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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창작사 1987.
2009년 05월 16일 21시 47분  조회:2547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행된 '토지조사사업'은 하나의 원시축적 과정으로서 농민의 토지이탈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9)
'토지조사사업'이 "지난날의 토지의 현실적 보유자(保有者)이며 또한 경작자였던 농민을 희생으로 하고 당시의 수조권자(收租權者)를 곧 토지소유자로 하는 방법에 의해 실시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소수의 수조권자와 부농이 토지를 취득하고 대다수의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되었다"함은 흔히 지적되는 일이지만, 이 '사업'은 종래 어느 정도의 토지보유권을 가졌던 중세적 전호를 식민지형 소작농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또 종래의 생산수단 소유자로서의 농민층을 비소유자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10)
1910년대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종래 어느 정도 생산수단으로서의 토지를 소유 내지 보유하고 있던 농민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비소유자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1920년대는 농민을 비소유자로 만드는 정책이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또 그 효과가 나타난 시기였다.(10)
'토지조사사업'이 농촌의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그들을 소작농민으로 만듦으로써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작농의 비율이 계속 높아지게 했다. 이것은 종래의 소농적(小農的) 농민응ㄹ 생산수단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식민지형 소작농으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종래의 중세적 지주경영을 식민지적 지주경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소작조건을 크게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작농의 증가로 그들의 경작면적은 감소되어갔고 소작료는 고율화했으며 소작권은 극도로 불안했다. 소작농민의 증가, 일본 이민의 증가, 이른바 농장형(農場型) 지주경영의 등장 등으로 일반 소작농민들의 경작면적은 줄어들고, 토지경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영리를 추구하는 식민지형 지주경영의 결과로 소작료는 급격히 고율화했으며, 종래의 영구소작제가 계약소작제로 변함으로써 농민들의 소작권은 극도로 불안해졌다.(10)
소작면적의 축소, 소작료의 고율화, 소작권의 불안 등은 소작농민의 영농수지(榮農收支)를 극도로 악화시켜 그들을 급격히 빈민화시켰다. 생산수단으로서의 토지에서 완전히 이탈되고 일정한 기간의 계약제에 의해 소작지를 경작하면서 지주의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에 의해 고율소작료를 수탈당한 식민지시기의 소작농민들은 일정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자족적(自足的) 영농에 종사하던 종래의 소농적 농민과는 다른 농업노동자적 개념에 접근하고 있었다.
농업노동자적 존재로서의 식민지시기의 소작농민들은 좁은 소작지로 적자영농에 시달리는 반실업자적인, 조선총독부가 말한 세궁민(細窮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심한 경우는 소작지를 완전히 잃은 완전실업자가 되어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20년대는 '토지조사사업'을 중시으로 하는 1910년대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종래의 소농적 농민을 생산수단을 완전히 잃은 농업노동자적 존재로서 식민지형 소작농민으로 만든 시기였으며, 식민지형 지주경영의 자본축적 과정을 통해 이들 소작농민이 계속 반실업자 내지 완전실업자화한, 다시 말하면 상대적 과잉인구화한 시기였다.(11)
1920년대와 30년대를 통해 식민지 지배당국이 춘궁민 혹은 세궁민으로 지목한 농촌빈민은 대체로 전체 농촌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연간 약 15만 명 정도가 농촌을 떠난 것으로 통계되었다. ...1920년대 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화전민, 이  시기에 처음으로 생겨나는 도시지역의 토만민(土幕民)과 전국 각 지방 토목공사장의 날품팔이 노동자 등은 모두 이들 노촌빈민 출신의 자기소유가 없는 노동자적 존재들이었다.(11)
식민지시기 농촌빈민의 이농(離農)현상은 도시지역에서의 노동시장 형성에 의한 노동력 흡인의 결과가 아니라 농촌 내부에서 생산수단을 잃고 노동자적 처지에 빠진 농민들의 실업, 빈민화, 파산에 의한 이른바 밀어내기식의 이농이었다. 따라서 농촌을 떠난 인구를 도시측에서(11)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그 상당한 부분이 다시 농민으로 주저앉되 이번에는 일반 농토가 아닌 깊은 산속의 산림을 불태워 일정 기간 경작하다가 지력(地力)이 다하면 다시 다른 곳에 불을 질러 경작하는 화전민이 되었다.(12)
1920년대와 30년를 통해 순(純)화전민과 겸(兼)화전민을 합쳐 120만 명이 넘은 것으로 통계된 화전민은 대부분 평지의 농민생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 목숨만을 이어가는 빈민이었다.(12)
일반적으로 농촌에서의 자본가적 경영의 발달이 농민분해를 촉진시켜 일정한 부분의 농민을 쫓아내는 한편 도시지역에서의 자본주의적 성장이 이들 농촌에서 분출된 인구를 그 값싼 노동력으로 수용하기 마련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서의 식민지배는 이들 농촌에서 분출되는 인구를 수용할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고, 이 때문에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산간지대로 들어가 그야말로 '원시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농인구에 의해 형성되는 근대 초기의 일반적인 도시빈민과 다른, 후진 일본 자본주의가 그 식민지 조선에서 만들어놓은 실업자의 변형으로서의 일종의 특수 빈민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2)
일본의 식민지 농업정책이 급격히 증가시켜놓은, 실업한 농업노동자적 존재로서의 농촌빈민의 일부는 한편으로는 도시쪽으로 분출되어 토막민이라는 전에 없던 일종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1920년대 초엽부터 전국의 대도시와 중소도시 주변에 나타난 토막민은 우릴 역사 위에 처음으로 형성된 이른바 근대적 빈민의 일종이었다.(12)
화전민이 된 인구와 함께 농촌에서 분출된 인구의 일부인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도 본래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그 값싼 노동력으로, 공장 노동자로서 수용되어야 할 인구였으나 일본 자본주의의, 특히 그 식민지 자본주의의 미숙성·후진성 때문에 공장노동력으로 흡수도지 못한 부분이었다. 농촌에서의 실업으로 강제로 분출된 이들은 도시지역으로 나와 날품팔이나 공사장 막일꾼이나 행상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거가 도시주변의 빈터에 땅을 파거나 거적을 두른 움집이었던 데서 토막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3)
조선에 대한 일본 식민지 농업정책의 가장 근원적인 목적은 조선 농촌을 일본의 항구적인 식량공급지로 만드는데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정책은 조선에서의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 농촌중간층의 성장을 억제하고 농촌사회를 일본인 및 조선인 대지주와 그 소작인으로 양분하여 농촌에서의 민족부르조아적 계층의 성장을 저지함으로써 그 식민지 지배를 영구히 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민지 농업정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초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농촌중간층을 몰락시켜 소작농으로 만드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다.(23)
식민지 농업정책으로서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을 위한 수리조합사업 등이 조선 농촌에서의 토지겸병을 촉진시킴으로써 중소지주층·자작농·자소작농을 급격히 몰락시켜 대부분 소작농민으로 만들었다.(28) 이밖에도 역시 식민정책의 일단으로서의 일본 농업이민의 조선농촌 침투와 그들의 지주화, 그리고 동양척식회사 등의 토지약탈이 또한 소작농민을 급증시켰다.(29)
'토지조사사업', 수리조합사업, 일본농민의 조선에의 식민 등이 일본인의 조선에서의 토지소유 및 지주화를 조장하는 정책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조선의 중소지주층·자작농층·자소작농층 등의 농촌중간층을 소작농으로 몰락시키는 정책이었던 것이다.(33)
일본의 식민지 농업정책이 조선 농민을 전반적으로  빈민화시킨 첫째 단계가 종래의 중소지주층·자작농층·자소작농층을 소작농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그 둘째 단계는 급증한 소작농민 일반의 소작조건을 급격히 악화시켜 소작농민 전체의 생활을 몰락시키는 과정이었다.(34)
소작농민의 비율을 계속 높여간 식민지 농업정책은 또한 지주권(地主權)을 강화시키고 소작조건을 급격히 악화시킴으로써 소작농민 일반의 생활을 영세화시켜 갔다. 종래의 지주·전호 관계를 근대적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적 지주·소작 관계로 바꿈으로써 강화된 소작조건의 악화현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소작료의 고율화로 나타났다.(35)
토지가 일부 대지주에게 집중되고 자작농의 소작농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경작면적의 한정, 소작농의 급증은 필연적으로 소작권의 경쟁과 불안을 가져왔던 것이다.(45)
마름의 중간수탈이 소작농민 궁핍화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46)
식민지시대에 와서 농촌빈민이 급격히 증가한 가장 중요한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가 만성적인 저곡가정책이 주원인인 농업경영수지의 악화에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51)
식민지의 농업구조 전체가 식민모국에의 값싼 식량을 공급하기에 적합하도록 짜여졌기 때문에 곡가는 풍·흉년을 막론하고 최저가격을 맴돌았고 따라서 조선농민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을 막론하고 적자영농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부채액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농민들 특히 소작농민의 경우 그 부채액이 전혀 감당할 수(58)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결국 파산해서 이른바 '야간도주'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유랑민이 되거나 화전민이 되며, 도시로 나가서 품팔이꾼이 되거나 심한 경우 걸인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59)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농업정책이 대토지소유제를 촉진하여 소작농민이 급증하게 하고 그 소작제가 지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소작조건이 계속 악화되게 했으며, 이 때문에 소작농민의 경영수지는 악화하고 농민부채는 증가하기만 했다. 이와같은 식민지 농(68)업정책은 결국 지주를 제외한 농민 전체를 빈궁 속으로 몰아넣었고, 따라서 전체 식민지시기를 통해 농촌빈민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69)
식민지시대를 통해서 농촌에는 전체 농민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만성적인 춘궁민이 있었으며, 이들은 춘궁기가 되면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와 심지어는 백토를 식료로 삼았고 특히 재해년에는 그 생활이 더욱 처참했다. 정미 한 되 값이 22전에서 42전을 오르내린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서 농촌빈민들 1인당 1일 생활비는 4전에 불과했으며 그것은 같은 시기 화전민의 1일 생활비와 맞먹었다.(91)
화전농법의 특징은 무시비(無施肥) 휴한농법에 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또 대단히 비정착적이었다. 경작지에 시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지만, 화전경작이 시비가 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영구적인 경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숙전화하여 화전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시비도 할 수 없는 비탈진 산간지대에 불을 질러 밭을 이루고 산화회층(山火灰層)이 비료 역할을 해줄 때까지만 조·감자·콩·옥수수 등을 심어서 겨우 연명하다가 지력이 소모되면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새로운 땅에 불을 질러 농토를 얻는 것이 전형적인 화전민 생활이었던 것이다.(153)
화전농업 자체 내의 농민층 분화에 의해 지주·소작 관계가 발달해가고 있었던 사실도 뚜렷하지만, 한편 화전농민이 대량으로 또 급진적으로 소작인화하는 조건은 딴 곳에도 있었다. 즉 화전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유림 내의 화전민들이, 종래 '무주공산'을 오랫동안 경작하여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땅이 '토지조사' '임야조사' 등에 의해 하루 아침에 그 소유권이 박탈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161)
일본인들과 결탁한 하급관리들의 횡포난 사유지의 국유화로 화전민들이 경작지를 잃게 되는 경우가 전국의 화전지대 도처에 있었지만 화전민들이 경작지를 잃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조선총독부가 '산림조사'를 통해 대부분의 산림을 국유림화하고 이를 닿시 주우회사(住友會社)와 같은 일본의 재벌회사에게 대부하여 이들 회사로 하여금 화전지대에다 식림(植林)하게 하는데 있었다.(163)
화전민의 대부분이 평지농촌에서 자작지는 물론 소작지마저 가질 수 없어서 유리하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화전지대로 찾아든 사람들이었지만 이조시대나 식민지시대의 초기까지도 평지농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화전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이 평지농민의 생활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식민지 경제정책의 결과로 이농민이 계속 분출되고 식민지 지배당국의 화전금지책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화전지대는 깊은 산 속으로 확대되어갔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과 평지농민 생활과의 차이도 점점 커져간 것이(169)라 생각된다. 깊은 산 속으로 쫓겨들어간 화전민 생활은 문명생활과는 거의 단절된 그야말로 '원시적'인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고 거의 완전한 자급자족적인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잉여생산을 가질 만한 조건이 되지 못한 반면 그들의 농경생활은 자연의 재해에 대단히 약한 것이었으므로 일단 재해를 만나면 그대로 이사하거나 또 유랑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생활이었다.(170)
화전지대는 대체로 고지대이며 또 산간지대이므로 작물의 성장기간이 대단히 짧게 마련이다. 4월 중순에 많은 눈이 내리는 경우 화전농업은 자연히 큰 타격을 받게 마련이며 더 나아가서는 폐농하게 마련이었다.(202)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농민들이 갑자기 만들어놓은 화전민 부락에는 공동의 부락신(部落神)도 없었고 공동경작의 풍속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농번기에 노동력을 얻기가 어려웠고 이 때문에 데릴사위제(豫婚制)와 같은 풍속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던 한편 부녀자의 야외노동이 일반화해가고 있었다.(216)
토막민이라 해서 백정(白丁)이나 일본의 후라꾸민(部落民)같이 특수한 사회를 이룬 하나의 사회적 계급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도시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빈민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토막민은 곧 식민지시기 조선인의 하나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그것은 그들이 바로 식민지시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나타난 빈민들이라는 점에서도 명백하다.(239)
식민지시대에 들어와서 전국의 도시와 그 주변에 새로 나타난 도시 빈민층으로서 토막민은 대부분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 출신이었다. 농촌을 떠난 인구의 대부분이 일단 도시로 나왔지만 그들에게는 도시에서 집을 마련할 만한 재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식민지 지배당국이 그들을 수용할 만한 시설을 마련하지 못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도시  주변 공지에다 토막을 마련해 살게 마련이었던 것이다.(241)
결국 일제 식민지시기 조선사회의 3대 빈민층의 하나이던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은 대체로 '토지사업'이 끝난 1920년대 이후 농촌에서 쫓겨난 인구들이었다. 식민지 산업구조가 이들 이농민을 공장노동자로 수용할 만하지 못했고 또한 식민지 구빈사업(救貧事業)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줄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굴을 파서 살거나 매(244)우 조잡한 가건물을 지어 사는 토막민이라는, 식민통치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빈민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45)
식민지가 길어짐에 따라 토막민·불량주택민 등 도시지역의 빈민들이 증가해갔고 또한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중소도시 지역까지 확대되어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지역에서의 토막민과 불량주택민의 증가는 이농민의 도시 유출로 인한 도시인구의 증가와 단순한 주택난의 결과로만 볼 수 없으며, 결국 식민지시기가 길어짐에 따라 지주층이나 일부의 자산계급을 제외한 민중사회 전체가 빈곤화한 결과이며 거기에 식민지 피지배사회의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254)
식민지시기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은 본래 대부분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농촌을 쫓겨난 이농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도시로 나와 초기자본주의 산업구조의 값싼 노동력이 될 만했지만 식민지 산업구조(254)가 이들을 수용할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고 따라서 이들은 대부분 날품팔이 노동자나 잡역부 등이 될 수밖에 없었다.(255)
농촌에서 갓 쫓겨난 이들이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기술노동력이 될 수 없었으며, 대부분 파산한 이농민들이어서 상업을 영위할 만한 자본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결국 날품팔이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56)
식민지시기의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은 바로 식민지지배의 소산물이었고 따라서 도시 주변에 형성된 토막민촌은 곧 식민지지배의 치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 경제구조가 이들을 어떤 형태로건 수용할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고 따라서 그 치부를 감추기 위해 도심지에서 먼 곳으로 옮겨가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280)
파산하여 이농하는 농촌인구의 대부분이 공장노동자로는 수용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산업구조 아래서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이란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식민지 산업의 기초적 시설, 즉 철도·항만·도로·수력발전소·수리조합사업 등을 실시하여 농촌에서 분출되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수용함으로써 식민지 기초시설도 확보하고 실업자 문제도 해결하는 길이었다.(291)
공장노동자가 일본인을 합해 8만 6천여 명밖에 안 되는 시기에 농촌을 떠나 노동자가 된 인구는 87만 명이나 되었고 그 위에 농촌의 임노동자 16만여 명이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위한 기초시설을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값싼 노동력이 양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농토를 잃고 농촌을 떠난, 전혀 기술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결국 토목공사장의 육체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가족을 고향에 둔채 단신 토목공사장을 따라 다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가가 완전히 파산한 경우 전 가족이 그야말로 유민들이 되어 전국 각지의 토목공사장을 따라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시기의 하나의 특수한 노동시장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92)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급격한 농민분해를 가져왔고 그 결과 화전민을 급증시켰으며 전에 없던 도시지역 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을 만들어내었고 또한 전국의 각 토목공사장을 따라다니며 단순 육체노동으로 호구책을 구하는 토목공사장 막일꾼을 만들어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만들어놓은 이들 토목공사장 막일꾼은 사실상 식민지 전체 기간을 통한 노동자층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이들은 또 항상 실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식민지시기 빈민의 일부였다.(294)
토막민이 되거나 토목공사장의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언제나 실업문제에 시달려 고통받고 있었으며, 특히 1920년대 말기 이후의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이들 농촌을 떠난 인구의 실업률은 급격히 높아져갔다.(295)
식민지 지배당국이 벌이는 각종 토목공사가 해마다 농촌에서 분출되어 나오는 많은 인구를 값싼 단순 육체노동자로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도급제로 실시된 이들 공사장의 노임이 너무 저임이어서 노동자들이 반발하거나 파업하면 고사청부업자들은 단신으로 흘러 들어와 부양가족도  없고 생활비가 적게 들어 저임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중국인 노동자로 대체함으로써 조선인 노동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313)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 농촌을 쫓겨난 인구가 도시지역의 변두리에 토막촌(土幕村)을 처음으로 형성하게 된 것이 1920년대 초엽이었고 역시 농촌을 쫓겨난 인구에 의해 화전민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도 같은 무렵이었다. 농촌을 쫓겨난 인구가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지역의 토막민이 되어 날품팔이로 연명할 수 있는 경우 또 특히 도시지역으로 나온 인구가 아직 그 수가 많지 않은 경우 실업자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지는 않았겠지만, 농촌에서 쫓겨나는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민(移住民), 즉 식민(植民)이 증가함에 따라 실업자 문제는 점점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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