 대하여

 이성복


돌은 제 얼굴을 만질 수 없다
아, 얼마나 답답할까
돌은 제 그림자를 숨길 수 없다
아, 얼마나 난처할까
돌은 제 눈물을 삼킬 수 없다
아, 얼마나 서러울까
전에는, 전에는 ......돌은 더듬거린다
여기는, 여기는 ......돌은 두리번거린다
돌은 부딪쳐도 부서진 줄을 모르고,
돌은 으스러져도 제 피를 볼 수 없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꽃피는 시절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시는 -캄캄한 인도하늘을 날으며  / 조병화


시는 공기처럼 우주 어디에나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는 시인에게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보고 감지할 수 있는 감성이 있고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그걸 말로 잡을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둔 그 시를
아름답게 닦고, 다듬어서
고독한 영혼들에게 뿌려 주는 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별처럼.


 

꿈 / 조병화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먼 아지랑이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2016 경향 신춘문예시 부문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 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당선소감>

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 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주는 날들이 올까.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과 ‘13시’ 나의 시동지들과 행운을 나눈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변희수(본명 변정숙)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대구 거주 | 영남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아,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시인 이시영·황인숙


 

포개어진 의자


              김소연

앉을래?
의자가 의자에게 말했다
서성일래,
의자가 대답한다

 

나무들이 서 있길래
뉘어주려고 폭풍이 들이닥쳤다
우리는 누운 나무를 보며 재앙을 점쳤다

 

잠든 사람의 조금 벌어진 입술이
기어코 천진해질 시간에

 

계절이 바뀌었고
틈을 벌린 채 나무는 새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 시작한다


 

천적

김학중

폐차장에 들어선 차들은
죽음에 이르러서 자신의 천적을 알게 된다고 해요
차를 부숴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앞 유리를 부수고
보닛을 찌그러뜨릴 때쯤이면
태어나 그처럼 맞아본 적 없는 차들은
백미러를 보며 길을 그리워한대요
길이 방목해 키우던 그 시절
세상 그 어디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던 그때를
회상에 빠진 헤드라이트가 그렁거리는 순간
차의 숨통을 끊어주는 게 폐차장에서 하는 일이래요
그러면 찌그러진 차체에 천적의 무늬가 떠오른대요
길의 무늬가 소름 돋듯이 뜬대요
계기판의 주행거리가 단지
오랫동안 길에게 쫓겼다는 증거였던 거죠
질주를 충동질하는 길이
후미등을 흉내 낸
빨간 신호등으로 자신을 길들여왔던 거죠
먹지도 못 하는 깡통을 만들어내는 천적 따위는
천적 축에 못 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폐차를 해본 사람은 잊지 않는대요
언제나 길은 제 위를 달릴 새 차가 필요하단 걸 말이에요

은밀한 포식을 즐기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
그 혓바닥 위로 당신도 막 걸음을 옮기고 있군요

프로필
김학중 : 서울 출생, 2009 (문학사상) 등단

시 감상

  먹이 사슬에서, 잡아먹히는 생물에 상대하여 잡아먹은 생물을 천적이라고 한다. 쥐와 고양이 같은 관계다. 살면서 무수하게 많은 천적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나보다 더 많은 재주가 있다거나 더 많이 무엇을 한 것이 아닌데도, 그 앞에만 서면 움츠려 든다. 나와 무엇이 다른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아! 나의 천적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든다. 한 달 남은 한 해, 내년엔 기필코 나를 이겨봐야겠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ㅤ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이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사랑인 기라

조홍래


바람도 숨죽인 맑은 날 밤
무서리 친다꼬 별일 있겄나
젖었다가
날 밝으모 늦가실 햇살에 말랐다가
그라다 떠나온 낭구 거름 되겄제

눈 오는 날이 푸근하다 캐도
니 품만큼 푸근하겄나
니캉 내캉 부둥켜 안고
눈 밟고 가는 달빛 소릴랑은
듣는 둥 마는 둥
오르락 내리락
하마 창가에 눈 쌓이는 소리 들릴랑가
섰다 누웠다 섰다 죽었다

물 겉은 무서리 친다꼬
꽃 안 죽는다
초겨울 서리 맞고도 국화는 튼실히 피더라
서리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그라다 보이 얼라도 다 컸삤네


    <심사평>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줄글(산문)이 아니라 마디글(운문)로 쓰면 대개 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잘 쓴 시냐? 못 쓴 시냐?"의 차이다. 잘 쓴 시란 욕심 없이 쓴 자연스런 글이다. 아는체 하지 않고 겸손하고 담담하되 정서적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조홍래 회원이 올린 시편에는 주관적 묘사를 통한 심상적 구조가 대체로 갖추어져 있다. 위의 시도 경상도 지역말로 시인 나름의 시적 대상에 대한 담론적, 의미적 탐구를 하고 있다.
   '무서리 친다꼬 별일 있겄나/젖었다가/날 밝으모 늦가실 햇살에 말랐다가/그라다 떠나온 낭구 거름 되겄제'
   삶을 관조하는 시다. 이런 시를 젊은 사람이 쓰기는 쉽지 않다. 습작의 시간이 많았음이 베여있다. 무서리 쳐도 꽃은 다시 피고 아등바둥 살아가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도 다 커고, 가을이 왔고 초겨울이 또 왔지만 그 서리 맞고도 국화는 튼실히 핀다는 표현들에서 아주 쉽지만 시를 밀고가는 힘이 느껴져서 앞으로 시를 제대로 쓸 수 있겠다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선했다. 이대흠 시인의 시처럼 토속적이고 구수한 지역말을 보존하는 일에 시인이 앞장서는 것은 장려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역말로 쓴 시는 시적 감흥이 없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언덕 위의 집

   서영처


  언덕 위에는 구름이 있고 햇살이 있고 하얀 집이 있고 하얀 집의 눈부신 고독이 있고 구름이
떠간다 바람이 분다 언덕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노루 사슴들 음표처럼 뛰어놀고 구름이 피어
나는 집 구름이불을 덮고 자는 집 창문으로 들락거리는 구름을 벽장에 차곡차곡 개어두는 집
들소들의 발굽 소리 지축을 흔들고 밤이면 별이 총총한 집 별무리들 모여 자는 귀가 환하게
밝아오는 집 언젠가 저 별들을 쫒아다닌 시절이 있다 바람 부는 날에도 언덕 위의 집 비오는
날에도 언덕 위의 집 걱정 근심 없는 집 메아리 찾아 골짜기를 헤매다 문득 올려다보면 햇살
아래 홀로 서 있는 집 근경은 없고 원경만 있는 집 세계를 정원으로 삼은 집 세계로부터 멀어진
섬 같은 집 아무도 살지 않는 집 공명하는 집 갈수록 희미하게 들리는 언덕 위의 집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고 백일잔치도 부고도 없고 그래도 내 노래는 언덕 위의 집 마지막 노래도 언덕 위의 집 언덕 위엔 구름이 흘러가고 햇살이 눈부시고 키 큰 나뭇가지에 매단 그네가 흔들리고 바람이분다 언덕 위에 집을 지어야한다 아이들 노루 사슴처럼 뛰어놀고 이제나저제나 근심이불을 덮고 자는 집 우는 아기 어르다 보면 가로등 총총한 고가도로 위로 자동차들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뿜으며 달려가고 벽장 속의 구름이불을 껴안고 아이들 시끌벅적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는 집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1월호


 

토마토

 조인선

고래 한 마리 입 벌리고 날아다닌다
간신히 몸을 굽혀 들어간다
거울이 깨져 있다
바람이 불려나
빛이 흔들린다
어두운 어머니 환한 미소 앞에
애꾸눈 아버지 무릎 꿇고 손 들고 있다
바람이 불려나
꽃이 진다
노란 스커트 밑에 새 알이 있다
바다는 왜 철사줄을 닮았나
늙은 고래 한 마리
사막에 누워 푸른 고등어 토한다
하늘 가득 고래가 날아다닌다


 

겨울아침 / 윤제림

역전다방 창가에 붙어 앉아 내려다보는 정거장 마당.
신발가게 주인은 귀마개 위로 장갑 낀 손을 붙이고 섰고,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검은 삽사리와 누렁이가
눈 위에서 한바탕 붙어 있다.
지금 막 계단을 내려간 다방처녀는 맨 종아리가
더 안쓰러운데, 연신 코트 깃만 고쳐 세우며
이발소 앞을 걸어가고 있다.
정거장 마당 깨랑 콩이랑 말린 나물이랑
꼭 한 움큼씩 벌여놓은 여자는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어서 기차 시간이 되어 더러 팔렸으면 좋겠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하루만의 위안>(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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