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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된 의식은 버려야 한다
2009년 05월 16일 13시 00분  조회:1521  추천:0  작성자: 방룡남

길이란것이 어떻게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는가? 이 물음에 함의가 투명하고 값있는 대답을 주려면 성큼 앞서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인간발전력사의 상징으로 된다는것을 까밟혀놓는것이 필요할것이다.
우리가 가장 고약한 도적놈으로 알고있는 쥐는 생존본능에 의해 가을철엔 밭고랑사이에 길을 내고 긴긴 봄, 여름, 겨울 이 세 계절엔 고작 량식창고나 부엌간으로 길을 낸다.
그러나 길은 인간과 관계할 때 재빨리 그 무의미성이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자기의 가슴우에 력력히 찍어놓고있는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서 길을 내는것이 아니라 보다 더 아름답고 리상적인 세계에로 통하기 위하여 길을 더듬고있기때문이다. 바로 이와같이 길에 대한 인간의 지향적인 탐색으로 하여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유익하고 무익한 길들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바로 또 그러한 지향적인 탐구로 하여 갈곳은 저긴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헛되지 않은 헛된 걸음(성공을 약속한 실패이므로) 을 걸었는가를 그 길들은 말해주고있는것이다.
우리 인간은 길의 운명에 처참할 정도로 급속한 진보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인제는 결코 자기의 행동적체험만으로 길을 탐색하는것이 아니라 보다 총명한 지혜로 길을 탐색하게 되였다. 그 지혜의 상징인즉 과학이다. 지남침이 생겨난것도 인젠 놀랍고 신비로울 때가 아니다. 하늘에 낸 길은 사람들에게 무한히 가능한 직선운동을 가리켜주어 더는 저 앞에 있는 샘을 찾아 열두굽이를 돌아 헤매게 하지 않는다. 바다에 낸 길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땅이란 결코 내가 딛고선 밑에만 있는것이 아니며 바다란것이 결코 끝간데 없이 망망하기만 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익한 길이 아직도 완전히는 자취를 감춘것이 아니다. 뿐더러 그것은 력사의 흔적으로 남은것이 아니라 아직도 무수한 발자국을 찍고있다. 그것은 아직도 산너머에 벌판이 있음에도 산을 옮겨 길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황소가 지구를 끈다고 미신하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믿음보다는 조상숭배가 극한을 이룬 결과라 해야 하지 않을가. 자기의 태줄이 묻힌 고향땅에서 원시적일망정 외계의 소음이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것이 생소한 현대적흐름속에서 버둥거리기만 낫다고 생각하는것이다. 그로부터 자아위안이란 곧바로 비행기보다 기차가 안전하고 기차보다 자동차가 안전하며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안전하고 자전거보다 11호차(두다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것이다. 돈이 없어 자전거를 사지 못하면서도 신체단련과 안전을 위해 사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아뭏든 어떻게 하나 돈을 벌어 차를 사겠다고 분발심을 가지지 못하는데는 적어도 현상태에 만족하는 정신적고질이 장난치기때문일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조상이 물려준 <<퇴물림>>에 있나 없나를 표준 세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여 그런 사람들은 지남침도 없던 그런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경험하여온 그런 애처롭고 가련한 탐색으로 망망한 원시림에서 자기가 나아갈 길을 찾아헤매고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그런 속에서도 숙명적인 행운으로 요행 무의미한 고행에서 빠져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나와 선자리에는 현대인이 살던 흔적밖에 남지 않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현대인이 달리는 속도, 그것은 결코 자연이 마련해준 생리적구조인 두다리로 닫는 속도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드레팔십리걸음을 하는 황소의 걸음은 더구나 아니다. 사람들이 고향땅에만 묻혀 사는 사람을 일컬어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하던 속담도 인젠 오라지 않아 그 공간적함의가 훨씬 넓어질것인즉, 그때면 지구에만 묻혀 사는 사람을 일러서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할것이다. 사람들은 벌써 지구로부터 달에로 려행할수 있는 공중길을 닦아놓고있지 않는가. 우리로부터 몇억광년이나 떨어져있는 별에 대한 한결 현실적인 관찰을 할수 있는것도 사실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이런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의 도전속에서 현대화의 길을 닦고있다. 우리와 세계속도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근대와 전근대사이랄만치 세기적격차를 두고있다. 그런데 그 차이자체가 벌써 하나의 엄청난 비극적요소로 되고있는데 가날픈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은 우주속을 헤염치면서 마음에 드는 별을 따려할 때 그들은 황소로 지구를 끌어보려 한다. 원시적신화와 현대적리상의 대비라고 하는것이 적중할것이다.
정든 길이 편하고 가깝다는 말도 있다마는 그것은 결코 전제없이 무분별하게 믿을수 있는 만병통치의 약은 아닐것이다. 가령 산을 뚫고 턴널을 놓고 골을 질러 다리를 놓아 곧게 뻗은 아스팔트를 두고도 오불꼬불한 산길을 걷는다면 걸어본다는 전제가 없을 때 그런 사람은 적어도 머리가 돈것이 아니겠는가.
조상들이 경험한바를 다듬어놓은것이 우리가 물려받아야 할 전통임에는 에누리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삶을 펼쳐가던 그 당시의 최대의 지혜의 산물이라 할때 오늘의 삶의 광장에서 우리 현대인의 지혜의 극점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있음도 틀림없다. 부모슬하에서 자식이 성장함은 본능에 가까운 상식일테지만 인간은 동물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풀어보면 자식은 결코 절대적으로 부모를 모방하기만 하는것이 아니다.
어제의 리상이 오늘의 현실로 되면서 부단히 그 삶의 내용을 달리하는것이 인간사회라고 보면 오히려 바야흐로 현실로 되는 리상을 위해 일생을 소모해온 전세대가 그 리상을 현실로 맞이하고 새로운 보다 높은 리상을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후세대앞에 자기를 반성하고 새롭게 삶의 내용을 꾸며가는것이 월씬 전진적인 삶의 자세일것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전통에 대해 취해야 할 옳은 자세란 조상세대가 그때의 삶의 현실에서 최대의 지혜를 동원하여 력사를 앞으로 굴려온 그 보배로운 삶의 자세를 물려받는것이지 결코 그들의 일거일동을 답습하는것일수 없음이 투명하다.
력사의 흐름은 세기의 쌓임속에서 가속적이다. 그것은 력사의 운수도구가 부단히 혁신되기때문이다. 그 본질적 함의는 바로 인간지혜의 무궁한 발굴에 따른 과학의 끊임없는 창조력이다. 토끼와 거부기의 달리기시합에서 토끼가 진것은 그 자신의 자만때문이지 결코 거부기가 토끼보다 빨라서가 아니다. 그나마 우주비행선은 결코 토끼처럼 자만하여 황소가 따라오도록 하늘공중에 발을 멈추고 잠을 자지는 않을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적고질이다. 원시적생활에 마음의 뿌리를 심고 원시적신화의 창조에 만족한 웃음을 짓는 변질되고 곰팽이 낀 농경의식은 전혀 먹을 수 없이 변질된 고기를 아깝다고 집구석에 그냥 놓아두어 악취를 한집 가득 풍기게 하는것과 꼭 같은 경우이다. 숨가쁜 세계의 달음질에 아침은 잠간이고 저녁도 순간이다. 억지로나마 소궁둥이에 채찍을 안겨 해넘기전에 갈곳에 닿을 수 있던 요행은 더는 바라볼수 없게 되였다. 아니, 그것은 렬강들의 총포앞에서 칼을 휘두르던 그때에 벌써 산산쪼각이 나지 않았던가! 닭알로 바위를 깠다면 신화라 해도 믿음을 줄수 없다. 하물며 소수레에 앉아 달나라로 갈 꿈을 꿔서야 되겠는가!
변질된 의식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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