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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에서의 현실극복의지
2009년 05월 16일 15시 26분  조회:3024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염삼섭의 『만세전』에서 읽는다


1. 연구사검토와 문제 제기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횡보 염상섭은 사실주의 소설문학을 확립한 최초의 작가라는 번지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한 연구는 1920년 『창조』 6호에 실린 김동인의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를 논함」에서 비롯되어 196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더니 1997년에 와서는 발표된 비평과 논문이 527편에 달하고 단행본만 해도 8권이나 되었다.1) 이는 작가 염상섭과 그의 작품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한 위치에 놓여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 리얼리즘과 사회문제성을 주요 궤도로 하여 고찰되면서 그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많은 한계점들도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묘사의 과잉이나 좀더 개성 있는 형상창조를 하지 못한 것 같은 기법상의 제 문제들은 아쉬움으로 지적해도 마땅하나 그의 작품을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라고 비평하면서 “『만세전』이나 『삼대』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김동인과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라는 면에서 같은 계보가 되고 만다”2)는 문학사적인 결론에까지 이르면 이는 사실 창작수준의 평가에 머물지 않고 작가의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문패를 떼여버리는 거나 다름없는 판결이다. 특히 그 판결이 2002년도에 출판된 개정증보판 『현대한국문학사』(이하 『문학사』)에서 내린 것이라고 보면 일개인의 연구서처럼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심각성조차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판결이 공정한지는 구체적 작품을 통해서만 옳게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염상섭 문학세계가 과연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고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인지를 상기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만세전』이나 『삼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우선 『삼대』보다 훨씬 일찍 창작된 『만세전』을 들어 기초작업으로 삼으려 한다.



2. 닫힌 의식에서 열린 의식에로의 추구―제목, 서두의 개정


『만세전』의 판본이 네 가지나 존재한다니 그 판본 연구도 상당한 흥미와 함께 가치 있는 작업이 되겠으나 판본 비교연구 자체가 하나의 연구항목이 되는 만큼 여기서는 본고의 문제의 제기와 관련해서 제목, 서두의 개정이 가지는 인식적 차이 내지 주제적 성향차이에 대해서만 밝혀보려 한다.

 우선 작품의 제목이 『묘지』에서 『만세전』으로 개칭되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묘지는 생명의 정지, 육체의 부화를 뜻하는바 이것이 상징적 의미로 될 때 그것은 곧 발전이 막힌 사회, 와해되는 집단을 상징할 것이고 도저히 구제 불가능한, 또는 치료 불가능한 어떤 종말의 상징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 묘지가 당시 조선 사회 현실을 가리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묘지』란 제목으로부터 우리는 금방 작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닫힌 의식 내지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꼬집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의 이른바 ‘원점회귀’는 표면화된 그대로 현실 도피적이고 식민통치에 대한 궁극적인 굴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 ‘원점회귀’는 내면적인 의식구조로 보면 이미 변질된 ‘회귀’이다.

 우리는 ‘원점회귀’를 행위의 평면적인 순환현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기표를 형성하는 기의의 차이로, 즉 처음의 동경과 두 번째의 동경이라는 달리 매겨지는 의미에서 주인공 행위의 이질성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처음 선택한 동경은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대결에서 확인한 근대화 그 자체였다면 두 번째 선택한 동경은 바로 제도적 장치로서의 식민지화와 시대적 요청으로서의 근대화라는 모순된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요물이었다. 이중구조인 만큼 선택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고 형상분석에 따라 작품의 명암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근대의식이 조선에 대량으로 이식되어 들어오는 때 봉건가치관의 억압으로 강제결혼을 한 주인공은 봉건의식에 대한 반항심리와 함께 근대의식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일본은 아직 사회에 미숙하고 봉건의식에 반기를 든 주인공에게 있어서는 그냥 근대성 그 자체였다. 자기가 거부하는 봉건의식과 지향하는 근대의식이라는 양자택일의 단순사유였기에 이미 결혼까지 한 가정적 삶을 주저 없이 뿌리치고 근대접근의 길인 일본행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만 부패한 봉건에의 반동이고 진보적인 근대에의 지향이었다.

 일본에 있으면서 차별을 느끼지 못한 것도 아니나 그것은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 문명한 자와 미개한 자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쯤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조차도 그냥 문명한 근대인이 미개한 봉건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이는 일본행 동기 자체가 봉건의식에서의 탈출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칠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 관념을 굳게 의식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3)


 봉건적 가부장제와 윤리 도덕적 가치관에 반항하여 근대문명을 찾아간 미성숙의 주인공한테는 망국의 수치와 식민지인의 굴욕이 아직 현실적인 신변체험으로 각인 되지는 않았다. 이는 그가 그 이전에는 아직 사회 기성세대가 아니고 학생이라는 것과 또 그의 가정이 그더러 유학을 하도록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가진 중류층이라는 것, 말하자면 그의 신분과 가정토대하고도 관계할 것이다.

 주인공의 의식에 질적 비약이 일어나게 된 것은 소설의 기본 줄기를 이루는 동경에서부터 서울에로의 일시적 회귀였다. 이 일시적 회귀의 여로에서 사회에 미성숙한 “책상 도련님”이었던 주인공은 그 자신이 직접 여러 현장에서 부닥뜨린 압박하는 무리와 억압당하는 무리라는 민족적인 차별, 직접 목격한 식민지화의 참경들을 통하여 망국의 치욕과 식민지인의 굴욕을 분하고 경악함 속에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워낙 아내의 죽음을 맞아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주인공의 의미는 봉건가치관과 가부장제적 가족제도의 산물을 총결산하고 그것과 철저하게 결렬하려는 장엄한 행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는 여로에서 당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은 그더러 개인의 삶을 넘어서서 현실인식에 눈뜨게 하였고 근대와 봉건이란 노출된 대결 뒤에 숨은 국권강탈과 식민지전락이라는 나라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정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럼에도 결국 주인공은 어서 빨리 이 묘지를 벗어나려 하며 동경으로 돌아가려 한다. 식민지 치하에서 썩어가고 몰락해 가는 나라와 민족을 두고 식민주의 발원지로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묘지』라는 제목으로 작품의 주제를 시사할 경우 어찌하면 주인공이 애초에 일본 동경에 갈 때는 근대의식에로의 지향 때문이었고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의 회귀는 벌써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외면한대로 발전적인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아름다운 탈을 벗고 파괴적인 식민주의 악마라는 원형을 드러낸 일본에 굴욕적인 화합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또 발전적 근대성의 상징이면서도 파괴적인 식민주의라는 가치 대립적인 이중성을 띤 일제의 ‘근대화’표명의 국권강탈 앞에 그 대상존재인 조선민족 내지 조선이라는 나라는 식민통치에 대한 내면적 반항심리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에 멀리 낙오했다는 미개함 때문에 썩어 가는 구더기나 죽음의 묘지로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암시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혐의는 작품의 제목이 『묘지』에서 『만세전』으로 개정되는 그것만으로도 벌써 해소되는 것이고 따라서 식민주의의 강압정치에 제도적으로 고착되는 식민지화의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썩어 가는 구더기나 죽음의 묘지라고 확인한 것은 『책상 도련님』으로서의 미성숙한 주인공의 분노와 경악함의 심리적 과잉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우선 이런 질식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도피가 아니고 악마의 일본에 굴욕적인 화합이 아니다. “대기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 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치는 질식”4)에서 우선 벗어나려는 욕망의 결단이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민족을 몰락하게 하는 파쇼적 식민통치는 반대해야 하지만 근대화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또 필연적인 시대 요청으로 나선다. 그런데 일본은 바로 제도적 장치로서의 식민지화와 시대적 요청으로서의 근대화라는 모순된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요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낙오한 봉건의식에서 자생력을 잃고 도태될 운명에 처한 민족의 미래지향적인 선택은 무엇보다 먼저 근대의식의 수립일 것이다. 이는 역사와 시대에 도태되게 하는 봉건의식에서의 탈피가 근대의식의 수립에 힘입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선결조건 역시 근대의식의 수립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각성이 있을 때 주인공의 서울에서 동경에로의 회귀는 파괴적 식민주의 악마에로의 굴욕적인 화합이 아니라 발전적 근대성에로의 새로운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나가는 자각과 발분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5)


 『만세전』을 폭풍전야, 혁명전야, 광명전야, 또는 어둠의 저쪽은 광명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작품은 봉건의식에 타락하고 식민주의에 멸망하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근대의식의 각성을 가져와야 한다는 역사적 시대적 당위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노출된 대결 뒤에 숨은 국권강탈과 식민지전락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노출시키고 일본의 발전적인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아름다운 탈을 벗기고 파괴적인 식민주의 악마라는 원형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서두의 개정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이다.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어서, 세상은 비로소 번해진 듯싶고,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이다. 일본은 참전국이라 하여도 이번 전쟁 덕에 단단히 한밑천 잡아서, 소위 나리긴(成金), 나리긴 하고 졸부가 된 터이라, 전쟁이 끝났다고 별로 어깻바람이 날 일도 없지마는, 그래도 또 한몫 보겠다고 발버둥질을 치는 판이다6)


 이같이 전주곡식으로 시작되는 서두는 벌써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에 근대문명의 천사로 둔갑한 일본이 파괴적인 식민주의, 확장주의로 광분하는 악의 손임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리라는 것을 미리 암시해주는 것이다.

 과연 작가는 제목과 서두의 개정에서 현실인식, 시대의식 내지 문제의식에 천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개정 자체가 창작 기법상의 미비한 점을 현실시각에서 진단하고 보완하려는 수축작업인 만큼 원작의 기술적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고 또 작가의 의도적인 주제노출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겠지만 그만큼은 작품이 결코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반봉건의식의 성장과 민족의식의 각성―플롯의 이중구조


 사실적 허구유형의 소설창작에서 플롯의 유형은 모든 창작기법의 선택 내지 전개양상의 선차적 전제조건이 된다. 서두, 서술형식, 서술시점 또는 서술시각, 인물 지어는 어조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플롯의 유형에 의해 선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작품의 구조 내지 골격을 이루는 플롯의 유형선택은 문학작품의 형식 자체만이 아닌,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한 유기체의 형성모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플롯의 유형 내지 짜임구조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은 그 작품의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기초적 내지 기본적인 작품해석방법의 한 가지이다. 흔히 무엇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려 했다는 작품분석방식이 공식으로 된다.

 그러나 단선 플롯에서는 이 공식이 퍽 쉽게 적용될 수 있으나 복선 플롯에서는 상황이 조금 복잡하다. 복선이라면 물론 구조상 둘 이상의 줄거리를 갖고있는 플롯형식을 말할 것인 데 작가의 총체적 설계에 따르는 줄거리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진맥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의미 매김이 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한 줄거리 또는 여러 줄거리는 다른 한 줄거리가 전개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배경이나 입체적인 수식이 될 수도 있으나 보다 적극적으로 기본줄거리에 작용하면서 작품의 의미 매김에 참여할 수도 있다.

 『만세전』의 플롯형식은 보건대 단선줄거리로 직선적 전진형 플롯유형인 듯 하다. 이것은 여로형 소설이라는 판단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작품은 주인공이 아내의 생명이 경각을 다툰다는 급보를 받고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그 여로에서 겪는 사건을 기본 줄거리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으로는 근대문명을 동경하던 한 조선의 인텔리가 한차례의 귀국여로에서 신변 체험적으로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사실을 통하여 일본의 발전적인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아름다운 탈을 벗기고 파괴적인 식민주의 악마라는 원형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작가가 말하려는 내용의 전부라면 봉건혼인이라는 규정적인 의미설정을 하지 않고 그냥 주인공이 아내의 생명이 경각을 다툰다는 급보를 받고 귀로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다. 나와 아내의 관계야 어떻든 귀로에서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것들에 대한 나의 신변체험은 크게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아내의 죽음은 다만 주인공이 귀국하는 계기작용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봉건가치관의 부산물을 철저히 청산하고 봉건의식에서 일탈하여 근대의식에로 전심하려는 주인공의 심리지향의 한 계기가 되었다가 결과적으로는,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심리갈등에 앓음을 하던 주인공이 일제 식민주의정책의 수탈로 피폐해지고 몰락해 가는 조선의 현실로부터 봉건의식에 의한 근대의식의 거절이 식민지화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는 민족사적 시대인식에 각성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역시 의식의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인 것이다.

 봉건적 가부장제도와 윤리가치관에 대한 반항으로 결연히 동경 행을 한 주인공이 아내의 죽음을 두고 귀국하려 하는 심리동기는 봉건도덕과 가부장제도가 강요한 부산물을 깨끗이 청산하고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이 시점까지 “책상 도련님”으로서의 주인공의 심리갈등은 그냥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갈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로의 모든 것들을 통해 자기가 동경하는 근대가 순수한 근대가 아니라 근대의 가면을 쓴 파괴적인 식민지임을 알았을 때 봉건의식 내지 봉건가치관은 다만 근대에 대한 낙오이고 반동만이 아닌 국권상실, 민족전락, 국토식민지화의 원인, 근원임을 알게 되고 근대문명의 상징이었던 일본이 사실은 파괴적 식민주의 원형임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식의 각성이 여기까지 오면 주인공의 봉건의식에의 반항은 다만 근대의식의 각성뿐이 아니라 역시 식민주의에 대한 극복인 것이고 따라서 동경으로의 회귀는 그 극복의지의 새로운 출발일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봉건의식에 대한 반항과 근대의식의 접근으로부터 봉건의식의 극복과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및 근대의식의 지향에로 나아가는, 현실인식과 시대의식의 질적 비약은 상기 이중구조의 플롯에 의해서 훌륭하게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즉 주인공이 귀국여로에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사실로 구성되는 시간상 직선적인 전진형 플롯과 가부장적 봉건혼인을 두고 겪는 주인공의 심리갈등으로 구성되는 공간상 수평적인 회고형 플롯의 구조적 얽힘이 의식의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을 보여는 것이다.

 『만세전』이 과연 이러한 이중구조의 플롯 구성에서부터 이와 같은 의식의 질적 비약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결코 『만세전』을 두고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고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이며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주인공의 민족사적 상징의미―주체적 근대의식의 맹아


 사실적 허구유형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러저러하게 객관적 세계와 관계하여 현실적 삶의 모습을 보이고 사건충돌과 심리갈등 속에서 시대의식의 흐름의 한 양상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원적인 이념주의에 의해 이론적으로 극단화된 전형창조론은 거부한다 하더라도 사회를 현장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을 묘사할 것 같으면 벌써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충돌 내지 조화 속에서 현실 반역적이든 미래지향적이든 아니면 가치 중립적이든 그 시대의 의식을 기준 점으로 하여 그 자신의 신앙과 이념과 문화수양에 따라 선택하게 되는 유형적인 삶의 특성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주인공 내지 등장인물의 인상착의나 신분규정은 크게 작게 어떤 의미전달의 기호가 될 수 있다.

 『만세전』이 부패한 봉건의식이 민족의식의 시대적 낙오를 초래하고 마침내 근대의식을 표방하는 일제에 의하여 국권을 상실하고 국토가 식민지화되고 개개의 자아마저 파괴당하던 민족사의 참담한 시대를 현실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전제할 때 이십대 초반의 일본유학생이라는 주인공의 신분규정은 피동적으로 근대문화이식을 강요당하고 식민지화의 극단적 강압정책으로 민족의 집단발육이 부전하고 주체적 근대의식이 아직 맹아상태에 처해있던 민족사의 시대상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봉건의식의 시대적 부패성과 근대의식의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진보한 시민사회가 제도적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시민의식이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으로 주체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당시의 조선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투시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근대를 외면한 무지와 몽매 속에서 뿌리뽑힌 봉건의식을 고집하여 근대사회에 역행적으로 타락하던 낙오의 민족을 두고 아직 사회적 문화적 인간으로서는 미성숙한 이십대초반의 어린 학생은 몰지각이란 근사한 의미범주로 하여 상징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 선택된 주인공의 근대의식의 접근은 봉건가치관에 대한 부정과 그 부산물인 강박결혼에 대한 반항으로서 어찌 보면 봉건속박의 현실일탈 내지 현장 도피행위로 행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는 봉건의식에 의한 민족의 부진과 식민지화에 대한 근원적인 각성과는 전혀 무관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신분규정이 민족의 근대의식의 맹아상태를 상징한다는 확인은 주인공이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탈피하려는 개인적 선택에서 출발했던 근대의식의 접근이 나중에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에 이르는 질적 비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 식민주의 강압정책과 민족의 집단발육의 부전으로 말미암은 민족적 근대의식의 맹아상태는 주인공이 아직 어리고 학생이라는 사회적 미숙성과의 일체화를 통하여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동경에서 서울까지 오는 여로에서 신변체험으로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견문을 통하여 구더기 끼는 무덤으로 전락한 조선의 실상을 흩어지는 안개 속의 실체처럼 뚜렷이 각인을 받고 일제의 파괴적 식민주의 만행에 내적으로는 영혼의 저항을 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어쩔 수 없어 마음을 앓는다. 현실인식과 시대의식의 각성은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직 맹아상태일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종로에서 뺨을 맞고 행랑 뒷골에서 눈을 흘기다가 자기의 약한 것을 분개하여 보기도 하고, 혼자 변명하기도 하여 보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겁겁증이 나서 몸부림을 하는 일종의 발작적 상태는 자기의 내면에 깊게 파고들어 앉은 『결박된 자기』를 해방하려는 요구가 맹렬하면 맹렬할수록 그 발작의 정도가 한층 더하였다. 말하자면 유형 무형한 모든 기반, 모든 계루에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지 않으면 질식하겠다는 자각이 분명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자기의 약점에 대한 불만과 연민과 변명이었다.7)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 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8)


 여기서 “결박된 자기”는 곧 일제의 국권강탈과 식민주의 노화정치로 말미암아 주체적 발전을 박탈당한 조선민족을 상징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고 “유형 무형한 모든 기반, 모든 계루에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지 않으면 질식하겠다는 자각”은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이고 내면의 영혼으로부터 싹터 오르고 있는 근대의식의 맹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결코 제도화되어 가는 식민주의 강압정치로 말미암아 민족의 내적 발전을 박탈당하고 주체적 자아가 훼손된 세계에서 역사와 시대를 초월한 당위적 전망이나 이상적 전형인물을 창조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초현실적인 전형창조론은 극복되어야만 하고 사실주의 소설창작에서의 역사 법칙적인 진보개념과 시간적으로 극복된 오늘의 시각에서 강요하는 이념 자체는 갈라보아야 할 것이다.



5. 맺는 말


 지금까지 염상섭의 『만세전』의 의식구조를 『묘지』에서 『만세전』에 이르는 의식차이와 이중구조의 플롯이 짜내고 있는 의미구조 및 주인공의 민족사적 상징의미 등을 통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조명해보았다.

 작가는 “일본이라는 악의 몸에 붙은 발과 손이 저지르는 악행” 속에서 싹터 오르는 근대의식의 맹아를 주인공의 민족사적 상징의미와 플롯의 이중구조 속에서 열린 의식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즉 주인공이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탈피하려는 개인적 선택에서 출발했던 근대의식의 접근이 나중에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에 이르는 질적 비약이 있는 한 작품은 어디까지나 열린 의식에로의 지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주인공의 서울에서 동경에로의 회귀는 파괴적 식민주의 악마에로의 굴욕적인 화합이 아니라 봉건의식과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발전적 근대성에로의 새로운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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