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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미디어와 메시지
- 김혁의 중편소설 '병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이번 3대문학지들에 게재된 소설들중에서 필자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작품은 단연 김혁의 중편소설 '병독'이였다. 최근에 읽은 일련의 소설들중에서 이 작품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빼여난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문단에 흔치않은 포스터모더니즘계렬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목이 집중된다.
포스터모더니즘에 대한 여러 해석들중에서 그 현학적인 허울을 벗겨버린다면 대체로 아래와 같은 특점들이 남아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첫째는 엄숙주의, 권위주의, 리상주의에 대한 배척, 둘째는 대중예술과 고금예술 사이의 경계불명, 셋째는 혼성모방(混成模仿), 넷째는 저자와 독자관계의 재정립 등이다. 은 이러한 포스터모더니즘의 특징들을 발판으로 세워진 소설이라는 이름의 구조물이다.
소설은 컴퓨터광인 주인공 가 주위의 몇몇 사람들과 어울리는 과정을 일인칭 초점화자 시점으로 전경화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네티즌이 아니면 친인친척들로서 그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가까운 관계라고 하는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혈통적공간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심리적공간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라 자처하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심리라는 이 고상한(?) 단어는 벌써 가칙를 잃은지 오래다. 이 소설의 곳곳에서 우리는 정상적이고 단정한 (아니면 책벌레나 저능아와 같은?) 전통의 젊은 이들과는 전혀 상반되는 형상들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 는 거의 동시에 세명의 녀성들과 아무런 부담없이 섹스를 즐길뿐만아니라 자기 이모의 장례식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땀을 흘리다가도 녀자친구의 애완견 장례에서는 소리내여 울고있는 특이한 별종이다. s2o라는 아이디를 가진 의 녀자친구는 몸의 가장 은밀한 곳에 까지 나비문신을 새기고 있는 기상천외한 인물일뿐만 아니라 방송국의 모 pd가 자기 가슴을 만지는것을 보고 남자친구가 은근히 화를 내자 제쪽에서 외려 하고 항의하면서 자기 가슴은 인공으로 만든 가짜이기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당연히 도 처음 만난와 아주 자연스레 침대에 오른다. 에게는 천사로만 보이던 도 몇번의 섹스를 나눈 뒤에는 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컴퓨터를 안고 튀여 버렸고 양말씻는 기계로나 보이던 빨래판 같던 도 결국은 나를 떠나 일본남자와 결혼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정조나 도덕이니 량심이니 사랑이니 하는것들은 한낱 휴지쪼각에 불과하며 심지어 돈까지도 쓰레기에 다름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소설의 저자에게 하고 질문한다면 아마도 저자는 소설속의 주인공의 말처럼 '왜 내 정신도 생리통이다'하고 소리지를지도 모른다. 현실속에서 리얼리터를 별로 얻을수 없는 이러한 플롯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것인가? 이것이 우리 독자들 몫인것이다. Pd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위선적인 권위주의, 돈에 목이 매인 엄마로 상징되는 이른바 어른들의 리성주의, 교원으로 있는 이모의 훈계로 표현되는 소위 지성인들의 엄숙주의, 이러한 모든 기성질서에 대한 이들의 배척과 풍자는 상당히 의미있는것이라고 볼수밖에 없다. 무의미한 담론을 통해 표현하는 의미, 이것은 전형적인 포스터모더니즘의 기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진실이 없는것은 절대 아니다. 은 의 컴퓨터를 훔치긴 했지만(?) 그 대가로 성실하게 섹스파트너역활을 했고 또 부족한 부분은 돈으로 남긴다. 은 비록 아이디에 미안한 쫀쫀한 놈이지만 녀자친구와의 의리(?)만은 무섭게 지키는 위인이다. 도 친구의 일하나만은 착실하게 도와주는 의녀(义女)이며 역시 성실하고 의협심이 많은 괜찮은 남자이다. 이것이 그들의 진실인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정조가 있고 그들의 사랑이 있고 그들의 도덕이 있는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설속에서 모두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추락하는 모든것은 가치가 없고 무의미한것인가? 추락하는것은 모두 추락하는자의 몫인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을것이다. 어쩌면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의 핵이 있을수 있다.
이러한 의 넋두리같은 리유없는 반항을 우리가 왜 새겨들어야 하는가? 그들의 광란적인 환상체험을 우리가 왜 음미해야 하는가? 우리가 왜 의 선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러한 그들의 배척과 풍자가 바로 어른 세계의 반작용인탓이다. 이 점은 소설속에서도 여러번 제시되지만 특히 작품의 결말에서 잘 드러난다. 가 중고품으로 사온 컴퓨터는 이미 바이러스에 걸려 있다. 그것도 다른 바이러스가 아닌 바이러스다. 라는 영문문자만이 식욕과, 성욕, 물욕의 만족만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욕구불만, 이제 그들에게 고픈것은 배가 아니라 머리인것이다. 배가 고프다고 나오니 그것보다 더 아이러니한 바이러스가 있을가? 그런데도 어른들은 유치하게도 식품이나 돈으로 아이들의 바이러스를 치료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것이다.
이 소설속에는 또 네수의 신세대 한국가요가 그대로 인용이 되여 있다. 짜깁기를 통한 혼성모방, 이러한 혼성모방을 통한 순수문학과 통속예술의 접목, 이러한 접목을 통한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파괴, 이것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이다.
이외에도 지적하고 싶은것은 텍스트의 일인칭 초점화자 시점과 언어문제의 절묘한 조화, 의학에서의 하나의 치료과정을 방불케하기도 하고 또한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상징하는것 같기도 한 a로부터 z에 이르기까지의 서술단락, 독특한 개성과 아이러니한 상징성을 결부시켜 낯선 대상의 병치에 성공한 이름짓기 등은 모두 이 소설의 성공에 기여한바가 크다. 제한된 지면으로 하여 이러한 측면에 대해 상세히 다룰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특히 높이 평가하고 싶은것은 이 소설에서 보여준 김혁의 언어구사가 자유자제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정말 는 점이다.
일찍 카나다의 석학 맥 루안은 라는 경세의 절구를 남겨 우리에게 미디어의 중요성을 상기시킨적이 있다. 매체가 전달하는것은 그 내용과는 전혀 다른, 곧 매체 그 자체의 특질일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오늘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선견지명이 아닐수 없다. 과학은 매체를 변화시키고 매체는 사람을 변화 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는 저모도르는 사이에 과학과 매체에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여 버렸다. 그리하여 편지세대, 전화세대, 텔레비죤세대, 컴퓨터세대 하는 신조어까지 생겨 나게 되였다. 오늘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물질적이고 관능적이고 감각적이고 기능적이고 경박한가 하는것을 직시한다면 그것이 매체의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쉽게 간파할수 있을것이다. 편지로 사랑을 나눈는 련인과 전화로 사랑을 나누는 련인, 그리고 인터넷 메일로 사랑을 나누는 련인은 같은 생각을 할수가 없는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매체의 변화에 줄곧 둔감한 반응을 보이던 우리 문단으로서는 김혁의 에 감사해야 할것 같다.
김혁은 인터넷을 가리켜 얻음이자 잃음이고 바램이라고 했다. 우리도 이제는 그 잃음의 정체와 바램의 대상을 낱낱이 환기해 볼때가 된것이다.
서영빈 (문학박사, 북경 경제무역대학 외국어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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