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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겨울부터 시작이다
2009년 05월 16일 14시 48분  조회:2470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진달래가 피면 봄이 본격적으로 승리의 함성을 올린다고 하지만 동북의 동장군은 완고하기 짝이 없다. 5월의 해빛이 따스한 손길로 대지를 부드럽게 만져주고있지만 산과 들엔 아직 겨울의 찬기가 싹 빠지지 못했다. 이른 아침이면 산기슭을 따라 감돌던 물김이 나무잎사귀나 풀잎들에 봄의 은구슬을 빚으려는듯 싸늘한 이슬방울들을 대롱대롱 달아매놓고 집집의 처마기슭이 가랑비를 맞은듯이 축축히 젖어버리도록 물안개가 대지공간을 유유히 감돈다.
동녘이 훤해와서야 해살이 애기풀을 마구 키스하면서 제노란듯이 쪽잠에 든 이슬을 흔들어 깨운다.
때는 바로 1979년 5월중순의 어느날 아침이다. 도회지사람들은 아침을 치른지 이슥해도 아직 일찍하다며 손발을 비비고있을 때 그리 크지않은 키에 퍽 다부지게 생긴 중년사나이 하나가 오솔길옆에서 도전적으로 이슬을 담뿍 담아들고 흐늘대는 잡풀들을 와락와락 떨쳐버리며 산발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었다. 바지가랭이는 어느덧 물에 푹 잠그었다가 나온듯 화락하게 젖어있었다. 신을 신었다고는 하지만 긁이나 뾰족돌을 방비하기 위해서 필요할뿐이지 바지가랭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가 양말을 푹 적시여 신안은 벌써 끈적끈적하였다. 감도는 안개속에 푹 빠진 산은 오만상을 찌프리고있어 범접하기가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문어발처럼 내리뻗친 산발을 하나를 타고 올랐다가 다른 하나를 타고내리면서 산마루까지 올라갔다가는 또 다른 산마루의 산발을 타고 오르내리자면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대체 이 사나이는 누굴가, 왜서 봄의 이른아침부터 찬이슬을 헤치며 산발을 주름잡고있는걸가?
그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이며 그때 당시 룡정현대외무역국의 부국장이였던 김석륜이다. 그는 지금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보배로 칠수도 없는 도라지따위의 산나물을 <<정탐>>하고있는것이였다...

1

룡정시(당시엔 현이였음)대외무역국은 1979년도에 성립되였다. 성립초기엔 1976년도에 세운 룡정현공급판매합작사의 대외무역조에서 사업하던 김석륜(조장), 정증봉, 최성률 등 세사람으로 구성되였다. 금방 <<가정>>을 꾸릴 때만 하여도 그들은 처참할 정도로 적수공권이였다. 원래 쓰던 판공실 한칸을 빌려쓰고있었는데 낡아빠진 책걸상에 자그마한 서류궤가 전부의 <<가장집물>>이였다. 말그대로 말짱 령으로부터 시작하는 가난뱅이 신세였다.
성립초기 이 대외무역국의 사업성질은 사실상 성대외무역국의 룡정판사처격의 작용을 하는데 불과하였다. 성대외무역국에서는 로임과 약간의 활동비용만 줄뿐이지만 그들의 수입은 몽땅 성의 명목으로 넘어가는판이였다. 일년내내 땀흘려 임무를 완수 또는 초과완수한다고 했댔자 고작 차례지는것은 얼마안되는 로임뿐이였다. 얼마나 불공평한 대우인가. 너무나 혜택없는 노릇이였고 보람없는 일이였다.
김석륜의 마음은 세차게 갈기질하였다. 현대외무역국을 성립할 때 그는 자기로서의 아름찬 타산이 있었댔다. 현공급판매합작사의 대외무역조에서 몇년간 조장사업을 해온 그는 한번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보람찬 일을 해내려고 하였던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너무나 의뢰생활에 중독되여 국가의 혜택을 노력없이 눅거리로 받으려고만 했다. 자조자급의 훈련이 너무나도 결핍했던것이다. 왜서 자기의 두손으로 창조할수 있는 재부를 게으름으로 외면해버린단 말인가! 쉽게 산다는것은 기실 허무한 삶을 의미한다. 보람없이 슬슬 무의미한 세월이나 죽여가면서 국가월급이나 제때 타먹는 기계적인 직업인이 되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여 세월의 갈피갈피에 고통과 희열을 끼워넣으면서 노력, 분투, 창업의 땀을 흘리는 성실한 기업시민이 되는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성대외무역국에서 주는 임무를 적대적으로 완수하는 전제하에서 좀 자체경영도 하기로 하고 성대외무역국에 제기하였다. 그런데 성에서는 그들이 자체경영을 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수입도 계속 몽땅 상납하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여러번 시비했으나 강에 돌을 던지는격이였다.
김석륜은 끈질기게 성대외무역국과 계속 입씨름을 하는 한편 이듬해에는 직접 자체경영을 밀고나갔다. 지루하고 번쇄한 시비만을 비생산적으로 되풀이할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성대외무역국에서 맡기는 임무만 해도 그들 다서사람(이땐 이미 다섯사람으로 불었났음)으로서는 퍽 아름찬것인데 자체경영까지 한다는것은 그렇게 식은죽먹기가 아니였다.
<<우리는 지금 가난하고 말끔한 가정이요. 우리절로 이 가난의 때를 벗자면 사람마다 간고하게 창업하는 정신이 있어야 하고 고락을 함께 나누는 의리가 있어야 하오. 일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거요.>>
김석륜은 늘 종업원들에게 이것을 강조하였으며 그 자신이 언제나 모범적인 실천자였다.
그 어떤 일이든 다랄붙기만 하면 그들사이엔 국장이 다르고 희계가 다르고 수매원이 다른 그런 계선이 없었다. 모두가 탐사원이자 조직원이고 기술원이자 수매원이였다.
고사리철이 되면 저마다 맡은 구역의 산을 답사하고 농민들한테 기술을 전수해야 했으며 또 농민들이 고사리를 캐오면 뿌리를 끊고 잎이 핀것을 가려내고 등수를 매긴다음 끓인 소금물에 절이는 등 가공을 직접하면서 농민들을 세세하게 지도해야 하였다. 그저 농민들한테 맡겼다간 기술이 숙련되지 못하기에 등수를 잘 가리지 못할수도 있었고 또 어떤 농민들은 사실 제일처럼 그렇게 알뜰하게 하지 않는것이였다. 조금만 소홀히 해도 같지 않은 등수가 뒤섞이거나 깨끗하게 정선하지 않아 불합격품이 될수 있는것이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심하게 한다고 해도 일차적으로 깨끗하게 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농민들을 직접 지도하여 정선했다고는 하지만 거두어온후 다시 검사해보면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것이 많았다. 그럴때면 미처 다른 사람들을 동원할새가 없어 그들 몇사람이 밤늦게까지 눈을 쥐여뜯으며 다시 처리하여야 하였다. 날이 새면 언제 눈을 붙일새가 없이 또 그것을 실어보내야 하는것이였다.
8-9월의 송이버섯철이면 더 바삐 돌아쳐야 했다. 야들야들한 생송이버섯은 모래가 잘 달라붙기에 하나하나 솔로 털어내야 한다. 그런데 농민들은 그 많은 송이버섯을 그렇게 하나하나 솔로 빗질할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는수 없이 그런대로 등수만 갈라서는 돌아와서 다시 하나하나 정선해야 하는것이였다.
다른 산나물도 마찬가지로 모두 수매요구가 있기때문에 그들은 산나물철이 되면 한시도 서성거릴새없이 바삐 돌아쳐야 했다. 그들에겐 잠자리도 고정된 곳이 따로 없었다. 오늘은 삼합에서, 래일은 지신에서, 모레는 명동에서... 어떤 땐 옷을 입은채로 새우잠을 잤으며 48시간을 하루로 보낸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삼합 북흥강역이 산나물이 많이 나는 중심지역이므로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살길을 찾아 보따리짐을 지고 넘어왔던 오랑캐령을 얼마나 넘나들었는지도 헤아릴수 없었다...
1982년 2월에 고배상과 윤만길이 광주로 가서 몇가지 일을 처리하게 되였다. 단위의 경제형편을 잘 알고있는 그들은 려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석차표를 끊었다. 꼬박 사흘밤을 걸상에 꼿꼿이 앉아 끄덕끄덕 <<기도>>를 드리며 가고나서 광주역에 내렸을 땐 온몸의 힘줄을 쏙 뽑아낸듯했고 그저 아무데서나 한잠 실컷 자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들은 먼저 주숙할 곳을 찾았다. 그곳에는 괜찮은 려관들이 있었지만 려관비가 너무 비쌌다. 서류가방을 든 많은 <<공무인원>>들이 국가돈을 쓰고 국가일을 하는데야 하고 배포유해서 그런 호텔을 드나들었지만 일전이래도 아껴쓰는데 습관되다싶이한 그들에겐 1원이 10원으로 여겨졌기에 아예 좋은 려관들은 바라보는것조차 단념하고 지나쳐버리였다. 마침내 그들은 삼사십명이 함께 투숙할수 있는 통칸방이 있는 초라한 려관에 짐을 풀었다. 점심때가 되자 그들은 만두를 사다가 가지고간 고추장, 짠지따위에다 대충 먹고는 벌렁 자리에 누웠다. 맨 널바닥에 짚방석을 깐 잠자리였지만 눈두덩이에 피곤이 무겁게 축 드리운 그들한테는 제법 푹신한 멋이 있어 눕자마자 깊은 잠에 골아떨어지고말았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온몸이 오싹오싹 해났다. 난방시설이 없는 남방의 2월은 낮게 드리우는 찬김에 이불마저 축축할 지경이였다.
그런것에는 아랑곳없이 이튼날부터 그들은 사처로 달아다니며 갖고간 일처리에 다랄붙었다. 보름이 지났다. 가지고간 고추장, 짠지들이 모두 거덜이 났다. 그들은 편이국수나 빵으로 끼니를 에웠으며 부대를 찾아가서 사업증을 보이고 사정해서 가마를 구해다가 드문드문 죽은 고기를 사서 끓여먹었다. 광주사람들은 모두 산고기를 사먹기에 죽은고기는 퍽 헐값이였다.
두달을 막 잡아서 갔던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려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때 무엇이든 돈이 될만한것을 구입해 가지고 가려 했다. 비록 그들은 떠날 확정적인 구입임무는 맡지 않았지만 이것은 지도부에서 제창하는 창업신이였고 또 그들이 가는곳마다에서 행동에 옮기는 고상한 기풍이였다. 허나 인제 려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얼 해간단말인가?
<<듣자니 우리 고장에서는 고무장판이 한창 인기를 모은다더구만>>
<<그런데 우리한텐 인제 려비도 얼마 안남았는데요.>>
<<글쎄...>>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난처한 얼굴로 마주 쳐다보았다.
<<우리 한번 외상으로 사정해볼가?>>
<<우리같은 생면부지한테 외상으로 주기나 하겠습니까?>>
<<한번 부닥뜨려 보지. 창피당할셈치고. 뭐 우리가 여기서 살겠나.>>
<<글쎄요, 그래보지요. 밑져야 본전일텐데.>>
이튿날 그들은 어느 한 고무장판공급판매부를 찾아갔다. 그들은 제잡담 사업증과 단위소개신을 내보이면서 찾아온 경위를 말하고 제발제발 사정하였다. 헛일삼아 찾아간 그들인지라 별로 큰 기대같은건 걸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도 수월할변이라구야. 하늘이 도왔던가, 그들이 하도나 진지하고 성근하게 청을 들어 그랬던지 아니면 그곳 책임일군이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여서 그랬던지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던것이다.
<<하지만 돈은 돌아가서 인츰 부쳐야 합니다.>>
<<그러지요, 그건 에누리없으니 념려하지 마십시오.>>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감사를 드린 그들은 어찌나 기뻤던지 두달이 거의 차는 객지생활에서 몰킨 고달픔이 순간적으로 말끔히 가셔지는듯싶었다. 그들은 그곳의 은행돈자리를 적은다음 사업증과 소개신을 <<저당>>하고 고무장판 팔천메터를 구입하여 연변에 부쳤다. 그리고는 그들도 그날로 돌아오는 기차를 잡아탔다.
이번길에 그들은 고무장판을 팔아 만여원을 수입하였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은 마침내 성대외무역국의 긍정적인 시선을 끌어왔다. 1982년, 성대외무역구에서는 마침내 룡정현대외무역국의 자립능력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체경영을 하는것을 허락하였다.

2

그해에 김석륜이 국장 겸 경리로 되였다. (이때에 와서 그들은 대내적으로는 의연히 대외무역국이라고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대외경제무역공사라고 하였다.)
기막힌 가난을 굳센 자립의지로 풀어버린 그는 한바탕 더욱 통이 크게 해제낌으로써 일상성의 공간을 초월하여 치부의 문을 두드려 열려고 윽별렀다.
이때는 바로 전 사회적으로 개혁, 개방의 물결이 높아가고있던때라 생활의 일상성속에 묻혀버리는것을 달가와하지 않던 그로 말하면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격이 되였다. 게다가 환난을 함께 겪어오면서 일심동체로 뭉쳐진 직원들의 드높은 상승심이 정신적인 집합력이 되여 뒤받침해주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그들은 해마다 2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1983년도에 그들은 세칸짜리 판공실을 새로 마련하였다. 이듬해에는 그 집을 팔고 성과 주에서 지원을 받아 건평이 600평방메터인 창고와 450평방메터에 달하는 지금의 판공청사를 지었다.
그런데 워낙 인간에게 있어서 삶을 참답게 산다는것 자체가 아픔을 당하는것이였다.
1985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외무역경제공사는 아무런 명성도 없어 누구도 오려하지 않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룡정현에 대외무역공사가 어느 골목에 있다는것을 아는이조차 많지 못했었다. 그런데 1985년도에 그들이 변경무역을 시작하면서부터 대외경제무역공사는 <<총각>>들한테 외면당한 <<처녀>>로부터 일약 열렬히 흠모하고 사랑하고 추구하는 대상자로 주목되였다. 삽시에 많은 <<중매군>>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들었다. 사회상에 류행되고있는 인간관계의 충격파가 드세게 그들을 충격하였다.
김석륜은 실무상의 애로가 아닌 인위적인 도전에 골머리를 앓게 되였다. 워낙 도리보다 세속을 중요시하는 인정세태인지라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수 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이런 <<중매군>>들은 거개가 사회명성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 천갈래만갈래로 련줄이 있는 사람들이였다. 그러기에 자칫하다간 순소비적인 시비에 빠져 사업을 망쳐먹을수 있는것이였다.
인간은 본래 자기의 운명을 자기절로 조종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 인간의 운명의 실타래를 마음대로 감았다 풀었다 할수 있는 무서운 힘이 사회에는 확실히 존재하고있는것이다. 그때문에 참답게 산다는것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것이며 때로는 목적과 결과의 배반을 초래하여 소나무처럼 억센 사나이도 졸지에 물거품이 되여버리는수가 있는것이다.
그는 몽매와 문명, 인정과 사업, 질투와 분발, 봉건의식과 현대의식의 치명적인 대결이 안겨주는 뼈저린 진통을 온몸으로 절감하였다. 소비의식으로 삶의 공간을 찾는 사람들은 채 익지않은 과일도 마구 따먹으려고만 생각한다. 그래 우리가 그런 인간들을 먹여살리자고 이때까지 애면글면 피땀을 흘려왔단말인가?!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더없는 서러움이 처량한 가을비처럼 부실부실 내리면서 알알이 외로움이 매달렸다. 그 외로움을 툭툭 털어줄 사람은 누구도 없는듯싶었다. 도리여 그들을 용납하지 않은것이 죄이기나 한것처럼 여기는것이였다.
어떤 권세인들은 은근히 자기의 권력과 그들의 사업을 련관시켜 암시를 주었고 어떤 못난이들은 자기들이 의탁하고있는 <<구세주>>를 왕패로 내들고 진공해왔다. 그들을 너무 매몰차게 내몰아도 안되고 그렇다고 오는대로 무작정 받아줄수도 없는것이였다.
아, 때와 장소에 알맞는 감정을 표현하면서 산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있는자는 십중팔구는 무사한 습관에 길들여사는 게으른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할일없이 밥얻어먹는것이 제일 리상적인 목적이다. 그들은 그 누가 선구적공적을 쌓아놓으면 떡심좋게 그 우에다 자기의 리상적인 생활을 설계하는 파렴치한 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받는다면 우리가 수립한 보귀한 창업정신이 개척을 모르는 게으름뱅이의식에 희석되여버리고말것이다. 게으른 질투, 포부없는 야욕은 인재를 라태와 무위도식에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적이니깐. 결코 그렇게 할수 없다.
그는 생기발랄하던 <<함선>>이 인정관계의 넝쿨에 걸려 무참히 침몰당하는것을 얼마든지 보아왔던것이다. 하기에 그는 대외경제무역공사라는 이 <<함선>>의 키가 자기한테 쥐여져있다는 아름찬 력사의 무게를 새삼스레 느꼈다.
그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워낙 평범한 생활에 조용히 몸담그려 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모든것이 결코 자기의 뜻대로만 되리라고 천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것이다. 그에게는 어려운 시기를 밝은 미래를 당겨오는 계기로 삼는다는 신조가 있었다. 오직 드팀없는 신념으로 자기가 확신한 목적을 향해 맹렬히 전진할 때 또 그것이 순수 개인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한 집단 나아가서는 사회의 근원적인 목적추구와 본질적으로 직결되는것일 때 어느때는 꼭 자기에 대한 몰리해가 발전적으로 해소될것이라고 믿어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또 어떤 사람이 소개한 사람이든 오직 하나의 선택표준을 내세웠다. 그것은 곧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맡겨주는 모든 일을 막힘없이 떠멀수 있는 사람이라야 등용한다는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번쇄하고 비생산적인 시비의 소용돌이속에 자기를 내버린것이 아니라 입방아찧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입이 부르트도록 시비를 하든말든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빈틈없이 밀고나갔다.

3

1985년도부터 시작된 변경무역은 그 무역액이 시초의 몇십만원으로부터 몇백만원, 지금은 최고 2천만원까지에 도달하였다.
무역액이 커갈수록 무역의 성공여부는 집체와 국가의 경제손익에 뚜렷한 도표를 그려주었다. 그런데 몇년래 적지않은 현, 시의 대외무역단위들에서 순차와 역차의 평형을 잡지 못하고 교역물의 상대적가격차와 시장수요를 계산적으로 정확하게 추산하지 못한 탓으로 실제상 많은 경제손실을 빚어냈다. 계약상으로는 얼마만큼의 무역을 했소 하고 소문을 크게 냈지만 적지 않게는 순차가 너무 빈번하여 텅텅 빈 장부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형편이였고 은행의 리자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여 리자만 잔뜩 불어났다.
무역령역의 이런 실태를 알고있고 그 자신 또 여러번 고배를 마셔본 김석륜은 원칙적으로 최대가능한 정황에서 직접교환을 주장하였다. 자기의 물건을 현지에서 상대방에게 확인시키고 자기도 상대방의 물건을 직접 확인한후 날자를 확정하여 량측이 동시에 물건을 교환하는것이였다. 이렇게 하니 순차를 줄일수 있었을뿐만아니라 돌아올 때 빈차가 뛰는 량비도 없앨수 있었고 물건이 적치되는 현상도 방지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차를 띄워 물건을 실어갔다가 올 때에 요구한 물건을 실어오려 하였는데 상대방에서는 물건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후일 꼭 자기네가 직접 실어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몹시 불만스러웠지만 할수 없는 일이라 우스개를 하고말았다.
<<보낼 물건이 마련되지 못했으면 돌이라도 두차 실어주십시오.>>
이 몇년래 그들이 최대의 노력으로 신용을 지켰기에 상대방에서도 백방으로 그들한테 신용을 지키려 애썼다.
변경무역이 시작되자 연변내 여러 무역단위들사이에는 치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개혁, 개방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경쟁의식은 국가성장의 필연적인요청으로 나서게 된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쟁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상업이라는 본질적인 규정성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에게 유리하기만 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떤 수단이든지 가리지 않는 페단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1987년도에 조선측에서는 운동복천을 대량으로 요구하였다. 이 정보를 남먼저 손에 쥔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는 인차 그들과 협의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많은 대외 무역단위들에서 낌새를 채고 늦어도 죽물이나마 마실수 있다고 여겼던지 주린 배를 안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김석륜은 제꺽 거기에서 손을 떼고 나앉았다. 한가지를 성숙시킬 때 그는 벌써 다른 한가지를 은근히 무르익히고있었던것이였다. 그는 조선에서 흰광목천을 대량적으로 요구한다는것을 알고 그들과 계약을 맺은후 이미 주백화공사와 흰광목천합동을 해놓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 기밀을 낚아챈 어느 한 대외무역단위에서 그들 몰래 백화공사를 구슬려서 룡정대외무역공사보다 12전씩 더 주기로 하고 중간에서 슬적 채버렸다. 그리고는 조선측에 룡정대외무역공사엔 그런 현물이 없는데 자기들한테 얼마든지 있다고 하였다. 하여 조선측에서는 실물이 없으면서도 있다고 한 룡정대외무역공사를 신용이 없다고 하면서 멀어젖히고 그들과 계약을 맺어버렸다.
그러자 공사의 직원들과 일부 지도자들도 분해서 펄펄 뛰였다. 너무나 비도덕적이다. 자기의 경제리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것조차 꺼리지 않다니! 이건 한 인간으로 말하면 너무도 억울한 인격모욕이다. 직원들은 그들과 한바탕 해내고 상대방에 그들의 허울을 발가놓으며 지어는 그들보다 더 높은 가격을 주더라도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한테 중간랑패를 보아선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석륜은 견결히 반대하였다.
<<우리가 하는것은 사회주의상업이요. 사회주의상업은 정당한 경쟁을 허용할뿐이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헐뜯거나 암살적으로 남을 해치는것은 모두 비렬한 짓이요. 남이 그따위로 한다고 해서 자기도 그런 구렁창에 빠진다는것은 더없이 미련한 짓이요. 그리고 이제 그들을 까밝힌다고 해서 우리에게 결코 리로운점이 크게 없을뿐더러 오히려 전체적인 형상을 더럽힐뿐이요.>>
승벽심이 강하기로 전혀 남한테 굽어들줄 모르는 그는 요만한 일로 옴니암니 다투느라고 아까운 시간만 덧없이 죽어버릴수 없었다. 그는 종래로 맺고끊는 성미였고 앉아있을줄 모르는 불같은 사람이였다.
그는 진짜 경쟁의식은 상승적심리를 바탕으로 하는것이지 남을 해치는 질투심리를 바탕으로 한것이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그따위 남의 경제성장을 질투하고 해치는 이른바의 <<경쟁의식>>으로는 사회나 국가성장의 설명이 한점도 가능할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것에 초점을 맞추는것이 아니라 흔히는 남이 이미 이룩해놓은것을 <<훔치>>거나 <<략탈>>하는것이기때문이며 곰이 옥수수따는격으로 사회나 국가로 놓고말하면 결국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것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 게다가 흔히 잃은것이 더 귀중하고 발전적인것이다.
<<우리는 시장동태에 좀더 밝아야 하오. 백방으로 남보다 앞서 정보를 장악하고 소뿔을 단김에 빼야 하는것이요.>>
이듬해에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는 조선과 목재수입자동차수출계약을 맺었다. 조선에서 목재무역을 하자면 목재운반용차가 대량적으로 수요된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김석륜은 사람을 사처로 띄워 115, 141형 해방표자동차를 <<수집>>하였다. 아직 남들이 미처 정신차리기전에 그들은 <<수집>>할수 있는 해방표자동차는 거의 다 끌어왔는데 산동, 하남 등지까지 뛰여다녔다. 그런데 조선과 계약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141형 해방표자동차 한대에 값을 2만 9천원을 매겼댔는데 그 사이에 국내에서 한대의 값이 3만 4~5천원으로 껑충 뛰여올랐다. 한대에서만도 6~7천원씩 믿지는 셈이였다. 다른 물건과 바꿔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그래서 김석륜은 꼭 목재라야 바꾼다고 고집하였다. 상대방에서는 워낙 목재를 위주로 하면서 일부는 다른 물건을 끼우려고 했던것인데 할수 없이 그의 드틸수 없는 요구에 응하였다. 그들은 지난해 한해에만 해방표자동차를 도합 202대나 수출하였으며 목재 3만립방메터나 수입하였다.
시장동태에 대한 파악의 투명도는 그들에게 치부의 길을 넓혀주었을뿐더러 경제적손실도 미연에 방지할수 있게 하였다. 송이버섯은 그들이 다년래 해오던 득점수가 높은 <<장사거리>>였다. 주로 일본에서 많이 요구했는데 생생한것은 톤당 18만원까지 올라갔고 (1986년도엔 최고로 20만원까지 올랐었다)절인것도 12만원씩 하였었다. 일본사람들은 송이버섯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했는데 연변의것이 질이 더 좋다고 인정하면서 될수 있으면 연변의 생생한 송이버섯을 많이 사가려하였다. 그런데 연변엔 송이버섯이 그렇게 많지 못하므로 대부분은 운남 등지에서 수매해오는것이였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점차 송이버섯에 대한 흥취를 잃게 되자 송이버섯값이 대폭 떨어지게 되였다. 1988년도엔 절인 송이버섯은 톤당 4만원도 받을수 없는 형편이 되였다. 이런 시장동태를 미리 장악하고 또 연변의 송이버섯수매량이 많지 못한것을 계산적으로 따진 그들은 1988년부터 송이버섯무역을 아예 딱 끊어버렸다. 그런데 이런 정황을 모르고있던 일부단위들에서는 이왕의 좋던 경기에 기억을 걸고 이해에도 맹목적으로 운남으로부터 톤당 10만원좌우씩 주고 대량의 절인 송이버섯을 들여왔다. 결국 물건을 가져가려는 주인이 나타나 주질 않아 지금 룡정시에만도 237톤에 달하는 송이버섯이 창고에서 기약없는 발송을 기다리고있다.

4

<<우리가 하는 일은 사회주의상업이다>>. 이것은 김석륜의 사업좌우명이다. 이것이 또 그 누구와도 다른 그만의 모습을 그려낼수 있는 정신적색갈이다.
1986년도에 룡정화학공업공장에서는 푸르풀알콜생산에 원료로 쓰이는 옥수수이삭속대가 딸려 쩔쩔 매였다. 농촌에서 도거리를 실시한후로 옥수수이삭속대가 그렇게 많이 집중된곳이 없었고 또 농민들은 그까짓 몇푼안되는 돈을 위해 옥수수이삭속대를 수레에 싣고 공장까지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외지에서는 맞돈이래야 주겠다는것이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김석륜은 지도부성원들을 모여놓고 토론하였다.
<<옥수수이삭속대는 조선에서 얼마든지 들여올수 있소.>>
그러자 한 지도일군이 말했다.
<<그걸 무역해서야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신고스레했대야 우리한텐 크게 떨어질게 없질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아오. 헌데 지금 화학공업공장에선 확실히 곤난에 봉착했소. 옥수수이삭속대 래원이 끊어지는 날이면 공장이 막대한 경제손실을 보게 되오. 우리가 하는것은 사회주의상없이지 개인상인이 아니란 말이요. 지방공업을 부축이는것도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이요.>>
<<옳소, 지방공업이 망해빠지는것을 보고도 가만 있는다면 우리는 더 큰 리익을 보았다 해도 속이 편안하지 못할것이요.>>
언제나 그를 받들어주고 지지해주는 남두형이 이번에도 선참 그를 두둔해나섰다.
그러자 다른 지도부성원들도 동감을 표시했고 나중에 그 지도일군도 동의를 표시하였다. 다년래 이 지도부는 누구한테 도리가 있으면 견결히 지지하고 가결이 없으면 사정없이 쟁론하는 기풍을 수립해왔다. 그리고 일단 결정된 일이면 누구 하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없이 일심동체로 결정을 집행해나갔다.
이해에 그들은 조선으로부터 옥수수이삭속대 2천톤을 수입하여 룡정화학공장에 원료로 제공해주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그들은 1988년에 공장측에서 원료공급을 자체로 해결할수 있게 될 때까지 련속 3년간 별로 리득이 없는 무역을 해주었다.
룡정기계수리공장에서 생산하는 바이스제품은 이미 국제수준에 도달하여 국제시장에 대량적으로 진출하고있지만 국내 생철값이 너무 비싸서 원료공급이 큰 문제였다.
이런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김석륜은 또 공사지도부성원들과 토의하고 1987년부터 룡정기계수리공장에 바이스생산원료로 청진제강소로부터 해마다 600~700톤의 생철과 반제품을 수입해주었다.
1986년에 40만원, 1987년에도 40만원을 시재정에 상납한 그들은 1988년도에 원래는 50만원만 상납하면 되였다.
그런데 하루는 한창진시장이 몸소 대외경제무역공사로 찾아왔다.
<<김경리, 시정부에서는 지금 로간부활동실문제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시재정에 상납하는 돈을 상납하지 않고 거기다 좀더 보태서 2년동안에 로간부활동실을 지어줄수 없겠는가고 상론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남동무, 당신생각엔 어떻소?>>
김석륜은 그만한 승산은 있었다는듯이 아무런 주저도 없이 대답해버리고는 그제야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남두형한테 웃으며 물었다.
<<대답은 제가 이미 해놓구선 나더러 반대하라는건가?>>
남두형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이제 로간부활동실이 당신들의 이름으로 버젓이 일떠서는 날이면 당신들도 룡정시 인민들앞에 큰 면목이 서게 될것입니다.>>
한창진시장은 소탈하게 웃으며 그들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그래서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는 1988년도에 70만원, 1989년도에 70만원 해서 도합 140만원을 투자하여 2년내로 로간부활동실을 지어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건축시공이 시작되여 얼마후에 한창진시장이 또 느닷없이 그들을 찾았다.
<<경제때문에 집을 2년씩이나 짓는다면 집도 못쓰게 되고 또 경제적으로도 도리여 손실을 보게 됩니다. 이미 할바엔 1년내에 후닥닥 해치우는것이 좋지 않습니까?>>
<<하하하, 시장어른도 한술한술 뜬느 전법을 쓰시는군요. 그럼 어떻게 한다, 우리에겐 아직 그럴만한 여유자금이 없는데. 아니, 그렇게 하지요. 리자돈을 내서라도 금년내로 완공하지요.>>
김석륜은 한시장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려고 역시 쾌히 응낙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은행으로부터 먼저 리자돈을 내여 그해에 한꺼번에 146만원을 투자함으로써 당해에 건평이 2천평방메터에 달하고 주체부분이 5층으로 된 로간부활동실을 덩실하게 세워주었다...
경제적계산으로는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이런 일들을 놓고 대외에서뿐만아니라 공사내의 일부 사람들도 이러저러하게 의론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지금세월에 돈을 벌어 남을 공짜로 먹이는 사람이 몇이나 되기에 그러는가 하는것이였다.
<<인간에겐 덕성이 있어야 하오. 덕성이야말로 그상한 인간과 자사자리한 인간을 차별놓는 시금석이요.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한 후회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더 많은 법이요.>>
김석륜은 사회주의상업이 지방공업을 위하는것은 응당한 것이며 로인(로간부)들을 위하는것은 결코 게으른 소비자들을 위하는것과는 다르다고 인정하였다. 로인과 어린이들은 영원히 전 사회의 봉사대상이라고 생각하였다.

5

사회성장을 부축여주고 국가진흥에 기여함을 기업발전의 첫째로 되는 목적으로 삼고있는 김석륜이였지만 종업들에게 치부의 혜택을 안겨주려는것도 미룰수 없는 책임으로 알고있었다.
자력으로 가난을 밀어내고 치부의 대문을 두드려 여는 사람들의 신통하게 맞물려지는 경험이 대개가 그러하듯이 이 몇년래 그들은 간고하게 창업하고 <<린색하게>> 소비를 계산하였으며 경영확대에 자본을 축적하였다.
사실 그들은 국가에 장려금세만 바치면 한해에만도 종업원들마다 엄청난 장려금을 탈수 있었다.
그러나 김석륜은 그렇게 하는것은 한치보기의 하루살이식생존방식으로서 개인이나 집체나 다 성장적으로는 아무런 혜택도 없이 비생산적인 순소비만 잔뜩 늘굴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적지 않은 조선족이 사는 농촌들에서 바로 이런 하루살이식생존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가을수확을 두고 돌아오는 해를 계산해보는것이 아니라 명년은 명년이라는 계산을 그어놓고 양력설이요, 음력설이요, 보름이요 하는 명절들을 쭉 줄세워 온 동네가 돌개술문화로 일년내내 번것을 탕진해버린다. 그래서 돌아오는 해면 또 빈 털털이로 생산대부금을 맡는것이다. 이렇게 하고서는 연자를 돌리는 나귀신세를 종내 벗어날수 없다.
창업을 하고 치부를 하자면 우선 있으며 나눠먹자는 원시적인 분배의식을 뽑아버려야 한다. 돈이라는건 써버리면 그만이다. 그건 전혀 성장이 알리지 않는 소비이고 광주리에 물담기이다. 그러나 또 한몫씩 담당한 그들에게 전혀 아무런 혜택도 없다면 그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킬수 없다. 가치창조가 자아향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누군들 그렇게 몸을 내번져 땀을 흘리려 하겠는가. 과연 그럴 경우면 차라리 국가적 담보가 든든한 곳에 가서 울급 제때에 타는 쟁정로임팀에 몸을 담는것이 훨씬 안전하고 멋스럽다고 할것이다. 어떻게 하면 종업원들에게 주는 혜택이 개인, 집체, 사회(국가)를 동시에 상징할수 있게 할가. 이것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계산으로부터 김석륜은 종업원아빠트를 건설할 타산을 세우게 되였던것이다.
이 몇년래 그의 <<부하>>들은 신심으로 가득찬 신념을 안고 하나같이 그의 두리에 뭉쳐 고락을 함께 하면서 만부하작업을 하였다. 자기한테 배당된 일은 그 어떤 핑게의 리유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완수하였다. 사실 그들도 남들과 같은 가정을 가지고 살기에 춘하추동 가정적으로 풀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하였다. 배급, 석탄, 가을채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들은 필수적인 생활문제로 가정마다에 제기되는것이다. 그런데 년시년말로 출장이 잦다보니 그 볼기를 그들 가족에서 맞아야 하였다. 김석륜 자신도 포함하여 그들이 공사의 일로 하여 가족에 첨가시킨 부담을 공상에 대한 간접적인 공헌으로 계산하면 결코 간과할수 없는 수자일것이였다. 만약 종업아빠트를 짓는다면 많은 가정적문제를 집단적 힘으로 쉽게 풀수 있는것이다. 그렇게 되면 종업원들은 집근심없이 일심정력으로 맡은 일에 몸을 내번질수 있을것이다. 말하자면 산재식생활을 청산하고 튼튼한 안식처를 마련해주는것도 결국은 그들에게 최대의 활력을 심어주고 전체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안정과 성장의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또 그들의 자존과 성취의 기쁨도 거짓없이 스며있는것이다. 사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튼튼히 확보하고자 하는 이러한 꿈은 인생살이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소박한 꿈이면서도 또 흔히는 저의 힘으로는 이루기 힘든 꿈이 아닌가!
1988년 5월에 룡정고중 정문 길맞은켠 기지에서 종업원아빠트건설공사가 착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또 김석륜과 대외경제무역공사에 운명적인 풍운을 몰아올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1989년 9월에 종업원아빠트가 기본적으로 완공할 무렵에 시당위와 시인민정부에 고발이 들어갔다. 시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집체돈으로 개인집을 <<호화롭게>> 지었다는것이였다. 10월에 시당위에서 조직한 련합조사조가 대외경제무역공사에 진출하였다.
장춘에 회의참석차로 갔다가 금방 돌아온 김석륜은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어정쩡하게 <<피고석>>에 앉은 <<피고>>로 변신하였다.
<<누가 이 집을 짓는걸 결정했습니까?>>
<<접니다.>>
<<당신한테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한개 기업소의 경리가 그래 자기 기업소 종업원들의 복리를 결정할 권리조차 없다는겁니까?>>
<<당신은 집체자금으로 그렇게 호화로운 집을 짓는것이 정책에 어긋난다는것을 모릅니까?>>
<<무엇이 호화롭다는겁니까? 당신들도 국무원에서 내놓은 <쑈캉(小康)수준>이란 무엇인지 알고있겠지요? 등소평동지도 먼저 부유해지고 후에 부유해지며 공동히 부유해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집체자금으로 주택을 짓는것을 통제한다는것도 국가재정이나 생산자금같은것을 마구 람용하는걸 두고 말하지 우리같이 종업원들의 장려금이나 초과수입금으로 종업원주택을 해결해주는걸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지금 국가재정으로부터 로임담보를 받고있는 단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집면적이 국가에서 규정한 표준을 초과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지금 한창 렴정건설을 하고 간고하게 창업할것을 제창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이 집을 지을 때 국가에서 상품집을 어떤 규격으로 지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작고 현대생활구조에 맞지 않게 짓는걸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집을 설계할 때 우리의 요구는 건평이 천팔백평방메터이고 4층이였는데 실제 지은것이 이천오백평방메터에 5층으로 되였습니다. 이건 순전히 시도시건설규획의 요구와 건축공사의 상품집판매표준에 의해 설계된것이지 결코 우리의 본의는 아니였습니다. 두번째로 렴정건설이라는것이 부패를 반대하고 공금을 람용하는것을 반대하는것이지 결코 할수 있고 해야 할 복리사업마저 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은 아닐것입니다. 그러고 만약 우리 자신이 번 돈이라 해도 어느 개개인 지도자들의 집을 짓거나 한다면 또 문제로 서겠지만 전체 종업원들의 복리를 해결하는거야 무슨 잘못이 됩니까?>>
치렬한 설전은 오래도록 진행되였다. <<피고석>>에 앉은 김석륜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돌하고 도전적이여서 전혀 <<죄의식>>을 느낄수 없었고 오히려 개척을 모르는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력사의 비극과 씨름하는 창조적이고 개척적인 인간의 드팀없는 지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사조는 떠나면서 최종결론이 있기전에는 그 집에 들지 못한다는 봉인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얼마후 시당위규률검사위원회에서는 그들을 내부 통보비판을 하고 김석륜더러 검토서를 쓰라고 하였다. <<연변일보>>에도 보도가 실렸다.
<<정말 엉터리군, 우린 그래도 돈을 벌면 먼저 사회와 국가를 생각했소. 지방공업을 부축여주고 백사십륙만원이나 투자하여 로간부활동실도 지어주었소. 이제 또 백오십만원이나 투자하여 교육을 부축여주기로 했는데 그래 우리는 자기가 피땀으로 번 돈으로 요만한 혜택조차 볼수 없단말이요? 좋소, 그럼 우리도 인젠 공헌이고 뭐고 싹 걷어치우기오.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이나 하면 그만이지.>>
여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1989년 새해를 맞으며 한창진시장이 그들한테 위문을 왔다.
<<김경리, 나는 시인민정부를 대표하여 당신들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며 우리 시를 위해 큰 공헌을 한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사실 우리 힘으로서는 언제가야 로간부활동실을 지을지 막연합니다.>>
<<그거야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시정부의 재정곤난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가만 있는다면 우리도 마음에 걸리지요.>>
김석륜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상론할 일이 있습니다.>>
한창진시장은 퍽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난 당신이 꼭 <호의>를 품고 오지 않았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김석륜은 소탈하게 웃으면서 우스개를 하였다.
그러자 한창진시장도 웃으면서 말했다.
<<등쳐먹을바에야 끝까지 해야지. 저 김경리도 알겠지만 1983년도에 국가에서는 거액의 투자를 하여 룡정고중에 새 청사를 지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때 새 청사 락성식에서 이 학교 교장선생이 시정부 지도자한테 실험문제를 제기했댔는데 그때의 지도자가 해결해주겠다고 대답하였댔습니다. 그런데 그후로 시정부의 지도자가 몇기 바뀌도록 해결해주지 못해 오늘 내가 그 보따리를 걸머쥐게 되였습니다. 이 학교 교장선생이 이 일로 몇십번도 더 나를 귀찮게 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또 김경리의 등을 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 좋은 청사에 실험이 없으면 백마에 안장없는격이지요. 우리가 토론해봅시다.>>
이리하여 지도부의 토론을 거쳐 룡정고중 실험실건설에 백만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한족고중인 제3중학교에 또 오십만원을 주기로 했던것이다....
김석륜의 가슴은 불도가니처럼 끓어번졌다. 겉으로 정의와 진리를 외우면서 속으론 시기와 질투를 품고있는자는 언제든 남이 잘되는걸 배아파 보고만 있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사람들은 자기의 무능을 탓할 대신 천방백계로 사회여론과 일부 선광능력이 결핍한 지도자들을 꼬드겨 남의 일을 망가뜨리려 하는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에겐 또 좋은것보다도 나쁜것을 더 쉬이 믿어버리는 악습이 있고 흙속의 진주보다 옥에 티를 더 쉬이 발견하는 변태적인 심리습관이 있다. 하여 인간의 판단력은 얼마나 처참하게 또 자주 사실의 진상과 삐여져나가는지 모른다.
그사이 사회에는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정책을 어기고 집을 지었다느니 김석륜이 착오를 범하여 대외경제무역위원회 주임에서 떨어졌다느니 하는 발없는 말들이 입을 통해 재빨리 류통되였다.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였다. 그가 주임에서 해임된것은 대외경제무역위원회를 정부기관의 행정단위로 하고 대외경제무역공사는 순수 기업소로 하여 정식으로 갈랐기에 대외경제무역위원회 주임을 내놓고 대외경제무역공사 경리를 맡은것이였다. 과연 덕행은 고의로 홍보하지 않으면 그만이 가장 절감하지만 추문은 어쩐지 류통성이 강해서 삽시간에 사방 몇십리에 강한 울림을 일으키는것이였다. 워낙 인간이란 그렇게 타인을 헐뜯는데는 적극적으로 잘 발동되는 본질을 갖고있는듯하다. 그래서 요언이란것도 뿌리없는 나무여서 종내는 시들어버리고 마는것이지만 그전까지는 과연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면서 요언의 대상을 여지없이 짓뭉개놓는것이다. 그러고보면 한 인간의 성장과 요절은 결국 그 자신만이 책임질수 없을만큼 자연, 사회, 인간 등 다방면의 비살같은 충격과 타격 그리고 부축임을 받으면서 결정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김석륜은 필경은 삶의 일상성에서 초탈하여 창조적 행위에 몸을 내번진 개척형의 인간이였다. 끈질긴 실험정신과 강한 돌파의식이 이런 사람들의 사유주체이다. 그는 직접 주당위 리덕수서기를 찾아가서 사실의 시말을 낱낱이 회보하였다. 회보를 다 들은 리덕수서기는 즉시 룡정시당위에 몇가지 지시를 주었다. 그 내용은 대개 이 몇년래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는 지방과 사회를 위해 큰 공헌을 했다는것, 집은 이미 지은것인데 대외경제무역공사를 내놓고는 자기돈으로 살수 있는 단위가 없다는것, 면적초과부분은 개인이 안아야 한다는것 드이였다. 이로써 그처럼 회오바람마냥 기승부리던 집풍파가 대뜸 가라앉아버렸다.
그러나 김석륜의 가슴은 좀체로 평온을 찾을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의 어떤 지도일군들은 흙속에서 진주를 찾으려 하는것이 아니라 옥에서 티를 발견하려고만 애쓰는가.

6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는 낡은 책상걸상에 자그마한 서류궤 하나로 <<가정>>을 꾸려서부터 어언간 십년의 <<가정사>>를 써왔다. 그들이 걸어온 십년은 실로 자립의지로 간고하게 창업한 십년이였으며 진짜 자기것으로 산 삶의 흔적을 력력히 찍어온 십년이였다. 거기엔 아직 이 글에서 소개하지 못한 많은 사연들이 적혀있다. 1986년 8월 31일 륙도하물이 불어서 륙도하 제방이 밀려가고 립암교가 뭉턱 끊어지자 종업원들이 총동원되여 삼합에서 거둔 송이버섯을 어깨로 메여서 강을 건넌 이야기(생생한 송이버섯은 정선, 포장하여 2~3일내로 일본에 도착되게 해야 한다), 30명 종업원 모두를 대학과 중등이상의 문화수준을 갖추게 한 이야기, 체육경기마저 무엇이나 하면 끝을 보는 상승심을 키우는 훈련장으로 삼게 한 이야기... 그 어느 이야기속에도 이 <<가정>>을 꾸리고 키워온 김석륜경리의 <<세대주>>다운 영상이 은근히 비껴있는것이였다. <<가정>>의 성원들에 대해 그토록 엄격한 그였지만 또 언제나 선구적 실천자였기에 그들의 존경과 애대를 몹시 받고있는것이였다...

* * *

피땀으로 써내려온 십년사를 되번져보노라니 김석륜의 머리에는 무사한 습관에 길들여 평범한 삶을 살던 직업인때엔 전혀 피해왔던 생각의 골목들이 한줄한줄 뻗어나갔다.
-라태, 질투, 게으름과 비속한 인정만 론하는 <<무식관중>>이 많은것이 삶의 일상성을 초월하여 분투하는 사람에게는 최대의 위험이다.
-형식적인 도덕주의는 국가성장과 인민소질제고의 가장 큰 장애로 되고있다. <<좁쌀 한줌이라도 나눠먹는다>>는 도덕의 허울을 쓰고 게으름뱅이의식과 극단적평균주의가 정신적질곡으로 되고있다.
-우리의 권력담당자들은 좀더 선광능력(캐낸 광물중에서 가치가 적거나 없는것을 골라내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모험가>>(개척자)들이 실착했거나 요언과 야유의 과잉속에서 헐떡거릴 때 권력으로 보호해줄줄 알아야 한다.
-개인적인 차원(내지 가정적인 차원), 집체적인 차원 및 사회적인 차원(내지 국가적인 차원)을 동시에 느끼는 바로 거기에서 거대한 힘이 분출하는것이며 또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전완미한 경제집단의 립체적조직결구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김석륜이 지금 가장 관심하고있는것은 어떻게 하며 종업원들이 좀더 혜택을 보고 집체가 더욱 부유해지며 사회나 국가에 더욱 큰 공헌을 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는 창업의 길이 험난한것이지만 치부의 길도 결코 평탄하지 않다는것을 잘 알고있다.
남보다 앞서 치부의 문을 두드려 열고 리상적인 삶의 설계도를 그리기 위해 <<현지답사>>를 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아픔과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인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창문가에 서서 기승부리는 동장군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띄우고있다.
아, 계절의 시작은 과연 봄이 아니라 겨울이다. 춥고 매운 계절, 정이 없이 모든걸 얼구어죽이는 계절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푸르싱싱한 새 생명을 싹틔우는 봄아씨를 맞이하기 위해 온갖 비난을 달갑게 받아안으면서 모든 잡동사니들을 동봉해버리는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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