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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2016 춘제 앞둔 중국 얼롄(Erlian) 풍경 | |||||||||||||||||||||||||||||||||||||||||||||||||||||||||||||||||||||||||||||||||||||||||||||||||||
강 교수, 우리나라의 음력 설날에 해당하는 중국의 2016년 춘제(春节)를 앞둔 중국 현지 분위기 취재 마친뒤 곧바로 몽골 울란바토르로 복귀 완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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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Mongolia)=Break News GW】 중국의 2016년 춘제(春节)를 앞둔 중국 현지 분위기 취재를 위해 중국의 얼롄(Erlian=二连)에 전격 입성했던,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 교수(본지 몽골 특파원 겸 KBS 몽골 주재 해외 통신원)가, 몽골 울란바토르로 무사히 복귀했다. 이에, 향후 기록 보전을 위해, 2016 춘제를 앞둔 중국 얼롄(Erlian) 풍경을 화보로 엮어 싣는다. 본 기자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UB)를 떠나, 우리나라의 음력 설날에 해당하는 중국의 2016년 춘제(春节)를 앞둔 중국 현지 분위기 취재를 위해, 취재 현장인 몽골과 중국의 접경 도시인 중국의 얼롄(Erlian=二连)에 전격 입성했던 때는 2월 5일 금요일 오전이었다. 참고로, 몽골에서 중국 얼롄에 입성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UB) 출발 중국 얼롄(Erlian=二连) 행 국제열차로 몽골 최남단 자민우드(Zamiin Uud)까지 가서, 일단 열차에서 내린 다음, 지프를 타고 몽골과 중국의 접경 도시인 중국의 얼롄(Erlian=二连)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그 첫째요, 몽골 울란바토르(UB) 출발 중국 얼롄(Erlian=二连) 행 국제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어느 이름 모를 몽골 국경수비대 군인들의 거수 경례를 받으며, 직접 몽-중 국경을 직접 넘는 방법이 그 둘째이다. 첫 번째 방법은, 몽-중 국경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지프가 길게 줄지어 서 있는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단점이 있고, 두 번째 방법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는 장점이 있는 반면, 계속 열차에서 대기해야 하므로 그야말로 지독하게 지루하다는 단점이 있다. 본 기자는 이번에는 두 번째 방법을 통해 몽골 야간 국제 열차 MTZ 022편으로, 직접 중국 얼롄에 입성했다.
취재 현장인 몽골과 중국의 접경 도시인 중국의 얼롄(Erlian=二连) 역에서 내려 중국 입국 수속을 밟는데, 본 기자 바로 앞에 캐나다 국기를 배낭에 부착한 외국인이 눈에 띄었다.
콘래드(Konrad)라는 캐나다 국적의 청년이었는데, 현재 다롄(大连=大連=Dalian)에서 영어 강사로 재직 중이라고 했다. 이 캐나다 국민의 목적지는 베이징이었다. "캐나다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캘거리(Calgary)"라는 답이 돌아나왔다. "아, 캘거리!"라고 했더니, "캘거리를 아냐?"고 묻는다. "물론, 알고말고! 캐나다 앨버타 주에 있고, 그 주에서 캘거리(Calgary)가 제일 큰 도시 아닌가? 1988년 동계 올림픽 개최 도시이기도 하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한다. 이 캐나다 국민은 아마 모를 것이다. 본 기자가 국제체육기자연맹(AIPS) 체육기자로서 활동 중이고, 주몽골 대한민국 현직 대사가 부임 직전 주캐나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게다가, 이 캐나다 국민은 아마 모를 것이다. 캐나다 밴쿠버하고 러시아 소치라는 도시 때문에 강원도 평창이 두 번이나 깊은 슬픔에 잠겼었다는 걸! "하지만, 알면 어떠하고 모르면어떠하리! 어차피 2018년은 대한민국의 강원도 평창이 동계 올림픽의 중심지가 될 터인데!" 아주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콘래드(Konrad)라는 캐나다 국적의 청년과 본 기자는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향후 몽골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싶다 하니 울란바토르에서의 재회를 기대해 본다. 아울러, 타이밍만 맞는다면, 그 반대로 캘거리에서의 재회도 기대해 볼 만하다. 캘거리에는 본 기자가 소속돼 있는 재외동포언론인협회(OKJA=Overseas Korean Journalists Association, 회장 김훈) 정회원 기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중국 입국 수속을 끝내고, 취재 현장인 몽골과 중국의 접경 도시인 중국의 얼롄(Erlian=二连) 역 광장으로 나왔다.
즉각 얼롄 시장으로 가기로 했다. 공식적인 중국의 춘제(春節) 연휴가 2월 7일 월요일부터 개시되므로, 왁자지껄한 중국 시장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중국 현지 국민들에게 물으니, 이미 시장은 2월 3일 수요일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 왜냐. 이렇게 되면 현장 취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낭패로다! 본 기자는, 일단, 숙소로 염두에 둔 캉바호텔(Kangba Hotel=康霸宾馆)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캉바호텔(Kangba Hotel=康霸宾馆)도 문을 닫아놓은 상태였다. 마치, 중국 대륙에서 미아가 된 느낌이었다. 아니, 그 많던 중국 인민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캉바호텔(Kangba Hotel=康霸宾馆) 근처의 호텔에 여장을 풀고, 숙소에 틀어박혔다. 황량한 거리를 돌아다녀봤자 건질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침 이날은, 대한민국 국립국어원(NIKL) 국어기본법 시행 제10돌 2015년 마지막 한국어교원 자격 부여 심사 결과가 웹사이트를 통해 전격 발표된 날이었다. 하여, 본 기자는 대한민국 국립국어원(NIKL), 국어기본법 시행 제10돌 2015년 마지막 한국어교원 자격 부여 심사 결과와 관련한 한국어 교원 자격 제도에 대한 기사를 꼼꼼하게 작성했다. 얼롄 거리에 황혼이 지기 시작했다. 본 기자는 양고기 꼬치 구이집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뜻밖에도, 귀성한 줄로만 알았던 식당 주인 내외가 본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양고기 꼬치 식당 주인은 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주 고향을 다녀오는데, 굳이 명절이라는 이유로 고향에 갈 필요가 있나요. 명절에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야지요!" 자못 기분이 흥겨워진, 본 기자는, 하얼빈 맥주를 반주로 삼아, 양고기 꼬치 구이를 15대나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야들야들한 양고기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숙소로 돌아오려니, 당초 숙소로 염두에 두었던 캉바호텔(Kangba Hotel=康霸宾馆)은, 여전히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으나, 조명만은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캉바호텔(Kangba Hotel=康霸宾馆)이라! 명색이, 호텔 이름이 '편안 강(康), 으뜸 패(霸)'를 써서 강패(康霸, 중국 발음으로는 캉바)렸다? 강씨가 패권을 잡는다는 의미일까? 본 기자는 예전처럼 이번에도 배시시 웃었다. 분명한 것은 중국에도 강(康)이라는 성씨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얼빈 맥주를 몇 병 사 들고, 본의 아니게 숙소에서 쉬고만 있으려니 한없이 처량하였다. "좋은 사람들과 풍족하게 먹고 마시며, 시장에 나가서 원하는 물건을 사기도 하는게 지구촌 명절 풍경이건만, 어찌 하다 보니, 나는 이 썰렁한 도시에 오갈 데 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 아아, 오랜만에 북적북적한(=좁은 곳에 많은 사람이 모여 수선스럽게 들끓는) 정겨운 분위기를 느껴 보고 싶었던 내 소박한 바람은 정녕 개꿈이었던가?" 중국 얼롄 시장에 들러 흥정도 하고, 값도 후려치면서, 따뜻한 옷도 좀 사고 싶었던 본 기자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게다가, 사방에서 가끔 꽝꽝 터지는 폭죽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중국 국민들은 중국의 춘제(春节=Chunjie)를 앞두고 왜 이렇게 폭죽에 환장하는 것일까? 한참 전, 중국의 춘제(春节=Chunjie) 무렵에 중국을 방문했던 본 기자는 전쟁이 난 줄 알았었다. 지금은 적응이 됐다지만 그래도 왠지 짜증스러웠다. 밤새 터지는 폭죽 소리에 본 기자는 아무 것에도 도대체 집중할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는 폭죽이 시끄러운 것은 그렇다치자. 한 해 동안의 자신의 복을 위해(악귀를 쫓기 위해)서라는데, 다른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불이 나든 말든,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더 많은 폭죽을 그렇게 꼭 터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참으로 이기적이로다. 덕분에, 본 기자가 숙소로 사용한 호텔 주변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기관단총 소리 같기도 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해서, 본 기자는 마치 종군 기자(從軍記者, War Correspondent)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롄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얼롄 시내 거리 풍경이나마 디지털 카메라에게 담으려고 거리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예상했던 대로 시내 거리는 한없이 한산했다.
아침을 먹어야 했다. 다행히도,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레스토랑은 문을 열어 놓았다. 하지만, 본 기자는, 중국 현지의 한국식당 전주성(田州城)에서 따뜻한 한국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한민족 동포들의 정겨움을 느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간 중국 현지의 한국식당 전주성(田州城)은 무정하게도 문을 닫아 놓은 상태였다. 본 기자의 신세가 참으로 더욱 처량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거리로 나서자니, 견공(犬公)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문득, 개 같은 인생(my life as a dog)으로 빠져 든 느낌이었다. 왜냐. 이 견공(犬公)들이나 본 기자나 이 좋은 설날 명절을 앞두고 쫄쫄 굶고 있었으니까! "고국의 식구들이여, 형제 자매, 일가 친척들, 동문 수학 벗들이여! 푸짐한 음식을 정겹게 나누어야 할 이 좋은 설날 즈음에 이 몸은 중국 거리를 개처럼 헤매고 있노라! 아아, 유년 시절의 설날 풍경은 그 얼마나 푸짐했더냐!" 하지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닌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법!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 지는 법이다. 사람들은 물을 보면, 누구나 마신다든지,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지만, 그러나 지옥의 중생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본다던가? 다시 거리를 걷다 보니 중국 현지에 문을 연 삼성전자 제품 전문 판매점에서는 설날 구호를 적은 내림막 부착 작업이 한창이었다. 문득, '부귀(富貴)'란 낱말이 눈에 띄었다. 묻고 싶었다. "부귀(富貴)가 그토록 소원이더냐?" 이 사람들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이다 보니, 아마 바이블을 읽어 본 적이 없었으리!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는 말이, 한 순간, 본 기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그랬다! 2016년 2월 6일 토요일, 중국 얼롄 시장과 거리는 그야말로 황량하였다.
게다가, 얼롄 시내의 뒷거리는 더욱 썰렁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편의점에 해당하는 상점(=델구르)은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본 기자가 2년 전 설날 무렵 들렀던 지난 2014년, 몽골과 중국의 접경 도시인 이곳 중국의 얼롄(Erlien=二连)에는 몽골의 차간사르(Tsaggan sar=Цагаан сар) 제수 용품을 사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온 수많은 몽골 사람들로 북적였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의 얼롄(Erlien=二连)은 중국과는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곳곳의 잔설과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함이, 얼롄이 중국 영토이긴 중국 영토이되, 완전히 중국이 아닌 다른 영토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더 이상의 현장 취재가 의미없다고 판단한 본 기자는 즉각적인 울란바토르 복귀를 서둘렀다. 중국 입국은 국제열차로 이뤄졌지만, 몽골 복귀 입국은 중국 얼롄에서 지프차를 타고 몽골 최남단 자민우드(Zamiin Uud)로 넘어간 뒤, 자민우드에서 열차를 타든, 지프차를 타든 해서 실행하려는 속셈이었다. 마침, 얼롄 시장 근처에 지프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본 기자는 중국 얼롄에서 몽골 최남단 자민우드(Zamiin Uud)까지의 지프차 승차 가격을 80위안으로 흥정했다.
그런데, 지프차를 타려고 보니 지프차 조수석에 봉지에 담긴 말린 과일이 놓여 있었다. 본 기자에게, 지프차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린 과일은, 선조들을 기리는 제사상에 올린 다음, 식구들과 같이 나눠 먹을 음식입니다!" 요컨대, 가장이라는 의미였다. 문득, 박목월 시인의 가정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렸다. "아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 강아지 같은 것들아 /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 아니 지상에는 /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 존재한다 /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가슴이 뜨거위진 본 기자는, 이 기사에게, 당초 흥정했던 승차 가격인 80위안에 20위안을 더 얹어 100위안을 건네 주었다.
본 기차가 올라 탄 지프차는 몽-중 국경인 중국의 얼롄(Erlian=二连)의 최북단 중국 영토로 출발했다.
그런 다음, 본 기자는, 도착한 몽-중 국경인 중국의 얼롄(Erlian=二连)의 최북단 중국 영토 출국장에서 중국 출국 수속을 밟았다.
중국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본 기자는 이번에는 몽-중 국경인 몽골 자민우드의 최남단 몽골 영토로의 출발 준비를 했다.
그런데, 중국의 얼롄(Erlian=二连)의 최북단 중국 영토 출국장을 나서니, 중국 얼롄에서 지프차로 몽골 최남단 자민우드(Zamiin Uud)로 본 기자를 실어다 주기로 돼 있는 기사가 말하기를 "마침, 여기에 울란바토르로 지금 출발하는 지프차가 있으니, 이걸 타고 울란바토르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몽골 자민우드로 진입해서 열차 표 끊고 대기하고 하다 보면, 울란바토르 복귀 시각이 그만큼 지연된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본 기자는 흔쾌히 "그럽시다!"로 답했다. 울란바토르행 지프차로 바꿔 탄 본 기자는 몽-중 국경인 몽골 자민우드의 최남단 몽골 영토로 진입해, 몽골 입국장에서 몽골 입국 수속을 완료했다.
하지만, 몽골 자민우드로 접어드니, 몽골 설날인 차간 사르를 앞둔 몽골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 설날, 중국에 춘제(春节)가 있다면, 몽골에는 차간사르(Tsaggan sar=Цагаан сар)가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설날에 해당하는 차간사르라는 이 몽골의 명절은 주로 우리나라의 음력 설날이나 중국의 춘제(春节)와 같은 날이기도 하나, 문화적으로는 티베트(Тvвд=Tibet)의 음력 설날인 로사르(Losar)와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몽골의 차간사르는 티베트 불교 색채를 갖고 있는 몽골 전통에 따라 법력이 높은 몽골 불교 승려들에 의해 해마다 날짜가 1년 전에 정해진다. 올해 2016년 몽골 차간사르는 2월 9일 화요일로 정해져, 달의 차고 기욺을 기준하여 진행되는 역법인 이른바 음력(陰曆)에 따라 설날을 쇠는 우리나라의 설날인 2월 8일 월요일과 하루 차이가 나게 됐다.
본 기자는 서둘러 몽골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환전을 위해 환전소를 찾았다. 다행히 환전소는 문을 닫지 않은 상태였다.
본 기자는, 그렇게, 중국 런민비(人民币=Renminbi) 100위안 지폐 앞면에 새겨져 있는, 중국의 군인, 투쟁가, 혁명가이며 중국을 건국한 정치가이자 초대 국가 주석인, 마오쩌둥(毛泽东=毛澤東=Mao Zedong, 1893. 12. 26 ~ 1976. 09. 09) 동지와 안녕을 했다.
자민우드를 떠난 지프차는 몽골 울란바토르를 향해 북진에 나섰다. 드디어, 본 기자의 삶의 본거지인 울란바토르로 향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몽골 국도 위를 질주하는 지프차 좌우로 펼쳐진 몽골 초원에는 눈이 쌓여 그야말로 설원이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울란바토르로 북상 중인 지프차 앞을 양떼 무리들이 건방지게 가로막았다. "네 이놈들, 무례하도다! 이 행차가 어떤 행차인 줄 알고 감히 앞을 막느냐?" 우리나라 같았으면, 찻길동물사고(=로드킬=Road kill=轢死=동물들이 도로 위로 올라왔다가 차에 치여 사망하는 것)를 당해도 수 십 번 당했으련만, 엄연히 이곳은 몽골이었기에 운전 기사는 갑자기 속력을 줄여 차를 서서히 몰기 시작했다.
양떼들을 보며, 본 기자는, 문득, 우리나라 사람들이 '광개토대왕비'로 알고 있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비문(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歸)□人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서기 395년)에 광개토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을 지나고 부산(負山)을 넘어 염수(鹽水)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비려(碑麗)를 파하고 3개 마을 6~700영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했도다.)" 참고로, '국강상(國罡上)'은 광개토대왕이 묻힌 언덕 이름이요,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을 넓혔다는 뜻이요, 평안(平安)은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는 뜻이며, 호태왕(好太王)은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다. 현재, "광개토대왕이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한 곳이 어디냐?"는 한-중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중국 학자들은 만주 지역으로 보고 있으나, 한국 학자들은 중국 내몽골 지역의 샤르무룬(Шар мөрөн) 강(江) 유역으로 보고 있다. 아니, 샤르무룬(Шар мөрөн) 강(江) 유역의 휠씬 북쪽 지역일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본 기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내몽골 지역이 아닌 현재의 몽골 지역인 바로 이곳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본 기자는 갑자기 감격에 떨렸다. 야간 국제 열차로 몽골과 중국을 오가던 때는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그것도 한민족의 명절 2016년 설날을바로 앞둔 시점이었다. 요컨대, 광개토대왕의 비려(碑麗)(패려=稗麗라고도 불린다) 정벌 뒤, 1621년(2016-395)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사를 초월해, 광개토대왕의 숨결을 느끼던, 그 순간, 본 기자는 그야말로 감격에 겨워, 새삼스레 가슴이 떨렸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년 전부터 본 기자는, 역사 자료들을 차곡차곡 모으면서, 광개토대왕을 주제로 한 소설을 구상해 왔다. 몽골 현지에 거주하면서 그런 일도 못하면 어찌 글 쓰는 문인(文人)이라 할 수 있으랴!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시간 문제일 뿐, 언젠가는 탈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비려(碑麗)(패려=稗麗라고도 불린다)는 거란족의 한 갈래로서, 염수(鹽水=중국 시라무렌 강) 유역의 유목 국가였으며, 광개토왕 때 고구려에 정복되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한편, 몽골 국민들이 직계 선조로 추앙하고 있는 흉노(匈奴, Хүннү улс, 중국어 슝노)족은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국 내몽골 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성(甘肅省),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흉노(기원전 209년~155년)족은 이후 탁발부(93년~234년)⇒유연(330년~555년)⇒거란(4세기~11세기)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줄기는 돌궐(552년~744년)⇒위구르(742년~848년)⇒견곤(539년~1219년)으로 이어졌다. 요컨대, 고구려, 비려(碑麗)(패려=稗麗라고도 불린다), 흉노(匈奴, Хүннү улс, 중국어 슝노)족의 활동 시기가 겹친다. 따라서, 현재, 거란족으로 알려져 있는 비려(碑麗)(패려=稗麗라고도 불린다)가, 흉노(匈奴, Хүннү улс, 중국어 슝노)족과 어떤 관계였는지의 연구 결과에 따라 한-몽골 관계의 기원이 고려 시대에서 고구려 시대로 수직 상승해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도 가능하다. 몽골 설원에 황혼이 지기 시작했다. 풍경은 아름다웠으나, 마음 한 구석엔 왠지 모를 비애(悲哀)가 꽃잎처럼 휘날렸다.
우리나라 신석정(辛夕汀, 본명=辛錫正, 1907. 07. 07 ~ 1974. 07. 06) 시인의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의 "(앞 내용 줄임) 해는 저물어 저물어 / (중간 줄임)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라는 시 구절을 떠올렸다.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몽골 국도 위를 하염없이 달리는 지프차 안에서, 본 기자는, 중국이나 몽골은 그렇다치고, "지금쯤 고국에서는 설날을 맞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살다 간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생각했다. 이 글은 어느 특정 종교 찬양 일색으로 덮어놓고 부화뇌동해서 쓰는 글이 아니다. 그저 역사 학도의 눈으로, 역사적 측면에서 쓰는 글임을 분명히 밝혀 둔다. 아브라함의 나그네로서의 삶은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져,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왕국을 이루기까지 400년 동안 이방 땅에서 살게 된다. 왕국 형성 이후 이미 8세기에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이스라엘 무리 일부가 강제 이주되고, 701년 산헤립의 침공과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6세기의 포로 사건(597, 587, 582년)으로 남은 남유다 왕국의 많은 무리도 바벨론이나 이집트로 사로잡혀 가거나 이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해외 체류는, 이스라엘이 건국됐음에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잠시 해외 체류 중인 본 기자는 이스라엘 아브라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조족지혈=鳥足之血)다. 게다가, 본 기자는 식구들을 이끌고 지구촌을 유랑하는 영원한 나그네는 아니다. 왜냐. 본 기자의 식구들은 엄연히 대한민국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가고 있으니까.
한명숙이라는 우리나라 가수가 부른 '그리운 얼굴'이라는 가요의 노랫말을 떠올리며, 본 기자는 2월 6일 토요일 밤 늦게 지프차로, 장장 8시간 45분을 달린 끝에, 몽골 울란바토르로 무사히 복귀했다. "별들이 하나 둘 살아 나듯이 뽀얗게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눈 감으면 고~향이, 눈 뜨면 타~향! 구름은 하늘에서 서로 만나듯 강물도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도 고향길에 서로 만나서 조용히 고향 노래 서로 불러요!" 우리 모두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본 기자는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코리아 하우스 III 레스토랑으로 가서, 소주와 삼겹살을 시켜, 늦은 만찬을 즐겼다. 중국의 2016년 춘제(春节)와 같은 날인 2016년 한민족의 설날 D-2의 밤이 그렇게 지고 있었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alex1210@epost.go.kr Copyright ⓒBreak News GW,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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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2/07 [14:23] 최종편집: ⓒ 2018break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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