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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용,의 담론체계와 그 의미
2009년 05월 16일 21시 15분  조회:1837  추천:0  작성자: 방룡남

(김종균편, <<염상섭소설연구>>, 국학자료원 1999)

-소설을 연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연구가 정당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연구와 연구 사이에 주고받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주고받기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이 소설의 언어이다. 소설의 언어는 담론형태를 이루고 있다. 소설의 담론은 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스토리가 있고, 그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한 언어 운용 차원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언어체로 보고, 그 언어체를 이루고 있는 구조적 실체가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담론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이다. 소설을 담론의 역동적 구조체로 보는 것은 소설의 언어를 연구하는 방법론의 반성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116)

-소설은 언어를 매재(媒材, medium)로 한다는 점, 그 언어는 주체가 개입된 활성화 된 언어라는 점에서 소설의 언어를 담론으로 다룬다는 것은 방법론상 하자가 없다. 그러나 문학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언어의 어떠한 측면에 중점을 두는가 하는 초점은 달라진다. 기왕의 연구들은 주로 언어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소설의 언어 혹은 문학의 언어를 대상적 실체로 볼 경우 언어와 언어의 사용 주체인 인간의 분리를 초래한다.(116)

-문학은 작가-작품-독자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학현상으로 존재한다. 특히 소설에서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화자의 개입은 이야기를 듣는 수화자(受話者)를 요구하게 된다. 또한 작중인물들 사이에도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구조의 측면이나 문학적인 실천의 측면에서나 기호론적인 성격을 띠는 담론구조를 이룬다. 이는 문학현상 속에 인간이 주체로서 관여하는 면모다. 소설의 언어를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는 방법론은 나름대로의 가치가 인정디는 것이지만 한계도 아울러 지닌다. 한계라는 것은 살아 있는 언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다룸으로써 언어의 실상에서 멀어지는 추상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116-117)

-언어에 주체가 개입됨으로써 언어는 대상적인 성격을 벗아나 담론의 차원으로 전환된다. 소설의 언어는 이러한 담론구조의 일종이다. 따라서 소설의 언어를 논의하는 방식도 이러한 담론차원의 것이라야 한다. 이는 방법론이 대상의 속성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청에도 부합된다....이러한 방법론에서 문학의 언어와 언어학에서 대상으로 하는 언어의 성격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는 부수적 결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롤랑 바르트는 <<흔히 알고 잇는 것처럼 언어학은 문장(phrase)에서 멈춘다. 즉, 문장이란 언어학이 다룰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단위인 것이다...언어학적 관점으로 볼 것 같으면 담화(discours)란 문장 속에 있는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함으로써 언어학의 관점을 문학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담론 차원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거기에 비해 미하일바흐찐은 <<소설의 문체학이 지닌 문제점들과 논쟁은 필연적으로, 언어철학의 일련의 원칙적인 질문들을 야기시켰으며, 이러한 질문들은 언어학이나 문체학이 결코 해명하지 못했던 언어의 생명이 갖는 측면들과 관계 있는 것이고 담화와 언어의 양상으로 표시되는 세계 속에서의 말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고 주장한다.(김치수편<<구조주의와 문학비평>> 홍성사, 1980 95. 이득재 역 <<바흐찐의 소설미학>> 열린책들, 1988 115) 한마디로 소설의 언어를 구명하는 작업은 담론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117-118)

-언어의 수행은 근본적으로 대화적인 성격을 띤다. 대화는 발화주체와 수신자가 전제된다. 이 수신자는 발화주체의 여러 조건을 제약한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언어가 수행되는 장에서 일방적인 전달이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독백조차도 내적으로 분화된 두 자아 사이의 대화라 할 수 있다. 대화적인 관계와 통로가 정상적으로 조정되지 않을 경우, 발화자는 상대방에 대해 매우 강한 의식을 작동시키는 압도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와는 달리 상대방의 언어적인 코드에 자신을 조정해 가지 않으면 대화를 이루어 낼 수 없다. 언어수행의 과정에서 주체가 주체로서의 역학을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다른 말로 탈중심화현상이 언어적으로 드러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주체가 대상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또는 자신의 주도권 일부를 상대방에게 위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는 가치의 간접화와 연관된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교환가치의 지배를 받는 근대적인 인간관계의 특징을 드러내는 언어양상이기도 하다. 이는 대상의 객관적인 제시를 지향하는 경향과 함께 근대소설을 구성하는 언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된다.(118)

-소설의 언어는 흔히 지적되듯이 서술과 묘사와 대화로 이루어진다. 소설의 이러한 언어요소는 시대의 영향을 따 강조되는 국면이 달라진다. 소설의 설화성이 강조되던 시대에는 서술이 소설언어의 근본양상을 이루었다. 근대로 내려오면서 서술보다는 묘사와 대화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대상의 객관적인 제시에 역점을 두게 된다.(Wayne C. Booth, The Bhetoric of Fiction, <<소설의 수사학>> 최상규 역, 새문사 1985 참조) 작가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개입하면 사실성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술보다는 묘사의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언어로 대상을 파악한다는 데서는 엄격한 의미의 모방(mimesis)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들 수 있다. 이는 언어수행의 일차원성과 사물의 다차원성에서 빚어지는 결과인데 결국 미메시스라는 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언어에 대한 이런 경직된 생각은 미국의 신비평과 시카고학파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소설의 언어는 그렇게 순정한 것도 아니고 단일한 것도 아니다. 작가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서술적인 언어도 소설 속에서 그 나름의 기능을 수행한다. 묘사는 객관미학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방법일 따름이다.(118-119)

-...<<인간의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밖에서는 고려할 수 없다>>는 철학적 전제에서, 삶의 본질을 대화적 속성으로 고려한 바흐찐은 <<타자의 시선만이 내가 총체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내게 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기능을 인정한다.(122)

-소설에서 작가의 개입이 타부시되는 것은 단편의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라 해야 옳다. 장편소설의 언어는 작가가 전적으로 통제하고 문체를 통일할 수 있는 그렇게 단일한 언어라고 하기 어렵다. 언어의 다양성을 소설의 특성으로 지적하는 바흐찐의 논지를 따른다면 장편소설에서 작가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소설은...언어의 내적 분화, 즉 언어의 사회적 다양성과 그 안에 존재하는 음성의 다양성을 진정한 소설적 산문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M.바흐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외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8 80)(122)

-언어적인 다양성은 종류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의 개입이 이루어질 소지가 마련된다. 전체로서의 소설을 구성하는 문체구성적 단위체의 기본 유형 속에 이미 작가개입의 가능성은 드러난다. 바흐찐이 말하는 소설언어의 기본 유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i) 작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학적.예술적 서술 및 그 변형들
ii) 다양한 형태의 일상구어체 서술의 양식화(ckao)
iii) 반(半)문학적이고, 글로 쓰여진 일상적인 이야기(편지, 일기 등) 여러 가지 형식들의 양식
iv) 작가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비예술적 문예언어(윤리적.철학적.과학적 진술이라든가 수사학적.인종학적 묘사 및 비망록 등)
v) 작중인물들의 문체론적으로 개별화된 화법들(M.바흐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외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8 67. <<바흐찐의 소설미학>> 이득재 옮김, 열린책들 1988 101)
소설언어의 이러한 유형론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작가의 개입여부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122-123)

-장편소설에서 작가의 개입은 소설의 예술적인 효과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설화성을 살려 주제의 깊이를 확보하게 해주는 작용를 하기도 하며, 사실을 제시하여 소설언어의 기능를 확대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객관적인 서술을 함으로써 사실을 허구로 보도록 해온 소설적인 인식의 패러다임을 뒤집음으로써 허구를 다시 사실로 보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작가개입의 언어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장황한 설명이나 독자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하는, <<현명한 독자는 우리가 앞에서 주인공이 이러저러했다는 것을 기억하리라>>하는 식의 개입은 기능적이기 어렵다. 작가의 개입이 통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작가의 개입을 아무 조건 없이 기능적이지 못하는 식의 설명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설언어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소설장르의 언어적 특징을 도외시하는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124)

-문학의 다른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소설의 언어는 구체성을 띠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별다른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술의 언어가 추상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언어가 구체화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언어가 대화화되면서 다중적인 시각을 획득함을 의미한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라든지 인물의 대화를 통한 구체화도 고려사항이 된다.(김윤식 <<한국근대소설사연구>> 을유문화사 1986 228-235. 여기서는 <<경기어의 능변과 간사함>>을 묘사한 문체의 힘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언어가 어떠한 양상으로 소설 속에서 살아 있는 언어가 되느냐 하는 문제에 연관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일언어 혹은 절대성을 띠는 언어가 탈중심화되는 경우를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소설 속의 언어가 일상언어의 맥락에 연관되어 그 패러다임으로 다시 정리됨을 뜻한다.(125)

-<편지>의 경우, 일차적으로 반문학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의 한 형태이다. 편지는 전달의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단일한 목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되 상대방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독백적인 것이면서 이중적인 목소리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일기와 달리 대상이 상정됨으로써 내재적인 대화의 성격을 아울러 띠게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지는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의 사상 혹은 삶의 태도를 무리없이 비판하기에 적합한 양식이다. 그리고 동일한 장명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달리 다른 인물에 대한 언급이 자유롭다. 이른 언어적인 전달의 통로가 간접화되는 데서 가능해지는 편지의 담론적 특징이다.(125-126)

-편지의 내용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그 이전에 언어적인 전달의 국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편지는 내용과 함께 누가 읽는가 하는 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전달의 특성을 보여주는 담론형식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자살자의 편지는 그 자신에게는 유서가 될 수 있으며, 애인에게는 결별의 고지(告知)가 될 수도 있고, 수사관에게는 자살의 물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127)

-편지 형식의 담론양상에 대해서는 통시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128)

-대화를 일단 제시한 다음에 작가의 전지적인 시점으로 서술을 덧붙이는 것...이는 타인의 말을 제시함으로써 이중적인 목소리가 가능하게 해 놓은 다음 다시 <<화자의 최종적인 의미상의 판단의 표현으로서의 직선적이고 직접적으로 그 대상 자체를 지향하는 말>>(M.바흐찐 <<도스토예프스끼 시학>> 김근식 옮김 정음사 1988 287)로 만듦으로써 단일언어적으로 전환되는 예이다. 작가가 다중적인 시각을 마련하면서도 단일언어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면모이다. 이러한 담론의 조직 방법은 전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는 면모로서 작가의 관점이 일관성을 띠게 되고, 따라서 언어는 집중화되는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128-129)

-담론의 양식문제는 작가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말하는 방식이 곧 사상이라는 전제에서 그러하다. 이는 보다 깊은 해석을 요하는 문제이다. 골드만이 분석한 문체와 사상의 관계론에 의한다면, 법복귀족들의 어법은 불균형이 특징인데, 데카르트의 담론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균제된 것이라면 파스칼의 경우에는 <<이 우주의 무한한 침묵이 나를 전율켜 한다>>는 것으로 대표된다는 것이다. 이 불균형이 장세니즘의 사상이라는 것이다.(L. 골도만 <<문학사회학 방법론>> 박영신.오세철.임철규 옮김 현상과 인식사 1984 제8장 참조)(131)

-자연과학의 인식태도와 다른 인문사회과학의 인식태도는 주.객 동일성에 그 특징이 드러난다.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포함하며, 대상이 주체의 의식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염상섭의 경우는(특히 <삼대>) 담론의 특성으로 본다면 대상과의 거리를 철저히 유지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포괄하는 형국이다. 달리 말하자면 주.객 동일성을 드러내는 소설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대상을 철저히 고립시켜 객관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일원논리를 강조하는 소설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의 의식과 주인공의 의식을 일치시키고, 그 의식이 당시 사회의 집단의식이라는 점을 제시한 데에서는 리얼리즘의 높은 수준에 이른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132-133)

-인물의 성격과 담론의 양상은 대응관계에 놓인다. 단순한 성격의 단일언어성과 그것에 대한 비판의 역할을 하는 복합성의 담론은 인물의 또 다른 성격을 드러내 준다. 이처럼 인물의 성격과 담론의 양상은 상관성을 지니는 것이고 이는 소설의 리얼리티를 언어예술의 측면에서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136)

-문학에서 사상과 담론을 논하는 경우 이 둘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분리하여 논하곤 한다. 특히 소설의 경우에는 사상이 소설의 텍스트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논의하는데 대해 큰 지적이 없다. 이는 소설이 산문으로 씌어진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소설을 사상전달의 매개체로 보아 예술적인 속성을 몰각하게 하는 결과를 빚기 쉽다. 소설은 사상의 해설서도 아니고 인생의 지침을 주기 위한 교과서도 아니다. 소설은 장르적인 성격상 사회, 역사, 철학과 밀착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소설이 반(半)예술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적인 자율성을 지니지 않는 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사상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소설에서 사상은 주인공의 이미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관념 자체>가 아니라 <관념의 인간>이다. <주인공의 이미지는 관념의 이미지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고 관념의 이미지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관념 속에서 그리고 관념을 통하여 주인공을 보고, 주인공 속에서 그리고 주인공을 통하여 관념을 보는 것이다.(M.바흐찐, 김근식 역. 앞의책 128). 그리고 이러한 관념(사상)은 결국 담론의 형식을 통해 드러난다.(136-137)

-타인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곧 새로운 소설구조의 창조일 수 없다는 것은 소설이 단지 소설내적인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설외적인 텍스트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소설이 이루어진다는 점의 지적이다. 소설의 담론이 자율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소설외적인 요인의 영향을 수용하여 상관성을 띤다는 지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사상은 단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거나 작가의 주의나 주장일 수 없다. 소설의 사상은담론의 형태 혹은 구조와 상관성을 띠면서 언어적으로 문체화되는 것이다.(140)

-소설의 언어는 다른 장르의 언어와 달리 다양한 형태의 문체화로 이루어진 담론체계다. 그리고 소설에서 지향하는 것은 단일한 시각의 독백적인 대상의 파악이 아니라 대화적인 시각의 다성적인 의미의 발굴이다. 이는 지향점의 하나일 따름이지 모든 소설이 그렇다거나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삼대>는 담론이 이중적인 목소리를 드러내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단일한 목소리에 의해 해설됨으르써 대화적인 속성이 제약을 받고 있다. 이러한 대화적인 성격을 장악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검토는 곧 언어 외적인 요인을 작품내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가 된다. 소설은 단순한 의미의 <언어의 구조체>일 수 없다는 데서 소설내적인 텍스트와 소설외적인 텍스트의 상호작용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를 다른 말로는 텍스트연관성(intertextuality)이라 한다. 식민지 한국의 근대성이 어떠한 양상의 것이었는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의 구조 혹은 집단의식이 검토되어야 한다. 당시의 가능의식이란 측면에서는 이념분자들의 담론구조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140-141)

-소설의 언어를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은 언어학의 범위를 뛰어넘는 일이다. 그것은 바흐찐이 말하는 사회언어학 혹은 메타언어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한 방법론은 문학(소설)을 대상적인 존재로 놔두고 분석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주체로서의 인간의 능동적으로 텍스트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배제된 문학은 물격화를 면키 어렵다. 문학이 비인간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방식의 하나는 문학의 존재양태와 거기 사용되는 언어의 양상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언어, 인간의 기호론적인 실천의 국면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탐구는 소설의 내적 조건인 담론의 양상과 외적 조건인 사회를 통합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것은 바흐찐의 지적대로 <추상적인 형식주의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주의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은 언어 속에서 하나가 되므로, 언어는 사회적인 현상, 언어적 살의 모든 영역들과 모든 계기들 속에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으로서-음성의 형상으로부터 형상이 지닌 의미의 가장 추상적 계층들에 이르기까지-이해된다.(M. Bakhtin, 이득재 역, 앞의 책 97)(141-142)

-소설을 담론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담론의 통시적인 구조에 대한 고려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소설의 다른 요소들 인물, 서사구조, 시공간 등과 맺는 관계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토속어의 의미 기능도 차원을 달리 하여 거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토속어가 어떠한 맥락에서 소설의 의미를 규정하는가 하는 점인데, 다음과 같은 언급은 크게 참조가 될 만하다. <문제는 순수한 언어학적 가치기준에 따른 특정한 언어 스타일, 사회적 방언 등의 존재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떠한 대화적 각도에서 대배되거나 대치되는가에 있다. 그러나 이 대화적 각도는 순수한 언어학적 기준에서도 확고하게 정립될 수가 없다. 대화적 관계는 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확고하게 언어학적 연구의 영역에 속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M. Bakhtin, 김근식 역, 앞의 책, 264) 또한 언어학의 영역이 확되고 방법론이 진전되면서 언어학과 문학이 만나는 가능성의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문장을 최종적 대상으로 하는 언어학의 영역이 개방될 필요가 있다.(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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