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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훈-재만한국문학연구
2009년 05월 16일 22시 03분  조회:2982  추천:1  작성자: 방룡남

蔡壎, 󰡔�在滿韓國文學硏究󰡕�, 깊은샘, 1990

우리나라 사람들의 만주로의 이주는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3․1운동 무렵까지는 만주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었으나, 産米增殖計劃의 실시 이후부터는 땅에서 뿌리 뽑힌 농민들이 만주에서나마 삶을 도모하려 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만주로 가는 이주민수의 증가는 우리나라 안에서의 日帝侵奪이 그만큼 가혹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9쪽)

만주국 건국 이후인 1933년말부터 1939년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집단부락은 ‘1만 3천 개’나 설치되었는데 이 제도야말로 만주를 강점한 일제의 ‘최대의 범죄’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과 만주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각종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有畜農業으로의 전환 및 식량 증산을 끊임없이 부르짖음으로써 가뜩이나 고달픈 우리나라 이주농민들을 괴롭혀 마지않았다.(22쪽)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과 만주국의 탄압과 폭정은 그 도를 더해갔다. 과중한 전재수행을 위한 단말마적 作態 앞에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이주민들은 농촌에 있거나 도시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더욱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25쪽)

이는 안수길의 실질적인 출세작(「새벽」-인용자 주)인 동시에 장차 전개될 안수길에 의한 만주개척민문학의 본격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55쪽)

특히 중국인 지주의 토지를 관리하는 사이비 동족인 ‘얼되놈’의 행패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작품은 일찍 없었다. 얼되놈의 빚 때문에 이주민들은 영원히 소작인의 신세를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빚의 담보로 잡힌 딸은 혼인 강요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어머니는 실성하는 등 어느 것 하나 이주민들의 괴로운 삶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주민들의 만주 정착과정에서 겪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10살 전후의 어린 ‘나’의 눈(기억 혹은 추억)에 의존함으로써 왜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등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킨 느낌이 없지 않다. 이주농민의 생활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농삿일에 종사하는 장면은 없고 얼되놈 박치만의 빚과 소금밀수에 연관된 이야기로 가득차 있을 뿐, 다른 생활의 자취는 소홀하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사건전개에 긴요하지 않은 긴 에피소드(예를 들면, 누이의 애인인 삼손과 그의 가족에 관(57쪽)한 장황한 설명, 胡氏를 만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가 어릴 때 늪에 빠질 뻔한 일을 회상하는 장면 등)를 늘어놓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몇 가지 사례는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58쪽)

이처럼 다소 초점 흐린 현실 인식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이주농민에게 있어서의 만주의 현실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형상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재만한국농민문학의 가능성을 크게 제고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58쪽)

이 작품(「벼」-인용자 주)은 <새벽>으로 시작되는 안수길 나름의 재만한국농민문학을 본격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데 있어 後續打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58쪽)

여기까지 이르는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박첨지가 만주로 이주하게 되는 동기라 할 수 있다. 딸을 잃은 허탈감을 달래려 화류계 여인인 ‘향옥’에게 탐닉한 나머지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안수길의 현실인식의 시각이 어디에 있었나 하는 것을 엿보게 해준다. 일제침탈로 인한 구조적 몰락의 심화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는 당시의 우리나라 현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59쪽)해 볼 때 박첨지의 만주이주 동기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60쪽)

매봉둔 정착과정에서는 당연히 수전 개간에 이어 벼농사를 짓는 장면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룰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수로와 퇴수로 파기에 이어 벼농사를 짓고 첫해의 수확으로 2백석의 벼를 거두는 장면까지를 불과 4면만으로 처리해 놓고 있음을 본다. 1944년판 󰡔�北原󰡕�에 실린 <벼>는 203면에서 291면에 이르는 분량을 가진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벼농사 짓는 장면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작품을 재만한국농민문학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지 적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60쪽)

계속되는 이야기 가운데서 박첨지의 만주이주의 계기를 마련해준 ‘향옥’이 7년 뒤에 매봉둔에 나타나 박첨지와의 묵은 인연을 되살림으로써 가정불화를 일으키게 하고 있는데, 이 대목은 가뜩이나 석연치 않은 이주 동기를 가지고 있는 박첨지의 이미지를 더욱 흐리게 하는 작용만을 하는 듯 보인다.(60쪽)

‘前章’과 ‘後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눈을 끄는 것은(61쪽) 학교를 설립하자는 논의에 따라 교사인 찬수가 등장함으로써 이 작품은 차츰 농민문학다운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학교설립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사람으로 당시의 최고급 지식인을 불러들였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주농민에게 있어 찬수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갓 정착한 이주농민의 아들딸을 가르치기 위해 꼭 찬수 같은 인물이 필요했을까, 어찌하여 찬수에게 ‘지도자’ 또는 ‘구세주’ 같은 역할까지 기대하게 되었을까 라는 회의를 지울 길이 없다. 찬수 같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의 설정이 재만한국농민문학으로서의 이 작품의 성격을 애매하게 하는데 커다란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62쪽)

그러나 찬수가 정작 ‘지도자’나 ‘구세주’ 같은 역할을 수행할 기회는 이 작품의 結尾 부분에 이르러 도래한다. 새로 부임한 젊은 縣長이 배일적인 정책을 펴는 가운데서, 첫째 매봉둔에 짓고 있는 학교공사의 중지(준공불허에 이어 방화), 둘째 우리나라 이주민들의 매봉둔 퇴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렸을 때 찬수는 ‘어느 날’ 이후 특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中本에게 연락하여 일본 영사관을 통한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지도자’나 ‘구세주’ 같은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찬수 뒤에는 중본이 있고 중본 뒤에는 일본 (영사관)이 있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원주민 마을로 달려가려는 매봉둔 사람들 앞을 가로막은 중국군은 총을 쏘지도 못하고 다른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하는 것이다.(62쪽)

이러한 찬수의 역할로 말미암아 매봉둔의 이주민들은 아마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것은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볼 때 찬수의 ‘지도자’나 ‘구세주’ 같은 역할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또 찬수 같은 인물을 ‘지도자’나 ‘구세주’로 설정하고 있는 안수길 나름의 재만(62쪽)한국농민문학의 행방은 과연 어느 곳이었을까 하는 것을 곰곰이 되새겨보게 된다.(63쪽)

앞에서 살펴본 바를 간추려 보면 이 작품은 재만한국농민문학의 본격적인 전개과정에서 <새벽>의 뒤를 이을 後續打와 같은 작품으로서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으나, 앞부분의 경우 박첨지의 만주이주 동기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안이한 현실인식의 자세와 함께 너무나도 쉬운 정착과정을 보여 주었고, 뒷부분의 경우 박첨지의 아들이자 최고급의 지식인인 찬수를 등장시켜 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농민문학다운 성격의 변질을 초래하였으며 배일적인 새 현장에 맞서기 위해 일본 사람 또는 일본(영사관)의 힘에 의지하려는 자세를 보인 대목 등 상당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63쪽)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들은 몇 가지 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첫째, 와우산목장의 설립시기를 만주국 건국후 8년되는 해로 설정했다는 점,

둘째, 주인공이 학생들에게 ‘귀농’을 권유하면서 만주의 상황을 ‘암흑시대’가 아니라 ‘아침’이라고 표현한 점,

셋째, 와우산목장 있는 곳이 ‘목축지정현’으로, 목장이 ‘목축부락’으로 지정되어 당국으로부터 갖가지 편의를 제공받는 일에(64쪽) 대해 주인공은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점 등.(65쪽)

만주국 건국후 8년 되는 해라면 1940년인데 이때는 이미 일본의 허수아비로서의 만주국 체제가 나름대로 굳어진 시기라 할 수 있고, ‘귀농’은 농촌으로 돌아가 ‘증산’에 힘쓰라는 말로, ‘아침’은 만주국의 현실을 희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당국의 갖가지 편의를 오로지 고맙게 생각해야 할 일로 여기고 있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前二作-<새벽>, <벼>-과는 달리 목전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적 일에서 취재하고 있으면서도 나날이 가중되고 있는 대다수 이주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외면하고 만주의 현실이나 시책을 긍정적으로, 또는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세계로의 이행가능성은 이미 <벼>의 결미부분을 통해서도 어렴풋이 예견되었지만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는 이 작품을 쓰면서 한층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 듯이 보인다.(65쪽)

한편 와우산목장으로 돼지 새끼를 수송해 오는 동안 주인공 찬호는 돼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짐승인가 하는 것을 재인식함으로써 교육계에서의 실패를 양돈 등의 목축사업에서 보상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무한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막상 와우산목장에 도착한 뒤부터 찬호는 뒷전에 물러서게 되고 돼지의 사육은 돼지 사육의 전문가인 중국인 老宋에게 일임되고 마는데 그 老宋은 야생 짐승의 내습과정에서 범에게 귀를 잃게 되자 범에 대한 ‘復讐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이 작품은 이야기 줄거리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65쪽)

그리고 이 작품에서 꼭 指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지식인인 찬호가, 후반부에서는 중국인인 老宋이 클로즈업되어 있는 것과 함께 ‘목축부락’으로 인가된 이 와우산목장을 구(65쪽)성하는 ‘농부’나 ‘인부’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66쪽)

더욱이 이 작품은 우리나라 이주민들의 정착 유형을 단순한 수전 개간으로부터 유축농업으로 유도하려는 의도 아래 쓰여진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1940년을 전후하여 장려되기 시작한 만주국의 有畜農業, 酪農, 畜産開發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66쪽)

지도적 인물인 정학도의 념원은 이주민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이곳 ‘만주에다가 아름다운 고향을 건설하자’는 것이기도 하고, 그가 세우려는 ‘농민도장은 유축농업을 기초로 하는 영농방법을 전수해야 할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면 <새벽>이나 <벼>의 처참하고 암울한 세계와는 전연 다른 이야기임이 분명하다.(68쪽)

이 작품의 주주들이 적자를 거듭하고 있는 북향목장에 증자하기를 꺼리는 것이라든가, 박병익이란 주주가 목장을 은행에 저당 잡히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착이후세대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만주국 건국 이전 시대처럼 어떻게라도 살아남으면서 정착하는 것이 문제가(68쪽) 아니라, 보다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 만들기와 보다 안락하고 윤택한 생활을 도모하는 일이 당면과제로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과거와 미래를 올바르게 바라볼 안목을 상실한 채 일본의 허수아비인 만주국이 마련해 준 현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69쪽)

이처럼 얼만 안되는 사례만으로도 이 작품(「북향보」-인용자 주)의 기조를 이루는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국정신에 즉’하여 행동하며, 기회만 있으면 ‘증산’을 부르짖고, 생일을 축하하는 사(70쪽)람들끼리의 모임에서조차 建國神廟와 만주국의 황제가 사는 궁성 및 諸宮에 대한 요배를 하고, 전몰 용사에 대한 묵념을 올린 다음, 時局省民의 誓詞를 齊唱할뿐더러, 우리나라 이주민들의 온갖 결점을 성토하는 일본인을 친구로서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갸륵하고 충성스러운 만주국 국민인가 하는 것은 물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목축기>의 경우보다 진일보한 경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71쪽)

한편 이 작품에도 <목축기>의 찬호를 닮은 인물로 찬구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다같이 농업학교 출신으로서 수의 면허를 가지고 있으며 또 목장의 전무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염상섭이 ‘<목축기>는 그것이 完結된 작품은 아닌모양’(단편집 󰡔�북원󰡕�의 서문-인용자 주)이라고 한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축기>의 세계를 심화 확대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선생’을 대신한 ‘정학도’가 북향도장을 설립하려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뜻을 가진 일이라 하더라도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찬구는 한번도 가축과 직접 접촉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찬구가 專務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다른 인부라거나 이 작품에도 또 등장하고 있는 老宋조차 가축과 어울리지 않고 있으며 농민들도 모심기 하는 장면에서 잠시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에는 주인공인 오찬구를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이 등장하고 있다. xx신문 지국을 경영하는 마준영, 소설가로서 교사일을 맡고 있는 현암, 여교사인 석순임, 유행가가수인 정애라, 일본인 관리 등이 그들이다. 이처럼 많은 지식인들이 지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에 정작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목장 혹은 목장에 딸린 땅에서 일하는 농민이나 목장 인부들의 활동하는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기(71쪽)법은 <목축기>에 이어 이 작품에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데 농촌이나 목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든가, 농촌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지식인을 그린 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러한 작품을 어찌하여 농민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72쪽)

그리고 작품 말미에서 정학도의 딸 애라가 비록 ‘익명의 독지가’로서 목장재건을 위한 성금을 냈다고는 하더라도 아버지의 유지를 어기고 농촌과 오찬구의 곁을 떠났다든지, 더구나 유행가가수로서의 생활을ㅇ 끝까지 고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정학도의 숭고한 뜻과 그 뜻을 이어받으려는 오찬구와 그 친구들의 피나는 노력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행동으로서 작가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하겠다.(72쪽)

안수길의 작품 가운데서 만주의 도시와 도시거주이주민에서 취재한 작품은 많지 않다. 사실 재만한국작가로서의 안수길의 문학세계를 상징할 만한 작품은 거의 첫째 항에 해당되는 농촌과 이주농민에서 취재한 작품이기 때문에, 둘째 항에 딸린 작품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둘째 항의 작품도 안수길의 현실인식의 자세를 알아보는데 있어 적잖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72쪽)

거지(「장」-인용자)로 전락한 이 이주민의 지나온 자취와 ‘오늘’의 상황은 수없이 많은 기막힌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가의 냉철한 눈은 여러 등장인물들을 골고루 비추기만 할 뿐, ‘거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지는 않고 있다.(73쪽)

이러한 경개를 통하여 볼 때 이 작품(「車중에서」-인용자 주)에 등장하는 ‘거지’ 또한 <장>에서의 ‘거지’ 못지않게 비참한 상황 아래 놓여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보이는 나는 그의 ‘역한 체취’에 혐오감을 느끼며 그에게서 ‘백치’ 또는 ‘거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10錢 두 닢의 적선을 하는데 그칠뿐더러 구상중인 작품 속에 그를 되도록이면 비참하게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소재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일종의 엘리트 의식 또는 선민의식으로 자리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있어서의 ‘거지’는 단지 嫌惡, 積善, 작품 속의 소재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작가라면 거지로 변한 그 이주민이 어찌하여 어머니를 남겨둔 채 고향인 汝海津을 떠나 병을 무릅쓰고 간도로 왔으며, 그동안의 생활은 어떠하였고 간질 발작에 이은 허리부상으로 귀향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대해 진지하게 천착하는 자세를 가졌어야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장>과 이 작품에 등장하는 거지에 관련된 묘사는 이 무렵의 안수길의 현실인식의 자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74쪽)

위와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들은 10대 소년인 ‘나’가 어려운 형편아래서도 立志傳中의 인물처럼 소원하는 바를 착착 성취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현장이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염상섭에 의해 ‘조선인개척민을 위한 농민문학’을 기대케 하던 안수길이 더구나 <새벽>의 속편으로 이러한 작품을 썼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라 할만하다. 만주(75쪽)의 농촌에 뿌리를 박은 것으로 보이던 사람들(‘나’의 일가, 삼손네, 영호네)이 왜 자꾸 도시로만 몰려오고 있을까.(76쪽)

이주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인 ‘용정으로 몰려오게 된 이면’에는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막힌 사연이 깔려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실에는 눈을 돌린 채 이미 龍井으로 이사온 사람들의 모습을 그것도 열 살 남직한 얼니아이의 눈을 통해 그려놓고 있을 뿐이다. 마땅히 직시해야 하고 고발해야 할 현실을 외면하고 10대 소년의 장밋빛 세계만을 구가한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76쪽)는 <장>, <車중에서>의 경우와 함께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77쪽)

이들 작품 중 <벼>는 재만한국농민문학의 발전을 구체화시켜 줄 작품으로서 크게 기대할 만한 자리에 놓여 있었으나 이주민의 만주이민 동기를 화류계 여인에 의해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인 것으로 설정하였으며, 만주정착 과정에서 수전 개간에 이은 벼농사 장면 또한 너무나도 간단하고 수월한 것으로 다루고 있음을 본다.(77쪽)

그리고 <목축기>와 <북향보>는 만주국이 건국된 훨씬 뒤의 상황을 작품화하여 <새벽>과 <벼>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작품에서는 이미 이주민들의 정착을 둘러싼 삶의 문제보다는 만주국이 베푸는 갖가지 편의를 고맙게 생각하면서 목축사업에 열중한다거나 만주를 아름다운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건국정신이나 증산을 되뇌이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작가의 현실을 인식하는 자세가 현저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한편 <벼>, <목축기>, <북향보>가 비록 농촌이나 목장(77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은 농민이나 목장의 인부가 아니라 지식인들이라는 점에서 이들 작품을 전적으로 농민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懷疑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78쪽)

<장>과 <車중에서>에 등장하는 ‘거지’는 다같이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이주민들임에 틀림없는데도 ‘구경꾼’이나 작중화자는 냉철한 입장이나 태도를 취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작가적 자세는 <새마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만주의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사 올 수밖에 없는 이주민들의 현실에 대한 외면이 그것이다. 기막히고 처절한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자세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78쪽)

이곳에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앞에 예시한 7작품을 분석 검토하면서 밝혀낸 ① 이주민의 이주동기 ② 정착과정, 그리고 ③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 및 ④ 농민문학문제에 관한 논의, 그 가운데서도 특히 ③, ④항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78쪽)

재만학국문학은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주목할 만한 몇 가지 특이성(문제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① 재만한국문학이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건국 이후 다수 이주한 우리나 문화인․지식인들에 의해 본격적인 전개과정을 갖게 되었다는 점-만주사변의 결과에 따라 건국된 만주국으로 이주한 문화인․지식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만주의 현실을 수용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무렵의 이주민들 사이에는 한국 안에서의 이념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② 만주로 이주한 문화인․지식인들이 거의 도시에 거주하면서 교사나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앞서 이주한 개척민들의 삶을 작품화했다는 점-만주로 이주한 문화인․지식인들은 전문학교나 대(102쪽)학 출신자가 대부분이며 거의 도시에 생활 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의 농촌에서 수전 개간이나 벼농사 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주농민들의 삶을 작품화하였는데 이들의 작품에서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이나 생동감․박진감 넘치는 농촌 풍경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안수길의 소설로 대표되는 몇 작품을 농민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재만한국문학-그 가운데서도 안수길소설의 주된 경향을 농민문학으로 파악한 염상섭의 언급은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③ 만선일보가 재만한국작가들의 유일한 발표기관이었다는 점-재만한국문학의 흐름이 재만문예동인지인 「북향」에서부터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재만한국문학의 본격적인 전개는 만선일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선일보는 ‘일본 관동군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것으로서 만주국의 건국이념이라든가 시책을 우리나라 이주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한 신문어었기 때문에 재만한국작가의 유일한 발표기관으로 정말 바람직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미심쩍다. 특히 김창걸의 <붓을 꺾으며>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작품 내용에 대해 부단히 간섭 규제한 것이 사실이라면 만선일보는 재만한국문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부정적인 위치에 서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103쪽)

재만한국작가 가운데서 작품의 수나 질적인 면에 걸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강경애, 안수길, 김창걸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작가는 인적사항이 다른 만큼 여러 면에서 상이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들의 현실인식의 자세 및 그 작품화 과정에서 나타내 보이는 특이성은 유다른 바 있다.(103쪽)

① 강경애의 경우-강경애는 崇義女學校와 同德女學校를 중퇴한 학력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숭의여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라든가 그 뒤의 여러 과정을 통해 이념을 획득한 바 있고, 남편 張河一의 계속적인 영향으로, 특히 1931~1934년 사이의 작품을 통해 이념적 세계관을 피력해 보이기에 이른다. 즉 만주로 이주한 뒤에 발표한 <蹴球戰>에서는 이념에 바탕을 둔 조직력에 의해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만주국의 현실에 맞서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며, <母子>에서는 남편을 통해 반만항일 활동의 문학적 수용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소금>에서는 남편은 공산당으로 인해 죽게 되고 아들은 공산당에 참여했다가 처형되지만 여주인공은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 소금밀수를 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부분저긍로나마 이념에 바탕을 둔 이러한 강경애의 현실인식의 자세는 객관적 정세의 악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1935~1938년 사이의 작품에서는 남편과 연관된 일이라든가, 빈궁과 인간의 배신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차츰 옮겨져 갔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만주를 강점하고 있는 일제의 서슬이 퍼런 상황 아래서 몇 작품에서나마 이념으로 현실에 맞서려는 작가의식을 펴보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② 안수길의 경우-안수길은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아버지가 머무르고 있는 만주 龍井으로 돌아온 뒤 李周福과 함께 북향회를 조직하고 동인지 「북향」을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35년 「조선문단」을 통해 작가로 데뷔, 1937년부터 만선일보의 기자로 일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안수길을 재만한국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식시켜 주는데 기여한 <벼> 그리고 <목축기>와 <북향보>에 이르러 안수길의 현실을 바라보는 자세는 뚜렷해진다. 즉 이미 개간한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힘에 의존하려는, 목장에 주어지는 만주국의 각종 혜택을 고맙게 생각하는,(104쪽) 농민도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만주국 건국이념이나 시책에 충실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장>, <車중에서>에서는 거지로 전락한 이주민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또는 혐오감을 가지고 대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자세 또한 안수길의 작가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③ 김창걸의 경우-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한 김창걸은 소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그의 시에 대하여 ‘혁명적 시인의 색채가 농후’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 뒤 오랜 방랑생활을 하면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은 뒤 1936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39년에 만선일보의 新春文藝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하기 전인 1936~1938년 사이에 쓴 작품-특히 <소표>, <두번째 고향>을 통해 김창걸은 마주로 온 우리나라 이주민들이 중국인 지주나 관리로부터 당하는 억울한 일에 대해서는 무력에 의존해서라도 끝내 맞서야 한다는 현실인식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식은 막상 만선일보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 뒤의 작품에서는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고 현실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곳으로 후퇴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작가의 <붓을 꺾으며>에 자세히 술회되어 있다. 그러나 1942년에 쓴 <강교장>에서는 다시 초기작품세계로 회귀하려는 몸짓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음 해에 끝내 절필하고 만다.(105쪽)

재만한국작가로서의 안수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과 그리고 절충적인 것의 세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져 왔다.(108쪽)

① 1935~1945년 동안에 발표한 20편에 가까운 작품 중 10여 편이 만주를 소설공간으로 하고 있다. 그 가운데의 몇 작품에서 만주농촌의 이주민을 그렸다고 해서 염상섭이 안수길을 ‘조선개척민을 위한 농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평가한 이래 그러한 견해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답습되고 있다.

② 안수길의 작가적인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작품은 <새벽>이다. 그 뒤 <벼>, <목축기>, <북향보> 등이 계속해서 발표되자 그야말로 전형적인 재만한국농민작가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찬수, 찬호, 찬구는 하나같이 지식인이다. 농촌에서 일하는 농부나 목장에서 일하는 인부의 구체적인 작업 광경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농촌이나 목장의 풍경만이 차용되어 있고 농부나 인부의 움직임이 배제된 채 지식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이들 작품을 농민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108쪽)

③ <벼>, <목축기>, <북향보>의 주인공들은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만주국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만주국의 이념이 창작의 주제’(김윤식 「우리문학의 마주체험」(下) (소설문학, 1986. 7), p. 206.-인용자 재인용)로 등장하게 되는 현실인식의 자세 때문에 ‘소설 <벼>, <목축기> 등은 왕도낙토를 설교하고 농촌진흥운동을 고취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위하여 일하도록’(조선족략사편찬조지음, 「조선족약사」, p. 248.-인용자 재인용) 우리나라 이주민들을 기만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모른다.

④ 안수길의 이색적인 이주민관을 보여주는 작품에 <장>과 <車중에서>가 있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거지’는 우리나라 이주민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무관심 또는 냉담한 태도는 온당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⑤ 해방전에 쓰여진 안수길의 작품은 낙천적이요 낭만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이 많은데 이는 애써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추고 명랑한 분위기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그러나 만주국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 우리나라 이주민들은 농촌의 경우 토벌 작전과 집단농장의 강행으로 마음 놓고 농삿일에 종사할 수 없는 형편 아래 놓여 있었고, 도시의 겨우 주거난, 취직난, 물자난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고난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극히 일부에 해당되는 또는 예외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밝고 즐겁고 희망찬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만주국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데 있어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재만한국문학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끼친 안수길의 공로는 지극히 크다. 그가 해방때까지 남긴 20편 가까운 작품도 적다고는 할 수 없으며, 작품의 기교 또한 제일급에 속하는 것이었다.(109쪽)

이러한 안수길에 대한 평가로는(109쪽)

첫째, 우리나라 문학의 암흑기요 공백기를 메워주는 작가라든가 우리나라 농민문학의 흐름을 잇는 작가로 찬양되어 마땅하다는 설이 있기도 하고,

둘째,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쓴 작가라든가 일본 제국주의에 매수된 ‘반동적 문인들’(조선족략사편찬조지음, 「조선족약사」, p. 248.-인용자 재인용)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비판되어 마땅하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안수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처럼 양극을 달리는 것보다는 안수길의 재만한국문학에 끼친 공로나 업적은 그것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몇몇 작품에 노출된 만주국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는 또 그것대로 논의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야만 안수길의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 있어서의 자리매김도 제대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110쪽)

서언의 끝부분에서 제기한 물음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결론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우리나라 사람들의 만주로의 이주는 1869년과 1870년에 걸친 흉년 때문에 많이 건너가기 시작한 이래 강제 합방, 3․1운동을 거쳐 산미증식계획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가 농촌의 구조적인 몰락과정이 거듭됨에 따라 해마다 증가하여 해방직전에는 이백만을 웃도는 수에 이르렀다.

만주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은 고국에서의 그것 못지않게 어려움에 가득 찬 것이었다. 농촌의 경우 만주국 건국 이후부터(112쪽) 치안유지를 핑계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농가의 집단부락화와 증산 및 유축농업으로의 전환 등을 강요하는 바람에 이주농민들의 고통은 筆舌로 형언키 어려울 만한 것이었다. 한편 도시의 경우 나날이 가중되는 주택난, 취업난, 생활필수품의 배급제 등으로 도시거주이주민의 어려움 또한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② 비록 수는 많았지만 만주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수전을 개간하거나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자생적인 文學活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재만한국문학의 형성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 건국된 뒤부터 만주로 다수 이주한 문화인․지식인 또는 문학도․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진작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있던 이들은 교사나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문학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 가운데서도 안수길과 이주복 등에 의한 북향회의 조직․활동 및 재만문예동인지인 「북향」의 발간, 만선일보를 통한 작품발표 그리고 작품집-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大地󰡕� 및 안수길의 첫 단편집 󰡔�북원󰡕�-의 간행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재만한국문학은 나름의 흐름을 이루어 나갔다.

③ 지금까지는 재만한국문학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안수길에게만 시선이 집중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재만한국문학을 빛낸 작가로는 안수길 이외에 강경애, 김창걸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 세 작가는 해방전에 각각 20편 내외의 작품을 남겼다. 이 가운데서 필자는 만주를 소설공간으로 한 작품만을 골라내어 유형별로 구분한 다음, 그 속에 담겨진 현실인식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113쪽)

안수길은 재만한국문학의 형성 과정에서 남다른 기여를 하였을뿐더러 <새벽>에 이어 <벼>, <목축기>, <북향보> 등을 발표하여 크게 주목되었으나 농촌이나 목장에서 활약하는 지식인들을 통해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114쪽)

④ 194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된데 비해 1945년까지 한글 신문인 만선일보가 폐간되었으며, 따라서 한글로 된 작품을 그때까지 발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늘날 우리들은(114쪽)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햇볕을 볼 수 없는 한글 작품이 만선일보에 발표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가 아니냐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곳에서 잠시 만선일보가 어떠한 취지로 창간되었고 재만한국이주민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또 재만한국문학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했느냐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선일보야말로 만주에 가서 살고 있는 우리나라 이주민들에게 만주국의 건국이념이라든가 시책을 홍보하고 지도할 뿐만 아니라 재만한국작가들에게는 김창걸의 <붓을 꺾으며>에 서술되어 있는 바와 같은 일을 서슴지 않는 언론 기관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곳에 실린 작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리나라 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떠한 작품이 우리나라 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명백해진다고 할 수 있다.(115쪽)

돌이켜본다면 재만한국문학은 고르지도 못하고 불행한 여건아래 생성 성장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주사변에 이은 만주국 건국 이후 다수 이주해 간 우리나라 문화인․지식인들에 의해 본격화의 길로 접어든 뒤 동인지 「북향」을 거쳐 만주국의 국책을 홍보하는 신문인 만선일보를 유일한 발표기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부터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선일보를 전연 이용하지 않은 강경애라든가, 발표되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작품을 쓴 김창걸 같은 작가가 일제와 만주국의 서슬이 퍼런 상황에서도 뜻 깊은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재만한국문학은 지나친 기대 아래 이론적 근거도 뚜렷하지 않은 채 과대평가 되어온 경향 또한 없지 않았다. 이제 우리들(115쪽)은 구득 가능한 자료를 차근차근하게 모아 면밀하게 분석․검토함으로써 보다 보편타당성 있는 평가에 도달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116쪽)

在滿朝鮮人作品集 讀後感

半世紀前부터 赤手空拳으로 바가지짝밖에 가지고 온 것이 없는 우리에게 오늘에 이만한 作品이 나왔다는 것은 實로 火中生蓮인 것이다.

半世紀라는 짧지 않은 移住史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제 겨우 作品集 하나 나온 것을 그렇게 신통히 여길 것이 무엇이냐고 비웃음이 없지 않을 것이나 우리에게 있어 이만한 收穫이란 文字 그대로 苦心慘憺이오 難産의 難産이 아니랄 수 없는 것이다. 이 땅 우리게게 문학적 유산이 있은 것도 아니오, 現實的 條件이 또한 그러한 것도 아니다. 다만 괭이로 파헤치고 호미로 긁어 담아서 알알이 주운 결정이요, 피로 물들이고 땀으로 섞어 빚은 매듭진 記錄인 것이다.

이 短篇集에 수록된 七篇의 作品들은 現地 作家의 作品들 중에서 그 精髓들만을 拔萃(발췌-인용자 주)한 것임으로 어느 것이나 精金이요, 美玉인 걸작 아님이 없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구수한 흙냄새가 풍기는 것 같고 大地의 脈搏이 그대로 뛰는 것 같다.

일찍 朝鮮文壇의 作家들 중에서도 滿洲를 取材한 作品들이 없는바 아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作品들이란 一律的으로 抽象的 槪念的 作品들뿐이라 거기에 흐르는 리즘이 滿洲의 생소한 雰圍氣를 살리지 못했고 오히려 隔靴搔癢의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었었다. 그러나 이번 이 作品集에 나타나는 內容만은 이 땅 滿洲의 雰圍氣를 그대로 呼吸했고 흙으로 더불어 싸우고 이 고장 現實과 더불어 부닥긴 눈물의 쓰라린 體驗에서 나온 알뜰한 純粹品들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文學이란 決코 觀念이나 文字遊戱가 아니요, 純粹(204쪽)한 體驗에서 얻은 崇高한 藝術(價値)이어야 할 것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이다.

나는 이 作品集 속의 일곱 편 作品이 모두 傑作들이라고 지나친 어리꾼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滿洲의 분위기를 알고 참다운 滿洲의 眞面目을 알고 鮮系의 生活을 알고 半世紀間 移民史를 알고 귀중한 體驗에서 얻은 아롱진 生活의 眞諦(진체-인용자 주)를 알고 흙냄새 그윽히 풍기는 참다운 흙의 文學을 찾으려면 이 한권의 作品集을 내놓고는 다시 다른 곳에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나는 文學에 대해서는 門外漢이라 이 한권의 作品集으로서의 完成與否는 모른다. 다만 우리들이 滿洲를 알고 滿洲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移民文學으로서의 귀중한 要諦인 것만은 아무나 누구나 어떤 世界的 文豪일지라도 體驗이 아니고는 건드리지도 못할 未開의 境地인 것이다.

나는 이 한권의 作品集이 나오기까지에 얼마나 눈물겨운 難産을 겪었다는 것을 이 作品集의 跋文에서 읽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었다. 빈바가지짝만 달랑달랑 매달아 가지고 江을 건너온 우리에게 무엇이 있으랴. 여기에 와서 一望無際한 거칠은 들을 손톱이 무지러지도록 파헤치고 그리고 논을 풀고 밭을 갈아서 겨우 安着의 꿈을 얻으려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으랴. 여기에서 現實과 싸우고 온갖 苦難을 克服하고 異鄕의 심산한 꿈을 어루만지고 鄕愁를 달래고 그러며서 우리가 가진 바 情緖를 눈물 섞어 읊조린 것이 이 한권인 것이다. 이것을 出版하기까지 얼마나 難關이 있고 얼마나 남다른 苦心이 있었던 것은 想像以上의 눈물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崔基正

(이 글은 1941. 12. 18 만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는 1941. 11. 15에 만선일보사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인용자 주)(205쪽)

북원발간예고

滿洲에 있어 鮮系藝文 運動이 싹트기 十年 그 가운데서 康德九年度에 在滿朝鮮人 作品集 󰡔�싹트는 大地󰡕�가 發刊된 것이 嚆矢로서 昨十年에는 다만 間島와 吉林에서 두 詩集이 나왔을 뿐 寂然히 作品集의 出版이 없던 中 今番에 南石 安壽吉 創作集 󰡔�北原󰡕�이 드디어 發刊케 되어 印刷도 거의 끝났음으로 不日間 世上에 나오리라 한다.

<새벽>, <벼>, <牧畜記>, <圓覺村> 等 旣發表分 外에 新作 <土城>, <새마을>을 收錄한 作品 都合 十二篇 四百餘頁의 巨篇으로 大部分作品은 滿洲에 있어서의 朝鮮人 生活의 時代的인 변천과 歷史的 使命等을 남김없이 取材한 것이다. 創作集으로서의 價値도 價値려니와 在滿朝鮮人 開拓의 文獻的 價値로도 적지 않은 바가 있어 크게 期待된다. 그리고 滿洲鮮系 藝文壇에서 個人作品集으로는 이것이 역시 嚆矢이다.

(안수길의 첫 창작집 󰡔�북원󰡕�은 1944. 4. 15에 간도 예문당에서 간행되었고 발간예고는 1944. 4. 12에 만선일보에 실린 것으로 되어 있다.)(207쪽)

<북향보>의 연재예고

본지 연재소설 <개동(開東)>은 만천하 애독자가 다같이 큰 기대 속에서 앞으로의 진전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공교로이 필자 염상섭(廉尙燮)씨의 건강관계로 섭섭하지만 일단 완결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거의 四개월간의 아무런 소식이 없이 지내온 것은 독자 제위께 심히 미안한 일이나, 지면의 관계, 본지의 성격 또는 시국의 긴박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속 연재할 소설에 대하여도 또한 신중치 않을 수 없어 이제야 바야흐로 만주조선문단 유일의 보배인 안수길(安壽吉)의 <북향보(北鄕譜)>를 실리게 되었습니다. 작자와 작품에 대하여는 긴 설명을 피하거니와 작자는 마주선계문학인으로서 불우한 환경 어려운 처지에서 단 한사람 외로이 꾸준히 또 진실히 문학을 해오는 만큼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는 역시 진실을 탐색(探索)하고 진실을 파악(把握)하려는 열의와 노력이 있어 반드시 독자의 가슴을 감격케 하고 심금(心琴)을 울리게 하는 바가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 특색 있는 작가의 특색 있는 작품에 더욱 특색을 가하고자 오본봉협(吳本鳳協)씨의 삽화를 넣게 된 것은 뚜렷한 특색의 또(215쪽) 하나일 것입니다.(216쪽)(만선일보에 실린 글이지만 게재 연월일은 미상)

<북향보>연재와 관련한 작자의 말

나는 과거의 짧은 문학적 경력(文學的經歷)에 있어 주로 우리 부조개척민(父祖開拓民)들의 지나간 역사를 단편적(斷片的)으로 살펴왔습니다. 이렇게 살펴온 중에 결론으로 파악된 것은 다음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 부조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이 고장을 그 자손이 천대만대 진실로 새로운 고향으로 생각하고 이곳에 백년대계를 꾸며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이 고장에 아름다운 고향을 만들지 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초삼아 이야기를 전개시켜 보려는 것입니다. 만주를 고향을 삼고 여기에 뿌리를 깊이 박자-이것은 현시국의 요청이기도 합니다. 서투른 붓이 독자에게 얼마만큼 흥미와 이익을 드릴지 미리 기약할 수는 없으나 증산에 매진하는 농민의 저녁 후의 동무가 될 수 있고 선계의 만주정착문제(滿洲定着問題)에 유의하는 분의 관심거리가 된다면 나로서는 분외의 영광이겠습니다.(216쪽)(만선일보에 실린 글이지만 게재 연월일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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