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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연 동시바구니
2017년 05월 05일 18시 09분  조회:1677  추천:0  작성자: 강려

가을 눈동자

 김 구 연    

햇살이 고요롭게
먼지를 데리고 노니는
마루방 탁자 위에
난초 잎으로 몸을 가린
우유빛
찻잔 하나.

 

오부룩하게 가을이
들어앉은 찻잔에
들꽃처럼
아, 들꽃처럼 누구를 기다려
가늘게 웃고 있는
초롱초롱
너의 눈동자.

 

 

강아지풀

 김 구 연    

 오요요
 오요요
 불러 볼까요.

 

 보송보송
 털 세우고
 몸을 흔드는

 

 강아지풀
 강아지풀
 불러 볼까요.

   "오요요" 소리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풀
  "오요요/ 오요요"는 어미가 제 새끼를 부를 때, 혹은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부를 때 내는 소리다. 바이올린의 높은 선율보다는 낮은 음역대(音域帶)에서 나오는 바순 소리에 더 가깝다. 뜻 없는 의성어지만 그 울림이 맑고 상냥하다. 'ㅍ'소리가 내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비교하면 맑음과 상냥함이 한결 뚜렷하게 드러난다. 공[球]처럼 입술을 작고 동그랗게 모아 발음하기 때문인가. 세 번씩이나 겹친 두음(頭音)으로 오는 'ㅇ'소리는 사방으로 퍼지지 않고 동그랗게 모인다. 이 때 둥근 입 모양은 젖 빠는 아가의 입과 닮아 있다. 'ㅇ'소리는 귀엽고 상냥하고 발랄하다.
  어떤 말들은 뜻을 품지 않고도 그 소리값[音價]만으로도 소통의 소임을 다한다. 이 시에 나오는 "오요요/오요요"하는 말이 그렇다. 음절 앞머리에서 낭랑한 소리를 이끌던 'ㅇ'소리는 다음 행의 "보송보송"에서는 음절의 끝에 숨어 겸손하게 앞소리를 떠받든다. 그 떠받드는 'ㅇ'소리는 강아지풀의 보드라움을 감각적 명징함으로 드러낸다. 'ㅇ'소리는 둥근 소리다. 내치고 따돌리고 깨뜨리는 소리가 아니라 품고 보듬어 안는 소리다. 이 소리에 외로운 자들이 먼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리라. 왜냐 하면 이 소리는 사랑과 안식을 약속하는 달콤한 영창(詠唱)으로 들리니까. 'ㅇ'이라는 음성기호는 둥근 것, 보드랍고 연한 것들, 예를 들면 엄마 젖, 아가의 오동통한 엉덩이, 젖살이 몽실몽실한 강아지, 탱탱한 탄력을 가진 꽈리들을 연상하게 한다.
  이 수작을 쓴 김구연(66)은 1971년에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아동문학가다. 시인은 남이 못 듣는 소리도 듣는 예민한 청각을 가졌다. 들에 매인 염소는 누나의 국어책을 먹고 날마다 국어책을 외운다. "염소가 누나의 국어책을/ 몽땅 먹어버렸다.// 그러고는 매일/ 매애애 매애애……// 국어책 외운다."(<국어 공부>)
  다시 입술을 모으고 "오요요/ 오요요"하고 불러보자. 강아지풀은 그게 저를 부르는 소린 줄 용케도 알아들었다. 제가 풀이라는 걸 잊은 강아지풀이 보드라운 털을 세우고 몸을 흔들며 온다. "오요요/ 오요요" 소리가 강아지풀을 강아지로 순식간에 바꾸는 놀라운 마술을 부리지 않는가. 우리 안에 잠든 열망과 무한한 그리움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가. 
(장석주 시인)

 

 

고추씨의 여행

 김 구 연

   노오란 고추씨가 
   땅 속에 묻히면
   초록색 싹이 되어 나오고
   그 어린 싹이 자라서
   새하이얀 고추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초록동이 아기고추가 열리고
   아기고추가 자라서
   빨간 잠자리
   매운 고추가 되고
   아, 빨간 고추 속에는
   노오란 고추씨가 돌아와 있네.

   고추씨가 싹이 되고, 싹이 꽃이 되고, 꽃이 고추 되고, 고추 속에 고추씨가 돌아와 있음. 이 시의 내용 줄거리입니다.
  어디 고추뿐일까요? 대개의 식물들이 다 그렇습니다. 한 알의 씨앗이 열매 맺어 수십 수백 배의 또다른 씨앗을 낳게 하는 건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능력을 가진 이는 보이지 않는 위대한 분, 그 누구의 은혜 때문일까요? 
(허동인)

  한 알의 고추씨가 싹이 터서 자라고, 끝이 뾰죽한 다섯 장의 흰 꽃잎으로 꽃이 피고, 풋고추에서 붉은 고추가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시인은 고추씨가 자라 다시 고추가 되는 것을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명,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윤회라고 합니다. 
  봄에서 가을까지 고추가 익을 때까지의 시간을 여행이라는 시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놓는 일. 이런 평범한 사실에 새로운 의미를 주어 우리에게 놀람과 기쁨을 주는 일은 시인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것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더 깊고 넓은 상상의 나라로 이끌어주는 일은 시인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시를 많이 읽으면 상상과 생각의 폭이 풍부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식에 맛을 보태주는 열매 속의 작은 씨앗을 보고 되풀이되는 생명을 긴 여행으로 엮어낸 시인.
  '한 송이의 꽃에서 우주를 본다.'고 말한 블레이크라는 시인도 있습니다. 
  자연이 풍요로운 여름은 우리에게 많은 상상력을 주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정두리)
 

 

귀뚜라미

 김 구 연

  따르르 따르르……
  비켜나세요.
  별님 달님
  비켜나세요.

 

  캄캄한 
  밤중에
  귀뚜라미가
  자전거를 탑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

   고요한 가을 밤입니다. 
  귀뚜라미 혼자 따르르 따르르 자전거를 탑니다. 귀뚜라미 자전거 소리는 밤하늘로 멀리멀리 퍼져 갑니다. 별님 달님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별님 달님 비켜 나세요' 하고 내가 귀뚜라미 대신 말해 줍니다. 
  고요한 가을 캄캄한 밤하늘로 귀뚜라미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세요. 
(김종상)
 

 

국어 공부

 김 구 연    

  염소가
  누나의 국어책을
  몽땅 먹어 버렸다.
  그러고는 매일
  매애애 매애애……   
  국어책 외운다.

   국어책을 외우는 염소를 보았나요? 
  염소는 왜소한 체구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되새김질을 하는 초식동물이지요. 종이도 잘 먹는답니다. 아, 염소가 그 새 '누나의 국어책을 몽땅' 먹어 버리고 말았군요. 그리고 "매애애 매애애" 울음소리를 내면서 계속 되새김질을 하고 있네요. 아마 국어 공부를 하는가 봐요.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들을 외우는 거야' 하듯이 입을 놀리네요. 
  동물의 행동 특성을 잘 관찰하면서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 놓은 김구연(1942∼) 시인의 시적 재치가 돋보이는군요.
 (김용희)

  내가 선물하는 동시집에 들어 있는 시 중에서 아이들이 가장 먼저 외우게 되는 시다.
  동물과 아이가 친구가 되는 이야기에다 동물이 먹고 우는 반복되는 단순한 행동을 아이가 책 읽는 소리에 빗대며 "매애애 매애애"로 청각화한 것이 쾌감을 안겨 주는 거다.
  이런 쾌감을 오래 붙들고 싶은 사람은 이 동시를 흉내내 볼 것을 권한다.
  "강아지가 형아의 운동화를 하루 종일 물고 다녔다. 그러고는 밤 늦도록 콩콩콩 콩콩콩 마루를 뛰어다닌다." 이런 식으로.
 (박덕규)
 

  

깜장 염소

김 구 연   

       새까만 얼굴
       새까만 눈동자
       새까만 바지저고리
       새까만 손발.

 

       캄캄한 밤중에
       느네들끼리 만나면
       어떻게 알지?
       엄만 줄 아빤 줄?

 

       매애애 매애애……
       목소리도 똑같은걸.

 

 

바람 부는 날

김 구 연    

 미루나무들이
 벌판을 달리고 있습니다.
 맨주먹 불끈 쥐고
 머리칼 휘날리며.

 

 콩밭도 달립니다.
 수수밭도 달립니다.
 미루나무 꼭대기
 까치집도 달립니다.

   동심의 모습을 발견하기
  이 시는 바람 부는 날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모양을 보고 마치 아이들이 맨주먹을 쥐고 달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쓴 시다.
  이 시에 나오는 미루나무나 콩밭이나 수수밭은 주먹을 쥐고 달리는 아이들 모습 그대로이다.
  자연을 보면 이와 같이 귀여운 동심을 발견할 수 있다.
  새와 꽃과 나무에서 아이들과 닮은 점을 찾아 시로 써보기 바란다. 
(이준관)

 

 

반딧불

 김 구 연    

남 다 자는
한밤에
초롱불 하나

 

어둠 타고
남실남실
쑥고개
넘어온다.

 

무섭지도 않나 봐
꼬마 반딧불.

   어두운 밤, 숲 속이나 산길에서 작은 초롱불을 밝히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은 무섭지도 않을까요? 
  또, 혼자 초롱불을 밝혀들고 누굴 찾아다니는 것일까요?
  반딧불을 사람의 처지에 비겨 보고 있습니다.
 (김종상)

 

 

빈 나뭇가지에

 김 구 연    

  빈 나뭇가지에
  구름 한 조각 걸렸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하얀 눈 몇 송이 앉았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뾰쪽뾰족 초록잎 돋았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빨간 열매 달렸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한 마리 산새 쉬었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빈 나뭇가지에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

   빈 나뭇가지에 왔다가 떠나가는 것을 '걸렸다, 앉았다, 돋았다, 달렸다, 쉬었다'로 말을 바꾸어 나타낸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시는 같은 내용의 이야기라도 이렇게 표현을 달리 해야 좋은 문장이 됩니다.
  만약 이것을 모두 '앉았다 가고'로 표현했다면 '구름 한 조각 앉았다 가고' '초록잎 앉았다 가고' '빨간 열매 앉았다 가고' '한 마리 산새 앉았다 가고' 로 되어 참으로 지루하고 멋없는 글이 되고 말 것입니다.
 (김종상)
 

 

성에

김 구 연    

        발이 시려운데
        하얀 이를 드러내
        네가 웃고 있구나.

 

        유리창에
        어룽지는
        마음의 그림자.       

   누군가 창 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보니 그게 아니라 유리창에 성에가 낀 것이었지요.
  모른 척 다시 공부를 하다 보면 또 누군가의 표정이 느껴지는 걸 어쩐답니까.
  저 추운 밖에서 하얗게 웃고만 서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성에의 모양새를 연민 어린 마음의 만남으로 읽은 김구연(1942~) 시인의 솜씨가 볼 만하군요. 
(박덕규)
 

 

아기 염소

김 구 연   

  어리고 어린 것이
  흰 두루마기에 딸기코
  하얀 수염을 기르고

 

  매애애, 매애애……
  뒷짐지고 할아버지
  헛기침 흉내내고

 

  부끄러운 것도 몰라
  우리 동네 아기 염소
  땅꼬마 영감님.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

   코가 빨갛고 수염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시나 봐요.
  아기 염소를 보니 그런 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기 염소도 코가 빨갛고 수염이 하얗습니다. 게다가 매애매애 합니다. 그래서 어린 것이 할아버지 흉내를 내다니 부끄럽지도 않니 하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 둘레에는 이렇게 서로 닮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김종상)
 

 

방아깨비

 김 구 연    

     "시집 갈래, 장가 갈래?"
     방아깨비를 잡아쥐고
     아이들이 놀려댑니다.

 

     방아깨비는 알아들었는지
     끄덕끄덕 끄덕끄덕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겠다고.

 

 

 

 

 

키를 잰다

김 구 연   

  벽 기둥에
  자를 만들어 놓고
  키를 잰다.

 

  날마다 날마다
  형제들이.

 

  그것도
  재어 보았니?
  생각의 키.          

   시는 징검다리와 같습니다. 낱말의 돌멩이를 몇 개만 놓아도 훌륭한 길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적은 말 속에 많은 생각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것도 재어 보았니? 생각의 키' 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키가 자란 만큼 생각도 자라야 합니다. 덩치는 커다란데 생각이 어리다면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김종상)
 

 

     김 구 연(金丘衍)

1942년 8월 9일 ∼ 
본명 : 김치문
서울에서 태어남.
영신고등학교 졸업.
1971년 '월간문학' 신인상 소년소설부문에 <꼴망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함.
1974년 동시 <꽃불> 외 4편으로 제2회 새싹문학상(1974)을,
1976년 동화 <동쪽에 집이 있는 아침>으로 제9회 세종아동문학상(1976)을,
1978년 동시 <빨간 댕기 산새> 연작으로 제13회 소천아동문학상(1978)을,
1986년 제5회 인천시문화상((1986)을 수상함.
동화집 : 자라는 싹들(세종문화사, 1976)
            마르지 않는 샘물(세종문화사, 1981)
            점박이 꼬꼬
            누나와 별똥별
            다람쥐는 도토리를 먹고 산다
소년소설집 : 붉은 뺨 사과 얼굴(그래그래, 2003. 6)
시집 : 꽃불(한진문화사, 1974)
         빨간 댕기 산새(강경문화사, 1976)
         분홍 단추(미문출판사, 1982)
         가을 눈동자(미문출판사, 1983)
         아이와 별
         나무와 새와 산길
         별빛과 눈물(동아사, 1991. 4) 
         은하수와 반딧불(자료원, 1999)
         별이 된 누나(자료원, 2002. 4. 6)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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