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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염상섭의 소설구조>>
-덕기는 그 어느 인물에서도 증오나 애정을 드런지 않는다. 이 중립성이 문체의 중립성을 가능케 한다...(59)
-물론 부 상훈의 치졸한 연극, 그리고 순순히 회계하는 장면, 지주사의 배신의 동기, 병화의 새 출발, 필순에의 방황 등등이 형편없는 피상적 관찰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삼대>>의 원전 쪽이 훨씬 설득적이다. 거기에는 단행본에 있는 <<부친의 사건>>(41장), <<백방>>(42)이 없다. 실로 개악인 셈이다.(61)
-과연 <<삼대>>의 주제가 중산층 안정감으로서의 재산의 윤리화로 본다면, 작가의 주제 파악의 지극한 보수주의가 옳으냐, 즉 시대의 진보성이냐 퇴보이냐의 문제가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함에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새삼 물을 것도 없다. 리얼리즘이 단순한 묘사의 정밀성에 그치는 자연주의가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이다.(61)
-서울 중인 계층 출신이자 그 계층 옹호에 철저한 <<삼대>>의 조부 조의관의 이데올로기를 호의로써 바라본 작가의 분신이라 할 덕기(손자 세대)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신학문과 기독교적 이념에 놓인 아버지 조상훈에 대해서는 놀랄 만한 적의를 작가가 드러내고 있다. 실상 작품 <<삼대>>의 리얼리즘상의 취약점이 바로 이 편견에 있는 것이다.(65)
-(중성적 안정감 회복이) 염상섭의 경우는 서울이라는 지역성, 그리고 궁정주변과 연결된 역사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그의 보수주의는 설명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은 중인계층의 역사성에 직결시켜 보면 한층 명백해진다.(70)
김현 <<염상섭과 발자크>>
-전형으로서의 인물은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을 자신의 피 속에 육화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오히려 그 이념 자체이다. 그러나 염상섭과 발자크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형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두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보다는 전형을 만들 수 있는 정열. 수난이, 다시 말하자면 한 시대의 문제가 어떻게 모든 인물들에게 확산해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다.(100)
-사회가 변하지 않고 풍속적인 면에서나, 윤리적인 면에서 굳건한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틀을 문학화하는 것이 작가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회가 변천한다면, 그 변천의 과정이 여러 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형을 창조하지 않고 <한 뭉텅이의 인물>들을 창조하려 할 때에는 (1) 평행을 이루는 여러 세팅의 복합, (2) 인물의 다양함, (3) 도덕적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것의 부정이라는 여러 측면을 종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100)
-<<만세전>>에서부터 점점 극복되기 시작한 자기 정열의 과잉표출은 그러나 <<삼대>>에 이르면 완전히 제거되고, 자기 관찰의 한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행해진다...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냉정한 관찰이라는 선으로 자신을 낙찬지운다. 물론 그 관찰은 개성의 자각이라는 개인주의적 입장 위에서 이다.(112-113)
-그를 통하여 소위 개화기시대의 인텔리. 부호들의 기독교와의 관계가 극명하게 들어난다. 개화기 초의 기독교가 풍속으로 뿌리박지 못하고, 새것 콤플렉스의 한 증세로서 <수입>되었다는 것을 상훈은 보여 준다.(114)
-30년대의 세대를 염상섭은 덕기와 병화로 대표시키고 있는데 그 두 인물이 다같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개화기 시대의 기독교의 악질적 측면을 나타내 주는 동시에 기독교에서 분파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극화를 보여 준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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