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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의 「농군」에 대한 김철의 비판을 중심으로
목 차 |
1. 문제 제기 |
2. 식민인과 식민지인-민족 단위의 위계질서 |
3. 김철과 고모리 요이치-‘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 |
4. 맺는 말 |
1. 문제 제기
한국 근대문학사는 문학 주체의 정신적인 자각에 앞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이라는 외세의 강압에 의해 굴절되고, 또 분단의 이념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에 의해 토막 났다. 그만큼 한국 근대문학은 외형적으로는 볼품없는 오작 내지 서구근대문학에 대한 서툰 모방작들의 더미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근대문학에 대해 식민사관의 멍에에서 벗어나 탈식민주의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이 본격화됨으로써, 앙상하고 가냘픈 나무보다는 식민지 바위틈에 뿌리내린 왕성한 생명력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또한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문학의 정체성 찾기와, 세계화를 대비한 범민족적인 문학사 정립작업에 의해 지하로 스며들어 흐르던 물줄기들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적 흐름이 서서히 윤곽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연구대상의 한 중심에 작가 이태준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는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살아온 작가이고, 역시 이기영, 한설야, 박태원 등과 함께 월북한 작가라는 딱지를 붙이고 문학사 내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태준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문학과 분단문학을 연구하는 방법론 및 인식론과 바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로 이태준과 그의 작품에 대한 기성연구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방대하다. 어쩌면 근·현대문학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한번쯤 이태준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을 줄 정도여서, 지금의 시점에서 그것을 모두 찾아 읽기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
100편도 넘어 되는 학위논문들과 몇 백편에 달하는 논저들 중에서 선택적으로 읽더라도 벌써 이태준과 그의 작품에 대해 다층적이고 전 방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강진호는 이제 이태준의 문학적 특성은 거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한다.2)
그러나 이태준의 단편소설 「농군」을 둘러싸고 진행된 그간의 논쟁들을 보면 결코 이태준의 문학적 특성이 이의 없이 낱낱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물론 문학연구도 다른 학술연구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합일되는 결론이란 있을 수 없고, 어쩌면 영원히 의문부호를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농군」을 중심으로 한 연구들이 극명하게 대치되는 속에서 드러낸 문제들은 가급적이면 보다 진지하고 학술적인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태준의 「농군」은 발표 당시부터 매우 이례적인 성향의 작품으로 주목받아왔다3)는 점에서, 이태준 문학세계의 특성을 전체적으로 밝히는 하나의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고, 또 그것이 식민지문학의 성격 규명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문학에 대한 문학사적인 정리 작업과도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군」에 대한 기성연구 중, 긍정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는 연구자는 이정숙과 장영우를 들 수 있고,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는 연구자는 민충환과 김철을 들 수 있다.
민충환은 제국주의 압력이 가중하던 1930년대 후반에 조선인들의 적극적이고도 투쟁적인 내용의 「농군」이 어떻게 검열을 통과하여 발표될 수 있었느냐를 문제 삼으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제재인 萬寶山事件의 진상과 作品內容을 對比시켜 본 결과 「農軍」은 尙虛의 作意와는 무관하게 日帝의 정치적 야욕에 부합 또는 협조한 親日的 결과를 낳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투철한 歷史意識이 결여된 어설픈 행위는 꼭두각시 놀음에 이용되는 불행을 自招할 수 있다는 한 敎訓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4)
그는 작품의 제재와 내용의 상이함을 지적하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사회성이 매우 강렬한 「농군」이 당시에 발표될 수 있었던 음험한 정체의 윤곽이 대충 드러났다고 본다.”5)고 확신하면서도 그러한 내용이 일제에 이용당한 것은 작가의 작의와는 무관하다고 믿는다. 작가의 작의와는 무관하다면서 일제의 정치적 야욕에 협조하였다는 주장은 도둑맞은 사람더러 도둑놈을 협조하였다는 말과 다른바 없다.
그러나 기실 그는 논문 중에, 역사적 진실과 예술적 진실의 상이성을 인정하면서도 “「농군」의 경우는 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흉계가 깊이 개재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6)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작품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지적하고, 작가의 작의는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제재와 내용의 상이성에서 친일적인 것을 밝혀내는 그의 논리는 그야말로 혼란스럽고 자가당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정숙은 이태준의 「농군」과 안수길의 「벼」를 대비하면서, 이들 작품이 ‘실향의식’과 ‘고향회기욕망’ 사이에서 응집, 승화되고 내포화된 민족의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7) 그는 논문에서 직접 민충환의 글을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이 바로 민충환의 글보다 한 해 뒤에, 그리고 같은 학술지에 발표되었다는 점에 의해서도 벌써 다분히 논쟁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충환에 비해 김철의 연구초점은 보다 작가와 텍스트 내지 콘텍스트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작가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내적 논쟁에 속하는 것이며, 식민지문학의 성격규명을 위한 본질적인 확인에 속하는 것이다. 결국 문학본체론적인 연구에서 「농군」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는 대표적인 연구자는 김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골동(骨董)의 완상(玩賞) 따위에나 탐닉하는 경박한 모더니스트로부터 민족의 현실을 꿰뚫는 리얼리스트 작가로 변신한 이태준. 그리고 그 변신의 생생한 물증인 「농군」. 한국근대문학사의 통상적이고도 통속적인 이해는 오래 동안 이 구도를 유지해 왔다.8)
간단히 말해, 이태준의 「농군」은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제부터 밝히려고 하는 바, 「농군」은 작가의 ‘심각한 내적 변모’와 ‘모색’의 결과가 아니라, ‘만주경영’이라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다시 말해 당대의 ‘국책(國策)’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소설이며, 그러한 사정을 떠나 소설 자체로 보아도 지극히 무성의 하고 불성실한 작품이다.9)
「농군」은 당대에 한창 유행하는 관습적 이념을 생각 없이 좇은 태작일 뿐, 식민지적 삶의 모순과 이중성을 드러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 작품에 부여되어 온 과도한 평가들과 오독(誤讀)은, 다시 한번 식민지적 무의식을 생각하게 한다, 만주국은 아직, 있다.10)
이것은 김철의 논문 「몰락하는 신생(新生): ‘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誤讀)」의 시작과 마무리에서 「농군」에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논자의 비판적 사로(思路)는 “만보산 사건은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 집단적 가학-피학심리(sado-masochism)의 폭발적 노출의 한 사례이며 「농군」 역시 그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을 하나의 논점으로 하고, 다른 하나의 논점은 “만주라는 공간, ‘만주국’이라는 실체야말로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장소였다. 「농군」은 물론 그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이다.11)
장영우는 민충환의 글이 “후속 연구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던” 것이, 김철에 의해 “새삼 논란이 불거졌다”면서 논쟁의 초점을 직접 김철에게 집중하고 있다.12) 그는 만보산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추적하고,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을 재확인함으로써 “「농군」과 만보산사건의 관련 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추론이 만보산사건의 경위나 작품의 세절에 대한 시비로 초점이 흩어지다 보니,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확인이 행위주체의 성격규명과 직결되고, 따라서 모든 역사적 사건 내지 의식의 발생적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강조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기성연구들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감안하여, 본고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성격을 재확인함과 아울러 이를 논거로 식민담론에 대한 김철의 연구자세 내지 심리지형을 곧바로 진맥해보려 한다.
2. 식민인과 식민지인-민족 단위의 위계질서
김철의 첫 번째 논점은 소재와 작품, 즉 만보산사건과 「농군」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의 예술성은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인식에 의해 나타난다고 확인하면, 그의 논점은 결국 사건적인 요소와 사물적인 요소(인물과 배경)의 변증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관계의 해명을 통하여 만주 조선인이주민의 신분확인을 하는데 모든 근거와 논리를 동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그가 이러한 변증관계를 만주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과 동격의 주체로 확인하기 위해 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아예 전제적으로, 먼저 만주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으로 ‘격상’시키고 만보산사건은 그것을 논증하기 위한 논거쯤의 사례로 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만보산사건을 논거의 사례로 들면서도 그것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고, 그가 주목한 것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만보산사건이란, 1931년 7월에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장춘 근교의 만보산 부근에서 조선인이주민들이 논을 풀기 위해 판 수로를 두고 밭농사를 하는 중국인들과 생긴 충돌사건이다. 조선일보의 오보와 함께 국내에서 화교에 대한 박해 사건으로 번져갔고, 일본은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김철은 만보산사건과 국내의 화교 박해 사태에 대한 박영석의 연구저서 만보산사건 연구(아세아문화사, 1978)에서 많은 것을 인용하면서도, 일제의 음모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는 “이 사태를 둘러싼 몇 가지 의문들, 예컨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일제 당국의 교묘한 음모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13)고 하면서도, 각주를 달아 의문을 제기하고, 이 사건이 만주사변의 한 계기로 되었음을 많은 연구서가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 사건이 없었어도 만주사변은 벌어졌을 것임은 물론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또 “만보산사건은 당시의 만주 일원에서 흔하게 벌어지던 사소한 분쟁이었고, 그것이 국내에 허위과장 보도됨으로써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를 빚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고 ‘의논’한다.14)
물론 일제의 음모론이나 만주사변의 계기론 같은 것은 좀 더 실증적인 연구를 요청하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김철이 그러한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모습도 없이 회의를 하면서 급급히 만보산사건을 흔하게 벌어지는 사소한 분쟁으로 인정하고, 화교 박해사태를 오보에 의한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급급한 결론이 곧 바로 “만보산 사건은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 집단적 가학-피학심리(sado-masochism)의 폭발적 노출의 한 사례이며 「농군」 역시 그 맥락 속에 있다.”는 논점과 맞닿아 있다는데 저의가 보이는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외세의 음모나 시대적인 돌발사건으로부터 만보산사건이나 화교박해사태를 차단시킴으로써 행위주체의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 집단적 가학-피학심리”를 문책하려는데 있었던 것 같다. ‘흔하게 벌어지던 사소한 분쟁’이니 외세의 책동에 의한 충돌이 아니라, 행위주체 민족의 습관적인 도전성의 노출 때문일 것이다. 또 화교박해사태를 허위보도로 촉발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고서도 “제국주의 피지배 집단의 정신분열적 가학성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례였다.”15)고 질타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이어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만보산사건 혹은 넓게는 만주 이민을 오로지 자민족중심주의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사실 자체에 대한 존중심의 결여라는 점을 떠나서도, 제국주의의 질서와 논리를 강화하고 재산생하는 긴요한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도 크게 조심할 일이다.16)
그러면 그는 어떻게 “자민족중심주의의 관점”에서 해탈하여 이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가. 애초에 그의 논점은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을 까밝히려는데 초점을 맞추는 듯 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타자이면서도 또 다른 ‘야만’의 타자를 발견하려는 것이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일 것이었다.
만주에서의 조선인의 위치란 무엇인가? 항일투쟁에 나서지 않는 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피지배자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제국의 힘을 뒤에 업고 타자의 삶을 위협해 들어가는 존재가 만주에서의 보통 조선인이 처한 현실이다. 이 기묘한 현실로부터 복잡한 의식의 분열, 메꾸기 힘든 틈새가 생겨난다. 그 분열이나 틈새가 어덯게 나타나고 무엇을 만들어내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만주를 배경으로 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17)
그러나 ‘자민족중심주의’가 “제국주의의 질서와 논리를 강화하고 재산생하는 긴요한 바탕이 된다는 점”에 “크게 조심”한 그는,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에서도 가학심리를 깊이 연구하던 나머지 점차 ‘제국주의자의 시선’과 등식을 만들어갔다.
만주 이주 조선인을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고 확인할 때,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그러한 신분과 의식의 이중성 때문에 언제나 중국관헌과 일본경찰(또는 일본관동군), 만주국과 일본영사관(또는 일본관동군)이라는 대립되는 정치세력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명기해야 한다.
그런데 김철은 “일본제국주의자”의 시선에는 “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인이 가질 법한 복잡성과 분열적 상황이 개입되지 않는다.”18)고 확인하면서도, 식민지인으로서의 조선인의 의식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그냥 식민주의 일본인의 시각으로 증언하고 있다. 말하자면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에서 식민지배에의 공모와 가학대상의 발견이라는 식민지인의 무의식을 아예 식민인의 식민주의 의식과 등호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농군」에서 만보산의 기억은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재현된다.”19)고 확인한다. 그는 고모리 요이치가 일본 메이지 국가의 홋카이도 개척사와 관련해 식민주의자들이 “아이누 사람들을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외국인’이 아니라며 감싸 안았고, 또한 ‘샤모(和人, 일본인)’와 차별화하기 위해 ‘구토인(舊土人)’이라는 배제의 칭호를 부여했다.”20)고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주의 농민들을 ‘토민’으로 호칭하는 「농군」의 시선이,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문명의 전도사로 위치지운 일본 근대국가의 식민주의를 그대로 복습하고 있는 것임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21)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 시점에 오면 조선인의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은 사라지고, ‘일본국적 조선인’이나 ‘제국주의자의 시선’만 남는다.
“만주에서의 조선 농민 부락과 그들의 경작은 단순히 농업생산 활동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 이주민을 포함하여 일본인 농업 이민의 활동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으로 기능하였다”22)는 확인은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 농업이민과 아무런 구별도 짓지 않는다. 그의 논리를 따르면, 오히려 일본인 농업이민 속에 조선인 이주민이 당연히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철이 만보산사건이나 화교박해사태에 대해 일제의 음모론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 점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으로 기능”한 조선인 이주민이라면 구태여 일제의 음모론을 확인한대서 사건의 성질이 달라질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일제가 사전에 모의했든, 사후에 정략적으로 이용했든 그들의 ‘첨병’인 조선인 이주민의 가학자의 성격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는 조선인 이주민의 이중신분을 확인할 때 문제는 그 반대일 수 있다.
그가 “조선 농민들의 수로(水路) 공사는 어느 모로 보나, 중국 농민들의 재산권과 생존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이며 폭력”이었으면서도 “조선 농민들이 이러한 행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일본 공권력의 보호 아래 있는 신분이었기 때문”23)이라고 한 것도,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과 동일시하면서 일본인과 중국인은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라는 이항대립의 구도 속에서 ‘일본국적 조선인’으로 해석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
만약 그가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적 이중성을 인정하고, 식민지 시대 위계질서가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결코 식민인과 식민지인 사이에 분별없이 등호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인은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성을 거세당하면서 강력하고 폭압적인 식민지배에 의하여 절망적인 피학심리가 형성되며, 그와 함께 절망에서 벗어나고 자기를 구원하려는 몸부림 속에 식민지배에의 공모와 가학대상의 발견에 식민지 무의식이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의 분열 내지 이중성은 복잡한 것으로서 단순한 이분법으로 해석한다면 자칫 극단적인 결론만 내리고 만다.
「농군」에서 조선인 이주민들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이해계산만 앞세우고 ‘토민’들의 사정을 무시했대도, 그것은 결코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문명의 전도사로 위치지운 일본 근대국가의 식민주의를 그대로 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기 삼십 호 조선농민은 가지고 온 물자는 이 황무지와 봇통에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에 이 황무지에 물을 대고, 모를 꽂지 못하는 날은 죽는 날일 수밖에 없다”24) 는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남부여대로 쪽박 차고 만주를 찾아오는 조선이주민의 초라한 모습은 결코 일본인이민의 목적의식과는 먼 심리적 거리를 두고 있다. 그들이 일본인 농업이민과 구별되는 것은, 우선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긴 식민지인으로서 살길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다음은, 중국 당국이 중국으로의 “귀화”를 촉구하는 국적문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조선인 이주민은 일본인과 동일시되고 있지 않았으며 중국 당국이 일제의 대륙침략을 견제하기 위한 쟁취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그런 만큼 강박적으로라도 중국에 귀화시키려는 중국 당국의 정책에 의해 조선인 이주민은 여러 가지로 심한 박해를 받았고, 국적문제와 직결되어 조선인 이주민을 위협하는 것이 거주권과 토지개간권이었다. 국적 문제·거주권 문제·토지상조권 내지 개간권 문제는, 일제의 대륙침략을 견제하려는 중국 당국의 배일사상과 대륙침략의 일환으로 만주를 점령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확장정책의 대항적 사항으로서, 만주국 건국 전까지의 사회문제였다.
따라서 제목 아래에 삽입한, “이 소설의 배경 만주는 그전 장작림의 정권 시대임을 말해 둔다.”는 작가의 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있었던 토지분쟁 사건임을 밝힌다는 의미로 읽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의 만주이주 역사가 일제 침략과 식민지 확장정치에 의해 그 성질이 변질해간 사실을 확인할 때, 이것은 결코 구시대의 학정(虐政)에 대비해 오늘의 평화를 노래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인 만주 이주역사는 쇄국시대·묵허시대·환영시대를 거쳐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인의 신분이 변질되면서 탄압시대로 들어선 것이었다.25) 즉 이 탄압시대는 일제의 대륙침략정책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이전의 이주역사를 감안할 때, 이와 같은 탄압시대를 굳이 밝히는 작가의 저의는, 조선인 이주민이 식민지인으로 전락하고 일제가 대륙침략을 노골화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살리려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김철은 작가의 이 말을 들어, 소설 「농군」을 기행문 「이민부락견문기」의 밝음을 더해주는 ‘어둠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농군」을 통해 과거의 어둠을 심하게 과장함으로써 ‘현재’의 평화와 성취를 크게 하려는 것으로서, 첫머리에 작자가 굳이 그런 시대배경을 밝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26) 그는 작가가 「농군」에서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만보산사건을 기억하게 되는 생활적, 인식적 바탕을 그의 선행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이민부락견문기」에서 곧 잘 잡아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행문은 「농군」의 밑그림 같은 것이면서 「농군」의 창작 과정과 작가 의식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자료”27)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가 여기에서부터 벌써, 앞뒤를 자른 나무토막처럼 문맥이 단절된 절록과 비틀린 해석과 과잉반응적인 감정 개입으로 텍스트를 색칠하고 가미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우선 “첫 번째 단락을 이끄는 것은, 차창으로 내다보는 대륙의 ‘거대한 공간’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흥분”28)이라고 하면서, “당시 만주행 열차의 이름이 ’‘노조미(のぞみ=희망)’였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상기하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29)이라고, 기행문에서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은 열차의 이름을 어떤 증거물처럼 들춰내었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튼 거대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앉아 차창 너머로 ‘토민들’의 농가를 바라보는 이태준의 시선은 문명인의 그것”이라고 결론에 급급해 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기행문에서 다만 “봉천奉天행”이라고 쓰고 있을 뿐 열차의 이름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열차의 이름이 주는 어떤 낭만이나 희망의 이미지가 작가한테 전달하는 감정의 색조를 읽어낼 만한 대목을 우리는 찾지 못한다. 그런데 텍스트나 작가의 서술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더라도, “노조미(희망)”란 이름의 열차를 탄 것 자체가 작가의 어떤 의식을 말해준다는 식의 판단은 지나친 강박이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철은 이어 “인신매매단의 행렬과 당대 최고의 서양식 호화 호텔, 거대한 박물관과 빈민구호기관, ‘잠깐 모인 손님 속에 노인(露人), 만인(滿人), 독인(獨人), 희랍인’들이 섞이는 국제 도시 신경 밤거리의 이국적 풍경이 스치듯이 묘사되는 이 기행문을 일관하는 것은 이 여정을 ‘독한 낭만’으로 감각하는 이태준의 에그조티즘이다. 이 시선으로 1938년 당대의 현실을 투시하는 안목을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무리일 것이다.”30)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도리어, 이주민들의 누추하고 피로한 몰골, 국적 없는 가엾은 백계처녀들, 조선의 풀, 고향의 진달래를 그리는 이주민의 향수, “고토를 그리는 유일한 앨범”인 바가지, “언제 어떤 정리를 당할지 추측할 수 없는” 불안, “내 고향 금수강산”에 돌아가면서 “황막한 벌판에 남는 저들을 한 번 더 돌아볼 염치가 없어”하는 작가, “멧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그 유구함이 바다보다도 오히려 호젓한” 장면들을 만나 가슴이 처연하기만 했다.
김철은 또 “장자워프 마을에 도착하여 농민과 대화를 나누는 단락의 소제목은 「배는 부른 마을」이다. ‘인전 뱃속은 아무걸루든지 채웁니다만...’이라는 농민의 말에서 따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기행문은 만주 개척의 성공 사례를 보고하는 것이고, 「농군」 역시 그 연장에 있는 것이다.”31)라고 진맥하고 있다.
“배가 부른 마을”도 아니고 다행으로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배는 부른 마을」, 또 그걸 한 번 더 강조하는 듯한 “인전 뱃속은 아무걸루든지 채웁니다만...”하는 시원치 않은 농민의 말이 “만주 개척의 성공사례를 보고”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배는 부른 마을」이라 해놓고 마지막 소제목을 「산불고수불려(山不高水不麗)」라고 한 이 소절은, 오히려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희망이 스러져 가고 학교가 만주국에 인수되고 “언제 어떤 정리를 당할지 추측할 수 없는”불안에 떨고, “황막한 벌판”에 “멧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그 유구함이 바다보다도 호젓한” 정적뿐인 이주민의 처연한 삶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작가는 분명 “채표彩票의 꿈”을 두고
“그거나 빠지면 우리도 다시 한번 고향 산천에 가 살아 볼까요! 그렇지 못하면 밤낮 이 꼴이다가 호인들 밭머리에 묻히고 말죠!”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요 또 슬픔이기도 할 것이다.32)
라고 ‘희망’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한, 공허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은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낸다.
“만주국에서 발행하는 ‘채표’(복권의 일종-인용자)에 당첨되는 것이 농민들의 유일한 생활의 낙이요 꿈이다. 그런대로 평화롭고 넉넉한 일상이다. 그것을 돌아보는 이태준의 시선 역시 그의 이 여정이 줄곧 그러했듯이, 평화롭고 한가하다. 국경지대나 마찬가지인 지역의 특성상 ‘언제 어떤 정리를 당할지 추측할 수 없는’ 불안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전체의 정조를 흔들 정도는 되지 않는다. 기행문의 결말은 이민부락을 감싸고 있는 이 평화와 여유의 분위기를 대단히 상징적으로 전달한다.”33)
그는 또 아이들이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를 하는 장면을 두고,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가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혼용되는 이 장면이 ‘오족협화’ 슬로건의 구현을 드러내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언어의 순서가 만주국에서의 각 민족의 현실적 서열을 따르고 있음은 작가의 의도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공들인 문학적 수사는 「이민부락견문기」의 최종적인 목적이 평화롭고 질서 잡힌 ‘현재’의 만주를 보여주는 데 있음을 드러낸다.”34)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평화롭고 질서 잡힌 ‘현재’의 만주”를 어떻게 보아냈는지 참으로 신비스럽기만 하다. “언어의 순서가 만주국에서의 각 민족의 현실적 서열을 따르고 있음”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오족협화’ 슬로건의 구현을 드러내고 있음을 짐작”한 그의 세밀한 연구에 감탄하면서도, 어쩐지 당시 사회 현실적으로 아이들한테 불려지던 습관을 그대로 표현한 작가의 사실주의태도를 달리 왜곡한 혐의를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작가는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가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혼용되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결국 “나중에 알고 보니 ‘처우웬바’는 담배를 피우자는 만주말이었다.”는 강조문구로 매듭짓고 있다. 유독 “처우웬바”라는 “만주말(실은 중국말-인용자)”을 풀이하면서 강조하는 데는, “애초엔 이민부락들이 연합해 가지고 설립 유지한” 학교가 “인전 만주국서 인수해 가지고 그들의 방침 하에서 경영되는 것이니까 불원不遠하여 교과서나 교원에 변동이 생길 것”이라는, 앞에서 쳐놓은 복선에 조응하는 것이라고 보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작가의 어떤 문학텍스트에 대한 분석에서, 선행 텍스트를 통한 상호 텍스트성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바람직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작업은 작가의 창작이념 내지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데 중요하며, 분석 텍스트의 밑그림 내지 내면화된 의미담론을 밝히는데 유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선행 텍스트에 대한 판독에서부터 오독의 혐의가 보인다면, 분석 텍스트에 대한 진맥은 잘못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김철과 고모리 요이치-‘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
이제부터 시작할 김철의 작업은, “만주라는 공간, ‘만주국’이라는 실체야말로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장소였다. 「농군」은 물론 그 맥락 속에 있다.”는 다른 하나의 논점을 논증하는 일이였다. 앞의 논술을 매듭지으면서 그는, “이제 이 논문의 두 번째 과제, 즉 3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 ‘만주’와 ‘만주 이민’이 지니는 의미, 그리고 그것과 식민지 문학과의 관계를 논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35)고 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만주 이민’을 ‘일본국적 조선인’으로 확인하고, 작가의 시선을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낙인찍은 바대로, 그의 논증은 결코 식민지 조선인의 ‘식민지적 민족주의의 이중성’을 변별하는 작업이 아니라, ‘일본국적 조선인’의 ‘식민주의적 의식’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이때에 ‘식민지적 무의식’을 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식민지인의 의식의 이중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하는 「문명」을 의식한 「반개」가 「야만」을 발견하려는 심리에서 출발하고 있음이 틀림없다.36) 왜냐하면 그의 사로(思路)를 따라가 보면, 그가 극구 조선인의 일본국적을 찜하는 저의는, 한사코 작가 내지 작중인물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시선’을 포착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식민지인이었던 조선인의 대 만주국 시각을 아무런 여과도 없이, “만주를 포함하는 대제국의 비전”을 꿈꾸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찾고 있는 것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인용한 거의 모든 자료는 일본인들이 남긴 것들이고, 그런 글들이 식민지 조선인의 의식을 증언하는 그의 입장을 대변하여 직접적으로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넓군요, 만주는. 나비모양 같아요. 그렇죠? 아버지”
(중략)
“아, 그렇구나. 나비가 일본을 향해 날고 있는 모습이네.”
(중략)
“하하하. 과연. 멋진 큰 나비가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을 향해 훨훨 날아오고 있구나. 좋구나.”37)
이처럼, 그는 이번 작업의 서두를 나가요 요시로의 글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나가요 요시로(長與善郞)의 만주견학(滿洲の見學은 만주를 향해 펼쳐졌던 그 숱한 상상과 모험의 이야기들의 한 작은 사례”라고 한다.38)
“이렇듯 만주를 ‘풍요의 뿔’(cornucopia)로 기호화 하는 것은 만주 사변 이후 일본 언론 매체의 관습적 레토릭이 되었다.39)
그런데 기묘한 것은, 이러한 논거들이 단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상상과 모험”을 논증하려는데 동원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주는 거대한 합작 프로젝트였고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대산업이었다.”40)
“식민지 조선 사회가 이 신생에의 열정 및 총동원 시스템의 자장 바깥에 있을 수는 없었다.”41)
결국 그가 논증하려는 것은, “조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42)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논증은, 조선인 이주민은 “일본국적의 조선인”,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 “제국의 힘을 뒤에 업고 타자의 삶을 위협해 들어가는 존재”라는 관점 위에 세워져 있다. 이는 작가나 「농군」의 시선을 확인하기 전에 벌써, ‘조선인 이주민’이라는 역사적 개념을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문명의 전도사로 위치지운 일본”과 동격의 위계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일본이 경험한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은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것은 독립국가로서의 일본이 세계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에서 느끼는 ‘식민지적 무의식’이며, 「문명」한 열강과 「미개」한 아이누를 매개하는 「반개」로서 수없이 「미개」를 발견함으로써 「문명」에 다가서려고 하는 「식민주의적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홋카이도가 일본국에 귀속되자 다시 새로운 「미개」를 찾는 작업이 대만을 식민지화 하고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고 만주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일본이 자각적인 ‘자기 식민지화’43) 과정을 거쳐 제국주의에로 발돋움하는 ‘산고(産苦)’였다.
그러나 조선인은 이미 나라를 잃은 식민지인이었고, 조선인 이주민은 고향마저 잃고 부평초 같이 뿌리 뽑힌 신세였다. 쪽박 차고 남부여대로 살길을 찾아 떠났던 그들을 “홋카이도를 식민지화”하던 개척사의 일본인과 등치시킨다는 것은, 식민지인의 너무도 많은 사연들을 역사의 뒤안길에 매장시켜버리는 것이다. 또 가령 그들의 구성원들 중에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갈등을 겪은 이들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식민지인의 민족주의 이중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인 분열현상일 뿐이지, 결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이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국가 내지 민족적인 차원의 이념일 수는 없었다.
“일본국적 조선인”이라는 시각에서는 일제가 일본인 이민정책의 부진으로 조선인 이민을 제국주의 지배의 방어벽으로 “대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그런 강제이주에 몰린 조선인 이주민들의 생존욕구 내지 민족주의 저항과 항일세력에의 공조관계는 그냥 외면되거나 배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비적이나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핑계로, 무고한 조선인 이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사르고 집단마을을 축성하여 고통과 굶주림에 허덕이게 한 역사 사실들은 결코 간과해도 좋을 사소한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철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조선인 이민은 일본 국적의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지적된 농업 이민의 일반적 성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44)고 결론내림으로써, 조선인이자 일본인이라는 황당한 ‘일선동일’론에 이르고 말았다. 엄격히 말해서, 일제의 식민주의 이민정책 구도 안에 조선이민이 들어있었다는 정치적 사항과, 그런 상황에 처한 조선인 이민의 식민지적 민족주의 이중성이라는 역사적 사항은 이질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변별하여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김철은 왜 식민지로 전락되었던 우리의 역사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이는 주체적으로 ‘탈식민주의’ 현실을 살고 있는 연구자로서의 그의 연구입장 내지 자세에 따르는 식민지적 기억상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이니, “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인이 가질 법한 복잡성과 분열적 상황”이니 하는 문제 제기에서는 그의 냉철한 역사철학적인 사고가 안받침 되어 있는 듯도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고모리 요이치가 말하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혼탁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었다가, 결국 ‘식민주의적 의식’의 탁류에 떠밀려가면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반성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기억을 통한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의 기묘한 재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피해보상이라면 과거의 아픔과 박해를 많이 밝히는 것이 좋겠지만, 민족적인 역사의 정통성을 찾는 데는 ‘야만’의 타자를 발견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연구자한테는 학자적 위상의 견지에서 그게 더 큰 바램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은 일본이 제국주의를 향해 발돋움하면서 경험했던 국가이념적인 모순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때, 김철은 다만 객관적인 비판의 입장을 취할 수 있을 뿐, 결코 주체적인 반성의 위치에는 설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래도, “일찍이 식민지 지배자였던 ‘대일본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본국’에 귀속한 사람으로서”45) 말하고 있는 고모리 요이치와 같은 입장일 수 없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개척사’를 전제로 하는 ‘식민주의적 의식’에 관해서라면, 고모리 요이치는 내부관찰자이고 김철은 외부관찰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주체적인 반성과 객관적인 비판의 입장차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반성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일 뿐이다. 따라서 식민지인의 후손이라는 그의 신분에 의해, 제국주의적인 식민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은 식민지 과거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고모리 요이치의 포스트콜로니얼을 조선인의 만주 이주역사에 여과 없이 대입시킬 때, 김철은 이미 범주 혼동과 함께 신분도착에 빠지고 만 것이다.
김철은 이태준이 「농군」에서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만보산사건을 보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에 앞서 그의 만보산사건의 실질에 대한 분석과 조선인 이주민의 성격에 대한 규명은, 벌써 작품과 관계없이 고모리 요이치의 논리를 따라 ‘가해자’로서 ‘야만’의 ‘타자’를 발견하려 했던 ‘일본국적 조선인’의 ‘식민주의적 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이러한 도치된 비판은, 그 자신이 ‘식민지적 무의식’에서 해탈하려는 기억의 정치학-식민지적 기억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문학텍스트, 특히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문학텍스트에 대한 의미담론에서 시대 역사적, 또는 사회 환경적 배경에 대한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러한 배경들이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가치를 확인하는 문학작품에서 인물의 사회적 속성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구체적인 존재자로 인식할 때, 같은 사회적인 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통념적인 시대정신이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획일적인 구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인 것처럼 인간의 심리지형은 매우 복잡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관계는 철학의 기본원리를 구성하면서 역시 문학의 미학원칙을 결정하는 것이다.
역사란 유적이 된 공간, 과거가 된 시간에 대한 사실적인 추적만이 아니다. 역사는 지난 날 인류가 경험했던 일들을 반추 내지 음미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행위주체의 기억과 해석의 정치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현재성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효용적 가치를 찾는 행위주체(연구주체)는, 결코 오늘의 지배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텍스트에 대한 분석담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언어를 질료로 하는 문학텍스트는 출판됨과 함께 기표에 의해 닫혀있게 되는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실제작가, 내포작가, 화자 등에 의해 의미담론이 다차원적으로 열려있다. 문학텍스트의 이러한 다차원적인 의미담론은 연구주체가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따라 구체적인 심상지리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학텍스트의 분석담론에서는 연구주체의 사회문화적인 심리지형과 생산적인 연구자세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논리를 전제로 하여 이태준의 「농군」에 대한 김철의 연구자세 내지 심리지형을 살펴보았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선의의 상찬이나 미화도 꼼꼼한 작품읽기를 외면하고서는 순식간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교훈”46)을 잊어서는 안 된다면, 그에 앞서 흑백만을 가리는 심판관이 되어 작가를 역사의 심판대에 섣불리 올리는 경거망동을 삼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바람직한 연구자세일 것이다.
주제어: 텍스트 읽기, 해석의 정치, 식민지적 무의식, 식민주의적 의식,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 식민지적 기억상실, 기억의 정치학.
(한림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외국인 등록증번호: 600502-5280173)
<참고자료>
1. 기본자료
김 철, 「몰락하는 신생(新生): ‘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誤讀)」, 상허학보(9집),
깊은샘, 2002.
이태준, 「농군」, 근대대표작가 소설선집, 문예춘추, 1988.
이태준, 「만주기행」, 이태준, 무서록, 깊은샘, 1999.
2. 논문(논저)
강진호, 「현대소설사와 이태준의 위상」, 상허학보(13집), 2004.
민충환, 「尙虛 李泰俊論(2)-「農軍」을 中心으로」, 어문연구(57집), 1988.
이정숙, 「日帝下의 失鄕小說과 고향의 의미-만주 개척 이주민들의 고난상,
<農軍>과 <벼>의 대비를 통해서」, 어문연구(64집), 1989.
이훈구, 滿洲와 朝鮮人(限定版), 成進文化, 1979.
장영우, 「<농군>과 만보산사건」, 현대소설연구(31집), 2006.
고모리 요이치, 포스트콜로니얼, 송태욱 옮김, 삼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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