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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연구자료들
2009년 05월 16일 22시 00분  조회:2675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삼대 연구자료

1.

(정현기 <<한국 근대소설의 인물유형>> 인문당 1983)

<<삼대>>. <<탁류>>. <<태평천하>>의 소설 세계에 나타난 인물연구

서론

하필 이 두 작가의 세 작품으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하는 이유는...세째, 이들 작가들이 실은 당시대의 시대적인 민족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리얼리즘 정신을 깊이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가 묘사적 사실주의에 충실하려고 했다면 다른 하나는 풍자적 사실주의로 그들의 정신을 드러냄으로써 둘이 다 당시대의 역사적 당위명제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좌절을 맞게 되는지를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다.(9)

-여기서 중시되는 점은 <공시적 관점>이라는 근대소설의 기법상의 특질과 함께, 작가의 객관성 비감동 및 몰개성이라는 근대사회화 이후 만연한 상대주의적 양상이다. 대중에 의해 확대.성장하기 시작한 시장경제 체제는 개인들로 하여금 절대적 선택의 기준을 이완시켰고 동시에 이 경향은 취향의 다양화라는 결과를 유도.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점차 고식적이고 <<사변적인 교훈>>이란 응당 절대적 가치를 잃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이른바 객관적 묘사라는 성실성을 유지함으로써만이 상대적 기준에 입각한 기호판정을 가능케 한다고 믿게 되었다.(14-15)

-개인과 사회라는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한 소설에 참여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주체적 자아를 부여하는 일은 정당한 노력일 뿐 아니라 그들이 서로 얽히면서 낳는 인식의 양상이 어떻게 긴장상태를 유지하는가를 지적할 때 소설구조가 지니는 미학적 가치는 다소간 입증되는 것으로 보인다.(15)

-봉건잔재를 의식내용으로 갖추고 유교적 전통을 고집하려는 제1세대 조 의관이 이 작품 속에서 지닌 소유내용들...우선 조씨가의 가부장제적인 인물이며 가족사 연대기의 제1주인공...(16)

-혼란한 틈에 일단 벼슬을 상징하는 표적을 사두고 남의 족보 속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 놓음으로써 그 자신의 가치영역이 영원히 지속. 확대될 것으로 믿는 사람, 이 이후에 채 만식의 <<태평천하>>에서도 동일한 의식구조는 드러나 보이는데, 이런 인물유형은 전체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여러 갈래의 한 전형이다.(20)

-상훈이가 대표하는 뿌리 잃은 가치세대에 의해 조 의관의 세대는 정면으로 도전당하면서 갈등을 표면화시킨다. ...부자 사이에 오고가는 애증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이면에는 조 의관의 가치관에 대항한 반발이 그 요인으로 깔리고 있다. 가치의식의 충돌인 것이다. 이 충돌에서 분명히 떠오르는 사항은 조 의관이 소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물질의 소유를 통해서 파생되는 의식내용이 드러난 것이다.(21)

-작품 전체구조 속에서 차지하는 상훈이의 역할이란 실상 별로 크지 못하다. 이유는 이 작품의 배경으로 되어 있는 세계가 유교권 인물에 의해서 기초되고 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배경으로 설정된 사회배경 자체가 동양이 서양과 마주치는 과도기에 있고 보수지향적인 인물을 조의관으로 보고 서양사상을 표방하는 인물로 상훈이를 보려고 하는 작가의 사회철학적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상훈은 어느 면에서 희생세대쪽으로 볼 수 있는 인물류에 속한다. 미국에 가서 2년간 있었고 교회생활을 통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교수사업을 펼치던 상훈이, 그러면서도 그는 생동하는 인물이 못되고 찌그러진 폐인이 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이미 3.1운동의 실패라는 커다란 상처의 후유증을 안고 있었던 시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상을 펼쳐보려던 모든 사회운동 자체가 위축되던 시대를 살면서 가장 구체적인 아버지 조 의관 세력의 실제적인 금전상의 위협을 받은 상훈이의 신념이라든가 신앙이란 실상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21-22)

-그러므로 그는 서구적인 합리주의 사고가 거대한 전시대의 잔유세력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왜곡. 굴절하게 되는가를 보인다...그들 두 사람이 지닌 갈등 가운데 표면적으로 보이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미래에 관한 신념이라는 점은 그 마찰의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들 신념의 구조자체가 실상은 자기 표현의 욕망을 지탱하는 방법적인 것에 머물고 있음이 작품 속에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22)

-네째 마디로 분류될 수 있는 부분이란 소유의 관계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접촉항인 각 개인의 탐욕과 질투. 아부. 술수. 허영심. 증오심. 체념 따위의 이른바 내적중개로 변질된 인간내면의 황폐함이다. 진실에의 추구라든지 진정한 의미의 삶의 추구가 결여된 채 일정한 힘에 이끌린 모습으로 불안과 무기력이 주조를 이루는 작품분위기로 이 조 의관의 소유관계는 이어져 있다. 그가 생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부재지주로서의 체면으로만 살고 있기 때문에 삶의 활력을 일으킬 성취동기나 그 실행을 위한 박진력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의 인물유형들 속에도 물론 다시 편입될 수 있는 인물들,...등은 상훈이를 필두로 한 처=덕기모. 첩=김의경. 홍경애의 인물군과 함께 한 가족사를 둘러싼 뿌리잃은 도시권 생활사의 한 단면도이다.(23)

-타락한 조 상훈과 그 희생자 홍 경애가 이런 마주침으로 관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 속에는 다분히 가진 자와 뿌리를 잃은 자간의 심리적인 동참의식이 작용했음을 무시할 수가 없다. 홍 갱애 모친이 조 상훈으로부터 생활상의 금전적 도움을 받으면서 겪는 심리적 고통은 실제로 그들이 넘겨야 할 심각한 하나의 시련이다. 신세를 계속 져 오던 갱애쪽의 처녀다운 의협심(?)은 어느 면에서 자기희생을 무릅쓰겠다는 보상심으로 크게 작용했다고 보여진다.(31)-?

-이처럼 비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이루어진 사회내에서의 비정상 성습속이 순환을 이루면서 반복됨은 중시해야 할 점이다. 한 개인이 스스로 관습을 깨뜨리면 어느 때든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경험적 사실이라면, 이 작품의 경우 바로 자신의 자식대에 와서 그가 행한 대가를 되돌림받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치가 이 항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우둔한 치부자들이 그 사물이나 현상을 변경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스스로 도덕적 관습을 깨뜨릴 때 그 부정적 결과가 가장 가까운 자기 자식에게 미친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것이다. 한번 깨어져 내려 온 성관습은 쉽게 다음 대에서도 용납될 수 있게 된다.(32)-?

-가정의 생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조 상훈과 밤중에 밀회한 것을 묵인한 그 어머니는 그 딸의 또 어떠한 불륜도 막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경애는 한껏 자유스런 몸림과 마음놀림을 부여받은 것이다. (32)-?

-완전히 중도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인물들의 행위를 그려보이고 그 대화까지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처럼 드러난 염 상섭의 <삼대>속에서도 실상은 무섭도록 냉엄한 작가적 판정이 개입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가 그리는 소설의 분위기 속에 깔린 어두운 색조, 일가의 해체과정, 인물들이 끝까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끝맺은 질곡뿐인 세계에의 조명 등은 그가 조준하고 있는 가치지향의 척도가 뚜렷함으로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지향의 척도란 그러면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자아에 대한 절실한 절망이다.(44)

-당시대의 교육사업이라든가 교회를 통한 구원의 방법이 어느 한 면에선 일제를 위한 교육으로 굴절된 모습을 띠었고 신앙문제 또한 교회조직의 허울만이 돋보이고 있었다는 한 예증을 그에게서 보게 된다.(45)-?(조 상훈이 아니라 김병화를 통해 시대성격적으로 표현)

-작가는 이 작품 전체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색정적인 배경을 구체화하고 있지 않지만 조 상훈이 성적으로 이미 도착적인 상태에 와 있음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그는 커다란 두 개의 의지-유교윤리를 기초로 한 재산가 부친과(돈의 힘) 애정윤리를 기초로 한 쾌락의 힘(김 의경. 매당)-에 의해 맥없이 부서져가는 인물의 한 전형을 나타낸다.(47)

-그러나 한편 이 인물이 계속해서 김병화로 대표되는 없는 자를 돕기 위해 그 가진 재산을 이용하는 심리적 배경에는 적어도 당시대 재산을 소유했다는 자기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녔다는 증거가 된다고 보겠다. 또 한편 이런 개인적인 자기성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불합리성이 당시대 사회내부에 심각하게 깔리고 있었다는 점을 용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가난하고 못사는 것이 오히려 당시대의 삶을 떳떳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면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병리현상은 대단히 깊은 것으로 보게 한다.(61)

-종교나 교육이란 극히 추상적인 것으로 믿을 수 없는 힘이고 현실적인 힘인 안정된 재산 자체만이 자존하느냐 파멸하느냐 하는 열쇠로 작가는 파악함으로써 상징적인 인물인 조 의관-중인계급 출신-을 주축으로 열쇠를 물려주되 꺼풀만의 종교 신봉자인 조 상훈이를 건너 뛰어 아직은 순수한 덕기에게 물려주게 만든 것으로 인식된다.(66)

-일제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주리를 틀린 백성들이 어떻게 살든, 사는 것 그 자체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고 이러한 작가의식은 중요한 인물인 덕기로 하여금 그 옆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비판적인 안목을 갖추되 동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하고 있다.(67)

-가장 가열한 외적의 수중에서 서로 합치할 수 없는 독자적인 방법론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일제가 바라는 바의 근본적 민족분열이라는 상태로의 귀결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덕기의 우유부단하고 늘 <<자기행위에 회의를 느끼는 성품>>은 일차적으로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또한 <<중도적 안정성의 회귀>>라는 평가를 가능케도 하는 반면 민족의 집결된 힘을 총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이해력의 폭이라는 긍적적인 평가도 가능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공동운명체간의 화해와 결속을 바라는 민족염원이 이룩할 수 있는 인물의 전형적인 한 기질로도 파악될 수 있다. 이런 긍정성이 부여될 때 이 인물은 작품배경으로 깔린 당시대의 민족적인 질곡을 견디며 자기가 설 위치에서 보여준 동족간에 행한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68-69)-?

-가진 사람을 작가가 옹호하려 한다는 관점에서 좀 더 떨어져서 그 재산이 당시대 한국민족이 지닌 현실적인 힘일 수 있었다고 볼 때 당위론의 관점은 달라져야 할 것이 아닌가? 조 의관이 가지고 있었던 소유내용이 한국 자체내에서 부당한 이익추구의 결과라는 판정은 그것대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라는 민족공통의 적 앞에서 내세울 마땅한 긍정적인 유산으로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 그 재산 자체는 한민족적 한가족의 소유라는 점에서 그 재산이 일본인들이 아닌 한국인들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당시대의 당위 명제가 있을 수 있다면 덕기에 오면서 그것이 실현되고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70)-?

-과격하고도 환상적인 공산주의자 장 훈의 파괴적인 자기 희생을 통해서 김 병화의 존재를 확립시키고 이 인물의 존재 위에서 덕기를 접속시키고 있음은 작가의 사회의식이 어떠한 개혁의지도 전통적인 민족단위의 기반 위에서 수립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신념과 맥을 잇고 있음을 인식케 한다.(75)

-일본이라는 악의 몸에 붙은 발과 손이 저지르는 악행을 짐짓 보지 못하고 지낸다 하더라도 한민족이라는 일개인은 어쩔 수 없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와 상황이 바로 작가 염 상섭이 살던 지점이었다.(91)

-앞에서 분류한 인물유형들을 작가적 절망-삶의 한계인식-이라는 안목에서 보면 중대한 측면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민족의 존재단위로 지닌 치부층의 소유양식이 뿌리가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불가피하게 그 소유양식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작가인식이다.(95)

-<삼대>의 작가가 그의 출생지인 서울이라는 도시적 삶의 양상묘사를 통해 1930년대 초반에 걸친 한국적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96)

2.

(최 혜실 <<한국 근대문학의 몇 가지 주제>> 소명출판 2002)

제 3부 근대문학과 일상성

제 1 장 <<삼대>>에 나타나는 1930년대 자본가 몰락

-그러나 이 다양한 주장들의 관계를 정치하게 살펴보면 한 가지 상충되는 점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돈을 추구하는 부르조아의 가치관과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족관은 그 본질상 상당히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충되는 가치관이 드러나며 양자는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고 어떤 선상에서 타협하는지 혹은 두 가치관이 정말 상반되는 것인지 세밀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데서 리얼리즘소설로서 <<삼대>>의 문학사적 의미망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126)

-대부분 한국의 소설들이 예술 특유의 돈에 대한 순결벽을 드러내는 데 반하여 염상섭의 <<삼대>>에는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인이 <<돈>>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126)

-그러나 지금까지 인물들이 ‘돈’을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양상과 그 이기심이 가족간의 ‘피의 논리’, 인륜이 작용하는 양상과의 교호관계는 세심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즉 기존의 연구는 합리적 논리와 가족간의 인정주의의 관계를 중산층의 보수주의란 개념하에 같이 놓고 산술적으로 결합하는데 그치고 있다. (128)

-물론 우리는 1930년대 초, 경성 공간에 공존해 있는 구한말 세대, 3.1운동 세대 앞으로의 세대라는 조.부.손의 현재 모습들에서 과거 역사의 편린들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논의의 초점은 상반된 세 가치관들이 현재의 시공에서 어떤 갈등들을 빚는가에 있는 것이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변모의 과정과 필연성을 통찰하는 데 있지는 않은 것이다.(128-129)

--결국 <<삼대>>의 가장 큰 주제는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물의 갈등 양상인 셈이다. 여기에는 혈육의 정이 존재하지 않는다.(1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훈이가 형사를 세워 금고를 탈취하거나 정미소를 상훈이에게 상속시킨다는 가짜 유서를 금고 속에 집어 넣는행동을 했다는 것은 신문소설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삼대>>가 현실이었다면 그것은 부자간의 소송을 의미한다. (138)

-...상훈과 덕기가 대안 없는 비판자라는 점만 강조하기로 한다.(146)

-조의관에게 있어 벼슬과 족보 사기는 천박한 속물주의가 아니라 자손들이 가문에 긍지를 가지게 함으로써 그것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반면 상훈이나 덕기에게는 이런 확고한 윤리관이 결여되어 있다. 상훈의 ‘제3제국론’이나 덕기의 동정자 성향은 현실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일 뿐 현실을 향한 가치관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결국 덕기가 <<무화과>>에서 아버지 상훈처럼 무위도식하다가 몰락하고 마는 전철은 이미 <<삼대>>에서 배태되고 있는 셈이다.(147-148)

3.

(김윤식 편 <<염상섭>> 문학과 지성사 1977)

김윤식 <<염상섭의 소설구조>>

-덕기는 그 어느 인물에서도 증오나 애정을 드런지 않는다. 이 중립성이 문체의 중립성을 가능케 한다...(59)

-물론 부 상훈의 치졸한 연극, 그리고 순순히 회계하는 장면, 지주사의 배신의 동기, 병화의 새 출발, 필순에의 방황 등등이 형편없는 피상적 관찰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삼대>>의 원전 쪽이 훨씬 설득적이다. 거기에는 단행본에 있는 <<부친의 사건>>(41장), <<백방>>(42)이 없다. 실로 개악인 셈이다.(61)

-과연 <<삼대>>의 주제가 중산층 안정감으로서의 재산의 윤리화로 본다면, 작가의 주제 파악의 지극한 보수주의가 옳으냐, 즉 시대의 진보성이냐 퇴보이냐의 문제가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함에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새삼 물을 것도 없다. 리얼리즘이 단순한 묘사의 정밀성에 그치는 자연주의가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이다.(61)

-서울 중인 계층 출신이자 그 계층 옹호에 철저한 <<삼대>>의 조부 조의관의 이데올로기를 호의로써 바라본 작가의 분신이라 할 덕기(손자 세대)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신학문과 기독교적 이념에 놓인 아버지 조상훈에 대해서는 놀랄 만한 적의를 작가가 드러내고 있다. 실상 작품 <<삼대>>의 리얼리즘상의 취약점이 바로 이 편견에 있는 것이다.(65)

-(중성적 안정감 회복이) 염상섭의 경우는 서울이라는 지역성, 그리고 궁정주변과 연결된 역사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그의 보수주의는 설명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은 중인계층의 역사성에 직결시켜 보면 한층 명백해진다.(70)

김현 <<염상섭과 발자크>>

-전형으로서의 인물은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을 자신의 피 속에 육화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오히려 그 이념 자체이다. 그러나 염상섭과 발자크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형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두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보다는 전형을 만들 수 있는 정열. 수난이, 다시 말하자면 한 시대의 문제가 어떻게 모든 인물들에게 확산해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다.(100)

-사회가 변하지 않고 풍속적인 면에서나, 윤리적인 면에서 굳건한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틀을 문학화하는 것이 작가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회가 변천한다면, 그 변천의 과정이 여러 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형을 창조하지 않고 <한 뭉텅이의 인물>들을 창조하려 할 때에는 (1) 평행을 이루는 여러 세팅의 복합, (2) 인물의 다양함, (3) 도덕적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것의 부정이라는 여러 측면을 종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100)

-<<만세전>>에서부터 점점 극복되기 시작한 자기 정열의 과잉표출은 그러나 <<삼대>>에 이르면 완전히 제거되고, 자기 관찰의 한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행해진다...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냉정한 관찰이라는 선으로 자신을 낙찬지운다. 물론 그 관찰은 개성의 자각이라는 개인주의적 입장 위에서 이다.(112-113)

-그를 통하여 소위 개화기시대의 인텔리. 부호들의 기독교와의 관계가 극명하게 들어난다. 개화기 초의 기독교가 풍속으로 뿌리박지 못하고, 새것 콤플렉스의 한 증세로서 <수입>되었다는 것을 상훈은 보여 준다.(114)

-30년대의 세대를 염상섭은 덕기와 병화로 대표시키고 있는데 그 두 인물이 다같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개화기 시대의 기독교의 악질적 측면을 나타내 주는 동시에 기독교에서 분파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극화를 보여 준다.(114)

4.

(한국문학연구총서 현대문학편 8<<염상섭 연구>> 새문사 1982)

김종균 <<염상섭의 생애와 문학>>

-<<삼대>>에는 조. 부. 자의 세대가 공존하면서 각기 다른 정신체계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중심세대는 할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유교사상 체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 따라서 개화. 개량주의자 아들의 세계는 빛을 못 보고 파멸에 이르는 과도기 체계 내지 역사적 공간에 끼어든 희생세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정신상태 여기서 이미 비극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15)

이주형 <<‘민족주의 문학운동’과 ‘삼대’>>

-<<삼대>>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축을 구성의 골격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세대간의 대립과 연속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횡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여러 인문들 간의 대립과 화해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축이다. 이와 같은 플롯은 <<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한 이중구성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 그리고 같은 세대의 여러 가지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창출된 것이었다고 보겠다.(43-44)

-조상훈이 이 작품 속에서 보이고 있는 행위의 대부분은 매우 통속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가장 통속적인 인물로 그려 보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조상훈이라는 것이 된다. 통속적 인물이란 대다수 시정의 사람들처럼 평속한 가치관을 가진 채 감각적, 순간 향락적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45)

-결국 종축과 횡축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가치관과 이념을 포용한 덕기의 현실대응 방법론은 1920년대 이후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말해 온 점진개량론, 준비론 혹은 실력양성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행방 후에 개고된 부분에서는 대일타협론까지 나타나고 있다. 개고된 부분에서 덕기는 기무라 고등과장에게 뇌물을 주면서 피검자의 석방을 ‘사정’하고 심지어 기무라의 도움에 대해 ‘감사한 안사’마저 하고 있다.(49)

-<<삼대>>의 형실대응 방법론은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층민들의 운명을 통찰하고 거기에 논리적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유산층 주변의 제한된 생활체험에서 나오는 지식인(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일단 이렇게 말해둔다)의 관념을 통해서 제시된 것...(51)

-또한 작중인물 덕기가 말한 대로 포용과 감화가 적극적 현실대응 방법이 될 수 있으려면 그 뒤에 오는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최종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논리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포용과 감화의 다음 단계에 대한 발전적 논리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삼대>>에는 제시되지 않으며, 이 점이 <<삼대>>의 큰 한계일 수밖에 없다. <<삼대>>이전이나 이후의 작품에서도 염상섭은 그런 발전적 논리를 제시한 적은 없다.(51)

김중하 <<염상섭 문학의 사회적 의미>>

-문학이 현실과 맺고 있는 현실반영적 의미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서의 문학사회학적 의미인 상대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의 근대문학이 발전해 온 파행적 특수성과 시대상황이란 것을 감안한다면-우리의 근대문학이 일제치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여건적 특수성-문학의 절대적 평가 기준에서보다 그 상대성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 단제의 민족사관이 극단적인 것이면서도 긍정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때문에 단제의 극언인 일제치하에서의 모든 문화활동은 반민족적 또는 친일적이란 표현이 절대적 변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해석된다.

그러나 만일 단제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는 불해하게도 친일근대문학은 가질 수 있어도 민족적인 우리의 근대문학은 처음부터 가질 수 없게 된다는 비극을 만나게 된다.(79)

-삼대에 걸친 인물의 연계성이 세대간의 갈등이란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돗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태도나 현실 인식의 차원은 소설의 배경적 의미 이상의 민족사적 현실에 대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소설 전체의 의미를 확대하도록 강요하게 된다.(84)

김시태 <<횡보의 비평>>

-문학은 아무것에도 예속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종교나 운동에 예속된 이용물이 되고 계급의 특유물이 되거나 선전기관이 되며 玩弄物이 될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시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릇된 현상이었다. 소위 예술이니 인생을 위한 예술이니 하지만 그 어느 견지로서든지 예술의 완전한 독립성을 거부할 수 없다. 더구나 경향이라든지 주의라든지 파라는 것이 작자와 작품을 지배하는 疇型에 배겨내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작가가 어떠한 주의라든지 일정한 경향에 구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견지로서는 계급문학의 가부를 논의 할 필요가 처음부터 없지 않을까 한다.(염상섭: <<작가로서는 무의미한 말>>, <<개벽>> 56호, 52면)(36-37)

-<<계급문학시비론>>에서 시작된 그의 프로문학 비판은 국민문학 논의와 함께 한층 가열되었으며, 그 후 이데올로기 문학운동이 종식된 30년대 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37)

5.

(김윤식 <<염상섭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811.3 염51z김1)

-제1장에서 작자는 중산층 출신의 부자집 손주인 덕기와, <맑스 보이>인 김병화를 보여줌으로써 30년대의 풍속도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514)

-말일 <삼대>가 이광수나 이효석의 작품에서처럼 사랑이라든가 감정을 일층 우위에 두고 얘기를 전개한다면 그것은 한갓 낭만적 멜로드라마에 떨어졌을 것이다. 사랑이나 감정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근대에는 핏줄이나 재산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적 삶이란 재산에 대한 생각이 핏줄이라든가 사랑보다 훨씬 큰 비중을 가져 인간을 행동케 하는 것이다.(516)

-<삼대>에는 핏줄과 재산이 유착되어 있어, 핏줄 쪽은 봉건적인 생각에, 재산 쪽은 근대적인 생각에 속하는 것이어서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삼대>는 근대적 소설이자 거기에 미흡한 것, 곧 중산층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이로써 잘 드러난다. (516)

-인간적 바탕의 깨끗함에 대한 도덕적인 우월성이야말로 작품 <삼대>의 밑바탕에 깔린 힘의 일종이다. 덕기도 병화도 이러한 도덕적 정결성에 의해 서로 깊게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필순 및 필순 집안의 존재는 <삼대>의 세속적인 측면을 재는 눈금과 같은 것이다. 어떤 명작도 그것이 명작이기 위해서는 논리 밖에 놓인 어떤 정결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삼대>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522)

-조성훈이 이 편지를 찾고자 안절부절 못하고 홍경애는 그 편지 쓴 여인의 정체를 몰라 몸이 달아 있는 이 장면을 국외자인 김병화가 지켜보고 있다. 부자집 아들의 오입장이 노릇하는 삶의 풍속도라 할 것이다. 홍경애가 김병화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것 역시 20년대 후반의 식민지 속의 서울의 풍속도에 속하는 것이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부자집 오입장이와 그 첩에 대한 흥미와 김병화와 피혁 등 사회주의자들의 행동 따위가 꼭같은 평면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곧 두 가지 모두가 한갓 풍속적인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대>에서 작가의 이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작품의 의미는 똑바로 파악될 수 없다.(523)

-풍속을 삶의 깊은 곳에서 그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풍속이 의식주를 해결한 자리 위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중산층 이상에 연결된 삶이라면 문화적 감각으로의 오입장이적인 감각이 빠질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조아지의 일상적 삶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삼대>가 이 시대 중산층의 삶의 감각을 다룬 유일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근거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527)

-...조씨가문의 분재기를 보여줌에 있어 작가 염상섭은 실로 파격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작가 염상섭이 맨얼굴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536)

-작가가 자기의 목소리를 버리고 돌연 <필자>라는 한갓 기록자의 자리에로 옮아 앉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삼대> 속에서 바로 이 대목만이 소설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소설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현실적 삶에서는 사실자체를 드러내야 한다. <삼대>가 소설임엔 틀림없지만 위의 대목만은 소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현실적 세계로 옮겨가 버린 것이다. 진실과 사실이 여기서 대비되고 있는 형국이다. 어째서 분재기란 소설로 다루어지지 않는가. 왜 작가는 소설 속에 분재기만은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이질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진실과 사실 사이에 소설을 두느냐 진실 쪽으로만 치달을 것인가를 묻는 마당에까지 작가는 모르는 사이에 육박해 온 것이다. 사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소설은 소멸되고 신문기사라든가 학술논문이라든가 보고문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진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그 끝에는 사랑이라든가 미움 또는 그리움과 같은 환상(꿈)의 수준에 이르고 말 것이다. 곧 로만스에 이를 것이다... <삼대>는 이 점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았다. 사실자체의 힘을 이용하여, 진실이라는 이름 밑에 자행되는 허위성(환상적 열매, 허황한 기준)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분재기의 제시와 그 제시방법이다.(536-537)

-그렇지만 <삼대>는 소설인지라, 작가는 금방 자기 목소리에로 되돌아갔다. 사실이란 한 번 얼굴을 내밀면 족한 것이다.(537)

-조부의 돈의 사상을 유지하되 사당의 사상(봉건적인 것)을 버리겠다면, 그것은 어는 쪽으로도 불철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철저함이야말로 바로 <삼대>의 한계라 할 수 있다.(539)

-곧 그러한 사상운동의 묘사는 범죄자(깡패)라는 감각이 아니면 결코 소설 속에서 포착될 수 없다. <삼대> 자체가 신문소설인 만큼 총독부 도서과의 검열의 직접적인 대상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정이 잘 이해될 것이다. 가치중립적인 일상적 삶의 감각 속에 신문이 놓여 있는 만큰 그 신문이 안고 있는 정치감각에 충실하는 일이야말로 근대적 삶의 기준에 제일 알맞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병화. 장훈은 깡패 또는 범죄자의 범주가 아닐 수 없다.(547)

-<삼대>가 가족사적인 소설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조부. 부. 손에 걸치는 삼대의 세대적인 갈등을 그린 것이 아님도 거의 확실하다. 더구나 같은 세대의 동시대적 의식을 그린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렸는가. 성격이었다. 성격이되, 운명론적인 성격이다. 발전소설, 또는 교양소설이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교양(발전)소설 또는 성장소설에서의 성격이란,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해 가는 것이지만, 운명론적인 성격은 날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비중이 결정론적 성격에 있는 만큼, 현실개혁의 의지는 사실상 승인되지 않는다. 현상유지의 보수주의, 인간의 일상적 준거, 가치중립성에 멈추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속성이 이 보수주의와 잘 어울릴 수가 있는 것이다.(554-555)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한 것, 그 속에 덕기의 인생이 놓여 있다. 이 불확실한 마음이란 덕기가 놓인 상황과 등가이다. 이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삼대>의 참주제가 새삼 선명해진다.(561)

-돈의 자율성과 개개인의 성격이라는 두 기둥 속에 놓인 조씨가문의 삼대는 각각 저마다의 <도의적 이념>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치중립적이고 현상유지의 보수주의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제 4 대인 덕기의 아들도 앞 세대가 보인 성격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음이 원칙이다. 다만 그는 그 나름의 <도의적 이념>만을 가질 따름일 것이다. 돈의 자율성을 돌파하지 않으면 이들 가문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은 이제 분명해진 것이다. 이들 가문은 그들 재산을 신성불가침으로 보호해 주는 통치부가 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구한말 통치부든 총독부든 미군정이든 자유당 통치부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에겐 역사가 없는 만큼 삶의 내재적 가치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삼대>가 안고 있는 한계가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니깐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을 이 작품만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일찍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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