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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추억
2025년 07월 28일 15시 04분  조회:233  추천:0  작성자: 흑토의 사나이
누구나 이 세상에 태여나면 부모님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게 되는데 보통 그 이름에는 부모들이 불면 날아갈가, 쥐면 부서질가 금쪽같은 자기 자식에 대한 희망이 담겨지게 된다. 그렇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면서 혹자는 타인들로부터 이름외로 별명이 붙여지는 수도 있는데 그 별명들은 대체로 그 사람의 성격특징이나 외모특징, 언행에 의하여 지어지는바 자칫하면 꼬리표처럼 한생을 붙어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별명으로 이름을 대신하여 불러도 화를 내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옛적에 사람들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외에 자체로 호와 자를 더 지었는바 자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부르는 호칭으로  하고 호는 무람없는 사이에 부르는 호칭으로 하였다. 수호전에 나오는 급시우나 표자두, 흑선풍같은 별호면 듣기가 거북스럽지 않겠지만 떳떳치 못한 별명은 비록 그 어떤 악의도 없이 지어졌지만 이름보다는 귀에 거슬리는데 이미 붙여진터라 한생을 따라다녀도 어쩔수가 없었다. 이름보다는 별명이 사람들에게는 더 익숙하였으니깐.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은 마을가운데의 길을 경계선으로 동쪽에는 한족들이, 서쪽에는 120여 가구의 조선족들이 옹기종기 화목하게 모여사는 마을이다. 지난 집체화시기 많은 사람들에게 별명이 붙여지면서 이름보다는 별명이 더 익숙하게 불려졌었는데 많은 별명중에서 오늘까지도 기억에 또렷한 몇사람만 적어보려 한다.
김로인은 젊어서부터 소사양원으로 일했는데 소를 알뜰히 거둘뿐만아니라 소에 대하여 아는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소의 이발로 소의 나이를 보아낸다든지, 소의 가슴이나 엉덩이로부터 살진 상태를 알아낸다든지, 소의 걸음걸이로 소가 밭일을 할수 있는지 없는지 등을 환히 꿰뚫고있었다. 그는 소가 혀바닥에 쓸이 돋아나 여물을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새끼를 당금 낳을 암소들의 뿔에다가 “병중휴식”이라는 패쪽을 만들어 걸어놓군 하였는데 누구든 그런 소들을 끌고가서 일한다면 크게 혼내주군 하였을뿐만아니라 아예 다치게도 못하였다. 암소가 새끼를 낳는 날이면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켜서 있었으며 생산대장과 사정하여 싸래기라도 얻어내여 죽을 쒀먹였다. “사람을 믿고 사는 짐승이니 잘 거둬주면 그만큼 보상해줄거네” 그가 늘 외우는 말이였다. 김로인이 그렇듯 정성스럽게 소를 거두다보니 생산대의 소가 날따라 늘어났다. 소가                 부릴수 있게 자라면 다루기 쉽게 코뚜레를 꿰야 하는데 생산대남자들중 유독 김로인만이 준확하고도 신속하게 코뚜레를 꿸수 있어 소코뚜레꿰는 일은 김로인이 전담하다보니 어느 소나 김로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소가 없었다. 사람들은 어느날부터인가 그를 “코뚜레”라고 부르게 되여 차츰 코뚜레령감이라면 동네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류씨는 타곳에서 우리 마을로 이사왔는데 사람들과 차츰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은 류씨가 먹물이 든 사람임을 알게 되였다. 비가 와서 생산대 일을 못하는 날이나 저녁에 혹 일이 있어 류씨네 집을 지나치면서 보면 류씨가 늘 책을 펼쳐놓고 독서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비록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우리 글로 된 신문잡지를 모두 청구해보았으며 평소 집식구들 모두가 책이나 신문을 읽는 전경을 볼수가 있었다. 거기다 류씨는 아침마다 라지오로 방송을 듣기에 국내외시사에 대하여 밝았다. 생산대일을 할 때 휴식시간이면 사람들은 늘 그가 앉아 쉬는데로 모여와서는 그에게서  옛말이나 뉴스를 흥미진진하게 얻어듣군 하였기에 휴식시간이 너무도 짧게만 느껴졌다. 그런 박식한 류씨를 두고 누군가가 “류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어 사람들은 그의 이름보다는 류박사라 부르기를 더 편해했다.
70년대말 집체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집체에서 소형공장을 운영하는걸 제창하게 되여 우리 생산대에서도 고무가공공장을 꾸리게 되였는데 기술자로 최씨가 타곳에서 이사오게 되였다. 고무가공공장이란 고무를 가공하여 맥주병뚜껑안의 고무받치개를 만드는것이였다. 일을 시작한날부터 사람들은 기술자로 일하는 최씨를 “고무땔”혹은 “죠피땔(胶皮垫)“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최씨 또한 푸접좋게 웃음띤 얼굴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였기에 모두가 편해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최씨를 “죠피땔”로만 알고 기억하고있지 이름은 아예 모르고있다.
마을의 앞쪽에는 조씨네가 살았는데 그들은 한족생산대에 귀속되였으나 같은 민족이다보니 조선족마을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비록 조선족마을에서 생활하였지만 마을사람들과 크게 래왕하지는 않았다. 후에 들을라니 살길을 찾아 조선에서 중국으로 올 때 조씨는 박치기로 일본경찰 셋을 쓰러뜨렸는데 박치기를 굉장히 잘한다는것이였다. 조씨는 살림살이가 얼마나 굳은지 바느질도 자체로 하고 신이나 옷이 해여지면 손바느질로 한뜸한뜸 기워서 입고 신었으며 식구들도 기워서 입히고 신겼다. 창고열쇠는 항상  옆구리에 차고 끼니마다 먹는 쌀은 떠서 내놓았기에 밥이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을 때는 절대로 없었다. 그가 혹 생산대의 림장에 며칠씩 묵으면서 일하러 갈 때면 그사이 집식구들이 먹을 쌀을 정확히 떠서 내놓은후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창고의 쌀마대들을 모두 아구리가 밑으로 가게 꺼꾸로 뒤엎어 놓고야 시름을 놓고 떠나갔다. 자기가 간후 안해의 힘으로는 쌀마대를 다시 뒤엎을수 없으니 쌀이 줄어들 걱정은 없었던것이다.
팬티도 목천으로 해서 입으면 빨리 해진다고 풍천으로 그것도 자기 손으로 손수 만들어 입었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갈 때 입고 갔다가 나무를 하느라 땀이 나자 두꺼운 풍천이라 살이 쓰리워 더는 아파서 한걸음도 걸을수 없으니 아예 팬티를 벗어 쪽지게에다 건다음 맨살에 바지를 입고 일하다 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사람들로부터 “조좁쌀”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였는데 사람들은 친구들이 모여 놀 때 좀이라도 잘게 놀면 “조좁쌀”이 되려구 그러냐?”, “조좁쌀”이보다도 더하네” 라는 말로 뚱겨주거나 핀잔을 주군 하였다. “조좁쌀”이라는 별명은 마을의 남녀로소에게 익숙한건 물론 린근에까지 퍼져 이웃마을에서도 조씨의 이름보다는 “조좁쌀”이라면 더 잘알았다.
리로인은 첫사람으로 마을개척에 나선 분으로서 마을 앞벌에 첫보습을 박고 삶의 터전을 가꾸어왔기에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안고있었다. 그런 그의 소개로 그와는 8촌간이 되는 사람을 마을에 이사호로 받게 되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8촌까지 한구들에서 살았다고 했듯이 한 마을에서 살면 오죽좋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이사온날부터 리로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리로인의 8촌을 “팔추이”라고 부르게 되였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것이 굳어져 이름은 둬두고 마을사람들 남녀로소 모두가 “팔추이”라고 부르다보니 말그대로 동네 8촌이 되였다.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팔추이”라면 코흘리개애들까지도 데꺽 알았으니 동네8촌이라해도 너무 어이없는 일은 아니였다.
70년대초 왕청 하마탕에서 마을의 의사로 이사호를 받았는데 의사인 남편보다 안해가 키가 더 컸으며 마을녀성중에서도 키가 제일 컸기에 마을 사람들 모두를 눈이 휘둥그래지게 하였다. 하여 이사짐을 푼 이튿날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군대말”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였다. “군대말”은 그 별명에 맞게 일을 헌걸차게 잘도 하였는데 웬만한 남자들은 저리 가라할 정도였으니 실로 산이 커야 그림자도 크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다. 성격 또한 시원스럽고 왈패스러워 모두와 잘 어울렸으니 “군대말”이라고 불러도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코뚜레, 류박사, 죠피땔, 조좁쌀, 팔추이, 군대말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 모습, 친인척관계에 의하여 부모님들이 지어준 이름외로 덧붙인 악의없는 별명인데 덧붙여진 그날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름대신 익숙하게 불리워지다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사라졌으며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아득한 옛말로 되고있다.
고향마을도 이젠 모두가 떠나가고 비여진지가 오래다보니 한족마을과 조선족마을을 갈라놓던 경계선 길도 그와 함께 역할을 잃은지 오래다. 지금은 많은 한족들이 조선족마을의 빈집들을 사서 번듯하게 벽돌기와집을 짓고 살아가고있다.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 모두해야 50명도 않되니 전처럼 별명을 붙일 사람도 붙여줄 서람도 없다. 전같은 풍경을 재현하기는 어렵거나 아예 될수도 없는 일일수 있겠지만 나는 내 마음속에 나름대로 그 풍경을 곱게 고이 그리고싶다. 나만의 소망과 함께.
202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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