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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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선족의 역사
2005년 04월 03일 00시 00분  조회:4280  추천:64  작성자: admin
중국사회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올바른 관계조명(2)
내가 본 조선족의 역사

김준봉ㅣ북경공업대학 객좌교수(한국인)


조선족이 오늘날 연변지역의 대부분을 일컫는 간도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재의 조선족 거주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130여년 전이다.

1677년 청정부는 만주, 특히 연변지역을 선조 발상의 신성한 땅으로 보고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 500㎞2지구를 봉금구로 정하여 한족이나 그 밖의 비만주족이 유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1860년대) 함경도 지방의 농민들은 10년간의 걸친 흉년으로 가난과 기아를 이기지 못하고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비교적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땅이 비옥한 만주(간도) 지역으로 이주 하였다.

처음에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러 오는 형태로 간헐적이었으나 , 차차 중국 청나라의 규제가 완화됨에 따라 조선족의 이주는 물론 다른 지방의 한족들 가운데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도 늘어났다.

청나라 정부는 1875년에 조선족의 정착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민 관리처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조선족의 본격적인 정착 이주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1860년에서 1909년에 이르는 약 반세기 동안 인구는 2배로 늘어났지만, 인구증가의 절반은 자연증가에 의한 것이므로, 만주로의 인구 이동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시기인 1910~1940년 사이의 조선족 인구의 증가는 엄청나다. 이 시기의 인구이동 규모는 이주의 기본 동기, 일본의 농업ㆍ노동 및 이주정책, 당시의 정치적 상황 등과 맞물려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주시기별로 분류하여보면

첫째시기는 19세기중엽부터 1909년까지의 자연경작이민시기로서 이 시기에는 주로 개별 흉년을 피해 경작이민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 대부분이 함경도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둘째시기는 자유망명이민으로 주로 정치적으로 일본의 압제를 피하고 자유를 위해 망명한 이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 강점 직후(1910~1920년), 조선족의 만주로의 이주는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데, 정치적인 이주는 당시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였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 실시 결과로 나타난 조선 농민의 소작화와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 등에 의해 전개된 조선인농민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착취와 궁핍 때문이었다.

1920년대에는 인구증가율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그 원인은 1920년대 조선인농민의 이동 목표지가 일본과 국내 도시로 바뀌었고, 그래서 만주로의 이주자는 이전에 비해 급격한 감소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시기는 1930년대 초반에서 해방이전까지의 강제개척이민시기로서 주로 일본의 집단이민정책에 의해 이주해온 사람들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전반기와 후반기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만주사변이후 후반기에 인구가 급증하게 된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만주의 침략과 조선의 파산농민의 처리를 위하여 조선 농민을 대량으로 만주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32년 9ㆍ18 만주사변 이후 조선족이 항일과 반일의 선봉으로 간주되면서 치안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이민이 제지되었다.

그리고 만주에서는 각종 치안조치와 함께 조선족에 대해 거주와 이동에 통제를 실시하는데, 즉 항일 무장투쟁 세력과의 연계를 끊기 위해 ‘집단부락’과 ‘안전농촌’을 만들게 된다. 이들 대부분이 한반도 남부지방을 기원지로 하며 출신지역별로 조선족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정착 당시 그들의 주거를 건축할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땅굴막» 혹은 출신지역의 민가와 유사한 형태의 집을 급조하였으며 그래서 주거의 질은 매우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후 1936년 만주의 치안이 안정됨에 따라 그 동안 침체되었던 만주의 농업발전을 위해 조선족 집단이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래서 1937년 처음으로 대규모적인 집단이주가 이루어졌고, 이 때부터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즉 1930년대 후반기의 만주지방의 조선족 인구의 급증은 이와 같은 정책적 배경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나 조선족 대규모 유입의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 농업의 파탄과 농민의 궁핍화였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이민 이라기보다는 고국에서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서 착취에 시달리다 못해 조국을 떠나 유랑하는 유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연변의 경우 집단 이주자들은 주로 인구가 적고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던 왕청과 안도에 배치되었고, 주로 조선의 남쪽 농업지역(특히 경상도)을 기원지로 하는 이들 후기 이민은 이미 조선족, 특히 함경도 출신으로 포화 상태인 간도보다는 다른 지역인 보다 북쪽 지방인 흑룡강성으로 향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연변과 조선, 연변과 그 외 중국 동북지방으로의 인구 이동이 더욱 빈번해지게 되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이민상황은 급변하게 되는데,즉 일본은 엄청난 조선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으로 파견한 것이다. 그 결과 만주로의 이주 규모는 크게 줄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만주 조선족들은 대규모 조선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해방 직후 만주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사람은 총 인구의 40%에 달하며, 귀환자의 비율은 이주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간도 지방보다는 다른 만주지역에서 훨씬 더 높았다. 이는 이주의 역사가 짧은 지역에서는 아직 정착의 기반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대규모로 조선족의 귀환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 중국 성립(1949년) 당시 연변의 조선족 비율은 63.4%로 압도적으로 지역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족의 인구유입은 계속되는데 반해 조선족은 한국동란 기간에 북한 지역으로 인구가 유출되고, 조선으로부터의 유입이 단절되면서 한족이 차지하는 인구비율은 점점 높아지게 된다.

위와 같이 중국에 사는 조선민족은 이주, 재이주, 재재이주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 중 연변의 조선민족은 대부분 함경도지방출신으로서 두만강을 거쳐 육로로 이주해왔으며 대부분이 조선족마을에서 생활하며 이민족과 함께 사는 경우에도 조선족은 일반적으로 특정지역에 모여 산다.

연길시와 같은 도시에서도 한족과 조선족의 거주지역은 확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조선족의 집거 현상이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시키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조선민족주거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출발부터가 일본이나 미국의 동포와는 다르게 중국에 올 때부터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으로 언젠가는 돌아갈 꿈을 꾸고 이주하였기에 민족의 동질성을 잃지 않고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을 생각하며 조선말과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먼저 결혼 문화 습관 등 모든 면에서 조선민족 특유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고있다. 그래서 지금도 민가 답사를 위해 산골이나 깊은 농촌에 가면 중국어를 못하는 조선족 할아버지 할머니를 흔히 만날 수 있다.

중국의 조선민족은 고향을 그리다가 사무친 그리고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황량한 만주벌판에 서전서숙등 민족학교를 세우고 우리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갈 준비만하다가 중국에 남을 수밖에 없게 된 아직도 호적상으로 한국인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고 부모들인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으로 간 우리의 선조들은 그곳 나라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애써 그곳에서 동화하고 정착에 성공했고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되어 금의환양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중국의 우리민족은 6.25민족내부전쟁과 외세의 앞력으로 그려진 38선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그 땅에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장황한 조선족 이주사에 대한 설명은 출발부터 중국의 우리 동포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민족이지만 북한사람도 아니고 미국이나 일본사람도 아니다. 엄연히 한국 사람이듯이 조선족은 분명 한민족으로 조선민족이나 그들은 엄연한 중국인이다. 한민족이면 무조건 다 한국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한민족이면서 북한 사람도 되고 러시아(고려)인도 되고 중국(조선)인이 될 수 있다. 대개의 중국의 우리 동포는 민족관이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인보다 투철하지만 국가관은 더욱더 투철하다. 우리는 대개 민족관이나 국가관이 투철하기는 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엄연히 국가와 민족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정치 공동체를 꿈꾸기 보다는 민족공동체로서 경제공동체를 생각하고 꿈꾸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하회에는 간단히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과의 차이를 보고 서로간에 잘 적응하고 화합하는 방법을 적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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