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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리 요이치-󰡔�포스트콜로니얼󰡕�
2009년 05월 16일 22시 08분  조회:3963  추천:1  작성자: 방룡남

고모리 요이치, 󰡔�포스트콜로니얼󰡕�, 송태욱 옮김, 삼인, 2002

 

머리말

 

이 책의 제목이 왜 󰡔�포스트콜로니얼리즘󰡕�도 아니고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도 아닌 것일까?

물론 당초 편집부측과 논의하면서 그런 제목을 달자는 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2001년이라는 현시점에서는 극히 한정된 영역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없었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라는 용어는 주로 영어권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급속하게 하나의 연구 영역을 형성하게 된 일련의 담론, 즉 어떤 역사적 시점으로부터 유럽이라는 극히 한정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권력 아래서 다른 지역에 대한 영토적 침략과 정복을 행한 이후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연구 동향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연구 동향의 특징은 유럽 식민주의의 제도들, 특히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가 피지배 지역 사회에 어떠한 충격을 주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국주의에 의한 담론 조작에 초점을 맞춰 식민주의적 담론(colonial discourse)-세계를 문명과 야만, 정복자와 현지인, 식민자와 비식민자, 주인과 노예, 선진과 후진, 진보와 정체, 중심과 주변, 진짜와 가(10)짜 등으로 양분하고, 그러한 일련의 이항 대립주의(binarism)적 쌍 개념을 참과 거짓, 성과 속,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이항(二項)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Hierarchie) 안에 봉인하는 언어 시스템-안에서 구성되는 주체(subject)와 그것에 반항하고 저항하며 대항하는 주체 쌍방을 분석하는 데에 전략적 역점이 두어졌다.

특히 두 개념에 공유되고 있는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예전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지역이 종주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과 후를 분할하는 역사적 경계를 명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어떤 지역이 옛 종주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했다고 해서 식민지 시대의 온갖 부정적인 유산이나 유제(遺制)가 불식되는 일이 결코 없을뿐더러 식민주의가 끝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구식민지가 독립한 후에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에 의한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적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출되었다.

그러한 논쟁에 입각하면서 문학을 비롯한 표상 예술의 연구 영역에서 예전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지역과 공동체 사회 속에서 산출된 다양한 표현에 착목, 식민지 시대의 상흔이나 유제가 거기에 어떻게 각인되었고 또 그것들에 대해 어떠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가가 적극적으로 문제화되었다. 이러한 동향은 포스트콜로니얼 비판이라고도 할 만한 영역을 형성했다. 거기에서는 첫째로,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공동체 안에서 산출된 포스트콜로니얼한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독하는 과정 속에서 그 지역 고유의 식민지 지배와 그 후의 역사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컨텍스트와의 관련성을 밝히고, 동시에 그 지역의 특수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 전체로 열어가려는 시도가 실천되었다.

둘째로, 비평가나 연구자 자신이 현재 진행형으로 살고 있는 포스트콜로(10)니얼한 역사 과정과 사회 속에서 정전화(canonize)된 기존의 텍스트를, 당시까지의 표현 양식이나 레토릭을 철저하게 재편성함으로써, 권위가 부여된 정전적 텍스트를 포스트콜로니얼한 정치 상황과 관련된 형태로 다시 읽어 나아가는 방향이있다. 이러한 다시 읽기야말로, 그 자체로서 보편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 온 ‘문학’이나 ‘예술’, ‘미’라는 개념이 식민주의적 담론의 변동 속에서 인공적으로 날조된 것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포스트콜로니얼한 신천인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을 󰡔�포스트콜로니얼󰡕�이라고 명명한 것은, 현재의 우리들이 스스로의 실천에서 식민주의와 그 유제를 비판하는 행위를 실제로 수행해 나아가는 데서는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형용사를 피수식어로부터 분리하는 편이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을 취한 이상,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수식어 뒤에 피수식어로서 어떤 명사가 붙는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비평한다는 책임=응답성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상이 포스트콜로니얼한 공간이나 포스트콜로니얼한 시간이라는 대명제라고 해도, 포스트콜로니얼한 밥그릇이나 포스트콜로니얼한 튀김이라는 소명제라고 해도, 그 각오는 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농담이 아니다. 도기나 자기의 이동, 생산 기술의 전파, 그 소유와 권력의 관계는 천 년 단위의 ‘세계’편성 과정을 밝혀 줄 것이고, 오늘 먹는 튀김의 밀가루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었고 내용물인 새우가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 포획되었는지는 음식물을 둘러싼 신식민주의적(neocolonialistic) 착취와 수탈의 양상을 드러낼 줄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이 구축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된 책은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1978)일 것이다. 유(11)럽에서 형성된 역사학, 언어학, 문헌학이라는 19세기적 지(知)의 담론은 항상 서양(Occident)과 동양(Orient)을 대비시키면서 학문적인 담론 체계를 형성해 왔다. 동양이라는 타자를 둘러싼 치밀한 분석과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 체계를 창출함으로써, 타자로서의 동양의 문화적 이질성을 거울로 삼아 서양이라는 유럽 사람들의 자기상(自己像)이 구성되어 왔다. 그리고 동양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쌓아 나아감으로써 유럽 사람들은 그것과 이질적인 서양을 권위화하고 동양을 지배하고 교도(敎導)하며 서양적(Occidental)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의해 ‘세계’를 조작하는 주체를 편성해 온 것이다.

담론을 둘러싼 푸코(Michell Foucault)의 이론에 입각한 사이드의 논의는, 이항 대립주의적 구도 속에서 서양과 동양을 대비시키는 학문적 담론이 그것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고 결국에는 그들 자신에 의해 재생산되어 굉장혹 강고한 이원론적 틀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자신의 담론이 지적 담론으로 인증되기 위해서는 반복 재생산되어 온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틀 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주체화=예속화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동양이란 실체적 무엇가가 아니라 몇 세대에 걸친 지식인, 학자, 정치가, 평론가, 작가라는 오리엔탈리즘에 꿰뚫린 사람들이 반복 재생산한 표상=대리 표출(representation)에 의해 구성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동양으로 에워싸인 사람들 자신이 서양으로부터 동일한 담론을 추출함과 동시에 서양과 동양이라는 지정학적 구도가 실체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이 인종주의나 ‘민족’주의 혹은 사상적임과 동시에 기분·감정적인 내셔널리즘의 온상이 되어가는 것이다.(12)

‘우리’를 비추기 위한 거울로서 ‘그들’의 표상적 구축. 당연히 이 논의는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 단계’와 타자를 둘러싼 논리를 불러들이게 된다.

유아가 거울 속에서 찾아내는 시각적 상을 자기상이라고 인지하기 직전 단계까지의 거울상은 유아의 신체나 표정의 움직임을 반복하기 때문에, ‘소문자 타자’는 유아로서는 예측 가능한 행동밖에 하지 않고 그것이 ‘소문자 타자’를 지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낳는다. 이 구도를 비유적으로 식민주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이동시키면, ‘소문자 타자’를 식민지화된 지역의 주변화된 타자와 겹칠 수 있다.

그것에 비해 라캉이 말하는 ‘대문자 타자’, 즉 담론을 중심으로 한 기호적 세계로서의 ‘상징계’를 통괄하는 ‘상징적 타자’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담론을 담당하는 중심이며 관념으로서의 제국 자체가 된다. 이 제국주의적 중심(실체로서는 어디에도 없다)은 식민지화된 지역의 사람들로서는, 한편으로 결코 동일화될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동일화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타자로서 기능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기준점이 되어 모든 이데올로기적 담론 변동의 요점이 된다. 따라서 피식민지적 주체는 이 제국주의적 타자의 감시와 응시의 시선에 구석구석까지 노출되고 또 꿰뚫리게 된다.

호미 바바(Homi Bhabha)는 이러한 식민자와 피식민자, 식민지 지배자와 식민지의 피지배자 사이에 현상하는 거울 관계를 전략적으로 양가적(ambivalent) 관계로서 다시 파악했다.(「흉내와 인간-식민지적 담론의 양가성」, 1984) 즉 식민지의 피지배자는 제국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상상된 진정한 지배자의 상을 계속해서 흉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결코 그 상과 동일화할 수는 없다. 호미 바바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제기한 이 틀(󰡔�검은 피부와 하얀 가면󰡕�, 1952)을 다시 짜 하나의 행위인 ‘흉내와 모방’을,(13) 그리고 고지식하게 진정성(authenticity)을 꾀하는 ‘적절한 모방’(mimicry)과 행위의 주체가 의식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별도로 하고 결과적으로 비웃음이나 얼버무림이라는 역설적인 혼란을 낳는 ‘부적절한 모방’(mockery, 비웃음이나 조소를 내재시킨 흉내)이라는 상호 모순된 측면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가성,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반되고 모순된 힘이 동시에 하나의 사상(事象)이나 행위에 작용하는 상태를 굳이 계속해서 찾아냄으로써 확고한 이항 대립주의의 틀을 구축한 제국주의적 담론을 전복하고 교란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오미 바바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가성에 드러나 있는 것은 식민지의 피지배자만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자 자신도 그러한 분열된 모순 가운데 휩쓸려 있다는 논점이다. 앞에서 말한 라캉의 이론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소문자 타자’가 주변화된 식민지의 피지배자이고, ‘대문자 타자’가 중심화된 식민지의 지배자라는 이분법이 반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양자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또 어디까지나 비대칭적이지만, 전위(轉位)와 역전위의 동력학(dynamics)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식민지적 상황에 휩쓸려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호미 바바의 논의는 식민지적 담론을 교란케 하면서 다시 짜는 낙관적 전망을 개척하는 방향을 지시했지만, 스피박(Gayatri Spivak)은 그러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라는, 이미 일정한 방법론을 구축한 담론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다. 즉 「섭얼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 1985)라고 했다.

미국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번역자였기 때문에 나온 비판이지만, 스피박은 애당초 어떤 지역에서 가장 차별받은 위체에 놓인 사람은 자(14)신의 현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타자 자신이 읽을 만한 담론을 스스로 엮어내는 지적 훈련을 받고 있는가(받을 수 있는가), 대부분의 타자에게 통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읽을 만하다고 인정되는 담론이란 단적으로 말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온 지적 엘리트에 의한 담론의 집적인 이상, 그 틀을 통해 가장 차별받는 사람의 ‘현실’은 결코 표상될 수가 없다. 결국 나오는 것은 가장 차별받는 사람 이외의 사람들이 대리적으로 표상한 담론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가장 차별받는 사람(섭얼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지지도 않은 것이다.

이러한 스피박의 날카로운 비판은, 식민주의적 강간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담론과의 관련 방식 총체에 대해 엄격한 윤리적 질문을 들이댄 것이다.(15)

일찍이 식민지 지배자였던 ‘대일본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본국’에 귀속한 사람으로서,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제목 아래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내가 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다.

첫째, 일본의 역사를 말할 때 정치적인 입장으로서는 우익에서 좌익까지가 기본적으로 ‘문명’으로서의 ‘근대’를 향했다고 긍정적으로 말해져 온 막부 시대 말부터 청일전쟁까지의 사건을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모순 속에서 다시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 마찬가지로 ‘초국가주의’(ultranationalism)에 의해 조종되어 ‘근대’화의 과정을 그르치고 만 ‘전시중’(戰時中)의 ‘야만’으로부터 다시 ‘문명’으로서의 ‘민주주의’로 향했다고 하는 패전 후의 사건을 동일한 모순 가운데서 다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15) 셋째, 메이지(明治, 1868~1912) 일본의 식민지적 담론 안에서 있으며 그것을 교란시키는 문학적 담론으로서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텍스트를 지금까지처럼 정전(canon)으로서가 아닌 방식으로 다시 읽는 실천을, 앞의 두 가지 역사적 서술 사이에 개입시키는 일이다.(16)

 

개국 전후의 식민지적 무의식

 

대륙·반도· 열도의 지정학

 

대륙의 개국

‘조공외교’란 중화(中華)사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므로 중국 이외의 나라는 문명과 무관한 ‘오랑캐’의 나라들이며, 그 나라들은 중국에 조공을 함으로써 그때마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확인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공을 하기만 한다면 그 나라는 자신의 지역에서 중국 본국으로부터 자립된 형태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치적 통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에 비해 서구 열강 사이의 조약 외교는 근대 국민 국가를 전제로 한 상(18)태에서 서구 열강의 국가 시스템을 기준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적인 합의를 만들고 서구 열강과 동일한 국가 개념에 합당한 국가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대등한 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19)

불평등 조약의 초점은 최혜국(最惠國) 조항과 협정 세율, 그리고 영사 재판권에 있었다. 물론 협정 세율은 이미 산업 자본주의화한 서구 열강이 자국 공업 제품의 수출을 용이하게 하는 시장 확대를 위한 것이었고, 영사 재판권은 사실상 서구 열강측이 상대국 안에서 치외법권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었다.(19)

 

열도의 개국

일본의 개국 양상이 중국의 경우와 미묘하게 달라지게 된 요인은,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형태로 근대 국민 국가가 된 미합중국을 최초의 개국 교섭의 상대로 삼은 데에 있었다.(21)

해리스는 미합중국의 평화주의를 강조하고, 먼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제3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지하는 것임을 강조했다.(22)

텐진조약과 비교했을 때 안세이 5개국 조약에서는, 관세율에서 청나라가 5퍼센트였던 것에 비해 대다수의 품목이 20퍼센트로 오른 것, 기독교에 대한 특별 조치가 들어있지 않은 것, 또 외국인의 ‘내지’(內地) 자유 여행을 인정하지 않은 것 등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구 열강에 의한 아편 전쟁에서 애로우호 전쟁에 이르는 경위를 숙지하고 그 교훈을 살리려고 한 막부의 국방 관계 관료들은 전쟁에 의한 반식민지화를 피하고 교역의 관세 이익에 의해 부국강병을 수행해 나아가는 노선을 취하고자 했던 것이다.(22)

 

‘존왕양이’와 자기 식민지화

중화사상의 산물인 ‘양(22)이’사상이란, 바로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는 선진 문화권이라고 가상(假想)하고 주변 지역의 사람들을 문화를 갖지 못한 오랑캐(夷狄)로 간주하는 차별적 배외주의이다. 이를테면 현실을 보지 않는 관념의 영역 속에서 열도를 옛 대륙의 위치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면서, 서구 열강을 오랑캐라고 간주하는 사상이 양이 사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이 사상은 현실 정치와 외교의 과정에서 보자면, 아편 전쟁에서 애로우호 전쟁에 이르는 청나라의 경험을 완전히 소거함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었다.

서민의 차원에까지 퍼진 ‘흑선’ 패닉(panic)에 편승한 형태로 형성되었던 ‘존왕양이’라는 광신적 배외주의의 기분·감정은 현실 역사 과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인식을 소거하면서, 그 소거된 공백을 ‘존왕’, 즉 불(23)평등 조약의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천황’을 떠받든다고 하는 낡고 새로운 권위주의에 의해 충전(充塡)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근대 천황제라는 장치의 기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 정부가 최초로 지니고 있었던 중요한 외교 과제는, 어쨌든 막부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일본의 위정자와 파워 엘리트들의 정신 구조는,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에 대해 종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표면상으로는 조약 개정을 진행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국공법’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의 외교 이론을 재빨리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자국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내의 제도·문화·생활 관습,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머릿속을 서구 열강이라는 타자에 의해 반(半)강제된 논리하에서, 자발성을 가장하면서 식민지화하는 상황을 ‘자기 식민지화’라고 부르고자 한다.(24)

열도의 파워 엘리트들은 서구 열강의 해군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및 청나라에 대한 식민주의적 외교 정책 그리고 열강 본국의 정치력·외교력과 실지(實地)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며, 지방 군벌제가 아닌 강력한 국가와 군대를 만드는 방향으로 ‘존왕양이’ 노선을 ‘존왕토막’(尊王討幕)으로 전환했던 것이다.(26)

 

반도의 개국

반도가 이러한 ‘조공 외교’권에 귀속해 있었기 때문에 1860년대 반도에서는 서구 열강에 의한 직접적인 개국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었다. 역으로 청나라와 ‘조공’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열도에서는 불가능했던 ‘양이’가 반도에서는 실질적으로 철저하게 실천되기도 했던 것이다. 무론 이 시점에서는 서구 열강의 태평양 전략에서 반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대륙이나 열도의 항만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기는 했다.(27)

반식민지화된 대륙, 개국하지 않은 반도, 개국에 의해 자기 식민지화를 수행한 열도 사이에서, 이러한 ‘만국공법’적 국가의 논리와 ‘조공 외교’적 국가의 논리가 미묘한 시간적 어긋남(time lag)을 내재시키면서, 서구 열강이 지닌 힘의 균형과의 흥정에 다투고 있었다. 그로 인한 혼란이 1870년대, 이 지역의 헤게모니 관계를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재편성해 버렸다. 그 최대의 요인은 열도의 파워 엘리트들이 ‘만국공법’을 내면화하는 방법, 즉 열도의 자기 식민지화 과정에 있었다.(28)

 

‘문명 개화’와 식민지적 무의식

 

‘만국공법’의 내면화

1860년대 열도의 파워 엘리트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만국공법’의 논리나 서구 열강이 만들어낸 ‘국제’ 관계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또 자신들이 귀속한 국가 자체를 그 규범의 틀에 적합한 것으로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28)

‘만국공법’이란 용어는 헨리 휘튼(Henry Wheaton, 1785~1848)이 지은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국제법의 요소들, 1836)를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P. Martin, 1827~1916, 중국 이름은 딩웨이량(丁韙良))이 󰡔�만국공법󰡕�이라는 제목으로 한역한 데서 유래한다. 이 한역본은 1864년에 간행되었고, 다음 해인 1865년에 일본인용으로 번각(飜刻)되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들어왔으며 막부 말기 유신기에 유포되었다. 일본의 파워 엘리트들에게 이 󰡔�만국공법󰡕�은 수입처인 청나라에 비해 훨씬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29)

 

식민주의의 실천

‘만국공법’은 어디까지나 서구 열강형 국가 사이의 ‘국제’법(International Law)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서구 열강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지배를 추인하듯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만국공법’의 논리에서 ‘세계’는 서구 열강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국가를 ‘문명국’으로 특권화하고 있고 그 밖의 지역을 ‘미개국’으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문명국’이 ‘미개국’의 영토를 ‘주인 없는 땅’으로 영유하고 지배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홋카이도’ 영유에 즈음해 메이지 정부는 이 논리를 사용했다. 아이누는 ‘미개’, 즉 ‘야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설령 그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토지는 영유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국공법’에서 식민지 영유가 정당화되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문명국’에 대해서이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불평등 조약을 강요받고 있던(32) 일본은 과연 ‘문명국’이었을까? 막부 말의 사절단이 서구를 방문했을 때, 대부분의 경우 일본은 방문한 국가의 보도에서 담론상 ‘미개’국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모순과 비정당성을 어떻게 은폐할 수 있을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 ‘문명 개화’를 국시(國是)로 내걸고 학교 교육을 철저히 함으로써 스스로 ‘문명’화, 즉 가지 식민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메이지 신정부의 파워 엘리트들도 엄연한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33)

 

‘문명’, ‘반개’, ‘야만’의 삼극 구조

‘문명국’측이 자신들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가운데 만들어낸 ‘만국공법’의 논리를, 아직은 ‘문명국’이 아니었을 일본의 형편에 맞게 독해한 사람이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1874년(明治 7년)부터 구상했고 다음 해에 탈고한 󰡔�문명론의 개략󰡕� 제1권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 개화’의 개념을 상대화해 보여주었다.

후쿠자와는 우선 “오늘날 세계의 문명을 논함에 있어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합중국을 최상의 문명국으로 보고 터키, 가나, 일본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반개(半開)의 나라라고 칭하며, 아프리카 및 호주 등을 야만국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명칭이 세계의 일반적 견해가 되어 있어, 단지 서양 여러 나라의 인민들만이 자신들의 문명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반개와 야만국의 인민들 역시 그 명칭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며 스스로 반개와 야만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감히 자기 나라의 상태를 자랑하며 서양의 여러 나라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번 읽어보면 다섯 대륙을 ‘문명’, ‘반개’, ‘야만’ 으로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권 국가의 차원에서 문제 설정을 하고 있다. 이어서 생(33)산 양식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야만’, ‘반개’, ‘문명’을 ‘인류가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段級)’ 혹은 ‘문명의 연령’이라는 사회 진화론적 발전 단계설의 논리에 기초해 세 단계로 위치 짓고 있다.

이러한 ‘문명’, ‘반개’, ‘야만’이라는 3단계 규정을 한 다음 후쿠자와는 “이상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그 양상을 적어보면 문명, 반개, 야만의 경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원래 이 명칭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아직까지 문명을 본적이 없는 동안에는 반개의 상태를 최상으로 여기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이 문명이라는 것도 반개에 비해야만 문명인 것이고, 반개라 하더라도 이를 야만에 비한다면 이 역시 문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반개’를 축으로 하면서 이들 세 항을 상대적인 관계 속에 재비치해 보여주었다.

서구적인 ‘문명’과 아직 만난 적이 없는 지역에서는 ‘반개’의 상태가 가장 진보한 단계가 된다. 게다가 ‘문명’이 ‘문명’으로 성립하는 것은 직접 ‘야만’과 대비해서가 아니라 ‘반개’와 비교한 상태에서 그것보다 진화했으므로 ‘문명’일 수 있다. 따라서 ‘반개’는 ‘야만’과의 대비에서는 충분히 ‘문명’이라 할 만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후쿠자와의 논의는 ‘문명’을 ‘문명’으로, ‘야만’을 ‘야만’으로 성립하게 하는 거울, 내지는 대립적이지 않은 일종의 촉매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중간항적인 타자로서의 ‘반개’를 만들어낸 것이다.(34)

일찍이 세계적인 ‘문명’을 구축했던 중국도 현시점에서 ‘서양’과 비교하면 ‘반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아프리카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하면 충분히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일본 수도권의 인민”도 ‘에조인’과 비교하면 분명히 ‘문명’측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에조인’이 사는 지역이었던 토지를 ‘홋카이도’라고 하면서 영유하고 개척의 장소로 삼을 수 있는 권리가 ‘문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반개’는 ‘문명’이라는 타자로서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고, 그 기준에 따라 자기 상을 형성함으로써만 ‘반개’일 수 있다. 동시에 ‘반개’가 ‘미개’ 내지는 ‘야만’으로 떨어져 ‘문명’인 서구 열강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의 타자로서의 거울인 ‘미개’ 내지는 ‘야만’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날조하여 거기에 자기를 비추면서,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충분히 ‘문명’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확인 행해지는 순간, 자신들이 ‘문명’측으로부터 ‘미개’나 ‘야만’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는(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막부 말기의 사절단에 대해 그러한 시선을 보냈지만) 공포와 불안을, 거울인, 즉 새롭게 발견한 ‘미개’와 ‘야만’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에서 소거하고 망각의 심연에 떨어뜨려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도록 뚜껑을 닫아버리고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조작을 통해 개국 후 일본의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원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식민지적 공포와 불안을 망각하기 위해서는 항상 타자로서의 거울인 ‘미개’와 ‘야만’이 계속해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처럼 발견된 ‘미개’와 ‘야만’은 그 지역이 내국화(內國化)되지 않으면 타자로서의 거울이라는 기능을 하겠지만, 일단 식민주의적 지배가 수행되고 자국의 영토가 되어버리면 타자로서의 ‘미개’(35)와 ‘야만’이었던 사람들도 동일한 자국민이 되어 자기의 일부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실제로 ‘홋카이도 개척사’가 설치된 이후 ‘토인’이라고 불렸던 아이누는 신민(臣民)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화로 유지되어 온 고유의 풍속이나 생활 관습이 금지당했던 것이다. 동시에 ‘구토인’(舊土人)이라는차별적 명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일본인’의 일부이면서도 차별을 지속받는 분열 속에 놓였던 것이다.(36)

 

‘정한론’의 양의성

...아이누가 ‘교화’라는 이름의 폭력적인 동화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상, 홋카이도를 영토화한 이후 타자로서의 거울인 ‘미개’와 ‘야만’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새롭게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표적은 반도로 향해졌다. 대원군의 지배 체제하에 있던 반도는 메이지 유신 후의 ‘왕정 복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신 정부가 신국가 체제를 통보하는 편지에 ‘황’(皇)이나 ‘칙’(勅)이라는 글자를 천황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당시까지의 ‘조공 외교’에서 조선에 대해 이러한 글자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종주국인 청나라의 황제뿐이었기 때문이다.(36)

 

‘제국’ 흉내 내기로서의 ‘타이완 출병’

...1874년 5월에 이와쿠라 토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정부 수뇌는, 3년 전에 타이완 동남쪽 해안에 표착한 류큐선(琉球船)의 승무원 54명에 대한 살해 사건과 1년 전의 빗추(備中) 오다현(小田縣) 세이코군(誠江郡)의 4명의 타이완 동남쪽 해안 표착자에 대한 약탈 사건을 구실로 ‘타이완 출병’을 결행한다. 이러한 무력행사를 가능하게 함에 있어 청나라측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타이완의 ‘야만인’(生蕃, 사건에 관여했다고 하는 ‘고사족’(高砂族))을 “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의 백성”(化外의 民)이라고 위치 지은 것이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만약 타이완 동남쪽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이 ‘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의 백성’이라면, 그 장소는 ‘주인 없는 땅’으로서 군사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일본측은 바로 ‘만국공법’의 논리를 행사했다.

조선 대신에 새롭게 발견된 ‘미개’와 ‘야만’이 ‘타이완 출병’이라는 최초의 대외적인 침략적 군사행동을 가능하게 한 억지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타이완 출병’은, 청나라와 일본 사에에서 사실상 ‘양속’(兩屬) 관계에 있었던 류큐 왕국의 주민을 ‘일본국 속민’이라고 주장하는 말이 열기를 띠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식으로 류큐 왕국에 대한 일본의 단독 지배의 근거를 획득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완에서 새롭게 발견한 ‘미개’와 ‘야만’에 의해, 후일 ‘류큐 처분’으로 이어지(40)는 류큐 제도(諸島)의 식민지적 영토화의 길을 여는데 성공했던 것이다.(41)

자신들이 서구 열강에 대해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한창 요구하고 있을 때, 그와 동일한 조약을 조선에 밀어붙이려는 욕망을 품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서는 이 시기에 형성된 일본형 식민주의 의식 구조의 특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언뜻 보면 특수하게 일본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만국공법’적인 서구 열강에 의해 산출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자체가 원리주의적으로 형성하고 만 모방과 흉내(mimicry) 연쇄의 일환인 것이다. 동시에 이 시기의 대륙, 반도, 열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만국공법’적(41) 관계와 ‘조공 외교’적 관계가 국소적인 편차의 비대칭성 속에 혼재하고 있었고, 그 혼재 속에서 ‘만국공법’적인 논리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것이다.(42)

본래의 한민족(漢民族)적인 ‘중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침략 왕조로서의 청조(淸朝)와 직접적인 ‘조공’ 관계를 맺지 않았던 일본이 청나라와 거의 유사한 불평등 조약을 거의 같은 시기에 체결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공교롭게도 서구 열강과 동시에 등등해졌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청일수호조규의 대등함이나 평등성은 어디까지나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성에서 보전된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대등함 속에서는 옛 대륙과 ‘조공’ 관계를 맺고 있던 종속 관계의 기득권을 없앨 수 있게 된다. 속국을 독립시킨다는 논리에 의해 일본이 청나라의 권익을 빼앗을 수 있게 된 것이다.(42)

 

‘탈아론’적 식민주의의 형성

 

흉내(mimicry)와 양자 관계(affiliality)

‘만국공법’의 논리 속에서 ‘친자 관계’(filiality)를 가장한 형태로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를 과도하게 흉내·모방하고, ‘양자 관계’(affiliality)로 들어가려는 방침이 더욱 강하게 되었던 것이 ‘강화도 사건’과 그것을 계기로 맺(43)어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사이드는 문화적 중심에 주변부가 그저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마치 양자(養子)처럼 완전한 양자 결연을 맺어 그 일부가 되는 욕망을 가지고 과도한 모방을 하는 현상을 의식적인 ‘양자 관계’ 만들기(affiliation)의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오키나와’(沖繩)의 속지화(屬地化)를 내재시킨 ‘타이완 출병’ 후의 ‘강화도 사건’은 그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준다.(44)

2월 26일에 조인된 조일수호조규는 표면적으로는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하면서, 일본 선박에 의한 연안 측량의 자유, 개항장에서 일본 영사가 재판권을 갖는다는 치외법권, 수출입 비과세 등 명백히 조선에 대해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또한 조약 체결 후 협의 과정에서 미곡 수출입 허가 조항이 덧붙여짐으로써 조선에서 대량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게 되었고, 그후 이 조항은 반도에서의 농업 파괴와 식량부족 현상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불평등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를 확보했고, 장기간에 걸쳐 쇄국 정책을 취해 오던 조선을 결과적으로 서구 열강에 앞서 개국시켰다. 그러한 의미에서 페리로 대표되는 미합중국의 일본에 대한 외교 전략을, 일본은 조선에 대해 극히 고식적인 형태로 모방했던 것이며, 동시에 서구 열강의 대리인 역할(agency)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이긴 하지만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이미 청나라와 대등(45)한 관계에 있었던 일본은 조선과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청나라와 조선의 종속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실상 ‘조공 외교’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그것은 ‘류큐’를 둘러싼 ‘양속’ 관계를 일본의 단독 지배 아래 두는 과정에서도 극히 중요한 기정 사실 만들기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이 ‘조공 외교’권에 ‘만국공법’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감으로써 옛 종주국으로서의 청나라의 위치를 모방하면서, 그 청나라가 종주국으로서 휘둘러왔던 ‘조공 외교’권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켜 가는 서구 열강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46)

 

‘부적절한 모방’에 의한 식민주의의 격화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막부 말기에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 서구 열강과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 국가의 지상 명제일 때, 오랫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조선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적인 ‘문명’·‘반개’·‘야만’(‘미개’)이라는 삼극구조의 논리 안에서는, ‘반개’는 ‘야만’ 없이는 ‘문명’에 대해 ‘반개’일 수 없기 때문에 ‘야만’을 계속해서 날조하지 않는 한 자기의 위치를 유지할 수(46)가 없다. ‘반개’로부터 벗어나 ‘문명’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을 개정할 수 없다. 그것이 현재의 권력 안에서 늦추어지고 있는 동안은 주변 지역에서 ‘야만’(‘미개’)을 계속해서 날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47)

호미 바바는 식민지화된 지역의 사람들이 종주국의 문화나 담론에 대해 ‘적절한 모방’을 강요받고, 결과적으로 종주국의 논리에 ‘점유’(appro-priate)되고 마는 과정에 대해 ‘부적절한 모방’, 즉 비켜놓기나 조소라는 패(47)러디를 통해 자신들을 표현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적절한 모방’은 하나의 탈식민주의적 담론의 논리적 가능성으로 제시된 것인데, 일본 식민주의의 발생을 생각하는데 있어서는 덮어놓고 이 논리를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위치 짓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일본에서의 식민주의적 의식의 발생은 ‘만국공법’권의 논리에 대해서나 ‘조공 외교’권의 논리에 대해서나 동시에 ‘부적절한 모방’을 행함으로써 성립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부적절한 모방’은 ‘만국공법’의 표면상의 원칙인 주권 국가간의 조약에 의한 대등한 외교관계라는 가면을 벗겨버리고, 약육강식의 군사적 위협에 의해 식민지화를 진행시켜 나아가는 권력 통치의 논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버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만국공법’권에 양자적 대리인으로 참가함으로써 대리인에서 제국주의적 주체로 이행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아시아 지역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격화시켰던 것이다.(48)

 

‘류큐 처분’이라는 이름의 식민지화

‘타이완 출병’의 처리에 즈음해 류큐 사람들을 ‘일본국 속민’으로 하는 조항을 청나라와 교환한 일본은, 그후의 교섭 과정에서 류큐가 고래로부터 일본의 영토라는 것을 반복해서 주장했다. 즉 류큐 사람들을 ‘일본인’이라고 한 것이 영유(領有)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48)

그리고 1879년 3월 27일, 구마모토(熊本) 진대병(鎭臺兵)을 류큐에 파견해 일방적으로 폐번치현을 통고하고, 수리성(首里城)을 군사력으로 접수했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청나라를 무시하는 형태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한다는 조치가 전국에 포고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류큐 처분’이다. 류큐 왕부의 ‘주권’을 짓밟은 것일뿐만 아니라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에서도 전혀 타결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의 폭거라는 형태로 ‘류큐 처분’이 행해진 것이다.(49)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반개’·‘야만’(‘미개’)이라는 삼극 구조를 둘렇싼 줄타기하는 듯한 논리는, 이렇게 주변 지역에서 ‘야만’으로서의 타자를 발견하고, 그에 비해 ‘반개’일 수밖에 없는 일본을 ‘문명’이라고 가장하지 않을 수 없는 연속적 상황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야만’으로서의 타자가 아이누 사람들이고 타이완 ‘원주민’이며 류큐 사람들이었다.(50)

결국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에서 ‘류큐 처분’ 문제는 타결을 보지 못하고 청일전쟁까지 넘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타이완 출병’, ‘강화도 사건’, ‘류큐 처분’이라는, 즉 군사력에 의한 위협을 통해 식민주의적 야망을 실현해 나아가려는 일본으로서는, 불평등 조약에서 대등하게 된 청나라와의(50) 모순이 ‘만국공법’적 논리 속에서 점점 심화되어 가게 된다.(51)

 

‘반도’에서의 위기와 군비 확대 노선

 

청불전쟁과 ‘조공 외교’권의 붕괴

이 시기 자유민권파를 포함한 일본의 여론이 갑신정변에 대해 과도하다 싶게 침략주의적 반응을 보인 최대의 이유는, 1884년(明治 17년) 8월부터 이듬해에 걸쳐 선전 포고도 없이 벌어진 ‘청불전쟁’이 일본 국내의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불전쟁은 신문 독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일본의 여론에 아시아 지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지배 정책이 결정적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일본 신문의 보도에서 이 전쟁의 발단은 ‘안난스 사건’(安南事件)이라고 불린 사건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는 1874년의 단계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국인 베트남을 보호국화하고 있었다. 1882년 프랑스의 광산(鑛山)조사대가 송코이강 유역에서 조사를 벌이는 것에 대해 태평천국의 난에 참가한 류용푸(劉永福)의 흑기군(黑旗軍)이라는 사병(私兵)들이 방해했다는 구실로, 프랑스군은 하노이를 군사적으로 제압했다. 당초에는 흑기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었지만, 하노이 점령 후 ‘조공 외교’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의 정규군이 윈난성(雲南省)과 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으로 진공했다. 이른바 ‘양무 운동’ 과정에서 근대적 장비를 갖(53)추었던 청나라 군대의 첫 대외 전쟁이 벌어지려고 했던 것이다. 리홍장(李鴻章)은 북베트남을 중립 지대로 하는 방향으로 평화 교섭을 진행했지만, 프랑스는 베트남 침략을 본격화하여 1883년(明治 16년)에는 후에(順化) 조약에 의해 베트남을 완전히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사태는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조공 외교’적 종속 관계가 완전히 무효라는 사실을 확정해 주는 사건이었다. ‘만국공법’권에 속해 있던 대국 프랑스가 ‘만국공법’의 틀 안에서 ‘조공’적인 속국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키는 형태로 떼어놓은 뒤 국가 주권을 박탈하는 식으로 보호국으로 만들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식민지로 속지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아시아 지배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해 취한 식민지 지배의 과정은 분명히 ‘류큐 처분’ 때 일본이 청나라에 대해 취한 과정을 모방한 것이며, 그 후 일본은 러일전쟁의 과정에서 조선에서도 동일한 과정을 실천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아시아 대륙의 남부 그리고 동남부의 반도와 열도 지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를 가속화하고 격화시켰던 것은, 이러한 불평등 조약 체제로부터 한창 탈출하려는 동북부 열도의 정권이 제국주의적 침략 경쟁에 모방적으로 참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조약상으로는 서구 열강과 같은 수준의 ‘만국공법’권적인 제국주의적 주체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 주변 지역에 대해서는 군사적 위협을 중심으로 하는 퍼포먼스적 몸짓에 의해 서구 열강적 ‘주체’를 모방·흉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조공 외교’적 종속 관계를 최종적으로 해체하는 서구 열강의 대리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리홍장은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청나라 정규군을 국경까지 철퇴시키는 방향으로 교섭을 진행했지만, 병사 철수를 둘러싼 오해가 원인이 되어 현지에서는 전투 상태가 되었다. 1884년 8월 23일에는(54) 프랑스 해군의 철갑 함대가, 목제 함대로 편제되어 있던 청나라의 푸젠(福建)함대를 십 몇 분 만에 전멸시켰다. 나아가 프랑스 군이 타이완을 봉쇄함으로써 전투 상태는 헤어나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드디어 1885년 6월 9일에 리홍장이 준비했던 방향으로 텐진조약의 조인이 이루어졌다. ‘양무 운동’에 의해 ‘근대적 전쟁 준비’를 갖추었을 청나라 정규군은 프랑스의 최신예 해군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공 외교’권에서의 종주국 청나라는 속국의 군사적인 위기를 방어할 수가 없다는 군사적 약체성을 뚜렷하게 폭로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바로 이러한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조공 외교’권이 서구 열강의 군사력 앞에서 요란하게 무너지려는 기회를 틈타 일어난 쿠테타였다. 반도의 정권에서 왕비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이 청나라에 의존하고, 개혁파인 김옥균 등의 독립당이 일본을 후원자로 삼았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반도의 정치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적 권력 정치의 대리투쟁이 되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55)

 

‘탈아론’적 왜곡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에 반발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정치 행동과 함께 밝은 1885년(明治 18년) 3월 16일,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脫亞論)을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사설로 발표한다. 그 앞머리에서 후쿠자와는 ‘동점(東漸)의 세(勢)’가 격렬한 ‘서양 문명’을 ‘홍역의 유행 같다’고 파악한다.......다시 말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문명’의 타자성을 병에 대한 비유를 통해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사용한 직후에 “이 유행병의 해악을 싫어해 이를 막으려 해도” “그 수단”은 없다고 단언한다.(56)

‘서양 문명’이라는 ‘유행병’적 타자성을 그렇게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것으로 담론화하는 데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특징이 있다. 즉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병과 그 이전의 건강했을 신체를 망각하고 감염 후의 삶을(57) 살아가는, 곧 병의 은폐인 것이다.(58)

그리고 일단 병에 걸린 ‘서양 문명’이라는 ‘유행병’이 “유해하기만 한 유행병이라 해도, 여전히 그 기세에 격해져서는 안 된다. 하물며 이해(利害)가 동반되며 항상 많은 이익이 있는 문명에 있어서야 말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문명’을 해악만이 아니라 이익이 많은 ‘병’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그 다음은 ‘문명’ 대 ‘구투’(舊套, ‘야만’)라는 이항 대립주의로 훌륭하게 변동되어 간다.(58)

 

‘국민정신’의 지정학

‘문명’, ‘활발’, ‘진보’, ‘독립’에 적대하는 ‘고풍노대한 정부’일 수밖에 없는 ‘구 정부’로서의 막부는 ‘폐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논리로 메이지 유신이 재정의 된다. 게다가 “일체 만사 서양의 최근 문명을 취해 오직 일본”만이 “구투(舊套)를 벗었다”고 십수년간에 걸친 ‘문명 개화’ 제1단계의 과정을 평가하고, 제2단계인 “아시아 전 대륙 안에서 새롭게 한 기축(機軸)을 이루어 주의(主義)로 삼는바”의 ‘탈아’가 주장되기에 이른다.(58)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나는 지나라고 하고, 하나는 조선이라고 한다”, ‘근린’에 있는 ‘두 나라의 인민’은 “고래로 아시아의 정교풍속(政敎風俗)” 안에서 ‘일본 국민’과 마찬가지로 살았지만 “그 인종의 유래를 각별히 한 것인지” 아니면 “유전(遺傳) 교육의 취지와 다른” 이유에서인지, ‘일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즉 “개진(改進)의 길을 알지 못하고” “고풍의 구습에 연연하는 정(情)”에 있어서, 그리고 ‘유교주의’에 기초하는 ‘외견의 허식’에만 집착하는 점에서, 이 ‘두 나라’, 즉 “지나와 조(59)선의 유사한 모양”은 극히 대단하고 “지나와 조선이 일본보다는 가까운”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로는, 이대로 가면 이 두 나라는 “문명이 동점”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하는 길이 있을 수 없으며”, “수년이 지나지 않아 망국이 되어 그 국토는 세계 문명 제국의 분할로 돌아갈 것에 한 점 의심도 없다”고 후쿠자와는 판단했던 것이다.(60)

 

자기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또 한가 중요한 것은 ‘지나와 조선’이 ‘일본’과 결정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렇게 강변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 문명인의 눈”에서 보면 이 “삼국의 지리(地利)가 상접(相接)하므로 때로는 이를 동일시하고, 지나와 조선을 평하는 값어치로서 우리 일본을 평가하는 의미가 없지 않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이 서구 열강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의해 ‘지나, 조선’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일이었다.

‘지나와 조선’의 정치가 ‘전제’적이고 ‘법률’에 따른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로부터 ‘법률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되고 마는 것이 두려웠으며 싫었던 것이다. ‘일본인’은 ‘서양의 학자’(60)로부터 ‘지나와 조선’ 사람들이 비‘과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이는 것, ‘지나인’의 ‘비굴’함이나 ‘조선인’의 ‘참혹’함 그리고 ‘근린’의 ‘잔인무도’함과 ‘동일시’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에 나오는 ‘문명’·‘반개’·‘야만’이라는 삼극 구조에서의 ‘반개’가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결국 20년 전까지 ‘일본’이 속해 있던 ‘아시아식의 정교풍속’을 철저하게 ‘구투’, ‘고루’, 비‘개진’, 비‘진리’, 비‘도덕’, ‘잔혹과 몰염치’라며 모멸하고, 현재의 ‘일본’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단절함으로써 더욱 ‘문명’에 가까운 ‘반개’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갑신정변 후의 ‘일본’ 신문을 중심으로 한 여론이 과도하게 아시아를 멸시하게 되는 최대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후쿠자와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서양 문명인의 눈’에 대해 ‘외견의 허식’에 가득 차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결론은 이렇다. “오늘날 일을 꾀함에 있어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키는 여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대오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고, 지나와 조선과 접촉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인 까닭에 특별히 배려할 필요는 없다. 바로 서양인이 이를 대하는 식에 따라 처리해야만 한다. 악우(惡友)를 사귀는 자는 함께 악명을 면할 수 없다. 나는 진정코 아시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할 것이다.”(61)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욕망

‘문명’과 ‘구투’로서의 ‘고루’함, 즉 계속해서 ‘야만’과 ‘미개’에 머무는 자와의 이원론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가는 식민주의적 이항 대립주의 담론이 최종적으로는 선과 악의 이항 대립으로 수렴되어 가는 너무나 전형적인(61) 사례가 ‘탈아론’이다. 그리고 ‘유행병’이라는 비유로 언급되었던 ‘문명’이 선인가 악인가 하는, 합리적인 사고에서 당연히 물어져야 할 그 문제가 그 순간 사고 정지의 심연에 떨어지고 만다. 역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말하는 정치적 무의식이 구조화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양 문명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의 적용 범위는, 이후의 ‘대일본제국헌법’의 발포(1889년)와 1881년(明治 14년) 메이지 천황에 의해 약속된 국회 개설(1890년)에 의해 청나라나 조선과는 다른 입헌 국가로서의 ‘외견’을 갖출 정치 일정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군인칙유’(軍人勅諭)로 헌법 밖에서 통수권을 획득한 메이지 천황이 ‘대일본제국헌법’과 ‘국회개설’에 의해 그 절대적인 권력을 위협받았던 것에 대항하여, ‘대일본제국 신민’의 ‘국민정신’을 ‘교육칙어’에 의해 통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태의 필연성도 분명히 해두었다.

‘대일본제국헌법’ 자체가 서구 열강 제국주의와 맺은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불가결한 ‘태서식(泰西式)법전’의 요점이었으며, 서구 열강의 논리에 의한 자기 식민화의 증좌였던 것이다.(62)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욕망은 ‘만국공법’에서의 종주국이 되기 위해 속국이 될 만한 지역에서 전쟁을 할 수 있게 되는 ‘보편의 나라’가 되는 데에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욕망은 2001년까지도 형태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있다.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인 청일전쟁에서 ‘대일본제국’ 천황의 이름 아래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바로 ‘대영제국’과의 사이에서 불평등 조약의 개정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시아’에서 서구 열강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서 ‘대일본제국’은 ‘외견’상 제국주의적 주체(subject)가 되고, 그 후 얼마 동안은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제국과 대영제국의 대립에서 영국측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해 가게 된다.(63)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한 대항 담론

 

‘회전’과 ‘소회전’

 

‘일본인의 눈’

청일전쟁의 승리와 그 후의 이론바 ‘삼국 간섭’을 거치면서 몇 겹으로 굴절된 일본의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상호 보완 관계를 표상한 표현자의 한 사람으로 소세키(漱石), 곧 나츠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가 있다.(64)

다이이치(第一)고등학교에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했지만 졸업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던 나츠메 긴노스케는 1900년, 제1회 문부성 관비 유학생이 되어 영국에 유학함으로써 엘리트 코스에 복귀한다.

20세기 첫해를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에서 맞이한 나츠메 긴노스케는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과 조우한다. 여왕의 장례와 마주친 다음날인 1901년 1월 27일, 나츠메 긴노스케는 일기에 “밤, 하숙집 3층에서 곰곰이 일본의 앞날을 생각한다. 일본은 진지해져야 하고 일본인의 눈은 더욱 켜져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소설가 나츠메 긴노스케가 탄생하는 데에 런던 유학이 작용한 결정적인 의(64)미는 이 “일본인의 눈은 더욱 켜져야 한다”는 인식의 획득에 있다. ‘일본의 앞날’, 즉 ‘문명 개화’, ‘부국강병’, ‘식산흥업’(殖産興業) 그리고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중심적인 모방 모델의 하나가 된 것이 ‘대영제국’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은 그 ‘일본의 앞날’을 체현하고 있는 ‘대영제국’의 쇠퇴 징조를 확실히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19세기의 끝과 20세기의 시작을 런던에서 경험한 나츠메 긴노스케는 그때까지 그 안쪽에 귀속해 있던 ‘대일본제국’의 ‘전도’(前途)를 바깥쪽으로부터 보는 ‘눈’, 동시에 ‘일본의 전도’, 즉 미래의 목표가 되었던 ‘대영제국’이라는 외부의 현재를 그 내부로부터 보는 ‘눈’을 획득한 것이다.(65)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밤낮없이 회전’하는 ‘다사한 세계’의 ‘파란’과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장소인 ‘작은 세상’에서의 ‘작은 회전’과 ‘작은 파란’을 밀접하고 불가분한 관계 속에 두고 볼 수 있는 ‘일본인의 눈’을 획득했던 것이다.(66)

 

‘진보’에 대한 의심

이 ‘눈’의 중요한 특질로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실제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로서의 ‘파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파란’과 개별적인 ‘나’라는 개인과 관계되는 ‘작은 파란’이 모두 ‘회전’ 내지는 ‘작은 회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의 모습이다.

‘회전’ 운동이란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과 바깥쪽으로 튀어나가려(66)는 원심력이 정확하게 평형을 이루었을 때 발생하는 운동이다.

방향을 완전히 역으로 하는 두 힘이 서로 끌어당기는, 갈라지기 직전의 길항 속에서 생기는 ‘회전’과 ‘작은 회전’.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모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두 논리의 힘이 서로 평형을 이루는 한 가운데에 몸을 두게 된다.(67)

청일전쟁 직전, ‘대영제국’과의 조약 개정에 이르러 청나라에 대해 서구 열강 못지 않은 전쟁이 가능한 ‘보통의 나라’가 된 ‘일본’. 그 청나라에 대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진보’에 ‘서양인’은 ‘놀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것은 당시까지의 ‘일본’이 서구 열강 못지않게 될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보’에 아주 뒤떨어진 나라라고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일본’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67)

그러나 영일동맹이 맺어진 1902년 1월 30일 전후의 수기에서는 “영국인(67)은 천하 제일의 강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영국은 망할 날이 없을까”하는 진화론적인 ‘진보’에 의심을 표명하면서, 그때까지 번영의 절정에 있었고 그 상태를 그 후로도 계속해서 갱신하고 있다고 믿어졌던 ‘영국’의 ‘망할’ 가능성을 지적한 다음, ‘일본’에 대해서도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 스스로 득의양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대영제국’은 청나라에서 자신의 권익을 지키고 조선 반도를 포함한 러시아제국의 남하 정책에 대항하는 데 있어 일본을 아시아의 헌병으로 삼을 작정으로 영일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이 동맹은 그 전까지는 ‘미개’의 섬나라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던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지 않으면, 아시아에 대해 전개해 온 식민주의적 정책을 지킬 수 없게 될 만큼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이 심해지고 ‘대영제국’의 힘이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예전에는 ‘미개’의 나라였던 ‘대일본제국’이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패권 다툼에 서구 열강 못지않게 참여함으로써 청나라에 대한 조차(租借)라는 이름의 식민지적 분할을 일거에 가속화했던 것이다. 역으로 ‘삼국 간섭’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대일본제국’을 대등하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는 국가적 표시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본 국내에서 영일동맹은 한 번 더 일본이 서구 열강 못지않다는 증좌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에 대해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혼자 하숙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의심을 표명했던 것이다.(68)

 

‘모순’으로서의 내셔널리즘

아무리 ‘문명 개화’라고 소리쳐 보아도 ‘일본인’은 영국인이 될 수 없다.(69)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강박적으로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답게 되려고 쓸데없는 모방을 한다. 한없이 자기를 타자로서의 거울인 영국인에 다가서게 하려고 한다. 그들의 기준에서 자기를 측정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문명 개화’란 바로 서구 열강의 논리와 가치관에 입각해 자기를 철저하게 개변하려고 하는 자기 식민지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식민지화는 ‘부국강병’을 하고 생산력·경제력·군사력을 서구 열강 못지않게 하여 외교적으로 대등하게 되면서, 바로 아시아의 주변 지역을 침략하여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를 전개한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 결과 침략적 내셔널리즘에 의해 자기 식민지화를 부추겨대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순’이 아니라고 꾸며대기 위해서는 자기 식민지화를 온폐하고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를 추진해 나아가는 내셔널리즘 쪽으로 일원화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일본제국’이 과도하게 침략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구도가 있다. 그러나 단독으로 그 침략성을 발동할 수 없는 이상, 가장 헤게모니적인 국가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그 귀결이 영일동맹이며, 일본형 기생(parasite) 내셔널리즘의 완성인 것이다.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그 의식의 한 부분을 자기 식민지화와 내셔널리즘이 갈라지는 한복판에 두면서도,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자기 식민지화, 즉 ‘대영제국’에 대한 흉내와 모방이 결국 ‘미래에는 중대한 대사’로 이어지고 국가가 ‘망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입장은 ‘모순’을 은폐하고 침략성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방향도, 혹은 ‘모순’을 해소한 것처럼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연속적인 ‘진보’의 가능성 속에서 근대를 발견하는 후쿠자와적 발전론도 아니다. 그것은 훗날의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를 관통하는, 계속해서 ‘모순’을 ‘모순’으로 파악하며 그 갈라짐의 중심에서 사고해 가는 표현자로서의 모습을 결정했던 것이다.(70)

 

러일전쟁과 식민주의

 

‘고양이’와 러일전쟁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거기에서 발생하는 인종주의적 차별과 전쟁이라는 폭력의 문제는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의 탄생 이후 일관된 주제로 나타난다. 예컨대 스스로 ‘소세키’라는 서명(署名)을 최초로 사용한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71)

키우는 고양이까지 전시(戰時) 내셔널리즘에 열광하고 있다는 설정인데, ‘혼성 여단’이란 러일전쟁에 대한 신문 보도의 핵심어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보명 1여단에, 필요한 다른 병종(兵種)을 더해 편제한 독립 부대를 말한다. ‘혼성 여단’이 새롭게 전장에 투입되었다는 신문 보도는 국내에서는 전의(戰意)와 국위를 고양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전장이라는 현장에서는 무능한 지휘관의 무모한 작전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자 예비군이 투입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나츠메 긴노스케처럼 ‘송적’(送籍)을 해서 징병을 피할 수 없었던 남자들은 거기에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장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71)

당시 ‘인간’으로서의 ‘일본’인 독자측에서 보면, 부엌 한가운데서 ‘쥐’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나’와 도고 헤이하치로가 같은 ‘걱정’을 하고 같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따위의 말은 결코 있을 수(72) 없다. 결과적으로 ‘나’의 담론은 동해의 해전을 부엌에서의 고양이와 쥐의 싸움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방법으로서의 ‘모순’이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나’는 ‘모순’되어 있다. 단지 한 마리의 고양이로서는 설령 ‘인간’쪽으로부터 다른 고양이와 비교되어 무가치하다고 아무리 비판받는다 해도 ‘쥐’를 잡아본 적은 없다. 쥐를 죽이는 살인을 범한 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속해 있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라는 국가 안의 ‘인간’을 주인으로 가진 ‘고용된 고양이’인 이상, ‘쥐’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쥐를 죽이는 살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쥐’를 잡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그리고 결코 ‘쥐를 잡지 않은’ ‘무명의 고양이’로서 그 생애를 마친다. 동시대의 일본 ‘군인’들처럼 ‘쥐’에 해당하는 러시아 병사를 죽이고, 단번에 신문지상에 영웅으로 유명하게 되는 방향을 거절하고서 말이다.(73)

 

󰡔�도련님󰡕�의 콜로니얼 이항 대립주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나’는 마츠야마(松山)로 보이는 지방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벌거벗은 몸에 빨간 훈도시를 차고 있는” ‘뱃사람’을 보고 “야만스런 곳이다”라는 감상을 갖는다.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야만’인이 사는 토지를 ‘주인 없는 땅’이라고 하여 식민지적으로 영유하는 것을 사후적으로 긍정하는 ‘만국공법’의 논리인 것이다. 우라가(浦賀)에 도착한 페리의 감상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수도 도쿄의 교외인 ‘오모리’(大森)와 비교해 마을이 작다고 화를 낸다. 올라탄 기차가 “성냥갑 같다”고 또 화를 낸다. 해변가에 서 있던 ‘코흘리개’에게 ‘중학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모른다고 하니까 곧바로 ‘멍청한 시골뜨기’라고 화를 낸다. 중학교에 부임 인사를 갔다 온 후, 마을을 산보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차별의식은 계속해서 발동한다.(74)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도쿄에서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고 ‘나’가 믿고 있는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달성도이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식민주의적인 이항 대립주의를 기본 틀로 하면서 착의(着衣)와 나체, 커다란 가치와 작은 가치, 교육을 받은 자와 교육을 받지 못한 자, 금세기와 전세기, 대연대(大聯隊)의 ‘근사’한 ‘병영’과 그렇지 않은 ‘병영’, 대도시와 소도시, 그리고 도회와 ‘시골’이라는 이항 대립이 ‘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일본의 ‘문명개화’=자기 식민지화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도회인 도쿄에서 온 이주자=식민자이므로 자신의 부임지를(74) ‘시골’이라며 멸시할 특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75)

‘5엔의 팁’으로 숙소의 사람을 놀라게 해주겠다는 벼락부자의 심정은, 절제된 생활에서 해방되어 “월급 40엔”이라는 이주지의 새로운 생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비일상적인 여행 기분 가운데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래 뵈도 근본은 하타모토(旗本)다”라고 ‘촌놈’을 경멸한다. ‘에도 토박이’를 자랑으로 여기는 ‘나’의 벼락부자 심정이 이 정도인 것이다. ‘야만’스러운 ‘촌구석’이라고 멸시하는 이주지의 생활 속에서, ‘나’는 예전의 생활 방식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풍요로운 생활 방식을 향유할 수 있다는 식민지 거주자 특유의 모습이다. ‘시골’은 도쿄라는 도시의 지적 엘(75)리트에게 식민지적 취직의 장소인 것이다.물론 종주국으로 돌아가면 그러한 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도쿄’로 돌아간 ‘나’는 ‘월급’이 ‘25엔’인 ‘시내 전차 기수(技手)’라는 직업밖에 얻지 못한다.(76)

 

조선의 식민지화와 󰡔�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

󰡔�문󰡕�은 ‘한국 합병’이라는 극히 기만적인 호칭을 부여받은, 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수행된 동시대 상황을 명확하게 새겨넣은 소설이다.(7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스케의 처 오요네가 남편과 그의 동생이라는 두 명의 남성에게 하나의 질문을 반복적으로 한다는 설정이다.(77)

처음부터 󰡔�문󰡕�의 주인공인 소스케에게는, 청일전쟁 이후 한국을 독립국으로 한다는 국제 조약을 맺었으면서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각료를 위협해 한국을 식민지적 속국으로 삼는 외교 조약을 억지로 맺게 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상세한 이력을 오요네에게 설명할 만한 사회적 관심은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 합병’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쓰인 󰡔�문󰡕�이라는 소설에서, 오요네 본인의 의식과는 별도로 소설의 전체 구조속에서 그녀의 물음은 소스케가 자신의 의식에서 배제하고 있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동시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상기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80)

 

계급과 식민지

󰡔�문󰡕�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지정학적 배치에는 계급과 식민주의의 관계가 명확하게 각인되어 있다.(81)

결과적으로 소스케는 장남으로서 자신이 상속받았어야 할 부친의 유산을 아버지의 동생인 숙부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스케의 유산 상속이 실패하는 전 과정이, 러일전쟁의 시작부터 ‘대일본제국’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 지배가 급속하게 강화되어 가는 기간, 즉 안중근이 예심의 진술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로 들었던 거의 모든 항목이 실천된 시기와 겹쳤다는 사실이다.(83)

 

‘한국 합병’으로의 과정

1903년 11월과 190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러일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미리 상정하면서 한국 정부는 전시에서의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한국에 대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조인을 강요했다. 사실상 이것은 한국 정부가 ‘대일본제국’ 정부가 하라는 대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보호국화를 강요하는 조약이다.

나아가 3월에는 일본군이 ‘한국 주둔군’으로서 한국의 영토를 군사적으(83)로 지배하고, 7월에는 군율에 의해 사형까지도 시킬 수 있다는 형태로 반일행위를 단속하기 시작했으며, 결국에는 그 파급력이 한국 전지역으로 퍼져 나아갔다.

이러한 무력 지배하에서 1904년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고문정치 체제가 포고되었고, 1905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한국에 들어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을사보호조약’을 밀어붙였다. 이 조약의 국제법상의 유효성은 지금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84)

소스케와 스기하라라는 ‘실패자’와 ‘성공자’의 이항 대립은 그대로 유산상속에 ‘실패’한 소스케와 ‘성공’한 사카이의 계급적 낙차와 겹쳐질 수 있다. 그것과 동시에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새롭게 창설된 통감부의 초대 총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70명에 가까운 통감부 직원들은 과연 ‘성공자’인가 ‘실패자’인가 하는 문제도 부상한다. 왜냐하면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취임에 즈음하여 일본 내에서는 그것이 무단파(武斷派)인 가츠라 타로(桂太郞) 내각에 의한 좌천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스케와 마찬가지로 사카이가 경영하는 “셋집을 빌려 쓰고 있는 혼다(本多)”라는 ‘은거 부부’가 “조선의 통감부에서 훌륭한 관리로 있는 외아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인 도쿄에서 근무한다고는 해도 월급이 보잘 것 없어 신발에 구멍이 나도 새 신발을 살 수 없는 소스케, 그 은거 부부와 같은 생활 상태를, 부모에게 생활비를 보낼 수 있는 식민지 ‘조선의 통감부’ 관리와 비교할 경우, 도대체 어느 쪽이 ‘실패자’이고 어느 쪽이 ‘성공자’인지 갑자기 결정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실패자’도 ‘성공자’도 ‘만주’나 ‘조선’이라는 식민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상황이다.

󰡔�문󰡕�이라는 소설의 시간 구조는 러일전쟁과 그 이후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과정, 그리고 그에 대한 이토 히로부미라는 한 정치가의 깊숙한 관여를 상기시키는 장치로 되어 있다.(87)

더욱이 󰡔�문󰡕�이라는 소설의, 소설로서의 스토리의 요체에, 소스케와 오요네라는 남편과 아내의 기억의 정치학이 있다. 오요네는 히로시마, 후쿠오카, 그리고 도쿄에서 유산, 출산 직후의 사망, 그리고 사산이라는 형태로 잃은 세 아이의 죽음을 매일같이 기억으로부터 되살리고 있는 데 비해, 소스케는 과거의 기억을 계속해서 망각해 왔다는 대비 속에 놓여 있다. 소스케에게 과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오요네가 물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이유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의식의 양상을 규정한다는 것이 이 시간 구조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이다.(88)

 

식민주의와 ‘낭만주의’

 

취직 장소로서의 식민지

일본의 능력주의(meritocracy)가 이제 일본 국내에 국한해서는 유지할 수 없으며 완전히 식민지 지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시대라고 파악하고 있는 작품이 󰡔�히간 지날 때까지󰡕�(彼岸過迄)이다. 주인공인 다가와 케이타로(田川敬太郞)는 󰡔�도련님󰡕�의 ‘나’와 비교했을 때 한층 더 식민주의적 일상 감각에 젖어 있는 인물이다. 소스케의 동생인 고로쿠가 대학에 진학할 학비를 조달할 전망이 보이지 않아 “만약 안 된다면 학교를 집어치우고 당장이라도 만주나 조선에라도 가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해도 국내에서는 좀처럼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케이타로에게 ‘만주’나 ‘조선’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일로 의식되고 있다.(88)

이제 막 획득한 식민지에서조차 생활의 장이 없다면 다시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낭만 취미(romantic)의 청년’으로 규정되어 있는 다가와 케이타로는 분명 남방에 대한 식민주의의 꿈을 품고 있었다.(90)

케이타로의 세대는 제국주의 열강 상호간의 격렬한 경쟁 속에서 늘 일촉즉발의 위기를 내포하는, 곧 성공의 배후에 커다란 위험을 안지 않을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막다른 곳에 몰려 있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히간 지날 때까지󰡕�의 화자가 독자에게 ‘낭만’주의가 식민지적 침략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낭만’주의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부터 있어야 할 자기로 상승(90)해 가려는 욕망의 표현 형태라고 한다면, 케이타로의 ‘낭만 취미’적 꿈은 남양에서 식민지적 플랜테이션의 경영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 지역에서 이미 성공을 거두었던 서구 열강 출신의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을 당치도 않게 모방·흉내 내는 꿈이었다.(91)

 

‘탐정’과 식민지 지배

 

‘고등 유민’과 전쟁 비용 조달

‘소회전’은 밀접하고도 불가분하게 큰 ‘회전’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94)

 

 

패전 후의 식민지적 무의식

 

상징 천황제와 식민지적 무의식

 

밖으로부터의 탈제국주의화

 

식민지화와 세 가지의 전후

 

상징 천황제와 오키나와의 요새화

 

비대칭적인 거울상 관계

 

반도 분단에 대한 일본의 책임

 

차별화된 거울의 상실

 

‘피해의 신화’의 기원

 

 

전후의 ‘문명’과 ‘야만’

 

단절된 과거

 

우월한 지위로부터 열등한 지위로

 

‘야만’적 과거로서의 ‘독재주의’

 

‘문명’, ‘진보’로서의 민주주의

 

‘야만’적 ‘독재주의’로서의 ‘공산주의’

 

적색 추방과 ‘단독 강화’

 

 

식민주의와 전쟁 책임

 

‘단독 강화’와 배상 문제

 

‘두 개의 중국’과 전쟁 책임의 모호화

 

‘반공주의’와 전쟁 책임의 무화

 

고도 경제 성장과 신식민주의

 

역사 교육과 아시아 멸시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과 ‘한일조약’

 

경제 원조라는 이름의 신식민주의

 

라이셔워의 근대화론과 아시아 배제

 

자신의 문제로서의 ‘탈식민지화’

자신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회전’으로서의 사건을 어떻게 세계적 상황으로서의 ‘대회전’과 겹쳐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소세키의 물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미 행해져 온 ‘소회전’과 ‘대회전’을 겹치는 담론의 시스템을 일단 파기하고 그 담론들을 꿰뚫고 있던 틀을 다시 짜고 교란시켜 지금 여기에서 제시할 수 있는 형태로 재편성하며 자기 나름의 ‘소회전’과 ‘대회전’을 겹치는 수밖에 없다. 아마 담론과 관계된 각자가 그러한 실천을 계속해 나아가는 것이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을 살아가는 데 있어 소박한 윤리기준이 될 것이다.(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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