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는 무척이나 어렵게 살았다. 내가 아주 어릴때였는데 그때는 집에서 밥을 지으면 수수밥과 약간의 이밥을 섞어서 만들군했다. 중국어로는 꼬량미(소리발음 高粱米)라는 것인데 그때는 그것이라도 배불리 먹을수 있다면 다 괜찮은 집안이였다. 어쩌다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네 집에 가면 조밥을 먹을수 있어서 무척 좋았던 기억이 남는다. 그때는 배급제로 쌀을 나누어 주었고 돈이 있어도 쌀을 살수 없었다. 양표(양식표-粮票)라는것이 돈을 대신하여 있었는데 그 당시 중국에만 있은 특별한 유통화페였다. 양표도 전국통용되는것이 있었고 성급에서 통용되는것이 있었고 지방에서만 통용되는것이 있었다. 양표가 많으면 그나마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집 어느 서랍속에는 그때 아껴서 모아두었던 양표가 한묶음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걸 아끼지 말고 다 먹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후에 와서 생각해보았지만 부모님들의 그런 근검절약하는 정신이없었으면 어떻게 우리 삼형제에 할머니까지 여섯식구가 그 세월을 날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군한다.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여서 남존여비사상이 깊숙히 배여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밥을 해도 한쪽 구석에 약간의 이밥과 수수가 섞인 밥은 우리 아버지와 장손인 내 몪이고 그냥 수수밥 혹은 옥수수밥은 당신과 나의 어머니 그리고 두 누나들의 몪이였다. 그래도 그때 세월에는 서로 군소리 없이 한가마밥을 가득 퍼서 잘들 먹었다. 채소는 마당에 심어서 조금 먹을수 있었으나 콩기름같은것은 사기가 힘들었다. 어쩌다가 궈즈(한족들의 기름튀김 음식)에 콩물을 팔때면 새벽부터 누나들과 내가 나가서 길다랗게 줄을 서야했다. 그렇게 먹던 그 음식들은 모두 별미였고 천하 일품이였다. 그래서 천하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산해진미도 아니고 배고플때 먹는 것이라고 했나본다.
아버지는 그때 문화혁명의 억울함이 풀려서 시골양봉장에서 다시 현 토산공사에 오게 되였다. 그때 토산공사는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물을 통일로 거두어들여서 큰 도시에 가져다 파는일을 했는데 장사를 못하게 하는 세월이라 대부분 국영 아니면 집체 기업이였다. 아버지는 중국글이든 우리 글로된 문장이든 뭐든지 잘쓰시고 또 붓글씨도 명필이시라(적어도 내가 볼때는 명필임이 틀림없다.) 얼마안돼서 고장(지금의 과장에 해당함)이 되셨다. 그때는 종축장이라는데서 통일로 소를 잡았는데 고기와 뼈는 팔아도 소가죽은 국가에 바치게 돼있었다. 그걸 거두는 일을 토산공사에서 했던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월같으면 한국바람에 연변에서도 소꼬리값이 천정부지 올리솟아서 비싼 요리가 되였지만 그 당시 우리 풍습에는 소꼬리를 먹지 않았다.
소가죽을 팔러오는 농민들은 대부분 소꼬리가 그냥 디룽디룽 달린 소가죽을 가져오군 했다. 지금도 대부분 한족지역의 한족들은 소꼬리를 먹지않는다. 그때 토산공사에서는 소꼬리는 가죽공장에서 받지 않으니까 그냥 끊어서 버리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그런 소꼬리를 끊어서 자전거 뒷짐싣는곳에 끼워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가 웬 소꼬리를 가져왔느냐고 물을때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않으셨다. 한참지나 우리가 숙제를 마치고 있을라니 어디선가 고기굽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때는 고기한점을 먹을려면 설날이 돼야 겨우 한두점 맛볼 정도였다. 우리가 마당에 뛰여나가보니 아버지가 화로불에 소꼬리를 굽고 계셨다. 털을 다 그슬리고 있었는데 고기가 같이 타면서 나는 냄새에 군침이 스르르 돌았다.
“아버지,이걸 먹을수 있는거예요? ” 하고 물어보는 내 물음에 아버지가 <쉬~>하고 입을 막는 시늉을 하셨다. 우리가 사는 집은 회사에서 통일로 지은 집이였는데 단층 구조로 줄줄이 서있는 구조였다. 비록 널판자로 서로 담장은 만들었지만 한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 지간이라 소리나 냄새가 나기 마련이였다. 나는 혀를 홀랑내밀고는 입맛을 다시며 아버지 주위를 뱅뱅 돌았고 저녁이 되여 우리는 뜨끈한 소꼬리 곰탕에 밥을 말아먹을수 있었다.
그렇게 몇년동안 우리는 고기걱정없이 잘 먹으면서 컸다. 어떤때는 토산공사로 팔려 가져오는 가죽이 하루에 열장씩 들어올때가 있는데 꼬리가 열개씩 들어오면 냉장고도 없는 세월이라 그냥 큰가마에 넣어서 푹 고와먹었다. 그때 그맛을 정말 말로 표현할수 없다. 그렇다고 누구와 나누어 먹을수도 없는 입장이였다. 그 어려운 세월에 그런 <비밀>이 폭로되면 언제 우리한테 꼬리에 붙은 털오리라도 차례지겠는가?
아버지가 회사의 신문종이에 소꼬리를 싸서 자전거에 달고 올때면 어떤사람들이 의아해서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면 아버지는 재치있게 “어디 누가 약재에 쓴다고 구해달라고 해서 그러오.”라고 했단다.
요즘같으면 자기자식이나 손주들을 “귀여운 내새끼, 우리 강아지”하면서 안아주고 보듬어주었지만 그때는 어림도 없었다. 아버지는 비록 우리에게 그런 사랑표현을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형제자매는 그냥 눈빛만으로도 부모님의 사랑을 읽을수 있었다.
그렇게 어머님이 정성들여 끓여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그<약재>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보신탕이되였고 부모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순간이였다.
지금 내가 아버지가 되고보니 내 자식이 어쩌다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 점심이라도 거르면 그만큼 가슴 아픈일이 없다. 지가 장난치다가 점심시간을 잊어먹고 지났다해도 가슴이 아픈데 그 없던 세월에 자식들한테 맛있는 음식은 혹 아닐지라도 그냥 배불리 먹일수만 있다면 세상의 아버지들이 누군들 마다하셨을까.
그렇게 나는 언제나 맛있는 소꼬리 곰탕에 지금은 웰빙음식이라고 찾아먹는 수수밥을 말아먹으면서 행복한 동년을 보낼수 있었다.
그때 생각을 할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지혜가 너무 돋보이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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