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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해가 지나간다.
연초의 계획은 그냥 계획으로만 남아있고 해놓은 일도 없이 또 한해가 지나간다.
며칠 전 조금 이르게 가진 망년회에서 한 스승님은 50세 이후의 세월은 급행열차라 하셨다. 지금까지의 세월도 내 기억으로는 특급열차 같았는데 50세를 전후로 시간이 기하급수로 빠르게 느껴진다니 인생을 일장춘몽에 비유한 선인들의 감회를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연말이 되면 여기저기서 달력을 보내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력이 하나의 장식품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예쁘게 만든 달력이라 해도 별 관심이 없다. 달력은 그냥 달력일 뿐, 여기저기 널려있는 달력을 보면서 거기에서 생명이나 시간의 의미를 추적하려는 사람은 없다.
옛날에는 달력을 쓰지 않고 일력(日历)을 썼다. 하루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은 언제나 어머님의 새해맞이 쇼핑목록 제1호였었다. 집에서 눈길이 가장 잘 닿는 위치에 정중히 걸어놓고 그 첫 장을 뜯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일력을 한 장 한 장 뜯어내는 재미에 나는 하루가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았고 그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미리 몇 장씩 뜯어 내군 하여 어머님의 꾸중을 들을 때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아버님이 일력을 뜯을 때면 언제나 일력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뜯어내시곤 했다. 그때 아버님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에 와서야 나는 아버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력의 한 장 한 장은 시간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시간과 구체적인 의미로서의 나의 삶이 만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내 일력에서 내가 뜯어내는 한 장 한 장의 일력은 내 인생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뜻에서 일력은 일기장과도 같은 삶의 기록이며 역사이다. 더구나 출장 같은 일로 며칠씩이나 건너서 한꺼번에 여러 장의 일력을 뜯어내게 되는 경우라면 가볍게 뜯어내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일력에는 오늘만 나타나지 어제와 내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 번 뜯어진 “오늘”은 영원히 일력에서 제외된다. 아직 “오늘”로 변하지 않은 “내일” 또한 일력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일력은 철저하게 오늘의 가치를 고집한다.
그만큼 일력에는 인생과 궤를 같이하는 시간의 무게가 실려있다. 한 장의 일력을 뜯어낼 때마다 하루의 인생이 연소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느낌 -- 그것은 결코 얄팍한 종이장의 촉감이 아니라 생명의 질감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달력에는 그러한 생명감이 결여되어있다. 한꺼번에 한 달의 시간이 넘어가지만 찾고싶을 때에는 언제든지 다시 넘겨와서 찾을 수가 있다. 마치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려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현혹시키는 게 달력이다. 또한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이 공존한다. 매일과 같이 언제나 나에게 한 달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처럼 달력은 우리의 시간 신경을 마비시킨다. 달력에 익숙해진 우리는 지나간 시간이 아까운 줄도,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줄도 모른 채 자기최면에 빠져 “어제”와 “내일”을 오늘로 착각하면서 산다.
그것도 모자라 새로 나오는 전자달력에는 아예 자그만치 백년간의 역서가 들어있다. 시간을 세는 단위는 갈수록 커지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생명감은 갈수록 엷어만 지고… 그래서 가끔 가다가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로 살고싶을 때가 있나보다.
하지만 젊은 학생들에게는 그래도 디지털이 더 어울리는가보다. 주로 메일을 통해 새해인사가 많이 오는데 오늘은 한국어를 배우는 중국 학생한테서 이런 메일이 와 나를 당황케 한다. “선생님, 아름다운 새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어처구니가 없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장난기가 발동해 슬그머니 아내에게 보였더니 아내 왈: “헌 년도 아직 안 갔는데 벌써 새 년이라니...”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세모에 무더기로 들어오는 달력들 속에 혹시나 일력이 없나 살피지만 번번이 헛수고다. 구할 수만 있다면 새해부터는 일력을 걸어놓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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