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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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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탄 올드 데이스
2020년 04월 16일 12시 43분  조회:726  추천:11  작성자: 김혁
 
평론

상해탄 올드 데이스

-김혁의 장편소설 《무성시대》
 
리광일

 
저명한 다산작가이고 조선족의 중견소설가인 김혁의 장편소설 《무성시대》가 2018년 1기부터 2020년 2기까지 《장백산》잡지에 14차에 거쳐 련재를 끝냈다. 이로써 김혁의 여섯번째 장편소설이 완성된것이다.
 
김혁은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청년생활》, 1985년 8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곧이어 《노아의 방주》(1985), 《맥주 두병》(1985)을 련속 발표하였다. 1994년 중편소설 《미망의 도시》, 《적(笛子)》, 《바람 속에 지다》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중편소설창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김혁의 장편소설창작은 2003년부터 시작되였다. 이해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창작하고 《장백산》잡지에 1년간 련재하였다. 이 작품은 어린이들의 시선으로 문화대혁명의 란장판을 그렸다. 이어서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녀인상을 그린 두번째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2003)를 창작하고 《연변문학》잡지에 1년반 동안 련재하였다. 이외에 조선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장편소설 《시인》(2010), 위만주국 황후인 완용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장편소설 《완용 황후》(2013), 조선족 최초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2015)을 창작하였다.
 
작가의 말에서 지적하다싶이 김염에 대한 논픽션은 많이 나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픽션은 매우 적은 형편이다. 특히 이 작품은 조선족문단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김염 관련 픽션물이고 첫 장편소설이다. 본고는 세가지 방면에서 김혁의 장편소설 《무성시대》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연기자의 일대기적인 플롯
 
이 소설의 시작은 “캇!”으로 시작된다. 1928년 상해에 있는 명성영업공사의 촬영장에서 영화 《목란종군》의 촬영이 한창인데 이 영화의 엑스트라로 김덕린(김염)이 촬영에 참가한다. 촬영에서도 그는 주인공 풀샷을 주는데 끼여들었기에 감독은 “캇!” 하는 쇠소리를 냈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액션!”으로 끝이 난다. 1950년 상해영화제작소에서 처음으로 제작하는 영화 《대지중광》의 주역으로 된것이다. 감독의 이 한마디에 무성영화의 대가가 다시 수은등아래에 서게 된것이다.
이 작품은 “캇!”에서 시작되여 “액션!”으로 끝난다. 즉 애송이 엑스트라 김염이 영화촬영에서 연기를 잘못해 감독이 “캇!”(중지)하는것으로 시작하여 이미 영화황제가 되여 주역으로 영화촬영에 참가하여 감독이 “액션!”(시작)으로 끝나는 작품의 구성이 주목된다.
이 작품은 영화황제 김염의 연기자로서의 일대기적인 플롯을 갖고있는것이 특징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연기자 김염의 생애는 세개 단계로 살펴볼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1910년 태여나서부터 1927년 17세까지인데 연기자가 되기전의 준비단계이다. 1910년 서울에서 의사집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가 1912년 일제의 수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2살되던 김염도 가족을 따라 흑룡강성 치치할에 온다.
영화를 보기 위해 열심히 빈 담배갑을 모은다. 담배갑 10개를 모으면 한부의 영화를 볼수 있기때문이다. 이렇게 부지런히 모아서는 영화를 보군 하였다.
저명한 경극배우 매란방이 출연한 영화 《천녀산화》를 세번이나 보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에게 불행이 따라온다. 아버지가 일제의 간첩에게 독살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였다. 어머니 홀로 일곱 아들딸을 먹여살리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리하여 가정은 뿔뿔이 헤여지고 자식들은 친척집에 보내지게 되였다. 김염은 천진에서 사는 둘째 고모의 집에 보내졌다.
고모집에 와서도 영화에 대한 김염의 애착은 식을줄을 몰랐다. 완령옥의 사진이 박혀있는 영화월간지 《영화월보》에 빠졌고 영화에 매료되였다. 그리하여 고모부와 언쟁이 일러났는데 고모부 김규식은 시시껄렁한 영화에 빠지지 말고 소래 광산 김씨의 자손으로서 독립운동가의 자식답게 옳바른 정도를 걸으라고 을러멘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김염의 뜻을 꺾을수 없었다. 
천진에서 김염은 명망높은 명문중학인 남개중학교에 입학하였고 학교운동회에서 달리기선수로 일등을 한다. 하지만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고모부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염은 영화배우의 꿈을 버릴수 없었다.
민신영화제작사의 후요 감독과 절친한 사이인 《대공보》 천진주재소 허기자의 소개장을 받고 김염은 1927년 이른 봄, 친구들이 모아준 돈 7원을 갖고 무작정 동방의 할리우드이고 당시 중국영화산업의 메카인 상해로 떠난다.
 
두번째 단계는 1927년부터 1932년까지인데 일반 연기자로부터 영화황제가 되기까지이다. 상해에 도착한 김염은 민신영화제작사를 찾아가 후요 감독을 만나고 사흘후 영화촬영장에 가서 엑스트라 행인 정(路人丁)의 역을 맡는다. 기록계원의 자리가 차례지지만 감독에게 코밑치성 안해 한달도 못되여 기록계원에서 해고된다. 극장지기로 취직하여 고독과 고뇌를 거듭하지만 무료로 영화를 보면서 많은 연습을 거듭한다. 이 과정에 배우의 기량을 닦은것이다.
극장에서 민신영화제작사 복만창감독을 만나고 그의 소개로 남국영화연극제작사 연극쟁이 전한을 만난다. 이 만남은 우연이지만 김염의 연기생활의 한페지를 만들어준 만남이기도 하다. 전한과 김염은 함께 연극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전한의 제작사에서는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번안해 공연하는데 한번은 극중의 요한 역을 맡은 배우가 나타나지 않아 김덕린 대타로 무대에 등장한다.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고 단번에 김염은 인기를 한몸에 안는다. 그동안 김염은 전한에게서 연극과 무대연기를 배운다. 후에 《열혈남아》라는 영화에 단역 대장쟁이로 출연하지만 영화가 실패한다.
상해에 온지 1년이 되는 1928년 설날, 김염은 상해 외탄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리라 작심하고 자기의 예명을 김염이라 한다.
련화영화제작사에서 그의 연기인생에 큰 역할을 한 손유감독을 만난다. 두사람은 모두 남개중학교 출신이고 동갑이다. 손유 감독은 영화 《야초한화》의 남녀주역으로 김염과 완령옥을 기용한다. 김염은 어릴 때 영화잡지에서 보았던 완령옥을 만난다. 영화는 대성공을 이루고 히트를 친다. 이어서 《련애와 의무》란 영화에 김염과 완령옥이 주연으로 출연하는데 역시 대성공을 이룬다. 김염은 이어서 복만창 감독의 《련애와 의무》, 《일전매》, 《도화읍혈기》 등 세부의 영화에 출연하고 사동산 감독의 《은한쌍성》에 출연한다. 이제 김염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길거리를 마음대로 다닐수 없게 되였다. 그는 스타가 되였다.
1932년, 영화전문지 《전성일보》가  “중국10대 영화명배우” 투표행사를 진행했든데 김염 1등을 했고 “상해의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되였다. 또한 《전성》영화잡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명배우”, “가장 건장한 남자명배우”, “내가 가장 벗으로 사귀고 싶은 남자배우”  등 테마로 투표행사를 진행했는데 단연 김염 1등을 하였다. 김염의 등극은 상해 영화계의 르네상스를 열어갔다.
 
세번째 단계는 1932년부터 1950년까지인데 파란만장한 영화황제의 인생을 보여주었다. 전한이 김염의 녀성팬들이 편지를 보고 영화 《세 모던 녀성》을 만들고 손유 감독이 영화 《들장미》를 만든다. 이 영화의 녀주연은 왕인미가 맡는다. 김염과 왕인미가 만나고 1934년 두사람은 결혼한다. 1934년 손유 감독의 영화 《대로》에 김염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섭이가 영화의 주제곡 《대로가》를 작곡하며 김염이 직접 노래를 부른다.
김염은 좌익영화인으로 맹활약하며 좌익작가련맹이 성립된 1930년대는 “김염의 년대”라 일컬어진다. 그는 오영강 감독의 항일테마의 영화 《장지릉운》에 주연으로 출연하지만 영화가 국민당중앙 영화검열기관의 검열에 걸려 곤욕을 치른다. 할리우드 영화출연 제의가 들어오지만 영화가 락후한 중국과 초라한 중국인을 보여준다고 제의를 거절한다. 
상해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1939년 김염은 중경에 가서 중앙영화촬영소의 손유 감독의 영화 《장공만리》의 비행사역을 맡는다. 왕인미도 영화에 참가한다. 3년간 촬영하고 개봉하자 장병들속에서 인기를 얻는다.
상해 일본 주둔군 병영에서 일본군이 영화촬영제의를 하자 거절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자 지인의 도움으로 김염부부는 향항으로 탈출한다. 다시 이들은 향항을 떠나 계림으로 피난하고 김염은 또 중경, 곤명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들은 곤명에서 리혼한다. 
일제가 투항한후 김염은 영화배우 류경의 소개로 대광명영화관에서 진이를 만난다. 김염과 진이는 사랑에 빠지고 드디여 향항에서 결혼한다. 1950년 상해영화제작소에서 촬영한 서도 감독의 영화 《대지중광》의 주역을 맡는다.
 
2. 력사적진실에 기초한 소설화
 
이 작품의 주인공 김염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작품은 력사의 현장을 비켜갈수 없다. 하지만 력사에 너무 집착하면 논픽션이 되기 쉽다. 이 면에서 작품은 력사와 소설의 관계를 잘 처리하였다. 이 작품에는 많은 력사적진실이 나타나고 특히 실존했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는 작품의 전반적인 플롯에서 중요한 공능을 하였다. 작품에 나오는 실존인물들은 고립적으로 등장하는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작품의 주선에 유기적으로 결합되며 매우 인성적으로 처리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들은 주인공과 얼기설기의 관계를 갖고있으며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에도 직결되였다. 
김염이 상해에 도착해 처음 만난 영화감독은 후요이다. 그는 씨나리오 작가이고 영화감독이다. 뿐만아니라 중국 초기영화리론의 개척자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는 《서상기》, 《위군자》 등이 있다. 이외 항일제재의 영화를 많이 제작했고 후에 싱카폴에 갔는데 일제가 강점한후 항일죄목으로 1942년 살해당하였다. 후요는 김염이 상해에서 처음 만난 영화인이고 그를 영화촬영장에 데리고 간 사람일뿐 큰 의미는 없는 인물이다.
두번째로 만난 사람은 밥통감독 복창만이다.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밥통》, 《세 모던 녀성》, 《련애와 의무》, 《목란종군》 등 영화를 제작하였다. 해방후 향항과 대만에서 영화감독으로 있었고 1974년 향항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복창만은 김염이 전한을 만나게 해준 사람이라는 점에서 작품에서 인물형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였다.
세번째로 만난 사람은 전한이다. 전한은 김염이 영화배우로 성장하는데 큰 작용을 한 인물이고 김염이 좌익영화인으로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전한은 문예활동가, 중국현대연극 3대 정초자의 한사람, 극작가, 희곡작가, 씨나리오작가, 소설가, 시인, 문예비평가 등 많은 칭호를 갖고있다. 후에 중국 국가가 된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이다. 1968년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를 받아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하연은 “전한은 현대의 관한경이고 중국 연극혼”이라고 평가했고, 소숙양은 “전한은 5.4운동에서 산생한 문화거인”이라 평가했고, 조우는 “전한의 일생은 한부의 중국연극발전사”라고 평가했다.
김염이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스타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손유 감독이다. 손유는 영화감독이고 씨나리오작가이다. 청화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류학을 가서 영화제작, 촬영, 편집, 화장 등을 배웠다. 해방전에 《들장미》, 《대로》, 《장공만리》 등 많은 영화를 제작했고 해방후 영화 《무훈전》을 제작했다. “문화대혁명”기간 영화 《무훈전》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1990년 상해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염부부가 상해를 탈출하는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오영강 감독이다. 그는 영화감독이고 씨나리오작가이다. 해방전에 《장지릉운》 등 영화를 제작하였고 해방후에는 《파산의 밤비》 등 영화를 제작하였다. 제1차 중국영화 금계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82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외 작품에서 편폭을 들여 소개한 섭이, 완령옥, 왕인미, 진이 등도 있지만 특히 주목되는 인물들은 서왈보, 권기옥, 안창남, 최용덕 등인데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기에 흥미롭다. 그리고 김염이 남경훈련소에 가입하는데 영향을 준 인물들이기도 하다.
서왈보는 독립운동가이고 한국 최초의 비행사이다. 시베리아에서 안창호, 리갑 등과 함께 군관학교를 설립해 독립투사를 양성하였다. 중국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였다. 풍옥상군벌의 항공대장, 남원항공학교장 등을 력임하였고 1926년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권기옥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활동한 한국 최초의 녀성 비행사이며 남경에서 항공서소속으로 10여년간 활동하면서 항일을 견지하였다. 평양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중국 항공학교 1기생으로 공부하였다. 안창남은 한국 최초의 비행사이다. 일본에서 비행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비행기술을 가르쳤다. 1930년 불의의 비행사고로 사망하였다. 최용덕은 비행사이다. 의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중국공군군관학교를졸업한후 학교 교관, 중국수상비행대장, 중국공군지휘부 참모장 겸 공군기지사령관, 중국공군기지학교 교장 등을 력임하였다.
작품에서 김염의 형상은 매우 립체적이고 풍만하게 부각되였다. 상해탄의 영화계 대 스타이지만 그의 몸에서 오만함, 거만함, 건방짐을 볼수 없다. 오히려 인정이 넘쳐나는 인물형상이다. 배우가 되려고 홀로 상해에 와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점에서 그의 강인한 성격을 볼수 있다. 그리고 성공한 후에는 동생들의 형편을 헤아려 상해에 데려다 공부를 시킨는 장면에서 혈육의 정을 아끼는 그의 둔후한 인품을 볼수 있다. 여가 시간이 나면 옥윤누나의 가게에 가서는 자건거를 타고 배달하는 장면에서는 시골사내의 솔직하면서 어딘가 귀염성스런 모습도 볼수 있다. 완령옥이 자살했을 때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정의감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고모부가 영화잡지를 불살르라고 윽박지를 때 자신이 즐기는 잡지를 끝까지 태우지 않는 무서운 고집스러운 성격도 있다.
그의 안해 진이의 증언에서도 나오고 작품에서도 나오지만 김염은 영화배우의 연기만 잘 하는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다재다능하다. 바이올린을 켤줄 알고, 의자를 만드는 등 목수일도 하고, 조각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뜨개질도 하고, 자동차 운전도 하고, 승마, 수영, 테니스, 축구, 롱구 등도 한다. 게다가 김치도 담글줄 안다. 영화황제가 아니라 잡가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인간 김염의 성격을 제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상해의 눙탕에서의 세방집 생활이다. 단돈 7원을 지니고 상해에 온 그에게 생활의 여유는 없었다. 하여 싸구려 세방집에서 살게 되는데 하루에 상해의 골목거리 음식인 썽잰보를 하나밖에 먹지 못한다. 썽잰보가게주인의 온갖 멸시와 야유를 받아가면서 푸대접을 받지만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그는 모든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한다. 심지어는 그의 예술생애의 첫 스승인 전한이 선물한 코트로 썽잰보 열개를 바꾸어 먹기도 한다. 후에 완령옥과 함께 주연한 손유 감독의 영화 《야초한화》가 히트를 치면서 하루새에 명배우가 되자 김염은 다시 썽잰보가게를 찾아간다. 가게주인이 알아보고 어쩔바를 몰라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썽잰보 100개를 사서 가게에 온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한턱 낸다고 한다. 김염의 너그러움을 알아볼수 있는 장면이다. 일반 사람들 같으면 목덜미에 힘을 주면서 호통을 치고 거들먹 거렸겠지만 김염의 몸에서 이런것을 볼수 없었다. 무명시절을 끝내고 스타로 되는 순간에도 그는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고 단지 어려웠던 그 시절을 청산하는 하나의 행사로 처리하였다. 뿐만아니라 가게주인의 딸 쇼죠가 만들어주는 헝겊신도 반갑게 받는다. 이미 구두를 신고있는 그가 헝겊신을 신을 기회가 없으면서도 말이다. 인간 김염을 따스하게 마주하는 순간이 아닐수 없다.
 
3. 예술미의 추구와 강렬한 항일의식
 
작품의 주인공 김염은 1927년에 상해에 온다. 그가 1932년 영화황제가 되기까지 5년밖에 안된다. 그럼 무엇이 그를 황제로 만들었을가. 여기에서 예술, 특히 영화예술에 대한 김염의 끈질긴 추구와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다. 김염이 후요 감독을 찾아갔을 때 그에게 맡겨진 역은 하잘것 없는 행인 정(路人丁)이다. 영화촬영이 생소했기에 실수로 감독의 욕을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집착은 이런 욕을 귀등으로 흘려버릴수 있었다. 
“방금전 욕을 삼태기로 얻어먹은 사람같지 않은 모습이였다. 다부산즈자락을 들어 땀으로 벌창해진 얼굴을 씻으면서 덕린은 또 다른 촬영장면들을 지켜보고있었다. 주연배우들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를 이글거리는 눈속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고있었다.”
“나라면 저 장면을 저렇게 연기할수 있었을가? 저 웃음은 지나치게 과장된것이였어. 지금 저 보폭은 너무 작아서 주인공의 마음을 보여줄수가 없네. 나라면 허리에 손을 얹지 않고 앞섶에 모아쥐였을 거야. 손부채질을 하기보담은 주먹으로 땀을 훔치는 장면이 더 실감날 텐데.”
이와 같이 김염은 주연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관찰과 연구를 진행했고 또한 자신이 구상한 장면들을 실제로 연기해보기도 하였다.
실제상황이 여의치 않아 먹고 살려고 극장지기로 일하게 된 주인공은 곤죽이 되도록 일을 하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곳이고 무료로 영화를 볼수 있다는 자체가 매우 중요했다. 말하자면 돈을 내지 않고 배우학원을 다니게 된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는 배우들의 연기를 연구하고 모방하고 자신의 기량을 쌓아갔다. 동시에 꼭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고 또 다짐하였다. 이런 마음은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있다.
“-나 기어이 이 길을 걸으리라.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이 길을 걸으리라. 고모부 앞에서 다진 서약을 위해서라도 이 길을 걸으리라. 배우로 꼭 성공하리라. 스크린에 큼지막이 떠올라 어머니와 만나리라, 고모부와 만나리라, 형님과 만나리라, 동생들과 만나리라. 다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처럼 가문의 번영과 행복을 이루리라. 큰 배우가 되여 관객들의 갈채를 받으리라. 그들의 눈과 가슴에 꿈과 감동을 전하는 배우가 되리라.” 
유명한 극작가이고 시인이며 문예비평가인 전한과의 만남은 김염의 예술의 길에서 중요한 공능을 하게 된다. 전한은 그의 문장에서 술, 음악, 영화는 인류의 3대 걸작이고 그중에서 영화는 가장 매력적이며 한낮에도 사람들을 꿈길로 유혹한다고 하였다. 김염은 이것을 외워두고있었고 이를 전한은 대견하게 생각한다.
특히 전한으로부터 연극의 모든것을 전수받을수 있은것이 다행이였다. 연기자로서의 기본적인 철학에서 아주 사소한것까지 배울수 있었다. 대사를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예술은 진보에서 이루어진다, 연기는 씨나리오에 대한 복제가 아니라 진보적인 행동의 지속과 연장이라는 가르침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법과 예술에 대한 신념을 알게 하였으며 그의 예술생활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게 하였다.
드디여 주인공의 예명이 탄생하게 된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은 김덕린이지만 상해의 외탄에서 김염이란 예명이 만들어진다. 로신의 작품집을 읽고 예명을 생각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외탄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김염이란 예명이 뇌리속에서 불꽃을 발하며 떠올랐다. 이는 작품에서 하나의 고조를 이루는 부분인데 이렇게 적고있다. “-그래, 이제 새로운 배우로 새롭게 태여나는 거야. 난 타오를 거야, 활활 타오를 거야.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쳐도 꺼지지 않을 거야. 스크린의 별로 활활 타오를 거야. 무대우에서, 무대아래에서 이 세상을 비추는 자가 될것이야. 김염, 이제 나를 김염이라 불러다오!” 주인공의 법열이고 새로운 탄생이라고 할수 있다.
김염이 풋풋하고 개성적인 연기특색과 수준을 소유하고있었지만 그것이 영화감독과의 합작이 없으면 성공의 길을 걸을수 없다. 여기서 새로운 영화예술에 대한 견해를 갖고있는 손유 감독과의 합작은 큰 몫을 하였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류학파인 손유는 당시 중국의 영화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새로운 견해를 갖고있었다. 상해의 영화계는 혁신이 필요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그 변화된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 치고박는 무협지따위는 버려야 한다, 어제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바뀌여야 한다는 견해는 주인공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당시 잘 나가는 명배우들의 분칠한 경극가면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충고는 김염의 연기특색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조언이 되였다. 따라서 김염, 손유, 완령옥 세사람의 합작으로 크게 성공한 영화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이제 배우로 크게 성공한 김염은 자신의 일기책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내가 원하면 언제나 들어갈수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과 배불리 먹을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니 그 무엇보다 영화배우 ‘김염’이 되였다는 사실이, 나를 기다리는 씨나리오 대본이 있다는 사실이, 내 몸짓을 기다리는 촬영기와 내가 나오는 스크린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모여드는 관객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행복하게 했다.”
이제 상해의 영화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되였다. 멜로영화위주로 녀성배우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던데로부터 김염을 중심으로 하여 반제, 반봉건이라는 시대적주제를 다룬 좌익영화가 흥기하게 되였고 단순한 오락에서 벗어나 문예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진정한 예술의 력역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자체의 올바른 공능을 하게 되였다.
작품에서 김염이 일본군인의 영화촬영제의에 “기관총으로 나를 쏜다 해도 난 일본영화에 출연하지 않을거요.”라고 하면서 거절하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영화황제가 된후 진보적인 인사들과의 만남은 김염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수 있는 시각을 주었다. 특히 일제의 중국침략후 항일의식은 당시 시대의 추세와 민심과 일맥상통하였으며 이는 또한 김염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원형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리하여 김염을 비롯한 작품의 주요한 진보인사들의 몸에서 강열한 항일의식이 드러났다.
김염의 항일의식은 가족배경에서 그 뿌리를 찾을수 있다.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은 조선최초의 근대식병원인 제중원을 졸업하고 조선의 첫 양의사가 되였고 세브란스병원과 병원이 운영하는 의과대학교의 책임자이다. 하지만 주목되는건 그가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이며 “신민회”의 멤버라는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사상가이고 독립운동가이며 “독립협회”, “신민회”, “흥사단”을 창립하면서 활발하게 독립운동활동을 진행한 사람이다. “신민회”는 안창호의 발기로 1907년에 조직되였으며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단체이다. 주요멤버는 윤치호, 안창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이며 여기에 리동휘, 리갑, 리동녕, 리회영 등이 가세하였다. 김염의 아버지는 이러한 인물이였기에 치치할에서 일본간첩에게 독살당하였다.
뿐만아니라 김염의 고모부 김규식도 독립운동가이며 신채호, 려운형과 친분이 있다. 신채호는 20세기초 력사가, 언론인, 작가,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력사학은 조선 근대력사와 민족주의력사의 출발점으로 된다. 려운형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고 정치가이다. “초당의숙”을 세웠고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가족배경에서 자라난 김염은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갖게 되였다.
이런 의식은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김염과 왕인미가 주연한 영화 《들장미》는 일제의 “9.18사변”을 소재로 반일정서와 애국정서를 불어일으키려 한 영화이며, 김염이 주연한 《대로》도 항일소재의 영화이며, 김염과 왕인미가 주연한 영화 《장지릉운》도 항일제재의 영화이며, 김염이 주연한 영화 《장공만리》도 항일제재의 영화이다.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일본과 중국이 합작한 영화를 만들려 하는데 이 영화는 무성이 아니라 영화이다. 그리고 김염을 주연으로 초청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김염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따라서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고 지어 총알까지 배달되였다. 할수 없이 이들 부부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향항으로 탈출하지만 향항도 일제에게 점령당하여 별수 없이 중경, 계림, 곤명으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예술을 고체예술, 액체예술, 기체예술로 구분하는 설도 있다. 조각상같은것은 고체예술이고 영화같은것은 액체예술이고 음악같은것은 기체예술이라고 한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소설은 고체예술이 될것이다. 김혁의 이 작품은 소설이다. 하지만 주목되는건 이 작품은 “액션!”으로 끝난다. “액션!”이란 시작이란 뜻이다. 소설은 결속되였지만 작품은 끝나지 않은것 같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끝난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편소설 《무성시대》는 액체예술이라고 평가내릴수 있다.
 
문단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인물전기소설이라 할 수 있는 윤동주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시인 윤동주”에 이어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인 “완용황후” 그리고 금번작인 조선족 영화황제 김염의 예술적 일대기를 다룬 “무성시대”에 이르기까지 김혁은 픽션과 논픽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민족의 인걸들을 조명하는 전기작품들을 인물평전에 이어 픽션작품으로도 련이어 내놓았다. 
그의 또  한부의 픽션인물작품을 기대해 본다. 



 
리광일(李光一)약력: 
 
1962년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저서<조선족문학사> <당대조선족소설연구> <해방후 조선족소설문학연구>등 다수, 주편 <중국조선족문학작품대계(해방후 편)>(전2권), 
논문 <김학철의 장편소설 “20세기 신화”> <20세기 후반기 조선족과 한족문학사조 관련연구> <김혁 소설세계의 통시적연구> 외 다수.
길림성 제7차사회과학우수성과상, 제6기조선족문학비평상, 해외한민족청년상 등 수상. 
 
 
“장백산” 2020년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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