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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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좋은 시11
2020년 01월 05일 00시 10분  조회:1994  추천:0  작성자: 륙도하

 

내 남자 양말을 개다가 / 에해야

남편,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고
하루에도 열두 번 미웠다 애잔했다
남편 좋아하는 음식 파는 곳을 지나며
지갑부터 꺼내드는 내가 웃기다
남편 좋아하는 색깔 스웨터 보며
발길부터 멈추는 내가 참 그렇다
놀이터에서 애들과 놀아주는
동네 젊은 아빠들 보다
애들 어릴 때  테니스에 미쳐
아빠 테니스 치는 테니스장 철망담
코를 대고 들여다보게 하던 생각에
울화통 확 치밀다가도
이국의 칸나빛으로 노을 스러지고
햇볕 냄새 가득 든 마른 옷 걷어 들여
뒤꿈치 말갛게 닳은
남편 양말 차붓이 개다 보면
문득 남편이 그립다
그.러.다.가.
퇴근하고 들어올 때 굽은 등을 보면
괜히 화가 나는 것이다
그 애잔하고 서글픈 내 남자의 세월
그대로 읽혀져 화가 나는 것이다
등좀 펴고 다녀!
퉁명스러워도 마누라 인사가 반가운
내 남자는 속없이 헤벌쭉 웃는다


 

삼계탕 / 이정록

시신의 입에 불린 쌀을 넣듯
깨끗한 헝겊에 찹쌀을 싸서 담는다 버드나무 숟가락 대신
굵은 손으로 청주 한잔에 황기 인삼까지 모신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다 이제 목이 달아났으니
소름으로 느껴 볼 수밖에 없다
뱃속에 넣은 반합이라니?

새벽을 열어젖히던 목청과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생각 많던 머리도 버리고
가부좌 틀고 누웠다 에고나 뜨거워라
벌떡 일어나 앉으면 사리 그득한 부처의 환생이구나 싶겠지만
스스로 다리 포갠 것 아니라 대추 밤 마늘 쏟아지지 마라
지퍼 채운 전대 끈이었구나 화탕지옥 와불 같다만
발목의 피멍을 보니 야단법석 힘깨나 썼겠다
등짝엔 도리깨로 찍은 용 문신도 있겠다
가스레인지가 불두화 피워올리며 독경을 해도
열반은 육탈이라, 웅크리고 있는 것 다 풀어놓거라
허벅지며 앙가슴에 쇠젓가락을 찌른다

없는 발가락 당겨
사라진 미주알 가리려 애쓰는 동안
허공이 품은 넓고도 아름다워 안개도 풀어놓는다
선학표 쟁반 송학 위에
삼계*의 매듭을 풀어놓는다

*삼계: 불교의 세계관에서 중생이 생사유전한다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미망 세계.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은방울꽃 / 이정록

아버지는 안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서
식구들을 하나하나 불렀다.
노모에게 미안하단 말 올리고선
빗줄기 속에 서계셨다.
우리는 마루 끝에 나란히 서서
차렷경례를 올렸다.
아버지 이제 오세요?
어머니가 나오시지 않으면 나오실 때까지,
어머니가 서열을 잘못 찾으면 막내 옆
끝자리에 설 때까지
야간 점호는 계속 되었다.
왜 내가 끝자리래요?
어머니께서 댓 발 입술을 내밀면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당신이 막내보다 귀엽잖아.
찡긋 눈짓을 날렸다.
우리는 그제야 골방으로 기어들었고
어머니의 입술은 은방울꽃 가장 작은
봉오리가 되어 취한 아버지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드리는 거였다.
그런 날 꿈결엔 막내를 임신한 늙은 어미가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는 것이었다.
 

흙장난 / 이정록

흙장난한다고
혼내지 마세요.

저 무 좀 보세요.

흙 속에서
미끈덩,
저리도 잘 컸잖아요.
 

엄니의 남자 / 이정록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등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굴뚝연기 / 이정록

굴뚝연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의
차가운 등짝을
덥히고 왔기 때문이지

 

나도 이제 기와불사를 하기로 했다 / 이정록

  금강산 관광기념으로 깨진 기왓장 쪼가리를 숨겨오다
  북측 출입국사무소 컴퓨터 화면에 딱 걸렸다 부동자세로 심사를 기다린다 한국평화포럼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고 와서 이게 뭔 꼬락서닌가 콩당콩당 분단 반세기보다도 길다

  "시인이십네까?"
  "네."
  "뉘기보다도 조국산천을 사랑해야 할 시인 동무께서 이래도 되는 겁네까?"
  "잘못했습니다" "어찌 북측을 남측으로 옮겨가려 하십네까?"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데서 주웠습네까?"
  "신계사 앞입니다"
  "요거이 조국통일의 과업을 수행하다가 산화한 귀한 거이 아닙네까?"
  "몰라봤습니다"
  "있던 자리에 고대로 갖다놓아야 되지 않겠습네까?"
  "제가 말입니까?"
  "그럼 누가 합네까?"
  "일행과 같이 출국해야 하는데요"  
  "그럼 그쪽 사정을 백천번 살펴서 우리 측에서 갖다놓겠습네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네다 통일되면 시인 동무께서 갖다 놓을 수도 있겠디만, 고사이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네까? 그럼 잘 가시라요"

  한국전쟁 때 불탔다는 신계사, 그 기왓장 쪼가리가 아니었다면 어찌 북측 동무의 높고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리요 나도 이제 기와불사를 해야겠다, 쓰다듬고 쓰다듬는 가슴 속 작은 지붕 조국산천에 오체투지하고 있던 불사 한 채
                       
 시집 [정말] 창비 2010

 

남의 나이 / 이정록

환갑이 넘으면
남의 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허망하게 죽은 젊은이와
한 몸이 되어 황혼 길을 걷는다.
다시 맞은 봄으로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팔순이 지나면
남의 나이를 모신다고 한다.
기저귀 차고 떠난 젖먹이와
둥개둥개 한 몸이 된다.
때도 없이 어리광 부리고
떼쓰기와 삐치기와 사탕을 좋아한다.
아예 똥오줌도 못 가리는
갓난아기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혼은
모두 다 동갑내기 벗이 된다.

 

나무도 가슴이 시리다 / 이정록

남쪽으로
가지를 몰아놓은 저 졸참나무
북쪽 그늘진 둥치에만
이끼가 무성하다

아가야
아가야
미끄러지지 마라

포대기 끈을 동여매듯
댕댕이 덩굴이
푸른 이끼를 휘감고 있다

저 포대기 끈을 풀어보면
안다, 나무의 남쪽이
더 깊게 파여 있다
 
햇살만 그득했지
이끼도 없던 허허벌판의 앞가슴
제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덩굴이 지나간 자리가
갈비뼈를 도려낸 듯 오목하다

시집「의자」2006 문학과지성사

작가의 말 : 나 스스로를 위로할 때, 읽는 시입니다. '내 가슴도 포대기 끈이 묶여있던 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야' 쓰다듬어 줍시다. 돌주먹 쥐고, 자신을 쾅쾅 부수지 맙시다.


 

일생 / 이정록

알로 한 번
알에서 애벌레로 또 한 번

다시 번데기로 한 번
또다시 배추흰나비로 한 번

난 생일이 네 번이야
너처럼 음력 양력 다 따지면
여덟 번이나 되지

난 나를 낳고
나를 떠나보내지
 
마지막은 아예
상복을 입고 태어나지

 [문학의오늘] 2016 겨울호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골목의 번식

김은숙


발밑을 믿지 마세요 골목의 뒤통수는 백 년이 가도 썩지 않아요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도 봉지에 버려진 조약돌,
툭툭 발길에 채여요
어둠이 눈감아줬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람 빠진 축구공쯤으로 여겼을 거예요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봉지 속으로 꼬깃꼬깃 숨겨진 첫울음,
도심에는 한 방향만 암기한 검은 사각형들이 살아요
정육면체 어둠이 검은 시냇물이 되어 흘러요
밤이면 먹물 같은 골목, 징검다리는 없어요
그 안에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못할 때
종착지는 캄캄한 땅속이거나 고래 뱃속이었어요
뭔가를 산란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지난밤 그 골목은 비좁았어요
집안 어디쯤에서 폐품이 되기 좋은 질긴 산책로를 발견했나요? 창문 밖 골목 저 끝말이에요
봐! 저기! 저것 좀 봐! 소리친 게 당신이었나요?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사실상 누군가 목을 비틀어서 유기遺棄한 비닐봉투였죠
은밀함을 목 졸라 죽일 때는 낯선 저녁 역광 뒤쪽이 최고예요
역광을 믿지 않았던 고래는, 죽은 봉투를 해파리로 읽었어요
그것들은 간혹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 먹다 고래의 사인死因이 되기도 하죠
검정을 죽이고 돌아와, 비닐봉투가 피살되었다는 뉴스특보를 보더라도 웃음 짓는 것이 중요해요 한잔의 블랙커피를 삽으로 파고서 떨리는 증거들을 감쪽같이 묻어버리세요
지난밤에는 어둠을 자백하라고 길고양이들이 나를 포위했어요 묻어버린 시간과 폐기한 말들을 뱉어내라고 난리에요 그렇지만 최후의 단서를 들키지는 않았어요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깨트린 새 소리예요
길게 누운 골목, 졸음의 이마 위로 갓 태어난 개똥을 조심하세요
골목 왼쪽,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헤- 벌린
깃발처럼 펄럭이는 검은 농담들, 맞아요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20원짜리 비닐봉투 도둑으로 몰린 사건 아시죠?
두께도 없고 입구도 없는 혐의는 아메바보다 지루해요
괜찮아요 밀봉된 태아의 캄캄한 몸과 비명도 따지고 보면 고무장갑과 같은 족속
붉어서 아무도 구별 못 해요
매일 밤 태어난 어둠은 막다른 모퉁이에 검은 무덤을 만들고, 아침이면
기지개 켜는 코스모스가 그것들을 화려하게 변호하죠

 

[20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다양한 목격서사 통해 우리 시대 골목론 새롭게 써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은 10명의 응모작 37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작품을 숙독한 후 5명의 작품을 놓고 거듭 읽었다. 전체적으로 잘 다듬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들인 흔적이 역설적으로 기성품을 보는 것처럼 익숙했고 개성이 없었다. 기존의 시 미학에 갇혀 안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는 결코 신인이 될 수 없다.

내용적으로는 올 한 해 국내외에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들이 있었음에도 그러한 곳에 눈길을 보낸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적 충동과 사유에 충실한 작품도 고르기 어려웠다.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개인 서사에 집중하는 시들이 많았는데, 미시적인 시·공간 속에서 사소하다 싶은 세목들을 짚어내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이런 시들을 읽으며 우선 논의한 내용은 시의 소통 가능성이었다. 요설에 가까운 언어 비틀기나 이미지 왜곡 등이 지적되었고, 익숙한 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나열하는 무딘 언어 감각도 건강하게 소통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피어라, 숲’ 외 3편, ‘배고픈 이름’ 외 3편, ‘보성 댁 출항기’ 외 2편, ‘간이’ 외 5편, ‘그늘의 곳간’ 외 2편이었다. ‘그늘의 곳간’은 잘 쓴 시였지만, 그 ‘잘’의 의미가 기성의 시 문법에 고루하리만큼 충실하다는 쪽으로 해석되었다. ‘간이’는 외부 세계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으나 시적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실패함으로써 산문화되고 말았다. ‘보성 댁 출항기’는 입담이 좋았다. 그러나 입담에 산문성이 더해지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배고픈 이름’은 잘 짜였고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도 좋았다. 그러나 아귀가 딱딱 맞아가는 시상 전개가 역설적으로 시를 단순하게 만들고 말았다.

심사위원들은 ‘피어라, 숲’ 외 3편 가운데 ‘골목의 번식’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앞서 언급된 시에 비하면 불안정한 면들이 있지만, 자기 목소리에 충실하다는 점이 계속해서 시를 써나갈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특히 ‘골목’에 ‘유기’된 생명체와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목격서사를 통해 이 시는 우리 시대의 골목론을 새롭게 써나가고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시를 써나가기를 당부한다.


허영자 시인·문신 시인

 

[20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김은숙]

"아직 발굴되지 않은 세계를 찾아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갈 것“

누구는 있다 했고, 누구는 없다 했다. 내게 시 쓰기란, 그들이 말하는 있거나 없거나 한 전설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메마른 종이에 수없이 뭔가를 심고 물을 주었다. 아주 가끔 다른 생각을 했다. 때론 밤을 새웠고, 새벽에도 걸었다. 간혹 뭔가가 보였고 이내 사라졌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시가 무엇인지…. 그러나 길었던 육신의 삶보다 시 안에서 보낸 짧았던 시간이 더 아팠고 반짝였다. 이것은 낯선 영토에서 발굴하는 일종의 고고학 게임이었다.

내 키가 채송화만 했을 때 교실 뒤쪽에 내 시가 붙여졌다. 첫 경험이었다. 그 후, 세상 저쪽에서 긴 세월이 흘렀고 나는 날것의 생을 건너며 성인이 되어 있었다. 시는 환자와의 대화 속에서, 골방에서, 저녁 산책길에서, 출퇴근길에 수시로 고개 들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밤마다 한 줄의 문장으로 내게 오셨다. 기적이었다.

원고를 보내놓고, 습관처럼 책꽂이 속에서 하늘을 꺼냈다. 잔인하게 푸른 형광색 오후에 자주 밑줄을 그었다. 그날 성탄찬양 연습 중에 수화기 저쪽 음성 하나가 나를 잡아당겼다. (학교 안 가겠다던 아이처럼) 난공불락 같았던 시 앞에서 돌아서려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내 손을 잡고 그 벽과 친해질 수 있다고, 시의 눈을 마주 보라고 응원해주신 김명희 선생님. 내가 언어의 껍질을 깨고 노란 부리를 내밀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 그 믿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뜨겁고 따뜻한 은행나무 도반들과 나를 사랑하는 모든 문우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매일 새벽 기도로 응원해 준 남편(당신의 침묵은 행복한 천둥이었어.)과 가족들, 나의 영원한 고향인 엄마에게도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큰 용기가 필요했던 외출에 흔쾌히 문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앞으로 치명적인 무게의 적막과 동거하겠지만 그때마다 잘 견디겠다는 다짐을 새기며 허브향 촛불을 켠다.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가야겠다.


* 김은숙 작가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서울 송파문인협회 이사, 은행나무문학회, 송파수필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석:

2020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풀씨창고 쉭쉭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커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 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당선소감]

“쉬지 않고 묵묵히 시의 길 걸을 것”


치유 위해 내디딘 걸음이 행운 전해줘 이끌어준 분들께 고맙다 말하고파

한해를 돌아보는 천변의 산책길에서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온몸의 통증으로 병원 순례를 하다가 무조건 시집을 읽었던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시에 대한 첫걸음은 살기 위한 길이었고 고통의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쓰기가 이렇게 큰 영광으로 이어지다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아버지가 개간한 산비탈 밭의 농작물은 늘 멧돼지들의 몫이었습니다. 형편없는 수확물 앞에 엄마의 하소연과 저들도 한식구라던 아버지의 뚝심이 엉기는 날이면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날엔 멧돼지 등에 올라탄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작물을 지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멧돼지 발자국마다 애기똥풀이 피었고 개똥벌레들이 잡식동물들의 접근을 막아줬습니다. 잡초와 멧돼지랑 함께 먹고 살았던 유년의 밭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심 곳곳에 멧돼지가 출현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산비탈 밭에서 한참을 서성이곤 합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신 공광규·이종섶 선생님, 시클 고맙습니다. 지켜봐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오늘도 요양병원에서 자식들만 기다리고 있을 엄마, 당신의 기도대로 생의 가장 큰 선물을 안고 달려갑니다.


이주송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밀고 가는 역량 섬세하며 힘차 … 야생동물과의 상생까지 다뤄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선자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작품은 ‘그랴’와 ‘신기루’ 그리고 ‘풀씨창고 쉭쉭’이었다. ‘그랴’는 ‘그랴’라는 말을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환하고 따뜻하게 더듬고 있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다. 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아쉬웠고 다른 투고작에서 언어가 조금은 넘친다 싶었다. ‘신기루’는 독특한 비유와 이야기 방식으로 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모호한 지점이 없지 않았고 동봉한 작품에서 편차가 느껴졌다.

‘풀씨창고 쉭쉭’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풀씨가 아닌 멧돼지의 등에 힘차게 올라타 대지를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씨앗의 모습은 당찼고, 시를 밀고 가는 역량은 섬세하면서도 힘찼다. 선자들은 몇번이고 행간의 여백까지 반복해 읽어나가며 이 시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나, 마지막 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멧돼지의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산기슭이 들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덜 다듬어지거나 서툰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별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 “쉭쉭거리는 씨앗창고”의 풀씨는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이 극지에까지 초록의 생명력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응모자는 말의 호흡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야생동물과 사람의 상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까지 넌지시 덧붙여 던지고 있기도 한 이 시와 더불어 동봉한 다른 네편의 시에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선자들은 논의의 끄트머리에 닿아 당선작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피싱’ ‘씨앗 열개’ ‘사후(死後)’ 등의 작품이 논의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곽재구 시인 박성우 시인


 임영조​(1943~2003)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생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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