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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드라마 한계에 이르렀나?
2013년 01월 18일 13시 21분  조회:10985  추천:2  작성자: 최균선
                           한국드라마 한계에 이르렀는가?
 
                                    진 언
 
   드라마는 행동하는 인간을 내세워 생활, 정감활동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예술형식으로서 사회, 인간의 인생화랑이다. 그래서 시대적상황에 근사한 인물과 내용으로 오락성만 아니라 반성할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 드라마제작의 첫목적이 리윤의 추구이 지만도 동시에 사람들의 정서에 영향을 줄수 있는 유익한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대부분 한국드라마들은 극정을 이루기 위하여 조작된 어거지삼각관계(약 99%), 불치병, 교통사고, 거의 모식으로 된 인위적인 기억상실계기, 신데렐라스토리…등이 기본모식이 되여있다. 한국드라마의 고질병인 뻔연한 설정 즉 입양 등을 계기로 한 출생비밀, 주요인물의 돌발사, 자극을 시도한 비론리적, 비현실적이며 극단적인 선악대결의 구도, 시대착오적인 전통적가치관념, 결혼관, 재벌집안의 반대, 고부간의 갈등, 구시대적인 캐릭터의 반복, 지루한 일상대화를 비롯한 진부한 에피소드의 전개등은 한국드라마가 새돌파구를 찾지못하고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 한다.

    드라마의 기본선은 애정의 갈등, 결혼풍파, 삼각관계와 지극히 리기적인 자기 보호에서 출발한 모략 등이다. 애정은 문학예술의 영원한 주제이지만 그먼저 인생의 주제이다. 한국드라마의 거의 모두가 애정풍파 스토리의 기본선으로 되여있고 기타 사업 등 생활내용은 애정선을 이어나간는 가교(架桥)로 설정되여있다. 드라마를 보면 한국사람들은 애정ㅡ이성지합을 위해 죽고사는것처럼 인지된다. 애정은 생활의 기본내용이고 인생의 동력이지만 삶의 목적자체일수는 없으며 인생자체일수 없다.

    태여나 남녀간의 사랑을 위해 산다는것은 너무 단순한 인생이다. 인생이 있기에 애정이 있지만 애정이 있기에 인생이 있는것은 아니다. 남녀의 결합을 도외시하고도 인생을 빛나게 살아간 사람들이 많다. 드라마마다 애정이 주선이라면 전형성을 잃는다. 전형환경과 전형인물이란 말을 쓰기싫고 쓰지 않는다해도 그 모든, 온갖 예술은 종국적으로 전형성을 모르고 형성될수 없다.

    말하자면 가정적연극의 울타리를 좀 벗어나 사회문제까지 소급되여 예술창작의 외연을 넓혀가야 복잡다단한 현실생활에 밀착될수 있다. 거기서 거기이고 그나물에 그밥인것같은 묵은 소재가 아닌 더 독특하고 다양한 소재를 다루어야 좋으련만 그냥 스토리가 비슷비슷하게 순환적이 되고있다. 모두어 말하면 시청자에게 말초신경적이고 무의미한 메시지가 아닌 보다 의미로운것을 전달하여야 한다는말이다.

    많은 드라마를 접한것같지만 드라마속의 전형인물과 더불어 련상되는 드라마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전형환경속에 전형인물의 부각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생동하고 진실하게 그려지지 못한 인물이 대부분이기때문이다. “사랑이 뭐길래”,“달빛 가족”과 같은 많은 우수한 드라마들은 세월이 오래가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형성을 띤 인물들과 그들의 생활적인 대화ㅡ정감교류의 진행과정과 장면들이 생생하다.

    며칠전 상영이 끝난《메이퀸》은 여느드라마보다 생활적이고 스토리가 잘 짜였지만 악행의 전개가 더 어찌될수 없는지경에까지 올라가서 결국 악이 저절로 포기한듯 선에 사과하고 선은 악을 용서하고 포용하는것으로 총총히 막을 내렸다. 다른 드라마처럼 일상대화의 련속으로 한집의 용량을 채우려하지 않고 스토리위주로 시종 긴장성을 유지하다가 보니 흡인력이 강하게 되였지만 그만큼 모순갈등의 절정에 치달아오를수록 그 해결이 막연했을것이다. 결국 권선징악이 아니라 중용지도이다.

    물론 캐릭터,에피소드 위주이면 갈등요소가 빈약하다고 느낌을 줄수도 있겠지만 소토리 위주의 한계의 극복에서 드라마의 성패가 결판나지 않을가 생각한다. 스토리의 긴밀한 전개로 하여 초반에는 재미있지만 갈등이 해결되면 앞에서 극에 이르도록 진행된 악행의 의미가 흐지부지해지고 결국 “그렇구 그렇지 뭐”하는 허무감만 안겨주면 좋지않다.《동해야 웃어라》는 결말을 보며 시청자들이 공연히 신경질적이 될 소지가 많아 시간을 랑비하고 정신건강에 리롭지 못한 실락감을 안게 된다.

    끝에서 동해와 도진이가 얼싸안고 화해할게면 왜 그렇게 갈등을 격화시켜 권선징악의 정당함을 유인해놓고 결국 한바탕의 인위적조성이였다는 사실로서 시청자들의 정서를 희롱했는가? 왜 갑자기 새와가 지고지순한 녀자가 되는지 이렇게 갑작스러운 캐릭터의 변화는 감정발전의 론리에 맞는지? 생명의 은인인 동해에게 인간으로서 차마 해선 안될 악행을 자행했음에도 인과보응은 왜 두루뭉실인가?

   보느라면 갑자기 바뀐 홍사장과 봉이엄마의 캐릭터가 결말을 이상하게 몰아가는듯 하다. 홍사장은 갑자기 량심의 가책(?)을 느끼고 동해에게 자기의 지분을 몰아줄것이며 봉이엄마의 가정적인 설득에 빠진 김선우가 잘못을 뉘우치고 자수할것이고 이로써 도진이 처리문제가 남는데…김준국장의 암투병이 형제의 꼬인 실타래를 푸는 열쇠가 되여 화해하며  동해가 용서해 줄것이라는 예감이 짙어가고…

    입만 열면 “이 자식이”란 말이 튕겨나오는 도진이나 그럴때마다 꼬박꼬박 존대하는 멍청한 동해나 서로가 용서하지 않을것같아 보이는데 나중엔 어이없게도 시청자들을 화해무드에 마주앉힌다. 하긴 칼을 놓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왜 선량한 사람만이 관용해야 하는가? 악인 갑자기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선인이 되는모식, 이것은 관용의 미학도 아니다. 동해는 태생적으로 모지라는 사람인가? 동해는 머슴같은 처지를 천성적으로 달게 접수하고 즐기는것는 바보로 되여있다.

    물론 인생이 론리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므로 정답이 있을수 없고 정감이 고정불변이 아니기에 고정적모식이 있을수는 없지만 무릇 어떠한 드라마이든 인물의 성격발전의 론리, 심리변화의 론리, 인식발전의 규률, 더나아가서 생활의 론리가 지켜져야 인물의 정서생활과 그로써 전개되는 장면, 장면들에 진실감이 확보된다.

    작가들이 서로 합작한듯 현실적으로 보편적이 아닌데도 마냥 상류층의 가정을 전형환경으로 삼고 재벌가에 들어가려는 녀자들의 추구가 공동한 주제이고 한국사회에 삶의 모식인듯이 비싸게 구는 녀자들에게 필이 꽂히는듯한 비현실적인 갈등들… 한국인들의 혼인관, 특히는 재벌가의 혼인생리가 드라마처럼 돼먹었다면 한국사회가 미시적으로 야단난다는 싱거운 우려심까지 안겨준다. 이는 거의 관례로 되였다.

   드라마《반짝반짝 빛나는》은 별다를것 없는 뻔한 스토리에 감질나는 녀자들의  흥미유발이 목적인듯 애정행각에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음 작가 개인의 미흡한 가치관을 비벼넣은것같다. 우선 개념이 정립되여있지 않다. 원칙적으론 애가 바뀌는 바람에 덕을 본 정원이가 대박이 난 “신데렐라”이고 그덕에 불행해졌다가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은 금란이의 조우는 너무나 조작감이 느껴진다.

   친딸의 캐릭터를 악녀로 형상화하고 가짜딸을 선한 품성과 이미지의 녀자로 부각하였는데 이는 혈통에 대한 부정인가? 또 가난한 남자는 아빠자격도 없는것처럼 그림으로써 현실성, 진실성을 등져버렸다. 이런 억지스러운 설정에 설득력이 떨어져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로 분위기를 창출해도 작가의 전지적인 서술이 한계를 넘었기에 지각있고 개념있는 시청자들은 작가가의 시도에 넘어가지 않는다. 배우들의 캐릭터가 자주 바뀌여 혼란되고 우롱당하는듯한 느낌들을 주고있다.

    구도상에서 공통점인 출생의 비밀과 선정적으로 자극하려는듯 바닥없는 악행의 련속, 그리고 선천적으로 부족하여 늘 당하는 약자들, 거의 어머니와 다름없는 이상 녀자(자기스승)와 열련에 빠지는 년하남의 현실성없는 애정극 등은 한국청년들의 진실한 애정가치취향을 오도하고있다. 그러나 녀자들의 형상들은 결국 전통관념에서 대남자주의가 뒤집어져 “대녀자주의”가 군림한듯한 인상을 주면서 한국녀자들은 다 암펌이고 악녀였다가 천사처럼 거룩하게 변하는 스토리뿐이다.

    현재 드라마작가들중 90%이상이 녀성들이라니 결국 거의 모든 가정드라마가 잘못은 남자들만 저지르고 남주인공들은 쩍하면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항상 녀자들을 남자종처럼 배려하는 인상을 주는데 녀성작가들의 리상향을 지양하는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작품성이 뛰여난 수작들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여전히 한계점에 이르렀으며 그 개선의 여지가 불투명하다고 여겨진다.

    요즘 상영되는 “사랑했나봐”는 제목에서 보여주다싶이 사랑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한 악녀의 형상으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해석할수 있는가? 모순갈등의 초점은 선정이가 윤진에게 딸을 보여주느냐 마느냐로 잡아놓고 극정을 끌어나가는데 마치 선량은 나약성이고 선량함은 악을 전승하지 못하며 선량한 자는 무능하고 악한 자는 언제나 한수 앞선다는 격이 되였다.  작자가 선악의 의미를 바람직하게 해석하지 못하고있다. 선정이의 끝없는 모략과 악행의 성공, 그리고 그냥 기만당하는 여러 인물들, 끝에 가서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다. 제목처럼 누가 누구를 “사랑했나봐”인가? 드라마가 길어질수록 짜집기가 분명해지고 구멍이 더 많이 생긴다. 선정이가 설정한 교통사고, 어리숙한 경찰, 유진의 지력부족의 설정 등등....반대로 선정이는 무소불위이고 온 사회체계가 그의 손길에 따라 운행되는듯싶다. 한국 사회가 정말 그럴가? 오도하고 있을뿐이다.
 
    사건의 발전속에 관중이 예상하지 못한 돌발사건으로 극정을 부단히 고조에로 끌어올려야 하는데 저지르는 악행이 인간의 도를 넘어서 “저럴수 있나?”하는 의문이 앞서면 벌써 생활의 론리. 인간감정의 발전론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어긋나게 되고 드라마를 연장하기 위한 억지로 해석될수밖에 없다. 더 물러설자리가 없게 함으로써 아무 여지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질질 끌어가다가 역시 “제가 잘못했어요. 그럴수밖 에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등 틀에 박힌 수법으로 끝낸 다면 역시 관중의 감정은 우롱당한것이고 유치한 오락성이 목적이였다는 결론에서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각색과 각색지간의 충돌은 갈라놓을수 없는 관계로 얽혀서 돌아가고 심지어 악연으로 맺어지기도 하면서 이야기는 심각해진다. 이는 악과 선의 투쟁으로 될수도 있고 “악”으로 락인 찍힌 선과 인습과의 투쟁이 될수도 있다. 흔히 선이 악을 전승하는것이 관례이다. 어떻게 긴장한 국면을 조성할것가?

    흔히 드라에서 보다싶이 관중은 알고있는데 이야기속의 인물은 그런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례하면 일촉즉발의 시각에 관중들은 주인공을 위해 손에 땀을 쥐게 된다. 드라마에서는 흔히 시간제한의 수법을 쓰는데 이야기속에 모종 사건을 이야기속에 묻어두고 잔뜩 곪기게 하거나 때아닌 때에 폭발하게 하면 관중을 긴장속에 잡아둘수 있다. 그러나 론리성에 맞게 끌고나가면서 긴장을 고조시켜야 한다. 그냥 복선을 깔고나가면서 관중을 안타깝게 만드는데 이것은 상용수법이다.

    텔레비죤드라마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본질적으로 한가지인바 곧 관점이고 태도이며 동작이다. 인물의 실질인즉 동작으로서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가이다. 인물의 행동이 인물의 성격을 극화한다. 인물은 또한 일종 계시이기도 하다. 작가의 직책은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부동한 인물들의 부동한 품성과 성격 특징들을 관중앞에 현연시켜 인생현장을 체험시키는 일이다.

     인물은 관중과 함께 극적동작을 이끌어가는 정절점을 찾게 한다. 동일성도 역시 인물의 한개 방면인것이다. 동작인즉 인물이다. 한사람이 하고있는 일은 말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표명한다. 이처럼 인물은 씨나리오의 근본적인 기초이고 이야기의 심장이며 령혼과 신경계통이다. 인물의 진실성결여는 령혼의 문란과 같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특수하고 보기드문 사람이 아니라 극히 흔하고 평범한 인물을  택해야 한다. 선정이같은 악녀가 전형성인가? 많은 영화들에 악녀들의 악행으로 드라마가 도배질는데 인간악이 극도에 이르렀고 사회악으로 번져가고있지만 사회, 시대의 주류로 될수는 없다. 악녀가 횡행하는 드라마를 보느라면 한국은 악녀들의 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스토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혹자는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로 보면 되지 실생활과 련계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너무 무지한 언동이다.

    반면적인 교육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긍정적인 미학가치는 반상적이다. 악에서 진,선미에 대한 지향이 더 강해지게 하지만 여기서는 벌써 별개의 문제이다. 이렇게 된데는 작가의 상상력의 한계 에도 불구하고 사전제작이 아닌 당일치기식제작으로 총총하게 쓰이고 드라마의 완성도가 미흡, 독창성부재, 관중의 이목만 노린 코드의 적용, 캐릭터의 개연성의 미달 등에서 드라마가 외곡된다. 근원은 상업병을 앓고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혹평할게면 왜 한국드라마를 보느냐? 하고 반문할것이다. 
    필자가 전문 시간을  파하여 연구성각도로 보는것은 아니고 띄이는대로 건너뛰며 본다해도 전후의 맥락을 이어볼수 있다. 드라마의 절주가 느리고 느리다는 설명이 되겠다. 햄리트는 하나이지만 천명의 관중에 천명의 햄리트가 있듯이 오가는 대화를 귀동냥해도 극정의 흐름을 짐작할수 있다. 여주니 본다거나 보이니까 눈에 띄는것이라 한다면 구차한 해석이겠지만...
    각설하고, 텔레비죤드라마의 생명력은 인문정신과 인성의 본질을 시사하는 영원한 주제발굴의 심도와 광도에서 고양된다는것을 밝히고싶다. 자타가 모르는바는 아니겠지만도 이는 창작기교문제가 아니라 창작사상, 정신경지의 문제이다. 텔레비죤극은 응당 내재정신과 건전한 정감내함이 융화되여야 상품화된 텔레비죤극으로서는 이를 실현하기 어렵다. 여기서 드라마의 한계선이 그어지는것은 틀림없다. 아무튼 소감도 각각이요 비평도 각자 시청자들의 고유된 권리라서 일가견도 아닌 감수를 횡설수설 적어보았다. 

                                                2012년 12월 26일ㅡ 013년 1월 29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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