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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사 회고와 문제 제기
“여타 한국 근대작가 누구와 견주더라도 그 당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채만식만큼 그 작품세계가 다양한 방법론에 의해 평가받은 작가도 드물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자문학이 그 주된 창작방법으로 되고 있다는 데에는 큰 이의가 없는 듯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풍자문학의 특질을 어떻게 규정하고 문학사적인 주소를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에 있어서는 평가가 크게 이질적이다.
채만식이 현역작가로 작품창작을 하던 당대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30여년 간에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로 카프에 의한 조직론적 이데올로기비평으로부터 시작되어 임화의 세태소설 논의를 지나 그 적극적인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풍자 자체를 억압시대에 있어서 작가의 소극적인 대응방식으로 폄하한 해방 후의 백철에 이르고 다시 1960년대에 천이두에 의하여 채만식의 풍자문학을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다루면서도 여전히 문학의 정도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간접적 측면적 접근의 방법으로 보는 확장양태를 보이고 있다.(백철, 『조선신문학사조사 현대편』, 백양당, 1949.7과 천이두, 「현실과 소설-한국단편소설론(3)」, 『창작과비평』, 1966년 가을호를 참조)
“1960년대까지의 공소함에 비춰 볼 때 197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채만식 문학에 대한 천착은 그야말로 비약적인 양적․질적 확장을 이루어왔다. 이 시기의 채만식 문학 연구는 거시적․미시적 차원의 다종다양한 접근 방법을 보여왔는데” 첫째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채만식에 대한 전기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고, 둘째는 리얼리즘론 차원에서 작가의 현실 인식, 세계관 및 그 내적 형식에 주목한 연구를 들 수 있고, 셋째는 작품에 나타난 언어와 문체 및 서사구조에 주목한 연구논문들을 들 수 있으며, 넷째는 비교문학적 연구를 포함한 텍스트 상호관련성에 관한 연구 갈래를 들 수 있다.2)
여기서 보면 아무튼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채만식 문학에 대한 연구가 작가론에서 문학사적 자리매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담론의 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담론에서도 역시 채만식 문학의 풍자성 자체에 대한 본질론적 규명과 허무에의 극복의지를 밝혀내는 것은 작가의 문학관 내지 세계관을 빚짐이 없이 돌려주고 참담한 식민지 억압의 현실에서도 빛을 찾아 몸부림치던 진보적인 엘리트정신을 발굴해내는 역사철학적인 작업으로 될 것이다.
2. 창작기법을 넘어서는 시대극복의 방법론-풍자정신
풍자문학이 채만식 소설창작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무엇보다도 풍자문학에 대한 본질론적 규명은 그 작가의 문학사적 자리매김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풍자가 문학창작 기법의 정도(正道)가 될 수 없고 현실에 대한 간접적이고 측면적인 접근으로만 한계가 지어질 때 아무리 채만식 풍자문학에 대한 평가가 최고점으로 솟아오른다고 해도 문학일반에 대한 검토 속에서는 벌써 다음 자리에 물러날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다. 과연 그런 경우라면 어떻고 어떠한 부류의 문학이 정도인지는 따질 필요도 없이 아무튼 채만식의 풍자문학은 다만 그 풍자문학 자체의 평가만으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먼저 풍자 일반에 대한 본질론적 규명에 앞서 채만식 풍자문학에 대한 이런 선입견이 두 가지에 근원을 두고있다는 지적으로 지루한 분석을 압축하려 한다. 왜냐하면 앞의 연구사에 대해 자세히 검토를 해보면 그런 논쟁을 곳곳에서 펼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근원이란 하나는 채만식이 현역작가로 있던 당대에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이 조직론적인 차원에서 출발하여 문학창작에서도 “문학적 이념 이전에 정치적 이념”3)을 선별기준으로 내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전반에 걸쳐서 정교화된 리얼리즘 이론의 수용과 좌파 시각의 문학사 연구의 영향을 받은 결과 채만식 문학은 그 의의만큼이나 한계가 부각되는 양상을 노정했다.”4)는 것이다.
전자는 문학창작에서 작가의 세계관과 계급적 이념의 관계를 혼동한 결과이고 후자는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전체주의적인 가치판단 혹은 리얼리즘 문학을 상대로 하는 연구가 쉽게 빠지는 주관, 이성적인 진보개념 내지 이상적 전망의 방법론에 맞춘 역사망각의 시간극복이라고 일깨워주지 않을 수 없다.
“풍자는, 인간의 악덕이나 우행의 교정책으로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옹호된다.”5)
“산문이나 운문이거나 간에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주제를 조소로써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전체의 구성원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풍자’의 형식상의 장르를 이루고 있다.”6)
“영어로 된 훌륭한 풍자는 중세기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쓰여져 왔다.”7)
보는 바와 같이 풍자는 접수미학의 시점에서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옹호되고 그럼으로써 문학의 한 장르로서 당당하게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쓰여”지는 장르사적 발전을 해온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문학장르 내지 문학사조를 포함해서까지 문학사의 흐름을 사회․역사철학적인 발전과 무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기본전제를 작가 및 작품 평가의 척도로 삼을 때 장르선택의 문제는 벌써 창작기법의 범위를 넘어 작가의 시대 대응적인 방법론으로 검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 대응의 방법론으로 검토 가능함을 우리는 풍자 대상의 본질과 시대적․제도적 요청에 대한 진단을 통해서 반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반증이 성립되지 않을 때 그것은 다만 작가의 창작기법선택임에 다름 아니고 따라서 현실인식과 시대의식이라는 리얼리즘 정신에 의해 작가의 세계관 및 역사관에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고대 로마 풍자문학의 두 유형을 대표하는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가 각각 낙관주의적 풍자와 비관주의적 풍자문학 작품을 쓴 이래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서구 풍자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두 흐름을 형성해 왔다.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맹목성을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으로서 치유 가능한 것으로 보는가 또는 치유 불가능한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질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보는가에 의해 대별되는 것들이다. 이는 곧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신뢰여부와 연관된 문제로서 풍자 작가 자신의 인간관 및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 등이 반영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채만식의 풍자문학에 나타난 그의 관점은 비관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채만식 자신의 기질에도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내적인 긍정적 보편성을 찾아내기 힘든 시대로서의 식민지 체제의 억압적 현실 속에서 현실 부정의 수단으로서의 풍자문학을 자신의 주된 창작 방법으로 채택한 채만식의 작가적 운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8)
정홍섭이 채만식의 풍자문학을 “비관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라고 결론하는 것은 역시 문학장르 내지 문학사조를 포함해서까지 문학사의 흐름을 사회․역사철학적인 발전과 무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기본전제를 척도로 작가 및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풍자이론 일반에 근거하여 풍자문학이라면 어차피 낭만주의적이 아니면 비관주의적이라는 양단이론에 기탁한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채만식의 풍자문학을 이미 창작기법의 범주를 넘어 “자기 내적인 긍정적 보편성을 찾아내기 힘든 시대로서의 식민지 체제의 억압적 현실 속에서 현실 부정의 수단으로의 풍자문학을 자신의 주된 창작 방법으로 채택한 채만식의 작가적 운명이었다”고 확인함으로써 그의 풍자문학을 시대적 대응의 방법론의 차원에로 환원시켜 바로잡아놓은 것이다.
방민호도 “일제 하 조선의 문학인들에 있어 식민지적 현실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문학적으로 의식되고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고 하면서 “근대문학의 독자적 발전이라는 명제를 두고 고민”9)한 당대작가들을 두둔해 나서고 있다.
“사실 1936년부터 38년 말까지의 3년 동안은, 채만식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맹렬한 활동기였다.
이 시기에 가해진 일제의 탄압은, 프로문예 작가들에게는 이데올로기의 탈피를 서두르게 하였고, 대부분의 작가들로 하여금 작품의 관심을 도시와 문명 또는 농촌과 자연으로 확대시켜 삶의 양상을 다양하게 제시하도록 하였다.”10)
1934년 2월부터 시작되는 제2차 사상범 검거를 비롯하여 정치적 탄압에 의한 식민지 강압정책이 강화되면서 일제는 <황국신민서사>의 강제 암기, 신사의 강제 참배, 일본어를 국어로 책용, 지원병제도의 실시와 창씨개명 등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가속화하려고 망발하였다.
이같이 부분적으로부터 전체적으로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는 때 “채만식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풍자 양식은 ‘근대(성)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유력한 공격 수단임과 동시에 자기 부정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었다.”11)
상기한 극한의 시대배경과 그런 배경에서도 채만식의 창작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였고 풍자문학이 주된 창작방법이었다는 사실은 채만식의 작가적 의식이 부정적 시대와 그에 호응하는 인간에 대한 공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을 진맥할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것을 조소의 풍자정신에 기탁한 것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풍자문학에서 가장 대표성을 띠고있다고 할 수 있는 장편소설 『태평천하』는 위에서 그의 풍자문학의 성질을 시대 대응의 방법론으로 확인함으로써 그 독특한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태평천하』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인물 구성 면에서 독특한 점을 보이는데, 『濁流』와 대비할 경우는 물론 유례없이 부정적인 인물들로만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종학 역시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저자 각주)12)
이는 작품의 인물설정을 통해 당시 사회의 시대상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가속화와 함께 민족의식이 거세되고 동물적인 생존을 위해 반민족적․반사회적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주인공 윤직원 영감을 주축으로 하는 부정인물들은 개인이나 한 가족의 타락을 넘어서서 민족성과 인간성을 잃어가던 당대 한국의 식민지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윤직원 영감이 식민통치에 의한 한국의 기형적인 근대발전과 자멸해 가는 식민지인의 몰락상을 가장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는 전형인물로 되는 것은 그 인물의 개인적 부정행위에 앞서 우선 그 자신이 시대의 발전에 도태될 저물어 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선 윤직원 영감의 계급적 신분이나 역사적 재산관계부터가 매우 우연하게 ‘하사’받은 것이다.
얼굴이 말[馬面]처럼 길대서 말대가리라는 별명을 듣던 윤 직원 영감의 선친 윤용규는 본이 시골 토반(土班)이더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전이더냐 하면 실상은 아전질도 제법 해먹지 못했습니다.
아전질을 못해먹은 것이 시방 와서는 되레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그때 당년에야 흔한 도서원(都書員)이나마 한자리 얻어 하고 싶은 생각이 꿀안 같았어도, 도시에 그만한 밑천이며 문필이며가 없었더랍니다.
...
그런데, 그런게 다 운수라고 하는 건지 어느 해 연분인가는 난데없는 돈 2백 냥이 생겼더랍니다. 시골 돈 2백 냥이면 서울 돈으로 2천 냥이요, 그때만 해도 웬만한 새끼부자 하나가 왔다갔다할 큰돈입니다.13)
전혀 무식하고 째지게 가난하였던 윤 직원의 선친 윤용규가 운수 좋게 난데없는 돈 2백 냥이 생겨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윤용규는 “칼로 벤 듯 노름방 발을 끊고, 그 돈 2백 냥을 들여 논을 산다, 대푼변 돈놀이를 한다, 곱장리를 놓는다 해가면서 일조에 착실한 살림꾼”14)이 되었다. 돈이 생명의 전부가 된 것이다.
윤 직원 영감은 선친으로부터 “3천 석거리”의 재산을 물려받은 부자이나 역시 무식하였고 “과시 승어부(勝於父)”라 할 정도로 치산에 밝았다. 그런 윤 직원 영감에게는 “돈을 모으는 데 무얼 어떻게 해서 모았다는 거”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한테는 돈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시금석이었다. 더구나 부친이 재산 때문에 목숨을 잃었기에 그한테는 동학당같은 무리는 화적패 내지 부랑당일 수밖에 없고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재산축적을 위해 여러 편리한 제도를 만들어주는 식민주의자가 은인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튼 윤 직원 영감은 그처럼 육친의 피로써 물들인 재산더미 위에 올라앉아 옛날 그다지도 수난 많던 시절과는 딴판이요, 도무지 태평한 이 시절을 생각하면, 안심되고 만족한 웃음이 절로 솟아날 때가 많았습니다.15)
사실 이에 앞서 그의 재산축적이 조선이 식민지화되던 초기 어두웠던 시절에 “체계변”이며 “장리변”의 이문과 “또 공문서(空文書)가 수두룩해서 가산 늘리기가 좋았던”데 원인하고 있으니 이는 벌써 일제 식민지수탈정책과 구조의 결과물임에 다름 아니다. “식민지 기생지주와 매판자본가들”, “일제는 이들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반봉건적 경제구조(지주와 소작인)를 강화하고, 또한 이들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16)
이와 같이 윤 직원 영감의 재산관계를 식민지역사와 함께 정리하고 그의 계급적 신분을 식민지수탈구조와 관련시켜보면 친일행위에 앞서 우선 신분적으로 식민지의 기생지주, 친일지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동학당 같은 무리를 화적패나 부랑당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그들이 부친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은 무리이기 때문이고 사회주의나 사회주의자를 증오하는 것은 무슨 주의의 선택도 아니고 다만 그들이 자기를 지켜주는 일본을 반대하고 ‘태평천하’를 위협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먹이를 주면 꼬리를 젖는 동물성에로 철저하게 퇴화된 것이다.
작품 전체무대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부정인물들도 각기 자기의 신변상황에 따라 현실을 외면한 채 불구가 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극복을 위한 아무런 생산적인 노력도 없이 식민지수탈구조에 자기의 무기력함과 동물적인 생존욕구만을 그대로 노출한 채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는 순 소비적 인간들이다.
“풍자의 대상이 된 작중 인물들의 공통점은 민족적 이상에 역행하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민족적․반사회적 행동으로 일관하는 지주 겸 고리대금업자, 목적 없이 살아가는 타락한 부유층의 자제,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르고 동물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채만식은 한 세대 속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무려 다섯 세대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는 여러 세대의 가치관을 동시에 대비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차이와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17)
이주형이 ‘세대’ 모티프에 천착한 것은 텍스트의 외부구조에 눈가림을 당하지 않고 작품의 저변에 깔려있는 작가의 내면적인 창작원리를 밝혀내려는 좋은 시도였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여러 세대의 가치관을 동시에 대비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차이와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보다는 작가 채만식이 당대 암담한 식민지통치의 가속화와 민족성과 인간성이 말살된 동물 본능적인 존재군상을 보면서 얻은, 민족수난의 극복이 여러 세대를 걸치지 않을 수 없다는 역사철학의 예술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투명한 해석이 될 것이다.
“‘세대’ 모티프의 문제는 역사철학의 문제이다. 즉 채만식의 ‘세대’ 모티프에는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한 행정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던 당대 조선이 과연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18)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과연 이 작품에서 어떻게 역사철학적으로 접근되고 있는가 하는 진단은 작품의 주제와 창작원리의 명암을 확인하는 기본 핵이 될 것이다.
3. 허무에의 극복과 성찰된 이념
『태평천하』는 부정적인 인물들로 작품의 전체구성을 이루고 그 부정적인 인물의 세대적 흐름을 윤용규→윤 직원→윤창식→윤종수→윤경손의 다섯 세대에 꿰어놓고 있다. 긍정인물은 아예 현실에서 외출시키고 현장에 있는 인물은 완벽하게 타락과 몰락하는 모습들이니 자칫 작품이 허무주의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카프 해체(1935. 5. 28),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공표(1936. 12. 12), 중일전쟁(1937. 7. 7), 조선사상보국연맹조직(1938)으로 이어지는 객관적 정세의 악화로 인해 일체의 사상운동이 금지(전망으로서의 사회주의 이념 상실)되었고, 여기서 작가의 ‘되다가 찌부러진 찌스러기주의자(소부르주아 의식)’l로서의 한계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한 이 작품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실상 이 작품이 중도에 쓰다가 만 인상을 주고, 허무주의적 색채마저 주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19)
『태평천하』가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했다는 이러한 결론은 작가의 인간관 내지 세계관을 계급적 이데올로기로 양극화하고 문학창작에서의 이념의 미학적 역할을 계급목적론으로 단순화하는 폐단이다.
문학, 특히는 리얼리즘문학은 현실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재구성을 걸친 현실의 본질적인 반영이라고 할 때 이때 현실의 진실한 재현은 이념을 매개로 또는 제작원리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창작에서 이념에 의해 현실이 재구성된다면 이념은 또 현실의 본질에 의해 성찰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찰되는 이념은 작가의 인간관 내지 세계관의 제약은 받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철학적인 방향성을 확인하는 이성적인 진보개념 내지 이상적 전망임에 다름 아니다. 이념이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전체주의적인 가치판단 내지 계급목적론으로 정의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리표현일 때 문학은 문학이기에 앞서 철학저서나 계급투쟁지침서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부분에 마치 폭탄처럼 갑자기 ‘배달’된, 일본에서 종학이가 피검된 사건을 작품의 허무주의 혐의를 벗길 수 있는 ‘실증자료’로 포착하는 것은 작가가 작품의 저변에 잠재적 생산성으로 깔아놓은 역사철학적인 발전이념에 접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문흥술은 이런 포착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일제 강점기에 경찰서장이라는 위치와는 극단의 자리에 있는 사회주의 선택은 작가 채만식의 동반자적 성격에 다름 아니다. 곧 몰락 중산계층인 작가의 소부르주아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매개항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드러남이라 볼 수 있다.”20)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계급목적론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런 판단으로는 어쩔 수 없이 “몰락 중산층인 작가의 소부르주아의식”을 꼬집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작품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미완성으로 표현되어 “실상 이 작품이 중도에 쓰다만 인상을 주고, 허무주의적 색채마저 주는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탈은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한 이 작품”이라고 확인한데서 생긴 것이다. 이런 논지를 따를 경우 그 시정방안은 아무래도 종학이를 작품의 플롯을 형성하는 기본인물로 설정하고 윤 직원 영감을 중심으로 하는 부정인물들과의 갈등 속에서 일제식민지수탈정책에 맞서 대결하다가 피검되는 과정으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태평천하』에는 일제 식민주의의 강압정치가 황민화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절정에 오르면서 국가의 상실과 민족의 몰락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여 있던 “당대 조선이 과연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확인하면 종학의 피검은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한”것이 아니라 바로 일제 식민주의가 종내는 극복되고 전복될 수 있다는 이성적 진보개념의 역사철학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윤창식→윤종수→윤경손에 걸쳐 삼대에 이르는 타락과 멸망은 윤 직원 영감한테는 큰 타격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한테 기생하여 살아가는 기생충을 떨어버리는 것만큼 해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윤종학의 피검은 그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되는 것이었다. 윤종학의 상징적 의미는 자기를 지켜주는 일본을 반대하고 ‘태평천하’를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일제 식민주의와 생리적으로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친일 기생지주는 식민주의자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대에 있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가장 철저한 대적이었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를 이성적 진보개념과 이상적 전망의 대응물로 내세운 것은 일제 식민주의가 종내는 극복되고 전복될 수 있다는 역사철학적인 접근을 위한 대리표현일 수 있다는 분석용어를 사용하여야 작가의 창작원리를 투명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식민주의 강압정치에 의한 국가의 상실과 민족의 몰락이라는 현실을 부정인물들의 동물적인 퇴화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작품의 전체적인 풍자적 구조에서 결말부분에 폭발한 종학의 피검 사건에 대한 ‘배달’은 적극적인 의미가 매겨질 것이다.
맺는 말
상기한 논술에서 보면 『태평천하』를 비롯한 채만식의 풍자문학은 식민주의 강압정치에 의한 국가의 상실과 민족의 몰락이라는 특정한 역사환경에서의 현실대응의 창작방법론이었으며 공격적인 풍자정신과 역사철학적인 접근방법이 허무에의 극복의지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창작이 성찰된 이념에 의해 현실을 재구성하고 또 작품에서 재구성된 현실의 재현이 다시 이성적인 진보이념을 나타낼 때 그것은 작가의 인간관과 세계관의 제약을 받더라도 계급목적론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역시 이념은 역사철학적인 방향성을 나타내는 진보개념이나 전망의 방법론이지 계급목적론의 이데올로기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의 본질에 충실할 때라야만 채만식의 풍자문학이 가지는 특정시대의 방법론적 특성을 옳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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