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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時下의 정책적 문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한을 받았다. 첫째로는 전시의 궁핍한 물자난으로 발표지면이 제한되었고, 당시의 대표적 잡지인 《國民文學》만 하더라도 용지 기근으로 20여 종의 잡지를 통폐합해서 발간했던 것이었다. 둘째로 발표지의 통폐합은 전시의 문예활동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軍 報道部의 입장에서는 국책문학을 이끌어가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했다. 물자절약에 언론 통제까지 가능했던 잡지의 통폐합은 그들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문예작품은 통제의 방향에 따라 이끌려 갔다. 따라서 이런 御用紙의 작품내용이 당시의 시대적 특질을 대변해 주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5)
이 시기에 가장 중추적 발표기관이었던 <<國民文學>>은 주간 崔載瑞에 의하여 초기 몇 회를 제외하고는 일본어로 간행되어 우리말 말살정책의 선봉이 되었다.(5)
전시의 문학이 시국적인 국책에 순응해야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일지 모르나, 일제말기의 한국문학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여건이 가세하여 복잡했던 것이다. 전통문학을 수호해야겠다는 민족적 저항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친일 아부의 어용작가들이 독버섯처럼 돋아났다. 한편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었던 나약한 文人群들은 군 보도부의 날카로운 감시에 따라 고뇌에 찬 작품들을 써낸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위에 뜬 기름처럼 국책에 순응하려는 서술이 부분적으로 비쳐 당시의 인생과 생활을 형상화하는데 있어 부득이 시국적인 옷을 입힌 것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기 문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親日作品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친일적인 측면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여 그 농도에 따라 광적인 戰爭讚美, 鍍金된 어용, 親日文學 등 3단계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그 시대문학의 특질로서 사회적 배경의 영향, 전쟁문학으로서의 요소,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질을 들어 이 시대 문학의 양상을 정리하고자 한다.(6-7)
그러나 여기서 다룬 대체적인 시기는 친일잡지인 <<人文評論>>이 창간된 1939년경부터 일본 침략전이 거의 종말을 고하는 1944년 중반까지를 암흑기 문학의 시기로 보려 한다. 1939년 이전에도 친일문학이 없지 않았으나 암흑기의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고, 또 1945년 전반에도 망상에 사로잡힌 작가들이 더러 있었으나 군부의 문화탄압의 여력이 없어진 때라 친일문학도 斜陽의 길을 걷고 있었다. 45년 전반까지도 친일지가 간행된 것이 있으나 내용이 잡지 체재를 갖추지 못했고, 지면 역시 휴지로도 부적당한 것에 인쇄되어 나왔다. (7)일본 패망의 징후는 친일지의 쇠락에서 직감할 수 있었다.(7-8)
(저자는 이 시대에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고 연령적으로도 20대 전후의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대에 있었다.)(8)
1940년부터 5년간의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어떠했는가 총체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침략전쟁이란 저항심은 다분히 마멸되고 대체적으로 시국에 순응하며 耐乏生活을 견디어갔다. 비평하거나 저항하기에는 그들의 힘, 다시 말해 軍閥의 暴惡이 너무나 거세었다. 체념하는 소극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횡포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수하는 대중이 대부분이었다. 南京이 함락하고 徐州가 함락했다고 금방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낮에는 축하행렬, 밤에는 제등행렬이 전국을 환호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전략적인 안목이 없는 국민들은 이대로 가면 일본이 승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축하행렬·신사참배 등에 별로 저항을 느끼지 않으며 참여했던 것이 당시 대다수 민중들의 의식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美國의 소리'방송을 들은 일부 계층만이 앞날의 戰局을 예상했던 것이다.(9)
건물마다 內鮮一體를 비롯한 東亞共榮圈을 주장하는 표어가 붙고, 전쟁 완수를 위한 격문이 거리마다 나부끼는 환경에서 전전긍긍 살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초비상의 공포 분위기에서 언제 벗어날 것인가를 생각할 뿐 당면한 고통을 운명처럼 체념하는 것이 당시 한국민의 공통된 의식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일본의 패망이 한국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일반 대중의식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없다.(9)
이미 식민지화한 한국은 대륙침략의 兵站基地로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지역적으로 일본과 만주의 중간도로가 된 한국은 전선에 이르는 補給확보의 요지일 뿐아니라, 人力需給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식량 및 지하자원을 전쟁에 동원하고,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후방의 단결을 위하여 한국민의 철저한 皇民化 정책이 요구되었다. 이런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쟁 발발 후 역대 총독은 우가기 잇세이(宇垣一成)서부터 1945년 終戰 당시의 아베노 부유기(阿部信行)에 이르기까지 거물급이 군림했다. 거의가 大臣을 역임한 그들이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그만큼 한국의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이란 발판이 없었다면 일본의 대륙침략은 염두에 둘 수도 없었다. 병참기지의 역할을 한 한국은 일본을 위하여 온갖 핍박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10)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의 皇民化政策은 지리적인 倂呑과 아울러 모든 한국적인 전통을 모조리 말살하며 일본화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內鮮 융화라는 온건한 말로 시작된 皇民化 운동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에 이르러 급속도로 격화하여 內鮮一體를 부르짖고 國體明徵을 강조했다. 이것은 동등한 처지에서의 一體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적인 것을 용해흡수하여 皇民化 一色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天皇은 '一視同仁'을 내세워 일본인과 같이 예우하겠다는 僞善으로 한국민을 무마하려 했다.(10)
1942년부터 2년간 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끼(小磯國昭)는 '道義朝鮮의 確立'을 기치로 내걸었다. 여기서 道義라는 것은 그 개념에 日本國體에 투철하여 皇國臣民으로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內鮮一體보다 한걸음 더나가 정신적인 同化를 말하는 것으로, 내선일체가 갖는 궁극의 도라는(10) 것이다.(10-11)
일본 國體의 본질은 1937년 일본 文部省에서 간행된 {國體의 本質}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大日本帝國은 萬世一系의 천황이 皇祖의 神勅을 받들어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萬古不易한 국체라는 것이다. 황조의 신칙이란 무엇인가. '天下를 집으로 하는 八紘一宇의 정신에 투철한 것이다.(강재언, {일제하 40년사}, 제4장-저자 각주)
이것이 일본정신의 權化요 통치이념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이 정신에 동참하라는 것으로, 과거 피상적인 內鮮一體에서 정신적인 동화를 강요했던 것이다. 즉, 이것은 한국민을 동등한 처지에서 대하려는 소위 '一視同仁'이 아니라는 증거이며, 한국인의 민족의식, 언어습관을 말살하려는 그들 계책의 시초였던 것이다. 그들이 만주를 침공하여 괴뢰정권을 세웠을 때 명분을 民族自決이라 내세웠다. 그리고는 한국에 동요가 생길까봐 그들은 당황했고, 拓植 대신을 지낸 永井 柳太郞을 비롯하여 한국 지식층에 宣撫工作을 폈다. 國體明徵을 들고 나온 것은 철저한 皇民化의 종국을 의미했다. 민족의식을 버리고 일본 정신에 투철한 인간 개조를 그들은 강력히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11)
황민화 운동의 일단으로 皇國臣民임을 맹서하는 소위 '황국신민의 서사'를 한국사람은 누구나 제창하도록 하고, 의식에나 간행물 일체에 이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것은 일반인용과 지식인용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국민학교 수준에서, 후자는 의식이나 지식계급에서 제창하도록 했다. 내용은 같으나 후자의 경우,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皇國臣民이다. 忠誠으로서 君國에 報答하리라
2. 우리들 皇國臣民은 서로 信愛協力하여 團結을 굳게 하리라
3. 우리들 皇國臣民은 忍苦鍛鍊 힘을 길러 皇道를 宣揚하리라
이런 황민으로서의 맹서는 아래로 국민학교 생도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암송하도록 했고, 심지어 보행자에게 즉석에서 제창하도록 하여 만일 못하면 非國民이라고 매도하는 수법으로 보급시켰다. 이런 일은 일본 본토에는 없었던 것으로 한국민의 皇民化 洗腦의 한 방편이었다.(11-12)
또 하나 황민화의 방편은 神社參拜의 강요였다. 일본에 고요한 神道精神을 보급하고 이것을 숭배함으로써 정신적인 황민화를 성취시키려는 것이었다. 神社는 格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南山 정상에 자리잡은 朝鮮神宮은 官幣神社라고 하여 일본에서 宗主格인 伊勢神宮과 직결되는 격조 높은 神社였다. 그리고 고을마다 마을마다 神社가 있었고, 여기 참배하는 度數에 皇民 精神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한국적인 종교는 물론 온갖 전통문화는 이 神道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신세계를 침식당한 한국민은 뜻도 모르는 '가시사마'(神樣) 앞에 합장배례를 강요당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 신자들의 반발이 컸고, 산사 참배에 불응한 장로계와 평양 숭실전문학교는 폐쇄당하는 불운을 겪었다.(12)
무엇보다도 치욕적인 일본의 行弊는 姓을 말살하려는 創氏改名制度에 있었다. 한국사람의 姓까지 없애고 '씨' 중심의 日本式 가족제도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한국은 옛부터 家系를 존중하여 族譜에 이름을 올려 조상에 이르는 뿌리를 밝히는 데 힘썼다. 그런 전통성을 말살하고 姓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니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차마 견딜 수 없는 굴욕의 극단이었다. 언어와 문자를 말살하고 생활양식까지 일본화시키려는 그들은 마침내 가족제도까지 유린하여 한국민으로서의 자취마저 없애버리려는 蠻行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12)
孝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실천도덕율에서 이 創氏만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12)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병참기지로서의 한국은 그 역할의 차원이 달라졌다. 인적 소모전에서 젊은 일본인은 거의 戰地로 끌려갔고, 이제는 한국 청년에 손대지 않을 수 없었다. 황민화 운동을 철저히 실행한 이면에는 전쟁에 인력동원을 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우선 1939년 7월부터 勞務動員이 본격화했고, 1938년 2월에는 그 악명 높은 '육군 특별지원병령'이 시행되어 군 입대를 종용했으며, 지원하는 사람을 영웅시하여 많은 젊은이가 동참할 것을 적극 권했다. 이어서 1943년 7월에는 '해군 특별지원병령'을 실시하기에 이르렀고 이렇게 일본 본토인과 같은 대접을 하는 것은 '天皇陛下의 聖恩'이라고 추켜세웠다. 그해 10월에는 '조선인 학도 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어 전문학교 대학의 재학생을 모두 戰地로 보냈다. 이름만 지원병이지 만일 응하지 않으면 노무징용으로 끌어가 더욱 위험한 일에 충당했다. 여자 정신대라 하여 부녀자를 慰安婦로 차출하여 전장으로 보낸 것도 이때에 더욱 심했다.
이런 지원병제도로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1944년 4월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각의에서 이 제도를 결정한 것은 1942년이었으나, 한국 청년 중에는 미취학자가 많아서 이들을 입영시켜 훈련하는 문제가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戰局이 파탄에 이르자, 재고할 여유도 없이 이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의 우민화정책은 여기에서 自家撞着에 빠지게 되었다. 식민지 교육정책은 공부를 시켜놓으면 마음대로 다루기 힘들고 지식인일수록 오만해서 황민화 운동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억제하고 특히 고등교육기관의 존재는 그들에게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12-13)
이런 과정에 대해서 일본인 尾崎秀樹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35년의 카프의 해산, 37년에 [皇國臣民誓詞]의 제정, 38년의 일본어 常用, 조선어교육의 폐지, 40년 창씨개명, <<每日新報>>를 除한 조선어에 의한 민간지의 폐간, 신사참배의 강제, 이런 사상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39년에는 朝鮮文人協會가 생기고 43년에는 朝鮮文人報國會가 조직되는데 그것은 조선인의 자유와 독립을 뺐고 생명까지도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종건 단계에 이르러서는 소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고 급기야 전면적인 징병제도가 되어 조선인을 전장에 몰아내게 되었다.(尾崎秀樹, {舊植民地文學노硏究} 序說-저자 각주)(13)
1944년은 패전을 눈앞에 두고 한국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군국주의의 적극적인 시책이 강화되고 있었다.(15)
당시 문학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준 문화적 배경은 특이했다. 침략전의 전초적 현상으로 모든 것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당연했다. 문화의 일반성은 희석되고 정책적 요구에 따른 특수한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즉 일반적인 문화창달은 위축되고 문인협회니 대동아문학자대회니 하는 침략전 성취에 따르는 기관들이 나타났던 것이다.(17)
조선문예회는 총독부 학무국의 주선으로 崔南善, 李光洙, 金永煥과 城大 교수 高木市之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1937년 5월 발기된 이 회는 제1부와 제2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레코오드·연극·영화·라디오 등 문예와 연예 각 방면을 교화 선도하여 비속화하는 것을 막아 사회 교화를 꾀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高木市之助를 좌장으로 하여 方應模·李相協·梁柱東·玄濟明·崔南善·金永煥·金億 등 14명과 일본인 17명이 출석하였다. 歌謠淨化운동의 일환으로 소년 소녀들을 위한 노래를 보급키로 하고 신작가요 발표회를 개최하는 등의 운동을 벌이다가, 동년 9월에는 <銃後風景歌>, <皇軍激勵歌>를 제작하여 음악회를 열기로 하고 그 수익금을 헌납한다는 결의를 하기도 하였다.(17)
조선문예회는 1938년 6월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이 발기할 때 발기한 59개 단체의 하나로 참가하였다.(18)
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은 38년 6월 민간 사회교화단체 대표자들이 총독부의 알선을 좇아 장기전에 대처한 銃後 봉사문제 등을 협의한 데서 결성된 단체였다. 여기에는 대동민우회 時中會 조선문화단체연합회 계명구락부 춘추회 등을 비롯하여 일본 적십자조선본부, 조선군사후원연맹 등 59개 단체와 尹致昊·李丙吉 등 개인 56명이 참가했으며, 이때 조선문예회도 발기 단체의 하나로 참여하였다.(18)
문인협회는 1939년 10월 21일 李光洙·金東煥·朴英熙·鄭寅燮 외 10여인의 발기인이 모여 성명서를 작성하고 회칙에 관한 토의를 거쳐 발족한 어용단체였다. 문인협회의 결성 동기는 한마디로 일본의 국책수행에 기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시하 점차 긴박해지는 시국을 맞이하여 문인들이 걸머지고 있는 책임이 크다는 관점에서 문인 각자의 개인적 행동을 제한하고 무장을 통하여 시국에 공헌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문인 전체의 대동단결이 필요하고 조직을 통하여 통제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문화정책을 받들어 친일작가인 이광수·김동환이 주동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 문인협회였다. 친일적인 문인단체가 구체적으로 결성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문인들의 조직화는 일단 이루어졌다. 그후 이 문인협회를 통하여 친일문학은 본궤도를 찾아 선봉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고, 사실상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문인협회의 성립은 내용적으로는 당국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이광수 외 십여 인의 발기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19)
문인협회의 목적...한마디로 요약해서 '皇軍的 新文化 創造'라는 것이다. 즉 전쟁 목적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화창조로서 일본문화를 중추로 하는 동아문화의 결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0)
첫째로 이 협회의 특징은 일본인 조선인이 다같이 참여한다는 것과, 둘째로 이 회가 성립된 후에 다같이 국민정신 총동원 연맹에 가입하도록 되었다는 점이다. 1939년 10월 29일 결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명예총재에 당시의 학무국장인 鹽原을 추대하여 학무국 감시하의 기구임을 밝혔고, 회장에 이광수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회장이 지명하기로 되어있는 간사로는 金東煥·朱耀翰·金文輯·朴英熙·鄭寅燮과 일인 측에서는...등이 결정되었다. 그후 金文輯이 자퇴하고...상무간사는 박영희가 맡았다.(20)
그리고 문인협회에서 제정한 '懸賞小說募集規定'에 의하면 그 취지에 있어 '高度國防國家建設에 邁進해야 할 現時局'이라는 당시의 戰局을 전제로 하고 현상작품의 성격규정에서 '표면적 효과를 겨냥하기보다는 위대한 국민적 정신이 작품 전체에 徹한 순문학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21)
1939년 문인협회가 결성된 이후 문인들의 시국적 무장은 일단 이루어졌다. 이 협회의 존재는 문인들에게 많은 제한을 준 것이 사실이고 이런 공적은 문인협회의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1941년에 들어서자 침략전은 점점 치열해지고 <<人文評論>>을 비롯한 어용잡지의 편집 태도도 적극적인 시국 동참을 표방하고 나섰다. <<人文評論>> 1월호(卷頭言-저자 각주)에 의하면 '文學挺身隊'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정신대란 이제까지 한국여성들이 위안부로 전선에 나가 몸을 바친 비인도적 만행을 일컫는 것인데, 여기서 문학 정신대란 문인들로 하여금 시국을 위해 몸을 바치라는 극한적 요청인 것이었다. 이런 문예운동은 점점 극심해져 42년에는 강압적인 문예운동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21)
이런 문단 실정에서 1942년 연말에는 '大東亞文學者大會'라는 모임이 이루어졌다.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는 11월 4일~5일, 양일에 거쳐 대동아회관에서 개최했다. 문인협회의 조직을 활성화하여 문학자들의 정신적인 무장을 꾀했던 것이다. 첫째 의제는 '대동아 정신의 수립'으로 일인 소설가 菊池 寬이 의장이 되고 香山光郞(李光洙)가 주제 발표를 했다. 두 번째 의제는 '대동아전쟁의 강화보급'으로서 발언자는 兪鎭午였다....
제2회 大東亞文學者大會는 다음해인 1943년에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五族協和(日本, 朝鮮, 滿洲, 中國, 蒙古, 大東亞共榮圈의 構成國-저자 각주)를 내세운 이 대회는 대동아공영권의 결속을 다짐하는 모임이었다. 이 회의에서 <<國民文學>>지의 주간인 崔載瑞가 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에 충성을 다하자는 내용으로 시종하였다.(22)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는 일본이 패전 전해인 1944년 11월 12일부터 3일간 중국 남경에서 열렸다....
그리고 결의사항으로서 '中國文學協會'의 결성을 보았고, 제4회는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제3회에는 일본 대표의 일원으로 이광수가 참석했다. 3회에 걸친 대동아문학자대회의 참가 인원은 제1회가 57명 중 朝鮮 9명, 제2회 99명 중 조선 9명, 제3회 14명 중 조선 1명으로 이광수가 끝까지 동조했다.(23)
이상과 같은 친일 문화운동이 한국문학을 암흑기시대로 끌어넣은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신문을 폐간시켰다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처사였다. 이들 신문이 전부터 시국에 순응하는 기사들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제4주의 문화란만은 한국문학을 보존하는 유일한 一燈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20여년간 조선문학의 기반이 되었던 두 신문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보니 서운한 생각은 차치하고 작가들을 수용할 공간의 말살은 실로 절망적인 것이었다. 특히 장편소설의 거의 전부가 신문소설로 자라오던 것이니 한국문학 발표지의 大宗이 끊긴 셈이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每日新報>>가 있었지만, 지면이 국한되었고 작품 내용도 제한을 받았으니 작가들의 설 땅은 없어지고 말았다. 친일 잡지인 <<인도(문?-인용자)평론>> <<국민문학>>이 있었으나 투고하는 작가는 친일 어용의 무리로 국한되었고, 신시대 등 시국적인 전쟁 찬양, 친일적 주제 일색으로 진실로 암흑기에 돌입했던 것이다.(24)
국민총력조선연맹은 40년에서 45년에 이르는 사이에 걸쳐 "유례없는 거대한 조직과 강력한 실천력으로 일본의 장기전 수행에 수반하는 銃後 활동의 제반 문제를 처리해 나간 단체"(林種國, {親日文學論}, 平和出版社, 1963,110면.-저자 각주)였다. "國體의 本義에 기하여 內鮮一體의 實을 기하고 각 地域에서 滅私奉公의 誠을 奉하여 協心戮力하여 써 국방국가 체제의 완성, 동아 신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기함"(강령 全文)을 목적으로 하였다.(25)
40년 12월 문화활동에도 신체제를 갖추고 민중을 지도하고자 문화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때의 문화위원으로는 金億·金斗憲·洪蘭坡·崔南善·沈亨求·白鐵·兪鎭午·李相範·李能和 등과 일본인 47명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文化翼贊의 반도체제'를 상론하고 연락계를 설치하고, 국문 문화익찬 소설과 가곡논문을 현상 모집하고, 황군감사 연예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41년에는 읍면 연맹 이사장 등 모범인물을 선정하여 선지참배단을 구성, 내지의 각 神社를 참배케 하여 일본정신을 체득케 하였다.(25)
44년 4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와 조선미술가협회의 협찬하에 문인·화가·기자들을 독려, 광부·직공·노동자를 위문하고 그들의 생활을 작품화하였다. 이후 詩歌를 통한 국어생활 보급과 일본정신 파악을 목적으로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다. 45년 5월에는 金史良·盧天命을 在支 반도출신 학병 위문차 파견하기로 하였다. 총력연맹은 이후 조선국민의용대가 결성됨으로써 이에 합류, 해체되었다. 그 동안 국민총연맹은 전후 6년 동안 "그들이 말한 바 국민운동의 최고봉으로 군림했으며 반도 민중 이천 육백만을 애국반의 세포조직으로 하는 유례없는 유기적 조직으로 반도 황민화 운동을 위하여 거의 발악에 가까운 활동을 전개"(林種國, {親日文學論}, 平和出版社, 1963,110면.-인용자)했던 것이다.(25)
이밖에 내지의 思想犯保護觀察所를 중심으로 한 전향자들의 時局對應全朝鮮思想保國聯盟(38)이 있었고, 내선 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정신을 깨닫고 皇道를 받들자는 취지의 皇道學會(40)가 香山光郞(李光洙)이 발기인 대표가 되어 결성되었으며, 41년 8월에는 삼천리사 주최의 臨戰對策協議會가 개막되었으며, 興亞保國團準備委員會(41)와 朝鮮臨戰保國團(41)이 황국정신 앙양과 근로 보국을 취지로 각계 인사를 망라하여 결성되었다.(26)
43년 4월에는 朝鮮文人協會, 朝鮮俳句作家協會, 國民詩歌聯盟 등의 해산에 의해 발족한 조선문인보국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에 세계 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하고자"한 이 단체에 兪鎭午·李光洙·柳致眞·崔載瑞·金億·盧天命·金璟麟·方仁根·鄭人澤·李泰俊·金南天·李無影·趙容萬·鄭飛石·李軒求·林和·白鐵·安含光·洪曉民·金基鎭·李源朝·鄭芝溶·金鐘漢·朴泰遠·異河潤 등이 가담하였다. 이 保國會는 日皇이 항복 방송을 하던 그날까지 "皇道 世界觀을 顯現"하기 위해 전력하였다.(26)
1941년 말 <<국민문학>>이 간행되기 직전의 출판계는 암담했다. <<문장>>이 폐간되고 <<인문평론>>도 <<국민문학>>으로 轉身하는 과정에서 간행이 중지되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창작활동이 사적인 연계를 이어나갈 만했는데, 실질적 암흑기 단계에 돌입한 시초였다. 20여종의 잡지가 통폐합되어 오로지 <<국민문학>>으로 이어질 때까지 창작계는 적적했다.927)
1941년 일제는 총력전이란 이름아래 문화면에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해 5월 제1회 잡지통제로 <<四海公論>> 등 21종의 잡지가 폐간되고, 이것들을 통합하여 나타난 것이 <<국민문학>>이었다. 당시 용지 기근으로 부득이 했다고는 하지만, 이 조치는 당국의 정책이었고 내적으로는 잡지통제에 의해 조선문단을 장악하고 혁신의 미명 아래 시국에 동조하는 잡지를 만들어보겠다는 의도였다. <<국민문학>>의 주필 최재서를 군 보도부 손에 넣고 조종만 잘한다면 한국문예의 임전태세는 성공한다고 본 것이다.(28)
창작용어에 일본어가 침식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문학>>에서부터였다. 처음 계획은 연 4회는 소위 국어판(일본어판), 연 8회를 언문판(한글판)으로 간행할 예정이었으나, 친일적 열성을 보이기 위한 주필 최재서는 한글판은 2회에 그치고 용어도 일본어로 바꾸고 말았다. 최재서가 문화적 민족적 반역자가 된 것은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필진은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고, 3분의 1정도가 일인이었다.(28)
문학작품의 시국화는 당시 문인에게 가해진 굴레였다. 1941년경까지 순수작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발표하는 데 많은 부담이 되었고, 군의 감시를 받으며 잡지의 발행인의 고뇌는 심각한 것이었다. 편집후기의 논설문 속에는 직접적으로 고통을 호소한 것이 非一非再했다.(29)
시국적인 문화정책으로 점점 좁혀 들어가는 당시의 문화계가 이 나라 문학을 암흑기로 끌어넣은 과정이었다.(30)
한국문화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있어 그 선봉 기수의 역할을 한 것은 言論彈壓이었다. 식민지 정책의 급선무가 언론·집회·출판 등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입과 귀와 눈을 막아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31)
신문지법(1907년-인용자)과 출판법(1909년-인용자)으로 한일합방 전부터 언론·출판을 탄압해 왔던 銃監府는 합방과 더불어 언론·출판물을 모조리 폐간시키고, 그들의 기관지를 통하여 침략정책을 강행했다. 모든 출판물은 원고의 사전검열과 내납검열의 이중 관문으로 인하여 이 당시의 출판업 경영이란 일종의 문화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日帝 관헌은 민족정신의 앙양이나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불복을 탄압하기에 혈안이 되었고, 전반적인 민족문화 말살을 목표로 온 신경을 여기에 경주하였다. 간혹 검열자의 소홀로 민족적인 글이 사전 검열에서 통과되는 경우가 있어도 간행 후에 판매 금지 또는 압수 소동이 일어나 오히려 피해가 더 컸으므로 영세한 민족자본으로 근근히 이어가던 출판인에게는 막대한 손실을 주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민족적 항거가 일어나자 일제는 종래의 폭압적 무단통치로부터 문화정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아래 다소 유화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언론과 출판의 자유도 약간 허용된 듯 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발행을 보게 되었고, 신문지법에 의한 언론잡지 <<開闢>>을 비롯하여 <<東明>> <<朝鮮之光>> <<新天地>> <<新生活>> 등도 발행되었다. 그러나 문화정치란 실상 일제의 음흉한 침략전쟁이 한층 더 노골화된 것으로 한일간의 융화정책에 의한 동화공작에 착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33)
이처럼 한국인이 경영하는 모든 언론·출판사업은 온갖 압력에 시달렸는데 더욱이 한글로 발행되는 우리 민간지는 민족해방 내지 경제 혁신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사회주의의 필치로써 일제의 치안을 방해한다 하여 빈번히 발행정지 처분을 당했다.(35)
검열 악법으로 허덕이던 출판업계는 경무청의 눈치를 보며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당시 출판물 검열의 가혹상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은 이른바 '벽돌신문' 용어의 출현이다. 신문의 판을 짜 놓고 그것을 박아서 경무청의 검열을 받는 데 얼마나 많이 붉은 줄로 삭제를 하는지 그대로 판을 깎고 인쇄해 내면, 활자를 엎어놓은 모습이 마치 벽돌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서 생긴 말이다. 그뿐 아니라 총독부에 납본하는 당당한 간행물의 발행인으로 서명을 한 경우에는 2·3개월의 경찰 신세는 각오해야 출판이 가능했다.(36)
당시의 잡지 중 오랫동안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것은 <<開闢>>이었다. 이 잡지를 대상으로 잡지 탄압의 양상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색채나 독립사상의 고취 등을 무조건 단속 대상으로 삼았고, 또는 총독정치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 민족에 대한 비방 등을 단속 규준으로 하다가 1924년경부터는 사회주의 기사에 대한 단속으로 변해 탄압정책이 더욱 가중되었다.(40)
1920년 5월 20일 신문지법에 의하여 발행이 허가된 <<개벽>>은 같은 해 6월 25일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고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로 발행 정지를 당할 때까지 전후 34회의 판매금지와 정간 1회, 벌금형 1회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개벽>>은 창간호로부터 난산을 거듭했는데, 창간호가 금지 처분을 받아 號外를 발간하려 했으나 그것도 여타 부분에 또다시 삭제를 가하여 임시호로써 겨우 출간되었다.(40)
이렇게 2차의 시련을 겪고 창간호는 임시호로 겨우 햇빛을 보았다. 창간호에서 삭제 당한 金起田 작 <금싸락>과 <옥가루>를 다음에 들어본다.
금싸락
北風寒雪 까마귀 집 貴한 줄 깨닫고 家屋家屋 우누나!
有巢不居 저 까치 집 잃음을 부끄러 可恥可恥 짖누나!
明月秋堂 귀두리 집 잃을까 젛어서 失失失失 웨놋다.
옥가루
黃昏南山 부엉이 事業復興하라고 復興復興 하누나!
晩山暮夜 속독새 事業督促하여서 速速速速 웨이네!
驚蠻 만난 개구리 事業 저 다하겠다 皆皆皆皆 우놋다!
앞의 <금싸락>은 조국을 잃은 개탄이 동물에 의인화된 것이고, <옥가루>는 단순한 계몽 격려의 시라고 볼 수 있으나, <금싸락>과 같이 실렸기 때문에 조국광복사업을 상징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창간호의 압수 조건 중에는 표지의 호랑이도 문제되었다. 버티고 서 있는 호랑이의 雄姿는 독립사상을 나타낸 것이니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상징한 것이 아니냐고 불온시한 것이다.(41)
3·1운동 후 많은 잡지가 나왔으나 친일 어용잡지를 제외하고는 그 수난상이 거의 같았고, <<開闢>>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43)
1939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부터 한국에 대한 정책은 강경 일로는 변해, 민족사상을 말살시키고 일본정신을 주입하려는 이른바 皇民化 운동에 혈안이 된 때요, 문학은 물론 고유문화 전반에 걸쳐 위축되던 시대라 <<文章>>誌를 최후로 어용지 일색이 되었다.(43-44)
1940년에 들어서면서 문화적 각종 탄압은, ...군 보도부와 총독부 도서과에 의해 진행되었다. 직접 간접으로의 탄압은 헤아릴 수 없어 당시 문인들을 질식 직전에 몰아넣었던 것이고, 자의든 타의든 그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1940년 3월 23일 총독부 경무국장은 담화로 [風俗警察取締要項]을 발표하여 사생활까지 탄압할 구실을 만들고, 전시 국민생활체제라는 틀에 넣어 戰時的 인간형을 만들려 했다.(44)
작가의 문학관에 대한 시국적 세뇌 방법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4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종 탄압은 사실 황민화에의 세뇌 방법이었다. 당시 잡지에 수록된 좌담회 기사나 논설의 대부분이 직접 간접으로 이에 대한 방편이었다. 법에 의해 객관적으로 제도화한 이외에 잡지 기사를 통한 정신개조의 방법이 심리적 호소의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44)
그러나 한편 국어 말살정책이 치열할수록 뜻 있는 한국인들은 한글 출판물에 대해 점점 애착심이 높아갔다. 한글로 된 것은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날개가 도친 듯이 팔렸고, 서점 창고에 뒹굴던 유행가 나부랭이도 남지 않았다. 특히 역사물의 인기는 굉장하여, 崔南善의 {故事通}은 순식간에 절판이 되었고, 더욱이 만주 등의 외지에 있는 동포들은 극성스러울 정도로 사들였다. 이것은 일종의 무언의 저항이었고 애국심의 발로였다.(45)
공적인 의사소통은 완전히 일본어로 영위되었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일본어가 주된 용어로 통용되었다. 우리말을 말살하려는 여러 가지 정책을 다 枚擧하기 어려우나 공공기관의 벽에 '國語常用'이란 표어가 붙어있고, 일상생활에서까지 일본어상용을 강요하고 있었다. 필자의 경우도 1928년 당시 보통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1945년까지 23년간 일본어로 교육을 받아왔는데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내나라 말이 아닌 일본어로 되었고 생활용어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어로 된 창작품이 그렇게 심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물론 우리말이 점점 박대를 받고 사라져 가는 현상을 마음속으로 탄식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당시의 여건이었다고 체념하는 편이 많았다.(46)
말과 문자를 잃는 슬픔이 알고 보면 최대의 민족적 비극이었으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일본어를 통용어로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어로 된 창작물은 올 것이 온 것이요, 당시의 대세였다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의사전달이 일본어요, 생활용어의 구실을 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본어 창작물을 한국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46)
그러므로 일제 치하에서 일본어로 창작된 문학작품은 그것이 당대의 불가피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파생된 거의 유일한 창작수단이요, 구차하나마 명맥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히 한국문학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온당하게 자리매김되어야 한다.(46)
일본어 상용정책은 일본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근간이 되는 것으로 일본에 동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여 '국어상용'이라는 표어가 어느 기관이고 첨부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도처에서 말이나 글로 강요되었던 것이다. 필자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 생도 명단을 인쇄해 붙이고 한국말을 쓰는 학생이 있으면 그 명단 밑에 표를 하도록 해서 단속했던 기억이 있다. 방마다 기둥에 '국어상용'의 표가 없는 곳이 없었다. 여기에 아첨 동조하는 글들이 보이기도 했다.(47)
이에 발맞추어 <<국민문학>>지는 창간 초기부터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모색하였다.(47)
창작 용어로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당했을 때 작가 중에는 창작품을 낼 만한 능숙한 일본어 실력이 없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작품을 쓰지 않으려는 계책도 들어 있었다. 작가 평론가들이 대부분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작품을 써낼 때 거의 일본 작품을 써내지 않은 李無影같은 작가도 있었다. 농민소설은 농민들이 쓰는 말이 전부 일본화하지 않아서 사투리나 비어 또는 농촌에서 쓰는 특수용어들, 다양다색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가 백성들이 쓰는 말을 통일해서 일본어와 같이 만들지 않으면 농촌을 상대로 소설은 쓰기 어렵다고 한 것은 당연했다.(55)
특히 농촌소설에 있어 나라마다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 표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李無影의 항변은 사실을 뛰어넘은 저항성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56)
일제는 한국문화의 뿌리를 송두리째 거세하기 위해 그 최우선책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더욱이 개탄스러운 것은 당시의 평론계와 창작계를 각기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최재서와 이광수 등 한국의 대표적 문인들이 일본어 창작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시에 모든 창작란을 일본어로 대치할 수 없었으므로, 한글 창작을 부분적으로나마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최소한의 문학적 양심이었고, 그것이 결국 한글 창작의 명맥을 이어가는 실날같은 고리가 되었다.(56)
일제말 암흑기시대의 문학을 '국민문학'이란 문학 유형으로 규정짓고 있다. 국민문학이란 말이 이때 비로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국민문학>>지의 출현과 아울러 최재서 등이 당시의 문학을 '국민문학'이라 한 데서 일제말기의 문학을 지칭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후, 광활한 만주를 욕심 내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그들은 그 여세를 몰아 1937년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득세한 일본 군벌들은 초기의 戰果에 힘입어 그 세력은 충천했다.
살벌한 칼날 앞에 온갖 문화는 위축되었고, 더구나 식민지 한국의 문화는 風前燈火 같이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어느 시대고 전쟁 앞에 이성이나 감정은 마비되는 것이 상례지만, 오로지 전승에 혈안이 된 와중에서 문학자에게 냉정을 되찾으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전쟁의 흥분 속에 같이 휩쓸려 침략군에게 갈채를 보내는 문학자들이 많아졌다. 이런 작가래야 표본적인 戰時文學家로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광적인 침략전 찬양이 당시 작품의 표본이었다.(57)
동양을 제패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전체로 하고, 일본 정신에 의해 동양 전체의 이상을 통일시켜야겠다는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이 국민문학의 요건이 되고 있다.(59)
1939년 10월에 창간된 <<인문평론>>은 1941년 4월까지 통권 16권으로 발간되고, <<국민문학>>에서 다시 재생된 잡지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 잡지사상 특수한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환경이 침략전의 결정이었다는 면도 그렇거니와 문예정책면에서 친일문학이 발로하기 시작한 점, 또 주간이 최재서라는 비중 있는 평론가였고 한편 평론 전문지로서의 기치를 들고 나온 것도 특이한 일이었다.(65)
<<국민문학>>지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간행되어 종전 직전까지 계속한 잡지로 <<신시대>>가 있다. 민족문학이 암흑기에 접어든 1941년 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간행된 이 잡지는 발행자가 박문서관의 주인 盧益亨(瑞原益亨)이라는 출판인이기 때문에 용지 기근을 극복할 수 있었고, 침략전 찬양이라는 그 社旨 때문에 잡지 통합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1941년 9월에는 盧益亨은 사망했으나, 자제가 계승하여 자영하는 大東印刷所에서 근근히 간행을 했던 것이다. 이 <<신시대>>는 <<인문평론>>이나 <<국민문학>>같이 잡지로서의 격조가 높은 것은 아니었고, 전쟁을 찬양하고 친일을 노골화한 잡지였다. 평론가 최재서의 안목과 출판사 주인의 그것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잡지는 일본인 필자가 많이 끼어서 시국적인 논설 쪽으로 그 성격을 몰고 갔다.(70)
1930년대 말경부터 친일적인 口號나 논설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194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친일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술한 유형 분류에서 보듯이 극심한 경우 광적인 전쟁찬미로 거의 이성을 잃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한편 일부 작품들은 평온한 가운데 친일적인 작품을 발표한 것들이 있었다.(72)
전쟁 발발 시초에는 문화 정책에 끼친 영향은 별로 없었다. <<문장>>이나 <<인문평론>> 등에서 순수한 소설들을 어렵지 않게 발표하여 40년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심중에는 靜中動의 파문이 차차 일기 시작했고, 그것이 눈덩이처럼 점점 커 가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72)
당시 가장 두드러진 전쟁문학의 성격은 생사를 초월한 국가관, 즉 군국주의자들이 강요하는 자기희생을 통한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봉사였다. 그 결과 戰死만이 천황을 받들고 국가를 위하는 영광된 길이라고 생각한 군국주의 사상이 국민사상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102)
1942년경부터는 이성을 잃은 채 전쟁을 찬미하고 일본정신을 부르짖는 논설·소설·시 등이 쏟아져 나왔고, 그 정도가 광적일 정도로 격렬했다.
광적인 전쟁찬미는 당시 軍 報道部에서 제일 바람직하게 생각한 제1급의 작품에 해당한다. 이런 작품의 전형적인 것이 鄭人澤의 <돌아보지 않으리>(카에리미나세지-인용자)(<<國民文學>>, 1943, 10.-저자 각주)였다 표제부터가 출전하면 뒤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인 것이다. 당시 중견작가였던 그가 이유는 여하간에 이런 작품을 써야 했다는 사실은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103) (일본정신, 즉 군국주의를 찬양한 표본적인 작품이었다-105)
전쟁찬미에 적극적인 소설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일본정신의 함양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선전물과 같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105)
당시는 정오의 싸이렌과 더불어 모든 활동은 정지되고 제각기 그 자리에서 默禱를 하라고 강요했다. 첫째로는 전승을 기원하는 묵도요, 둘째는 戰死將兵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였다.(110)
초기 침략전이 강세를 보인 무렵에는 지역적 戰勝을 駒歌(謳歌의 오역?-인용자)하는 시가행진이나 밤의 등불행렬이 이어졌고, 이는 마치 전쟁에 완승한 것 같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것은 약한 자의 과시이지만 한편 한국에 있어 더욱 흥행했던 것은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示威였다. 특히 학생층이 동원대상이던 이 시위를 모면할 길은 없었으니 본의든 타의든 젊은 知性은 친일의 굴레를 쓸 수밖에 없었다.(117)
일제의 이른바 聖戰論은 淸日 전쟁 때 우찌무라(內村鑑三)의 '義戰論'이 발단이 되어 나타난 침략을 미화한 논리로써, 이후의 일제의 식민지배에 따른 동양평화론과 결탁한 것이다.(125)
戰時의 문학이 시국에 순응해야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일지 모르나 40년대 한국문학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여건이 가세하여 사정이 더욱 복잡했다. 전쟁찬미의 親日御用作家가 기세등등한 때였지만, 한편 전통문학을 수호해야겠다는 민족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고,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는 나약한 文人群이 상당수 있었다고 본다. 이런 와중에서 軍 報道部의 감시는 날카로웠고, 進退兩難의 궁지에서 작품을 쓴 작가도 있었다. 당시의 잡지가 어용작가들의 발표지였던 것은 사실이나 발표된 작품을 면밀히 검토하면 성격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이 친일적 시국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억지로 강요당해 써진 듯한 작품, 또는 <<國民文學>>誌의 성격을 감안하여 시국적인 색채를 다소 가미한 작품들을 접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修辭的으로 鍍金된 御用을 찾을 수 있다.(130)
이런 시의 창작방법은 감추어진 상징성이 암흑기의 식민지적 작품으로서의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다. 이들 시들에 담겨있는 서정성이 시적 묘사를 갖추면서도 시국에 協從하는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다. 창작수법상 일종의 畸型的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면 이런 성격은 암흑기 식민지문학에서만 볼 수 있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132)
鍍金된 어용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소설작품으로서 우선 특기할 것은 일본인과의 애정을 다룬 작품이다. 전시에 애정물은 금기에 속했으나, 소위 內鮮一體 同祖同根을 구현하는 日人과의 애정일 때는 時局物로서 허용이 되었다.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작가들은 애정물을 썼던 것이다.(132)
그러나 上記作品(이효석의 <아자미의 章>, <<국민문학>>, 1941. 11과 韓雪野의 <血>, <<국민문학>>, 1942, 신년호. 여기서 <아자미의 장>은 비중있는 중견작가 이효석의 작이요, 더구나 <<국민문학>>창간호에 발표되었다는 점등은 당시 소설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인용자 주)에서 日女와의 애정을 다룬 것은 시국물인체 위장한 것에 불과할 뿐, 애초부터 내선문제를 깊이 다루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보여진다....왜냐하면 위의 작품들은 내선일체를 적극 추종한 국민문학이 아니라 작가들이 억압적 현실 속에서 작품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오히려 내선일체를 소재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작품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 성장한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의 근본적 개조를 통한 완전한 '하나 됨'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랑하는 남녀(134)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들을 다루고 있다.(134-135)
즉, 이 작품들은 진부한 애정소설 속에 일본인 여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자국인끼리의 연애보다 이색적인 소재적 신선함을 얻는 동시에 시국에 영합하는 듯한 교묘한 위장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135)
鄭人澤의 <淸?里界常>는(<<국민문학>> 1941. 11, 창간호-저자 각주) 전반부에서 전혀 시국물과 직결되지 않는 인상을 준다....
이 작품은 기성다운 작자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묘사가 수준급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주인공 부부는 그 동네의 반장일 뿐 아니라 동네의 어려운 일을 보살피는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병을 위해 斷指한 甲乭의 집을 보살피는가 하면 피폐해 가는 人文學院을 회생시킬 계획을 꾸미고 돈을 모금하여 방공호를 건립할 상의도 한다. 이리하여 戰時下 국민으로서의 모범적인 모델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 것이다.(135)
이에 대해 유진오는 당시의 작품평(「국민문학이라는 것은」, <<국민문학>> 1942. 11-저자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작품은 愛國班의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하여 차츰 시국에 대해 눈뜨게 되는 가정부인을 그린 작품으로 솜씨 좋게 매듭지은 것은 퍽 호감이 갔지만 남편 되는 사람의 그 정체를 알 수 없고 남을 깔보는 태도가 마음에 거슬린다. 그는 마치 하나님처럼 높은 곳에서 자기 아내의 거동을 쭉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무슨 자격이 있어 그런 태도를 취하는 지 독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작가는 무슨 주제를 선택해도 파고드는 힘이 부족한 듯하다.(그러나 사실 애국반 열성분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전시 시국물의 모델을 잡은 듯이 위장하고 남편이란 정체 모를 인물을 통하여 드러나지 않은 주제를 암시한 것 같다. 그와 같은 시국물의 모델을 주재하는 남편인 까닭에-인용자)(68-69)
安壽吉의 <圓覺村>은 '滿洲 鮮系作家選'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고, 작자 자신도 일본이 만주에 괴뢰정권을 세우기 이전에 만주에서 半島人先驅開拓民의 생활을 발굴한 작품임을 밝히고 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한국인을 만주로 이민시켜 그곳을 개척하게 했고, 기후가 좋은 반도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으로 삼았다. 작품 첫머리부터 무대는 얼어붙은 만주벌판에 이주하는 白衣民族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한 떠돌이 산사람의 이주이지 만주이주가 아니다-인용자)(136)
이 작품은 만주를 배경으로 개척민의 상태를 묘사하여 <<國民文學>>에 게재될만한 요건을 갖추기는 했으나 실제 내용은 완전히 금녀를 사이에 둔 억쇠와 익상 간의 애정 다툼이라 할 수 있다.(잘 못 읽은 결론인 것 같다-인용자)(137)
農民文學은 우리 문학사상에 비중이 큰 부분으로 국민의 8할이 농민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농촌운동이 민족운동과 결부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이 특히 관심을 두는 대상이기도 했다. 농촌운동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제재를 함부로 손대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155)
친일문학의 주제를 압축하여 말한다면 소위 '皇民化'이다.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일제는 조선인의 참여를 절실히 요구하였으며, 이것이 실제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황민화이다. 이 시기의 작가들에게는 문학을 통해 효과적인 황민화를 추구하도록 강요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작품들이 황민화의 실체와 필요성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하고 있다. 그것이 명분상으로나 실리적으로 옹호되어 나타났음은 물론이다.(167)
친일문학에서는 먼저 황민화의 역사적 당위성이 역설된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갈라졌던 핏줄이 하나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내선동조론이 크게 부각된다.(167)
재미있는 것은 작가들이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연애 또는 결혼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통상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과 조선인의 반일감정이라는 부정적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고난과 역경을 거친 끝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 해결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167-168)
<<국민문학>>의 편집요강에서 첫째로 내세운 것이 '內鮮文化의 종합'이었다. 소위 '內鮮一體', 즉 일본과 한국을 결부시켜 실질적인 내용이 될 수 있는 內鮮文化의 종합을 기도했고, 이 길을 신문화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삼았으며, 한국인의 모든 知能은 이것을 구심점으로 하여 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런 내선일체의 정신을 함양하려면 우선 일본의 소위 '國體明徵'의 일본적 國體觀念을 체득해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국체에 及하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경향을 배척함은 물론이요, 일본의 국체관념을 흐리게 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은 절대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全體主義 내지 군국주의는 이런 논리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셋째로 이런 기본적 자세와 더불어 이것을 선양하기 위한 '국민 士氣의 진흥'이 뒤따라야 했다. 즉, 신체제하의 국민생활에 상응하지 않는 비애, 회의, 반항, 放蕩 등의 퇴폐적 기분은 일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적인 감성은 일절 거세당하고 오로지 신체제하의 국민정신만이 존재가치를 인정받았다.
넷째로 정신적인 무장이 성숙하면 '國策에의 協力'이 요구되었다. 종래의 불철저한 태도를 一擲하고 적극적으로 시국 극복에 挺身한다는 것이다. 점점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제시된 것이다. 특히 당국에서 수립한 문화정책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지지 협력하고 그것이 개개의 생활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168-169)
일제는 전쟁이 고비에 달하자 皇民化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인에게까지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 1938년 2월에 실시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을 필두로 지원병제가 점차 확대되더니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4월에 이르러서는 명백하게 강제적인 徵兵制로 굳어져 무고한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전쟁터로 끌어냈다.(172)
사실 戰場 현지에서 兵隊들의 머리는 단순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무엇을 찾으려는 의도는 이미 사라지고 무명의 많은 군인들이 보여주는 전투행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전장의 문학은 무의식적으로 눈에 비친 군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런 환경에서 어떤 主義에 관계없이 발로되는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개의 병사와 병사간에 싹트는 인간애는 극한상황을 목전에 둔 인간의 참모습일지 모른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전쟁문학을 통한 인간의 모습은 무한한 인간성의 원천일 수 있다. 더욱이 전쟁이란 비인도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그곳에서 참다운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귀중하고 강렬한 것일 수 있다.(177-178)
진정한 의미의 전쟁문학은 전쟁의 정세와 양상의 보고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목적, 특질, 역사적 의의를 파악해야 한다. 우선 한 사람이라도 전쟁의 의의, 목적에 대한 회의가 나타나야 한다.(178)
이 시기의 문학작품은 이미 주어진 관념적 정책적 주제에 국한된 작품들이었다. 종군작가들은 의도적인 주제를 휴대하고 전장에 나아가 종군중의 견문을 형상화했다. 그들의 머리에는 발표금지, 또는 판매금지라는 부자유한 작품활동이 항상 견제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의 전장문학에는 일정한 관념이라는 안경 너머로 인생을 비춰보는 관념 우위의 작품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게 어떤 외적 역학작용에 의해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 참다운 인간생활이 표현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때에 진정한 전쟁문학의 본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179)
40년대 초는 민족적 비운의 시기였다. 저항할 능력이 없어 忍辱을 감수해야 했던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자연 締念과 悲嘆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원망한다는 뚜렷한 대상을 내세우지 못하고 그저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침략전을 聖戰이라고 狂態를 부리는 일부 문인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凋落의 國運을 노래하는 글들이 약간 있었다. 抵抗詩를 쓸만한 용기는 없으나 북받쳐 오는 民族魂에 조용히 눈물을 흘린 구절들이었다.(184)
日帝末 暗黑期 文學은, 저자가 특히 그 개념을 정립한 바의 용어로서, 일본의 침략 전쟁이 더욱 가열되고 한국 내에서 <<인문평론>>이 창간되는 등 친일성 문학이 대두되는 1939년 경부터 일본의 침략전이 종말을 고하는 1944년 중반까지의 문학을 가리킨다.(187)
日帝末의 우리 사회는, 周知하는 바와 같이,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써, 한일 합방 이후 계속 핍박을 받아온 우리 문학 또한 전통적 고유 문학의 여맥을 이어갈 기력이 다하여 질식 직전의 암흑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우리 文學史에 가장 수난에 가득 찬 시기라 할 日帝 말기는 그러나 문학사적 계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그 정리가 절실히 요망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비록 치욕적 상흔의 유산을 남긴 시기라 하더라도, 일관성 있는 우리 문학사, 공백기 없는 사적 연계성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문학적 내용을 비롯하여, 우리 문학이 어떻게 핍박을 받고, 어떤 형태로 소멸해 갔으며, 어떤 형태로 잔존했던가를 반드시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187)
일제는 1932년 1월 괴뢰정권인 滿洲國을 건설, 대륙 침략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본은 1931년 9월 의도적인 도발로 滿洲事變을 일으킨 다음, 1937년에 일어난 中日戰爭을 전후하여 일본 軍國主義는 정치를 주도하게 되고, 마침내 1941년 太平洋戰爭을 일으켜 5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러한 전쟁을 통해 한국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兵站基地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감내하기 어려운 핍박과 착취를 당하게 된다. 이 같은 15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意識構造 또한 크게 변화한다. 1920년대의 널리 확산되어 있던 저항 의지는 점차 사그라져 일부 뜻 있는 사람들만이 체제저항의 불씨를 키워간 데 반해, 대부분의 경우 대체로 체제에 동조하고 시국에 순응하는 쪽으로 행동 방향을 정하게 된다. 거리마다 전쟁을 부추기는 격문이 나부끼는 가운데 전쟁이 가져온 참혹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이 한국인의 참모습이었다.(188)
이 기간 동안 일본인의 한국인 장악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져, 우리 민족은 주체적 인식을 갖게 되기는커녕 모든 한국적인 전통이 모두 말살 당하고 점점 일본화 되어갔다. 內鮮融和라는 온건한 말로 시작된 皇民化運動은 內鮮一體로 격화되고, 國體明徵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과 한국이 동등한 지분을 지니는 입장에서의 一體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적인 것들 용해 흡수하여 皇民化 일색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188)
皇民化의 방편은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황국신민의 서사」같은 것을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제창하게 만들었고, 의식이나 간행물 일체에 빠뜨리지 못하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일본에 고유한 신도정신을 보급하고 숭배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황민화를 성취하려는 것으로, 이른바 '神社參拜'를 들 수 있다. 또한 한국 사람의 姓까지 없애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치게 만드는 '創氏改名制度'도 이 시기 황민화운동의 구체적 방법이었다.(188-189)
또한 일본은 1943년 '지원병'제도를 실시, 우리의 젊은 청년들을 전장에 내보내기 시작했고, 1944년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더 많은 청년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전장으로 내몰았으며, 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부녀자를 차출, 전장의 위안부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처참한 현실 속에서도 친일파를 비롯하여 체제에 순응하고 동조하던 자들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굳혀갔다.(189)
당시의 문학에 영향을 준 문화적 배경은 문학 작품의 時局化로 요약된다. 당시 문인들에게 가해진, 시국화라는 이 굴레는 문화의 일반성을 희석시키고 정책적 요구에 따른 특수한 양상을 드러나게 했는데, 침략전의 전초적 현상으로서의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189)
한국문화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있어서 그 선봉 기수의 역할을 한 것은 언론 탄압이었다 .식민지 정책의 급선무가 언론, 집회, 출판 등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입과 귀와 눈을 막아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91)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우리 국민들의 비분강개하는 우국충정이 기세를 올리자 총독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907년 光武 新聞紙法을 제정한 것이 우리 민족의 언론 및 출판 탄압의 첫 조치였다. 또한 1909년에는 出版法을 제정하여 출판의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고 언론을 탄압하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이다. 新聞紙法과 出版法으로 한일합방 전부터 언론 출판을 탄압해왔던 統監府는 合倂과 더불어 언론 출판물을 모조리 廢刊시키고, 그들의 기관지를 통하여 침략정책을 감행하였다.(191)
1919년의 삼일운동으로 문화정치라는 이름의 허울좋은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던 일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긴장을 유발하고는 揭載制限令이라는 檢閱制를 철저하게 시행하여 더욱 우리의 언론 출판 문화 행위를 통제하는 한편, 항일사상과 한국민족사상에 대한 억압조치를 강화하였다.(191)
이 시기의 문화 탄압은 군 보도부와 총독부 도서과에서 주도적으로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1940년 총독부 경무국장 명의로 발표된 '風俗警察取締要綱'이라는 담화는 그 내용이 국민의 사생활까지 탄압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전시적 인간형을 만들려 한 것이다.(191)
이 시기의 가장 치명적인 문학적 탄압의 증거로는 우리말 사용의 금지에 관한 것이다. 공적인 의사소통은 완전히 日本語로 이루어졌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일본어를 통용시키는 일본어 상용정책이 수행되었다. 우리말을 말살하고 일본어를 어느 자리에서나 사용하게 하려는 정책이 바로 이것이며, '國語常用'이라는 당시 어느 공공 건물이거나 간에 벽에 붙은 표어는 단순히 요식적인 것만 아니요, 전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할 만큼 영향력이 큰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특히 암흑기 시대에 일본어로 창작된 문학작품은 그것이 당대의 불가피한 사회적 조건에서 파생된 거의 유일한 창작수단이요, 구차하나마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히 한국문학의 범위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온당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191)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일본어로 제한하는 정책은 바로 이어서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창작시키는 데로 진행되었다. 식민지의 언어정책은 문학정책과 맞물려 친일을 적극적으로 찬양 고무하는 정략적 특징을 띠고 문학창작을 이끌어 가도록 유도되었다.(192)
문학이 일정한 목적의식에 의하여 침식당할 때 문학의 예술성과 독창성이 소멸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제말 암흑기의 문학은 전쟁 완수라는 시국적 요청을 충실히 반영, 어떻게 하면 이에 공헌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았다. 이에 따라 문학은 침략전쟁의 성공적 완수라는 정책적 목적을 위해 사역 당하게 된다. 일본이 대륙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戰勝에 혈안이 된 분위기 가운데 전쟁의 흥분 속에 휩쓸려 박수갈채를 보내는 우리 문학인들이 속출하였다.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든 또는 강요된 것이든, 이 시기의 상황은 광적인 침략전을 찬양하는 작가만이 戰時文學家로 살아남을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192) 분위기였다.(192-193)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崔載瑞는 국방체제하에서의 문학은 시국에 맞는 문학관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국민문학'의 이론적 기반을 담당하였다. 그는 국민문학이 우선 일본국민의 이상으로서 동양을 지도해야 할 문학이요, 한마디로 '일본 정신에 의해 통일된 동아문화의 종합'을 주장하였다. 그는 주로 국민문학이라는 기준 아래 문학의 원론에 관한 글들을 발표, 앞장서서 친일문학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문학원론'에서 敎訓說과 快樂說을 절충한 순수문학의 이론을 내보인 바 있는 그는, <<국민문학>> 창간호(1941.11)의 「국민문학의 요건」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변신을 하나의 문학적 이념으로 교묘히 호도하고 있다. 이 글은 1) 국민문학은 특수한 문학이 되는가, 2) 작가의 국민의식, 3)주제의 문제, 4) 비평기준의 문제, 5) 국민성격의 형성력으로서의 문학 등 모두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재서는 이 글에서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비상시"의 상황에서 당대의 문학이 지향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戰時體制에서의 문학이란, 유럽의 문학적 전통에 뿌리를 박은 "근대문학의 한 延長"이 아니라,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담은 대표적인 문학이며, 따라서 군국주의의 이념을 그 전제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과거에 가치를 부여했던 '純粹意識', '個人意識', '個性', '敎養' 등이 '국민적 이상', '국민의식', 국민생활' 등으로 둔갑하는 이러한 그의 변신은 무주체적 관념적 현실 수용의 나약한 自己變身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이 시대의 암울한 정신사적 파산의 한 양상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193)
침략당한 植民地人으로서 지배자가 내세운 '국가'라는 허구 속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그 從屬論理에 따라 가치와 이념을 추구하려 한 최재서의 '국민문학' 이론은 백철·박영희 등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고, 그리하여 이른바 國策文學이 이 시대를 주도하고, 그 문학적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193)
최재서에 의해 그 서막이 열린 친일문학의 준동 양상은 '친일 잡지의 등장'과 '친일 문학의 등장'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는데,...(193)
40년에 들어오면 본격적인 친일문학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30년대 말경부터 친일적인 구호와 논설들이 등장하고, 전시하의 시국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강요하는 이른바 <<국민문학>>이 대두함에 따라 당시 우리 문인들의 심중에는 靜中動의 파문이 일기 시작했고, 태도 결정에 있어 심각한 번민과 갈등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당시 문단의 경향은 적극적으로 시국에 협력하거나, 붓을 꺾고 지조를 지키거나, 여러 가지 압력에 굴복하여 전향의 대열에 뒤따라가는 경우 등으로 나뉘지만, 그러나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또는 생존의 방편이든 出世 揚名의 수단이든, 대부분의 문인들은 친일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의 창작태도를 바꾸고 '전향'을 긍정적으로 다루거나, 침략전을 破邪顯正의 聖戰으로 미화하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195)
전쟁말기, 日帝는 생사를 초월한 국가관, 국가에 대한 자기 희생과 적극적인 봉사를 강요한다. 그 결과 戰死는 곧 천황을 받들고 국가를 위하는 영광된 길이라는, 軍國主義 사상이 국민 정신의 기조를 이루게 된다. 이에 따라 이른바 '국민문학'은 聖戰에의 참전을 부추기거나, 지원병들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또는 일본 정신을 함양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戰勝을 위한 '죽음의(198) 행진'을 미화해서 이를 강요하거나 '鬼蓄美英'을 부르짖기에 이른다.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잃은 親日群像들은 반도 출신들에게도 성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크신 天皇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一死'뿐이라는 狂氣를 드러낸다. 이 시기의 광적인 어용문학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狂的인 戰爭讚美의 문학, 다른 하나는 鍍金된 御用으로 친일을 은근히 조장하는 경향의 문학이다.(198-199)
1942년경부터 이성을 잃은 채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하고 전쟁을 찬미하는 시와 소설, 논설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는 광적인 열의로 親日이란 목적의식을 성취하려 했다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199)
鄭人澤의 <돌아보지 않으리>는 당시 軍 보도부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한 전형적인 어용 작품이다. 표제부터가 일본을 위해 出戰하면 목숨을 바치고 되돌아보지 않겠다는 맹세의 詩句이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戰士의 희생을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미화시킨 작품이다.(199)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 중에는 전시체제하의 시국적 색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광적인 전쟁 찬미'작품들과는 그 성격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작품, 다시 말해서 억지로 강요당해 써진 듯한 작품들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修辭的으로 '鍍金된 御用'으로 볼 수 있는데, 광적인 전쟁 찬미, 적극적인 친일작품은 아니지만 시국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 범주의 작품은 그래도 나름대로 서정성도 확보하고 있고, 구성이나 묘사 등 서술 기법이 수준 이상이라 할 수 있는데....(200)
<<인문평론>>과 <<국민문학>>을 무대로 전개된 일제 말기의 評論은 戰時體制의 시국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 시기의 평론은 이들 잡지의 발간 취지와 편집 방침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한다. 문학론과 시국론을 적절히 안배하여 게재한 <<인문평론>> 초기의 평론은 주로 문학의 순수성을 표방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시국적인 논설들이 대두하면서부터 그리고 <<국민문학>>에 이르러서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거나 戰時下에서의 문학의 역할을 역설한 것들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른바 '국민 문학론'이 그것이다. '국민문학론'은 '일본 정신'과 군국주의의 구현, 국가관의 확립, 同祖同根論, 銃後文學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최재서는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앞장섰다.(201)
일제말기 문학의 성격은 이른바 황민화 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국민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문학'은 식민지 지배체제라는, 그것도 戰時體制라는 특수한 정치적·사회적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일본 정신을 함양하고 군국주의를 고무 찬양하기 위해 급조된 官制 御用文學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국민문학'은 본질적으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고 기생함으로써 존재가 가능했고, 이 점에서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친일 문학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은 그 주제와 제재, 그리고 창작 동기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전반적인 성격은 '內鮮一體의 皇道文學'으로서, '문학적 이념의 파탄'을 드러내 결과적으로 '민족문화 전통의 昏迷'를 가져온 '畸形的 戰時文學'으로 규정할 수 있다.(203)
일제말기 문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황민화'의 당위성 강조에 있다. 이 시기의 친일문학은 따라서 '內鮮一體의 政策文學'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내선일체'의 문학, '國體明徵'의 일본적 국가관을 체득시키는 문학, '국민사기의 진흥'을 고무 찬양하는 문학, 그리고 '국책에 협력'하는 문학을 지향했다.(203)
지원병제·징병제를 실시, 조선인들을 전쟁에 강제 동원한 일제는 일본적 국민의식의 앙양, 지도적 문화이론의 수립, 국민문화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이른바 '국민문학'운동을 강요하고, 친일문학인들은 이 같은 시국에 편승하여 이를 광적으로 전개해 나갔다.(203)「국민문학의 요건」을 발표, 친일 어용문학의 길을 연 최재서가 그 대표적인 문인인데, 이들은 植民地人이면서도 일제가 내세운 '국가'라는 허구 속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이 종속 논리에 따라 문학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문학적 이념의 파탄을 자초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시기 문학이(으로 하여금-인용자) '國策文學' 또는 '銃後文學'의 성격을 띠게 한다.(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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