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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섭,『채만식 문학과 풍자의 정신』, 도서출판 역락, 2004. 12
2009년 05월 16일 21시 26분  조회:1756  추천:0  작성자: 방룡남

"타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전통-인용자)를 상실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나(전통-인용자)의 가장 참된 존재방식인 것"(김상봉, 『나르시스의 꿈-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 한길사, 2002, 309면)이 식민지 시대 작가 채만식이 맞은 이중적 역설의 운명이자 자의식의 내용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채만식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풍자 양식은 '근대(성)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유력한 공격 수단임과 동시에 자기 부정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었다.(64)

 채만식 풍자문학의 이와 같은 강한 자기 부정성으로 말미암아, 그의 풍자문학은 풍자의 커다란 두 유형 즉 낙관주의적 풍자와 비관주의적 풍자 가운데 후자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고대 로마 풍자문학의 두 유형을 대표하는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가 각각 낙관주의적 풍자와 비관주의적 풍자문학 작품을 쓴 이래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서구 풍자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두 흐름을 형성해 왔다.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맹목성을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으로서 치유 가능한 것으로 보는가 또는 치유 불가능한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질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보는가에 의해 대별되는 것들이다. 이는 곧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신뢰여부와 연관된 문제로서 풍자 작가 자신의 인간관 및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 등이 반영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채만식의 풍자문학에 나타난 그의 관점은 비관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채만식 자신의 기질에도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내적인 긍정적 보편성을 찾아내기 힘든 시대로서의 식민지 체제의 억압적 현실 속에서 현실 부정의 수단으로서의 풍자문학을 자신의 주된 창작 방법으로 채택한 채만식의 작가적 운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64-65)

 ...채만식의 풍자문학은 그 주제적 갈래 면에서, 크게 지식인의 자기 풍자 및 현실 풍자, 주로 여성이 겪는 질곡의 형상화를 중심으로 한 민중 현실에 대한 풍자, 그리고 이 양자의 문제를 과거 전통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통해 접근하는 것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또, 이 주제들과 그것을 다루는 작가의 의식 및 태도에 조응하여 여러 풍자의 양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채만식 풍자문학의 이와 같은 다양한 갈래의 주제와 양식들은 무엇보다도 『天下太平春』이라는 작품 속에서 집약적으로 총괄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작품에 여러 주제적 요소와 풍자 양식이 단지 모두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제적 요소와 풍자 양식의 결합이 유효 적절하게 유기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채만식 문학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225)

 이 작품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인물 구성 면에서 독특한 점을 보이는데, 『濁流』와 대비할 경우는 물론 유례없이 부정적인 인물들로만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종학 역시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저자 각주) (226)

 이 부정적 인물들의 중심에 윤장의가 놓여 있는데, 이 인물에 대한 풍자의 의미는 우선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윤장의라는 인물 형상은 무엇보다도, 이전 작품들에서 줄기차게 문제 제기된 바 있는 퇴락한 전통이 이제는 그 일말의 긍정성을 상실한 것은 물론, 그 허위의식마저 완전히 내팽개쳐진 채 희화적으로 타락해버린 상황을 상징화한 것이다....이제 윤장의는 더 이상 퇴락한 전통에 대한 일말의 자의식도 지니지 않은 채 그것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서 까지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습이 희화적 아이러니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그 외양의 당당함과 동시에 속물적 물욕을 아무 거리낌없이 드러내 보이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에 나서기 때문이다. 둘째, 윤장의의 그와 같은 치부는-제4장 '우리만 빼놓고 어서 亡합사......'의 치부 과정에서 요약적으로 나타나듯-반민중적이고 반민족적인, 그리고 극단적으로 이기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서, 이에 대한 풍자는 이러한 치부를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존시키는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부패에 대한 반어적 공격이 된다. 셋째, 돈으로 양반 족보를 만든다든지 향교의 장의(또는 직원) 직함을 사는 행위의 형상화에서 나타나는 바 윤장의에 대한 풍자는 타락한 '전근대적' 전통을 온존시키는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반어적 공격의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속에는 타락한 전통에 대한 자기 풍자 또한 포함된다. 또한 이 타락한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예의 전통적인 가부장중심주의이다.(227)

 만일 윤장의가 보이는 속물적 물욕의 본질을 파악함에 있어서 그의 '계급적' 성격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이와 같은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왜곡된 전통과 현실에서의 속물성을 동시에 포착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놓치게 되고 만다.(229)
 
 "채만식의 소설들이 이러한 암흑기를 배경으로 한 것들로서 대부분 두 개의 서로 상반된 계층이나 사상의 대립 갈등에 의한 역설이지만「태평천하」는 하나의 인물을 시대적 상황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자기 모순의 풍자를 노린 점에서 독특하다"(송하춘, 『채만식-역사적 성찰과 현실풍자』,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4, 53면-저자 각주)는 평가도 이런 맥락의 의미로 이해도리 수 있다. 이미 자동적으로 몰락할 운명에 있는 계급으로 그려지고 있"(신두원, 「풍자와 니힐리즘적 부정정신의 안과 밖-채만식론」, 『한국문학작가론4-근대의 작가』(황패강 외 공편), 집문당, 2000, 283면.-저자 각주)다는 판단 역시 부적절한 것이다. 작품 결말에서의 종학의 피검이 반드시 윤장의 자신의 몰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없다. 윤장의 일가의 가족 관계는 이미 파탄을 넘어 해체의 지경에 놓여 있는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격적 본질에 비춰 볼 때 윤장의 자신은 그 나름대로 얼마든지 자기 앞길을 열어 나가리라는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다.(229-230)

 여기서 주목할 것이, 이와 같은 그의 현실 적응력이 타락한 전통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 삼음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서 타락한 사회 현실에 대한 민활한 적응력은 곧 타락한 전통에 자기 존재의 근거를 둠으로써 가능해 진다...다시 말해, 타락한 전통의 '보수성'을 현실 속에서 자기 이해 관철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능력을가진 윤장의라는 인물은, 타락과 질곡이 지배하는 현실이 지속되는 전제하에서는 자기 전통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만이 입신 출세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입증한다.(231)

 그런데 특히 이 알레고리적 요소가 아이러니적 풍자의 효과를 오히려 뒷받침하고 있다는 데에 이 작품의 특징이 있기도 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시공간 배경에서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공간 배경이 윤장의의 집 울타리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으며-벗어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정도이며-더더욱 시간 배경은 하룻동안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시간 배경 설정은 다분히 알레고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 배경 설정상의 이와 같은 알레고리적 성격이 이 작품에서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의 문제적인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아이러니적 풍자에 기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작품의 시간 배경인 "정축년(丁丑年) 구월 열xx날인 오늘 하루"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시점에 대한 알레고리적 표현물이다. 즉 1937년 9월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제가 같은 해 중일전쟁을 일으켜(7월 7일) 중국 수도인 베이징을 함락(7월 28일)한 이후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중국이 중·소 불가침조약을 맺고(8월 21일) 제2차 국공합작(9월 22일)을 하는 등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급박한 시기였다. 바로 작중시간 배경으로 설정되고 있는 이 '하루' 동안의 윤장의 집안에서의 일련의 소동은 이와 같은 역사적 위기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적 표현인 것이다.(237)

 채만식 문학의 핵심적 특질을 이루는 바 그 풍자 정신의 요체는, 바람직한 의미에서의 삶의 질서의 연속성으로서의 전통이 해체되고 있으나 새로운 삶의 질서는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의 발현이다. 그런데 이렇나 전통(의 해체)에 대한 문제 의식은 자기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시각과 태도가 전제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극단적으로 열악한 시대 상황에 의해 내몰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서 '사소설'은 부정적이고도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풍자 정신의 와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작가 스스로가 현실 부정과 비판을 넘어 새로운 역사적 전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낸다는 점에 서 '역사소설'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풍자 정신의 해소의 표현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244)

 1930년대 후반은 채만식 문학에 있어서, 전통 해체기의 부정적 현실에 대한 공격적 비판으로서의 풍자문학 작품의 창작이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시기....(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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