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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길연구자료들
2009년 05월 16일 22시 01분  조회:2894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안수길 연구자료

 

1. 元亨甲, 「안수길의 작품세계」, 안수길, 󰡔��第三人間型󰡕��, 삼중당, 1981

 

선생에 있어서 북간도는 제이의 고향일 뿐 아니라 문학의 대륙적 원천(大陸的源泉)이다. 선생의 작품세계가 한국의 다른 작가와 다른 점을 우리는 이 두개의 고향에서 찾아야 된다. <<北間島>>나 <<通路>> 등의 대하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白夜>>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 <<泥土地域>> <<浮橋>> 등 10여 편의 장편소설에서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저 황량하고 광활하며 중후한 인간의 거의 원시적 광야의 무대이다. 또렷한 이성(理性)의 질서가 작용하고 지배하는 문명이나 교양의 알뜰한 그늘이 아니라 그것들이 미치지 못하는 막막한 회색의 들판인 것이다. 분명히 이러한 대륙적 차원은 한국문학에 있어 특이한 일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의 교양으로서 인간성의 선악의 분별이 갈라지고 모든 면면들이 닳고 닳은 사회적 의식 차원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안선생의 또 하나의 면이 이러한 회색적인 광야의 문학을 내재적(內在的)으로 보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가(276쪽) 황량한 광야에 이끌리면서도 늘 그의 탄생 조건이자 어버이의 고향인 함흥의 정서속에 젖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에는 전자에 못지않게 지대한 그의 문학적 의미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섬세하고 꼼꼼하며 다분히 사말적(些末的)이라고 할 만한 자랑스러운 감정이나 교양의 언어적 노력은 이 후자의, 즉 생래적(生來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는 이 두개의 상반된 의식영역 또는 지향성의 갈등현실이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이러한 작품에 있어서의 갈등현실은 곧 그의 문학적 현실인 동시에 또한 문학적 실현의 불가결한 이유라고 할만도 하다. 안선생의 평소의 모습과 그가 일생을 살아온 역정의 대조적인 성격이 이러한 그의 독특한 문학적 현실을 무엇보다도 연연하게 증명하여준다. 그의 곱기 이를 데 없고 늘 잔잔하며 모든 것에 있어 가냘프리만큼 깊이 생각하는 겁먹은 눈빛과 나직한 키에 허약한 체구, 그리고 동양인 특유의 교양의 전아한 소극성이 그 표정과 거동에서 국향(菊香)이듯 풍기는 인격적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미 소년시절부터 파란이 약속될 수밖에 없고 그의 생애를 더듬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 같고 어떤지 이화감(異和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이 함흥고보(咸興高普) 二년이라는 10대의 나이에 항일 동맹휴학사건을 주모하여 퇴학당하고 다시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도 광주학생사건에 호응 봉기하여 또한 끝내 졸업을 못하고 일제의 경찰서와 국외를 전전한, 그 생기발랄한 민족정신과 조국애의 산 경력을 그의 조용한 모습에서 상기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된 十三편의 단편소설들은 그러한 그의 기복어린 민족의식과 만주의 회색적(灰色的) 대지, 그리고 그의 고향인 어버이의 땅의 아기자기한 감각적 정서가 그의 품향(277쪽)(稟香)어린 인격적 교양에 무르녹아 깊은 자기 조화속에 빚어진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안선생의 단편소설의 특색은 그가 많은 중편과 장편, 대하소설에서 시도하였던 거대하고 광활한 주제라는 것을 전혀 의식조차 하려고 하지 않은 점이다. 선생은 단편소설이 지닐 수 있는 매력의 가능성을 끝까지 성실하게 추구한 것 같다. 큰 것은 큰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소박한 원리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편소설에서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 十六편(실린 것은 13편임-인용자 주)의 단편이 반증적(反證的 )으로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단편소설만의 문학적 가능성(可能性)을 열어준 셈이다. 우리가 장편소설의 도도한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려 스치고 지나버릴 지루한 감정적인 사말성(些末性)들이 하나하나 이 단편들의 작가적 시력(視力)으로 포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감성의 편린 같은 것들이 단순한 사말성이 아니라 대륙적 광야의 체험에서 또는 민족적 시련의 체험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이듯 받아낸 결정체(結晶體)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커다란 사회적 체험의 배경과 심각한 인간적 체험의 거울이 없이는 어떠한 한 줄의 문장도 그 진실한 의의를 못가진다. 안수길선생의 고드름 같은 이 생활 감성(感性)의 결정체들은 단순한 흥미로 엮은 작가적 여적(餘滴)이 아니라 보다 깊은 내연성(內緣性)을 가지고 그의 <<北間島>>적 세계에 문맥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커다란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골돌한 인간의 오뇌(懊惱)가 뒤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이 짤막한 단편들은 그 어느 하나도 깜찍한 재치에 끝나지 않고, 재미있게 읽히면서 재미로 그치지 아니하며, 하물며 투명하게 생활현실을 비춰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문학적 문맥이 생활속에(278쪽) 무산하는 일 없이 음미할 맛있는 여운을 남겨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단편소설들은 친근감에 넘치는 서민생활의 알뜰한 순례기(巡禮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적 현실을 그 원근(遠近)에 있어 겪은 자의 애정있는 순례기이다. 애정과 증오의 경지를 훨씬 높은 차원에서 극복한 조화(調化)의 한 실현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단편들의 언어전개(言語展開)사이에 기웃거리는 여러 가지 색다른 눈길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비극적 현실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암시하고 있다. 서민의 현실생활이 움직여지고 있는 그 내면의 보이지 않는 줄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 작가적 사명을 이 단편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그 보이지 않는 내면성에 있어 집단적 불행과 숙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작품 하나하나를 다 읽고난 다음에, 지극히 막연한, 먼 원경으로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작품 하나하나 속에 분명히 내용으로서 박혀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편 한편의 전체성(全體性)으로 하여금 독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위치에 서게 하고 또한 그 독자로 하여금 작품이 암시하는 작품의 대안(對岸)을 향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안수길선생은 작품속에서 어떠한 주제(主題)를 내세워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일을 극히 꺼려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학에 있어 그런 욕심은 허다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부딪쳐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데까지나 그것은 문학적 생명의 자기 손상이거나 자기 학대에 다름 아닌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절실하고 위대한 주제나 주장이라 하더라도 결국 문학세계에서 벗어나는 문학의 월권(越權) 내지 배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은 암시할 권리는 있어도 지적할 권리는 없다. 안선생은 그의 이 단편들에서 곧 볼 수 있듯이, 그가 철저할이만큼 가난하고 수모받고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의 문학을 착상하면서도(279쪽) 끝내 그가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 겸손한 것은 그러한 문학의 원리적(原理的)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十六편의 소설은 그 모두가 한결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하나도 같은 소재, 같은 내용, 같은 방향의 것이 없다. 모두가 특이한 독자성(獨自性)에 있어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단편들의 특징은 그 전개(展開)의 자연스러움에 있다. 우리가 맺히는 데 없이 읽어나갈 수 있고 어느 대목에서도 진전상(進展上)의 벽에 부딪히는 일 없이 순탄하게 넘어가며 그의 소설의 함정에 빠져들어 갈 수 있는 것은 그때문일 터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소설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온 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점차로 그 소설의 세계를 신뢰하고 결국은 의식의 전영역성(全領域性)으로서 정서적으로 젖을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 같다. 그것을 빙이(憑移)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소설 독자의 빙이야 말로 소설의 성공의 키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편들의 승점(勝點)은 독자의 감명도(感鳴度)를 어느 수준에서 머물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사유(思惟)할 수 있도록 끌어나간다는 점이다. 작가가 그의 주장이나 주제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거나 과장해서 강렬한 독자의 감명도를 이 작가는 시도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 것이다. 흔히 이러한 작품을 전전적(戰前的)이라든가 잃어버린 세대의 특색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소재(素材)의 성숙한 자기동화(自己同化)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작가의 관조적(觀照的)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소설의 한 생명(280쪽)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또는 체험의 심천(深淺)을 떠나서, 이러한 관조적 작가태도로, 여간한 작가의식의 성숙도가 아니고서는 바라기 어렵다.(281쪽)

<<第三人間型>>

이 소설이 이 작가의 제삼창작집의 이름이기도 하듯이 단편으로서도 작가 안수길의 한 대명사이기도 하다. 확실히 <<第三人間型>>으로 하여금 이 작가의 작가적 심도(深度)가 움질일 수 없게 부각되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제三인간형이란 현실의 어려움에 패배하여 스스로의 사명감을 버리거나 또는 현실에 질질 끌려가는 애매모호한 소극적형이 아니라 그 현실속에서 주체성을 잃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사명의식(使命意識)을 되찾기 위하여 현실을 극복해가는 인물이다....(281쪽)

그러나 제삼인간형이란 이름은, 흔히 모든 작(281쪽)가가 그러하듯이 편의상 붙인 제목에 불과하다. 주제로서 형성될 만한 사상적(思想的)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인간적 사명을 찾아 나선다는 의미(意味)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작품이 추구(追求)하고 의미는 보다 깊은 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배후(背後)인 六․二五와 더불어 우리는 민족의 역사적 숙명을 느끼게 되고 그 역사적 숙명에 도전하는 인물로서 등장한 것이 다름아닌 <미이>란 존재라고 상도되는 것이다. 일제(日帝)의 극혹(極酷)이라든가 六․二五의 참극이라든가의 민족적 수난은 그 모두가 국민의 자주성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비겁한 의타성(依他性)에 직결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제삼인간형이라는 막연한 주제성(主題性)은 단순히 현실을 파헤치고 살아나가는 주체적 인격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국민적 의식구조에 대결하는 오의(奧義)를 품고 있는 것이다.

광주학생사건을 뼈아픈 현실로서 체험하고, 중국인의 허망스런 국종의식(國宗意識)을 현실로서 목격한 작가의 역사의식을 생각할 때 이 소설의 이야기속에 나타난 여주인공의 존재는 민족적 당위성이 감지(感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기막힌 라이트 모티브이기도 한 <검정 넥타이>는 그러한 깊은 민족적 반성을 음미할 만한 상징이다. 그것이 <검은 넥타이>란 점에서 그것도 악세서리의 멋에 그치고 말 수가 없다. 죽은 역사의 모티브를 죽은 역사에 돌려줘야 하는 <미이>의 각성은 바로 민족의 의식구조에 도전하는 한 역사적 각성(覺醒)이 느껴지고 남는 것이다. 그 <검정 넥타이>로 하여금 <조운>과 <석>이라는 작중 주인공이 심각한 쇼크를 받았듯이.(282쪽)

<<翠菊>>

사랑과 성(性)의 일원성(一元性)을 기대한 문학작품은 세계문학사상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같은 사랑이란 얼마나 절실하고 불가능한 인간문제의 필연성(必然性)인가를 다룬 문학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 풀길 없는 인간의 필연성을 이 소설에서처럼 아름답고 담담한 내연성(內燃性)으로 전개한 작품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짧고 이렇게 조용하고 이렇게 기복없는 내용으로서 이렇게 성공한 성문학(性文學)은 <<翠菊>>외에 보지 못했다....<분이>의 괴로움을 너무도 알고 그러기 때문에 마음으로 아끼고 감싸주는 시어머니야 말로 <분이>의 대항할 수 없는 적이었다. 마침내 <분이>는 그 적 앞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웃집 머슴과 도피행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네의 죽음이 성의 괴로움으로부터 스스로 해방하자는 것은 아니다. 욕구불만이 죽음으로 결과했다는 것은 값싼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의 피상적 견해다. 오히려 그네는 그네의 죽음으로써 그네의 성을, 그네의 사랑을 그네의 존재 이유를 그네의 생명의 필연성을 자기방어한 셈이다. <분이>의 자살은 성의 욕구가 얼마나 절실하게 인간적인가를 진리로 남겨 주었다.(283쪽)

<<旅愁>>

...통속적인 작가 같으면 이 <철>과 <황숙>의 기묘한 해후를 남녀의 애정문제로서 관계지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러고 남을 만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가는 이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第三人間型>>에서처럼 분별(分別)의 지성(知性)이라고 할까, 극복의 의지라고 할까 하는 이 작가만의 정신적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황숙>이라는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그러한 속된 인간의 범정적 개연성(凡情的蓋然性)을 탈피한다. <황숙>은 불행을 딛고 일어난 안수길 특유의 의중(意中)의 인물이다. 그는 어떠한 비극도 비극으로서 그리지 않는 우리 문단(文壇)의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황숙>은 그러한 안수길문학의 전형적인물상(人物像)인 것이다.(284쪽)

안수길 문학의 이러한 놀라운 자기혁명이 그 충분한 동기 부여를 가지고 그러나 커다란 내적 고민의 도정없이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연한 인과(因果)를 느끼게 한다. 피난생활 속에서 무섭게 변모한 三八이북 동포의 생(284쪽)존의식이 이렇게 간파되는 직시력(直視力)의 세계는 이 작가만의 것이다.(285쪽)

<<牧畜記>>

생(生)의 의지가 투쟁적인 끈기로 전개된다. 인간의 정서적인 무기력화라든가 삶의 꿈 같은 희박화라든가가 일체 허용될 수 없는 현실세계이다. 종돈(種豚) 70마리를 모국의 논산(論山)에서 만주의 와우산까지 생활을 같이하며 수송하는 <찬호>란 인물은 실향민(失鄕民)의 전형인 동시에 그 실향을 극복하기 위한 생의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이러한 민족의 의지를 만주의 황량한 허허벌판에서 발견하고 조국광복의 내일의 힘일 것을 다짐하는 것 같다. 수난의 민족사를 그 최악의 현실에서 체험한 작가에 있어 문학일반의 고독이라든가 향수 같은 것이 문제될 수 없다. 그건 오히려 감미롭고 값싼 문학의 기만일지 모른다. 목축장에 생활을 의탁하고 있는 천애의 고아 老로우슨이 호랑이에게 귀를 잃고 그 복수심에 불타 끝내 호랑이와의 대결을 위하여 단신 산으로 올라가는 투지가 주인공 <찬호>를 뒷받침했다.(285쪽)

<<새>>

날지 못하는 새는 생명의 의미(意味)가 없다. 사회적으로 활동력을 잃은 가장(家長)은 이미 남자의 명맥이 없다. 새가 날듯이 남자는 사회에 나가서 경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것(286쪽)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운이 없고 위축되어 폐인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턴가 이런 남자의 철학(哲學)이 남자사회를 위협하기 비롯하고 있다. 무직(無職)은 무능의 대명사처럼 등장하고 무능은 자학을 낳으며 무능과 자학은정신분석상 이어동의(異語同義)가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새>>는 소설로서도 색다르거니와 안수길문학에 있어서도 특이한 일면이다. 작중 인물인 <나>는 이러한 무직과 무능과 자학이라는 금일사회(今日社會)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그 스스로의 무능을 동일시하는 환상에 빠진다. 그가 멀쩡한 정신으로 선물로 받은 새장 속의 새를 해방시키는 것은 그의 유능(有能)여부를 알기 위해서였다. 물론 가난이 몰고 온 병이다. 그러나 이 병은 남자들의 금일사회를, 그 농도야 어떻든, 물들이고 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하면 작가의 기발한 착상인 것 같으나 남자사회의 전염병을 고발한 의미가 곁들여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뒤에는 작가 특유의 자신의 철학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작가의 작품세계는 단순한 구경꾼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87쪽)

<<梟首>>와 <<꿰매입은 洋服바지>>

효수와 광복투쟁, 아무리 생각해도 인과성(因果性)이 없는 논리(論理) 같으면서 나라없는 무리의 비극이 더욱 참담하게 심각하여진다. 안수길의 모든 작품이 체험의 진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 참혹한 이름의 소설은 그 담담한 회상적(回想的) 전개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의식을 사무치게 한다.(289쪽)

 

2. 李光勳, 「三段階의 變貌」, 안수길, 󰡔��牧畜記󰡕��, 범우사, 1976

 

우리가 이미 문단의 원로가 된 작가 安壽吉에게서 받는 인상은 한평생을 외길로 살아온 고고(孤高)한 선비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사실상 그는 해방직후의 신문사 근무와 피난시절의 교사생활이후 식생활을 위하여 직장을 가진 일이 없었다. 오로지 소설만을 써오면서 오늘의 연륜을 쌓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나이의 문인들이 흔히 갖기 쉬운 문학단체의 감투싸움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많은 돈이 걸려 있는 문학상에 연연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작품을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 데도 한눈을 팔지 않은 채 오늘을 쌓아왔다. 산마루에 꿋꿋이 서 있는 하나의 거목이나 노송에 앉아 있는 학처럼 세월을 엮어온 것이다.(11쪽)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1940년대에 첫창작집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만주라는 입지적인 조건이 크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가 간도시절에 써낸 작품으로는 중편 「벼」를 비롯하여「한여름밤」 「새벽」 「牧畜記」 「圓覺村」 「바람」 등이 있으며 「滿鮮日報」에 연재한 장편 「北鄕譜」도 이때에 쓰여졌다. 작가 안수길에 있어서 이때가 작가생활 제1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때의 작품인 「牧畜記」에 나타나듯 자연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차 있다.(12쪽)

「牧畜記」의 주인공 찬호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으로 돌아온 전직교사이다. 그는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고 영적(靈的) 세련을 갖추었다는 인간의 심성보다는 「저희를 생각해 주는 줄 알고 저희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할 줄 아는」 돼지의 심성에 더욱더 마음이 끌리는 순박한 인물이다.(12쪽)

그의 교사직 실패는 그 자신이 너무나 순박했기 때문이다. 다른 교사들은 거의가 다 삼일운동을 전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온 지사(志士)들이었기 때문에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조리있고 감격적인 말솜씨를 가진 웅변가들이었다. 그러나 찬호에게는 말솜씨가 없었다. 그리고 일제와 싸운 혁혁한 공로도 없고 평범한 농업실습교사인 것이다.

그는 항상 그 자신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망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침내 그는 교사직을 미련없이 던지고 와우산(臥牛山) 기슭으로 들어와 목장을 경영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不信)이 동물에 대한 애정과 믿음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운 것이다.(13쪽)

동물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자연에 대한 뜨거운 동경이 전편에 넘쳐 흐르는 작품이 바로 「牧畜記」이다.

해방이 되던 해 6월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만선일보사를 사직하고 귀향, 흥남시에 있는 과수원에서 3년간의 요양생활을 하며 작품활동 제2기의 청사진을 잉태한다.

해방 뒤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인 1948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월남한다. 그리고 경향신문사에 문화부 차장으로 입사하고 조사부장에 이르나 다시 6․25동란을 피해 대구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엔 부산으로 내려가 해군문관 등을 거쳐 피난지의 용산고동학교 교사로 취임한다. 이 당시의 작품들이 그의 문학 제2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旅愁」 「密會」 「翠菊」 「假面」 등과 제2회 아세아문학상 수상작품인 「第三人間型」들이 이 당시의 작품들이다.

제1기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우선 무대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도시 소시민의 일상을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작중인물의 대부분은 이 사회를 개조하고 변모시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물들이기보다는 항상 피해만 당하는 서민의 애환에 초점을 맞추어주고 있다. 그들은 항상 주저하고 눈치를 살(14쪽)피며 세상을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이다. 그들에겐 사태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킬 힘도 없으며 그 자신의 문제 조차도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결단성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사회에 대한 분노, 시대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그 자신을 향해 터뜨리는 것이 고작이다.

이 상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第三人間型」을 살펴보면 이러한 작가의 성향은 퍽 선명하게 노출되고 있다.(15쪽)

생업인 교직에도 충실치 못하고 그 자신의 이상이요 사명인 문학에도 충실치 못하는 「석」이 바로 작가가 그리는 제2의 인간형인 것이다.(16쪽)

「第三人間型」은 안수길의 제2기문학을 대표하고 있는 작품이며 그 당시의 작품 경향을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도시에 살면서도 그 자신의 문제에조차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며 또 사회의 구조적 병리나 상황에 대해서는 분노나 저항보다는 체념과 순응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큰 변모를 겪는다. 사회에 대한 적응이나 저항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변하게 되며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층더 높아지게 된다. 우리 사회의 비리(非理)에 대해서는 종래의 체념이나 순응과는 달리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저항을 시도하기도 한다. 4․19가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의식혁명이었다. 이미 4․19직후 「白夜」라는 신문소설을 통해 자유당 말기의 사회상을 고발한 발 있는 작가는 「서장」 「이락에서 온 불온문서」 등을 비롯하여 「꿰매입은 양복바지」 「동태찌개의 맛」 등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예리한 메스를 들고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수길문학 제3기가 시작된 것이다.(17쪽)

결국 김수동씨(「서장」의 주인공-인용자 주)는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항상 남에게 매어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활을 설계하고 추진해 가는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항상 벽에 막혀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가 아내를 향해 던진 숭늉사발은 처음부터 그 목표가 아내가 아니고 아내 뒤에 있는 「벽」이었다. 그 벽을 부셔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벽은 그의 손으로 무너뜨리기엔 너무나 견고했던 것이다.(18쪽)

「牧畜記」를 비롯한 해방 전의 초기작품에선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전원으로 돌아가는 인간상을 보았고 「第三人間型」으로 대표되는 제2기의 작품(해방이후 4․19에 이르기까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몸을 담고 있으나 현실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자기자신에게도 충실치 못하는 좌절과 방황의 인간상을 본다.

그러나 4․19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말하자면 제3기라 할 수 있는)들에서는 현실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과 여기에 대한 열띤 분노와 저항을 보았다. 현실에 대한 태도가 점차 적극적인 모습으로 선명한 색깔을 띠우고 펼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北間島」 「城川江」 등에서 펼쳐지는 한말(韓末)부터의 우리 민족사는 이 작가의 작품세계가 보다 새로운 차우너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청신호(靑信號)이다.(19쪽)

 

3. 李炯基, 「登山路의 意味」, 󰡔��風車/登校通告󰡕��, 삼중당, 1979

 

안수길(安壽吉)은 언젠가 두 사람의 동료 작가와 자기를 대비해서 각자의 문학의 차이를 재미있게 설명한 일이 있다. 지금 수중에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인용할 수는 없지만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황순원(黃順元)과 김동리(金東里)와 안수길(安壽吉) 세 사람이 금강산에 올라갔다고 하자. 황(黃)은 이 나무, 이 꽃, 저 바위, 이 맑은 물......하면서 그 자연의 오묘함을 샅샅이 살피며 즐길 것이고, 김(金)은 세부적인 관찰보다도 그 전체적인 신비를 중시해서 철학적 명상에 잠길 것이다. 그때 나 안수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나는 산 정상(頂上)의 경관(景觀)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등산로(登山路)가 어떻든가를 생각할 것이다. 비가 오면 길이 망가지지 않을까, 또는 산에 멧돼지가 내려와 아랫동네 밭을 노략질하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일을...

나는 이 글을 六四년인가에 나은 황순원 전집의 그 책 속에 끼어 있는 해설 팜플렛에서 읽었다. 그리고는 안수길의 평가의 적확(的確)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불과 몇 줄 안 되는 글 속에서 당대의 정상급, 작가 세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알기 쉬운 말로 또 이렇게 뚜렷하게(287쪽) 밝혀낼 수 있는 안수길이란 작가를,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때부터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안수길의 이름은 내게 있어 언제나 그 글과 함께 떠오른다. 그 글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안수길의 자기평가다. 금강산에 가서도 경관이 아니라 등산로를 생각한다는 그 말을 듣고 보니 미상불 안수길은 그말대로의 작가였던 것이다.

등산로를 생각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문학적 관심이 인간의 구체적 현실과 생활에 그 초점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리얼리즘이 그의 문학의 기반을 이루게 되리라는 사실은 여기서 쉽게 도출될 수 �는 추론이며 또한 그 추론은 정당한 결론이다.

작가가 현실과 생활에 관심을 둔다고 할 때의 그 현실 그 생활은 물론 등 더웁고 배부른 사람의 그것일 수가 없다. 밥먹고 할일 없는 사람들의 그 팔자가 엿가락처럼 늘어진 현실과 생활도 환상이나 신기루는 아니지만 그러한 현실, 그러한 생활은 작가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성가시게 여긴다. 안수길의 예의 등산로 이야기의 그 말투를 빈다면 산 밑에서 밭갈이를 하지 않고 고대광실에서 떵떵거리는 사람, 그리고 산에 오를 때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비가 와서 등산로가 망가지거나 말거나, 멧돼지가 밭을 노략질 하거나 말거나 자기와는 무관한 강 건너의 불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망가진 등산로와 멧돼지의 피해를 알리고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 한다면 괜한 소리로 남의 기분을 잡친다고 짜증을 낼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안수길이 관심을 갖는 현실과 생활은 그 현실, 그 생활이 언제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서민들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288쪽)

서민! 그렇다, 안수길 문학의 특징의 하나는 그 서민성에 있다. 소설의 주인공을 영어로(288쪽)는 히어로우 즉 영웅이라 하지만 안수길의 소설에는 영웅은커녕 영웅의 친척 뻘되는 인물도 찾아볼 수 없다. 영웅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악당 역시 거기에는 없다. 주인공은 물론 주인공을 에워싼 여타의 인물도 모두가 서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 서민의 생활은 고달프고 그 나날은 또한 개미 체바퀴 돌기처럼 따분하고 볼품 없다. 그 고달른 생활, 그 따분한 나날은 사회적 여건이 그들에게 그것을 강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는 적어도 그것을 물리쳐 보려고 안간힘조차 써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력함의 반증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수길은 그들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높은 데서 아래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의 이웃에 대한 사랑, 아니 그보다도 훨씬 친근하고 또 농도가 짙은 혈연적(血緣的) 사랑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사랑은 서민들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는 긍정적 요소를 발견하는 데 있어 민감하다.(289쪽)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 안수길은 그 당연한 귀결로서 사회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고발하게 된다. 이 경우의 부조리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에는 또 그 구조적 부조리를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할 권력 체제의 역학에 대한 저항성이 절로 반영되는 것이다.<<登校通告>>는 그의 그러한 저항성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292쪽)

그러고 보니 안수길은 <<素朴한 印象>>이나 <<萌芽期>>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작품에서 한결 같이 차분한 객관성과 간결한 문체를 견지하고 있다. 거기서 오는 작품의 전체적 인상은 그 옛날의 이름 있는 도자기를 방불케 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의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는데 있어 큰 기여를 한다. 사회의식과 저항성이 작품의 내용적 바탕이 되고 있는 작가의 경우는 예술성이 대체로 소홀해지기 쉽다는 일반적 통례를 생각하면 이 또한 안수길 문학의 좋은 수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93쪽)

 

4. 申東漢, 「安壽吉의 文學世界」, 한국문학전집(18), 󰡔��안수길󰡕��, 삼성당, 1986

 

滿洲 新京(현재 長春)에서 발행되던 滿鮮日報에는 그 무렵 崔南善․廉想涉․朴八陽․李台雨․金朝奎․李石薰․金萬善․孫素熙․尹金淑 등 여러 文人이 모여 있어 國內文壇과는 달리 마치 一種의 亡命文壇 비슷한 樣相을 띠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作家 安壽吉은 가장 활발하게 作品發表를 하여 젊은 熱情을 文學에 불태웠다.

이 때에 발표된 短篇 <圓覺村> <牧畜記> <새벽>, 長篇 <北鄕譜> 등을 보면 滿洲 大陸에 와서 荒蕪地를 開墾하는우리 農民의 敢鬪相을 素材로 한 것들이 많다.

이러한 素材를 가지고 그는 넓은 大陸 벌판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雄渾한 筆致로 엮어 나가고 있다.(559쪽)

...그는 滿洲의 曠野에서 흙과 싸우는 우리 農民의 모습을 그리는 데 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때에 발표되었던 여러 作品을 묶어 그는 一九四三年에 첫 創作集 <<北原>>을 刊行하였다. 당시 國內에서는 소위 國民文學이라는 이름 아래 親日과 附日의 作品만이 활개를 치고 있었던 狀況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短篇集의 刊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만도 하다.(560쪽)

 

5. 申東漢, 「안수길의 문학」, 신한국문학전집(39), 󰡔��안수길선집󰡕��, 語文閣, 1981

 

안수길의 문학편력을 살펴나가는데서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젊은 시절을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에서 보냈다는 사실이다.(543쪽)

「通路」의 시대적 배경은 노일전쟁과 동학란을 전후한 이조 말의 1900년대에서 한일합병 직전까지의 개화기로서 여기에 함경도의 한 서민의 가족사를 펼쳐놓고 있다.

이제까지도 우리 문단은 몇 편의 개화기를 작품으로 다룬 장편을 가지고 있다. 해방 전에 발표된 「大河」, 「塔」, 「봄」 등이 거기에 해당되는 장편들인데 이것들은 일제하에서 발표의 자유를 못 가진 채 써졌던 말하자면 절름발이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행방을 맞이한 오늘날까지 이 이조말엽 개화기의 격동의 세태를 소설화한 것이 이제껏 별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안수길씨가 敢然히 붓을 들게 된 것은 그 의도부터가 우리 문학의 肥沃을 위해 기획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547쪽)

...작자는 윤 노인의 회고록을 소개해 나가는 형식으로 그 가족의 생활을 통해 풍속을 그리고 시대상을 낱낱이 묘사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547쪽)

만세교에 얽힌 사연은 그것이 바로 이 겨레의 수난의 자취요, 榮枯盛衰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증인인 것이다.(548쪽)

사방으로 밀려다니는 전란 가운데의 피난생활-그 가운데에서 민중들의 기대일 데 없는 어려운 살림살이의 모습이 펼쳐지고 쳐들어오지도 않는 노병(露兵)을 피하여 함흥시민이 철수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동도 벌어진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이 변전하여 노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마수는 더욱이 강토에 야욕을 뻗치게 된다.(548쪽)

가족사를 더듬어 나가는 가운데 이조말엽 개화기의 혼돈의 세태를 작품화해 가고 있는 이 「통로」는 그 기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문학사에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거편이 될 것이며 이것이 하루 빨리 완결되기를 고대하는 마음 간절하다.(549쪽)

 

6. 申東漢, 「서민정서와 역사의식」, 한국문학대전집(14), 󰡔��안수길󰡕��, 太極出版社, 1981

 

장편 「城川江」은 제1부를 「通路」라는 제목 아래 68년 11월부터 <<현대문학>>지에 1년 동안 연재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은 대하소설 「성천강」의 프롤로그라 할 수 있다.(601쪽)

장편 「성천강」의 시대적 배경은 노일전쟁과 동학혁명을 전후한 이조말(李朝末)의 개화기에서 한일합병을 거쳐 3․1운동에 이르는 격동기로 여기에 함경도의 한 서민의 가족사를 펼쳐놓고 있다.(602쪽)

윤 원구도 이 겨레의 궐기에 앞장서고 드디어 국내에서는 발을 붙일 수가 없어 간도를 향해 떠나는 데서 작품 「성천강」은 끝을 맺고 있다.

이렇게 한말(韓末)의 개화기에서 일제식민지 치하의 초기인 3․1운동까지의 4반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주인공 윤 원구의 생태를 그려 나가는 가운데에서 우리나라의 근대 여명기의 시대풍속을 극명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대하소설 「성천강」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주인공 윤 원구의 인물묘사이다. 그는 적극적인 반일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대에 영합하는 아부파도 아니다.(605쪽)

그러면서도 스스로 올바른 길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양심적인 인물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의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형이면서도 또 가장 전형적인 타이프라고 할 수 있다.(606쪽)

악과 선의 대극에 위치하는 중간적인 인물은 작가가 작품에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 안수길은 그것을 이 장편 「성천강」에서 본때 있게 해놓았다.

언제나 동요하면서도 올바른 길을 걸어가려는 양심적인 지식인의 자세를 「성천강」의 주인공 윤 원구에게서 우리는 실감있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굽히지 않는 문학관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문학의 대전제라는 작가 안수길의 말 그대로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근본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것을 가장 깊이 있고 폭넓게 나타내 준 것이 바로 장편 「성천강」이다.(606쪽)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파란을 몰고 온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린 장편을 그 동안에 별로 문학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었다. 이것을 크게 채워 주고도 남는 것이 바로 대하소설 「성천강」의 진면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정통적이면서도 세련된 리얼리즘의 수법을 가지고 민족의 격동기의 모습을 힘있게 그려 나간 작품 「성천강」은 우리 근대 이후의 소설사에 큰 자리를 차지할 거편이 아닐 수 없다.(606쪽)

 

7. 김윤식, 󰡔��안수길 연구󰡕��, 정음사, 1986

 

함흥과 간도 사이, 제1의 고향과 제2의 고향 틈에서 오르내린 작가 안수길의 성장과정은 그대로 식민지와 탈식민지의 사이를 방황한 그의 시대와 대응될 뿐만 아니라, 「성천강」과 「북간도」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세계와 대응되는 것이기도 하다.(16쪽)

만주국이란 일본 역사책에만 나오는 독특한 나라의 명칭이다.(36쪽)

안수길이 마주에 있는 동안 창작한 작품을 연대별로 보면 「새벽」(1935), 「함지쟁이 영감」(1936), 「부억녀」(1937), 「차중에서」(1940), 「4호실」(1940), 「한여름밤」(1941), 「벼」(1941), 「원각촌」(1941), 「토성」(1942), 「새마을」(1942), 「목축기」(1943), 「바람」(1943) 등 모두 12편의 단편과 장편 「북향보」(北鄕譜, 1944)가 알려진 바의 전부이다. 이들 작품을 연대별로 검토해 보면 그의 작가적 원점으로서의 변하지 않는 부분과 객관적 정세 변화에 따라 변해 간 부분을 알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첫 작품인 「새벽」과 마지막 작품인 「목축기」에 이르는 9년간의 창작활동 속에는 안수길 문학의 본질이 잠겨 있을 것이며 그것은 또 저절로 만주국의 조선계 작가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66쪽)

김오성은 이를 두고, “이 작품이야말로 개척민의 생활사의 한 토막이라 할 수 있다”라고 전제하고, “「싹트는 대지」를 읽고 참담한 색조를 만주문학의 성격으로서 인상 받은 것은 기실 이 작품에서 받은 자극에서인 것이다. 안씨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서술할 만한 능력을 가진 작가다. 만주개척사의 문학적 탐구를 안씨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인문평론>>, 1942, 3, p. 23)라고 보았다. 이러한 평가의 기(71쪽)준은 만주이민 개척사의 전사에 해당되는 세계야말로 재만 조선인 작가의 작품상의 본질이라고 본 점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하다.(72쪽)

조선농민들이 처음 두만강을 넘어가 정착할 때, 중국(청나라)인 땅인 만큼 중국인 지주로부터 땅을 분양받아 소작인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 아래에 있었다. 이 기본조건 아래 삶의 있음의 방식이 만들어졌다. 「새벽」이 이 삶의 방식을 어느 작품보다 먼저(72쪽) 깊이 그리고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73쪽)

중국인 지주(지팡)와 조선 이민 사이엔 지주와 소작이 관계가 이루어진다. 오직 바가지와 호미만을 갖고, 고향서 야간도주하다시피 하여 온 조선 이민들이 소작조건에 맞추어 살기란 당초 무리한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이민은 밭농사가 아니고 물을 이끌어와 벼농사를 짓고자 하였다. 그 비용 때문에 지주로부터 빚을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주가 빚을 줄 때는 담보를 반드시 요구하였다. 그것이 인질이다. 인질은 주로 딸이 선택된다. 빚을 갚지 못하게 되지 딸을 빼앗기게 된다. 아비는 빼앗긴 딸을 찾기 위해 지주 집에 찾아가 불을 지르든가 살인을 하는 것이 최서해적인 창작방법론이다. 이를 보통 우리 문학사에서는 자연발생적인 프롤레타리아문학이라 한다. 소재를 궁핍한 곳에서 찾고 지주(공장주)와 소작인의 대립구성 그리고 살인, 방화로 끝을 맺는 자연발생적인 창작방법은 최서해의 「홍염」, 김영팔의 「검은 손」, 이기영의 「세 거지」, 주요섭의 「개밥」 등에도 어느 정도 해당된다(백철, 「조선신문학사조사」, 현대편, 백양당, 1949, p. 38). 이러한 초보적인 단계에서 목적의식에로 방향 전환한 것은 「낙동강」(1927)이후이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이 뚜렷한 계급의식을 내세워 창작을 할 단계에로 성숙했느냐 아니냐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법론을 가졌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권환의 「목화와 콩」(1931), 이기영의 「홍수」(1930), 「서화」(1930) 등에서 비로소 논의가 가능해진다. 20년대와 30년대 소설의 차이를 가능케 한 그 소설형식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매개적 인물 설정에서 찾아낼 수 있다. 계급 사이의 대립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 자연발생적인 것이고 또 그것이 20년대 프로소설의 형식이라면 30년대 프로소설은 매개인물(지식인 또는 의식분자)을 설정함으로써 계급대립에로 나아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김윤식, 「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 일지사, 1978, p. 244. 이하 참조).(73쪽)

「새벽」은 최서해의 「홍염」 쪽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73쪽)기에는 30년대 소설의 특징인 매개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 사실은 그만큼 「새벽」이 자연발생적인 단계에 놓여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척이민의 초기단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자연발생적 단계가 당연한 순서일 터이다. 만주 개척이민의 전사를 다루는 일이 매개인물 설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74쪽)

이러한 개척이민의 비극을 소년 <나>의 목격담으로 엮어 나간 것이 「새벽」이 작품상으로 성공한 으뜸 조건이다. 또한 「새벽」은 개척이민의 전사에 해당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소재상의 최대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75쪽)

안수길이 개척이민사를 보다 깊은 곳에서 탐구한 것은 1941년에 씌어진 「벼」와 「원각촌」 두 편이다. 「벼」는 조선민족 단위의 생존권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주제의 강점을 띤 것이며, 「원각촌」은 한 개인의 강렬한 개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이르지 못한 독특하고도 높은 수준을 보인 것이다. 특히 민족 단위의 생존방식을 다룬 「벼」는 훗날 안수길의 대작으로 꼽히는 「북간도」의 기본구도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77쪽)

만주국 건국 이전과 그 이후를 구별하는 일은 만주개척이민사를 이해함에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이 사실을 떠나면 만주문학은 물론이지만 안수길 문학의 특질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가 없게 된다. 앞에서 「새벽」과 「새마을」을 살피는 자리에서 이 문제를 조금 엿본 바 있었거니와, 「새벽」은 만주국 건국 이전의 일이고 「새마을」은 이후의 것이다. 「새벽」이 「새마을」보다 훨씬 심각하고 깊었다는 것, 「새마을」이란 「새벽」의 후일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조금 엿볼 수가 있었다. 조선인에 있어 만주개척이민사는 만주국 건국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 고난의 역사도 그때에 비로소 겪었던 탓이다. 만주개척이민의 전사(前史)에 해당되는 것이 안수길 작품(77쪽)의 참주제인 것이다. 만주국 건국 이후란 따지고 보면 민족단위의 고통이란 거의 없거나 적어도 내면화된 것일 따름이다. 만주국이란 일본 군부의 괴뢰정권인 만큼 그 정책 속엔 조선계 이민을 일본계 이민 다음으로 우대한 사실만 보아도 이 점을 알아차릴 수가 있을 것이다. 「새벽」에 비해 「새마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낙천주의에 빠져 있는가도 이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전제에서 볼 때 「벼」의 배경이 1930년으로 되어 있음은 이민의 전사의 막바지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78쪽)

벼농사란 무엇인가. 조선계 이민사는 벼농사를 떠날 수 없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거치른 만주벌판도 예외는 아니다. 벼농사는 물을 떠날 수 없는 만큼 관개사업이 첫 과제이다. 관개사업이 집단적 노동을 요청한다는 것, 그것이 곧 조선인 공동체를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야말로 벼농사가 갖고 있는 생산적 성격이다. 이 점에서 단순히 <민족>이라는 핏줄과 구분된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는 하나, 만주 이민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반대이거나 적어도 동등한 것이다. 물은 피보다 진하든가 적어도 같은 수준의 무게를 갖고 있다. 벼농사를 모든 농사 중 으뜸으로 치고, 벼농사로써 생존의 터밭을 삼고자 하는 지향성은 조선 민족만이 가진 특수성이다. 이 점은 적어도 만주에 살던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한 가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인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공동체의 기본단위의 제일 밑바닥에 놓인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의 기본 단위란 핏줄에 못지않게 삶의 방식으로서의 생산양식도 놓여 있기 때문이다. 벼농사는 민족적인 단위와 생활적인 단위가 동시에 결부된 것인(78쪽) 만큼 만주개척이민사의 특징을 제일 잘 보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만주벌판에 벼농사를 하기 위해 관개사업을 벌이는 일은 이처럼 조선민족으로서의 공동체와 노동공동체의 완벽한 결합체를 만들 수 있지만 거기에는 이를 방해하는 세력 또는 이와 대립되는 조건들도 결코 만만치 않으며 이에 대한 싸움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 반대 조건들은 땅주인, 중국관헌, 원주민 등이다.(79쪽)

만주에서의 땅주인이란 무엇인가. 만주는 청나라 땅이고 민국 건국 이후엔 중화민국의 국토인 만큼 당연히 중국 정부가 지주이거나 중국인의 개인 소유로 되어 있었다. 중국 정부는 각 성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정 및 치안을 맡겼다.(79쪽)

이 사건의 발생이란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 사건이 작품 「벼」가 차지하는 성숙된 단계의 조선인 개척이민사의 참모습에 깊이 관련을 맺게 된다.

첫째 사건은 벼농사 및 이주민 증가에서 오는 원주민의 저항이었다. 어느 시기에는 중국 정부도 대체로는 방치원의 생각과 같아서 만주개척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이주증(移住證)을 발급하여 조선인 이민을 환영하였으나, <바가지와 보퉁이를 이고 거지 떼같이 몰려오는> 조선인에 원주민들의 불만은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은 벼농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원주민과 이민 사이의 싸움은 지주 및 중국 정부가 중재함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에까지 이르게 된다.(80쪽)

둘째번 사건은 중국관헌에 의해 일어난다. 여태까지 중국 최고 관리인 현장(縣長)은 조선인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민국 17년(1928)이래 장개석의 북벌이 성공하여 청천백일기가 북만주에도 휘날리게 되자 중국은 종래의 매관매직의 썩은 정치를 없애고 삼민주의에 입각한 힘센 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거기에 발탁되어 온 인물이 소현장(邵縣長)이었다. 북경대학을 나오고, 일본 유학까지 한 소현장은 패기에 있어서나 정치의식에 있어서나 진보적이었다.(81쪽)

「벼」의 이러한 결말에서 드러나듯, 결국 조선 개척민은 일본 세력을 업고, 일본영사관의 힘을 빌어 중국 정부와 대결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일본인 나까모도와 그가 이끌고 올 일본영사관이야말로 매봉촌의 구세주인 셈이다. 일본영사관이 무서워 소현장도 편의대도 감히 총을 쏘지 못했음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단계만 나아가면 만주국 문학에 이르게 된다. 일본(83쪽) 군부의 허수아비가 만주국이라면, 만주국 이념에 맞는 문학 건설은 곧 친일문학에로 나아가는 길목에 해당된다. 일본영사관의 비호를 받아 중국 원주민을 위협하는 가해자 집단으로 매봉촌이 우뚝 서는 일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조선 개척민이 일본인 다음으로 원주민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이 「벼」가 나아갈 다음 단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벼」는 만주국 건설 직전의 조선 개척이민의 현실을 제일 잘 반영한 작품이라 평가될 수 있겠다.(84쪽)

「벼」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만주국 건국과 그것의 이념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달린 것이라, 만주개척이민사의 전사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척이민의 전사 중에 최후 단계가 「벼」인 셈이다.(84쪽)

「벼」가 차지하는 위치는, 작가 안수길에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만주개척이민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에 놓이는 것이다. 만주국 건국 이전과 이후로 나눌 때, 「벼」가 만주국 건국 직전의 상황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조선개척이민사의 제2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안수길은 「싹트는 대지」에서 작품 「새벽」을 내놓고 그것을 통해 조선개척이민의 제1단계의 생존권 문제를 보여 주었으며, 「벼」를 통해 제2단계의 그것을 보여 준 것이다.(85쪽)

「새마을」은 앞에서 조금 살펴본 바와 같이 만주국 건국이념이 바탕에 깔려 있으며 「토성」은 그 이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종의 국책 작품에 속하는 것이다. 「벼」에서 「토성」, 「새마을」에로 나아가는 길은 탄탄대로여서, 거기엔 대외적인 측면에서 가해 오는 고통이나 갈등은 없다. 만주국 정부(85쪽)가 그런 조건들을 말끔히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그 대신 거기엔 가족 내부의 갈등 또는 사랑의 문제 등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게 된다. 말하자면 외부의 적과 싸우는 단계에서 민족, 가족, 마을, 내부의 인간적 문제들과 싸우는 단계에로 이르게 된다.

이러한 큰 변화의 길목에 「원각촌」(1941)이 놓여 있음은 음미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86쪽)

작가 자신은 「건국 전, 만주에 있어서의 반도인 선구 개척민의 생활을 발굴하는 일련의 작품 중의 일편임을 말하여 둔다」고 머리에 밝혀 놓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새벽」과 한 가지로 만주국 건국 이전의 시기의 조선 개척민 이민사를 다룬 것이다. 그렇지만, <반도인 선구 개척민의 생활의 발굴>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개척민의 초기단계에 속하는 것인 만큼 건국 직전의 희망찬 세계를 다룬 「벼」와는 구분되는 것이기도 하다.(88쪽)

그는 한 마리의 늑대이다. 간도에 들어온 한 마리 늑대를 그린 작품 「원각촌」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새벽」이라든가 「벼」 계통의 개척이민사와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첫째 조선 민족단위나 가족단위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순전히 한 개인의 생존권을 다루었다는 점. 사나이 억쇠는 가족도 족보도 고향도 없다. 이원보라 불리는 그는 혼자이고 정착을 싫어하였다. 산판을 돌아다니며 나무 자르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러니깐 집단의 영웅이 아니라 한 마리 늑대로서의 고독한 영웅상이다. 이것은 작품 「원각촌」이 시정(市井)의 리얼리즘에 맴도는 창백한 지식인의 심리 해명에 전전긍긍하는 국내 문단을 충격한 제일 큰 이유였다. 유진오가 <큰 물에 큰 고기가 산다>는 것은 이런 뜻으로 해석된다. 거칠고 외로운 그러나 강인한 개성을 지닌 인물을 이 작품에서 만들어 낸 안수길의 작가적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아내의 부정이 도덕적인 문제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 아내의 부정은 도덕문제가 아니라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늑대의 관습>이자 <늑대의 본능>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모랄감각이 전혀 스며들지 못한다. 개인의 생존권의 최소 단위를 문제삼을 수 있을 따름이고, 가정이라든가 종족단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89쪽) 사람을 짐승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일은, 원시적인 세계에서는 으뜸 자리에 오는 일이다. 먹는 일과 종족번식을 위한 생식작용만이 짐승으로서의 사람의 가장 기본 조건이다. 만주 개척이민의 원시적인 유형은 물을 것도 없이 이런 인물의 창조를 통해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90쪽)

「원각촌」의 삵은 누구인가. 해룡선사의 돈으로 자기 명의의 땅을 산 중국에 입적된 조선인 한익상이다....「붉은 산」에서는 삵이 민족 내부에서의 악종이고 민족 외부에서는 선종이었다. 이 때문에 한 인물 속에 선악이 함께 있었다. 「원각촌」에서의 한익상은 민족의 안에서도 밖에서도 악종이었다. 한편 억쇠는 안으로든 밖으로든 관계없이 선종도 악종도 아닌 한 마리 늑대였을 뿐이다.(91쪽)

「원각촌」이 비록 <<국민문학>>지에 발표되긴 했으나 작가는 퍽 애착을 가진 듯하며 또 이 작품이 국내에 반향을 일으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는 점은 한 번 더 눈여겨 둘 필요가 있다. 개척이민의 집단적 의의를 다룬 작품이 아니라, 그 집단에 관련되기는 하나 오히려 집단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고독한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만주개척이민의 영웅상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이 국내 작가들에 일층 관심거리가 될 수 있었다.(91쪽)

「목축기」(<<춘추>>, 1943. 4)는 안수길 문학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작가 자신도 이 작품만은 소중히 하였다. 태극출판사 「안수길」편 속에 「성천강」과 함께 단편으로서는 오직 이것 한 편을 여러 곳 개작하여 싣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93쪽)

염상섭의 견해에 따른다면 「목축기」가 <새로운 경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경지>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서는 상당한 설명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글(창작집 「북원󰡕��의 서문-인용자 주)에서 염상섭은 매우 솔직하게도 안수길의 종래의 작품들이 “차라리 그 모(93쪽)든 점을 제쳐 놓고라도 이 작가가 주로 취재하는 전기(前期) 개척민의 생활상이 주는 엽기적 흥미만으로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바”라고 말해 놓고 있는 터이다. 중국인에게 딸이나 아내를 인질로 하여 돈을 빌고, 살인 방화로 종말을 고하는 일이라든가 원주민과의 피투성이 싸움이라든가 마적단의 습격으로 온 마을이 잔악하게 학살되는 일들을 그린 전기 개척이민사가 <엽기적 흥미>의 일종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 1단계가 「새벽」이고 제2단계가 「벼」였으며, 그 제3단계가 「목축기」인 셈이다. 그렇지만 제3단계인 「목축기」는 「새벽」, 「벼」와는 다음 한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만주국 건국 이전과 이후가 그것이다. 「벼」는 만주국 건국 2년 전이었다. 「목축기」는 건국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의 일을 그린, 이른바 개척 전기가 아니라 <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후기엔 <엽기적 요소>란 줄어들거나 다른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있다.(94쪽)

「목축기」보다 한 해 먼저 쓴 것이나 미발표된 작품에 「토성」(土城, 1942)이 있다. 「토성」은 「벼」에도 연결되지만 김동인 이래의 삵과 같은 인물의 계보와도 연결되는 만큼 「원각촌」과 관련이 맺어진다. 「토성」은 만주사변이 터진 1931년에서 만주국 건국에 이른 과정 속에 놓인 조선 개척민 가정을 다룬 것이다.(94쪽)

학수는 명수 집안의 삵이었다. 학수의 욕심은 돈이었다.(95쪽)

「토성」은 매우 엽기적이다. 그러나 그 엽기적 성격은 「새벽」이라든가 「원각촌」의 경우와는 썩 다르다. 학수라는 인물이 얼마나 영악한가를 문제삼음에 있어 <돈>이 핏줄보다 우위에 섬을 선명히 보여 준 점에서 작품 「토성」은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목축기」는 염상섭의 지적과 같이 새로운 단계를 보이는 작품이다....찬호가 학생을 훈육하는 직업을 버리고 돼지를 키우는 일에 훨씬 큰 보람을 느끼는 이유야말로 이 작품이 개척이민 <후기>작품에 해당되는 즉, 참주제가 놓인 곳이다. 교사에서 돼지 키우기에로의 이행이 곧 개척이민의 전기와 후기에 엄밀히 대응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벼」의 주인공인 교사인 찬수에서 「목축기」의 목장주 찬호에 대응되는 것이기도 하다.(95쪽)

「목축기」는 국내에서 돼지를 사서 기차로 수송해 오는 찬수와, 그 돼지를 와우산 농장에서 기르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교사직을 버리고 농민이 되어 만주국 건국이념에 이바지하겠다는 주인공 찬호의 굳건한 의지가 심어져 있다. 그리고 염상섭이 지적한 바와 같이 「목축기」는 <완결된 작품이 아닌 모양>이다. 작가는 「목축기」 후속편을 「북향보」(<<만선일보>>, 1944. 12. 1-1945. 7. 4)라고 하여 장편으로 만들어 내었다. 「북향보」의 주인공은 「벼」의 찬수, 「목축기」의 찬호와 같은 계보에 속하는 인물 찬구이다.(97쪽)

「목축기」의 신념이 곧 「북향보」에 이어져 있는 만큼 「목축기」는 안수길 문학의 제3단계에 속하는 중요성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목축기」의 참된 모랄은 어디 있는가. 이런 물음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A)하나는 작품 자체에서 참주제를 이끌어 내(97쪽)는 방식. 이 경우 「목축기」의 참주제는 만주국 이념의 하나인 만주 농업건설 이념에 해당될 것이다. 만주에서 뿌리를 내려 만주국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숭고한 것이자 현실적인 것인 만큼 거기엔 아무런 잘못이 없다. (B)다른 하나는 민족주의적인 모랄감각이다. 그것은 작품의 참주제와 구별되는 작가의 모랄감각에 관련된다. 이 (B)에 관해서는 「부억녀」를 통해 좀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98쪽)

이 글(「싹트는 대지」의 염상섭의 <서>-인용자 주)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싹트는 대지」가 국내의 <조선문학>과는 다른 대륙문학(개척문학)의 특징을 가졌고, 그로써 <조선문학>에 포함된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그것(99쪽)에 멈추지 않고 나아가, 장차는 만주국 문학 즉 5개 민족 협화를 이상으로 하는 국민문학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다른 하나이다. 조선문학으로서의 만주국 조선계 문학이냐 만주국 문학으로서의 조선계 문학이냐를 문제삼는 일은 「싹트는 대지」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체적으로 가능해졌다. 조선어로 씌어진 것이면서도 국내의 것과는 다른(조선문학의 어느 구석에서도 엿볼 수 없는 신선미)것이 「싹트는 대지」라면, 그러면서도 아직 만주국 문학(국민문학)축에 들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싹트는 대지」는 이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만일 「싹트는 대지」에서 나아간다면 <꽃피는 대지>, <여름 여는 대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조선문학이기보다는 만주국 문학에 일층 가까울 것이다.(100쪽)

「싹트는 대지」는 2백만 조선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는 문학이라 할 수 있고, 여기에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고 있는 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구체적이자 상징적인 창작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100쪽)

일본 군부의 주도 아래 놓인 만주국인 만큼 실질적인 주인은 일본계였다. 형식상으로 일본계 속에 조선계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다른 종족들의 조선인의 특권 부여의 비난이 있었지만, 요컨대 이 특권적인 조건 때문에 조선계 인구가 급증된 것으로 분석된다.(101쪽)

만주국이 민족 협화를 외치며, 이에 상응하는 문화건설에 나아갈 때 그 최고 통치기관은 무엇이었을까. 물을 것도 없이 관동군 보도부였다.(101쪽)

...조선계가 전혀 언급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일본인들이 만든 「만주 연감」인 만큼 그들은 일본계 속에 <鮮系>라 하여 조선계를 포함했다는 관점에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일본어계란 일본어로 쓴 문학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만선일보>>란 거기에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싹트는 대지」도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102쪽)

어째서 안수길은 만주국 문학의 조선계 작품으로 「원각촌」라든가 「벼」, 「새벽」 등을 내세우지 않고, 만주와는 아무 관련 없는 부억녀를 제출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솟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뿐이다. 즉, 염상섭이 주장하는 생각과 <<신천지>>의 주간 오랑부부의 생각 사이에 큰 차이가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 「싹트는 대지」가 출간되었어도 만주국 문단에서는 전혀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염상섭은 이 점이 불만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곤란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2백만을 헤아리는 조선인을 배경으로 갖고 있는 조선계 문학을 외면하고서 어떻게 만주국 문단을 이룰 수가 있으며 이른바 <협화정신>을 살릴 수가 있겠느냐고 염상섭은 본 것이다. 그러기에 염상섭은 안수길이 동의하든 않든 상관없이 그의 창작집 「북원」을 「어데보다도 먼저 만주국 예문단에 보내고자 하는 바」라고 외쳤다. 그렇지만 오랑 중심의 <<신천지>>의 편집 태도는 이와 달랐을 것이다. 그들의 처지에서 볼 때 조선인의 만주국 개척사란 만주 원주민과의 투쟁사가 아니었던가. 비록 상해로 망명은 가지 않고 일본 관동군 지배 하에서 허깨비인 만주국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있긴 하나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주체성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인은 법적 지위로 보아, 일본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107쪽)

이러한 사정은 안수길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재만 각계 민족의 대표작 특집을 하는 마당에 「새벽」이나 「원각촌」을 내보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 작품들이 강인한 조선인의 삶을 위한 투쟁력과 생존권에 대한 싸움으로 일관되어 있는 만큼, 그것은 곧 다른 민족과의 충돌을 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 내부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문제점들이 곧 조선인의 성격적 결함으로 파악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107쪽)

그러니까 일본 본토에서 바라볼 때 만주국 문학의 중심은 만주를 배경으로 글을 쓰고 있는 일본작가에 있고 그 양념으로 만주(원주민)계와, 소련혁명 후 쫓겨 온 백계 러시아계에 있음이 드러난다.(109쪽)

우리는 지금껏 만주국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가)일본중심의 문학, (나)중국인 중심의 문학, 그리고 (다)염상섭과 안수길이 생각했던 <왕도낙토>의 제3세계로서의 문학 등이 그 구체적 대답이었다. 조선인으로서 남의 땅 만주에 살 권리가 있는 것일까. 이 물음을 (다)는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나)중국인의 처지에서 보면 (가)는 침략자이자 용납될 수 없는 세력이다. 또한 (다) 역시 못 마땅한 침입자임에 틀림없다. 안수길이 오랑을 향해 <당신네나 우리나 다 같은 처지니 협조해서 문학활동을 하자>는, 엄밀히 말해 잠정적인 의미밖에 없다. 근원적인 문제에서는 모든 것이 명백하다. 문학이란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세계인 만큼 염상섭으로 대표하는 (다)의 세계는 따라서 썩 비문학적인 것이다. 안수길이 「부억녀」를 내놓은 것은 따라서 (다)에 속하긴 하지만 <조금> 근원적인 것에 가까이 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수길은 만주이민문제를 제시하는 대신 조선문학만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안수길이 (다)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에 설수 있는 것은 「북간도」에서이다. 그것은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의 세계관을 얻은 다음에야 겨우 가능하였다.(112쪽)

「만선일보」가 무엇이었느냐에 관한 논의는 우리 근대문학을 주체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바른 이해에 이를 수가 있다. 그것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되는 과제이다. 안수길에 있어 이 과제는 어떻게 인식되는 것이었을까. 이 물음은 「북향보」(1944)에서 「북간도」(1967)에 이르는 과정 전체에서 해답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114쪽)

작가 안수길에 있어 창작 수준 및 창작 동기,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창작집 「북원」(1944)에 응축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내 문단에서 바라볼 때도 간도의 문학 하면 제일 먼저 안수길을 꼽았으며, 만주국 만주계(중국계)쪽에서 바라볼 때도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로는 안수길을 꼽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114쪽)

만주 개척민 후손들이 만주를 <천대만대> 살아갈 <고향>으로 본 자리에서 작품을 쓴다는 것을 안수길은 작가적인 최종 단안으로 제시해 놓고 있다. 만주땅을 자기의 천대만대 고향으로 생각하는 일이 작가 안수길이 「북향보」를 집필하던 1944년 12월에 있어서의 최종적인 단안이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두고 어떻게 그 단안을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즉, 안수길은 「북향보」의 연재가 채 끝나기도 전인 1945년 6월말에 고향 함흥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던 사실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엄연히 있었던 것이다. 그 고향에는 할머니와 아버지까지 있는 곳이었다. 안수길은 간도를 떠난 것을 건강 때문과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 온 점을 들고 있다.(115쪽)

이러한 상태였다면 그가 작가로서 최종 결론으로 삼았던 조선인 개척사에 관한 결심이라든가 포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우리는 손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자손만대에 만주 땅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다는 1944년 12월에 표명한 그의 의지란, 한갓 수사학적인 것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마땅히 던질 만하다. 왜냐면 만약 만주 땅을 자손만대의 고향이라고 생각할 각오였다면 일제가 패망하든 않든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몸의 건(115쪽)강 문제도 역시 그러하다. 뼈를 만주 땅에 묻는 일이라면 용정이라 해서 안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보아 온다면 안수길 문학의 중심에 놓인 만주개척이민사란 것도 어느 정도 방편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곧 알아차리게 된다.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만선일보>>에서 물러났고, 거기에 연재한 장편 「북향보」도 끝나갈 때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미련 없이 간도를 떠날 수가 있었다. 그에게는 부모와 조상이 있는 고향이 다름 아닌 함흥에 오롯이 있었다. 자손만대에 만주 땅을 고향으로 하겠다는 것은 한갓 헛소리로 돌아간 셈이다. 적어도 해방되던 그해와, 그로부터 3년간의 투병생활 중에는 그러하였다. 그에게는 출애굽기적인 민족운동 혹은 가족이동의 체험이란 아주 없는 형편이다. 8․15가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광복(빛의 회복)의 의미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116쪽)

만주에 있어 조선인은 1939년엔 1,065,523명이던 것이 해방되던 1945년엔 2,163,115명으로 늘어나 일본인을 몇 배 앞지르고 있었다. 이들은 준일본인의 대접을 받아 초기 개척민의 고통 없이 땅을 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백만을 웃도는 조선인의 상당수가 그야말로 조부들이 피땀흘려 개척한 만주땅을 <천대 만대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머물렀다고 볼 수가 있다. 오늘날 길림성 연변 조선인자치구를 이루고 있는 이백여만 명의 조선인이 이(117쪽) 사실을 증거한다. 만주에 있어 조선인은 일본인과는 달라서 가해자가 아니라 생활인이었으며, 그들은 실상 돌아갈 고향도 없었던 계층들인 만큼 만주 땅이 그대로 고향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것이다. 안수길처럼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해방의 환희 속에서 고향을 찾아갔을 것이다. 이 제2의 부류들은 대개는 만주국 건국 이후 이주해 온 계층들일 것이다. 그들은 뿌리가 없거나 약한 자라 쉽게 만주 땅에 왔고 또 쉽게 떠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안수길의 집안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부류에 든다. 만주서 낳은 개척민의 제2세대에 속하는 윤동주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118쪽)

그는 해방되기 두 달 전에 귀국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보다 먼저 고향에 와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안수길 문학을 설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도 특수한 뜻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물러서 있었던 것이다. 만주국이 무너지는 소리를 그는 직접 듣지 못했고 그 혼란을 그는 보지 못하였다. 만주국 조선계 작가의 대표적인 존재로 꼽히던 그가 정작 만주국 붕괴의 현장에서 일찌감치 물러나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일종의 직무유기와 다름없는 죄의식을 유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 성실한 작가의식에 불타오르면 오를수록 이 <작가적 죄의식>은 깊은 상처를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만들어 놓고 만 것이다.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이라든가 일제의 패망을 미리 알았다든가는 작가의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말일 수가 없다. 그는 갈 고향이 따로 있었다. 만주․간도․용정 따위는 잠깐 몸을 두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그가 갖고 있었음이 여지없이 증명된 마당에서 새삼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작가로서의 부끄러운 일종일 터이다. 이 죄의식 또는 부끄러움의 드러남과 그것의 극복과정이 장편 「북간도」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이 점에서 「북간도」는 안수길의 작가로서의 자존심 회복이고, 다만 그 점에서 이 작품은 기념비적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안수길을 떠나 우리 근대문학사에서도 기념비적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또 다른 논리가 필요할 것이다.(120쪽)

안수길이 해방 후에 쓴 첫 작품은 「여수」(1948)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의 작가로서의 부끄러움과 죄의식의 실마리가 이 작품 속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120쪽)

첫 작품 「여수」는 서울에 적응하지 못하는 월남작가이자 만주에(122쪽)서 미리 도피해 온 작가 안수길의 내면풍경에 해당된다.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작가로 남과 더불어 스스로 자부하던 안수길이 누구보다 먼저 그 개척민의 피땀서린 만주를 헌신짝모양 팽개치고 귀향한 사실은 병 때문이든 무엇이든 엄연한 사실에 속한다. 오히려 다른 친구들은 만주에 그대로 있는 형편이다. 작가로서 죄의식, 부끄러움의 의식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안수길은 계속 작가로 활동하고자 했다. 낯선 서울에서 3년 만에 다시 작가로 출발함이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며 어떤 소재 및 내용을 붙들어야 하는 것일까. 숙을 통해 주인공 철이 깨치는 삶의 태도에서 우리는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에서 한갓 초라하고도 겸허한 신진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123쪽)

「여수」의 주인공 철이 만주서 월남한 M신문사 특파원이란 점, 그리고 현재 서울의 어떤 신문사 기자라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이루어진 근본 동기인 까닭이다. M신문사 시절과 지금 경향신문사 시절을 비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첫 작품 「여수」가 태어날 수 있었다. 치수 맞은 간도 용정과 치수 맞지 않는 서울과의 비교에서 절망하는 일, 그리하여 만주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리적 퇴행을 창작동기로 삼은 것이 「여수」의 참주제이다. 주인공 철이 숙이의 참상을 보고, “서울이 좁은 것, 칫수 안 맞는 것, 어깨를 펼 수 없는 것, 그것은 내가 생활을 잃어버린 탓은 아닐까?”라고 하여, 작품의 결말을 삼은 것은, 물론 작가의 앞으로의 결의를 보인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앞으로 적극적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리라는 것, 곧 적극(124쪽)적으로 창작활동을 해야 하리라는 결심의 표명이다. 안수길에 있어 삶(어떻게 사느냐)과 창작은 별개가 아니고 완전히 동일한 물건인 탓이다. 이 점에서 그는 철저한 인생파 계보에 든다.(125쪽)

이처럼 어떻게 사느냐와 작품이 나란히 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작품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 없이는 결코 작품이 낳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여수」에서는 신문기자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수」를 낳게끔 한 계기(참주제)는 만주로 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심리적 퇴행의식이다.(125쪽)

작품 「밀회」는 그러니까 소시민의 일상적 삶 속의 심리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작품이 이루어지게 된 매개 개념(참주제)은 만주체험이다. 미애와 의사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125쪽)

작품 「밀회」도 만주체험을 매개로 하여서 비로소 씌어질 수 있었다. 작품 어느 구석이든 만주체험을 이끌어 들이지 않고는 도무지 작품을 쓸 수가 없었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126쪽)

세 번째 작품 「범속」(1949)은 만주체험의 연속성이 매우 교묘하게 이중적으로 용해되어 있다....주의 깊은 안수길의 독자라면 <찬수-찬구>라는 이름이 마주개척이민사를 다룬 「벼」, 「북향보」의 주인공 이름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한편 한철은 어떠한가. 끝자만 딴다면 <철>이 되는데, 이 이름은 첫 작품 「향수」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그런데 「향수」에 나오는 철은 M신문사에 근무하다 월남하여 서울 모신문사 문화부 기자 노릇하는 사람이다. 철은 서울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초조해 하는 지식인이며 이 점은 3년만에 사회에 복귀하여 작가로 되돌아온 작가 안수길의 투영이라 보아 큰 잘못이 없다. 그러니깐 「범속」에 나오는 한철은 안수길을 지칭한다고 볼 수가 있다.(126쪽)

흡사 「밀회」에서모양, 거꾸로 된 세상이라든(127쪽)가, 심리라든가, 가정을 보여주는 것이 안수길의 만주 이후의 작품구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범속」의 주제는 유별난 인간이나 그런 인간의 행위의 허위를 뒤집어 보임으로써 삶의 담담함과 건실성을 드러내고자 한 곳에서 찾아 마땅하다. 아마도 이것은 40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성숙 또는 상식성을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128쪽)

작품 「범속」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주제 쪽이 아니다. 주제보다도 항시 먼저 있고, 그것이 없으면 전혀 작품이 이루어지지 않는 매개 개념 또는 계기(참주제)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우리의 관심이 놓여 있다고 할 때 「범속」에서 그것은 무엇인가. 여수에서는 그것이 안수길 자신의 모습인 M신문사 R지국 특파원으로 된 만주체험이었고, 「밀회」에서는 아내 미애를 짝사랑한 의사의 만주체험이었다.(128쪽)

경숙이를 경멸하기 위해 애라를 창조했든 그 반대든 그러한 상황 설정의 동기는 작가 안수길의 내면 속에 있었다. 그 내면은 1935년에서 1945년까지 만주체험에서 형성된 것이다. 「범속」이란 작품이 이루어진 기본 핵은 겉으로 드러난 주제에 있지 않고 이 내적 동기에 있는 것이다.(129쪽)

첫째는 그가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였다는 사실. 이것은 그의 작가적 야심 또는 자존심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것에 손색없는 작품을 해방 후에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았다. 둘째는 인생파에 속하는 안수길인 만큼 작품은 그의 삶과 나란히 가야 하는 것이었다는 점.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공백기 3년은 삶의 공백기 3년에 해당된다. 이 두 가지 점이야말로 그가 해방 후 작가로 재출발할 때 마주체험의 연속성 없이는 전혀 작(129쪽)품을 이루어 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주체험을 매개 개념으로 하지 않고는 그가 도무지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여수」에서 보듯 한갓 심리적 퇴행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밖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만주체험을 매개체로 하는 한 작가 안수길은 참된 작가로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주를 누구보다 먼저 팽개치고 떠나온 사람으로서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탈각하지 않고는 그는 진정한 작가로 변모할 수 없다.(130쪽)

그에게 있어 <어떻게 사느냐>는 따라서 이중적이었다. 체질상 <어떻게 사느냐>쪽에 서는 작가로서의 안수길은 그러한 유형의 작품을 「새벽」이래 계속 써 내었다. 그러나 작품에(144쪽)한 태도(체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실제로 자기가 살아가는 일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경향신문>>의 기자 노릇(조사부장)을 버리고 용산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기자 노릇이나 교사 노릇 어느 것도 그에겐 한갓 방편이었다. 본업이 <작가>인 만큼 그 삶의 목적인 <작가 노릇을 하느냐> 한갓 <입에 풀칠하는 교사>(기자) 노릇을 하느냐를 그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해결 없이 <어떻게 사느냐> 쪽에 선 창작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체질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참된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기자(교사) 노릇이냐> <작가 노릇이냐>에서 한 쪽을 택해야 한다. <작가 노릇이냐> 쪽을 택한 것이 1956년 앞뒤이다. 비로소 작가 안수길은 실생활에 있어 <어떻게 사느냐>를 해결하였다. 그 결과가 「북간도」이다. 「북간도」가 우리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이자 이 작가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145쪽)

왕도낙토를 표어로 내세운 만주국에 조선인 이민 수가 급증한 것은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 있다. 일본은 전쟁수행의 산업기지를 만주에 건설하기 위해 이민정책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150쪽)

안수길의 「토성」, 「목축기」가 막바로 국책에 순응한 것이라 하기는 물론 어렵다. <어떻게 사느냐>를 줄기차게 문제삼아온 안수길에 있어서는 만주국 국책도 한갓 <어떻게 사느냐>에 흡수되는 것이어서 그 자체가 「유맹」처럼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154쪽)

<<만선일보>>가 안고 있는 특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매일신보>>라면 만주국 기관지중의 하나가 <<만선일보>>라는 관계와 흡사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와 만주국 기관지 사이의 차이란, 곧 조선총독부 정책과 만주국 정책의 차이와 흡사하다. 만주국 민족정책이란 겉으로는 5개 민족 협화였지만 그 내실은 일본국을 제1위로 하고 조선족을 두 번째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계는, 중일전쟁(1937)이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 때문에 인구증가가 더 이상(155쪽)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만주에는 조선계 이주민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것은 만주국 개척을 위해 불가피하였다....일본은 전쟁 수행의 물자공급을 위해서도 만주국 인구증대를 강행해야 했으며, 거기에는 조선계 개척을 크게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상당한 이론 대립이 생길 수 있었다. 즉 <민족협화냐>, <민족질서론이냐>가 그것이다. 만주국을 움직이는 관동군측 및 일본관리들은 민족협화라는 대의명분으로써 이른바 <왕도낙토>를 건설하는 일이 앞서느냐, 일본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질서를 내세워 다른 민족을 식민화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1937년 이후, 관동군 사령관을 역임한 조선총독 미나미(南)는 관동군에게 의견을 제출하였다.

「만주국 내에 있어서의 조선인에 대한 태도가 민족협화여서는 못쓰니까 고쳐주길 바란다」(「만주제국」지, 앞의 책, p. 206)

미나미 총독의 항의는 만주국이 조선계를 우대함에 대한 항의이다. 5개 민족 평등을 내세우는 일이 일본인 우위 조선인 하위의 질서관에 위배된다는 것, 그러니까 조선통치자로서 총독은 조선통치에 악영향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정을 미루어 보면, 국내의 <<매일신보>>와 만주의 <<만선일보>>의 검열상의 차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156쪽)

그의 문학적 활동 범위는 <<만선일보>>문예란이며 그의 문단적 야심은 국내문단에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선일보>>에서의 활동은 국내문단으로 나아가는 방편의 일종인 셈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두 개의 고향을 가졌던 사실과 완전한 대응관계를 이룬다. 그가 태어난 함흥은 단순한 태생지가 아니고 할머니가 있는 진짜 고향이었다. 한편 부모가 교사 노릇하며 살고 있던 간도 용정은 어른이 되어서 산 곳에 지나지 않는다. 유년기와 중학과정을 함흥에서 다닐 정도로 그는 이쪽저쪽을 왕래하였다. 그러나 어느 편이냐 하면 함흥이 참된 고향이었다. 병들어 요양한 곳이 함흥이었음을 보아도 이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그의 작가적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했음을 새삼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문학적 야심과 목표가 국내 문단에 진출함이지만 그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만주국 체험을 통해서일 뿐이었다. 「새벽」, 「벼」를 비롯 「원각촌」, 「목축기」란 무엇인가. 국내에서 그를 알아준 것은 이들 작품세계인 것이다. <큰물에 큰 고기가 논다>(유진오)는(157쪽) 평을 얻어낸 것은 오직 마주체험을 작품화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만주체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조선개척민의 고난사(과거)와 당면한 과제를 소재로 하여 작품을 쓰는 일을 가리킴이라면 그것은 한갓 소재주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재주의야말로 창작에서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작가는 아무도 그가 잘 알고 있는 소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소재는 절대적인 것이다. 체험이 곧 소재인 만큼 그것을 떠나면 창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주 체험이야말로 작가 안수길의 최대의 강점이자 작가적인 원점이기도 한 것이다.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존재인 안수길의 자존심은 이처럼 만주 체험을 원점으로 했음이 확연히 드러났다.(158쪽)

3년간의 공백기는 참으로 이상한 체험이다. 거대한 허구였던 만주국의 붕괴 과정과 조선의 총독정부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한국민족사가 시작되는 유례없는 역사적 전환기를 그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역사적 체험을 하지 못한 안수길이 과연 어떻게 하면 계속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158쪽)

만주국 조선계 문인의 대표적 존재였다는 사실에서 작가 안수길은 완강히 벗어나지 않았다. 그를 이러한 심리적 퇴행에로 이끈 근본 동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만주체험에 대한 자의식을 들 수 있다. 작가적 출발점이자 명성을 얻은 것이 곧 만주체험이고 보면 이것은 안수길의 원점이다. 그 원점은 양면성을 지닌 가치개념이다. 만주국을 전제로 한 가치개념이라면 그것은 만주국이 허수아비이듯 한갓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딛고 일어선 그의 「북원」의 세계는 일종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큰 물에 큰 고기가 논다>는 말을 가능케 한 만주체험을 안수길 만큼 깊이 가진 작가란 없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작가로서의 자존심의 근거인 만주체험은 작가로서의 부끄러움의 일종이기도 하였다. 이 틈에 끼어 그는 오랫동안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둘째로 그의 창작방법의 일관성 즉 <어떻게 사느냐>를 계속 고(159쪽)수한 점이다. 창작방법의 불변성은 안수길 문학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사느냐>라는 창작방법의 고수라는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만주체험에서 말미암았다. 개척이민의 수난사를 다룬다는 것이 곧 <어떻게 사느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사느냐를 다루듯, 월남한 이북사람 또는 만주에서 돌아온 귀국동포가 어떻게 사느냐를 다루었으며, 6․25 이후에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뿌리 뽑힌 사람들이 또 어떻게 사느냐를 다룰 뿐이었다.(160쪽)

<큰 물에 큰 고기가 논다>는 명제와 만주국의 이념에 관련된 세계는 결국 안수길에게 자랑과 부끄러움, 자존심과 속죄의식의 공존을 가능케 하였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그의 만년의 대작 「북간도」이다. 그의 만주체험의 속죄의식과 자존심은 이로써 마침내 극복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민족문학 쪽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국의 허구를 깨고 민족문학의 처지에 서서 만주체험을 재정비하기에 10여 년이 걸렸던 셈이다.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린 것은 만주체험이 그에게 얼마나 강렬한 자존심과 죄의식을 몰로 왔는가를 새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그가 그 찬란한 만주국의 붕괴과정, 총독부 붕괴과정, 그리고 새로운 한국민족사의 격동기 3년간을 보도 듣도 못하고 과수원에 드러누웠던 사실에서 말미암았다. 결정적인 만 3년간의 해방공간의 체험이 없는 작가 안수길은 「북간도」를 쓰기에 그토록 머뭇거리고 긴 준비기간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이것은 「북간도」의 결말의 취약점으로 들러나기도 하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만주체험은 작가 안수길에게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계속 던져 놓고 있었다. <큰 물에 큰 고기가 논다>는 명제가 그것이다.(160쪽)

대하소설 「북간도」를 분석함에 있어 맨 먼저 우리가 취할 방법은 제1부에서 제3부까지를 한 단위로 보고, 제4, 5부와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북간도」를 이루고 있는 공간적 구조에서 말미암는다. 만일 우리가 「북간도」를 이루고 있는 (A)역사적 구조층 (B)공간적 구조층 (C)인물 구조층을 각각 문제 삼는다면 이중 (B)가 (A)(C)보다 훨씬 본질적인 몫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162쪽)

이 작품 제1부 초두의 상당한 부분이 이 정계비 해설에 바쳐져 있음은 부인될 수 없다. 과연 간도가 우리 땅이냐 청나라 땅이냐를 결정하는 일은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인식의 수준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이지 단순한 정계비 해석으로 해결되거나 결정될 성질은 아니다. 다만 정계비란 그러한 해결에 이르는 실마리의 하나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기본적 사실을 작가는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한 가지 골격을 삼고자 하였다.(163쪽)

「북간도」에 있어 역사적 구조층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계비 문제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간도이민의 제1세대에 속하는 이한복이 간도 이민 훨씬 이전에 할아버지를 따라 정계비를 보러간 적이 있다. 그는 공부를 못한 무식한 농민으로 성장했지만 할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간도가 조선 땅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사잇섬 농사>를 대담하게 지은 것도 이런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이한복은 종성부사를 안내하여 정계비를 다시 보러가게 된다. 간도 농사는 그 후로 자유롭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한복은 간도이민의 합법화를 위해 노력한 숨은 일등 공신이다. 그러기에 이민 제1세대인 이한복의 자존심은 대단하였다. 그가 머리 깎기를 절대 반대한 것도 이러한 조선인의 자존심에서 말미암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존심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되었다.(167쪽)

손자 창윤이 이러한 할아버지의 환상을 안고 어른이 되여 청인 비각에 불지르고 비봉촌을 탈출했다가 되돌아오는 장면까지가 「북간도」 제1부이다. 그러니까 정계비라는 「북간도」 속의 역사적 구조층은 제1부에서는 압도적 의미를 띠고 있다. 그렇지만 <정계비> 자체가 갖고 있는 실증적 사실이 제1부의 원동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면적인 사실임을 면하기 어렵다. 국경문제의 현실적 측면을 무시했거나 적어도 소홀히 한 점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 창윤의 의식을 지배한 할아버지 이한복의 고집은 논리성이 빈약하며 따라서 그것에 주로 기대어 자란 창윤의 행동도 비논리적 측면을 띠게 된 것이다.(168쪽)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북간도」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묻는 일은 중요하다. 역사적 사건을 소설이 얼마나 수용하여 자기의 구조층으로 삼는가는 소설가의 안목보다도 소설형식이 결정할 문제인 까닭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를 결정하는 서사적 형식이 역사적 구조층을 선택 조절할 권리를 갖고 있는 만큼 작가는 이 법칙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청산리 독립전쟁은 앞에서 우리가 문제삼은 (가)항인 정계비 사건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정계비는 많이 불확실한 것이지만 청산리 독립전쟁은 분명한 사건인 것이다. 「북간도」에서 작가 안수길은 청산리 독립전쟁을 제5부의 주축으로 삼고 있다.(170쪽)

제1부에서 제4부까지의 서두는 이처럼 각각 소리시늉말을 내 걺으로써 작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자 하였다.(173쪽)

제5부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작품중심에 크게 자리를 잡는 바람에 제1부에서 제4부까지에 걸치는 일상적 삶이 갖는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장편 「북간도」의 소설적 결함 중 제일 큰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적어도 장편은 서사적 형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 일상적인 삶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의미, 일시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어긋남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 어긋남이 없는 형식을 이름하여 서사시(서사시적 상태)라 부를 수 있다.(174쪽)

작품 「북간도」의 제1부에서 제3부까지는, 일상적 삶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속에는 물론 삶의 의미도 충분히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비봉촌을 만들기 위해 겪는 여러 가지 싸움이란 일상적 삶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삶의 의미이자 본질이다. 그 본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느냐>이다. 정계비 사건이 계속 그 삶의 공간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는데 그 메아리가 단순한 역사적 구조층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은 비봉촌 사람들의 <어떻게 사느냐>라는 것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느냐>(의미, 본질)와 일상적 삶(묘사)이 균형감각을 얼마나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는가를 재는 일이 「북간도」의 작품상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제1부에서 제3부까지는 상당한 수준에서 그러한 균형감각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할 때 제4부는 그 균형감각이 의미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 창윤이 가족을 이끌고 비봉촌을 떠나 대교동으로 옮긴 뒤의 삶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봉촌에 뿌리내리기란 곧 농민생활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사느냐>의 의미란 땅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 비봉촌을 떠나 아들 정수의 교육을 빙자하여 창윤일가가 대교동으로 옮겼을 때의 <어떻게 사느냐>는 무엇이었던가. 농사짓기가 아니라, 기와굽기와 국수장수였다.(175쪽)

농사짓기에서 기와장이 또는 국수말이에로 바꾼 것은 <어떻게 사느냐>의 의미 변화를 새삼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징조는 제3부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러니까 제1부에서 제3부까지가 줄곧 농사짓기를 통한 <어떻게 사느냐>로 일관된 것이며, 이 범위 내에(175쪽)서 역사적 구조층인 정계비 사건의 메아리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제4부에서 제5부는 별개의 구조, 별도의 작품이라 볼 수도 있다. 같은 주인공, 같은 만주 땅의 얘기이긴 하나, 비봉촌과 농사짓기를 떠난 국수장수의 세계인만큼 그 역시 <어떻게 사느냐>의 일종임엔 변함이 없다 해도, 「북간도」를 두 토막 내기에 족한 형국 즉 구성적 파탄을 가져온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제4부에 오면 일상적 삶이 매우 변화가 심하고, 시사적 정치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일상적 삶이 정치적 시사적 풍문에 휩쓸려, 정상적인 삶에서 떠나 있는 형국이다....정치적 사건 속에 일상적 삶이 모조리 흡수되기 시작하는 것이 제4부의 특징이다. 심지어 어린 중학생인 정수가 독립투사인 듯 묘사되기조차 하는 정도이다. 제4부에서는 <어떻게 사느냐>가 바로 독립운동에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적 삶은 의미(본질)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마침내 현상과 본질의 균형감각은 깨어지기 시작한다. 제4부가 제1부에서 제3부까지와 질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는 점은 이런 곳에 있다. 그것은 서사적 형식의 파탄이다.(176쪽)

제5부에 오면 제4부에서 진행된 의미 부분이 더욱 강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봉오동전투와 곧 이어, 청산리 전투가 제5부 전체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제5부는 흡사 플라톤의 철학과 같이, 일상적 삶은 아주 무가치한 것으로 떨어져 나가고 오직 독립투쟁이라는 의미(본질)만이 이데아 속으로 높이 스며들어간 형국을 빚고 있다. 그것은 서사적 형식의 쪽에서 보면 치명적 결함이다. 서사적 형식으로서의 소설이 아니라, 다만 어떤 민족주의자의 신념의 전개에 지나지 못한다. 마치 이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듯한 착각(176쪽)마저 준다. 「북간도」의 결함을 제1부에서 3부까지와 제4부에서 5부까지 사이의 단절감에서 찾아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주인공)이 한결같이 독립군이라든가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소설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주제로 훌륭한 소설이 씌어질 수 있음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북간도」의 제1,2,3부는 「비봉촌」에서 뿌리를 내려 <어떻게 사느냐>를 문제삼는(그런 주제를 다룬) 소설이다. 그 주제는 그것으로 스스로 완벽한 것이다. 그 주제를 살리기 위해 일상적 삶과 본질(의미)을 얼마나 어긋난 상태에서 밀도 있게 파악하여 그려내었는가, 다시 말해 이념으로서의 규정적인 것(prescription)과 실질적인 묘사(description) 사이의 긴장 또는 간격좁힘 속에 리얼리즘이 가능하다(루카치, 「우리시대의 리얼리즘」, 하퍼․로우출판사, 1964, p. 116). 제1부에서 3부까지 즉 비봉촌에서의 삶의 묘사와 그 삶의 의미는 상당한 수준에서 그 점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제4,5부에서는 독립전쟁이 유사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갓 유사주제(類似主題)이지 참주제는 아니다. 만일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참주제로 택했다면 작가는 제1,2,3부와 다른 새로운 「북간도」를 써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또 다른 「북간도」가 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제1,2,3부에 이어 제4,5부를 썼다. 두 부분의 연결점에 상당한 무리가 빚어졌다. 제5부에서 그 점이 크게 노출되어 있다.(177쪽)

그렇다고 제5부가 의미(독립군의 민족주의(177쪽)적 이념) 일변도로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제5부는 그 나름대로의 소설적인 처리를 적절히 해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독립군의 패배한 모습을 그린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제5부의 전반부가 통쾌하고도 극적인 전투장면 묘사이고, 그 속에서의 어린 병사 정수의 행동을 그린 것과 대조적으로 그 후반부는 패배한 독립군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 모습이 매우 가라앉은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 정수는 올 데 갈 데 없는 존재가 되어 마침내 일본영사관으로 스스로 나아가 자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적 처리는 제5부만이 갖는 논리이자 소설에서만 대할 수 있는 이른바 소설적 진실이다. 낭만적 거짓이기보다는 소설적 진실이라 불릴 수 있다.(178쪽)

「북간도」는 만주 개척이민 제1세대인 이한복에서 그 제4세대인 이정수에까지 걸치는 백 오십여 년에 걸친 시기 속에 출렁이고 있다고 할 때, 그 역사적 구조층은 (가)정계비 문제 (나)청산리 독립전쟁 그리고 (다)만주국 문제이다.(182쪽)

만주국 건국 목표는 왕도낙토(王道樂土)였다. 그것은 5개 민족 협화를 기본원칙으로 했으며 구체적으로는 일본 민족을 제1위로 하고, 그 다음이 조선인이고, 그 다음이 중국인의 순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정수를 포함한 용정의 조선인들은 어떠했는가. 이 물음을 「북간도」는 겨우 제5부의 마지막 두 장에서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제5부 속에 만주국 전체의 운명을 결판 짓는 두 가지 역사적 구조층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며, 따라서 제5부는 소설적 처리로서는 무리일 정도로 역사 쪽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갖고 있다.(182쪽)

이러한 결말은 장편 「북간도」의 것으로는 매우 허술하고 미약하다. 특히 제1,2,3부를 연상할 적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제4,5부의 결말로서는 어떠한가. 다시 말해 제4,5부가 제1,2,3부와는 주제가 다른 별개의 작품이라고 보는 관점에 선다 할지라도 이 결말은 역시 미약하다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 이 물음에는 소설적인 형식(구속력)이 겨우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제5부는 만주국 전체의 운명을 건 두 개의 역사적 구조층이 일방적으로 강화, 강조됨으로써, 그 속의 일상적 삶은 숨도 쉴 수 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역사적 구조층의 강도가 높으면 그럴수록 일상적 삶은 위축된다. 일상적 삶이 위축되어 미약해지고 의미(본질, 이념 따위)가 이념의 차원으로 군림하게 되는 청산리 독립전쟁으로 말미암아 제5부의 전반부는 소설적 미달현상을 빚었다. 한편 그 후반부는 만주국 이념이 일상성을 외면함으로써 역시 소설적 미달 현상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어느 쪽이나 <서사적 형식>에 대한 고려가 빈약한 탓에 제5부는 실패한 부분이라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184쪽)

공간적 구조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적 구조층에 대응되는 개념이자 동시에 역사적 구조층에도 대응되는 개념이다. 앞장에서 살폈듯 「북간도」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구조층은 (가)백두산 정계비 (나)청산리 독립전쟁 (다)만주국 등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를 다시 세대별로 보면 이민 제1세대에서 제4세대에 걸치는 기간으로서, 역사적 구조는 또한 인물적 구조층과도 자연히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역사적 구조는 시간적 구조를 흡수하여 일층 문제적인 시간으로 단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구조층에 알맞게 대응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통틀어 공간적 구조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럴 때 공간적 구조층에는 다음 두 가지가 포함된다. 하나는 사람들이 발을 딛고 사는 지명 즉 마을(도시)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의 구성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후자는 이른바 공간적인 소설구성법을 특별히 가리킨다.(185쪽)

「북간도」 5부작을 통틀어 볼 때 인물들이 뿌리를 내려 깃드는 곳은 비봉촌과 용정이다. <어떻게 사느냐>라는 생존방식(의미, 철학)만이 「북간도」 전체를 꿰뚫고 있을 뿐, 공간적 구조는 비봉촌과 용정(대교동)으로 크게 갈라져 버린다. 이것은 제5부에서 그 역사적 구조가 청산리 전투와 만주국 건국으로 갈라지는 것과 흡사하다. 제1,2,3부까지는 비봉촌이 삶의 터전이며 따라서 개척이민의 <어떻게 사느냐>가 땅(농사짓기)과 결부되었음에 비해 제4,5부에서는 비봉촌을 떠나 대교동(용정)으로 이동됨으로 말미암아 농사짓기에서 장사꾼, 기와장이, 국수말이로 변질된 세계이다. <어떻게 사느냐>의 처지에서 보면 같은 것이지만 땅과의 투쟁에 비해 국수말이의 삶은 뿌리 뽑힘에 해당되며, 유랑민에의 변동을 의미하게 된다. 「북간도」가 일관성을 가진 <서사적 구조>를 띠지 못하고, 두 토막이 나버림으로써 소설적 실패를 초래했다고 평가될 수 있는 주된 근거도 이곳에서 말미암았다.(185쪽)

비봉촌에서의 <어떻게 사느냐>는 「북간도」 전체에서 제일 빛나는 부분이자 참주제가 잠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1,2,3부는 이 참주제를 둘러싸고 구성되어 있는 만큼 「북간도」는 거듭 지적되었듯 비봉촌에서의 조선 개척이민의 <어떻게 사느냐>의 문학적 형상화로 규정, 평가될 수 있다.(187쪽)

비봉촌의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이한복 영감과 최칠성 영감의 대립 갈등으로 시작된다.(187쪽)

정계비를 두 번이나 답사한 이한복의 자존심의 근거는 정계비에 적힌 대로(東爲土們)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신념에서 말미암았다. 그에게는 국경개념이란 한갓 관습과 실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적 측면을 알아차릴 능력이 모자랐다. <어떻게 사느냐>에 있어, 이한복은 끝까지 조선인의 처지를 지킴으로써 비타협적인 쪽에 서고 있다.(187쪽)

장치덕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청국식 변발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선식 상투도 아니다. 제3의 노선인 것이다. 그 결과는 손자 현도의 현실타협주의로 나타난다....그것의 공간적 배치가 용정이다. 따라서 「북간도」에서 용정은 비봉촌에 엄밀히 대응되고 있다.(188쪽)

비봉촌의 이한복은 상투주의자이다. 그는 변화의 세계에 담을 쌓는다. 이에 맞선 최칠성의 방식은 처음부터 현실주의적이다.(188쪽)

비봉촌이 청인화됨을 계기로 하여 비봉촌에서의 이탈현상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비봉촌은 한편으로는 청인화로 뿌리를 내려 농삿군의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봉촌을 떠나 유랑하는 뿌리뽑힘의 세계가 열려진다.(190쪽)

뿌리 뽑힘으로서의 비봉촌 이탈의 첫 주자는 창윤이다. 그는 「북간도」 제1부의 주역이다. 비봉촌에 지주 동복산의 비석을 세우던 날 밤 비석에 불을 지르고 비봉촌을 떠나는 행위를 그는 저질렀다. 창윤이 감히 이러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직접적 계기가 용정이라는 곳임을 알아차리는 일이 「북간도」의 공간적 구조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190쪽)

창윤의 의식은 용정 공간과 비봉촌 공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이것은 끊임없는 비봉촌 이탈지향성과 귀환지향성을 이루게 된다.(192-193쪽)

「북간도」 제1부에서 가장 선명히 제시된 공간적 구조층은 용정과 비봉촌이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의 성격이 주인공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 지배 방식의 특이함이 「북간도」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게 된다. 유토피아로서의 용정과 현실적인 고통의 공간으로서의 비봉촌이란 도식으로도 그것은 그러하며, 현실적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공간과 비현실적 환상적 공간으로서의 공간으로도 그것은 그러하다. 비봉촌 공간이란 조부와 부의 무덤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것은 근대적 과학적 현실적인 지도 속에 표시 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청룡, 백호>로 표상되듯 한갓 풍수지리설의 수준에 놓여 있고, 용정은 역사적 개념으로 저만치(193쪽) 놓여 있다.(194쪽)

제3부의 공간적 구조층은 매우 특징적이다. 용정과 비봉촌이 제1,2부에서는 심리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제3부에 오면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깨지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비봉촌 이탈현상이 빚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로 말미암아 작품 「북간도」 전체의 균형감각이 어떤 모양을 갖는가를 물을 수가 있다.(195쪽)

용정이라는 공간구조층은 단순한 지명 이상의 뜻을 머금는다.(196쪽)

창윤이 대교동(大敎洞)으로 옮기게 된 것은 제3부의 제일 중요한 사건이자. 「북간도」 전체의 구조상의 파탄에 해당되는 곳이기도 하여 자세한 검토가 불가피해진다.(197쪽)

창윤이 비봉촌을 떠난 명분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중요하다. 조부와 부의 무덤이 있는 비봉촌을 떠나는 명분은 아들 정수의 교육문제로 되어 있다. 제3부가 정수의 3세에서 비롯됨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공부를 조부도 부도 제대로 못했고, 창윤이마저 제대로 못한 탓에 이제 제4세대인 정수만은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이점은 훌륭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핑계일 수 있다. 결국은 비봉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증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한복, 장손, 창윤의 3대에 걸쳐서까지 비봉촌에 뿌리내리기를 못했다면 이 가족은 <어떻게 사느냐>에 실패한 것이자. 비봉촌에서의 삶의 조건의 혹독함을 새삼 말해 주는 것이다. 비봉촌의 삶의 기반이 농사짓기뿐임은 색삼 말할 것도 없다. 그 농사짓기의 어려움, 즐거움 및 그 나름의 삶의 깊이를 「북간도」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작가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수길은 교사 집안의 아들이고 자신도 교사였고 또한 신문기자였을 뿐이다. 그대신 「북간도」에는 교사가 곳곳에 등장하여 여러 가지 조연출을 하게 된다.(198쪽)

왜 훈춘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 물음은 제4부부터는 중요하지 않다. 제4,5부의 중심부는 벌써 창윤이 아니고 정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윤이 어디 있던 관계가 없고 오직 주인공 정수가 있는 곳이 문제될 따름이다. 그것은 곧 정수가 용정에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즉 용정이 공간구조층의 한가운데 노출된 것이다.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함으로써 제4,5부가 얼마나 제1,2,3부와 공간적 구조층에서 다른가를 잘 드러낼 수가 있다. 제1,2,3부는 비봉촌과 용정(대교동)의 대응관계가 성립되고 그것이 작품 구성의 기본원리로 되어 있지만 제4,5부엔 용정에 대응되는 공간개념이 사실상 없다.(199쪽)

이한복의 정계비 답사를 앞세워 거창한 간도 조선개척이민사의 역사적 배경을 끌고 들어간 「북간도」 제1부의 의도는 매우 선명한 것이다. 그것은 만주국 건국 이전까지에 있어서의 조선 개척이민의 전사(前史)를 그리고자 하는 작가 안수길의 야심이 드러남이기도 하다.(202쪽)

이 무렵의 안수길은, 만죽국 이념을 위해 작품을 썼던 아니든 상관없이 재만 조선인의 대다수의 삶의 방식 즉 <어떻게 사느냐>를 문제 삼았다고 할 수 있다.(203쪽)

안수길은 그의 부친조차 교사였던 만큼 농민체험의 간접성조차도 없는 형편이었다. 안수길이 용정을 「북간도」 전체의 중심점으로 삼은 것은 의도적이기 보다도 불가피한 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20여 년간 용정에서 살았다....이러한 체험을 가진 그가 의욕만으로 비봉촌을 그려낼 수 없다. 비봉촌의 묘사가 한갓 <환상적>인 것으로 되어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대신 용정의 묘사는 빈틈없고 또 역사적이면 현실적이다. 「북간도」의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그 중심점은 비봉촌이 아니고 용정으로 되고 만 것이며, 이 공간적 구조층의 면에서 볼 때 결국 「북간도」는 두 토막으로 갈라진 형국을 빚고만 것이다.(204쪽)

「북간도」를 통틀어 등장하는 인물을 고찰하기 우해서는 다음 세 가지 갈래를 나누어 둘 필요가 있다. 첫째는 남성 중심으로 되어 있음이고, 둘째는 저항적 인물과 타협적 인물의 대립이고, 셋째는 교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인물유형이다.(204쪽)

「북간도」는 부계(父系)의 문학이다. 역사적, 공간적 구조층 자체가 남성적이고, 한국인의 가족구조 자체가 가부장제적이다. 「북간도」에 등장하는 남성들을 문제삼을 때는 제1세대인 이한복, 장치덕, 최칠성을 먼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 세 인물은 각각 <어떻게 사느냐>의 세 가지 유형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북간도」가 소설적으로 성공한 것은 이 세 전형적 인물의 창조에 있다 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다. 작가의 역량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여기에서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작가 안수길의 창작방법론의 핵심이자 만주 개척이민의 삶의 방식 자체인 만큼 이 문제를 떠나면 「북간도」는 스스로 허물어지고 만다. 역사적 구조층이나 공간적 구조층은 실상은 이 세 가지 인물 유형을 위한 한갓 보조장치 또는 배경의 구실을 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211쪽)

백두산 정계비를 두 번씩이나 살펴보고 온 이한복은 그 정계비의 환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그에 있어 <어떻게 사느냐>는(211쪽)처음부터 명백하다. 정계비에 표시된 대로, 간도는 조선 땅인 만큼 비봉촌에서 그는 주인으로 행세하고자 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주인인 동복산에 맞서 머리 깎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러한 태도를 비봉촌민에게도 강권한다. 젊은층들은 이한복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이한복이 내세우는 주체성이란 따지고 보면 그의 성격에서 온 것이다.(212쪽)

할아버지는 18살의 이한복을 데리고 몸소 정계비를 답사하고 그 내력을 설명해준바 있다. 그러니까 정계비는 역사적 수준에서 돌연 심리적 수준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이한복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정계비에 적힌 「東爲土們」의 뜻이 지시하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고 할아버지의 성스러운 이미지이다. 그것은 한갓 환상이지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현실적으로도 존재하지 않거나 무효상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한복의 <어떻게 사느냐>는, 주체성 지키기라기보다는, 다만 심리적인 자기 해방의 일종일 따름이다.(212쪽)

이한복으로 대표되는 이 환상적 관념에 들린 인물 유형이 「북간도」에서 실패한 것은 작가의 인식부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즉 작가가 이한복이라는 인물을 두고 <어떻게 사느냐>의 한 가지 유형을 보이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민족의 주체성과 연결시키고자 한 점은 계산 착오일 터이다. 이러한 환상적 방식의 <어떻게 사느냐>가 비봉촌의 건설에 있어(213쪽) 큰 보탬이 되지 못한 사실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아비 말을 듣지도 않고 농삿군 자식인 주제에 농사도 짓지 않고 돌아다니는 이한복이 어째서 할아버지만을 성자처럼 받들게 되었는가에 대한 심리적 통찰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이 부분이 빠진 마당에서 이한복이 민족주체성 지키기는 환상적 수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214쪽)

이한복을 대표되는 <어떻게 사느냐>와 최칠성으로 대표되는 <어떻게 사느냐>에서 전자가 환상적임에 비해 후자는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현실적이란 합리적이라는 뜻이기보다는 생활적이라는 뜻에 가깝다. 생활적이란 또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땅의 사상을 가리킴이다. 비봉촌은 농사 짓는 마을이며 이 마을의 <어떻게 사느냐>는 <땅의 사상>의 틀 속에서의 논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214쪽)

작가는 시종일관 최칠성의 사상을 이런 각도에서 보고 있다. 그 때문에 「북간도」의 제1,2,3부의 견고성을 상당히 허무러 뜨리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이토록 고의적으로 최칠성을 미워하는 생각 즉 작가의 주관성(편견) 때문에 비봉촌은 결국 황페화되어 중요 등장인물들이 비봉촌을 떠나고 최씨 일가와 그 주변 인물만 남는 것으로 그려지고 마는 것이다. 개척이민의 아픔과 그 고난사로 시작된 제1,2,3부가 작가의 주관성으로 말미암아 리얼리즘의 수준으로 성숙하지 못한 한 가지 사례를 이런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끝내 작가는 최칠성을 매장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최칠성이라는 작중인물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작품 속에 살아서 우뚝 버틸 수가 있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명료한 곳에서 왔다. 곧 그는 땅의 사상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봉촌>에서의 <어떻게 사느냐>는 바로 땅의 사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대가 비봉촌이고 그 주민의 삶의 터전이 땅인 만큼, 땅을 지탱하는 사상은 작가의(215쪽) 주관성과는 관계없이 당연히 존속하는 것이다. 적어도 비봉촌의 주역들이 아직도 비봉촌에 머물러 살고 있는 한, 작가는 최칠성을 결코 무시하거나 비양거릴 수가 없다. 「북간도」에서 작가의 부주의한 주관성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의 수준에 육박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객관성에서 온다. 리얼리즘은 그것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대상 자체의 법칙성을 파악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인 만큼 비봉촌의 법칙성에 밀착된 최칠성은 당연히 그 권리를 작품상에서 갖는 것이다. 작가도 여기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작가는 최칠성을 땅의 사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주체성 상실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216쪽)

적어도 농부인 사람들은 최삼봉․노덕심의 모습을 비웃을 수가 없다. <어떻게 사느냐>에서 그러한 얼되놈 모습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얼되놈 모습이란 정확히 말하면 <땅의 사상>의 겉모습이다. 그 모습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비봉촌을 떠나야 한다. 적어도 비봉촌에 뼈를 묻을 수 없다.(217쪽)

당초 제1부에서 비봉촌의 개척사를 다루고자 했으나, 제2,3부롤 올수록 비봉촌의 황폐사를 다루게 되고 만다. 그것은 작가의 주관성 때문이다. <땅의 사상>으로서의 <어떻게 사느냐>에 비중을 두지 않으면 비봉촌은 당연히 황폐화되고 만다. 땅의 사상은 얼되놈의 모습을 승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점에 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당초부터 살기 좋은 용정이나 대교동에 정착하지 않고 비봉촌에 닻을 내렸던가. 이 근본적인 점에 관해 작가는 아무런 해명도 해놓지 않았다.(217쪽)

출발점에서부터 작가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비봉촌 자체가 한갓 환상이고 관념이다. 그것은 이한복의 세계관과 흡사하다. 만일 땅의 사상 즉 비봉촌 정착의 투쟁사를 「북간도」의 주제로 삼았더라면, 이 작품은 훨씬 거대한 서사시적인 형식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만큼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서사적 형식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에서 직접적으로 오는 것인 만큼 땅의 사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만주 개척이민이란 땅의 개척이 중심 과제인 때문이다. 그것은 땅의 개척을 방해하는 두 가지 적대세력과의 싸움의 형식에서 겨우 달성될 수 있다. 하나는 외부조건과의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조건과의 싸움이다. 이것은 서사적 형식이 갖추고 있는 고전적 형식이다.(218쪽)

「북간도」의 중심이 비봉촌이기보다는 용정임을 알아차리는 일이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함에 지름길이다.(219쪽)

「북간도」 전체를 통해 제일 현실적이고 확실한 인물 즉, 합리적이며 따라서 근대적 인물은 장치덕의 손자 장현도이다.(219쪽)

장현도의 상업에의 전환은 용정의 역사성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땅의 사상>과는 대립되는 <장사의 사상>이 바로 용정과 그 역사성이다. 그리고 <장사의 사상>은 근대적 성격을 띤 것이기도 하였다.(220쪽)

이러한 장현도의 삶의 방식을 두고 현실타협주의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도의 땅의 사상에 맞선 <장사의 사상>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장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도시의 사상이다. 물건의 팔고사기란 합리적인 선에서 움직인다. 인간행동의 기본 동기가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으뜸으로 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최소한도의 지혜이다. 그 다음이 신분적 이해관계이다. 막스 베버가 말하는 종교(생각)가 그것이다. 근대사회란 합리적인 논리 위에 서있는 것인 만큼 그것은 환상적 관념을 용남하지 않는다. 이런 대낮의 논리 앞에 이한복의 환상적 기준이 견딜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221쪽)

장사의 사상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땅의 사상이다. 용정과 비봉촌의 대응관계가 이것이다. 작가는 이 두 사상을 가운데 두고, 다시 말해 용정과 비봉촌을 가운데 두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떻게 사느냐>를 제4세대에까지 추구했더라면 만주국이 무너진 뒤에 남는 문제까지도 포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서사적 형식을 취하는 대신 작가는 이한복으로 대표되는 <환상적 사상>을 제4부, 제5부의 주축으로 삼고자 함으로써 「북간도」 전체를 두 토막으로 갈라지게 하고 만 것이다.(222쪽)

작가는 땅의 사상과 장사의 사상을 동시에 배제하고 환상적 기준에 의거된 주체의 사상을 드러내고자 하여 이한복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환상적 사상으로 변해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땅의 사상도 장사의 사상도 철저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환상적 사상 자체의 취약성에서 말미암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주체성 사상 자체의 취약점과 관련이 없다.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는 사상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고 또 숭고하다. 적어도 민족 단위의 사고범위 내에서는 이 사상이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는 <독립전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독립전쟁을 하는 마당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논리가 있는 만큼 <땅의 사상>이나 <장사의 사상> 따위는 한갓 지엽적인 것이라서 독립전쟁의 사상과는 족히 겨눌 성질이 못 된다. 독립전쟁의 사상은 그 자체가 신성한 만큼 비교 대상이 있을 수 없다.(222쪽)

「북간도」는 이 독립전쟁 사상을 제4부에서 비롯하여 5부에서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다....그러나 독립전쟁의 사상은 한갓 주변부의 울림에 지나지 않았다. 첫째, 주역인 정수가 중학 2년급의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정수가 용정의 영향권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만일 작가가 독립전쟁의 사상을 제5부의 중심부에 두고자 했다면 응당 독립사상의 중심부에서 인물과 배경을 놓아야 했을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라든가, 간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222쪽)좌진 휘하에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자리에 주역들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달리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휘하의 한갓 소년병으로 주역 이정수를 설정하고 있다.(223쪽)

이렇게 보아올 때 「북간도」에 담겨 있는 인물상들이 매우 투철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비봉촌으로 대표되는 <땅의 사상>, 용정으로 대표되는 <장사의 사상>도 각각 투철하지 못해 두 사상의 내적인 긴장관계가 없었으며 따라서 용정과 비봉촌은 형식적인 대응관계만 낳고 말았다. 그 두 사상의 가운데에 이한복의 환상적 사상과 이정수의 독립전쟁 사상이 끼어 있긴 하지만, 이 독립전쟁 사상은 그 원줄기에서 너무나 머릴 떨어져 있었던 만큼 <어떻게 사느냐>에서 실패하기에 이르게 된다. 상해 임시정부에 연결되지 않은 독립전쟁 사상은 <자수의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독립전쟁의 사상 쪽에서 보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223쪽)

우리는 이런한 전망에서 작가의 이정수에 대한 애착을 읽을 수가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용정에 대한 애착과 확실성에서 말미암았다. 작가에겐 비봉촌도 환상이며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도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다만 역사책 속에 있는 것이다. 한국 독립 운동사를 들추면 얼마든지 부딪칠 수 있는 과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할 때 현도가 상무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용정은 작가에겐 허구가 아니고 구체적인 현실이다. 작가가 이정수를 자추케 한 것은 이정수를 용정으로 이끌어오기 위한 한갓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용정에는 현도네가 있고 임영애가 있고 말송 경시가 있고 일본 총영사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용정에 가야 아버지 창윤이를 만날 수가 있었다. 현도와 창윤이 만나는 곳이 정해 놓은 용정인 때문이다. 「북간도」는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용정의 사상> 또는 <장사의 사상>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북간도」는 중인계층이 만주땅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다룬 작품이라 규정된다.(224쪽)

그렇다면 작가는 왜 중인계층의 만주에서의 <어떻게 사느냐>에 충실하지 않고 비봉촌과 청산리 전투를 펼쳤는가. 그것은 한갓 허영심이 아니었을까. 이 주관성 또는 허영심이 「북간도」를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어 내지 못한 참까닭일 터이다. 작가가 이 사실을 깨들은 것은 「북간도」를 완성한 직후일 것이다. 작가는 직관적으로 그 오류를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다. 「통로」(1968), 「성천강」(1971)이 그 증거이다. 이 두 장편은 처음부터 선명하게도 중인계층의 <어떻게 사느냐>를 내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 안수길은 그의 작가적 본령을 발휘하게 된다. 「북간도」는 그러니까 많은 객기를 품고 있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은 막(224쪽) 바로 「북간도」의 작품수준이나 그 무게를 낮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해석은 다만 작품 이해의 한 가지 방편에 해당될 뿐이다. 작가의 진실과 작품의 진실은 다를 수가 있는 만큼 「북간도」는 작가의 진실에서는 벗어난 작품일 뿐 작품의 진실에서 보면 민족문학의 큰 봉우리에 놓일 수 있다. 북간도에서 4대째 걸쳐 <어떻게 사느냐>로 고민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2백만을 웃돌았던 역사적 사실이 그 작품의 진실성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술은 조금 더 나아가면 오늘날 중공의 연변 자치구에 살고 있는 약 2백만 한국교포의 <어떻게 살았느냐>에까지 이어지는 과제이기 때문이다.(225쪽)

「북간도」에는 자의식을 가진 인물은 단 한 살마도 등장하지 않는 만큼 심리적 서술방식이 스며들 틈은 없다. 억지로 자의식을 가진 인물을 골라낸다면 독립군에 가담했다가 자수하는 이정수일 터이다.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자기를 남과 구별함에서 오는 자의식이 없고 무턱대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한결같이 신식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 문제는 관련이 있다. 오직 중학을 다닌 인물은 이정수뿐이다. 이정수가 조금이나마 자의식의 흔적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조차 심리적 측면은 문제 밖이다.(226쪽)

「북간도」를 지배하고 있는 묘사 거부의 설명방식은 역사적 구조층의 드러냄을 위해 제일 알맞은 서술형식이라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북간도」를 떠받들고 있는 다른 두 기둥, 즉 공간적 구조층과 인물적 구조층을 드러냄에는 어떠한가. 물을 것도 없이 비봉촌과 용정을 거점으로 한 공간적 구조층을 밝힘에도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인물적 구조층을 드러냄에는 극히 부적절한 서술방법이 아닐 수 없다. 「북간도」의 세가지 구조층 중 인물적 구조층이 제일 허술하고 미약한 이유도 이런 서술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231쪽)

용정이란 「북간도」 전체의 중심점이다. 비봉촌이 한갓 비현실적 환상적인 장소라면 용정은 역사적이자 현실적인 장소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상의 구조에서 그렇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232쪽)

「통로」란 「북간도」에 이르는 통로이자 또한 「북간도」를 지나온 통로이기도 하다. 그는 「통로」를 통해, 또 하나의 우람한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구상은 마음만 앞섰지 실질상으로는 잘 되어지지 않았다. 제목에 관해서조차 그 구체성이 없고 막연했던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이 있다면 장차 쓸 「통로」는 북간도와 별개일 수 없고 그 앞단계이거나 뒷단계라는 점뿐이다. 그것을 그는 자기의 고향에서 출발시키고자 했다. 「만세교」라는 구체성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북간도」는 엄격히 말하면 환상적 기준에 의해 씌어진 것인 만큼 작가의 내면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는 만세교가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다만 아버지 곁에 머문 수년 동안 살았던 제2고향 용정이란 곳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었을 뿐 아니라 조상대대로 살아온 진짜 고향인 함흠 서호진에 비하면 근본적인 삶의 뿌리가 못 된다. 그것이 「만세교」이다. 그렇다고 제2고향인 북간도 체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북간도 체험이 제2고향으로서의 체험이며 따라서 그것은 성인으로서의 역사 감각에 관련되는 만큼 문제의식에 충만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감각은 「북간도」에서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다. 만주에서의 조선민족 개척이민사의 발자취와 그 <어떻게 사느냐>를 그리는 일은 민족문학의 각도를 세우기에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북간도」가 작가에게는 물론 우리 문학사에서 문제적임은 이러한 시각에서 말미암았다. 작가에 있어 「북간도」는 따라서 야심작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주관성을 일방적으로 이끌어 들임으로써 진실성에 해를 끼치게 되기 쉽다. 「북간도」에서도 그러한 주관성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던 것이다.(247쪽)

「북간도」에서도 그러했지만 안수길에 있어 여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인이란 가족의 한 장식품과 같을 뿐 어떤 기능적 몫을 하지 못한다. 철저히 남성지배의 원칙이 지켜져 가고 있는 곳이 곧 「통로」의 기본 구조이다.(251쪽)

「북간도」의 제1대인 이한복 집안의 가계도를 「통로」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한복의 가계는 철저한 함경도 <상놈>이었다. 대대로 일족은 농사를 업을 삼아 <미미한 생계>를 이어온 가계에 지나지 않는다.(254쪽)

「북간도」에서 작가는 알게 모르게 실패를 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실패의 원인은 이한복․창윤․정수의 가문을 지배하는 사상이 참된 주체성 사상이 못 되고 한갓 환상적인 사상에 지나지 못했음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간도」는 허영심이 부분적으로 작용한 작품임을 누구보다도 작가는 가슴 한구석에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북간도」를 끝내고 나서야 작가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통로」, 「성천강」을 쓰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어떻게 사느냐>는 환상적 기준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작가가 「통로」, 「성천강」을 쓴 뒤에 「북간도」를 했더라면 그 「북간도」는 훨씬 무게 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262쪽)

「북간도」는 <땅의 사상>과 <장사꾼의 사상>을 양쪽에 두고 그 가운데 제3의 사상을 세우고자 하였다. 제3의 사상이란 구체적으(270쪽)로 무엇인가. 이한복, 이창윤, 이정수로 대표되는 <어떻게 사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3의 사상은 불행하게도 확실한 것이 못 되었다. 그것은 작가의 환상적 사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간도」 속에 있는 3가지의 <어떻게 사느냐> 주에서 이한복 집안이 택한 <어떻게 사느냐>가 제일 치졸하고 또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가 익히 알지도 못하는 사상, 다만 작가의 주관적 사상으로 이한복의 집안의 인물들을 조종한 탓이다.(271쪽)

체질적으로 그는 체험의 작가유형이었다. 작가의 인격과 작품이 나란히 간다는 생각이 그의 창작방법론을 지배해 왔던 만큼 그는 인생파유형에 분류된다. 소설이 허구라고 하고 그것에 무게 중심을 둔 작가 유형을 안수길은 처음부터 멸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느냐>를 묻고 그것에 대답하는 형식만이 그에겐 소설인 까닭이다.(273쪽)

그는 혼심의 힘을 기울여 「북간도」를 썼다. 그것은 「북원」이라든가 「북향보」의 세계와는 다른 역사관에 그가 이르렀음을 뜻한다. 「북원」이나 「북향보」가 서있는 세계관은 <만주국 조선계>라는 매우 한정된 세계관 위에 선 것인 만큼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일지라도 한국민족문학의 범주에 똑바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못 된다. 만주국 이념에 속하는 세계에 지나지 못한 탓이다. 그런 한정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북간도의 조선민족 문제를 한국민족운동사의 주류 속에 편입하는 방식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안수길에겐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안수길 혼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그를 에워싼 한국의 50~60년대의 총체적 의미가 그 해답을 만들어내었다. 동족상잔을 거친 6.25를 겪은 뒤에야 그러한 민족사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다.(278쪽)

「효수」는 만주체험 자체에 멈추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시점에서 쓰되, 마주체험 자체를 당시의 상태로 포착하는 일은 작가적 역량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만주체험이 이 작가에게 얼마나 깊이 뿌리박힌 것인가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282쪽)

만주국을 전제한 바탕 위에 서 있었던 만큼 그에게 있어 만주체험은 만주의 조선인 개척사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해 이 시기에 있어서도 그는 만주를 관찰하는 자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만주국의 주인이라든가, 뼈를 만주 땅에 묻어야 하는 자리와는 다른 좌표측에 서 있었다. 「북원」이나 「북향보」의 세계가 아무 저항없이 한국 민족문학 속에 들어오기(290쪽)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291쪽)

해란강을 거닐면서 그는 친구들과 싹트는 대지에 무학의 씨를 뿌리고자 하였다. 동인지 「북향」을 6까지 간행한 일이 그 첫 번째 결실이었다. 이어서 창작집 「북원」과 장편 「북향보」를 썼다. 그는 「만선일보」기자라는 매우 중요한 자리에서 있었고 이 자리가 또한 그의 창작을 이끌어 올리기도 하였고 제한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그는 1932년에 성립된 일본관동군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조선계작가의 대표적 존재에까지 이를 수가 있었다. 오랑 부부가 경영하는 잡지에 안수길의 「부억녀」가 실린 것은 당시의 안수길의 위치를 제일 잘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안수길의 이 시대의 작가적 수준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만주국 조선계작가의 대표적 존재라고 할 때 그 만주국이 괴뢰국가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토성」, 「목축기」 등에서 제시한 모랄도 괴뢰적인 성격에 훼손된 까닭이다. 이 사실은 안수길이 8․15해방 몇 달 전에 고향 함흥으로 되돌아온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만주의 조선개척민단의 생존권을 그린다고 자처한 안수길이, 설사 건강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온 사실은 그에겐 만주가 아닌 돌아갈 고향이 따로 있었음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중거이다. 만주에 뼈를 묻고자 하는 종류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안수길이 만 3년의 공백기를 거쳐 월남하고, 다시 창작을 시작할 때 그의 만주체험은 부끄러움과 자부심의 양면성을 가진 것으로 그의 의식을 송두리째 지배하였다. 부끄러움이란 만주국문학에 예속되었다는 점이고 자부심이란 작가의 체험의 특이성에 관련된다. 이 둘을 동시에 극복하기 위한 길이 곧 「북간도」를 쓰는 일이었다.(300쪽)

「북간도」를 쓰기 위해 안수길은 <어떻게 사느냐>의 창작방법을 재확인하는 오랜 과정이 요청되었다. 만주국 조선계의 시각에서(300쪽) 벗어나 한국민족의 주체성 쪽에 서서 만주체험을 재편성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301쪽)

장편 「북간도」(1959~1967)가 그의 대표작임은 주지된 터이다. 이것이 단순히 작가 안수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의 대표작 중의 하나라는 점의 승인과 민족적 리얼리즘이란 용어의 성립이 대응된다는 점의 해명은 우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는 문학사적 안목(필자의 용어로는 의미강)에서 설명될 성질의 것이다.

한국 근대소설의 사적(史的) 전망에서 볼 때 식민지 상황의 의미가 기본항으로 놓이며, 이 축(軸)은 님의 침묵으로 표상된다. 한국 근대문학사를 정신사적 측면에서 설명, 파악하려는 시도는 이 한도 내에서 일정한 유효성을 갖는다. 흔히 사람들은 도대체 그런 흑백논리로 문학을 처리한다는 것의 오류, 혹은 경직성을 지적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축을 상정한다는 것과 사고의 경직성은 적극적으로 혹은 단호하게 말해서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기본항의 인정과 논리의 경직성이 동일한 것으로 처리된 경우는 실상 문학의 본질적 측면을 몰각함에서 대부분 연유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별 계층 분석과 그 계층별 세계관(작품 및 정신적 산물)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를 위의 진술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305쪽)

「북간도」는 소설로서의 약속을 희생하고 사실 자체를 살리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이런 독법으로 읽는다면 작가의 강박관념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물음 속에 소위 민족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의 비밀이 있다. 동시에 이 진술 속엔 「북간도」가 완성의 의미 쪽보다 과정으로서의 의미 관련이 내포된다. 고쳐 말해 예술적 리얼리즘의 미달이 민족적 리얼리즘이다. <민족적>이라는 형용어와 <예술적>이라는 형용어가 동질적으로 파악될 때 한국문학은 아마도 진정한 작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러운 물음 혹은 움을 작가 안수길은 거의 혼자의 힘으로 감당해 온 것으로 볼 수 있고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성이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북간도」, 통로(1969), 「성천강」이 그 도전이다. 이 세 작품이 그의 소설적 싸움의 3부작이다.(309쪽)

우리는 어째서 「성천강」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변은 이 작품 전체의 토운〔어조〕에서 얻어낼 수밖에 없다. 작품 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는 <관북연락선>에서 그 해답이 주어진다. 한국을 운위할 때, 관서, 관북, 영남, 호남, 경기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면 이 「성천강」은 관북지방의 대명사이다. 당시에 관북은 부산과 화륜선으로 연결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육진(六鎭)개척 이래 관북은 영남지방의 이민 후손이다. 그리고 관북은 곧 간도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런 전망에 설 때 「북간도」에서 작가가 간도를 일반화한 것이었다면 「성천강」에서는 간도의 특수화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주(311쪽)제상으로는 <간도가 한국의 연장>이라는 명제보다 <간도가 함북의 연장>이란 명제는 공소하지 않은, 보다 압축된 것으로 된다. 이런 설정이 득실이 있겠지만, 만일 다음 사실을 믿는다면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작가는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을 쓸>따름이다. 「북간도」가 전자의 경우라면 「성천강」은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작가 자신이 「성천강」에 자부심을 가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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