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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금방 나갔을 때의 일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이 되어서도 나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학교로 출근했었다. 그 날이 그냥 무슨 요일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게 어린이날인지 공휴일인지 전혀 알 바 없는 나로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 날 강의책자를 챙겨들고 캠퍼스에 들어섰다. 캠퍼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별로 신경을 안 쓰고 강의실이 있는 동에 들어서니 강의시간이 임박했는데도 복도에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수위 아저씨한테 물어서야 오늘이 어린이날이라는 것, 어린이날은 공휴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은 ‘아동절(儿童节)’이라 하여 6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놓고 있지만 공휴일은 아닌지라 나는 허탕의 불쾌감보다는 뜻밖의 휴일을 챙기게된 은근한 만족감을 즐기며 연구실에 들어섰다.
그날따라 날씨가 왜 그리도 따뜻하고 포근한지,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실 떠있고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꽃향기를 실은 봄내음이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임어당이 그랬던가? 봄날에 독서함은 춘의(春意)에 어긋난다고. 나는 책상 위의 책들을 죽- 밀어놓고 춘의에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학교 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보니 그 곳에서는 어린이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초등학교 아이들로 보이는 ‘선수’들이 달리기 경주에 열심이고 그 응원단 사이의 대결도 만만치 않았다. 관람석을 빼곡이 채운 관중들은 가족 단위로 원족이라도 온 것처럼 모두 도시락을 준비하여 놓고 대단한 명절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봄날의 화창한 날씨에는 역시 독서보다 운동회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모든 걱정들을 잊고 지긋이 운동회 구경을 해 보기로 했다. 아마 겨우 초등학교 일학년이나 되었음직한 꼬마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 자주 하던 이른바 장애물 경주였다. 그렇다고 여러 가지 장애물을 설정하여 놓은 것은 아니고 다만 몇 십 미터 가다가 한번 씩 땅에서 뒹굴고 나서 다시 뛰는 경기인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어떤 학생들은 뒹굴고 나서는 방향을 혼동해서 자기가 뛰어오던 방향으로 냅다 달리다가 선생님이 옆에서 길을 막고 주의를 줘서야 다시 되돌아서서 달리는데 그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어린이들의 경기만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학부모들의 경기가 더욱 일품이었다. 겨우 60여 미터를 달리는데 마음만 앞서고 다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아 허우적거리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어린 자녀들이 넘어지지 않는데 한창 나이의 어른들이 뛰다가 넘어지는 건 아무래도 균형감각이나 체질상의 문제 같지가 않았다. 방향을 혼동하는 어린애들의 경우를 동심이라고 한다면 어른들의 경우는 욕심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그 욕심이 조금도 추하거나 밉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서 아이들에겐 어른의 지도가 필요하고 어른에게는 동심의 해맑은 거울이 필요한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올림픽보다 더 재미나는 이 어린이 운동회를 보고 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시골의 마을 운동회가 떠올라다. 어렸을 적 내가 자란 마을은 5백 가구 남짓한 조선족들이 집거하는 평원지대의 마을이었는데 일년에 한 번씩 열리는 마을 운동회는 그 어떤 명절보다도 즐거운 축제의 날로 기억된다.
마을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아침 일찍부터 마을 전체가 술렁대면서 흥분을 잉태한다. 꼬마들은 벌써부터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나가 집안 어른들의 좌석잡기에 급급하고 노인들은 희끗한 수염을 날리며 젊은이들의 옹위 속에 운동장으로 향한다. 마을 아낙들이 한복을 입는 거의 유일한 날도 바로 이날이다. 학교 운동장을 제외하면 온 마을이 텅 비어버려 중학생들의 토마토 서리나 참외 서리도 이날 이루어지기 십상이다. 운동회라고 하여 어떤 특정된 경기종목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축구나 배구, 널뛰기, 그네, 씨름 등이 전부다. 때때로 새로운 종목이 신설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자전거 늦게 타기처럼 유희성에 지나지 않는다. 기록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어떤 정확한 수치나 숫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관중의 참여도는 과히 열광적이다. 막판에 가면 으레 한두 사람이 술에 취해 심판의 공정성이요 뭐요 하며 시비를 걸게 마련이지만 그것도 웃음 속에서 유야무야되고 만다.
마을 운동회는 꼭 정해진 시간이 따로 없이 그냥 봄철의 모내기가 끝나서 하기도 하고 또 가을걷이가 끝나서 하기도 하고 날씨가 궂으면 한 주일 씩 미루기도 한다. 한해는 우리 고향 출신의 한 유명한 교수가 오랜만에 귀향하자 그의 일정에 맞추어 열기도 했다.
이런 마을 운동회가 올림픽이나 월드컵보다 더 재미있는 이유를 나는 여태껏 ‘선수’들과의 유대관계로만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이 그 어느 명배우의 연기보다 자기 아들의 어설픈 연기를 더 재미있어 하듯이 나의 이웃이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활약이 바로 마을 운동회를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확신하면서 거기에 일말의 의혹도 가져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생동하는 봄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한가롭게 어린이 운동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생각이 달라졌다. 이것이 바로 아마추어의 매력이고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너무도 판이한 세계를 상상하면서 너무 오랫동안 아마추어의 세계를 잊고 있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왜 자기가 이처럼 오랫동안 허탈한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흔히 하는 말처럼 프로의 세계는 철저히 돈의 세계이고 과학의 세계이고 승부의 세계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항상 정확한 수치가 개입되고 기계가 개입되며 냉혹한 판정이 개입된다. 프로의 세계에서 인정(人情)이나 관용 또는 용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마추어의 세계는 유희의 세계, 정서의 세계요 낭만의 세계이다. 어차피 유희인 만큼 승부는 벌써 뒷전이고 중요한 것은 유희 자체를 얼마나 즐겼는가 하는데 있다. 인간의 즐거움이나 재미는 바로 이 유희성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프로 마라톤 선수들의 그 숨막히는 라스트 스퍼트 장면에서 우리는 물론 가슴을 저리는 뜨거운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재미가 아니고 즐거움은 더욱 아니다. 그 감동은 오히려 비극미에 가깝다.
우리 인생에서 재미나 즐거움이 중요한 건 아마 그것이 비극미에서 오는 감동보다 더 원초적이고 더 본질적이며 더 자연적인데 있는 것 같다. 그 어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나 유희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동적이 될 수 있고 여유가 있으며 그러한 주동성과 여유가 바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윤활하게 하는 이른바 예술의 모태(母胎)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이란 본래부터 아마추어에 그 기원을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예술이 프로로 되면 자연히 상업화와 연결되면서 과학이 가미되는 반면 낭만이나 유희성은 자기 자리를 잃게 된다.
지난 20세기를 뒤돌아보면 참으로 과학의 세기라고 할만하다. 미국 타임지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아인슈타인을 꼽은 것도 결국은 20세기의 성격을 과학이 대변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막 시작된 새 천년에도 과학은 역시 초고속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과학가들의 예측대로라면 2025년쯤에는 그 공포의 에이즈도 극복이 가능할 것이며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태아 시에 벌써 각종 면역세포를 주입하여 병에 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그때에 가서는 과연 우리의 꿈처럼 인간이 장생불로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 중엽에 이르러 인류가 사망하는 제일 큰 병명을 ‘고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고독’이라는 이름의 병을 과학의 힘으로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어느 하나에 너무 치우침이 없이 과학과 낭만, 이성과 감성, 물질과 정서가 적절히 평화공존하는 그런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아쉽다.
하지만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마을 운동회나 어린이 운동회 같은 아마추어 모임이 자주 있는 한 적어도 우리는 재미와 즐거움을 좀 더 오래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느라면 21세기의 ‘고독’이라는 이 악성종양에도 어느 정도 면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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