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근대적 개념으로 소설은 텍스트 형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설은 언어라고 하는 매개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소설텍스트를 언어적 담론으로 보게 된다. 소설의 언어는 바흐친의 주장대로 다층성과 이질성이 특징이며 이는 인간들의 복잡한 삶의 내용과 관계가 된다. 이처럼 소설은 논리와 감성이 조화된 정치한 의사소통의 체계를 기본 구조로 하기 때문에 소설의 서사구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소설의 언어를 대상으로 의사소통의 거대구조 차원과 텍스트의 미세구조 두 차원의 분석이 동시에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거대구조 차원의 분석은 《소설현상》에 대한 분석이다. 문학을 거대 소통행위로 보는 관점을 문학현상의 관점이라고 한다면 소설을 거대 층위에서 바라보는 소통행위구조를 《소설현상》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가 소설을 써서 출판을 하면 서점이나 도서관 같은 중개를 거쳐 독자에게 보급되는데 독자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여러 가지로 반응하게 된다. 이러한 반응은 대체로 다양한 루트를 통해 여러 사람한테 전달이 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하는 것은 그러한 반응이 작가한테 미치는 영향이다. 전통적인 문화의 공간에서 독자의 반응은 크게 문학 애호가를 포함한 일반적인 독자층과 비평가를 중심으로 한 고급적인 독자층으로 층위가 나뉘게 되지만 요즘의 사회적 특성상 작품의 판매 현황과 독자층의 변화에 대한 고려도 독자의 반응을 연구할 때 함께 해야 할 사항이 될 것이다.
아무튼 문학에서의 작가와 독자의 소통의 구조는 일상의 언어적 대화의 소통 구조가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소설의 경우,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무엇을 뜻 깊게 전달하려고 하고 독자는 자기의 부동한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반응은 결과적으로 독자의 체험을 보다 보편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것으로 두텁게 하는 동시에 작가의 창작을 새롭게 영향 주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이러한 외적인 소통 구조와는 달리 소설작품의 내적인 소통구조는 텍스트의 담론구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소설은 그 이야기를 소설가가 직접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을 등장시켜 말해준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즉 소설의 서술과 전달은 서술자의 개입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서술자는 텍스트 표면에 나타나기도 하고 뒷면에 숨기도 한다. 텍스트 표면에 나타나는 서술자의 양상도 여러 가지로 작중인물이 되는 경우도 있고 작중인물 역할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작중인물이 되더라도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고 조역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소설에 나오는 서술자의 이러한 역할 분화는 이른바 액자소설에서 잘 나타난바 있다.
소설텍스트의 언어적 층위는 작가, 서술자, 작중인물, 그리고 서술자나 작중인물에 의해 지시되는 텍스트 외적 인물들의 언어로 층위를 이루게 된다. 이들 층위 사이에 나타나는 상호작용은 대화적 속성을 띠게 된다. 소설의 기호론은 소설을 이루는 층위 사이에 나타나는 대화적 속성을 밝히는 데 기여한다. 이는 소설의 요소를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구조 안에서 요소들 사이의 연관성이 중시하고 이들 요소들 사이의 연관성이 시각의 조정을 통해 어떻게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는 예술적 장치 역할을 하는가를 살펴보는데 있다.
소설은 작가가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이야기를 함으로써 문제를 이끌어내는 양식이다. 소설내적인 문제 상황에 독자가 동참하게 되는 것은 기호론적 구조의 언어화 즉 담론을 통해서이다. 소설의 언어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담론의 형태로 되어 있다. 즉 《작가-작품-독자》의 층위와 《서술자-작중인물-피서술자》 층위를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담론은 언어학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정태적 자료인 언어가 아니라 주체들이 개입함으로써 역동적으로 활성화된 언어를 말한다. 다른 말로는 대화화된 언어를 뜻한다. 대화화된 언어는 텍스트를 고정된 언어매체로만 보지 않고 일정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인물의 행동 방향까지 제시함을 말한다. 따라서 담론화된 언어는 언어를 통한 이데올로기 실천이 된다.
하나의 소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담론의 주체를 고려해야 함은 물론 이 주체들의 행위범주도 고려해야 한다. 즉 주체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그러한 행동을 촉발하는 동기를 살펴보지 않고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이 논문은 바로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를 고백체의 소설로 보고 그 근거를 이 소설 속의 인물의 그러한 행동과 행위의 동기가 작가의 것과 일치한다는 데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논문은 김학철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인 《20세기의 신화》에서 구사되는 서사담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김학철 연구에서 보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소설의 내적 질서 내지 형식미에 대한 부분을 보충하고 그의 소설세계의 진모를 밝히는데 기여할 것이다.
Ⅱ. 《20세기의 신화》의 서사 담론의 특징
소설 텍스트는 다양한 사회적 언술이 예술적으로 문맥화된 결과이다. 소설의 담론은 다양한 계층의 언어를 두루 포함하며 또한 매 개인의 개성 있는 말투를 예술적으로 재조직한 것이다. 이러한 소설적 담론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장르는 장편소설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언어를 가장 복합적인 층위로 풍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광활한 소설적 공간과 충분한 소설적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장편소설이란 장르에서 가능하겠기 때문이다.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소설의 언어는 우선 작중인물들의 시각으로 탈바꿈된 대화이고 다음 서술자의 해석이 가해진 지문 형태의 표현이다. 끝으로 여러 가지 다른 양식의 말들이 여기에 가세함으로써 소설적 담론의 언어 체계는 비로소 다양한 층위에서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1. 투사적 서술체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의 언어담론의 특징은 단적으로 말해 서술자와 작중인물의 말이 거의 동일한 성격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을 투사적 서술(投射的 敍述)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기의 감정을 인물의 심리와 행동에 투사함으로써 작가와 인물과의 거리감보다는 내적인 관계를 맺는다. 물론 독자는 이러한 관계를 주로 인물의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점은 곧 서술자의 감정과 인물의 감정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데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독자는 인물의 감정뿐만 아니라 서술자의 감정을 어렵지 않게 느끼게 되고 매 개 장면과 대화의 내용에서 독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서술자의 관점으로 초점화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독자의 시각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서술자와 작중 인물의 밀접한 관계는 고백체의 언어적 특징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인데 먼촌에 사는 우리 사촌형이란 군이 어른들의 담배 피우는 게 어찌나 부럽던지 어른들 몰래 살담배 한 봉지를 사가지구 굴뚝 뒤루 들어갔더라나. 나중에 우리 고모란 이가 바가지를 들구 잿물인가 뭘 뜨러 갔다가 보구 놀라서 고함을 쳐 식구들이 달려나와 보니까…… 기가 차지. 열네 살 먹은 그 사촌형이 정신을 잃구 나가쓰러진 바루 옆에 크기가 거의 나팔만한 마라초 한 대가 덜어져서 그저 타구 있더라는군. 글쎄 이 무지한 군이 커다란 신문지 조각에다 살담배 한 봉지를 단꺼번에 다 말아가지구 들입다 빨아댔다지 뭐요. 그러니 제놈의 머리가 휭 돌잖구 어째여.》
작품의 전편(강제노동수용소)의 시작 부분에서 일평이가 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소설의 제9장에서는 굶주림과 병마에 죽음의 길로 자식을 앞세운 채와 심의 비참한 사연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적인 것에 대한 고백은 이 소설에서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많이는 현실적인 것과의 교차로 과거적인 내용이 고백체에 담겨져 있다. 전편의 3장과 4장에서 이어지는 일평이의 과거에 대한 회억과 현실 상황이 교차적으로 서술되는 부분과 10장, 11장에서 작가들의 수난, 그리고 13장에서 18장까지 기아와 아첨쟁이들의 교차적인 모습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러한 과거와 현실의 교차적 출현은 작가의 현실 비판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이다. 또 소설의 후편(수용소 이후)에서 일평이와 이선생과의 대화(2, 9), 정숙이와의 대화(3, 12, 13), 심과의 대화(4, 11, 12, 15, 17)채와의 대화(8) 등은 작가의 고백적인 언술에 기대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 후편을 관통하는 고백체에서 가장 대표적인 언술의 사례는 후편의 제16장이다. 이 부분은 주로 이선생한테 보내는 일평이의 편지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바, 바이올리니스트 채의 죽음을 전하면서 그 죽음을 강박한 어두운 시대에 대한 질타로 되어 있다.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바람이 낙엽을 굴리며 돌아다니는 묘지는 쓸쓸하기가 마치 달나라 같았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아 졸고 있는 병든 까마귀의 꺼칫한 깃이 바람에 거슬리는 것을 보니 어쩐지 보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으스스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서산마루에 핏빛의 낙일이 뉘엿뉘엿 가라앉을 무렵 겨우 봉분을 끝내고 술 한잔 없이 봉분제를 지냈습니다. 어떻게 지냈는지 아십니까? 선생님. 고씨가―반동음악가라는 딱지가 붙어다니는 고씨가―무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어요. 망인이 생전에 가장 사랑하던 《찌고이너바이젠》을 마지막으로 들려주자는 것이었지요. 그가 사랑하던 바로 그 바이올린으로 말입니다. 《찌고이너바이젠》의 가슴 설레는 선율이 타는 듯한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하고 땅거미가 깃들이는 묘지에 울려퍼질 때 저는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지 못했습니다. 심선생도 눈구석을 눌렀습니다. 하씨는 흐느끼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쌌습니다.
고씨는 바이올린을 울리고 또 울리고, 울리고 또 울리고 수없이 울렸습니다. 마치 무엇에 접한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기진맥진해 쓰러질 때까지 계속할 작정이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심선생이 다가가 고만하라고 어깨를 쳐서야 겨우 멈추고 돌아서는데 그 눈이 혼 나간 사람의 눈같이 공허했습니다.
하씨가 바이올린은 임자 곁에 묻어주겠다는 것을 우리가 밀막았습니다. 봉분 앞에서 사르겠다는 것도 못하게 붙들었습니다. 《남편의 손때 묻은 물건이라군 이 바이올린 하나가 남았을 뿐인데 기념으루 남겨둬야 하잖느냐》니까 하씨는 《그래두 바이올린이 없으면 더 고적해할 것 같아서 그런다》며 울음을 터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일견 최서해의 《탈출기》의 기본 서사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강렬한 사회비판적인 성격으로 특징적이다. 서한체는 소설적 구조로 작용할 경우, 화자나 인물의 내면적 풍경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의도적인 허구나 과장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궁핍에 처한 그러한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진실하게 반영한다. 《탈출기》에서의 주인공 《나》와 앞의 예문에 나오는 일평이들은 경제적인 가난과 정치적인 박해라는 점에서는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가 주인공을 극도의 궁핍과 곤궁에 빠뜨리는 환경의 억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한 소설적 배경을 갖는다. 그러한 억압은 결국 인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바, 《탈출기》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앞의 예문인 제16장의 끝부분에서도 페퇴피의 시를 인용, 삐라 사건과 함께 투쟁에 선뜻 나서리란 다짐을 함으로써 고백체의 언술은 내면 의식의 강조로 마무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액자소설의 구조
고백체의 언술로 특징지어지는 이 소설의 담론 특징은 다른 한편, 액자 소설의 구조를 일부 취하고 있음으로써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평이가 길섶에 앉아 담배를 얻어피우며 사원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개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철도자살을 한 젊은 색시의 남편은 본래 농사일에 막히는 게 없는 실농군이었는데 불행이 닥쳐오느라고 팔다리의 관절이 붓는 병에 걸려 운신을 못한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 인민공사의 진료소는 의사도 시원찮고 설비도 불충분하고 또 약도 변변치가 못한 까닭에 치료를 옳게 할 수가 없어서 환자를 시내 주립병원에다 보냈더니 주립병원에서는 진찰을 하고 나서 입원을 시켜야겠는데 300원을 먼저 들여놓는 게 규정이라고 그냥은 받아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한낱 보통사원이 현금 300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마당에서 삼을 캐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 환자는 운신을 못하고 집구석에 앓아누워 짜증 부리는 것과 한숨짓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답답한 형편에 어린아이는 또 어린아이대로 없는 밥을 내라고 온종일 울고 보채었다. 혀도 제대로 안 도는 것이 눈만 뜨면 제 어미를 잡아뜯으며 《바부 바부》소리를 고집스레 외웠다. 아이의 성화를 받다 못한 어미가 수일 전에 생산대의 ㅂ종자 한 바가지를 몰래 떠내다가 밤저녁에 도적 절구질을 해가지고 어린아이에게 밥을 지어 먹였다.
이 일이 탄로가 나자 대대(大隊) 당지부에서는 여사원들을 한 100명 동원해가지고 공유재산을 절취했다는 죄로 색시를 《변론》에 부쳤다. 색시에 대한 변론은 저녁 어슬녘에 시작되어 가지고 닭울녘까지 계속되었다. 이 동안에 ㅂ종자 한 바가지 떠낸 색시는 《도둑고양이 같은 년》이라는 욕설로부터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지주․부농의 앞잡이》라는 정치딱지까지, 《씹을 팔아서라도 훔친 벼종자 값을 당장 물어내라》는 공동(恐動)으로부터 《네년이 그따위 심보를 가지고 이담에 쪽박을 차잖거든 내 이 손바닥에 장을 지지라》는 저주까지…… 아무튼 인간으로서의 들을 수 없는 악담은 하나도 빼놓잖고 다 들었다. 차마 사람의 귀로는 듣지 못할 야비한 욕설과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치이는 끔찍끔찍한 저주의 우박 밑에 젊은 색시는 밤새껏 서 있었다. 백 사람의 입이 퍼붓는 십자포화와 백 사람의 눈이 퍼붓는 집중포화 밑에 젊은 색시는 밤새껏 서 있었다.
이런 장소에서는 악독한 욕설을 많이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당의 사업에 충실한 것으로 된다고 지도일꾼들이 뒤에서 부추기는 까닭에 열성분자로 되려는 사람들은 다 사슬에 매인 개처럼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날뛰었다. 악독한 욕설을 덜 퍼부으면 낙후분자로 인정을 받고 악독한 욕설을 아주 안 퍼부으면 적을 동정하는 미덥지 못한 인물로 지목을 받게 되므로 아무도 감히 입을 다물고 가만있지를 못하였다.
이날 밤 변론회가 일단 파해서 색시가 집에 돌아온 것은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집에 돌아온 색시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한숨도 짓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거둘 것 거두고 치울 것 치우고 제 할 일을 다 하였다. 그러던 것이 저녁차 내려올 무렵에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업고 집을 나왔다. 곧장 철길까지 나와가지고 색시는 업은 아이를 내려서 가슴에 꼭 껴안자 달려오는 기차의 바퀴 밑으로 뛰어들었다.
전편의 5장에서 철도자살을 한 젊은 색시의 이야기이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그것도 굶고 있는 어린아이가 불쌍해서 종자 벼 한 바가지를 훔쳤다가 목숨까지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기막힌 사연이다. 이 사연은 작품에서 어느 한 노인이 주인공인 일평이한테 들려주고 있고 이를 다시 독자들이 엿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즉 노인의 이야기는 하나의 액자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이 사건을 듣는 일평이의 모습은 또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인의 이야기는 내부적 사건으로 되고 일평이의 반응은 외부적인 사건이 된다.
이 외에 《인민의 적》으로 판정이 되는 바람에 파혼할 수밖에 없은 일평이와 이혼을 강요당한 채의 이야기(9장), 같은 이유로 강제노동 현장에 끌려온 고향이 산동인 왕의 이야기(12장) 등도 이러한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액자의 형식은 보다 객관적으로 사회의 문제성을 드러내고 그 본질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러한 예는 사회비판적 성격이 주요한 소설적 분위가가 되고 있는 이 소설에 적절히 활용된 경우이다. 물론 고백이 아닌 순수 스토리나 플롯으로서의 사건 전개도 일부 삽입되어 그러한 객관성과 사회비판성에 일조하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제6장에서 똥거름을 이고 《농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3`8절을 기념하는 여성들의 행렬을 묘사한 부분이나 제7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수수쌀 소동》등이 일례가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고백체의 대화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의 기본 구조에서 상징적으로 형식화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기본 사건이 서술자와 동일한 주인공의 시각에 의해 전개가 된다는 점, 그러한 사건이 주로 주인공과 기타 인물과의 대화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이 소설의 기본적인 서사구조이다. 다른 측면에서 전편과 후편이 18개의 장절로 분절되어 있고, 이것이 주로 암담한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서 작가가 의식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죽음의식 내지 지옥(18층 지옥)의식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그러한 분절이 상징하는 바가 우연의 결과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수용소 안팎이 전혀 다를 게 없이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작가의 단정에서 그러한 상징성은 충분히 계산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Ⅲ. 결론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의 서사담론은 나름대로의 특징적인 고백체의 언술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그의 작품의 사회비판적인 주제를 극대화하는 가장 개성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독백체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인 타자성에 대한 반발로서의 내면적인 의식의 담론화는 이 소설에서 기타 작가가 경험하기 힘들었던 김학철 나름대로의 고아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억압되고 밀폐된 수용소 같은 공간에서 그러한 고아의식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작가의 경우 이 점은 해당 시기에 보편적으로 감행되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왜곡 상에 대한 회의에서 더욱 심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는 주체민족의 잘못된 시책에 휘둘린 피해의식과 그러한 주체에 영합할 수 없는 소외감 내지 허무감이 무겁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김학철의 이 소설에서 담론의 궁극은 소외된 타자의 위치에 있는 민족에 대한 우환의식이 내면화되어 있고 이러한 궁극적인 담론은 그의 소설 전체를 일관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지는바, 그가 우리 민족 공동체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그때 당시부터 벌써 하나의 중요한 사명감으로 출발하여 시도하고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러한 잠재적인 담론이 그의 수필에서 가장 직접적이고도 폭넓게 진행되었음은 더 설명할 나위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학철의 이러한 잠재적인 담론은 개인의 의식 분열과 공동체의 해체 위기에 허덕이는 오늘날의 현실적인 문제를 돌아볼 때, 역사적이면서도 시대적인 담론으로 지속적으로 되풀이해야 될 주제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이 그의 전반 문학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주요한 관건임은 물론이다.
참고문헌
김학철, 《20세기의 신화》, 창작과 비평사, 1996
김상태, 《문체의 이론과 해석》, 새문사, 1982
바흐친, 김근식 역, 《도스또예프스끼 시학》, 정음사, 1988
구인환 외, 《문학교육론》, 삼지원, 1992
주석:
1)《문학현상》은 문학이 이루어지는 내적 외적 제반 조건을 고려한 현동화 양상을 가리킨다. 즉 작가와 작품과 독자의 역동적인 작용태를 뜻하는 동시에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역사적 조건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구인환 외, 《문학교육론》, 삼지원, 1992 참조)
2)1 액자소설은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를 끌어들여 이야기의 신빙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오랜 전통을 지닌 서사기법이다.
3)지금까지의 김학철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사회역사적인 비평의 방식으로 일관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단순하게 전개되어있다. 이 연구는 그러한 연구 시각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중요한 목적의 하나로 삼고 있다.
4)김상태, 《문체의 이론과 해석》, 새문사, 1982 참조.
5)바흐친은 작가의 사상이 인물들을 지배하고 작품 안의 세계와 정신의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소설을 독백체 소설이라고 했었다. 바흐친, 김근식 역, 《도스또예프스끼 시학》, 정음사, 1988. 15쪽
6)김학철, 《20세기의 신화》, 창작과 비평사, 1996. 이하 예문 같음.
7)언술이란 《입으로 말하거나 글로 쓴 모든 것을 총칭한 개념으로서 광기의 사례들이거나 법률적인 규정, 역사적 자료 등》을 말한다. 푸코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의 특징적인 언술이 무엇이며, 그 언술을 제약하는 조건은 무엇인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새로운 역사 기술 방법을 제시한다.
8)《이때까지는 최면술에 걸린 송장이었다. 제가 죽은 송장으로 남식구들을 어찌 살리랴. 그러려면 나는 나에게 최면술을 걸려는 무리를, 험악한 이 공기의 원류를 쳐부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다가 성공없이 죽는다 하더라도 원한이 없겠다. 이 시대 이 민중의 의무를 이행한 까닭이다.》-《탈출기》에서
9)김학철은 오래 동안 국적을 바꾸지 않았었고, 여기에 정치적인 박해를 지속적으로 받으면서도 정의와 진리를 위한 끊임없는 외로운 추구를 거듭해왔는바, 이 과정에서 그가 겪었을 외로움 내지 소외감은 극에 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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