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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순 지음, 신승하 외 옮김, , 고려원,1994
2009년 05월 16일 21시 40분  조회:1953  추천:0  작성자: 방룡남

만보산사건은 일본이 만몽(滿蒙)에서 토지상조권(임차권)을 얻음으로써 만몽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지 권익을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경제외교를 이때 외교이념의 특징으로 삼았던 幣原외상은 이 권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중국측의 단호한 저항과 반대에 한때 동요되어 경찰관을 철수시켰던 장춘·길림의 영사에게 강경한 태도로 최후까지 노력하라는 전보를 여러 차례 쳤다. 중촌사건은 中村震太郞대위가 흥안령의 군사적 지형 정찰을 위하여 이 지역으로 출동하였다가 현지 주둔군에게 사살된 사건이였는데, 외무성이 파견한 현지 주재기관은 이 특무정보활동에 대하여 강변하였고, 또한 이 사건을 이용하여 만몽에서 일본의 권익을 확대시키려 하였다.
외무성과 폐원외교의 이와 같은 노력은 관동군의 최고 목적-무력에 의한 만몽점령-과 다름없는 것이었는데, 관동군의 군사행동에 의한 식민지 권익의 획득과 일치되어 외교교섭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만보산의 토지상조권 문제도 만주사변에 의하여 해결되었기 때문에 만몽에서 일본제국의 국익을 확대시킨 공통성이 있다. 외무성이 주도적으로 처리한 만보산, 중촌 두 사건에 폐원외교는 [연약외교]라고 비난받았으나 외무성과 폐원외교의 두 사건에 대한 강변과 중국측에 대한 대응은 만주사변 도발의 여론을 조성하고 그 사회적 기반을 만들었다.(13쪽)
그러나 외무성과 폐원외교는 만주사변을 위하여 열강의 양해를 얻는다던지, 혹은 특정한 열강과 도맹관계를 체결한다던지, 혹은 외교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등 외교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또한 만주사변으로 태어난 [만주국]이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하였(13쪽)던 외교적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4쪽)
일본은 사변에 대한 제3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교섭을 주장하였으나, 중국은 일본 침략을 국제연맹과 열강에 호소하여 그 힘을 빌려 일본을 제제하고 사변을 해결하려 하였다.(14쪽)
국제연맹은 세계의 대소 50여개국으로 성립된 국제적인 기구였으며 주로 큰 나라 열강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구라고 말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제연맹과의 관계는 주로 열강과의 관계나 다름이 없었다. 열강과 일본은 모두 제국주의 국가로서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에서의 식민지적 권익을 보호, 확대하려는 공통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를 위하여 상호간에 도정 협력하여 서(14쪽)로 얻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에 지지하는 일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일본과 열강은 중국침략에서 각자의 권익과 세력범위를 확대시키기 위하여 서로를 배척하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러한 쟁탈을 위하여 때로는 상대국의 침략을 반대하고 제한을 가하는 일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 양면적 관계가 열강과 일본과의 이중 관계였다.(15쪽)
폐원외교에는 이중성이 있었다. 폐원외교는 대내적으로 불확대의 방침을 주장하여 관동군의 군사적 확대를 견제하고 제한하면서,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을 대표하는 외교로서 관동군의 모략적 군사행동에 관하여 전면적으로 강변하여 그 군사적인 행동에 외교적 국제적 보장을 부여하기 위하여 시종일관 노력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폐원외교에 대한 연구와 평가에 있어서는 주로 사변초기의 대내적 견제 역할을 중요시, 폐원외교가 국제연맹·열강과 중국에 대한 외교에서 보여준 역할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16쪽)
상해사변시기 芳澤외교는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처음부터 군부와 일치 협력하여 외무성과 군부는 하나가 되어 행동하였다. 방택외상은 육군대신과 함께 上海出兵을 결정하고 열강의 개입과 협력을 주동적으로 요구하였다. 군부도 열강의 개입에 같은 요구를 하였다. 이것은 상해사변시기의 방택외교가 만주사변시기 폐원외교가 열강의 개입을 반대하였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상해사변의 특이성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상해사변은 [만주국]의 수립부터 열강의 눈을 돌리고 만주국의 성립에 열강이 간섭하는 것을 견제하려는데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열강의 식민지 권익이 집중되고 있는 상해로 집중시키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상해사변에서는 두가지 상호 모순되는 정책을 취하였다. 하나는 사변을 도발하여 일본과 열강과의 모순을 격화시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열강을 사변에 끌어들여 여기에 협조하거나 또는 타협하는 것이다. 전자는 군부가 취한 정책이고 후자는 외무성이 주로 취한 정책이다. 이 두 정책은 방법 수단으로서 상호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열강의 눈을 돌리는 목적에서는 일치되는 것이다.
열강은 일본의 계획에 따라 상해사변에 끌려들어가 일시 만주국의 수립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못하게 되었고, [만주국]은 열강의 특별한 저항없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상해사변은 일본과 열강과의 모순을 격화시(19쪽)키고 [만주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는데 역작용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0쪽)
[만주국]은 일본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국가주권이 없는 식민지로서 외교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만주국]은 식민지이면서 또한 독립국가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주국]을 둘러싼 외교문제가 제기되게 되었다.(20쪽)
사변후에 대[만주국]외교는 하나는 식민지 체제의 확립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만주국]승인과 국제연맹 열강의 이에 대한 승인의 획득문제였다. 이 외교는 먼저 內田외상시대부터 시작되어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변후의 외교가 이처럼 오랜기간 계속되게 된 것은 일본의 전쟁사와 또한 외교사에 있어서도 유일한 현상이었다.
사변후 만주에 대한 외교 특징의 하나는 바로 그 양면성에 있다. 이면적으로는 외무성이 군부와 함께 그들의 식민지체제 확립 조정에 모든 힘을 경주함에서도 표면적으로는 역으로 그들의 식민지적 괴로정권을 세워 이른바 [독립성]을 장식하기 위하여 필사적이었다. 이 양면성의 정책을 拓務省은 [양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라고 빈정댔다.(20쪽)
[만주국]이 국제적인 승인을 얻는 일은 독립국가로서의 승인을 받는 것에도 있었지만 오히려 일본의 만주침략과 일본의 식민지로서의 [만주국]이 열강에 의하여 승인을 얻는 것에 있었다. 이것은 일본과 열강이 만몽을 다투기 위하여 제기된 현상이기도 하였다.(21쪽)
일본외교에 있어서 [만주국]문제는 국제정세와 戰局의 변화에 따라서 그 위치가 바뀌었다. 중일전쟁에서 첫 번째 자리를 잡고 있던 [만주문제]가 일본과 미국교섭에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순위는 여덟 번째가 되었으며, 1944년 태평양전쟁의 후반기에는 어떻게 현상을 유지하느냐로 바뀌었으며, 1945년의 여름에는 종전외교의 하나로서 [만주국 문제]가 이용되어 대미국 대소련 외교의 [토산물]로서, [만주국]의 국제관리, 중립화 혹은 북만철도와 旅順을 소련에 양도하는 등으로 변화, 전국의 변화에 따라 [만주국]의 위치도 바뀌었다.(21쪽)
남경정부는 이와 같은 판단에 근거하여 만주사변에 저항도 간섭도 하지 않았으나 상해사변에서는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한편으로는 교섭하였으며, 열하작전에서는 저항 불교섭(최후에는 교섭)의 방침으로 대응하였다.(26쪽0
남경정부의 만주사변에 대한 외교의 특징은 국제연맹이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關東軍을 만철 부속지에서 철수시키고, 국제연맹 총회의 최종보고에 의하여 일본을 제재하면서 괴뢰 마주국을 해산시키려는 것이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남경정부는 국제연맹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고, 미국에 기대를 갖게 되어, 9개국 조약에 의하여 만주사변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 기대에 따르는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았다.(26쪽)
남경정부는 [만주국 문제]가 단기간 안에 해결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장기적인 외교정책에 의하여, 또는 일본 국내의 정치세력의 변화에 의하여, 또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 이면에는 [패배론]이 있었다. 남경정부는 군사적으로 일본에 대항하면 반드시 진다고 판단하여, 저항은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능한 한 자신의 군사적 세력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장학량·장개석이 모두 그러했다. 특히 장학량이 그러하였다. 이것이 [패배론]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 [패배론]과 자기세력의 보존에는 역사적으로 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911년 辛亥革命에서 청조가 붕괴된 다음에 특히 1916년 袁世凱가 사망한 다음에, 중국 국내에는 군벌이 난립하여 軍閥混戰時代로 들어갔다. 1926·7년의 북벌에 의하여, 신흥군벌이 된 장개석은 형식적으로 한때 이 군벌세력을 통일하였으나 군벌 내부의 대립가 혼전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군벌은 반봉건적인 군벌로서 지방할거 세력이었다. 그들은 각자 분할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자신의 군사적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숫자적으로 일본군보다 수십배나 되는 중국측 군대는 대외 침략자에 대결하려 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세력지반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장학량·장개석도 모든 힘을 다하여 일본과 대결하여 결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결전에서 패배하면 스스로의 지배지역이 모두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사변에서 남경정부의 부저항 혹은 소극적인 저항에는 이와 같은 반봉건적 군벌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27쪽)
다음으로 현실적인 문제로는 공산당의 혁명근거지와 工農紅軍에 대한 [圍剿]작전이 있었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쿠테타로 공산당을 탄압하여 제1차 국공합작을 파괴하였다. 그후 國共양당은 대립적인 국내전쟁으로 들어갔다. 국민당은 1930년 12월에 10만군대를 동원하여 제1차[剿共]작전을 시작하였다. 1931년 4월에는 20만 군대를 동원하여 제2차 작전을 하고, 이해 7월에는 3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3차 작전을 시작하였다. 만주사변은 바로 이시기 중간에서 일어난 것이다.(28쪽) 이를 위하여 국민당의 남경정부는 대공작전을 중요시 하고 일본에 대하여 부저항 정책을 취하였다. 상해사변때에도 약 5개 사단을 상해에, 30개사단을 대공산당포위에 배치하여 상해정전협정을 성립시키자 마자 바로 60만의 군대를 출동하여 제4차 [圍剿]작전을 시작하였다. 1933년 5월에 당고협정에 의하여 만주사변이 일단 종결되는 것처럼 보이자 10월에 바로 백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5차 공산당에 대한 [위초]작전을 시작하였다.(28쪽)
만보산의 서남 10-51㎝(㎞의 오타가 아닐가-인용자)가 되는 곳에 伊通河가 있으며, 강의 서안에 三姓堡·馬家哨口·宮荒屯 등의 촌락이 있는데, 그 주변에는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수만경이나 있었다. 이 토지의 소유자는 매년 정부에 지세를 납부하였는데 그 재정적인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에 일부 한인 농민들을 고용하여 수전(논)을개발하고 있었다. 제3구의 구장 曹彦士는 1931년 3월에 현정부에 이 일을 보고하여 현정부도 이 황무지의 개발을 통감하고 그에 관한 구체적인 대책을 검토하였다.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만보산 지방에서 토지상조권을 획득하고자, 이 일대에 한인 농민을 대량으로 이주시켜 수만경의 토지, 즉 논을 개발하려고 하였다. 중국국민당 길림성 당무지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0집, pp.570-1-인용자 재인용) 일본측은 이통하 양안에 17개의 수로를 굴착하여 한 수로에 1천경의 水田(논)을 개발하도록 하여 약 2만경의 수전을 조성하고 한인 농민 2·3만명을 이곳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본은 또한 滿鐵線을 馬家哨口까지 연장하여 한인 농민의 거주를 구실로 영사관과 경찰서까지도 설치하고자 하였다. 만보산 지방에 대한 개간문제는 이 장기계획의 한 부분으로 일본이 만몽지방에서 토지상조권을 획득하고 중국측에게 인정시켜 만모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지적 권익을 신장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측은 만몽지역에서 일본인에 대한 토지상조권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직접 중국의 지주로부터 토지를 빌리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중국인 매국노  永德을 이용하였다. 학영덕은 일본측과 공동으로 비밀리에 어용회사 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여, 이 회사의 이름으로 만보산의 지주인 張鴻賓·蕭翰林 등 12명과 4월 16일에 황무지 5백향(頃의 오타인 것 같다-인용자)의 租地契約을 체결하였다.(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0집, pp.505-7-인용자 재인용) 학영덕은 이 토지를 스스로 경영 경작하지 않고 바로 한인 토지경영자인 李昇薰 등 9명에게 轉貸하여 그들과 10년동안의 계약을 체결하였다.(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0집, pp.507-9-인용자 재인용) 이승훈(33쪽) 등은 길림성 각지로부터 한인 농민 180여명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살도록 하였다. 4월 18일부터 먼저 황무지와 이통하를 연결하는 수로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수로용지는 두가지의 계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체 길이 10㎞에 걸친 수로용지는 당지 41명의 농민 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게 되었다. 당지의 농민들은 4월말부터 한인 농민들의 굴착공사를 저지하려하였는데, 한인 농민들은 일본 관헌의 지지아래 수로굴착공사를 계속하였다. 5월 하순에 중국측 농민은 이 문제를 직접 성정부에 탄원하였다. 25일에 장춘현 공안국은 중국 경찰을 파견하여 공사중지를 권고하였으나 한인 농민들은 공사를 계속하였다. 중국 경찰은 한인 감독을 구속하였다. 6월 1일에 장춘현 정부는 직원을 파견하여 이 현의 경찰과 협력, 평화적인 수단으로 한인 농민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한인 농민은 철수하지 않았다. 중국 경찰은 그들의 우두머리 8명을 공안국으로 연행하였다. 6월 3일에 장춘현 공안국장은 기마대 50명과 경관 10명을 이끌고 이미 연행한 8명과 함께 수로 굴착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마가초구에 가서 공사중의 한인 농민을 쫓아냈다. 일본측은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일본영사관의 경찰관 10명의 지원아래 한인 농민에게 계속하여 공사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농민과 한인 농민, 중국 관헌과 일본 관헌이 대립하게 되어 7월 1일에 일본 영사관의 경찰관 발포에 의하여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34쪽)
한인 농민의 만몽지방 이주는 본래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역사적 관계와 국제법이 명확하지 않아 자연적인 왕래에 속하는 것이었으나, 청일전쟁후부터 서서히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만몽침략 정책의 일환으로서 그 성격을 바꾸게 되었다. 일본은 1908년 조선에 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성립시켜 1910년까지 2년동안에 1만1천 정보의 조선 농민의 토지를 탈취하였다. 조선병합후에는 이른바 토지조사를 통하여 또한 102만 5천 정보의 토지를 탈취하였으며, 동양척식회사도 1920년에 10만 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다수의 조선인 농민들이 몰락하여 토지를 잃은 소작농이 증가하였다. 그들은 생존을위하여, 토지를 구하기 위하여, 조상의 고향을 떠나 土們江과 鴨綠江을 건너 만몽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이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의 산물이었으나 동시에 또한 일본의 만몽정책의 한 구성 부문으로서 일본에게 이용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21년 5월 봉천총영사 赤塚正助가 편찬한 <在滿朝鮮人問題>란 제목의 보고서는 [요컨데 조선인들이 중국 관민으로부터 거주의 위협을 느끼는 박해를 받지 않고 비교적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고 살도록 그들에게 평등하게 재정적인 원조를 보태주어 장래 이들의 생활이 낳아지게 되면 제국(일본)의 북만주로의 발전에 유용함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滿洲移民史硏究會 編, <<日本帝國主義下の滿洲移民>>, 龍溪書舍, 1976, p. 325-인용자 재인용)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있어서 한인의 만몽이민이 기대되어, 일본의 만몽정책의 일환으로서 추진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35쪽)
일본은 만주에 있는 한인의 국적 문제에 대하여 일본에 유리한 때에는 한인이 귀화하여 중국의 국적을 취득하게 되고, 또한 한인이 이른바 [일본신민]으로서 국적이 일본에게 있을 때가 유리한 경우에는 일본 국적을 적용하였다. 이것은 한인의 이중국적이 일본의 만몽정책에 유리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중국적 문제는 일본의 만몽침략정책과 직접 관련된 문제가 되었다.
중국측은 일본의 만몽정책의 일환으로서 한인의 이중국적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만몽지방에 있는 한인이 완전히 귀화한 중국국적을 취득하기를 원하였다. 7월 상순에 만보산 사건후 조선에 있는 화교배척 사건을 시찰하기 위하여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일본주재 중국공사 汪榮寶는 조선의 민족주의 단체인 新幹會 간부와 회담하였을 때 [신흥 중국이 평소부터 치욕을 감내할 수 없었다. 영사재판권과 치외법권의 철폐를 위하여 진력하고 있는 오늘날 한인이 이중국적을 갖고 있는 것은 침략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이 분쟁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중국에 귀화하게 되면 만사는 해결된다](<<朝鮮日報>>, 1931년 7월 19일-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만보산 사건과 이중국적 문제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만보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38쪽)
동북당국은 일본의 만몽정책의 일환이 된 한인 농민의 이중국적 토지소유권 문제에 대하여 1928년부터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봉천성정부는 28년 3월 <日鮮人土地耕作團束에 관한 訓令>, 29년 4월에 <이주조선인 단속에 관한 훈령>, 같은 해 7월에 <조선인 토지경작 단속에 관한 훈령>을 내려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39쪽)
일본측이 특히 논의 벼농사를 고집하게 된 이유는 수로용지에 대한 토지상조권을 획득하는 문제이외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삼았던 만몽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몽에는 관동군·만철직원과 그밖의 일본인이 약 23만명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쌀을 현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45쪽)
주옥병처장(장춘시정주비처-인용자 주)은 수로용지는 절대적으로 점거하는 일을 허가할 수 없으며 한인 농민의 구체적인 생활 곤난상황에 따라 개간하는 논을 밭으로 바꾸고 이에 의한 손해는 학영덕이 배상하는 안을 제의하였다.(<<上海新聞報>>, 1931. 7. 9-인용자 재인용) 이것이 중·일 타협안인데 일본측은 찬성하지 않았다. 林총영사는 15일에 張作相에게 [한인들이 지주에게 공사관계로 입힌 손해를 배상하는 대신에 중국측은 이곳에서 한인들이 논농사를 하도록 인정](Microfilm, S483 reel, Sl. l. l. 0-18. p. 68-인용자 재인용)하라고 요구하였다. 奉天省 주석 臧式毅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하였다.(45쪽)
봉천의 森岡영사도 이곳 영사관을 방문한 길림성 정부의 교섭서 주임 施履本에게 [중국측에서 시간을 끄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이후 이틀안에 수로공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다하고 일본측은 한인들이 이 지방에 거주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논농사를 경영하는 것 이외에 없다]고 말하였다.(Microfilm, S483 reel, Sl. l. l. 0-18. p. 86-인용자 재인용) 시이본은 논농사를 밭농사로 바꾸고 이에 의하여 발생된 손해는 중국측이 배상하는 안을 다시 제의하였으나 삼상영사는 [귀하의 제안은 절대로 승인받을 수 없다](Microfilm, S483 reel, Sl. l. l. 0-18. p. 88-인용자 재인용)고 반대하였다.(46쪽)
7월 상순에 한국에서 일어난 화교배척사건의 도화선은 <<朝鮮日報>>의 호외때문이었다. 호외는 [중국관민 800여명이 200동포와 충돌 부상, 중국 주재경찰관과 교전, 급보에 의하면 장춘주재 일본 주둔군이 출동준비, 三姓堡에 풍운이 점차 급함], [대치한 일·중관헌이 한시간여 교전하여 중국 기마대 600명이 출동, 급박한 동포의 안위], [철수요구를 거절, 기관총대를 증파], [전투준비]이라고 만보산 사건을 확대하여 보도하였다.(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第一書房, 1981, p. 117-인용자 재인용) 이 보도를 본 한인들은 인천·진남포 평양 등 30여개소에서 화교를 박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화교는 사망자 121명, 부상자 300명, 실종자 77명, 재산손실 수백만원의 피해를 입었다.(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3집, p. 664-인용자 재인용) 만보산 사건과 화교배척사건과의 관계를 해명하려면 이 사실을 확대 보도한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金利三과 외무성의 현지 주재기관과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天津 <<大公報>> 北京 <<晨報>> <<吉長日報>> <<益世報>>는 김이삼이 일본영사관의 사주를 받아 과장된 허위적인 떠도는 정보를 보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吉長日報>>, 1931. 7. 16-인용자 재인용) 김이삼은 早稻田大學출신으로 7월 15일의 <<조선일보>>에 <조선일보 기자의 사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는 [만보산의 한인 농민은 불합리한 투쟁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이미 현장에서 퇴거한 자가 많으며 남아있는 한인 농민도 일본 경찰의 저지에 의하여 자유롭게 퇴거할 수 없기 때문에 진퇴양난의 어려운 처지에 처하여있다.] [만보산 사건은 일본영사관(71쪽)의 사주를 받아 허위로 본국에 허위보도를 타전하고 나아가 양민족이 충돌하는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한·중 양민족에게 사죄한다]는 뜻을 표명하였다.(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第一書房, 1981, pp. 135-6-인용자 재인용) 이 사죄성명은 滿蒙에 있는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위협아래 쓰여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의 신빙성이 문제가 있을지 모르나 김이삼이 7월 15일 길림시의 遠東旅館에서 길림총영사 순보 朴昌厦에게 암살되었다는 것은 총영사관의 사주에 의하여 김이삼이 허위적인 보도를 타전하였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닌가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일세보>>는 7월 19일에 [오호 일본제국의 추행, 한인의 화교배척을 충동하고 있는 확증, 조선일보기자 일본영사의 사주받아 날조 선동. 차후 참회해서 흑막을 폭로하고 일본경찰에게 총살되다]라고 보도(72쪽)
화교배척사건이 발생한 다음 중국의 각 신문은 가장 큰 문제로 이 사건을 보도하여 중국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고 광범위한 충이 참가한 반일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운동은 上海를 중심으로 일본상품의 불매운동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상해에서는 7월 13일에 시상회 노동조합·각 민중단체 등이 반일화교후원회를 성립시키고, 한국에 있는 화교를 후원하는 자금을 모금하고 동시에 일본상품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이 회는 17일에 <일본상품배척방안대강>·<일본상품저지방법대강>을 제정하였으며, 29일에는 <일본상품처리방법>을 결정하고 일본상품검사소를 설치, 실력으로 일본상품을 압수하였다.(76쪽)
이와 갈이 화교배척 사건에 대한 중국인들의 투쟁방향은 만주에 있는(76쪽) 한인들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향하여 있었다. 이것은 남경정부 중국민중단체와 언론에서 화교배척 사건에 관하여 정확하게 이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국국민당 길림성당무위원회의 <만보산 화교배척 두 사건에 관하여 민중에게 고함>은 만보산·화교배척 사건의 원인은 불평등조약에 있으며 [민중은 일치 단결하여 주동적으로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우리 동포는 세계의 약소민족과 연합하여 공동분투하자]는 구호를 제창하면서 청백충실한 한인에 대하여 인식을 한층 더 분명하게 이해하여, 확실히 연합하여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영원히 우의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일치 노력하여 공동의 적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遼寧省 案館史料-인용자 재인용)고 길림성안의 중국 민중에게 호소하였다.(77쪽)
이른바 만보산 사건은 한인 농민과 만보산지역의 중국 지주 농민과의 토지분쟁 형식으로 발발한 사건이었으나 실은 일본의 만몽에 대한 토지 상조권 획득과 중국정부 당지의 지주 농민이 일본의 이러한 경제침략에 반대하는 것에 의하여 일어난 충돌이었다. 그 성격은 토지상조권의 문제로서 한인 농민이 일본측에 이용되어 양측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난 사건이었다.(92쪽)
상해는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는 거점이었으며 따라서 열강은 상해에 대량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당시 상해에 투입되어 있던 외국 투자는 일본-3억 8천만량, 영국-5억 3천 4백만량, 미국-1억 6천 3백만량, 프랑스-1억 3백만량이었으며 무역액(1930년 현재)은 일본-1억 7천 2백만량, 미국-2억 5천 7백만량, 영국-2억 9천 8백만량이었다. 열강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상해에 거대한 식민지 권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만주사변 이래 중국 인민의 반일, 반침략의 투쟁 가운데 열강도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공동의 운명에 처해 있었음을 말하주는(179쪽)것이라 할 수 있다. 관동군의 板垣 등이 다른 지방도 아니고 상해에서 사변을 도발한 원인도 상해 지구의 이와같은 특징을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180쪽)
3월 1일의 괴뢰 만주국의 수립, 같은날 상해 파견군의 총공격과 3일의 임시총회의 개최는 거의 같은 시기에 겹쳐지고 있다. 이것은 우연한 현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1일의 괴뢰 만주국의 수립은 3일의 임시총회 개최 전에 이를 기정 사실로 만들어서 임시 총회가 개최되면 여기에 압력을 가하여 총회가 이 기정 사실을 묵인하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1일의 총공격은 3일에 개최된 임시 총회의 시선을 상해 문제로 집중시켜 괴뢰 만주국의 수립을 열강의 눈으로부터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195쪽)
우선 외무성은 일본이 멋대로 세워놓은 괴뢰 정권을 동북인이 전개한 독립 운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괴뢰정권 수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1월 25일 국제연맹의 제4차 이사회가 개최되게 되었다. 이 이사회에 대한 대책으로 芳澤외상은 일본측 理事에게 만몽 독립운동은 [이른바 동북인의 동북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운동이 이번 사변 이후의 시국을 이용하여 표면에 드러난 것으로 생각되는바, 소위 독립 운운하는 일은 중국에서 흔히 있는 일로 이번 운동도 요컨데 순수한 중국측 내부의 문제로서 우리가 관여할 이유가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23-인용자 재인용)라고 변명하도록 지시하였다. 25일 재개된 이사회에서 佐藤尙武이사는 [일본군이 만주에 출병한 이후에도 중국 관민은 여전히 동지방에 안주하고 있으며 오로지 지방 정부의 교체만이 있었을 따름](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34-인용자 재인용)이라고 변명하였다.(273쪽)
괴뢰 만주국을 승인할 것인가의 여부는 일본과 열강이 만몽을 쟁탈하는 투쟁이기도 하였다. 19세기말 이래 일본은 열강과 쟁탈 가운데에서 남만주에서의 식민지 권익을 획득하였으나 이제는 전 만몽에 대한 패권을 쟁탈하게 된 것이다. 열강은 남만에서 일본의 권익을 승인하였지만 일본이 전 만몽에서 패권을 확립하는 데에는 반대하여 일본과 만몽을 쟁(281쪽)탈하였다(282쪽)
연맹은 2월 15일 [국제연맹 규약 제15조 제4항에 따른 국제연맹 총회 보고서]-소위 최종 보고서를 일본 대표에 넘겨주었다. 이 보고서...제4부 권고의 기술에서는 리튼보고서 제9장의 10원칙을 전면적으로 채용하여 일본군이 부속지 내로의 철병과 만주 자치 정부의 건립을 권고하는 동시에 미·소 위원을 포함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양 당사국 간의 교섭을 촉진하도록 규정하였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p. 482-7-인용자 재인용)(301쪽)
총회는 연맹 보고서의 채택에 들어가 지명 투표를 시행한 결과 찬성 42, 반대 1(일본), 기권 1(태국)로 보고서는 채택되었다. 보고서의 채택은 국제연맹과 열강이 괴로 만주국을 부정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일본이 국제적 승인을 획득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3월 27일(1933년-인용자) 국제연맹의 탈퇴를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 후 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계속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302쪽)
일본은 청일전쟁이후 본격적으로 만몽을 침략함으로써 열강과 만몽의 지배권을 두고 쟁탈하였다. 이 쟁탈전에서 일본은 영국의 종용하에 南滿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 후 만몽에서 일본의 세력이 확대되자 열강은 그 세력을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대전 후에 만들어진 워싱턴체제는 열강이 서로 협력하여 만몽 및 중국본토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고 만든 시스템이었다. 일본은 이 견제를 타파하려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 시스템에 도전하였다. 이 도전은 일본이 만몽을 놓고 열강과 쟁탈하는 싸움이기도 하였다.(303쪽)
사변초기에 일본과 열강은 연맹의 옵서버 파견문제를 중심으로 대립하였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에 간섭하는 제1보로서 연맹의 옵서버를 만몽에 파견하여 사변발발의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대책을 강구하여 만몽에서 일본의 군사적 확대를 제한하려고 하였다. 외무성은 대외적으로 關東軍이 사변을 일으킨 사실을 은폐하고(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관동군이 柳條湖의 만철선을 폭파하고 심양(봉천)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독립 수부 보병 제2대대와 제2사단의 보병 제29연대가 북대영과 봉천성을 공격하면서 막을 열었다. 그러나 일제는 장학량의 군대가 滿鐵을 파괴하기 우해 사변을 일으킨 것 같이 세계 여론을 기만하였다.-인용자) 사변에 대한 연맹과 제3국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사변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연맹의 파견요구를 반대하고 연맹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던 것이다.(304쪽)
열강은 만몽을 쟁탈하기 위해 관동군을 부속지내로 철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중국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관동군의 만주군사점령에 대해 동정하는 일면도 갖고 있었다.(307쪽)
폐원외상은 [시찰원의 임무는 중국의 전반적 형세를 현지에서 보고 듣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즉 보다 상세하게 말하면 중국 각지에서 對日 불법행위 내지 일반적인 생명재산의 안전을 확보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위의 안전이 확보되고 있는지, 중국은 일본 기타 각국과의 조약을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위 조약이 이행되고 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재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만주시찰을 목적으로 하고, 특히 아군의 철군 여부와 관련하여 직접 관계있는 사항만을 조사하도록](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561-인용자 재인용) 지시하였다.(308쪽)
이사회의 일본대표부는 폐원외상의 지시에 근거하여 대표부의 試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측이 제출했던 5항목 대강에 근거하여 중·일 양국이 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를 이사회가 승낙하면 연명시찰원의 파견을 고려하는 것으로 하였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570-인용자 재인용) 이것은 시찰원 파견을 중·일간 직접 교섭을 위한 교환조건으로 제출하였던 것이다.(308쪽)
(폐원외상은 일본대표에게)결의문(시찰원파견에 관한 결의문) 가운데에서 [(가)중국 각지에서 排外排貨運動의 상황부터 조사를 진행하고, (나)중국은 외국인 생명재산의 안전을 확보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생명재산의 안전을 확보케 하고 있는지, (다)중국은 외국과 맺은 조약을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기존의 이들 조약이 완전히 이행되고 있는지 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권위있는 위원을 임명케 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609-인용자 재인용)라는 것을 명확히 기입할 수 있도록 훈령했다.
다만 폐원외상의 주관적 생각과는 반대로 열강은 의연히 만주사변에 관심을 갖고, 조사단의 조사목적·범위에 대해 폐원외상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연맹사무총장 드러몬드는 [일본측에서는 중국의 전반적인 상황 조사를 중요시 한 나머지 만주에서 일아난 이번 사건에 관한 조사 등은 비교적 경시하고 있다고 인정된다.]라고 하고, 이것에 반해 [중국측에서 만주사건에 관한 조사를 중점적으로 해야 한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쌍방간의 차이는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하면서 드러몬드는 자신의 결의시안을 제출하였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614-인용자 재인용)(309쪽)
澤田이 폐원외상에게 연맹측의 결의안을 수락하도록 건의하였을 때, 연맹 수뇌는 [시찰위원안을 후퇴함으로써 이로 인해 이번 이사회의 결말을 붙이고, 이로써 연맹으로서는 일본에 대해 기한을 첨부하여 철병을 강요하는 등의 일은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1권 제3책, p. 649-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조사단의 파견을 찬성함으로써 외무성이 획득했던 외교적 [하사품]이었던 것이다.(311쪽)
폐원외상 시대에 있어 전반기에는 조사단 파견에 대해 반대하였고 후반기에는 역으로 그 파견에 찬성하였다. 이것은 모순된 현상으로 보여지나 그 목적은 모두 관동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외교적으로 보장을 제공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폐원외교가 조산단에 대하여 취한 정책의 특징인 것이다.(312쪽)
일본은 조사단을 받아들임으로써 대외적으로 일시 유리한 지위를 보장받았으나 한편 열강은 조사단의 파견을 직접 간섭의 제1보로 하고, 그후 조사단의 현지 보고서를 [무기]로 하여 일본과의 만몽쟁탈에서 새로운 외교태세를 갖추었다.(312쪽)
리튼은 사변의 해결방법으로서 일본은 [만주국의 국제관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고 방택외상에게 물었다. 이 방법은 일본인의 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방택외상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렇다면 지방자치정부를 세우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리튼은 말하였다. 이것(314쪽)은 리튼이 만주사변 해결을 위한 초보적인 방침을 보여준 것이었다.(315쪽)
조사단은 神重戶光를 거쳐 3월 14일 上海에 들어갔다. 重光葵공사는 열강 사이에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반공반소정책을 강조하여 일본의 만몽침략정책을 변호하고, 이를 통해 조사단의 양해를 구하려고 하였다. 22일 重光공사는 조사단에 대해 소련은 [중국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중국의 적화를 끝까지 수행하고 곧 이어서는 인도에도 그 마수를 뻗치자고 하며, 아시아지역에 대한 적화에 성공하는 날에는 다시 세계혁명의 길을 지향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때 [만약 중국측의 희망에 따라 일본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일본의 세력이 만몽으로부터 약화되는 순간 러시아가 곧 남만주로까지 침입할 것은 명백한 것임으로, 나는 오로지 일본의 존립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戰局의 유지라는 책임감에서도 이같은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만몽은 동아시아의 전국을 안정시키는 관건이 되며 만몽이 한번 어지러워지면 동아시아 전국은 붕괴의 속도를 더욱 가속시킬 것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만몽에 대한 행동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05-706-인용자 재인용)라고 언급하였다.(315쪽)
당시 괴뢰 외교부에는 하얼빈 총영사였던 大橋忠一이 차장 겸 총무장으로서 실권을 잡고 외교정책을 좌우하고 있었다. 그가 (위원회를 돕기 위한 조사단 중국측 참여위원 전 외교부장 顧維鈞의 만주입경을-인용자) 거부하는 표면적 이유로는 [顧가 연맹위원의 공정한 조사에 대해 종종의 마수를 삽입시켜 신국가측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두렵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31-인용자 재인용)라는 것이다. 그러나 滿鐵調査課에서 작성한 <고유균의 만주국 입국거부문제의 경과조서>에는 [同조사단 참여위원으로서 중국정부가 임명한 고유균의 만주입경을 저지하여 사실상 만주국이 완전히 중국정부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조사단에 체험하도록 하고, 전세계에도 알리는 뜻에서 만주국의 위 주장을 관철토록 하는 것이 매우 뜻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866-867-인용자 재인용)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이 분석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으며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고 있었다. 대교도 4월 20일 방택외상에게 [만주국으로서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성을 강조하고, 세계로 하여금 이를 인식케 함으로써 첫째는 곧 다가올 만주문제에 관한 국제적 토의에 관해 일본의 입장을 가볍게 하고, 둘째로는 새로운 식민지 통치형식으로서 독립국가주의의 특징을 발휘토록 하는데 촉진케 할 것](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22-인용자 재인용)이라고 그 거부의 목적을 솔직히 말하였다.(316쪽)
관동군 참모장 橋本虎之助는 [고유균에 대한 저지는 만주국의 자유의지가 존재해야 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41-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고, 이것은 괴뢰정권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보이려고 한 것이었다. 주북평 矢野眞참사관도 조사단에 대해 [長春정부는 반드시 일본정부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同정부가 고의 입만에 반대성명을 하는 이상 그것을 저지하기는 곤난하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43-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고, 그 독립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317쪽)
조사단은 고의 입만문제에 관해 [이사회결의에 의거, 중·일 양 정부 이외와는 교섭하지 않고, 만주에서의 보호는 일본정부가 그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중국의 참여없이는 입만할 수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39-인용자 재인용)는 뜻을 주북평 시야참사관에게 전했다. 그러나 괴뢰정권은 계속해서 고의 입만을 거부하고 만약 고유균이 조사단과 함께 입만하면 즉시 강제하차케 한다고 경고하였다. 방택외상은 장춘정권의 양해를 얻기 위해서(317쪽)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구실로 조사단의 일부와 고는 大連을 경유하여 만주에 입경할 것을 제의하였다. 리튼과 남경정부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마지막에는 이와 타협하여 조사단의 일부와 고유균은 대련을 경유하고, 일부는 秦皇島·山海關을 경유하여 4월 21일 봉천에 이르렀다. 이것은 조사단이 일본과 괴뢰정권의 압력아래 괴뢰정권문제에 관해 일본과 타협한 제1보였던 것이다.(318쪽)
조사단은 입만 전후 괴뢰정권의 존재를 무시하고 괴뢰정권과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 [만주국 정부측은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80-인용자 재인용),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조사단에게 제한을 가하였다. 이것에 대해 森島守人봉천총영사대리는 [吉田대사에게, 조사단에 대해 적당한 이해를 제공하고 권력의 존재를 인식케 함으로써 만주국측에 상당한 양해를 보이는 것이 조사단을 위해서도 또한 일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조사단이 결국 어떠한 보고를 하는가는 예측하기 어려워도 만주에는 중국본토와 관계없는 별개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승인토록 하는 것이 공정한 보고를 하도록 하는 기초조건이 되며, 이는 본대사의 굳은 신념을 보이는 것이며, 조사단도 아마 무(318쪽)언가 방법을 궁리해 낼 것으로 생각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80-781-인용자 재인용)고 방택외상에게 의견을 제시하였다.(319쪽)
조사단은 5월 3일 괴뢰 외교부총장 사개석을 방문하고, 사는 [(가)만주국이 성립하였으므로 위원은 제네바 출발 당시의 만주와 현재의 사태를 충분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나)청조는 3백 년 전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한 것으로 중국은 만주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다. 후자를 전자의 일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외국인의 이익 및 외국에 대한 채무는 신국가 성립 당시의 성명과 같이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811-인용자 재인용)고 이야기 하고, 괴뢰 만주국의 승인과 괴뢰정권에 대하여 열강의 호의를 획득하려고 하였다. 4일에는 괴뢰 만주국 국무총리 鄭孝胥와 회담하고, 5일에는 執政 溥儀를 예방하였다. 그때 리튼은 [이와 같은 곤란한 시국을 만나 노고가 많으므로 특히 경의를 표합니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819-인용자 재인용)라고 인사하였다. 그런후 별실에서 잔을 들어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고, 기념촬영에 들어갔다....이러한 접촉을 통해 조사단도 괴뢰정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보고서를 통해 현상회복의 불가능성을 강(319쪽)조하게 된 것이다.(320쪽)
조사단은 관동군사령관 本庄, 참모장 橋本, 참모 板垣征四郞, 石原莞爾, 土肥原賢二와도 회담을 가졌다. 관동군측은 萬寶山事件, 中村事件으로부터 柳條湖事件까지에 관한 설명에서 그들의 침략적 행동을 변명하고 모든 책임을 중국측에 넘겼다. 참모장 교본은 5월 5일 조사단에 대해 소련의 극동방면 병력증강상황을 설명하고 관동군의 대소전략의 의의를 인식케 하였으며, 반소라는 열강과의 공통성을 이용하여 그들의 호감을 얻고자 하였다.(320쪽)
[제국정부로서는 만주국을 승인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길 밖에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947-인용자 재인용)라고 내전외상은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승인할 날짜에 대해 리튼보고서 제출 전으로 해야 하는지 그 후로 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그 영향을 고려하여 결정되지 않았다.(323쪽)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고, 기정사실로서 리튼보고서의 작성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일본정부는 8월 8일 武藤信義를 괴뢰 만주국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고 괴뢰정권에 대한 정식승인에 착수하였다. ...무등대사가 8월 20일 만주로 가서 기본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에 들어간 것...(324쪽)
리튼보고서는 일본과 중국에 대한 열강의 이중성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324쪽)
이것은 일본의 만몽권익을 승인하고, 만몽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아래 만몽자치정부를 내세워 그 내부질서는 헌병대를 통해 확보하고 일본군과 중국군이 함께 만몽으로부터 철수한다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일본의 권익을 승인하면서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고 괴뢰 만주국정권을 부정하였다. 다른 한편 중국에 대해서는 만몽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였지만 자치정부의 형식으로 중국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중국군의 철병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열강의 양면성에 근거하여 쌍방을 타협케 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만주사변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었다.
또한 이 타협적 만몽자치안에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만몽에 침투하려는 열강의 욕망이 포하되어 있었다. 보고서는 [동삼성내에 있어 유일한 무장대인 특별헌병대를 외국인 교관의 협력아래 조직할 것을 제의](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別卷 p. 258-인용자 재인용)하였다. 여기서 외국인 교관이 헌병대를 통제하고, 행정기관에는 외국인 고문을 채용할 뿐만 아니라 외국인 고문으로 하여금 광범한 권능을 행사토록 하려고 하였다. 동삼성 중앙은행에는 국제결제은행 이사회가 추천한 외국인을 총고문으로 임명하려고하였다. 이 군사교관과 고문이 [만주자치정부]의 군사·정치·경제를 콘트롤하는 것을 통해 만주에서의 열강의 권익을 유지, 확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327쪽)
외무성은 관동군의 모략으로 도발된 만주사변을 괴뢰 만주국의 국제적 승인으로 귀착시키고자 하였다.(329쪽)
9월 22일 고유균은 미국대표 맥코이와 회담하였다. 고는 일본이 [만주국]대표의 참가를 주장하고 국제연맹 회의의 순조로운 진행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맥코이에게 질문하였다. 맥코이는 '일본이 [만주국]을 승인하게 됨으로써 국제연맹은 또 하나의 기정사실을 직면하게 되었으며 조사단의 보고서도 복잡하게 되었다. 중·일 쌍방이 [만주국]문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즉기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은 이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원하고 있지 않지만 [만주국]은 결국 중국에 반환될 것이다. 중국은 그 반환을 30년 혹은 50년까지 기다려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顧維鈞回憶錄(2)>>, 中華書局, 1983. pp. 22-25-인용자 재인용)(340쪽)
1932년 9월 이후 중국 국내에서는 군벌들의 호전이 일어났다. 사천성에서는 劉湘軍과 劉文輝, 산동성에서는 韓復 와(346쪽) 劉珍年(<<上海新聞報>>, 1932年 9月 21日-인용자 재인용)티벳에서는 티벳군과 사천성군과의 충돌이 연이어 일어났다. 과거 일본은 중국 국내의 혼전을 이용하여 중국은 통일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제연맹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라든가. 또는 군벌혼적이 열강의 대 중국무역에 줄 영향을 이용하여 열강을 선동함으로써 중국에 대항하려고 하였다.(347쪽)
제네바 중국대표가 일본의 열하침공(1933년 초 일본군은 산해관사건을 도발하고, 2월 하순부터 열하작전을 개시하였다-인용자)을 이용하여 국제적으로 일본을 제재하려고 한 노력은 남경정부의 불찬성과 열강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만주문제]는 국제연맹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369쪽)
5월 31일(1933년-인용자) 중·일 쌍방은 <塘沽協定>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의 체결로 만주사변도 일단락되고 남경정부도 괴뢰 만주국의 불승인을 부르짖으면서도 사실상 이 협정의 체결로 [만주국]의 존재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지는 않았다. [만주국]의 승인문제는 이후 중·일 외교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초점이 되었으나 1945년 8월의 종전으로 괴뢰 만주국은 해체되고 중국은 동삼성지역의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369쪽)
[만주국]에 대한 승인에는 열강의 승인과 일본의 승인이라는 두 종류의 승인이 있다. 이것은 같은 종류의 승인으로 보여지나 실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372쪽)
열강의 [만주국]승인은 열강이 일본의 만몽침략을 승인하고, 그 결과 성럽한 만주국을 일본의 식민지로서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국주의시대에 있어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로부터 발생하는 현상으로 다른 열강의 승인을 획득하지 못하면 국제적으로 그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식민지를 자신이 승인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만주국]승인에서 보여지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식민지는 종주국에 부속하고 있는 것으로 독립국가는 아니다. 독립국가가 아닌 식민지를 독립적인 국가의 형식으로 세웠기 때문에 승인문제가 발생하고, 또한 승인을 통해 괴뢰정권의 소위 독립성을 겉치레할 필요성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표리불일치성에서 나온 현상인 것이다.(373쪽)
1932년 1월 4일 판원참모가 상경하기 전에 관동군사령관 本庄은 三宅참모장과 松木고문 및 板垣·石原참모와 식민지체제의 정체문제를 검토하고 판원참모에게 [이 시기 중국 본토로부터 분명하게 이탈하기 위해서는 명실공히 독립국가라고 할 필요가 있다](<<現代史資料·滿洲事變>>, 第七卷, 東京, みすず書房, 1977, p. 189-인용자 재인용)라고 지시하였다.(373쪽)
외무성과 육·해군성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1월 6일에 <중국문제처리방침요강>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만몽은 그것을 우선 중국본부정권으로부터 분리 독립케 하여 한 정권의 통치지배지역으로 하며, 점차 一國의 형체를 갖추도록 유도]하고, 9개국조약 등의 관계로 가능한 한 중국측의 자주적 발의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형식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現代史資料·滿洲事變>>, 第七卷, 東京, みすず書房, 1977, p. 343-인용자 재인용)라고 결정하였다.(374쪽)
열강이 괴뢰 만주국을 승인한다는 것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서 만주국을 승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식민지에는 반식민지와는 달리 다른 열강의 식민지적 권익이 허락되지 않는다. 따라서 열강의 만주국 승인 자체가 스스로의 권익을 만주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열강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380쪽)
6월 14일 중의원에서 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결정한 후, 이제 일본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는가만이 주된 문제로 남았다. 외무성은 <만주국 승인의 건>에서 [뒤에 기록한 여러 점을 고려하여 적당한 시기에 승인한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Microfilm, S563 reel, Sl620-1622, pp. 669-672-인용자 재인용)
(가) 日·滿관계의 정비
[일·만 간의 여러 관계를 충분히 정비하지 않고 조급히 승인하는 것은 승인후 만주국을 관리하기에 곤란할 우려가 있다]
(나) 독립국으로서의 만주의 내용충실 정도
(다) 조급한 승인이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
[조사요원이 보고, 제출전에 우리측이 중대한 이유없이 만주국을 승인하는 것은 연맹을 앞지르는 것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9개국조약국, 특히 동조약의 옹호자로 임할 미국을 자극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라) 우리나라 내에서의 승인 촉진론
(마) 승인 지연에 따른 만주국측의 불안 및 관동군 기타 在滿日人의 초조, 요약하면 이것은 일본에게 유리한 시기에 승인한다라는 것이며 또한 승인을 위한 준비를 충분히 해야 된다는 것이다.(381쪽)
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통한 법적 식민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재등(외무성의 통상국장이며 滿鐵이사였던 齋藤良衛-인용자)은 일·만간에 <우리 국방과 만주국의 치안유지문제>, <적화선전 방지의 문제>, <우리 거류민의 보호, 일·만 공동이익 보호의 문제>, <교통의 실제 장악의 문제>, <일·만 경제통제문제> 등에 관한 협정과, 외교문제에서는 <일·만 양국의 협정을 요하는 외교사항의 결정>, <일본의 만주국 외교관, 영사관의 직무대행문제>, <만주국 외교부에 일본인 고문 및 보좌관 고용초빙문제> 등의 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협정은 괴뢰 만주국 승인 전후에 대체로 체결되었다. 고문협정은 형식상 체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일본은 괴뢰만주국에서 차관정치를 실시하고, 표면적으로는 만주인, 안으로는 일본인 차관 또는 총무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문과 차관은 같은 것이었다.(382쪽)
재등은 괴뢰 만주국정부를 통제 지배하기 위해, 외무성에 <만주국 내외정무지도방법>안을 제출하고 [만주국정부 및 각 성정부의 정무에 관한 지도의 근본방침은 만주특파총감의 의견에 따라 제국정부가 그것을 정하고, 그 실행에 관한 세세한 결정은 특파총감에게 일임한다.], [조언의 전달, 독려 및 감시는 제국정부가 추천하는 만주국 중앙정부 및 성정부 고문으로 하여금 그것을 담당하게 한다], [만주국정부 또는 성정부가 앞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거나 또는 충실히 실해하지 않을 경우 특파총(382쪽)감은 제국정부의 지시를 받들어 필요한 조치를 집행할 것](Microfilm, S563 reel, Sl620-1622, pp. 697-702-인용자 재인용)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특파총감제는 그후에 駐滿大使制가 되고, 대사가 총감의 역할을 담당하게 도었으나 이 제안은 일본이 [만주국]을 지배할 정무의 이면을 집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383쪽)
괴뢰 만주국의 승인에서 가장 큰 국제적 장애는 9개국조약의 존재였다. 괴뢰 만주국의 성립이 9개국조약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일본의 승인도 당연히 이 조약에 위반되는 것이었다. 남경정부는 1932년 3월 12일에 선언을 발표하여 이 괴뢰정권은 [반란기관]이라고 비난하고, 9개국조약에 위반된다고 엄중히 항의하였다. 열강도 9개국조약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만주국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았다.(羅家倫 편, <<革命文獻>> 第37輯, pp. 1892-1893-인용자 재인용)(383쪽)
內田외상은 8월 25일 제63회 의회에서 괴뢰 만주국 승인에 관한 焦土外交의 연설을 행함으로써 세간에 파문을 일으켰다.(384쪽)
일본의(384쪽) 괴뢰 만주국에 대한 단독 승인은...중국과 열강에 대한 외교적 선전포고로 그후 외무성은 중국 및 열강과 10여년간 외교전을 벌리게 되었고, 이 외교전에서 [만주국 문제]가 계속해서 하나의 초점이 되었다.(385쪽)
괴뢰 만주국 성립이전 만몽은 일본과 열강의 반식민지였다. 南滿은 주로 일본의 반식민지였으며 滿鐵부속지와 관동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385쪽)
삼도(三島: 봉천총영사대리-인용자)는 노골적인 식민지 지배체제가 열강에 줄 영향을 고려하여 독립적인 형식을 띤 식민지체제에 상응하는 기구를 설치하려고 한 것이었다.(387쪽)
9월 15일 일본과 괴뢰 만주국은 [일·만의정서]에 조인하고, 무등(武藤信義: 관동군 사령관, 임시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장관-인용자)은 임시특명전권대사에 취임한후 전권사무소를 장춘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임시적 조치로서 10월 30일 임시특명전권대사는 정식 특명전권대사가 되었고, 전권사무소는 12월 1일에 대사관으로 승격, 무등대사는 12월 23일 집정 溥儀에게 소위 신임장을 제출하였다. 신임장은 공화국에 대한 형식으로 천황은 부의를 [짐의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 이렇게 설치된 주만일본대사관은 형식적으로 독립국가에 설치했던 대사관과 같은 것이었으나 그 중심은 고나동군을 중심으로 한 외무, 척무 등 관계성이 공동으로 만몽에 군림하는 기구였다.(390쪽)
대사관 설치시 일본은 괴뢰만주국에 있어 총영사관 5개소(아얼빈, 新京, 吉林, 奉天, 間島-인용자), 영사관 10개소, 영사관 분관 10개소, 출장소 1개소를 갖고 있었다. 외무성의 이 파견기관은 전 북평공사관에 속하였으나 주만대사관의 설치로 관동군사령관인 주만대사의 지휘하에 들어가 괴뢰 만주국을 통제 지배하는 기구가 되었다.(391쪽)
만주국에 대한 통제 지배기구는 삼위일체 체제로 일시 통일되었으나 이것은 [만주국]의 머리부분만 일체화했던 것에 그치고 하부와 동경의 중앙부의 지휘계통은 그 내부의 권한 쟁탈로 계속해서 분열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식민지화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하부의 통제지배체제와 중앙부의 지휘계통을 통일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 조정 통일과정에서 외무성은 관동군과 협력하는 한편 군과 통제 지배권을 다투었다.(391쪽)
이 문제는 1934년 후반기에 있어 긴급히 해결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만주국의 식민지지배가 대체로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그 통제 지배체제를 현상에 적응시키기 위해 조정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391쪽)
형식적으로 괴뢰 만주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군의 재만전권부, 통감부, 도독부와 같은 지배체제를 물리치고 주만대사관의 형식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 것은 역시 외무성의 공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육군측도 통감부 등의 관제를 주장하면서도 [어떤 식으로 꾸며야 독립국이라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것으로 고뇌하고 있었으나 결국 이 고뇌는 외무성이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395쪽)
그후 괴뢰 만주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의 진전에 수반하여 그 지배통제체제도 나날이 완벽하게 됨으로써 외무성이 그 지배에 참여할 필요성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주만대사관은 만주지배의 최고기구로서 계속 존재하였으며 재만영사관은 그 존재 의의를 잃게 되었고 외무성 자신도 자주적으로 그것을 폐쇄할 조치를 취하였다. 1939년 1월 12일 외무성은 정보부장의 담화 형식으로 對만몽정책 수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봉천, 길림 등 10여개소의 영사관을 폐쇄하였다. 1941년에는 新京(長春),  하얼빈 총영사관과 牡丹江, 黑河, 滿洲里의 영사관만 남겼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이들 총영사관, 영사관은 만주에 대한 통제 지배보다도 주로 소련과의 영사관계를 처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395쪽)
1934년에 조종되었던 對만지배체제와 통제기구는 그 후 大東亞省의 성립으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太平洋戰爭의 발발로 일본은 서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소위 大東亞共榮圈을 확립, 그 통제 지배기구로서 1942년 11월 1일 대동아성을 설치하였다. 대동아성의 설치로 척무성과 대만사무국은 폐지되고 대동아성내에 만주사무국을 신설하여 괴뢰 만주국을 통제 지배하였다.(395쪽)
대동아성 성립후 주만대사관은 대동아성 관할의 현지관청이 되었고, 외무성은 괴뢰 만주국에 대한 직접 지배로부터 배제되었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식민지화가 그 최고 절정에 달했던 필연적 결과이다. 이것에 대해 당시 重慶방송이 [종래의 우리 동북지방, 즉 만주국 및 함락지구에서 속성되었던 괴뢰정부의 치하는 금후 정식을 일본의 심민지가 되었고 일본정부 직할의 통치지역이 되었다.](馬場明, <<日中關係と外政機構の硏究>>, 東京, 原書房 ,1983, p. 441-인용자 재인용)고 논평했던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396쪽)
외무성은 괴뢰 만주국의 소위 완전 독립과 영토, 주권보전을 존중하(397쪽)는 것으로서, 1934년부터 37년에 결쳐 [만주]에서의 치외법권 철폐, 만철부속지에 대한 행정권이양이라는 對滿외교를 전개하여 외교적 연극을 연출하였다.(398쪽)
최외법권은 일본과 열강이 반식민지 중국에서 갖는 특권으로 이 치외법권의 존재는 중국의 반식민지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완전한 식민지에서는 종주국의 법적 지배가 확립되고 자연적으로 그 법권을 갖게 되며 법률적으로 치외법권을 특별히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 까닭에 괴뢰 만주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이 진행되어 전 만주가 일본의 법적 지배하에 놓인 상황에서 종래의 치외법권은 완전한 식민지화 정책의 진행을 방해하게 되고, 그 철폐는 식민지화 정책을 진전시키는데 필수적인 일이었다.(398쪽)
이 치외법권의 철폐는 또한 다른 열강의 [만주]에서의 식민지적 특권을 제한, 배제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괴뢰 만주국 성립후 열강으로부터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은 열강의 주만영사관과 그 치외법권 등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소위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유리한 일면이 있었던 것이지만 일본이 [만주]에 있어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여 그 권익을 확대하는 것에 관해서는 하나의 장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반식민지의 경우 각 열강이 하나의 국가 또는 한 지역에서의 병존은 가능하나 식민지의 경우 그 종주국이 하나의 국가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각 열강이 병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00쪽)
11월 5일 이 조(400쪽)약의 체결과 동시에 괴뢰 외교부 외무국장은 일본 이외에 치외법권을 갖는 국가에 대해 [일본국과 사이에 정한 치외법권의 최종적 철폐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고, 그 결과 일본 신민은 우리 나라의 모든 법령의 제한에 복종하게 됨으로써 제국정부는 이 기회에 위 조약의 실시와 동시에 앞서 기록한 일부 외국인에 대해서도 역시 현재 은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치외법권적 취급을 폐지해야 할 것](滿洲帝國政府 編, <<滿洲建國十年史>>, 東京, 原書房, 1969, p. 90-인용자 재인용)이라고 성명하고, 12월 1일을 기해 이것을 실시하고자 하였다.(401쪽)
외무성은 국제연맹에서 괴뢰 만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 획득에 실패한 후 계속해서 승인획득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소위 독립성에 대한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본의 만주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와 [만주]의 식민지적 지위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획득한다라는 것에 있었다.(401쪽)
일본은 만몽침략과 괴뢰 만주국의 성립을 위해 국제연맹을 탈퇴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지만 1936년 이후는 역으로 만주국 승인의 획득을 매개로서 파시즘 국가와 새로운 동맹관계를 체결, [만주국]도 파시즘진영에 참가하는 것으로 파시즘 국가의 승인을 얻었다. 이것은 일본이 파시즘외교를 수행함으로써 얻은 부산물이었다.(402쪽)
괴뢰 만주국은 이상과 같이 외무성의 알선으로 독일·이탈리아와 정치, 경제관계를 긴밀화하고, 양국의 지지와 승인아래 1939년 2월 24일 방공협정에 참가하였다. 또한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방공협정에 참가했던 다른 파시즘 국가의 승인을 획득하게 되었다. 1941년에는 17개국이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였다. 그중 방공협정에 참가했던 스페인·헝가리·불가리아·텐마크·루마니아·핀란드·쿠로아치아·스로바키아 등이 있었으며, 2,30년대에 파시즘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던 리투아니아·폴란드 등도 있었다.
다음으로 일본이 중일전쟁 과정에 세웠던 汪精衛정권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세웠던 동남아시아의 버마·타이 등 괴뢰정권도 [만주국]을 승인하였다. 이 승인은 괴뢰간의 승인으로 일본의 [만주]침략을 승인했다라기보다는 서로 상대의 괴뢰성을 인정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은 영·미 여러 나라는 일시 만주에 주재하고 있던 영사관을 유지하면서 [만주]와의 경제, 무역관계를 보존할 가능성을 모색하였다.(405쪽)
외무성이 앞에서 기술한 여러나라의 재만 활동을 허가했던 것은 滿蒙 자원과 시장을 이용하여 일본의 만몽침략과 괴뢰 만주국의 식민지적 존재에 대한 열강의 승인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승인의 획득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일본은 [만주]에서의 열강의 활동과 권익을 제한하게 되고, 열강도 차차 재만 영사관을 폐쇄하여 만주로부터 손을 끊기 시작하였다.(406쪽)
이후 일본은 [만주]에 있어 식민지체제를 한층 강화함과 동시에 이번에는 역으로 먼저 중국측의 승인을 획득하고 다음에 이것을 이용하여 열강의 승인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만주]는 중국의 일부분이며 중국의 승인없이 열강이 그것을 승인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409쪽)
그 첫째 단계는 1933년 9월부터 1935년 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 외무성은 우선 악화됐던 중·일 관계를 [개선]하여 중국으로부터 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획득하려고 한 것이다....
[일본이 중국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중국정부를 원조하여 중국인의 편이라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고, 동시에 만주에서는 끝까지 기정방침을 통해 만주국의 건국을 진행하여 중국에 대한 국가건설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한다면 만주 문제는 중국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국제연맹 및 열강과의 분쟁도 점차 해결할 기운이 올 것이(409쪽)라고 판단하였다].(重光葵, <<外交回想錄>>, 每日新聞社, 1978, pp 149-150-인용자 재인용)(410쪽)
1935년 여름부터 [만주국]승인문제는 제2단계로 들어갔다. 외무성은 군부의 화북침입이라는 유리한 정세를 이용하여 드디어 [만주국]의 묵인 혹은 승인문제를 양국관계 개선의 전제로서 제출하였다.(410쪽)
[만주국 승인문제]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제3단계에 들어갔다. 외무성과 군부도 사변 초기에는 군사적 우세를 이용하여 [만주문제]와 화북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사변 초기에 있어 외무성은 육·해군성과 함께 소위 불확대, 日·中停戰이라는 간판아래 <日·中國交全般的調整要綱案>을 작성하고, 8월 8일 남경에 있던 川越茂대사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였다. 동시에 동아국장 石射猪太郎의 알선으로 在華日本紡績同業會 이사장 船津辰一郎을 중국에 파견하여 남경정부에 대한 화평공작을 전개하였다. 이 공작에서 외무성과 군부는 우선 [중국은 만주국을 금후 문제로 삼지 않는다는 약속을 은밀히 체결할 것]을 남경정부에 요구하였다.(防衛廳硏修所戰史室, <<戰史叢書·支那事變陸軍作戰(1)>>, 朝雲新聞社, 1975, p. 249-인용자 재인용)(413쪽)
일본은 왕조명의 남경 괴뢰정권을 승인하기 전에 중경의 장정권을 굴복토록 하려고 하였으나 장정권은 [만주국 문제]를 포함한 일본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전영명공작(錢永銘: 중국교통은행 이사장-인용자)]도 실패로 끝나게 됨에 따(417쪽)라 일본은 11월 30일(1940년-인용자) 왕조명정권과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그 괴뢰정권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동시에 [日·滿·華共同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두개의 괴뢰정권은 상호 상대를 승인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두 괴뢰정권의 승인 처리문제가 또한 일본외교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였으며, 일·미교섭에서도 이 문제가 의논됨에 따라 태평양전쟁의 개전외교의 일부분이 되었다.(418쪽)
[만주국 문제]는 중국문제의 기점이 되었고, 또한 중국문제에서의 타협이 [만주국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쳐 중국문제에서의 타협을 견제하였다. [만주]·중국문제에서 비타협은 태평양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이 원인이 태평양전쟁이 종결되는 종전외교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424쪽)
1944년 7월 연합국군의 사이판섬 상륙과 東條내각의 총사직은 패평양전쟁이 그 후반기에 들어갔음을 나타내 주었으며, 일본의 패배도 시간문제가 되었고 일본의 외교도 서서히 종전외교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424쪽)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만주국 승인문제]는 1944년 후반기에 이르러 승인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현상을 유지하는가의 문제로 변화되었다. 1945년 여름 일본의 종전외교는 [만주국]을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문제가 되어 대소, 대미외교의 [선물]로서 [만주국]의 국제관리, 중립화 혹은 북만철도와 여순을 소련에게 양도하는 등으로 바뀌고, 또한 영·미 열강과 중국도 대소외교에 [만주국]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만주국] 위치에 있어 커다란 변화이며, 이 변화는 태평양전쟁과 제2차 대전의 전국 전환으로 발생하였던 현상이었다.(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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