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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晙, 「일제하 노동운동의 방향 전환에 관한 여구」
일제하 한국의 1920년대말~30년대초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먼저 사회·경제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에 대한 수탈 정책이 산미 증식 계획 중심의 수탈 정책에서 독점 자본의 본격적 진출과 병참 기지화를 내용으로 갖는 식민지 이식형적 공업화릎 통한 수탈 정책으로 이행하던 시기이며, 공황을 전후로 하여 일제가 농민에 대한 수탈과 노동자에 대한 식민지적 노동 조건의 강요, 그리고 민족적 중소 기업 및 토착 수공업에 대한 수탈·파괴를 한층 강화하던 시기였고, 그리하여 빈궁화하여 몰락한 농민이 도시로 나와 노동자나 도시 빈민으로 퇴적되거나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고 그도 안 되면 일본이나 만주·간도 등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는 과정이 한층 강화되고 가속화되었던 시기였다.(11)
한편 장기적으로는 일제가 1920년대의 독점의 확립과 더불어 나타난 만성적 불황과 자국내의 민중 운동의 격화,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민족 해방투쟁의 고양 등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이 위기가 1920년대의 공황을 계기로 한층 심화되자 자국내의 민중운동과 식민지의 민족 해방투쟁에 대한 파쇼적 탄압과 만주와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통해서 이 위기를 극복해보려고 광분하던 시기이다.(11-12)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식민지 한국의 민족 해방투쟁은 이 시기에 커다란 전환을 겪게 되었다. 즉 이 시기에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의 창립과 해체가 있었고,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그 재건 운동의 맹렬한 전개가 있었으며, 노동자의 파업 투쟁과 농민의 소작쟁의, 그리고 항일 학생운동이 크게 고양되었고 또한 격렬한 양상으로 발전해갔다. 또한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라는 조건하에서 합법 운동의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면서 한편으로는 일부 계층과 운동가들이 변절하거나 개량주의화되어갔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비타헙적 운동은 지하화·비합법화되어가는 분화 과정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운도의 목표와 방법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의·논쟁이 전례없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그것이 운동의 전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었다.(12)
이 시기에 노동운동 역시 이러한 상황적 조건 속에서 민족 해방운동의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서 전체 운동 및 여타 부분 운동들과 활발히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크게 고양되고 또한 커다란 전환을 겪고 있었다. 노동운동의 고양과 전환은 노동운동의 이념·이론·조직·구체적 투쟁양상 등 모든 측면에서 나타났다. 노동운동의 전환(방향전환)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 노동운동의 특징을 다소 단순화시켜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 대중적 파업투쟁의 경제투쟁·비폭력 투쟁·합법 투쟁 일변도에서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결합 및 폭력적 비합법 투쟁으로의 점차적 이행; ② 합법·공개 조직 중심의 운동에서 비합법·지하 조직 중심의 운동으로서의 전환; ③ 볼셰비키적 노동운동론(이념과 이론)과 노동운동의 결합.(12)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뉘이질 수 있는데 제1시기는 1927년(정우회 선언 직후)~1928년(12월 테제 직전)까지이며(이렇게 시기 구분을 하는 것은 본고가 방향전환론의 변화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그 자체에서는 원산 총파업이 분수령이고 보아야 할 것이다.-저자 각주) 제2기는 1929년~1931년(태로 10월 서신 직후)까지이다. 필자는 제1기를 방향 전환론의 대두기, 제2기를 본격적인 방향전환기라고 본다.(15)
노동운동에서의 방향전환론은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전환의 영향을 받아 그것과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전개되었다. 이 대두기의 방향전환론은 1920년대 전반까지의 노동운동의 발전과 한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본격적 도입, 민족협동전선 내부에서의 헤게모니 문제의 대두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전개되었다.(16)
한국의 근대적 노동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1910년대와 그 이전에도 노동자조직이 있었고 노동쟁의도 간혹 발생했지만 대부분의 쟁의는 비체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에 머물렀고 노동자조직도 대체로 상호 부조와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적·분산적·비투쟁적인 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식민지 한국 민중의 정치적 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세계적인 혁명적 신사조가 한국에도 밀려옴에 따라 노동운동 또한 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이념·조직·쟁의 등 모든 측면에서 근대적인 성격을 갖는 노동운동으로 성장하였다.(16)
1920년대에 새로운 발전 단계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당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급속히 전개되던 사상운동, 즉 사회주의 사상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 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는 그 창립 당시부터 민족주의적 이념과 함께 사회주의적 이념을 은연중 포함하고 있었으며, 특히 기관지 『공제』를 통하여 조선노동공제회의 회원 중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노선에 입각한 노동운동'을 주장하고, 사회주의를 신사상으로서 선전하였다.(16) 1922년 10월 조선노동공제회를 탈퇴하고 나온 급진적인 좌경 인테리겐차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노동연맹회는 출발 당초부터 사회 개량주의의 배격을 선명하게 내걸고 사회 혁명주의로의 전환을 표방했다. 중앙의 전국적 노동단체의 활동, 그리고 그들에 의해 야기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의 사상 투쟁 등의 영향하에서 지방의 노동운동가와 노동단체들도 개량주의·민족주의 대 사회주의의 사상 투쟁과 분열 등을 경험하면서 점차로 '상호 부조·계몽 그리고 직업소개를 목적으로 한 단체'에서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 변혁'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4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이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의 실현을 목적한다'고 선언하고 출범할 당시에 이르르면 사회주의 사상은 조선의 노동운동에 있어서 이념상 완전히 독점적인 직위를 차지하게 된다.(식민지 시대 한국의 노동운동에 사회주의적 이념 이외에 다른 조류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특징적이다. 이에 대해 김봉우(1985: 219)는 "특히 조선의 노동자 계급은 대체로 제3세계 식민지와 약소 민족이 자기의 해방을 절규하면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이자 소련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상 유파의 영향을 받을 틈도 없이 사회주의적 영향에 휩쓸렸다"고 말하고 있다.-저자 각주) 그러나 이 시기의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농민 대중과는 분리된 소부르조아적 급진 인테리겐차들의 전유물이었으며, 그것조차도 하나의 사회 사상으로서의 체계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당시의 사회주의 사상이란 아직 "그 본질적인 이론체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불충분한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뒤섞인 막연한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방향 전환기의 한국 공산주의자 중 대표적 이론가로 꼽히는 李鐵岳(한위건의 가명)은 이 시기의 이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것(초기의 조선 무산계급 운동-인용자)은 조합주의·공산주의 및 식민지 부르조아 급진주의의 일종 혼합형이었다."(이철악, 「조선 혁명의 특질과 노동 계급 전위의 당면 임무」, 『계급투쟁』, 창간호, 1929년 9월, p. 17)-저자 각주)한편 노동운동의 역사가 짧아 나름대로의 운동 경험이 정리되지 못했고 사회주의의 도입도 아직은 학설의 소개에 그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어떤 노동 운동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못했다.(16-17)
1920년대 전반의 한국 노동운동에 있어서 가장 특기할 만한 성과의 하나는 근대적 노동조합의 생성과 전국적 노동자조직의 결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노동조합·노동단체는 그것들이 대중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지 못하다는 커다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단체들은 중앙이나 지방 할 것 없이 거의 소부르조아적인 지식인 중심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노동운동의 역사가 극히 짧고 노동자 계급이 아직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던 1920년대 전반기의 조건하에서는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한 것도 사실이다. 그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 노동자 조직·단체가 대중 속에 뿌리박지 못한 사상 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노동자 대중과 직접 노동 현장에서 접촉하고 그들을 조직·지도하는 조직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러한 인적 구성은 노동자 조직·노동 운동에까지 사상 운동에서의 파벌 투쟁을 끌어 들여와 노동운동의 발전을 저해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통렬한 비판이 있다. "과거 조선의 무산계급운동은 일종의 간판의 운동이었고 광고의 운동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다만 단체를 통해서만 보았고 공장·광산 등의 일터에서 보지 못했다. 현실적 투쟁을 통하여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려 하지 않고 단체의 간부가 됨에 의하여 대중을 지휘·지령함으로써 만족하였고 회원수도 모르는 단체 간판을 모음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자랑하였다." 이철악, 앞의 글, pp. 26~27.-저자 각주) 노동자 조직·단체들의 이러한 약점은 1927년 이후의 방향전환기에 심각하게 반성되며 그러한 반성의 결과가 방향전환론 대두기의 중심적 슬로건인 "노동자 속으로! 공장으로! 광산으로!"로 나타나게 되었다.(18)
식민지 한국에서 본격적인 노동쟁의는 1910년대말부터 시작되었다(18)
특히 1919년과 1920년에는 3·1운동의 영향도 있고 하여 노동쟁의가 연간 80여 건으로 격증했다. 1921, 22년에는 전후 공황의 영향하에서 노동쟁의가 잠시 주춤했으나, 1923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히 풍미하고 주의자들이 쟁의에 관여하여 계급의식을 고취·선동시키려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각지에 주의적 색채를 띤 노동 단체가 생겨나면서 [……] 재차 증가"하였다. 1924, 25년에는 일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 및 노동운동에의 사회주의자의 개입에 대한 탄압·저지가 강화되고 노동쟁의 자체에 대한 파괴 책동도 강화된 탓으로 노동쟁의의 건수는 약간 줄어들었으나 1926년 이후에는 또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처럼 약가느이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노동쟁의는 점차 늘어갔고, 그 과정에서 차츰 노동자 계급의 조직성과 투쟁성도 커져갔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노동쟁의는...대부분 임금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발생했으며, 권리 요구 투쟁은 극히 소수였고 민족 해방 등 정치적 요구를 내건 파업 투쟁은 거의 없었다. 즉 거의 모든 파업투쟁이 경제 투쟁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시기의 파업투쟁에 있어서는 노동자측의 조직성과 준비가 크게 부족했다. 따라서 파업이 장기화되거나 일제 관헌과 자본가측의 회유나 탄압이 거세어지면 이탈자가 생겨 파업 대열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 쟁의의 발전과 한계 또한 방향 전환론 대두의 한 계기가 되었다. 즉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대중 투쟁의 증가는 이렇게 고양되어 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다 목적 의식적인 운동으로까지 발전시키려는 동기를 만들어냈고, 경제 투쟁에 한정된 노동자들의 투쟁을 정치 투쟁으로까지 고양시키려는 지향을 만들어냈으며, 그를 위하여 노동자들의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노동자들을 보다 높은 정치 의식으로 고취시키려는 지향을 만들어냈다.(19)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지향은 아무런 매개적 요인이 없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에 대한 내재적인 반성과 새로운 지향은 전체 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전환의 영향하에서, 그 자극을 받아 나타난 것이었다. 1926년 4월에 발족한 정우회는 같은 해 11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단일 정치 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사상 단체의 해체와 민족 단일당의 결성"을 주장했다. 정우회 선언의 핵심적 내용은 ① 분파투쟁의 청산과 사상 단체의 통일; ② 대중의 무지와 자연 생장성의 퇴치를 위한 조직 및 교육의 필요성; ③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전환; ④ 비타헙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 등이었다. 이러한 정우회의 방향 전환 선언은 당시 한국의 사회 운동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노동운동 또한 이러한 방향전환선언과 그에 자극받아 전개된 사회 운동의 방향 전환으로부터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특히 위에서 말한 정우회 선언의 골자 중 ②항과 ③항은 재래의 노동 운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지향에 대하여 하나의 준거들로서 작용했다.(20)
정우회 선언 이후 민족협동전선 문제를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 한국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의 시기에도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이론이 소개되기는 했었지만 그것이 학설 풀이의 수준에 그쳤던 데 비하여, 이 시기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저작의 다수가 매우 광범위하게 읽히고 토론과 논쟁의 전거로서 활용되었다. 이러한 사상적·이론적 전환은 노동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레닌의 사상 중 자연 발생성에 대한 부정과 목적 의식성에 대한 강조, 정치 투쟁과 혁명적 계급 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계급간의 제휴·동맹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성·헤게모니에 관한 이론 등은 이 시기의 노동운동론 속에 크게 반영되었던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론이 종래의 운동에 대한 비판·반성 그리고 장차의 운동에 대한 지향의 준거들이 되었다.(20-21)
양당론 논쟁이란 1927년(4월 민족주의 제휴론에 의한 신간회의 결성-인용자 주) 전진회측이 주도한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의 창립 대회석상에서 중앙협의회를 상설로 할 것인가 비상설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전진회측과 ML 당측(정우회-인용자 주)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양측 모두가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을 지지했으나 상설론자(전진회측)드이 민족단일당 밖에 따로 계급적 협의 기관을 두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비상설론자(ML 당)측은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는 민족 운동과 계급 운동을 따로 구분하지 말고 단일 정당을 만들어 힘을 집중하여 공동 투쟁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논쟁은 표결을 통하여 비상설론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논쟁을 통하여 민족단일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독자성 사이의 문제에 대한 ML 당의 이론적 불확실성이 더 뚜렷이 드러나고 말았다.(21-22)
이에 ML 당은 노정환의 「신간회와 그에 대한 우리의 임무」라는 글을 통하여 이 문제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려 하였다. 그는 신간회를 민족협동전선 혹은 민족단일당의 매개 형태로 규정하고 그 안에서 프롤렡차리아트가 헤게모니를 전취하는 것을 당면의 임무로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소위 '청산론자'들에 의하여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라는 상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 등을 논거로 계급적 표지를 철거하고 그 대신 민족적 표지를 취해야 하며(장일성), 신간회를 협동전선을 뛰어넘는 당의 형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며(김만규),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국민(민족) 운동내의 한 '경향' '세력'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홍양명) ML 파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전취론'을 격렬히 비판하였다.(22)
ML 파는 이들을 '계급 표지 철거론자' '특수 조선의 신사'라고 부르며 격렬하게 논박했다. ML 파는 이들의 주장이 "무주체적 협동에 도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독립성의 포기를 주장하고 全투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러한 "오류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포기, 조선 민족 해방 운동의 현단계의 사회적 특징 및 이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위에 대한 무이해에 입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928US 3월 제4차 조선공상당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채택한 「민족 해방 운동에 관한 논강」의 제6항.-저자 각주) 제 3·4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하던 ML파는 이처럼 좌(양단론) 우(청산론) 양쪽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신간회를 민족협동전선(혹은 그 매개 형태)으로 보고 그 내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전취를 당면의 임무로 삼는 입장을 주류로서 굳혀갔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는 한층 주력하여 노동자의 스트라이크와 농민의 일상 투쟁을 전취·지도해야"(같은 논강, 제6항.-저자 각주)한다(22)고 보았다.(22-23)
이러한 입장에서 ML파와 그들이 주도하던 제 3·4차 조선공산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투쟁을 조직·지도하라고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노동 운동의 방향 전환의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계기가 되었던 것이다.(23)
방향전환론 대두의 또 하나의 계기는 지난날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 시기까지 약 7~8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그야말로 파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1925US 조선공산당이 성럽된 이후 파벌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특히 정우회 선언 이후로는 '파벌주의 박멸'의 구호가 고창되었지만, 파벌 투쟁적인 요소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커다란 약점은 대중과 분리되어 있었고, 노동자·농민적인 요소는 매우 적었다. 게다가 이들 지식인 출신의 전위들도 주로 중앙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지방의 각 단체의 임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노동자·농민 속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반성이 '공장으로' '노동자 속으로' 들여가려는 지향을 만들어냈다...(23)
('가자! 공장으로! 광산으로! 노동자 속으로! 라는 슬로건의 등장)
이 슬로건은 1928년초에서 1929년초에 이르는 기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슬로건이었다.(25)
이러한 슬로건과 이러한 프로그램은 방향 전환에 관한 그들의 성격 규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방향 전환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과도적인 역사적 사명으로서 민족 해방 투쟁을 전체 성격으로 파악하는 과정-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 해방 운동의 주체 조건으로서의 역사적 필연성을 파악하면서 전민족적 정치투쟁의 무대로 등장하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방향 전환을 본질적으로 민족 해방 운동과 노동 운동의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진실한 프롤레타리아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공장으로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들이 '진실한 프롤레타리아성'을 획득하고, 노동자들을 '진실한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 계급 의식으로 무장시키며, 그리하여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조합주의적·고립적·국부적 투쟁 형태에서 전체적 목적 의식적 정치투쟁에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상의 핵심 고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26)
1920년대 후반기의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와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띠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사상·이론적인 측면의 변화였는데, 1926년경을 전환점으로 하여 볼셰비즘(마르크스-레닌주의)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운동 노선에 있어서도 볼셰비키적인 운동 노선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 및 이론 체계에 대한 이해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이론들은 현실 상황과 운동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이해와 구사의 수준은 그 원칙론적 명제들을 식민지 한국의 현실에 막 대입해보기 시작한 시점의 그것이었고, 따라서 체화되지 못하고 경험을 통해 변용·구체화되지 못한 것이었다.(27-28)
이러한 사상적·이론적 변화는 노동 운동에도 거의 그대로 투영되었다. 1920년대의 막연한 사회주의 대신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노동 운동의 지도 이념으로서 노동자 계급 앞에 제시되었고, 막연한 '계급 해방'이라는 목표 대신에 '민족 해방'이라는 민족적 임무와 '계급 해방'이라는 계급적 임무가 동시에, 그리고 훨씬 더 구체화된 형태로(2단계 혁명론)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 그리고 민족협동전선 내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획득, 노동동맹 등의 전략적인 개념들과 표면 조직과 이면 조직,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합법 투쟁과 비합법 투쟁의 결합 등의 전술적인 개념들도 제시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 전반기와 비교해볼 때 커다란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 발생적이고 비체계적인 노동 운동이 목적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노동 운동으로 전환될 수 있는 사상적·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에 있어서도 앞서 지적한 공산주의 운동 일반이 가졌던 한계가 그대로 나타났다. 노동 운동의 목표와 이념은 노동자 계급 자신에게 정확히 전달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였고, 노동 운동론도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명제들만이 제시되었을 뿐 어떤 구체적인 방침이나 실천 경험을 통한 예증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은 이론과 실천의 괴리, 또는 이론 부재나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내어 노동 운동의 이념과 이론이 노동 운동의 자연 발생성의 극복과 목적 의식성의 획득에 커다란 도움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28)
이 시기에 노동자 계급의 조직 운동과 조직적 역량은 크게 발전했다. 첫째로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크게 증가했다. 일제와 자본가 측의 가혹한 탄압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 100개 이상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927년 3월부터 1928년 2월까지의 1년 동안에도 60개의 노동 단체가 새로 결성되어 1928년 현재 노동 단체수가 총 350을 헤아리게 되는 등, 공장·사업장 단위의 노동조합들과 지역 단위의 조직체의 발전에 힘입어 갈수록 광범한 대중이 노동조합의 조직 속에 포괄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노동자 조직이 보다 통일적이고 계통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1925년 이래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각각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나뉘어짐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이 한 단체 속에 섞여 있던 어색함이 해소되었다. 또 각지에서 1925~1926년에 지역별로 노동 연합체들이 결성됨으로써 중앙의 총동맹-지방의 연맹(또는 연합회)-개별조합으로 이어지는 통일적이고 계통적인 체계가 만들어져 노동 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에서 통일적 계통으로서 전개도리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셋째로 인쇄·철공 등 일부 산업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전국적 산별 노조가 결성되고, 지방별로는 그 밖의 많은 산업에서도 산업별 노조가 결성되었다는 것은 '1산업 1조합'을 원칙으로 하는 산업별 노동조합주의를 향한 의미있는 전진이었다.(29)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제점들도 많이 있었다. 첫째, 조선노동총동맹이 일제의 탄압과, 합법주의에 안주하여 적극적으로 해금 투쟁을 전개하지 않은 지도부의 안이한 자세, 누차에 걸친 공산당 사건으로 인한 간부 상실 등의 이유로 말미암아 그 기능이 마비되어 기대되었던 전국적인 규모에서의 노동 운동을 통일적·계통적으로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전위 내지 활동가와 대중과의 분리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다. 노동 운동에 참가한 지식인 출신의 운동가의 대부분은 중앙이나 지역 조직의 간부·임원으로 있었을 뿐이고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 대중과 접촉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파벌 투쟁의 노동조합 내부로의 연장과 일부 노동조합 간부의 개량화의 원인이 되었으며 노동자의 조직·훈련·교육에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었다. 셋째로 조직 운동의 단순성을 지적할 수 있다. 식민지하, 게다가 가장 야만적이고 파쇼적인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던 일제의 치하에서 애당초 합법성이란 일제가 허용하는 좁디좁은 공간 속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조직의 합법적이고 표면적인 형태(즉 노동조합)만이 존재했다.(29-30)
1927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 원산 총파업에서 그 절정에 이르른 1920년대 후반의 대중적 파업 투쟁의 앙양은 그 자체로서 일제를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 해방 운동의 각 부문(특히 학생 운동과 농민 운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또한 전위의 맹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 '노동자 속으로'라는 구호가 전위들에게 커다란 설득력을 가진 슬로건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1920년대말~1930년대초의 노동운동의 방향전환에 있어서 그 내적인 추동력이 되었다.(32)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은 곧이어 일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고 그 여파는 일본의 부담 전가 정책을 통하여 한국에까지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32)...공황으로 인한 농민층의 몰락과 탈농화, 그리고 일본·간도 등으로부터의 귀환 노동자의 증가 등의 요인으로 인해 상대적 과잉인구의 풀이 팽대해지고 그것이 현역 노동자군을 압박함으로써 그나마 열악하기 그지없던 한국 노동자들의 상태는 한층 더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2-33)
이러한 공황으로 인한 노동자 계급의 상태 악화는 노동 조건을 유지·개선하기 위한 치열한 경제투쟁을 야기하였고, 이러한 파업투쟁의 앙양은 1930년대초의 방향 전환론의 본격적 전개의 한 배경적 요인이 되었다.(여기서 배경적 요인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방향 전환론을 직접적으로 결과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저자 각주) 한편 일제는 일제하 전 기간을 통하여 노동운동에 대해서 극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출판법·보안법·제령7호·치안유지법 등 갖은 악법과 집회 금지·해산 종용·집회에의 임석·검거·예비 검속·스파이 행위 등을 통하여, 그리고 때로는 경방단 등과 같은 어용 단체들과 심지어 헌병·군대까지 동원하여 노동 운동을 억압했다. 일제의 탄압은 1920년대 후반기부터 극단적으로 강화되었다. 1928년의 치안유지법 개악, 일본 田中 내각의 파쇼화, 그리고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山梨 총독의 조선에 대한 파쇼적 통치와 일제 경찰의 억압 기구 강화가 방향 전환기를 특징지워준다.(33)
이러한 악법과 억압 기구 강화를 통한 일제의 파쇼적 탄압의 격화는 합법적·표면적 운동을 크게 제약하였다. 조선노동총동맹의 무력화와 원산 노련의 강령·마크 개정 들은 그 알려진 일례에 불과하다. 출판법은 노동운동의 각종 선전·선동 문건의 제작에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했고, 보안법은 집회의 강제 해산과 금지를 위한 법적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제령7호와 치안유지법은 노동운동의 정치 투쟁화에 대한 커다란 제약 조건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주의를 내건 노동 단체가 표면에 나서서 합법적인 공간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일제와 일본인 자본가 단체·어용 단체들의 공격 아래에서는 경제 투쟁만이라도 열심히 하는 노동자 조직도 그 상태나마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합법적인 존재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 시기의 노동조합에 있어서는 개량화·노자협조주의화를 의미했다. 바로 이런 사정이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기존의 노동조합을 그러한 것으로 개조하려는 노력이 비합법·지하 적색 노조 운동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도록 한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33-34)
(12월 테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이 1928년 12월 10일 채택·발표한 이 테제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이다. 이 테제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그때가지의 약점을 지적하고 붕괴 상태에 빠진 조선 공산당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재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이 테제는 당 재건 문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 테제가 노동 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하여 미쳤던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36)
첫째로 이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을 기초로 당을 재건하라는 것을 그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지식인 서클의 조직이라는 옛 방법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특히 공장과 노동조합에서 볼셰비키 대중 작업에 착수할 경우에만 이 거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것은 "순수한 공산주의 개념과 진실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고 형태하에 행동하는 건전한 공산주의 관점을 가진 공산주의 세포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형성"의 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테제는 조선공산당의 '볼셰비키화' 즉 '볼셰비키적'인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요구했던 것이다.(이러한 지침은 코민테른이 이미 제5회 대회(1924년)에서 내걸었던 '볼셰비키화'슬로건에 따른 것이다. 이 슬로건은 코민테른 제5회 확대집행위원회 총회(프레남)에서 지노비에프가 기초한 「코민테른 제당의 볼셰비키화에 대한 테제」가 채택됨으로써 코민테른 산하 각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조직적·사상적 노선이 되었다. '볼셰비키화'의 핵심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첫째는 조직 문제로서 ① 생산점(즉 공장 경영 세포)을 기초로 하여 당을 개조하는 것(이는 활동의 중심을 공장·경영으로 옮기는 것, 당원 중 노동자의 비중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② 당 밖의 노동자 대중 조직, 특히 노동조합 내에서 당의 활동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상적인 문제로서 당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시킨다는 것이다.-저자 각주) 이러한 지침은 곧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철저히 받아듣여졌고, 그리하여 1929년 이후의 모든 공산당 재건 운동은 이러한 '볼셰비키화' 노선에 다라 추진되었다. 물론 종래의 조선공산당이 지식인 중심의 부르조아적인 정당이고 따라서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하여 당이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자기 반성은 한국의 공산주의자 대열내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또 앞에서 보았듯이 이 테제가 지시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내용의 지향이 이미 내부에서 대두했지만, 이 테제는 이러한 지향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러한 지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당을 재건한다는 '볼셰비키화' 노선은 노동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관심을 크게 환기시키고 그들에게 공장 경영을 출발점으로 해서 직접 노동자들 속에서 활동하고 그것을 기초로 당을 재건하도록 촉구함으로써 1930년대의 혁명적 노동운동의 전개에 기본적인 동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7-38)
둘째, 이 테제는 노동운동에 대한 몇가지 지침을 포함...(38)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될 것은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평가 절하이다.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평가 절하는 민족 부르조아와 그들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코민테른 당국의 평가 절하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평가 절하 자체는 "공산당과 민족 혁명 운동의 잠정적 동맹"까지도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제휴가 결코 "공산주의 운동과 부르조아 혁명 운동의 연합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하여, "혁명적 노동운동의 완전한 독자성을 엄격히 유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와 더불어 테제는 "공산주의자들은 대중 가운데서 필요한 준비 작업이 없이는 민족 기구의 장악이 그들을 대중과 접맥할 수 있게 하는 아무런 보장도 되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논리는 한때 민족유일당 또는 민족협동전선당의 매개 형태로 규정되어왔던 신간회를 잠정적 동맹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주된 노력이 기울어져야 할 곳은 민족협동전선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운동이며, 신간회가 아니라 노동조합·농민조합이라고 지적한 셈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곧바로 신간회 해소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모여있던 좌익적인 역량들을 공산당의 재건과 노동조합·농민조합의 재조직·강화를 위한 방향으로 재배치해야 한다는 논리와 실천적 노력을 낳았다.(38-39)
1927~1928년부터 국제 노동운동에 좌선회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① 국제 노동조합 운동의 통일을 위한 노력의 실패; ② 몇몇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계급투쟁의 격화; ③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파시시트들에 대한 협조와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 부르조아지·개량주의자의 제국주의에 대한 협조; ④ 이러한 정세 하에서 부르조아·사회 민주주의자·민족 개량주의자·개량주의적 노조 지도자 등이 완전히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편으로 이행했다고 본 코민테른 및 그 하부 기관들의 과도한 판단에 기초하여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계급 대 계급'의 전술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전술에 기초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서구에서는 사회 민주주의자,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민족 부르조아지들을 주요한 타격 대상으로 삼았다.(39-40)
1930년대에 들어오면 민족협동전선이라는 문제 의식이 반제통일전선이라는 문제 의식으로 바뀌고 그 계급 동맹의 내용 또한 바뀌게 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계급 동맹의 내용의 변화이다. 1920년대 후반의 '민족협동전선'론에 있어서 민족협동전선을 구성하는 계급은 부로조아지·소부르조아지·프롤레타리아트·농민이었다. 그러나 1930년 단계에서 나타난 고경흠의 '반제통일전선'론은 "노동자·농민·피압박 소시민층을 ××[혁명]의 추진력으로 하는 반제국주의 ××[혁명]의 단계"의 "광범한 반제통일전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부르조아지가 동맹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45-46)
프로핀테른(Profintern은 1921년에 창립된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러시아어 약자 표기이다.-인용자 주)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고 일본·중국 등의 노동조합과는 상당한 교류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프로핀테른과 한국의 노동조합 사이의 교류는 1928년에야 시작됐다.(이는 아마도 한국 노동 운동의 통일적 기관으로서의 조선노농총동맹이 1924년에야 창립되고, 그 후로도 일제의 탄압과 내부의 파벌 대립으로 노농총 자체가 거의 무력화되어 있던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저자 각주) 1928년 3월에 열린 프로핀테른 제4회 대회에는 한국 대표로 한해와 김경식이 참가했고, 동 대회는 「식민지·반식민지에 있어서 노동운동에 대한 테제」중에서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4개 항의 당면 임무를 제시하였다. 1928년 이후 프로핀테른과 한국 사이의 연락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프로핀테른 연락부 및 범태평양노동조합회의(이하 태로)의 지부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이미 무력화된 조선노동총연맹과 연락하기보다는 태로와의 협력하에서 직접 적색 노조를 조직·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50)
태로는 1927년 5월 20일 무한에서 결성되었다. 이 제1회 대회에는 소련·중국·일본·조선·인도네시아·영국·프랑스·미국 등 8개국의 대표가 참석... 이 대회에서 채택된 선언과 일반 강령 및 경제 강령을 통하여 태로는 태평양 지역의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획득이라는 목표와 더불어 식민지의 독립, 제국주의 전쟁 반대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표도 전면에 내 걸었다. 그리고 대회는 이 과제를 수행할 지도부로서 범태평양노동조합서기국(이하 태로 서기국)을 설치했다. 서기국은 상해에 두고 중화총공회와 전러시아노동조합평의회로부터 대표자 각 2명씩, 그리고 미·영·일·불·조선·쟈바 등으로부터는 대표자 각 1명씩을 보내어 구성하기로 하고, 서기국회의는 6개월에 1회, 대회는 2년에 1회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범태평양노동자』라는 기관지도 발행하기로 하였다.(50-51)
(9월테제-「조선에 있어서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에 대한 결의」)
1930년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프로핀테른 제5회 대회에는...한국의 문제를 의제로 삼지는 않았으나 한국의 노동조합의 조직 방침에 대한 결정을 하기로 결의했다. 대회가 끝난 후 대회의 결의에 의하여 테제 작성위원회가 구성되어 테제를 작성했고 프로핀테른 집행위원회는 이를 1930년 9월 18일 정식으로 채택·발표했다.(52)
이 테제는 공황과 일제의 탄압이 격화되고 대중의 혁명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이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의 배반과 좌익의 주체적 역량의 미비로 말미암아 그 발전을 저해당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정세 인식에 기초하여 씌어진 것이다(제1항~4항). 이러한 정세 인식은 1930년대초의 한국의 민족 해방 운동과 노동운동이 당면하고 있던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한 것임과 동시에 세계적 규모에서 혁명 운동·노동 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정세 인식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 인식은 식민지 한국에서나 세계적 규모에서나 모두 노동운동의 '좌편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작용했다.(52-53)
9월 테제는 이러한 정세 인식에 근거하여 '조선의 좌익'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조선노동총동맹내의 좌파를 결집시켜 조직하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제5항). 이것은 물론 조선노동총동맹으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을 지시한 것이 아니고 좌파의 '독자적 지도와 혁명적 본질'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테제는 또한 개량적 노조내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테제는 '이중조합주의'적인 경향이 그리 크게 나타나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53)
12월 테제와 9월 테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자가 1930년대 노동운동에 목표를 제시한 것이며, 후자는 그것에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12월 테제가 공산당의 '볼셰비키화'라는 기본 노선에 입각하여 일제의 탄압과 내적 취약성으로 인해 붕괴된 조선공산당을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한 진정한 볼셰비키적 전위당으로 재건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1930년대에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장과 농촌을 무대로 활발한 조직작업과 투쟁을 수행하도록 하는 기본적인 동인을 제공했고, 9월 테제는 12월 테제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1920~30년의 국내외적인 운동의 흐름과 그 조건의 변화를 반영하여,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그러한 노력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전략·전술, 즉 방법론을 제공해줌으로써 193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을 틀지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54)
(10월 서신-「조선에 있어서 범태평양노동조합서기국 지지자에 대한 동 서기국의 서신」)
태로의 10월 서신은 5개항에 걸쳐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정세와 임무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고 현단계에 있어서 조선 노동 계급 앞에 가로놓여 있는 중요한 제문제들에 대하여" 좌익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상세한 내용을 담고있었다. 이 테제는 그 내용으로 보아 명백히 9월 테제의 연장선상에 서 있으며, 그것의 적용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결함들을 지적하고 그것의 극복 방ㅇㄴ을 제시함과 동시에 9월 테제에서는 상세하게 규정되지 않고 원칙적인 명제로만 제시되었던 몇몇 사항들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55)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민족 개량주의에 대한 평가가 극단화되었다는 점이다. 10월 서신은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자치라는 표어 아래 점차 일본 제국주의에 접근하여 민족 해방 운동에 반역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자치 운동의 부활(1920년대초에 대두했으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맹공을 받고 좌절되었으며, 1926년에도 부활 움직임을 보였다가 좌절된 자치운동은 1930년경부터 부활했다.-저자 각주) 과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1일)을 기화로 민족 부르조아들이 일제의 기도대로 민족 감정을 부채질하여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제의 만주 침략에 은연중 호응한 점, 그리고 심지어 일부는 일제의 침략 논리인 대아시아주의에 호응한 점 등에 원인을 두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평가는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 개량주의 또는 민족 부르조아지를 완전히 동일한 부류로 보거나 후자를 전자의 '주구' 또는 '충실한 동맹자'로 보는 인식에 다름아니었다. 이러한 평가와 인식은 한국의 좌익들로 하여금 신간회를 해소한 후 1930년대 전반까지는 민족주의자들과의 어떠한 제휴도 시도하지 않고 적색 농노조 조직에만 일로 매진하게 하였다.(55-56)
두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가 한층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테제 발표 당시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한편으로는 일제의 만주 침략을 위한 음모의 하나였던 만보산 사건과 '일제의 민족간 이간질(조선·중국인간)에 의해, 그리고 이에 대한 민족 부르조아들의 의식적·무의식적 동조·선동에 의해 그 해 7월 초순 한국 각지에서 수일간 벌어진 중국인에 대한 습격과 그로 인해 조성된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한 한국 민중의 무의식적인 동조적 분위기가 감돌던 시점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인해 아시아 지역에서 세계 전쟁의 전운이 감돌고 특히 중국의 혁명 운동과 소련에 대한 일제의 전쟁 도발의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태로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저지하는 것을 가장 커다란 임무로 삼게 되었고,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그에 기초한 국제적 반제 통일 전선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더욱 강화한 것이 중국과 한국에 있어서의 부르조아 민족주의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었다. 즉 태로는 당시의 전선이 한편에는 식민지·반식민지의 노동자·농민과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 전선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반식민지의 토착 부르조아지의 동맹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고 파악하였다. 태로 10월 서신에서의 이러한 경향은 1930년대 초반의 태로 계열의 적색 노조운동뿐 아니라 적색 농노조 운동과 나머지 다른 운동(특히 학생운동)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즉, '제국주의 전쟁 반대' '중국 혁명을 사수하라! 소비에트 연방을 사수하라!' 라는 구호는 당시의 거의 모든 좌익계 유인물의 말미를 장식하고, 반전 데이(반전 데이(정식 명칭은 '제국주의 전쟁 반대 국제 투쟁'이며 일명 '적색 데이'라고도 함)는 코민테른 6회 대회의 결정에 의하여 제정되었고, 1929년 3월 유럽 14개국 공산당회의에서 매년 8월 1일 거행하기로 정해졌다.-저자 각주)는 노동·농민·학생 운동에서 중요한 기념 투쟁일의 하나가 되었다.(56-57)
셋째로는 노농동맹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9월 테제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해야 된다고 지적되었으나 이것이 한국의 좌익에 의하여 전혀 실행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 태로서기국이 '노동 단체와의 연결과 노동자·농민 투쟁의 통일 전선 편성 및 지주·자본가·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의 상호지지' 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 것이다.(57)
넷째로는 파벌주의의 해독을 또다시 강조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태로와 프로핀테른의 노선에 따라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 등의 파벌별 재건 운동이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었다.(57)
마지막으로 주목되는 것은 시기 상조적인 이중조합주의에 대하여 제동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10월 서신은 프로핀테른의 좌선회와 9월 테제의 영향하에서 한국의 좌익들이 개량주의적 노조 속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혁명적 노조를 만들어 섣불리 노동조합을 둘로 나누고 결국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프로핀테른과 태로의 진의는 개량주의적 노조 속에서의 활동을 포기하는 것이나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혁명적 노동조합을 기계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며 개량주의적 노조 속에서의 활들을 통해 하부의 대중을 장악하고 점차 아래로부터 노동조합의 기관과 투쟁 기관(예컨대 파업위원회)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것이고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공장 그룹으로부터 출발해 혁명적 노조를 건설하고 합법·비합법 투쟁을 통해 이 노조의 합법성을 전취해 나가는 것이라고 역설했다.(57)
일제하 노동 운동의 방향 전환기였던 1929~1931년은 일제하의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대중적 파업투쟁이 고양되었던 시기이다....노동쟁의는 1929년 102건, 1930년 160건, 1931년 205건으로 해마다 그 건수가 격증하여 불과 2년 사이에 2배가 많아졌고 참가 인원수도 2배 이상으로 격증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원산 총파업(1929년 1월~4월), 부산 조선방직 파업(1930년 1월), 신흥탄광 노동자의 파업과 폭동(1930년 5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1930년 8월), 함흥 평창제사공장 여성 노동자의 파업(1931년 1월), 광주 道是제사공장 파업(1931년 2월), 경성방직 영등포공장 파업(1931년 5월)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공 파업(1931년 5월~6월), 인천 力武정미소 노동자 파업(1931년 6월) 등 굵직굵직한 노동쟁의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들 쟁의는 그 완강성·준비서·전투성 들을 통해 일제와 자본가(대부분이 일본인이었던)들을 크게 당황하게 하였으며 거의 전국적으로 그 영향을 미쳐 이 파업을 지켜보는 노동자 계급과 그 밖의 식민지 민중을 크게 고무하고 격동시켰다.(58)
1929~30년 단계에서 이미 상당수의 공산주의자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선진적 노동자들의 비합법적인 서클이 노동자 대중 속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이들의 영향하에서 노동운동의 새로운 경향(개량주의의 배격, 새로운 조직 형태, 새로운 투쟁 전술)들이 점차 발전되어 있었다....(61)
1929년~1931년 단계에서의 지하 적색 노조운동은 이제 겨우 그 맹아가 보일 뿐이거나 혹은 초기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맹아와 초기적인 시도들이 발전하여 193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가장 특징적인 흐름 중 하나인 지하 적색 노조운동으로 성장해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의의를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61)
(부록-프로핀테른 제4회 대회에서의 『식민지·반식민지에 있어서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테제』중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이 약한 것은 이 나라의 공업화가 미약하고 또 격심한 테러 아래서 발전하고 있는 운동 자체가 미약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한 조건은 식민지 동양 전체에 공통적인 것이다. 운동이 이렇게 약한 것은 그 밖에도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이 특수한 상황 아래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 상황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와 및 이민 정책이다. 이 정책의 결과 팽대한 수의 조선의 노동자가 이민이 되어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 숙련 노동자의 수만 해도 조선 본국에 있는 공업 노동자의 총수보다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많은 수의 일본인 노동자가 조선에 건너와 있으며, 이론의 자본가와 관리, 게다가 가장 좋은 토지에서 살고 있는 강력한 일본인 '농민'과 더불어 조선에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 본토에서는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의 노동조합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일본 자본가의 손아귀에 있으며 일본인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도구로서 역할하고 있다.
노동 운동의 건전한 발전에 대한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 것은 조선의 혁명운동의 격렬한 내부 투쟁이었다. 이들 모두는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을 저지했다. 1927년 하반기에 비로소 조선노동총동맹이 성립되었다-이것은 조선의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의 노동조합 중앙 조직이었다.
조선의 좌익은 다음과 같은 임무에 당면해 있다.―① 개개의 조합과 개개의 단체를 조직적으로 강화하는 것, 활동가와 간부를 육성하고 교육하는 것; ②대부분은 총동맹밖에 있는 미조직 공장 노동자를 총동맹에 끌어들이는 것; ③ 광산 노동자·목재벌채 노동자·어업 노동자·농업 노동자 사이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는 것. 총동맹이 조선의 농민 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이들 부류의 노동자를 매개로 하는 경우에 가장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들 사이에서의 활동은 중요하다; ④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의 좌익(평의회)와 활동을 조정할 것. 이 양 조직은 공동의 행동강령을 작성하고 그 강령에 기초하여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와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서 광범한 계몽 활동을 개시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인 노동자 약간의 층이 감염되어 있는 인종적 편견 및 제국주의적 경향과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혹한 억압하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노동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근거 없는 불신감과 적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노동운동과 조선의 노동운동의 소원한 상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만 조선 및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 쌍방에 유해한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에 대햐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70-71)
金炅一, 「일제하 고무 노동자의 상태와 노동 운동」
이와 같이 고무 제품 중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고무신이 지니는 상품적 특수성과 아울러 일제의 규제가 적고 비교적 소규모의 자본을 요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 분야는 조선인 공업 자본이 대규모로 진출하여 일본인 공장을 압도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82)
여기서 생고무 등을 비롯한 원료 가격 시세의 불안정성 및 공황 이래의 전반적 궁핍화의 심화 혹은 농촌 진흥 운동에서의 자작자급 정책의 영향으로 인한 판로의 협소화 등의 요인이 겹쳐 자본가 입장에서의 적극적 대응책이 요구되었다. 이 경우 자본가들이 택한 가장 손쉬운 대응책의 하나가 임금의 감하를 통하여 노동자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제품 가격의 조절을 통한 대응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이 시기는 앞에서 말한 시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때문에 실효를 거두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이른바 통제라는 이름 아래 30년대 이후 전개된 이 부문에서의 독점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83)
이와 같은 원료의 독점적 공급이 식민지 지배 권력의 적극적 알선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일본인계 자본의 비중이 높은 부산에서 이러한 독점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에 따라 주로 조선인계 위주의 공장은 교대제 작업이나 조업 단축, 또는 휴업 혹은 불가피하게 대공장으로 합병되는 길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전시 체제로의 이행과 함께 독접 자본과 식민지 권력의 유착이 강화되면서 보다 심각화된다. 즉 원료수입제한령 혹은 고무배급통제규칙 등에 따른 전시 입법으로 고무 원료의 배급 통제가 강화되는 한편 원료 폭등 등의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시키는 독점 가격과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적 높은 가격에 고시된 公定價格의 성립 등으로 중소 자본의 몰락과 독접 자본으로의 집중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인계의 공장은 소수의 대규모 공장을 제외하고 일본 자본에 합병되거나 휴업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86)
1930년 이후에는 식민지에서 민족 부르조아지의 개량화·타락화와 더불어 노동조합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극단적으로 강화되어가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합법적 노동 조직이나 노동 단체가 해체 내지는 무기력화되어가는 가운데 비합법적 지하 적색 노동조합 운동이 대두하게 딘다. 이는 민족 해방 투쟁의 일환으로서 노동운동의 주체적 내재적 요구에서 비롯되어 코민테른 등의 反帝統一戰線에 의한 세계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전개되었으며, 아래로부터의, 즉 생산 현장에서의 노동자 조직을 통하여 공장 등에 튼튼한 조직적 기초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141)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대응으로서 고무 공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은 공동의 협정을 통한 임금의 인하이다. 자본가 계급의 단결에 의한 공동의 임금 인하는 우선적으로는 일정 지역 내에서 이루어졌다.(146)
고무 공업이 휴업기에서 다시 조업기로 들어가는 상반기의 4~6월, 혹은 하반기에는 추석의 번망기를 넘긴 한산기가 이러한 공동의 임금 인하를 위한 가장 좋은 시기로서 흔히 선택되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이 시기에는 임금 인하에 순종치 않는 노동자를 쉽게 해고시킬 수 있었으며 혹은 노동자들의 반발에 의해 설령 조업이 중단되더라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147)
자본가들에 의한 공동의 임금 인하가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동맹파업 등의 형태로 이에 맞서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본가들의 대응은 노동자의 해고 혹은 공장의 휴업 조치였다. 후자는 한산기일 경우 쉽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드물었다. 오히려 동맹파업의 대응책으로는 파업 노동자를 해고하고 신노동자를 모집하는 전자의 방법이 가장 빈번하게 행애졌다. 반봉건적 농업 구조와 결합된 식민지의 경제 체제에 의해 값싼 노동력을 언제든지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보다 쉽게 하였다. 물론 고무 공업에서의 작업은 어느 정도의 숙련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일정한 지역 내에 숙련의 경험을 지닌 인구의 비율이 높을수록 자본가에게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149)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무지와 무식을 이용하여 임금 내용을 복잡하게 한다든지 일본어를 사용하거나 어려운 문구를 사용한다든지 혹은 파업 과정에서 기만적 타협안을 제시하거나 구도로 해놓고 사후에 이를 다시 번복하는 등의 기만적 행위를 하였다.(150-151)
일제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표면상으로는 엄정한 중립을 내세워 공정한 태도를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통치 기구로서의 본성을 버릴 수는 없었다. 시기에 따라 다소의 변화 있지만 노동 운동에 대한 일제의 기본 방침은 식민 통치에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이라한 원칙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동맹파업이 일어나더라도 사태가 자본가에게 유리하거나 혹은 크게 불리할 것 없는 상황에서, 혹은 사태가 이미 확대되어 더 이상의 자극이 있으면 악화나 파급의 우려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일제는 대부분 불개입의 원칙을 내세우고 관망하는 태세를 쉬하였다. 마지막 경우에는 대부분 사태를 이와 같이 이끌어온 노동자들의 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되거나 파급될 때에 일제는 신속히 개입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제가 스스로 조정에 나서 기만적 타협안을 내세워 강제로 승인하도록 하는 것 등에 의하여 노동자 조직의 분열을 유도하는 형식으로 대부분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불개입이건 개입이건 간에 일제는 항상 식민 통치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맹파업 등의 계획은 사전에 탐지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파업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비밀리의 혹은 공공연한 검거와 취조가 무원칙적으로 자행되었다. 검거된 노동자들은 파업단에서 이탈하여 취업을 할 것을 강요받거나 이후로는 쟁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거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동자들의 집회나 각종 대회 혹은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사회 단체 등의 대중연설회 등도 사전에 금지되거나 현장에서 제지되었다.(152)
특히 30년대 이후에는 전시 체제로의 이행에 따라 노동 단체를 비롯한 사회 단체가 일제의 전반적인 탄압하에서 강제로 해체되거나 지하로 잠적하게 되며 이에 따라 경찰이 거의 전적으로 노동 쟁의의 조정을 담당하게 된다. ...노·자의 관계에서 유일한 중재자로서는 식민지 경찰밖에 남아있지 않은 30년대 이후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어간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노동자들은 점차로 식민지 경찰의 조정에 의존하는 빈도가 잦아지게 된다.(153-154)
고무 공업에서 이 부문이 지니는 산업적 성격과 생산 과정·노동 조직·노동 조건 등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부문에서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과 비참한 생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틀내에 편입된 식민지 공업의 발전의 미숙성이라는 조건하에서 반본건적 농업과 관련된 농촌에서의 노동력 공급은 이러한 상태를 조성하고 악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일반적 교양이나 각성 등은 자본주의 성립의 초기에 식민지화의 경험 앞에서 저해되고 지체되었다.(156)
한도현,「반제 반봉건 투쟁의 전개와 농민조합」
갑오농민전쟁에서 분명한 모습을 띠고 전개되었던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유산되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조선에다 근대적 제요소들을 도입하면서도 조선의 봉건 세력들을 재편·유지시켰다. 자신의 해방을 갈구하면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전개해왔던 조선 민중은 이제 그 봉건 세력의 옹호자·맹주인 침략 세력에 항거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 침략 후 우리 근대사의 과제는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으로 되었다. 이러한 반제 반봉건의 과제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구조로부터 도출된다.(158)
일본 제국주의는 해체되어 가고 있던 조선의 자연 경제를 더욱 급속히 해체하고 구래의 봉건 계급이 지닌 경제적 기초를 흔들어놓았다. 그래서 제국주의하의 대중의 빈곤은 종래의 봉건적 착취에 의한 가난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종래의 봉건제하의 가난과 달리 식민지 민중의 가난은 식민지 내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경제 침략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봉건적 제관계를 일거에 자본주의적 관계로 개혁시킴으로써 식민지를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내부의 모순을 통해서 착취한다. 식민지 해방을 통해 자유로운 발전을 이루려면, 이 두 가지 속박,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존 세력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 관계를 맺은 채 존재하고 있다. 즉 제국주의의 지배를 타파하지 못하면 봉건 잔존 세력을 타파할 수 없으며, 식민지 내부의 모순을 경시하여 봉건 잔존 세력의 지배를 간과한다면 대중들로 하여금 반제 투쟁의 전선에 일어서도록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식민지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을 도와 봉건적 지주 계급을 타도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의 지배 체제를 뒤엎을 수 없고, 또 봉건적 지주 계급의 주요한 지지자인 제국주의의 지배를 뒤엎지 않으면 봉건 지주 계급의 지배를 일소할 수 없다. 결국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민족 해방 투쟁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억압을 뒤집어엎는 민족 혁명이고, 대내적으로는 봉건적 지주의 억압을 뒤집어엎는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민족 혁명이다.(159-160)
농민 대중이 양적으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할 뿐 아니라 지주 계급은 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사회적 기초라는 점, 또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 나선 농민들의 세력은 폭풍처럼 세차고 맹렬하여 그 어떤 힘으로도 농민 세력의 발흥을 억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제국주의 혁명은 민족 혁명이자 농촌 혁명이기도 했다.(160)
명천 농민조합은 농촌 계급 구조를 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있다.
① 부농: 농업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부분이 절대 다수여서 1년작 농작물로 1년간 생계를 꾸리며 고리대금업적·상업적 착취를 행하는 층.
② 중농: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자기 노동력을 쏟는 부분에서 주로 1년간 농작물을 거둬들이는데 풍년에는 약간 남고, 흉년에는 부족한 층.
③ 빈농: 자기 노동에 의해 생산한 농산물로 3~4개월 내지 6개월간 생활을 유지하지만 다른 계절 노동 또는 고리 대금 차용에 의해 겨우 생활하는 층.
이것을 보면 지주와 농업 노동자에 대해서 별로 기술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두 계급의 문제를 명약관화한 사실로 간주해버린 듯 하다. 다만 종래 운동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부농·중농·빈농 등의 구분 문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164-165)
1924년에 노농총동맹이 결성되고 다시 1927년에 노농총동맹에서 농민총동맹이 분화·독립하였다. 이 조직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농민 스스로의 전국 조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농민 운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다.(166)
농민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지주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농민 자신의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또 사회 운동의 선진인자들도 믽우 구성의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의 대중 조직 건설이 시급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물론 소작인 조합과 같은 유의 농민조합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여기에서 논의하려고 하는 농민조합은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방향 전환론과 깊이 관련된 조직이다. 다시 말하면 반제·반봉건 투쟁의 심화·발전 과정에서 발전된 농민의 대중 조직이다.(169)
20년대말부터 제기된 방향 전환론은 바로 지식인·소시민적 운동으로부터 대중을 기초로, 대중을 축으로 하는 대중 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170)
20년대 후반 대중 속에 뿌리박으려는 방침 속에서 전개된 농민조합은 종래 조합과는 달리 그 이념적 선진성, 즉 다면 혁명 성격에 대한 파악, 분명한 계급 노선, "隊內의 철과 같은 규율"등을 요구했다. 이 점이야말로 30년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농민조합의 특색이다.(172)
제국주의 세력은 반동적인 봉건적 모순을 재편·온존시켜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해왔다. 여기에다 봉건 지주 계급뿐 아니라 매판 자본가까지 가세하여 식민지 민중들을 억압하였다. 그리하여 식민지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광범한 민중과 더불어 제국주의 세력과 그 하수인들을 타도하여 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 제도를 타파하는 것이다. 이 혁명은 수많은 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그 과제들이 사회 운동의 발전에서 각기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서로 다르다. 그러한 과제들의 위상을 올바로 부여하고 마침내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사상이 담당하는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모름지기 사회 변혁 운동은 의식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또 사상적으로 각성되지 못한 민중은 사회 경제적으로 아무리 억압을 받아도 해방 운동을 추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변혁 운동은 그 담당자들의 사회 경제적 이해를 대변해주는 사상을 갖고 있으며 그 사상은 사회 변혁 운동의 전과정에 대해서 또 변혁 이후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준다.(173-174)
김현숙, 「일제하 민간 협동조합 운동에 관한 연구」
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을 완료한 日帝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미 증식 계획을 수립하여 일본 독점 자본의 조선 농업 지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일본 독점 자본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농촌을 식량 보급지, 공업 원료 획득지, 독점 상품 시장 그리고 자본 수출지로서 재편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 강행으로 인해 소작농은 물론 자소작농·자작농까지 포함한 광범한 조선의 농민이 몰락하였다. 특히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에 파급되어 일본이 농업 공황을 시발로 극심한 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든 1930년대 초반, 농산물 가격의 급격한 하락과 함께 조선 농가 경제는 풍년 중에도 파탄을 면할 수 없었으며, 도시로, 해외로 따날 수밖에 없게 된 농민들이 속출하였다.(189)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지배의 1기라 할 수 있는 1910~1919년 사이의 기간에 총독부 주도하에 그 지배를 위한 자본주의적 기초 작업으로서 철도·도로·항만·통신 등의 설비와 조선은행을 정점으로 하는 식민지적 은행 체계, 중앙 및 지방의 행정 기구 등의 각종 기구와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토지 조사 사업을 완료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물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초작업은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경제의 일환으로서, 즉 그 본원적 축적을 위한 식민지로서 편성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획기로 급성장하여 구조적 변화를 일으킨 일본 자본주의는 생산과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진행, 독점 자본간의 협정 성립, 거대 은행과 독점적 산업 기업간의 관계의 긴밀화, 자본 수출 등등의 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독점 자본주의로서 구조적 재편을 단행한 일본 자본주의는 戰後 공황에서부터 미롯된 위기 속에서 자본 축적상의 모순, 특히 만성적인 농업 공황에 직면하여 시달렸다. 일제는 이러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 값싼 식량과 원료, 방대한 상품 시장, 그리고 자본 투자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일제는 이미 식민지 지배의 기초 작업을 완료해놓은 조선을 이 요구에 부응시키기 위해 산미 증식 계획을 골자로 하는 일련의 농업 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일본 자본이 공업 부문이 아닌 농업 부문을 투자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일본 자본측의 요구뿐만 아니라, 조선 내부의 상황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 즉 전력이 부족하여 공업 부문에서의 이윤 추구가 곤란하였고 조선 내에서의 농업 투자는 일본 내에서의 농업 투자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즉 토지 개량 사업의 경우 사업비가 일본에서의 사업비의 2~4할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추정되었기 때문이다.-저자 각주) 1920년부터 시작된 농업 정책의 본질은 조선의 농업에서 생산된 잉여를 비농업 부문, 구체적으로 말해 일본 독점 자본의 자본 축적을 위해서 이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산미 증식 계획 및 기타 농정이 진행됨에 따라 농업에서 생산된 경제적 잉여가 교환 과정을 통해 직접·간접적(지주 경유)으로 자본가에게 착취됨으로써 조선 농민은 소작농은 물론, 자소작농·자작농까지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몰락했다.(194-195)
이렇게 1920년대를 거쳐 점차 그 비중이 커지고 있는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는...식산은행·東拓·금융조합 등의 기관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으며, 보다 중요한 점은 식민지 농업 정책의 기본 성격의 변화에 따라 농업 자금 대부의 주된 역할을 담당했던 금융 기관이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즉 1910년대의 토지 조사 사업은 東拓이, 1920년대의 산미 증식 계획은 식산은행이, 그리고 농촌 진흥 운동으로 대표되는 1930년대의 농업 정책에 있어서는 식산은행과 금융조합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같은 금융 기관들의 자금원은 주로 일본으로부터의 차입금, 즉 당시 금융 기관의 채권 발행을 통해 일본내의 起債市場에서 조달된 자금과 대장성 예금부에서 식산은행이나 동척에 직접 대부하는 형식으로 조달된 자금이다.. 식산은행은 이렇게 도입한 자금을 농업부문에 직접 대출하거나, 그 하위 금융 기관인 금융조합을 금융조합연합회를 통해 대출하였다. 1920년대의 산미 증식 계획의 강행을 위해 도입된 일본 자본은 주로 지주·자작농·자소작농 상층에 독점되고 있었다.(195-196)
소지주와 자작농 상층에 대한 대부는 식산은행의 하위 기관인 금융조합이 주로 담당하였다. 소위 라이화젠식 신용조합으로 자처하던 금융조합 역시 담보 대부를 원칙으로 하고 일부의 보증 대부를 지주·자작농, 이들로 구성된 단체·농회 등으로 한정시킴으로써 담보·보증을 제시할 수 없는 영세 소농들은 대부 받을 수 없었다. 실제로 저리 자금을 필요로 하던 영세 소농들은 지주 등이 이미 대출 받은 저리 자금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 재차 빌려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식산은행과 동척의 농사 개량 자금의 아자율은 담보 대부가 7푼 9리, 보증 대부가 9푼 6리였다. 보증 대부시에는 신용이 확실한 사람에 한하여 10인 이상의 연대 채무를 지우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일본보다 금융 금리가 높았던 조선에서 이것을 저리 자금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농촌의 개인 금리, 즉 고리대가 평균 35.2%였던 점과 비교하면 훨씬 대부 조건이 유리한 저리 자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방출된 저리 자금은 주로 지주에게 집중되어 점차 고리대적 성격을 띠어가게 되었다. 결국 토지 개량과 농사 개량을 목적으로 말녀되었던 저리 자금은 고리대로 변질되어 지주·자본가 계급의 농민 수탈을 지원하고 농가 경제를 몰락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금융 독점 자본이 투자를 통해 농업 부문에서 산출된 잉여를 이자의 형태로 가져가고, 그 중간에서 지주를 중심으로 한 농촌 고리대가 중간 착취를 가해 영세 소농의 부담을 가중시키던 이런 상황이 영세 소농들이 자구적인 경제 운동으로 신용조합을 조직하게 되었던 배경이 되었다. 이런 민간의 협동조합을 해체시키면서 금융조합은 1930년대 농촌 진흥 운동의 전개에 발맞추어 식산계를 조직하여 중간의 상인·고리대 자본을 배제하고 영세 소농들에게까지 직접 손을 뻗쳐 농촌 금융을 장악하여 발전해나갔다.(196-197)
일제의 침략 이후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인한 자급자족 경제의 파괴는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의 진행과 함께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요구에 따른 미곡·면화·양잠 등의 농산물의 상품화와 이출, 그리고 농업 경영에 필요한 생산 수단으로서의 비료·농기구 등과 일상 생활의 소비 자료인 의류·직물 등의 일본 독점 상품의 침투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독점 자본은 농산물 가격을 통제하면서 농·공산품간의 부등가 교환을 통해 착취해나갔다.(197-198)
일본 독점 자본의 농촌 지배로 인해 농가 경제는 지속적으로 피폐되었으며, 농가 수지의 만성적 적자 상황, 이에 따른 농가 부채의 누적과 소작농의 증가 추세, 移村 등은 1920~1930년대초의 농촌 상황을 대변하는 특징적인 현상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1930년대초에 첨예하게 드러났고 이에 따라 농민 운동의 열기가 고양되었다. 민간 협동조합 역시 이 시기에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일제는 소농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농촌을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한 국가 독점 자본주의의 지배 체제로 재편성하기 위한 농촌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다.(202)
일제는 3·1운동 이후 민족 해방 투쟁의 열기가 고양되고 반일적 실력 양성의 기운이 거세게 대두되자 '문화 정치'를 표방하고 나서서,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사이비 민족주의인 민족 개량주의를 퍼뜨리고, 실천면에서는 자치 운동을 목표로 삼은 정치 단체의 조직을 통해서 민족 운동의 격화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총독부는 1920년초부터 기만적 '문화 정치'를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 강령으로서 참정권 획득 청원, 실력 양성, 민족성 개조의 3가지를 내걸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부분이 '즉각 독립론'을 외치며 반대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2년경부터 민족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분열시키고 포섭해나가기 시작했다.(207-208)
이런 상황하에서 1922년말부터 1923년초에 걸쳐 '自作會' '조선물산장려회', 그 자매 단체인 '토산물애용부인회'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등의 실력 양성 단체가 방죽이 터지듯 일제히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이르러 반일 청년층이 민족 독립을 위해 벌이려던 민중 계몽·실력 양성의 기운은 1920년부터 총독부가 꾀해온 대로 민족 개량주의자의 주도하에 타협적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들 실력 양성을 한다는 단체들의 운동은 그것이 지닌 비현실성, 대일 타협적 성격으로 인해서 민중의 거부 반응을 만나 본격적 전개 후 고작 1년만에 사실상의 기능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209)
1920~1922년의 발생 초기에 조직된 소비조합들은 각 지역의 유지·청년들의 발기로 창립되었으며 전후 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에 대처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3·1운동 이후 많은 단체들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됨과 아울러 경제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겨 소비조합을 새로이 조직하기도 했고, 기존의 단체에서 그 부속 사업의 일환으로 조직하기도 했다.(212-213)
1920년 4월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는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 규모의 근대 노동 단체이다. 이 단체는 당시의 민족 문제와 노동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의 선진적이고 애국적인 민족주의자 지식인들 및 사회주의자 지식인들과 노동자 대표들이 합작하여 조직한 노동 단체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서울 본회 외에도 전국에 46개 支會를 설립하고 약 6만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을 회원으로 조직했으며, 노동자들을 위하여 노동 강연회·노동 야학·기관지 발행·소비조합 조직·患難相救事業·共濟事業·노동조합 조직·동맹 파업 지도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노동운동의 발전과 민족 운동의 전개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에서는 1920년 9월 1일~2일 서울 본회에서 열린 지회장 회의에서 소비조합 설립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시설부 사업으로서 1921년 7월 1일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을 창립하였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였다. 일본인 노동자의 약 50%밖에 임금을 받지 못하며 기아선상에서 시달리던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나날의 곤란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값싼 일상 생활 용품을 구입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시설부 사업으로 소비조합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216)
1920년 8월에 결성된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와 1922년말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청년연합회 등에서 시작했던 물산 장려 운동은 1923년 1월 서울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고 각 지방에 지부가 결성되면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 물산 장려 운동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서 외래품을 배척하고 토산품을 애용하여 민족 기업을 육성함으로써 민족 경제의 자립을 얻고자 했던 계몽 운동으로 강연회·전단 살포 등의 방식을 통해 전개되어 나갔다. 이 물산 장려 운동은 고조되어가던 반일적 실력 양성의 기운을 완화·조정해 나가고자 일제가 민족 개량주의자들을 내세워 '문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던 상황에서 일제의 정책적 유도에 따라 전개도니 것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가 '문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던 1923년부터 1~2년 동안 활발히 전개되다가, 그 비현실성, 대일 타협적 기만성 등으로 인해 '민립대학설립 기성회' 등의 유사한 실력 양성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곧 유명무실하여졌다. 물산 장려 운동의 주도 세력들은 예속 자본가·친일파·민족 개량주의자가 많은 '民友會'의 간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물산 장려 운동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좌익으로부터의 맹렬한 이론적 비판을 받았다. 즉 식민지하에서 민족 기업육성이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며, 만약 조선 산업이 발전하였다 해도 무산 대중이 자본가에게서 이윤을 착취당하기는 일본 자본가에게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이 운동은 인텔리겐챠가 유산 계급을 옹호하고 무산자의 혁명 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을 받게 되자 물산 장려 운동의 주도측은 이전까지의 선전 활동에서 그 방향을 전환하여 구체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기관들을 조직하고자 했다. 즉 기관지를 발행하고, 헌칙에도 규정되어 있는 소비조합과 생산 기관을 설치하고자 했으며 조선물산진열관 설치 및 조선물산품평회의 개최를 계획하였다.(217-218)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지 1~2년만에 유명무실해지면서 소비조합을 설치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물산 장려 운동이 그렇게 된 데에는 그 자체의 한계와 문제점, 그리고 좌익의 비판뿐만 아니라 일제 당국의 관권에 의한 탄압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일제는 그들이 유도하고 조정하던 실력 양성 운동이라 하더라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동요를 줄 위험이 있는 방향으로 나가면 즉각 막고자 했다. 즉 일제는 물산 장려 운동이 그 목적을 일본 상품·일인 상인 배격으로 연결시키자 즉시 탄압을 했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점에다 간부들의 무성의로 인해 1~2년 동안 활발히 전개되다가 그 이후에는 유명무실해졌다.(219)
소비조합을 조선물산장려회의 중앙 조직 산하에 설립하려는 노력은 실패했으나 각 지방에서 이 물산 장려 운동의 취지에 호응하여 조선 물산 장려에 관한 선전과 소비 절약 등을 위해 소비조합을 조직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들 소비조합들 중 몇몇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점차 의류 등의 필수품 생산에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히고자 노력했었다.(219)
전후 공황의 파급 효과로 인한 경제적 파탄과 3·1운동 이후 이뤄진 민족적 각성으로 고조되던 '반일적 실력 양성 운동'의 기운은 뜻있는 많은 인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과 유도, 그 자체가 지녔던 오류와 한계 등으로 인해 개량적인 운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민족 해방 운동을 위해 지속적인 힘이 될 수 있는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1920년대 초반, 발생기의 소비조합 운동 역시 이런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다고 하겠다.
소비조합은 일본 독점 자본의 침투로 인해 자급자족 경제가 파괴되고 중간의 상인·고리대자본이 유통을 장악하게 되어 수탈이 가중되던 상황에서 전후 공황의 여파가 밀어닥치자 일반 소비자로서의 공동 이해를 기반으로 해서 조직되었던 것이었다. 소비조합은 3·1운동 이후의 사회 운동, 즉 노동 운동·농민 운동·물산 장려 운동 등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나갔다. 이 시기의 협동조합은 그 종류상 주로 소비조합이었으며 1,2년 내에 곧 해체된 원인은 이론적 미숙, 경험 부족 등의 문제와 아울러 소비조합의 조직의 비민주성, 계급간의 이해 상충 등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소비조합 운동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문제점들로 인해 올바른 민족 운동 속에서 그 위치를 제대로 정립할 수 없었던 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221-222)
협동조합 운동의 본격적인 대두는 광범위한 反帝民族統一戰線의 결성이 요청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민족주의 양 계열에서 민족 해방 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조직되고 운동 역량이 성숙되는 가운데 1924년경부터 민족통일전선론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송진우·이광수·최린 등의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민족적 대동단결'의 스로건하에서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제휴(타협적 자치 운동)를 선전하고, 이에 대해 사회주의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제휴에 의한 통일전선을 주장하였다. 당시 외적으로는 코민테른에서 식민지·종속국에서의 반제통일전선 문제가 제기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이러한 외적 상황의 영향과 이보다 더욱 중요한 내적 요인인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는 정치적·사회적 운동 역량의 성숙을 바탕으로 반제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추진되었다. 김성수·송진우·최린 등 '자치 운동파'의 활동에 대응키 위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신간회가 1927년 1월 조직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다시 대두하였다. 조선의 민족 운동이 협동조합이라는 경제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치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26년 5월 재일 동경 유학생들이 동경에서 조직한 협동조합 운동사가 적극적으로 선전과 조직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기독교 청년회(YMCA)의 농촌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협동조합 운동도 1928년부터 그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신파의 전위 행동대인 천도교 청년당이 주도하던 조선농민사 역시 1926년부터 비상설적이나마 알선부를 설치하고 알선 사업을 펴나갔다.(222-223)
이미 상품 화폐 경제에 편입되어 생산과 소비의 상당 부분이 시장에 종속되게 된 조선 농민들은 1920년대초부터 적극적으로 시행이 된 일제의 농정으로 경제적 몰락이 가중되던 상황에서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 풍년 기근을 거쳐 1931년 농산물 가격이 최저로 폭락하자 경제적 파탄을 면치 못했다. 소작농뿐만 아니라 자소작농·자작농까지 모두 몰락의 위기에 처했으며, 도시에서는 노동자는 물론 봉급 생활자들도 생활의 곤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공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들은 상업 자본의 중간 착취라도 배제하여 수지 작자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커졌으며, 이에 협동조합 운동은 활발한 선전과 조직 활동을 통해 급속히 확대되었다. 협동조합 운동은 1930년을 획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아 1931년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수많은 협동조합들이 조직되었다.(223)
민간 협동조합은 그 발전과 아울러 일인 상인, 관제 협동조합인 산업조합·금융조합 등과 경쟁하게 되고 마찰을 일으켰으며, 노동 운동 조직·농민 운동 조직에 부속되어 그 보조를 맞추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또한 협동조합 운동의 주도 인물들이 사상 불온 등의 이유로 검거되는 사태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제 관헌이 이 운동을 위험시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1928년 원산 노동 쟁의가 일어났을 때 勞聯消費組合이 쟁의의 자금 공급소로서 큰 역할을 수해하자 탄압이 일층 격해졌다. 또한 1920년대말 대두하기 시작한 좌익 농민조합에서 관제 협동조합의 배격·철폐를 주장함과 아울러 소비조합 운동을 계급 해방 운동의 한 부분으로 위치지워 활동하다가 1931년 이후 본격적인 좌익 농조 탄압이 시작되자 폐쇄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은 1931년 5월의 신간회 해소 명령과 아울러 대대적으로 가해졌다.(224)
1931년 5월의 신간회 해소와 더불어 사회 운동은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재조직된 좌익 노동조합·좌익 농민조합 등의 제국주의·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적극적 운동과 이들에 대립해서 대중을 그 영향에서 단절시키려는 우경화된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나뉘어졌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일제 관헌 당국은 "이들이 각 농민 획득 경쟁을 벌였으며, 협동조합 운동 역시 민족적으로 또는 계급적으로 경제 운동에 이용하려 하였다"고 파악했다. 신간회 초창기에는 그 지도와 지지를 받던 협동조합 운동이 신간회의 해소 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민족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개량적 경제 운동으로 흐르는 경향이 한편으로 나타나자 일부에서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간회 해소기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기독교청년회, 천도교 조선농민사의 협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하에서 사회주의들의 운동에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던 것이다.(224-225)
극심한 공황의 타개책으로 일제는 만주 침략을 감행하면서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사회 경제적 체제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로서 활용하기 위해 조선에 군수 공업을 육성하였으며, 극심한 농업 공황으로 혁명적 농민 운동이 한층 격해진 농촌을 농촌 진흥 운동으로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자작 농창제를 적극 추진해나가며 1920년대의 지주를 통한 지배 체제로부터 분해되어 몰락해 가는 소농들을 유지·온존시키면서 전시 대비 국가 독점 자본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체제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이러한 지배 체제에로 소농을 연결시키는 일선 기구로서의 금융조합의 활동이 확대되었던 것은 이 시기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소위 라이화젠식 농촌 신용조합이라고 자칭하던 금융조합은 행정 당국의 비호하에 소농들을 금융 독점 자본 체제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하며 더욱 더 발전하였다. 조선농회·금융조합·산업조합 등의 일선 기구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된 농촌 진흥 운동과 함께 민간 협동조합들은 해체되어 나갔다. 연합체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자생적·분산적으로 경영되던 많은 조합들이 경영난에 시달려 파산하거나, 빈농 층과 중 소농 층 사이의 내분으로 해체되기도 하고 산업조합에 편입·흡수되어 버리기도 했다. 또한 1932년 가을이래 강화된 탄압 속에 사상 불온 혐의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거나, 간부가 검거되어 중심 인물을 잃고 와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1933년 5월에는 조선 최대의 협동조합인 평안협동조합의 신용 사업이 은행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기초되었다. 산업조합과의 경쟁에서 나아가 금융조합과 경쟁하게 되자 이를 법적 조치로 금지시킨 이 사건은 협동조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그 발전을 저지하였다.(225-226)
1920년대 중반에 들어 일본에는 유학생을 비롯한 재일 한국인 수가 더욱 증가했다. 이에 따라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재 동경조선청년동맹 등의 재일 한국인들의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다.(231-232)
협동조합운동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5월 24일 창립되었다. 협동조합운동사는 동경의 대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인 조선유학생 14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단체였다.(232)
이들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들 중 다수가 1927년 5월에 창립된 신간회 동경지회의 간부로 활약을 함으로써 협동조합운동사는 신간회와 연관을 맺게 되었다. 신간회 동경지회에서는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협동조합운동사·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신흥과학연구회 등의 각 단체의 지도자들이 그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창립 당시 선출된 신간회 도경지회의 간부 22명 중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는 6명이나 되었다.(232)...1928년 본부를 동경에서 서울로 이전하기 전까지 협동조합운동사는 신간회 동경지회와 일정한 연관 관계를 맺으며 활동했다.(232-233)
협동조합운동사의 사상적 경향에 대하여 「일제하 조선의 치안 상황」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한 줄기임을 선명히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水野直樹는 「신간회 동경지회의 활동에 대하여」에서 협동조합운동사를 민족주의계의 가장 강한 비타협파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1927년 11월부터 전개된 조선공산당계 사회주의자와 서울파 사회주의자 사이의 신간회―'민족협동전선당'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와 입장에 관한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게 조급한 좌익 소아병이고, 어디까지나 소부로조아를 포함한 전민족적인 단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서울파에 입장과 행동을 같이했다. 또한 협동조합운동사의 위원장이던 전진한이 1928년 7월 서울파의 '비이론파 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신의주에서 검거되는 등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들은 서울파의 사회주의자들과 일련의 유대가 있었다고 보여진다.(233)
동경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던 초기의 협동조합운동사의 활동은 1926년부터 동경에서 기관지 『朝鮮經濟』를 월간지로 발행했던 것과 1926년, 1927년 두 해 동안 여름 방학을 이용한 귀국 강연회였다. 1926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간부 전진한 등이 귀국하여 경상남북도를 순회하면서 각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협동조합을 선전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다 경상북도 咸昌(1927.2)·尙州(1927.4)·中牟(1927.4)·豊山(1927.5)·靑里(1927.8 이전) 등의 지역에 협동조합이 조직되어 소농들의 생산품 공동 판매와 소비품 공동 구입, 기타 공동 이익을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 조합들에서는 一人一口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利用高에 의한 배당을 실시하는 등 협동조합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수행하여 그 취지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다음해인 1927년 여름에는 그 취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협동조합운동사 사원 5,6인이 3대로 나누어 전 조선을 4, 50소, 남쪽의 경상도·전라도로부터 충청도·황해도를 거쳐 북쪽의 평남·평북에 이르기까지 약 40일간 500여 리를 여행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233-234)
동경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던 협동조합운동사는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1928년 4월 본부를 경성(광화문 121번지)으로 옮겼다. 동경에서 신간회 동경지회와 맺고있던 관계는 경성으로 이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즉 그 전해인 1927년 12월 지회 100개소 돌파 기념식을 열고 1928년 봄에는 실제 운동의 당면 과제 6개 항목을 제시했던 신간회는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했었다. 신간회가 제시한 6개 항목의 행동강령 중 제5항이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하고 지도한다"였다. 본부를 이전한 협동조합운동사는 이전의 선전에 주력하던 데에서 방침을 전환하여 본격적으로 조합을 조직하면서 각지의 조합들을 연결시켜 연합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236-237)
협동조합운동사의 해체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자료가 없어서 잘 알 수는 없으나 해체 시기는 신간회 해소기(1931.5)와 거의 비슷한 때였다고 추정된다.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들 중 일부는 해체된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신문·잡지 등을 통한 선전 활동을 계속했다. 협동조합운동사가 앞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협동조합에 대한 주체적 입장(소농민)과 객관적 조건인 독점 자본 사이에 모순·대립이 존재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인 반독점·반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인식과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수 없으나 그 운동의 기반을 1920년대 초반의 조합들과는 달리 보다 대중적으로 확대하려 했었다는 점에서 볼 때 1920년대초의 발생 초기의 협동조합 운동보다는 일보 전진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40-241)
3·1운동 당시 대중 결집의 매개체로서 큰 역할을 수행했던 기독교는 19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 등으로 교회내의 변화가 불가피하였으며 사회 참여가 요청되었다.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과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해방의 과제를 안고 노동자·농민에의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데 기독교를 하나의 표적으로 삼아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반기독교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청년 지식층의 단체가 그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은 반기독교 운동의 이유로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도구이며 일제의 협조자이고, 망국민의 현실 도피처이며 과학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사상적·종교적 위기에 봉착하게 된 기독교는 경제적 몰락이 가속화되어가던 농촌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는 데 대한 대응책의 일환으로서 농촌 사업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청년회가 주관했던 협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농촌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은 1925년 2월의 기구 개편으로 농촌부가 신설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240)
농촌 사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청년회는 우선 1925년 2월을 기하여 기구 개편을 단행하였다...이로 인해 평양과 원산을 제외한 중앙(경성)·선천·신의주·함흥·대구·광주 등 6개 도시 기독교청년회가 일제히 농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농촌 사업의 내용은 선교 활동·농촌 계몽 및 문맹 퇴치 운동·농촌 지도자 양성 교육·보건 교육·농사 개량 지도(종자 개량·비료 사용법·원예·양잠·과수 재배·임업·농기구 사용 관리), 그리고 협동조합 운동이었다.(241)
협동조합 운동은 1928년 예루살렘대회에 참석했던 신흥우·홍병선·김활란·정인과 4사람이 덴마크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241)...데마크 농촌을 연구·시찰하고 1928년 6월 귀국한 이후 전국 순회 간사로 홍병선이 총책임을 지고 협동조합 운동을 주관하였다. 기독교청년회의 간부들은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조선 농촌의 피폐 원인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① 도시에서 생산하는 공업 생산품은 고가이요, 농촌에서 생산하는 농산품은 저가이므로 농촌은 자기 물건을 염가로 팔아서 고가 물건을 사서 쓰게 된 금일 문명 생활이 근본적으로 농촌을 피폐케 한 것이다. 원래 농촌의 생명은 자작 자급을 하여 유지하는 것인데 자작 자급을 떠나기 시작할 때부터 피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② 공산품은 가격이 한번 올라가면 별로 저락하지 아니하나 농산품은 전쟁시나 그외에 특별한 경우에 일시 올라갔다가 1, 2년 후에 곧 저락이 되는 것이다. 일시 곡가가 올라갈 때는 지가까지 올라가서 지세도 같이 올라갔지만 곡가는 덜어져도 지세는 그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농촌 피폐의 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③ 농촌에서는 생산품을 갖다가 파는데 크게 밑지고 판다. 그 利는 중간 상인들이 먹게 되는 것이다. 도 비료나 기타 공산품마저도 중간 상인의 큰 이익을 주고야 사서 쓰게 되는 것도 농촌 피폐의 한 원인이 된다.
④ 농촌에서는 금전을 융통하는데 고리를 쓰게 되어서 농사하여서는 이익의 대부분을 고리에 빼앗기게 되는 것이 농촌 피폐의 한 원인이다.
[………]
⑧ 농촌에서 자작농도 견딜 수 없어서 자기 소유지를 팔게 되는데 하물며 소작농이란 더 말할 필요가 없이 死地에 서고 있는 것이다. 소작농이 많은 것도 농촌 피폐의 원인이다.(홍병선, 「朝鮮의 農村現象에 對하야」,『衆明』, 1933.7. 1卷 2號, pp51~52.-저자 각주)(242-243)
농촌 피폐의 원인으로 현하 자본주의 경제 제도 제도 속에서의 농공간의 부등가 교환, 교환 과정에 매개한 상업 이윤의 착취, 고리대 자본의 착취, 소작농의 소작료로 인한 이중 부담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에 대한 계몽을 하면서 조합 조직의 전제 조건인 협동과 신용만 있으면 농촌은 소생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하였다. 농촌 피폐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제도, 즉 일제에 의해 일본 자본주의 경제권에 편입된 데에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어떠한 반제·반독점 투쟁으로서의 발전도 모색치 않고 단지 협동과 신용으로써 산업신용조합을 건립하면, 농촌 사업이 성공하면, 농촌이 소생될 수 있으리라는 논지는 체제내적·개량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소극적인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이 1932년 7월부터 실시된 官製主導의 소위 농촌 진흥 운동으로 별다른 무리 없이 포섭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 하겠다.(243)
이렇게 공황기에 계속 확대·발전하던 기독교청년회의 협동조합 운동은 1932년 7월부터 실시된 농촌 진흥 운동의 전개에 따라 점차 관제 농민 운동으로 포섭되어 버렸다.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 내용이 자력 갱생 운동과 유사하여 총독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농촌 진흥 운동이 농촌 부락으로 조직됨에 따라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 조직을 일제는 부락진흥회에 강제로 합쳐버렸다. 협동조합은 부락진흥회에 흡수되거나 해체되어 1935년경에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으며, 1937년에는 중앙의 협동조합연합회도 해체되고 말았다. 1938년에 들어가서는 아예 기독교청년회의 농촌부가 폐지되어 버렸다.(245)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농민에게 접근해가면서 反기독교 운동을 벌이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으로서 일본 독점 자본의 농촌 지배롤 나날이 몰락해가던 농촌 계몽 및 문맹 퇴치 운동, 농사 개량 지도, 그리고 협동조합 운동 등으로 접근해갔다. 그러나 이 농촌 사업은 보다 적극적인 반제·반독점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체제내적 개량주의 운동의 한계내에 머물게 됨으로써 결국 일제의 농촌 진흥 운동에 흡수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협동조합 운동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245-246)
조선농민사는 1925년 10월 천도교 청년당의 주요 인물들을 주축으로 해서 사회의 각계 인사들이 직접·간접으로 참여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비록 천도교 청년당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조선농민사는 崔麟이 이끌던 천도교 신파(총독부는 3·1운동 이후 여전히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던 종교 단체들을 갈라놓고 재편성을 통해서 어용화를 꾀하면서 민족주의자를 몰아내는 방법을 썼다. 이것은 특히 천도교에 대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천도교를 1920년 재정난 타개책으로서의 인원 정리와 '敎憲改革'을 둘러싼 의견 대립을 이용해서 분열을 빚게 하고는 마침내 천도교를 新·舊 兩派로 갈라 놓았다. 그후에도 신구 양파에 더하여 '聯合會派' '六任派'의 사파로 분열시키고, 新派의 두목격인 崔麟을 밀어 주도권을 휘어잡도록 획책했다. 천도교청년당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최린 등 천도교 신파 집단이 조직한 파벌이었다.-저자 각주)의 전위 조직인 천도교 청년당의 주도에 의하여 창립된 단체로서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농촌 계몽 운동 단체였다. 조선농민사는 3·1운동 이후 대두한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층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저의에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의 농민 운동은 조선노농총동맹 대 조선농민사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조선농민사는 처음에는 조선 농민의 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월간 잡지 『조선농민』을 발간하는 일개 잡지사로 출발했으나 점차 그 기반을 닦아 본격적인 농민 운동 단체로 성장해 나갔다. 조선농민사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천도교 청년당의 영향력이 강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1930년 4월 전국대표대회에서 ''법적 관계 3개조안'의 통과를 통해 조선농민사를 천도교 청년당의 직권하에 두게 되었다.(처음부터 천도교 청년당 산하의 단체로 조직하지 않고 개별적 참여의 형식을 빌어 조선농민사를 조직했던 것은 각계각층의 비천도교인을 망라해서 다양한 세력을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저자 각주) 이성환을 중심으로 한 非청년당계는 이를 거부하고 분리하여 全朝鮮農民社를 조직했다. 조선농민사 활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협동조합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변화하고 확대되었다.(246-247)
조선농민사는 1926년 들어 각지에 『조선농민』의 구독을 매개로 한 이른바 社友會와 天道敎 靑年黨 地方黨部 산하의 농민 조직이 확대 발전되면서부터 서서히 하부 조직을 갖춘 본격적인 운동 단체로서 면모를 갖추어가지 시작했다. 이와 함께 알선부 사업이 시작되었다. 즉 1926년 4월에 설치 계획을 발표하고, 10월에는 『조선농민』10월호에 알선부 신설 기사와 함께 전 17조로 이뤄진 '조선농민사 알선부 부칙(안)'을 발표하면서 알선부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조선농민』지를 통해 소비조합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해 왔었다. 1926년 1,2월호에서는 농민들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불균형, 즉 농가 수지의 적자 문제를 논하면서 종래의 계 조직을 시대에 맞게 조정하여 協力社라는 소비·신용조합을 조직하여 관제 곰융조합·산업조합을 이용하지 말고 경제적 능력을 기르자는 주장을 하였고, 매월 연재되는 농민독본에서도 공동 정신을 발휘하여 공동 경작, 농사에 관계된 각종 조합, 또 상공업자의 착취를 막을 수 있는 소비·판매조합 등을 조직하여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협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계몽적 선전에 따라 지방 지부로부터의 공동 구매 알선에 대한 요청이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조선농민사는 알선부를 신설하게 되었던 것이다.(247-248)
조선농민사는 1928년 1월 14일 제11회 중앙이사회에서 社友制를 社員制로 하고 사원의 권리·의무를 명백히 확립하여 일층 유기적 조직체로 변경키로 결의하고, 1928년 2월 14일에 社制 변경을 단행하였다. 조선농민사의 조직이 유기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중앙 집권제가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이뤄진 이 社制 변경으로 인해 지방의 社友會 혹은 조선농민사 지사가 郡 농민사로 확대·발전되었고, 이전까지는 조선농민사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던 천도교청년당 지방당 산하의 농민 조직들이 조선농민사의 하부 조직으로 전격 개체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농민계몽 단체에서 농민 운동 단체로 그 단체 성격을 바꾼 것이라 할수 있다. 이렇게 지방 조직을 일원화시켜 조직을 강화하고 단체 성격을 전환시킨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농민 획득 운동에 대해 민족개량주의자 집단인 천도교 신파가 취한 대응 조치의 일환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소작인조합을 자소작농·자작농까지 포함한 농민조합으로 개편하고 이의 중앙적 지도 기관으로서 1927년 9월 농민총동맹을 창립하여 적극적으로 농민 운동을 전개해 나가자, 최린을 위시한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전위 행동대인 청년당으로 하여금 조선농민사 조직을 매개로 하여 농촌 내부의 자기 지지 기반을 확립하며, 농민총동맹과 대결하고자 하였다.(251)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이뤄진 1928년의 社制改定으로 조선농민사는 중앙 집권적 조직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천도교 청년당의 영향력이 중앙에서부터 지방으로 보다 강력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변경된 조직 체계는 里 농민사를 기본 조직으로 면·군·전조선농민사의 4층 체계로 되어 있으며, 각 단위 조직 내에 이사회를 설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중앙이사회와 군 이사회에는 사무부·경리부·교양부·알선부·선전조직부를 두며, 중앙이사회에는 앞의 5부 이외에 조사출판부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알선부는 조선농민사내의 6부의 하나로 위치지워지게 되었다.(251)
1930년 4월 천도교 청년당이 '법적 관계 3개조'를 강제로 통과시켜 조선농민사를 장악한 이후에 알선부는 확대·강화되어 공생조합으로 발전했다. 그 후 계속되는 정관 개정 등의 과정을 통해 조선농민사는 공생조합을 강력한 중앙 통제적 조합으로 만들어 나갔다.(253)
1931년 4월 6일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종래의 알선부를 경제부로 개칭하고, 중앙이사회에서 제안한 경제 사업, 즉 공생조합의 설치를 만장 일치로 가결하였다. 이 공생조합은 종래의 알선부를 확대·개편한 것으로서 조선농민사의 경제 운동 단체였다.(255)
이처럼 중앙의 통제를 받는 중앙집권적 조직일 경우 그 중앙에서 조선농민사를 움직이는 천도교청년당의 성격, 구체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천도교 신판의 영수였던 최린은 이른바 '당면 이익' '자치론'을 내걸고 식민지 통치 권력에 적극 협력했으며, 1930년대에 들어서는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그 전까지의 민족 개량주의자의 가면마저도 벗어던지고 공공연히 친일파를 자처하게 되었다.(258-259)
1920년대말 1930년대초의 극심한 공황기에 소비조합 운동이 상당히 문제시되고, 신간회·근우회에서 소비조합의 조직 문제를 토의하게 되자 좌익의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에 대한 검토를 하였다.
좌익 농민조합은 1920년대말부터 결성되기 시작했는데 그 결성의 계기는 첫째, 1928년 12월의 코민테른 12월 테제였고, 둘째,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비합법 운동으로의 이행이었다. 적농의 결성 방법에는 공산주의자가 새롭게 조직한 것(수원·평택·나주·봉화·영주·김천·고원·문천·북청·풍산 등)과 이미 조직된 농민 단체에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가면서 적색농민조합화한 것(정평·흥원·단천·영흥·북청·성진 등)이 있다.(266)
민간 협동조합 운동은 일본 독점 자본의 침투로 인한 중간 유통 과정에서의 상업 자본의 확대와 이에 대한 독점 자본의 상업 이윤 배제 요구라는 상호 모순을 그 객관적 조건으로 하고, 몰락의 위기에서 중간 상업 이윤이라도 우선 절감하고자 했던 소농민들의 지구적인 노력을 주체적 조건으로 하여 발전했었다. 독점 자본은 지배력이 강화됨에 따라서 농촌을 직접 장악하고자 하는 요구가 켜지게 되자, 중간 상업 자본을 배제하고 장악해나가는 수단으로서 협동조합을 이용한다. 따라서 협동조합에 대한 소농민과 독점 자본의 이해 상충이 격화되므로 협동조합은 그것이 보다 적극적인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반독점·반제 투쟁과 연결되어 그 일 부문 운동으로, 경제 투쟁의 일환으로서 전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독점 자본의 농업 지배를 더욱 합리적으로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뿐이다. 협동조합이 보다 적극적인 반제 투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의 계급적 기반, 조직의 성격, (중앙의)주도 단체의 사회적·정치적 입장 등이 중요한 변수였다.(267-268)
협동조합은 전후 공황과 3·1운동 이후의 사회 운동의 영향 속에서 발생·변화되었다. 초기의 협동조합은 독점 자본의 침투에 대한 농촌의 모든 계급의 대응으로서, 지주·유지의 주도하에 조직되었었다. 그러나 다액 출자자 중심의 비민주적인 성격으로 인해 계급간의 이해가 상충되었으며, 이론적 미숙, 경험 부족 등으로 조직된지 1,2년 사이에 해체되고 말아 신용조합·생산조합으로서의 발전이 불가능했다. 이 시기에는 각 지방의 분산적 조합들 이에도 조선노동공제회·물산 장려 운동 등의 사회 운동 단체에서도 협동조합을 조직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조선노동공제회의 소비조합 운동은 비록 단기간 동안 전개되었을 뿐이지만, 노동자들을 위한 최초의 소비조합이었다는 점과 전체 노동운동의 일 부문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산 장려 운동의 전개에 따라 이에 호응흔 소비조합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어 선전·구매·판매 활동을 벌였으나, 물산 장려 운동 자체가 지닌 계급적 한계(민족 자본 형성을 위한 운동으로서)와 일제의 정책 유도에 따른 개량적 전개로 인해 물산 장려 운동이 1,2년 사이에 유명무실해지면서 그 소비조합들 역시 발전을 하지 못했다. (268)대체로 발생기의 협동조합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민족 해방 운동에 있어 올바른 위치를 정립하지 못하고 말았다.(268-269)
민간 협동조합 운동은 1920년대 후반의 반제 민족 통일 전선의 결성과 대공황이라는 사회 경제적 배경 속에서 당시의 사회 운동·농민 운동이 일환으로서 전개되었다. 반제 민족 통일 전선인 신간회는 행동 강령의 하나로서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하였으며 당시의 농민 운동 단체들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269)
협동조합운동사는 신간회와 일정한 연관 관계를 맺으며, 그 지지를 받아 운동을 전개했으나, 탄압과 내부 역량의 부족으로 신간회 해소기에 즈음해서 중앙 집권적 연합체 조직을 결성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기독교 청년회의 협동조합 운동과 조선농민사의 공생조합 운동은 신간회·협동조합운동사가 해체된 이후인 1932년에 더욱 조직을 확충, 중앙연합체를 결성했다. 이들 단체는 협동조합을 발전시켜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반독점·반제 운동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협동조합만으로 이상촌을 건설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체제내적 개량주의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269)
따라서 반제 투쟁에 기여할 수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독점 자본의 농촌 지배 강화를 위해 중간의 유통 과정을 합리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했으며, 1932년 7월부터 전개된 일제의 관제 농촌 진흥 운동에 점차 포섭되고 말았다. 좌익 농민조합의 협동조합 운동은 좌익농조의 일 부문 운동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전체 운동의 부문 운동으로서의 협동조합에 대한 좌익의 입장은 관제 산업조합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중소농을 빈농 쪽으로 유도함으로써 조직 기반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구이며, 운동의 자금 조달을 가능하게 해주고, 미조직 농민들에게 교육과 선전을 행할 수 있는 기관인 동시에 중간 이익을 배제하여 자본가 기업에 대한 간접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것이었다. 협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청년회나 조선농민사가 협동조합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반제 운동으로서 발전시키지 못한 채 그 테두리 내에 머물게 했던 데 비해서, 협동조합을 전체 운동 속에서 올바르게 위치 정립시켜 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협동조합 잧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반독점·반제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게 연결지워준 것이라 하겠다.(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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