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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에세이 수사비평-장르의 이론
지속적 형식(산문픽션)(요약)
1. 유(類)로서의 픽션과 종(種)으로서의 소설
문예비평에서 기본적으로 지속적인 형식을 취하는 어떤 문학작품-거의 산문으로 된 문학작품-에 이 픽션이라는 말을 적용하여도 지장은 없을 것이다. 가령 이것이 무리한 주문이라면 단 하나의 진정한 픽션의 형식은 이른바 소설뿐인데, 소설을 픽션과 동일시하는 임시변통적인 습관에 대해서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간에 항의가 허용될 수는 있다.(574)
픽션과 소설을 동일시하는 문학사가들은 이 세상이 소설 없이도 오랫동안 그럭저럭 지내왔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하고 있다. 겨우 디포에 이르러 커다란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그들의 시야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것이었다.(575)
산문 픽션에 대한 이와 같은 소설 중심적인 견해는 프톨레마이오스(그리스 수학자, 천문학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인용자)적 견해로서, 너무 지나치게 복잡해진 나머지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에 대신해서 좀 더 상대적인 또한 코페르니쿠스적인 견해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575)
우리가 소설을 픽션으로서가 아니라 픽션의 한 형식으로서 진지하게 고찰해볼 것 같으면 소설의 특질이 무엇이든 그 전통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디포, 필딩, 오스틴, 그리고 제임스 등이며, 또 그 전통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고 있는 것은 보로, 피콕, 멜빌, 에밀리 브론테 등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가치평가가 아니다. 우리는 백경이 에고이스트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메러디스의 작품 쪽이 전형적인 소설에 한층 더 가까운 것이라고 느낀다.(576)
제인 오스틴의 소설처럼 우리가 전형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설에서 플롯과 회화는 풍습 희극의 여러 관습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폭풍의 언덕은 오히려 옛날 이야기와 발라드에 연관되는 관습들을 따르고 있다. 이 관습들은 비극과 한층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격정, 광란 등의 비극적 감정은 제인 오스틴의 균형 있는 어조를 산산이 부수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는 그런 감정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 속에 들어가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것이나 그것의 암시도 이 소설 속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플롯의 형태도 다르다. 제인 오스틴이 중심적인 상황의 주위를 교묘하게 움직이면서 돌고 있는 데 반해, 에밀리 브론테는 직선적인 억양을 갖고 이야기하며, 또 화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제인 오스틴의 경우에는 화자가 터무니없이 어울리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로 다른 습관을 따르고 있으므로 폭풍의 언덕을 소설과는 별개의 형식의 산문 픽션이라고 간주하여도 정당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 별개의 형식을 로맨스라고 부르겠다.(576)
2. 픽션의 종(種)으로서의 소설과 로맨스의 차이
소설과 로맨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성격묘사의 구상에 있다. 로맨스 작가는 ‘실재의 인간’을 창조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양식화된 인물, 인간 심리의 원형을 나타내는 데까지 확대되는 인물을 창조하려고 한다....인간 성격 가운데 어떤 요소가 로맨스에 방출되므로, 로맨스는 본래 소설보다도 더 혁명적인 형식으로 되고 있다.(577)
소설가는 인격을 취급한다. 이 경우 등장인물들은 페르소나, 즉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있다. 소설가는 안정된 사회의 틀을 필요로 하며, 그러므로 훌륭한 소설가의 대부분은 지나치게 소심하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인습을 존중해왔다. 로맨스 작가는 개성을 취급한다. 이 경우의 등장인물들은 진공 속에 존재하며 몽상에 의해서 이상화된다. 또 로맨스 작가는 아무리 보수적이라 할지라도 그의 글에서는 무언가 허무적인 것 또는 야성적인 것이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문 로맨스는 독립된 픽션의 한 형식으로서 소설과 구별되(577)지 않으면 안 되며, 또 현재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는 산더미 같은 잡다한 산문작품에서 독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578)
현대의 로맨스에서 소설로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 역도 성립된다. 산문 픽션의 여러 형식은 인간으로 말하면 인종적 특징처럼 혼합되어 있는 것이지 성별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반 사람들이 요구하는 픽션은 늘 혼합된 형식, 즉 로맨스적인 소설이다. 말하자면 독자가 자기의 리비도를 주인공에게, 아니마를 여주인공에게 투영할 수 있을 정도로 로맨스적이고, 이 투영을 일상의 낯익은 세계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설적인 작품인 것이다.(678)
(그럼에도 위와 같은 구별을 한다는 것-인용자) 그 이유는 위대한 로맨스 작가를 고찰할 때, 그것은 로맨스 작가 자신이 선택해서 취한 관습에 의거해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비평가가 단지 로맨스 형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윌리엄 모리스가 산문 픽션의 한구석에 밀려나 있는 것은 부당하다. 또 로맨스의 혁명적인 성격에 대해서 앞서 말한 것을 생각하면, 그가 이 형식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입장으(578)로부터의 ‘도피’라고 여기는 것도 부당하다. 만일 스콧에게 그를 로맨스 작가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소설가로서의 그의 결점만을 따지는 것은 좋은 비평이라 할 수 없다. 천로역정에는 원형적인 성격묘사, 종교적인 경험에 대한 혁명적인 자세 등 많은 로맨스적인 특징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이 작품은 하나의 문학적 형식의 완성된 일례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영문학의 정식(定食)에 어떤 종교적인 영양을 가하기 위해서 채택된 책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579)
로맨스는 소설보다 더 오래된 형식이다. 이 사실이 로맨스는 유치한 형식, 말하자면 미숙하고 발전이 없는 형식이라는 역사적 착각을 가져온 것이다.(579)
영웅을 주제로 하는 로맨스는 인간을 다루는 소설과 신들을 다루는 신화의 중간에 있다. 고전 그리스∙로마 신화의 말기에 그 하나의 발전으로서 산문 로맨스가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아이슬란드의 산문 사가(Saga)는 두 개의 신화 에다(Edda)의 뒤를 곧바로 잇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소설은 오히려 그 자체의 세계를 확대해서 픽션의 측면에서 역사에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경향을 나타낸다.(580)
3. 자서전-고백형식의 픽션
자서전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일련의 이행을 거쳐서 어느 때고 소설과 한데 합쳐지는 별개의 형식이다. 대부분의 자서전은 창조적인, 따라서 픽션적인 충동에 의해서 고취되고 있으며, 이 충동은 작가의 생활에서의 사건과 경험 중에서 하나의 통합된 패턴을 만들어내는 쓸모 있는 것만을 선택하려 한다. 이 패턴은 작자 자신을 초월하고 있는 더 큰 무엇-이것을 작가는 그의 자아와 동일시해오고 있다-일 수도 있으며, 또 단지 그의 인격과 태도의 일관성일 수도 있다.(581)
이 형식을 발명한 것처럼 보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또 그 현대형(型)을 확립한 루소를 좇아 우리는 이 매우 중요한 산문 픽션의 형식을 ‘고백’형식이라고 부르겠다.(582)
로맨스의 경우에서와 똑같이 고백을 독립된 산문형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갖는 가장 훌륭한 산문작품의 일부는 ‘사상’이라고 해서 전혀 문학으로 인정되지 않고, 또 ‘산문 문체의 모범’이라고 해서 전혀 종교나 철학으로 인정되지 않아 막연한 책들의 한구석에 팽개쳐져 있는데, 그 산문 작품들을 고백형식으로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픽션으로서 명확한 위치를 얻게 된다. 또 소설과 로맨스와 똑같이 고백에도 단편형식이 있다. 수필이 그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여러 개의 수필로 구성되어 있는 고백인데, 여기에서는 다만 장편형식의 지속적인 이야기만 빠져 있다. 몽테뉴의 구성법과 장편고백과의 관계는 조이스의 더블린 시민이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같은 짧은 이야기로 된 작품과 장편소설 또는 로맨스와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다.(582)
루소 이후, 아니 실제로 루소에서도 고백은 소설 속으로 흘러들어(582) 그 혼합에서 허구적 자서전, 예술가 소설(Kűnstler-roman), 기타 이와 유사한 형식이 나오게 된다. 문학적으로 보면 고백이 늘 작가 자신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적어도 몰 플란더스이래 극적 고백은 소설에서 사용되어왔다. ‘의식의 흐름’기법에 의해서 이 두 가지 형식은 한층 집중적으로 융합될 수 있는 것처럼 되고 있지만, 이와 같은 경우에서조차도 고백형식 특유의 성질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백에서는 종교, 정치, 예술 등에 대한 어떤 지적∙이론적인 관심이 거의 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고백의 작가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값어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그가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통합적인 견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583)
4. 네 번째 종의 픽션형식-아나토미
소설은 외향적∙개인적인 경향을 갖고 있으며, 그 주된 관심을 사회(583)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성격에 두고 있다. 로맨스는 내향적∙개인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즉 로맨스는 소설과 똑같은 성격을 다루지만, 다루는 방법이 한층 주관적이다.(여기서 주관적이라는 것은 소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취급방법을 가리킨다. 로맨스의 등장인물은 영웅적이며,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이다. 소설가는 보다 객관적이기 때문에 한층 자유로이 등장인물의 심리에 관여할 수 있다). 고백도 역시 내향적이지만 그 내용은 지적이다. 분명히 다음 단계로서 우리는 외향적∙지적인 네 번째의 픽션 형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584)
우리는 앞서 대부분의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를 픽션이라고는 불러도 소설이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작품이 어떤 형식을 갖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은 별개의 픽션 형식임에는 틀림없다. 루소의 에밀에서부터 볼테르의 캉디드에, 버틀러의 만인의 길에서부터 에레혼 연작에, 헉슬리의 대위법에서부터 멋진 신세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우리는 소설을 떠나서 이 같은 형식-그 형식이 무엇이든 간에-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584)
이런 작가들이 사용하는 형식은 메니포스(Menippos)적인 풍자, 드물기는 하지만 또한 바로(Varro)적인 풍자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그리스의 견유철학자 메니포스가 만들어낸 형식이라고 주장되고 있다....메니포스적인 풍자는 운문으로 된 풍자시에 산문으로 된 삽화를 개입시키는 습관에서부터 발달한 것 같은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산문형식뿐이다.(585)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인간 그 자체보다도 인간의 여러 가지 정신적인 태도를 다룬다. 메니포스적 풍자는 현학자, 고집쟁이, 괴팍스런 사람, 벼락출세자, 사기꾼, 광신자, 온갖 종류의 탐욕스럽고 무능한 전문가들의 사회적 행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는 구별되는 각자의 아전인수적인 인생관을 다룬다. 따라서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추상적인 관념과 이론을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고백을 닮고 있으며, 그 성격묘사에서는 소설과 다르다. 즉 그것은 자연주의적이라기보다는 양식적인 성격묘사를 행하며, 또 인간을 관념의 대변자로서 보는 것이다.(585)
이 전통의 일정한 주제는 이미 논한 허풍선이 학자를 조소하는 것이다. 소설가는 악과 어리석은 행위를 사회의 병이라고 생각하나, 메니포스적 풍자가는 그것을 지성의 병, 한계를 모르는 일종의 현학적인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버릇은 허풍선이 학자의 모습 속에 상징적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규정되고 있다.(586)
그 가장 집중적인 모습을 취할 경우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단일한 지적 패턴에 의한 세계상을 그려낸다. 줄거리에서부터 지적인 구성이 조립되므로, 이때 이야기의 습관적인 대강의 줄거리는 심하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리지만, 이 결과 일견 조잡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독자의 부주의라든가 소설 중심의 픽션관에 의해서 판단하고자 하는 독자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586)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메니포스적인 풍자의 경우에는 형식의 명칭이 역시 태도에도 해당된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태도의 명칭으로서의 풍자는 공상과 도덕의 결합이다.(587)
메니포스적인 풍자의 단편 형식은 보통 대화 또는 회담인데, 여기에서는 성격의 갈등보다도 오히려 관념의 갈등에 극적인 흥미가 주어진다....이 경우에도 이 형식은 반드시 늘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순수하게 공상적 또는 도덕적인 논의로 차츰 변한다.(587)
소설가는 헨리 제임스처럼 인간관계의 철저한 분석에 의해서, 그렇지 않으면 톨스토이처럼 사회현상의 철저한 분석에 의해서, 자신의 충일감을 나타낸다. 지적인 주제와 태도를 취급하는 메니포스적 풍자가는 지적인 방법으로, 말하자면 그의 당면 주제에 관계되는 방대한 박식을 차례로 동원해서 펼쳐 보이기도 하고, 또 현학적인 적들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전문어를 눈사태처럼 퍼부어서 꼼짝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충일감을 보이는 것이다.(588)
스위프트 이전에 영어로 씌어진 최대의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버턴의 우울의 해부인데, 여기에서도 극도로 해박한 지식을 창조적으로 다루는 것이 구성원리가 되고 있다. 여기서는 우울이라는 개념이 제공하는 지적 패턴에 의해서 인간사회가 고찰되고, 대화 대신에 책의 심포지움이 전개된다. 이 결과 초서(그는 버턴이 애독한 작가의 한 사람이다)이래 영문학에서 버턴의 책만큼 단 한 권의 책에 포괄적인 인간생활의 고찰을 담은 작품은 없는 것이다.(589)
버턴의 표제의 ‘아나토미’(anatomy), 즉 ‘해부’라는 말은 해체 또는 분석이라는 뜻으로, 그의 형식의 지적인 방향을 아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번거롭고 그리고 현대에서 오히려 오해를 낳고 있는 ‘메니포스적 풍(589)자’라는 이름 대신 부르기 편리한 아나토미라는 말을 채용하는 편이 좋겠다.(590)
아나토미도 물론 결국에는 소설과 합치하기 시작한다. 아나토미에서 생성되는 여러 가지 잡종 속에는 이른바 사상소설(思想小說, roman these)과 1930년대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처럼 등장인물이 사회적 또는 기타의 관념의 상징으로 되고 있는 소설이 포함된다.(590)
아나토미의 형식과 전통을 올바르게 이해할 것 같으면 문학사의 대부분의 요소가 정연하게 정리될 것이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은 대화 형식, 운문의 삽입, 널리 퍼져 있는 관조적인 아이러니의 기조 등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아나토미이며, 이 사실은 그것이 준 커다란 영향을 이해하는 데에서 꽤 중요하다. 월턴의 낚시 전서도 아나토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운문과 산문의 혼합, 전원의 연회라는 장면 설정, 대화 형식, 음식물에 대한 백과전서적인 흥미, 그리고 고기 낚시를 경멸은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을 거의 찾지 못하고 있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온건한 메니포스적인 조롱 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590)
5. 픽션의 네 가지 종(種)의 복합형식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픽션을 바라보면 네 개의 주요한 흐름, 즉 소설∙고백∙아나토미, 그리고 로맨스가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섯 개의 가능한 복합형식 그 모두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중 소설이 다른 세 개의 형식을 어떻게 서로 결합하고 있는가를 제시한 바 있다. 하나의 형식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는 경우는 드물다.(591)
한층 포괄적인 구성을 취하는 픽션에는 적어도 세 개의 형식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파멜라에서의 소설, 로맨스, 그리고 고백, 돈키호테에서의 소설, 로맨스, 그리고 아나토미, 프루스트에서의 소설, 고백, 그리고 아나토미, 아풀레이우스에서의 로맨스, 고백, 그리고 아나토미 등등의 요소를 볼 수 있다.(592)
만일 어떤 독자에게 율리시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항을 일람표로 만들라고 요구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첫째로 더블린의 광경∙소리∙냄새 등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는 점, 성격 묘사의 화려함, 회화(會話)의 자연스러움 등, 둘째로 영웅적인 원형의 패턴, 특히 오디세이아가 제공해주는 패턴과 대치됨으로써(592) 생기는 줄거리나 인물의 교묘한 패러디, 셋째로 의식의 흐름의 기법의 예리한 사용방법을 통해서, 성격과 사건이 드러나는 것, 넷째로 기법에서도, 또 주제에서도 항상 백과전서적∙포괄적이 되고자 하는 경향, 그리고 기법과 주제를 지적인 관점에서 취급하는 경향.
이 네 가지 점이 각각 작품에서 소설, 로맨스, 고백, 아나토미에 연관되는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이제는 꽤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율리시스는 이 네 가지 형식 전부를 사용하고 있는 완전한 산문 서사이며, 그 형식은 전부가 실제로 똑같이 중요성을 갖고, 또 서로서로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집합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인 것이다.(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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