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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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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청소년 위한 SF세계명작소설 원문 사이트주소 댓글:  조회:547  추천:0  2023-08-23
아래 주소는 청소년 위한  SF세계명작소설 원문 사이트입니다 . 방화벽 뛰여넘지않아도 열립니다  사이트 열고  그림옆에 첫번째  PDF 보기 를릭해 보면 됩니다 https://sf.jikji.org/book/index.html
1199    해저 지진 도시 F. 폴 . J. 윌리암슨 작 이 인석 역 댓글:  조회:446  추천:0  2023-08-23
해저 지진 도시   F. 폴 . J. 윌리암슨 작 이 인석 역   프레더릭 폴 1920년 미국 태생 . 20샅 때부터 SF를 쓰기 시작하여 작가 활동을 하계 되었다. '우주 살인" "해저 정보" "해저 함대" 등.   J. 윌리암슨 1908년 미국 태생. "우주 군단" "휴머노이드" 등.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 원수․박 홍근 / 문학박사 최 인학 공학박사 양 옥룡 / 이학박사 김 희규 전교육감 김 성묵   정 보······················ 4 타이드 신부·················· 13 해저 박물관·················· 22 해저 지진 도시················· 28 지진 예지··················· 37 지오존데···················· 50 미 행····················· 61 백만 불 짜리 지진··············· 72 이든 기업··················· 84 노인끼리의 대결················ 95 구정물 처리장에 잠수선!············ 105 진도 +(플러스) -(마이너스)·········· 114 10억 불의 공황················ 125 연판으로 둘러싼 금고············· 137 스튜어트 이든의 범죄············· 149 지저 기지에의 침입자············· 161 지진 박사··················· 176 지저에의 여행················· 189 바위의 바다·················· 200 이든나이트의 빛················ 212   작품 해설··················· 219   등장 인물   스튜어트 이든 : 이든 나이트를 발명한 위대한 발명가이며, 바다 밑에서 일어날 지진을 미리 알아내는 권위자이다. 이든은 수소폭탄을 사용하여 인공 지진을 일으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지진의 위기에서 구출한다. 존 고에쓰 박사 :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지진학자. 지오존데(Geosonde. 지하 기상 측정 기계)를 개발하여 바다 밑에서 일어나는 지진 예지에 크게 공헌한다. 짐 이든 : 해저 함대기지 사관생도. 인공 지진으로 숙부인 스튜어트 박사가 살인자의 오해를 받게 되자 고민한다. 기데온 파크: 스튜어트 이든의 충실한 조수. 수소폭탄으로 일으키는 인공 지진에 가담한다. 다나까 중위 :해저 함대 사관 후보생의 일본인 지휘관. 인공 지진을 일으키는 스튜어트 이든을 추적한다. 밥 에스코 : 해저 함대 사관 후보생. 인공 지진을 일으키는 데에 가담하여 친구인 이든에게 미행 당한다. 벤 단소프: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주식 거래소를 창설하여 개인적인 돈벌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 비인간적인 사나이. 할리 단소프 : 아버지 벤 단소프의 비정을 목격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비인간적임과 자기의 괴로움을 고백한다. 타이드 신부 : 지진학자 정 보   토요일 오후는 자유시간이다. "수중 테니스라도 하지 않겠나?" 나는 동급생인 밥 에스코를 꼬셔서 해중(바닷속) 풀장으로 갔다. 우리들 잠수 사관 후보생에게는 자유시간 중의 스포츠도 훈련에 든다.... 이곳은 미국 뉴욕에서 1천 2떠 킬로미터 동남쪽 대서양에 있는 버뮤다 섬이다. 이전부터 이곳에는 영국과 미국의 해군 기지와 공군 기지가 있었다. 지금은 국제 연합의 해저 함대 기지가 되어 그 한쪽에 잠수 사관 학교가 설치되어 있다. “짐 빨리 오게." 밥 에스코는 풀 속에 뛰어들어 발로 물을 차면서 잠수하기 시작하였다. "서둘 것 없네." 나는 수영장 가에서 신중히 산소 봄베(압축된 고압 상태의 기체를 넣어 두는 두꺼운 강철로 만든 용기)를 조절하며 말했다. "이든 후보생!" 갑자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들어보니 두 명의 해군 사관이었다. 우리의 교관하고 사령부의 당직 장교가 풀에 다가 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부동 자세를 취했다. "이든 후보생. 1300시(오후 1시)에 사령관실로 출두할 것." 당직 장교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넷, 알겠습니다." 나는 경례를 했다. 당직 장교는 답례를 하고 교관과 함께 사라져 갔다. 풀 수면에 밥의 얼굴이 나타나 수중 마스크를 들썩하고 외쳤다. "빨리 오게, 짐. 무얼 하고 있나?" 그러나 교관하고 당직 장교의 뒷모습을 보자 휘파람을 불었다. "저 두 사람은 뭣하러 왔었나?" "1300시에 사령관실로 출두하라는 걸세. 나 혼자서 말일세.“ "흐음, 어쩌면 단소프가 얘기하던 건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 밥은 물에서 올라왔다. "어떤 얘긴가?“ 내가 이렇게 묻자 밥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네하고 나 그리고 단소프, 이렇게 세 사람에 관계되는 일인 모양일세." "알 수 없는 일에 신경을 써도 할 수 없잖은가." 나는 봄베에서 마스크를 떼어 내고, 공기를 공급하는 밸브를 점검하였다. 수중 테니스는 중지하지만 다음 할 때에 대비해서 점검해 두는 것이다. (조심하고 더욱 조심을 해라. 수중 장비는 모두 두 번씩 점검하여라.) 이것이 해저 함대의 습관이다. 해저에서는 다시 할 수가 없다. 장비의 고장이 그대로 죽음에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밥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사로 향했다. 버뮤다의 태양이 벌거벗은 등에 뜨겁다. 요새 해저에서의 훈련이 많았던 탓이다. 과학의 진보가 여러 가지 발명을 낳게 해서 마침내 인류는 해저를 정복했다. 암흑의 해저에는 거대한 돔(둥근 지붕)에 싸인 해저 도시가 차례차례로 건설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발명도 자연의 공기의 싱그러운 내음과, 수평선이나 지평선의 망망함을 해저 생활에서 맛 볼 수는 없었다. 밥은 멈춰 서서 푸른 숲과 해변가 백사장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빨간 지붕들과, 해면이 빛나는 하얀 물거품들을 바라보았다. "통가 해구에 있는 자연 진주를 몽땅 합친다 해도 이 아름다운 경치를 따를 수는 없지." 확실히 밥이 말하는 게 옳다. 심해의 엄격함과 무서움이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해저 도시와 돔은 모두 이든나이트라는 특수 금속의 얇은 피막으로 둘러싸여 굉장한 수압(물의 압력)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든나이트 피막 밖에는 언제나 검은 사신(재앙을 내리는 요사스러운 귀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에 누가 버튼을 잘못 눌러 파이프의 열고 닫는 장치가 틀리면, 사신은 당장에 이든나이트를 파괴하고 도움 안으로 침입한다. 그리고 해저 도시는 트럭의 타이어에 짓눌린 땅콩처럼 납작해지고, 시민들은 산산조각이 될 것이다. "자네들 대낮부터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나?" 돌연 말소리가 들려 그쪽을 돌아보니 또 한 사람의 사관 후보생이 옆에 와 있었다. 아까 밥이 말하던 할리 단소프였다. 나에게는 초면이지만 이름만은 듣고 있었다. 할리는 날씬한 체격에 밥보다 약간 키가 작았다. 줄이 선 진홍색의 제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싫은 인상이었다. 밥이 초면인 우리들을 소개했다. "짐, 할리 단소프는 심해 기지에서 온 학생일세." "그리고 또 다시 심해로 돌아가는 걸세. 자네들과 함께 말이네." 소매에서 조그만 산호 파편을 털어 내면서 할리는 말했다. 나와 밥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 다 할리하고 함께 심해로 간다는 명령을 들은 일이 없었다. "명령은 오늘 오후 나기로 되어 있단 말일세." 할리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네는 그런 걸 알고 정보를 입수했지." 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보로는 우리가 가는 행선지가 어디로 되어 있나?"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일세." "그라카타우라고?" 밥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렇네." 하고, 대답하며 할리는 밥의 얼굴을 이상한 듯이 바라보았다. 어쩐 셈인지 밥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라카타우로 무얼 하러 간단 말인가?" 내가 거듭 물었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그곳으로 간다는 것뿐이네. 그 이상의 것은 아직 모르네." 할리는 또 어깨를 으쓱했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나는 할리의 정보를 믿고 싶었다. 만약에 지금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서슴없이 '그라카타우'라고 대답할 것이다. 수많은 해저 도시 중에서 그라카타우는 가장 새롭고 가장 큰 해저 도시였다. 장소는 순다 해협(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의 중간)에 있는 유명한 화산섬 그라카타우 섬의 남쪽에 가로놓인 자바 해구의 언저리이며, 수심 5천 미터의 해저다. 나의 숙부 스튜어트 이든이 즐겨 이야기해 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섬 주변의 해저는 석유와 우라늄과 주석의 보물고이다. 그러나 그곳에 해저 함대의 훈련 기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일이 없다. 대체 무슨 훈련 때문에 세 명의 잠수 사관 후보생이 그곳에 파견되는 것일까? 할리는 경멸하는 투로 밥에게 말했다. "왜 그러나, 밥. 안색이 나쁜걸, 무섭나?" "무서울 것까지는 없지만 지진이 약간 마음에 걸린다네." 밥은 조금 불안한 듯 하였다. "그렇다면 그라카타우 섬의 해저 도시는 자네에겐 맞지 않는 곳이군. 백년 전에 일어난 그라카타우 화산의 대폭발 얘기는 들었겠지? 그 때 해상에서는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큰 물결이 일어났다는군! 그 주위의 해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대란 말일세." 할리가 눈을 빛내며 기쁜 듯이 말했기 때문에 나는 비꼬아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해저 지진이 많으면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 지진은 물론 지상에서도 무서운 재해를 가져온다. 그러나 해저의 경우는 더욱 커 천 배나 되는 굉장한 파괴력을 휘두른다. 극히 작은 지진일지라도 수송관을 절단하고 밀어닥치는 바닷물이 광구의 갱 속을 막아 버린다. 또한 강한 지진이라면 일순간에 이든나이트의 얇은 피막을 찢어 버리고, 해저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돔을 박살내 버린다. 심도(깊은 정도, 깊이) 1만 미터의 수압을 견디어 내는 이든나이트도 대지진에 대해서는 별로 저항력이 없는 것이다. "보통의 해저 생활자는 지진을 두려워할 뿐이지." 할리는 빙그레 웃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해저 지진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강우도 있단 말일세.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 말이네. 우리 아버지는 해저 도시 그라카라우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네. 정보를 잘 입수하면 지진 때마다 돈을 한탕씩 벌어들인다네!" 이 때 내 머리 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할리, 자네 아버지가 실업가인 벤 단소프 씨인가?" "그렇네. 우리 아버지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가 완성되기 전에 장래를 내다보고 그 한 쪽을 사서 장사를 시작했지. 지진 때마다 해저 산업 관계의 주식이 대폭 떨어지네. 그 때 그것을 몽땅 사서 재산을 불리었다네. 지금 아버지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주식 거래소 회장이며 해저 도시를 운영하는 시의회의 의원직도 갖고 있네. 아버지는 모든 시민으로부터 '따개비 벤'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래 해저에서 살고 있어......" 이 자랑 얘기를 밥이 막았다. "'따개비 벤'이라고? 그건 기생동물이란 뜻이 아닌가? 적어도 자네 아버지는 해저 도시 개발의 선구자는 아닐세. 육상의 인구 증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해저 도시의 개발에 도전한 진정한 탐험가나 발명가라면 짐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을걸. 짐의 숙부인 스튜어트 이든은 이든나이트의 발명가일세!" 할리는 입을 다물고 나를 날카롭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스튜어트 이든은 자네와 숙부인가?" "그렇네." 하고,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가족이나 친척은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느냐 아니냐가 중대한 문제이지, 육친이나 친족 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아니라고 항상 숙부에게 훈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저 도시의 건설을 가능케 한 이든나이트의 발명가를 숙부로 두고 있다는 것은 역시 나의 자랑이었다. "나와 아버지는 자네 숙부의 발명을 몽땅 살수도 있었을 걸세." 할리는 도전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숙부의 가르침을 지켜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리는 밥에게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자네의 가족은 어떤가?" "어떠냐고?" 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는 계속했다. "자네도 가족은 있겠지? 얘기해 주게나. 어떤 사람들인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어디에 살고 있지? 자네 아버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지극히 평범한 시민일세. 아버지는 일가를 이루고 있지." "해저에 간 일이 있나? 해저 생활자인가?" 할리가 너무나 짓궂어서 내가 끼어 들었다. "가족 같은 건 아무래도 좋잖은가. 우리들이 이제부터 세 사람 함께 해저로 간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간에 팀웍을 짜는 게 중요한 일이란 말일세." "잘 될까?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는 적어도 지진이 두려운 사나이에게는 맞는 장소가 아닌걸." 한 마디 뱉듯이 말하고 할리는 총총히 사라졌다. "호감이 안 가는 녀석이군. 될 수 있는 한 저 녀석을 상대 않는 게 좋겠네. 밥, 저놈하고 함께 해저로 간다는 명령이 아직 나온 것은 아니지 않나." 나는 걸어가면서 밥을 위로했다. 밥은 결코 겁쟁이가 아니다. 해저 지진을 두려워 할 그런 사나이가 아니다. 통가 지구에서 거행한 지난번의 심해 훈련에서 우리는 때때로 사신하고 대결했다. 그 충격에서 아직 완전히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기숙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까, 당번 후보생이 게시판에 사령부에서 온 명령서를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밥과 나는 게시판 앞에 멈춰 섰다.   다음의 후보생은 금일 1700시(오후 5시)에 사령관실로 출두할 것.)   할리 단소프. 짐 이든. 밥 에스코.   밥과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상한데, 당직 사관은 아까 풀장에서 분명히 1300시에 출두하라고 말했었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당번 후보생이 뒤돌아보았다. "아아, 짐인가. 자네는 두 번 출두하기로 되어 있네. 1300시의 출두는 자네의 숙부이신 스튜어트 이든의 사망설에 관한 거라네."     타이드 신부   사령부 정문 입구에 잠수 사관 학교의 상징이 조각되어 있다. 라고. 나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빨리 사령관실에 출두했다. 사령관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1300시에 어김없이 나타날 모양이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미 양친을 잃어버린 나는 숙부인 스튜어트 이든이 단 한 사람의 육친이었다. 숙부의 집은 여기서 1만 6천 킬로미터 떨어진 해저 도시 마리니아에 있다. 얼마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최근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듣고 있었다. 나는 불길한 생각을 쫓아 버린다. 분명히 당번 후보생은 사망설이라고 말했다. 죽었는지 아닌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1300시 정각에 사령관이 나타났다. 검은 수단을 입은 사나이와 함께였다. 턱 벌어진 체격의 사령관 옆에 서니까 마치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로 작은 몸집의 사나이다. "이든 후보생, 이분은 이에즈스회(기독교 중의 일파)의 타이드 신부다. 자네를 만나 꼭 얘기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단다." 신중한 목소리로 사령관은 말한다. 나는 신부의 손을 잡고 문득 불안을 느꼈다. 신부의 눈이 날카롭게 나를 보고 있었다. 사령관의 눈도 엄격하게 나에게 쏠리고 있었다. 신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 숙부님의 친지일세. 짐, 아마 자네는 숙부에게서 내 얘기를 들었을 테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파란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저는, 숙부하고 자주 만나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럴테지." 타이드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둥근 얼굴의 볼이 붉고 반들반들했다. 연령은 잘 알 수 없지만 이미 젊지 않은 나이인 것만은 확실하다. "짐, 자네를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자네 일은 잘 알고 있네. 통가 해구에선 큰 공을 세웠다더군. 나도 언젠가 그 해구에 들어가 보고 싶지만 매우 힘이 들 걸세........" 타이드 신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까, 나는 상대방의 정체를 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신부치고는 바다 밑의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바다 밑에 들어가 활약하고 있는 듯한 말투다. "그건 그렇고 짐, 이것들을 본 기억이 있나?" 그러면서 타이드 신부는 상자를 열고 플라스틱 주머니를 끄집어내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책상 위에 진열해 놓았다. 멋진 통가 진주를 박은 은반지며 스텐레스 케이스에 들어 있는 정밀 손목 시계, 얼마간의 화폐와 소액 지폐, 미국과 마리니아의 달러, 그리고 찢어진 봉투가 한 통, 손에 들고 볼 필요도 없었다. 모두 내가 잘 알고 있는 것들 분이다. 반지는 숙부의 것이며 거기에 박혀 있는 진주는 쟈슨 그레이켄이라는 오랜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시계는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숙부에게 물려 준 것이다. 그리고 찢어진 봉투의 표면에 씌어 있는 주소하고 이름은 내 필적이다. 내가 숙부에게 보낸 편지인 것이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숙부님 것입니다." "역시, 그랬군......" 타이드 신부는 위로하는 눈초리로 나를 보면서 숙부의 물건들을 또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숙부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물어 보았다. "나는 알 수 없네. 짐, 그래서 자네에게 물어 보고 싶어 찾아온 걸세." "제가 당신에게 얘기를 해요?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것보다도 신부님은 그 물건들을 어디서 손에 넣었습니까?" "수중차 안에서네. 이 설명을 하자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참고 들어주게나." 타이드 신부는 플라스틱 주머니를 상자에 넣고 방안을 빙빙 돌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교단(종교 단체)은 화산학과 지진학 개발에 공헌하고 있네. 나도 신부이면서 해저 화산과 해저 지진의 연구 방면에는 전문가인 셈이네. 그런데 2주일 전......" 잠깐 말을 끊고 타이드 신부는 창 너머로 밝게 빛나는 버뮤다의 바다에 눈길을 보냈다. "인도양의 바다 밑에서 돌연 분화가 일어났지. 그건 참으로 전연 예상 밖의 분화였네." "예상 밖? 정말로 미리 알 수 없었습니까?" "그렇다네, 짐. 자네도 잘 알다시피 오늘날의 과학은 지진이나 화산의 분화를 거의 100퍼센트 예지(미리 앎)할 수 있는 데까지 진보되어 있네. 그러나 인도양의 분화는 전혀 예지 할 수 없었다네. 그 부근의 바다 밑에는 분화를 일으킬 만한 활동이 전연 없었는데 분화가 일어난 걸세. 그 때 나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있었지. 그곳 지진계의 기록에 의해 진원지(지진이 일어난 곳)는 약 3천 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양의 바다 밑이라는 것을 알았네. 나는 진원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곧 수중차로 출발했네. 그래서 다음날 밤 진원지에 도착했지. 해상은 분화 때문에 아직 거칠었네." 그는 말을 이었다. "해저에서는 새로 분출한 용암과 진흙이 3킬로 사방에 퍼져 있었네. 이곳저곳에서는 아직 조그만 폭발이 계속되고, 용암은 뜨겁고 바닷물은 펄펄 끓고 있었지. 나의 수중차는 해저 지진 관측용으로 만들어진 내진(지진을 견뎌 냄), 내열(높은 열에서 질이 변하지 않고 견딤)용이기 때문에 간신히 가까이 갈 수가 있었네. 만약에 그곳에 해저 도시의 도움이 있었다면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을 걸세. 설령 해저 도시가 없었다 해도 때마침 탐광(땅 속에 있는 각종의 광맥이나 광산을 찾아내는 일) 기술자가 있었을지도 알 수 없지." "신부님.“ 나는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의 숙부님의 물건들은 그곳에서 발견했습니까?" "그렇다네. 그렇지만 짐, 순서를 따라 설명할 테니까 조금만 더 참고 들어주게. 나는 뜨거운 용암 언저리를 따라 과학적인 관측을 계속하는 것과 동시에 불행한 조난자를 찾으려고 했지. 물론 바닷물은 흙탕이어서 수중차의 불빛이 통하지 않더군. 더군다나 분화 때문에 활동이 둔해져 매우 힘이 드는 일이었네. 이윽고 거의 망가져 가던 음파 탐지기가 구조 신호를 잡았네. 그것이 자동 긴급 발신기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았네. 나는 구조 신호의 음파를 따라 용암원의 언저리를 전전했네. 간신히 상대방의 위치를 찾아 냈지. 그것은 수중차였네. 진흙과 암석에 절반이 묻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지. 나는 신호를 보냈으나 대답이 없었네. 그렇지만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든나이트 잠수복을 입자마자 바다로 나가 상대방 수중차에 옮겨 탔네." "저런! 모르셨습니까? 그건 자살 행위입니다!" 나는 그만 부지중에 외쳤으나 사령관이 흘기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람을 구하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지. 짐, 그러나 수중차에는 아무도 없었네. 필경 그 수중차는 폭발로 휘날려 바윗더미에 덮여서 움직이지 못하게 됐던 거겠지. 로커는 열린 채였고 이든나이트 잠수복은 없었네." "그렇다면 탔던 사람들은 모두 탈출했던 겁니까?" "그럼. 하지만 안전한 장소까지 피신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 나는 아무도 없는 수중차 안에서 자네에게 보여 준 물건들을 발견했네만, 곧 그것을 가지고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네. 가까이서 또 폭발이 일어나 하마터면 뜨거운 흙탕물에 휘말릴 뻔 했기 때문일세." "그래서...... 신부님은...... 우리 숙부님이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나는 타이드 신부가 동정이나 위로의 말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타이드 신부의 파란 눈은 날카롭고 차갑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까의 물건들이 스튜어트 이든 것이 아니라고 자네가 그래 주길 바랐던 걸세." "아뇨, 분명히 숙부님의 물건들입니다. 그래도 나는 숙부님이 죽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나도 스튜어트 이든이 무사하기를 빌겠네." 타이드 신부는 또다시 밝게 빛나는 바다에 눈길을 돌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짐, 문제는 자네 숙부님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게 되어 있네." "그밖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나는 직업상 인간의 죽음에는 익숙하네. 가령 누가 죽는데도 놀라거나 다급해 하거나 하지를 않지. 그런데 이번 해저 화산 폭발은 내게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해 주었다네." 타이드 신부는 무엇인가 알아내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짐, 자네 숙부님은 어째서 인도양에 계셨을까?" "알 수 없습니다. 요전에 제가 연락을 했을 때는 해저 도시 마리니아의 집에 계셨습니다." "요전이라니, 언제쯤?" "분명히 두 달 전이었습니다." "거기서 숙부님은 무얼 하고 계셨나?" "앓고 계셨습니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랬었군, 즉 말하자면 자네 숙부님은 자기 병에 절망하고 있었어. 그래서 결정적인 일을 할 생각이 들었을는지도 모르겠군." "결정적인 일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물어 봐도 타이드 신부는 곧 대답해 주지를 않았다. 신부는 30초 가량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간신히 말했다. "인도양의 해저 지진은 예지 할 수 없었네. 그것은 인공적인 것이었다는 증거일세. 가장 훈련을 쌓은 최상급의 지진학자들 밖에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 온 지구 전역에 지진 예지망이 쳐 있어서 어떠한 지진이라도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있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요즈음 예지 되지 않은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네. 인도양의 해저 폭발도 그 중의 하나일세. 이 지진들은 모두가 해저 도시에서 떨어진 바다 밑에서 일어나고 있네." "지금까지 몇 차례입니까?" "여섯 번일세. 그것도 회를 거듭할수록 강하게 되고 진원지도 해저 깊이 되어 있다네. 말하자면 누군가가 인공 지진의 기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실험을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단 말일세." "설마 제 숙부가......" 나는 망연해졌다. "그렇다네, 짐...... 만약에 스튜어트 이든이 살아 있다면 어떠한 관계든 있을 것일세." 타이드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해저 박물관   인공 지진의 실험! 그 장본인이 나의 숙부라고 타이드 신부는 말한다. 놀라움을 넘어서 나는 몹시 화가 치밀어왔다. 타이드 신부는 사령관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려고 하였다. 그것을 내가 불러 세웠다. "숙부님의 소지품을 놓아두고 가실 수 없습니까?" 타이드 신부는 사령관을 힐끗 쳐다보더니 머리를 가로 저었다. "언젠가는 자네에게 건네줄 작정이지만 당분간 내가 맡아 두겠네. 이것들은 아주 소중한 증거품들이니까. 지금은 나 혼자서 조사하고 있지만, 그 중 해저 함대의 조사국이 나서게 되면 역시 증거품으로 필요하게 될 테니까." 그 이상 타이드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경 사령관이 나에게 그만 물러가라고 명령을 내렸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전연 기억에 없다. 어느 새엔가 나는 공중 전화 박스 속에 들어가서 해저 도시 마리니아에 있는 숙부님의 집을 호출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사무실도 비어 있었다. 계속해서 호텔, 수중차 발전소에 전화를 걸었지만 숙부는 물론 숙부의 충실한 조수 기데온 파크도 없었다. 타이드 신부의 이야기는 정말인 것 같았다. 숙부는 완전히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이다. 다시 내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교내의 해저 박물관 홀에서 커다란 세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메르카토르(네덜란드 지리학자)식 투영 도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육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연 소용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육지의 부분은 강과 큰 도시를 빼고는 새까맣게 칠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다의 부분은 아름다운 색깔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청색과 녹색은 바다 밑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다. 진홍빛과 오렌지색은 바다 밑의 산악지대를 나타내고 있다. 황금색은 해저 도시, 거미줄처럼 둘러친 은빛 선은 파이프 선이나 진공 튜브 길, 어둡게 흐린 부분은 바다 밑의 광물 자원을 나타내고 있다. 해저에는 무한한 부(쌓은 재화)가 있다. 억만장자를 백만 명 만든다 해도 아직 남을 정도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나 숙부처럼 해저 개발자들이 목숨을 걸고 쌓아 올린 것을 때려부수려는 사람들도 있다. 부정한 수단으로 사복을 채우려는 야심가도 있다. 타이드 신부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해저 개발자의 한 사람인 스튜어트 이든이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이 된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타이르며 지도 앞을 떠났다. 이 해저 박물관에는 해저 개발의 역사를 말하는 여러 가지 물건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전연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느 사이엔가 밥과 할리가 박물관에 와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나? 아까부터 밥하고 내가 과 있는데도 알지 못하니 어이가 없네그려." 할리가 일부러 과장해서 말했다. "잠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얼버무렸다. "이것 좀 보게!" 밥이 유리로 된 전시 케이스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가느다란 금속이 들어 있었다. 직경 10cm, 길이 90cm의 끝이 뾰족한 원통이다. 표면에는 무수한 발화점이 즐비하여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저 굴진(땅 속을 파 들어감)카의 모형일세. 밥은 케이스 안에 있는 카드를 가리켰다. "어럽쇼! 이 기계로 인간이 해저 지하에 자유로이 파들어 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놀라 외쳤다. 그러자 할리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지저 굴진 카 얘기라면 내게 물어 보게. 우리 아버지는 이 기계의 드릴을 몇 개인가 사들였다네. 아버지 말로는 이 드릴은 해저의 굳은 바위를 버터처럼 깎아 낸다는 거야. 이 드릴을 구비한 지저 굴진 카는 인간이 타고서 바다 속을 전진하는 잠수함처럼 바다 밑 아래 바위 속을 거칠 것 없이 전진하는 걸세. 그래서 드릴을 가진 인간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거라네." "한심한 놈이야! 자넨 언제나 돈벌이 생각밖엔 할 수 없나?" 라고, 밥은 싸울 듯이 말했다. "돈벌이가 나쁜가?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네......" 할리도 맞서며 밥을 쏘아보았다. "잠깐만.“ 나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확실히 이 모형은 훌륭하지만 실물의 경우는 어려운 문제가 있네." "사실은 그렇다네." 하고, 할리가 비로소 털어놓았다. "지저 굴진 카의 동력은 원자력이니까, 고열을 방출하네. 거기다가 드릴이 고속으로 암석을 깎기 때문에 마찰열이 생기네. 더욱이 해저 밑의 땅 속으로 수 km를 파 들어가면 무서운 지열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타기 위해서는 강력한 냉방 장치의 개발이 필요하다네." 할리가 말을 마치자, "여보게." 하고, 밥이 탁상시계를 가리키며 외쳤다. "1700시까지 이제 5분밖에 안 남았어. 빨리, 사령관실로 가세." 잠시 후 우리들 세 사람은 사령관실의 커다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사령관은 북극의 바다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여러분, 자네들은 잠수 사관 후보생으로서 마침내 최후의 실지 훈련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온 세계에는 전쟁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해저 함대에는 여전히 중대한 임무가 부과되어 있다. 갖가지 해저의 위협으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지키고, 나아가서는 해저 개발의 추진력이 되는 것이다. 해저 개발에는 각국의 협력 태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든나이트는 미국에서 발명되었으나, 해저 농원의 기술은 영국에서 개발되었다. 지저 굴진 카는 독일의 착상이다. 지진 예지의 기술은 일본인의 손으로 개발되었다. 바다의 위험에 대해서도 온 세계가 합심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해저 함대는 과거의 빛나는 영광에 언제 까지나 취하고 있을 수는 없다. 세계 정세와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해저 개발 기술의 진보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사령관은 잠수사관 학교의 표어를 입에 올려 또 한번 우리를 돌아보았다. "여러분은 우리 잠수 사관 학교의 학술, 훈련, 더욱이 심리 테스트에 있어서 모두가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특히 새로운 과학 기술의 특별 훈련생으로 발탁된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밤 2100시(밤 9시)에 출발하여 뉴욕과 싱가폴을 경유해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로 향하는 것이다. 임무에 대해서는 해저 함대 그라카타우 기지에서 지시를 받도록. 이상 끝. 해산!" 우리는 재빠르게 경례를 하고 뒤로 돌아서 사령관 실을 나왔다. "내가 말한 대로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거든." 할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특별 훈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해저 지진 도시   우리들의 제트기는 속도를 늦추면서 해상에 떠 있는 엑스(X)형의 비행장을 향해 고도를 내렸다. "저 5천 미터 바로 아래에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가 있다네." 할리는 그 해저 도시가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는 것이었다. 활주로에 착륙한 제트기는 곧 굵은 로프로 칭칭 묶였다. 항공 모함의 경우와 같았다. 우리는 제트기에서 열대의 태양이 내리쪼이는 활주로에 내려섰다. 비행장은 3백 미터의 활주로가 두 줄기 직각으로 교차한 곳이다. 주위의 해면은 꽤 파도가 세었다. 그렇지만 해면에서 활주로까지는 약 70미터 가량 되기 때문에, 어떠한 높은 파도가 밀어닥쳐도 안전한 것이다. 떠 있는 비행장은 해저 도시의 현관인 동시에 배기(공기를 밖으로 뽑아 냄)장치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든나이트로 덮인 유달리 특별한 관이 신선한 공기를 해저 도시로 보내고, 더럽혀진 공기를 해상으로 토해 내는 것이다. 낡은 형의 해저 도시는 더러워진 공기를 정화(더러운 것 없애고 깨끗하게 함)해서 다시 사용하는 장치를 구비하고 있지만, 최신식의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서는 해상에서 직접 신선한 공기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들은 5천 미터의 바다 밑 공기를 뱉어 내는 배기통 옆을 지나칠 때, 차고 축축한 공기의 냄새며, 염수(소금물) 냄새며, 사람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리운 냄새였다. 할리의 안내로 우리들은 바다 밑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 승강기는 무서운 속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와 밥은 저도 모르게 잡을 것을 찾으려고 허둥대었다. 이것을 보고 할리가 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자네들은 무엇인가 꽉 잡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나? 승강기가 무서워서야 어디 지진이라도 일어났을 땐 어떡할 건가?" 그러자 밥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도 마주 대답을 했다. "승강기 속도에 놀랐을 뿐이네. 자네가 서 있을 수 있다면 나와 짐도 서 있을 수 있지." 승강기는 4천 미터의 바다 밑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문이 열리자, 나는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별세계에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이곳에는 눈부신 푸른 하늘도, 상쾌한 바닷바람도 없었다.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오직 깊이 5천 미터의 인도양 뿐인 것이다! 해상으로 통하는 승강기의 발착소는 해저 도시의 최상층에 있었다. 할리의 안내로 우리는 다른 승강기에 갈아타고 중간에서 긴 통로를 걸어 최하층부 부근에 있는 해저 함대 기지로 향했다. 넓은 녹지 내에서는 땅 위에 나무와 풀이 밝은 태양등 밑에 자라고 있었다. 바다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이상의 사치는 없을 것이다. 두터운 현창(뱃전에 댄 창문)으로 도움 밖에 펼쳐지는 해저 농원이 보였다. 청백색의 해저 식물의 숲이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상업 지구를 지나갔다. 이곳에는 많은 상사가 모여 해산물의 매매와, 주식이나 투기의 거래가 번창하게 행하여지고 있었다. "저것을 보게. 우리 아버지의 착안일세!" 할리가 외쳤다. 그것은 '그라카타우 수속 거래소'의 출입구였다. 기둥과 벽이 잠수함을 본따서 녹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주식 거래소 창립 멤버의 한 사람으로 설계를 맡았었지." "어럽쇼, 그건 또 아주 훌륭하신데......." 밥은 칭찬인지 빈정대는 것인지 잘 분간할 수 없는 묘한 말을 했다. 이것이 할리의 비위를 거슬린 모양이다. "밥, 자넨 그라카타우가 마음에 안 드나?" "아니, 그렇지 않네. 떠 있는 비행장에 깜짝 놀랐네. 딴 해저 도시에선 보지 못했으니까." "다른 구식 해저 도시를 그라카타우하고 같이 취급하지 말아주게. 해상에 떠있는 비행장 건설비는 자그마치 5억 불이네! 완성하기까지 3년의 세월이 걸렸지. 그렇지만 투자 대상으로서는 확실한 걸세." 할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계속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해상에 뜨는 비행장 건설의 정보를 입수하자 재빨리 투자했었네. 어떻든 그 통풍관은 해저 도시의 생명줄이니까 말일세. "통풍관이 끊어질 염려는 없나?" "어떨 때 끊어지리라고 생각하나?" "폭풍우 때지.“ "걱정 말게 .통풍관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구조이네. 그리고 해상은 아무리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비행장 주위에는 전자 방파 장치의 부이(부표)가 떠 있으니까 직접 피해를 받는 일은 없네." "이 지방은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대인데, 지진 때 굉장히 높은 물결이 휘몰아치면?" "해일 말인가? 지진으로 일어나는 높은 물결은 정확하게 말하면 해일이라고 그런다네. 해일은 분명히 해안에서는 속도가 빠르고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만 해저에서는 그처럼 무서운 건 아닐세. 해일이 지나간 것이 측량기에는 나타나도, 우리들은 느끼지 못할 정도니까." 밥이 잠잠해졌기 때문에 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가 되었다. "밥, 지진을 무서워하지 말게. 이곳 주민들은 모두 지진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네. 자기들 스스로가 이곳을 '해저 지진 도시'라고 부를 정도니까. 그렇지만 이 해저 도시는 진도(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지면의 진동의 세기) 9의 지진에도 이겨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단 말일세. 진도 9도 이상의 지진 같은 건 좀처럼 일어나는 게 아닐세.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안심하고 장사를 할 수 있는 걸세." 확실히 할리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생활이나 지진에 대해서 상세하였다. 그렇지만 친구에 대한 동정심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싫어하는 지진 이야기를 듣고, 밥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굳어졌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다행히 해저 함대 기지 정문 앞에 이르러 간신히 할리의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는 진홍빛 제복을 입은 위병에게 신분증명서를 보이고 본부로 들어갔다. 본부에서는 깨끗이 면도를 한 부관이 우리를 맞았다. "여러분은 오늘로써 당 기지에 배속된다. 해리스 준위가 제군을 기숙사로 안내한다. 그리고 1600시에 스테이션(장소) 케이(K)에서 다나까 중위를 만난다. 여러분들은 다나까 중위 지휘하에 들어간다. 이상." "스테이션 케이(K)는 어디 있습니까?" 할리가 불안스럽게 물었다. "이곳에서부터 3천 미터의 지하다." "3천......." 할리는 숨을 삼켰다. 정보통인 할리도 해저 도시의 지하에 관한 정보까지는 입수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와 밥도 질문하고 싶었는데, 그러기 전에 부관이 말했다. "그러면 해리스 준위가 기숙사에 안내한다. 임무에 관해서는 다나까 중위에게 물어라." 부관이 '해산'이라고 하기 전에 할리가 외쳤다. "부관님, 이 해저 도시에 나의 가족이 있습니다. 아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나의 아버지는 이 곳에 주식 거래소를 창설한 벤 단소프입니다. 아버지를 방문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을 수 있습니까?" 부관은 잠자코 할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을까요?" 할리가 재촉하자 부관은 냉정하게 말했다. "안된다." "어째서입니까? 할리는 불만스럽게 되물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자네 직속 상관은 다나까 중위다. 다나까 중위에게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필경 안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라카타우 기지의 훈련을 위해 배속 받은 사관 후보생은 최초의 두 주일은 외출할 수 없는 것이 규칙이니까." "두 주일이나?" 할리는 다시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부관님, 나의 아버지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알고 있다. 그러나 군은 한낱 사관 후보생이다!" "알겠습니다." "비로소 할리의 목소리는 자신을 잃었다. 우리는 경례를 했다. 이 때 밥이 말했다. "또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 자기 임무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좋다!" 부관은 갑자기 인간적인 표정이 되었다. "나는 자네들이 부럽다." "부럽다고요?" "그렇지. 자네들의 임무는 우리 해저 함대의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다. 자네들 세 사람은 해양 지진학, 즉 해저 지진의 과학을 습득하기 위해서 파견되어 온 것이다. 해양뿐만 아니라 해저의 지하까지 과학적 조사를 하는 것이다." 바다 밑의 또 그 지하의 과학 조사!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것 같은 임무가 아닌가! 우리들은 해리스 준위에게 안내되어 기지 안의 기숙사로 향했다. 거대한 수리 독(뱃도랑)에는 이든나이트로 뒤덮인 잠수함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독에서 울려오는 금속성이 더 한층 기지다운 활기를 느끼게 하였다. 나는 걸으면서 부관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의 훈련 장소는 해저의 지하 3천 미터다. 3천 미터의 해저조차 무서운 수압을 받고 있는데, 또다시 3천 미터나 굳은 바위 아래로 들어간다면 위험은 몇 배 아니 몇 십 배나 될 것이다. 해저 조사는 나의 숙부 스튜어트 이든이 발명한 이든나이트 포장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해저 밑바닥의 땅 속 조사는 아직 미지수다. 지금 원자력 지저 굴진 카가 실험 단계에 들어가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올라타고 땅 속을 안전하게 항행하기까지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로 기체 내의 냉방이 문제다. 둘째가 기체의 강도다. 이든나이트 강철판(장갑)은 3천 미터까지의 수압에는 견디어 낼 수 있지만, 3천 미터나 더한 암석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셋째로 방사능에 따른 오염 문제다. 최초의 원자력 드릴은 네바다 산맥 전체를 방사능으로 오염시켜 버려서 100년 동안이나 인간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밥과 할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은 밥보다도 할리 쪽이 맥이 빠져 힘이 없었다. 자랑한 정보에는 스테이션 케이(K)에 관한 것이 빠져 있었으며,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중요 인물인 아버지의 권위도 해저 함대의 규칙을 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할리가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진 예지   심해(깊은 바다)에는 태양 광선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육상과 같은 낮이 없다. 바다가 생긴 이래로 심해는 줄곧 밤만이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는 것을 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버뮤다에 있는 해저 함대 관측소는 하루를 스물 넷으로 나눈 '해저 시간'을 정하여, 이것이 온 세계의 해저 도시에서 쓰여지게 되었다. 1515시에 해리스 준위가 우리들을 스테이션 케이(K)로 안내하기 위해서 기숙사까지 마중을 나왔다. 우리들은 승강기로 해저 도시의 맨 하층부에 내렸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향하는 곳은 여기보다 훨씬 지하에 있었다. 최하층부의 음침한 창고 지구를 지나치자 통풍관이 가득찬 어두운 터널이며, 해저 도시의 활동을 지탱하고 있는 각종의 파이프가 보였다. 또한 펌프의 돌아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해저 도시에서 사용한 더러운 물을 모두 이곳에 모아 굉장한 압력으로 도움 밖의 바다로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터널 안의 통로로 들어서자 머리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치형의 친정은 검은 현무암(검은 잿빛의 화산암)으로, 해저 도시를 만들 때 해저의 암반(고르지 않은 큰 바위로 된 땅)을 파던 드릴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윽고 우리들은 금속 문에 부딪쳤다. 그 속에서 제복의 위병이 나와서 외친다. "정지!" 해리스 준위는 우리들의 배속 명령서의 사본을 보였다. 위병은 엄격한 눈초리로 명령서의 문자를 한 자 한 자 확인하듯이 읽고 나서야 돌려주었다. 기지보다 경계가 엄중하다. 스테이션 케이(K)는 아주 중요한 장소인가 보다. "가세." 해리스 준위는 문을 들어서자 우리들을 다른 승강기로 안내했다. 그것은 내가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조그만 원형의 승강기의 바구니가 원통형의 틀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바위를 파낸 틀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이든나이트의 엷은 막이 직접 둘러쳐져 있었다. 그것도 그럴 만하다. 회전축(긴 손잡이)에는 바닷물과 암석의 무서운 압력이 걸려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올라타자 승강기는 내려가기 시작한다. 주위의 이든나이트가 푸른색, 흰색, 초록색 등 가지 각각으로 변화한다. 그 아름다운 빛이 나를 격려해 주는 것 같았다. 숙부가 발명한 이든나이트는 우리 이든 집안의 자랑인 것이다. 언뜻 보니 할리의 얼굴은 백묵처럼 새하얗다. 밥은 굳어진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수 분 사이에 승강기는 3천 미터의 굴대를 내려갔다. 지금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두께 3천 미터의 암석층과, 거대한 해저 도시와, 그 위에 또 깊이 3천 미터의 인도양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승강기를 나와 이든나이트 로커를 지나 아치형 천장의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이곳에는 이든나이트가 둘러 처져 있지 않았다. 필경 압력 콘크리트로 보강했을 뿐일 것이다. 몹시 습하고 어둡다. 해저에서 3천 미터나 견고한 바위로 차단되어 있다고 하는데도, 천장이며 벽에서 물이 스며든 자리가 많았다. 그것을 보고 있는 사이에도 불어서 조그만 물방울이 되어 벽을 타고 흘러내려서 현무암 바닥에 새겨진 가느다란 도랑으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든나이트가 씌워 있지 않다네. 사용하면 곤란하지. 지저 굴진 카가 출입할 수 없게 되니까 말이네." 하고, 해리스 준위가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아연해졌다. 마치 꿈 같은 계획이 아닌가. 지저 굴진 카가 굳은 현무암 속을 자유롭게 달리며 암벽을 뚫고 이 지저 기지로 출입한다는 것이다. 잠시 후 우리들은 스테이션 케이(K)의 본부에 닿았다. 본부라고는 하나 인공조명이 붙은 자그만 사무실이다. 우리들의 새 지휘관인 다나까 중위는 여위긴 했지만, 정력적인 느낌이 드는 일본인이었다. "세 사람 모두 잘 왔네.“ 중위는 우리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군의 숙부, 스튜어트 이든 씨의 일을 잘 알고 있다네. 훌륭한 인물일세. 일부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쓸 필요 없네. 모두가 시기하고 있단 말이네." "고맙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지만 별로 반갑지가 않았다. 숙부의 나쁜 소문이 이런 곳까지 퍼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우리들은 의자에 앉았다. 추운 방이다. 조명이 있는데도 어쩐지 컴컴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필경 축축이 젖은 검은 현무암의 벽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머리 위에 8천 미터에 달하는 암흑의 물과 바위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추운 것은 어째서일까? 다나까 중위는 우리들의 의문을 미리 알아차리고 말했다. "군들은 여기가 어째서 덥지 않은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옳은 생각이다. 이만큼 깊이 땅 속으로 들어왔으면 지구 내부의 열로 온도가 꽤 있을 터이다. 그런데도 추울 정도로 서늘하다는 것은 강력한 냉방 장치가 가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이 서늘한 것은 심리적인 문제, 즉 해저에서 3천 미터 지하에 있다는 공포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주위의 바위에 해저로부터 찬물이 스며들어 지열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머지 않아 지오존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원하는 대로 더워질 테니 걱정할 것 없네." 다나까 중위는 우리들처럼 가느다란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지오존데......." 들어 본 일은 있어도 본 일은 없다. 거기 대해 내가 질문하려고 하는 순간 할리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위님, 지금 곧 24시간의 외출 허가를 주실 수 없습니까.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가족?" "아버지입니다." 할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는 벤 단소프입니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중요 인물로서......." "알고 있네." 다나까 중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외출 허가는 안 된다. 금일부터 2주일간 자네들 세 사람은 매일 16시간 여기 있지 않으면 안되네. 즉 하루 24시간 중에서, 쉬는 시간인 8시간을 제하고는 나머지 전부가 근무 시간이라는 것일세. 알겠나?" 그렇게 말하고 다나까 중위는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있는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자 뒤 벽면에 지도가 나타났다. 내가 본 일도 없는 이상한 지도다. 그것은 해저의 지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위에 쓰여진 무수한 선과 그림자의 부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자네들은 사관 후보생으로서 지금까지 예가 없을 만큼 어려운 훈련을 받기 위해 이 스테이션 케이(K)에 배속된 것이다. 훈련의 내용은 지금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 싼 바위, 해면 밑 8천 미터, 해저 밑 3천 미터의 암반의 조사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나까 중위는 계속했다. "자네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해저 지진 예지 과학을 습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훈련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굉장한 특별 훈련이었다. 잠수 사관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무렵, 훈련이 힘들어서 비명을 올렸지만, 이번의 특별 훈련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매일 해저 아래 무서운 바위 속에 쳐 넣어져서 쉬는 시간도 없고, 숨 쉴 새도 없이 몽땅 쥐어짜졌다. 학습 때나 실습 때나 다나까 중위의 독설이 계속해서 우리들을 채찍질했다. 다나까 중위는 부하를 아끼는 훌륭한 군인이었으나, 겨우 2주일 동안만으로 우리들의 머릿속에 해저 지진학의 대강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다나까 중위에게 살해당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불안해질 때도 있었다. 우리들의 실수를 발견하고 다가온 때의 얼굴은 마치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만큼 무서운 모습이었다. 최초의 공부는 지진의 이론이었다. 장시간의 수업과 실험이 반복되었다. "지각(지구의 겉껍데기)이란 무엇인가? 암석은 튼튼한가? 아니 압력에 대해서는 약하다. 쉽게 어긋나거나 움직이거나 한다. 평균해서 이동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부분적으로 융기하지나 함몰하거나 옆으로 밀려 어긋나거나 뒤틀리거나 한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바위에 가소성 (고체가 힘을 받아 형체가 바뀐 것이, 그 힘이 없어져도 처음 모양으로 바뀌지 않는 현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뒤틀리는 게 축적된다. 그것이 점점 증대해져서 마침내 폭발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지진은 돌연 풀어놔 준 뒤틀림의 에너지를 소산(흩어지고 사라지고 하여 없어짐)하기 위한 진동이다.“ 라고, 다나까 중위는 설명했다. 또한 우리들은 지진파(지진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퍼지는 여러 가지 파동)의 주요한 형에 대해서도 배워야 했다. 최초로 지진 관측기에 잡히는 것이 피(P)파(종파)다. 이것은 가장 빠른 것으로서 지저의 하층을 초속 8킬로의 속도로 전달되고, 그 진행 방향하고 수직의 진동, 즉 세로로 흔들림을 일으킨다. 다음에 에스(S)파(횡파가 온다. 이것은 초속 5킬로로 전달되며, 진행 방향과 수평 진동, 즉 옆으로 흔들린다. 그리고 가장 길고 강력한 엘(L)파가 온다. 이 엘( L)파가 무서운 파괴력을 뒤흔드는 것이다. 따라서 피(P)파하고 에스(S)파를 관측하면 파괴적인 엘(L)파를 예지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을 우리들은 배운 것이다. 우리들은 다나까 중위의 뒤에 걸려 있는 것 같은 관측 지도를 한 사람씩 작성해야 했다. 그것은 스테이션 케이(K)에서 160킬로 이내의 지각에 축적되어 있는 뒤틀림, 단층, 열 에너지, 아주 약한 지각 진동, 암반의 이동 등 지진에 관련이 있는 모든 자료를 나타낸 것이다. 우리들의 지도를 하나씩 비평하자, 간신히 다나까 중위는 한숨 돌렸다. 우리도 휴식 시간을 얻어 의자에 걸터앉아 콘크리트 벽에 생긴 소금 부스러기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돌연 밥이 중위를 보고 물었다. "중위님, 해리스 중위는 여기는 장래 지저 굴진 카가 출입하기 위해 이든나이트를 둘러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만 사실입니까?" "아니, 예지의 문제일세." 다나까 중위는 미소를 띠면서 일어서서 우리들이 만든 지도를 만졌다. "여기에 쓰여 있는 자료는 모두 관측 기계로 입수한 것일세. 기계는 모두가 대단히 민감해. 만약에 해저 도시 옆에 놓아둔다면 교통 기관의 진동은 물론 펌프의 진동마저 기록해 버릴 걸세. 그래서 스테이션 케이(K)는 해저 도시로부터 3천 미터나 지하에 설치되어 있다네. 자네들도 여기서는 조용히 걸어다녀야 하네. 무거운 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거나 하면 안 되네. 이든나이트의 보호막을 둘러치지 않은 것도 관측 기계 때문일세. 지진의 진동은 바위로 전달되어 오네. 만일에 이 스테이션 안에 이든나이트를 둘러쳐 버리면 지진의 진동을 막아서 관측 기계가 소용이 닿지 않게 되네." 여기서 다나까 중위는 말에 힘을 주었다. "우리들의 하는 일은 극비일세. 이 스테이션 밖에서는 우리 일에 관해서 절대로 말을 해선 안 되네." "어째서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러자 다나까 중위의 길다란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해저 지진 예지 기술에는 비참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네. 초기의 해저 지진 예지 기술 개발자들은 지나치게 자신을 가졌었지. 그것이 생각지도 않은 과오를 범했네. 물론 당시는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 우수한 관측 기계가 없었으며, 우리들이 손에 넣고 있는 것 같은 자료도 없었네. 그러나 과오가 너무나 많았네. 그들은 때때로 부정확한 예지 정보를 발표했었지. 그 최악의 예가 일본의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 경우였네." 다나까 중위는 한 손을 들어서 저주스러운 기억을 떨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창백한 이마를 문질렀다. "나는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의 비극을 너무나 잘 알고 있네. 그 때의 생존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해저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네 " 우리들을 둘러보면서 다나까 중위는 계속하였다. "나는 아직 어린애였지. 우리 가족은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가 생겼을 때 요꼬하마에서 이주했었네. 그해 여름 지진이 계속해서 일어났지만 해저 도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네. 나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 어머니가 지진이 두려워서 해저 도시에서 떠나고 싶다고 애원했어도 아버지는 상대하지 않았었네. 한편으론 돈 관계도 있었지. 요꼬하마에서 해저 도시에 이주하느라고 아버지는 저금을 거의 다 써 버렸기 때문이었네. 그렇지만 결국은 돈 문제보다도 용기의 문제였겠지. 아버지는 지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네. 당시 거기에는 해저 지진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불린 지진학자가 있었지. 자네들도 이름쯤은 알고 있을 테지." "존 고에쓰 박사 말일세. 고에쓰 박사는 해저 도시의 지진 예보 스테이션의 주임이었지. 그래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지진 예보를 하였네. 일련의 지진은 작은 것 뿐으로서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를 파괴할만한 큰 지진이 일어날 염려는 전연 없다고 잘라 말했네. 해저 지도를 보이면서 난세이 나하 위치 해구에는 앞으로 1년간 대지진이 일어날 위험이 전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피난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이야기했네. 해저 지도는 설득력이 있었지. 그러나 고에쓰 박사의 예보는 틀린 것이었네." 다나까 중위는 검은 머리를 흔들며 갸름한 얼굴을 괴로운 듯이 찡그렸다. "그것은 금요일 날 점심 전이었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양친이 나를 본토의 학교로 도로 보낼 얘기를 하고 있었네. 마침 학기가 끝날 때여서 때가 좋았었지. 전학 얘기를 끄집어낸 분은 어머니였어. 이 때 어머니는 고에쓰 박사의 텔레비전 방송을 듣고 그렇게 지진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예감이라고 할까,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던 지도 알 수 없지. 그날밤 양친은 나를 요꼬하마로 보냈었네. 그리고 다음날 오후 대지진이 일어난 걸세.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는 순식간에 파괴되었으며, 생존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네.“ 입을 다물고 다나까 중위는 그냥 선 채로 있었다. 그 검은 눈은 콘크리트 벽에서 스며 나와 방바닥의 가느다란 도랑으로 소리도 없이 흘러 들어가는 작은 물줄기를 쫓고 있었다. 할리는 무엇인가 정보라도 끌어내려는 눈초리로 다나까 중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밥은 젖은 콘크리트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일을 극비에 붙여두는 이유이네." 또다시 다나까 중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진 예보는 신용이 없다.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의 시민들을 피난시키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물론 나의 부모님도 희생자네. 따라서 해저 함대가 이 스테이션에서 지진 예지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어도 공적으로 예보를 하는 것을 삼가고 있네. 지금 우리들이 하는 일은 고에쓰 박사의 실패로 죽은 사람들의 수 이상의 사람들을 지진에서 구할 수가 있네. 그렇지만 우리들은 우선 지진 예지를 정확한 것으로 하는 방법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시기가 올 때까지는, 우리들이 여기서 진행시키고 있는 일에 관해서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된다. 이건 명령이다."     지오존데   어느 날 다나까 중위는 우리들이 작성 중인 지진파 측정도를 들여다보고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주 좋았어. 이제야 자네들도 일이 익숙해진 모양이군. 이쯤에서 자네들에게 새로운 걸 하나 보여 주기로 하지." 그러면서 다나까 중위는 원통형의 노란 플라스틱 용기를 끄집어냈다. "지진 예지의 열쇠는 관측이야. 만약에 해저 밑 100 킬로의 지진파를 관측할 수 있다면 해저 도시에 어느 정도의 지진이 올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오랫동안 우리들 지진학자의 꿈이었지만 지금 간신히 실현한 것이다." 다나까 중위는 용기를 열었다. 그 안에는 길이 60센티, 직경 5센티의 원통형인 기계가 들어 있었다. 우리들이 잠수 사관 학교 박물관에서 본 지저 굴진 카의 모형을 소형으로 만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지오존데네. 자네들도 알고 있듯이 지오존데는 고공(높은 공중)의 기온, 습도, 기압 등을 측정하지. 그런데 이 지오존데는 지각 속의 깊은 곳을 조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관측 기계일세. 이 머리 부분에 원자력 드릴이 붙어 있네. 그리고 주위는 이든나이트 막으로 포장하고 내부에 감도가 좋은 관측 기계와 음파 발신기가 조립되어 있네. 이든나이트 막은 땅 속의 굉장한 압력으로부터 지오존데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관측 기계의 기능을 막아 버리네. 그래서 1분간에 한 번, 10분의 1초 동안만 자동적으로 이든나이트 막이 열리도록 고안되었네. 이것이라면 땅 속의 압력에도 견뎌 내며, 또한 땅 속 상태를 관측할 수도 있지. 가장 깊은 진원(지진이 일어난 곳)까지 조사할 수가 있는 것이네. 이 새 무기로 인해 우리들은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의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아도 될 걸세." 다나까 중위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덧붙였다. "두 주일의 훈련기간은 끝났으니 내일 자네들에게 외출 허가를 주겠네." 당장 할리가 생기가 도는 목소리로 외쳤다. "중위님, 그 말씀을 저는 고대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자네 아버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네. 나는 내일 1200시부터의 외출 허가증을 준비할 작정이네. 오전 중에는 현재의 자료를 근거로 해서 실재로 지진 예지를 하기로 하세. 그것을 하고 나면 외출해도 좋아. 이 2주일 동안 자네들은 참으로 잘 참았네." 다나까 중위는 우리들이 작성한 지진파 측정도를 보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해산!" 곧 우리들은 3천 미터 위의 기지로 돌아가 식당에 들어갔다. 이 때 밥이 잠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에는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식사하는 동안 할리는 줄곧 자기 아버지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기 아버지가 통치하는 해저 왕국에 돌아온 황태자처럼 득의양양 했다. 그리나 밥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기숙사에 돌아가서 나는 내일의 실습에 대비해서 준비를 했다. 할리는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의 모습은 또다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의 극미소 지진계 (극히 미소한 지진동을 자동적으로 기록하게 된 계기)를 조사하다가 고장난 것을 알았다. 이것으로는 내일 실습에 사용할 수 없다. 나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하고 교환하기 위해서 비품 창고로 향했다. 기숙사를 나가 조금 걸어가니까 밥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나이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필경 중국이나 말레이지아 사람일 것이다. 갈색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조그만 사나이였으며, 수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밥은 무엇인가를 건네주는 모양으로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외쳤다. "여보게,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내 책을 어떻게 했나?" 작은 사나이는 나를 힐끗 보고서 가슴이 철렁한 모양이었다. 그는 곧 쇳소리로 외쳤다. "아아뇨, 그런! 당신의 책 같은 것은 훔친 일이 없어요!" "무슨 일인가?" 하고, 내가 물었다. "이 녀석이 내 고에쓰 박사의 책을 훔쳤단 말일세." "고에쓰 박사의 책?" 그것은 고에쓰 박사 저술의 해저 지진학 원론으로 우리들이 교과서로 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밥, 그 책은 할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나? 분명히 할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는 걸.“"할리에게? 참 그랬었지......." 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 작은 사나이를 보고 고함친다. "좋아, 알았다. 빨리 꺼져 버려!" 작은 사나이는 밥에게 맞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한쪽 손을 머리에 올려놓고 통로를 달려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나는 숙사로 돌아왔다. 역시 밥의 책은 할리의 침대 위 선반에 반듯하게 올려져 있었다. "이것 보게!" 내가 가리키자 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생각났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어쩐지 침착하지 못한 모양으로, "좀 자겠네." 하고는, 자기 침대에 기어들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나는 밥의 일을 걱정하면서 비품 창고로 갔다. 거기서 극미소 지진계를 찾고, 그리고 찾는 김에 지오존데를 점검해 두려고 생각했다. 지오존데는 방습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그 케이스를 보자 나는 어쩐지 밥의 수상한 행동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뚜껑을 열었다. "없다!" 나는 망연해졌다. 어느 틈엔가 지오존데가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아침. 나는 지오존데의 분실에 관하여 스테이션 케이(K)에서 다나까 중위에게 보고했다. "그렇게 중대한 일을 왜 곧 보고하러 오지 않았나? 책상을 두드리면서 다나까 중위는 고함쳤다. "그게, 글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제 중으로 보고하지 않은 것은 밥의 일로 머리가 가득 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의 수상한 행동을 다나까 중위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별로 없단 말인가? 좋아, 자네들 세 사람은 여기서 지진 예지 작업을 시작하게. 나는 기지의 수사본부에 갔다오겠다. 해저 함대의 소중한 재산이 도둑 맞았대서야 되나?" 다나까 중위는 떠났다. 분명히 큰 사건이었다. 지오존데의 도난으로 말미암아 극비에 붙이고 있는 지진 예보에 관한 일이 일반에게 새어 나가면 귀찮게된다. 스테이션 케이(K)로 돌아왔을 때 다나까 중위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누군가가 지오존데 같은 것을 집어내는 것을 보지 못했나?"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만 밥과 작은 수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밥은 그 사나이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분명하지가 않다. "좋다. 수사는 기지의 수사 본부에 맡기기로 하자. 그건 그렇고 자네들의 지진 예지는 다 되었나? 보여 주게.“ 다나까 중위는 우리들의 지진파 측정도를 모아 한 장씩 주의 깊게 점검하였다. 다나까 중위 앞에는 공식 지진파 측정도가 있었다. 스테이션 케이(K)에서는 최신식 관측 기계에 의해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지하의 움직임을 항상 24시간 앞까지 예지하고 있다. 우리들의 측정도를 공식 측정도하고 비교하고서 다나까 중위는, "정확한 예지는 정확한 관측에서 생긴다. 대단히 훌륭하다." 이렇게 말하고, 할리와 나에게 측정도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밥에게 얼굴을 돌렸다. "나는 자네 계산에는 동의할 수 없네. 자네는 오늘 2100시에 진도 2의 지진이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습격한다고 예고하고 있어. 이건 정확한가?" "네." 하고 밥은 표정도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스테이션 케이(K)의 공식 측정에도 그러한 지진은 예지 되어 있지 않아. 단소프나 이든의 측정에도 없네. 어떻게 해서 자네는 이러한 예지를 하였나?" "관측 기계가 표시한 숫자에서입니다. 진원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북북동 31킬로 지점입니다. 열류(열의 흐름)가......." "그렇다. 열류를 판독(뜻을 헤아려 읽음)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하고 틀리는 거다. 애석하지만 이 지진 예지로는 자네에게 외출 허가증을 줄 수 없군." "그렇지만 중위님......." "완전한 지진 예지를 하는 것이 자네들의 임무일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자는 외출 허가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해산......." 다나까 중위는 차갑게 맡했다. 기지로 돌아온 나와 할리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진홍빛 제복을 입고 외출 허가증을 받기 위해서 해리스 준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밥은 나와 할리가 샤워를 하고 있는 사이에 어디론가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쪽이 내게 있어서는 고마왔다. 외출 허가가 취소된 밥에게 외출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리는 기쁨에 들떠서 이제부터의 예정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짐, 나하고 함께 가세. 우리 아버지하고 같이 식사를 하세. 아버지는 아주 최고급의 해저 요리를 자네에게 한턱 낼 걸세. 아버지는 일류 요리사를 쓰고 있단 말이네. 자, 같이 가세 짐!" 해리스 준위는 책상에서 전화 중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하고, 수화기를 놓고는 해리스 준위는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 밥이 어디 있는지 모르나?" "기숙사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자, 해리스, 우리들의 외출 허가증을 주게." 하고, 할리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게. 지금 다나까 중위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다나까 중위는 밥에게 특별 근무를 시킬 테니까 2000시에 스테이션 케이(K)로 오도록 연락하라고 말하고 있어. 그런데 밥은 기숙사에 없거든......." "이상한데......." 할리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들은 밥의 특별 근무가 어떤 것인지 곧 알아차렸다. 2000시는 밥이 예지 한 진도 2의 지진이 일어나는 1 시간 전이다. 필경 다나까 중위는 밥이 예지 한 지진이 일어나는 시각에 밥을 스테이션 케이(K)에 있게 해서 예지가 틀렸다는 것을 체험시킬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밥은 없어졌다. "밥의 외출 허가증도 없어졌네." 그렇게 말하면서 해리스 준위는 책상 서랍을 열어 우리들에게 보였다. "자네들 것과 함께 여기 넣어 두었었네. 그런데 다나까 중위한테서 밥의 외출은 취소하라고 연락이 왔기에 밥의 외출 허가증을 폐기하려고 했지. 그런데 벌써 없어진 후였어."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서랍 속을 들여 다 보았다. 참으로 밥은 수상한 행동만 한다. 내가 지오존데의 분실을 알기 직전에 밥은 수상한 중국인 수위하고 함께 있었다. 그 때의 행동도 납득이 안 간다. 그렇지만 밥은 나의 친구다. 좋지 않은 일은 딱 질색으로 생각하는 사나이다. 내게는 밥이 해저 함대의 규율을 무시하고 무단 외출을 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네들은 외출하기 전에 밥을 찾는 것이 좋을걸. 다나까 중위는 자네들이 임무를 완수하는 한, 부하를 극진히 사랑하는 훌륭한 상관이지. 그렇지만 자네들이 임무를 소홀히 하게 되면 어떤 태도로 나올지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고 해리스 준위는 할리와 나의 외출 허가증을 내 주었다. 우리들은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밥은 없었다. 그리고 밥의 제복도 없었다. "그 자식은 무단 외출한 거야! 자넨 알고 있었지?" 하고, 할리가 외쳤다. 나도 화가 나서 고함쳤다. "한 대 갈길 테다! 밥은 훌륭한 사관 후보생이야. 그 따위 짓을 할 리 없어!" "그럼 밥은 어디 있나?" 할리가 추궁해 왔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미 행   할리는 나를 동정하는 듯이 말했다. "밥은 지금쯤 시내에 있어. 틀림없어." "그렇게는 생각할 수 없네." 나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할리의 말이 옳은 것 같이 생각되었다. 위병은 우리들의 허가증을 조사했다. 우리들은 기지를 나오자 승강기로 시내로 올라갔다. 펌프실과 공기 순환 제어실 옆을 지나, 잠수 화물선이 이든나이트 포장의 압력실에 코를 박고 있는 로커를 지나쳤다. 나는 돌연 말했다. "밥을 찾자." "흥, 자네도 그 자식의 무단외출을 인정했구먼......." 할리는 멈춰 서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손목 시계에 눈길을 주고 약간 망설이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지....... 1300시에 아버지하고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거든. 같이 가지 않겠나?" "난 밥을 찾겠네. 제발 부탁이니 도와주게." "도와주지. 그렇지만 식사를 안 할 순 없잖나? 나는 오랫만에 아버지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먹고 싶어 견딜 수 없단 말일세. 식사가 먼저야. 밥은 1900시까지만 찾아내면 될 게 아닌가?" 우리들은 환상 자동 주로에 올라타고 또 시의 중앙으로 향하는 방사상 자동 주로로 갈아탔다. "상부 동남구로 가는 사람은 대개 비번(당번이 아닌 사람들)이라네. 거기에는 각종의 상점과 극장, 레스토랑(서양 요리점)이 모여 있지. 여보게 자동 주로를 타고 있을 땐 몸의 중심을 잘 잡도록 하게. 자, 나처럼 주로의 전방을 보게, 짐." 하고, 할리가 말했다. "그 따위쯤, 이미 알고 있네." 내가 대답하니까 할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네는 이 해저 도시에 온 지 아직 2주밖에 되지 않았네. 하지만 난 태어나면서부터 죽 여기서 살아왔단 말야. 선배의 충고는 고분고분 듣는 법이지." 다른 승강기로 나를 안내하면서 할리는 계속 얘기했다. "이 해저 도시는 꼭대기에서 해상에 떠 있는 비행장으로 연결된 튜브만 빼놓으면 완전한 반구형일세. 직경은 6백 미터, 높이가 3백 미터니까. 물론 해저 밑에 있는 배수 펌프와 창고 지구, 스테이션 케이(K)는 포함시키지 않고 말이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밥이 있지 않을까 해서 승강구 안의 사람들과 통행인들을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진이 해저 도시를 파괴할 염려는 거의 없지. 공식으로는 진도 8, 실제로는 진도 9의 지진에도 이겨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작은 지진일지라도 이든나이트로 포장되지 않은 지하에 틈이 생기면 큰일이지. 거기서부터 해수가 침입해 올 테니까.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해저 도시는 8개 구로 나누어져 있네. 만약에 해수 침입의 위험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각 구가 셔터를 내리고 독립한다네. 이렇게 하면 가령 몇 개 구가 침수 당한다 해도 나머지 구에 있는 사람들은 구조되거든. 물론 그런 일이 없기를 신께 기도하지만, 만약에 동력 공급 장치가 고장난다면 각 구의 자동 셔터가 가동하지 못할 테니까 말일세." 할리는 계속 지껄여 댔다. 그 동안 나는 밥의 모습을 계속 찾았다. 어느 샌가 우리들은 인파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는 12층일세. 가장 번잡한 상점 거리지." 라고, 할리가 설명했다. 머리 위 12미터의 금속 천장에 조명등이 가지런히 달려 있는 외에는 지상 도시의 상점 거리하고 거의 다른 것이 없었다. 입체 영화 극장과 레스토랑을 에워싸는 인파 속을 밀어 헤치듯이 걸어갔다. 일반 시민, 잠수 화물선의 승무원, 잠수 객선의 승객, 거기에다 해저 함대의 제복을 입은 사나이들도 있었다. 빨간 제복의 사관 후보생도 몇 사람인가 눈에 띄었으나 모두 다 밥이 아니었다. 할리가 말했다. "시내의 도로는 장장 180킬로나 되네. 시속 6.5킬로의 자동 주로를 써도 전부 돌려면 며칠은 걸릴 걸세. 거기에 만일 밥이 있다 해도 빌딩 안에 있다면 발견될 리 만무하지. 단념하는 편이 좋을 걸세. 우리 집으로나 가세." "한번 더 찾아보세." 나는 할리에게 부탁했다. 13층은 사격장, 당구장, 플라스틱 모델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거기에도 빨간 제복의 사관후보생들이 있었지만 밥의 모습은 없었다. "가망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네만 한번만 더 같이 찾지. 이 위층엔 우리 집이 있네." 할리는 나를 데리고 또 한 층 위로 올라갔다. 방사상 자동 도로에 따라 고급 레스토랑들이 즐비해 있었다. 우리는 단소프 일가가 살고 있는 거주 구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주로가 넓었으며 양쪽에는 손질이 잘 되어 있는 잔디가 파랗게 계속되고 있었다. 아파트의 건물도 호화로운 것뿐으로서 출입구는 로봇 수위가 지키고 있었다. "잠깐 들려서 식사를 하지 않겠나? 부친의 요리사가......." 할리는 자꾸만 권했으나, 나는 밥의 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고맙네, 요담에 먹기로 하겠네." 나는 할리하고 헤어져서 혼자서 밥을 찾기로 했다. 자동 주로로 다음 구로 들어섰다. 오피스(회사 . 관청 . 사무소) 거리였다. 근무 시간이 끝난 때문인지 사람의 그림자가 뜸했다. 그곳을 지나치자 또 다시 주택가가 되었다. 일반 월급 생활자와, 공장 노동자와, 해저 함대의 군인과, 민간 화물선 승무원의 가족들이 사는 장소다. 빌딩도 단소프 가가 있는 고급 주택지처럼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발코니(서양식 건축에서 방밖으로 나온 지붕이 없는 전망대)에서는 사나이들이 셔츠만 입은 편안한 모습으로 신문을 읽고 있다. 도로에서는 어린애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고, 그 애들을 부르러 온 여인들도 평상복 차림이었다. 이런 곳에 밥이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상점거리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그 때다. 내가 밥을 본 것은! 밥은 주름 투성이의 자그마한 중국인하고 얘기하고 있었다. 기지의 기숙사 앞에 있었던 수상한 사나이다! 나는 두 사람 옆으로 달려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나는 스파이도 사립 탐정도 아니다. 분명한 증거가 없는 한 친구인 밥을 나쁜 놈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차치하고 밥과 중국인의 행동은 수상했다. 두 사람은 짧은 말을 주고받고는 빠르게 헤어졌다. 그리고 밥은 장화 소리를 울리고 돌아가며 주위를 살폈다. 자그마한 중국인은 10미터 가량 천천히 걸어가자 껌 자동 판매기에 돈을 넣고는 밥처럼 또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떨어진 채로 자동 주로에 올라탔다. 승강기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자동 주로에 뛰어올라 미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빨간 제복은 눈에 띄기 쉽다. 거기다 마침 통행인도 적은 것이다. 얼마 안 되어서 밥은 자동 주로에서 내려서 승강기 앞에 섰다. 그 앞에는 잠수선의 선원이 세 사람 있었다. 자그마한 중국인도 자동 주로에서 내리자, 자동 뉴스 속보기에 돈을 넣고 챙이 달린 조그만 창문에 얼굴을 대고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이 때 빨간 제복의 잠수 사관 후보생이 두 사람 나타나 전시창 앞이 섰다. 깃의 배지가 낯익다. 그렇다, 지금 기지에 입항하고 있는 잠수 연습선 시몬 레크 호의 승무원들이다. 전시창 속에는 민간용의 얕은 바다의 잠수 장구가 전시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연습선의 후보생들은 무엇인가 지껄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후보생들의 열에 서서 전시창을 들여다보는 척 하였다. 제복이 같으니까 안성맞춤으로 컴플라치(변장, 위장)가 되었다. 거기다 또 고맙게도 전시창의 유리가 거울 대신이 되어서 밥과 중국인의 모습을 비치고 있었다. 승강구의 문이 열렸다. 밥은 세 명의 선원과 함께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자그마한 중국 사람도 자동 뉴스 속보기에서 멀어져서 다음 엘리베이터(승강기)를 기다리기 위해 승강대 앞에 섰다. 나도 두 사관 후보생과 같이 승강기 앞으로 걸어가서 그 앞에 섰다. 다음 엘리베이터가 왔다. 제일 먼저 중국인이 타고, 두 후보생이 뒤따르고, 마지막으로 내가 올라탔다. 나의 등뒤에서 자동문이 닫힌다. 중국인은 어린애처럼 껌 포장지를 벗기고 있었으나, 문득 뒤돌아보고 나를 쳐다보았다. 주름 투성이의 얼굴에 놀라움이 지나갔다. 내가 누군 지를 알아 본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곧 얼굴을 돌리고, 껌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기 시작하였다. 이 중국인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꽤 늙은 노인이지만 움푹 패인 눈은 예리한 이치(사물을 분별하는 슬기)로 빛나고 있었다. 수위나 문지기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결코 늙어빠진 노동자는 아닌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맨 아래 충에 닿았다. 문이 열렸다. 나는 밖으로 나오자 서둘러 밥을 찾았다. 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이 걷기 시작하였다. 나는 뒤따랐다. 두 사람은 몇 시간이나 시내를 빙빙 돌았다. 우스운 미행이었다. 중국인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으며, 또 내가 미행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미행을 계속한다. 그밖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0시가 다가왔다. 이 시간에 밥은 스테이션 케이(K)에서 특별 근무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거기서 다나까 중위는 밥의 지진 예지가 틀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할 작정인 것이다. 아까의 승강기로 밥이 곧 바로 기지로 돌아가, 다나까 중위의 명령을 알았다면 예정 시간대로 스테이션 케이(K)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문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어째서 밥은 무단 외출을 하였을까? 지금 내가 미행하고 있는 늙은 사나이하고는 어떠한 관계인가? 2000시를 지나자 중국인의 태도가 침착성을 잃었다. 때때로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천장과 벽을 둘러보기도 하고 건물과 통행인에게까지 불안스런 눈초리를 돌렸다. 나의 미행 말고도 무엇인가 커다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불안스러운 기운이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전체에 넘쳐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땅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퍼져 오는 굉장한 에너지였다. 나의 발 아래에서 땅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차 심해졌다. "해저 지진이다!" 밥의 예지가 옳았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비명을 들었다. 그리고 중국인이 내 쪽으로 되돌아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계속해서 천장에서 삐죽삐죽한 어떤 커다란 물체가 떨어져 왔다. 나는 재빨리 물러섰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내 몸은 2미터 가량 퉁겨져 나가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 졌다.     백만 불 짜리 지진   귓속에서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안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중국인의 주름 투성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 눈에 악의는 없었다. 슬픈 듯이 젖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의식을 되돌린 것을 확인하자 중국인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몸의 통증과 싸우며 내 힘으로 다시 일어났지만, 이미 중국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저 함대의 간호병이 달려왔다. "괜찮나?" "대수롭지 않네." 간호병이 내 몸을 조사하고 있는 사이에 스피커에서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지진 경보 발령! 지진 경보 발령! 안전 벽, 안전 문, 안전 셔터는 모두 폐쇄됩니다. 다튼 구역으로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일세." 그렇게 말하고 간호병은 일어나서 다른 부상자를 찾기 위해 사라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천장의 조명등이 떨어져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그 끄트머리가 내 몸을 스친 모양이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또 다시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험은 없습니다. 해저 도시의 손해는 극히 경미합니다. 부상자도 극히 가벼운 사건이 두 셋 정도 보고되었을 뿐입니다. 모든 안전 장치는 정상으로 가동되고 있습니다. 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옥내에 머물러 계십시오! 되풀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옥내에 머물러 계십시오! 공공 통로는 일반 시민의 통행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구의 경계인 안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나는 현재 지점에 있을 수밖에,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2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간신히 지진 경보가 해제되었다. 이미 내 외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 중국인을 찾아 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자동 주로나 보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지진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만 하다. 아까 정도의 지진은 별로 진기한 것도 없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는 멕시코에서 서인도제도, 남유럽, 소아시아를 지나 동인도에 이르는 대지진대 위에 있다. 지진이 많은 것을 각오하고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지진은 특별한 것이다. 이 지진은 밥 에스코 외에는 아무도 예지 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의문으로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안고 나는 기지의 기숙사로 돌아왔다. 나는 밥을 만나고 싶었다. 밥이 스테이션 케이(K)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머리가 아프고 시내를 돌아다닌 피로 때문에 곧 잠들어 버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밥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밥은 내가 잠든 뒤에 돌아와 한잠 자고 나보다 먼저 일어나 나갔던 것이다. 반대편 침대에 할리가 앉아 기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짐, 자네에겐 멋지게 한 방 얻어맞았네. "무엇 말인가?" 내가 되묻자 할리는 '흐흐흐'하고 웃었다. 그 눈은 샘이 솟아나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보를 가르쳐 주게, 짐. 자네하고 자네의 숙부님은 우리들을 완전히 선수치지 않았나?" "무슨 얘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나는 침대에서 내의와 옷을 입고 혼자서 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밥이 와 있었다. 그리로 할리는 아까 나를 보았을 때와 같은 눈초리로 밥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할리 앞에서 말라빠진 중국인의 일들을 밥에게 물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돌아와서 참 다행이네, 밥." "내 일을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좋았을걸, 짐." 밥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나? 만약에 다나까 중위가, 자네가 무단 외출한 것을 눈치 챘으면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나?" 내가 강하게 말하자 할리가 끼어 들었다. "여보게들, 쓸데없는 얘긴 말게. 그것보다도 자네들은 어째서 날 따돌렸나?" 멀뚱해져 있는 밥에게 할리는 거듭 물었다. "자네는 어젯밤 지진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왜 내게 얘기해 주지 않나?" "나는 예지 했을 뿐일세. 그것뿐이네." "거짓말 말게. 다나까 중위도 짐도 나도 예지하지 못한걸.“ "정보 같은 게 있을 수 없지. 나는 관측기가 나타낸 자료를 읽고 그것을 예지 지진학의 원리에 맞췄을 뿐일세. 나의 예지대로 지진이 일어날지 어떨지 전연 자신은 없었네." 밥은 완고하게 버텼다. "그렇지만 꼭 적중하지 않았나 말이야! 그래 좋아. 일단 자네 얘기를 믿어 두지. 그런데 짐......." 할리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계속했다. "나는 어젯밤, 그 지진 뒤에 아버지하고 지진 예지에 관해서 얘기를 했단 말일세. 아버지는 정확한 지진 예지를 할 수 있다면, 수백만 불의 돈을 벌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건 그렇지. 그러나 지진 예지의 목적은 돈벌이보다는 인명 구조에 있네.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 같은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서 정확한 지진 예보가 필요한 걸세." "알고 있네. 그렇지만 나는 지금 특별히 돈벌이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단 말이네. 어떤 사람이 정확한 지진 예지의 정보를 손에 넣고 주식을 조작한다면 큰 돈을 벌 수 있단 말일세. 그리고 실제로 어젯밤 지진으로 큰 돈을 벌어들인 사나이가 있다고 아버진 말씀하셨다네." 이렇게 말하고 할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네 얘기는 통 알 수 없군, 할리." 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자 할리는 빙긋이 웃고 나를 손가락질했다. "똑똑히 알고 싶으면 짐에게 물어 보게나. 짐에게 숙부님 일을 물어 보란 말일세." 나는 더욱 무슨 영문인지 몰라 확인하기 위해서 물어 보았다. "우리 숙부님이라니, 스튜어트 이든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오랫동안 숙부하고 만난 일이 없네. 자네는 설마 우리 숙부가 이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있다고 말하진 않겠지?" "나는 자네 숙부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네. 그렇지만 자네 숙부님과 관계 있는 정보를 아버지로부터 듣고 있네. 사실은 어제 자네 숙부님의 대리인이 주식 거래소에서 대량의 주를 투매(손해를 무릅쓰고 팔아버림)했네. 자네 숙부님은, 오늘은 주가가 대폭락 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세. 즉, 어젯밤 지진이 온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 말이네. 자네의 숙부님에게 있어서는 백만 불의 지진이었단 말일세!" 할리의 얘기는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나는 숙부인 스튜어트가 심해 기업의 모든 분야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떨 때는 큰 부자가 됐다가, 또 어떤 때는 파산 직전으로 몰리기도 하면서 사업을 계속해왔다. 이든나이트를 발명하기 훨씬 전부터 숙부는 두뇌와 돈과 때때로 목숨조차 걸고, 바다의 위험을 상대로 싸웠었다. 물론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다. 심해 해저에 해저 도시를 건설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그 증거다. 또한 무서운 심해가 숙부를 때려부순 일도 적지 않다. 그런데 숙부는 정말 재해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계획한 것인가? 그러한 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가르쳐 주게, 짐. 자네 숙부님은 어디에 계신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계시나?" 할리는 악착같이 물었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할 뿐이었다. "해저 도시 마리니아에 계셨을 텐데...... 지금은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네." "그런가...... 이건 낭패군. 우리 아버지는 자네 숙부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네......." 맥이 빠진 듯이 할리가 말했다. 밥은 조소를 띠고 한 마디 했다. "자네 아버지라면 지진 때마다 수백만 불씩 돈벌이를 하고 싶어서 못 견딜걸세." 비꼬는 말인데도 할리는 화를 내지 않고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짐네 숙부님하고 우리 아버지가 손을 잡으면 굉장한 돈벌이가 되지!" 그렇지만 숙부가 벤 단소프 같은 인물하고 함께 일하고 싶어할지 어떨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시간이 없었다. 해리스 준위가 기숙사로 들어온 것이다. "이든 후보생, 다나까 중위의 명령이다. 0800시에 스테이션 케이(K)로 가게." 해리스 준위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0800시까지는 거의 시간이 없다. "뛰어 갓!" 해리스 준위가 외쳤다. 그러나 나는 순순히 기숙사를 나올 수가 없었다. 다나까 중위는 내게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해리스 준위의 해풍에 탄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 낼 수 없었다. "지금은 자유시간인걸. 그걸 알면서 끌어낸단 말인가?" 나는 뒤통수를 두드리며 말했다. "끌어낸다고? 자네들 후보생은 자기 권리를 주장할 만한 일을 분명히 하고 있나?" 해리스 준위는 밥에게 눈을 돌렸다. "어제 자네의 외출 허가증이 없어졌네. 거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그 외출 허가증은 찾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 "발견했지! 그렇지만 외출 허가증이 분실된 사이에 자네는 어디 있었나? 외출 허가증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사용하고, 아무도 몰래 다시 갖다 놓은 게 아닌가?" 해리스 준위가 아무리 날카롭게 물어도 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는 밥이 어떤 식의 거짓말을 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갈 것인가 끝까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빨리 가보게, 짐!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해리스 준위에게 호령을 받고 나는 스테이션 케이 (K)를 향해 달렸다. 해저 3천 미터의 지진 관측소에서는 다나까 중위가 벽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입 속으로 무엇인가 중얼중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필경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름한 얼굴은 해쓱해져 있었지만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얼마 후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자넨 어제 지진으로 상처를 입었다면서?" "대수롭지 않습니다. 약간 스쳤을 뿐입니다." "다행이군."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뒤로 젖히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는 행운이었네. 만약에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를 습격한 것 같은 대지진이었다면......." 그렇게 말하고 중위는 머리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자네는 어제 지진을 예지하지 못했지. 물론 부끄러워 할 것은 없다. 나도 예지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밥 에스코는 예지 했네." "그렇습니다." "자네는 밥 에스코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나?" "네, 잠수 사관 학교 입학 이래의 친구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밥이 어떻게 해서 어젯밤 지진을 예지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럴까...... 자네는 예지 할 수 있었지 않나?" 다나까 중위는 살피듯이 나를 보았다. 대체 어찌된 셈인가? 다나까 중위까지 할리와 같이 어젯밤 지진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갑자기 다나까 중위는 화제를 바꿨다. "자네는 이에즈스회의 지진학자 타이드 신부를 알고 있지." "네, 잠수 사관 학교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최근 이 부근에서 일어난 몇 개의 지진에 관한 타이드 신부의 학설도 알고 있겠지?" "네 , 그렇지만......." 하고, 나는 어물거렸다. "타이드 신부는 일련의 지진이 인공적으로 일으킨 것이라고 믿고 있네. 누군가가...... 필경 주식 거래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일세! 거기에 대해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완고하게 말했다. 그제야 다나까 중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생각할 수 없네. 하지만 어떤 사나이가 하려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는지도 알수 없네. 타이드 신부가 말하듯이 자네의 숙부에게는 의문스러운 데가 있네. 물론 나는 우리 해저 함대에 대한 자네의 충성심을 믿고 있네. 그래서...... 만약에 자네가 시내에서 어제처럼 스파이 놀이를 금후에도 계속할 마음이라면 나는 기꺼이 원조하겠네. 언제든지 자네가 좋을 때에 특별 외출 허가증을 내주지. 용건은 그것뿐일세. 돌아가도 좋아!" 기숙사를 향하면서 내 마음은 산란하였다. 다나까 중위는 어젯밤 밥이 기지에서 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밥의 지진 예지가 적중한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냐 아니냐 하고 내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까지 꿰뚫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밥이 중국인에게 지오존데 같은 것을 건네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리가 숙부의 대리인에 대해서 얘기한 것도, 타이드 신부가 숙부의 조난에 대해서 말한 것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숙부는 내게 있어 단 한 사람뿐인 친척이며, 밥은 생사를 같이 해 온 친구이다. 이 두 사람을 의심하게 되면 나는 마지막이다. 나는 다나까 중위에게서 특별 외출 허가증을 받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스파이 흉내 같은 짓도 안 할 것이다. 반드시 밥은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숙부의 문제도 그렇다. 행방불명이기 때문에 당치도 않는 오해를 받은 채로 있기 때문인 것뿐이다. 기숙사에서는 할리하고 밥이 장비의 점검을 하고 있었다. 나도 내 로커를 열었다. 숙부의 사진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할리가 그것을 집어들어 사인을 보았다 "아아? 이분이 자네 숙부님인가. 자네가 생각을 다시 해서 숙부님을 우리 아버지한테 모시고 와 주었으면 고맙겠지만." "하지만 어디 계신지 모른단 말이네, 할리. 남극일지도 알 수 없고 또 카일루아 만인지도 모르겠단 말일세......." 라고, 나는 말했다. 이 때 밥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 해저 도시에 계실지도 모르지......." "뭐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밥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니, 사실은......." 하고, 밥은 황급히 변명을 했다. "난 스튜어트 이든을 어디선가 본 듯 하단 말이네. 아마 딴 사람일 거야. 자네 숙부를 많이 닮은 사나이를 보았을 뿐이란 말이네." "나는 또......." 나도 할리도 똑같이 낙담했다. 그러나 나는 밥이 숙부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다나까 중위에게 특별 외출 허가증을 받으리라고 다시 고쳐 생각하였다.     이든 기업     나는 군모가 비뚤어진 것을 고치고 제복의 단추가 제대로 채워졌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고 나서, 벤 단소프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 출입구는 현무암의 높은 기둥이 즐비하고, 웅장한 느낌이었다. 수부에는 거만하고 새침한 금발의 여인이 있었다. 나를 보고도 모른 척 한다. "벤 단소프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단소프 씨의 자제분인 할리 단소프의 친구입니다." 나는 용건을 말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자세히 뜯어보며,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는, 귀찮은 듯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인상이 나쁜 안내인이다. 나는 그냥 돌아가 버릴까 하고 생각했으나, 단 하나의 단서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숙부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있다면 찾지 못할 리가 없다. 나는 사업 조합이며 호텔 등에 모조리 전화를 걸어봤지만, 숙부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남은 것은 벤 단소프를 만나는 것뿐이다. 벤은 아들인 할리에게 숙부의 소문을 얘기하고 있다. 그 소문의 출처를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 수부의 여인이 흰색이 도는 금빛 눈썹을 들고 수화기를 놓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아, 이든 씨. 사장님은 에이 (A)층에 계십니다." 나는 작은 엘리베이터로 에이 (A)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린 단소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린은 외무 판매원 같은 태도로 정중히 나의 손목을 잡았다."짐 이든 군, 어서 오게! 자네 얘기는 할리에게서 자세히 듣고 있네. 그리고 자네 숙부에 관해서도 옛날부터 잘 알고 있지!" 나는 벤이 숙부의 친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벤이 숙부의 행방을 찾는 유일한 단서인 것이다. 벤은 나를 방음 장치가 된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짐.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무엇인가 해 줄 일이라도 생겼나?" 마치 자기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말씨였다. "나는 숙부를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라고, 나는 정중히 말했다. 벤은 웃으며, "자넨 숙부님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나?" "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라면 숙부가 있는 곳을 아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건 무리일세, 짐." 벤은 머리를 흔들며 방안을 걸어다녔다. "자네 숙부님은 수중 카로 조난된 뒤로는 행방불명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옛날부터 자네 숙부님은 '바다에 사는 사람을 위해'라고 하면서 무모한 모험만 해왔지. 그래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 두라'고 나는 몇 번씩 충고했었네. 그랬더니 마침내 영리해진 모양일세." "무슨 맡씀이신지요?" "정보를 잡았단 말일세." 벤은 싱긋 웃었다. "그 일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네. 자네 숙부님의 대리인이 어제 수백만 불의 주식을 전부 깨끗이 팔아 버렸다네. 지진에 의한 주가의 폭락을 겨냥해서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이지. 자네 숙부뿐만이 아닐세. 할리 이야기로는 자네 친구도 지진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서? 그 친구도 혹시 자네 숙부님하고 같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저는 지진 예지에 관한 얘기를 금지 당하고 있습니다. 할리도 같습니다." 나는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알고 있네. 그렇지만 그 친구를 만나면 나한테 놀러 오라고 전해 주게나. 내가 그 친구를 부자로 만들어 주지!" "단소프씨! 전 정말 숙부님을 찾고 있답니다. 도와주실 수 없으실까요?" "그래 그래, 나는 적어도 자네 숙부님의 대리인을 알고 있으니까." 벤은 수화기를 들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말의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윽고 수화기를 놓자 벤은 눈썹을 모았다. "숙부님의 대리인의 주소를 알았네. 제 7구 4층 88번지야. 나는 일이 있어서 이것으로 실례하겠네." 단소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왜 벤의 태도가 갑자기 차갑게 변해 버렸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내려왔다. 4층은 상업 지구와 민간 잠수선 독 지구하고의 사이에 낀 장소로서 빌딩의 태반이 창고나 해운업자의 사무실이었다. 이곳에는 보행자용 자동 주로가 없었다. 거리는 해산물을 실은 화물 운반차로 붐볐다. 오래간만에 나는 바다의 냄새를 맡았다. 차를 비키며 나는 88번지로 향했다. 두 개의 창고에 낀 문이 88번지 입구였다. 문을 들어서자 어두운 제단이 위로 뻗쳐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서 창고 뒤에 있는 기다란 복도로 나갔다. 그곳에는 몇 개의 사무실이 잇달아 있었다. 복도가 마주치는 곳에는 상하가 달린 작업복을 입은 사나이가 금속 도어에 페인트로 글을 쓰고 있었다. ......이든 기업.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사나이에게 말을 걸었다. "스튜어트 이든 씨는 이곳에 계십니까?" 그 사나이는 돌아다보았으나 굉장히 놀란 모양으로 페인트 깡통을 손에서 떨어뜨릴 뻔 하면서 외쳤다. "짐 ! 짐 아닌가!" 그것은 기데온 파크였다. "기데온!“ 나는 나도 모르게 사나이의 손을 잡고 그 검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데온 파크는 흑인이었지만 숙부의 친구이자 충실한 조수였다. 바다빛 같은 초록색 페인트가 묻은 검은 얼굴에 흰 이를 보이며 웃고 있었다. "짐! 짐은 버뮤다에 돌아가 있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악수를 했기 때문에 내 손에도 페인트가 묻었다. "난 아무래도 일류 페인트장이가 못 돼 놔서, 원!" 하면서, 기데온은 내게 걸레 조각을 건네주고 자기도 다른 걸레로 손을 문지르며 또 웃었다. "괜찮아, 기데온. 그렇지만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나? 마리니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말하자 기데온은 문을 열었다. "자, 안으로 들어오게, 짐. 좁고 지저분한 곳이지만 손질을 하면 이럭저럭 사무실로 쓸만해서......." "그런데, 숙부님은 어떻게 하고 계시나?" 내가 이렇게 묻자 기데온은 발을 멈추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제일 먼저 그걸 물으리라고 생각했었지. 짐, 숙부님은 건강이 몹시 나쁘셔. 하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지. 스튜어트 이든을 녹 아웃 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을 거야!" 그 말이 옳다고 나도 믿고 있다. 그렇지만 타이드 신부 생각이 나서 나는 물었다. "기데온, 나는 숙부의 수중 카가 인도양의 해저에서 조난됐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이 질문으로 기데온은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페인트 통을 덜컹덜컹 하면서 내게서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가서 자네가 알고있는 걸 이야기해 주게나, 짐." 이든 기업의 사무실은 썰렁한 작은 방이 두 개 뿐인 조그만 것이었다. 벽은 선명한 바닷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가구는 책상이 하나, 망가진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지만 먼저 쓰던 사람들이 남겨 놓고 간 물건인 것이다. 세간은 무거워 보이는 강철제 금고 뿐이었다. 그 문짝에도 역시 페인트로 '이든 기업'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지만, 그것은 진짜 페인트장이가 쓴 것 같았다. 기데온은 의자에 앉으며 의자 하나를 내게 권했다. 나는 타이드 신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였다. 기데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만 사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일세. 하지만 우리들은 그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네. 장사 신용에 영향이 미치거든." 기데온은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방바닥에 말라붙은 페인트를 긁고 있었다. "타이드 신부가 우리들의 수중 카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네. 무엇인가 사고가 날 때마다 그 현장엔 반드시 타이드 신부가 나타나거든, 이든나이트를 둘러친 자가용 수중 카로 말이네." 키득키득 웃고 나서 기데온은 또 다시 심각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러나 타이드 신부는 때때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단 말야. 짐, 그 신부는 짐 보고 누군가가 인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란 자네 숙부님일지도 모른다고 했을테지?" "맞았네, 기데온.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지. 숙부님은 절대로 그 따위 일을 할 사람이 아냐!" "물론이지, 짐." 기데온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짐, 숙부님은 몸이 좋지 않아. 우리들은 인도양 해저에서 지진에 부딪쳤네. 수중 카는 망가져서 못쓰게 됐지. 할 수 없이 우리들은 수중 카를 버리고 생명 유지 장치 속에서 60시간을 지낸 뒤에 긴급 전파 신호를 알아채고 달려온 잠수선에게 구조 되었다네. 60시간이란 말일세! 말이 60시간이지. 짐처럼 혈기 왕성한 청년이라도 60시간이나 생명 유지 장치 속에 있었다면 뻗어버릴 걸. 짐의 숙부님은 이미 청년이 아닐세. 거의 다 죽다시피 했던 몸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야. 지금 숙부님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계시네. 오늘 아침은 차분히 쉬실 수 있게 호텔에 남겨 두고 왔네." "난 숙부님을 만나 보고 싶단 말야, 기데온!" "잘 알겠네, 짐. 만날 수 있고 말고. 하지만 숙부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게." 기데온은 금방 페인트를 바른 벽을 불안스럽게 바라보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짐, 자네는 숙부님을 잘 알고 있지. 숙부님은 긴 생애의 전부를 바다의 정복을 위해서 봉사해 왔어. 짐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숙부님은 이든나이트를 비롯해서 백 가지가 넘는 발명을 이룩한 위대한 발명가시지. 그렇지만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을 사나이가 아닐세. 해저 산맥에 오르고 해구를 탐험했지. 해저에 광구를 가지고 해상에 해양 농장을 개척했네. 그리고 항상 해양 개발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들을 원조해 왔네. 숙부님의 덕분에 성공해서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어. 또한 새로운 발명이며 무서운 탐험의 기획을 숙부님한테 가져오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지. 짐! 바다에 관한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숙부님은 흥미를 갖고 계셨네." 기데온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초라한 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기데온은 말한다. "분명히 숙부님의 사업은 요새 잘 안 되고 있지. 좀 너무 광범위하게 손을 뻗친 감이 없지는 않아. 꽤 오랜 동안 수입보다는 지출 쪽이 많거든, 짐." "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어젯밤은 어땠지? 숙부님을 위해 주식을 조작했지 않나? 그래서 수백만 불의 돈을......." "그 얘기는 자네 숙부님 자신이 아니면 대답할 수 없네, 짐. 그렇지만 이 말 만은 할 수 있지. 짐의 숙부님은 절대로 사리사욕(개인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 돈을 벌 사람이 아니다, 라고!" 확실히 그렇다. 기데온이 말하는 대로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어째서 나는 친구인 밥만이 아니라 숙부인 스튜어트 이든의 행동까지 감시 할 임무를 맡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되었나? "짐!"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나의 숙부 스튜어트 이든이 서 있었다.     노인끼리의 대결   일순 나는 숨이 딱 멎어버릴 것 같았다. 숙부의 변한 모습은 너무나 놀라왔다. 넓은 어깨가 축 쳐지고 몸 전체가 바싹 줄어 있었다. 피부는 노랗고 건강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총기가 있던 푸른 눈은 흐려지고 바쁜 듯이 깜빡거리고 있다. 걷는 모습도 발이 헝클어져 위험스러웠다. "스튜어트 숙부님!" 나는 간신히 외쳤다. 숙부는 매달리는 듯한 모습으로 내 손을 힘있게 잡고 의자에 털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코를 풀고, 눈을 닦더니 근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 짐? 나는 네가 버뮤다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구나." "계속 버뮤다에 있었답니다. 숙부님 특별 훈련을 받기 위해서 여기 오게 됐습니다." 기밀 안보의 입장에서 나는 훈련의 내용을 말할 수는 없었다. "건강은 좀 어떠신가요, 숙부님." "보기보다는 건강하단다." 하며, 숙부는 갑자기 일어섰다. "나는 거친 바다를 헤쳐온 사나이다!" 나는 숙부의 이 말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져서 묻고 싶은 것을 당장에 물었다. "스튜어트 숙부님, 제가 듣기엔 어젯밤의 해저 지진으로 숙부님이 백만 불을 벌었다고들 하던데요." 스튜어트 이든은 훑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에서 아무 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숙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벌었지. 하지만 그쯤으로는 새발에 피란다. 짐, 오랜만에 만났는데 돈 이야기는 그만 두자. 그것보다도 네 모습을 잘 보여다오. 오오, 이젠 아주 어른이 다 되었구나, 짐. 훌륭한 사관이 될 거다!" 숙부는 기쁜 듯이 웃으면서 내 빨간 제복을 쓰다듬었다. "너의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이 모습을 보았으면 얼마나 기뻐하겠니!" 숙부의 눈은 생기 있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 없다, 짐. 너는 해저 함대 사관이 되고 나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다. 돈도 건강도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숙부는 '이든 기업'이라고 쓰여진 강철 금고를 바라보았다. 기데온이 기침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스튜어트, 당신은 면회 약속을 잊으시지는 않으셨겠죠?"     "약속?"숙부는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런, 벌써 시간이 되었구나. 짐, 나는 아직 너하고 얘기하고 싶은데, 딴 사람하고 약속이 있단다. 네가 모르는 사나이하고 점심을 하기로 되어 있어. 애석하지만......." "나는 기지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또 외출 허가가 나오면 전화 드리지요. 그 때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요." 나는 일어섰다. 그 때 숙부하고 점심을 함께 하기로 되러 있다는 손님이 들어왔다. 그 손님은 내가 알고 있는 사나이였다. 숙부는 내가 알지 못하는 줄로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을 꺼렸던 것일까? 그 사나이는 신부 옷을 입은 타이드 신부였다. 나와 타이드 신부가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을 보더니 숙부는 마음을 달리했다. 잠시 후 숙부는 나와 타이드 신부를 데리고 부근의 레스토랑으로 간 것이다. 번잡한 거리를 걸으면서 타이드 신부는 혈색이 좋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또렷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한 것 같군, 짐. 이런 데서 자네를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 뜻하지 않은 기쁨이군 그래." 레스토랑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숙부와 타이드 신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화제는 주로 해산물에서 만드는 식량 이야기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 타이드 신부는 지진 연구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숙부는 말했다. "미안하네만 신부님, 지금의 나로서는 당신 계획을 원조해 줄 수 없네." "돈이 전부가 아닐세, 스튜어트." 타이드 신부는 숙부를 설득할 듯 말했다. "그렇지만 지진 연구도 하기에 따라서는 돈벌이도 될지 모른단 말일세. 만약에 누군가가 해저 지진을 예지 하는 방법을 안다면 그 인간은 상당한 이익을 취할 수 있겠지. 아니, 해저 지진을 인공적으로 일으킨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일이 있네." 뜨거운 커피가 컵에서 숙부의 손에 흘렀다. 숙부는 냅킨(식사할 때 옷에 음식이 묻지 않도록 가슴이나 무릎 위에 펴놓는 수건)으로 손가락을 훔치면서 작은 테이블 너머로 타이드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님, 당신은 직업상 인간의 죄를 추궁하는 버릇이 있군. 그래서 인간이라는 걸 나쁘게만 보게 되지." 이 비꼬임에 타이드 신부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인간의 결점에 대해선 엄격하네. 그렇지만 아무리 결점이 많은 인간이라도 반드시 구제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타이드 신부는 의자 등에 기대어 앉았다. "나는 신부가 될 공부를 시작했을 무렵 화산 활동과 지진에 대해서 마음이 끌렸었네. 어째서냐고? 화산 활동이나 지진의 재해가 신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긴 인생을 나는 지진 연구를 위해 바쳐왔지만, 신에 대한 두려움은 더해 갈 뿐이라네. 인간이 신의 의지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일기를 예지 하듯이 지진을 정확히 예지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인간은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재해에서 구원될 수가 있네." 타이드 신부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타이드 신부가 다나까 중위 밑에서 하고 있는 극비의 작업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그런데 지진 예지하고는 정반대인 연구 분야가 있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지. 사람들의 생존뿐만 아니라 영혼에까지 화를 미치는 것일세. 스튜어트, 자네는 내가 말하는 뜻을 알 수 있을 걸세. 나는 누구인가 그 인간의 이름은 모르지만, 인공적으로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를 잡았단 말이네. 만약에 그러한 기술이 있다면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데 써야만 하네. 특정한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써서는 안 된단 말이네!" 끝으로 타이드 신부는 격렬한 어조로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숙부를 만나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숙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타는 듯한 눈으로 타이드 신부를 쏘아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쳐, 보이지 않는 불꽃을 퉁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타이드 신부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다. 한편 숙부가 해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면서까지 돈벌이를 하는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왜 숙부는 자기에게 씌워진 의심을 풀려고 하지 않을까? 또한 타이드 신부도 인공 지진의 범인이 숙부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더욱 분명히 추궁하지 않는 것일까?) 숨막히는 듯한 대결은 중도에서 흐지부지 끝났다. 타이드 신부는 또다시 온화한 얼굴로 돌아가서 해산 스틱(막대기 모양의 과자) 요리며, 디저트(식사 후에 먹는 과자나 과일)로 나온 해산 과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숙부는 고개를 끄덕일 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점심이 끝났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몸조심 하십시오." 타이드 신부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숙부하고 같이 시끄러운 거리를 지나서 약간 지저분한 사무실로 향했다. 숙부는 아직 입을 다문 채 괴로운 모양인지 비칠비칠 걸었다. 그러나 88번지 입구에 오자 갑자기 내 손을 잡고 강한 말투로 말했다. "짐, 너하고 아직 이야기하고 싶은데, 또 한 사람 손님이 있다." "네, 다음에 또 오겠어요." 나는 숙부에게 인사를 하고 곧 거리로 되돌아왔다. 왜 숙부가 갑자기 나를 쫓아 버렸는지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88번지에 다가갔을 때 한 사나이가 깨끗하지 못한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몇 번이나 전에 본 일이 있는 그 사나이는 늙어빠진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은 조그맣지만 무거워 보이는 꾸러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도둑맞은 지오존데하고 꼭 같은 크기로 자꾸만 생각되었다. 나는 어디를 어떻게 지나서 기지로 돌아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기숙사에 들어가니까 밥 에스코하고 할리 단소프가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운이 좋은 녀석이야! 다나까 준위는 어째서 자네에게만 외출 허가증을 내 주었을까?" 할리는 부러운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짐, 곧 스테이션 케이(K)로 가게. 다나까 중위가 기다리고 있네 " 밥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밥이나 할리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안성맞춤이었다. 땅 밑의 지진 관측소는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그 사무실 책상에서 다나까 중위가 지각(지구의 외각) 심도도(깊은 정도를 그린 지도)에 관측 데이터 (사항 자료)를 써넣고 있었다. "자넨가. 무엇인가 보고할 만한 일이 있었나?" 다나까 중위는 피로해 보였으나 날카로웠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고, 나는 답했다. 숙부를 찾은 것은 비밀로 해 두었다. 별로 새로운 사실도 없는데 숙부의 일을 보고해서 다나까 중위의 의혹을 더욱 깊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다나까 중위는 빨간 연필로 지각 심도도에 그림자를 그려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굴을 들자 움푹 패인 눈을 내게 돌렸다. "나는 에스코 후보생에게 외출 허가를 해주었다. 에스코 후보생이 청구해 왔고 그것을 물리칠 아무런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밥은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다나까 중위는, "그야 그렇지. 나는 해리스 준위더러 자네가 돌아올 때까지 외출시키지 말라고 일러두었네. 말하자면 자네에게 에스코 후보생을 미행해 달래기 위해서였지." "밥을 미행한다?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밥은 내 친구입니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열을 내어 항의했다. "침착하게, 이든 후보생. 자네가 에스코 후보생의 친구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렇기 때문에 자네에게 미행을 부탁하는 걸세. 자네가 싫다면 해저 함대 보안국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되는 걸세. 지금 같아서는 나는 밥 문제를 내 손으로 해결했으면 하고 생각하네. 만약에 밥이 명령 위반의 행위를 했더라도 내가 꾸짖기만 하면 되니까 말일세. 그러나 수사를 보안국으로 넘기면 밥은 군규 위반으로 문책 받아 처분될지도 알 수 없단 말일세. 알겠나, 이든 후보생?" 다나까 중위는 입을 다물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할 수 없군요." 나는 한숨을 뿜어냈다.     구정물 처리장에 잠수선!   한 시간 후 나는 시내에서 밥 에스코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하고 있었다. 미행은 간단했다. 나는 제복 위에 코트를 입고 기지의 정문 옆에 숨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밥은 정문을 나서자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나는 뒤를 밟았다. 밥은 한 사나이를 만났다. 늙어빠진 중국인이었다. 아까 들고 있던 무거워 보이는 꾸러미는 이미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 놓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밥하고 중국인이 서로 만난 것은 지하 1층으로 바로 기지의 정문 위에 해당되는 곳이다. 거기에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기지보다 아래에 있는 구정물 처리 구역으로 내려갔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전체의 구정물이 이곳에 모여져서 강력한 펌프 작용으로 5천 미터의 해저로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돔을 둘러싼 무서운 수압과 싸우는 배수 펌프의 고동이 발 밑에서 전해져 온다. 두 사람은 배수 터널의 한 곳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가운데가 통로이고 양쪽 벽에 붙은 쪽이 배수구로 되어 있었다. 벽의 조명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또한 편리한 것은 배수구를 흐르는 물소리가 내 발자국 소리를 지워 주는 것이었다. 긴 터널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계속되는 것일까? 이미 해저 도시를 둘러싼 돔 안은 아니다. 해저 밑에 나와 있다. 내 머리 위에는 100미터의 바위와 4천 미터의 해수가 있는 것이다. 터널의 벽과 천장은 바위가 직접 노출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곳에 해수가 스며 나와 바위를 흘러내리고, 혹은 커다란 물방울이 되어서 철썩철썩 하고 방바닥과 배수구에 떨어진다. 그 해수는 심해의 냉기와 소금 냄새를 터널 안으로 끌어 들였다. 갑자기 전방에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터널이 구부러진 것이다. 나는 걸음을 빨리 해서 구부러진 곳으로 가 보았다. 거기서부터 앞은 암흑이었다. 일순 위축되는 마음을 북돋워 나는 귀를 기울였다. 들려 오는 것은 터널 안에 울려 퍼지는 물소리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새파란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어둠 속을 둥실둥실 헤엄치듯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청백색 등을 목표로 걷기 시작하였다. 터널이 끝나고 홀 같은 조금 넓은 곳으로 나갔다. 거기서 갑자기 걷는 것이 힘들었다. 땅바닥 전체에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점점 깊어져서 복사뼈 위까지 찼다. 얼음처럼 차다. 발뿐만이 아니다. 친정에서 떨어지는 바닷물이 코트를 통해 제복으로 스며들었다. 덜덜 떨면서 나는 철벅철벅 물을 차며 걸었다. 물은 더욱 깊어지고 흐르는 속도도 빨라졌다. 50미터쯤 앞으로 가자 전방의 등불이 멎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동안 기다렸으나 등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나는 생각이 미쳤다. 그 불빛은 등불 그 자체가 아니다. 젖은 바위가 빛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빛은 광장에 입을 벌린 또 다른 터널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걸음을 빨리 하여 그 터널로 들어갔다. 등불과 함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터널은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이나 가파른 내림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흐름도 그만큼 빨라서 발이 떠내려갈 것만 같았다. 나는 한 발짝씩 발 밑을 더듬으며 걸었다. 물은 양쪽 벽에 가까워질수록 깊어졌다. 중앙은 간신히 발을 덮을 정도여서 걸어가기가 좋았다. 그러나 천장에서 찬물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 제복은 흠뻑 젖었다. 마침내 나는 터널을 나왔다. 그곳은 원형의 넓은 방이었다. 중앙에 거대한 구정물이 모이는 탱크가 있어서 6개의 터널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물이 굉장한 물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방의 천장은 콘크리트로 굳혔으나 주위의 벽은 착암기 자리가 보일 정도로 노출된 현무암이었다. 내 발 밑에서 암반이 흔들거렸다. 구정물 탱크의 물을 해저로 배출하는 펌프의 진동이다. 청백색 빛이 커다란 방안을 어슴푸레 비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천장에도 벽에도 조명등은 없었다. 그 빛은 구정물 탱크 속에서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나는 거대한 탱크 옆으로 다가갔다. 물의 흐름이 내 발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며 거품을 내고, 나를 탱크 속으로 떠밀어 넣으려고 한다. 나는 양손을 짚고 네 발이 되어 흐름에 저항하면서 탱크 속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청백색 빛의 정체를 알았다. 그것은 이든나이트 막의 발광이었다. 구정물 탱크에 떠 있는 잠수선을 덮은 이든나이트 막은 청백색 빛을 방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상한 풍경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구정물 탱크 속의 잠수선!) 나는 전신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어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수선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수중 카였다. (이렇게 큰 것이 어떻게 해서 바다로 나가는 것일까?) 구정물 탱크에 워터(물) 로커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구정물 탱크의 수면은 가장자리에서 4미터 가량 아래였다. 터널에서 나온 더러운 물이 폭포처럼 흘러 떨어져 물거품을 튀기고 있었다. 수중 카의 긴 선체는 물거품이 퉁기는 수면 높이에 떠서 뭉툭한 전망대가 1미터 가량 위로 솟아 있었다 늙어빠진 중국인이 전망탑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교대로 다른 사나이가 좁은 갑판으로 나왔다. 그 사나이는 손잡이를 잡고 검은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사나이는 기다렸다. 그 수 미터 위에서 나도 기다렸다. 돌연 둥근 헬멧(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쓰는 서양식 투구형 모자)이 수면을 가르고 나타났다. 온도 조절 장치가 달린 잠수복을 입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보통 잠수복 정도로는 얼음처럼 찬 물 속에서 1분간도 살아 있을 수 없다. 잠수복의 사나이는 수면에 드리워진 로프의 끝을 잡고 갑판에 있는 사나이에게 신호를 하고는, 또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갑판의 사나이가 로프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몹시 무거운 모양이었다. 사나이는 숨이 차서 때때로 몸을 펴서 위를 보았다. 내 모습은 어둠에 싸이고 물거품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래 사나이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것은 밥 에스코였다. 갑자기 나는 추워졌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추위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 꿈이기를 나는 바랐다. 그렇지만 모두가 현실인 것이다. 또다시 잠수복의 다이버가 떠올랐다.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밥하고 둘이서 살금살금 신중히 수중 카의 갑판에 끌어올렸다. 그것은 직경 15센티 가량의 금빛으로 빛나는 금속으로 된 공이었다. 주위에는 스텐레스의 밴드가 둘러져 있고 둥근 동그라미가 달려 있었다. 그 동그라미에 로프가 튼튼하게 매어져 있었다. 나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핵폭발 장치였다.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수폭' 이었다. 물론 핵무기를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엄금되어 있다. 나는 추위도 잊어버리고 핵 해적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밥은 금색의 금속구(금속으로 된 공)를 해치(갑판의 승강구)에 넣었다. 그것을 선내에서 중국인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밥은 로프 끝을 수면의 잠수부에게 던졌다. 잠수부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떠올랐다. 로프 끝에는 또 하나의 금속구가 매어져 있었다. 2개, 3개, 4개...... 합계 8개의 금속구가 해치에서 배 안으로 옮겨져 들어갔다. 8발의 수폭 ! 그 1발만으로도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날려보낼 위력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이 있다하더라도 밥들의 행동은 위험 천만인 것이다. 잠수부가 무서운 작업을 완료하고 수중 카의 갑판에 기어올라 잠수복과 헬멧을 벗었다. 나는 어느새 몸을 앞으로 내밀어 하마터면 탱크 속에 떨어질 뻔했다. 헬멧을 벗고 나타난 새까만 얼굴, 그것은 숙부의 오른팔 기데온 파크가 아닌가! 기데온은 잠수복의 손질이 끝나자, 로프를 끌어올리며 밥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물소리에 지워져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해치로 들어갔다. 수중 카의 내부에서 모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치가 닫혔다. 전망탑이 들어가고 선체를 덮은 이든나이트가 숨을 쉬는 듯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 때 내 마음속에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구정물 탱크에는 잠수선이 바다로 출입하는 워터 로커가 있을 리 없다. 이 배는 로커가 필요 없는 것이다. 이 배는 바닷속을 항해하기만 하는 수중 카가 아니다. 보다 더 강력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배는 지저 굴진 카이다. 굳은 암반을 버터처럼 긁어내며 전진하는 원자력 드릴을 장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전망탑을 들여놓아 전체가 원추형의 원자력 드릴 그 자체처럼 보인다. 내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저 굴진 카는 해저 함대가 극비로 시험중인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민간인이 손에 넣었단 말인가? 지저 굴진 카는 잠수를 시작했다. 검은 뿔이 선체를 덮고 이든나이트가 압력의 변화에 반응해서 빛나기 시작했다. 검은 수면은 곧 빛을 막았다. 선체가 구정물 탱크를 둘러싼 암반 속으로 파고 들어간 모양이다. 암흑이 주위를 둘러쌌다. 나는 몸을 떨면서 저린 발로 일어나 터널을 향했다. 주위는 숨이 막힐 듯한 어둠이다. 발 밑에서 암반이 흔들리고 있다. 구정물 배출 펌프의 고동인가? 아니면 지저 굴진 카의 원자력 드릴의 진동인가? 언 발을 끌면서 나는 축축이 젖은 터널을 되돌아 나왔다. 이 바다 밑을 지저 굴진 카가 나의 두 친구와 8발의 수폭을 싣고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진도 +(플러스) -(마이너스)   내가 기지로 돌아온 것은 2400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말쑥한 제복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그것보다도 '내 눈이 어떻게 된 모양이다. 내가 지금 보고 온 것은 현실이 아니다' 라고 누구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젖은 옷인 채로 스테이션 케이(K)로 향했다. 다나까 중위는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보고를 요구했다. 책상 위에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중심으로 2천 킬로 사방의 지진 에너지의 축적도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내가 보고 온 것을 상세히 얘기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된 탓인지 다나까 중위는 놀라지 않았다. 때때로 지진파 그래프에 눈을 주기도 하며, 끝까지 시큰둥하게 듣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의 요점을 되풀이했다. "그자들은 지저 굴진 카를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거기에 수소폭탄을 여러 개 싣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점을 나는 믿을 수 없네. 마치 옛날 이야기 같군 그래. 지저 굴진 카는 지금 온 세상을 통틀어 6대밖에 없단 말이네. 그걸 민간인이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네. 거기에 밥 에스코가 타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난센스(무의미, 엉터리)란 말이네!"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태도를 바꿔 물었다. "자네는 지금 얘기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나?" "네. 이게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자, 보십시오!" 나는 흠뻑 젖은 제복을 가리켰다. 내 구두에서는 찬물이 아직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분명히 자네는 젖어 있네. 하지만 좀더 확실한 증거는 없나?" "없습니다. 다만 밥 에스코는 지저 굴진 카로 지하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기지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도 증거는 될 수 없단 말일세. 밥 에스코는 다른 장소에 있을지도 알 수 없지. 오히려 다른 장소에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옳을 걸세. 역시 자네 이야기는 믿을 수 없네. 어쩌면 자네는 자기 숙부를 옹호하기 위해서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 대고 있는 게 아닌가?" 당치도 않은 소리다. 나는 화가 벌컥 치밀었다. "중위님!" "아니 내가 틀렸으면 사과하네. 그렇지만......." 이 때 빨간 불이 켜지고 벨이 올렸다. 송신관으로 통신이 온 신호다. 다나까 중위는 수신구에서 캡슐을 끄집어내어 통신문을 꺼내어 펼쳤다. 거기에는 '컴퓨터과'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왜 다나까 중위가 내 말을 건성으로 들었으며 핀트가 맞지 않은 반응을 나타냈는가를 알아챘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이다. 밥 에스코의 일과 분실한 지오존데를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중대한 일인 모양이다. 배수 처리의 구정물 탱크에 있었던 지저 굴진 카와, 민간에서는 사용 금지의 수소 폭탄의 사건까지 옛날 얘기라고 처리해 버릴 정도로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글이 나에게 여러 가지 일을 말해 주었다. 지진 예지에는 여러 가지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그 데이터를 사용하기 전에 하나씩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컴퓨터는 거의 소용이 닿지 않는다. 컴퓨터라는 것은 확실히 많은 양의 복잡한 계산을 순간적으로 처리할 수가 있다. 그러나 데이터에 대한 판단력이 없다. 따라서 지진 예지에서는 단 하나의 경우를 빼고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경우란 누군가가 자기가 계산한 지진 예지의 결과에 자신이 없을 때다. 그 때는 자신의 계산에 수학적인 실수가 있는지 어떤지를 컴퓨터를 써서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컴퓨터의 회답을 보고 자기 계산의 실수를 알아 챈 것도 아닌 모양이다. 통신문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좋지 않은 일?" 다나까 중위는 입을 일그러뜨리고 찡그리며 웃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지하 심부의 지진 에너지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네." "그렇지만 오늘 관측으로는......." 내 말을 다나까 중위가 막았다. "오늘밤 관측 결과로 나타났단 말일세. 지진 에너지가 대단히 빠른 속도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네. 무슨 일인가가 지하 심부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는 증거일세." 비로소 나는 관측실을 둘러보고 각종 관측 지도와 측심도에 눈을 돌렸다. 어느 관측 지도도 이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하 에너지의 증가는 0900시에서2300시에 사이에 현저했다. 다나까 중위가 내 뒤에서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특별 지오존데 관측을 명령하려고 한다. 지하 2백 킬로에 지오존데를 내려놓는다면 정확한 지진 예지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겠지. 그러나......." 왜 마지막까지 말 할 수 없는가. 나는 잘 알고 있다. 지오존데를 그 정도로 지하 깊이 내려도 성공할 기회는 극히 드물다. 지중의 압력이 너무나 강한 것이다. 10개중에 9개의 지오존데는 2백 킬로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그 압력에 파괴되고 말 것이다. "해 보기로 하세. 지하 20킬로 정도나 될지 모르지만......." 다나까 중위는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내게 얼굴을 돌렸다. "지금의 내게는 구정물 탱크에 있던 지저 굴진 카 얘기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제대로 들을 여유가 없네." "증거가 필요하다면 구정물 탱크를 다 비워 놓고 주위의 암벽을 조사해 보면 좋겠죠." 라고 나는 제의했다. "오늘밤은 구정물 탱크의 배수를 하고 있을 여유가 없네. 특별 지오존데 관측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야. 자네는 이제 돌아가도 좋아. 기숙사에 가서 잠이나 자게." 다나까 중위는 내가 방을 나오기도 전에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관측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숙사에 돌아오자 나는 뜨거운 샤워 아래 서서 얼어 버릴 뻔한 발의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주물렀다. 그리고 침대에 기어들었지만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숙부의 일을 옹호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냈으리라고 말한 다나까 중위를 원망할 마음은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내가 목격한 일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밥 에스코와, 늙어빠진 중국인과, 숙부의 친구인 기데온 파크가 지저 굴진 카에 올라타고 있었는지 내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그 세 사람이 어디서 수폭을 손에 넣은 건지 영 짐작도 안 간다. 그 수폭을 대체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했을까? 나는 찔끔해서 후닥닥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다나까 중위가 지금 애태우고 있는 지진 에너지가 증가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나는 타이드 신부의 말을 생각해 냈다. 누군가가 인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주가(주식의 값)를 조작하기 위해서 인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지만 밥들이 지저 굴진 카로 땅 밑으로 운반해 간 수폭이, 현재의 지진 에너지가 격증하고 있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만약에 수중에서 수폭이 폭발한다면 축적되어 있는 지진 에너지를 해방시켜 실제로 지진을      일으킬 것이다.나는 가슴을 쓰다듬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나쁜 꿈을 꾸었다.나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에워싸고 있는 돔의 균열(갈라져 나누어짐)을 발견했다. 거기로 차가운 바닷물이 스며들어 바닥에 떨어져 작은 흐름이 되고, 또 소용돌이치는 강이 되어 좌악좌악 시내로 침입했다. 나는 이든나이트 막이 찢어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 숙부를 부르러 가려고 했으나, 금방 찬물을 뒤집어쓰고 몸이 얼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물은 내 턱까지 찼다. 누군가가 나를 잡아 물에서 건져 주었다. 나는 눈을 떴다.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은 할리 단소프였다. "가위에 몹시 눌린 모양이군, 짐, 저녁에 오징어를 먹었나?" 잠수부 사이에선 오징어를 먹으면 나쁜 꿈을 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할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우리들은 전원 30분 이내에 스테이션 케이(K)에 출근하도록 명령이 내렸네. 짐."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손목 시계를 찾았다. "지금 몇 시인가? ......." "0500시네, 짐." 할리가 말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다나까 중위는 우리들을 보통 때보다 3시간이나 일찍 근무하도록 하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지하 심부에 고여 있는 지진 에너지에 관한 문제인 것일까? 우리들이 스테이션 케이(K)에 도착했을 때 케로우 중위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다나까 중위의 신고장을 받아 지오존데를 지하로 내리는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작업을 거들어 주라고 명령하였다. 케로우 중위는 언짢은 기색으로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밥 에스코는 스테이션 케이(K)에 없었다. 기숙사에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들이 지오존데를 지하로 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다나까 중위는 스테이션 케이(K)의 한 구석에 있는 어느 조그만 관측 지도실 침대에서 큰 대자로 누워 자고 있었다. 작업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지오존데는 역시 스테이션 케이(K)의 지하실에서 겨우 21킬로 내려가서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망가지기 전에 수초 동안 귀중한 관측 데이터를 음파로 보내왔다. 그것은 굉장히 높은 온도와 이상한 중력 변화였다. 이 2개의 데이터는 스테이션 케이(K)의 지하에 고온이며, 밀도가 짙은 암석의 흐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고온이며 밀도가 짙은 작은 암석의 흐름, 그것은 흐물흐물하게 용해된 마그마(땅 속의 깊은 곳에 뜨겁고 녹은 상태로 있는 바위를 만드는 물질. 바윗물)가 틀림없었다. 케로우 중위는 지각 구분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나까 중위가 예측하고 있던 대로다. 이든, 단소프, 자네들 두 사람은 곧 지오존데의 관측 데이터를 분석하게. 한 사람씩 분석해서 같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네. 자네들이 습득한 지진 예지 기술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다. 열심히 하게." 그래서 할리와 나는 분석 데스크(책상)에 나란히 앉았다. 우선 나는 지하의 등압선(기압이 같은 지점을 서로 이어 맺은 곡선)과 등온선(온도가 같은 지점을 이어서 그린 선)의 중력 변화 지수 등을 지각 구분도에 써넣었다. 그리고 과거의 분석 결과하고 대조해 봐서 장래의 변화를 예지 했다. 다음으로 타이드 신부가 발견한 지진 역학의 법칙을 사용해서 지진 에너지의 축적량을 계산하고, 그 에너지의 방출 범위와 진동 규모 등을 계산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계산해 낸 지진 예지의 수치에 시간과 진도의 확립 오차의 법칙을 적용해서 수정했다. 나는 내 분석 결과에 깜짝 놀라서 할리의 데스크를 들여다보았다. 할리의 계산도 이럭저럭 나하고 같은 결과가 된 것 같았다. 할리의 얼굴은 창백했다. 핏발이 선 눈으로 계산을 다시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할리는 얼굴을 들고 불안스럽게 나를 보았다. "짐 , 끝났나?" "응. 끝났네." "자네의 예지는 어떤가?" 할리의 입술은 마르고,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한숨을 들이쉬고 나는 잘라서 말했다. "예측 진도, 10 플러스(+) 마이너스(-) 2. 예측 시간, 36시간 플러스(+) 마이너스(-) 24시간." 그러자 할리는 지우개를 놓고 안심한 듯이 속삭였다. "나는 내 능력에 자신을 잃을 뻔했지만....... 좋았어. 내 해답도 자네하고 같아." 그리고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굴속 같은 정적이 우리를 휩쌌다. 주위의 벽에서 물이 스며 나왔다. 그것이 소리도 없이 벽을 타고 땅바닥 한쪽에 있는 도랑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3천 미터의 암석과 4천 미터의 바다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예지로는 지진은 빠르면 지금부터 12시간 후에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진도 12의 초대형 지진이 될 가능성이 있네." 할리는 의자를 돌려 관측실의 시계를 쳐다보고 큰 목소리로 계속했다. "진도 12의 지진이 일어나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지."     10억 불의 공황   우리들은 지진 예지의 결과를 케로우 중위에게 제출했다. "일어나게, 다나까 중위!" 케로우 중위는 날카롭게 외치고는 우리들의 지진 예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잠이 깬 다나까 중위가 비칠비칠하면서 다가왔다. 두 중위는 각기 우리들의 지진 예지를 검토했다. 이윽고 다나까 중위는 한숨을 쉬고, 예지의 계산서를 책상 위에 놓고 케로우 중위를 돌아보았다. "우리들의 계산과 같군. 다나까 중위." 라고, 케로우 중위가 말했다. "음, 마침내 출동할 때가 되었군. 뒤를 부탁하네. 케로우 중위.“ 다나까 중위는 황급히 방을 나갔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케로우 중위가 우리하고 마주 앉아 뱉듯이 말했다. "축하하네. 자네들의 지진 예지의 결과는 나나 중위의 예지하고 꼭 일치했네. 이것으로 우리들은 60시간 이내에 대지진의 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예언할 수 있네." 우리는 잠시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지저의 관측소는 기분 나쁜 정적에 싸였다.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울려 퍼지고 극미소 지진계가 우리들의 마음의 동요까지 기록하는 것처럼 바늘이 흔들거렸다. "대지진에 대해서 우리들은 무엇을 하면 좋습니까?" 할리가 헐떡이면서 말했다. "지진을 기다릴 뿐일세.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케로우 중위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표정을 굳히면서 말했다. "지진 얘기를 누구에게도 해선 안 되네. 알겠나? 우리들의 일은 극비일세.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지진 예지의 결과를 말해선 안 된단 말일세. 상대가 누가 됐던지 말이네." 나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중위님.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면 시민들은 그것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 해저 도시는 항상 위험에 싸여 있다네." "하지만 이러한 위기는 좀처럼 없습니다. 진도 12의 대지진이 온다면 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중위님은 생각지 않습니까? 적어도 시민들의 대피 수단을......." "그것은 우리들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걸세. 그것 때문에 다나까 중위가 달려갔지만 말이네." 케로우 중위는 지진 예지 용지를 초조하게 들여다보았다 "스테이션 케이(K)는 해저 함대에 시 당국이 협력해서 설치되었네. 그래서 시 당국의 허가 없이는 우리들은 지진 예지의 결과를 발표할 수가 없다는 규칙을 정했다네. 어젯밤 다나까 중위는 시장에게 전화를 걸었네. 그리고 지급 긴급 회의를 열도록 시장에게 요청하러 간 걸세. 시의회의 승인을 얻지 않으면 지진 예지의 결과를 발표할 수 없기 때문이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렇게 가만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라고, 나는 외쳤다.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케로우 중위는 고함친다. 그로부터 2시간 동안 우리들은 새로운 데이터를 보충해서 지진 예보를 검토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나까 중위가 스테이션 케이(K)로 돌아왔다. 깨끗이 면도를 하고 새로운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오랫동안 서리 속에 내버려둬서 시들어져 가는 작두콩처럼 쪼그라들어 생기가 없었다. 우리들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서둘러 각종 계기를 읽고, 극미소 지진 그래프를 따라 조사하고는, 천천히 책상으로 뒤돌아갔다. 케로우 중위는 예지가 혹시나 틀리지나 않았나 해서 역(반대)계산을 하고 있었다. "변화가 있나?“ 다나까 중위가 묻자 케로우 중위는 고개를 저었다. "변화는 없네. 시의회 쪽은 어떻게 됐나?" "모두 다 바빠서 회의에 출석하지 못한다는군! 의원들은     거의가 실업가니까 말이네. 그리고 어쩌면 지진 예지를 발표해서 시내에 패닉(경제계가 혼란에 빠지는 상태. 즉 경제 공황)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일세. 하지만 패닉은 벌써 일어나고 있는걸.""패닉이?" 케로우 중위는 할리하고 나를 쏘아보았다. "지진 예보를 누가 알렸지?" "그런 게 아닐세. 먼젓번 지진의 영향이 꼬리를 끌어 주식이 쏟아져 나와서 주가는 대폭락일세. 오늘도 시장에게 가는 도중에 주식 거래소가 열려 있었는데, 꼭 정신 병원 같은 소동이었네. 나는 단소프 씨하고 전화조차 못했다니까. 긴급한 경우에 대비해서 전화 회선을 확보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 하여튼 시장은 주식 거래소의 종업(업무를 마침) 후가 아니면, 의결에 필요한 의원의 정수를 모이게 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는 걸세. 이제 3시간만 참으면 되네." 그렇게 말하고 다나까 중위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우리들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한다?" 다나까 중위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우리들이 우리 마음대로 지진 예측의 결과를 발표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게.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경찰의 협력이 전혀 없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상상할 수 있나? 믿을 수 없는 무서운 혼란이 일어나겠지. 자네가 상상할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날 걸세! 그렇게 되었을 때 과연 시민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네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는 없네. 해저 함대는 내가 기지 사령부에 보고한 지진 예지의 결과에 따라 이미 피난 계획을 세우고 있네. 물론 이 스테이션 케이(K)는 가능한 한 활동을 계속하겠지만 만약에 자네가 빨리 피난할 수 있게 다른 근무로 바꾸고 싶다면......." "다나까 중위님, 너무합니다!" 나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아니, 미안하네." 다나까 중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오존데를 또 하나 망가뜨려 보게! 새 데이터가 필요해.“ 또다시 지오존데가 21킬로의 지중으로 내려졌다. 그것이 망가지기 전에 보내온 데이터에도 특히 문제가 될 만한 변화는 없었다. 나는 새 데이터를 근본으로 해서 진도와 시간을 다시 계산했다. 해답은 '진도, 11 플러스(+) 마이너스(-) 2도','시간, 30시간 플러스(+) 마이너스(-) 12시간'으로 나왔다. 다나까 중위는 내 해답을 자기 해답하고 비교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일치했군. 먼젓번하고 틀리는 건 지진이 약간 대형이 되고, 지진이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 가까워진 것뿐이네." 다나까 중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입 언저리가 굳어 있었다. "시장에게 또 전화를 걸고 오겠네." 다나까 중위가 자기 방으로 사라졌을 때 할리가 들어 왔다. 식당에서 횐 뚜껑이 달린 커피 잔을 여러 개 날라왔다. 그 중 1개를 내게 주며 할리는 물었다. "샌드위치 먹을래?" 나는 할리가 내미는 쟁반을 보고 머리를 가로 저었다. 스테이션 케이(K)의 시계는 점심 시간을 훨씬 지나있었지만 별로 식욕이 없었다. "나도 먹고 싶지 않아." 할리도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다나까 중위는 무엇을 하고 있나?" "시장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네." "다나까 중위는 나에게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게 해주지 않을까? 만약에 내가 지진 예지 정보를 알리면 우리 아버지는 10분 안으로 의회를 열게 할걸세." 그 때 다나까 중위가 자기 방에서 나와 조용히 다가왔다. "단소프 후보생, 자네가 부친에게 전화할 필요는없네. 의회는 지금 열렸네." 그리고 케로우 중위에게 얼굴을 돌렸다. "나는 이제부터 시의회에 지진 예지의 결과를 보고하러 가네. 스테이션 케이(K)에 관해서는 자네에게 전 책임을 맡기겠네. 케로우 중위, 시의회는 굉장한 소동이 일어날 걸세. 일부 의원들은 지진 예지 발표를 반대하고 있으니까." "저를 함께 데리고 가 주실 수 없습니까? 제 모습을 보면 부친은 지진 예지 발표에 힘을 빌려 주실 지도 모르는데......." 할리는 열심히 부탁했다. "음, 나는 자네하고 짐 이든을 같이 데리고 갈 작정이네. 단 자네들이 할 일은 관측 지도를 펼쳐 놓는 것뿐일세. 이야기는 내가 하겠네. 잘 알아두게."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시의회 의사당은 금융 지구와 해상에 떠 있는 비행장 윗 부분의 발착장 사이에 있었다. 시장과 의원들은 해저 생활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대회의장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회의였다. 의원들은 제멋대로 자기 생각을 서로 주장하고 여기저기서 논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시장은 10번 이상이나 '정숙'이라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나까 중위가 연단에 섰어도 아직 떠들썩한 것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의 한 마디로 소란은 딱 그쳤다. "진도 11도의 해저 지진이 얼마 안 있어 일어납니다." "진도 11도라고?“ 시장은 놀라서 되물었다. "예측 진도 11도 입니다." 다나까 중위는 되풀이한다. "예측 진도 11도라?" "예측이라면 진도가 그대로 11도가 될 수도 있겠지?" 벤 단소프가 말참견을 하였다. "그렇습니다." "혹은 진도가 9도, 8도 아니 7도 일는지도 알 수 없지." "아뇨. 그것은 너무 낮게 보시는 겁니다."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을 테지?"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확률로 보아 대단히 희박합니다." "알았소, 중위. 당신은 확률의 문제를 근거로 해서 우리들 보고 이 해저 도시에서 피난하라는 말이군. 그것을 실행하려면 얼마마한 비용이 들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 말을 듣자 다나까 중위의 다갈색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단소프 씨!" "아니, 문제지요 중위. 우리들은 돈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우리들이 거액의 세금을 내지 않으면 사회 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지. 물론 당신네들 과학자가 소용이 되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내 아들도 당신의 부하로 일하고 있소. 내 아들은 아주 우수한 놈입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애요. 우리들은 어린애들에게 이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습니다! 중위, 당신은 지금 우리에게 지진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가르쳐 주었소. 이야기는 잘 알아들었소. 그래서 당신은 우리에게 어쩌라는거요?" "대지진은 48시간 이내에 일어납니다. 전 시민은 곧 피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나까 중위는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말은 너무 지나쳤네, 중위!" 단소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서 고함친다. "당신이 할 일은 지진 예지를 하는 것뿐일세! 거기에 따라 어떠한 방법을 쓰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결정할 것이네. 나로서는 피난은 절대 반댈세!" 순간 넓은 의장 안이 조용해졌다. 다나까 중위는 가방에서 노트를 끄집어내어 의원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 당국의 건설 기사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그 보고입니다. 기사들의 말에 따르면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는 진도 9도까지의 지진에는 견디어 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든 나이트의 안전 셔터가 완전히 가동하면 대부분의 시민은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도 10도가 되면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들의 지진 예지로는 지금부터 일어날 지진이 진도 11도나 아니면 12도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위, 나는 나의 주장을 반복할 수밖에 없군.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시민은 피난할 필요가 없소." 여기서 벤 단소프는 시장 쪽을 향했다. "시장, 그 이유를 중위에게 설명해 주시오." 시장은 혈색이 좋은 큰 사나이였지만 단소프가 갑자기 발언하라는 바람에 놀란 모양이어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 당국에서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특별 직원들이 수년간이 걸쳐 피난 문제를 연구해 왔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직원들에게 현재 전 시민이 당장에 피난할 방법을 물었던 바 불가능이란 대답을 들었습니다. 현재의 전 인구는 75만 명입니다. 사용이 가능한 모든 선박을 동원해 본대도 5만 명 이상은 운반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틀간의 여유가 있다면 육상이나 해상에 피난길을 설치해서 10만 명쯤은 피난시킬 수 있습니다. 떠 있는 비행장을 사용해서 5만 명에서 10만 명을 피난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해저 도시에는 50만 명이나 되는 어른과 아이들이 남아서 해신(바다를 다스리는 신령)의 저주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째서 당신은 평상시부터 좀 더 좋은 계획을 세워 두지 않았습니까? 언젠가 이러한 위기가 오리라는 것을 당신은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다나까 중위는 홧김에 외쳤다. "중위! 말이 지나치군!" 시장 역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같이 외쳤다. 그러나 벤 단소프는 시장을 말리고는 대신 자기가 말하기 시작했다. "중위, 물리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도 있소. 대부분의 시민은 가령 피난할 수 있다 쳐도 여기서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요. 여기는 우리들의 집이오. 우리들에게 피난을 명령하는 지진 예지는 고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시장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시장, 나는 중위에게 감사하고, 지하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주기를 제안하는 바요." 의원들 사이에서 또다시 의논이 시작되었지만, 회의를 지도하고 있는 것은 벤 단소프였다. 시장조차도 단소프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들은 힘없이 회의장에서 나와 지하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연판으로 둘러싼 금고   다나까 중위는 노여움을 감추려고 했으나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시의회 의사당을 나온 우리들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할리가 입을 열었다. "다나까 중위님, 부친의 일을 나쁘게 생각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괜찮아! 핑계 따윈 듣고 싶지 않네!" 하고, 다나까 중위는 고함쳤다.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친은 실업가입니다. 중위님이 그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는 겁니다." "알고 있네. 자네 아버지는 살인자라는 걸 말이네." 다나까 중위는 끝까지 냉담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아버지는 어떻든 아버지입니다." "미안하네, 이 일로 인해서 나는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진 모양이네." 다나까 중위의 마음속을 우리들은 알 것 같았다. 이곳에는 거대한 현무암의 기둥이 즐비하고, 호화스러운 사무실과 시 건물 빌딩이 나란히 서고, 그 사이를 시민들이 바쁜 듯이 왕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진 예지가 옳은 것이라면 이틀 동안에 모두 죽어 버리게 된다. 해저 도시      밑에 있는 암반 그 자체가 허물어져서 빌딩이 무너지고 도움의 이든나이트 막을 찢어 버리고 5천 미터의 수압이 시 전체를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폐허는 심해의 낙지와 오징어의 집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시 자체가 시민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단소프 후보생!" 돌연 다나까 중위가 입을 열었다. 할리는 부동 자세를 취했다. "단소프, 전화를 걸어 주게. 나 대신 기지 사령관을 불러내어 시의회가 내 권고를 거부한 것을 보고하게. 해저 함대가 독립 행동을 취하는 편이 좋겠다고 전하게." "네, 중위님!" 할리는 서둘러서 전화 박스로 향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다나까 중위는 중얼거렸다. "해저 함대는 피난해도 자기만은 피난하진 않겠지. 시민의 일부를 구하려고 할 게 틀림없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있고 말고! 할리 단소프가 전화를 하고 돌아오면, 우리들은 즉시 최근 연거푸 일어나는 지진이 인공적인 것인지 어떤지, 그것을 조사하러 가는 것일세!" 다나까 중위는 힘차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지저 굴진 카를 본 구정물 탱크로 안내하겠습니다. 물을 뿜어 내지 않더라도 잠수복을 입고 들어가면......." 나는 기운이 나서 말했지만, 다나까 중위는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서둘지 말게. 나는 구정물 탱크를 조사하러 갈 마음은 없네. 자네 숙부님의 사무실을 조사하는 걸세." 할리가 돌아오자 우리들 세 사람은 곧 4층으로 향했다. 우리들은 잠자코 있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시내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공황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제 7구의 거리에는 무거운 전기 트랙이 여전히 시끄럽게 달리고 있었다. 공장이나 창고에서는 노동자들이 바쁜 듯이 일하고, 주변에는 해산물의 냄새가 진하게 떠돌고 있었다. 나는 다나까 중위와 할리를 안내해서 88번지의 창고 사이에 있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지나서 '이든 기업'의 문 앞에 섰다. 역시 나는 망설였다. "열어!" 다나까 중위는 명령했다. 나는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기데온 파크가 지저분한 책상에서 낡은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얼굴을 들어 나를 보자 타이프에서 손을 떼면서 외쳤다. "짐! 잘 왔네!" 그러나 내가 혼자가 아닌 것을 알자 웃음이 사라졌다. 붙임성 있는 검은 얼굴이 쌀쌀해졌다. 낡은 타이프 라이터에 플라스틱 커버를 하고, 치다만 타이프 용지를 감추고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이 쪽은 다나까 중위라네, 기데온."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중위." 기데온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스튜어트 이든을 만나고 싶소. 여기에 안 계신가?" "계십니다. 구석방입니다." "그런가." 다나까 중위는 구석방을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그러나 기데온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미안하지만 스튜어트는 지금 취침중이라서......." "깨워 주게!" "그게 곤란합니다, 중위. 스튜어트는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매일 이 시간은 휴식을 위해 낮잠을 자게 되어 있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오실 수 없을까요?" 기데온은 정중히 설명을 했다. "자네는 무엇인가 숨기고 있군, 파크! 저리 비키게!" 다나까 중위는 외쳤으나 기데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커다란 검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다나까 중위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흥분한 나머지 떨고 있었다. 순간 나는 맞붙잡고 싸우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자기 감정을 누르고 한 발 물러섰다. "미안하네, 파크. 내 태도가 좀 예의에 어긋났던 모양일세. 그렇지만 나는 역시 해저 함대 일로 여기에 왔네." "해저 함대의?" 기데온의 표정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중요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네. 파크, 만약에 스튜어트 이든이 사실상 있는 것 같으면 깨우는 편이 좋을 걸세. 스튜어트 이든은 대단히 복잡한 입장이 되어 있네. 그것은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파크, 짐 이든 후보생의 보고에 의하면 자네는 지저 굴진 카의 사용 및 금지된 핵 폭발물 소유라는 불법 행위를 하고 있더군." 기데온 파크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얼굴을 돌려 나를 보았다. "짐, 자네는 우리하고 같이 가세." 다나까 중위는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까 중위가 말하는 대로네. 기데온, 내 생각으로서도 스튜어트 숙부님을 깨우는 편이 좋을 것 같네." "그렇겠지요, 도련님." 기데온은 한숨을 쉬고 빙그르 방향을 돌려 초록색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잠깐 사이를 두고 기데온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우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방 한구석에 있는 강철제 대금고와 그 옆에 있는 좁은 침대였다. 침대 옆에는 숙부의 장화가 벗겨져 있었다. 침대 위에서 숙부가 한 팔꿈치를 세우고 몸을 일으키며 나를 보았다. 축 늘어진 숙부의 새파란 눈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짐, 만나고 싶었다!" 나를 보고 숙부는 밝게 웃었으나, 기데온처럼 내가 혼자가 아닌 것을 알자 갑자기 웃음이 사라지고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의 동요를 감추는 베일과 같은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숙부의 목소리는 침착성을 되찾고 있었다. "있고 말고요." 다나까 중위가 숙부의 말을 받아서 말했다. "이든 후보생, 이분이 자네 숙부님이신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해저 함대의 다나까 중위입니다. 공적인 용무로 찾아뵈었습니다." 다나까 중위는 방안을 둘러보고, 큰 금고에 눈길을 멈추고 말을 계속했다. "이든 씨, 해저 함대는 당신이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인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당신의 발언은 증거가 될 것이니 그리 아시고 말씀하십시오." "알았소." 숙부는 침대 위에 일어나 불상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놀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훨씬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숙부는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나 망가진 책상 앞까지 천천히 걸어와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다나까 중위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알고 싶소?"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지저 굴진 카하고 금지된 수폭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시치미를 뗄 수는 없습니다. 당신 조수가 수폭을 굴진 카에 실어 나르는 현장을 목격 당했으니까요." 숙부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 기데온에게로 눈을 옮겼다. 기데온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군. 그러나 그것은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오?" 이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기데온에게 책임을 밀어붙이는 따위의 짓은 절대로 한 일이 없는 숙부인 것이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든 씨, 당신에게 직접 관계가 있는 일을 몇 가지 물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는...." 다나까 중위는 손가락을 하나 꼽고, "당신이 캘커타 해산(깊은 바다에서 1천 미터 이상의 높이로 고립되어 있는 봉우리) 부근의 해저(바다의 밑바닥)에서 분화 때문에 수중 카를 잃었을 때, 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셨는가라는 것입니다." 하고, 숙부를 쳐다보았다. "심해(깊은 바다) 살베이지(Salvage. 해난 구조, 침몰선 인양 등)는 내가 가장 힘을 쏟고 있는 일이라오. 중위, 우리들은 해저 산맥 계곡에서 침몰선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인양하려고 하였소." 숙부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다나까 중위는 가늘고 새까만 눈썹을 한쪽만 꿈틀하고 움직였다. "나는 인도양의 역사 지식에 좨 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 25년 동안에 캘커타 해산 부근에서 대형선이 침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것은 좀 더 옛 시대의 침몰선이라오." "알겠습니다." 다나까 중위는 대답은 했지만 의심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심해 살베이지가 당신의 사업이라면 어째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사무실을 두었습니까?" "나의 일은 살베이지뿐만이 아니오. 나는 옛날부터 바다에 관한 모든 사물을 사업의 대상으로 해온 것이오." "주식 투기도 말입니까? 나는 당신이 먼젓번 지진으로 백만 불의 이익을 얻었다고 듣고 있습니다." "때로는 주식 투기도 사업의 하나입니다. 나는 과거 30년 동안 바다의 부를 취급해서 장사를 해 왔습니다. 캘커타 해산에서 수중 카를 잃어버리고 이 곳으로 왔을 때 주식이 과열해서 이상 고가(높은 값)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한 번 오면 그것이 작은 것이라도 대폭락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소. 여기서는 빠르건 늦건 간에 언젠가는 지진이 일어나니까 말이오. 그래서 투매에 나섰던 거요. 이만하면 대답으로서 충분하겠소?" "질문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저 금고의 내용물은 무엇입니까?" "다나까 중위, 그 질문은 월권이오! 나는 마리니아의 시민이오. 나는 이곳에서도 법률적인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소. 만약에 당신이 금고 속을 보고 싶다면 수사 영장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오!"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열 수 없습니다!" 숙부는 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물고 늘어졌다. "당신은 금고를 열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이든 씨, 첫째 이유는 먼젓번 지진을 밥 에스코 후보생이 틀림없이 예지 한 사실입니다. 둘째는 에스코하고 여기      있는 당신 조수가 지저 굴진 카를 숨겨둔 구정물 탱크까지 갈 때 미행 당한 일입니다. 셋째는 에스코와 당신 조수가 지저 굴진 카에 수폭을 싣고 있는 현장을 목격 당한 사실입니다. 넷째는 에스코와 파크를 미행해서 지저 굴진 카를 발견하고, 그 일을 증언한 사람이 당신의 조카인 이든 후보생이란 사실입니다."숙부는 책상 뒤에 털썩 주저앉아 다나까 중위가 커다란 목소리로 하나하나 이유를 열거할 때마다 마치 매맞고 있는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주름 투성이의 얼굴이 격한 분노로 해서 시뻘겋게 물들었다. 굳게 마주잡은 두 주먹이 공중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렇지만 최후에 다나까 중위가 내 이름을 대자, 숙부는 양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 알았네. 자네의 승리일세. 중위, 그럼 금고를 열겠네." 숙부는 일어섰으나 어지러운 듯 의자를 잡고 잠깐 쉬었다. 그리고 금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시력이 약한 눈을 다이얼에 갖다 댔다. 곧 찰카닥 하고 볼트가 벗겨졌다. 숙부는 괴로운 듯이 일어서서 금고 문을 열었다. 나는 다나까 중위의 뒤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금고 내부는 두께 10센티의 연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 광선이 들어가서 스텐레스 스틸의 밴드를 감은 황금색 공이 몇 개나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수폭이다!" 다나까 중위는 승리감에 외쳤다. 그리고 분노에 타는 얼굴을 숙부에게 돌리고 말했다. "설명해 주십시오, 이든 씨. 금고 안에 왜 수폭을 넣어둔 거죠?"     스튜어트 이든의 범죄   다나까 중위는 연판으로 둘러싼 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수폭의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듯 뒷걸음질쳤다. 그 얼굴에는 근심, 놀라움, 슬픔 등이 뒤섞인 승리감 이 나타나고 있었다. "자아, 이든 씨! 어떤 변명을 하실 셈이오?" "나는, 나는......." 숙부는 말을 더듬었다. 금고에서 떨어져 비칠비칠하며 겨우 침대까지 걸어간 숙부는 그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벽에 털썩 기대앉았다. 숙부의 그런 모양을 보고 있던 다나까 중위가, "저것은 핵폭탄이란 말이오!" 하고, 외쳤다. "민간인이 가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해저 함대에서 홈친 것이 틀림없소.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서도 민간의 핵 폭발물 제조 및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법이 적용됩니다. 당신은 금지품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정하지 않소." 숙부는 거의 들릴까 말까 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이 수소폭탄으로 인공 해저 지진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당신은 부정합니까?" 다나까 중위는 꿰뚫는 것 같은 기세로 숙부를 손가락질했다. 숙부는 괴로운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다나까 중위는 놀란 모양이었다. 중위는 나를 힐끗 보고 나서 숙부에게로 눈을 돌리고, 반신반의하는 듯 다시 물었다. "당신은 인정하는 것입니까? 인공 지진으로 인해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다는 무서운 범죄를 인정하는 것입니까?" "죽음이라고? 아무도 죽지 않아......." 말하다 말고 숙부는 긴 숨을 몰아쉬더니 바닷바람에 그을린 얼굴이 창백해지고 돌연 얻어맞은 것처럼 털썩하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숙부는 머리를 침대 밖으로 내밀고 누워서 괴로운 듯이 헐떡거렸다. "스튜어트 숙부님?" 나는 외치면서 달려갔다. 기데온도 숙부를 도우러 달려왔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우리들을 막았다. "안 돼! 그 사나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놈은 범죄자다!" "그렇지만 환자입니다." 기데온이 정중히 항의하였다. "약이 필요합니다. 나를 밀어내 버리면 당신은 환자를 죽이는 것이 된단 말이오!" "그 책임은 물론 내가 지지. 그 사나이는 내가 체포한 용의자요." 다나까 중위는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는 숙부를 향해 점잖을 부리며 선고했다. "스튜어트 이든, 나는 해저 함대 사관의 권한에 따라 핵무기의 불법 제조 사용 방지령을 적용해서 당신을 체포한다!" 이 말이 숙부에게 들렸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데온에게는 들렸을 텐데, 항의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침대에 다가가 재빨리 숙부의 머리 밑에 베개를 받치고, 발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담요를 덮어 주면서 속삭였다. "괜찮아, 스튜어트. 지금 주사를 놔 줄 테니까." "아무 것도 하면 안 돼! 그 사나이는 범죄자다!" 다나까 중위는 다시 고함쳤다. 기데온은 일어서서 다나까 중위에게 얼굴을 돌렸다. 굉장한 형상이었다. 이렇게 화가 난 기데온의 얼굴을 나는 아직까지 본 일이 없었다. 기데온은 웬만해서는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사나이가 아닌 것이다. 다행히 다나까 중위의 얼굴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기를 잘 했다. 기데온은 고대 아프리카의 거인 전사처럼 다리를 벌리고 서서 심해의 밑바닥을 생각나게 하는 기분 나쁜 검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낮지만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튜어트 이든은 심장이 나쁘단 말이오. 중위, 나는 스튜어트에게 주사를 놔주려고 하오. 그것을 막으려거든 나를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오!" 다나까 중위가 숙부의 괴로워하는 숨소릴 듣고 있는 동안, 기데온은 책상 속에서 조그만 피하(살가죽의 밑) 주사기를 꺼내어 숙부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좋아, 주사를 놓아주게." 이렇게 말하고 다나까 중위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 때 기데온은 이미 주사를 놓고 있었다. 기데온의 검은 손가락이 작은 주사바늘을 숙부의 가는 팔에 꽂고 피스톤을 조용히 눌렀다. 이윽고 바늘을 빼고 바늘구멍에 동그랗게 맺힌 피를 닦아냈다. 주사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우리들은 모두들 침대를 둘러싸고 담요 밑에서 허덕이는 숙부를 지켜보았다. 기데온이 무릎을 꿇고 숙부에게 무엇인가 속삭였다. 숙부의 여윈 얼굴은 핏기가 없어지고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이든을 살펴 두게. 묻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네. 훔친 수폭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인공지진을 일으키다니.... 이 이상의 범죄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다! 더욱이 영웅적인 발명가로서 온 세계에 알려진 사나이가 이런 범죄를 범하다니! 이 사나이를 살려 두게, 파크!" 흥분하는 중위를 쳐다보고 기데온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일어나서 덧붙였다. "인제 2분만 있으면 되지요. 하지만 이제는 걱정 없습니다. 스튜어트가 눈을 떴을 때 뭐라고 할지 기다려집니다." "새삼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어." 다나까 중위는 여유를 두지 않고 고함쳤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숙부가 범죄자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스튜어트 이든은 온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나이다! 내가 소년 시대에 숙부에 대해서 품고 있던 감정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나까 중위님, 숙부님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당신은 우리 숙부님을 잘 모릅니다. 숙부님은 지금 중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거기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숙부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어야 옳습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범죄자라고 몰아치지 마십시오! 숙부님이 눈을 뜨고 설명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다나까 중위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지쳐 있었다. 그것도 그럴 만 했다. 이 수일 동안 다나까 중위는 스테이션 케이(K)의 침대에서 잠깐씩 졸았을 뿐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다. 심신이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으면서 내 상상 이상으로 숙부 문제를 생각해 왔던 것이다.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다나까 중위는 말했다. "이든 후보생, 자네는 육친의 정에 너무 약해. 하기는 나도 과거에는 자네 숙부님이 존경할만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건 지나칠 정도로 인정하고 있었단 말일세. 그러나 지금은 그 때 하고는 상황이 달라졌네. 자네는 자네 숙부님이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것을 듣지 않았나?“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기데온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는 입을 열었으나 끝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갑자기 발 밑이 흔들흔들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의자를 붙잡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느 얼굴에도 놀라움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제각기 비틀거리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해저 도시 밑에 있는 암반 깊은 곳에서 와르르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왔다. 거인인 저음 가수의 신음 소리 같았다. 대금고가 나를 향해서 천천히 미끄러져왔다. 진동이 거세어지고 내 발바닥이 흔들렸다. 숙부의 낡은 책상 위에서 잉크병이 춤을 추다 방바닥에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검푸른 잉크가 내 빨간 바짓가랑이 끝에 튀었다. 할리는 서둘러 발을 내디뎠지만 균형이 잡히지 않아서 방바닥에 넘어졌다. "지진이다!" 라고, 나는 외쳤다. "예상보다 빨리 일어났군!" 심한 지진은 혼수 상태에 빠져 있던 숙부까지 깨워 놓았다. 스튜어트 이든은 지금까지도 몇 번씩이나 죽음의 문을 들어가려다가는 살아난 사나이인 것이다. 한쪽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면서 숙부는 속삭였다. "지진일세 .기데온......." 기데온은 숙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트, 예정 대로네. 우리들은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걸세!“ "잠깐만!" 책상을 붙잡은 채 다나까 중위가 물었다. "자네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이 건물은 지진에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포로를 살려 두고 싶거든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편이 좋습니다. 중위." 기데온이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들의 발 밑에서 방바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지진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3도에서 5도 가량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 우리들이 예지 한 지진은 진도가 10도에서 12도인 것이다. 벽의 긴급 방송용 스피커가 왕왕 소리를 냈다.   전 시민 여러분에게 ! 전 시민 여러분에게 ! 지진 경보 발령 ! 전시의 내진 장치가 가동을 시작합니다 전시의 안전 셔터가 내려집니다. 전시의 주로가 정지됩니다. 전시의 공공 통로는 공용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기침을 들여 마시는 것 같은 소리를 남기고 스피커는 침묵했다. "지금 방송을 들으셨죠? 자 중위, 이곳에서 나갑시다." 기데온이 재촉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다시 방바닥 전체가 흔들렸다. 방 한가운데까지 움직여 온 대금고가 벽을 향해 도로 가려고 했다. 바닥에 붙은 4개의 차바퀴로 방바닥의 약간의 경사를 천천히 미끄러지듯 움직여 무거운 강철의 큰 몸뚱이를 바람벽에 부딪쳤다. 벽의 석고가 부서져 날았다. 금고 속에서 절그렁 절그렁, 잘그럭 잘그럭 하는 소리가 어울려 났다. 연판으로 된 내부에서 황금색 공 모양인 수소폭탄이 구르며 서로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유쾌한 소리는 못 되었다. 이론상으로는 이들 수폭은 특별한 신관(화약에 점화하여 탄환을 터뜨리기 위하여, 탄환에 장치한 도화관)을 장치하지 않으면 절대로 폭발하지 않는 장치로 되어 있으나, 만일이라는 일도 있다. 우리들은 이론보다는 만일의 경우를 두려워한다. 지금 이 순간은 우리들이 예지한 진도 12도의 대지진조차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핵폭발은 순간적으로 이 거대한 해저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짐, 금고를 붙들어라!" 기데온이 외쳤다. 우리들은 금고에 달라붙었다. 심장 발작으로 죽어가던 숙부조차도 비틀거리며 금고를 붙잡았다. 기데온의 주사는 놀랄 만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숙부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그 눈이 생기 있게 빛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숙부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금고의 한 쪽을 힘있게 붙들은 것이다. 할리하고 다나까 중위가 반대편에서 붙잡았다. 그 동안에 기데온은 금고 바퀴 밑에 전화책이며 침대의 매트리스 같은 것을 있는 대로 집어넣어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외쳤다. "자, 밖으로 나가자!" 다나까 중위는 흔들흔들 흔들리는 건을 벽을 둘러보았다. 건물 자체는 강철이기 때문에 무너질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벽은 달랐다. 회벽은 금이 가고 친정에서도 석회 부스러기가 우리들 머리 위에 떨어졌다. 기데온의 말 그대로다. 해저 도시 자체는 안전해도 이 방 안에 있으면 위험한 것이다. 벽의 스피커가 또다시 외쳐대기 시작했다.   전 시민 여러분에게! 전 시민 여러분에게! 시장의 성명을 전달해 드립니다. 현재 상황 아래에서는 위험은 없습니다. 전혀 위험은 없습니다. 전시의 내진 장치가 유효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진에 따른 사상자나 설비의 피해는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지진 경보는 얼마 안 가 해제될 것입니다. 되풀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험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은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와 거리로 나가는 출입구까지 왔다. 거리는 피난처를 찾거나, 자기 집이나 재산을 지키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나까 중위는 기도하듯이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지진이 끝나 주었으면......." 그러자 숙부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진은 앞으로 일곱 번 일어날 걸세." "일곱 번요?" 다나까 중위는 굳어진 얼굴로 숙부를 쏘아보았다. "역시, 당신은......." 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낡은 건물은 지진의 진동에 따라 내벽 벽뿐만 아니라 밖의 벽도 무너졌던 것이다. 출입구 위에 뻗어 나왔던 석회 추녀가 돌연히 무너져 내렸다. "비켜라, 짐!" 기데온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울려왔다. 나는 황급히 물러섰으나 한 발 늦었다. 석회 추녀는 나와 다나까 중위와 할리의 세 사람 위에 떨어졌다. 나는 어깨에 심한 충격을 받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동안이나 정신을 잃었었는지 알 수 없다. 문득 눈을 뜨니 내 옆에 다나까 중위가 넘어져 있었다. 발이 추녀에 깔려서 움직일 수 없었으나, 미친 사람 모냥 큰 소리로 외쳐 대고 있었다. "놈들은 도망쳐 버렸다. 살인자! 반역자!" 혼란을 틈타 기데온과 스튜어트 숙부는 유유히 도망쳐 버린 것이다. 나는 추녀 부스러기들을 헤치고 다나까 중위와 할리를 구출했다. 다행스럽게도 세 사람 모두 상처는 없었다. 다나까 중위는 마침 지나가는 경찰관을 붙잡고 숙부와 기데온의 체포를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경찰관에게는 대금고 속의 수폭이며 인공 지진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무계(허황하고 터무니없음)했다. 필경 해저 함대 사관인 주제에 지진 때문에 정신이 나가 당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위험은 없습니다. 침착하십시오!" 그처럼 경관은 지진 경보의 말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다나까 중위는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을 내게로 돌리며 외쳤다. "이든 후보생, 이래도 자네는 숙부를 옹호할 텐가? 그 사내는 도망쳤어. 내가 그 사나이의 유죄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지저 기지에의 침입자   해저 도시는 지진에 지지 않았다. 얼마 후에 진동이 멎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우리들은 해저 함대 기지에서 잠수병의 일부를 불러다 대금고 쪽 처리를 부탁하고, 방금 있었던 지진의 기록을 조사하기 위하여 서둘러 스테이션 케이(K)로돌아왔다. "진도가 4도다. 우리들의 지진 예지가 이렇게 틀린다는 것은 이상하군!" 다나까 중위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케로우 중위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빨간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가 나간 뒤 혼자서 스테이션 케이(K)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나까 중위, 우리들의 예지가 틀렸던 걸세!" 케로우 중위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또다시 지오존데를 지중에 내려보기로 하세. 새로운 데이터가 필요하네. 그리고 관측 기계를 점검해서 처음부터 예지의 계산을 다시 하는 거다. 30분 안으로 완성시켰으면 하네. 아까의 지진이 우리가 예지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다나까 중위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졸린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자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아무리 피로하더라도 다나까 중위에게 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다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에 아까의 지진이 인공 지진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예지한 진도 12도의 대지진은 예정대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잠이 부족하다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은 영원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지오존데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을 때, 해저 함대 잠수병들이 들어왔다. 지휘관인 대위가 구두의 뒤축을 딱 마주치며 부동자세를 취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나까 중위, 우리는 자네가 발견한 핵 폭발물을 여기에 넣어 두려고 운반해 왔다. 이것은 기지 사령관의 명령이다." "여기에?" 다나까 중위는 벌컥 성을 내어 쨍 하는 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런 것은 도로 가져가십시오! 우리들은 지진 관측만으로도 벅찹니다. 핵폭탄의 수비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중위, 사령관의 명령이오. 자네는 지진이 계속되고 있는 이 시기에 핵폭탄을 시내 어딘가에 놓아두라고 하나?" 대위는 강경했다. 이미 잠수병이 무거운 황금빛 공 모양의 수폭을 창고실에 계속 나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위의 말이 옳다. 적어도 스테이션 케이(K)는 해저 아래의 굳은 암반에 에워싸여 있다. 그렇지만 돔에 둘러싸인 시내는 강렬한 진동만이 아니라 홍수로 인해 파괴될 우려도 있으니까, 핵폭탄을 놓아두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우리들은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지막 잠수병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들어 왔을 때, 그 등뒤에 검은 신부 옷을 입은 사나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일어나서 외쳤다. "타이드 신부!" "오오, 짐. 안녕하시오 다나까 중위. 나의 무례한 방문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나까 중위는 예지 테이블의 의자에서 일어서며 타이드 신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라면 대환영입니다. 우리들의 지진 예보를 보시겠습니까?"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진도 12의 지진을 예지했는데 진도 4의 지진이 일어났소. 그래서 진도 4의 지진이 당신이 예지했던 지진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소. 당신의 생각은 옳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만약에 지장만 없다면 단신의 예지 재점검을 돕고 싶은데요." "그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아무쪼록 부탁 드리겠습니다." 다나까 중위는 선선히 대답했다. 2명의 중위, 타이드 신부, 할리,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은 각기 지진 예지의 계산에 들어갔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시작하기 전부터 해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드 신부가 제일 먼저 계산을 끝내고 연필을 놓았다. 다음에 다나까 중위가 얼굴을 들었다. "진도 10이다." "진도 11 도입니다." 할리가 중위의 뒤를 이어 말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전원이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12시간에서 24시간 이내에 또 다시 대지진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타이드 신부는 우리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계속했다. "이 사실은 아까 일어난 지진이 우리들이 예지한 것이 아니었다는 증명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인공으로 인한 지진, 즉 스튜어트 이든 및 그 협력자들에 의해 감행된 인공 지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로우 중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는 나를 힐끗 바라보면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어라고 말해서 좋을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번째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첫 번째보다는 조금 약한 느낌이었다. 지진계는 간신히 진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필경 장소의 문제일 것이다. 스테이션 케이(K)는 굳은 암반 속에 있지만 시내에 있는 건물에서는 지진의 진도가 커져서 더욱 흔들릴 것이 분명하다. 주위의 바위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흔들렸으나,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나까 중위는 침착성을 도로 찾았다. "그 미친놈들은 앞으로도 몇 번이나 뒤흔들 작정인가! 타이드 신부, 나는 시의회에 즉시 피난을 권고하러 가겠습니다. 함께 가 주실 수 없을까요?" "기꺼이!" 하고, 타이드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눈이 충혈된 케로우 중위가 혼자서 관측 기지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다나까 중위, 타이드 신부, 할리, 나까지 네 사람은 시의회 의사당으로 서둘러 갔다. 지금이야말로 해저 도시의 거리 거리는 험악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대수로운 피해는 눈에 뜨이지 않지만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사회 도덕을 잃어버린 얼굴들이었다. 우리들은 폭도들에게 방해를 받게 되어 몇 번인가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의사당 회의실에 모인 의원들은 반수 이하였다. 필경 일반 시민들에게는 용감한 것처럼 행세해 놓고서 개인적으로 피난해 버린 모양이다. 의사당에 머물러 있는 의원들도 완전히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서로 고함치며 마주잡고, 마치 도둑고양이들의 모임 같은 집합이었다. 벤 단소프는 의장석을 향해 외쳤다. "당신은 시장이오! 저 바보 같은 것들을 잠자코 있게 하시오. 해저 함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조금도 들리지 않는구만!" 심해 생물을 그린 아름다운 벽화 밑에서 시장은 핑크색 얼굴에 땀을 홀리며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 우리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의원끼리의 격렬한 논쟁은 전혀 조용해질 것 같지 않았다. 타이드 신부가 저벅저벅 위원석 앞으로 나갔다. 방바닥에서 시장의 망치를 집어들고 시장에게 절을 하고는 벽을 두들겼다. 그리고 잘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이상하게도 소란이 일시에 멎었다. 의원들은 입을 다물고 일제히 타이드 신부를 보았다. 타이드 신부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 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하였다. "다나까 중위가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답니다. 아무쪼록 끝까지 조용히 들어주십시오." 다나까 중위는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었다. 짧은 말로 현재의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인공 지진이 몇 번 일어날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6번은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일은 우리가 예지한 진도 10도에서 12도의 대지진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일어나면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는 마지막입니다." 다나까 중위가 강단을 내려서자 타이드 신부는 또다시 시장에게 절을 하고 의원들에게 호소하였다. "자, 여러분. 현 시점에서 우리들이 할 일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피난할 수 있는 사람은 곧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서      피난한다는 안건을 표결하고 싶습니다.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의원들은 거의 다 손을 들었다. 시장도 들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투표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할리와 나도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거친 목소리가 최면술을 깨웠다. "잠깐만!" 그것은 벤 단소프였다. "타이드 신부, 여기는 당신이 오실 곳이 아니오! 쓸데없는 일일랑 그만 둬 주십시오!" "실례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표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표결? 아아, 좋습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포기하는 결정을 해 주십시오. 그 대신 이 해저 도시는 이 후 50년 동안은 단 100원 어치의 값어치도 없어집니다. 모든 투자가가 겁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시민들이 도망쳐 버린 해저 도시'라고 생각하고 다른 해저 도시의 주를 사게 되겠지요. 그만 두십시오, 타이드 신부. 가령 어떠한 인물일지라도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쏟아 넣은 나의 투자를 무효로 하는 짓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표결을 계속하십시오! 단지 피난하는 쪽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나하고 대립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의장 안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타이드 신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피난에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두 개의 손이 천천히 오르고 또 하나가 따랐다. 그러더니, 그 중의 하나가 내리고 계속해서 또 하나가, 또 나머지의 하나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피난에 찬성하는 의원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타이드 신부는 한숨을 쉬었다. 망치를 시장 앞에 살그머니 놓고 인사를 하고 나서 타이드 신부는 말하였다. "당신들 영혼에게 신의 자비가 깃들기를......." 세 번째 지진은 우리들이 해저 함대 기지 가까이까지 돌아왔을 때 일어났다. "진도 4도군.“ 타이드 신부는 한 손으로 보도의 손잡이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다나까 중위의 손을 잡으면서 속삭였다. "진도 4, 언제나 진도 4도일세! 놈들은 우리들의 숨통을 끊을 만한 큰 지진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일까?" 다나까 중위의 목소리에는 신경질적인 울림이 섞여있었다. "침착하시오, 중위." 타이드 신부는 중위에게 충고하고는 손잡이에서 손을 놓고 곧바로 서 보았다. "이제 괜찮겠지. 나는 가 보겠소." "어디로 가십니까?" "수중 카로 진원지를 알아내고 오겠소.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진 측정뿐이오. 물론 피난할 사람을 수중 카로 탈 수 있는 데까지 태우고 실어 나르는 일도 생각해 보았소. 그러나 내 수중 카는 많은 사람을 수송하기엔 맞지 않소.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사람들을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을 지도 알 수 없소." "잘 알았습니다." 다나까 중위는 일어섰다. "단소프 후보생 , 자네는 신부님을 수중 카까지 모시고 가게.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신부님." "안녕히." 타이드 신부는 다나까 중위의 손을 잡고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진심을 가져라." 그것은 특히 지금의 경우 뜻이 깊은 말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하면서 걸었다. 기지 정문 가까이 갔을 때 다나까 중위는 나의 어깨를 잡았다. "저걸 봐라!" 전망창 너머로 해저 군항이 내다 보였다. 거기에는 수많은 잠수 함선이 집합해 있었다. 순항(배를 타고 돌아다님)중에 무선 전신이며 음파 통신으로 기지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속속(자꾸 잇달아서) 돌아오는 함정의 모습이 보였다. 시장이나 시의회의 표결에 관계없이 해저 함대는 전 함선을 통틀어서 독자적으로 시민 구출 작업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전 시민을 구출하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시장의 발표를 생각했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전 기능을 통틀어 피난 활동을 한다고 해도 대지진이 올 때는 50만 이상의 시민이 시내에 남게 되는 것이다. 설령 전 시민의 피난은 무리하다고 하더라도 될 수 있는 한 보다 많은 생명을 구출하는 것이 해저 함대의 사명이었다. 이든나이트에 둘러싸인 어뢰형(물고기 모양의 공격용 수뢰) 선체를 청백색으로 빛내며 해저 군함을 향해서 오는 해저 함대의 모습에는 비장한 각오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해저 함대의 활약을 기원하면서, 지진 예지를 계속하기 위해서 스테이션 케이(K)로 돌아왔다 긴급 방송용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재즈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의회가 시민들의 불안을 얼버무리려고 방송하고 있는 것이다. 다나까 중위는 얼굴을 찌푸리고 스피커의 스위치를 꺼 버렸다. 우리들은 몇 번이나 예지의 계산을 되풀이했다. 해답은 여전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지진이 일어날 예정 시간이 조금씩 앞 당겨지는 것뿐이었다. 몇 번의 지진에 의해 이미 우리들의 관측 기계는 피해를 받고 있었다. 모두가 암반의 약하디 약한 진동이라도 기록되는 정밀한 기계이기 때문에 진도가 4도 가량의 지진에 흔들려도 고장이 나 버리는 것이다. 해리스 준위는 계기의 전문 기술자들을 집합시켜서 관측 기계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어때, 해리스? 이제 전부 고쳤나?" 다나까 중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물었다. "전부 점검은 했습니다만.... 자신이 없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해리스 준위가 대답했다. "좋아!" 다나까 중위는 극미소 지진계의 그래프로 다가가 들여다보았으나 금방 고함쳐 댔다. "바보 같으니라고! 자네는 이 기계를 더욱 나쁘게 망가뜨렸구만? 이건 또 뭐야......." 중위는 입을 다물고 그래프의 진동 기록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우리들을 불렀다. "케로우, 이든, 이리로 오게. 그리고 좀 보게!" 나는 케로우 중위하고 같이 그래프를 들여다보았다. 그래프는 이상한 진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암반의 진동으로 치면 강하고, 그리고 규칙적이다. 마치 어떤 강력한 기계의 진동 같았다. 적어도 지진에는 이러한 진동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진원이 스테이션 케이(K)보다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 않은가! 케로우 중위는 망연자실해서 외쳤다. "기계가 고장났네. 해리스, 서둘러 조정하게. 자넨 기계를 아주 잡쳐놓고 말았군." "잠깐만, 진원을 자세히 보게. 위치가 자꾸 바뀌고 있군 그래!" 라고, 다나까 중위가 말했다. 우리들은 그냥 관측을 계속했다. 사실이었다. 이상한 진원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것은 느리기는 하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씩 고도(높은 정도)를 낮추면서 스테이션 케이(K)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다! 다나까중위, 자네는 저 귀여운 소지진을 이곳으로 초대했나?" 케로우 중위가 외쳤다. "아니, 나는 이놈의 정체를 알고 있다네. 이놈은 지저 굴진 카일세. 지중 여행에서 돌아온 걸세. 그리고 지금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아래로 다가와 있는 것이네." 다나까 중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수분 동안 우리들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채로 그래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인간이 만든 승용차가 굳은 암반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이 현재 관측 기계에 의해 보고 있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중 카에는 필경 내 숙부인 스튜어트 이든과 내 친구 밥 에스코가 함께 타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 문이 열리고 할리가 관측실로 들어왔다. 몹시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단소프 후보생 지금 돌아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다나까 중위는 할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태도를 눈치챘다. 할리의 눈은 얼굴에서 튀어나을 것처럼 커다랗게 벌려져서 우리들의 머리 너머로 현무암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할리, 무슨 일인가7" "바위.... 바위가!" 할리는 벽을 가리키며 맡을 더듬었다. 우리들은 일제히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극미소 지진계의 바늘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그래프에는 모두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진동을 기록했다. 암벽에는 긴 균열이 생기고 거기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떨어졌다. 지진인가? 아기, 그렇지는 않았다. 지진보다도 훨씬 기묘한 것이었다. 격렬하게 진동하는 균열에서 고속 엔진의 소리가 들려왔다. 잇달아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이든나이트의 머리 부분이 나타났다. 원추형의 굴착 드릴(땅을 파서 뚫는 송곳)이다. 바위가 흔들리고 부서지며, 뻥하니 구멍이 뚫렸다. 거기서 지저 굴진 카의 기다란 차체가 진동하면서 관측소에 침입해 왔다. 그것은 내가 배수 처리 지구의 구정물 탱크 속에서 목격한 지저 굴진 카에 틀림없었다.     지진 박사   여위고 작은 몸뚱이여서 인지 다나까 중위는 재빨랐다. 획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 우리 둘이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권총을 들고 뛰어나왔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길을 비켜라!" 지저 굴진 카는 거대한 몸뚱이를 흔들어 대면서 지진 예지실로 2미터 가량 코를 들이박았다. 벽의 지도를 찢고 선반을 전부 망가뜨리고 책상을 부셔 버렸다. 그리고 간신히 굴착 드릴의 회전이 약해지고 천천히 멎었다. 지저 굴질 카의 등에서 수중 카와 같은 전망탑이 조용히 솟아올랐다. 손 하나가 해치를 들어올렸지만 바위 끝에 부딪쳐 절반 밖에 열 수가 없었다. 세 번, 네 번 해 보니까 간신히 바위 끄트머리가 부서지며 뻥하니 뚫렸다. 그곳에서 비틀비틀하고 나온 것은 놀랍게도 밥 에스코였다. "정지!" 다나까 중위는 권총을 겨누고 말했다. "에스코, 움직이지 마라!" 밥은 다나까 중위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체에 사다리를 걸치고 내려오기 시작했으나 휘청하고 떨어질 뻔하였다. 밥은 차체의 이든나이트를 잡았다. 이것이 잘못이었다. 원자력 드릴로 굳은 바위를 깎아낸 마찰로 인하여 차체에서 연기가 날 지경으로 뜨거워졌던 것이다. 밥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었다. 그렇지만 데인 아픔 때문에 정신을 되찾았다. 밥은 데인 쪽 손을 다른 쪽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다나까 중위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스테이션 케이(K)를 온통 엉망으로 해 버렸으니......." "자네는 더 엉망진창인 일을 저질렀어. 에스코!" 다나까 중위가 고함친다.     "나는......."밥은 말이 막히는지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말했다. "지저 굴진 카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와도 괜찮습니까?" "다른 사람들?" 다나까 중위는 눈썹을 모았으나 곧 머리를 끄덕였다. "좋고 말고." 이번에는 밥도 순조롭게 사다리를 올라 해치 안을 향해 말했다. 맨 처음 숙부 스튜어트 이든이 나타났다. 그 얼굴은 여위고 흠뻑 땀에 젖어 있었으나, 요전번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오오, 짐." 숙부는 큰 소리로 나를 불렀으나 권총을 겨누고 있는 다나까 중위를 보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숙부 뒤를 이어 기데온 파크의 모습이 나타났다. 기데온은 해치에 서서 우리들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해치 속에 팔을 걸쳐 마지막 사람을 끌어 올렸다. 그것은 밥하고 같이 있던 늙은 중국 사람이었다. 내 옆에서 숨을 들여 마시는 기척이 났다. 다나까 중위였다. "고에쓰 박사!" 권총의 총구가 흔들려서 방바닥을 향했다. "박사님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중국인? 천만에! 늙어빠진 이 중국인이야말로 이 기지의 책장에 꽂힌 대부분의 책을 저술한 일본인 지진학자 존 고에쓰 박사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다나까 중위는 평소부터 가장 존경하는 지진학자가 도망친 범죄자인 나의 숙부하고 한속이 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고 또다시 권총을 겨누었다. "고에쓰 박사님, 까닭을 들려주십시오." "아, 좋고 말고." 그러면서 고에쓰 박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앉을 곳을 찾고 있는 것이다. 곧 할리가 접는 의자를 가져와 권했다. "고맙네." 고에쓰 박사는 미소지으며 의자에 앉자 불쑥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의 참사는 해저 거주 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다. 이것은 고에쓰 박사가 지진 예보를 잘못하고 시민의 피난을 막은 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난세이 나하에서 과오를 범했네. 그런데도 지진이 일어났을 때 마침 요꼬하마에 있어서 살아 남았지. 그래서 나는 나의 여생을 과오를 보상하는 일에 바치리라고 결심했네. 우선 나는 타이드 신부하고 협동으로 지오존데를 개발했네. 그리고 이 지저 굴진 카를 설계했지." 고에쓰 박사는 열이 식은 차체를 철썩철썩 손으로 두드리면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지네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지오존데의 존재에 의해 우리들은 이전보다도 훨씬 정확한 지진 예지가 가능해졌네."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만 나는 덜컥 말을 해버렸다. 그러나 고에쓰 박사는 미소지었다. "자네들의 예지가 틀린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걸세. 짐, 우리들 때문이라네. 자, 들어보게. 단순한 지진 예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지진을 예지해서 재해를 최소한으로 막을 뿐만 아니라 지진 그 자체를 막는 방법을 발견하리라고 결심했네. 그 방법이란 인공 지진을 일으키는 일이었네. 지하 심부에 지진 에너지가 축적되어 그것이 대지진을 일으킬 징후가 보이면, 그 직전에 파괴력이 작은 조그만 인공 지진을 몇 번씩이나 일으켜서 위험한 지진 에너지를 발산시켜 버리는 것이네. 이러한 인공 지진을 자네들은 이미 몇 번인가 체험하였네. 모두가 다 우리들 네 사람이 일으킨 거란 말일세.“ 이 이야기는 어떠한 큰 지진보다도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다나까 중위의 얼굴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할리는 꼼짝도 않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케로우 중위는 연방 머리를 젓고 있었다. 그리나 나는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제가 말했잖습니까! 나는 우리 숙부님이 돈을 벌기 위해서 더러운 짓을 할리가 없다고 그토록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다나까 중위를 향해 외쳤으나, 중위도 지지 않고 말했다. "잠깐만, 짐! 인공 지진의 진상은 고에쓰 박사의 얘기로 대충 알았지만, 아직 내게는 몇 가지인가 의문이 남아 있네. 자네는 검은 걸 희다고 우기지는 못할 걸세. 자네 숙부님은 이미 몇 가지의 범죄 행위를 인정하고 있네. 가령 먼젓번 인공 지진으로 공황을 일으켜서 백만 불의 이익을 얻은 일 같은 것 말이네. 또한 핵 폭발물의 불법 소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네." "저에게 설명시켜 주십시오, 중위님! 백만 불쯤의 이익은 숙부가 지금까지 잃어버린 금액에 비하면 극히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 백만 불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구출할 계획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숙부 사무실 금고 안에 있던 수폭은 인공 지진을 일으키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흥분해 있었다, 숙부가 나를 보고 웃음을 띄었다. 기데온은 나에게 윙크를 한다. 그리고 고에쓰 박사는 주름 투성이 얼굴에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든 후보생이 말한 대로네. 핵폭발로 인해 일으키는 소지진의 연속으로 지각에 축적된 지진 에너지를 조금씩 안전하게 발산시킬 수 있네."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해저 함대의 사관으로서 사건을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직 3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네들은 지저 굴진 카를 어디에서 손에 넣었습니까? 대량의 수폭은 어디에서 입수하셨습니까? 그리고 왜 모든 것을 비밀리에 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다나까 중위의 날카로운 질문을 숙부가 빙그레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움푹 틀어간 파란 눈에는 바다에 모든 것을 건 사나이의 정열이 불타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기로 하지. 어째서 비밀로 했는가? 이 계획은 아무래도 비밀리에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네. 만약에 우리가 시의회에 나가 설명했다고 치세. '여러분, 우리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가공할 피해를 가져오는 대지진을 막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몇 번인가 소지진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의원들이 허가를 할 것 같은가? 돈벌이에 미친 벤 단소프에게 이끌리는 시의회가 어떠한 것인가는 자네 자신도 경험했으리라고 알고 있는데?" 할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나까 중위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나머지 두 개의 질문에도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전 시민 750만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만부득이한 것이었네. 이번 계획은 10년 전 고에쓰 박사가 마리니아에 있는 나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시작한 걸세. 박사는 이전부터 그라카타우 단층을 근심하고 계셨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가 조만간에 진도 10도인가 또는 그 이상의 대지진에 습격을 당해 폐허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일세. 그리고 해저 도시의 파괴에 의해 많은 인명이 없어진다는 비극의 재발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방지하자고 결심했네." 숙부는 고에쓰 박사를 힐끗 쳐다보고 다나까 중위에게 눈을 돌렸다. "당신은 박사를 책망 할 수 있나?“ "그렇지만 어째서 박사는 당신에게 가셨습니까? 왜 이 해저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안 가셨나요?" "가셨다네. 박사는 맨 처음 벤 단소프를 만나러 가셨지. 그 때 단소프가 뭐라고 했는지 자네는 짐작이 갈 걸세. 벤 단소프는 '우리는 그런 미친 짓에 거액을 던져서 이 해저 도시의 번영을 망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했다네." 숙부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단소프는 고에쓰 박사가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에서 저지른 과실을 상기했음이 분명하네. 그리고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서 나가 달라, 이번에 다시 나타나면 경찰에 체포시키겠다'고 협박했다네." "단소프는 내가 어떤 조건만 승낙한다면 여기서 살아도 괜찮다고 제안했지. 스튜어트." 하고, 고에쓰 박사가 덧붙여 말한다. "참, 그랬었지." 숙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소프는 박사에게 지진 예지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네. 지진 예지의 정보를 독점해서 주식을 움직이면 큰 돈벌이가 된다고 생각한 걸세. 이 아이디어가 우리들에게 큰 소용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 하여튼 고에쓰 박사는 단소프에게 쫓겨나서 내게로 오셨던 걸세." "박사는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다가올 공포에 대해, 그리고 또 박사의 새로운 기술을 응용한다면 이곳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대지진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내게 말씀하셨네. 처음에 나는 반신반의했지. 그렇다고 나를 책하진 말게. 타이드 신부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렸으니까." "그러나 고에쓰 박사는 나를 설득했네. 그래서 나는 단안을 내려 한번 해 보기로 했네. 그 당시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았네. 지금도 별로 좋지는 못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또한 당시 내게는 별로 돈이 없었네. 고에쓰 박사의 계획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네. 지저 굴진 카 한 대를 만든다 해도 1천만 불이 들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가장 필요한 핵 폭발물도 없었네. 돈을 만들었지. 자네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말이네. 고에쓰 박사의 지진 예지를 이용해서 주식을 매매했던 것일세. 핵폭발물 쪽은.... 중위, 자네는 하미칼 파르카호의 조난을 기억하고 있나?""하미칼 파르카호?“ 다나까 중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자신 없게 대답했다. "그건.... 훨씬 전에, 그러니까 내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무렵, 조난한 배 말이죠. 당신이 아직 이든나이트를 발견하기 전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 배의 화물이 분명히......." "수폭이지! 자네는 굉장한 기억력을 갖고 있군, 중위. 하미칼 파르카호는 지금부터 31년 전 인도양의 캘커타 해산 부근에서 침몰했네. 어느 배거나 침몰해서 28년이 경과하면 그 화물은 인양한 사람의 소유가 되네. 이것은 국제 해양법에 명기되어 있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걸세. 나는 그 화물의 소유자가 되었네. 마침 그 무렵 고에쓰 박사는 캘커타 해산 부근에 꽤 큰 지진이 일어나리라는 걸 예지했네. 그래서 나는 금방 입수한 수폭을 써서 당장에 박사의 이론을 테스트하기로 했네. 시험은 성공했지. 그렇지만 우리들의 수중 카는 그만 미처 도망치지도 못하고 조난하고 말았네. 거기에 박사의 지저 굴진 카가 나타나서 나하고 기데온을 구출하고, 나머지 수폭들을 실었었네. 그리고 우리들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로 왔네. 지저 굴진 카는 배수 설비의 구정물 탱크 속에 감추고, 수폭은 구정물 탱크하고 사무실 금고 속에 감춰 놓고 고에쓰 박사의 이론을 실행으로 옳기는 '때'를 기다렸네. 그 때가 4일 전일세. 그 다음부터는 자네가 알고 있는 대로일세." "스튜어트! 시간일세......." 돌연 박사가 말했다. 숙부는 벽의 시계를 쳐다보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신중하게 말했다. "모두 조심하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이 1분쯤 계속되자 다나까 중위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겁니까?" "조용히!" 숙부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 순간 우리들은 느꼈다. 발 밑에서 바위가 흔들렸다. 기분 나쁜 땅울림이 주위의 공기를 흔들었다. 이미 우리들은 각기 무엇인가를 붙잡고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네 번째 지진일세!" 숙부는 땅울림에 지지 않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방바닥의 흔들림이 점차 거세어졌다. 지저 굴진 카의 콧등에도 진동이 전달되어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일으킨 지진에 흔들리고 있는 지저 굴진 카의 차체가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천장 바위틈이 갈라졌다. 거기서 차가운 바닷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지저에의 여행   돌연 관측실 바로 밖에서 새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다음 지진이 곧 뒤이어 일어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놀랐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스테이션 케이(K)가 홍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배수 펌프 소리였다. 펌프의 속도는 빨랐다. 천장뿐이 아니라 벽이 갈라진 기다란 틈 사이로 검은 물이 바위부스러기와 함께 흘러 들어온다. 다나까 중위는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것도 당신네들이 계획한 인공 지진의 하나입니까?"" "아암, 그렇다네." 숙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말했다. "고에쓰 박사의 계획은 단층면에 대한 대각선상에 여덟 번의 인공 지진을 일으키는 것이네. 우리는 그중 네 곳에 수폭을 장치했네. 이번 것이 네 번째네." "나머지 네 번은?" "지금부터 수폭을 장치하러 가야지." 숙부는 태연하게 말했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배수 펌프와 바닥을 흐르는 물소리만이 울렸다. 고에쓰 박사가 일어섰다. "난파선의 핵폭탄은 오랫동안 바닷속에 있었기 때문에 꽤 상한 것이었네. 우리들은 8회분의 수폭을 지저 굴진 카에 싣고 출발했지만 절반 밖에 쓰지 못했네. 그래서 예비 수폭을 가지러 오지 않으면 안되었네. 우리들은 구정물 탱크로 들어오고, 기데온하고 밥 에스코가 스튜어트의 사무실에 가 보았으나 금고 속에 넣어 두었던 수폭이 없어졌겠지.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이 해저 함대 기지로 운반되어서 이리로 옮겨진 사실을 알았네. 그래서 이리로 왔다네. 우리들은 수폭이 필요하네!" 고에쓰 박사가 힘차게 외쳤다. "나머지 수폭이 없으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네. 대지진의 진도는 1, 2도쯤 내리겠지만 반드시 일어나네. 그리고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는 전멸할 걸세." 사건의 진상을 알자 다나까 중위의 결단은 빠르고 정확했다. "대지진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지 않으면 안 되지요. 고에쓰 박사, 수폭은 이 지하 관측소 창고에 있습니다. 지저 굴진 카에 싣는 일을 도와 드리죠!" 수폭을 싣는 데는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들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속구를 가죽끈으로 매달아 창고에서 관측소까지 바위 터널 통로를 지나 지저 굴진 카 위에 있는 기데온에게 건네주었다. "어이차!" 기데온은 배짱 좋게 웃으면서 무거운 금속구를 받아 들어 해치 속에 내려놓았다. 선 내에서는 다나까 중위와 할리가 숙부의 지시에 따라 금속구를 가지런히 놓고 있었다. 고에쓰 박사도 케로우 중위와 한 조가 되어 일하고, 밥 에스코와 나도 질세라 금속구의 운반을 서둘렀다. 수폭을 전부 나르는 일이 끝났을 때, 밥과 나는 한숨 쉬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수수께끼에 싸인 사건이 시작되면서부터 어둡게 가라앉았던 밥의 얼굴이 오래간만에 활짝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짐, 자네는 명탐정이야. 난 미행 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했는데도 안 되었었네. 정직히 말해서 자네에게 그러한 명탐정의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네." "미안하네, 밥." 나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속에서는 자네를 믿고 있었네. 숙부나 기데온도 믿고 있었지. 사복을 채우기 위해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위험 속에 빠뜨리는 것 같은 일을 할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일세. 하지만 아직 내가 모를 일이 한 가지 있네." "어떤 일 말인가, 짐7" "이번 계획을 모두 비밀리에 한 것은 당연하네. 그러나 어째서 내게도 숨겼었나? 스테이션 케이(K)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면 숙부는 왜 자네 대신에 나를 끼워 주지 않았을까?“ "자네를 동지로 삼으면 자네와 숙부하고의 인연을 알기 때문에 곧 비밀이 탄로 난다는 판단이었네. 모르겠나, 짐? 비밀을 간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네에게 우리들의 행동을 숨겨 두는 것이었네. 우리들이 스테이션 케이(K)에 배속된 직후 자네 숙부님이 몰래 나를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내게 협조를 부탁하셨다네, 숙부님은 자네를 빼 버려도 계획이 성공된 후에 잘 설명하면, 자네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네. 그 말씀대로 아닌가 짐!" "그랬었나. 그렇지만 나도 고에쓰 박사와 숙부의 계획을 도와드렸으면 좋았을 걸." 나를 빼 버린 데 대한 불만은 역시 마음속에 남았다. 이 때 다나까 중위가 지저 굴진 카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밥에게 물었다. "나도 아직 모를 것이 한 가지 있다. 자네는 먼저 번에 우리들이 아무도 예지하지 못했던 지진을 정확히 예지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스튜어트 이든이 인공 지진을 일으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 그리나 계획의 기밀을 지키는 걸 잊어버린 경솔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종아. 문제는 기지에서 도둑 맞은 지오존데에 관한 것이다!" 다나까 중위는 큰 소리로 외쳤지만 밥은 멍청한 얼굴이었다. "지오존데는 귀중한 관측 기계일세,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가 추궁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그 일에 관해선 아무 것도 모릅니다." 밥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저 굴진 카의 해치에서 할리가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전부 실었습니다!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다섯 번째의 지진이 시작되었다. 먼젓번에 비해서 결코 센 것이 아니었다. 아직 작동(기계의 운동,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는 지진계가 그 지진파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바위가 축축한 탓인지 또는 주위가 너무 조용한 탓인지 땅울림은 먼젓번 보다 크고 진동도 심한 것 같았다. 거기다 더욱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이 지질은 고에쓰 박사의 계획 이외의 것이었던 것이다. 숙부가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나머지 수폭을 장치하러 가세!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야지!" 이 때 천장에서 바위부스러기가 숙부의 머리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숙부는 그만 방바닥에 넘어졌다. 붉은 피가 머리와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바위부스러기는 지저 굴진 카의 몸체에도 떨어져 내려서 마치 기관총 같은 소리를 냈다. 나도 고에쓰 박사도 바위부스러기를 맞았다. 기데온은 방바닥에 쓰러졌지만 곧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고에쓰 박사하고 숙부는 나이를 먹은 탓인지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위로 또 바위부스러기가 더욱 쏟아져 내렸다. "저 두 사람을 구출해라!" 다나까 중위가 말했다. 밥과 나는 두 노인을 부스러기가 비처럼 쏟아지는 곳에서 커다란 제도 책상 위로 옮겼다. 불쑥 밥이 고함쳤다. "짐, 자네도 피를 홀리고 있네!" 분명히 나도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약간의 찰과상에 지나지 않았다. 바위의 뾰족한 끝이 목에서 어깨에 이르는 곳을 그어댔으나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들이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는 동안 다나까 중위는 분주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미 관측 기계의 대부분은 거듭된 지진의 충격 때문에 거의 망가져서 불충분한 데이터는 최고의 육감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다나까 중위는 연필을 내동댕이치고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걸 좀 보게!“ 다른 색연필을 잡자 다나까 중위는 지도 위에 5개의 지진의 진원에 두 十(십)자 표시를 써넣었다. 네 번은 인공 지진이고 한 번은 자연으로 일어난 지진이다. "자, 보게." 빨간 십자 표식을 붉은 연필로 이어가면서 다나까 중위는 설명했다. "다섯 번째의 자연 지진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군. 축적된 지진 에너지를 방출하는 데 공이 컸네. 즉 인공 지진 1회분의 대신이 되었단 말일세. 지저 굴진 카는 곧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네. 한 시간 내에 또다시 다음 자연 지진이 일어날 걸세. 진원은 여기쯤일세." 숙부는 힘들게 몸을 일으키고 책상에서 일어나 의자를 붙잡고 몸을 지탱하면서 고함쳤다. "자, 출발이다! 고에쓰 박사, 기데온, 가세!" 그러나 다나까 중위는 숙부를 의자에 다 눌러 앉혔다. "당신이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머지는 우리들이 하겠습니다!" "자네가?" 숙부는 다나까 중위를 쳐다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자넨 장치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 고에쓰 박사하고 나는 이제 이 일에 익숙해졌으니까 괜찮아도 다른 사람들은 위험하네!" "지금 당신께서는 위험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처로 출발하시면 죽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다나까 중위는 숙부 앞에 지도를 내밀었다. "여기하고 여기하고 이곳입니다! 이 세 군데에서 나머지 인공 지진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밖에 우리들에게 필요한 무슨 지식이 없습니까? 나는 밥하고 기데온을 함께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필요하군요." "제가 가겠습니다!" 나는 외쳤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내 옆에서 할리가 외치고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리고 할리는 내게 얼굴을 돌리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야하네, 짐!" 주위에 정적이 돌았다. 배수 펌프와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바닷물 소리만이 차고 습한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지금부터 출발할 지저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저 밑 3킬로의 스테이션 케이(K)보다 수 킬로나 더 아래까지 굳은 지각 속을 진행하는 것이다.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열과 압력이 더해 가는 공포의 여행이다. 그래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진은 다섯 번 일어났지만 아직 세 번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머지 세 번의 인공 지진은 먼젓번 다섯 번 것보다 깊은 곳에서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저 굴진 카가 단층에 눌려 짜부라지거나 뜨거운 마그마 속에 떨어져서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릴 위험이 있다. 나는 지오존데가 2킬로의 장소에서 몇 개가 망가졌는가를 생각했다. 지금, 우리들은 그것보다도 훨씬 깊은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나까 중위가 말했다. "좋아, 이든 후보생, 단소프 후보생, 자네들을 둘 다 데리고 가기로 하지. 케로우 중위, 자네에게 스테이션 케이(K)와 두 노신사를 맡길 테니, 잘 부탁하네.“ "왜, 지저 굴진 카의 승무원이 한 사람 더 붙어서는 안 되나? 노인네들에겐 간호원 따위는 필요 없겠는데." 케로우 중위는 지저 여행에 참가하고 싶어서 불만을 토로했다. "이것은 명령일세. 여기서 할 일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부탁하네. 케로우 중위." 케로우 중위는 할 수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다나까 중위는 지저 굴진 카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아, 출발이다!" 우리들이 지저 굴진 카에 올라타고 있을 때 긴급 방송이 시작됐다. 지진의 피해에 관한 뉴스와 경고였다. 뉴스에 의하면 배수 펌프가 파열해서 더러운 물이 배수 펌프의 처리 능력을 넘는 속도로 구정물 탱크에 모이기 시작했다. 완강한 배수 펌프가 파열했다고 한다면 동력 관계에 고장이 생길 우려도 있다. 늦게나마 시민들의 피난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시민들은 해상에 떠 있는 비행장으로 통하는 승강기에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이미 발포(총탄을 내 쏨)하는 소란까지 빚어냈다. 총화(총을 쏠 때 총구에서 번쩍이는 불)로 동력 장치가 파괴된다면 큰 일이다. 어물어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우리들은 고에쓰 박사와 숙부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 지저 굴진 카의 해치를 닫았다. 밖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좁은 선실 앞부분에 장치된 조종석에 기데온이 앉았다. 우리들은 명멸하는 조그만 불빛 속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원자 드릴이 막대한 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선실의 조명은 최소한으로 절약하고 있는 것이다. "출발!" 다나까 중위가 명령했다. 기데온이 끄덕이고 출발 버튼에 손을 뻗쳤다. 동력이 들어오자 지저 굴진 카의 몸체를 뒤덮은 이든 나이트가 숨쉬듯 빛나고, 원자력 드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저 굴진 카는 진동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굉음은 마치 미친 공룡이 바위를 발로 밟아 부수며 짖어 대는 것 같았다. 선실 안에 있어도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굉장한 소음이었다. 지저 굴진 카는 뒷걸음질쳐서 자기가 뚫고 나온 벽의 구멍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우리들은 지저의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바위의 바다   다나까 중위는 소음 못지 않게 고함쳐 댔다. "좀더 속력을 내게, 파크! 50분 이내에 목적한 장소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이네!" "예, 중위님!" 기데온은 위세 좋게 대답하면서 눈을 질끈 감아 윙크를 해 보였다. 나는 기데온하고 같이 있었기 때문에 땅 속을 전진하는 두려움을 잊을 수가 있었다. 할리만은 몹시 우울해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할리가 타이드 신부를 수중 카의 발착소까지 전송하고 나서 스테이션 케이(K)로 돌아왔을 때의 일을 문득 생각해냈다. 그 때 할리는 전에 없이 기운이 없어 보였으며, 울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때마침 지저 굴진 카가 침입해 왔기 때문에 할리의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강철같이 굳은 바위를 깎으며 고속으로 진행하는 지저 굴진 카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할리에게 말을 걸어 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 때 기데온이 돌아다보며 고함쳤다. "수폭 발사의 준비를 부탁하네!" 우리들은 황금빛의 무거운 금속구를 주의 깊게 발사관에 박았다. 그것은 구식 잠수함에 달려 있던 어뢰 발사관 같은 것이지만 어뢰 대신에 핵폭탄을 수중이 아니라 땅 속에 쏘아 박는다. 그러기 위해 발사관의 첫머리에는 굳은 바위를 깎는 특수한 장치가 달려 있다. 발사관의 조작은 해저 함대에서 특별 훈련을 받은 승무원의 일이지만, 지금은 경험이 없는 우리들의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황금빛 수폭은 스텐레스 스틸 밴드의 위치를 움직이면 안전 장치가 빠지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바다 밑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전 장치나 시한 장치가 고장났을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폭은 일단 안전 장치를 빼기만 하면 돌연 우리들의 얼굴 알에서 폭발한지도 모른다. 또는 뜨거운 바위 속에 발사한 순간에 폭발할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어느 얼굴도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행히 안전 장치는 무사히 빠졌다. "발사!" 기데온이 외쳤다. 발사관의 첫머리가 자동적으로 바위를 파고 수폭을 틀어박았다. 발사가 완료되자 지저 굴진 카는 몸체를 뒤틀면서 전속력으로 그곳을 떠났다. 14분 후 예정대로 주위의 바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진동하여 지저 굴진 카에 대들었다. 작은 몸체는 마치 거대한 동물이 이빨로 물고 흔들어대는 것처럼 흔들렸다. 선실의 명멸등(자동적으로 꺼졌단 켜졌다 하는 전등)이 순간 꺼졌다 다시 명멸하기 시작했으나, 먼저보다 빛이 약해졌다. 원자력 드릴도 멎었다. 내 마음속에 체념이 스쳤다.     그러나 원자력 드릴의 바위를 깎는 힘찬 음향이 또다시 울려 왔다.지저 굴진 카는 스스로 일으킨 인공 지진을 참고 살아 남은 것이다. "폭발 지점이 너무 가까웠군! 이번에는 폭발 시간을 좀 더 길게 해서 멀리까지 도망치도록 하지!" 기데온은 안심한 듯이 웃는 것이었다. 내 옆에서 밥이 손잡이를 잡으면서 불안스럽게 말했다. "드릴 소리가 이상하다! 어느 것인가 하나 회전이 둔해졌어!" 지금 충격으로 고장난 것일까? 지저 굴진 카의 원자력 드릴 장치는 몇 개인가의 드릴이 동시에 움직여서 바위를 파고 들어간다. 1개라도 고장이 나면 바위를 고르게 부술 수 없는 것이다. 나도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소리만 듣고 고장을 알아차릴 만큼 전문가는 아니었다. 가령 고장이 일어났다고 해도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수폭이 예정 지점에 발사되었다. 그라고 예정대로 인공 지진이 일어났다. 우리들이 받은 충격은 먼젓번과 같은 굉장한 것이었지만, 어떻든 살아날 수 있었다. 다나까 중위는 연필을 들어 깜박거리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계산을 계속하며 그 해답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한 번으로 충분할 것 같네.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자 기데온이 돌아보며 말했다. "고에쓰 박사를 믿읍시다, 중위님! 고에쓰 박사는 여덟 번의 인공 지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정대로 할 뿐 입니다." "그렇군." 다나까 중위는 갸름한 얼굴에 분노의 빛을 띄고 외쳤다. "만약에 우리들의 손으로 대지진을 막아냈다고 해도 그건 절대로 시의회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물욕(재물을 욕심 내는 마음)에 눈이 먼 비인간적인 그 자들에게 보복을 받게 할 방법은 없을까?" "이미 보복을 받고 있답니다!" 할리가 우는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그건 또 무는 뜻인가?" 할리를 똑바로 보며 중위가 물었다. "우리 아버지와 시장, 그리고 3, 4명의 시의회 의원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답니다, 중위님!" 할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격한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중위님은 저에게 타이드 신부를 부두까지 전송하라고 하셨죠? 그 때 나는 부두에서 아버지의 잠수 요트를 보았습니다. 50만 불이나 들여서 만든 호화선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살아가는 보람이었습니다. 마침 선체(배의 몸체) 검사를 받기 위해서 입항하고 있었답니다. 나는 잠수 요트를 바라보면서 부친이 시민의 피난용으로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요트에는 8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원 50명이 탈 수 있는 선실에 단 8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공간에는 종이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권에다 채권 그리고 돈뭉치들....... 부친은 전 재산을 요트에 싣고 도망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할리는 절망적인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자기와 몇 사람의 친구만을 태우고 시민들을 내버려두고 피난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친은 저보고도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나의 임무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요트는 해치를 닫고 워터 로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바깥쪽의 로커 도어가 열렸을 때 무서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잠수 요트를 둘러싸고 있는 이든나이트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바닷물와 그 무서운 수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잠수 요트를 납작하게 뭉개 버렸습니다. 물론 요트에 탔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할리의 목이 경련을 일으켜 꿈틀 꿈틀거렸다.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다나까 중위가 상냥하게 말하였다. "미안하네, 단소프 후보생. 자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줄은 모르고 있었네......." "아닙니다. 아버지는 중위님에게 조상(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픈 뜻을 표시함)을 받을 만한 인간이 못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또 한 가지 중위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실된 지오존데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사실은....... 그것을 훔친 것은 접니다. 부친의 부탁으로 훔쳤던 것입니다. 저는 지오존데의 기밀을 누설하고 더욱이 그것을 훔쳤으며, 해저 함대의 규율을 이중으로 깨뜨렸습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변명 하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사건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고백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할리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계속하였다. "부친은 훔친 지오존데를 견본으로 해서 같은 것을 많이 만들어 개인적으로 지진 예지의 정보를 손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예전에 고에쓰 박사에게도 같은 일을 제안했었습니다. 물론 주식으로 돈을 벌려고 했던 것이죠. 저는 변명은 않겠습니다. 순순히 군사 재판을 받을 각오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이번에야말로 훌륭한 해저 함대의 사관 후보생이 되리라고 결심합니다.“ 모든 것을 고백하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벗은 탓인지 할리의 얼굴은 밝았다. 다나까 중위는 꼿꼿이 일어서서 머리를 선실 천장에 대고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소프 후보생! 자네는 이미 재판을 받고 있네.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참으로 극적인 순간이었다. 조종석에서 기데온이 돌아다보고 감동적인 공기를 깨뜨렸다. "시간을 봐라! 마지막 수폭을 발사할 장소에 와있다." 우리들은 분주히 수폭을 발사하고 그 자리에서 멀리 가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모자랐다. 지진의 공격으로 선실의 명멸등이 꺼지고 그대로 다시는 켜지지 않았다. 차체도 몹시 삐걱거리고 뒤틀렸지만 박살이 나는 것만은 면했다. "잘됐어! 이렇게 순조롭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밥은 내 등을 힘껏 두들기면서 외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밥, 이리로 와서 좀 도와주게. 원자력 드릴이 움직이지 않는단 말일세!" 기데온이 불렀다. 마지막 지진의 충격으로 조종장치의 누르는 단추가 아주 못 쓰게 되어 버렸다. 할 수 없이 기데온은 수동레버(지렛대)로 조종 장치를 움직이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밥과 기데온은 손끝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레버를 당겨 간신히 2, 3센티 움직였다. 동력이 들어와 또다시 원자력 드릴은 굳은 바위를 깎기 시작했다. 명멸등에도 전등불이 들어왔으나 선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다. 선실 안의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기데온이 원자력 드릴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동력을 돌리기 위해서 냉방 장치를 꺼버린 것이다. 몇 분이 지났다. 조종석의 계기는 지저 굴진 카가 스테이션 케이(K)의 바로 옆에 와 있는 것을 나타냈다. 원자력 드릴의 진동이 갑자기 약해졌다. "바위 밖으로 나왔네!" 기데온이 기쁜 듯이 외쳤다. 우리들도 마음을 놓았다. 우리들은 훌륭히 임무를 마치고 스테이션 케이(K)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기뻐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돌연 금속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선실에 들려온 것이다. 기데온은 굳은 표정을 하고 혀를 찼다. "이든나이트가 터졌다!" 계기를 힐끗 쳐다보고서 우리들을 돌아다보았다. "우리들은 물 속으로 나왔는데 말일세, 불이 붙을 정도로 뜨거워진 이든나이트가 갑자기 찬 물 속에 휩싸이니 급격한 온도 변화에 의해 깨지고 만걸세. 그렇지만 상관없어. 계기는 정상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지금 확실히 스테이션 케이(K) 안에 있는 걸세. 즉 스테이션 케이(K)는 물 천지란 말이네."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숙부와 고에쓰 박사는 어떻게 됐을까? 아니, 어쩌면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그 자체가 전멸해 버렸는지도 알 수 없다. 우리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단 말인가? 해저 도시의 큰 돔이 쫙 갈라져서 5천 미터의 수압에 눌려 짜부라졌단 말인가? "여기서 나가자!" 다나까 중위가 외쳤다. 그러나 꽉 입술을 깨물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든나이트가 망가져 버렸다면......." 이든나이트가 소용이 없다면 우리들은 해저에 나가는 순간 5천 미터의 수압을 받아 큰 망치로 두들겨 맞은 곤충처럼 납작해질 것이다. "좀 도와주게 ! 공기를 주우러 가야지. 바위 속에 박힌 공기를 찾는 거야!" 기데온이 말했다.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 우선 공기가 필요하다.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거듭되는 인공 지진의 충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지저 굴진 카는 또다시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선실 안의 온도가 자꾸만 올라가 눈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뜨거워졌다. 원자력 드릴의 회전이 불규칙적으로 되어 그 소음이 더 한층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또한 선실 안 공기가 더러워지고 기계가 타는 냄새가 자욱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맨 먼저 다나까 중위가 쓰러지듯 넘어졌다. 잇달아 단소프가 긴급용 레버 앞에서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 졌다. 나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어느 틈엔가 밥도 방바닥에 길게 뻗어 있었다. "일어나, 밥! 어떻게 됐나?"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기데온의 괴로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짐 ! 좀 도와주게. 혼자선 도저히......." 그러나 그 목소리도 점차로 작아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기데온이 있는 쪽으로 향했으나 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지저 굴진 카가 돌연 핑그르르 방향을 바꿔 나는 그만 방바닥에 동댕이쳐졌다. 지저 굴진 카가 돌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나는 뜨겁고 딱딱한 금속 바닥 위에 넘어져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서 미쳐 날뛰는 지저 굴진 카를 붙잡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이 거의 빠져 버렸다. 마지막 명멸등이 꺼졌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이든나이트의 빛   검은 신부복을 입은 자그마한 몸집의 산타클로스가 나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짐! 짐! 이걸 좀 마셔 봐라." 무엇인지 쓰고 혀가 찌잉 하는 것이 내 입에 쑤셔 박혀 왔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타이드 신부의 파란 눈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여기는.... 대 체......." "가만히 있는 것이 좋아." 타이드 신부는 듣기 좋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색이 좋은 뺨에 상냥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제는 괜찮아, 짐. 자네는 지금 내 수중 카에 타고 있는 거야. 우리들은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로 돌아가는 길이라네." "그라카타우?" "하지만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는 물 천지가 되었는데요, 신부님! 우리들은 거기 있었습니다. 스테이션 케이(K)는 물 속에 잠겨서 사람이 살아 있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타이드 신부는 근심스럽게 눈썹을 모았으나 분명히 말했다. "돌아가 보기로 하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타이드 신부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나는 일어섰다. 내가 있는 곳은 선실이었다. 벽에는 가지각색의 최신 지진 관측 기계와, 지도와 자료 등이 꽉 차 있었다. 수중 카 전체가 움직이는 지질 관측 연구소였다. 여기에서 행하여진 관측이며, 연구는 고에쓰 박사의 지진 이론에도 많이 인용되어 있다. 나는 이전부터 이 수중 카에 대해서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실제로 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더욱이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기데온 파크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검은 얼굴에 환하게 빛나는 듯한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짐, 다행이네! 모두 걱정했었네. 다른 사람들은 벌써 한 시간 전에 일어났는데, 자네만이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은?" 나는 염려가 되어 물었다. "전원 무사하네. 타이드 신부님이 구해 준걸세. 우리들이 마침 진원 위에 있을 때 신부님이 해저를 지나다가 지저 굴진 카의 진동을 찾아낸 거지. 지저 굴진 카는 조종 장치는 고장났지만, 원자력 드릴은 움직이고 있었지. 정신을 잃은 승무원들을 태운 채로 해저의 이토(진흙)충을 휘저으면서 상승하고 있었다네. 신부님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일세. 이 조그만 수중 카는 이미 피난민과 관측 기계로 가득 찼었는데 우리들을 구조해 주셨네. 더욱이 해저도시 그라카타우에 돌아가자고 말씀하시는 걸세. 자네 숙부님과 고에쓰 박사를 구출하기 위해서......." 기데온은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숙부와 고에쓰 박사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가령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시민들과 함께 숙부나 고에쓰 박사가 희생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들은 승리를 거둔 것이다. 고에쓰 박사의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기술에 의해 대지진을 막아내는 방법이 확립된 것이다. 그것이 조금쯤은 위로가 된 것이다. 우리들은 타이드 신부의 관측 설비를 써서 각기 지진 예지의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대성공이다!" 할리가 계산 용지를 흔들면서 외쳤다. "이것 좀 보세요! 예측 진도 제로(0), 예측 시간 무한, 그리고 예측 오차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극히 적습니다." "내 결과도 같다. 이든, 에스코, 자네들은 어떤가?" 이 며칠 내 처음으로 다나까 중위의 얼굴이 밝았다. 중위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똑같습니다." 밥과 나는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대지진을 일으키는 지각 내의 지진 에너지는 완전히 발산해 버린 것이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대지진을 예방한다는 우리들의 계획 그 자체는 성공한 것이다. 우리들은 지진이 반드시 예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나아가서는 지진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제는 해저 도시 난세이 나하의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육상에 있는 도시들도 지진에 대해서 안전해졌다. 리스본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대지진 같은 비극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구출치 못했던가? 슬픔과 애석함이 한층 우리들의 마음을 조이는 것이었다. 수중 카는 무거운 짐에 허덕이면서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를 향해 서둘렀다. 선실에는 피난민들이 참을성 있게 앉아 있었다. 우리들에게서 스테이션 케이(K)가 물 천지였다는 소리를 듣고, 해저 도시에는 이미 생존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육친이나 친구들을 해저 도시에 남겨 놓고 이 수중 카에 올라탔을 것이다. 어느 얼굴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민들은 해저 개발자들이다. 하나의 해저 도시가 전멸하면 또다시 새로운 해저 도시를 건설할 것이 틀림없다. 침울한 시간이 흘러갔다. "해저에 빛이 보인다. 저건 이든나이트의 빛이다!" 돌연 타이드 신부가 외쳤다. 우리들은 일제히 현창에 달라붙었다. 분명히 보인다. 전방 바다 밑에 청백색 빛이 거대한 발광 생물(빛을 뿜어내는 생물)처럼 숨쉬고 있었다.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의 돔이다! 이든나이트가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우리들은 어린애들처럼 환성을 지르고 서로 어깨를 두드려 댔다. 고에쓰 박사의 인공 지진 기술은 장래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 그 자체를 구출한 것이다. 수중 함선이며 수중 카들이 속속 돌아오기 때문에 워터 로커의 앞은 굉장히 혼잡하였다. 우리들의 수중 카는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나서야 간신히 로커를 지나 부두에 매어져 해치를 열었다. 또다시 우리들은 따뜻한 활기에 찬 해저 도시 그라카타우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숙부와 고에쓰 박사는 병원에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는 않다. 조금 피로했을 뿐이야! 자네들이 지저 굴진 카로 떠나간 뒤 스테이션 케이(K)에 바닷물이 자꾸만 흘러 들어와서 할 수 없이 위로 피난했지. 해저 함대의 기지도 위층으로 옮겼다네. 역시 이든나이트야. 돔은 고에쓰 박사의 연속 인공 지진에도 까딱도 안 했거든." 숙부는 옆 침대에 있는 고에쓰 박사에게 웃어 보였다. 기데온이 내 어깨를 꽉 붙들고 말했다. "스튜어트, 우리 둘은 당신네들을 조금도 걱정 안 했었지. 그렇지, 짐?" "그렇고 말고요. 우리들은 숙부님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겨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도 맞장구를 쳐서 아주 그럴 듯이 말했다. 그러나 숙부와 할리가 껄껄 웃어 버렸기 때문에 효과가 없어졌다. 숙부는 빙그레 웃었다. "자, 일에 착수하기로 할까? 바다에는 아직도 도전할 것이 많이 남아 있지. 병원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면 바다를 정복할 수는 없지. 여보 간호원 아가씨!" 시트를 걷어차고 회고 짧은 가운에서 맨발을 삐죽 내밀며 방바닥에 내려선 숙부는 큰 소리로 고함쳤다. "여보세요 간호원, 나는 곧 퇴원할 테니까 옷을 갖다 주지 않겠소?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작품 해설   지진은 왜 일어나는가?   '해저 지진 도시"는 미국 SF작가 프레더릭 폴과 잭 윌리암슨이 함께 쓴 소년 소녀용 SF이다. 미국의 추리 소설과 SF중엔 이 작품 외에도 두 작가의 재능을 합쳐 공동으로 쓴 작품이 많다. 1958년에 발표된 해저를 주제로 한 "해저 정복" "해저 함대" "해저 지진 도시"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해저 지진 도시"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지진을 미리 알게 되는 것이다. 작품 속에 일본인 지진학자가 등장하는 것은 일본이 세계 제 1의 지진국이며, 또한 지진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받고, 지진 연구가 가장 발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저의 미래 도시 그라카타우에서는 이미 지진 관측망이 육상과 해저에 설치되어 있어서 며칠 후에 일어 날 지진까지 미리 알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20세기 시대에서는 지진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미리 알 수 있다 해도 그 기술이 어느 정도일까? 미래의 "해저 지진 도시" 같이 지진을 백발백중 미리 알 수 있을까? 그러면 지진은 왜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보자.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지는 지각이라고 불리는 부분인데, 그 두께는 대륙 부분에서는 평균 350km, 해저 부분에서는 평균 5Km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지각 밑에는 두께가 2900km되는 맨틀이라는 암층이 있다. 이 맨틀 밑에는 뜨거운 열이 있어 위로 올라가는데, 이것이 지각에 부딪히면 열이 식어져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운동을 일으킨다. 이것을 '맨틀 열 대류'라고 한다. 즉 암석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 맨틀 열 대류로 인하여 오랫동안 지각과 맨틀 상층(깊이 약 700km)사이에 뒤틀리는 변화가 생긴다. 이것이 어느 한계점을 넘으면 주위의 암석을 파괴시킨다. 그리고 이 충격이 지진파가 되어 전달되는데, 이것을 지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맨틀 열이 녹아서 유동체가 된 암석, 즉 마그마가 지각이 갈라진 통 사이에 스며들어 암석을 파괴하고, 지진을 일으킨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진은 세계 각처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지진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을 가진 지대를 지진대라고 하는데, 지진대에는 사람이 느낄 수 없는 진도 영(0)의 무감각 지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해저 지진 도시 아이디어 회관 과학 문고 232p. 19cm (SF 세계 명작 34)   인 쇄      1978년 8월 20일 발 행      1978년 8월 33칠 역 자      이 인 석 조 판      크리스찬 신문사 오프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영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 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 록 제 2-213호       전 화 (266) 1975 . (266)798    
제 4 행성의 반란 REVOLT ON ALPHA. C   로버트 실버버그 R. SILVERBERG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1905년 미국 태생. 콜롬비아 대학 재학 중 SF를 쓰기 시작하여, SF작가 휴고를 기념하는 휴고상 수상. “가시 밭길의 여로", "유리탑", "한번 다시 태어나", "살아 있는 화성인", "대빙하의 생존자" 등   편집위원 아동문학 감수 ․박 홍근/문학박사 최 인학 공학박사 양 옥룡/이학박사 김 희규 전교육감 김 성묵     알파 C로의 출발················· 4 공간 도약법··················· 9 우주의 노래·················· 15 결사적인 우주선 밖의 활동··········· 23 목성 식민지의 반란··············· 35 우주 통신의 수수께끼·············· 44 공룡의 요리·················· 52 우리에게 자유를················ 63 반란의 청년 지도자··············· 73 전기 기타의 수수께끼·············· 85 제 2의 배반자················· 96 밀림에 불시착················· 101 지하의 감방·················· 112 혁명과 우정·················· 120 탈 옥····················· 130 집으로 돌아가라, 지구인들아!········· 143 진공 작전··················· 154 대 행 진··················· 163   작품 해설··················· 171   등장 인물   랠리 스타크 : 이 책의 주인공. 지구의 우주 정찰 사관 학교 졸업생, 실습 훈련차 제 4행성에 간다. 하르 엘리슨 : 화성의 사관 학교 졸업생. 제 4 행성의 반란에 참가한다. 오헤어 : 하급 우주 선원이지만, 랠리와 우정이 깊다. 반란에 참가하지만, 랠리를 탈출하게 해 준다. 라인하르트 선장 : 카르텐호의 선장, 아주 냉철한 성격이다. 해리슨 : 지구에서 임명한 제 4행성의 대통령 . 하이틀 : 카르텐호의 연습생. 랠리와 함께 반란군에 붙잡힌다. 존 브라운 :시카고 식민지의 혁명 운동 지도자. 커터 :알파 C 제 4행성 자유세계 평의회 대표. 혁명의 최고 지도자.   알파 C로의 출발   우주 연습선 카르텐호는 명왕성의 우주 공항에 그 거대한 몸체를 쉬고 있었다. 1주일의 기항(항해 중에 들름)이 랠리 스타크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이런 곳은 이미 싫증이 난다. 빨리 알파 켄타우루스의 제 4 행성으로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며, 랠리는 선실의 창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았다. 태양계의 가장 바깥쪽을 돌고 있는 명왕성은, 태양의 빛을 적게 받으며 만물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죽음의 세계이다. 공항의 주위에 줄지어 있는 산들도 얼음에 덮여 있고, 그 얼음의 산 위에는 검은 하늘이 차갑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명왕성은 행성간 여행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중계 기지이다. 지구를 출발한 카르텐호는 일단 명왕성에 기항해서, 여기서 행성간 여행으로 4, 5광년 걸리는 알파 C를 향해서 가는 것이다. 은하계 여행의 경우 카르텐호의 최대 속도는 초속 16만 km이다. 그런데 이 속도라도 알파 C까지 8, 9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다. 그러므로 카르텐호는 명왕성에 기항해서 행성간 여행용으로 장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공간 도약법으로 행성간 여행을 하면, 15일만에 알파 C까지 갈 수 있다. ) 처음으로 행성간 여행에 참가하게 된 랠리는 마음이 조급했다. 빨리 출발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랠리는 지구의 우주 정찰 사관 학교를 이제 막 졸업한 사관 후보생이다. 졸업 후의 실습 훈련을 받기 위하여 연습생으로서 카르텐호에 타게 된 것이다. 이 실습 훈련을 마치면 한 사람의 훌륭한 우주 정찰 사관이 된다. 연습생은 4명이다. 4명 중 랠리를 포함한 3명은 지구의 사관 학교를 졸업했는데, 하르 엘리슨만은 화성의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 카르텐호는 명왕성에 오는 도중 일부러 화성에 기항하여 하르를 태웠다. 지금까지의 실습 훈련은 은하계 여행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우주 정찰 사관 학교의 졸업생은 명왕성까지밖에 오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의 실습 훈련은 사관 학교 창립이래 최초로 행성간 여행을 하게 되었다. "목적지는 알파 C의 제 4행성이다." 이 같은 발표를 듣고, 재학 중이었던 랠리의 가슴은 설레었다. 알파 C의 제 4행성은 지구를 닮은 별로서, 기후도 따뜻하고 공기도 있다. 그러나 지구보다 1억 년 정도 역사가 느렸고, 따라서 공룡의 전성 시대이다. 그 곳에는 작은 식민지가 개척되어, 개척자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항성간 여행으로 공룡이 있는 행성에 가게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멋진 일일까. 랠리는 어떻게든 알파 C의 제 4행성에 가고 싶었다. [단, 행성간 여행에 참가하는 연습생은 사관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이어야 한다.] 라는 규칙이므로 1, 2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주 정찰 사관 학교는 지구와 화성에 각각 하나씩 있다. 모두 우수한 학생들만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1, 2등을 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부탁해 볼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랠리의 아버지는 우주 정찰 사관의 사령관이다. 아버지가 사관 학교 교장에게 부탁하면 아마 졸업 성적과 관계 없이도 행성간 여행의 연습생으로 선발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부탁을 할 분이 아니야.) 아버지는 부정한 일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다. 만약 랠리가 아버지의 힘으로 행성간 여행에 참가시켜 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그 따위 정신으로 어떻게 훌륭한 군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나? 지금 당장 우주 정찰 사관학교를 그만둬라" 라고 호령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어떻게든 내 자신의 실력으로 해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정한 랠리는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다. 드디어 노력한 보람이 열매를 맺었다. 랠리는 졸업 시험을 1등의 성적으로 통과했고, 바라던 행성간 여행에 보기 좋게 선발되었다. "과연 나의 아들답게 잘해 주었어. 너는 이제 우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급할 때일수록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중대한 일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거다." 하고 스타크 사령관은 지구를 출발할 랠리에게 격려해 주었다. 화성까지의 여행은 선 내의 생활이 처음인 랠리에게는 하나같이 신기하고 나날이 즐거웠다. 그러나 화성에서 명왕성까지 올 동안은 벌써 싫증이 나고 말았다. 하물며 명왕성에서 카르텐호의 선체를 다시 개조하는 작업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화성은 온통 벽돌 색의 사막이다. 푸른 것이라고는 지면에 붙어 있는 이끼 종류뿐이다. 명왕성은 산도 평야와 바다도 꽁꽁 얼어붙어 있다. 두 곳은 보호 돔(반원형의 지붕) 안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알파 C의 제 4행성은 지구와 같이 신선한 공기가 있고 도처에 푸른 숲이 있다. 돔이나 우주복 없이도 자유로이 생활할 수가 있다.) 랠리가 한시라도 빨리 알파 C의 제 4행성에 가고 싶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드디어 카르텐호의 개조도 끝나고 출발할 날이 왔다. 승무원들은 돔 안에 살고 있는 명왕성 식민지의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고 선 내로 돌아왔다. "출발 5분 전, 모두는 가속 제어 좌석에 앉을 것!" 선 내의 아나운서가 알렸다. 랠리는 가속 제어 좌석의 쿠션에 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서 5분 후, 카르텐호는 거대한 몸체를 떨면서 천천히 떠올랐다. 차츰 속도를 내면서 암흑의 우주 공간을 알파 C를 향해 나아갔다.       공간 도약법   [태양계에 가장 가까운 행성은 알파 C가 아니고 프록시마 C이다.]랠리는 항성간 여행의 역사를 생각한다. [그러나 프록시마는 행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행성간 여행의 목적지가 될 수 없다. 알파 C는 11개의 행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제 4행성은 지구와 비슷해서 사람이 살기에 알맞다. 지금부터 125년 전, 알파 C 제 4행성과 더욱 먼 시리우스의 행성을 개척하기 시작하여 식민지가 개척되고 있다.] 20세기 초,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동하는 물체는 1초간에 약 30만 KM 되는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는 없다.] 라는 이론을 세웠다. [그러나 2183년 헉슬리 박사가 발표한 새 이론에 의하여 행성간 여행의 길이 열렸다. 우주선은 광속을 넘어서서 날 수는 없으며, 광속에 가까운 우주선을 만들어도 4. 5광년 떨어져 있는 알파 C까지 가는데 5년 정도 걸리며, 왕복에는 9년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헉슬리 이론을 응용하면 15일만에 갈 수 있다. 이것을 공간 도약법이라고 부른다. 우주연습선 카르텐호도 명왕성을 출발하여, 이틀째에는 공간 도약법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랠리가 맡은 일은 우주 통신이다. 라인하르트 선장이 쓰는 항행일지를 매일 지구 우주국에 보내며, 여행 중의 다른 우주선과 연락을 취하는 일이다. 당번이 아닐 때는 자기 선실에서 자유로이 지낼 수 있다. 같은 방에 동료 연습생 하르 엘리슨이 있다. 하르는 화성의 정찰 사관 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랠리보다 키는 작으나 가슴은 떡 벌어지고 튼튼한 체격이다. 그리고 얼굴은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있다. "하르, 우리들은 내일 공간도약법으로 들어가. 라인하르트 선장이 오늘 항행일지에 그렇게 써놓았더군." 하고 선실에 들어서면서 랠리가 말했다. "쉬잇!" 하르는 둘째손가락을 입에다 대면서 말했다. "항행일지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건 규칙위반이야. 랠리, 선 내에는 도처에 도청 마이크가 장치되어 있을지도 몰라. 말을 조심하라고." "설마… 선장이 왜 우리들의 이야기를 도청하겠어? 우리를 신용하지 않는단 말인가?" 랠리는 라인하르트 선장을 존경하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보이고, 엄격한 얼굴 표정은 랠리의 아버지와 닮았다. 가끔 카르텐호에서 항선 여행 중이라는 것을 잊고 '아버지'라고 부를 뻔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하르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읽고 있던 책을 접고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장은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그 때 누군가가 선실의 문을 노크했다. 랠리는 하르와 얼굴을 마주 쳐다보고 대답했다. "예 ,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고참자인 우주 파일럿 올코트가 들어왔다. "랠리, 자네의 쪽지를 보았네. 내게 뭘 묻고 싶은가?" "이것입니다." 하고 랠리는 책상 위에 있는 행성간 여행의 교과서를 집어들었다. "이 교과서에는 제가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공간 축지 항법을 할 수 있습니까? " "그렇게 물으면 곤란한데… 아무도 모른다. 헉슬리 박사도 모른다. 전기의 작용인지 자기의 작용인지… 아무튼 축지 장치를 가동시키면 공간 도약법을 할 수 있을 뿐이야." "사관 학교에서는 공간 도약법에 대하여 그리 많이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라고 랠리가 말하자, 하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성의 사관 학교도 마찬가지였어." "간단하지. 축지 장치의 작용은 정확하게 모르더라도 축지 장치의 사용법만 알면 공간 도약법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이렇게 말하면서 올코트는 책상 위의 메모 용지를 한 장 집어들었다. “이 종이를 우주라고 가정하고, 종이의 위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우주 여행을 한다고 하자. 거리는 10cm이다. 그런데  이렇게 종이를 둥글게 말면 양끝이 가까워져서 거리는 1m로 된다. 즉 공간 도약법은 제 4차원의 공간을 이용하여, 굉장히 먼 우주의 2점 사이의 거리를 좁혀 단시간에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고 올코트는 메모 용지를 책상 위에 놓으면서, "내일이면 이 우주선이 공간 도약법으로 들어갈 테니까, 어떤 것인가 자네들이 직접 경험해 보라고. 백 번 말로만 들어봤자 한 번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편리한 공간 도약법을 왜 행성간 여행에는 쓰지 않나요?" 하고 랠리가 묻자, 하르는 웃었다. "너는 지구의 우주 정찰 사관 학교를 나온 연습생이 아닌가? 머리를 쓰라고, 랠리.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는데 공간 도약법을 사용하는 것은 수소폭탄으로 토끼를 잡으려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 하르가 말한 대로야. 수백만 km나 되는 먼 거리는 공간 도약법으로도 핀으로 찌르듯 가벼운 정도이지만, 만약 지구에서 화성까지, 아니 목성까지라도 공간 도약법으로 날면 태양계 내의 전 행성이 파괴되고 만다." 라고 올코트가 설명했다. "네에…그래서 행성간 여행을 하는 우주선이 명왕성에 일단 기항하는 것이군요." 하고 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명왕성이 태양의 가장 밖에 있다. 그 곳에서 우주선은 추진 장치 등을 보통 은하계간 여행의 것에서 행성간 여행의 공간 도약법용으로 바꾼다. 그리고 되돌아갈 때는 또 여기에서 본래의 행성간 여행용으로 바꾸어서 지구로 가는 거다." "그럼, 공간 도약법을 사용하는 동안, 우주 공간의 상태에는 아무 변동이 없나요?" "특별히 변동되는 것을 보지 못했어. 우주 공간은 어디든지 텅텅 비어 있으니까 말야. 비어 있고 캄캄하고, 그리고 추운 곳- 그것이 우주이다. 랠리, 우주는 쓸쓸한 곳이다." "알고 있습니다." 우주 파일럿의 피로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명왕성에서 알파 C까지 15일이 걸린다. 그 중에서 보통의 은하계 여행으로 명왕성을 떠나오고, 7일은 알파 C의 제 4행성에 가깝게 가는 행성간 여행으로 소비한다. 그리고 그 중의 2일간만 공간 도약법을 사용하여 4.5광년, 즉 4천만 km의 100만 배라는 상상도 못할 먼 거리의 대부분을 날아간다. 랠리는 우주 비행사의 쓸쓸함을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우주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다. 별의 사이에 떠 있는 작은 금속에 싸여 있는 세계이다. 이 곳은 구멍가게도 없고, 신문도 배달되지 않으며, 길 위에서 캐치볼도 할 수 없다. 날이면 날마다 우주 공간의 암흑을 바라다보며 자기의 맡은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저녁때가 되면 그룹끼리 모여 식사를 한다. 그룹이라고 해도 승무원이 5, 6명에서 12, 13명이 보통이고, 많아 보았자 20~30명 정도이다. 이런 적은 수이므로 서로가 상대방을 너무나 잘 알아서 얼마 안 가 지루하게 된다. (우주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조로운 생활과 쓸쓸함을 이겨내는 정신력이다.) 라고 생각하며, 랠리는 선실 창가에서 암흑의 밖을 내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어떤 것이 알파 C인지 알 수가 없었다. 6월 7일-명왕성을 출발하여 6일째인 날, 선실의 텔레비전 전화의 스크린이 환하게 밝아지고, 라인하르트 선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모두에게 전달한다. 공간 도약법에 대비하라. 본선은 10초 후에 공간 도약법으로 들어간다." 랠리와 하르는 급히 가속 제어 좌석에 앉아 벨트로 몸을 고정시켰다. 그밖에는 어떤 준비를 해야 좋을지 몰랐다. "9, 8……" 텔레비전 전화에서 초를 읽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7, 6, 5……" 아무 것도 모른다고 올코트는 말했는데, 랠리는 처음으로 당하는 공간 도약법에 기대와 불안에 꽉 차 있었다. "4, 3……" 랠리는 하르를 보았다. 하르도 이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둘은 그만 빙긋 웃고 말았다. "2, 1……" 갑자기 선체가 비틀리는 것 같고, 선실 전체가 무너져 랠리 머리의 주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기증은 1분쯤 지나니 멎었다. 카이텔호는 드디어 공간 도약법으로 들어간 것이다.     우주의 노래   잠시 동안 비틀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으나, 곧 선실은 보통 때와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올코트가 말한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간 도약법으로 비행하는 동안에는 우주통신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랠리는 이틀간은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오헤어가 있는 곳으로나 가볼까.) 라고 랠리는 생각했다. 바트 오헤어는 기관부와 잡역부 일을 겸하고 있는 하급 선원이다. 랠리 등이 모이는 곳에는 잘 나오지 않고, 여가만 있으면 뒤에 있는 기관실에서 전기 기타를 치며 우주의 노래를 부른다. 세상에는 굉장히 큰 키를 가진 사람도 많았지만, 오헤어처럼 큰 사람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헤어는 놀랍게도 키가 3m이고, 머리카락은 붉은 색, 수염은 푸른색, 음성은 힘찬 저음이다. 다른 연습생과 사관들은 그를 경멸했지만, 랠리는 지구를 출발하기 전부터 오헤어와 사이가 좋았다. (하급 선원과 사귀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하급 선원도 같은 승무원이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사관들의 특권 의식이 오히려 못마땅했다. "난 뒤의 기관실에 갔다 오겠어." 랠리는 하르에게 말하고, 선실을 나왔다. 하르는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그 자세대로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서 기관실로 들어섰다. 그 곳에서는 오헤어가 두 조수와 더불어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트! " 하고 랠리는 미소를 지으며 불렀다. "오, 랠리! 자네는 공간 도약법 동안에는 여가가 있겠구나. 우주 통신사는 멋쟁이야." 오헤어는 무거운 연료를 옮겨놓으며 반갑게 랠리를 맞이했다. 윗통을 벗고 있는 상반신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보는 바와 같이 기관에 특수원료를 사용하고 있다. " 라고 말하고, 양손을 입에 대더니 메가폰처럼 만들어 아직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두 조수를 불렀다. "포크스! 크란넬! 일은 좀 있다가 하고 이쪽으로 와라. " 조수들이 왔다. 오헤어에는 못 미치지만, 랠리에 비하면 큰 사나이들이다. 크란넬은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체격인데, 얼굴 한쪽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었다. 포크스는 크란넬보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머리는 빡빡 깎고, 팔뚝에는 혈관이 밖으로 불거져 나와 있다. 오헤어는 마루에 주저앉아 납으로 된 벽에 기대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왜 자네를 이틀이나 할일 없이 놀려 두고 있지? 승무원이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데…" "정말이야, 랠리. 쓰러질 때까지 일을 시키는 것이 선장의 성격이라고." 하고 크란넬도 한 마디 한다. 랠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선장을 험구하는 오헤어를 찬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군인인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고 우주 정찰 사관 학교를 졸업한 랠리는 '항상 상관을 존경하라'는 교육을 받아왔었다. "아마 선장은 나에 대하여 깜박 잊고 있는 모양이야. 선장은…" 하고 선장을 두둔하려 했으나, 아무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헤어는 혈관이 튀어나온 큰손으로 기타를 끌어안고 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으로 먼 곳으로 바라보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깊숙한 저음으로 슬프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오, 화성이여, 메마른 죽음의 세계 개척민은 이제는 없어라. 전쟁은 끝나고 평화는 돌아왔으나 개척민은 이제는 없어라.   크란넬은 조금 높은 목소리로 합창하여 오헤어의 노래를 한층 더 북돋아 주었다.   사막에 즐비한 탑의 무리 쓰러져서 모래알이 되고 탑을 세운 개척민도 사막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없어라.   갑자기 텔레비전 전화의 벨 소리가 울리더니, "모두 자기 자리로 가라!" 라는 라인하르트 선장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랠리는 불안해하며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곧 자기 선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오헤어들은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는다. 선장의 명령을 들은 척도 않는다. 그래서 랠리도 오헤어들과 같이 선장의 명령을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모두 자기 자리로 가라!" 두 번째 명령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오헤어들은 노래를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다. (이 사나이들은 선장을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 랠리는 어이가 없었으나, 여기서 공연한 말을 하여 오헤어 등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싫었다. "가슴에 깊이 파고드는 곡이다." 포크스가 감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말에 대답도 않고, 오헤어는 더욱 빠르게 줄이 끊어질 정도로 심하게 기타를 치면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높은 소리를 내었다.   우주선을 타는 이는 슈퍼맨(초인) 불덩이나 바위라도 날아오려마 별을 향해서 똑바로 가리 광막한 우주는 우리들의 집이어라.   이 노래는 옛날부터 우주 승무원들이 불러오던 노래의 하나이다. 랠리도 매력적인 중간 음으로 같이 부르기 시작했다. 포크스와 크란넬도 합창한다.   하이 호오, 분사의 소리를 들어라 발진이다. 상승이다. 하이 호오, 하이 호오! 발진이다! 상승이다! 오오, 하이 호오.   오헤어가 또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오, 우리는 알파 C에서 났어라 공룡이 있는 행성에서 자랐어라 3m의 큰 사나이 자유를 사랑하는 큰 사나이   이때 텔레비전 전화에서 라인하르트 선장의 큰 소리가 흘러나와 기관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두 자기 자리로 가라! 긴급 사태 발생! 긴급 사태 발생!" 태연하던 오헤어도 노래를 그치고 기타를 놓고서 벌떡 일어나서는 기관 쪽으로 달려갔다. 포크스와 크란넬도 뒤따랐다. "나도 선실로 가야지!" 랠리도 정신을 차리고 복도로 뛰어 나갔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달리는데 손도 발도 뜻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는다. 갑자기 충격을 받았다. 카르텐호가 공간 도약법에서 보통 항법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랠리는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복도의 벽이 빙글빙글 돌면서 가까이 온다. 천장이 내려앉아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랠리는 마루바닥에서 선실 쪽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려고 했다. 문득 우주 정찰군 사령관 제복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얼굴은 복도 바닥에서 기고 있는 아들의 꼴을 보고, "선장의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바보 같은 녀석!" 라고 호령하시는 것 같았다. 더 심한 충격이 왔다. 랠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결사적인 우주선 밖의 활동   누군가가 뺨을 쳤다. (아프다.) 랠리는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차츰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뺨을 한 대 더 맞고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만!" 하고 랠리가 눈을 떠보니, 오헤어가 손을 들고 한번 더 뺨을 치려는 기세였다. "됐어… 정신 차렸군." 랠리는 일어나면서 빨개진 뺨을 비볐다. "일이 일어났나? 왜 보통 항법으로 돌아갔지?" "나도 모르겠어, 랠리. 라인하르트 선장은 모두를 통제실로 집합시켜 사태를 설명하려고 해. 우린 지각이야. 빨리 가자." "선실로 돌아가려고 복도로 나오자, 갑자기 위가 빙글빙글 돌더니… 그리곤 마루에 넘어져 머리를 벽에 부딪친 모양이야." 하고 랠리는 오헤어와 같이 통제실로 급히 달려가면서 말했다. 머리에 난 큰 혹이 점점 아파 오기 시작했다. (첫 명령을 들었을 때 바로 선실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랠리는 금모올(mogol)이 번쩍이는 아버지의 제복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고, 자기의 부주의한 행동이 후회되었다. 두 사람이 통제실에 발을 들여놓자, 이미 모든 승무원은 벽 쪽으로 둥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라인하르트 선장이 서 있었다. 선장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집합에 늦은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이제 모두 집합했구나. 너희들 두 사람은 나중에 시말서를 제출하라." 랠리는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는 것 같아서 오헤어의 큰 체구 뒤에라도 숨고 싶었다. "자, 이제 이번 사고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선장의 엄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가 통제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엔진의 분사구에 무언가가 막혔기 때문이다. 유성의 파편인지 우주진이… 그러한 것이 분사구에 날아들어 공간 도약법 장치에 고장을 일으켜, 갑자기 보통 항행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하고는 승무원을 한 바퀴 빙 돌아본 다음, 선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본선이 이대로 보통 항법으로 알파 C에 가면 4년쯤 걸려, 그쪽에 도착하는 해는 2367년이 된다. 그런데 본선에는 4주일간 분의 식량밖에 없다. 4년 분이 아니고 단 4주간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사히 알파 C의 제 4행성에 도착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우주선 밖으로 나가서 고장을 수리하는 일이다. 오헤어, 고장은 자네의 담당이네. 곧 우주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 수리하라." 오헤어는 아무 대답 없이 경례를 하고는 통제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 랠리는 불안했다. (우주선 밖은 춥다. 얇은 우주복으로는 우주 공간의 추위를 긴 시간 동안 완전히 막을 수 없다. 더욱이 우주선 밖의 활동은 위험하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헤어는 우주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 우주선이 공간 도약법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면, 알파 C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는 굶어죽는다. 설령 다른 우주선에 연락하여 구조를 부탁한다 해도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 우주선을 발견하기란 망망대해에 떨어진 바늘을 찾아내는 일보다 더 어렵다. 구조의 가망은 거의 없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다시 계속했다. "승무원 한 사람만 우주선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우주법의 위반이다. 연습생 랠리 스타크, 전원 집합에 늦은 벌로서 오헤어의 우주선 밖의 수리를 도와라. 우주복을 입고 빨리 가라!"잠시 동안 랠리는 멍하니 선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려 경례를 하고는 아무 말 없이 복도로 나왔다. 우주 공간에서 실제로 우주선 밖의 활동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랠리는 우주복을 입고 우주 헬멧을 썼다. 그리고는 몇 번 점검한 후, 에어록을 통하여 우주선 밖으로 기어 나왔다. 우주복과 헬멧은 공기가 통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자동 공기 정화장치가 달려 있다. 헬멧의 내부에 있는 무선 전화가 동료와 연락을 취하는 수단이다. 우주 장갑을 낀 손에는 우주총을 한 자루 들고, 또 한 자루는 우주복 뒤쪽에 달아매어져 있다. 그리고 양발에는 자석 구두를 신고 있다. 이미 오헤어는 우주선 위를 뒤쪽의 분사구를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랠리도 뒤따라 강철이 잘려 있는 강철 보행 트랙을 한 발짝 한 발짝 주의 깊게 오헤어의 뒤를 따라갔다. 강철 보행 트랙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자석 구두가 말을 듣지 않게 되어 몸이 허공에 뜨고 만다. 오헤어의 걸음걸이는 아주 빠르다. 랠리는 턱으로 무선 전화의 스위치를 넣었다. "바트, 기다려 주게." 그러자 오헤어는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헬멧 속의 랠리 얼굴을 보고 오헤어가 말했다. "랠리! 자네도 왔나?" "라인하르트 선장의 명령이야. 한 사람만이 우주선 밖에서 활동하는 것은 우주법 위반이라 하더군." "흥! " 하고 오헤어는 코방귀를 치면서 말했다. "항상 나 혼자 우주선 밖의 활동을 시켜 놓고서 그런 말을 해. 아마 자네가 집합에 늦었기 때문에 벌을 준 모양이지." 하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나가면서, 오헤어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우리 선장을 어떻게 생각하지? 우주 정찰군의 고참 사관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아.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금속으로 만든 로봇이야." 하며 오헤어는 손으로 보행 트랙을 가리켰다. "주의해서 오게. 랠리, 여기에서 발을 잘못 디디면 위험해. 그러나 그 선장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 놓고 싶다!"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아니야, 오헤어.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는 이 우주선의 선장이 아닌가." 하고 랠리는 주의를 시켰다. "이거 잘못했군, 랠리. 네가 우주 정찰 사관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군. 그러나 언젠가는 알 날이 올 것이다. " 오헤어의 말을 랠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알 날이 올 것이다.) 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선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좋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선장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다. 선장의 명령을 위반하면 우주선을 탈 수 없다. 만약 승무원이 선장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우주선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랠리는 사방을 돌아다보았다. 지금 우주 공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랠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우주선은 움직이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그대로 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어떤 곳을 보아도 끝없이 펼쳐져 있는 암흑과, 무수한 별빛의 점들만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는 아래로 떨어질 위험은 전혀 없다. 그러나 랠리는 어쩐지 불안했다. 만약 자석 구두가 보행 트랙을 잘못 디디면 랠리의 몸은 우주선에서 떠오를 것이며, 뉴턴의 법칙에 따라 우주선과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날아갈 것이다. (아무튼 우주 여행을 하려면, 우주선 안이 좋구나.) 라고 랠리는 생각했다. 가지고 있는 두 자루의 우주총은 무기가 아니다. 랠리 자신을 소형 로켓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우주선은 로켓의 분사로 움직인다. 분사의 반동으로 분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진한다. 이와 마찬가지 이론으로 무중력의 우주 공간에서 권총을 발사하면 발사한 사람은 권총의 탄환이 날아가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만약 랠리가 우주선에서 발이 떨어져 떠오르려고 하면, 우주선과 반대 방향을 향해서 우주총을 발사한다. 그러면 그 반동으로 우주선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랠리, 일을 시작하자! " 오헤어의 소리가 헬멧 속의 무선 전화를 통하여 들려왔다. 차가운 금속적인 울림이다. 랠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떨쳐버리고, 보행 트랙을 나아갔다. 자신이 20살의 청년이 아닌, 그리스 신화의 신이 되어 하늘을 산책하고 있는 기분이다. 이 때 갑자기 앞쪽에서 밝은 불이 번쩍했다. "아니?" 놀라고 있는 랠리의 헬멧 속으로 오헤어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이쿠! 우주총이 폭발했다! 랠리, 구해 줘! " 라는 소리와 함께, 오헤어의 몸이 우주선에서 붕 떠오르며 천천히 멀어져 간다. 비로소 랠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헤어의 손에 쥐고 있던 우주총이 저절로 발사되었다. 그 때문에 반동으로 오헤어의 몸이 보행 트랙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에 떠오른 것이다. "큰일났다! " 랠리는 두서너 발 나아가 머리 위에 떠 있는 오헤어의 자석구두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조금 모자라 손이 닿지 않는다. "그런 짓 하지 말아! " 오헤어의 고함 소리에 랠리는 정신을 차렸다. 만약 오헤어의 발을 붙잡으면 랠리의 몸도 우주선에서 떨어져 나가 우주공간에 떠오르고, 오헤어와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고 말 것이다. "바트, 우주총을 사용해! " "안 돼. 떨어뜨리고 말았어! " 오헤어는 갑자기 우주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정신없이 손에서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그 때문에 우주총의 폭발 반동으로, 오헤어는 꽤 떨어진 우주공간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예비 우주총이 또 하나 있지 않아?" 하고 랠리는 초조하게 소리쳤다. "없어! 나의 우주복은 네가 입고 있는 것보다 구식이라서 예비 우주총이 없어, 랠리." 이미 오헤어는 우주선에서 3m나 멀어졌다. 그리고는 계속 무수한 별을 향해서 멀어져 가고 있다. "나는 죽어서 저 별들의 친구가 될 것이다. 헌 침대 위에서 죽어 가는 것보다 훨씬 좋다. 랠리,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울부짖는 오헤어의 목소리가 랠리의 헬멧 속에서 메아리친다. "절망하기에는 아직 일러, 바트. 나의 우주총을 한번 써 보자." "너의 것을? 좋은 생각이야. 부탁해. 이쪽으로 정확하게 던질 수 있겠어? 정확하게 던지지 않으면 안돼!" "해 보자, 바트." 라고는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우주총을 오헤어에게 정확하게 던지기만 해서도 안 된다. 속도가 문제인 것이다. 늦으면 오헤어까지 닿지 않을 것이며, 빠르면 오헤어가 받지 못하여 그대로 무수한 별 쪽을 향해서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랠리는 사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학생 야구부의 투수였었다. "어느 정도는 자신 있어.“ 랠리는 한 손에 우주총을 들었다. 오헤어의 위치를 똑똑히 겨누어 가며 우주총을 던졌다. 작은 회색의 총은 우주 공간을 떠서 오헤어 쪽으로 날아갔다. 아아, 그러나 실패였다. 정확하게 조정은 했지만 목표가 움직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만 것이다. 우주총은 오헤어가 뻗친 양손 끝에서 5, 6cm 멀어진 곳을 통과하고 말았다. 오헤어는 떨어져 나가는 우주총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포기했다는 듯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랠리, 아마 나는 우주선에는 되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그러니 크란넬에게 얘기하여, 나의 전기 기타를 자네가 가져 주게. 자네는 칠 수 있겠지. 그리고 크란넬들과는 트럼프를 하지 말라구. 돈이 있는 것이 한정일 테니까. 언젠가는 자네도 선장이 되어 승무원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가 오겠지. 그 때는 기관실에서 일하고 있는 하급 선원들을 좀 잘 돌봐 주게. 그리고 이 오헤어, 몸통이 너무 커서 머리가 잘 돌지 않는 붉은 머리의 사나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다오…" "시시한 소리하지 말아. 아직 자네를 구조할 방법이 남아 있어." 하며 랠리는 예비 우주총을 빼들었다. 그것을 오헤어의 반대 방향으로 발사했다. 빨간 불이 총구에서 튀어나오고, 동시에 랠리의 몸은 우주선에서 떨어져 나와 오헤어 쪽으로 향했다. "미쳤어! 너마저 별이 되고 말아! " 오헤어가 놀라면서 외쳤지만, 랠리는 듣지 않았다. 이미 우주선에서 100m쯤 떨어져 나온 것일까. 암흑 속에서 은색의 선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오헤어 쪽으로 상당히 가까이 다가갔을 때, 랠리는 느꼈다. (진로가 10도쯤 틀린다.) 랠리는 다시 우주총을 발사하여 진로를 수정했다. 음파를 전하는 공기가 없기 때문에 발사음은 들리지 않으나, 총구에서 뿜어 나오는 불은 한때 하늘의 별빛보다도 더욱 밝다. 두 번째의 발사는 정확했다. 똑바로 가까이 다가온 랠리의 몸을, 오헤어는 양손을 펴고서 힘차게 끌어안았다. "랠리, 우주총을 두 번 발사했지?" "그래." "아직 두 발은 발사할 수 있겠구나. 신중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돼. 우주총을 내게 맡겨 줘." "부탁해." 하며 랠리는 우주총을 내밀었다. 오헤어는 커다란 손으로 힘차게 그것을 쥐었다. 총구에서 불이 튀어나오고, 두 사람의 몸은 카르텐호를 향해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카르텐호에 접근했다. 선체까지 5m 남았을 때, 두 사람의 움직임이 중지되었다. 아무리 몸을 휘저어도 선체에 내릴 수가 없다. "잘 안돼. 이대로 우주선과 같이 날아갈 수밖에 없게 됐어." 하면서 오헤어는 랠리의 양손을 목에 감고 랠리의 발을 우주선으로 향하도록 돌렸다. 그리고는 반대방향으로 우주총을 발사했다. 그것이 최후의 발사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몸은 같이 움직여 랠리의 발이 선체에 5, 6cm까지 닿게되었다. 그러자 랠리는 발을 쭉 뻗었다. 자석 구두가 보행 트랙의 강철판에 딱 들어 붙었다. 발판을 확보한 랠리는 슬슬 오헤어의 큰 몸을 당겼다. 흡사 천천히 도는 영화의 움직임과 같았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선체에 양발을 디디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항상 혈색이 좋은 오헤어의 얼굴도 창백해져 있고, 거친 숨소리가 랠리의 무선 전화를 타고 흘러왔다. 랠리도 갑자기 마음을 놓은 때문인지 피로함을 느끼고 우주선 안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오헤어는 랠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맙다, 랠리." 짧은 이 말 속에 큰 사나이의 감사의 뜻이 넘쳐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두 사람은 다시 자기들의 임무를 생각했다. 승무원의 운명은 지금 오헤어의 손에 달려 있다. 만약 오헤어가 분사구를 수리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모두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해골이 된 사람들을 태우고, 카르텐호는 암흑의 우주 공간을 영구히 헤맬 것이다. 두 사람은 분사구의 입구에 다다랐다. "랠리, 여기서 기다리라구. 나 혼자 할 수 있어." 하고 오헤어의 큰 몸이 분사구로 기어 들어갔다. 랠리도 분사구를 들여다보았지만,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주선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별은 차가운 빛의 점이었다. 공기와 먼지가 없으므로 지구에서 보는 것처럼 반짝이지 않는다. 랠리는 무수한 별을 향해서 가슴을 쭉 폈다. 우주의 정복자가 된 기분으로-. 10분쯤 지났을 때, 오헤어의 헬멧이 분사구에서 나오더니, 곧 전신이 나타났다. "됐어. 고장의 원인을 제거했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대단치 않은 고장이야. 자, 우주선 안으로 돌아가자. 우주 비행사, 랠리." 오헤어는 랠리를 지금 처음으로 우주 비행사로 인정해 준 것이다.     목성 식민지의 반란   (나는 오헤어와 협력하여 카르텐호의 승무원의 생명을 구했다.) 랠리는 영웅이 된 기분으로 우주선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라인하르트 선장은 고장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수고했다" 라고 말할 뿐이었다. 다른 사관들도 모른 척 말 한 마디 없이 모두 자기가 맡은 장소로 흩어질 뿐이었다. 우주 정찰군에는 영웅이란 없다. 오헤어와 랠리가 생명을 걸고 작업을 한 것도 일상 생활의 한 임무에 지나지 않는다. 드러낼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랠리는 자기의 활약을 자랑할 수 없게 된 것이 서운했지만, 오헤어만은 잘 알아주리라고  생각했다. 카르텐호는 다시 공간 도약법으로 들어가 알파 C로 향했다. 랠리는 여가가 있으면 하르와 토론도 하고, 기관실의 오헤어를 찾아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헤어는 랠리에게 전기 기타를 퉁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은 과거 250년 동안에 우주 여행에서 생겨 나온 여러 종류의 우주 노래를 같이 불렀다. 때로는 오헤어도 우울한 기분이 되어, 지구의 언덕과 호수와 고층 건물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들을 주제로 한 오래 된 노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나 지구의 노래는 아주 적고, 대부분이 20세기에 시체를 달의 바다와 분화구에 남긴 용감한 우주 개척자에 대한 노래였다. 랠리도 점점 지구의 일을 잊고, 우주의 생활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자기가 태어난 지구의 고향과 친구들이 문득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구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새삼 놀라기도 하였다.(그러나 지금 이것이 나의 생활이다. 다음의 행성을 향해서 나는 것이 우주 비행사의 생활이다.) 라고 랠리는 생각했다. 다음날, 카르텐호는 예정대로 공간 도약법에서 보통 항법으로 돌아왔다. "자, 이제 감시 정거장과 연락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하르가 물었다. "아니, 아직 1시간 이상 더 지나야 해. 그 때까지 통신 가능 구역에 들어가지 못하거든."랠리는 손목의 우주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감시 정거장은 알파 C의 주위를 돌고 있는 인공 위성이다. 알파 C의 행성에 착륙할 우주선은 반드시 감시 정거장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하르는 손을 뻗어 레코드의 스위치를 켰다. 어둡고 슬픈 곡조가 선실에 흘러나왔다. 엘스베리 작곡 '화성의 바다에서 춤을 추면'이다. "이건 화성의 곡이지?" 하고 랠리가 물었다. "그래, 귀에 거슬리니 ?" "아니, 지금 공부에 싫증이 나는 참이었어." 하며 랠리는 읽고 있던 교과서를 덮고서는 책상 위에 놓았다. "랠리, 넌 이런 곡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 "옛날 곡이지. 처음 들어보지만 좋은 것 같아." "그럼 잘 됐네. 화성의 음악은 화성 땅에서 생겨난 거야. 모두가 처음에는 싫어하지만, 차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음악이지." "그러나 너처럼 화성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아니, 누가 내가 화성에서 태어났다고 그래? 나는 목성에서 태어났어." 하며 하르는 랠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랠리는 이상하게 여겼다. 화성에서 태어난 사람은, 화성의 중력이 지구보다 작기 때문에 몸이 넓고 길게 성장한다. 그런데 하르는 키가 작고 굵직한 몸이다. 그러나 목성 태생이라면 당연하다. 목성은 중력이 크기 때문에 키가 크지 못하고 옆으로 벌어지는 튼튼한 체격이 된다. "나는 목성 식민지에서 태어났어. 4살까지 거기서 살았지. 그래서 나의 골격과 근육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어. 너도 지구의 3배 가까운 중력 속에서 산다면 나같이 될 거야." 하고 하르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럼, 식민지가 망했을 때 화성으로 이사했니?" 하고 랠리는 물었다. "그래, 나의 양친은 반란 소동으로 피살되었어. 그래서 나는 화성 식민지에 있는 형님 집으로 오게 된 거지." 이 얘기를 듣고, 랠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목성 식민지의 역사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목성 태생의 하르 엘리슨이 왜 우주 정찰 사관 학교에 입학했을까? 우주 정찰군과 사관은 지구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하르 엘리슨은 지구와 지구의 식민지 정책을 싫어하는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20년 전 목성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지구 정부는 목성 식민지에 제대로 원조를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자력으로 목성에서 광산을 개발했다. 그런데 지구 정부에서는 광산에서 캐내는 천연자원을 계속해서 운반해 갈 뿐더러, 그들에게 많은 세금을 내게 했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노예가 아니다. 지구의 손을 벗어나 독립해야 한다.) 하며 식민지에서는 지구가 천연자원을 가지고 가는 것을 거부했다. 지구는 곤란하게 되었다. 식민지 쪽에서는 개발 원조를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지구의 경제가 위태로울 정도로 많은 개발 자금을 목성에 투자했던 것이다. 지구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목성에서 나오는 천연자원을 지구에 운반하고, 식민지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지구와 식민지 사이의 생각은 서로 엇갈려, 대화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식민지의 사람들은 무기를 잡고 일어나 지구정부의 행정관들을 추방했다. 지구 정부는 목성 식민지의 반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보냈다. 치열한 전투가 되풀이되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고, 식민지는 지구군의 손에 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란으로 살아 남은 식민지의 사람들은 죄수가 되어, 지금도 목성의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다. 만약 하르의 양친도 살아 남았다면 비참한 죄수가 되었을 것이다. "화성의 집에서 떠나온 지 한 달 가까이 되었어. 2. 3개월 후에 이 행성간 여행을 마치면 우리도 이제 우주 정찰군의 사관이 돼." 하고 하르가 말한다. "그렇고 말고." 랠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주 정찰군 사령관의 제복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했다. 할아버지도 생각했다. 사진으로만 본 증조 할아버지도 생각했다. 스타크 집안의 장남은 대대로 우주 정찰군에 들어가 지구를 위하여 일하여 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우주 비행사가 꿈이었어. 그래서 우주 정찰군에 입대했지. 우주 정찰군의 사관이 되면,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지구에 갈 수 있게 될는지?" 하고 하르는 열을 올리며 말했다. "그렇고 말고, 하르. 우리는 알파 C에서 바로 지구로 향해.“ "알파 C에 가는 것도 나의 목적의 하나야, 랠리." “나는 살아 있는 공룡과 식민지가 보고 싶어. 우주 식민지에서 태어나 우주 식민지에서 자라난 내가 알파 C 식민지에 대한 기분이 어떤지 너는 모를 거야.“ "알파 C 식민지에 대해서는 나도 소문을 듣고 있어. 어떤 친구가 이야기하여 주어서 말야. “알파 C의 제 4행성에 있는 식민지는 지구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해야 한다-라는 책을 읽었다고 하더군." "혹시 「우주 노예는 싫다!」라는 책이 아냐?" 이렇게 말하면서, 하르는 자기 가방에서 푸른 표지의 책을 꺼냈다. "이것 말인가? 매우 좋은 책이지." 그러나 랠리는 하르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그래, 그 책이야. 그러나 우주 정찰 사관 학교 출신의 연습생이 이런 책을 읽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넌 우주군에게 망한 식민지의 출신일지는 모르지만, 사관 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지구에 충성을 맹세했을 텐데." 랠리의 음성이 높아졌으므로, 하르는 입에 손을 갖다댔다. "좀 작은 소리로 말하라고. 마치 우리가 싸우는 것처럼 보이잖아. 확실히 나는 지구에 충성을 맹세했지. 그러나 알파 C의 실정을 알고서는, 그 곳 사람들이 지구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그렇다면 지구에 대한 충성에 위배되지 않아?" 라고 말했지만, 랠리의 심중은 혼란스러웠다. 한 달 가까이 같은 선실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하르의 사리 판단과 많은 지식에는 종종 감탄한 바 있었다. 그 하르가 지금 지구의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이것만은 하르의 의견을 인정할 수가 없다.) 랠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온 지구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리라고 결심했다. "이 책을 읽으면 너도 생각을 달리할 거야. 지구가 항상 옳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어. 랠리, 아무튼 이 책을 읽어보라구. 읽어보고 나서 토론하자." 하며 하르는 책을 랠리의 쪽으로 내밀었다. 책으로 손을 뻗으려 하다가 랠리는 단념했다. "아니, 나는 읽고 싶지 않아. 지구는 항상 정당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알파 C 제 4행성의 식민지에서도 틀린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고. 지구를 비난하는 책을 읽고 마음을 동요시키기 싫어. 너는 나와 달라, 하르. 너의 부모는 목성 반란 때 지구군에게 피살되었지. 그 후부터 너의 마음 한 구석에 지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지구의 정책을 공격하는 책에 관심이 있는 거야." 하고 랠리는 열을 내어 말했으나, 하르는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손목 시계를 보고, 랠리는 깜짝 놀랐다. "아니, 1분 후에 통신 시간이다."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르의 방을 나오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의 토론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 하르?" "좋지, 랠리. 책은 치워 두겠다. 만약 네가 읽고 싶거든 읽어보라고. 자네의 눈도 조금은 열릴 거야." "내 눈은 이렇게 떠 있다. 눈이 좀 희미해진 것은 너라고." 이렇게 말하고 랠리는 방을 나왔다. 통신실로 가는 복도를 걷고 있는 동안 어쩐지 마음이 어두웠다. (뒤에 그 책을 한 번 읽어볼까?) 별로 해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되나, 그런 것에 마음이 켕긴 것을 안다면, 아버지 스타크 사령관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읽을 필요 없어.) 하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랠리는 힘차게 통신실로 들어갔다. 이미 라인하르트 선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주 통신의 수수께끼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왔군." 하며 라인하르트 선장은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통신하기 위하여 왔다. 본선은 이미 알파 C와의 통신 가능 구역에 들어와 있다." 랠리는 행성간 통신용의 거대한 장치 앞에 아무 말 없이 가 앉았다. 어깨 너머로 선장이 들여다보고 있는 속에 다이얼을 돌렸다. 장치에서는 가늘긴 하나 잘 들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잡음은 계속되었다. (고장일까?) 당황하여 조사하여 보았으나, 장치는 정상이었다. 장치를 잘못 취급한 것도 아니다. 아직 연습생이지만 랠리는 우수한 통신사이다. 갑자기 잡음 소리가 그치며, 깔깔한 금속 적인 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는 알파 C의 감시 정거장. 그쪽은?" 랠리는 규칙대로 응답했다. "우주 연습선 카르텐호. 지구시간 6월 1일에 명왕성을 출발, 알파 C 제 4행성의 런던 식민지를 향해서 항행 중. 착륙 허가를 부탁함." 상대의 금속적인 음성이 부드러운 사람의 음성으로 변했다. "너는 매릴로인가?" 감시 정거장에서는 처음 질문은 로봇이 하고, 그 다음에 인간통신사에게 인계하게 되어 있다. "아니, 랠리 스타크 연습생이다." "최초의 행성간 여행인가? 나는 헨리이다. 미안하지만 너에게 착륙 허가를 내릴 수 없다. 제 4행성에 직접 연락해 보라. 런던 식민지 공항은 폐쇄 상태인 모양이다." 이 말을 듣고, 랠리는 라인하르트 선장을 쳐다보았다. "누구의 명령인가 물어 보아라." 하고 선장은 말했다. 랠리는 헨리에게 물었다. "본선의 라인하르트 선장은 공항을 누가 명령하여 폐쇄시켰는가 묻고 계신다.“ "식민지 사람들이 폐쇄시켰다. 그들은 런던 식민지 공항의 폐쇄를 행성간 여행 위원회에 신청했다. 그러나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폐쇄시키고 말았다." "그러면 본선은 제 4행성에 착륙할 수 없는가?" "그들이 우주 정찰군의 우주선을 환영할는지… 아무튼 직접 물어 보라, 지금 런던 식민지 공항에 연결하여 주겠다." 하고 감시 정거장의 통신사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서 2,3분 지 나자, 새로운 음성이 통신 장치에서 흘러 나왔다. "이 곳은 알파 C 제 4행성 자유 세계의 통신사 밀러. 그쪽의 용건을 말하라!" 랠리는 놀라면서 선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알파 C 제 4행성 자유 세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쪽의 용건을 말하라!" 하고 제 4행성 의 통신사는 재촉했다. 그러자 라인하르트 선장은 랠리에게 자리를 비키게 하고, 자신이 직접 통신 장치 앞에 앉았다. "이쪽은 지구의 우주 연습선 카르텐호의 라인하르트 선장이다. 런던 식민지 공항에 착륙하는 허가를 얻고싶다." "제 4행성은 지금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있습니다, 선장. 런던 식민지 공항은 폐쇄 중이라서…" "폐쇄라고? 누구의 명령으로 폐쇄하였는가?" 라인하르트 선장의 얼굴은 상기되었으나 상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알파 C 제 4행성 자유 세계 평의회의 명령입니다. 당신의 우주선은 수리가 필요합니까7" "아니다. 이쪽은 우주 연습선이다. 해리슨 대통령의 관저에 연결해 주기 바란다." "대통령도 평의원도 지금 이 런던 식민지에는 없습니다." 그러자 라인하르트 선장은 분노에 찬 얼굴로 한참 통신 장치를 쏘아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반란을 일으켰는가?" 그러나 그 답변은 피하고, 런던 식민지의 통신사는 다른 말로 말했다. "알파 C 제 4행성 자유 세계에 착륙하는 것은 당분간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때, 다른 소리가 튀어나왔다. "라인하르트 선장, 시카고 식민지에 착륙하여 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들어가라!" 하고 런던 식민지의 통신사는 화가 나서 방해를 하기 시작했다. 랠리는 라인하르트 선장 옆에서 손을 뻗쳐 다이얼을 돌려서는 방해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했다. "그쪽은?"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은 다른 소리에 물었다. "시카고 식민지에 있는 해리슨 대통령의 임시행정본부입니다. 이 곳에 착륙해 주십시오." 선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랠리는 하르가 보여 주던 푸른 표지의 책과 목성 식민지의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면 그쪽에 착륙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해리슨 대통령은 당신들의 착륙을 환영하실 것입니다." 통신은 끊어졌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장치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굳어진 얼굴로 랠리를 쳐다보더니, 말 한 마디 없이 뚜벅뚜벅 통신실을 걸어나갔다. 랠리도 선실로 돌아왔다. 하르는 지구의 음악을 들어가면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랠리를 보더니 레코드를 끄고 물었다. "통신 연락은 잘 되었어?" "우리가 착륙하는 곳은 런던 식민지가 아니고, 시카고 식민지로 변경되었어." 하고는 랠리는 통신의 내용을 하르에게 알리지 않을 결심을 했다. "자네가 없을 동안에 나는 궤도 계산을 해 보았어. 랠리, 이 우주선은 내일, 알파 C 제 4행성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돼. 이미 우리는 제 1 행성과 제 2 행성의 궤도를 통과했어 지금 제 3행성의 궤도에 가까이 가는 중이야." "알파 C 계통의 행성 무리들은 조금 달라. 제 1 행성은 우리 태양계의 수성 정도의 크기로 이상은 없으나, 제 2 행성과 제 3 행성은 무언가 모르게 이상하다고." 알파 C의 천체에 대해서는 랠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쌍둥이 행성인가? 흥미가 있군." "그래. 제 2 행성과 제 3 행성은 서로 상대의 주위를 돌고 있어. 크기는 두 개 다 화성 정도인데,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못 돼." "왜?" "두 행성은 거리가 가까워서 조수의 간만이 심해. 만조가 될 때마다 대홍수가 일어나, 행성의 표면 전부가 물에 잠기지. 그래서야 식민지를 만들 수 없지." "그렇겠지. 농장물의 수확이 적어서는 식민지는 자급자족할 수가 없을 테니까." 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하르는 모든 식민지가 지구의 원조를 받지 않고 자급 자족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 랠리는 의심스러웠다. 하르는 지구와 우주 정찰군에 충성을 맹세하긴 했어도 지금은 마음이 동요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칫 잘못하면 맹세를 잊어버리고 충성심을 버릴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행성은 어때, 랠리?“ "제 4행성은 공기가 있으니까 사람이 생활하는 데는 가장 적당하지. 지구와 닮았어." 하며 랠리는 한 교과서를 집어들고는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봐, 하르. 이것이 제 5행성이야. 크기는 지구 정도인데, 유독 가스의 대기에 덮여 있어. 제 6행성은 대단히 춥지만, 작은 식민지가 하나 있어." "식민지라고? 나는 몰랐는데. 자네의 교과서에는 어떻게 씌어 있나?" "가장 최근의 보고에는 압력 돔(반원형의 지붕)안에 12명의 개척자가 살고 있다고 하는군." "식민지의 시작이구나.“ 하르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 7행성과 제 8행성은 거대한 행성이야. 중력이 너무 강하여 사람은 움직일 수도 없지. 그러므로 우주선을 착륙시키기 곤란해. 즉 목성보다 더 강한 중력의 지옥이야." "그래, 나도 책에서 읽은 일이 있어, 랠리. 20년 전에 우주 정찰군의 우주 조사선이 제 7 행성에 갔었지. 다행히 착륙은 성공하였으나, 굉장한 중력 때문에 이륙이 불가능했어. 승무원은 굶어 죽을 때까지 땅에 들러붙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어. 그것은 큰 실수였었어. 우주 정찰군은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용기만 믿고 행동하는 일이 간혹 있어." "자네는!" 하며 랠리는 얼굴을 바로 하며 하르를 쏘아보았다. "자네는 자네가 우주 정찰군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가? 자네의 말버릇은…" "그렇게 화내지 말아, 랠리. 우주 정찰 사관이 유머정도도 이해할 수 있는 교양이 없다면 곤란해." "미안, 하르. 내가 너무 신경질적이었어." "괜찮네. 자네의 교과서에는 알파 C 계통의 생물에 대하여 어떻게 씌어 있던가?" "거의 없어. 물론 제 7 행성, 제 8 행성은 중력이 너무 강하여 생물이 성장할 수 없어. 하지만 해파리 같은 것은 다소 있는 모양이야. 제 9, 제 10, 제 11 행성은 생명이 싹트기에는 온도가 너무 낮지. 제 2, 제 3 행성에는 원시적인 생물이 있어. 제 6 행성에는 원시적인 냉한대 생물이 있다. 제 1 행성은 너무 덥고 제 5행성도 알파 C의 태양에서 너무 멀리 위치하고 있어 이렇다 할 생물이 없는 것 같아. 제 4행성에 대해서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고." "글쎄." 하며 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랠리는 교과서를 덮고, 알파 C 제 4행성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내일이면 착륙한다. 꿈속에서 그리는 것은 오늘 저녁뿐이다. 제 4행성은 열대의 세계이다. 곳곳의 무성한 밀림에는 지구의 식민지가 흩어져 있다. 그러나 행성의 연령은 지구보다 1억 년 젊어서, 큰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원시림에는 무서운 공룡이 어슬렁거리고있다. (공룡이 가까이 오면 땅이 울렁거릴까? ) 라는 생각만 해도 랠리는 몸이 오싹해졌다.     공룡의 요리   6월 16일 정오, 카르텐호는 제 4행성을 감싸고 있는 대기권 근처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지상의 유도에 따라 착륙 궤도에 들어섰다. 지상에서 3만m 되는 곳까지 내려갔을 때, 시카고 식민지에서 소형 우주선으로 마중을 왔다. 4척의 우주선은 시카고 식민지의 바깥쪽에 있는 초원에 착륙했다. 그 곳까지 식민지 사람들은 환영을 하려고 나와 있었다. (드디어 공룡이 있는 행성에 도착했다!) 랠리는 기운차게 제 4행성의 땅을 밟았으며, 처음으로 놀란 것은 중력이 큰 것이었다. 몸이 무거워져 발을 들어올리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알파 C 제 4행성은 지름이 1만 6천 km나 되어 지구의 1만 2천 7백km에 비하면 상당히 커서, 그만큼 중력도 강하다. 그러므로 이 행성에서 태어난 식민지의 사람들은 큰 중력과 싸워 가며 살기 때문에, 근육과 골격이 발달하여 오헤어와 같은 큰 사나이가 된다. 이 중력도 목성만큼 강대하게 되면 생물에 대해 반대 작용을 한다. 목성 태생의 사람은 하르와 같이 키가 작고 뚱뚱한 체격이 된다. 같은 사람이라도 중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 체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랠리가 놀란 것은 제 4행성의 공기였다. 맑은 공기를 힘차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토하면서 생각했다. (맛있구나.) 하르도 다른 승무원도 정신없이 깊숙이 공기를 들어 마셨다. 무리도 아니다. 지구를 출발하여 자연의 공기를 마셔 본 일이 없다. 화성에서는 돔의 안에서 인공 공기를 호흡했다. 돔밖에도 대기는 있지만 산소가 적기 때문에 호흡할 수가 없다. 명왕성에는 돔의 밖에는 대기가 전혀 없다. 대기는 바위에 얼어붙어 있다. 카르텐호의 선 내에서는 화성과 명왕성에서처럼 인공적으로 재생한 공기를 호흡하여 왔다. 그래서 랠리는 자연의 공기 맛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 (알파 C제 4행성에는 돔이 없다. 자연의 공기 속에서 살 수 있다!) 랠리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우주 여행에서 자연의 공기를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 제 4행성의 공기는 달고 머리가 멍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산소가 풍부하다.) 랠리는 교과서의 한 구절을 생각해 내었다. (제 4행성의 공기는 지구의 공기에 비하여 산소의 비율이 높다. 그러므로 한층 더 신선하게 느껴지겠지.) 랠리 등은 우주선보다 30m나 공중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성벽을 향해서 걸어갔다. 사방에는 윤이 나고 싱싱한 초록색의 식물이 무성하고, 처음 보는 수목이 머리 위에 높이 솟아 있다. "이 성벽은 공룡을 막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행성에 있는 4개의 식민지는 전부 이러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고 근육이 튼튼한 한 식민지의 사람이 설명했다. 랠리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이 세계는 아직 지구의 중생대와 같은 시기이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1억 년 전의 지구와 닮은 거대한 것이 많다. 벽 밑에는 높이 2m쯤 되는 작은 문이 있었다. 큰 야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 문을 통하여 랠리 등은 시카고 식민지 안으로 들어갔다. 번화한 곳이었다. 작은 가게와 시장, 주택 등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지구의 도시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의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흡사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건설한 빈약한 시가지 같았다. 승무원일행은 식민지 사람에게 안내를 받으며 시가지의 길을 걸었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안내역과 나란히 걸어가며 무언가 속삭였다. 양쪽의 가게와 주택에서 사람들이 나와서는 신기한 듯이 랠리 등을 구경하고 있었다. "똑똑히 봐. 도로가 모두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어." 하고 랠리는 키가 작은 연습생 하이틀 ․반 ․하렌에게 속삭였다. "플라스틱은 비용이 많이 드니까 사용하지 않은 모양이야" 하이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곳 사람들은 플라스틱을 사용할 기분이 안 날거야. 콘크리트가 튼튼하고 실용적이야." 하고 하르가 말했다. 하이틀도 하르의 의견에 찬성했다. 이윽고 랠리 등은 건물로 들어가 긴 계단을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 익숙한 랠리 등에게는 긴 계단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 넓은 방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서 구식의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일어서서 랠리 등에게로 다가왔다. 나이는 많으나 잘생긴 얼굴이고, 걸음걸이도 당당하였다. "나는 알파 C 제 4행성 식민지 정부의 해리슨 대통령입니다." 하고 자기 소개를 하고 난 해리슨 대통령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망명 중입니다만…" 라인하르트 선장도 자기 소개를 했다. 그리고 승무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소개하고, 다시 무언가 얘기하려고 하자, 해리슨 대통령이 가로막으며 말했다. "시장하시겠죠?" 랠리는 선장을 대신하여, '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신선한 공기를 많이 마셔서인지 대단히 배가 고팠다. 그러나 라인하르트 선장은 용건을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나이였다. "식사보다 먼저 이 곳의 정세를…" "아니, 식사부터 먼저 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리고 나서 천천히 얘기하는 것이 좋겠어요."하며 해리슨 대통령은 랠리 등을 식당에 안내하고는 테이블에 앉게 했다. 랠리 등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해리슨 대통령 외에도 몇 사람의 식민지 사람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인조 식품의 틀에 박힌 요리만 먹고 있던 랠리는 식민지의 음식이 신기했다. 최고 요리는 스테이크인데, 조금 딱딱하였으나 맛은 좋았다. 랠리가 접시의 스테이크를 깨끗하게 먹고 나자, 갑자기 해리슨 대통령이 말했다. "이 고기, 맛이 있어요?" "예… 대단히 맛있습니다." 하고 랠리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것 참 잘 되었소. 이 곳에 오는 손님들은 공룡 스테이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공룡 스테이크!" 랠리가 깜짝 놀라면서 빈 접시를 내려다보자, 다른 승무원들이 씨익 웃었다. "공룡 스테이크는 이 곳의 주식이오. 시카고 식민지의 인구는 약 1천명, 1주일에 두세 마리의 공룡을 잡으면 모두의 식량이 마련되오. 또 공룡의 뼈를 가지고 조각을 많이 만드는데, 그건 나중에 구경하시오." 하고 말을 마치더니, 해리슨 대통령은 묵묵히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랠리 등은 넓은 방으로 되돌아왔다. 해리슨 대통령이 이야기를 꺼냈다. "라인하르트 선장, 참 잘 오셨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지금 제 4행성에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주 정찰군에게 원조를 청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 자신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 나는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당신은 왜 런던 식민지에서 시카고 식민지로 오셨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라인하르트 선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랠리 등을 힐끔 쳐다보았다. 필경 해리슨 대통령과 단 둘이서 비밀로 얘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해리슨 대통령은 의자에 앉으면서, 모두의 앞에서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행성간 평의회는 알파 C 제 4행성에 대하여 앞으로 25년 내에 독립을 인정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4행성의 각 식민지에서도 이미 독립의 준비를 하고 있지요. "그 일은 알고 있습니다."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은 말했다. 랠리와 하르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른 승무원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 "그런데 알파 C 제 4행성의 사람들은-물론 당신들은 제외하고 왜 지구인을 차갑게 대하고 있습니까?" 선장은 착륙전의 교신으로 생각한 바가 있는 모양이다. "런던 식민지에 있는 혈기 왕성한 많은 모임들은 행성간 평의회의 약속은 제 4행성의 독립을 연기시키고 우물쭈물하고 말려는 음모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런던 식민지에 알파 C 제 4행성 자유 세계 평의회를 새로 만들어서는 대통령인 나를 이곳으로 추방시킨 것입니다." "헨리크스 마을과 봄베이 식민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시 반란에 참가하였습니까?" "아마도… 지금 이 행성에서 지구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것은 시카고 식민지뿐입니다." 해리슨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라인하르트 선장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화가 난 붉은 얼굴로 외쳤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행정관은 어디 있습니까? 지구에서 파견되어 있는 행정관은 반란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지요. "왜죠?" "런던 식민지의 무리는 행정관을 지구로 강제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선장." 하더니 해리슨 대통령의 음성은 갑자기 작아졌다. "더욱이 은하계 여행용의 우주선에 5년 분의 식량을 싣고." 카르텐호의 승무원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하르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행정관을 몇 년간이나 우주선에 가두어 두는 것은 잘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해리슨 대통령을 런던 식민지에서 추방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인 것이다. "이 사건을 대통령인 당신께서는 바로 우주 정찰군에 알렸어야 할 일이 아닙니까?"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이 비난하자 해리슨 대통령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알리려고 생각했습니다만 마침 카르텐호가 접근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들을 맞이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랠리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식민지의 사람은, 지구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해리슨 대통령 같은 사람도 지구를 우습게 보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25년 뒤에 독립시켜 주겠다는 지구의 의견을 무시하고 반란을 일으키는구나. 그러나 지구에서 강력한 우주 정찰군이 도착하면 반란은 곧 진압될 것이라고 랠리는 생각했다. "그래서 시카고 식민지도 다른 세 식민지의 반란에 참가할 작정입니까?" 라인하르트 선장은 신중한 질문을 했다. "지금 형편으로는 뭐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내일 저녁 시카고 식민지의 전 주민이 모여 회의를 열어 지금처럼 충성을 다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라고 해리슨 대통령은 엄숙한 태도로 대답했다. 주저할 수가 없다. 만약 시카고 식민지가 반란에 참가한다면 카르텐호의 승무원들은 적지에서 고립하게 되고 만다. "곧 손을 써서 반란의 확대를 막자. 올코트, 자네는 시카고 식민지의 반란파 지도자에게 연락을 취하라. 시카고 식민지는 우주 정찰군의 계엄령 하에 있다고 통고하라!"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은 카르텐호의 부관인 올코트 우주비행사에게 명령했다. 그리고는 랠리 등을 날카로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비상사태에 대비하라! 나는 해리슨 대통령과 더 이야기를 하겠다." 랠리 등은 시가지의 변두리에 있는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텅 빈 넓은 방이 세 사람의 연습생 - 랠리, 하르, 하이틀에게 할당된 곳이다. 방의 한쪽 창으로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또 한쪽 창에서는 끝없는 밀림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랠리, 전투가 시작될까?" 하이틀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글쎄…" 랠리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사관 학교에 있을 때부터 하이틀은 과학교수들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로 수재였으나, 동작이 느리고 군사 교련과 체육은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싸우지 않고 해결하였으면 하는 생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제부터 돌아가는 형편을 난들 알 수 있나.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면, 우주 정찰군의 공격용 우주선이 와서 우리들을 구출하여 줄거야." "아니, 그 전에 집단 학살을 할거야. 랠리, 요전에 내가 너에게 얘기한 목성 식민지의 반란 때와 같이 처음에는 소규모 반란에서 대규모 전쟁이 된다. 정말 그 때와 똑같은 과정이야." 하고 하르가 참견했다. "목성 식민지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은 싫어. 제 4행성의 사람들은 힘이 무척 세고 일을 잘 해. 그러한 상대를 적으로 해서 싸우는 것은 불리해." 하고 랠리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하르는 빙긋이 웃으며, 창가로 걸어가서 말을 계속했다.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식민지 사람에게 목에 형틀을 걸고, 노예같이 혹사하려는 지구 사람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나, 랠리? 목성에서도 화성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어." "그만해! 지구 사람이 식민지 사람들에게 목에 형틀을 건다는 것은 어떤 뜻이지? 너는 비뚤어져 있어, 하르. 지구는 식민지의 개척을 원조하고 그 자금을 회수하고 있을 뿐이야. 지구의 원조가 없었더라면 어떤 식민지도 발전하지 못했을 거야." 랠리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야 그렇지. 그러나 지구를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식민지도 풍요한 독립 국가가 되었을 거야. 이 시가의 도로도 구멍 투성이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랠리, 자네는 대대로 우주 정찰군에서 일하고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만사를 바보같이 지구만 믿으려 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해 본 일은 없어?" "우리 스타크 가문을 모욕하나?" 하며 랠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면서 하르 쪽으로 다가갔다. 하르는 꼼짝도 않았다. 키는 작으나 튼튼한 몸을 굽혀서 대항할 자세를 취했다. 그 때, 둘의 사이를 하이틀이 가로막았다. "진정하라고. 싸우려면 밖에 나가서 해. 힘이 남아돌거든 공룡 사냥이나 가시지. 나는 피곤하여 자고 싶다고." "하이틀의 말이 옳아. 시원찮은 짓은 하지 말자." 먼저 랠리가 손을 내밀었다. 하르도 랠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문제는 언젠가 다시 조용히 얘기하자. 우리들도 좀 자야지."     우리에게 자유를   이튿날 아침 일찍 랠리는 눈을 떴다. 어제 저녁 열어 두었던 창에서 따스하고 달콤한 공기가 흘러 들어와, 향수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르와 하이틀은 아직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랠리는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성벽 저쪽의 초원에는 카르텐호가 착륙한 그 때의 모습대로 서 있었다. 초원의 주위는 30m가 넘는 거목의 숲이다. 수목은 밑에서 쳐다보았을 때는 소나무 같다고 여겼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단풍과 떡갈나무, 야자 같은 잎도 눈에 띄었다. 갑자기 수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꽉 어울려 있는 가지가 앞뒤로 흔들리고 좌우로도 흔들렸다. "무엇일까?" 랠리는 발돋움하여 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침해는 이미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데, 아직 사방은 조용하며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무들의 흔들림은 점점 심해지고, 별안간 밀림이 둘로 갈라지더니 큰 바위 같은 것이 초원에 나타났다. "앗!" 랠리는 갑자기 숨을 삼켰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거대한 동물이었다. "공룡이다!" 랠리는 뒷걸음질치면서 침대에서 자고 있는 하르의 발을 잡고 흔들었다. "왜 이러는 거야?" 잠이 덜 깬 하르는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일어나! 창 밖을 봐!" 다시 한 번 랠리는 흔들었다. "왜 이래?“ 하르는 크게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쪽으로 와서 밖을 내다보라고." 아직도 잠이 들깬 하르를 랠리는 창가까지 끌어 당겼다. "뭐야?" 눈을 비비며 하르는 1분간쯤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를 꼬집어 봐. 아직 잠이 들깬 모양이야. "자네는 깨어 있어." 하고 랠리는 피식 웃었다. "저것이 이 행성의 공룡이야. 하르, 자네가 키우면 어때?" 두 사람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초원에 모습을 나타낸 거대한 파충류는 검은 잿빛인데, 4개의 굵은 발을 가지고 있고, 긴 목 끝에 작은 머리가 달랑 얹혀 있었다. 몸통의 크기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작은 머리이다. 뚱뚱한 몸통 뒤에는 허리뼈가 통해 있는 꼬리가 길게 뻗쳐 있고, 그 끝은 밀림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저놈이 우주선으로 다가간다!" 하고 하르가 말했다. 괴물은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는 우주선에 주의 깊게 다가가려 하고 있다.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쿵, 쿵, 쿵하는 소리가 나는데 건물 안에 있는 랠리 등에게까지 땅의 울림이 전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로 잠을 깼는지 하이틀도 창가로 왔다. 세 사람은 정신없이 공룡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공룡은 아무도 없는 우주선 가까이까지 다가가서는 거대한 목을 치켜들고, 콧등으로 차가운 선체의 냄새를 맡았다. 푸른 하늘에 똑바로 서 있는 우주선 머리에서, 지상 30m 높이에 있는 승강구의 출입문 근처까지 자세히 살펴보고는 콧등으로 출입문을 밀었다. 출입문이 열리자 큰 한쪽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곳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공룡은 머리를 낮추고  우주선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다시 밀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안 되어, 카르텐호의 승무원들은 아래층에 모여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만약 다시 공룡이 카르텐호에 가까이 오면 어떻게 하지? 그 놈이 우주선을 넘어뜨리지는 않을까?" 라는 불안을 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주선을 움직일 수도 없고, 우주선의 주위에 높은 성벽을 쌓아올리는 것도 무리야." 이야기가 채 끝나기 전에 라인하르트 선장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곧이어 해리슨 대통령 이 제 4행성의 자위대 병사 두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병사들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 식민지의 젊은 사나이들이었다. "이 사람은 존 브라운-시카고 식민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 운동의 지도자입니다." 하고 해리슨 대통령이 소개했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햇볕에 그을린 사나이를 보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게, 브라운. 자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훤칠하게 키가 큰 브라운은 태연스럽게 라인하르트 선장 앞으로 나아가서 질문을 기다렸다. "자네들은 오늘 저녁 여기에서 회의를 한다지, 존?" 다짜고짜로 라인하르트 선장은 질문했다. "나를 체포할 작정입니까, 선장?" "걱정하지 말게. 어떤 목적으로 회의를 하는가 알고 싶을 뿐이니까." "그러면 이야기하지요. 다른 3 개의 식민지 일은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는 오늘 저녁 회의를 열어, 시카고 식민지가 3개 식민지의 반란에 참가할 것인가를 주민 투표로써 결정할 작정입니다. 만약 내가 출석을 못하면 동료가 대신하여 회의의 사회를 맡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외면하고, 자유도 주지 않으며, 거기에다 무거운 세금까지 가혹하게 받아 가는 지구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길은 단 하나, 4개의 식민지가 단결하여…" "이제 알겠다. 브라운."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은 상대방의 말을 중지시키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시카고 식민지는 계엄령 하에 있다. 그러니 내게는 오늘 저녁의 회합을 금지시킬 권한이 있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겠지?“ "저건 언론통제인데." 하고 랠리는 놀라면서 하르에게 속삭였다. "쉬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자고." 하르가 주의를 주었다. "알고 있고 말고요.“ 하며 브라운은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나 선장, 시카고 식민지의 반란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까… 그런데 왜 알파 C 제 4행성이 갑자기 독립을 원했는가?" 이 말을 듣고, 브라운의 눈은 이글이글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신장. 우리는-우리의 조상이 이 곳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 오랫동안 독립을 원해 왔습니다. 지금은 이미 지구를 의지할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훌륭하게 이룩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구는 필요 없으며, 지구 역시 우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지구는 우리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독립허가를 내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세금이 지구의 거대한 경제에 얼마쯤 보탬이 될까요? 지구가 이렇게 빈약한 식민지를 괴롭히려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옳지 않다. 무역으로 서로가…" "무역? 4, 5광년이나 떨어져 있는데도요? 무역의 상대로서는 너무나 멀지요. 우리가 지구에서 공급받는 것은 책과 도구 종류뿐입니다." "너희들이 반역자가 되면 그 책과 도구도 지구에서 오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가?" 하고 해리슨 대통령이 말했다. "우리들 힘으로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유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보낸 행정관에게 감시당하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지구에 보고하지도 않으며, 지구에서 부과한 세금을 바칠 필요도 없으며, 우리 자신의 정부를 세울 자유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라는 브라운의 소리는 차츰 커져서 넓은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하고 있는 저 말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에서 인용한 말이야. 거의가 책에 써놓은 그대로군." 하고 하르는 랠리에게 속삭였다. 랠리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지구는 명예스러우며, 정당하며, 식민지의 수호자 즉 약한 사람의 편-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고 그대로 믿어왔었다. 그런데 지금 어쩐지 그 신뢰감이 흔들리는 것 같다. 라인하르트 선장도 아무 말이 없고, 브라운의 열띤 말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지구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머리를 누르는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세금도 이렇게까지 바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합니다. 또 행성간 평의회에는 아직까지 우리의 대표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라인하르트 선장, 당신은 지구의 역사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부터 6백년 전, 지구의 곳곳에 있었던 식민지는 흡사 지금의 우리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식민지는 지배자에게 어떻게 말하였던가요? '선거권이 없으면 세금도 못 내겠다.' 이 말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선장?" "알고 있다." "그 뜻을 잘 아십니까? 이 식민지는 이미 독립 국가로서 자립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행성간 평의회는 우리에게 독립을 주겠다고 확실히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지구의 형편이 좋을 때, 지구의 준비가 다 되었을 때가 아닙니까?" 라는 브라운의 소리는 랠리의 귀에도 크게 울려 퍼지며 들려 왔다. "행성간 평의회가 쉽게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 브라운이 알까?" 하고 랠리는 하르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브라운은 너보다 지구의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행성간 평의회는 어쩔 도리가 없어야만…" 하고 하르도 속삭였다. "브라운, 기다려라. 그러는 동안에 꼭…" 하고 해리슨 대통령이 말을 꺼내려는데, 브라운은 큰소리로 가로막았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당신은 런던 식민지에서도 기다리라고 말하다가 추방되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작정입니까? 우리가 행동하는 대신, 당신이 행성간 평의회과 담판하여 독립 허가라도 빨리 얻을 자신이 있습니까?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립을 얻기 위하여 일어선 런던 식민지 쪽이 정당합니다. 우리는 4개 식민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알파 C 제 4행성의 독립을 선언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알았다." 하며 라인하르트 선장은 일어섰다. 그리고는 눈을 브라운에서 해리슨 대통령 쪽으로 돌렸다. "나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태를 조용히 수습하고 싶습니다. 즉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우주 정찰군의 무장 우주선을 부르기 전에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습니다. 나의 의사를 시카고 식민지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지 않겠습니까, 해리슨 대통령? 그리고 이 브라운 씨는 구속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자 출입문 쪽에 있던 몇몇 식민지 사람들이 라인하르트 선장을 위협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것을 본 해리슨 대통령은 말했다. "선장, 브라운을 체포하면 사태가 더 악화됩니다. 이대로 보내 주면 브라운은 우리의 각오를 혁명 측 사람들에게 말하겠지요." "그러지요. 브라운을 내보내고 싶진 않지만 할 수 없겠군요. 그러나 오늘 저녁의 집회 문제는 어떻게 하지요?" "예정대로 하도록 맡겨둡시다. 집회는 이미 허가가 나와 있거든요. 지금 와서 권력으로 금지시키면 복잡해집니다." "알았습니다. 브라운을 석방하여 주십시오." 라인하르트 선장은 키가 큰 브라운이 태연하게 방을 나서는 것을 보고 "해리슨 대통령, 나와 함께 가 주십시오. 이 행성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처음부터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방에서 나갔다. 뒤에 남은 승무원들은 한참동안 속삭였으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승무원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그대로 놀게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선장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하르가 빠른 걸음으로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의 소매를 잡으며 랠리는 말했다. "잠깐 기다려 주게, 하르. 같이 방으로 가지. 나는 자네가 가지고 있는 그 푸른 표지의 책을 읽고 싶어." 하르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랠리를 가로막았다. "다음으로 미루게, 랠리. 나는 브라운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네." 하고 말하고는, 랠리를 남겨놓은 채 넓은 방에서 힘차게 뛰어 나갔다.     반란의 청년 지도자   멍하니 서 있는 랠리에게 하이틀이 뒤에서 말을 걸었다. "랠리, 모처럼 얻은 자유시간을 뜻 있게 보내자. 시가지 구경은 어때?“ "좋지." 하고 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연습생은 큰길로 나왔다. 이 부근은 상업 지역인 모양이다. 양 길가에 점포가 늘어서 있다. "브라운을 어떻게 생각해?" 한 점포를 향해 걸어가면서 하이틀이 물었다. "글쎄, 곤란한데. 브라운이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군. 또한 지구에는 지구 입장도 있겠고… 그걸 확실하게 알지 않고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지." "그래. 나는 지구가 왜 식민지를 냉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를 알고 싶네." 두 사람은 제일 첫 상점으로 들어갔다. 상점 안에는 공룡의 뼈로 만든 조각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상점 주인이 나오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상당히 나이가 많은 노인인데, 근육이 튼튼하여 노인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서들 오십시오. 지구에서 오신 손님!" 발음이 이상한 것은,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지구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리라. 랠리는 멋진 공룡의 조각을 손에 들고 물었다. "이것도 파는 겁니까?“ "그럼요, 팔고 말고요. 공룡 뼈의 조각은 이 행성의 명물이죠. 시카고 식민지에서는 우리 상점이 총판을 맡고 있습니다." "이것 좀 보게, 랠리!" 하이틀은 10cm 가량 꼬리를 든 공룡 조각품을 손에 들고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진짜 같구나." "공룡 스테이크를 먹어 보신 지는 모르지만, 진짜 공룡은 몸길이 27m, 키는 10m나 되지요. 젊은 녀석의 고기를 당신들이 먹는 거요." 하고 상점 주인은 식민지 사투리로 설명했다. "이 공룡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공룡은 많은 종류가 있고, 식민지에 따라 이름이 다르니까요. 거기에다 지구에서 온 사람들은 마음대로 우리가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이것은 얼마입니까?" 하고 하이틀이 물었다. "정가는 3우주달러지요. 당신들은 아마 이 행성의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겁니다. 나도 돈은 그리 필요 없습니다. 물물 교환을 하면 어떨까요?" "물물 교환?" "예, 당신이 팔에 끼고 있는 그 책이 좋겠습니다. 이 식민지에는 책이 귀하니까요." "이 책은 곤란한데요. 이건 나의 교과서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하이틀은 책을 펴서 내용을 보였다. "지금부터 공부하는 데 필요한 책이지요…." 곁에서 랠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하이틀이 좋아졌다. 이 며칠간 하르와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못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하이틀은 식사 때에도 우주 여행의 교과서를 가지지 않을 때가 없을 정도로 책벌레이다. 공룡의 조각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책과 바꿀 리는 만무하다.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지요. 이걸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내가-아니 시카고 식민지에서 당신에게…" ”괜찮을까요? …감사합니다." 하이틀은 미안한 표정으로 공룡의 조각품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랠리도 조각품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렸다. 서재의 책상 위에 놓아두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집, 우주 여행을 출발하고서 처음으로 집의 일이 문득 머리를 스쳐온다. 집이 있는 지구는 지금은 우주의 멀고 먼 곳에 있다. 거리를 숫자로 나타내어 보아도 실감이 안 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무려 4000만 km의 100만 배이다. 두 연습생은 2m 이상이나 되는 공룡 조각품이 서있는 입구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랠리는 상점 주인을 돌아다보았다. "오늘 저녁의 집회에 지구인도 출석할 수 있습니까? 저도 가고 싶군요."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들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옆 상점에서는 신기한 야채류를 팔고 있었다. 그 상점 주인은 지구의 사과 비슷한 둥글고 빨간 과일 한 개를 랠리에게 주었다. 입에 넣고 씹어 보니 신맛이 많고, 입에 맞지 않는 기묘한 맛이었다. 알파 C 제 4행성은 걷는 데 힘이 든다. 둘이는 한 발짝 한 발짝마다 저항을 느끼고 열 걸음 정도 걷고서는 깊은 호흡을  했다. 공기는 산소가 많아서 가슴으로 힘껏 들이마시면 이상한 활력이 나오는 것 같다.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식민지 내부는 집뿐만 아니라 큰 농원이 있으며, 군데군데 높게 서 있는 나무만이 성벽 밖의 야만스러운 밀림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중력만 강하지 않으면 지구에 돌아온 기분이 난다. 그러나 파랗게 맑게 갠 하늘을 쳐다보면 그러한 착각은 당장에 사라진다. 알파 C의 태양은 중천에 걸려 황색으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 보는 태양보다는 약간 크다. 더욱이 하늘 한 모서리에는 푸르스름한 베타 C가 작은 빛의 테가 되어 떠 있고 반대쪽과 수평선 가까이에는 프록시마 C가 조그맣고 붉게 빛나고 있다. 이곳에는 태양이 3개 있다. 빛은 지구와 같이 황색이었으나, 베타 C의 희미한 빛과 프록시마 C에서의 붉은 빛도 섞여 있다. 이것이 알파 C 제 4행성에 지구와 다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두 연습생은 강한 중력 때문에 걷는 데에 힘이 들어 벤치에 걸터앉아 쉬었다. 무심코 눈을 들어보니 바로 옆에 존 브라운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랠리는 얼굴이 붉어졌다. 브라운으로서는 지구에서 온 우주 정찰군의 인간은 미운 적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적의를 나타내지 않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별로 소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침에 당신들은 나를 보았을 것이다. 나는 브라운-존 브라운이다." 식민지 사투리이기는 하지만, 활발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음성이었다. "나도 당신을 알고 있다." 하고 랠리는 말했다. "나도." 하이틀도 고개를 끄덕이며 끼여들었다. "오늘 저녁 집회에 참가하지 않겠는가? 지구인도 환영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새삼스럽게 출석할 기분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내가 선장에게 이야기한 것을 다 들었으니까." "가겠다. 나는 출석할 작정이다." 라고 랠리는 대답했다. "나도 가지, 브라운. 너와 같은 이름의 사나이를 노래한 것이 기억 난다. 옛날 지구의 노래지." 하이틀의 말에 랠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지나간 어느 날 밤에 오헤어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서정적인 노래이지. 첫 구절이 아마 「존 브라운의 몸은 묘비 아래에 잠들고」 였다." 하고 하이틀은 곡조를 붙여 가며 외었다. "그 브라운은 나의 선조이다." 브라운은 솔직히 말했다. 2320년에, 브라운의 아버지는 지구에서 알파 C 제 4행성에 이주해 왔다. 그리하여 지금의 브라운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브라운은 알파 C 제 4행성 식민지의 2세대이다. "지금 조금 시간이 있다. 어때, 나와 같이 성벽에 올라가 보지 않겠는가? 이 행성의 중력에 익숙해지는 훈련도 되고, 밖의 밀림도 구경할 수가 있다. 너희들은 오늘 아침에 우주선의 냄새를 맡고 있던 공룡을 보았겠지. 기분이 어떻던가?" "무섭게 크더군." 랠리는 거대한 공룡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하고 브라운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본 것은 가장 큰놈이다. 이 식민지에서는 그 공룡을 '두 꼬리'라고 부르고 있다. 목과 꼬리가 거의 같을 만큼 길어서 꼬리가 두 개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브라운은 양손을 펴들고 공룡의 형태를 그려 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또 같이 가기를 권했다. "나와 같이 성벽에 가지 않겠는가?" "가지. 하이틀, 자넨 어떻게 할건가?" 하고 랠리가 물었다. 하이틀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나는 안 가겠어. 자네들 둘이 가게. 나는 본부에 되돌아가서 그 후의 상황을 알아보겠어." "그럼, 그렇게 하게." 랠리와 브라운은 성벽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랠리는 브라운이라는 사나이에게 이상한 친밀감을 느꼈다. 같이 걷고 있는 사나이가 반란의 지도자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랠리, 자네는 이 행성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지?" "글세… 여기에는 런던 식민지, 봄베이 식민지, 헨리크스 식민지, 시카고 식민지라는 4개의 식민지가 있지. 총 인구는 5천명으로서, 그 반은 런던 식민지에 살고 있지." "아니야, 정확하게 말하면 반이 아니야. 런던 식민지에 2천명, 다른 세 곳에 천명씩 있다." 둘은 성벽 가까이 갈 때까지 대화를 계속했다. 랠리는 마음이 풀리며 친숙한 기분으로 질문했다. "식민지가 개척되고 몇 해나 되지?" "100년쯤-정확히 말하면 125년 전에 개척되었지. 최초의 개척자는 중력이 커서 상당히 고생한 모양이나, 여기서 태어난 우리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식량 문제는 이 행성에 있는 공룡을 주식으로 하여 해결했지. 만약 공룡을 식량이 되도록 관리하지 못했다면, 식민지는 현재의 상태로 발전하지 못했을 거야. 물론 부식도 필요하지. 그것도 곡식과, 야채의 재배로 걱정 없게 됐네." 성벽의 밑에 계단을 만들어 놓아, 구불구불하게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브라운이 앞서고, 랠리는 뒤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룡은 항상 성벽 밖의 빈터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나?" 하고 랠리는 숨찬 목소리로 물었다. "이른 아침 뿐이야. '두 꼬리'는 대단히 겁쟁이지. 날이 밝고 시가가 시끄러워지면 밀림 속으로 숨고 만다. 이 행성에 오자마자 그놈을 보게 된 것은 자네가 운이 좋은 거야." "공룡이 겁쟁이라니?" "그럼. 그놈은 초식 동물이야. 그 작은 입으로 배가 부르도록 풀을 뜯어먹자면 하루에 10시간이나 12간은 걸릴걸." "자네들은 공룡이 무섭지 않은가?" "아무렇지도 않아." 하고 말하면서 브라운은 웃었다. "만약 그놈이 우리를 해롭게 하려고 하면 이런 성벽은 쉽게 넘어오고, 우리를 잡아먹을 수 있어. 그런 일이 자네가 여기 있을 동안에 일어날지도 모르지, 랠리." 둘은 성벽 꼭대기에 섰다. 30m 밑의 식민지를 바라보니, 먼 곳과 한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랠리는 성벽 꼭대기를 거닐다가 반대쪽으로 눈을 돌렸다. 순간 숨이 막힐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광대한 푸른 숲은 큰 바다처럼 심한 기복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그 위에는 기묘한 모습의 새들이 날고 있었다. 성벽의 바로 밑은 카르텐호가 우뚝 서 있는 초원이고, 바로 옆에까지 밀림의 나무들이 성벽 높이만큼 높이 솟아 있었다. "저 새는?" 랠리는 나무 꼭대기 위에서 천천히 날고 있는 거대한 새를 손가락질하면서 물었다. "익수룡이야. 앞발의 넷째 발가락이 길고, 거기에 얇은 막이 덮여 있어 2m에서 3m나 되는 큰 날개로 변화해서 하늘을 나는 공룡이지. 학자들은 '프테라노돈'이라고 부르고 있어. 옛날에 지구에 있었던 것과 같은 종류라고 하더군." "그 새는 시가지에 날아오지 않는가?" "예전에는 잘 날아온 모양이야. 식민지 아이들을 채 가지고 간 이야기도 있어. 그래서 그놈이 시가지 상공에 나타나면 총으로 쏘아 떨어뜨렸지. 그놈들도 위험한 것을 알고는 지금은 절대로 시가지 가까이 오지 않게 되었어." 익수룡은 나무 가지 끝을 빙빙 돌고 있다가, 갑자기 긴 부리를 가지에 힘차게 내밀더니, 한 마리의 뱀을 입에 물었다. 날뛰는 뱀을 머리로부터 말끔히 삼키고 말았다. 랠리는 등이 오싹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태연하다. "저것이 밀림의 법칙이네. 익수룡은 항상 나무에 올라오는 뱀을 기다려서 잡아. 그러나 익수룡도 호수 위를 낮게 날면, 물에 살고 있는 공룡이 수면으로 긴 팔을 뻗어 익수룡을 잡아서는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지.“ 초원 끝에서 많은 이빨을 가진 공룡의 머리가 쑤욱 나타났다. "아, 나타났다! 오늘 아침의 그놈인지도 모르겠군." 하고 랠리는 손가락질하며 외쳤으나, 브라운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시간이 됐어. 슬슬 돌아가서 집회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군. 자네는 여기서 공룡의 구경을 더 할 작정인가?" 오후의 태양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는 익수룡이 기분 나쁜 소리를 질러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성벽 위에 자기 혼자 서있는 모습을 상상한 랠리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도 같이 내려가지." "그러는 것이 좋을 거야. 오늘 저녁 집회에서 만날 수 있을까?" "물론." 하고 대답하고, 랠리는 브라운의 뒤를 따라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브라운 같은 친밀감을 주는 좋은 사나이가 반란을 지도한다면…) 숙소로 돌아가면 하르의 책을 빌려서 읽어 보리라고 랠리는 생각했다.     전기 기타의 수수께끼   숙소에 돌아오니, 건물의 주위는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식민지 사람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라인하르트 선장을 만나도록 해 달라고 소리소리 외치고 있었다. 랠리는 선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선장은 테이블을 끼고 앉아서는 해리슨 대통령과 두 식민지 사람과 더불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랠리가 보고를 하려고 하자, 선장은 손을 흔들며 나가 달라는 손짓을 했다.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쓸쓸함을 느끼며, 랠리는 계단을 올라가 자기 방으로 향했다. 방안에서는 하이틀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르도 반대쪽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둘은 랠리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오헤어가 너를 찾아왔길래, 하이틀이 브라운과 산책하고 있다고 말했어. 그게 정말인가?" 하고 하르가 물었다. "정말이야. 브라운은 우리들을 오늘 저녁 집회에 초대하더군." 라고 랠리는 대답했다. "자넨 갈 건가, 랠리?" "선장이 내게 일을 맡기지 않으면 가겠다. 그러나 선장은 이 우주 여행을 마칠 때까지 항상 우리에게 작은 일거리들을 맡길 것이니 어떨는지…" "집회를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할 건 없어." "왜? 나는 집회에서 이 식민지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보고 싶어. 우리 눈앞에서 지금 역사가 만들어지려 하고 있어." "그 말은 옳아. 그러나 이 식민지 사람들이 주민 투표에서 반란을 찬성했을 경우, 맨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지구인을 사형시킬 것이 아닌가." "설마!" 랠리는 깜짝 놀라면서 하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오후부터 지금까지 브라운과 같이 있었어.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 그 사나이가 우리를 사형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아." "배반자!" 하고 하르는 웅변조로 크게 외쳤다. "나는 너를 배반자로 고발한다, 랠리 스타크 연습생! 네가 반란 지도자를 두둔하는 것은 어떤 이유야? 지구가 생명을 걸고 정한 식민지 법을 위반할 작정인가? 악마에 홀린 것이 아닌가? 나는 너를 믿고 있었다." "믿고 있었다고?" 하며 랠리는 빙긋이 웃었다. 하르가 비꼬는 말에도 아무렇지 않다. 의자에 걸터앉아 생각해 보았다. 하르가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브라운과 다른 시가지의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 랠리는 혁명가라는 자를 보통의 범죄자 이상으로 나쁜 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적이 친구처럼 보이고, 친구가 적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랠리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했다. (잊어서는 안 된다, 랠리. 지구는 항상 정당하다. 식민지에서 속지 마라.) 그러나 이 시카고 식민지의 사람들이 자기를 속이고 있을까? 지구인은 모두 영리하고, 식민지의 사람들은 야만일까? 어떤 경우에도 식민지의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를 얻기 위하여 싸우는 정직한 사람이며, 지구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지배자일까? 랠리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랠리는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님은 오헤어였다. 랠리는 이번 우주 여행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된 큰 사나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큰 사나이는 겨드랑이에 자기가 가장 아끼고 있는 전기 기타를 끼고 있었다. 그것을 조용히 랠리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네게 줄 때가 왔어, 랠리." 오헤어의 얼굴은 창백해서 붉은 머리카락이 더욱 돋보였다. 눈은 보통 때보다 험상궂고, 얼굴전체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바트?" 랠리는 번쩍번쩍 빛나는 전기 기타와 오헤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것은 보통 전기 기타가 아니고, 훌륭한 소리를 내는 고급품이다. 그것은 오헤어가 지금까지 수많은 우주 여행에 한시도 놓지 않고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이 기타는 자네가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자네에게 줄 뿐이야, 랠리." 하며 오헤어는 갑자기 빠르게 지껄였다. "나는 이제 가지 않으면 안 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곧 돌아와서 자네의 연주를 들어볼 거야. 자네에게는 기타의 명수가 될 소질이 있어. 랠리, 자네는 기관부가 아니고 우주 정찰군의 사관이 될 사람이기에 나는 섭섭해. 기타의 재능 같은 것은 우주 정찰군 사관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 기타를 소중히 간직해 주게, 랠리. 음을 맞추는 방법은 알지?"     "알고 있고 말고, 오헤어.""만약 고장이 나거든 그것을 가지고… 나를 만나러 오게나. 자, 그러면 안녕, 랠리." 하고는 문을 열고 오헤어는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고맙네, 바트." 이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다시 의자에 앉으며 랠리를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왜 오헤어는 자기가 그처럼 아끼던 물건을 내게 주는 걸까?" "아마 기타를 간수할 곳이 없어서겠지." 라고 하이틀이 그렇게 말하자 랠리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오헤어는 비록 자기가 앉을 장소가 없어도 기타를 놓아둘 곳은 꼭 찾는 사나이야.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런 것은 오헤어가 다시 오면 물어 보면 되잖아. 그것보다 이 근사한 기타로 한 곡 들려주게나. 나는 기타 연주를 자주 듣고 있지. 한데 그것보다 더 잘 칠 수가 있을까?" 하르의 말이었다. "한번 쳐보지." 랠리는 기타의 코드를 전원에 연결시키고 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낮고 김빠진 소리가 났다. 하르와 하이틀은 껄껄 웃었다. "굉장하다, 랠리! 재창이다, 재창!" 하고 하르가 놀렸다. "이상하다." 하며 랠리는 기타를 들여다보았다. 자기도 이렇게 낮은 음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한 번 더 랠리는 켜 보았으나, 여전히 낮은 소리이다. "자네가 이 기타를 켜는 것은 무리야. 그렇지 않으면 오헤어가 어떤 장난을 쳤는지 몰라." 라고 하르가 말했다. "아니야. 오헤어는 누굴 놀리는 사람이 아냐." 하며 랠리는 음을 맞추려고 애를 썼지만, 여전히 맞출 수가 없었다. "음을 잘못 맞춘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 같아, 랠리"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운드 박스가 이상해." 하고 랠리는 기타의 심장부에 손을 집어넣고 찾아보았다. "이상한 곳은 없는 것 같은데…아니?“ 랠리의 손가락은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이놈이구나! 여기에 이상한 것이 꽂혀 있어. 이것 때문에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어. 오헤어는 내게 기타를 주기 전에 왜 이것을 빼놓지 않았을까?" 랠리는 조그맣게 똘똘 접은 쪽지를 꺼냈다. 그리고서 기타를 다시 치니 아름다운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이제 됐다." 랠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조그맣게 접은 쪽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못쓰는 종이가 아닌 것 같은데…" 하며 기타를 손에서 놓고, 쪽지를 펴서는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편지다." 그것은 힘차게 갈겨 쓴 글씨로 꽉 차 있는 편지였다. 랠리는 말없이 읽어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면서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설마…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었다. "뭐라고 씌어 있지, 랠리?" 하고 하르가 물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라도?" 하이틀도 궁금해서 물었다. "내가 읽어 줄께." 하고 랠리는 흥분된 목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랠리, 내가 한 짓에 화내지 말기를 바란다. 아마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내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고 놀랄 것이다. 내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 자네는 이 편지를 모두에게 보이겠지. 나는 반란에 참가한다. 랠리, 이 일을 네가 선장과 사관들에게 똑똑하게 알려다오. 이번 우주 여행에 출발하기 전에 나는 계획을 세웠었다. 나는 알파 C 제 4행성의 혁명에 참가해서,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동료를 도우려고 남모르게 결심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랠리는 잠시 멈추었다. 하르는 진지한 얼굴빛이었고, 하이틀은 화가 나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랠리는 계속 읽기 시작했다. "나의 행동을 네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아마 너는 나를 지구에 대한 반역자라고 생각할 거야. 너의 친구 오헤어가 왜 이런 짓을 하는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나를 반역자라고 불러서 마음이 시원하거든 그렇게 불러다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뿐이다. 언젠가는 자네도 각자는 각자의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 자네의 눈도 넓어질 거야." 이 구절을 랠리는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뜻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뜻일까?" 하고 하르에게 물어 보았다. "끝까지 읽어보라고." 하르는 재촉했다. "오헤어 가문의 사람은 대대로 반역자였었다.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 자네가 아버지처럼 훌륭한 군인이 되려는 것처럼, 나도 아버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반역자가 되고 싶다. 식민지의 독립을 위하여 일할 뿐이다. 지구 같은 곳은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에 대하여 화를 내지 말아주게, 랠리. 우리는 제각기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그것을 나는 했을 뿐이네. 자네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 정찰군에 일생을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야. 열심히 근무하여 훌륭하게 되길 바란다, 랠리. 그리고 기타의 음을 맞추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지금도 너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바트 오헤어." 편지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랠리는 편지를 놓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헤어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나는 예상하고 있었지. 꽤 오래 전에 오헤어는 내게 말했었어." 하며 하르는 지금에 와서야 처음으로 오헤어와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이 말은 랠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편지를 내려다보며 랠리는 중얼거렸다. 오헤어가 갑자기 반란 편으로 끼게 될 것이, 브라운이 라인하르트 선장 앞에서 알파 C 제 4행성의 자유와 독립에 대하여 웅변을 토할 때보다도 더욱 랠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지구에 돌아가면 랠리는 아버지에게 오헤어를 소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엄청난 경우에, 어찌 아버지는 랠리와 오헤어와의 우정을 용서하실 것인가. 오헤어는 우주 정찰군의 사관이 아니고, 우주선의 잡일을 하는 사나이다. 기관을 손보는 크고 큰 황소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지금은 지구에 대하여 싸움을 걸어오는 반역자이다. 갑자기 랠리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헤어 바보 녀석!) 랠리의 온 몸은 분노와 슬픔으로 떨렸다. (오헤어는 아무 짓도 못할 거야!) (반란에 참가시킬 수는 없어!) (런던 식민지로 도망가도록 해서는 안돼!) 오헤어의 돌연한 행동은 랠리의 마음을 너무나도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두 동료는 말없이 서서 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랠리의 마음은 볼 수가 없었다. (아직 늦지 않을지도 모른다…) 랠리는 갑자기 문으로 향했다.     제 2의 배반자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하르가 물었다. "라인하르트 선장에게 보고하러 간다. 그러면 오헤어가 콥터(공중차)에 타기 전에 붙잡을 수 있을는지도 몰라." 라고 랠리가 대답하자마자, 하르는 재빨리 문과 랠리 사이를 막아섰다. "자네는 오헤어를 선장에게 밀고할 작정인가? 오헤어는 자네의 친구야!" 강한 체격의 하르가 문을 막고 있다. 약하고 작은 사나이인 하이틀은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있다. "비켜다오, 하르." 랠리는 부탁했다. 그러나 하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켜라." 하며 랠리는 하르를 밀치며 돌진했다. 그러나 간단하게 밀려 나왔다. 하르의 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너도 반역자의 한 패구나!" 화가 치밀 대로 치민 랠리는 판단력을 잃었다. 오직 문에서 나가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다. 다시 돌진했다. 하르를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문을 열려고 했다. 하르의 키는 165센티, 랠리의 키는 180센티, 물론 랠리가 훨씬 크다. 그러나 하르는 중력이 큰 목성에서 태어난 사나이다. 지구 태생인 랠리보다 체중도 무겁고 근육도 발달되어 있다. "이 녀석, 비키지 못하겠어!" 랠리는 있는 힘을 다해 밀고 당겼다. 그러나 하르의 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계속 밀치락달치락했다. 그러는 동안 하르는 문 쪽을 벗어나 방 모서리로 밀리고 말았다. (이때다!) 랠리는 결사적으로 하르의 무거운 몸을 밀어버리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하르의 동작은 재빨랐다. 뒤에서 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랠리의 힘으로는 상대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몸을 비틀며 주먹으로 하르의 가슴을 힘차게 쳤다. 그렇게 강한 하르도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랠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쏘아보았다. 거칠게 숨을 쉬면서 방안을 맴돌았다. 랠리는 하르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마치 철가면을 덮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르에게 유리하다. 하르는 랠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끌어 방안에서 못나가게 하면 되는 것이다. 랠리의 얼굴은 분노에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토론에서도 지고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체력으로도 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랠리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히고 마루바닥을 차며 어깨로 상대의 몸을 향해 돌진했다. 돌진한 순간 팔에 고통을 느꼈으나, 이 돌격은 성공한 모양이다. 하르는 균형을 잃고 뒤로 밀려났다. 그가 벽에 부딪친 틈을 타서 랠리는 문 쪽으로 달렸다. 문 옆에는 하이틀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다. "비켜라, 하이틀!" 랠리는 약하고 작은 연습생을 옆으로 밀치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하르는 돌격을 당한 충격에서 회복되어 양손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붙들리면 큰일이다. 목성 태생의 굳센 사나이에게 다시 붙들리면 큰일이다. 랠리는 복도로 뛰어나가려다가 무언가에 부딪쳤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다. "비켜…" 말을 끝맺기도 전에 랠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상대는 바로 라인하르트 선장이 아닌가. 랠리는 당황해 하며 피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한참동안 아무 말없이 랠리를 바라본 후, 방안을 휘돌아보았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르도 아무 말이 없다. 하이틀도 무언이다. 세 연습생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나서 선장 쪽을 보았다. "어찌 된 거야?" 선장이 독촉했다. 랠리는 할 수 없이 입을 열려고 했다. "실은…" 이 때, 밖에서 콥터의 이륙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재빨리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콥터는 식민지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성벽 위를 날아올라가, 밀림 상공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누가 조정하고 있는가?" 선장이 급히 물었다. "오헤어입니다. 오헤어는 혁명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런던 식민지로 간 것입니다!" 하고 랠리는 외쳤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랠리는 똑똑히 대답했다. "너희들은 왜 싸우고 있었나?" "별일 아닙니다. 그것보다 선장님, 오헤어가 이런 편지를 제게 써 놓고 갔습니다. 반란에 참가한다는 결심을 써 놓고 있습니다." "음, 오헤어는 언제 이것을 남겨놓았지?" "방금 입니다.“ "그것을 왜 바로 내게 보고하지 않았나, 스타크 연습생?" "그건 저…" 랠리 스타크는 망설였다. 하르 엘리슨에 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감싸주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잘 설명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하르의 지구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 사나이를 친구로서 어디까지나 감싸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 "실은… 엘리슨 연습생이 저를 말렸습니다. 그래서 즉시 선장님께 가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랠리는 친구를 판 기분이 들었다. 이 때, 문이 와락 열리더니 올코트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선장님! 오헤어 놈이 콥터를 훔쳐 도망갔습니다!" "알고 있다."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랠리를 쳐다보았다. "오헤어가 반란에 참가했다고 했지, 스타크 연습생?" "그렇습니다. 제가 오헤어의 편지를 보고 선장님께 보고하러 가겠다고 말하자, 하르가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는데 때마침 선장님께서 오신 겁니다." "어떻게 싸웠나?" "처음에는 토론을 했습니다만, 결국에는 서로 붙들고 싸우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르는 어디 있나?" "여기에…" 하며 랠리는 방안을 획 한 바퀴 돌아보았다. "선장님께서 왔을 때엔 틀림없이 여기에 있었는데…" "조금 전에 나갔습니다." 하이틀이 대답했다. "찾아와라. 이건 중대한 문제다." 하고 선장은 명령했다. 또 다시 폭음이 들려왔다. 랠리들은 일제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또 한 대의 콥터가 성벽 위를 날아오르더니, 밀림을 향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제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랠리는 말했다.     밀림에 불시착   "하르도 반역자였던가? 지구에 충성을 맹세한 우주 정찰군의 연습생이?" 라인하르트 선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랠리도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오헤어, 그 다음은 하르, 동료 중에서 두 반역자가 생겼다. "오헤어는 콥터를 훔쳐서 런던 식민지로 도주했다. 그 사실을 자네가 먼저 알고 나에게 보고하려다 하르 엘리슨 연습생과 다투었다. 그 엘리슨 연습생도 콥터를 훔쳐 런던 식민지로 도주했다. 그렇지?" 라인하르트 선장은 사건의 경위를 되풀이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랠리는 분명히 대답했다. "이렇게 되면 이쪽에서도 작전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겠군. 너희들 두 사람-랠리 연습생과 하이틀 연습생은 콥터로 도망친 두 사람의 뒤를 쫓아라. 런던 식민지로 가는 거다. 그리고 그놈들을 만나게 되거든 자네들도 혁명에 가담하겠다고 말하라. 그리하여 놈들의 반란 계획을 조사하라. 그놈들이 무기를 가지고 폭동을 일으킬 기세면 즉시 이쪽으로 돌아와라. 그러면 우리는 우주 정찰군의 군용 우주선을 불러서 반란을 진압시키겠다. 그리고 도주한 두 사람은 반역죄로 체포한다. 올코트, 두 연습생에게 곧 콥터를 준비해 주게." 라는 라인하르트 선장의 목소리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올코트는 랠리와 하이틀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대로에 콥터가 한 대 서 있었다. (2, 30년 전의 구식이다.) 하고 랠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알파 C 제 4행성의 공장에서는 제트콥터를 만들 수가 없다. 전부 지구에서 가지고 와서 사용하고 있다. 콥터뿐만 아니라 식민지인의 생활은  아직 지구를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많다. 랠리와 하이틀은 콥터를 탔다. 구식이지만 기계 설비는 표준의 것이었다. 랠리는 조종석에 앉고, 그 옆에 하이틀이 앉았다. 랠리는 기기를 점검하고, 엔진을 걸었다. 콥터는 부웅 떠올랐다. 런던 식민지는 이 곳에서 서쪽으로 1600km 떨어져 있다. 4개 식민지는 기하학적 형태로 위치하고 있었다. 콥터는 높은 성벽을 넘고, 빈터 위를 지나서 두 식민지 사이에 펼쳐져 있는 밀림의 상공으로 나왔다. 좌석을 동그랗게 덮은 투명창 너머로 내다보니, 수십 m 밑에 나무의 꼭대기에 익수룡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래 지상에는 밀림의 큰 야수들이 먹이를 찾아 헤매며 서로 싸우는 것이 보였다. 랠리는 기분이 나빠서 콥터의 고도를 20m 더 올렸다. "그쪽에 가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고 하이틀이 말을 꺼냈다. "나도 모르겠어. 아무튼 반란의 정보를 알고 돌아오는 거지. 일이 잘 되면 하르와 오헤어를 데리고 올는지도 몰라." "그렇게 될까?" 하이틀은 코방귀를 뀌었다. 콥터는 밀림 위를 계속 날아갔다. 그러는 동안에 랠리는 연료 계기의 램프가 꺼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연료가 거의 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출발 할 때 너무 서둘러서 연료 계기의 점검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침반은 콥터가 서쪽으로 똑바로 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랠리는 콥터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만약 연료가 떨어지면, 콥터를 밀림의 밖에 착륙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런던 식민지 가까이 갔으면 좋겠는데…" 하며 랠리는 식민지의 건물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하이틀은 입술을 깨물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랠리는 굳어진 얼굴로 콥터의 조종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다. 연료 계기는 드디어 0을 가리켰다. 그러나 연료는 아직 탱크 속에 얼마 정도는 남아 있을 것이다. 랠리는 눈을 부릅뜨고 밀림의 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저 걸 봐." 하고 외치며 팔꿈치로 하이틀을 쳤다. "성벽이다!" 하이틀도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창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앞쪽의 먼 밀림 너머에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 전방에 식민지의 성벽이 우뚝 서 있었다. "시카고 식민지의 성벽 같다." 순간 랠리는 방향을 잘못 잡아 시카고 식민지로 되돌아 온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성벽은 시카고 식민지의 것보다 좌우로 길게 퍼져 있다. 나침반도 여전히 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틀림없이 런던 식민지다." 랠리는 안심했다. 그 순간 "연료가 떨어졌다!" 하고 하이틀이 처음으로 계기를 보고는 외쳤다. "알고 있네." 랠리는 일부러 하이틀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둘이서 걱정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콥터의 연료탱크는 계기가 0을 가리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그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지." 드디어 연료도 이제 바닥이 나고 엔진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런던 식민지까지는 15~6km 정도 남아있다. 도저히 그곳까지 갈 수는 없다. 둘은 1분 정도 아무 말 없이 날아갔다. 마침내 엔진이 정지되었다. "여기서 착륙해야겠어. 그리고 걸어야겠다." 랠리는 콥터의 고도를 낮추고 활공시켰다. 그러면서 착륙할 장소를 찾았다. 훌륭한 조종이었다. 콥터는 용하게 거대한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 소리 없이 착륙했다. 둘은 땅에 내렸다. 랠리는 우선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고서, 하이틀을 재촉하여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런던 식민지의 성벽까지는 1760m, 그 중의 1600m가 밀림이야." 랠리는 앞에서 길을 찾았다. 밀림은 열대성의 거대한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습기 찬 강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지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서 수십 m의 상공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러한 식물의 험한 생명력에 랠리는 새삼 놀랄 지경이었다.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밀림 속을 조심하면서 둘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걸었다. 밀림은 살아 있다. 도처에서 수없이 울어대는 곤충의 소리, 익수룡이 날개 치는 소리, 개구리 같은 작은 동물이 시내에 뛰어드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공룡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 공룡의 우는 소리 보다도 가까이 있는 곤충이 더 곤란했다. 크고 작은 갖가지 곤충이 끊임없이 두 사람 얼굴에 달려들어 깨물고 할퀴고, 귀 안에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때로는 칠면조만큼이나 커다란 잠자리가 힘찬 날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간다. 랠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걸었다. 하이틀은 숨찬 소리를 내어가며 따라왔다. 15분 정도 걸었을 때, "이제 5분쯤 지나던 밀림에서 벗어날 수 있어. 초원으로 나갈 수 있다고." 라고 말하고 랠리가 뒤돌아보니, 하이틀은 넘어져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있었다. "1분간만 쉬었다 가자, 랠리." 체력이 약한 하이틀은 피로를 이기지 못해서 이마의 땀을 닦고 있다. "가자, 하이틀. 조금만 힘을 더 내. 그러면 식민지의 성벽 안에서 푹 쉴 수가 있어." 어깨에 내려앉는 곤충을 쫓으면서 랠리는 말했다. "자아, 조금만 힘을 더 내서 가자." - 그러나 하이틀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계속 땀을 닦고 있었다. "너무 무리야, 랠리. 나는 자네보다 약해." "그러나 이런 곳에서 주저하면 위험해, 하이틀. 가자, 자네와 발맞추며 천천히 걸을 테니." "알았어, 랠리." 하면서 하이틀은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공룡이라도 나오면 좋겠다. 그놈을 잡아서 등에 올라타고 가면 되겠는데." 그 때, 숲 속에서 한 동물이 뛰어나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길이는 1m 정도, 두 발로 캥거루처럼 꼬리로 균형을 잡고 있었다. "공룡의 새끼가 아닐까? 나를 태우고 가기에는 무리군." 이렇게 말하면서 하이틀은 겨우 일어섰다. 둘은 천천히 걸어 2, 3분쯤 나아갔다. 굉장히 큰 나비가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름다운 여러 가지 빛깔로 된 날개는 접시만큼이나 크다. 캥거루와 비슷한 순한 작은 공룡이 또 두 마리, 조금 큰 것 한 마리가 맹렬한 속도로 두 사람 앞을 달려갔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작은 동물 두서너 마리가 입에서 침방울을 튀기면서 랠리의 뒤쪽으로 달려갔다. 머리 위에는 익수룡이 높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밀림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야." 하며 랠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이틀도 발걸음을 멈추고, 겁에 질린 얼굴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왼쪽에서 수목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까?" 랠리는 놀라면서 소리난 쪽을 돌아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수목 사이에 거대한 괴물이 보였다. 그것은 커다란 나무를 좌우로 쓰러뜨려 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꼬리다!" 이 행성의 밀림에 살고 있는 가장 거대한 공룡이다. 브라운은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런 밀림 속에서 이처럼 거대한 파충류를 만나면 태연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우리를 잡아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녀석이 지나가는 통로 길에 있다가는 밟혀 죽겠다." 랠리는 거대한 괴물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며, 그가 오고 있는 수목 뒤에 조그만 시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놈은 물을 마시려 가는 길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안심이 되었다. 랠리의 발 근처에서 녹색의 작은 동물이 나무줄기를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무 꼭대기로 달아나려고 하는구나." 다람쥐 같은 동물이 놀라 달아나는 것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랠리는 갑자기 공포를 느꼈다. 물을 마시고 돌아가는 공룡이 온순하게만 가리라고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옆에서 쓰러지는 나무가 랠리들의 머리 위에 넘어질지도 모른다. 밀림 속에 있을 동안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다. 하이틀은 아직껏 앉아서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일어나, 하이틀. 가자, 저쪽에 환한 것이 보이지, 그 곳이 초원이야." 하고 하이틀을 손으로 끌어당기면서 랠리는 걷기 시작했다. 이제 2백 m만 나아가면 밀림을 벗어날 수 있다고 느꼈다. "조금밖에 안 남았어, 하이틀." "안 되겠어, 랠리, 이제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가 없어." 또다시 하이틀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랠리가 아무리 손으로 당겨도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곤충과 열기로 말미암아 하이틀은 강행군에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랠리는 조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밀림의 소란은 더 심해져 갔다. 공룡의 외치는 소리가 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그 공룡이 어느 쪽에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 상당히 먼 거리 같기도 하고, 바로 옆인 것 같기도 했다. 작은 공룡 두 마리가 랠리 뒤쪽을 스쳐 지나갔다. 작은 동물들이 전부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랠리는 이상했다. 뭔가 무서운 것이 작은 동물들을 쫓고 있는 것일까? "출발하자, 하이틀 일어서…" 하고 랠리가 말할 때였다. 까르륵 ! 갑자기 머리 위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밀림을 진동시켰다. 다음엔 찌지직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 오고, 대지는 지진처럼 흔들렸다. 랠리는 머리 위를 쳐다보고 숨을 삼켰다. 공룡의 굵은 목이 나무 끝에서 하이틀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톱니 같은 흰 이빨을 드러낸 아가리까지는 지상에서 30m 쯤 되어 보였다. "하이틀, 빨리 나를 따라와!" 라고 외치며, 랠리는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지하의 감방   공룡의 울부짖는 소리는 끊임없이 밀림 속에 메아리쳤다. 랠리는 정신없이 뛰었다. 160m쯤 가면 밀림에서 초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초원을 100m 쯤 가면 런던 식민지의 성벽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나 가까워서 꿈이 아닌가 느껴졌다. "이제 살았다!" 한숨을 돌리면서 랠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2, 3m 뒤떨어져서 하이틀이 숨을 헐떡이며 창백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 뒤에는 공룡이 작은 산만큼이나 거대한 몸을 나타냈다. 그 머리는 나무 꼭대기 만한 높이로 랠리들을 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뭔가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이틀은 나무뿌리를 차고 그 자리에 넘어졌다. "정신 차려!" 하고 급히 뒤돌아가서 하이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가… 나는 상관 말고… 달려라!" 하이틀은 땅바닥에 딱 들러붙은 채 허덕거렸다. 그러한 광경을 공룡의 머리는 나무 꼭대기에서 잠자코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공중에서 내려온 담쟁이덩굴이 랠리의 얼굴에 부딪혔다. "따라와!" 하고는 랠리는 덩굴을 젖히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앞이 훤해졌다. 풀밭으로 나온 것이다. 100m 저쪽에 런던 식민지의 성벽이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허덕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이틀이었다. 이제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다던 하이틀이 역시 공룡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자기 힘으로 밀림을 빠져 나온 것이었다. 대지가 지진처럼 흔들렸다. 밀림에서 공룡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랠리는 겨우 성벽 문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하이틀을 뒤돌아보았다. 하이틀은 드디어 기운이 다해 땅에 넘어졌다. 그것을 공룡이 이상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랠리는 망설였다. 하이틀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우고 문까지 데리고 오고 싶다. 그러나 무리한 일이다. 하이틀이 있는 곳까지는 30m 이상의 거리이다. 설령 간다고 해도 데리고 돌아오기 전에, 두 사람 모두 공룡의 밥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공룡은 하이틀의 몸 위에 거대한 몸통을 구부리  고, 캥거루 같은 작은 앞발을 하이틀의 몸에 갖다댔다. 땅에 살짝 엎드리고 있는 살아 있는 것을 자세히 보려고 큰 눈을 가까이 대었다. 하이틀은 살아 있다. 기어서라도 도망치고 싶으리라. 그러나 힘이 빠진데다가 너무 무서워서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문득 랠리의 머릿속에 한 계획이 떠올랐다. 사람의 머리 만한 돌을 주워서 문을 나왔다. 대담하게 공룡에게서 3, 4m 가까운 곳까지 다가갔다. 거기서 공룡의 추한 머리를 향해서 힘껏 돌을 던졌다. 공룡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또 한 개의 돌을 찾아서 던졌다. 뇌가 작고 지혜가 모자라는 큰 야수는 랠리에게 마음을 빼앗겨 하이틀은 잊어버렸다. 기회는 이 때다. 하이틀은 랠리의 작전을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기어서 문으로 향했다. 공룡은 좌우로 머리를 돌려가며, 랠리와 하이틀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야아, 이쪽이다!" 랠리는 이쪽저쪽으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돌을 주워서는 계속 던졌다. 공룡의 머리를 점점 혼란시켰다. 그 동안에 하이틀은 문까지 올 수가 있었다. 그러자 랠리도 문으로 달려 들어왔다. 랠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공룡은 다시 하이틀을 생각해 내었는지 큰 몸통을 흔들며 머리를 움직여 가면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둘은 겨우 안전한 식민지의 안으로 도망쳐 올 수 있었다. 공룡은 두 개의 먹이가 성벽 안으로 달아난 것을 알고, 긴 꼬리로 성벽을 치면서 작은 앞발로 문을 끌어 당겼다. 그러나 공룡을 대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성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공룡이 자기 몸통으로 치면 칠수록 아프기만 할뿐이다. 마침내 공룡은 포기하였는지, 성벽을 떠나 천천히 밀림 속으로 사라져 갔다. 랠리와 하이틀은 문 안쪽에서 공룡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미 녹색의 제복을 입은 사나이가 무기를 손에 들고 랠리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하르도 껴 있었다. "왜 왔나?" 하며 하르가 물었다. 랠리는 차갑게 동료를 쳐다보았으나, 반역자 행세를 할 임무를 생각하고 일부러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들도…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서 왔다. 그런데… 밀림 속에서 너희들의 큰 파수병의… 심한 환영을 받았다네." 아직도 랠리의 호흡은 고르지 못했다. "알고 있다. 공룡이 성벽 가까이까지 온 것을 우리도 보았다." 키가 큰 한 식민지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는 하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르 엘리슨? 자네는 이 두 사람을 알고 있겠지?" "나는 의심한다. 특히 이 사나이를." 하고 하르는 랠리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이 사나이는 지금까지 지구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너는 우리 혁명에 참가하고 싶은가?" 하며 키 큰 사나이가 물었다. "그렇다." 하고 랠리가 태연스럽게 대답하자, 키가 작은 하르 정도는 아니지만 식민지 사람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랠리를 쏘아보았다. "이 사나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스파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한 사람이 외쳤다. 키가 큰 사나이는 지도자인 모양이었다. 모두의 의견을 듣고 나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을 잠시 동안 가두어 두지. 그러면 우리편인가 적인가 알 수 있겠지." 혁명군 사나이들은 랠리들을 이끌고 식민지의 시가지로 들어갔다. 시가지의 모습은 시카고 식민지와 꼭 닮았는데, 다른 것은 도로에 슬로건을 쓴 커다란 깃발이 죽 늘어서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이다.   알파 C 에 자유를! 선거권이 없으면 세금도 못 내겠다! 우리는 독립을 요구한다! 지구의 쇠사슬을 끊어라!   그밖에도 푸르고 붉은 깃발이 높은 나무에 걸려 있었다. 사나이들은 랠리와 하이틀을 구식차에 밀어 넣고, 식민지의 반대쪽에 있는 큰 건물로 향했다. 키 큰 사나이는, "나는 런던 식민지에 있는 지방 정부의 대표다." 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일행은 건물의 계단을 올라갔다. "이 곳이 알파 C 제 4행성 자유 세계의 중심이다." 하고 커터 대표는 말했다. 건물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구를 갖출 수 없다. 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쓸 만한 가구를 모조리 시카고 식민지로 가져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우리 손으로 응접용 가구를 만들어야 한다." 하며 커터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손가락질했다. 랠리와 하이틀은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다음 층엔 너희들이 있을 방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커터는 계속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그 곳은 어둡고 습기 찬 지하였다. "이 복도의 문을 좀 열어 주게." 커터가 앞서 걷고, 그 뒤를 랠리와 하이틀이 따르고 또 혁명군의 병사 두 사람이 뒤를 딱 붙어서 따라왔다. (처음부터 붙잡혀서 감방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다.) 랠리는 런던 식민지에 온 것을 후회했다. "너희들에게 특별히 따로따로 방을 준비했다." 라고 말하고, 커터는 한 혁명군 병사를 돌아다보며 열쇠를 넘겨주었다. "한 사람은 여기, 또 한 사람은 A블록에 집어넣어라." "죄도 없는데 감금시키는가?" 하고 랠리는 항의했다. "자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서다. 자네가 하르 엘리슨처럼 진심으로 우리에게 가담해 주면 고맙겠다. 그러나 우리를 속이려고 온 것이라면, 한 번 더 위험한 밀림을 헤매어야 될 것이다." 혁명군의 병사는 하이틀을 데리고 구부러진 복도로 사라졌다. 감방의 문이 열리고 병사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이틀이 뭐라고 항의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철컥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리 따라와라. 네가 있을 방으로 간다." 커터는 랠리를 데리고 다른 복도로 들어갔다. 자기 자신이 의심할 정도로 랠리는 냉정했다. 자기도 커터의 입장에 서면 역시 이렇게 하리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공룡에게 쫓기다가 가까스로 생명을 구해서인지, 감옥쯤은 그렇게 무섭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여기다." 감방의 문을 열면서 커터는 말했다. 랠리는 태연하게 걸어 들어가서 벽 쪽에 놓여 있는 단단한 침대로 가서 걸터앉았다. "이런 잠자리는 마음에 안 들겠지만, 일시적이니 참아 주게." 하고 커터가 말했다. "상쾌하고 좋은 밤일세, 커터." 랠리는 침대에 드러누우면서 비꼬았다. "도둑이나 들지 않게 문단속을 잘 하고 가게." "알았습니다, 손님." 하고 대답하며 커터는 히죽히죽 웃어가며 감방 문을 닫고 열쇠를 채운 후 곧 사라졌다. 캄캄한 방에 혼자 남은 랠리는 생각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몇 주일 전에 우주 정찰 사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나이가, 지금은 혁명군에게 붙잡혀 지하 감방에 갇혀 있다. 랠리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숨 푹 자고 눈을 뜨면, 지구의 집에 돌아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랠리는 하르를 생각했다. 화성의 우주 정찰 사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가, 우주 정찰군의 회색 제복을 벗어 던지고 혁명군의 녹색 제복을 입고 있다니. 오헤어도 그렇다. 식민지 인은 모두 키가 크지만, 오헤어처럼 3m나 되는 사나이는 드물다. 그 몸에 맞는 제복이 혁명군에 있었던가. 랠리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문 쪽으로 달려갔다. 철창 사이로 복도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이다.     혁명과 우정   어둠 때문에 랠리에게는 희미한 그림자가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발자국 소리는 감방 앞에 와서 멎었다. 금속 문을 두들기더니 누군가가 속삭였다. "랠리!" "나는 아무 데도 달아나지 않는다." 랠리는 불만에 차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나야, 하르다." 하고 문 밖에서 성냥을 켜는 소리가 났다. 불빛에 하르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 반역자." 랠리는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넨 죄수야." 하르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성냥불이 꺼지자, 두 사람의 모습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커터가 너와 얘기하라고 나를 보냈다." "무슨 얘기를?" 랠리는 독촉했다. "커터는 너와 하이틀을 스파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너희들을 계속 가두어둘 생각이다." "나는 진심으로 혁명에 가담하고 싶은 거다. 왜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 "무리이니까." 하고 하르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커터들은 나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어. 너희들은 아직 라인하르트 선장의 명령에 따라 일하고 있다고…" 랠리는 그만 대답이 막혔다. 어둠 속으로 하르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 이제 와서는 하르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자네는 아직 라인하르트 선장의 편이지?“ 라는 하르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래. 선장은 나와 하이틀을 스파이로 여기에 보낸 거야. 솔직하게 말한다.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속지 않을 것이니." "물론이지. 우리는 속지 않아." 하르가 말하는 '우리'라는 것은 혁명 측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랠리는 하르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고 없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르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얘기해 보게, 랠리. 자네는 왜 라인하르트 선장 같은 그런 윗사람에게 충성을 지키고 있는가? 분명하게 대답해 보게. 자네는 곰곰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지구 쪽이 정당하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가?" "모르겠어." "자네는 지구의 어디에서 태어났나?" "애팔래치아야. 서반구 북아메리카 애팔래치아의 뉴욕시야." "나도 알고 있어. 지리에서 배웠어. 합병 전에는 아메리카 합중국이라고 불렸던 곳이지?" "그래." 하고 랠리는 인정한다. 이제 어둠에 다소 익숙해져서 하르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았다. "랠리, 자네가 아메리카 태생이라면 이 반란의 의의를 모를 리 없잖아?" 라는 하르의 음성은 높았다. "자네는 자기 나라가 애초에 어떻게 출발했는가를 모르는가? 지금 이 알파 C 제 4행성에서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독립했다. 너는 아메리카 혁명의 표어를 알고 있는가?" 랠리는 갸웃거리며 생각해 보았다. 역사를 배운 것은 상당해 오래 전의 일이다. "아마, 선거권이 없으면… 없으면…" 랠리가 말이 막히자, 하르가 대신했다. "선거권이 없으면 세금을 못 내겠다." "그래, 생각이 난다." "옳은 말이야. 그 표어를 자네는 오늘 보지 못했는가? 잘 생각해 보게." 하르는 비꼬듯 말했다. "런던 식민지에 서 있는 깃발에 그 말이 씌어 있더군." "그래. 우리는 독립을 얻기 위하여 싸우던 아메리카의 입장과 같다. 그런데 자네는 식민지의 독립을 막으려는 대영 제국 패거리의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겠지. 어느 쪽이 옳은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자네는 아직 라인하르트 선장에게 충성을 바칠 작정인가?" "뭐가 뭔지 모르겠군." 랠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음이 혼란하여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하르의 말에는 반박할 틈이 없었다. 하르가 옳고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할 도리밖에 없는 것 같다. "랠리, 자네는 자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대대로 충성을 바쳤다는 이유 때문에 지구에 매달려 있을 뿐이야. 남자는 18, 19세가 되면, 스스로 사리를 판단하고 태도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이다.“ "하르… 하르… 어떻게 하면 나는 혁명을 도와 줄 수 있나? 내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자네가 진심으로 우리 혁명에 참가할 마음이 있는가? 만약 그랬을 때, 너의 아버지인 우주 정찰군 스타크 사령관이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지구를 배반할 가치가 있는가 라고 말씀하시겠지." 하고 랠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나도 진심을 털어놓겠다. 커터 대표는 이미 혁명 계획을 착착 진행 중이다. 여기에 네가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무슨 일?" 랠리는 하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자네를 못 본 척하고 시카고 식민지로 되돌아가도록 해 준다. 그러면 너는 카르텐호의 우주 통신 장치를 파괴해 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라인하르트 선장이 우리가 무력으로 일어설 때까지 우주 정찰군의 응원 부대를 요청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대한 문제다." 이 말을 듣고 랠리는 온 몸이 떨렸다. 우주선의 통신 장치를 파괴하다니! 랠리는 자기가 얼마나 중대한 입장에 서 있는가를 느꼈다. 비록 혁명은 찬성한다 할지라도 우주선을 손상시키는 파괴 행동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통신 장치를 파괴한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 "그럼, 우주 정찰군에 공격당할 염려 없이 혁명을 진행할 수 있어. 우리는 라인하르트 선장을 인질로 잡아둘 거야. 다른 지구인도, 지구인을 동정하는 눈치인 식민지 사람들도 한 사람 남기지 않고 체포하지. 그리고 방위 태세를 완벽하게 한다. 우리 식민지는 밀림 한가운데 있고, 공룡을 방비하기 위한 높은 성벽으로 요새화 되어 있어. 그렇게 간단하게 함락되지 않아. 또 한편에서는, 지구에 있는 제 4행성인이 우리가 지구로부터의 수출로 얻은 이익으로 군용 우주선을 사서는 이리로 가지고 오지. 그렇게 되면 이 행성의 방위도 완벽해져. 우주 정찰군의 공격 우주선이 쳐들어와도 지지 않아. 지구에서는 아마 알파 C 까지 공격 우주선을 보내는 막대한 비용과, 또 여기서 장시간 걸리는 게릴라전에 휘말려들 것을 생각하고, 원정을 포기하고 우리의 요구를 인정하여 줄지도 몰라. 그러나 아무튼 혁명이 성공하고 못하냐는, 우리의 준비가 완전히 정비될 때까지 라인하르트 선장의 통신 장치를 침묵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어." "알았어. 내가 혁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이군." 하며 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점이야. 커터는 나에게 자네가 우주선의 통신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기뻐했어. 통신 장치를 파괴하는 데 가장 알맞은 사람이라고 말야. 어떤가, 랠리?" "3분간만 생각할 여유를 주게." 하고 랠리는 감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괴롭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혁명 측이 정당한 것도 같고 지구가 못된 것도 같다. 양쪽이 모두 완전히 정당하지 못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구 측 방법이 더 공정하지 못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랠리는 지구가 나쁘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하르에게 끈기 있게 설복 당하여 그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설령 혁명이 정당하다고 치더라도, 왜 자기가 말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혁명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소원대로 우주 정찰군의 사관이 되어, 장차 언젠가는 알파 C 제 4행성인을 구조해 줄 때가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주 정찰 사관을 꿈꾸며 열심히 노력해 온 보람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평생 원시적인 행성에 살며 지구와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혁명은 정당하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우주 정찰군의 견습 우주선 통신 장치까지 파괴하는 것은? 만약 혁명이 실패한다면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지구로 송환되리라. 그러면 군법 회의에 걸려 아버지의 명예까지 더럽히리라. 우주 정찰군의 사령관인 아버지는 아들이 왜 지구를 배반하고 혁명에 참가했는지 고통스러워하리라. 그리고 살아 계실 동안 반역자가 된 아들 때문에 괴로워하리라. "안되겠다." 하고 랠리는 말했다. "그게 대답인가? 커터는 너의 대답을 가슴 죄며 기다리고 있어." "안되겠어. 나로서는 할 수가 없어." 하고 랠리는 되풀이했다. 하르는 지난날의 동료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최후에는 그렇게 말하리라고 생각했었어. 자네는 혁명을 이해하지 못해. 혁명을 이해는 한다 치더라도 혁명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무리야." "나는 우주 정찰군을 포기할 수 없어, 하르. 나의 아버지와 지구의 일들이 머릿속에 맴돌아 어쩔 수가 없어. 자네들의 혁명은 정당하겠지만, 그러나…" 랠리는 여기서 말을 중단하고 말았다. "좋아, 자네가 거절했다고 커터에게 보고하지." 하고 하르는 냉정한 태도로 말하고는 등을 돌리고 문에서 멀어져 갔다. 랠리는 그를 불렀다. "하르!" "왜 그래?" 하르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나와 하이틀은 언제까지 감금시킬 작정이지?" "커터는 자네를 즉시 내보내 줄 작정이었어. 나는 열쇠를 가지고 왔었고.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재판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있지 않으면 안돼. 나는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어. 그러나 실패야. 자네는 할 수 없는 놈이군." "재판이라니?" "스파이 행위에 대한 재판이야. 적의 땅에서 잡힌 스파이는 알고 있겠지?" ”나는 우주 정찰군의 제복을 입고 있어. 제복을 입고 있으면 스파이로 취급할 수 없지 않은가?" 화를 내면서 항의하자, 하르는 웃었다. "그만두게, 랠리. 이 혁명에 지구의 오래 된 국제법 같은 것을 적용시키려는 것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아. 우리의 생명은 오로지 이 혁명에 걸려 있어. 자네는 그것을 방해하려는 스파이야." "형은 어느 정도인가?" "만약 유죄로 결정되면, 지구와 같이 사형이야." "사형?" 랠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두운 주위가 한층 더 어두워진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었어야 했어.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옛날의 친구였다는 점 때문에 자네가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었다. 그러나 자네는 거절했지.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나를 도망시켜 주게. 자네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무리한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카르텐호에서는 친구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적이야. 이 이상 자네를 살릴 방법은 없어. 달아나려면 자신의 힘으로 도망쳐." 하르는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랠리는 꼼짝도 않고 바라보았다. 별로 하르를 원망할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르에게는 혁명이 전부가 아닌가. 혁명 앞에는 지난날의 우정 같은 것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탈 옥   랠리는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다. 지금의 랠리는 순교자인지도 모른다. 지구를 배반하면 목숨을 건질 기회도 있었는데, 그것을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고귀한 행위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지구에 충성을 바쳐도, 지구는 나의 생명을 구해 주지 못한다. 모든 것이 꿈이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랠리는 또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알파 C 제 4행성의 지하 감방에 앉아서, 사형 판결을 받기 위한 재판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랠리는 손을 뻗쳐 벽에다 갖다대어 보았다. 축축하고 싸늘한 벽이다. 결코 꿈은 아니었다. 랠리는 순간 또다시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들었다. "하르인가?" 대답은 없었다.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쇠문이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아무 말 없이 방안으로 들어 왔다. (재판을 기다리지 않고 나를 죽이려 온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랠리는 긴장된 얼굴로 상대를 살폈다. 그림자는 낮으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리내지 말고 조용해, 랠리. 난 오헤어야." 랠리는 깜짝 놀랐다. 반가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바트!" "그래. 이런 곳에서 자네를 만날 줄은 몰랐군. 하르는 자네를 분별없는 놈이라고 말했어. 그러나 자네는 꾀를 부릴 만큼 영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럼, 하르는 모든 것을 얘기했나?" "그래. 그러나 나는 자네를 설득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야. 만약 자네가 여전히 지구에 충성을 바치겠다면 그것도 좋아.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비록 정치에 대한 사상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스파이로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어, 바트." "알고 있어. 나도 자네만큼이나 괴롭다." "어떻게 해서 이 감방에 들어왔지, 바트?" "나는 이 감방의 간수야. 자네가 있는 방의 열쇠도 가지고 있어." "그랬던가…" 생각하고 나서 랠리는 말했다. "오헤어!" "왜, 랠리?" "나는 카르텐호로 돌아가고 싶어. 자네는 어떻게 할 수 있지 않나?" 그러자 오헤어는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어, 랠리. 나는 혁명 측의 사람이야. 내 편지를 읽어. 적이면서도 친구이고, 친구이면서도 적이야. 만약 내가 너를 카르텐호로 돌려보내 준다면, 나의 입장은 어떻게 되지? 랠리, 안돼." "자네도 영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바트, 자넨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랠리는 얼굴이 따가웠다. 정당하지 못한 행위는 하기 싫었지만, '살아나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아버지에게 배웠다. "바트, 우주선 밖에서 고장 수리를 할 때의 일을 벌써 잊어버렸나!" 라고 말하는 랠리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해서 붉어졌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잊고 있다고 생각하나, 랠리?" "바트, 스파이는 사형이야." 오헤어는 잠자코 랠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제는 적으로 갈라져 있다. 그러나 랠리에게 생명을 구조 받은 빚은 그대로 남아 있다. "알았다, 랠리. 너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구나. 인간의 사회에는 정치 사상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오헤어는 문을 열었다. "가게, 나가게." 고통스러운 오헤어의 목소리.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가게. 하이틀은 아직 여기에 있지만, 그 사람까지 내줄 수는 없어. 이 건물을 잘 빠져나가 뒤로 돌아가면 콥터가 있어. 시카고 식민지의 방향은 알고 있겠지, 동쪽으로 1600km야. 자, 나가게. 잘 가라, 랠리." 순간 랠리는 주저하였으나.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고마워, 오헤어. 그럼, 잘 있게." 이렇게 말하고 문을 나왔다. 살금살금 대여섯 걸음을 간 후 뒤돌아보았다. 오헤어는 텅 빈 감방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 나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이 곳으로 올 때 기억해 두었기 때문에 구불구불한 복도까지는 쉽게 빠져 나왔다. 계단을 올라 1층 홀로 나올 수 있었다. 홀의 문은 열려 있었다. 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커터의 모습이 보였다. 책상에서 보고서 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단숨에 달려서 빠져나가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하면 오히려 눈에 띄기 쉽다. 차라리 천천히 걷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커터는 동료가 건물 안에서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랠리는 애써 태연하게 천천히 홀로 들어섰다. 똑바로 앞을 향해 될 수 있는 대로 발소리를 죽여 가며 걸었다. l보, 2보, …, 5보, 6보… 갑자기 커터가 얼굴을 들었다. (아차!) 순간 랠리는 심장의 고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커터는 곧 보고서에 눈을 돌렸다. 설마 지하 감방에 갇혀 있는 포로가 홀을 빠져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랠리는 숨을 죽였다. 단숨에 달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면서 가까스로 출입문에 다다랐다. 뒤돌아보니 커터는 여전히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지나갔는지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밖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되자, 랠리는 이제 살 것 같았다. 알파 C가 바로 머리 위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다. 저 아래쪽에는 푸르스름한 베타 C가 희미하게 떠 있다. 제 3의 태양 프록시마 C는 보이지 않았다. 그 붉고 작은 태양은 수평선 밑에 지고 있겠지. (콥터를 찾아야지.) 랠리는 오헤어가 가르쳐 준 대로 빠른 걸음으로 행정 건물의 뒤쪽으로 걸었다. 거기에 콥터는 보이지 않았다. "이거 야단났다!" 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큰일이다. 콥터가 없으면 지하 감방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시카고 식민지까지는 1600km의 밀림이 계속되어 있다. 그 곳을 무기 하나 없이 걸어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에 올 때만 해도 밀림을 조금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죽을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머리 위에서 노리는 거대한 공룡의 머리와 무서운 익수종의 모습을 기억하자, 랠리는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하든지 콥터가 있어야 한다. 랠리는 머리를 들고 100m 가량 되는 곳에 성벽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랠리는 눈이 번쩍 뜨였다. 성벽 위에 콥터가 한 대 앉아 있지 않은가. 랠리는 성벽을 향해서 급히 걸었다. 장화의 밑바닥이 콘크리트의 길바닥을 걸을 때마다 덜컥덜컥 소리가 났다. 곧 성벽에 이르렀다. 돌계단이 구불구불 성벽 위에까지 연이어 있었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랠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사방을 살폈다. 행정 건물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랠리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발의 무게와 싸우면서 콥터가 있는 꼭대기를 향해서 필사적으로 올라갔다. 아아, 성벽 위에는 뜻밖에도 사람이 있었다. 콥터의 프로펠러를 닦고 있다. 그 사람은 존 브라운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놀라며 한참 동안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는가?" 하고 브라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묻고 싶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 나는 자네의 콥터를 빌리고 싶다." "콥터를?" 브라운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랠리도 같이 내려다보았다. 세 사람의 사나이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시간이 없다. "내 자네의 도주를 도와주리라 생각하나? 변명해도 소용없어. 저 세 사람은 너를 잡으려고 오는 사람이야." 브라운은 랠리의 입장을 환히 알고 있었다. "나는 콥터가 필요할 뿐이야." 랠리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이것을 빌려줄 수는 없어.“ 브라운은 뒤따라오는 사람이 성벽 위에 올 때까지 랠리를 붙잡아 둘 작정이다. (전쟁에 수단 방법을 가릴 수 없다.) 랠리는 이렇게 마음먹고, 번개같이 브라운의 턱을 갈겼다. 상대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날쌔게 콥터로 뛰어 올랐다. 콥터는 구식이라서 엔진을 발동시키는 방법을 몰랐다. 랠리는 조종반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조금 시간이 걸렸으나, 가까스로 출발의 버튼을 눌릴 수가 있었다. 콥터는 큰 소리를 내면서 3m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 사나이가 성벽 위를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브라운은 겨우 일어서서 콥터를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랠리는 다른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콥터는 수평 비행으로 바꿔지며, 굉장한 속도로 밀림 위로 나왔다. 다시 뒤돌아보니, 성벽 위에서는 네 사나이가 손을 흔들며 마구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이 콥터로 추적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 때까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날아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랠리는 생각했다. 5분쯤 지났을까, 두 대의 콥터가 뒤쪽에서 나타났다. "좋아, 올 테면 와라." 랠리는 자신이 있었다. 브라운에게 빼앗은 콥터는 구식이지만 굉장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일단 가까이 따라온 콥터는 차츰 같게 보였다. 드디어는 포기해 버렸는지 두 대 모두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젠 안심이다." 랠리는 시카고 식민지를 찾아내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 동쪽으로 1600km 가면 된다고 오헤어는 말했다. 그런데 어디가 동쪽인가? 랠리는 나침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런던 식민지의 성벽을 떠나올 때 방향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대로 곧장 계속 날아왔으니까, 이 방향이 동쪽이 아닐까? 주저도 되지만 하는 수 없다. 진로를 변경시키지 않고 그대로 날아야겠다고 랠리는 결심했다. 콥터는 순조롭게 계속 날았다. 밀림의 나무들이 신나게 뒤로 흘러가고 있다. 런던 식민지를 떠난 후부터 전후 좌우가 온통 밀림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때때로 수목 사이에 거대한 공룡의 모습이 보였다. 이 밀림의 왕자들은, 다른 행성에서 침입해 온 밉상스러운 작은 동물이 두 패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 밖이란 듯이 유유히 날고 있다. 익수룡이 밀림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랠리는 1, 2분 정도 콥터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하늘을 나는 파충류의 생태를 관찰했다. 익수룡은 거의 날개와 긴 부리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개는 얇고 부드러우며, 길게 뻗은 앞발의 넷째 발가락에서 박쥐같이 펼쳐져 있다. 겉보기에는 콥터같이 상당한 속도로 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무 끝에서 둥둥 떠서 상하로 오르내리고 있어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콥터는 순조롭게 날아가고 있었다. 단조로운 녹색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에 랠리는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앞쪽에 회색의 점이 나타나더니 점점 커져 갔다. "시카고 식민지의 성벽이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랠리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식민지의 위에 오자, 랠리는 착륙을 망설였다. 착륙시키는 버튼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 끝에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성벽 위의 공중에서 정지시키고, 줄사다리로 내려오면 되겠다. 한시라도 빨리 카르텐호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랠리는 여기서 또 망설였다. 라인하르트 선장에게 사실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하르 등이 원하는 대로 통신 장치를 파괴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아무튼 지구인의 동료를 만나는 것이 우선 급하다. 랠리는 무사히 콥터에서 탈출하여 성벽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최초로 만난 식민지 사람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햇볕으로 그을린 얼굴에 턱수염이 달려 있는 사나이다. "지구인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식민지 사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지구인이 있는 곳? 당신은 혹시 돌지 않았나요?" 랠리는 놀랐다. 아직까지 악몽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머리를 의심했다. "우주 연습선 카르텐호로 온 지구인 말입니다. 확실히 시카고 호텔에 있을 겁니다. 나는 그만 길을 잃어서…" "당신, 여기서 시카고 호텔을 찾다니? 여기는 봄베이 식민지라오." "설마…" 하고 말을 계속하려다가 랠리는 입을 다물었다. 동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이 그만 서쪽으로 날아온 모양이다. 그래서 봄베이 식민지에 착륙한 것을 알게 되었다. 런던 식민지의 콥터가 추적을 그만두고 되돌아간 것은 아마 랠리가 방향을 잘못 잡고 가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잘못된 이상 이제 와서 하는 수 없다. 문제는 봄베이 식민지가 랠리를 잘 봐 주든지, 아니면 다시 감금될 뿐이다. 랠리는 큰맘먹고 말을 꺼냈다. "나는 곧 시카고 식민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가 시카고 식민지인 줄 알고 잘못 착륙했어요." "그것 참 안됐는데…" 하며 턱수염이 난 사나이는 랠리를 봄베이 식민지 행정 본부에 안내 해 주었다. 봄베이 식민지 대표는 훤칠한 키에 얼굴이 잘생긴 사나이였는데, 랠리에게는 매우 발음하기가 어려운 이름이었다. 랠리는 봄베이 식민지에 그만 실수하여 날아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혁명 소동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콥터로 관광 여행을 하던 중 방향을 잘못 알고 이렇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만약 런던 식민지에서 연락이 오면 만사는 끝난다. 도망자라는 것이 탄로 나기 전에 이 봄베이 식민지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카고 식민지의 방향을 가르쳐 드리지요. 콥터는 어디에 두었나요?" "성벽 위에 떠 있습니다." 하고 랠리는 대답했다. "호, 그래요. 왜 착륙시키지 않고요?" 하면서 대표는 육군 제복을 입고 출입문 곁에 서 있는 사나이를 손짓했다. 그러면서 랠리를 보고 웃었다. "익수룡에게 채여 어디로 날아가기 전에 착륙시켜 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제복의 군인에게 명령했다. "챈들러, 북쪽 140 지구 성벽 위에 콥터가 떠 있다. 그것을 착륙시켜라. 그러고 나침반을 준비하여 이분에게 시카고 식민지의 방향을 잘 가르쳐 드리고, 출발하도록 해 드려라." 랠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식민지에는 아직 반란의 소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급하시지 않으면 오늘 저녁 여기서 쉬고 가시지 않겠습니까? 손님으로서 대접하겠습니다."대표는 친절하게 말하였으나, 랠리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아닙니다. 돌아가는 것이 늦어지면 동료들이 걱정할 테니까요." "그도 그렇겠습니다." 하면서 봄베이 식민지 대표는 랠리를 전송해 주었다. 챈들러에게 나침반을 빌리고, 조종법을 잘 배웠기 때문에 이젠 안심이다. 봄베이 식민지의 성벽을 출발하여, 시카고 식민지까지 랠리는 가장 가까운 거리를 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틀림없는 시카고 식민지였다. 눈여겨본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랠리는 성벽 위에 콥터를 착륙시키고, 호텔로 향했다. 혁명 측 사람에게 붙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으나,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조용했다. 드디어 시카고 호텔을 찾았다. 시카고 식민지를 출발해서부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밀림 속을 헤매며 지하 감방으로 붙들려 들어가고, 봄베이 식민지까지 헛 비행을 하고 난 다음, 지금 겨우 도착한 것이다. 랠리는 피로에 지쳐 있었다. 우주 정찰군의 제복은 여러 군데 찢어지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얼굴도 땀과 먼지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우선 목욕부터 하고 싶었으나. 라인하르트 선장에게 먼저 보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지구인들아!   라인하르트 선장은 반란 소동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 얼굴이 많이 여위어 있었다. "랠리 스타크 연습생, 지금 돌아왔습니다!" 랠리는 절도 있게 경례를 하려 했으나, 너무나 피로에 지쳐 있었으므로 몸이 마음대로 잘 움직여 주지 않았다. 선장은 성급하게 말했다. "때마침 잘 왔다. 어제 저녁의 집회 결과, 우리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어제 저녁의 집회! 그러면 랠리의 모험은 24시간 이상 걸렸단 말인가! 피로에 지쳐 멍한 랠리는 생각을 정리했다. "자네가 이곳을 떠나고 없을 동안에, 시카고 식민지는 주민 투표로 혁명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헨리크스 마을도 같은 주민 투표로 혁명에 가담하게 되었다. 봄베이 식민지만은 다시 지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니 우리는 현재 혁명 소동 속에 처해 있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네는 런던 식민지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가?" 순간 랠리는 통신 장비를 파괴하는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기로 결심했다. "런던 식민지는 혁명의 중심지입니다. 혁명의 최고지도자는 커터라는 사람입니다. 이미 런던 식민지를 알파 C 제 4행성 자유 세계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커터는 혁명 정부의 지방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지구 체제 밑에 있는 알파 C 제 4행성 식민지 정부 대통령 해리슨이 들어왔다. "대통령, 커터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은 물었다. "런던 식민지의 혁명 지도자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의 한 사람이지요. 런던 식민지에서는 모두가 커터 밑에 단결하여, 만약 필요하다면 혁명 전쟁을 일으킬 작정입니다." "다른 식민지는? 싸울 태세입니까?" "시카고 식민지는 싸울 것입니다. 헨리크스 마을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봄베이 식민지는 지구 체제파와 혁명파의 반반이지만, 유력한 자가 지구 체제 쪽이 많아 과격한 반란은 일으키지 않겠지요. 그러나 다른 식민지가 런던 식민지를 지지하면 동조할 것입니다." "하이틀 ․반 ․하렌 후보생은 어디에 있나?" 라인하르트 선장은 다시 랠리에게 질문했다. "저와 하이틀 연습생은 런던 식민지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탈옥에 성공했습니다만, 하이틀은 아직 감방에 있습니다. 저는 혁명군의 콥터를 훔쳐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알고 봄베이 식민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식민지 사람이 저를 이 곳으로 오도록 해 주었습니다." "런던 식민지에서 어떤 모습을 보고 왔는가?" "모두 반란 계획을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보고하라! 그놈들이 무장하여 일어서는 장소와 때는?"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은 언성을 높였다. "예, 그것은…" 랠리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자신도 느꼈다. "그 곳의 정보는 지구에 대하여 중대하다, 스타크 연습생. 알겠지? 자, 그러면 무엇을 탐지하고 왔는가?" "아무 것도 탐지하지 못했습니다." 선장의 눈은 분노에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뭐, 아무 것도 탐지하지 못하고 돌아왔단 말인가? 자네는 정신이 있는가 없는가, 스타크 연습생?" 해리슨 대통령이 보기가 딱해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라인하르트 선장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소리쳤다. "스타크 연습생, 선장으로서 명령한다. 혁명에 대하여 듣고 본 것을 자세히 보고하라!" 랠리는 선장의 얼굴을 쳐다보고 이를 꽉 깨물었다. 명령은 명령이다. "혁명파는… 우리 모두를-물론 선장도 붙들어서 인질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며 랠리는 하르와 오헤어, 커트, 그리고 혁명에 몸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을 고발했다. 이 일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지구에 충성을 바쳤다고 칭찬해 주실까, 아니면 친구를 팔았다고 노하실까? 랠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튼 동료를 밀고하고 배반한 것이다. 그러자 해리슨 대통령이 열의 있게 말했다. "만약 인질을 잡아 두면 투쟁은 오래 가고, 피가 피를 부르는 비참한 일이 일어납니다. 덕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평화적 해결이라는 것은 일시적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혁명 운동을 완전히 타도하는 것, 해결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냉정하게 말하고, 책상에서 뭔가 쓰기 시작했다. "런던 식민지의 인구는 얼마지요, 해리슨 대통령?" "2천명 조금 넘을 것입니다." "음, 모조리 없애는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라고 말하면서, 선장은 다시 일어섰다. "해리슨 대통령, 급한 용무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랠리, 나를 따라오게." "어디로요?" "우주선이다. 해리슨 대통령, 대단히 죄송하지만 카르텐호의 승무원 전원을 급히 우주선으로 돌아오도록 전달하여 주실 수 없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 행성을 떠날 작정입니까?" 하고 대통령은 물었다. "아직 떠나지는 않겠습니다만, 우리는 성벽 안에서 너무 오래 머물고 있은 것 같습니다." 하고 선장은 비꼬듯 말했다. 랠리들이 카르텐호로 돌아오는 도중, 도로에 군중이 웅성대고 있었다. 지구인들이 통과할 때마다 그들은 더러운 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중앙 대로에는 표어를 써 붙인 깃발이 곳곳에 나부끼고 있었다. 표어는 랠리가 런던 식민지에서 이미 본 것이 많았으나, 새로운 것들도 눈에 띄었다.   집으로 돌아가라, 지구인들아! 너희들은 보기도 싫다! 해리슨을 데리고 가라!   랠리는 도로에서 혹시 폭도들이 습격할까 걱정하였으나, 식민지인 군중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욕할 뿐이었다. 성벽 출입문을 나와 풀밭을 지나고, 사다리를 올라 우주선에 들어가자, 겨우 마음이 놓였다. 랠리의 침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마음이 허전했다. 문득 혁명군의 녹색 제복을 입은 하르와, 또 런던 식민지의 어두운 감방에 잡혀 홀로 있을 하이틀의 생각이 났다. 다른 승무원들도 속속 우주선으로 모여들었다. "이 구역 어딘가에 제 3우주 정찰 선단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곧 이 공문을 보내라." 라인하르트 선장은 조금 전에 호텔에서 쓴 공문을 내밀었다. "예, 즉시 보내겠습니다." 하고 랠리는 경례를 하고, 통신실로 향했다. 장치가 통신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공문을 읽었다.   라인하르트 선장이 우주 정찰 사령관 카아 장군에게 긴급보고 X4. 알파 C 제 4행성에서 혁명이 진행 중. 혁명군은 지구인과 지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인질로 붙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음.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군용 우주선을 빨리 보내 주십시오, 벌주기 위하여 폭도의 근거지 런던 식민지를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파괴시켜야 하겠음.   랠리는 몇 번인가 되풀이하여 읽었다.   (벌주기 위하여 런던 식민지를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파괴해야 하겠음.) 부분적, 또는 전면적 파괴. 부분적, 또는 전면적 파괴.   랠리는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주 정찰군의 우주 선단을 부르면 오헤어와 하르는 물론, 아무 죄도 없는 가련한 하이틀까지 죽고 만다. 그리고 알파 C 제 4행성은 목성의 식민지 반란 때와 같은 길을 걷고 만다. 수백 명, 수천 명의 식민지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혹시 살아남은 사람은 반역죄로 죄인 노동자가 되어 일평생을 혹사당한다. 랠리가 공문을 보낸다면, 자유를 원하는 알파 C 제 4행성의 희망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통신 장치에 통신을 할 수 있다는 불이 들어왔다. 랠리의 손가락은 자동적으로 우주 통신 장치의 조종반 위로 미끄러져 갔다. 그리하여 우주 정찰군의 군용 우주선단을 불러내는 전파를 우주 공간에 보내기 시작했다. "이쪽은 센타우리 구역, 군용선단 X16532이다. 그쪽은?" 랠리의 귀에 빠른 군용 우주선단의 통신사의 소리가 들려 왔다. 랠리는 공문을 내려다보았다. [부분적 또는 전면적 파괴] 공문 용지를 손으로 구겨 보았으나,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쪽은?" 하는 금속적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랠리는 구겨진 용지를 펴들고 선장의 필적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도저히 보낼 수가 없다. "그쪽은?" 하고 또 군용 선단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랠리는 스위치를 꺼버리고 통신실을 나오고 말았다. "공문은 보냈는가?" 저쪽 복도에서 라인하르트 선장이 물었다. "아직 보내지 못했습니다, 선장." 랠리는 떨리는 음성을 억누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기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1, 2분 후에 다시 해보겠습니다." "빨리 해라.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군용 우주선단을 부르지 않으면 늦는다." "알겠습니다, 선장" 하고 랠리는 통신실로 다시 돌아가, 또다시 통신 장치를 켰다. 명령이기 때문에 통신을 중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랠리는 런던 식민지를 전멸시키는 것을 도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이쪽은 우주선단 X16532. 그쪽은?" 같은 소리가 또 들려왔다. "라인하르트 선장으로부터 제 3 우주 정찰 사령관 카아 장군에게." 랠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통신을 시작했다. "사령관에 연결시키겠다." 군용 우주선의 통신사가 대답했다. 랠리는 자기 앞에 복잡하게 늘어서 있는 통신 장치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몇 초, 아니 길어도 수십 초안에 카아 장군의 목소리가 들려오겠지. 그리하여 랠리가 공문을 보내면, 알파 C 제 4행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싫다! 그런 엄청난 일을… 랠리는 통신실의 출입문을 열고 복도를 살펴보았다. 때마침 키가 큰 연습생 폴 켄벨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쪽은 카아 사령관." 통신 장치에서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폴." 하고 랠리는 동료를 불렀다. "왜 그래, 랠리?" "이리 좀 들어와." 랠리는 손에 들고 있던 공문을 바라보았다. "보내라. 그쪽 공문을 기다리고 있다." 하고 카아 사령관은 되풀이했다. "이 공문을 자네가 좀 보내다오, 폴." "왜 자네가 보내지 않지? 자네가 할 일 아닌가?" "접속이 나쁜가? 이쪽 소리가 들려는가? 어서 대답하라." 카아 사령관은 계속 응답을 재촉하고 있다. 땀방울이 랠리의 이마와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라인하르트 선장만 지금 여기에 오지 않으면 잘 되어 가겠지- "부탁한다, 폴. 나는 급한 용무가 있어." "무리야. 나는 통신 방법을 모르잖아." "간단해. 이 용지에 씌어 있는 공문을 읽으면 되는 거야. 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해 볼게. 공문을 이리 줘." 폴은 억지로 고개로 끄덕였다. 이 때,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카아 사령관이 너무 기다리다가 지쳐서 통신을 끊은 것이리라. "괜찮아, 곧 불러줄 테니까." 며 랠리는 다이얼을 돌렸다. 군용 우주선의 통신사는 또 나오며 투덜댔다. "왜 이래 ? 우리를 놀릴 작정인가?" 몹시 화가 난 모양이다. 통신사답지 않은 말투이다. "여기에 앉아서…" 고 랠리는 폴을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이것을 읽으면 돼." 고 말하며, 형편없이 구겨진 공문 용지를 넘겨주었다. 폴은 용지를 펴들었다. 그러자 랠리는 통신실을 나왔다. 통신을 보내는 것을 듣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다.     진공 작전   랠리는 문 밖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섰다. 다시 통신 장치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폴이 막 공문을 읽으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그것을 내게 줘, 폴. 아무래도 내가 해야겠어."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랠리! 장난하고 있나?" 순한 폴도 벌컥 화를 냈다. "미안하다. 내가 보내겠어." 랠리의 얼굴에서는 또다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폴이 자기의 이상한 행동을 선장에게 보고할지도 모르겠다. "자네가 보낸다면 그만이지 뭐. 왜 기분이 나쁜가?" 마음씨가 좋은 폴은 랠리의 이상한 행동이 기분이 나빠서 그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공문을 보내라." 통신 장치에서 독촉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폴은 방에서 나갔다. 랠리는 통신 장치 앞에 앉으며 공문을 들여다보았다. "공문을 보내라. 왜 꾸물거리는가?" 상대방은 화가 난 목소리로 재촉했다. 랠리는 대답하려고 입을 열려다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스위치를 꺼버렸다. 그대로 조용히 앉아 통신 장치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랠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운명의 공문은 결국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오헤어, 하르, 하이틀-그리고 혁명에 참가한 모든 식민지 사람들을 랠리 스타크가 구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영웅적 행위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랠리는 공문을 찢었다. 갈가리 찢어진 종이 조각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에 통신 장치의 냉각 회로에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회로기판을 빼냈다. 이것은 예비 부속품이 없는 중요한 회로기판이다.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보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버지 스타크 사령관은 이 행위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랠리로서는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랠리는 장치 속을 손으로 더듬어서 회로의 배선을 끊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주 통신 장치를 파괴하고 만 것이다. "이제 이 장치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랠리는 주머니에 집어넣은 회로기판 손으로 만지면서, 마루바닥에 흩어져 있는 공문 조각들을 힐끗 돌아보고 통신실을 나왔다. "공문은 보냈는가?" 하고 라인하르트 선장이 물었다. "보냈습니다." 라고 랠리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경례를 하고 복도를 빠져 나와, 승강 계단을 지나 지상으로 나왔다. 아버지에 대한, 우주 정찰군에 대한, 지구에 대한, 하르에 대한, 오헤어에 대한, 혁명에 대한 것 등을 차례차례 생각하면서 풀밭을 지나 시카고 식민지의 성벽으로 향했다. 지금 랠리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존 브라운이다. 시카고 호텔은 이미 지구인이 거주할 곳이 못되었다. 젊은 식민지 사람들이 차지하여 혁명 본부가 되어 있었다. "존 브라운이 여기에 있는가? 있으면 곧 만나자고 전해 다오." 랠리는 정면 입구에 서 있는 식민지 병사에게 부탁했다. "브라운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가?" 문지기는 랠리의 제복을 차가운 눈초리로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다." "글쎄, 브라운이 당신을 만나 주실까?" "급한 용무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랠리는 문지기가 거절하는 것을 뿌리치고 억지로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저 놈을 붙잡아라!" 문지기가 소리치자, 식민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소동이 일어났다. "이런 곳에서 왜 이리 야단들이야?"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소동은 멈추었다. 랠리는 두 식민지 사람에게 팔을 붙들린 채 얼굴을 들었다. 눈앞에 존 브라운이 서 있었다. "자네는 대단히 강하군. 우주 비행사가 되기보다 레슬링 선수가 되는 것이 좋을 뻔했어. 나는 자네가 봄베이 식민지를 비행했다는 것도 들었다." "소동을 일으켜 미안하군, 브라운. 나는 꼭 콥터가 필요해서…" "콥터는 회수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는가?" "나는 런던 식민지에 가야겠어. 그 곳 사람들에게 경고할 일이 있다. 나를 런던 식민지에 데리고 가 주지 않겠는가?" "무엇을 경고한다는 거지? 자네는 거기에 한 번 가보아서 몸서리가 쳐질텐데, 그래도 또 가고 싶은가?" "그 때는 명령으로 갔었다. 이번에는 나의 뜻으로 가고 싶다. 가도록 해 주겠는가?" 하며 랠리는 식민지 사람에게 붙들린 팔을 뿌리쳤다. "그렇다면 자네는 또 혁명 측에 가담하겠다는 건가? 너처럼 지조가 없는 사나이는 처음 본다. 그러나 마침 내가 런던 식민지에 갈 용무가 있으니 자네를 손님으로 대접하여 데리고 가 주지. 그쪽에 가거든 자네가 좋을 대로 경고를 하든지, 마음대로 해라. 이 사나이를 묶어라." 하고 브라운은 말했다. 식민지의 사나이들은 다시 랠리에게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반항하지 않고 묶였다. 그리고 콥터 뒤에 실렸다. 브라운은 조종석에 앉자, 곧 콥터를 이륙시켰다. 시카고 식민지에서 런던 식민지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콥터는 런던 식민지의 중심부에 있는 넓은 광장에 착륙했다. 브라운이 콥터에서 내리자 먼 곳에 있던 군중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곧 커터와 녹색의 제복을 입은 혁명군 사나이들이 나타났다. "자네들의 손님을 다시 데리고 왔다." 하며 브라운은 콥터의 안을 가리켰다. 제복의 사나이들이 달려들어 랠리의 묶은 것을 풀어 주었다. "자네는 이 녀석을 어떻게 체포했나, 브라운?" 하고 커터가 물었다. "체포한 것이 아니야. 스스로 우리 본부에 찾아와서 여기에 오겠다고 원하길래 끌고 왔을 뿐이다." 브라운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 말을 들어주게…" 하고 랠리는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오헤어가 서 있었다. 랠리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이 지구인을 다시 독방에 처넣어라." 하고 커터는 제복의 사나이에게 명령했다. "당신들은 예정대로 출발할 것인가?" 하고 브라운은 물었다. "그렇다.“ 커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모든 혁명군은 30분내에 런던 식민지를 출발한다. 한밤중까지 가서 제 1캠프를 치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제 2캠프를 친다. 즉 내일 저녁에 시카고 식민지에 들어가서, 지구인들을 체포하고, 또다시 우리들이 숨을 장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두 혁명군의 병사는 랠리를 끌고 가려 했다. 때마침 거기에 하르가 나타났다. "랠리, 왜 되돌아왔는가?" "하르, 내 말을 듣게." 랠리는 병사들에게 팔을 붙들리면서, 필사적으로 말을 꺼냈다. "라인하르트 선장은 나에게 공문을 전송하라고 명령했어. 그는 우주 정찰군의 제 3우주 정찰 선단을 불러서 혁명을 지지한 벌로서 런던 식민지를 파괴하려고 해." "그건 큰일이군! 카터에게 이야기해야겠어! 곧 진공 작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늦어." "서두를 것은 없어, 하르 그것보다 이 병사들에게 내 팔을 놓아주도록 말해 주게. 이상한 것을 보여 주겠네." "손을 놓아. 그러나 경계해라." 하고 하르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은 랠리의 손을 놓고, 대신 총을 겨누었다. "하르, 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주게. 내가 내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면 총을 든 병사가 쏠지도 모르니까. 그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 주게."하며 랠리는 부탁했다. "주의해, 하르." 한 병사가 말했다. 하르는 랠리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통신 장치의 부품을 꺼냈다. "통신 장치의 부품 아닌가?" "그래. 카르텐호의 우주 통신 장치에서 가장 중요한 회로기판이야." "진짜인가?" "보면 알 거야." "랠리?" 갑자기 하르는 랠리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랠리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랠리 네가 이것을 통신 장치에서 떼어낸 것이 먼저인가 나중인가? 즉 라인하르트 선장의 공문을 전송하기 전인가, 후인가?" “나는 전송하지 않았다. 전송하는 대신에… 장치의 회로를 파괴시키고 이 전자관을 떼어내 가지고 왔다.” "랠리!" 햇볕에 그을린 하르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그 때 커터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 지구인을 왜 데리고 가지 않지? 무슨 일이 있었나, 하르?" "그렇다. 라인하르트는 우주 정찰군에 부탁하여, 런던 식민지를 완전히 파괴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공문을 보내기 전에 랠리가 통신 장치를 파괴시키고 여기로 왔다고 한다." 기쁨에 떨리는 목소리로 하르는 보고했다. "정말인가?" "이 회로기판이 확실한 증거다." 라고 말하면서, 랠리는 손을 뻗어 하르가 가지고 있는 회로기판을 도로 빼앗았다. "우주선에서는 통신 장치의 회로를 수리할 수 없어. 이 부품은 다시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카고 식민지로 쳐들어가면 선장을 쉽게 체포할 수 있겠군. 그런데 선장은 네가 통신장치를 파괴한 것을 알고 있는가?" "통신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한 폭로되지 않는다. 내가 선장에게 공문을 보냈다고 보고해 두었으니까." 갑자기 커터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르도 랠리의 팔을 가볍게 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터의 뒤를 따라갔다.     대 행 진   랠리는 밀려드는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는 도로에 홀로 서서, 알파 C 제 4행성의 맛있는 공기를 힘껏 마시고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지구도, 아버지도, 우주 정찰군도, 모든 것이 과거의 꿈이었다. 그리고 지금 랠리는 홀로 조용한 거리에 서 있다. "하이틀은?" 문득 생각이 났다. 약하고 키 작은 연습생은 아직도 지하 감방 어느 곳에 갇혀 있을까? 커터들은 런던 식민지를 한 사람도 없게 하여 텅 빈 진공 지대로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하이틀은 홀로 그 어둡고 습기 찬 지하 독방에 팽개쳐져 있을 것이 아닌가. 랠리는 지하 감방이 있는 건물을 찾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성벽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 외에는 모른다. 랠리는 조용한 거리를 급히 걸어갔다. 10분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행정 건물은 어디입니까? 지하 감방이 있는 건물인데요." "자네는 왜 이런 곳에 남아 있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가에서 나가고 말았는데." "부탁합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노인은 왼쪽을 가리켰다. 랠리는 미친 사람같이 달렸다. 그리고 눈에 익은 건물을 찾아내어, 돌계단을 올라갔다. 열려 있는 출입문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하이틀, 하이틀!" 하고 부르며 지하 감방으로 통하는 출입문에 이르렀다. "하이틀!"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좋아, 랠리!" 문득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하이틀은 커터들이 데리고 갔어." "오헤어!" 랠리는 기쁨의 소리를 지르면서, 큰 사나이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문단속을 하고 있는 중이야. 이렇게 해 두면 건물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커터가 생각했어. 자, 밖으로 나가자." 큰 사나이 오헤어는 정면의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갔다. "자, 이만하면 안전하겠지." "기다려 주게, 오헤어."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돼. 커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아무튼 캠프에서 자네를 만나게 될 거야." 하며 오헤어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어둠이 짙어 가는 중앙 대로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먼 곳에서 집합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랠리는 어둠 속에서 믿음직한 큰 사나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집합 나팔 소리가 조금 전보다 크고 길게 울려 퍼졌다. "런던 식민지의 동지 여러분에게 고한다!" 커터의 목소리가 곳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흘러나왔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진공 작전에 들어가고 있다. 잘 들어라. 다음 집회 나팔이 불던 우리는 동쪽 문에 집합한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동쪽 문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미리 계획을 세운 대로 대행진을 한다. 우리는 무장하고 밀림으로 나아간다. 공룡을 겁낼 필요는 없다. 그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조명으로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다. 런던 식민지에서 30km 되는 곳에 제 1캠프를 설치한다. 거기에는 5백 명의 동지가 남아서 계획대로 캠프를 요새화 한다. 다른 사람은 날이 밝을 때까지 런던 식민지에서 80km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서 제 2캠프를 친다. 여기에서도 500명이 남는다. 다른 사람은 시카고 식민지에서 10km 떨어진 제 3캠프에 공중 수송된다. 그리고 헨리크스 마을의 대원들과 합류하여 시카고 식민지에 돌입하여 지구의 우주선을 탈취한다! 자, 그러면 각자 출발 준비를 서둘러, 다음 집회의 나팔 소리가 날 때까지 대기하라." 밤의 어둠은 만물을 감싸고, 차가운 공기가 몸에 스며드는 밤이었다. 랠리는 며칠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갔다. 알파 C 제 4행성에 대하며, 랠리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랠리는 크게 깨달았다. 자기가 보는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보는 입장에서도 설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나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던가. (우주 정찰군 사관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랠리는 아버지를 배반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킨 것이다. 랠리는 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콥터가 지상에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랠리는 주머니에서 회로기판을 꺼냈다. 아직 랠리는 알파 C 제 4행성의 운명을 손안에 쥐고 있다. 만약 지금 콥터를 타고, 시카고 식민지에 날아가서, 카르텐호에 되돌아가, 회로기판을 우주 통신 장치에 도로 끼어 넣으면 혁명은 궤도에 오르기 전에 끝이 나고 말 것이다. 랠리는 회로기판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띠었다 "우주 정찰군 사관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랠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총총 빛나기 시작했다. 알파 C와 베타 C는 지평선 밑에 지고, 프록시마 C만이 아직 하늘 한 모퉁이에 진홍색의 빛을 내면서 도로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랠리는 포기한 심정으로 별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우주 정찰 사관이 되어, 별에서 별로 우주를 날아다니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 시절의 꿈이 지금 사라져가고 있다. 데네브와 리겔과 프로키온 등의 별에도 갈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구에도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구-랠리 가 태어난 행성. 랠리가 사랑한 행성, 집에도 두 번 다시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 랠리는 그리운 태양과 아홉 개의 행성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암흑의 하늘에 빛나고 있는 무구한 별들의 사이에 가려서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더 좋겠지. 최후의 집합 나팔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다시 한 번 랠리는 별하늘을 쳐다보았다. "우주 정찰군 사관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랠리는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아버지는 랠리가 취한 길이 정당했다고 인정 해 주시겠지. 지구를 위해서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진실을 위하여 랠리는 혁명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랠리는 통신 장치에서 빼 낸 회로기판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별빛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머리 위로 높이 쳐들어 힘차게 대지 위에 내리쳤다. 회로기판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콘크리트 위에 흩어졌다. 그 조각 하나하나가 프록시마 C의 빛을 받아 붉은 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랠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시카고 식민지를 목표로 한 혁명의 대행진은 시작되고 있었다. 노여움과 희망을 안고 전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물결을 향해, 랠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끝)     작품 해설   공룡에 대하여   공룡은 지금부터 2억 년 전에서 7천만 년 전까지 약 1억 3천만 년 동안 지구의 여러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공룡은 도마뱀의 친구인 파충류이고, 공룡이 번성하여 살고 있던 때를 파충류 시대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습니다. 공룡은 작은 산만큼 큰 것도 있으리라고 상상됩니다만, 이 소설에는 자세히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겠습니다.   1. 프테라노돈 보통 익수룡이라고 말하고, 하늘을 나는 공룡입니다. 큰 것은 날개를 펴면 9m에 가깝습니다.   2. 스테고사우루스 검룡이라고 말하고, 기묘한 갑옷 같은 것으로 온 몸을 덮고 있습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약 6m의 길이, 전투기의 수직 꼬리 날개와 같은 골판이 두 줄 등에 있습니다. 꽁지에 4개의 날카로운 침 같은 깃이 있어서, 강적이 습격해 오면 이것으로 자신의 몸을 지킵니다. 식물을 먹고삽니다.   3. 티라노사우르스 이것이 공룡의 주인공입니다. 다른 초식 공룡을 잡아먹고 삽니다. 그 이빨은 악어의 이빨보다 수십 배 날카롭고, 다른 공룡의 등뼈를 용이하게 깨물어 박살냅니다. 길이 15m, 높이 6m, 몸무게 10톤 이상입니다.   4. 이구아노돈 이구아나라는 도마뱀을 닮았으므로 이구아노돈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길이는 9m, 나무의 새싹들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고기는 맛이 있으므로 티라노사우루스 등이 가장 즐겨 잡아먹었습니다.   공룡은 왜 멸망했을까?   공룡은 몸집도 큰데 왜 사멸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로 두뇌가 둔한 것입니다. 사람은 몸무게의 50분의 1 무게의 뇌를 가지고 있는데, 공룡은 2만 5천분의 1밖에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두뇌로서는 온 몸을 마음먹은 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은 대식이라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하루에 50~60Kg의 나뭇잎과 식물이면 살 수 있으나, 브론토사우루스는 450킬로그램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파나 산불에 의해서 식물과 나뭇잎이 줄어들면 굶어죽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강적, 그것은 작은 포유류 동물입니다. 지혜가 발달한 이 작은 포유류들이 집단적으로 공룡의 알을 깨먹기도 하고, 새끼들을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구에서는 공룡이 한 마리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네스호에서 실제로 공룡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 공룡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의 일대 뉴스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1197    절대 0도의 수수께끼 ♣ E. S. 가드너 지음 댓글:  조회:455  추천:0  2023-08-23
절대 0도의 수수께끼 ♣ E. S. 가드너 지음   액체 침략자 ♣ R. M. 파뤼 지음     절대 0도의 수수께끼   괴이한 유괴 사건················ 6 대답은 '아니오'················ 10 총경 허풍 떨다················· 15 투명 인간이란 말인가·············· 19 그랜트 가의 창고················ 23 범인은 이미 사라지고·············· 26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32 얼어 버린 잉크················· 36 미치광이 과학자················ 39 울려 퍼지는 총 소리·············· 42 절대 0도···················· 51 은행장도 사라지다··············· 56 루비도 사라졌다················ 60 또 다시 옷만이················· 65 밀퍼스 가 6372번지··············· 70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72 악마의 최후·················· 77   액체 침략자   검은 호수··················· 84 화상 입히는 물················· 87 3명의 청년 과학자··············· 90 여과성 바이러스················ 94 인간 쪽이 더 하등 동물이다·········· 100 말하는 액체·················· 102 두려운 액체 생물··············· 107 소금에 취한 액체 생물············· 111 대성공···················· 117 나를 다시 호수로··············· 120 금을 만들자·················· 125 교환조건··················· 130 슈미트도, 액체 생물도············· 136 배반자의 최후················· 141 포위되었다·················· 147 군대 출동··················· 149 상대하기 벅찬 적··············· 151 최후의 수단·················· 154 데이의 결의·················· 158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163   절대 0도의 수수께끼   ♣ E. S. 가드너 지음 등장 인물   ● 덴저 필더 : 유괴된 억만 장자. 몸값을 지불해 주도록 경찰에 편지를 보냈지만…. ● 핸더 총경 : 로스앤젤레스 경찰 본부의 수사 부장. 협박장을 받고는 24시간 이내에 범인을 체포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 샘즈 : 덴저 필더의 비서. 덴저 필더의 행방을 혈안이 되어 찾고 있다. ● 앨버트 크롬 : 천재 과학자. 그러나 자기의 발명을 정부에 팔려다가 실패하고 지금은 약간 정신이 돈 상태다. ● 알리 기자 : 루비 기자와 경쟁 관계에 있는 '스타'신문의 유능한 기자. 이번 사건에서도 루비 기자와 서로 특종 기사를 얻기 위하여 경쟁을 벌인다. ● 시드 로드니 : 유명한 핑커튼 탐정소의 뛰어난 탐정. 은행으로부터 사건 수사를 의뢰 받는다. 언제나 침착하며 머리가 명석하다. ● 솔로몬 : 덴저 필더가 거래하는 은행의 은행장. 지독하게 꼼꼼하며 유괴범이 요구하는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 루비 기자 : '크랠리온' 신문의 여기자이며 로드니의 친구. 맡은 일에 매우 충실하며 어디라도 용감하게 달려간다.   괴이한 유괴 사건   로스앤젤레스 경찰 본부 핸더 총경의 방에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나이들이 모여들었다. 신문 기자들이다. 그 기자들의 시선이 지금 한 사나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억만 장자인 덴저 필더 씨의 비서 샘즈를……. 자고 있는 것을 흔들어 깨워 황급히 달려나온 듯했다. 셔츠의 칼라는 때에 찌들어 있고 넥타이는 비뚤어져 있으며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든 참이었다. 읽기 시작하는 그의 눈은 긴장한 탓인지 더욱 가늘어졌다. "아니, 이건." 하고 그가 말했다. "어떻소? 그 편지의 글씨가 덴저 필더 씨의 필체가 확실합니까?" 핸더 총경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샘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쓴 것입니다." "뭐라고 써 있습니까? 핸더 총경, 내용을 밝혀 주실 수 없습니까?" 한 신문 기자가 핸더 총경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 핸더 총경은 아무 말 없이 샘즈의 손에서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핸더 총경님께. 저는 덴저 필더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에게 유괴되어 어딘지 모르는 곳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저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신다면 지금 즉시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중단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몸값으로 50만 달러를 빨리 그들에게 지불해 주십시오. 저의 은행 예금은 현재 20만 달러밖에 없습니다만, 제가 거래하는 은행의 솔로몬 은행장에게 부탁하면 부족한 돈을 곧 빌려 줄 것입니다. 총경님께서 솔로몬 은행장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몸값을 지불하는 방법은 50만 달러를 007가방에 넣어 제 비서인 밥 샘즈에게 시켜 차이나타운에 있는 마우라는 중화 요리집 뒷문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게 하고 샘즈는 자동차를 타고 왔다가 다시 자동차로 되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단, 샘즈는 반드시 혼자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찰이 따라오거나 지폐의 일련 번호를 적어놓거나 하면 나는 곧 살해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지켜 주십시오. 믿겠습니다. 나를 잡아 두고 있는 사람은 굉장한 천재 과학자이며 두뇌가 명석한 무시무시한 사나이입니다. 저는 무서워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쪼록 급히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덴저 필더.   "이런 편지요." 핸더 총경은 매듭짓듯이 말했다. "나에게 직접 배달된 것이오." "그렇지만 아주 이상한 협박 사건이군요. 보통 협박 사건이라고 하면 범인은 경찰에 알리면 죽이겠다고 하는 것이 상식인데 오히려 경찰 본부의 핸더 총경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스타 신문의 알리 기자가 말했다. "즉, 범인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요?" 여기자인 루비가 덧붙여 말했다. "아니면 미치광이겠지. 이런 일은 범죄자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보내 줄 테지." 핸더 총경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 모두이거나. 매우 자신만만한 사람 아니면 미치광이일 거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한 사나이였다. 바로 시드 로드니. 유명한 핑커튼 탐정소의 명탐정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은행이 특별 수사 요원으로 선정한 인물이다. 샘즈가 로드니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로드니 씨, 당신은 은행이 어떻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덴저 필더 씨를 구해 내기 위해서 모자라는 30만 달러를 빌려 줄까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번에는 로드니에게 쏠렸다. 로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덴저 필더 씨의 필적이 틀림없음을 이미 샘즈 당신이 확인했고 또 핸더 총경도 덴저 필더 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은행에 돈을 지불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나의 견해를 전할 생각입니다." 모두가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 때, 쿵쿵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대답은 '아니오'   핸더 총경이 방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은행장 아서 솔로몬 씨였다. 무표정하게 차가운 눈초리로 방안의 사람들을 빙 둘러보았다. 여느 사람과는 달리 옷차림도 깔끔했으며 수염도 깨끗이 면도한 침착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나오라는 연락 받고 왔소, 핸더 총경." 말투도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다. "꽤 늦으셨군요, 솔로몬 씨. 저는 수염도 깍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집에서 달려나왔습니다만." 샘즈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갈림길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굳이 흉한 몰골을 하고 나와야 할 까닭은 없지 않소?" 은행장은 싸늘하게 한 마디 내뱉고는 핸더 총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총경, 용건이 뭔가요?" 핸더 총경은 편지를 건네 주었다. 은행장은 의자에 걸터앉아 주머니 속에서 안경을 꺼내더니 먼저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았다. 그리고는 불빛에 안경을 비추어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그럴 듯하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은행이 몸값을 지불할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솔로몬 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안은 쥐죽은듯이 조용했으며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솔로몬을 응시하고 있었다. 로드니가 입을 열었다. "핑커튼 탐정소로서도 덴저 필더 씨의 목숨을 위험으로부터 구해 내기 위해서는 일단 돈을 지불해 줄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은행장은 힐끗 로드니를 쳐다보았다. "이 사건에 대해 뭔가 알아 냈소?" "아직 없습니다." "음." 은행장은 뭔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솔로몬 씨! '스타' 신문으로서는 빨리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아니 아마도 이것은 전 시민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알리 기자가 다그치며 말했다. 은행장은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그렇다면 대답하겠소.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 순간 방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서인 샘즈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그에게 덤벼들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런 감정을 그는 용케도 꾹 참고 있는 것이다. "덴저 필더 씨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까짓 30만 달러 정도는 바로 갚을 수 있소! 그 정도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건 인정합니다." 은행장은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그의 글씨임이 분명해요." "그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어째서 돈을 내 주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비서인 샘즈는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은행은 5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금은 20만 달러입니다. 그러니 20만 달러까지라면 언제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20만 달러만 갖고는 반액도 되지 않으니까 이렇게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유괴범은 우리를 깔보고 더욱 더 날뛰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범죄자들도 이런 범죄를 흉내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불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고 그 결론을 이미 여러분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단 덴저 필더 씨의 생명이 안전하게만 된다면 경찰은 전력을 기울여 범인을 체포할 것입니다." 핸더 총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은행장은 경멸하듯이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까지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실패만 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은행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섰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샘즈 비서가 은행장 앞을 가로막았다. "솔로몬 씨, 잠깐! 이건 한 인간의 목숨이 걸린 문제요!" "은행의 안전도 걸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샘즈 씨!" 은행장은 이렇게 말하고 샘즈를 밀어젖히더니 부랴부랴 방에서 나가 버렸다.   총경 허풍 떨다   문이 꽝 닫혔다. 모두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헨더 총경은 땅이 꺼져라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쁜 놈! 돈에 눈이 먼 지독한 수전노!" 샘즈 비서가 외쳐댔다. "그 놈은 지금까지 덴저 필더의 덕을 본 주제에 이제 와서 배신을 하고 이렇게 냉정하게 거절하다니!" 샘즈가 모자를 움켜쥐었다. "여기 있다간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나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핸더 총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샘즈는 나갔다. "가엾어요. 너무 흥분해 있어요." 하고 '크랠리온' 신문의 루비 기자가 말했다. "무리도 아니지. 지금 자기 회사 사장이 살해될 지경에 처해 있으니 말이오." 또 다른 기자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핸더 총경을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총경님!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군요. 신문에 기사를 써야겠습니다." "좋소. 그럼, 이렇게 쓰시오. '경찰은 지금 매우 유력한 새 단서를 잡았다. 24시간 이내에 반드시 범인은 체포될 것이다.' 하고 말이오." 핸더 총경이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단서라는 게 뭡니까?" "그것은 아직 발표할 수 없소!" 핸더 총경이 벌컥 화를 내자 신문기자들은 황급히 방을 나가 버렸다. 이제 방안에는 핸더 총경과 로드니 탐정만 남았다. "총경……. 아무래도 당신은 허풍을 떤 것 같군요. 새 단서란 건 거짓이었죠?" 로드니가 조용하게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총경은 로드니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자기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말일세…….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경찰의 명예가 완전히 땅에 떨어질 텐데 어쩌겠나?" "하지만 그랬다가 만약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명예고 뭐고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것 아니겠소?" "그러니 대체 어쩌면 좋겠나? 자네에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면 좀 들려 주지 않겠나?" "음, 뭐 없는 건 아니지만……." 로드니가 담배를 피우면서 무심코 말하자 총경은 정신이 번쩍 드는지 벌떡 일어섰다. "정말인가?" "음, 믿지도 않을 테지만." 바로 그 때 방문이 빠끔히 열리더니 두 사람의 남녀가 뛰어 들어왔다. "그게 뭡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은 루비 기자와 알리 기자였다. "당신들은 뭐요? 아직 신문사로 돌아가지 않았소?" "로드니 씨가 뭔가 열쇠를 쥐고 있을 것 같아 문 옆에서 엿듣고 있었죠. 어서 그걸 말씀해 주십시오!" "끈질긴 사람들이군." 로드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할 수 없군. 그러면 당신들 두 사람만 특별 케이스요. 그 대신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절대로 발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오. 어떻겠소, 총경. 괜찮겠죠?" "어쩔 수 없지." 핸더 총경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니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꺼 버렸다. "지금까지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할 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소. 내가 생각할 때 이 사건은 겉보기보다는 훨씬 심각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오." "음." 하고 총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내 육감이지만 이 사건의 범인은 보통 유괴 사건의 범인보다는 몇 배나 머리가 뛰어난 것 같소. 경찰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는 점이 바로 그 증거요. 그래서 나는 덴저 필더를 유괴할 만한 동기를 가진 사람의 기록을 닥치는 대로 모조리 조사해 보았소." "하지만 그 정도는 경찰에서도 조사해 보았소." 핸더 총경이 중간에 끼여들어 말참견을 했다. "맞아요. 하지만 경찰은 전에 덴저 필더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실패한 일당을 면밀하게 조사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음……. 그건 그랬지. 하지만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이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거기에 흥미를 느꼈던 겁니다. 즉, 돈을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있는 놈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할 만한 녀석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게 누군가?" "앨버트 크롬이라고 하는 남자죠. 그런 이름 들어본 적 없습니까?" 핸더 총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루비 기자가 말했다. "저……, 그 사람 얼마 전에 새로운 발명을 했느니 어쨌느니 하며 문제를 불러일으킨 그 과학자 아닌가요?" "맞았소. 바로 그 사람 말이오." 하고 로드니가 말했다. 알리 기자도 무릎을 탁 쳤다. "아아, 그 남자라면 기억하고 있어요! 정부에 속임수 발명을 팔려다가 거절당하자 정부를 제소하겠다던 그 허풍선이 말이죠?" "그 사내가 어쨌다는 거야?" "아니, 증거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그 사내를 만났을 때 뭔가 좀 이상한……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사내는 곧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당치도 않은 짓을 하곤 했거든요." "그 따위 느낌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싱거운 사람 같으니……." 핸더 총경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밖에서 문을 열었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더니 방금 나갔던 샘즈가 새파랗게 질려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뭔가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 듯이!   투명 인간이란 말인가   "어찌 된 일이오?" 샘즈는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예……. 있었습니다." "기운 내서 말을 해 보시오." 샘즈는 입술이 타는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나는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차를 몰고 클레몬트 가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 가 방향으로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갑자기 검은 대형 트럭 한 대가 나타나 내 차에 바짝 달라붙어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추월하려나 보다 생각하고 앞서 보내려고 속도를 줄였는데 그 녀석도 덩달아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트럭으로 차츰 내 차를 인도 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나!" 여기자 루비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문득 유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브레이크를 막 밟았더니 그 차는 느닷없이 내 차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내 차를 향해 무언가를 내던지더니 그대로 쏜살같이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어요." "허어……." 핸더 총경이 마치 더 잘 들으려고 하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처음에는 폭탄이 아닌가 했는데, 터지지 않길래 겁이 났지만 가만가만 살펴보니……, 새까만 종이 뭉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읽어 보십시오." 샘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장의 타이프 용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샘즈. 네 녀석은 멍청한 바보다! 은행장이 안 된다고 한 것은 네 놈이 너무 무례하게 대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너희들이 하고 있는 짓은 덴저 필더를 위해서는 좋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라. 너희들이 취한 행동을 그에게 알려 줬더니 '아무도 내 일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지 앉는군.' 하며 버럭 화를 냈다. 이제 앞으로 은행장과 협상할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12시간 이내에 돈을 가지고 와라. 만약 이번에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덴저 필더의 목숨을 없애 버릴 테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를 죽이고 나면 다음은 샘즈, 네 녀석을 잡아들일 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행장 솔로몬도 말이다. 솔로몬을 잡아들이면 그 때는 몸값이 1백만 달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돈을 내 놓는 것이 몸에 이로울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라. 이것이 최후 통첩이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여기서 있었던 일이 그렇게 빨리 새어나갔을까?" 핸더 총경이 제일 먼저 말했다. "이 방에 도청 장치라도 설치해 둔 것이 아닐까요?" 알리 기자가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여기는 경찰 본부란 말이오. 아무리 영리한 범인이라 해도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소." "투명 인간이라면 할 수 있겠죠." 로드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치 않은 소리요. 과학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들이 한 이야기를 알고 있겠소? 범인이 천리안이라도 갖고 있단 말인가요?"   그랜트 가의 창고   다섯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정적을 깨고 마침내 알리 기자가 말했다. "여기 이렇게 죽치고 있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제 곧 새벽닭이 울 시간입니다. 배라도 채우러 갑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합시다." "그것이 좋겠소." 로드니가 찬성했다. "그전에 총경, 일단 솔로몬씨에게 전화라도 걸어서 몸조심하라고 일러두는 것이 좋지 않겠소? 또한 경호원을 붙여 두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아까 말했던 크롬이란 자에 대해서도 좀 더 조사해 두도록 하십시오." 핸더 총경은 로드니가 말한 대로 순순히 응했다. 그의 충고는 언제나 유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사람은 야간 영업을 하고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수사계의 그린 경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합니다, 총경님. 솔로몬씨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것 참 이상하군. 여기서 솔로몬씨의 자택까지는 불과 4~5분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핸더 총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크롬에 대해서는 뭔가 알아 냈소?" 이번에는 로드니가 물었다. "예, 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 냈습니다. 그는 그랜트 가의 633번지에 있는 한 창고에 실험실을 만들기 위해 그 창고를 빌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험은 화재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하여 허가를 내 주지 않자 구청에 찾아와 담당자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는 기록이 컴퓨터 조회 결과 나타났습니다." "뭐라구? 아니, 그까짓 일이 뭐 그리 재미있단 말인가? 그 따위는 알아 내 보았자 이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핸더 총경이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그 때, 갑자기 로드니가 말했다.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요, 총경. 그 녀석이 실험실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필시 그 창고에 방을 꾸몄을 것이오.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덴저 필더 씨를 가둬 두기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겠어요?" "아!" 핸더 총경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더군다나 크롬은 과학자이고 덴저 필더 씨의 편지에도 범인은 과학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크롬은 덴저 필더 씨에게 앙심을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총경, 이건 틀림없소." "좋다, 아무튼 가 보자!" 핸더 총경은 벌떡 일어났다. 신문 기자들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샘즈 비서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고 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핸더 총경과 로드니는 여러 명의 경찰과 함께 2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그랜트 가 633번지의 창고로 들이닥쳤다. 바로 그 때 아침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해맑은 아침해가 높은 빌딩 숲 사이로 내리비치기 시작했다. 핸더 총경이 4층 짜리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다. 원칙적으로는 수속을 밟아 수색 영장을 갖고 와야 하지만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다."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곰팡이 냄새가 확 코를 찔렀다. 텅 빈 널찍한 건물 안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군. 아무리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넓은 건물을 빌려 놓고 그대로 썩이다니." 총경은 이렇게 투덜투덜 혼자 지껄이면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모두 깜짝 놀라서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야?" 한쪽 구석에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커피 잔과 먹다 만 샌드위치가 쟁반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핸더 총경이 그 샌드위치에 손을 대 보았다. 커피 잔에도 코를 대고 벌름벌름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음, 이건 그다지 오래 된 것이 아니군. 아마도 어제쯤 먹다가 남긴 것일 거야. 그렇다면,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군!" 핸더 총경은 갑자기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재빠르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함께 온 그린 경감을 뒤돌아보았다. "어이, 자네는 아무나 한 사람 데리고 가서 계단을 지켜. 그리고 자네와 자네는 비상 계단과 뒷문을 지키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한 층 한 층 수색한다. 만일, 누군가 나타나면 체포하라, 만약 반항하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사살해도 좋다! 모두 알았나?" 경찰들은 바짝 긴장되었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범인은 이미 사라지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층에 다다르자 탁 하고 멈췄다. 총경을 앞세우고 모두 민첩하게 뛰어 내렸다. 복도에는 2개의 문이 있었다. 2개의 방이 모두 잠겨 있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안에는 휴지 조각 따위만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을 뿐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아냐. 위로 올라가 보자!" 모두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3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고나서야 비로소 로드니의 느낌이 옳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방 안에는 기다란 실험용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시험관과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리로 만든 기구들이 복잡하게 널려 있었다. 화학 약품 병과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도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군!" 총경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눈을 멈추었다. 그의 눈은 옆방과 연결된 샛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빼어 들었다. 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낮은 자세를 취하고는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낭패야! 문이 잠겨 있어서 꼼짝달싹하지 않아!" 바로 그 때였다. 그 문을 통해 실오라기같이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소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살려 주시오! 나는 덴저 필더요!" "역시!" 핸더 총경은 문을 열려고 어깨춤으로 쾅쾅 문을 부딪쳐 보았다. 그러나 두껍기만 한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총경은 큰소리로 그 쪽을 향해 외쳤다. "어이, 덴저 필더요? 경찰이오. 당신을 구하려고 왔소!" "고맙소! 빨리 여기서 꺼내 줘요." 덴저 필더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확실히 들렸다. "열쇠는 없나?" "없소. 잘 보시오 총경. 그 문에는 열쇠 구멍이 없지 않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로드니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문이다. 쓸데없이 크기만 한 손잡이가 달려 있을 뿐 열쇠를 꽂을 구멍이 없는 것이다. "빨리! 빨리!" 하고 문 저 쪽에서는 덴저 필더가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찌된 까닭인지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절박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때려 부숴라! 한꺼번에 몸으로 부딪쳐!" 핸더 총경이 명령했다. 전부 한 몸이 되어 쾅쾅 어깨로 문을 부딪쳐 보았으나 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깨만 아프고, 픽픽 튕겨 나가 넘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 저 쪽에서 덴저 필더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쿠, 그 놈이 온다. 안 돼! 여보게, 그만두라니까. 아아! 저 쪽으로 가! 그만둬, 그만두라니까, 악! 으윽! 사, 살려 줘!" 그것은 너무나도 소름 끼치는 오싹한 목소리였다. "어이, 덴저 필더! 괜찮소? 기운을 내요, 이제 곧 구해 줄 테니." 경찰관 하나가 어디서 찾아냈는지 공사장에서 쓰는 기다란 쇠 지렛대를 갖고 왔다. "좋았어, 그것을 문틈에 끼워 넣어라!" 그러나 문이 딱 들러붙어 틈이 없어서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겨우 지렛대가 들어갔다. "하나, 둘, 셋!" 세 사람이 덤벼들어 힘껏 힘을 모아 잡아당기자 튼튼한 문이었지만 마침내 삐꺽삐꺽 거리며 흔들렸다. 핸더 총경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한 채, "자, 한 번만 더 해 보자!"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결국에는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 모두 권총을 겨누고 방으로 우르르 밀어닥쳤다. 아니……. 모두가 멍청히 멈춰 버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 방은 문도 창도 없다. 천장에 창문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것은 너무 높기 때문에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었다. 방안에는 탁자와 의자, 그리고 침대가 있고 탁자에는 먹다 만 밥그릇이 놓여 있다. 틀림없이 사람이 있었던 증거다. 그런데 덴저 필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여우에 홀린 듯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저게, 저게 뭐야?" 모두 뒤돌아보았다. 방금 부숴 버린 문 바로 옆 마루 위에 양복이 한 벌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좀 이상했다. 사람이 입고 있는 채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옷을 입은 사람은 증발해 버리고 옷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핸더 총경이 허리를 굽혀 양복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그것은 5분 전에 멈춰 있었다. 5분 전이라면 경찰들이 이 문 앞에 와 있을 때다. 양복 안쪽에는 실크 와이셔츠가 단추가 하나 풀리지 않은 채 소매 또한 양복저고리의 소매를 따라 그 속에 가지런히 넣어진 채로 있고 목에는 넥타이도 아주 단정하게 매어져 있었다. 바지 자락 밑에는 구두가 놓여 있고 그 구두 속에는 양말이 들어 있었다. 아무도 숨소리 하나 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모두가 몸통 없는 양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알리 기자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마치 회오리바람이 몸통만을 쏙 빨아내 삼켜 버린 것 같잖아!" "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리가 없어! 틀림없이 함정이야. 함정일 거야." 핸더 총경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핸더 총경, 한 번 생각해 보셔요. 구두를 신고 있다가 구두끈을 묶은 채로 벗어 보십시오. 그건 불가능합니다." 루비 기자가 구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하나도 없질 않소. 저 꼭대기에 매달린 통풍용 둥근 격자 창문 사이로 연기처럼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확실히 그 따위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핸더 총경이 말을 이었다. "자, 거기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소? 여기에 있던 사람은 덴저 필더였어. 그건 확실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그의 양복이야. 이 양복점의 상표가 바로 그 증거지. 게다가 이것은 그가 항상 갖고 다니는 금딱지 만년필이고 시계에는 그의 이름의 머리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명함 꽂이도 있으니 말야." 핸더 총경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덴저 필더는 여기에 갇혀 있었던 것이 분명해. 그리고 그를 가둔 것은 틀림없이 그 크롬이라는 발명가야." "그러면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는 덴저 필더가 사라졌다는 그 사실입니까?" 하고 알리 기자가 끼어들었다. "그럼 설명하겠소. 이 양복은 우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기에 놓아 둔 것이오. 자, 양복 안쪽을 만져 보시오. 차갑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 경찰이 만져 보았다. "맞습니다 ! 얼음 덩어리처럼 찹니다!" "사람이 이것을 입고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온기가 남아 있어야 당연한 것이오." 핸더 총경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 문 안쪽에서 비명을 질렀던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카세트 녹음기요. 틀림없이 이 방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을 것이오. 크롬은 과학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소." "글쎄요, 총경." 하고 이번에는 로드니가 말했다. "아까 안에서 들렸던 소리는 비명 소리뿐만이 아니었소. 안쪽에서도 문을 쾅쾅 두드렸소. 카세트 녹음기였다면 문을 걷어 찰 리는 없지 않소?" "그건……." 총경은 말문이 막혔다. 로드니는 문을 가리켰다. "보시오. 문 아래쪽에 구두로 걷어 찬 자국이 있지 않소?" 모두가 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군! 구두에도 문에 칠해져 있는 것과 같은 페인트와 나무 부스러기가 붙어 있어." 알리 기자가 구두를 집어 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방에는 덴저 필더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사람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군." "좋아, 그럼 이 방의 벽을 철저히 살펴서 비밀의 통로가 있는가 없는가 조사해 봐!" 총경은 경찰들에게 명령했다. "그 벽을 부숴라!"   얼어 버린 잉크   경찰들은 재빨리 각목과 지렛대로 닥치는 대로 모조리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어느 새 온 방 안의 벽들이 너덜너덜 걸레 조각처럼 뜯겨져 버렸다. "허어, 이 벽은 이상한데." 로드니가 벽으로 다가가 보더니 말했다. 정말로 이상한 벽이었다. 맨 바깥쪽에는 나무 판자가 붙어 있었지만 그 안쪽에는 두꺼운 석면이 붙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석면 뒤에는 철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1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벽이 막혀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을까?" 루비 기자가 말했다. "응, 방음 장치를 할 때는 대개 이런 방법이 동원되긴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좀 지나치군."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벽이란 벽은 모조리 벗겨져 버렸지만 끝내 비밀의 통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보라구! 역시, 내가 말한 대로야. 여기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핸더 총경이 크게 외쳤다. 그리고 로드니가 아까부터 덴저 필더의 만년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이, 로드니! 뭘 가지고 애들처럼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나?" "장난이 아니오. 이 만년필이 써지나 안 써지나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오." "그게 장난이지 뭔가?" "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로드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만년필을 열어 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잉크가 들어 있는 고무 튜브를 싹둑 잘라 버렸다. "어이 이봐, 뭐 하는 짓이야!" 핸더 총경이 보다 못해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로드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잘라 낸 튜브를 손바닥 위에 거꾸로 세우자 그 속에서 작은 대롱 같은 것이 나왔다. 보고 있던 사람이, '저건?'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잉크가 나온 것이 아니라 괴상한 것이……. "뭡니까, 그게?" 누군가가 물었다. "잉크요." "고체 잉크인가요?" "아니오. 얼어 버린 것이오." "그런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루비 기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 방은 이렇게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더운데 말예요. 잉크가 얼어 버릴 까닭이 없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어 있으니까 이상한 거죠. 어쩌면……." "어쩌면, 뭡니까?" "여기에 덴저 필더가 실종된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오." "어이 어이! 여보게들!" 핸더 총경이 옆에서 소리쳤다. "그 따위 쓸 데 없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자네들을 여기에 내버려두고 갈 테야. 우리들은 지금부터 크롬의 집을 완전 포위하고 체포하러 갈 참인데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갑니다, 가요!" 알리와 루비 두 사람은 허둥지둥 총경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로드니는 여전히 그 언 잉크 대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미치광이 과학자   이윽고 핸더 총경 일행이 발명가 앨버트 크롬의 아파트에 당도했다. 총경의 연락을 받은 무장 경찰들이 이미 아파트 주위를 이중 삼중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이제 크롬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핸더 총경이 노크를 했다. 자세히 보았더니 이 문도 역시 아까 그 실험실의 문과 똑같은 두껍고 열쇠 구멍이 없는 그런 문이었다.   "누구요?" 억지로 목소리를 죽인 듯한 낮은 소리가 들렸다. 총경은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거짓 대답을 했다. "육군 본부에서 온 하더 대위입니다. 당신의 발명을 기필코 사들이라는 상부의 지시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문 안쪽에서 껄껄대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것 참 고마운 얘기군. 곧 열어 드리지." 핸더 총경은 뒤에서 명령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문이 열리면 일제히 들이닥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크롬은 그런 수작에 넘어갈 멍청이가 아니었다. 갑자기 문에 붙은 좁다랗고 기다란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곳을 통해 매서운 눈초리를 한 남자가 밖을 내다보았다. 언저리가 짓물러 터진 왠지 기분 나쁜 그런 눈이! "경찰, 이런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남자는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창문으로 뭔가 새하얀 연기를 내뿜는 물건을 내던졌다. 총경은 창문을 향해 권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창문이 콱 닫혀 버린 지 오래다. 총알은 탕탕 튕겨 버렸다. 그 순간 핸더 총경이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그 하얀 연기를 들이마신 순간 숨이 막히고 눈이 따끔따끔 아파 온 것이었다. 가스다. 최루탄 가스다! "조심해, 모두! 가스니까!" 그는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뒤에 있던 부하들도 우르르 후퇴했다. 그러나 최루탄 가스는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어느 새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최루탄 가스 때문에 큰 난리가 났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콜록콜록 기침을 하느라고 온통 수라장이 되었다. 알리 기자도, 루비 기자도 눈을 가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단지 로드니 탐정만은 처음부터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피할 수가 있었다. 잠시 물러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과학자 크롬의 첫 번째 작전은 멋들어지게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소방차가 왱왱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다. 커다란 대형 선풍기를 꺼내더니 독가스를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가스 마스크가 경찰들에게 지급되었다. 지렛대와 긴 각목을 든 1개 중대의 경찰들이 다시 문으로 접근했고 그 옆에는 카빈총으로 무장한 2~3명의 경찰들이 따랐다. 만약 크롬이 또 다시 독가스를 던지려고 하면 한 방 먹여 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크롬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문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저마다 손에 권총을 치켜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없잖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넓은 실험실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약품 병이 깨지고 여러 가지 장치와 기구가 여기저기 마룻바닥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크롬의 모습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도 문도 하나 없는데 또 다시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울려 퍼지는 총 소리   "또 없다구! 그 따위 당치 않은 일이 있나! 이번에는 내가 이 두 눈으로 크롬을 똑똑히 보았단 말이야!" 핸더 총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몹시 화가 나서 고함을 쳐댔다. "반드시 이 방 어딘가에 도망칠 만한 곳이 있을 것이다. 생쥐 구멍 하나 빠뜨리지 말고 모두 분담해서 찾아라. 알았나!" 경찰들은 벽이며 마룻바닥이며 할 것 없이 각목으로 쿡쿡 찌르기도 하고 지렛대로 때려부수기도 하며 비밀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어머, 저런 곳에 모르모트(실험용 흰 쥐)가 있다니." 루비 기자가 손으로 가리켰다. 현관문 바로 옆에 새장이 있고 그 안에는 3마리의 모르모트가 찍찍 울어대며 야단을 떨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로드니 탐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실험용이겠죠?" "그렇긴 하지만, 무슨 실험일 것 같소?" 그 때 실험실 한쪽 구석에 있던 전화가 따르릉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경찰이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대더니 곧, "총경님, 전화입니다." 하고 말했다. "내 전화? 어디서 왔을까?" 핸더 총경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속에서 쉰 목소리가 괴상하게 들려왔다 "고생이 많군. 당신들이 거기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나는 밖으로 나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지. 이 다방 참 멋진 곳이군." "앗! 당신은 크롬!" "그렇소. 이제 일러 주지. 그 방 북쪽 구석에 비밀 지하도가 있네. 나는 그 곳을 통해 빠져 나왔지." 그리고 전화가 딱 끊겨져 버렸다. 핸더 총경은 수화기를 마룻바닥 위에 내동댕이쳤다. "저 쪽 구석이다! 저기 지하도가 있어. 그 놈은 그 곳으로 살짝 도망쳐 버린 거야!" 경찰들이 달려들어 쇠지레대로 때려 부쉈다. 그러자 벽이 빠끔히 열리고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따라와!" 핸더 총경이 앞장서서 어두컴컴한 비밀 통로로 내려갔다. 뒤따라서 경찰들이 뛰어들었다. 로드니와 알리 기자도 그 뒤를 따랐다. 비밀 통로는 바로 넓은 지하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는 커다란 차고였다. 네댓 대의 차가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죽 늘어서 있고 출구에는 커다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나쁜 놈! 크롬 이 자식, 이런 곳에 이렇게 거대한 차고를 갖고 있다니!" 핸더 총경은 놀라서 혀를 찼다. "어딘가에 출입문을 열 수 있는 단추가 있을 거다. 찾아봐라!" "있습니다. 여깁니다!" 한 경찰이,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단추를 눌렀다. 하지만 셔터는 꼼짝도 않았다. "거 참 이상하네. 고장났나?"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로드니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상하오! 이건 함정이오, 총경. 놈은 아직 이 집 어딘가에 있소. 우리들을 이 차고에 몰아 넣고 몽땅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이오." 경찰들은 오싹 소름이 끼쳐 꼼짝 않고 있었다. "돌아가자!" 핸더 총경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바람 하나 들어올 틈새도 없을 정도로 꼭 닫혀 있던 셔터 문이 소리 없이 약간 열리더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불길과 함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따다다닷! 따다다닷! 기관총이다! "윽!" 한 명의 경찰이 몸을 뒤로 젖히며 풀썩 쓰러져 버렸다. "윽!" 핸더 총경도 비틀거리며 오른손으로 감쌌다. 총탄에 맞은 것이다. 그러나 총경은 팔을 감싸면서 명령했다. "모두 바닥에 엎드려. 반격해라!" 계속 쏘아대는 총성이 지하실 천장에 울려 퍼져 흡사 지옥을 방불케 하는 대소동이었다. "안 되겠다. 기관총을 당해 낼 수가 없으니 지원병을 불러라!" 한 경찰이 벌떡 일어나더니 통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그 뒤를 향해 기관총의 총탄이 비 오듯이 퍼부어 댔다. "아악!" 경찰은 통로 바로 앞에서 튀어 오르더니 풀썩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로드니 탐정이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비 오듯이 퍼붓는 기관총 세례 속을 쏜살같이 돌진하며 통로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2분 후에 그는 수류탄 상자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뒤집혀 있는 자동차 뒤쪽으로 뛰어가더니 수류탄을 한 개 집어 들었다. 안전핀을 빼더니 맹렬하게 불길을 내뿜는 비밀 출입문을 향해 내던졌다. 로드니는 전에 프로 야구에서 투수로 활약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수류탄은 정확히 통로 속으로 떨어졌다. 꽈, 꽝! 통로 입구에서 오렌지 색 불길이 솟아올랐다. "아-악!" 고통스러워하는 비명 소리가 총성 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해치워라!" "좋았어, 그렇다면 나도……." 다른 경찰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크롬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고 했다. 아까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던 것이다. "앗, 그렇게 하면 안 돼! 될 수 있으면 크롬을 생포해야 한단 말이오." 로드니가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꽈-과-꽝! 꽝! 꽝! 출입구는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느새 다 타 버렸다. 연기가 점점 사라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관총 소리가 울려대던 출입문은 엉망진창 말이 아니었다. 기관총은 더 이상 불을 뿜지 않았다. "이젠 괜찮겠지." 경찰들은 권총을 거머쥐고 앞으로 나갔다. 출입문 바로 안쪽에 시체 하나가 무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미치광이 과학자 앨버트 크롬의 처참한 최후였다.   사라진 모르모트   싸움은 끝났다. 부상자가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다. 중상을 입은 핸더 총경 대신에 그린 경감이 경찰 기동대를 지휘하며 크롬의 실험실 안을 구석구석까지 조사했다. 덴저 필더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니는 실험실 구석에 이상한 상자 모양의 기계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상자와 그 옆에 있는 변압기가 서로 코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기계 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이게 뭘까?" "폭탄일지도 몰라. 조심해. 폭발물 처리반이 올 때까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그렇지만, 전선을 끊어 놓는 게 좋지 않습니까?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한 경찰이 말했다. 그린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전선을 끊어 버릴 참이었다. 바로 그 때 로드니는 우연히 모르모트가 들어 있던 새장을 보고 있었다. 경찰이 전선을 끊어 버리자 갑자기 그 기계에 치직하며 불이 붙었다. "앗! 위험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두 그 기계 곁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기계는 폭발하지 않았고 윙윙 소리만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로드니는 문득 새장 속에 있는 모르모트들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히스테리를 일으킨 듯이 새장 속을 맴돌고 있던 모르모트들이 갑자기 딱 멈춰 섰다. 그러는가 했더니 순식간에 작아지기 시작했다. 로드니는 잘못 보지나 않았나 하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벼 보았다. 그러나 틀림없다. 모르모트는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이, 여보게들 이것 좀 봐!" 로드니가 외치는 소리에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알리 기자와 루비 기자도 어느 틈에 달려와 새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모르모트가……." 하고 말하던 로드니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모르모트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모르모트가 도망쳤잖아. 아까 서로 총질할 때 파편이라도 날아와 새장의 창살을 망가뜨려 도망 쳤겠지 뭐." 알리 기자가 말했다. "그게 아냐! 모르모트는 마치 얼음덩어리가 녹듯이 작아지더니 마침내는 사라져 버렸단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경찰들이 웃었다. "미치광이 과학자의 실험실에 있더니 핑커튼 탐정소의 명탐정까지도 이상해져 버린다면 곤란하지." 그린 경감이 빈정댔다. "아무튼, 우리들은 그 따위 잠꼬대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어. 덴저 필더의 행방을 찾아 내는 것이 급선무이니 말일세. 자,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일해!" 경찰들은 다시 흩어졌다. 로드니 혼자만이 새장 앞에 남았다. 그는 살짝 새장의 창살에 손을 대 보았다. 지독하게 차가웠다. 그리고, 마치 냉동실에서 막 꺼낸 차디찬 얼음 덩어리에 손을 대면 척 달라붙듯이 손이 창살에 달라붙어 버렸다. "에잇!" 억지로 손을 떼려고 하다가 손가락 끝의 살갗이 약간 벗겨져 피가 맺혔다. 그리고 난 다음 로드니는 새장 속에 들어 있는 물통에 관심을 가졌다. 물통 속에 들어 있는 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더군다나 새장의 창살에는 어디 한 군데고 모르모트가 도망칠 만한 구멍이 없었다. 그런데도 모르모트들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 된 노릇일까? 그 때 멋진 생각이 로드니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 바로 그거다!   절대 0도   "로드니 탐정님! 왜 그렇게 멍하니 서 계십니까!" 뒤에서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루비 기자가 서 있었다. "아아, 루비 기자로군. 당신은 절대 0도란 것을 알고 있소?" "절대 0도라구요!" 루비 기자는 물끄러미 로드니를 마주 쳐다보았다. 언제나 침착하며 머리도 좋고 남자다운 로드니인데…… 루비 기자는 갑자기 걱정이 되어 로드니 탐정의 안색을 살폈다. "로드니 탐정님, 당신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소. 나는 미친 게 아니오. 단지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요. 당신도 학교에서 배웠을 거요!" "그 정도는 배웠죠. 마이너스 273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기라도 한가요?" "있지!" 로드니는 갑자기 힘 주어 말했다. "이야기해 줄 테니 잘 생각해 봐요. 덴저 필더는 분명히 출구가 없는 방 안에 있었소. 그런데 방문을 열었을 땐 그림자 하나 없었소. 그렇지요?" "예, 그래요. 그리고 양복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어요." "그 옷은 얼음덩이처럼 차가웠었소. 만년필 속에든 잉크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말이오. 시계도 태엽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멈췄던 거요." 로드니는 눈을 반짝이며 눈앞에 텅 빈 채로 매달려 있는 새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속에 있던 모르모트는 실제로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소. 잘 봐요, 저 물통 속을. 얼음이 얼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내가 이 새장을 만졌을 때 얼마나 차가운지 손가락이 들러붙어서 상처가 나 버렸을 정도였소. 자, 보라구요."로드니는 피맺힌 손가락을 루비 기자에게 보였다. "즉, 이 새장 속도, 덴저 필더 씨가 있었던 그 방 안도 모두 절대 0도가 되어 버렸었다는 겁니까?" "맞았소!" "하지만 덴저 필더 씨나 모르모트가 없어진 것과 그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이에요!" "잘 들어봐요." 로드니는 마치 학교 선생이 학생에게 가르치듯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루비 기자는 모든 물질은 분자라고 하는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요?" "예,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열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자가 운동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을 테지요!" "예." "즉, 온도가 높다는 것은 분자의 운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운동이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부피가 커지게 되지요. 반대로 분자의 운동이 느려지면, 즉 온도가 내려가면 물질은 작아지게 됩니다. 절대 0도라고 하는 것은 분자가 전혀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분자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사라져 버리고……, 즉 지금 본 것처럼 말이오!" 루비 기자는 로드니가 하는 이야기가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이상해요. 여기 존재하고 있던 물질이 사라져 버리다니……." "이해를 못 하는군요! 우리들이 물질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원자와 전자 그리고 분자의 운동이란 말이오. 그 운동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물질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오. 이것은 이미 사실로 인정된 이론인 거요." "그렇다면 결국 크롬은……." "크롬은 그 운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거요! 덴저 필더도 모르모트도 그 방법으로 없애 버린 거지요. 그래서 잉크나 물이 얼어 있었던 거요!" 루비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잠시 후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드니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로드니 탐정님. 나는 그런 괴상한 이야기를 신문에 실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이상한 기사를 쓴다면 신문은 팔리지도 않을 것이고 나는 편집국장에게 야단만 맞을 거예요. 아마 신문사에서 쫓겨날지도……." 로드니는 울화통이 터져 고래고래 한바탕 난리를 치르더니 도중에 그만둬 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드니 탐정님, 너무 지치셨나 봐요. 댁에 돌아가셔서 좀 쉬셔요, 네!" 로드니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루비 기자는 '더 야단 맞기 전에 가 버리는 게 좋겠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슬슬 꽁지가 빠지라고 도망쳐 버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로드니는 맥없이 꾸물꾸물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실험실을 나왔다.   은행장도 사라지다   로드니는 핸더 총경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총경은 침대 위에 누워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어깨부터 팔까지 새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까짓 정도의 상처 때문에 주저앉을 총경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 전화통을 갖다 놓고 계속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부하를 야단치기도 했다. 로드니가 들어서자 눈으로만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 몸통은 없고 양복만 달랑 발견된 그 방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시켰지만 비밀 통로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어. 정말 이상한 사건이야." 그 때 또 전화가 울렸다. 핸더 총경이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총경이 호통을 쳤다. "좋아. 먼지 하나 건드리지 말고 사진으로 찍어 둬라. 감식과에 있는 사람을 빨리 보내고 지문을 채취해. 시계를 잘 조사해 보고 몇 시에 멈춰 있는가 즉각 보고해라!" 총경은 후- 하며 한숨을 쉬더니 로드니를 뒤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뭔가 무서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놀란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솔로몬의 옷이 발견됐어." "옷이!" 로드니는 양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렇다네." 총경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만 말이야. 솔로몬의 옷이 자기 승용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하는군. 마치 여태껏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녹아 버리고 옷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하며 구두도 브레이크 위에 놓여 있다고 하는군." "즉, 덴저 필더 씨와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것 하나 다른 것 없이 그대로란 말이군요!" "그렇지." 그 때 또 전화가 울렸다. 핸더 총경은 전화를 받더니 다시 말했다. "좋아, 알았어." 그리고 로드니를 뒤돌아보았다. "시계는 10시 13분에 멈춰 있다고 하는군. 너무나 차가워서 시계가 얼어붙어 멈춘 것 같다는 거야." 로드니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한결같이 똑같군요. 총경, 내 생각을 듣고 싶지 않으신가요." 핸더 총경은 피식 웃었다. "절대 0도가 어쩌고 분자가 어쩌고 그런 이야기라면 벌써 루비 기자에게 들었네." "당신도 믿지 않는 건가요!" "다른 때 같았으면 물론 믿겠지만, 이번만은 자네의 의견을 전혀 믿고 싶은 생각이 없네. 아무리 대 발명가라고는 하지만 한 인간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 두 눈으로 모르모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다." "그런 거라면 나도 마술사가 하는 것을 보았지. 그와 비슷한 것을 말이야. 분명히 거기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기도 하고 또한 사람을 톱으로 두동강 내기도 하는 것을. 하지만 모두 속임수를 쓰는 것이야." 로드니는 어깨를 움츠리며 형사 콜롬보의 흉내를 냈다. 그것은 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알았소, 총경. 그런데 그 솔로몬의 옷은 어디서 발견됐다고 합니까?" "71번 가와 보일 가가 만나는 로터리라는군." "아직 그대로 두었겠죠!" "그대로일 걸세. 이번에야말로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 감식과 사람이 갈 때까지는 절대로 그 주위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명령해 두었으니까. 자네가 그 곳으로 간다면 그린 경감에게 내가 전화를 해 주지."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 " 로드니는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와 곧바로 자동차를 그 쪽으로 몰았다. 현장 근처에는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찰이 줄을 쳐 놓았다. 하지만 로드니는 쉽게 통과할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모두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 경감이 현장에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참 묘합니다. 솔로몬씨가 집에 돌아오자 마자 어딘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씨는 전화를 받았고 통화를 마치자마자 부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밖으로 나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 전화는 어디서?"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태도는?" "왠지 매우 흥분되어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현관문이 부서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 이상은 아직 경찰도 모르고 있었다. 로드니는 그린 경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곧 솔로몬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루비도 사라졌다   솔로몬 씨의 저택은 은행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치 성과 같이 으리으리했다. 그렇지만 저택 안은 신문 기자, 카메라 맨, 형사들로 북적거렸다. 로드니는 솔로몬씨의 부인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그녀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의식이 흐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망한 나머지 되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어엇, 이상하네!' 신문 기자들 가운데 당연히 있어야 할 루비 기자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비록 여자이긴 하지만 그토록 취재에 열을 올리는 루비 기자가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로드니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루비 기자마저도…….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나 않은 것일까? 기자들을 붙들고, "루비 기자 못 봤나?" 하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못 봤다는 말뿐이었다. 루비를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때 한 경찰이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로드니 씨, 전화 받으셔요." 로드니는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로드니 탐정님!" "야, 이거! 루비 기자!" 로드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루비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평상시는 훨씬 침착했는데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뭔가에 쫓기는 듯 다급해 하는 것 같았으며 매우 빠르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로드니 씨. 제 말 잘 들으셔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제가 솔로몬 씨 집에 가지 못한 것도 그 쪽을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인 거예요." "대체, 뭘 조사하고 있었다는 거요!" 로드니는 안달이 나서 물었다.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어요. 로드니 씨, 당신이 말한 것처럼 만약 절대 0도로 인간을 녹여 버리려면……. 머리카락에 뭔가 가루를 뿌립니까?"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이봐요, 루비 기자,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오!" "아니에요! 빨리 가르쳐 주셔요.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 예요." "그렇긴 하지만 나도 역시 알지 못해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생각하는 거죠?" "왜냐 하면 말이에요, 제가 보았어요. 솔로몬 씨의 머리에 그런 가루가 묻어 있었던 것을. 그리고 잠시 후에 솔로몬 씨가 몸부림치며 머리를 쥐어뜯었어요." "하지만 그것과 사건이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실은 제 머리카락에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가루가 묻어 있지 뭐예요. 머리를 깨끗이 감긴 했지만 아까부터 점점 몸이 차가와 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뭐, 뭐라구!" 로드니는 펄쩍 뛰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죠?" "제 아파트예요. 아아…… 역시 당신 생각이 맞았어요. 절대 0도예요. 아아, 로드니 씨, 이제 말이 잘 안 나와요. 추워요. 너무 추워요. 너무……." 루비 기자의 목소리는 거기서 뚝 끊어졌다. "이봐요, 루비 기자! 루비 기자! 어떻게 된 거야!" 로드니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전화에서는, 톡, 톡. 하는 가느다란 소리뿐이었다. 그것은 코드에 대롱대롱 매달린 수화기가 흔들려 벽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로드니는 수화기를 내팽개치고는 마치 불도저처럼 사람들을 밀쳐 버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 그 넓은 저택을 뛰쳐나와 차에 올라타고는 핸들을 잡았다. 액셀레이터를 밟자 차는 로켓처럼 굉음을 내며 질주했다. 커브 길에서 전봇대에 부딪칠 뻔했으나 용케도 빠져나갔다. 그리고 똑바른 길을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해!" 차는 4~5분만에 루비 기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로드니는 아파트로 뛰어들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복도로 뛰어 내렸다. 루비 기자의 방 앞에 오자마자 두 주먹으로 문을 마구 두드려 댔다. "이봐요, 루비 기자! 루비 기자! 나야, 로드니야. 괜찮아?" 대답이 없었다. 로드니는 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서 돌려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거실을 지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전화가 놓여 있었다. "아니?" 전화의 수화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다음 순간 로드니는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그 전화 바로 밑에 한 벌의 여자 옷이 헝클어져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에 본 적이 있는 루비 기자의 옷이었다!   또 다시 옷만이   이게 웬일인가? 루비 기자마저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로드니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루비 기자의 옷을 조사해 보았다. 틀림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담뱃불을 붙였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덴저 필더를 절대 0도를 만드는 장치로 사라지게 한 것은 틀림없이 그 미치광이 크롬이다. 하지만 크롬은 죽어 버렸는데, 오늘 아침에는 솔로몬 씨 그리고 루비 기자마저도 똑같은 꼴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악마와 같은 범인이 아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것이 과연 누굴까? 로드니의 머리는 컴퓨터처럼 회전이 빨랐다. 아까 루비 기자는 솔로몬 씨의 머리에 뭔가 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고 했다. 루비 기자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다. 덧붙여서 그녀는 이런 말도 했던 것이다. 틀림없이 아까 내가 말했던 절대 0도로 인간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루비 기자의 머리에도 그 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리고 로드니에게 전화하고 있는 동안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도대체 루비 기자와 말을 나눈 상대는 누군가? "아! 그렇지!" 로드니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무엇인가가 그의 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오른쪽으로 돌아서더니 루비 기자의 방을 뛰쳐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마저 없다는 듯 계단을 달려 순식간에 일층까지 내려왔다. 단 세 걸음에 밖으로 뛰어나와 차에 오르는가 싶더니 벌써 차는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앗, 위험해! 이봐, 빨간 불이란 말야!" 교통 순경이 로드니의 차를 보더니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불구하고 로드니는 전 속력으로 맹렬하게 차를 몰아 질주했기 때문이었다. 반대편 쪽에서 오던 차들이 질겁을 하고 핸들을 꺾어 피했다. 로드니의 차는 마치 회오리바람을 방불케 하듯 쌩 하고 교통 순경 앞을 지나치더니 그 다음 로터리에서도 또 그 다음 로터리에서도 신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날쌔게 달려갔다. 마침내 진범을 알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절친한 친구였던 루비 기자의 원수를 때려잡는 거야! 로드니의 얼굴은 마치 도깨비 얼굴같이 붉게 상기되었다. 마침내 차가 주택가에 들어섰다. 그라고 어떤 커다란 저택 앞에 끼익 하고 급정거를 했다. 그 곳은 덴저 필더 씨의 저택이었다. 로드니가 초인종을 마구 눌러대자 가정부가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샘즈 비서 있소?" "계시긴 합니다만 무슨 일로!" "만나고 나서 이야기하죠." 로드니는 가정부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가정부가 정색을 하며 로드니 앞을 가로막았다. "이러시면 안 돼요, 손님. 제가 먼저 손님이 오신 사실을 샘즈 씨에게 전한 다음 그분의 승낙이 있어야만……." 로드니는 가정부 따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이층에 있는 샘즈의 방으로 올라갔다. "기, 기다리세요!" "시끄럽소!" 로드니는 가정부를 확 밀쳐 버렸다. 가정부는 안간힘을 다해 로드니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으며 결국 마음을 바꿔 먹은 것 같았다. 휙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안쪽으로 가 버리는 것이었다. 로드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샘즈 방 앞에 이르자 온 집 안이 쩡쩡 울릴 정도의 고함을 질렀다. "나와라, 샘즈!"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로드니는 문을 열었다. 없는 것 같았다. 침실을 나와 욕실을 지나서 그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책상 앞에 있는 긴 의자 위에 한 벌의 양복만이 길게 엎드려 누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샘즈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역시 거기 누워 있던 사람의 몸통만이 사라진 것 같은 상태였다. 샘즈까지도……. 로드니는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아까 샘즈가 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으로 달려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샘즈마저 이 꼴이 되었으니 그의 생각은 빗나가고 만 것이었다. 설마 범인이 자기 자신을 사라지게 할 리는 없다. 진범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 놈이 루비를 없애고 나서 샘즈를 덮친 것이다. 그리고 샘즈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밀퍼스 가 6372번지   로드니는 샘즈의 양복을 조사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양복 안쪽 주머니에 메모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드 로드니, 루비 오만, 밥 샘즈. 이 세 사람은 기어코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릴 것이다. 우리를 방해하는 놈들은 모두 이렇게 될 것이다. 덴저 필더도, 솔로몬도 물론 우리가 죽였다.   형체 없는 악마의 도전장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다. 로드니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샘즈의 양복 주머니를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계, 담배 케이스, 라이터, 만년필, 열쇠, 지갑. 지금까지와 좀 색다른 것은 이것들이 차갑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지갑을 열어보았다. 지폐 외에 여러 가지 서류 같은 것이 나왔다. 로드니는 그 중 한 장을 눈여겨 보았다. 그것은 운송 회사의 영수증이었다. 읽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워싱턴 블루바드 753번지에 사는 앨버트 크롬이 밀퍼스가 6372번지에 사는 사무엘 글로브라고 하는 사람에게 기계 한 대를 보내 주었다고 쓰여 있었다. 로드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크롬이 보낸 기계의 영수증을 어째서 샘즈가 갖고 있는 것일까? 사무엘 글로브라는 사람은 또 누군가? 그 다음에 로드니는 담배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담배가 들어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담배였다. 그는 한 개피를 집어 부러뜨려 보았다. 담배 가루가 마룻바닥에 쏟아졌다. 바로 이거다! 담배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이것이 루비가 말한 그 가루인 것이다. 그 담배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은 로드니는 일어섰다. 그리고 문으로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아까 그 가정부가 큰 권총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물러섯! 두 손을 머리에 올려! 허튼 수작 부리면 머리통에 바람 구멍을 내 버릴 거야." 가정부는 기분 나쁜 눈초리로 로드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 젖혔다. "아, 하하핫! 이봐, 농담은 이제 그만 집어치우시지." "입 닥쳐! 손 들라는 말, 안 들려!" 로드니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거기에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쿠션이 하나 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위에 주저앉았다. "자아, 어서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줘." "안 돼! 셋 셀 동안 손을 들지 않으면 진짜 쏘겠다!" "하지만 나는 권총도 아무것도 없지 않소. 그런데 뭐 그렇게까지……." "하나, 둘." "이봐,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셋." 로드니는 일어나 손을 드는 척하다 갑자기 쿠션을 집어 들고는 그녀를 향해 내던졌다. 탕! 푹! 총알이 로드니의 귀를 스쳤다. 그리고 두 번째 총알은 쿠션에 날아가 박혔다. 세 번째 총을 쏘기 전에 로드니가 달려들었다. 가정부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로드니는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아랫배에 한 방 먹였다. 가정부는 깩하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로드니는 권총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가정부를 그대로 둔 채 집에서 뛰쳐나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밀퍼스 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곳에 있는 사무엘 글로브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드니는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밀퍼스가 6372번지에 도착했다. 그 곳은 조용하고 낡은 주택가였다. 그는 돌층계를 단숨에 달려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다. 비었나? 그 때 후닥닥 달려가는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집 안에서 들렸다. 다음에는 쿵쿵쿵 하며 큰 발자국 소리가 그 뒤를 쫓아가는 듯했다. 그러더니 "까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로드니는 재빨리 좌우를 살펴보았다. 문 옆에 창문이 있었다! 달려가 쓱 열어봤더니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히도 스르륵 열렸다. 그는 창문을 기어올라가 방 안으로 뛰어 내렸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더니 이층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그는 계단을 올라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였다. 뭔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주 조금만 머리에 뿌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가씨. 아프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아. 먼젓번에는 이 가루를 씻어내 버렸지만 이번에는 그렇게는 안 될걸." 여자가 뭐라고 대꾸했다. "응 그래 맞아. 이 발명을 한 사람은 크롬이지. 나는 크롬에게 이 발명품을 완성하게 했지. 물론 덴저 필더를 유괴한 것도 모두 내가 방법을 일러 준 거라구." 남자는 거기서 후후 하고 기분 나쁜 소리로 웃었다. "크롬이 죽기 전에 나는 물질을 절대 0도가 되게 하는 가루를 만드는 기계 한 대를 훔쳐내 여기에 갖다 놓았던 거야. 솔로몬을 죽인 것이 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로드니는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방 쪽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지금쯤 로드니 씨가 이리로 오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저 목소리는……. 루비 기자가 아닌가! 그러자 남자가 다시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당신과 로드니 그리고 나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협박장을 내 양복 주머니에 넣어 두고 왔거든. 그리고 마치 나도 사라져 버린 것처럼 해 놓고 왔단 말씀이야. 로드니는 내가 이미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이제 당신만 죽여 버리면 나는 자유야. 이제부터는 부자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릴 테야. 그래도 나는 의심받지 않겠지. 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인간이니까 말야." 샘즈다! 역시 샘즈가 범인이었던 것이다! 샘즈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 자, 고통은 없을 거야. 춥다는 생각이 들자 마자 죽을 꺼야. 그리고 몸의 세포가 녹기 시작하고 사라져 버릴 테니까. 이 가루를 당신 머리카락에 뿌리면……." 로드니는 쓰윽 문을 열었다. 샘즈가 뒤돌아보았다. 로드니는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아, 샘즈 아닌가! 아니, 이게 웬일인가!" 샘즈는 섬뜩하면서도 겉으로는 어느새 태연한 모습을 하고 머릿속으로는 잔꾀를 꾸미고 있었다. 활짝 웃음을 짓고는, "그럴 만한 깊은 사정이 있어서요, 로드니 씨. 그게 말이죠……." 하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로드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드니도 방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슬쩍 몸을 피하면서 샘즈에게 강펀치를 한 방 먹였다. "윽!" 어느 틈에 주머니 속에서 꺼냈던 권총이 탁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샘즈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 새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로드니를 한 방 걷어찼다. 그리고 로드니가 깜빡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옆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로드니 씨!"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는 순간, 루비 기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로드니는 뒤돌아보았다. "루비! 당신 무사했군요!" "로드니 씨, 머리 좀 이렇게 해 보세요! 가루 묻지 않았어요? 근질근질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가렵지도 않구요." 로드니가 물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로드니는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던 권총을 집어들고 문으로 다가섰다. "항복해라, 샘즈! 이젠 도망칠 수 없다!" 대답 대신에 문 안쪽에서 굉장한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해서 홱 물러서자 기관총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곧 경찰이 올 거예요. 그 때까지 기다려요." 루비가 말했다. 두 사람은 두텁고 긴 의자를 쓰러뜨려 바리케이드를 치고는 그 뒤로 숨었다.   악마의 최후   "고마와요, 로드니 탐정님. 당신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로드니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역시, 루비 기자답군요. 그러면 당신 방에 있던 그 옷은 뭐지요?" "이제, 말씀드리죠." 루비 기자가 말했다. "로드니 씨가 생각하고 계셨던 그대로였어요. 크롬은 생물을 녹여 버리는 방법을 발견한 거예요. 어떤 특수한 전류를 통하게 하면 사람 몸의 분자는 절대 0도가 되며 그 전류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리는 거죠. 하지만 녹여 버리려면 화학 약품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돼요. 크롬은 그 가루를 발명한 것입니다." "가루……. 아아, 당신이 조금 전에도 걱정했던 그 가루 말인가요?" "맞아요. 그 가루를 머리에 뿌리면 그것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신경에 영향을 끼쳐 전류가 잘 흐르도록 하는 것이죠. 샘즈는 그 가루를 담배 속에 넣어 항상 갖고 다녔죠. 그리고 재를 터는 척하면서 없애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머리에 묻히는 것이죠." "그랬었군!" 로드니는 그 담배 케이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당신이 해 준 이야기를 샘즈에게 했거든요. 그랬더니 샘즈가 담뱃재를 터는 척하면서 내 머리에 묻혔던 거예요. 그 순간 퍼뜩 솔로몬 씨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도 머리에 재 같은 것이 떨어진 다음 잠시 후에 사라져 버렸거든요." "음! 샘즈는 당신이 완전히 알아차리기 전에 죽이려고 생각했던 거요. 그래서 당신은 샘즈가 진범이란 것을 알게 되었군요!" 루비 기자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음에는 왠지 머리가 자꾸 가려웠어요. 그래서 깜짝 놀라 머리를 감고 또 감고 해서 깨끗이 씻어 냈어요. 그리고 계략을 꾸몄죠. 옷만 남겨 두면 샘즈는 나를 없애 버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그래서 먼저 옷을 그런 식으로 놓아두고 나서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죠." "과연." "그런데 깨끗이 씻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약간 묻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에 몸이 차가워지더니 결국은 의식을 잃고 말았어요. 이젠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샘즈의 차 안에 있지 뭐에요. 샘즈는 성공했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 아파트에 왔던 것이죠." "아, 그랬군요 ! 이제 모든 걸 알겠소. 그래서 그 다음 샘즈는 자기도 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런 잔꾀를 부린 것이군요." 로드니는 굳게 닫힌 방문을 계속 지켜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왜 여태 샘즈가 진범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참 이상하죠? 제일 처음, 우리들이 덴저 필더 협박장 때문에 모였을 때 누군가가 우리가 한 이야기를 도청하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했던 일이 있었지요. 그것도 역시 생각 해 보면 샘즈가 가장 수상했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거요. 왜냐 하면 그 때 모였던 다섯 사람 중에서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샘즈 뿐이었기 때문이죠." "그 말도 그럴 듯하네요……." 루비 기자가 혀를 낼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들은 범인과 미주알고주알 의논하면서 그 범인을 잡으려 했으니 우습군요."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 범인이 이번에야말로 잡히겠지." 로드니가 말했다. 그 순간 샘즈가 있는 방에서 윙 하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는 뭐지요?" "앗! 어쩌면……" 루비 기자가 벌떡 일어났다. "위험해요. 나오면 당해요!" "하지만……. 틀림없이 샘즈는……."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벌일 때 복도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무장을 한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샘즈는 저 문 안에 있소. 하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소." "좋아, 총을 쏴서 부숴라!" 지휘자가 명령했다. 경찰들은 총구를 문에 겨냥하더니 일제히 발사했다. 따, 따, 따, 따, 땅! 천지를 울리는 총성과 함께 빛이 번쩍거리더니 문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쿵하고 안쪽으로 넘어졌다. 틀림없이 반격해 오리라고 여겼으나 그대로 조용할 뿐이었다. "방심하지 말아.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경찰들은 총을 겨누고 살금살금 방으로 다가갔다. 방 한가운데에는 언젠가 크롬의 실험실 안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계가 놓여 있었다. 기계는 경찰들이 문을 부수기 위해 쏘아댄 총알에 맞아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없잖아!" 경찰이 외쳤다. "아녜요, 있어요. 이거요." 루비 기자가 그 기계 바로 옆에 있는 긴 의자 위를 가리 켰다. 거기에는 한 벌의 주인 없는 옷이 길게 가로누워 있었다. 그리고 옷 주위에는 새하얀 가루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군…….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사라져 버렸군." 로드니가 맥없이 말했다. 미치광이 과학자를 이용해 천인공노할 완전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던 악마 같은 샘즈도 이렇게 해서 스스로 미세한 분자가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액체 침략자   ♣ R. M. 파뤼 지음   등장 인물   ● 액체 생물 : 검은 호수에서 발생한 여과성 바이러스. 소나 고양이를 잇달아 녹여 버릴 정도로 생명력이 왕성하다. 또한 고도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 데이 :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 소장으로, 냉정한 화학자. 액체 생물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점차 액체 생물에 대한 일종의 우정을 느끼게 된다. ● 한스 슈미트 :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의 세균학자. 멋진 발견을 하여 큰 부자가 되려고 액체 생물 연구에 몰두한다. ● 이반 지노프 : 항상 인류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려고 하는, 메트칼프 연구소의 생물학자. 데이와 슈미트와 더불어 액체 생물의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 메트랄프 사장 : 데이 일행에게 자유롭게 연구를 하도록 밀어 주는 후원자. 최초로 호수의 이변을 알아차려 데이를 비롯한 세 사람에게 조사를 의뢰한다. ● 피어슨 소장 : 메트칼프 사장과 잘 아는 사이로, 주둔 사령관. 병사들을 지휘하여 닥쳐오는 액체 생물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하지만……. 검은 호수   "저것이 바로 그 호수다." 메트칼프 사장이 소나무 숲의 건너편에 보이는 작은 호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따뜻한 6월인데도 불구하고 손가락은 딱딱하게 굳어져 가늘게 떨리고 있는 듯했다. "저것이?" 일행 중 키가 크며 어깨가 딱 벌어진 청년이 말했다. 그리고 그 호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둘레는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병풍같이 깎은 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수 가장자리에는 풀 한 포기도 없다. 거무칙칙한 수면에는 맑게 개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이 선명히 비쳐지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 나쁜 호수다. 하지만 특별히 색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넓이를 보아서는 호수라기보다 자그마한 연못이라든가 웅덩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이 호수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사장님? 어쩐지 괴물이라도 살고 있는 듯한 호수이기는 하지만 설마 20세기에 공룡이라도 나오려고요? 아무래도 우리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 팀이 나설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요?" 청년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나 사장은 머리를 저었다. "자네는 아직 아무런 점도 발견하지 못했나, 데이군? 저 호수의 수면을 잘 보게나! 수초가 전혀 눈에 띄지 않지? 대개의 호수에는 반드시 있는 갈대조차 없지 않나? 물고기도 없네. 아니, 수생 곤충조차 없을 걸세." 데이라고 불린 청년이 대꾸했다. "그런 점들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장님. 이 호수는 염분이 매우 많이 함유된 호수겠지요. 그러므로 담수어나 보통의 수생 곤충과 갈대 등은 살아갈 수 없지요. 아, 사해라고 있지요? 그 곳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런 산 속에 어떻게 짠 물 호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산 속이기는 하지만 이곳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었을 겁니다. 잘 조사해 보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아마 이곳은 몇만 년 전까지는 바다 속이었겠지요. 그것이 솟아올라 움푹 패인 곳에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 이런 짠 물 호수가 생겨난 것이겠지요." 데이는 침착한 어조로 답변했다. 그는 항상 냉정한 성격의 과학자로,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 소장직을 맡고 있다. 그러나,메트칼프 사장은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것 같지는 않네. 나는 아무래도 이 호수가……." 데이는 사장의 염려를 일축해 버리려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흠칫했다. 어쩐지 이 호수는 이상해 보였다. 바람도 없는데 수면이 희미하게 물결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것은 거무칙칙한 물 속에서 어떤 거대한 생물이 몸을 감추고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공룡이 이 호수의 바닥에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는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생각을 부인했다. '내가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메트칼프 사장은 그러한 데이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끄덕였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증거를 보고부터 의혹이 생기기 시작한 걸세." "무시무시한 증거라니요?" 데이는 사장의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쪽으로 와 보게나." 라고 말하고 소나무 숲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소나무 숲 건너편에는 푸른 풀이 난 목초지가 호수 가장자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메트칼프 사장은 앞장서서 그 목초지를 가로질러 물가 쪽으로 걸어갔다. 호숫가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검은 바위 같은 물체가 가로 놓여져 있었다. 그 곳으로부터 지독한 냄새가 풍겨와 코를 찔렀다. '무엇일까?' 데이가 생각에 잠겼을 때, 사장이 검은 바위를 가리켰다. "잘 보게나!" "아니!" 데이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이럴 수가 검은 바위로 보인 것은 몸의 절반이 참혹하게 물어 뜯겨져 있는 커다란 검은 소의 시체였던 것이다!   화상 입히는 물   "이, 이것은……." 데이는 썩어가기 시작한 소의 시체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코를 움켜쥐면서 말했다. "우리 목장의 소지. 그렇지 않아도 한 마리가 없어져서 조사해 보았더니 글쎄 이 모양이……." "사장님!" 데이가 말을 가로막았다. "이 소의 시체는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뒷부분 절반이 물어 뜯겨진 것이……. 마치 뱀에게 먹히다 만 개구리처럼 절반이 녹아 없어졌으며 앞부분으로 갈수록 점차 가늘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네!" 메트칼프 사장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 호수 속에 무언가 거대한 뱀 같은 괴물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설마 소를 한 입에 삼킬 정도의 뱀이 있을라구요? 몇 만 년 전의 괴물이라도 그것은 불가능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러나 조사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보트를 가져다가 서너 명의 어부에게 이 호수 밑바닥을 깡그리 훑어보라고 했지." "그래서요?" "그런데 생물이라고는 흔적조차 없다는 걸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뱀장어나 게 등이 있었다는데, 그런 것들이 한 마리도 없다지 뭔가?" "흠……." "그것뿐이 아닐세." 메트칼프 사장은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어부들이 늘어뜨린 그물이 얼마 안 있어 너덜너덜 끊어져 버렸다네. 게다가 어부들이 튀어오른 물로 인해서 지독한 화상을 입었지 뭔가!" "물로 화상을 입었어요?" 데이가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호숫가로 다가섰다. 그러자 메트칼프 사장이 당황해 하며 뒤에서 소리쳤다. "정신 차려, 데이 군 ! 물보라가 몸에 닿으면 화상을 입는단 말일세. 그 물은 마치 염산과 같아서 몸에 닿기만 해도 타 버린단 말이야." 데이는 이내 멈춰 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활짝 펼친 다음 수면을 향해 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수건은 마치 얼음이 열탕 속에서 녹아 없어지듯이 순식간에 녹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흠……." 데이는 재차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의 깊게 호숫가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준비해 온 유리병에 가만히 물을 담았다. "잘 알았습니다, 사장님. 어쨌든 이 샘플을 갖고 돌아가서 면밀하게 검사해 본 후에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3명의 청년 과학자   데이는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실험실로 들어갔다. 뒤죽박죽 어지러운 실험실이었다. 한가운데에는 갖가지 화학 실험 도구를 늘어놓은 좁고 긴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오른쪽 벽가에는 수신기가 한 대, 테이블이 한 대 있었으며, 그 위에는 해부용 고양이가 한 마리 놓여져 있었다. 고양이 앞에는 한 사람의 흰 가운을 걸친 피부색이 검은 청년이 지금 막 고양이에게서 끄집어 낸 내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참이었다. 그 반대쪽의 왼쪽 벽 가에는 단단한 몸집의 청년이 흰 가운을 걸치고 역시 시험관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비커에 물을 넣기도 하며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데이가 들어서자 돌아보더니 데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유리병을 의아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게 도대체 뭔가, 데이?" "이건 보통 물 같은데?" 고양이 해부를 하고 있던 청년이 유리병을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기다리게 지노프, 그것을 만지기 전에 우선 내 이야기 좀 듣게나." 데이는 오늘 메트칼프 사장과 함께 겪은 이상한 체험을 두 사람에게 들려 주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몸의 절반이나 녹아 버린 소 이야기와 데이의 손수건이 녹은 이야기를 듣자 점차 진지한 표정을 띠며 말했다. "흠……. 그것 참 이상한 이야기군." 하고 지노프가 말했다. "자네 이야기가 진짜라면 이 짠물은 지독히 강한 산성을 띠고 있다는 말인데, 조금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는다든지, 소를 녹여 버린다든지 하는 강한 약품은 산 이외에는 생각해 볼 수도 없지. 그렇지 않나, 슈미트?" "하지만 그러한 산성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그 호수로 들어갔단 말인가?" "그것을 이제부터 우리 셋이서 연구해야 한다구." 하고 데이가 말했다. "이 물이 지니고 있는, 사물을 태운다든지, 녹인다든지 하는 작용은 화학 분야이므로 화학자인 내가 연구하기로 하지. 그리고 생물과 물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물학자인 이반 지노프가, 또한 물 속의 생물학적 문제는 세균 학자인 한스 슈미트가 조사하기로 하지." "좋았어, 합시다." 라고 지노프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요즈음, 신통한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짜증이 나던 참인데, 이 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이끌어내도록 해야지." "암, 그래야지.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고 있는 메트칼프 사장에게도 기쁨을 안겨 주어야 하지 않겠나?" 데이도 얼굴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균 학자인 한스 슈미트는 건장한 몸집을 흔들며, "흠!" 하며 코를 벌름거렸다. "자네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꼭 아이들 같구먼. 데이는 항상 메트칼프 사장에게 은혜를 갚을 것만 생각하고 있고, 지노프는 오로지 인류를 위한 것만 생각하고 있지 뭔가? 하지만 나는 달라. 언젠가 멋진 발명을 해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이 내 꿈이지. 이번 이 연구는 어쩐지 내 꿈을 이루게 해 줄 듯한 기분이 드는군." "자, 그것도 좋겠지. 그렇게 될지 어떨지는 앞으로의 연구 여하에 따라서 결정될 걸세. 그럼 속히 착수하도록 하지." 데이는 말을 마치자 이내 횐 가운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쓰고 자신의 실험 테이블 앞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유리병 마개를 열고 그 물을 극히 소량 시험관 속에 따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물이 튀어서 손가락에 닿았다. "앗! 손가락을 데었어." 데이는 손가락을 누르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 바를 만한 약을 찾았다. 슈미트가 무언가 작은 병을 갖고 달려와서 그 속에 담긴 액체를 데이의 손에 발라 주었다. "아, 고마워. 제법 효과가 있는데 그래?" 라고 데이가 말하며 한숨 돌렸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사용한 거지?" "석탄산을 엷게 한 것이야." "뭐라구!" 데이는 깜짝 놀랐다. "산을 중화시키는 데 산을 사용했단 말인가? 뭔가 잘못 되었는걸!" "응. 그렇지만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긴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을 중화시키는 데는 알칼리성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석탄산을 가져왔지?" "세균학자란 갑자기 어떤 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는 본능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석탄산을 거머쥐는 버릇이 있다네. 그런데 산으로 중화된 것을 보니 데이, 아무래도 이 물은 알칼리성인 것 같은데?" "리트머스 시험지로 반응을 조사해 보면 알겠지." 라고 지노프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렇지. 어째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산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이지." 데이는 이내 빨간 리트머스 시험지를 갖고 와서 물 속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리트머스 시험지는 즉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흠……. 확실히 알칼리성인 것 같아. 그래서 석탄산으로 중화시킬 수 있었지 뭔가." 그러자 슈미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군.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그 물의 샘플을 주게나. 조사해 보고 싶은 점이 있네."   여과성 바이러스   그리고 4~5일 동안 세 사람은 한눈도 팔지 않고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결국 데이가 먼저 실험에서 손을 들고 말았다. "아니, 이건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단지 바닷물이야. 나는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알아 낼 수가 없네." 그러자 슈미트가 파란 눈을 물끄러미 데이에게 향하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네. 아무리 분석해 봐도 바닷물 분자밖에는 나오지 않는걸." "화학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세균학적으로 볼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걸." 슈미트는 무언가 비밀이라도 움켜쥐고 있는 듯 단호히 말했다. 데이와 지노프는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래? 어떤 점이 다른가?" "요컨대, 이 물에는 일종의 여과성 바이러스가 들어가 있단 말일세." "여과성 바이러스라니?" 데이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화학자이므로 생물에 관한 일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란 물론 세균의 일종이지. 보통의 바이러스는 여과기를 사용하여 거르면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대개는 걸리고 말지. 그런데, 이 여과성 바이러스는 아무리 미세한 여과기에도 채취되지 않으므로 정말이지 아주 작은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네. 그래서 여과성 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여 진 것이지." "음, 그런가?"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그렇지 않다는 점이 밝혀졌네. 즉, 여과성 바이러스란 보통의 세균과 같이 작은 생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액체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세균인 것이라는 점이 밝혀졌어." "살아 있는 물이라고?" 라고 생물학자인 지노프가 말했다. "물이 생물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걸?" "그렇다면 생물이란 무엇일까?" 라고 슈미트가 거꾸로 되물었다. "먹을 것을 섭취하고 성장하며 번식해 가는 것이 생물이겠지?" "그건 그렇겠지." "그렇다면 여과성 바이러스 역시 말할 나위 없이 생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몸 형태는 물이기는 하지만 먹기도 하고 성장도 하며 번식해 가기 때문이지." "음……. 그러면 자네는 결국 그 호수에 여과성 바이러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 살고 있다는 말이지?" 라고 데이가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니 지노프가 해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실험실에 갖다 둔 고양이 한 마리가 바구니에서 빠져 나와 호수 물을 담은 시험관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저, 저런!" 지노프가 소리지르고 미처 달려갈 틈도 없이 고양이는 엎어진 물을 날름날름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캬옥! 캬옥!"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고 고양이는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그러더니 온 몸을 비비꼬며 발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끔찍한 독이군. 가엾게도." 데이가 고양이를 집어 들어 옆에 있는 싱크대 속으로 집어 던졌다. 고양이는 꿈틀꿈틀 몇 번인가 버둥대더니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죽었군……." 지노프가 고양이 몸뚱이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데이가, "어 ! 저것 좀 보게." 라고 소리쳤다. 지노프와 슈미트가 일제히 쳐다보니, 고양이의 배 부분에 어느 사이엔가 커다란 구멍이 뻥 하니 뚫리고 그 곳에서 투명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빨리, 싱크대 마개를!" 데이가 외쳤다. 슈미트가 재빨리 달려가서 마개를 틀어막았다. 세 사람은 싱크대 앞에 서서, 물끄러미 고양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마치 얼음이 녹듯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배, 가슴, 발, 머리……. 그리고 흰 빛을 띤 액체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에 싱크대는 부쩍 늘어난 횐 빛의 액체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액체의 표면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실룩실룩 움직이며 파도같이 넘실대고 있었다. "액체 생물이다!" 데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호수의 물도 꼭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었어. 그 호수 전체가 이 액체 생물이 되어 버린 거야! 그 소도, 이 물에 먹혀 버린 것이지!" "그러나 소의 경우는 머리와 상반신이 남아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것은 그 곳이 모래땅이었기 때문이지. 소의 배 쪽에서 배어 나온 액체 생물은 이내 지면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린 것이네. 그래서 상반신이 남았던 것이지. 만일 모래땅이 아니고 딱딱한 바위땅이었다면, 상반신마저 액체 생물로 변해 버렸을 테지." 슈미트가 끼어들었다. "무서운 생물이군……." "만일 이 생물이, 호수에서 넘쳐 나게 되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녹여 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지. 대단히 위험한 생물이야. 이 녀석을 죽일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세!" 슈미트도 안색을 바꾸어 말했다. 바로 그 때, 지금까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지노프가 손을 내저었다. "잠깐, 그전에, 내가 한 가지 실험해 볼 것이 있네." "무슨 실험인가?" "이 액체 생물에게 과연 지능이 있는가 없는가를 조사해 보는 실험이네."   인간 쪽이 더 하등 동물이다   "뭐라고?" 데이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지노프는 상체를 쑥 내밀며 말했다. "내가, 동물의 뇌를 내가 발명한 장치에 연결하여 뇌파를 파악해 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들도 잘 알고 있겠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이 액체 생물에게 응용해 볼 생각이야. 이 생물은 이토록 생명력이 왕성한 생물이니 틀림없이 지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지능이 있다면 반드시 무언가 들려올 것이네. 자, 그럼 즉시 시험해 볼까?" 지노프는 재빨리 커다란 유리 용기를 가지고 와서 국자로 조심스럽게 액체 생물을 담아 넣었다. 액체 생물은 여전히 부글부글 움직이고 있었다. 지노프는 유리 용기를 자신의 실험 테이블까지 가져가 수신기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신기의 스위치를 올리고, 길고 가느다란 검은 고무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막대기 끝에는 금속 침이 연결되어 있으며, 한쪽은 수신기에 이어져 있다. 이것이 전극인 것이다. 지노프는 가만히 그 금속 침 쪽을 액체 생물 속에 찔러 넣고 스피커의 다이얼을 조절했다. 그러나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지노프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하지만 스피커는 여전히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하하하!" 갑자기 슈미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의 실험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군. 도대체 이런 여과성 바이러스가 지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생각 아닌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스피커에서, "여보세요!" 라고 지노프의 음성과 꼭 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노프는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2개의 전극을 액체 속에 빠뜨릴 뻔했다. "하하하!" 이어서 스피커에서는 슈미트의 음성과 꼭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처럼의 실험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군. 도대체 이런 여과성 바이러스가 지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생각 아닌가?" 세 사람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쳐다보았다. "이것 참 놀랄 만한 일이군!" 데이가 잠시 후 소리쳤다. "이 녀석은 우리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군!" "그러니 역시 이 녀석은 어떤 종류의 낮은 지능을 갖고 있다는 말이군!" 지노프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스피커에서는 다시금 똑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보게. 낮은 지능을 갖고 있는 쪽은 바로 자네들 인간 쪽이네!"   말하는 액체   세 사람은 거듭 입을 딱 벌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이러스는 이번에는 흉내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뭔가를 물어보게." 데이가 흥분해서 말했다. 지노프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질문을 생각했다. "자네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모두 알아듣는가?" 세 사람은 스피커 쪽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질문 방법이 서투른 모양이야. 좋아, 내가 한 번 물어보지!" 슈미트가 지노프를 밀어 내며 앞으로 나섰다. "자네는 사실은 고양이 뇌일 것이므로 고양이 뇌를 이용하여 떠들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스피커에서는 역시 반응이 없었다. 다음에는 데이가 물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액체 생물은 아까의 말을 마지막으로 무엇을 물어보아도 일언반구 대꾸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지?" 지노프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뇌까렸다. "아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능을 모두 써 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 도대체 그것으로 지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 역시 어리석었던 것 같네. 과학자 세 사람이 모여 고양이가 녹은 물을 상대로 이러쿵저러쿵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키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라구!" 슈미트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고. 이 녀석은 아까 우리가 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 걸맞은 대답을 했단 말이야. 즉, 조금 더 지식을 넣어 준다면 대답을 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데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틀림없이 그렇다구. 데이, 이 녀석에게 어떤 책이든 읽어 주자구.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걸세." 지노프가 즉시 찬성했다. 그리고 재빨리 연구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생물학 책을 가지고 왔다.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나는 그만두겠네. 그런 시시한 짓을 하고 있느니 차라리 집에 가서 낮잠을 자는 편이 낫겠네." 슈미트가 머리를 옆으로 흔들며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 후, 몇 시간에 걸쳐 지노프와 데이가 교대로 스피커를 향해 책을 계속 읽어 주었다. 가끔씩 질문을 해 보았으나 여전히 액체 생물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밤이 깊자 두 사람은 결국 낭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의 일이다. 지노프가 재차 액체 생물을 향해 물었다. "어떤가? 어제 읽어 준 책은 재미있었나? 오늘도 무언가 읽어 줄까? 대답해 보게나." 지노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액체 생물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술렁술렁 움직이면서, "그렇게 해 주게. 어젯밤의 생물학 책은 대단히 재미있었네. 이번에는 여과성 바이러스에 관한 책을 읽어 주었으면 하네." 라고 똑똑히 대답하지 않는가! 지노프는 깜짝 놀랐다. "어이! 모두 지금 한 말을 들었지? 이 거품 도깨비가 말을 했다네." 말이 떨어지자마자, 액체 생물의 단호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를 거품 도깨비라고 부르지 말아! 여과성 바이러스라든가, 액체 생물이라든가,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미, 미안하네." 지노프는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다. 마치 학교 선생님에게 잘못을 들켰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어이, 우리 세 사람 모두 정신이 돌아 버린 것이 아닐까?" 슈미트가 아직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겁내면서 말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이 다시 또렷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네. 자네들은 중대한 발견을 한 것이지. 여과성 바이러스가 액체 생물이라는 점을 발견한 과학자보다도 훨씬 중대한 발견이지. 자네들은 새로운, 더욱이 자네들보다도 훨씬 뛰어난 지능을 가진 생물을 발견한 것이란 말이야. 자, 알았으면 여과성 바이러스에 관한 책을 가져와서 어제처럼 또 읽어 주게!"   두려운 액체 생물   세 사람은 온순하게 액체 생물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하루 종일 교대로 무색 투명의 유리병을 향해 책을 낭독해 주었다. 한 권을 다 읽자 액체 생물은 이어서 관심 있는 책을 명령했다. 그리고 조금도 쉬지 않고 넘실넘실 흔들거리면서 세 사람의 낭독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 5시가 되자, 세 사람 모두 녹초가 되어 버렸다. "잠시 쉬었다 하세." 지노프가 손을 뻗어 전극 막대기를 뽑으려고 하자 스피커에서 몹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짓이야! 전류를 끊으면 안 돼. 아직 낭독이 끝나지 않았잖아!" "그렇지만 우리들은 좀 쉬어야겠네." 지노프가 겁먹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쉰다구? 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래서 데이가 연구소 도서실에서 커다란 백과 사전을 가지고 와서 '피로'라든가 '수면' 등의 낱말을 읽어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한 것이라네." "과연 그렇군. 인간이란 존재는 성가신 것이군. 우리에게는 피로 따위라든가 싫증이란 것이 없지. 오늘은 도리 없군. 그만두기로 하세. 그 대신 내일 아침이 되면 오늘처럼 낭독을 계속해 주게나." 겨우 허락을 받은 세 사람은 전극을 뽑아 낸 뒤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도중에 세 사람은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자 세 사람은 다시 모여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액체 생물이 명령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주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의 지식욕은 점차 심해질 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 그날 저녁에는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버렸으며 어리석은 짓에 점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실험을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이 따위 물에게 혹사당하고 있다니 바보 같은 짓도 유분수지!" 슈미트가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즉시 그 말에 대해서 따지고 들었다. "뭐라고? 하등 동물인 주제에, 건방진 말을 하지 말게나. 자네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같은 고등 생물을 위해 일하게끔 되어 있었단 말일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슈미트는 화가 치밀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물이 담긴 병을 집어 들려고 했다. 데이와 지노프가 당황하여 앞을 가로막았다. "참게나, 슈미트." 지노프가 말리며 액체 생물 쪽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대단히 뛰어난 지능의 소유자란 점은 잘 알고 있네, 액체 생물 군. 그러나 우리 또한 이 지구상에서의 생물 중의 왕자지. 즉, 고등 생물이란 말이지. 그리고 고등 생물이란, 호기심을 갖고 있는 법이네. 우리는 자네가 어떤 생물인가를 알고 싶어. 그런데도 자네는 책만 읽어달라고 하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시끄러워, 그런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아." "그렇게 제멋대로 지껄인다면, 전극을 뽑아 버려 더 이상 지껄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겠네. 아무리 지능이 발달해 있더라도, 그 곳에 들어 있는 한 자네는 별 도리가 없을 걸세." 액체 생물은 잠시 듣고 있더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투덜거렸다. "흠……. 아무래도, 내가 좀 신경질적이 된 듯하네. 잠깐 기다려 주게나. 그 원인을 생각해 볼테니." 액체 생물은 잠시 묵묵히 있었다. 그리고 5분 정도쯤 지나자 전보다 훨씬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원인을 알았네. 내게 염분이 부족해진 거야. 그래서 괜스레 신경질적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소금을 조금만 넣어 주지 않겠나?" 슈미트가 약품 선반에서 식염을 가지고 와서 조금 집어넣고 유리 막대기로 휘저었다. 액체 생물은 마치 인간이 하듯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제 기분이 좋아졌어. 자, 다시 낭독을 시작해 주게." "잠깐 기다리게." 데이가 끼어들었다. "이제 슬슬, 우리 질문에 대답해 주어도 될 것 같군. 도대체 자네 정체는 무엇인가?" 액체 생물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자네들이 액체 생물이라고 말한 그대로일세. 하지만 나는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지능이 높은 뛰어난 생물이지." "그렇다면 그 호수 전체가 자네처럼 지능이 높은 액체 생물이란 말인가?" "물론이지. 그러나 나는 이곳에 와서 제법 공부를 했으므로, 호수에 있는 나와는 상당히 차이가 나지. 그러나 다시 호수에 돌아가게 해 준다면 호수의 전체가 나와 똑같은 지식을 가지게 된단 말씀이야." "잠깐,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네. 이번에는 지노프가 끼어들었다. "지금 '나'와 '호수의 나'라고 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액체 생물은 킥킥대며 웃었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원래 하나의 나인 셈이지. 그러나 나눈다면 몇 개의 나로 나뉘어진다네. 지금은 호수의 나와, 병 속의 나이지만, 호수에 가서 합쳐지면 다시 하나의 나로 바뀐다는 말이야. 이 병 속의 나도 만일 2개의 병에 나누어 적당한 음식과 물과 소금을 준다면 2개의 나가 된다네. 즉, 우리는 끝없이 번식해 갈 수 있단 말이지." 세 사람은 모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단 말이다." 라고 액체 생물은 세 사람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하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언젠가는 우리가 이 지구를 점령할 때가 올 것이다. 능률이 낮은 당신들 인류를 대신하여 우리 액체 생물이 지구상의 주인공이 될 날이 말이야. 만일, 우리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을 익힌다면……."   소금에 취한 액체 생물   "어쨌든 정신 차려야겠네. 저 액체 생물에게 당하지 않도록 말일세." 데이가 말했다. "그래. 저 놈이 무턱대고 불어난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 걸세." 그런데 그 염려가 머지 않아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의 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슈미트가 여과성 바이러스가 담긴 병에 소금을 넣어 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멍해 있던 슈미트는 그만 소금 병을 손에서 놓쳐 절반이나 담겨져 있는 소금 병이 액체 생물 속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앗!" 슈미트는 당황하여 병을 집어내려고 손을 뻗쳤다. "위험해! 손이 녹는단 말이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노프가 외쳤으므로 슈미트는 순간적으로 손을 거두어 들였다. 유리병 속의 액체는 이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끓는 물처럼 수면으로부터 거품이 튀어 올랐다. "어떻게 된 일이지?" 슈미트가 안색을 바꾸며 소리쳤다. "스위치를 넣어 보자!" 데이가 재빨리 전극을 용기 속으로 집어넣고 수신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마자 갈라진 목소리가 다급하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좀 더 소금을 주게! 조금만 더! 고양이 시체를 조금 더 주게! 나는 성장하고 싶단 말이야. 좀 더 분열하고 번식하여 이 지구상에 넘쳐흐르고 싶단 말이야." 세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거품은 한층 발작하고 있었다. "넘쳐흐른다! 강으로, 바다로! 지구는, 4분의 3이 물이지. 바다로 들어간다면 지구는 이제 우리 것이 된다! 이 지구상의 생물을 모두 먹어 치우면 지구는 우리 것이다." 뒤이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우와와와……. 이이이이……. 오오오오오……." 하는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당장이라도 지구를 점령하고자 덤벼드는 액체 침입자의 싸움의 외침 같았다. 지노프가 수신기의 스위치를 껐다. "이 녀석은, 소금에 취했군. 굉장히 난폭해졌어." "응, 난처해졌군." 데이가 팔짱을 끼고 여전히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액체 생물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이 녀석이, 정신이 들려면 며칠 걸릴 것 같군." "질산을 넣어서, 소금의 화합물을 만들면 어떨까?" 라고 슈미트가 말했다. "안 돼, 질산 나트륨에는 살균성이 있기 때문에 이 액체가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렇지! 무언가를 혼합해서 엷게 하면 어떨까?" 라고 데이가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물이다. 물로 20~30배 정도 묽게 해 보지!" 세 사람은 급히 끓고 있는 액체를 커다란 물통에 쏟아 넣고 끓음이 멈출 때까지 물을 쏟아 넣었다. 이윽고 진정되었다. 대신에 액체 생물은 커다란 물통 가득히 불어나 버렸다.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한다?" 하고 지노프가 말했다. "이렇게 불어나 버리다간 큰일나겠는걸." "그래, 위험하고 말고. 그럼 불어난 만큼 싱크대에다 쏟아 버리면 어떨까? 하지만 원래 지능은 그대로 남아 있겠지. 아까 액체 생물이 일부나 전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지 않나?" "그 말은 맞지만 싱크대에 버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 "어째서?" "싱크대에 이렇게 많은 액체 생물을 버리면 강으로 흘러 들어가 그대로 바다로 들어가게 되지. 바닷물에는 소금기가 있으니까 액체 생물은 맹렬한 속도로 번식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 속의 생물을 전멸시키고 바다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된다고. 아까, 소금에 취한 액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 일이지!" 데이가 말했다. "그렇군. 하마터면 멍청한 짓을 할 뻔했군." 슈미트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좋을까?"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데이가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내가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을 때, 석탄산을 발라서 중화시키지 않았나? 그러니 원래 있었던 만큼의 액체만 퍼내고, 이 통 속에다 석탄산을 넣는다면 중화되어 죽어 버릴 것이네." "그것 좋겠군. 자, 빨리 해 보세." 세 사람은 이내 전과 똑같은 분량만큼을 원래의 유리 용기에 집어넣고 물통 속에다 석탄산을 퍼 넣었다. 액체는 즉시 탁하게 변하여 잠잠하게 되었다. "잘 되었군." 세 사람은 유리 용기 쪽으로 돌아가, 전극을 찔러 넣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을 것을! 먹을 것 좀 줘!" "아직 살아 있군!" 데이가 기뻐서 소리쳤다. "지금은 취해 있지 않군 그래." 지노프가 중얼거리며 해부대 위에 남아 있던 고양이 시체의 일부분을 용기 속에 집어넣었다. 시체는 즉시, 슈……, 슈……, 소리를 내며 녹아들기 시작하더니 2~3분이 지나자 완전히 녹아 없어져 버렸다. 이것으로 겨우 액체 생물은 기운을 차린 듯했다. 목소리도 전보다 훨씬 커졌다. "아, 고맙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건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단 말씀이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 주지 않겠나?" 데이가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통 속의 액체 생물을 죽여 버린 것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 이외의 부분은 어떻게 되었나?" "아, 그것은 저……, 싱크대 속에 버렸지." 데이가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일순간 용기 속의 액체는 무서운 기세로 거품을 일으키며 거친 소리로 말했다. "아아!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런 짓을 하면 그 부분은 죽어 버린단 말이야! 보통의 물로 지나치게 묽어지면, 우리는 죽어 버린다고!" 세 사람은 의미심장하게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생각지도 않게, 액체 생물을 죽이는 방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성공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액체 생물은 다시 원래대로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전처럼 갖가지 책을 읽어달라고 지시했다. 세 사람의 과학자는 액체 생물의 요구를 들어 주었으나 그동안 곤란한 일이 벌어졌다. 메트칼프 사장이 짠 물 호수의 수수께끼는 어떻게 되었는지 연구 결과를 빨리 보고하라고 성가시게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것 참 난처하군." 데이가 말했다. "사실대로 그 짠 물 호수의 물은 굉장한 지능을 가진 생물이라고 이야기를 해야만 하나……. 그러나 사장이 믿지 않겠지." "믿지 않으면 증거를 보여 주면 되지 않나?" 라고 슈미트가 말했다. 데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은 무리야. 증거를 보여 주면 사장은 틀림없이 그런 위험한 생물은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죽여 없애라고 말할 걸세. 나는 모처럼의 귀중한 연구 재료를 그런 식으로 없애 버릴 수는 없다네." "그것도 그럴 법하네." 라고 지노프가 말했다. "설령 죽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메트칼프 사장은 즉시 세상에 그것을 발표할 거야. 그렇게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진귀한 액체 생물의 견본을 얻고자 그 호수로 몰려들 걸세. 그리고, 필시 어떤 사소한 실수에서 액체 생물은 난폭하게 날뛰게 될 것이란 말이야." 그러자 슈미트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그렇지! 이런 때야말로 액체 생물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어보면 어떨까? 그 녀석은 항상 자기가 인간보다도 훨씬 머리가 좋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마 그 녀석이 무언가 멋진 지혜를 가르쳐 줄지도 모르지." 과연 좋은 제안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액체 생물에게 곤란한 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액체 생물은 잠시 묵묵히 있더니 이내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면 내게 좋은 생각이 있지. 내가 자네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빌려 줄 테니 자네들 연구소가 의뢰 받은 문제를 내게 들려주게나. 내 우수한 두뇌라면 어떠한 문제라도 즉시 해결할 수 있을 걸세. 그렇게 되면 자네들 연구소는 점차 번창하여 사장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걸세." "진짜로 그렇게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면 알 것 아닌가?" 그래서 세 사람은 마침 당면해 있는 발명에 관한 사항을 액체 생물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발명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워서 거의 체념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액체 생물은 그 발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니 단 한 시간 정도만에 대수롭지 않게 해결해 버렸다. 세 사람이 몇 개월에 걸쳐서도 풀 수 없었던 문제가 액체 생물에게는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 참 굉장하군!" 세 사람은 액체 생물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발명에 관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메트칼프 과학 연구소의 명성은 즉시 굉장한 기세로 치솟았다. 일의 주문이 점차 늘어났다. 그 주문을 액체 생물은 간단하게 해결했고 그로 인해서 성공의 사례금이 점차 불어나게 되었다. 연구소 일은 갑자기 늘어나 바쁘게 돌아갔다. 연구소를 증축한다든지 조수나 사무원을 몇 사람 새로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성공에 가장 깜짝 놀라서 기뻐한 것은 물론 메트칼프 사장이었다. 그리고 짠 물 호수의 수수께끼 쪽은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모두가 액체 생물이 말한 대로 된 것이다.   나를 다시 호수로   세 사람도 역시 바쁘게 지냈다 산처럼 쌓인 주문을 차례차례 액체 생물과 상담하여 해결해야만 했다. 액체 생물은 엄중한 방음 장치가 된 깊숙한 방에 두었고, 그 방에는 데이와 슈미트, 그리고 지노프의 세 사람 이외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액체 생물의 비밀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옆방은 낭독실이었다. 액체 생물에게 갖가지 문제를 해결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책을 읽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새로 고용한 사람에게 책을 읽게 하여 그 소리를 마이크로폰과 스피커에 연결시켜 방음실 속에 있는 액체 생물에게 들려 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몇 주 동안은 마치 화살과 같이 지나갔다. 연구는 아무런 장애 없이 잘 풀려갔으며, 사례금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런 만큼, 세 사람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자 액체 생물이 점차 불쾌한 듯이 보여 졌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서 액체의 염분이나 영양분을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의 불쾌함은 점차 도를 더해 갈 뿐이었다. 결국에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적이 몇 차례나 계속됐다. 세 사람은 방음실에 모여 그에 대한 일을 의논했다. "결국, 액체 생물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 슈미트의 제안에 모두가 찬성했다. 그래서 스위치를 넣고 지노프가 대표로 물어보았다. "액체 생물 군.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무언가 불만이 있으면 말해 보게나. 무엇이라도 원하는 대로 해 주겠네. 자네가 우리에게 협력해 주지 않으면 우리 입장이 퍽 난처해진다네." 그러자 액체 생물은 여전히 불쾌한 어조로 대꾸했다. "불만투성이일세! 도대체, 이런 일만 하고 있다니,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게 무슨……?" "자네들 세 사람은 내 두뇌 덕택에 점차 유명하게 되어 돈까지 벌게 되었지만 내게는 돈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네. 그런데 나는 매일같이 수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얻는 것은 고작해야 그날 그날의 양식인 죽은 물고기나 고기 덩어리뿐이지. 나는 이제 이런 생활에 싫증이 났단 말일세." "그러나 우리가 돈을 버는 데 있어서 전혀 비용이 안 드는 것은 아니네. 설비를 늘리기도 하고, 책을 다량 구입해서 자네에게 갖가지 지식을 알려 주는 것도 돈이 필요한 것 아닌가?" 데이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은 불만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단지, 사물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싫증이 났단 말이야. 자네들 역시 그렇겠지. 나도 책에서 익힌 지식을 무언가 중요한 일에 사용하고 싶다구!" "그래서 매일 갖가지 연구를 들려 주지 않는가?" 지노프가 말하자 액체 생물은 경멸한다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흥, 그런 어리석은 문제를 생각하는 것 따위를 갖고 나는 내 지식을 유용하게 사용한다고는 생각지 않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 보게나!" 성질 급한 슈미트가 소리쳤다. "나를 다시 호수에 데려다 주게. 나는 남은 부분의 나에게 지금까지의 내가 공부한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단 말이야. 자네들은 다시 별개의 나를 이곳에 데리고 와서 가르치면 될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어." 데이가 강경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네. 자네가 이곳에 있는 한, 자네는 우리들의 선생이네. 인류에게 새로운 지혜를 전수해 주는 은인이지. 그러나 만일 자네를 다시 호수로 돌려보내 그 호수 전체가 자네와 똑같이 갖가지 지식을 익히게 된다면, 무서운 인류의 적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것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승낙할 수 없다네." "뭐라고! 이 은혜도 모르는 인간 같으니. 하등 동물인 주제에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렇게 말한다면 이제 두 번 다시 지혜 따위는 빌려 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 알라고!" 액체 생물은 화를 벌컥 내며 입을 다물었다. 이리하여 2~3일 동안 액체 생물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난처하게 되었다. 어쨌든 액체 생물이 협력해 주지 않으면 일은 밀리기 마련이고, 그렇다고 해서 액체 생물의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묵묵히 액체 생물의 하는 태도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하루, 이틀이 지났다. 다투고부터 5일째 되던 날, 세 사람은 함께 방음실로 향했다. "오늘쯤은 기분이 풀려 있을지도 모르지."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방음실 문을 열고 책상 위의 용기를 본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액체 생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가슴이 철렁하여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 어찌 된 셈이지?" "아니! 어떻게 빠져나갔지?" "도망칠 수가 없지 않은가!" 세 사람은 제각기 엉겁결에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렇다면 도둑이 들어와서 훔쳐간 것이겠지. 아아, 이제 액체 생물이 없어졌으니 이 메트칼프 연구소도 끝장이야. 모처럼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었는데, 이제 다 수포로 돌아갔군. 역시, 녀석이 한 말을 들어 줄 걸 그랬나봐……." 이렇게 말한 것은 슈미트였다. 지노프가 슈미트의 얼굴을 흘겨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슈미트! 이런 때에 돈 벌 궁리를 하고 있다니! 도대체 그 생물이 이 곳을 빠져나가 이 세상에서 번식해 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게나. 인류가 놈들에게 깡그리 먹혀 버릴지도 모른단 말일세!" 데이는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은 액체 생물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이는 오랫동안 액체 생물과 함께 일해 오면서 마치 친구에 대한 우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액체 생물은 포로 신세인 자신이 싫어져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먹어 사라져 버렸는지도 몰라. 아, 우리가 너무 심한 짓을 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책상 밑바닥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어딘가에 액체 생물이 흘러 넘친 자국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방구석에, 해파리 같은 모습의 반원 물체가 꿈틀대며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앗!" 데이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금을 만들자   "저, 저것 좀 보게!" 데이의 외침에 슈미트와 지노프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앗! 액체 생물이다!" 그러자 그 반원 모양의 액체 생물이 마치 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듯이 주르륵 주르륵 세 사람을 향하여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그 일부분이 스르륵 일어서는 듯싶더니 기다란 팔과 같은 모습이 되어 세 사람 쪽으로 스르륵 뻗었다. "으앗!" 세 사람은 엉겁결에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액체 생물이 있는 곳에서 세 사람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팔은 도중에서 맥없이 구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반원 모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액체 생물이 변화한 것이다! 스스로 몸의 성질을 바꾸어 움직인다든지 손을 뻗칠 수 있다든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일 먼저 제 정신을 찾은 사람은 데이였다. 그는 테이블 위의 빈 유리 용기를 쥐자, 흐느적대며 움직이고 있는 액체 생물의 옆으로 달려가 병의 입 쪽을 벌렸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마치 보금자리 속으로 들어가는 문어처럼 미끄러지듯이 스스로 용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데이는 유리 용기를 가슴에 안고 재빨리 테이블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급히 전극을 꽂고, 수신기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대단히 흥분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인간들이여! 나는 이제 막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정신력으로 내 몸을 바꾸어, 어디에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정신력이라고?" "그렇다. 역시 내 뛰어난 두뇌가 해 낸 것이다. 이것으로 지금까지 두뇌는 인간의 몇 십 배나 뛰어나면서,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하등 동물과 같은 신세에서 해방되었단 말이다!" 액체 생물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세 사람은 할 말을 잊은 채 서 있었다.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 머리가 뛰어나며, 무서운 액체 생물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면 순식간에 인류나 모든 생물을 먹어 치울 것이다. 세 사람은 힐끗 눈을 마주쳤다. '이 방에서 절대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세 사람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지노프가 한발 한발 석탄산이 있는 선반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이 기묘한 말을 끄집어냈다. "인간들이여, 나는 매우 기쁘네. 그래서 지금까지 자네들을 괴롭힌 것 같아서 자네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네." 액체 생물의 예외적인 발언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엇을 해 준다는 말인가?" "음, 우리는 이 2개월 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어. 그러나 그것으로는 서로 공부할 시간이 없어진다네. 그래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도 돈 그 자체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네." "돈을 만든다고?" 슈미트가 한 걸음 몸을 내밀며 물었다. "어, 어떻게 만든단 말이지?" "기다리게." 데이가 슈미트를 말리면서 말했다. "위조 지폐를 만든다니, 당치도 않네." "위조 지폐를 만든다는 말이 아닐세.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황금을 만들자는 것이네. 아무 곳이나 널려 있는 하잘것없는 금속을 황금으로 바꾼다는 말이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지?" 슈미트가 다시 몸을 내밀며 물었다. "아직은 할 수 없네. 그러나 그런 것쯤은 문제가 아니지. 지금까지 낭독해 준 책에서 보면, 모든 금속은 원소로 되어 있으며, 그 원소를 바꾼다면 구리를 금으로 바꾸는 일도, 철을 금으로 바꾸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세." "그 원소를 바꾼다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 "그렇지 않아. 라듐이라든가 우라늄이라고 하는 방사능을 지닌 금속은, 저절로 방사능을 내뿜어 납으로 변해 가지 않는가? 그 원리를 응용한다면, 분명히 해 낼 수 있을 걸세." "그것 참 멋지군! 구리나 철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인류의 꿈이었네. 우리가 그것을 해 낸다면 그야말로 굉장한 일이라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슈미트가 굉장히 흥분하여 말했다. "나는 역시 안 될 거라고 생각하네. 멋대로 금을 만들어 낸다면 이 세상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으니까." 데이가 고개를 저었다. 지노프도 끼어들었다. "맞아. 우리는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되는 과학만을 연구해야 해. 보통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연구로서는 좋지만 진짜로 금을 만들어 낸다면 인류를 위해서 안 된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희들은!" 슈미트는 맹렬히 덤벼들었다. "데이, 자네는 항상 세상이 이러쿵저러쿵 된다느니, 시끄럽게 떠들어대지. 그리고 지노프, 자네는 일 년 내내 인류를 위한다느니 하면서 이루지도 못할 이상만을 내세우고 있고 말이야. 그러나 나는 달라. 나는 부자가 될 이런 멋진 기회를 놓칠 바보가 아니란 말이야!" 슈미트는 말을 마치자 액체 생물 쪽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반대일지 모르지만 나는 대찬성일세. 나는 자네 편이란 말이야. 자, 어떻게 하면 금을 만들 비법을 고안해 낼 수 있겠나? 무엇이라도 좋으니 명령만 내려 주게!" 액체 생물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러면 시작하도록 하지. 우선 원자, 물리학 관계 책을 남김 없이 갖고 와서 낭독자에게 읽히도록 하고 다음은 광물학의 책을 가져다가 낮이나 밤이나 계속해서 읽어달란 말이야!"   교환 조건   이리하여 액체 생물은 금을 만드는 비법 연구를 시작했다. 매일매일, 낭독하는 사람은 산처럼 쌓인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주었다. 액체 생물은 그 내용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사흘째가 되어 슈미트가 아직 안 되겠느냐고 묻자, "아직 알 수 없는 점이 있어. 전기에 관한 책을 20권 정도 가져다가 다시 읽어 주게." 라고 말했다. 닷새 째에는 다시 30권에 달하는 갖가지 책들을 요구해 왔다. 세 사람은 이제는 다른 연구에 관한 일은 내팽개치고, 매일같이 액체 생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업었다. 슈미트는 특히 초조해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방음실에 들어가서는 액체 생물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슈미트는 그 일로 인하여 잠도 못 이루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였으므로 이내 여위게 되어 마치 병자같이 되어 버렸다. 열흘째의 일이었다. 그 날 아침, 세 사람이 방음실에 들어가 수신기 스위치를 넣자, 이내 스피커에서 쾌활한 액체 생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나는 드디어 문제를 해결했소!" "해, 해 냈다고?" 슈미트가 스피커 쪽으로 몸을 바싹 당기며 물었다. "이론은 완성되었지. 실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어서 빠뜨린 것이 있었네." "그렇다면?" "금을 만들려면 극히 간단한 장치가 필요해.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화학 약품과 전기 기구를 메모해서 이 곳에 갖다 주게나." 세 사람은 떨리는 손으로 액체 생물이 부르는 물품의 이름을 메모하여 앞을 다투어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각자가 맡은 물품을 갖고 방음실로 향했다. 문을 열려고 할 때 슈미트가 말했다. "그런데 데이, 이런 것으로 정말 금을 만들 수 있을까? 액체 생물 녀석,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우리에게 엉터리로 말한 것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어." 데이는 강경히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 액체 생물은 우리에게 엉터리로 가르쳐 준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점차 저 액체 생물 녀석이 좋아진단 말씀이야. 저 녀석이 바깥으로 나가면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에 결코 인간처럼 거짓말을 한다든지, 속인다든지 하지는 않는단 말일세. 그러므로 틀림없이 이번에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녀석은 혼자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기쁨에 겨워 진짜로 금을 제조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기분이 드네." 슈미트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역시 지혜는 인간 쪽이 한 수 위지. 나는 녀석에게서 금 제조법을 익힌 뒤, 이내 그 용기 속에다 석탄산을 집어넣어 죽여 버릴 작정이네.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렇게 하면 이제 위험도 사라질 것이고, 게다가 금 제조법이 다른 사람에게 유출될 염려도 없어지지 않겠나?" "자, 자네! 무슨 소릴 하는가!" 데이는 발끈 화를 내며 슈미트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액체 생물을 속이자고 말하는 건가? 나는 그런 비겁한 짓은 할 수 없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데이?" 슈미트가 다시 비웃으며 응수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구. 단지 세균이란 말이야. 속이고 뭐고가 없지 않아?" "아니, 그렇지 않아. 설령 상대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약속을 어긴다든지 속인다든지 하는 짓은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절대로 그런 짓을 허락할 수 없다구!" 세 사람은 언쟁을 벌이면서 방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가지고 온 화학 약품과 코일, 전기 기구 등을 액체 생물의 용기 곁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부 준비되었네." 라고 데이가 말했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지?" 그러자 액체 생물은 전연 의외의 제안을 해 오는 것이었다. "다음은 금 제조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에, 나에 대한 사례를 정할 차례야." "뭐, 뭐라고?" 세 사람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사례를 원하는가?" "당연하지 않나? 나는 자네들을 세계 제일의 부자로 만들어 주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거야. 그 대신에 내가 조그만 사례를 바란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는가?" "도대체 어떤 사례를 바라는가?" 지노프가 액체 생물에게 따지고 들었다. "극히 간단한 일이지. 금 제조법의 대가로 나를 원래의 호수로 데려다 주면 되는 걸세." 액체 생물이 차분히 대꾸했다. 세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갑자기 슈미트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정도쯤이라면 기꺼이 책임지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슈미트!" 지노프가 큰소리로 가로막았다. "그 일만큼은 절대로 안 되네! 이 액체 생물이 호수로 되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액체 생물은 이제 스스로 걸어다닐 수도 있단 말이야. 호수 안의 물이 모두 기어 나와서 우리를 습격할 거란 말이야!"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암, 가능하고 말고." "자네, 정말 내 일을 방해할 셈인가, 지노프!" 슈미트와 지노프는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언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증오와 노여움으로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슈미트도, 액체 생물도   "두 사람 모두 이제 그만 두게나!" 데이의 딱 벌어진 몸집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마지못해 물러섰으나 아직까지도 씨근거리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진정들 하게. 우리 모두가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그런 것 같구먼.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세." "이런 녀석과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 인류의 운명보다도, 돈벌이를 앞세우는 이런 비열한 녀석은 이제 볼도 보기 싫다고!" 지노프가 입술을 떨면서 소리쳤다. 슈미트가 이내 응수를 하려다 말고 무슨 생각에선지 몸을 돌려 휙 하니 방음실에서 나가 버렸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으나 할 수 없이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복도에 나서자 슈미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이 좋겠군. 액체 생물이 듣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지노프의 완고함에는 내가 두 손 들었네. 그렇다고 나라고 해서 인류의 운명과 돈벌이를 바꿀 수야 있겠나? 무엇보다도 전 세계가 액체 생물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다면 금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렇다면 어째서 자네는 그런 말을 했나?" 지노프가 따지고 들었다. "이해 못 하겠나? 나는 녀석에게서 금 제조법만 배우면, 즉시 녀석 속에다 석탄산을 뿌려 넣어 죽여 버릴 작정이란 말이야. 금 제조법의 비결이 목적이쟎나?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라고." "자네는 그렇게 항상 거짓말만 늘어놓는군!" 지노프가 분통을 터뜨렸다.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수긍할 줄 알아야지! 더 이상 건방진 소릴 지껄이면 목을 분질러 버리겠어!" "어럽쇼! 할 수 있으면 해 보게!" 지노프가 주먹을 움켜쥐고 대들었다.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하려는 듯이 씩씩댔다. 데이가 다시 두 사람을 메어 놓았다. "이제 그만하게나! 오늘 더 이상 논쟁을 벌이다가는 싸움이 벌어질 것 같으니 오늘밤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서 의논해 보기로 하세." 데이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데이는 어젯밤 늦게까지 일을 했던 탓에 늦게 눈을 떴다. 이미 한낮이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이것 참, 늦잠을 잤군." 데이는 세수도 하는둥 마는둥하고 급히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여느 때와 같이 화학자와 물리학자, 생물학자와 수학자들이 자기의 책상에서 이미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낭독하는 사람도, 평소처럼 마이크를 향해 무미 건조한 목소리로 어려운 전문 서적을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데이는 방음실 앞에 서서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앗!"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액체 생물을 넣어 둔 용기가 없어졌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금 제조를 하기 위한 도구나 약품류도 그리고 액체 생물과 이야기하기 위한 수신기까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액체 생물만 없어졌다면 다시 그 정신력을 이용해 걸어서 빠져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용기째 없어진 것이나 도구와 수신기까지 없어진 것으로 짐작해 보건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의 소행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누가? 물론 슈미트 아니면 지노프다. 이 방음실 열쇠는 그들 세 사람밖에는 갖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이 빼내 갈 리는 만무하다. 슈미트일까? 그렇지 않으면 지노프일까? 데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열려 있는 문으로 지노프가 불쑥 들어왔다. 그리고 얼이 빠져 있는 데이를 보고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데이?" "지노프? 그렇다면 역시 슈미트. 여보게, 저길 보게나! 누군가가 액체 생물을 훔쳐 갔어." "슈미트 녀석 짓이군!" 지노프는 방안을 둘러보면서 외쳤다. "그렇다면 그 녀석! 역시 금 제조법 때문에 액체 생물을 빼돌렸구나!" "하지만 어디로 갖고 갔을까?" "그 짠 물 호수로 갔을 거야. 틀림없이 액체 생물이 금 제조법의 비법과 교환 조건으로 내걸었을 테지." "큰일났군!" 데이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짠 물 호수에 그 액체 생물을 놓아 주면, 녀석은 호수의 동료들에게 걷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걸세. 그렇게 된다면 세계는 파멸일세!" "빨리 가 보세, 데이!" 지노프가 데이의 손을 낚아채며 외쳤다. "지금이라도 빨리만 가면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자, 빨리 가 보세!""잠깐만 기다려!" 데이는 연구실의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45구경 자동 권총을 끄집어내어 포켓에 쑤셔 넣었다. "만의 하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네. 자, 가지." 두 사람은 연구소 밖으로 뛰쳐나와 속력이 빠른 지노프의 2인승 차에 올라탔다. 차는 이내 엔진 소리를 내며 짠 물 호수 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배반자의 최후   차는 조금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러나 짠 물 호수 근처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차로 가면 눈치 챌 테니 여기서부터는 걷기로 하지." 두 사람은 차를 도로 모퉁이에 세워 놓고 어둠 속을 걸어갔다. 그러자 호숫가 쪽에서 회중전등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 속으로 호수 바로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둘레에는 유리 기구와 수신기 같은 것이 놓여져 있었다. "저기 있다! 간신히 늦지 않은 것 같군." 지노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슈미트 녀석은 액체 생물을 속이려고 했지만 액체 생물도 역시 슈미트를 믿지 않은 것이 틀림없어." 데이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슈미트는 금 제조법을 배우기까지는 액체 생물을 호수에 데려다 주지 않겠다고 말했을 것이고, 액체 생물은 호수에 가기 전까지는 제조법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말했겠지."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도 가능한 한 빨리 슈미트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슈미트는 지금 액체 생물에게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금을 제조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하면 되나?" 열심히 질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갑자기 환희의 외침으로 바뀌었다. "오, 금이다! 진짜 금이 되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슈미트는 손에 번쩍번쩍 빛나는 조그만 것을 받쳐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금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저것 좀 보게나!" 갑자기 지노프가 데이의 팔뚝을 움켜쥐면서 공포에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슈미트가 금을 바라보면서 한쪽 손을 포켓 속에 찔러 넣고 무언가 조그만 약병을 끄집어내는 것이 보였다. "아, 저것은 석탄산이다! 놈은 액체 생물을 죽일 작정이다." "안 돼! 뛰어가자!" 지노프와 데이는 급히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슈미트는 병마개를 열자 재빨리 그것을 액체 생물의 용기 속으로 부으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액체 생물이 들어 있는 유리 용기 속으로부터 회중전등 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는 문어발과 같은 것이 휙 하니 튀어나오는 듯싶더니, 막 약품을 쏟으려고 하는 슈미트의 손목을 눈 깜짝할 새에 휘감아 버린 것이다. "아, 앗!" 슈미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약품 병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 이 손 좀 풀어 줘!" 슈미트는 비명을 지르며 손목에 휘감긴 문어발 같은 것을 떼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 갑자기 슈미트의 커다란 몸집이 획 하고 한 바퀴 도는 것 같더니 땅 위로 곤두박질치는 것이었다. "으악!" "죽은 것 같아! 빨리 가 보세!" 데이가 외쳤다. 두 사람은 더욱 빨리 뛰어갔다. 회중전등이 꺼져 버렸다. 첨벙 소리가 났다. 호수 속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호수 주위는 어둠 속에 빠져 버렸다. 그 어둠 속으로부터 슈미트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액체 생물, 용, 용서해 주게, 그것은 농담이었어. 아니, 진담이라네. 제발 부탁이니 나 좀 풀어 주게! 이제 그런 비겁한 짓은 다신 하지 않을 테니 용서해 주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슈미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으, 윽! 죽는 것은 싫어. 나 좀 구해 주게, 아앗, 누군가 나 좀 구해 주게!" 이어서 첨벙! 하는 세찬 물소리가 났다. 그리고 부글부글하는 거품이 끓는 소리와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소리가 잇달아서 들려왔다. 듣기에도 끔찍스러운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어둠 속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슈미트의 최후의 목소리였다! 데이와 지노프가 권총을 한쪽 손에 쥐고 그 곳으로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뒤였다. 주위는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으며 수면에는 이미 슈미트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가지고 온 회중전등을 켜서 주위를 비추었다. "슈미트!" 하고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지면에는 전선과 코일, 그리고 금을 제조하기 위한 도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금 전에 만든 금 덩어리도 있었다. 슈미트와 액체 생물이 다투었을 때 뒤죽박죽이 되어 유리 기구가 뒤엎어져 있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있지 않았다. "슈미트를 죽여 버리고 호수로 도망쳐 버린 것 같군." 지노프가 공포에 질려 말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나겠네, 데이. 액체 생물은 이제 동료 액체 생물들에게 걷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 틀림없어.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지겠네!" "슈미트 녀석이 나빠. 액체 생물은 약속을 지켜 금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녀석은 액체 생물을 죽이려고 했으니." "누가 아나? 액체 생물이야말로 슈미트를 속여서 이곳까지 데려왔는지 말이야. 제조법을 가르쳐 준다고 말하여 이 곳 호수까지 데려와 죽일 작정이었는지." "글쎄, 어쩐지 나는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지만……." 데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그 액체 생물만큼은 인간 편이 되어 줄 것이 라는……." 진짜로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을 하고 있나, 데이!" 지노프가 초조해 하며 말했다. "녀석은 슈미트 몸을 잔혹하게 녹여 없애지 않았나? 더욱이 그 액체 생물 역시 이 호수 전체의 액체 생물과 마찬가지야. 액체 생물은 하나라고 언젠가 녀석이 말하지 않았나?" "하긴 그렇지만……." "자,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세. 그리고 메트칼프 사장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뒤 무엇이든 액체 생물들의 습격에 대비할 방법을 강구해 보세." "그렇게 하세."   포위되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자동차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데이가 운전했다. 메트칼프 사장의 저택에 가려면, 이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달려야만 한다. 달리기 시작해서 얼마 안 돼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홀연히 호수 일대에 커다란 물결이 일더니 도로에까지 물보라가 휘몰아쳤다. 물보라는 유리창에 닿자 기분 나쁜 벌레처럼 꿈틀꿈틀 돌아다녔다. 데이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위험해. 일단 마을로 돌아가서 사장에게는 전화로 사정을 털어놓도록 하세." 이렇게 말하고 핸들을 꺾는데, 그 때 뒤를 돌아본 지노프가 목구멍이 조이는 듯한 공포의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질했다. "아, 안 돼. 데이! 저것을 보게!" "이런!" 호수의 물이 도로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바람에 밀린 물결이 호숫가에 밀어닥치자 그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조금씩 호숫가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물결은 호숫가에서 부서지자 순식간에 거대한 물의 덩어리가 되어 그것이 서로서로 부딪쳐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부풀어올라 직경 50센티미터 정도의 무시무시한 해파리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몸의 밑 부분에서 문어발 같은 것이 쓱 하고 튀어나와 도로 쪽으로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놈이 가르쳐 주었구나! 호수 안의 액체 생물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그것뿐만이 아니야. 녀석은 두 달 사이에 인류가 5천 년에 걸쳐 이룩해 놓은 문명을 터득했단 말일세. 그 지식이 지금 호수 전체에 퍼졌단 말이야. 이 놈들은 정말 무서운 적이군."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해파리 군대와 같은 액체 생물의 무리는 서서히 전진해 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차 위로 기어올라 운전대 유리창으로 올라왔다. "제기랄!" 지노프가 와이퍼 스위치를 틀었다. 액체 생물은 불시의 공격을 받고 창으로부터 떨어졌다. "달아나자!" 데이는 액셀레이터를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이미 앞쪽 도로에도 액체 생물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끝장이야! 포위 당했어" "젠장! 이렇게 된 바에는 강행 돌파다. 가자!" 데이가 외쳤다. 차는 맹렬한 속도로 전방의 액체 생물 무리 속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앞에도, 뒤에도, 거대한 해파리 괴물과 같은 액체 생물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차바퀴가 녀석들에게 부딪쳐 헛돌았다. 지노프가 문을 열고 둘레의 땅 위를 향해 자동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정신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움직이는 원동력이 부서져 액체 생물은 갑자기 물의 형태로 바뀌어 다시 흘러 내렸다. "지금이다!" 차는 전속력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2분 후에는 액체 생물 무리의 한가운데를 벗어나 산 맞은편의 메트칼프 사장의 저택을 목표로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군대 출동   메트칼프 사장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이 호수의 수수께끼 정체에 관한 것임을 알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것참 큰일이군!"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할 심산일까?" "모르지요. 어쨌든 녀석들의 지능은 우리 인간보다 몇십 배나 높단 말예요. 게다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요. 총을 쏘아도 폭파시켜도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더욱이 그 녀석들은 지금도 점점 불어나고 있어요!" "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메트칼프 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노프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아시는 분 중에 누군가 고위층에 있는 분이 안 계십니까? 이 이야기를 하더라도 곧이들을 사람 말입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조사에만 몇 주일씩 걸리게 하는 사람말고 즉시 행동에 옳길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여하튼 1분이라도 지체 없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하고 옆에서 데이가 거들었다. "있네. 그런 사람이라면 주둔 사령관인 피어슨 소장이 적격이지. 그라면 내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 줄 거야."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즉시 전화를 걸어 보시죠." "알았네." 메트칼프 사장은 즉시 수화기를 들어 군사령부를 불렀다. 피어슨 소장이 나오자 사건 경위를 간단하게 설명한 후 수화기를 지노프에게 넘겨줬다. 지노프는 재빨리 이야기했다. "이 지방에 있는 주둔 부대를 즉시 전원 집결시켜 그 짠 물 호수로 보내 주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무 소독에 쓰이는 분무기를 전원에게 지참시켜야만 합니다." "잘 알았네. 두 시간 이내에 최초의 부대가 그곳에 도착할 걸세." 피어슨 소장은 군인답게 즉시 답변해 주었다. 지노프는 이어서 보스턴과 뉴욕에 있는 굴지의 약품 회사에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창고에 있는 석탄산을 전부 이곳으로 갖다 주기 바랍니다. 대사건입니다. 서둘지 않으면 인류가 멸망하고 맙니다."   상대하기 벅찬 적   그 날, 밤이 깊었을 무렵 주둔 부대를 태운 트럭이 잇달아 도착하기 시작했다. 지노프와 데이는 병사들을 지휘하여 석탄산을 분무기에 채워 넣도록 하여 즉시 호수로 출동시켰다. 병사들은 물가에서 꿈틀대고 있는 액체 생물에게 분무기를 일제히 퍼부었다. 액체 생물들은 이내 흰 빛을 띤 물이 되어 땅 위로 흘렀다. 한편 공병 부대는 호수 위에 철제 보트를 띄워 가지고 있던 석탄산을 무차별로 호수 속에 털어 넣었다. 뉴욕에서는 석탄산을 가득 실은 헬리콥터가 잇달아 날아와 호수 위를 날면서 석탄산을 마구 뿌려댔다. 짠 물 호수는 이내 굉장한 기세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별 수 없이 액체 생물도 전멸한 듯이 보였다. "됐다. 이젠 안심이다." 지노프와 데이는 피어슨 소장과 메트칼프 사장과 함께 호수 근처에 마련된 사령부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다. 당황하여 그 곳으로 달려온 장교 한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피어슨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큰일났습니다, 사령관님! 액체 생물은 아직 전멸되지 않았습니다! 호수에서 흐르고 있는 작은 강 주위 일대로 액체 생물이 넘쳐흘러 그 근방에 있던 마을 사람이 10명 정도 죽었습니다!" "저런! 지금 즉시 부대의 일부를 그 곳으로 파견하게!" 분무기에 새롭게 석탄산을 집어넣은 부대가 황급히 강 쪽을 향해 떠났을 때, 다시 전령이 사령부로 뛰어 들어왔다. "보고합니다! 액체 생물의 일부분이 물줄기를 타고 하류에 있는 목장으로 내려가 소 몇십 마리인가를 녹여 없앴을 뿐더러 여전히 전진 중입니다!" 사령관이 분통을 터뜨렸다. "당했군! 우리가 호수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곳 저곳으로 도망쳐 버렸단 말일세!" 지노프도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후로도 보고는 잇달아 날아왔다. 액체 생물은 교묘하게 인간의 눈을 속여 물줄기를 타고 물과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사령부 벽에 걸린 지도에는 액체 생물이 발견된 장소가 차례차례 표시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데이는 깜짝 놀랐다. "앗, 이것을 보셔요! 그들은 바다 쪽으로 가고 있어요! 바다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들은 몇천 배로 불어날 수 있습니다!" "큰일이군! 그렇게 되면 끝장일세. 한 방울이라도 바다로 들어간다면 승산은 없어져 버리네!" "이렇게 되면 미국 전역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비상선을 긋고 그들을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도록 해야만 하겠어요." "그러나 이곳은 커다란 강이 있지 않는가? 강으로 들어선다면 군대의 힘이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는가." 피어슨 소장이 절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는 갑자기 액체 생물의 말을 생각해 냈다. "아니, 강은 괜찮습니다. 액체 생물은 보통의 물에 엷어지면 죽어 버린답니다. 그러므로 강으로는 절대로 접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안심이네. 즉시 명령을 내려 액체 생물을 저지할 비상선을 치도록 하지!" 피어슨 소장이 힘있게 대꾸했다. 바다와 강 사이에는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비상선이 쳐졌다. 물이나 풀이 있는 곳에는, 한 군데도 남김 없이 석탄산을 뿌려 절대로 액체 생물이 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액체 생물 쪽이 인간보다도 지능이 높았다. 거의 대부분의 액체 생물은 비상선에 걸려 죽음을 당했으나 극히 소수의 액체 생물은 인간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을 통하여 비상선을 돌파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조금이라도 먹을 것과 물이 있다면 액체 생물은 순식간에 천 배나 만 배로 불어나는 것이다. 비상선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바다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꼴이었다. "이제 틀렸군." 사람들은 절망했다. 온 세계가 액체 생물, 수수께끼의 액체 침입자의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인 것이다.   최후의 수단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데이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미 그 곳에는 대부분의 액체 생물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으나 데이는 어쩐지 그 곳에 실험실의 유리 용기 속에 들어 있던 그 액체 생물이 숨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게 책임이 있다. 우리가 액체 생물에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돌연 데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황급히 사령부로 돌아가 소형 수신기를 한대 빌려서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가만히 2개의 전극을 물 속에 넣고 스위치를 넣었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액체 생물과 이야기를 해 보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아주 가냘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아, 자네는 데이가 아닌가?" "그렇다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데이는 재빨리 물었다. 액체 생물은 마치 인간의 한숨과 똑같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네. 내 일부분이 자네들에게 지독한 피해를 입히고 있지." "자네 말대로 우리 인간의 운명은 실로 급박한 처지에 도달해 있네. 액체 생물 군, 아직 자네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내 부탁 좀 들어 주게. 우리 인류를 멸망시키지 말아달란 말이네. 지구의 문명은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피땀 흘려 이룩해 놓은 것이네. 그것을 멸망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데이는 필사적으로 하소연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다시 가냘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알았네, 데이 군.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액체 생물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이미 난폭하게 날뛰는 내 일부분들을 만류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네. 나는 석탄산으로 인해 완전히 기운이 빠져 버렸단 말일세." 데이가 즉시 되물었다. "어째서 자신의 일부분을 자신의 의사대로 할 수 없단 말인가?" "그것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야. 즉, 나는 호수의 나와 분리되어 자네들 인간의 지혜를 배워, 자네들 인간과 교제했단 말이네. 그로 인해 호수의 나와 연구소에 있던 나 사이에는 완전히 틈이 벌어졌던 것이지. 이번에도 나는 호수의 나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지. 그러나 호수의 나는 내 말을 듣지 않고 튀어나간 것이네." "그, 그렇다면 자네의 힘으로도 이미 어쩔 수 없단 말인가?" 데이의 가슴 속에 절망감이 밀어닥쳤다. 액체 생물은 헐떡이면서 드문드문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방법은 있지. 데이 군. 자네는 인간이 아닌 나를 위하여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어주었네. 내 생명은 이제 얼마 안 남았다네. 그러므로 자네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내 일부분이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 없애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네." "제발 부탁이네!" 데이는 다급하게 외쳤다. "좋아. 간단한 일이지. 자네는 연구소에서 슈미트가 나에게 소금을 너무 많이 뿌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바로 그것이 방법일세." "그렇다면……." "바다를 향해 가고 있는 내 일부의 가장 선두에 소금을 뿌리면 되네. 그렇게 하면 내 일부는 취하여 의식을 잃어버린다네. 그밖에 흩어져 있는 동료들도 그 소금에 끌려 모두 그 곳으로 모일 것이란 말이네." "고, 고맙네!" 데이는 소리쳤다. "정말 고맙네. 그 대신 나도 약속하겠네. 자네의 일부를 모두 처치하더라도 자네만큼은 결코 죽이지 않기로 말일세. 그리고 먹을 것과 책의 낭독을 거르지 않도록 하겠네." "아아, 고맙네." 데이는 액체 생물의 목소리를 뒤에 남긴 채 사령부로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피어슨 소장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 줬다. "알았네.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 피어슨 소장은 매우 기러하며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데이의 결의   10분 후에는 소금을 실은 트럭이 열을 지어 최전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데이의 지시대로 소금 둑을 쌓았다. 효과는 1백 퍼센트였다. 액체 생물들은 이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리고 소금에 잔뜩 취해 있을 때 석탄산을 퍼부어 순식간에 전멸시켜 버렸다. 인류의 위기는 마침내 구제되었다. 그 보고를 접한 사령부는 온통 기쁨에 술렁였다. 데이는 기뻐서 환호하는 사령부를 살짝 빠져 나와 호수로 갔다. 작전이 뜻대로 끝났다는 것을 액체 생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호숫가에 도착한 데이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지노프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지금 막 석탄산을 호수 속으로 부어 넣으려고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기다려, 지노프!" 데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짓이야! 나는 그 작전을 액체 생물이 가르쳐 주었을 때 그만은 살려 주기로 약속했단 말일세. 이에 대해서는 아까 그만큼 다짐해 두지 않았었나!" "듣기는 들었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약속이야." 라고 지노프가 대꾸했다. "상대는 위험한 액체 생물일세. 언제 다시 난폭하게 굴지 알 수 없단 말야. 지금 죽여 버리는 것이 세계의 안전을 위하는 길일세." "아니, 안 되네. 약속은 약속인 법이야. 나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가 한 약속은 지키겠네!" 데이는 병사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지노프가 병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병사들은 느닷없이 데이에게 총을 겨누었다. "무, 무슨 짓인가!" "순순히 말을 듣게나. 나는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네. 그러나 액체 생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 모두 전멸시켜야만 한다네." 지노프가 강경히 말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에게 석탄산을 집어넣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돌연 데이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호숫가를 향해 달려갔다. "무, 무슨 짓인가 데이. 호수에 빠지면 죽어!" 지노프가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 소리치자 데이는 몸을 빙글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나는 호수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이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액체 생물에게 내 목숨을 주어 버리겠네!" "바보 같은 짓을!" 지노프가 달려나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데이의 몸이 호수 속으로 풍덩 하고 빠진 뒤였다. "아앗!"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연기를 내면서 녹아가는 데이의 참혹한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데이의 몸은 한참이 지나도 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데이도 깜짝 놀랐다. 손도 발도 어느 곳도 고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호수의 물 속 깊은 곳으로부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 군. 자네는 좋은 친구일세." 액체 생물의 목소리였다. "자네는 죽지 않아. 왜냐 하면 나는 이미 죽음 앞에 와 있기 때문일세. 바이러스란 이미 왕성하게 번식한 후에는 돌연 살아가는 힘을 잃게 되어 죽어 버리는 것이네. 나도 역시 마찬가지지. 석탄산은 필요 없네." "오오……." 데이는 물 속에서 신음했다. "그러나 나는 자네의 우정을 죽어서도 잊지 않겠네. 고맙네. 고마워. 고마……." 돌연 액체 생물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호수 속의 데이도, 호숫가에 서 있던 지노프도, 지금은 아무런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호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호수 위에는 두세 마리의 곤충이 퍼덕거리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 절대 0도의 수수께끼   이 소설은 텔레비전 연속 드라마로 방영된 '페리 메이슨'이란 변호사가 차례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으로 유명한 미스터리 시리즈를 집필한 얼 스탠리 가드너의 작품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흔치 않은 에스에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소설을 읽은 독자 가운데는 어째서 이것이 미스터리(추리 소설)가 아니라 에스에프(SF, 과학 소설)로 취급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스터리에서는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데 있어서 현대 과학에서 알려진 사실을 초월한, 즉 현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나올 곳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는 밀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이 때 새로운 발명이라든가 초능력, 또는 타임 트래블(시간을 초월해서 여행하는 것) 따위의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사용하게 되면 독자는 추리하는 즐거움이 없어지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러한 틀을 과감하게 벗어나서 작가가 자유로이 공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는 것이 에스에프이며, 넓은 의미의 모험 소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2가지 소설 (미스터리와 SF)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물인 점에서는 똑같지만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가드너는 에스에프라고 확실히 명명할 수 있는 작품을 쓰지 않았던 작가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가 젊었을 때 쓴 작품으로, 미스터리와 에스에프의 구별을 무시하고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소위 추리 소설을 성공시킨 흔치 않은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훌륭한 에스에프 작품이 많이 나와서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에스에프가 하나의 문학 장르를 확립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가드너는 1백 권 이상의 미스터리를 썼으며, 팔린 책만도 1억 수천만 권에 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에서의 그의 인기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가드너가 작품을 쓰는 속도가 매우 빨랐으므로, 대부분의 작품은 구술로 이루어졌을 거라고들 합니다. 어쨌든 그는 미국 유행 작가의 전형적인 시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드너는 본래의 자기 직업인 변호사 사업에도 충실했던 사람으로, 개인 재산을 다 털어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을 돕는 '최후의 법정'이라는 위원회를 만들어 활약했던 일로도 유명합니다. 가드너는 1970년에 사망했습니다만, 사망하던 그 해까지 계속 발표한 '페리 메이슨'의 후속 작품을 이제는 더 이상 접할 수 없게 되어 수많은 애독자들은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액체 침략자   지금까지 지구에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초미생물이 인류의 우주로 향한 진출과 더불어 지구상에 침입하여 저항력이 없는 우리에게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는 이야기는 에스에프의 일반적인 주제였습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지금도 때때로 재방영되고 있는 마이클 클라이튼의 '안드로메다 병원체' 등은 최근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만연한다고 알려지면, 혹시 다른 우주에서의 병원체가 우주 공간을 날아와 귀환한 우주선이나 인공 위성에 달라붙어서 지구에 침입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연상되어질 정도로 그 영화는 흥미진진했으며 박력이 있었습니다. 사실, 생명체라고는 살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던 굉장한 고온과 저온이 동시에 존재하는 진공의 우주 공간 속에 미생물이 살아 있다는 것은 최근의 과학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인에 의한 달 착륙 계획에서도 나사(NASA ,미항공우주국)는 아폴로 우주 비행사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엄중한 격리 검역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우주 초미생물의 공포는 에스에프만의 것이 아닌, 현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극히 과학적인 자료에서 묘사된 에스에프와는 별도로 이 소설과 같이 우주의 어딘가에는 수백, 수천만의 집단이 되어 인간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지능을 가진 미생물이 있어, 지구를 정복한다고 하는 에스에프도 지금까지 많이 묘사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미생물인 이티(ET)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우주로부터 되돌아 온 조종사에 달라붙어 지구로 침입한다고 하는 인류의 우주 진출에 따르는 침입이라는 점에서 '안드로메다 병원체'와 아주 흡사합니다. 다만, 이들 미생물이 지구의 생물에 발붙인다든지 그것을 습격하여 성장하며 괴물화되어간다는 점에서 앞의 내용과 다른 의미이며, 에스에프를 일종의 탐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쪽이 훨씬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종류 주제의 에스에프는 많이 쓰여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을 쓴 랄프 밀런 파뤼라는 작가에 대하여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합니다만, 1930년대 미국에 에스에프가 퍼지기 시작했을 무렵의 유행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소설은 40년 이상이나 전의 것입니다만, 주제도 좋으며, 그 이야기의 재미 또한 만점이어서 현재까지도 읽힐 수 있는 에스에프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정성호 미스터리 SF 문고 10 절대 0도의 수수께끼   초판인쇄 ● 1987년 8월 5일 초판발행 ● 1987년 8월 15일 지 은 이 ● E. S. 가드너 옮 긴 이 ● 정 성 호 펴 낸 이 ● 김 성 근 펴 낸 곳 ● 성정출판사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07-24 전화 832-9151~2, 833-0547 등록일자 ● 1980년 3월 12일 등록번호 ● 제 11-95호 값 ● 1,500원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SF작가협회 편   텔레파시의 비밀   김학수 지음     김학수 부산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한국 SF 작가협회 회원 연구 논문, 번역물 다수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원수, 박흥근 / 문학박사 최안학 공학박사 양옥룡/이학박사 김회규 전교육감 김성북 표지그림 신동우/속그림 ․최충훈       해상우주연구소(海上宇宙硏究所) K기지(基地)··· 4 우주에서 온 소녀의 실종············ 13 일본인 사사키················· 21 배터리 상점·················· 32 산록산장(山麓山莊)··············· 35 사사키의 부하 야마모도············· 39 전기 충격··················· 43 아사의 텔레파시················ 50 아사의 예감·················· 60 드디어 출발·················· 62 첫번째 위기·················· 66 연달아 닥치는 위기··············· 72 자장(磁場) 함정················ 73 눈이 먼 우주선················· 75 우주선이 뜨거워진다·············· 75 결단······················ 78 논쟁······················ 79 10분 안에 들어와요··············· 81 이수미 아줌마의 활약·············· 83 사사키가 온다················· 88 텔레파시 치료················· 92 착륙······················ 99 여기는 사사키················· 101 사사키의 최후 통첩·············· 103 뇌파 증폭기·················· 111 격론(激論)·················· 114 야간 순찰··················· 119 긴 낭떠러지·················· 121 적선····················· 122 서치라이트·················· 126 추격····················· 128 새떼····················· 133 항복이냐 ! 항전이냐 !············· 136 핵융합 총··················· 141 비상 수단··················· 144 텔레파시의 비밀················ 153   SF 단편 : 우주 도난·············· 162   작품 해설··················· 195   해상우주연구소(海上宇宙硏究所) K기지(基地)   8시 5분 전에 우리는 전부 도서실에 모였다. 오늘 따라 재빨리 저녁 설거지를 해치운 아줌마가 기대에 찬 얼굴을 빛내면서 TV를 향해 앉았고, 스파이크 씨와 아저씨는 원자력 엔진 도면을 가운데 놓고 캐도늄 제어봉(制御棒)의 설치 위치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는데, 화면 쪽을 간혹 힐끔거리는 폼이 그래도 궁금한 모양이다. 실은 어제 아침에 KBS-TV 녹화(錄畵)반이 이 연구소에 갑자기 나타났었다. 매주 일요일 저녁 8시에 방송되는 우주 시간에 이 베이스 K 연구소를 소개하고 싶다고 2주 전부터 아저씨에게 수차 전화 연락이 왔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 사실 헤시코스행 이륙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 번번이 퇴짜를 놓았던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전화만 빈번히 해 보았자 소용이 없겠음을 깨달았는지 이제는 아예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그렇게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별 수 없게 됐다. 아저씨와 기사 주임 스파이크 씨는 심히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할 수 없이 베이스 K의 녹화를 허용했었다. KBS에서 구태여 이 연구소의 녹화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지의 녹화도 녹화지만 그보다 - 그들은 「아사」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녹화반은 기지의 촬영에 50분 남짓 걸렸지만 아사와의 대담은 2시간이나 걸렸다. 그들은 또 오늘 저녁 녹화 방송에 아사와의 대담(對談)을 생방송으로 꼭 보내고 싶다고 방송국으로 왕림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물론 아사는 쾌히 응했다. 그녀의 이런 흔쾌한 수락은 이유가 있었다. 녹화반이 떠난 이튿날, 그러니까 오늘 오후 6시경 아사는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제송라(諸松羅)양을 따라 헬리콥터 편으로 KBS를 향해 떠났다. 우리는 지금 그 방송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사가 생전 처음 그런 곳엘 가서 무사히 방송을 끝낼 수 있을까?"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던 아줌마가 벽시계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다. "그럼! 미스 제보단 훨씬 잘 해낼 거야. 어쩌면 스튜디오에 모인 사람 중에 제일 침착한 사람이 「아사」일지 몰라." 도면에만 열중해 있는 줄 알았더니 스파이크 씨도 관심을 보인다. "동감이야. 그녀처럼 자신감에 차 있는 여자는 못 봤으니까. 헤시코스에서는 다 그런 훈련을 받으며 자라는 모양이지?" 역시 엔진 도면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더니 자기 턱을 슬슬 문지르면서 아저씨가 한 마디 거든다. 아저씨의 턱 문지르는 습관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좀 별난 버릇이다. 성났을 때도 턱, 기분 좋을 때도 턱, 곤란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도 턱…… 걸핏하면 턱을 문질렀다. 그러나 같은 턱을 문지르는 데에도 형편에 따라 다르다. 화가 나거나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는 급하게, 기분 좋을 때나 일이 잘 되어 갈 때는 슬슬…… 지금 턱을 슬슬 문지르는 걸로 보아 아무리 방송에 관심이 없는 체해도 화면에 나타날 광경을 속으로는 은근히 기분 좋게 기다리는 게 분명하다. 9시 2분 전에 내가 입체 천연색 TV에 전원 스위치를 넣었다. 8시 차임벨 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우주로'라는 시그널 뮤직과 함께 입체 TV화면 가득히 우리 베이스 K의 조감도가 나타났다. 아나운서의 해설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이 기다리시던 우주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김영준 박사의 책임하에 있는 총․채의 해상우주연구소 베이스 K와 1개월 전에 김 박사와 함께 지구에 도착한 헤시코스의 공주 아사 양을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아저씨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묘한 웃음이랄까, 입 언저리가 기다랗게 이지러지는 은근한 미소가 화면에서 나오는 빛 속에 드러났다. 그러면 그렇지! 보름 안으로 아사를 헤시코스로 돌려보내기 위해 K우주선에 원자력 엔진을 장비하는 일이 급하다는 이유로 기지의 내방(來訪)을 끝까지 못마땅해 왔던 아저씨였더라도, 막상 우리 연구소와 아저씨를 필두로 한 연구소 전 종사원이 전국에 소개되고 있는 화면에 그렇게 관심이 없을라구! 아나운서의 유창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온다. "베이스 K!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유일한 우주 물리학자인 김영준 박사가 몸소 건설했고, 또 현재 그의 책임하에 운영되고 있는 베이스 K 연구소! 한국에서는 그 처음으로 실현을 본 해상 연구소 베이스 K의 규모는 과연 어떠하며, 그간 어떤 학술적 성과를 올렸으며…… 등등이 우리에게는 궁금한 바 있는 것입니다." "울릉도 비행장을 출발한 헬리콥터가 서남쪽으로 바다 위를 한 시간쯤 날자 망망한 대해 위에 한 작은 점이 나타났습니다." "점을 향해 계속 접근함에 따라 그것은 급속도로 확대되어서 화면에 보시는 바와 같은 웅장한 자태를 나타냈습니다." "그 기묘한 연구소의 모양, 그것은 '장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먼저 박사님께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베이스 K의 하는 일을 알아봤습니다." 화면에 아저씨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저씨의 얼굴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그의 모습에서 노벨상 수상자다운 대가의 풍모를 찾지 못해 실망하리라. 짧게 깎은 머리, 매섭게 빛나는 눈, 미 우주항공국(NASA)에서 놓치기 아까워했던 학자였다는 것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운동장에 선 축구 코치를 먼저 연상하리라. 그러나 좀 더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풍부한 양 볼에서 학자의 고집스런 인상도 함께 느꼈으리라. "우리 연구소는 행성간의 항해에 큰 문제가 되어 있는 태양의 방사능비(放射能雨)와 우주 먼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외계(外界)에서는 우주선(宇宙線)이라고 해서 막대한 양의 고속 입자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들 고속 입자는 방사능 주머니라고 해서 일정한 지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만 나선 운동을 하며 돌고 있습니다. 태양의 활동이 활발할 때는 이 방사능 주머니가 커져서 태양계 구석구석에까지 그 효과가 미칩니다. 이 주머니가 태양계의 곳곳에 도깨비처럼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중차폐(重遮蔽)가 되어 있지 않은 우주선이 그 안에 빠지면 승무원은 치명상을 받습니다. 우리 연구소는 이 주머니의 소재지를 조사하고 그 안의 방사능 강도를 측정하여, 주머니의 변화하는 모양을 예측하는 자료를 만들어서 주로 미 우주항공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중요 임무는 우주 먼지라는 것에 대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직경 수 밀리미터로부터 크게는 산같이 큰 것도 있습니다. 태양계 자체가 고속 운동을 하는 만큼 이 우주 먼지, 흑은 운석(隕石)은 상대 속도가 엄청나게 커서 이 역시 항해하는 우주 차량에 상당한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이 운석이 태양계 내의 항로에 나타날 확률을 수학적으로 엄밀히 정립시키는 것이 우리가 맡고 있는 크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아저씨의 긴 설명이 끝나고 아나운서의 말이 다시 흘러 나왔다. "이런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는 베이스 K 연구소에 대해 그 동안의 연구 실적을 물어 보았습니다." 다시 아저씨의 프로필이 화면에 클로즈업 됐다. "업적이라고는 아직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만 간단히 두 가지만 들면, 먼저 말한 운석에 대한 문젠데 금성에서 화성 사이의 전 외계에 나타날 우주 먼지와 운석에 대해서는 90%까지는 예측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간을 비행하는 우주선은 저희가 제공한 자료만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 우주선이 운석의 장애를 받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항로가 저절로 컴퓨터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나머지 10%가 불확실하니까요. 이 10%도 쉬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헤시코스라는 하나의 새로운 행성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신문으로 보도된 일이 있습니다만, 지난 해 12월이었습니다. 화성 근방을 자료수집차 비행하던 우리들은 우연히 -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는 헤시코스인의 텔레파시에 유도된 것이 나중에 판명됐습니다만 - 여하튼 예기치 않게 한 작은 행성을 -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은 행성 - 사실 좀 큰 운석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 우리와 완전히 동일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 헤시코스인의 생태에 대해서는 이미 지상으로 발표된 깃과 같습니다." 다시 아나운서의 내레이션이 계속된다. "헤시코스! 인간이 살고 있다! 누구도 짐작 못했던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 방송국에서는 헤시코스의 공주 아사 양을 여러분에게 직접 생방송으로 소개할 예정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럼 거기에 앞서서, 박사의 기사 주임 스파이크 씨에게 초점을 돌려 연구소 내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파이크 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서양 미남이다. 좁고 우뚝한 코, 깊고 파란 눈, 얇은 입술, 바쁘다고 투덜대면서도 녹화할 때에는 부랴부랴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저고리 왼쪽 주머니에 흰 손수건까지 얌전히 꽂고 카메라 앞에 선 신사다. 스파이크 씨의 한국어는 완벽하다. 우리와 함께 생활한 지가 벌써 만 2년이 넘었으니까 '와' 자나 '왜' 자 같은 중모음이나 'ㄴ'과 'ㄹ'을 확실하게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그만하면 어디 갔다 놓더라도 손색없는 한국어다. 하기야 엑센트가 약간 문제이지만. "해상 기지를 제일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은 우리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은 리차드 B. 플러입니다." 쳇! 역시 자기 나라 자랑부터 먼저 시작이군. "플러씨의 아이디어에 의해 세계 여러 곳에 해상 도시와 해상 연구소가 생겼습니다. 우리 베이스 K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한 30번째 될 겁니다. 베이스 K 연구소는 김영준 박사님과 제가 같이 설계한 것입니다." 스파이크 씨의 말은 어떻게 들으면 단조로운 것 같지만 체계는 뚜렷하고 논리적이다. 사실, 이런 논리가 그들의 생활에 파고들고 나아가서는 저희들의 찬연한 기계 문명의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파이크 씨의 설명에 따라․연구소 내부가 하나하나 화면에 나타났다. "연구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부분은 직경이 210미터, 다른 한 부분은 직경이 50미터인데, 두 부분은 45O미터 되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큰 부분은 연구실, 도서실, 기계 공작실, 거실, 우주선 조립실, 배(船)대는 부두 등이고 작은 부분은 우주선 발사장입니다." "기지는 파도를 막기 위해 실리콘 수지 유리로 완전히 막혀져 있습니다. 또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10톤짜리 닻 4개가 물 속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해상 연구소가 움직일 때는 2천 5백만 마력의 플루토늄 원자력 엔진이 가동됩니다. 시속 20노트를 낼 수 있습니다. 해상 연구소의 장점은 이 기동성입니다.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습니다." 아나운서가 다시 나왔다. "다음에는 김 박사님의 조카 김태진 군에게 녹음 마이크를 돌려 다른 여러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김 박사와 스파이크 씨의 관계." 내 차례다. 내 얼굴이 나타났다.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앉았으니 기묘한 생각이 든다. "아저씨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 아인슈타인 연구소에 계실 때 노벨상을 받으셨어요. 그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숙제로 되어 오던 통일장(統一場)이론을 완성시켰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 그 후에 아저씨는 미 우주항공국에 초빙되어 가셨는데, 스파이크 씨는 그 때부터 아저씨 밑에서 일하게 됐대요. 후에 아저씨가 귀국하시려 하자 항공국에서는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내놓으면서 만류했대요. 아저씨께서 기어코 귀국하시려 하자 항공 당국에서는 이 베이스 K 기지를 설치하고 항공국에서 하시던 일을 계속해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아저씨께서는 이것까지는 차마 거절하시지 못하고 이 일을 맡았답니다. 그러나 미 우주항공국의 자본으로 건설된 연구소이기는 하지만 NASA 소속은 아닙니다. 일종의 물자 차관으로서 돈으로 갚는 게 아니라 연구 보고로서 빚을 갚고 있습니다. 앞으로 논문 5개만 더 내면 연구소는 완전히 우리 것이 되는 셈입니다." 다시 아나운서가 나왔다. "베이스 K의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 - 가정부 이소미(李素美) 여사를 만났습니다. 항시 검푸른 바다만을 보며 살고 있는 베이스 K에서 살림을 도맡아 보면서 끓임 없는 유머로서 기지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에 항상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여사의 역할 - 또한 작다 할 수 없다는 박사의 말이었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흘러나오는 도중에 아줌마의 얼굴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내가 곁눈으로 아줌마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더니 약간 실쭉한 표정이다. 자기 얼굴이 너무 짧게 나타났다 사라진 게 불만인 모양이다. 이 때, 스테미너를 불어넣는 드링크제라도 마신 듯한 힘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줌마의 시선을 화면 쪽으로 다시 끌어 들였다.   우주에서 온 소녀의 실종   "그러면 여러분이 보고 싶어하시던 아사 양을 카메라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운동 선수라도 소개하듯, 열띤 아나운서의 목소리다 아사와 제양이 다소곳이 나타났단. 스파이크 씨 말이 맞았다. 아사는 담담하고 의젓한 티를 그대로 간직한 채지만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아사는 우리말을 못합니다. 아니 아예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텔레파시란 기상천외의 방식으로 생각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녀 텔레파시의 위력은 상대편과 정확하게 뇌파가 동조만 된다면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도 생각을 송수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과는 이 동조(同調)가 어렵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 박사의 여비서 제송나 양으로 하여금 아사 양의 텔레파시를 수신해서 제양의 입을 통해 아사 양과의 대담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아사 양 - 처음 지구에 오신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화면에는 아사 양만 나타났다. 먼저 1미터 90이 넘는 늘씬한 몸매 전체가 나타났다가 황금빛 머리칼 아래의 둥근 얼굴이 화면을 채웠다. 누나(제송나 양을 나는 이렇게 부른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지만 화면에는 아사 양뿐이기 때문에 그녀가 직접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것은 우리 헤시코스에 있는 지하 도시를 새로 발굴해 낸 사람이 김영준 박사님 일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철학과 예술 - 특히 전기 분야의 과학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박사님이 오시기 15년 전에 갑작스런 대 화산 폭발로 헤시코스의 공전 궤도가 태양에서 멀어지면서 모든 것을 얼려(氷) 버리는 무서운 한파가 몰려왔습니다. 그 동안에 인구의 5분의 3이 죽어 갔습니다. 물이 얼어 버리는 바람에 수력 발전도 불가능해서 단 하나의 연료인 전기도 끓어졌습니다. 우리는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긁어모아서 불을 때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저의 땅에 오신 박사님께서는 우리가 그 때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던 지하 도시를 찾아 냈습니다. 실은 수천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서 우리의 선조들이 땅 속으로 들어가서 지하 도시를 건설했던 것인데, 정확한 문헌이 없어서 그 장소를 확실히 몰랐던 것입니다. 지하 도시를 찾아 낸 박사님께서는 또 다른 광명의 실마리를 저희들에게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원자력입니다. 사실은 벌써 2만 년 전에 저희 조상들이 원자력의 비밀을 알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자력을 동원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황폐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모든 문명이 송두리째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하늘과 땅에 가득한 방사능은 인간을 서서히 죽게 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선조들은 대 결단(大決斷)을 내렸던 모양입니다. 원자력의 개발을 불법화(不法化)시키고 그와 관련되는 문헌은 깡그리 없애 버렸습니다. 이 지독한 경험을 가졌던 우리 종족은 나중에는 원자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마귀처럼 두려워하고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박사님은 원자력의 도입을 제의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펄쩍 뛰었지요. 연방 죽어 가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설득했습니다. 원자력은 자제(自制)를 가지고 적절히 통제만 한다면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습니다. 결과는 박사님 측의 승리였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사고 방식의 완전한 변화, 철학의 완전한 변화였으니까요. 저는 이번에 박사님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물론 유람온 셈입니다. 그러나 원자력의 이용 방법을 보러 오기도 한 겁니다. 두 주일 후에 저는 저희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 때에는 원자로를 건설할 자재를 가져갑니다. 지금도 흐르노프 교수는 헤시코스에 남아 계시면서 새 자재가 도착하는 즉시로 원자로를 건설하고 운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술자를 훈련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헤시코스로서는 지구로부터 톡톡한 은혜를 입고 있는 셈이군요." 아나운서가 웃으면서 한 말이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박사님께서 저와 같이 가시면 저희의 뇌파 증폭기의 사용법을 배우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기계는 오래 전에 선조가 만들어 여태까지 사용하여 오고 있는 것인데 멀리까지 생각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처음에 여쭈어 본 지구에 대한 인상은 어떻습니까?" "우선 중력이 커서 걸어다니기가 힘들어요. 센 중력에 끌어당겨서 그런지 지구인들은 키가 작은 것 같아요. 헤시코스에서는 완전히 성장하면 남녀가 다 보통 2미터 10은 되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 지구인들은 미래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들을 가지고 과감하게들 일하고 계세요. 또 여기에는 헤시코스에 없는 음악이라는 것도 있고요." "또 색다르다고 생각되는 것은 없었나요?" "예 있어요 - 여러분들은 입으로는 저마다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신다고 하지만 실제는 어디 그래요. 저마다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잖아요? 더욱이 사람을 살상시키는 무기를 생산해서 돈을 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아요. 놀랄 일입니다. 헤시코스에서는 아무도 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아무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부자니 가난뱅이니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이 가진 지식으로만 판단되니까요." 이것이다. 아사가 방송에 출연하기를 기꺼이 승낙한 것은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많은 신문기자들과의 대담에서도 항시 이 말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던 그녀인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데 그 곳에서는 수천 년 동안 전쟁이란 없었다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원자전 이후에는 전쟁이란 말(생각)도 잘 쓰지 않는 형편이 됐으니까요. 아무쪼록 여기서도 우리의 예를 본받으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1, 2초 동안 아나운서의 말이 끊어진다. 아사의 말에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매우 고마우신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오늘 본 방송국에 출연한 것이 즐거우십니까?" "예! 즐겁고 보람이 있어요. 제 말을 들으신 많은 분들이 더 한층 큰 우정과 사랑을 저에게 보내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사가 무척 어려운 말을 할 때처럼 잠시 머뭇거린다. 아나운서, 미소로서 아사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분도 간혹 계시는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오히려 저에게 강렬한 증오감을 보내 오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그걸 느끼고 있어요. 무서워요!" 도서실에 있던 우리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 마주 보았다. 아사의 팔은 그만큼 신중하고 불길한 예감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다. 아나운서도 잠시 당황해 하는 표정이었으나 곧 밝아지며 원기 있게 말한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아사 양께선 너무 지나치시게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아나운서가 얼굴을 화면 쪽으로 향했다. "오늘 아사 양을 본 방송국에 모신 것을 다 같이 기뻐하는 바입니다. 오랫동안 훌륭한 말씀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헤시코스까지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빕니다." 곧이어 '우주로‘라는 음악이 울려 나오면서 대담은 끝났다. 이 '우주로'라는 시그널은 아사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내가 스위치를 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아사의 말을 듣고 아사를 미워할 사람이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내가 먼저 고즈넉한 침묵을 깬다. "아사는 남이 가진 생각에 얼마나 민감한지 너도 알지. 우리가 추위를 타듯이 그녀는 감정을 느낀단다." 아저씨의 대꾸다. 턱을 쓰다듬는 손길이 약간 바빠진다. "그러나 누가 아사를 미워한단 말입니까?" 하고, 스파이크 씨가 파란 눈을 아저씨 쪽으로 돌렸다. 아저씨의 손길이 더욱 바빠진다. "아사를 미워한다기보다 그녀의 생각을 꺼릴 가능성은 있어. 아사는 여기 온 후, 헤시코스에서 이룩된 평화의 복음을 기회 있는 대로 세상에 얘기해 왔거든. 그 복음이 사람들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 할 사람이 있어." "원 박사님도. 아무리-그런 수도 있을라구요." 아줌마가 이의를 제기한 소리다. "아줌마! 예수는 추종자도 많았지만 적도 많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갑자기 요란한 마이크로 웨이브의 전화 벨 소리가 대화를 중단시켰다. 육감이란 이상한 것이다. 항상 듣던 벨 소리지만 지금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 뒤가 서늘하다. 아저씨가 수화기를 들었다. "예, 김영준 입니다. 무엇이라고? 수상한 차가 있었다고요? 예! 예! 경찰에 벌써 연락했습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섯 개의 눈은 아저씨가 들고 있는 전화기에 못 박혔다. 수화기를 놓는 아저씨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다. 아저씨의 왼손은 물고 늘어지듯이 턱을 움켜잡고 있다. 최악의 사태를 뜻하는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방송국에서 온 전화야 " 아저씨의 목소리는 경황이 없다. "2분 전에 방송국을 나온 아사와 제양이 괴한에게 유괴 당했어!"   일본인 사사키   아저씨와 내가 KBS의 옥상 헬리포트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조금 넘었다. 스파이크 씨는 원자력 엔진을 조립하고 있는 60명이 넘는 기술자를 감독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소에 남았다. 눈이 자라는 데까지 불꽃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서울의 야경(夜景)은 망막한 바다 위에 툭 있는 좁은 연구소에서 파도 소리를 유일한 벗으로 하며 오랫동안 살아온 나에게는 새삼스럽게 왈칵 고독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감상에 오랫동안 잠겨 있을 새는 없었다. 수은등 아래 참새처럼 웅크리고 있는 주인 잃은 누나의 빨간색 헬리콥터를 보았을 때 다시 마음이 찡해 왔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누나와 아사를 납치해 갔을까? 지금쯤 무슨 고초를 당하고 있을까? 몇 시간 전에 TV 화면에 다소곳하게 나타났던 그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방송국에서 얻은 정보로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데 아무런 도움도 안됐다. 방송을 마친 누나와 아사는 시내 구경을 간다면서 방송국을 나오다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신형 폭스바겐 속으로 갑자기 끌려 들어갔다는 것이고, 이를 목격한 수위가 그 차번호를 즉각 경찰에 신고했지만, 번호는 가짜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방송국에만 오면 설마 무슨 단서가 잡히겠지 하던 희망도 사라졌다. 오직 하나의 위안이라야 모든 항구와 비행장에 납치된 지 10분 후부터 엄격한 감시망이 펴져 있었기 때문에 누나와 아사가 아직도 국내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가정뿐이었다. 밤이 깊어서야 아저씨와 나는 근방 호텔에 들었다. 그러나 밤새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오전 중에는 줄곧 호텔 방에 머물러 있었다. 간간이 경찰을 불러 상황을 알아보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소식을 기다리고……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경찰에서는 사건의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 갇힌 맹수 신세가 된 아저씨는 신경질만 늘어간다. 하잘 것 없는 일에도 벌컥벌컥 화를 낸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방 안을 서성거린다. 껍질이 벗겨지라고 턱을 문지르면서……. 아저씨의 성미를 잘 아는 나는 묻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아예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오후 세 시경에야 늦은 점심을 먹고 휴게실에서 잠시 쉬며 커피를 마셨다. 휴게실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앉아 있다. 흡사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 때, 어떤 사람이 휴게실에 나타났다. 그 사람이 들어섰을 때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얼른 외면해 버렸다. 쏘는 듯한 매서운 눈초리를 오래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저씨와 눈 씨름이라도 붙여 놓으면 재미 있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픽 웃었다. 그 사람은 우리 뒤쪽 자리에 앉는다.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몰래 훑어보았다. 눈은 실같이 가늘다. 키는 1미터 60쯤 될까? 작은 키다. 그러나 어깨는 딱 벌어졌다. 한 마디로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체격이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한국인은 아닌 것 같은 인상이다 일본 사람? 중국 사람? 그런데 이 사람은 간혹 이 쪽 - 우리 쪽을 힐끔거린다. 내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이상 한 생각이 들어서 우리편을 보는 건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안녕 하싱니까?(안녕하십니까?) 박사님." 발음이 형편없는 우리 말이다. 독특한 비음이 없는 걸 보니 중국인은 아니다. "네, 안녕하십니다."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아저씨간 얼떨결에 건성으로 대꾸한 말이다. 전국에 명성이 자자한 아저씨가 낯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인사를 듣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 때마다, 아저씨는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역시 반갑게 마주 대꾸해 줘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다르다. 아사와 누나 일로 머리가 꽉 차 있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저씨의 흥미를 끌 수 없는 상태다. 그 사람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 소넹(년)은 박사님 조카 깅대징 꿍(김태진 군)이궁(군)요. 우주 여행에 노렝(련)한 경험을 가진 소넹(년)찌 (치)고는 아직 영(연)소하므니다." "……" 나는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이런 자리가 아니고 혼자서 이런 서투른 발음을 듣는다면 나는 틀림없이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아저씨에게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더라면 벌써 벼락이 떨어지고도 남을 일이다. "잉(인)사성도 발꿍요(밝군요)." 하고 그는, 아저씨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법 붙임성 있게 계속 지껄이기 시작한다. 발음은 돼 먹지 못했지만 말의 순서만은 제법 훌륭했다. "요새 젊응 애들은 버릇이 정차 엄어져 가능 것 같아요. 어릉을 몰라보고 항부로 대들려는 경향이 있거등요." 무슨 쓸데없는 얘기야? 아저씨가 은근히 화가 동하는 모양이다. "요점을 빨리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례지만 저는 지금 좀 바빠서. 헌데, 우리는 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아저씨의 약간 모난 소리다. "아닝(닙)니다. 만난 일이 없었으므니다. 그래서 제 이릉(름)을 대보아야 별 도움이 안되겠으므니다만…… 저는 사사키라고 하므니다." 분명히 아저씨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는 태도 같다. 말을 해 가는 동안에 발음은 많이 나아졌다. "아-그렇습니까? 나는 김영준입니다. 차라도 한 잔 드시지요." "감사하므니다. 저능(는) 다른데서 벌써 마셨으므니다. 용서한신다(면) 담배를 한 대 피우겠으므니다." 스므니다는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물론 피우시죠. 보아하니 일본서 오신 것 같은데 우리말을 잘 하시는 군요." 아저씨의 마지못한 대꾸다. 사사키는 담배를 꺼냈다. 그 때 얇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성냥을 그어 담뱃불을 붙인다. 그의 태도는 첫인상과는 달리 상냥했다. 연방 생글거리면서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눈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간다. 아저씨가 마지못한 듯 하면서도 여태까지 그의 상대가 피어 준 것도 이런 그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능(는) 약감(간) 국제적이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남의 태도와 형편이야 어찌됐던 말을 빙빙 돌려가면서 시간이 가거나 말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하고 말겠다는 배짱인가? "여러 나라 큼(큰) 회사에(의) 대행 업자 노릇을 하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보니 약감(간) 외국어를 지껄일 줄 알게 됐으므니다." 정말 이따위가 있어? 그럼 제 자랑이나 하려고 그렇게 말을 질질 끌었나? "그래요? 그럼 좀더 정확하게 용건을 말씀해 주실까요?" 기분과는 달리 억지로 말만은 용하게도 신사의 체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줌마가 보면 웃음을 참느라고 틀림없이 쩔쩔맬 것이다. 사사키는 다시 한번 싱그레 웃었다. "나를 고용하고 있능(는) 사라믄(람은). 일본의 항(한) 무기 생상(산) 업자이므니다." "그래서 저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 때문인가요? 댁의 대행 사무에 관계되는 일 때문에?" 아, 알겠오. 그러면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니 이제 그만 합시다 하는 투다. "그렁(런) 명(면)도 있지요. 그런데 그 보다 나는 유괴 당한 박꾸사님에(의) 두 소녀를 찾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찾아 왔으므니다." 나른하게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던 아저씨가 스프링에 퉁긴 듯이 사사키 앞으로 다가앉는다. 창 밖은 자동차 소음이 한창이지만 방 안에는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소리가 꺼진 무성 영화처럼. "누나와 아사 말씀인가요?" 침묵을 견디다 못해. 내가 급하게 끼여들었다. "그래, 깅꿍(김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빛나는 눈으로 사사키를 똑바로 쳐다본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겁니까? 그 얘들이 있는 곳을 알고 계신단 말씀이신가요?" 사사키는 창 쪽으로 시선을 보낸 채 말이 없다. 우리의 조바심을 일깨우려는 태도일까? "깅 박꾸사! 나는 그들이 있능(는) 곳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소. 그것은 오로지 박꾸사에(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소." 시선을 돌려 입을 연 그의 태도에는 여태까지의 상냥함은 간 곳이 없다. 가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아저씨의 눈을 마주 쳐다본다. 조그맣고 새까만 눈동자가 무섭도록 빛을 낸다. "내게 달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서르맹(설명)하지요." 그는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내뿜는다. 여유 작작하다. 위압적인 태도다. "나를 고용하고 계신 분께서는 헤시코스인이 가지고 있다능 그 경이적인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하시므니다. 뇌파 증폭기라던가요? 그래서 나의 제앙(안)은 현재 건조 중인 우주선으로 당장 헤시코스에 가서 그 물건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넘겨 주면 아사와 제송나를 돌려보내 주죠. 짐작컨대 헤시코스 국왕의 딸의 안전을 위해서 그 뇌파 증폭기와 운전 방법을 순순히 내어놓을 거요." "알겠소." 물어뜯는 듯한 아저씨의 대꾸다. 아저씨는 화산처럼 터지려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역력하다. "당신 같은 악당을 적절하게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군요. 사사키상." 사사키는 서양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댄다. 소름이 쭉 끼친다. "하하…… 제바르(발) 제바르(발) 고정해요. 바꾸사! 바꾸사는 여태까지 만도 그럴 수 없이 무례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거망(만)했소." 아저씨를 아예 아이 취급하듯 한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상대를 위압하는 힘이 있다. 사사키의 태도는 불꽃 꼬리를 길게 그으며 떨어지는 운석을 연상시킨다. 표범 같은 자세라고나 할까? "나의 고용주는 일본 모처에서 현재 우주선을 건조 중에 계시므니다. 무장한 사람을 헤시코스에 보내서 그 기계를 탈취해 올 수 있는 망방(만반)의 중(준)비가 되어 있단 말씀이므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아까 제의항(한) 방법이 훨씬 강당(간단)하고 또 그것이 일층 진보한 문멩(명)인에 태도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 잘난 당신의 간단하고 문명인다운 안을 거절한다면?" "하하- 그망항 건 알 덴데.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엄능(없는) 불행이 오겠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아까 말항 것처럼 무장 우주선을 보내서 그 기계를 탈취해 오겠죠." "도대체 당신들은 그 기계를 어디다 쓸 작정이요?" "솔직히 말하시오." 사사키는 음흉한 미소를 짖는다. "박꾸사와 같은 어리섞은 이상가들이 잠꼬대 같은 평화르(를) 떠들어대면, 우리가 만든 무기는 쓸모 엄(없)게 되고 폐물이 되고 말 것이 아니겠소까? 그러나 원래 인간은 경쟁과 투쟁을 좋아하니까 전쟁을 선동할 수 있도록 새롭고 기발한 생각을 그 기계를 통하여 세상에 끊임없이 퍼트리면 투쟁을 좋아하는 인간들에게는 적선을 베푸는 셈이고, 또 우리의 무기도 폐물이 되기는커녕 자꾸자꾸 더 필요해 질 것이 아니겠오?" 기가 막힌 아저씨는 한참 동안 말을 못한다. 일본인의 상혼(商魂)이 어떻다는 것은 전 세대들로부터 익히 들어오던 바지만 이렇게 악랄한 사사키 같은 자가 있는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 "참으로 솔직하군요 사사키상 ! 정말이지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최고의 악마요!" 사사키가 또 낄낄댄다. "하하-. 연설은 필요 없어 박꾸사. 그러나 나의 제안 이 박사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인정하오. 그래서 이 문제를 좀더 신중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겠오. 내일 정오에 전화를 거르(걸)겠오. 그 때 답해 주시요." 사사키는 일어섰다. "또, 그 동안에 경찰에 연락하지 말 것을 엄숙히 경고하오. 예를 들어 레가 이 호테루(호텔)를 나간 후 미행당하는 흔적이 발견될 때는 여자들에게 지체없이 큰 재남(난)이 닥칠 거요." 그는 문간에 버티고 서서 친근한 미소를 던졌다. "박사가 알아듣도록 잘 말하게, 깅꿍."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한 대 치기 전에 빨리 나가." 천장이 쩡 울린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오. 박꾸사 몸에 해로울 뿐이오. 그럼 사요나라." 배터리 상점 문이 닫혔다. 기가 막히는 순간이다. 사사키는 우리를 철저히 우롱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쫓아나가서 놈을 때려 눕혔으면, 그리고 경찰서까지 질질 끌고 갔으면 싶은 심정이지만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아사와 누나 때문이다. 사사키는 그 점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한 행동임은 물론이다. 한참 동안 우리는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때,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계 있어서 의자 밑으로 엎드렸다. "그자가 담배를 꺼낼 때 의자 아래로 무엇이 떨어지는 걸 보았어요? 아저씨?" "못 봤는데." 평소의 아저씨답지 않은 힘없는 대답이다. "종인 것 같던데요. 아- 여기 있어요." 나는 무릎을 털고 종이를 펴 들었다. 의정부의 어떤 배터리 상점에서 발행한 영수증이다. "의정부라-. 어디 보자." 아저씨는 눈이 번쩍 뜨이는 모양이다. "형제 동력 배터리 상사, 의정부시 낙선동 5가 120번지 동력 배터리 A형 교환. 245원. 흠~ 날짜는 오늘이구나!" 영수증을 움켜 쥔 아저씨는 원기를 되찾았다. "사사키 놈은 여기에 오기 두어 시간 전에 배터리를 교환한 모양이구나." "그럼, 누나와 아사도 의정부 어디에 잡혀 있겠군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럴 것 같구나. 자, 가자. 1시간 반 남짓하면 갈 수 있다. 배터리 상점에 가서 우선 알아보아야겠다." "경찰에 연락하면 안되나요?" "아직은 안돼. 사사키의 경고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지. 우리끼리만 놈을 기습하자!" 우리는 구르듯이 카운터로 달려가서 지프 한 대를 빌렸다. 일부러 삼분의 일쯤 방전이 된 동력 배터리로 교환해서 출발했다. 형제 배터리에 가서 교환하기 위해서다. 요즘은 공기 오염 때문에 고출력을 요하는 특수 차량 외는 내연 기관의 장비를 법률로써 금하고 있다. 내연 기관 대신에 전부 동력 배터리로 대치된 배터리 카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 세대에 흔했다는 주유소가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배터리 카는 48시간 계속해서 굴리고도 2시간이면 거뜬히 재충전이 끝난다. 충전할 틈이 없는 경우에는 도로 양편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배터리 상점에서 쓰던 것과 바꾸면 된다. 사사키도 무슨 급한 일이 있었던지 밤사이에 집에서 충전하지 않고 형제 배터리에서 동력 배터리를 교환한 모양이다. 고가 도로로 서울 시내를 벗어난 우리들은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자 풀 스피드로 차를 몰았다. 누나와 아사가 당하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한시가 급한 것이다. 길옆에는 추수를 마친 빈 논밭이 쓸쓸하게 펼쳐져 있다. 누나와 아사를 잃은 우리 마음처럼……   배터리 상점   6시 반경, 의정부에 도착했다. 행인이 일러준 대로 의정부 시내에서 서북으로 뚫린 길을 30분쯤 달리니까 낙선동이 나타났고 5분도 더 채 못 가서 우리는 쉽게 간판을 찾았다. 형제 동력 배터리 상사. 새로 생긴 배터리 진열대에 차를 세웠다. 뒤편 사무실에서 푸른 유니폼을 입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뛰어 나왔다. 해맑은 얼굴이 좋은 인상을 준다. 아저씨의 주문을 받은 소년은 능숙한 솜씨로 차체 밑에 있는 얇고 넓은 배터리를 꺼내서 양극에 계기를 대 본다. "극판 용량은 새 것과 마찬가진데요. 50시간 사용하셨군요." 충전과 방전이 반복됨에 따라 극판이 전해액에 녹아 들어가서 극판의 작용 물질이 점차 감소된다. 소년의 말은 배터리의 사용 시간이 얼마 안돼서 극판이 아직 멀쩡하다는 뜻이다. 소년은 진열대에서 전지 하나를 꺼내 왔다 "같은 B형인데 사용 시간도 50시간입니다. 보시죠." "됐네, 그 걸로 빨리 해 주게." 소년은 차체 밑으로 배터리를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급하신가요?" "뭐 별로…… 이 근방에 살고 있는 친구 한 사람을 찾아보려고 그래. 아참, 그 친구도 여길 자주 들른다던데, 자네 혹시 기억에 없나. 귀가 작고 눈이 좀 가는 편인데……" 소년은 전극을 연결하고 있다. "눈이 가늘어요? 일본 사람 말인가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일본 사람이야. 어디 살고 있는 지 아나?" 흥분을 감춘 아저씨의 말이다. 소년은 차체에 기대서서 영수증을 쓰고 있다. "아저씨 친구 분은 말씨가 참 재미있던데요." 영수증을 쓰면서 혼자 씨익 웃는다. 사사키의 우스꽝스런 발음이 생각난 모양이다. "산록산장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면서 눈을 껌벅한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등어리를 타고 슬금슬금 올라온다. 소년이 영수증을 내밀었다. "190원입니다." 아저씨가 200원을 꺼내 주었다. "거스름은 필요 없네." 제법 큰 팁이다. 볼펜 하나가 1원밖에 안 하니까. "산록산장이 어디 있지?" 소년은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오시다가 전철(電鐵) 정거장을 보셨죠.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거장에서 오른 편으로 꺾어서 한 40분쯤 달리면 채석장이 나와요. 바로 채석장에서 산 쪽으로 200미터만 가면 울창한 숲이 나오는데, 그 숲 속에 있어요." "고맙네, 덕택에 친구를 빨리 만나 보게 됐군. 산장에는 다른 사람도 많이 살고 있나?" "예, 많이 있어도 맨 일본 사람인 모양입디다. 일주일 전에 세 들어 온 모양인데, 그 분 말씨가 하도 재밌어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아저씨 친구 분은 참 부자인 모양이죠. 차도 맨 폭스바겐이고 헬리콥터도 세 대나 있대요." "틀림없군. 자…… 일 잘하게. 고맙네." 우리는 차에 올랐다. "안녕히 가세요." 우리는 소년의 인사를 등뒤에 받으며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산록산장(山麓山莊)   형제 배터리의 해맑은 그 소년이 일러준 대로 우리는 전철(電鐵)정거장 맞은 편에서 오른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산허리에서 한 뼘쯤 높게 걸린 해가 제법 눈부신 초가을의 햇살을 보내 온다. 시계를 보니 6시 50분이다. 전철에서 정확하게 35분 달렸다.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길 왼편에 널찍한 채석장이 희뿌연 어둠 속에 드러났다. 드디어 나타났다! 채석장 입구와는 반대편으로 측백나무 울타리를 한 넓은 길이 산 쪽으로 길게 뻗어 있고, 길이 끝나는 성싶은 곳에 검은 숲이 나타났다. 저 숲 속이다. 아사와 누나가 저 숲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전철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부터 가늠해 본다. 4km를 6분에 주파한다고 하면 의정부에서 24km 쯤 달려온 셈이다. 차부터 적당한 곳에 숨겨야 한다. 채석장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산더미 같은 원석(元石) 사이에 지프차를 숨겼다. 시계는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아저씨는 어둠이 더 짙어질 때까지 20분쯤 더 기다리자고 했다. 원석에 걸터앉았다. 으스스한 한기가 스며든다.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아저씨와 나는 서로 별 말이 없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별 뾰족한 수가 없다. 무조건 숲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게다. 들어가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서로 의논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까부터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다. 아사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이제야 그 느낌이라는 것이 아사의 텔레파시 통신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떠오른다. 나는 애써 정신을 모아 아사의 생각을 수신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간절하게 구원을 청하는 생각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저씨도 같은 생각을 수신했는지. "태진아, 가 보자. 아사와 제양은 틀림없이 저 숲 속에 있는 것 같다. 숲 속으로 우리를 오라고 하는 것 같구나." 우리는 측백나무 울타리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10월 상순의 이른 가을이라 길 주위에서는 아직 밤벌레 소리가 한창이다.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지나갈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소리가 뚝 그쳤다가 몇 발자국 지나가면 또 일제히 울어댄다. 벌레 소리까지 신경이 쓰인다.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울타리 길 끝에 이르렀다. 별장은 아직 보이지 않고 울창한 숲 속으로 넓은 차도가 뚫려 있고 100와트가 넘는 휘황한 수은 가로등이 켜져 있다. 길가 숲 속의 어둠 속으로 얼른 피하는데, 입구에 서 있는 작은 간판의 글씨가 눈에 띈다. 「산녹산장 입구」 우리는 길을 따라 숲 속을 전진했다. 20분쯤 나아갔을까 갑자기 시커먼 집 그림자가 눈앞에 다가선다. 마(魔)의 집처럼 시커멓게 길게 누운 건물에서는 빛이라곤 없다. 그래서 마지막 가로등 다음의 컴컴한 어둠 저쪽에 집이 도사리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저씨와 어둠 속에 숨은 채 건물 주위를 살펴보았다. 학교 건물처럼 엄청나게 큰 집이다. 건물 정면에 큰 철문이 있고 문 옆에 수위실 같은 것이 있다. 수위실 양 옆으로 울창한 정원수가 검게 보이고 밖은 한길이 넘는 담이 둘러 쌓여 있다. 집 뒤쪽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꺼먼 숲 외는 불빛이라곤 없으니 더 기괴하다. 아저씨가 소곤거린다. "태진아, 집 뒤로 돌아가 보자." 아저씨가 몇 걸음 앞서고 내가 뒤에 서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집 뒤로 돌아가서 건물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담 밖의 언덕 위까지 갔다. 불빛이 보인다. 두 군데다. 둘 다 건물 중간쯤에서 새 나오는 빛인데, 하나는 일층이고 다른 하나는 이층이다. 일층에서 새 나오는 빛으로 건물 뒤편의 잔디밭이 보인다. 그러나 빛이 비추는 범위는 극히 좁다. 또 아저씨가 낮은 소리로 말한다. "아래 층 빛이 새 나오는 곳까지 가 보자. 어두워서 들킬 염려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한길이 넘는 담을 넘어 정원수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빛이 새 나오는 사이를 피해서 재빨리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불빛이 새 나오는 창 앞에 바짝 엎드렸다. 1, 2분을 그런 자세로 기다려 보았다. 아무 기척이 없다. 내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고 창문에 눈을 바짝 들이댔다. 있다! 사사키가 있다. 큰 방에 혼자 있다. 방 가운데 있는 엄청나게 큰 테이블 앞에 앉아서 턱을 한 손으로 괸 채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저씨도 가까이 와서 보라고 손짓을 했다. 아저씨도 방 안을 한참 들여다본다. 우리는 다시 창에서 떨어져서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아사와 누나가 어디 있을까요?" 내가 속삭인 말이다. 아저씨는 말없이 불켜진 2층을 쳐다본다. 나도 그 방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아사와 누나를 생각할 때마다 아사의 생각이 전달되는 것 같다. 아저씨와 내가 거의 동시에 이층을 쳐다본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틀림없이 이층에 있는 것 같다. 아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때 아닌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부루호라는 아사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아사도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래서 저 소리를 일부러 우리에게 들려 준 걸까? 피아노 소리는 곧 그쳤다. 우리는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이층은 까마득하게 높게 보인다. 다시 사사키가 있는 방을 기웃거린다.   사사키의 부하 야마모도   이 때, 아저씨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바로 우리 등 뒤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그대로 조용히 손을 들어! 서툰 짓 하면 용서 없어." 얼떨결에 나와 아저씨는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 침착한 목소리는 다시 명령했다. "손을 든 채로 돌아서요." 우리는 바보처럼 손을 든 채 돌아선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어둠에 눈이 익음에 따라 사람 형체가 나타났다. 아저씨만큼이나 키가 크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아주 말라깽이 같다. "당신들은 김영준 박사와 김태진 군?"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수위실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놈들! 나쁜 짓을 하다가 보니 수위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망을 보고 있었구나. 그는 들고 있는 권총 끝으로 우리를 사사키의 방으로 몰고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사사키도 우리를 보더니 우리가 놀랐던 만큼이나 놀라는 눈치다. 우리를 방 안으로 몰고 온 자가 몸수색을 했다. 무기라곤 있을 리가 없다. 아예 그런 것을 생각도 안해 본 우리였으니까. 그자가 사사키 앞으로 나아가서 귀에다가 무어라고 한참 쑥덕거렸다. 사사키나 그 자나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조용조용히 얘기하는 품으로 보아 상당히 훈련된 범죄 집단에 틀림없다. 귓속말로 보고를 받은 사사키가 입을 열었다. "오 ! 깅 박꾸사(김 박사),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 아저씨는 사사키를 노려보면서 말이 없다. 사사키는 혼자 낄낄대더니 아무래도 궁금한 모양이다. "태진군, 우리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지."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반은 진실인지 모른다. "사사키씨, 우리는 아사의 텔레파시가 시키는 대로 왔을 뿐이에요. 미리 알려 드립니다만, 당신들이 어디를 가던지 아사가 옆에 있는 한 우리는 당신 있는 곳을 알 수 있어요." 사사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 깅꾼?" "정말입니다. 아사와 우리와의 텔레파시 통화거리는 수십 킬로미터는 됩니다." "그럼 왜 경찰을 데려 오지 않았어?" "당신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그 말에 사사키는 넓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어제꼈다 "하하하…… 고맙군 깅꾼, 그러나 내가 경찰에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지, 서로 약속한 건 아니잖아……" "그러나 잠깐, 사사키 씨" 나는 그의 말을 막았다. "사사키 씨, 당신은 알아 둬야 할 일이 있어요. 연구에는 스파이크 씨가 있어요. 스파이크 씨도 우리와 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미국에 아사의 텔레파시를 수신하고 경찰을 데리고 이리로 올 거예요." 나는 실수를 했다. 사사키에게 겁을 주어 보려는 뜻이 오히려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 하면 내 말을 듣고 나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던 사사키가 불쑥, "그래? 좋아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당신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사키상, 당신은 우리를 일본으로 데려다가 어떻게 할 참이요?" 하고, 아저씨가 조용히 입을 연다. "박꾸사, 아주 안성맞춤이 되었소이다. 당신들을 일본에 억류해 놓고 내가 몸소 헤시코스에 가서 아사를 미끼로 뇌파 증폭기를 뺏어 오겠소." 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사사키 씨, 당신은 노벨상 수상자 한 사람을 납치함으로써 생길 국제적인 분규를 생각해 보셨나요?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에 즉각 항의를 제기할 거고, 세계 여론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그렇게 되면 일본 경찰도 당신을 체포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요." "하하…… 깅꾼, 이론이 제법이군. 그런데 이거 봐." 그는 자기가 앉았던 책상 위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이게 무언지 아나? 이스라엘과 아랍 양국이 어제 무기 수출 계약이 체결됐다는 내 부하의 전보(電報)야. 금액은 자그마치 10억 불? 그뿐인가, 곧 북평정권에도 무기 수출 계약이 다 되어가고 있어. 나의 정부가 나를 체포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이젠 알겠지? 연간 수억 만 불의 외화 손실이야 알아듣겠나? 깅꾼." 아저씨가 끼여들었다. "이스라엘과 아랍 제국에 같이 무기를 판단 말이죠?" "하하 그렇소. 박꾸사, 그들 양국은 거의 20년 간이나 나의 변함없는 고객이었소." "무기를 팔아서 서로 싸우게 하고 당신은 돈을 번다는 말이죠. 사탄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이 방에 있구려." 사사키는 예의 그 낄낄거리는 웃음으로 혼잔 히히덕 거리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금방 험악한 눈초리로 아저씨를 잠시 노려보더니, 부하를 불러 뭐라고 지시했다. 눈치로 보아 우리를 이층 방에 가두고 내일 아침 4시에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사키 입에서 야마모도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로 보아 우리를 잡아온 자의 이름이 야마모도인 모양이다.   전기 충격   아저씨와 나는 이층으로 끌려 올라갔다. 방 안에 들어서니 피아노 앞에서 울고 있던 누나가 쓰러질 듯이 달려와서 아저씨 품에 안긴다. 아사는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우리 쪽을 쳐다보고 서 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에서도 저렇게 침착하다니. 등뒤에서 문이 잠겼다. 아사의 침착한 태도를 보니 나도 새삼 정신이 드는 것 같다. 그렇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지. 아사가 생각을 전해 왔다. "나는 박사님과 태진이가 잡힌 것을 벌써 알고 있었어요." 역시 그랬었구나. 아사가 우리의 뇌파를 벌써부터 수신하고 누나를 시켜 우리에게 피아노까지 쳐주었구나.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다 듣고 난 누나는 더 서럽게 울었다. 속수무책이다. 열쇠 구멍으로 내다보니 야마모도가 아닌 다른 자가 문 앞에 보초를 서 있다. 나는 탈출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저씨도 무엇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누나는 한쪽 구석에서 여전히 훌쩍이고…… 태연한 사람은 아사뿐이다. 조바심이 나는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벽시계가 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4시 전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창 밖으로 내다보니, 아래층에 불이 꺼졌다. 언제 떴는지 축구공 같은 달이 공중에 매달려 있고, 뜰 안에 가득한 달빛 속에 쥐 죽은 듯한 정적만이 깃들어 있다. 이따금 누나의 훌쩍이는 소리가 적막을 깰 뿐. 나는 창가에 서서 달빛 속에 누워 있는 검은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때, 나의 눈길이 내가 서 있는 창가에 미쳤다. 지붕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흘려보내는 물받이 관에 눈이 미쳤다. 합성 수지로 된 튼튼한 파이프다. 한참 동안 나는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창 아래를 가리켰다. 아저씨가 다가왔다. "아저씨! 이 물받이 관을 보세요. 충분히 타고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저씨의 눈에 별이 번쩍하면서 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본다. 이윽고 고개를 든 아저씨가 힘없이 말했다. "이걸 타고 내려갈 수는 있겠는데…… 그러나 밖에 서 있는 보초가 알 것 아냐." 모처럼 생각해 전 책략이 허사가 되었다. 한참 말없이 서 있던 아저씨가 새삼스럽게 눈을 빛내면서 내 귀에 바짝 입을 가까이 댔다. "보초에 전기 충격(電氣衝擊)을 주자." 내가 무슨 말인가 싶어 멍하고 쳐다보니 "문가에 전기 콘센트가 보이지. 기기서 전기를 끌어내어 보초 몸에다가 220V를 바로 가하는 거야." 전주(電柱) 변압기를 생략함으로써, 변압(變壓) 과정을 한 단계 줄여, 송전 비용을 절하하기 위해 220V가 일반 수용가에 바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초 몸에다 갔다 대나요?" "수가 생길 거야." 아저씨와 나는 문제를 오랫동안 의논했다. 결국 이렇게 하기로 합의했다. 실내 전화선을 끊어서, 콘센트에 연결하고, 아저씨와 내가 한선 씩 손가락에 감고 있다가, 보초를 유인한 후에 보초의 양손을 아저씨와 내가 하나씩 잡아서 보초에게 전기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아저씨 계산에 의하면 220볼트 전선을 가하면 인체 저항이 100킬로옴쯤 되기 때문에 전류는 2밀리암페어를 넘지 않지만 보초는 양손에서 내장을 통해 다른 곳으로 전류가 흘러가기 때문에, 1, 2초만 전류를 통해 주면 일시적으로 실신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선을 잡은 끈으로 보초의 손을 잡기 때문에 일종의 점접촉(點接觸)이 되어 우리 몸에는 전류가 전연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도 손바닥이 약간 찌릿한 정도라는 것이다. 시간을 보니 2시 20분이다. 아저씨와 나는 바쁘게 작업을 시작했다. 누나는 이젠 지쳐서 피아노 앞에 엎드려 있고, 아사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앉았다가, 아저씨와 나 있는 쪽으로 걸어와서, 우리의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생각을 보내왔다. "박사님, 설사 우리가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죽이지는 마세요." 그녀의 평화 신봉, 박애 정신을 익히 알고 있다. 아저씨가 그녀를 무마시킨다. "아사, 보초를 죽이지는 않아. 잠시 실신 상태를 만들뿐이야. 염려 말아." 아저씨의 말에 안심을 했는지 아사는 우리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전화선을 3미터쯤 끊어 냈다. 두 선을 콘센트에 끼웠다. 이제는 보초를 유인할 일이 남았다. 아저씨가 누나에게 우리 계획의 대략을 설명하고 보초를 꾀도록 했다. 설명을 들은 누나는 약간 생기가 도는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더니 물주전자를 들고 문 앞으로 갔다. "아저씨! 보초 아저씨!" 여태 훌쩍이던 끝이라, 일부러 과장하지 않아도 울음 섞인 누나 목소리는 애절하게 들린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문 밖에서 들려오는 보초 소리다. 제법 정중하다. "물 좀 주세요. 목이 타 죽겠어요." 보초는 한참 말이 없더니 "아가씨 안됩니다. 물은 아래층에 있습니다. 떠오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누나가 우리 쪽을 쳐다본다. 아저씨가 자꾸 조르라는 손짓을 했다. "목이 타 죽겠어요. 물도 안 주시려고 그래요? 수도까지 1, 2분이면 되잖아요." 보초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 실패인가 하고 우리는 바짝 긴장했다. "그릇 있어요?" 누나의 가냘픈 말에 넘어간 모양이다. 누나가 얼른 말한다. "여기 주전자 있어요." "주전자 이리 주세요." 문이 열린다. 보초는 바짝 경계하는 태도로 옆구리에 찬 권총을 시위하면서 손을 내민다. 우리는 얼른 딴청을 부린다. 다시 문이 잠기고 보초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진다. 나와 아저씨가 문 앞에 붙어 선다. 심장이 소리가 나도록 쿵쿵거린다. 1분쯤 지났을까? 보초의 바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이 온다. 문 앞에 선다. 열쇠를 꽂는다. 찰가닥 소리가 나면서 열쇠가 열린다. 문이 열린다. 앞에 서 있는 누나에게 주전자를 내밀던 보초가 문 옆에 붙어선 우리를 보고 약간 놀라면서 손이 허리로 간다. 이 때다. 나와 아저씨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으으……윽." 졸지에 당하는 심한 전기 충격이라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그자의 총을 재빨리 빼앗았다. 그자는 반항할 기운을 잃었는지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다. 아저씨가 커튼을 찢어다가 자갈을 물리고 그자를 침대 다리에다가 꽁꽁 묶어 버린다. 순식간의 일이다. 벽시계는 3시 5분이다. 우리는 서둘렀다. 창문을 소리 안 나게 열고 아저씨가 먼저 내려갔다. 그 다음이 누나인데 애를 먹었다. 겨우 땅까지 내려가긴 내려간 모양인데 중간쯤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땅에 떨어졌다. 쿵 소리가 없는 걸 보니 아저씨가 무사히 누나를 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 때 미끄러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뚫고 크게 들려왔다. 내가 부축하면서 함께 내려가던 아사 양이 미끄러진 것이다. '쿵'하는 소리가 크게 나자, 건물 뒤쪽에서 요란한 벨 소리가 울리면서 강한 서치라이트가 이 쪽을 향하여 훑어온다. "방금 누가 담을 뛰어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숲 속을 샅샅이 뒤져라!" 외치면서 뛰어나온 사람의 손에는 늑대처럼 사나운 개가 으르렁거린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땅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그 곳은 사나운 개가 으르렁거리는 곳에서 지척간이다. 개의 이빨이 불빛을 받아 번쩍 한다.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서 전신에 식은땀이 쭉 흐른다. 우리는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다. 개를 주시하면서. 개를 붙들고 있는 자가 사사키가 분명하다. 작은 키, 넓은 어깨, 사사키가 무어라고 외친다. 나는 무슨 소린 지 모르겠는데 숲으로 나가는 길을 막으라는  소리라고 아저씨가 귀뜸 한다. 사사키와 몇 명은 개를 따라 잔디밭을 왔다갔다한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눈으로 개의 동작을 좇았다. 개는 거의 10여 분이나 사사키를 끌고 잔디밭을 우왕좌왕 한다. 코를 땅에 끌며 우리와 반대편으로 가다가는 다시 우리 쪽으로 오고, 그러다가는 다시 옆으로 움직이고…… 잔디밭이라서 우리의 냄새를 쉽게 찾아 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결국 저 놈이 냄새를 찾지 못한 모양이지." 이렇게 혼자 생각했을 때다. 개는 우리가 조금 전에 내려온, 물받이 관에 코를 대고 한참 있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고 우리 쪽을 쳐다본다. 입을 떡 벌리고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짖어댄다. 사사키 손에서 풀려 나오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사사키가 개의 끈을 풀어 준다. 개는 쏜살같이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온다. 푸른 달빛 속에 검붉은 입과 송곳 같은 이빨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아이구머니!" 기어 들어가는 소리를 지른 누나가 내 팔을 움켜잡고 와들와들 떤다.   아사의 텔레파시   개는 이미 눈앞에 다다랐다. 날카로운 이빨이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서, 나는 무의식 중에 눈을 딱 갚았다. "제양! 겁내지 마. 내가 개하고 친해 볼께." 이 때,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추호도 당황한 흔적이 없는 아사의 침착한 생각이 전해 왔다. 헤시코스 인들은 새나 짐승의 생각을 수신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침착한 아사의 텔레파시 통신에, 이런 일이 번개처럼 내 머리에 떠올랐지만,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성난 개의 뜨거운 콧김이 이미 코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사가 겁도 없이 한 팔을 내밀어 개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쉬! 조용히! 너는 우리를 해치지 않겠지! 그지?" 혼신의 힘으로 개를 향해 복사(輻射)되는 아사의 텔레파시 에너지다. 실로!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 무섭게 짖어대던 개가 단박 조용해지면서 주인을 만난 듯 킁킁거리며 아사의 손등을 핥는다. 텔레파시가 계속 복사된다. "넌 우리하고 친구가 된 거야!" 개가 알아들은 듯이 꼬리를 흔들며 킹킹댄다. 사사키 일당은 벌써 십 미터 이내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아사는 개의 머리를 두 손으로 쥐고, 개의 큰 코에 다시 정신 감응력을 집중시킨다. "이제 저리 가! 빠져 나갈 때까지 딴 곳을 보고 짖고 있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사는 그녀의 생각을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듯이 동물에게까지도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개는 마지막 이별이라는 듯이, 크게 한번 짖고 사사키 일당을 끌고 반대편으로 달린다. 나는 전신이 식은땀으로 후줄근하다. 누나와 아저씨가 긴 한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지구에 있는 짐승에까지도 생각을 전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었어요." 하고, 아사가 생각을 보내온다. 누나는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이 기적 같은 일에 멍한 표정으로 아사를 쳐다보고만 있다. 누나 뿐 아니라, 아저씨도 나도 한참 동안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냥 엎드려만 있었다. "아사! 넌 참 멋지게 해 치웠어!" "가자." 한참 만에야 겨우 정신을 수습한 아저씨가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선다. "자! 가자! 정문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진 담을 넘어 가자.“ "차가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아저씨가 이끄는 대로 풀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아사는 우리의 마스코트야. 아사가 같이 있는 한 아무 일 없을 거야." 아저씨 말대로 우리는 더 이상 사사키 일당의 방해를 받지 않고 채석장의 차 있는 곳에 이르렀다. 채석장을 빠져 나와 의정부를 향해 힘차게 차를 몰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안도의 숨을 가슴이 후련하도록 후- 내쉬었다. 우리는 다시 해상 기지로 돌아왔다. 궁금해 하는 스파이크 씨와 아줌마를 위해 그 동안에 일어난 일을 아저씨가 간단히 말해 주었다. 우리가 채석장을 떠난 후, 약 1시간 후에 우리의 전화 신고를 받은 경찰이 산장을 습격했지만, 사사키 일당은 이미 헬리콥터로 국외로 탈출하고 난 뒤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해상기지로 비행해 오는 도중에 서울 시경에서 마이크로 웨이브 전화로 우리에게 연락해 주어서 비로소 알았다. 아사의 텔레파시 통신으로 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줌마는 새삼 경탄했다. 마침내 스파이크 씨가 우리 모두가 은연 중에 걱정하던 일을 끄집어낸다. "아사를 놓쳤으니 이젠 사사키는 우리보다 먼저 헤시코스에 갈려고 하지 않을까?" 아저씨도 스파이크 씨의 의견에 동조한다. "틀림없이 그렇게 할 꺼야." 침착한 아사도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그렇게 되면 정말 큰 일이에요. 헤시코스에서는 아무도 사사키와 맞싸울 정도로 마음이 악하지 못해요." "나도 그 점을 알고 있어." 중대 결정을 내릴 듯한 표정을 하며, 아저씨가 천천히 입을 연다. "우리는 그자들이 기계를 뺏어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헤시코스에서 충분한 응전 태세를 갖추도록 사전에 일러 주어야 해!" "그럼 예정보다 일찍 출발하신단 말인가요. 아저씨?" "그래, 태진아. 내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사사키의 우주선이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러나 일을 틀림없이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7일……" "그래,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 친구는 사사키를 아는 모양이야." 사사키! 전기가 통하듯이 정신이 찌르르하다. 나는 사나이를 새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니! 이자는 야마모도가 아닌가! 산록산장에서 우리를 붙들었던 사사키의 부하 야마모도란 자가 아닌가? 나는 정신없이 외쳤다. "아니 사사키의 부하 야마모도가 아니요!" 사나이는 벌써부터 나를 알아보고 있었는지 새삼 고개를 끄덕한다. "그래, 맞았다. 나는 사사키의 부하였었지.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달라. 나는 너의 아저씨에게 미리 일러 줄 이야기가 있어 일부러 온 거야. 너의 아저씨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어!"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야마모도! 무슨 이유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 자가 일부러 여기까지 나타났는데, 보통 방문객처럼 무작정 쫓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그의 말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사키의 부하였었지만 지금은 형편이 달라? 나는 야마모도를 아저씨의 서재로 안내했다. 한참 동안 야마모도를 묵묵히 쳐다보고 있던 아저씨가 입을 연다. "당신이 하고 싶다는 말이 뭐요?" 야마모도는 볼품 없는 수염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사사키의 일 때문에 박사님에게 급하게 알려 줄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자는 일본인인데도 우리 말이 아주 유창하다. "급하게? 사사키 일 때문에?" "예, 사사키는 지금 박사님의 우주선을 파괴할 계획을 하고 있어요." 아저씨는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당신은 내게 왜 그런 걸 일러 주는 거요? "당신이 스파이가 아닌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이요?" "말씀드리죠. 사사키는 한 때 나의 친구였습니다. 그의 우주선에 원자력 엔진을 설계한 것도 접니다. 그러나 놈은 나의 설계도만 뺏고 약속한 돈은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그자의 부하 노릇을 하면서 돈을 받아내려 애썼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약속한 돈을 독촉했죠. 귀찮아진 놈은…… 이 손 좀 보십시오." 야마모도는 밝은 곳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차마 바로 쳐다볼 수 없는 꼴이다. 손은 으깨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처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놈은 동경에 있는 그의 집 지하실에 나를 감금시켰소. 나는 수갑을 돌멩이로 쳐서 손을 빼고 가까스로 탈출했죠." 산록산장에서 우리를 붙잡아 사사키에게 넘긴 것이 불과 일 주일 전이다. 그런데 그 동안에 그런 일이 벌어졌었단 말인가? 다시 아저씨의 질문. "알겠소. 그런데 한국엔 언제 왔소?" "오늘 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보트 한 척을 빌려 여기 까지 달려왔죠." 아저씨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야마모도의 말을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무슨 댓가를 요구하는 거요?" 야마모도는 서양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사사키의 계획을 자세히 일러 주면 얼마를 주겠소? 박사님 " "공갈로 재물을 취득할 참이요?" "아니, 아니, 천만에!" 그는 두 손을 야단스럽게 내젓는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지 나는 지금 무일푼의 상태입니다. 돈도 집도 없습니다!" 드디어 아저씨가 협상 안을 내놓는다. "좋소! 그럼 당신이 한달 동안 서울에서 살만한 돈을 주리다." 야마모도는 얼굴이 훤해지면서 입이 떡 벌어진다. "아이구 박사님 ! 고맙습니다. 역시 박사님은 인심이 후하십니다." "자 그만, 그럼 사사키의 계획이란 걸 빨리 말하시오." 야마모도는 메마른 입술을 축인다. "사사키의 우주선은 큰 결함이 하나 있어요. 이 결함은 앞으로 일 주일 안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런데 박사님의 우주선은 지금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놈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놈의 지하실을 탈출하기 전에 놈이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말을 엿들었어요. 오늘 밤중으로 사사키의 부하 몇 놈이 여기에 잠입합니다. 우주선을 파괴하려고요. 소형 잠수정을 이용할 겁니다!" "오늘 저녁!" 나는 무의식 중에 큰 소리를 질렀다. "박사님이 내일 출발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야마모도의 말을 음미하듯 또 한참 무얼 생각하더니 서랍에서 수표책을 꺼낸다. "야마모도씨, 당신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당신은 이 돈을 받을 자격이 있소!" 아저씨가 내민 수표를 받아 든 야마모도는 수표를 잠시 쳐다보더니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허리를 굽신거린다. "자 그만 해 둬요. 그런데 당신이 동경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허겁지겁 달려와서 구태여 이런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잘 납득할 수 없는데-" "그러실지 모릅니다." 그는 여윈 몸에서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주먹을 쥔 오른 팔을 높이 흔들어 댄다. "박사님! 이거 보세요! 저는 죽도록 그 놈을 미워합니다. 놈에게 손해를 줄만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작정입니다. 저는 이 손에 대한 원한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지금 야마모도가 연극을 하고 있다면 그는 천부(天賦)의 배우 소질을 타고 났다고나 할까? 방 안에 있던 우리들은 그가 펄펄 뛰고 있는 모양을 보고 야마모도가 사사키에 대해 품은 원한이 정말 골수에까지 사무친 것처럼 느껴진다. "흠- 이제 당신의 행동을 약간은 이해하겠오." 야마모도가 하는 짓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아저씨가 한 말이다. 아주 어려운 일을 부탁할 때처럼 야마모도는 다시 난처한 웃음을 띄운다. "한 가지 더 요청이 있습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사키에게 원자력 엔진을 설계한 것도 바로 접니다. 저의 일생의 관심사는 기계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박사님의 원자력 엔진을 한번 구경할 수 없을까요?" "아니, 그건 왜 또?" 아저씨의 얼굴 표정이 흐려진다. "우리의 설계는 스파이크 군이 이미 논문으로 발표한 건데요. 우리의 엔진은 그 설계에 따라 제작한 것일 뿐인데요." "예 저도 그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야마모도는 애원한다. "단지 기계를 보는 것, 그것을 만져보는 것, 이것이 제 소원입니다. 화가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고 싶어하듯 여하튼 나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입니다." 아저씨는 잠시 머뭇거린다. 과학자가 다른 과학자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심정에 공감이 가는 모양이다. 갑자기 결심한 듯, "한번 보는 정도로는 상관없겠지. 태진아! 전자실장에게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소너로 바다 밑을 감시하고 동해의 기동함대에 연락해서 만약의 사태에 응원을 부탁토록 해라. 그리고 스파이크 군을 이리 오라고 전해라. 스파이크 군과 나는 야마모도씨를 안내해서 엔진을 구경시키겠다." 내가 방을 나올 때 그 수상한 사나이는 다시 기분이 회복되어 지껄이기 시작한다. "고맙습니다. 박사님은 같은 과학자로서 저의 심정을 이해하신 모양입니다. 그저 기계를 구경하는 것뿐입니다. 번쩍번쩍하는 금속을 만져 보고, 알큰한 기계유의 냄새를 맡아보고…… 그것뿐입니다. 또 제가 설계한 엔진과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차후에라도 박사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누가 압니까? 헤헤……" 나는 부리나케 전자실로 달려가서, 실장에게 아저씨의 명령을 전달하고 스파이크 씨와 함께 아저씨의 서재로 돌아왔다. 아저씨와 스파이크 씨는 우주선으로 야마모도를 안내했다. 물론 나도 따라갔다. 야마모도는 엔진을 보자 예상 외로 별 말이 없다. 흡사 꿈꾸는 사람처럼 엔진의 외피를 어루만지며 혼자 무어라고 중얼거리곤 한다. 계기의 배선 상태를 보고 싶다기에 조정판을 뜯고 안을 보여주었다. 그 때, 야마모도가 발을 잘못 디뎌서 조정판 위에 쓰러졌다. 스파이크 씨가 그를 도와 일으켜 준다. 쓰러질 때 오른 팔을 호되게 다친 모양으로 그는 연신 팔을 주무른다. 우주선 안을 한 바퀴 쭉 둘러 본 야마모도는, 고맙다면서 연방 허리를 굽신거리며, 바짝 마른 그림자를 끌고, 올 때 탔던 보트로 어둠이 덮인 바다 위로 총총히 사라졌다.   아사의 예감   야마모도가 떠나자, 우리는 저녁에 닥칠 일이 걱정이 되어 그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밤새 우리는 전자실에서 소너가 그리는 브라운관의 반점을 주시했다. 그러나 브라운관에는 밤새 이상이 없었다. 새벽 4시경에야 잠자리에 든 나는 정신없이 골아 떨어져서 9시가 훨씬 지나서야 눈을 떴다. 충분한 휴식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식탁에 둘러앉았으나 여행 때문에 맘이 들떠서 별로 식욕이 없다. 역시 재잘거리는 측은 이수미 아줌마다. "밤에 우주선을 폭파하러 온다더니 아무 일 없이 지나갔어. 이상하잖아!" "글쎄, 어떻게 된 셈일까? 야마모도가 탈출한 걸 보고, 그가 벌써 여기를 다녀간 걸 알고, 안 온 것이 아닐까?" 누나가 한 말이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야. 이 쪽에서도 미리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와 봐야 헛일이라고 생각했겠지. 아사 네 생각은 어때?" 아줌마가 스스로 편리하게 결론을 내려놓고, 그래도 불안했던지 아사에게 묻는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를 습격한다는 것은 야마모도의 거짓말인 것 같아.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큰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위험에?" 누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냐 하면 아사의 예감은 항상 적중했으니까. "그래, 나는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큰 사고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아사, 제발 그런 기분 나쁜 생각은 말어. 꼭 비관론자처럼 말이야." 항상 낙천적인 아줌마가 아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분을 - 돌리려고 애쓴다. 이 때, 아저씨가 식당에 들어선다. 아저씨와 스파이크 씨가 우주선을 최종 점검했을 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회전 분사기의 회로에 한 군데가 단락되어 있었는데 스파이크 군이 금방 수리했다. 너희들은 11시 30분에 승선한다. 무슨 물어 볼 것 있나?" 아줌마가 질겁을 한다. "물어 볼 건 없어도 야단 났어요. 나는 아직 백 한 가지나 할 일이 남았어요. 아침 설거지하고……" 아사와 누나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아줌마의 호들갑을 겨우 멈추게 했다. 승선할 때까지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서 나는 스파이크 씨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곳엘 갔다. "이상한 일이야. 아사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고 했는데, 나도 그래." 스파이크 씨가 나를 보고 한 말이다. "스파이크 씨답지 않은 소리군요. 도대체 무슨 사고가 난단 말입니까? 최종 점검 때 아무 이상이 없었다면서요. 이륙이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뭐 한두 번 타 본 건가요?" "그건 그래. 그러나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려운 일을 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해." 아사와 누나가 아줌마의 설거지를 다 거들어주고 우리 있는 곳으로 온다. "여기를 떠나는 것이 장말 섭섭해." 아사의 머리칼이 햇빛에 유난히 반짝거려서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이 올올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말 이 곳은 아름다워. 넓은 바다, 시원한 공기, 푸른 나무, 끝없이 피어오르는 구름, 모두가 정말 좋아. 다만 걱정되는 건, 사사키가 헤시코스에 오면, 사람들을 악에 물들게 할까봐 겁이 나." 누나가 아사를 위로한다. "박사님과 너의 아버지가 사사키를 격퇴시킬 묘안을 짜낼 거야. 걱정 마." 그러나 아사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드디어 출발   11시 반. 우리들 6명은 전원 승선했다. 아저씨와 스파이크 씨는 컨트롤 패널 앞에 앉고, 나와 나머지 세 사람은 조정실 귀퉁이에 준비된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안전벨트를 묶었다. 아저씨는 인터폰을 잡고 우주선 밖과 연락한다. "전자 조정실장 나와주게, 오버." "예, 전자실장입니다. 오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내 말대로 시행 해주기 바라네. 첫째, 출발 후 항상 본선과 교신이 가능하도록 레이저 빔으로 쭉 본선을 추적해 주게. 둘째, 화성 방면으로 항진하는 다른 우주선이 있거든 즉시 본선에 연락해 주게. 셋째, 헤시코스로 가는 도중이거나 돌아오는 길엔 의외의 사고가 본선에 생기거든 나를 대신해서 사사키 일당의 만행을 세상에 공포하고 그들 일당의 발호를 세계의 여론으로 막도록 노력하고, 내 이름으로 한국은행에 예치된 전 연구 자금을 인출해서 기지 종사원의 퇴직금을 지불하도록 하게 알았나? 오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박사님 일행은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통화 끝." 아저씨의 비장한 말에 나와 누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 마주보았다. "발사대 나와라. 오버." "발사대 나왔음. 오버." "애드벌룬(풍선)에. 가스를 충전하라. 오버." "발사대 알았음. 오버." 대원들은, 조정실 벽에 붙어 있는 텔레 스캐닝 TV화면을 응시한다. 지름 50미터의 풍선 위에 우리가 탄 작은 우주선이 얹혀 있다. 지름 7미터의 우주선을 중심에 올려놓은 채 윗 부분을 조금 잘라 낸 거대한 반구(半球)같이 생긴 풍선은 지금 수소 가스로 급속히 팽창하고 있다. 풍선 위를 잘라 내어 평평하게 된 곳에는 두 겹으로 된 초전도체 물질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우주선은 컴퓨터로 자세 제어를 받으며 풍선과 함께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TV 화면에는 베이스 K 기지가 점점 작아져가고, 고도계의 지시는 100미터, 500미터 차츰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다. 20분 후 고도계의 눈금은 5000미터. 아저씨가 체크 버튼을 누르자 버튼 옆에 붙어 있는 두개의 전구 중 푸른 전등이 반짝 빛을 켠다. 모든 계기는 정상이라는 신호다. 20세기 말엽까지도 계기 점검을 하려면 카운트다운이라고 해서 며칠씩 걸린 모양인데, 지금은 방금 아저씨가 한 대로 버튼 하나로 확인할 수 있다. 몇 분의 1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기계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푸른 등 대신 붉은 등이 커지고, 그 부분을 맡고 있는 컴퓨터에도 붉은 등과 부저가 울리게 되어 있다. 계기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아저씨가 "3초 후에 도약, 2초 후에 점화한다." 대원들은 전부 의자를 수평으로 눕히고 천장을 향해 누운 자세를 취한다. "3초, 2초, 1초, 영, 도약!" 아저씨의 말이 떨어지자 스파이크 씨의 오른 손에 쥐어진 두개의 리모콘(원격 조정) 중 한 개의 스위치가 눌려짐과 동시에, 우주선은 공중으로 도약한다. 처음에는 점점 멀어져 가는 풍선의 윗 부분이 보인다. "2초, 1초, 영, 주엔진 점화!" 나는 무의식 중에 눈을 딱 감았다. 동시에 몸 전체를 잡아 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느낀다. 중력권 탈출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잠잠하던 우주선은, 원자력 엔진의 울부짖는 소리와 진동으로 마치 생명을 되찾는 것 같다. 15초 후, 대기권을 어지간히 벗어난 모양이다. 우주선의 진동은 여전하지만 선체와 공기와의 마찰음은 거의 사라졌다. "이온 엔진으로 전환!" 아저씨의 말이 떨어지자, 스파이크 씨의 오른손이 짧은 레버를 젖힌다. 선체의 진동이 뚝 그쳤다. 삼중 수소를 내뿜던 주 엔진이 정지하고 출력이 작은 수은증기의 이온 엔진이 가동된 것이다. 1960년대, 인간들인 처음으로 외계에의 비행을 시도할 때는 지구 표면에서부터 출발하는 방법 밖에 몰랐기 때문에, 막중한 우주차륜의 무게를 중력권 밖으로 끌고 나오기 위해서는 우주선 전체의 길이가 100미터가 넘고 무게도 3-4천 톤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우주차륜을 지구 표면이 아닐 6, 7km 상공까지 풍선으로 끌어 올려서, 그리고 메뚜기가 날 때 깡충 뛰어서 날 듯, 풍선 꼭대기에 붙은 두 겹의 초전도체물질에 거의 무한대의 전류를 흘려 풍선과 우주차륜이 같은 극의 수억 가우스의 자석이 되게 함으로써 풍선과 우주차륜은 서로 반발하여 메뚜기가 뛰듯 차륜이 공중으로 치솟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연료가 옛날보다 80% 이상이 절약되었고, 또 이것은 불과 5mm 정도의 두께로서도 모든 방사선을 충분히 차폐할 수 있는 변성 실리콘 수지가 발명됨으로써 옛날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의 가벼운 원자력 엔진의 설계가 가능해진 때문이다. 이륙 후 꼭 35분 경과. 진공의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창 밖은 칠흑같이 어둡고 군데군데 반짝이지도 않는 별이 박혀 있다. 텔레 스캐닝 TV에는 공처럼 생긴 지구가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다. 저 공 속에 40억 가까운 인구가 득실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사사키도 야마모도도 물론 있겠지.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이온 엔진의 약한 진동음 뿐 죽음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2억 2천만 킬로미터의 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첫번째 위기   컨트롤 패널 앞에는 스파이크 씨만 앉아 있고, 아저씨는 옆방의 연구실로 가버렸다. 아줌마와 아사도 취사실에서 무슨 별다른 요리를 만든다고 나오지를 않는다. 나와 누나는 레이저 펄스로서 항속과 항로를 체크하고 있다. 이온 엔진의 가속으로 우주선은 점점 가속되고 있다. 현재의 속력은 0.3 광속도에 접근하고 있다. '태진아! 이리와!" 기절할 듯이 놀란 스파이크 씨의 목소리다. 깜짝 놀라 스파이크 씨 쪽을 쳐다본 나는 순간 절망감 같은 것에 의해 전신의 힘이 쭉 빠진다. 스파이크 씨의 눈알은 똑바로 박혀 있고, 자세는 엉거주춤 굳어 있다. 회복할 수 없는 위험에 직면한 표정이다. "빨리, 박사님을 오라고 해라." 수 초 동안 얼빠진 듯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스파이크 씨가 겨우 한 말이다. 나는 부리나케 아저씨를 모셔왔다. 스파이크 씨의 표정으로부터 벌써 절박한 사태를 짐작한 아저씨지만 기장답게 침착하게 말한다. "스파이크 군, 무슨 일인가?" "여기 패널 이 쪽에 귀를 대 보십시오!" 나와 아저씨는 거의 동시에 스파이크 씨가 가리킨 부분에 귀를 대어본다. 그런데 약한 이온 엔진의 진동음에 섞여 때아닌 시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니, 시계 소리 아닌가!" 귀를 댄채 아저씨가 스파이크 씨를 쳐다보며 한 말이다. "그렇습니다. 시계 소립니다. 시한 폭탄 소리입니다."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스파이크 씨가 겨우 뱉은 소리다. "시한 폭탄!" 성대가 조여지듯 들려오는 아저씨의 신음. "야마모도가 시한 폭탄을 처넣은 겁니다. 어제 그 놈이 엔진을 보고 싶다고 할 때, 이 패널을 열어 보여 주었거든요. 그 때, 그 놈이 쓰러진 걸 기억합니까? 일부러 쓰러지면서 우리의 주의를 딴 곳에 모아 놓고 그 틈에 폭탄을 집어넣은 겁니다." 뼈를 깎는 듯한 후회와 저주를 담은 스파이크 씨의 넋두리다. "자! 빨리 패널을 열어 보자." 애써 침착을 되찾으며 아저씨가 재촉한다. 아저씨와 스파이크 씨가 떨리는 손으로 후크를 벗기고 패널을 열었다. 이온 엔진의 약한 진동음과 시계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그러나 어두워서 어디에 있는 건지 보이지는 않는다. "태진아, 아토믹 토치(원자력 등불)를 가져오너라." 나는 기기실로 달려가서 토치를 가져다 주었다. 서치라이트 같이 센 토치의 불빛은 어두운 곳을 비추었다. 불빛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한 군데 멈추었다. 있다! 엔진 시동용 배터리 옆에 초록색을 띤 물체가 붙어 있다. "들어가 봐야지." 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아저씨가 패널 속으로 고개를 밀어 넣고 어깨를 집어넣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어림없다. 구멍이 너무 좁은 거다. "아저씨 비키세요. 제가 해 보겠어요." 아저씨가 무어라고 말릴 기회를 주지 않고, 나는 잽싸게 머리와 몸뚱이를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린다. "그래 용타. 최선을 다 해 보아라. 스파이크 군, 방사능이 오염될 지 모르니 엔진을 끄게." 엔진의 진동음이 그쳐 버리니 시계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나는 엔진을 지지하고 있는 철봉을 따라 한치 한치씩 접근해 갔다. 목이 탄다. 어깨가 후들후들 떨린다. 나는 혼자 스스로를 타이른다. "태진아, 기운을 내라. 기운을 내. 네 한 손에 전 대원의 생명이 달려 있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전 인류의 장래가 네 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뇌파 증폭기는 틀림없이 사사키 손에 들어갈 거고 그렇게 되면……" 사사키와 뇌파 증폭기의 생각이 떠오르니 한결 진정되는 것 같다. 시한 폭탄은 이제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다. 오른 손을 내밀었다. 아직 좀 모자란다. 조금 더 전진한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가 된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놈을 잡으려고 하지만, 신들린 사람처럼 팔이 떨려서 잘 되지 않는다. 폭탄에 손을 대자마자 그놈이 꽝 터질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우주선도 없어지겠지만 나, 태진이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무한한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니다 우주 먼지가 되겠지. 자식아! 우주 먼지가 되는 것은 너뿐이 아니다. 아저씨도 아사도 누나도 스파이크 씨도 마찬가지다. 기운을 내라. 기운을 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면 어떡하니. 나는 독사라도 잡는 기분으로 눈을 꽉 감고 폭탄을 덥석 잡았다. 꽝! 터지지는 않는다. 대신 차가운 감촉과 시계의 진동이 더 크게 느껴진다. 힘을 주어 폭탄을 떼어 내려 한다. 그러나 잘 안 떨어진다. 센 영구 자석이 금속제 배터리 케이스에 꽉 달라붙어 있다. 두 손으로 거머쥔다. 다시 당겨 본다. 역시 안 떨어진다. 토치를 비추어 주며, 초조하게 지켜보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굴속에서처럼 우렁우렁 들려온다. "태진아, 떼라 떼! 어떡하든지 떼어 내라. 힘을 내라." 두 손으로 잡은 채 안간힘을 써 보지만 옴짝달싹도 않는다. 이젠, 두 손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폭탄이 미끄러지기만 한다. 30초뿐이다! 이럴 때, 망치라도 있으면 옆으로 두들겨서 떼어 보기라도 하겠는데, 그러나 지금은 도로 기어 나가서 망치를 가져올 여유가 없다. 아저씨가 던져주더라도 좁은 틈 사이로 여기까지 용케 닿을 수도 없다. 나는 러닝 셔츠를 뜯어서 붕대처럼 손에 감았다. 셔츠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붕대를 감은 손으로 폭탄을 힘껏 내리쳤다. 뒷골이 찡하도록 통증이 온다. 그러나! 약간 움직인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내리친다. 이 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또 내리친다. 폭탄은 배터리 케이스의 가장자리로 조금씩 미끄러져 나간다. 이놈! 이놈! 나는 악을 쓰며, 내리치고 또 내리친다. 주먹이 불덩이 같이 뜨겁다. 폭탄이 이제는 배터리 가장자리에 반쯤 물렸다. 두 손으로 잡고 혼신의 힘으로 잡아당긴다. 딱 떨어진다. 덕택에 뒷 꼭지가 철봉에 호되게 부딪혔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이제 이 놈을 빨리 들고 나가야 한다. 앗! 그런데! 시계 소리가 뚝 그쳤다. "아저씨, 시계 소리가 안 들려요!" "빨리 갖고 나오너라. 30초 후에 폭발한다." 나는 폭탄을 든 채 결사적인 포복을 감행한다. 하나 둘 셋…… 벌써 20초도 넘은 것 같다. 이를 악물고 입구, 입구만을 향해 기어나간다. 손과 얼굴이 부딪히고 긁히는 것은 이젠 문제가 아니다. 30초, 30초 이내에 입구까지 끌고 나가야 한다. 아저씨의 손이 이만큼 들어와 있다. 나도 폭탄 든 손을 내민다. 그러나 아직 안 미친다. 조금씩 기어나가면서 손을 다시 내밀어 본다. 아직 안 자란다. 기어나가며 또 내민다. 아! 드디어 아저씨의 손이 폭탄에 닿았다. 폭탄이 아저씨의 손에 잡혀서 굴 속을 빠져나갔다. "빨리 쓰레기 총을……" 다급하게 외치는 아저씨의 소리가 들린다. 우주 공간에서 만 부득이 버릴 쓰레기나 물체가 있으면 소독해서 공간으로 쏘아 낸다. 지금 아저씨는 그 쓰레기 버리는 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폭탄을 밖으로 쏘아 버리려는 것이다.   연달아 닥치는 위기   쓰레기 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쿵' 둔탁한 진동음이 들린다. 폭탄을 밖으로 쏜 것이다. 아니 쿵하는 쓰레기 총의 진동음과 거의 동시에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진동이 그 뒤를 따랐다. 동시에 우주선 외피에 무엇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폭탄이 바로 밖에서 폭발한 것이다. 그래서 그 파편이 우주선 외피에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위기일발의 시간. 주위는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패널 입구에 얼굴을 내민 채 땀으로 완전히 목욕을 한 상태로 조정실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완전한 침묵과 고요가 무의미하게 계속된다. 폭탄이 외피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터졌다면 우주선에 구멍이 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대원들은 이제 다음에 올 우주선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침묵이 5분 간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아저씨가 깼다. "자, 태진아 이제 나오너라. 정말 수고했다. 현재로서는 별 이상이 없다. 이리 나와서 항로를 계속 체크해 보아라. 몇 분 동안 엔진을 껐기 때문에 항로가 태양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을 거다. 자, 그리고 스파이크 군, 주 엔진을 점화해서 항로를 수정해야 될 것 같네." 아저씨의 말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였다. 갑자기 선 내의 전등이 모조리 꺼져버렸다. 불이 꺼지는 것과 함께 찌…… 찌…… 괴상한 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벼락인가. 우주선 전체가 불에라도 타고 있는 것 같다. 찌……찌……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 찌……찌……   자장(磁場) 함정   찍찌……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온다.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도체 태양 전지 패널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스파이크 군, 전력을 원자력으로 대치하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저씨의 목소리다. 그제야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듯, 스파이크 씨가 아토믹 토치를 비추면서 동력 전환 스위치를 잡아 젖힌다. 조정실이 환하게 밟아졌다. 우선은 살 것 같다. 그러나! 더 기막힌 사실이 조정실이 밝아지면서 밝혀졌다. 조정석 앞에 있는 패널에는 모조리 붉은 불이 켜 있지 않은가! 우주선의 각 부분이 전부 고장이란 뜻이다. 그 붉은 등 중에서 우리들의 시선이 못 박힌 곳은, 외부의 방사능 강도를 측정하는 방사능 강도 기록기이다. 기록지 위를 움직이게 되어 있는 핀이 휘어져 있지 않은가! 기록 용량을 넘어선 센 방사능이 닿아서 계기를 망쳐버린 것이다. "무서운 방사능 대에 들어선 것 같다. 태진이가 폭탄을 꺼내려고 패널 안으로 들어갈 때, 10여 분 간 엔진을 껐기 때문이다. 추진력이 없었기 때문에 컴퓨터 항로 추적기도 우주선 외피 밖으로 나온 렌즈 시스템이 시한 폭탄의 파편에 맞아 고장인 것 같다. 하여튼, 이런 상태에서 2시간 이상 지나면 우리 모두는 치사량의 방사능에 오염된다." 온통 붉은 전등으로 수 놓여진 조정석 패널을 쳐다보며 아저씨가 한 말이다. "박사님, 이 자이로 진자가 이상한 운동을 해요." 등 뒤에서 누나가 갑자기 한 말이다. "어디 보자." 깜짝 놀란 듯이 아저씨가 누나 곁으로 달려간다. 누나가 가리키고 있는 자이로 진자의 운동을 아저씨가 세밀히 관찰하고 있다. "음! 돌고 있구나. 이거 야단났구나. 자장 트랩 (함정)에 빠졌다. 찌찌하는 소리는 고속의 대전 입자가 지나가면서 우주선에 고압의 전류를 유기시켜서 방전하는 소리고, 우주선 외피에 유기된 전류 때문에 고속의 대전 입자의 자장 때문에 나선 운동을 하면서 이 방사능대 속을 돌고 있는 것이다." 자이로 진자는 우주선의 가속 방향을 보기 쉽게 하기 위해 만든 간단한 진자(흔들이)이다. 이것이 약 2분에 한번쯤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주선이 주기가 2분인 나선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저씨의 말인 것이다.   눈이 먼 우주선   "에그머니! 그림 박사님 우리는 이 자석띠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있던 누나가, 울상이 되면서 물은 말이다. "제양! 염려마라. 방법이 있을 것이다. 침착하게 앉아 있거라." 하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누나를 레이저 펄서 옆에 있는 의자에 살그머니 앉힌다. 굳은 얼굴을 하고 조정석에 앉아 있는 스파이크 씨 옆으로 아저씨가 돌아왔다. "스파이크 군! 할 수 없네. 장님 흉내를 내야겠네." 스파이크 씨가 말뜻을 몰라 아저씨를 올려다본다. "이것 보게. 레이저 펄서까지 붉은 등이네. 우주선은 장님이 된 거야. 지팡이 없이는 오도가도 못하는 장님 말일세. 방안에 있다가 갑자기 불이 나갔네. 그러면 싫어도 장님 행세를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팔을 뻗어 더듬을 수밖에 없지. 이 쪽으로 더듬다가 안되면 다른 쪽을 더듬고…… 그런 식 말고는 문을 찾는 방법이 없지. 우주선이 눈이 멀었으니까, 아무 방향으로도 우선 달려봐야지. 그래서 용케 자장을 벗어나면 레이저 펄서를 수리하세. 지금 같은 방사능 강도에서는 우주선 밖에 10분 이상 나가 있을 수 없어. 자! 주 엔진을 점화해서 우주선의 속력을 0.4 광속도로 해서 이리저리 달려보세."   우주선이 뜨거워진다   자조 섞인 아저씨의 긴 설명을 듣고 있던 스파이크 씨가 간단히 대꾸한다. "그렇게 해 봅시다. 박사님." 스파이크 씨가 캐도늄 제어봉을 앞으로 쑥 뽑았다. 갑자기 우주선에 맹렬한 진동이 온다. 노즐에서 뿜어 나가는 삼중수소가 우주선에 진동을 주는 것이다. 우선 살 것 같은 기분이다. 무의미한 침묵과 뇌신경을 자극하는 찌…… 하는 소리뿐이던 우주선에 가스 분출의 반동으로 생기는 맹렬한 진동은 우주선이 아직 건재 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주선의 생명은 뭐니 뭐니해도 추진력이다. 추진 장치에 고장이 있으면 고칠 방법이 없지만, 우선 이 추진 장치가 완전하고 보면,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주선이 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경을 찌르는 찌찌…… 하는 방전음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지만 추진력 반동에 의한 진동으로 확실히 우리도 약간의 생기를 되찾았다. 부엌에 있던 아사와 아줌마까지 나와서 스파이크 씨를 쭉 에워쌌다. 스파이크 씨는 정확하게 20분 간격으로 우주선의 진행 방향을 45도씩 바꾸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360도의 방향 전환에 140분, 약 2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0.4광속도, 즉 광속도의 10분의 4의 속도로서 45도의 방향전환을 한다는 것은, 지상에서 시속 100마일로 하이웨이를 달리던 차가 180도의 방향 전환을 할 때에 차에 닥칠 위험과 같은 정도의 위험이 우주선에 생긴다. 시속 100마일의 자동차가 갑자기 180도의 회전을 하면 10중 8, 9 자동차는 전복한다. 큰 운동량의 갑작스런 변동으로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튕겨져 나와 유리를 깨고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우주선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선체에 생기는 큰 스트레스로 끼-ㄱ-, 긴 금속성의 비명을 지른다. 우주선체 바로 밖에서 터진 폭탄 때문에 선체에 어떤 흠이 생겨 있을지도 모르는 이 판국에 이렇게 심한 스트레스를 계속 우주선에 준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위험하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저씨와 스파이크 씨가 이렇게 위험스럽게 우주선을 운전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제한된 시간 때문이다. 2시간! 2시간 내에 우리는 이 자장의 함정을 벗어나야 한다. 2시간이 지나면 대원 전원에게는 치사량의 방사능이 온 몸에 쏘이게 된다고 했다. 45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찌찌…… 하는 무서운 방전음 속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다. "박사님 ! 선실의 온도가 자꾸 올라가요!" 갑자기 누나가 한 말이다. "응?" 계속되는 위험에 신경이 둔해졌는지 무슨 뜻인지 몰라 아저씨가 누나를 멍하니 쳐다본다. "저 온도계 좀 보세요. 25도에요. 아까부터 자꾸 더운 것 같아서 온도계를 보았더니 글쎄……" 누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인다. 침통하게 온도계를 응시하며 아저씨는 말이 없다. "센 자장 속에서 우주선이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니까 선체에 큰 소용돌이 전류가 흘러서 우주선이 가열되는구나. 발생 열량이 너무 많아서 반도체 온도 조절기가 제대로 동작을 못하는구나. 하여튼 좀 두고 보자." 힘없이 말을 마친 아저씨는 조정석의 스파이크 씨 옆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눈치다. 다시 15분이 지났다. 자장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 건 물론이고 선실의 온도가 올라가서 대원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돋아나 있다. 35도. 15분 동안에 10도가 올라간 것이다. 계속 이런 비율로 온도가 올라간다면 30분 후에는 55도가 될 것이다. 그 동안에 우주선이 주파한 거리는 대략 계산해 보아도 실로 4억 킬로미터에 접근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마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우주선은 직선 거리를 비행하지 못하고 자장 때문에 진로가 휘어져서 뺑뺑 도는 나선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결 단   65분 경과. 땀에 얼룩진 얼굴을 빛내면서 아저씨가 조종석에서 마침내 천천히 일어선다․. "스파이크 군, 속도를 0.1광속도로 줄이게.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고속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발생하는 맴돌이 전류를 크게 해서 우주선의 온도만 올려주는 효과밖에 없겠네. 할 수 없네. 레이저 펄서의 렌즈 시스템을 고쳐서, 베이스 K의 방향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겠네.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방사능 강도에서는 우주선 밖에서 10분 이상 있을 수 없네. 다시 말하면, 10분 내에 렌즈 시스템을 수리해야 해." 말을 잠시 중단하고 아저씨는 대원들을 새삼스럽게 쭉 둘러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결연히 말한다. "내가 나가서 렌즈 시스템을 수리한다." 잠시 동안 선실에는 침묵이 흐른다. 다만 기분 나쁜 방전음 만이 선실을 채울 뿐. 마침내 아저씨가 수리함에서 여분의 렌즈 시스템과 연장을 꺼낸다.   논쟁   꺼낸 렌즈 시스템을 재빠른 솜씨로 하나 하나 점검하고 나서, 밖에 입고 나갈 우주복을 챙기고 있다. 우리는 아저씨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 이 때, "박사님, 제가 나가겠어요. 박사님이 나가신다면 고장난 우주선의 여러 가지 증세에 누가 적당한 지시를 내리겠어요. 제가 나가겠어요." 하고, 갑자기 나선 사람은 뜻밖에도 이수미 아줌마가 아닌가! 말을 마친 아줌마가 아저씨의 손에서 우주복을 뺏어 든다. "아니- 아줌마가- " 너무나 뜻밖이라는 듯이, 아저씨는 아줌마를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우리를 쭉 둘러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주복을 이리 주어요. 여자가 나설 곳이 아니에요." 하고, 아저씨가 다시 우주복을 뺏으려 든다. 아줌마는 재빨리 우주복을 뒤로 감추면서 야무지게 항변한다. "박사님, 무어라구요. 여자가 나설 곳이 아니라구요? 그게 무슨 케케묵은 소리에요. 어째서 제가 나가면 안 되지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서슬이 시퍼래서 달려드는 아줌마에게 아저씨는 별로 반박할 이론적 근거가 없는지, "하여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요! 어서 그 우주복 이리 내요. 아줌마는 이 어려운 일을 해 낼 수 없어요." "뭐라구요. 해 낼 수 없다구요. 제가 기계 공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박사님은 잊고 계시는군요. 저도 베이스 K에 들어갈 때, 어려운 시험을 다 거쳐서, 박사님 자신에게서 엔지니어의 자격을 인정받았던 거예요. 그 사실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하도 야무지게 공박해오는 바람에 아저씨도 말을 잇지 못한다. 참다못해 내가 나선다. "아줌마 이리 주세요. 제가 나가겠어요." "여긴 또 뭐야, 네가 나가?" 아줌마는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노려본다. "안 돼. 이런 일에 어린애가 나서는 게 아니야. 너는 잠자코 있어." 나는 오랫동안 같이 생활해 오면서 아줌마의 이런 면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는 우스개 소리만 잘 하는 아줌마, 조금만 우스운 일이 있어도 참지 못하고 깔깔대는 아줌마,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태평스런 아줌마. 이런 것이 아줌마에 대한 나의 인식의 전부였다. 아니 비단 나뿐이 아니다. 아저씨도 누나도 스파이크 씨도 나와 같이 느껴왔으리라. 그런데! 지금의 아줌마는-. 조금 전에 나를 쳐다보던 아줌마의 표정은 추상같았다. 감히 무어라고 다른 소리를 끄집어 내지 못하게 하는 위엄이 있었다. 나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다. 무어라고 대들었다가는 뺨이라도 한대 얻어맞을 형편이다.   10분 안에 들어와요   아저씨가 이제는 사정을 한다. "아줌마, 이리 주어요. 아줌마의 뜻은 알겠지만 지금 우리는 위험에 처해 있어요. 이럴 때, 책임자인 내가 모든 것을 처리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줌마의 태도는 어림없다. "맞습니다. 박사님, 말씀 잘 하셨어요. 박사님은 책임자이십니다. 책임자 되시는 분이 어떻게 그런 곳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십니까? 박사님은 책임자이기 때문에 경솔하게 행동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책임자에게 만일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머지 대원은 어떻게 되라는 것입니까? 전쟁터에서 장군은 항상 후방에 있으면서 최고의 작전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박사님은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최후의 순간까지도 냉정을 잃지 말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베스트의 상태에 있으면서 명석한 판단으로 대원에게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자, 더 이상 논쟁을 벌릴 시간이 없습니다. 렌즈 시스템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 주세요." 아줌마의 논리에 아저씨도 이젠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아줌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겨우 말을 꺼낸 아저씨는 종이를 펴놓고 렌즈 시스템 수리에 필요한 이야기를 그림을 그려 가면서 설명한다. 아저씨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난 후, 아줌마는 우리의 도움으로 우주복을 입고, 공구 세트와 렌즈 시스템을 허리에 매어 달고 에어 록이 있는 곳으로 간다. 스파이크 씨가 스위치를 돌리자 에어 록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아줌마는 거리낌없이 에어 록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에어 록 문 앞에서 아저씨가 다시 아줌마에게 확인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분 안에는 우주선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설사 수리가 덜 되었더라도 그대로 들어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10분 안으로 꼭 들어와야 합니다." 아줌마는 간단히 "알겠어요. 박사님" 하고는 대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에어 록을 닫아버린다. "아줌마-" 하고, 가늘게 외친 누나는 아사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이수미 아줌마의 활약   이수미 아줌마가 사라진 에어 록에는 기압이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 기압 상태에서 밖과 통하는 문을 그대로 열어 버리면 선 내의 공기가 진공의 우주로 분출해 나가면서 수십 톤의 힘으로 사람을 밖으로 내동댕이 쳐버린다. 그래서 우주선 밖으로 나갈 때는 먼저 에어 록 내의 공기를 진공 펌프로 뽑고 난 뒤에 문을 열어야 한다. 진공 펌프 돌아가는 소리가 그쳤다. 에어 록의 공기가 거의 다 빠진 것이다. 아저씨는 목석처럼 제자리에 굳어 있다. 아사와 누나는 서로 얼싸안고 의자에 쓰러져 버린다. 스파이크 씨만이 콘트롤 패널의 각종 계기를 부지런히 점검하고 있다. 에어 록에 빨간 불이 켜졌다. 밖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는 신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목 시계를 쳐다본다. 큰 바늘이 3을 가리키고 있다. 이 바늘이 5를 가리키기 전에, 즉 10분이 지나기 전에 아줌마가 선 내로 들어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줌마는 치명적인 방사능에 오염될 것이다. 2분이 지났다. 텔레 스캐닝 TV도 고장이기 때문에 선체 밖에 나가 있는 아줌마를 볼 수가 없다. 선 내의 공기는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뜨겁다. "레이저 펄서를 동작시켜 보아라." 하는 아저씨의 말에 나는 급히 펄서의 전원 스위치를 넣었다. 펄서는 잘 동작하고 있다. 그러나 반사광을 포착하는 스코프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레이저 빔이 선체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폭탄이 터질 때, 선체 밖으로 나와 있는 렌즈 시스템을 부수면서 경통을 막아버린 것이 분명하다. "아줌마, 들려요?" 아저씨가 인터폰에 대고 한 말이다. "잘 들립니다. 박사님." 인터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아줌마의 소리. 아줌마의 목소리라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렌즈 시스템의 고장 상태는 어때요?" "염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경통이 꾸부러져 있습니다만 새 것과 금방 교환할 수 있겠습니다." 하는 아줌마의 대답. 경통이 휘어졌어? 염려할 정도가 아니라고? 천만에 말씀! 아줌마는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경통이 휘어질 정도면 일은 커졌다. 왜냐 하면 움푹하게 들어간 곳에 있는 경통이 폭탄의 열 때문에 휘어질 정도면 경통 부근의 파괴상은 간단히 수리할 정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쉽게 교환되겠어요?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거든 다시 들어와서 의논하도록 합시다." 이마에 송송히 돋은 땀방울을 훔치며, 아저씨가 인터폰에 대고 한 말. "염려 마세요. 고장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다시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통화 끝." 역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카랑카랑한 소리. 이어 선체 외피를 깎는 전기톱의 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들려오는 전기톱의 진동음에 아저씨와 나는 기약 않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톱소리! 심상찮다. 톱으로 외피를 잘라 내야 될 형편이라면 일은 분명코 간단치가 않다. 톱소리는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상상해 보라. 초속 12만 킬로미터로 날으는 로케트의 껍데기(외피)에, 연약한 여자가 달라붙어서 필사적으로 전기톱을 휘두르고 있는 광경을. 나는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손목 시계를 들여다본다. 바늘은 벌써 4를 넘어서고 있다. 이 바늘이 5까지 가기 전에, 즉 5분이 지나기 전에 렌즈 시스템이 수리되어야 한다. 조바심 나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펄서의 스위치를 또 넣어 본다. 스코프에는 여전히 깜깜 무소식. 아저씨는 벌겋게 충혈되도록 턱을 문지르고 있다. 손목 시계를 초조하게 들여다보면서, 아사와 누나도 의자에 한 덩어리가 된 채로 시계를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있다. 시계를 보기가 겁이 나서 시계 찬 손을 되도록 외면하려 하지만 눈은 저절로 시계 찬 손으로 간다. 아줌마가 에어 록 밖으로 나간지 꼭 8분이 되었다. 9분. 1분밖에 남지 않았다. 마침내 아저씨가 인터폰의 수화기를 집어든다. "아줌마, 이제 그만하고 들어오세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 "아줌마 안 들려요. 그대로 들어와요!" 카랑카랑한 아줌마 소리가 스피커를 울린다. "박사님, 염려 마세요. 염려하는 것만큼 방사능 강도가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업이 거의 다 마쳐 갑니다." "안돼요! 아주머니! 그대로 들어오시오. 명령이요." "다시 명령하거니와, 지금 곧 선 내로 들어와요." "박사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저씨는 송화기를 든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스피커만 들여다보고 있다. 다시 시간은 2분이 초과되었다. 여전히 톱 소리가 들려 오고. 다시 더 2분. 아줌마가 나간지 꼭 14분이 되었다. 갑자기 톱 소리가 멈추었다. 아저씨가 인터폰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한다. "아주머니 14분이어요. 그대로 들어오시오!" "안 들려요? 들어와요. 이제 더 이상 기장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다른 여행 때는 아주머니를 제외하겠오." "……" 여전히 스피커는 침묵이다. 선실에는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흐른다. 톱 소리까지 그쳤으니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누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아저씨가 다시 송화기를 끌어당긴다. "아주머니, 내 말이 들립니까? 들리거든 대답하세요. 오버" "……" "아! 박사님. 펄서 스코프에 반사 반점이 나타났어요." 이 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누나가 외치는 소리에 아저씨와 나는 반사적으로 펄서 스코프로 고개를 돌렸다. 스코프에는 바라고 바라던 푸른 반점이 나타나지 않는가! 레이저 빔이 우주선체를 빠져 나가 다른 물체에 부딪쳤다가 다시 펄서에 수신되었다는 표시인 것이다. "레이저 빔이 수신됩니까? 박사님." 스코프를 들여다보며 감격에 차 있는 우리들은 순간적이나마 방사능 빗속에 있을 아줌마를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때,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듯이 카랑카랑한 아줌마의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예, 수신 상태 양호합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아주머니." 감격에 찬 아저씨의 대꾸였다. 아줌마가 나간지 19분이 넘고 있다. 에어 록에 푸른 불이 켜졌다. 아줌마가 에어 록 안으로 들어와서 외피의 문을 닫았다는 표시다. 이어, 에어 록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린다. 아주머니가 우주복 차림으로 걸어 나온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하다. 그런데! 가금에 꽂힌 도시메터(방사능 감지기)는 꼭대기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지 않은가. 허용량 이상의 방사능 오염을 뜻하는 것이다. "빨리 방사능 클리닝 룸(소제하는 방)으로." 하는, 아저씨의 말에 스파이크 씨가 달려들어 아줌마를 덥썩 안고 클리닝 룸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사사키가 온다   아주머니를 클리닝 룸에 갖다 누이고 클리너(소제하는 약품)의 스위치를 넣고 난 뒤, 스파이크 씨가 조종실로 다시 달려왔다. "아사와 제양은 클리닝 룸에서 아주머니를 간호해라. 자, 스파이크 군, 로케트를 1마이크로 광속도로 떨어뜨리게. 베이스 K와 연락해서 방향 지시를 받아야겠네. 아사 양과 제 양은 지금부터 정각 2분 후에 심한 감속을 하게 될테니 그 때까지는 안전 벨트를 잡아매도록." 아저씨의 지시와 설명이 끝나자 아사와 누나는 클리닝 룸으로 가고 조정석 안의 우리들은 로케트의 진행 방향에 90도가 되도록 의자를 회전시켜 벨트로 묶었다. "1초 후에 역추진, 4초, 3초, 2초, 1초, 영 분사!" 아저씨의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수십 메가와트의 역추진 에너지 분사로 로케트는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선체의 맹렬한 진동음 때문에 그렇게 극성스럽던 이온의 방전음도 일순 들리지 않는다. 0.4광속도로 비행하는 로켓이 베이스 K의 진행 방향 지시를 받으려 해야 헛일이다. 왜냐 하면, 로켓의 레이저 펄서에서 복사되는 레이저 빔을 베이스 K가 수신하여 방향 지시를 보내올 때는 로켓의 속도가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광속도 10분의 4) 이미 로케트는 최초의 신호를 보내고 난 위치에서 벌써 수십만 킬로미터나 위치를 바꾸고 난 뒤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이 로켓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작은 속도(1마이크로 광속도 음속)로 비행하는 것은 오차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아저씨는 로켓의 속도를 1마이크로 광속도로 줄일 것을 지시한 것이다. 0.4광속도로 비행하던 로켓을 1마이크로 광속도로 떨어뜨리는 것은 재래식의 화학 연료 로켓으로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는데는 중력권 탈출에 필요한 연료의 수천 배가 들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우주선은 삼중 수소를 추진제로 하는 원자력 로켓이기 때문에 적은 연료로서도 그만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역추진 분사가 시작되고 20분이 지났다. 펄서 스코프의 스케일에는 우주선의 속력이 초속 0.3km가 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역추진 분사 끝." 하는 아저씨의 명령에 스파이크 씨의 조종으로 맹렬한 분사 진동이 끝났다. 다시 방전음이 극성을 떨기 시작한다. 선실의 온도는 섭씨 56도. 찌는 듯한 더위다. 조종실 패널에 달려 있는 방사능 누적 강도기에도 벌써 붉은 표시를 한 위험 영역에 육박하고 있다. "태진아, 베이스 K와 교신해 보아라." 하는 아저씨 말에 벌써 부터 펄서 앞에 앉아서 지시만 기다리고 있던 나는 마이크를 당겨 베이스 K를 흐출한다. "베이스 K, 베이스 K, 여기는 K-3 우주선, 여기는 K-3 우주선, 대답하라. 오버." "……" 30초를 기다려 보았으나 응답이 없다. 나는 다시 처음과 똑같은 순서로 반복하고 수신 위치로 바꾸고 기다렸다. "여기는 베이스 K, 여기는 베이스 K, 수신 상태 양호, 오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저씨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마이크를 끌어당긴다. "여기는 K-3 우주선. 본선의 자동 항로 추적기 고장. 기지의 방향 지시를 바람. 본선의 현재 위치와 진행 방향을 알려달라, 오버." "K-3 우주선은 감마-13 방사능 함정에 빠져 있음. 현재 진행 방향에서 시계 방향으로 15도 방향으로 항진하면서 계속 본 기지의 유도를 받으라, 오버." "알았다. 계속 유도 바란다. 통화 끝." 스파이크 씨가 벌써 방향 수정을 하고 있다. 5분 후에 2도 수정, 다시 5분 후에 3도 수정하라는 베이스 K의 연속적인 유도로 20분 후에는 그 극성스럽던 방전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 나왔다. 우주선 외피에 쏟아지는 벼락치는 듯한 방전음의 틈바구니를 벗어났을 때 조정실의 우리들은 일순 허탈감에 빠져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다. "감마-13 함정은 1분 전에 완전히 벗어났다. 현재 진행 방향으로 항진하라. 사사키의 우주선은 30분 전에 중력권을 벗어나서 헤시코스로 항진 중에 있음." 허탈감에 빠져 있던 우리들은 사사키가 지구를 출발했다는 베이스 K의 연락을 받자 악몽을 되새길 때 모양 몸서리가 쳐진다. 우주선에 시한 폭탄을 장치하여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먼 우주 공간에서 우리들을 폭살 시키려던 잔인한 사사키. 그 사사키 때문에 우주선의 자동 항로추적기가 고장을 일으켜 무서운 방사능 함정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아줌마의 여자답지 않은 거사로 우리는 겨우 함정을 벗어났지만, 그러나 아줌마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있지 않은가! 그 사사키가 우리 뒤를 따라 지구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 음흉하고 잔인 무도한 사사키 일당이 헤시코스에 오면 장차 헤시코스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헤시코스 인들은 전쟁과 같은 폭력 행위하고는 담을 쌓은 지 오래 라지 않는가. 양떼를 향해 이리가 달려드는 모양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오싹해 진다.   텔레파시 치료   "스파이크 군, 방사능 함정을 벗어났으니까 이제부터 자네가 나가서 항로 추적기와 텔레 스캐닝 TV를 수리하도록 하게. 나는 조종실이 남겠네. 태진이 너는 아줌마에게 가서 증세가 어떤가를 보고 오너라. 사사키의 우주선은 본선과 성능이 같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우리보다 3시간 정도 뒤떨어져 있다. 되도록 빨리 본선을 수리해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우리가 헤시코스에 가서 무슨 방비를 해야겠다." 사사키의 추격 소식을 듣고 잠시 침울한 생각에 빠져 있던 아저씨가 스파이크 씨와 내게 내린 지시다. 스파이크 씨는 우주복을 갈아입고 우주선 밖으로 나가고 나는 아줌마가 누워 있는 클리닝 룸으로 달려간다. 아줌마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 전신 샤워를 하고 난 뒤 비타민과 필수 아미노산을 주사했을 뿐이라고 한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체(人體)라는 소우주. 신비하고 신비한 것이 인체라는 유기 물질의 집합이다. 인간은 그 동안 태양의 상당한 부분에까지 탐색선을 보낼 정도로 지혜로워졌지만, 인체에 대한 비밀의 베일은 손도 못 대고 있는 형편이다. 거대한 우주선은 조립할 수 있지만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인체 환경에 적응해 가는 가장 간단한 유기체, 박테리아 하나도 합성해 내지 못하고 있다. 방사능 오염이라는 병도 그렇다. 1억분의 1밀리미터 이하의 작은 알맹이가 인체 속을 지나가면서 닥치는 대로 세포를 파괴하여 세포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파괴되는 세포가 심장이라든가, 호르몬 생산 기관이라든가, 뇌와 같은 중요 기관의 것인 경우는, 그 치명상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만일 파괴된 세포의 기능을 즉시 원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약품이나 새로운 세포로 대치시킬 수 있는 물질이 발명되지 않고는 방사능 오염이라는 무서운 병은 역시 영원한 불치(不治)의 병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다. 아주머니가 받은 치명상에 대해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저 인체 표면에 묻은 방사능을 씻어 내고 흡수가 빠른 양질의 단백질을 주사하는 길 밖에는. 그만큼 인체라는 유기질은 현재의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신묘한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원자핵의 구성까지도 하나 남기지 않고 낱낱이 파헤쳐 온 인간이 아직 그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유기체(有機體)라는 것의 비밀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고 인간의 접근을 영원히 허용치 않는 신만의 독점물이란 말인가? 새하얗다 못해 푸른기 마저 띄우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줌마를 보았을 때, 나는 인간의 능력 한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추연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아사가 이런 말을 해 왔을 때, 나는 과학이 무엇인지 비과학이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태진아, 그다지 염려하지 마. 고향이 가까워지니까 아버지의 텔레파시가 명확히 수신되는데 아줌마의 병은 내 힘으로 고칠 수 있을 것이래. 나의 의지를 한번 불어넣어 보라는 거야." 나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 그저 멍하니 아사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의지를 불어넣어? 무슨 뜻일까? "인간의 능력은 묘한 거야. 인체는 근본적으로 정신력, 즉 의지(意志)의 지배를 받거든. 병이 들었을 때 병자 자신이 자기의 병에 대해 체념해 버리면 인체는 체념해 버린 정신력을 따라 행동하여 결국 병자를 죽이고 마는 거야. 반대로 병자 자신이 자신을 가지고 병을 이긴다고 생각하면 인체는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하여 병을 치료하여 때때로 인간들이 말하는 기적을 만드는 거야, 믿음, 신념이라고도 하지. 지구인들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같은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예수님은 내 병을 틀림없이 고쳐주실 거다. 그분의 옷이라도 만지면 그분의 능력이 나의 병을 좇아 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의 병에 대한 신념을 갖기 때문에 사람이 가진 잠재력으로 병은 고쳐지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 때, 중요한 것은 병자가 갖는 믿음, 신념인 거야. 나는 꼭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신념 말이야." 아사의 긴 설교조의 설명을 듣고 나는 어이가 없다. 하기야 고도의 형이상학적인 문명을 이룩한 헤시코스 인들인지라, 그래서 텔레파시라든가 기상천외한 정신 감응이란 수단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방법까지 개척한 그들인지라 나는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아사의 설명이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사는 이런 나의 마음의 움직임을 벌써 알아 냈는지, "좀 건방진 말이지만 지구인들이 여태까지 쌓아온 과학은 절름발이 과학이야. 기계를 만들고 그래서 인간의 물질 생활을 풍요하게 하고 기껏 그런 정도야. 그러나 물질 과학보다 몇백 배 더 중요한 정신 과학을 아주 등한시하여 왔거나 혹은 전연 모르고 있어. 앞으로 너는 헤시코스에 가서 나의 이런 말을 이해할 때가 올거야." 아사의 말은, 반박하고 싶은 구석이 너무도 많지만 지금은 그런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아줌마가 위독하지 않은가? "그럼 아사 너는, 네가 말하는 그 정신 과학으로서 아줌마를 치료할 수 있단 말이지?" "물론 장담은 못해. 그러나 해볼 테야, 될 거야." 황금빛의 금발을 양어깨에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옥처럼 티 하나 없는 얼굴을 한 아사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할 때는 성녀(聖女), 바로 그것 같이 착각된다. 코웃음으로 날려 버리기에는 너무나 숙연한 그 무엇이 서려 있다. "그럼 아사, 최선을 다 해 주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나는 지금부터 무의식 상태에 있는 아줌마의 의식 속에 나의 정신력을 집어넣을 거야. 아주 조심해 줘. 나의 텔레파시가 방해받지 않도록 말이야." 이렇게 말한 아사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줌마의 이마에 한 손을 얹고 눈을 감는다. "아줌마 당신은 방사능 때문에 약간 병이 생겼어요. 그러나 그 병은 겁날게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방사능 때문에 파괴된 당신 몸의 세포는 지금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물론, 아사가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텔레파시 통신으로 아줌마의 뇌파에 동조(同調)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사와 오래 같이 있었기 때문에 누나와 내가 그녀의 통신을 수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방사능이 지나간 세포의 원형질이 약간 파괴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원형질이 점차 회복되고 있어요." 아사의 최면술을 거는 것과 같은 텔레파시 치료가 죽은 듯한 적막 속에 진행되고 있다. 이 때, 누나가 나의 소매를 슬그머니 끌어당기며 밖으로 나가자는 눈짓을 한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누나는 밖으로 나왔다. "태진이, 너는 아사의 말을 신용 안 하는 것 같지만, 나는 달라. 나는 아사의 뜻을 믿어. 우선 아사의 놀랄만한 예언을 생각해 봐. 아사는 우리가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미리 예언했잖아. 아사 말대로 헤시코스 인들은 지구인이 전혀 모르고 있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 한 거야. 나는 그 새로운 과학이 점점 사실인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해." 나의 태도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도대체 과학이란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고, 재현성(再現性)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종류의 과학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거 아냐?" "태진아, 네 말은 지구인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틀림없는 말이야. 그러나 전연 증거가 없는 것도 아니야. 벌써 20세기 후반에 와서 알려진 사실이기는 하지만 우리 피부에는 60 킬로사이클의 교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잖아. 60킬로 싸이클이면 공간으로 복사될 수 있는 전자 에네르기야. 하기야 이 60킬로싸이클이 인체의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 그러나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뇌 아니야. 그러니까, 이 대뇌의 명령이 이 주파수 속에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까 대뇌의 명령, 즉 우리의 사고 작용(思考作用)이 고주파에 실려 공간으로 복사된다고 생각해 봐. 참 재밌잖아. 사람들 중에 극히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이 60킬로싸이클을 수신할 수 있을지 몰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야." 나는 누나의 아주 그럴 듯한 이론에 반신반의한다. '그럴 수가 있을까?' 이 때, 아저씨가 수심에 쌓인 표정으로 이쪽으로 걸어온다. "어떻게 되었니, 아주머니의 증세는 어때" 하는, 아저씨의 물음에 누나가 아사의 텔레파시 치료에 대해 그 동안의 경과를 간단히 보고한다. 아저씨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럴싸하다는 표정은 아니다. "할 수 없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니까. 그리고 항로 추적기가 수리되었다. 벌써 헤시코스가 TV 스크린에 나타나고 있어. 45분 후에 도착할 것 같다. 현재 속력은 1대시 광속도."   착 륙   나와 누나는 조종실로 돌아와서, 레이저 스코프 앞에 앉았다. 스파이크 씨와 아저씨는 아줌마의 병세(病勢)를 보기 위해 간호실에 가 있다. 우주선은 완전히 정상(定常)을 회복했다. 선실 내의 온도계도 섭씨 17도를 가리키고, 자동항로 추적기도 파란 불을 켠 채로 정확하게 1초 간격으로 레이저 빔을 복사(輻射)하고 있다. 폭풍 후의 고요, 눈이 스스로 감겨지는 기분 좋은 상태다. 이런 중에서도 사사키 생각이 후딱 떠오르면 무의식 중에 오금이 조여들고 심장이 소리내어 쿵쿵거린다. 사사키! 그 매서운 눈, 딱 벌어진 어깨, 능글맞은 웃음,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더구나 그 사사키가 30분 전에 지구를 출발했다니까 불과 2시간 간격을 두고 우리를 추격하고 있지 않은가? 그 무섭고 잔인한 놈이 헤시코스에 가면 선량하기만 한 헤시코스 인들은 어떻게 될까? 놈은 뇌파 증폭기를 뺐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사양하지 않겠지. 양떼 속에 뛰어든 이리가 흰 양떼를 피로 물들이며 처참한 살육을 저지르는 광경이 벌어지겠지. 그러나 전연 그렇지 않을 지도 몰라. 왜냐 하면, 뭐니뭐니 해도 아저씨와 흐르노프 교수가 있으니까. 교수는 지금 헤시코스에 있으면서 헤시코스 인들에게 원자력 이용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위험이 닥치면 아저씨와 의논해서 무슨 기상천외의 묘책(妙策)을 강구할런지 모르지. 또 아사의 아버지인 솔베즈 추장이 있지 않은가? 수만 년 간이나 정신 감응술을 연마해 온 종족의 후예니까 지금 내가 상상도 못하고 있는 비책(秘策)을 알고 있을 지도 몰라. "태진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있어? 자, 20분 후에는 착륙이다. 레이저 스코프(Laser scope)를 가동시켜 보아라." 하는 아저씨 말에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새삼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아저씨, 스파이크 씨, 아사가 조종실에 들어와 있다. 사사키 생각에 골몰해서 사람이 들러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는 언제나 처럼 그림자 같이 조용히 서 있다. 나는 얼른 그녀의 표정부터 살펴본다. 원래, 좀체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사니까 표정을 보아서는 그녀의 감정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표정이 무척 밝다. 아사의 텔레파시 치료에 의해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 "아줌마의 병은 상당히 회복됐다. 이제 원기만 회복하면 돼. 2, 3일 후에는 완전히 회복할 것 같다." 아저씨가 나의 궁금증을 풀어준 말이다. 아사도 아저씨의 말을 긍정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레이저 스코프에 스위치를 넣었다. 스코프에는 동전 만한 크기의 헤시코스가 나타난다. 정확하게 거리를 측정해 보니까 15분 후에는 대기권에 돌입하게 될 것 같다. 조종실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역추진 분사기가 점검되고 우주선 자세 제어용 로켓이 시험되고 우주선의 진행 속도를 줄이는 역추진 분사가 1분 동안 계속되었다. 숨 돌릴 새도 없이 아저씨의 명령이 떨어지고 그 때마다 스파이크 씨의 손이 콘트롤 패널 위를 바쁘게 움직인다. 레이저 스코프에는 헤시코스의 육지 모양이 가득차 있다. 다시 역추진 로켓이 분사하고 우주선 외피를 스치는 헤시코스의 대기(大氣)와의 마찰음이 점점 크게 들려 온다. 대원 전부가 의자 위에 누운 채 벨트로 몸을 묶고 있다. 드디어 심한 감속이 시작되고 역추진 분사음이 크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대기와의 마찰음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우주선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레이저 스코프에 나타난 헤시코스가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다. 쿵-하는 둔탁한 소리에 이어 우주선이 크게 기우뚱거리다가 조용해 졌다. 드디어 2억 5천 킬로미터의 긴 여정을 무사히 끝내고 헤시코스에 도착한 것이다. 우주선의 해치를 열고 아저씨를 선두로 우리는 바쁘게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핼쑥한 낯빛을 한 아줌마도 누나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사사키   생소한 총경이다. 태양은 지구에서처럼 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부시게 빛나지를 않는다. 그저 검붉기만 하다. 산과 들은 서로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뚜렷한 차이가 없이 평평하기만 하다. 우주선 밖으로 나오자 한기(寒氣)가 단숨에 몸을 엄습한다. 바람도 별로 없다. 공기의 성분은 지구에서와 비슷해서 산소통이 없어도 불편은 없다. 기온은 섭씨 3도. 그늘진 곳에는 고드름까지 달려 있다. 500여 일의 긴 겨울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은 시들어져 맥이 없고, 키가 큰 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잔디같이 낮게 깔린 이름 모를 식물이 있어 거기에는 흰 꽃이 한창이다. 흡사 눈(雪)과 같다. 산과 들을 구별할 수 없는 땅에 눈 가는 데까지 깔려있다. 좁은 선실에 갇혀 있던 대원들은 땅 위를 뛰어다니며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다. 10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굴이 입을 벌리고 있다. 헤시코스의 지하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다. 굴 속의 지하 도시는 원래 헤시코스 조상들이 벌써 몇천 년 전에 건설해 놓은 것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심한 풍화 작용(風化作用)으로 굴 입구가 폐쇄되어 나중에는 지하 도시의 위치 조차 모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헤시코스에 다시 한파가 몰려와서 헤시코스 인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베이스 K 조사팀이 우연히 이곳에 와서(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헤시코스 인들의 텔레파시 통신에 유도되어 화성 근방을 탐험하던 우리가 헤시코스에 착륙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하 도시를 찾아 냈던 것이다. 섭씨 마이너스 50도의 혹한 속에서 나와 스파이크 씨가 다이나마이트를 안고 저 굴 속을 한 발짝 한 발짝 폭파해 들어갔던 것이다. 오래된 굴이 다이나마이트 폭발음에 무너져서, 나와 스파이크 씨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깜깜한 굴 속에서 만 72시간을 견뎌 냈었다. 그러니까 나와 스파이크 씨에게는 헤시코스가 새삼스런 감회를 안겨 주고 있다. 자칫했으면 목숨까지 버릴 뻔했던 저 굴! 꼭 열흘 동안 부지런히 굴을 뚫은 보람이 있어서 지하 도시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래서 추위에 떨던 헤시코스 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였을 때, 헤시코스 인들의 그 기뻐하던 모습.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 벌어졌던 그 호화찬란하던 축제(祝祭). 나는 그 때 얼마나 어깨가 으쓱했는지, 죽어 가던 5000명의 헤시코스 인들을 구했다는 자부심으로. 그런데 목숨을 걸고 구해 낸 그 헤시코스 인들에게 다시 검은 구름이 닥쳐오고 있지 않은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검은 구름은 나와 같은 지구인인 사사키가 아닌가? 헤시코스 인들은 은인으로서의 지구인도 가졌지만, 또한 영원한 원수의 관계를 가질 지구인도 생기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사사키의 최후 통첩   굴 쪽에서 지프차 한 대가 급히 달려오고 있다. 우리를 마중 나오는 모양이다. 지프차는 지난번 여행 때 우리가 남겨놓고 간 것이다. 인력이 작은 이 곳에 맞게 차체가 무겁도록 개조한 배터리 카(Battery Car)다. 아사가 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차에 탄 사람은 페트라다. 솔베즈 추장의 부관이다. 차에서 내린 페트라가 아사 앞에 잠시 무릎을 꿇고 공주에게 예를 드린 후 아저씨 앞으로 걸어왔다. 페트라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침울해 보인다. 자기들에게 사사키의 위험이 닥쳐오고 있는 것을 감지(感知)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조금도 겁내거나 당황해 하는 거동은 아니다. 이 점 아사와 다를 바 없는 헤시코스인의 기질이다. 페트라가 아저씨에게 생각을 전해온다. "먼 여로에 수고하셨다고 추장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김영준 박사와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같이 가십시다." 말을 마친 페트라는 스파이크 씨와 나를 차례로 껴안는다. 비록 지구인들처럼 말로써 환영의 뜻을 나타내지 않지만 진심으로 환영하는 그의 텔레파시를 우리들은 충분히 느끼고 있다. 아줌마는 처음 여행이기 때문에 아저씨가 페트라에게 아줌마를 소개했다. 아줌마는 창백한 안색으로나마 기쁜 듯이 손을 내민다. 페트라도 지구인의 인사 방법에 익숙했는지라 마주 손을 내밀어 아줌마의 손을 잡는다. 페트라가 생각을 전한다. "아줌마가 여행 도중에 겪은 재난(災難)에 대해 추장께서는 진심으로 위로의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줌마가 얼굴을 붉힌다. 나이가 40이 다 된 아줌마가 새삼스레 얼굴을 붉히는 건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저렇게 잘 생긴 남자에게 손을 잡힌 채 위로의 말을 들을 때, 얼굴에 홍조를 띠는 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페트라는 미남이다. 눈처럼 흰 피부, 2미터가 넘는 키, 굽이치는 금발, 거기에 정신 감응술로 단련된 지혜로운 표정과 태도, 과연 같은 남자인 나도 반할 형편이다. "스파이크 군! 태진이와 여기 남아서 사사키의 우주선을 감시해 주게. 사사키의 우주선이 보이거든 무전으로 연락해 주게. 나머지는 이 차로 지하 도시로 가자." 일행이 지하 도시로 떠나자 나와 스파이크는 우주선으로 다시 들어왔다. 사사키의 우주선이 레이저 스코프에 나타나려면 아직 1시간 반은 기다려야 한다. 레이저 빔(Laser Beam)에 의한 탐지 방법이 마이크로 웨이브(Micro wave) 탐지법보다 그 성능이 수백 배 우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몇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우주선 같은 작은 물체를 포착해 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사사키의 우주선이 레이저빔의 탐지 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깜깜한 스코프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심신이 나른한 것이 금방이라도 잠에 떨어질 것 같다. 베이스 K를 출발하고 난 뒤, 겹치는 사고 때문에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졸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어느새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번쩍 떴다. 스파이크 씨의 웃고 있는 얼굴이 바로 얼굴 앞에 있다. "태진 군, 무척 졸렸던 모양이군. 그런데 이거 봐." 하는 스파이크 씨 말에 겨우 눈을 비비고 스코프를 쳐다보았다. 아- 거기에는 어느새 콩알만한 크기의 반점이 나타나 있지 않는가. "사사키야. 5밀리 광속도로 접근하고 있어. 사사키도 원자력 엔진을 장비한 모양이야." 스파이크 씨의 말이다. 너무나 여유만만하다. 이 서양 신사에게는 다가올 모험이 즐거운 모양인가? 이것이 소위 말하는 개척 정신이라는 건가? 여유 만만한 스파이크 씨와는 반대로 나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긴장을 느끼면 스코프를 계속 응시한다. 반점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우주선의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다. 보고 있는 동안에 반점은 우주선의 모양을 갖추며 벌써 손목 시계만 해졌다. "사사키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박사님께 네가 연락해라." 하는 스파이크 씨 말에 출발할 때의 아저씨의 말이 생각나서 얼른 단파 무전기의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여기는 우주선, 여기는 우주선, 아저씨 나와 주세요, 오버." 아무 반응이 없다. 지프차에 장치된 무전기에 스위치를 넣지 않고 있는 건가? 나는 다시 아저씨를 부른다. "여기는 우주선, 여기는 우주선, 아저씨 나와 주세요. 오버." 이번에는 반응이 있다. "여기는 지하 도시. 무슨 일이냐? 오버." "사사키의 우주선이 나타났습니다. 현재 5000킬로미터 지점에서 계속 접근 중임, 20분 후에는 착륙할 것 같습니다. 오버." "알았다. 계속 감시해라. 곧 그 곳으로 가겠다. 통화 끝." 단파 무전기의 전원 스위치를 끊고 나는 다시 스코프를 응시한다. 우주선은 화면을 가득 채우며 접근해 오다가 사라졌다. "착륙한 모양이다. 여기서 2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우주선이 화면에서 사라지자 스파이크 씨가 한 말이다. 이 때, 지프차 오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아저씨가 우주선 안으로 들어섰다. 사사키가 2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착륙했다고 보고한다. "200킬로미터쯤이라. 음, 태진아, 단파 무전기를 이동시켜 놓아라. 사사키가 행동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어라고 할 꺼다. 3, 4시간 지나면 해도 질 테니까 오늘밤은 행동을 못하겠지. 놈은 이 쪽의 동정을 알아볼 꺼야. 그리고 사사키는 지하 도시의 위치를 정확하게 몰라. 그래서, 우리와 더 연락을 하고 싶을 거야." 하는 아저씨 말에 나는 다시 무전기에 전원 스위치를 넣자마자 음산한 사사키의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사사키, 여기는 사사키. 김영준 박사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시한 폭탄이 실패한 것을 모르고 있는 줄로 알지 모른다. 그러나 시한 폭탄이 실패한 것을 알고 있다. 박사의 우주선이 폭발하는 광경이 레이저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도착했다. 무기와 군인을 싣고. 그래서 박사는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앞으로 12시간 내에 뇌파 증폭기와 그것을 운전할 줄 아는 헤시코스 인을 내게 인도하라. 시한을 넘길 때는 가차없이 공격한다. 오버." 사사키의 말이 끝나자 아저씨가 스위치를 꺼버린다. "저건 사사키가 녹음해 둔 걸 꺼야. 2, 3분마다 저걸 반복하겠지. 그러나 응답해서는 안돼. 우리의 위치를 쉽게 알아낼 테니까." 아저씨의 말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궁금해하던 일을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아저씨, 그런데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이쪽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잖아요?" "그래, 우리에게 무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야. 그렇다고 전연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야. 우선 사사키는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어. 그리고 인원도 이쪽이 월등하게 많고. 그런데 문제는 추장이 분란을 피하기 위해 기계를 사사키에게 순순히 내어 주려 하고 있는 점이야.“ 아저씨 말에 나는 놀랐다. "그 기계가 사사키 손에 넘어가면 지구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추장에게 말씀드렸나요? 아저씨." "물론 이야기했다. 그러나 추장은 자기 종족의 안전만 생각하고 있어." 잠시 말을 끊고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아저씨가 결연히 말한다. "사사키는 우리에게 12시간의 시간을 주었다. 그 안에 우리는 기어코 추장을 설득하여 사사키를 방어할 계획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12시간 안에 말이다……" 해치를 닫고 우주선 주위를 정돈한 후 우리는 지하 도시를 향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긴 터널(Tunnel)을 한참 달렸다.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철문을 지나 아름다운 도시 입구에 들어섰다. 평평한 지붕을 한 집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온갖 꽃이 만발한 정원이 보인다. 위기가 닥친 것을 느끼고 있을 터인데도 통행인의 몸가짐은 동요되는 법이 없이 침착하다. 지하 도시 전체를 덮고 잇는 거대한 돔(Dome) 가운데에 장치된 통풍관을 이용한 환기 시설은 완벽하다. 5천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도 공기의 신선도는 도시 밖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집집마다 꽃나무와 수목이 울창한 것도 주민이 내뿜는 막대한 양의 탄산가스를 제거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곳의 수목은 독특해서 태양 광선이 없는 밤에는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假死狀態)가 되는 것이다. 지하에서만 수만 년 간 살아오는 동안 신진 대사량이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아예 밤에는 생명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낮에는 탄소 동화 작용으로 주민이 쏟아놓는 탄산가스를 흡수하고 밤에는 가사 상태가 되어 도시 내의 산소를 소모하지 않게 되어 있다. 식물도 인간의 요구에 순응한 것이다. 이것은 근래 새삼스럽게 다시 말썽이 일기 시작한 다윈의 진화론을 보완(補完)하는 하나의 새로운 증거가 된 것인데, 지난 번에 흐르노프 교수가 이 사실을 세상에 발표했을 때, 생물학계가 잠시 떠들썩했었다. 차가 지나갈 때, 키가 크고 혈색이 좋은 시민들이 인사의 생각을 보내온다. 사사키가 최후 통첩을 보내온 것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뇌파 증폭기   시 중앙에 있는 광장에서 아사와 아줌마를 만나 나는 차에서 내리고 스파이크 씨와 아저씨는 추장의 집으로 계속 차를 몰았다. 조용한 방에 누워서 정양을 취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줌마가 기어이 뇌파 증폭기를 보기로 했다고 한다. 나와 아줌마는 아사를 따라 작은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아저씨들은 추장 집에서 사사키 문제를 토론하고 있으리라. 롤러 위에 얹힌 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갑자기 실내에 들어온 우리들은 처음에는 아무 것도 잘 볼 수가 없다. 실내 벽에서 반사되어 오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가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참 그대로 서 있으려니까, 방 가운데에 둥그런 울타리가 보인다. 울타리 안에는 희미한 불이 켜져 있고 가운데에 투명한 운모상자가 있다. 상자 안에는 수만 개의 번쩍이는 철사가 서로 엉켜서 맥박처럼 뛰고 있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기계가 스르륵 스르륵하며 우주 공간을 향해 텔레파시 에너지를 복사하는 약한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쳐다본다. 이것이 사사키 일당을 유혹하여 헤시코스에 때아닌 유혈의 참극을 불러일으키려고 하고 있는 뇌파 증폭기인 것이다. 한참만에 아줌마가 입을 연다. "이것은 정말 상상도 못할 기계야 ! 유리로 된 핏줄 속으로 피를 들여보내고 있는 것처럼 철사가 꿈틀거리고 있잖아?" "좋은 비교예요. 철사는 생물체의 뇌세포의 역할을 하거든요." 하는 아사의 대답이다. "기계를 운전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니?" 역시 아줌마의 물음이다. "기계가 적당한 송신 파장으로 조정되면 기계 운전자가 이 극판 두 개를 꼭 붙잡아요. 그러면 운전자의 뇌파가 증폭되어 복사되지요." "그럼 우리도 사용할 수 있을까? 태진이나 나나 말이야."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훈련만 받으면 말예요. 기계운전자는 생각을 송신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거든요. 이것은 일종의 복사 에너지가 공간을 누비며 주사(走査)되고 있어요. 이 에너지는 훈련을 받지 않는 마음에는 치명상을 입혀요." 나는 아사의 말에 그 에너지라는 것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뇌파 증폭기의 운전 동력은 지구에서와 같은 전기임에는 틀림없어. 그러나 주요 부분품은 이리도늄인데 이 금속에 대해서는 태진이 너도 알고 있지? 헤시코스에만 있는 거야. 흐르노프 교수께서 지난 번에 분석한 바에 의하면 원자 번호 111.5라는 기묘한 원소야. 이 이리도늄은 충전되면 감마선과 같은 일종의 센 방사능을 내뿜게 되는데, 이 방사능에 견디도록 훈련을 받지 않은 마음은 마비되고 마는 거야." 감마선이라는 바람에 약간 찔끔하는 눈치지만, 그래도 아줌마의 호기심은 그칠 줄 모른다. "그럼, 그렇게 위험하면 사사키가 쉽게 이용할 수 있을까?" "쉽게 이용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국민 중의 누구에게서나 일주일 이내에 조정 방법을 배울 수 있거든요. 그의 정신은 단단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아주 쉽게 배울 거예요." 방 안에는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다. 스르륵 스르륵 하는 기계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올 뿐, 소리가 날 때마다 에너지가 충전되느라고 철사가 맥박처럼 뛰고 있다. "꼭 살아 있는 짐승을 묶어 놓은 것 같구나" 한참만에 아줌마간 내뱉듯 한 말이다. 징그러운 물건을 대할 때처럼 상을 찡그리며, "우리 국민들이 다른 세계에 우리의 생각을 보내온 수천 년 동안 기계는 이렇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대요. 지난번에 우리가 절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필사적인 구원의 호소를 외계를 향해 보냈어요. 그 때마침 화성 근방을 지나가던 박사님 일행이 우리의 정신을 수신하고 여기로 오신 거예요." 아사가 말하는 동안 기계를 보고 있던 아줌마는 "알겠어 아사. 헤시코스는 이 기계 때문에 살아났단 말이지. 그러나 나는 너의 기계가 싫다. 겁이 난다." 사실 아줌마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흡사 간교한 짐승을 울타리에 놓아둔 것처럼 요기 같은 것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뇌파 증폭기에 대해서는 호감이 가지 않는다. 기계라고는 하지만 우리 지구인이 여태까지 생각하고 있던 기계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그런 것이다. 아사는 나와 아줌마의 그런 기분을 금방 느꼈음인지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추장 집에서 헤시코스의 명물인 순 과일로만 된 저녁을 먹고 아사와 아줌마는 동물원 구경을 가고 나는 응접실로 갔다. 응접실에서는 추장, 아저씨, 흐르노프 교수, 스파이크 씨가 둥근 테이블에 앉아서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논쟁은 예상 외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추장은 사사키의 최후 통첩에 겁을 먹고 뇌파 증폭기를 순순히 내어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급하디 급한 아저씨의 성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격론(激論)   아저씨가 탁자를 탕 내리치며 소리친다. "분명코! 이런 말은 일국의 통치자가 할 소리가 아니오. 줏대 없는 협상이며 너무나 유약한 사실상의 항복이요!" 솔베즈 추장은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키가 크고 귀공자 같은 얼굴에 범하지 못할 위엄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말은 눈동자에는 고뇌와 초조감이 안개처럼 서려 있다. "김영준 박사! 나는 귀하의 용기를 칭찬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소이다. 박사의 말과 같이 나는 많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통치자이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백성에게는 투쟁과 유혈의 모험이 결단코 있어서는 안되겠소이다. 수천 년 동안 우리 국민은 평화 속에 살아 왔소이다. 그리고 나는 이 평화의 철학을 자손만대에 영구히 계승시킬 의무가 있소! 전쟁에 휘말려 드는 것은 생각할 여지조차 없소이다." 추장의 태도는 확고하다. 일순 방 안에는 긴박한 침묵이 흐른다. 여태까지 두 사람의 논쟁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흐르노프 교수가 천천히 일어서면서 정중하게 입을 연다. "솔베즈 추장! 나는 당신 국민들과 수 개월 동안 같이 생활해 왔소. 그 동안에 나도 당신들의 그 평화를 신봉하는 철학을 숭상하기에 이르렀오. 그러나 생각해 보시오. 나는 50억의 지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과학자에게 원자력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간 무던히도 애써왔소. 이제 김 박사가 천신만고 끝에 원자재와 기계까지 운반해 오지 않았소이까? 그래서 당신들에게는 추위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기회가 주어진 게 아닙니까? 이 점 우리들에게, 아니 전 지구인에게 당신들은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그 점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추장의 태도가 약간 수그러지는 듯하자, 교수의 웅변이 계속된다. "생존의 기본은 협조입니다. 이것은 행성 간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지구인은 당신들을 도와왔습니다. 이제 당신들이 우리를 도울 차례입니다. 사사키에게 뇌파 증폭기를 허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들은 평화와 사랑을 퍼트리는 데 사용해 왔지만 사사키는 적의와 전쟁을 도발시키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추장은 괴로운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흐르노프 교수, 배은망덕한 것 같아서 나의 마음은 괴롭습니다만 어쩔 수 없소이다."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하고, 흐르노프 교수가 다시 추장의 말을 가로챘다. 숨가쁜 열변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기에게 비록 약간의 이롭지 못한 일이 일어날 위험이 있더라도 진정으로 그들을 협조한 수 있는 태세를 갖추지 못한 종족은 진보할 자격이 없습니다. 또 위험이 바로 코앞에 닥친 이런 결정적인 위기에서도 자기 몸만 도사리고 위험에 적극적으로 부닥치는 일말의 용기도 없는 비겁하고 피동적인 종족은 영원히 고립되고 기필코 멸망합니다." 격앙된 모욕조의 열변이 끝났다. 순간 추장은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한참 동안이나 마룻바닥을 응시하며 넓은 이마에 한 손을 얹고 침묵을 지킨다. 이윽고 고즈넉이 고개를 든 추장은, "나의 친구여! 당신의 논리는 무어라고 대답하기 심히 어려운 비약이요. 그런데 설사 나와 국민들이 당신들을 기꺼이 도와 줄 생각이 있더라도 사사키에게 대항할 방법이 있소? 우리에게는 무기라고는 없지 않소?" "추장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고, 아저씨가 다시 대화에 끼여든다. "무기와 같은 물리적인 면에서는 불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추장, 당신과 흐르노프 교수와 나는 일종의 방어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충분한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추장은 대답하지 않는다. 아저씨의 말을 수긍한다는 것인가? 한참만에 흐르노프 교수가 다시 입을 연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기계는 바로 여기 도시의 중심에 있소. 그리고 여기로 들어오는 길은 철문이 막고 있는 터널 뿐이요. 그럼 추장! 당신 국민들이 흙 한 포대씩만 운반해다가 철문 뒤에 쌓아놓으면 어떨까요? 사사키가 특별한 무기와 장비를 준비해 오지 안았다면 두꺼운 철문과 흙 포대를 뚫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열흘 후에 닥쳐 올 맹추위 때문에 쫓겨가게 될 겁니다." "오라, 그것 참 멋진 생각이오." 아저씨가 기쁨의 환성을 지른다. "그러나 다른 입구가 없는 것이 아니오." 하고, 추장이 무겁게 입을 연다. "통풍구와 지하로 흐르는 수로 입구로도 침투할 수 있습니다." "거기는 수비하거나 처단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고, 아저씨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또 나선다. "추장! 흐르노프 교수의 뜻을 내가 다시 한번 말하리다. 우리는 필요한 인력만 확보하면 사사키를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키가 우리에게 허용한 시간은 불과 24시간입니다. 쓸데없이 논란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나는 참으로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말은 알아듣겠습니다." "그럼, 우리를 도와 주겠다는 겁니까?" 아저씨가 표범처럼 눈을 빛내며 다그쳐 묻는다. "철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도록, 사람을 동원하겠습니다." "만세! 훌륭하신 용단입니다!" 다혈질인 아저씨가 어린애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친 말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다시 알려 둘 것은, 이 모든 조치는 우리 국민이 여태까지 신봉해 온 원리와는 완전히 어긋난다는 사실입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추장의 영단(英斷)을 거듭 칭찬합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사사키 일당의 무장 상태와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찰대를 파견해야겠습니다. 추장, 지원자를 선발해 주시오." 아저씨가 추장에게 부탁한다. "그럴 필요 없어요. 스파이크 씨와 제가 지프차를 타고 갔다 오겠어요." 하고, 내가 재빨리 나섰다.   야간 순찰   적선이 착륙한 근방의 지도와 약간의 C-레이션, 열 개의 다이너마이트와 나침반을 준비하고, 광장의 중앙에 대기하고 있는 지프에 올랐다. 스파이크 씨가 운전대에, 나는 그 옆에 앉아서 나침반으로 방향을 지시하기로 한 것이다. 차에 시동이 걸리자, 아저씨가 스파이크 씨에게 "되도록 모험은 피하게, 지금 출발하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쯤에는 적의 2, 3km까지 접근할 수 있을 거야. 거기서 부터는 도보로 정찰을 행하도록. 어둡다고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돼. 사사키가 서치라이트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정찰 목적은 3가지 - 첫째 적의 병력 수, 둘째 적의 무장 상태, 셋째 적의 기동 수단, 이상. 그러면 잘 갔다오게!" 흡사 야전군 사령관처럼 엄숙하게 다짐하는 아저씨에게, 미국인 특유의 우스꽝스런 거수경례를 척 갖다 붙이고 난 스파이크 씨가 차의 클러치를 밟는다. 이 때, 우리의 야간 순찰을 전송하러 나온 추장과 함께 서 있던 아사가 갑자기 우리 차 뒤에 뛰어오른다. "나도 같이 갈래요." 질겁을 한 추장이 딸의 어깨를 잡는다. "아니- 얘가? 네가 정신이 있니? 없니?" "아니에요, 아버지. 저는 정신이 멀쩡해요. 저는 스파이크 씨와 태진이만 그런 위험한 곳에 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저는 이분들보다 이 땅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아요?" "그러나 사사키에게 다시 붙들리면…….. "염려 마세요, 아버지. 저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려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어서 가자고 스파이크 씨에게 재촉이다. 추장이 다시 딸의 팔을 잡는다. "아사-" "전 꼭 같이 가겠어요. 박사님 일행이 지난 번에 여기 오신 이후로 저는 그분들과 같이 있기를 바랬어요. 그분들처럼 용감하고 대담하게 되려고요. 우리는 매사에 너무 소극적이에요." "가게 내버려 두시죠. 추장." 아저씨가 아사 편을 들고나선다. "나 같으면 이런 딸을 둔 것을 큰 자랑으로 알겠습니다. 당신의 국민들이 이제 도시 밖으로 용감히 뛰어나가서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려는 이 때, 아사는 그들을 이끌어갈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늙은 추장은 머뭇거리다가 딸을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놓는다. "그렇군요, 박사. 헤시코스에는 이제 나 같은 늙은이가 아닌 적극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스파이크 씨가 액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는다. 초록색의 이끼가 끝 없이 뻗어 있는 평원에 군데군데 솟아 있는 핑크 색의 바위를 피해가면서 차를 몬다. 북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져 있는 적선에 이르는 진로를 그르치지 않으려고 나는 시종 나침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물론 헤시코스에서는 지구에서처럼 나침반이 자기상의 북극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뇌파 증폭기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방사능 에너지 때문에 지하 도시를 향하고 있다.   긴 낭떠러지   두 시간쯤 달렸을 때, 동서로 한없이 길게 펼쳐져 있는 큰 낭떠러지에 도달했다. 처음 착륙했을 때부터 이미 우리는 이 벼랑을 알고 있었다. 그 때는 반대편에서 오다가 이 낭떠러지를 만나 더 이상 탐험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때, 우리는 낭떠러지를 올라가는 대각선의 좁은 길을 발견했었는데, 긴 양옆에는 녹슨 금속제의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헤시코스에 고대 문명이 존재했었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같은 길을 달려 내려가다가 그 가파른 경사와 깊은 계곡에 사지가 오그라드는 것 같다. 그러나 스파이크 씨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 차를 몬다. 돌멩이에 타이어가 몇 번 미끄러진 것 외는 무사히 계곡 아래까지 내려갔다. 다음에는 가끔 말라붙은 강바닥의 푸석푸석한 땅 위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지구에서만큼 중력이 크지 않아서 여기도 사고 없이 통과했다.   적 선   남쪽에 뾰족하게 솟은 언덕으로부터 어둠이 갑자기 몰려온다. 그러나 그 어둠이 미쳐 다가오기 전에 돌로 된 벼랑을 옆에 낀 계곡을 볼 수 있었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차에서 내렸을 때, 저절로 기운이 번쩍 날만한 광경을 그 계곡에서 발견했다. "불빛이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나의 부르짖음에 "적선의 해치에서 나오는 불빛 같다." 하고, 스파이크 씨가 흥분을 감추고 침착하게 말한다. "놈들이 우리를 못 봤어야 하는데 …….." 하는, 나의 걱정에 아사는 "우리는 사사키들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달려 왔으니까 우리를 알아봤을 리가 없어." 출발할 때, 아저씨가 일러 준 대로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정찰을 하기로 하고, 우리는 군데군데 솟은 바위 사이로 경사진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20분쯤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다 보니 이젠 완전히 어두워졌다. 돌멩이에 채이고 바위에 미끄러져서 몇 번인가 넘어질 뻔했지만, 그 때마다 서로 잡아 주어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전구처럼 별이 반짝이고 있지만, 계곡에는 전혀 빛이 와 닿지 못한다.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해서 정찰하기에는 오히려 안성맞춤이다. 계속 접근함에 따라 어둠 속에서나마 하늘을 향하고 우뚝 서 있는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사키의 우주선이다. 눈짐작으로도 우리 것보다 더 큰 것 같다. 가까이 감에 따라 약한 기계 음이 들려온다.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는 원자력 엔진 소리라고 스파이크 씨가 귀뜸 해 준다. 추측했던 대로 지상에서 6m쯤의 높이에 있는 해치에서 불빛이 새 나오고 있다. 아사가 생각을 보내 온다. "그들의 생각을 이제 느낄 수가 있어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굳은 생각이에요. 우리가 여기 있는 줄은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우주선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적선에 바짝 가까이 다가갔다. 입체 사진 같은 광경이 나타났다. 선실 한 가운데에 놓인 탁자 주위에 15명의 대원이 식사 중이다. 검은 상의에 푸른 바지를 입고 긴 가죽 장화를 신고 있다. 선실 귀퉁이의 수신기 옆에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사사키도 보인다. 사사키 옆에는 어깨에 금색 견장을 달고 지휘봉 같은 것을 들고 있는 깡마르고 키가 큰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15명의 대원을 통솔하는 장교 신분 같다. "사사키, 장교 1사람, 군인 15명, 도합 17명입니다. 그런데 무기는?" 하는, 나의 귓속말에 스파이크 씨가 "소총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군. 선실 뒷벽을 보아. 나란히 세워 둔 개인 화기가 보이지. 무슨 총인지는 모르지만." 스파이크 씨 말에 아사가 와들와들 떤다. "큰일났어요. 저들이 도시 안으로만 들어오면 우리는 대항할 방법이 없어요. 아이구 무서워." 스파이크 씨가 아사를 진정시킨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그러나 아직 놈들은 도시 밖에 있어. 놈들은 너의 국민들이 쌓고 있는 굴을 뚫지 못할 거야." 우주선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놈들이 차를 가져온 흔적은 안 보인다. 그러나 화물을 풀어서 우주선 아래 어디엔 가에 내려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둠 때문에 우주선 아랫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이 때, 갑자기 아사가 생각난 듯이 "얼마 안 있으면 화성이 떠오를 거예요. 그 때는 땅이 대낮처럼 밝아져요." 아사의 말에 새삼스럽게 지평선 쪽을 보았다. 벌써 희끄무레한 빛이 북쪽 산봉우리 근방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더 있으면 밝아져서 적이 우리를 발견할지 몰라요." 하고, 내가 조바심이 나서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는 스파이크 씨를 재촉한다. "태진이! 놈들에게 차가 있는지 알아보아야 해. 그런데 저게 뭐야. 군인들이 움직이고 있잖아." 정말 군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바짝 긴장된다. 서치라이트가 켜지면서 우주선 아랫부분을 비춘다. 네 명의 군인이 사다리를 타고 땅으로 내려온다. 동시에 여태까지 들리던 기계 음이 훨씬 더 커지면서 기중기의 긴 팔이 우주선 안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 기중기의 팔 끝에는 대형 장갑차 같은 것이 달려 있지 않은가? 먼저 내려온 군인들이 바쁘게 설치더니, 그들 머리 위로 내려오는 장갑차 같은 것을 땅에 풀어놓는다. 거의 30분간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 적은 장갑차 4대와 무언지 알 수 없는 화물을 땅에 내려놓는다. 무기, 탄약, 음식물인 모양이다. 화물 중에는 별로 크지는 않지만 대포 같은 것도 있다. 벌써 지평선에 둥근 화성이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봐요! 화성이 떠오르고 있어요. 빨리 가요." 아사의 재촉이다. "가자!" 스파이크 씨가 일어선다. "박사님이 지시한 사항은 다 체크했다. 인원, 무기, 차. 자, 소리 안 나게 빨리!" 아사와 내가 앞에 서고 스파이크 씨가 뒤에 서서 우리는 급하게 귀로(歸路)에 오른다. 적선에서 나는 기계 음이 점점 멀어진다. 벌써 화성이 높이 떠올라서 사방으로 찬연한 빛을 보내고 있다. 3개의 긴 그림자가 길게 앞장선다. 나는 점점 불안해진다. 대낮 같은 빛 속에 우리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 쪽에서 우리 쪽을 보기만 하면 우리의 긴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발견될 형편이다.   서치라이트   언덕을 반쯤 올라왔을 때, 기어코 일은 터졌다. 내가 큰 바위 위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바위가 흔들거려서 나는 몸의 균형을 잔지 못하고 바위와 함께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이 때, 잽싸게 달려든 스파이크 씨의 손을 잡고 나는 겨우 돌에 치이는 것을 면했지만 큰 바위가 굴러 내려가면서 와당탕 하는 돌 사태를 막을 수는 없다. 다행히도 돌 사태가 크게 일어나지 않고 중간에서 멎었지만 그 소리는 적선에까지 충분히 들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약하게나마 들리던 기중기 소리가 뚝 그치더니 센 서치라이트 빛이 우리 쪽을 향해 날아온다. 숨을 죽이고 서 있는 곳에서 50m쯤 떨어진 바위 위에 날아온 둥근 불빛이 마의 함정처럼 흔들거리며 우리 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온다. "가자. 20m만 달려가서 저 바위 뒤에 숨자!" 스파이크 씨의 다급한 부르짖음에 놀란 토끼처럼 우리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둥근 서치라이트 빛이 야금야금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바위 있는 곳에서 15m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서치라이트가 우리 머리 위로 휙 다가온다. 곤두박질하듯이 우리는 땅에 엎드린다. 숨을 죽인다. 서치라이트 함정 속에 우리를 가둔 채 불빛은 잠시 그대로 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다. 그런데! 불빛이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여 간다. 그럼 적은 아직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벌떡 일어난다. 스파이크 씨가 내 팔을 낚아채면서 외친다. "꼼짝 말고 있어!" 이유는 금방 명백해졌다. 1, 2m쯤 떨어진 곳에 잠시 멈춘 불빛이 다시 우리에게로 덮쳐온다. 우리는 다시 마귀의 손에 잡혔다. 내가 다시 엎드리기 전에 나의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눈치 챘으리라. 두려움에 떨면서도 행여나 하고 잠시 그대로 엎드려 있다. 갑자기 2, 3m 떨어진 곳에서 불꽃같은 먼지를 내면서 금속성의 비명을 지르며 총알이 떨어진다. "바위 있는 곳으로 달려라." 스파이크 씨의 숨가쁜 부르짖음과 함께 우리는 쏘는 듯한 불빛을 등 뒤에 받으며 필사적으로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앞에, 옆에, 빗발처럼 총알이 날아와 박힌다. 바로 내 머리 위에 있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서 내 입술을 때린다. 짭짤한 피가 입 속으로 흘러 들어오지만 이런데 신경 쓸 새가 없다. 총알을 맞기 전에 어떻게 하든지 한시 바삐 저 바위 뒤로 숨어야 한다. 9m……, 5m……, 총탄이 쏟아진다. 소낙비처럼.   추 격   우리 발꿈치 바로 뒤에 총알이 비명을 지르며 따라와 먼지를 풀썩일 때, 우리는 꼭대기에 이르렀다. 구르듯이 바위 뒤로 몸을 숨긴다. 불빛이 이곳까지는 못 미친다. 우리는 새삼 각자의 몸을 살펴본다. 총알을 맞은 흔적은 없다. 총알이 사람을 피해 간다더니, 빗속을 뛰어 다니면서도 비 한방울 안 맞은 격이라 할까? 총소리가 그치고 급히 시동이 걸리는 차 엔진 소리가 들린다. 살그머니 내다보니, 몇 사람이 총을 든 채 장갑차 속으로 급히 뛰어들고 있다. "언덕을 빙 돌아서 앞길을 차단할 모양이다. 빨리 빠져 나가자." 하는, 스파이크 씨의 말과 함께 우리는 또 다시 죽자고 달리기 시작한다. 언덕을 다 내려와서 평원을 달릴 때는 이제는 제법 높게 뜬 화성(火星)의 반사광 때문에 세 사람의 긴 그림자가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며 우리를 끌고 간다. 지프차가 숨겨져 있는 바위 뒤를 돌아서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된 채 차에 오른다. 스파이크 씨가 황급하게 엔진을 넣어 막 움직이려 하자 오른쪽 언덕 아래서 적의 장갑차의 머리가 나타난다. 장갑차와의 거리는 800미터 정도. 다른 사고만 없다면 장갑차가 우리를 따라 잡기 전에 벼랑까지 우리가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다. 스파이크 씨가 잡고 있는 핸들 앞에 붙어 있는 속도계가 60을 가리키고 있다. 현재 상태로 달리면 벼랑까지 45분 정도 걸릴 것 같다. 곳곳에 솟아 있는 바위와 작은 나무의 긴 그림자가 차의 운전을 어렵게 한다. 그림자 때문에 눈이 현혹되어 헤드라이트를 켜고서도 자칫하면 바위를 향해 돌진할 가능성이 있다. 설사 큰 바위와 정면 충돌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먹만한 돌멩이가 타이어에 깔리기만 해도 큰일난다. 중력이 작기 때문에 차가 공중으로 튕기기 쉽고 그러면 자연 전복될 위험이 있다. 적의 사정도 우리와 마찬가지인지 우리와의 간격을 조금도 좁히지 못하고 있다. 20분쯤 달리자 밤하늘에 까맣게 솟은 벼랑이 보이기 시작한다. 차 뒷자리에서 아사가 생각은 전한다. "벼랑 위에까지 우리를 쫓아오면 어떻게 하지?" 스파이크 씨가 안심하라는 듯이 말한다. "다이너마이트가 있잖아? 꼭대기에 먼저 올라가서 길을 폭파시켜 버리면 그만이야." 멋진 계획이다. 급한 중에서도 이 코 큰 신사의 머리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는 것이 놀랍다. 우리가 사사키 일당을 벼랑에서 저지시키면 놈들은 640킬로미터 이상을 돌아야만 지하 도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상태로만 달린다면 아무 일 없겠구나 하고 혼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쉴 때다. 바로 이 때 피- 웅 하고 공기를 찢으며 날아온 총알이 바로 귓전을 스친다. "앗! 스파이크 씨! 적이 다시 쏘기 시작해요." 하고,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아사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차 속에 납작 엎드린다. 차 뒤에는 그녀의 황금빛 머리칼만이 국화꽃잎처럼 휘날린다. "난 벌써 그럴 줄 알았어!" 스파이크 씨가 침착하게 뇌인 말이다. "그러나 과히 염려할 것 없다. 멀리 떨어진 차 속에서 정확하게 조준할 수는 없어." 총알이 또 날아온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20미터나 떨어진 곳에 먼지를 일으킬 뿐이다. 현재의 차의 속력은 65마일. 이제 땅은 그렇게 울퉁불퉁 하지는 않다. 그런데! 적의 속력이 빨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 동안에 눈에 띄도록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눈만 내밀고 뒤를 쳐다보고 있던 아사가 부르짖는다. "얼마나 가까워졌니?" 스파이크 씨가 물은 말이다. "전 잘 모르겠어요. 태진이, 넌 알겠나?" 나의 추측으로는 우리와의 거리가 540미터쯤 된다고 했다. 적은 바위와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산새 처럼 잘도 달려온다. 이렇게 가다가는 10분 안에 우리를 따라잡을 것 같다. 적은 장갑차이기 때문에 차체가 육중해서 웬만한 속력을 내더라도 돌멩이에 튕겨서 전복될 염려가 없다. 그래서 속력을 증가시킨 모양이다. 또, 총알이 날아와서 앞 타이어에서 불과 10센티 정도 떨어진 곳에 풀썩 먼지를 일으킨다. 스파이크 씨와 나는 앞에서, 아사는 뒤에서 되도록 자세를 낮춘다. 그러나 가장 걱정되는 것은 타이어다. 타이어에 총알이라도 맞는 날이면 만사가 끝난다. "지금 거리는 어떠냐?" 앞을 노려본 채 스파이크 씨가 물은 말. "더 가까워 오고 있어요." "할 수 없다. 속력을 더 내자." 전복을 각오하고 속도계가 70을 가리키도록 속력을 올린다. 적도 눈치를 챘는지 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면서 적의 속력도 더 빨라진다. 이제는 벼랑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뻗어 있는 울타리 길이 보인다. 공중에 높이 뜬 화성의 반사광으로 은실처럼 반짝이는 작은 길! 그러나 그 길은 아직도 멀다. 그런데 사사키 일당은 미친개처럼 악착같이 달려오고 있다. 스파이크 씨가 액셀러레이터 밟은 발에 힘을 준다. 속도계가 90을 가리킨다. 조금만 잘못되어도 차는 전복한다. 적이 400미터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총알에 맞는 것을 겁내기보다는 폭풍을 만난 배처럼 제멋대로 흔들리는 지프차에서 떨어져 나갈까봐 더 겁이 난다. "스파이크 씨! 큰일 났어요. 점점 더 가까워져요!" 하고, 뒷자리에 엎드려 있는 아사가 발을 동동 구른다. "사격도 점점 정확해지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조바심이 나서 스파이크 씨를 재촉한다. 총알이 지프차의 본넷에 맞아서 삐웅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을 낼 때, 스파이크 씨가 체념한 어조로 중얼거린다. "이제는 기적을 믿을 수밖에 없다."   새 떼   놈들의 차의 엔진소리가 점점 높게 그리고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이제는 금시라도 우리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다. 이 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무의식 중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새떼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다. 아사도 고개를 들어 새떼를 쳐다본다. "아버지가 보내신 거야. 아버지는 벌써부터 나의 생각을 수신하고 계셨어. 새떼를 보내 우리를 도우려는 거야." "그러나 새 따위가 무슨 도움이 돼?" “이해 못하겠니, 태진아? 새떼가 차 주위를 둘러싸면 운전사가 앞을 못 보아서 운전을 못할 것 아냐!" 그 동안에도 스파이크 씨는 묵묵히 차만 몰고 있다. 나는 일이 어떻게 되나 하고 뒤를 돌아다본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새떼가 장갑차를 덮었다. 벌떼 처럼 겹겹이 둘러싼 새의 날갯짓이 장갑차의 헤드라이트 빛 사이로 어른거린다. 새 날개로 된 담요를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 "스파이크 씨, 저걸 한 번 보세요!" 하고, 아사가 기쁨의 환성을 지른다. "적은 완전히 포위 당했어요. 아- 지금 차가 섰어요. 스파이크 씨 , 차가 섰어요." 하고, 나도 덩달아 부르짖었다. 차는 새와 구름 같은 먼지에 둘러 쌓여 정지해버린 것이다. 스파이크 씨는 돌아볼 념도 내지 않고 여전히 최고 속력으로 차를 물고 있다. 그러나 말만은 천연덕스럽다. "거봐! 기적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이제 기적이 일어난 거야!" 이 때, 자지러질 듯한 기관총 소리가 밤하늘을 찢는다. 그와 함께 애처로운 새 울음이 가슴을 뭉클하게 찬다. 놈들이 새 떼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이다. 콩튀듯하는 총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풍지박산하는 새떼의 날개소리가 바람소리처럼 들려온다. 공중으로 솟아오른 새 떼는 검은 담요처럼 뭉쳐서 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적은 새떼의 포위를 벗어났다. 그러나 이 때 쯤에 우리는 1600미터나 그들 보다 앞 서 있다. 스파이크 씨의 계산으로는 이제는 적보다 먼저 벼랑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새들은 그들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아사는 새떼에게 생각을 보내어 위험을 피해 공중 높이 솟아오르도록 한다. 드디어 벼랑까지 도달했다. 급커브를 틀어 울타리 길을 달려 오르기 시작한다. 중력이 작아서 험한 길에 타이어가 잘못 반동을 일으키면 차는 나르듯이 해서 계곡 사이에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스파이크 씨의 운전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반동이 일어날 만한 바위를 용케 피해서 잘도 달려 올라간다. 벼랑 꼭대기에 무사히 도착한다. 나와 스파이크 씨는 차 뒤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꺼내어 급히 오던 길로 도로 달려 내려간다. 적은 이제 벼랑길로 접어드는 참이다. 우리는 녹슨 울타리 쇠 하나를 빼버리고 폭약 2개를 묻었다. 이 정도면 지름 2미터쯤의 함정을 만들기에는 충분하리라. 스파이크 씨가 퓨즈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놀란 토끼처럼 꼭대기로 다시 뛰어 올라갔다. 뛰면서 힐끗 쳐다보니 적의 장갑차가 마지막 커브를 돌고 있는 중이다. 아사를 태운 채 약간 움푹 들어간 곳에 세워둔 지프차 아래로 곤두박질해 들어갔다. 이 때,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이 들려온다. 뒤이어, 폭파 찌꺼기가 비처럼 쏟아져서 지프차의 본넷을 두드린다. 다시 조용해진다. 우리는 벼랑 꼭대기로 다시 올라갔다. 길 가운데 커다란 웅덩이가 입을 벌리고 있다. 탱크라도 통과하지 못할 장애물이 생긴 것이다. 멀리 벼랑 중간쯤에 장갑차가 정지해 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그들 중에는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고 있는 사사키도 알아볼 수 있다. "이젠 숨쉴 시간이 생겼다. 그러나 사사키는 계곡을 빙 돌아서 결국은 지하 도시로 오고 말 것이다." 스파이크 씨가 숨을 헐떡이며 한 말이다. 우리는 다시 지프차에 올랐다. 머리 위로 돌아가는 새떼의 울음소리가 공중에 가득하다.   항복이냐 ! 항전이냐 !   야간 정찰에서 돌아왔을 때는 수백 명의 헤시코스 인들이 흙 포대를 산더미처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책임자인 추장의 부관 페트라는 우리가 들어서자 무거운 철문을 잠그고 굴 안쪽에서부터 흙 포대를 쌓기 시작한다. 추장 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그간의 정찰 결과를 스파이크가 보고했다. "적은 전부 20명 정도이고, 장갑차가 3, 4 대, 개인 자동화기에다가 포 같은 것도 있단 말이지. 그리고 벼랑의 길이 폭파되었기 때문에 빙 돌아와야 한단 말이지." 하고 혼잣말처럼 뇌인 아저씨가 "추장, 벼랑은 동서로 얼마나 뻗어 있습니까?" "약 640킬로미터 됩니다." "그럼 여기까지 오는데 줄잡아도 6시간은 되겠지." 하고, 또 한참 무얼 생각하는 눈치더니 "나는 사사키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먼저 무선 접촉을 해올 것 같아.“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추장은 눈을 내리 감고 그린 듯이 앉아 있다. 무기력한 침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흐르노프 교수가, "그럼, 김 박사! 우리는 그 동안에 어떤 대비책을 강구해야겠오? 터널에 흙 포대만 쌓아 놓으면 그만이겠오?" 아저씨가 대답한다. "잘 알다시피 터널 말고도 도시로 잠입하는 길이 2개 또 있소. 사사키도 그걸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도 흐르노프 교수께서 집필한 저서와 신문 보도를 읽었을 테니까. 놈들은 우선 지하 강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이렇게 하자면 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소. 또 한 가지는 통풍관을 이용하는 건데, 이건 수km나 되는 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사키가 이 방법을 쓸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곳에 만일을 위해 보초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그대로 지시하겠습니다." 그린 듯이 앉아있던 추장의 말이다. "예, 고맙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 되도록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사키가 보내올 무선 연락을 기다려야하는데. 놈의 동태를 알 필요가 있으니까 교대로 잡시다. 처음에는 흐르노프 교수와 내가 맡고, 다음에는 태진이와 스파이크 군이 맡게." 나는 아줌마가 휴양하고 있는 방으로 갈려고 나서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우리 우주선은 어떡합니까? 터널 입구에 그대로 놓아둔 걸 보면 사사키가 폭파하려 들텐데요?" "그는 우주선을 폭파하기가 어려울 거야. 해치의 개폐 주파수(開閉周波數)를 모를 테니깐. 해치는 열지 못할 거고, 유압 착륙 장치는 폭파하려면 폭약이 많이 들텐데, 모르긴 해도 터널 폭파에도 폭약이 모자랄 걸." 이 때, 추장의 부관 페트라가 들어선다. "터널 입구를 잠그고 흙 포대를 다 쌓았습니다." "수고했네. 사람들을 쉬게 하게." 하는, 추장의 말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민들은 현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장이 대답한다. "알겠네, 기계를 통해 내 생각을 전하겠네. 내 생각을 수신할 때까지 시민들은 집에 머물러 있도록 하게. 그리고 또 한 가지 지하 강 입구나 통풍갱에도 보초를 세우도록 하게." 추장의 지시를 받고 페트라가 물러나자 "박사, 나는 불안하오, 정찰 결과로는 저들은 많은 장비를 갖추고 있는 것 같지 않소?" 하는, 추장의 조심스런 말에 "이해합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사키가 굴을 통과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요." 하고, 아저씨가 위로한다. "당신의 판단이 정확하기를 바랍니다." 하는 비꼬는 듯한 여운 있는 말을 남기고 추장은 기계실로 가버린다. 나와 스파이크 씨는 아줌마의 병실에 들렸다가 다시 돌아와서 긴 의자에 누웠다. 아줌마는 많이 회복되어 있었으나 아직도 파리한 얼굴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런 것이 다 사사키 놈의 소행이라 생각하니 새삼 속에서 불같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야간 정찰에서의 흥분 때문에 졸리는 줄은 몰랐으나 이내 깜박 잠이 깨었다. 추장의 텔레파시가 산울림처럼 우렁우렁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추장이 시민들에게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지금은 위기입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평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적이 침투해 왔습니다. 지구로부터 어떤 파렴치한 적이 몰려온 것입니다. 그들은 나쁜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우리의 뇌파 증폭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복이냐 항전이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만약 항복하면 우리에게 육체적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은 뇌파 증폭기를 이용하여 우리의 지구 동지들에게 처절한 죽음과 살육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항전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우리 일신의 위험은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구인 친구 김영준 박사의 말은 겨울이 닥쳐올 며칠 간만 터널을 봉쇄하면 적은 저절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답니다. 우리는 헤시코스의 새로운 역사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김 박사는 연장과 기계와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 왔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하고 우리의 찬란했던 옛 문명을 되살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항복하여 우리의 친구를 배반하겠습니까? 아니면 항전하여 우리는 우리뿐 아니라 위험에 놓인 이웃까지도 도울 수 있는 용기의 소유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겠습니까?" 그 이상의 생각은 내 머리에 들려오지 않는다. "스파이크 씨 들립니까?" "그래, 들려." 그는 일어나 앉아서 팔을 베고 옆으로 비스듬하게 눕는다. 낙천적인 이 카우보이의 후예도 표정이 침울하다. "추장은 훌륭한 사람이야. 그러나 시민들은 그를 배반할 거야." 라는, 스파이크 씨 말에 내가 발끈하여 "그걸 어떻게 압니까? 국민들의 대답이 들립니까?" "아니, 지금은 안 들지만 그렇게 생각될 뿐이야." 우리는 기다렸다. 도시가 한꺼번에 숨을 죽인 것 같다. 미동도 없는 고요가 도시를 무겁게 싸고 있다. 추장의 텔레파시가 다시 들려온다.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항복입니까? 항전입니까?" 나는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를 쓴다. 갑자기 침묵을 깨고 터진 봇물처럼 헤시코스 인들의 대답이 들려온다. "우리는 항전한다. 우리는 항전한다. 우리는 항전한다…" 평화만 알고 평화 속에서만 살아오던 헤시코스 인들이 드디어 궐기한 것이다.   핵융합 총   나는 4시간 동안 잤다. 그 때 아저씨가 어깨를 흔들어서 깨었다. "자, 일어나. 이제는 네 차례다. 옆방에 수신기를 갖다 놓았다. 스파이크 군은 먼저 가 있다." "사사키에게선 무슨 연락이 있었나요?" "아니, 숨소리도 없었다." 스파이크 씨와 나는 90분이나 묵묵히 앉아 기다린다. 맡은 시간이 거의 다 되도록 수신기에는 아무 반응이 없다. 아저씨의 말로는 사사키가 무선통화로서 사람들을 겁내게 하려는 일종의 심리전을 펴려고 꼭 연락을 할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처량한 생각이 든다. 헤시코스 인들을 돕는 것은 좋지만, 그리고 뇌파 증폭기를 보초 함으로써 지구 도처에서 일어날 분쟁을 막는다는 대의 명분이 좋기는 하지만, 이러다가는 동해의 베이스 K기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영영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나 아닌지? 이런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신기에 반응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수신기의 볼륨을 올렸다. 그러자 소름끼치는 사사키의 탁한 음이 들려 온다. "여기는 사사키, 내 말이 들려요? 오버." 내가 옆방으로 달려가서 아저씨를 불러왔다. "여기는 사사키, 내 말이 들려요? 오버." 또다시 들려온다. 수신 상태가 양호하다. 그가 가까이 있다는 증거다. 아저씨가 송화기를 끌어당긴다. "김명준이가 사사키에게 말함. 수신감도 양호." 사사키 소리가 뒤따른다. "사사키가 말함. 터널 앞에 있는 철문을 발견했음. 철문 뒤에 바리케이드를 쳐둔 것도 알았음. 그러나 당신들은 바보. 당신들은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하지 못함. 우리는 어떤 장애물도 제거할 수 있는 핵융합 층을 갖고 있음. 폭력을 피하고 뇌파 증폭기를 순순히 내어줌이 좋을 것임. 오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하는, 나의 안타까운 물음에 아저씨가 고개를 젓는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아저씨가 다시 송신기를 누른다. "김영준이가 사사키에게 말함. 뚫을 수 있으면 뚫어보기 바람. 당신들은 앞으로 열흘 밖에 시간이 없음. 그 다음은 무서운 혹한 때문에 견디지 못함. 오버." "여기는 사사키!" 사사키의 소리가 일층 날카로워 진다. "당신은 바보, 김 박사. 바보에게는 행동으로 일깨워 주겠음. 오버." 무서운 협박과 함께 통화는 끝났다. 우리들은 망연자실, 그대로 한참이나 서 있다. "핵융합 총? 핵융합 총이 뭡니까? 아저씨." 아저씨의 손가락을 무릎 사이에서 폈다, 오므렸다 하고 있다. 초조하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수소탄이야! 다만 대포에 장비해서 쏠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이 좀 적을 뿐이야, 총알을 맞는 부분에는 순간적으로 100만도 가까이 온도가 올라서 모든 물질을 순식간에 증발시킬 수 있어." 이 어마어마한 말에 우리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럼 철문과 흙 포대는 별 소용이 없겠군요?"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겠지. 그가 정말 핵융합 총을 가지고 있다면 허세 부린다고는 말할 수 없어.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부서지지 않을 가능성은 있어. 철문은 두꺼워. 철문 뒤에는 흙 포대가 또 있고 그가 뚫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뚫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우리 쪽에서 흙 포대를 쌓을 수도 있고." 하고, 아저씨가 일어선다. "추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야겠다. 그후에 터널로 가서 철문 저쪽에서 사사키가 정말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아야겠다." 아저씨는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나는 헤시코스를 처음 방문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 때는 상쾌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행복한 기분이 충만했었다. 그래서 우리도 덩달아 같은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는 헤시코스 인들의 가슴속에는 공포와 전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어 우리의 마음을 더 한층 무겁게 한다. 아저씨가 추장 일행과 함께 들어선다. 추장과 무슨 일 때문에 다툰 모양이다. 아저씨는 지구에서 종종 그랬던 것처럼 더 한층 성미가 급해 졌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돼! 나는 터널에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를 알아봐야겠어! 누구 같이 안가겠어?" 바로 이 때다. 쿵-그르르-쿵. 둔탁한 음이 방안을 흔든다. 흡사 지진을 만난 것 같다. "드디어 시작이군!" 아저씨의 자조적인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비상 수단   쿵-구르르-쿵. 둔탁한 진동음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귓전을 계속해서 두들긴다. "자- 모두들 터널로 가보자." 하는, 아저씨 말에 우리는 허둥거리는 걸음으로 아저씨를 따라 나선다. 그러나 추장은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추장께서는 안 가보시겠습니까?" 추장이 조용한 소리로 말한다.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요." 추장의 표정은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같다. "몇 세기 전에 헤시코스가 다른 행성인으로부터 침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그 때, 당시의 추장이 어떤 엄청난 조치를 취해서 침공한 외적을 물리쳤습니다. 도서관 어디엔 가는 당시의 추장이 썼던 그 비상 수단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둔 것이 있을 겁니다. 나는 지금 그 기록을 찾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현재의 우리 입장에 어떤 도움이 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저씨는 아까보다 더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게 현재의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요. 과거의 일이 아니오. 융합탄이 계속 터지고 있소. 현재의 일을 걱정해야 할 때요. 지금은." "과거란 미래를 구축하는 기반이요." 추장은 아저씨를 타이르듯이 조용하게 말한다. "역사와 과학은 순서 있게 짜여져야 비로소 발견이 있는 거요, 김 박사." "쳇, 쓸데없는 이론이요. 차라리 흙 포대 쌓는 시민들을 거들어 주는 것이 나을 거요." "거긴 페트라가 돌보고 있어요. 김 박사." 추장의 시종 침착한 태도에는 아저씨의 급한 성미로도 어쩔 수 없는 위엄이 도사리고 있다. 아저씨의 성미가 수그러진다. "미안하오, 추장. 당신의 일을 비방하려는 뜻이 아니었오. 단지 지금 신경이 팽팽해져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요." 하는 아저씨의 사과에, 추장은 "그 심정은 알겠소! 그러나 박사! 침착해서만 새로운 계획을 도모할 수 있소. 침착하시오." 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그린 듯한 자세로 돌아간다. 우리는 아저씨를 따라 터널을 향했다. 추장 집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이긴 하지만 거리로서는 꽤 멀다. 수 km는 실히 된다. 굴에 가까워질수록 둔탁한 진동음은 커진다. 굴에 도달했을 때는 바로 서 있으면 발이 저려올 정도로 땅의 진동이 심하다. 골굴 근처의 흙에는 여기저기 박혀 있는 이리도늄이 고양이 눈처럼 반짝이고 있다. 뇌파 증폭기의 주요 원료 금속인 것이다. 흐르노프 교수가 이리도늄과 납을 반응시키면 금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 때의 촉매로서는 단지 식염이 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 냈을 때, 우리가 탄성을 올렸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리도늄은 공간을 지나는 동안에 소멸되어 버린다는 어이없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가졌던 실망감도 지금의 급박한 사정에 이르러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었지만, 그러나 그 발견들이 융합탄이 터지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는데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굴 입구에는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흙 포대를 더 쌓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융합탄의 진동 때문에 새파랗게 질려서 우왕좌왕 하고 있다. 페트라가 시민들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타이르고 있지만, 아무도 흙 포대를 메고 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다. 이런 혼란 상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아저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흙 한 포대를 들러 메고 굴 속으로 들어간다. 나와 스파이크 씨도 아저씨의 뜻을 눈치채고 각기 흙 포대를 짊어지고 아저씨의 뒤를 따랐다. 아저씨는 몸소 흙 포대를 지고 굴 속에 들어가 보임으로써 융합탄이 터질 때, 나는 진동음으로는 굴이 무너질 정도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아저씨의 의도는 맞아 들어갔다. 우리가 세 포대째의 흙 포대를 짊어지자 시민들도 각기 흙 포대를 지고 굴 속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다. 이제 시민들은 진동음 때문에 겁을 내지는 않는다. 페트라의 지시에 따라 부지런히 굴 속으로 흙 포대를 운반한다. 시민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흙 포대를 운반하던 아저씨가 또 무슨 생각이 났는지 흐르노프 교수와 함께 시내로 들어가 버린다. 아저씨의 다른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스파이크 씨는 계속해서 시민들과 함께 흙 포대를 운반하고 있다. 세 시간쯤 지났을 때, 아저씨와 흐르노프 교수가 다시 굴에 나타났다. 교수의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전자 기기와 같은 휴대용 컴퓨터가 들려 있다. 전자 지진계다. 아저씨와 교수는 굴 입구에서 땅을 50cm쯤 파고 지진계를 묻고 전선을 끌어 내어 컴퓨터에 연결한다. 그 동안에도 시민들의 작업은 계속된다. 아저씨와 교수는 컴퓨터를 심각하게 들여다보며 낮은 소리로 무슨 의논들을 하고 있다. 1시간쯤 컴퓨터를 관찰하고 있던 아저씨와 교수는 다시 시내로 들어간다. 페트라는 시민들을 바꾸어 가면서 부지런히 굴을 막고 있다. 우리는 다시 추장 댁의 응접실에 모였다. 추장과 아사는 아직 도서관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저마다 깊은 감회에 젖어 있는가 보다.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끊일 사이 없이 떠오른다. 사사키가 굴을 뚫을 것인가? 못 뚫을 것인가? 만약 뚫는다면? 우리도 이제는 마지막이겠지! 아저씨도, 스파이크 씨도, 추장도, 아사도, 시민들도, 그리고 나도. 그럼, 우리는 동해의 베이스 K에는 영영 다시 돌아가지 못한단 말인가? 아니 이 무슨 이기적인 생각이야! 헤시코스 인들이 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베이스에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를 걱정하게 되어 있어? 나는 아직 19살밖에 안되었지만, 그래서 앞으로 할 일이 태산 같이 많지만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한 번은 다 죽는 게 아닌가? 옳지 못한 일을 쫓다가 욕된 삶을 길게 이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옳은 일을 일해 끝까지 싸우다가 깨끗이 죽는 것이 실로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아저씨와 같은 세계적인 학자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오냐! 올 테면 와라 너 사사키! 굴이 꿇린다면 내겐 쇠붙이 한 조각도 없는 상태지만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너와 싸우리라. 이 때, 아사와 추장이 응접실에 나타났다. 좀체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아사도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이다. 그러나 추장은 그대로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융합탄이 터질 때마다 머리에서 금방이라도 불이 쏟아져 내릴 것 같지만 추장의 태도는 실로 의연, 바로 그것이다. 전장에 임한 야전군 사령관의 태도도 저럴 수가 있을까 ? 안온한 품위를 잃지 않고, 조금도 동요의 기색이 없는 추장의 태도를 보니 나는 한결 기운이 솟는 것 같다. 저런 사람이라면, 이런 절대절망의 한계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비책을 가슴속에 묻어 놓고 있을지도 몰라 -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박사, 터널이 며칠이나 견딜 것 같소." 추장이 아저씨에게 조용히 묻는다. "조금 전에 나와 흐르노프 교수가 급하게 만든 지진계로 융합탄의 폭발 진원을 조사해 보았더니 한시간에 약 1.4m쯤 전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터널 l00m를 완전히 막아 놓는다면, 사사키가 터널을 통과하는데 3일 내지 4일이 걸리는 셈입니다." 3일 내지 4일. 그럼 3, 4일 후면 결국 굴을 돌파한단 말인가? 행여나 하고 기대를 걸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무참하게 깨어지자 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진다. 혈색 좋은 스파이크 씨의 얼굴에도 핏기가 싹 가신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 7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데 굴을 뚫는데 3, 4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면, 아-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다. 아저씨의 대답을 들은 추장도 더는 말이 없다. 흡사 묵도를 드리는 신자처럼 눈을 지그시 내리 감고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띤 채로. "추장, 놈들이 터널을 돌파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한결 기가 죽은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추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저씨를 묵묵히 쳐다보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연다. "박사, 박사는 시민들만 동원하면 사사키를 막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터널이 돌파당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되려 내게 묻는군요?" 잔잔하게 흘러나온 추장의 텔레파시는 아저씨를 가볍게 힐책하고 있다. 추장의 태도에, 아저씨도 다시 발끈한다. "추장, 내게 방법이 전연 없다는 말은 아니오. 단지 추장에게 어떤 묘안이 없는가를 물어 본 것 뿐이요. 나와 흐르노프 교수는 이렇게 의견을 모았어요. 즉, 터널 바로 앞에 폭약을 묻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적이 나타날 때, 그것을 터뜨리는 겁니다. 그러면……" "잠깐 박사, 그것은 안됩니다. 첫째, 사사키의 장갑차를 부수려면 상당한 폭약을 묻어야 하는데 적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 할 리가 없고, 둘째 설사 적이 통과할 때 요행히 폭약을 터뜨린다 하더라도 특수강으로 된 장갑차 4대를 부수려면 장갑차는 그만 두고라도 굴이 무너집니다.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굴을 무너뜨리면 지하 도시에 갇힌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보시다시피 굴은 특수하게 설계 시공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뇌파 증폭기를 내어 주고 항복하겠다는 겁니까?" 추장은 다시 아저씨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저씨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추장을 마주 대하고 있다. "박사, 그건 아니오. 뇌파 증폭기를 내어 주지 않기 위해서 우리 헤시코스 인은 적들과 싸우겠다고 총의로 결정하지 않았소이까? 일단 일어선 우리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니, 그럼 무기도 없는 시민들로 하여금 사사키의 장갑차로 돌격이라도 하게 할 셈입니까?" 아저씨의 말에 추장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아하, 그건 당치도 않는 생각이요."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추장은 다시 말문을 닫는다. 한참 동안 묵묵히 앉아 있던 추장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한다. 방안에 있는 사람의 눈길은 자석에 끌린 듯이 추장의 뒷모습을 쫓는다. 서성거리던 추장은 굴 쪽을 한참동안 응시한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돌아선다.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하고는 다시 추장은 등을 돌리고 굴 쪽을 쳐다본다. 웬일인지 추장의 뒷모습은 고뇌와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쓸쓸해 보인다. 그럴싸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사의 눈동자도 슬픔에 젖어 있다. "추장. 어떻게 하실 건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 추장은 돌아서서 다시 아사 옆에 앉는다. "그럼 간단히 말하리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우리 조상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곤란에 부딪혔습니다. 그 때, 추장은 뇌파 증폭기에서 나오는 텔레파시 에너지를 써서 적을 무찔렀습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은 방법을 쓰려고 합니다." 말을 마친 추장은 아사의 팔을 꼬옥 쥔다. 무슨 일일까? 아사도 추장도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것 같다. "아니, 그게 가능할까요? 무기를 가진 적을 텔레파시로 쫓아낼 수 있을까요?" 하는, 아저씨의 거듭되는 질문. "도서관에 비치된 서류에 적을 무찌르는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도 오늘 그 서류를 보고서야 뇌파 증폭기의 진정한 비밀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이제 다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흙 포대를 쌓는다고 적을 막을 수 없는 이상 더 이상 쓸 데 없는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민들을 다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추장은 새삼 우리들을 주욱 훑어 본 뒤에 "현재 쌓아 놓은 흙 포대는 내일 낮쯤에는 적에게 돌파됩니다. 그 때,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그럼 다들 편히 쉬기를." 추장은 더 이상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고 아사와 함께 방을 나가 버린다.   텔레파시의 비밀   우리는 갖은 억측을 하면서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밤새 추장과 아사는 응접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쿵 그르르 쿵 그르르……. 융합탄의 폭발음은 바로 굴 앞에서 들려오는 것 같고 그 때마다 창이 깨어질 듯이 흔들린다. 굴 속에는 금방이라도 사사키 일당이 나타날 것 같다. 아저씨와 흐르노프 교수는 밤새 무슨 의논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신통한 방법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완전히 날이 밝았다. 굴 입구에서는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먼지가 구름같이 인다. 아저씨의 지진계에 의하면 늦어도 한 시간 후에는 사사키가 지하 도시로 들어 올 것이라 한다. 응접실에 있는 사람은 전부 창가에 붙어 서서 폭발음이 날 때마다 연기를 뿜고 있는 굴 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초조하게 기다리길 40분. 추장의 부관 페트라가 소리 없이 방안에 들어선다. "여러분, 뇌파 증폭기실로 모이시랍니다." 웬일인지 페트라도 심한 슬픔에 젖은 눈동자를 하고 있다. 헤시코스의 멸망이 눈앞에 닥쳐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우리는 뇌파 증폭기실로 갔다. 아사와 추장이 증폭기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추장을 보자, 아저씨가 다시 급하게 묻는다. "도대체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추장은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을 조용히 들고 "그러리다. 증폭기를 통해 나의 정신력을 적을 향해 집중시키는 겁니다. 이 증폭된 텔레파시 에너지는 그 위력이 실로 무시무시합니다. 사사키의 핵융합 총도 여기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 때 추장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사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추장의 품에 와락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린다. 품 안에 안긴 딸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는 추장의 손길도 가늘게 떨리고 있다. 이 때, 우리들의 머리에는 의혹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사가 울고 있고. 페트라도 슬픔에 젖어 있고, 추장의 눈길도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무슨 일인가? 단지 사사키의 다가오는 공격이 무서워서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그 무엇인가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겐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아저씨도 이런 사태를 짐작했는지 추장에게 다가가서 무엇인가를 물으려고 할 때였다. 쿵구르 쿵. 쿵구르 쿵. 도시 전체가 날아갈 듯한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면서 굴은 시커먼 연기를 무럭무럭 토해 놓는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 드디어 사사키의 장갑차가 연기를 헤치고 삐죽이 나타난다. 이 때, 추장은 증폭기에 다가가서 레버를 두 손으로 잡으면서 페트라에게 명령한다. "최대 입력(入力)을…….. 페트라는 증폭기에 들어가는 전원의 메인 스위치를 넣는다. 추장은 레버를 잡은 채 두 눈을 감고 정신을 모은다. 사사키의 장갑차 4대가 전부 나타났다. 핵융합 총처럼 보이는 길다란 대포를 장갑차에 장비하고 시내를 향해 천천히 들어온다. 이 때. “사사키! 그 자리에 서라!"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우뢰처럼 들려온다. 아니, 우뢰란 말은 적합하지 않다. 도시 전체가, 공간 전체가 소리로 꽉 찬다. 거대한 소리의 바다 속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소리가 추장의 텔레파시인 것을 한참 만에야 깨달았다. 추장이 잡고 있는 뇌파 증폭기의 이리도늄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성난 뱀처럼 꿈틀거린다. 거대한 소리, 아니 나는 텔레파시로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 몽롱한 정신 속에 사사키 일당의 당황해 하는 생각이 전해 온다. "무슨 소리야, 어디서 나는 소리야!" "누구야?" "하느님 소리다아." 적들의 생각이 텔레파시 에너지에 흡수되어 흡사 눈에 보이는 것처럼 내 정신 속에 들어 온 것이다. "사사키! 서라! 그 자리에 멈추어라." 다시 추장의 텔레파시가 성난 파도처럼 밀려온다. "뭐야? 어디서 나는 소리야!" "유령이다아-" 적은 대 혼란에 빠진다. 이미 장갑차 2대는 제자리에 서 버린다. 그러나 사사키의 지능과 생각은 아직도 강하다. 그는 부하들에게 호령호령한다.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텔레파시일 뿐이다. 텔레파시로는 우리에게 해를 주지 못한다. 전진하라! 전진하라!" 적은 다시 대열을 가다듬어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장갑차 한 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사키는 움직이지 않는 차를 향해 다시 악을 쓴다. "2번 차, 따라 오라. 겁낼 건 없다. 적은 우리에게 해를 주지 못한다. 우리에겐 핵융합 총이 있다." 강력한 사사키의 정신력이 추장의 텔레파시를 위압한 건가? 움직이지 않던 장갑차 한 대마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사키 들어라! 텔레파시는 너희들에게 해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본보기를 보이겠다. 2번 차! 2번 차! 2번 차 승무원은 15초 이내에 전부 밖으로 나오너라. 텔레파시 에너지로 장갑차를 녹여버리겠다." 다시 귓전이 우렁우렁하는 산울림 같이 울려 퍼지는 추장의 텔레파시다. 2번 차의 승무원 사이에는 다시 대 혼란이 일어났다. 내리자거니 그대로 전진하자거니 저희들끼리 실랑이를 벌이는 마음들이 환하게 들린다. 다시 추장의 텔레파시가 울려 퍼진다. "10초 남았다. 10초 내에 내리지 않으면 인명을 살상하는 것이 우리의 평화 신봉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할 수 없이 승무원과 함께 장갑차를 녹여 버리는 수밖에 없다. 8초 남았다. 죽지 않으려면 빨리 장갑차 밖으로 나오너라." 추장의 텔레파시가 승무원의 정신력을 완전히 위압했다. 장갑차의 뚜껑이 열리면서 4명의 승무원이 구르듯이 밖으로 뛰어 나온다. "자-그럼 사사키 보아라. 텔레파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 주마." 하는, 공간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지는 텔레파시와 함께 앗! 자- 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칼날 같이 날카로운 불이 장갑차를 향해 쏟아지지 않는가? 세계의 종말! 아니 하느님의 심판이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섬광이 장갑차에 날아들어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장갑차를 시뻘겋게 달구고 있다. 수십만 개의 불화살이 날고 있는 광경과 같다고나 할까? 참으로 몸서리쳐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장갑차는 다음 순간 형체도 비참한 쇳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사사키! 보았느냐? 돌아가라! 돌아가지 않으면 너희들도 저 장갑차 같이 된다." 다시 대뇌를 파고드는 추장의 텔레파시. 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승무원의 무서운 공포감이 그대로 전부 들려온다. 전차 1대는 슬금슬금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사사키의 발악적인 호령이 다시 들린다. "3번 차! 3번 차! 돌아서라! 돌아서서 저 안테나를 쏘아라! 핵융합 총으로 텔레파시를 복사하고 있는 저 안테나를 쏘아라!" 아- 드디어 사사키가 에너지가 복사되고 있는 증폭기실 지붕에 달려 있는 안테나를 발견한 것이다. 핵융합 총으로 안테나를 부수어 버리면 추장의 텔레파시도 맥을 추지 못할 것이 아닌가! 달아나던 차도 멈추어서 3대의 장갑차에서 순식간에 시뻘건 화염이 우리를 향해 날아온다. 그런데! 핵융합 총의 총구를 떠난 화염은 공간 속에서 어디로 빨려 들어간 듯이 사라져 버린다. 이럴 수가 있을까? 수소탄이 날아오다가 고차원의 공간으로 흡수되듯이 소리 없이 사라지다니! 사사키도 잠시 동안은 믿어지지 않는 듯이 화염이 빨려 들어간 공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더니 다시 악을 쓴다. "다시 쏘아라 ! 계속 해서 마구 쏘아라." 쿵구르르 쿵. 쿵구르르 쿵. 쿵구르르 쿵. 계속해서 총구를 떠나는 핵융합 총.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중도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적들은 악착같이 쏘아댄다. 그럴 때마다 융합탄은 미지의 공간 함정에 빠지듯이 사라져버린다. 다시 추장의 텔레파시 통신이 흘러나온다. "사사키! 소용없는 짓이다. 융합탄으로도 뇌파 증폭기에서 복사되는 강력한 텔레파시 탄막은 뚫지 못한다. 사사키! 돌아가라. 정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조금 전의 장갑차 꼴이 된다. 자 돌아가라." 이 때, 사사키가 탄 장갑차의 뚜껑이 열리면서 사사키가 뛰어나온다. 손에는 번쩍이는 긴 일본도가 들려 있다. "자 ! 전원 돌격- ---돌겨어ㄱ…….." 사사키는 미친 듯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단신 시내를 향해 달려온다. 아무도 사사키를 뒤따르는 자는 없다. "돌격- 돌격-" 사사키는 제 정신이 아니다. 미쳐버린 것일까? 가공할 집념의 화신, 증폭기를 소유하고 싶은 무서운 욕망이 사사키를 저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칼을 휘두르며 20m쯤 달려오던 사사키는 힘없이 칼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더니 이윽고 땅에 픽 쓰러진다. 텔레파시 에너지 탄막을 뚫느라고 드디어 기력이 다한 것이다. "사사키를 데려가라! 단지 기절했을 뿐이다." 다시 울려오는 추장의 텔레파시에 사사키의 장갑차에서 승무원 2명이 달려와서 그를 안고 장갑차에 태운다. 이윽고 장갑차 3대는 방향을 바꾸어 굴 안으로 사라졌다. 사사키의 더러운 욕심은 정의 앞에 산산이 깨어진 것이다. 사방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아직도 주위에 팽배한 뇌파 증폭기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우리 모두는 그저 멍한 의식에 놓여 있다.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나의 뇌리에 어디선가 가슴을 파고드는 오열이 들려온다. 나는 끌리듯이 울음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본다. 울고 있는 것은 아사다. 그런데 아사의 무릎을 베고 길게 누워 있는 사람은? 아니 추장 아닌가? 그제야 정신이 든 우리들은 추장의 주위로 달려갔다. 아니! 저 추장의 모습은! 우리가 다가온 것을 안 추장이 힘없이 눈을 뜬다. "여러분, 지구 친구 여러분, 나는 드디어 그대들의 은혜를 갚았소. 나는 나의 전 체력을 뇌파 증폭기에 쏟아 넣었오. 그래서 지금 보다시피 뼈만 남은 흉측한 몰골이 되었오." 추장은 한참 숨을 헐떡이다가 통신을 이어 갔다. "2000년 전에도 이렇게 해서 추장은 자기의 목숨을 바쳤오. 그런데 박사, 지구 친구들은 빨리 이 곳을 떠나 주시오. 아까의 막대한 텔레파시 에너지 때문에 헤시코스는 태양의 궤도를 이탈했소. 이제 본래의 우리의 고향, 오메가 항성을 향해 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태양계를 이별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여러분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은혜, 여러분의 용기를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박사 출발해 주시오. 늦으면 박사가 가진 연료로서는 헤시코스가 가속되고 있는 궤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빨리! 그리고 안녕히." 아사와 페트라가 슬픔에 젖어 있었던 이유가 저절로 밝혀졌다. 추장은 사사키와의 대전에서 그 자신 생명을 잃을 것을 아사와 페트라에게만 알려 놓았던 것이다. 화약 냄새가 짙게 풍기는 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양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을 염도 내지 않고 나는 속으로 뇌까린다. "아사여! 헤시코스여! 영원히 안녕."     우주 도난   뜻밖의 사고   먹물 같은 어두움 속에 군데군데 박혀 있는 별, 별, 별. 사방 어느 쪽으로 보나 죽고 싶도록 단조로운 광경 뿐. 완전한 진공 - 그러니까 빛을 산란시켜 줄 공기가 있을 리 없고, 따라서 별이 있다고 하지만 인류의 눈에 익어온 찬연하게 반짝이는, 그래서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에의 꿈을 키워준 별은 아니다. 안간힘을 다해서 마지막으로 한줄기의 남은 빛을 발하고 그대로 폭삭 꺼져버리려고 하는, 임종 직전에서 허덕이는 것 같은 별 - 그런 별이다. 그런 별을 겹겹이 싸고 있는 지옥 같은 칠흑의 심연. 생명의 꼬투리도 없는 세계. 숨막히는 죽음의 세계. 만일 독자들이, 푸른 하늘과 신선한 공기와 짙푸른 바다가 있는 지구상의 풍경에 익숙해온 독자들이, 여기에 선다면 그대들은 아마 십중팔구는 1분 이내에 정신 착란의 징조를 나타내고 말리라. 완전한 정지의 세계 - 수없이 널려 있는 별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는다. 훈련된 사람이면 지구도 금성도 화성도 쉽게 찾아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도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는다. 행성은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고 있다고? 누가 그런 얼빠진 소리를 했나? 보라! 지구도 화성도 금성도, 그 어느 것이나 미동(微動)이나 하고 있나? 행성들의 공전 궤도가 너무 커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 완전한 절대정지의 세계에서 과연 어느 누가 그런 말을 곧이 들을 것인가? 앗! 그런데 움직이는 것이 있기는 있다. 아니 어디에! 저기 저 별들 사이를 보라고! 반짝 반짝 마치 거울같이 빛나고 있지 않어? 빛나는 게 있기는 있는데 - 그런데 그놈도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야, 난 아까부터 저놈을 보고 있었어. 주위에 있는 별을 기준해서 보면 저놈과 다른 별 사이의 간격이 확실히 변하고 있어. 그래? 그럼 좀더 가까이 가볼까? 아니! 이건 우주 화물선이 아닌가? 아마 그런가봐. 우선 덩치가 크고 또 저놈의 진행 방향으로 보아 금성행(金星行)이 분명한데 - 먼 포물선 궤도에 진입되어 있지 않어? 여객선 같으면 여객을 태운 채로 145일이나 걸리는 저 먼 궤도를 날고 있지는 않겠지. 응, 지구에서 금성으로 곧바로 가려면 태양의 인력을 이기기 위해서 막대한 연료를 소모해야 하는데, 연료가 소모되지 않는 포물선의 자유궤도를 택한 모양이야. 좀 더 가까이 가볼까. 아이구 이건 너무 크다. 앞뒤 길이가 500미터는 될 것 같은데. 저 뒤가 동력실이고 저 앞 대가리가 조종실인 모양이다. 그럼 어디 조종실 안을 한번 들여다볼까? 40대로 보이는 혈색 좋은 사나이가 자이로 위에 얹힌 의자에 파묻혀서 멍청하게 계기판을 쳐다보고 있다. 창 밖으로 밀려가는 별 떼들의 풍경이 황홀할 지경이지만 이 사나이에게는 그런 광경도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사나이는 이미 109일이나 우주선에 갇혀 있는 것이다. 갑자기 조종실 문이 열리면서 이건 흡사 대낮에 도깨비라도 본 것 같이 눈을 흡뜬 깡마른 사내가 나타난다. 용하게 조종실 문까지는 열고는 기력이 다 된 모양이다. 그대로 문밖에서 털썩 주저앉는다. 아니 무중력 상태에서는 마음대로 주저앉지도 못한다. 고속 필름에서처럼 공중에 뜬 채 바람이 새는 풍선같이 몸이 천천히 꼬일 뿐이다. 문이 열리는 순간에 선장처럼 보이는 자이로에 앉은 사내의 멍청한 표정에 약한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문소리를 들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돌아다보지는 않는다. 여전히 허탈 상태의 멍한 표정이 된 채. 3~4분이 그대로 지난다. 처마에 달아놓은 낙지꼴이 된 가시처럼 보이는 사내는 여전히 눈이 까뒤집힌 채, 그래도 생명이 있다는 증거라도 보이려는 듯, 어깨로 숨을 쉬고 있다. 다시 3~4 분. "뭔가?" 마지못해 터져나온 선장의 말. "……" "뭔가 말이야." 뭐야?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해 치우고 사라지지 않고 - 하는 듯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겠다는 투다. "……" 여전히 대답할 염을 내지 못한 채 기사는 숨만 헐떡인다. 선장이 빙 돌아앉는다. 얼굴 전체가 짜증이다. 살이 통통하게 찐 양 볼이 솜에 물이 배이듯 짜증으로 배어있다. 선장은 말없이 기사를 쳐다보고 있다. 표정이 천천히 변한다. 물을 짠 빨래같이 늘어져 떠있는 기사의 몰골에서 어떤 중대한 사태를 점차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젠 선장도 입을 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기사를 쏘아보기나 할 뿐. "터졌어요!" 가까스로 기사의 입에서 기어 나온 말. "무엇이 터졌단 말인가?" 반사적으로 기사의 말을 뒤이은 선장의 물음. "아니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예비 산소 탱크가 터졌어요." 순간 선장의 표정은 경악으로 변한다. "이젠 우리는 다 틀렸어요." 말끝은 왁 터뜨리는 울음 속에 묻혀버린다. 선장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기사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얼굴이 점차 일그러진다. 눈길이 싸늘해지면서 그럴 수 없는 절망감으로 차여진다. "여봐, 그렇게 다 죽어 가는 모양이 된다고 해서 터진 놈이 저절로 때워질 수는 없어." 선장은 자리를 박차고 더러운 것이라도 치워버리듯 기사를 옆으로 밀어붙이면서 화물실로 둥둥 떠간다. 화물은 초현실적으로 싸여 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중력이 있는 곳에서처럼 마룻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놓을 필요가 없다. 그저 공중에 띄워놓고, 우주선이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를 가감할 때 벽에 날아와서 부딪히지만 않도록 잡아매어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화물이 몽땅 없어졌다 하더라도 선장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에어록의 안쪽 벽에 볼트로 조여져 있는 산소탱크에 그의 눈은 화석처럼 굳어 있다. 탱크는 먼저 번 보았을 때와 조금이고 달라진 게 없다. 알루미늄 페인트는 여전히 번쩍이고, 금속 통은 얼음같이 차가워서 무엇이 들어 있었던가를 알려 주고 있다. 무엇이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표시는 없다. 다만 탱크 안의 산소 압력을 말해 주는 압력계의 바늘이 0에 머물러 있다는 것 말고는. 전쟁 중에, 아내의 다정한 미소를 등 뒤에 받으며 출근한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내도 집도 무참히 폭격에 날아간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선장은 압력계를 쳐다보고 있다. 계기 자체가 고장이 나서 압력을 잘못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쓸 데 없는 희망으로 계기를 입김으로 닦아도 보고 유리판을 두들겨 보기도 한다. 바늘은 0을 가리킨 채 꼼짝도 않는다. 선장이 다시 조종실에 돌아왔을 때 기사는 놀랄 만큼 원기를 회복하고 있다. 벌써 미쳐버리기라도 했는지 히죽 히죽 웃기까지 하면서 농담을 하려든다. "운석(雲石)에 맞았어요. 이 정도로 큰 화물선은 일세기에 한 번쯤 맞는다는 통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90 몇 년 간은 염려 없게 된 셈이죠." "경보(警報)도 안 울렸잖아? 실내 기압도 변화 없고, 그런데 어떻게 탱크에 구멍이 뚫렸단 말인가?" "구멍이 뚫린 게 아니에요." 기사는 흡사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아까와는 딴판으로 덤덤하게 지껄인다. "탱크 안에 있는 산소는 냉각 코일을 통해서 햇빛이 안 쪼이는 쪽으로 돌면서 액화되잖아요? 운석이 그 냉각 코일을 부숴 버린 거예요. 그래서 탱크 안의 산소가 끊어져 버린 거예요." 선장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잠자코 있다. 사태는 위험하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아닌 수도 있다. 벌써 항해의 4분의 3을 마쳤으니까. 그리고 산소가 비등해 버리기는 했지만 우주선 밖으로 새어 나가지만 않으면 선 내에 그대로 있을 테니까. "냉각 코일에서는 산소가 계속 흘러나오기는 하겠지. 꽤 탁해지기는 하겠지만." 한 가닥 희망을 건 선장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러나 답은 압니다. 우리가 내뿜는 탄산가스에 분해되어 다시 냉각기에 들어갈 때 10%의 손실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 모자라는 만큼의 산소를 보충하기 위해 예비 탱크를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우주복! 우주복 탱크는 어때?" 하고 갑자기 살 길이라도 발견한 듯이 선장이 흥분해서 외친다. "거기에는 산소가 30분밖에 쓸게 없어요. 비상시에 주 탱크까지 가는 동안에 쓸 정도만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흥분해서 외쳤다가 금세 그 착오를 깨닫자, 기사에게 자기의 경솔을 보인 것 같아서 선장은 더 기분이 나빠진다. "방법이 있을 꺼야. 화물을 버리고 빨리 간다든지……" 얼른 한다는 이야기가 또 실수를 한다. 선장은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또 금방 죽어갈듯이 빌빌거리던 기사는 저렇게 조리 있게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자기가 더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기에게 또 성이 난다. 1세기에 한 번쯤 이라는 운석과의 충돌을 미리 예측해서 설계하지 않은 화물선 설계도에 대해서도 화가 무럭무럭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기한은 2, 3주일 남았다. 그 동안에 여러 가지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 - 라는 생각으로 선장은 자꾸만 엄습해오는 공포감을 떼어 놓으려고 애를 쓴다. 말할 것도 없이 비상 사태다. 우주 공간에서 만 일어날 수 있는, 그러니까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닿는 그런 비상 사태가 아니라, 기일이 2, 3주일이나 남은 기묘한 비상 사태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다. 어쩌면 너무 많은 시간이다. 선장은 자이로에 앉으면서 메모지를 꺼낸다. "사태를 정확하게 정리해 보세." 아까 자기가 턱없이 흥분해서 외쳤던 위신을 되찾으려는 듯이 일부러 침착을 꾸미며 기사를 가까이 부른다. "선 내에는 아직 공기가 대류하고 있어. 그런데 그것이 냉각기에 들어갈 때마다 10%씩 없어지고 있어. 거기 산소 소모표를 이리 주게. 나는 우리가 하루에 몇 입방 미터씩이나 소모하고 있는지 기억에 없거든. 어디 얼마나 견디겠는가 계산해 보세."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문제가 따르는 때는 단순한 덧셈과 나눗셈에도 무척이나 긴 시간이 걸리는가 보다. 선장은 자기가 방금 한 계산이 엄청나게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여섯 번이나 셈을 반복했다. 이윽고 선장은 더 이상의 계산을 포기하고 의자에 몸을 던진다. "최대로 절약하면 20일 간은 견딜 수 있겠는데 - 그러니까 금성까지 10일 간이 모자라는 셈이군."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면서 긴 여운을 남기고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10일! 10일만 넘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산소 없이 단 5분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10일이라니! 10일! 그것은 죽음과 삶과의 거리만큼이나 실로 까마득한 시간 간격이다. 공상 과학 소설의 내용이 선장 머리에 얼른 떠오른다. 지금과 같은 경우를 취급한 소설은 여러 개 있다. 그 소설에서는 보통 3가지 해결 방법이 등장한다. 그 중 가장 흔한 방법은 우주선에 식물을 재배하여 식물의 탄소 동화 작용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주 비행사가 화학 공학이나 원자력 공학에 대한 천부의 재질을 발휘해서 산소 제조 방법을 고안하여 비행사의 목숨을 건지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금액의 특허권을 얻어 거액의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 방법들은 수식(數式)과 분자식까지 동원해서 진저리가 날 정도로 상세히 써 놓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그럴싸하게 느껴지도록 되어 있다.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은, 비행 속도와 비행 진로가 완전히 일치하는 제 3의 우주선이 찬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방법들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의 이야기이고 현실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첫번째 방법이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화물선에는 한줌의 풀씨도 없는 것이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불과 20일 사이에 완전히 자라서 산소를 공급해 줄 것 같지는 않다. 산소를 제조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고 또 아무리 필사적으로 덤빈다 하더라도, 수세기 동안이나 해결하지 못한 일을 단 20일 안에 해결할 것 같지도 않다. 우연히 주위를 지나는 화물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설사 우연히 같은 궤도를 지나가는 화물선이 있다 하더라도 - 실제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선장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 그쪽 형편도 이쪽과 마찬가지여서 서로 한 발자국도 가까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화물을 버리면 어떨까요. 질량이 작아질 테니까 궤도를 변경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사의 말에 선장은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다.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까는 나도 얼른 그렇게 생각했지만 헛 일이야. 하기야 하려고만 하면 1주일 내에 금성에 도착할 수는 있어. 그러나 그 때는 화물선에 브레이크를 걸 연료가 없어져서 금성에서는 예인선이 우리를 붙잡을 수가 없게 돼." "쾌속정도 우리를 잡을 수 없지요?" "선적표에 보면 그 시간에는 금성에 쾌속정이 한 대도 없어. 설마 그런 것이 우리를 따라 잡는다 하더라도 쾌속정은 금성에 다시 돌아가지는 못해. 그렇게 하려면 자그마치 초속 50km가 필요해." "우리가 적당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면 금성에 연락해 봅시다. 거기서는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해보세. 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가서 송신 안테나를 조종해 주게." 기사가 둥둥 떠서 밖으로 나간다. 선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기사의 뒷모습을 좇는다. 선장은 혼자 생각한다. 꽤 말썽을 부릴 거야. 처음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이 야단이더니만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가 되어 있어. 금방 침울하다가 또 금방 히죽거리는 품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금방 죽을 상을 하고 있던 기사가 최초의 심한 충격이 가시자 재빨리 원기를 회복해서 이제는 선장 자신보다 오히려 더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에 선장은 강한 시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처음처럼 죽을 상이 되어 허덕이면 그 때는 그런 기사를 얼마든지 멸시해 주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태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긍지를 가질 것인가 - 하는 선장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사의 갑작스런 회복을 정신이 좀 이상해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송신기에 부저가 울린다. 안테나의 조정이 끝났다는 기사의 연락이다. 신체에 붙어 있는 포물형 안테나가, 겨우 1천만 km 떨어진 곳에서 화물선과 거의 나란한 궤도를 달리고 있는 금성을 향했다. 안테나에서 나오는 3밀리 전파는 30초도 안되어 금성에 도착할 것이다. 가혹하게도 그들의 운명이 30초 내에 결정되는 것이다. 금성의 자동 모니터가 3미리 파장을 수신하고 내용을 보내라는 신호가 왔다. 선장은 되도록 침착하게 현 사태를 조심스럽게 분석하여 설명하고 조언(助言)을 구했다. 기사의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자기 방에서 이어폰으로 듣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신이 끝나기는 했지만, 금성에서는 이 돌발 사태를 금방은 알지 못할 것이다. 송신 내용이 테이프에 우선 녹음이 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가 기사가 송신 내용을 알기 위해 늘 하는 대로 별 생각 없이 테이프를 틀어 보게 된다. 그래서 너무나 뜻밖의 사태에 한참은 벙벙하게 된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기사의 입을 통해 금성과 지구에 이 극적인 뉴스가 전해지게 된다. 신문에는 대문짝 만한 활자가 등장하게 되고 TV는 다른 프로그램을 제쳐놓고 해설이다, 구조 방법이다, 해서 연일 떠들썩하게 될 것이다. 사무실, 길 가, 차 안, 어디서나 이 문제가 화제가 되리라. 선장은 서가에서 책을 하나 빼들었다. 운석에 대한 것이다. 기사는 1세기에 한 번쯤 운석에 맞는다고 했는데, 실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운석과 우주선이 충돌할 확률은 여러 가지 복잡한 요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복잡한 계산을 단숨에 해치워 버리는 컴퓨터로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에 통계수학자들이 한 일이란 고작 몇 가지 모호한 규칙을 세워 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운석이 회오리바람처럼 태양계를 휩쓸 때는 우주선의 보험을 맡고 있는 보험 회사들이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운석의 대부분은 지구의 대기권에 돌입할 때 타 없어져서 지구 표면까지 도달하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이 별똥별이다. 크기는 대부분 머리핀보다 작다. 대체로 100년만에 한 번쯤 떨어지는 산 같이 큰 놈도 간혹 있긴 하지만. 또 우주 공간을 굉장한 속도로 날아다니는 먼지 같이 작은 놈도 있다. 이런 것이 전부 운석인데, 우주 비행 중에는 운석이 선체에 맞아서 구멍을 낼 만한 놈만 문제가 된다. 운석의 위험은 크기 뿐 아니라 속도도 문제가 된다. 크기가 적더라도 속도가 크면 역시 선체에 구멍을 뚫을 수가 있으니까. 지금 선장이 들고 있는 책에는 태양계 도처에서 일어난 운석과의 충돌 사고가 대략 나와 있다. 그것에 의하면 이번에 사고를 낸 운석의 크기는 지름이 1cm, 질량이 10g쯤 되는 큰 놈 같이 생각되는데, 이런 놈과 만날 확률은 10일, 즉 300만 년만에 한 번이라고 한다. 300만 년만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 놈이 하필이면 우리에게 맞다니 - 선장은 생각할수록 꼭 죽을 운수인 것 갈다. 화물선은 너무 크다. 너무 크기 때문에 괴물과 만날 기회도 많아진다. 또 너무 커서 지구 표면에서 떠오르지도 못한다. 그래서 아예 기구의 밖을 돌고 있는 우주 정거장에서 조립되었다. 화물은 지구 표면에서 연락선 로켓으로 우주 정거장까지 운반해 온다. 금성에 가서도 금성 표면에 내려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연료 만으로서는 금성의 바깥 궤도에 진입하지도 못한다. 금성 근방에 도착하면 예인선이 기다리고 있다가 화물선과 도킹해서 궤도에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물론 화물은 공간에서 풀어 금성으로 운반된다. 선장은 자기들의 안전 문제에만 너무 골똘한 나머지 화물에 대한 생각을 깜박 잊고 있었다. 옛날의 선장들은, 배가 난파했을 때 자기는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면서도 여객과 화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다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비하면 지금의 선장의 태도는? 그러나 선장은 선장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다. 우주 화물선은 옛날 배처럼 일단 사고가 나면 영구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승무원에게는 어떤 운명이 떨어지더라도 화물선은 정밀하게 그 궤도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승무원이 없기 때문에 중간에 약간의 궤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금성을 약간 빗나가더라도 5개월 후에는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다. 화물을 맡긴 화주는 화물선에 사고가 생겼다 하더라도 캘린더만 뒤적이고 있으면 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선장은 화물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물 생각이 나자, 화물 중에는 막대한 보험금이 걸려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무엇일까? 행여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화물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중에는 어쩌면 도움이 될 것도 있을 것 같다. 선장은 새로운 기운이 번쩍 나서 선적표를 훑어보기 시작한다.   선장과 기사   이 때 기사가 조종실에 들어선다. "기압을 조금 줄였습니다. 선체에 약간 누출(漏出)이 있어서요." 선장은,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뭉치를 기사에게 내밀었다. "적재 일람표야. 도움이 될 화물이 있을지 모르니까, 같이 훑어보지." 기사는 말없이 일람표를 받아들고 썩 내키지는 않는 태도로 품목에 눈길을 준다. 아무 소용이 없어도 좋다. 단 몇 분간이라도 죽음을 잊고 몰두할 수만 있으면 좋다. 품목 하나하나에 표시를 해 가면서 되도록 천천히 읽어 내려갔지만 30분도 안되어서 끝났다. 고개를 든 두 사람은 눈길이 마주치자 뜻하지 않게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10만 달러의 보험금이 걸려 있는 품목이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포도주! 당치도 않게 포도주에 10만 달러라니!" 선장은 일람표를 획 집어던져 버렸다. 마침내 금성에서 연락이 왔다. 연락문을 녹음하는데 거의 1시간이나 걸렸다. 내용은 전부 우주선의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자세한 질문서였다. 너무나 꼼꼼하고 세세한 질문서여서 전부 조사해서 질문에 답할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락문을 어떻게 생각하나?" 선장이 침울한 소리로 물었다. 그리고는 기사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기사는 잠잠하다. 한참 있다가 불쑥 한다는 말이, “우리를 바쁘게 하려는 속임수겠죠. 자세히 조사해서 보고하면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를 바쁘게 하려는 겁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에는 죽음을 잊어버릴 수 있을테니까요." 선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생각과 똑같았던 것이다. 선장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기사는 산소 탱크가 터진 것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정신 착란 증세와 비슷한 무기력함을 나타냈었다. 그러다가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또 금방 원기를 회복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제는 추리하는 방식도 정상인 선장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가? 그래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선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문자 그대로 고지식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예외 없이 자기가 종사하는 업무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따라서 교우 관계도, 독서의 방향도 한정되어 있다. 또 예외 없이 상상력이 부족하다. 자기를 기준해서 모든 사태를 판단하려고 하며 융통성이 없다. 융통성이란 창조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자만이 향유한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지식한 사람이 의외로 음흉하고 때로는 어이없게 비겁해질 수 있다. 선장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엄격하게 기술 교육을 받고, 또 순조롭고 기술계의 좋은 직장을 얻었다. 10년 간이나 이 직(織) - 선장 - 에 종사하고 있다. 상사로부터의 신임도 두텁다. 무엇하나 아쉬운 것이 없다. 적어도 선장 자신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마음에 드는 직업과 월등히 많은 보수에 - 선장의 인생은 순탄, 바로 그것이었다. 쭉 곧은 길을 달려오면서 한눈을 팔 사이가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항상 뒤적이고 있는 책은 복잡한 수식이 잔뜩 들어 있는 공학 관계 서적이다. 석달이 넘는 외로운 우주 항해에서도 소설책 하나 보는 법이 없다. 도대체 소설 따위가 세상에 필요할까 하는 생각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항해에서 기사라는 자가 갖가지 책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났을 때부터 선장은 못마땅했다. 기사가 자기 방에 꽃아 두고 있는 책은 제목조차 보기 싫은 것들이었다. 윈스턴 처칠의 2차 대전 회고록이니, 무슨 미신 책과 같은 텔레파시니, 독심술이니,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니…… 또 기사의 경력도 선장의 비위를 거슬렀다. 전공을 세 번이나 바꾸었다는 것이다. 의학을 공부하다가 싫어서 역사를 전공하고 나중에는 그것도 싫어서 기계 공학으로. 가장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이, 또 가장 협동을 요구하는 좁은 우주선에 같이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여행이 순조로웠으면 한 사람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든, 다른 사람은 복잡한 경력과 성격을 갖고 있든 없든, 특별한 문제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이 순조롭지 못한 것이다. 못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20일 후에 죽기 위해서 산소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는 최악의 비상 상태인 것이다.   포도주   융통성이 있는 자는 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 최초에는 큰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최초의 심한 좌절은 휘어진 용수철이 곧 제자리에 돌아가듯, 곧 원상으로 복귀될 수 있다. 기사는 그런 사람이다. 검은 놈 아니면 흰 놈, 흰 놈 아니면 검은 놈 식으로, 매사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는 고지식한 선장에게는 이런 기사의 속성이 이해될 리가 없다.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시간이라야 벽에 걸린 크로노미터(정확한 시계)를 보고서야 몇 분 몇 시간이 지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지구에서는 해가 지고 뜬다. 해의 위치에 따라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서늘했다 더웠다 한다. 우주 여행에는 이런 것이 전연 없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는 몇날 며칠이고 변화가 없다. 정확하게는 왜 변화가 없을까마는 시계 시침의 움직임을 얼른 알아볼 수 없듯이 그림자의 미미한 움직임을 알 수 없다. 언제 보아도 같은 자리에 같은 크기의 그림자에, 언제 보아도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태양 - 하여튼 변화가 없는 세계인 것이다.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받은 선장과 기사는 적어도 겉으로는 항상 하는 대로 행동했다. 선장은 항해 일지를 쓰고, 항로를 점검하고 기사는 기계를 조사하고. 운석에 맞은지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에 금성과 지구에서는 우주선을 구할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아직 그 회담 결과는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락이 늦어지는 걸로 보아 희망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선 내의 모든 것은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공기는 여전히 깨끗하여 호흡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쉽게 생을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흘째 되는 날, 금성에서 연락이 왔다. 전문적인 술어를 빼면 죽은 사람에게 주는 조사(弔辭)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중에도 화물의 안전에 대해서는 지겹도록 상세한 지시를 받았다. 또 지구에서는 천문학자들이 화물선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인데 결과는 7개월 후에 화물선이 원일점에 돌아갈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름 후에는 죽어 있을텐데 6~7개월 후라니! 연락문은 너무나 잔인했다. 연락문을 읽고나자 기사는 말없이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선장은 초점 없는 눈길을 창 밖에 던진 체 우두커니 서 있다. 생각난 듯이 자이로 의자에 쓰러져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쓰고 또 썼다. 아내에게, 친구에게, 회사에, 유언도 썼다. 유언장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 죽음이란 것이 절실한 현실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몸부림치도록 두려워진다. 벌떡 일어나서 방 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때 아니게 배가 고프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빠지면 사람은 때로는 턱도 없는 이상 망이 나타나는 법이다. 자신을 학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선장은 배가 몹시 고프다. 음식물을 위 안에 때려 넣어서 위를 심하게 학대하고 싶은 일종의 이상 본능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녁 사 때가 되었는 데도 기사가 부르러 오질 않는다. 오늘 저녁은 기사가 식사 준비를 할 차례인 것이다. 기사를 부르러 쫓아나갔다. 노크도 없이 기사의 방문을 벌컥 열어제쳤다. 기사는 침대에 태평스럽게 누워 있다. 뚜껑이 열린 화물 상자가 방 가운데에 떠 있다. 상자를 들여다볼 필요까지는 없다. 기사는 충혈된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 선장을 올려다본다. 10만 달러의 보험이 붙은 포도주를 마신 것이다. "관으로 빨아 마시려니 무척 힘든데요." 기사가 태연하게 지껄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기분을 내어 마실 수 있도록 선장은 인공 력이라도 좀 만들어 주시지 않을래요?" 선장은 기사를 노려보면서 어깨로 숨을 쉬고 있다. "늘상 그렇게 상만 찌푸리지 말고 한잔 마셔 보세요. 이판에 어때요?" 기사가 포도주 병을 선장에게로 밀었다. 선장이 되밀어 던졌다. "개돼지처럼 멋대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도움이 될게 뭐야!" 기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진홍색의 포도주를 입 안으로 쏟아 넣는다. "장하십니다. 선장님, 임무 제일이군요." 이죽거리고는 플라스틱 통을 눌러서 포도주를 또 들이킨다. 선장은 말없이 상자를 문 밖으로 밀어 넣고 문을 깨어져라 닫아 버리고 나가 버린다. 상자를 화물실로 둥둥 띄운 채 밀고 가서 화물실을 잠궈 버리고 방 앞을 지날 때 기사의 취한 노래 소리가 들려 온다. 선장은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린다. 무서운 유혹을 떨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허겁지겁 조종실로 향한다.   무서운 유혹   무서운 유혹! 그렇다 무서운 유혹인 것이다. 남은 산소량을 계산할 때, 계산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선장과 기사가 말없이 계산한 새로운 산법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마시면 20일 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남은 여행은 30일. 열흘이 모자란다. 그러나 한 사람만이 마실 수만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살아서 금성 땅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만이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두말 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은 못 마시게 하는 것이다. 죽게 하는 것이다. 기사의 방 앞을 지나가면서 선장이 몸서리친 것은 기사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사와 문명인을 자처하는 선장은 그런 야만적인 생각에 일시나마 자기 마음이 사로잡힌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을 떨어버리기 위해 몸을 떨었던 것이다. 사흘만 굶으면 문명인도 야만인이 되고 만다는 그 잘난 문명인의 긍지 때문에. 선장은 곰곰이 생각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죽어야 할 것인가는 공평무사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명인인 자기로서는 어떤 한계 상황에 놓이더라도 신사답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기사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등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럼 우선 기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아니 그도 이미 깨닫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어떻게 밝힐까? 그렇지! 편지로 알리자. 선장은 새로운 구제 방법이나 발견한 것처럼 책상에 앉아서 쓰기 시작했다. 쓰다가 말고 하다가 가까스로 편지 한 장을 만들었다. 지금 전할까? 아니야, 지금은 그가 취해 있어. 다음날 전하지. 편지를 금고 속에 보관했다. 편지를 지금 당장 전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는 선장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감추어진 보다 중요한 다른 이유 때문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이틀 후에 편지를 줄 작정이었지만 이럭저럭 다시 연기했다. 자주 연기만 하는 것이 선장답지 않았지만 자기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사도 알고 있을 테니까, 기사가 이 문제를 먼저 끄집어 내어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란 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기사도 선장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선장은 생각한다. 기사란 무슨 소용이 있나? 그는 가족도 없다. 화물선에 있어서도 특별한 책임을 부여받은 위치도 아니다. 그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진다든지 더 좋아한다든지 할 일이 없다. 그러니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어떤가? 우선 아내와 아이가 있다. 또 화물선을 책임지고 있는 책임자다. 기사는 없어도 그뿐일지 모르지만 자기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이렇게 보면 누가 보든지 선장과 기사 중 어느 쪽이 죽어 주어야 될지가 확실해진다. 기사가 조금이라도 인격이 있는 문명인이라면 이 문제를 먼저 끄집어 내어 자기가 죽어 주겠노라고 했어야 옳은 것이다. 그러다가 선장은 또 깜짝 놀라는 것이다. 자기가 언제부터 남을 이렇게 과소평가해서 죽음의 문제에서까지 자기에게만 유리하게 생각하려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편지를 전하지 않은 것은 이런 자기 자신의 무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아무리 다르게 생각하려 해도 기사가 죽어 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이제는 공기가 표가 날 만큼 탁해졌다. 그렇다고 아직 호흡하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선장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산소가 점점 없어져서 질식하는 꿈을 수 없이 되풀이했다. 그 때부터 전신은 멱을 감은 듯이 식은 땀 투성이가 되었다. 점점 몸이 쇠약해 가고 있는 것이다. 기사의 침착한 태도가 못 견디게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선장과 기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식사 때뿐이었는데 그 때마다 기사는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는 말없이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표정 같지가 않았다. 선장이 죽음의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동안에 기사는 책에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잊기 위해서는 책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누구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죽음을 앞에 둔 자가 웬만큼 정신적 바탕이 탄탄하지 않고서는 책을 읽을 엄두도 못낼테니까. 선장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지면서 정신적으로도 더 이상 지탱하기가 곤란해 졌다. 기사가 아니라 자기 쪽이 정신 착란을 일으킬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때가 자주 생기기 시작했다. 기사에게 줄 편지를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선장은 확고한 태도로 편지를 꺼내 들고 기사의 방을 찾았다. 세상에는 하잘 것 없는 일이 도화선이 되어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수가 많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엄청난 일이란 것이 그 하잘 것 없는 것 때문에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일이 미리 준비되었다가 작은 미끼를 출구로 해서 터진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선장이 기사의 방문 앞에 나타났을 때, 선장은 기사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담배 연기를 맡았던 것이다. 선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귀중한 산소를 쓸 데 없이 담배를 피워 소비하다니! 이래도 그는 사람 대접을 받을만한 인간인가? 선장은 기사에게 줄 편지를 구겨버렸다. 기사에게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 화주가 맡긴 주요한 화물에 서슴지 않고 손해를 입히는 태도를 보였을 때도 꾹 참고 공정한 인간의 대우를 해 왔다. 그리하여 기사 자신이 죽음의 문제를 먼저 꺼낼 기회도 충분히 주었다. 그런데 이젠 더 이상 그에게 공정한 기회를 줄 필요는 없다. 기사가 피우는 담배 냄새를 맡았을 때, 순간적으로 살인을 계획한 사람치고는 선장의 행동이 이상하게 조직적이었다. 곧장 조종실로 돌아온 선장은 작은 약상자를 열고 해골 표시가 붙어 있는 약병 하나를 끄집어 내었다. 그리고는 병에 붙어 있는 레테르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1g이면 무통 즉사. 레테르에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이 독약은 또한 무미인 것을 선장은 알고 있었다. 일은 결국 갈 데까지 가고 만 셈이다. 기사는 애연가였다. 담배 한 가치도 건강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피우다가 말다가 하는 선장으로서는 기사의 태도가 납득될 리 없다. 기사는 피우고 싶으면 목이 따갑건, 기침이 나건 심지어 감기에 걸려 있을 때도 피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물론 산소가 소중한 건 기사라고 모를 리 없다. 또 담배가 탈 때 산소가 소모된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하루 4가치 정도는 산소 소모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기사는 계산하고 있었다. 담배 몇 개피가 소모하는 산소가 무시할 정도의 양이라는 것을 선장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산소에 신경과 민의 상태에 있는 선장에게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어 보았더라면, 담배 몇 가치가 산소의 공급에 전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담배 피우는 것을 단호히 금지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기사는 차라리 선장 몰래 하루 4가치씩만 피우기로 했었다. 운 나쁘게도 그중 한 개피가 선장에게 들키고 단 것이다. 어차피 한 사람은 죽어야 할 운명이다. 단지 죽어야 할 사람이 기사가 선택된 것뿐이다. 또 누가 죽어야 될 것인가를 두 사람이 공평하게 제비 같은 것을 뽑아서 결정하지 않는 것이 틀릴 뿐이다.   독 살   플라스틱 컵 두개와 빨대를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적어도 겉으로는 태연하다고 선장은 생각했다. 옛날에 본 희극 영화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선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화의 내용인 즉, 독약을 탄 그릇이 잘못되어서 죽이려던 자가 되려 독약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에는 독약이 든 그릇을 혼동할 염려는 없다. 컵에 각자의 이름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기사는 컵을 받아들고 공간을 우울하게 응시하고 있다. 선장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다. 컵을 입에 가져다 대려다 말고 기사는 입맛을 다신다. "전에는 마시기 좋게 만드시더니 오늘은 약간 뜨겁군요." 선장의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내가 왜 그걸 그렇게 뜨겁게 만들었담! 이런 사소한 실수야말로 살인범이 교수대에 가는 이유가 아닌가? 기사는 컵을 든 채 흡사 공중에 떠 있는 사람에게라도 말하듯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산소를 혼자서만 사용할 수 있다면 금성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까?" 선장은 입술을 떨며 시선을 땅에 떨군 채 가까스로 대답한다. "그 그건 그래. 혼자서만 쓴다면 금성까지 충분하겠지." 기사는 눈을 지긋이 감고 묵념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다시 말한다. "그럼 우리 둘 중에 누가 에어 록 밖으로 나가느냐, 혹은 독약을 마시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 두 사람이 다 죽기를 무턱대고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분별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순간, 선장은 어이가 없었다. 기사가 감히 그런 생각까지를 하다니. 그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어차피 죽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단 말인가? 단지 자기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적당하지 않았었단 말인가? "옳아, 자네 말이 옳아. 그렇게 하는 것이 문명인다운 태도지." 기사는 선장 쪽을 힐끗 쳐다보면서, 컵을 끌어 들여 빨대로 천천히 빨아 당긴다. 빨대를 따라 기사의 입 속으로 빨려 올라가는 갈색 액체를 선장은 넋을 잃고 쳐다본다. 선장은 눈을 감았다. 이제 기사는 죽고 나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죄책감과 외로움이 전신을 떨게 한다. 선장은 눈을 감은 채 일어선다. 기사의 죽어 가는 모양을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유난히 반짝이는 화물선이 멀리 보인다. 화물선의 에어록이 열리면서 선 내의 밝은 전등불이 우주 공간으로 왈칵 쏟아져 나온다. 불빛을 등지고 두 개의 그림자가 망망한 공간을 향해서 있다. 수 분 동안 꼼짝 않던 두 개의 그림자 중 한 개의 그림자가 공간 밖으로 몸을 던진다. 등에는 산소통 같은 것을 지고 있는데, 통 꽁무니에서는 가는 연기 같은 산소 추진제가 쏟아져 나온다. 산소 탱크가 로켓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 밖으로 나온 그림자는 처음에는 천천히 다음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화물선에서 멀어지고 있다. 15분 후에는 그림자가 캄캄한 공간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이 정도면 화물선의 만유 인력에 끌려 시체가 다시 돌아올 염려는 없게 되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에어 록의 다른 그림자는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에어록을 닫아 버린다. 공간으로 쏟아져 나오던 불빛도 사라졌다. 큰 풍선 같은 금성이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역전 (逆轉)   다가오는 화물선을 금성 궤도로 끌어넣을 예인선 안에서 승무원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화물선과의 거리는 3700입니다. 30분 후에는 도킹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단 말이야. 누가 죽어야 할 것인가를 화투로서 결정짓고, 그리고서는 진자는 미련 없이 에어 록 밖으로 나가 버렸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흉내낼 수 없는 일이야." "그래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우리 예인선에 그런 경우가 닥쳤다면 화투고 뭐고 할 것 없이 당신은 나를 밖으로 내던져 버리겠죠." "하하…… 그건 아마 반대일 걸. 자네야말로 내겐 기도를 드릴 시간도 주지 않고 나를 내쫓을 거야." "그건 그렇고. 기사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혼자서 외롭게 수십만km를 달려왔으니까.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기분일까?" "기분 따위는 나중에 찾세. 도킹 준비나 하세." 두 사람은 부산하게 선 내를 돌아다니던 도킹 시설을 점검하고 있다. 두 개의 우주선이 초속 2km로 서로 접근하고 있다. 예인선의 꼬리 부분에는 강철제의 올가미가 곤충의 촉수처럼 빛나고 있다. 화물선의 배 부분에는 예인선의 올가미를 걸 낚시처럼 생긴 강철봉이 수없이 뻗어있다. 두 우주선은 반대편에서 서로 날아들면서 카우보이가 로프를 던져 말의 머리를 멋있게 낚아채듯 예인선의 강철 로프가 화물선의 낚시바늘을 후려 꿰어야 하는 것이다. 두 우주선이 서로 스치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제어를 받는 고리와 낚시 바늘은 서로 얽히는데 실수가 없다. 두 우주선이 서로 스치는가 싶더니 고리와 낚시 바늘로 연결된 두 우주선은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덩치가 큰 화물선 쪽이 운동량이 작은 예인선을 끌고 원래의 진행 방향으로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다. 다음 순간, 예인선의 옆구리 방향에서 수 초 간의 방향 전환 분사가 있은 후 두 우주선은 금성의 인공 위성 궤도에 진입한다. 같은 궤도에 진입한 두 우주선의 고리가 벗겨지고 예인선의 도킹 터널이 화물선과 연결되었다. 에어록의 압력 조절의 시간이 지난 다음 드디어 우주선의 문이 열렸다. 창백한 얼굴을 한 기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예인선의 승무원과 기사는 흡사 다른 생물을 쳐다보듯 서로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듯 구급약과 산소통을 짊어진 예인선의 승무원이 기사를 영접하러 터널 속을 기어간다. 수척할 대로 수척한 기사가 예인선의 승무원 두 사람을 상대로 지난 일을 이야기한다. 독약을 탄 커피를 마신 기사가 죽어 가는 모양을 보지 않기 위해 조종실로 나가던 선장은 등 뒤에서 기사가 부르는 소리에 멈칫했다. "선장님, 그렇게 바쁘세요? 의논할 일이 있는데……" 선장은 전신을 떨며 천천히 돌아서서 믿어지지 않는 듯 기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앉아요!" 기사의 엄숙한 명령이다. 선장은 몽유병자처럼 기사가 가리키는 쪽에 앉았다. 기사가 엄숙한 소리로 말한다. "선장님, 당신은 더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기사의 말에 끌리듯 선장은 반사적으로 되뇌었다.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 무슨 뜻이요? 도대체 언제부터 선장님은 나를 독살시키려고 마음먹었소?" 선장은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이나 멍하게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대답한다. "오늘 아침이야." 어린아이를 나무라듯 기사는 선장을 질책한다. "독약을 탄 건 오늘 아침이지만 죽이려고 마음먹은 것은 벌써 오래 됐어요. 나는 선장님의 행동을 보고 눈치챘어요. 나는 당연히 금성 본부를 불러내어 선장님을 고발했어야 할겁니다. 그러나 참았어요. 어차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죽어야 할 마당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이 불미스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대신 선장님이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 왔어요." 바보처럼 기사의 꾸지람을 받고 있던 선장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독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나?" 기사가 실소를 한다. "후후…… 그건 독약이 아니고 소금이요!" 선장은 질겁을 한다. "무어야?" "선장님이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이상 나는 죽지 않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옳지 않겠어요? 나는 그 동안에 선실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선장님이 나를 감쪽같이 살해할 방법이 32가지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일일이 방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두었지요. 독약도 그 중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독약을 비우고 거기에 소금을 채워 두었지요." 선장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이제야 말로 선장님이 죽느냐 내가 죽느냐를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선장은 홀린 듯 고개만 끄덕인다. "먼저 우리들은 죽기 전에 가족과 경찰 당국에 대해 유언을 녹음해 둡시다. 그래야만 나중에 이러쿵저러쿵 말썽이 없을 것 아닙니까? 화투 한 장씩을 집어서 큰 숫자가 이기는 겁니다." 선장은 긴 한숨을 토하면서 기사의 말에 동의했다. 선장과 기사는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져서 한참 만에야 다시 식당에 모였다. 유언을 녹음하고 나온 것이다. 기사는 포장을 벗기지 않은 새 화투 한 벌을 내놓았다. 먼저 선장이 한 장을 집었다. 기사도 한 장을 집었다. 선장은 집은 화투를 책상 위에 바로 놓았나. 기사도 그 옆에 자기 화투를 놓았다. 선장 것은 난초, 기사 것은 공산. 말없이 일어선 두 사람은 악수를 교환했다. 선장은 산소통 로켓을 지고 기사는 빈 몸으로 에어 록에 나갔다. 말없이 선장은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산소 분사를 가는 연기 같이 남기면서 선장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작품 해설   SF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필자도 한편쯤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 보려고 하니 이야기를 꾸며 본 경험이 없는 필자로서는 우선 스토리 텔링에 자신이 안 생겼다. 그래서 구성 면에서 우선 남의 것을 참고하기로 작정했는데 그 결과가 에 연재되었던 이 SF이다. 처음에는 필자의 원안에 기초한 창의적인 작품을 꾸며 볼 욕심으로 여러 가지 메모도 해 두었지만, 형편은 애초의 생각대로 되지 못했다. 남의 것을 참고한다는 것은 필자의 의욕이 용서치 않았지만 상당한 열심으로 정리해 두었던 그 동안의 메모가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길 바랄 뿐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참고한 작품은 영국 작가 Angus, Mecvicar의 'Secret of the Lost Plant'과 역시 영국 작가 Arthur C. Clarke의 'Breaking Strain'이다. 필자는 유감스럽게도 'Secret of the Lost Plant'의 작가 Mecvicar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Breaking Strain'의 작가인 Clarke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현재 70세의 고령인데도 그의 창작욕과 아이디어는 고갈할 줄 몰라서 연전에는 일본의 미래학회에서 초청 연사로 연설한 일도 있고 또 일본의 모 영화사의 요청으로 '서기 2001년'을 집필한 일도 있다. 이 작가의 배경을 보면 그의 작품이 평판을 받는 이유의 약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즉, 그는 영국 Kings College에서 수학과 공학을 전공해서 각기 학사 학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에 대한 전문가이며 특히 통신 위성의 아이디어를 처음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으로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 재단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는데, 아인슈타인 등이 이 상을 수상한 것으로 보아 무게 있는 상인 것 같다. 그의 SF 중 'Possibillity'라는 단편은 미국의 MIT(매사추세츠 공대)에서 필독서로 추천되어 있고, 'Childhood's end'라는 장편 SF는 문학 작품으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텔레파시의 비밀'에 소개되는 해상도시 베이스 K의 건설을 창안한 리처드 B. 플러씨는 실명이다. 이 분은 라디오 정류 회로의 전해 콘덴서, 2극 진공관 대신에 사용하는 셀렌 정류기, 이 밖에 수은전지 등의 발명자인데 일본 도쿄의 해상 도시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출해서 화제가 되었던 사람이다. 또한 작품 속에 소개되는 배터리 카는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중이다. 공해 없는 자동차로는 적격이지만 전지의 용량이 작기 때문에 아직 숙제로 남아있다. 결국 전지차의 개발은 용량이 큰 전지의 개발로 낙착이 되는 셈이다. 자동차에 장비할 동력용 소형 모터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외지의 보도이고 보면 배터리 카의 실현도 시간 문제인 것이다.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권을 탈출하는 방법으로 시도해 본 자석식 우주선 출발 방식은 (자석의 같은 극은 서로 반발한다. 자극이 셀수록 반발력이 클 것은 물론이다. 도로에 자석의 한 극을 포장하고 차체 밑에 다른 극을 붙이면 차는 땅에 닿지 않고 떠다닌다)는 꿈과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강력한 자석을 얻는 방법이다. 강력한 영구 자석을 만들려면 무한히 센 전류를 흘려주어야 하는데, 이 때는 도선의 저항 때문에 도선이 견디지 못한다. 이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자석의 세기는 제한을 받는다. 물론 자석의 세기도 극한치가 있어서 무한대의 세기를 갖는 자석을 만들 수는 없다. 다만 전류의 제한 때문에 이론적인 극한치의 1/100 정도의 세기를 가진 자석밖에 현재로선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전류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고 한다. 초전도라는 현상 덕택이다. 어떤 종류의 물질은 절대 영도(섭씨 -273도) 근방이 되면 전기 저항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이론상 무한히 센 전류가 흘러도 열이 나지 않고 따라서 극한치에 가까운 자석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자성체의 재료가 문제가 된다. 이렇게 얻은 강력한 자석을 이용하여 우주선이 튀어 오르도록 하고 이 초기의 에너지에 의해 우주선의 지구 탈출에 필요한 많은 화학 연료가 절약되게 했다. 이것은 필자의 공상적인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그 실현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텔레파시(Telepathic Wave)란 말도 필자가 마음대로 각색한 것이다. 미국에서 노틸러스 호(이것은 쥴 베르느의 소설 '바다밑 2만리'에 나오는 세계 최초의 잠수함 이름이라는 것을 웬만한 독자들은 알고 있으리라)란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여 그 시험 항해로서 북극의 빙하 밑을 통과한 일이 있다. 이 때, 잠수함 안의 한 방과 워싱턴 사이에는 정신감응력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즉 잠수함에 타고 있는 한 실험자가 자기 앞에 몇 장의 카드를 놓고 멀리 워싱턴에 있는 다른 실험자에게 자기의 생각을 송신한다. 송신한다고 하지만 자기 앞에 벌려놓은 카드 중의 어떤 카드를 워싱턴의 실험자가 집도록 마음속으로 미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 워싱턴에 있는 실험자는 잠수함의 실험자의 것과 같은 종류의 카드를 앞에 놓고 잠수함의 실험자가 보내는 메시지를 받으려고 애를 써서(물론 마음속으로) 그럴싸한 카드를 집어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송수신해서 나중에 그 결과를 대조하여 보니 놀랍게도 약 80%(이 숫자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가 적중했다고 한다. 이것이 필자의 아이디어를 자극하여 인간의 생각, 즉 대뇌의 신호로 변조된 일종의 파동인 정신감응력의 파를 만들어 내게 했다. 인체에 60 사이클의 교류가 흐른다는 내용도 사실에 입각한 것이다. 이번에 아이디어회관의 호의로, 그리고 SF를 사랑하는 분들의 주선으로 나의 시험작이 뜻밖에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영광을 입는다. 이런 종류의 책이 청소년들에게 많이 읽혀져서 그들의 분방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모처럼 용감하게 시도하는 건설적인 이색 출판사업에 격려의 기회가 되기를 빈다. 텔레파시의 비밀 김학수 작   아이디어회관 과학문고 224p. 19cm   인 쇄      1978년 4월 25일 발 행      1978년 5월 5일 작 자      김학수 옵셋 인쇄   삼정인쇄소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시문제책사 발행인     박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제 2-213호       전화 (25)1975, (25)1970   값 450원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한국 SF 작가 협회편   북극성의 증언   서광운 지음     서광운 동경대학 수학과 수료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사 한국일보 초대 과학부장, 외신부장, 대우 서울신문 문화부장 현 한국일보 과학부장 한국SF작가 협회회장 번역한 책: 버로우즈 작 「화성의 미녀」 지은 책: 항공 기상의 과학, 세계를 움직인다 등   편집 위원 아동 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 박사 최 일학 철학 박사 양 옥용/이학 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태풍 경보···················· 4 과학 논쟁··················· 11 괴물의 출현·················· 22 괴물의 정체·················· 35 우주선의 출현················· 44 납 치····················· 53 화성의 지하 기지················ 61 프록시마의 비행 대장실············· 68 작업 예정표·················· 75 에덴 동산··················· 85 박 진나의 노랫소리··············· 90 노이로제의 치료················ 98 운하 지대의 휴양소·············· 102 사무한과의 협상················ 111 은하계 탐험·················· 121 오메가 9호 성에 착륙············· 129 학술 탐험··················· 132 뜻밖의 소식·················· 137 반란 진압 작전················ 143 드디어 지구로················· 156   SF 단편: 달로켓 실종 사건··········· 170   작품 해설··················· 185     태풍 경보   거센 바람이 창 밖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기상대의 태풍경보가 들어맞은 듯 뚝 위의 수양버들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인다. "김군, 태풍이 대단한데." "996밀리바의 태풍치라는 예보였습니다." 권 박사는 이 말을 들은 것인지 안 들은 것인지 전자 계산기의 조작 석에서 일어서서 창문 가까이 걸어갔다. 그리고선 창 밖의 나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군, 나 임업 실험지까지 다녀오겠네." "박사님, 이 태풍 속을 무리하시면……" "능금나무가 아무래도 걱정거리야." 권 박사는 연구소 로크를 열고 비옷으로 갈아입고 문 밖을 나섰다. 조수 김 철수는 박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시선을 돌려 다시 책상 위의 그래프 작업을 계속했다. 임업 실험지는 분지에 자리 잡은 50만 평의 넓이로 무수한 나무들의 생명을 태풍의 희롱에 맡긴 채였다. 연구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과나무 밭 언덕 위에 선 권 박사의 눈에는 50만 평의 대지와 20만 주의 나무들이 대낮처럼 똑똑히 보였다. 그 한 그루 한 그루엔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쏟았던 정성이 이제 마지막 그 결실을 보려는 즈음 996밀리바의 태풍 15호는 어려운 고비를 몇 차례고 넘어온 권 박사의 마음 속에 또 한번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의 그림자를 얼룩 지우는 것이었다. 태풍과 태풍이 연결하는 인연이란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도 있는 것일까. 권 박사는 찬바람에 도리어 생명력을 느끼면서 홀로 회상에 잠겼다. 20년 전의 가을에도 심한 태풍이 분 적이 있었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기독교 신도인 애인과 어쩐지 서먹서먹해진 끝에 서로 이별하기로 선언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럽게 태풍을 만났었다. 마음의 공허 때문이었을까. 강풍에 못 이겨 오들오들 떠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문득 느낀 일이 있었다. 저렇게 모진 바람에 휩쓸려 지면서도 왜 나무의 가지들은 어지간히 그 잎사귀까지 나무 줄기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몹시 시달리면서도 되돌아오는 나뭇가지의 유연성을 다만 생물학적인 세포 섬유의 탓으로 돌려야 옳을 것인가. 그는 더 강한 생명력이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를 굳게 연결하고 있는 것만 같은 상상에 사로잡혔다. 사과나무 가지를 배나무에 접목해서 새로운 품종의 과일을 얻는 궁극의 비밀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씨앗의 문제를 넘은 더 강력한 생명력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을 것 같다. 그는 이런 생각 끝에 보통 때의 나무줄기와 가지 사이의 모양이 마치 자석의 자력선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유사성을 발견해 냈다. 나무줄기가 자석이고, 나무의 뿌리나 가지와 잎은 뿔뿔이 발산하는 자력선과 방향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들은 이런 착상을 영감이라고 했지만 당시 비바람에 흠뻑 젖으면서 되돌아가는 그의 가슴은 뜻밖의 발상에 오히려 침울할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어느덧 흘러 권일송 박사의 나이도 52세를 새겨 놓았다. "자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권 박사는 오랜 수수께끼를 또 한 번 자문해 보았다. 언덕 위엔 동남풍이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는데, 어둠 속을 때아닌 그림자 하나가 접근해 온다. 알고 보니 바로 그의 부인 문 여사였다. 권 박사는 밤늦게 자기를 찾아 나온 아내를 도리어 나무라면서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통보를 연구소에 연락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다음다음 날이었던가, 연구소의 제 1 차 종합 브리핑이 권 소장실에서 열렸다. 18명의 각 부 반장이 옵서버로 참석한 가운데, 자력선 부장이 맨 먼저 보고했다. "구체적인 데이터는 상부에서 정리 중이므로 연말의 제 3 차 브리핑 때까지는 완결된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오늘 브리핑의 요점을 말씀드린다면 식물의 자력선이 하늘과 땅의 상하 방향에서 수평축에 대하여 160도의 자유 방위를 갖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구의 광물성 자장이 남극의 직선 방위 외에는 작용하지 못하는 까닭에 식물 자력선 발전을 여간 저해해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 부는 지구 자장의 방향을 없애고 식물 자력선만에 의한 식물의 생장 과정을 실험해 본즉 식물의 재래식 자력선의 강도는 나뭇가지의 생장 비율인 황금률의 자승의 대수에 정비례한다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옵서버들은 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당부는 이 법칙에 따라 식물의 재래식 자력선을 약 12배 강화할 수 있는 실험을 계속 중에 있습니다." 자력선 부장의 설명은 차츰 학술적인 문제를 다루더니 한 시간 남짓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달의 중력이 식물의 뿌리에 대해 밤중에 미치는 영향까지 브리핑했다. 차례에 따라 원예 부장이 일어섰다. "원예부로선 토마토 재배를 위해 자석을 뿌리에 함께 심어 줌으로써 재래종보다 5배의 다수확을 올렸고 수박은 과일이 익기 시작한 일정한 기간 자력선을 보강함으로써 일 년 내내 맛이 변하지 않는 특수 품종을 개량해 냈습니다. 당부가 결론을 얻으려는 것은 일년생 식물을 그 특징을 변경함이 없이 다년생 식물로 성전환을 시키려는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과나 귤의 경우도 재래식 방법은 종이로 과일을 싸서 보호하는 방식인데, 이를 지양하여 100분의 1밀리의 플라스틱 막을 과일 표면에 액체로서 살포하면 자력선과의 균형 하에서 반드시 구형이 아닌 4면체 또는 3면체 등의 이른바 임의의 다면체 재배에 착수했습니다." 이 날 아침 회의는 두 부장의 보고로서 끝나고, 하오에는 임업 부장이 브리핑에 나서 참나무 등의 가지에 전기 코일을 감아서 전자기 유도에 인한 수목의 생장 시험 결과 약 5배의 생장 성과를 보았으며, 지금 실험 중인 데이터가 완결되면 뜻밖의 새로운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해양 생물학 부장은 미역과 전복 등에 자석의 힘을 적용한 결과, 바다 속의 유기물의 소화도가 훨씬 높아져서 미역은 종래의 5배의 영양가를 갖게 됐고, 진주의 크기는 조건에 따라 자두 만한 것이 생산되었다고 실물을 제시하면서 보고했다. 예정한 시간이 넘은 까닭에 이론부의 보고는 후일로 미루고 이 날의 브리핑은 끝났다. 권 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소장실의 벽에 이런 액자가 걸려 있었다.     권 박사의 관심이 바다로 향한 것은 4년 전부터였다. 땅 위에서의 자력선 연구는 어지간할 때까지 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력선의 근원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3년 전에 남쪽 바다의 고도인 우도에 해양 생물학 분실을 만들어 놓고 바다 속의 식물 연구를 계속해 온 것이다. 내년 4월로 예정된 종합 기술학 외에 식물 자력선의 입체적 활용과 그 근원에 관한 보고를 내놓으려면 연말까지 모든 결론을 지워 놓아야만 한다. 10월 6일 권 박사는 단신 비행기편으로 우도로 떠났다. 예정은 20일간이었다. 비록, 소장이 출장 중일 망정 브리핑을 계속하는 것은 자력선 연구소의 관례이다. 10월 8일, 전날의 브리핑이 속개되어 이론 부장이 보고를 했다. 키가 후리후리한 그는 이 날 따라 보우 타이를 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온갖 나무들이 저마다의 자력을 갖고 있는 사실을 좀 더 살펴 볼 때, 개개의 나무가 생장하는 과정에 따라 자력도 커지느냐, 또는 본래 일정한 자력이 식물의 성장 운동에 따라 발전할 따름이냐 하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이론부로서는 후자의 경우를 중시할 때, 그렇게 되면 개개의 자력의 상한을 규정해야 되며, 거기서 인공적으로 보강할 수 있는 최대치를 구해야 될 것입니다." "원예적 실험에 의한 이런 관계의 본질은 중수소가 뚜렷이 작용하고 있는 듯한 예증을 주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중수소에 의해 자력의 역량이 설명된다면 지구상의 식물 자력의 총화는 간단히 밝혀질 것이나, 북극과 남극에 있는 자장과의 관련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집트로부터 도착한 문헌에 의하면, 모타칸 박사는 지구의 자장이 옛부터 매몰된 큰 나무들의 자력이 지구 자전의 영향으로 각각 적도를 한계로 해서 남북으로 집결한다는 믿을만한 근거가 있다는 새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학설을 믿는다면 중수소와 지구 자장의 구성 분자 사이에 어떠한 치환이 있었을 법도 한 연구의 실마리가 나타날 것입니다만……" 이론 부장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론부 소속으로 있는 조수 김 철수가 일어서서 자기의 상정이라고 하며 대략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력선 센터는 모든 간접적인 것을 배격하고 직접적인 원인 규명에 나서고 있습니다. 지구 자장의 자력과 식물 자력 사이의 관계는 다만 음양의 그것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마치 전극을 플러스 방향으로 작용시키면 전열기가 되고 마이너스 방향으로 작용시키면 냉장기가 될 수 있는 원리처럼 지구 자장의 자력은 생명력이 가사 상태에 놓인 식물 자력의 반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기물이 무기물로 치환된 것을 화석이라고 하지만, 화석에도 생명체가 깃들여 있듯이 지구 자력과 식물 자력을 단순한 공존 상태로부터 통합 상태로 끌어올린다면, 그 에너지야말로 무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식물 자력은 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서정시라도 읊는 듯한 철수의 보충 설명도 45분으로 끝났다. "'이로써 제 1 차 종합 브리핑을 일단락 짓겠습니다." 부소장을 겸하고 있는 자력선 부장의 인사가 끝나자 모두들 서류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침 소리 마저 없는 회의란 여간 심각하지 않은 법이다. 허나 시계의 두 바늘은 말없이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학 논쟁   전화가 걸려 왔다. "자력선 연구소입니다." 철수는 수화기를 손에 쥐자 먼저 대답했다. 전력 회사에 있는 떠버리 친구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자네 오늘 토요일인데 약속이 있나? 없겠지.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으니 1시 반까지 제 3 영양 센터에서." "글쎄, 일이 남아 있는데……" "쌍둥이 호박 만드는 일 말이야. 하하, 결혼한 친구들에게 맡겨 놓으면 되지 않아."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그렇다면 가급적……" "가급적이 뭐야. 꼭 기다리고 있겠네." 미스터 강은 학생 시절부터 일방 통행처럼 말해버리는 버릇이 있다. 철수는 전투 중에 잠깐 쉬는 기분이었으나 떠버리와 만나면 기분 전환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흥 가까이 자리잡고 있는 3층 건물의 제 3 영양 센터는 여전히 만원이었다. "전력 회사의 미스터 강이 와 있을 텐데, 어디 있습니까?" "네, 2층 26호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소이다." 안내계의 젊은 여자가 무척 친절하게 일러 준다. 층계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벌써 26호실로 연락이 된 듯 미스터 강이 문을 열고 나와서 있었다. "넥타이나 좀 매고 다니지 않고……" 강윤식은 대뜸 따지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소녀들이 음식을 날라왔다. 방은 시간제로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만사가 기계적이었으며, 제 3 영양 센터의 자랑은 닭볶음이었다. 술은 없었다. "강, 일부러 할 말이 있어 오늘 불렀는가?" "이 사람아, 할 말은 무슨 말이 있겠나. 그저 친목을 도모하자는 것뿐이지." 그는 자기가 맡고 있는 전력 회사의 발전국 일에 관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열다섯 군데나 되는 조수 발전소의 건설이 날씨의 탓으로 예정보다 좀 늦어지고 있다는 둥, 유성에 처음으로 만든 지열 발전소의 성적이 역시 예상대로 잘 되나간다는 둥, 그대로 두면 말문이 언제 닫힐는지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잘 알겠네. 그건 그렇다고 하고 결혼 날짜를 언제로 잡았는가?" 신나게 말하던 윤식의 말문이 급정거했다. "아직은 모르겠어. 아마도 내년 봄쯤일 거야, 신부 왈 국가 시험을 치른 다음으로 하겠다나." "그 여의사의 주장 대로군." 철수는 얘기 끝에 요즘 자력선 연구소에서 새로운 법칙이 발견된 경위와 식물 자력선이 완전히 규명되면 그렇게 속썩이던 로켓 연료를 어느 정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윤식은 그 얘기를 무심히 듣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렇게 훌륭한 일을 왜 국민에게 안 알리느냐고 눈을 흘긴다. "아직 발표할 시기가 아니야." 하고 철수는 가볍게 응수했는데, 이 짧은 얘기가 온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게 되리라고는 철수도 윤식이도 미쳐 몰랐다. 윤식이가 이 날의 철수 얘기를 지나가는 말로 대륙 신문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귀띔해 준 것이 화근이 됐다. 며칠 후, 신문이 배달되자 자력선 연구소는 발칵 뒤집어졌다. '자력 혁명! 자력선 연구소에서 무한 동력을 발견! 과일의 다면체 재배도 대성공!' 이라는 큰 제목 아래 과학 면의 톱기사로 대략 다음과 같이 보도 됐기 때문이다.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기술진은 13년의 연구 끝에 자력선을 해방시킴으로써 자력 혁명의 제 1 차 작업을 완성했다. 식물의 열매를 이루는 궁극적인 힘을 중수소라고 생각하는 동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이 에너지를 재생산함으로써 장차는 우주 로켓의 추진력까지도 생산해 낼 가능성을 검토 중에 있다고 한다. 동 연구소의 기본 방침은 식물의 생장과 결실을 광선의 합성에 의한 간접적인 신진 대사를 초월하며, 식물 생명체의 직접적인 궁극의 효소를 찾아 내서 이것을 유도하려는 데 있다. 옛날, 고 우장춘 박사에 의하여 육종된 이른바 씨앗 없는 수박은 단순히 씨앗의 교배로서 이루어진 것인데, 자력선 연구소가 그 동안 식물 자력선의 적절한 적용으로 맛이 변치 않는 수박을 만들어 낸 것은 널리 보도된 바 있다. 이런 연구를 기초로 해서 엷은 플라스틱 막을 과일에 살포함으로써 세모꼴, 네모꼴의 사과, 배, 포도 등의 과일 생산이 가능해 진 것은 우리 나라의 기후 풍토와 아울러 과학진의 커다란 승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순장 김 일송 박사는 출장 중인 우도의 해양 생물학 본실에서 이번 연구의 결론은 아직도 종합된 것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식물 자력의 완전 해방은 동 연구소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원예 부장이 가져 온 신문을 읽고 난 자력선 부장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세상에 알려 주는 것은 고마운데, 내용을 똑바로 써줘야지, 원……" "난 아무래도 과학원에 제출한 제 1 차 종합 브리핑의 보고서를 읽고 적당히 쓴 것 같은데요?" 원예 부장 추측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철수는 혹 윤식이가 남에게 발설하지는 않았나 하고 혼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발설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문 보도가 상세하지 못하고 요령부득이었기 때문에 빗발처럼 연구소에 조회해 오는 문의 때문에 연구 계획이 지연되었다는 데 있다. 그 날 저녁, 당장에 외국 신문의 특파원이 소장을 찾아서 회견을 청했다. 나이 50세가 넘어 보이는 외국 기자는 특히 해양 생물부에서 양식한 자두 만한 진주에 더 관심을 갖고 사진까지 찍어갔다. 국내 학회에 보고한 다음 해외의 관계 학회 회의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던 자력선의 종합 보고였던 만큼 그렇다면 ①식물 자력선의 발생을 태양력 이외의 '자료'에서 찾고 있느냐 ②자력선에 의한 로켓의 연구는 어느 정도의 진전을 보고 있느냐 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부소장이 진땀을 뺐다. 과학청에서도 이튿날 보고서를 일곱 통 더 작성해 달라는 지시였고, 우주 물리 연구소에서도 조회가 오고 엽록소 연구소에서는 일부러 사람을 보내왔다. 회색 양복을 입은 서른 대여섯 살로 보이는 청년의 명함에는 '국립 엽록소 연구소 식물 화학 반장 박한수'라고 적혀 있었다. 용건은 임업 실험지에 있는 여러 가지 나무의 잎을 백장쯤 얻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한수는 철수의 안내로 분지의 넓은 실험지를 거의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토마토, 사과, 배, 수박, 오동나무, 삼나무 등의 잎과 과일 백여 개를 골라 모았다. "미스터 김, 고맙습니다. 우리 연구소에선 다배체 연구가 한창이어서 자력선의 영향을 비교 아니할 수 없게 됐어요." "아무튼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서로 힘을 모을 날이 오지 않겠어요." 철수와 박한수는 전공 분야는 다르지만 학구심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엽록소 연구소에서 분명히 도전해 온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엽록소 연구소 측은 공문으로서 필요한 협조를 청하면 되는 것이었다. "엽록소 연구소 놈들이 당황했군." 한수가 돌아가자 철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부장님, 이번 테마는 화학반의 책임 아래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좋소, 그러나 너무 서두르진 마시오." 식물 화학 부장은 평소에 박한수가 덤비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한수는 당장에 7명의 임원들과 회의를 열고 식물 자력선의 모순점을 찾아 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만일 자력선에 의해서 식물이 생장이 5배 늘어날 수 있다면, 그 나무의 잎사귀의 세포들은 그 만큼 빛의 합성 작용을 활발히 해야될 겁니다. 우리는 자력선 연구소의 잎의 세포 구조를 분석해서 염색체를 분류해야 겠습니다. 국립 연구소의 권위와 전통을 위해서 여러분의 분발을 기대하겠습니다……" 계획에 따라서 10여 년 전에 미국이 월남의 게릴라전 때 사용한 적이 있는 '호지돌'과 인(P) 화합물을 선정된 잎에 붙여 놓았다. 이 약은 낙엽제 또는 고초제로 알려진 것이다. 화학반은 그럼으로써 수분이 없어질 때의 인 형질의 상태를 우선 파악해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수박의 염색체가 2배체와 4배체를 교배시켜서 씨 없는 수박과 똑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1주일 동안에 상당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부장님, 실험 결과를 보니까 자력 연구소의 잎이나 과일들의 염색체는 차원이 낮아서 말이 아니군요. 지금 우리 연구소에서 착수 중인 밀농사의 경우, 밀의 염색체가 56쌍과 70쌍에 달한 것을 실용화하려는 단계인데, 이 비율로 따지자면 자력선 연구소의 것은 평균 40쌍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고나 할까요……" 화학 부장은 한수의 보고서를 들여다보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거린다. 납득이 가는 그 무슨 새로운 사실이 반증된 셈일까? 이런 일이 있은 며칠 후, 엽록소 연구소 소장 이갑노 박사는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화학 반장 한수가 권한 것이다. 프레스 인터뷰는 30여 명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연구소 강당에서 열렸다. "먼저 개략을 설명하겠습니다. 지구상의 온갖 생명은 태양의 에너지를 근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식물이 섭취하고 있는 에너지와 총량은 전 세계의 하늘에서 날려오는 것의 불과 2.5% 밖에 안됩니다. 이렇게 미미한 양입니다만, 그 중에 농토가 섭취하는 에너지의 양은 겨우 3%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97%가 이용되지 않은 채 입니다. 까닭에 본 연구소의 사명은 이렇게 남아 돌아가는 태양 에너지를 더 많이 빨아들이기 위해서 잎이 넓은 식물을 만들어 효율을 높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박사는 근엄한 어조로 문제점을 지적해 나갔다. 씨앗의 교배로서 염색체를 다배체로 만들기 위해 저온 작용 외에 초음파를 이용하고 있다던가 벼의 알이 재래종의 2배나 되는 씨앗을 개량 해냈다던가 하는 설명이었다. 회견이 근 한 시간 계속 되는 동안 기자 중에는 자력선 연구소의 업적을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한 사람도 있었다. "본 연구소는 식물 증식의 문제를 화학적인 면에서 탐구하고 있고, 자력선 연구소는 물리학적 면에선 접근하고 있는 까닭에 서로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날의 회견 내용은 다음 날 조간마다 대서특필되어 '국립 엽록소 연구소에서 쌀과 밀의 다배체 재배에 성공'이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반도 일보만은 식물 자력선 연구소와 엽록소 연구소가 내년 봄 학회를 앞두고 시소 게임을 벌리고 있다는 단평까지 실어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뜻밖에 벌어진 과학 논쟁을 세상 사람들은 먼 산의 산불 구경처럼 대했을 뿐이다. 한동안 자력선 연구소의 권일송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의 수상자 후보에 올랐다는 외국 통신의 보도도 있어 떠들썩했지만 호수에 던진 돌의 여파가 가시듯이 세상은 다시 잔잔해졌다. 12월로 접어든 어느 날 하오, 권 박사와 자력선 부장은 소장실의 소파에 기대어 보기 드물게 환담하고 있었다. "이번에 들은 얘기인데, 우도의 섬 사람들이 요즘 과일은 그전 것보다 맛이나 향기가 덜하다고 불평해요. 이론상이나 실제로 지금 것이 더 맛이 있을 텐데. 역시 사람이란 소년 시절이나 자기 과거를 사치스럽게 생각하는 면이 반드시 있는가 봐." "너무나 자기 중심이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인구가 천 만을 넘어섰는데 과일의 크기나 수량을 대량 생산하지 않으면 요즘 꼬마들은 사과 맛도 알지 못하게요. 옛날 옛날 하지만 그 때의 재래종으론 어디 차례가 돌아올 것 같습니까?" "그 이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란 말이야. 이론부의 조수를 하고 있는 철수 군만 해도 정열만으로 독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소장이 평소에 철수를 아끼고 있는 것은 연구소 직원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철수는 철수대로 나이는 젊지만 식물 자력선에 의한 우주선의 추진력을 꼭 해결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김군을 장차 나이로비에 있는 원시 식물 연구소에 유학시켜 보면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력선 부장도 김철수를 아끼고 있는 눈치였다. 철수는 이날 밤 숙직에 걸려 있었다. 차를 타고 신공덕리의 연구소까지 오는 연도의 가로수들은 벌써 나뭇잎이 낙엽을 지우고 있고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지켜보는 듯이 북두칠성의 어미별인 북극성은 36도의 높이에서 변함 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유성이 많은 밤이군." 저도 모르게 유성 수를 손꼽고 있던 철수는 다섯 개나 목격한 일을 이상스럽게 여겼다. 임업 실험지의 나무들만이 초겨울에도 푸릇푸릇한 잎사귀를 자랑하는 듯 푸른 바다를 이루고 있는 사실이 마음 든든했다. 철수는 숙직 요령대로 이날 밤은 소나무 잎의 총수와 자력의 평균치를 전자 계산기로 처리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이웃 마을의 멍멍개 소리 마저 멈춘 새벽 3시쯤이었다. 마치 번개가 반짝이는 듯 야광탄을 터뜨리는 듯 창 밖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고요 그대로였다. "이게 웬일일까? 소리도 없는 야광!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수는 연구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상한 빛의 정체는 아무리 돌아다보아도 찾아 낼 수 없었다. 유독 밝아야 할 광원이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철수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동안 약 3분이 지났을까. 야광은 천천히 꺼지기 시작하여 분지의 남쪽에서 마지막 불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군대의 훈련도 아니겠고 이게 무슨 신호일까?" 철수는 연구실로 들어오자 바로 전화기를 붙들었다. 단추에 적힌 번호만 누르면 그만인 전화기였으나 소장 관사에서 되돌아오는 호출 신호가 더딘 것만 같았다. "웬일이요. 이 밤중에. 뭐? 이상한 광채를 보았다고. 김군! 이 일을 경찰국에 연락하고 당장에 연구소원 전원을 비상 소집 해주게." 김철수는 소장의 흥분한 말을 듣자 비로소 그 무엇인지 긴장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권일송 박사는 자기대로의 예감에 취하면서 이 일을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를 한참 동안 생각하며 서 있었다.   괴물의 출현   급히 연구소로 달려온 권일송 박사는 철수로부터 이상한 광선에 관해서 자세한 얘기를 물어보았다. "나는 지난밤에 우도의 해양 생물학 분실에 들렀을 때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단 달이야. 어떤 날 밤에 북극성이 반짝이는 쪽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코발트 빛깔엔 윤색한 듯한 밝은 비행체가 서쪽을 향해서 지나가지 않아. 우도의 위도로 보아 북극성은 30도 쯤의 높이에 보이는데, 그 광채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이란 눈을 깜박할 사이거든. 맨 처음에는 비행접시의 환상인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다른 관측소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을 게고 그 때부터 마음 한 구석이 공연히 놓이지 않았었지." 오른손으로 안경을 만지면서 말하는 권 박사의 눈이 이 날밤은 유난히 깊어 보였다. 거의 총동원되다시피 연구소원들이 차례를 다투면서 모여들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났기에 한 밤중에 비상 소집이야. 그런데, 박사는 왜 안경을 벗고 있소?" "앗, 잊어 먹었구나. 너무 급하게 서두른 게 잘못이야. 책상 위에 놓은 걸 그대로 두고 뛰어 나왔지." 임업 부장 박시영이 한바탕 웃어 넘겼다. "밤중에 여러분을 비상 소집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 오늘 당번을 맡은 김군이 이상한 광채가 임업 실험지 변두리에서 빛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대로 넘길 수도 있겠는데, 태양의 자기 활동이 가장 최소로 떨어진 요즘의 일이고 또한 나로선 우도 여행이래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한 일이 있어 여러분과 의논하려는 것이오." 권 소장의 설명을 들은 연구소인들은 다시 한 번 긴장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들은 정찰반과 기동반과 연결반의 세 가지 반을 짜기로 했다. 정찰반은 평소에 감각이 예민하고 관찰력이 발달한 사람들을 잡아 제 일선에 배치했는데, 김철수도 정찰반에 소속되었다. 기동반은 일종의 관측반으로서 여러 측정기로 장비하고 현장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온갖 준비를 갖추었고, 연락반은 경찰 또는 군대의 물리 화학반과 협동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 총지휘는 역시 권 소장이 맡아서 정찰 반장을 겸임했다. 정찰반이 임업 실험지를 헤매면서 이상한 광채를 찾았을 때는 벌써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고 있었다. "송영철 경위올시다. 저 유지 같은 이상야릇한 괴물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한참 동안 대낮처럼 밝은 빛을 냈다고 신고를 받았는데, 지금은 별로 밝지도 않습니다. 권 박사님 어찌된 셈일까요?" 송 경위가 먼저 거수 경례를 붙이고 권 박사에게 설명하면서 혹 폭발물이 아닌가 싶어 접근 못하도록 새끼줄을 쳐 놓았다고 말했다. "과연 이상한 물체로군. 저것은 광물성일까 식물성일까?" 권 박사는 혼자 중얼거렸다. 괴물체는 마치 아네모네 꽃나무를 수백 배나 확대한 것처럼 유리 같은 촉수를 수없이 뻗고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든 밤송이나 다름없지 않아. 도대체 동물일까? 식물일까?" 갸우뚱거리면서 생각해 보았으나 도저히 속단할 수 없었다. 괴물의 촉수는 결코 투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리처럼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반투명이었고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런 물체에서 백조처럼 밝은 빛이 나타났단 말이야. 발전할 수 있는 기능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 저 반투명의 둥근 몸체에 그 비밀이 숨어 있으리라.' 권 박사는 홀로 생각에 잠기면서 괴물에 접근하는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 맨 먼저 돌을 던져 보았다. '폭' 하는 소리가 났을 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저것이 광물성이라면 더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나겠지. 광물성은 아닌 모양이다. ' 권 박사의 지시에 따라 정찰반은 이번에는 경찰견을 그 쪽으로 접근시켜 보았다. 개가 철없이 그 물체를 보고 컹컹 짖다가 촉수를 물어뜯자 돌연 변화가 일어났다. "앗! 저것 보아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숨이 꽉 막히는 순간, 순식간에 경찰 개는 그 유리 같은 촉수에 붙들려 뼈와 가죽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드라큘라처럼 괴물체는 눈 깜박하는 사이에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경찰 개를 미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권 박사님? 저 물체는 분명히 생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경찰개 토니가 가엾게도 희생되고 말았는데 총을 쏘아서 잡아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송 경위는 복수심에 가득 찬 사내처럼 권총을 빼들고 괴물체를 쏘아댔다. 그러나 괴물체에 맞은 총알은 유리 같은 몸체로 들어간 채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했다. 괴물체는 깨어지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여전히 땅에 뿌리가 박힌 듯 요동조차 하지 않았다. 송 경위는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이 일을 일단 본서에 보고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뛰어가 버렸다. 이미 동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대로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현장에는 몇 감시원을 남겨 두고 우리도 일단 연구소로 되돌아가서 대책을 세워야겠군." 권 박사는 이렇게 정황을 판단하고, 김철수 외 다섯 사람을 감시원으로 남겨 놓고 일단 연구소로 철수해 버렸다. "저 물체는 분명히 지구 위의 생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로봇이라면 동물을 해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동물의 피만 빨아먹는다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소장! 저의 소견은 이렇습니다. 만일 저 괴물이 지구상의 생물이라면 총알을 맞으면 그 세포가 파괴되어 죽기 마련입니다. 총알을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점은 기필코 괴물이 마치 연체동물처럼 특수한 세포 조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동물의 피만 빨아먹는 점으로 보아 괴물은 수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안경을 벗어 놓고 뛰어나온 임업 부장 박시영이 이러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현장에 연락해서 소방차로 물을 퍼부어 보면 어떨까. 수분에 대한 반응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권 소장은 수분에 대한 반응을 알고 싶었다. 연락반은 워키토키로 현장의 김철수를 불러 내고 소방차의 물을 쏘아보도록 지시를 전달했다. 대기시켜 놓은 소방차는 당장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헬멧을 쓴 소방대원이 호스를 들이대고 용감하게 물을 쏘았다. 그러나 괴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물을 빨아들이지도 않고, 더구나 움직이지도 않아 이번에는 무슨 광물체처럼 생각되었다. 감시원들은 다시 겁을 집어먹으며 서로 불을 던져 보았으나 괴물은 꿈쩍도 않았다. 불에 대한 반응도 전혀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권 박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이 사태를 어떻게 단정하고 귀결을 지어야 할 것인가? 일단은 지구 외의 우주 생물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났지만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공포의 막이 내려 있어 어쩔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현장 감시원의 당황한 보고가 전해왔다. "소장 큰일났습니다.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어, 이쪽을 향해서 걷고 있습니다." 김철수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시간은 여덟시 오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괴물은 이제 보니까 몸 속에 무수한 렌즈 모양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괴물은 혼비백산하여 뛰어 도망가는 사람들을 결코 쫓아가지는 않고 소리 없이 임업 실험장으로 향했다. "소장, 괴물이 임업 실험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느티나무 아래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김철수는 시시각각으로 괴물의 동정을 연구소에 보고했다. 괴물은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 무수한 촉수로 나무 뿌리 근처를 감았다. 과연 거창한 느티나무가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사귀로 차례차례 시들기 시작하지 않는가! 느티나무는 순식간에 마치 시래기처럼 바싹 마르고 말았다. 이 놀랄만한 사건이 과학청에 보고되어 그 뉴스는 당장에 호외로서 퍼지고 라디오도 임시 뉴스로 이 일을 보도했다. 우주인이 한국에 내습하여 동물과 식물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뉴스는 온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고 말았다. 권 박사는 괴물의 정체가 이번에는 알쏭달쏭 해졌다. '옳지. 저 놈이 느티나무의 생기를 빨아먹는 것으로 보아 식물 내의 수분이 필요한 모양이다. 보통 물은 빨아 드리지 않고 동물의 피를 빨아 먹는 것도 틀림없이 혈액 속의 수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상태에 있는 동물성 수분과 식물성 수분이 필요하다는 점은 그 수분으로 그 무엇인가 합성하려는 의도에서 일 것이다.' 권 박사는 혹시 괴물이 순수한 수분을 흡수해서 중수소를 만들 작정이 아닌가 하고 짐작도 해 보았다. 괴물이 밤중에 백열처럼 밝은 광선을 발산한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듯 했으나, 권 박사는 아직은 속단하지 않았다. 괴물과 직접 대결해 보지도 못함은 아직도 그 괴물과의 통신 방법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의 문을 열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엽록소 연구소의 식물 화학 반장 박한수였다. "우주인이 임업 실험지를 헤매고 있다지요. 큰일났군요. 도와 드리려고 왔습니다." 박한수는 권 소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의 옆엔 22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 대학생이 따라와 있었다. 여학생은 영리하게 보이는 미인이었다. 박한수는 여동생이라고 권 박사에게 소개했다. 박한수가 여동생과 함께 현장으로 뛰어 가본즉, 느티나무의 수분을 빨아먹은 괴물체의 몸은 불어 있었다.   멀리서 이 괴물을 처음으로 본 한수는 동생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마치 말미잘이 둔갑할 것 같구나. 저 적갈색 촉수의 끝이 노랗고 흡반의 눈부신 녹색은 말미잘과 비슷하단 말이야." "오빠, 말미잘이 무엇이지? 처음 듣는 이름인 것 같아" 한수는 워키토키를 들고 있는 철수를 발견하자, "설명은 나중에 할게." 하면서 그쪽으로 다시 뛰어갔다. 키가 철수보다 큰 한수는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 괴물은 어찌된 셈입니까?"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철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시선만은 결코 괴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다. 괴물은 사람의 존재를 전혀 무시하고 차례 차례로 촉수를 뻗어 감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씩 빨아들일 때마다 몸집이 점점 커졌다. 이제는 코끼리만하게 비대한 괴물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은 꼴이었다. 그러나 머리며, 눈을 가려 내기 어려워 그 놈이 과연 잠들고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저놈을 생포할 수는 없을까요? 아무래도 걷는 속도가 느린 것을 보니까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 같소." 어느새 부하들을 데리고 되돌아 온 송영철 경위가 철수에게 의논했다. 멀리서 괴물을 포위하고 있는 경관들은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생포요? 생포해서 뭘 할 작정이요. 결코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저놈의 정체도 모르고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무슨 보복을 당할는지 책임지겠어요?" 박한수가 나서서 송 경위를 도리어 나무라려고 한다. 철수는 송 경위에게 말을 했다. "한수씨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송 경위님, 좀 더 동정을 살핀 다음에 우리가 취할 행동을 통일합시다." 권일송 순장의 지휘 본부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철수 역시 저 괴물이 혹 중수소를 먹고사는 동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 중수소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의문은 풀리지 않는 채였다. "오빠, 소금을 뿌려 보면 어때요? 보통 생선을 절일 때처럼 소금으로 처리해 보면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아." 한수의 여동생이 뜻밖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녀는 유난히 검은 눈썹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을 철수의 얼굴로 옳기면서 말한 것이었다. "저 분은 누구십니까?" 철수가 물어 보자, "참, 소개를 안 했군요. 내 누이동생입니다. 금강 여대 3 학년이지요. 수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한수는 여동생을 철수에게 인사시켰다. "박진나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이번에는 침착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미스 박의 의견은 그럴 듯 합니다. 그러나 소금에서 나트륨(Na)이 추출되는 사실을 잊었나요, 소금으로 생선은 절일 수 있지만 글쎄 저 괴물이 가만히 있을까요?" 철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이 여대생이 괴물을 장난감으로 생각하나 싶었다. 아직은 괴물이 난폭하지 않아 사람을 해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소금을 뿌려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철수는 한수를 쳐다보면서 설명했다. "만일 저 괴물의 몸 속에 소립자만으로 되어 있는 물질이 있다면 소금 속의 나트륨 핵이 반응하여 당장에 폭발할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수소탄이 아니라 눈앞에서 나트륨 탄에 불을 붙일 위험성을 도외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괴물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괴물은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별안간, 워키토키가 떠들기 시작하여 철수를 비롯한 감시원은 임업 부장 일행과 교대한다는 지시가 전해왔다. "박형, 교대하게 되었으니 연구소로 돌아가겠습니다." 한수는 현장에서 괴물의 동태를 더 관찰하고 싶은 눈치가 엿보였다. 철수가 감시원을 보아서 철수하자, 박진나는 뒤따라 왔다. "연구소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스커트 대신에 통이 좁은 하늘색 바지에 분홍색 잠바를 입은 진나는 쑥스러운 웃음을 띄우면서 철수 옆으로 쫓아왔다. 이제는 긴장이 풀린 철수는 배가 고픈 생각이 갑자기 몰려 왔다. 그러나 연구소에 도착해 본즉 아직도 회의는 계속하고 있어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회의의 초점은 괴물이 어떻게 해서 의사를 소통해 보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고 있었다. 마침내 자력선 부장은 주장했다. "괴물이 실험지의 나무 물을 빨아먹는 것으로 보아 전자 반응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자파를 이용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글쎄, 전자파 송수신도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파장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해 야 옳을까?" 권 박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파장의 선택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괴물은 지구 위의 생물이 아닌 만큼 음파를 이용한 음성으로 소통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빤한 일이다. 그간 여러 사람들이 괴물을 둘러싸고 떠들어 보았으나 아무 반응이 없는 것도 다만 언어가 다른 까닭만이 아닐 것이다. 이론 부장은 맨 처음에는 적외선으로 통신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본즉, 적외선은 지구의 스케일에서나 효과적이지 우주적인 통신 방법은 못될 것이라는 결론에 부딪치고 말았다. "소장님, 아무래도 미국에서 착수했던 수소파를 써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파장도 센티미터로 고정되어 있어서 전파 천문학계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론부들은 수소파가 적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우주의 모든 물질의 기원은 수소에 있으며, 수소가 결합 반응해서 헬륨으로 변하고 헬륨이 반응해서 산소, 네온, 질소 등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전 우주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가스 모양의 성운이나 허공에 먼지처럼 부서진 우주진 역시 수소로 구성되어 있다. 까닭에 가장 공통적인 수소의 파장을 이용하는 길이 적당하다. 더구나 수소는 온도가 낮을 때는 발광하지 않지만 적합한 조건 아래서는 수소 원자의 회전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원자가 플러스 방향에서 마이너스 방향으로 회전을 바꿀 때 발산하는 에너지의 차가 바로 파장 센티미터의 광양자의 에너지에 해당한다. 미국의 그린벤크에 있는 국립 전파 천문대에서 드레이크씨가 우주인과의 통신 방법으로 쓰고 있는 파장도 바로 이 수소 센티 파장인 것이다. 이론 부장은 21센티 파장에 괴물이 동조하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권 소장에게 이를 우겼다. 철수가 생각하기에도 이론 부장의 주장이 가장 적당한 해결책일 것 같았다. 전우주에 공통된 것을 이용하는 일이 쉬울 것이다. "그러면 제 1 차로 이론 부장의 의견에 따라 수소의 21센티 파장으로 통신해 보기로 정합시다." 권 소장은 연락 반장에게 이 회의의 결론을 과학부에 보고하고 필요한 지원들 얻도록 지시했다.   괴물의 정체   박진나는 회의의 결론은 알쏭달쏭했으나 연구소원들이 무슨 신호로서 괴물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21센티 파장에 맞추어 덮어놓고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물어 볼 작정일까?' "사람이 쓰는 말과 우주 생물이 쓰는 말 사이의 빈도 수가 달라 서로 통하지 않을 텐데……" 사실이지 한국말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아, 어, 발음처럼 영어에서는 E, O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그들은 아, 어의 빈도 순서로 된 말로서 어떻게 우주 생물과 대화할 작정일까? 박 진나의 이런 걱정도 아랑곳 없이 괴물과 통신하기 위한 장비 동원은 착착 진행되었다. 상오 10시를 기하여 권 박사를 비롯한 과학진이 현장에 도착하여 1백 미터 떨어진 언덕 위에 수소 전파 송수신기를 장치했다. 괴물은 비대한 몸을 움츠린 채 여전히 잠들고 있는 듯 요동하지도 않고 있었다. "이론 부장! 송신해 보시오." 권 박사의 신호로 이론 부장은 마이크를 한 손에 들고 괴물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구에 사는 인간이다. 우리는 지구에 사는 인간이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 확성기를 통해서 들리는 목소리는 바로 수소 전파와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괴물에게도 전파로서 들릴 것이다. 괴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알았다. 그러나 이론 부장 꾸준히 호출을 계속했다. "너는 인간을 해칠 작정이나? 또는 도우려는 생각이냐? 무슨 용건으로 지구 안에 나타났느냐? 언제 떠날 예정이냐?" 두서 없이 마구 방송하는 동안 갑자기 일어서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흐느적흐느적 하는 촉수의 세 개를 마치 안테나처럼 꼿꼿하게 세우고 주의를 모으려는 자세를 보였다. "소장님, 분명히 신호를 포착한 듯한 눈치입니다. 수소 전파가 동조하는 모양입니다." 철수는 권 박사의 옆으로 다가서면서 괴물의 배꼽 둘레에 있는 수많은 렌즈 모양의 혹을 가리켰다. "아마도 몸 안에서 발광한 광채를 저 렌즈 혹을 통해 발산시키는 모양입니다." "음, 그것도 그럴 성 싶군. 그런데, 수소 전파가 일부 밖에 동조하지 않는 모양이지, 어찌 된 일인가?" 권 소장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박 진나가 방자하기 나서서 말했다. "소장님, 보통 말을 신호하면 저 괴물은 마치 암호처럼 들리지 않겠어요? 어느 정도의 인텔리인지 몰라도 혼자서 아무 기구도 없이 지구인의 말을 해독한다는 것은 무리일 거에요. 차라리 소수 신호를 보내 보내세요." 어이가 없는 순간이었으나 아무도 진나의 발언을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저는 수학을 전공하고 있으니까 생각이 났어요. 1, 2, 3, 4, …… 이 정수대로 신호하면 4와 6은 2로 나눌 수 있고. 3으로 나눌 수도 있지 않아요. 그러면 상대방이 해석할 때, 나눌 수 있는 숫자는 뜻이 많은 것 같아 혼선을 일으키기 쉬울 거예요. 절대로 혼선이 일어나지 않고, 한 가지 뜻밖에 없는 숫자가 바로 소수가 아니겠어요." "소장님, 진나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는 듯 합니다. 소수표를 가져와서 순서에 따라 송신해 보면 어떨까요?" 철수가 찬성하는 바람에 권 박사도, "그래, 그렇게 해 보지. 아마도 원예부에 소수 표가 비치되어 있을 거야." 연락반원이 뛰어가서 가져 온 소수표를 놓고 방송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괴물은 어리둥절했던 자세를 풀고 언덕을 향하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괴물을 포위하고 있던 경관이며, 구경꾼들은 깜짝 놀라서 저마다 길을 비키며 도망쳤다. 괴물은 신호 소리를 따라서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공연히 소수 얘기를 했나 보다. 괴물이 저렇게 발신기 쪽으로 걸어가면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진나는 마음 속으로 불안을 감추지 못했으나, 용감한 이론 부장은 태연스럽게 소수 표를 읽고 있었다. 철수는 재빨리 달음박질해서 이론 부장 옆으로 다가서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방어하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소수표가 111에 이르렀을 때, 괴물은 웬일인지 걸음을 멈추었다. 괴물에게는 총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관은 모두 총을 겨누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이 멈추자 소수표의 방송을 일단 중지했다. 사실은 아슬아슬 했던 순간이었던 만큼 괴물이 주저앉자 사람들도 이마의 식은땀을 씻어 냈다. 철수는 3미터까지 가까이 온 괴물을 지켜보면서 이론 부장에게 말했다. "부장님, 저 괴물의 지능 지수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부장께서 읽어 내린 소수 표는 말하자면 음악의 도, 레, 미, 파, ……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음악에서는 도에서 도로 한 옥타브가 끝나는데 저놈이 별안간 멈추는 것을 보니 소수표의 111로서 저놈들의 한 옥타브가 끝나는 모양입니다. 오늘 아침 경찰 개를 잡아먹는 솜씨로 보아 분명히 로봇은 아닌데 도대체 IQ의 정도를 정확히 알아 낼 수가 없군요." "조금만 더 생각하면 풀릴 것도 같아. 소수에 이번에는 0을 붙여서 호출해 보겠어." 이론 부장 이번인 02, 03, 05, 07, 011, …… 등의 신호를 보냈다. 괴물은 다시 일어서더니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하고 갈팡질팡이다. "옳지, 저놈의 감응도를 알 수 있겠다. 소수 신호에 0을 붙일수록 활동은 델리케이트하게 되고, 소수 자체는 기호로서 언어 감응을 나타내는 걸 거야." 이론 부장 착상에 따라 전자 계산기로 해답을 내본 즉 그럴듯한 용어표와 행동표가 작성되었다. 송 경위가 작업 중에 살며시 물었다. "그 소수란 무엇이오. 아까부터 소수 소수 하던데 알 수가 있어야지." 철수는 자기가 대답하는 대신에 발신기 옆에서 다이얼을 들여다보고 있는 박 진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수 말씀이에요? 보통 숫자 중에서 1하고 자기 자신의 수로 밖에 나눌 수 없는 숫자지요. 예컨대 2, 3, 5, 7, 11, 13, …… 등과 같은 소수를 쓰면, 혼동하지 않으니까 통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에요." "알고 보면 별다른 것이 아니군요. 채소만 먹으면 소증이 생기듯이 소수란 깨지지 않는 수로군." 송 경위는 뻔한 일을 공연히 물어 보았구나 하는 표정을 애써 지으면서, 그들의 곁을 떠났다. 새로 작성된 신호표에 따라 이번에는 철수가 교대해서 괴물과 대화했다. "너는 어디서 온 생물이냐?" 마이크 소리는 징징 울렸으나, 괴물의 대답 소리는 끼이 하는 벙어리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수신기로 해독된 대답은 훌륭한 문답으로 "나는 프록시마 별에서 사는 생물이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록시마 별이 어디에 있는가 알아다오." 철수는 반원에게 부탁하고 질문을 계속했다. 프록시마 별인즉, 태양계에 가장 가까운 항성인데 광속으로 지구까지 도달하자면 4백 27년이 걸린다. "너는 무엇하러 지구에 왔느냐? 그리고, 언제 떠날 작정이냐?" 철수의 질문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괴물 쪽으로 집중되었으나, 끼-끼 하는 벙어리 소리 때문에 당장 이 대답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해독된 대답은, "그 사명은 나도 모르겠다. 다만 비행 대장의 명령으로 낙하했을 따름이다. 언제 떠나느냐고? 그것은 알 수 없다. 비행 대장이 일방적으로 호출하기로 되어 있을 뿐이다." "너는 왜 오늘 아침에 동물의 피와 나무의 수분을 빨아먹었느냐?" "배가 고파서 그랬다. 그러나 나는 결코 지구인과 적대적은 아니다. 왜냐 하면 나나 여러분이나 프록시마들의 노예나 다름없다. 우리는 노예끼리 싸우지 않는다." 노예라는 말을 듣자 철수는 권 박사와 이론 부장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노예라니 무슨 뜻이냐?" "두고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대답하자, 괴물은 돌연 그 자리에서 벌벌 떨더니 마치 전기 쇼크라도 받은 듯이 임업 실험장의 한 지점을 향하여 나무를 파헤치면서 헐레벌떡 뛰어갔다. 소수 방송으로 가까스로 괴물과의 통신에 성공한 감시 반원들은 별안간 허둥지둥 도망가는 괴물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 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송 영철 경위가 지휘하는 경관대는 마치 범인을 추격하듯 당장에 그를 뒤쫓아 괴물과 함께 숲 속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장님, 이게 웬 일일까요?" 철수는 한 손에 붙잡고 있던 마이크를 내려놓으면서 권 박사에게 물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걸. 웬 일일까. 순조로운 대화 끝에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은 혹 우주로부터 무슨 지령을 받은 게 아닐까? 우리가 쓰고 있던 파장은 우주 통신의 가장 기본적인 전파니까 상대방에도 통했을는지도 몰라." 과연 상대방의 송수신 장치에 방수되었을까. 중성 수소의 21센티 파장은 정말로 우주의 에스페란토 말과 비슷한 것일까? 괴물과의 도깨비 장난 같은 대화를 듣고 모두 신통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파장이 과연 전 우주적인 통신 방법이라고까지는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권 소장이 호령조로 말했다. "우리도 뒤를 쫓아가 보자. 코끼리 만하게 커진 괴물이 또 무슨 짓을 할는지 알 수 없지 않아." 자력선 연구소원들은 무전기며, 마이크 장치를 걸치고 괴물이 도망간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한편, 후닥닥 자리를 뜬 괴물은 임업 실험장의 나무를 헤치고, 정신 없이 제자리로 뛰어와서 주저앉았다. 괴물은 숨도 헐떡이지 않고, 또랑또랑 주위를 살펴보더니 렌즈 비슷한 눈을 깜박거렸다. 다부지게 뒤쫓아온 송 경위는 가쁜 숨을 억누르면서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괴물을 멀리서 포위하고 여전히 경계 태세를 취하였다. "이건 맨 처음에 괴물을 발견한 장소가 아닌가. 저 놈이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구나." 누구보다도 먼저 뛰어온 철수가 숨을 헐떡이면서 중얼거렸다. 소수 통신을 제안한 여대생 박 진나도 날쌔게 뒤따라와서 철수 옆에 서자 생긋 웃어 보였다. 비로소 관심을 가진 철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느 대학에 다니세요?" "금강 여대에 재학하고 있어요. 시시하지요?" "수학을 전공한다니 퍽 희한합니다. 장차 학교 선생을 할 작정인가요?" "글쎄, 그건 두고봐야겠어요." 철수와 진나가 괴물을 지켜보면서 얘기하고 있는 동안 권 박사 일행이 옮겨왔다. 전파 장치를 풀어놓고 그들은 또 다시 괴물과 통신하기로 했다. 그러나 철수가 마이크를 대고 아무리 숫자를 불러대도 괴물은 못 들은 척 아무 대답이 없다. 마음만이 초조한 가운데 이럭저럭 한나절이 지나자 권 박사는 다시 감시반 몇 사람을 남기고 연구소로 일단 되돌아 가버렸다. 철수는 이날 새벽처럼 대여섯의 감시반원과 남게 되자 참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진나도 서성거리다가 남기로 작정했는지 참나무 근처의 땅 위에 덜렁 주저앉았다. 엽록소 연구소의 화학 반장 박한수는 여동생을 남긴 채 괴물이 물을 다 빨아먹어 버린 느티나무의 가랑잎을 한 묶음 들고 권 박사와 함께 가버렸다. "이제는 지구전으로 옮겼는 걸. 손으로 생포할 수 없는 것이 분하다." 철수는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혼자 말로 한탄했다. "저 놈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남의 땅에 와서 낮잠을 자다니 뱃심이 이만저만한 놈이 아니군." 서로 괴물을 욕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전만 같아도 이상한 괴물체가 나타났다면 소문만 듣긴 여기 저기서 구경오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뒤끓겠지만, 이제는 세상이 저마다 할 일을 갖게 되어 자기와 직접 관계 없는 일은 넘겨다보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까닭에 이웃 마을 사람들도 아침에 잠깐 구경하고 되돌아가 버려서 괴물과 현장은 한적한 가운데 감시원들의 쉴 새 없는 경계의 눈만이 번쩍이고 있었다.   우주선의 출현   감시 반원은 연구소의 구내식당에서 배달해 준 도시락을 먹고 저마다 큰 물 주전자를 기울여 더운 숭늉을 따라 마시며 잡담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늘에는 벌써 별이 총총 내보이며 반짝이기 시작하고 북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된 하늬바람은 이따금 찬 기운을 휘몰아치어 오슬오슬했다. 주위가 어두워질수록 괴물만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서치라이트의 눈부신 흰 광선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철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저 괴물이 과연 프록시마 별 사람들의 노예일까? 노예 정도의 존재로서 팔다리의 빨판으로 짐승이며 식물의 물을 빨아먹을 수 있으니, 프록시마 별 사람들의 실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더구나 굉장한 빛을 낼 수 있는 발전 장치를 몸 속에 갖추고 있으니 지구 위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문명이 발달한 것은 틀림없다. 만일 우주인이 여기에 나타난다면 인류를 적대시할까? 또는 친구처럼 반갑게 대할 것일까 아무튼 두고봐야 하겠지만 밤도 캄캄해 졌으니 저 여대생을 우선 돌려보내야 한다.' 한편, 박진나는 그녀대로 묵상에 잠겨 있었다. '밤이 오면 왜 사람들은 외로운 생각이 드는 것일까. 하늘에는 해보다 훨씬 크고 밝은 별이 은하계만 해도 1천억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왜 지구의 사람들은 태양만을 의지하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 다른 별에서 온 생물이 잠들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가까이 가 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평소에 온 우주를 다 아는 척하고 있지만 막상 일을 당하면 사람의 힘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이 있어서 모든 섭리를 지배하고 있다지만 이 경우에는 하느님의 전지 전능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염없이 쫓고 있을 때 철수가 가까이 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미스 박, 이제는 날도 어두워지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집에도 걱정하고 있을 거요. 우리는 여기서 밤새도록 놈을 지켜봐야 하니 미스 박이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요." "김 선생,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게요. 우주 생물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여러 가지 의문이 샘물처럼 솟아 나와서 그래요." 박진나는 방긋 웃으면서 자기가 있고 싶을 때까지 있겠다고 우겼다. 여자가 고집하는 일을 구슬러 본 적이 없는 철수는 더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남쪽 하늘 쪽에 유성이 떨어지듯 아무 소리 없이 코발트색의 불빛이 하나 나타났다. 밤하늘을 날으는 비행기의 빨갛고 파란 불빛보다 훨씬 빠른 그 불빛은 이쪽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 괴물을 지키던 사람들은 경관이고 감시반이고 할 것 없이 갑자기 불안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혹 우주인이 나타나는 것이나 아닐까? 송 경위는 재빨리 소리쳤다. "일단 후퇴해야 한다. 경관은 빨리 언덕 너머로 후퇴해서 집결하라." 불안을 감추지 못한 경관들은 후다닥 후다닥 일어서서 언덕을 목표로 달음박질을 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임업 실험장 상공에 다다른 불빛은 하늘 높이 별안간 멈추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불빛의 모양이 비행접시처럼 둥그런 것인지 로켓처럼 그 끝이 뾰족한 것인지 아직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철수도 급히 감시반원을 언덕 너머로 피난시키고 코발트 불빛의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저게 무슨 불빛이냐?" 연구소의 권 박사가 워키토키로 물어왔다. "아직은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철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권 박사가 아직도 언덕 아래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제기랄, 가라고 할 때 돌아갔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 텐데…… 공연히 돌아와서 말썽을 부리는구나.' 철수는 어둠을 뚫고 이상한 괴물체를 응시해 보았으나 무슨 모양인지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저 우주선도 역시 투명체로 만들어진 것일까? 모습을 짐작할 수 없다니 말이 되나. 더구나 고요 그대로 공중에 정거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철수는 이럴 때일수록 더 침착해야 된다고 자기 자신에 타이르면서 우주선의 동정을 주시했다. 함께 지켜보던 동료들을 되돌아보니 그들도 두 눈을 부릅뜨고 공중에 정지한 코발트 불빛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소수 전파 수신기에서 끼이 끼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어 있다시피 몸을 움츠리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괴물 쪽으로 돌렸다. 어둠 속에 서치라이트의 밝은 광선이 둥그렇게 점찍고 있던 괴물은 돌연 몸을 가볍게 흔들더니 발광하기 시작하지 않는가! 괴물의 푸르스름한 몸빛은 차츰 밝아져서 마침내는 수천 룩스에 달할 만큼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이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으며, 그 중에는 엎드려서 고개만 내밀고 놀라움에 떠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공중 높이 떠 있던 우주선은 괴물의 신호 불을 알아보았는지 거의 불을 끄다시피 컴컴한 모습으로 쑥 내려와서 괴물이 서 있는 근처의 보리밭 위에 착륙했다. 헬리콥터처럼 요란스러운 프로펠러의 폭음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로켓처럼 굉장한 분사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우주선은 마치 무성 영화의 화면처럼 싱거운 까닭에 사람들은 더욱 신경을 날카롭게 긴장 아니할 수 없었다. 철수는 나지막한 소리로 권 박사에게 보고했다. "소장님, 방금 우주선이 착륙했습니다. 우주선의 모양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둥그렇게 보일 뿐, 그 똑똑한 형태는 짐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괴물이 우주선 쪽으로 걸어갑니다. 층계처럼 보이는 사다리를 괴물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몸집이 코끼리만 한데도 빨려 들어가듯 출입문을 넘어서니까 그렇게 밝던 불이 꺼진 듯이 보이지 않는군요.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지켜 볼 작정입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하고 우주선 쪽을 살피고 있었다. 진나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꾹 누르고 처음으로 보는 기적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불끈 쥔 두 손에서는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우주선의 문이 다시 열려 불빛이 새어 나왔다 괴물 비슷한 그림자가 서너 개 보일까 말까할 때, 돌연 휑! 하는 소리가 들리자. 철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치 현기증에 휩쓸린 듯 철수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 저기서 앗! 엇!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 역시 발목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송 경위도 진나도 나머지 경관들도 모두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철수의 손에 꽉 쥐인 워키토키만이 홀로 외치고 있었다. "감시반! 감시반! 김철수 없느냐?" 권 박사의 초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현장의 사람들은 마취제라도 마신 듯 모두 쓰러지고 아무 대답도 헐었다. 괴물들은 우주선으로부터 걸어나와 사람이 깔려 있는 언덕 근처에서 한 사람씩 살펴보더니 그 중 세 사람을 끌어안고 되돌아 가버렸다. 권 순장이 급히 현장에 출동했을 때는 우주선은 그림자조차 없고, 언덕 너머 여기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새로 나온 연구소원들이 붙들고 흔드는 바람에 졸도한 사람들은 하나 둘씩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권 박사는 맨 먼저 철수를 찾았으나 아무리 전등으로 비추어보아도 철수는 없고, 다만 워키토키가 땅 위에 뒹굴고 있을 따름이었다. 송 경위 없어졌고 박진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소장님! 아마도 세 사람이 납치되어 간 듯 합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임업 부장 박시영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큰일 났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야. 여보게, 그 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어떻게 됐단 말인가?" 권 박사는 의식을 되찾은 감시반원을 붙들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글쎄요. 휑 소리가 나자 발목의 기운이 쑥 빠지고 머리가 아찔하더군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써 보았으나 온몸의 밸런스가 무너져서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아 저절로 쓰러지자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그 연구원은 아직도 얼빠진 표정으로 더듬더듬 설명했다. "음! 마취제도 전개 쇼크도 아니고 하물며 광선이 번쩍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레이저 광선의 작용은 아니겠고 도대체 무슨 쇼크를 받았을까?" 권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워키토키를 주어들고 우주선이 내려앉았다는 지점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권 박사는 걸으면서 마음 속으로 여간 후회하지 않았다. '괴물을 감시시키지 않았던들 이런 사고가 생기지 않았을 것을 내가 너무 꼼꼼했나 보다. 그렇지만 과학자로서 모처럼 대하는 우주 생물의 생태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진리를 캐내는 일에 충실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생기고 또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진리에 접근할 수 없으니 진토를 위한 이율배반은 어느 시대나 고역이란 말이야…… 열댓 명의 사람이 우주선이 내렸던 보리밭으로 와서 밝은 서치라이트로 우주 물체의 자취를 비춰 보았다. 무슨 실마리라도 잡아서 도깨비 장난 같은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리의 푸릇푸릇한 새잎은 군데군데 가볍게 밟혀 있을 뿐 이렇다 할 증거나 단서를 잡을만한 물건도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소장님, 괴상하군요. 프록시마 별의 생물들이 어떤 문명을 갖고 있길래,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먼 곳에서 우주 공간을 내왕하려면 최소한 광속을 이용한다더라도 무슨 흔적쯤은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임업 부장의 의문은 바로 모든 사람의 의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우주인들이 혹 중력을 좌우할 수 있는 새로운 소립자 장치를 갖추고 있지나 않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지구 위를 오갈 뿐만 아니라, 사람의 균형을 방해하여 실신케 하는 일은 중력 통제 장치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인데……" 권 박사 일행이 우주선의 기능을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있는 동안 철수와 진나와 송 경위는 우주 생물에 납치된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납 치   우주선은 여전히 비행하고 있는데 송 경위의 손목 시계는 똑딱똑딱 하는 소리를 거의 멈추고 하오 8시 10분을 가리킨 채 좀처럼 초침이 돌지 않고 있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송 경위가 맨 먼저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누운 채 둘레둘레 주위를 살피니 철수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으며, 여대생도 엎드린 채 잠들고 있었다. 송 경위는 기어가서 철수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김형! 김형! 정신차리시오. 어서 일어나요." 철수는 꿈속에서 멀리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를 의식하자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어이구. 송 경위 아니요. 이게 어찌된 영문이지. 도대체 여기는 어디요?" "나도 모르겠소. 우선 정신이나 차리고 나서 살펴봅시다." 사람의 말소리를 듣자 진나도 몸을 꿈틀거렸다. 세 사람은 의식을 회복했으나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어 어쩔 줄을 몰랐다. 제정신을 되찾은 세 사람은 오직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셈이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아찔하더니 이 모양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요." 송 경위는 갇혀 있는 방의 둘레를 샅샅이 살피면서 중얼중얼했다. 그는 손으로 바닥이며, 벽을 만져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폭신폭신한 스펀지 같기도 하고 우유 빛깔의 생고무 같기도 한데 무엇으로 만든 물건일까?" 송 경위가 혼자 수다를 떨고 있는 동안 김철수는 떴던 눈을 다시 감고 아까부터 일어난 일의 경위를 정리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갑자기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진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귀속의 삼반규관에 이상이 생긴 탓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쓰러질 리가 있나. 우주선의 출입문 쪽에서 반짝하더니. 삼반규관이 마비된 일은 그놈들이 레이저 광선을 사용한 까닭은 아닐 것이다. 만일 레이저 광선을 썼다면 그 빛에 쪼인 사람은 한 사람뿐이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쓰러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들은 혹 중력을 좌우하는 중력총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소리도 냄새도 빛도 없는 중력총일는지도 모른다.' 철수가 이런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박진나는 이제야 정신을 가다듬어 철수가 누워 있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 와서 철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철수는 내심 깜짝 놀랐다. "김 선생! 정신을 차리세요. 걱정할 건 없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아요. 무슨 수가 꼭 생길 거에요." 철수는 두 눈을 뜨고 물끄러미 진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순간에 진나는 마치 자기 집 안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연할 뿐더러 생글생글 웃음을 띠고 있지 않는가. 철수의 가슴이 도리어 아파졌다. '이 여학생은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는데 데 또 공연히 앙탈을 하더니 기어코 납치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누구의 속을 썩히려고 이러는 걸까. 집에서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철수의 마음은 결코 놓이지 않았다. "김형?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요? 우리 세 사람을 어쩌자는 작정일까요?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요." 송 경위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설마 죽일 리야 있겠어요. 죽이려면 벌써 몰살 시켰을 거요. 오늘 아침에 괴물이 일러주지 않았어요. 자기는 물론이지만 사람도 장차 프록시마 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상대방의 실력이 우리보다는 월등히 훌륭하니까 덤벼본들 아무 소용이 없겠소. 그저 처분을 바랄 뿐 순종하는 것은 도리어 이롭다는 것은 송형이 경찰 경험으로 더 잘 알텐데……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는지 모름지기 기다려 봅시다." 철수는 모든 일을 운에 맡긴 듯 이렇게 말하고 나서 또 다시 두 눈을 감아버렸다. 방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아 저마다 누워 천장을 바라 볼 밖에 신통한 생각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는 낙담의 전주곡이기도 하다. 박진나는 고요 그대로의 방안이 환하게 비치는 광원이 무엇일까 하고 천장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타원형처럼 길다랗게 둥그런 천장은 마치 반투명의 유리처럼 밖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천장 자체에서 발광하는 것도 같아 알쏭달쏭한 꿈 속만 같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밖으로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들이 들어있는 방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과연 방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정지하고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김 선생, 기다려 보는 것도 좋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되나요? 어떻게 해서라도 도망해 볼 생각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진나가 먼저 서두르기 시작했다. "도망해 보시구려. 문고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탱크 속에서 무슨 수를 쓸 수 있단 말이요. 가만히 기다려 봅시다." 철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말하고 있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종잡을 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송 경위는 송 경위대로 재빨리 괴물들로부터 후퇴하지 못한 일이 후회가 되었다. "아휴!" 송 경위가 긴 한숨을 내리 쉬었을 때, 방 안의 어디선지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과 목소리라기 보다는 마이크 소리 비슷하게 전기를 입은 듯한 굵은 소리였다. "너희들은 이제 화성에 도착했다. 여기는 지구와는 달라 너희들 마음대로 살 수 없는 환경이다."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얼이 빠진 세 사람은 서로 얼굴과 눈을 지켜보면서 마이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희들은 지금 우주인의 포로가 된 것이다. 지구 위에서는 기쁘다든지, 슬프다든지 하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겠지만, 우주 세계에서는 오직 이성만이 있을 뿐이다. 너희들은 쓸데없는 생각은 다 멀리 버리고 지금으로부터는 우주의 율법과 지시에 따라야만 한다. 스스로를 지키는 자는 살 것이요, 스스로를 반역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스피커를 통해서 들려오는 듯한 말소리가 끝나자, 세 사람은 도깨비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서로 상대편의 얼굴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까까지의 기억이 생생하고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마이크 소리는 화성에 도착했다고 일러주지 않는가! 아무리 과학을 연구하고 과학 정신을 믿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단 십여 분 사이에 화성에 도착하는 가능성을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철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다리를 꼬집어보았다. 틀림없이 다리는 아프고 정신은 말똥말똥하지만 마치 몽유병자나 다름없는 심경을 속일 수가 없었다. 아무도 말이 없고 휘둥그레진 두 눈은 간신히 초점을 가누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무리 원자력을 쓴 우주선이라 할지라도 지구를 떠나려면 얼마만큼의 동요이라든지 폭음 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가만히 누워 있던 그대로 아무 충격도 없이 화성에 도달했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자, 이쪽으로 내려오게!" 방의 왼편 벽에 장치해 둔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말미잘 같은 괴물이 나타나 서 있다. 철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 위에서 맨 처음에 본 괴물의 크기는 큰 문어처럼 생기고, 그 놈이 나중에 피와 나무 액을 빨아먹고 코끼리 만하게 커지더니,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괴물은 낙지만 하게 오므라들고 있지 않는가? 그 조그만 생물이 사람의 말을 써가면서 내려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진나는 몸이 오싹해지자, 철수의 팥을 붙들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문 밖의 눈부신 광선을 배경으로 서 있는 조그만 괴물이 마치 커다란 왕거미 같기도 하여 철수의 이마 위엔 진땀이 송글 솟아났다. "나오라면 나가 봐야지요." 송 경위는 핏기 없는 얼굴로 철수를 되돌아보면서 눈짓으로 재촉했다. 세 사람은 죄인처럼 초라한 자세를 겨우 가누면서 입구를 향하여 걸어갔다. "여보, 놀랠 것은 없소. 내가 지구에 내려갔던 우주 가족이요. 내 이름은 오후레족 33호요. 당신들을 지하 도시로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맨 앞장을 선 송 경위는 이 괴물이 아까까지 지구에 있던 그 놈이라고 하는 말을 듣자 얼마간 마음이 풀어진 듯 했다. 그런데 말소리는 들리지만 눈이 어디에 있고, 입이 어디 붙어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어 징그럽기만 했다. 송 경위의 꽁무니를 따라 나가면서 철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화성이라면 이대로 나가도 될까. 산소도 부족할 테고 지구와의 중력 차이로 몸이 휘청휘청할 텐데……' 그러나 삽시간에 꿈처럼 일어난 사건이어서 이러쿵저러쿵 자기 생각을 내세워 볼 겨를도 없을 뿐더러, 괴물에게 대꾸해 볼 용기조차 잃어버린 채였다. 세 명의 포로는 한 발자국씩 소리 없이 출입구 쪽으로 접근해 갈 따름이었고, 괴물은 잠자코 인간의 동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드디어 문 밖으로 나왔다. 아! 지구 위의 그림에서 본 그대로 나무 하나 없는 평광지가 한없이 눈에 띄고, 저 멀리 강물이 흐르는 듯한 풍경이 아닌가! 사막 같기도 하고 홍수에 휩쓸린 평야 같기도 한 이 땅이 바로 화성이란 말인가! 그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보라색 하늘 저 편에 낯익은 지구가 떠있고, 그 곁에 붙어있는 것처럼 떠 있는 것이 바로 달이었다. 서로 손목을 붙잡은 채, 넋을 잃고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 이들은 우주 생물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구나하는 실망에 사로잡혀 감개무량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내려갑시다. 당신네 지구 나라 구경은 천천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요." 오후레 33호는 독촉한다. 마치 비행기의 트랩을 내리는 것처럼, 그들은 또박또박 사다리를 내려서 땅위에 섰다. 땅은 딱딱하고 잔디 비슷한 풀이 엷게 군데군데 돋아 있었다. 그들은 지구 위에서나 다름없이 걸을 수 있었으며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호흡에 아무 지장이 없고, 약간 발이 가벼운 듯한 촉감을 빼놓고는 걸음도 마음 대로였다. "김 선생, 참 이상한데요. 마치 요술에 걸린 듯해요. 아무리 지구 위의 과학자들이 엉터리라고 할지라도 수십 년을 두고 관찰한 화성의 실태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어요. 학교에서 배운 과학 지식이 모두 거짓말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 보세요. 발걸음이 이렇게 자유스러우니, 첫째 질량의 법칙이라든지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 무색할 지경이에요." 진나는 흙 위를 깡충깡충 뛰어 보면서 과학 지식을 비웃었다.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어. 도깨비에 홀린 것만 같아, 흑 내가 미치지는 않았나 하고 아까부터 볼을 꼬집어보고 있어요."   화성의 지하 기지   그들은 5백 미터쯤 걸어갔을까. 오후레 33호는 앞장서서 둥근 지붕을 한 플라스틱 집 안으로 세 사람을 인도했다. 송 경위는 속으론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망측스러운 오후레 33호와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지금부터 어디로 가자는 것이요? 공연히 애 먹이지 말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면 빨리 처치하시오." 송 경위는 반 농담조로 오후레에게 말했다. "여보 잡아먹기는 왜 잡아먹어요. 비행 대장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요. 비행 대장은 지금 화성의 지하 기지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소." 가까이서 보니, 오후레의 눈은 셋이었다. 둘은 사람처럼 입 근처에 나란히 있고 제 3의 눈이 둥그런 머리 꼭대기에 붙어 있어 하늘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입보다는 주둥아리라고 하는 편이 적합할 정도로 뾰족한 문어 모양의 입이 있고 콧구멍은 마치 하모니카 칸처럼 구멍이 여러 개 있고, 팔 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 촉수에는 흡반과 같은 액체 흡수 구멍이 무수히 붙어 있으며, 배와 허리에 상당하는 부분에는 마치 탄띠처럼 수많은 렌즈가 몸에 박혀 있었다. 송 경위는 또 물어 보았다. "당신은 지구 위에 있을 때 사람의 말을 이해도 못하고 발음도 못하더니, 어떻게 말할 수가 있소?" "그 동안 화성까지의 비행 중에 지구인의 말을 분석해서 전자 계산으로 해 줬을 따름이오. 일정한 문법만 발견하면 단어의 뜻은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는 법이오." 송 경위는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철수와 진나를 쳐다보았다. 오후레 33호는 앞장을 서서 반 투명체의 플라스틱 비슷한 뚜껑이 덮여 있는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올랐다. 세 사람은 차례로 의자에 앉았다. 오후레는 마치 자동 엘리베이터의 스위치를 누르듯이 한 촉수로 단추를 눌렀다. 자동 에스컬레이터는 아무런 요동도 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주선의 밀실과는 달리, 이번에는 창문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열 대여섯이나 될까? 기차의 레일처럼 나란히 줄지어 깔려 있는 지하 철도는 지금 오후레가 운전하고 있는 것만 이 아마도 시속 3백 킬로미터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이제는 지하 기지로 가니까, 에스컬레이터의 진동이 다른 곳에 번질까봐 천천히 운행하고 있는 거요. 여기는 지구보다는 훨씬 간결하고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소." 오후레의 설명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진 철수는 정말로 지구와는 다른 문명을 실감하자 처음으로 물어 보았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십 몇 분에 비행해온 비밀은 도대체 무엇이요?" "그것은 간단하지요. 중력을 이용했을 따름이오. 알고 보니까 지구의 문명은 겨우 알파 문명에 지나지 않소. 이제 원자력을 손대고 있으니 중력을 활용하기까지는 아직도 수 백 년 걸릴 것이오. 태양의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려면 불과 8분밖에 걸리지 않지 않소. 중력의 속도는 광선이나 마찬가지오. 다만 중력을 본질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구인의 신비 사상이 원시적일 따름이오. 중력은 가까운 최근 점에서 가장 강력하고 멀리 떨어질수록 기운이 약해져서 극 원점에서는 차츰 제로에 가까워지지 않소. 모든 물질이 극대와 극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중력 역시 맥시멈과 미니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질인 것이요. 물질은 또한 에너지인 까닭에 중력 에너지를 전환시키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법이오." 오후레의 모양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론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럴듯하다고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 우주선은 중력을 이용해서 자유자재로 우주를 여행하고 있지 않는가! "중력을 어떻게 전환시킨단 말이오." 철수는 귀를 기울이며 질문을 계속했다. "중력은 언제나 두 물질 사이에 수직으로 작용하고 있소. 까닭에 물질과 물질은 밸런스를 취하고 있는데, 중력이 서로 잡아당기는 실 모양의 선형이라고 생각하는 지구인과 지식은 잘못이오. 중력은 모래알처럼 깔려 있는 장형인 것이오. 그래서, 우주인들은 공간 속에서 수직으로 깔려 있는 중력을 마음대로 그 작용 반응을 바꾸어 동력으로 삼을 수 있소." 자력선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처해오던 철수였지만, 오후레의 설명은 알 것도 같고 꿈만 같기도 하여 갑자기 침울해졌다.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화성에 내렸을 때도 우리는 그 통로에 미리 지구와 똑같은 중력장을 만들어 적합한 산소와 중력을 마련한 임시 공간을 가설해 놓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무 불편도 느끼지 않았을 거요. 지구인들은 공간의 최소 단위인 시간에만 사로잡혀 아직도 모든 것을 시간이 해결하는 것으로 믿고 있소. 풍선 속에 공기를 불어넣을 수 있듯이 공간의 테두리로서 그때그때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오. 뭐라고요? 산소가 도망가버릴게 아니냐고요? 그것은 염려 없소. 일정한 곡률을 가진 공간을 만들어서 그 가장자리나, 둘레에서 중력을 가속하거나 증폭하면 그만이오." 송 경위는 흥미 없는 얼굴로 창 밖을 열심히 내다보고 있었으며, 철수는 머리 속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의 스파크를 느끼고, 진나는 혹 우주인이 질의 수학 세계에 살고 있지나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오후레가 이윽고 일어선다. "여러분 지하 기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또 한 번 꿈속에서 깨어난 듯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차에서 내린 오후레는 뚜벅뚜벅 앞장서서 걸어갔다. 보도는 스펀지를 깔아 놓은 것처럼 폭신폭신하고 지하도의 천장에는 형광 도료를 발라 놓았는지 보라색 빛이 밝았다. 송 경위, 박진나, 김철수의 순서로 세 사람은 오후레의 뒤를 따르고 있는데도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비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그림자가 없을 때는 불안하거나 허전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 "비행 대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송 경위는 오후레의 어깨 너머로 물어보았으나 목소리는 어딘가 메마르게 들렸다. "당신네들 시간 단위로는 아마도 10분쯤 걸릴 겁니다. 별로 멀지는 않아요."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해 주는 오후레의 걸음은 기계적으로 옮겨지고 있을 뿐이다. 세 사람이 뒤따라 걷고 있는 시간은 사실상 짧은 것이었으나, 침묵은 그들이 걷고 있는 거리를 수 킬로나 되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박진나는 철수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나란히 걸으면서 한풀 가신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김 선생님 미안해요. 되돌아가라고 했을 때 순순히 말을 들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공연히 우겨서 미안해요. 이제는 고집을 부리지 않겠어요." 진나는 자기 때문에 모두 뜻하지 않은 황변을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요. 만사를 운명에 맡길 도리 밖에 없지 않소. 기운을 내서 다가올 시련을 이겨내야만 되겠소." 철수는 철수대로 앞으로 어떤 일에 부딪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으나, 침착한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이르고 있던 것이었다. 사람은 흔히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생각을 남에게 말로서 나타내는 법이다. 지하 보도는 한없이 뻗어 있었으나, 오후레는 한참 걷다가 이윽고 오른 쪽 골목길로 접어 들어갔다. 거기에는 문이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문을 열고 오후레는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올라탔다. 그들이 차례로 탄 에스컬레이터가 아마도 3m 높이쯤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오후레는 다시 내려서 이번에는 양쪽에 방문이 가지런히 서 있는 복도로 들어갔다. '이제 비행 대장이라는 작자의 사무실에 가까워진 모양이구나. 도대체 우주선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철수는 마음 속을 전류처럼 흐르는 흥분에 도리어 긴장을 느꼈다. 오후레가 잠자코 어떤 방문 앞에 서자, 세 사람도 한꺼번에 걸음을 멈추고 방문을 쳐다보았다. 무한대의 마크가 셋 붙어 있는 표지판이 마치 빌딩의 호수를 나타내는 숫자처럼 걸려 있었다. 오후레가 노크를 하니까 방문은 저절로 열렸다. 방안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응접 세트가 놓여있고 벽 위에는 기차 시간표보다 더 복잡한 숫자 표가 걸려 있었다. "다 왔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비행 대장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오후레는 나지막하게 일러주면서 방안의 저편 옆문을 열고 들어갔다.   프록시마의 비행 대장실   세 사람은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앉는 자리가 지구상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어서,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이 우러나기는 했으나 그래도 심장의 맥박은 뛰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꿈 속의 일인 것만 같아. 화성의 지하 대륙 속에 이런 호화판 사무실이 있을 수 있을까?" 송 경위가 두 팔을 위로 뻗으면서 기지개를 켜고 침묵을 깨뜨리자 또한 상냥스러운 말소리가 뜻밖에 들렸다. "있을 수 있지요. 있고 말고요." 눈이 휘둥그래진 세 사람은 일제히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앗! 하는 놀라움이 거의 동시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진나는 한 손을 입에다 대고 가까스로 막아댔다. 우주인이 거기 서 있지 않는가!! 우주인은 우뚝 서 있었다. 온몸이 파랑으로 빛나는 우주인! 세 사람은 등뼈가 머리 끝으로 달음박질하는 고통에 못 이겨 피하려고 애써 보았으나 다리의 기운이 쑥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카메라의 렌즈가 순식간에 붙잡은 영상처럼 그들의 두 눈에 비친 인상은 차디찬 녹색 인간이었다. 놀라 자빠지다시피 당황하여 얼굴이 굳어진 세 사람의 얼빠진 꼴을 보자 프록시마의 별사람은, "호호호호……" 한바탕 웃어댔다. 옥으로 만든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맑은 웃음소리! 철수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헷갈리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몸부림치고 싶었다. 그 모양은 마치 침팬지가 그 무엇인가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평소에 이른바 문명의 탈을 쓰고 있지만, 워낙 큰 놀라움을 당했을 때는 원시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우주인은 소파 저 편에 따로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자 세 사람의 얼굴을 한 사람씩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놀랄 것은 없어요. 어떤 의미에선 여기가 지구보다 차라리 안전하고 편할 거예요. 참, 오후레. 차를 끓여 와요." 프록시마의 별 사람은 참으로 태연스럽게 말하면서도 사람의 몸 냄새가 몹시 못마땅한지 이마를 찌푸리면서 "여러분 몸에서 산소 냄새가 심하게 풍기는군요. 역시 산소권에 사는 사람은 어딘지 다르군. 여러분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는 눈에는 여러분이 마치 원시 동물처럼 비칩니다. 우리 별나라로 데리고 가면 동물원의 인기 짐승이 될 거예요. 하하하하" 우주인은 고갯짓을 하면서 세 사람의 기이한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오후레가 차를 날라 왔으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겁이 얼마간 풀리자 세 사람도 우주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주인은 미국 영화배우 율 브린너처럼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그뿐이랴, 눈썹도 수염도 없는 까까중 그대로의 대머리 위에 다시 똬리를 얹어 놓은 양 살덩이로 된 불룩한 테두리가 하나 끼어 있었다. 두 눈은 얼굴 깊숙이 들어박히고 눈썹 대신에 가느다란 뼈가 튀어나와 있었으나, 해골처럼 보기 사납지는 않았다. 귀와 코와 입은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으나 다섯 손가락 중 엄지손가락이 둘이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보통 대로였다. 발은 신을 신고 있어 당장에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온몸의 푸른 빛깔이 차가운 인상을 던져주고 이마 위의 이른바 똬리 살만이 불그스레한 빛을 띄고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불과 3, 4초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서로 처음으로 마주 보는 마음의 시간은 주마등처럼 흘러 며칠을 두고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이 느껴졌다. 송 경위가 큰기침을 하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 먼 곳까지 납치해 왔소?" 질문하려던 말꼬리가 어느덧 따지는 목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태양계 탐험대의 제 3 비행장이요. 이름은 삼무한, 발음하기 쉽게 사무한이라고 해 둡시다. 나는 여러분을 납치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의 문명을 보여 주려고 안내해 온 것이요." 사무한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난 뒤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고 있던 지구의 문명은 우주적인 규모와 표준에서 볼 때, 알파 문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소의 환원 상태로부터 생명이 생긴 지구 위에선 아직도 산소 없이는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과학자들은 원시적인 막대기 대신에 총알이 튀어 나가는 총을 겨우 만들어 냈고, 그러한 물리적인 원리를 반복해서 요즘은 프로톤 프로톤(p-p)사이클을 해방시키려는 핵실험에 겨우 성공했을 따름이오. 지구의 문명은 아직도 화학 원리에 매달리고 있는 중이오. 화학 반응을 토대로 하는 문명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희랍 문자를 빌리자면 알파 다음에 베타(β) 문명까지 발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의 도수가 더 높아져서 만유 인력을 이용하게 됨 때부터는 감마 문명으로 옳기고,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델타 문명 시대요. 우리들 프록시마 별 사람들은 지금 델타 문명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사무한의 설명을 듣자 세 사람의 머리 속은 어리둥절해졌다. 철수는 오후레가 우주선의 원리를 설명했을 때보다 더 큰 쇼크를 느끼면서 사무한의 구슬 같은 말소리에 안 홀릴 수 없었다. "그 까닭에, 실례의 말씀 같지만, 송 영철 경위가 갖고 있는 권총은 한낱 어린아이의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요. 그 총알로 프록시마 별 사람들이나 우주 생물들은 결코 상하지 않습니다. 호호호호……" 사무한은 또 한바탕 큰 소리로 웃어댔다. 사무한은 웃어댈 때마다 얼굴의 혈관을 흐르는 푸른 피가 유난히 눈에 띄어 지켜보는 사람의 살갗을 오싹 움켜쥐는 듯한 냉혈동물의 감촉을 발산하고 있었다. 철수는 그네들의 문명이 소위 델타 단계까지 발달했다고 한다면 아무리 미미한 지구인이라 할지라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이 생각했다. "정작 당신네들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다면, 거기에는 더욱 순화된 도덕률이 있을 게 아니요. 우리의 의사도 묻지도 않고 사람을 일방적으로 납치하는 짓은 분명히 틀린 일이요.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행동을 강요한다는 것이 이른바 델타 문명의 도덕률이란 말이오?" 철수는 기운을 내서 덤벼 보았다. 그러나 사무한은 빙그레 웃으면서 철수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양 힐끗 그의 눈을 엿보고 나서 말했다. "그럴듯한 말씀이요.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한 일은 강요할 수 없으며 억지로 시켜본들 오래 갈 수 없는 법이오. 우리의 세계에도 확실히 그러한 사회 통념이 있었소. 그러나 그것은 역사책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도덕률이지 지금은 전혀 차원이 달라 여러분과 같은 하급 생물에 적용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소. 말을 바꿔서 쉽게 말하자면, 지구인의 경우 아직은 진정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합의라든지 동의라든지 하는 행동이 성립될 여건이 없을 거요. 다만 거래의 조건만이 문제될 것이오." 사무한은 박진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기 앉아 있는 진나 양은 여자요. 나도 프록시마의 여자이지만 예컨대 사랑의 조건을 비교해볼 때, 우리의 세계와 지구인의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를 거예요. 우리의 경우, 우주를 이 곳 저곳으로 여행해야하는 까닭에 그때 그때의 환경에 지배를 받기 쉽소. 가령 산소권에 들어간다든지, 탄소권에 들어간다든지 할 때, 우주선 밖의 환경이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주 사회학은 최고는 5대까지의 배우자 계보를 예정표로서 미리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동의한다든지, 합의한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존재 이전에 이미 그 존재는 장의 원리에 따라 규정되고 있는 것이오. 인류의 경우는 사랑의 법칙을 따지자면 마음이 착하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마음이 허영에 날뛰기 쉬운 불확정성 원리 비슷한 상황 때문에 언제나 상대방과 사랑을 거절하기 쉬운 것이오. 미스 박도 내 말을 알아차릴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진나는 제멋대로 지껄이는 사무한을 마음 속으로 여간 미워하고 있지 않는 참에, 그 역시 여자라는 말을 듣자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행 대장! 우리는 당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끌려 온 것은 아니에요.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리고 우리를 납치해 온 목적이나 조건이 있다면 속시원하게 이 자리에서 말씀해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서 해치우고 돌아가야 될게 아니오." 진나의 히스테리가 폭발한 셈이다. 그러나 사무한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책상 옆에 매달려 있던 스위치를 꾹 눌렀다. 그러자 숫자표가 걸려 있는 반대편 벽 위에 해가 떠오르듯이 스크린이 나타났다.   작업 예정표   화면은 점점 뚜렷해지고 거기에는 밀림이 보였다. "잘 보시오, 이 밀림에서 어떠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해 보시오." 화면은 한없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 있는 밀림을 조금씩 클로즈업시키더니 대여섯 사람이 귤을 따먹고 있는 장면에 고정시켰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인류에 틀림없고 다만 두 서넛은 오후레와 똑같은 말미잘 모양의 생물이었다.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으나, 세 사람의 귀에는 낯설어서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뙤약볕 밑에서도 밀짚모자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세 사람은 화면의 밀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없어 물끄러미 쳐다 볼 따름이었다 "저 화면 속에서 얼굴이 약간 젊어 보이는 사람이 바로 이집트의 모타칸 박사요. 방금 왼손으로 귤을 따들고 있는 분이오. 이 곳에 온지 한달 쯤 되었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예정표에 따라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오." 사무한의 설명에서 모타칸 박사의 이름을 듣자 철수의 두 귀는 솔깃해졌다. '모타칸 박사라면 식물 자력선과 광물성 자력선의 통합 비전을 내세운 학자인데, 어찌하여 이 곳까지 납치되어 왔을까?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은 어떤 무서운 계획을 진척시키고 있는 모양이구나. 어디 잠자코 있어 보자. ' 철수만이 아니었다. 화면에서 목격하듯 세 사람 외에도 지구인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사무한은 다시 스크린의 스크린을 끄고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감상이 어떠냐는 듯 눈초리로 보았다. 성급한 송 경위는 당장에 외쳤다. "그 농장 같은 숲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지구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어서 말해 보시오." "조건이요? 조건은 아니오. 다만 여러분이 탄산가스를 최대한도로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른바 에덴의 화원과 같은 동산에서 즐기는 동안에 우리의 목적은 달성될 것입니다." 사무한은 넌지시 웃는 얼굴로 얘기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업 예정표를 갖고 오겠다는 것이다. 철수는 뜻밖의 조건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탄산가스가 어떻단 말인가. 원 이런 일도 다 있을까? 여보, 송 경위, 탄산가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우." 철수는 송 경위의 오른팔을 붙잡고 흔들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확실히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탄산가스를 만드는 법을 알아야지. 아무나 무턱대고 만들 수 있나!" 송영철은 놀림을 받고 있지나 않나 하고 생각했다. "뭘, 그까짓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당분으로 분해되어 맨 나중에는 산소와 결합해서 에너지로 불타버릴 때, 저절로 탄산가스와 수분으로 분해되지 않아요. 아마도 무슨 속셈이 있을 거에요." 진나는 거리낌없이 단정하면서도 공연히 복받쳐 오르는 외로움을 씻어낼 도리가 없었다. 사무한은 응접실로 되돌아와서 세 사람에게 작업 예정표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탄산가스가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던 지구의 여러 나라의 문자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른바 헌법 제 1 조의 규정이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산다가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는다로 요약됩니다. 간혹 두 가지를 절충해서 사람은 먹기 위해서도 살고 살기 위해서도 먹는다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델타 문명을 자랑하는 프록시마 별사람들이 헌법을 말한다면 우리는 생물을 개조하고 합성하기 위해서 산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세계와는 차원이 전혀 다르고 양의 세계가 아닌 질의 세계에 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예정표를 잘 읽어보면 저마다 해야할 일이 스스로 판단될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서 얘기합시다." 비행 대장 사무한은 사무적인 말투로 지시하고 나서 오후레를 불러 세 사람을 숙소로 안내하도록 명령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세 사람은 오후레의 뒤를 또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오후레가 앞장서서 안내해 준 방은 호텔의 객실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네모진 방이 아니라 벽의 한 쪽이 반 호형이어서 그들은 이 건물의 원통형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안에는 푹신푹신하게 보이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사무용 책상 위에 놓인 텔레비전은 아마도 텔레비전 전화인 듯 지구 위의 그것보다는 거추장스럽지가 않았다. 텔레비전 외에 왼 쪽 벽 위에 세계지도 만한 크기의 스크린이 매달려 있는 것이 특히 철수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 방에서는 송 경위가 쉬시오. 다른 분들도 이와 똑같은 구조의 옆방에서 한 분씩 쉬게 될 겁니다. 저 책상 위에 텔레비전 전화가 있으니 서로 연락하려면 번호가 적힌 단추를 한 번만 누르면 됩니다. 저마다의 번호는 아까 받은 작업 예정표에 다 적혀 있습니다." 오후레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세 사람은 손에 쥐고 있던 예정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0707이 내 번호요?" 송 경위가 반문하자 "그렇소. 잘 기억해 두시오." 오후레는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김철수의 번호는 2828이었고 박진나는 3232번이었다. 오후레는 송 경위를 남겨 놓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뒤따르면서 철수가 돌아다보니 송 경위는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억지로 지워 보였다. 진나는 송 경위의 옆방을 차지하게 되고 철수는 다시 그 옆방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후레, 잠깐 앉아서 설명해 주시오. 저 벽에 걸린 스크린은 뭘 하는 거요?" 철수는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는 기왕에 이질 문명에 접하게 됐으니 될 수 있는 대로 온갖 지식을 알아 두고 싶은 충동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스크린? 벽에 걸린 저것 말이오?" "그렇소." "저건 독서판이요. 우주인들의 책인 셈이지요. 여러분도 지구에서 이제 마이크로 필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우주의 책은 알기 쉽게 말해서 마이크로 필름을 스크린에 사영하는 방법을 쓰고 있소. 자기가 읽고 싶거나 찾으려는 자료를 저편 박스의 전자 계산기와 상의하면 곧장 마이크로 필름의 번호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번호에 따라 필요한 필름을 찾아 내서 다시 영사 장치에 넣어주면 자동적으로 한 페이지씩 큼직하게 영사됩니다. 마이크로필름에는 수백 권의 책이 송두리째 압축되어 인쇄되어 있으니까요. 여러분의 영화와 전축의 원리를 합한 것이나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철수는 오후레의 말대로 영자 스크린을 움직여 보았다. 알맞게 큰 글씨가 한 페이지씩 비췄으나, 처음으로 보는 프록시마 문자를 철수가 이해할 리 만무했다. 다만 그는 글자의 첫 인상이 대체로 타원형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주무시오. 다시 연락하겠소." 오후레가 인사를 하고 나간 뒤 방안에 홀로 남은 철수의 마음은 갑자기 긴장이 풀어졌다. 그는 까무러치듯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보는 우주 문명이며 우주인과의 대화는 자기의 명이 나중에는 어떻게 될 망정, 우선 철수로서는 커다란 놀라움에 얽힌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철수는 유리창이라곤 한 장도 없는 방안에 누워서 어느덧 명상에 잠겼다. 옛날 사람들은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어왔다. 7세기쯤 중국의 풍도 사람이 목판 인쇄를 시작한 뒤, 그 기술이 서양으로 건너가 15세기에 비로소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자 인쇄를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는 이조 이전부터 한국에서 발달되었다. 책도 맨 처음엔 종교 서적이었으나, 차츰 문학과 과학 기술서로 발전해 갔다. 사람들은 책을 대량 생산하려고 활자를 점점 작게 만들다가 책의 종류가 너무 많아지자, 이번에는 분류의 필요상 마이크로 필름이 생겼다. 이처럼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 중에서도 시청각에 중점을 둔 스크린 영사가 등장하여 사람들은 한자리에 앉아서 집단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책과 사람의 눈의 거리가 30센티쯤이면 가장 이상적이라더니 이제는 수 미터 내지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스크린을 통해서 글을 읽게 됐구나. 이렇게 발전해 나간다면 독서법은 장차 어떻게 변할 것인가?' 철수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만 잠들고 말았다. 어쩌면 호흡 작용을 이용한 장치일까? 방안의 전등이 얼마 후에 저절로 꺼지고 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컴컴한 방안에 텔레비전이 밝아지자 진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김 선생님, 주무세요?" 그녀는 한두 번 철수를 부르다가 대답 없는 첫날밤이 싱거워졌는지 텔레비전 스위치를 끈 듯 서서히 화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철수는 푹 쉬고 난 뒤 잠에서 저절로 깨어났다. 멀리서 차량이 굴러가는 듯 가벼운 진동이 전해 올 뿐, 밖을 내다 볼 유리창조차 얼어 새벽인지 낮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습관대로 일어나 변소에 다녀와서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의 물 꼭지를 틀어보고 깜짝 놀랬다. 거기서는 시원스러운 물이 흐르지 않고 찐득찐득한 우유 빛깔의 액체가 나오지 않는가! 철수는 어리둥절한 채로 내민 손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할 건 없어요. 그대로 세수하면 됩니다. 이 액체는 식물에서 추출한 영양수니까요. 피부에 바르면 그대로 흡수되어 신진 대사가 더욱 활발해 집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오후레가 뒤에 서서 넌지시 일러 주었다. 철수는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듯 마음 속으로 불쾌한 기분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이 액체 속에 손을 담가 보았다.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그 액체는 매우 시원했다. 더욱이 얼굴에 바르자 살갗 속으로 스며드는 상쾌한 기분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산들바람을 맞는 듯 했다. 철수는 세수하고 나서 비로소 아침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얼마 후 오후레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흔히 볼 수 있는 지구의 식당 구조와는 달리 방의 한 가운데에 기다란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어 마치 회의실 같은 인상을 던져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식당은 오락실과 회의실을 겸하고 있었다. 송 경위와 박진나는 아미 와서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그들은 철수를 보자 몇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친구를 대하는 양 무척 반가운 말투로 인사했다. 오후레는 약장 비슷한 반투명의 상자 속에서 소시지며, 알약을 물에 녹인 국물이며, 떡 같은 빵을 꺼내와서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식사는 셀프 서비스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만은 내가 웨이터 노릇을 하겠지만, 다음 차례부터는 저마다 먹고싶은 음식을 집어와서 잡수시고 치우십시오." 무표정한 오후레는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송 경위는 배고픈 김에 먼저 손을 내밀어 빵을 덥석 쥐어 입에 넣었다. 스펀지 케이크처럼 슬슬 입 속에서 녹는 맛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구미를 당겼다. "굉장히 맛있는 맛이로군.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샤보뎅 비슷한 빵나무에서 만든 것입니다. 씹을수록 싫증이 안 나는 게 이 양식의 특색이지요." 한 입을 깨문 진나도 과연 그 상쾌한 맛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 샤보뎅을 빻아서 찌는 겁니까? 굽는 거예요?" 진나는 요리법을 알아 두고 싶었다. "빻아서 만들다니요? 빻아서 가루를 내면 다시 이겨서 만들어야 되지 않아요, 과정이 귀찮아서 손이 더 가게 됩니다. 알아보니 지구 위에서는 과정을 복잡하게 해서 그 때마다 이익을 취하려는 풍조가 있는 모양인데, 문명 단계로서는 퍽 원시적이지요. 여기서는 벌써 그런 단계를 극복하여 과정을 최대한으로 간략하게 하고 있습니다. 샤보뎅 빵도 식용 샤보뎅의 껍질을 벗겨서 찌는 동시에 방사선 처리만 해 놓으면 백 년이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후레의 유창한 설명을 듣고 있는 사이에 세 사람은 이럭저럭 식사를 끝냈다. 철수는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자기도 꼭 식용 샤보뎅의 비밀을 알아 두어야겠다는 마음의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식당에서 나와서 지난번에 타고 내려온 차를 타고 지상으로 나왔다. 송 경위는 햇볕을 쪼이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이구, 땅위로 나오니까 살 것 같구나. 사람은 역시 훤칠한데서 살아야지 두더지처럼 땅 속에서 살기에는 알맞지 않아. 김 선생도 이제 얼굴색이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송 경위의 심정은 또한 세 사람의 심정이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까 더 시원한 것 같아요. 어제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는데 아직은 지구가 보이지 않는구나." 진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넓은 하늘을 쳐다보며 지구를 찾고 있었다.   에덴 동산   오후레는 여전히 앞장을 섰다. 그들은 움직이는 도로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른 쪽 벌판을 횡단하고 있었다. 평지에 깔아 놓은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는 시속 60킬로쯤 될까, 관광 여행에 비기자면 최악의 관광 지대처럼 살풍경한 화성의 표면 대륙을 에스컬레이터만이 씩씩거리면서 질주할 따름이었다. 철수는 아마도 남쪽 지평선 위에 떠 있는 화성의 위성 포보스를 목격할 수 있었다. "미스 박, 저 지평선 위에 떠 있는 달 모양의 천체가 바로 화성의 위성 포보스일 거요. 지구의 과학자 중에는 저 포보스가 화성의 생물에 의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햇빛을 반사하는 모양이 어딘지 금속성 같은 느낌도 주지요?" "글쎄요. 그럴듯하기도 하는데 아무리 저렇게 큰 물체를 인공적으로 만들었을까 꼭. 김 선생님도 웃기지 마세요." 이럭저럭 두 시간은 앉은 채 굴러왔을까. 그들은 양편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계곡 길을 따라 들어가자 마치 비행장의 격납고처럼 보이는 돔형의 건물을 보았다. "저기 보이는 온실이 바로 여러분의 작업장이요. 온실의 넓이는 20만 평쯤 될 거요. 기온은 언제나 아열대 지방과 똑같이 유지하고 있으니까, 약간 더울는지 모르나 익숙해지면 그런 대로 지내기 편할 것이오. 예정표에 적힌 대로 여러분은 저 처마에서 3개월 동안 일해야 됩니다." 오후레가 수많은 촉수 중의 하나를 쳐들고 가리키면서 설명을 끝내자, 에스컬레이터 도로는 작업장 문 앞에서 일단 멈추었다. 요령이 생긴 그들은 차례대로 내려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 모양의 작업장의 지붕은 지하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투명의 셀레핀이라는 물질로 덮여 있었다. 철수가 나중에 알게된 셀레핀이라는 물질은 플라스틱도 알루미늄도 아니면서 마치 반도체 작용처럼 바깥 온도와 내부 온도를 조절해주고 내부의 화학 원소의 비율을 일정하게 조정해 주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 것이었다. "이제 예정표대로 여기 머무르고 있다가 저 사무용 게시판에 스크린에 나타나는 지시를 읽고 시간이 되면 숙소로 돌아오시오.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갑니다." 오후레는 이내 돌아가고 말았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우두거니 서 있었다. 작업장이란 말뿐이지 온실 속은 마치 남양의 무인도를 방불케 할 만큼 갖가지 열대 식물이 무성하고 있었다. 코코아․파파야․망고․바나나․파인애플․오렌지 등등 주렁주렁 나무 위에 열린 과일은 여간 탐스럽지가 않았다. 화성의 대륙 위에 이렇게 훌륭한 열대성 온실이 있다니 지구 위에선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세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가 처음으로 무인도의 정글 속을 헤매던 것처럼 조심조심 밀림 속을 파헤치고 전진해 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질서 없는 정글 같았으나, 속으로 들어갈 수록 식물의 재배 구역이 완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돔형의 천장 위에 여기 저기 붙어 있는 둥근 렌즈 모양의 거울은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텔레비전 장치일까? "김 선생, 예정표에 적힌 대로라면 이 과수원의 열매를 얼마든지 따먹어도 상관없는 걸로 되어 있는데…… 어디 바나나를 하나 시식해 볼까요?" 송 경위는 바나나를 여러 개 꺾어서 먼저 입맛을 본 뒤 철수와 진나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저놈들에게 언제 붙잡혀 죽을는지도 모르는데 먹을 수 있는 대로 먹고 봐야지. 미스 박 그렇지 않아요?" 송 경위는 이번엔 입맛을 다시면서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너무나 많이 잡수면 배탈이 나서 토해내야 되니 몸조심 해야죠." 진나는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이 온실이야말로 이른바 에덴의 화원이나 다름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 곳이 한국의 어느 곳이어서 여기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은 진나의 마음을 도리어 감상 속으로 이끌어 갔다. 이 사치스러운 과수원 안에서 먹고 싶은 과일을 마음대로 따먹으면서 소풍하라는 지시를 그들은 액면대로 납득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탄산가스 생산에 협조해 달라고 하더니 이게 무슨 수수께끼일까? 사람은 쉬고 있을 적엔 한 시간에 약 반 입방 피트의 산소를 호흡하고 중노동을 할 패는 그 10배쯤 되는 산소를 소모하는데, 이 때 생기는 탄산가스의 양은 그보다 약간 적을 따름이다. 도리어 사람은 들이마시는 공기 속의 탄산가스의 양이 3% 이상이면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6%가 넘으면 헐떡이게 되기 마련인데,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의 속셈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식물이 탄산가스를 호흡하여 산소를 방출한다고 해도 식물과 사람 사이에 탄산가스를 에워싼 무슨 궁극의 비밀이 있을까?' 철수는 과수원의 새파란 잎사귀들을 응시하면서 신공덕리의 임업 실험장에 못지 않은 의문에 빠져 들어갔다. '혹 모타칸 박사를 만나게 되면 물어봐야겠다.' 그는 마음 속으로 자문자답하면서 나뭇가지에 손을 뻗어 노란 오렌지 한 개를 따들었다. 껍질을 벗겨보니 웬일일까 과육의 칸이 반달 모양으로 막혀있지 않고 중심을 향하여 석류처럼 각추 모양으로 칸이 막혀 있지 않은가! 철수는 뜻밖에 마주친 색다른 과실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를 발견한 듯한 자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에덴의 화원이나 산책하듯이 여기 저기를 돌아보았으며, 모처럼 걷는 기분은 한편으로 마음의 여유를 불러 일으켜 주었다.   박진나의 노랫소리   진나는 과수원 안이 이제는 답답해졌다고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온실 밖에서 어느덧 지은 즉흥시를 노래에 맞추어 부르고 있었다.   분홍빛 얼굴이 저기 떠 있네 오목한 보조개 방실거리며 그 무엇인지 눈짓하건만 화성인 돌아서니 철이 없구나. 낯익은 내 고향 우리네 지구 내 다시 언제나 되돌아가리. 태양을 따라 도는 젖줄이련만 불러도 대답 없는 인류들이여. 진나의 목소리는 그다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눈물을 뚝뚝 흘려가면서 목메어 부르는 노랫소리는 처량하고 아름답게 들렸다. "김 선생, 아무래도 미스 박이 돌기 시작한 게 아니요?" 송 경위는 귓속말로 철수에게 물었다. "설마? 그러나 모르지요." 진나의 동정을 무심하게 보아온 철수의 신경이 이내 곤두섰다. "나가 봅시다. 미스 박이 간 곳으로." 두 사람은 밖을 향하여 쏜살 같이 달음박질했다. 철수와 송 경위가 다가선 줄도 모르고 박진나는 염치없이 흐느껴 울고만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를 물결치듯 흔들면서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는 진나의 모습은 도리어 두 사내에게 소외감을 던져 줄뿐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철수는 미스 박! 하고 꾸짖을 수도 있고 타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슬픔의 세계 속에 온갖 감정을 적시고 있을 때, 감히 그 세계 속으로 함께 뛰어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는 법이다. 주춤하던 생각을 뿌리치고 철수가 말을 걸었다. "미스 박! 울어서 뭘 합니까. 운다고 가엾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비행 대장이 미리 일러 준 말을 잊으셨나요. 감상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지구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당분간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소. 어서 정신을 차리고 이성으로 돌아가요." 송 경위도 무슨 말을 해보려다가 진나의 어깨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보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흐느껴 울던 진나는 잔잔한 연못에 던진 돌의 파문이 저절로 사라지듯 어느덧 슬픔을 거두고 말았다. 손수건을 꺼내서 한참 동안 눈물을 씻은 진나는 이제야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방긋 웃어 보였다. 순간 세 사람의 마음 속에는 또 다시 태양이 떠오른 것 같은 안도감이 되돌아 왔다. "어린애처럼 울어서 미안해요. 지구를 바라보니 공연히 슬픈 생각이 치솟아 오르지 않겠어요.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고 계실까? 우리가 살아 있는 사실을 지구에 전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유난히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말하는 진나의 태도는 아직도 어디까지나 학생다운 순진함이 넘치고 있었다. "왜 없겠어요. 기회를 봐서 오후레에게 부탁하든지 또는 통신사를 매수하든지 무슨 묘안이 있을 거요. 미스 박! 이제는 제발 울지는 마세요. 아까는 진나 씨가 미친 줄 착각했단 말이다. 핫하하하……" 송 경위의 너털웃음은 화성의 계곡을 메아리치듯 유쾌하게 울렸다. "자, 모두 기운을 차리고 온실 안으로 되돌아가야지. 거기에는 우리가 배울만한 식물의 새로운 지식이 많아요. 미스 박도 다시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구……" 철수의 말에 세 사람은 걸음을 온실 쪽으로 옮겼다. 철수는 어느덧 세 사람의 반장 격이 되고 만 것이다. '여자란 어디를 가거나 염치가 없단 말이야. 자기 감정과 세계 속으로 모든 것을 끌어넣으려고 하니 되는 말인가. 마치 요술사 모양으로 울음으로 사람을 홀리려고 들거든……' 철수는 마음 속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적엔 호통을 쳐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좀전의 온실 안으로 되돌아오자, 진나는 언제 내가 울었더냐 하는 식의 명랑한 표정으로 앵두 열매를 따먹기 시작했다. 철수는 철수대로 지구상의 식물을 발전시키는 이 온실의 비밀을 밝혀 보려는 욕심으로 나무의 뿌리 근처를 파헤쳐 보기도 했다. 고도로 발달된 식물의 과실들이 과연 잎파랑이의 광합성에 중점을 둔 것인지, 또는 뿌리에 전자력을 작용시킨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성의 식물의 비밀이 하루 사이에 풀어질 것으로 손쉽게 생각하지는 않고 다만 잘 익은 열매의 씨를 입수해 놓기로 작정했다. 언젠가는 지구로 되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도록 철수는 오렌지의 씨앗을 발라 옷 속에 감추어 두었다. 세 사람은 첫날의 작업을 이럭저럭 마친 셈이다. 몇 시간 후에 벌써 저녁이 된 것인지 텔레비전 스크린은 지하 기지로 되돌아오라는 지시를 전해왔다. "정말로 미치겠는 걸. 차라리 포로답게 중노동을 시키면 시켰지, 과수원에 소풍 보낸 것도 아니고 나무 열매만 먹고 어디 살 수가 있겠나." 송 경위는 투덜거리면서 온실을 나와 에스컬레이터의 맨 앞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철수와 진나가 자리에 앉자 송 경위는 스위치를 눌렀다. 에스컬레이터는 아침에 오후레가 운전할 때와 마찬가지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태양의 그림자를 길게 끌고 돌아가는 화성의 살풍경한 평야를 바라보면서 묵묵히 자기 생각에 잠겼다. 지하 기지로 내려가는 정류장에서 그들은 차를 갈아타고 개미 한 마리 없는 지하철도를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3개월 동안 이따위 일정을 되풀이해야 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저놈들은 무슨 수작이 있기에 우리들에게 속시원하게 계획을 밝혀주지 않을까? 아무리 문명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인간성을 무시하는 생활은 싫증이 나는 걸." 송 경위는 만사가 답답할 뿐이었다. 크게 하품을 하면서 한 손으로 입을 막는 꼴이 진나의 눈에는 여간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송 선생은 그래도 무던하군요, 오늘날까지 사모님이나 애들 걱정을 입밖에 내지도 않으니 훌륭한 인격자 같아요." 박진나는 웬일인지 송 경위가 앉아 있는 뒷자리에 그의 가족들이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미스 박도 농담하시네. 그래 내가 우리 집 옥희 이름을 부르면서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단 말이오? 불러도 대답 없는 시늉을 나타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래도 걱정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나중에 증언할 수 있지 않아요. 언젠가 사모님을 만나는 날엔 송 선생이 천하 태평이었다고 꼬아 바쳐 드릴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은 만사가 귀찮소. 구워 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시오." 진나는 공연히 말을 해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구와 화성의 거리가 수억 만리나 떨어져 있는데도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마치 서울서 인천이라도 가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는 머나먼 거리가 심리적으로는 무척 가깝게 여겨지고 물리적으로는 요 수삼 일간에 일어난 일들이 심리적으로는 몇 년 동안 겪은 듯이 느껴지는 판단의 동기와 척도는 무엇일까? 비슷한 모양에서 연역되는 연상 작용의 탓일까, 콩알만한 것이 태산처럼 보이고 태산 만한 것이 주먹에 잡힐 듯 하는 심리의 저변에는 역시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공존하는 좌표의 원점 같은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는 거겠지.' 진나는 제자리걸음으로 결론 없는 공상 속에서 숨박꼭질 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차에서 내려 사무한이 있는 빌딩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없는 빌딩의 식당을 찾아들어 식사하기로 했다. '어서 저녁을 먹고 이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면서 화성의 식물과 동물과 광물 사이의 엔트로피를 계산해 보아야지. 언제까지나 우물쭈물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 철수는 마치 미륵불 같은 혼자만의 생각을 되씹으면서 이날도 샤보뎅 빵을 소리 없이 되씹었다. 송 경위는 철수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밥을 먹고 있는 것을 힐끗 힐끗 쳐다보면서 그가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혼자서 짚어보았다. '아무리 그가 과학자라고 해도 미스 박의 머리가 차츰 돌고 있는 상태를 알 수 있을까? 분명히 박진나는 신경과민으로 노이로제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을.' 송 경위는 주스를 마시면서 이번에는 진나의 표정을 슬그머니 살짝 보았다. 진나의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커져 보였다. 빵을 씹는 입의 움직임이 불규칙하고 마치 동물과 식물이 투쟁하는 모양의 야성적인 제스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식당에서 나온 후, 저마다의 방에 들어갈 때까지 서로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벌써 공통된 화제를 잃고 있었고, 세속적인 인사말을 가식할 기운조차 없었다. 지구 위에서 흔히 쓰이는 인사말은 그런 대로 전통적인 환경의 굴레 속에서 어딘지 자기 방위를 취하려는 심정을 격식화시킬 따름이다. 화성의 지하 기지 안에서 눈에 안 보이는 환경의 압력 때문인지 그들은 서로 인사말도, 교제의 외교 사례적인 말도 해볼 필연적인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히들 주무세요. 오늘밤에는 꿈속에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런지……" 진나는 언짢지 않는 표정으로 애원하다시피 간신히 인사말을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손을 대지 않아도 방문은 극초단파 식인지 자동적으로 열리고 닫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서로 눈만 쳐다보면서 동쪽과 서쪽으로 방향을 각각 바꾸고 기운 없는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누가 보고 있어야만 기운을 차리는 것이 지구상의 인간의 습성인 것일까? 철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 옷을 벗고 전자 계산기를 일일이 살피면서 프록시마 문자를 해독해 보려고 마이크로 필름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혼자 있다는 것처럼 쑥스러운 일은 없는 모양이다. 철수는 스크린에 사영되는 우주 문자의 공통성을 분석해 보려고 지켜보았으나 혼자서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문턱을 넘어 설 아무런 여건이 없는 것을 깨닫자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워 버렸다. 개인이 온 누리의 역사를 혼자의 힘으로 넘어설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일까?   노이로제의 치료   철수는 어느덧 잠들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송 경위와 철수가 식당에서 만났을 때, 한 사람이 없는 일을 맨 처음에는 그다지 걱정하지 못했다. "김 선생, 미스 박이 아마도 늦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지요. 전화를 걸어 볼까요?" 송 경위는 경찰에서 여러 사람을 대해보던 경험 때문에 어딘지 석연치 않은 박진나의 행동이 걱정스러웠다. "글체, 고단했던 모양일까? 빨리 불러 내야지. 우리끼리만 아침밥을 먹을 수도 없고……" 철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송 경위는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올리고 3232에 맞추었다. 그러나 스크린에는 방 속의 정물 환경만이 나타날 뿐, 침대 위에도 세면대 앞에도 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웬 일일까? ' 송 경위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육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김철수는 송 경위만큼 놀라지는 않은 듯했다. 송 경위가 아무리 호출해 본들 박진나는 그림자도 대답도 없었다. (실인즉 진나는 간밤에 비행 대장 사무한의 지시로 정신병원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밤중에 가위에 눌린 듯 잠꼬대인지 헛소리인지 알 수 없는 신음 소리에 놀랜 사무한은 3232의 지구인을 병원으로 이송시켜 버렸다. 지구 위라면 동료들에게 밤중의 돌발 사고를 알려 줄 불문율의 관습이 있으나, 여기는 전혀 차원이 다른 화성일 뿐더러 녹색 사람들의 생활 습성은 지구의 그것과는 딴판이었다. 포로의 탓은 아니겠지만 한 사람의 운명을 여러 사람이 공통으로 걱정한다는 지구 위의 습성은 사무한의 수준에서 볼 때, 초 원시적인 공동 운명체의 발생학적 단계에 지내지 않는 것이었다. 철수와 송 경위가 잠들어 있을 때, 진나는 오후레의 시중을 받고 모타칸 박사가 쉬고 있는 과수원 쪽의 병원으로 이송되고 말았다. 진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모든 일이 이미 끝나고 난 뒤였다.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단 안경을 쓴 노인이 옆의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진나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랬으나 슬그머니 두 눈을 다시 감고 이게 웬 일인가? 자문해 보았다. 분명히 꿈 속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은 바꿔지고 만 셈이다. 사람의 의식이란 결국 선입감을 수정하는 연속 작업이 아닐까? 자기의 선입견을 수정하지 않거나 순간적으로 수정하지 못할 때, 놀라움이라는 뜻하지 않는 생각이 감전화되는 모양이다. 진나는 감은 두 눈을 뜨지 않고 의식의 단층을 이어보려고 마음의 연속성을 숨가쁘게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가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는 자각이 없는 까닭에 심리적인 그래프의 선을 이을만한 공통된 바탕을 발견할 리가 없다. '모르겠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지난번에 스크린에서 보던 사람인데, 철수 씨는 그를 이집트의 유명한 모타칸 박사라고 일러 준 적이 있다. 왜 모타칸 박사의 방에 내가 있는 것일까? 차라리 솔직하게 물어볼까? 모른척하면서 상대방의 설명을 들어볼까?' 진나는 마음 속에서 마하 3쯤 되는 속도로 사태 판단을 서둘렀다. 그러나 신통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같은 지구 위의 인류인데 설마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예감만이 진나의 눈을 뜨게 했다. "미스 박이랬지요. 의식을 회복했으니 기쁩니다. 나는 이집트의 식물 물리학자인 닥터 모타칸이요. 놀랄 것은 없습니다. 미스 박은 신경 과민증에 사로잡혀 사무한의 지시로 어젯밤에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요. 사무한을 비롯한 우주인들은 마치 벌레의 운동 법칙을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사람의 운동 법칙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감정이라는 개개인의 불확정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스 박이 향수에 사무쳐 마음의 분열이 일어난 행동을 그들은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더러 당분간 미스 박을 위해서 운하 지대의 휴양지에 다녀오라는 분부요. 그의 뜻을 잘 따라야지 우리는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모타칸 박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조용히 일러주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웃음이란 어느 시대의 어디서나 적의가 없다는 표시인 것이다. 진나는 나이 먹은 외국인 앞에서 후다닥 일어서서 대꾸할 수도 없어 똑바로 누운 채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 "나는 전혀 모르겠어요.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그 동안 흥분 상태가 계속된 모양이지요. 쉬라면 쉬고 일하라면 일해야지 다른 도리가 있겠어요. 사무한은 여자라고 자청했으니까 설마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요. 그래 박사님하고 운하 지대로 가야 하나요? 우리 동료들과는 아무 연락도 못한 채?" 진나는 상냥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모타칸 박사는 어딘지 어질게 보여 마치 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암, 진정하셔야지. 함께 온 철수 군과 송 경위에겐 나중에 사무한이 직접 설명하겠지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리 인간들은 프록시마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수준으로 볼 때, 마치 원시적인 짐승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 정도밖에 인류가 발달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자 일어나서 함께 운하 쪽으로 가봅시다." 모타칸 박사가 재촉하는 대로 진나는 머리를 손으로 다듬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섰다.   운하 지대의 휴양소   모타칸 박사는 벌써 밖에서 차를 대기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차는 마치 쪽배처럼 길다란 모양이었으나 바퀴가 하나도 없었다. '자동차 마저 중력을 이용한 것일까?' 진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리하여 모타칸 박사와 함께 넓은 바다와 같은 운하 지대의 휴양지에 도착하니 새하얀 모래사장에는 수많은 오후레 족들이 마치 대천 해수욕장에서처럼 자외선을 쪼이고 있었다. 진나는 차에서 내리자 이 진기한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보지." 모타칸 박사는 재촉했다. 모타칸 박사의 뒤를 따라 진나 양이 들어선 집은 거의 반투명체로 된 셀로판 가옥이었다. 그 집은 언뜻 보기에 2층인지 3층인지 아리송했다. 마치 소라 껍데기 모양의 구조였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여기서 몸조리를 해야됩니다. 나는 맨 꼭대기 방을 쓸 테니, 미스 박은 그 아랫방을 쓰십시오. 이 집은 밤이 되면 나선형을 따라서 자동적으로 땅속에 파묻히고 해가 뜨면 저절로 땅위로 솟아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답니다. 아무래도 내가 윗방을 사용하는 것이 예의일 거요." 대머리가 반들반들한 모타칸 박사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두 팔을 펼쳐 시늉해 보이면서 말했다. "오늘은 우선 쉬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해수욕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 풀릴 겁니다. 그럼 나는 올라갑니다.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부르세요." 모타칸 박사는 회전 층계를 밟으면서 위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진나는 아휴 하는 한숨을 내리쉬면서 가까운 의자에 몸을 던졌다. 분명히 바닷가까지 왔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머리 속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였다. 혹, 프록시마 인들이 자기만은 격리해서 무슨 인체 실험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오후레와 같은 무지막지한 동물에게 감시하도록 맡겼을 것이다. '모타칸 박사와 함께 있도록 한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정말로 나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이 그렇게 약한 여성이 되고 말았을까?' 진나는 요리조리 상환 판단을 서둘러 보았다. 얼마 후 퉁 동 당 하는 가벼운 음률이 들리더니 방이 송두리째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해변가에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진나가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는 밝은 해가 이미 눈부신 광선을 번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운하 지대의 아침은 빠른 것인지 벌써 물에 들어가는 꼬마 오후레 족들이 많았다. 진나가 여고 시절에 오빠 박한수를 따라 만리포 해수욕장에 놀러갔던 즐거운 추억을 더듬고 서 있을 때, 모타칸 박사가 층계를 내려 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박사님, 먼저 내려가세요. 아직 세수도 못했어요, 곧 내려갈게요." "허허, 잠꾸러기시군. 그러나 잘 쉬었다니까 마음이 놓이는군." 모타칸 박사는 미소를 띄우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진나도 부랴부랴 세수를 마치고 머리를 빗고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모타칸 박사는 코오아 수프를 마시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 "이 운하 지대에는 먼지도 없어 자외선 기운이 여간 강하지 않소. 지구 위에선 보통 파장이 2천 9백 옹스트롬 이하의 자외선은 공기 중의 먼지에 흡수되어 지표까지 도달하지 못하는데, 여기에는 2천 9백 옹스트롬 정도는 능히 도달 할 수 있소. 지구 위에선 2976 옹스트롬의 자외선을 쪼이면 살갗이 타서 벗겨지는 선번(Sunburn)현상을 일으키지만, 오후레 족은 더 짧은 자외선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후레 족들은 대낮의 해수욕을 피하고 아침과 저녁에만 물에 들어가고 있소. 살갗이 벗겨지면 그만큼 신경을 더 써야 하니 미리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죠." "그런데 박사님, 저는 여기서 얼마 동안 휴양해야 되나요? 함께 온 친구들과 제가 합류할 수 있을까요?" "글쎄 사무한은 미스 박을 걱정해서 이 곳으로 보낸 것이니까 좀 쉬고 있으면 다른 동료들과 만나게 해 주겠지요." 그러나 진나는 어쩐지 앞일이 까마득한 것만 같았다. 모타칸 박사는 아침밥을 다 먹고 나서 바다 저 편의 섬까지 드라이브하자고 권했다. 그들은 여기까지 타고 온 쪽배 모양의 바퀴 없는 자동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 자동차는 물위로 들려서 마치 호버 크래프트처럼 수면 위에 살짝 뜨면서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장치 때문인지 요란스러운 엔진이나 분사기 소리가 나지 않아 머리를 스쳐 가는 바람만이 질주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미스 박! 화성의 운하에서 한 여름을 즐긴다는 것을 전에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일 거요. 그러나 바로 이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오." 모타칸 박사는 더듬더듬 말문을 열고 지구의 현실과 화성의 현실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일러 주었다. "이 운하의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6천 미터 가량 될 거요. 지구 위의 바다는 해면으로부터 10미터 내려갈 적마다 수압이 1기압씩 늘어갑니다. 그래서 보통 잠수부는 수심 40미터까지 내려가서 작업을 할 수 있고 특수한 경우, 깊이 90미터까지 내려갈 수도 있으나,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2분에 지나지 않소. 지구는 이러한 조건에 비하면 화성의 경우는 중력 관계로 깊이 3백 미터까지 넉넉히 내려갈 수 있지만 프록시마 인들은 굳이 바다 속으로 내려가지 않고 필요할 때는 일정한 해면과 물을 물리적으로 증발시켜 버리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더 많은 열량의 에너지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점이 우리들 지구인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소." 진나는 날개가 돋친 듯 달려가는 수상 자동차 위에서 말해주는 모타칸 박사의 설명이 척척 머리 속에 들어가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람의 말이나 설명은 그 때와 장소가 완전히 일치할 때, 아무 장애물 없이 100%로 상대방의 대뇌에 새겨지는 것일까?' 진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만일 모타칸 박사의 이러한 설명이 무더운 교실에서의 강의였다면 따분해서 머리에 들어갔을까?' 노 박사는 말을 이어갔다. "아까 물가에서 본 오후레 족을 보면 남녀의 구별이 없지 않아요.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면 아마도 자기 관리가 잘 되어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다만 형식적인 심벌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라는 통일 상으로 합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모타칸 박사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지구의 현실을 살펴 볼 때 이런 점에 주의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의 몸에 비교해서 말하겠습니다. 수많은 정자 중의 엘리트 하나가 난자와 결합해서 세포 분열을 시작할 때, 맨 처음에 소화 기관이 되는 것을 내배엽이라고 부르고, 다음으로 근육과 뼈가 되는 것을 중배엽이라 하고, 맨 나중에 신경계통과 뇌를 구성하는 것들 외배엽이라고 칭하지요. 내배엽 - 중배엽 - 외배엽의 형성 과정은 퍽 흥미가 있습니다. 이 프로세스를 인간의 역사의 발전 과정과 비겨 볼 때, 비슷한 점이 많이 나타납니다. 원시 시대에 사람은 식생활을 해결하려고 무척 애써왔고 지금도 애쓰고 있는데, 이것은 내배엽 대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다음으로 인간은 스스로의 근육과 팔다리를 해방하려고 산업 혁명을 일으켰는데, 중배엽 시대라고 일컬을 수도 있겠지요. 그 다음에 사람은 스크린을 통한 매스컴을 발달시켰고, 최선을 유행시키고, 전자 계산기를 개발하여 이른바 중배엽 시대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포의 분열 과정과 역사의 발견을 이렇게 비교해 보면, 맨 처음에는 농업 혁명이, 다음에는 산업 혁명이 두 번째로 두뇌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경제학 분야에서도 비슷하게 해석하여 제1차 산업을 수산과 농업에 두고, 제 2 차 산업을 제조업에 두고 제 3 차 산업을 상업이나 정보․교육․서비스업에 두고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스 박! 어떤 학자는 인류의 발전 과정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 속에서 재현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일을 기억하시겠지요. 그러나, 나는 거꾸로 사람의 개체의 발달이 인류의 역사의 진도를 규정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와 개체는 레시프로칼 하지만 처음의 주체는 역시 사람이니까요." 모타칸 박사는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불은 보이지도 않은 채 연기만 풍기기 시작했다. 벌써 수상 자동차는 섬에 다다른 것이다. "외배엽 시대로 접어든 인류의 역사가 크게 혼란을 일으키고 또한 개인의 도덕이 흐리멍덩해져 가는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섬으로 차를 몹시다." 나는 모타칸 박사가 일러주는 역사 발전의 구름다리에서 깨어난 듯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가서 앞을 내다보았을 때, 시커먼 괴물들이 우글우글 하는 것을 목격했다. "앗! 저것은 또 무엇일까?" 깜짝 놀라면서 진나는 모타칸 박사의 왼팔을 잡았으나, 박사는 당장에 아무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사무한과의 협상   한편, 식당에선 박진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철수와 송 경위는 아무리 3232를 찾아도 찾아 낼 도리가 없어 오후레의 사무실을 불렀다. 오후레도 방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오후레가 미스 박을 납치해 간 것이 아닐까? 김 선생, 오후레를 찾아봅시다." 송 경위가 후닥닥 일어서면서 재촉했다. "송형, 진정해요.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먼저 사무한에게 이 일을 보고해야 되지 않겠오. 사무한의 사무실로 함께 가봅시다." 철수는 어디까지나 침착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송 경위 못지 않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딜 가게 되면 찍소리라도 연락은 있을 텐데…… 무슨 급한 일이 생겼을까?" 철수는 혼자 말을 하면서 앞장서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그리하여 5층에 있는 사무한의 사무실에 와 보니 무한대 대 기호가 셋 여전히 붙어 있었다. 송 경위가 다짜고짜 노크를 했다. 문은 노크를 안 해도 저절로 열려지는 것을 방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이 앉아 있으니 사무한이 의젓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웬 일이시오. 두 분 다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김철수가 나서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함께 납치 되어온 박진나 양이 어젯밤 중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버렸소. 귀하는 혹 그 행방을 모르나요." "호호호호? 그런 일로 그렇게 새파랗게 흥분하십니까? 진나 양에겐 아무 일도 없소. 어젯밤에 꿈 속에서 갑자기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경련하는 것을 오후레를 시켜 모타칸 박사에게 보냈습니다. 의사와 상담하나마나 노이로제가 심하니 모타칸 박사에게 부탁하여 지금 운하 지대의 휴양지에서 당분간 쉬도록 했소. 무슨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 사무한의 상냥스러운 목소리는 결코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하 지대가 어디이며, 멀쩡한 사람을 병자라고 따돌리는 심보가 무엇인지, 두 사람에겐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운하 지대로 가서 진나 양과 만날 수 있게 해 주시오. 그녀의 심정은 우리가 더 잘 이해하니까,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면 노이로제는 하루 사이에 해소될 겁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와 대등한 입장에 서 있지 못하다는 것 좋은 알고 있겠지요.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 화성입니다. 여러분은 프록시마 별 사람들의 포로라는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어느 틈에 오렌지 주스가 날라져왔다. 사무한은 두 사람에게 차를 권하면서 자기가 먼저 컵을 들었다. 아무리 큰 소리를 해 본들 철수와 송 경위는 자기들이 포로라는 벽에 부딪치고 보면 할 말이 없다. 포로! 그것은 우주이건, 지구이건, 동물 세계이건, 생물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슬픈 대명사가 아니고 뭐냐. 철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지구인의 문명이 지지부진한 원인이 원망스러웠다. '지구 위에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능력이 희망과 소원대로 달성되지 못한 까닭에 그만큼 진보가 늦어질 따름이다. ' 이런 생각은 비단 철수뿐만이 아니란 월등하게 훌륭한 우주인 앞에서 송 경위도 참을 수밖에 없는 굴욕이었다. 사무한은 두 사람을 위압적으로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비행대가 화성을 개발해 온지 오래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구나 금성의 식물 씨앗을 화성에 옮겨 심어 개량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심지어는 여러분 이외에도 동물과 식물의 천연적인 열 교환을 시도해 보았으나 기대에 어긋났고 까닭에 탄산가스를 대량으로 만들려던 당초의 계획이 예정대로 진전되지 않고 있소. 그래서, 우리는 태양계의 쩨쩨한 별보다는 1친 억 개를 헤아리는 은하계의 넓은 별 중에서 쓸만한 씨앗을 구하려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철수 씨는 다소 식물 발전에 관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씨앗 계획에 관심을 갖겠지요. 어떻습니까? 말해 보시오." 눈을 똑바로 뜨고 깜박거리지 않은 채 사무관의 입을 주시해오던 철수는, 그녀가 도리어 자기에게 의견을 묻자 마음 속으로 당황했다. 무슨 의견을 내세우면 무식이 폭로될까봐 주저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씨앗 계획의 내용을 알고 싶은 반작용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철수는 어떻게 해저라도 사무한의 기분을 잡아당겨 행방불명이 되다시피 한 박진나를 찾아 내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 "왜 말이 없습니까? 나는 프록시마 별의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식물과 동물을 개조하는 사명을 띠고 있소. 스스로 개조를 거역하는 자는 멸망이 있을 뿐이오. 철수 씨라 송 경위도 지구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런 것쯤은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어서 대답하시오." 사무한은 엉뚱한 요구를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새로운 씨앗 계획은 몇 해나 걸립니까? 또 우리 두 사람이 꼭 참가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탄산가스를 대량 생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철수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다가 도리어 사무한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세 가지 질문을 내세우고 맞서 보았다. "불과 6개월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두 분이 화성에 남아 있어 본들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은하계 원정을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탄산가스가 필요한 이유는 아직은 묻지 마십시오." 사무한은 철수의 말을 냉큼 받아서 슬슬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성에서의 식물 재배가 한계점에 달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식물이 자라기 일해서 포지티브 프레셔와 네거티브 프레셔의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압력이 작용해야 합니다. 지구의 경우 한동안 네거티브 프레셔가 압도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공룡시대의 식물처럼 거대한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지구뿐만 아니라 화성의 경우도 포지티브 프레셔가 압도적이어서 전자력이나 화학비료에 의한 재배가 제각기 한계에 달했다고 봅니다. 까닭에 새 씨앗 계획은 그러한 네거티브 프레셔가 아직도 남아 있는 별에서 우선 씨앗을 도입하여 세포의 배추체를 적절히 유지시키면서 새로운 품종을 발전시켜야 됩니다." 사무한은 식물에 관한 설명은 더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고 철수와 송 경위가 화성에서 은하계로 떠나는 여행에 참가하도록 지시했다. "아무리 우리의 입장이 약하다고 해도, 덮어놓고 데리고 갈 수야 없겠지요. 사무한이 만일 인간의 포로가 되었다고 입장을 바꿔보십시오. 우리는 결코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송 경위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면 어쩌자는 거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송 경위는 의견을 내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철수는 재빨리 송 경위를 제지하면서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박진나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기왕이면 함께 가보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그런 약속쯤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한은 가볍게 0K했다. 송 경위는 처음으로 김철수를 올려보았다. 6개월 후에 지구로 되돌려 보내달라는 조건을 붙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모레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사무한은 두 사람을 응접실에 남겨 두고 옆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철수와 송 경위는 착잡한 표정을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볼 따름이었다. 은하계 탐험에 참가하는 대가는 너무 값 싼 것이었다. 송 경위는 마음 속으로 과학자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것이구나 하고 삭여버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미스 박과 만나면 그만이라니 김철수의 감정을 따지고 들떠간다면 필경은 송 경위와 철수 사이에 대립이 생겨 서먹서먹하게 될 것은 뻔하다. 송영철은 지구로 송환될 수 있는 언질을 잡아 낼 수 있었던 최초의 기회를 전송해 버린 셈이다. "이 다음에 그런 호기가 찾아오면 이번에는 싸워서라도 꼭 내 주장을 고집해야겠다." 송 경위는 침대 위에 누워 모양 없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혼자 다짐했다. 화성의 지하 도시의 밤은 바스락 소리 하나 없는 고요 그대로의 적막 속에서 잠을 청하는 숨소리들이 바둥거리는 격이다.. 며칠 후, 철수와 송 경위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오후레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무한이 보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랴부랴 밥을 먹고 나서 사무한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날 따라 유난히 파랗게 보이는 사무한은 기다리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서서 철수와 송 경위를 웃음으로 맞이하면서 소파에 앉도록 권했다. 이제부터 진나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말하겠거니 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철수는 사무한을 바라보았다. 송 경위는 저 자가 또 무슨 소리를 할 것인가 불안한 생각이 맴돌았다. 사무한이 사무실에서 먼저 나와 기다리는 적은 일찍이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급히 부른 이유는 태양계의 회전 조건으로 보아 내일 낮에 출발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곧 출발 준비를 해야겠는데, 약속대로 미스 박을 텔레비전으로 불러 내어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스크린을 통해서 만나 보십시오." 사무한의 말은 천만 뜻밖의 얘기였다. 화성의 슬픈 포로들이 서로 얼싸안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체념으로서 달래 보려던 그들의 욕망은 산산조각이 되고 만 셈이다. 철수는 그것은 약속 위반이라고 항의하려 했으나 벽에 걸린 스크린에는 벌써 미스 박의 얼굴이 큼직하게 나타나 있었다. 수심에 잠긴 듯 여위어 보였으나, 그래도 건강한 박진나의 얼굴을 보니 두 사람은 반갑기 짝이 없었다. "미스 박! 어떻게 된 일이요?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이 많았소. 지금 어디에 있는 거요." 철수의 초조한 물음에 진나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기운을 차려서 말을 해야지, 우리는 내일이면 6개월 간의 은하계 여행을 떠나야 됩니다. 어서 얘기를 해야 속이 풀리지요." 송 경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재촉했다. "은하계 여행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가게 되면 나도 함께 가야지요. 오늘날까지 세 사람이 생사를 같이 해 왔는데 ……" 진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야무지게 대들었다. "몸이 아픈 사람이 멀리까지 가서 뭣해요. 미스 박은 당분간 모타칸 박사와 화성을 지키고 계세요. 말이 6개월이지 우주적인 시간의 단위에 맞추면 잠깐이니까요." 사무한이 나서서 얘기를 가로막아 버렸다. "아무래도 운명의 별이 함께 있지 않는 모양인가 보오. 미스 박!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돌아올 테니 당분간 꾹 참고 있어요. 시련을 이겨 낼 줄 알아야지요." 철수는 이 이상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사무한에게 속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대꾸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걱정할 건 없어요. 다행히 모타칸 박사가 도와주고 한다니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 같소. 아무리 은하계 여행을 한다고 해도 서로 연락할 길은 있을 거요." 송 경위도 진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진나는 말이 없었다. 그들이 은하계까지 여행하는 목적을 납득할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프록시마의 율법은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맨 처음에 일러 두었을 텐데…… 미스 박은 몸조리나 잘 하세요." 사무한은 표정 하나 까딱도 않고 이렇게 말하고 나서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껐다. 흔히 얘기하는 싱거운 이별이라기 보다 오히려 마음을 주름잡은 구겨진 이별이었다. 박진나는 그녀대로 스크린이 꺼지고 난 다음에야 그럴 바에는 걱정 없이 다녀오라는 한 마디를 못한 것이 여간 분하지 않았다. 세 사람에게 던져진 운명의 주사위가 다시 한 번 굴러갔을 따름이었다.   은하계 탐험   다음날 화성을 떠나게 되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온 화성의 발진 기지엔 비행접시 모양의 타원형의 우주선이 아닌, 로켓 모양의 송곳같이 뾰족한 우주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무한은 평소와 다름없는 복장으로 앞장을 서서 델타 3호라는 표지가 빨갛게 적혀 있는 우주선의 입구의 문을 열었다. 철수, 송 경위 그리고 오후레의 순서로 층계를 뒤따라 올라서 비행체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한이나 오후레에게 아무 감개도 없듯이 철수에게도 송 경위에게도 은하계로 간다는 새삼스러운 실감이 들지 않았다. 은하계의 중심으로부터 3만 광년 변두리에 떨어진 채, 그 중심을 맴돌고 있는 태양계의 존재는 주먹만하게 굵직굵직한 별들에 비할 때 콩알만한 미존에 지나지 않다. 철수와 송 경위는 밀실의 의자에 자리잡는다. 사무한과 오후레는 아마도 조종실에 자리잡은 듯 녹색, 인간과 황색 인간 사이에는 헐지 못할 벽이 가로 막혀 있었다. "김 선생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말이 없소, 은하수를 탐험한다니 나는 꿈 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거짓말만 같아 우습기 짝이 없소." 송 경위는 철수보다 서너 살 위였지만 침묵이 계속될 때마다 으레 먼저 말문을 여는 버릇이 있었다. "꿈이라니요? 우리는 완전히 홀린 것이오. 은하계의 직경만 해도 약 8만 광년인데 저 거대한 성운 속으로 여행하다니 일찍이 아무도 상상 못했을 거요. 가만히 두고 봅시다." 철수는 길다랗게 자란 손톱을 들여다보면서 말할 뿐이었다. 그 동안 한두 번 깎기는 했으나, 그들의 손톱은 어지간히 길어서 그 위에 색칠만 한다면 지구상의 여성들의 매니큐어 손톱이나 다름없이 보였을 것이다. "푸른 하늘 은하수…… 라는 반달의 노래를 로켓이라는 쪽배로 달리는 셈이로군." 송 경위는 입술에 쓴웃음을 띄어 보였다. 도넛형의 은하계의 옆얼굴인 별들의 띠를 은하수라고 부르는 것을 송영철은 미처 모르고 아직도 은하계와 은하수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델타 3호가 이륙했는지 몸의 양감이 얼마간 다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구에서 화성까지 단 10여 분 사이에 납치되어 온 체험에 비추어 프록시마의 초문명을 부정할래야 해 볼 길이 없었다. "몸이 조금 가뿐해진 것도 같은데, 송 경위는 어떻소?" "마찬가지올시다. 밖이 안보여 도리어 답답하기 짝이 없소." "창문도 없고 천장의 스크린은 여기서 조종할 수도 없으니 곡간차에 타고 있는 기력이라는 거지요. 핫하하" 송 경위도 따라서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 지는 듯 했다. 그러자, 별안간 앞 천장의 원형 스크린에 스위치가 들어간 듯 바깥 모양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 선생 보십시오. 태양이 벌써 저렇게 멀리 보이지 않습니까. 빠르기도 하군. 제 아무리 뛰어난 요술꾼도 저렇게는 못하겠지요." 송 경위는 눈이 휘둥그래 해지면서 자꾸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태양을 중심으로 좁쌀 만한 아홉 개의 항성이 한 주먹만하게 보면 채 시시각각으로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철수는 머리 속으로 '어이없이 간단하군‘ 하는 소리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림으로 보는 태양계 그대로 델타 3호는 간단하게 그 굴레를 벗어난 것이었다. "기분이 어떻소?" 어느새 사무한이 나타나서 빙그레 웃으면서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는다. "기분이라니요?" 철수가 반문했다. "감상 말이에요. 은하계 여행의……" "언제 우리들이 기분으로 좌우된답니까? 우리는 좀 더 이성적인 지구인을 자처하고 있소." "말이 빗나갔군요. 여러분은 태양계를 처음으로 벗어나 본 사람들이니 한 마디 물어 보았을 따름이오." 사무한은 이내 냉정한 어조로 되돌아갔다. 서로 화목하게 은하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처지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문명의 우월 의식과 열등 의식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창호지 만하게 얇은 반투명의 벽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도 그러한 벽 위를 동짓달 달빛 모양의 차디찬 적의를 은근히 스쳐간 것이었다. 사무한은 생각을 다시 하듯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편의상 우리라고 해 둡시다. 지금 우리는 파섹의 속도로 은하계의 변두리 별 사이를 비행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1파섹 3.26광년을 일컫습니다. 광년이라는 거리의 단위가 너무 짧아 파섹이라는 거리의 단위를 취한 거요. 이 델타 3호의 속도는 킬로 파섹까지는 가속할 수 없으나 그래도 웬만한 속도는 다 낼 수 있습니다." 사무한은 스크린의 화면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의 태양은 매초 220km의 속도로 은하계의 중심을 미분 회전하고 있어 태양이 은하계를 한 바퀴 공전하려면 2억 5천만 년이 걸립니다. 알기 쉽게 10억 년에 4회전하는 셈이지요. 지구의 나이를 60억 년이라고 할 때, 지구가 태양계에 태어나서 벌써 24회나 은하계를 공전했다는 계산이 성립됩니다. 이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팽이 장난 같지요. 그러나 은하계 안에는 태양보다 수백 배 수천 배나 더 큰 별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만큼 더 강한 방사선이나 우주선을 발생하는 장소를 태양계가 통과하고 있다는 뜻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스크린 속의 태양계의 자취는 이미 사라지고 이름 모를 다른 별들이 멀리 바라다 보였다. 사무한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옛날에 지구 위에서 여러분의 선조들이 겪었던 공룡 시대의 공룡들은 어느 날 태양계가 강력한 우주선이 깔린 은하계를 통과할 무렵부터 위축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거의 멸종하다시피 없어진 거요, 그 뿐이랴, 지금으로부터 85만 년 전만 해도 지자기의 극성은 오늘의 남극과 북극이 서로 바뀌어 있었으며 240만 년, 335만 년 전에도 자기 변동이 있었소. 그러한 현상은 또 하나 태양계가 은하계의 궤도를 돌 때 다른 강력한 별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오." 철수는 사무한의 파란 눈이 반짝이면서 일러 주는 새로운 얘기에 넋을 잃고 이끌려 들어갔다. "태양계나 지구의 원시적인 발달 과정을 설명하려면 또 한이 없겠소. 다만 포지티브 프레셔와 네거티브 프레셔의 관련이 식물 개조에 중요하기 때문에 미리 일러둘 따름이요.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은 뒤늦게 그러한 두 가지 프레셔의 상관 관계를 발견하여 상대성 이론이라고 주장한 모양인데, 파섹 단위의 은하계나 성운 세계에 있어서는 네거티브 프레셔와 허력 사이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이 흥미진진합니다. 우리가 머지 않아 도착할 오메가 9호 별은 말하자면 네거티브 프레셔와 허력의 밸런스가 알맞은 전형적인 별입니다. 아직도 화학 원소의 구성은 지구보다 안정되어 있진 않지만 은하계의 허시점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동물보다는 식물이 전지표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요, 오메가 9호 별은 그러한 환경의 수많은 별 중의 하나입니다." 사무한은 그러면서 네거티브 프레셔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을 자랑했다. 자기의 머리에 둘러진 링 모양의 살이 바로 1백 년의 나이를 뜻하며 네거티브 프레셔의 세계에서는 보통 6백 년이면 장년층에 속한다고 말했다. 철수도 송 경위도 사무한은 여기를 듣고 있는 동안 대꾸해 볼 아무런 건더기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오직 교단 앞에 짝지어 앉은 학생처럼 사무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볼 따름이었다. "그럼, 다시 연락할 때까지 쉬고 계세요. 오메가 9호 별까지 3일은 걸릴 거요." 사무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선 조종실로 가 버린 후에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네거티브 프레셔가 과연 무엇이며 허력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알쏭달쏭 했으며 더구나 은하계의 용궁과 같다는 오메가 9호 별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신비스럽기만 했다. 철수와 송 경위가 미스 박을 걱정하고 찾아 볼래야 찾아 낼 수도 없는 아득한 허공의 저편에 반짝이는 별들을 밤낮으로 바라보곤 있는 동안 지루한 시간은 72시간이라는 공간을 날랐던 모양이다. "자, 스크린을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노란 별이 우리가 찾고 있던 오메가 9호 별이요. 머지 않아 착륙하게 될 테니 마음의 준비를 갖추시오." 사무한은 조종실 쪽에서 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보이면서 일러 주었다. 화면에는 과연 울퉁불퉁한 땅덩어리가 쏜살처럼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여 눈알이 어지러웠다. 어느새 델타 3호는 수평 비행으로 옮겼는지 몸에는 다시 양감이 생긴 듯 묵직한 중량감이 팔다리에 감돌았다.   오메가 9호 성에 착륙   "송형, 왜 꾸물꾸물하고 있습니까? 내려서 식물만의 세계로 된 별천지를 구경합시다." 철수가 아무리 권해도 송 경위는 핼쑥하게 빠진 얼굴에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눈으로서 좀 쉬어야겠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웬 일이시오. 이 신기한 세계의 탐험을 앞두고 기운을 잃다니. 송 경위도 마음이 약하군." 사무한은 지쳐버린 송 영철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말로만 동정하는 척 할 뿐이었다. "그럼 여기 남아 있어요." "여기서 죽기 전에 화성에라도 빨리 돌려보내 주쇼." 송 경위는 사무한에게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이 곳에서 성과만 좋으면 곧 돌아갈 테니 걱정 마시오." 오후레가 조종한 듯 델타 3호가 땅에 내리자 송 경위만 남긴 채 세 사람은 우주선의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송 경위는 여태까지의 시무룩했던 자세를 버리고 벌떡 일어서서 조종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흠! 모든 것이 자동식이구나. 숫자도 단위도 전혀 다르구나." 송 경위는 수백 가지 계기판을 그래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무전 장치였다. 송 경위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어떻게 해서든지 신공덕리의 자력선 연구소나 경찰 본부에 자기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싶었다. 보고라기 보다는 단 한 마디라도 알리고 싶은 욕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정작 일을 해 보자니 지식이 모자라는구나." 송 경위는 혼자서 마음 속으로 한탄하면서 필사의 눈초리로 무전 장치를 찾아 조종실을 뒤졌다. 초조한 시간의 흐름… 그 시간은 연속해서 흐르지 않고 띄엄띄엄 흐르는 불연속의 시간이었다. "옳지! 이것일는지도 모른다." 송 경위는 무수한 계기판 중에서 사인 커브와 코사인 커브가 교차되고 있는 전류의 보라색 빛깔을 찾아 냈다. 그리하여 한 손으로 아래쪽 다이얼을 약간 돌려본즉 삑삑 소리나는 귀에 익은 전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그 전파가 중성 수소파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파장 21센티미터의 이 수소파만이 우주 통신총으로 사총되고 있기 때문이다. 송 경위는 마이크를 입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 댔다. "신공덕리, 신공덕리의 식물 자력선 연구소! 경찰 본부! 경찰 본부!" 송영철은 잠깐 멈춘 다음 다시 호출을 계속했다. '자력선 연구소! 경찰 본부! 여기는 김철수, 송영철, 박 진나. 여기는 은하계!" 송 경위의 음성은 점점 높아갔다. 송 경위는 애절한 목소리로 고국의 사람들을 불러댔다. 신공덕리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권일송 박사를 부르고 경찰 본부도 불러봤으나 당장에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은하계의 오메가 9호 별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몰래 송신기를 붙잡은 송영철은 꾀를 부리면서까지 스스로 붙잡은 단 한 번의 호기를 놓칠 수가 없었다. '힘이 자랄 때까지 우선 송신이라도 해 놓아야지. 소식이라도 전해 듣고 봐야지.' 송 영철의 가슴은 점점 두근거리면서 숨소리는 마침내 목소리를 압도하고 말았다. '신공덕리! 경찰 본부!' 송 경위의 대뇌 속에는 기록되었을는지도 모르나, 기진맥진한 채 조정실 밑바닥에 쓰러진 그의 마음의 고함을 들어주는 자 아무도 없었다. 송 경위는 멀고 먼 은하계의 또 하나의 별 속에서 그래도 자기의 신념과 의무를 다해 보려고 온갖 힘을 기울인 끝에 졸도하고 만 것이다.   학술 탐험   한편 오메가 9호 별에 내린 김철수는 사무한의 뒤를 따라 밀림 속을 헤치면서 언덕바지로 향해 갔다. 오후레는 사무한을 안내나 하듯이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철수 씨, 동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별인데 소감이 어떠하오? 이 널찍널찍한 잎사귀나 거칠 것 없이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키가 부럽지 않아요?" "글쎄요." 철수는 마음 속으로 지구 위의 숲과 이 곳의 기기묘묘한 나무들을 비교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구 위의 숲에선 지금도 전나무와 백양나무가 수만 년 이래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전나무는 그늘을 좋아하지만 그와 반대로 백양나무는 빛을 좋아한다. 전나무의 숲에선, 백양나무는 조그만 싹인 채로 발아래 숨어 있다. 그늘이 많은 전나무가 진로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전나무를 베어 버리면 백양나무는 밝은 빛을 받아서 금방 생생해지고, 며칠만이 아니라 몇 시간마다 커진다. 어미의 전나무가 살아 있던 무렵에는 넓은 초록의 스커트 덕택으로 애송이 나무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햇빛을 막아 주던 어미 전나무가 없어지자 애송이 나무들은 지나치게 밝은 빛을 받고 약해져서 마침내는 죽어 간다. 그 대신 백양나무는 쑥쑥 자란다. 이전에는 우연한 기회에 그 적수인 전나무가 땅위에 떨어뜨리는 가느다란 빛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양나무가 주인이 되어 어두웠던 전나무 숲 뒤에 밝아 보이는 밝은 백양나무의 숲이 마련된다. 그리하여 시간은 또 흐른다. 시간이란 위대한 일꾼이다. 백양나무의 키는 차츰 높아지고 그 정상은 점차로 밀집해진다. 처음에는 밝고 드문드문했던 그 발치의 그늘은 차츰 짙고 어두워져 간다. 백양나무는 승리자가 되었지만 그 승리 속에 바로 자멸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백양나무의 그늘 밑에서 이번에는 그늘을 좋아하는 전나무가 자란다. 몇십 년이 지나면 전나무 꼭대기는 백양나무의 꼭대기를 쫓아오고 숲은 서로 뒤섞인 잡색으로 바뀐다. 백양나무의 밝은 녹색은 끝이 뾰족한 어두운 전나무 꼭대기에 눌리고 만다. 전나무는 점점 높아져서 이번에는 그 울창한 가지나 잎이 백양나무의 떼를 햇빛에서 가리고 만다. 이리하여 백양나무의 종말이 온다. 전나무가 짓는 그늘 속에서 백양나무는 쇠약해지고 대신 전나무가 생존의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글쎄라니요. 오메가 9호 별에서 우리들이 찾아 내어 할 새로운 씨앗은 반드시 화성의 사막을 푸른 녹지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 넓은 잎사귀는 이 별이 지니고 있는 네거티브 프레셔의 작용으로 퍼진 것이지 결코 광선의 잎파랑이가 발달한 때문은 아닐 것이오. 어서 따라 오세요." 사무한은 철수를 힐끗 쳐다보면서 마치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 앞장서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비행 대장, 오늘은 아무래도 정찰 정도로 끝내고 자료 수집은 내일부터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오후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무한의 눈치를 살펴보고 있다. "아니야. 일을 후일로 미룰 수는 없지 않나. 오늘 가능한 한 자료 수집을 위한 기초 조사는 해 놓아야지. 오후레는 문명인으로서의 사명이 얼마나 엄숙한 것인가를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전 우주를 프록시마의 문명으로 통일해서 생물 개조의 혜택을 주자는 것이 우리 비행대의 임무가 아니었는가!" 사무한은 오직 전진밖에 없다는 꿋꿋한 자세를 취하면서 한 손으로 숲의 잡목을 비키고 갔다. 철수는 철수대로 뒤따르면서도 수많은 수수께끼를 삭이고 있었다. 도대체 녹색 인간들은 무엇 때문에 탄산가스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또한 오메가 별의 정글을 내다 볼 때, 지구 위의 전나무와 백양나무 사이의 투쟁과 비슷한 밀림의 암투가 이름 모를 진귀한 나무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오메가의 밀림에서는 지구와는 달리 낮과 밤의 주기가 고르지 않기 때문인지 온도차로 식물의 분포가 판이하게 달라 보였다. 잎사귀가 넓은 나무들은 산마루에 더 많이 집결하고 잎사귀가 뾰족한 나무들은 계곡 쪽에 더 집중하여 무성하고 있었다. 이 별의 식물들은 분명히 복사열 자체보다는 네거티브 프레셔의 작용을 더 많이 받고 있는 듯 보였다. 철수는 마음 속으로 '녹색 인간들의 핏속의 활력소는 산소와 결합하는 헤모글로빈과 달라 탄산가스와 결합하는 이질적인 그 무엇이 있나보다. 저 자들이 탄산가스를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식물을 찾고 있는 것은 탄산가스를 화학적으로 합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합성의 단계를 끊고 나서 이제는 자연의 소산을 소중히 여기려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철수의 이와 같은 명상은 또 한 번 사무한의 히스테릭한 음성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 "철수 씨, 자 이 네모진 열매를 따 넣으세요. 새로운 품종을 이제 발견할 것도 같소. 핫하하하." 오후레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따온 파란 열매를 사무한은 한 손으로 철수에게 넘겨주었다. 철수는 등에 짊어진 셀레핀 배낭에 열매 일곱 개를 받아 넣었다. 철수는 열매를 운반하는 인부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세 사람은 첫 날 수십 리의 산과 들을 헤매면서 주목할만한 열매를 열댓 종류 따 모아 가지고 우주선이 있는 장소로 되돌아 왔다. 송 경위는 졸도한 지 몇 시간이 흐른 후 저절로 의식을 회복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세 사람을 태연히 맞이했다. "송 형, 얼굴색이 몹시 나빠 보이는데 아직도 시원치 않아요?" 철수의 걱정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송 경위는 마음 속으로 철수에게 털어놓아야 할 얘깃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영철 씨는 이 약을 더 잡수세요. 내일이면 함께 자료 수집을 해야 되니까요. 몸을 조심해야지. 지구인들은 몸이 약해서 탈이야." 사무한은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송 경위와 철수만이 밀실에 남게 되자 송 경위는 철수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김 선생! 실은 오늘 낮에 21센티 중성 수소 파장으로 지구를 불러 보았오. 신공덕리의 연구소와 경찰 본부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던 끝에 졸도하고 말았는데 언제쯤 대답이 돌아올까?" 송 경위의 검은 두 눈동자는 흑 산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나지막한 귓속말은 철수에게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지구의 권 박사와 연락을 취해야지. 그렇구말구." 철수는 새삼스럽게 생각난 듯이 지구에의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처음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뜻밖의 소식   네 사람의 탐험가들은 오메가 9호 별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사하고, 그 다음엔 남쪽에서 북쪽으로 자료를 수집해 갔다. 근 한 달이 지날 무렵의 일이다. 네 사람이 로켓을 북쪽으로 이동시키려고 작업에 착수하는 순간 우주선 속에서 요란스러운 경보가 비명처럼 울렸다. "찌리링 찌링 찌리링!" 난데없이 울리는 경보에 깜짝 놀란 사무한은 곧바로 조종실로 달려갔다. 출입금지가 되다시피 한 조종실이었지만 날카롭게 긴장된 분위기에 휩쓸려 철수와 송 경위도 조종실로 뛰어 들어갔다. "음! 그래 ? 반란을 일으켰다고? 음, 음! 알았어. 주모자는 오후레 13번이라고. 알았어요. 곧 떠나지." 리시버를 귀에 대고 얼굴빛 하나도 변치 않은 채 사무한은 지시를 내린다. "797 방정식을 원용하도록, 오후레 13번의 간뇌 속 세 번째 세포가 이상을 일으킨 것이겠지. 797 방정식에 따르면 거기에 동조한 자의 간뇌 3호 세포가 모두 동결될 거야." 옆에서 이 일을 지켜보는 오후레 33번의 표정은 까딱도 않았다. 송 경위는 혼자서 짐작컨대, '오후레 족들이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일어 선 모양인데 여기 서있는 오후레는 태연자약하니 여간이 아니군, 문명이란 이렇게 생물의 감정을 고갈시키는 것일까?' 그는 마음 속으로 도리어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긴장된 분위기는 쉴 새 없이 그 당장에서 로켓의 진로를 화성으로 돌리고 말았다. 눈 하나 끄덕하지 않고 로켓을 오메가 9호 별의 중력권 밖으로 몰고 올라온 사무한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면서, "철수 씨, 영철 씨, 언제까지 조종실에 앉아 있을 작정이요? 사무실로 돌아갑시다. 어서 일어서요." 두 사람을 독촉하는 한편 조종석을 오후레에게 비워 주었다. 로켓은 사실상 자동 조종 이행을 하고 있었지만 어지러운 계기판을 감시할 인원은 한 두 사람이 꼭 필요한 모양이다. 세 사람은 조종실에서 나와 사무한의 사무실로 옮겨왔다. "자아. 거기 앉으세요. 우매한 오후레 족들이군. 자기 종족의 개조를 과학에 의존하지 않고 집단적인 감정에 의존하여 발산시키다니, 문명의 과정은 언제나 그런 곡절을 다 해야 하는 것인지 프록시마의 베타 문명의 수준으로 볼 때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기회에 내가 어릴 때 들은 프록시마의 전설을 두 분에게 말해 드리지요." 사무한은 침을 꿀꺽 실키고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할머니에게 들은 얘기죠. 옛날에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이 다른 별을 찾아갔을 때, 짧은 시간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는 아무 난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우주선으로 비행해서 새 천지에 도달해야 할 때는, 한 세대를 30년으로 쳐서 3세대가 같은 우주선에서 생활해야만했답니다. 그래서 당시의 우주 사회학자들은 장차 백 년 동안에 우주선에서 일어날 여러 가지 사건과 일들을 전자 계산기로 예측하여 미리 예정표를 짜놓았습니다. 두 쌍의 젊은 남녀가 함께 결혼하는 시기와 거기서 태어난 어린아이의 배움 문제, 그리고 다시 어린아이들이 성장해서 결혼하는 시기와 배우자 문제를 일일이 예정표대로 진행시켰다고 합니다. 프록시마의 문명은 이와 같이 일단 극한 상황에서 재검토되어 서로 감정적인 - 아니 - 비이성적인 면을 탈바꿈할 수 있게 짜여갔습니다. 백 년이라는 세월을 소수의 인원만으로 여행해야 된다는 것은 초기와 선조들에겐 여간한 고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늘 보는 얼굴이 언젠가는 보기 싫어져 감정의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따라서,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표대로 율법을 엄수하지 않는다면 우주 개발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어 헌법 제 1 조를 우리는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제정하고 그대로 지켰답니다. 그 후 문명의 진도에 따라 율법의 내용도 차츰 바뀌어졌지만 우주 사회에선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정신은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한은 테이블 위의 컵을 들어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더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다. "그러면, 우주선 안에서 돌아간 자기네 부모들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할머니는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주의 개척자들은 예정표에 따라 시체를 여러 화학 원소로 분해했답니다. 몸 속의 수분은 수분대로 칼슘은 칼슘대로 인분은 인분으로 온갖 원소로 분해해서 그것을 고스란히 이용했다더군요."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하면서 얼마간 이마를 찌푸렸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몸인데 그 아까운 화학 원소를 버릴 아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초기 시대처럼 클로렐라와 같은 식량으로 백 년 간의 우주 여행을 계속하려면 산소 1mg 일망정 아주 소중한 자산이니까요. 그러한 눈물겨운 우주 개척사의 뒤를 이어 프록시마의 별 사람 사이에선 미신이라든지, 종교라는 심리적인 부담이 아주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두 분이 언젠가 미스 박을 꼭 만나 봐야겠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문득 프록시마의 전경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감정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순수하고 합리적으로 순화된 것이 바로 과학 정신이 아닐까요? 두 분이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하겠어요." 사무한은 할 얘기는 이제 다 끝났다는 듯이 손으로 악수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사무한은 아무리 감정을 청산했다고 자처하고 있지만 화성의 반란 사건이 그를 다소 긴장시키고 흥분시킨 것 같았다. "자, 우리는 돌아갑시다." 철수는 멍청하게 사무한의 얼굴을 아직도 쳐다보고 있는 송 경위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거 근사한 전설인데……" 송 경위는 중얼거리면서 철수의 뒤를 따랐다. 밀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김 선생, 아까 그 전설, 그럴듯한 대목이 맞은데요. 우주 사회학이라는 것도 있는 모양이지요?" 송 경위의 물음이 이 시점에선 도리어 귀찮았다. 철수는 사무한의 얘기보다는 어찌하여 화성과 오메가 별 사이의 통신이 마치 직통 전화처럼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궁금했다. 혹, 그것은 오후레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얘기해 준 도약파를 이용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전파가 빠르다고 해도 보통 공간에선 광속보다 빠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화성이란 멀고 먼 파섹의 거리를 마치 직통 전화처럼 이용할 수 있는 사실은 공간이 비틀어진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광속보다 따른 도약파를 이용하고 있을 게다. 또 한 가지의 수수께끼가 철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셈이다. 네 사람이 화성으로 급행하고 있는 우주선은 마치 큰 바다의 고기 모양 유유히 소리 없이 한없는 공간을 홀로 비행하고 있을 뿐이다. 우주선 속에서의 지루한 하루하루가 그래도 밖에서는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 어느 날 저녁이라고 해두자. 사무한이 우주선의 조종실로 들어갔다. "김 선생, 아마 화성에 가까워지는 모양이죠. 사무한이 직접 조종실로 들어가데요." 송 경위는 재빨리 눈치채고 자고 있는 철수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얼마 후에, 우주선 내의 마이크 소리가 모처럼 울렸다. "한 시간 후면 화성에 도착합니다. 지금 막 태양계의 중력권 내에 들어갔습니다. 내릴 준비를 해 주십시오." 사무한의 특징 있는 목소리였다. 철수와 송 경위는 또 한번 얼굴을 맞대고 할 말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다. 미스 박은 어떻게 되었을까? 반란은 도대체 어떤 규모일까? 두 사람의 마음 속은 서로 달랐다. 우주선이 마침내 화성의 비행기지에 도착하자 사무한은 허둥지둥 조정실의 문을 열고 층계를 총총히 내려갔다.   반란 진압 작전   긴장의 빛을 감추지 못한 오후레 33번과 송 경위와 김철수도 뒤따라 화성의 땅을 밟았다. "남의 일인데도 덩달아 신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 선생, 우주 생물들의 반란은 어떤 규모일까요?" 송영철 경위는 철수의 시선을 살피면서 물었다. 물어본다기보다 오히려 자문자답하고 있는 듯도 했다. "송 형은 싸움이라니까 역시 신이 나는 모양이죠. 오후레 13번이 주동이 되어 반항한다니까 포로 신세인 진나 양에게는 큰 위험은 없을 게요. 이런 기회에 사무한을 도와 주면 그도 우리의 협력에 감사하는 무슨 표시라도 할게 아닌가 생각하오." 철수는 냉정하게 앞을 내다보면서 화성의 싸움터에서 어부지리를 얻을 계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야 물론이지요, 나도 그 동안 쭉 생각해 왔지만 이 기회에 사무한의 앞장을 서서 논공행상을 바랄 작정이었오. 언제까지 납치된 채 여기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기야 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이 하늘의 이치지만 우리의 입장에선 종족이 다른 자들의 싸움 속에서 실리를 취할 도리밖에 없을 거요. 그리하여 진나를 구하는 것이 선결 문제 같소." 철수와 송 경위는 나지막한 소리로 소곤거리며 사무한의 뒤를 따랐다. 사무한은 그 길로 지하 기지의 자기 사무실로 급행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사무한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차가 나선형의 건물 앞에 도착하자 사무한은 맨 먼저 내려서 먼저 층계를 올라갔다. "철수 씨와 송 경위는 저마다의 방에서 쉬고 계세요. 반란의 전모를 파악하는 대로 필요할 땐 연락을 해 드리겠소." "비행 대장, 언제라도 불러 주십시오. 언제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송 경위는 대뜸 사무한을 안심시켰다. 오후레 33번을 데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사무한은 모자를 벗어 던지고 당장에 텔레비전 스크린의 스위치를 켰다. 반란 장소는 바로 운하 지대였다. 수많은 오후레족 남녀노소들이 스크린을 압도하다 시피 화면 전체에 크게 비췄다. 그들의 표정은 노기에 가득 차 있는 자가 있고, 문어 다리 모양의 팔을 여러 개 뒤흔들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그 무엇인가 힘차게 외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도리어 슬픔에 잠긴 침울한 얼굴을 짓고 있는 자도 있었다. 오후레의 반란족들은 운하 지대의 건물을 때려부수거나 불을 지르는 난폭한 행동은 취하지 않은 듯 보였다. 주모자로 알려진 13번의 큰 얼굴이 화면에 투사되어 그 표정을 낱낱이 알 수 있었는데, 그는 다른 군중들보다 얼마간 높은 장소에 자리 잡고 서서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또렷또렷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13번은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나! 감마 문명의 압도적인 차이를 아직도 실감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을 얕보고 하는 수작이구나. 오후레 33번, 니키타 박사에게 797 방정식을 빨리 적용하도록 해요." 사무한은 가느다란 시선을 화면에 집중시키면서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오후레 33번은 대꾸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비행 대장님, 797 방정식의 적용 명령은 대장님이 직접 니키타 박사에게 내려 주십시오." "뭐라고?" "입장이 난처해서 하는 말입니다. 같은 동족을 억눌러야 되는 명령을 저는 전달하고 싶지 않습니다." "억누르다니, 누가 억누른단 말이야. 13번과 머리에 고장이 난 것을 고쳐 주겠다는 것뿐이지. 오후레, 그래서 항상 얘기하지 않았나. 감정은 우주 사회에선 절대 금물이라고. 우선 13번을 체포해 놓고 무엇 때문에 소란을 일으켰는지, 또 요구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할 게 아닌가! 나로서는 아직도 13번의 머리의 전두엽 세포 하나가 고장을 일으킨 것 같아요." 사무한은 언성을 높이면서 오후레 33번을 꾸짖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직접 지시하지." 사무한은 니키타 박사의 사무실을 불러 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니키타 박사는 온후한 표정으로 먼저 사태 진전 상황을 슬슬 보고했다. "비행 대장님, 오후레 13번은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이 이 이상 화성의 오후레 족속의 문명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프록시마 별의 생물이었지만, 이제 화성에 안착, 이 곳을 독립지로 삼아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고 모의한 듯 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오메가 9호 별의 탐험에서 돌아온 후에 상의해야 할 일이지. 나도 없는 사이에 제멋대로 흉계를 꾸민다는 것이 말이 되오? 니키타 박사는 797 방정식에 따라 오후레 13번을 당장에 체포해 오시오." 사무한의 명령이 떨어지자 니키타 박사는 화면에서 사라졌다. 사무한이 스위치를 끈 것이었다. 그 후, 니키타 박사는 단신 중력총을 손에 들고 반란 현장으로 출동했다. 녹색 인간 사회에서는 일단 명령이 내리면 즉석에서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겉보기에 비대한 니키타 박사가 마치 지구상의 화염 방사기처럼 등에 탱크를 지니고 발사 호스를 가진 모습은 로봇을 연상시킨 것이었다. 급히 출동한 차에서 내린 니키타 박사가 반란 본부의 건물에 접근하자 무수한 오후레 족들은 환성을 올리면서 니키타 박사 앞으로 육박해 왔다. 이 때 니키타 박사의 중력총이 아지랑이처럼 아른하게 투명한 기운을 뿌리면서 발사되었다. 순간! 앞질러서 쫓아오던 오후레들은 서리맞은 풀인 것처럼 번번이 축 늘어지고 만다.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얼었다. 마치 현기증에 걸린 듯 발걸음이 휘청거리다가는 쓰러지고 마는 광경은 고요 그대로 외마디 소리 하나 외치지도 못한 채였다. "나는 니키타 박사다. 오후레 13번! 어서 항복해라. 비행 대장이 너의 요구를 듣기를 원하고 있다. 어서 건물에서 밖으로 나오라!" 니키타 박사의 말이 마치 마이크 소리처럼 쨍쨍 울려 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성서성하던 주위의 공기가 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오후레 13번은 공연히 희생자를 낼 생각을 삼가야 한다. 우주 세계에서 생명이 얼마나 존중되는지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어서 항복하라." 박사는 권유를 되풀이했다. "797 방정식을 적용하기 전에 어서 나오라." 수많은 오후레 족의 시선이 니키타 박사의 일거 행동을 응시하다가 이번에는 13번이 서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말없는 시선의 집중을 받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오후레 13번은 한참 두 눈을 감긴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나가서 사무한의 처벌을 받는 것이 오후레 족을 위해 유리할 것이냐? 또는 끝까지 버티어서 죽음으로서 오후레 족의 희망을 인식시키는 것이 유리할까?' 주모자 13번은 핼쓱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자문자답해 보았다. "죽음으로써 주장을 관철하느니 보다 역시 사무한과 만나서 내 주장을 내세우고 난 후에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 13번이 단상에서 내려 걸어가자 오후레 족의 차가운 시선이 마치 교수대로 이끌려 가는 죄수를 전송하듯 뒤쫓아 따랐다. 주모자는 아무 말 없이 건물 밖으로 나와 터벅터벅 니키타 박사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니키타 박사는 이제야 마음을 놓은 것인지 중력총의 총구를 내리고 주모자를 마중하는 시늉을 취했다. "오후레, 쓸데없는 소란을 피우지 말고 빨리 사무한을 만나러 가세. 어서 차에 올라타요." 니키타 박사가 운전하는 전자 에스컬레이터 차에 13번이 타자 자동차는 고속으로 현장을 떠나고 말았다. 오후레 13번은 내내 말이 없었다. 주모자가 사무한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한은 텔레비전 전화로 니키타 박사의 도착을 확인하자 이번에는 철수와 송 경위에게 자기 사무실로 오도록 연락을 취했다. 니키타 박사와 오후레 13번이 사무한의 응접실에 들어와서 13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얼마 후에 송 경위의 뒤를 따라 철수도 그 방으로 들어갔다. 비행 대장은 엄숙한 말투로 따지기 시작했다. "13번은 무엇이 답답해서 내가 얹는 동안 소란을 일으키오? 오랫동안 함께 우주 탐험을 해오다가 어찌하여 말썽을 일으켰소. 어디 설명을 들어 봅시다." "네, 서슴지 않고 대답하겠습니다. 아무리 오후레 족이 생물 개조의 과학력으로 진화했다고 해도 우리의 머리와 생리는 도저히 프록시마 별의 문명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분에 알맞은 문명이 필요합니다. 도저히 비약할 수 없는 모든 여건하에서 우리는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의 노예로 만족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의 가난한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비행 대장의 우주 정복의 이상은 너무 방대하여 우리의 규모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비행 대장 사무한님, 제발 오후레의 문명 수준에 개입해 주지 마십시오. 오후레는 오후레로서의 생명을 다 할 수 있는 진화의 가능성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의 현 생리로선 화성이 가장 적합한 거주지라고 생각됩니다. 오후레는 중수소를 흡수해야 되는데 화성의 운하 지대는 중수소가 많은 해류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장님! 우리의 희망을 들어주십시오." 주모자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애원했다. "그런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소.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은하계를 탐험하고 있는 동안 소란을 피운 것이요?" "그건 이렇습니다. 우리 생각으로선 오메가 9호 별까지의 거리로 보아 비행 대장이 언제 돌아올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소. 그 동안이나마 화성의 독립을 확보해 보려고 애써 봤을 뿐, 결코 나뭇가지 하나 상처를 입히거나 불지르거나 하는 난동은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반역이 평화적이라고 하더라도 반역 행위 자체는 나와의 약속 위반임엔 틀림없소. 오후레 13번은 우주선에서 태어난 후 내가 기르다시피 한 생물이요. 어찌 나와의 정의와 약속을 저버릴 수 있겠소. 나는 13번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줄 생각하오." 사무한은 주모자의 해명을 들은 척 만 척 사뭇 강경한 태도를 취하려는 눈치가 엿보였다. "비행 대장님! 오후레 13번의 요구는 그 시기가 나빴을 따름이지 내용 자체는 지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뜻밖에 송 경위가 오후레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섰다. "우리가 맨 처음에 서울의 신공덕리 임업 실험장에서 오후레 족을 목격했을 적에 그 말미잘 같은 기묘한 모양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기묘한 생물이 또다시 식물의 물줄기를 다 빨아먹는 현장을 보고 우리는 두 번 다시 놀랐습니다. 이제 오랫동안 겪고 보니 오후레 족은 선량한 생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운명에 따라 생명을 자결하겠다고 주장하니 이 일을 막을 자 어디 있겠습니까? 오후레 족이 화성에 안주의 땅을 정하겠다고 하면 이것을 꾸짖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권장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사무한 님은 이 일을 심사숙고해야 옳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송 경위의 열변은 굳어졌던 사무한의 표정을 다소 풀리게 했을까? 얼음장같았던 방안에 공기가 약간 풀리는 것 같은 촉감이 저마다 스며들었다. "송 경위의 뜻도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프록시마의 율법은 생물의 개조를 거룩한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낙오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과학은 과거의 진리를 수정함으로서 새로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지 결코 오늘에 만족하여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반역 사건은 과학 생활에 있어서 심벌을 취하느냐, 시스템을 취하느냐 하는 낡은 논쟁을 재연시킨 것입니다. 오후레 13번은 니키타 박사와 함께 근신하고 있으십시오. 니키타 박사, 13번을 데리고 먼저 나가 계시오.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곧 알아 내겠습니다." 니키타 박사와 주모자가 문 밖으로 사라진 후의 방안의 공기는 훨씬 홀가분해졌다. "이따위 반역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유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인지 오후레의 경우 1세대를 30턴으로 잡아 3세대에 한 번씩 비슷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할아버지 때 억누르면 아버지 때는 참고 아들 때는 기운을 얻어 폭발하는 것일까요? 할아버지 때 잘 지내면 아버지 때는 겨우 유지되고 아들 때는 망해서 어쨌든 1백 년을 주기로 불만의 언밸런스가 터지는 것 같아요." 사무한은 아직도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비행 대장님, 그런 심각한 얘기보다는 오메가 9호 별로 떠나기 전의 약속을 이행해 주십시오. 미스 박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반란 사건의 소용돌이 틈에서 혹 다치지나 않았는지? 이제는 노이로제도 다 나았을 텐데 우리들과 만나게 해주십시오." 철수가 비는 듯한 목소리로 사무한에게 부탁했다. "김철수 씨는 아무래도 큰 학자가 못될 것 같아요. 미스 박의 행방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내가 알기로는 모타칸 박사가 곧잘 보호하고 있을 겁니다. 그 점은 안심하세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입니다. 사람은 텔레비전 스크린이 아닌 실제의 피부를 육감할 때만이 안심이 되는 법입니다.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은 지구보다 몇 단계 앞선 문명을 호흡하고 있으니까,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경지에 도달했겠지만 지구인의 경우는 아직은 추상적인 숫자보다는 육감할 수 있는 실물이 모든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오후레 족보다 조금 앞섰을지도 모르나, 그들의 심정과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김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프록시마의 문명이 그렇게 엄청나게 발달되었으면 구태여 태양계의 쩨쩨한 땅덩어리보다는 더 시원 훤칠한 은하계의 새 행성계를 찾아서 새 계획을 세우는 것이 도리일 것 같습니다. 미스 박이 병에 걸리든 말든 그것은 지구인인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송 경위도 옆에서 덩달아 거들었다. "오후레 13번도 그렇고 여러분도 똑같이 낮은 문명의 그대로를 구제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얘기인데…… 구제한다는 것과 해방시킨다는 것 본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나는 오후레 족은 물론 언젠가는 지구의 인류 자체도 더 높은 차원의 베타 문명으로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한 일은 없는 법이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세요. 나도 그 동안의 일을 정리해야 되겠어요." 사무한은 먼저 일어서서 두 사람을 문 밖으로 내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쏭달쏭 합니다. 사무한은 미스 박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겁니까?" "송형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면 안되요. 오후레 13번의 처벌 문제를 먼저 해결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과학의 상징주의와 체계주의 사이의 모순을 다시 해결해야 되고 또한 구제냐 해방이냐 하는 문제도 곁들여 귀결된 다음에 비로소 미스 박의 문제가 저절로 풀릴 거요." "그럼 지금 사무한은 심각한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단 말이죠?" "그렇구말구. 그 사람 말대로 6백 년은 산다지만 자기 모순은 환경의 1백 년 주기에서 점화될 수도 있겠죠, 내일까지 아무 소리말고 기다려 봅시다." "내일까지 ? 또 내일까지 ……" 송 경위는 입 안에서 중얼거리면서 층계를 내려갔다. 철수는 철수대로 내일이라는 말이 던져 주는 막연한 뉘앙스를 마음 속으로 되씹으면서 송 경위를 뒤따라 내려갔다. 사무한은 자기 마음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태양계를 찾아서 화성의 지하 대륙에 기지를 마련한 지 불과 7년도 못되어서 오후레 족들의 마음이 변하리라는 것은 일찍이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사무한은 홀로 사무실을 나와서 차를 몰고 땅위의 운하 지대로 향했다. 밖의 공기는 오존이 풍부한 지하 도시의 공기에 비하여 얼마간 서늘했다.   드디어 지구로   그녀는 지금까지 가장 신임해온 모타칸 박사를 만나서 장차의 일을 상의해 볼 작정이었다. 녹이 쓴 것처럼 황토가 빨갛게 산화한 화성의 지표 여기 저기에 그 동안 가꿔 놓은 푸른 녹지대와 숲이 지금의 외로운 심정을 풀어 주는 듯 했다. 그러나 식물은 여전히 식물에 지나지 않아 동물의 움직이는 감정과의 대화에는 알맞지 못했다. 사무한은 그대로 차를 몰고 운하 속으로 들어갔다. 화성에서와 차량은 모두가 수륙 겸용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차는 마치 모터보트처럼 제트 엔진을 요란스럽게 울리면서 수면을 스치듯 달려갔다.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은 이러한 제트 엔진과 연료를 농축된 탄산가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철수와 송 경위가 돔형의 과수원에서 탄산가스 증산을 위해 작업하고 있을 때,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무척 애써 보았지만 탄산가스 엔진에까지 그들의 작용이 미치지는 못했다. 지구인보다 월등하게 높은 문명을 자랑하는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은 이른바 멘델레프의 원자 주기율과 순서에 따른 원자량이 가벼운 원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구 위에서는 아직도 원자량이 무거운 우라늄과 같은 원소 개발에 열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프록시마의 우주인들은 그러한 원소 개발을 한 두 바퀴 돌아서 어디서든지 쉽게 입수할 수 있는 가벼운 원소 개발에 문명의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주인들은 합성 가스보다 생기(生氣) 가스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곡물을 건조함으로써 식물원 자체를 일종의 원소 생산 공장으로 조직해 왔기 때문이다. 사무한이 탄 차는 어느덧 모타칸 박사가 머물고 있는 섬에 다다랐다. 사무한이 다시 육상으로 차를 몰고 달리자 저 멀리 달팽이 집 모양의 빌딩이 몇 개 서 있는 넓은 광장에 검은 점이 하나 보였다. 그 점은 차가 가까이 갈수록 점점 커져 마침내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바로 모타칸 박사가 마중 나온 것이었다. 차는 소리 없이 모타칸 박사가 서 있는 곳에서 멈췄다. "비행 대장님, 웬 일인데 혼자 오셨소?"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박사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찾아 왔지요." "상의할 일이라니요?" 모타칸 박사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글쎄, 내가 새로운 씨앗을 얻으려고 은하계의 오메가 9호 별을 탐험하러 잠깐 화성을 비워놓은 사이에 오후레 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어요." "반란? 처음으로 듣는 소식인데…… 그래서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눈이 휘둥그래진 박사는 대뜸 물었다. "큰일이야 일어나겠어요. 주모자 13번을 잡아서 가둬 놓았는데, 그들의 요구인즉 자기네들만이 화성에서 살아 보겠다는 거요." "아니 화성에 무엇이 있기에 여기서 영주하겠다는 것일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차원의 생물이니까 말이 통해야지요……" "음, 저차원은 저차원이지." 두 사람은 나란히 층계를 올라서 모타칸 박사의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을 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박사를 찾아왔습니다," "비행 대장, 우리는 전 우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따위 것이 문제가 되겠어요. 우선 앉으십시오.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오겠습니다." 모타칸 박사가 옆방으로 사라지자 혼자 남게 된 사무한의 머리에 문득 박진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참, 박사님, 그 미스 박이라는 애의 상태 어떻습니까? 그 동안 좀 안정이 됐나요?" "네, 처음에는 감상에 사로 잡혀 말도 잘 않더니 요즘은 말도 곧 잘하고 명랑해졌지요. 만나 보겠습니까?" "만나 볼까요?" 모타칸 박사는 사무한이 주스를 마시는 동안 탁상의 텔레비전 전화로 진나 양을 불러 내어 사무한이 일부러 집까지 찾아온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금방 이 곳으로 오도록 일러주었다. "나도 어렸을 적엔 그랬지요. 같은 친구들이 외국에 간다면 혼자만 낙오된 것 같이 몹시 외로울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니 그저 그러려니 하는 생각뿐이지 과학의 진리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진나 양도 동료들이 오메가 9호 별로 떠나게 된 소식을 듣자 미칠 듯이 괴로워하더군요. 이제는 가라앉았을 거요. 핫하하하……" 모타칸 박사는 제자리에 앉자 거침없이 웃어댔다. 모타칸 박사의 거짓 없는 설명을 듣고 사무한은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지구인이란 겉모양보다 순진하기 짝이 없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일로 희로애락에 사로잡히는 버릇은 아마도 수명이 짧은 생활 환경이 비좁은 탓임에 틀림없다. 모타칸 박사란 해도 나이 겨우 쉰 둘인데 벌써 높은 사람 행세를 하고 있으니, 내 나이 백 살에 비하면 아직도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은 것을……’ ‘나이로 보나 문명의 수준으로 보나 지구인들과 이 문제를 상의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일은 아무래도 나 혼자 해결할 문제에 속한다.’ 얼마 후에 진나 양이 문을 활짝 열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미스 박의 숨소리는 아직도 거칠었다. "사무한님,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빨리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을 나는 무척 걱정하면서 슬퍼했어요. 밤에 잠도 잘 못 잤는 걸요. 그래 철수 씨와 송 경위도 무사하나요?" "두 분 다 무사하니 그런 걱정은 이젠 그만해요. 마음이 얼마간 가라앉았다니 반가운 소식이요. 건강은 괜찮아요?" "모타칸 박사가 옆에 있어 주어서 요즘은 완쾌되었어요. 아주 건강합니다." 진나 양은 마치 큰 언니나 만난 것처럼 사무한과 다정스럽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철수 씨와 송 경위는 지금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궁금하기 짝이 없어요……" "지하 도시에서 오메가 별의 새 씨앗을 분류하고 있지요. 그렇게도 궁금하다면 어디 모타칸 박사, 함께 지하 도시에 가볼까요? 오후레 족의 처리 문제는 아무래도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럼, 비행 대장님, 그 곳으로 가서 나도 직전 오후레 13번을 만나서 얘기를 해보고 싶군요. 서로 얘기해보면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그럴까요?" "그렇고 말고요. 지구의 문명을 원시 시대로부터 자연의 섭리를 믿는 대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여 불가지론으로 돌리기도 합니다마는 자연 과학의 발달은 서로 공통된 수학이라는 용어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왔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든지 합리적인 해결이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전통을 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문명의 발달이 반드시 플러스의 방향만으로 진보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 않아요. 때로는 마이너스의 방향에서 도리어 더 큰 비약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요. 박사님, 그러한 유치한 의논은 그만두고 일단 지하 기지로 되돌아갑시다. 어서 서두르게요." 세 사람은 차를 몰고 섬을 떠났다. 맨 앞자리에서 모타칸 박사가 운전했다. 진나 양이 철수와 송 경위가 만난 시간은 저녁 때였다. 사무한의 '그럼 내려가 보라'고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나 양은 층계를 두개씩 뛰어내려 식당 옆의 작업장으로 돌진했다. 미스 박의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은 가속되어 갈 뿐!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선 진나 양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뒤돌아보는 철수와 송 경위의 시선을 순식간에 뒤덮고 말았다. "김 선생…… 송 경위!" 고함소리는 작업장의 벽마다 이중 삼중으로 메아리쳐 삽시간에 소프라노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말았다. 이제껏 참고 참아 온 감정의 둑이 무너진 미스 박은 철수와 송 경위의 두 어깨를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철수와 송 경위는 예고 없는 재회에 어리둥절 어쩔 바를 몰랐다. 철수는 진나 양이 어떻게 해서 작업장에 뛰어들어 왔는지 머리 속에서 그 경위를 짐작해 보려고 애썼으나 어깨를 흘러오는 그녀의 뜨거운 맥박은 모든 생각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다시 모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스 박, 진정해요, 어떻게 된 영문이요?" 철수가 가까스로 물었다. "흣흐흐흐……" "백주몽이라더니 이게 정말로 꿈이 아니요?" 송 경위는 진나 양의 팔을 어깨에서 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나는 정신 잃은 사람 모양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면서 말했다. "모처럼 반가운 순간을 울음으로 메우다니 될 말이요. 어서 눈물을 거두시오." 철수가 호령하니까 박진나는 조금은 제정신이 났는지 수건을 끄집어냈다. "이러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옮깁시다." 송 경위는 앞장서서 문을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식당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뚫어지게 번갈아 볼 때, 서로 살아 있는 보람을 실컷 느낄 수 있었다. 온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검은 눈동자들은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참, 반가워요. 나는 그 동안 두 분과 영영 못 만날 것 같았어요. 아아 이젠 소원이 풀어졌다." 진나는 난데없이 팔짱을 끼고 윗몸을 의자 뒤로 가누었다. "어찌 된 일이요. 갑자기 이 곳에 온 경위는?" 진나는 그 동안 모타칸 박사와 함께 운하 지대에서 휴양해 온 일, 집에서 오후레 족의 동정을 산 일, 그리고 반란이 일어난 후 갑자기 사무한이 모타칸 박사의 방에 나타나서 지하 도시로 함께 온 일등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음? 곡절이 많았구나. 아, 모타칸 박사도 이 곳에 와 있군." 철수는 모타칸 박사의 소식을 듣자 어쩐지 만나보고 싶어졌다. "박사는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내 생각 같아서는 사무한이 박사와 무엇인가 의논한 것 같아요." 철수와 진나의 대화는 차츰 정상적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김 선생, 난 잠깐 볼 일을 보고 오겠어요. 나는 나대로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할 일이라니요?" "그건 나중에 공개할게요." 송 경위는 혼자 식당 문을 열고 나갔다. 다음 다음날 아침, 사무한은 오후레 문제를 마지막으로 해결하겠으니 자기 사무실로 모여달라고 통지해왔다. 철수와 송 경위와 박진나는 나란히 사무한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벌써 모타칸 박사는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얼마 후에 니키타 박사가 오후레 13번과 함께 나타났고 사무한은 오후레 33번을 데리고 옆방으로부터 들어왔다. "여러분 편히 앉으세요. 그 동안 화성의 반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한 끝에 비로소 어젯밤에 한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나로서는 퍽 괴로운 일이지만 과학의 발전과 우주의 조화라는 넓은 견지에서 해결을 짓자는 것이니 미리 양해해 주십시오." 방 안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도가니 속 같았다. 사무한은 자기 결론을 문서로서 작성한 것인지 파란 종이를 손에 들고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레 13번이 주축이 된 화성의 반란 사건은 분명히 프록시마 별사람에 대한 반역이다. 이 일은 아직도 알파 문명 이전의 생물이 차원이 높은 감마 문명을 자기 수준에서 판단해 보려는 무모한 모험이며 동시에 이 일은 우주의 온갖 생물을 개조하려는 본연의 노선에 대한 중대한 배반이다. 발전하는 온갖 문명의 속도를 화성이라는 조그마한 별의 테두리 속에 동결시켜 서로의 교류를 거부하려는 의도는 그것이 비록 저차원의 오후레 족에게 타당할지라도 더 저차원의 식물에 있어서는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교류에 따른 이질적인 요소의 충돌 없이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으랴! 까닭에 나는 화성의 현황을 당분간 이대로 지속하되, 오후레 13번을 문책하고 더 높은 과학 수준까지 훈련시키기 위하여 일단 프록시마 별의 본부로 송환하기로 정했다. 13번의 송환은 나 스스로가 맡겠다. 따라서, 내가 화성에 없는 동안 김철수, 송영철, 박진나의 세 지구인이 화성 안에 남아서 탄산가스 실험에 종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까닭에 이 세 사람을 프록시마로 떠나는 길에 지구에 송환해 주겠다. 나머지 모타칸 박사와 니키타 박사의 행동은 자유 의사에 맡기기로 했다. 이상." 사무한의 판결은 뜻밖의 것이었다. 오후레 13번의 얼굴엔 죽음을 면한 안도의 빛이 감돌았고 철수와 영철, 진나는 생각지도 않던 사건 때문에 저절로 지구에 생환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사무한은 문서를 낭독하자 무표정하게 옆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권일송 박사의 제자입니다. 일찍이 박사님의 연구 논문을 많이 읽었습니다. 화성에서 인사드리게 되니 이 이상의 영광이 없습니다." 철수는 모타칸 박사에게 자기를 소개했다. 모타칸 박사 역시 반갑다고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박사는 자기 연구가 아직도 계속 중이므로 화성에 남아야겠다고 말하고 니키타 박사 역시 중력에 관한 수치 계산이 덜 끝났으므로 계속 남아 있겠다고 잔류하기를 택했다. 세 사람은 사무한의 방을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오자 문 밖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모두 살았다! 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사무한은 화성을 출발하는 시간을 통고해 주었다. 철수는 화성의 과수원에서 얻은 열매와 오메가 9호 별에서 얻은 새 씨앗을 한 보따리 싸놓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나는 화성의 색다른 돌을 주워 주머니에 담아 놓았으나 송 경위만은 화성의 식물과 광석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씨앗이야 가지고 가서 잘 키워 보세요. 지구의 대기권 내에서 어느 정도 자랄 것인지…… 실험을 계속해요." 철수의 물음에 사무한은 쾌히 반출을 허가해 주었다. 떠나는 날, 사무한의 방에는 말끔히 차린 지구의 세 사람과 아무렇게나 옷을 입은 오후레 13번과 33번 그리고 전송 나온 두 박사가 모였다. 사무한은 마지막으로 두 박사에게 인사했다. "머지 않아 되돌아 올 작정입니다. 잘 부탁해요." 그리하여 일행은 차를 타고 지하 도시로부터 지상으로 나왔다. 마침 태양의 밝은 빛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아 서 있는 우주선에 가는 사람들은 차례로 올랐다. 철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타칸 박사의 모습이 로켓의 창 너머로 비췄다. 어느덧 소리 없이 이륙한 중력선은 먼저 지구에 들를 예정이다. "아휴, 이제는 지구로 가나보다. 여보 김 선생, 이것 좀 보시오. 중력총의 발사 장치를 훔쳐 갖고 가오." 송 경위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중력총의 발사 장치를? 여보 경관이 도둑질을 한단 말이요?" "도둑질은 무슨 도둑질이요. 자기 조국을 위해서 애국하는 거지……" 미스 박은 선실 안의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낯익은 아시아 대륙의 모양이 점점 크게 눈 안에 들어온다. 한반도가 보인다. 철수가 창 너머로 화성의 저쪽을 바라본즉 우주 공간의 저 멀리 낯익은 북극성이 방실거리고 있었다.     달로켓 실종 사건   피보고자 : 대장, 제임스 케어니 보 고 자 : 의학박사, 아모스 P. 파인맨 보고내용 : 우주비행사, 폴 데이븐포트 대위가 최면 상태에서 진술한 사실과 그에 대한 평가 등급 : 일급 비밀   존경하는 케어니 장군. 여기 약속한 바와 같이 달로켓 발사 도중과 후에 일어난 일, 그리고 최초로 성공한 달세계 일주 비행을 마치고 지난 주 돌아온 우주 비행사 폴 데이븐포트 대위가 깊은 최면 상태에서 들려 준 기이할 진술을 그대로 적어 보냅니다. 케어니 장군의 급한 연락이 있은 뒤 나는 패트릭 공군기지에서 프린드 대령의 브리핑을 들었다. 그는 로켓 발사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데이븐포트 대위도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에야 자기가 행운의 비행사로 선정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달 우주선 새턴 C-ll은 48시간의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완전 정밀한 검사를 받았고 아무 이상도 없음이 확인되었다. 데이븐포트도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필요 없는 흥분을 보이는 일 없이 캡슐 안의 운전대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새턴은 그 궤도로 매끄럽게 솟아 올라갔다. 달까지는 굉장한 고속도로 달리기로 되어 있어서 34시간 이내에 닿을 것이고 캡슐이 달에 접근하면 한 번 회전하면서 역 로켓을 쏘는데, 그 것은 달 주위에 밀접해 있는 궤도로 진입하기에 알맞도록 속도를 늦추기 위한 것이다. 달의 이면 쪽으로 우주선이 돌아 들어가기 시작할 때 우주선은 찬란한 기체 소듐의 섬광 신호를 내 쏠 것이다. 51분 동안 저편 쪽을 돌고 나서 다시 섬광 신호와 함께 지구의 시계 속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리고 나서는 캡슐은 지구로 돌아오는 60시간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모든 단계가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신호가 크고 똑똑하게 들려왔고 지구상의 수신소마다 신호를 잡기에 바빴다. 슈가그로브에 있는 강력한 방사능 망원경은 돌고 있는 51분 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접촉을 가질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아무 이상 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계획이 딱 들어맞아 정확히 발사 후 34시간 14분이 되자 찬란한 섬광이 보였고 2초 늦게(거리 관계로) 데이븐포트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 없이 달의 이면 궤도로 들어가고 있다는 말과 다른 기술적인 상황 보고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런 목소리는 차츰 사라지고 49분 20초 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침착하고 크고 똑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구가 보인다. 섬광을 발사한다." 그러자 찬란한 섬광이 모든 망원경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전속력으로 돌진!" 하고 말하더니 "헬로, 새파란 아름답고 정다운……" 하고는 말소리가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그로브의 망원경과 다른 모든 수신 장치에서 온 우주선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우주선과의 연락을 다시 가져보고자 갖은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인 우주선의 순간적인 산화로 밖에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여간 어떤 자그만 신호라도 모두 포착할 수 있게끔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5시간 54분 간의 실종 뒤에 별안간 우주선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전의 여섯 시간 전에 뚝 끊겼던 데이븐포트의 말도 끝을 맺으며 들려 왔다. "헬로, 새파란 아름답고 정다운 지구여. 이제 내가 간다." 곧 데이븐포트에게 질문이 퍼부어 졌었으나 수수께끼는 점점 깊어만 갔다. 그는 절대로 신호를 중단한 일이 없었고 귀환 비행은 예정된 그대로 진행이었다고 우겼던 것이다. 6시간 동안 사라졌었다는 얘기에 그는 그저 놀랄 따름이고 아무 설명도 해 주진 못했다. 그는 줄곧 단 일분 간도 지구와의 접촉이 끊기지 않았다고만 우겨댔던 것이다. 60시간 후에 지구에 무사히 착륙한 데이븐포트는 조사를 받았으나 60시간 전의 우주선의 실종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며 알아듣지조차 못한다. 꾸준한 조사 끝에 패트릭의 기술자들은 캡슐이 어떤 종류의 전립자의 폭우에 휩싸여 6시간을 보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이 폭우는 밀도를 매우 높아서 모든 전기 장치 - 데이븐포트의 두뇌까지를 포함한 - 의 기능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 후 해리 윌로프라는 필름 기술자가 이상한 발견을 했고 이것이 나를 이 사건에 개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 캡슐 안에는 캡슐 내부를 완전히 포착할 수 있게 장치된 고속 촬영기가 있었고 주기적으로 자동 촬영이 되게끔 되어 있었다. 윌로프는 이 필름을 현상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필름은 처음부터 다른 장치의 자료들과 일치해 나가다가 어떤 지점에서 뚝 끊어지고 다시 훨씬 뒤의 자료와 일치되는 사진이 갑자기 작동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미경으로 조사해 본 결과 필름이 끊겨졌고 그 절단 부분이 너무나 능숙하게 이어져 있어 육안으로는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다시 필름을 몹시 느리게 돌려보았더니 절단 부분 바로 앞의 필름 네 토막에 데이븐포트의 모양이 없는 텅 빈 캡슐 내부가 찍혀 있었다는 것인데.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상부에 이것을 보고했다. 캡슐에서 나오자면(더구나 전속력으로 달리는 캡슐 안에서) 비행사는 바깥의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네 토막의 필름은 확실히 텅 빈 캡슐의 내부 사진이었다. 그리하여 공군 당국은 나에게 데이븐포트 대위에 대한 최면 시술을 의뢰했다. 첫눈에 데이븐포트 대위는 시술이 쉬운 환자 같아 보이지 않았으나 암시를 시작하니까 곧 순응해 들어왔다. 최면 경험이 없다고 그는 말했지만 전에 최면 받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경험이 있는 사람은 첫번 혼수 상태에 쉽사리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몇 분 후에 '손댐불' 이라고 알려진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에서 그는 내 암시에 따라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캡슐 안에 들어앉아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곧 캡슐 안에 앉아 있던 모습으로 자세를 고쳤다. 비행사에게 지시하는 여러 항목이 적힌 것을 내가 읽자 그에 따라서 그는 단추를 누르고 여기저기 만지고 잡아당기고 비틀고 하면서 발사 직전의 우주 비행사의 행동을 재현했다. "발사!" 폭발 순간에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눈이 하애지더니 아랫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면서 천천히 일어나 앓았다. "뭔가, 데이븐포트?" "아파요. 압력 때문에 여기가." 그는 오른쪽 아랫배를 가리켰다. 캡슐이 치솟아 오름에 따라 고통도 낫는 모양. 그는 차츰 회복되어 기쁜 얼굴로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오케이, 이상 없음." 이런 따위 신호를 보냈다. 나는 손짓을 해서 그의 말을 멈추게 하고 말했다. "35시간 뒤에야 자네는 달의 이면을 돌고 두 번째의 섬광을 발사했네. 지구가 보여, 이제 어떻게 되지?" 그는 다시 민첩하게 손발을 움직여 눈에 보이지 않는 기계들을 만졌다. "전속력으로 돌진!" 하고 내가 말했을 때, 그는 앞을 내다보곤 싱긋 웃었다. "헬로, 새파란, 아름답고 정다운……" 그는 공중을 올려다보며 놀란 표정이 되어 몸이 빳빳해졌다. "무슨 일인가?" 나는 성급하게 물었다. "중력입니다." 그는 중얼거렸다.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지구와 연락이 끊어졌어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앞을 내다보며 "아니요. 아냐." 라고 말했다. "무엇이 보이나? 데이븐포트!" "저…… 배에요, 바로 앞에 있어요. 내가 저걸 따라 가나 본데요, 그리고 지금……" 그는 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맹렬히 갈기고 있었다. "엔진이 꺼져요." 그는 목이 꽉 막혔다. "엔진이…… 꺼져요." 라고 그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나는 배 쪽으로 끌려가요." 그는 절망한 얼굴로 캡슐 창 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다. "쪽문이 열리고 우리는 배 갑판 위에 들어왔어요." 그는 뻣뻣해진 채 기다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한편으로 돌렸다. "그 쪽문을 열지 말아!" 하고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는 가냘픈 외침에 불과했다. 그는 공포에 가득 차서 무엇이 - 아마도 쪽문이 - 캡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우주 비행복을 벗는 듯 천천히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만지지 말란 말이다…… 내 산소란 말야." 그는 숨쉬기가 힘드는지 잠깐 뻣뻣해지더니 한두 번 숨을 쉬어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공기다. 이 배엔 공기가 있다."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지?" 하고 나는 가만히 물었다. "커다란 우주선이요. 격납고 같은 거예요. 텅 비었냐구요? 아뇨, 저것들은 사람인가요?" 이 마지막 말은 묻는 투였다.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나?"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머리를 저으면서 "안 보여요. 눈이 부셔서."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는 양손을 들고 무엇을 떨어버리려는 몸짓을 했다. 내가 손짓을 하니까 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지? 대위." "나를 캡슐 밖으로 끌어내고 있어요." 그는 놀란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다른 우주선 위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겁에 질려 있었다. "아이구! 이게 우주선이란 말야?" 그는 둘레둘레 바라보았다. "이건 금속으로 된 산더미에요, 굉장한데요, 굉장해요, 무슨 종류의 동력을 쓰는 걸까? 왜 등록이 안 되어 있을까? 아무리 이렇게 큰 것이…… 아서요, 아서!" 대위는 물 속에서 움직이듯 허우적거렸다. 대위는 눈을 감고 몸서리를 쳤다. "만지지 말란 말야. 제발, 제발." 그는 또 허우적거리다가 점차 안심이 되는 듯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일이야, 폴?" "저것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요. 가만 가만히, 그리고 한 사람이 내 머리를 다독거립니다. 무슨 개가 고양이를 어루듯이 내 머리를 다독거립니다. 무슨 개나 고양이를 어루듯이……." "자네를 다독거려? 그럼 그것들이 보이겠지? 어떻게 생겼어?" 그는 천천히 걷는 시늉을 하며 "안 보여요." "여보게 데이븐포트, 천천히 보게, 똑똑히 보이지, 보이지?" 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아뇨, 그것들말고는 다 보입니다. 이 벽은 금속입니다. 따뜻합니다. 그리고 이 방…… 낮은 탁자, 밝은 등불, 실험실인가 보죠? 무슨 도표인지 그래프가 있어요. 그런데, 그놈들은 안 보여요. 희미한 게 움직이기만 하구……." 그는 몸을 움직이며 땀이 비오듯 했다. 이 때, "놈들이 내 옷을 벗겨요. 발가벗기고 있어요." 그러자 덜덜 떨면서 말했단. "아이 추워, 추워 죽겠구나, 이놈들아! 나를 벽에 세워놓고, 벽에서 빛이 나옵니다. 전기 냄새…… 오존 냄새." 그는 또 팔을 들고 손가락을 펴고 다리를 벌리고 섰다. "이놈들이 나를 재고 있어요, 내 몸의 내부 조직을 사진으로 찍고 있어요." "그게 누군가?" 나는 손짓을 하며 물었다. "폴, 잘 들어 그놈들을 봐, 똑똑히 보란 말야." 그는 자세히 쳐다보는 시늉을 했지만 눈이 부신 듯한 얼굴로, "안 보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 사지를 세고 있어요. 손가락 발가락 이빨…… 야, 이게 뭐야!" 그는 이와 같이 정밀한 신체 검사라고 보이는 과정을 주욱 설명했다. 외적인 것은 무엇하나 남김없이 다 검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인지 몸이 꽉 눌리고 나서 대위의 주형을 때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스펀지 고무 같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자 대위는 갑자기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수술실이에요, 놈들이 나를 눕히고 있어요, 안 돼, 안 돼!" "폴, 무슨 일인가?" "놈들이 내 관자놀이에 무얼 갖다 댑니다. 전선이에요." "전기가 또……" 나는 그를 찬찬히 보았다. 머리털이 갑자기 뻣뻣이 곤두서고 이마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실신 상태로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전기가 완전히 통한 모양이었다. 그는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배 근처가 이상하게 경련 하는 것 같아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웃옷을 벌려 보았다. 가느다란 붉은 줄이 갈비뼈에선 아랫배로 흐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 그것은 하얗게 변하고 차츰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데이븐포트는 다시 생기를 찾고 눈을 떴는데, 눈동자가 커지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은 내가 그를 혼수 상태에 빠뜨리던 때와 똑같은 움직임이었다. "데이븐포트!" 나는 날카롭게 말했다. "빨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놈들이 나보고……"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 끌어내는 듯이 보였다. "내 우주선으로 돌아가면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타이르고 있어요…… 나는 기억하지 않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는 한쪽 팔을 짚고 일어나듯이 기쁜 빛을 띄었다. "내 비행복, 비행복을 입혀 주고 있어요. 오케이. 오케이." 그는 옷을 꿰어 입고 단추를 끼고 나서 헬멧을 쓰는 시늉을 했다. "조심해야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좌우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되었다." "폴?" "네, 이놈들이 날 캡슐로 데리고 갑니다. 여긴 꼭 항공모함의 격납고 같은 데요. 만일에 이렇게 큰 항공모함이 있을 수 있다면 말이죠. 글쎄. 패트릭 기지의 활주로 같은 걸요."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나 폴?" "캡슐에 돌아 왔어요. 이놈들이 우리들의 장치를 썩 잘 알고 있는가 봐요." 그는 한숨을 들이쉬고 의자에 주저앉아 있더니 마치 발사 직후처럼 차츰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자넨 지금 어디에 있지?" 내가 물었다. 그는 힐끗 보더니 앞을 내다보고 말했다. "캡슐 안에 있죠, 60시간 있으면 도착합니다." "그 커다란 우주선은 어떻게 됐지?" 하고 내가 말했다. "수술실은 또 어쩌구?" 그는 스위치들을 건드려 보고 다이얼을 들여다보곤 하더니 말했다.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듣겠는데요?" 분명히 그 기이한 체험이 이젠 끝난 것이었다. 그는 다시금 캡슐 안에 태워져 날기 시작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무의식의 저 밑바닥에 파묻혀 버렸던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내가 셋을 세면 데이븐포트, 자네는?" 나는 천천히 명료하게 말했다. "지구로 돌아와 있을 테고 여기서 말한 걸 한 가지도 기억 못할 거야 알겠지, 하나, 둘, 셋……." 그는 꼼짝 않고 앉아 있더니 잠시 후에 말했다. "다 끝났어요? 이상하군요, 나는 하나도 기억이 없으니 말씀이에요." "뭐, 기억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던 걸." 후에 나는 프런드 대령과 만나 최면 시술 결과를 얘기했다. 그 자리에선 나는 데이븐포트가 우주 비행 후 투시선 검사를 했는가 물었는데 프런드 대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복부 내장 검사를 해 주시오." "왜요? 데이븐포트가 어디가 불편하다고 투덜댄 일이 있나요?" "아니오, 불편하다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란 말씀이오, 의당히 아프다고 했어야만 해요." 데이븐포트는 내장이 X광선에 나타나게끔 하는 특별한 약을 먹고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두 가지 기이한 일이 나타났다. 갈비뼈부터 아랫배까지 길고 가느다란 줄이 빛나고 있음이 눈에 띄었다. 또 오른쪽 아랫배 한 부분이 같은 종류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데이븐포트의 진료 기록표에는 맹장 수술 혹은 그밖에 어떤 외과적 수술도 받았다는 기록이 없었다. 데이븐포트에게 꼬치꼬치 캐물은 결과, 그는 우주 비행을 하기 직전에 오른쪽 아랫배가 퍽 아팠었다고 대답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맹장염의 징조가 보였던 것이지만, 그는 흥분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로켓이 발사된 직후에는 굉장히 아팠었지만 달 주위를 돌고 난 뒤에 지구가 보이는 지점에 와서부터는 고통이 싹 가셔 버렸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정밀한 탐색 검사를 해 보았다. 그 이상한 빛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런데 이 조사에서 우리는 데이븐포트의 맹장이 탁월한 솜씨로 전단 수술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 냈다. 그것도 분명히 최근에 말이다. 분홍 빛깔의 새 살이 절단 부분에 나 있었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일은 맹장이 있던 바로 위의 내장 거죽에 삼각형이며 반점이며 선으로 된 지도 같은 모양이 흐린 하늘색으로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르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일종의 문신인 것 같다. 빛의 근원은 아마도 새 살을 나게 하고자 사용한 무슨 방사능 과정에서 남은 결과라고 짐작된다. 데이븐포트의 복부 안쪽에 아직 희미한 상처가 남아 있어서 복부를 절개한 일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데이븐포트는 그가 내 앞에서 재현한 모든 일을 실제로 체험했다는 것이다. 어떤 알지 못한 종에게(그것이 화성(?)인지 또는 무슨 별에 사는 괴물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로켓이 내 쏜 소듐 섬광에 이끌려 왔을 것만 같다) 납치되었다가 놓여났을 것이다. 그놈들은 데이븐포트를 그 우주선(틀림없이 정찰 임무를 가진 우주선 일게다.)을 납치해 놓고 생리학적인 검사를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때 데이븐포트의 맹장염을 발견하고 절단한 다음, 내장에 이상한 문신을 새겨 넣었다. 복부의 절개는 아마도 무슨 전자 메스로 한 것이어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극히 희미한 흔적 밖에는 남기지 않았다. 수술 후 그는 문자 그대로 순간적인 작용으로 새 살을 나게 하는 어떤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납치 순간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잊어버리는 최면의 암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놈들은 무슨 발광체로 된 옷을 입었던가, 그런 장치를 가졌던가 해서 데이븐포트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덧붙여야겠다. 동물학자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어떤 야생 동물을 몇 마리 잡아서 조사한 뒤에 그 동물의 어떤 부분에 특별한 표시를 새겨 놓고 놓아 준다. 어느 기간이 지난 뒤 그 학자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이라도 그것을 다시 잡으면 그 동안의 성장 혹은, 다른 학술적인 자료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낙인이 찍힌 동물을 '컨트롤'이라고 부른다. 내 생각 같아서는 데이븐포트의 배 안의 문신은 바로 이 낙인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면 누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우리는 다만 기다려 보는 수밖에는 없겠다.     작품 해설   서 광 운   지구 위의 인구는 나날이 늘고 식량 생산은 더디다. 어떻게 해서 넉넉한 식량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농학자들은 온갖 열매를 크게 만드는 방법으로 씨앗 개량에 온갖 힘을 다하고 있다. 참으로 농업 개량은 큰 문제임에 틀림없다. 은 이러한 농업 개량을 도마 위에 놓고 사람과 식물의 관계를 우주의 특수한 공간을 무대로 살펴보려는 시도라 하겠다. 좀더 능률적인 생산 방법이 없을까 하는 모색 끝에 식물 자력선 연구소가 설정된 것이다. 이를테면 토마토를 재배하는데 우리에 가까운 땅 속에 자석을 심어 두면 땅 속의 철분을 좀더 많이 이끌어 낼 수가 있어 토마토 열매는 더 실하고 옹글지게 마련이다. 식물과 자력의 상호관계를 확대하면 식물 자체 특히 나무의 경우 자식과 자력선의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무의 뿌리는 자석의 핵이요, 줄기를 거쳐서 하늘 높이 가지와 잎사귀를 매다는 모습이 자력선과 비슷하다는 뜻이라 하겠다. 우리의 조상은 일찍이 나무 가운데서도 느티나무와 같은 단정한 나무를 숭상했다. 뿌리는 다리요, 줄기는 몸통이요, 가지는 팔이라고 생각한 끝에 거기에 하늘로 통하는 기운이 있다하여 곧잘 신주로 모시기도 했다. 식물을 신비롭게 여기는 일은 비단 이것뿐이 아니라, 영하의 온도에서도 살아 남는 한대 지방과 툰드라, 사시사철 잎사귀가 짙푸른 상록수, 겨우살이를 하려고 넘은 잎을 떨어뜨리는 활엽수 등은 물론 한 해 동안에 열매를 맺는 식물에 이르기까지 신비스럽지 않는 게 없다. 이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좀더 식물을 개량해서 식량을 넉넉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길러 보려고 무대를 화성 오메가 9호 별로 옮긴 것이다. 우리의 태양계에 가장 가까운 별 중에 프록시마 별이 있다. 이 곳 우주인들은 식량을 합성해서 먹던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역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활로를 찾게 된다. 녹색 인간의 녹색은 대자연을 상징하고 있으리라. 그들은 새로운 품종의 과실을 얻으려고 우주 공간의 여기저기서 실험을 계속하게 된다. 탄산가스를 흡수하여 산소를 내뿜는 식물의 특성 때문에 사람을 식물의 보조 기구로 쓰게 된다. 즉 사람은 식물과는 정반대로 산소를 호흡하여 탄산가스를 내뿜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도로서 플러스 방향의 압력 대신에 마이너스 방향의 압력이 식물의 성장과 관계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상에서 육면체의 열매, 사면체의 열매의 연구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열매들은 수송할 때나 포장할 때 극히 편리하기 때문이다. 은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가상이며 여기서 지구의 문명을 희랍 말로 알파 문명이라고 규정할 때, 만유인력을 사용하게 되면 감마 문명, 그러니까 프록시마 별의 문명은 이보다 한발 앞선 델타 문명으로 본다. 광선이 물질인 이상 중력도 물질이어야 된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흔히들 무한 동력을 모르고 있지만, 장차 물질로서의 중력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면 우리의 에너지원은 무한히 해방 될 것이다. 에서 화성 여행을 하게 되는 사람의 수는 3명이다. 이 작품은 1966년에 쓰인 만큼, 세 사람의 우주 비행사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1969년 7월 21일보다 3년 앞서있다.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SF작가협회 편   4차원의 전쟁 서광운 작   서광운 도쿄 대학 수학과 수료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사 한국일보 초대 과학부장, 외신부장, 사회부장 대우 서울신문 문화부장 현 한국일보 과학부장 한국SF작가협회 회장 번역한 책 : 버로우즈 작 {화성의 미녀} 지은책 : {항공, 기상의 과학}, {세계를 움직인 재벌} 등   편집위원   아동문학가 이원수, 박홍근 / 문학박사 최인학 공학박사 양옥룡 / 이학박사 김회규 전교육감 김성묵 표지그림 신동우 / 속그림 최충훈   격려사   과학기술처 장관         사람은 딴 동물과는 달리 스스로의 환경(環境)을 거의 마음대로 만들어가며 살게 마련이다. 정신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특히 물질적인 환경 개조에 더 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적인 환경 개조는 기초 과학(基礎科學)의 연구와 응용 과학(應用科學)의 발달이 이룩됨으로써 비로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기계 문명(機械文明)의 원리를 먼저 깨달은 서양(西洋) 사람들이 오늘날의 인류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양보다 상당히 늦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도 1백 년 전부터 기계 문명이 밀물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전기, 수도, 전화, 기차, 전차 등 문명의 이기(利器)는 한국인들을 놀라게 했고 또한 과학과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자각을 일깨워주었다. 우리의 국사(國史)를 돌이켜보면 세계 최초의 활자와 거북선(鐵船)을 만들어낸 과학의 핏줄기를 이어받고 있어 근대 과학(近代科學)을 소화하고 현대 과학에 도전하는 능력은 결코 남부럽지가 않다. 다만 그러한 능력을 가꾸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과학을 크게 발전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더 잘 살기 위해서 조국 근대화(祖國近代化)라는 큰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마당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그리고 과학하는 마음은 청소년 시절부터 기르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 우리 나라에도 과학 소설(SF) 작가 협회가 있어 청소년들에게 과학하는 마음을 재미있게 일깨워 주는 작품(作品)을 엮어 계속 출간한다고 하니 이것이 하나의 산 과학 교재로서 널리 읽혀 우리 나라의 과학 목표 달성에 이바지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74년 12월     책머리에   한국 SF작가 클럽을 대표하여 서 광 운   우리에게는 단군 신화가 전해오고 서양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가 있다. 모두가 비롯된 일들을 미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자못 이야기가 있어 대대로 몸받아 왔는데 기계 문명이 지구 위에 일어서기 시작한 후부터, 특히 우리의 개화 백 년 후부터 거기에는 무슨 신화가 생겼으며 또 창조되고 있을까요? 만일 지난날의 신화가 생명을 소중히 여겨 그 기원을 파고 캐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새로운 신화는 무릇 물질을 일구는 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처음으로 촛대를 들어 우리의 눈길을 우주(宇宙)의 얼개에 돌린 이는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이를테면 태극오행설과 같은 우주 운행의 이치가 아니라, 별의 탄생에서 빛의 얼개에 이르는 본질을 꿰뚫어 읊어 사람들은 이를 상대성 원리라고 노래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성 원리야말로 오늘의 새로운 신화 창조의 첫 장이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똑바로 쏜살같이 달리는 광선도 무거운 물체(별) 옆을 지나칠 적에는 구부러진다는 것입니다. 직행(直行)이 곡행(曲行)이 된다는 말에 뭇 과학자들이 눈을 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SF. 그러니까 {사이언스 픽션(科學小說)}은 그러한 신화를 가장 알기 쉽게 해설하는 작업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딱딱한 과학에서 부드러운 문학으로 뛰어넘고, 또한 공상적인 문학력을 실증 본위의 과학 분야로 들어가는 쌍방 교통을 이룩하는 것이 바로 SF작가들의 일거리입니다. 베르느에서 시작한 SF는 백 년 동안에 놀랍게 발전하여 지금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눈부시게 꽃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단군 이래 처음으로 SF 작가 클럽이 탄생한 것은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던 1969년의 4월 3일의 일. 당시 서울의 종로구 수송동에 자리잡고 있던 과학세계사의 편집실이 바로 산실이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날에 뜻을 같이 한 창설 회원들의 이름을 적어두면 김학수, 오영민, 강민, 신동우, 서정철, 이동성, 지기운, 윤실, 이흥섭, 최충훈, 강승언, 서광운 등입니다. 그리하여 잡지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한결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일독하면 우리나라의 SF 소설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에스에프 한국편을 이처럼 알뜰하게 꾸며 내주신 아이디어 회관의 박훈 사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여러분의 성원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차 례   바닷물이 불어온다················· 8 빙하 시대가 오는가?··············· 12 성운인의 내습·················· 16 이상한 광체(光體)················ 21 비행접시의 정체················· 25 성운일들과 교전················· 30 성운인 금성 점령················· 34 히말라야에 착륙하라··············· 38 이게 무슨 꼭두각시냐?·············· 42 둔갑한 4차원 로봇················ 47 비행접시가 정지하다니·············· 51 출동 명령 제 1 호················ 55 비행접시 편대의 습격··············· 57 비행접시 함구령················· 58 제 자리를 지켜라················· 62 독일 원정대의 비극················ 64 비행접시와 교전················· 67 젠킨 대위의 고민················· 70 기포탄을 사용하시오··············· 74 그림자의 정체는················· 77 로봇끼리의 격투················· 82 기포탄을 투하·················· 85 소련군이 선제 공격················ 89 융해탄은 없었다················· 95 핵공격의 위력·················· 98 융해탄의 비밀·················· 101 아비타의 기습·················· 104 아비타와의 협상················· 107 불발탄의 오발·················· 111   ■ SF 단편   미쳐버린 마차·················· 119 의식 교환기··················· 136 우주 여행···················· 164   작품해설···················· 178   바닷물이 불어온다   물때가 좋거늘, 하마하마 큰 놈이 물 것만 같아 조바심으로 지새운 밤이 벌써 희번하다. 장홍팔 노인은 동녘이 아슴프레 밝아올수록, 마음을 더욱 죄어치며 거슴츠레한 눈으로 낚시대의 끝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참이다. 바다의 겉면은 여전히 검어둑하고 하늘은 끄느름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새벽녘에 고기가 잘 무는 것을 장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터다. 한밤중에 대끝이 바르르 떨리면서 짜릿한 어신이 손끝으로 전해올 때마다 장 노인은 잠자코 옥돔을 여섯 마리나 낚아 올렸다. 여느 때 못지 않게 심심치 않은 밤이었다. 어느덧 동쪽 거제도 산모통이를 불그레하게 물들인 하늘에 아침 햇살이 댓줄기 기운차게 내뻗칠 무렵, 장 노인은 마디마디 불거진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워 물며 새삼스러운 생각에 잠겼다. '사리가 되려면 아직도 이레가 남아 있을 텐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밤새도록 수위(水位)가 여느 날보다 한자나 더 높으니 말이다.' 마음 속으로 중얼대면서 내뿜은 담배 연기에 한눈이 시려 그는 왼쪽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러면서도 자정(子正)을 넘어선 뒤에 문득 수위가 높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 수수께끼를 풀려고 이래저래 궁리를 쫓고 있는 참이었다. '내 나이 쉰 여섯에 바다라면 물 속 17길까지 다 아는 처진데 별안간 수위가 한 자나 높아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덕분에 푸짐한 옥돔을 많이 잡았다마는 이건 보통 일이 아닐 게다.' 장 노인은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수수께끼가 힘에 겨운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통영, 그러니까 오늘날의 충무에서 태어나서 16살 때부터 잠수부 생활을 해온 장 노인인지라 바다라면 그 밑바닥의 구석구석까지 다 알고도 남는 인물이다. 평생을 잠수부로 35년 간이나 일한 뒤, 5년 전에 은퇴하여 지금은 툭하면 낚싯대를 짊어지고 홀로 바닷가에 도사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평생 몸을 담아온 바다에의 미련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장 노인은 이마에 새겨진 내천(川)자 주름살마저 어울리는 바닷사람이다. '알고도 모를 일이다. 돌아가서 알만한 이에게 의논해 보자.' 장 노인은 불구족족하게 희번덕거리는 물결에 한 번 더 눈길을 던지고 나서 낚싯대를 챙기고 말았다. 이른 봄이어서 바닷물의 촉감은 여간 싸늘하지가 않다. 장 노인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한잠을 늘어지게 잤다. 꿈결도 썩 시원치가 않고 뒤숭숭했다. 아침밥을 느즈막히 먹고 나서 장 노인은 수산청 충무지원에 당도하여 낯익은 김 주사를 만났다. "웬일이세요 영감님, 아침나절부터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보자마자 인사하는 김 주사에게 장 노인은 간밤에 갑(甲) 바위에서 겪은 심상치 않은 일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바닷물이 한 자나 불어 오르다니 처음엔 난들 믿어졌겠는가!" "영감님 그럴 리가 있겠어요. 사람들이 달나라를 이웃집 마을 가다시피 하더니 달도 도깨비 장난을 시작했단 말이오. 천만에 그럴 리가…… 원." 김 주사는 손을 내저으며 맞상대를 하려하지 않는다. 농담을 하지 말라고 시답지 않게 여기는 김 주사의 태도에 적이 화가 난 장홍팔 노인은 "그럼 내가 미쳤단 말인가! 여보게 자네는 그래도 과학이다, 기술이다 하는 이론을 아는 사람이 아닌가. 내가 평소에 허풍 깨나 떨고 다니는 사림이었다면 꼭 망신을 당할 뻔했네 그려. 농담이 아니니까 제발 손닿는 대로 알아나 보게." 장 노인은 굽히지 않고 우겼다. 장 노인이 정색을 하고 덤비는 바람에 김 주사도 얼마간 멋쩍게 되어 요로에 알아보겠다고 그저 얼버무릴 도리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달포쯤 후에, 서울의 국민신보가 바닷물이 불어 오르기 시작했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수산청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3월 27일 현재 전국 해안선의 수위가 50cm나 높아졌다. 바다에는 물 마루라는 현상이 있어 지형에 따라 밀물과 썰물 관계로 보통 수면보다 수위가 높은 수면을 이룩할 수도 있으나, 이처럼 온 해안선의 수위가 한결같이 높아진 일은 역사상 처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원인은 기상청에서도 확인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수위가 꾸준히 올라가고 있어 그 비율을 따져본 즉 약 석달 전부터 증수가 시작된 것으로 미루어진다. 해안선에 위치한 어촌과 항구는 계속 경계를 요한다.   는 줄거리의 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텔레비전으로 현지 녹화되어 방방곡곡에 보도되자, 세상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충무의 바닷가에서 낚시질하던 장 노인이 우연히 발견한 사실이 바야흐로 확인된 셈이다. 관계 과학자들은 가까운 해안선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조사한 결과 바닷물의 짠 기의 도수는 다름이 없었으나 수온이 평균 1도 가량 낮아진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 해수의 변화는 아마도 7백 년을 두고 주기적으로 변하는 바닷물의 팽창기에 상당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해양적 신라가 3국을 통일한 7백 36년이라든지, 미국이 영국과의 전쟁에 이겨 독립 선언을 한 1776년, 그리고 미국이 태평양을 손아귀에 넣은 1950년대에 이어 2550년대에 해양성 기운이 전 세계를 휘덮는 주기에 해당한 것 같다.   이러한 학설을 내세운 역사학자마저 나타났다. 천지이변을 종교에서는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이 있지만, 역사학자는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다고 안심시키려는 버릇이 있는 듯 하다. 어쨌든 지구물리학계와 해양학계는 수위 문제를 도마 위에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판이었다.   빙하 시대가 오는가?   날이 갈수록 바닷물은 야금야금 늘어만 갔다. 이 괴이한 현상은 비단 한국에서만 아니라, 전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도 확인되어 야단스러운 논쟁으로 번지고 말았다. 미국의 록키 산맥 속에서 반평생을 빙하(氷河) 연구에 골몰해 온 리처드 고든 박사는 서슴없이 경고를 했다. "바야흐로 지구는 제 4 빙하기에 접어든 것이다. 백만 년의 빙하기를 거쳐 녹은 물들이 오늘날의 바다를 이룩하고 있는데, 지구의 빙하 활동이 시작되려고 바닷물이 증수되고 있는 것이다. 팽창은 반드시 수축을 가져오는 법이니 머지 않아 지구 위에는 무서운 한파가 밀어닥쳐 적도 근처까지도 꽁꽁 얼어붙는 무서운 빙하 시대가 다가올 것으로 짐작된다." 리처드 고든 박사의 경고는 오랜 전통을 지닌 뉴욕 타임즈 지에 실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때아닌 빙하 시대라니 이게 무슨 영문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지하 도시를 빨리 건설하여 동면할 준비를 서둘러야 된다." "그 동안 쌓아 두었던 핵무기를 써서 히말라야 산 속에 동굴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말발 깨나 하는 평론가들은 당장에 피난 대책을 들고 나왔다. 정말 고든 박사의 말대로 제 4 빙하 시대에 접어든다면, 인류는 열대 지방의 일부 지역을 빼놓고는 전멸한 우려가 없지 않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식량을 합성해서 먹는다손 치더라도 수십억의 인구가 지하 도시에서 2만 년이고, 3만 년을 견디어낼 도리가 없지 않는가! 가공(可恐)할 사태를 앞두고 기상학자들은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지난 1천 년 간의 기온 변화는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패턴을 보여 주고 있을 뿐, 기상적으로는 극히 안정되어 있다. 태양의 흑점 폭발도 11년의 주기에 따라 꾸준히 활동하고 있을 뿐, 지구가 태양 복사열의 급격한 변동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더욱이 지난 몇 달 동안의 기온 변화는 지난, 지지난 해와 별 차이가 없으니 갑작스럽게 빙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맞서게 됐다. 기상학자들의 견해도 그럴 듯한 것이, 아무리 바닷물이 불어난다 하더라도 지구 전체로 봤을 때, 기상상 두드러진 변화가 인정되지 않는데, 어찌 리처드 고든 박사의 학설을 사탕 먹듯 삼킬 수 있으랴. 논쟁은 국제적으로 벌어졌으나 나라마다 스스로의 갈 길에 결론을 내려야 할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서울만 해도 인천의 바닷물이 50cm나 불은 덕분에 인도교 근처의 한강 물이 염기를 띄게 되어 장차 식수 문제의 해결이 시급해졌다. "하루에 평균 1cm씩 불어 오른다고 해도 대책을 세울 시간은 넉넉하다. 짠물이 양수리에 있는 팔당 댐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기본적인 식수는 문제없다. 짠 기가 낮은 강물은 원자력으로 민물로 바꿔치면 된다." 종합국토개발위원장 고흥우 박사는 자신만만한 담화를 발표하여 민심을 달랬다. 그럼에도 열흘이면 10cm씩 증수하는 바닷물에 장차 집이 침수될 것으로 내다본 시민들은 산비탈을 찾아서 옮기기 시작했다. 판판한 평지의 땅값은 개값으로 떨어지고 산값이 다락같이 뛰니 이게 무슨 어이없는 현실이냐. 이런 변동은 한국만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일본에서도 느닷없는 인구 이동이 고지를 향해서 옮겨지기 시작했다. 정부나 과학 기관이 염려할 것 없다고 소리 높여 설득해도 시민의 귀에는 곧이 들리지 않았다. "한 달이면 30cm씩 증수하는 천지이변을 법률이나 병력으로 막아 낼 재주가 어디 있겠느냐.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바야흐로 성서의 묵시록에 예언된 말세가 온 것이다." 항간에는 이러한 소문이 퍼지고 어딜 가거나 불안에 휩싸여 아우성이다. 바닷물이 늘어만 가는 진상을 규명하려고 과학자들은 갖은 힘을 다 하고 있다. 성산포 우주 기지의 고일동 사령관은 남극(南極) 기지 사령관 오기남 준장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남극이나 북극의 얼음이 녹아나고 있지나 않을까? 이 점을 알아 내면 얼음이 녹는 원인도 밝혀 낼 수가 있으리라고 믿는데, 귀관의 현명한 판단을 바라오." 이러한 지시를 받기 전에 에레버스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 대원들은 이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보통 영하 30도, 심할 때는 70도까지 내려가는 극한(極限) 속에서 한국의 씩씩한 젊은이들은 이웃의 미국 대원(리틀 아메리카), 일본 대원(쇼와 기지)들과 겨루면서 관측을 계속하고 있는 판이다. "현재로선 남극의 얼음이 녹고 있는 사실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소. 아마도 북극에서 무슨 이상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예감이 듭니다. 그쪽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남극 기지로부터 채 1주일도 못 되어 그 동안의 상세한 관측 자료와 함께 보고해 왔다. 성산포 기지 사령관 고일동 소장은 곧장 미국에 조회를 했다. 미국은 북극권에 소련과 함께 방대한 관측소를 상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주일이 지나서 미국 관측 본부로부터 들어온 통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짧은 전보였다. 거기에는 자상한 관측 결과도 첨부되어 있지 않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모양이군.' 고일동 소장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바로 이날 저녁, 세계의 텔레비전 뉴스는 뜻밖에도 금성이 정체 불명의 우주인에게 점령되었다는 몸서리치는 사실을 황급히 보도했다. 이 뉴스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공연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성운인의 내습   미국은 당장에 우주작전본부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서쪽에 있는 아킬레스 산맥 속에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소련이 우랄 산맥 속에서 작전 본부를 두고 있는 사실은 그전부터 널리 알려지고 있다. 한국의 우주 작전 본부는 50년 전부터 이미 한라산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터이다. 바로 그날 밤부터 고일동 소장 앞으로 수없이 많은 작전 명령서가 빗발치듯 날아 들어왔다. "한국은 우주 특공대원 5명을 편성해서 우주 공간의 정찰 임무를 맡을 것. 정찰 결과는 본국은 물론이려니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아킬레스 산 속에 있는 국제우주작전본부에 통보할 것. 이상." 고일동 사령관은 작전 명령서를 손에 쥐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의 바닷물은 나날이 불어가고 게다가 정체 불명의 우주인이 금성을 점령했다니 이게 악몽이 아니고 뭐랴.' 고일동 사령관은 갑자기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우주인들이 태양계를 공격해 오지 않았는가. 무슨 영문인지 지구는 물바다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오랜 평화 끝에 무서운 세상이 오고 만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그에게는 너무 벅찬 문제가 던져진 셈. 머리를 싸매고 해결하려야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루만질 수조차 없는 우주 전쟁으로 돌입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서울에서 열린 긴급안보회의에서는 민족과 인류의 안전을 위해서 총력을 다 하기로 의결됐다. "국제작전본부의 지시를 준수하도록 해요. 이것은 국제협정으로 이미 약속된 일이니까 우리도 지켜야지." 대통령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면서 짤막하게 지시를 했다. 워싱턴, 런던, 파리, 모스크바, 그리고 도쿄는 서울 못지 않게 불안에 싸여 있다는 신문 보도. 노이로제에 걸린 허약자 13명이 하룻밤 새에 비관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소식도 전해 온다. 고일동 사령관은 제트기 편으로 성산포 기지로 내려오자 특수전투부대의 김민수 박사를 사령관 실로 불렀다. "방금 서울에서 국가안보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길인데, 국제 협정대로 아킬레스 본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기로 의결이 됐어." 고일동 사령관은 눈앞에 서 있는 김민수 대장보다 자기가 더 흥분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곧 말소리를 낮추며 의자에 앉도록 권한다. 그리고선 웃음을 씹으며 얘기를 이었다. "아킬레스 본부는 우선 우주 정찰대 5명을 파견하도록 지시를 해왔어. 우리가 맡아야 할 공간은 여기 자세히 적혀 있으니 오늘 저녁까지 인선(人選)을 마쳐 주게." 김민수 박사는 덤덤히 앉아서 고 박사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고 한 마디 물어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령관님, 우주인의 정체에 관한 속보가 들어왔습니까?" "아직은 입수를 못했소. 그런데, 미국 측은 어느 정도 진상을 짐작하면서도 전세계가 너무 불안해 할까봐 일부러 공개하지 않는 것 같애. 안 그래요?" "글쎄올시다. 저의 생각으론 금성을 점령했다는 우주인은 우리 은하계 우주인이 아니라 다른 성운(星雲)에서 온 이른바 성운인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금성을 점령할 필요가 있겠어요. 은하계 우주인이라면 직접 지구인과 교신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대목이 석연치가 않아요." "김 박사의 얘기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야. 그게 바로 한국 특공대가 확인할 문제꺼리가 아닐까요?" "알았습니다." 김민수는 납득이 가지 않는 낯빛으로 경례를 붙이고서 사령관 실을 물러 나왔다. 그리고선 허겁지겁 자기 방으로 뛰어가서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대원 명단을 펼쳤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적힌 인물 카드를 뒤적이면서 생각을 더듬는다. '특공대는 반드시 희생될지도 모른다. 젊은이를 골라야지. 용감한 사람들을……' 평소에 함께 고생을 해가며 우주 훈련을 받아온 1백 명의 대원 중에서 김민수 박사는 다섯 사람을 뽑아 냈다. 물론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김민수(36) 박사, 화학 전공. 권우경(45) 박사, 심리학 전공, 안경을 낌. 박동운(25) 지구물리학 전공. 이성기(22) 재학 중, 해양학 전공. 문지향(27) 대졸, 전자공학 전공.   김민수 대장이 명단을 정리한 서류를 들고 고일동 사령관을 다시 만난 것은 오후 4시의 일. "좋습니다. 잘 뽑아 냈군요. 그러면 이 명단대로 본인들에게 통고해 주시오." 고 사령관은 아킬레스 본부에서 시시각각으로 내려오는 전문의 뭉치 속에서 한 장의 전문을 썩 뽑아 김민수 대장에게 내 보였다. "한국 특공대의 출발은 4월 3일 하오 3시 정각으로 지정되었음. 이상." 전문 지령에는 불필요한 말이 한 마디도 없어 차라리 김민수의 마음에 들었다. 국제우주작전 본부와 사전에 작전 연습을 해 본 적은 없었으나 고도의 컴퓨터 조작에 손익은 최근의 의사 소통은 극히 기계적이어서 차라리 손쉽다. 김민수는 원자력 엔진이 장치된 로켓 '톱상어 호'를 우주선으로 쓰기로 정했다. 연락을 받은 특공대원 4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김 대장실로 모였다. "이번엔 죽을 각오를 해야될 것 같애. 발진 시각은 모레의 하오 3시 정각. 아킬레스 본부의 작전 명령인즉, 지구와 화성과 금성을 연결하는 3각 공간을 정찰하라는 거야. 알겠지!" "네!" 그들에게는 새삼스러운 다짐이 필요 없었다. 준비를 마친 한국의 특공대원들은 홀연히 성산포 기지를 치솟았다. 물바다로 변해 가는 조국 땅을 내려다보면서.   이상한 광체(光體)   흔히 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우주선이 귀청이 떨어질 듯한 요란스러운 지동(地動)을 멀리하고 하늘 높이 용솟음치고 나서 궤도에 오르면 발밑에 굽어보이는 지구는 온통 보라색이요, 새하얗게 햇빛을 반사하는 구름 떼에서 눈길을 돌리면 우주 공간은 늘 컴컴하기만 하다. 4월 3일 오후 3시. 예정대로 발사되어 우주 공간까지 솟구쳐 오른 톱상어 호에서 김민수 박사는 지구를 내려다보며 평소와 다른 점을 느꼈다. '이번에는 지구의 표면이나 둘레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구나. 바닷물과 구름이 희번덕거린다손 치더라도 너무나 강렬한 은빛이다. 무슨 까닭일까?' 김민수 박사는 눈 아래 동그만이 깔린 수수께끼를 풀려고 한참 씨름을 계속했다. 알쏭달쏭한 현상이다. "대장님,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셔요." 문지향 양이 성산포 기지와 통화를 나눈 뒤에 넌지시 묻는다. "아무 것도 아니야. 지구의 빛깔이 새삼스럽게 은빛을 띄고 있는 게 좀 수상한 것 같아서." "대장님도 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지구의 표면은 가끔 둔갑할 때도 있지 않아요." "하기야 그렇지만……" 김민수 박사는 말끝을 맺지 않은 채, 시무룩한 표정으로 지구물리학을 전공한 박동운을 부른다. "금성 근처로 먼저 가보는 것이 어떨까?" "금성을 차지하고 있던 소련 원정대가 급기야 철수한 모양이던데요. 괜찮을까요?" 박동운이 걱정스럽게 대꾸하자, 문지향은 퍼뜩 떠오른 경멸의 눈초리를 감추느라고 얼른 눈시울을 두어 번 깜빡이고 나서, "반대로 화성엘 가서 뭣합니까? 소련 원정대가 겪은 일은 모조리 우랄 본부와 아킬레스 본부에 보고되어 있지 않겠어요. 우리 한국 특공대가 직접 안드로메다 성운인과 마주치는 일만이 우리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지 않을까요?" 하며 한 마디 던진다. "권 박사의 생각은 어떻소?" 김민수 대장은 문지향의 의견에 대답하는 대신에 권우경 박사를 보고 묻는다. "아킬레스 본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편이 가장 합리적이 아닐까요. 아무래도 본부의 작전 관리실이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을 테니……" 권 박사는 안경 너머로 너무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눈빛을 던져 준다. 우주선 톱상어 호는 그러나 금성과 화성을 연결하는 3각형의 꼭지점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금성을 정찰해 보기로 합시다. 아킬레스 본부의 지시도 중요하지만, 기지 사령관 고일동 소장의 의견도 참작하지 않을 수 없소. 미국의 작전 본부가 무엇인가 진상을 죄다 알려 주지 않고 있는 눈치가 엿보인다는 거요." 김민수 대장의 결론이 떨어지자 특공대원들은 온몸의 핏줄기에 북받치는 애국의 순정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우주 전쟁의 위험이 다그쳐 오고 있더라도, 전 지구보다는 자기 나리의 권익을 먼저 따지는 심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인듯. 그러나 톱상어 호는 방향을 태양의 황도면에서 32도로 꺾어 타원 궤도를 따라 금성이 있는 우주 공간으로 직행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도 반이 넘어서려는 무렵, 전파 망원경의 스크린을 꼬박 지켜보고 있던 이성기 군이 우주선의 궤도 왼쪽에 이상한 광체를 발견했다. 이성기는 나이 스물 둘. 처음엔 가슴이 적이 울렁거렸으나, 마음을 가다듬으며 한 시간을 관찰해 본 즉, 그 광체는 제 자리에 고정된 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김 대장님, 저 물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체의 지름을 계산해 보니까 100m가 넘는 듯 합니다. 접근해 보는 게 어떨까요?" "움직이지 않는다니 그게 될 말이야." "그래도 지구와의 상대 속도(相對速度)를 따져 보니까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 측정치를 보여 주게." 이성기로부터 측정 표를 받아들은 김민수 대장은 한참 들여다보고 있더니,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추적하라!" 명령을 내리고 난 김민수 대장은 권우경 박사의 곁으로 걸어가서, "저게 바로 지구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머리처럼 멀리서 지구에 붙어서 돌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며, 콩알만하게 스크린에서 반짝이는 광체를 가리켰다. "나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소. 그러나 일단은 아킬레스 본부에 보고하는 게 어떻겠소." "그야 물론이죠." 그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아킬레스 본부에 그 물체를 조회해 본즉, 그것은 지구의 어느 나라 비행체도 아님이 밝혀졌다. 톱상어 호의 특공대원들은 긴장을 아니할 수 없었다.   비행접시의 정체   "엔진을 초속도로 점화하도록!" 김민수 박사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르고 나서 저마다 전투 태세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로켓은 빛살처럼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질주한다. 마치 바다 속에서 먹이를 쫓는 날쌘 상어처럼. 숨을 죽여가며 한달음에 이상한 광체를 향하여 돌진하는 톱상어 호. 컴컴한 우주 공간에서 저 물체는 이쪽의 움직임을 이미 포착했을까? 다섯 시간의 숨막힌 질주 끝에 그 광체의 근처에 다다르고 보니 그것은 엄청난 비행접시였다. 얼핏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게 떠 있었으나, 특수 장치로 측정해 본즉 비행접시는 하체에서 엄청난 광선의 다발을 발사하고 있지 않는가! 태양 광선보다 훨씬 짧은 층자선(層磁線)을 발사하고 있는 비행접시는 발사의 목표를 지구에 맞추고 있지 않은가! "요것들이!" 김 박사는 멀찍이 그 광체를 감돌면서 정찰하기로 작정했다. "대원들은 잘 듣게. 저 비행접시에 어떤 모양의 우주인이 타고 있는지 탐지해 내야만 공격할 수 있겠다. 적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가름해야겠다." 김 박사는 사령탑에 꼿꼿이 앉아서 마이크를 통해 일러준다. 대원들은 저마다 관측 장치 앞에 앉은 채 침묵을 지킨다. 톱상어 호는 반 투명체로 보이는 비행접시의 둘레를 타원 궤도를 그리면서 선회하고 있다. 영문을 모르는 제 3 자가 이 광경을 구경했더라면, 비행접시는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비쳤으리라.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는 비행접시의 탑승원들. '안드로메다 성운인이 금성을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과연 저놈들은 어떤 놈들일까?' 김 박사뿐 아니라, 특공대원들은 긴장 속에서도 호기심에 찬 눈초리를 한시도 놓지 않았다. "층자선의 흐르는 방향에 로켓탄을 발사해 보시오." 참다못해 김 박사는 가느다란 소리로 호령한다. "오케이!" 박동운은 거침없이 허리를 구부리며 조준을 맞춰 로켓탄을 한방 쏜다. 쏜살같이 내달은 로켓탄은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층자선의 흐름을 뚫고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김민수 대장은 소스라치게 놀랬다. '이게 웬 일이냐. 만일 층자선이 북극의 얼음을 녹일만한 열량(熱量)을 지니고 있다면 로켓탄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키고 말 게 아닌가. 그런데 탄알은 무쪽 같이 통과하고 말았다. 층자선이란 도대체 무슨 광선일까?' 두려운 생각마저 든 김민수 대장이 창 너머로 비행접시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을 때, 비행접시에 느닷없이 둥근 창문이 나타났다. 마치 똑같은 빛깔로 여태까지 가리고 있던 커튼이라도 치워버린 듯 비행접시의 방 속이 환히 비쳐 보인다. "저게 뭐야? 외뿔을 이마에 꽂은 우주인!" "여러 명이다. 아마도 수십 명은 되겠다." "다리가 몸체에 비해 짧은 편이다." 특공대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외친다. 김민수 대장도 처음으로 보는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의 기이한 모습을 한참 관찰 아니할 수 없었다. 생물이 어떻게 진화를 했기에, 저처럼 외뿔이 구부러진 채 이마 위에 남아 있을까? 저 뿔이 과연 무슨 구실을 하는 것일까. 흔히 말하는 개미들의 촉각 구실을 한다면 저렇게 굵지 않아도 되는 것을. 거기에도 무슨 비밀이 있을 것으로 김 박사는 짐작했다. '어쨌든 놈들은 상당한 문명 수준으로 지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정체를 안 이상 여기서 우물쭈물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김 박사는 이처럼 판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의 무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은 생각이 속을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성운인과 맞붙은 이상 36계를 놓을 수는 없지. 일단 공격을 해서 저놈들의 실력을 시험해 보자." 김 박사가 결단을 내리자 이성기 군은 누구보다도 흥분했다. "먼저 로켓탄을 쏘아봅시다. 놈들은 아까 우리가 시험삼아 층자선 흐름에 쏜 로켓이 불발한 것을 얕잡아 보고 창문을 연 듯 합니다." 기운찬 소리로 외치면서 그는 발사 장치의 단추를 꾹 누른다. 로켓탄은 이 날, 이 순간을 기다렸노라는 듯 쏜살같이 내달아 비행접시의 심장부를 향하여 돌진한다. 하나, 둘, 셋, …… 그리고 네 발. 내닫는 족족 로켓탄은 보기 좋게 비행접시에 명중하여 꽝꽝 터진다. 후련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비행접시는 끄덕도 하지 않고 구멍 하나 뚫리지 않지 않는가! 대원들의 얼굴은 순간에 새파래졌다. "얼토당토 않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어서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한다." 김민수 대장이 얼결에 숨가쁘게 소리지른다. 톱상어 호는 기수를 번드치며 전속력으로 비행접시의 근처를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친다. "우주인들이 킬킬 웃고 있어요. 아무래도 어린애 장난 같아서 그러는 거죠." 어느 겨를에 창 너머로 그들이 비웃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았는지, 문지향이 재빨리 일러 준다. 혼비백산한 특공대원들은 정강이야 나 살려라고 줄달음치려고 허우적거렸으나 일은 순조롭지가 않았다. 비행접시의 우주인들이 이번에는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성운인들과 교전   "이크, 눈앞이 어지럽구나!" 권우경 박사가 졸지에 안경을 바로잡으며 외친다. "어서 성산포 기지와 아킬레스 본부에 우주인과의 교전 상태를 보고하라!" 김민수 대장은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신경총의 조준단추를 누른다. 톱상어 호의 특공대원들은 느닷없이 받은 공격 - 그것도 정체 불명의 원인 때문에 발이 휘청거리며 앞이 어지럽다. 문지향은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바닥에 쓰러진 채 까무러치고 만 듯, 박동운은 두 눈을 부라리고 이를 악문 채 신경총을 발사하며 대항하고 있다. 이성기는 로켓 조종에 진땀을 흘리고 있고, 권우경은 지구와의 통신 연락에 골몰하고 있다. "이군! 로켓을 비행접시와 평면으로 몰 게 아니라 수직방향으로 몰아 주게. 수많은 창구와 겨루다간 남아날 게 없어." 김 박사가 알맞게 명령하는 바람에 톱상어 호는 다시 균형을 되찾아 비행접시와 수직면에서 교전 상태로 들어갔다. 김대장은 비행접시를 위 아래로 회전하며 창구에 마주칠 때마다 무자비하게 신경총을 쏘아댔다. 박동운 역시 오른쪽에서 마찬가지 자세로 항전하고 있다. 과연 한국 특공대원들이 쏘아대는 신경총이 저편에 얼마만한 피해를 주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불이 확 달아 붙는다든지, 그 무엇인가 엔진이 천둥소리를 내며 폭발한다든지 하는 반응이 있다면 금새라도 전과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초음파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신경 섬유에 장해를 일으키는 이른바 신경총에는 소리도 없고 피해 상황도 뚜렷이 헤아릴 수 있는 기준도 없다. 다만 총격의 틈틈이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외뿔 우주인이 픽픽 쓰러지는 광경만이 신경총의 효과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에 지나지 않다. 톱상어 호는 비행접시를 빙글빙글 감돌면서 마구 공격을 가했다. 이쪽이 우주인의 방사선 총에 맞아 쓰러지는 확률도 마찬가지다. 문지향이 먼저 쓰러지고 권우경 박사도 마침내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김 박사! 일단 후퇴하면 어떻겠소?" 박동운이 총을 쏘아대면서도 넌지시 의논한다. 고개를 똑바로 가눈 채로. "여보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여기서 후퇴하면 놈들은 지구인을 더욱 깔보고 말 거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공격을 끈질기게 계속하면 놈들은 우리의 끈기에 질려서 도망칠 수도 있어." 김민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꼿꼿이 가눈 채 등 너머로 얘기만 던진다. "이군! 선회 시간을 10분으로 줄여 주게." 김대장은 기를 쓰고 덤비려는 눈치다. "그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직경 100m의 물체를 두고 10분만에 선회할 타원 궤도는 계산상으로나 실제로도 불가능합니다." 이성기 군이 서슴없이 대꾸한다. "핫하하하. 그랬던가?" 김민수 대장이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는 바람에 우주선 안의 긴장에 휩싸인 공기가 조금 풀렸다. "김 박사, 너무 고집을 쓰지 마시오. 이미 희생자가 두 사람이나 나왔는데 일단 후퇴하는 편이 이로울 것 같습니다." 박동운이 차근차근하게 권하면서 마냥 겨냥에 바쁘다. 상대방도 어지간히 희생자가 나왔는지 심한 대항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럼 일단 화성 기지로 되돌아가 보기로 할까?" 김 박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힐끗 박동운을 돌아본다. 박동운이 저도 모를 결에 돌아보는 눈길이 김 박사와 마주친다. 박동운은 조금도 불안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오케이. 일단 후퇴하자."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성기는 키를 돌려 여태까지의 타원 궤도를 훌쩍 벗어나고 말았다. "저봐요. 비행접시도 창문을 내리고 있어요." 이성기가 크게 숨을 몰아쉬면서 한 손으로 가리킨다. '그럼 놈들도 지쳤단 말인가? 어쨌든 대단한 적이 나타난 거야. 이대로 어물어물하다간 온 지구가 놈들에게 전멸 당할는지 모르겠다.' 김민수 박사는 벌써 주먹만하게 멀리 떨어져 보이는 비행접시를 바라보며 몇 번 다짐했는지 모른다. 박동운에게 조종석을 물려 준 이성기는 바닥에 까무러친 권우경 박사와 문지향의 어깨를 양팔로 번갈아 흔들며 귀에 대고 소리친다. "이젠 정신을 차려요. 아무 일없으니 빨리 깨어나요." 어깨며 머리를 마구 흔들어도 두 사람은 곤드라진 채 아무 대답이 없다.   성운인 금성 점령   비행접시와 한국의 톱상어 호가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꼴을 지켜 본 제 3 의 목격자가 있었다. 말할 나위조차 없이 그것은 미국의 원정대였다. 그들은 태양계의 고요의 공간에서라면 비록 1억km나 떨어진 곳의 숨소리까지도 도청할 수 있는 도청 장치를 지니고 있는 정예 부대. 톱상어 호가 희생자를 달래면서 화성 기지로 후퇴하고 있을 때, 미국 원정대는 아득히 비행접시를 추적했다. 그들의 보고는 시시각각으로 화성 기지와 지구의 아킬레스 본부에 전해졌다. 미국 원정대가 도청한 녹음의 일부를 살펴보면 이렇다. "사르만다 대장, 지구인이 덤벼드는 꼴이 마치 장사벌 같아서 우습기 짝이 없었어요. 꽤 끈질긴 공세를 취하던데 신경총 정도의 무기밖에 개발하지 못했으니 어린애 장난 같기만 해요." 종달새처럼 드맑게 지저귀는 목소리는 아마도 소년의 음성인 듯. "깔볼 수는 없어. 지구의 으뜸가는 약점인 북극의 얼음을 녹이려니까 벌떼처럼 도전해오지 않았느냐. 지구인들의 기계 문명이 어느 정도 발달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야." 대장이라고 불린 사르만다는 퍽 신중한 말투로 계속 소년을 타이른다. "아비타, 안드로메다 성운의 문명이 은하계보다 더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가?" "그럼요. 우린 4차원 로봇을 개발하지 않았어요?" "너무 자만하고 있군 그래. 아무리 4차원 로봇이 있더라도 그것을 막아 내는 장치를 지구인이 개발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우리가 정작 맞부닥칠 상대는 반드시 태양계의 인류만이 아닌 거야. 장차 은하계의 생물들을 정복해야 된단 말이야. 그 때까지는 행동을 신중히 해야 돼. 알겠나." 대장 사르만다가 차근차근 일러주는 목소리를 들은 미국 원정대의 온몸에선 소름이 끼쳤으리라. 비행접시는 멈춰 걸떠 있는가 하면 느닷없이 미끄러지듯 눈 깜박할 새에 수백km를 비행해 버리곤 했다. 아마도 광속보다 빠른 그 무슨 추진력을 개발해 낸 듯. 한참 도청 소리는 잠잠하더니 금성 기지에 다다른 듯, 달카닥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무엇 때문인지 씩씩거리는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혹 그 소리는 한국 원정대의 신경총을 맞아 까무러친 성운인들이 다시 되살아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아닐까? "다 왔다. 부상병들을 먼저 들것에 실어 내라." 대장 사르만다의 쉰 목소리가 호령했다.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듯 잡음만이 요란하다. 대장은 분명히 먼저 빠져 나왔는지 한참 후에 소리가 들려온다. "소와르, 지구의 북극을 녹이려던 작업을 일단 중지하고 돌아왔습니다. 지구인들이 눈치를 채고 상어 모양의 로켓으로 공격을 가해 왔어요. 퍽 용감한 전법을 써서 우리측의 희생자도 일곱이나 됐어요." 보고를 듣자 벌떡 일어나는 기색의 도청 소리 끝에, "그까짓 것을 한 몫에 처리하지 못했어요? 지구 따위에서 세월을 보낼 수가 없지 않아요. 우리의 은하계 정복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깐깐한 목소리가 호통을 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소와르라고 불리는 자는 안드로메다 원정대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남자가 아닌 중성에 가까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령관이라는 속된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좌표장(座標長)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수학에서의 좌표가 X, Y 축으로 4등분되는 것처럼 어머니 모(母)자가 좌표의 네 가지 상한(上限)을 가려내고 있는 사실과 우연한 일치일는지 모른다. 더욱이 총사령관이라면 저마다의 좌표를 일러 주고 새로운 좌표로 옮겨주는 어머니 구실도 겸해야만 할 것이다. 사령관이라는 직선적이고 원시적인 명칭 대신에 좌표장이라는 공간 칭호로 부르는 일도 참고할만한 일이라 하겠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녹여온 북극의 얼음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웬만한 연안 도시는 피난 소동이 나는 등 법석입니다. 도시 지구인들은 하천과 바닷가의 도시 문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요. 얼마나 원시적인 흔적입니까. 공간을 이용하고 광선을 활용하는 과학을 이제야 개발하기 시작한 모양이야." 사르만다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럼 대장! 금성의 기지를 빨리 정비해서 비행접시 편대를 꾸며 지구를 단숨에 공격해버리는 스케줄을 새로 짜요. 조그마한 땅덩어리 속에서 서로 잘났다고 시샘을 하는 생물은 벌레나 다름이 없지 않아요. 전우주의 이름으로 멸망시켜 버린들 누가 상관하겠소." 좌표장 소와르는 원한에 사무친 소리로 투덜거린다. 화성 기지에 이르는 동안 가까스로 권우경 박사와 문지향을 소생시킨 한국의 특공대원들은 이런 도청 소리를 귀담아 들으면서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뿌리칠 도리가 없었다. 안드로메다 성운인은 분명히 인류를 적으로 삼고 있지 않는가!   히말라야에 착륙하라   김민수 박사는 우주인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성산포 기지 사령관 고일동 소장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4차원 로봇이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고일동 소장이 근심스러운 전문을 보내왔다. 아직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4차원 로봇. 김민수 박사는 화학이 전공이어서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자공학을 전공한 문지향도 아무리 기를 써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사령부의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미국 원정대는 씩씩하게도 금성의 둘레를 멀찍이 감돌면서 끊임없이 도청 보고를 보내오고 있는 중. 보고는 계속된다. "지금 남아있는 원정대원은 몇 사람이지?" 소와르 좌표장의 소리. "합해서 99명이 남아있습니다." 대장 사르만다는 덤덤히 보고한다. 아마도 그들은 회의실에서 무엇인가 의논하고 있는 모양. 가끔 다른 숨소리가 섞갈린다. "저 스크린에 비친 지구의 확대판을 보니까 넓은 바다가 보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태평양을 뜻한 거다) 바다에 내려서 지구 기지를 확보하느니 보다, 높은 산을 이용하는 편이 우리 산악인으로서는 편리할 것 같아요. 넓은 바다의 서쪽에 높은 산들이 깔려 있습니다. (아마도 히말라야 산맥을 뜻한 듯) 저 산 속에 기지를 정하는 게 어떨까요?" 사르만다가 설명하고 있다. "빛깔이 온통 은빛이군. 꽤 높은 산인 듯한데 거기에 평지가 있을까?" 소와르의 물음을 받아 이번에는 소년 아비타가 귀여운 소리로 대답했다. "소와르님, 산은 아무리 높아도 계곡이 있지 않아요. 계곡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델타(三角洲)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 걱정은 마셔요. 지구인들은 아직도 산봉우리가 무장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소년의 또렷또렷한 말소리를 듣자 문지향은 입속말로 종알거린다. "쳇, 깜찍하기도 하구나. 무슨 어린애가 히말라야 산맥에서 지구를 공격하도록 권한단 말이야. 꼭 만나서 혼을 내주고 싶군." "미스 문, 뭘 실없는 소리를 입에 담고 있어. 상대방이 비록 어린애일지라도 IQ가 지구인보다는 높다는 걸 알아두어야지." 해양학을 공부하고 있는 22살의 이성기가 눈을 흘기며 나무란다.도청 소리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럼 그 산맥을 기지로 정하도록 해요. 1주일이면 준비가 다 되지 않을까요? 사르만다." "문제없습니다. 유사시에 대비해서 지구인들이 (소련 원정대를 뜻함) 파놓은 지하 기지까지 정비해 놓겠어요." 사르만다는 자신 있게 답변하고 일어서는 모양이다. 의자를 뒤로 당기는 듯한 소리까지 울렸다. 그 소리를 도청하고 있던 특공대원들은 숨을 죽인 채 말이 없다. 김민수 대장은 가벼운 기침 소리를 두어 번 내뱉은 후,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고 혼자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비상시에 이용할 지하 기지를 정비하겠다니 이게 웬 말이냐. 그렇다면 놈들은 금성의 지표에 기지를 건설하고 있단 말인가? 콘세트식의 돔형 건물일까? 그렇더라도 밤낮으로 심하게 바뀌는 온도를 무슨 수로 조정하고 있느냐 말이다. 더욱이 금성에는 구름이 많아 비바람이 심한 곳인데 도깨비 장난이 아니고서야 땅 위에 기지를 만든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꼬리를 맞물고 일어나는 문제와 아무리 씨름을 해보아도 신통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은 1주일 후면 행동을 개시할 작정이다. 1분, 1초를 조바심 속에서 허송한다. 이것은 한국 원정대로선 여간 분한 일이 아니다. "대장님 차라리 선수를 쳐서 금성을 기습하면 어떻겠어요. 기습하면 그만큼 놈들의 준비 기간이 늦춰지지 않겠어요. 그 틈을 타서 아킬레스 본부도 전지구의 동원 태세를 확고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답답증을 참다 못한 박동운이 우겨댄다. "솔직해서 좋아요. 그러나 작전상 큰 뜻이 있을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공연히 우주인들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아. 지금 원정대가 금성을 감돌면서 도청하고 있는 까닭도 다 아킬레스 본부의 지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손이야 불쑥 내밀기는 쉬워도 한번 붙잡히는 날이면 오므리기가 어렵지 않아. 고일동 소장의 지시가 있을 거야." 김민수 박사는 피가 뒤끓는 박동운을 달랬다. 화성 기지에는 미국, 영국, 일본의 수비대도 깔려 있기 때문에 박동운은 더욱 흥분했을는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꼭두각시냐?   성산포 기지의 고일동 소장은 그대로 아킬레스 본부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락을 취하는 중,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아킬레스 국제 작전 본부는 한국 특공대가 비행접시와 교전한 전황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미국 원정대의 도청 보고를 들으면서 종합 작전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한 중간 보도는 시시각각으로 성산포 기지에 통보되는 것은 물론이다. "고일동 사령관 귀하. 아킬레스 본부는 우주 원정대의 정보를 종합한 결과, 금성을 기습하느니 보다 우주인들이 지구에 착륙하려는 순간을 잡아서 공격하는 편이 피해가 덜 하리라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한으로 억누르기 위해 한국 특공대는 비행접시가 다시는 북극의 얼음을 녹이지 못하게 막아 주는 임무가 가장 긴요하다고 사료됩니다. 이 지령은 화성 기지에 전달되겠지만 귀하께서도 별도의 지령이 있을 때까지 한국 특공대로 하여금 현재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아킬레스 본부가 마지막으로 종합 작전을 세운 모양이다. 고일동 사령관은 부관이 들고 뛰어온 종합 작전문을 한 눈에 읽고 나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인천은 이미 반이나 물 속에 잠기고 서울의 한강이 넘치려고 찰랑찰랑하는 마당에 한국 특공대가 이를 막지 못한 일이 원통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국제 협력을 저버릴 순 없었다. 잘 받아보았다는 회신이 이내 아킬레스 본부로 타전되었다. 그리고는 고일동 사령관은 화성 기지를 불러 냈다. "북극에 대한 층자선(層磁線) 방사를 계속 막아달라는 거야. 전투도 중요하지만 지구가 물 속에 잠기지 못하도록 지키는 임무도 중요하지 않는가?" 고일동 사령관의 시무룩한 말소리를 전해들은 김민수 대장은 그러나 한국 특공대의 임무가 한결 긴급하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오케이. 우주인과의 접전이 심해질 때는 언제라도 현장에 날아갈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겠소. 아킬레스 본부를 더 설득해 주시오." 김민수 박사는 더 이상 구질구질한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제나름의 작전 계획이 서 있기 때문에. 아킬레스 본부의 지령에 따라 한국 특공대의 톱상어 호는 이내 화성 기지를 발견해서 금성과 화성과 지구를 이은 3각형의 꼭지점으로 급행했다. 특공대원들의 용기는 용솟음치고 있었다. 화성 기지에 가만히 앉아서 지령을 기다리는 조바심은 톱상어 호가 발진함으로써 완전히 가시고 말았다. 원자력 엔진에 점화한 뒤, 경계 공간으로 들어서자 톱상어 호 안에서 귀신이 곡할 사태가 마침내는 벌어지고 말았다. 권우경 박사가 웬일인지 등뒤가 오싹해서 뒤돌아본즉 거기에는 외뿔 우주인이 한 놈 말없이 서 있지 않는가! "이게 무슨 허깨비야!″ 권우경 박사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기겁을 하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우주선 안에서 갑자기 찬바람이 일었다. 다른 대원들의 눈길이 한 군데로 쏠렸다. 거기에는 비행접시와 교전했을 때 창너머로 보던 안드로메다 성운인이 버젓이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지 않는가! 가장 나이 어린 이성기는 얼결에 쇠망치를 불끈 쥐고 안드로메다 우주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우주인은 얻어맞은 채로 방바닥에 쓰러져야만 한다. 그 만큼 이성기의 동작은 민첩했다. 그럼에도 외뿔 우주인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꼿꼿이 선 채 여전히 웃고 있지 않는가! 이성기의 쇠망치는 결국 허공을 내리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황한 그는 이번에는 번개처럼 허리를 무찔렀다. 그러나 허깨비는 요동도 하지 않는다. 순간 김민수는 '아, 이게 투명 우주인이구나. 4차원 로봇의 수수께끼가 풀릴 듯 하다.′ 생각이 문득 떠오르자 허리춤을 쥐고 껄껄 웃어댄다. 대원들의 의아한 눈초리가 김민수에게로 쏠린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외뿔 우주인의 환상에 지나지 않아. 보라 ! 이게 뭔가 무섭단 말인가. 일종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아." 김민수는 두 손으로 미친 사람처럼 외뿔 우주인의 얼굴이며 가슴을 찔러보였다. 주먹은 허공을 지나칠 뿐 우주인의 환상은 그대로 여전하다. 특공대원들은 그제야 저마다 허공을 만져 본다. 아무렇지도 않은 허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주인의 이미지는 여전히 서 있다. "저놈들이 기묘한 교란 작전을 하고 있는 거야. 이것은 광선의 장난에 지나지 않아. 원 망할놈들 같으니……" 박동운이 따라 웃으면서 손을 내젓는다. 두 눈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눈물마저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군은 허깨비인지 꼭두각시인지를 감시하게. 다음의 모션이 무엇을 뜻할는지 모르니까." 김민수는 지시를 내리고선 새삼스럽게 꼭두각시 우주인을 뜯어보았다. 살갗이며 모습이 진짜와 꼭 같다. 광선의 장난치고는 기막힌 걸작이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표정을 보니 다음의 동작도 마음대로 자아낼 수 있다는 증좌가 아니겠는가. 김민수 박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4차원 로봇은 웃음을 멈추고 조종석의 박동운 쪽으로 헤적헤적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김민수 박사는 머리끝까지 쭈뼛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전진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둔갑한 4차원 로봇 한 발자국씩 조종석으로 말없이 다가서는 4차원 로봇. 비록 그것이 물렁 팥죽 같이 살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더라도 되돌아 지켜보는 박동운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질려 있었다. "어서 피하지 않고 뭘 우물쭈물이야 ! " 김민수 대장이 얼결에 꽥 하고 고함을 지르자, 조종석에 앉아 있던 박동운은 날쌔게 자리를 박차고 비켜서며 몸을 사린다. "이 낮도깨비가 어쩌자는 거야, 원." 잦아들어가는 가는 목소리를 어이없다는 듯 내 뱉으면서 박동운은 접근하는 4차원 로봇으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러자 꼭두각시도 잽싸게 한 팔을 내뻗으며 박동운의 어깨를 붙잡으려고 덤비는 게 아닌가 ! 박동운은 새파랗게 질려서 다시 몸을 돌려 벽에 철석 달라붙은 채 꼭두각시를 노려본다. "에이, 망할 것이!″ 나이 어린 이성기가 보다 못해 불끈 쇠망치를 휘두르며 4차원 로봇의 뒤통수를 보고 후려 갈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쇠망치가 로봇의 뒤통수에 닿기가 무섭게 이성기가 기겁을 하며 나동그러지는 것이 아니냐. 4차원 로봇은 단순한 허깨비나 물렁 팥죽이 아니었다. 둔갑한 것이다. 그 무슨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괴물로 어느새 둔갑한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기적을 본 박동운은 우주선의 벽에 달라 붙은 채 끈질기게 뻗쳐오는 로봇의 손길을 피하느라고 연신 바둥거릴 수 밖에. 로봇은 마치 박동운을 껴안으려는 듯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외뿔이 어른거리는 이마를 쇠귀신처럼 들이댄다. 광선이 빚어 내는 꼭두각시의 윤곽을 무슨 수로 피해야 옳을 것인가. 숨이 목에 차서 허덕이며 이마에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흐르는 박동운을 김민수 대장도 당장에 구해 낼 길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4차원 로봇의 손이 박동운의 몸에 닿자마자, 지구 물리학을 전공한 박동운이 으악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선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로봇의 손길이 무섭다. 놈들은 아마도 레이저 광선에 전자력을 실어서 동력을 보내는 것처럼 필연코 층자선(層子線)에 자력을 실어보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김민수는 승리자처럼 두리번거리는 4차원 로봇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면서 머리 속에선 부리나케 생각을 쫓았다. '그렇다면 우주선 톱상어 호의 온 겉면을 특수 물질 민들렁으로 칠해 주면 되지 않을까? ' 번개처럼 떠오른 긴급 대책을 해치우려고 김민수 대장은 단숨에 바른 쪽 기계실로 뛰어든다. "대장님! 우린 어떡해요? " 문지향이 소리지르며 황급히 뒤따른다. 권우경 박사는 온 몸을 움츠리고 로봇을 노려 보며 말이 없다. 김민수 대장은 기계실로 들어서자 다자고짜로 민들렁 방출장치의 네모꼴 단추를 기운차게 누르고선 TV 스크린의 스위치를 켰다. 순식간에 곳곳에서 흘러 나오는 뿌연 액체가 무너진 수문을 뚫고 흐르는 봇물처럼 우주선의 겉면을 뒤덮는 광경이 스크린에 뚜렷하다. 김민수 대장은 액체가 우주선을 완전히 덮힌 것을 확인하자 숨쉴 새도 없이 이번에는 제 2의 단추를 누른다. 톱상어 호의 기수에서 뿌연 안개 모양의 기체가 뿜어지면서 로켓은 더 없이 반들반들한 은빛으로 반사하기 시작한다. 1초, 2초, 3초, … 몇 초가 지났다. 그러자 옆 방에서 꼭두각시와 맞서 사생(死生)을 걸고 겨루고 있던 권우경 박사가 한 손에 안경을 벗어 들고 기계실로 뛰어 들며 외친다. "빨리 나와 봐요. 4차원 로봇이 귀신처럼 사라지고 말았어.″ "정말이에요?″ 문지향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뛰쳐나간다. 김민수 박사는 그러나 계속 기계실에 남아서 TV 스크린을 뚫어지게 지켜 볼 따름. '됐다. 역시 민들렁의 위력이 세다. 이젠 살았다.‘ 그는 속으로 다짐하면서 눈 앞에 삼삼거리는 남극 기지 사령관 오기남 준장의 모습에 새삼 감사의 뜨거운 정을 느꼈다. 민들렁이라는 특수 반사체는 오기남 준장이 남극 기지에서 개발해 낸 경험과 연구의 결정체이다. 광선뿐 아니라, 온갖 전파를 반사시켜 버리는 미립자군(微粒子群)으로 된 민들렁은 초 콜로이드 상태로서 나무를 제외한 온갖 금속체에선 100%의 효과를 내는 새 발명품. 김민수 대장은 우주선의 겉면이 민들렁으로 포장되자 4차원 로봇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당연하다고 마음 깊이 읊조리고 나서 조종실로 옯겼다. 문지향은 바닥에 쓰러진 박동운과 이성기의 머리와 팔, 다리의 요소를 골라가면서 정신없이 침을 놔 주고 있었다. 층자선이나 전기력에 마비된 신경은 오직 침술만이 회복이 가능하다. 문지향은 기초 교육을 받을 때, 이미 경락(經絡) 계통을 이용한 신경 의학을 공부해 놓았었다. 굳이 말하자면 혈관이나 신경 계통이 유선 통신망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동양의 경락은 무선 통신망이라고 이를 수 있다. 침을 놓기 시작한지 30분 후에 두 사람이 다 숨을 몰아 쉬고 되살아난 것은 물론이다.   비행접시가 정지하다니   '자, 이젠 4차원 로봇의 발생 근거지를 때려 없애야지.' 김민수 박사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 대원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로봇의 손길이 닿자마자 마치 전기가 옮은 듯이 짜릿하면서 정신이 나가버리던데 , 이번엔 혼을 내 줘야지." 박동운은 어금니를 악물고 눈을 부라린다. 4차원 로봇을 광선으로 내보낸 근거지를 찾아서 톱상어 호는 벌써 3일 간이나 비행을 계속했다. 김민수 대장은 처음에는 분명히 비행접시에서 꼭두각시가 방사된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도 타원을 나사못 모양으로 이어가는 타래 비행으로 지구와 금성의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많은 운석(隕石)과 마주쳤을 뿐, 컴컴한 공간에서 반짝이는 비행접시의 그림자도 찾질 못했다. "혹 놈들이 금성의 기지에서 방사한 게 아닐까요?" 답답증을 참다못해 이성기가 이마를 찌푸리며 들떼놓고 묻는다. "글쎄, 있음직도 해. 그러나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은 지구를 괴롭힐 작전을 세우고 있지 않겠어. 무슨 행동 대원이 움직이고 있을 거야." 김민수 대장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궁리에 잠긴다. 고일동 소장에게 문의해 보자. 북극의 얼음이 녹아나고 있는지 체크해 보면 성운인들의 활동 상황을 어느 정도 종잡을 수 있을 테지.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그는 권박사에게 성산포 기지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회답은 부정적이었다. 성산포 기지 사령관 고일동 소장은 바다의 수위가 요 1주일 간 불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 그렇다면 성운인들의 작전이 정지됐다는 뜻일까? 5일째 되던 날 오후, 금성을 감돌면서 정찰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미국 원정대로부터 짤막한 무전 연락이 들어왔다. "금성의 황도면 S125도 시그마 지점에서 반짝이는 비행접시를 발견, 아마도 지구로 향하는 성운인의 우주선인 듯." 무전이 해독되자마자 한국의 특공대원들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가자! 이젠 놓치면 안 된다.″ 김민수는 그동안 몸 안에 침체된 활기를 불러일으키듯 평소의 말소리보다 훨씬 높은 소리로 호령했다. 그리고선 조종석의 박동운 옆으로 뚜벅뚜벅 다가서서, "이온 엔진을 가동시키는 게 어떄? 24시간 안에 가야겠어." 하며, 소리를 낮췄다. 이성기는 이미 마취총을 손질하고 있다. 김민수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흡족한 기분에 감싸였다. 아무래도 젊은 투지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온 엔진이 점화되자 톱상어 호의 속도 계기판은 초속 8만 km를 넘어서 바늘 끝이 한들거린다. 우주 공간에서는 광속이 아니고선 아무리 총알처럼 달리더라도 육체적으로 실감이 나지 않는 법.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한결 더 넓은 우주의 거대함을 증명해 줄 뿐이다. 대원들은 교대로 잠을 자면서 목표 지점을 향하여 한달음에 치닫고 있다. 장차 벌어질 전투에서 결국 체력이 마지막 판가름을 한다는 것은 지난 번의 교전에 체험한 터다. "대장님, 레이더권 내에 비행접시가 들어왔습니다. 여기 보이지 않습니까?“ 문지향이 당돌한 목소리로 외치는 말소리를 듣고 잠자던 사람들까지 벌떡 깨어나서 모든 눈길이 레이더 스크린에 쏠린다. "지난 번 것과 비슷한 비행접시로군." 김민수 대장은 지구를 향해 쾌속도로 날아가는 비행접시의 크기가 더욱 뚜렷해지자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5시간에서 4시간으로, 4시간에서 3시간으로, 또 3시간에서 2시간으로 거리가 단축되자 이성기는 마취총의 가늠자를 기수 쪽으로 겨누고 숨을 죽인다. 드디어 비행접시가 톱상어 호의 사정권 내에 들어오자 민수 대장은 마구잡이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선수를 치고 나가는 편이 전투에서는 늘 유리한 법. 두 눈을 간잔지런하게 좁히며 비행접시의 창구를 겨누고 마취총을 마구 쏘아대는 이성기의 뒷모습은 마치 얼룩말을 노리는 사자처럼 부르르 떨고 있다. 김민수 대장도, 권우경 박사, 문지향도 마취총의 방아쇠를 힘차게 잡아 당기는 순간순간이 계속된다. 박동운은 톱상어 호를 비행접시의 둘레로 핑글핑글 감돌게 몰면서 노상 태경을 배경으로 조종하고 있다. "대장님, 왜 놈들이 반격 해 오지 않을까요? " 이성기가 조바심을 한다. "반격이야 왜 안하겠어. 혹 민들렁 도료 때문에 층자선이 조정실까지 침투 못하는지도 몰라." 김 민수는 고개를 갸우뚱 말을 끊고 방아쇠를 다시 꼬나쥔다. "이상해요. 마취총을 발사한지 30분이 넘었는데, 아무 대꾸가 없을 리가 있어요?" 문지향이 고개를 들며 되돌아 본다. "미스터 박, 톱상어 호를 비행접시와 나란히 몰아 주게." 대장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톱상어 호는 급선회하여 비행접시의 꼬리를 맞출 듯이 후면에서 나란히 치솟는다. 그러자 얼마 후부터 비행접시의 속도가 눈에 보이도록 떨어지면서 마침내는 정지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웬 일이야? 설마……″ 김 대장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비행접시를 지켜본다. 설마 성운인들이 전멸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김민수의 머리를 퍼뜩 스쳐갔다.   출동 명령 제 1 호   비행접시의 출입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 본 이성기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첫눈에 비친 광경인즉 성운인들이 숨진 메뚜기처럼 갈가리 늘어져 있는 판이 아닌가! 거기에는 손가락이라도 삐걱 움직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 엎드린 채 축 뻗어버리자, 누운 채로 굳어버린 자, 딩굴고 있는 자, 모두가 처참한 꼴로 숨져 있었다. "내려가 봐야지. " 권우경 박사가 뒤에서 재우치는 소리를 듣고 이성기는 출입문의 사다리를 내려간다. 권우경 박사도 조심스레 뒤따르며,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 이성기가 마이크로폰으로 톱상어 호에 남아 있는 김민수 대장에게 묻는다. "팔, 다리를 묶어 놔야지 않어 ." "네, 알았습니다. 그런데 비행접시를 폭파시키겠습니까, 연행하겠습니까? " "아니야, 그것을 조종하고 톱상어 호와 합세해야 돼." 조종하라는 말을 듣자, 이성기는 이내 이마를 찌푸린다. 자신이 없기 때문에……. "조종 기술은 박동운 형이 더 우수합니다. 권 박사와 교대로 박동운 형을 보내 주시오." "알았어요, 좋도록 하지." 이성기와 권 박사는 우선 바닥에 뻗어 있는 성운인 16명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았다. 살갗이 거치러웠다. 그리고선 권 박사가 박동운과 교대를 해서 휑뎅그렁한 비행접시 속에는 오직 박동운과 이성기만이 남았다. "이놈들은 자동 비행 장치로 비행접시를 몰았군. 이군, 이 구멍뚫린 파이프를 보란 말이야. 자기(磁氣) 테이프를 컴퓨터에 물려서 저절로 비행체가 날아가게 만들었어. 상당한 실력이군." 비행접시의 조종실을 둘러본 박동운이 한참 감탄 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조정 방법이 있을 텐데…….″ "물론이지.“ 두 대원이 주고 받고 있는데, 별안간 무전 신호가 빗발같이 들어온다. 당장에 알 수는 없으니 개미 모양의 글자가 TV 스크린에 주사(走査)되기 시작하지 않는가. "통신 두절을 탓하는 연락문이겠지.″ 박동운은 걱정없다는 듯이 눈길을 조종 계기판에 돌려 계기판의 배열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두 대원이 비행접시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톱상어 호는 선체를 접하여 함께 표류하고 있는 중. 김민수 대장은 비행접시를 점령한 사실을 자상하게 성산포 기지에 보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축하하오. 성운인의 비행체를 지구인으로서 처음으로 한국 특공대원이 나포한 사실은 여간한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지금 기지의 모든 대원들이 여러분의 얼굴을 사진으로 얼싸안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소. 계속 성공있기를……고일동." 성산포 기지 사령관이 제 1 차로 보내온 격려 전보이다.   비행접시 편대의 습격   그러나 아킬레스 본부는 성산포 기지에 보내는 동시에 메시지를 톱상어 호에도 보내왔다. "금성을 정찰 중인 미국 원정대는 금성 기지에서 출발한 일단의 비행접시 편대를 발견했다. 편대는 지구를 향하여 타원 비행 중, 한국 특공대가 중도에서 우주 편대의 정찰임무를 이어받도록 귀관에게 지시한다. 또한 추격 중인 비행접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가는 곳을 밝혀 주기를 요망함. 아킬레스 본부.“ 희비가 엇갈리는 말, 그대로 톱상어 호의 특공대원들의 가슴에는 기쁨과 긴박감이 엇갈릴 수 밖에. "박동운, 박동운, 성운인들이 비행접시 편대로 지구로 향발했다. 우리에게 추격 임무가 새로 내려졌다. 되도록 빨리 비행접시를 가동시키도록 하시오.“ 김민수 대장의 긴박한 목소리를 전해들은 박동운은 겨드랑이 속에서 식은 땀이 주르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안간힘을 다해서 비행접시를 가동시켜야만 되겠는데, 박동운은 배열판의 으뜸가는 실마리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으뜸가는 실마리란 결국 동력원 말이다. 안절부절 못하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성기가 한손으로 가리켰다. "동운형! 혹 이게 동력원 스위치가 아닐까?"   비행접시 함구령   스위치와 계기판이 옹기종기 천장까지 즐비하다. 여간해서는 조종 계통의 수수께끼를 풀기 어렵겠다고 반쯤 단념하고 있는 참에 이성기가 손으로 가리킨 것이 있다. 박동운은 반사적으로 굵직한 스위치를 켜 봤다. 다급할 적에는 망설여 볼 겨를조차 못 느끼는게 사람의 심정인 모양이다. 만약에 비행접시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생사를 걸고 접전 끝에 나포한 성운인들의 우주선도 한낱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아니겠는가. 아니 그보다 우주 공간에서 표류하는 한, 성운인들에게 발견되는 날에는 톡톡히 복수를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럴 경우 비행접시를 점거한 승리자의 입장이 순식간에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도리어 화근을 불러들이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박동운은 하느님의 은총이 있기를 순간적으로 빌었다. 다급해져서 청하는 기원이었으나 박동운의 처지로선 다른 대안이 전혀 없었다. 찡! 하는 울림과 함께 이윽고 계기판의 불이 켜지면서 가느다란 바늘들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하자, 박동운과 이성기는 얼굴을 마주 볼 뿐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성기의 직감대로 기적적으로 동력원이 움직이는 것을 한참 살피다가 두 사람은 달겨들다시피 말없이 껴안고 서로 상대방의 등을 두들기며 좋아했다. "살았다 ! 저 스크린을 봐. 바깥이 환히 비치지 않아." "실마리는 잡았으니까 어서 톱상어 호를 따라갑시다." 이성기는 재우치면서 삐삐 소리가 들리는 무전기 쪽의 좌석에 자리잡고 놈들의 통신 테이프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톱상어 호의 지시를 받아야 겠는데 워키 토키로선 무리하다. 김대장과 너무 떨어졌어." 이번에는 박동운이 서둘면서 뒷방에 묶어 논 성운인들의 꼴을 훔쳐본다. 놈들은 여전히 까무러진 채 뒹굴고 있다. "동운형! 김 대장이 나왔습니다.″ 김동운은 이성기로부터 비행접시의 마이크를 받아들고 장차의 행동 방침을 물었다. "성산포 기지로 직행하게. 우리 특공대가 비행접시를 나포한 사실은 성산포 기지에만 보고해 놨으니까. 알겠지." "네, 앞으로 지시는 어디서 받을까요 ? " "물론 성산포의 고일동 사령관으로부터 받아야지.″ 박동운에게는 귀환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김민수 대장의 말투로 미루어 비밀리에 안착하라는 뜻이었다. 박동운과 이성기가 제주도의 성산포 기지에 도착한 것은 이로부터 3일 후의 일. 미리 통보해 놓은 까닭에 착륙은 손쉽게 유도되었다. "성운인의 수는 몇이지?" 비행접시가 땅에 내려앉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기내에 들어온 고일동 소장은 첫마디에 묻는다. "16명이라구. 좋아요. 꽁꽁 묶어 놔야지. 섣불리 난동을 부리면 귀찮아. 이 사실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게." 고일동 사령관은 박동운과 이성기에게 조심을 시키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안드로메다 성운인의 문명 기계를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기지에 남아 있던 대원들 몇몇이 비행접시 안으로 올라와서 외뿔 우주인의 손발을 고쳐 묶으면서, 그 비늘과 같은 꺼칠꺼칠한 살결을 보고 얼굴을 일그린다. "4차원 로봇가 있었다지 않아. 분명히 그 발생 장치가 있을 텐데. 알 수 없나?" 고일동 사령관이 답답증을 감추지 못한다. "저희들은 가까스로 기지까지 몰고 왔을 따름이지 온갖 기능을 일일이 체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사령관께서 전문가를 동원하셔야죠." 고일동 사령관은 박동운의 대답은 귀넘겨버리고 넓다란 계기실을 구석구석 거닐며, 신비로운 형체의 비밀을 한시라도 바삐 알아내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날 밤, 대통령을 비롯한 전 각료와 전문가가 비밀리에 성산포로 날아와서 긴급 회의를 연 결과 비행접시의 비밀이 규명될 때까지 외국에 통보하지 않기로 의결했다. "아무리 전 지구의 연합군이 일치단결하고 있다 손치더라도 역시 자기 나라의 이익이 앞서지 않겠어요. 과연 미국과 소련 및 중국의 이익이 어떻게 일치되느냐 하는 문제는 대의명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이런 기회에 상대방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꽁무니를 빼는 나라가 없지 않다고 누가 단정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나름의 자위책을 갖기 위채서도 4차원 로봇의 정체를 덮어 두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고일동 사령관의 강력한 주장이 결국 성공이 된 것이다. 정부는 마침내는 고일동 사령관에게 비행접시의 확보와 비밀 해명의 임무를 내맡겼다.   제 자리를 지켜라   한편, 금성과 지구 사이의 정찰 궤도를 지키던 톱상어 호는 예정대로 금성을 떠나서 지구로 향하는 비행접시 편대를 추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번처럼 덮어 놓고 비행접시와 교전해서는 안된다. 미국 정찰대가 꾸준히 금성 주변을 감시하고 있으니 한국 특공대는 금성 사이의 궤도에서 소정의 임무만 수행하면 족하다."는 지령이 아킬레스 본부로부터 들어왔다. "우리가 맡은 구역만 감시하면 그만이 아니겠어요. 쓸데없이 기를 쓸 건 없을 것 같아요." 김민수 대장 앞으로 찍혀오는 전문을 그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문지향이 넌지시 말을 머금는다. "합동 작전은 이래서 탈이란 말이야. 여태까지 뒤따르던 공이 폭삭 무너져버리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가 본디 맡은 책임은 북극의 얼음판을 녹이는 괴물을 적발하는 데 있었으니까 그런대로 자위를 해야지." 권우경 박사가 안경테를 매만지면서 중얼거린다. 김민수 대장은 아킬레스 본부의 지령에 따라야 하겠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속으로는 여간 마땅치가 않았다. 톱상어 호를 민들렁으로 완전 무장한 지금은 적이 아무리 4차원 로봇을 들여보내려고 기를 쓰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기왕이면 한국 특공대가 끝까지 추격했으면 하는 욕심을 저버린다는 것은 여간 서운하지 않다. 김민수 대장은 성운인과의 전쟁 규모가 어떤 것인지 알아 볼 겸 아킬레스 본부에게 추격 요청을 해 보았다. 톱상어 호는 4차원 로봇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주석을 그는 꼬리에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참만에 회전이 튕겨왔다. "성운인이 지구 착륙을 모색하고 있는 지역은 아직도 뚜렷하지가 않다. 아킬레스 본부로선 성운인과 지상에서 맞싸우는 편이 인류에게 유리하다는 전번의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갈 뿐이다. 만일 지상의 전투에서 성운인이 불리하게 되는 날에는, 놈들이 반드시 응원을 금성에 요청하거나 일단 금성으로 후퇴하지 않겠는가. 한국 특공대는 그러한 경우에 대비해서 지구와 금성 사이의 공간을 지켜달라는 것이지, 결코 전투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는 티끌만큼도 없다. 여러분의 건투를 빈다. " 아킬레스 본부의 전문은 김민수 대장의 요청을 보기좋게 물리친 것이 아닌가. 김민수 대장은 쓴맛을 다시는 도리 밖에 없었다. "미스 문이 항성 관측을 계속해 줘. 난 잠깐 쉴 테야.″ 김민수 박사는 시덥지 않는 낯빛으로 침대실로 들어가 버린다. 귄우경 박사도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조종실의 바닥에 뒹굴고 만다. 한국 특공대는 운수가 사납다는 것인가. 저 멀리 아득한 공간을 햇빛을 반사하면서 덩그렇게 줄지어 가는 비행접시 편대를 천체 망원경으로 지켜보면서 문지향은 톱상어 호를 U턴(Turn)시키고 말았다.   독일 원정대의 비극   정찰 임무는 화성에서 출동한 독일 원정대에게 인계되었다. 독일 원정대는 시시각각으로 아킬레스 본부에 비행접시 편대의 동향을 보고해 왔다. 한 발짝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침묵의 컴컴한 공간에서 반딧불처럼 소리없이 날아가는 비행접시 편대. 놈들은 한 달음에 지구에 내려와서 단숨에 지구를 파멸시킬 작정일까? 온 지구를 파멸시키고 인류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을만한 무슨 수단을 가지고 있기에 저처럼 덤비는 것일까? 독일 원정대의 한스 유벨 박사는 감시의 눈을 더욱 조리며 머리 속에서는 수많은 의문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원정대의 우주선 속에 느닷없이 외뿔 우주인의 4차원 로봇이 옹기종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 한스 유벨 박사는 좁은 조종실 안에서 너울거리는 낮 도깨비를 보자마자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까무러치고 말았다. 대원들은 영문을 모른 채 눈이 휘둥그래질 수 밖에. 기겁을 한 대원들은 빈손으로 덤비는 4차원 로봇을 보고 한 사람씩 쇠망치로 대결하느라고 허우적거리는 판. 무전사는 아킬레스 본부에 급히 4차원 로봇의 출현을 알렸다. "정체 불명의 광선체가 별안간 우주선 내에 침입했다. 방금 전 대원이 격투 중. 한스 유벨 박사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지령 있기를 고대함." 회전은 이내 들어왔다. "독일 원정대는 지체 없이 비행접시 편대에서 멀리 떨어져라. 4차원 로봇을 당장에 막을 길은 없을 것이다. 한국 특공대를 현장에 급파하겠다. 이상" 이런 회전이 들어오는 동안에도 외뿔 우주인의 환상들은 독일 원정대의 몸을 겹치면서 조종실을 점령하다시피 다섯 놈이나 득실거리고 있다. 아직은 그 무서운 에너지가 로봇의 몸에서 발생하지 않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날에는 독일 원정대가 전멸할 것은 뻔하다. 한스 유벨 박사는 졸지에 까무러친 상태에서 간신히 깨어났다. 목구멍을 막았던 숨을 몰아쉬고 나니 눈앞이 조금은 뚜렷해졌다. "대장님, 아마도 레이저 광선과 비슷한 환상인 듯합니다. 정신을 차리십쇼." 당돌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유벨 박사의 머리를 스치자 그는 기운차게 일어서서 로봇을 쏘아보았다. 정말로 알쏭달쏭한 도깨비들이 아닌가. 대원들의 모습과 겹쳐서 세상에서도 이상야릇한 모양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한스 유벨 박사는 다시 두 눈을 딱 감고 이윽이 탈출구를 더듬어 봤다. 총은 쏠 수가 없다. 광선이나 전파의 침입을 막을 도리는 없을까?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봐도 신통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유벨 박사가 다시 눈을 뜨고 로봇을 노려보고 있는 그 때, 전기를 옮은 듯이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로봇의 기능이 발휘되고 만 것이었으나 유벨 박사가 이를 해명하기 까지에는 너무 여유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유벨 박사도 몸을 피하느라고 진땀을 빼긴 했으나, 상대방의 수효도 만만치가 않아 그는 마침내는 로봇에 감전되어 또 다시 졸도하고 말았다. 한국 특공대가 부리나케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독일 우주선은 죽음의 배처럼 우주 공간을 표류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4차원 로봇의 희생이 되고 말았나 보다. 민들렁과 같은 물질을 개발했더라면 난을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김민수 대장은 권박사를 보고 말을 이었다. "서양의 전통적인 과학은 모든 것을 흡수해서 폭발시키거나 관통시키는 방법에만 너무 집착해 왔어요. 자연의 것, 인공적인 것을 그대로 공간에 돌려 보내 버리는 반사의 과학을 좀 더 개발했더라면 위기를 면했을텐데…… 그러나 로봇의 감전력으론 일시 전신 마비가 생길 뿐이니까 언젠가는 되살아날 거요." 당장에 독일 우주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김민수 박사는 쓸쓸하게 한 마디 던져 줄 따름이었다.   비행접시와 교전   아킬레스 본부의 긴급 지령으로 한국의 톱상어 호가 비행접시 편대의 감시 임무를 다시 도맡게 됐다. 다시 U턴한 톱상어 호는 편대의 진로를 성산포 기지와 아킬레스 본부에 동시에 통보했다. "아마도 히말라야 산중에 착륙할 것 같다. 비행접시는 북극과 남극을 멀찍이 정찰한 뒤, 속도를 낮추고 태평양 상공을 거쳐 히말라야 쪽으로 강하하고 있는 중임. 이상." 톱상어 호의 이러한 보고뿐 아니라, 달 기지에서도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행접시 편대가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레이다 망에도 포착되어 비상 경보는 도처의 작전 사령부를 순식간에 전쟁 기분으로 바꿔 놓았다. 이제는 완전히 지구 주변으로 들어온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의 편대를 물샐틈없이 포착하고 있는 아킬레스 본부는 우랄 산맥의 굴속에 설치된 소련 우주 사령부와 공동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성운인들은 금성에서 정하기를 히말라야의 시요네르 봉우리 근처에 착륙할 작정이었으나 예정을 바꿔 좀더 북쪽에 깔린 카라코람 (Karakoram)의 K2 봉우리인 가드윈 요스틴(8611m) 계곡에 내려앉을 듯함. 소련군의 긴급 출동을 바람. 미군은 파키스탄과 인도양의 부대를 출동시켜 K2의 남쪽에서 성운인들과 접할 예정이다. 이상." 아킬레스 본부의 이러한 협동 작전을 우랄 사령부는 크게 환영하고 있다. 카라코람은 소련과,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 등의 접경을 이루는 고원 지대니 만큼 지리적으로 소련에 가깝다. 우주인들이 카라코람에서 발작하는 날에는 피해가 소련에 먼저 미칠 것은 뻔하다. 소련은 그러한 속셈으로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참이다. 소련이 대 부대를 헬리콥터 편으로 카라코람 산중에 출동시키고 있을 때, 비행접시 편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않고 거침없이 K2 계곡의 넓은 평지에 차례차례 내려 앉았다. 마치 나비가 살포시 꽃 위에 내려 앉는 양. 역시 밤이었다. 모든 기습이 어둠을 틈타서 감행되는 것처럼 성운인들도 태양을 가리고서 6대의 비행접시를 지상에 착륙시킨 것이다. 그리고선 맨 처음에 땅에 발을 내 딛은 놈은 소년 아비타였다. 한 놈, 두 놈씩 대담하게 내려서는 군상들. 때마침 으스름 달밤이어서 검은 그림자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꼴이 바위 틈에서 엿보인다. 미국의 결사대원들이 이미 선발대로 파견되어 계곡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진을 치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비행접시가 내려앉은 계곡의 북녘에서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가 밤하늘을 울리더니 우렁차게 메아리친다. "소련군의 선발대일 게다. 신호탄을 쏘아라." 미국 결사대의 리차드 M. 젠킨 대위는 나지막이 명령한다. 아무래도 맞싸워야 할 상대방이다. 조만간에 싸우게 될 바에야 소련군에게 미군의 위치를 알리는 동시에 우주인에게 겁을 줘야 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신호탄이 붉은 꼬리를 싸리비처럼 끌면서 밤하늘에 치솟았다. 하나, 둘, 셋, 수없이 꼬리를 끌며 줄지어 올라가는 바람에 우주인들은 이내 눈치를 챈 듯. 가물거리던 그림자들이 허겁지겁 비행접시 안으로 사라지더니 비행접시는 일제히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시뻘건 불길을 소리없이 창구마다에서 쏘아대는 모양을 한참 관찰하다가 젠킨 대위는 추켜들었던 손을 썩 내리고선 미군에게 발포를 명령했다.   젠킨 대위의 고민   카라코람의 고원은 험준하다. 산봉우리마다 깎아 세운듯 우뚝우뚝 솟아 쭈뼛한 심산유곡에서 우주인과 접전하고 있을 줄이야 세계의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결사대장 리차드 M. 젠킨 대위의 응전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이저총은 파르스름한 불꼬리를 찍찍 갈기며 일제히 비행접시 쪽으로 집중한다. 서로 불꽃을 튀기는 숨막히는 순간 순간이 벌어지고 있건만, 자동 소총이나 기관총처럼 콩 볶는 듯한 요란스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역시 4차원 전쟁의 특색이다. 광선과 광선이 찍찍 엇갈리며 날아가는 침묵의 전쟁. 비행접시의 창구마다에서 내뿜는 광선이 퍽 여유가 있다. "로켓포로 공격하라. 적의 맨 앞에 있는 비행접시를 먼저 목표로 삼도록 하라." 젠킨 대위는 소리를 높였다. 10여 분을 쏘아댔는데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을 뿐더러 상대방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가 않는다. 열이 올라 소리칠 수밖에. 거북이처럼 바위에 달라붙어서 레이저총을 굴리던 소대원이 지체 없이 로켓포를 발사했다. 쌕하는 소리와 함께 눈부신 불길을 뿜으면서 내뻗친 로켓탄은 토끼를 노리는 독수리 못지 앉게 날아들었다. 한 발, 두 발 꼬리를 맞물고 날아가는 로켓탄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기대는 순식간에 어긋나고 말았다. 로켓탄은 비행접시 언저리에 접근하자 어이없이 폭발하고 말지 않는가. "놈들은 특수 장치로 비행접시를 감싸고 있다. 로켓탄 발사를 중지. 레이저총으로만 공격하라!″ 젠킨 대위는 얼결에 고래고래 소리칠 뿐, 뾰족한 묘안을 당장에 발견할 수도 없었다. 지상전에서 쓰여온 최신 무기가 이처럼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할 때, 다음 차례는 어떻게 해 보라는 작전법이 교련 교과서에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달아오른 젠킨 대위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보람없는 전투 경과를 아킬레스 본부에 보고했다. "뭐라구? 로켓포도 소용이 없단 말이야. 알았어. 후속부대가 20분 내로 도착할 거야. 우선 현 위치에서 감시 임무를 계속하도록 하라! " 아킬레스 본부의 지시도 별로 신통한 것은 못됐다. "소생이 비행접시에 접근해서 우주인의 동태를 정찰해 보겠습니다. " 핏대가 오른 제임스 하사가 젠킨 대위 옆으로 다가와서 자원한다. 그는 특수 훈련을 받은 몸. 이런 기회에 실력을 과시해 보고 싶은 심정인가 보다. 표정이 돌처럼 굳은 채가 아닌가. "좋아. 두 사람만 데리고 내려가 보게. 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게. 신호탄 준비는 돼 있나? " "네, 빈틈없습니다." "좋아. 가 보게." 젠킨 대위는 지휘관의 입장에서 우두커니 있을 순 없다. 손을 써볼 대로 써보는 게 지휘관의 임무인 것이다. 제임스 하사가 당장에 부하 2명을 거느리고 바위를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젠킨 대위는 흐뭇하게 여겼다. '그는 끝내 깨닫지 못했지만 직업 군인으로서의 훈련과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 때운에 군대는 규율이 제일이라는 생각만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쟁은 사람 아닌 로봇이 하는 것이라는 우주 차원의 사고 방식을 깨닫기에는 아직도 까마득 했다. 장교로서 지휘관으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는 맹목적으로 믿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참 후에 제임스 하사 일행은 모종의 임무 수행에 성공했다. 그들은 기어가다시피 비행접시 편대에 접근해서 도청 장치를 바윗장에 설치해 논 것이다. 선발대의 진지에 기묘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국인이라고 했지. 저 쪽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있는 인종은 뭐라구? 소련인? 지구 위에는 웬 인종들이 저다지도 많느냐? 도무지 알 수 없는 소인들의 땅덩어리구나." 이내 해독된 대화는 이런 뜻의 말을 주고 받고 있다. 종달새 모양으로 종알거리는 목소리는 분명히 소년 아비타의 말소리일 것이다. 그는 좌표장(총사령관) 소와르가 말리는 데도 기어이 지구 원정에 나선 영리한 소년이다. "어쨌든 지구인도 만만치는 않다. 마지막 무기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이대로 층자선(層子線)총으로 놈들의 접근을 막아 내자. 우리에겐 이미 작전이 서 있지 않는가." 아비타의 말소리가 여러 대화 속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들려온다. 그 소년이 혹 지휘관이 아닐까? 도청 장치를 통해서 흘려오는 정보를 귀엽게 듣고 있던 젠킨 대위는 문뜩 우주인들의 마지막 무기가 무엇일가 하는 상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핵무기라면 지구에는 얼마든지 있다. '놈들은 모종의 생물 무기를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놈들은 도대체 지구를 말살시킬 작정일까? 지구를 지배할 생각일까? 그 목적에 따라서 사용하는 무기도 다른 것이다. 놈들의 의도를 알아 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젠킨 대위는 도깨비 불장난 같은 싸움터에서 고민했다. 문득 고개를 들고 쳐다본 밤하늘엔 헤아릴 수 없는 별만이 총총하다.   기포탄을 사용하시오   한편, 오스트랠리아의 산 속 동굴에 자리잡은 아킬레스 본부의 상황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대로 우물쭈물하다간 우주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릴는지도 모르는 긴박한 사태가 아니겠어요? 전 인류를 순식간에 멸망시킬지도 모를 우주 무기를 먼저 사용하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저의 의견으로선 우리 편이 핵무기로 선수를 쳐야 옳을 것 같습니다. " 짙은 눈썹이 돋보이는 참모장 사뮤엘 O. 하야시 장군이 조바심 끝에 말을 꺼낸다. 그러나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덤덤히 방 안을 거닐면서 가끔 걸음을 멈추곤선 발 끝으로 벽을 툭툭 차보기만 하는 총사령관 에밀 C. 브라운 제독은 참모장의 건의를 귀넘겨 듣고만 있는 것일까. 아무런 대꾸가 없다. 하야시 장군은 의견을 이어갔다. "자고로 미국은 세계가 곤궁에 빠져 있을 때, 뒷짐을 쥐고 이를 외면한 역사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지구가 사느냐 죽느냐하는 시련의 순간입니다. 어째서 제독께서는 말이 없으십니까. 핵무기 사용에 싸인을 하시요. 나는 참모장으로서 건의하는 것입니다." 하야시 장군은 브라운 제독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결의를 재우친다. 총사령관이 너무 우유부단한 것만 같다. "아니야. 내 생각은 달라. 지금 핵무기를 쓴다는 것은 졸렬하다." "까닭은? " 참모장은 재빨리 제독의 말끝을 가로챘다. "까닭이라니? 뻔하지 않아. 만일 우주인의 비행접시에 반물질(反物質)이 있는 경우 지구가 눈깜박할 새에 폭발하고 말는지도 모를 게 아니야. 여태까지의 전쟁관을 버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게 아닌가." "반물질, 새로운 관점……″ 하야시 참모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팔장을 끼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핵무기를 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여파가 뜻하지 않게 인류의 전멸을 가져온다면 결과는 보나마나이다. 하야시 장군은 머리 속에서 부리나케 대안을 더듬어갔다. '기포탄(氣泡彈)을 사용하면 어떨까? 우주인들도 분명히 무슨 원소를 호흡하고 있을 것이다. 레이저 광선도 로켓탄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이 마당에서 핵무기 대신에 기포탄을 써봄직도 하다.' 참모장은 컴컴한 사색(思索)의 수렁 속에서 문뜩 깨어나자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총사령관 앞으로 다가갔다. "기포탄을 사용합시다. " "기포탄 ? "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우주인들의 숨통을 막아버릴 수 있겠습니다." 하야시 장군이 우긴다. 그가 주장하는 기포탄은 로켓으로 발사 폭발시키면 공중에서 수억, 수십억의 플라스틱 거품이 낙하산처럼, 안개 모양으로 내려앉아 거품에 덥힌 생물은 주위의 원소를 빼앗겨 일종의 진공 상태에 덮이고 마는 무서운 화학 무기이다. 미 국방성과 일본이 합자해서 개발해 낸 이 최신 무기는 그동안 실전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비밀 무기인 것이다. 하야시 참모장은 어째서 맨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가벼운 뉘우침마저 들었다. "기포탄이라. 써봄직도 하지. 그러나 성급히 사용해서 도리어 아군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될 일이야. 또한 성공한다 하더라도 우주인을 생포하는 것이 지상 명령이니까." 브라운 제독은 넌지시 덧붙였다. 하야시 참모장은 속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총사령관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쟁에는 타이밍이 있지 않는가? 브라운 총사령관은 자칫하면 타이밍을 놓칠 정도로 결단을 내리는 데는 소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수많은 공수대가 오스트랠리아 기지를 발진하기는 했으나, 아킬레스 본부는 그들을 엉겁결에 발진시켰을 뿐이 아닌가?   그림자의 정체는   미국의 증원부대가 카라코람의 현지에 급파된 후 젠킨 대위의 선발대는 결사대로 몸바꿈했다. 제임스 하사가 구축한 진지로 진출한 젠킨 대위는 비행접시 편대로부터 불과 1km 지점에서 레이저총을 튀기고 있는 판. "돌격을 해서 아예 비행접시로 침투하는 게 어떨까?″ 젠킨 대위는 파란 눈동자를 굴리며 대원들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나는 우주인 한 놈을 생포하고 말테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재미가 아니겠어요. 핫하하하.″ 제임스 하사가 거리낌없이 웃는 목소리는 맥없이 고원의 수풀 속으로 잦아든다. 제임스 하사는 자기가 생각해도 우주인과의 대결은 멋있을 것 같았다. "그럼 결사대는 사명을 다 해야겠다. 우리가 제 1 비행접시에 접근하는 동안, 아군은 제 2의, 제 3의 비행접시에 레이저총을 집중시킬 것이다. 놈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엎드려서 힘껏 기어가기로 하자.“ 젠킨 대위는 말을 마치자, 이내 엎드려서 가제 모양으로 꾸불텅꾸불텅 기어가기 시작한다. 30여명의 결사대원들이 뿔뿔이 헤어져서 뒤따르는 모습을 그는 가끔 뒤돌아본다. 그러면서도 과연 우주인들이 이쪽의 움직임을 환히 내다보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두려움이 물결치듯 솟구쳐올 때마다 젠킨 대위는 고개를 들고 비행접시 쪽을 바라보았다. 별빛에 아련한 비행접시의 그림자. 거기에는 전혀 불빛이 없으며 다만 간간히 쏘아대는 방사선총의 불길이 공기와 화합해서 시퍼렇게 꼬리를 끌 따름이다. 미국의 증원부대는 전 화력을 동원해서 비행접시마다에 레이저총을 쏘아부치고 있다. 죽음의 광선만이 오가는 고용의 격전이다. 역사상 이런 전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젠킨 대위는 엎드려 목격하고 있다. 집채 같은 바위에 다다랐을 때, 젠킨 대위는 멈춰서 숨을 돌리기로 했다. 잇따라 대원들이 도깨비처럼 말없이 모여든다. 더 지시하거나 명령할 것조차 없다. 별빛에 반들거리는 대원들의 눈동자들이 모든 것을 양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사대장은 문뜩 떠오른 생각을 쫓아보았다. 자기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이처럼 싸우고 있을까 하고. 인류를 위해서? 아니다. 미국을 위해서? 아니다. 그럼 뭐냐? 우주인을 보고 싶은 충동 때문이 아닌가. 그들과 겨뤄서 한 놈이라도 생포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는 판이었다. 비행접시까지의 거리는 나머지 400m 가량. 젠킨 대위는 한 손을 들어 내두르면서 전진하도록 신호를 했다. 무난히 한 달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 제임스 하사의 두 눈이 부라린 탓인지 올빼미 눈처럼 동그랗게 보인다. 젠킨 대위는 순간 본능적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 무엇인가 앞을 가리는 그림자가 수없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게 아닌가. 흠칫 몸을 움츠리며 앞을 조심스레 살펴 보았다. 어느새 비행접시는 제 모습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허깨비처럼 이쪽을 보고 걸어오고 있지 않는가! 미국 결사대는 죽살나게 검은 그림자에 총을 쏘아 댔으나 모두 허사였다. 외뿔 인간처럼 아른거리는 그림자의 손이 젠킨 대위의 얼굴을 제치자마자 그는 강한 전기를 받은 듯 소스라치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30여 명의 대원들도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의 손길에 붙잡히기가 무섭게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뻗어버리고 말았다. 결사대원들은 처음으로 당하는 일이어서 이상야릇한 그림자들이 4차원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결사대원들을 짓밟으며 쑥밭을 만들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미국 증원부대의 진지로 전진해 오는 로봇 부대 ! 전투사령관은 졸지에 벌어진 변화를 급기야 아킬레스 본부에 타전했다. "괴물의 정체는 4차원 로봇이다. 독일의 한스 유벨 박사 일행도 우주 공간에서 놈들에게 변을 당한 일이 있다. 한국의 우주 특공대만이 로봇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즉시 연락해서 무슨 묘안을 짜내겠다." 아킬레스 본부의 회전은 매몰스러웠다. 일선 지휘관으로서 1개 공수사단을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에게 미리 4차원 로봇에 관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일종의 작전 미스테이크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공수사단장은 화가 머리까지 올랐으나, 항의를 한대도 아킬레스 본부가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을 적엔 헛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 발짝 한 발짝씩 어른거리며 푸서리처럼 다가오는 로봇을 당장에 어떻게 막아내라는 말인가. 공수사단장은 흔히 토론해 온 3차원 전쟁의 작전법이 아무 소용없는 사실을 순간순간 뼈저리게 느끼면서 자신의 무력감 속에서 헤메일 수밖에. 로봇과의 거리는 나머지 2km! 진퇴를 결정해야 할 순간에, 동쪽 산봉우리를 넘어 멧발 위에 동그마한 비행접시 한 대가 찬란한 불빛을 뿌리면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킬레스 본부에서 거의 동시에 통보가 다다랐다. "한국 특공대가 그 동안 우주에서 철수하여 생포한 비행접시를 몰고 현장에 급행 중. 염려말고 증원 부대는 비행접시 편대를 감시하게." 로봇 부대의 위압에 눌려 간이 써늘해진 공수 사단장의 머리 위에 나타난 또 1대의 비행접시가 바로 우군(友軍)기라는 보고를 받자, 그의 기름진 얼굴에 희색이 빙돌았다. 미군 진지에서 급히 쏘아올린 조명탄이 카라고람 고원을 대낮같이 밝혔다. 한국의 비행접시는 성운인의 비행접시 편대를 하늘에서 맴돌면서 도무지 착륙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미군 진지에선 실망이 엇갈렸다. 이 숨막히는 순간에 미군의 전 초소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이번에 사람 모양의 새로운 로봇이 비행접시 주변에 수천 개 나타났다. 어른거리는 그림자 모습이 지구인과 비슷하다." 지상에서 몸이 달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동안 김민수 대장은 드디어 4차원 로봇의 비밀을 해득하고 마침내는 유사 로봇의 제조에 성공한 것이다. 카라코람 고원에서 김민수 대장이 조종하는 유사 로봇이 막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봇끼리의 격투   꿈질꿈질 움직이면서 4차원 로봇 부대를 뒤쫓는 한국 로봇의 수는 점점 불어난다. 우주인들의 외뿔 로봇 부대는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헤적거리며 미군 진지를 보고 돌진해 간다. 둥실둥실 떠 있는 조명탄의 파르스름한 불빛에 어려 야릇하게 어른거리는 로봇을 비행접시 안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박군! 초점을 미군 진지 앞으로 급히 돌려 줘 로봇을 결투시켜 보자. " 김민수 대장은 이제는 손익은 비행접시의 기능을 테스트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박동운이 선뜻 포커스를 전방으로 맞추자 환영같은 지구인 로봇은 서브렁섭적 몸을 날리어 4차원 로봇의 대열 뒤에 대어 서며 팔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전원을 넣어 봐요." 김민수 박사는 조심스럽게 이르며 밖을 뚫어지게 내다본다. 저 아래서 가물거리는 한국 로봇들이 전원이 들어가자마자 꾸역꾸역 4차원 로봇의 뒷덜미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미군진지까지 간신히 500m를 남긴 곳에서 아슬아슬한 격투가 벌어진 셈. 미군들도 분명히 손에 땀을 쥐고 이 해괴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1초, 2초, 3초가 지날 무렵 4차원 로봇의 대열이 별안간 몸을 뒤로 바꿔 서더니 키가 나직한 한국 로봇의 팔을 붙들며 메어치려는 듯 덤비기 시작한다. '저게 어쩌자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 김 대장은 박동운에게 B스위치를 넣도록 지시했다. 박동운이 분명히 B스위치를 넣고 나니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는 게 아닌가 ! 한 눈에 굽어보이는 고원 위에서 격투하던 로봇들의 자취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지 않는가! 두 눈을 비벼대며 다시 확인하려고 애써도 로봇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게 웬 일이야? 도깨비에 홀린다는 속담이 있더니 도깨비 장난같군. 이유는 무엇일까?' 어이없이 사라진 로봇의 모습을 김대장도 당장에는 납득하질 못했다. '반물질끼리라면 폭발한다는 학설도 있기는 하지만 에너지끼리 소멸해 버리는 현상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안경을 낀 권우경 박사가 창 밖을 열심히 내다보며 자문하는 소리. "B 스위치의 에너지 때문에 4차원 로봇이 승화해 버렸는지 또는 우주인들이 딴 에너지로 걸맞게 했는지 알 수가 있나. 어쨌든 나머지 로봇을 다시 남아 있는 4 차원 로봇 쪽으로 집결시켜 보자.″ 김민수 대장의 더듬는 듯한 말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모험인 만큼 자칫 잘못하면 무슨 봉변을 당할는지 알 수 없는 일. 지구물리학을 전공한 박동운은 나머지 로봇들의 초점을 유도해 주고 나서 새로이 로봇 환상을 빚어내 보려고 계기를 조작해 봤다. 단추를 누르고 주파수를 맨 처음의 그것에 맞춰 봤으나 형상은 이룩되지 않는다. 그렇라면 한 대의 비행접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4차원 로봇의 수효는 한정되어 있단 말인가. 그럴 법도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혹 다른 주파수로서 딴 차원의 로봇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수수께끼는 당장엔 풀리지 않았다. "어쨌든 미군 진지의 아슬아슬했던 위기를 구해 냈으니 천만다행이다." 감사하다는 아킬레스 본부의 전문이 들어왔다. 김민수 대장은 여태까지 고정되다시피 떠 있던 비행접시를 소련군 진지가 있는 쪽으로 이동시키면서, "그래도 고원에 앉아 있는 비행접시 편대가 가만히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지 않아." 하며 중얼거린다. 과연 우주인의 비행접시는 미군들과 한바탕 교전하고 난 뒤부터 4차원 로봇 부대만 내 보냈을 따름이지 한국 특공대가 나포한 비행접시로 재주를 부리고 있음에도 당장 쓰다달다 한 마디조차 없다.   기포탄을 투하   이즈음, 아킬레스 본부는 우주인들의 통신 연락을 도청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참이었다. 금성 기지에서는 그들의 통신 연락을 손쉽게 포착하여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는데 지구에 내려앉은 편대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놈들이 혹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통신 방법을 쓰고 있지나 않을까?" 총사령관 에밀 C. 브라운 제독은 조바심이 나서 막료들에게 물었다. 상황실에 둘러앉은 막료들인들 뾰족한 수가 없었다. "글쎄요. 답답하기는 매한가집니다마는……" 참모장 사무엘 O. 하야시 소장이 시무룩한 말투로 중얼거릴 뿐, 머리속에서는 어서 기포탄(氣泡彈)을 투하할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성산포 기지에 무슨 뾰족한 수라도 없을까?" "연락은 해보겠습니다마는……" "한국의 특공대는 우주인의 비행접시를 나포했다지 않아." 브라운 제독의 답답증을 속시원하게 풀어 줄 수 있는 건더기가 없는 것도 역시 답답한 노릇이었다. "소련군의 동태는 어때?" "비행접시의 북쪽 산중에 진지를 구축 중이랍니다." "놈들은 왜 그리도 슬로 모션이야." 브라운 제독은 푸념 투성이가 되고 있었다. 적이 무슨 수작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의 장군의 초조함은 자고로 어슷비슷 하리라. "총사령관님,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하야시 장군이 내민 쪽지를 낚아채다시피 잡아쥐고 브라운 제독은 단숨에 내리 읽는다. "한국 특공대는 비행접시 운행을 위해 일시 우주 편대에서 철수했음. 까닭에 우주 정보는 두절되고 다만 카라코람의 비행접시에서 우주인의 연락 통신을 입수했음.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음. ① 우주인은 4차원 로봇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듯. ② 지구 원정을 중단할 것인지 계속할 것인지 금성 기지에 지령을 요청중이나 아직 회답이 없음. ③ 원정을 계속하게되는 경우 어떤 수작을 부릴 것인지 경계를 요함. 이상." 브라운 제독은 다시 한 번 전문을 뜯어 읽는다. 그리고선 힘없이 전문을 하야시 장군에게 돌려 보낸다. "난데없이 한국 측이 우주 전쟁의 열쇠를 쥐게 되고 소련군은 곰처럼 우물거리고만 있지 않아. 미군만 전면에서 싸우게 되면 무슨 피해를 입을는지 알 수 없는 전세가 꽤 고약한 편인데 어떡하지?" 제독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기포탄 편대를 출동시키겠어요." "좋아요. 몇 분 후면 현장에 도착하지?" "30분이면 넉넉합니다." 하야시 참모장도 이제는 낯에 생기가 돌고 말소리도 또랑또랑해졌다. 그가 일선 사령관에게 명령하는 목소리도 가벼웠다. 카라코람의 미군 사령관은 기포탄 폭격기가 출격한다는 연락을 받자 가슴이 공연히 두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4차원 로봇 등쌀에 애가 말라붙듯 했으나 한국 로봇의 응원으로 한숨을 돌리고 나니 이번에는 희소식이다. 기포탄 세례로 비행접시들이 옴씰 못하고 생포될 일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아까부터 줄곧 공중에 터뜨리고 있는 조명탄의 불빛은 한결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한국의 비행접시도 연락을 받은 듯 멀찍이 치솟아 올라가 버린다. 고원에 깔려 있던 인간 로봇들도 저절로 걷히고 말았다. 붕하며 이윽고 남쪽 하늘에서 쏜살같이 날아들은 제트 폭격기의 편대가 어렴풋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선 조명탄에 덩그랗게 비친 평지를 향하여 수없이 많은 기포탄을 빗발처럼 떨어뜨리며 스쳐간다. 한 개, 두 개, …… 아니 스무 개, 스물 다섯 개, …… 폭탄이라기보다 드럼통 모양의 검은 기포탄은 공중에서 쾅 소리와 함께 차례차례 터지더니 내려앉은 비행접시 위에 실 모양의 커텐을 순식간에 친다. 속도는 좀 더딘 편이었으나 폭포수가 비행접시 편대의 지붕을 덮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실오라기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거품이 되어 부풀면서 땅 위에 등근 지붕을 쳤다. 마치 거미줄 그물로 목표물을 들씌운 것처럼 그 속에 든 생명체는 꼼짝도 못할 지경이다. 특수 플라스틱의 거품은 쉴새없이 움찔거리고 있다.   소련군이 선제 공격   기포탄으로 완전히 밀폐된 공간. 거기서는 수천 수억의 거품마다가 기체를 흡수하는 바람에 빈틈없는 진공 상태가 빛어지게 마련.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는 박테리아까지 숨통이 막혀 얼마 후에 죽을 것은 뻔하다. 비행접시 편대가 기포탄 세례를 받은 후 1시간 쯤 지나자 난데없이 로켓포 공격이 시작된다. 미군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는 작전이었는데 별안간 소련군이 포격을 가하며 쳐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나 미군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지금 비행접시 편대는 거품의 돔 속에서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전혀 짐작할 길이 없다. 무턱대고 포격을 가하는 것이 올바른 공격법인지 또는 신중히 반응을 보고나서 공세를 취하는 편이 옳은지 판단은 엇갈리고만 셈이다. 미군도 덩달아 사격을 하면서 비행접시 편대가 들어 있는 거품의 장막을 향하여 돌진해 갔다. 싸움터에서는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유리하단 말인가. 소련군과 미군이 제나름의 속셈으로 헐레벌떡 뛰어들고 있을 때, 어렵쇼. 비행접시는 불사조(不死鳥)처럼 후들거리며 일제히 거품의 지붕을 뚫고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갓 뎀 !" 미군 사령관은 기가 차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소련군 쪽을 쏘아본다. 서로 연락해서 차근차근 공동 작전을 취했더라면 이처럼 어이없이 적을 놓치지는 안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지상군은 훌쩍 떠올라서 소리없이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6대의 비행접시를 향해 대공 포화를 집중시켜 봤으나 행차 뒤의 나팔에 지나지 않았다. 우주인들은 지상군을 얼리는 듯 비웃는 듯 곧추 치솟은 후, 방향을 동쪽으로 잡고 밤하늘로 사라지고 말았다. 기포탄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만 사실을 연락받은 아킬레스 본부는 적이 당황했다. "한국 특공대로 하여금 비행접시를 미행하도록 하라." 브라운 제독은 서슬이 파래지며 긴급 지시를 내렸다. 명령은 성산포 기지를 통해 한국 비행접시에 이내 중계됐다. "놈들은 카라코람에서 능히 버틸 수도 있었는데, 왜 후퇴하는 걸까? 원정 계획이 바뀐 모양이지." 인공 위성의 속도로 비행접시 편대를 뒤쫓으면서 김 민수 대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레이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킬레스 본부의 통보는 잇따랐다. "미군과 소련군이 미사일 공격을 개시하겠다. 한국 비행접시는 정확한 진행로를 시시각각으로 통보하도록." 우주인의 비행접시 편대는 그럼에도 유유히 고도 300km를 유지하면서 지구 정찰을 계속하고 있다. 태평양 상공을 지나서 미국을 횡단하여 유럽 지역까지 한눈으로 내려다보는 정찰 비행이다. 한국 특공대는 멀찍이 떨어져서 뒤를 따를 뿐 1대 6의 비율로 공격하는게 도시 무리한 짓이다. 비행접시 편대가 우랄 산맥을 스쳐갈 때, 돌연 소련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땅 위로부터 탄도탄이 여러 개 소리없이 고개를 쳐들고 치솟아 오는 게 아닌가. 우주의 넓은 공간에서는 마치 종달새가 하늘로 치닫는 듯한 인상밖에 주지 않는다. 비행접시 편대도 결코 잠자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허등지등 피하느라고 고도를 급히 올리거나 진로를 바꾸지도 않았다. 비행접시는 저마다 저절로 온 겉면이 보라빛 불빛을 띠며 마치 반딧불처럼 사방 수십 km를 환하게 비쳐 주는게 아닌가. 미사일은 기운차게 치달았으나 반딧불 세력권 내에 돌입하자마자 폭발은 커녕 찍소리도 못한 채 녹아버리는게 아닌가. 이상야릇한 현상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꼴을 보며 김민수 대장은 속으로 감탄 아니할 수 없었다. "대단한 문명이다. 물체를 송두리째 녹여버릴 수 있는 광선의 장막을 우리는 아직껏 발명해 내지 못했는데……" 아마도 미사일을 추적하고 있는 레이다망은 미사일이 돌연 없어지는 신기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김 민수 대장은 아킬레스 본부에 통보를 했다. "비행접시의 보라빛 광선권이 마치 반딧불처럼 형성되어 있어 거기에 다다른 미사일은 오는 족족 녹아 버린다. 무리한 전법을 피하는 게 좋겠다." 물론, 이러한 정보는 이미 지상에서도 분석되었으리라. 그럼에도 비행접시가 미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 무수한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국 비행접시에서 도청한 우주인들의 작전 비밀은 알쏭달쏭한 것이 많았다. 암호의 일부를 해독하고 있을 뿐이어서. 비행접시 편대는 벌써 지구의 둘레를 등서로 일곱 바퀴, 남북으로 다섯 바퀴나 돌고 있다. 상황은 성산포 기지를 통해 일일이 아킬레스 본부에 보고됐다. "어쩌자는 거야. 지구에 대한 정찰만으로 일단 철수할 것인지."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정찰을 하는 놈들이 그저 돌아가겠어요. 한바탕 할 작정이 아닐까요?" 김민수 대장의 말을 이 성기가 받아 넘긴다. "아무래도 수상해. 그러나 덮어놓고 공격하지는 않겠지. 저나름의 무슨 기준이 있을 게 아닌가." 권우경 박사가 뒤를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한국 특공대가 걱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벌안간 반딧불을 거둔 비행접시 편대는 태평양 상공을 천천히 하강하더니 무수한 물체를 뿌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허겁지겁 레이다 스크린을 들여다봐도 거기에는 흔적조차 비치지 않는다. 김 민수 대장은 곧 성산포 기지에 연락했다. 얼마 후, 성산포 기지의 고일동 사령관이 통보해왔다. "비누 모양의 단단한 물질이 샌프란시스코 교외에 수없이 떨어졌다. 마치 우박 같다고 한다. 그러나 정체가 무엇인지 당장에는 알 길이 없다." "비누 모양이라?" 특공대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보도 관제가 풀리어 통보된 상황은 어마어마 했다. 비누 모양의 물질을 멋 모르고 줍던 시민들은 그 물질에 손이 찰싹 붙은 채, 온 몸이 그 자리에서 녹아버리고 말았다. 물질과 함께 곤죽이 되어 흐르는 액체는 광물성은 해치지 않았으나, 모든 식물과 동물이 이에 젖거나 닿기만 하면 저절로 스스르 녹아버리는 죽음의 액체로 변해 버렸다. 그것은 분명히 융해탄이다. 물질의 기운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선 뜻밖에도 25만 명 이상이 녹아버리고 식물과 가축까지 휩쓴 죽음의 홍수가 저지대를 향해서 서서히 흐르고 있다지 않는가! 우주인들은 어쩌자고 그런 가공할 물질을 던졌을까? 경고삼아 한 짓일까? 지구를 과연 멸망시킬 속셈의 하나일까? 김 민수 대장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문득 외쳤다. "이 비행접시 안에도 혹 그 비누 모양의 물질이 숨겨져 있나 찾아 봐라!" 문 지향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가령 융해탄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당장에 써 먹을 데가 없지 않아요. 실망할 것까지는 없는 것 같애요." 적이 어른스러운 말투다. "미스 문은 단순해서 좋아. 당장에 융해탄을 입수할 수만 있다면 한달음에 금성 기지로 쫓아가서 성운인들의 본거지를 폭격할 수도 있지 않겠어. 전쟁이란 서로 견제하는 작전을 쓸 때도 있는 법이야."   융해탄은 없었다   아무리 찾아 봐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봐서 공격용 무기는 으례 비행체의 밑바닥 근처에 쌓아두게 마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샅샅이 뒤져 봐도 비누 모양의 융해탄(融解彈)은 꼴도 볼 수가 없었다. "역시 놈들은 금성 기지를 떠날 때, 따로 적재하고 왔나 보지. 이 비행접시는 우리가 그 전에 나포하지 않았어. 할 수 없는 노릇이야." 김민수 대장은 어깨를 으쓱 추켜 보이며 별 도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비행접시 안에서는 가벼운 수심이 흘렀다. 박동운이 퉁명스럽게 받아 넘긴다. 김민수 대장은 박동운의 발상이 그럴 듯하다고 느꼈다. 허나 그 비누 무기가 당장엔 없을 뿐더러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빚어지고 있는 대참사를 한 대의 비행접시의 힘으로 막아 낼 길도 없었다. 김민수 대장은 줄곧 안드로메다 성운인의 비행접시 편대를 감시 비행하면서도 그 동안의 중간 보고를 성산포 기지로 보낸다. 저 멀리 반딧불처럼 까물까물 빛나면서 제자리 비행을 하고 있는 비행접시 편대는 태양의 강한 빛을 보라색으로 반사시키는 미국의 태평양 연안을 한눈에 내려다 보고 있는 듯. 아마도 그들이 투하한 비누 무기의 효력을 공중촬영이라도 하고 있는 성 싶었다. 김민수 대장은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이 보라는 듯이 융해탄을 떨어뜨린 것은 분명한 복수라고 느꼈다. 미국이 함부로 미사일 공격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정찰 비행 정도로 스쳐 갔을지도 모른다. 김 대장은 성운인들이 그만큼 신중하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대장님, 회전이 막 들어왔습니다……" 해양학을 전공한 이성기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전문을 내민다. 잠자코 전문을 받아 쥔 김민수는 두 줄째 읽어 내리다가 눈이 휘둥그래진다. 뜻밖의 지시였다. "아킬레스 본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비행접시 편대에 대하여 핵공격을 가하기로 정했다. 지금 캘리포니아 주 일대의 시민들은 생지옥 속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다. 비행접시가 또다시 융해탄 세례를 하기 전에 이를 격추하라는 항의로 전 미국이 벌집 쑤셔 놓은 듯 하다. 사상자수는 이미 45만 명을 넘고 있다. 지령을 받은 시각으로부터 15분 후면 지구연합군의 핵공격이 시작될 예정이다. 한국 특공대는 비행접시 편대를 멀리 피하여 감시 임무를 계속하도록. 사령관 고일동." 김민수 대장은 전문의 내용을 지체없이 대원들에게 방송해 주고 나서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창 밖을 다시 한번 내다 보았다. 우주 편대는 여전히 제자리 비행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어서 기수를 지구의 그늘로 돌리자." "오케이!" 하며, 긴장한 목소리가 우주선의 벽에서 금속성을 머금고 울린다. 한국 특공대는 살며시 현장을 떠나 방향을 바꿨다.   핵공격의 위력   시간은 어김이 없었다. 조종실의 시계 초침이 정확하게 제자리에 서자, 레이다 스크린에 비친 비행접시 편대의 광점(光點)의 언저리에서 대여섯 발의 핵폭발물이 번쩍 무딘 빛다발을 순식간에 발사시키는 게 아닌가! 수소탄 한 발이면 수백만 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위력이 아니었던가! 그것도 한 발이 아닌 대여섯 발이 동시에 터진 위력이다. 만일 그 광경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였다면 장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익은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오렌지 빛깔도 레이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자니 먼 발치에서 성냥불을 몇 개 켜보이는 것만 같았다. 김민수 대장은 그러나 관찰이란 이처럼 객관화되기 때문에 무정한 것일까 하고 감상에 잠길 겨를조차 없었다. 번쩍 타오른 빛다발 속에서 비행접시 편대가 전멸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촉각처럼 대상물을 더듬는 레이다 스크린이 더디어 조바심만 등줄기를 솟구친다. "실패했어요, 겨우 한 대가 명중해서 불덩이가 되고 말았어요." 권우경 박사가 안경을 고쳐쓰면서 돌아보지도 않은 채 보고한다. "한 대라니요. 한 대라도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7" 문지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소리쳤다. "뭐라구? 끔찍하다구. 융해탄에 말려서 송두리 채 녹아버린 인명은 어떡하구." 이성기가 걸쌈스럽게 대든다. 한국 특공대원들은 잠시 흥분에 휘말려 왈가왈부했으나 비행접시 편대를 감시해야 하는 임무는 결코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편대는 어디로 피했나?" 김민수 대장은 재우쳐 물었다. 나머지 비행접시들이 감쪽같이 레이다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권우경 박사는 이마를 계기반에 비벼대다시피 사방을 더듬어 자취를 찾아 내느라고 진땀을 빼고 있다. 김민수 대장은 급한 대로 비행접시 한 대가 핵무기의 밥이 되고만 사실을 성산포 기지에 통보했다. 물론 한라산의 레이더 추적소가 탐지하고 있겠지만. "저런, 황경(黃經) 135도 선상에 나란히 보입니다!" 권우경 박사가 당황한 소리로 외친다. 졸지에 귀신같이 몸을 피한 비행접시의 성능을 한국 특공대원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솜씨는 여간하지 않다고 김 대장은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킬레스 본부의 통제 아래 놓인 핵기지에서도 제 1 발이 실패한 탓인지 또는 비행접시와 탄도탄의 속도 차를 계산해 본 것인지 두 번째 발사 통보는 아직도 없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격이 돼 버렸군. 놈들이 또다시 복수할지도 모르겠는 걸." 김민수 대장은 혼잣말로 걱정을 한다. "융해탄 세례를 다른 도시에도 하면 도시라는 도시는 모조리 폐허가 되고 말겠어요. 막아 낼 도리는 없을까?" 권우경 박사도 기운 빠진 소리로 중얼거린다. 대원들도 한결같이 머리 속에서는 무슨 묘안을 더듬고 있으리라. 저마다의 눈길이 다르다. "아무래도 성산포 기지로 일단 돌아가야겠어. 붙잡아 놓은 성운인이 있지 않아, 그 놈들한테 물어 보면 뾰족한 수가 있을지 모르지 않아." "좋은 아이디어올시다. 급히 돌아가야겠죠?" "아무렴, 그렇지 않고." 김 대장의 방안을 대원들은 대환영이다. 오랜 우주 생활에 갑자기 싫증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리라. 어쨌든 비누 무기의 공격에서 지구를 구해 내려면 적의 비밀을 알아 내야만 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훈령을 구하시오." 김민수 대장은 결단성 있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지시했다. 얼마 후, 성산포 기지에서 돌아온 훈령은 비행접시 편대의 감시 임무를 그대로 계속하라는 뜻밖의 대답이었다. 성운인들은 기지의 전문가들이 심문할 수 있으니 번거롭다는 뜻이었다. "어렵쇼. 감시 임무야 레이더 망으로 추적할 수도 있지 않아요. 모처럼 뭍에 발을 디디고 싶었는데……." 이성기가 툴툴댄다. 나머지 대원들도 속셈이야 따로 있었겠지만 실망의 빛을 굳이 내색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야, 내가 직접 심문해 봐야겠어. 그렇지 않고서는 사내로서 성금이 서지 않아." 김 대장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다시 사유를 설명하고 한국 특공대는 가까스로 성산포 기지의 귀환 명령을 받아냈다.   융해탄의 비밀   기지의 드넓은 벌판에는 남서풍이 불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드는 산들바람이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핵무기가 그다지도 명중하지 않는 것일까?" 사령관실에서 김민수 대장과 마주 앉은 고일동 소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다. "처음엔 전멸한 줄 알았지요. 비행접시의 움직임이 워낙 감쪽같아서요. 별 도리가 없을 것 같아요." 신통치 못한 말투로 김 대장은 대답할 뿐. 인사치레가 끝나자 김 대장은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을 수용한 별관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넓은 회의실에서는 이미 심문이 시작되고 있는 참이었다. 살갗이 비늘모양으로 꺼칠꺼칠한 외뿔 우주인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심문에 끼어든 김 대장은 그 동안 가꾼 생각대로 협상하기로 했다. 으름장이나 협박으로 그들이 비밀을 토해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더우기 성운인들의 문명 수준은 지구보다 높다. 그들의 눈에는 인류가 야만인처럼 비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약속하겠다는 거요. 만일 여러분이 융해탄을 막는 비밀을 알려 준다면 비행접시를 돌려주며 금성 기지로 귀환할 수 있는 길을 보장하겠오. 지지하게 따지지 않고 결론부터 말한 겁니다." 김민수 대장은 두 눈을 간잔지럼하게 뜨고서 진지한 표정으로 성운인들에게 말을 건넸다. "‥‥‥‥" "왜 대답이 없습니까? 못 믿겠다는 거요. 무슨 증거를 제시하면 되겠오?" "알겠소. 인질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칼은 지구인들이 빼들고 있지 않습니까. 신의만 지켜주면 협상할 수 있는 겁니다." 외뿔 성운인 한 놈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문을 열었다. 김 대장은 솔깃해졌다. "당신들 지구인은 우리의 원정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본디 당신네들은 생명의 기원(起源)을 찾아서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파헤친 과거를 지니고 있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 그러한 수준을 넘어 물질의 기원을 찾아서 태양계를 답사하러 왔을 따름입니다. 태초에 수소(水素)가 응결하여 폭발함으로써 우주가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설에 지나지 않아요. 정말로 그랬는지 증명해야 됩니다. 우리들 안드로메다 사람들은 그래서 물질의 기원을 밝히느라고 은하계를 여러군데 탐험하고 있는 중이오." 외뿔 성운인은 잠깐 말을 멈추고 창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어갔다. "그러니까 지구인들이 우리의 평화적 목적을 이해하고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협상의 열쇠가 달려 있는 거에요. 신의란 결국 상대방의 뜻을 이해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겠어요. 어떻습니까? 납득이 갑니까?" 외뿔은 김민수 대장을 적이 얕잡아보는 말투로 타이른다. 김민수 대장은 벌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참고 말을 받았다. "그러한 원정 목적은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예요. 당신네들이 먼저 층자선 장치로 북극의 얼음을 녹이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인류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방위하기 위해서 싸움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당신네 비행접시 편대는 융해탄을 투하해서 45만 명이 넘는 인류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소. 이 일을 어떡하자는 거요!" 김 대장은 이마에 핏대를 올려가며 호통을 쳤다. "그러니까 협상에 응하겠다는 게 아니오. 분명히 우리와 우리의 비행접시를 석방시켜 준다면 융해탄의 비밀을 공개해 드리겠소. 어떻소? 날짜를 정할 수 있겠소?" 외뿔은 날짜라는 말에 힘을 주며 김 대장의 표정을 살핀다. "좋습니다. 날자를 정하지요. 오늘로부터 10일 후라면 어떻겠소?" "약속합니까? 문서로 교환하는 게 좋겠는데……" 외뿔 성운인은 조심스럽게 협상을 진행시킨다. 여간한 솜씨가 아니다. 그리하여 김민수 대장과 성운인 사이에 협상이 성립되어 융해탄을 막아 낼 수 있는 물질은 오직 석회(石灰․탄산칼슘)밖에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급기야 아킬레스 본부로 보고되어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융해탄 소동이 석회를 뿌림으로써 고비를 넘기게 됐다. 흘러 내리는 악마의 액체는 석회분과 결합하자 이내 굳어지고 말았다. 인류는 성운인과의 대결에서 우선 일차적인 승리를 거둔 셈일까?   아비타의 기습   "웽웽." 한밤중의 성산포 기지에 비상령이 걸렸다. 레이더가 비행접시 편대의 접근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놈들의 술책에 걸렸구나!" 김민수 대장은 대뜸 뉘우침으로 온 몸이 떨리는 것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고일동 사령관이 일러 준대로 감시 임무만 계속 지켰더라면 비행접시 편대에 미행 당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놈들은 한국 특공대의 비행접시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 행방을 넌지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 준비를!" 고일동 사령관은 쏜살같이 내달리며 외친다. 지하 작전실로. 거기에는 핵전쟁에 대비해서 오래 전부터 작전 상황실이 꾸며져 있다. 김민수 대장은 한달음에 비행접시로 뛰어들었다. 벌써 대원들이 비행접시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10초 후면 떠오르려는 참이다. 이 때, 비행접시의 수신 장치가 별안간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하지 않는가. "분명히 성운인들의 통신 연락이다." 김 대장은 들여다 보면서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자는 거야! 속으로 반발을 느꼈으나 권우경 박사가 통신문을 해독하고 나서 아비타가 사라미사를 부르고 있다고 일러 준다. "사라미사를? 그 놈은 나하고 협상한 외뿔이 아닌가. 어쩌자는 거야." 김 대장은 혼잣말로 외쳤다. "불러 오지요. 그 놈만 불러와서 아비타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게 현명하지 않겠어요?" 권 박사의 말대로 김 대장은 사라미사를 수용소에서 불러들였다. "아비타로부터 연락이 오고 있다. 무슨 얘기인지 설명해 다오." 김 대장이 공손하게 일러 주자 사라미사는 곧장 수신 장치로 뛰어가더니 금방 얼굴에 생기가 돌지 않는가. 그는 물어보지도 않는데 외쳤다. "비행접시와 포로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기지를 융해탄으로 전멸시키겠다고 합니다." "전멸?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러한 공갈이 안 통한다는 것 쯤은 자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통보해 주게. 서로 언약한 일이 있으니까 일단 금성 기지로 철수해 달라고." "그렇지만 아비타는 총사령관이요. 내가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순 없오." "뭐? 김민수 대장의 이름으로 통고하란 말이야. 이쪽에는 자력총이 있는 사실을 아비타도 알고 있지 않는가?" 사라미사는 멈칫거리더니 아마도 그러한 뜻을 전한 듯. "금성 기지로 철수할 순 없다고 합니다.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는 전 지구에 융해탄 세례를 하겠답니다." 사라미사는 짐짓 웃음을 담으면서 일러준다. 아비타와의 연락이 자신을 준 것은 틀림없는 일. "전지구를……. 안될 일이지. 융해탄이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주게. 그리고 핵공격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도." 사라미사는 김 대장의 단호한 호령에 적이 당황한 듯 떨리는 말소리로 보고한다.   아비타와의 협상   난데없이 융해탄이 빗발치듯 하지 않는가! "망할 자식들! 협상도 채 끝나기 전에 위협하려는 심뽄가." 김민수 대장은 서슬이 새파래져서 온 몸의 기운을 불끈 쥔 주먹 안으로 모아 내흔들었다. "고 사령관, 핵무기를 써야겠어요.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김민수 대장이 외치는 소리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성산포 기지의 핵무기는 여기저기서 퍼런 불을 내뿜으며 치솟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경고없이 습격해 올 때는 거침없이 맞서야 되는 법. 그러나 김민수 대장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라미사를 보고 호통을 쳤다. "아비타에게 일러 줘. 아무리 융해탄을 퍼븟는다고 해도 조금도 겁날 건 없다고. 우리의 동해안은 말짱 석회 (탄산칼슘)로 구성돼 있는 만큼 융해탄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게." "알겠습니다. 연락하겠오. 설득시키겠습니다." 얼결에 넋이 나갔던 사라미사도 멍했던 정신을 바로잡고 골똘히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우주인들은 핵무기는 결코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인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비타만은 성산포 기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정에 어두운 듯 융해탄 세례를 계속하고 있다. 고일동 사령관의 빈틈없는 조처로 지상에 떨어진 융해탄이 채 위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석회가루에 엉기고만 것은 물론이다. 아비타는 그 무엇인지 크게 오산하고 있는 참이었다. "납득이 갔나 봅니다. 협상을 계속하자는 전갈이요. 어떻게 할까요?" 사라미사는 황급히 김민수에게 보고했다. 그의 거치른 숨소리가 긴박감을 돋아줄 뿐. "오-케이, 그렇다면 공격을 멈추고 아비타 더러 성산포 기지까지 내려오라고 전하게. 신변은 보장하겠다고." 융해탄 공격이 이윽고 멈췄다. 헛공격에 지나지 않았다. 동시에 한국의 핵공격도 중지되었다. "어쩌자는 건가?" 고일동 사령관이 비행접시 안으로 들어와서 묻는다. "아비타 더러 내려와서 협상하자고 일러줬습니다. 아마도 곧 내려올 거요." 김민수 대장은 잘라 말할 뿐, 수신기의 신호는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사라미사의 말대로 과연 아비타가 타고있는 비행접시만이 소리없이 성산포 기지에 앉은 것은 2시간 뒤의 일이었다. 1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비행접시의 계단을 내려오는 아비타는 소년 우주인이 아닌가. 여느 우주인과 마찬가지로 외뿔에 비늘 모양의 거친 살갗을 지니고 있었으나 파란 윤기가 반짝거리는 점이 딴 우주인과는 달랐다. 사라미사는 헤적거리며 급히 아비타 쪽으로 내닫는다. 두 우주인 사이에서 귓속말이 오갔다. 아비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발걸음을 내딛는다. "내가 이 기지의 고일동 사령관이오. 어쨌든 반갑소." "나는 안드로메다의 아비타. 좌표장 소와르의 명령을 받고 동료를 구출하려고 왔오. 어쨌든 귀관을 만나니 반갑소." 소년 아비타의 목소리도 어딘지 드레진 데가 있다. 협상은 회의실에서 시작됐다. 아비타의 옆자리에는 사라미사가 앉고 맞은 편에는 고일동 사령관과 김민수 대장 등이 대어 앉았다. 우주인들은 포로와 비행접시를 고스란히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고일동 사령관은 그러나 비행접시만은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고집했다. 왜냐 하면 사라미사와의 언약이었기 때문. 김 대장도 끼어들어 융해탄의 비밀을 캐낼 때, 어쨌든 우주인들을 석방해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덧붙였다. 우주인 대표와 성산포 기지에서 협상을 벌이고 있는 사실은 시시각각으로 아킬레스 본부에 통보되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은 캘리포니아에서 당한 희생자의 분통을 생각해서라도 아비타를 생포해 버리라고 독촉이 빗발같다. 소련의 건의인즉 아비타를 사로잡아 놓고 제 2 차 협상대표와 교섭을 벌리는 편이 유리하다는 의견이다. 고일동 사령관은 아비타에게 일부러 미국과 소련의 의견을 알려 주었다. 국제적으로 성운인들이 저지른 행동이 크게 반발을 사고 있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성운인들은 그들대로 금성 기지와 끊임없는 연락을 하곤 했다, 아마도 좌표장 소와르의 훈령이 도착한 듯, 아비타는 쪽지를 훔쳐보는 시늉을 하더니 연설조로 말문을 열었다. "전에도 연락한 바 있지만 우리의 태양계 원정 목적은 생명의 기원이 아닌 물질의 기원을 탐사하려는 것인 만큼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한국 특공대가 우리 동료들을 납치해 갔기 때문에 부득이 융해탄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었다. 더우기 핵공격을 가해서 우리 비행접시 한 대를 송두리째 잿더미로 만든 것도 지구인들이 아닌가. 지구인의 인상은 퍽 호전적인 것 같다. 우리가 대항할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좌표장 소와르는 이미 나포된 비행접시 한 대와 지구의 상당한 물질과 교환하기를 원하고 있다. 받아들이겠는가?" 마지막 조건이 시달된 모양 같았다. "지구의 물질 - 그것은 다른 행성계의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원한다면 흔해 빠진 한라산의 돌이나 참죽나무 따위를 주지 못할 정도로 인색치는 않다." 고일동 사령관은 선선히 아비타의 조건을 받아 주었다. 그들은 기념이 될만한 물질을 요구했을 뿐 호전적은 아니었다.   불발탄의 오발   고일동 사령관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협상을 매듭짓고 우주인들을 날려보냈다. 더 이상 지구 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중히 고려했다. 미국이나 소련의 의견에 따르자면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잇따를 것은 뻔하다. 사라미사는 김민수 대장에게 고맙다고 코가 땅에 닿도록 합장을 하고 떠나면서 태양계를 떠날 때까지 서로 교신할 것을 기약했다. 그런데 아비타 일행이 성산포 기지를 떠난지 불과 30분만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은 금성 기지로 돌아가는 도중에 정원이 초과된 비행접시의 무게를 조정하려고 남아 있는 융해탄을 시베리아와 북극의 얼음판에 버리는 게 실수였다. 우랄 산맥 동쪽에 있는 소련의 비밀 공업 지구에 융해탄이 느닷없이 빗발치자 소련군은 핵무기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비행접시에 타고 있는 사라미사로부터 숨가뿐 문의가 성산포 기지에 들어왔다. "당신네들이 잘못을 저지른 거요. 어쩌자고 시베리아에 융해탄을 버렸오. 소련은 정식으로 도전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오. 탄산칼슘의 비결을 일러주긴 했으나 졸지에 변을 당하여 소련은 홍분하고 있소. 어서 도망가는 편이 상책일 것이오." 김민수 대장은 지체 없이 전후책을 일러 주었다. 우주인들은 시베리아를 그저 허허벌판이라고만 판단한 모양이었다. 약이 오른 소련의 우주 함대가 비행접시 편대를 추격하지 않을 리가 없다. 더우기 우주인의 높은 문명의 이기 - 비행접시 한 대를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사실도 얄밉다면 얄밉게도 시샘이 생기는 일이었다. 추격을 받은 우주인들은 층자선(層紫線)총으로 저항하면서 상투적인 4차원 로봇를 소련 함대 속에 투입하고 있는 모양. 우주 공간에서 솔개와 독수리의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동안 지상에서는 또한 뜻하지 않은 사건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말았다. 재수가 없으면 엎드려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대로 소련이 발사한 핵무기 중 두 발이 하늘에서 불발된 채 미국의 시카고 근처에 떨어져 폭발해 버린 다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시카고 인구의 태반이 핵폭발로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국은 졸지에 뒤집히고 말았다. "소련은 우주인과 짜고 미국을 공격해왔다. 시카고 시민의 반이 희생된 이 마당에 우리가 좌시할 수 있겠는가! 미국 군부는 뭘하고 있는가!"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직결하는 텔렉스가 아무리 사태의 진상을 주고 받아도 술렁대는 여론을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정부는 이미 설득력을 잃고 만 것이다. 미국의 침착한 신문들은 국민들이 냉정하기를 바라는 사설을 쓰고 계몽에 안간힘을 기울였으나 선정적인 텔레비전 해설자들은 시카고의 생생한 참경을 스크린에 보도하여 민심에 마구 불질러 놓을 뿐이었다. 미국의 올리버 대통령도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상 부득이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언론을 통제하기로 했으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는 딱한 입장에 몰리고 말았다. "비록 오발탄이 터졌다고 변명할 수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3백만 명의 인명이 희생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다. 국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부득이 소련에 대한 상당한 보복을 아니할 수 없다." 올리버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국민에게 입장을 밝히고 시베리아에 대한 핵공격을 군에게 지시하고 말았다. 소련은 소련대로 졸지에 미국과 전쟁을 해야되는 궁지에 몰렸으나 올리버 대통령의 딱한 입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텔렉스가 사전에 통보한 한정된 구역에 대한 핵무기 공격이 자칫 벗어나기만 하면 전면 전쟁으로 옮길 비상령을 전국에 내렸다. 미국의 핵공격은 우랄 동쪽의 융해탄 세례를 받은 공업지구에만 한정되었으나 이번에는 소련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정부가 일부 시민을 희생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이 중앙 위원회에서 날카롭게 벌어졌다. 그러나 언론 통제를 전통화 해온 소련으로서는 진상을 전국민에게 알리지 않고서 사태를 수습하기엔 편리했다. 이 무렵 금성 기지의 좌표장 소와르는 지구 위에서 벌어진 전투를 이용해 보려고 이모저모로 생각에 잠겨 있다. "김민수 대장, 당신네 지구인들이 얼마나 호전적이며 바꿔 말하자면 얼마나 야만스럽다는 것이 지금 입증되고 있지 않습니까.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은 서로 헐뜯고 살려는 생명의 더러운 일면을 말살시키는 새로운 무기를 투입할 수도 있소. 그것은 다름아닌 박테리아 무기요. 안드로메다의 특수 박테리아를 뿌리면 사람은 물론 무쇠까지도 좀먹히고 마는 지구 전멸의 순간이 시작되오. 지금 우리 좌표장은 태양계에서 생물을 없애 버리느냐 또는 그대로 얼마간 진화하는 더딘 길을 남겨 주느냐 하는 판단을 서두르고 있소. 김민수 대장, 미국과 소련에 어서 이 소식을 전하시오." 사라미사의 전갈이다. 한동안 포로였지만 그래도 한국군과의 인연을 맺고 이해하게 된 성운인은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우선 일러 준 것이다. 고일동 사령관의 이름으로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의 동정이 급히 아킬레스 본부와 소련의 우랄 작전 본부에 통보 되었다. "전투를 중지해야 되겠어. 보복이란 얼토당토 않은 관념이야. 도대체 핵무기를 만들어 놓은 게 재앙을 자초한 것이 아니겠는가. 안 그래요?" 브라운 제독은 평소의 호전적인 군인과는 딴판으로 전쟁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어서 올리버 대통령에게 건의하시죠." 하야시 소장이 재우친다. 고일동 사령관의 전갈이 성금이 서서 미국과 소련은 다섯 시간이 채 못되어 휴전을 선포하고 말았다. 동시에 아킬레스 본부는 전지구인에게 성운인들의 박테리아 공격에 대비하도록 호소했다. 지구가 우주인에 의해 전멸하느냐 인류가 스스로 할퀴고 헐뜯어 자멸하느냐 하는 갈림길이 금성에 도사린 소와르 좌표장의 판단 하나로 결정된다는 것은 여간 서글픈 일이 아니었다 . 그러나 만일 김민수 대장과 사라미사와 같은 완충의 연락로가 없었더라면 4차원 전쟁으로 지구와 인류는 전멸했을는지도 모른다. 지구와 인류가 위험한 고비에 다다르고 있었다는 일련의 경위는 휠씬 후에 전모가 밝혀졌다. "그럼 그렇지. 바닷물이 불어났을 때부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우주인들의 수작이었군 그래." 충무의 갓바위에서 이날도 시울을 드리우고 낚시를 하는 장홍팔 노인은 꿈인지 생시인지 자기가 전인류를 건져준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히죽 웃어 보았다.     ■ S.F 단편   ※ 우주 여행기 ※ 미쳐버린 마차 ※ 의식 교환기     미쳐버린 마차   "이것은 콜레라 균(菌)의 표본입니다. 누구나 다 무서워하는 콜레라의 바이러스입니다." 세균학자(細菌學者)는 현미경 밑으로 슬라이드 글라스를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나이는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분명 이런 일에는 익숙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부드럽고 횐 손으로 다른 한 쪽 눈을 가리면서 "잘 보이지 않는데." "그 조준 장치를 돌려보시오. 아마 렌즈의 촛점이 당신의 눈에 맞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인간의 시력은 제가끔 다르니까요. 그 조준 장치를 이쪽이나 저쪽으로 조금씩 돌려보면 됩니다." 세균학자가 가르쳐 주었다. "아, 이제 보입니다!" 하고 방문객은 말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 아니군요. 조그만 줄기가 있고 핑크색의 덩어리 같은 부분도 있군요. 이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물건, 원자처럼 작은 이 하잘 것 없는 것이 그렇게도 번식력이 강해서 이 도시의 모든 인간을 전멸시킬 수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얘기야!" 그는 일어나서 글라스 판을 현미경에서 꺼내어 창가로 가서 보였다. "이렇게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고 그 표본을 아무 말없이 여러 가지 각도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건 아직 살아 있는 것입니까? 지금도 위험한 물건 입니까?" 하고 물었다. 세균학자가 설명을 했다. "아닙니다. 죽은 것입니다. 지금도 염색이 돼 있읍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콜레라 균을 모조리 죽여 염색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창백한 얼굴의 사나이는 엷은 미소를 띠우며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무서운 것을 옆에 놓고도 용케 태연할 수 있군요. 아직 살아 있고 활동할 수 있는 표본을……." 그러나 세균학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그는 말을 중단하고 방을 가로질러 저쪽 구석에 놓인 몇개의 시험관 중에서 하나를 들고 돌아와서 "이것이 살아 있는 놈입니다. 살아 있는 병원균(病源菌)을 이렇게 해서 배양하고 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건 콜레라 균의 통조림 같은 것입니다." 그 때, 방문객인 창백한 사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이 잠시 번득였다. "이런 것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군요." 했다. 그리고 그는 탐스러운 듯이 그 조그만 시험관을 들여다 보았다. 세균학자는 방문객의 표정에 나타난 병적인 기쁨을 읽었다. 그날 오후 옛 친구의 소개장을 가지고 처음으로 찾아온 사내이기는 하지만 그들 학자들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검은 머리와 짙은 녹색의 눈, 야윈 표정에 신경질적인 동작, 제멋대로인 점도 있지만 일단 관심을 표시하자 상당히 날카로운 데가 있다. 보통 세균학자들이 교제하고 있는 과학자 클럽의 모든 사람들의 점액적(粘液的) 인신중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연구 과제로 하고 있는 인명에 위험을 가할 가능성이 있는 세균류의 문제에 이렇게까지 깊은 감명을 표시하는 것을 듣고는 그 얘기에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균학자는 어색한 몸짓으로 시험관을 받아들자, "그렇습니다. 여기 고약한 병균이 가득히 갇혀 있습니다. 이 조그만 시험관을 부숴 구도의 수원지에 던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합니까? 이 미소한 존재, 염색을 해서 현미경의 기능을 빌리지 않으면 볼 수도 없는, 냄새도 없고 맛도 없는 이 미세한 바이러스에게 '가라. 그리고 번식하라. 수원지의 저수지에 가득 번져라'하고 말만 하면 죽음은 무섭고, 고통스럽고, 오욕이 넘치는 이 도시에 가득 퍼지고 사방에서 무수한 희생자가 나타나겠지요. 그것은 아내의 손에서 남편을, 어머니의 손에서 아이들을 빼앗았습니다. 정치가를 그 정부(政務)로부터, 가난뱅이를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상수도의 관을 통해서 골고루 퍼져 물을 끓여 먹지 않는 가정을 골라 벌을 줍니다. 미네랄 워터 제조소에 침입하여 샐러드 속에 흘러 들어가고, 때로는 물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기도 합니다. 물통 속에서 말이 목을 들이밀 때를 기다리기도 하며 부주의한 아이들이 공중 수도 꼭지에 입을 대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일단 땅 속에 스며들면 지하수 줄기를 따라 무수한 우물이나 약수터 같은 곳에 다시 얼굴을 내밉니다. 이 시험관을 한 번 수원지(水源池)에 던지기만 하면 이 도시의 전 인구를 멸망시켜 버릴 수도 있겠지요." 세균학자도 여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말을 그쳤다. 그는 언제나 자기 말에 열중하는 것이 결점이라는 비난을 종종 받고 있었는데 그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안에 갇혀 있는 이상 안전합니다. 절대로 안전합니다." 창백한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기침을 한 번 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란 놈들은 악당들이면서 무척 어리석군요. 천치들이 아닙니까? 이렇게 유효한 물건이 있는데 폭탄 같은 걸 가지고 사람을 죽이니 말입니다." 그 때,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톱 끝으로 가볍게 건드리는 정도의 소리였다. 세균학자가 가서 문을 열자 "당신 잠깐만 오세요." 하고 그의 아내가 속삭였다. 아내와의 용건을 마치고 세균학자가 연구실에 돌아와보니 창백한 그 방문객은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런, 정신 없이 얘기를 듣고 있었군. 한 시간이나 선생님 시간을 빼앗았군요. 네 시 십이 분이나 됐습니다. 세시 반에는 물러갈 예정이었는데, 너무 얘기가 재미있어서…… 아니 어쨌든 이 이상 선생님 시간을 뺏으면 실례가 될 것 같습니다. 네 시에 약속도 있었구요."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인사를 하며 그 방을 나갔다. 세균학자는 문밖까지 나가 전송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복도를 통해서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는 그 방문객이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적인 면이 있는 사나이야." 하고 세균학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병원균의 배양물(培養物)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의 그 기쁜 표정! 그것은 단순한 표정이 아니야." 순간 그는 무서운 상상에 사로잡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황한 그는 증기통 옆에 있는 시험대를 돌아보고 또 급히 책상을 바라보았다. 계속하여 어쩔줄 모르고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고 나서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홀의 테이블 위에 놓았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홀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네, 왜 그러시죠?" 아내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 당신하고 얘기할 때, 내 손에 뭘 쥐고 있지 않았었나?" 잠시 후에 아내의 대답이 들렸다. "아니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셨어요. 내가 분명히 보았어요." "이걸 어쩌나!" 세균학자는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집 앞의 계단을 뛰어내리자 거리로 나섰다. 아내는 현관문이 난폭한 소리를 내고 닫히는 소리를 듣고 놀라 창가로 다가섰다. 바깥 길 저쪽에서 비쩍 마른 사나이가 마차를 타고 있었다. 남편인 세균학자는 모자도 쓰지 않고 슬리퍼를 신은 채로 쫓아가고 있었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마차를 향해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쪽 슬리퍼가 벗어졌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이가 정신이 돌았나 봐!" 하고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모두 저이가 하는 무서운 학문 탓이야." 그리고 그녀는 창문을 열고 남편을 불러 들이려 했다. 그 때, 수척한 사나이도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의 아내처럼 세균학자가 돌았다고 생각되었는지 당황하여 세균학자 쪽을 손가락질하면서 마부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마부는 채찍을 흔들었다. 잠시 후 마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뒤쫓는 세균학자를 남겨두고 길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세균학자의 아내는 잠시 동안 창가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방안으로 몸을 돌이켰다. 그녀는 넋이 나가 있었다. "본래 좀 이상한 데가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하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쓰 바람에다 양말발로 거리를 뛰어다니시다니!" 그러나 잠시 후 좋은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급히 모자를 쓰고 구두를 들고 홀로 뛰어 갔다. 벽에 걸린 남편의 모자와 오바를 벗겨 들자 현관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다행히 마차가 한 대 천천히 뛰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세웠다. "이 거리를 곧장 가 주세요. 샤쓰 바람에 모자도 쓰지 않은 신사가 양말발로 뛰어가고 있을테니 그 분을 좀 잡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마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채찍을 흔들었다. 이런 주문은 흔히 당하는 것이라는 듯이. 얼마 후, 마차가 기다리는 주차장에 모여 있던 한가로운 마부들은 갑자기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다 보았다. 밤색 털의 늙은 말에 채찍을 가하며 마차 한대가 굉장한 속력으로 그들 옆을 지나갔다. 그 마차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있다. 잠시 후 그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사 정신을 차린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저게 하리 힉스란 녀석 아냐. 왜 저렇게 미친듯이 마차를 몰까?"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 중에서 떠벌이 아저씨라고 불리우는 건장한 사나이였다. "역시 늙었어로 채찍을 흔드는 솜씨가 대단해." 감탄한 것은 견습을 하는 어린 마부였다. "어!" 그 때, 한 마부가 소리쳤다. "또 한 대가 오는데. 이것도 미친 놈처럼 몰고 있어 무서운 속력인데……" "저건 조지 녀석인데." 떠벌이 아저치가 말했다. "정말 미친 놈처럼 무서운 속력을 내고 있구나. 어쩌면 먼저 지나간 마차를 쫓아 가겠는데." 마부들은 활기가 돌았다. 제가끔 뭐라고 떠들고 있다. "잘 해라. 조지!" "경쟁이구나!" "곧 따라갈 수 있겠어!" "좀 더 빨리 몰아라!" "저 암말은 무척 빠른데!" 이렇게 말한 것은 견습을 하는 어린 마부였다. "정말 그렇구나!" 떠벌이 아저씨도 소리치고 있다. "나도 한 번 따라가 볼까. 어 저것 봐! 또 한 대가 더 있구나.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인데. 오늘은 이 거리의 마차가 모조리 미쳐버린 모양이구나!" "이번 마차에 탄 손님은 여자다." 하고 견습의 어린 마부가 말했다. "여자가 남자를 쫓아가고 있는 거야. 이건 거꾸론데." 이것은 떠벌이 아저씨의 말이었다. "저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뭐지?" "모자 같은데." "재미 있는 일이다! 어느 쪽이 이기는가, 아마 조지 할아버지가 이길 거야." 견습하는 꼬마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이 뒤는 누가 달려올까?" 마부들의 박수갈채가 떠들썩한 거리를 세균학자의 아내가 탄 마차가 달려갔다. 기분이 나쁘지만 그녀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버스톡크 힐거리를 내려가서 킴넬 타운 하이 스트리트를 향해 달렸다. 그 동안 그녀는 앞에 달리는 마차의 마부의 어깨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앞의 마차의 마부는 그대로 열심히 말에 채찍을 가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남편을 그녀로부터 점점 멀리 태워가는 것이었다. 맨 앞 마차 속에서는 조금 전의 사내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팔장을 꼭 끼고 있었지만 손에는 시험관을 잔뜩 움켜쥐고 있다. 이 조그만 시험관 속에는 무한히 퍼질 가능성이 있는 파괴력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기분은 공포와 환희가 기묘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체포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금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가를 생각할 때 막연하기는 하지만 커다란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희는 불안을 휠씬 능가하고 있었다. 그 이전의 어떤 무정부주의자도 이와같은 명안(名案)에 생각이 미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명성을 부러워하고 있던 유명한 무정부주의자들은 이제 그의 옆에 서면 모두가 희미한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단지 수돗물을 배급하는 수원지에 들어가서 이 조그만 시험관을 그 곳 물 탱크 속에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흘륭한 명안을 생각해 낸 것인가! 소개장을 위조하여 연구실에 들어가서 얼마나 완벽하게 찬스를 잡은 것인가! 얼마 안가서 전세계에 나의 공적이 떠들석하게 퍼질 것이 아닌가. 지금껏 나를 냉소하고, 괄시하고, 그리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앞세웠으며, 또 나와 함께 앉는 일 조차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녀석들도 싫어도 내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죽음, 죽음! 세상 녀석들은 언제나 나를 대수롭지 않은 사람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전세계의 인간들이 나를 잡아 누르기 위해서 공모하고 있었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이제야말로 그녀석들에게 인간을 한 마리씩 고립시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착실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눈에 익은 길 같은데 도대체 어디일까? 그렇다. 그레이트 세인트 앤드류 스트리트임에 틀림없다. 무척 많이 달려왔구나. 마차비는 얼마나 달라고 할까? 그는 목을 길게 빼고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세균학자의 마차는 50야드 이상 떨어지지 않고 쫓아온다. 이 녀석은 좀 서투르군. 잘못하면 내가 탄 마차는 잡히고 나는 체포될런지도 모르겠는데. 그는 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냈다. 그것을 좌석 천정 창문으로 마부의 코 밑에 내밀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더 줄 수도 있어. 잡히지만 않게 달려주면 말이야." 마부는 즉시 돈을 받아 갔다. "걱정 마세요." 라고 대답하면서 천정 창문을 닫았다. 채찍이 땀에 젖은 말의 옆구리에서 빛났다. 순간,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창백한 사나이는 몸의 균형을 잡으려다 시험관을 잔뜩 움켜 쥔 손이 마차의 벽에 부딪혔다. 유리 기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깨진 조각이 마차 바닥에 떨어지면서 다시 한 번 소리를 냈다. 그는 당황하여 정신없이 사방을 휘둘러 보다가 앞문 위쪽에 묻은 두세 방울의 액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몸이 떨렸다. "이거 큰일 났는데. 잘못하다가는 내가 첫번째 희생자가 되겠는걸. 이제 다 틀렸다! 그러나 나라는 사나이는 어차피 순교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것도 훌륭한 순교자로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건 너무 처량한 죽음인데. 얘기로 들은 것처럼 괴로운 것인가?" 잠시 후, 그는 생각이 하나 떠올라 발치를 살폈다. 떨어진 조각에는 아직 조그만 물방울이 남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마셔 버렸다. 이것을 마셔 놓으면 죽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고 있는 동안 그에게는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세균학자의 추적을 무서워하며 도망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웰링톤 스트리트에서 그는 마부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발이 발판에서 미끌어졌다.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았다. 콜레라 균의 독은 이렇게 빠르게 효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그는 마부에게 손짓을 하였다. 부지런히 물러가 버리라는 듯한 몸짓을 하고 그 뒤 팔짱을 끼고 길 위에 우뚝선 채, 세균학자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그런 자세에는 어딘지 비장한 데가 있었다. 다가온 죽음의 의식이 그에게 어떤 위엄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고 서서 대담한 웃음을 띠고 추적해 오는 세균학자의 도착을 기다렸다. "무정부주의 만세! 자네 좀 늦게 왔어. 나는 그걸 마셔버렸단 말이야. 콜레라균은 내 몸 속에서 활동을 시작했어." 세균학자는 마차 속에서 안경 너머로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마셨다고? 그리고 당신이 무정부주의자라고? 역시 그렇구나. 이제 알았다." 그리고 세균학자는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릴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러자 무정부주의자는 이별을 고하는 극적인 몸짓을 남기고 으쓱대는 걸음거리로 워털루 다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독이 침입한 자기 몸이 행인들의 몸에 부딪치도록 일부러 휘적거리면서…… 세균학자는 그의 뒷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갑자기 모자와 신발 등을 가지고 그의 옆에 나타났어도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가지고 왔군, 미안해."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 이제 멀리 사라져 가는 무정부주의자의 모습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먼저 마차를 타고 가요." 그는 역시 시선을 무정부주의자 쪽으로 돌린 채 아내에게 말했다. 그의 아내는 아내대로 이런 자기 남편이야말로 정신이 돌았다고 믿어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마부에게 남편과 함께 집에까지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마차가 오던 방향으로 돌아섰다. 당당한 몸짓으로 걸어가는 무정부주의자의 검은 그림자는 (그것은 이미 멀어져 조그만 점으로 보였지만) 세균학자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세균학자는 그의 아내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신을 신으라고 했지? 당신 말대로 신어야지."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세균학자는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건 사실 중대한 일인데……" 그리고 계속하여 "알고 있지. 저 사내는 나를 만나려고 우리 집에 왔지만 사실은 무정부주의자였어. 여보 왜 이래?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 무정부주의자라고 해서 그렇게 새파랗게 질릴 건 없잖아! 그렇게 마음이 약하면 알맹이가 되는 그 뒷이야기는 못 하겠는걸…… 어쨌든 나는 아까 저 사나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 물론 무정부주의잔지 뭔지는 모르고 말이야. 그래서 당신한테도 말해서 알고 있는 그 박테리아의 새로운 배양물(培養物)말이야. 여러 가지 원숭이의 피부에 푸른 반점(班點) 만드는 그것을 아세아성(性) 콜레라 균이라고 설명해 주었던 거야. 그러자 그 사나이는 그것을 가지고 도망쳐 버렸어. 런던시의 수원지에 그걸 풀어버리기 위해서야. 그 녀석이 하려는 일이 성공했으면 이 문명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새파랗게 변색(變色) 되었을런지도 모르지. 그런데 녀석은 그것을 자기가 마셔 버렸단 말이야. 그 녀석이 그걸 마셔 버렸으니 앞으로 녀석의 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런지는 나도 정확한 짐작이 안가지만 당신도 알고 있듯이 그 박테리아의 실험으로 우리 집의 어린 고양이를 푸른 색깔로, 그리고 세 마리의 강아지를 푸른 색깔로 만들었잖나 말이야. 강아지의 경우는 푸른 반점(班點)이 되었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망아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푸른 말이 되었잖아…… 그 녀석에게는 안됐지만…… 그러나 저러나 나도 손해를 단단히 보았는 걸. 그 박테리아를 다시 배양해야 하게 됐으니 말이야. 시일과 비용이 또 들게 됐어. 어처구니 없이……"세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마차의 뒷문으로 무정부주의자가 간 워터루 다리 쪽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는 마차는 올 때와는 달리 보통으로 천천히 세균학자 부부를 태우고 달려갔다.   의식 교환기   이상한 소리   "마키타, 들리나, 마키타!" 그는 깜짝 놀라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누군가 부르고 있다. 여기는 대도시 뉴욕의 한 구석, 어떤 낡은 아파트의 한 방이다. "마키타! 들리면 대답을 해 주시오!" 그는 움찔했다. 머리 속에서 들리는 것이다. '나, 나는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아닙니다! 내가 당신의 마음에 대고 부르고 있는 거요!" "누구요, 다, 당신은?" 그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소리를 내서 말할 필요는 없소. 생각하기만 하면 되오 - 나는 더어스 아룬. 20만 년 후의 중앙 은하 제국(中央銀河帝國)의 인간이요." 마키타는 멍해졌다…… "20만 년 후의 미래? 무슨 소리요? 그런 세계가 있을게 뭐요.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소. 물질은 시간을 초월할 수 없소. 하지만 사고(思考)는 물질이 아니오. 그러므로 시간을 초월하여 얘기할 수 있는 거요. 기계의 힘을 빌리면……" "과연 그럴 듯하군. 그런데 내게 무슨 용무요?" "난 고고학자(考古學者)요. 지금 여러 가지 과거의 일을 조사하고 있는데, 꼭 한 번 과거를 이 눈으로 보고 싶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이 있소. 나하고 당신하고 일시적으로 몸을 교환해 보지 않겠소? 즉 내 마음은 당신의 몸에 들어가고, 당신의 마음은 내 몸에……" "뭐, 뭐라고? 농담 마시오. 그런 미친 짓을……" "조금도 위험할 것 없는 거요. 나하고 여기 있는 벨쿠엔이 공동으로 발명한 의식 교환기(意識交換機)는 절대 안전한 보증이 붙어 있소." "그,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시오. 마키타, 이렇게 좋은 찬스는 다시 없을 거요. 당신은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를 직접 볼 수 있는 거요. 인류는 지금 바야흐로 전 은하계 (銀河系)에 퍼져 수많은 나라를 세우고 있오. 우리 중앙 은하 제국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국가요." 마키타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런 세계가 있다면 가보아도 좋을 것 같다. 가령 무슨 착오가 있더라도 이야기꺼리 쯤은 되리라……. "좋소, 해 봅시다!" "고맙소. 그럼 마음이 변하기 전에 곧 시작합시다.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뭐요?" "이 실험이 탄로나면, 곤란한 일이 일어나오. 그러니까, 이 비밀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알았소. 약속하리다." "그럼 마음을 편히 갖고, 잡념(雜念)을 쫓아 버리시오. 알겠소? 그럼 스위치를 넣겠소!" 갑자기 마키타는 머리 속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침을 느꼈다. 날카로운 금속성(金屬聲)이 높아졌다. 다음 순간, 그의 의식은 깊은 암흑 속으로 끝없이 말려 들어갔다.   20만 년 후의 미래 세계로   문득 의식이 되돌아왔다. 눈을 뜨자, 복잡한 기계가 우선 눈에 들어왔다. 실험실인 듯한 방의 중앙에 놓인 침대 같은 것에 그는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들었군. 실험은 대성공이야."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내가 벨 쿠엔. 더어스의 선생이야. 자, 일어나서 자네 몸을 보게." 마키타는 깜짝 놀랐다. 둥글둥글하고 굳건했던 원래의 몸은 날씬하게 마른 몸으로 변하고, 아주 부드럽고 몸에 착 붙는 옷과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손발은 마치 자기의 것처럼 움직였다. 그는 희한한 듯이 실내를 둘러보고, 복잡한 기계를 가리켰다. "이게 그…… 의식 교환기입니까?" "맞았어. 나와 더어스의 공동 발명품이지." 늙은 과학자는 그 장치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이 실험은 아직 아무도 모르네. 앗바스까지도." "앗바스라니, 그게 누구입니까?" "중앙 은하 제국의 통치자인 임금이야. 그런데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지. 그게 더어스야!" "네? 그럼 내가 들어가 있는 이 몸은 왕자인가요?" "맞았어. 헌데, 더어스는 과학자야. 정치엔 전혀 흥미가 없단 말야." 마키타는 가슴이 뛰었다. "어떤 세상인지 빨리 보고 싶군요." "아, 아직 멀었어. 여기는 중앙 은하 제국의 끝에 있는 별인 하발라야의 산 속이야. 수도성(首都星)인 스룬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린단 말야. 그 전에 남이 수상히 여기지 않을 만큼의 지식을 알아 둬야겠어." 벨 쿠엔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도어를 걷어차며, 시커먼 옷을 입은 사나이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꽈당탕 뛰어 들어 왔다. "네, 네놈들은, 암흑 성운 연맹 (暗黑星雲聯盟)의……" 벨 쿠엔은 낯빛이 달라져 밖으로 달아났다, 그리고는 어디다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 때, 한 사나이의 무기에서 붉은 섬광이 뻗쳐 나갔다. 휘르르르! 리드미컬한 소리를 내며, 열선(熱線)은 벨쿠엔의 가슴을 꿰뚫었다. 노인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털씩 쓰러졌다. "무, 무슨 짓이냐!" 마키타는 감연히 사나이를 향해 덤벼들었다. "더어스 왕자, 쓸데 없는 반항은 그만 두시죠." 사나이들은 열선총을 그에게 정확히 겨냥하고 둘레를 에워쌌다. "우리는 암흑 성운 연맹의 인간들입니다. 당신은 쇼르․칸 장관(長官)한테로 모셔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싫다면?" "억지로라도 모셔 갈 뿐이죠." 무엇인지 잘은 알 순 없지만, 이 암흑 성운 연맹인가 하는 녀석들은 앗바스를 유괴(誘拐)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중앙 은하 제국과는 적대 관계(敵對關係)에 있는 모양이다. "그, 그렇지만 난 더어스가……" 그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진짜 더어스와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약속을 어길 수 없다. 그는 재촉을 받고 비밀 연구소의 뒤쪽 산봉우리에 에워싸인 우주선 발착장(發着場)에 나왔다. 그 때, 문득 머리 위에서 폭음이 들려 왔다. 푸른 하늘에 반짝 세 개의 흰 점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왔다. 은빛 우주선이다! "앗, 제국의 패트롤 정(艇)에게 발견당했다!" 땅 위에 내려와 있던 암흑 연맹의 검은 우주선이 쾅!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 그 폭풍에 휩쓸려 쓰러졌던 마키타가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때는, 이미 전투는 끝나 있었다.   미소녀 리안나   "이 중대한 시기에 또 쓸데없는 연구에 빠져 있었단 말이냐? 국민에 대한 의무를 잊진 않았겠지!" 국왕 앗바스는 불쾌한 표정으로 마키타를 맞이했다. 여기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항성(恒星) 카노오브스를 에워싸고 도는 행성(行星) 스루운이 중앙 은하 제국의 수도성(首都星)이다. 마키타는 우주 패트롤 정에 구조되어 초광속(超光速)으로 날아 사흘만에 이 스루운에 도착한 것이다. 보는 것, 듣는 것이 모두 놀라운 사실들이었으나, 그는 그 놀라움을 끝까지 숨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행히 아무도 아직은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나, 지금의 그는 한시라도 빨리, 원래의 자기 몸으로 20세기로 돌아가고 싶었다. "폐하(陛下), 그렇게 너무 화를 내시지 마십시오." 뚱뚱한 몸집에 훈장을 잔뜩 늘어뜨린 우주군 총사령관 코르브로가 옆에서 달랬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더어스를 빼앗기고 '파멸(破滅) 머신'의 비밀을 쇼르 칸에게 탐지 당할 뻔했단 말이야." ''파멸 머신'이란 무슨 소리일까?' 그러나 마키타는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더어스라면 알고 있는 것인 모양이다. "게다가 리안나의 일도 있다. 포말하우트 왕국(王國)과 손을 잡지 못하면 은하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단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은하(銀河) 정복을 꾀하는 암흑 연맹(暗黑聯盟)이 바라는 대로된단 말야." '리안나?' 아직도 마키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때였다. "더어스 왕자님, 안녕하세요?"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날씬한 몸매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마키타는 빨려 들어가듯이 그 눈을 지켜보았다. 앗바스의 얼굴이 환하게 풀어졌다. "오, 리안나!" '아, 그렇구나. 리안나란 이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구나. 혹시 더어스의 아내인지도……." "뜰이라도 산보하시지 않겠어요?" 그가 너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리안나는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나무 인형처럼 잠자코 뒤를 따랐다. "리안나, 당신은 정말 아름답군." "어마, 더어스, 말씀이 느셨네요. 요전에는 그렇게 냉정하시더니……. 오늘밤의 당신은 마치 다른 사람같이 상냥하군요." "아, 그야 당연하지 않아. 부부 사이니까." 리안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마, 무슨 말씀이세요. 우린 이제 막 약혼한 사이인데……. 그것도 당신은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정략 결혼(政略結婚)인 걸요." 마키타는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아, 미안해. 난 정신이 좀 어떻게 된 모양이야. 그렇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니 그건 거짓말이야. 난 당신이…… 좋아!"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그를 지켜보았다. 마키타는 그 이상 질문을 받지 않도록 리안나를 끌어안고 빨갛게 물든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스파이 혐의   두 사람이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왕궁(王宮) 안이 소란해졌다. "더어스 왕자님! 폐하의 명령으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스파이 혐의입니다!" "뭐, 뭐라고!" 마키타는 뭐가 뭔지 멍해졌다. 리안나가 그를 감싸듯하며 소리쳤다. "더어스가 스파이라니, 그런……" "리안나, 안됐지만 증거가 있으니 할 수가 없구나!" 앗바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손에 얄팍하고 조그만 금속판(金屬板)을 들고 있다. "이 통신판이 증거다! 조금 전 더어스의 방에 숨어들어 가려던 수상한 사나이를 사살(射殺)했더니, 이걸 가지고 있었단 말야." 그는 마키타를 노려보았다. "아, 하필이면 내 아들이 배반자라니! 자, 잘 들어봐라, 이걸 해독기(解得器)에 걸 테니까……." 널찍한 방으로 끌려 간 마키타 앞에서 그 금속판은, 테이블 위에 놓여진 조그만 기계에 끼워졌다. 문득 목쉰 소리가 나왔다. "쇼르 칸으로부터 더어스 왕자에게! 유괴(誘拐)로 가장하여 당신을 암흑 성운(暗黑星雲)으로 초대하는 작전은 불행히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곧 다음 수단을 강구했으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암흑 성운은 한시라도 빨리 당신으로부터 『파멸 머신』의 비밀을 들어 서로 힘을 합쳐서 은하계 정복을 달성할 날이 오길 고대하겠습니다. 그러면 부디 이상한 혐의를 받는 행동은 삼가도록 해 주십시오……." 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마키타는 외쳤다. "거, 거짓말이다! 그건 모략(謀略)입니다!" "닥쳐라!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변명이냐, 이 비열한 놈아! 네 처벌은 추후 결정한다. 위병(衛兵), 더어스를 옥에 가둬라!" 앗바스는 고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뒤로 돌아섰다. 위병에게 끌려가는 마키타를 코르브로 총사령관과 리안나가 새파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탈 출   깊은 밤, 죽은 듯한 고요. 마키타는 어두운 지하 감옥 속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차라리 약속을 어기고 진상을 모조리 자백해 버릴까? 그러면……. 아니다. 이제 그런다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살 것이다.' 그 때, 문득 쇠문의 자물쇠가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검은 그림자 둘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더어스, 말할 게 있어요……" "리안나! 어떻게 여길?" "이 코르브로 총 사령관이 당신을 살려 주신대요." "뭐라고?" 총 사령관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왕자님의 결백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폐하는 몹시 노하고 계십니다. 잘못했다 간 내일에라도 왕자님을 배반자로서 처형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당장은 우선 이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왕자님의 결백은 꼭 우리들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 그렇지만 어디로 피한단 말이오?" "우리 별, 포말하우트로 가요. 아버지가 지켜 주실 거예요. 앗바스 왕도 섣불리 손 댈 수는 없을 거예요. 두 나라 사이의 평화를 깨뜨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자 그럼 한시라도 바삐 나가시죠! 부하를 시켜 벌써 배 (우주선)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함 정   "리안나, 당신은 어째서 같이 왔지? 공범자(共犯者)로 몰릴 텐데……." 우주 군함 마르카브 호(號)는, 지금 캄캄한 우주를 초광속(超光速)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여기는 그 선실(船室) - 마키타는 리안나와 단 둘이 있었다. "이게 그 대답이에요" 리안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자, 조용히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거지, 리안나!" "네, 지구에서 돌아오신 뒤부터의 당신이 무척 좋아졌어요." 마키타의 가슴이 갑자기 드높이 뛰었다. "그럼, 당신이 사랑하는 건, 이전의 더어스가 아니라 지금의 더어스란 말이지!" 리안나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렇다면 리안나의 사랑을 얻은 것은 나다. 마키타다!' 그는 불현듯이 그 비밀을, 몸은 더어스지만 마음은 마키타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지만, 나는 더어스와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사나이의 약속은 어길 수 없다. 그리고 막상 고백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나는 예전의 시대로, 20만 년이나 과거로 돌아 갈 운명이 아닌가!" 그는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면서 처음으로 사랑한 오직 한 사람의 여성을 굳게굳게 포옹했다. 그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창 밖으로 눈길을 던진 리안나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이 배의 진로(進路)가 이상해요. 포말하우트성(聖)이 아니에요." "뭐라고, 함장은 뭘하구 있는 거야." 마키타는 급히 함장을 불렀다. 함장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탄로가 났다면 할 수 없지. 당신들의 추측이 맞았소. 이 배는 마수(馬首) 암흑 성운, 즉 암흑 성운 연맹의 본거지로 향하고 있소. 너무 나쁘게 생각 마시오." "뭐라고? 그럼 네 놈은……" "그렇소, 쇼르 칸의 일원(一員)이오. 저 코르브로 총사령관도……" "으음, 그 충성스러운 것 같던 코르브로 놈이!" 그는 함장을 향해 돌진했다. 함장은 재빨리 끝이 뾰족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앗, 위험해요. 마취 (痲醉) 피스톨이에요." 리안나의 비명이 들린 다음 순간, 피스톨은 마키타를 향해 발사되었다. 총을 맞자 그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폭로된 정체   "잘 오셨습니다. 더어스 왕자." 눈을 뜬 순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굵직하고 목쉰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눈썹이 굵고 대머리가 까진 사나이가 마키타를 들여다보고 있다. "네 놈은…… 쇼르 칸이구나!" "맞았오. 당신을 일부러 여기까지 초대한 이유는 물론 아시겠지요" "모르겠는데. 그보다도 리안나는?" 마키타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실험실 같은 장소에서 그는 침대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부인께서는 별실에서 잘 쉬시고 계시니 안심하셔도 좋을 거요. 그런데 정말 비밀을 모르시오?" "'파멸 머신'……의 비밀 말이로군." "그렇소." "사실 나는 '파멸 머신'의 비밀은 전혀 모른다." 쇼르․칸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안 가르쳐 주겠단 말씀이로군." "안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거야, 안됐지만……" "좋소, 과연 왕자답군. 그럼 각오는 단단히 되어 있으시겠지?" "각오? 하하, 고문 말이로군." "그런 원시적인 짓은 안하오. 이거요." 쇼르 칸은 곁에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두뇌 수색기(頭腦搜索機). 즉 머리 속의 지식을 싫건 좋건 간에 끄집어 내는 기계요. 다만 나는 그다지 쓰고 싶지가 않소. 이 기계에 걸리면 심중 팔구는 바보가 돼 버린단 말씀이야." 마키타는 훅!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머리 속을 예리한 아픔이 꿰뚫고, 그는 암흑에 휩싸였다. 문득 정신이 들자, 숙취(宿醉) 같은 두통과 구역질이 몰려 왔다. "기분이 어때, 존 마키타!" 쇼르 칸이 웃고 있다. 마키타는 깜짝 놀라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알고 있군?" "두뇌 수색기를 중단한 것은 그 때문이지. 그렇지만 않으면 지금쯤 자네는 바보가 되어 있었겠지…… 그렇더라도 무척 놀랬는 걸." "그러니까 '파멸 머신'의 비밀 따윈 모른다고 했지 않소. 그런데, 그 기계는 대체 뭐요?" "상상할 수도 없이 무서운 기계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이 은하계가 마젤란 성운(星雲)의 생물에게 침략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더어스네 아룬 일족(一族)의 조상이 '파멸 머신'을 발견하여 마젤란 일당을 격퇴했네. 그런데 그 기계가 너무나 무서운 무기였으므로 조상들은 그 비밀을 공개하지 않고 대체로 자기네들 일족에게만 전했단 말야. 그렇기 때문에 중앙 은하 제국에 대항하는 자가 없는 거야. 더어스, 아니 마키타, 자 빨리 지구로 돌아가서 진짜 더어스를 불러내란 말야. "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지구의 주변에는 은하 제국의 우주군이 우글거리고 있지. 그런 곳에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간 당장에 의심을 받을 거구…… 그렇지 유령선(幽靈船)을 쓰자!" "유령선?" "에너지를 너무 많이 먹는 게 흠이지만, 배 둘레에 특수 자력(磁力)을 쳐서 레이더나 빛이 통하지 못하게 하는 배지, 말하자면 '투명 망토'를 입는 셈이야." 마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면 쉽사리 지구에 갈 수가 있겠군…… 그런데 리안나는 내가 함께 데리고 가겠소." 쇼르 칸은 한 순간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좋아, 만일의 경우 인질(人質)로 쓰지." 앞으로 이틀 후면 지구에 도착할 만한 거리까지 왔을 때. 갑자기 부저가 울리고, 창 밖의 진공(眞空)이 사라졌다. 유령선이 '투명 망토'를 입으면 안에서 밖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적이 가까이 왔다. 자, 선실(船室)로 들어가시오." 마침 그 때,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복도를 걷고 있던 마키타와 리안나는 감시병의 열선총(熱線銃)으로 떠밀렸다. "선실로 들어갈 때, 기절한 척하고 쓰러지는 시늉을 해요." 마키타는 빠른 말로 리안나에게 속삭였다. 리안나는 잠자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문 쪽에서 리안나는 비틀거렸다. "더어스, 나, 기분이 이상해요……." "앗, 정신 차려, 리안나! 이봐, 좀 도와줘." 리안나를 부축하면서 그는 감시병에게 부탁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빌렸다. 그 순간, 마키타는 감시병에게 덤벼들었다. 총을 쳐서 떨어뜨리자마자, 바른 편 주먹에 전 체중을 실어 명치끝을 후려쳤다. 감시병은 축 늘어져 버렸다. 마키타는 재빨리 감시병의 검은 제복과 헬멧을 벗겨 자기가 입었다. "이쯤이면 그럭저럭 적의 눈을 속일 수 있겠지, 리안나, 당신은 여기 계시오!" 그는 리안나에게 그렇게 명령하자, 복도를 달렸다. 에너지 발생 장치가 밑에 있는 것은 전부터 짐작이 되었었다. 그는 급히 트랙을 내려 추진 장치실로 뛰어 들어갔다. 감시병이 몇 사람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둘러보니 구석에 방이 또 하나 있었다. '투명 망토' 에너지 발생 장치실은 그 곳인 모양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들켰다. 마키타는 잠자코 열선총(熱線銃)의 버튼을 눌렀다. 감시병은 뒤로 나가떨어지고 그 저쪽의 기계류에 섬광이 닿았다. 기계류가 무시무시한 불꽃을 뿜으며 폭발함과 동시에 유령선의 '투명 망토'는 깨어졌다.     국왕 암살   모습을 드러낸 유령선은, 제국 우주 함대에 발각되어 치열한 공격을 받았다. '투명 망토'를 잃어버린 유령선은 무장한 함대의 적이 못되었다. 항복한 유령선의 승무원과 마키타들은 제국 우주 함대의 기함(旗艦)으로 연행되었다. "아, 더어스 왕자님!" 유령선 선장의 뒤에서 나타난 마키타와 리안나를 보고 코르브로 총 사령관은 흠칫 놀라서 일어났다. 그는 제국 우주 함대의 층 지휘관으로서 이 기함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흠, 이 배반자야, 악운(惡運)이 다해서 붙잡혔구나." 코르브로는 태연한 태도를 가장하고 말했다. "배반자? 그건 이 편에서 할 소리야, 네놈이야말로 제국(帝國)을 배반하는……" 마키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코르브로는 곁에 있는 사나이를 돌아다보고 소리친다. "마르랑 함장(艦長), 이 배반자와 그 공범자인 저 여자를 구태여 스룬까지 보낼 필요는 없다. 곧 사형시켜 버려라." "그, 그러나 우주법 (宇宙法)에 의하면 어떠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아,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지, 상관없어. 내 명령이야." 마키타는 코르브로를 노려보면서, "마르랑 함장, 코르브로가 왜 나를 사형시키려는지 알겠지? 그것은 자기 자신이야말로 배반자이므로……" "시끄럽다. 빨리 사형시켜라!" "코르브로, 너는 여기 있는 유령선의 선장도 나와 함께 사형시킬 셈이냐?" 코르브로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 그렇다. 그 놈도 사형이다!" 선장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떠들기 시작했다. "코르브로, 네 놈은 자기편까지도 죽일 작정이냐, 네놈도 암흑 연맹의 인간이면서……" 코르브로는 새파랗게 질렸다. "멋지게 함정에 빠졌구나. 자, 그 배반자를 체포하라!" 마키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함장의 부하들은 코르브로에게 덤벼들었다. 코르브로는 끌려가면서 히스테릭한 웃음과 함께 씹어 뱉듯이 한마디했다. "내 운명도 이것으로 다 된 모양이다. 하지만 앗바스의 생명도 지금쯤은 위태로울걸."   파멸 머신은 어디에   스룬으로 달러간 마키타와 리안나는 그러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국왕은 최후의 순간에서 생명을 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나쁜 뉴스가 들어왔다. 암흑 성운 연맹이 마침내 중앙 은하 제국에서 선전 포고(宣戰布告)를 한 것이다. 쇼르 칸은 중앙 은하 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게 다음과 같이 통고했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적은 오직 한 나라, 중앙 은하 제국뿐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 은하계를 마음대로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문명은 다한 것이다. 우리 병력은 적보다 훨씬 우세하다. 그들이 믿는 유일한 무기 '파멸 머신'도 이미 그들을 구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을 쓸 줄 아는 인간은 이미 없기 때문이다. 앗바스는 중상(重傷)을 입고, 더어스는 그 사용법을 모르는 것이다. 왜냐 하면, 더어스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마키타는 마침내 궁지에 몰렸다. 동요하는 우방(友邦)을 가라앉히고, 적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파멸 머신'을 써 보여야만 한다. 그러나 지구로 돌아가서 진짜 더어스와 교환할 시간은 없다. 최후의 희망은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앗바스로부터 어떻게 해서라도 그 사용법을 들어야 하는 것뿐이다. 그는 의식이 몽롱한 앗바스를 필사적으로 흔들었다. "아버지, '파멸 머신'에 대해 뭐든지 좋으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더어스, 너는 알고 있을 텐데……" "네, 그렇지만 쇼르 칸의 두뇌 수사기(頭腦搜査機)에 걸려서 거의 기억력이 없습니다!" "…… 그렇구나…… 최하층의 지하도로 가라…… 너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어릴 적부터…… 네 몸을 조절해 왔다. 사용법은 가보면 안다…… 빨리 가 보아라." 아직도 잘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하층의 지하도로 달려갔다. 입구로부터 뛰어든 순간, 파란 광선이 확 내리 비쳤다. 뒤에서 따라온 호위병이 외쳤다. "저희는 여기서부터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희에겐 그 광선은 살인 광선이나 마찬가지여서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 몸의 조절이란 이걸 말하는 것이었구나. 더어스의 일족(一族)만이 어릴 적부터 이 광선에 면역되도록 조절을 받는 거구나!" 마키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달렸다. 막다른 곳에 도어가 있었다. 도어를 열자, 눈앞에 거대한 렌즈를 조립한 기계가 있었다. "이거구나. 이것이 '파멸 머신'이다!" 머리 위에 금속판이 붙어 있고, 그 곳에 사용법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마침내 그것은 일어났다   '파멸 머신'의 투시(透視) 스크린이 암흑 성운 연맹의 대 함대를 중앙에 포착했다. 마키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파멸 머신'의 스위치와 버튼을 차례로 조절해 간다. 여섯 개의 계기(計器)의 빨간 바늘이 스크린의 중앙을 가리킨 순간, 메인 버튼을 누른다. 그것으로 일은 끝나는 것이다. 사용법은 무척 간단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마키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절대로 잘못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은하계 전체의 운명을 쥐고 있는 그는 이 장치가 어떤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 빨간 여섯 개의 바늘이 천천히 스크린의 중앙을 가리키는 위치로 다가간다. 다음 순간 중앙을 똑바로 가리켰다. 파란 램프가 켜졌다. "발사!" 마키타는 메인 버튼에 대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꽉 눌렀다. 스크린 위에 비친 대 함대의 광점군(光點群)이 어렴풋이 흔들린 것 같았다. 그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틀렸다. 실패다. 이젠 틀렸다……" 갑자기 대 함대의 광점군 복판에 검은 점이 쑥 나타났다. 점은 맥박치면서 차츰 확대되어 간다. "아앗!" 마키타의 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이건 정말 가공할 기계로구나! 이번에는 공간이 줄어든다!" 대 함대는, 공간 그 자체를 소멸해 버리는 '파멸 머신'에 의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다.   육체 환원기   "더어스, 들리나, 더어스!" 마키타는 의식 교환기(意識交換機)의 중앙에 누워 열심히 불렀다. 암흑 성운 연맹은 무너지고 은하계에 다시 평화가 돌아온지 벌써 닷새째. 그는 지금 사랑하는 리안나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 이 지구의 히말라야 산 속으로 돌아왔다. 그는 끝내 리안나에게 이 비밀을 고백하지 않았다. 고백하면 도리어 마음의 상처를 깊게 할 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잠자코 리안나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더어스, 들리면, 대답을 해 주시오!" "오, 마키타, 기다렸오. 대체 어찌된 일이오!" 어렴풋이 더어스의 대답이 들려 왔다. "미안하오. 여태까지 아무래도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오." 그는 간단히 여태까지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그렇군, 당신은 약속을 지켜 주었군." "그리고 은하계까지 구해 주었군! 고맙소!" "자, 준비는 다 되었소?" "음, 좋소. 자……" "그럼 스위치를 넣겠오." 머리 속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더니 날카로운 금속음이 차츰 높아졌다. 다음 순간, 마키타는 암흑 속으로 어디까지나 멀어져 갔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마키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다시 그 눈익은 방의 눈익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운 뉴욕의 낡은 아파트다. 그는 침대에서 나오자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기 있는 얼굴은 존 마키타였다. 더어스의 마르고 흰 얼굴이 아니라, 길고 네모진 얼굴이었다. 그는 창가에 기대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리온 성좌(星座)가 분명히 보였다. 저 성좌의 어느 곳엔가 마수(馬首) 암흑 성운이 있는 것이다. 혹성(惑星) 스룬이 있는 카노오프스는 보이지 않았다. 지평선 밑에 있는 것이다. 눈물이 흐릿하게 밤하늘을 가렸다. "리안나! 리안나!"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심연(深淵)이 그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를 영원히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그는 그 추억만을 가슴에 간직하고 영원히 덧없는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얼마 후, 얕은 잠에 빠졌다. "마키타, 존 마키타!" 그는 곧 알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리안나!" "아, 마키타. 저예요." "하지만 어떻게 나를……" "더어스가 가르쳐 주었어요. 그래서 분명히 알았어요. 제가 정말 사랑하는 것은 마키타, 당신이라는 걸." "리안나, 고마워. 그럼 적어도 작별 인사만은 할 수 있겠군." "아니, 아니에요. 마키타, 기다려 줘요!" 리안나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더어스는 마음이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면, 육체도 초월할 수가 있을 거래요. 그는 지금 육체 환원기 연구를 시작했어요. 연구가 성공하면, 마키타, 저한데 와 주시겠어요?" 희망의 불꽃이 가슴에 확 피어올랐다. "가지, 가구 말구!" "그럼 기다려 줘요. 마키타. 더어스는 꼭 성공할 거예요. 그럼 그 때까지 안녕!" 그는 가슴이 철렁하여 침대에서 뛰어 일어났다. "지금 그것은 꿈이었을까. 아니, 아니다!" 그는 창가로 달려가 깜박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주 여행   한동수 교수의 타임머신   내가 아무리 놀랬다고 해도 큐크롭스 성좌(星座)의 한 혹성, 아마울로피아에 갔을 때처럼 놀란 적은 없다. 거기서 경험한 갖가지 사건은 모두가 한동수 교수의 덕택이다. 한동수 교수는 항상 연구에만 골몰하는 과학자이며 발명광(發明狂)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박사는 불쾌한 생각을 씻어 없애는 특수 세제(洗劑), 구름을 마음대로 물들이거나 적당한 모양으로 굳히는 약품 등을 만들어 냈다. 또한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는 개구쟁이들의 낭비되는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장치도 발명했다. 핸들, 손잡이, 도르래 따위를 집안의 여기저기에 장치해 놓으면 아이들이 놀다가도 심심하면 이러한 장치에 손을 대고 누르거나 잡아당기게 된다. 그러면 어느 새 빨래가 되고 잔디에 물이 뿌려지고 발전(發電)이 되기도 한다. 나는 며칠 전 한 교수의 최근의 발명품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무쇠로 만든 난로였다. 한 교수는 이것이 자기의 발명품 중에서 제일가는 자랑거리라고 뽐냈다. "우병진 박사, 이것으로 인류의 오랜 꿈이 실현되게 되었오. 나는 타임머신을 드디어 만들어 냈단 말이오. 즉 시간을 자유자재로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소. 내 계산이 틀림없다면 이 타임머신 속에서는 1분이 2개월 정도로 연장될 수가 있소. 어디 의심스러우면 한 번 시험삼아 들어가 보시지." 나는 무슨 일이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오기가 있다. "그렇게 해 봅시다." 나는 즉석에서 승낙하고 그 기계 속으로 들어갔다. 한 교수는 문을 확 닫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콧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문이 닫히면서 난로 속에 쌓였던 먼지와 검정이 휘날렸기 때문이다. "에에치!" 재채기가 한 번 크게 나왔다. 그 순간 스위치가 들어온 모양이다. 시간이 마이너스의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의 재채기는 밤과 낮이 다섯 번 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5주야가 지나 난로의 문이 겨우 열렸을 때, 나는 늘어진 문어처럼 축 처져서 뻗어 있었다. 한 교수는 이상스럽다는 듯이 한참 나를 들여다보다가 내력을 알고서는 껄껄껄 웃었다. "허허참, 내 시계는 이제 겨우 4초가 지났는데, 그렇다면 내 타임머신이 쓸 만한 물건이란 말이군." 나는 어이가 없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 교수는 나의 대답이 시원치 않자 약간 실망한 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엄청난 기계를 나에게 선뜻 내던져 주었다. 나는 몹시 지쳤기에 이 훌륭한 발명품의 두 번째 실험, 즉 시간을 플러스 쪽으로 돌리는 테스트는 우선 사양키로 하고 집으로 옮겨다 놓기만 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타임머신의 사용법도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고 해서 헛간 한 구석에 내버려두었다. 타임머신은 한 반 년쯤 거기서 낮잠만 자고 있었다.   도둑의 종족   그 즈음 우병진 교수는 유명한 ‘우주 동물학’의 제 8 권을 집필 중에 있었는데, 아마울로피아에 사는 생물에 특히 관심이 있다. 한 교수는 자기의 위대한 발명품인 타임머신의 실험에는 이 혹성의 생물이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한 교수의 여러 가지 플랜에 나는 귀가 솔깃했다. 연료와 식량을 충분히 준비하고 곧 떠났다. 아마울로피아까지 여행하는 데는 적어도 30년이 더 걸릴 것이므로 어정어정 할 수는 없었다. 그 동안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을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우선 은하(銀河)의 중심 구역에서 만난 비곤트 종족에 대해서는 부득이 말해야 하겠다. 그들은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족이다. 원래는 자기네 소유의 행성이 있었으나 너무나 욕심이 많은 종족이라 땅을 한없이 파헤쳐 모든 지하 자원을 다 다른 혹성의 세계로 수출해 버리고 자기들의 혹성을 벌집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속속까지 다 파낸 그들의 혹성에는 발을 디딜 곳도 없이 커다란 구멍만 남게 되었고, 제 집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은 아이들이 하루에도 몇 천 명씩 생겼으며, 결국 자기들의 혹성을 떠나 우주를 방랑하기 시작했다. 비곤트 종족이 밀어닥치면 어떤 혹성에서나 야단법석이 일어나며, 그들이 떠난 뒤에는 폐허만 남는다. 이를테면 그들이 스치고 간 다음에는 공기의 일부가 부족해지거나, 강물이 갑자기 말라 바닥이 드러나거나, 혹은 섬이 몇 개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한다. 아르테눌리아라는 혹성에서는 그들이 커다란 대륙 하나를 통째로 훔쳤다. 다행히 얼음덩이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이었으므로 아르테눌리아 행성으로서는 큰 손해는 입지 않았지만, 그들이 그 훔친 대륙을 애써 개척하느라고 법석을 떠는 것이 꼴 사나왔다. 나는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그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정착지를 마련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나는 잠시 여행을 중지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요행히 나는 아직 쓸모 있어 보이는 위성 하나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나는 즉시 그 위성을 손질하여 행성으로 승격시키고, 비곤트족이 살도록 했다. 물론 거기에는 공기가 없었다. 나는 공동 투자를 제의했다. 이웃 행성에서 쾌히 승낙을 했기에 공기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방랑족과 헤어졌다. 아마울로피아까지는 이제 6킨틸리온km 밖에 남지 않았다. (1킨틸리온은 Ix168이다. ) 나는 단숨에 날았다. 목적지 아마울로피아가 보이자 천천히 착륙 준비를 했다.   타임 머신의 위력   나는 브레이크의 단추를 눌렀다. 그러나 기계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로켓은 아마울로피아의 지표를 향해 총알처럼 내려갔다. 그제야 자세히 살펴보니 브레이크 장치가 송두리째 보이지 않았다. 손버릇 나쁜 그 비곤트족의 소행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의 로켓이 공기의 마찰로 인해 점점 뜨거워져서 금방 불길에 쌓일 것만 같았다. 앞으로 1분 이내에 나는 통닭구이처럼 익어져 숯검정처럼 타 버릴 것이다. 순간 나는 타임 머신이란 위대한 기계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스위치를 눌렀다. 착륙하는 데 3시간 이상을 끌면서 내가 무사히 이 아마울로피아 혹성에 착륙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민첩한 판단의 덕택이었다.   내가 탄 로켓이 내린 곳은 넓다란 빈터였으나 사방은 청백색의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반투명의 나무 사이로 에머럴드 빛깔의 기묘한 생물들이 부산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기괴한 생물들은 나를 보자 숲 속으로 도망쳐 숨어 버렸다. 살갗의 색이 고운 옥색으로 반짝이는 것만 다를 뿐 사람의 모습과 꼭 닮았다. 그들에 대해서는 이미 한 교수에게서 예비 지식을 얻은 바 있으나,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우주 소백과 사전을 꺼내 보았다. 『이 혹성의 주민은 미크로세팔이라고 하는, 사람과 비슷한 생물의 하나로 지능이 아주 낮음. 그들과 의사를 통해 보려고 해도 성공한 예가 없음』 과연 소백과 사전의 설명은 틀림이 없었다. 미크로세팔은 네 발로 기어다니지만, 없을 때는 쪼그리는 것이 별났다. 내가 가까이 가니 에머럴드 빛깔의 눈을 크게 뜨고 왁자지껄 떠들어댄다. 그러나 행동은 무척 얌전한 편이다. 이틀 동안 나는 청백색의 숲과, 그 숲 너머 넓은 평야를 탐사하고 돌아왔다. 나는 문득 타임 머신의 생각이 나서 몇 시간 동안 가동시켰다가 내일 그 효과를 보기로 했다. 그래서 무거운 타임 머신을 로켓에서 꺼내 우거진 숲 속에 감춰 두고 플러스 쪽으로 핸들을 돌려놓았다.   누군가가 몹시 흔들어서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미크로세팔들이 둘러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몇 시간 전만 해도 네 다리로 기어다녔는데, 지금 내 주위의 미크로세팔들은 두 다리로 서서 무엇이라 지껄여 대며, 신기하다는 듯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팔을 빼려다가 하마터면 어깨가 빠질 뻔했다. 그들 중에서 제일 몸집이 큰 꺽다리 하나가 내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하더니 이빨의 수를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은 신기한 동물을 발견했다는 듯이 나를 요리조리 돌려 가며 들여다보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거인의 손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으나, 결국 바깥으로 끌려나와 로켓의 꽁무니에 단단히 묶여 버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미크로세팔들은 로켓에서 모든 물건과 장치들을 죄다 들어내고 있었다. 너무 커서 꺼내기 어려운 것은 조각조각으로 깨뜨려 운반하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이제 지구로 돌아 갈 것도 단념하고, 일생을 아마울로피아의 흙에 외로이 묻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고 한동수 교수가 원망스러웠다. 이 때, 난데없이 돌맹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로켓에도, 서성거리는 미크로세팔들에게도, 그리고 묶여 있는 내 머리에도 사정없이 명중했다. 나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 영문을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한참 동안 치고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미크로세팔들이 뿔뿔이 도망치고 다른 미크로세팔들이 몰려와서 나를 풀어 주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서는 나를 어깨에 메고 숲 속 깊이 들어갔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이르러 행렬은 멈춘다. 통나무로 만든 오두막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나를 그 오두막에 밀어 넣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면서 꽃과 과일을 나에게 바쳤다. 그리고선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부락민의 신(神)이 되었다. 무당이 와서 나의 얼굴빛을 보고 점을 치기 시작했다. 점괘가 나쁘면 향을 피웠다. 나는 매일 원치 않은 한증을 몇 차례씩 하게 되었다. 3, 4일이 지나자 처음에 나를 사로잡았던 미크로세팔의 일당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시 쳐들어 왔다. 그들의 두목은 나의 이빨을 헤아리던 그 거인이었다. 싸움이 치열하게 계속되는 동안 나는 이쪽 편에서 저쪽 편의 손으로 몇 차례씩이나 내왕을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神)이 되었다가 금새 노예가 되기도 한다. 전쟁은 공격 부대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그들의 노획물이 되어 마을로 끌려갔다. 높다란 장대 꼭대기에 매달고 힘 센 놈이 어깨에 메었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이 장대를 매고 행진했다. 나를 깃발의 대용품으로 삼은 것이다. 편한 노릇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구박을 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어느 정도 미크로세팔의 말에 익숙해지자 나는 두목에게 그들이 이렇게 빨리 진화(進化)한 것이 다 나의 덕택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좀처럼 타임 머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설명을 알아들을 때쯤 되어서 아깝게도 두목은 여자 무당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즉 미크로세팔의 세계에도 무혈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여자 무당은 지금까지 원수로 지내 오던 두 미크로세팔을 통합했다. 경축 잔치 때 나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나없나를 일일이 음식을 먹어서 확인하는 고역을 맡았다. 그 때 무당이 나를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저런 미남자가 우리 부락에도 있었던가" 무당은 나를 억지로 자기 남편으로 삼았다. 나는 기회는 이 때다 하고, 미크로세팔에 대한 나의 위대한 공적을 이 여자 무당에게도 설명했으나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집안 싸움이 벌어졌다. 나의 아내, 즉 미크로세팔의 두목은 살해되고, 나는 간신히 그들의 소굴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는 타임머신을 감춰둔 숲으로 달려가서 핸들을 다시 돌리려고 했으나, 미크로세팔들이 좀더 민주적인 제도와 발달된 문명을 가지게 될 때까지 한번 기다려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숲에서 나무 뿌리를 뽑아 먹으면서, 며칠을 지냈다. 밤이 되면 마을로 살짝 내려가서 그 마을이 어느 사이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마을에 사는 미크로세팔들은 농사에 힘쓰지만 도시의 미크로세팔들은 마을을 습격하며 재물을 빼앗고 저항하는 마을 사람을 내쫓았다. 이러는 북새통에서도 상업이 발달하고 종교가 생겼다. 그런 탓인지 나의 로켓이 어느 사이에 도시의 광장으로 옮겨져 있었다. 즉 그들은 로켓을 새로운 신(神)으로 모시고 있었다. 이윽고, 이 도시의 농민의 일단이 여러 번 습격하여 폐허로 만들었으나, 그 때마다 도시는 금방 재건되었다. 이러한 난리를 평정한 사람이 사르세파노스 왕이다. 왕은 마을을 불태워 없애고 농민을 추방했다. 나는 갈 데가 없어져 도시로 방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전에 나의 아내였던 무당의 시녀들이 나를 알아보고 나를 왕의 안마사로 취직시켜 주었다. 나는 우선 밥벌이가 되어 안심이었다. 나는 정성껏 왕을 모셨다. 왕은 나를 특별히 여겨 벼슬을 하사하였다. 즉 왕실의 전속 사형 집행인이란 어마어마한 자리였다. 왕의 총애는 감사했지만 이런 벼슬을 맡기니 난처했다. 틈을 엿보다가 타임 머신이 있는 숲으로 도망쳐 나왔다. 시간을 더욱 빠른 방향으로 돌렸다. 하루 속히 미크로세팔의 나라가 질서 있는 문명한 세계로 바꿔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그날 밤으로 왕이 과식으로 배탈이 나서 죽고 왕자가 왕위에 올랐다. 나는 타임머신의 속도를 가장 빠른 쪽으로 당기려고 핸들을 획 돌렸다. 그랬더니 '우지직' 나사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2, 3일이 지나니 희한한 일들이 생겼다.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동 묘지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났다. 노인들이 점점 젊어지고 아이들은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추었다. 왕의 장례식 행렬이 뒷걸음질치며 물러난 뒤 사흘만에 왕은 관 속에서 기어 나와 먼지를 털고 있었다. 타임 머신이 고장나서 시간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거북스러운 것은 내 자신의 몸이 자꾸 젊어져 가는 것이다. 여하한 나의 로켓이 신주처럼 숭배되고, 내가 그들의 신(神)처럼 모셔질 때를 기다려 그 위세를 몰아 로켓으로 숨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시간의 속도가 너무나 빠른 것이 오히려 걱정이었다. 만일 시기를 놓치면 나는 영영 지구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나는 매일매일 나무에 내 키의 변화를 표시해 보았다. 상당한 스피드로 내 키가 작아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나는 7, 8세의 소년으로까지 젊어졌다. 그리고 나는 지구로 되돌아 갈 때까지 먹을 양식을 마련하느라고 밤마다 몰래 로켓을 들락날락했다. 몸집이 점점 작아지니 일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 외에도 몹시 난처한 것은 괜스레 딱지 놀음이나 구슬치기가 하고 싶어지고 손가락을 자꾸 빨게 되었다. 이럭저럭 출발 준비가 다 되었기에 날이 새기 전에 로켓으로 잠입해서 출발의 핸들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키가 너무 작아져서 손이 닿지를 않았다. 의자를 갖다 놓고 기어올라 겨우 핸들을 돌렸다. 나는 하도 힘이 들어 홧김에 소리를 질렀더니 그 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으에엥'하는 갓난아이의 소리로 들렸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서서 걸어다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타임머신의 작용은 그 후에도 잠시 계속되는 것 같았다. 왜냐 하면 아마울로피아 혹성이 한 점의 빛으로 보일 만큼 멀리 떠나 왔을 때, 나는 허기를 느껴 식량 저장고까지 가까스로 기어가서 우유병을 집어 들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반 년쯤 나는 우유로 자랐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아마울로피아의 비행에는 근 30년이 걸린다. 그러므로 지구에 되돌아 왔을 때, 나는 출발 당시의 나와 비슷한 청년으로 성장했으므로 친구들은 아무도 내가 왕복 60년의 긴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줄은 몰랐다.     작품 해설   4차원의 전쟁, 서광운   지구의 인류가 우주인의 공격을 받는다면 일치단결해서 이와 싸워야 한다. 모든 인류가 서로 합심해야 되는 사실은 요즘 공해(公害) 대책이나 식량 문제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됐다. 그러한 내부의 위협과 외부의 위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지 않겠는가. 일부 기상 전문가들이 전망하고 있다시피 오늘날의 기상 이변은 혹 새로운 빙하 시대(氷河時代)로 접어드는 조짐이 아닐까. 아직은 아무도 이를 부정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바닷물이 하루에 1센티씩 불어가는 현상을 설정하고 이는 새로운 빙하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그런데 어째서 바닷물이 불어가느냐 하는 원인을 과연 어디서 캐낼 수 있을까. 지구 위에서 인공적인 변화가 없는 한, 혹 외부 세계에서 어떤 작용이 일지나 않을까. 외부 세계의 작용이 있다면 그것을 우주인, 여기서는 안드로메다 성운인으로 설정해 보기로 한 것이다. 왜냐 하면 우주인들이 태양계까지 원정해 올적에는 우리 인류보다 훨씬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은 금성(金星)을 점령하고 거기에 정찰 기지를 두고 지구를 넘어다보는 것, 우주선에서 지구의 북극을 향하여 층자선이라는 빛 다발을 내리쏟는 사슬에 북극의 얼음이 모짝모짝 녹아 나는 것이 아닐까. 김민수를 대장으로 하는 한국의 특공대는 우주의 이러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로켓탄을 발사해 봤으나 아무 소용도 없지 않는가. 재래식(在來式) 무기가 쓸모가 없다는 것은 지구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신경총(神經銃)으로 우주인들을 물리치게 되는데 그들의 이마에 돋은 외뿔은 진화(進化) 과정에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기력을 상징하는 외뿔일까? 또는 우주 방사선에 의한 돌연 변이(突然變異)를 뜻하는 것일까. 어쨌든 우주인의 모습이 인류와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외뿔 우주인이지만은 그들은 3차원의 세계 - 가로, 세로, 높이 그러니까 부피가 있는 세계 - 를 넘어선 4차원의 로봇을 지니고 있다. 인류가 막아 놓은 벽을 마치 귀신처럼 소리 없이 침투할 수 있는 실체(實體)를 보통 4차원의 생물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아인시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一般相對性理論)을 수식으로 설명했을 적에 3차원의 X, Y, Z 축(軸) 외에 시간이라는 차원을 덧붙여 4차원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데서 비롯한다. 『4차원의 전쟁』에서는 우주인이 만들어 낸 4차원 로봇를 광선이나 자력선의 조작으로 보고 이들 침투력을 반사, 격퇴하기 위한 민들렁이라는 액체를 등장시킨다. 과학이나 기술의 경우 적용에 대한 반작용이 있듯이 어떤 새로운 장치가 발명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저지력이 있을 수 있는 증좌를 제시하려는 시도라 하겠다. 그러나 지구 전체가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지역 사회에서만이 이를 막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 작전 본부를 한국, 미국, 호주, 소련 등지에 설정하고 합동 작전을 펴게 한 것이다. 히말라야의 기슭 카라코람 일대는 아직도 지구의 비경(秘境)이기에 거기에 안드로메다 성운인들이 침공한 것으로 가상해 보았다. 합동 작전에서 우리의 특공대가 용감한 까닭도 우주 로봇을 격파할 수 있는 무기가 뒷받침됨을 알 수 있으리라. 1970년의 작품임을 밝혀 둔다.     4차원의 전쟁 서 광 운 작 아이디어 회관 과학 문고 224p. 19cm     초 판     1978년 4월 25일 재 판     1981년 2월 10일 작 자     서 광 운 오프셋 인쇄    삼정 인쇄소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동서 제본소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 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 록 제 2-213 호      전화 (266) 1975․(260) 2000   값 1,000원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한국SF작가협회 편   관제탑을 폭파하라 서광운 작       이상한 징조··················· 4 예보국장의 행방················· 7 파카 B9호의 비밀················ 22 소련에 잠입하라!················ 26 확대 연석 회의················· 33 비둘기 6호 발사················ 37 국민신보 기자················· 44 하바로프스크 천문대·············· 48 탈출 모의··················· 52 젊은 간호원·················· 59 청진 비행장·················· 70 예보국장의 수난················ 73 허력 에너지·················· 77 유린 가고파 양의 정체············· 81 17호 태풍 아이러호··············· 85 노라른스키 교수의 논문············· 96 허력 에너지의 완성·············· 102 가고파 양의 실종··············· 109 일본에 잠입하라················ 112 전쟁의 먹구름················· 134 출동 명령··················· 143   ■ SF 단편   기적의 세레나데 호·············· 151 이 별····················· 165 서 박사의 실험················ 171 수수께끼의 모랫벌··············· 176   작품 해설··················· 183   이상한 징조   오늘날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2천 18년의 초봄. 그러니까 해토머리라 할지라도 아직은 늦추위가 땅을 어녹이치고 있는 어느 날 밤. 국립 기상청의 대기실에서 아까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는 사내가 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텔레타이프와 텔레타이프 사이의 통로를 잔걸음으로 왔다갔다하며 가끔 야릇한 표정으로 척척 찍혀 나오는 전문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걸……'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팩시밀리(Facsimile)가 찍어내는 천기도를 손에 들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아까부터 통신 위성 카파(Kappa) B9호가 보내 온 기상통보가 엉뚱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이날 밤은 동경 128도, 북위 38.7도의 상공을 지나칠 때마다, 온갖 관측 데이터(Data)를 2배에서 3배 사이로 껑충 늘려 송신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다만 카파 B9호가 방금 보내 온 데이터의 위치가 금강산 근처의 상공이며, 그 숫자대로라면 초봄인데도 기온은 한더위 못지 않게 덥고, 기압이나 습도가 마치 대만의 그거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예보 과장은 마땅히 의아한 생각을 품었다. 그는 당직 일지에 그러한 사실을 적어 놓고 새벽녘에 딴 직원과 교대하여 잠이 들었다. 이튿날도 진종일 아무 탈없이 통신 위성은 모든 자료를 정상적으로 보내 왔다. 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돌기 때문에 하루에도 궤도를 19회나 돌며 기상 데이터를 보내 주고 있다. 그런데 이상야릇하게도 밤이 되면 카파 B9호는 꼭 금강산 상공에서 변조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다음 날 밤에도 그 다음 날에도 확인되었다   보고는 기상청장 박상문 앞으로 올라갔다. "수신 안테나가 그 때마다 고장을 일으키는 게지요. 한 번 손질해 봐요. 그럴 리가 있겠소." 박상문 박사는 불거진 이마를 한 손으로 문지르면서 가벼이 물리쳤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아요. 카파 위성은 일본측이 쏘아 올린 것이니까 그 쪽에 연락이나 해 주어야죠." 예보국장 성하룡이 안경을 바로 고치며 신중한 낯빛을 짓고 대꾸했다. "그럼 좋도록 해요. 통고해 주는 거야 친절한 일이니까. 그 쪽에서도 이미 수신하고 있을 텐데……" 기상청장은 혹 한국측 기계 고장으로 잘못 수신한 사실을 공연히 선전함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를 만들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투였다. 예보국장은 당장 보고서를 꾸며 일본 기상청 앞으로 타전했다.   「본 기상청장은 서기 2018년 3월 1일 밤 8시 30분 경부터 귀국의 기상 위성 카파 B9호가 보내는 자료에 변조를 발견했습니다. 위치는 동경 128도, 북위38.7도의 금강산 상공을 통과할 적마다 관측 데이터가 3배로 늘어남이 별지처럼 확인되었습니다. 그 원인을 방금 조사 중이나 귀국에서도 참고로 알아두기 바랍니다. 」   이런 줄거리의 통고를 받은 일본 기상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 시각에 똑 같은 데이터를 받고 지금 검토 분석 중에 있으나, 아직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답신이 들어왔다. 일본 기상청만이 아니었다. 중국 대륙에서도, 소련의 하바로스크 기상대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어찌 된 일인가 하는 문의가 얼마 후에 당도했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있나. 우리가 쏘아 올린 기상 위성은 늘 서울 상공을 통과하고 있는데도 아무 탈이 없는데, 하필이면 일본의 카파 위성만이 금강산 상공에서 공연히 변조하다니." 대책 회의의 자리에서 기상청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도깨비장난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 수원의 송수신소를 샅샅이 뒤져봐도 아무 이상도 없는데. 일본 사람들한테 자기네 주파수로 고치라고 연락하죠." 예보과장 이기호는 그 팔팔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입바른 말을 늘 뱉는 사람이다.   예보국장의 행방   이 무렵 한국의 과학 기술부 아래 서울에는 기상청이, 신골덕리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제주도의 서귀포에는 우주 개발청이, 강원도의 설악산에는 천문대가 있었다. 뒤늦게 발을 내딛은 한국의 과학 기술계였지만 정부의 개발 계획보다는 과학자가 스스로 국제 수준을 넘어서려고 애쓴 보람이 있어, 이제는 어느 나라보다도 규모있는 종합 발전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러한 국력은 1700km의 동해안, 2200km의 남해안, 4700km의 서해안을 합친 총 8600km 남짓한 해안선과 해양 자원의 개발로 화학 공업을 이룩함으로써 뒷받침되었다. 이제는 국산 인공 위성도 올리게 되어 이웃 나라에 꿀릴 필요가 없게 되니 예보과장 이기호가 큰 소리를 할 만하다. "장소가 금강산인 만큼 좀더 신중히 금강산 근처를 살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나도 전에 그 곳의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혹 거기서 모종의 새발견을 해냈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곳을 조사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아요." 예보국장 성하룡의 주장이다. 그는 기상청으로 전임 발령을 받기까지 근 10년을 꼭 생물 자력선 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하면서, 기상이 생물의 생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연구한 농업 기상 전문가이다. "좋은 의견이오. 정 국장이 아무래도 적임자가 아니겠소. 금강산의 기상 관측소를 중심으로 알아 봐 주시오." 청장 박상문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외국의 문의에 속시원한 답신을 보내려면 한국에서 가능한 모든 조사를 종합해야만 한다. 성하룡 국장은 이튿날 저녁 차를 타고 총총히 금강산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2주일이 흘렀다. 그런데도 성 국장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출장의 관례에 따르자면 도착한 즉시로 무사히 닿았다는 보고를 본청에 내야만 한다. 성 국장은 그런 보고를 하지 않았어도 본청에서는 급한대로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도 들러야 하니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눌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2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조회해 본즉, 예보국장은 1주일 전에 관측소를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는 연락이다. "웬일일까? 본청에도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기상청장은 근심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청장 박상문 박사는 이 기호 예보과장을 몰래 불러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알아보도록 당부했다. "경찰보다는 정보부에 부탁하는 편이 낫겠지. 정보부에는 과학 담당의 전문가도 수두룩하니까 경찰보다는 신중할 거야." "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예보과장의 얼굴이 적이 굳어진다. 일본의 기상 위성이 공연히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 예보국장마저 온데간데 없게 되었으니 무슨 꿍꿍이 속이란 말인가? 예보과장은 입을 꾹 다물고 이를 악물고 청장실에서 나오자 단김에 차를 몰고 정보부를 찾아서 그간의 경위를 일러 주었다. "그렇다면 실종 사건이란 말이지. 음, 1주일 전에 그곳을 떠났는데도 깜깜 소식이니. 우선 전국에 수배 해놓고 볼 일이야." 담당관은 사뭇 흥분하여 앉은 자리에서 전화기를 들고 예보국장 성하룡을 비밀리에 수배하도록 신청했다. 예보과장이 새삼스레 일러 줄 필요조차 없이 성하룡의 인상이라든지 경력이나 풍채는 이미 정보부의 인물 카드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10분만에 수배를 마치게 마련이다. 거처불명이 된 성하룡의 얼굴은 두툼하고 탐스러워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푼더분한 귀공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는데, 안경을 벗으면 금방 바투보기눈이 나타나 앞을 조려보려고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몸집은 큰 편이 아니나 좋아 보이는 풍채이다. 까닭에 메부수수한 시골사람들 틈에 끼면 단박에 특징이 드러나는 도시형 인텔리다. 예보과장은 정보부에서 나오자 혼자 생각으로 예보국장의 행방을 더듬어 보았다. 설마 교통 사고로 부상을 입지는 않았겠지. 만일 그러한 경우라면, 본인이 아니면 병원측에서 재빨리 본청에 연락이 올 게 아닌가. 교통 사고가 아니라면 여자 관계는 어떨까? 모처럼 금강산을 찾아갔고 더욱이 10년 동안을 근무한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도 들렀으니, 혹 전에 사귀던 여자를 만나서 단꿈을 꾸고 있지나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일단 연락을 않을 사람은 아니다. 국제적으로 회답을 보내야 할 책임자가 그토록 넋을 잃고 사랑에 빠질 리가 없다. 예보과장은 평소에 여자 관계가 깨끗한 국장의 인품으로 미루어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사고나 여자 관계가 아니라면 과연 자살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자살할 아무런 이유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처럼 오직 나라를 사랑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몸을 조심하는 이도 드물다. 집에는 2남 1녀의 처자가 버젓이 행복을 누리고 있으며 가정에도 충실한 그이다. 예보과장의 머리 속에서 한없이 맴도는 생각들은 정 국장의 자취를 잡을 만한 아무 실마리도 던져 주지 않았다. 도시 걸릴 것이 없는 알쏭달쏭한 실종이 아니고 뭐랴. 예보과장은 정보부에서 걱정하던 일을 대충 청장에게 보고한 끝에, "역시 제가 금강산으로 직행해서 현장을 알아봐야겠습니다. 내일이라도 국장님이 허허 웃으며 나타나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남에게 부탁만 하고 먼 산만 바라볼 수 없지 않겠어요?" 하며 현장 조사를 자청했다. "옳은 얘기야. 나도 줄곧 걱정이 되어 밥맛이 다 없어질 판이네. 저 쪽(정보부) 얘기를 우선 들어본 다음에 우리가 나서야 되지 않을까?" "그럼 하루나 이틀 더 기다려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만일 뚜렷한 꼬투리가 없을 적엔 독자적인 수색을 해 나가겠어요." 두 사람은 방침을 세우고 각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무했다. 다음날 아침 정보부에서 남몰래 보내 온 보고는, 예보국장 비슷한 인물을 구철원 역에서 본 사람이 있고, 또 그 이튿날 원산 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구철원 역이라니 서울로 돌아오기 위한 길목이 아닌가. 그런데 또 어째서 북쪽으로 원산까지 올라갔다는 말이야.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알 수 없어." 기상청장은 두 손으로 이마를 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가지는 않았을까요? 원산 쪽으로 갈 일이 도대체 없지 않습니까. 분명히 납치된 것 같은 직감이 드는데요. 청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보과장은 박상문 박사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들여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납치? 도대체 기상학자를 납치할 건더기가 있어야 말이지. 세계 공통의 서비스 기관원을 누가 굳이 납치한단 말인가. 혹 자기 나름대로 더 조사할 일이 있어 성진(城津) 기상대까지 가 보려는 생각이 아닐까? 금방 알아봐 주게." 말을 마친 박상문 박사는 머리를 싸매고 울상이 되다시피한 얼굴을 손으로 힘껏 쓸었다. 예보과장이 장거리 전화로 알아본즉 성하룡은 원산에도 성진에도 들르지 않았다는 전갈이다.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걷잡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소식을 확인한 바로 그날 밤, 10시 5분 전에 예보과장실에 전화가 따르릉 울려왔다. "네, 예보과장실입니다." 이 기호가 수화기를 들고 대답하자, 뜻밖에도 예보과장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야. 성하룡이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오. 그런데 알아볼 일이 있어 당분간 기상청을 쉬어야겠네. 청장이나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도록 전해 주게." 예보과장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물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중강……" "여보세요. 거기가 어딥니까?" "……" "여보세요. 교환! 빨리 이어 줘요." 예보과장 이기호가 아무리 외쳐 봐도 상대방의 전화는 딱 끓긴 채 아무 대답이 없다. 아무리 고함을 질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예보과장은 흥분을 참지 못한 채로 이 일을 기상청장에게 곧장 보고했다. "중강이라니 그런 데가 어디에 있나?" 청장도 납득이 가지 않는 눈치이다. "중강이라는 지명은 아무리 찾아 봐도 없어요. 혹 중강진(中江鎭)이 아닐까 하고 시외전화를 급히 부탁해 놓았는데, 국장님의 떠듬떠듬한 목소리로 보아 곁에서 누가 감시하고 있는 듯 해요. 더우기 어디냐고 물었을 때 중강 무엇이라고 대려고 할 적에 입을 가로막힌 듯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먼저 중강진을 불러내서 물어 보겠습니다." 이기호의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가빴다. 가까운 곳이라면 당장이라도 달음질해서 알아내려는 기세이다. 이기호는 안절부절 못하고 여러번 교환대를 독촉하여 가까스로 20분 만에 중강진 기상대를 불러냈다. "여보시오, 중강진이지요? 여기 서울이오." "네, 그렇습니다." "30분 전에 예보국장이 거기서 전화를 걸어온 것 같은데 지금도 계시면 바꿔 줘요." "안 계십니다. 통 들르지 않았는데요.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 예보과장이시군요. 예보국장이 이곳에 오셨단 말씀입니까?" 금방 또랑또랑한 말소리가 울려왔다. 그런데도 이기호는 힘없이 대답했다. "알았어요. 수고하시오.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오." 전화통을 놓으며 고개를 떨군 이 기호는 '중강'이라는 장소의 수수께끼를 한참 좇아 봤다. '아무래도 금강산부터 현장 조사를 하여 어쩐 일인지 실마리를 잡아내야지 웬 일인지 분간을 못하겠다.' 스스로 수사관이나 된 것처럼 예보과장은 벽에 붙은 토끼 모양의 한반도 지도를 쏘아보았다. 그날로 기상청장의 허가를 얻어 예보과장 이기호는 아침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모든 일을 신중히 해야 하네. 몸을 아껴야 되오." 떠나기 직전에 청장이 타이른 말소리가 예보과장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기차는 전기화된지 오래다. 한강 상류를 따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다. 2등차 칸에 자리잡은 예보과장 이기호는 아까부터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며 수심에 찬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따름이다. 창 밖의 골짜기에는 진달래 꽃이 울긋불긋하고 강가의 척 늘어진 실버들의 파릇파릇한 초록색이 눈알을 쏜살같이 스쳐가곤 한다. 그는 포개어 올린 다리 위에 턱을 고이고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좇았다. '예보국장은 무엇 때문에 중강진까지 올라갔을까? 그는 혹 무슨 논문이라도 쓰려고 혼자 애태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기호의 가슴은 이내 답답해졌다. 수수께끼를 풀을만한 꼬투리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예보과장은 혼자 조바심이 나서 속이 절로 버글거리고 있는데도 차간의 딴 손님들이 아랑곳 할 리가 없다. 그들은 구철원 역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전철로 갈아 탄 뒤부터는 제법 관광 기분을 풍기기 시작했다. 등산복을 말끔히 차린 그들 남녀노소가 들떠서 지껄이는 말소리가 자꾸 헛들리기만 한다. 기차는 금화를 거쳐 두 번이나 길다란 철교를 지나 단발령을 허위넘을 무렵부터 쌕쌕거리기 시작한다. 온갖 신록이 물을 머금은 채, 싱싱한 빛을 현란하게 햇빛에 얼비쳐 주는 가파른 비탈길을 기차는 허덕허덕 기어 올라간다. 차 안의 스피커가 안내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금강산은 높이가 1638 미터요, 봄에는 금강산이라고 일컫고,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모두 창문을 열어젖치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며 기암절벽(奇巖絶壁)을 손짓하며 야단법석이다. 예보과장 이기호는 마음 속으로 저들처럼 관광할 수 있는 처지라면 이처럼 눈부신 구경이 또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물 자력선 연구소로 가서 예보국장의 발자취를 캐내야만 하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그다. 기차가 종착역에 다다르자, 이기호는 왁자지껄한 사람들과는 달리 총총히 연구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비탈진 자동차 길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이기호는 생각을 더듬었다. '예보과장은 먼저 관측소에 들른 뒤, 자력선 연구소를 찾아간 모양인데 관측소는 이곳에서도 까마득하게 멀다. 먼저 자력선 연구소에 들러 보기로 하자.' 높은 낭떠러지에서 깊은 골짜기를 보고 산새들이 짹짹 지저귀며 나닐고 있다. 그 새 소리들이 새삼 야릇하게 울려온다. 이기호는 해가 산봉우리에 걸릴 무렵에야 연구소에 도착했다. "어이구, 이 멀고 호젓한 길을 얼마나 고생했소. 어서 들어오시오." 미리 연락을 취해 놓은 까닭에 연구 소장 김철수가 반가이 맞아들였다. "그저 휴가로 놀러 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기호는 껄껄 웃어댔다. "그러게 말이에요." 두 사람은 소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마치 절간 같군요. 조용하기 짝이 없고……" 이기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김철수 박사는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어떻게 된 노릇이오?" 이기호는 한번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성하룡 예보국장이 거처(去處) 불명이 됐어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소장님을 만나 볼겸 일부러 찾아 왔어요." 이렇게 말을 끄집어낸 이기호는 그 동안의 경위를 대충 설명했다. "그래요……" 김 박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두 손을 깍지끼고 고개를 숙이며 무슨 생각을 좇는 듯 손길로 책창방아를 찧는다. "그래서, 박상문 기상청장은 예보국장이 전에 이 연구소 직원으로 있은 적이 있으니까, 이번 실종과 무슨 관계가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더욱이 일본의 카파 B9호 위성이 금강산 상공에서만 송신 싸이클이 변조를 일으킨단 말이에요." 이기호는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김철수 박사는 고개를 들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참 신기한 일도 다 있군. 성하룡군이 여기 있을 적에 바로 식물 자력선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의 연구 테마로 말하자면 광물질 속에 있는 식물질을 동조(同調)시켜 보겠다는 것이었소." 김 박사는 아주 조용한 소리로 이기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옛날에 식물이 지구 위에서 판친 시대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 후 식물은 까들어들어 땅 속에 파묻히고 말았지만, 성하룡군은 그러한 식물들이 지열로 말미암아 2차적으로 화학 반응을 일으켜 희암석(稀巖石)이 된 것으로 믿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의 견해는 늘 광물과 식물 사이에 실오리 만한 공통성이 있으리라는 거요. 까닭에 식물의 엑기스를 뽑아 광물질에 작용시켜 보려는 연구를 계속해 왔었지요. 그는 레이저 광선과 같은 열 반응을 식물 자력선의 전자 반응으로 일으켜 보려고 애썼지요." 김 박사는 예보과장이 과연 납득하느냐 하는 눈으로 흘끔 그를 쳐다보더니 담담한 어조로 얘기를 이어 갔다. "이를테면 한약을 마시지 않습니까. 한약은 식물의 엑기스라고 이를 수 있는데, 그 엑기스는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서 장기(藏器)와 장기 사이를 흐르는 소화액이나 호르몬의 길을 씻어 주는 구실을 하거든요. 성하룡군은 늘 농담조로 전자와 전자가 흐르는 마디와 같은 진공관 사이에 식물 자력선을 작용시킬 수 있으리라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장담하듯 식물 자력선이 거기에 동조나 변조를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허선(虛線) 에너지가 될 거라고 자랑했는데…… 그러한 연구는 아직도 그의 후배가 계속하고는 있지요. 그런데, 그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다니 웬 일일까?" 김철수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따름이다. 잠시 후 소녀가 차를 들여왔다. 차는 향긋한 작설차(雀舌茶)였다. 작설차는 옛부터 갓나온 나무의 어린 싹을 따서 만든 향기로운 차다. "그런데, 예보국장은 연구소에서 며칠이나 묵고 내려 갔습니까?" 이기호는 권하는 대로 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아마 이틀 쉬다가 떠났었지. 관측소가 험한데다가 마침 뒤늦게 눈보라가 휘몰아친 바람에 고생만 하고 돌아갔는데 무슨 영문일까?" "혹, 거동에 이상한 점을 느끼시지나 않았는지요?" "이상한 점?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식물 자력선이 성공한 게 아닌가 하고 혼자서 기뻐하더군. 그 관계는 나중에 연구원에게 자세히 물어보면 알 거요. 아무래도 걱정인데……“ 벌써 바깥 세상은 어둠침침하다. 멀리서 부엉부엉 하고 우는 부엉이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치고 있다. 소장과 함께 저녁을 들은 이기호는 초저녁에 딴 채에 있는 자력선 연구실로 찾아가서 연구원을 만났다. 그들은 예보국장이 실종된 사실을 처음으로 전해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수야 있겠어요. 무슨 딴 일이 별안간 생겨 미처 보고를 못한 게지요." 그들은 입을 모아 사건을 부정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실종은 엄연한 실종이다. "다만 성 국장은 식물 자력선이 완성되면 모든 전자기능에 간섭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더군요." 연구원들은 예보국장에겐 여자 관계란 티끌만큼도 없다고 되려 껄껄 웃으면서 증언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 나절, 이기호는 관측소로 향하려던 참에 서울의 기상청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를 들자 기상청장의 귀익은 목소리가 걸걸하게 들려왔다. "과장이오? 빨리 본부로 돌아오시오. 전화론 말을 못하겠는데 엉뚱한 데서 예보국장의 자취를 확인했소." "찾아냈단 말씀이지요. 천만다행입니다." "글쎄……" 전화는 끊어졌다.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무슨 실마리가 잡힌 것만은 뚜렷하다. "소재를 알아냈으니 다행이구려." 옆에서 김철수 박사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누그러진 얼굴을 지어 보였다. 이기호는 당장에 서둘렀다. 관측소로 전화 연락만 하고 채비를 갖추었다. 금강산 역에서 서울로 떠나는 차는 상오 11시 정각이다. 벌써 시간이 빠듯하다. 연구 소장과 작별하고 난 이기호는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다. 정거장까지 사람을 안동하겠다는 친절을 굳이 뿌리치고 홋홋이 내려오는 참이다. 역까지의 거리는 5마장에 지나지 않는다. 길섶에는 보라색 제비꽃이 가냘프게 이슬방울을 맺히고 고개를 들면 돌비알마다 참나리 꽃이 소담하게 얼굴을 내보이고 기웃거리고 있다. 이기호는 혹독한 겨울이 가고 따사로운 봄에 생명을 되살려 주는 자연의 섭리를 그지없이 고맙게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어 보았다. 거푸적, 거푸적…… 문득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뒤따른다. 웬 사람일까 하며 뒤돌아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기호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 뒤에서 이번에는 사붓사붓하는 소리가 뒤따른다. 분명히 사람의 발자국 소리다. 그런데도 둘러보면 그림자도 안 보인다. 으슥한 산길. 혹?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기호의 머리끝은 쭈뼛이 서고 소름이 확 끼쳤다. 이기호는 나이답지 않게 냉큼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듯한 소리가 마구 울린다.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줄달음치며 멀리 정거장이 바라보이는 길목에 이르렀을 적엔 그의 겨드랑이는 식은 땀으로 흠뻑 적셔져 있었다. 헐레벌떡 정거장에 뛰어들어 그는 무사히 서울행 기차를 탔다.   파카 B9호의 비밀   그가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서 돌아올 무렵 정보부의 과학과원 김민수는 멀리 웅기(雄基)에 와 있었다. 성하룡 예보국장의 발자취를 더듬다가 보니 웅기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웅기는 나진(羅津)의 조금 북쪽, 두만강 하구에서 멀지 않는 북단에 자리잡고 있는 도회지이다. 중강진(中江鎭)에서 어떻게 코스를 밟은 것인지 어쨌든, 예보국장은 길주(吉州), 청진(淸津), 나진을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키가 땅딸막한 과학과원 김민수는 바로 식물 자력선 연구소장 김 철수의 동생이다. 예보국장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서울에서 웅기까지 민수가 와 있다는 것을 형 김철수 박사가 알 리가 없다. '이건 분명히 소련의 공작원이 저지른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은 왜 예보국장 같은 인물을 납치해 갔느냐 말이다.' 민수는 혼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리송한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박상문 기상청장은 정보부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우선 이기호를 금강산에서 불러들인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예보과장은 자력선 연구소에서 들은 얘기를 낱낱히 구두로 보고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것은 제가 돌아오려고 연구소를 나와 정거장으로 걸어올 때, 분명히 미행을 당한 것 같아요. 저는 학생 시절 때부터 산악반이었기 때문에 엔간히 후미진 산길일지라도 겁나는 일이 없는데 어찌나 무서운지 솔직히 말해서 36계를 놓았다니까요?" 이기호는 덧붙이며 쑥스러운 웃음을 띄었다. 기상청장도 그 소리에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더니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일렀다. "요즘 일본에서 또다시 금강산 상공에 무슨 변이 생긴 것 같다고 재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 왔는데. 식물 자력선의 탓이라고 겉잡아 일러 주면 우리를 돌았다고 하겠지. 식물 자력선의 작용인지 아닌지, 아직은 과학적으로 확실치 않으니 속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도 없고, 사정이 아주 딱해졌는데." 실은 일본뿐이 아니라 멀리 독일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문의해 오고 있는 판이었다. 박상문 청장은 혹 카파 B9호가 금강산 위에 이르렀을 순간에만 고장이 나도록 기계의 순환에 차질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설령 그렇다면 지구의 궤도를 돌 때마다 딴 위도상에도 통과하기 때문에 그러한 주기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야 할 법하다. 그런데 금강산 상공에서만 그런 변조가 생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일본측에 요청해서 그 통신 위성을 회수하거나 고장난 데를 고치도륵 권해 보죠." 이튿날, 아침 회의에서 관측과장이 제안했다. "그까짓 것 저네들이 못하겠다면 제주도의 우주 개발청에 부탁해서 우리가 올라가서 고쳐 주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썽이나 꺼야 할 게 아닙니까." 젊은 간부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모두 그렇게 흥분할 게 아니라 이번 사건은 둘이면서도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나 마찬가지이니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의논을 보아 결정하기로 합시다. 감정대로 일을 처리할 순 없지 않아요." 박 청장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간부들도 이해 못할 리 없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새로운 조치가 취해지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청장이 과학기술부에 요청하여 관계청장과 정보부 과학과와의 연석 회의를 열게 됐다. 그 결과, 두 가지 문제를 따로따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 한 가지는 정보부로서는 과학과원 김민수를 웅기에서 그대로 소련으로 밀파하기로 하고, 다른 한 가지는 일본 측에 카파 B9호의 고장이 금강산과 관련이 없으니 스스로 회수하든지 고장을 고치도록 촉구하기로 한 것이다. 과학기술부의 결정으로 일본측에 공문이 발송되었다.   소련에 잠입하라!   그리고 한편으로는 웅기에 머무르고 있던 김민수에게 지령이 내려졌다. "귀하는 예보국장이 확실히 소련에 납치되었는지? 납치되었다면 소련의 무슨 기관원에게 납치되었는지 그 물적 증거를 입수하기 위하여 소련 영토 내로 잠복하여 살피도록 하라. 본부에서 짐작되는 바는 예보국장 성하룡이 하바로프스크 지방에 연금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 하면 시베리아의 기상 정보 센터는 하바로프스크이기 때문이다. " 김민수는 여관에서 이러한 암호 전보를 받아 읽고 온몸의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방 안의 창을 열어 젖히고 두만강 쪽을 바라보니 음력 초사흗날의 눈썹달이 나직한 언덕 위에 걸려 있다.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는 채비를 차리고 여관에서 나오자 곧장 공동 묘지를 찾았다. 터벅터벅 걸어서 시가지를 빠져나온 그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길을 지나가 공동 묘지에 이르렀다. 사방은 호젓하며 어리친 개 한 마리도 없다. 가끔 산새가 멀리서 지저귈 뿐, 산바람이 물결치듯 쏴쏴 지나간다. 민수는 주위를 조심스레 두루 살핀 후 뭇 묘지의 가장자리에 있는 한 무덤으로 다가섰다. 큼직한 무덤 앞엔 케케묵은 비석이 우뚝 서 있다. 「[金海金氏 常人之墓」 (김해 김씨 상인지묘)라고 새겨 있을 뿐, 딴 비석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무덤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네모난 넓은 돌이 놓여 있으며 다만 화강암(花崗巖)으로 쌓아 올린 축대가 무덤의 주인공의 화려했던 과거를 말해 주는 듯하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무덤을 한 바퀴 돌고난 뒤, 축대의 왼편으로부터 두번째 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과연 열릴까?' 김민수는 눈앞에서 아롱아롱하는 돌비늘(雲母)과 질돌(石英)의 검싯 투명한 무의를 한 눈으로 쏘아보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의심을 내쫓았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한 손으로 돌결을 만져 보았다. 돌은 차가웠다. 민수는 네모진 돌의 왼편 모서리를 먼저 손톱으로 긁어냈다. '과연 전에 교육을 받은 그대로구나.' 혼자 감탄하면서 양복의 웃옷 안주머니에서 둥그런 메달을 꺼냈다. 태극기와 이화 무늬가 새겨 있는 정보부의 메달 뒤쪽에는 짜름한 수나사의 꼭지가 달려 있다. 민수는 그 꼭지를 긁어낸 화강암의 구멍에 맞추고 나사돌리개처럼 틀어 보았다. 영락없이 맞아들었다! 조심스레 끝까지 돌리고 난 민수는 다시 대각선을 따라서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서 구멍을 찾아 똑같이 메달의 꼭지를 틀어막으며 돌렸다. 그리고서 이번에는 바로 위 모서리에, 다음에는 대각선을 따라 왼쪽 아래 모서리를 더듬어 꼭지를 돌렸다. 그러자 축대의 돌문이 소리없이 열리지 않는가? 김민수는 눈물이 핑 돌 듯한 감흥을 느끼면서 발을 돌문 안으로 내딛고 밖을 살펴 본 뒤, 살짝 문을 밀었다. 돌문은 마치 친구인 양 순순히 닫혔다. 이제 홀가분해진 과학과원 미스터 김은 스위치를 더듬어 굴 속에 전등을 켰다. 환히 밝은 굴 속은 휑댕그렁 했으나 낯익은 얼개였다. 민수는 이미 설악산 남쪽 기슭에서 이와 같은 굴 속 생활로 한 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 민수는 허리를 펴고 먼저 책상 서랍의 지도를 꺼내서 펼쳤다. 소련의 접경 지대의 작전도가 역력하다. 돌을 힘껏 던지면 닿을만한 폭에 지나지 않는 두만강(豆滿江)의 좁고 깊은 골짜기가 표시되어 있는 곳 - 이 편에는 아오지 역에서 갈라진 철도를 따라 동북쪽의 끝에 경흥(慶興) 역이 외따롭다. '이 곳을 거쳐 한말(韓末)에 처음으로 북감자가 러시아로부터 들어온 곳이구나.' 민수는 문득 떠오르는 감상을 지우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쭉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신라 시대의 북경(北京) 대동강(大洞江)이 태봉(泰封)에서 청천강(淸川江)으로 내밀고, 고려 때는 압록강으로 내키고, 이조(李朝) 초 무렵엔 두만강으로, 말엽에는 간도(間島)에서 연해주(沿海洲) 일대로, 그리고 일제 시대 때는 만주와 화북으로 뻗어 나간 발자취가 말없이 적혀 있다. '백성의 세력은 늘 북으로 향하고 식량과 무역은 남쪽의 바다 건너에서 구해야 하는 팔자가 아닐까?' 민수는 생각하면서 경흥에서 두만강 철교를 건너 노보키에프스크에 이르러, 다시 블라디보스톡에서 만주의 동쪽 끝을 마주보는 하바로프스크까지의 길목을 눈에 익혔다. 그리고선 민수는 다른 서랍을 열어 소련 지폐를 한 뭉치 꺼내서 바지의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무전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붉은 불이 조그마하게 켜지며 마치 옛 친구처럼 찡하고 대답한다. 무전기는 5kW짜리이다. 민수는 모르스 신호를 따 찌-찌-따 연거푸 보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발신기지 델타엔 이상이 없습니다." 델타란 웅기(雄基)의 비밀 기지의 부호이다. 정보부는 한반도의 온갖 요소, - 독도에 이르기까지 지하의 비밀 기지를 이미 만들어 놓고 비상시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민수는 금고 속에서 마취총을 꺼내 들고 잠깐 망설였다. '역시 안 가지고 가는 게 낫겠지. 무기란 그것이 비록 호신용이라 할지라도 적은 그것을 공격용으로 오인하기 마련이다. 공연히 일을 덧낼 필요는 없다.' 그는 총을 도로 금고 속에 집어넣고 스위치를 돌려 페리스코프(Periscope)의 스크린을 살폈다. 화면에 나타난 바깥 정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김민수는 태연히 돌문을 열고 나자 화강암을 말짱히 봉한 다음, 총총히 그 곳을 떠났다. 웅기 역은 그다지 붐비고 있지 않았다. 기차는 해안선을 따라서 여러 번 선 뒤, 한 시간만에 아오지역에 도착했다. 민수는 여기서 블라디보스톡 행 국제 열차로 갈아탔다. 아오지와 블라디보스톡 사이는 모노 레일이다. 차간의 유리창이 타원형인 것이 벌써 이국 정서를 풍겨 준다. 뿡! 하는 기차 소리와 함께 소리없이 정거장을 떠난 열차는 시속 1백 km로 쏜살같이 줄달음쳤다. 국경역 경흥에는 단 10분만에 도착, 거기서 세관의 조사가 시작됐다. 김민수는 시치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자칫하면 헛기침이 나오려고 한다. 민수의 자리 앞에 이르른 소련 관원과 한국 세관원이 묻는다. "무슨 일로 소련으로 가지요?" "국민 일보 특파원입니다. 시베리아 일대의 과학 발전상을 취재하러 가는 길입니다." 민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서슴없이 대답했다. "소지품에는 법에 어긋나는 물건이 없겠지요?" "없습니다. " 신문 기자의 신분증을 들여다보고 난 세관원들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셈이다. 검사가 끝나고 이윽고 기차는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두만강의 급류가 힘차게 솟은 아름드리 정글 사이를 물보라를 튀기면서 세차게 흘러가고 있다. 무섭게 내려오는 물발을 억세게 받아 넘기는 바위는 수만 년을 두고 물에 깎여 둥글둥글 뭉우리를 이루고 있다. 국제 열차는 한 다름에 노보키에프스크에 이르러 해안선을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린다. 멀리 잔물결이 얼비치는 햇빛이 눈부시다. 민수는 결코 마음을 놓지 않으면서도 수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 있는 동해의 검푸른 바다를 넋없이 바라보았다. 북쪽 소련을 끼고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는 동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앞자리에 앉은 소련 부인이 태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저 여자는 무슨 일로 한국에 다녀가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직업 의식이란 어느 때고 무섭게 고개를 쳐드는 모양이다. 기차는 한참 만에 블라디보스톡 역에 다다랐다. 블라디보스톡 역은 유럽과 동양을 연결하는 종착역인 까닭에 과연 굉장한 차림이었다. 정거장은 해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항구에 떠 있는 3만 톤급 화물선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는 소련의 극동잠수함대의 기지이기도 하다. 민수는 여러 갈래로 된 플랫홈을 지하로 가로 질러 역의 구내 식당으로 찾아갔다. 하바로프스크로 떠나는 기차는 앞으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민수는 문 어귀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여기에 당분간 머물면서 수소문을 해볼까? 또는 바로 하바로프스크로 직행할까?' 민수는 또다시 망설였다. 그러나 담배연기를 뱃속까지 깊이 빨아들여 훅 내뿜고 났을 적엔 이미 결정이 굳었다. 민수는 역시 하바로프스크로 직행하기로 한 것이다. 시간에 맞추어 그는 3번 플랫홈으로 찾아갔다. 차에 오르니 소련인 외에도 일본인, 중국인들이 많았다. 이윽고 발차한 뒤, 김민수는 혼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성하룡 예보국장을 하필이면 소련놈들이 납치해 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확대 연석 회의   한편, 서울의 기상청에는 일본 기상청으로부터 회답이 들어왔다. "카파 B9호의 기능이 정상적인 만큼, 회수하기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새 기상 위성을 내보낼 적에 작업원을 올려 보내서 고장의 원인을 조사할 작정이오니 양해해 주십시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읽고 난 박상문 기상청장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경비가 아까워서 제대로 일을 못하는 모양이군. 자기네가 쏘아 올린 것을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는 성질을 누가 모를까 봐. 그러나 남의 나라의 위성을 우리가 함부로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야. 위성의 소유권이 우주법에 엄연히 규정되어 있는 만큼 어쩔 수도 없지.' 그러면서도 기상청장은 석연치 않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일은 역시 과학부 장관과 의논해서 우주개발청과 식물자력 연구소 측과 확대 회의를 열어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박상문 청장은 예보과장 이기호를 불렀다. "이 공문이 일본 기상청에서 보내온 회답이야." 공문을 받아 쥐고 읽어내리는 예보과장의 얼굴이 샐룩거린다. "흥, 내버려 두겠다는 회답이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조사해 보지요. 일본인들은 아직도 식물 자력선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지요. 식자연(植磁硏)의 김철수 박사와 의논해 보는 것이 어때요? " 예보과장은 기승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 내 생각도 여러 사람과 연석 회의를 갖고 결정하고 싶은데……" "그야 물론이지요. 식자연 관계로 성하룡 국장이 납치되어 가는 판국에 우리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당장에 연락을 취해서 건의해 봅시다." "그럼 그렇게 하지." 기상청장은 예보과장의 주장을 들어 이튿날 아침 과학부장관을 찾아가서 경위를 보고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3일 내로 연석회의를 갖고 의논해 보시오." 과학부 장관은 시원스럽게 이른다. 그리하여 과학부 장관의 명의로 회의가 소집되어 3일 후 송월동(松月洞)의 기상청 회의실에서 연석 회의가 열렸다. "이제는 모든 사정을 알았습니다. 예보 국장이 실종된 일도 그 원인을 따지자면 우리 식자연(植磁硏)과 관계가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까닭에 식물자력선이 정작 그러한 작용을 기상 위성에 일으켰는지 아닌지를 알아 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김철수 박사가 현지답사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주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남의 인공 위성을 함부로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선 작업원을 올려 보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말썽이 생기면 귀찮으니까요." 권중희 우주개발청장은 신중론을 폈다. "아니, 권 박사는 반대하시는 겁니까?" 김철수 소장이 소리를 높이며 따졌다.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되도록이면 우주공법에 위반된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그건 처지가 다르지요. 일본으로 말하자면 자기네 기상자료 수집에 하등의 지장이 없기 때문에 고장을 고치나 마나 하겠지만, 우리로선 확인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남의 집 자동차가 자기집 앞에서 클랙션 고장을 일으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을 때, 그 자동차의 주인이 당장에 없다고 해서 클랙션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당장에 귓청이 찢어지도록 시끄러운데도. 아무리 우주공법이 완벽하다고 해도 법률가에게 의논하면 떳떳이 손댈 수 있는 귀절을 찾아 낼 겁니다. " 김철수 박사는 자뭇 흥분하고 있다. 우주개발청장 권중희 박사로 말하자면 전에 식자연의 소장을 지낸 적이 있는 권일송 박사의 맏아들이며 김철수 박사보다는 훨씬 후배이다. 권중희 박사가 김 소장의 서슬에 당해 낼 도리가 없다. "정 그러시다면 우주공법학자에게 문의해서 작업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아직도 외국에선 전례가 없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 보자는 것 뿐이지요. 그래 우리가 김 박사 팀의 연구 계획이나 자료 수집을 방해하겠습니까?" 권 청장은 쓴웃음을 띄우면서 변명을 했다. "사실이지 기상청의 입장으로선 외국에서 문의해 온 것에 대답할 길이 없어 난처하기 짝이 없습니다. 식물 자력선의 효과가 그만큼 위대하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속전속결(速戰速決)주의로 외국에 알릴 필요조차 없이 슬그머니 해치우는 게 낫지 않겠어요?” 박상문 청장은 본디 거추장스럽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미이다.   비둘기 6호 발사   "그렇다면 뒷 일을 나중에 수습하기로 하고 작업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우주개발청장이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하며 토론에 매듭을 지었다. 일본이 쏘아 올린 카파 B9호의 고장 원인을 한국의 우주개발청에서 조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그 날로 제주도의 동쪽 성산포에 자리잡고 있는 우주선 발사 기지에 지시가 내렸다. 성산포의 우주 작업원들은 때아닌 출장을 환성을 올리며 반겼다. 지휘관인 문봉기 대령은 세 명을 올려 보낼 작정이다. "대장님, 다섯 명은 올라 가야지요. 모처럼의 출장 명령인데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젊은 대원들이 마치 소풍이나 가듯이 자원했다. "군들은 놀러 가는 줄 아나. 로켓을 한 번 쏘아 올리는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 줄 아나? 멀쩡한 초등학교 30개를 신설할 비용이 든단 말이야." 지휘관의 예정대로 작업원은 3명으로 결정되고 차례에 따라 공정히 뽑혔다. 그리하여 5일 후, 발사 준비가 모두 완료되었다. 작업원이 타고 갈 위성은 3단계 로켓 비둘기 호이다. 15층 건물의 높이만한 로켓 발사대의 저편 관제탑(管制塔)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전화 연락이 부산하다. 오전 10시를 20분 앞두고, "A OK !(모든 조건이 다 좋다)" 하는 보고가 기관마다에서 들어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내려세기가 시작되어 "다섯, 넷, 셋, 둘, 공-" 하는 마이크 소리와 더불어 로켓은 시뻘건 불을 내뿜으며 덩그렇게 발사대를 빠져나간다. 불길은 더욱 세차게 백열화(白熱化)하며 비둘기 6호는 한 달음에 쑥쑥 우주 공간을 향하여 기운차게 내뻗쳤다. 눈길에서 사라진 비둘기 6호로부터 보내오는 자동 전파와 삑삑소리는 아주 순조롭다. 비둘기 6호는 단숨에 11km 대기권(大氣圈)을 돌파하고 진주 구름이 군데군데 깔려 있는 오존층을 솟구쳐 80km의 성층권을 뚫고 800km의 전리권을 넘어 비로소 외권(外圈)에 이르렀다. 잠깐 사이에 고개를 틀어박은 채 외기권에 다달은 세 사람은 한결같이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이구 이젠 살았구나. 매 번 올라올 적마다 정신이 아득해진단 말이야." 항공장 오동환은 어깨와 허리를 죄고 있던 벨트를 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공군 소령이다. 공과대학의 전자공학과를 나온 해군 대위 천기흥도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뱃속까지 숨을 들이 마셨다. 또 한 사람은 정비장교인 공군 대위 김순걸이다. "우주 공간에 올라올 적마다 느끼는 일인데,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갓날 적에도 비슷한 스릴이 있을는지도 몰라. 언제나 성공하면 기적인 것만 같애." 그는 군입을 다시면서 한 마디 했다. 비둘기 6호는 이미 궤도에 따라 수평 비행을 하고 있었다. 항공장은 성산포 기지의 문봉기 대령과 무선 전화로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램 제트를 분출시켜 궤도를 수정하라!" 우주 기지에서 지령이 내렸다. 오동환 소령은 대번에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위성의 오른쪽에서 시뻘건 불길이 세차게 내뻗치면서 위성은 왼쪽으로 대각선을 따라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날은다. "너무 고요해서 미칠 지경인데……!" 천기흥 대위가 실뚱머룩한 말투로 지껄인다. 사실이지 우주공간은 너무나 조용했다. 지상에서라면 램 제트의 소리는 요란스럽게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외기권에는 공기가 없는 탓으로 음파(音波)가 생기질 않아 소리가 번지질 못한다. 서로 레시버를 통해서 들어오는 말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죽음의 고요나 다름이 없다. 비둘기 6호는 보라빛 지구를 내려다 보면서 다섯 바퀴 돈 다음, 천천히 카파 B9호에 접근해 갔다. 지상의 관제탑에서 일일이 위치를 일러 주고 궤도를 수정해 주는 바람에 일본의 기상 위성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비둘기를 카파에 도킹시켜야겠는데, 김 대위가 먼저 나가서 작업을 하고 천 대위는 다음 차례로 나가도록 하게. 카파와 함께 돌면서 조사하기로 하지." 항공장은 늠름한 목소리로 일렀다. 우주복의 플라스틱 마스크 너머로 들여다 보이는 오 소령의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다. 김 대위가 먼저 기밀실(機密室)로 내려갔다. 오 소령은 기밀실의 기압을 내린다. 기압계의 바늘이 거의 0에 가까워질 무렵, 그는 다른 단추를 눌러서 우주선의 출입문을 열었다. 조종실의 스크린에 비친 김 대위의 얼굴이 싯누렇다. 자못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김 대인는 찬찬하게 몸을 밖으로 내밀고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선 헤엄치다시피 허공을 끌어 당기면서 생명의 줄을 늦추며 카파 B9호의 옆구리로 접근해 간다. "햇빛이 너무 눈부시는데요. 도킹할 만한 자리가 있어야지." 김 대위가 짜증을 낸다. "잘 찾아봐요. 위성의 꼬리를 더듬어 보면 로켓과 분리할 때의 결합부가 있지 않겠어." "참 그렇지요." 김 대위의 도킹 작업은 10분만에 끝났다. 이번에는 천 대위가 나갈 차례이다. 오 소령은 다시 기밀실의 기압을 올렸다. 이것은 마치 바다 깊숙히 해저 탐험을 할 때의 절차와 비슷하다. 바다 속에서는 수압을 고루 조정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외기권에서도 기압을 고루 조정해야만 한다. 오 소령은 기압이 조종실과 똑같이 되는 것을 보자 천 대위에게 눈짓을 했다. '기밀실로 내려가도 된다.' 는 뜻이다. 천 대위가 내려가자 항공장은 전과 똑같은 절차를 밟아 기압을 내리고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천 대위도 우주 공간을 밧줄을 따라 아장아장 헤엄쳐 갔다. 그들은 가벼운 자석(磁石)신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카파 B9호에 올라갈 수가 있다. 두 작업원은 일본 위성에 달라붙다시피 계기실로 통하는 출입문의 나사 장치를 돌려서 풀었다. 나사 돌리개로 위성을 두들겨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우주 공간의 특징이다. 두 대위는 플래쉬로 계기실 안을 비추어 보았다. 여느 위성과 마찬가지로 계기판의 바늘이 퍼렇게 움직이며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 이대로 금강산 상공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도둑놈도 아닌데 마음이 조마조마 하군." 천 대위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별 생각을 다 하네. 과학자가 과학 연구를 하는데 뭐가 잘못인가. 어서 코드나 접선시켜요." 두 작업원이 접선시킨 코드를 통해서 비둘기호의 조종실에 갖가지 데이터가 자동적으로 기록되게 마련이다. 그들은 계기판의 규칙적인 바늘만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는 참이다. "작업원에게 이른다. 3분 후에는 금강산 상공을 통과할 예정이다. 실수가 없도록" 오 소령의 지시가 울려왔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며 눈망울을 졸였다. 과연 3분 간이 지나자 계기판이란 계기판은 사시나무 떨듯이 바늘이 흔들리기 시작하지 않는가! 기계실은 마치 유령을 만난 것처럼 간섭파(干涉波)를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사인 커브를 나타내던 계기판이 느닷없이 코사인 커브를 그리기 시작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두 작업원은 더욱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천 대위의 가슴은 공연히 두근거리기만 했다. "작업원에게 이른다. 다시 금강산 위를 지나치려면 99분이나 걸린다. 도킹한 상태를 그대로 둔 채, 일단 비둘기 호로 돌아와서 대기하라." 오 소령의 지시를 어겨서는 안된다. 그들은 계기실의 출입문을 닫고 개구리처럼 빠져나와 비둘기 호로 돌아왔다. 기밀실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용하기에는 좁다. 한사람씩 출입하도록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례로 조종실에 수용되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할 뻔 했어. 자네들이 인공 위성에 나가 있는 동안 비둘기 호의 계기판도 제멋대로 바늘이 춤추지 않는가! 식물 자력선이란 게 대단한 모양인데." 뜻밖에도 오 소령마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야. 다시 한 번만 확인하고 어서 내려가세." 이러구러 시간은 흐른다.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대서양이며 아프리카 대륙이 흰빛을 눈부시게 얼비친다. 눈길을 서쪽으로 돌리면 반굽이로 뚜렷한 지평선 너머에서 오로라 못지 않는 흰빛이 엷은 노란색으로 환히 물들고 있다. 세 사람은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대로 다시 작업을 이었다. 이번에는 천 대위가 먼저 나가고 김 대위가 뒤를 따라 카파 B9호로 옮겼다. 금강산 위에 이르자 금방 일어난 간섭 현상이 또 다시 일어났다. 진동은 약 30초 동안 계속되었다. 이젠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들은 인공 위성의 고장을 고칠 필요가 없었다. 본디 고장이 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 대위와 천 대위는 코드를 뽑고 출입문을 흔적없이 마무린 다음 도킹을 거두고 비둘기 호로 돌아왔다. 감쪽같이 카파 B9호의 내부를 들여다 본 셈이다. "이젠 어서 내려가자." 오 소령은 두 사람에게 말하고 나서 우주 기지에 연락을 취했다. 내려오라는 대답이 이내 들려왔다. "하강(下降) 준비, 역추진 로켓 발사!" 비둘기 6호는 관제탑의 지시대로 서서히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국민신보 기자   한편, 하바로프스크 정거장에 내린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는 역전 광장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어디로 가실까요?" 늙수그레한 운전사가 무뚝뚝하게 묻는다. "코스모푸카야 신문사로!" 김민수는 거침없이 응답하고 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길거리의 가로수는 아마도 플라타너스인 듯 굵고 넓적한 잎사귀를 첩첩이 우거질대로 매달고 있다. 하바로프스크에는 1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이 드물다. 5층 가량이 평균이라고 할까, 벽돌집이어서 얼핏 보기에 산뜻하지가 않다. '저 건물들을 전에 포로로 잡혀 온 일본의 관동군 장병들이 지어 놓았나?" 민수는 2차 대전이 끝나자 소련이 만주에 있던 일본군을 끌어다가 강제 노동을 시켜 집을 지은 일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차는 이윽고 코스모푸카야 신문사의 현관에서 멎었다. 미터에 적힌 대로 요금을 치른 민수는 수위실에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그 신문사의 파브로프 과학부장이다. "아, 그래요. 여기까지 찾아 오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소. 곧 내려가겠습니다." 뜻밖에도 친절한 대답이었다. 한참 후에 땅딸막한 파브로프가 층층대를 내려온다. 민수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파브로프도 반갑게 악수를 한다. 민수는 그리고선 명함을 꺼내서 주었다. "한국의 국민신보 과학부 기자이시라니 반갑습니다. 우선 식당으로 가서 얘기를 들어 봅시다." 파브로프는 앞장 서서 걷는다. 민수는 뒤따르면서 소련의 신문 기자도 소탈한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은 지하실에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더듬더듬 의사 소통을 시작했다. "시베리아의 농업 사업을 자세히 알려고 왔습니다. 취재의 편의를 좀 제공해 주십쇼." 민수는 간곡한 말투로 부탁했다. "제공하구 말구요. 우선 호텔을 정해야 될 텐데, 프레스 클럽에 방이 있을 테니 거기서 머무르는 게 가장 편할 거요." 파브로프는 차를 시키고 일어서더니 성급히도 전화를 들어 프레스 클럽을 불러대고 방을 부탁한다. "방이 예약되었으니 그리로 가서 쉬십쇼. 나는 일을 마치고 나서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는 우물쭈물하는 성깔이 아닌 모양이었다. 커피도 후루룩 마시고 나더니 금방 민수를 재촉하다시피 일어선다. 사무적인 편이 고마울 뿐이었다. 민수는 안내해 주는 대로 프레스 클럽의 3층 303호실에 들었다. 파브로프가 나간 뒤, 김민수는 수화기를 번쩍 들고 한국의 정보부 과학부 전화 번호를 댔다. 국제 전화는 30분이 넘어 때르릉 걸려 왔다. "과학부장이십니까? 나 김민수요. 무사히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여 코스모푸카야 신문의 파브로프 과학부장의 안내로 프레스 클럽 3층 303호실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일보에서 농업 기술 취재를 하러 왔다니까 아주 반기더군요." 민수의 전화 보고를 들은 강 윤식 과장은 제법 신문사 과학부장답게 일러 준다. "취재를 똑똑히 하게. 농업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상 관계도 곁들어서 잊지 말도록…… 그럼 몸조심하게." 국제 전화는 도청되기 쉽다. 민수와 과학부장은 겉으로는 태연히 취재 연락을 주고 받았으나, 호흡에서 느끼는 체온은 사뭇 다르다. 이날 저녁 파브로프가 찾아 와서 두 사람은 취재 스케줄을 함께 짰다. 파브로프는 시베리아에서 제일가는 과수원을 보이고 싶은 눈치였다. 과수원, 농과대학 그리고 농장과 조림(造林) 지대를 그는 천거했다. 민수는 마다할 까닭이 없다. 차례로 예정표를 짜면서 그는 이왕이면 농업기상관측소도 구경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 참, 그것을 잊었었군. 농업기상관측소도 보고 시베리아 제일의 하바로프스크 기상대도 꼭 둘러 보십시오." 파브로프라는 사나이는 어디까지나 호인이었다. 초면에도 서먹서먹한 점이 전혀 없으며 자기는 독일의 대학원에서 지질학을 연구한 적이 있는 만큼 외국인과의 접촉이 많았다고 자랑한다. 두 젊은이는 과학 특히, 농업과학이 장차는 공장 규모로 일관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 합의하며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헤어졌다.   하바로프스크 천문대   민수는 잠자리에 들어 고상고상 작전을 꾸몄다. '아무래도 기상대를 중심으로 수소문해야겠다. 과수원이니 농과대학은 사실상 흥미없는 일이다. 기상대의 젊은 실무자를 붙잡고 물어보아야겠다.' 침대 속에서 소리치다가 또 눈을 뜨며 노루잠으로 하루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이튿날부터 파브로프의 안내로 각 기관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한다. 그러나 민수의 마음은 마지막 날에 가기로 된 기상대의 취재에만 정신이 쏠려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1주일 후, 민수는 파브로프와 함께 하바로프스크 기상대를 찾아 갔다. "한국의 신문기자 김민수올시다. 잘 부탁합니다." 민수가 천연스럽게 인사하자 기상대장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퍼뜩 스쳐갔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기상대장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지만 민수의 마음에 비친 야릇한 심중은 지울 도리가 없다. 송수신 시설, 관측기재 등을 일일이 구경하면서 민수는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며 예보국장 성하룡의 모습을 찾았다. 하바로프스크 기상대는 과연 훌륭한 시설이었다. 고저(高低) 기압의 위치, 시도(示度), 진행 방향, 속도, 등압선과 불연속선의 위치 등을 전자계산기로 계산해서 수치(數値) 예보를 하고 있었다. 태풍이나 허리케인의 진행 방향을 수치 예보해 온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천기도를 수치 예보로 바꿔 보려는 꿈을 여러 나라의 기상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겨우 실용화된 것이다. 민수는 국제방송과에 들렀을 때, 젊은 실무자를 붙들고 물었다. "대한민국으로 나가는 기상 방송은 어디서 합니까?" 계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 송신기를 가리키면서, "이 기계올시다."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서는 송신 테이프의 키를 계속 두들기고만 있다. '말을 붙일 틈도 주지 않는구나. 이 일을 어떻게 한담?' 민수는 몸이 달았다. 그리고선 다시 목소리를 추스르며, "여기에는 어느 나라 연구원이 주재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일본, 중국, 미국, 그리고 한국의 교환연구원이 와 있지요." 그 젊은 계원은 귀찮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아, 그렇습니까." 민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 속에서는 번쩍 불이 튀었다. '한국에서 연구원이 와 있을 턱이 있나, 그 사람이야말로 예보국장임에 틀림없으리라.' 민수는 기상대장에게 이 일을 추궁해 볼 작정으로 건성으로 돌아보았다. 층층대를 돌아서 긴 낭하를 지나칠 때, 민수는 무심코 반쯤 문이 열린 방안을 훔쳐 보았다. 아아! 거기에는 눈익은 예보국장 성하룡이 책상 머리에서 책을 들여다 보고 있지 않는가! 김민수는 순간 멈칫 걸음이 떼이지 않았다. 청년 김민수는 순간 망설였다. '예보국장을 본 이상, 당장에 알은 체 할 것인가, 또는 일단 지나친 뒤에 연락을 취할 것인가?' 그의 머리 속에선 번개처럼 판단이 맴돌았다. 민수는 언뜻 기상대장의 눈치를 훔쳐 보았다. 기상대장은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아니다. 기회를 놓쳐버릴 염려가 있다. 여기서 단번에 결판을 지어야 돼.' 민수는 마음먹자 문을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성하룡 예보국장님! 안녕하셨어요, 저는 한국에서 온 국민일보 특파원입니다. 소식이 없어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민수가 우리말로 인사하자 그는 깜짝 놀란 낯빛으로 변했다. 소스라치게 놀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예보국장은 이내 목소리를 추스리며 태연히 말했다. "그러세요. 반갑기 짝이 없소.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찾아 왔습니까?" "대강 짐작이 갔어요. 선생님은 식물 자력선 연구의 권위이시라니까 짐작할만 하죠." 김민수는 짧게 잘라서 말한 뒤, 금방 코스모푸카야 신문의 과학부장 파브로프를 성하룡에게 소개했다. "그렇습니까. 그런 훌륭한 분이 여기에 와 계시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좀 있다가 점심이나 같이 하면서 식물 자력선 얘기를 들어 봅시다. 한 바퀴 돌고 오겠어요." 파브로프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하지요. 기다리겠습니다." 예보국장과 파브로프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민수는 마음 속으로 쾌재(快哉)를 불렀다. 어떻게 해서 예보국장을 끌어 낼 구실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던 참에 마침 안성맞춤이다. 하바로프스크 기상대장은 속으로는 어쨋든 헤살을 놓을 수도 또한 그런 생각을 내색할 겨를조차 없었다. 김민수는 방에서 나와 앞장서며 안내해 주는 기상대장의 설명을 건성으로 듣고만 있었다. 얼마 후에, 기상대장에게 깎듯이 작별 인사를 한 김민수는 파브로프가 운진하는 자동차 속에 성하룡 예보국장과 함께 타고 있었다. 차는 오른편으로 멀리 부두(埠頭)를 바라보면서 경쾌하게 달린다. 6월의 시원한 바람이 반쯤 열린 창문으로부터 마구 들이친다.   탈출 모의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요. 어떻게 여기까지 끌려 왔습니까. 청장님이 여간 걱정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것도 모두 우리 나라의 과학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수고라고 생각하면 뭐 대단한 건 없지요. 그래 미스터 김은 이곳에 온지 오래 됩니까?" "2주일밖엔 되지 않아요. 국장님을 만나 뵈려고 딴엔 무척 애를 썼습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자동차는 어느덧 아담한 이층 건물 앞에 다다랐다. "자, 여러분 내립시다. 이 식당은 하바로프스크에서도 유명한 달팽이 요리집입니다. 예보국장을 위해 특별 대접하는 겁니다." 파브로프는 해맑게 웃으며 먼저 내려선다. 두 한국인이 그의 뒤를 따라 식당에 들어서니, 과연 진미(珍味) 요리집 못지 않게 홀의 장식이 고전적이다. 벽에는 페르샤 융단에 수놓은 고궁의 그림이 걸려 있고 검은 털이 생생한 곰의 박제(剝製)도 진열되어 있다. 파브로프는 두리번거리는 그들을 안내하여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하고 있는 손님들이 제법 점잖아 보인다. 이 식당은 외국인용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웨이트레스가 시중을 들어준다고 파브로프가 일러 주었다. 일행은 달팽이 요리를 주문했다. "아까 식물 자력선을 연구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예보국장님은 그 가능성을 믿고 계십니까?" 파브로프가 먼저 얘기를 끄집어 냈다. "믿구말구요. 당신네들 서양사람들은 광물성에만 너무 치중했지 식물의 신비한 기능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애요. 식물에 왜 자력선이 없겠어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참,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식물이 어떻게 전기 작용을 일으킨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처음 듣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실제로 연구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이곳까지 온 까닭도 따지고 보면 툰드라와 같은 한대 식물의 자력선을 연구해 볼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자 김민수는 속으로, '이 양반이 무슨 흰소리를 하나. 그래 납치되어 온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국경을 넘어 왔단 말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연구의 성과를 어느 정도인지 묻고 있는 게 아니죠. 제가 묻고 있는 초점은 식물이 무슨 힘으로 전기력를 발생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파브로프가 적이 초조하게 묻자 성하룡은 빙그레 웃으면서 천연스럽게 말한다. "우리는 대기권의 온도차와 기압차(氣壓차)로 말미암아 허리케인이나 태풍과 같은 무서운 힘이 생기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소 폭탄의 수 배나 되는 위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는 식물을 포함해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기력에 공명하는 식물 자체의 전기력을 왜 인정 못해요. 거기에는 수분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오. 그 양을 수적으로 표시하자면 다소 복잡해지지만 식물 자력선의 근원은 역시 대기층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성하룡이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 문제의 달팽이 요리가 나왔다. "퍽 흥미있는 테마라고 생각됩니다. 음식이 식기 전에 먼저 듭시다." 파브로프는 약간 슬기로운 말투로 권하면서 먼저 꼬챙이를 들었다. 철사로 된 꼬챙이를 소라딱지만한 달팽이집의 어귀에 쑤셔넣고 끌어내지 않는가! 두 한국인은 말없이 그의 솜씨만 지켜 보고 있다. 파브로프는 사리사리 끌어 낸 달팽이 한 마리를 쏘스에 찍어서 탐스럽게 입으로 가져간다. 두 사람도 그대로 흉내를 내며 달평이를 내어 씹어 봤다. 살짝 데힌 그 놈이 징그러운 생각보다는 훨씬 구수하다. 마치 소라를 씹을 때처럼 졸깃한 입맛이 있다. "달팽이 요리도 그렇게 볼 게 아닌데요." 하고 김민수는 솔직히 감탄를 털어 놓았다. "이건 일부러 먹기 위해서 깨끗이 양식한 달팽이니까 별식으로선 치는 음식이죠." 파브로프는 설명하면서도 연방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다. 김민수는 식사를 들면서 슬며시 손님들의 움직임을 살펴 보았다. 손님들은 거의가 나이깨나 먹은 층이었다. 늙은 부부가 마주 앉아서 평화롭게 포크를 움직이고 있는 옆자리에 앉은 한 청년의 눈초리가 아무래도 수상하게 느껴졌다. 움펑눈이 김민수의 눈과 자주 마주친다. 외국인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에 앞서 민수는 직업 의식 때문에 본능적으로 혹 감시를 받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혹 감시를 받고 있다면 벌써 수배가 되었을까?' 민수는 시베리아에서 만들어 냈다는 사과를 먹으면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 자리에서 성하룡 예보국장을 그대로 빼돌려 도망갈 순 없을까? 그 어떠한 묘안은 없을까? ' 민수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화장실로 갔다. 노크를 해 본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대변소의 문을 꼭 잠그고 한참 동안 생각 끝에 주머니에서 가루약을 꺼냈다 화장실은 예상한 대로 수세(水洗)식이었다. 거기에는 흘러내리는 오물을 모으는 탱크가 분명히 땅 속에 묻혀 있으리라! 민수는 긴장한 얼굴로 상당한 양의 가루약을 물에 풀어서 내려 보냈다. 흰색 가루약은 세차게 내려오는 물에 씻겨서 구멍을 타고 내려가 버렸다. 민수는 그제야 대변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세면대에서 손을 깨끗이 씻고 맞은 편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고 싱긋이 웃어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민수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태연스럽게 돌아와서 시치미를 떼고 제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아직도 식물 자력선 얘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곁눈질로 험상궂은 움펑눈이를 살펴보니 그는 먼산을 바라보듯 벽의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민수는 한없이 헤아려 봤다. '과연 오물 탱크가 파묻혀 있을까? 만일 보통 설계대로 있기만 하다면 그 속의 메탄가스가 무섭게 폭발할 거야.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겠지.' 이러한 생각을 하며 그는 속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파브로프의 얼굴만 지켜보고 있었다.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가 화장실에서 뿌린 흰 가루약은 냄새도 나지 않는 산화제(酸化劑)이다. 그 약은 국립화학연구소의 특별연구반이 정보부의 위촉을 받아 비밀리에 만들어낸 메탄가스의 폭발 촉진제이다. 민수는 속으로 1초, 2초, 3초하며 헤아리면서 오직 그 효과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예보국장 성하룡이 신이 나서 손짓을 하며 우주선과 식물의 자력선의 유사점을 설명하고 있을 때, 별안간 꽝! 하는 폭음이 터졌다. 꽝! 꿍꽝! 와그르르…… 폭발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고 식당 안은 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람 살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연기 속을 헤매는 부인과 아이들! 변소가 폭발하는 바람에 불이 붙어 연기가 삽시간에 휘돌았다. 민수는 재빨리 예보과장의 손목을 붙잡고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입구를 향하여 탈출하려고 허덕였지만 불길과 연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플라스틱 제품으로 말짱 장식해 놓았기 때문에 거기에 불이 붙어 무서운 독(毒)가스를 내뿜는다. 민수는 그럴수록 정신을 가다듬으며 예보국장의 손목을 더욱 굳세게 붙잡고 입구를 향하며 달음박질했다. 두 사람, 아니 모든 사람들이 한 손으로 연기를 가리면서 뛰어간다. 민수가 가까스로 문 밖으로 나왔을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코 속이 싸하게 매큼하다. 독한 기운이 무섭게 코청을 찌르는 것을 느끼자, 김민수는 의식을 잃고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젊은 간호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김민수는 머리가 쑤시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되찾았다. 도무지 생각이 옹송망송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걷잡을 수가 없다. 머리를 만져보니 붕대로 동여매고 있었다. 분명히 식당에서 탈출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가스 냄새에 중독이 되어 쓰러진 뒤, 어떻게 되었을까? "정신이 났습니까? 참 다행이에요. 미스터 김은 다행이어요." 김민수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온 젊은 여자 간호원이 기쁘다는 듯 중얼거린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민수는 물었다. "대단치는 않아요. 화재 현장에서 가스 중독이 된 거에요. 이젠 안심하셔도 돼요." 여자 간호원은 상냥스럽게 일러 주면서 민수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본다. "예보국장님과 파브로프는 어떻게 됐죠?" "아, 모두 무사합니다. 가벼운 중독으로 한 때 실신했을 따름이에요. 저 편 침대에 누워 있지 않습니까?" 간호원이 가리키는 곳에 성하룡이 역시 머리를 동여맨 채로 누워 있었다. 그의 의식은 아직도 흐리멍텅한 모양이다. 눈을 감은 채 아무 대꾸도 없다. "파브로프는?" "벌써 깨어나서 출근했어요." 여자 간호원이 웃어 보인다. 영락없이 밤볼진 얼굴에 보조개가 더욱 정답다. 그녀의 나이는 23, 24세 쯤일까. 어딘지 모르게 동양인다운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병원에서 이틀이 지났다. 성하룡 예보국장도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다. "혼날 뻔 했어. 객지에서 개죽음할 뻔 했지, 핫하하하." 예보국장은 쓴웃음을 일부러 웃어 보인다. 간호원의 이름은 유린 가고파라고 했다. 그녀는 김민수가 한국 사람인 줄 알고 더욱 친절히 대해 주었다. 밤이면 침대 옆에 앉아서 이런 얘기도 했다. "저의 할아버지는 한국 사람이래요. 아무튼 일제 시대에 만주의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쫓기고 쫓겨서 시베리아로 도망왔대요. 처음엔 치타 정부와 독립군의 사이가 좋았는데, 1921년 6월에 소련 정부가 일본과 협정을 맺어 독립군을 무장 해제 시켰다지 않아요. 조선 독립군은 그 때 흑룡강(黑龍江) 자유 시에서 반항했는데, 이 때 저의 할아버지 김한성은 포로가 되어 나중엔 소련에 귀화하고 말았대요. 어머니는 소련인이였어요." 김민수는 귀가 솔깃했다. 해방 전의 독립 투사의 손녀를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는 무릎을 칠 만큼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 "이것도 모두 선현(先賢)이 맺어 준 인연인가 봅니다. 나는 신문 기자이지만 저 분은 한국의 훌륭한 과학자이지요.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김민수는 젊은 간호원에게 호소했다. 아무리 세상이 너그럽다고 해도 소련의 소방대원들이 화재와 폭발의 원인을 조사않을 리 없다. 산화제를 써서 화장실의 지하 탱크를 폭발한 사실이 드러나는 날이면 민수의 정체도 밝혀져 재미없는 일이 생긴다. 민수는 하느님의 덕분으로 만나게 된 이 한국계 간호원의 가냘픈 팔에 매달려야 겠다는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 올랐다. 머리의 붕대를 풀던 날, 김민수는 넌즈시 그녀를 꼬여 뒤뜰을 산책했다. "미스 유린, 성이 가고파라니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을까. 나는 신문 기자이니까 상관이 없지만, 그 예보국장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소. 제발 우리를 도와주시오. 우리를 비행장까지 안내해 주시오. 안내만 해 주면 고맙겠소." 나란히 거닐면서 김민수는 애타는 소리로 애원했다. 젊은 여인은 민수의 두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더니 별안간 이슬같은 눈물이 눈시울에 맺힌다. '이 한국 사람들은 죄인이 아닐 텐데, 분명히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할아버지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그녀의 가슴을 메우는 감상이 어느 듯 동정의 눈물을 자아낸 것이었다. 김민수는 그녀의 두 손을 쥐고 "꼭 부탁해요." 하며, 힘을 주었다. 그녀는 말 대신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보였다.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속담이 있는데, 미스 유린! 오늘밤에 부탁해요. 네?" "오늘 밤에요?"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랜다. "결코 폐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까." 미혼(未婚)의 젊은 두 남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통할 수 없는 감정이고 심정일 게다. 김민수는 강다짐을 하다시피 밤 9시에 병원을 탈출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예보국장님, 오늘 밤에 병원을 떠납시다. 뒤가 시끄러을 것 같으니 비행장으로 갑시다. 저는 정보부 과학과원이오." 성하룡은 이 말을 듣자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납치되고 다시 납치되다시피 탈출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이구나……' "가야지." 성하룡은 눈을 뜨며 절로 다짐한다. 그날 밤, 세 사람은 조심스레 빠져나와 뒤뜰에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에 올랐다. 매끈한 시동(Smooth start)으로 자동차는 굴러 간다. 미스 유린이 운전했다. 그녀가 지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큰 길로 나오자, 그들은 전속력으로 비행장을 향하여 줄달음쳤다. 차는 밝은 시가를 지나쳐 교외로 달린다. 숨을 죽이며 비행장에 이르렀을 적엔 하늘에 별이 총총하고 초생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유린 가고파 양의 검은 머리카락은 가지런하다고 할까 차라리 함초롬하다. 그녀가 기를 쓰고 몰아대는 자동차는 비행장의 가장자리를 휘뜰휘뜰 돌아서 어떤 경비행기 옆에서 급정거했다. 유린 양은 엔진을 끄고나서 손짓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 그대로 세 사람의 그림자는 잽싸게 움직여 벌써 비행기의 트랩을 차례로 밟고 있었다. 저마다 가슴은 두근거릴 뿐 도무지 말이 없다. 숨을 죽이고 신경만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먼저 조종석에 들어선 유린 양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말을 끄집어 냈다. "자, 이 비행기로 탈출하면 돼요. 미스터 김은 비행기 조종을 할 수 있나요?" "허허……" 김민수는 대답 대신에 웃어 보였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고 제도가 다르다고 할망정 한국에서는 이미 비행기 조종의 유행 시대는 한 물 간 뒤였기 때문이다. 해방 전에는 자전거 타기가 유행하고 60년대부터는 자동차 부리기가 유행하더니 21세기에 들어설 무렵부터 비행기 조종이 대중 스포츠로 등장하고 요즘은 도리어 원시적인 요트 열이 한창이다 "그렇지만 미스터 김은 이 나라의 항공부호를 알지 못할 테니까 이 일을 어떻게 한담." 유린 가고파 양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못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염려마세요. 부호나 약호만 적어 주면 요령껏 빠져나갈 테니 어서 내리세요." 김민수는 주머니에서 종이와 볼펜을 꺼내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야, 아무리 조종술이 우수하다고 해도 부호를 모르면 관제탑의 의심을 받아요." 유린양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김민수의 소매를 끌고 출입문 쪽으로 갔다. 가만한 말로 속삭인다. "당신은 내가 대한 민국으로 가면 신분을 보장해 줄 수 있어요? 나를 안동하지 않고서는 여기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성심껏 도와 드리려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유린양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깜박이지도 않은 채 뚫어지게 김민수의 눈동자를 쳐다본다. 김민수는 순간 당황했다. 자기를 버리고 한국인을 도와 주겠다는 이 어여쁜 간호원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 마음은 또한 어떤 것일까? 혹, 엉뚱하게 그녀는 소련 공작원이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고맙소. 고마워요. 그렇게까지 우리를 위해 주신다니 은혜는 기어이 갚으리다." 김민수는 유린 양의 두 손목을 꼭 쥐고 그녀의 성의를 받아 들였다. 손목에서는 따스한 기운이 달아 오르고 있었다. '한 시가 바쁘다. 우선 한국땅까지 국경을 넘어 놓고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김민수는 서슴없이 조종석으로 되돌아 와서 비행기에 전원(電源)을 넣었다. 엔진을 걸려는 참이다. 그런데 출입문과 트랩을 걷어 올리고 돌아온 유린 가고파 양이 싱긋이 웃으며 김민수의 어깨를 밀치는 것이 아닌가! 조종석에서 비켜 달라는 눈치다. "이 나라의 국경까지는 내가 비행기를 몰을 게요. 미스터 김은 하늘에선 벙어리일 텐테. 홋호호." 티없이 해맑은 웃음소리엔 만만한 자신이 어려 있었다. 김민수와 바꿔 앉은 유린 가고파 양은 익숙한 솜씨로 차례차례 스위치를 넣고 발동을 걸어간다. 그리고선 레시버를 머리에 끼고 관제탑을 부른다. "관제탑. 여기는 민간 항공기 R3호. 블라디보스톡을 떠날 예정. 오버." "R3호기. 17번 활주로를 쓰시오. 오버." 관제탑에서는 금방 지시가 내렸다. 세 사람이 탄 비행기는 제자리에서 서서히 빠져나와 활주로를 누비며 17번 활주로를 찾아 갔다. 엔진 소리는 경쾌하게 밤 하늘에 울리고 가솔린의 양을 가리키는 계기의 바늘도 안심할 만 했다. 누구의 비행기인지 훔치는 게 오히려 쑥스러울 분위기이다. 유린 양은 이윽고 17번 활주로 앞에서 다시 마이크 연락을 했다. "R3호기 출발 준비 완료. 오버." "R3호기 출발해도 좋다. 고도(高度)는 2,500 피트. 풍향은 서남풍. 풍력은 3. 안전 비행을 바란다. " 부르릉거리는 프로펠러 소리는 한결 요란하게 급회전하기 시작하고 R3호기는 가볍게 꽁무니를 들추었다. 양력(揚力)을 얻어가며 질주하는 비행기의 날파람에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선 붉은 신호등이 뒤쪽을 보고 줄달음친다. 이윽고 서부렁섭적 땅을 뜬 R3호기는 기수를 비스듬히 쳐들고 밤 하늘을 향하여 한 달음에 쏜살같이 솟아 을랐다. 정해진 2,500 피트의 고도를 잡은 유린 양은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거요. 서쪽으로 20분만 날면 만주땅으로 빠질 텐데…… 궁금했던 모양인가 예보국장 성하룡이 묻는다. "국장님. 그런 눈치도 없으세요. 중국으로 빠지면 항공관제가 더 귀찮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남쪽으로 날아가다가 방향을 살짝 서쪽으로 바꾸면 이내 한국 땅으로 넘어 가요." 젊은 간호원이 시원스럽게 말하는 투에 질렸는지 예보국장은 덤덤히 앉아 있을 뿐이다. 비록 무사히 이륙은 했으나 시간은 벌써 10시를 5분이나 넘어 있다. 환자들이 자취를 감춘 일이 이젠 드러났으리라. 발칵 뒤집힌 병원의 소란을 상상만 해도 김민수의 마음은 조마조마한 한편 제법 통쾌하기도 했다. 세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 채 별 말이 없었다. 1시간 남짓 비행하다가 유린 양이 레시버를 풀어 김민수에게 건네 주었다. 방스레 웃으면서. 민수가 모처럼 붙잡은 조종간의 촉감은 차가웠다. 차라리 자릿한 만족감 같은 것이 온 몸에 전해 왔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꺾어야겠어." 민수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항로를 바꿨다. 그는 달빛에 아스라이 반짝이는 싱카이호(湖)의 넓은 호수를 발치 밑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김민수는 거기서부터 만주와 소련의 국경을 조금 서쪽으로 쏠리면서 남하해 갔다. 그의 머리 속에는 나진(羅津)과 청진(淸津)의 두 비행장이 교대로 오버랩 되었다. 어느 비행장에 내리거나 상관은 없겠지만 신문사에서 냄새를 맡으면 귀찮은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만 같아서이다. 그는 도리어 넓고 번잡한 청진 비행장을 고르고 허리를 구부리며 연료 계기를 들여다 보았다.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는 청진까지 빠듯하다. "예보국장님, 청진으로 가겠습니다." 민수는 뒤를 돌아보며 일러 주었다. 예보국장은 두 눈을 감은 채로 "아무렴." 하고 한 마디 할 따름이다. 다행히 뒤를 쫓아 오는 비행기는 없었다. R3호기는 고도를 3,500 피트까지 높이 뜨며 드디어 두만강을 넘어섰다. 한반도로 들어서자 민수의 긴장했던 어깨가 저절로 풀렸다. "유린 양, 정말로 고맙소. 이젠 우리들의 조국으로 들어섰으니 안심하시오. 이제 청진 항공국과 콘택트 하겠어." 민수가 건네는 말을 듣고 유린 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아랑곳없다는 시늉을 한다. 자칫 잘못하면 추격하는 전투기의 총알을 맞을는지도 모르는 모험이었건만 간이 큰 이 젊은 간호원은 마치 이웃 도시에라도 날아가는 양 시종 태연하다.   청진 비행장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시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김민수는 생각했다. "SRCK ! SRCK ! 여기는 R3호라는 소련 국적의 민간 비행기요. 청진 비행장까지의 항로 지시를 요망함. 오버." 민수가 부르고 있는 SRCK는 청진 항공국의 호출 부호이다. "여기는 SRCK. 항로를 서미남(西微南) 15도로 고치시오. 오버." 아주 사무적인 쌀쌀한 말투의 회답이 레시버의 음향판을 울린다. 항공국 직원이 R3호기의 사정을 알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한국말에 어려 있는 믿음의 마음은 외로울수록 한결 간절하게 들려오는 법. 김민수가 내다보는 밤중의 강산은 드문드문 켜진 민가의 등불과 멀리 내려다보이는 붉은 항공 표지등 밖에는 온갖 생명이 숨을 죽인 채 깔려 있을 뿐이다. 조종석와 계기판에서는 항로의 방향을 잡아 주는 신호가 '삑삑'하며 규칙적으로 파랑불을 켜 주고 있다. 30분이 지나고 다시 30분이 지날 무렵 밤 하늘에 훤하게 비치는 불빛의 바다가 멀리 바라보였다. 청진 비행장 상공에 다다른 것이다. 활주로의 표지등이며 써치라이트의 눈부신 흰빛은 어느 비행장과 다름이 없었건만 유린 양은 그래도 호기심에서인지 자리에서 일어서서 눈시울을 조리며 굽어보면서 말했다. "꽤 큰 비행장인 듯 해요. 미스터 김." "한국에서 여덟 번째 가는 비행장이죠.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송 기지이기도 합니다. " 김민수는 보라는 듯이 집게손가락으로 불빛이 훤한 쪽의 항만을 가리켰다. 그리고선 R3호기는 착륙 준비를 서둘렀다. "청진 관제탑, 여기는 R3호기. 착륙 준비 완료. 오버." "R3호기, 12번 활주로를 쓰시오. 자동 착륙 장치를 사용하도록. 오버." 그들은 관제탑의 지시대로 적외선(赤外線)으로 인도되는 자동 착륙으로 들어갔다. 기체는 이윽고 거뜬히 내려 앉았다. 민수는 비행기를 공항의 출입구에 가까운 구석으로 몰고 가서 발동을 껐다. 그리고선 한 번 크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예보국장을 돌아보았다. "다 온 거요! 비행기가 편리하긴 하군." 성하룡은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의 벨트를 고르고 바지의 먼지를 털었다. 세 사람은 차례로 비행기를 내려 공항 사무소 쪽으로 걸어 갔다. 기다리고 있던 공항 직원은 아닌 밤중에 도착한 소련 여자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잠깐 연락할 곳이 있으니 사무실로 들어갑시다." 민수는 먼저 말을 건네며 젊은 직원을 안동하고 공항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고 휘황한 전등빛만이 눈부시다. 시계는 새벽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정보부 과학과원이오. 청진 비행장에 내린 것은 곡절이 있으니 그리 알으시오." 민수는 타이르고 나서 전화통을 들고 정보부의 청진부를 불렀다. "나는 김민수인데 누구시오? 오, 장기환군인가. 숙직인 모양이군. 여긴 비행장인데 빨리 공항 사무실까지 와 주게. 손님이 두 분이 있어. 오케이." 수화기를 천천히 놓으면서 민수는 창 너머에 서 있는 유린 가고파 양을 새삼스럽게 관찰해 보았다.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서 무척 크게 느껴졌던 그녀의 몸매가 실상은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알맞게 내민 유방이며 날씬한 허리에 놀랍게도 그녀는 단화(短靴)를 신고 있었다. 공항 직원은 어리둥절한 채 민수와 외국 여인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기웃거릴 따름이었다. 한참만에 장기환이 차를 몰고 기운차게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자 민수의 손목을 쥐고 굳게 악수를 한다. "사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시장할 테니 우선 식사를 해야죠. 시내의 올나이트 식당으로 갑시다. 서울행 여객기는 새벽 4시에 있습니다. 어서 식당으로 갑시다." 장기환이 설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그의 차에 올라 쏜살같이 시내를 향해 넓은 국도를 마구 달린다. 예보국장 성하룡이 이날 아침 서울로 돌아온 소식은 기상청이나 가족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예보국장의 수난   하루 종일 푹 쉰 예보국장은 떼꾼했던 표정이 가시고 좀 상기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보부 과학과장 강윤식은 걱정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생각할수록 꿈같은 얘기입니다. 아 금강산에서 볼 일을 마치고 식물 자력선 연구소를 나오지 않았어요. 정거장까지 전송하겠다는 김철수 박사를 굳이 보내고 혼자서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네 산모퉁이로 접어들자 난데 없이 코 큰 사람 두 명이 불쑥 들이닥치면서 내 팔을 붙들지 않겠어요. 가슴이 덜렁 내려 않더군요. 웬 사람들이냐고 고함을 꽥 질렀더니 예보국장이 아니냐고 영어로 묻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짓을 했어요. 아니라고 잡아 떼면 그만인 것을 고지식하게도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대기시켜 놓았던 자동차로 끌고 가요. 처음엔 웬 미국인이 이렇게도 난폭할까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예보국장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넋없이 말을 이었다. 과학과장실에는 단 둘이 마주 앉아 있을 뿐이다. 과학과장은 가끔 펜으로 메모하고 있었다. "놈들은 한참 달리다가 주머니에서 박카스 병만한 것을 세 개 꺼내더니 한 놈이 뚜껑을 열고 꿀꺽 마시더군요. 시원할 테니 나에게도 마시라는 거예요. 괜찮다고 사양해도 굳이 마시라는 바람에 마지 못해 한 모금 마셨더니 그만 정신이 핑 돌고 말았어요. 까무라친 거지요. 그 후, 어떻게 됐는지 통 기억이 없어 어렴풋하게 제정신이 돌아왔을 적엔 어떤 호텔의 침대 위에 누워 있더군요. 장소가 어딘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종잡을 수 없는 판인데 머리는 띵해요. 한 놈이 나타나더니 제법 공손하게 일러 주더군. 국장님, 여기는 중강진(中江鎭)인데 본청에 소재를 연락하시라구. 전화통을 안겨주는 바람에 연락을 할 수는 있었으나 옆에서 노려보는 서슬에 더 이상 자상한 얘기는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중강진 기상대에는 들르지 않았군요." 과학과장이 미심쩍게 묻는다. "그럼요. 기상대에 들르면 우리 직원들이 가만히 있었을라구. 놈들이 적어 준 쪽지대로 읽었을 따름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온몸의 기운이나 정신이 아련하여 반항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조직적인 생각이 꾸며지지 않아요." "아마도 그 약기운인가 보죠." "그럴지도 몰라요. 나는 상대방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무척 겁이 났어요. 그런데 하루는 유고미크라고 자칭하는 놈이 소련으로 가자고 꾀는 거예요.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처럼 못살게 구느냐고 따졌더니, 놈은 아주 겸연쩍은 표정으로 상부의 지시라고만 잡아 떼요. 상부는 아마도 당신에게 식물 자력선에 관한 연구를 도와드릴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만 일러 주더군요. 혼자서 생각했어요. 타산을 해보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장차 툰드라 식물의 자력선 연구를 기어이 해볼 작정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기상청의 일을 팽개칠 수는 없다는 생각. 두 가지 생각을 저울질해 보았으나, 당장에 탈출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주사위를 던져 본 거죠. 기왕에 젖은 몸 차라리 소련으로 들어가서 식물 자력선 연구를 계속해 보자는 배짱이 생겨요. 욕심이지요. 그래도 겁이 나서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신신 부탁했죠. 그랬더니, 한 놈은 줄곧 윗도리의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겨누면서 감시하지 않아요. 바보처럼 줄줄 끌려 갔을 따름이오." 예보국장은 대충 경위를 설명했다. "딱한 상황엔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성 국장은 식물 자력선을 좀더 연구해 보려는 개인적인 욕심이 앞서지는 않았을까요?" 강 과장은 예보국장의 표정을 지긋이 훑어 보며 묻는다. "하기야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지 않아요. 나는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이바지하려는 욕심에서……" 과학과장은 예보국장의 말을 가로 막으며 느닷없이 책상을 탁 치고 일어서며 호통을 쳤다. "뭐요? 과학엔 국경이 없다구요! 무슨 뜻이죠. 어림도 없는 생각!" 서슬에 성하룡은 질겁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본 들 잘못된 일은 없는데…… "그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씀이오." 예보국장도 굽히지 않고 한 마디 했다. 두 사람의 논쟁이 대짜배기로 벌어졌을 때, 공교롭게도 찌르릉하고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는 과학부장으로부터 걸려 왔다. "예보국장이 무사히 돌아 왔으니 천만 다행이오. 그만한 과학자를 앙성하려면 40년이나 걸리니 강(姜) 과장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마시오. 내 부탁이오." "네, 염려 마시오. 형식적인 사무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강윤직은 수화기를 놓고 예보국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국장님, 과학에 국경이 있나 없나 하는 문제는 언젠가 심포지움에서 토론하기로 합시다.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십쇼." "먼저 기상청에 연락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어요. 전화 좀 씁시다." 성하룡은 박상문 기상청장을 불렀다. "이게 웬 일이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도무지 꿈 같기만 하오. 어서 기상청으로 오시오……" 기상청장이 반색하며 말하는 소리가 쨍쨍 울린다. 성하룡은 정보부에서 태워준 차를 타고 기상청으로 직행했다. 예보국장의 모습을 본 기상청은 발칵 뒤집혔다. 현관의 수위실로부터 청장실까지 마치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나는 듯한 흥분이 삽시간에 휩쓸었다. "정말로 놀랬어. 도대체 도깨비 장난 같아서 앞뒤를 종잡을 수가 있나. 어서 차를 드셔." 박상문 청장은 넘쳐 흐르는 기쁨을 참지 못해 손수 전화통을 들고 예보과장 이기호를 불렀다. "하바로프스크까지 납치된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말라던데요. 소문이 돌면 정보부의 입장이 난처해진대요". 예보국장은 먼저 기상청장에게 못을 박아 놓고 그 동안의 경위를 짧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기상청의 관계 직원들은 우선 예보국장의 건강한 얼굴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허력 에너지   그날로 부터 근 한 달 후, 성하룡의 모습은 다시 금강산의 식물자력연구소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는 과학부 장관에 간청해서 식물 자력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기상청에서는 예보국장을 놓치기 싫어 붙잡았으나 성하룡의 결심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정 그렇다면 조건을 붙입시다. 자력선이 완성된 다음엔 다시 기상청으로 돌아오기로 합시다." 박상문 청장과 예보국장 사이에서 이러한 언약이 맺어졌다. 정보부는 정보부대로 예보국장이 일단 자리를 떠나는 것을 환영했다. 왜냐 하면 법규상 성하룡이 그 자리에 눌러 앉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성하룡이 식물 자력선 연구소로 돌아오자 김철수 박사는 발벗고 환영했다. "구관이 명관이라, 역시 성 형이 일을 완성시켜야죠." 김 소장은 마냥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한 동안 들뜨다시피 했다. 성하룡은 납치 사건의 진동이 가라앉을 무렵부터 식물 자력선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눈독을 들일 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연구인 것을 그 동안 소홀히 한 것을 뉘우치기도 했다. 금강산으로 돌아온 그는 그 때부터 밤과 낮을 가리지 않았다. 늘 두더지처럼 연구실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력선 연구의 초기 시대엔 자력선이 식물 성장에 미치는 영향만에 관심을 기울였었다. 이를테면 식물 자체 내의 자력선이 전자력(電磁力)의 자장에서 세포의 배수체(倍數體)를 마치 진공관에서처럼 증폭(增幅)시키는 현상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었다. 그 연구가 열매를 맺자 그는 다시 세 단계로 식물 자력선 자체를 증폭하여 이를 에너지로서 유도하는 문제에 손을 댄 것이었다. 이 유도(誘導) 문제는 수식상으로는 가능했었다. 성하룡이 이론적인 가능성을 입증한 뒤, 기상청의 요청으로 예보국장에 전임하였기 때문에 연구실에 남은 후배들이 뒤를 이어서 오늘날까지 실험을 계속해 온 것이다. 식물 자력선의 유도 에너지 실험은 그 동안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르 카파 B9호 위성에 송신 변조를 일으킬 만큼 방사력(放射力)이 강한 것으로 발전한 것만은 사실이다. 성하룡은 연구소로 돌아온 뒤부터 그러한 유도 에너지를 레이저 광선에 실어서 먼 데까지 발사하는 실험에 손을 대는 한편, 이론적으로는 식물 자력선이 일종의 허력(虛力) 에너지로 전자(電子)의 흐름과 공명(共鳴)할 때, 그 전자를 소멸시켜버리는 반세계(反世界)론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허력 에너지의 착상은 아주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은하계의 별 속에도 허력 에너지만으로 된 별이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가설(假說)이오. 정 형, 나는 생각컨대, 우리가 그러한 별의 근처로 가면 모든 물질이 그 자리에서 삭아 버릴 것입니다. 녹거나 타거나 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허력 에너지를 쬐면 모양도 없이 삭아 버린단 말씀이에요." 연구소장 김철수 박사는 간간히 연구실에 들러서 자기의 의견을 내놓고 상대방과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다. 이 날도 성하룡의 연구실에 들러 허력 에너지설을 꺼내어 성하룡의 구미를 돋굴 작정인가 보다. "김 박사처럼 이론으로만 따질 수 있는 학자는 부럽습니다. 우리는 생리적으로 실험을 해보지 않으면. 좀이 쑤시니까 탈이죠. 허력 에너지의 가능성을 저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식물 자력선으로부터 완전무결하게 유도하고야 말겠어요." "그 때는 우리들이 인류의 과학사에 아인슈타인 이상으로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는 거지. 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성 형, 그렇게 시험관만 들여다 볼 게 아니라 일도 쉬엄쉬엄 합시다." 김 박사는 실험학자들에게 공통된 버릇을 늘 입버릇처럼 황소같다고 조롱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한 가지 일만 붙잡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코대답만 하기 때문에. 성하룡은 이 날도 금강산의 녹음이 무르녹은 골짜기를 돌아다니면서 색다른 약초를 한 아름 캐어 가지고 돌아와서는 일일이 온상에 옮겨 심었다. 실힘실에는 혹 옛 진시왕(秦始王)이 와서 보면 탐이 나서 목에서 고무래질할 정도로 진기한 약초들이 전기 코일에 감겨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수백만, 수천만 년 동안 말없이 그들만의 생존 투쟁을 계속해 온 식물들의 숨은 에너지가 장차 우주 공간을 통해서 발사되리라는 것만 생각해도 성하룡은 한없는 행복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황홀한 순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유린 가고파 양의 정체   두 사람이 잡담을 주고 받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사환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른다. "소장님, 서울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뭐, 손님? 어떤 분인데." "두 사람이에요. 한 분은 외국 여자이고요. 성 선생님도 계시느냐고 물어 왔어요." "외국 여자?" 가만히 서있던 성하룡이 대뜸 묻는다.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장실까지 가 보니 거기에는 다름 아닌 김민수와 유린 가고파 양이 와 있지 않는가. "놀랬는데. 그거 무슨 소식이라도 던져 주고 찾아 와야지 미리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무고하셨어요." 두 사람은 먼저 굳은 악수를 했다. 성하룡은 가고파 양의 두 손목을 붙씁고 반색을 하며 소파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너 웬 일이냐? 외국 여자까지 데리고." 김 박사는 민수를 보고 나무라듯이 말한다. "소개를 하겠어요. 이 분은 유린 가고파라는 한국계 소련 여잡니다. 지난 번 하바로프스크에 갔을 적에 크게 신세를 진 생명의 은인이죠." 민수는 그리고선 가고파 양에게 "내 형님이니까 인사를 하시지." 하고 권한다. 쑥스럽지 않을 만큼 인사 소개는 이내 끝났다. "그래, 가고파 양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요?" 성하룡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성하룡은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연구소장이 김민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성 형, 아직도 모르셨나. 이 놈은 내 동생이오." "그러시던가요. 미처 몰랐는데…… 세상이 손바닥보다 더 좁아졌어. 핫하하하." 성하룡이 껄껄 웃어대는 바람에 가고파 양도 눈이 휘둥그래져서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릴 따름이다. 네 사람이 이렇게 만날 줄이야 아무도 몰랐으리라. "휴가를 얻어 금강산 구경을 왔지요. 사나흘 묵고 갈래요." "넌 팔자도 좋구나. 외국 여자하고 신선 놀음을 다 할줄 아니. 어서 차를 들거라." "저요, 저는 미스터 김 덕분에 정보부의 동북아시아과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매일 소련과 만주 지방의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일이 퍽 재미나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처럼 살기 좋고 외국인에 대한 인심이 좋길래 할아버지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가 봐요. 금강산도 아주 아름답고 하늘도 가없이 맑고……" 가고파 양이 종달새처럼 지껄이는 말소리 가운데는 그녀의 행복감이 어려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부터 실컷 구경을 하지." 김 박사가 일러 준다. 민수와 가고파 양은 다음 날부터 금강산 관광객에 끼어 폭포며 절이며 이름모를 골짜기며 발길이 가는 대로 구경하며 돌아 다녔다. 가고파 양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지 못하고 그날 그날의 생활에 쫓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가엾은가 하며 한탄하고 있었다. 저 멀리 유럽의 관광객들도 비로봉의 안개구름을 들이마시며 극락에 온 듯 하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의 산 구경을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식물 자력선 연구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연구소를 구경해야죠. 색다른 약초가 많다던데요." 민수가 성하룡을 보고 웃어 보인다. "그야 얼마든지 있지. 따라와요." 성하룡이 앞장서서 연구실 뒷뜰에 있는 온실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가고파 양은 깨알만한 꽃송이가 피어오른 약초의 넓은 잎사귀를 어루만져 보며 삽삽한 푸른빛이 마음에 든다고 아양을 떤다. 온실을 두루 구경하고 그들은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동안 김민수의 눈망울에는 깊숙이 반짝거리는 광채가 늘 따르고 있었다. 가고파 양이 무심코 던지는 눈길을 쫓는 민수의 시선은 쉴 새 없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화까지 훔쳐 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인즉, 민수는 가고파 양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금강산 구경을 꾀한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소련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라면 식물 자력선 연구소를 구경하는 동안 그 무엇인가 이상한 행동을 취하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민수는 가고파 양이 그러한 정체를 드러내지나 않을까 하고 속으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어머나, 이 나무뿌리는 마치 사람의 모양과 비슷하네요. 이름이 무엇인가요." 그녀는 산삼(山蔘)이 담겨있는 유리병 앞에서 놀란 듯 소리 질렀다. "인삼이라구 하지요. 우주 비행사들이 훈련받을 때 먹는 중요한 보약의 한 가지입니다. 한국의 특산물이죠." 성하룡은 기꺼이 설명해 준다. 민수는 그 동안에도 차거운 눈초리로 가고파 양의 얼굴에서 그 무엇인가 읽어 내려고 훔쳐보고 있었다. 옥에도 티가 있듯이 만일 가고파 양이 조금이라도 야릇한 관심을 나타내는 경우, 김민수는 그녀에 대한 인식을 180도로 바꿔야 했기 때문에 그는 마치 범인을 쫓는 심정으로 그녀를 감시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훑어 보아도 민수의 지레걱정은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가고파 양의 태도나 표정에서 그는 당장엔 아무런 속임수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연구소의 직원들과 함께 어울려서 저녁 식사를하고 여럿이 피라밋에 관한 얘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17호 태풍 아이러호   피라밋의 각도는 한결같이 45도이며 이것은 구름장을 깨고 내뻗치는 태양 광선의 각도와 평행하도록 짜여 있다 누군가가 설명했다. 이집트인들의 태양 숭배가 다분히 기하학을 발전시켰다는 얘기이다. 그러한 얘기가 오가는 판에 라디오에서 갑자기 임시 뉴스가 흘러 나왔다. "기상청이 발표한 기상 특보입니다. 중심시도(中心示度) 940mb의 제 17 호 태풍 아이러 호는 이날 오후 8시 20분 현재, 제주도 남쪽의 북위 31도 5분, 동경 125도 30분의 해상까지 진출하여 방금 북북동으로 북상 중에 있습니다. 제 17호 태풍의 중심 속도는 매시 40km이고 모레쯤은 남부 지방에 상륙할 우려가 있으므로 미리 단속해 주기 바랍니다." 방 안은 금방 어둑해졌다. "야단났군. 아이러호는 1957년의 추석날에 부산을 휩쓸은 사라호보다 10.5mb나 더 강한 놈인데. 야단났어." 이윽고 성하룡 부장만이 홀로 긴 한숨을 내쉰다. 기상 특보의 탓인지 창 밖의 나무잎들이 한결 요란스럽게 너불거리는 것 같았다. 한편, 아이러호와 맞닥뜨리게 된 기상청은 태풍을 폭파시키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로 긴급 회의를 열었다. "폭파시켜서 진로를 변경시켜야만이 정통으로 엄습을 당하지 않을 게요. 이대로 놔 두면 인천근방에 상륙하지나 않을까." 예보과장 이기호는 작업복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우긴다. "그러나 만일 태풍의 진로가 꺾이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반드시 꺾인다는 확률(確率)이 60% 이상이 아닐 때는 도리어 헛수고가 아닐까요." 젊은 과원 아니 통보원이 넌지시 반박한다. 모레면 폭풍우를 몰고 들이닥치게 마련이다. 그런 날이면 올 가을의 농사는 쑥밭이 되고 말 것이다. 의론은 티격태격 그칠 줄을 모른다. 손으로 이마를 파묻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기상청장 박상문은 한참 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선언한다. "폭파시키자! 아무리 따져봐도 폭파시키는 도리밖에 없다. 원자탄 값과 피해액을 견주어 봐도 역시 폭파시키는 게 낫다." 이마를 맞대고 있던 간부들은 그제야 정신이 난 듯 천기도 앞으로 모여들었다. "폭파 시간을 몇 시로 하겠습니까?" "오늘 밤 그러니까 자정(子正)이 넘어서 새벽 3시 정각에 동중국 해상에서 깨트려 보자." 기상청장은 그리고서 전화통을 들고 제주도의 우주 개발청에 직통 전화를 걸었다. 기상청의 결정이 상세히 연락되었다. "잘 알겠습니다. 이내 출동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명령은 척척 실천으로 옮겨져 우주개발청의 평화용 원파탄을 실은 폭격기가 성산포 기지에서 한 시간 후에 떠올랐다. 광풍을 헤치며 성층권까지 치솟은 폭격기의 적외선 장치로 태풍 아이러호의 중심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컴컴한 밤중에 레이다에 잡힌 태풍은 사나운 용처럼 소용돌이 치며 서서히 북상하고 있다. 조종사 김순걸 공군대위는 침착하게 태풍을 쫓으며 3시 정각을 기다린다. 기상청으로서는 처음으로 원자탄에 의한 태풍 폭파를 시도한 것이다. 2시 50분! 김 대위는 투하 장치의 스위치를 넣었다. 투하 장치는 자동적으로 움직이며 카운트 다운의 절차를 일일이 계기판에 전해 준다. 5분 전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4분, 3분, 2분, 그리고 30초, 15초, 10초, 5초, ……, 0초! 번쩍 섬광이 터진다. "꽝! 쿠르릉" 울리는 폭음 소리와 함께 뭉게뭉게 말려 올라오는 버섯 구름! 김순걸 대위가 멀찍이 지켜보는 레이더의 영상은 갈기갈기 흔들리고 있었다. 김순걸 공군대위는 동시에 관측반장이기도 했다. 과연 원자탄은 태풍 아이러호에 명중하여 엄청나게 많은 수증기를 뽑아 올리고 말았다. 태풍은 그 쉴 새 없는 진행 방향에서 마치 자동차의 타이어가 빵구난 듯 멈칫 하더니 여전히 실세(失勢)를 되찾아 소용돌이칠 따름이다. 자동차의 타이어는 한 번 구멍이 뚫리면 바람이 꺼지지마는 태풍은 마치 칸막이가 되어 있는 잠수함처럼 원자탄이 터진 부분만 잠깐 흔들리다가는 또 다시 균형을 잡고 끄덕없이 북상하고 있다. 김 순걸 대위는 비행기의 계기가 잡은 관측 데이터를 가지고 제주도 기지에 우선 돌아왔다. 숨가쁘게 본부실에 뛰어 들어서니 거기에는 기상청장 박상문, 관측과장 김민수, 우주개발청장 권중희 박사 등 대여섯 사람이 회의상을 둘러싸고 무엇인지 의논하고 있었다. 김순걸 대위는 예정 지점에서 성공적으로 원자탄을 폭발시킨 것과 그 후의 데이터를 수집했다고 짤막하게 보고한 다음 그 방을 물러갔다. "역시 불로써 물을 견제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모양이다. 한강에 돌 던지기지 원자탄 한 개쯤으로 태풍의 방향이 바꿔질 것 같지 않았어." 권중희 박사가 먼저 관측 자료를 들여다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그러나 기상청으로서 반증을 낼 한 자료도 입수해 놔야 하니까 실험해 본 거요." 박상문 청장이 저으기 난처한 얼굴을 지으며 변명했다. 사실이지, 태풍의 비구름 중에는 중심으로부터 지름이 2000km나 되는 범위에서 3백억 톤의 물을 싣고 날아가는 초특급도 있다. 이러한 태풍의 위력이란 수폭 2천 개와 비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감히 원폭 한 개를 떨어뜨려 실험해 보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상청장이 예보과장 이기호를 안동하고 온 일에는 까닭이 있다. 원폭에 의한 수증기의 증발량이 대체로 알려진다면 다음 단계로서 드라이 아이스 공세를 취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상청은 전에 그러한 실험으로 사소한 저기압의 목을 마르게 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태풍의 영양제(營養劑)는 바로 수증기이다. 태풍은 바다 위에서 수증기를 휘말아 가면서 더욱 강해지며 비교적 수증기가 없는 육상에 올라오면 영양제의 보급이 끊기어 세력이 약화된다. "권 박사, 너무 기상청을 얕보지 마십쇼. 실은 잇달아 드라이 아이스 작전을 취할까 합니다. 태풍의 수증기를 바다 위에서 깡그리 떨어뜨려 버려야지, 육지까지 쳐들어 오는 날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비행기 10대만 빌려 주십쇼." 박상문 청장은 기를 쓰며 부탁했다. "좋습니다. 그러나 청장, 나중에 웃음거리가 돼서야 되겠소. 드라이 아이스를 어떻게 준비할 작정입니까?" "그 일은 염려 마시오. 이쪽에서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예보과장을 직접 관측반장으로 올려 보내겠소." "나는 반대할 생각이 없소. 좋을 대로 하시오." 권 박사가 선선하게 청을 들어 준 바람에 기상청 기술진은 곧장 진두지휘에 나설 수 있었다. "여러분, 제주와 서귀포, 한림의 드라이 아이스 공장을 모두 불러 주시오." 박상문 청장은 지체없이 지시했다. 전화는 금방 나왔다. "여보세요. 여긴 성산포의 우주개발본부요. 아침에 부탁해 둔 드라이 아이스 가루를 급히 보내 주시오. 도착하는 대로 비행기에 싣고 뜰 테니까……" 박상문은 차례차례로 전화 연락을 마쳤다. 그들은 전에 요드화 은가루와 요드화 연의 연기를 뿜어서 태풍의 진로를 바꿔 보려는 실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다. 까닭에 이번에는 차디찬 드라이 아이스 가루를 태풍의 수증기에 안겨 줌으로써 이를 얼음알로 만들어 비를 유도하자는 것이다. 30분도 채 못되어 드라이 아이스 상자는 속속 우주 기지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 내다보니 작업원들이 분주하게 플라스틱 상자를 나르고 있다. 벌써 동쪽 하늘은 훤하게 밝아오고 있다. 얼마 후에는 태풍이 휘몰아칠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불어오는 바람기는 선득하기만 하다. 멀리 검푸른 수평선 위에 산뜻한 진붉은 햇살이 대여섯 줄기 힘차게 내뻗히더니 이내 하늘은 불그스럼하게 물들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햇살은 스러지고 뭉글뭉글한 햇덩어리는 눈부시게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태풍이 몰아오기 전의 고요함인 지금 바다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기지에서는 터보 제트기의 발동 신호가 내렸다. 점화된 엔진은 하늘이 무너질 듯 소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드라이 아이스의 투하 시간을 6시 30분 정각으로 하시오. 그리고 예보과장, 당신이 탄 비행기는 끝까지 관측해야 돼." 기상청장이 늠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비행복으로 말끔히 갈아 입은 이기호는 제 1 호기가 기다리고 있는 활주로로 뛰어가서 기상(機上)에 몸을 실었다. 6시 30분 정각. 10대의 비행기가 태풍의 눈을 중심으로 뿌리는 드라이 아이스의 뿌연 가루는 검은 빛 버섯구름과 대조적이었다. 마침, 잿더미 위에 칠 모래를 담쫙 뿌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비행편대는 열십자 갈지자로 그리고 멀리 태풍의 허리를 따라 원형으로 샅샅이 드라이 아이스를 쏟았다. 약을 뿌린지 근 한 시간 만에 태풍 아이러 호는 사나운 등뼈에 침을 맞은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예보과장이 편승하고 있는 1번기는 급강하해서 눈앞에 벌어진 기상 이변(氣象異變)의 이상야릇한 모습을 사진찍기 시작한다. 태풍의 눈 언저리로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리 쏟고 있지 않는가! 분명히 드라이 아이스 가루는 저기압의 물방을 속에서 얼음알로 응결되어 그 무거운 하중을 하강(下降)시킴으로써 마침내는 빗방울로 변한 것이다. 마치, 청이의 수염이 한없이 꺾이어 나가는 것처럼 검푸른 작달비가 길길이 빗발치고 있다. 이기호는 이 숨막히는 광경을 뚫어지게 지켜보며 "대성공이다 ! 우리는 승리했다." 고,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정말로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통쾌한 일을 목격했어. 굉장한데 굉장해." 천기흥 해군대위가 연방 눈을 깜박거리며 레이다를 들여다 보고 있다. 태풍 아이러호는 그로부터 약 20km 북상하는 동안 속도가 점점 떨어졌다. 태풍의 중심선의 수증기가 도려빠진 관계로 가장자리의 수증기가 몰려들어 진행방향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기호는 재빨리 이 사실을 기상청장에게 무전으로 알리고 태풍의 앞머리로 진출했다. 태풍의 이변은 그뿐이 아니었다. 북위 32도 40분, 동경 125도 50분의 자리에서 별안간 아이라호가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부지깽이로 한 대 얻어맞은 삽살개가 꽁무니를 말고 움츠리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이러호는 거기서부터 한참 비틀거리며 방향를 남서쪽으로 약 60km나 옮겨 갔다. 그 동안 아이러호가 바다에 뿌린 비는 수 10억 톤은 됐으리라. 태풍은 그러더니 한 시간 30분 뒤부터 새로이 방향을 가다듬어 일본의 규슈(九州) 지방을 향해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상청의 과학진은 역사상 처음으로 드라이 아이스에 의한 태풍의 진로 변경에 성공한 것이다. 이기호의 다섯번째 무전 연락을 받고 박상문 기상청장은 만면에 흐뭇한 웃음을 띄며 더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얄궂은 일이 생겨났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자니 부모에게 효성이 되지 않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자니 나라에 충성이 되지 않는 이율배반(二律背反)과 같은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두 달 후의 일이다. 일본 기상청은 태풍 아이러호의 진로 변경에 관해서 한국 기상청에 강경한 항의를 보내왔다. 그 때, 한국은 9백 40mb의 태풍을 꺾어버릴 수 있었으나 그 바람에 일본의 규슈 지방은 9백 80mb로 약화된 아이러호의 엄습을 받아 과수원 농장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항의문을 통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독선적인 사태가 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국제 회의를 열어서 공동 이익에 관한 협정을 맺어야 옳을 것으로 압니다. 만일, 중국이 일방적으로 그와 비슷한 진로 변경을 했을 때, 한국이 입을는지도 모르는 피해를 상상해 보면 일본의 고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태풍의 진로가 늘 포물선 모양으로 북위 32도 근처에서 늘 좌회전하는 현상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북위 31도선의 공동관리를 차제(此際)에 제안하는 바이다." 라고 통고해 왔다. "귀찮은 문제가 생겼구나. 31도선의 공동 관리라." 공문을 받은 기상청장은 손으로 이마를 툭툭 두들기면서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문제는 확률(確率)에 속하지 않겠어요? 태풍의 진로를 변경한다 해도 반드시 일본 쪽으로만 진행한다는 것은 아니니까." 옆에 서 있던 예보과장 이기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지 그래. 확률 문제야. 자네는 전문가니까 그러한 확률을 다시 전자 계산기로 뽑아내 주게." 박상문은 구원을 받은 듯 이맛살을 풀고 좋아했다. 그들은 과학부 장관에 이 일을 보고하고 이에 대한 회답을 수치 계산이 끝난 뒤에 보내기로 정했다.   노라른스키 교수의 논문   한편,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정보부로 돌아온 유린 가고파 양은 얌전하게 동북과에서 근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서는 엄두도 못낼 만큼 소련의 온갖 사정을 샅샅이 알게 되었다.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어요. 여태까지 살아오던 자기 나라에 관한 일은 그렇게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야요. 겨우 전화 번호나 영화 제목을 기억하는데 바빴으니 못난 사람이지요." 하루는 갑자기 가고파 양이 민수에게 말했다. "무슨 수수께끼를 안기는 거죠. 우물 안의 개구리라니, 이해할 수가 없는데……." 옆 자리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던 민수는 일손을 멈추고 얼굴을 돌렸다. "수수께끼? 그런 건 아니예요. 내가 할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와서 도리어 소련에 관한 공부를 더 많이 했단 말이에요. 경제도 산업도 기술도 문화도 더 알게 됐어요." "그야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벌써 노스탈지어가 생겼단 말이죠.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지." 인수는 가고파 양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머리채를 길게 늘어뜨리고 전기인두질은 결코 하지 않았었다. 보통 여자들이 유별나게 길게 달은 속눈썹이나 마스카라도 칠하지 않은 채 자연스러운 얼굴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혼혈아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일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녀의 둥그런 얼굴을 세로지르는 오똑한 콧날이며 움푹 패인 두 눈은 새삼스러운 조형(造形)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 돌아가고 싶다면 도와줄 테니 바른대로 말해 봐요" 민수는 약간 장난스러운 말투로 떠 보았다. "미스터 김, 그런 게 아니예요. 당신은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애. 그런 말은 후일로 미루고 이 문헌을 좀 읽어 봐요." 가고파 양은 끄덕도 하지 않은 채 민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뭘 가지고 그래." 민수는 일어서서 그녀의 책상머리에 놓인 종이철을 고부장히 들여다 보았다. 종이철은 전자과학에 관한 모스크바의 과학 아카데미 회의의 보고서였다. "이쪽 제목을 봐요. 「허력(虛力) 에너지가 전자 회로에 미치는 연구 보고」라는 제목 말이에요. 어디서 들은 제목 같죠? 저, 성하룡씨의 연구 말이에요." 김민수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이런 일도 있나 싶었다. 눈을 다시 한 번 비비고 깨알같은 글씨로 된 제목을 들여다 보았다. 분명히 「허력 에너지가 전자 회로에 미치는 연구 보고」이다. 발표자 이름은 바이칼 대학 물리학 교수 노라른스키 박사라고 적혀 있다. "음,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민수는 몸을 일으켜 팔장을 끼고 콧숨을내려 쉬었다. "무엇인가 잘못된 거야. 소련 과학자가 이런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성하룡 씨의 연구와 무슨 관련이 있을 거야. 가고파 양, 보고서 봤어요?" 가고파 양이 쳐다 본즉 민수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묻는 민수의 태도가 한낱 우습기만 했다. "읽어 봤어요. 그러나 제가 물리학을 알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세계에서도 일류가는 이러한 어려운 논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어요. 생각 좀 다시 해 보셔요." "핫하하하." 민수는 별안간 목청이 찢어지도록 큰 소리로 웃어 제쳤다. "그건 그렇지. 자기도 알쏭달쏭한 내용을 하물며 문외한인 가고파 양이 알 리가 있나. 바보같은 질문을 했어." 그는 생각할수록 웃음보만 터졌다. "내가 잘못했어." 민수는 이내 웃음기를 가다듬고 그 논문을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보고서를 성하룡에게로 보내야만 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고파 양은 시종 침착하게 앉아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의 생각 같아서는요. 이래요. 예보국장이 납치되지 않았어요. 그 때, 괴한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주사를 맞고 텔레파시(精神感應力) 해석(解釋)을 당한 것 같아요. 저는 병원에 있었으니까 신경과에서 텔레파시 해석을 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어요. 텔레파시에 걸리면 머리 속에 생각하고 있는 기억의 곡절이 자동적으로 전기 회로에 의해 기록되거든요. 성하룡씨의 식물 자력선 연구에 관한 대뇌의 기억이 텔레파시로 말미암아 그 사람들에게 누설되지나 않았을까? 저는 공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과학에는 우연의 일치라는 게 있다. 신라(新羅) 시대의 기술자들이 화주(火珠)를 만들어 불상(佛像)에 렌즈의 원리를 응용했을 적에 희랍의 기술자들은 이들 렌즈의 원리를 전쟁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 발전에 과연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 김민수의 머리는 결코 가고파 양보다 재치있게 돌지는 못하는가 보다. 그녀의 해석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생각도 들었다. "알았어. 어쨌든 이 문헌을 식물연구소에 보내기로 하지. 성하룡씨도 나자빠질 거야. 노라른스키? 노라른스키라 어디서 듣던 이름같은데 ……." 김민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쥐고 옹송망송한 생각을 더듬어 보았으나 노라른스키에 얽힌 실마리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 거리를 안은 김민수는 밤에 잠자리에 들어도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노라른스키라는 인물을 생각해 내려고 그는 예보국장 성하룡의 실종 경위를 더듬어 보았다. 당시 성하룡을 납치해 간 두 사람의 괴한 중의 한 사람 이름이 노라른스키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성은 똑같되 이름이 다른 점은 웬 일일까? 소련 사람의 성에도 똑같은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민수는 허력 에너지가 전자 회로(電子回路)에 미치는 연구 보고서를 오려서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성하룡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는 일부러 중앙 우체국을 찾아가서 제 4 종의 등기 우편으로 보냈다. 봉투의 한 모서리의 귀를 잘라서 내용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밝혔다.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음에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꾸미는 편이 도리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꼭 일 주일이 지나자 성하룡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귀중한 자료를 잘 받아 읽었습니다. 노라른스키라는 대학 교수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재작년에 지구의 자장(磁場)과 자전 속도의 변화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학자입니다. 이번에 학회에 보고한 연구논문은 이론면에서 허력 에너지를 취급한 것입니다. 내용인 즉 마치 조각(彫刻)의 방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조각의 조(彫)는 중심이나 심지가 없는 것을 밖으로부터 모양을 갖추어서 '+'방향으로 핵심을 구하는 작업이요, 각(刻)은 정 반대로 핵심이 있는 것을 새겨 냄으로써 '-'의 방향에서 모양을 갖추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 때, 조와 각이 눈에 안 보이는 공간에서 서로 엇갈리는 공통점을 생각해 보십쇼. 이것을 우리는 조화점(調和點)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노라른스키 교수는 바로 전자 회로의 '+'방향과 허력 에너지외 '-'방향을 회전시켜 엇갈리는 조화의 소멸(消滅)을 강조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전자를 좀먹는 허력 에너지가 새로운 우주 에너지로서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민수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럴 듯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허력 에너지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성하룡의 편지 내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심하시오. 우리는 이론면에서보다 실험면에서 더 일찌기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틈이 나면 금강산에 와서 구경해 보면 우리의 허력 에너지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행간마다에서 풍기는 기백은 그의 연구가 결코 노라른스키에 뒤벌어졌다거나 자신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는 그럼 그렇겠지 하는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허력 에너지의 완성   사실이지, 성하룡은 그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골똘한 보람이 있어 요즘 허력 에너지의 초보적인 발사장치를 완성했던 참이다. "당신이 아니고선 이 연구에 매듭을 지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장한 일을 한 겁니다. 한국의 과학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이제 세계에 자랑할수 있게 된 거요." 식물 자력선 연구소장 김철수 박사는 시사(試射) 실험이 끝날 때까지 성하룡을 격려했다. 시사 실험은 금강산의 호젓한 골짜기를 골라서 연구소의 관계자들만 참석한 가운데 베풀어졌다. 발사 장치는 마치 둥근 탄창(彈倉)에 탄알을 가득 쟁인 기관포와 비슷했고 또한 레이저 광선의 발사 장치와도 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은 발사기의 꼬리에 기다란 코드가 달려 있어 허력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자장(磁場)을 전화(電化)시키는 장치이다. 허력 에너지는 분명히 레이저 광선과 같은 특수 광선에 싣고 발사되었다. 전자파는 전리층에서 반사되지만, 성하룡의 특수 에너지는 그대로 전리층을 뚫고 우주의 가없는 곳까지 돌진할 수 있는 것이 특색이다. 첫번째 실험에서 성하룡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뒀다. 기록계에 나타난 계수는 발사 장치의 모든 기능이 정상적임을 나타냈다. "됐어! 이젠 우리 연구소가 세계에 둘도 없는 소멸(消滅)장치를 발명한 셈이야. 권일송(權一松) 박사가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성하룡은 젊은 과학원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상어린 목소리였다. 자고로 위대한 천재는 큰 발명이나 발견을 이룩하고 나면 웬일인지 저절로 고독감에 빠지게 마련이다. 첫날의 실험 대상은 화성이다. 레이저 광선에 실은 허력 에너지는 서로 펄스가 다르기 때문에 반사해 오는 양상도 또한 다르다. 화성에 다다른 허력 에너지는 일부가 소멸되고 얼마 후부터 레이저 광선만이 되돌아 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전자의 충돌이 있었을 게다. 허력 에너지가 소화된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젊은 연구원들은 더위도 잊고 구슬땀을 손등으로 씻어 내면서 발사 장치를 조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대성공이오. 오늘의 실험 결과를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도록. 그렇지 않아도 외국의 과학간 첩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혹시 냄새를 맡으면 또 귀찮을 일이 생길 테니까……." 김철수 박사는 소원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렸다. 두 번째 실험은 그 날부터 달포가 지난 초가을에 진행됐다. 벌써 따사로운 햇볕이 살갗에 부드럽게 엉펴 가끔 진땀을 맺게 하는 계절이다. 성하룡은 며칠 동안 잠을 한 숨도 이루지 못하고 기계 장치의 정밀도를 조정해 왔다. "전원(電源)을 넣어요." 성하룡이 한 손을 번쩍 들고 신호를 했다. 전원이 넣어지자 발사 장치 람다호는 쉽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끓기 시작했다. 실험 대상은 일본의 카파 B9 호와 한국의 기상 위성 소나기 호였다. 이 두 인공 위성은 궤도를 돌면서 금강산 상공을 여전히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우주 기지와 수원의 송수신소로부터 시시각각으로 텔레타이프 연락이 들어오고 있다. 그 때마다 두 위성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다. "하오 3시 25분, 북위 40도 1분, 동경 128도 3분의 신의주(신의주)로부터 적도면에 대하여 80도 간도르 소나기 6호가 금강산을 420km 높이로 통과한다. 텔레타이프의 톡탁거리는 건반(鍵盤)이 거센 숨소리를 내며 글자를 찍어 낸다. "발사 준비!" 성하룡이 외친다. "준비 완료!" 이비 대답이 들어왔다. "발사!" 성하룡은 두 눈으로 뚫어지게 서북쪽 하늘을 노리면서 몸을 구부리고 기관포를 쏘다시피 발사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거기에는 로케트 실험 때와 같은 소란함이 없었다. 폭발도 폭음소리도 있을 리가 없다. 실험의 장면은 극히 조용하지만 픽픽 되돌아 오는 신호 소리에 계기판의 바늘이 바르르 떨리면서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다. 몇 초가 지났을까. 텔레타이프에서 찍혀 나온 전문이 김철수 박사의 손으로 옳겨졌다. "소나기 6호가 그 동안 보내오던 송신이 별안간 중단됐음. 기기 고장인 듯." 수원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전문은 짤막했으나 김철수 박사는 속으로 웃음을 죽이며 심각한 낯빛을 지었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이처럼 정확하게 전자(電子)를 좀먹는 기계가 있을 줄 몰랐다. 이제 살인 광선과 마찬가지로 전파 파괴 장치가 나타날 게 아니냐. 놀라운 일이 아니고 뭐냐.' 저만큼에서 성하룡은 도깨비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발사 장치의 손잡이를 힘껏 쥐고 있었다.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양이 더욱 안타깝게 보인다. 10분이 흘러갔다. 그들에게는 1년의 세월보다도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성 국장, 이것을 읽어 보시오." 김철수 박사는 전문을 성하룡에게로 돌렸다. 성하룡은 아무 말 없이 멀거니 전문을 들여다 볼 따름이었다. 쓰다 달다하는 말이 없을 정도로 그는 자기의 과학적 승리를 믿고 있던 참이다. 또 한 장의 다른 전보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제주도에서였다. "소나기 6호는 동해 해상에서 자제(自制) 능력을 상실했음. 지금 리모트 콘트롤로 작업을 복구시키는 중이나 완전한 기능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것임." 이 전문을 손에 들은 성하룡은 담배를 꺼내 물고 한없이 푸른 물이 든 듯한 맑은 하늘을 눈을 조리며 볼 따름이었다. 4시 50분에 시험 발사한 허력 에너지가 일본의 기상 위성 카파 B9호에 무슨 충격을 주었는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허력 에너지는 일련의 실험 계획에 따라 그후 태풍에도 적용해 보았다. 태풍이 일면 저기압의 물방을이 모두 이온화되어 전기력을 지니게 된다. 성하룡 국장은 태풍의 기운을 꺾기 위해서 허력 에너지를 발사하여 이온을 죽이는 실험을 해 보았다. 이 실험은 한국대학교 문리대의 기상학과 실험실에서 작은 규모로 진행됐다. 보통 실험은 담배 연기와 같은 발연(發煙) 장치로 진행되지만, 이번 실험에는 특수 물감으로 물들인 수증기를 불어 넣어 전화(電化)시켜서 진행했다. 수증기가 몰아 붙이는 방향에 허력 에너지의 커텐, 그러니까 장막을 쳐서 이온화된 수증기의 우악스러운 기운을 꺾자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도 성하룡은 뜻대로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허력 에너지의 장막을 어떻게 해서 수십km에 걸친 넓은 범위에 펼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장차의 연구 과제로 남게 되었다. 허력 에너지가 더 많은 응용 분야를 발견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알려지게 됐다. 성하룡은 소련의 툰드라를 연구해서라도 하루 바삐 일을 완성시켜 보려던 지난 날의 생각이 어리석은 짓이었구나 하는 뉘우침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툰드라가 아니더라도 금강산의 약초 연구만으로도 거뜬히 허력 에너지를 완성시키지 않았는가! 성하룡은 모처럼 서울에 들러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지금 물리학에 새로운 이론을 도입한 세계적인 주인공인지를 가족들은 미처 모른 채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반길 따름이었다.   가고파 양의 실종   허력 에너지에 관한 연구 보고서는 한 벌이 정보부의 과학부 금고 속 깊숙이 보관되었다. 김민수가 그 금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유린 가고파 양은 그러한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 허력 에너지가 실제로 어떠한 성능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고파 양의 거동을 미행하는 검은 그림자가 요즘 늘 뒤따랐다. 가고파 양은 까마득이 그런 사실을 눈치조차 못 채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보부에 출근할 뿐이었다. 호기심에 찬사람들의 눈에 가고파 양의 존재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첫째, 그녀는 처녀의 신분으로서 한남동 외인 주택에 홀로 살고 있지 않는가. 둘째로는 소련 여성으로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정보부에 근무하고 있는 점. 셋째로는 최근 일본과 소련의 외교 관계가 긴장되어 한국이 두 나라의 스파이 소굴로 변하고 있는 사실도 곁들어 그녀의 존재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후 관계를 김민수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고파 양의 싹싹한 인품을 믿고 함께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민수는 그러면서도 늘 가고파 양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혹 노스탈지어에 걸리지 않았나, 혹 고독을 견디어내지 못하지나 않나 하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가고파 양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면 저도 모르게 민수의 마음도 꺼림칙해지고 그녀의 낯빛이 밝으면 괜히 마음이 놓이는 요즈음이었다. 어느 맑게 개인 일요일에 그는 모처럼 바다 구경을 하기로 정하고 가고파 양을 꾀었다. "참말이죠. 함께 가요.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가고파 양은 민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써 옷 걱정부터 시작했다. 유린 가고파 양은 이튿날 15층 건물의 서울역 3층에 자리잡은 구내 식당에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짙은 하늘색의 맑은 빛깔의 블라우스에 밤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의 새하얀 프릴이 깃 언저리에서 그녀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 "자동차로 가겠어요? 기차로 갈까?" 민수는 운동 모자를 젖혀 올리면서 물었다. "도대체 어딜 가길래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말을 안했던가. 인천으로 가서 모터 보트를 타고 덕적도(德積島)까지 해상 드라이브를 할려구요.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물결도 잔잔할 거요." "좋아요. 해상 드라이브란 멋이 있어 보여."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내려갔다. 30톤짜리 모터 보트는 그런대로 최신식 설비를 갖춘 것이었다. 최대 시속이 40마일이나 나오는 쾌속정의 일종이다. 거기에는 운전사가 있어 두 사람은 굳이 운전할 필요가 없었다. 브르릉거리는 발동기 소리와 함께 부두를 떠난 모터 보트는 팔미도를 지나자 전속으로 섬 사이를 누비며 한달음에 덕적도에 도착했다. 두 젊은 남녀는 흔히 세상의 선남선녀가 하는 것처럼 모든 시름을 잊고 오직 자연 속에 몸을 맡긴 채 웃고 지껄이고 태양과 바닷바람에 온 몸을 쬐이며 하루를 즐겼다. 그날 밤, 아무 사고없이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왔다. "바래다 드릴께." "괜찮아요. 먼 데도 아닌데, 애인 행세를 해 볼 작정인가요?" 가고파 양이 장난스러운 눈초리로 반문하는 바람에 민수의 입은 천금처럼 무거워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민수는 전날 밤의 일이 한없이 뉘우쳐졌다. '끝내 바래다 줄 걸 잘못했어.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킨 셈이 아닌가.' 유린 가고파 양이 그날 밤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실종된 것이었다. '도대체 대 서울의 한복판에서 어느 놈이 정보부원을 납치해 간단 말이야. 못난 놈 같으니……. ' 민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올랐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그지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을 종합해 본 즉 가고파양 비슷한 짙은 하늘색의 블라우스를 입은 서양 여자를 가운데 자리에 앉힌 자동차가 한강의 고속 도로를 질주한 사실이 드러났다. 어떤 놈들일까? 경찰 보고는 그 검은 세단차의 운전사며 사내들이 서양인이 아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분명히 납치해 간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어느 나라 공작대원들일까?   일본에 잠입하라   민수의 머리 속을 스치는 질문은 한이 없었다.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옳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아니고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추적해 보자.' 민수는 난데없이 벌어진 가고파 양의 실종 사건을 기어이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3일 후, 민수의 모습은 모지(門司)로 가는 연락선의 갑판 위에서 볼 수 있었다. 민수가 깊은 생각에 잠겨 먼 산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갑판 한구석의 짐짝의 그늘에 몸을 감춘 청년이 매서운 눈초리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해탄의 검푸른 파도는 여전히 거칠었다. 김민수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바다는 젊다고 느끼면서 한없이 넓은 수평선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가고파 양의 정체는 무엇일까? 공작원은 아닌 듯 하지만 역시 노스탈지어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민수는 알쏭달쏭한 생각을 쫓으며 선실로 내려갔다. 층층대를 한 발자국씩 힘있게 딛으며 내려가는 민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괴한도 갑판 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연락선 위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는 무사히 모지(門司)항에 도착했다. "뿌 부욱!" 우렁찬 고동소리를 넓은 항구에 울리면서 연락선이 부두에 닿자 성급하게 갑판 위에 올라와서 기다리던 선객들이 저마다의 짐을 들고 내리기 시작한다. 민수도 웅성거리는 군중들에 끼어 가방을 들고 트랩을 내려갔다. 마중나온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곧장 택시를 몰고 정거장으로 향했다. 자동차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모지의 시가지는 일본의 서쪽 현관답게 높은 굴뚝들이 즐비하게 치솟아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모지 역에 이른 민수는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연락선의 도착시간과 도쿄(東京)로 떠나는 특급 열차의 출발 시간은 30분의 여유를 두고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민수를 쫓는 수상한 청년도 역시 정거장에 도착하여 멀찌감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민수가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청년과 두 번이나 눈길이 맞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른척 하면서 한참 있다가 청년의 거동을 살펴보펴고 고개를 돌려 본즉 또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음, 무슨 일이 생겼구나. 놈이 나를 미행하거나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서울에서부터 쫓아 왔을 텐데, 일본의 공작원일까? 서울에 벌써 일본의 정보기관이 그물을 펴고 있단 말인가!' 민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시청앞 광장의 복작거리는 인파를 생각해 보았다. 겉으로 평화스러운 통행인들이 지하도를 오르내리고 있지만, 거미줄 모양으로 끈이 달린 특수 기관원의 눈초리가 새삼 긴장을 자아내고 있지 않는가. 더우기 요즘 일본과 소련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다. 민수는 무딘 부저 소리에 상상의 날개를 접고 개찰구로 걸음을 옮겼다. 특급 열차는 아침 10시 정각에 모지역을 떠났다. 민수가 자리잡은 곳은 이동차간의 입구에 가까운 데였다. 앞뒤를 둘러 본즉 수상쩍은 청년도 저만큼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민수가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을 깨달았음인지 그 청년은 될 수 있는 대의 시선을 민수 쪽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열차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은 산간을 한 달음에 달리고 해안선을 누비면서 도쿄에 도착한 것은 하오 4시 40분이었다. 도쿄는 민수에게 낯익은 도시이다. 전에 1년 동안 수리 통계 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민수는 도쿄역에 도착하자 조심스럽게 수상쩍은 청년의 뒤로 돌았다. 이번에는 그 청년의 뒤를 밟아 볼 작정이다. 청년은 선선한 표정으로 가방을 들더니 쏜살같이 플랫폼의 인파 속으로 몸을 감추어 버렸다. 짝눈의 청년이라는 인상이 민수의 머리 속에 못박혔다. 민수는 공중전화실을 찾아들어 주일 대표부의 임관식(林官植) 공보관을 불러냈다. "나야, 민수다. 전화 연락받았지. 좀 귀찮은 일이 생겨서 일부러 연락선을 타고 기차로 도착했다. 어느 호텔로 가면 되겠나?" "프린스 호텔이 좋지 않을까? 그쪽으로 예약을 해버렸는데……. 이쪽 일을 마치고 찾아 갈 테니 먼저 가 있게." 용건만을 짤막하게 말하고는 민수는 수화기를 놓고 넓은 광장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높직 높직한 건물들이 하오의 햇빛을 받고 서로 그림자를 꺾고 있었다. 프린스 호텔의 3동 312호실에 들은 김민수는 이내 전화기를 들어 대륙(大陸) 상사의 문일환 과장을 불렀다. "그동안 별 일 없었나? 국민일보 일로 취재하러 왔는데 상의할 일이 있으니 프린스 호텔로 와 주게. 312호실이야." "오케이, 당장에 갈께." 문일환의 걸걸한 목소리가 전화통에서 쌩쌩 울린다. 믿음직했다. 그는 정보부원이다. 3년 전부터 도쿄에 근무를 하고 있는 별동 대원인 것이다. 김민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산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넓은 벌판에 가없이 건물과 집만이 같려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는 그런대로 한 가지 거대찬 생명체를 이루고 숨가쁘게 호흡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도시의 인구란 최대 공약수(最大共約數)의 생명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반목하므로써 최대 공약수가 깨질 때, 도시는 허허벌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스나 로마의 문명도 그래서 망했고 이조(李朝)의 질서도 그래서 무너지고 말았다. 30분 가량 되었을까,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문일환이 들어왔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때물이 가신 말쑥한 차림이었다. "오래간만이야." 그는 민수의 손목을 붙잡고 두어 번 흔들면서 정다운 눈길로 얼굴을 들여다 본다. "앉아라. 갑자기 귀찮은 일이 생겼어. 전에 소련에서 데려온 여자가 있었지. 그 여자가 서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에게 유괴당했단 말이야. 국내에서 꾀어 낼 놈이 있을 리 없구,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일본 놈들의 수작인 것만 같애. 급히 알아 봐 주게." 문일환은 버릇처럼 뒤통수를 한 번 긁고 나더니 "왜놈들의 수작이라. 어떤 선에서 그랬을까? 당장에 알아 봐야지." 대뜸 전화통을 들고 교환수에게 번호를 일러 주었다. 문 일환이 불러낸 상대는 교포 3세인 다찌가와 이사무(立川勇)였다. 다찌가와는 일본 자위대(自衛隊) 정보 기관의 소식통이다. 문 일환은 사건의 경위를 대충 설명하고나서 유린 가고파 양이 일본 어느 곳에 감금되고 있는지 알아 봐 달라고 부탁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임관식도 호텔로 찾아 왔다. 김민수가 임관식을 통해서 얻은 정보인즉 마침 도쿄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 학술 회의에 소련의 노라른스키 교수가 참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필코 무슨 관련이 있을 거야,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려고 그가 몹시 서두르고 있지 않는가. 가고파 양이 허력 에너지의 비밀이라도 아는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지." 민수는 혼자 쓴웃음을 뱉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수작을 비웃었다. 한편, 삼각지에서 졸지에 납치당한 가고파 양은 영문을 몰라 어쩔 줄을 몰랐다. "무슨 사람들이 이래요. 어서 놔 주셔요." 가고파 양은 등뼈를 꼿꼿이 세우며 대들었으나 놈들은 막무가내였다. "잠자코 있으면 된다. 우리는 다만 당신을 일본까지 호송하는 책임이 있을 뿐이니까. 통사정해도 소용이 없어. 거기 가면 책임자가 있으니 그 분에게 말하는 것이 제일이야." 그들은 일본인이면서도 소련 말이 유창했다. 극히 사무적으로 가고파 양을 다스렸다. 그녀는 세 놈에게 붙잡힌 채 꼼짝달싹 못하고 자동차로 수원까지 내려간 다음, 비행기편으로 곧 부산으로 옮겨져 다시 일본 땅으로 끌려갔다. 가고파 양은 정말로 영문을 몰랐다. 일본인들에게 끌려갈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놈들은 처음엔 제법 사나운 눈초리로 대하더니 비행기가 부산을 떠나자 별안간 태도를 바꿔 은근하기 짝이 없는 대우를 했다. 낯이 간지러울 정도로 마치 여왕을 모시는 것처럼 대했다. 비행기는 하네다(羽田) 국제 공항을 피하고 다찌가와(立川) 비행장에 착륙했는데, 가고파 양은 거기가 어딘지 알 리가 없다. 아름다운 포로가 된 채로 그녀는 자동차에 실려 빌딩이 서 있는 거리를 빠져나와 호젓한 공원을 지나서 외딴 집에 이르렀다. 그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살림집은 아닌 듯, 뎅그렁한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그 동안 아무 사고도 없어 도리어 감사를 드립니다. 이젠 마음을 푹 놓고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키가 훤칠하게 큰 놈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일러 준다. 가고파 양은 어리둥절할 뿐, 악몽(惡夢)과도 같은 하루 사이의 변화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들을 외면할 뿐이었다. 근 한 시간이 지나자 노크도 없이 불쑥 방안으로 들어온 서양인이 있었다. "유린 가고파 양, 안녕하셔요. 얼마나 고생했소. 하바로프스크에서 한국인들에게 납치당했다지요. 이젠 안심하시오. 머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는 소련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듯 그쪽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까지 납치해 오는 것이오." 그녀는 생각할수록 치밀어 오르는 분함을 참지 못해 퉁명스럽게 따졌다. "나는 소련 대사관 2등 서기관 블라비노프라는 사람이오. 당신이 허력 에너지의 비밀을 어느 정도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노라른스키 교수의 청이 있어 서울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것이오." "뭐라구요? 허력 에너지? 난 몰라요? 날 서울로 돌려 보내 주세요.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데 당신네가 간섭할 건 없지 않아요." "허허, 너무 단순한 생각이오. 가고파 양이 한국인에게 납치됐다면 우리로선 구해 낼 의무가 있는 것이오. 설사 납치되지 않았더라면 수속없이 출국한 당신을 본국으로 송환할 권리가 있는 것이오. 그대가 서울을 가고 싶어하는 까닭은 무엇이오?" "듣기 싫어요.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인이었소.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면 그만이 아니겠어요. 그 노라른스키 교수를 만나게 해 주셔요. 속시원하게 일러줄 테니까." "어쨋든 반가운 일이요. 오늘 밤에 이 곳으로 모셔올 테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블라비노프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가고파 양을 가볍게 다스릴 뿐이었다. "그럼 그 동안에 그대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어떵게 납치당했는지 경위를 듣겠습니다. 숨김없이 말해야 됩니다." 블라비노프는 따지려고 들었다. 가고파 양은 모든 일을 숨김없이 일려 주었다. 한국인들을 도망가게끔 한 일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지금까지 한국의 정보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자못 딱딱한 소리로 그는 물었다. 그녀는 동북아과에 소련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온 사실을 솔직히 대주었다. 노라른스키 교수의 학술 논문도 보았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해가 저물자 노라른스키 교수라는 뚱뚱보가 나타났다. 블라비노프와 입빠르게 한두 마디를 건네다가 가고파 양에게 인사를 청했다. "당신이 허력 에너지에 관해서 혹 아는 게 있지 않나 싶어 만나 보고자 한 것이오. 나라를 위해서라도 나를 좀 도와 주시오." 가고파 양은 뭇 사람들이 자기를 무슨 거물인 것처럼 공손히 대하는 태도에 싫증을 느꼈다. "아는 게 없어요. 교수께서도 아시다시피 나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교수님의 논문을 보기는 했으나 내용은 깜깜합니다. 서울에서 소문에 들은 얘기로선 한국의 학자가 허력 에너지 장치를 완성시켰다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완성시켰대요?" 노라른스키의 얼굴에는 갑자기 심각한 그림자가 졌다. 그는 팔장을 끼고 한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동양인들의 특운한 공간 의식에는 따라갈 수는 없는가 보다. 식물성에 전자력을 부여하는 그 대목만 알아 내면 결코 뒤떨어지지 않겠는데…….' 노라른스키는 머리 속에서 복잡한 수식을 더듬어 보았다. 풀리지 않는 수식이었다. 가고파 양은 그러한 교수의 옆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김민수는 프린스 호텔에 묵으면서 문일환의 보고를 받았다. 교포 3세 다찌가와가 일본 자위대 정보 기관에서 입수한 소식은 소련 여인을 태운 비행기가 다찌가와 비행장에 내렸다는 것이다. 비행장에서 어디로 갔을까? 김민수는 도쿄의 소련 대사관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거기서도 새로운 여직원이나 낯설은 젊은 여성이 기숙하고 있는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이 됐다. "옳지, 노라른스키 교수를 찾아 보아야겠다. 문 과장도 노라른스키의 주변을 알아봐 주게." 그들 젊은 한국 정보부원은 1천만 명이 넘는 도쿄의 인구 속에서 한 사람의 여성을 찾아 내야만 했다. 김민수는 문화 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학술회의장으로 찾아 갔다. 그는 해외에 나오면 의례 국민일보 과학부 기자였다. 접수처에서 신원을 밝힌 즉시 민수는 보도반석이라고 표시된 자리에 안내되었다. 일본인 기자뿐 아니라 서양인 기자들도 대여섯 자리를 잡고 회의를 방청하고 있었다. 민수는 3일째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회의는 일정(日程)에 따라 하오 4시에 파했다. 그는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는 학자들 가운데서 노라른스키 교수를 찾아내는 데 한참 걸렸다. 노라른스키는 뚱뚱한 몸집에 돋보기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차라리 인터뷰하면서 떠보는 게 어떨까?" 문 일환이 성급하게 굴었다. "저 자가 무슨 상관이 있어. 요는 가고파 양의 소재만 알아 내면 그만 아니야. 미행하는 게 상수지." 두 사람은 노라른스키의 뒤를 밟았다. 그는 택시를 잡아 탄다. 그들도 놓칠세라 택시를 잡아타고 뒤를 쫓는다. "앞의 푸른색 택시를 꼭 따라 가요." 일본인 운전사는 고개를 꾸벅하더니 알았다는 듯 핸들을 크게 돌리며 앞차를 따라간다. 차가 고속 도로로 빠져 나온 뒤부터 두 대의 택시는 마치 편대 비행하는 제트기 모양으로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질주한다. 노라른스키의 차는 교외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는 공원을 가로질러서 언덕배기에 있는 2층집으로 향하고 있다. 뒷차는 속력을 내리고선 멀찍이 따라 갈 따름이다. 노라른스키의 차가 그 집의 대문 앞에서 멎었다. 대문은 단단한 철문이었다. 노라른스키가 차에서 내려서 부저를 누른다. 한참 후에 안뜰에서 사내가 나타나더니 철문을 열어 준다. "앗, 저놈이! 짝눈의 청년이다." 김민수는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여기서 내리자." 민수는 택시를 돌려 보내고 문일환과 함께 나무 그늘에 잽싸게 몸을 감추었다. 두 청년은 노라른스키가 현관으로 들어가 버리자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벌써 어두컴컴해진 밤기운을 타고 어디선가 귀뚜라미의 귀뚤귀뚤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짝눈이가 노라른스키 박사를 맞아들인 현관문은 굳게 닫힌 채 둥근 외등만 동그마니 밝다. "기다려 봐야겠지. 무턱대고 집 안으로 들어가다간 일을 망칠 우려가 있겠다." 민수는 문일환을 보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문일환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 말이 없었다. 시간은 아랑곳없이 흐를 뿐. 담너머 2층 집을 우두커니 지켜보며 기다린다는 것은 확실히 고역이다. 그러나 만사는 막연한 기다림 속에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이 켠으로 흘러오는 동안에 접질러서 비틀거리듯 으례 새로운 사건이 생겨난다. 두 사람은 풀서리 뒤에 몸을 감춘 채 몇 번이나 하품을 해가며 말없이 기다렸다. "이럴 게 아니라 저기 있는 느릅나무 위에 올라가서 안쪽을 살펴봐야겠어요." 문일환이 문득 말을 던졌다. "조심해서 살펴봐요.이 편이 공격을 해야 되니 더욱 조심해야." "염려마세요. 잠깐 올라가 보지요." 문일환은 서풋서풋 저쪽으로 걸음을 옮겨 느릅나무 밑에 이르렀다. 그는 고개를 추키고 나무를 둘러보더니 서부렁섭적 뛰어올라 나무 가지를 붙잡고 날래게 기어 올라간다. 두 길, 세 길까지 올라선 문 일환은 안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망원경을 꺼내들고 하염없이 2층집을 들여다 본다. 망원경은 적외선 장치가 되어 있어 어둠 속에서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응접실의 창 너머로 노라른스키 박사의 얼굴이 마주 보이고 사진에서 익힌 가고파 양의 옆 얼굴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민수의 짐작이 들어 맞았구나.' 가고파 양은 무엇인가 항변하고 있는 모양이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문일환은 원숭인 못지 않는 재빠른 솜씨로 느릅나무를 술술 내려와서 훌쩍 뛰어 내렸다. "여보게, 가고파 양이 응접실에서 손짓을 해가며 무엇인지 항변하고 있던데……." "음, 제대로 들어맞았군. 무슨 수를 쓴다?" 민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길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은다. 두 청년은 잽싸게 풀섶 뒤로 몸을 사리고 지켜 보았다. 젊은 아베크가 정답게 손길을 잡고 속삭이며 가로등 밑을 지나간다. 민수는 어둠 속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뜰 안으로 넘어 들어가 볼까요?" "개가 있을는지도 모르잖아. 좀더 생각해 보자." 민수는 늦장을 부리면서도 속으로 집히는 것이 있었다. 저처럼 노라른스키가 가고파 양을 붙들고 말을 시키는 까닭은 분명히 노라른스키가 식물 자력선에 탐이 나서 무엇이든 캐묻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고파 양이 성하룡의 연구 전체를 알 리가 없다. 그렇다면 노라른스키는 가고파 양을 설득시켜 장차 식물 자력선에 관한 전보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할 게 아닌가. 민수는 머리 속에서 더욱 생각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마도 놈들은 가고파 양을 이쪽에서 뺏어가도록 만들 것이다. 뺏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서는 놈들의 계획에 빗나간다. 짝눈이가 부산에서부터 미행해 온 것으로 보아 놈들은 이쪽의 움직임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다. 김민수는 여기까지 추리(推理)를 하고 나서 빙그레 웃었다. 놈들의 수작이 빤히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다. "좀 더 기다려 보자.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거야." 민수의 말꼬리를 문일환은 물고듣지 않았다. 티격태격할 장소가 아닌 까닭에.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검은색 세단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양관(洋館)의 정문 앞에 서지 않는가. 운전사가 짧게 클래션을 울리고선 기다린다. 양관의 창을 밝히던 전등이 2층 쪽에서부터 차례차례로 꺼지며 응접실만이 환하게 남더니 현관문을 열고 블라비노프 2등 서기관이 빠져 나왔다. 노라른스키가 잇달아 배를 문지르며 나타나고 짝눈이도 뒤를 따른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철문을 열고 차례대로 세단차에 올랐다. 민수와 문일환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동작을 지켜 볼 따름이었다. 세단은 느린 시동(Slow Start)으로 굴러가기 시작한지 한참만에 속도를 올리며 사라져 버렸다. 민수는 말없이 문일환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문일환은 어깨를 으쓱 추켜보였다. "들어가 볼까?" "먼저 현관 기둥에 돌을 던져보지요." 문일환은 길 섶에서 돌맹이를 주워 힘껏 던졌다. 철커덩! 소리가 나자마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컹컹거리며 개가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다시 숨을 죽이고 뜰 안의 인기척을 살폈다. 개가 우짖는데도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없다. 민수는 바지 주머니에서 마취총을 꺼내들고 문일환에게 눈짓을 했다. 들어가 보자는 것이다. 철문을 열고 발을 내려딛자, 어둠속에서 세퍼트 세 마리가 내달아 덤벼든다. 민수는 단숨에 총을 꼬나 쏘았다. 세 마리의 세퍼트는 마취총알을 맞는 족족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차례차례 쓰러지고 만다. 두 정보부원은 현관까지 줄달음쳐서 문일환은 응접실 창밖으로 돌고 김민수는 발길로 현관문을 열어제쳤다. 역시 인기척이 없다. 민수는 총을 겨누면서 조심스레 한 걸음씩 복도로 들어섰다. 문일환이 뒤를 따른다. 민수는 응접실 문을 우악스럽게 박차고 빗겨 섰다.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잽싸게 눈으로 더듬어 본즉 가고파 양이 손발을 묶인 채 손수건으로 재갈을 먹히고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지 않은가! 민수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미스 가고파! 이게 웬 일이오?" 하며, 나지막이 외쳤다. 문일환은 문 어귀에 서서 빈틈없이 사리며 둘레를 경계하고 있다. 민수는 익은 솜씨로 그녀의 입막음부터 풀어 주었다. "민수씨! 오, 이젠 살았는가 봐요." 가고파 양의 두 눈에는 이내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바래다 주겠대도 고집부리더니 고생만 하지 않았어." "설마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요." 가고파 양은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자기 집에서 눈을 흘기며 민수에게 대들었다. 민수가 추리했던 그대로 노라른스키는 가고파 양을 이용해서 식물 자력선의 비밀을 캐내려는 계획이었다. 가고파 양은 결코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조국의 독립을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던 그녀의 할아버지의 피가 너무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와는 인연이 너무 깊어진 것 같애. 차라리 결혼을 하면 어떨까?" 정보부의 과학과장 강 윤식은 하루는 민수와 잡담 끝에 이렇게 권했다. "과장님도 그러한 생각이었나요. 글쎄 생각은 여러 번 해봤지만 외국 여성이어서……." "외국 여성이라니. 당당한 백의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 사내답게 프로포즈를 해보지 않고." “글쎄올시다. 두고 봐야지요." 민수는 말꼬리를 흘려버렸다. 직업상 계교에만 살아 오던 민수였고 보기에 따라서는 일류 배우 못지 않은 곡절을 겪어 왔다. 언제까지 인생을 중간에 걸뜬 채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임을 민수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친구로서의 우애(友愛)와 결혼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늘 앞선다. 어느 날 저녁, 민수는 가고파 양과 나란히 남산의 길을 걸으면서 그러한 문제를 끄집어 냈다. "제 생각 같아서는 벗사랑과 결혼을 따로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애요. 원시적인 뜻에서 결혼해서 가족을 기르며 보호하는 정신은 찬성할 수 있겠으나, 시방같이 하루 하루가 문명과 기계화의 시대로 질주하는 세상에서는 부부가 원시적으로 얽매이면 낙오하기 마련일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벗으로 살아나가는 편이 차라리 속도 시대에 걸맞는 방법일 게요. 저는 결혼을 동양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고파 양이 떨어지게 속을 내비쳤다. 민수는 그녀에 비하면 아직도 세습적(世襲的)인 고루한 냄새가 몸에서 풍기는 편이다. "벗사랑? 평생을 한결같이 벗으로 끝낼 수 있다면야 오죽이나 좋겠소. 그런데 사람은 나이를 먹게 되고 또한 다음 세대를 통솔할 책임이 있으니 집 안에서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받는 자가 구별되어야 할 게요." "명령이라구요? 사내들은 명령의 뜻을 아직도 잘 모르는가 봐요. 민수 씨가 말하는 명령이란 호통을 친다는 뜻이겠죠. 할아버지도 가끔 그랬으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명령이란 합의를 본 결의 사항에 지나지 않잖아요. 명령을 받는 사람이 납득을 해야지 그 명령도 실천할 수 있을 게 아니예요. 사내들이 간혹 자기는 빼놓고 두 다리를 쭉 뻗어버린 채 명령만 하는 것은 보기에 민망해요. 미래는 다리를 뻗고 살려는 사람을 게으름뱅이로 규정하고 말 거예요." 가고파 양은 발부리로 길 위의 잔돌을 쿡쿡 차면서 거침없이 말했다. 박물관의 넓은 뜰에 들어서면서 민수는 걸음을 멈추고 가고파 양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고파 양은 오히려 선선한 눈초리로 민수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 본다. "사랑한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못하겠구. 우리들 결혼해 볼까?" 민수는 남의 일처럼 조금 뜬 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어요. 생각해 보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결혼이 적격한지 않은지 전자 계산기에 물어봐야지요. 뚜렷한 답이 나올 거예요." "전자 계산기? 별로 신통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아닐까?" 그러나 이튿날 가고파 양이 결혼 상담소에서 얻은 전자 계산기의 답은 두 사람의 결혼이 80% 적합하다는 결론이었다. '나머지 20%는 무엇일까?' 민수는 문득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 만큼 노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준 게지요. 도시 100% 적합하다는 답은 있을 수 없다던데요." 가고파 양은 민수의 두 손목을 꼭 쥐며 일러 주었다. 민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가고파 양의 허리를 껴안고 어색하게 얼굴을 그녀의 목 언저리에 파묻었다. 조국을 위해서 그다지도 용감하게 여러 차례 사선을 넘어온 사내였지만 첫사랑에는 애들보다 약했다. 가고파 양과 김민수가 화촉을 밝힌 것은 그 날로부터 석 달 뒤의 일. 식물 자력선 연구소장이자 친형인 김철수 박사와 성하룡이 함께 와서 축복해 준 것은 물론이다.   전쟁의 먹구름   이 무렵, 일본과 소련은 사할린(樺太)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외교적으로 한창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판이다. 일본은 노일전쟁(1904~5)으로 제정 러시아로부터 사할린의 남쪽 반을 빼앗아 유전과 탄광을 개발해 오다가 2차대전으로 당하자 다시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은 거기에 심어놓은 권익을 되찾으려고 끈덕지게 소련에게 압력을 가해 왔다. 소련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일본의 전자 공업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 자칫하면 꿀리기 쉬운 입장이었다. 사할린을 중립화시켜 아이누 인들에게 넘겨 주자는 일본의 주장을 소련측이 헛들을 수 없는 것이, 사할린은 본디 아이누 족의 땅인 것을 소련인들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점령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여론은 일본의 그러한 주장을 뒤에서 제 3 국이 조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측은 소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조상의 땅을 돌려 주는 수 밖에 없다고 우겨댄다. 그러나 서로 주장을 내세울 뿐이지 감정적으로 충돌할 환경은 못됐다. 소련은 강력한 핵무기를 지니고 있을 뿐더러 어느 때고 우주에서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대륙간 탄도탄으로 소련을 전멸시킬 수 있는 세균 무기를 비밀리에 개발해 놓고 있다. 만일, 지역적인 충돌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유엔은 이를 제재할 능력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까닭에 강대국은 서로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협정 하나로서 스스로의 발을 묶어 놓고 있을 뿐, 세계 평화에 대한 제재의 보장을 바랄 수 없는 입장이다. 이러한 국제적인 긴장 속에서 공교로이 성하룡의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는 사실은 소련이나 일본으로서도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온갖 자동 계기나 전자 공업의 산물이 허력 에너지 발사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은 이미 실험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터이다. "발사 장치를 만들어 놓으니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졌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니까.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모양이야." 성하룡은 가끔 조수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게 아니지요. 허력 에너지를 막아 내는 발사 장치를 누군가는 반드시 개발할 게요. 그럴 때, 이것을 다시 방비하는 장치를 개발해야 겠지요." 조수 중에는 이렇게 앞일을 내다보는 젊은 과학인도 있다. 금강산의 외딴 골짜기에서 연구 생활만 계속하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극을 창조해 내는 정신은 과학한국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랑할 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김철수 박사에게 호출이 내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나같은 늙다리도 필요한 모양이지." 김 박사는 비시시 웃어보이며 서울로 떠났다. 일주일 후에 김 박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연구소로 돌아오자 성하룡 부장을 불렀다. "극비에 속하는 정보야. 일본과 소련이 멀지 않아 무력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두 나라가 싸우면 우리 나라에도 반드시 피해가 있을 건 뻔하지. 그래서,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무력 충돌을 사전에 방지할 문제를 검토 중이라네." 김 박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얘기를 이어갔다. "허력 에너지 장치를 얼마나 발동시킬 수 있나 묻지 않는가. 비상시에는 허력 장치로서 분쟁에 개입하겠다는 계획인 것 같애. 당장에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을 알아봐 주게." "그렇지 않아도 그러한 기회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싸움이 터지면 발벗고 나서 보겠어요." 성하룡은 가슴을 펴고 두손으로 문지르면서 장담했다. 순식간에 번쩍이는 눈빛은 마치 개구리를 노리는 뱀의 그것처럼 독기가 어려 있었다. 이런 대화가 오간 3일 후에 난데 없이 라디오 방송은 중대 발표를 보도했다. "오늘 새벽 3시에 동해안을 초계 중인 일본 구축함과 소련 순양함이 정면 충돌하여 일본 구축함이 침몰했습니다. 일본 해군의 승무원들은 잽싸게 구명 보트로 옳겨 타고 소련의 구조 작업을 거절했답니다. 일본의 함대는 급거 현장에 출동 중이며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덤덤이 듣고 있던 성하룡은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구나 생각하면서 가슴에 용솟음피는 뜨거운 것을 느꼈다. 일본의 극동함대 총사령관 오까사끼(岡崎) 제독은 기함 이즈모(出雲) 호의 작전실에 앉아 초조한 기색으로 팔목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계의 바늘은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함 1척, 항공모함 1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그리고 잠수함 8척으로 편성된 함대는 현해탄의 검푸른 밤의 파도를 세차게 헤치면서 전진하고 있다. 사세호(佐世保) 군항을 황급히 떠나 온 이들은 고조(高潮)된 긴장 속에서 사고현장으로 직행하고 있는 참이다. 보고된 현장은 울릉도의 동북쪽 북위 39도 4분, 동경 131도 5분, 수심 1천 5백 m의 해역이다. 일본 해군장병들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한바탕 싸워 볼 작정이었다. 굳은 표정에서 그들의 전의(戰意)를 넉넉히 엿볼 수가 있었다. 북상할수록 안개가 짙었다. 울릉도 근처의 바다는 한국에서도 가장 안개가 많은 곳이다. "참모장, 전투 준비는?" 오까사끼 제독은 짤막하게 물었다. "완료된지 5분이 지났습니다. 유사시에 블라디보스톡을 넉 아웃시킬 중거리 유도탄을 가동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참모장은 군함마다에서 보고되어 붉은 불이 켜진 전기 작전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좋아. 정치참모는 해군본부의 움직임을 문의해 주게." 총사령관은 이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한쪽 다리를 절면서 브리지로 올라 갔다. 함대가 충돌 현장에 다다른 것은 사고가 일어난지 꼭 세 시간 후였다. 바다는 어슴프레 밝아 왔지만 뿌연 안개는 수평선을 가리고 있었다. 먼저 헬리콥터가 붕붕거리며 항공모함으로 부상자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조원들의 손으로 침몰한 구축함의 나리세 함장이 수용되어 기함으로 이송되어 왔다. "죄송합니다. 본인의 부주의로 귀중한 구축함을 가라앉히고 말았으니 함대사령관을 뵐 낯이 없습니다." 나리세 대령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총사령관 앞에서 일단 사과를 했다. "성패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요. 충돌 현황을 듣고 싶소." 오까사끼 총사령관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대했다. 나리세 해군 대령이 설명한 사고 현황은 이러하다. 일본 구축함은 예정 항로에 따라 동해를 초계 중, 전날 저녁부터 짙은 안개를 만나게 됐다. 레이더는 곧잘 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위 39도 4분, 동경 131도 5분의 해역에 이르자, 별안간 시계(視界) 1 마일 해상에 불쑥 검은 빛 순양함이 나타나지 않는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레이더망이 왜 이것을 미리 포착하지 못했을까? 얼떨결에 구축함은 귀청이 찢어지도록 날카로운 기적(汽笛)을 연발하면서 신호를 했다. 군함의 속도를 급히 낮추고 대피태세(待避態勢)를 갖추었다. 상대방의 국적을 확인했을 적에는 순양함은 이미 코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위기일발(危機一髮)! 그러나 소련 순양함도 뜻밖의 일을 당한 듯 속력을 낮추며 충돌을 피하려고 함수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서의 1마일이란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다. 여태까지 질주해 오던 관성(慣性)을 달랠 길 없이 소련군함은 내쳤다 일본 구축함의 교리를 들이받고 말았다. 우르릉 쿵 쾅! 삽시간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함미 쪽에서 두동강이가 난 군함은 기울기 시작했다. 다행이 불이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아 열댓 명의 부상자를 내었을 뿐, 전원이 구명정으로 옮길 수 있었다. 충돌은 전혀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두 나라의 국민들은 신문 보도만 읽고 분개했다. 사고는 서로의 자료를 국제해난(海難)재판소에 제출하여 거기서 판가름해야만 된다. 그럼에도 신문은 저마다 추측 기사와 해설을 실어 자기네 쪽이 정당한 것처럼 떠들었다. 소련의 순양함은 함수에 약간 금이 갔을 뿐 평소와 마찬가지로 항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듣기에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순양함은 순양함대로 항해의 안전을 보장할 길이 없어 한국 정부의 양해를 얻어 가까운 원산항으로 기항했다. 군함이나 상선이 해상에서 위급할 때, 국제법상 가까운 항구에 기항하는 일을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국의 근해에서 일어난 충돌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국 정부도 공연한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별 도리가 없게 됐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일본 해군은 극동함대를 계속 블라디보스톡 앞바다까지 초계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또 무슨 꼬투리만 잡는 날에는 영영 전화의 불꽃이 튀길 판이었다. 소련 해군은 그들대로 잠수함과 항공모함을 원산 앞바다로 보내어 수리 중에 있는 순양함을 보호할 양 닻을 내리지 않은 채로 근해를 유예(遊曳) 중이다. 일본의 극동함대가 먼저 대거 출동한 사실은 블라디보스톡의 소련 함대를 자극한 것이다. "만일 일본 해군이 발포하면 서슴없이 응전하라. 이 해역에서의 분쟁이 당장에 전면 전쟁으로 발전할 확률은 적다." 소련 함대사령관 역시 에누리 없는 명령을 내린지 오래다. 국제 긴장은 으례 썰물과 밀물이 번갈아 들듯이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한 번 달아오르면 여간해서 식지 않는 법. 일본 외무성은 모스크바에서 주소대사로 하여금 이 건을 정식으로 정부에 항의케 하고 소련 측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소련은 며칠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비로소 각서를 일본측에 수교했다. “……역시, 국제해난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응당한 보상을 요구하거나 물거나 해야겠다. 지금 형편으로는 우발 사건을 유감으로 여길 뿐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여론은 발칵 뒤집혔다. "도의적인 책임마저 지지 않으려는 소련 정부의 처사는 괘씸하다. 일본의 극동함대는 뭘 우물쭈물하고 있느냐. 본보기로 소련 군함을 격침(擊沈)시켜라." 왁자하게 들먹거리는 여론을 정부도 당장에 가라 앉히질 못했다. 미국 정부가 워싱톤에서 두 나라 대사를 통해서 조정안을 내놓고 일을 마무리려고 애썼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소련은 미국 정부가 나서서 입을 내밀 처지가 못된다고 한 마디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그들의 태평양 함대까지 만들어 바다로 진출해 오는 일은 일본이나 미국으로서는 못 마땅한 일이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의 이동(以東)에서 군사 기지를 철수한 뒤, 소련은 슬그머니 인도양에 해군 기지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들은 이제 태평양 특히 서태평양에서 활개를 치려는 판이다. 국제해난재판소의 송사(頌辭)는 지지부진 날짜만 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급한 일본 해군이다. 고의(故意)인지 우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제 2의 충돌 사건이 동해에서 또 생겼다. 이번에는 소련측 구축함이 폭발하면서 침몰했다. 사상자도 30명을 헤아렸다. "망할 놈들! 일분러 우리 군함을 들이받다니 말이 되느냐 말이다. 일본 군함을 발견하는 대로 발포해도 무방하다." 악에 바친 발포 명령이 내리고 말았다. 동해는 졸지에 전쟁터로 바뀌고 말았다. 서로 상대방을 발견하려고 그림자를 찾아서 정찰기가 하늘 높이 비행구름을 그으면서 날으고 있다.   출동 명령   "동해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 우리의 어족보호상 불가피 개입해야만 한다. 정보망을 넓혀서 쌍방의 동태를 주시하도록." 김이찬 참모총장은 정보부에 또 한번 지시를 내렸다. 유린 가고파 양이 한껏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그녀는 소련 방송과 비밀 지령을 해독하는 작업에 정식으로 참가했다. 소련 함대의 작전 지령이 쏟아져 나왔다. 현해탄을 뚫고 일부 함대는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확대는 불가피한 거야. 이거 야단났는데." 직접 담당은 아니었으나 김민수도 몸이 달았다. 입수된 지령에 의하면 일본 해군은 세 갈래로 제 1 전대는 직접 블라디보스톡을 치고, 제 2 전대는 현해탄에 포진하고, 제 3 전대가 유격 함대로 주력을 이루리라는 것이다. 전운(戰雲)은 날이 갈수록 짙어지기만 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다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고 대책을 토의했다. "쌍방의 접전으로 한국 어선이나 영토에 직접으로 피해가 생길 때, 그래도 우리는 중립을 지켜야 되는가 또는 무력 개입을 해야 옳은가?" 해군과 공군 측에서 먼저 이러한 질문을 내놓았다. "보복을 해야 할 것으로 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군이 대마도를 점령하는 방책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육군 측에서도 강경론이 펼쳐졌다.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로선 만전의 태세를 갖추어 놓아야 할 것이다. 오늘 오후 5시를 기해서 전군이 응전 태세로 들어갈 수 있토록 조처하도록!" 김이찬 참모총장은 회의에 일단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선 따로 식물 자력선연구소의 김철수 박사와 성하룡 실장을 불러 놓고 정세를 설명해 주었다. "지금 일본은 일본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제각기 한국의 중립을 요청해 왔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고려할 순 있으나 군사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가 직접 피해를 입었을 때. 가만히 앉아 있다면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무력하다고 비난할 것은 뻔하다. 그래서, 국군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전에 장치해 놓은 허력 에너지 장치를 동원할 생각이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염려 마십쇼. 허력 에너지는 본래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서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김철수 박사는 서슴없이 답변했다. "성 실장의 견해는?" 참모총장은 잊지 않고 물었다. "과학자로써 한 마디 말씀드리자면 피를 흘리는 충돌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본디 평화를 위해서 발전시켜온 것이지 결코 전쟁의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충돌이 생겨서 피해를 입을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나가서 허력 에너지 장치로 쌍방의 전쟁을 억제해 버려야 할 줄로 압니다." "대단히 좋은 의견이오. 그러나 나라의 체면으로선 함부로 개입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어쩔든 에너지 발사를 총동원해 놓으시오. 당신의 솜씨를 보여 줄 날이 온 것 같소." 이러한 얘기가 오고 간 이틀만에 참모본부에 짤막한 전보가 날라왔다. 「일본의 제 3 전대와 남하 중의 소련 함대가 독도(獨島) 동쪽 30마일 해상에서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는 소식이다.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군!"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성하룡은 뜨거운 것이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온 몸이 화끈화끈 달아 올라왔다. 3분도 채 못되어 참모본부로부터 호출 명령이 내렸다. 급히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출두하라는 것이다. 성하룡은 1초가 늦을세라 옷을 갈아 입고 차를 남산 기슭에 있는 참모본부로 몰았다.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는 시민의 표정은 라디오 점포의 문전에 모여 모두 걱정스러운 빛으로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당장에 포항(浦港)으로 직행하시오. 거기서 대기 중인 순양함 북두칠성호를 타고 출동하시오. 작전 명령은 함장이 알고 있을 테니 잘 부탁하오." 김이찬은 성하룡의 손목을 붙잡고 힘주며 말했다. 그의 두 눈에는 말과는 반대로 차가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이기호 군은 어디로 배치했습니까?" 성하룡은 물었다. "방금 김포 공항을 떠났을 거요. 그 쪽은 비행기에서 당신은 해상에서 한껏 일해 주시오." 성하룡의 가슴 깊이 감격의 샘은 포항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 넘쳐 흐르고만 있었다. 북두칠성호는 모든 엔진을 걸고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양함이 외항을 향해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 5분 하늘은 맑게 개였으나 북서풍을 받은 물결은 흰 거품을 들쓰고 넘실거리고 있었다. 성하룡은 북두칠성호에 미리 장치해 둔 허력 에너지 발사장치를 점검(點檢)해 보았다. 둥근 벌집 모양의 커다란 발사기는 전기 회로를 순순이 받아 들인 채, 온 몸에 열을 올리면서 수 많은 계기판에서 바늘을 흔들이며 약동하고 있다. "성 실장! 허력 에너지 발사에 관한 모든 지령을 본함에서 내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공군 쪽도 본함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점 참고삼아 알아두시오." 갓 마흔이 지났을까 말까 해 보이는 함장이 다가와서 일러 주었다. "고맙습니다. 이쪽의 발사 준비는 다 돼 있습니다." 성하룡은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대답했다. 벌써 은은한 포성이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단파 방송은 쌍방이 교전 중이라고 보도하고 있을 뿐 피해는 당장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발사 준비!" 임종구 함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레시버에서 쨍 울린다. 성하룡은 보조원들의 얼굴을 둘러 보았다. 서로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개만 끄떡여 보인다. "동동북 각도는 33도. 발사!" 성하룡은 짜릿한 전율을 온 몸에 느끼면서 단추를 기운차게 눌렀다. 그리고선 계기판으로 눈을 돌렸다. 다시 눈길을 벌집 안테나로 옮긴즉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그 무엇이 거기에서 내뻗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지령은 공군에게도 내려졌다. 허력 에너지 편대가 2만 m상공을 날으고 있는 중이다. 허력 에너지의 집중 발사를 가한지 3분, 4분, 5분만에 요란스러웠던 포성이 별안간 잠잠해졌다. "이게 웬 일이야. 전자 장치가 움직이지 않는다!" "빨리 전원(電源)을 체크해 봐!" "전원에는 이상이 없소." 일본 해군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소리가 전파 수집기의 확징기를 통해 들어온다. "기관장 어떻게 된 일이오? 군함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것 같소!" 소련 해군 쪽에서도 야단법석이다. 모든 전자 회로가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전함도 항공 모함도 움직이질 못한다. 두 나라 해군 장병들은 천지이변이나 다름이 없는 기적의 수수께끼를 풀어 낼 재주가 없었다. "한국은 극동의 이 해역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드디어 허력 에너지를 발사했습니다. 허력 에너지는 모든 전자의 움직임을 좀먹어 버리는 전혀 새로운 에너지입니다. 소련 해군 장병 여러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이 위대한 비밀무기의 위력 앞에서는 모든 군사적 모험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총을 버리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를 찾으시오." 유린 가고파 양의 유창한 소련말 방송이 들려 왔다. 성하룡은 마음이 저절로 흐뭇해졌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몸부림치며 평화를 원했던 것처럼 한국은 이제 스스로의 평화를 실력으로 지킬 수 있는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고 말았다. "대 성공이오. 우리의 승리요." 잠잠해진 바다 위에서 함장은 성하룡을 힘껏 부둥켜 안았다. 성하룡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 S.F단편선   ※ 기적의 세레나데 호 ※ 이별 ※ 서박사의 실험 ※ 모래벌의 비밀     기적의 세레나데 호   영등포에서 지하철(地下鐵)을 내린 영웅은 마중나온 아저씨와 함께 광장을 건너 갔다. 우주관광연맹사에서 나왔다는 F씨가 벌써 차에 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해라. 이분이 너를 케이프 케네디 우주 정거장까지 데리고 가서 안내하기로 된 F선생이다. 그럼 너무 수선떨지 말고 잘 다녀와!" 영웅이가 내민 손을 잡는둥 마는둥 F씨는 왼쪽 손에 들었던 시가를 입에 옮겨 물면서 차를 곧장 김포 비행장을 향하는 탄환도로(彈丸道路)로 몰았다. "학생이 이번 퀴즈 문제에 일등한 사람입니까?" F씨는 3차 대전 직전에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는 한국인 3세였다. 옛날 우리 나라처럼 자그마한 나라에도 여러 가지 사투리가 있던 시절. 아마 이 분은 경상도 지방에서 이주해 간 이민의 자손이 아닐까 생각됐다. 영웅이는 요즘 '김유신 장군의 소년 시절'이라는 연극에 나가느라 경상도 방언의 발음 지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말소리가 어쩌면 그렇게 경상도 사투리하고 꼭 같아요?" "내 말이 경상도말캉 같다꼬?“ "예!" "우리 옛날 조상들 고향은 강원도라카든데……" 비대한 체구의 F씨가 서툰 우리 말로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 우스워서 영웅이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울창한 숲을 양쪽 기슭으로 거느린 한강이 오른쪽 발 아래 사라지고 「천천히 시속 100마일」이라고 쓴 표지판이 있는 커브를 끼고 큰 독수리 날개처럼 접힌 지점에 도달했다. 왼쪽으로 7월 하오의 눈부신 햇빛을 받고 잠자리같은 헬리콥터 편대가 떠 오른다. 벌써 런던, 파리,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김포 국제 공항에 도착한 극동항공공사의 제트기가 개미같이 자그마한 손님들을 동체에서 풀어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걸 타고 가는 거예요?" "아니지. 아마 저 속에 퀴즈 문제에 이등으로 당첨된 파리에서 오는 아가씨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F씨는 이어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관광공사에서 이번에 주최한 퀴즈 문제의 응모자 총수는 8억. 그 중 정답이 3억. 이 3억을 대상으로 실시한 추첨에서 백 서른 두 명이 뽑혔는데, 그 중 세 명은 5세 미만의 애 이름으로 응모해서 실격, 백 스물 아홉 명이 우주 여행의 특권을 얻었다. 그 가운데서 다시 등수를 매겨서 다섯 명만 전적인 관광공사 부담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것, "학생 이번 문제는 너무 쉬웠지?" F씨는 얼굴에 미소를 띄며 이렇게 물었다. "달이 생긴 원인에 대한 학설 3가지를 든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요. 첫째 지구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 태평양 근처에서 말입니다. 둘째는 외계에서 태양계를 떠돌다 들어와서 지구의 인력에 사로잡혔다는 것, 셋째는 지구가 형성될 때 그 가까이에서 달도 형성이 되었지만, 달이 작기 때문에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 학설을 맨 먼저 제창한 사람을 들으라는 것은 학교에서도 안배웠거든요. 그게 아까 그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쓴 거예요. 그 아저씨는 지금 원자력원에서 일하시거든요." 달나라 관광 사업은 예상했던 것처럼 성적이 좋지는 못하다는 풍문이었다. 달나라에는 공기가 없기 때문에 지구에서 천체를 관망할 때처럼 별들이 물빛을 머금고 반짝거리지는 않는다. 거기서 지구를 바라다 본다는 것은 지구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실감있게 느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말을 3차 대전 후 어느 철학자가 말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지구에서 볼 때 달이 주는 것보다 훨씬 밝은 빛을 지구는 달에 비쳐주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서 전체를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태평양같이 큰 바다를 바라다 보고 있노라면 누구의 가슴에도 시상(詩想)이 떠오를 것 같았다.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하얀 쪽배에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이런 동요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달보다 여섯 배나 큰 지구를 바라다 본다는 것은 바라다 보는 그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신비한 체험이었다. 처음에는 지구에서 볼 수 얹는 달의 이면을 구경하고 중력이 지구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몸 움직임이 가볍고 자유스러운 달에 비싼 돈을 들이면서까지 가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옛날의 얘기. 우선 달은 너무 고요했다. 대낮에도 별이 보이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우주복 속에 싸인 제 숨소리 뿐이었다. 두 시간이면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이 우주 생활의 매력은 아는 사람만이 알았다. 이를테면 플로렌스라는 여자 같은 이름을 가진, 영웅이를 안내하는 아저씨같은 분이랄까. "달에서는 안내원의 얘기를 절대로 어겨서는 안되지." 제트기가 이륙할 때 채웠던 벨트를 끌르면서 플로렌스씨는 로이 양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이 양은 프랑스에서 행운의 추첨에 이긴 영웅군의 동행이었다. 영어 실력은 영웅이와 어슷비슷. "안내원의 말을 안듣는 사람도 있나요?" 로이 양이 묻자 "우주선 안내원은 전부 여자거든. 여자 손님들이 특히 말을 안 듣지 뭐니." "어마 그래요?" "일전에는 안내원들이 달에 파견 나가 근무하고 있는 우주 개발국 기지에 손님들을 안내했거든." "그래서요?" "그렇지 않아도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쓸데 없는 질문을 해서 골치를 앓는 판인데, 어느 부인이 묻는 말에 공사부 엔지니어 한 사람이 대답을 안했대. 그랬더니 고만 그 부인은 그 자리에서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거였지. 막무가내야." "어디 그럴 수가 있어요." 로이양은 영웅군을 쳐다보며 싱긋 웃는다. "달나라에서는 지구와 달라서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 공휴일이거든, 그 사람은 휴일날 아침인데 금방 근무 교대를 하고서 한잠 자려던 참이었지." "우주복을 오래 입고 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면서요?" 영웅이가 물었더니 "누가 그러든. 시시한 소설 얘기지. 나두 우주복을 십여 년 입고 지낸 사람이지만, 어디 내가 너희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니?" "……?" "넌 아까 내 한국말 사투리가 경상도라고 했지만 우주복을 입고 정말 바깥 세상과는 무전기 하나로 밖에는 연락할 수 없는 속에서 나는 열심히 한국말 공부를 했어. 알고 보니까 한국에는 크게 나누어 다섯 가지 사투리가 있다고 하지 않겠니. 그 다섯 가지를 이제는 다 마스터하게 된 것도 실은 우주복을 입고 보초 근무를 서 온 덕택이었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그들은 어느덧 마이애미 남단 케이프 케네디 우주 공항 상공을 날고 있었다. "아저씨가 이번 여행을 계획하셨다지요. 이번에는 어느 코스로 가나요?" "이번은 제일 스릴이 있는 코스지." "스릴이라니요?" 로이 양의 눈이 커진다. "달의 뒷모습은 이제 안 알려진 데가 없고, 첫 개척자들이 우주선을 분해해서 만들었다는 도시도 가보면 듣던 것과는 좀 다르거든." "거기에 아직도 사람이 사나요?" "아니. 지금은 우주천문대에서 관리하는 검시소가 하나 있을 뿐이야." "그럼 우리들은 어디로 가는데요?" "저 목마른 바다라는 말 들어보았지?" "아! 폭이 60km쯤 되는 그 먼지로 된 바다 말인가요?" 로이 양이 물었다. "응 거기도 이제는 배를 띄우고 있거든." "배를요?" "그렇지, 글쎄 썰매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하기야, 그 바다가 그렇다면 육지는 아니고, 공기는 없지만 빈 공간도 아니니 뭐 배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우리가 이번에 타게 될 우주선도 이름은 독립 호라는 배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   케네디 우주 정거장에서 영웅 군과 로이 양은 세계 도처에서 온 일행과 합세하였다. 그들은 지구에서 마지막 먹는 저녁은 모두 자기 나라 고유의 음식으로 하는 것 같았다. 전골 백반을 먹는 영웅이 곁에 앉은 인도 할아버지는 맵게 생긴 카레라이스를 맨손으로 먹고 있었다. 우주선 독립 호는 타는 기분이 배와 같았다. 승객 가운데는 무중력 상태에서 배멀미를 하지 않으려고 주사를 맞는 사람도 있었다. 예정대로 저녁 10시, 독립 호는 달을 향하여 발사대를 출발했다. 로이 양은 영웅 군의 팔을 꼭 잡으면서 이제부터는 '미스터가 나의 나이트'라고 했다. 총총한 별들이 선창에서 멀어지더니 햇빛이 닿고 있는 태평양 서쪽 일대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윽고 지구는 완전한 하나의 원으로 신비를 가득히 감춘 우주를 배경으로 구름의 베일을 두른 공처럼 멀어져 갔다.   눈을 떠 보니 벌써 달에 닿아 있었다. "여러분 긴 여행에 얼마나 지루하셨습니까. 여기는 여러분이 기대하시던 루나 제일 정거장입니다. 목마른 바다로 향하는 관광선은 5번 플랫홈에 대기 중이니 우주 하복을 잊지 말고 관광선을 타시려는 손님들은 열을 지어 나오시기 바랍니다." 로이 양을 앞세운 영웅 군은 퀴즈 일등 당첨의 금뱃지를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키 큰 흑인 중년 신사와 나란히 독립 호보다 유리벽면이 휠씬 크고 시원하게 생긴 관광선 안에 들어섰다. 세레나데 호라는 관광선에는 선장과 스튜어디스 두 사람이 정원 서른 명의 손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모든 손님이 자리를 잡은 다음 우주선을 개조해서 만든 관광선의 스튜어디스 월킨즈 양은 "세레나데 호에 오르신 여러분을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여행은 네 시간 정도 걸릴 것이며……" 고운 목소리로 또렷또렷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게 관광 코스와 설명이 시작되는 동안, 세레나데 호는 지구빛이 달빛처럽 환한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단. 독립 호의 속력은 세레나데 호의 수백 배를 능가하는 것이었으나, 손님들은 여유 있게 적외선 망원경으로 처음 보는 달나라 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 세레나데 호가 달리는 달 표면에 깔렸던 흙가루가 더 보드러운 융단처럼 일 센티미터 남짓 깊어지면서 관광선은 드디어 목적지의 하나인 목마른 바다에 나섰다. 말만 들어보던 옛 화산구였다. 은빛으로 한없이 깔린 이 우주진으로 형성된 바다는 죽은 듯 조용했다. "어때 사하라 사막 같지?" 스튜어디스의 설명이 끝난 다음 영웅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로이 양에게 말을 건넸다. "사하라 사막보다 이 먼지는 더 부드럽대. 아니 그런데 저게 뭐지?" 시속 30노트로 달리던 세레나데 호는 갑자기 선체를 기울이면서 돌연 앞을 막고 나서는 벽을 피하여 속력을 늦췄다. 벨트를 풀고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소리를 쳤다. 이런 사태는 우주 비행으로 잔뼈가 굵은 나탈리 조종사에게도 적지 않은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다. 앞에서 솟아 오른 것은 벽이 아니라 사구(砂丘)였다. 달의 내부 깊숙이 도사리고 있던 마지막 열기가 일으킨 발작같은 지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세레나데 호는 점점 가라앉지 않는가!   그 때, 지구 쪽에 면한 클라비우스 위성 제일 도시의 천문대에서는 지진계의 바늘이 놀란 듯 흠칠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동으로 기록되어 통제실 기술국장의 데스크 위에 붉은 불빛으로 깜박거렸다. "이게 무슨 일일까?" 우주 생활에서 필요한 수면 시간은 두 시간이라고 하지만 지금 로렌스 국장은 막 점심 후의 낮잠을 즐기려던 참이었다. 그는 곧 지진계가 있는 곳으로 뛰어 내려갔다. 붉은 바늘은 마지막 진동에서 몸을 가누려고 파르르 떨었다. 옆에 있는 전자 지도판을 열어 본 그는 진원이 어딘가를 알아챘다. "비상! 비상 신호를 내려라. 지금 목마른 바다 근처를 항해 중인 관광선은 없는가?" 로렌스 국장은 마이크에다 이렇게 고함쳤다. 나탈리 조종사는 우선 승객들을 진정시키고 선체의 내부 압력을 증가시켰다. 먼지 깊숙히 가라앉을수록 밖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위험했던 것이다. "지금 세레나데 호는 예기치 않은 지진을 만나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만, 10m 이상 가라앉을 염려는 없습니다." 그 때, 키 큰 흑인 신사가 조종사 앞에 나타났다. "제가 한센 탐험 대장입니다. 앞으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가 유명한 한센 대장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과 공포에 싸였던 분위기는 조금 안정되었다. 화성 중거리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년 전에 은퇴한 유명한 우주 비행사가 바로 이 사람이었던가. 영웅이는 부러운 눈빛으로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식량과 물은 충분하오?" 한센 씨가 묻자, 스튜어디스 월킨즈 양은 "칠일 동안 먹을 비상식량이 있고 물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선체가 상하지 말아야 할텐데요." "그보다 산소가 떨어질까 봐 더욱 걱정이군." 그리고 한센 씨와 조종사는 조종석으로 갔다. 네 시간 후 세레나데 호가 당면한 문제는 식량과 산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선내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먼지 속에 밀폐된 선실 속에서는 서른 명의 체내에서 발산하는 열도 대단했다. 네 시간에 7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 우주 하복으로 갈아 입어야 했다. 남자들은 웃옷을 벗었고, 여자들은 수영복 차림이 되었다. "수색대를 또 보내보았나?" 세레나데 호가 실종한 다음 '목마른 바다' 일대에 썰매를 풀어 놓았으나 기술국장은 아직 세레나데 호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지금 막 3호 썰매에서 무선 연락이 왔습니다. 목마른 바다 한쪽에 먼지가 샘솟는 곳이 있다는 보고입니다." "뭐 먼지가 샘솟는다고?" 기술국장은 구조작업의 선두에 나설 준비를 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다시는 입지 않으려고 했던 우주복을 또 한 번 입는 수 밖에 없었다. 현장에 도착한 로렌스 기술국장은 그것이 곧 대류 현상(對流現象)인 것을 알았다. 그 속에 파묻힌 물체가 지금 타고 있지 않으면 열에 달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물체가 세레나데 호일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선체 내는 흡사 한증탕 같았다. 선실 밖을 사그락거리고 스쳐가는 먼지들이 달아오른 배기구 근처의 열에서 일어난 대류 현상인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다음이었다. 그래서 사뭇 오르고 있던 실내 기온이 주춤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조종사는 생각했다. 이렇게 축 늘어진 선객들을 어떻게 구조해 낼 것인가 - 저만치 한국에서 왔다는 퀴즈왕이 불란서 소녀의 손을 꼭 잡고 잠들어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선체 위를 깎아들어오는 쇠소리와 함께 천정 한구석에 구멍이 뚫리고 시꺼먼 쇠통 하나가 나타났다. "살아 있으면 대답을 하시오. 여기는 구조모함."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조종사는 쇠통 밑에 달린 마개를 열었다. 순간, 선내에 있던 모든 물체가 일제히 손을 드는 것 같았다. "빨리 기통 마개를 잠궈. 선내 기압과 조절이 안 되면 위험해!" 세레나데 호는 자꾸 더 밑으로 가라 앉았다. 로렌스 국장이 산소통을 넣었을 때는 깊이 20 m의 진흙처럼 굳은 바다 속 바닥 위에 떠 있었다. 잠수함을 내려보내기 전에 세레나데 호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승객들을 전부 깨워서 힘 있는 대로 발을 구르도록 지시할 것." 로렌스가 세레나데 호의 실종 위치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구의 각 통신사에서는 구조 현장의 텔레비전 중계를 의뢰해 왔기 때문에 목마른 바다에는 온갖 형태의 선박들이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옛날에 쏘아 올린 로켓의 선체를 뜯어서 개조한 것들이었다. "구조할 가망이 있습니까?" "22세기 과학에 불가능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로렌스 국장은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두 가지 사실이 걱정되었디. 그것은 구조 사다리를 내려뜨릴 잠수함을 세레나데 호의 천장에 밀착시킨 다음에도 배가 밑으로 가라앉는 경우요, 세레나데 호의 발전기에서 일어날 화재의 염려였다. 완전히 내화 재료로 만든 선내에 화재의 위험이 있을까? 문제는 파이버 글래스였다. 잠수함을 세레나데 호에 밀착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도선이 끊겨나간 자동발전기는 전도체(電導體) 구실을 하는 우주진(宇宙塵)에 마치 점화기(點火器) 같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것이 파이버 글래스에 당기고 앞으로 옮겨서 산소통에 불이 일 때까지 한센 대장의 계산에 따르면 8분밖에 남지 않았다. 뚜껑처럼 천정이 도려져 나가면서 사다리줄이 내려왔을 때, 48시간 동안 목마른 바다 속에 갇혔던 서른 명의 사람들은 환성을 울릴 겨를도 없었다. 여자를 앞세우는 성급한 구출 작업을 해야 했다. 인력이 약한 곳이기 때문에 모두들 나는 듯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벌써 선실 속에는 파이버 글래스가 타는 짙은 흑회색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하고 그 위로 종이컵 몇 개가 타 있는 것이 보였다. 조종사가 마지막으로 사다리줄을 잡아 쥘 때까지 꼭 6분이 걸렸다. 저 연기가 천정을 덮기 전에 세레나데 호는 50 피트 깊이의 먼지 속에서 자폭을 하고 말겠지. "기적이야!" 로렌스 국장은 나탈리 조종사의 땀에 흠뻑 젖은 팔을 잡아 올리면서 소리쳤다. 그 때다. 구조모함 근처의 먼지가 일제히 춤을 췄다. 드디어 세레나데 호는 폭파한 것이다. "역시 기적은 있군!" 인공 위성의 중계를 거쳐 구조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던 영웅 군의 아버지 말이었다.   이 별   "모두들 안녕!" 벤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로봇의 에너지 탱크에서 손을 뗐다. 이 행성(行星)에서 최후의 지구행(地球行) 로켓이 발사된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벤 노인은 수백 개의 로봇과 생활을 같이 해왔다. 벤은 자기가 설계해서 개량을 가해온 로봇들에게 둘러싸여 오늘날까지 행복된 나날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즐거운 생활에 이윽고 피리어드를 찍을 날이 온 것이다. 약 2개월 전에 심장의 발작을 일으켰다. 이 때, 벤 노인은 자기의 죽음이 눈앞에 찾아온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2개월 동안 벤 노인은 오직 즐겁기만 했던 로봇들과의 생활을, 그리고 30 수 년 전 이 근처의 행성에 많은 지구인이 살았던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지냈다. 벤 노인이 여기에 온 것은 우라늄이 아직 에너지원(源)으로 중요시되어 있던 시대였다. 그 후, 이 우라늄을 상회하는 에너지량을 가진 새로운 플루토늄의 시대가 다가왔기 때문에 이 근처에 있는 행성은 버려진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30 수 년 전, 이 행성에 파견되어 온 사람들은 지구로 끌어 올려졌다. 이 행성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벤 노인은 최후의 지구행 로켓를 타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벤 노인은 젊고 우수한 로봇 공학의 기술자로 이 행성에 파견되었던 것이었다. 이 행성의 광산 채굴 작업에 사람 아닌 고도로 발달한 로봇이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벤은 행성의 로봇 관리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구인이 이 행성에서 할 일이 없어짐으로써 로봇도 여기에 쓸모없이 버려지게 된 것이다. "내 모든 지혜를 짜내어 개량해서 이제는 인간에 가까운 감정을 갖기 시작한 로봇을 버리려 하는가요?" 벤은 정부의 관리에게 열심히 항의를 했으나 정부 관리는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쪽의 의견을 들어 보세요. 2척의 로켓이 이 행성과 지구를 왕복해야 합니다. 그 경비는 로봇을 수백 개 구입하는 값의 8배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로봇을 그 곳에 버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크게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만든 로봇은 그 정도의 비용을 가지고는 만들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십 년 간을 있으면서 그 동안에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 로봇 공학의 권위자인 아시모프 박사라도 그 가치를 인정해 줄 것입니다." 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만들어 개량한 로봇을 지구로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런데 과학적 지식이 없는 관리의 눈으로 보아 지금 지구상에서 심부름꾼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로봇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당신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 집착하는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로봇들을 여기에 남겨둔다 해도 당신이 지구에 돌아가면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기술은 지구에 돌아간다 해서 퇴보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건 모르는 말입니다. 나의 로봇은 몇 번이나 거듭 말한 바와 같이 십 몇 년 동안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결과 지금과 같이 우수한 성능(性能)을 가미(加味)할 수 있게 까지 된 것입니다. 실물이 없으면 개량해 온 프로세스(過程)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1개만 가지고 돌아가는 허가를 얻도록 당국에 신청해 드리지요." 이 답변에 벤은 난처하게 되었다. 관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모든 로봇을 운반해 갈 필요는 없다. 그런데 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모든 로봇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의 감상(感傷)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벤에게 있어서는 절실한 감정인 것이었다. 사실 사람의 정(情)이란 야릇한 것으로서 아무리 많은 자식을 가졌어도 그 하나 하나에 끌리는 정은 마찬가지여서 어느 하나도 떼어놓기 싫은 것이다. 벤의 기분은 흡사 그와 같은 것이었다. 타협이 끝나자마자 지구의 정기편(定期便) 우주선이 이 행성을 출발하는 날이 닥쳐왔다. 로봇의 에너지 보급탱크는 이제 활동을 멈추어 버릴 운명에 부딪친 것이다. 이 로봇들은 아직도 1세기는 더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지만 에너지 탱크를 움직일 인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로봇은 두 번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이윽고, 로켓은 지구를 향해 발진(發進)했다. 그런데 벤은 아무도 없는 행성에 홀로 남은 것이었다. 그래서 로봇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행성은 지구와 거의 비슷한 자연 조건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장 식량이 떨어져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벤이 입김을 준 로봇은 그 후 벤이 상상치도 못했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벤의 로봇은 인간과 꼭 같은 감정을 가진, 아니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미개한 행성은 로봇 자신의 의지로 개척되어 바야흐로 여기는 지구상에 있는 도시와 맞먹을 정도의 건물이 건설되었다. 그 결과, 이 행성에는 인간인 벤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로봇의 힘의 원천은 벤이 관리하고 있는 에너지 보급 탱크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벤은 이들 로봇의 왕인 것이다. 또한 로봇들도 벤을 창조주(創造主)로 모시고 왕을 대하는 태도로 그를 경애하는 것이 었다. 그런데 벤을 모시고 즐거웠던 날들도 이윽고 그 막을 닫을 날이 찾아온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벤 노인의 주위에는 로봇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히." 벤은 최후의 고별을 하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른손은 에너지 보급 탱크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스위치에 가 있었다. 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루의 휴식도 없이 자기가 만든 로봇을 돌보았던 것이다. 이윽고, 에너지원은 끊어졌다. 그 순간 벤 노인은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로봇들의 활동은 정지하지 않았다. 많은 로봇들이 슬픈 표정으로 벤의 침대 가까이 가는가 싶더니 벤의 시체를 안아 일으켰다. 얼마 후, 이 행성의 고요한 초원에 로봇들의 장열(葬列)이 보였다. 창조주를 정중하게 장사지냈다. 사실인즉 자기가 로봇의 에너지원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벤 노인에 대해서 로봇들은 그들 스스로 에너지원을 얻을 수 있었던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 로봇들의 벤에 대한 경애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서 박사의 실험   "드디어 완성이다." 서 박사는 만족한 기분이었다. 박사의 눈앞에는 작은 상자 모양의 기계가 알루미늄 빛을 내고 있다. 그 기계로 말하면 서 박사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걸려 완성한 '사고뇌파 수신 장치(思考腦波受信裝置)'였다. 이것은 문자(文字)로 인간의 사고를 캐치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명품인 것이다. 사고 뇌파는 일종의 전파로서 그 파장을 알고 동조(同調)할 수 있는 장치만 만들어진다면 그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이론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제로 이 연구에 정면으로 착수한 사람은 서 박사가 처음인 것이다. 서 박사는 자기가 만들어전 장치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이 장치는 박사의 과거 수십 년 간의 노고의 결정이다. 그 동안 서 박사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리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러나 연구가 완성된 지금 그의 노고는 모두가 하나의 즐거운 회상이 될 뿐이었다. 서 박사는 장치를 앞에 놓고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 장치가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사회에 일대 변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잡아 한 나라나 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박사는 복잡한 생각들을 머리에서 쫓아 버리려는 듯 냉정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하여간 이론적으로는 성공되었지만 아직 실험이라는 수속이 남아 있다. 실험의 결과 어딘가에 결함이 발견되는 경우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빨리 실험을 해 보는 것이 급선무다. 정말 십 여년 동안을 연구실에 도사리고 앉아 외출이라고는 한 발자국도 해보지 않고, 오직 이 연구에 전력을 기울인 그였다. 박사는 그 동안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전연 모른다. 현실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하루에 한 번 찾아오는 식료품점 점원에게서 음식을 받는 것뿐이다. '만일 장치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박사는 연구의 성과에 자신이 있지만 만일의 경우 실험에 실패한다면 하는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이 때 부~하고 부저가 울렸다. 하루에 한 번 오는 식료품점의 점원이 온 것이다. 10여 년 동안에 이곳에 오는 점원도 여러 명 바뀌었다. 지금 이 점원은 30번째나 되리라. 그런데 이 부저 소리가 서 박사에게 결단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서 박사는 장치에 안테나를 연결하고 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박사는 그 점원을 실험 대상으로 하려는 것이다. 피실험자(被實驗者)는 '인간'이면 누구라도 좋은 것이다. 점원은 홍안의 소년이었다. 식료품이 든 부대를 고르고 오렌지 주스 통조림을 꺼냈다. 통조림을 들고 있는 소년 앞으로 간 서 박사는 "아무도 없으니 한 잔 하고 가게." "저는 먹지 않아요." 소년은 정중히 예를 차리며 마시려 하지 않았다. 이 때, 서 박사는 장치에 스윗치를 넣고 질문했다. "오렌지 주스를 싫어하는군." "아니오, 가끔 마십니다." 박사는 이어폰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온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어떤 반응이 있을까 하고. 그런데 서 박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서 서 박사는 또 하나의 주스를 들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 때, 테이블 커버에 물이 번져갔다. 소년은 재빨리 일어나 옆에 있는 걸레로 훔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치워 놓고 서 박사 앞에 앉았다. 이어폰의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틀렸구나……' 서 박사는 점차 불안해졌다. 주스를 찔끔찔끔 테이블 위에 붓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었다. 소년의 마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처럼 기다려도 이어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소년이 무의식적으로라도 무엇을 생각하면 그 사고파(思考波)를 기계가 캐치하고 언어 변환 장치(言語變換裝置)가 말로 만들어 이어폰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잘 먹겠습니다." 소년은 허리를 굽히며 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서 박사는 그 순간 장치의 점검을 시작했다. 조작 과정에 어떤 미스가 있었던 게 아닐까? 재빨리 장치를 분해하고 부품을 하나하나 설계도를 보며 맞추었다. 박사의 손 끝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서 박사가 점검을 마친 것은 해가 저물녁이었다. 그런데 조작 과정에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서 박사는 실내의 전등을 켰다. 그렇다면 과거 십여 년간의 연구를 재검토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는 복잡한 계산,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의 낙서로 생각될 도식(圖式)이 빽빽이 적힌 레포트를 꺼냈다. 어딘가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 그는 열심히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계산에 잘못이 있다면, 지금부터 수정해 나가야 할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면 서 박사는 과거 10여 년의 세월을 히송한 셈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졌다. "옳지 여기까지는 잘 되었다. 그러면 근본적인 잘못은 없다는 것이군." 서 박사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는 급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이내 잠 속에 빠져 들어갔다. 머리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나 몸은 느슨하게 풀려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책상에 기대고 잠이 들었다. 담배는 박사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채로. 직사 광선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셔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여섯 시간 후였다. 박사는 까무러치리만큼 놀랐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기록이 온통 잿더미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박사는 푸석푸석한 잿더미를 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순간 창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이 이 재를 날려버렸다. 서 박사는 다시 종이에다가 그 복잡한 이론을 전개할 기력를 잃어 버렸다. 부저가 울렸는데 이에 답할 사람이 없었다. 식료품을 받을 서 박사는 어지럽게 놓여진 기계들 사이에 싸늘하게 누워 있었다. 어제부터 서 박사의 집에 다니게 된 식료품점의 「로봇 점원」은 문 앞에 식료품을 내려 놓고 가버렸다. 최근 10여 년 간에 로봇 공학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드디어 실용화된 사회가 찾아왔던 것이었다. 수수께끼의 모랫벌   사라진 아버지   바다는 코발트 블루로 빛나고 있었다. 1960년 7월 25일-. 고등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로렌 랜달(16세)은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양친과 함께 셋이서 플로리다로 피서차 떠났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플로리다 반도 끝에 있는 플로리다 시티 해안. 이것이 그 알 수 없는 괴사건의 발단이 되리라고는 로렌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로렌과 같이 수영하기는 참 오래간만이구나. 어디 한 번 경주 해볼까. 아빠도 아직은 젊으니까 너한테 지진 않을 거다." "좋아요, 아빠, 렛츠 고!" 아름다운 금발을 바람에 날리며 로렌은 흰 인어(人魚)처럼 바다로 뛰어 들었다. 비치 파라솔 밑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빙그레 웃는 어머니. 로렌의 아버지 제임스 랜달은 조그만 철강회사의 사장이었다. 가정은 늘 명랑하고 화목했다. 로렌과 아버지 랜달은 서로 앞섰다 뒤졌다 하며 혜엄쳐 나갔다. 그러나 바닷가로 돌아올 적에는 로렌과 랜달의 거리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겼다! 엄마, 내가 이겼지?" 이윽고 로렌은 바다에서 올라왔다. 아버지 랜달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해안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0분 후였다. "아, 피로해. 로렌한테 완전히 졌는데……." 랜달은 물에 젖은 일굴로 빙그레 웃었다.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비치 패러솔 안에서 랜달을 보고 웃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강렬한 한낮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모랫벌에 비치는 강렬한 태양 광선이 플래쉬를 터뜨린 것처럼 번쩍 빛났기 때문이다. "어마……." 자그마하게 외치는 로렌. 그 로렌에게로 한 5미터쯤 다가온 랜달. 랜달의 표정이 한 순간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고 굳어져 버린 것이다. "우, 우, 우……" 무엇엔가 짓눌리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는 랜달. 그 순간,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아버지 랜달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앗, 아빠!" "여보, 여봇!" 모녀는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자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중에서 괴로운 듯한 랜달의 음성이 들려 왔다. "로……렌……린……다. ……살려……다……오." "아빠, 아빠, 어디 계셔요, 아빠!" 그러나 구원을 바라는 랜달의 음성은 차츰 작아져 갔다.   앗, 로렌이 사라진다   "뭐, 뭐라구? 눈 앞에서 인간이 사라지다니!" 달려온 주(州) 경찰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경찰관은 그곳에 이 사건의 기괴함을 나타내는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아, 이것은……." 모랫벌을 가리키는 경찰관. 그 곳에는 사라진 아버지 랜달의 발자국이 물가에서부터 분명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랜달이 사라진 지점에서 끝나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저녁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모랫벌에 서 있는 로렌과 어머니 린다. 그러는데, 그 때 갑자기 공중에서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리……린다……. 로……로렌……." 그것은 분명히 아버지 랜달의 소리였다. 그러나 랜달의 지상에의 통신은 그것이 최후였다. 사라진 랜달의 음성은 경찰관도 확실히 들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1961년 7월 25일-. 랜달을 잃어버린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다시 그 악몽(惡夢)같은 회상이 남아 있는 플로리다 시티 해안을 찾았다. 이튿날에는 10여 명의 FBI(미국 연방 수사국)가 출동하여 수색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FBI는 괴사건의 수수께끼의 실마리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렬한 햇살 밑에 전개된 흰 모랫벌에는 빨강․파랑․노랑의 아름다운 비치 파라솔의 꽃이 현란하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수욕을 하러 나온 사람들의 환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해와 다른 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로렌과 린다의 마음은 납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엄마, 아빠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로렌, 그만 돌아가자. 잘못 왔나보다. 어떻게든 아빠의 수수깨끼를 풀려고 왔지만, 엄마는 이 모랫벌을 보니까 괴로워 죽겠다." '안 돼요, 엄마! 난 아무래도 이 모랫벌에 아빠가 사라진 수수께끼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요. 로렌은 모랫벌을 달려 갔다. "엄마, 요 부근이었어요. 그날 아빠는 바다에서 이렇게 걸어왔어요. 그리고 이 근처까지 걸어 왔을 때……." 로렌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린다는 흠칠 놀랐다. 태양이다! 그 때와 똑같은 태양 광선이 이 순간 갑자기 플래쉬를 터뜨린 것처럼 번쩍 빛난 것이다. 그리고 린다는 분명히 보았다. 로렌의 상반신이 스르르 사라져 간 것을! "로렌!" 린다는 총알처럼 사라져 가는 로렌에게 뛰어가 매달렸다.   아버지가 있었다   "로렌, 정신 차려라, 로렌!" 모랫벌에 쓰러진 로렌을 어머니 린다는 흔들었다. 이윽고 로렌이 문득 눈을 떴다. "앗, 엄마, 엄마, 나……." "로렌,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 넌 지금 사라져 갈 뻔 했었어. 내 눈앞에서 아빠처럼 사라져 갈 뻔 했었단 말야!" "네? 아빠처럼…… 아, 참 그래요. 나 정말 아빠 봤어요. 아빠가, 아빠가 있었어요." "로렌!" "태양이 갑자기 번쩍 빛났었죠." "그래, 로렌, 그 때 네가 사라질 뻔 했었지." "난 어쩐지 현기증이 났었어요. 그러더니 여태까지 눈 앞에 있던 바다며 모랫벌이 문득 사라지고, 내 눈 높이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어요. 바로 거기에 아빠가 '로렌, 용케 왔구나'하고 손을 내밀었어요. 난 그 때 아빠 손을 잡으려고 했었죠." "로렌, 넌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녜요. 꿈이 아녜요. 그 때 난 오른손으로 꽃밭에 있는 꽃을 쥐고 있었어요. 앗!"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그렇게 외쳤다. 한편 로렌의 오른손. 그 손바닥에 한 송이의 꽃잎이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묘한 색채의 꽃잎이었다. 내리쪼이는 태양에 그 꽃잎은 황금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보라빛으로, 그리고 곤색으로 변했다. 이 보고를 듣고, 주립대학에 있는 식물학의 권위 포오트 보오선 박사가 그 꽃잎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러나 보오선 박사의 지식으로도 그 꽃잎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이 꽃은 지구상에는 없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이 꽃잎의 조직과 섬유의 상태를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끝내 결론은 얻을 수 없었다." 신문과 주간지(週刊誌), 텔레비전, 라디오는 로렌이 당한 이 괴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발표했다. 그리고 어느 과학자는 이런 추리를 신문에 게재했다. 『랜달이나 로렌은 모두 사라지기 조금 전에 태양이 강렬하게 빛났다고 한다. 이것이 그 사건과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로렌이 보았다는 꽃밭의 세계야말로 제 4 차원의 세계가 아닐까. 이러한 인간 실종(失踪)의 예는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모두 제 4 차원의 세계에 가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랜달이 사라진 플로리다 시티의 해안에 그 4차원의 세계로 가는 입구가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 해설 관제탑을 폭파하라   서 광 운   한반도의 기상(氣象)은 대강 두 가지 영향을 받고 있다. 여름이면 압도적으로 태평양 기권의 영향을, 겨울이면 반드시 시베리아 기권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 나라와 소련과 일본은 기상 상으로 어쩔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이 순간에도 계속 기상 통보를 교환하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인공 위성 시대여서 기상 위성은 수시로 지구 위의 궤도를 돌면서 태풍 발생을 비롯한 기상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지구 위의 수신소에 연락해 준다. 그러한 연락이 전파를 이용하고 있으므로 전파(電波)를 가령 광물성이라고 생각할 때 식물성의 에너지 발사로 이를 제동(制動)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상정(想定)에서 '관제탑을 폭파하라'는 작품이 쓰여졌다. 이러한 상상의 에너지를 허력(虛力) 에너지라고 우선 불러 두었다. 그리고 허력 에너지원을 약초에서 구해 보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산삼(山蔘)와 위력을 잘 알고 있으며 사람이 허할 때, 보약을 달여 먹으면 기운이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허(虛)한 것을 실(實)하게 만들어 주는 기운은 곰곰 생각할수록 신비스럽지 않는가. 미국이나 소련의 우주 비행사들도 우주 여행에 앞서 보약을 먹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한 허력 에너지를 발사하여 이를 우주 공간에서 사람이 몸받을 수도 있고 또한 전자 장치가 몸받아 동조(同調)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그래서 시대를 한반도 통일 이후로 설정하고 약초가 많은 금강산에 식물 자력선 연구소를 세웠다. 까닭인즉 우리의 과학은 날이 갈수록 계면(界面)이 없어져 물리학적인 것이 화학적인 것에 영향을 받게 되고 또한 거꾸로의 방향도 가능한 현실로 바뀌어 가고 있으므로 생약학(生藥學)과 전자 물리학의 사이가 언제 갑자기 인연을 맺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라 하겠다. 식물 자력선 연구에 초점을 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관상대의 기구나 인원이 안타까울 정도로 국제 선진수준에 비하여 빈약하기에 기상청 예보국장 성하룡을 등장시켜 봤다. 만일 작품에서처럼 우리의 허력 에너지인 식물 자력선이 인공 위성의 회로를 제동할 수 있다면 이 비밀을 탐내지 않는 전문가는 없으리라. 소련의 시베리아 기상 센터는 하바로프스크에 있으므로 이 곳을 무대로 택하게 된다. 하바로프스크는 정치적으로도 8․15 해방 전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수많은 한인(韓人)들이 독립 운동 근거지로 삼아온 일이 있었던 만큼 무대로서는 안성마춤이라 하겠다. 거기서 소련의 노라른스키 교수가 허력 에너지에 관심을 갖고 그 곳의 비밀 경찰에 부탁하여 성하룡 예보국장을 납치하게 된 일은 장차 과학경쟁이 과열되는 경우 인간 두뇌를 납치해 갈 우려도 없지 않으리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정보부의 구실도 국익(國益)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폭을 넓혀야 되는 방향은 변하지 않으리라. 1904, 5년 한반도의 권익을 둘러싸고 소련과 일본이 충돌, 전쟁을 빚어 낸 사실은 잊을 수 없다. 장차 동해(東海)에서 소련과 일본의 해군 세력이 또 한 번, 충돌할 가능성을 내다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무슨 수를 써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기상상의 관계는 지정학적으로 분쟁을 일으키기 쉬움으로 허력 에너지 개발에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이 작품은 1968년에 쓰인 것으로 장차의 소련과 일본 관계를 예상한 것이라 하겠다.   관제탑을 폭파하라 서광운 작   아이디어회관 과학문고 224p, 19cm (SF 세계 명작 56)   인 쇄     1984년 8월 20일 발 행     1984년 8월 30일 역 자     박홍근 조 판     태광 문화사 제 판     명림 정판사 옵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영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제 2-213호      전화 (266) 1975, (266)1970   값 1,500원  
1192    양서인간 AMPHIBIAN HUMAN - 베리야에프 А. ВЕЛЯЕВ 지음 댓글:  조회:315  추천:0  2023-08-23
양서인간 AMPHIBIAN HUMAN   베리야에프 А. ВЕЛЯЕВ 지음   베리야에프 1884년 소련 태생.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특히 뇌의 의식과 인체 개조 등의 생물학과 의학의 문제가 특색 있게 다루어졌다. "합성인간" "아리엘"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원수, 박홍근 / 문학박사 최인학 공학박사 양육룡 / 이학박사 김희규 전교육감 김성욱       바다의 악마··················· 5 돌고래를 타고················· 15 스리다의 실패················· 21 카디스 박사·················· 28 병든 손녀··················· 34 이상한 뜰··················· 38 세 번째의 담·················· 42 기다리는 스리다················ 46 양서인간을 만나다··············· 52 로스모의 하루················· 56 젊은 아가씨·················· 57 와루코의 계획················· 61 시내······················ 68 작은 복수··················· 73 초조한 스리다················· 79 불쾌한 상봉·················· 86 새로운 친구·················· 92 여 행····················· 103 바다의 악마다!················ 111 전속력···················· 119 포 로····················· 126 내버려진 메두사호··············· 134 침몰선···················· 139 갑작스런 아버지················ 145 까다로운 사건················· 152 천재적인 미치광이··············· 156 피고의 발언·················· 163 감옥 안···················· 172 탈 출····················· 194 새출발···················· 203   작품해설··················· 205     등장인물   로스모 : 카디스 박사의 수술로 양서 인간이 되어 바다와 육지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된 청년으로 바다의 악마란 별명을 얻게 된다. 루이제 : 스리다의 청혼을 거절하고 물에 빠져 자살하려고 했는데, 로스모에게 구조된다. 로스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나 끝내 스리다의 흉계로 헤어지게 된다. 카디스 박사 : 유명한 외과 의사로서 인디오인들에게 신처럼 존경을 받고 있다. 로스모를 루이제와 결혼시키면 한몫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르센 : 루이제를 외국으로 가게 하려고 하다가 루이제가 스리다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러나 끝내 루이제와 미국으로 함께 이주한다.     바다의 악마   아르헨티나의 여름밤은 상당히 무더웠다. 맑게 개인 하늘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로 빛나고 있었다. 메두사 호는 닻을 내린 채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다는 조용하고 파도 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판에는 진주를 캐는 사나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자고 있었다. 모두가 낮의 고된 일과 뜨거운 태양에 지쳐서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힘없이 겨우 일어나서 비틀비틀 물통으로 걸어가서 물을 퍼마셨다. 목이 무척 마른 모양이었다. 물 속에는 수압이 강하기 때문에 물 속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식사는 해가 진 후에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 식사라는 것도 소금에 절인 물고기가 고작이었다. 메두사 호의 선주이며 선장인 브르고스 스리다는 스페인 계통의 대단히 인색한 부자였다. 밤에는 대개 그 스리다의 조수인 아루바가 숙직을 한다. 아루바는 인디오(남아메리카의 원주민)로서 젊었던 시절에는 유명한 진주잡이였으며 보통 사람보다 두 배 정도나 오래 물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었다고 젊은 진주 캐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치곤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거야 어릴 때부터 엄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지. 나는 열 살 때부터 메세타라는 사람한테 진주 캐는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됐었다. 그에게는 나처럼 어린 견습생들이 12명이나 있었다. 그는 굉장히 엄한 사람이었다. 하얗고 작은 돌을 물 속에 던져놓고는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찾아오면 이번에는 좀더 깊은 곳에 돌을 던져 넣는다. 만약에 돌을 줍지 않고 그냥 올라오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다시 물 속에 처박혀 버린다. 하여간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익혔다. 다음에는 물 속에서 오래 견디는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것도 역시 무척 고통스러웠다. 어른들이 바다 밑으로 들어가서 닻에다가 바구니를 단단히 묶어놓는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걸 풀어서 배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역시 그냥 올라왔다가는 말도 못하게 두들겨 맞게 된다. 결국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친 아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나는 그걸 끝내 견디어 내어 결국 이 근처에서는 제일 가는 진주잡이가 되었지." 그러면서 상어에게 깨물려 굽혀지지 않는 왼쪽 발과 닻의 쇠사슬에 걸려 다쳤다는 옆구리의 흉터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루바는 나이가 많아져서 바다 속에 들어가 진주조개를 캐는 위험한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진주와 산호와 조개 껍질 등을 파는 작은 상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자란 아루바는 육지에서의 생활은 여간해서는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가게를 딸에게 맡겨 놓고 진주잡이 배에 타곤 하는 것이었다. 진주 업자들은 누구나 아루바를 무척 잘 대해 주었다. 왜냐하면 이 지방의 해저 상태와 진주조개가 있는 장소를 아루바 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고 진주의 품질도 그만큼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루바는 통에 걸터앉아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방은 조용하고 파도 소리와 잠자는 사나이들의 코고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먼바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루바는 눈을 떴다. 누군가 소라 껍질로 만든 피리를 불었다. 이어서 '아, 아!'하는 기운찬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배의 고동 소리와도 다르고, 물에 빠진 사람의 비명 소리와도 달랐다. 아루바는 뱃전으로 가서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어두워서 그런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루바는 갑판에 누워 자고 있는 한 사나이를 걷어찼다. "야, 부르짖고 있다. 틀림없이 그 놈이다." "예?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데요." 사나이는 눈을 비비면서 일어서더니 귀를 기울였다. 그때, 또 피리 소리와 이어서 '아, 아!'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다. 틀림없이 그놈이다." 다른 선원들도 일어나 우르르 마스트에 켜 있는 등불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소리는 한번 더 들리고는 다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바다의 악마다!" 선원들은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놈은 상어보다 더 무섭다!" "빨리 선장에게 알려라!" 그러자, 선장인 스리다가 털이 시커멓게 돋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갑판 위로 올라왔다. 꼭 옛날 해적선의 선장과 같은 느낌을 주었고 혁대에는 항상 권총을 차고 있었다. "웬 소란이냐?" 스리다의 걸직한 목소리와 관록이 붙은 몸집은 선원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저, 바다의 악마가 외치는 소리가 조금 전에 들려왔습니다." "잘못 들었겠지." "아닙니다. 모두가 들었습니다." "빨리 여기서 떠나도록 합시다." 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떠들기 시작했다. "알았다. 그럼 날이 밝으면 떠나도록 하자." 스리다는 하는 수 없이 승낙하고 자기 선실로 돌아갔다. 잠이 달아난 스리다는 담배를 피며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가끔 이 근처 바다에 나타나 어부들을 놀라게 하는 이상한 괴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직 똑똑히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이 있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꽤 오래 전부터 어부나 선원들 사이에 그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괴물이 들을까 조심하는 것처럼 조그맣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 이야기 중에서 공통적인 것은 나쁜 짓을 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구해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은 바다의 귀신이다. 천년에 한번씩 나타나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혼내주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바다의 악마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모두가 기도를 올리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라고 성당의 신부들은 말했다. 이런 소문은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전체까지 퍼져갔고 신문도 바다의 악마에 대한 기사를 자주 실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어선이 침몰되거나, 그물이 찢어지거나, 애써 잡은 물고기가 없어지거나 하는 것은 모두 바다의 악마가 한 짓이라고 하며, 익사 직전의 사람들을 구해주고 어선에 몰래 큰 물고기를 던져 넣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바다의 악마를 봤다는 사람들의 말이 서로 너무나 달라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뿔이 났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염소처럼 수염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발은 사자 같다거나 개구리 같다는 둥 너무나 엉뚱한 소문이었다. 경찰은 처음에는 이런 소문을 누가 장난 삼아 지어내서 퍼뜨린 것이라고 코웃음만 치고 있었다. 그러나, 소문이 너무 퍼져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자 경찰은 조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안 경비 모터보트가 사방으로 흩어져 가까운 바다와 해안을 2주일간이나 수색을 계속했다. 그러나 소문을 퍼뜨린 몇 사람의 어부를 붙들었을 뿐이고 바다의 악마는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경찰서장은, "경찰 당국은 그 동안 총력을 기울여 바다의 악마 수색 작전을 벌여온 바, 할일 없는 사람들이 지껄인 뜬소문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소문을 지어낸 사람들은 모조리 체포해서 엄중하고 처벌하기로 했습니다. 어부 여러분은 뜬소문에 현혹되지 마시고 바다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바다의 악마는 경찰서장의 성명을 조롱이라고 하는 듯 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어부들이 경찰서장의 성명을 믿고 바다로 나갔는데 또 바다 속에 내린 그물이 고기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찢겨져 있었다. 또 다른 어선 한 척에는 양 한 마리를 언제 누가 데려다 놓았는지 양이 우는 소리에 깜짝 놀래서 허둥지둥 항구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신문들은 바다의 악마가 또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을 크게 보도하면서 과학자들에게 그 정체를 알아내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누구나 바다의 악마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누군가가 조작한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몇 명의 과학자들은 반대 의견을 발표했다. "과학은 지구의 생물 전체에 대해 샅샅이 연구를 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바다의 생물에 대해서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어떤 상상도 못할 생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의견은 너무나 막연하여 설득력은 없었지만,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이 논쟁을 결말짓기 위해서는 학술 조사단을 보내서 과학적으로 조사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조사단도 바다의 악마를 만날 수가 없었다. 단지 몇 가지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지만 그것 역시 바다의 악마에 대한 결정적인 것은 되지 못했다. 조사단의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바닷가 몇몇 장소에는 인간의 발자국이 흐릿하게 나 있었다. 그 발자국은 이상하게도 모두가 바다 쪽에서 육지로 나와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보트를 타고 바닷가에 가까이 온 사람들이 그런 발자국을 남길 수도 있다. 둘째, 그물을 끌어올릴 때 예리한 칼 같은 것으로 그물이 끊겼다고 하는 몇 개의 그물을 조사해 보았으나 수중의 바위나 쇳조각에 걸렸을 때에도 그렇게 끊겨질 수가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어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폭풍우가 있던 날 돌고래 한 마리가 모래밭으로 밀려 올라와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돌고래는 밤 사이에 누군가에 의해서 다시 바다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모래밭에는 발자국과 긴 손톱 같은 갈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된다. 넷째, 양에 대해서는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보트로 운반해 와서 어선에 던져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읽고 의문이 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장난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더욱이 과학자들의 보고서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사건은 짧은 시간에 상당히 먼 두 곳에서 일어났다. 그게 사실이라면 바다의 악마는 굉장한 속도로 헤엄칠 수 있거나 적어도 둘 이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더욱 무서운 일이다. 스리다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동안에 날이 밝고 창가에는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스리다는 등불을 끄고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그때 갑판에서 돌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스리다는 얼굴을 씻다말고 급히 트랩(배나 비행기의 오르고 내리는 층계)을 뛰어올라가 갑판으로 나갔다. 벌거숭이 사나이들이 뱃전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로프로 달아매어 놓은 보트가 모두 풀어져서 벌써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스리다는 바다에 뛰어들어가 보트를 붙들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주춤주춤하면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리다는 명령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바다의 악마에 잡혀 먹히려면 선장 자신이 뛰어들어가면 되잖소!" 하고 떠들었다. 스리다는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댔다. 사나이들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마스트 주위에 모여들어 스리다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드디어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루바가 중간을 가로막고 나섰다. "나는 상어나 바다의 악마 같은 걸 무서워하지 않는다." 하고 바다로 뛰어들어가더니 가까운 보트를 향해서 헤엄쳐 가는 것이었다. 모두 떨면서 아루바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루바는 늙었고 발 한쪽은 잘 못 쓰지만 헤엄치는 것은 빨랐다. 이윽고 가까운 보트에 도착하자 재빨리 기어올라갔다. "로프는 칼로 끊겨 있다. 이 끊긴 자리는 면도칼같이 날카로운 칼로 잘린 것이 틀림없다." 아루바가 외쳤다. 아루바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다른 어부들도 차례차례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돌고래를 타고   태양이 떠오르고 점점 더워져갔다. 메두사 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 20킬로미터쯤 되는 곳으로 내려가 바위로 빙 둘러싸인 항구에 돛을 내렸다. 곧 보트가 배에서 내려졌다. 보트에는 진주 캐는 사나이들이 둘씩 타고 있었다. 한 사람은 로프로 몸을 감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것을 당겨 올렸다. 두 사람은 교대로 물 속에 들어갔다. 그 중 한 척의 보트는 바위 바로 옆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이 깨끗하고 맑기 때문에 바다 밑에 들어가서 진주조개를 모으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트 위에서도 잘 보였다. 돌연 물 속에 들어가 있던 사나이가 심한 요동을 치면서 로프를 강하게 당겼다. 보트에 있던 사나이는 웬일인가 하면서 로프를 힘차게 잡아당겨 그 사나이를 보트 위로 끌어올렸다. 물 속에서 올라온 사나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통스러운 듯 숨을 몰아쉬는 것이었다. "왜? 상어라도 있던가?" 사나이는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보트에 타고 있던 사나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바다 속을 들여다보았다.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옆에서 붉은 보랏빛의 연기 같은 것이 천천히 떠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피였다. 그 옆에는 시꺼먼 것이 움직이다가 바위 그늘로 사라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는데 그건 상어가 틀림없었다. 정신을 잃은 사나이를 메두사 호로 급히 노를 저어 운반했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정신을 되찾고 나서도 벙어리같이 입만 딱 벌리고 있을 뿐 한참동안은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모두 걱정이 되어 그 사나이의 수위로 모여들었다. 사나이가 겨우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보았다! 바다의 악마를......." "정말인가?" "정말이고 말고! 언뜻 보니 상어였다. 그 놈이 나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꼼짝없이 죽게 됐다고 생각했다. 큰 입을 딱 벌리고 내 곁에까지 왔다. 그런데 그 상어 뒤에서 무엇이 헤엄쳐오고 있었다." "그게 뭐든가? 또 한 마리의 상어였나?" "아니야. 바로 바다의 악마였다." "뭐라고? 그래 어떻게 생겼든? 머리도 있던가?" "머리? 있었어. 눈은 쟁반같이 둥글둥글했지." "손도 있던가?" "손은 개구리 같고, 손가락은 길고 녹색인데 손톱이 있고 물갈퀴도 있었다. 몸뚱이는 물고기의 비늘같이 빛났다. 바다의 악마는 상어에게 나가오다가 한 손을 쑥 내밀었다. 상어의 배에서 피가 튀겨 나왔다." "그놈의 발은 어떻게 생겼었나?" 한 사나이가 물었다. "발? 발 같은 건 없었어. 긴 꽁지가 있었고 그 꽁지 끝은 두 개로 갈라져 있었어." "너는 상어와 그 괴물 중에 어느 편이 무서웠냐?" "그거야 괴물이지. 나의 생명을 구해주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것은 바다의 악마였으니까." "그렇다! 그건 정말 바다의 악마였다." "아니,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는 바다의 신일지도 모른다." 이 소문은 즉시 항구로 퍼져서 어부들은 작은 배를 타고 메두사 호로 달려왔다. 바다의 악마에게 구조 받은 사나이는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다보니 점점 흥이 나서 그 바다의 악마는 코에서 붉은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든지, 또 날카로운 이가 보였다는 등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스리다는 사나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가면서 갑판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사나이가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스리다는 그 사나이가 상어의 습격을 받고 놀란 김에 이야기를 꾸며서 늘어놓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부 만든 이야기라고는 볼 수가 없다. 누군가가 상어의 배를 찔렀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바닷물이 빨갛게 물들었으니까. 그게 정말 이상한 일이야.) 스리다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바위 벼랑에서 돌연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메두사 호의 승무원은 그 소리를 듣고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란 토끼 모양 이야기도 뚝 그치고 새파랗게 질려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가의 바위 근처의 물위에 돌고래의 무리가 나타났다. 한 마리의 돌고래가 무리에서 벗어 나와 흡사 피리의 신호에 대답하는 것 같이 크게 콧숨을 쉬고 재빨리 바위 저쪽으로 헤엄쳐 사라졌다. 모두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돌연 그 돌고래가 또 모습을 나타냈다. 돌고래 등위에는 아까 그 사나이가 이야기하던 그 바다의 괴물이 말을 타듯 타고 있었다. 괴물은 인간의 몸과 거의 똑같이 생겼었다. 얼굴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두 개의 큰 눈이 태양 빛을 받아 빛나고, 피부는 파란 은같이 윤기가 났었다. 손은 개구리같이 손가락은 길고 물갈퀴가 붙어있었다. 무릎 아래는 물 속에 잠겨서 그것이 꼬리인지, 사람과 같은 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괴물은 커다란 소라 껍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입에 대고 불더니 사람처럼 명랑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리이딩, 스피드를 내라!" 라고 외치며 개구리 같은 손바닥으로 돌고래의 등을 두드렸다. 돌고래는 힘차게 스피드를 냈다. 메두사 호 승무원은 그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소리를 쳤다. 돌고래 등에 탄 괴물은 뒤돌아보다가 재빨리 돌고래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숨어버렸다. 돌고래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녹색의 손만 조금 보였다. 돌고래는 슬며시 물 속으로 들어가더니 그 괴물과 같이 바다 속의 바위 그늘로 사라지고 말았다. 메두사 호의 갑판 위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인디오들은 무릎을 꿇고 바다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젊은 멕시코 사람은 마스트로 이어 올라가 떠들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진주를 캐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스리다와 아루바는 겨우 모든 사람을 진정시켰다. 메두사 호는 닻을 올리고 북쪽으로 향해 출발했다.     스리다의 실패   스리다는 자기 선실로 돌아가더니 머리끝에서부터 물을 끼얹으며 중얼거렸다. (바다의 괴물이 틀림없이 사람의 말을 하다니......? 도대체 이것이 꿈일까? 그렇지 않다. 모두가 그 바다의 악마를 보았다.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일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스리다는 또 한번 물을 끼얹고 머리를 식혔다. (하여튼 그 괴물은 인간과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고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물 속에서나 땅 위에서나 자유로이 활동할 수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도 할 줄 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 놈을 붙들어서 훈련시켜 진주를 캐도록 하면 어떨까? 그놈은 물 속에서 살 수가 있어. 그놈 한 놈만 있으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채용할 필요가 없다. 어부를 고용하면 급료로 캔 진주의 4분의 1을 주어야 하나 그놈에게는 아무 것도 줄 필요가 없다. 그러면 큰 돈벌이가 될 것이다.) 스리다는 혼자 미소지었다. 스리다는 지금까지 큰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지니고 악착같이 인간의 손이 아직 닿지 않은 진주조개를 찾고 있었다. 페르시아 만과 실론 서해안은 물론, 홍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 등은 진주가 많이 나는 산지로 유명하나, 그곳으로 가기에는 메두사 호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그렇다고 새 배를 살만한 돈도 없었다. 그래서 스리다는 아르헨티나 해안에서 참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바다의 악마를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1년 내에 큰 부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째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스리다는 승무원을 모두 모아놓고 말했다. "너희들은 바다의 악마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어떻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모두 경찰에 붙들려서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니 너희들도 바다의 악마를 보았다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길로 감옥에 들어가서 평생동안 나오지 못할 것이다. 생명이 아깝거든 바다의 악마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 하고 주의를 주고 스리다는 아루바를 불러서 계획을 털어놓았다. 아루바는 스리다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난 뒤에 대답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바다의 악마는 백 명의 어부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붙잡느냐가 문제로군요." "그물로 붙잡겠다." 스리다는 말했다. "그놈은 그물 같은 것은 상어의 배를 자르는 것처럼 쉽게 잘라버리고 말 겁니다." "강한 철사줄로 그물을 만든다." "누가 그놈을 잡으러 갑니까? 이 배의 모든 사람은 바다의 악마를 직접 봤기 때문에 겁에 질려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아루바, 자네는 어떤가?" "나는 바다의 악마 같은 것을 상대해 본 일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군요. 그놈의 몸이 살과 뼈로 되어 있다면 죽이는 것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채로 사로잡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아루바, 자네는 바다의 악마가 무섭지 않은가?" "그거야 상대의 정체를 잘 모르니까 무서운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무서운 동물과 싸우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스리다는 아루바의 손을 잡고 곧 계획을 상의하기 시작하였다. "보수는 많이 주마. 하여튼 이 계획에 참가하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너는 인디오 중에서 5명만 뽑아다오. 그들은 용감하니까. 바다의 악마는 바닷가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놈이 사는 곳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면 간단하게 그물을 쳐서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이다." 스리다와 아루바는 곧 일을 착수하였다. 스리다는 둥글고 긴 원기둥 모양을 한 커다란 금속 그물을 주문했다. 아루바는 5명의 인디오를 설득시켜 바다의 악마를 생포하는 일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준비가 다 끝나자 메두사 호는 바다의 악마를 처음 본 항구로 향했다. 바다의 악마가 의심하지 않게 메두사 호는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닻을 내렸다. 스리다 이하 인디오들은 고기를 잡으러 온 어선처럼 행동을 하면서 바다 속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2주일이 지나갔다. 바다의 악마는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스리다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가자 돈은 점점 줄어져 갔다. 스리다는 굉장히 인색한 사람이었다. 3주일 째 되는 날 드디어 바다의 악마가 나타났다. 아루바는 고기잡이를 끝내고 고기가 꽉 차 있는 보트를 바닷가에 대놓고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잠깐 들렸었다. 그리고 되돌아와서 보니 보트는 비어 있었다. 이것은 바다의 악마의 행동임에 틀림없다고 아루바는 생각했다. 그날밤, 인디오 중의 한 사람이 항구 남쪽에서 피리 소리를 들었다. 이틀 후, 이른 새벽에는 젊은 인디오가 바다의 악마를 보았다고 보고했다. 바다의 악마는 돌고래와 나란히 헤엄을 쳐서 바닷가 가까운 절벽까지 오자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스리다는 기뻐하면서, "낮에는 바다의 악마가 바다 깊숙이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이 틀림없다. 빨리 그곳을 찾아내야 하겠다. 누가 그 일을 맡겠는가?" 모두 바다의 악마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아루바가 선뜻 나서더니, "내가 하겠소!"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메두사 호의 승무원은 모두 보트를 타고 절벽 쪽으로 갔다. 아루바는 로프의 한쪽 끝을 허리에 묶고, 날카로운 단검을 손에 쥐고, 큰 돌을 발 사이에 끼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모두 숨을 죽이고 어두운 바다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40초가 지나고 5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났다. 이윽고 로프가 당겨졌다. 아루바는 물 위로 떠오르자 심호흡을 하고서 말했다. "좁은 통로가 지하의 동굴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 속은 캄캄했습니다. 바다의 악마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아마 그곳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잘 됐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일하기가 좋다. 거기에 그물을 치자. 그러면 틀림없이 걸려들 것이다." 스리다가 기뻐하면서 말했다. 해가 지고 나서 인디오들은 금속 그물을 굵은 로프에 매달아서 동굴 입구에 내려놓았다. 로프에는 방울을 달아놓았다. 그물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그 방울이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사방은 곧 어두워졌다. 달이 떠올라 바다를 밝게 비치기 시작했다.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했다. 돌연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로프를 달려 그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물은 무거웠다. 로프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뭔가 그물 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물을 수면에 당겨 올려보니 그물 속에는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날뛰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에 비쳐서 커다란 눈과 은색의 비늘이 빛나고 있었다. 바다의 악마는 그물에서 빠져나가려고 가진 힘을 다하여 설치고 있었다. 드디어 한 손이 그물에서 빠져 나왔다. 바다의 악마는 허리에 찼던 단도를 빼 들더니 그물을 끊기 시작했다. "이놈,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거다!" 아루바는 로프를 끌어당기면서 호통을 쳤다. 그러나 금속 그물은 끊어졌다. 바다의 악마는 재빠른 동작으로 끊긴 그물의 구멍을 넓히기 시작했다. 인디오들은 빨리 그물을 바닷가로 당겨 올리려고 하였다."좀더 빨리 당겨라!" 아루바가 외쳤다. 그러나 거의 다 올라왔다고 생각한 순간 바다의 악마는 그물의 구멍에서 빠져 나와 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인디오들은 너무 놀라서 그만 그물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스리다는 이를 갈면서 원통해 하였다. "좋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잠수부를 고용해서 항구 전체에 그물을 쳐서라도 네 놈을 생포하고야 말겠다."     카디스 박사   스리다는 곧 생포 작전을 시작했다. 항구 밑바닥에 가시철사를 쳐 놓고, 금속으로 된 그물을 치고 여러 군데에 함정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함정에 걸려든 것은 물고기 뿐, 바다의 악마는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날씨가 점점 나빠져 갔다. 파도가 높이 일고 항구의 물도 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스리다는 매일 바닷가에 나와서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바다의 악마란 놈이 해저의 깊은 곳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그놈을 사로잡으려면 이쪽에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고 생각한 스리다는 아루바에게 말했다. "곧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잠수복과 산소 봄베를 두벌 사 가지고 오라. 그리고 수중용 회중전등도 잊지 말고 사와야 한다." "바다의 악마가 있는 곳에 손님으로 가시렵니까" 아루바가 물었다. "물론 너와 같이 간다." 아루바는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시내로 갔다. 얼마 후 아루바는 두벌의 잠수복과 회중전등과 단도를 사 가지고 왔다. 다음날 아침 바다에는 파도가 일고 있었으나 스리다와 아루바는 잠수복을 입고 바다 밑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동굴 앞에 쳐놓은 금속 그물의 밑바닥을 뚫고 어두운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회중전등을 비추자 작은 물고기들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동굴 속은 상당히 넓고 높이가 4미터, 폭은 5미터쯤 되었다. 스리다와 아루바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은 점점 좁아졌다. 갑자기 스리다는 깜짝 놀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회중전등의 빛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육중한 철문을 비쳤기 때문이다. 스리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철문을 밀기도 하고 당겨도 보았으나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아마 철문은 문 저쪽에서 빗장이라도 걸어놓은 것 같았다. 그건 더욱 놀랄만한 수수께끼였다. 스리다는 곰곰이 생각했다. (바다의 악마는 머리가 뛰어나게 좋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힘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바다의 악마는 돌고래를 길들일 뿐만 아니라 쇠를 다루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바다 속에 저렇게 육중한 철문을 설치해 놓았겠지. 아니, 그런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물 속에서 정말 쇠를 다를 수 있을까? 없다. 그렇다면 바다의 악마는 바다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육지에도 올라와 살 수 있을 것이다.) 스리다와 아루바는 별 수 없이 동굴을 나왔다. 바닷가에 올라와서 잠수복을 벗고 스리다는 물었다. "아루바,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루바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그 철문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혹시 그 동굴은 출입구가 두 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의 출입구는 항구에 있고 또 하나의 출입구는 땅 위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땅 위를 조사해 보자." 두 사람은 곧 바닷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스리다는 바닷가를 걷고 있는 동안 하얀 돌로 쌓아놓은 높은 담을 발견했다. 담은 10헥타르나 되는 넓은 땅을 둘러싸고 있었다. 스리다는 그 담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입구는 단 한 개뿐이고 문은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있었다. 철문은 안에서 열쇠로 잠겨 있어서 아무리 힘껏 떠밀어 보아도 끄떡도 안 했다. 벽의 주위에는 바위와 절벽으로 되어있고 밑에는 항구가 펼쳐 있었다. 요새 같다고 스리다는 생각했다. 스리다는 2,3일 동안 담의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입구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담 저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스리다는 메두사 호로 되돌아와서 아루바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항구 위에 있는 그 요새와 같은 집은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인디오에게 물어보았더니 카디스 박사라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 카디스 박사는 어떤 사람인가?" "신이라고 합니다." 아루바가 대답했다. "농담할 때가 아니다. 아루바!" "나는 들은 그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은 카디스 박사를 신처럼 존경하고 있으며, 구원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누구를 어떻게 구해 주었길래 그러나?"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있답니다. 카디스 박사는 절름발이에게 다리를 붙여주기도 하고, 더욱이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 엉뚱한 소릴 지껄이고 있구나. 해저에는 바다의 악마가 있고 육지에는 구원의 신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아루바, 자네는 바다의 악마와 구원의 신 사이에 무엇인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큰일이 나기 전에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카디스 박사가 고쳐 주었다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보았는가?" "예. 만나 봤습니다. 발이 부러져 카디스에게 치료를 받고 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니는 사나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머리통이 깨어져서 죽어버린 사람이 카디스 박사의 덕택으로 살아났다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그러면 카디스 박사는 환자를 진찰하는 모양이지." "진찰 받는 사람은 인디오 뿐이라고 하더군요." 스리다는 아루바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자 곧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스리다는 카디스 박사가 인디오를 치료하고 있고, 인디오에게 정말 신과 다름없는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스리다는 또한 의사들에게 카디스 박사가 천재적인 외과 의사지만 좀 남다른 데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카디스 박사는 외과 수술에는 최고의 권위자이며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의사 사이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의사들은 자기가 손댈 수 없는 환자를 만나면 곧 카디스 박사를 불러서 수술을 부탁했다. 카디스 박사는 어느 곳이든지 가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들을 구했다. 그러나 카디스 박사는 많은 돈이 생기자 고향으로 돌아가 개인 연구실을 마련하여 거기에 틀어박혀 연구에 열중하고 의사의 일은 그만두어 버렸다. 단지 인디오의 치료만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카디스 박사가 의사라면 환자의 진찰을 거절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환자인 양 가장해서 그 담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라고 스리다는 결심했다. 스리다는 철문 앞에 가서 가만히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힘을 주어 세게 두들겨 보았으나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스리다는 화가 나서 큰 돌을 들어 철문에다 집어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윽고 담 저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누군가가 철문으로 가까이 왔다. "무슨 일이오?" 철문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환자입니다. 빨리 열어주십시오." 스리다는 대답했다. "환자라면 그렇게 문을 두들기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선생님은 진찰을 하지 않으십니다." "의사라면 환자를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리다가 호령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스리다는 화를 내면서 메두사 호로 되돌아왔다. 배에 되돌아와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자 스리다는 차차 침착해졌고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스리다는 갑판으로 올라가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닻을 올려라!" 하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메두사 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병든 손녀   태양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먼지투성이의 시골길을 나이가 많은 인디오가 발을 질질 끌면서 걷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누더기였으며 조그만 계집애를 안고 있었다. 계집애의 목에는 큰 종기가 나 있어서 괴로운 듯 울고 있었다. "제발 죽진 말아라." 그 노인은 중얼거리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철문 앞까지 오더니 그 늙은 인디오는 계집애를 왼손으로 끌어안고 오른손으로 철문을 네 번 두드렸다. 문은 곧 열렸다. 인디오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흰옷을 입은 흑인이 서 있었다. "아이가 병이 나서 박사님께 진찰을 좀 해주십사 하고 왔습니다." 인디오가 말했다. 흑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철문을 걸어 잠그고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따라가면서 인디오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곳은 그리 넓지 않은 앞뜰이었다. 그 앞뜰은 바깥쪽의 높은 담을 지나서 안쪽에 또 한 개의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두 번째 문이 있는 곳에 하얀 집이 있었다. 그 앞뜰에는 환자 같은 인디오의 남녀가 서너 명 앉아 있었다. 애를 끌어안고 발을 절룩거리는 할머니의 곁으로 가자 그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따님이십니까?" "손녀입니다." 인디오가 대답했다. "나쁜 병이 당신 손녀의 몸에 들어간 겁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그분은 나쁜 병을 내쫓아 주실 것이니까요. 그러면 손녀는 병이 나을 겁니다." 하고 할머니가 말했다. 인디오는 끄덕였다. 흰옷을 입은 흑인이 아이가 있는 곳까지 와서 하얀 집의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인디오는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흰 시트가 깔린 좁고 긴 테이블이 있었다. 안쪽 유리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흰옷을 입은 카디스 박사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지고 얼굴은 약간 검은 편이었다. 눈은 몹시 날카로웠다. 인디오는 인사를 하고 아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카디스 박사는 환자를 받아 들고는 둘둘 싸놓은 낡아빠진 포대기를 펼치고, 계집애를 들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목의 종기를 주의 깊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한달 후에 이 아이를 찾으러 오십시오. 그때까지는 병을 고쳐놓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늙은 인디오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이를 끌어안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인디오는 카디스 박사의 뒷모습에 절을 하고 나갔다. 그로부터 꼭 한달 후에 나이 많은 인디오는 그 방에 다시 들어왔다. 방의 유리문을 열고 병이 다 나은 조그만 계집애가 깨끗한 옷을 입고 아장아장 걸어나왔다. 인디오는 쫓아가서 계집애를 끌어안았다. 목의 종기는 완전히 없어지고 수술한 작은 흉터가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계집애의 뒤를 따라 카디스 박사가 들어왔다. "자, 이 아이를 데리고 가십시오. 당신은 알맞은 때에 데리고 왔습니다. 만약 하루만 늦었더라도 이 아이는 생명을 잃었을 겁니다." 인디오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자 애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카디스 박사 앞에 꿇어앉더니, "박사님은 저의 손녀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돈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 보수로 저의 몸뚱이를 드리겠습니다. 제발 가져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당신의 몸뚱이를 갖다니......, 무슨 말씀이오?" 박사는 깜짝 놀랐다. "저는 늙었습니다만 아직은 힘이 있습니다. 저는 이 아이를 며느리에게 데려다주고 곧 돌아오겠습니다. 제발 저를 써주십시오. 저는 저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박사님께 바치겠습니다. 제발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기쁘게 다 하겠습니다." 박사는 생각에 잠겼다. 박사는 새 사람을 더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거리는 많았다. 넓은 뜰의 관리는 토레라는 흑인 혼자로서는 힘겨웠다. (아마 이 인디오라면 틀림없겠지. 상당히 성실해 보이는군.) "당신 생각이 정 그렇다면 좋습니다. 언제부터 이곳에 와 주시겠습니까?" "일주일 후에 오겠습니다." 인디오는 머리를 숙였다. "당신의 이름은?" "와루코입니다." "그러면 와루코, 어서 갔다 오시오." 와루코는 계집애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계집애는 울기 시작하였다. 와루코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뜰   일주일 후에 와루코가 돌아왔다. 카디스 박사는 와루코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잘 듣게나. 와루코, 너를 고용하겠다. 식사를 주고 월급도 지불하겠다." 와루코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월급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박사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고마운 소리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하게나. 단 한가지만 약속해주기 바란다. 여기서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제가 그런 소리를 하거든 제 혀를 끊어주십시오." "그럼, 그런 일이 없도록 약속을 꼭 지켜다오." 이렇게 말하고 카디스 박사는 흰옷을 입은 흑인을 불러서 말했다. "와루코를 안내해서 토레에게 보내 주어라." 흑인은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하고, 와루코를 데리고 흰 집을 나와서 두 번째 담의 철문을 두드렸다. 담 안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잠시 후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흑인은 와루코를 대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곳에 서 있는 또 다른 흑인에게 빠른 말로 뭔가 말하고는 돌아갔다. 노란색에 까만 반점이 있는 표범 같은 동물이 와루코를 향해서 쫓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면서 담에 몸을 바싹 붙였다.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가까운 나무에 올라갔다. 표범 같은 동물이 개 같은 소리로 짖어댔다. 흑인은 그 이상한 동물을 향해서 '시이!'하고 소리냈다. 동물은 짖는 것을 그치고 땅에 앉았다. 흑인은 이번에는 나무 위의 와루코를 향해서 '시이'라고 말했다. "왜 당신은 '시이, 시이'라고만 하죠? 혀가 없소?" 와루코는 나무 위에서 물었다. 흑인은 화난 것 같이 끙끙댔다. 와루코는 그 흑인이 혹시 벙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이 흑인은 비밀을 안 지켰기 때문에 혀를 끊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와루코는 무서워졌다. 흑인은 다가오더니 와루코의 발을 잡아당겼다. 와루코는 하는 수 없이 나무에서 내려와서 억지로 웃음을 짓고 한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하며 물어보았다. "당신이 토레입니까?" 흑인은 끄덕였다. "당신은 혹시 벙어리가 아니오?" 흑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혀가 없소?" 흑인은 아무 대답도 않고 표범 같은 동물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가더니 '시이, 시이'하고 뜻도 모르는 소리를 하였다. 동물은 일어서서 와루코의 냄새를 맡더니 천천히 저쪽으로 갔다. 와루코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토레는 와루코에게 손짓을 해가며 넓은 뜰을 여기저기 안내하였다. 뜰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바닷가 쪽으로는 경사가 멀리까지 완만하게 되어 있었다. 뜰 안에는 조개 껍질을 깔아놓은 좁다란 길들이 가로 세로로 이어져 있었다. 뜰 한가운데는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 인공 분수가 물을 하늘높이 뿜어 올리고 있었다. 뜰에는 갖가지 새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와루코는 생전 이런 동물들을 본 일이 없었다. 거기에는 정말로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여섯 개의 발을 가진 도마뱀이 녹색의 비늘을 번쩍이면서 좁다란 길을 가로질러 가는가 하면, 나무에서는 머리가 두 개나 달린 큰 뱀이 내려와서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와루코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와루코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했다. 토레가 큰 소리로 '시이'라고 하자 뱀은 머리를 흔들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발이 두 개 달린 뱀도 있었다. 우리 안에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돼지가 끙끙거리고 있는가 하면 몸뚱이가 두 개나 붙어있는 두 마리의 흰쥐가 아장아장 걸어가기도 했다. 몸뚱이가 한데 붙어있는 두 마리의 양도 있었다. 와루코가 가장 놀란 것은 장미색의 털이 없는 벌거숭이 개였다. 개의 등에는 원숭이의 머리와 가슴과 손이 흡사 개의 몸뚱이에서 솟아 나온 것 같이 붙어 있었다. 개는 와루코의 옆에 가까이 오더니 꼬리를 흔들고, 원숭이는 손으로 개의 등을 두들기는 것이었다. 앵무새 머리를 한 참새가 나무에서 날아올랐다. 좀 떨어진 풀밭에는 소의 머리를 한 말이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와루코는 꼭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를 좀 식히려는 생각으로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물 속에는 물고기의 머리와 아가미를 가진 뱀, 개구리 같은 발을 가진 물고기, 도마뱀 같은 긴 머리를 한 큰 개구리 등이 헤엄치고 있었다. 와루코는 도망가고 싶었다. 토레가 돌을 깔아놓은 널따란 마당으로 와루코를 데리고 갔다. 뜰 한가운데는 대리석으로 만든 깨끗한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 뒤에는 주택과 작업장과 창고 등이 있었다. 그 저쪽에는 선인장의 숲이 흰 담 있는 데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또 담이 있다?) 와루코는 생각했다. 토레는 와루코를 작고 깨끗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 방이 당신이 사용할 방이라고 손짓으로 설명하고는 가 버리고 말았다.     세 번째의 담   와루코는 이상한 뜰에 차차 익숙해져 갔다. 이 뜰에서 살고 있는 동물은 새도 짐승도 뱀도 잘 길들여져 있었다. 첫날에 와루코를 놀라게 한 표범의 몸뚱이를 한 개는 와루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다. 열두 명의 흑인이 이 동물들을 돌보아주고 있었다. 모두가 토레와 같은 벙어리인지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토레는 이 뜰의 책임자이고 모든 사람들의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와루코는 토레의 조수가 되었다. 일은 쉽고 식사도 좋았다. 와루코에게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으나 단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카디스 박사의 일과는 규칙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환자를 진찰하고 9시에서 11시까지 수술을 하고, 그 이후는 뜰 한가운데 있는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동물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수술과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와루코는 세 번째의 담 저쪽을 구경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모두 쉬고 있는 틈을 타서 세 번째 담 가까이 가 보았다. 담 안에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아이들 소리에 섞여서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와루코는 뜰에서 카디스 박사를 만났다. 박사는 와루코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와루코, 자네가 여기에 온지 한 달이 되었는데 열심히 일을 해주어서 고맙다. 실은 아래 뜰의 관리인 한 사람이 병이 나고 말았다. 자네는 그 사나이를 대신해서 일해줘야겠다. 단, 아래 뜰에서 무엇을 보아도 절대로 딴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와루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다. 그런데, 자네는 안데스 산맥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있나?" "저는 그 산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 참 잘 됐군. 머지 않아 동물과 새를 잡으러 가게 될 것 같다. 그때는 너를 데리고 가기로 하겠다. 자, 아래 뜰에 가 있거라. 토레가 너를 안내해 줄 것이다." 와루코는 아래 뜰에 가 보고 또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태양이 비치고 있는 넓은 초원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원숭이와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인디오의 아이들인데, 모두 카디스 박사의 수술을 받고 거기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 살에서 열두 살까지의 아이들이 이 초원에서 뛰고 놀면서 치료를 받아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양친에게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원숭이가 사이좋게 같이 놀고 있었다. 원숭이는 꼬리가 없고 몸에는 털이 나 있지 않았다. 놀란 일은 원숭이들이 인간과 같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 원숭이들의 말소리는 높고 날카로워서 듣기에 힘이 들었다. 와루코는 그것이 정말 원숭이인지 사람인지조차 분간할 수도 없었다. 와루코는 뜰을 걷고 있는 사이에 위 뜰 보다 이 뜰이 더욱 경사졌으며, 바다에 가까운 것을 알았다. 한 모퉁이에 큰 바위가 절벽같이 솟아올라 있었다. 큰 바위 아래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와루코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게 조심하며 뜰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다. 수일 후 그 바위가 콘크리트로 만든 인공 바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위에는 철문이 붙어 있었다. 철문은 바위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 철문은 어디로 통하고 있을까? 바다로 통하게 되어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붉은 풍선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풍선은 뜰을 지나 바다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붉은 풍선을 본 순간 와루코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와루코는 카디스 박사에게 가서 부탁했다. "박사님, 이제 우리들은 안데스 산중으로 가야 된다고 하셨죠?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떠나기 전에 딸과 손녀를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카디스 박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박사는 고용인이 여기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하였다. 와루코는 잠자코 박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군. 3일간 여가를 주마. 단 여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돼!" 카디스 박사는 옆방으로 가서 돈이 들어있는 작은 상자 곽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딸과 손녀를 위해서 써 다오. 이것은 입을 열지 않는데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도 좋다."     기다리는 스리다   "아루바, 오늘도 그놈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제 너와 인연을 끊겠다." 스리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가에서 아루바를 만나자 곧 그렇게 말했다. 아루바는 몹시 초조해져 가고 있었다. 와루코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형인 와루코를 카디스 박사가 있는 곳에 스파이로 보낸 것을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와루코는 아루바보다 늙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튼튼하고 표범같이 민첩했다. 와루코는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어떤 나쁜 짓이라도 예사로 저지를 인간이었다. 스파이로서는 안성맞춤이나 그렇게 신용할 수 있는 인간은 못 되었다. 조그만 이익 때문에 형제의 인연이라도 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리다는 그런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루바 못지 않게 걱정을 하였다. "아루바, 내가 하늘로 올린 붉은 풍선을 와루코가 보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루바는 대답 대신 거북하게 웃었다. 태양은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스리다도 아루바도 기다림에 너무 지쳐 있었다. 그때 저 먼 쪽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났다. 아루바는 흥분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형님이다!" "어서 오게!" 와루코는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미 늙은이 같은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어때 '바다의 악마'를 보았나?" 스리다는 초조하게 물었다. "그것은 아직 이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나는 카디스 박사에게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데 박사는 나를 굉장히 신용하고 있소. 병들은 계집애를 내 손녀라고 거짓말을 했으니까." "어디서 계집애를 손에 넣었나?" 스리다가 물었다. "계집애쯤은 얼마든지 있소. 병을 고쳐준다고 하니까 아주 기뻐하면서 나에게 돈까지 주어 계집애를 맡겨 주었소." 와루코는 카디스 박사에게 얻은 돈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집애의 어머니에게 돌려준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카디스 박사는 아주 굉장한 동물원을 가지고 있더군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와루코는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다 얘기했다. "그것 참 신기한 얘기로군. 하지만 바다의 악마에 대한 비밀을 알지 못했으니 문제가 아닌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계획이지?" "카디스 박사와 같이 안데스 산맥에 사냥을 하러 가게 되어 있소." "그럼 잘 됐다! 카디스 박사의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사냥간 틈을 습격하여 바다의 악마를 빼내도록 하자." 와루코는 고개를 저었다. "표범에게 물려죽지 않으면 다행이오." "그럼 이렇게 하지. 사냥을 떠나는 카디스 박사를 미리 앞질러 가서 숨어 있다가 인질로 해서 바다의 악마와 교환하기로 하자." "숨어서 박사를 기다린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오. 그러나 카디스 박사가 바다의 악마를 넘겨준다고 약속한다고 해도 정말 넘겨줄 것 같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스리다는 초조해져서 되물었다. "천천히 기다리는 것이 좋소. 카디스 박사는 나를 신용하고 있소. 나를 신용하게 되면 나에게도 바다의 악마를 소개해 줄 것이오." "그래서?" "카디스 박사를 여러분들이 습격해 주시오. 그리고 내가 카디스 박사를 구조해 주는 것이오. 그러면 카디스 박사가 나를 신용할 것입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세 사람은 카디스 박사를 습격할 장소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1시간 가량 의논을 하자 계획이 세워졌다.   스리다와 와루코는 세 명의 부랑자들을 고용해서 강도처럼 변장시키고 무기까지 주어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을 타고 기다리게 했다. 밤이 되었다. 그들은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도 카디스 박사가 사냥을 가는데 자동차를 이용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리고 밝은 헤드라이트의 빛이 비쳤다. 그 순간 검은색의 자동차가 그들의 옆을 번개같이 지나갔다. 스리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땅을 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아루바가 말했다. "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소. 낮에는 덥고 밤은 서늘해서 밤에 가기로 했을지도 모르오. 낮에는 분명히 어디에서 쉬게 될 것이오. 급히 뒤를 쫓아 봅시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달렸다. 두 시간쯤 뒤쫓아갔을 때 멀리서 모닥불이 보였다. 아루바가 혼자 정찰을 하고 돌아왔다. "그놈들이오.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하고 있는 중이며 와루코가 망을 보고 있습니다. 빨리 해치웁시다." 음모자들은 일제히 달려들었다. 카디스 박사가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박사, 와루코, 세 명의 흑인 등은 모두가 꽁꽁 묶이고 말았다. 누군가 박사에게 많은 돈을 요구했다. 박사는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큰 돈은 지금 가지고 있지 않다." "돈을 주지 않으면 날이 새기 전에 너희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 "그런 큰 돈을 가지고 있을 까닭이 없잖소!" 박사는 음모자들이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음모자들은 자동차 안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표본용 알코올을 찾아내어 돌려가며 마셨다. 술에 취하여 모두들 땅바닥 위에 쓰러져 코를 골고 자는 것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 와루코가 살금살금 카디스 박사에게 기어갔다. "접니다. 와루코입니다. 요행히 끈을 풀었습니다. 놈들은 모두 자고 있습니다. 운전사가 마침 자동차를 다 고쳤습니다. 빨리 달아납시다." 모두 재빨리 자동차에 올라탔다. 운전사는 부랴부랴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뒤쪽에서 고함 소리와 총소리가 났다. 카디스 박사는 와루코의 손을 말없이 꽉 붙잡았다.     양서인간을 만나다   와루코는 카디스 박사가 곧 바다의 악마를 보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디스 박사는 와루코에게 상금만 주었을 뿐, 그대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와루코는 네 번째 담에 달린 비밀의 철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비밀의 철문에는 작은 스위치가 붙어있었다. 그것을 눌렀더니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와루코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저절로 닫혔다. 와루코는 걱정이 되어서 다시 문을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스위치는 아무 데도 없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와루코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뜰에는 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 바다와 경계가 되는 담 가장자리에는 큰 풀이 있었다. 와루코는 깜짝 놀랐다. (바다의 악마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드디어 찾아냈구나!) 와루코는 반가워서 풀의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풀 바닥에는 큰 원숭이가 앉아서 와루코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원숭이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 신기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니 원숭이의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오므라졌다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것이 바다의 악마란 말인가? 이건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원숭이가 아닌가!) 와루코는 무의식중에 웃음을 터뜨렸다. 와루코는 비밀을 알아내게 되어서 기뻤으나 이런 것이 어떻게 해서 어부들을 놀라게 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모습은 소문에 들은 내용과는 달랐다. 그러나 꾸물거리고 있을 순 없었다. 와루코는 빨리 담이 있는 데까지 되돌아와 여기저기 살피며 넘어갈 곳을 찾다가, 담에 걸쳐있는 큰 나무를 발견했다. 곧 나무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담 위로 건너가 발을 부러뜨릴 각오를 하고 뛰어내렸다. 겨우 일어섰을 때 카디스 박사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와루코, 어디 있나?" 와루코는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고 있는 척 하였다. "여기 있습니다." "와루코! 따라오라." 박사는 비밀의 철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 철문은 이렇게 하면 열린다." 박사는 와루코가 이미 알고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나는 비밀을 이미 알았어요.) 하고 와루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풀 속에는 아직도 원숭이가 있었다. 와루코는 처음 보는 것처럼 크게 놀라는 척 하였다. 카디스 박사는 원숭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원숭이는 급히 풀에서 뛰어나와 가깝게 서 있는 나무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박사는 허리를 굽히더니 풀 속에 있는 녹색의 철판을 눌렀다. 풀의 양쪽 해치가 열리지 풀의 물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리고는 저절로 해치는 닫혔다. 어디서인가 모르게 쇠사다리가 천천히 밀려나왔다. "가자, 와루코." 박사는 풀의 바닥으로 내려갔다. 박사가 깔아놓은 돌 한 개를 밟자 풀의 바닥 중앙에서 일 제곱미터쯤 되는 해치가 열렸다. 거기에서 쇠사다리는 지하로 통하고 있었다. 와루코는 박사의 뒤를 따라 쇠사다리를 내려갔다. 쇠사다리는 길고 지하는 캄캄했다. "넘어질라, 주의해라. 자, 다 왔다." 카디스 박사는 벽을 더듬더니 스위치를 넣었다. 사방이 갑자기 밝아졌다. 눈앞에 육중한 철문이 보였다. 박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또 스위치를 넣었다. 한쪽 벽이 유리로 되어있는 넓은 방이었다. 박사는 스위치를 넣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방은 캄캄해지고 유리벽 쪽은 밝아졌다. 그것은 큰 수족관 같았다. 그것은 해저와 계속 이어져 있는 큰 유리로 만든 집이었다. 바닥에는 해초와 산호가 무성해 있었다. 그 사이를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해초 사이에 인간 같은 것이 모습을 나타냈다. 눈은 크게 튀어나와 있고 손은 개구리 같았다. 신체는 파란 은색의 비늘이 빛나고 있었다. 그 생물은 재빨리 유리벽 쪽으로 헤엄쳐 와 박사를 보고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쪽의 작은 유리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 작은 방의 물은 금방 빠졌다. 기묘한 생물은 문을 열고 그들이 서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안경과 물갈퀴를 벗어라." 박사가 말했다. 기묘한 생물은 안경을 벗고 물갈퀴를 벗었다. 그러자 늠름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변해버렸다. "소개하겠다. 로스모다. 물 속에서도 살 수 있는 양서인간이지. 바다의 악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바로 이 청년이다." 청년은 빙긋이 웃으며, 와루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와루코는 그 손을 쥐었다. 너무나 놀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로스모를 돌보아주던 흑인이 병이 났단다. 와루코, 네가 잠시 동안 대신해서 잘 돌봐 주어야겠다. 잘 돌봐주면 계속해서 네게 맡길 작정이다." 와루코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로스모의 하루   먼동이 틀 때가 가까워졌다. 공기는 습기가 많았으나 따뜻하고 목련꽃의 달콤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로스모는 허리에 단검과 수중 안경과 손과 발의 물갈퀴를 차고 뜰의 좁은 길을 걸어갔다. 풀 앞에까지 온 로스모는 걸음을 멈추더니 수중 안경을 쓰고 손갈퀴과 발갈퀴를 달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마음을 상쾌하게 해줬다. 그 순간 아가미가 자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이 물고기로 변하는 것이었다. 로스모는 풀의 난간을 잡고 바다로 통하는 수중 터널로 기어 들어갔다. 어둡고 긴 터널을 통해서 바다로 나가는 곳에는 철문이 있었다. 로스모는 손으로 더듬어서 철문을 열고 바다로 나갔다. 바다 속도 아직은 어둡다. 여기저기 푸르스름하게 빛을 내고 있는 발광 생물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곧 날이 새었다. 로스모는 조용한 아침 바다를 좋아했다. 이윽고 아침해가 바다에도 비쳐 와서,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눈을 뜨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로스모도 손과 발을 써서 넓은 바다를 기운차게 헤엄쳐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침 식사는 굴이나 조개를 따서 먹었다. 식사가 끝나면 조금 쉰 후, 물고기나 돌고래와 같이 바다를 헤엄쳐 돌아다녔다. 때때로 물위에 떠올라와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갈매기와 신천옹(날개를 펴면 3미터 가량이나 되는 커다란 새로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음)과 장난을 치면서 파도를 타고 놀았다. 그러나 배가 나타나면 곧 바다 밑으로 기어 들어가 버린다. 로스모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는 카디스 박사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남쪽 바다는 아름다웠다. 물은 한없이 맑고, 붉고 푸르며 노란 물고기가 나비 떼처럼 쉬지 않고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이렇게 하루를 바다에서 지내고 저녁이 되면 다시 풀로 되돌아와서 물위로 올라와 꽃향기를 맡으며 침대에서 자는 것이다.     젊은 아가씨   언젠가 로스모는 폭풍우가 멎은 뒤에 바다로 나가 헤엄치고 있었다. 상당히 멀고 깊은 바다에서 이곳저곳 바라보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흰 천 같은 것이 둥둥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사람이었다. 더욱이 젊은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는 나무 조각에 걸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죽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일까?) 로스모는 나무 조각을 잡아끌며 바닷가로 헤엄쳐 나왔다. 바닷가까지는 좀 멀었다. 로스모는 힘을 다해 헤엄쳤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아가씨를 꼭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닷가에 도착하자 끈을 풀고 여자를 살며시 끌어안아 풀 위에 옮겨놓고 인공 호흡을 시켰다. 아가씨의 속눈썹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로스모는 아가씨의 심장에 귀를 대어보았다. 가냘픈 심장의 고동이 들려왔다. (아, 살아있다!) 로스모는 하늘에라도 뛰어오를 듯이 기뻤다. 아가씨는 눈을 뜨고 로스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로스모는 실망했다. 그러나 기뻤다. 아가씨의 생명을 구해 준 이상, 이곳을 빨리 떠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가씨를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먼데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로스모는 곧 바다로 뛰어들어가 바위틈에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모래사장 저쪽에서 수염이 많이 나고 얼굴이 검게 탄 사나이가 오고 있었다. 사나이는 그 아가씨를 보자마자, "아니, 이런 곳에 있다니!" 하고 중얼거리며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내려다보고 곧 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인공 호흡을 시키는 것이었다. (왜 저런 짓을 할까?) 로스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엉뚱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그러나 당신을 나무 조각에 묶어놓은 것은 잘 했다." 아가씨는 눈을 뜨고 머리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놀람과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나이는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아가씨를 일으켜 세웠다. 아가씨는 일어서자마자 곧 모래 위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삼십 분쯤 지나서야 겨우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불쾌한 표정으로 수염난 사나이에게, "당신이 나를 구해주셨지요? 고맙습니다. 틀림없이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 겁니다."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신의 가호보다 너의 사랑을 더 원하고 있어." "이상하다. 내 옆에는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너의 착각이다. 그러나 혹시 악마가 붙어 네 피를 빨아먹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제는 안심해라." 아름다운 아가씨와 수염이 덥수룩한 사나이는 모래사장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로스모는 수염난 사나이는 왜 자기가 그 여자를 구해줬다고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스모는 자기도 모르게 슬퍼졌다.     와루코의 계획   와루코가 로스모를 잘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카디스 박사는 이젠 와루코를 사냥 가는데 동행시키지 않았다. 와루코는 잘 됐다고 기뻐했다. 박사가 없는 동안 흉계를 꾸밀 수도 있고, 아루바와 자유로이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로스모를 훔쳐갈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와루코는 풀의 곁에 있는 로스모의 집에 살면서 항상 로스모를 보살펴 주는 것이 일과였다. 두 사람은 곧 친해졌다. 인간과 교제가 없는 로스모는 육지 생활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는 와루코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바다의 일이라면 로스모는 어떤 과학자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더욱이 로스모는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식물학, 동물학 등을 상당히 많이 공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몰랐다. 로스모는 날씨가 더우면 지하의 터널을 통해 바다로 나가 하루종일 바다 속에서 살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되돌아와 아침까지 집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가 오든지 풍랑이 심한 날은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로스모가 거처하는 집에는 부엌, 식당, 도서실, 침실 등이 있었다. 침실은 크고 방 한가운데 풀 같은 큰 욕탕이 있고 창가에 침대가 있었다. 로스모는 침대에서 잘 때도 있으나 오히려 물이 들어있는 욕탕 속에서 자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카디스 박사는 출발하기 전 로스모에게 일주일에 3일은 침대에서 자도록 해야한다고 명령하고 떠났다. 그래서 와루코는 항상 로스모의 방에 가서 왜 침대에서 자지 않느냐 하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물 속에서 자는 것이 더 기분이 좋은 걸요." 로스모는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다. "박사님은 침대에서 자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나쁩니다." 로스모는 카디스 박사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와루코는 그 관계가 의심스러웠다. 로스모의 손과 얼굴이 흰 것은 항상 물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카디스 박사는 스페인 사람인데 로스모의 얼굴 형태는 와루코와 같은 인디오 종족이었다. 와루코는 로스모의 피부 색깔을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로스모는 항상 몸에 꼭 맞는 비늘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왜 당신은 잘 때에도 그 옷을 벗지 않나요?" "이 비늘 옷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으니까요. 지느러미와 살갗의 호흡을 방해하지 않고, 또한 상어의 습격을 당하거나, 칼로 끊으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정말 이 옷은 부드러우면서도 쇠보다 더 강해요." "그럼 그 안경과 물갈퀴는 왜 씁니까?" 와루코는 옷장에 걸려있는 개구리발 같은 물갈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손갈퀴와 발갈퀴는 헤엄칠 때 필요하죠. 이 수중 안경은 물 속에서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지요. 이것을 쓰고 있으면 물 속이 잘 보이거든요." "당신은 항상 풀에서 항구로 나가십니까?" 와루코는 알고 싶은 비밀을 물었다. "그래요. 요즘은 다른 수중 터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나쁜 사람들이 터널의 출입구에 그물을 쳐놓고 나를 사로잡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아주 조심하고 있습니다." "항구로 나가는 터널은 하나 뿐이 아니군요." "물론이죠. 여러 개가 있죠. 당신이 물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안내해 드릴텐데....... 바다의 말에라도 태워드리고......." "바다의 말이라니....... 뭡니까?" "돌고래지요. 어떤 날 폭풍우가 심했었는데 돌고래 한 마리가 바닷가에 떠밀려 올라가고 말았어요. 그놈은 지느러미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난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놈을 바다로 끌고 와서 상처가 다 아물게 될 때까지 돌보아 주었어요. 그래서 그놈은 나를 아주 좋아하게 되어 지금은 아주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죠. 다른 돌고래와도 친해졌습니다. 돌고래와 노는 것은 참 재미가 있어요. 그 외에도 친구들이 많습니다. 내가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으면 물고기들이 슬슬 뒤따라옵니다." "그럼 적은?" "적도 있지요. 상어라든지 큰 문어라든지....... 그러나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단검이 있으니까......." "그래도 상대편이 몰래 다가온다면 곤란하겠지요." 로스모는 그 말에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나는 멀리 떨어진 것도 잘 들을 수가 있어요." "물 속에서도 들립니까?" 로스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와도?" "그럼요. 귀와 살갗으로 느낄 수가 있어요. 적이 움직이면 물이 진동하고 그 진동이 빠르게 전달되어 오니까 나는 그 진동을 느끼고 미리 준비하지요." "자고 있을 때에도?" "그럼요." (스리다가 이 청년을 사로잡아서 한번 돈을 잘 벌어 보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나이를 수중에서 사로잡는 것은 어렵겠다. 이 사실을 빨리 스리다에게 알려주어야 되겠다.) 라고 와루코는 생각했다. "얘기는 좀 다르나 왜 당신은 어부의 그물을 찢기도 하고 고기가 들어있는 배를 뒤집기도 해서 어부들에게 골탕을 먹입니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그들이 못 먹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기 때문에......." "어부는 팔기 위해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스모는 이 말의 뜻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듯 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와루코는 설명했다. "인간이 그렇게 많이 있어요? 육지의 새들이나 짐승들 만으로서는 부족한가요? 왜 인간은 바다에까지 와서 고기를 잡아가나요?" "그런 것은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곧 주무십시오. 꼭 침대에서 자야 합니다." 하고 말하고 와루코는 자기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로스모의 방으로 가보니 그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물이 젖어 있었다. "또 욕탕에서 잤구나." 그날 로스모는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쩐 일인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디 갔다 왔어요?" 와루코가 물었다. "오늘 돌고래와 같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까운 해안에 갔다가 참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어요. 눈은 파랗고 머리는 금발이었습니다. 여자는 나를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며 달아났습니다. 내가 수중 안경을 쓰고 물갈퀴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전에 나는 바다에 빠진 젊은 아가씨를 구해 준 일이 있었는데 오늘 만난 아가씨가 어쩐지 그 아가씨와 비슷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어쨌지요?"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되돌아오지 않았군요. 와루코, 그 아가씨는 이제는 다시 바닷가에 오지 않을까요?" (이 사나이가 여자를 좋아하니 다행한 일이다. 시내가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사로잡는 것은 간단하겠군.) 와루코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젠 바닷가에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내가 그 아가씨를 찾아 드릴까요?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나와 같이 시내로 갑시다." "그러면 그 아가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로스모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시내에는 아가씨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아가씨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지금 곧 갑시다."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출발합시다. 당신은 항구까지 나와주십시오. 나는 옷을 가지고 해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옷을 구해 오겠습니다." (오늘 정겨운 아우를 만나고 오자.) 라고 와루코는 생각했다.     시내   로스모는 항구에서 솟아올라 해변가로 올라갔다. 와루코는 흰 양복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로스모는 뱀 껍질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가 하는 수없이 입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양복을 입는 것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와루코는 넥타이를 매어 주고 만족스럽게 로스모를 살펴보았다. "자, 갑시다." 와루코는 로스모를 놀라게 하기 위해 시내의 중심지로 데리고 갔다. 그것은 실패였다. 시내는 소음과 많은 사람들로 혼잡해 있기 때문에 로스모는 곧 피로에 지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젊은 아가씨가 눈에 뜨일 때마다, "있다!" 라고 외치고 와루코의 손을 잡아당기었다. 그러나 곧 그 아가씨가 자기가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자 실망하곤 했다. 점심때가 되어 와루코는 식사를 하기 위해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거기도 역시 시끄럽고 무더웠다. 로스모는 냉수만 마시고 식사에는 손을 대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슬프게 말했다. "이렇게 혼잡한 곳에서 사람을 찾기 보단 바다 속에서 친구인 물고기를 찾는 것이 훨씬 좋겠습니다. 시내라는 곳은 정말 싫은 곳입니다. 나는 옆구리가 아파요. 자, 그만 갑시다. 와루코!" "알았습니다. 잠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 곳에 들렸다 갑시다." "나는 이젠 인간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싫어요." "바다로 가는 도중입니다. 그리고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와루코는 로스모를 달래서 거리로 나왔다. 로스모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통스럽게 숨을 쉬면서 와루코의 뒤를 따라 빌딩과 빌딩 사이를 빠져서 교외로 나왔다. "여깁니다." 와루코는 이렇게 말하고 어두컴컴한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로스모는 상점 안을 두루 살펴보았다. 거기는 바다의 밑바닥 같았다. 벽과 마룻바닥에는 크고 작은 각종의 조개 껍질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천장에는 산호와 불가사리와 성게 등이 실로 꿰매져 매달려 있었다. 유리 케이스 안에는 진주가 들어 있었다. 로스모는 자기와 낯설지 않는 것들을 보고는 조금 안심했다. "조금 쉬십시오." 하고 말하면 로스모를 안락 의자에 앉히고 상점 안을 향해 외쳤다. "아루바! 루이제!" "형님이셔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옆방에서 소리가 났다. 와루코는 그 방으로 들어가 곧 문을 닫았다. 아루바는 진주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루바! 루이제는?" "세탁소에 갔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스리다는?" 와루코는 계속 물었다. "스리다는 아침에 또 한바탕 말싸움을 했으니까.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루이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리다는 만날 때마다 결혼하자고 조르지만 루이제는 죽어도 싫다고 거절하면서 피하고만 있잖아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라고 하지만 스리다 같은 부자에게 시집을 안 간다고 하는 그 마음을 모르겠어요. 스리다는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지?" "데리고 왔어요?" "저기 앉아 있는데......." 아루바가 문틈으로 상점 안을 내다보았다. "없는데요?" "없어? 안락 의자에 앉아있을 텐데......." "루이제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두 사람이 후다닥 상점으로 나와보니 거기에는 루이제 혼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있던 청년 어디 갔지?" 아루바가 물었다. "제가 들어오자 그 청년은 눈을 휘둥거리더니 별안간 휙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상해서 곧 쫓아나가 보았지만 이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와루코는, (아아, 그 아가씨라는 것이 루이제였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때 로스모는 거리를 곧바로 빠져 나와 해안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바닷가에 다다르자 재빨리 바위틈에 숨어서 사방을 돌아보고 양복을 벗어 그것을 바위 밑에 감추고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니 일시에 피로가 사라져버렸다. 로스모는 해안을 따라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 근처의 바다도 로스모는 잘 알고 있었다.   와루코는 집에 와서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로스모는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흘이 되자 푸르스름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어디에 갔다 왔어요?" 와루코는 로스모를 보고 기뻐서 물었다. "바다 밑바닥에......." "왜 그렇게 파란 얼굴을 하고 있어요? 왜 그래요?"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요." 로스모는 와루코에게 뭔가 숨기고 있었다. "배가 고파요. 먹을 것을 좀 주셔요." 로스모는 아무 말도 없이 식사만 하고 수중 안경과 물갈퀴를 가지고 곧 다시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와루코는 그저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작은 복수   진주 파는 상점에서 뜻밖에 파란 눈을 한 아가씨를 만난 로스모는 자기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 이제는 크게 후회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번 더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와루코에게 부탁을 하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웬일인지 와루코와 같이 그 아가씨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로스모는 처음 그 아가씨를 만났던 바닷가에 매일같이 헤엄쳐 갔다. 그리고 하루종일 바위틈에 숨어서 그 아가씨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가에 올라가서 그 아가씨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안경과 물갈퀴를 벗고 흰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때로는 2,3일 계속 기다리면서 지냈다. 밤이 되면 바다 속으로 들어가 물고기와 굴을 먹고 물 속에서 잤다. 어느 날 해가 질 무렵 큰마음을 먹고 그 상점에 가보았다. 문이 열려있었으나 그 아가씨는 없었다. 로스모는 바닷가로 되돌아왔다. 뜻밖에 바닷가 절벽 위에 그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 아가씨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로스모는 바위틈에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그 아가씨는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키가 큰 청년이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청년은 그 아가씨의 곁에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잘 있었소? 루이제!" "안녕하셔요? 오르센!" 그 아가씨가 반갑게 대답했다. 오르센이라는 청년은 루이제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로스모는 어쩐지 슬퍼졌다. "가져왔군요." 오르센은 루이제의 진주 목걸이를 보고 물었다.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에게 들키지나 않았소?" "들키지 않았어요. 아무튼 이제 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지 누가 뭐래요?" 그들은 해안의 높은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루이제는 진주 목걸이를 벗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름다워요! 저녁 노을을 받아 더 아름답게 보이죠? 자, 받으셔요. 오르센." 오르센은 손을 뻗쳤다. 그 순간 진주 목걸이는 루이제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다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 어쩌지!" 두 사람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 같았다. "바다에 들어가서 찾을 수 있을까?" "안 돼요. 여기는 깊어요. 큰일났군요. 오르센!" 로스모는 루이제가 슬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방금 오르센을 미워하던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로스모는 바위틈에서 나와 천천히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오르센은 얼굴을 찌푸렸다. 루이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로스모를 바라보았다. 다가오고 있는 청년은 바로 며칠 전에 상점에서 뛰어나간 그 청년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당신은 진주 목걸이를 바다에 빠뜨린 모양이군요. 제가 건져 드릴까요?" 로스모가 물었다. "제 아버지라도 여기서는 안될 것이어요. 아버님보다 더 오랫동안 잠수하는 사람은 없어요." "한번 해 봅시다." 로스모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루이제와 오르센이 어리둥절히는 사이에 옷도 벗지 않고 높은 절벽 위에서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바다를 살펴보고 있었다. 1분이 지나가고 2분이 지나갔다. 로스모는 떠오르지 않았다. "죽고 말았어요." 루이제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로스모는 자기가 물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루이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오래 물 속에 있는 것을 느끼고 급히 떠올라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바닥에는 바위가 많아서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꼭 찾아드리겠습니다." 2분 후에 로스모는 다시 떠올라왔다. "찾았습니다." 로스모는 바위를 타고 해안으로 기어올라왔다. 옷에서는 물이 폭포같이 떨어졌다. 로스모가 조금도 숨이 차지 않는 것을 보고 루이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루이제는 로스모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진주 목걸이를 받았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이제는 로스모가 보고 있는 앞에서 진주 목걸이를 오르센에게 넘겨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당신은 그걸 왜 저분에게 넘겨드리지 않습니까?" 로스모는 오르센을 손으로 가리켰다. 오르센은 얼굴이 붉어졌다. 루이제는, "아, 그랬지요." 라고 말하고 목걸이를 오르센에게 건네주었다. 로스모는 즐거웠다. 그로서는 이것은 아주 작은 복수였다. 로스모는 루이제에게 인사를 하고 재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혼자되고 보니 여러 가지 의심이 떠올랐다. (오르센이라는 청년은 어떠한 사람일까? 왜 루이제는 오르센에게 진주 목걸이를 주는 것일까?) 그날밤 로스모는 또다시 돌고래와 같이 바다를 헤엄쳐 돌아다녔다. 다음날은 하루 종일 바다 밑에서 진주를 찾았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항상 가던 해안으로 올라가서 양복을 입었다. 저녁 무렵 루이제가 혼자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로스모는 바위틈에서 나와 루이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루이제는 로스모를 보고 반가운 듯 다정하게 물었다. "당신은 나의 뒤를 따라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요전 진주 목걸이를 오르센에게 건네주기 전에 그것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진주를 좋아하십니까?" "예." "그러면 이 진주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루이제는 로스모의 손바닥 위에 있는 진주가 지금까지 본 어떠한 진주보다도, 또 아버지에게 이야기 들었던 어떤 진주보다도 훌륭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양이 좋고 아무런 티도 섞이지 않았으며 200캐럿 정도의 무게가 되었다. 따라서 그 값은 정말 굉장한 것이다. 루이제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진주와 늠름한 청년을 번갈아 보았다. (이 청년이 왜 나에게 비싼 진주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자, 받아주십시오." 로스모는 다시 말했다. 루이제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어요. 그렇게 비싼 선물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뭐, 별로 비싼 선물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바다 밑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루이제가 웃었다. "부탁입니다. 받아주십시오." 로스모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네요." 로스모는 기분이 나빠졌다. "당신이 필요 없으면 오르센에게 주십시오. 그 사람이면 좋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루이제는 화를 냈다. "오르센이 진주를 좋아해서 그때 진주를 준 것이 아니어요. 당신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정말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그러자 로스모는 진주를 바다 멀리 내던지고 루이제에게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루이제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비싼 진주를 돌멩이같이 내던지는 사람을 지금까지 한번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좀 기다려 주셔요." 그러나 로스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루이제는 뒤쫓아가서 로스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스모로서는 생전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용서해 주셔요. 당신을 슬프게 만들어서......." 루이제는 로스모의 손을 꼭 잡았다.     초조한 스리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매일 해질 무렵이 되면 로스모는 시내에서 가까운 그 바닷가로 헤엄쳐 가서, 바위틈에 숨겨 놓은 양복을 갈아입고 루이제와 만나서 바닷가를 산책했다. 로스모는 머리가 영리해서 루이제가 모르는 일들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와 반대로 시내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이라도 알 수 있는 일도 몰랐다. 루이제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로스모는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루이제가 아는 것은 로스모가 어느 부잣집 의사의 아들이라는 것 뿐이었다. 때로는 두 사람은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발 아래에는 파도가 밀려오고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럴 때면 로스모는 무척 기분이 좋아져서, (아, 이게 행복이라는 거로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가야겠어요." 하고 루이제가 말하면 로스모는 마지못해 일어나서 루이제를 시내 가까이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바다로 되돌아와 옷을 벗어 숨겨놓고 바다에 뛰어들어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이 매일 계속되었다. 로스모로서는 루이제가 소란스럽고 먼지투성이인 시내에서 살고 있는 것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 속에서 생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제는 바다 속에서 생활할 수가 없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로스모도 땅 위에서만은 살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육지에 있으면 로스모는 옆구리가 쑤시고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로스모는 루이제와 오르센의 관계가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루이제는 로스모에게 내일은 올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왜요?"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가요?"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아니어요. 바래다주지 않아도 좋아요." 루이제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 혼자 돌아가는 것이었다. 로스모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 바다 바닥에 물이끼가 낀 돌 위에서 하룻밤을 꼬박 세웠다. 너무 슬펐다. 밤새도록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먼동이 틀 무렵 자기 집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항구 가까이에서 어부들이 돌고래를 잡고 있었다. 큰 돌고래가 총알에 명중되었다. 돌고래는 물위로 높이 뛰어 올랐다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 "리이딩이다." 로스모는 깜짝 놀랐다. 한 어부가 바다에 뛰어들어가 상처 입은 돌고래를 쫓았다. 돌고래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어가면서 다시 떠올랐다. 어부는 재빨리 돌고래 있는 곳으로 헤엄쳐 갔다. 로스모도 곧 돌고래를 구조하러 나섰다. 로스모는 물 속으로 들어가서 어부를 뒤따라가 발을 이로 깨물었다. 어부는 상어에게 습격 당했다고 생각하고 발을 힘차게 내두르며 단검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단검이 로스모의 목에 닿았다. 그 순간 로스모는 어부에게서 떨어졌다. 어부는 급히 배로 되돌아갔다. 로스모는 상처 입은 돌고래를 데리고 물 속의 동굴로 기어 들어갔다. 거기는 물이 반정도 밖에 없고 천장의 바위틈에서 공기가 들어오고 있어서 돌고래는 자유로이 호흡할 수가 있었다. 로스모는 돌고래의 상처를 살폈다. 총알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지방이 많은 곳에 박혀 있었다. 로스모는 총알을 빼냈다. "자, 이제는 됐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한다." 로스모는 돌고래의 등을 정답게 두드렸다. 이번에는 자기의 상처를 걱정하여야 되었다. 로스모는 지하 터널을 통해서 자기 집으로 되돌아왔다. 와루코는 로스모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찌된 일인가요?" "돌고래를 구하려다 어부에게 당했어요." 와루코는 믿지 않았다. "혼자 또 시내에 갔었지요?" 와루코는 부상을 치료해 주면서 물었다. "비늘을 조금 들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서도 와루코는 로스모의 어깨 비늘을 젖혀 보았다. 어깨에는 붉은 반점이 있었다. "노로 두들겨 맞았어요?" 와루코는 손으로 만져가면서 물었다. 부어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날 때부터 있었던 점 같았다. "아니어요." 로스모는 대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와루코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고 있다가 이윽고 급히 방을 나왔다. 와루코는 급히 시내에 잇는 아루바의 상점으로 갔다. 상점에는 루이제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루이제는 손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와루코는 아루바의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아루바는 와루코의 얼굴을 보자마자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정말 야단났어요. 스리다는 왜 바다의 악마를 잡아오지 못하느냐고 화만 내고 루이제는 집에 있지도 않고 스리다만 나타나면 달아나 버립니다. 스리다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힘으로라도 루이제를 데리고 가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그 놈이 어떤 짓을 할는지 모르겠군요." 와루코는 동생의 넋두리를 듣고 말했다. "로스모를 데리고 못 오는 것은 그놈도 루이제와 마찬가지로 항상 집을 비우고 없으니까 그렇다. 거기에다 그놈은 나와 같이 시내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요새는 웬일인지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때 문이 휙 열리며 스리다가 불쑥 들어왔다. "형제가 모여 앉았구나. 너희들은 언제까지 날 속일 작정이냐?" 와루코는 일어서면서 애교 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힘껏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바다의 악마는 머리가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한번 겨우 여기까지 데리고 왔었는데 그땐 당신이 없었잖아요? 그 후 바다의 악마는 시내에 나오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기 싫다면 안 도와도 좋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이번 주 안으로 나는 두 가지 일을 해치울 작정이다. 카디스 박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며칠 후면 돌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빨리 서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힘센 녀석들 몇 놈을 골라서 데리고 갈 테니 와루코, 너는 문만 열어주면 된다. 뒷일은 내가 맡을 테니까. 모든 준비를 갖춘 다음 아루바에게 알리겠다." 스리다는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아루바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너와는 내일 말하겠다. 알았지. 이제는 최후의 수단을 써야지 안 되겠다. 그런 줄 알게." 스리다는 호통을 치고는 나가버렸다. 상점에서 스리다는 루이제에게 작은 소리로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싫어요!" 루이제의 소리가 들려왔다. 와루코와 아루바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불쾌한 상봉   로스모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목의 상처가 몹시 쑤셨고, 물 밖에서는 숨쉬기가 곤란했다. 그래도 루이제를 만나러 바닷가로 나갔다. 루이제는 낮 12시가 조금 지나자 도착했다. 날씨는 점점 무더워져 갔고 그만큼 로스모는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져 갔다. "오늘은 아버지가 볼일로 상점을 비우기 때문에 내가 상점을 보게 되었어요." "그럼 빨리 돌아가야겠군. 바래다 드리죠." 두 사람은 상점으로 가는 먼지투성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오르센이 오고 있었다. 그러자 루이제는, "저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조금 기다려 주셔요." 하고 말하고는 오르센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소곤소곤 무엇인가 한참 이야기를 했다. 루이제가 무슨 부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러면 오늘 저녁 열두 시쯤......." 오르센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르센은 루이제와 헤어져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루이제가 되돌아왔을 때는 로스모는 얼굴과 귀가 빨개져 있었다. 로스모는 이 기회에 루이제에게 오르센과 사이를 물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몰랐다. 로스모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나는 알고 싶어요. 당신과 오르센의 관계를....... 당신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저녁 12시쯤 만나기로 했죠?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루이제는 로스모의 손을 잡고 상냥하고 웃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나를 믿고 있어요?" "물론이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괴롭습니다." 로스모는 옆구리가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면서 고통스러운 듯이 이야기를 했다. 빨갛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루이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굉장히 아픈 모양이어요. 부탁이어요.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지 마셔요.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얘기해 드리죠." 그때 말을 탄 사나이가 지나가다가 갑자기 말을 되돌리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로스모는 어디선가 본 일이 잇는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얼굴 색이 거무스름하고 수염이 난 사나이........ (그렇다! 루이제가 바다에 빠졌을 때 해안에서 만났던 사나이다.) 그 사나이는 급히 루이제의 손을 잡고는 호령했다. "이제 겨우 찾았다. 결혼식 전날 딴 젊은이와 밀회하고 있는 신부를 본 일은 없어!" 루이제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면서 발끈 화를 냈으나 그 사나이는 루이제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빨리 돌아가거라. 나도 1시간 후에 간다." 로스모에게는 마지막 이야기는 들리지 아니하였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목에는 무엇이 걸린 것 같아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너는...... 정말로...... 나를 속이고 있었구나!" 그렇게 말하고 로스모는 갑자기 높은 절벽 위로 달려가더니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루이제는 비명을 지르고 스리다를 향해서 외쳤다. "빨리......, 빨리......, 저 사람을 구해주셔요!" 그러나 스리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살하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루이제는 바다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해변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스리다는 놀란 듯 말에 채찍질을 하여 뒤쫓아가서 루이제의 어깨를 잡아 말에 태우고는 시내를 향해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자살하고 싶은 놈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은 거야. 루이제, 바보 같은 짓을 하지마!" 그러나 루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점 가까이에 다 왔을 무렵 스리다는 물었다. "그 젊은 사나이는 누구냐?" 루이제는 스리다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손, 놓으셔요!" 스리다는 기분이 나빴다. "야, 아루바!" 스리다의 호령 소리를 듣고 아루바가 급히 밖으로 나왔다. "자네 딸을 맡아라! 젊은 녀석을 뒤쫓아 바다에 뛰어들어가려고 하는 걸 구해주었다. 두 번씩이나 목숨을 구해주었는데도 조금도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고집불통이다. 그러나 이제 곧 결판을 짓고 말겠다. 나는 1시간 후에 올 것이니까 약속을 잊으면 안 된다!" 스리다는 큰 소리로 웃다가 말에 채찍질을 했다. 아루바와 루이제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루이제는 힘없이 의자에 털썩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루바는 상점 문을 닫고 루이제의 주위를 왔다갔다하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로스모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사람은 바다에 뛰어들어가 죽고 말았을 거야. 불쌍하게도! 오르센을 만나고 또 스리다를 만났으니 완전히 오해하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왜 스리다는 나를 신부라고 불렀을까?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야.) 루이제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로스모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 수줍은 사람이지만 그렇게 좋은 사람은 없지. 이제부터 어쩌면 좋을까? 로스모의 뒤를 따라 바다에 뛰어들어가서 죽어버릴까?) 아루바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루이제, 그렇게 되면 이 상점은 파산이다. 이 상점의 물건들은 모두가 스리다의 것이다. 만약에 네가 결혼을 거절하면 그 사나이는 이 물건들을 모두 가져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나가지? 조금이라도 이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생각해다오." "그러니 스리다에게 시집을 가라는 말씀이죠? 싫어요!" 루이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바보 같은 것!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스리다가 힘으로라도 너를 끌고 갈 거다!" 아루바는 문을 확 열고는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친구   일주일이 지나갔다. 오르센은 어선 위에서 바다를 살피고 있었다. 방금 수평선으로 올라온 태양이 항구의 바다 밑바닥까지 비추고 있었다. 바다 속 흰모래 바닥에는 몇 명의 인디오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숨쉬기 위해 가끔 물위로 떠올랐다가 또 밑으로 들어가곤 하는 것이었다. 오르센도 물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 옷을 벗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물이 차가워서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세 번째 들어갔을 때 바다 속에서 작업을 하던 인디오들이 상어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별안간 허겁지겁 물위로 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러나 하고 바다 속을 들여다보다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개구리와 인간의 중간쯤 생긴 괴물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온 몸이 초록색의 비늘로 덮여 있었고, 눈이 툭 튀어나온 이상한 괴물이었다. 오르센이 떠오를 사이도 없이 그 괴물은 개구리 같은 손으로 오르센의 손을 잡고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았다. 물 속이라서 아무 것도 들리지는 않았으나 오르센은 괴물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오르센은 급히 수면으로 떠오르며 괴물의 손을 뿌리치고 배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인디오들은 바다로 재빨리 뛰어들어가 해안을 향해서 헤엄쳐 도망쳤다. 그런데 그 괴물이 뱃전을 잡고는, "내 말을 들어다오. 오르센, 나는 루이제에 대해서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오르센은 물 속에서 괴물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랐다. 그러나 안심도 되었다. 오르센은 용감한 청년이었다. 상대가 자기와 루이제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상 틀림없이 인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소." 오르센은 대답했다. 로스모는 배에 올라와 뱃전에 앉았다. 오르센은 상대의 둥그렇게 튀어나온 눈을 보고 생각했다. (안경이겠지.) "내 이름은 로스모라 하오. 전에 당신에게 바다 밑에서 진주 목걸이를 찾아 준 일이 있소." "그러나 그때 당신은 인간다운 눈과 인간다운 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던데......?" 로스모는 빙긋이 웃으면서 개구리 같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것은 자유로이 벗었다 꼈다 하는 것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인디오들은 해안의 바위 위에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당신은 루이제를 좋아하죠?" 로스모가 물었다. "그렇소." 오르센은 솔직히 대답했다. 로스모는 한숨을 쉬었다. "루이제도 당신을 좋아하나요?" "물론." "그러나 루이제는 나를 좋아합니다." "그건 루이제의 자유지요." 오르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의 자유? 그러나 루이제는 당신의 약혼자가 아니오?" 오르센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침착해지면서 분명하게 대답했다. "아니, 루이제는 나의 약혼자가 아닙니다." "거짓말 마시오! 말을 탄 거무스름한 사나이가 그녀를 신부라고 불렀소." "나의?" 로스모는 놀랐다. 수염이 난 사나이가 루이제를 오르센의 신부라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루이제 같이 젊은 아가씨가 그렇게 나이가 많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의 신부가 된다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사나이는 그녀의 친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스모는 계속 물었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요? 진주를 캐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요? 루이제에게서 당신 이야기를 조금 들었었기에 그대로 두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을 바다에 처넣었을 것이오. 그렇소. 진주를 캐고 있소." "내가 바다에 던졌던 진주를? 루이제가 당신에게 이야기해 주었죠?" 오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진주를 좋아하나요?"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진주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러나, 진주는...... 팔면 돈이 되잖소?" 오르센은 또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돈을 좋아하겠군요." "당신은 도대체 내게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 거요?" 오르센은 화를 내면서 물었다. "나는 루이제가 왜 당신에게 진주를 주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리고 당신은 그녀와 결혼하려는 것이죠?" "아니, 그런 마음은 없소.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때는 이미 늦었소. 그녀는 딴 사나이와 결혼하고 말았소." 로스모는 새파랗게 질려 오르센의 손을 잡았다. "그 수염을 기른 사나이와?" "그렇소. 그녀는 스리다와 결혼했소." "뭐라고?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었을 텐데......." 로스모는 정말 놀랐다. 오르센은 로스모를 동정하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말 당신을 사랑했었던 것 같소. 그러나 당신은 그 루이제가 보는 앞에서 바다로 뛰어들어가 버리지 않았소? 그래서 루이제는 당신이 자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 로스모는 깜짝 놀랐다. 자기가 물 속에서도 샅 수 있다는 것을 루이제에게 이야기한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높은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것을 자살이라고 생각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르센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제 저녁, 나는 루이제를 만났습니다. 루이제는 당신의 자살을 무척 슬퍼하면서 '로스모가 자살한 것은 나의 책임이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럼 그녀는 왜 그렇게 빨리 결혼하고 말았을까요? 그리고 그 아가씨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도 바로 납니다. 나는 물에 빠진 아가씨를 바닷가까지 끌어다놓고 누가 오는 것 같기에 바위틈에 숨었었소. 그런데, 그 스리다란 놈이 와서 자기가 구해줬다고 루이제에게 말하는 것이었소." "루이제도 누가 자기를 살려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왜 당신은 그 사실은 말하지 않았나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해서....... 그런데 왜 그런 사람과 결혼을 했을까요?" "나도 잘 모르겠소." "당신이 아는 데까지 만이라도 좀 이야기해 줄 수 없겠소?" "좋아요. 나는 단추 만드는 공장에서 조개를 사오는 일을 하고 있었소. 루이제의 아버지에게 부탁을 받아서 자주 조개를 갖다 주곤 하였었소.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되었으며 자주 항구와 해안을 산책하곤 했지요. 그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어떤 돈 많은 늙은이에게 졸리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것이 바로 스리다겠군요?" "물론 그렇죠. 루이제의 아버지 아루바는 그 스리다에게 오래 전부터 도움을 받아 오고 있는 형편이라 그렇게 훌륭한 사람과의 결혼을 거절하면 안 된다고 열심히 루이제를 설득하고 있었소." "나이도 많고 험상궂은 사람을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죠?" "그거야 아루바 자신에게는 좋은 사윗감이니까요. 아루바는 스리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만약 루이제가 결혼을 거절하면 스리다는 아루바를 파산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루이제는 크게 고민하고 있었지요. 스리다는 결혼하자고 계속 졸라대고, 아버지에게는 꾸중만 듣게 되고......." "왜 루이제는 스리다와의 결혼을 거절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당신은 젊고 힘도 좋지 않소? 왜 스리다를 해치우지 못했나요?" 오르센은 깜짝 놀랐다. 바보도 아닌데 왜 그런 엉뚱한 말을 하는지 오르센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가 않소. 법률이나 경찰이나 법원도 모두 스리다와 아루바의 편이니까요." "그러면 루이제는 집을 나와버리면 될텐데." "루이제도 집을 뛰쳐나올 생각을 했었지요. 그리고 나도 협력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나는 전부터 미국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습니다." "당신은 그녀와 결혼할 작정이었군요?" "바보 같은 소리! 우리는 친구라고 말했잖소." "그럼 당신들은 왜 여길 도망치지 못했지요?" "여비에 쓸 돈이 없었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미국까지 가려면 상당한 돈이 든단 말이오. 그래서 루이제는 자기의 진주 목걸이를 팔기로 했었소. 그리고 준비도 다 되었는데......." "잠깐, 그러면 그녀는 나를 버리고 갈 작정이었단 말이오?" "이런 일들은 전부 당신과 만나기 전에 시작된 일이오. 당신과 안 후에는 그녀는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할 작정이었소." "그래도 집을 뛰쳐나올 계획을 의논한 상대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잖소?" "나는 1년 이상 그녀의 친구였으니까요." "좋아요. 그 다음 얘기를 해 주시오." 오르센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여간 준비는 다 되었소. 그랬는데 당신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바다로 뛰어들어갔소. 그 다음날 아침 나는 공장에 가기 전에 아가씨의 집에 들렸지요. 배표를 샀기에 밤 10시까지 출발 준비를 하도록 그녀에게 전하기 위해서였소. 그녀의 상점에 가자 아루바가 나오더니 슬픈 얼굴로 '루이제가 없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날 내가 가기 한 시간쯤 전에 스리다가 멋있는 자동차를 타고 왔다는군요. 그렇게 멋있는 자동차가 상점 앞에 멈추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라서 아루바도 루이제도 상점에서 나와 그 자동차를 보러 나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리다가 자동차의 문을 열고 나오더니 루이제에게 시장까지 태워다 줄 테니 타라고 하더라는군요. 스리다는 루이제가 매일 아침 시장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도 루이제가 거절하자 '체면 차리는군. 그러면 내가 거들어 주지'라고 말하면서 루이제를 억지로 자동차에 떠밀어 넣고는 그대로 떠나 가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나는 화가 나서 아루바에게, '딸을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는 듯이 데리고 가는 데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라고 말했더니,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지. 딴 사람 같으면 몰라도 스리다는 옛날부터 잘 알고 있으며 루이제와 결혼하기 위해서 데리고 간 것이다. 부자가 그리 흔하게 있는 것이 아니야. 부자와 결혼하면 사치스러운 생황을 할 수 있잖아. 스리다는 파라나 강 가까이에 큰 저택을 가지고 있다. 거기는 스리다의 어머니가 살고 있지. 틀림없이 스리다는 루이제를 거기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당신은 왜 아루바를 두들겨 주지 않았소?" 로스모가 물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 싸움만 계속해야 되는군요. 물론 나도 아루바를. 두들겨 주고 싶었지요. 그러나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오. 나는 아직 그녀를 구출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루이제를 만나러 갔습니다." "스리다의 집에?" "그렇소." "당신은 왜 스리다를 죽이고 루이제를 구출해 오지 않았죠?"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군요! 당신은 그렇게 싸움을 좋아합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너무 심하잖소?" 로스모는 눈물이 핑 돌았다. 오르센은 로스모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하긴 그렇소. 그런 짓을 하는 놈은 해치우는 것이 좋긴 하죠.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간단한 것이 아니지요. 루이제도 이제와서는 스리다와 떨어질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왜요?" "첫째로 당신이 자살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과 같아요. 나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어요. 나는 이미 결혼식을 올리고 말았어요. 신부님이 나의 손가락에 결혼 반지를 끼어 주고, 이 세상 만사는 하나님의 뜻대로이다, 하나님이 맺어준 일은 인간의 힘으로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스리다와 같이 살아도 조금도 행복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기 싫어서 스리다와 같이 살 수 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하나님이란 어린아이들에게나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같은 것이다' 라고 나의 아버지는 늘 말하고 계십니다. 오르센, 당신은 루이제를 결국 설득시키지 못했군요?" "어쩔 수 없었오. 루이제는 신앙심이 강합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천천히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소. 스리다는 결혼식 후에 큰 소리로 웃으면서, '이제 한가지의 일은 끝났다. 사랑스러운 작은 새를 잡아 새장에 넣었으니까. 남은 것은 물고기를 잡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스리다는 루이제에게 바다의 악마를 잡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간다고 말하더군요. 바다의 악마란 바로 당신이 아니오? 당신은 물 속에 언제까지라도 있을 수 있고 더욱이 어부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까." 로스모는 오르센에게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생각하다가 꾹 참고 물었다. "왜 스리다는 바다의 악마를 잡으려고 할까요?" "바다 속을 돌아다니면서 진주를 캐기 위해서죠. 당신이 바다의 악마라면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로스모는 자기의 장난이 유명하게 되어서 신문과 잡지에 실려있는 것을 몰랐다. "나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루이제를 만나고 싶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파라나 시라고 했죠? 그 곳은 알고 있습니다. 파라나 강 어구에 있는 도시죠. 스리다의 저택은 어디 있습니까?" 오르센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로스모는 오르센의 손을 힘차게 쥐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을 겉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자, 그럼 나는 루이제를 찾으러 가겠습니다." "지금 곧?" "1분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로스로는 물에 뛰어들어가 해안을 향해서 헤엄쳐 나갔다. 오르센은 혀를 차며 헤엄쳐 가는 로스모를 바라보았다.     여 행   로스모는 재빨리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바닷가에 숨겨 놓은 양복과 구두를 싸서 허리띠에 묶어서 어깨에 걸쳐 매고 단도를 차고 수중 안경을 쓰고 물갈퀴를 끼고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파라나 강의 입구에는 기선과 어선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밑바닥에서 위를 쳐다보리 큰 딱정벌레가 물위를 헤엄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닻을 단 쇠줄이 물 속에 수풀 같이 서 있었다. 해저는 쇠 부스러기와 유리 조각과 먼지가 쌓여 있어서 강물은 더러웠다. 하구로 갈수록 빠른 흐름을 거슬러서 헤엄쳐야 했다.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로스모는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다. 바로 그 군간 머리 위로 검은 것이 피나갔다. 파라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선이었다. (잘 됐다!) 로스모는 기선 바닥에 툭 튀어난 곳을 꽉 붙잡았다. 기선은 삼각주 지대를 통과하고 파라나 강 안으로 들어갔다. 강은 상류에서 많은 진흙이 흘러 내려와서 흙탕물이었다. 로스모는 숨쉬기가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꾹 참고 뱃바닥을 꽉 잡고 있었다. 손에서 쥐가 났다. 거기에다 배도 무척 고팠다. 조금 쉬어가야 될 것 같았다. 로스모는 배에서 손을 떼고 내려가 진흙이 쌓인 강바닥으로 내려가 바닥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가자미 같은 것도 없으며 굴이나 조개는 전혀 없었다. 민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로스모는 하는 수 없이 그 고기를 잡아먹었다. 민물고기는 여물고 흙내가 났지만 워낙 배가 고팠으므로 그런 대로 먹었다. 잠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게 강바닥의 큰 돌 틈바구니에 끼어서 잤다. 그러나 곧 깨었다. 로스모는 상류로 올라가는 기선을 기다려서 또다시 배에 매달려 가는 여행을 계속했다. 고생 끝에 파라나 시에 도착했다. 여행의 반이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이 로스모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육지의 여행이었었다. 로스모는 소란스러운 항구에서 사람이 없는 강변까지 헤엄쳐 가서 사방을 돌아다보며 강변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중 안경과 물갈퀴 등을 벗어 강변의 모래 속에 묻고 양복을 아침 햇볕에 말렸다. 형편없이 구겨진 양복을 입은 로스모는 꼭 불량배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데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로스모는 오르센이 가르쳐 준 대로 강의 오른쪽 길을 걸어갔다. 더워는 점점 심해져 갔다. 로스모는 목이 타고 정신이 흐릿해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 로스모는 몇 번인가 물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겨우 오후 4시쯤 되어서 나이 많은 농부를 만났다. 노인은 로스모의 이야기를 듣고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저 밭 가운데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큰 연못이 있을 것이오. 연못에는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서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스리다의 저택이 보이지요." "얼마나 먼가요?" "저녁때면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로스모는 밀밭 사잇길을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 목이 타고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주위에는 물이 없었다. (큰일이군. 빨리 연못에 도착해야지!) 로스모는 이렇게 생각했다. 배도 고팠다. 돌담 안에는 귤과 오렌지의 가지가 늘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바다 속과 달라서 무엇이든 주인이 있는 것이니 마음대로 따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쪽에서 금색의 단추와 하얀 복장에 흰 모자를 쓰고 허리에 피스톨을 찬 뚱뚱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스리다 씨의 저택은 여기서 멉니까?" 뚱뚱한 사나이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로스모를 살펴보다가, "무슨 볼일이 있나? 어디서 왔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라고 로스모가 입을 열자 그 뚱뚱한 사나이는 긴장하는 것 같았다. "조금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로스모는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꺼내었다. "두 손을 이리 내라." 하고 뚱뚱한 사나이가 말했다. 로스모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별 생각 없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뚱뚱한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서 재빨리 로스모의 두 손이 채웠다. "이젠 됐다. 자, 가자. 스리다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주마!" "왜 이런 것을 내 손에 채웁니까?" 로스모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잔소리 말고 따라와 ! " 뚱뚱한 사나이는 엄하게 명령했다. 로스모는 하는 수 없이 따라가기는 했으나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로스모는 어제 저녁 이 근처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과 경찰이 범인을 찾고 있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또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어서 의심을 받고 있는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 더욱이 로스모의 애매한 대답은 의심을 한층 더 받게 된 것이었다. 경찰관은 로스모를 파라나 시의 경찰서로 호송하기 위해 가까운 마을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로스모는 어떻게 하든지 도망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연못이 보였다. 연못에는 좁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로스모는 걸음을 빨리 하였다. "천천히 걸어!" 경찰관이 호령을 했다. 두 사람은 다리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다리 중앙까지 오자 로스모는 갑자기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경찰관은 수갑을 찬 사람이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로스모는 뚱뚱한 경찰관이 자기 뒤를 쫓아서 연못으로 뛰어들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관의 입장에서는 애써 잡은 범인을 익사시킬 수는 없었다. 경찰관도 뒤따라 물에 뛰어들어 로스모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연못은 깊었다. 로스모는 그대로 경찰관을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경찰관은 곧 손을 놓았다. 로스모는 수 미터 앞으로 헤엄쳐 가서 물에서 머리를 내밀고 살펴보았다. 경찰관은 로스모의 머리를 보고 호령했다. "이놈! 물에 빠져 죽는다! 이쪽으로 헤엄쳐 나오너라!" 그 순간 로스모의 머리에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 살려! 빠져죽겠다.......!" 로스모는 그렇게 외치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물 속에서 경찰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경찰관은 한참동안 헤엄쳐 다니면서 로스모를 찾아 헤매다가 포기하고 연못가로 올라갔다. (곧 되돌아가겠지.) 로스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관은 돌아가지 않고 동료들의 응원을 얻어서 익사한 범인을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때 다리 위로 한 농부가 지나가고 있었다. 경찰관은 그 농부를 부르더니 쪽지에 무엇을 적어 주면서 가까운 경찰서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로스모는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경찰관이 망을 보고 있기 때문에 로스모는 물위로 떠오를 수가 없었다. 더욱이 물 속에는 거머리가 있었다. 거머리가 손과 발에 달라붙었다. 로스모는 경찰관이 눈치 못 채게 물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조용히 거머리를 떼어내고 있었다. 30분쯤 지나서 세 명의 경찰관이 고무 보트와 쇠갈퀴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보트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쇠갈퀴로 연못 바닥을 긁어 가며 익사한 사나이를 찾기 시작했다. 로스모는 그런 것은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가끔 장소를 조금씩 옮기면 되었다. 경찰관들은 연못을 샅샅이 찾았으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관들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로스모는 유쾌했다. 그러나 곧 얼마 안 가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이 밑바닥을 뒤집어 놓아 물이 온통 흙탕물로 변해서 로스모는 도저히 아가미로 호흡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떠오르면 경찰관에 붙잡히고 만다. 그러나 딴 방법은 없었다. 로스모는 비틀거리면서 물이 얕은 쪽으로 걸어가서 물위로 목을 불쑥 내밀었다. "아 아 아 ! " 한 경찰관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보트에서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둑을 향해서 헤엄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맙소사!" 보트에 남아있던 경찰관은 꿇어앉아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로스모는 이렇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곧 이 스페인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경찰관들은 저승에서 망령이 온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로스모는 온통 진흙 투성이었다. 로스모는 좀더 놀라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드러내고, 크게 눈을 뜨면서 무서운 신음소리를 냈다. 물가에서 땅으로 기어올라가 일부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은 벌벌 떨면서 꿇어앉아 있을 뿐 누구 한 사람도 로스모를 뒤쫓으려고 하지 않았다.     바다의 악마다!   스리다의 모친은 돌로레스라고 부르는 아주 뚱뚱하고 성미가 몹시 고약한 할머니였다. 아들이 젊은 신부를 데리고 오자 할머니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우선 루이제의 아름다움이 할머니에게는 전혀 못마땅하였다. "저런 신부를 얻으면 고생을 한다." 할머니는 아들과 둘이만 있게 되면 항상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 "아니, 잘 훈련시키면 괜찮아요." 스리다는 스리다대로 항상 같은 대답을 하며 자기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달을 쳐다보면서 공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저녁도 돌로레스 할머니는 뜰 벤치에 걸터앉아 모기를 쫓으면서 새로운 토지를 사서 저택을 넓히는 공상을 하고 있었다. 돌연 낮은 돌담 위에 사람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곧이어 수갑에 채인 손이 나타나더니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뜰 안으로 뛰어내렸다. (죄수가 도망쳐 들어오고 있다.) 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어서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몸과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수갑을 찬 사나이는 살금살금 걸어서 창 밑 가까이 와서 집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루이제 ! " 하고 그 사나이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그랬구나 ! 며느리에게 저런 사나이가 붙어 있었구나!) 라고 돌로레스 할머니는 생각했다. 그 순간 할머니는 루이제에 대한 미움과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되자 힘이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일어서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빨리! 죄수가 뜰에 몰래 들어와서 루이제를 부르고 있다!" 라고 할머니는 스리다에게 말했다. 스리다는 곧 방을 뛰쳐나와 입구에 있는 커다란 삽을 들고 살짝 집을 돌아갔다. 창 밑에는 진흙 투성이의 옷을 입고 수갑을 찬 사나이 가 서 있었다. "요 녀석 혼 좀 나봐라!" 스리다는 삽을 높이 들었다가 사나이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죄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이 놈을 어떻게 할까?" 스리다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연못에 던져 넣으면 어떻겠니? 연못은 무척 깊으니까." "떠오르지 않을까요?" "돌을 달면 되지." 할머니는 집안으로 들어가 로프를 가지고 나왔다. "돌을 수갑에 묶어서 달면 된다." 스리다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체의 발을 잡고 뜰 모퉁이에 있는 연못으로 끌고 갔다. 연못에서 스리다는 로프로 큰 돌을 묶고 그것을 시체 수갑에 달아서 연못 속으로 밀어 넣었다. "피로 물이 빨갛게 물들텐데......" 할머니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 물은 흘러내리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루이제를 혼 좀 내줘야겠군......." 스리다는 루이제가 있는 방의 창문을 흘겨보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루이제는 이층 한가운데의 방을 쓰고 있었다. 그날밤 어쩐지 루이제는 잠이 오지 않았다. 무더웠고 모기가 윙윙거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생각만이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로스모에 대한 추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남편 스리다와 그의 모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하면 이제까지의 생활이 지루하고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문득 루이제는 로스모의 소리가 들리는 듯 싶었다. 뜰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제는 더욱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창 밖이 환해지자 루이제는 일어나서 뜰로 나왔다. 아직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루이제는 무의식중에 발을 멈췄다. 정원의 모래에는 퍼가 묻어있었다. 곁에는 피묻은 삽이 팽개쳐 있었다. (어제 저녁 여기서 싸움이라도 일어났던 모양이군.) 루이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핏자국을 따라서 걸어갔다. 피가 연못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물 속에서 로스모의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마의 살이 찢어지고 그 모습은 처참했다. 루이제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물 속에 가라앉은 로스모의 얼굴을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내가 정신이 나간 것일까?) 라고 루이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루이제는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달아나려 하여도 로스모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로스모의 얼굴은 물이 천천히 출렁거리면서 물위로 나타났다. 그리고 수갑에 채어진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가냘픈 미소를 띄우면서 말했다. "루이제! 이제 만나게 되었구나! 나는......." 루이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사라져라! 유령은 보기 싫다. 당신은 죽고 말았잖아요. 왜 이런 데서 나타나지요?" "아니오. 루이제, 나는 죽은 것이 아니오. 이렇게 살아 있소. 거짓말이라고 생각되거든 이 손을 만져보구려." 로스모는 수갑 찬 두 손을 내밀었다. 루이제는 뒷걸음질을 하였다. "무섭게 생각하지 마오. 나는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나는 딴 사람과 달라서 물 속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바다에 뛰어들었어도 죽지 않았던 것이오." 로스모는 비틀거리면서도 빠른 말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루이제, 나는 당신을 찾고 있었소. 어제 저녁 여기까지 왔다가 스리다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실신했는데 스리다는 나를 연못 속에 던져 넣었다오. 나는 연못 속에서 숨을 되쉬게 되었어요. 묶어놓은 손을 벗기려 해도 이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소." 로스모는 수갑을 보였다. 루이제는 눈앞에 있는 것이 유령이 아니고 정말로 인간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수갑에 채였어요?"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루이제, 나와 같이 달아납시다. 나의 아버지 집에 숨어있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같이 삽시다. 루이제, 내 손을 만져봐요. 오르센이 나를 바다의 악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인간이오. 루이제, 왜 나를 무서워하죠?" 로스모는 진흙과 돌이 달린 채 못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지쳐서 비틀거리며 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루이제는 로스모에게 허리를 굽혀 내려다보며 손을 꽉 잡았다. "가련한 로스모!" "그런 곳에서 밀회하다니......?" 돌연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뒤돌아보자 가까이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스리다는 루이제의 비명을 듣고 뜰로 나와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엿들었다. 눈앞에 있는 놈이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던 바다의 악마라는 것을 알게 된 스리다는 무척 기뻤다. 즉시 로스모를 붙잡아서 메두사 호로 데려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 딴 방법을 쓰기로 했다. "야, 로스모, 너는 루이제를 카디스 박사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어. 루이제는 이제 내 마누라니까. 그리고 너도 아버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경찰이 너를 찾고 있으니까!" "나는 아무 나쁜 짓을 한 일이 없소!" 로스모는 버럭 큰 소리를 쳤다. "경찰은 죄 없는 인간에게 수갑을 채우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붙잡아서 경찰에 넘겨야 하겠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할 작정입니까?" 루이제가 스리다에게 말하였다. "그럴 수밖에 도리가 없어." 거기에 돌로레스 할머니가 다가왔다. "죄수를 도망치도록 하다니....... 그런 짓을 하면 또 다른 집에 들어가 딴 새댁을 훔쳐내지 않을까?" 루이제는 스리다의 손을 붙잡고 상냥스럽게 부탁을 했다. "제발 부탁이어요. 저 사람을 풀어주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대해서 아무 나쁜 짓을 한 일이 없습니다." 돌로레스 할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고함을 쳤다. "스리다, 이런 여자의 말은 듣지 마라!" "아무래도 내게는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약점이 있는 모양이야. 그럼 그렇게 하지." 스리다는 기분 좋게 들어주었다. "너는 벌써 공처가가 되고 말았구나!" 할머니는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어머니는 잠자코 계셔요. 좋다, 로스모! 너의 수갑은 줄로 끊어주마. 그리고 옷도 갈아 입혀 주고 메두사 호에 태워 주마. 너의 집 가까운 항구에 닿거든 바다에 뛰어들어가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기라. 단지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너는 루이제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루이제, 너도 같이 간다. 그런 것이 더 안심이 되겠지." "당신은 생각 보단 좋은 사람이네요." 루이제는 감사하다는 듯이 말했다. 스리다는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띄었다. 돌로레스 할머니는 아들의 꿍꿍이속을 알고나 있는 듯이, (자식, 또 무슨 음흉한 계획을 꾸미는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전속력   그로부터 수일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 떨어져 있는 아루바 상점에서는 와루코가 동생인 아루바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디스 박사는 내일 돌아온다. 내가 좀 일찍이 오려고 생각했으나 몸에 열이 있어서 이렇게 늦었다. 아루바, 정말 우리들은 스리다를 위해 할만큼은 다 한 것 같았다. 그놈은 우리들보다 훨씬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바다의 악마를 잡아오게 하여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한다. 아니꼬운 수작이 아니고 뭐겠니? 난 바다의 악마를 스리다에게 꼭 넘겨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주 같은 것을 캐지 않아도 좋다. 바다에는 보물을 실은 배가 많이 가라앉아 있다. 그런 배에서 보물을 꺼내오도록 하면 좋지. 그건 그렇고, 아루바 ! 로스모가 루이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나?" 아루바가 뭔가 말하려 하는 것을 와루코가 손으로 막고, "잠자코 들어라. 조금도 거짓말이 아니야. 로스모는 정말 루이제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루이제도 로스모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내가 보는 눈은 틀림이 없다. 둘은 자주 만나고있다. 어떠냐? 루이제의 신랑으로는 스리파보다도 로스모가 몇 배 더 훌륭하지 않을까?" 아루바는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 하나 옛날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미 20년 전의 일이지만 너의 아내가 친정에 가 있었지. 너의 부탁을 받고 친정으로 내가 데리러 갔었다. 그런데, 네 아내가 오는 도중 산중에서 아기를 낳다가 산모와 아기가 다같이 죽었다고....... 나는 그때 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너를 너무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한 가지만은 숨긴 것이 있었다. 그것을 지금 말해주마. 너의 아내는 도중에 죽었으나 그 아기는 살아있었다. 마침 그곳은 인디오의 마을이었다. 한 할머니가 나에게 그 근처에 있는 카디스 박사라는 하느님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루바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할머니는 나에게 아기를 카디스 박사에게 데리고 가면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카디스 박사에게 아기를 데리고 갔었다. 박사는 아기를 받아서 진찰을 해보고, '이 애는 힘들겠다'고 말하더군. 나는 저녁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때에 흑인이 나에게, '갓난애는 죽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와루코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기는 사내애였다. 그 애의 어깨에 점이 있었다. 그 점의 형태를 나는 잘 알았다. 그런데 최근 나는 로스모의 어깨에 똑같이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루바는 눈을 휘둥그래 뜨면서 와루코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로스모가 내 아들이라는 말씀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카디스 박사가 거짓말을 한 것이 틀림없다. 네 아들은 절대 죽지 않았다. 그리고 카디스 박사는 그 애를 바다의 악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몹쓸 놈이로군! 좋다. 나는 이 손으로 박사를 죽이고 말겠다!" "안 된다. 참아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잘못 알았을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20년 전의 일이니까. 어깨의 점이라고 해서 딴 사람에게는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서둘면 안된다. 너는 카디스 박사에게 가서 '로스모는 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증인이 되어주지. 너는 박사에게 내 아들을 돌려다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병신으로 만든 것을 법원에 고발하겠다'라고 말해라. 박사로서는 그것을 제일 곤란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로스모를 되돌려 주지 않거든 정말로 법원에 고발하는 것이다. 그래도 안 되거든 로스모를 루이제와 결혼시키는 것이 좋다. 루이제는 너의 양녀이니까. 네가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너무나 슬퍼하고 있기에 내가 데려다 준 딸이 아니냐?" 아루바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방안을 걷기 시작했다. "내 아들? 내 아들! 아, 이젠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왜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는가?" 와루코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형님이 누워 계실 때 루이제를 스리다에게 시집 보냈습니다." 그 말에는 와루코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로스모도 스리다에게 붙잡혔습니다." "뭐라고?" "정말입니다. 아침에 스리다가 여기에 와서 큰 소리로 웃더니, '이제는 너희들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나 혼자 바다의 악마를 붙잡았단 말이다. 너희들에게는 한 푼도 주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루바는 아주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와루코는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아루바를 쳐다보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야말로 단호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동생 녀석은 일을 거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사실 로스모가 아루바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꼭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틀림없이 그 아이에게는 어깨에 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으로서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는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와루코는 로스모의 어깨에 점을 보고 그것을 이용하여 돈을 벌겠다고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루바가 그 말을 듣고 그렇게 흥분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와루코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루바를 크게 놀라게 했다. "언제까지나 슬퍼만 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내일 이른 아침에 카디스 박사가 되돌아온다. 내일 날샐 무렵에 방파제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로스모를 구출해야 한다. 카디스 박사에게 로스모는 내 아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스리다는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북쪽으로 갔다고 생각됩니다. 스리다는 그전부터 파나마 해안에 가고 싶어하였으니까요." 와루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내일 아침 해안에서 만나자. 혹시 내가 좀 늦는다 해도 꼭 기다려야 한다." 와루코는 급히 되돌아갔다. 그날 밤 와루코는 한숨도 자지 않고 계획을 짰다. 카디스 박사는 이른 아침에 집에 도착했다. 와루코는 인사를 하고 슬픈 얼굴로 그럴 듯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박사님이 안 계실 동안에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로스모에게 항구에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는데도......." "어떻게 되었나?" "붙들려 가서 배에 태워 갔습니다. 나는......." 카디스 박사는 와루코의 어깨를 잡고 눈을 쳐다보았다. 와루코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됐다. 거기에 대한 것은 나중에 자세히 듣자." 그렇게 말하고 카디스 박사는 와루코의 어깨에서 손을 놓고는 흑인을 불러 무엇인가 명령하고 와루코에게 말했다. "날 따라 와!" 카디스 박사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뜰로 향했다. 와루코는 그 뒤를 따라갔다. 세 번째 담 있는 곳에서 카디스 박사는 풀이 있는 곳까지 와서 풀 속의 해치를 밟았다. 풀의 물이 빠졌다. 두 명의 흑인이 따라왔다. "따라 오라!" 하고 박사는 지하의 계단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와루코와 두 흑인은 박사의 뒤를 따랐다. 지하 바닥까지 오더니 박사는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오른쪽 문을 열고 어두운 통로를 걸어갔다. 통로는 내리막길이었고 멀리 계속되어 있었다. 박사는 스위치를 넣어 불을 켰다. 거기에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는 큰 동굴이 있었고 돌 바닥 높이까지 물이 채워져 있었으며 물위에는 잠수함이 떠 있었다. 네 사람은 잠수함 속으로 들어갔다. 카디스 박사는 선실에 불을 켜고 한 흑인은 해치를 닫고 또 한 사람은 엔진을 가동시켰다. 잠수함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스모를 붙잡아간 놈들은 어디로 갔는가?" "해안을 따라 북으로 갔다고 합니다. 나는 도중에서 아우를 데리고 갈까 생각합니다. 이미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왜?" "동생이 그러는데 로스모를 잡아간 놈은 진주업자인 스리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너는 그런 것을 알고 있는가?" 박사는 의심쩍게 물었다. "내가 로스모를 붙잡아간 배 형태를 설명하니까 아우는 그것은 틀림없이 스리다의 메두사 호라고 말해 주더군요. 스리다는 로스모를 붙잡아가서 진주를 캐는데 쓰려고 할겁니다. 나의 아우는 진주조개가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생각에 잠겼다. "좋다! 네 동생을 데리고 가자!" 아루바는 방파제 위에서 와루코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수함은 해안으로 향했다. 아루바는 카디스 박사를 보고서는 얼굴이 굳어지는 듯했으나 상냥하게 인사했다. "전속력!" 박사는 명령했다. 박사는 브리지에 올라가서 바다 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포 로   스리다는 로스모의 수갑을 줄로 쓸어 끊어주고 새 양복을 입힌 다음 강가 모래 속에 몰래 감추어 둔 수중 안경을 가지고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스리다는 로스모가 수중 안경을 가지고 갑판에 오르자마자 선원들을 시켜 로스모를 배의 창고에 가두어버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스리다는 식량을 싣기 위해서 잠깐 정박했다. 스리다는 루이제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 가까운 항구에서 로스모를 석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곧 탄로 났다. 밤에 창고 쪽에서 고함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제는 그 소리가 로스모의 소리라는 것을 곧 알았다. 스리다는 그때 갑판에 있었다. 루이제는 선실로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에는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루이제는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스리다는 로스모의 고함 소리를 듣고 인디오 선원을 데리고 브리지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창고 안은 어두컴컴하고 무더웠다. "왜 떠드는가?" 스리다가 난폭하게 물었다. "나는....... 나는 숨쉬기가 곤란하다.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여기는 너무나 무덥다. 이대로 있으면 내일까지 넘길 수가 없겠다." 로스모가 죽는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스리다는 선원들에게 명령해서 로스모의 방에 물을 담은 통을 넣어주었다. 로스모는 곧 통 속으로 들어갔다. 선원들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 죄수가 바다의 악마라는 것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통은 작아서 몸을 쭉 뻗을 수도 없었다. 단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통에서는 소금으로 절인 물고기 냄새가 났다. 그래도 무더운 창고 속보다는 나았다. 스리다는 항상 브리지에 있었으나 날샐 무렵 선장실로 되돌아갔다. 루이제가 이미 잠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루이제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스리다를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며 노려보았다. "당신은 나를 속였어요!" 스리다는 우물쭈물하면서 일부러 기분 좋은 듯이 대답했다. "로스모는 스스로 이 배에 남아있겠다고 했어. 언제까지든지 네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말 마셔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싫어졌어요. 나는 당신을 미워해요." 루이제는 돌연 벽에 걸려 있는 단도를 빼들어 스리다에게 겨누었다. "아니, 위험해!" 스리다는 재빨리 달려들어 루이제의 손을 비틀었다. 단도는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흥분하지 마! 물이라도 마시고 자라." 스리다는 단도를 주워들고 선실을 나왔다. 태양이 떠올랐다. 스리다는 여전히 갑판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곧 고집을 꺾어놓고야 말겠다." 스리다는 루이제의 일을 생각하면서 중얼거렸다. 스리다는 선원들에게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메두사 호는 닻을 내리고 정지했다. "쇠사슬을 가지고 오너라. 그리고 창고에 있는 사나이를 여기로 데리고 오너라!" 스리다는 로스모를 빨리 바다에 넣어서 진주를 캐도록 하고 싶었다. 로스모는 두 선원에게 부축되어 곧 모습을 나타냈다.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스모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뱃전까지 몇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였다. 로스모는 돌연 선원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한 발자국 정도 남았다. 그러나 그 순간 스리다의 큰 주먹이 로스모의 머리를 후려쳤다. 로스모는 정신을 잃고 갑판에 쓰러졌다. "당황하지마!" 스리다는 엄하게 말했다. 선원은 쇠사슬을 갖고 왔다. 가늘고 긴 튼튼한 사슬이었다. 스리다는 사슬 한쪽 끝을 로스모의 허리에 감았다. "이놈 머리에 물을 퍼부어라." 로스모는 물세례를 받자 곧 정신을 되찾고 자기 몸에 감겨 있는 쇠사슬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이제는 달아날 수가 없다. 너를 바다에 넣어주마. 너는 진주조개를 찾는 거다. 많이 따 가지고 오면 오랫동안 물에 넣어줄 것이나 못 따오면 또 창고에 처넣을 것이다. 알겠나?" 로스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에 와서는 깨끗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며, 딴 일은 어떻게 되든 좋다는 기분이었다. 로스모는 사슬에 묶인 채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슬을 끊고 싶었으나 빈손으로는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로스모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주조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바다 속은 무더운 창고와 달라 기분이 좋았다. 배 위에서는 선원들이 숨도 쉬지 않고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도 로스모는 떠올라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면에 거품이 떠오르다가 곧 그 거품도 사라졌다. 물이 맑아서 해저를 돌아다니고 있는 로스모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선원들은 이렇게 오래 물 속에 들어가 있는 인간을 본 일이 없었다. 로스모는 쇠사슬을 당겨서 신호를 했다. 올라온 로스모의 허리에 찬 큰 주머니에는 진주조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진주조개는 수일간 태양 빛에 내놓아 조개가 썩고 나면 진주를 빼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선원들이나 스리다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곧 조개를 열어보았다. 놀라는 함성이 선원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수확은 스리다의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형태가 좋고 빛깔도 아름다운 굵은 진주가 20개 이상이었다. 이것만해도 굉장한 재산이었다. 스리다는 선원들이 진주를 탐내는 눈치를 알아차리고 급히 그것을 자기 모자 속에 넣었다. "자, 여러분! 식사하러 갑시다. 로스모, 정말 수고했다. 선실이 하나 비어있으니 오늘부터는 너를 거기에 있도록 해주마. 선실 쪽이 창고보다 시원하다. 거기에 금속제의 큰 탱크를 마련해주마. 아니, 그런 것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매일 바다 속에 들어갈 것이니까. 물론 쇠사슬을 단 채로." 로스모는 스리다와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욕심덩어리인 인간이라면 이쪽에서도 체면 차릴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냄새나는 창고보다 탱크 쪽이 좋지요. 그러나 나를 병이 나지 않게 하려면 물을 30분마다 갈아주어야 할 겁니다." "건방지게 굴지 마!" "건방지게 구는 것이 아니오. 큰 물고기를 양동이 안에 넣어둔 채로 놓아두어 보시오. 물고기는 곧 죽고 말거요. 물고기는 물 속의 산소를 마시고 있으니까요. 나도 역시 물고기와 같단 말이오."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써서 계속 너의 탱크에 펌프로 물을 퍼 올리게 하자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내가 파산하고 말 거다. 네가 캐오는 진주 정도로서는 아무래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 로스모는 진주의 가격이 대단히 비싼 것과 스리다가 어부들에게 지불하고 있는 급료가 싼 것을 모르기 때문에 스리다의 이야기를 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붙들어 가지고 수지가 맞지 않으면 나를 놓아보내 주십시오!" 로스모는 바다를 살펴보았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스리다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해주시오. 그렇게 해주면 나는 당신에게 진주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부터 산더미같이 진주를 모아 놓았습니다. 나를 놓아주신다면 그 대신으로 진주를 다 드리겠습니다." 스리다의 안색이 변해졌다. "거짓말 마라!" 로스모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진주는 어디에 있는가?" "해저의 동굴에 있습니다. 그 장소는 물론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이놈이 말하는 것이 정말이라면 나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큰 부자가 되겠구나.) 라고 스리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스리다는 딴 사람의 말을 쉽게 믿어버리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로스모의 보물을 어떻게 하면 쉽게 빼앗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 루이제를 이용하자. 루이제의 부탁이라고 하면 그놈은 진주를 틀림없이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곧 너를 석방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잘 지낼 수 있도록 해주마." 로스모는 다시 뱃바닥의 창고에 갇히었다. 금속제의 탱크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리다는 기분 좋게 선장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진주가 가득 들어있는 모자를 루이제에게 보였다. "나는 너에게 훌륭한 진주를 선물할 약속을 한 일이 있었는데 로스모의 덕분에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봐라, 한번에 이렇게 많은 진주를 얻었다." 루이제는 힐끔 진주를 쳐다보고 무의식중에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겨우 참았다. 스리다는 그것을 눈치채고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제일 가는, 아니 아메리카 대륙에서 제일 가는 큰 부자가 된다. 당신에게 궁전 같은 집을 지어주겠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사주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로 이 진주를 반쯤 당신에게 주지." "불법으로 손에 넣은 것은 필요 없어요. 나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마셔요." 루이제는 쌀쌀하게 말했다. 스리다는 당황했다.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은 로스모를 석방시키고 싶지 않소?" 그러나 루이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리다의 얼굴을 쳐다보며,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요?" 하고 차갑게 물었다. "로스모의 운명은 네 손에 달려있다. 로스모는 바다 어딘가에 많은 진주를 감추어 두었다. 네가 로스모에게 말해서 그 진주를 메두사 호까지 가져오도록 하여다오. 그렇게만 해주면 즉시로 로스모를 자유롭게 해주겠다." "천만에요. 당신은 진주를 손에 넣고 나면 로스모를 또 쇠사슬에 묶어둘 것이 틀림없어요. 이제 다신 당신의 그런 나쁜 계략에 걸려들지 않을 겁니다." 스리다는 선장실에서 나와 자기 선실로 들어가 가방에 진주를 정리해서 자물쇠를 채우고 천천히 갑판으로 올라갔다. 스리다는 루이제와의 언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 부자가 되고 난 뒤의 자기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스리다는 갑판으로 올라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항상 눈치 빠른 스리다도 선원들이 모여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버려진 메두사호   스리다는 갑판에 서 있었다. 기관사의 지시로 5,6명의 선원이 스리다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은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람의 수효가 많았다. 그러나 스리다를 때려눕히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스리다는 있는 힘을 다해 선원들의 손을 뿌리치고 마스트 있는 쪽으로 달아났다. 스리다는 항상 권총을 차고 있었으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그것을 뺄 정신이 없었다. 스리다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다가 날쌔게 마스트로 기어올라갔다. 한 선원이 발을 붙들었다. 스리다는 자유로운 한 발로 그 선원의 머리를 차고 더 높이 기어올라가 허리에 찬 권총을 빼들었다. "가까이 오는 놈은 사정없이 쏘겠다!" 선원들은 뒷걸음질을 쳤다. "선장실에 무기가 있다. 문을 부숴 버리고 가져오라." 기관사가 외쳤다. 몇 사람의 선원들이 해치를 향해서 달렸다. (실패다!) 라고 스리다는 생각하고 바다 쪽을 내려다보았다. 스리다는 자기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잠수함이 물을 헤쳐가며 메두사호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 살려! 빨리, 도와주시오!" 스리다는 큰 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손에 들고 해치에서 달려온 선원들은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중에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잠수함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스리다를 죽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스리다는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오래 가지 않았다. 잠수함의 브리지에는 아루바와 와루코가 서 있었다. 그 곁에 또 한 사람, 아주 날카로운 눈매를 한 키가 큰 사나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스리다! 로스모를 즉시 보내라! 5분 동안의 여유를 주마. 말을 안 들으면 배를 침몰시키겠다!" (이놈의 자식, 배반했구나!) 스리다는 와루코와 아루바를 원망 섞인 눈으로 노려보면서, (그러나 로스모는 죽어도 되돌려 보내지 못하겠다.) 하고 생각했다. "지금 곧 로스모를 데리고 오겠소." 스리다는 마스트에서 내려오면서 대답했다. 선원들은 빨리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급히 보트를 내리거나 또는 바다에 뛰어들어가서 해안을 향해서 헤엄쳐 갔다. 모두 선장인 스리다를 구조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스리다는 자기 선실로 달려 들어가서 진주가 들어 있는 큰 가방을 열어 진주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혁대와 수건을 손에 쥐고 그대로 층계를 달려왔다. 루이제가 있는 방의 자물쇠를 열고 루이제를 끌어안고 갑판으로 뛰어올라왔다. "로스모는 병이 나서 선실에 드러누워 있습니다. 빨리 데려 가시오." 스리다는 그렇게 외치고 나서는 루이제를 끌어안은 채 뱃전으로 달려가 구명 보트를 내려 루이제를 태우고 자기도 그 안으로 뛰어내렸다. 루이제는 잠수함 위에 자기 아버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 로스모를 살려 주셔요 ! 로스모가 있는 곳은......." 그러나 루이제는 끝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스리다가 루이제의 입에 수건을 쑤셔 넣고 두 손을 혁대로 묶었다. 그것을 본 카디스 박사는 호령을 했다. "그 여자에게서 손을 떼라!" "이 여자는 내 아내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을 필요가 없다." 스리다는 오히려 호통을 치면서 보트를 젓기 시작했다. "섰거라! 그렇지 않으면 쏘겠다!" 그러나 스리다는 여전히 배를 젓고 있었다. 카디스 박사는 피스톨을 쏘았다. 탄환은 보트에 맞았다. 스리다는 루이제를 끌어안고 총알받이로 썼다. "몹쓸 놈 같으니!" 카디스 박사는 중얼거리면서 권총을 내렸다. 아루바는 잠수함의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들어가 구명 보트를 뒤따라 헤엄쳤다. 스리다는 이미 해안에 거의 다다랐다. 스리다는 해안으로 뛰어 내리자 루이제를 끌어안고 바위틈으로 사라졌다. 스리다를 따라가도 소용이 없다고 느낀 아루바는 메두사호 쪽으로 헤엄쳐 갔다. 갑판 위로 올라간 아루바는 배 안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스모는 없습니다!" 아루바는 카디스 박사에게 외쳤다. "그러나 로스모는 어딘가 가까운 곳에 있을 것입니다. 스리다 놈이 루이제의 입을 막지 않았더라면 거처를 알 수 있었을텐데......." 와루코는 분한 듯이 말했다. 와루코가 해면을 살피고 있을 동안에 물 속에서 마스트 끝이 튀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몰된 배 같았다. "아마 스리다는 로스모에게 침몰선의 보물을 찾도록 시킨 것이 아닐까요?" 와루코가 말했다. 아루바는 갑판에 떨어져 있는 쇠사슬을 주워 올려 보았다. "스리다는 이 쇠사슬로 묶어서 로스모를 바닷속으로 들여보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로스모는 도망치고 말 것이니까. 아니, 침몰선 안에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스리다를 쫓았으나 로스모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실망해서 한숨을 쉬었다.     침몰선   카디스 박사와 아루바 일행은 그날 아침 메두사 호에서 일어난 사건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선원들은 밤새도록 비밀히 의논을 계속한 결과 기회를 보아서 스리다를 죽이고 로스모와 메두사 호를 뺏기로 결정했다. 스리다는 망원경으로 해면을 살피고 있었다. 배의 마스트 같은 것이 수면에 튀어나와 있었다. 그 가까이에 구명 용구가 떠 있었다. 보트를 타고 가 조사해보니 그 구명 용구에는 '마파르트 호'라고 적혀 있었다. (마파르트 호가 침몰된 곳이로군.) 라고 스리다는 생각한다. 그 배는 큰 여객선이었다. (이런 배는 비싼 보물들을 많이 싣고 있을 것이다. 로스모에게 찾아오도록 시킬까? 그러나 쇠사슬이 모자란다. 쇠사슬로 묶어 두어야 로스모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물건이 욕심이 난다고 해서 로스모를 도망치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스리다는 어떻게 할까 하고 한참 생각했다. 메두사 호는 수면까지 튀어나온 마스트 끝까지 가서 정지시켰다. 마파르트 호는 S.O.S(에스 오우 에스; 무선 전신에 의한 조난 신호)를 칠 사이도 없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무전기가 고장이 났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쯤은 항구에서 많은 구조정이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로스모를 쇠사슬에서 풀어놓고 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로스모를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놓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스리다는 야비한 웃음을 머금고 자기 방으로 가서 종이 쪽지에 뭔가 써서 로스모가 있는 곳으로 갔다. "로스모, 너는 글자를 읽을 줄 알겠지? 루이제가 이것을 너에게 전해주라고 하더라." 로스모는 편지를 받아서 읽어라. "로스모! 저의 부탁을 들어주셔요. 메두사 호 가까이에 배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 배 안으로 들어가서 금은과 보석을 훔쳐 가지고 오셔요. 스리다는 그 대가로 당신을 묶어놓은 사슬을 풀어줄 것입니다. 당신은 메두사 호로 틀림없이 돌아와야 해요. 그것은 저를 위해서 부탁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당신은 곧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 루이제로부터." 로스모는 지금까지 루이제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이 없어서 글씨체를 알 수가 없었다. 로스모는 단지 루이제에게서 편지를 받았다는 것만이 기뻤다. 그러나 곧 이것은 스리다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제는 왜 이 편지를 직접 가지고 오지 않지요?" 로스모는 편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루이제는 지금 기분이 나쁘다. 그러나 네가 다시 돌아오면 너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더군." "왜 루이제는 보석을 갖고 싶어하는 건가요?" 로스모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듯 갸우뚱했다. "여자는 누구든지 아름다운 옷과 보석을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군? 그 때문에 돈이 필요한 거야. 여객선에는 금화를 많이 싣고 있다. 그런데 가라앉아 버리면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너는 그것을 주워 모아서 루이제에게 주면 된다. 더욱이 배 안에서 죽은 승객이 금제품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듣고 로스모는 화를 벌컥 냈다. "나는 죽은 사람의 물건을 뺏는 것은 죽어도 싫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루이제는 욕심이 없는 사람인데 그것을 나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다." (이놈의 자식! 잘 설득시키지 않으면 걸려들지 않겠는데.) 라고 스리다는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졌다. 너를 속이는 것은 정말 어렵군. 이렇게 된 바에야 내 진심을 말하마. 마파르트 호의 금화를 탐내는 것은 루이제가 아니고 바로 나다. 이렇게 진심을 말하면 너는 내가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겠지?" 로스모는 갑자기 웃었다. "물론이지!" "그럼 좋다. 하여간 나는 금화와 보석이 탐난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마파르트 호에 있는 가치 있는 물건을 모두 갖다준다면 너를 놓아주겠다. 그런데 너는 나를 믿고 있지 않다. 만약 쇠사슬을 풀어서 너를 바다 속으로 보낸다면 너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걱정이다." "난 돌아온다고 하면 꼭 돌아온다." "말로서는 신용할 수가 없다. 너는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도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너는 루이제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루이제가 말하는 것은 듣겠지. 그렇겠지? 그래서 나는 루이제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물론 네가 자유로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럼 알겠지?" 로스모에게는 스리다가 말하는 것 모두가 그럴 듯 하다고 생각되었다. 로스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리다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마파르트 호의 금화를 가져오도록 하고 다음에 진주를 가져오도록 하면 두 가지 다 내 것이 된다.) 그러나 로스모로서는 스리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로스모는 갑판으로 나와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선원들은 로스모가 쇠사슬을 풀고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곧 스리다가 침몰된 마파르트 호에서 금화를 끌어올리려는 흉계를 알았다. 스리다에게 막대한 재산을 독차지시킬 수는 없었다.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선원들은 스리다에게 달려들었다. 메두사 호 갑판에서 선원들이 스리다를 쫓고 있을 동안에 로스모는 침몰된 배를 조사하고 있었다. 해치로 기어 들어가서 넓은 복도로 나왔다. 사치스러운 객실이 여러 개 연달아 있었다. 그러나 시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틀림없이 구명 보트를 타고 침몰되기 직전에 배를 떠난 모양이군.) 라고 로스모는 생각하고 아래층 객실도 기어 들어갔다. 그곳은 삼등 선실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방마다 사람들의 시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어딜 가나 시체들뿐이었다. 로스모는 소름이 쪽쪽 끼쳤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나빠졌다. (침몰된 배속을 뒤진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루이제는 생각이나 했을까? 혹시 또 스리다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닐까? 좋다. 루이제를 직접 만나서 물어보기로 하자.) 로스모는 물고기와 같이 침몰선에서 살짝 빠져 나와 메두사 호로 다가갔다. "스리다! 루이제!" 로스모는 힘껏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을까? 스리다가 또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로스모는 조심스럽게 구명 보트를 붙잡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루이제!" "여기다!" 해안 쪽에서 스리다의 소리가 들려왔다. 숲 속에서 스리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루이제가 아프다! 빨리 이곳으로 와라!" (뭐라고? 루이제가 아프다고......?) 로스모는 곧바로 뛰어들어가 해안으로 헤엄쳐갔다. 막 땅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 루이제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스리다가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어요! 로스모 빨리 달아나셔요." 로스모는 재빨리 방향을 바꿔서 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느 정도 헤엄쳐 간 다음 뒤돌아보았다. 해안에서는 흰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루이제, 고맙다. 이제 우린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될까?) 로스모는 깊은 바다 쪽으로 헤엄쳐 갔다. 먼 쪽에는 흰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작은 배가 보였다.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과는 만나지 않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로스모는 해저로 내려갔다.     갑작스런 아버지   잠수함에서 되돌아온 아루바는 무척 실망했다. 로스모를 찾지 못했고, 스리다는 루이제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루바는 상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아루바, 로스모가 돌아왔다." 와루코의 소리가 들려왔다. "뭐요?" 아루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스모가 돌아왔다. 내가 말한 대로 로스모는 그때 침몰선 안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돌아온 뒤에 로스모가 돌아왔다." "나는 지금 카디스 박사에게 쫓아가서 아들을 돌려달라고 하겠소." "절대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쉽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카디스 박사와 끝까지 싸우겠다. 지금 곧 갑시다." 와루코는 깜짝 놀라면서 손을 저었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원래 카디스 박사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번 일로 더욱 심해져서 아무도 만나려고 하질 않아. 나도 만나보기 힘들다." "좋아요. 그럼 카디스 박사에게는 내일 가기로 하고, 난 지금 항구로 나가보겠소. 자식놈의 모습을 보게 될는지도 모르니까." 아루바는 해변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밤새도록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눈에는 달빛이 비쳐 아른아른 거리는 흰 파도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순간 먼바다 위에 검은 점 같은 것이 움직였다. 아루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건 틀림없이 사람이다. 그런데 저렇게 바다 멀리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은 로스모 밖에 없다. 그렇다! 틀림없이 로스모다.) 아루바의 생각은 틀림없었다. 요즘 로스모는 새벽이나 저녁때에만 바다에 나오고 있었다. "야, 로스모!" 아루바는 손을 흔들고 고함을 치고는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로스모의 모습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렸다. 아루바는 별 수 없이 바닷가로 나와 다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로스모가 보였던 곳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루바는 카디스 박사의 집 문 앞에서 철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흑인이 철문 위의 조그만 창을 열고 물어보았다. "박사님께 전해드릴 게 있습니다." "박사님은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흑인은 그렇게 대답하고 창문을 닫아버렸다. 그래도 아루바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담 저쪽에서는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카디스 박사, 어디 두고보자!) 아루바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랴부랴 시내로 들어가 법원 근처에 있는 살롱으로 들어갔다. 그 살롱은 법원에 일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만나거나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 살롱에는 법원의 여러 가지 수속과 절차를 잘 아는 사법 서사나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루바는 그곳에 가면 고소장을 써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카레나 씨, 오셨소?" 아루바는 입구에서 보이에게 물었다. "예, 오셨습니다." 카레나라는 사람은 돈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교활한 변호사인데 아루바와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뚱뚱하고 대머리인 카레나는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가 아루바를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자, 앉게. 어쩐 일인가?" "카레나 씨, 큰일났소. 정말 큰 문제입니다." "무슨 일인데......?" "바다의 악마를 아십니까?" "만난 일은 없지만 그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그 바다의 악마라고 불리는 인간이 바로 나의 아들인 로스모입니다." "시원찮은 소리! 자네 혹시 술이라도 취한 게 아닌가?" "그런 소리 마십쇼. 나는 어제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럼 더욱 큰일이군." "머리가 돌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돌지 않았습니다. 자, 잘 들어보셔요." 아루바는 그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카레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탁 치면서 말했다. "그거 썩 잘됐군! 충분히 돈벌이가 되겠다. 그러나 자네가 로스모의 아버지라는 증거가 조금 희박하지만......." "의심하고 계십니까?" 아루바는 화를 내면서 카레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그렇게 화내지 마. 난 단지 법률가로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하여튼 이 일은 큰 돈벌이가 되겠다." "나는 아들이 필요하지, 돈 같은 것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돈은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것이네. 너도 아들이 생기면 더욱 필요하게 된다. 이번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카디스 박사가 하고 있는 실험과 수술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 약점을 이용하면 된다.""나는 아들이 필요하오. 카레나 씨,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만들어 주시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그런 것은 최후수단으로 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처음에는 카디스 박사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내는 것이지. '우리들은 당신의 실험과 수술이 불법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찰에 알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원하지 않는다면 십만 달러를 보내시오'라고 써 보내는 거다." 카레나는 아루바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루바는 불쾌한 표정을 한 채 잠자코 있었다. "둘째로 그 돈을 받은 다음, 카디스 박사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내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다. '로스모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아들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래서 법원에 고소해서 당신은 로스모를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폭로하겠다. 당신이 고소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로스모를 당신 곁에 두고 싶거든 우리들이 지정한 장소에 백만 달러를 가지고 오시오.' 그러면 자네는 백만 달러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카레나는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 아루바가 주먹을 쥐고 무섭게 찡그린 얼굴로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레나는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아루바를 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돈만 벌 것이 아니야. 아루바,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 "좋소, 계속 말해 보시오." "카디스 박사는 백만 달러를 지불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받아두었다가 로스모에게 주면 되잖아. 물론 나도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당연히 배당을 좀 받아도 괜찮겠지. 카디스 박사가 백만 달러를 지불하면......." "법원에 곧 고소해야겠소." "아니 조금만 더 들어봐. 이번에는 신문사와 잡지사에 '카디스 박사의 무서운 범죄'라는 기사를 파는 거다. 그것이 끝나거든 너는 법원에 고소해서 아들을 되찾으면 되잖아." 카레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단숨에 포도주 한잔을 비워버렸다. "어떠냐?" "나는 한숨도 자지 않고 로스모의 일을 생각했는데 당신은 재판을 미룰 생각만 하고 있군." "그래도 그것은 백만 달러 때문이다. 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이 손에 들어오는 거다. 알겠나? 너는 20년 동안이나 로스모 없이도 잘 살아왔잖아." "그러나 지금은 틀려요. 어쨌든 법원에 제출할 서류나 만들어 주시오." "아루바 정신차려! 큰 부자가 되는 거다. 자동차든 배든 무엇이나 살 수 있단 말이다." "하여간 서류나 꾸며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딴 변호사에게 부탁하겠소." 아루바는 딱 잘라 말했다. 카레나는 더 이상 아루바에게 이야기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어 쓰기 시작했다. 아루바의 아들을 마음대로 빼앗아 병신으로 만든 카디스 박사를 법원에 고소할 서류가 다 되었다. "한번 다시 생각해보지 않겠나?" 카레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루바는 고개를 힘있게 저었다. "그럼 이것을 검사에게 제출하게." 카레나는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검사실에서 나오다가, 아루바는 스리다를 우연히 만났다. "장인 어른, 어째서 이런 델 왔소? 나를 고소하러 온 것은 아니겠죠?" 스리다는 의심쩍게 아루바를 쳐다보았다. "사실은 몽땅 고소하고 싶다. 내 딸을 어디다 감추어 두었나?"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소? 당신이 루이제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나는 당신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오." 스리다는 아루바를 떠밀어버리고 검사실로 들어갔다.     까다로운 사건   검사실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에서 가장 큰 교회의 가루소라는 신부였다. 키는 그리 크지 않으나 살이 찌고 수염을 기른 검사는 당황하게 일어서서 정중하게 신부를 맞아들여 의자를 권했다. 가루소 신부는 야위었으며 코가 조금 뾰족하였다. 여기에서는 교회가 가장 권위 있는 곳이라서 모두 신부를 겁내고 있었다. 신부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용건을 말했다. "나는 카디스 박사의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가 알고 싶소." "아, 그 사건에 흥미를 가지고 계십니까?" 검사는 곧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싹싹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스리다가 밀고해 주었기에 우리들은 카디스 박사의 집을 수색했습니다. 스리다는 카디스 박사가 아주 좋지 않은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카디스 박사의 연구소는 병신 동물을 만들어내는 공장 같아서 정말 놀랐습니다. 카디스 박사가 만들어낸 괴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가택 수색의 일이라면 신문을 보고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카디스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 하는 것이오. 카디스는 이미 체포했겠죠?" "물론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범죄의 증거로서 로스모라는 청년도 잡아놓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은 그 청년이 세상을 놀라게 한 바다의 악마였으니까요. 우리들은 지금 대학 교수에게 감정인으로서 박사의 뜰에 있는 괴물을 조사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물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이곳으로 운반해 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로스모는 교도소 지하실에 가두어놓고 있습니다. 그 청년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그 청년의 신체를 양서 인간으로 변경시켜 버린 모양입니다. 과학자들은 언젠가 이 문제를 똑똑하게 밝혀줄 겁니다." "나는 그런 문제보다도 카디스 박사의 지금부터의 운명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이오. 어떻게 될 것 같소?" "카디스 박사의 사건은 법률상으로 보면 참 까다로운 사건입니다. 어떤 죄가 되는지 아직은 똑똑히 모르겠습니다마는 불법적으로 동물을 해부해 온 것과 로스모를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죄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는 얼굴을 찌푸렸다. "카디스 박사의 죄는 단지 그것뿐인가요?" "또 있습니다. 아루바라고 하는 인디오가 로스모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증거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감정인이 아루바와 로스모 사이에 혈통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면 아루바를 증인으로 쓸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디스 박사의 죄라는 것은 기껏해야 의사의 규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과 아버지의 허가 없이 남의 아들을 수술했다는 것뿐이군요?" "거기에 아이를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추가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까다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잘못하면 정신이상자로 처리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런 싱거운 이야기만 듣게 될 줄은 몰랐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검사는 깜짝 놀라면서 가루소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교회의 재판은 신의 재판입니다. 신에 순종하고 있는 우리들은 카디스 박사의 행위를 당신들과는 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당신에게 가르쳐 드리겠소." "부탁합니다." 검사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성서에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습에 닮게 인간을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오. 그런데 카디스 박사는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손을 대어서 양서 인간 같은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이며 하나님에 대한 범죄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모두 하나님이 만든 것입니다. 그 동물의 몸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것을 허락해도 좋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카디스 박사는 엄한 벌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하는 말을 검사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신부는 의기양양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카디스 박사는 물론 로스모에게도 마음이 걸립니다. 로스모는 카디스 박사의 희생자인데 그러한 인간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상 아무래도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만들어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산다면 양서 인간이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카디스 박사와 로스모를 엄하게 처벌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인간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신부님의 덕택에 카디스 박사의 범죄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박사와 로스모에게 무거운 벌을 주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천재적인 미치광이   카디스 박사는 원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도 논문을 쓰고 교도소의 의무실에 가서 환자들의 수술도 해주었다. 수술을 받은 사람 중에는 교도소 소장의 부인도 있었다. 그 부인의 병은 위암이었기 때문에 딴 의사들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수술을 포기한 것을 카디스 박사의 수술을 받고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드디어 재판 날이 다가왔다. 넓은 법정 안은 이 재판을 방청하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카디스 박사는 피고석에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 태도가 너무나 당당해서 피고가 아니라 재판장 같이 보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카디스 박사에게 모였다. 사람들은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바다의 악마인 로스모가 끝내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스모는 교도소 지하실에 갇힌 이후 건강이 나빠져서 물탱크 속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바다에 대한 생각만으로 꽉 차 있을 뿐이었다. 로스모의 재판은 카디스 박사의 재판이 끝난 다음에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감정인으로 위촉된 세 사람의 과학자가 그 동안 감정한 결과를 보고했다. 보고자는 베이도스 교수였다. "법원의 위임에 의하여 우리들은 카디스 박사의 연구소에 가서 박사가 수술한 동물과 로스모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설비가 잘 되어 있는 실험실과 수술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기 메스(수술하는 칼)와 자외선 등 최근의 외과 기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기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카디스 박사 자신이 발명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박사의 동물 실험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이 실험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동물의 기관과 조직을 이식하기도 하고 두 마리의 동물을 합쳐놓기도 하고 수놈을 암놈으로 만드는 등,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실험이었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정말 천재적인 과학자이며 동시에 뛰어난 외과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뜰에는 생후 4~5개월에서 14세 정도의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인디오의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어떠한 상태인가요?" 검사가 말했다. "모두가 건강하고 힘차게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거의 전부가 카디스 박사가 죽음에서 구해준 아이들입니다. 인디오들은 박사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 여러 지방에서 중병에 걸린 아이들이 박사에게 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병이 낫는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검사는 걱정이 되었다. 가루소 신부의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부터는 카디스 박사에게 될 수 있는 한 무거운 죄를 씌우려 했는데 감정인이 박사를 칭찬하고 있으므로 침착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 "베이도스 교수, 박사의 수술은 사회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백발의 재판장은 감정인이 '예'라고 대답할 것 같아서 급히 말을 꺼냈다. "재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감정인의 개인적 의견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로스모라는 청년을 조사한 결과를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베이도스 교수는 보고를 계속했다. "로스모의 신체는 인공적 피부로 덮여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여물고 탄력 있는 물질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물질인지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또 물 속에서는 특수한 유리로 수중 안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수중 안경을 사용하면 물 속의 물건들이 똑똑하게 보입니다. 그의 인공적 피부를 벗겨 보니 좌우 어깨마디뼈 밑에 직경 10센티미터 정도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은 상어의 아가미처럼 생겼습니다." 방청석은 웅성거렸다. "그렇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로스모는 인간의 폐와 상어의 아가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스모는 땅 위에서는 물론 물 속에서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양서 인간이라는 말씀입니까?" 검사는 비꼬아서 질문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로스모에게 상어의 아가미가 붙어 있을까요?" 재판장이 질문했다. "그것은 수수께끼입니다. 아마 카디스 박사가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 줄 겁니다. 우리들의 의견은 지구상의 생물은 오랜 세월 동안에 하등 생물에서 고등 동물로 진화되어 오게 된 것인데 각기 그 생물들은 성장의 과정에서 진화의 모든 단계를 거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먼 선조도 옛날에는 아가미를 가지고 물 속에서 살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검사가 일어서니까 재판장은 손으로 제지했다. "생기고 나서 20일째의 태아는 네 개의 아가미처럼 생긴 주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태아는 성장함에 따라 그 주름이 귓구멍과 아래턱으로 변해져 갑니다. 우리들은 카디스 박사가 로스모를 태아 때부터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장된 인간에게도 간혹 턱 밑에 아가미의 주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가미의 유물로서는 물 속에서 호흡할 수는 없습니다. 태아는 성장하는 도중에 아가미가 계속 발달하거나 또한 아가미가 사라지고 말거나 그 두 가지 중에 한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가미가 계속 발달되면 귓구멍과 턱이 없는 병신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로스모는 틀림없는 정상적인 인간이며 보통 인간과도 같습니다. 귀와 아래턱과 폐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욱이 말짱한 아가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가미와 폐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물이 입과 폐를 통해서 아가미에 가는지 하여튼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들은 로스모를 해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해부를 한다고 해도 현재의 형태와 조직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카디스 박사만이 설명할 수 있는 수수께끼라고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카디스 박사에게 어떻게 해서 물 속에서도 살 수 있는 원숭이를 만들었을까 하는 설명을 들어봐야 하겠습니다." "감정인으로서 당신의 결론은 어떻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베이도스 교수도 역시 유명한 외과 의사였는데 교수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으로 말해서 나는 카디스 박사가 왜 이러한 수술을 했는가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카디스 박사가 해놓은 일은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카디스 박사는 아마 동물과 인간의 신체를 자유로이 변경시켜 보려는 아심을 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러나 박사의 이러한 생각은 미치광이와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그 소리를 듣고 냉소를 지었다. 베이도스 교수는 카디스 박사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미치광이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교도소에서 감금 생활보다는 정신병 환자로서 병원에서 지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디스 박사는 베이도스 교수의 동정심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베이도스 교수는 카디스 박사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덧붙여 말했다. "나는 박사가 미치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견으로서는 카디스 박사를 잠시동안 정신병 환자 요양소에 입원시켜서 정신병의 진찰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재판장은 말을 꺼냈다. "그런 문제는 따로 심의하도록 합시다. 카디스 박사, 당신은 감정인과 검사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카디스 박사는 대답했다.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도 말하도록 해 주십시오."     피고의 발언   카디스 박사는 천천히 일어나 누구인가 찾는 것같이 법정을 휘둘러보았다. 방청석에는 아루바와 와루코와 스리다도 있었다. 제일 앞줄에는 가루소 신부가 앉아 있었다. 카디스 박사는 신부를 보고 살며시 웃고 다시 법정 전체를 휘둘러보고 누구인가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피해자가 없는 모양이군요." 카디스 박사는 말했다. "내가 피해자입니다!" 아루바가 갑자기 일어나면서 외쳤다. 와루코는 재빨리 아루바의 소매를 잡아당겨 의자에 앉혔다. 재판장이 물었다. "어떤 피해자입니까? 당신이 수술한 동물이라면 수가 너무 많아서 여기까지 데리고 올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양서 인간인 로스모라면 이 건물의 지하실에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카디스 박사는 침착하고 똑똑하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정말 돌아버린 것일까? 그렇잖으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미친 척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그렇게 설명할 정도의 것은 못됩니다. 나의 사건에서 최대의 피해자이고 그리고 단 한 사람의 피해자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밖에 없을 겁니다. 검사는 내가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만들어놓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돌연 한 의사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잘못됐다. 새로 고쳐 만들 필요가 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만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 말을 빠짐없이 정확히 기록해 둘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검사는 자기가 모욕이나 당한 것처럼 외쳤다. 카디스 박사는 고개를 움츠렸다. "나는 기소장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를 재판에 서게 한 이유는 즉 그런 것이겠지요. 나는 기소장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생체 해부를 해서 병신이 된 동물과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나를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또 다른 이유가 첨가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까닭입니까? 교회가 이 사건에 손을 뻗친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고 카디스 박사는 가루소 신부를 쳐다보았다. "당신 생각으로는 원고는 피해자인 하나님이고 피고는 가해자인 나와 다윈(진화론을 주장한 영국의 학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동물과 인간의 신체는 불완전하여 반드시 개량할 필요가 있다고 내가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을 여기서 한번 더 똑똑히 밝혀 두겠습니다. 이것은 여기에 계시는 가루소 신부님도 인정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방청석은 한참 웅성거렸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의 일이었습니다만 나는 가루소 신부의 맹장을 수술하고 신부의 신체의 일부분이지만 개량시킨 일이 있습니다. 그때 수술대 위에 누워 계시던 가루소 신부는 내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 돌기를 칼로 오려내는데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죠?" 카디스 박사는 가루소 신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신부는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가냘프게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시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을 때 여기 계시는 검사도 나에게 정형 수술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검사는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자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옆길로 가지 마시오." 재판장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것은 검사에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내가 아니고 검사 쪽이니까요." "좋소. 계속해 보시오." "아까 베이도스 교수가 인간은 동물과 물고기로부터 진화되었다고 말했을 때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중에서는 아무도 놀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베이도스 교수는 태아 이야기 같은 것은 안 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나는 태아에게 손을 댄 일은 없습니다. 나는 외과 의사입니다. 나의 무기는 하나의 조그만 칼뿐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의 환자를 수술하고 있는 동안 자주 신체의 각 조직과 기관을 이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그 방법을 개량하기 위하여 동물의 조직을 이식시키는 실험을 했습니다. 나는 기관을 이식시키면 그 기관이 어떻게 되는가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관찰했습니다. 관찰이 끝나면 그 동물을 뜰에 내놓았습니다. 나의 동물원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가 특히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예를 들면 포유동물과 물고기와 같이 서로 아주 다른 동물간의 기관을 바꾸는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다른 과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성공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 로스모는?" 베이도스 교수가 물었다. "로스모는 나의 자랑거리입니다. 로스모를 수술할 때 아가미 뿐만 아니고 신체의 모든 기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인간을 수술하여도 좋다는 확신을 가질 때까지 나는 여섯 마리의 원숭이를 미리 실험했었습니다." "그 수술은 어떤 수술이었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나는 로스모에게 젊은 상어의 아가미를 이식했습니다. 그래서 로스모는 땅 위에서는 물론 물 속에서도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청석에서는 놀란 듯 더욱 웅성거렸다. "그 후 나는 더 큰 성과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나의 새로운 수술은 양서 원숭이입니다. 나의 연구소의 풀 속에 있는 원숭이는 땅 위에서나 물 속에서나 아무리 오래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로스모는 물이 없는 곳에서는 3,4일 이상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상 물이 없는 곳에 있게 되면 폐가 피로해지고 아가미가 말라서 로스모는 옆구리에 진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 좋은 예로서 로스모는 내가 집을 비웠을 때 너무 오랫동안 육지에 있었기 때문에 신체의 상태가 많이 달라져서 지금은 하루의 대부분을 물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검사는 일어나서 재판장에게 말했다. "피고에게 질문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카디스 박사, 당신은 어떤 목적으로 양서 인간을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등 동물에서 진화함에 따라서 하등 동물이 가지고 있지 않는 많은 장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등 동물이 가지고 있던 많은 훌륭한 성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물 속에서도 생활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동물의 진화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동물은 물 속에서, 즉 바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후 지상에서 살고 있던 몇 종류의 동물은 다시 바다로 되돌아갔습니다. 돌고래는 본래는 물고기였었으나 육지로 올라와서 포유동물이 된 다음 또 바다로 되돌아가서 고래와 같이 포유동물 그대로 바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고래와 돌고래는 폐로 호흡을 합니다. 돌고래도 수술을 해주면 폐와 아가미의 양쪽으로 호흡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로스모의 친구인 리이딩이라는 돌고래에게 이러한 수술을 해줄 작정입니다. 그렇게 하면 리이딩은 로스모와 똑같이 언제까지라도 물 속에서 지낼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딴 인간들도 로스모와 같이 물 속에서도 생활할 수가 있게 된다면 인간의 생활은 지금과는 아주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바다는 지구 겉넓이의 십분의 칠 이상이 됩니다. 더욱이 바다에는 식량과 자원이 무진장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원과 식량은 현재 아주 약간만 인간에게 이용될 뿐입니다. 에너지도 그렇습니다. 바닷물은 790억 마력에 해당하는 태양열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만약 바다가 그만한 열을 공기 중에 조금도 발산하지 않았더라면 바다는 이미 옛날에 열로서 부글부글 끓어버렸을 것입니다. 하여간 거기에는 굉장한 에너지가 인간에게 사용되지도 못한 채 헛되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해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멕시코 만류와 플로리다 해류만 해도 1시간에 10억 톤의 물을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강에서 흘러내리는 양의 약 삼천 배입니다. 한 해류도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힘을 인간이 이용하고 있습니까? 전혀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도와 조수도 굉장히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도 인간은 거의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땅 위의 생물은 공중의 그리 높은 곳까지도 올라가지 못하고 땅 속 깊은 곳까지도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 같으면 적도에서 북극과 남극에 이르는 동안, 물의 표면에서 10킬로미터의 깊이까지 거의 대부분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무진장한 자원이 묻혀 있으나 우리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습니까? 겨우 바다의 표면에 가까운 곳에서 물고기와 해초와 조개를 잡고 있을 뿐입니다. 바다 깊은 곳은 전혀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바다 속에서 하고 있는 일은 거의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리를 놓기 위한 지주를 세운다든지 침몰한 배를 끌어올리는 것들뿐입니다. 그러한 작은 일에도 인간으로서는 참 위험한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 2분 이상 물 속에 들어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어떻게 바다 속에서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잠수복을 입지 않고 산소 장치도 가지지 않고 바다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완전히 변해질 겁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다면 인간은 바다 속에서도 수많은 큰 발견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스모는 해저에서 귀중한 금속과 광물을 발견했습니다. 바다 바닥에는 이런 금속과 광물이 많이 있을 겁니다. 또 양서 인간이 나옴으로써 침몰한 배와 같이 해저에 가라앉은 귀중한 물건들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로스모도 아직 그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깊은 해저에 들어가려면 심해어와 같이 큰 수압에 견딜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기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검사가 앞질러 말했다. 카디스 박사는 검사의 말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만약 인간이 물 속에서도 생활할 수 있게 되면 바다의 개발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되어나갈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바다는 우리들에게 조금도 무서운 곳이 아니며 나아가서 물에 빠질 걱정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방청석의 사람들은 카디스 박사의 말을 감탄하면서 듣고 있었다. 재판장도 박사의 말에 말려들어서 질문을 했다. "당신은 그렇게 훌륭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왜 실험의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했더라면 나는 더 빨리 재판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디스 박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나의 발명은 이익보다 해를 더 가져올는지도 모릅니다. 그 증거로 이미 로스모를 서로 빼앗으려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를 법원에 고소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기에 있는 욕심꾸러기 스리다입니다. 그리고 스리다는 로스모를 훔쳐냈습니다. 만약 로스모가 스리다의 것으로 되고 나면 스리다보다 더욱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스리다에게서 로스모를 빼앗고 나쁜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을 겁니다. 모두가 돈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나의 발명을 발표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카디스 박사는 잠시 동안 말을 중단하고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선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하면 나를 미치광이로 취급하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카디스 박사는 베이도스 교수 쪽을 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나는 설사 천재적 미치광이라고 하더라도 미치광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미치광이나 정신이상자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했을 뿐입니다. 나의 연구의 성과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눈으로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한 일이 법률에 위반되었다고 생각하시거든 제발 나를 엄하게 처벌해 주십시오. 나는 죄를 가볍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습니다."     감옥 안   로스모를 조사한 감정인들은 로스모의 신체뿐만이 아니라 지능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어느 해인가? 지금은 어느 달인가? 오늘은 며칠인가? 오늘은 무슨 요일인가?" 감정인들은 물어보았다. 그러나 로스모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로스모는 보통 아이들도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로스모의 지능이 보통 인간과 비교해서 뒤떨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알만한 것을 모르는 것은 카디스 박사의 집과 바다 속에서밖에 생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감정인들은, (로스모는 법률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는 인간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로스모는 아무 벌도 받지 않게 되었다. 법원에서는 로스모의 재판을 정지시키고 로스모에게 후견인(부모 대신 돌보아주는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후견인이 되겠다고 신청해 왔다. 그것은 스리다와 아루바였다. 로스모를 잃고 카디스 박사를 원망하고 고소한 스리다였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스리다는 카디스 박사가 벌을 받아 복역하는 동안 그 틈을 타 로스모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리다는 곧 후견인이 되겠다고 신청했다. 그리고 값비싼 진주로 재판관들을 매수했다. 스리다는 제일 유력한 후견인 후보가 되었다. 아루바는 자기가 로스모의 친아버지이니까 당연히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루바에게는 운이 없었다. 변호사 카레나가 여러 가지로 노력을 했는데도 감정인들은 로스모가 20년 전에 낳은 아루바의 아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증인이 와루코 한 사람 뿐이라는 것도 불리하였다. 와루코는 아루바와 형제간이었다. 형제의 증언은 법률적으로 별로 강력한 효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루바는 완전히 실망했다. 와루코는 아루바 집으로 옮겨와 있었는데 이렇게 실망하고 있는 아우를 보고 걱정했다. 아루바는 식사나 잠자는 것도 잊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흥분해서 상점 밖으로 뛰어나가 정신없이 거리를 헤매면서 "내 아들이다! 내 아들이다!" 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갖은 욕설을 다 퍼붓는 것이었다. 어떤 날 아루바는 갑자기 와루코에게 말했다. "형님, 나는 지금부터 감옥에 갑니다. 간수들에게 진주를 주고 로스모를 면회하겠습니다. 그리고 로스모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로스모는 내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로스모에게는 나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와루코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루바는 형무소로 갔다. 간수를 만날 때마다 그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탁하고 최후에 진주를 선물로 주면서 차차 형무소 안으로 들어가 겨우 로스모가 있는 감방까지 갈 수 있었다. 로스모가 있는 작은 방은 창에 철창이 붙어있고 컴컴하고 무덥고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감옥의 간수는 물통의 물을 자주 갈아주지 않았고 마룻바닥에는 썩은 물고기가 이쪽저쪽에서 뒹굴고 있었다. 물고기는 로스모의 식량이었다. 창과 반대쪽 벽에는 철제의 커다란 물통이 놓여있었다. 아루바는 물통 쪽으로 가서 더럽혀진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로스모!" 아루바는 작은 소리로 불렀다. "로스모!" 또 한번 불렀다. 물 표면은 약간 출렁거리고 로스모는 물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조금 후에 아루바는 떨리는 손을 살며시 뻗쳐서 미지근한 물 속에 넣었다. 손이 로스모의 어깨에 닿았다. 물 속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로스모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누구요? 무슨 볼일이요?" 아루바는 꿇어앉아서 말했다. "로스모! 아버지가 왔다. 너의 친아버지다. 카디스 박사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야.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너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로스모, 로스모! 자 내 얼굴을 똑똑히 보아라. 설마 너는 아버지를 모르지는 않겠지?" 물은 로스모의 머리카락에서 얼굴을 흘러내려 턱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로스모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늙은 아루바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은 모릅니다." 로스모는 대답했다. "로스모, 나를 잘 보아라!" 그렇게 말하고 아루바는 갑자기 로스모의 머리를 붙잡고 앞으로 끌어당겨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로스모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로스모는 이 돌연한 행동에서 몸을 빼내려고 손발을 내두르며 물통의 물을 퉁겼다. 누군가의 손이 아루바의 어깨를 잡고 아루바를 일으켜 방 모퉁이로 내동댕이쳤다. 아루바는 돌 벽에 머리를 부딪쳐서 신음했다. 눈을 떠보니 거기에는 스리다가 서 있었다. 스리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종이 한 장을 들고 승리한 사람같이 그것을 뒤흔들고 있었다. "잘 보아라! 로스모의 후견인을 나에게 임명한다는 증명서다. 너는 딴 곳에 가서 부잣집 자식을 찾는 게 좋다. 이 청년은 내일 아침 내가 데리고 간다. 알겠나?" 아루바는 마룻바닥에 누운 채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루바는 재빨리 일어나 고함 소리를 지르면서 스리다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어 스리다를 거꾸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아루바는 스리다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입에 넣고 씹어 삼켜 버렸다. 그러고도 무서운 힘으로 스리다를 두들겼다. 엎치락뒤치락하고 싸움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간수는 아무에게도 편들지 않았다. 간수는 두 사람에게 상당한 뇌물을 받았기에 중립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리다가 아루바의 목을 조르자 간수는 당황했다. "목 졸라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스리다는 듣지 않고 아루바의 목을 계속 조르고 있었다. "이것 참 재미있다! 힘으로 후견인을 결정할 작정인가!" 카디스 박사의 소리가 났다. "너는 왜 멍청하게 서 있는가? 자기 임무를 잊고 있나?" 카디스 박사는 간수에게 명령하는 투로 말했다. 카디스 박사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간수는 당황하여 싸움을 말리러 뛰어들었다. 이 소동을 듣고 딴 간수들도 달려왔다. 얼마 안 되어 스리다와 아루바를 떼어놓았다. 스리다는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재판에서 진 카디스 박사를 모두가 존경하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놈들을 방에서 쫓아내어라! 나는 로스모와 단 둘이서 얘기하고 싶다." 카디스 박사는 간수들에게 말했다. 간수들은 박사의 명령에 따랐다.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어도 결국 스리다와 아루바는 끌려나가고 방문은 닫히었다.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기다려 카디스 박사는 물통 쪽으로 가서 로스모에게 말했다. "일어서라, 로스모. 방 한가운데로 나오너라. 너를 진찰해야 되겠다." 로스모는 물통에서 나와서 방 한가운데로 가 섰다. "그래, 그래. 좀 밝은 쪽으로 오너라. 숨을 들여 마셔라. 더 많이. 그만, 됐다." 카디스 박사는 로스모의 가슴을 두드려 보고 호흡의 상태를 조사했다. "숨쉬는 것이 힘드는가?" "그렇습니다, 아버지." 로스모가 대답했다. "내가 잘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바깥에 나와 있었구나." 로스모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스모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카디스 박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버지, 왜 물 밖에서 오랫동안 있으면 안 됩니까? 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왜 안 되는 겁니까?" 카디스 박사로서는 슬픔에 꽉 찬 로스모의 눈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법정에서 답변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박사는 그 고통을 참았다. "그것은 너는 딴 인간에게는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물 속에서도 살 수 있는 몸이다. 로스모, 만약 보통 사람과 같이 땅에서만 사는 것과 물 속에서만 사는 것과 그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면 너는 어떤 쪽을 선택하겠니?" "잘 모르겠습니다." 로스모는 생각에 잠겼다. 로스모로서는 바다의 세계도 땅과 루이제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이미 영원히 떠나버렸다. "지금 심정 같으면 바다의 생활을 선택하겠습니다." 하고 로스모는 대답했다. "너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 길을 선택하고 말았구나. 너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물에서 나와 있었기 때문에 신체 구조가 변화되어서 지금부터는 물 속에서밖에 생활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버지! 이렇게 더러운 물 속은 싫습니다. 이런 데서 계속 있을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날 겁니다. 나는 넓은 바다에서 살고 싶어요." 카디스 박사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네가 될 수 있는 대로 이 감옥에서 빨리 나갈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겠다. 그러니까 로스모야, 조금만 더 참고 힘을 내도록 해라!" 카디스 박사는 로스모의 어깨를 꼭 잡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외과 의사 치고 누구나 다 그렇게 되었을 것이나 카디스 박사도 몇 번이나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카디스 박사의 실패로 죽어갔다. 그러나 그 동안 불완전한 수술의 방법을 많이 고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죽은 몇 사람의 경험은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수술 방법의 진보를 가져왔다. 그 일에 대해서 박사는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스모의 운명에 대해서는 큰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로스모는 박사의 자랑거리였다. 박사는 로스모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친자식같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박사로서는 로스모의 병과 지금부터의 운명이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 들어오십시오." 카디스 박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박사님께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교도소 소장이었다. "아니, 괜찮소. 그런데 부인과 아이들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박사님 덕택으로 아주 건강합니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가족은 멀리 안데스 산으로 보냈습니다." "정말 잘 했소. 산의 기후는 여기 보단 훨씬 건강에 좋으니까요." 박사는 말했다. 소장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문 쪽을 힐끔 쳐다보다가 재빨리 박사 곁으로 다가와서 귓속말을 하는 것이었다. "박사님! 박사님 덕택으로 집사람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의사로서의 나의 의무니까요. 감사할 필요가 없소." "나는 어떻게 하든지 박사님에게 은혜를 갚아드리고자 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신문을 읽고 박사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학자를 불량자와 도둑놈과 같이 이런 감옥에 넣어둔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동료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아마 나는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요양소로 보내질 것 같군요." 카디스 박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요양소라면 감옥과 같은 곳이 아닙니까? 잘못하면 더 나쁠지도 모릅니다. 미치광이들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장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서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산중으로 보낸 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나는 박사님을 여기서 빠져나가게 하고 저도 자취를 감출 작정입니다. 저는 생활이 빈곤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붙들리지 않을 겁니다. 박사님도 종교인과 장사꾼들이 들끓고 있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계속 사셔야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제발 먼 딴 나라로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또 한가지 박사님에게 조용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소장은 조금 주저하다가, "박사님께 중대한 비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입을 열었다. "너무 신세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오히려 내가......." "아닙니다. 꼭 은혜를 갚겠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선 그 무서운 명령은 양심에 어긋나서 도저히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비밀을 폭로하여 단순히 양심의 고통을 면하려고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박사님은 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써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범죄의 하수인으로써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범죄?" 카디스 박사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형식상으로는 그럴 듯하게 로스모의 후견인으로 스리다를 정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스리다에게도 로스모를 넘겨주지 않을 것입니다. 스리다는 로스모의 후견인이 되기 위하여 많은 뇌물을 썼습니다만 도저히 로스모를 손에 넣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로스모는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리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카디스 박사는 무의식중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뭐라고요? 아니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로스모는 독살 당할 겁니다. 이 일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가루소 신부입니다. 특히 가루소 신부는 로스모를 죽여야 한다고 직접 표현하지 않았습니다만 나에게 독약을 주었습니다. 아마 청산가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는 오늘 저녁 이 독약을 로스모의 물통 속에 넣기로 되어 있습니다. 담당 의사는 이미 매수되어 있습니다. 그 의사는 로스모의 시체를 조사하고는 무조건 로스모는 박사의 이식 수술의 부작용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고 진단을 내리기로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이 명령을 실행하지 않으면 나는 엄한 벌을 받을 거라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설령 명령대로 한다고 해도 결국 나는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를 죽여야 그들에게는 범죄의 증거가 남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도망갈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미 도망갈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나로서는 로스모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짧은 시간에 두 사람 다 구출할 수는 없습니다. 박사님 한 분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구출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거야 나도 로스모가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박사님의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박사가 살아 계신다면 또 다른 로스모를 만들어 낼 수가 있겠지만 또 한 사람의 카디스 박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카디스 박사는 소장의 손을 힘껏 쥐면서 말했다. "당신의 친절....... 정말 고맙습니다만 그러나 나를 위해서 그런 희생을 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체포되면 재판을 받게 됩니다." "체포되지 않습니다. 나는 충분히 생각하고 빈틈없이 계획을 세웠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하여튼 나는 나 때문에 당신을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로스모를 구출해 주신다면 나는 나 자신을 구출해 주시는 이상으로 당신에게 감사드리겠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힘도 있고 더욱 어디를 가나 내 편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는 나를 도와줄 겁니다. 그러나 로스모는 지금 당장 여기에서 구출해 내지 않으면 생명에 위험이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박사님의 말씀이 옳을 것 같군요. 노력하겠습니다." 소장이 나가고 나서 카디스 박사는 빙긋이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잘될 것 같다. 분쟁의 씨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 불쌍한 로스모......." 카디스 박사는 책상 앞으로 가서 종이에 무언가 쓰고 나서 잠시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들겼다. "소장에게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시오." 소장이 들어오자 카디스 박사는 말했다. "한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한번만 더 로스모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로스모와 만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건 쉬운 일입니다! 지금 저보다 높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그것 참 잘 되었군요. 부탁 드리는 김에 한 가지만 더......." "예, 좋습니다." "로스모를 구출해 주십사 하고 정식으로 부탁드립니다. 내게는 그것 이외에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 "박사님은 아내의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그 정도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올시다. 제 입장에서도 그 이상 더 고마울 게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가족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자, 여기에 편지가 있습니다. 이 주소로 찾아가십시오. 주소와 내 이름의 첫 글자 'C(시이)' 밖에 써놓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숨어있어야 할 형편이 되거나 돈이 필요할 때는 이 사람이 도와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양할 필요는 없어요. 자, 나를 로스모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로스모는 카디스 박사가 금방 다시 왔기에 놀랐다. 그때와 같이 슬퍼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을 한 카디스 박사를 본 일이 없었다. "로스모, 생각보다 빠르게 너와 헤어지게 되었구나. 아마 오랫동안 헤어져 있게 될 것 같다. 나는 너에 대해서 걱정이 너무나 많다. 너에게는 위험이 많이 따르고 있다. 만약에 너를 여기에 그대로 둔다면 너는 죽고 말 것이다. 설사 죽지는 않는다 하여도 스리다 같은 욕심쟁이 놈들의 포로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나는 형을 받고 2년 정도 감옥에서 보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더 길어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감옥에 있을 동안 너는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 가 있어야 되겠다. 그런 곳이 있는데 여기서는 아주 멀다. 남아메리카 저쪽 태평양에 있는 투아모투 제도의 한 조그만 섬이다. 너 혼자 거기까지 가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행의 위험은 네가 여기에 남아있을 때 받게 될 위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마음이 나쁜 놈들의 손에서 달아나려고 애쓰기보다 그 섬까지 헤엄쳐 가는 것이 더 쉬울 거다. 그러나 어떤 길을 택해서 그곳까지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어쨌든 여기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라도 남아메리카를 북쪽에서 도는 길과 남쪽에서 도는 길의 두 가지가 있다. 어느 길을 택해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 북에서 도는 길은 좀 멀다. 이 길을 선택하면 먼저 대서양을 북으로 올라가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나가야 한다. 파마나 운하를 통과하는 것은 위험하다. 수문 있는 곳에서 붙잡힐는지도 모르고 까닥 잘못하면 배에 눌려 죽을지도 모른다. 파나마 운하는 그렇게 넓지도 않고 깊지도 않다. 가장 넓은 곳은 91미터이고 깊이는 12미터이다. 요즘에 와서 배가 커졌기 때문에 배 바닥이 운하의 바닥에 거의 닿을 것이다. 그 대신 너는 항상 따뜻한 물 속에서 헤엄쳐 갈 수가 있다. 거기에다 파나마 운하에는 큰 수로가 세 개나 있다. 그 중 두 개는 뉴질랜드로 가는 수로이다. 거기에 가는 기선의 뒤를 쫓아가든지 또는 기선을 붙들고 가면 너는 편하게 투아모투 제도에 도착할 수가 있다. 특히 뉴질랜드로 가는 배는 투아모투 제도의 바로 옆을 통과한다. 그러니 그 기선을 붙잡고 가다가 뉴질랜드보다는 조금 북쪽에서 떠오르면 된다. 남아메리카의 남단을 도는 길은 가깝지만 그 대신 남극 대륙이 가깝기 때문에 바닷물이 굉장히 차갑다. 특히 푸에고 섬의 남쪽 바다가 가장 차갑다. 그렇다고 푸에고 섬의 북쪽 마젤란해협으로 가기보다는 남쪽으로 도는 쪽이 좋다. 길은 약간 멀지만 그쪽이 안전하다. 바닷물이 점점 차나, 갑자기 차가워지지는 않으니까 너는 그 차가움에 익숙해지리라고 믿는다.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식량의 걱정도 없다. 물고기와 조개를 먹으면 된다. 더욱이 너는 어릴 때부터 바닷물을 마시고 있었으니까. 푸에고 섬 남쪽에서 투아모투 제도에 가는 것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보단 조금 어렵다. 그곳에서는 북서쪽으로 큰 기선이 갈 수 있는 수로가 없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투아모투 제도의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가르쳐 주지. 그리고 위치를 알기 위한 기구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약간 짐이 되어서 헤엄치는데 곤란을 느끼겠지만.......""나는 리이딩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짐은 리이딩에게 운반시키겠습니다. 내가 없으면 리이딩은 쓸쓸할 테니까요." "좋겠지. 리이딩을 꼭 데리고 가도록 해라. 투아모투 제도에 도착하거든 조금 떨어진 한 개의 산호초로 된 섬을 찾아라. 곧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섬에는 높은 기둥이 서 있고 그 기둥 끝에는 물고기 형태를 한 것이 달려 있으니 그것을 목표로 하여 찾으면 된다. 그 섬을 찾기에는 2,3개월 걸릴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 근처의 바닷물은 따뜻하고 굴이 많이 있다. 먹는 것에는 조금도 곤란을 받지 않을 것이다." 로스모는 카디스 박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물었다. "그 섬에는 누가 있습니까?" "내 친구가 있다. 동정심이 많고 자상한 나의 옛 친구인 아루만 빌보아라는 과학자가 살고 있다. 프랑스 사람인데 유명한 해양학자이지. 옛날 유럽에 있을 때 나는 그 빌보아를 알게 되어 친한 사이가 되었다. 거기다 빌보아는 참 재미있는 친구인데 지금 여기에서 자세한 얘기할 겨를이 없다. 그 친구가 왜 유럽을 떠나 태평양 한 가운데의 외딴 섬에 살게 되었는가는 그쪽에 가서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빌보아는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인도 있고 딸과 아들도 있다. 부인은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다. 아들은 25세이고 딸은 아마 17세일 것이다. 너에 대한 것은 편지로 알려놓았으니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그리고 친자식처럼 대해줄 것이다. 물론 너는 하루의 대부분을 바닷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하루에 5,6시간은 섬에 올라와서 그들과 같이 생활할 수가 있다. 그러는 동안에 너의 건강이 회복되면 너는 전과 같이 더 오래 땅에서 생활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너는 빌보아를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수가 되어 해양학의 연구를 거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조수가 된다면 빌보아는 무척 기뻐할 것이다. 아무튼 너는 지금이라도 바다에 살고 있는 생물에 대해서는 어떤 대학 교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카디스 박사는 빙긋이 웃었다. "법원의 감정인들은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네게 오늘이 몇 월 며칠인가 하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다니....... 그러한 질문에 네가 대답할 수 있을 까닭이 없지. 너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으니까. 이왕 질문을 하려면 해류라든가 수온이라든가 또는 아르헨티나의 가까운 바다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것을 물었어야지. 그러면 네가 바다에 대해서 얼마만큼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았을 것이다. 너는 그쪽으로 가거든 그 지식을 더욱 넓혀 인류를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 좋다. 빌보아와 같은 대과학자와 네가 힘을 합친다면 해양학을 크게 진전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을만한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확신하고 있다. 빌보아도 너와 같이 일을 하고자 하고 있다. 머지 않아 빌보아와 나란히 네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질 때가 틀림없이 올 것이다. 너는 과학에 이바지함으로써 인류를 위해 이바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여기에 남아 있으면 너는 욕심쟁이들에게 이용될 뿐이다. 그쪽에 가서 깨끗한 바다와 빌보아의 따뜻한 가정 분위기에 싸이면 너는 정말로 행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늘 저녁 너는 바다로 들어가게 될 거다. 바다에 들어가거든 곧바로 바다 안의 터널을 통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지금 집에있는 사람은 짐뿐이다. 집에 도착하거든 헤엄치기 위한 도구와 단도를 가지고 곧바로 바다로 되돌아가서 리이딩을 찾아서 날이 새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알겠니? 잘 가거라, 로스모!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카디스 박사는 로스모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서 빙긋이 웃고 로스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는 훌륭하니까 도중에서 조난 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탈 출   오르센은 단추 공장에서 퇴근하여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오르센은 귀찮은 것 같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문이 열리며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루이제였다. "루이제? 아니 어떻게 왔지요?" 오르센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셔요? 오르센, 어서 식사를 계속하셔요." 루이제는 문에 등을 대면서 말했다. "전 이제 남편과 시어머니와 같이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제는 절대로 되돌아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것 참 잘했군요! 앉으세요. 아니 발을 떨고 있는데 어찌된 셈인가요? 당신은 전에 하나님의 뜻으로 맺어진 것이라고 절대로 이별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었소? 이제 그 말을 취소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그렇고 하여튼 반갑군요. 당신은 아버지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갔나요?"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간다면 스리다가 알고 곧 데리러 올 것이 분명해요. 그래서 나는 친구 집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면...... 지금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공장이나 나가서 일할 작정이어요. 그래서 부탁하러 왔어요. 오르센, 어떤 일이라도 좋습니다." 오르센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어려워요. 가기에다 스리다는 당신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런 것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스리다는 당신이 있는 곳을 알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 아니오?" 오르센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루이제, 당신은 지금 아르헨티나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스리다는 꼭 당신을 찾아낼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도 잘 알겠지만 스리다는 절대로 당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법률과 여러 사람들은 스리다를 편들 겁니다." 루이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상관없어요! 그러면 나는 캐나다나 알래스카에 가겠어요." "그린랜드나 더 북쪽이 좋지요!" 오르센은 농담같이 말하고 곧 정색을 하며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아르헨티나에 있어서는 위험합니다. 나도 전부터 어떻게 하든지 이 나라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종교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그때 못 떠난 것이 정말 유감스럽소. 당신을 스리다에게 뺏기고 배표와 돈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소. 지금 나는 한푼도 없습니다. 당신도 그렇겠지? 유럽에 가기 위한 뱃삯 같은 것은 없다하더라도 굳이 꼭 유럽에 안 가도 좋을 것 같소. 우루과이나 브라질이라도 우선 가게 되면 스리다가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갈 준비를 하면 됩니다. 당신이 간다면 물론 나도 같이 가겠소. 당신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카디스 박사와 로스모는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로스모가요? 로스모를 찾아갔어요? 그리고 왜 감옥에 들어갔습니까? 만나도록 해줄 수 없어요?" 루이제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한꺼번에 물었다. "로스모는 감옥에 들어가 있지요. 그리고 스리다의 노예가 되고 말 것 같소. 카디스 박사와 로스모는 엉뚱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말았지요." "정말 무서운 일이군요. 구출할 수는 없을까요?" "나는 줄곧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음대로 잘 안됐는데, 예상외로 형무소 소장이 우리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로스모를 구출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조금 전에 카디스 박사와 형무소 소장에게서 편지를 받았소." "로스모를 만나고 싶습니다! 나도 같이 갈 수 없을까요?" 루이제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오르센은 생각에 잠겼다. "그만두는 것이 좋겠군요. 당신은 로스모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죠?" "로스모는 환자입니다. 로스모는 물고기로서는 건강하지만 인간으로서는 환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로스모는 이제 와서는 공기를 거의 호흡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당신이 로스모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생각해 보시오. 로스모나 당신이나 점점 더 고통스러워질 뿐입니다. 로스모의 당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물에서 나와서 육지에 오래 있으면 로스모는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루이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말했다. "그렇겠군요." "우리들과 같은 보통 인간과 로스모와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입니다. 로스모는 바다 없이는 살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다만이 로스모가 살아 갈 곳입니다. " "그러나 어떻게 해서 살아 나갈까요? 넓은 바다 속에서 단지 물고기와 돌고래와 어울려 행복할 수 있을까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로스모는 바다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루이제는 얼굴이 빨개졌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지......." "그만둬요." 루이제는 슬프게 말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마음의 상처도 잊혀지겠죠 그러는 동안에 로스모도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와 돌고래와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겠죠." 해는 점점 어두워져갔다. 방안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시간이 다 되어서 형무소에 가야 되겠군요." 오르센은 일어섰다. 루이제도 일어섰다. "먼 곳에서 보는 것쯤은 괜찮겠지요?" 루이제는 물었다. "물론 괜찮겠지요. 당신이 있다는 것을 로스모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 주셔요."   오르센이 물을 운반하는 사람의 복장을 하고 마차를 끌고 형무소의 뜰에 도착할 무렵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간수가 오르센을 불러 세웠다. "어디 가시오?" "바다의 악마 때문에 바닷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르센은 형무소 소장이 가르쳐 준 대로 대답했다. 오르센은 형무소의 건물 모퉁이를 돌았다. 그 곳에는 취사장과 감방의 간수들이 드나드는 문이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복도와 입구에 서 있어야 할 간수들을 소장은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밖으로 출장을 보냈다. 로스모는 소장이 데리고 나왔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 빨리 물통 속으로 들어가시오." 소장이 말했다. 로스모는 재빨리 물통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자, 어서 가시오." 오르센은 말에 채찍질을 하여 감옥의 뜰을 나와 천천히 거리를 빠져나가 역 앞을 지났다. 마차에서 조금 떨어져서 루이제가 쫓아오고 있었다. 마차가 시내를 빠져 나왔을 때는 어두웠다. 길은 해안을 따라서 계속되고 있었다. 바람은 강하게 불고 파도는 해안으로 밀려와 바위에 부딪쳐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르센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자동차가 지나가도록 기다렸다. 자동차는 붕붕 소리를 내면서 사방에 밝은 빛을 비춰가면서 시내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지금이다!" 오르센은 뒤돌아보고 루이제에게 바위 그늘에 몸을 감추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나서 통을 두들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착됐소! 나오시오!" 물통 속에서 머리가 나타났다. 로스모는 사방을 둘러보고 재빨리 물통 속에서 기어 나와 땅으로 뛰어내렸다. "오르센, 정말 고맙습니다." 로스모는 젖은 손으로 오르센의 손을 힘차게 쥐었다.--- 로스모는 숨을 헐떡거렸다. "잘 가시오! 부디 조심하시기 바라오. 앞으로는 너무 해안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쁜 놈들에게 붙들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르센은 물론 로스모가 카디스 박사에게 어떠한 지시를 받았는가는 모르고 있었다. 로스모는 숨을 헐떡이면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먼 섬으로 갈 작정입니다. 오르센,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로스모는 바다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닷가까지 가서 로스모는 갑자기 돌아서더니 외쳤다. "오르센, 오르센! 언젠가 루이제를 만나는 일이 있거든 잘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잊지 않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로스모는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로스모는 조금 헤엄쳐 가다가 목을 내밀고 바닷가를 향해서 외쳤다. "루이제, 안녕!' 그리고는 물 속으로 사라졌다. "로스모, 안녕......!" 루이제가 바위 그늘에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바람은 점점 심해져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오르센은 루이제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갑시다. 루이제!"--- 오르센은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오르센은 루이제를 한길로 데리고 왔다. 루이제는 한번 더 바다를 되돌아보고는 오르센의 손에 매달려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새출발   카디스 박사는 형기를 마치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박사는 먼 곳으로 여행할 준비를 서두르는 것 같았다. 와루코는 카디스 박사 밑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스리다는 새 배를 사서 지금은 캘리포니아 만에서 진주를 캐고 있다. 스리다는 아직 아메리카 제일의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해마다 저축이 늘어가고 있었다. 루이제는 스리다와 이혼하고 오르센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뉴욕에 가서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어촌에서는 지금은 이미 바다의 악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가끔 더운 밤이 되면 늙은 어부들은 젊은 어부들에게 먼바다의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바다의 악마는 흡사 저렇게 소라로 만든 피리를 불었던 것이었단다." 그리고 바다의 악마에 대한 전설을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단 한 사람 로스모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주 나이가 많고 거의 미치다시피 한 아루바라는 거지였다. 아이들은 이 거지를 알고있어서 길에서 만나기만 하면, "야, 바다의 악마의 아버지가 왔다!" 라고 말하면서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그러나 이 늙은 거지는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다. 스페인 사람을 만나면 이 늙은 거지는 반드시 뒤돌아보고서 침을 뱉었고 뜻도 알 수 없는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내버려두었다. 머리가 돌았다고 해도 이 거지는 온순하고 누구에게도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다가 험해지면 이 늙은이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는지 급히 바닷가로 달려가 바위 위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파도에 휩쓸려 갈 것도 잊고 고함을 계속 지른다. 바다가 잔잔하게 될 때까지 낮이건 밤이건 계속 고함을 지른다. "로스모! 로스모! 내 아들 로스모! 조심해라, 로스모!" 그러나 바다는 비밀을 감춘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끝-   작품해설   인체 개조와 기관 이식   베리야에프는 1884년에 태어나 1942년에 세상을 떠난 소련의 SF 작가인데 50편 이상의 SF를 썼습니다. 그 중에는 우주 비행 이야기, 텔레파시 이야기, 극지 개발과 해저 생활 이야기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뇌의 이식과 인체 개량 등의 생물학과 의학의 문제가 특색 있게 다루어졌습니다. 소년 시절에 베르느의 SF 소설을 애독하고 하늘을 그리워하여 양산과 홑이불로 만든 낙하산을 타고 지붕에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신부였기 때문에 아버지 명령을 거역 못하여 11살 때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신부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연극과 바이올린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또다시 베리야에프는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베리야에프는 1915년 척추병에 걸려 5년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5년간 베리야에프는 일어날 수도 없었고 돌아누울 수도 없어서 겨우 머리만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창 밖에서 날아 들어온 벌레가 얼굴에 앉아도 손으로 그 벌레를 쫓을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베리야에프는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생활에서 고통을 이겨가며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공상에 잠기기도 하고 병을 이겨내가면서 쓴 합성인간(제1집 3권)을 1925년에 발표했습니다. 현재에는 아직 심장의 이식도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심장 이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장의 이식을 하려면은 건강한 심장을 가진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안 되고, 이식될 심장은 가능한 건강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심장의 이식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는데 머리, 즉 뇌의 이식을 실현시키려면 아직 요원합니다. 그러나 절대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베리야에프는 겨우 머리만 움직일 수 있는 생활을 하면서, 자기 머리를 다른 건강한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수술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면서 합성 인간이라는 소설을 썼던 것입니다. 베리야에프가 의학적인 문제와 인체 개조를 주제로 하여 1928년 발표한 두 번째 작품이 양서인간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지구상의 생물은 아메바 같은 단순한 생물에서 오랜 세월동안에 차츰 진화되어 사람 같은 고등동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진화의 최고의 산물이며 다른 동물에 볼 수 없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는 많은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신체로서 새와 같이 하늘을 날을 수도 없고 물고기 같이 물 속에서 생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람은 그 뛰어난 두뇌를 써서 일찍부터 도구를 만들어내고 도구와 기계로서 자기 신체의 결점을 보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달리는 데에는 자동차 같은 것을 이용했고, 하늘을 나는 데에는 비행기를, 바다를 건너는 데에는 배와 잠수함을, 먼 곳을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망원경 등을 만들어 지금의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우주 개척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주 과학의 발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구와 기계는 편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편한 것도 많습니다. 사람은 비행기를 사용하여 새같이 난다고 하여도 자기 자신이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잠수함 등을 사용하여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물 속에서 물고기같이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신체를 개조하여 새같이 자유로이 하늘을 날고 물고기같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양서 인간에 나오는 카디스 박사가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다른 점은 열심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인체를 개조하는 것을 주제로 SF를 쓰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인체는 자연계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체이므로 그 개조는 쉬운 일이 아니고 더욱이 사람의 신체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죽을 염려가 많아서 섣불리 작품을 쓰면 어떤 영향이 미칠지 몰라서였습니다. 둘째로 사람의 사회에는 옛날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라는 기독교의 신앙이 거의 2000년간을 인간의 사고 방식을 지배하여 왔고 사람의 신체에 손을 댄다는 것을 모두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리야에프는 인체 개조를 주제로 한 SF 소설에 일찍이 손을 댄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위를 끊어내는 현대적 외과 수술을 하고, 충치를 빼내고 이를 갈아넣고, 맹장 수술 등은 오래 전부터 실시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신체를 개조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도 없을 것입니다. 카터스 박사는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인디오 소년에게 상어의 아가미를 이식시켰습니다. 사람은 폐로써 공기 중의 산소를 마시고 살며, 물고기는 아가미로써 물 속의 산소를 흡수하여 사는 것인데 육지나 물 속에서도 자유롭게 생활하기 위하여서는 폐와 아가미를 같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하여도 사람에게 상어의 아가미를 이식하는 것은 카디스 박사도 큰 용단을 내려 실험한 것입니다. 현재에는 사람끼리 서로 한 사람의 내장을 다른 사람 내장에 이식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있고 또 자유로이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사람과 물고기와의 몸 구조는 대단히 다릅니다. 사람은 온혈 동물이고 물고기는 냉혈 동물이기 때문에 기관의 이식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식도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가능할 것입니다. 지구상의 생명은 하등 생물에서 고등 생물로 차차 진화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선조도 태고시절에는 물고기 시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태아는 그 모친의 배 안에서 한 사람의 형태가 될 갓난아이로 성장될 때까지는 생물의 진화의 과정을 밟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물고기 사이에는 핏줄의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고기의 아가미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알습니다. 이것이 카더스 박사의 신념입니다. 카디스 박사는 물고기처럼 바다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양서 인간 로스모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로스모는 아직 육지에서나 바다 속에서나 완전히 자유롭게 살 수는 없었습니다. 물 속에서 나와 오랫동안 육지에서 생활하면 로스모는 호흡에 곤란을 느꼈습니다. 카디스 박사의 수술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스모의 신체에 그러한 성질이 있는 것은 지구상의 많은 양서류, 즉 개구리나 도롱뇽 등이 항상 물 가까이에 살고 있고 물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살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스모는 물 속에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는 뭍 속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런데도 로스모는 인간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육지에서는 돈벌이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로스모는 그런 사람들에게 희생을 당하고 말게 된 것입니다. 착실하고 마음씨가 곱고 용감하면서 동정심이 많아 누구에게도 호감을 사는 로스모인데도 마음씨가 비틀어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홀로 쓸쓸한 남쪽 바다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예사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한 로스모는 인간 사회로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자입니다. 또 달리 생각해보면 로스모는 카디스 박사의 연구에 대한 희생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카디스 박사는 생각이 깊고 훌륭한 과학자이지만 그에게 양서인간의 수술을 받은 사람은 역시 고독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양서인간을 쓴 다음 해에 베리야에프는 {얼굴을 잊은 사람}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여기에서는 외과 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이것도 역시 인간의 개조를 주제로 한 SF입니다. 사람의 신체 내에는 여러 가지 호르몬을 내는 내분비선이 있습니다. 호르몬은 신체 작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물질입니다. 얼굴을 잊은 사람은 그 내분비선에 어떤 작용을 하면 얼굴 형태뿐만 아니라 키와 피부색까지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약품을 발명함으로써 일어나는 사건을 쓴 이야기입니다. 희극 배우 브레스트는 태어나면서부터 못생긴 얼굴과 이상한 몸매 때문에 미국에서 희극왕이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웃기고 영화 배우로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브레스트는 자기 얼굴과 몸매가 추잡한 것을 팔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이라도 좋으니 미남자가 되어봤으면 했습니다. 미남자가 되어도 미남자 역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고 브레스트는 믿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브레스트는 소로킨이라는 의학 박사가 특별한 약을 사용해서 사람의 얼굴 형태를 변화시키는 치료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소로킨 박사를 찾아가서 그 약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약은 차차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형편없던 코가 잘생긴 코로 변하고, 얼굴 형태도 미남형으로 변해지고, 키도 커지고....... 급기야 브레스트는 어느 누가 보아도 훌륭한 미남자로 변했습니다. 브레스트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보기에 추잡한 희극배우였기 때문에 브레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추잡한 형태를 잃고 미남으로 된 브레스트를 한 사람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영화에도 출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희극배우 시절에 저축하여 둔 재산도 법률에 의하여 모조리 몰수당하고 말았습니다. 브레스트는 화가 나서 복수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소로킨 박사가 가지고 있는 마술의 힘을 가진 약을 훔쳐내어, 자기에게 해롭게 한 사람들에게 몰래 먹여서 그 사람들을 추잡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그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1930년에 베리야에프는 {호이치 도이치}라는 이상한 제목을 가진 중편소설을 썼습니다. 서커스에는 간혹 셈을 할 수 있는 개가 등장하는 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셈은 물론이고 사람의 말도 알고 글자도 쓸 수 있는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코끼리는 정말로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글자를 쓸 수도 있었습니다. 이 코끼리는 호이치 도이치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독일의 서커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조련사에게 두들겨 맞고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모래 위에 빗자루로, "나는 코끼리가 아니라 사람이다." 라고 써놓고 달아난 것이었습니다. 그 코끼리가, "나는 사람이다." 라고 써놓은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 코끼리는 와구넬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사람의 뇌를 이식시킨 코끼리였기 때문입니다. 와구넬 박사는 죽은 사람의 뇌를 빼내어 코끼리 머리 안에 이식시켰습니다. 이 코끼리는 밀림 속에서 와구넬 박사 일행과 떨어져 나와 대자연 속에서 야수의 생활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자세히 체험합니다. 그러나 코끼리로서는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야수를 죽일 뿐만 아니라 인간끼리 서로 살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뇌를 가진 코끼리 도이치는 도저히 야수와 섞일 수가 없어, 사람에게 학대를 당해 가며 고통스러운 여행의 나날을 보내다가 문명의 세계에 와서 서커스의 인기배우로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명 세계에서도 평화로운 생활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동물의 입장에서 본 사람의 잔인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베리야에프는 이외도 기관의 의식과 인체의 개조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썼는데, 끝으로 베리야에프의 노령기(194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리엘}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리엘은 양서인간과 흡사한 이야기인데 여기에서는 아무런 장치도 없고 날개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새같이 자유로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물위에 꽃가루를 떨어뜨리면 꽃가루는 이상하게 움직입니다. 그것은 무질서한 운동으로 돌고 있는 물의 분자가 꽃가루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액체와 기체의 이러한 무질서한 분자 운동을 브라운 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이드라는 과학자가 전기의 힘을 이용하여 분자의 무질서한 운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의 분자 운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보내면 그것은 뇌파에 일정한 전하(물체가 띠고 있는 정전기의 양)를 가지게 되어서 사람의 몸은 대지와의 전기적 반발력으로 하늘을 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리엘이라는 소년은 하이드의 이러한 실험으로 날개도 가지지 않고 하늘을 자유로이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리엘 소년의 운명도 로스모의 운명과 같이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리엘은 베리야에프 최후의 장편 소설입니다. SF작가로서의 베리야에프는 인체 개조를 주제로 SF를 쓰기 시작하여 인체 개조의 주제로 작가 생활을 끝마쳤습니다. 더욱이 인체 개조를 주제로 쓴 베리야에프의 작품은 거의 비관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인체 개조로 인하여 초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내어도 결국은 인간 사회의 욕심 많은 사람들에게 악용될 뿐이라는 베리야에프의 생각이 작품 속 깊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인체의 큰 개조는 반드시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베리야에프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안드로메다 성운 ANDROMEDA NEBULA   이반 에프레모프 IVAN EFREMOV 지음   이반 에프레모프 1937년 소련 태생. 뛰어난 과학자로서 태도가 모든 작품의 토대가 되어 있다. "뱀자리의 심장", "면도칼날", "축시 1969년" 등   편집위원 아동문학가 이 원수․박 홍근/ 문학박사 최 인학 공학박사 양 육룡/ 이학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책머리에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오늘날, 인류가 금성이나 화성은 물론 더 먼 곳으로 우주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꿈만은 아닌 것입니다. 설령, 장래에 과학 기술이 빨리 진보되어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강력한 애나메존 연료가 개발된다하여도 인류의 우주 여행은 은하계 우주내의 직경 50 광년 정도의 작은 원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에는 큰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조그만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류는 인구 폭발로 땅은 좁고 자원은 부족해서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우주 개발을 서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순한 모험심으로서의 탐험이 아니라 저 우주 속에 잠자고 있는 수많은 자원을 개발하고 인류가 살아갈 넓은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며 우주를 향한 공상을 끝없이 펼쳐 보면 이 작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과 인간과의 다툼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이러한 인류의 희망을 싣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탠트라 호를 따라 꿈같은 우주 여행을 떠나 봅시다.       행성 질다의 생물················ 12 불길한 예감·················· 16 자신을 멸망시키다.··············· 21 다가오는 위험················· 24 최초의 탐험·················· 28 최후의 보고·················· 31 슬픈 고별식·················· 35 무서운 인력·················· 39 거대한 철의 별················· 43 운명의 시간·················· 46 두 개의 행성·················· 51 금속제의 물체················· 55 미지의 행성에 착륙··············· 61 사람 없는 파르스 호·············· 66 한 사람 또 한 사람··············· 74 곤란한 작업·················· 80 수수께끼의 우주선··············· 84 기괴한 생물·················· 87 괴물 생포 작전················· 93 덫이 놓여졌다.················· 95 괴성에서의 탈출················ 110 청색의 금속·················· 115 드디어 지구로················· 121 해파리의 정체················· 130 다시 새로운 별로··············· 136 지구여 안녕·················· 144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151   악마 나라에서 온 소녀   사라진 스포츠카················ 160 춤추는 인형·················· 167 초능력을 가진 소녀·············· 174 홍구의 도전·················· 180 괴조의 웃음·················· 188 사랑하는 마음················· 195   작품 해설··················· 202   등장인물   엘그 놀 : 제 37항성 탐험대 대장으로 우주선 탠트라 호의 선장. 14명의 대원과 함께 행성 질다로 항행 하다가 철의 별에 불시착해 앨그래브 호의 조난을 발견하였으나 이상한 생물의 습격을 받는다. 오직 우주 탐험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용감한 인물. 니자 크리트 : 처음으로 항성 탐험대에 참가한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 대원으로 놀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폴 히스 : 천문학자. 에온 타알 : 생물학자. 기괴한 생물의 공격을 받아 왼쪽 팔이 마비된다. 펠 린 : 숙련된 우주선 조종사. 잉그리드 조슨 : 여성 천문학자. 케이 렐튼과 함께 행성 질다의 비극을 주제로 한 교향곡 "행성의 파멸"을 작곡한다. 케이 렐튼 : 전자 공학 기사. 달론 웨델 : 대우주통신망대의 스테이션 관리국장. 놀의 친구. 비너 레드 : 지질학자. 루마 라스비 : 여의사.     앨그래브 호의 조난   제 37 항성 탐험대에 참가하고 있는 젊은 여성 니자 크리트는 우주선 탠트라 호의 조종석 계기 위에 몸을 구부린 채 커다랗고 붉은 보라색이 나는 문자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니자의 진지한 옆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뚜렷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체격이 몹시 좋은 사람이 활발한 동작으로 들어왔다. 열려진 문으로 황금색 빛이 들어오자 니자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아름답게 빛났다. 들어온 사람이 대장 엘그 놀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니자의 눈은 밝게 빛났다. "끝내 주무시지 않았네요? 100시간이나 주무시지 않다니!" "그런 나쁜 표본을 보여서는 안 되지." 대장의 얼굴에는 조금도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으나 말씨만은 밝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어요. 아무 것도 모른 채!" 니자는 조심스럽게 작은 소리로 말한다.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아. 확실하게 말해 봐. 대원들은 모두 잠들었다. 지금 이 우주에서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은 너와 나 두 사람 뿐이야. 지구까지의 거리는 앞으로 50조 킬로미터, 즉 5광년 가까이 남아있어........." "애너메존 연료는 이제 한 번 가속할 수 있을 정도밖에는 남아 있지 않은데........." 비장한 목소리로 니자가 말했다. 놀 대장은 거침없이 문자판에 다가섰다. "다섯 바퀴 째로군!" "예, 다섯 바퀴 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신기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니자는 자동 수신기의 스피커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잠들 수가 없는 거야. 여러 가지 경우,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두지 않고서는......... 그리고 다섯 바퀴 째가 끝날 때까지는 결정을 끝내야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110시간이 남아 있어요." "좋아. 그렇다면 잠시 이 의자에 앉아 한잠 자기로 하자." 니자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이 말했다. "대장님, 궤도의 반경을 작게 해 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앨그래브 호의 송신기에 어떤 고장이 일어났을 지도 모르잖아요?" "아니, 그럴 순 없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궤도 반경을 좁히거나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이 탠트라 호는 즉시 가루가 되어버리는 거야! 그렇다고 한 번 속도를 낮춰 버리면 애너메존 연료가 떨어지니까 아주 옛날의 달세계 여행용의 로켓과 같은 속도로 5광년의 거리를 날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다시 태양계에 돌아가자면 10만 년이나 걸리게 되는 거지." "그건 그렇겠지만......... 그러나 앨그래브 호는 코스에서 벗어나서 역시 우리들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그렇게 엄청나게 코스를 벗어날 이유가 없어. 게다가 앨그래브 호가 정확하게 계산하여 결정한 시간에 출발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예를 들어 어떤 믿을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나서 송신기가 두 개 모두 고장이 났다고 해도 앨그래브 호는 이 탠트라 호의 궤도를 가로질렀을 거야. 그렇다면 이쪽의 수신기가 앨그래브 호를 잡았을 거다. 그렇다면......?" 놀 대장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앨그래브 호는 조난 당한 것이 틀림없어!" "그런데 조난 당한 것이 아니라 운석군 때문에 파손되어 가속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가속을 못하게 됐다? 그것도 조난과 마찬가지가 되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수 만 년이 걸리게 되니까 말야. 그렇게 되면 더욱 안타깝게 죽음을 기다리는 전망 상태가 계속되는 거야." 놀 대장은 소형 전자 계산기의 테이블 밑에서 접는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즉시로 대장의 두 손은 피아니스트처럼 재빨리 전자 계산기의 핸들이며 버튼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항성 탐험대에 참가한 니자는 어떤 싸움에 맞서듯이 계산기를 마주하고 있는 놀 대장의 모습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서 그는 이렇게 침착하고 믿음직한 사람일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사람의 옆에 있으면 안심할 수 있다. 이미 5년 동안이나 놀 대장과 함께 지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도 놀 대장과 함께 당직을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니자는 기뻤던 것이다. 다른 대원들이 최면 작용에 의해 깊은 잠에 들어간 3개월 동안 깨어 있는 사람은 오직 니자와 놀 대장 두 사람뿐이었다. 아직 13일이 남아 있다. 13일이 지나면 두 사람은 반 년 동안 잠자게 되어 있었다. 그 동안은 항행사, 천문학자, 기계기사 등이 교대로 당직을 맡아 왔다. 이때에 놀 대장이 의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니자는 정신을 차렸다. "난 잠깐 항성도실에 갔다 오겠어. 니자의 휴식시간까지 이제 9시간이 있군. 그때까지 한잠 자는 게 어떨까?" 놀 대장은 시계를 보면서 니자에게 말했다. "어서 가셔요. 저는 피로하지 않으니까 계속 여기 있어도 괜찮습니다. 대장님은 마음놓고 주무셔요." 놀 대장은 자기를 쳐다보는 니자의 상냥한 눈동자에 그만 싱긋 웃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대장이 나가자 니자는 의자에 앉아 익숙해진 눈으로 계기들을 들여다보았다. 니자의 머리 위에는 어두운 영사막이 있었다. 그것은 탠트라 호 주위의 우주 모습을 중앙 사령실에 전하는 영사막이었다. 지금 여러 가지 색깔의 별이 빛나고 있으며 마치 밤거리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같았다. 행성 K2․2N․88, 그것은 태양계에서 멀리 떨어진 생물이 없는 완전히 식어버린 별이다. 이 행성은 항성을 목표로 하여 지구를 떠난 우주선끼리, 우주에서 서로 만나는데 매우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만나는 것도 상대방 앨그래브 호가 조난이라도 당했는지 끝내 실현될 것 같지 않다. 지금 다섯 바퀴 째......... 그래도 안 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놀 대장은 어떻게 좋은 방법을 발견하려고 온갖 지혜를 다 짜내고 있는 것이다. 탐험 대장에게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착오가 있으면 이 제일급 우주선 탠트라 호는 우수한 학자들로 편성된 탐험대와 함께 이 무섭고 무한히 넓은 우주 공간에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영원히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저 놀 대장이 착오를 범할 걱정은 조금도 없다. 갑자기 니자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탠트라 호가 아주 작은 각도였으나 코스를 벗어난 것이었다. 현기증이 겨우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또다시 눈이 잿빛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되었다. 탠트라 호는 곧 바른 코스로 되돌아 온 것이다. 우주선에 실은 몹시 강도가 높은 레이더가 전방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우주선의 최대의 적이 되고 있는 운석군이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우주선을 조종하고 있는 전자 기계가 수백만 분의 1초 사이에 탠트라 호의 진로를 바꾸어 위험이 지나간 다음에 곧 본래의 진로로 되돌려 놓은 것이었다. 하고 니자는 생각했다. 정말로 앨그래브 호는 운석에 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났을까? 놀 대장이 언젠가 말한 일이 있다. 감도가 높은 레이더가 발명된 현재에도 우주선은 10대에 1대 비율로 조난 당하고 있다고. 앨그래브 호의 조난으로 탠트라 호도 위험한 입장에 놓여 있는 셈이다. 니자는 지구를 출발한 후의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행성 질다의 생물   제 37 항성 탐험대는 뱀주인 자리에 있는 행성 질다를 목표로 하여 지구를 출발한 것이었다. 질다는 그 행성계 중에서 고등 생물이 사는 단 하나의 행성이며 대 우주 통신망을 통하여 오래 전부터 지구나 다른 행성 세계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통신 연락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질다에서부터 통신 연락이 끊어진 것이 벌써 70년 이상이나 된다. 대체 질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지구의 의무였다. 대 우주 통신망에 속하는 행성 중에서 질다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 바로 지구였기 때문이었다. 탐험대의 우주선 탠트라 호에는 많은 관측 기계가 실려 있었다. 이것에 탄 대원은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를 합쳐 14명으로 모두가 여러 가지 시험을 치르고 오랜 세월 우주선 안에서의 생활에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었다. 로켓 엔진의 연료로 사용되는 애너메존은 중간자(메존)에 의한 결합을 파괴한 핵물질로서 광속과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애너메존 연료는 우주선 탠트라 호가 행성 질다까지 가는 데에 필요한 최소의 양 밖에는 싣지 못했다. 돌아올 때에 필요한 연료는 그 질다에서 보급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질다에서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 연료 보급이 되지 않을 때에는 제 2급 우주선 앨그래브 호가 K2․2N․88 행성의 궤도 가까이에서 탠트라 호와 서로 만나 애너메존 연료를 받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니자는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니자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은 피와 같이 붉은 색을 한 음침한 항성이다. 그것은 행성 질다의 태양이었다. 이 항성은 지구를 떠나서 4년째가 끝나는 수개월 사이에 탠트라 호의 영사막 속에서 점차로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4년째라고 하는 것은 광속에 가까운 속력으로 날고 있는 우주선의 승무원들에게 있어서의 시간으로, 그 동안 지구에서는 이미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행성 질다에서 그 피와 같이 붉은 항성까지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탠트라 호가 질다에 가까워짐에 따라 새빨간 원반과 같은 그 태양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이 내뿜는 높은 열을 흠뻑 받은 탠트라 호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선체를 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질다에 가까워지는 2개월 전부터 탠트라 호는 이 행성의 우주 통신 스테이션과 연락을 취하려고 했다. 질다의 단 하나인 우주 통신 스테이션은 대기가 없는 작은 질다의 위성에 있었다. 그 거리는 지구와 달과의 거리보다 가까웠다. 탠트라 호는 질다에서 3,000만 킬로미터 정도 가까워져서 속도를 초속 3,000 킬로미터로 떨어뜨리기까지의 사이에 계속 호출 신호를 보냈다. 니자가 당직 차례였으나 승무원 전원이 일어나서 중앙 사령실의 영사막 앞에 모였다. 니자는 송신기의 출력을 증가시키고 강력한 서치라이트로 전방을 비치면서 호출을 계속했다. 이윽고 단 한 점 빛나는 행성을 발견했다. 끝내 질다가 보인 것이다. 탠트라 호는 행성 질다의 주위를 돌면서 나선을 그리며 점점 질다에 가까이 가면서 위성의 속도와 우주선의 속도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탠트라 호는 마치 질다의 위성과 한 가닥의 줄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그 위성의 상공에 조용히 멈췄다. 탠트라 호의 전자 입체 망원경이 쓰다듬는 듯이 위성의 표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 한 번만 봐도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광경이 갑자기 모든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거대하고 납작한 유리 건물이 태양의 빛을 받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붕 바로 밑은 집회장과 같은 큰 홀로 되어 있어서 거기 많은 생물들이 움직이지 않고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지구의 인간과는 다르지만 인간과 같은 종류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천문학자인 폴 히스는 흥분한 채로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유리 지붕 아래에 희미하게 보이는 생물들은 언제까지라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히스는 망원경의 배율을 높였다. 그러자 긴 테이블을 놓은 연단 같은 것이 보였다. 그 주위에 큰 계기판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많은 생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하나의 생물이 다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공포에 떠는 얼빠진 눈이 먼 하늘의 한 점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어 있어. 얼어붙었어!" 놀은 엉겁결에 외쳤다.   불길한 예감   탠트라 호는 위성의 상공에 계속 서 있었다. 14명의 대원들의 눈은 깜짝도 하지 않고 유리로 만들어져 있는 건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묘지라고 해도 좋았다. 이 시체의 무리는 이미 몇 해 동안 이렇게 이 건물 속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행성 질다로부터의 연락이 끊어진 것이 70년 전이다. 게다가 빛이 지구에 이르는데 걸리는 6년이라는 세월을 합치면 거의 4분의 3세기가 된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대장에게로 모였다. 대장은 창백해진 얼굴로 질다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의 크림색 안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안개의 저쪽 여기 저기에 산 모양이며 바다의 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 저 멀리 아득한 지구에서 우주로 날아 온 제 37 항성 탐험대의 임무인 것이다. 놀은 대원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위성 스테이션은 부서져 있는데 이 75년 동안 그대로 내버려둔 채이다. 그렇다면 행성 질다에 무엇인가 비참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행성에 가까이 가서 대기권 내에 들어가 경우에 따라서는 착륙하여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모두 모여 있으니까 의견을 듣고 싶은데…." 반대 의견을 말한 것은 천문학자 히스, 단 한 사람뿐이었다. "질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었다면 우리들이 여기서 애너메존 연료를 보급 받을 수 있는 희망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착륙…, 천만에요. 낮은 고도로써 질다의 주위를 도는 것만 해도 탠트라 호의 연료는 거의 다 써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뭡니까? 강력한 방사선이 있어 우리들은 모두 몰살을 당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듣고 니자는 분개했다. 히스를 제외한 다른 대원은 한 사람 남김 없이 대장의 의견에 찬성했다. 놀은 천문학자의 생각에 반대했다. "우리들의 우주선에는 우주선 방어 장치가 되어 있다. 어떤 행성의 방사선도 이것을 뚫을 수는 없다. 게다가 이 행성 질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여기에 보내진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지구는 대 우주 통신망에 들어 있는 다른 행성에 대해 대체 무엇이라고 보고해야 하지? 행성 질다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원인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을 피하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대기 상승부의 온도는 정상입니다!" 놀은 그 보고를 듣자 싱긋 웃고 나서 조종석에 앉았다. 탠트라 호는 속도를 내리고 주의 깊게 한 바퀴 한 바퀴 행성 질다를 향하여 고도를 낮추었다. 질다는 지구보다 약간 작다. 그러므로 저공으로 그 주위를 회전하는 데에는 별로 큰 속도가 필요 없었다. 천문학자와 지질학자는 질다의 지도와 맞추어 가면서 광학 기계로 행성의 지표면을 관측하고 있었다. 대륙은 지도대로의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붉은 태양에 비쳐지는 바다는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산맥도 본래 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행성 질다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놀은 질다의 성층권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그 전리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았다. 놀은 무엇인가 막연하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선형으로 내려오면서 탠트라 호가 여섯 바퀴 째로 접어들었을 때 큰 도시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신기는 침묵된 채 아무런 신호도 발신하지 않는다. 니자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깜박 졸았다. 불과 몇 분 동안 밖에 잠들지 않았다고 느꼈으나, 니자가 눈을 떠보니 탠트라 호는 지구의 보통 제트기 정도의 속도로 행성 질다의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 행성에도 분명히 거리며, 공장이며, 항구가 있을 텐데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지만 강력한 입체 망원경에 단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행성의 대기를 뚫고 돌진하고 있는 이 우주선의 폭음은 수 십 킬로미터까지도 들릴 것이다. 1시간이 지났다. 행성에서의 응답을 숨도 쉬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대원들의 긴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팽팽해졌다. 놀은 경보용 사이렌의 스위치를 넣었다. 굉장한 소리가 행성 질다의 어두움 속으로 울려 퍼져 갔다. 모든 사람은 이 사이렌의 소리가 대기의 충격파와 뒤섞여 수수께끼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질다의 사람들의 귀에 닿게 해 주십사 하고 기도하는 마음뿐이었다. 붉은 보라색의 빛이 불길한 어둠을 쫓고 탠트라 호는 행성 질다의 낮 부분으로 나왔다. 아래에는 검은 우단과 같은 색깔이 가득히 펼쳐지고 있지 않는가. 촬영한 필름을 서둘러서 확대해 보니, 지구의 양귀비꽃과 비슷한 검은 꽃이 수없이 많이 피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무나 풀이나 꽃 대신에 이 검은 양귀비꽃이 바다처럼 끝없이 수 천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검은 꽃밭 사이에 도시의 도로가 커다란 해골의 갈빗대처럼 보였다. 건물의 녹슨 철골은 마치 붉은 상처 같았다. 생물은 어디에나 보이지 않았다. 나무는 하나도 없고, 다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검은 양귀비꽃뿐이었다.   자신을 멸망시키다.   "얼마나 무서운 비극일까! 질다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죽인 위에다 자기들의 행성까지 멸망시켰던 것이다!" 생물학자인 에온 타알은 짓눌린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온화의 정도는 별로 심하지 않은데…." 니자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숨기면서 말했다. "하여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 생물학자는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방사능에 의한 이와 같은 변화는 깨닫지 못하는 동안 어느 사이엔가 점점 축적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생물에 대한 방사능의 작용이 점차로 증대해 간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질이 변화된다. 유전은 엉망이 되고 번식이 멈추어진다. 방사능에 의한 질병이 전염병 같이 퍼진다. 그러한 예는 비단 이 질다가 처음은 아니다. 대 우주 통신망에 속하는 행성 중에도 이러한 비극이 몇 번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자 놀 대장이 자신 있게 똑똑히 말했다. "행성 그 자체는 무사히 남아 있으므로 1세기 이내에 우리들의 이주는 시작될 것이다." 놀 대장은 탠트라 호의 코스를 가로 궤도에서 세로 궤도로 바꾸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다. 질다인이 모두 죽어 없어졌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이 행성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혹시 소수의 질다인이 어디엔가 살아 남아 있을 지도 모른다. 발전소 같은 것이 파괴되어 구원을 요청할 수는 없었지만 살아 있을 수는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탠트라 호는 죽음의 행성 질다의 주위를 이번에는 북극에서 남극으로 돌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지면이 노출되고 그것이 허리띠처럼 계속 되어 있었다. 거기서는 누런 안개가 공중에 펼쳐져 있었고, 그 안개를 통하여 바람에 날리는 붉은 큰 모래땅이 여기 저기 보였다. 그 앞에는 상복처럼 지면을 덮은 검은 양귀비꽃이 또 가득히 펼쳐지고 있었다. 이 양귀비꽃이야말로 방사능에 견디어 냈거나 그렇지 않으면 방사능의 작용으로 갑자기 변화를 일으켜 생명력을 가지게 된 단 하나의 식물이리라. 이제야 모든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다른 행성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할 애너메존 연료를 이 죽음의 행성의 폐허 속에서 찾아낼 희망은 없어졌다. 탠트라 호는 점차로 궤도 반경을 크게 하여 행성 질다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행성용의 이온 로켓으로 속력을 올려 질다의 인력권을 탈출하자 K2․2N․88이라는 번호만으로 알려져 있는 생물이 없는 행성으로 향했다. 그 행성에는 미리 신호 위성이 투하되어 있으며, 우주선 앨그래브 호가 거기서 탠트라 호를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질다에 대해서 기록을 조사하고 있는 동안에 이 행성에서는 위험한 핵연료의 실험이 행해지고 있던 것을 기록한 자료가 발견되었다. 행성 질다의 유명한 과학자들이 생명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징조가 나타났다고 경고를 하고 실험을 중지하도록 몇 번 충고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발견되었다. 118년 전, 대 우주 통신망을 통하여 질다에 대해서도 간단한 경고가 내려지고 있었다. 높은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텐데, 질다의 정부는 어쩐지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질다의 정부는 위험한 실험을 계속 행하여 해가 적은 핵에너지를 개발하지 않고 위험한 종류의 핵에너지를 이용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유해한 방사능이 축적되어 끝내 질다는 자기 자신이 자기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탠트라 호가 앨그래브 호와 서로 만날 희망도 점점 적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사태가 탠트라 호에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예 감이 들었다.   다가오는 위험   놀 대장은 항성도실에서 되돌아와 문 앞쪽에 멈추어 섰다. 니자는 엎드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짙은 갈색 머리칼은 황금색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니자의 소녀와 같은 옆얼굴, 좀 올라간 눈, 그 눈은 지금 불안과 용기를 안고 크게 떨고 있었다. 놀은 니자의 은근한 애정이 얼마나 자기 마음에 기둥이 되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놀은 방으로 들어갔다. 니자는 당황하며 일어섰다. "필요한 자료와 항성도를 모두 골라 왔어. 계산기에 걸어 보자." 놀은 소파에 앉아서 별자리표, 자기장, 중력이 강한 장소, 우주선 입자의 강한 흐름과 운석의 흐르는 속도와 밀도 등을 읽어 내려갔다. 니자는 긴장하여 계산기의 단추를 누르고 스위치의 다이얼을 돌렸다. 놀은 계산기가 계산한 해답을 손에 들고 눈썹을 모았다. "우리들이 가는 전갈자리에 있는 암흑 성운 가까이에 강력한 중력의 장소가 있다. 연료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해 코스를 뱀자리 쪽으로 벗어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에는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력에 의한 가속을 이용하여 엔진을 걸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었는데........." "그 방법으로 될 순 없을까요?" "천만에. 매초 25만 킬로미터라는 지금의 속도로 만약에 지구의 중력권 안을 날았다고 한다면, 그 우주선의 중량은 1만 2천 배가 되어 가루가 되고 말지. 중력권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이기 때문에 이런 속도로 날 수 있어. 중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중력이 크면 클수록 그 때문에 생기는 가속도도 크게 되는데, 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다니........." "그것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고 있을 경우 뿐이야. 이 경우 우주선 자체가 광선 같이 직선에 가까운 움직임 밖에 한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탠트라 호는 광선 비슷한 것이므로 곧바로 태양계에 항로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치지요?" "그건 골치 아픈 문제야. 일단 엔진을 건 이상, 멈추거나 속도를 크게 낮추거나 하면, 그것이야말로 자살 행위지. 다시 또 가속시킬 만한 연료는 이 탠트라 호에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위험이 다가오고 있어. 우리들이 가고 있는 곳은 지금까지 한 번도 조사한 일이 없는 영역이야. 거기에는 항성도 없고, 생물이 사는 행성도 없으며, 단지 중력의 장소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최종적인 결정은 다섯 바퀴 째가 끝날 때 모두를 깨워 가지고 천문학자의 의견을 물어서 하는 것이 좋겠다. 그때까지는........." 놀은 하품을 했다. "주무시지 않고서........." "그렇게 할까? 이 의자 위에서 한잠 잘까 보다. 혹시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앨그래브 호의 신호가 들려 오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니자는 일어서서 계기류와 시계 옆의 약한 초록색의 조명만을 남기고 불을 껐다. 탠트라 호는 완전한 정적 속을 나아가고 있었다, 계기류는 모두 잘 돌아가고 있었다. 때때로 희미하게 벨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것은 탠트라 호를 곡선에 따라서 나아가게 하기 위한 보조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였다. 강력한 애너메존 엔진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 잠들고 있는 우주선의 안은 긴 밤의 편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우주선과 승무원들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최초의 탐험   놀 대장이 눈을 뜨고 무거운 머리를 들고 보니 니자는 지친 얼굴로 여전히 계기의 옆에 앉아 있었다. 놀은 단숨에 벌떡 일어나 니자에게 말했다. "어허, 14시간이나 잤잖아. 니자! 왜 깨워주지 않았지?" 니자는 기쁜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니자가 잘 차례다." "저도 여기서 한잠 자도 좋지요?" 니자는 서둘러서 식사를 하고, 얼굴을 씻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니자는 눈을 감지 않고, 놀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동 샤워를 끼얹고 상쾌해진 놀은 니자를 대신하여 계기의 앞에 붙어 있었는데 곧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왜 자지 않지?" 하고 놀은 니자를 보고 말했다. 니자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망설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끝없는 우주의 이 먼 곳에까지 온 것을 생각하니, 인간의 위대함에 머리가 숙여지는 것 같아요. 대장님은 몇 번이나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전 이번이 첫 우주 탐험인 걸요.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이러한 큰 여행에 저도 한 몫 끼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울렁거리는군요." 놀은 엷은 웃음을 띄우고 이마를 닦았다. "이런 말을 하면 니자도 틀림없이 낙심할 것이나 우리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의 것인가를 가르쳐 주지. 이걸 보아라." 놀은 영사기 옆에 가서 스위치를 넣었다. 사령실의 뒤쪽 벽에 소용돌이형의 은하계가 비치고 별들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큰 소용돌이의 가장 끝에 겨우 찾아낼 수 있는 줄기가 있었다. 그 부분에 먼지와 같은 작은 별이 드문드문 떠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우리들의 태양계는 은하계의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있으며, 우리들이 지금 있는 곳도 여기다. 그런데. 이 줄기만 해도 백조자리에서 용자리까지 별이 있잖아. 이 줄기의 이쪽 끝께서 저쪽 끝으로 간다고 해도 이 탠트라 호로서는 거의 4만 년이 걸린다. 또 이 줄기와 옆의 줄기 사이의 이 어두운 지대를 가로지르는 데 4천 년은 걸린다. 그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끝없는 우주 공간을 여행하고는 있다고 해도 겨우 직경 50광년 정도의 작은 점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므로 대 우주 통신망이 없다면, 우리들은 우주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니자는 말없이 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최초의 항성 전쟁을 생각해 봐요. 당시는 우주선도 작고, 속력도 느리고 강력한 방어 장치도 없었어. 그런데 인간의 수명만 해도, 지금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지. 그래도 우리들의 조상들은 한 번의 여행을 위해, 짧은 일생의 전부를 바쳤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이겠지!" 니자는 찬성할 수 없다는 듯이 목을 길게 뺐다. "그러나, 만약에 먼 장래에 지금과 같은 방법이 아니라, 우주 공간을 정복하는 다른 방법이 발견되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들의 일을 이렇게 말할는지 몰라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이다'라고." 놀은 니자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니자도 그렇지." 니자는 얼굴을 붉혔다. "저는 이 탐험대에 끼게 된 것을 정말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부터는 어떤 희생을 당해도 몇 번이고 우주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요."   최후의 보고   놀 대장은 천천히 니자에게 향해 돌아앉으며 불쑥 낮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니자, 사실을 말하면 저 행성 질다에서 나의 꿈은 비참하게도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어!" 니자는 놀라며 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질다가 멸망하지 않고 애너메존 연료가 보급되었다면 나는 탐험대를 더 앞쪽으로 나아가게 할 작정이었다. 우주 조사 위원회와 타협하여 이미 양해를 얻고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질다에서 가지고 탠트라 호에 희망자만을 태워 더 먼 우주 공간으로 가고 싶었던 거야. 나머지 대원은 앨그래브 호로 지구에 돌아가게 하고......... 니자,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너는 어떻게 했지?" "저요? 물론 대장님과 함께 앞으로 가겠어요." "그런데, 니자라면 어디로 가고 싶지?" 놀은 니자를 지켜보면서 물었다. "어디든지, 저기라도!" 니자는 은하계의 두 개의 줄기 사이에 있는 깊은 어두움을 가리켰다. "아니, 그건 너무 멀다. 니자, 85년 정도전에 '계단식'이라고 불린 제34항성 탐험대가 출발한 것은 니자도 알고 있지? 3척의 우주선이 연료를 우주 공간에서 보급 받으면서 거문고자리를 향하여 지구를 떠나갔다. 그 중 2척은 연료 보급용의 무인 로켓으로 애너메존의 보급이 끝나자 지구로 돌아 왔어. 그런데 또 한 척인 파르스 호는........." "아아, 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았던 우주선 말이죠?" 니자는 흥분하여 말을 그쳤다. "그렇다. 확실히 파르스 호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았어. 파르스 호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지구에 보고하고 되돌아가는 도중 조난되었다. 파르스 호의 여행 목적지는 직녀성 즉 거문고자리의 알파성의 행성이었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쪽 밤하늘에 파랗게 빛나는 저 별을 넋을 잃고 보았던가! 직녀성까지의 거리는 거의 26광년이다. 인간이 우리들의 태양에서 이렇게 멀리 온 것은 파르스 호가 처음이었다. 어쨌든 파르스 호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파르스 호가 조난된 것은 운석과 충돌한 때문인지, 우주선에 큰 고장이라도 일어난 때문인지, 그 것은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파르스 호는 지금이라도 우주 공간을 날아가고 있을 지도 모르며,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대원들도 아직 살아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나, 어쩌면 그렇게 무서운 일이!" "우주 공간을 향하여 나는 우주선은 필요한 속도를 낼 수 없게 되면, 모두 그와 같은 운명을 밟게 된다. 어쨌든 거리가 굉장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와의 사이에는 순식간에 수 천 년의 간격이 생겨 버리는 것이지!" "그래서 파르스 호는 어떤 보고를 지구에 보내 왔어요?" "보고라고는 해도 아주 간단한 것이었어. 통신의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아서 들렸다 안 들렸다 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지. 전자장 때문에 어디선가 방해를 받은 까닭이었을 테지. 나는 지금도 그 보고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것은 이러한 내용이었어. '여기는 파르스, 여기는 파르스! 베가를 떠나 26년…… 충분히……기다리고 있음. 베가의 4개의 행성…….' 그리고는 그만이었지. 참 애석한 일이었어." "그래도 그건 구조를 청하는 신호였지요? 어디선가 구원을 기다린다는........." "물론이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일부러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통신을 보냈겠어. 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어. 파르스 호에서는 그것을 최후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으니까." "돌아오는 길에 들어서서 26년이라면 베가에서 태양까지가 31년이니까 파르스 호는 우리들이 있는 이 근처나 혹은 지구에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되지요?" "아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 정상적인 속도를 넘어서 날고 있다면 그러한 계산이 되는데 그건 매우 위험한 일이야!" 놀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쨌든 파르스 호의 대원들은 실로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어! 파르스 호의 코스를 다시 한 번 날아가고 싶다. 그 다음부터 그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개량되었으니까 한 척의 우주선으로도 안 될 일은 없어. 나는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행성을 가지고 있는 푸른 태양 베가를 동경해 왔으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세계라면 저도 가보고 싶어요. 그러나 왕복에 지구의 시간으로 60년, 우주선의 시간으로 40년이 걸린다면 그건 인생의 절반인 걸요! " "큰 성과를 얻기 위해선 당연히 큰 희생이 뒤따르게 되지.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것은 희생도 아무 것도 아냐. 나의 지구상에서의 생활은 우주 여행의 나머지의 짧은 휴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 실은 난 우주선 속에서 태어났어." "어머, 어떻게 그러한 일이......?" 니자는 놀라며 물었다. "제 35항성 탐험대는 4척의 우주선으로 되어 있었어. 그 한 척에 나의 어머니가 천문학자로서 타고 있었지. 탐험대가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에서 내가 태어나고 지구에 돌아왔을 때에는 벌써 18세가 되었어. 나는 우주선 속에서 조종 기술을 배우고 병을 앓는 대원 대신 조종을 했으며, 애너메존 엔진을 취급하는 기계 기사의 일을 대신하기도 했어. 어쨌든 나는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향하는 우주선 속에서 별을 바라보며 성장하게 된 거야. 우주선이 향하는 방향에는 태양에 가까운 곳에 서로가 가깝게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한 쌍의 항성이 있었어. 하나는 푸른색, 또 하나는 오렌지색으로 빛나고 검은 구름에 싸여 있었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산소도 없는 황폐한 행성의 하늘이었어. 탐험대는 그 행성에 착륙하여 7개월에 걸쳐 조사를 했는데, 그때 행성에 세워진 임시 건물의 유리 지붕에서 나는 그 하늘을 바라 본 거야. 그때, 나의 장난감이 된 것은 매우 무거운 이리듐의 덩어리였어. 그래, 이런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지. 니자의 휴식 시간이 벌써 됐으니까." "괜찮아요. 더 이야기를 계속해 주셔요.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것이 처음인 걸요." 놀은 니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작은 최면기를 가지고 왔다. 니자는 점차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슬픈 고별식   니자가 눈을 떠보니 탠트라 호는 여섯 바퀴 째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놀 대장의 엄숙한 얼굴을 보기만 해도 앨그래브 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니자가 파동 샤워를 끼얹고 몸단장을 하고 돌아오자 놀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일어나 주어서 마침 잘 됐다. 깨자마자 안 됐지만 음악과 조명의 스위치를 넣어 모두를 깨워 줘!" 니자는 재빨리 스위치를 넣었다. 대원들이 잠들어 있는 모든 선실에서 플래시가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낮게 떨리는 것 같은 독특한 음악이 점차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잠들고 있는 신경을 주의 깊게 자극하여 조금씩 깨어나게 하고 정상적인 활동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다섯 시간 후에는 모든 대원이 정상 상태로 돌아가고 식사와 신경 자극 장치로 원기를 회복하여 중앙 사령실에 모였다. 앨그래브 호가 조난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대원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놀의 기대대로 절망적인 말을 하거나 공포에 떠는 사람은 없었다. 행성 질다의 상공에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 천문학자 히스마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만 젊은 여의사 루마 라스비만이 좀 얼굴이 창백해지고 귀여운 입술을 살짝 빨았다. "조난된 동지들을 추도합시다." 이렇게 말하고 놀은 영사기의 스위치를 넣었다. 영사막 위에 탠트라 호가 출발하기 전에 찍은 앨그래브 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원이 일어섰다. 앨그래브 호의 승무원 7명의 사진이 잇달아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어떤 사람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놀이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대원들은 한 손을 들고 고별의 인사를 보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주를 나는 사람들의 관례로 되어 있었다. 함께 출발한 우주선은 반드시 서로의 승무원 전원의 사진을 촬영해 두기로 되어 있었다. 소식이 끊어진 우주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주 공간을 헤매고 승무원들도 또 오랫동안 살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어쨌든 우주선은 영원히 되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니까. 때로는 파르스 호처럼 최후의 통신 연락을 보내는데 성공한 우주선도 있었으나 그것을 찾아내어 구조하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슬픈 고별식이 끝나자 놀은 애너메존 엔진을 걸었다. 이틀이 지나자 엔진의 소리는 멈추었다. 탠트라 호는 일 주야에 210억 킬로미터라는 굉장한 속도로 지구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태양계까지는 지구의 시간으로 대체로 6년 정도 걸릴 것이다. 새로운 코스의 계산을 계속 반복해서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애너메존 연료로 6년 동안을 계속 날지 않으면 안 된다. 가는 곳에 있는 344+2u라고 불리는 아직 조사하지 않은 영역이 모두의 걱정거리였다. 거기를 피하여 멀리 돌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영역을 벗어나면 운석에 부딪칠 뿐만 아니라 코스를 바꿀 때에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2개월 후에는 코스의 계산이 끝나고 탠트라 호는 정상 상태로 그리운 지구까지 우주선의 시간으로 4년 동안의 코스를 계속 날아갔다.   무서운 인력   당직 시간을 끝낸 놀 대장과 니자는 지쳐서 긴 잠에 들어갔다. 대신하여 다음 한 조가 당직을 맡았다. 우주 탐험 여행에 참가한 것이 이번이 세 번째라는 숙련된 우주 조종사 펠 린과 여성 천문학자 잉그리드 조슨,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당직을 자원한 전자 공학 기사 케이 렐튼의 3명이었다. 잉그리드는 조종사 펠의 허가를 받아 도서실에 틀어 박혔다. 옛날부터의 친구 케이와 함께 행성 질다의 비극을 주제로 한 교향곡 '행성의 파멸'을 작곡하고 있는 것이다. 펠은 싫증이 나면 대신 잉그리드를 조종석에 앉히고 자기는 기묘한 문자의 해독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 문자는 지구에 가장 가까운 켄타우루스별의 어느 행성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그 행성의 주민들은 자기들의 별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으나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펠은 이 수수께끼 문서의 해독을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당직은 또 두 번 교대를 했다. 그 동안에 탠트라 호는 쭉 10조 킬로미터 정도나 지구에 가깝게 날아갔으나 애너메존 엔진은 합쳐서 몇 시간 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펠의 그룹의 4번째 당직도 이윽고 3개월 째가 끝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자동 경보기가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펠, 잉그리드, 케이 세 사람은 뜨끔했다. 잉그리드는 케이에게 매달렸다. "이건 큰 일이다. 중력의 강도가 계산의 배가 되어 있다!" 펠 조종사는 창백해졌다. 뜻밖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한시 바삐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선 탠트라 호의 운명은 이제 펠의 손에 쥐어지고 있었다. 중력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우주선의 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 번 속도를 낮추면 다시 속도를 올릴 만한 애너메존 연료가 없다. 펠은 이를 악물고 제동용의 이온 보조 엔진의 스위치를 넣었다. 잘 울리는 타격음이 계기의 소리에 더해져 중력과 속도의 관계를 계산하고 있는 계기의 경보음을 지워버렸다. 경보음은 멈춰지고 계기의 바늘은 속도와 중력의 균형이 취해진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펠이 제동 엔진의 스위치를 끊자 즉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바늘이 제자리에 돌아갔다. 무서운 힘이 탠트라 호를 끌어 코스를 벗어나게 하며 바른쪽으로 바른쪽으로 끌어 당겨 가고 있는 것이었다. 탠트라 호가 강력한 중력권에 끼어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펠로서는 코스를 바꿀 만한 결심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코스를 바꾸는 데는 매우 정확한 작업과 큰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펠은 보조 엔진을 사용하여 우주선에 브레이크를 걸고 왼쪽으로 돌려보았다. 그러나 코스의 선택을 잘못한 것은 확실해지고 있었다.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큰 물질 덩어리에 지나치게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구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잉그리드가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선 속도를 더 낮추지 않으면…." 하고 펠은 말했으나 별로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옆에 있는 중력권과의 경계는 벌써 지나버렸어요. 중력이 점점 증가되고 있잖아요." 타격음이 계속 울렸다. 우주선을 통제하고 있는 전자 두뇌가 전방에 물질 덩어리가 있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보조 엔진이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탠트라 호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속도는 늦춰지고 있었으나, 그래도 사령실에서 조종을 하고 있는 대원들은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잉그리드는 바닥에 쓰러지고, 펠은 소파 위에서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머리를 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케이는 본능적인 공포와 어린애 같은 무력감을 맛보고 있었다. 엔진의 타격음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한없이 큰 소리로 변해갔다. 전자두뇌만이 정신을 잃은 우주선 안의 대원들을 대신하여 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강력한 두뇌도 복잡한 결과를 예상하여 비상 사태를 해결해 가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능력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탠트라 호의 흔들림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 보조 엔진의 이온 연료의 양을 나타내는 바늘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펠은 중력이 계속 증가되기만 할뿐이어서 속도를 낮추어 뚫고 나아가는 것이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펠은 코스를 운석이 밀집하고 있는 왼쪽으로 돌리기로 결정한다. 펠은 힘껏 애너메존 엔진의 레버를 당겼다. 선명한 녹색 불길이 내뿜어지는 것이 창문으로 보이고, 계속하여 눈부실 정도의 자줏빛으로 변했다. 애너메존 연료가 굉장한 힘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탠트라 호 전체가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크게 흔들렸다.   거대한 철의 별   놀 대장은 아직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옆으로 누워 있었다. 어딘가 멀리서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정신도 육체도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놀은 자기가 탐험 대장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빨리 의식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겨우 놀은 탠트라 호에 애너메존 엔진이 걸린 것을 깨달았다. "무엇인가 이상이 생겼구나!" 놀은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엉금엉금 기어가서 문을 열고 거의 굴러가다시피 해서 중앙 사령실에 들어갔다. "앞쪽 영사막을...... 적외선으로 바꾸어...... 빨리 엔진을 멈춰라. " 놀은 정신없이 외쳤다. 내뿜던 빛이 사라지고 동시에 우주선의 진동도 멈춰졌다. 오른쪽 전방의 영사막에 붉은 갈색 빛을 내는 거대한 항성이 나타났다. 그 순간 모두 숨을 죽이고 우주선의 코스에서 좀 빗겨난 어둠 속에 나타난 거대한 별을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펠이 비통한 소리로 외쳤다. "참, 난 바보였어. 틀림없이 암흑 성운의 옆에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철의 별이 아니어요?" 잉그리드가 창백해져서 외쳤다. 놀은 의자 뒤를 잡고 겨우 일어섰다. "그렇다! 틀림없이 철의 별이다. 우주 여행자의 공포의 표적이 되어 있는 그 별이다. 철의 별이 이 근처에 있다고는!" 놀은 언제나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성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펠은 미안하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와 같이 강한 중력을 가진 암흑 성운이라면, 그 내부에는 꽤 큰 고체 입자를 품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탠트라 호는 오래 전에 그것과 충돌하여 산산이 가루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력의 힘이 갑자기 변하거나 무언가 소용돌이와 같은 움직임이 생기는 건 어떤 이유입니까? 그건 검은 구름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항성이 몇 개인가 행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현상이 있으니까." 펠은 피가 나올 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놀은 펠을 격려하듯이 끄덕여 보이고 전 대원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스위치를 넣었다. 우주선은 다시 흔들리고 무엇인가 굉장한 속력으로 영사막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것 봐, 해답은 이제 나왔어. 행성을 쫓아 넘었어. 어물어물해서는 안 되겠다!" 놀은 연료계에 눈길을 보냈다. 무엇인가 말하려다 말고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애너메존 연료계의 바늘은 거의 제로(0) 근처까지 내려가 있었다.   운명의 시간   우주선 탠트라 호의 방향 지시기의 굵은 화살표는 천천히 오른쪽으로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우주선의 코스는 철의 별을 둘러 싼 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길다란 밧줄이 탠트라 호를 철의 별 쪽으로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놀 대장은 긴장하고 쇠약한 나머지 비틀거리면서 계산기 앞에 앉았다. "잉그리드, 철의 별이란 어떤 별이지?" 잉그리드의 뒤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전자 공학 기사 케이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T형 스펙트럼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을 말해요. 빛은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 완전히 식어버린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두 번 다시 타오를 수도 없는 별입니다. 그러한 별은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는 적외선을 내고 있으므로 꽤 가까운 거리에서 적외선을 느끼는 장치를 사용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거여요. 그러나 올빼미는 적외선을 느끼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올빼미라면 이 별이 보일 지도 몰라요." "그런데 왜 철의 별이란 이름이 붙었지7" "지금까지 발견된 이와 같은 별은 모두 철을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구보다 훨씬 커요. 그러므로 그 별이 크다면 질량도 중력도 굉장히 클 수밖에 없죠."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지?" "모르겠어요. 애너메존 연료는 영에 가깝고, 이 우주선은 철의 별 주위를 나선을 그리면서 점점 가까이 끌려가게 되고 마지막에는 거기에 떨어지고 말게 되죠." 잉그리드는 초조해 하면서 머리를 돌렸다. 놀은 조종반 쪽으로 옮기자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모두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눈을 뜬 지 얼마 안 된 니자도 사건의 중대함을 깨닫고 조용히 있었다. 3시간이 지났다. 놀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남아 있는 애너메존을 사용하여 탈출을 해 보자!" 탠트라 호에는 다시 애너메존 엔진의 진동이 전해져 왔다. 철의 별의 인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은 이미 계산되었다. 어물어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속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으므로 탈출은 점점 더 어렵게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너메존 엔진의 시동으로 탠트라 호의 속도는 빨라졌다. 1시간, 또 1시간…… 어두운 붉은 색의 무서운 별은 앞의 영사막에서 모습을 감추고 옆의 영사막에 비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철의 별의 인력이 탠트라 호를 탈출시키지 않으려고 뒤쫓고 있는 것은 계기의 바늘을 보면 알 수 있었다. 3시간, 4시간…… 놀의 머리 위에서 붉은 표시등이 빛나기 시작했다. 놀은 레버를 끌어 당겼다. 엔진이 멈추었다. "탈출했다!" 펠은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놀은 천천히 펠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탈출했는지 어쩐지는 아직 몰라. 애너메존을 모조리 써버렸어!" "그럼 어떻게 하죠?" "이젠 기다려보는 것 밖에는 딴 방법이 없어! 철의 별의 인력과 탠트라 호의 속도가 맹렬히 경쟁하는 중이야." 놀은 의자에 기대어 기도하는 심정으로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태가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소리에 섞이어 그것과 융합되지 않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야말로 철의 별이 우주선 탠트라 호를 상대로 해서 싸움을 걸어오는 소리였다. 니자의 두 뺨은 타오르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강하게 뛰고 있었다. 니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운명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초조하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시간, 2시간,........ 5시간,......... 시간은 느릿느릿 지나갔다. 눈을 뜬 대원들이 중앙 사령실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대원 14명 전부가 사령실로 모여들었다. 탠트라 호의 속도가 떨어지는 정도가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결국 철의 별에서 탈출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탠트라 호의 코스는 점차로 방향을 잃고 끝내 나선의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탠트라 호의 운명은 이제 누가 말해도 명백해졌다.   두 개의 행성   갑자기 옆에서 큰 함성이 일어났다. 깜짝 놀란 대원들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문학자 히스가 뛰어오르며 두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히스의 얼굴은 딴 사람처럼 공포와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펠을 가리키면서 떠들어댔다. "이게 다 이놈 때문이다! 이 얼빠진 것, 쓸모 없는 바보 같은 놈......!" 폴 히스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이미 쓸 수 없게 된 욕지거리를 모조리 늘어놓으려고 했다. 옆에 있는 니자는 듣기에 민망스러워 귀를 막고 싶었다. 놀 대장이 일어섰다. "동료를 꾸짖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펠이 일부러 실수한 것은 아냐. 게다가 이번 경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놀은 계산기의 핸들을 돌렸다. "이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수가 일어날 확률은 30퍼센트나 있었어. 게다가 우주선이 흔들렸기 때문에 생긴 충격을 넣으면 히스 자네라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 틀림없어." 그러자 히스는 자포자기가 되어 이번에는 대장에게 대들었다. "그럼 당신이면 어떻게 됐지요?" "나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거야. 제 36항성 탐험대에 참가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철의 별을 가까이에서 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임은 모두 내게 있다. 또 조사도 돼 있지 않는 영역에 우주선을 나아가게 했을 때 나는 이러한 일은 당연히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간단한 지시 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대장님이 잠들어 계실 때에 이런 곳에 들어와 버렸어요. 예상할 수가 없었잖아요." 하고 니자가 외쳤다. 놀은 똑똑히 말했다. "아니, 나는 이런 일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만 했다. 지금 그러한 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다. 지구에 돌아가서 해야할 말이다." "지구에 돌아가서, 라고?" 히스가 떠들어댔다. "지구로 돌아갈 희망은 조금도 없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오!" "아니,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싸움이다." 하고 놀은 잘라 말했다. 니자는 그것을 듣고 저도 모르게 싱긋이 웃었다. 놀은 모든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면서 자기의 생각을 대원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 철의 별은 반드시 행성이 있을 것이다. 그 행성도 2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행성은 아마 클 것이기 때문에 대기도 있을 것이 틀림없다. 가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들이 착륙할 필요는 없다. 이 탠트라 호에는 아직 고체 산소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여기서 놀은 일단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탠트라 호는 그 행성의 주위를 돌면서 행성의 대기를 조사하여 착륙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되면 고체 산소를 다 사용한 후에 착륙하면 된다. 그 정도의 연료는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나서 반 년 정도 사이에 방위를 계산하고 행성을 자세히 조사해서, 그 결과를 지구에 보고한다. 그리고 구조용의 우주선을 보내 주도록 해서 우리 자신들과 탠트라 호를 구출해야 한다." "그러한 것이 될 수만 있다면야........." 히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솟아오르는 기쁨을 억 누르고 있는 듯 했다. "물론, 될지 안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목표다. 우리들은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히스와 잉그리드는 행성을 관측하여 그 크기를 계산해주기 바란다. 펠과 니자는 행성의 질량을 기초로 하여 탈출 속도, 궤도 속도와 회전 각도를 계산할 것........."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착륙 준비도 진행되었다. 생물학자, 지질학자, 의사 등 세 명은 자동 정찰 스테이션을 투하할 준비에 나섰다. 기계 기사들은 착륙용 레이더와 서치라이트를 정비하고 행성에서부터 지구에 통신을 보내기 위한 인공 위성을 조립했다. 공포와 절망을 맛본 다음이기 때문에 작업은 착착 진행되어 중력의 변동으로 우주선이 흔들리는 이외에는 작업이 중단되지 않았다. 그러나 탠트라 호의 속도가 많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웬만큼 흔들려도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히스와 잉그리드는 두 개의 행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두 개 중에 바깥에 있는 행성에 가까이 가는 것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식어버린 커다란 행성으로서 그것을 싸고 있는 두터운 대기는 인간에게 해로운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죽는다면 두께가 1,000킬로미터나 되는 얼음 층에 격돌하여 암모니아의 대기 속에 빠지는 것보다는 단숨에 철의 별 가까이에서 타버리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무섭고 거대한 행성은 태양계 안에도 얼마든지 있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금속제의 물체   14명의 대원을 실은 우주선 탠트라 호는 점점 철의 별에 가까이 갔다. 19일이 지나서야 겨우 안쪽 행성의 크기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것은 지구보다 큰 행성이었다. 그 행성은 철의 별(항성)의 주위 궤도를 굉장한 속도로 공전하고 있다. 행성의 1년은 지구의 2개월 정도로 계산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철의 별은 그 행성을 적외선으로 충분히 따뜻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대기만 있다면 생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착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다른 행성에서 지구와는 다른 진화과정을 거쳐 생겨난 생물은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오랜 세월 속에 여러 가지 병원균에 대하여 면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면역은 다른 행성의 미생물(현미경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작은 생물)에는 전혀 당해 내지 못한다. 고등 생물은 없으나 생명이 존재하는 행성을 찾은 초기의 탐험 대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에 걸렸던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항성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예방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었다. 은하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구에는 다른 행성에서의 손님이 찾아 온 일은 아직 없다. 최근에 들어와서 겨우 지구에서는 땅꾼자리, 백조자리, 큰곰자리, 봉황새자리 등의 가까운 행성에서 지구의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놀 대장은 행성의 생물을 만날 위험을 생각하여 생물 방어복을 창고에서 꺼내도록 지시했다. 거문고자리의 별 베가를 찾아갈 꿈을 꾸었던 놀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여 생물 방어복을 충분히 싣고 온 것이다. 마침내 탠트라 호의 속도와 철의 별의 안쪽 행성의 속도가 일치되었다. 탠트라 호는 행성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피와 같이 거무죽죽한 빛을 발사하며 희미한 갈색으로 빛나는 행성을 적외선 영사막을 통하여 겨우 분별하게 되었다. 대원은 한 사람 남김 없이 각기 부서에 붙어 계기와 맞서고 있었다. "자전의 주기는 대체로 20주야." "레이더 관측에 의하면 바다와 육지도 있습니다." "대기의 두께는 1,700킬로미터." "정확한 질량은 지구의 43배." 하고 연달아 보고가 들어온다. 놀은 이러한 숫자를 종합하여 궤도 계산을 위한 데이터를 정리했다. 질량이 지구의 43배라 하니 상당히 큰 행성이다. 중력이 크므로 이러한 행성에 착륙하면 우주선도 인간도 뱀이나 거북이와 같이 지면에 짓눌려 버릴 지도 모른다. 어떤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별에 착륙한 우주선이 겪은 사실인지 아닌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를 놀은 생각했다. 그러한 우주선은 엔진을 최대로 발동시켜도 행성의 표면에 찰싹 달라붙은 채 꼼짝달싹도 하지 않아 날아 올라갈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중력이 그와 같이 크지 않을 때에는 우주선만은 무사히 남게 되나 인간의 뼈는 똑똑 부러지고 만다. 그러한 운명에 빠진 탐험 대원들이 고통을 참으면서 최후의 순간에 보내온 통신은 엄청난 중력의 무서움을 말해 주고 있었다. 탠트라 호가 행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동안은 대원들이 그러한 운명에 빠질 걱정은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착륙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자기 몸의 무게를 지탱할 만큼 힘이 못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원들은 그러한 상태에 견디면서 몇 십 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모두가 이러한 장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서운 중력에 짓눌리고 적외선을 내는 태양 밑에서, 그리고 어두움의 밀도가 높은 대기 속에서 살아갈 수가 있을까? 그래도 혹시 구원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단지 그 정도의 희미한 희망만이 겨우 남아 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탠트라 호는 대기의 끄트머리에 가까운 곳을 돌고 있었다. 대원들은 이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행성을 조사했다. 그러나 철의 별에 비춰지고 있는 면은 빛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면에 비하여 훨씬 온도가 높고 게다가 정전기를 많이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주선의 강력한 레이더가 그 정전기에 방해되어 행성의 표면의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영상이 찌그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놀은 관측 스테이션을 투하하기로 했다. 이윽고 스테이션의 자동 장치가 보고해 왔다. 놀랍게도 대기의 하층부에는 산소와 수증기가 있고 기온은 섭씨 12도였다. 이것으로 보면 지구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기압은 지구의 1.41배였다. "이렇다면 생활할 수 있다!" 생물학자는 대장에게 관측 스테이션에서의 보고를 전하고 약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 수 있을 정도라면 아마도 다른 생물이 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탠트라 호가 15바퀴 째로 들어가려고 할 때 강력한 텔레비전 송신기를 비치한 두 번째 자동 스테이션이 투하되었다. 그러나 그 자동 스테이션은 어떻게 된 셈인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신호를 보내오지 않는 것이었다.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여성 지질학자는 안타까운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텔레비전 스테이션을 투하하기 전에 레이더로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하자." 탠트라 호는 희미한 육지며 바다의 윤곽을 레이더로 찾으면서 행성의 상공을 날아갔다. 넓고 넓은 평원이 적도 근처에서 튀어나와 넓은 바다를 둘로 갈라놓은 것 같은 모양이 레이더의 영사막에 나타났다. 탠트라 호는 지향성 전파를 내면서 폭 2,000킬로미터의 지대를 조사했다. 갑자기 영사막에 밝은 점이 반짝 빛났다. "금속입니다! 광석이 표면에 나와 있어요!" 지질학자가 외쳤다. 놀은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지금 반짝거린 것은 순간적인 것이었는데 내게는 그 형태가 확실한 것 같이 보였다. 그건 큰 금속 덩어리 즉 운석이기나 아니면........." "우주선!" 니자와 생물학자가 동시에 외쳤다. "시시하다!" 히스는 두 사람을 깔보듯이 말했다. "아니, 정말 우주선일지도 모른다." 놀이 히스에게 답했다. 히스도 지지 않았다. "말다툼을 해 봤자 소용없다. 어쨌든 확인할 방법이 없으며 우리들은 착륙할 생각도 없으니까........." 그러자 놀이 말했다. "3시간 후에 다시 한 번 이 평원의 상공에 왔을 때에 확인해 보자. 그 금속제의 물체는 착륙한다면 나라도 거기를 골랐을 것이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될만한 장소였어. 그 지점에 텔레비전 스테이션을 투하하기로 하자."   미지의 행성에 착륙   놀 대장의 계략은 잘 되었다. 탠트라 호는 3시간이 걸려 어두운 행성을 다시 한 바퀴 돌았다. 탠트라 호가 평원에 가까이 가자 이번에는 텔레비전 스테이션의 보고가 전달되어 왔다. 대원들은 밝아진 영사막을 지켜보았다. 스위치가 켜지고 텔레비전은 1,000킬로미터나 아래의 어둠 속에 있는 어떤 물체의 윤곽을 비춰 주었다. 텔레비전 스테이션의 서치라이트에 비친 낮은 낭떠러지며, 언덕이며, 골짜기가 영사막 위에 나타났다. 카메라는 그 모습을 계속 비춰 주었다. 갑자기 어뢰와 같은 모양을 한 빛나는 물체가 여럿 보였다. "우주선이다!" 대원들의 입에서는 동시에 부르짖듯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니자는 으쓱해서 히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사막은 사라지고 탠트라 호는 다시 텔레비전 스테이션에서 멀어졌다. 생물학자인 에온은 곧 전자 카메라의 필름을 현상하기 시작했다. 에온은 초조한 듯이 필름을 영사기에 걸었다. 눈에 익은 유선형의 앞쪽 부분, 넓은 뒤쪽 부분, 높은 평형 날개 ......! 틀림없이 그것은 지구의 우주선이었다. 이런 암흑의 행성에서 지구의 우주선을 만나다니! 아무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봐도 지구의 우주선이 틀림없었다. 그 우주선은 올바른 착륙의 자세를 취하고 커다란 받침대를 내놓고 수평으로 누워 있었다. 보기에는 조금도 상한 데가 없는 것 같았고, 바로 이제 막 착륙한 것 같았다. 탠트라 호는 행성의 상공을 돌면서 신호를 보냈으나 그 우주선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몇 시간이 흘러갔다. 중앙 사령실에 다시 14명의 대원 전부가 모였다. 놀은 깊이 생각하고 있다가 이윽고 일어서자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결단을 내려 탠트라 호를 착륙시키자. 어쩌면 동지들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을 지도 모른다. 저 우주선은 어딘가 고장이 나서 지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저 우주선의 동지들을 구출하여 애너메존 연료를 얻으면 우리들도 도움을 받고 모두 무사히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저 우주선도 애너메존의 연료가 떨어져서 이 행성에 불시착했다면?" 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애너메존이 없어져도 행성 비행용의 이온 연료는 남아 있을 것이다. 올바른 자세로 착륙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온 연료를 얻어 다시 한 번 상승하여 궤도 비행을 하며 지구에 구원을 청하자. 잘 되면 8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무거운 행성에 착륙하는 경우의 위험과 거기서 생활할 경우의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 암흑의 세계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 진다!" 히스가 중얼거렸다. "물론 위험은 있다. 그러나 착륙할 때에 우주선을 상하지 않게만 한다면 그다지 이 행성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놀은 조종반의 레버 앞에 서서 한동안 망설이는 눈치였다. 니자는 결심한 듯이 대장의 옆에 가까이 가서 격려하듯 생긋 웃었다. "대기권 하층에 돌입하여 착륙한다!" 놀은 큰 소리를 지르며 신호의 스위치를 넣었다. 사이렌이 탠트라 호의 선내에 울려 퍼졌다. 모든 대원들은 민첩하게 제각기 자기 부서로 돌아갔다. 행성용 엔진이 울리고 탠트라 호는 미지의 행성의 표면을 향하여 다가가기 시작했다. 레이더와 적외선 반사가 영원한 암흑 세계를 더듬고 고도계의 눈금에는 '15,000미터'라는 숫자에 붉은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한 바퀴를 돌자 이 행성의 표면에는 높은 산이 없으며 화성의 언덕보다 좀 높은 정도의 고지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놀은 고도 제한 장치의 바늘을 2,000미터 낮추고, 강력한 서치라이트의 스위치를 넣었다. 아래에는 큰 바다가 펼쳐지고 해면에는 검은 파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깊이는 알 수 없다. 검게 빛나고 있는 바다의 물이 거무죽죽한 색으로 변했다. 육지가 시작된 것이다. 서치라이트의 빛이 누런 모래밭이며, 가파르지 않은 언덕의 잿빛 바위를 비추기 시작했다. 탠트라 호는 행성의 대륙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조종하고 있는 놀은 드디어 그 평원을 발견했다. 그 순간 왼쪽의 레이더의 신호가 울렸다. 탠트라 호는 서치라이트를 그쪽으로 돌렸다. 제 1급 우주선의 모습이 빛을 받고 탠트라 호에서 확실히 보였다. 마치 새로운 우주선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주선의 가까이에는 임시 건물도 없었고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탠트라 호가 가까이 가는 데도 그 우주선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죽은 것처럼 가만히 어두움 속에 누워 있었다. 서치라이트의 빛은 우주선보다 더 앞쪽에서 파란 거울 같은 것에 부딪쳐 반짝 빛났다. 그것은 거대한 원반이었다. 원반은 검은 흙 속에 가장 자리의 일부가 덮여서 기울어진 채로 서 있었다. 순간 원반의 저쪽에 낭떠러지처럼 서 있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러나 그 저 쪽은 캄캄했다. 그 앞쪽은 절벽이나 경사가 져 있는 것 같았다. 귀를 찢는 것 같은 사이렌 소리가 탠트라 호의 선체를 뒤흔들었다. 발견된 우주선에 될 수 있는 한 가까이 착륙하려고 생각한 놀이 경고로 사이렌의 스위치를 눌렀던 것이었다. 착륙 지점에서 반경 약 1,000미터 내의 위험 지대에 혹시 사람이라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행성용 엔진이 높은 소리와 함께 불기둥을 내뿜었다. 영사막에 새빨갛게 탄 모래 연기가 나타났다. 이 때 선실의 바닥이 쑥 치솟더니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좌석이 소리도 없이 돌아서 수평의 위치로 바꿔졌다. 큰 받침대가 탠트라 호의 선체에서 내밀어지더니 행성의 대지에 닿았다. 커다란 충격이 대원들의 몸에 전해졌다. 탠트라 호는 머리 부분을 흔들면서 엔진을 완전히 멈추고 정지했다. 놀은 손을 내밀어 받침대를 끌어넣기 위해 레버를 당겼다. 탠트라 호는 조금씩 머리 부분을 땅위로 기울어지게 하여 수평의 위치로 되돌아 왔다. 착륙은 무사히 끝났다.   사람 없는 파르스 호   착륙의 충격에 대원들은 마치 무거운 병에라도 걸렸던 것처럼 한 동안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생물학자인 에온이 공기를 표본으로 분석을 해 보았다. "호흡하기에 별 지장이 없을 것 같군요. 곧 현미경 검사를 해 보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주복을 입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에는 검출할 수 없는 바이러스가 있을 지도 모르잖아?" 놀 대장은 착륙용 좌석의 벨트를 벗기면서 생물학자에게 말했다. 출입문에는 이미 가벼운 우주복과 비행용의 기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기계는 가죽으로 싼 강철의 뼈대에 전기 모터와 용수철을 붙인 것인데 이것을 우주복 위에 입으면 강한 중력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 우주 공간을 6년 동안이나 헤맨 뒤이므로 대원들은 모두 조금이라도 빨리 땅에 발을 디디고 싶어 가슴이 뛰고 있었다. 케이와 히스, 잉그리드, 여의사 루마와 두 명의 기계 기사가 탠트라 호 안에 머물며 무선기와 서치라이트와 그 외의 기계를 관리하게 되었다. 놀 대장 이하 8명은 출입문의 에어록에 모여서 기다렸다. "공기를 보내라!" 대장 놀이 두터운 벽 저쪽에 남아 있는 대원에게 명령했다. 에어록 안의 기압이 바깥 기압보다 훨씬 높아졌을 때 겨우 밀폐되었던 문이 열렸다. 대원들은 마치 공기의 압력 때문에 밀려서 나가게되는 식으로 밖으로 밀려 나갔다. 공기의 압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의 유해물이 선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선내에 남아 있는 대원들은 얼른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서치라이트를 그들의 앞쪽을 향해 비춰 주었다. 대원들은 그 빛 속을 자기 몸의 무게를 간신히 지탱하면서 보행기 용수철의 도움을 받으며 비틀거리면서 겨우 나아갔다. 목적하는 우주선까지의 거리는 1킬로미터 정도였다. 대원들은 일초라도 빨리 도착하려는 마음만 앞섰지 몸은 거북이처럼 느릴 뿐이었다. 게다가 돌 투성이의 울퉁불퉁한 땅이었다. 우주복을 입고 그 위에 보행기를 걸친 무거운 몸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것으로서는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라도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습기가 많은 두터운 공기를 통하여 하늘의 별은 창백하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위는 캄캄한 어둠 속이므로 서치라이트에 비치는 우주선의 모습은 특히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선체의 두터운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틀림없이 이 우주선은 우주 공간을 오랫동안 헤매었을 것이 틀림없다. "저걸 봐!" 에온의 외치는 소리가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려 왔다. 생물학자 에온의 손은 입을 쩍 벌린 것 같이 열려있는 우주선의 문과 거기서 내려져 있는 작은 승강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승강기 주위와 선체의 아래에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식물이었다. 1미터 가까이 자란 굵은 줄기 위에 검은 밥공기 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그 밥공기 같은 것의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나 있었다. 마치 톱니바퀴 같았다. 그것이 잎인지 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검은 톱니바퀴 같은 것을 달고 있는 식물은 가득 모여 있었는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게 했다. 커다랗게 벌어져 있는 검은 문은 그 이상으로 더 불길한 예감을 느끼게 했다. 밟힌 자리도 없이 모여 있는 식물, 열려져 있는 문, 그것은 인간이 무척 오래 전부터 여기를 왕래한 일이 없었고, 우주선을 지키지 않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놀과 에온, 니자 등 세 사람은 승강기 속에 들어가고 놀이 핸들을 돌렸다. 승강기는 약간 삐걱거리며 올라가 세 사람을 우주선의 해치까지 운반했다. 계속해서 나머지 대원들도 올라 왔다. 놀은 무선 전화로 서치라이트를 끄도록 탠트라 호에 명령했다. 서치라이트가 꺼지자 대원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모두가 헬멧 위의 회전 헤드라이트를 켰다. 해치에서 선내로 통하는 문은 닫혀져 있었으나 밀폐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약간 밀자 간단하게 열렸다. 대원들은 중앙 통로에 들어가자 망설이는 일없이 나아갔다. 그 우주선의 구조는 탠트라 호와 거의 같았으며 모양만 조금 다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우주선은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것 같군." 놀은 니자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니자는 저도 모르게 뒤돌아 서며 놀을 보았다. 어둠침침한 속에서 헬멧의 저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대장의 얼굴은 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얼굴빛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이 우주선은……?" "앗! 그 파르스 호?" 니자는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거문고자리의 베가라는 행성에서 지구로 돌아오는 도중에 조난된 그 파르스 호라는 말씀이죠?" 대원들은 우주선의 뱃머리 가까운 중앙 사령실로 들어갔다. 놀은 보행기로 이리저리 비틀거리기도 하고, 벽에 부딪치기도 하며 중앙 배전반 앞에 이르렀다. 조명 스위치는 켜진 채로 있었으나 전류는 흐르지 않고 형광 도료를 칠한 표시판이며 기호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놀은 비상등의 스위치를 발견하여 그것을 누르자 불이 켜져 희미하게 주위를 비추었다. 그 불빛으로 앞쪽 영사막 쪽에 눈길을 보낸 놀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니자는 놀의 앞을 보았다. 영사막의 옆에 지구의 말과 대우주 통신망의 공통되는 부호로 '파르스'라고 쓰여져 있지 않는가! "역시 파르스 호였구나?" 80년 전에 소식이 끊어진 우주선이 이때까지 오랫동안 암흑 성운이라고 생각되었던 이 검은 태양의 행성 위에서 발견되다니……. 파르스 호의 선내를 남김 없이 조사해도 그 승무원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만한 실마리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산소 탱크도 비어 있지 않았으며 물과 식료품도 앞으로 수 년 동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파르스 호의 승무원들의 모습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통로며, 중앙 사령실이며, 도서실 등 여기 저기에 무엇인가 전혀 알 수 없는 검은 액체 같은 것이 보였다. 도서실의 바닥에는 이상한 반점이 있었다. 무엇인가 흘러서 말라붙은 느낌이었다. 선미의 기계실에서는 전선이 비틀려 뜯겨져 있었으며 냉각기의 튼튼한 기둥이 몹시 구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선체의 다른 부분은 전혀 파손된 곳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를 파손시키는 데도 굉장히 큰 힘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파손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대원들은 지칠 때까지 이리 저리 조사를 했으나 역시 파르스 호의 승무원들이 사라진 수수께끼를 풀어낼 실마리는 어디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이 조사로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파르스 호의 연료 탱크에는 애너메존 연료와 행성 비행용의 이온 연료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이 정도의 연료가 있으면 탠트라 호가 이 무거운 행성을 떠나 지구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애너메존 연료의 큰 용기를 탠트라 호에 옮겨야하는 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중력이 지구의 3배나 되는 이 행성 위에서 그런 작업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생물학자인 에온은 중앙 사령실의 테이프 레코드에서 채 쓰지 않은 항행 일지며 테이프를 뽑아냈다. 대장과 지질학자는 금고를 열고 파르스 호의 승무원들의 관측 기록을 꺼냈다. 많은 항행일지, 천문 관측이며, 계산의 데이터를 메고 탠트라 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칠 대로 지쳐 겨우 탠트라 호에 이른 대원들은 곧 기다리고 있었던 대원들에게 둘러 싸였다. 밝은 불빛이 비치는 테이블에 앉고 보니 묘지와 같은 바깥의 어둠도, 아무도 없이 내버려진 우주선도 마치 무서운 꿈에서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다만 이 행성의 무서운 인력만이 끊임없이 모두를 괴롭혀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얼굴을 찌푸릴 정도의 고통과 계속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파르스 호에서 가지고 온 항행일지의 테이프는 전 대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곧 재생기에 걸렸다. 니자는 죽음의 우주선에서 80년 동안이나 보존된 기록에서 무엇이 나올까 하고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믿을 수 없는 일에 구원을 청하는 소리, 극한 상황에서의 비명 소리,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의 최후의 한 마디, 그런 것들이 녹음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 재생기에서 드디어 소리가 흘러 나왔다. 니자의 몸은 오싹하고 떨렸다. 그 소리는 지구로 최후의 통신을 보내고 나서 7개월이 지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설명한 것이었다. 파르스 호는 그 25년 전에 행성 베가에 가까운 우주 빙하 지대를 가로질러 갈 때에 파손되었다. 선미의 상처는 다행히 수리가 되었기 때문에 계속 날을 수가 있었는데 엔진의 미묘한 조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20년 동안 필사의 노력을 계속 했으나 그 보람도 없이 끝내 엔진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파르스 호는 관성 비행(물체가 환경의 변화나 외력의 작용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운동의 상태를 언제까지나 지속하려는 성질)을 이용하여 비행하는 것을 계속 했다. 그러나 파르스 호는 알려지지 않고 있던 중력권에 들어가서 속도를 잃고 말았다. 파르스 호는 그때에 최초의 통신을 지구에 보냈다. 파르스 호는 철의 별의 중력권에 끌려들어 갔던 것이다. 그 후로는 이 탠트라 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다만 탠트라 호의 경우는 애너메존 연료가 없었던 때문이었지만 파르스 호는 엔진이 고장 나는 바람에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파르스 호는 애너메존 엔진만이 아니라 행성 비행용의 이온 엔진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행성의 위성조차 될 수가 없었다. 파르스 호는 다행히도 무사히 이 행성의 바다에 가까운 낮은 땅에 착륙하게 되었다. 승무원들은 엔진의 수리, 지구로의 송신, 미지의 행성의 조사라는 세 가지 일을 곧 착수했다. 그런데 그때 기괴한 사건이 일어났다. 송신용 로켓을 발사할 발사대의 조립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승무원이 한 사람 또 한 사람 계속 행방 불명이 되어 가는 것이었다. 즉시 수색대를 보냈는데 그 사람들마저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행성의 조사는 일단 중지하고 발사대의 건설을 위해 우주선 밖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전원이 함께 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작업 중에 휴식을 해야 할 때에는 우주선으로 되돌아와 엄중히 밀폐하고 거기서 휴식을 취했다. 송신용 로켓을 발사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기 때문에 파르스 호의 가까이에 있는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우주선의 조사도 뒤로 돌려졌다. 그 우주선은 계속 저 위치에 있어 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니자는 놀 대장 쪽을 보았다. 그러자 놀도 니자가 말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스 호의 승무원 14명중에서 남은 것은 8명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책을 취한 뒤부터는 승무원이 갑자기 행방 불명이 되는 일은 없어졌다. 여기서 테이프에 녹음되어 있는 일지는 거의 3일 동안이나 끊어져 있었다. 그 뒤로 이번에는 젊은 여자의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신우주 기원 323년 7월 12일. 살아 남은 우리들 전대원은 송신용 로켓의 발사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우리들은 정확한 계산에 기초하여 로켓의 발사를........." 소리는 여기서 끊어지고 한참 후에 다시 들렸다. 녹음기에 말하고 있는 여자가 뒤를 돌아 본 모양일 것이다. 이번에는 목소리는 아까보다 약했다. "스위치를 넣습니다. 앗......!" 재생기는 말이 없어지고 테이프만이 소리 없는 그대로 감겨지고 있었다. 탠트라 호의 대원들은 불안한 듯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무엇인가 있었어요!" 잉그리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짓눌린 것 같은 빠른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만 구원됐습니다. 라이크는 늦어서 타지 못했습니다. 승강기에...... 문을 닫을 사이도 없이...... 제 2의 문만이...... 기계 기사 사후 쿠턴이 엔진 쪽으로 기어갔습니다. 행성용 엔진으로 응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침묵이 또 한동안 계속되고 나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쿠턴은 늦었던 모양입니다. 나 혼자 남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예상은 서 있습니다. 그 전에 한 마디........." 그 여자의 소리는 크고 힘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파르스 호를 발견하는 일이 있다면 결코 우주선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 여자는 여기서 길게 한숨을 쉬고 작은 소리로 자기에게 들려주듯이 덧붙이는 것이었다. "쿠턴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 오지 않고서는......... 자세한 것은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위치의 소리가 났다. 테이프는 자꾸만 돌아갔는데 끝내 최후까지 그 이상의 설명은 들려 오지 않았다. 그 여자도 역시 끝내 되돌아오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곤란한 작업   놀 대장은 재생기의 스위치를 끊고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조난된 우리들의 동지들이 우리들을 도와주려고 하고 있다. 다른 행성에서 이 별을 찾아오게 되면 여기서 생명에 관계되는 위험에 부딪친다는 경고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위험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주선 밖에 나가지 않으면 애너메존 연료는 보급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고 케이가 물었다. "물론이다. 우주선 밖에 나가서 작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고가 있는 이상 필요한 조치는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다." "아아, 알았습니다. 작업장 주위에다 방어 배리어를 치는 거지요." 생물학자 에온이 말했다. "주위만으로는 안 돼요. 두 척의 우주선 사이의 길에도 치지 않으면 ........." 히스가 말했다. "물론이다. 상대가 어떤 놈인지 알지 못하니까 방사선과 전류의 이중 방어 배리어(SF소설에 자주 나오는 방어용 병기. 전류나 또는 방사선의 일종인 스크린을 쳐 적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던가 미사일이나 광선포를 방어한다던가 하는 장치)를 친다. 케이블을 끌어 빛의 통로를 만든다." 그때, 지질학자인 비너가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쳐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여의사와 천문학자가 중력과 싸우면서 정신을 잃은 비너에게 가까이 갔다. 여의사 루마가 진찰하고 말했다. "큰 일은 없습니다. 충격과 긴장이 계속된 때문이겠지요. 좀 도와 주셔요. 이 분을 침대에 옮기지 않고서는......." 그러나 그러한 간단한 일도 만약에 기계 기사 타론이 자동 운반차를 사용할 것을 생각해 내지 못했더라면 큰 중력 때문에 좀처럼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조사를 하고 돌아온 다른 대원도 그 차로 저마다의 침대에 운반되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무거운 중력에 익숙하지 않은 대원들의 몸은 긴장이 계속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된다. 휴식이 끝나자 연결된 두 대의 자동 조종차가 두 척의 우주선 사이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길 양쪽에는 굵은 케이블이 처졌다. 두 개의 우주선 옆에 두터운 특수 유리로 된 감시탑이 세워지고 감시원이 안에 앉아 때때로 강력한 방사선을 주위 일대에 보내고 있었다. 작업 중에는 강한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대원들은 파르스 호의 중앙 해치를 열고 애너메존 연료 탱크 4개와 이온 연료의 실린더 30개를 운반차에 내릴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그것을 탠트라 호에 싣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탠트라 호의 연료 해치를 열 수가 없다. 그러한 일을 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행성의 생물이 만들어내는, 인간에게는 매우 유해한 것이 우주선 속에 들어 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해치를 열 준비만을 해 놓고 파르스 호에 남아 있는 압축 공기의 용기를 전부 운반해 왔다. 해치를 열어 연료 탱크를 싣기까지 계속해서 압축 공기가 뿜어져 나오도록 했다. 또 방어용의 방사선도 준비되었다. 대원들은 무거운 보행기에 의지해서 하는 작업에 점차 익숙해졌다. 이 행성에 착륙하여 강한 중력 때문에 아프기 시작한 뼈의 마디마디도 점점 편해졌다. 지구상의 시간으로 계산하여 5일이 지나갔다. 기괴한 생물이 나타날 기미는 아직 없었다. 기온이 갑자기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점점 강해졌다. 검은 태양이 가라앉고 밤이 찾아 온 것이다. 온도가 처음에는 그다지 낮지 않았으나 한밤중이 가까워지면서 굉장히 낮아졌다. 우주복의 온도를 거기에 맞춰 높이면서 작업은 계속 되었다. 최초의 탱크를 파르스 호에서 내려 탠트라 호까지 전부 운반해 놓았는데 벌써 새벽이 되었고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주선이 삐걱삐걱 흔들릴 정도로 무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돌풍이 몰아쳐 고압 케이블을 끊어 놓자 파란 불꽃이 튀었다. 파르스 호에 달아 놓은 서치라이트가 촛불처럼 꺼지고 말았다. 놀은 어쩔 수 없이 작업을 일단 중지시키고 우주선 안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장님, 저쪽엔 감시원이 남아 있습니다!" 지질학자 비너가 아득히 보이는 감시탑의 불빛 쪽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알고 있어. 저기에는 니자도 있어. 내가 곧 가보겠다." "그러나 전류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수상한 생물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비너는 걱정하며 주의를 했다. "아니, 이런 폭풍에야 놈들도 나오지 못해. 폭풍이 가라앉지 않는 동안은 안심이다. 게다가 여기서는 나의 몸도 꽤 무거워졌으니까 땅 위를 기어가면 바람에 날릴 걱정은 없을 거다. 실은 저쪽 감시탑에 가서 놈들을 기다려서 해치우려고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대장님, 저도 데리고 가주십시오!" 생물학자인 에온이 열을 내어 놀에게 부탁했다. "좋아. 그런데 자네만이야." 두 사람은 돌풍에 말려들지 않도록 바위 틈새며 땅 위에 나온 것들을 틀어잡고 기어갔다. 바람은 두 사람을 땅에서 떼어놓으려는 듯이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수수께끼의 우주선   니자는 두 사람의 도착을 기다렸다는 듯이 감시탑의 해치를 열었다. 놀 대장과 에온은 한 사람씩 탑 속으로 들어갔다. 안은 따뜻하고 조용했다. 감시탑은 폭풍을 생각하고 튼튼히 만들어 놓았는데도 두 사람이 일부러 와준 것을 니자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러한 행성에서 홀로 폭풍이 몰아치는 밤을 지내다니, 정말 쓸쓸했어요." 놀은 감시탑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탠트라 호에 연락했다. 탠트라 호에서 비추고 있던 서치라이트가 꺼지자 이 암흑의 행성을 비추고 있는 것은 감시탑 안의 약한 불빛뿐이었다. 폭풍은 점점 심해가고, 회오리바람이 지날 때마다 대지가 흔들렸다. 세 사람 모두 두터운 우주복을 입고 있어서 좁은 감시탑 안은 더 좁았다. "한잠 자지 않겠어?" 놀이 말했다. "검은 태양이 올라올 때까지는 아직 12시간이나 있어야 된다. 그후가 아니면 폭풍은 그치지 않으며 따뜻해지지도 않으니까." 니자와 에온은 기뻐하며 찬성했다. 세 사람은 지구의 3배나 되는 중력에 눌리며 더군다나 우주복에 졸아든 채로 웅크리고 잤다. 니자는 때때로 눈을 떠, 탠트라 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잠을 자는 것이었다. 폭풍은 점점 약해지고, 조용해졌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 나타나기 꼭 좋을 때가 된 것 같았었다. 세 사람 모두 각성제를 먹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저, 계속 걱정이 되는 일이 있어요." 니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저 딴 세계에서 온 원반형의 우주선 말이어요. 대체 어디서 어떻게 하여 온 걸까요?" "그에 대해선 나 역시 걱정하고 있어." 놀이 대답했다. "단지 저 우주선이 여기 온 이유는 확실해. 역시 철의 별 때문이야. 이 넓은 우주에는 이와 같은 철의 별이나 우주선을 끌어들이는 행성이 몇 개가 있다는 것은 대 우주 통신망으로 알고 있었어. 다만 우리들의 태양계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은 몰랐어. 우리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야." "대장님은 그 원반형 우주선을 조사할 작정입니까?" "물론 조사하고 말고. 지구에 가까운 행성일지라도 저런 원반형 우주선을 알려지지 않고 있어. 아마 어딘가 먼 곳에서 온 것일 거야. 비행 도중 사고를 일으켜 승무원들은 모조리 죽고 그대로 몇 천년을 은하계의 속을 헤매어 온 것이 틀림없어. 우리들이 그 원반에서 무엇인가 좋은 자료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대 우주 통신망을 통하여 들어오는 통신의 의미를 더 잘 알게 될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파르스 호의 연료의 적재가 끝나면 곧 그 원반형 우주선의 조사에 착수해보자." "그러나 파르스 호를 조사할 때에는 몇 시간으로 끝났어요." "아니, 난 입체 망원경으로 그 원반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그런데 그 원반형 우주선에는 창이나 입구 같은 것을 어디에서고 찾아낼 수가 없어. 어떤 우주선에도 우주에의 모든 조건에 견딜 수 있게 충분한 방어 설비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뜨리고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매우 어렵다. 우리의 탠트라 호를 생각해도 그렇다. 탠트라 호를 밀폐하면 특수 구조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선체를 부수고 들어가는 일이 그렇게 간단히 된다고 생각해? 더욱이 우리들이 모르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진 우주선이라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수수께끼를 풀어보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놀은 말하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바람 소리가 조금도 마이크로폰에 울려오지 않았다.   기괴한 생물   그때 무엇인가 와글거리는 소리가 밖에서 감시탑의 벽을 통하여 들려 왔다. 놀 대장은 한 손을 흔들어 두 사람에게 알렸다. 니자는 그 의미를 곧 깨닫고 불을 켰다. 바로 옆에서 코를 잡혀도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된 탑 안은 마치 큰 바다 밑바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투명한 특수 유리의 천장 문을 통하여 붉고 작은 불이 깜박거리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러한 작은 불은 확 타올라 검붉은 빛과 초록빛을 발산하는 별처럼 되었다가 사라지는가 하면 또 나타나는 것이었다. 작은 별은 쇠사슬처럼 한 줄로 이어져 구부러지기도 하고 둥글게 되기도 하고 8자형이 되기도 하면서 다이아몬드와 같이 단단하고 매끈거리는 특수 유리의 천장 창문 위를 소리도 없이 움직이며 돌아다녔다. 탑 안에 있는 세 사람은 온 몸의 신경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심한 아픔을 느꼈다. 마치 붉은 별의 빛이 바늘처럼 몸에 꽂혀진 것 같았다. "니자, 전압을 높일 대로 높이고 한꺼번에 불을 켜라." 놀이 속삭였다. 감시탑은 밝고 푸른빛을 어둠 속으로 내보냈다. 세 사람은 눈이 부셔서 전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니자와 놀 대장은 순간 묘한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탑의 오른쪽 어둠만이 곧 사라지지 않고 크고 검은 그림자를 남겼다. 그 그림자는 곤충의 더듬이와 같은 것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앗 하는 사이에 더듬이 같은 것을 집어넣고 감시탑의 빛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착각이었을까? 아니, 그럴 수가 없어요. 확실히 언뜻 보인 걸요." 니자가 주장했다. 놀 대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건 생물임에 틀림없어. 우리들을 공격하려고 하는 거야!" 놀은 외쳤다. "이 행성은 암흑이라고는 해도, 우리들에게만 암흑인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에게는 적외선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리므로 대장님, 이러한 장소에서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노란색이나 파란색의 빛은 여기의 생물에 비하여 매우 강한 작용을 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 반응이 앗 하는 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조난 뒤 파르스 호의 승무원들이 놈들에게 습격되었을 때 거기를 비춰도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겠지요. 틀림없어요. 겨우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에는 이미 늦어 버렸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놀의 생각에 찬성한 에온은 생물학자로서의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좋아. 다시 한 번 시험해 보자. 놈들이 가까이 오는 것은 싫지만........." 니자는 조명을 껐다. 세 사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이 행성의 생물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놈들의 무기는 대체 무엇일까? 놈들이 가까이 오면 유리창이나 우주복을 통하여 그것이 우리들에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에너지일까?" 생물학자는 자꾸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너지에는 종류가 그다지 많지 않아. 그건 틀림없이 전자 에너지다. 그 생물은 우리들의 신경에 작용하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더듬이가 이쪽의 몸에 직접 닿으면 큰일이 난다." 놀은 이렇게 말하고 목을 움츠렸다. 그때 니자는 불그스름한 작은 불이 줄지어 세 방향에서 빠른 속도로 가까이 오는 것을 깨닫고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굉장히 많이 왔군요! 천장의 창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에온이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그렇다. 모두 조명등의 빛과는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각자 자기와 정면 쪽을 감시하기로 하자. 니자, 스위치를 부탁해!" 조명이 비치자 그 순간 감시탑을 향해 밀려 온 생물들은 얼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 사람 모두 그 생물의 세밀한 곳까지 분별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이 본 것을 종합하면 이 기괴한 생물의 대체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름모꼴을 한 납작한 큰 해파리 같은 것이며, 아래쪽에 술(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 같은 더듬이가 가득 나 있었고, 땅에서 그다지 높지 않은 곳을 둥둥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더듬이는 1미터나 될까? 몸의 크기에 비하면 짧았다. 그러나 마름모꼴의 뾰족한 쪽에는 2개씩 그것보다 훨씬 긴 더듬이가 붙어 있었다. 생물학자 에온은 더듬이의 뿌리 쪽에 큰 자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자루 속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더듬이에서 별과 같은 불꽃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대장님, 조명등을 계속 켰다 껐다하시는데 혹시 뭐가 있었어요?" 갑자기 잉그리드의 아름다운 소리가 울렸다.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폭풍이 그쳤으므로 여기서는 이제 작업에 착수하기로 하겠습니다. 이제 곧 그쪽으로 갈 테니까요." "무슨 소리! 이쪽은 굉장한 위험에 부딪히고 있어. 곧 모두를 집합시켜!" 놀은 다급한 소리로 명령했다. 놀은 탠트라 호에 남아 있는 대원들에게 감시탑에서 세 사람이 본 생물 이야기를 전했다. 의논한 결과 행성용 엔진의 일부를 운반차에 실어 운반하기로 했다. 이 엔진의 열로 주위를 불태워 버릴 계획이었다. 길이 300미터의 불길이 엔진에서 뿜어 나와 돌이 많은 지면을 휩쓸며 주위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30분도 걸리지 않은 동안에 대원들은 절단된 케이블을 수리하고 방어 배리어를 쳐 놓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행성의 밤이 되기 전에 애너메존 연료를 옮겨 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원들이 말로서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필사적으로 일하였으므로 겨우 싣는 작업을 끝낼 수가 있었다. 모두 지쳐 버린 몸을 간신히 움직여 탠트라 호 속으로 들어갔다. 마이크로폰을 통하여 우주선의 밖에서 몰아치는 엄청난 폭풍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비록 작지만 불빛이 밝게 비치고 있어 밖의 어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우주선 속의 세계가 한층 좋게 생각되었다.   괴물 생포 작전   잉그리드와 루마가 입체 영사막을 펼쳤다. 이제부터 지구의 모습을 영사막에 비추어 지쳐 있는 대원들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골라온 필름은 인도양의 넓고 넓은 바닷가였다. 밝게 빛나는 파란 물결이 대원들의 발아래서 물보라를 일으켰다. 니자는 옆에 앉아 있는 생물학자인 에온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에온은 우주 공간의 아득한 저편에 있는 그리운 지구의 일을 상상하고 있었다. 니자가 그 에온에게 말을 걸었다. "이 암흑과 폭풍, 거기다가 저 기분 나쁜 전기 해파리를 만난 후에 지구를 보니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정말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저 해파리란 놈을 사로잡아야겠어. 지금 어떻게 하면 그놈을 사로잡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제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니자는 문득 생각해 낸 방법을 에온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비어 있는 음료수의 탱크를 이용하는 거지요. 거기에다가 자동적으로 닫히는 뚜껑을 붙여요. 그리고 무엇인가 깡통의 날고기를 한 토막 미끼로 넣어 두는 겁니다. 그 고기는 우리들의 귀중한 식량이지만 할 수 없어요. 그 검은 해파리가 먹이를 먹으려고 탱크 속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뚜껑은 닫히는 거죠. 그렇게 되면 미리 붙여 놓은 콕으로 탱크 속에 있는 이 행성의 공기를 뽑아내요. 그리고 대신 우리들이 지구에서 가져온 불활성 가스를 넣고 나서 뚜껑의 주위를 완전히 용접해 버리면 어떨까요?" "과연 그건 명안이다." 생물학자 에온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놀 대장을 비롯하여 다른 전원이 거기에 찬성했다. 지구의 9주야에 해당되는 이 행성의 긴 밤사이에 기사들이 니자의 계획에 개량을 가하여 끝내 검은 전기 해파리를 사로잡을 덫을 만들어 놓았다. 놀은 그 동안에 강력한 절단기를 만들었다. 그 절단기를 사용하여 어딘가 먼 별에서 온 그 원반형의 우주선 속에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바람이 자고 굉장한 추위가 더위로 바뀌어졌다. 지구의 9주야에 해당되는 이 행성의 캄캄한 낮이 찾아 온 것이다. 놀은 아직 남아 있는 이온 연료를 옮기는 작업 이외에도 조난된 파르스 호의 승무원들의 유물을 모아 완전히 소독하여 지구로 가지고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중요한 일은 다 끝내고, 드디어 괴물을 사로잡는 대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덫이 놓여졌다.   생물학자인 에온이 자원한 케이와 잉그리드와 함께 파르스 호의 옆에 설치한 감시탑에 들어갔다. 전류가 끊어지자 새까만 어둠이 찾아왔다. 괴물은 곧 나타났다. 네 마리였다. 생물학자인 에온은 적외선 영사막에 비친 그 네 마리의 살인 해파리의 움직임을 손에 쥔 듯이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한 마리의 괴물이 덫인 탱크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자 더듬이를 오므라뜨리고 몸을 공처럼 둥글게 하여 탱크 속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또 한 마리의 검은 괴물이 탱크 옆에 나타났다. 뒤에 온 괴물이 먼저 온 괴물을 향하여 더듬이를 뻗치는 것이었다. 불꽃이 빠른 속도로 탁탁하고 퉁기었다. 적외선 영사막으로 보자 마치 녹색의 번개같았다. 처음의 괴물은 뒤로 물러섰다. 그때에 둘째 번의 괴물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몸을 둥글게 하여 탱크 속에 떨어져 들어갔다. 에온은 곧 스위치의 단추를 누르려고 했다. "잠깐!" 이렇게 외치며 케이가 에온의 손을 눌렀다. 첫 번째의 괴물도 뒤를 쫓아 똑같이 몸을 줄이고 탱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탱크 속에는 이렇게 하여 두 마리의 괴물이 들어갔다. 그렇게 큰놈이 이렇게 작게 줄어들다니! 그것을 본 에온이 단추를 누르자 탱크의 뚜껑은 쾅 하고 닫혔다. 그러자 즉시 대여섯 마리의 괴물이 탱크의 주위에 달라붙었다. 에온은 곧 조명을 넣고 외쳤다. "탠트라 호, 방어 바리어의 전원 스위치를 넣어 주시오!" 그 순간 괴물들의 모습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두 마리만은 보기 좋게 탱크 속에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밖에 나온 에온은 탱크에 가까이 가서 저도 모르게 뚜껑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러자 즉시로 신경에 침이 꽂히는 것 같은 아픔이 전해와 에온은 비명을 질렀다. 에온의 왼쪽 손은 마비가 되어 버렸다. 기계 기사인 타론이 내열복을 입고서야 겨우 탱크의 뚜껑을 용접하고 속을 순수한 불활성 가스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콕도 용접하고 탱크를 절연 물질로 싸서 탠트라 호로 운반했다. 기괴한 이 행성의 생물을 격파하고 두 마리의 괴물을 사로잡을 수는 있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큰 희생이 있었다. 의사가 아무리 열심히 치료를 해도 생물작자 에온의 마비된 손은 전혀 낫지 않았다.   또 다른 괴물   수수께끼의 원반형 우주선에로의 원정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생물학자인 에온은 마비된 한쪽 손이 매우 아프기는 하지만 이 원정에는 꼭 참가하고 싶다고 해서 놀 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놀은 끝내 에온의 애원에 못 이겨 원반형 우주선의 조사에 에온도 참가하게 했다. 어딘가 먼 세계에서 온 그 원반형 우주선은 모두가 예상한 것보다 더 먼 지점에 있었다. 서치라이트의 빛으로서는 아득히 먼 쪽에 희미하게만 보이기 때문에 모두들 원반의 크기를 실제보다 작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옆에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원반형 우주선은 직경이 350미터 이상이나 되는 매우 거대한 우주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까지 방어 배리어를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파르스 호에서 케이블을 풀어서 그것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수수께끼의 우주선은 우뚝 선 낭떠러지처럼 머리 위에 높이 솟아 있어 그 위쪽은 어두운 하늘에 들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새까만 구름이 끼어 서치라이트의 빛도 그 상부에는 이르지 못했다. 우주선의 동체는 녹색의 물질로 두껍게 덮여 있었다. 두께가 1미터 정도나 되는 그 녹색의 물질은 이쪽 저쪽 금이 가서 그 사이로 선명한 하늘색의 금속이 엿보였다. 원반형 우주선이 파르스 호를 향하고 있는 쪽에는 직경 15미터, 높이 10미터 가량의 소용돌이 모양의 축 같은 것이 내밀어져 있었다. 그 반대쪽은 마치 지옥의 밑바닥 같은 짙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으나 거기는 더 불룩한 것 같았다. 두께 20미터의 원반에 둥근 것의 일부를 붙인 모양으로 거기에도 소용돌이형의 긴 축 같은 것이 내밀어져 있었다. 이 거대한 원반은 땅 속 깊이 들어가 있으며, 주위의 돌이 녹아서 굳어진 것처럼 되어 있었다. 대원들은 출입구나 해치 같은 것이 없는가 하고 찾아보았으나 끝내 그러한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이 원반형 우주선의 금속의 벽에는 빈틈이 하나도 없었다. 놀은 끝내 결심해 버렸다. "좋다. 그 절단기를 사용하자. 그걸로 소용돌이형의 축 앞에 구멍을 뚫어보자." 그 절단기는 모두가 그 검은 전기 해파리를 잡을 덫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 놀이 궁리한 것이었다. "이것이 있으면 아마 어떤 우주선의 벽도 구멍이 뚫릴 것이다. 그 축에는 우주선 안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먼 우주의 어딘가 에서 온 이 우주선의 속에는 승무원들이 사용하고 있던 일용품이 모조리 그대로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대원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원반의 뒷면에 나와 있는 소용돌이처럼 생긴 축의 앞부분은 땅 위와 거의 닿는 곳에 있었다. 대원들은 거기까지 서치라이트와 고압선을 끌고 갔다. 원반에 닿아 반사된 서치라이트의 파란빛이 주위의 .평원에 뽀얀 안개처럼 펼쳐진다. 그 빛은 평원 끝에서 무엇인가 잘 알 수 없는 검고 큰 것에 부딪쳤다. 아마 그것은 절벽인 것 같았다. 그 앞에 밑바닥이 없는 어둠이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원반의 축에 구멍을 뚫는 작업은 나와 케이와 둘이서만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열과 방사선을 막는 성능이 좋은 우주복을 입고 있으니까 좋으나, 당신들은 생물 방어 우주복 밖에 입고 있지 않으니까 우리를 보고만 있으면 된다." 놀은 여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엇인가 잘 알 수 없으나 머리 속을 스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놀은 인간으로서의 의지의 힘을 빼앗겨 마치 자기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놀은 땀방울을 흘리면서 큰 입을 벌리고 있는 밑바닥이 없는 어둠 속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니자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우주복의 헬멧의 이어폰에서 울려온 니자의 비명에 놀은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와 멈춰 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다시 암흑의 힘에 끌리고 있는 것처럼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케이와 에온은 서치라이트의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서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어느새 놀 대장과 함께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때때로 서서 열심히 자기 자신과 싸우는 모양이었다. 그때 세 사람이 가는 쪽의 안개가 낀 암흑 속에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이 나타났다. "앗!" 니자는 곧 그것을 눈치 채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소리를 칠 수 없었다. 꿈틀거리는 그 검은 그림자는 입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이미 보아 온 그 해파리의 무리는 아니었다. 검은 십자가라고 하면 좋을지......... 폭이 넓은 팔을 펴고 그 십자가의 세 개의 팔 끝에 렌즈와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그 렌즈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서치라이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발은 암흑의 골짜기 속으로 이어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놀은 다른 두 사람보다 먼저 빨리 앞서 가고 그 기괴한 생물에서 100보 정도 가까이 가서 쓰러졌다. 멍하니 서서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대원들이 대장의 생명에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늦었고 검은 십자가의 높이는 쳐놓은 고압선보다 훨씬 높았다. 검은 십자가는 식물의 줄기처럼 점점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제라도 놀을 습격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니자가 당하다 "대장님, 위험해요!" 니자는 필사적인 힘을 짜내어 절단기를 들고 전류를 넣었다. 정신없이 뛰어나간 니자는 놀 대장을 감싸주듯이 했다. 그 순간 검은 십자가의 세 개의 팔 끝에서 니자를 향하여 번개같은 빛이 날아왔다. 니자는 두 팔을 벌리고 대장의 몸 위에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는 바람에 니자의 손에서 떨어진 절단기의 앞 끝이 안성맞춤으로 검은 십자가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 순간 절단기는 검은 십자가를 향해 강력한 불꽃을 발사했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은 검은 십자가는 벌벌 떨면서, 뒤로 나자빠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암흑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순간 놀 대장과 케이와 에온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세 사람은 서둘러서 니자를 일으키자 곧 원반의 뒤로 물러섰다. 역시 제 정신으로 돌아온 다른 대원들은 그 사이에 행성용 엔진을 조금 뜯어 고쳐 대포처럼 만들어 끌어 내왔다. 놀은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심한 분노에 차서 대포를 암흑 속을 향해 쏘아댔다. 그리고 나서 주위의 지면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생물학자 에온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는 니자의 옆에 몸을 구부리고 니자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우주복 속의 니자는 눈을 감은 채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대장님, 니자가 저 괴물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에온은 가까이 온 놀 대장의 모습을 보고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니자를 탠트라 호까지 운반해서 루마에게 조사를 받게 하시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놀의 소리는 보통 때와 다름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헬멧의 좁은 창으로는 대장이 어떤 얼굴로 에온에게 부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에온, 너도 루마에게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 부탁한다. 우리 9명은 여기 남아서 조사를 계속한다. 지질학자도 함께 가도록. 원반에서 탠트라 호까지의 도중에 있는 암석의 표본을 모두 모아 주기를 바란다. 이 이상 이 행성 위에서 어물어물하고 있을 수는 없다. 계속 어물대다간 전원이 당할 뿐이다!" 말을 끝내자 놀 대장은 척척 원반 쪽으로 가까이 갔다. 행성용 엔진의 대포가 앞으로 끌어내어졌다. 기계 기사가 대포를 조작하여 10분 간격으로 화염을 방사했다. 원반의 표면이 모조리 타버렸다. 놀과 케이는 원반의 소용돌이형의 축에 절단기를 들이댔다.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두터운 우주복을 통하여 들려 왔다. 절단기를 들이댄 부분의 녹색 물질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그 굳은 파편이 퉁기어 우주복에 부딪쳤다. 대포의 뒤에 있던 또 한 사람의 기사가 그 파편을 모아 상자에 넣었다. 절단기를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중에 녹색 물질의 큰 덩어리가 벗겨져 떨어지고 선명한 청색의 금속 표면이 나타나서 서치라이트의 빛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우주복을 입은 인간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케이는 녹색의 물질을 깎아 냈다. 이어 케이는 절단기를 엷은 청색의 금속에 댔다. 이윽고 청색의 금속에 깊은 틈새가 생겼다. 그런데 그 금속은 여간 두꺼운 것이 아닌 모양으로 우주선 안에까지 불길이 들어가지 않았다. 케이는 정사각형이 되도록 전압을 높이어 금속에 깊은 선을 넣어 갔다. 선의 깊이는 1미터 이상이 되었다. "좋아, 내가 하지." 케이가 지친 것을 보고 놀 대장이 말했다. 놀은 절단기를 받아 들고 정사각형의 세 번째의 한쪽을 끊어 갔다. 그때였다. 절단면이 차차 바깥쪽으로 내밀어지기 시작하지 않는가! "비켜라! 엎드려라!" 놀은 당황하며 절단기의 스위치를 끊고 뒤로 물러서면서 외쳤다. 마치 깡통의 뚜껑을 열 때처럼 두꺼운 금속의 일부가 갑자기 말려 올라갔다. 그 틈 사이로 밝은 무지갯빛과 같은 불길이 굉장한 힘으로 내뿜어졌다. 그 폭풍으로 놀 대장과 케이는 상당히 멀리까지 날리었다. 두 사람 모두 조심하기 위해 특수한 두터운 우주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살아났다. 폭발로 엷은 청색의 금속은 즉시로 녹아 겨우 고생하여 열어놓은 틈새가 또 붙어 버렸다. 고압 전선은 폭풍으로 당장에 끊어져 버렸다. 모두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뒤에서 방어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고 놀은 얼른 판단했다. 다행히 서치라이트만이 깨지지 않고 빛을 내고 있었는데 대원들은 그 빛이 닿는 곳으로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부상자는 없었다. "전원 탠트라 호로 철수한다! 필요 없는 도구나 서치라이트는 버려라!" 대원들은 급하게 운반차를 타고 탠트라 호로 되돌아왔다. 딴 세계의 우주선을 겁 없이 꿰뚫어 열려고 하여 이런 일이 생겼는데 피해가 그 정도로 적게 끝난 것만도 정말 행운이었다. 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니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주복이 그 검은 십자가의 무기의 힘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보호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생물학자 에온이 앞서 그 검은 해파리에 손이 닿았으나 목숨은 살아났으니까........." 놀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가닥 희망을 거는 것이었다. 기밀실에 들어가니 케이가 놀의 옆에 다가와서 왼쪽 어깨의 뒤를 가리켰다. 단단한 합금으로 만든 우주복의 어깨 부분이 찢어지고 파란 금속의 파편이 꽂혀 있었다. 파편은 우주복의 안쪽까지는 닿지 않았으나 그래도 뽑아 내는데 꽤 힘이 들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주복을 벗었다. 놀은 행성의 무거운 중력에 짓눌려가면서 겨우 우주선으로 들어갔다. 남아 있던 대원들은 안심된 듯이 대장을 맞이했다. 원반에서의 사고는 입체 망원경으로 자세히 보아 알고 있었으므로 조사의 결과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괴성에서의 탈출   우주선 탠트라 호 선내의 의무실에서 여의사인 루마와 생물학자 에온이 무거운 몸을 끌다시피 하면서 나왔다. 놀 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 옆으로 달려갔다. "어떤가? 니자의 상태는........." "살아는 있습니다만........." "절망인가?" "아니 지금 상태로서는 절망할 정도는 아닙니다. 의식을 잃고 잠을 자는 혼수 상태이며, 호흡수가 아주 줄어들고 있습니다. 맥박이 100초에 1회뿐인 것이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살아 있으나 이 상태는 꽤 오랫동안 계속 될 것이 예상됩니다." "니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겠지?" "예 , 그것은........." "그래, 어떤 조치를 취할 작정인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절대 안정을 계속 시킬 작정입니다. 증세가 이 이상 나빠지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므로 그대로 지구로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지구에 돌아가면 신경 전류 연구소에 입원시키면 좋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무슨 전류에 당한 것 같습니다. 니자의 우주복에 구멍이 세 곳이나 뚫어져 있으니까요." 여의사 루마는 이렇게 말했으나 문득 얼굴이 흐려졌다. "다만 걱정되는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놀은 놀라며 여의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행성에서 이륙할 때에 맥이 200초에 한 번 정도가 돼 버리면 뇌로 가는 혈액이 모자라게 되니까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절망이다!" 생물학자 에온이 슬픈 듯한 얼굴로 루마의 말을 이었다. 놀 대장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이윽고 그다지 자신 없이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산소의 양을 늘려 압력을 높인 공기 속에 니자를 들여놓으면......?" "그건 좋은 생각입니다! " 루마와 에온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곧 특별실을 만듭시다. 물론 여러 가지 예방 조치는 필요하지만 그렇다면 맥이 200초에 한 번이 되어도 걱정 없습니다." 놀은 안심했다. "그럼 니자의 병실 준비가 완료되면 곧 연락하도록. 어물어물하지 말고 이 행성에서 일 초라도 빨리 탈출하자!" 대원들은 각자 자기의 부서로 돌아갔다. 출발 신호가 높이 탠트라 호의 선내에 울렸다. 대원들은 마음을 놓고 이착륙용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거운 행성에서 날아오르는 것은 정말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조종을 잘못 하게 되면 상승을 위해 필요한 가속도가 지나치게 커져서 모두 그 압력에 눌려 죽게 될지도 모른다. 놀은 정확히 계산하여 우주선을 상승시켜 갔다. 가속도는 점점 커져 간다. 조종반 위에 놓여 있는 놀의 손은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그러나 손가락은 정확히 움직였다. 우주선 탠트라 호는 큰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짙은 어둠 속에서 맑고 검은 하늘로 점점 올라갔다. 무거운 행성은 탠트라 호를 좀처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드디어 애너메존 엔진의 스위치를 넣었다. 애너메존 엔진의 시동은 곧 탠트라 호의 선체를 뒤흔들었다. 이윽고 탠트라 호의 표면이 엷은 청색의 불길로 뒤덮이고 그 불길이 천천히 뒤로 흘러가는 것이 영사막을 통하여 보였다. 드디어 탠트라 호는 무서운 행성의 대기권을 탈출하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이 다시 보이고 탠트라 호는 행성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인간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압력도 없어져 가고 점점 편하게 되었다. 대원들은 기쁜 나머지 소파에서 뛰어 올랐다 그러나 긴장이 풀어지자 이제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래서 대원들은 교대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대장 놀과 펠, 히스, 루마네 사람만이 부서에 배치되었다. 여의사 루마는 이륙한 후에도 계속 니자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당직인 세 사람에게 루마의 기쁜 보고가 전해져 왔다. 니자의 맥박은 좀 늦어지기는 했으나 110초에 한 번으로 안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애너메존 엔진이 55시간 동안 계속 움직인 후 탠트라 호의 속도계의 바늘은 시속 9억 7천만 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주선은 24시간마다 철의 별에서 200억 킬로미터씩 멀어져 갔다. '죽음의 행성 질다와 조난한 앨그래브 호, 그리고 파르스 호의 대원들을 전멸시킨 괴물이 살고 있는 무서운 행성!‘ 그러한 사건을 계속해서 경험한 뒤였기 때문에 지금 지구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탠트라 호의 대원들의 안정된 감정과 기쁨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그와 같은 기쁨에 한 가지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14명 째의 대원인 젊은 여성 니자가 병실에서 삶과 죽음의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4개월이 흘렀다. 14명으로 된 제 37항성 탐험대를 실은 우주선 탠트라 호는 엄청난 속도와 정확하게 계산된 코스를 계속 날아갔다. 탐험 대장 놀에게 있어서 지구로 돌아가는 4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지루하다고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명의 은인인 소중한 니자를 살리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지구로 날아가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색의 금속   놀 대장은 행성을 떠난 다음 날에도 이제까지 밀려온 것을 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그 파르스 호에서 가져온 입체 필름을 보는 일이었다. 그 필름에는 그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별, 지구의 북반구의 여름 밤하늘을 장식하는 파란 별 베가가 찍혀져 있을 것이다. 80년 전, 탠트라 호가 지금 있는 곳에서 약 23광년 떨어진 우주에서 촬영된 이 필름은 그 암흑의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선 파르스 호 속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다행히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영사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주선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비쳐졌는데 탐험 대장 및 전 대원들이 모두 젊다. 남자와 여자 대원들이 잇달아 영사막에 나타났다. 이 명랑하고 활발한 젊은 대원들이 아주 옛날에 그 철의 별에서 괴물의 먹이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윽고 카메라는 거문고자리의 항성 베가와 그 행성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파란 항성 베가는 굉장한 빛을 내며 불타고 있었다. 그 별은 직경과 질량이 태양의 3배 가까이되고 짓눌린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굉장한 힘으로 자전하고 있었다. 표면의 온도가 1만 1천 도로 불그스레한 진주와 같은 색깔의 빛을 수백만 킬로미터까지 보내고 있었다. 베가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행성은 이 빛으로 완전히 휩싸여 있었는데, 어떤 우주선이라도 이 불길 속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억 킬로미터 떨어진 두 번째의 행성까지도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파르스 호의 대장은 우주선을 제 3의 행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해 가고 있었다. 그 행성은 크기가 상당히 큰 것 같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엷은 대기층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대지도 끓어오르는 불소, 해로운 일산화탄소, 밀도가 큰 불활성 가스로 되어 있어 지구의 생물은 1초도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파랗게 빛나는 태양인 베가가 행성을 계속 불태우고 있으며 빨갛고 새까만 용암이 지하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늘 높이 뿜어 올려진 재가 짙은 구름이 되고 수천 킬로미터까지 뻗치는 번개가 사방 팔방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파르스 호가 제4의 행성으로 향하는 것을 알았을 때 필름을 보고 있던 네 사람은 기대에 찬 시선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윽고 베가의 가장 바깥쪽의 행성이 영사막에 나타났다. 그 크기는 지구와 거의 같아 보였다. 파르스 호는 점점 고도를 낮추어 갔다. 혹시 살기 좋은 낙원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생물이 살 수 있는 별이기를 바라면서......... 그들은 이 최후의 행성을 조사하려고 하고 있었다. 파르스 호의 대원들도 지금 탠트라 호 속에서 그 영사막을 보는 네 사람과 같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도 헛되이 깨져버렸다. 이 네 번째의 행성도 베가의 불길에 타서 지구의 뜨거운 사막과 같은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행성의 표면이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파르스 호의 조종사가 우주선을 그 행성으로 가까이 접근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눈앞에 원뿔 모양의 모래 산이며 새까만 바위와 베가에 비치어 녹색으로 빛나는 어떤 결정 같은 것이 나타났다. 행성 위에 물이 존재하는 기미는 전혀 없었고 가장 원시적인 식물의 흔적마저도 없었다. 파란 불길에 타서 굉장한 돌풍이 불어닥치고,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지구의 동지들이 이 사실을 알면 틀림없이 실망할거야." 생물학자 에온이 중얼거렸다. "내가 베가를 동경하게 된 것은 파르스 호의 통신을 읽고 나서야……." 놀 대장은 에온을 향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마 나는 그 통신을 틀리게 해석한 모양이다." "허허, 어떻게 해석하셨는데요?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해석하지요?" "그건 간단하지. 베가의 네 개의 행성에는 생명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지구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으며 지구에 돌아가는 것만이 다시없는 행복이로다." "과연 아무도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니……." 에온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이윽고 파르스 호는 궤도에 접어들고 있었다. 파르스 호의 그 후의 운명을 기록한 필름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 자신이 체험한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직자들은 대장만을 조종석에 남겨 놓고 휴식을 위해 저마다의 방으로 돌아갔다. 놀 대장은 상자 속에서 암흑의 행성에 있는 원반형 우주선에서 가져 온 금속 덩어리를 꺼냈다. 엷은 청색의 금속 덩어리를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꽤 무거웠다. 이와 같은 금속은 지구에는 물론이고, 태양계의 다른 행성이나 태양계의 가까운 항성에도 없는 금속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놀은 어딘가 상상도 못할 만큼 먼 세계에서 온 우주선에서 얻은 금속은 원자의 구조는 달라도 지구상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질다의 멸망 보고와 함께 이 일도 지구와 대 우주 통신망에 속하는 행성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보고였다. 철의 별은 지구에 꽤 가까운 곳에 있으나 파르스 호와 탠트라 호의 경험을 참고해 특별한 장비를 갖춘 탐험대를 보내면 그 검은 십자가며 전기 해파리에게 습격되어도 그다지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반형 우주선만 해도 구멍을 뚫으려고 한 장소는 반드시 위험한 곳이었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형의 축은 우주선의 엔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좋았을 것을......... 놀은 여러 가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다시 그 날의 사건, 니자가 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기를 구원해 주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그 검은 십자가의 이상한 무기에 쓰러진 때의 일을 생각했다. 당직의 교대를 위해 히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며 놀은 일어섰으나 침실로는 가지 않고 니자의 병실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드디어 지구로   두 사람의 기사가 마치 사고라도 일어날 때와 같이 분주하게 중앙 사령실과 도서실에 지구로부터 방송을 수신하기 위해 텔레비전 영사막을 거의 13년만에 설치해놓았다. 탠트라 호는 이제 지구의 전파가 닿는 곳에 들어온 것이었다. 대원들은 영사막에 비치는 지구의 색깔과 영상, 그리고 소리로 아주 생기가 돌았다. 드디어 탠트라 호에서 보낸 전파가 지구에 닿았다. 놀 대장은 제37항성 탐험대의 성과를 간단히 전하고 신경 전류 연구소에 니자의 치료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구에서 보내 온 방송은 탐험 대원들의 모험에 감탄하는 격려의 내용으로 가득 찼다. 전 대원이 잠에서 깨어나 수신기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지구와 연락이 끊어진 것이 지구의 햇수로 13년이나 된다. 대원들은 지구에서의 뉴스에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이 한 사람 남김 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구로 끝내 돌아온 것이었다. 탠트라 호는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에 있는 지구의 우주 기지에 가까워지자 광속에 가까운 우주선의 속도를 점차로 낮추기 시작했다. 이 기지에서라면 시간 당 9억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 탠트라 호는 겨우 5시간 정도면 지구에 도착된다. 그러나 값이 비싼 애너메존 연료가 드는 거대한 우주선을 일부러 날게 할 필요가 없으므로 태양계 중에서는 이온 로켓과 광자 로켓을 사용하는 우주선을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해왕성에서 지구까지 아직 2개월이나 걸릴 것이다. 트리톤은 매우 큰 위성인데 주로 질소와 탄산가스로 된 엷은 대기층이 있었다. 놀 대장은 탠트라 호를 트리톤이 지정한 장소에 착륙시켰다. 멀리 언덕 위에 있는 검역 요양소 건물의 유리창이 빛나 보였다. 우주의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완전히 격리된 채 5주 동안 이 요양소에서 철저한 검역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5주간 사이에 숙련된 의사들이 우주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몸을 세밀하게 검사하고 무엇인가 다른 행성의 세균이 있는 지 없는 지를 조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수속을 등한히 하는 것은 전혀 용서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다른 행성에 착륙한 인간은 그곳에 고등 생물이 없었다고 해도 검역만은 절대로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 어쨌든 우주의 행성에는 인간이 면역을 가지지 않는 어떤 새로운 세균이 있는 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선 그 자체도 우주기지를 떠나 지구로 돌아오기 전에 선내의 검역을 받고 소독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양소에서 5주 동안의 생활은 우주선에서의 생활에 비하면 훨씬 편했다. 연구를 위한 실험실도 있으며 음악실도 있다. 가벼운 우주복을 입고 요양소 가까운 산에 매일 산책을 나갈 수도 있다. 또 지구와의 연락이 쉽다는 것이 좋다. 지구의 뉴스는 단지 5시간이면 닿으니까! 니자를 넣은 특수한 유리 상자는 조심스럽게 요양소에 옮겨졌다. 놀 대장과 생물학자 에온은 맨 나중에 텐트라 호에서 내렸다.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은 중력이 작기 때문에 중력을 증가시켜 주는 가중복이라는 옷을 입지 않으면 갑자기 붕 뜨게 된다. 두 사람은 가중복을 입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해왕성과 이 위성의 거리는 겨우 35만 킬로미터 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위성 트리톤의 하늘에 떠 있는 이 행성은 굉장히 큰 원반과 같다. 두 사람은 언덕의 끝에서 또 다른 중형의 우주선을 발견했다. "어허, 다른 우주선도 검역을 받고 있는 건가?" 에온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먼저 출발한 탐험대가 돌아오기까지는 다음의 탐험대를 출발시키지 않게 되어 있는데......?" 놀은 머리를 갸우뚱한다. 이윽고 두 사람은 2킬로미터를 걸어 붉은 현무암으로 된 요양소의 테라스로 올라갔다. 어두운 하늘에 작은 원반과 같은 차양이 어느 항성보다 밟게 빛나고 있었다. 생물학자 에온이 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장님, 우리들의 모험도 이걸로 끝났습니다. 우리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대장님, 모두 당신의 덕분입니다!" 놀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크게 머리를 흔들었다. "무사했다고? 니자가 있어. 그런데 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니자의 덕분이야." "그러나 니자는 반드시 회복됩니다. 여기 의사들은 우주 의학의 전문가들이니까요." "그렇기는 해도 니자가 당한 그 검은 십자가의 무기는 처음 아닌가?" "그건 아직 알지 못하지만 니자가 어떤 종류의 전류에 의한 충격으로 자율 신경에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니자의 마비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은 이상하지만 지구의 의학은 반드시 치료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겁니다. 그 행성에서 잡아온 괴물을 사용하여 실험하면 니자의 마비의 원인이 확실해질 것이며, 나의 마비된 이 손도 실험에 필요하게 될 겁니다." 그것을 듣고 놀은 부끄러웠다. 이 생물학자가 자기를 위하여 어떻게 애썼느냐 하는 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검은 해파리의 무기와 그 십자가의 괴물의 무기는 같은 종류라고 생각하나?" "절대로 틀림없을 겁니다. 이 손의 마비 상태를 봐도 압니다. 그 암흑의 행성은 바로 가까이의 검은 태양에서 열 에너지와 전기 에너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 검은 생물은 전기 에너지를 비축하여 그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바꾸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 그건 뭘까? 그래, 니자가 당하기 전에 우리들의 머리가 이상하게 되어 비틀거리며 걸었던 그 현상은........." "글쎄요. 그건 아마 다른 현상일 겁니다. 나도 그 일을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그 무서운 십자가의 괴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초단파를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초단파가 우리들의 의식을 완전히 흐트러 놓았어요. 지금은 사멸해 버렸지만 옛날 지구에는 아나콘다라는 거대한 뱀이 있었는데 먹이를 최면 상태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검은 십자가의 전파는 그보다도 더 강한 최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놀 대장은 멀리 태양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 최대의 영원한 희망이었다. 5주간의 검역 기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트리톤 우주 기지의 소장이 놀을 만나려고 요양소로 왔다. 13년에 걸치는 탠트라 호의 우주 여행도 이제 얼마 안되어 끝난다. 지구에서의 연락을 듣고 놀은 대원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오늘 즉시로 출발한다. 우리들은 이 기지에 와 있는 다른 6명을 함께 지구로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사람들의 행성간 우주선은 명왕성의 광산을 개발하기 위하여 여기에 남겨 두는 모양이다. 에온, 언젠가 본 그 우주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 6명은 보통의 행성간 우주선을 개조하여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을만한 위대한 일을 했다. 지구의 15배의 질량을 갖는 명왕성의 강한 인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두께 7,000킬로미터의 짙은 메탄의 대기층을 뚫고 그 밑바닥까지 가서 암모니아의 눈보라를 일으키며 명왕성의 주위를 비행했던 것이다. 명왕성은 두께 3,000미터의 굳은 얼음과 고체가 된 탄산가스층으로 덮여져 있다. 그것이 여기 저기서 거대한 바늘처럼 내밀고 있어서 얼마나 위험한 비행이었다는 것은 여러분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 사람들은 얼음이 그다지 두텁지 않고 표면에 높은 산이 노출되고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 산에 놀랍게도 거의 다 파괴된 건물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시대의 문명의 유물일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것은 아직 최종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며 이제부터 여러 가지로 검토될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놀랄 만한 위대한 작업이었다." 여기서 놀 대장은 한숨을 돌리고 모든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그 6명의 영웅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다." 크게 박수가 일어났다. 모든 사람 앞에 모습을 나타낸 6명은 뜻밖에도 무척 젊었다. "자아, 출발이다!"' 놀이 명령했다. 이윽고 탠트라 호는 트리톤의 우주 기지를 지나 지구로 향했다. 지구까지 가장 짧은 코스를 취할 수는 없다. 도중에 운석 무리며 수많은 소행성들이 기다리고 있어 조난되는 일이 가끔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은 애너메존 연료를 절약하면서 72일 간의 예정을 50시간으로 단축해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지구에서의 통신이 계속 탠트라 호에 보내져 온다. 지구의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철의 별의 암흑에 승리한 탐험대와 명왕성의 얼음에 승리한 탐험대에의 축하 메시지였다. 화성, 금성, 소행성에 있는 우주 기지에서의 축하 메시지도 들어 있다. "탠트라 호! 탠트라 호! 엘 호므라 공항에 착륙해주시오? " 드디어 착륙 지점이 지시되었다. 엘 호므라! 그것은 북아프리카 사막 지대에 설치된 중앙 우주 공항이다. 탠트라 호는 태양이 비쳐 따스해진 공기를 뚫고 이윽고 중앙 우주 공항에 내렸다.   해파리의 정체   놀은 신경 전류 연구소의 연구원들의 익숙한 동작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방 중앙의 테이블 위에는 특수 유리의 큰 상자가 있고 그 속에는 그 철의 별의 행성에서 사로잡은 두 마리의 검은 해파리가 들어 있는 음료수용의 탱크가 있었다. 탱크는 파이프며 전선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생물학자 에온도 마비된 한 쪽 손을 붕대로 묶어 걸고 그대로 진지한 얼굴로 자동 기록 장치를 지켜 보고 있었다. 놀이 실망한 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는구나. 4년간의 비행 도중에 죽어버린 모양인데 ........." "그렇다면 곤란해집니다. 니자나 나도 마비의 원인을 캐내는데 몇 년이 걸릴 지 몰라요." "자네는 저 해파리의 것이나 십자가의 것이나 무기는 같은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닙니다. 소장 그림 샬 박사를 비롯하여 모두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십자가는 저 행성과는 관계가 없지 않는가 하고 느꼈습니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저 괴물은 원반형 우주선의 생물일 것이라고. 그 우주선에서 나와서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야. 그리고 그 십자가는 생물이 아니라 우주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예? 그러나 역시 저 검은 십자가는 암흑의 행성 생물입니다. 틀림없이 낮은 평지 쪽에 살고 있는 놈일 겁니다. 놈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리고 해파리는 십자가보다도 가볍고 민첩하므로 우리들이 착륙한 평지에 있는 생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검은 십자가와 원반형 우주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우연일 겁니다. 즉 그 십자가의 괴물은 우주선의 저쪽에 있는 낮은 평지에 있었습니다." "과연......... 그래서 자네는 십자가와 해파리가 무기로 하고 있는 기관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대로입니다. 같은 행성에 살고 있는 생물이니까요. 같은 기관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행성의 대기에는 전기가 가득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소장은 그 행성의 생물들은 공기 속의 전기를 모으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해파리의 더듬이 속에 불꽃이 달려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괴물도 더듬이가 있었지만 불꽃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생각 못했던 것뿐이겠죠. 게다가 니자의 마비와 나의 마비는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희망도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다고?" 놀은 놀란 듯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자, 저걸 보십시오." 생물학자 에온은 이렇게 말하고 기록 장치의 바늘을 가리켰다. "탱크 속의 전극은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괴물 해파리는 전기 에너지를 가득 갖고 있던 채 탱크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탱크의 절연은 완벽하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밖으로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해파리의 전기 에너지는 이 탱크 속에 남아 있다는 건가? 그런데 미터기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즉 해파리는 죽어서 분해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그래, 누에고치와 같은 것을 만들어 들어갔다는 건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는데 형편이 좋지 않은 시기를 그렇게 하여 견디어 내는 생물이 있습니다. 저 해파리도 그러합니다. 그 행성에서는 밤이 길고, 춥고, 아침저녁으로 굉장한 폭풍이 몰아치는데 그 때 해파리는 그렇게 하여 꼼짝 않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 행성에서는 낮과 밤이 비교적 빨리 바뀌므로 해파리도 고치처럼 되어, 본래대로 되돌아가는 상태를 계속 되풀이하는 것일 겁니다. 만약에 이 예상이 틀림없다면 탱크의 해파리도 본래 대로의 무서운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간단할 것입니다." "온도나 대기나 밝기도 그 행성과 같게 하면 좋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벌써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확인해 둡시다." 에온은 두 사람의 조수와 의논을 했다. 탱크 속의 전극은 불이 켜진 작은 거울로 바꾸었다. 거울은 탱크의 밑바닥을 비추었다. 거기에는 하얀 덩어리가 두 개 뒹굴고 있었다. 표면이 꺼끌꺼끌하고 직경이 70센티미터 정도가 된다. 소장 그림 샬 박사도 예상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달려 왔다. 즉시로 실험이 시작되었다. 매직 핸드(방사성 물질이나 원자로 따위를 다룰 때에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방벽 밖이나 원거리에서 조작하는 기계적 장치)는 탱크의 뚜껑을 끊어 열었다. "온도, 중력, 압력, 전하........." 소장이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 1시간, 2시간......... "앗! 뚜껑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흥분한 조수의 소리가 울렸다. "행성과 같은 조건을 만들어라!" 소장이 명령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장은 무엇인가 실수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둡게 하지 않으면 안 돼요!" 놀이 갑자기 말했다. "그렇지! 왜 잊었을까?" '즉시 셔터가 내려졌다. 불이 꺼졌다. 숨막히는 것 같은 몇 분이 흘러갔다. 둔한 소리가 가며 탱크의 뚜껑이 열렸다. 낯익은 불꽃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해파리의 더듬이가 탱크 위에 나타난 것이다. 앗! 하는 사이에 해파리는 튀어 올라 몸을 펼치고 유리 천장에 부딪쳤다. 무수한 불꽃이_해파리의 몸에서 튀겼다. 두 번째의 해파리가 잇달아 탱크 속에서 튀어나왔다. 계기들이 해파리의 구조를 기록하고 카메라가 해파리의 움직임을 필름에 담았다. 이제는 인간이 그 자료를 정리하여 괴물의 실체를 밝히는 것뿐이었다. 이윽고 소장이 놀의 옆에 와서 말했다. "이젠 안심하고 돌아가십시오. 3,4일이면 이 괴물의 연구는 완전히 끝날 것입니다. 이제는 그 마비의 작용이 어떤 것인지 대체로 알 것 같습니다." "그럼, 니자와 에온의 치료의 방법도?" "물론입니다." 놀의 마음은 기쁨에 넘쳐 금방 날아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큰 부담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가! 놀은 겨우 그 기쁨을 억누르고 소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당신들의 연구는 이 다음의 탐험지에 크게 공헌할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성에의 탐험은 계속되는 겁니까? " "반드시 계속될 겁니다."   다시 새로운 별로   놀은 부드럽고 물기가 있는 풀을 밟으면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저쪽에 무성한 녹색의 소나무 숲이 보인다. 그 소나무 위에 밝고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날개를 편 것 같은 구름이 빛나고 있다. 놀은 삼목 나무의 향기가 풍기는 어둑어둑한 숲을 지나 이윽고 언덕으로 나왔다. 여기 신경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림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상쾌한 바람에 갖가지 꽃이 나부끼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대부분을 좁은 우주선 속에서 살아온 놀에게 있어서는 지구가 이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되기는 처음이었다. 놀의 가슴은 젊은 여성 니자를 구해주기 위하여 수고해 준 여러 사람과 지구의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무서운 검은 십자가의 더듬이에서 나온 전류 때문에 니자는 신경을 다쳐 온 몸이 마비되어 있었는데, 지구로 가지고 돌아온 해파리를 조사하여 마비의 원인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것은 신경 전류 연구소의 의학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니자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이제는 장기간의 혼수 상태에 의한 피로를 풀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게끔 휴식만 취하면 되는 것이다. 병실 쪽에서 한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오는 것이 놀의 눈에 띠었다. 그 사람은 놀의 오랜 친구로서 의학박사 실리아 웨이더라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실리아는 제 37항성 탐험대의 대장으로 참가했던 놀이 무사히 지구에 돌아오는 것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말 없이 그렇게 저의 얼굴만 바라보시지요?" 가까이 온 실리아 쪽에서 놀에게 말을 걸었다. 놀은 실리아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니자의 생명을 구해준 이 손에 감사를 드립니다. 계속 간호해 주셨다고요? 그렇게 원하던 연구 여행에 참가하는 것조차 포기하면서........." "포기했다고 까진 할 수 없어요. 텐트라 호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에 늦어졌을 뿐이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이윽고 갈림길까지 오게 됐다. "안녕! 언제 또 만나게 될까요? 새로운 우주선이 출발하기 전까지는 만나지 못할 지도........." 실리아는 우주 조사 위원회가 새로운 우주 탐험 계획을 결정했는데 거기에 놀이 다시 대장으로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니자와 함께 3개월 정도 남반구의 요양소에 가기로 되어 있지요. 꼭 놀러와 주십시오." 실리아는 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로봇 자동차가 멈춰서 실리아를 자동차에 태우고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우주 조사 위원회는 제 38항성 탐험대를 우주의 저쪽으로 내보내는 일에 대해 신중한 토의를 되풀이했다.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탐험대의 코스와 임무는 최근의 새로운 발견에 의해 다시 한 번 검토해야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새로운 합금의 가공법이 발견되어 우주선 선체의 강도가 늘어났고, 애너메존 엔진이 개량되어 한 척의 우주선이 비행할 수 있는 거리를 더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제38항성 탐험대에는 텐트라 호와 같은 형의 제1급 우주선 아텔라 호와 린다젤 호를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발견에 기초하여 최신식 4단식 로켓 수직형 원형 우주선이 완성되어 시그너스 호라고 명명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제38항성 탐험대는 두 척의 우주선으로 에리다누스 자리의 '오미크론 2'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삼중성으로 간다는 최초의 계획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첫째, 우주선 린다젤 호를 철의 별로 보낸다. 둘째, 우주선 아텔라 호를 에리다누스 자리의 오미크론 2에 보낸다. 셋째, 최신형 우주선 시그너스 호를 에리다누스 자리의 아케루나로 보낸다. 이때까지 안전을 생각하여 동시에 두 대의 탐험대를 우주에 보내는 일은 우주 조사 위원회의 이 새로운 결정은 굉장한 결단이었다. 철의 별에 탐험대를 보내게 된 것은 탠트라 호가 그 행성에서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던 원반형의 우주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놀의 보고와 그가 가지고 돌아온 선체에서 얻은 금속 파편에서 그런 형태의 우주선의 건조는 지구의 과학 수준으로는 할 수 없고 은하계 내의 다른 세계에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 원반형 우주선은 어딘가 상상도 할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에서 몇 백만 년이나 여행을 지속해 끝내 은하계의 인력에 끌리어 그 철의 별에 착륙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리하여 탐험대를 파견해서 이 우주선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에리다누스 자리의 오미크론 2라는 항성은 누런 색과 파란 색과 붉은 색의 새 개의 항성으로 된 삼중성이다. 우리들의 태양에서 16광년의 거리에 있어 생물이 전혀 없는 몇 개의 행성을 가지고 있다. 그 세 개의 항성 중 파란 색의 별은 작지만 매우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지구에서 가장 무거운 금속인 이리듐의 2,500배 정도로 무거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항성을 될 수 있는 한 가까이에서 조사하는 일이 그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그너스 호를 보내는 에리다누스 자리의 별 아케루나는 봉황새자리의 바로 옆이며, 남쪽 하늘에 높이 빛나고 있는 별이다. 우리들의 지구에서 98광년의 거리에 있으며 녹색으로 보인다. 이 별은 쌍둥이 행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두 개의 행성에는 물과 공기가 있고 지구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최근 은하계 내의 다른 행성의 탐험대의 조사로는, 이 쌍둥이 행성에는 고등 생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행성의 주민은 골격이 연약해 이 쌍둥이 행성에서 살수가 없으나 지구인은 이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원회의 보고회에서는 그 탐험대에서 보내져 온 우주 통신이 영사막에 비치고 있었다. 아케루나의 행성으로 향한 탐험대가 보내온 밝게 빛나는 녹색의 별이 비추는 그 행성의 표면의 영상이 영사막에 떠올랐다.. 아름다운 녹색으로 둘러싸인 높은 산과 산길은 골짜기와 우뚝 솟은 절벽! 공작석과 같이 아름다운 시냇물과 산맥 저쪽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호수며, 바다 쪽으로 강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윽고 둥근 언덕에 덮인 수풀이 해안까지 펼쳐지고 있는 경치가 보였다. 바다는 녹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푸르른 수목이 무성한 숲도 있었다. 숲과 숲 사이의 공지에는 작은 나무나 풀이 무성했다. 하늘에서는 황금색을 띤 녹색의 빛이 대지에 내려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위원회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이리하여 시그너스 호를 에리다누스 자리의 아케루나로 파견하는 것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어 그 대장에 다시 엘그 놀이 선출되었다.   놀과 니자가 휴양을 취하고 있는 요양소는 남극 지방에 있었다. 옛날 남극 대륙을 덮고 있었던 얼음은 과학의 힘으로 녹여져서 지금에는 4분의 1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요양소의 건물은 고대의 큰 해양 항해선을 방불케 하는 것 같은 유선형의 유리벽이 바다를 향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태양은 1시간 정도로 남쪽 언덕의 그늘에 숨어버리고 거기서 하얗게 빛나는 빛이 하늘 가득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 은색으로 빛나는 가파르지 않은 고갯길을 네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바다 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 사람들은 니자와 실리아, 그리고 놀과 얼마 전까지 대우주 통신망의 스테이션 관리국장인 달론이라는 놀의 친구이다. 실리아와 달론은 이 요양소에 문병을 왔던 것이다. 실리아가 니자에게 말했다. "어쨌든 너무나 긴 여행이어요. 우주선을 지구에 되돌아오게 하려면 당신들의 자식들이 그 뒤를 잇지 않으면 안 돼요. 니자, 당신은 그런 여행에 견뎌낼 수 있겠소?" 놀이 그 소리를 듣고 뒤에서 소리쳤다. "실리아? 혹시 당신은 달론과 미리 짠 게 아니오? 아까부터 달론은 30분이나 나를 우주 여행을 못하게 설득하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오. 우주 비행사로서의 많은 경험을 젊은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영원히 지구에 되돌아 올 수 없는 여행이라면 떠나는 것을 집어치우라고 했소." "그래서 설득은 성공했나요?" "천만에. 우주 비행의 경험은 이번 여행에서야말로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거요. 시그너스 호를 아주 멀리까지 몰고 가는 것이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놀은 밝은 하늘 저 편을 가리켰다. 실리아와 달론은 슬픈 듯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놀은 시그너스 호를 타고 에리다누스 자리의 항성 아케루나의 쌍둥이 행성으로 향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물론 니자도 함께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케루나로 간다고 해도 지구에서 아케루나까지의 거리는 70광년 가까이된다. 돌아오는 것까지 계산하면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서 140년이다. 이것은 우주선의 시간으로는 92년이 된다. 놀과 니자는 다른 20명의 승무원과 함께 그만한 세월을 시그너스 호 속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놀이나 니자의 유해는 화장이 되어 쌍둥이 행성에 묻혀지게 될 것이다. 또는 비행 도중에 죽을 지도 모른다. 그때에 유해는 관으로 사용하는 로켓에 넣어 우주공간에 날려보내는 것이다. 오랜 옛날의 조상들이 전사한 용사들의 시체를 작은 배에 실어 바다 위에 띄워 보낸 것처럼......... 실리아가 니자의 귓가에다 속삭이듯이 말했다. "곤란한 일에 부딪쳤을 때 놀을 격려하고 신중한 행동을 취하게 할 수 있는 건 당신뿐이어요........." 니자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여 안녕   중앙 우주 공항이 있는 엘 호므라는 북아프리카의 넓은 평원 지대이다. 옛날 이 근처에는 한 포기의 풀도 없는 황폐한 사막이었다. 낮 동안은 태양이 쨍쨍 빛나고, 가을이나 겨울의 밤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다. 그런데 인간의 힘은 그것을 기후까지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지금은 옛날의 사막 시대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람뿐이었다. 남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옮겨다 심은 엷은 녹색의 풀이 마침 불어온 바람에 파도처럼 물결쳤다. 우주선이 발착할 때마다 지면에 직경 약 1킬로미터 정도의 타버린 동그란 지대가 남는다. 그 동그라미 속은 해로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10년 동안 출입 금지되는 것이다. 달론과 우주 조사 위원회의 늙은 의장 크롬은 시그너스 호가 떠나는 날 이 엘 호므라의 우주 공항에 왔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거무칙칙한 잿빛의 평원에 두 개의 큰 반점이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최근에 출발한 제38항성 탐험대의 두 척의 우주선이 남긴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하나는 원반형의 우주선을 조사하기 위하여 철의 별로 떠난 린다젤 호와 또 하나는 에리다누스 자리 오미크론 2의 삼중성으로 향한 아텔라 호의 것이었다. 이윽고 시그너스 호의 아름답고 커다란 모습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저처럼 아름다운 선체도 지구로 되돌아올 때에는 운석의 떼에 부딪쳐 선체가 모두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그 시그너스 호를 다시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역사상 처음인 대 우주 여행에 걸리는 140년간을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주 공항에 내려서자 실리아와 물리학자인 보즈가 먼저 와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시그너스 호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케루나 행의 영웅들은 어디에 있지?" 물리 학자가 물었다. "아, 저기 있어요." 실리아가 은색의 금속 기둥에 우윳빛 유리를 붙인 큰 건물을 가리켰다. 공항의 중앙 홀이었다. "그럼 우리들도 저기 가봅시다!" "아니, 우리들은 사양하겠어요. 그 사람들은 지금 지구와 최후의 송별회를 하고 있어요. 시그너스 호 앞에서 기다립시다." 두 사람은 실리아의 말에 찬성했다. 갑자기 달론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우주선 두 척도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군요." 그 때 큰 소리가 가까운 스피커에서 울렸다. "달론 씨, 달론 씨! 우주 통신사 앤트가 중앙의 텔레비전 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달론 씨, 중앙 건물의 텔레비전 실로 빨리 오십시오!" 그것을 들은 달론은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얼굴에 나타냈다. 이게 곧 친구인 놀과 니자가 영원히 지구와 헤어지려고 하는 때에......... 그러자 물리학자인 보즈가 달론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대신 가겠습니다. 나는 별로 개인적으로 관계되는 사람을 전송하는 것도 아니니까." 물리학자인 보즈는 조용한 둥근 텔레비전 실로 들어갔다. 당직 기사가 오른쪽 영사막을 가리키고 다이얼을 돌렸다. 영사막에 우주 통신사 앤트의 흥분된 얼굴이 나타났다. "나도 시그너스 호가 출발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려고 생각하면서 우주 전파의 수신을 해보았습니다. 중요한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부터 엘 호므라에 전파를 보내겠으니 그것을 포착하여 반구형 영사막에 비춰 주십시오. 서둘러서!" 수신에 익숙한 보즈는 2분 동안 모든 준비를 끝냈다. 영사막에는 은하계 밖의 큰 성운이 나타났다. 먼 옛날에 인간이 발견한 안드로메다 성운이었다. 그 소용돌이의 바깥에 작은 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불은 점점 커지고 성운은 영사막 밖으로 밀려나와 사라지고 말았다. 노란색이며 붉은 색의 별빛이 흐르고 앞서의 불이 똑똑히 떠올라왔다. 오렌지색의 항성이다. 항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영사막에 밝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불꽃이 튀기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폭발이죠!" 앤트의 소리가 울렸다. "아니! 폭발이 아닙니다. 내 생각으론 안드로메다 성운과의 연락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보즈가 흥분해서 말했다. "아니, 그건 믿을 수 없어. 어쨌든, 안드로메다 성운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통신은 150만년 전에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발사된 겁니다. 우리들의 지구는 빙하기로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에 발신된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영사막은 어두워졌다고 생각하자 또 밝아졌다. 평원과 같은 것이 희미한 빛 속에 나타났다. 거기에는 버섯과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여기 저기 있었다. 영사막의 앞쪽에 표면이 틀림없이 금속으로 된 둥근 물체가 빛나고 있다. 그 위쪽에는 양쪽이 불룩한 큰 원반이 몇 개 떠 있었다. 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상승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원이 사라지고 하나의 원반만이 영사막에 남았다. 원반의 양쪽에 소용돌이형의 축이 붙어 있었다. "야, 저것이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엘그 놀 대장의 제37항성 탐험대가 철의 별 위에서 발견한 원반형의 우주선! 그것과 꼭 같지 않은가! 그 순간에 영사막에 붉은 빛의 선이 소용돌이치고 어두워졌다. "아아, 통신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앤트가 실망하며 말했다. "이 이상 에너지를 사용하며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뉴스가 전해지면 지구상에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으로 철의 별에서 발견된 그 우주선이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왔다는 것은 확실해진 것입니다. 만약에 놀이 철의 별에서 그 우주선 저것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지금 영사막에서 본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 원반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것이라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날아온 것일까?" 물리학자 보즈가 물었다. "만약에 그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면 200만년 정도 걸린 것으로 계산됩니다. 저 원반형 우주선은 안드로메다 성운과 우리들의 은하계를 갈라놓고 있는 공간을 몇 백만 년이나 걸린 죽음의 여행을 계속한 끝에 드디어 그 철의 별에 도착한 것일 겁니다." "그들의 수명이 우리들보다 길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리 길다고 해도 그들의 수명이 수 백만 년이라고 생각할 수 없지요. 어쨌든 지금은 아직 서로가 방문하거나 연락하거나 하는 일은 될 수 없으니까 별 수 없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할 수 있게 될 거다!" 보즈는 자신 있다는 듯이 똑똑히 대답했다.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달론과 실리아는 풀밭에 서서 시그너스 호의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넓은 플랫폼이 소리 없이 시그너스 호의 바로 옆에 멈추었다. 플랫폼 위에는 22명의 대원이 줄지어 있었다. 높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 반원들은 철야로 탐험대의 장비와 우주선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했던 것이었다.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우주선 발사 위원회의 위원장이 탐험 대장 놀에게 보고했다. 전송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카메라맨들이 탐험 대원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이것은 우주로 떠나는 대원들이 지구에 남겨 놓고 가는 최후의 기념품이 될 것이다. 놀은 멀리서 실리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가까이 걸어갔다. "와 주어 고맙소!" "오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걸요!" "이렇게 되고 보니 니자나 다른 대원들의 일이 가엾고, 어쩐지 나 자신도 서글픈 생각이 드는군요. 이번에 지구에 돌아와서 나는 지구를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소!" "놀, 그래도 당신은 끝내 가버릴 작정이어요?" "가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만약에 그만 둔다면 나는 우주뿐만 아니라 지구까지 모두 잃게 되어 버리는 걸요." 어느 사이에 니자가 옆에 와 있었다. "몹시 괴로워요. 좋은 사람들뿐인데, 모두들 억지로 헤어져야 한다니......!" 니자의 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실리아는 니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위로하여 주었다. "이제 9분이면 해치가 닫힌다!" 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이미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제부터 시작되려고 하는 여행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을 위한 크나큰 작업인 것이다.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행성을 조사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자손에 대한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이며 인류를 위해 우주에 징검다리를 놓는 길이다." 우주 조사 위원회의 올룸 의장은 시그너스 호를 에리다누스 자리의 아케루나의 쌍둥이 행성에 보내는 것을 결정할 때 확실히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이나 그것을 전송하는 사람도 물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겉치레의 인사 같은 것은 영원히 지구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출발 시간입니다!" 놀의 소리가 들리자 모든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실리아는 눈물을 머금고 니자를 끌어안았다. 남자들끼리는 상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악수를 하는 것으로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놀과 니자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시그너스 호의 거대한 선체에서 나온 검은 해치의 앞에서 키가 큰 놀과 늘씬한 니자가 서서 손을 흔들어 최후의 인사를 했을 때 모든 사람은 말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실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었고, 뜨거운 눈물 방울이 얼굴을 적셨다. 두 사람의 모습은 시그너스 호의 선내로 사라졌다. 순간 문은 밀폐되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거대한 선체의 어디에 출입구가 있었던가 할 정도였다. 이윽고 최초의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주선의 가까이에 자동식 플랫폼이 나타나 전송하는 사람들을 태워 우주선에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 텔레비전 송신대와 우주선을 비추던 서치라이트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그너스 호의 회색 선체는 어둡게 되었다. 그러자 앞쪽에 붉은 불이 켜졌다. 발사 준비의 신호였다. 우주선은 발사대의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발진방향을 정하자 멈춰 섰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점점 멀어져 안전 지대로 돌아갔다. "저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우리들의 하늘을 볼 수가 없게 되는 거죠?" 전송하는 사람들 중 한 여자가 이렇게 말하고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우주선의 아래 부분에 녹색의 신호등이 켜졌다. "발사합니다! 위험 지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두 손을 들어주십시오!" 자동 기계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쳤다. 서치라이트가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주위를 비췄다. "신호가 울리면 곧 우주선에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아주십시오!" 자동 기계가 다시 외쳤다. 이윽고 신호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갑자기 시그너스 호는 굉장한 폭음 소리를 내며 불을 껐다. 폭음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고 생각되자 눈이 부실 정도의 밝은 불길이 우주선의 주위에 솟아올라 갔다. 불길은 굵고 둥근 기둥이 되고 또 가느다란 기둥이 되더니 마지막에는 한 줄기의 빛으로 변했다. 다시 한 번 신호가 울리고 뒤를 돌아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큰 별이 하늘 높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시그너스 호의 모습이었다. 우주 공항의 불빛이 꺼지고 멀리 저쪽 남쪽의 지평선에 진짜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의 눈은 파랗게 빛나는 아케루나가 떠 있는 밤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시그너스 호는 한 시간에 9억 킬로미터의 속도로 그 별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이다. 70년 후 우주선의 시간으로는 47년 후에 아케루나에 도착한다. 어쩌면 저 사람들은 녹색 항성의 햇빛 아래서 지구와 같이 즐겁고 아름다운 생황을 개척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물리학자 보즈는 시그너스 호가 날아오른 밤하늘을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는 달론과 실리아의 옆에 가까이 다가갔다. 보즈는 바로 얼마 전에 영사막 위에서 본 것을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안드로메다 성운과 우리들의 은하계와의 최초의 접촉. 우리들의 은하계의 가장 자리에 와서 죽은 채로 철의 행성에 착륙한 원반형 우주선이 안드로메다 성운의 행성에서의 것이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보즈의 이야기에 가슴을 두근대며 텔레비전 방송실에 들어가 다시 한 번 재생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갑시다! 린다젤 호가 돌아오면 여러 가지 일이 확실해 질 것입니다! 그래도 놀이라는 사나이는 굉장한 친구다. 그 사람이 어딘가 먼 딴 세계에서 날아온 우주선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으니까." 보즈가 말했다. "그래도 놀은 자기가 발견한 원반이 그렇게 먼 곳에서, 더군다나 우리들과는 다른 우주인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영원히 알지 못하고 마는가? 좀더 빨랐더라면 떠나기 전에 알려 줄 수 있었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정말 굉장한 선물이 되었을 걸........." 실리아는 정말로 유감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니, 이 큰 뉴스는 또 연락되어 올 거야. 우주 조사 위원회에 부탁하여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특별히 송신용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하면 좋아. 지금부터 18시간 정도면 시그너스 호에 그 전파가 닿을 것이다." 달론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빛내면서 다시 한 번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악마 나라에서 온 소녀 惡魔の國ガら來た小女   후쿠시마 마사미 (島正實) 作     사라진 스포츠카   도쿄 도심지를 가로지르는 고속 도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호호, 하하!" 요란스러운 웃음소리와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스포츠카 특유의 폭음과 한데 뭉쳐서 뒤에서부터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기야마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기야마의 차체를 스쳐서 붉게 칠한 선더버드의 차체가 비스듬히 휙 지나갔다. 자동차에는 4,5인의 젊은 남녀가 타고 있으며 높은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난폭하게 운전하는 녀석이로군!" 기야마는 점점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선더버드는 샌다께야 역전의 큰 커브를 더욱 더 속력을 내면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배기통은 밤인데도 빨갛게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선더버드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앗!" 기야마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반사적으로 발은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있었다. "끼끼익!" 브레이크와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는 그의 신경을 뒤흔들었다. 자동차는 정지하였다. 그곳은 지금 막 스포츠카가 사라진 근처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획 돌아보았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핸들을 잘못 틀어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면, 눈앞에 방해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넓고 긴 고속도로 위에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밤거리는 아주 조용해서 그런 교통 사고가 일어난 흔적도 없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환각을 일으킬 정도로 피로해있지도 않았고, 신경이 날카롭게 될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아주 정상적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은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속 도로 위에서는 자동차를 오래 세워 놓고 생각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동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언젠가 주간지에서 이것과 흡사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문득 났다. 그것은, 어떤 도시에서 골프장으로 가던 모 회사의 중견 간부 4사람이 앞을 달리고 있던 자동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는 기사였다. 그 도로도 역시 일직선의 외길인데 도저히 숨을 만한 곳이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기야마는 핸들을 쥐고서 또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엉뚱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주간지를 읽었을 때에는 아마 흥미 본위의 기사이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과 똑같은 것을 현재 경험한 것이었다. 기야마는 계속 중얼거렸다. 그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비친 도로 위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기야마는 얼핏 뺑소니차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 수가 없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동안에 자동차는 쓰러져 있는 여자 가까이에 왔다. 그는 자동차를 정지시키고 빨리 뛰어 내려서 쓰러진 여자를 안아 들었다. 젊고 그리고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것도 일본 여자가 아니었다. "정신 차려요!" 기야마는 소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소녀는 축 늘어져 쉽게 의식을 회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기야마는 재빨리 소녀의 손발을 만져 보았다. 기야마는 외과 의사였다. 손으로 만져 보아서는 아무 곳에도 상처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출혈도 없었다. 그러나, 달리는 자동차에서 떨어졌다면 내출혈을 했을는지도 모르고, 머리뼈가 깨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야마는 소녀를 끌어안고 운전석 옆자리에 겨우 앉혀 놓고 빨리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라고 생각하면서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넣었다. 여기에서 신주쿠 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기야마는 액셀을 밟았다. 캄캄한 밤중의 고속도로 위를 전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하였다. 아름다운 소녀의 몸이 자동차의 진동으로 기야마의 몸 쪽으로 기대어져 왔다. 기야마는 조각 같은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다. 기야마는 새삼스레 그 소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오늘 저녁 친구 노다와 토론한 것이 생각났다. 노다는 텔레파시라든지 인간 소멸이라든지 하는 기이한 현상이 결코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기야마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반대했었다. 그것은 과학적 가능성을 상상력으로 무책임하게 비약시켜서 만들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마침 자동차가 고속 도로를 벗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구급 병원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되돌아가야 했다. 기야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벌써 자신의 팔은 핸들을 똑바로 쥐고, 발은 액셀을 계속 밟고 있었던 것이다. 기야마는 자기가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라고 느낀 것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자기가 살고 있는 맨션의 차고의 문을 밝게 비추고 있을 때였다. 기야마는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핸들을 꺾어서 되돌릴 자세를 취했다. 그 때였다. 고운 손이 소매를 살짝 당기는 것이었다. 젊은 여자는 눈을 뜨고서 그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되돌아가지 마셔요." 가느다란 소리는 일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경찰에 가지 않으면......?" "여기도 좋아요. 당신의 집도........." "그러나 나의 집에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왜 당신을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기야마는 변명하는 것같이 말했다. "괜찮아요. 피로했을 뿐이니까요. 상처는 없어요. 재워주신다면 곧 회복될 거여요. 더욱이 당신은 의사이지요?" 기야마는 놀라면서 소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았지요?" "하여간........." "하여간이라니?" "지금은 묻지 마셔요. 나는 피로합니다." 소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눈을 감았다. 또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얼굴 색도 종잇장같이 하얗다. 손목의 맥을 짚어보니 불규칙하게 뛰다가 뚝 멈췄기 때문에 그는 아주 당황했다. 기야마는 소녀를 끌어안고서 자동차에서 내려 맨션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침대에 눕혔다. 강심제의 피하주사를 한 대 하얀 팔에 놓았다. 소녀의 가슴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침실을 나왔다. 그러나, 거실의 안락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모금 빨자, 비로소 이때까지의 행동이 새삼스럽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고속도로에서 소녀를 구출한 이후,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았다. 흡사 누구에겐가 자기의 생각을 조종당한 것같이 행동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춤추는 인형   다음날 새벽, 기야마는 거실의 소파 위에서 눈을 떴다. 어제 저녁 일이 꿈같이 몽롱했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 아름다운 소녀가 여전히 자기의 침실에서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녀는 벌써 기운을 완전히 회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 데도 상처는 없었다. 소녀의 이름은 홍구라고 했다. 그가 예측한 것과 같이 홍구는 월남인의 아버지와 프랑스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로서, 아버지는 사이공에서 큰 보석상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사이공이라고요?" 기야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사이공에 살던 당신이 어떻게 해서 도쿄에 오게 되었나요?" 기야마가 묻자, 홍구는 둥글둥글한 눈을 뜨고 길고 까만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대답했다. "몰라요." "모르다뇨? 정말 이상하군요." "예, 나는 어제 저녁 이전의 일은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요. 하여튼 사이공에 있었어요. 기억 상실증에 걸렸나 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일본말을 그렇게 잘 하죠?" "그것은 제가 일본을 좋아해서지요. 일본 사람 선생에게서 일본어를 배웠거든요." "그건 그렇다 하고, 왜 당신은 고속도로에 쓰려져 있었어요?" "몰라요." 이상 아무리 물어 보아도 홍구는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물론, 기야마는 홍구의 이야기를 손톱만큼이라도 신용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가, "일단 경찰에 이야기하자." 고 말했을 때의 반응은 정말 이상했다. 홍구는 점점 그 아름다운 얼굴이 변하더니 새파랗게 질렸다. "부탁입니다. 그것만은 제발 하지 마셔요." "왜? 너는 경찰을 겁낼 이유가 없잖아." 홍구는 억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하여튼 무서워요. 왜 그런지는 몰라도 무서워요. 부탁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셔요. 조금만요." 그러나, 어쩐지 기야마는 그렇게 호소하는 홍구를 그 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홍구를 자기 방에 있도록 해 두고, 그런 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게 되어 버린 일이었다. 기야마는 낮에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문득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 일이 있었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홍구의 그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뿐이었다. 그리고 며칠인가 아무 일없이 지나갔다. 홍구는 마치 아내처럼 침착하게 기야마의 출퇴근을 돌보아 주었다. 그는 차츰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기를 마음속으로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 생활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사건이 일어난 지 7일째에 드디어 적중되고 말았다. 그날 밤 기야마는 급한 환자가 있어서 보통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는 바로 열 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쳐다보니 자기 방이 캄캄하였다. 그는 자동차를 차고 앞에 세워둔 채 엘리베이터를 급히 탔다. 자기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전기가 켜있지 않았다. 언젠가는 슬쩍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고 보니 견딜 수 없이 허전해지고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방안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두운 식당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야마는 깜짝 놀라면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고양이 정도의 크기였다. 다음 순간, 그는 그 정체를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서재의 선반에 얹어 놓았던 프랑스 인형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흡사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조종된 것 같이 팔딱팔딱 기괴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야마는 무심코 뒤로 물러서면서 반사적으로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전깃불은 식당을 환하게 비추었다. 프랑스 인형은 눈이 부셔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꿈틀거리다가 곧 넘어지고 말았다. "아, 기야마 씨! 이제 오십니까?" 식당과 거실 사이에 그 소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것은 무슨 꼴이오?" 기야마는 정면으로 홍구에게 쏘아 붙였다. "보고 말았군요.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참고 있던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당신은 도대체 뭐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이상한 짓을 하면 용서하지 않겠소!" "이상한 일은 안 했어요." 홍구는 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다면 설명하시오. 도대체 이 기괴한 짓은?" "모르실 겁니다, 당신은." "흥, 알겠어! 그러면 경찰에 가서 이야기하겠소." 기야마는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가지 마셔요, 기야마 씨!" 뒤쪽에서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기야마는 못 들은 척 하고 수화기를 들어올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손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이 그 자세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 말 없이 갔더라면 몰랐을 텐데. 연습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당신이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리지도 말고........." 홍구는 혼자 중얼거렸다. 기야마는 움직일 수도 없고,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러면 가겠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안녕히 계셔요, 기야마 씨! 지금까지의 일은 제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구는 현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홍구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초인종은 계속해서 요란스럽게 울렸다. "할 수 없구나!" 홍구는 혼자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기야마는 갑자기 마룻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급히 돌아보았을 때는 거기에 홍구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홍구는 방안에서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는 계속 초인종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초능력을 가진 소녀   기야마가 정신을 차려서 문을 열어보니 그의 친구 노다가 와 있었다. "왜 이래? 새파랗게 질려 버렸잖아?" 노다는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유령이라도 본 얼굴 같은데?" "보았다. 아니 있었다, 거기에......!" "뭐라고?" 노다의 표정은 이상하게 변했다. 기야마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 노다는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 기야마가 양주를 놓아둔 선반에서 자기 멋대로 브랜디를 꺼내어 컵에 따르더니 꿀꺽꿀꺽 마셨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노다는 기묘한 얼굴로 기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야마, 설마 네가 날 놀리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기야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노다는 브랜디가 든 컵을 양손으로 꼭 쥐고서 방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너는 정말로 기이한 현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 홍구라는 여자는 초능력자일 것이다." "초능력자라고......?" "그렇다. 그러나, 얄밉게도 그런 존재를 믿고 있는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코웃음치면서 반대하던 너에게 나타나다니........." 노다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홍구라는 여자가 갑작스럽게 고속도로에 나타난 것이나, 지금 이 방에서 사라진 것은 대단히 고도의 초능력인데, 그것을 텔레포테이션이라고 하지. 정신 감응 이동이라고도 하는데, 즉 일종의 정신 동력이라는 힘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는 그런 사건이 있었다." 노다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인형을 조종한 것도 같은 원리이며, 염동력(마음먹은 대로 떨어져 있는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 또는 정신 동력으로 물건을 움직이는 것이다. 홍구가 너의 마음을 미리 알아차리고 너를 자유로이 조종한 것은 가장 간단한 초능력의 힘이었으며, 이것을 텔레파시라고 말한다." 노다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흥분한 것 같았다. "하여간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증거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기야마! 이것은 수십만 명중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희귀한 경험이다. 만약 그 여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의학과 물리학 그리고 화학과 생물학 등도 모두 다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기야마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스포츠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은?" "물론 텔레포테이션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단지 무엇 때문에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모르지만........." 노다는 기야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도 그 홍구라는 아가씨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 것도 그 아가씨가 한 짓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니까." 기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홍구가 모든 사건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 날 낮 무렵이었다. 병원의 의무실에서 쉬고 있는 기야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야! 기야마, 큰일 났다. 그 스포츠카가 발견되었단다!" "스포츠카라니? 아아, 고속 도로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스포츠카 말인가?" 기야마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아직도 모르고 있었는가? 마이아사 신문을 읽어봐. 상단에 상당히 크게 나와 있어. 가노 현의 눈 쌓인 골짜기에 붉은 선더버드가 충돌하여 대파된 체 발견되었다. 부근에는 네 사람의 남녀 시체가 흩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열흘 전의 일인 것 같았다. 해발 2000미터 산골짜기에 어떻게 스포츠카가 떨어졌는지 원인은 전혀 모른다고 나와 있지 않은가!" 기야마는 어리둥절하여 멍하게 수화기를 귀에 대고만 있었다. "네가 본 스포츠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수께끼는 풀렸다. 그녀는 초능력을 써서 인간을 노리개 감으로 삼고 있다." "그럼, 왜 그녀 자신이 고속 도로에 쓰러져 있었을까? 그리고 하필이면 경찰과 병원에 발견될 위험을 지니면서........." 기야마는 무심코 반박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홍구는 너무 많이 힘을 내서 쓰러졌다고 생각된다. 스포츠카를 500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로 날려보낸다는 것은 아무리 초능력자라 해도 힘겨운 일이다. 정신력을 남김 없이 써 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노다는 소리를 낮추었다. “일부러 쓰러진 것처럼 보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너같이 얼빠진 녀석을 곯려 주려고 말야." 기야마는 머리를 방망이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다는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대사건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노다의 이야기는 기야마의 머리에서 강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다의 이야기는 틀림없었다. 다음 달 신문에는 일본 항공기가 원인 모르게 행방 불명된 사건이 크게 실려 있었다. 신문은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없었고 보통의 조난사고로서 취급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비행기는 화물 수송기였기 때문에 승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비행 코스 상공은 맑게 개인 날씨에 바람 한 점 없어서 사고가 날 이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상스러운 것은 비행기가 무선 연락도 전혀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무리 돌발적인 사고라도 SOS(에스오에스) 정도는 발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의 행방은 수수께끼였다. 사건은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홋카이도로 날던 제트 여객기의 바퀴가 아무런 고장도 없었는데 돌연 빠져 나오지 아니하여, 80명을 태운 여객기는 착륙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다행히 기장의 냉철한 판단으로 여객기는 하네다 공항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게 되었었다. 이 뉴스가 발표되던 날 저녁, 기야마의 아파트에 노다가 찾아왔다. 방에 들어오더니 불쑥 말했다. "야, 기야마! 오늘의 일본 항공기의 사고도 홍구의 행위일 것이다." 기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 같은 아가씨다. 그 아가씨는 일부러 비행기 바퀴를 못 빠져 나오게 하여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최후까지 바퀴가 빠져 나오지 않았더라면 80명의 승객은 모두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어쨌든 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기야마, 곧 바로 경찰서에 가자. 가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고하고 무슨 대책이든 세워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상대는 초능력자이다." "그러니까 전국에 지명 수배해서 찾아내는 즉시 사살하도록 명령을 내도록 해야 된다." "사살?" 기야마는 놀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렇고 말고. 그 외에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런데 기야마 너는 아직까지 그 악마와 같은 여자를 계속 감싸줄 작정인가?" 기야마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감싸줄 생각은 없어. 자, 가자."   홍구의 도전   기야마의 마음은 무거웠다. 홍구는 놀랄 정도의 초능력자이다. 잘못하면 전 인류를 위협하는 큰 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현관을 나왔다. 노다가 문을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손잡이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하다?" 노다가 경계하면서 말했다. 그 때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닌가! 문이 바깥쪽에서 열리더니 틀림없는 홍구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홍구!" 기야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홍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기분 나쁜 냉소를 지었다. "어딜 가시는 건가요? 기야마 씨." 기야마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끝까지 남아 있던 홍구에 대한 사랑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잘 되었다. 홍구! 우리들과 같이 가자!" 기야마는 호령조로 말했다. "어딜 데리고 가시려고요?" 홍구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물론 경찰이다. 너는 네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기야마가 그렇게 말하자, 홍구의 입에서는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참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꼭 데리고 가시겠거든 어디 데리고 가보시죠." 기야마는 손을 내밀어 홍구의 팔을 잡으려 했다. "으악!" 신음 소리가 기야마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전신에 날카로운 침을 맞은 것 같이 아프고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요것이!" 노다가 홍구를 향해 힘껏 덤벼들었다. "쓰으으으!" 아주 가냘픈 소리가 홍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자, 2미터나 떨어져 있던 노다의 육중한 몸이 3미터나 저쪽으로 튕겨 나갔다. 노다의 커다란 몸이 현관의 고무나무 화분에 떨어져 화분이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흙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 노다는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그러나, 노다는 그것으로 낙심하지 않고 억지로 일어서 한 번 더 맹수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가냘픈 홍구를 단 일격에 처치하려는 결심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으악!" 노다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의 커다란 몸은 홍구의 0.5미터 앞쯤에서 붕 하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노다는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흔들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에게 멱살이라도 잡힌 것같이 점점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서 마룻바닥에서 2미터 높이의 공중에 허우적거리며 떠 있었다. "아니, 왜 그러셔요? 커다란 사나이가 여자 하나를 잡지 못하셔요?" 홍구는 코웃음쳤다. "이놈......!" 노다는 이를 갈면서 분해하였다. "홍구, 왜 이런 짓을 하오? 왜 죄도 없는 사람들을 골탕먹이면서 좋아하는 거요?" 기야마는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홍구는 태연하게 뒤돌아보더니 "가르쳐 드릴까요? 우리들이 볼 때 당신들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등 인간이어요. 하등 인간인 주제에 잘난 척하고 있으니까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 역시 인간이잖아! 단지 보통 사람이 가지지 않는 얼마간의 초능력을 가진 것에 불과해." 기야마의 말에 홍구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건방진 소리!" 기야마의 얼굴에 찰싹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물론 홍구는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정신 동력을 이용해서 때린 것이 분명했다. "우리들과 비교하면 보통의 인간이라는 것은 개와 인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거여요. 개가 인간과 같은 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요? 당신들은 개에 불과한데 양복을 입고 으스대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습단 말이어요!" 홍구는 아주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우리들 초능력자야말로 진정한 인간입니다. 새로운 인간입니다. 당신들과 같은 낡은 인간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홍구의 눈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 하였다. "우리들은 오랜 세월 동안 참고 있었습니다. 마치 정신 박약아 같은 인간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고도 꾹 참고 있었습니다." 홍구는 또 마녀같이 비웃었다. "우리들의 초능력을 더욱 발달시켜 준 것이 무엇인지 알겠어요? 바보 같은 당신들 인간이 발명한 자살 병기 즉, 원자 폭탄이나 수소 폭탄 등이 남겨 놓은 방사능 때문이죠." 노다와 기야마는 꼼짝도 못한 채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때 홍구의 표정은 갑자기 변했다. "우리들은 머지 않아 당신들 낡은 인간에게서 이 세계를 빼앗을 거여요. 내가 해온 일은 조그만 장난 거리였지만 그 날을 위한 준비였지요. 그러므로 나의 정체를 알아 버린 당신들을 그대로 살려둘 수가 없게 되었어요." 기야마와 노다는 밧줄로 묶인 사람같이 꼼짝도 못하면서 이를 갈았다. 홍구는 식당 쪽으로 팔을 쑥 내밀었다. 그러자 식당에 있던 칼이 공중을 통하여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자, 기야마씨 칼을 잡으시오." "뭐라고?" "그 칼로 노다의 심장을 찌르시오. 그리고 자신의 목도 끊으시오. 그렇게 되면 경찰이 조사해도 싸움을 해서 당신이 노다를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보이겠죠. 어때요, 좋은 생각이죠?" 그렇게 말하고 나서 홍구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자, 칼을 잡으시오!" 기야마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달리 손은 눈앞에 떠 있는 칼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반항해도 홍수가 밀려오는 것 같은 홍구의 사고파(텔레파시)가 그를 삼키고 밀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 용서해다오……." 그는 칼을 힘껏 쥐고 있었다. 그리고 노다의 가슴을 향해서 칼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 사고파의 흐름이 약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상쾌한 사고파가 슬쩍 마음의 표면을 스쳐갔다. 홍구의 사고 조절은 어떤 사람에게 방해되어 약해진 것이었다. 기야마는 매우 당황한 태도를 취한 홍구의 얼굴을 노려보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아! 왜 방해하십니까?" 갑자기 홍구는 천장 쪽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다음 순간 홍구의 사고 조절은 완전히 힘을 잃었다. 노다가 쾅하고 마룻바닥에 떨어지고 기야마도 균형을 잃고 모로 넘어졌다. "이때다. 해치우자!" 노다가 일어서면서 외쳤다. "두고 보자!" 홍구의 소리가 아닌 소리가 원한과 미움이 섞인 소리로 외쳤다. 자세히 보니 이미 그 아가씨의 모습은 거기에서 없었다. 정신 감응 이동(텔레포테이션)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거친 숨을 쉬어가며 그 자리에 정신없이 서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곧 바로 경찰서로 갔다. 수사과에 노다가 전부터 잘 아는 오가가와 경감이 있었다. 물론 오가가와 경감은 처음에는 두 사람이 농담을 하는 줄 알고 화를 냈었다. 그러나, 기야마의 이야기와 미결로 되어 있는 이상한 몇몇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서는 비로소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한참 동안 팔짱을 끼고 있던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하여간 그 아가씨를 찾아 볼 것을 틀림없이 약속하지." 그 정도의 약속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보통 같으면 전혀 상대도 안 해 줄 이야기였으니까.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날 밤에 비밀히 수사를 하고 있던 형사 한 사람이 오오모리에 있는 한 호텔에 홍구 같은 여자가 유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가가와 경감에게 연락을 받은 기야마와 노다는 오오모리로 자동차를 달렸다. 도중에서 오가가와 경감과 두 경찰관을 태운 자동차와 만나서 두 대는 전 속력으로 국도를 달렸다. 자동차 안에서 문득 기야마가 말했다. "그러나, 이상하다. 홍구가 그렇게 간단하게 발견되다니……? 이만한 사람들이 쫓아가고 있는데 홍구의 텔레파시에 반영이 안 될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도 아직 움직이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아가씨라도 만능은 아니겠지. 요사이 너무 날뛰기 때문에 정신력을 다 소모하고 지쳐 버렸는지도 모르잖아." 노다의 추측은 틀림이 없었다. 이윽고, 자동차는 호텔 앞에 가까이 왔다. 경찰 자동차가 호텔에서 수십 미터 가까이 왔을 때였다. 돌연, 기야마가 핸들을 잡은 채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홍구다! 지금 현관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것은 다음의 순간이었다. 앞에 달리고 있던 경찰 자동차가 지면에서 번쩍 쳐들리더니 무서운 힘으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옆으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기름에 인화되어 곧 불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자동차 안에서 오가가와 경감은 간신히 뛰어 나왔다. 기야마는 홍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작스레 홍구가 이쪽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아니어요, 틀려요. 기야마! 나는……." 그것은, 요전 아파트에서의 홍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된 것은 기야마 혼자였던 것 같았다. 노다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형사의 권총을 빼서 홍구를 향해 쏘았다. "위험한 놈이다. 텔레파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노다가 외쳤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딴 형사들도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요란스러운 총성은 계속 울려 퍼졌다. 그러자, 홍구가 비틀거리더니 쓰러졌다. 기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홍구가 사살된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흉측한 괴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을 하등 동물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 마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죽이지 않으면 딴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아, 없다! 홍구가 없어졌다!" 노다는 외쳤다. 연기 속을 자세히 보아도 홍구가 쓰러졌던 호텔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괴조의 웃음   그날 밤늦게 기야마와 노다는 기야마의 자동차를 타고 경찰국을 나왔다. 두 사람은 완전히 지쳐 버렸다. 경찰국에 설치된 임시 수사 본부에서 바로 전까지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 같은 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흥분해서 떠들어대고 있는 경찰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멍청하게 앉아 있던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구제안은 내일로 미루게 되어 두 사람은 겨우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노다의 얼굴은 핼쑥해지고 검게 타 있는 것을 기야마는 보았다. 두 사람 모두는 홍구의 초능력의 무서움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들을 맥 못 쓰게 만든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가씨를 잡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집을 파괴당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개미같이 허무하고 우습게 보였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무력감이 그들을 더욱 맥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문득, 기야마는 전방에 불빛이 좌우로 비치고 있는 것을 보고 천천히 자동차를 몰았다. "비상선이다." 노다는 말했다.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홍구를 체포하기 위해서는 하지 않을 수 없겠지. 도로 한가운데 세 사람의 경찰이 서 있었다. 그 중 한 경찰관이 회중전등을 켜 들고 그들의 자동차 가까이 왔다. 기야마가 자동차를 정지시키자 젊은 경찰관이 차안을 검색했다. 노다가 포켓에서 수사본부에서 발행한 증명서를 꺼내서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경찰관은 회중전등의 불빛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아무 말 없이 되돌려 주었다. "수고하십니다." 라고 말하며 노다는 증명서를 받는 순간 큰 소리로 외쳤다. "무, 무슨 짓인가?" 기야마는 놀라서 그쪽을 보았다. 경찰관이 권총을 빼서 두 사람을 향해 겨냥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처님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텔레파시로 사고 조정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야마는 순간적으로 딴 경찰관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그러나, 그 경찰관은 눈치가 빨랐다. 권총은 재빨리 기야마 쪽으로 향해졌다. "시원찮은 짓을 하는 게 아냐!" 경찰관은 야릇하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홍구의 소리를 흉내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흉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얼마나 기괴한 유머일까? "잘도 나를 죽이려고 했지요? 두 사람이 나의 정체를 이미 세상에 다 알려놨으니 그 보답을 해야겠군요." "정신 차려! 넌 경찰관이다." 갑자기 노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경찰관은 노다를 보았다. 그리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등 인간의 주제에!" 쾅! 하는 요란스런 총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번쩍 빛났다. 노다가 왈칵 앞으로 거꾸러지면서 문이 열리더니, 그대로 자동차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기야마는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떤 힘이 기야마의 눈을 강제로 뜨게 만들었다. 두 손은 핸들을 잡고 기아를 넣고......... 갑자기 자동차가 굴러 나갔다. "야, 기다려!" 당황하여 가로막던 경찰관이 본넷(자동차의 엔진덮개)에 튕겨 올라가 검은 바람같이 뒤로 흘러 떨어졌다. 자동차는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기야마는 자기가 강한 사고 조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백 미러를 보지 않아도 뒷좌석에 태연하게 앉아서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한 아가씨의 존재를 느꼈다. 홍구였다. 홍구는 새까만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없는 까만 새같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계속 내고 있었다. "아셨지요? 기야마씨. 이것으로 당신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우리들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홍구가 노래 부르듯이 아주 유쾌하게 말했다. 기야마는 대답 대신에 전신에 힘을 주어 자동차를 길가의 전주에 충돌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허사였다. 머리에서는 필사적으로 명령을 내렸으나 손발은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명령을 내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마치 침을 맞는 것 같은 심한 두통이 일어났다. 기야마는 드디어 참을 수가 없어 저항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식은땀이 전신에 흘러 내렸다. "고집이 센 사람이군요. 기야마씨, 당신은 나에게 반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어떻게 할 작정이지?" 기야마는 이를 꽉 깨물은 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어떻게 한다고 생각해요?" "멀리까지 못 간다. 뒤를 돌아 봐라."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어요. 경찰차 두 대가 아까부터 우리들을 따라오고 있었어요." 홍구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간단하게 손을 쓸 수 없을걸요. 당신이 있으니까!" 홍구는 재미가 난다는 듯이 싱그레 웃었다. "그러나, 결국은 허사지요. 나는 당신을 죽일 테니까요." 그 말은 이제 와서는 기야마의 가슴에 아무런 공포도 흥분도 일으키지 못했다. 일종의 투명한 체념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해도 허사일 것이다. 홍구, 너에 대해서는 일본뿐만이 아니고 이미 전 세계에 알려지고 말았다. 너는 어디를 가나 편하게 쉴 수가 없어졌다." "허사가 아녀요. 당신을 죽이는 것은 하나의 본보기지요. 그리고 우리들은 새 인간으로서 낡은 인간에게 도전하는 겁니다." "무리한 일이다. 네가 어떠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혼자서 세계를 움직일 수 있겠나?" 기야마는 룸미러로 비치는 아름다운 홍구의 모습에 천천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결국 너는 너무 일찍 태어난 것이다. 머지 않아 인류는 모두가 너와 같은 초능력자로 진화되어 가게 될런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너는 말하자면 진화의 꽃이 때를 맞추지 못하고 너무 일찍 피어버린 셈이다." "건방진 소린 마라!" 한 차례 바람이 일어나는 듯 하더니, 홍구는 그의 옆자리로 텔레포트 해왔다. 그 얼굴은 흥분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쨌든 당신은 죽을 것이니까 이야기나 해 드리지요. 기야마씨, 우리들은 수가 많아요." "많아?" "그럼요. 지금 일본에는 동아시아의 초능력자가 전부 모여 있는데, 백 명이 넘습니다. 언젠가 고속도로에서 그 시원찮은 스포츠카를 후지산까지 텔레포트 시켰지만 그 때는 다섯 사람이 힘을 합친 것이었지요. 과연 힘이 들었지만 잘 해치웠어요." 보통 소녀와 같이 천진하게 우쭐거리는 것 같았다. "열 사람이 모이면 특급 열차라도 텔레포트 할 수 있어요. 15명이 모이면 하늘을 날고 있는 제트기라도 바다에 떨어뜨릴 수가 있어요. 오십 명, 백 명이 힘을 모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더욱이 우리들은 수가 많아요. 온 세계의 초능력자가 모이면 천 명도 넘지요." 홍구는 갑자기 화재를 바꾸었다. "우리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싸움에도 관계가 있어요. 지금부터는 이쪽 저쪽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 대립을 격화시키고, 세계에 위기가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서 미국과 소련과 그 밖의 핵 보유국의 실권을 우리들 초능력자가 장악할 거여요." 홍구의 빨갛게 상기된 뺨이 기야마의 얼굴에 닿을 것 같았다. "홍구......!" 기야마는 부드럽게 불렀다. "왜요? " 홍구는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뭐라고요?" "네가 초능력자라는 것을 모르고, 고속 도로에서 구해서 집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됐다. 너의 정체를 알고 나자 나는 너를 미워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어. 지금도 나는 아무래도 너를 미워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까?" 홍구의 얼굴빛은 점점 변해져갔다. 손을 들어 힘껏 기야마의 뺨을 때렸다. "감히 하등 동물인 주제에 나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다음 순간 홍구는 이 세상에 없는 괴조의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난 홍구가 아녀요. 홍구와 쌍둥이인 론이란 말이어요."   사랑하는 마음   "쌍둥이라고?" 기야마의 마음은 비로소 강하게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래요. 홍구는 당신의 아파트를 빠져 나와서 한번도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요. 홍구는 너무나 주책이 없기 때문에 내가 대신해서 당신을 죽이기로 했어요." "주책이 없다고?" "홍구에게는 초능력자로서의 자존심이 없어요. 무슨 일이건 우리들의 계획을 방해할 뿐이었지요, 그 고속도로의 사건도 우리들과 다투기까지 해서 그 스포츠카의 텔레포테이션을 못하도록 하려고 했었지요. 그래서 정신 동력을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넘어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심한 지경을 당해봤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주책없이 오늘도 우리들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호텔에 와서 잔소리만 늘어 놓았었죠. 그러나, 누가 그런 주책없는 말을 듣겠어요?" 기야마는 갑자기 그 호텔 앞에 나타난 홍구가 '아니어요. 틀려요!' 라고 외치던 것을 역력히 기억해냈다. 홍구는 론들이 엉뚱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중지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사랑하고 있는 홍구는 괴물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착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던 것이다. "바보!" 갑자기 심한 사고파가 기야마의 머리 속에서 불꽃처럼 퍼졌다. 론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고통으로 신음하였다. 이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 갑시다. 속력을 내서!" 기야마의 발은 명령에 따라 액셀을 꽉 밟았다. 스피드 미터기의 바늘이 점점 백을 넘어서 백 이십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때 자동차는 리오고쿠 다리를 향해서 돌진하고 있었다. 비가 온 다음이라 물은 많이 불어서 철교 밑을 힘차게 소용돌이치며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여기가 기야마를 죽일 장소 같았다. 문득 주위에서 요란스런 사이렌 소리가 이중 삼중으로 들려왔다. 백 미러에 비치는 경찰차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옆에서도 다가왔다. 포위해서 정차시킬 모양이었다. 철교가 눈앞에 다가오자, 갑자기 경찰차가 철교의 차도에서 튀어나와 가는 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속도를 낮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동차가 달려들었다. 충돌할 순간 경찰차가 부웅 떠오르더니 옆으로 비껴지면서 길을 열었다. 론이 정신 동력으로 방해되는 물건을 밀쳐버린 것이었다. 자동차는 리오고쿠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자, 슬슬 각오하시죠!" 론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차체가 부웅 떴다. 그대로 난간 쪽으로 슬슬 가까이 다가간다. 이어 깊은 물이 보였다. 갑자기, 차체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탕하고 떨어졌다. "또 방해할 작정이군!" 갑자기 론이 비단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기야마는 정신을 차렸다. 몸이 자유롭게 됐다. 사고파는 약해져 있었다. 맑은 사고파가 그의 머리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는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 손이 갑자기 굳어졌다. 론의 불같이 타오르는 사고파가 공간을 향해서 날아갔다. 차가 옆으로 기울어져 가는가 하면 다시 점점 들려 올라가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히 올라가지는 못했다. 올라가려고 하다가는 내려가고 내려가다가는 또 올라가고 하는 것이었다. 론과 홍구는 제각기 정신 동력을 다 발휘해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치열한 싸움이었다. 꼼짝도 못하고 기야마는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반항하고 몸부림치는 론을 보고만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흉하게 찌그러지고, 눈언저리는 찢어졌고, 입술을 깨물어 피가 튕겨 나오는가 하면 몸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발작을 일으킨 정신병 환자같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자동차가 또 다시 천천히 떠올라가기 시작했다. 론의 정신력은 홍구의 정신력을 누르려고 하고 있었다. 차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점점 난간 가까이로 다가갔다. 범퍼(완충기)가 난간에 부딪히더니 서 버렸다. 그러다가 또 들려 올라갔다. 다음 순간 자동차는 강물 위에 있었다. 죽음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기야마는 눈을 감았다.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물소리에 뒤섞여서 홍구의 사고파가 들려왔다. 기야마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시켜 가면서 어떻게든지 사고파의 한 조각이라도 어딘가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홍구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론은 치명타를 당한 짐승같이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기야마가 최후로 본 것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론과 그리고 솟아올라 꿈틀꿈틀 다가오고 있는 시꺼먼 물결이었다. 자동차는 거꾸로 물 속에 틀어박혀 버린 것이었다.   문득 눈을 떴다. 별이 반짝이고 있는 밤하늘이 똑똑히 보였다. 기야마는 놀라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는 냇가의 모래밭에 누워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옷은 조금도 젖어 있지 않았다. "정신이 드셨어요?"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놀라면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홍구의 검은 얼굴이 강 저쪽 하늘 속에서 똑똑하게 보였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그 정신력이 합쳐져서 당신을 자동차 안에서 이곳으로 텔레포트 시킬 수가 있었어요." 홍구는 어쩐지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말하는 것이었다. 기야마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내가 자동차가 강에 떨어지기 전에 홍구가 텔레포트 시킨 모양이로군?" "그래요." "론은?" "자동차와 같이 물 속에 가라앉아 버렸어요!" 홍구는 조그만 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하는 수가 없었어요. 론은 모든 사람을 선동해서 그 탐욕에 가득 찬 계획을 강행하려고 했어요. 아무리 설득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딴 사람들은 모두가 그 계획을 포기했는데 ........." 그러나, 기야마는 희미한 불빛에서 그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도 론같이 하등 동물의 연인은 싫겠지?" 홍구는 얼굴을 획 돌렸다. "그래서 나를 사랑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홍구는 돌연 고개를 돌려 기야마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녀요. 만약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니, 우리의 사랑이 일치하지 않았다면 최후의 텔레포트는 할 수 없었을 것이어요. 텔레포트는 사랑이 이루어 준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잠시 동안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그러자 행복감이 샘솟듯 두 사람의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작품 해설   미래의 우주 개발   이 작품은 소련의 대표적 SF 작가인 이반 에프레모프가 1947년에 발표한 우주에 도전하는 미래 인류의 대모험 이야기입니다. 에프레모프는 작가인 동시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생물학자이며 지질학자입니다. 고생물학자로서 전 세계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1945년부터 1949년의 4년 동안에 소련 학술 조사대의 책임자가 되어 3번이나 고비 사막을 조사하여, 많은 공룡의 뼈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에프레모프는 1907년, 발트 해의 핀란드 만 부근의 레닌그라드 가까운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혁명 후 16세 때 선원이 되었으나 그 후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하여 흥미를 느끼고 있던 고생물학을 열심히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27년에 2억 년 전의 생물의 화석을 발견한 것을 비롯하여 수 차의 학술 조사에 참가하여 지질학, 생물학의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에프레모프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중앙 아시아 탐험에 참가했을 때, 이상한 질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을 때부터 였습니다. 1944년에 최초의 SF 단편집을 출판하였습니다. 「다스카로라에서 우연히 만난」등 5개의 단편이 실려 있었는데 그 해에 또다시 몇 개의 단편을 발표하여 SF 작가로서 갑자기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에프레모프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인데, 청소년을 위한 최초의 과학 기술 잡지 「청년의 기술」에 연재되기 시작하게 되어, 곧 젊은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에프레모프는 또 「뱀자리의 심장(1959년)」,「면도칼날(1963년)」,「축시 (1949년)」등의 과학 장편 소설을 위시하여, 많은 작품을 썼는데 뛰어난 과학자로서의 태도가 모든 작품의 토대가 되어 있습니다. 우주 시대가 다가옴에 따라 SF 문학은 점점 대중화되어 많은 독자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드로메다 성운」은 뛰어난 작품으로서 소련 SF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소련 SF 작가에는 에프레모프보다 앞서 금성 비행의 이야기인 「무에의 도약」등을 쓴 베리야에프라는 선구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소련 SF계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공로가 컸습니다. 그 다음을 이은 사람이 바로 에프레모프입니다. 그 이후 「달의 길」의 카젠츠에프, 「보랏빛 구름의 나라」의 스트르가스키 형제 등의 우수한 작가가 나타나 현재는 젊은 작가들이 계속 작품 활동을 하여 소련도 SF가 유행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푸트니크 1호와 가가린의 우주 여행에서 현재까지의 소련 우주 비행 기술이 급속히 진보되어 소련의 젊은 사람들에게 우주에 대한 관심을 모은 것도 SF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파멸된 행성, 무서운 철의 별, 기괴한 우주 생물....... 우주 모험 이야기는 인류가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는 동안 예기하지 못할 위험에 부딪칠 것을 작가의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여 씌어진 것입니다. 인류가 우주에의 발판을 겨우 세웠을 뿐인데, 이 작품의 무대가 될 시기는 아직 수천 년 후의 미래일 것입니다. 설령 장래에 과학 기술이 지금보다 빨리 진보되어 이 작품에 나오는 강력한 애너메존 연료가 개발된다 하여도, 인류의 우주 여행은 이 작품에서도 말하는 것과 같이 은하계 우주내의 직경 50광년 정도의 작은 원 안에서 맴돌게 되는 것에는 큰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우주의 개발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순한 모험심 만으로의 행동이 아니고, 인류의 생존과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필요성을 느껴서입니다.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며 우주에의 공상을 끝없이 펼쳐 보면, 이 작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먼 우주 공간의 저쪽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의 발전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지구상에서 인류의 생활을 평화롭고 풍요하게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이 작품에 나오는 행성과 같이 인류는 스스로 지구를 멸망시키게 될지도 모릅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의 원작은 방대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우주 탐험의 한 부분을 발췌해서 옮긴 것입니다. 이 우주 탐험이 실현될 시대는 사회의 구조도 크게 변화되어 국가도 없고 인류 전체가 한 나라가 되어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연과 기후를 개조시켜 인간은 풍족하고 평화스럽게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우주 개발이 최대 관심사이고 또 최대의 목적으로 되어 있지만, 아직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는 이렇게 인류 전체가 웅장한 우주 개발의 사업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해도 아직 우주에의 여행은 곤란과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시대가 오고 오지 않고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SF   「악마 나라에서 온 소녀」의 작가인 후쿠시마 마사미는 일본의 SF를 키운 사람으로서 일본 SF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1959년에 SF 월간지인 「SF 매거진」이 창간된 이래 SF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외국의 대부분의 SF가 번역 소개되었고 SF 작가가 많이 등단해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1970년, 일본에서 세계 처음으로 국제 SF 심포지엄이 열릴 정도로 많은 붐을 일으켰으며, 일본 작가의 작품들이 영국과 미국에 번역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 나라는 이제 겨우 SF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어렴풋이 알려질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발전된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미국, 영국, 소련,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SF가 굉장한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와 과학이 세계 강대국과 겨룰만하게 된 것도 SF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특히 후쿠시마 마사미라는 작가는 월간지 「SF 매거진」의 편집장을 15년간 해 오는 동안 많은 번역 작가와 창작 작가를 양성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는 한편 자신도 번역과 창작에 전력을 해서 많은 작품을 냈습니다. 일본 SF 작가 협회 회원이며, 소년 문예 작가 협회 이사이기도 합니다. 「SF 입문」, 「SF의 세계」 등 SF 소개서를 썼는가 하면 「미궁의 세계」,「미지의 세계」등의 창작과 「우주 스테이션」,「방황하는 도시 우주선」,「얼어붙은 우주」 등의 번역 작품이 있습니다. 「악마 나라에서 온 소녀」는 월간 「SF 매거진」의 편집을 하고 있을 때 발표한 단편집으로, 꾸준히 새로운 독자에게 읽혀지고 있는 작품으로서 그의 단편 중에서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안드로메다 성운 에프레모프 작 ․ 박 홍근 역   아이디어회관 문고 224p. 19 cm   인 쇄      1978년 8월 20일 발 행      1978년 8월 30일 역 자      박 홍근 제 판      명림 정판사 오프셋     장원 출판사 인 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양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제 2-213호       전화 (266) 1975. (266) 1976   값 550원
1190    암흑 성운 Dark Nebula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 지음 댓글:  조회:346  추천:0  2023-08-23
암흑 성운 Dark Nebula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 지음   아이작 아시모프 1920년 소련 탄생. 과학자로서의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을 문학으로 결정된 우수한 작품이 많다. "은하 제국의 흥망사", "우주의 작은 돌”, “저것은 로봇" 등   아동 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 박사 최 인학 공학 박사 양 옥룡/이학 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끊어진 텔레비전 전화·············· 5 방사성 물질··················· 9 중성자 폭탄·················· 14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28 근절 시켜 보이겠다··············· 36 숨은 혁명가·················· 50 살리느냐, 죽이느냐?·············· 58 탈 출····················· 66 수수께끼의 행성················ 72 우 정····················· 80 뜻밖의 재회·················· 83 속이기····················· 86 암흑 성운··················· 95 배신자····················· 99 아무래도 이상하다··············· 102 질량 검사 미터················ 106 함정이다!··················· 113 밝혀진 정체·················· 116 하늘의 도움과 하늘의 적············ 124 두 죽음···················· 127 미친 자의 공상················ 133 희 망····················· 140   SHORT SHORT by 星新一   신발명 베개·················· 145 시험 작품··················· 148 약의 효력··················· 152 악 마····················· 155 재 난····················· 159 구관조 작전·················· 162 변덕스러운 로봇················ 166 박사와 로봇·················· 171 밤의 사건··················· 175 나팔 소리··················· 178 선 물····················· 181 실 패····················· 185 안 약····················· 188 이상한 로봇·················· 191 스피드 시대·················· 195 딱따구리 계획················· 199 거 래····················· 203     등장 인물   비론 파릴: 이 책의 주인공. 네페로스별의 파릴 대통령의 아들로서 지구 문화 대학에 유학 왔다가, 존티어가 꾸민 음모에 말려들어 많은 고난을 겪으나 결국은 살아남는다. 아우타치: 린겐별의 대공(비론을 해치려고 ‘존티어’라고 가명을 썼음). 비론과 지구 문화 대학의 친구지만, 그것은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음모의 장본인이며, 두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아르타: 로디아별의 총독의 딸. 강한 성격과 아름다운 모습의 아가씨. 비론과 함께 모험과 고난을 겪는다. 힌리크: 로디아별의 총독. 로디아별을 지키고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해 바보처럼 행동하나, 사실은 혁명의 중심 인물. 질브레트: 힌리크의 동생. 발명에 취미가 있으며, 비론을 구해 준다. 그러나 혁명의 암흑 성운을 머리 속에서 공상한 좀 정신이 돈 사람이다. 알라타프: 타이란 제국의 장관. "말의 머리" 별지대를 휘두르고 탄압하는 강한 권력을 쥔 사나이. 리제트 대령: 아우타치의 부하, 양심적인 사나이로서 아우타치를 죽이고 자기도 죽는다. 탠도로스 대령: 알라타프의 충실한 부하.     끊어진 텔레비전 전화   그것은 희미하고 가느다란 소리였다. 멀리서 들릴 듯 말듯 몰래 소곤거리는 것 같은 불규칙한 소리. 그 소리는 언제부터인가 캄캄한 침실 안 어디선가 끈질기게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소리다 그러니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는 들릴 리 만무하다. 따라서 비론 파릴은 세상 모르게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한밤중. 비론은 낮 동안 대학 운동부에서 연습하느라고 피로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서 잠에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침실 벽의 텔레비전 전화의 버저가 요란하게 올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울리다가 일단 그치고, 또 요란스럽게 울렸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부르르르르. 비론은 약간 몸을 움직였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부르르르르. 이윽고 그는 눈을 떴다. 텔레비전 전화의 소리구나 하고 깨닫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잠이 채 깨지 않은 채 침대의 베갯머리를 손으로 더듬어,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렀다.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것은 대학의 친구인 샌더 존티어의 얼굴이었다. "존티어 웬 일이야? 볼일이 있으면 내일 학교에서 듣겠어. 잠이 와서 미칠 것만 같다. 좀 자게 내버려 둬." 그러면서 비론은 스위치를 끄려고 했다. 그러나 존티어는 비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다시 계속 외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무도 없습니까? 거기가 지구 문화 대학의 학생 호텔 527호실입니까? 여보세요!" 비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 그는 스크린의 옆에 있는 영상 송신용의 파일럿 램프(전기 장치에 달아 놓은 전등)가 켜져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쪽에서는 이쪽의 소리와 모습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텔레비전 전화가 고장난 것이다. 그는 호텔의 룸서비스를 불러내는 단추를 눌렀다. 켜지지 않는다. 조명용의 단추를 눌러 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켜지지 않는다! 그는 문득 묘하게 숨이 가빠 오는 것을 깨달았다. 환기 장치가 멈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방안의 공기가 탁해지고 있었다. 비론은 화가 났다. 순간 스크린이 슬그머니 꺼지면서 어둠 속에 묻혀 갔다. 존티어는 단념하고 텔레비전 전화를 끊어버렸다. 방안은 깜깜했다. 비론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더듬어서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문은 곧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똑바로 나가려다가 그만 아플 정도로 문에 몸을 부딪치고 비틀거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는 자동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간단한 고장이 아니다. 꽤 큰 규모의, 아마도 호텔 전체의 전기 고장인지도 모르겠다. 비론은 어둠 속에 멍청하니 서 있었다. 손목 시계를 보니 아직 2시밖에 안 되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비론은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 녀석들의 장난이야." 비론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로 돌아가서 벌렁 누웠다. 그리고 어두운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쩐지 쓸쓸해졌다.   방사성 물질   비론 파릴은 지구인이 아니었다. 오리온자리의 암흑 성운 '말의 머리'라는 별지대의 암흑 성운에 있는 네페로스 태양계의 행성 주민이다. 물론 멀고 먼 선조는 지구인이었다. 지구에서 새로운 천지를 찾아서 대우주를 건너, 네페로스 태양계에 이주한 우주 이민의 자손인 것이다. 그래서 얼굴도 몸도 지구인과 매우 흡사하다. 단지 얼굴 빛깔에 금빛이 어리고, 눈이 제비꽃 색깔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것은 네페로스의 태양이 약간 보라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론은 행성 네페로스의 지도자, 파릴 대통령의 아들이다. 3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 지구에 유학생으로서 온 것이다. 그 3년도 꿈같이 지나가고 말았다. 졸업식이 끝나면 곧 고향 네페로스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도울 작정이었다. 비론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멍하니 천장의 어둠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난이라는 것을 안 이상 떠들어댈 필요는 언다. 좀 지나면 전기를 켜 줄 것인데, 괜히 떠들어대어 내일 아침 모두에게 놀림을 받을 필요는 없는 거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묘한 시간에 잠이 깨었으므로, 오히려 정신이 맑아 오는 것이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는 모로 돌아누웠다. 그 희미하고 묘한 소리를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뽀, 뽀, 뽀, 뽀, 뽀, 뽀, 뽀, 뽀. 속삭이는 듯한 가느다란 소리. 뽀, 뽀, 뽀, 뽀, 뽀, 뽀, 뽀, 뽀. 부드럽고 드러나지 않는 소리- 언제 어디선가들은 것도 같은 소리이다-그런데 무슨 소리일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 비론은 침대 속에서 머리를 갸우뚱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을수록 더욱 귀에 들어와서 오히려 확실히 들려온다. 더구나 그 소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여전히 같은 상태로, 뽀, 뽀, 뽀, 뽀, 뽀, 뽀, 뽀, 뽀. 하고 계속 울리고 있다. 이렇게 되어서는 도저히 잠들 것 같지 않다. 그는 마침내 일어나서, 베갯맡에 있는 캐비닛에서 만년필 모양의 플래시 라이트를 꺼내어 스위치를 돌렸다. 번쩍 한줄기의 광선이 방안을 비추었다.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벽장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그는 벽장을 열고 안을 비쳐 보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소리는 확실히 거기서 나고 있다. 비론은 거기에 쌓여져 있는 잡동사니들을 뒤적여 보았다. 낡은 럭비공이라든지 펜싱용의 마스크라든지, 깨진 비디오 테이프, 코드 따위를 뒤적거리다가… 아니, 이것은? 비론은 그것을 열어 보았다. 낡은 방사능 측정기였다.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비론은 자기도 모르게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조금은 그리워졌다. 그 방사능 측정기는 비론이 지구 문화 대학의 신입생으로서 지구로 올 때, 아버지가 짐짓 내주셨던 것이었다. 지구는 3백여 년 전에 무서운 핵전쟁을 하여, 일단 멸망했다. 비론처럼 다른 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지구를 둘로 갈라서 싸우고 있던 나라끼리 수폭이며 코발트 폭탄을 장착한 미사일을 쏘아대어 두 편 모두 전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오랫동안 지구는 방사능 투성이로 된 행성으로서, 한때는 사람이 살지 못했다. 이윽고 방사능은 없어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지구를 찾는 사람은 반드시 방사능 측정기를 가지고 오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러나 가지고는 오지만 거의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비론도 벽장 구석에 내던져 두고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령의 정체를 보았도다…… 이런 거겠지." 비론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방사능 측정기를 본래대로 놓으려고 했다. 그 손이 갑자기 오그라들었다. 몸이 굳어졌다. 방사능 측정기가 소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방안 어디엔가 방사선을 내는 물질이 있다는 것을 뜻함이 아닌가! 방사성 물질 같은 것을 둔 일은 없다. 적어도 어젯밤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방사성 물질을 갖다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도 동급생들의 장난일까? 그럴 리는 없다! 이 측정기가 붙잡을 만한 방사성 물질이라면, 오랜 동안에 원자병의 원인도 될 수 있을 만큼 높은 방사능을 가진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아니야, 이건 장난이 아니다. 친구 중에 이런 장난을 할 녀석은 없다. 그럼, 장난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결론을 한 가지다. 비론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하는 어떤 자가 일부러 둔 것이다. 그러나 범인은 벽장 속에 낡은 방사능 측정기가 있을 줄은 알지 못했으리라. 그 덕분에 비론은 범인의 무서운 계획을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성자 폭탄   비론은 방사능 측정기를 다시 쥐고서는 벽장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밑으로 가까이 했을 때였다. 가가가가가, 가가가가가, 가, 가, 갓. 방사능 측정기가 크게 소리를 내었다! 여기다! 그는 그 위에 쌓여져 있는 것을 치워 보았다. 그것은 곧 발견되었다. 처음 보는 길이 20센티 정도의 직사각형의 검은 상자가 거기에 있었다. 손으로 쥐어 보았더니 묵직했다. 이건 뭐야? 비론은 놀란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보고 있는 동안에 비론은 얼굴이 점점 새파래져갔다. 이것은… 소문에 들은 초소형의 중성자 폭탄인 것이다. 이 검은 상자 속에는 초소형의 중성자 발생 장치가 되어 있다. 중성자 발생 장치는 시한식으로서 점차로 열이 올라가게 되어 있어, 일정한 온도에 달하면 맹렬한 중성자 방사선을 낸다. 방사선이므로 원자폭탄처럼 폭발도 하지 않으며, 열도 빛도 내지 앉는다. 그 대신 이 방사선을 맞으면 즉시로 무서운 원자병에 걸리며 몇 시간 후에는 죽고 만다. 더군다나 중성자라는 방사선은 철이나 납이나 콘크리트의 두꺼운 벽도 마음대로 꿰뚫는다. 아마 이 정도 크기의 중성자 폭탄이라면 주위의 백 미터 이내에 있는 생물이라는 생물은 모두 죽게 되는 것이다. 틀림없다. 누군가가 비론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방법도 무섭도록 잔인하고 악랄하다. 비론 한 가람을 죽이기 위하여 호텔 안에 있는 사람 전부를 죽이는 이 중성자 폭탄을 사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성자 발생 장치는 지금이라도 시시각각 그 온도에 도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에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호텔 안의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된다. 모두에게 빨리 알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론은 텔레비전 전화가 고장이 나 있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는 거기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 버렸다. 자동문도 닫혀 있었다. 그는 비로소 배 밑바닥으로부터의 공포를 느꼈다. 암살자는 처음부터 이것저것 모두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폭탄을 발견하고 알려 주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게끔 사전에 모든 손을 쓰고 있은 것이다! "제기랄!" 비론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다. 입술을 끊어질 만큼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렇게 어이없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는 의자를 잡았다. 그리고 자동문 앞에 다가서자 힘껏 들이받았다. 두 번, 세 번 계속 들이받자 의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특수 스틸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캄캄한 절망감이 밀어닥쳤다. 죽는다…… 그 때였다. 바깥 복도에서 이쪽을 향해 급히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비론은 문에 바짝 붙어 서서 힘껏 소리를 질렀다. "이봐! 누가, 누가 와서 이 문 좀 열어 줘!" 그러자 발자국 소리가 마치 기적처럼 우뚝 방 앞에서 멈추었다. "이봐, 부탁해. 이 문을 열어 줘!" 비론은 다시 한 번 필사적으로 외쳤다. "파릴인가? 거기 있니?" 누구의 소리인가 희미하게 들렸다. 방음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 빨리 열어 줘. 큰일이다!" 비론은 또 힘껏 외쳤다. 그러자 밖에서 문을 향해 쿵 하고 몸을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비론은 초조해졌다. 빨리 하지 않으면 폭발은 이 순간에도 일어날지 모른다…… "이봐 파릴, 거기서 비켜서라고. 열선총으로 문을 뚫겠어." 바깥 사나이가 외쳤다. 비론은 얼른 문에서 비켜섰다. 찌찌찌익, 찌찌지익! 날카로운 발사 음이 울렸다. 방안 공기가 찌릭찌릭 진동했다. 그러자 어느 새 문과 일부가 빨갛게 되고, 이어서 오렌지 색깔이 되고, 그리고 눈에 타 붙는 것 같은 하얀 광선이 어둠을 꿰뚫었다. 다음 순간, 문이 안으로 찰칵 넘어지며 복도의 빛이 눈부시게 방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거기에 두 사나이가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아까 전화를 결어 왔던 존티어, 또 한 사람은 호텔의 관리인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오려고 했다. 비론은 두 손을 벌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들어오지 말아요. 이 방에는 초소형 중성자 폭탄이 장치되어 있어. 언제 폭발할지 몰라." "뭐라고?" 두 사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존티어가 곧 관리인을 뒤돌아보았다. "당장 호텔 안에 있는 사람들을 피난시켜야 해. 얼른!" 관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존티어는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오면서 비론에게 물었다. "어디야?" 비론이 가리켰다. 존티어는 그리로 가더니, 겁도 없이 폭탄을 들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 "뭐하는 거야, 존티어?" 존티어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뻔하잖아. 분해하여 폭발 못하게 하는 거야." "위험해! 이제라도 폭발할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지금 도망쳐도 단 한가지지. 그보다도 중성자 발생 장치를 분해하는 쪽이 덜 위험해." 존티어는 말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폭탄의 바깥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방사능이 있어." 비론은 두려운 듯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 곧 끝나니까, 대단한 방사능 광채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게다가 중성자는 발생 장치가 움직이지 않으면 파괴되지 않아." "그러나……” “겁나면 자넨 도망쳐, 파릴." "무슨 소리야. 좋아, 나도 무엇이든 하게 해 줘." 비론이 급히 말했다. "그럼, 손전등으로 손 쪽을 비쳐 줘." 비론은 무릎을 꿇고 손전등을 존티어의 손 쪽으로 돌렸다. 존티어는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뚜껑을 뜯고 코일을 뽑고 배선을 벗겼다. 잘못하면 중성자 발생 장치는 맹렬한 열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생명은 위험하다. 더군다나 이제라도 폭발을 일으킨다면… 무서운 방사선의 폭풍우 속에서 두 사람은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비론의 이마에는 방울방울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냉정하고 침착하게, 마치 시계 수리라도 하는 것처럼 일하고 있는 존티어의 대담함에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사실 굉장한 용기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죽음의 중성자 폭탄을 유유히 분해하는 존티어라는 사나이의 용기는 무섭기까지 했다. 길고 긴, 무척 오랜 시간으로 생각되는 시간이 지나갔다. 존티어의 나이프 끝이 찰칵 소리를 내며, 최후의 회로를 끊었다. "끝났다……" 존티어가 툭 한 마디 했다. “다음은 이놈을 납으로 된 상자에 집어넣고 땅에 파묻으면 된다…… 흠, 7분 30초 걸렸구나.” 존티어가 손목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그 팔을 비론이 힘주어 잡았다. “존티어,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자, 존티어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존티어는 아마 떨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지, 파릴…… 이제야 무서워진다." 그는 목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곧 존티어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비론을 지켜보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 방으로 와, 파릴. 자네에게 꼭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존티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파릴…… 때가 들어맞아서 다행이야." “때가 들어맞았다고?" “응, 난 아까 자네에게 텔레비전 전화를 걸었지." "그건 알고 있어. 그런데 전화가 고장이 나서……" "그래. 그 때 나는 자네에게 목숨을 노리는 놈이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전화가 통하지 앉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달려 온 거야." "그랬어……” 비론은 생각난 듯이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대체 누가 나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걸까. 그리고 자넨 어떻게 그런 일을 알고 있어?" 존티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말했다. "실은 이건 자네의 아버지에게 관계가 있는 일이야, 비론." "아버지? 그럼 대체 어떤 일인가?" 비론은 다시 한 번 놀라며 물었다. "자네 최근에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은 일이 없는가?" "아니. 얼마 전에 전보를 치려 하자, '말의 머리' 별지대로 서브 에테르 파가 흩어져 통신 불능이라고 했어. 그런데, 왜?" 존티어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것도 관계가 있어. 실은 서브 에테르 파가 아니야. '말의 머리' 별지대엔 정치적인 긴장이 있어서 통신을 받지 않는다. 비론…… 자네 아버지는 한 달 전쯤에, 타이란 제국 정치 경찰에 체포되었다." "뭐라고!" 비론은 너무나 놀라서 멍하니 상대방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타이란 제국이라는 것은 물론 '말의 머리' 별지대에 있는 50여 개의 태양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독재 우주 국가이다. 비론의 고향인 네페로스 태양계도 그 세력 범위에 들어 있는 별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타이란 제국은 그 별 지대에 속하는 별들의 정부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 별을 자기의 속국으로 보고, 반항하는 자에게는 용서 없이 군사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비론은 가슴속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그러면…… 어쩌면 네페로스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서 아버지는 그 책임을 지고……?" 실은 비론이 나라를 떠날 때에도 타이란 제국의 압제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이 일어나서 한 차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니야. 이제 발표되겠지만, 파릴씨는 다른 태양계에 대한 침략을 준비했다는 이유때문에 체포된 것이다." 존티어가 말했다. "그럴 리가!" 비론이 외쳤다. 존티어는 끄덕였다. "물론 그건 단지 구실이야." "그럼 왜……?" "파릴씨는 '말의 머리' 별지대 전체의 독립 운동의 지도자인 것이다. 그는 타이란 제국의 독재 정치를 쓰러뜨리고, 저마다의 태양계에 자유와 독립을 주려고 하는 비밀 혁명 조직의 지도자니까." 존티어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그러나 비론에게는 아직 믿어지지 않았다. 비론의 아버지는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물론 정의감이 강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전혀 혁명 운동의 지도자와 같은 그런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존티어, 자네는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을 알고 있는 거야? 서브 에테르 통신도 끊어지고 있다는데?" "그 이유는 간단해. 나도 자네 아버지와 함께 혁명 운동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동지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존티어는 힘있게 말하고서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계속했다. "비론, 자네도 '말의 머리' 별지대 주민의 한 사람이다. 더군다나 네페로스별의 대통령의 외아들이다. 타이란 제국의 독재자들의 횡포가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어. 교육받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언젠가는 타이란 제국의 압정을 물리치고, 저마다 용기를 내어 별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생각할 것이다." 존티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실은 나는 린겐별의 시민이다. 네페로스별과는 실로 이웃과 다름없는 곳이다. 나는 나의 별에서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여 지구로 망명해 온 거야. 고향의 별에 있을 때 나는 자네의 아버지와도 자주 만나서 여러 가지를 의논했어. 나는 너의 아버지 존경하고 있었다. 훌륭한 인물이었어. 자네 아버지는." 존티어는 순간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을 했다…… 그리고 나서 계속했다. "실은 나는 지금도 ‘말의 머리' 별지대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어. 어떤 특별한 연락망이 있으므로 저쪽의 정보를 알고 있는 거다. 자네 아버지의 체포에 대한 것도 그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네의 목숨을 노릴 것이라고 미루어 생각했었지." “그렇다면……저 중성자 폭탄도 타이란 제국의 스파이가 장치를 했다는 건가?" "그렇다." "그런데 왜냐? 좌우간 '말의 머리' 별지대에서 이 지구까지는 5백 광년이나 떨어져 있어. 그렇게 먼 곳에 있고, 정치에도 아무 관계없는 나의 목숨을 빼앗은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네가 아버지의 명성을 모르기 때문이야." 존티어의 날카로운 눈이 비론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파릴씨는 '말의 머리' 별지대의 어느 혁명가로부터도 매우 존경을 받고 있어. 만약에 그가 혁명 운동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면, 드디어는 혁명이 성공될는지도 몰라. 그러므로 타이란 제국은 아버지를 그런 구실로서 서둘러서 체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거다. 그런데 만약에 그 존경받는 인물의 아들이 고향에 돌아오면… 일단 눌러버린 혁명 운동이 다시 불타올라, 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보다 더 강한 혁명 조직이 만들어질지도 모르다…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래서 자네가 멀리 지구에 있는 동안에 없애버리려고 생각했던 거다." 비론은 어쩐지 눈앞에 뿌옇게 안개가 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주에 걸친 대 음모다…… 그러나 비론은 아직 확실하게 사정을 이해한 수는 없었다. 다만 증오해야 할 타이란 제국 우주 정치경찰의 손에 아버지가 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심한 분노가 타올라 왔다. "음……” 비론은 악물고 있는 이빨 사이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강대한 타이란 제국. 그 앞잡이로 되어 있는 우주 정치 경찰. 그 손으로부터 어떻게 아버지를 구출할 수 있을까? 아득하기만 하다. 고개를 들고 존티어가 말했다. "자네는 아버지를 구출하고 싶은가?" "물론이지." "구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는가?" "하고 말고!" "혁명 운동에 참가하겠어?" "아버지가 참가하고 있다면……” "파릴씨는 지도자였다." "참가하겠어." "좋아." 존티어는 비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 반드시 성공을 이루고 말겠어." "어떻게?" 비론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선 로디아별로 간다." "왜? 네페로스로는 안 되는가?" "네페로스에 가면 마지막이야. 착륙과 동시에 어떤 구실로서 체포되고 만다. 그보다는 우선 로디아로 가서 총독 힌리크를 만나는 거다. 자네는 힌리크를 알고 있나?" 비론은 머리를 흔들었다. "'말의 머리' 별지대의 로디아 별단체의 총독이다. 별지대에서 첫째가는 비겁한 자로서 우둔한 사나이야. 그런데 타이란 제국의 티라니 왕국과는 옛날부터의 친구이므로 '말의 머리' 별지대에서는 꽤 큰 권력가이다. 그리고 이 사나이는 또 자네 아버지와도 친구였다." 존티어는 홀로 끄덕였다. “그러므로 힌리크는 자네가 믿고 찾아가면 그렇게 간단하게는 우주 경찰에 넘겨주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다른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혁명의 기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겠다. 모험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밖에는 취할 방법이 없어. 어때 해 주겠나?" 비론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존티어는 비론의 손을 꼭 잡았다. “좋아. 과연 비론 파릴이다. 자네는 내일 오리온 성좌 행의 정기 우주선을 타야 한다. 준비는 내가 알아서 다 해 두겠어." "졸업식은 어떻게 하지?" "바보! 그런 건 단념해." 존티어가 화를 내듯 말했다. "그리고 출발에 대해서는 동급생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알았지? 어쨌든 조심하여 내일은 누구도 모르게 우주 공장까지 와야 한다." "알았어." 비론은 끄덕였다. 비론이 돌아가고 한참 되었을 때, 혼자가 된 존티어는 침대 위에 앉은 채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두개골 속에 넣어 두고 있는 특별의 통신기에, 지금 아득한 우주 저편에서 초광속 전파의 통신이 들어온 것이다. 무엇을 전해 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들은 존티어의 얼굴은 갑자기 긴장되었다. "파릴이…… 역시." 그의 입에서 희미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가속복을 입고 로비에 모여 주시오!" 우주선의 각 선실에 갑자기 스피커 소리가 울렸다. 비론은 전망창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녹색 지구를 보고 있었는데, 스피커의 소리에 일어섰다. 선실의 벽장에서 가속복을 꺼내어 입기 시작했다. 입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가속복이 하는 것은 항성간의 우주선이 광속 이상의 속력을 낼 때, 그 가속에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입는 특별 내압복인 것이다. 옷을 다 입고 나서 문득 창 밖을 보자, 지구는 이미 보일 듯 말듯 캄캄한 우주의 밑바닥으로 점점 가라앉아 가는 듯이 보였다. 비론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로비로 결어나갔다. 로비에는 승객이 거의 모여 있었다. 로비의 의자는 천천히 몸을 눕혀서 잘 수 있게 조절되어 있다. 가속 때에는 모두 여기서 지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관들, 뒤이어 선장이 나와서 인사를 했다. "여러분, 주선은 이제부터 10분 이내에 최초의 점프를 행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선장은 말을 이었다. "여러분 중에는 물론 항성간 비행에 익숙해진 분도 계십니다만, 처음인 분도 꽤 많습니다. 그래서 규칙에 따라서 간단하게 점프의 설명을 해 두겠습니다." "점프라는 것은 우주선에서 종사하는 사람들끼리의 말이며, 사실은 초공간 비행이라고 합니다. 본선은 이윽고 빛의 속력을 넘는 속력으로 날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본선은 문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점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장님, 빛의 스피드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들었는데요……” 승객 중의 한 사람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보통의 공간과 시간의 세계- 즉 보통의 우주 공간에서는 빛보다 빠른 것은 없습니다. 사실 100여 년 전까지는 인류는 빛보다 빠른 스피드를 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바로 이웃에 있는 태양계에 가는데도 3년이나 4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초공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보통 의미의 거리라든지 시간이라든지 하는 것이 전혀 없어지고 맙니다. 빛의 스피드를 넘으면 거기를 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초공간에서는, 빛이라도 10년이나 20년이나 걸리는 큰 거리를 한번 날아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몇 백년도 전에 바다를 넘는 배가 지협을 파서 운하를 만들고 대륙을 멀리 돌아가는 번거로움을 없앤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위험은 없습니까?" 또 승객의 한 사람이 물었다. 뚱뚱한 여자 손님이었다. 선장은 히죽 웃었다. "초기에는 있었습니다. 초공간에 들어간 우주선이 그대로 영원히 행방 불명이 된 예도 있으며, 초공간에서 나올 때 대폭발을 일으켜 버린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초광속 비행에 필요한 계산이나 에너지의 조절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걱정은 조금도 없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손목 시계를 힐끔 보았다. "이제부터 1분 후에 점프에 들어갑니다. 점프의 지속 시간은 5분간입니다.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아주 일시적인 것이므로 곧 좋아집니다. 절대로 일어서서는 안 됩니다.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안전 벨트를 매어 주십시오." 스피커가 초를 부르기 시작했다. "50초 전- 40초 전- 30초 전-" 로비는 조용해졌다. 몸을 움직이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20초 전- 10초 전- 9- 8- 7- 6- 5- 4- 3- 2- 1-제로!" 순간 쑥 하고 몸 내부가 끌려 올라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빙글 현기증이 나고, 눈 속에 빨강, 노랑, 파란빛이 튀겼다. 그리고 편해졌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전망 스크린에는 마치 꿈속에서처럼 이상한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보통의 별하늘은 이제는 없다. 빛의 다발이 엿처럼 길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다가 싹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또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다. 그것은 우주선이 빛의 스피드를 넘어섰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 것이다. 초공간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빛의 춤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길고 긴 시간, 비론은 그 빛의 댄스를 보고 있은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이윽고 또 한번 그 붕 하고 몸이 뜬 것 같은 기분이 되면서 눈앞이 어두워졌다. "앗, 별이다! 별이 보인다!" 누군가가 외쳤다. 비론도 눈을 뜨고 전망 스크린을 보았다. 가슴이 꽉 죄어드는 것 같은 굉장한 감동. 굉장하다…… 거기에는 마치 가득찬 별만으로 생긴 것 같은 맑게 빛나는 하늘이 있었다. 시계를 보자, 꼭 5분이 지나고 있었다. 3~5분 동안에 우주선은 태양계의 안쪽에서 단숨에 5백 광년을 날아, 은하계의 별이 훨씬 더 많은 공간까지 나온 것이다. 비론은 반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초공간 비행은 몇 번 되풀이해도 굉장하다. 가슴속의 어두운 기분까지도 말끔히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았다.   빛나는 달은 먼지와 같고 우리들을 감싸고 돌아간다. 살아 있는 빛의 안개만이 우주는 멀고도 끝이 없어라.   비론의 입술에서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우주에 나오면 언제나 느끼는 그 파도와 같은 기쁨을 지금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또 한 번 손목 시계를 보았다. 안전 벨트를 풀어도 좋을지 어떨지를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 때, 비론은 갑자기 어떤 것을 보았다. "앗!" 비론은 너무나 큰 놀라움에 입을 딱 벌린 채 한동안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는 손목 시계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손목 시계의 끈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겨우 소리가 나왔다. 이상했다. 그 손목 시계는 지구로 유학하러 올 때 아버지가 주신 방사능 감광 밴드의 시계였다. 방사능을 받으면, 그 밴드의 금속 면의 빛깔이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진한 초록색이 되면, 치사량의 방사능을 받은 것이 된다. 엷은 초록색이라도 곧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푸른색이면 그다지 걱정한 필요는 없으나 빨리 그 장소에서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주 적은 방사능이라도 밴드는 민감하게 반응을 나타내어 엷은 푸른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밴드는 본래대로…… 하얗게 차분한 광택 그대로이다. 이럴 리가 없다. 그 중성자 폭탄을 발견했을 때도…… 아니, 존티어가 폭탄을 분해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에도 이것을 차고 있었다. 그러니 밴드는 엷은 푸른색으로 변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비론의 머리 속에 크고 거무죽죽한 수수께끼가 소용돌이 되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는 서둘러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잡담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좀 실례." 하고 헤쳐 나가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앞에 왔을 때, 좀 망설이다가 결심하고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론은 순간 느꼈다. 누군가가 초공간 비행을 앞두고 짧은 시간에 그의 방을 몰래 조사하고 간 모양이다. 대체 어떤 자가 조사했을까? 타이란 제국 경찰의 스파이일까? 역시 나의 신변을 엿보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비론은 자기가 가는 길에 무서운 음모의 소용돌이가 몇 겹으로 돌고 있는 것을 확실히 눈으로 본 것같이 느꼈다.   근절 시켜 보이겠다   항성 우주선은 그로부터 1시간 후, 로디아 태양계의 제 3행성에 착륙했다 우주 공항에 내렸을 때, 비론은 곧 무장한 푸른 제복의 사나이들을 보았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눈에 익은 타이란 제국 우주 경찰의 제복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우주 공항을 경계하고 있다. 우주 질서를 지키기 위한다는 구실이었으나, 실은 독립운동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푸른 제복을 보고 비론은 놀랐다. 비론은 각오를 하고 우주 게이트를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제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을 조사하고 나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페로스의 비론 파릴이오?" "그렇소." “대장이 만나고자 하오. 지금 곧 공항 사무실까지 함께 가 주어야겠소." 비론은 얌전히 두 사람의 푸른 제복의 뒤를 따라 공항 사무실로 갔다. 넓은 빌딩 속을 엘리베이터로 몇 10층 올라갔다. 거기에 우주 정치 경찰의 로디아 사령부가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그 넓고 넓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책상 앞에 놀랄 만큼 키가 크고 여윈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푸른 제복에 굵은 금줄이 두 개… 고급 사관의 제복이다. "네가 비론 파릴인가?” 라고 물으며, 독수리 같은 잔인한 눈으로 파릴을 쏘아보았다. "그렇습니다." "왜 네페로스별로 직접 가지 않고, 이 로디아별에 왔는가?" 불쑥 날카로운 질문을 먼저 꺼냈다. 비론은 그러나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대답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장.” "어떤 목적인가? ” 대장의 눈이 번쩍 빛났다. "실은 이 로디아별의 힌리크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을 우연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힌리크 총독에게 알려드리기 위하여 일부러 여기로 온 것입니다.“ "뭐……?" 대장의 얼굴에 분명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비론은 불안을 감추고 태연한 자세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 이상한데, 파릴. 로디아별의 치안 유지를 맡고 있는 우리들의 귀에도 그런 음모가 있다는 것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 그런데 멀리 떨어진 지구에 있던 자네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는가?" "간단한 이유입니다. 그 음모는 지구에서 추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머리' 별지대를 피하여 지구로 망명한 작자들의 손으로 추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흠?" 대장은 책상 끝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어떤 음모인가? 자세히 말해 주게." "그것은 힌리크 총독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서는 곤란합니다." "뭐라고……?" 대장은 화를 냈다. 그 표정에 험악한 노여움이 떠올랐다. 그런데 또 그 시선이 책상의 한쪽에 옮겨졌다고 생각하자, 즉시로 폭풍이 조용해지는 것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변했다. "좋아. 그럼 자네를 힌리크 총독에게로 데리고 가겠어. 총독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우리들의 임무니까." 대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실내 텔레비전을 켜고 부하에게 비론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도록 명령함으로써 깨끗이 석방하고 말았다. 푸른 제복을 따라 우주 경찰의 에어 카를 타면서도 비론은 어딘가 긴장이 풀려 보였다. 물론 지금 대장에게 말한 것은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그건 존티어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작전이었다. 존티어는 이렇게 말했었다. “만약에 붙잡히면 이 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진상을 알기까지는 우주 정치 경찰이라 해도 분별 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힌리크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지는 못하지. 옛날의 파릴씨와의 우정을 보아서라도 자네를 보호하려고 할 꺼다.” 그 때 비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악명 높은 타이란 제국의 우주 정치 경찰이 그런 잔재주를 부린 이야기를 신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엉터리 짓을 하다간 더욱 의심을 받고 그러는 동안 어떤 진상을 잡으려고 할 것이다. 그야말로 그 당장에 체포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존티어는 그 이야기를 할 것을 주장했다. ”지금 자네에게는 말할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좋아. 나를 신용하고 해 보는 거다. 그들은 반드시 내가 말하는 대로 할 테니까." 그리하여 그야말로 그대로 된 깃이다. 비론은 점점 눈앞에 전개되는 로디아 수도의 바깥 시가를 보면서 생각했다. 비론의 의심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비론이 끌려가자, 곧 대장은 책상의 끝을 보았다. 그곳에는 비밀의 실내 텔레비전 스크린이 있었다. 그리고 스크린 안에는 키에 비해 무겁게 어깨가 넓은 늠름한 몸집의 사나이가 비치고 있었다. "장관……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보 같은 놈. 그 따위 어린애들이나 속을 말로 우리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장관이라는 사나이가 말했다. 이 사나이야말로 우주 정치 경찰의 장관으로서 타이란 제국의 황제 티라니의 첫째 왕자 알라타프인 것이다. '말의 머리' 별지대에서 첫 손가락 꼽힐 만큼 잔인하며, 머리가 잘 돈다는 사나이로 불리는 알라타프의 비웃음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도록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요. 장관?" "물론 놈을 엄중하게 감시해야 한다." "그것은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지만…… 특히 어떤 점에 주의를 하면 좋은지요?" "음, 그놈이 그 허무맹랑한 거짓말의 암살 이야기를 힌리크한테 하러 가는 목적을 캐내야 한다. 그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위험한 줄 알면서도 하려고 한 것은 반드시 무엇인가 이유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과연…… 그러나 하필이면 고르고. 고른 것이 힌리크라는 것은 묘한 일이죠, 장관. '말의 머리' 별지대에서 첫째 가는 바보로 통하는 사나이를 고르다니." 대장은 비웃었다. 그러나 알라타프 장관은 웃지 않았다. "바보이기 때문에 도구로 이용될 위험이 있다. 모르겠는가, 앤드로스?" "무슨 도구입니까?" "물론 반역 음모의 도구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알라타프는 비로소 음흉한 웃음을 띠었다. "요즈음 이 별지대에는 우리 타이란 제국에 대한 반란의 음모가 비밀리에 계속되고 있다. 아무리 탄압해도 놈들은 단념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딘가에 놈들을 지도하는 주모자가 있다는 증거다, 앤드로스." "그럴까요. 우리들은 네페로스의 파릴을 체포했습니다. 놈은 죽을 때까지 따로 지도자는 없다고 끝까지 말했습니다." 앤드로스가 말했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죽음의 신과 같은 웃음을 웃었다. "파릴의 아들놈이 이미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요?" 알라타프는 그것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는데,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네? 파릴의 아들 말입니까?" "아니야, 지도자에 대해서다. 반드시 있다." 알라타프는 무서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을 찾아낸다. 그리고 혁명의 반역자들을 근절해 버리겠어!" 앤드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려 왔다. 항상 보아 오는 알라타프 장판의 표정, 언제나 오싹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만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알라타프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알았는가, 앤드로스? 틀림없이 비론 놈을 감시해야한다!"   광 대   "싫어요. 나는 절대로 싫어요. 그런 일은!" "이봐,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지 않은가?" "아니에요.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결코 이렇게는 되지 않아요. 반드시 저를 위해서 싸워 주셨을 거에요." 여기는 로디아 총독 관저의 한 방.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로디아별의 총독 힌리크와 그의 딸 아르타였다. 아르타는 아름다운 얼굴을 새파랗게 하고 분노로 떨고 있었다. 그 반대로 힌리크 총독은 좀 비겁하다 싶을 정도로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그런 무리한 말은 하지 마라, 아르타." "무리하다니요? 저는 그런 싫은 사나이의 아내는 되기 싫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어요." "알라타프는 타이란 황제 티라니의 첫째 왕자다. 이윽고 이 '말의 머리' 별지대의 지배자가 될 인물이야." "저는 황제의 아내도 원치 않아요." "그렇지 않다. 내 말은 다른 뜻이 아니야. 알라타프 같은 실력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다." "그렇기는 하지만, 설마 아내가 되지 않는다고 탄압하다니……” "아니, 그렇다, 아르타." 힌리크는 두려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알라타프에게 의심을 받고 있다." "의심을 받는다고요…… 무엇을요?" "너는 알고 있지. 그 네페로스의 파릴을." "네, 알고 있어요. 저번에 다른 태양계에 침략 준비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죠. 그러나 그것은 구실이어요. 대체 평화 유지법이라는 법률 그 자체가 타이란 제국에서 관리하게 되어 있는 엉터리 법률인걸요. 파릴씨는 저도 알고 있지만 훌륭한 인물이어요. 그는 다른 태양계의 영토나 산물에 야망을 가질 사람이 아니어요." "그건 그래 아르타. 그런데도 그는 체포되었구나."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내게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미 그는 비밀리에 죽음을 당했다는 거다, 아르타……” "설마!" "아니, 틀림없는 정보야. 가엾게도 나는 그와 친했는데…… 네가 말하듯이 실로 훌륭한 인물이지. 나에게 있어서는 좋은 친구였다. 그런 그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힌리크는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우주 정치 경찰은 나와 그가 친했기 때문에, 나도 그의 독립 운동의 한 패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는 거야. 친하긴 하지만 나와 그와는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혁명을 일으키다니, 그런 빗나간 일을 이 내가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지금 알라타프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가 없구나." 아르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되는 타이란 제국의 횡포와, 그리고 아버지의 여실한 무기력함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 때, 실내 텔레비전의 신호 램프가 켜졌다. 아르타가 스위치를 넣자, 스크린에 관저를 정비하는 대장의 얼굴이 비치었다. "뭐여요?" 지금 우주 경찰 앤드로스 대령의 부하가 오셨습니다." “뭐, 뭐라고?" 힌리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아르타도 놀랐다. "무슨 용무라고 말하던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온 비론 파릴이라는 젊은 사나이를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 사나이가 총독께 면회를 신청하고 있습니다." “비론 파릴! 그는 파릴의 아들이다. 지구에 유학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용무로 나를 면회하려고 하는가?" "다름아니라 저……” 경비 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뭔가 지구에서 총독 각하의 암살 계획을 세우고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암살 계획이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냐!" 힌리크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르타가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내가 만나 보겠어요, 아버지." 그리고 나서 스크린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 남자를 제 방으로 보내요."   망명자   아르타는 들어온 청년을 지켜보았다. 어깨가 넓고 늠름한 체격에 빈틈없는 느낌을 주는 청년이었다. 그 얼굴에는 파릴 대통령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당신이 비론 파릴씨죠?" "그렇습니다. 총독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총독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청년은 씩씩한 말투로 말했다. 아르타는 끄덕였다. "저는 총독의 딸이에요. 파릴씨, 아버지는 지금 몸이 불편해서 만날 수가 없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전해 드리겠어요.." "당신이 힌리크 총독의 따님?" 비론 파릴은 잠시 동안 아르타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니까요." 아르타는 방에 있는 시녀들에게 눈짓을 했다 시녀들이 방에서 나가자, 비론 파릴은 한 걸음 다가왔다. "총독의 암살 계획이라고 말씀하셨죠, 파릴씨? 무슨 일이죠?" "그건 꾸며 낸 것입니다." "뭐라고요?" 아르타는 순간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점점 찌푸렸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럼, 무슨 용무로 왔나요?" "망명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망명을……?" "그렇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타이란 제국의 앞잡이들에게 체포되어 투옥된 것은 알고 있죠. 나는 갈곳이 없어졌소. 그러나 힌리크 총독은 아버지의 친한 친구였지요. 총독이라면 나의 청을 들어 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나의 말을 총독에게 전해 주시오." 아르타는 서슴없이 말하는 비론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은 모르나요?" "모르다니, 무엇을요?" "당신 아버지의 일을." "체포된 것 말이죠? 그러니까 말하고 잇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아버지는 이미 사형을 당했다는 소문입니다." "뭐! 사형?" 비론은 두 주먹을 틀어쥐며 부르짖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아니어요. 아버지의 정보부가 확실하게 전해 주었어요. 앞으로 타이란 제국에서 발표가 있을 겁니다…… 물론 병으로 죽었다고 변명을 하겠지만." 비론은 이미 듣지 않고 있었다. 슬픔과 현기증이 동시에 밀려 왔다. 가슴속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남아 있는 거라곤 억누를 수 없는 분노의 불길뿐이었다. 그것은 가슴 깊이에서 점차로 강하게 불길을 더해 가서, 가슴에서 온 몸을 퍼지고 있었다. 비론은 문득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몹시 아름다운 파란 얼굴을 한 아르타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들로서는 당신의 망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비론 파릴씨." 여기까지 말하고 아르타는 살짝 눈을 내리 감았다. "사형수의 아들의 망명을 허가한다면, 우주 정치경찰에서 우리들까지도 의심을 받습니다. 안 됩니다. 비론 파릴씨!"   숨은 혁명가   비론은 차가운 눈으로 아르타의 괴로워하는 듯한 얼굴을 다시 보았다. "과연, 자기 일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할 수 없어요, 로디아별을 위해서니까요." "그런 명목으로 당신들은 정의까지도 눈을 감고있는 겁니다. 소문은 사실 대로군. '말의 머리' 별지대에서 가장 비겁하다는 소문은 힌리크만이 아니라 딸까지로군." 아르타의 얼굴은 점점 핏기가 오르면서 변했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비뚤어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할 말이 없어요. 당신을 우주 정치 경찰에 넘기겠습니다." 아르타가 손을 움직이자, 자동문이 열리면서 호위병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신경 충격 채찍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을 우주 정치 경찰에 넘겨줘요. 불법 망명을 청했어요." "알았습니다." 호위병이 충격 채찍을 들고 다가온다. "함께 갑시다, 파릴." 이때였다. 뒤에서 어울리기 않게 한가로운 듯한 밝은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그 두 사람." 호위병은 뒤돌아보고, 거기에 사치스러운 복장을 하긴 서 있는 사나이를 향해서 차려 자세로 경례를 했다. 사나이는 뚜벅뚜벅 앞으로 다가오면서, "아르타, 너의 복수는 좀 지나쳐.” "어머, 지르 아저씨, 엿들었군요." 아르타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엿듣다니, 기특한 소리를 하는군. 지나가다가 들은 것 뿐이야. 아르타, 너는 여자로서 너무 차갑구나. 모처럼 우리를 믿고 온 사나이를 무참하게도 타이란 제국의 바보 같은 놈들에게 넘겨주다니." "쓸데없는 참견은 마세요, 아저씨." 아르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어요. 그러나 아버지나 우리들이나 로디아별의 전 주민을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요. 그런 것쯤은 아저씨도 알고 있을 거여요. 아무리 태평스러운 아저씨도요." "이봐 이봐, 태평스럽다니? 나 역시 꼭 망명을 허락하라든지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다만 모처럼의 손님을 대접도 하지 않고, 당장 체포하여 감옥에 넣는 법은 없다고 말한 거다." 사나이는 비론을 뒤돌아보았다. "실례했어, 비론 파릴." 하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질브레트. 힌리크 총독의 동생이야. 즉, 아르타의 아저씨가 되지. 잘 왔군." 비론은 내민 손을 기계적으로 쥐었다. "아르타, 얼마 동안만 파릴 군을 나와 함께 있게 해줘. 그 정도는 되겠지?" 아르타는 난처한, 얼굴을 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끄덕이고 말았다. 질브레트는 비론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파릴군. 나의 연구실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비론은 질브레트에게 팔을 잡힌 대로 따라갔다.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 풀리자, 얼떨떨한 것이 마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와 눈앞을 뽀얗게 흐려놓았다. 상냥하셨던 아버지, 엄격하셨던 아버지, 네페로스의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훌륭한 아버지…… 3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의 추억이 밀물처럼 가슴을 때려왔다. "여기다. 자아, 들어가요. 파릴군." 질브레트의 목소리에 비론은 문득 자기 정신으로 돌아오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거기는 확실히 연구실이라는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벽에는 빈틈없이 책이 줄지어 정리되어 있었고, 벽 앞에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놓여 있는 작업대가 있었다. "괴롭지?" 질브레트가 슬쩍 말했다. 비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괴로울 때는 우는 것이 좋아. 눈물은 슬픔을 달래 주지." 질브레트는 조용히 말했다. "괴로울 때는 또 좋은 음악도 효과가 있다. 옳지, 자네에게 내가 발명한 새로운 악기의 연주를 들려주지." 하고 질브레트는 멍하니 있는 비론 앞에, 작은 네모난 상자를 가져 왔다. "음악을 들을 때는 방이 어두운 편이 좋겠지." 그는 자기 마음대로 정하며 천장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천장에서 비치고 있던 조명이 슬쩍 어두워지며 사라졌다. 비론은 그야말로 놀랐다. "나의 발명이다. 눈에서 나오는 전자에 의해 자동적으로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조명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 악기에 비하면 어린애를 속이는 거나 같은 거다." 하고 그는 상자의 단추를 눌렀다. 아무런 음악도 들려오지 않는다. 비론은 자기도 모르게 질브레트를 보았다. "상자를 지켜보게." 비론은 아무 생각 없이 상자를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무엇인가 둥둥 뜨는 것이 눈앞에 있었다. 주위가 보라색으로 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일종의 음악이 두뇌의 어디선가 울리기 시작했다. 비론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음악이 높아지자, 색깔은 폭포처럼 흐르는 비단의 빛남으로 변했다. 그러자 보고 있는 동안에 그것은 각가지 색깔로 변하면서 폭발되었다. "앗!" 비론은 머리를 안고 엎드렸다. 머리가 깨져서 날아가 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본래의 장소에 있었다. 조명도 켜지고, 질브레트가 그 묘한 상자를 가지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대체……” "이 상자야. 이 상자에는 일종의 전파가 나온다. 그것이 자네의 뇌에 작용하여 음이나 색깔을 보이게 한다. 최후의 것은 조그마한 나의 장난이야." 질브레트는 짓궂은 장난을 한 아이처럼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어떨 때 소용됩니까?" "아무 소용도 없는 거야. 단지 장난감이야." 질브레트는 천천히 벽 한쪽을 메우고 있는 찬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때로는 쓸모 있는 것도 발명하지. 예를 들어 이건 어때?" 하면서 질브레트가 하나의 큰 책을 들고 책장을 넘기자, 어디에선가 희미한 빠른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이것은?" 질브레트는 갑자기 빠른 말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란 제국 우주 정치 경찰의 비밀 통신이다. 그들은 이것으로 자네가 이 로디아에 오늘 도착하는 것도 다 알고 있었어. 물론 나도." 비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왜 당신이 이러한 일을?" "모르겠는가?" 비론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실망스러운데? 그렇다면 자네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라고 말해도 믿어 주지 않겠는데?" "나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비론은 되물었다. "그렇다. 침략자를 타도하기 위해서다. 독재자를 때려눕히고 우리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다." 질브레트의 그때까지의 상냥스러운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한 사람의 정열에 불타는 혁명가였다. 그도 또한 숨은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 "타이란 제국은 한 가지 한 가지 우리들을 탄압하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별들간의 통신도 시키지 않으며, 우주선을 가지는 것도, 조종을 배우는 것조차도 금지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우리들을 언제까지나 그들의 노예로 두기 위해서다. 비론 파릴, 자네는 그런 일을 언제까지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 줄 수 없지. 단연코 줄 수 없어!" 질브레트의 얼굴은 아주 상기되었다. "자네 부친께서도 그 때문에 죽었어. 자유와 긍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죽어갔다. 우리들은 그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원수를 갚고 목적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타이란 제국의 힘은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은하 우주 중에서 최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우주 국가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무찌릅니까?" 질브레트는 잠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어떤 방법입니까?" "파릴…… 자네는 우주선의 조종을 할 수 있나?" "평범한 것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대학에서 스포츠 부원으로 배웠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러시나요?" 비론은 질브레트의 엉뚱한 질문에 놀라면서 되물었다. "실은 그것이 중요한 일이다. 잘 들어두게, 파릴군, 이 '말의 머리' 별지대에 타이란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주선을 손에 넣고 거기로 날아가서……" 이렇게 말하다가 질브레트는 말을 멈추고 문을 보았다. 문의 일부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왔어." 그러는데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곧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무장한 두 사람의 로디아인의 호위병이 서 있었다. "무슨 용무야?" "불법 망명자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로디아병은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오면서 비론의 앞에 멈춰 섰다. "비론 파릴, 불법 망명자로서 체포한다." 비론은 입술을 꽉 다물고 질브레트를 보았다.   살리느냐, 죽이느냐?   "누구의 명령이냐?" 질브레트가 물었다. "총독 각하의 명령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로디아 군인은 재빠르게 신경 충격총을 벨트에서 뽑아서는 비론에게 들이댔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비론, 얌전하게 따라가게." 질브레트는 짐짓 웃음을 얼굴에 닫고 말했다. 이미 조금 전의 얌전한 사내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 변하는 속도의 빠름에는 비론까지 놀랐다. 비론은 질브레트의 거동에 무엇인가 비밀의 신호라도 얻을까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없었다. "걸어라." 비론에게 충격총을 들이대고 로디아 군인이 말했다. 그때였다. "아, 잠깐만, 그 사람의 외투를 잊었어." 질브레트가 불러 세웠다. 비론은 깜짝 놀랐다. 그는 외투를 입고 오지 않았다. 그러면 이것이…… "그렇지. 저기 커튼 뒤에 놓아두었지." 질브레트가 또 말했다. 비론은 그 뜻을 이번에야 깨달았다. 로디아 군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총구가 자기를 벗어나 바닥을 향하고 있는 것을 비론은 보았다. 그는 일어나 천천히 커튼으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번개같이 커튼의 옆에 잇는 의자를 와락 잡고 가까운 쪽의 로디아 군인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응……“ 맞은 로디아 군민은 한 마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뭘 하는 거야!" 또 한 사람의 로디아 군인이 충격총을 빼들었다. 비론은 쓰러진 로디아 군인의 총을 덮쳤다. 순간 로디아 군인의 총구에서 보라색의 광선이 번쩍이면서 비론의 다리를 맞추었다. "앗!" 비론은 앞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몸부림 쳤으나 발이 저려서 움직이지 못하겠다. 비론은 이를 갈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다시 공격해 오지 않는다. 로디아 군인의 성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비론은 상체를 겨우 움직여 뒤돌아보았다. 뒤돌아보고 놀랐다. 로디아 군인은 방 한가운데선 채로 눈을 위로 치뜨고, 두 손을 맥없이 내리고 흔들흔들 몸을 흔들고 있었다. 대체 이것은…… 질브레트가 그 검은 음악 상자를 가지고 스위치를 움직이고 있다. 그 눈은 군인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비론은 곧 알아차렸다. 그 로디아 군인의 머리 속에는 아까 비론의 머리 속에 있던 것 같은, 색깔이 있는 음악이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전파가 만드는 색깔과 빛의 홍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비론은 아픈 다리를 끌고 일어서면서 신경 충격총을 그놈에게 돌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광선에 맞은 군인은 그 즉시로 뒹굴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비론은 질브레트에게 말했다. "인사는 필요 없어. 그보다 빨리 숨지 않으면……" 질브레트는 이렇게 말하고, 책상 위의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책상 표면에 오렌지색의 빛이 켜지고, 그것이 점점 이동했다. “이것은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시설이다. 이 오렌지색은 호위병이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 질브레트는 비론을 뒤돌아보았다. "급하다, 파릴. 자네는 아르타에게 숨겨 달라고 부탁해." "아르타에게? 아르타는 내가 붙잡히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진심이 아니야, 오히려 아르타는 타이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최후의 경우가 되면 살려 주는 거야. 숨겨 달라고 부탁해야 해. 아르타의 방은 복도를 곧바로 가서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아 왼쪽에서 세 번째 방이다. 서둘거라. 나는 여기서 호위병들을 막을 테니까." 비론은 억지로 방에서 밀려 나왔다. 할 수 없이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돌아 힐끗 뒤돌아보았을 때, 몇 명의 호위병이 질브레트의 방문 앞에 서 있고, 질브레트는 손짓 몸짓으로 무엇인가 떠들고 있었다. 그는 다시 가르쳐 준 방으로 달려갔다. 노크를 하자, 곧 응답이 왔다. "누구요?" "질브레트 경의 심부름입니다." 비론은 갑자기 생각나는 대로 대꾸했다. 문이 열리자말자 비론은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머, 당신은……” 아르타는 깜짝 놀랐다. 비론은 충격총을 겨누었다. "소리내지 마. 떠들면 기절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까." 아르타는 곧 놀라움에서 벗어나 차가운 눈으로 비론을 쏘아보았다. "왜 이래요?" "쫓기고 있어. 네가 보낸 호위병들에게. 나는 붙잡히고 싶지 않아. 숨겨 주기를 바란다." "싫어요." 아르타는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가엾지만 잠들어야겠어." "그건 어리석은 짓이어요. 호위병들이 왔을 때,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하려고요? 그런 짓을 하면 더 빨리 잡힐 뿐이에요." 비론은 충격총의 총구를 아르타의 아름다운 이마의 한가운데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만 두세요. 그런 길로 나에게 억지로 무엇인가 시키려고 생각하면 틀렸어요." "너는 충격총의 위력을 알지 못하는군. 이렇게 가까운데서 머리를 쏘면 머리가 돌지도 모른다." "해 봐요." 엄숙하게 말했다. 비론은 마음속으로 놀랐다. 이렇게 강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는 부끄러워져서 총을 내렸다. "나가요." 아르타가 말했다. "나가고 말고." 비론은 성난 소리로 외쳤다. "먼저 말해 두겠어. 너희들은 비겁한 자들의 집단이다. 마음속까지도 타이란인의 노예로 되어 있다. 그런 놈들에게 의지하려고 한 내가 바보였다. 너도 힌리크의 피를 받고 있어. 그에 못지 않은 파렴치야." "떠들지 말아요." 아르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말을 할 권리는 당신에게 없어요." "그럼, 왜 타이란 제국의 앞잡이에게 꼬리를 치며 따르려고 하는 거야. 친구의 죽음에 눈을 감으려고 하는 거야!" 아르타의 얼굴빛이 핏기를 잃었다. 말소리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건…… 그것은 로디아 사람을 위하기 때문이어요." ”로디아인을 위해서 라면 정의도 우정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거군." ”그건…… 그래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몇 억이라는 로디아인이 생명과 재산이 위협을 당하기 때문이어요. 한두 사람의 생명이나 우정과는 바꿀 수 없어요!" 아르타는 창백해져서 말했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그대로 노려보고 있었다. 심한 언쟁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거칠게 짓밟는 괴로움을 톡톡히 알았던 것이다. 마음은 서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비론은 돌아섰다. 문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을 때, 바깥 복도에서 와글와글 하는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울려왔다. 호위병이 오고 있는 것이다. 비론은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충격총을 겨누며 손잡이에 손을 댔다. 상대의 수효는 많고 이쪽은 혼자다.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앉으나, 하는 데까지 해 보려고 각오를 했다. "잠깐만, 파릴씨!" 갑자기 아르타가 뒤에서 외쳤다. "욕실에 숨어요! 빨리!"   탈 출   비론은 놀라며 아르타를 보았다. "숨겨 드리겠어요. 자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비론은 몸을 날리며 욕실로 뛰어 들어 갔다. 아르타의 소리가 문 너머로 물렸다. "누구죠?" "관저의 호위 대장입니다. 위험한 범인이 도망쳤기 때문에 조사하고 있습니다. 어서 문을 열어 주십시오." 비론은 아르타가 문을 여는 것을 욕실의 문틈으로 보았다. 삼엄하게 무장한 15, 6명의 호위병들이 서 있었다. "내 방도 조사를 해야 하나요?" "만약 허락을 한다면, 우주 정치 경찰의 앤드로스 대령으로부터 철저하게 수사하라는 전갈이 왔으므로." 비론은 숨을 죽였다. 아르타는 뭐라고 대답할까? 갑자기 욕실을 가리키면서 '저기여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비론의 성급한 추측이었다. 엄한 아르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사할 필요도 얹어요, 대장. 여기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대장,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하겠어요?" 내장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 이상 총독 따님에게 무례할 수는 없었다. "소동을 피웠습니다. 실례합니다." 하고 대장은 경례를 붙이고는 군인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비론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론이 욕실에서 나와 아르타의 옆으로 갔을 때, 갑자기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비론은 깜짝 놀라면서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질브레트였다. 그는 무엇인가 큰 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을 비론의 앞에 던졌다. 그것은 호위병의 제복이었다. "갈아입어, 파릴. 아까 그놈들 중 한 놈으로부터 빌렸어. 빌리는 김에 이것도 실례했지." 하며 그는 또 한 자루의 충격총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다. "그러나…… 지르 아저씨, 이제부터 대체 어떻게 하는 거여요?" "파릴 군이 옷을 갈아입으면 우주 공항에 가서 항성 우주선을 한 척 훔치겠어. 그리고 로디아와는 한동안 작별이야." "어머! 그런 일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 않으면 안 돼. 이제 나는 뒤로 물러서지 못해. 도망 범인을 도와 주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들도 타이란 제국의 우주 정치 경찰에 체포되는 수밖에 없어." 질브레트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그래도 아버지를 두고서는 안 돼요!" "괜찮아. 힌리크는 그래도 로디아별의 총독이야. 그렇게 쉽게 어쩌지는 못해." "그래……" "아르타, 이제 슬슬 결심할 때야." 질브레트는 엄숙한 말투로 바꾸어 이렇게 재촉했다. "너도 사실은 타이란 제국이 미운 거다. 그것을 힌리크나 주민의 안전을 위하여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짓을 하고 있어서는 언제까지라도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어설 때가 온 거야." 아르타는 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얼굴을 든 아르타는 분명하게 끄덕였다. "알겠어요, 지르 아저씨. 피해서 어디로 가죠? 뭘 해야 하나요?" "그건 나에게 맡겨 둬. 비론, 준비는 됐나?” "됐어요." "좋아, 가자!" 질브레트는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두 사람에게 신호를 했다. 두 사람은 한 줄로 서서 재빨리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복도의 끝에는 감시병이 서 있었으나, 질브레트와 아르타를 보더니 당황해 하며 경례를 붙였다. "무슨 변한 것은 없는가?" 질브레트가 일부러 멈춰 서서 묻는다. '네, 아무것도 없습니다. 각하." "좋아. 잘 주의해서 감시해라." 세 사람은 유유히 관저 밖을 나왔다. 근처에도 호위병이 있었으나,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5분 후, 세 사람은 에어 카를 우주 공항에 세우고 있었다. 넓은 공항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의 우주선이 하늘을 바라보며 솟아 있었다. "발진 준비가 되어 있는 우주선이 아니면 안 되는데." 질브레트는 공항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딱 손가락을 소리냈다. "됐어." "뭘요. 지르 아저씨?" "봐라, 저걸." 질브레트가 가리킨 곳에는 다른 우주선과는 좀 모양이 다른, 그야말로 스피드가 날 것 같은 소형 우주선이 이리 발진 준비를 끝낸 채 발사대에 놓여있었다. "안되요.…… 저건 타이란인의 무장 우주선이어요!" "그렇다 더구나 알라타프의 전용 우주선이다. 저걸 실례해야겠어. 속력이 빠르고, 타는 기분도 저것이 제일이야." 질브레트는 재미나는 듯이 웃었다. 세 사람은 그야말로 밤의 산책을 즐기는 것처럼 천천히 그쪽으로 가까이 갔다. 알라타프의 우주선 문에는 두 사람의 타이란 우주 경찰관이 서 있었는데, 다가온 사람이 호위병을 거느린 로디아 총독의 동생인 질브레트 경과 총독의 따님이라는 것을 알고, 차려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그 가슴에 두 자루의 신경 충격총이 내밀어졌다. 그로부터 15분 후. 로디아의 총독 관저에서는 힌리크 총독이 알라타프 장관과 앤드로스 대장을 앞에 하고 푸르락붉으락 하고 있었다. 방금 로디아인의 호위 대장으로부터 세 사람이 어딘 가로 우주선을 타고 갔다는 보고를 받은 거다. "아르타가 유괴 됐다!" 힌치크 총독이 외쳤다. "도망 범인에게 강제로 끌려간 거다! 아아, 내 딸이 인질이 되다니…… 알라타프 장관, 빨리 당신의 부하에게 명령하여 범인을 체포하며 주십시오. 아니, 범인은 어찌되든 나의 딸과 동생을 구원해주십시오." "저…… 유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총독." 하고 우주 대장이 난처한 듯이 말했다. “타이란인 경관에게 충격총을 들이댄 것은 질브레트 경인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그놈은 발명 미치광이라서 그런 난폭한 짓을 할 위인이 못 되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총독." 알라타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내 부하의 보고로도 내 우주선을 훔쳐간 것은 동생인 모양이니까." "당신의 우주선을? 아아, 이게 무슨 일이람!" 힌리크가 절망적인 몸짓으로 말했다. 그런데 왠지 알라타프나 앤드로스는 조금도 흥분하거나 떠들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입가에는 기분 나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하필이면 내 우주함을 훔치다니, 운이 나쁜 작자들이구나, 앤드로스." 알라타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앤드로스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왜일까?   수수께끼의 행성   우주함은 행성 로디아의 진한 보라색의 대기층을 뚫고 점점 높이 올라갔다. 지구에서 연습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비론의 조종 솜씨는 훌륭했다. 전망 스크린에 행성 로디아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갔다. "지르 아저씨, 이제부터 어디로 가나요?" 아르타가 질브레트를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걸 결정하기 전에 두 사람은 내 말을 들어 주기 바란다." 질브레트는 좌석에 깊숙이 앉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기회를 20년이나 기다려 왔다." "20 년 이나요?" 아르타가 놀란 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 그건 지금의 타이란 황제 티라니의 즉위식 때였다……” 질브레트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말의 머리' 별지대의 여러 태양계의 귀족과 지도자는 모두 초대했다. 나도 초대되어 타이란 행성으로 갔다. 무사히 갔고, 식도 무사히 끝났다. 그런데 돌아올 때였다. 내가 탄 타이란인의 우주선이 유성에 충돌했던 거다." 라고 말하고, 질브레트는 그 때의 일을 떠올리듯 눈을 감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하고 아르타가 재촉했다. "마침 최초의 초공간 점프가 끝나고 보통 공간을 비행할 때의 일이다. 나는 그때, 내 선실에 있었다. 갑자기 심한 소리가 났다고 생각하자, 우주선이 박살날 것 같은 굉장한 진동이 일어났어. 나는 우주복을 입고 조종실로 뛰어갔다. 그러자 어찌 됐느냐고- 조종실의 벽에 사람의 머리 만한 큰 구멍이 뚫려 그 곳으로 낱아 들어온 운석이 조종실 안을 휘저은 것처럼…… 통신기가 엉망이 되고, 타이란인의 조종사는 찢어져 죽어 있었다. 바닥은 피바다였어." "어머나……” 아르타가 몸을 움츠렸다. "우선 구멍을 막지 앉으면 안 되었어. 공기가 대단한 기세로 뿜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구급용의 금속판을 꺼내어 구멍을 막았지. 덕분에 공기가 빠지는 걸 막았지. 아니 원자로나 엔진은 망가지지 않은 것 같아서 당장 죽는 것만은 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어." "SOS를 치지 못했습니까?" "못 쳤지. 통신기는 고칠 수 없게 부서져 있었다. 게다가 나는 조종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유성이 부딪친 충격으로 진로도 바뀌었고 속력도 달라졌을 거다. 거기에 초공간 점프가 되지 않으면 도저히 그 넓은 대우주에서 고향까지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걱정했다." 질브레트는 여기서 싱긋이 웃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며칠인가 멍청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문득 전방 스크린을 보자 거기에 큰 대기권을 가진 행성의 모습이 비치고 있지 않는가. 우주선은 우연히 그 행성의 방향으로 표류하고 있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으나, 그대로 두면 행성과 엇갈려 또 정처 없는 우주의 미아가 되거나, 아니 행성의 중력에 끌려 콩가루가 되고 말 상황이었다. 게다가 우주선의 조종을 할 줄 몰라 착륙할 수도 없었다. 모처럼의 행성을 눈앞에 두고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비론도 아르타도 점점 이야기에 끌려서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 행성의 대기권 속에서 갑자기 세 척의 무장 우주선이 나타나 내 우주선을 포위했다. 그리고 공격하려 했어." "타이란 제국의 우주선으로 알고 공격하려고 한 건가요, 지르 아저씨? 그런 엉터리 행성이 이 '말의 머리' 별지대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아르타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래, 나 역시 믿어지지 않았어. 그러나 어물어물하다가는 우주선까지도 날아가 버릴 판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우주복을 입고 에어록에서 뛰어나가 우주복의 통화기를 가지고 '말의 머리' 별지대의 통용어로 내가 로디아인이라는 것과, 조난 당하여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정체 불명의 우주선은 공격을 중지하고 나를 구해 주었다. 그들은 타이란 제국의 우주함이 그들의 세계를 정찰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공격할 작정이었다는 거다." "그들의 세계라니요." "그렇다. 그들의 세계는 타이란 제국을 타도하려고 비밀리에 준비를 계속해 온 혁명가들의 세계였던 것이다!" 비론도 아르타도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은 나를 친절하게 대접해 주었어." 하고 질브레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들의 세계는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정원도 주택도 훌륭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그 행성 전체가 강력한 요새였다는 점이다." 질브레트의 눈이 빛났다. "지상에서는 전혀 알 수 없으나, 지하에 들어가면 어느 거리에도, 어느 산에도, 어느 계곡에도 미사일 기지가 있고 원폭․수폭 저장고가 있었어. 그리고 주민은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군인이었어. 그 행성의 주민은 단 한 사람 남김없이 타이란 제국 타도를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브레트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했다. "나는 그 행성에 3일 동안 있었어. 그 동안에 그들은 나의 우주선을 수리하고, 로디아까지 갈 수 있도록 자동 조종 장치도 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질브레트는 꿈을 꾸는 것처럼 한동안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날 이후 20년, 나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다시 그 행성을 방문하여, 함께 타이란 제국을 타도하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것이다…… 지금의 그 행성은 그 당시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딥니까, 그 행성은7" 비론은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희망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질브레트는 갑자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왜 그래요, 지르 아저씨? 그 행성의 이름은 뭐라고 하나요?" 아르타도 재촉했다. 그러자 질브레트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모른다." "뭐라고요?" "모른다. 나는 그 행성의 이름도 장소도 아무 것도 모른다……” 질브레트는 절망하듯 말했다.   린겐별로   "모르다니, 무슨 소리여요? 잊어버렸나요?" 아르타가 다가앉으며 물었다. 질브레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기억이 지워진 것이다. 혁명 행성의 작자들은 조심성이 강했어. 만약에 내 입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혁명의 준비가 되기 전에 타이란 제국의 공격을 받으면 단숨에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행성을 떠나기 전에 특수한 수술을 하여, 그 행성의 이름이나 위치에 대해서 기억을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럼, 그 행성과 장소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나요?" "몰라."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아르타가 울먹이듯 말했다. “한가지 방법이 있다.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그 방법은요?” 비론과 아르타는 양쪽에서 다가앉으며 동시에 물었다. “그 혁명의 행성 일을 알고 있는 인물에게로 가면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요?” 비론을 초조했다. “있어…… 그라면 아마 알고 있을 거야.” “그가 누구입니까?” “린겐별이 아우타치 공이다.” 린겐별…… 네페로스에 가까이 있는 별이다. 또한 친구 존티어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린겐별은 이 ‘말의 머리’ 별지대에서도 가장 타이란 제국에 대하여 혁명 운동이 심한 곳이다. 그 중심 인물이 행성 린겐의 아우타치 공이다. 더구나 그는 자네의 아버지 파릴씨와도 만나서 혁명 운동의 의논도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아마 그와 파릴씨는 내가 말한 혁명 행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없다. 알고 있는 것은 아우타치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린겐별로 가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종대 쪽으로 다가앉았다. 린겐별을 향하여 초공간 점프의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 정   초공간 점프를 하기 위해서는, 전자 계산기의 도움을 빌어 린겐별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 한동안 비론은 그 준비에 바빴다. 30분 후에는 그것도 끝나고 모든 준비는 완성되었다. 질브레트와 아르타는 초광속의 가속에 대비하여 자기들의 선실로 들어갔다. 비론은 지금 혼자 조종실에 앉아있다. 다음은 컨트롤 레버를 당기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안했다. 보통 공간을 날아간다면 자신이 있다. 그러나 초공간 점프는 이론적으로 배운 것뿐이다. 지식이 있다는 것과 경험이 있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실수는 하지 않는다고 자신해도 어쩐지 불안하여 조종 레버를 당길 결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몸이 굳어지고, 어느 사이에 이마에는 비지땀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 때 문을 열고, 가속복을 입은 아르타가 소리 없이 들어왔다. 비론은 뒤돌아보고 당황했으나, 곧 태연한 얼굴을 했다. "아니, 아르타. 방에서 잠자지 않고……” 비론이 말하자 아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고 파란 얼굴을 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왜 그래요, 아르타?" "파릴…… 나 무서워요!" 아르타는 갑자기 겁난 것처럼 말했다. 비론은 놀랐다. 강한 성격의 아르타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가 무섭소?" "점프 말이어요. 만약에 조종을 실수하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죠." "음……” 비론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가슴의 고동이 더한층 빨라지는 것 같다. "만약에 계산 착오를 하면, 아르타 말 대로요. 초공간에서 보통 공간으로 되돌아올 때, 린겐 태양의 한복판에 나와버려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버릴지도 모르지." 비론은 자신의 가장 큰 불안을 말했다. "어머!" 아르타는 갑자기 비틀거렸다. 몸이 부들부들 열병 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비론은 아르타를 살며시 보조 조종석에 앉혔다. 그러자 아르타는 마치 어린 여자아이처럼 비론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되는 건 싫어요. 비론, 괜찮죠? 실패는 안 하죠?" 비론은 용기가 났다. 어쩐지 마음속에 지금까지 도사리고 있던 불안과 공포가 점차로 햇빛을 받은 얇은 눈처럼 사라져 갔다. 성격이 강한 아르타가 무서워하며 마음속으로부터 자기를 의지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르타에게 따뜻한 우정을,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강한 자신을 비론은 느꼈던 것이다. 비론은 부드럽게 아르타의 몸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아르타. 나의 힘을 믿어 줘요.” “네……” “봐요, 이젠 무섭지 않게 됐지?” “네…… 저의 손을 쥐고 있어 주면……” “좋아.” 비론은 조종석에 앉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힘주어 아르타의 손을 잡았다. "자아, 꼼짝 말고 있어야해요, 아르타. 점프를 시작하니까." "네." 아르타는 얌전하게 끄덕였다. 비론은 좌석을 광속력으로 조절했다. 의자가 뒤로 젖혀지며 두 사람은 나란히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다. 비론은 이제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에 넘치는 솜씨로 조종 레버를 당겼다. 순간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은 곧 사라졌다. 비론은 눈을 뜨고 전망 스크린을 보았다. 거기에는 오렌지 색깔로 타오르는 거대한 항성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린겐별이어요." 아르타가 외쳤다. 초공간 점프는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다.   뜻밖의 재회   몇 시간 후, 비론들의 우주선은 린겐 태양계의 수도가 있는 제 4 행성의 대기권 밖에 접근하고 있었다. 우주선이 행성의 지표에서 2천 킬로 정도의 위성 궤도에 들어갔을 때, 대기권 안쪽에서 4척의 린겐별의 우주선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바싹 다가왔다. 공격이나 환영, 어느 쪽도 할 수 있는 태세다. 질브레트가 텔레비전 통신기로 호출했다. “나는 로디아별의 질브레트 경이다. 타이란 제국 우주 경찰에 쫓기고 있다. 이 별의 대공 아우타치를 만나고 싶다. 회답을 기다림." 그런데 주위를 둘러싼 4척의 린겐 우주선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오지 않는다. 기분이 좋지 않은 침묵을 지키면서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전망 스크린 위에 희미하게 하얀 점이 비쳤다. 잠깐 사이에 아주 가까이 왔다. “또 한 척, 소형 우주선이 온다. 이번 것은 굉장히 작다. 일인용 소형 우주정이다." 비론이 말했다. 그것을 본 질브레트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아우타치 대공의 전용 우주 요트다. 자신이 일부러 와 주었구나." 이윽고 우주 요트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접근했다. 통화기에 조용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선해도 좋은가? 여기는 아우타치." "좋습니다." 우주 요트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광속의 로프가 발사되자, 길다란 은색 뱀처럼 구불구불 너울거리며 우주를 넘어 이쪽을 향했다. 가벼운 소리가 났다. 로프 끝에 붙어 있는 강력한 전자석이 이쪽 우주선의 선체에 붙은 것이다. 로프가 팽팽하게 당겨지자, 우주 요트는 천천히 우주를 미끄러지듯 가까이 왔다. 요트는 수십 미터까지 가까이 가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 에어록에서 우주복을 입은 사나이가 나타났다. 등에 짊어진 소형 로켓을 분사하자, 점점 이쪽으로 날아왔다. 사나이는 공간에서 몸을 비틀고 에어록 근처에 뛰어올랐다. 굉장히 훈련된 동작이었다. 비론이 에어록을 여는 스위치를 넣었다. 사나이는 에어록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조종실 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 와요." 문이 열리며 우주복을 입은 린겐인이 들어왔다. 그는 입구에서 우주 모자의 볼트를 늦추고 벗었다. "오! 당신은 아쿠타치 전하. 일부러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하며 질브레트도 뛰어나가 사나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비론은 멍하니 그 사나이를 린겐별의 대공 아우타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지구 문화 대학의 비론의 동기이며, 비론을 중성자 폭탄의 죽음에서 구출해 준 사나이 바로 그 존티어가 아닌가! 린겐별의 대공 아우타치 전하와는 바로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속이기   "역시 자네였군, 비론 파릴." 존티어, 아우타치는 놀란 모습도 보이지 않고 말한 다음 돌아서서 질브레트와 아르타에게 인사를 했다. "얼마 전에 타이란 제국 서브 에테르 방송이, 로디아에서의 우주함 도난 사건에 대한 임시 뉴스를 방송했어요. 타이란 방송은 범인의 이름을 말하지 앉았으나, 조금 전 질브레트 경이 텔레비전에 나왔기 때문에 비론 파릴이 안에 있는 것을 알았어요. 질브레트 경은 우주선의 조종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오. 반드시 조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럼, 전하는 파릴과는 지구에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까?" 질브레트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아우타치는 빙긋이 웃으며 끄덕였다. "린겐의 아우타치 대공으로서가 아니라, 망명 유학생 샌더 존티어로서 알고 있었지요. 아니, 아는 사이라기보다도 친구이며, 또 동지도 되지요. 만약에 비론이 그 사건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렇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이봐, 비론?" 비론은 벌써부터 아우타치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심한 어떤 흐름이 잉잉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래, 비론?" 아우타치가 궁금한 듯 재촉했다. "틀려, 존티어. 자네는 나의 친구도, 동지도 아니다. 더욱이 생명의 은인도 아니야." 질브레트와 아르타는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아르타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했다. "아니, 비론…… 만약에 이분이 존티어라면 당신을 중성자 폭탄으로부터 구출해 큰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당신은 그렇게 말해 주었어요!" 질브레트도 입에 침방울을 튀기며 말했다. "그렇지. 거기다가 아우타치 대공 전하는 린겐별만이 아니라 '말의 머리' 별지대 전체의 혁명의 중심 인물이야. 실례되는 말을 하지 마, 파릴!" 그러나 아우타치는 냉정했다. 비론의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 비론은 왼팔을 쑥 내밀면서 한 걸음 나아갔다 "이 손목 시계의 줄을 보게나, 존티어." 하며 팔을 아우타치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 줄은 고감도의 방사능 감광 줄이야. 만약에 그 폭탄이 진짜였다면 이 줄이 파랗게 색깔이 변해 있어야 하는 거다." 아우타치의 푸르고 맑은 눈이 줄을 보았다. 비론은 또 입을 열었다. "즉, 그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중성자 폭탄이라고 여기게 할 요량으로 갖다둔 가짜였다. 그 방사능 측정기도 무슨 장치를 해서 소리를 내게 했던 거다. 자네는 그것이 가짜라는 결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아우타치는 짧게 물었다. "자네는 그 폭탄을 불과 몇 분 만에 보기 좋게 분해했어. 그만큼 중성자 폭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해했을 때 그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다." 여기서 비론은 입을 다물고 아우타치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우타치는 말하지 않았다. "자네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 끝까지 진짜인 것처럼 했었다. 왜일까? 그것은 나에게 진짜라고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를 나의 생명의 은인으로 만들고 동시에 사태가 절박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때 존티어, 나의 짐작이 틀리는가? 그 가짜 폭탄을 나의 방에 장치한 것은 자네가 아니면 자네의 한 패거리지, 어때?" "정신이 돌았는가, 비론? 확실한 증거도 없는 일을 가지고 전하를 공격하다니, 무엇보다 아우타치 전하가 과연 그런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질브레트가 가로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비론은 막무가내로 계속했다. "자네가 아니면 자네의 한 패거리가 나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잠들어 있는 동안에 폭탄과 그 측정기에 장치를 하고, 텔레비전 전화며 자동문을 파괴해 놓았다. 그리고 자네가 그 텔레비전 전화로 나를 깨우고 폭탄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나타나서 나를 구해 주는 연극을 했다. 존티어, 왜 그런 짓을 했어?" 아우타치는 잠자코 있었다. 비론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 주겠어. 자네의 목적은 나를 타이란 제국의 작자들에게 체포되게 하는 데 있었던 거다." "그만! 어지간히 하지 않겠어, 비론? 자네는 아우타치 전하에게 알지도 못하는 일을 강요하고 있는 거야." 질브레트가 초조해서 외쳤다. 그러나 비론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자네가 나로 하여금 하라고 한 그 엉터리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고. 그런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타이란 인이 믿어 주겠느냐 말이야. 오히려 타이란 인은 그것을 뻔한 거짓말이라고 여겨서 나를 체포했을 것이다. 아니, 나에게 무엇인가 다른 목적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층 내게 의심을 가할 것이다. 자네는 그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자네는 내가 타이란인에게 체포되어 내가 그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어때, 그렇다면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해 보라고!" 날카롭게 쏘아 대는 비론의 말에 질브레트도 침묵을 지켰다. 아우타치는 한동안 말없이 비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긴장된 침묵이 한순간 팽팽하게 계속 되고 있었다. 이윽고 아우타치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눈은 생각보다 날카롭군. 비론 파릴, 자네의 추리가 맞다." 질브레트도 아르타도 놀랐다. 비론은 날카롭게 다그쳤다. "왜! 왜 그렇게까지 나를 속일 필요가 있었는가? 내게 말한 것 정도는 우주 정치 경찰도 벌써 알고 있었을 거다. 왜지, 존티어!" "말하지 비론. 자네를 속인 이유를……” 아우타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몇 해 동안 린겐별과 그 가까운 별들의 혁명 운동을 지도해 왔다. 그것은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네. 그러나 우리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자네의 부친은 우리들이 가장 의지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부친 쪽이 나보다 강력한 혁명가였을지 모른다. 부친은 잘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곤란한 문제가 생겼고, 부친이 체포된 것이다.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무슨 뜻인가?" 비론은 아우타치의 말뜻을 알지 못해 되물었다, "즉 부친은 좀 지나쳤던 것이다. 그 때문에 타이란 제국은 우리들의 혁명 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의심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들의 전면 세력을 뿌리째 뽑아치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우타치의 차갑게까지 보이는 눈이 비론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자네야. 네페로스의 파릴 대통령의 아들인 자네가 부친의 죽음을 알고 몰래 돌아온다. 더군다나 신분을 감추고 로디아에 가서 옛날 부친의 친구였던 힌리크 총독을 만나러 갔다고 하게 되면, 우주 정치 경찰은 싫어도 자네를 주목한다. 자네를 의심하고, 자네의 문제에 집중하기 위하여 다른 것은 소홀해진다. 쭉 우리들에게 다가온 위기는 잠시나마 늦추어진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그 때문에 내가 붙잡혀 죽어도 괜찮다는 건가?" 비론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미움이 솟구쳐 올랐다. "할 수 없었다. 비론 파릴. 타이란 제국의 압제를 물리치고, '말의 머리' 별지대에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어떤 비열한 방법이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돼. 이 시대에 이 정도의 속임수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아우타치는 여기서 비로소 안도와 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자네에게는 매우 미안한 일을 했다.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비론은 말없이 서 있었다. 용서할 마음은 추호도 일어나지 앉는다. 그러나 아우타치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까지 지금 이 '말의 머리' 별지대에는 인간다운 마음씨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두 타이란 제국 때문인 것이다…… 질브레트가 옆에서 참견했다. ”용서하겠나, 비론? 우리들은 지금 혁명이라는 큰일을 하고 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들 개인의 생명이나 운명은 티끌처럼 가볍다는 생각이야." "티끌처럼 가볍다뇨?" 비론은 화가 나서 되물었다. “만약에 파릴씨가- 자네의 부친도 살아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비론은 답답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아버지도 반드시 그렇게 말할 것이다. 큰 목적을 위해서 작은 일은 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넌 이제 아이는 아니다. 어른인 것이다 라고. 슬픈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슬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타이란 제국의 압제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아닌가…… 비론은 얼굴을 바로 들었다. "알았네, 존티어. 자네를 용서하겠어." 존티어-아우타치는 끄덕였다. "좋아, 그걸로 좋아. 그럼 일에 착수하자." 질브레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아우타치 대공 전하, 우리들이 린겐별까지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는 혁명의 행성으로 가기 위해서 입니다. 당신은 물론 저 '말의 머리' 별지대 어디인가 혁명의 행성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요?" "혁명의 행성?" 아우타치는 눈썹을 모았다. "그런 것이 있는가?" "모르고 있었습니까?" 비론과 질브레트가 성급히 물었다. "몰라. 듣지도 못했어." 비론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당신이 듣지도 못했다니!" 질브레트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말의 머리' 별지대에 그런 행성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어요. 그건 뭔가 잘못이거나, 헛소문이 아닐까요?" "헛소문은 아니오! 실제로 내가 갔다 왔어요!" 질브레트는 거의 부르짖듯 말했다. "갔다 왔다고요, 당신이?" 아우타치는 매우 의심스러운 듯 되물었다. 비론은 실망하여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모처럼의 고생도 물거품이 되려는가. 아우타치는 최후의 희망이었다. 그런 그야 알지 못한다면, 혁명의 행성을 찾아낼 희망은 절벽에 부딪혔다. 새까만 절망의 파도가 철썩철썩 소리를 내면서 밀려왔다. 그때 아우타지가 침묵을 깨뜨리고 말했다. "질브레트경. 그 이야기를 되도록 나에게 자세히 해 줄 수 없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나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암흑 성운   질브레트는 비론들에게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자세히 되풀이했다. 그 동안 아우타치는 몸도 움직이지 않고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과연." 하고 그는 말했다. "믿지 못하는군, 당신도!" 질브레트는 안타까워했다. "믿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그런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짓나요?" 질브레트가 외치듯 말하자, 아우타치의 웃음은 더욱 확실해졌다. "그러면 실례, 질브레트 경. 그런데 내가 웃는 것은 당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고, 당신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볼을 내밀었다. "방법이 있지요." "어떻게요?" "그런 행성이 만약에 보통 우주에 있다면, 우주 정치 경찰이 절대로 알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 행성은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거요. 그렇다면 그 장소는 단 하나----” "어딥니까?" "암흑 성운 안이오." 아우타치는 잘라 말했다. 세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암흑 성운. 그것은 이 오리온 별자리 안에 있다. 거대한 가스를 말한다. 보통 가스는 빛을 받으면 빛난다. 그런데 이 가스체는 빛을 흡수해도 절대로 빛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가스체가 있는 곳에는, 거기만 희미하게 우주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검게 보인다. 암흑 성운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본디 이 별지대를 '말의 머리'라고 하는 것도 이 별지대의 뒤에 있는 거대한 암흑 성운의 모양이 지구에서 보아 말의 머리와 똑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암흑 성운 속에 태양계가 있다는 건가요?" 아르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있어요. 암흑 성운은 지름이 약 20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며, 더욱이 가스의 덩어리라고는 하지만, 실은 행성의 대기권과 비교해서 몇 천 배나 옅은 것이오. 지금까지 이 암흑 성운 안에서 수십 개의 태양계가 발견되었지요." "그러나 그런 가스의 덩어리 속의 태양계 행성에 인간이 살 수 있을까요?" 질브레트가 다시 물었다. "이 때까지는 그것이 확실하지 않았지요. 그 때문에 아직 암흑 성운의 내부는 잘 조사를 못하고 따라서 아무도 사람을 보내지 않아요. 그러나 지금은 그 가스가 반드시 유독가스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 대개는 나트륨이라든지 칼슘, 칼륨 동위 원소의 아주 옅은 집합인 것이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소." "과연? 그러면 암흑 성운 속의 태양계의 행성을 모조리 조사하게 되면." 질브레트의 말을 비론이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암흑 성운 속의 태양계를 하나하나 조사하다가는 몇 해가 걸릴지 모르니까요." "암흑 성운 속을 모조리 조사할 필요는 없어." 아우타치가 말했다. "질브레트 경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주선이 운석과 충돌한 것은 최초의 초공간 점프의 바로 뒤였다고 말했어. 그러므로 타이란 태양계의 거리는 계산이 되며, 그러므로 그 거리에 해당되는 공간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조사하면 되지. 그렇지, 나의 계산으로는 크게 잡아 다섯 개의 태양계를 조사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만 다섯 개로 좋을까요!" 질브레트가 뛰어오를 듯 말했다. "그걸로 분명히 행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발견될 거요. 만약 당신의 말대로라면." 하고 아우타치가 말했다. "내 말은 틀림없습니다." "잘 됐어요! 이 행성이 발견되면, 우리들은 그 행성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두 손을 잡고 단숨에 타이란 제국에 반기를 휘날리는 것이오. 그리고 타이란 제국의 독재를 무너뜨리는 것이오.” 아르타도 나서며 들뜬 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그 행성을 찾으러 가시지 않으렵니까, 아우타치 대공?" 질브레트는 언제나의 버릇처럼 재촉하듯 말했다. 그러나 왠지 아우타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타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음……”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기 전에 한 가지를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소. 우리들은 혁명의 배신자를 우리들로부터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놈에게 혁명의 행성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오." "배신자? 그게 누구입니까?"   배신자   아우타치는 비론을 쏘아보았다. "자네의 부친을 타이란 제국으로 넘긴 밀고자다. 즉 자네의 부친을 죽이고 혁명 운동을 위기에 몰아 넣은 범인이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가?" 그러자 아우타치가 손가락을 거누었다. 바로 아르타였다.   "그녀의 아버지다. 로디아별의 총독 힌리크다. 그가 부친을 타이란 제국에 팔았던 것이다." 아르타는 창백해 졌다. "그, 그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 아우타치는 날카롭게 말했다. "어떤 증거지?" 비론도 다가섰다. "자네 부친은 우주 경찰에 체포되기 전에, 나에게 로디아별도 혁명 운동에 참가시키자고 했어. 그리고 로디아에 가서 힌리크 총독을 만나고는 곧 체포되었다. 뻔하지, 힌리크는 그로부터 혁명운동의 이야기를 듣고 겁이 나서 타이란 제국에 그 비밀을 알려 준 거야. 힌리크는 오랜 친구를 적에게 넘긴 장본인이다!" "그런…… 그런 추측만으로 증명이 되나요?" 아르타는 입술을 떨며 항의했다. "그럴까? 그렇다면 왜 힌리크는 아직까지도 우주 정치 경찰에 체포되지 않고 있어? 자기의 동생과 딸이 타이란 제국에 반항하고 있는데도 말야. 보통 상식으론 벌써 체포되어 있지 않으면 이상하지. 대단치 않은 이유로 공격을 받고 멸망된 별도 있어. 그런데 힌리크는 아직도 총독의 지위에 있어. 그거야말로 밀고자의 증거가 아닌가!" 아우타치의 격렬하고 날카로운 말에 아르타는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그만 막혀 버렸다.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비겁하리 만치 무기력한 부친이다. 무서움과 목숨이 아까워서 친구를 밀고하는 그런 사실이 절대로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아우타치는 그런 아르타를 지켜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배신자의 딸을 혁명의 행성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한 거요. 나는 그녀를 린겐 행성에 가두어 둘 것을 제안하오." 비론은 아우타치로부터 아르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타는 새파래진 얼굴을 바로 쳐들고 비론을 바라보았다. 비론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그녀는 데리고 가겠다." 뜻밖의 말에 아르타는 놀랐다. "비록 힌리크는 배신자라 할지라도 그녀 자신은 관계가 없다. 데리고 가지 않는다는 것은 사나이답지 못하다." 비론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런 말을 하다가는 반드시 후회할 거야, 비론. 내 말대로 하자." 아우타치가 타이르듯 말했다. "아니야.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겠어." 아우타치는 차가운 눈으로 아르타와 비론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다면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나는 되돌아가서 준비를 하고 오겠어. 부하인 리제트 대령을 보낼 테니까 우주 탐험에 필요한 것을 부탁하라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우주 요트로 돌아갔다. "고마워요, 비론." 아르타는 살짝 비론의 팔을 불잡으며 말했다. 비론은 몸을 비키면서 대꾸했다. "아르타, 당신에게 말해 두겠소. 이제부터는 필요 없이 내게 말을 걸지 말아 주오. 사나이답게 행동하자고 말했으나, 부친을 적의 손에 넘긴 배신자의 딸과는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없지 않소." "어머, 그렇게까지……” 아르타는 입술을 떨었다. "당신까지도 그런 말을 하시나요?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건 나에게는 관계없어.“ 비론은 중얼거리듯 말하고 얼굴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윽고, 린겐 행성에서 보급품을 가득 실은 페리 보트를 타고 리제트 대령이 왔다. 리제트 대령은 그야말로 군인답게 우주에 그을린 늠름하고 큰 사나이였다. 그는 비론을 보고 딱딱한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당신이 비론 파릴이지요?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소. 어쩌면 파릴씨가 젊어져서 돌아온 모습과 똑같소." “아버지를 잘 알고 있습니까?" 비론은 자기도 모르게 매달리듯 되물었다. “물론 잘 알고 있지요. 우리들은 모두 파릴씨를 존경하고 좋아했어요. 그가 타이란 인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모두 울었어요, 모두." 비론은 새삼스럽게 솟아오르는 슬픔을 꾹 참았다. "지구 대학에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이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지금쯤 졸업했을 것입니다." 리제트 대령은 헝클어진 검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 일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론 파릴. 즉 그…… 왜 지구에서 당신을 속인 일 말입니다." 비론은 리제트 대령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할 수 없었소. 우리들은 아우타치 대공으로부터 아무 말도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설마 그런 수법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후에 알고 놀랐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지요." “당신들에게 아우타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비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랬다오, 언제나 그랬지요. 대공은 굉장히 머리가 좋을 뿐입니다. 항상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지요. 그러면 대개의 경우 성공했으니까요. 그는 지혜의 덩어리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하고 있으나……” 리제트 대령은 곤란한 듯 여기서 그제야 말머리를 돌렸다. "때때로 우리들을 좀더 믿고 의논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도 있지요.” "그래요……” 비론은 생각에 잠긴 채 끄덕였다. "그렇소…… 언젠가는 큰 실패를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리제트 대령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서 보급의 일 때문에 이야기를 할 사이도 없었다. 그러나 비론은 바쁘게 일하면서도 무엇인가 마음속에 걸리는 것을 느꼈고, 그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윽고 보급 작업은 끝났다. 아우타치가 이끄는 대형 우주함도 궤도에 올랐다. 리제트 대령은 로켓 보트로 돌아갔다. 아우타치의 긴장된 얼굴이 텔레비전 스크린에 비쳤다. "출발이다. 준비는 됐는가?" "좋아." "본 함이 앞에서 이끌어간다. 궤도를 떠나 조금 가면, 타이란 우주 경찰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곧 점프로 옮긴다. 본 함의 조종사와 잘 연락을 취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따라오라." "알았어." "발진!" 두 척의 항성간 우주함은 동시에 린겐의 위성 궤도를 떠나 캄캄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갔다. 비론은 텔레비전의 스크린을 지켜보면서 조종반을 보고 있었다. 앞에는 암흑의 대우주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목적지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수수께끼의 암흑 성운인 것이다. 혁명의 행성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질량 검사 미터   그와 때를 같이해서…… 린겐별에서 멀리 1광년 정도 떨어진 우주 공간에도 한 척의 대형 우주함이 발진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타이란 제국의 우주 정치 경찰에 속하는 항성 우주함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알라타프 장관과 그 부하 앤드로스 대장 등 경찰 간부였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장관.” 앤드로스 대장이 조종반이 붙어 있는 질량 검사 미터의 바늘을 보면서 말했다. 알라타프는 음흉하게 웃었다. "어리석은 놈들이다. 나의 전용함에는 질량 검사 미터가 붙어 있어. 어디를 가든 당장 탐지될 것도 모르고서……” "정말입니다.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들의 길 안내를 맡고 있는 셈이니까요." "장관 각하! 아무래도 초공간 점프를 할 모양 같습니다. 목적지는 틀림없이 암흑 성운의 방향입니다." 사관 한 사람이 외쳤다. "음." 알라타트가 신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파릴의 아들놈이 로디아에 가서, 질브레트를 데리고 린겐별로 갔다. 그리고 아우타치도 데리고 암흑 성운으로 간다. 앤드로스, 이것은 드디어……" "반도들의 본거지로 가는 것 같지요?" 앤드로스 대장이 눈썹을 모았다. "그렇다, 앤드로스. 절대로 놈들을 놓치지 말라. 그리고 타이란 행성의 본부에 연락하여,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발진할 수 있도록 강력한 우주 함대의 출동 준비를 시켜라." "알았습니다." 알라타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반역자의 본거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게 행동해라. 그리고 본거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면, 즉시로 힌리크를 체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건방진 계집애 아르타가 항복하지 않으면 힌리크를 우주에 내던진다고 해라. 그런 경우에 이용하려고 그 쓸모 없는 힌리크 놈을 이번 비행에 데리고 왔거든." 앤드로스 대장은 빙긋이 죽음의 신과 같은 웃음을 띠고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장관, 맡겨 주십시오." 한편, 사정이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비론 일행은 초공간 점프를 몇 회 되풀이한 후, 이미 계산해 둔 암흑 성운 근처의 공간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섯 개의 태양계 중 첫 번째의 목표를 향해 보통 공간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태양에 가까이 가서 우선 그 태양이 행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그리고 행성이 있으면 그 행성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인지 어떤 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듯 쉬운 일은 아니다. 항성과는 달리 행성은 빛을 내지 않으며,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리므로 행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태양의 움직임을 여러 가지로 관찰하고, 그 결과 계산에 의해 산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몇 시간이나 전자 두뇌와 씨름을 하지 앉으면 안 된다. 지루 하기 짜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비론 일행은 잘 버티어 나갔다. 출발하여 일주일째가 지날 무렵 태양계 셋의 조사를 끝마쳤다. 첫 번째 태양계에는 행성이 없고, 두 번째 것은 이중성 (2개 이상의 항성이 접근하여 분별할 수 없는 별들)이며, 행성은 있었으나 그 궤도가 엉망이어서 지나치게 춥기도 하고 지나치게 덥기도 하여, 생물이 생겨서 자라나는 데는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세 번째 태양도 행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메탄과 암모니아의 대기권을 가진 죽음의 세계였다. 네 번째 태양을 향해 초공간 점프를 했을 때였다. 보통 공간을 나와 비론은 몹시 지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러자 질브레트가 흔들어 깨웠다. "비론, 비론, 일어나게." 비론은 번쩍 눈을 떴다. "뭡니까, 왜 그래요?" “저기다. 저걸 봐.” 질브레트는 흥분한 목소리로 전방 스크린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오렌지색의 네 번째 태양이 크게 비치고 있었다. "전자 두뇌의 숫자를 보라고. 저건 F2형의 태양이다.” 비론은 뛰어 일어났다. F2형이라는 것은 태양의 크기이며, 표면 온도에서 산출된 항성의 형태이며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을 가지고 있을 듯한 항성 형태의 하나이다. 그는 잇달아 나오는 전자 두뇌의 테이프를 읽었다. "지름 약 160만 킬로…… 표면 온도 7천도…… 음! 좀 뜨겁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뜨거운 것은 아니다. 행성이 있기만 하면 진짜다! 당장 관측을 시작하자." 지루한 관측이 시작되었다. 비론 일행은 전자 두뇌 앞에 앉아서 일을 계속했다. 몇 시간 후, 전자 두뇌는 기다리고 기다린 관측의 결과를 뱉어냈다. "행성이 있다! 9개나 있다. 그리고 그 제 3행성은 어쩌면 산소를 포함한 대기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비론이 기쁜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통화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리제트 대령의 흥분한 얼굴을 내 비추었다. "비론 파릴! 이 태양계의 제 3행성이……” “알고 있습니다. 이쪽에서도 같은 데이터가 나왔어요." 하고 비론은 상대의 말을 막았다. ”그렇소! 그럼, 어서 접근 준비를 합시다. 어쩐지 이번에야말로 찾고 있는 행성을 발견한 것 같소!” "그렇다면 좋겠는데요……” "비론 파릴!" “이번에 얼굴을 볼 때는, 이 행성의 표면에서 보고 싶은데요!"   탐험차   이윽고 두 척의 우주함은 목적하는 제 3행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척 모두 텔레비전을 모조리 움직여서 그 행성의 표면이며, 근처의 공간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만약 그것이 진짜로 혁명의 행성이라면, 비론 일행을 적으로 간주하여 갑자기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온종일 제 3행성의 근처를 계속 관측했으나 행성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비론과 질브레트는 아우타치의 우주선에 옮겨 타고 서로 의논했다. “이상한데요, 어디일까요? 역시 여기는 그 예의 행성이 아닐까요?" 비론은 질브레트를 뒤돌아보며 물었다. "어때요, 생각이 안 납니까?" 그러나 질브레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나지 않아. 다만…… 이렇게 거친 행성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지표에 길도 인공의 구조물도 하나 보이지 않잖아." 아우타치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다. 질브레트 경이 혁명 행성을 발견한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그 정도의 과학이 발달한 주민들이라면 20년 동안에 어떤 일도 한다. 사정에 따라서는 타이란 제국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모조리 지하 도시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들어맞는 말이다. "그러니 어쨌든 착륙하여 지표를 조사해 보기로 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게 좋겠어요. 그렇게 해 보기로 합시다." 비론도 질브레트도 찬성했다. 이윽고 두 척의 우주함은 주의 깊게 그 행성의 대기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는 북반구에 위치한 대륙의 고원 지대에 착륙했다. 그 근처는 낮이었다. 모두 우주선에서 밖으로 나왔다. 오랫동안 진공의 우주에서 살아온 탓으로 진공 광선이 아닌 자연의 태양 빛이 비치니까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공기도 충분히 마실 수 있었다. “역시 움직이지 않는 넓은 지면이라는 것인데요." 질브레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여기서 얼마 동안 기다려 주시오. 나는 탐험차로 이 근처를 좀 조사하고 오겠소." 아우타치가 말했다. “나도 가겠어, 아우타치.” 비론이 말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서 가는 것이 안전하다." “그게 좋겠군. 그럼 리제트, 자네는 텔레비전으로 주위를 잘 관찰해 줘. 만약 무엇인가 변화가 있으면 곧 알려 주도록." “알았습니다, 아우타치 대공." 리제트 대령은 긴장된 얼굴로 끄덕였다. 두 사람은 무한 궤도가 붙은 트랙터와 비슷한 소형 탐험차에 올라 출발했다. 탐험차는 딱딱한 바위산을 좌우로 기울면서 짐차로 멀어져 갔다.   함정이다!   비론 일행의 모습은 점차로 작아지고, 이윽고 화강암과 바위산 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르타와 질브레트는 우주함 안으로 들어가서 텔레비전을 켜고, 그 화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몹시 거친 땅이었다. 바라보이는 모든 것이 딱딱한 바위산뿐이다. 겨우 빈약한 나무가 서 있는 숲이 여기저기 보일 뿐…… 생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르타는 화면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 비론과는 그 때 이후로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아르타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로부터 몇 십 번, 몇 백 번 생각해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자 그 때마다 어쩐지 자신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확실히 아버지는 비겁하고 무기력한 사람이다. 그러나 타이란인의 횡포를 미워하는 데 있어서는 남에게 지지 않는다. 애국자를 타이란인에게 넘기다니,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아버지는 아니다. “아니, 리제트 대령은 어디로 갈 작정일까?” 갑자기 질브레트가 이렇게 말했으므로 아르타는 정신을 차리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텔레비전 카메라는 겨우 수십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린겐 우주선을 바로 눈앞이 있는 것처럼 똑똑히 비치고 있었다. 지금, 그 에어록에서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비론들이 간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타는 급히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배율을 올렸다. 스크린 가득히 리제트 대령의 모습이 비치었다. "보세요, 지르 아저씨!" 하고 아르타는 스크린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는 장거리용의 광선총을 가지고 있어요!" "뭐라고!" 질브레트는 스크린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에 아르타는 벽에 걸려 있는 신경 충격총을 잡았다. "이봐 아르타, 뭘 하고 있나?" "뭐해요! 비론을 도와주러 가야죠. 아우타치와 리제트 대령은 비론을 죽일 작정이어요. 비론은 함정에 빠지려고 해요!" "무슨 소리냐? 아우타치 대공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대체 무슨 함정이냐?" "몰라요…… 그러나 모든 것이 거짓 투성인 것처럼 느껴져요. 모두 누구에게 속고 있는 것 같은……” "무슨 모를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아르타, 자아 그 총을 이리 줘." "싫어요!" 아르타는 충격총을 질브레트 쪽으로 돌렸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방해하면 쏘겠어요." "이봐, 이봐!" "나는 리제트 대령이 왜 장거리용의 광선총을 가지고 가는지 그것이 걱정이 돼요. 확인하러 갔다오겠어요." "그만 둬, 아르타." "지르 아저씨, 에어록을 열어 줘요. 그렇지 않으면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기겠어요." 질브레트는 하는 수 없이 에어록을 여는 스위치를 눌렀다. 아르타는 열린 에어록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지금 리제트 대령이 걸어간 방향으로 구르듯 달리기 시작했다. 아르타는 무엇에 홀린 듯이 마구 달리고 또 달렸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공포가 아르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비론이 지금 어디서 위험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물론 조금 전까지 비론에 대해 느끼고 있던 미움도 분노도 지금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밝혀진 정체   비론과 아우타치를 태운 탐험차는 울퉁불퉁한 바위산을 천천히 전진하여 점차로 높이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전망이 넓어졌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어디나 거칠고 쓸쓸한 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도, 건물도, 다리도, 인공으로 만든 것은 뭐 하나 보이지 않았다. 30분쯤 달렸을 때, 눈앞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탐험차에서 내려 그 근처를 조사해 보았다. 한쪽은 도끼로 내려친 것 같은 절벽이었고, 그 아래는 물이 줄어든 개천이 바위투성이의 바닥을 드러내고 흘렀다. 그 앞쪽은 또 바위가 겹겹이 쌓인 평원이 계속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기척은 전혀 없었다. "틀렸다.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비론이 말했다. "그런데……” 아우타치는 절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오!" 하고 소리쳤다. "뭐냐?" 비론은 아우타치 쪽을 보았다. 아우타치는 절벽에서 몸을 거의 내밀고 아래를 보고 있었다. "파릴, 이 절벽 아래를 좀 보라고. 바로 아래 말이야. 무엇인가 지하도의 입구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다." "어디에?" 비론도 흥분을 느끼며, 아우타치처럼 절벽 끝에 웅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어지러웠다. 아래까지는 적어도 7,80미터는 될 것 같았다. 떨어지면 물론 생명은 없다. 비론은 살폈다. 절벽의 바로 아래에 과연 무엇인가 동굴의 입구 같은 것이 있는 것도 같다. 그는 가지고 온 망원경을 꺼내어 눈에 댔다. 그리고 실망했다. 그것은 보통의 큰 바위로서, 그 움푹 들어간 것이 동굴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아니야, 아우타치. 저건 보통……" 이렇게 말하면서 뒤돌아보았다. 그 때였다. “피융--” 무엇인가 어깨 끝을 스치며 날아갔다. 망원경이 손에서 떨어지며 동시에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머리 만한 큰 검은 바위가 아래로 굴렀다. 아우타치가 바위 돌멩이를 집어던졌던 것이다! "뭘 해!" 비론이 외쳤다. 아우타치의 얼굴은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말도 없이 또 바위 돌멩이를 집어들고 비론을 향해 던졌다. 맞으면 그대로 바위와 함께 절벽 아래로 거꾸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비론은 재빨리 몸을 비켰다. 바위 돌멩이가 몸을 스치는 바람에 그는 비틀거렸다. 낭떠러지에 한쪽 발이 미끄러져 자칫하면 떨어질 뻔했다. "위험하다!" 비론은 허리를 구부리며, 또 다른 바위 돌멩이를 집어들고 있는 아우타치를 향하여 결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아우타치가 비틀거렸다. 일어서려고 하는 그를 향해 힘껏 주먹을 날리자, 아우타치는 한 바퀴 빙글 돌고서 저만치 쓰러졌다. 다시 몸을 날려 한 대 치려고 생각했을 때, 비론은 그만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쓰러진 아우타치가 어느 새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론은 상대의 몸을 향해 뛰어들려고 헌다. 피융! 굉장한 소리와 함께 얼굴 바로 옆의 공간에 하얀 광선이 일어나고, 그 충격으로 비론은 쓰러졌다. 광선총이었다. 신경 충격총처럼 신경을 마비시키는 깃이 아니라, 수천 도의 고열로 태우는 무서운 죽음의 흉기인 것이다! "물러서라, 파릴.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이번에는 너의 가슴을 꿰뚫겠다!" "정신이 돌았느냐, 아우타치. 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물러서라니까, 모르겠느냐!" 비론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아우타치는 서서히 광선총을 겨누면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비웃는 듯한 웃음이 서려 있었단. "이런 일은 될 수 있으면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으면 단숨에 끝나버렸을걸. 그러나 이렇게 된 마당에서는 할 수 없다. 자, 각오는 되 있겠지?" "잠깐만!" 비론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 아우타치? 이유를 말해봐라!" 아우타치는 경련 하는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뭐라고 파릴. 그럼, 너는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건가?" "알다니, 뭘 알지 못했다는 거냐?" “정해져 있지 않느냐! 내가 바로 너의 아버지를 타이란 인에게 팔아 넘긴 장본인이다. 즉 나야말로 너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란 말이다." "뭐……?" 비론은 너무나 큰 놀람에 어리둥절하여 대답 조차할 수 없었다. "허허, 이건 내가 좀 지나치게 걱정을 한 모양이구나. 네가 나를 의심한다고 생각한 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던가." 아우타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비론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내디디려고 했다. 그러자 아우타치의 광선총이 움직였다. "꼼짝 말고 있어.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이지만, 네가 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를 듣고 싶겠지. 어때, 비론?" "어서 그 이유를 말해라. 나도 너를 의심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왜 네가 나의 아버지를 타이란 제국에 팔아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좋아, 이야기해 주지. 그러나 말해 둔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테니까." 아우타치는 악마처럼 음산하게 웃고 나서, 가까운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이야기를 꺼냈다. "사건의 발단은 너의 아버지의 인기가 높아진 때부터였다. 우리들은 함께 '말의 머리' 별지대의 혁명운동을 지도해 왔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실행력도 머리도 월등히 좋은 나보다 모두 너의 아버지를 지지했다. 나는 언제나 2등이었다. 나는 그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우타치의 표정에 거무죽죽한 증오가 나타났다. 그는 계속했다. "그렇게 되면, 예컨대 혁명이 성공해도 실권은 너의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만다. 나는 '말의 머리' 별지대의 제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다. 2등은 참을 수가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타이란 제국 편에 붙어 출세하는 것이 좋아. 경쟁 상대도 타도할 수 있고.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너의 아버지를 우주 경찰에 밀고했던 것이다." 비론은 이를 갈았다. 참고 있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당장에 아우타치를 향하여 덮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것을 억누르는 데 무서운 의지의 힘이 필요했다. 비론을 보고 있는 아우타치는 기분이 좋은 듯이 웃었다. "질투심은 때로는 혁명보다, 아니 무엇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거다. 비론 파릴, 이야기를 계속할까? 너의 아버지는 파묻었다. 그 때 네가 지구에서 돌아온다는 걸 알았다. 돌아오면 귀찮지. 그래서 나는 유학생처럼 꾸며 지구로 갔다. 한동안 사태를 엿보고 있다가 그 중성자 폭탄의 연극을 했지. 너는 의외로 굉장히 머리가 날카로웠다. 그래서 연구 끝에 나는 너를 우주 경찰에 체포되도록 하려고 그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꾸며냈지. 그런데 너는 운이 좋았다. 질브레트라는 경솔한 놈 덕분에 보기 좋게 우주 경찰의 손을 벗어났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는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결국 너보다 내 쪽이 더 운이 좋았던 거다. 그 질브레트가 일부러 너를 나에게로 데리고 왔으니까 말야,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 비론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우타치의 눈이 빛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희들은 나에게 굉장한 선물을 가져다 주었어. 혁명 행성의 이야기다. 나에게 있어서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나는 혁명 행성의 존재를 미끼로 타이란 제국에 높은 지위를 요구할 작정이었다. 예를 들어 우주 정치 경찰의 차관과 같은 지위를 말이야.“ “이봐! 너에게는 한 가닥의 앙심도 없느냐? 어떤 이유에서든 한번은 혁명가였던 네가,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아니 '말의 머리' 별지대의 백 억이나 되는 주민들의 자유와 독립에 있어서,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희망인 혁명 행성을 팔 작정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비싸게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파렴치한 놈!" 비론은 이를 갈았다. "말조심해라. 이젠 이야기도 마지막에 가깝다. 그런 나의 목적 때문에 너는 어떻게든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해자야. 혁명 행성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이 행성 조사를 주장한 것도 너를 죽일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네가 발이 미끄러져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되는 거니까. 자, 시간이다. 비론, 죽어라!" 하면서 아우타치는, 방아쇠를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아, 비론의 운명은 여기서 끝날 것인가.   하늘의 도움과 하늘의 적   "비론 위험해요!" 이 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 소리가 바로 옆에서 일어났다. 아르타였다, 아우타치는 옆을 돌아다보았다. 비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번개같이 아우타치를 덮쳐 광선총을 가진 손을 비틀었다. 광선총에서 발사된 광선이 빗나가면서 바위를 깨뜨렸다. "앗!" "윽!" 마침내 아우타치의 손에서 덜커덕 광선총이 떨어졌다. 비론은 재빨리 광선총을 발로 걷어찼다. 광선총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절벽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아우타치의 배에 비론의 강한 주먹이 들어갔다. 아우타치는 신음 소리를 내며 아랫배를 쥐면서 웅크렸다. 그러자 아르타가 충격총을 오른손에 들고 뛰어왔다. "아르타!" "다행이어요, 비론.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어요." 두 사람은 손과 손을 마주잡았다. 순간, 비론은 좀 떨어진 바위 그늘에서 휙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리제트 대령이었다. 그의 손에는 강력한 위력을 지닌 장거리용 열선총이 쥐어져 있었다. 아우타치는 그것을 깨달았다. "아, 리제트! 잘 와 주었어. 그 놈들을 쏴 죽여. 놈들이 나를 속이고 죽이려 했던 거야." 아르타는 충격총을 겨누지 못하고 망설였다. 리제트와 열선총의 총구가 두 사람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다가오는 리제트 대령의 열선총의 방향이 아우타치의 가슴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뭘 하는가…… 나를 배신할 생각인가?" 아우타치는 파랗게 질렸다. 리제트 대령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얼굴은 한없이 쓸쓸하고 슬픈 모습이었다. "아니다. 배신한 것은 내가 아니고 당신이다, 아우타치 대공."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어. 파릴이지? 리제트, 너는 속고 있다!" 아우타치는 필사적으로 변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리제트 대령은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도 아니다. 나는 당신 자신의 입에서 당신의 배신을 들은 것이다." "뭐……?" 리제트 대령은 열선총으로 아우타치의 우주복의 가슴 근처를 가리켰다. "나는 오늘 당신 우주복의 가슴에 초단파 송신기를 숨겨 두었다. 당신이 항상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무모한 짓을 하기 때문에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이 여기서 비론 파릴에게 지껄인 것은 남김 없이 나에게도 들렸다. 나만이 아니야. 우주함의 승무원 모두가 라디오로 들었을 것이다. 아우타치, 당신의 배신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리제트 대령은 열선총을 겨누며 한 걸음 나아갔다. "아우타치, 당신은 우리 린겐의 적이다. 아니, ‘말의 머리' 별지대의 자유를 사랑하는 주민 전체의 적이다. 깨끗이 포기하고 각오하는 게 좋아. 모두를 대신하여 내가 사형을 집행한다." “기, 기다려, 기다려 줘, 리제트!" 아우타치가 비명을 질렀다. 리제트 대령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였다. 순간 주위의 바위 뒤에서 우르르 10여명의 사나이들이 나타나서 네 사람을 둘러쌌다. 타이란 제국 우주 경찰의 제복이었다! "손들엇! 모두!" 맨 앞의 사나이가 광선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앤드로스 대장이었다. 2, 3명이 리제트 대령에게 달려들어 열선총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바위 뒤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알라타프 장관이었다.   두 죽음   맨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아우타치였다. 그는 경찰에게 팔을 잡힌 채 알라타프 쪽으로 기어갔다. "장관, 마침 좋을 때에 와 주었소. 이놈들은 모두 반역자요. 나를 암살하려고 했어." "당신도 그 반역자의 한패 같은데, 아우타치.” 울라타프는 쌀쌀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은 도망범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들을 숨겨주고 더군다나 우주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앉고, 마음대로 우주 비행을 하고 있었어. 이것은 어느 것이나 우주 평화 유지법에 저촉되는 위반 행위다. 그러니 위반자는 반역자로 취급되어야 마땅하겠지, 아우타치?" "말 못할 사정이 있소, 알라타프 장관!" 아우타치는 울상이 되어 외쳤다. "어떤 사정이오? 들어봅시다." "나는 이 반역자들이 혁명의 행성과 연락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들은 내가 사실은 타이란 제국의 충실한 친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나를 혁명가들의 한패라 생각하고는 그 혁명 행성의 비밀을 얘기했소. 그리고 나에게 그것을 찾는 데에 협력해 달라고 부탁한 거요." 아우타치의 얼굴에는 비열하고 아첨하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알라타프의 나뭇조각 같은 무표정한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혁명의 행성이란 뭐냐?" "타이란 제국에 반항하여, '말의 머리' 별지대의 평화를 찾으려고 하는 무법자들의 행성이오. '말의 머리' 별지대에 숨어 있는 혁명가들의 본거지요. 바로 음모의 중심지요." 알라타프와 앤드로스는 순간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걸 찾으러 왔다는 거냐7" "그대로요, 알라타프 장관. 그리고 그 행성은 이 근처의 공간에 있소. 그래서 세 개의 태양계와 수십 개의 행성을 조사했소. 그런데 그 모두가 찾는 별은 아니었소." "그렇다면 아직 혁명 행성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이군." 알라타프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있소." 아우타치는 알라타프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장관, 나는 혁명의 행성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소. 티라니 황제에게 나를 우주 경찰의 차관으로 추천해 준다고 약속하면 가르쳐 주겠소.” "배신자! 부끄러움을 알아라!" 하고 외친 것은, 좌우로 경관에게 붙들려 있는 리제트 대령이었다. 그러나 아우타치는 태연했다. 알라타프의 입가에 멸시의 웃음이 떠올랐다. "우선 장소를 가르쳐 주는 것이 순서겠지, 대공. 나는 일방적인 거래는 하지 않는다. 실물의 가치를 확인한 후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약속하지 못하지." 아우타치는 좀 망설였으나, 곧 결심한 모양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가르쳐 주겠소. 그것은 우리들이 조사를 하지 못한 최후의 태양계에 있소. 즉, 은하별의 좌표에 목록 7351-"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리제트 대령이 순간의 긴장된 분위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경관의 손을 뿌리치며, 날쌔게 땅에 떨어져 있는 광선총을 집어 들었다. "이 비열한 아우타치!" 라는 소리와 함께, 굉장한 보랏빛의 광선이 눈 깜짝한 사이에 아우타치의 몸을 휩싸버렸다. "으악--" 아우타치는 부르짖으며 3미터나 뛰어올랐다. 순간 앤드로스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잽싸게 광선 권총을 뽑아 리제트 대령을 쏘았다. 리제트 대령은 노란색 광선을 맞고 앞으로 푹 쓰러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우타치는 즉사했다. 그의 몸으로부터 반쯤 검게 그을린 보라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떠올랐다. 배신자는, 그리고 야심가는 그것에 알맞은 무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비론은 리제트 대령 옆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령도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비론은 대령을 위해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리고 일어서서 알라타프를 뒤돌아보았다. "안 됐어요 알라타프, 혁명의 행성이 있는 곳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소." 그러나 알라타프는 씩 웃었다. "천만에 안된 것은 그쪽이야. 비론 파릴, 우리는 이미 혁명의 행성 위치를 알고 있어." "거짓말이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여기로 오기 전에 너희들의 우주함을 습격하여 질브레트를 비롯한 승무원 모두를 체포했다. 혁명의 행성 장소는 질브레트가 이미 가르쳐 주었어." "그럴 리가 없어요!" 하고 아르타는 경멸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지르 아저씨는 기억을 상실하고 있어요. 기억을 돌이켰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 생각해 냈어, 힌리크양." 하며 알라타프는 기분 좋은 듯이 아르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면 기억이 지워졌다는 건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자, 아주 간단하게 자백을 했어." "그럼, 왜 아우타치에게 물으려고 했나요?" “질브레트가 자백한 별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지. 알겠어요, 힌리크양?" 알라타프는 뽐내 듯이 말했다. "리제트와 너희들이 분노에 차서 놈을 쏘아 죽이는 기회를 만들어 준거야. 그렇게 되면 귀찮은 자가 하나 줄어드는 셈이니까." 그는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자아, 연극은 끝났다. 즉시 출발 준비! 행선지는 여기서 약 2광년 앞에 있는 은하의 별무리 목록 GC 735243별이다. 서둘러라!" 미친 자의 공상   세 척의 우주함이 이름도 없는 황폐한 행성을 날아오는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비론은 다른 린겐별 사람들과 함께 알라타프의 우주함 창고에 내던져졌다. 아르타와 질브레트는 힌리크 총독과 함께 다른 방에 갇혀 있을 것이다. 비론은 절망 속에 떨어져 몸부림쳤다. 자기의 무력함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시시각각으로 혁명 행성의 운명은 점차로 끝나가려 하고 있다. 갑자기 습격을 받으면 아무리 무장하고 있다고 해도 혁명의 행성이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말의 머리' 별지대의 자유와 해방의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정말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을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도 좋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비론은 어느새 졸려 왔다. 심한 피로 때문에 잠이 밀려온 것이다. 갑자기 요란한 경보 버저가 울렸다. 비론은 벌떡 일어났다. 다른 린겐인들도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윽고 버저는 그쳤다. 그리고 복도에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난폭하게 열렸다고 생각하자 한 사나이가 밀려 들어왔다. 질브레트였다. "바보 같은 놈, 우주함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다니, 호기심도 많은 놈이야." "그저 얌전히 있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을걸." 타이란인의 경관이 비웃으며 떠나갔다. 질브레트는 이마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대로였다. 비론은 말없이 그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협박에 겁이 나서 혁명의 행성 비밀을 누설한 질브레트를 위로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경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질브레트는 살짝 일어났다. 그리고 뜻밖에도 재빠른 동작으로 주위를 휘둘러보고는 비론을 보자 얼른 다가왔다. "했어! 해치웠어, 비론!" 갑자기 그는 낮게 속삭였다. 그 눈에 이상한 빛이 감돌면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뭘 했다는 거요?" 비론은 놀라 되물었다. "놈들은 방심하고 있었어. 나는 갇혀 있는 방에서 빠져나와 일부러 경보 버저를 울렸지. 그리고 그 소동 사이에 기관실에 숨어 들어가 엔진을 약간 고쳐 놓았지.” "고치다뇨?" "내가 천재적 발명가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질브레트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계속했다. "놈들은 나를 위협하며 억지로 혁명의 행성 위치를…… 그 최후의 태양계 위치를 물었어. 그러나 내가 함부로 놈들에게 혁명의 행성을 넘겨주리라고 생각해? 천만에, 놈들에게는 결코 아무 것도 넘기지 않아!" "뭘 했다는 거요?” 비론은 초조해서 질브레트의 팔을 흔들었다. "지금 우주함은 보통 공간을 날고 있어. 방향을 잡으면 이제 당장이라도 초공간 점프로 옮길 거다. 그와 동시에 우주함의 원자 연료가 한꺼번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폭발하는 장치를 하고 왔어.” 질브레트는 눈을 빛냈다. "모두가 원자로 돌아간다. 흐흐흐! 모든 것이.” "정말이오, 질브레트 경?” 비론이 외쳤다. "정말이고 말고.” "훌륭합니다……” 비론은 상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질브레트 경, 나는 당신을 멸시하고 있었소. 당신에게 그런 용기와 결단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소.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비론은 질브레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잘 해 주었어요, 질브레트 경.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죽습니다. 그리고 놈들도 없어져요. 그러나 혁명의 행성은 남고, 그러면 언젠가 혁명의 행성을 중심으로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타이란 제국을 타도할 날이 오겠지요. 우리들은 그걸 믿고 죽는 겁니다." 그때였다. "앗핫핫, 앗핫핫……” 질브레트가 비론에게 손을 잡힌 채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비론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질브레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뭐가 우스워요?" "뭐가 우습냐고? 이렇게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비론 파릴, 잘 들어라. 그런 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어!" "그런 거라니요?" "혁명의 행성은 없는 거란 말야." "뭐 , 뭐라고요?" 비론은 소리쳤다. 질브레트는 그런 비론을 보고, 또 기묘한 쉰 소리로 바보처럼 웃었다. "그건 나의 꿈이었지, 비론. 타이란 제국은 밉다. 그러나 도저히 그렇게 강력한 것을 멸망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만약에 이 세상에 혁명의 행성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즉 혁명의 행성을 나의 머리 속에서만 꿈꾸어 온 공상인 거야!" 비론은 상대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왜요, 질브레트.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유가 있을 게 뭐람." 질브레트는 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너도, 아우타치도, 타이란 제국의 작자들까지도 모두 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에 걸려들어 갈팡질팡했어. 그것이 재미있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질브레트는 또 짐승처럼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그치자, 갑자기 질브레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지고, 몸이 열병에 결린 것처럼 덜덜 떨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는 연극도 싫증이 났다. 이런 세상에서 산다는 것조차도 싫어졌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다. 그래서 엔진을 좀 고쳐 놓고 온 거야."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함께 죽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비론은 겨우 대답했다. "혼자서만 죽어? 싫다. 죽는 건 무섭지 않으나, 혼자서는 싫다. 모두 함께 죽는 거다. 형도, 아르타도, 비론 너도 말이야." "나는 개죽음은 하고 싶지 않소." 하고 비론은 외쳤다. "개죽음이라고? 비론…… 이제 그런 일은 어떻게 되어도 좋지 않은가. 개죽음도, 명예로운 죽음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야. 뭘, 조금도 아프지 않아. 눈 깜짝하면 끝이야. 편해진다. 아아, 굉장히 편하게……” 비론은 놀랐다. 그리고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는 질브레트의 눈을 보았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머리가 돌아버린 거다. 질브레트는 그 전부터 미치광이였던 것이다! 비론은 조용히 질브레트를 밀치고, 문을 두들겨서 경관을 불렀다. "내가 하는 말을 당장 알라타프 장관에게 전해 주시오. 아주 급한 일이오." "무슨 일인데?" 타이란인 경관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조금 전 소동 때, 질브레트 경이 엔진에 뭘 장치했소. 초공간 점프를 하면 그 순간에 이 우주함은 박살이 나오." "뭐라고!" 경관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비론은 큰 소리를 질렀다. "빨리 하시오. 목숨이 아깝거든 지금 당장에 가서 점프를 중지시키시오!" 경관은 휙 돌아서더니 사령실을 향하여 복도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희 망   초광속 점프 중지의 명령이 내린 것은, 점프를 하기 겨우 3분전이었다. 기관실이 철저하게 조사되었다. 질브레트가 말한 대로였다. 점프를 하게되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우주선은 거대한 원자의 불덩어리가 될 뻔했던 것이다. 알라타프도 창백해졌다. 곧 질브레트를 거짓말탐지기에 걸어 엄중히 조사한 결과, 역시 혁명의 행성은 질브레트의 미친 머리 속의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알라타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날뛰었다. 질브레트를 비롯하여 비론들을 모조리 우주 밖으로 내던져 버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형 집행은 그 직전에 중지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힌리크 총독, 아르타, 비론, 질브레트, 네 사람을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미치광이의 공상에 덩달아 춤추어, 있지도 않은 혁명의 행성을 찾아다니며 힌리크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만약에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일은 무사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다시 한 번 아량 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 머리가 날카로운 알라타프는 그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비론의 기민한 활동에 의해서 죽음의 일보 직전에서 구출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이윽고 네 사람은 아우타치의 우주선으로 옮겨졌다. 비론이 조종을 맡았다. 비론과 아르타는 조종석의 전망 스크린을 지켜 있었다. 알라타프의 두 척의 우주함이 점점 우주의 암흑 속 저편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윽고 빛과 같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비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버렸다.” “네…… 이제 우리들은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왔어요.” “응……” 비론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한 가지 있지. 나에게 아르타라는 좋은 친구가 생긴 점이.” 아르타는 얼굴을 붉혔다. “저야말로 그래요, 비론. 그러나 우리들은 대체 언제까지나 타이란인들을 겁내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비론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나도 안타깝소. 생각하면 미친 질브레트 경이 부럽소. 비록 공상 속에서나마 혁명의 행성을 믿을 때, 그게 희망일 수도 있으니까.” “희망은 있다.” 갑자기 힘찬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종실의 문 뒤에서 나타난 인물은 바로, "어머! 아버지!" 하고 아르타가 외쳤다. "혁명의 행성은 있다, 비론 파릴.” 힌리크 총독이 말했다. "그렇지만……” 말하려다가 아르타는 입을 다물었다. 비론도 놀라 힌리크 총독을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여느 때의 힌리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굴의 모습에도 행동에도 빛이 빛나는 것 같은 위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에…… 어디에 그 혁명의 행성이 있는 것입니까?" 비론이 물었다. 힌리크 총독은 끄덕였다. "로디아별이다. 우리들 고향의 별에 말이다." 비론도, 아르타도 너무 놀라서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제 말하겠다, 두 사람에게." 힌리크 총독은 두 사람을 정다운 눈빛으로 보면서 계속했다. "로디아는 벌써 20년 전부터 혁명 운동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도자였어. 그러나 타이란 제국의 엄격한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항상 바보 같은 짓을 해 왔다. 다른 동지들도 모두 위장을 하여 지하에 숨어 있다." "그랬어요, 아버지……” 아르타가 아버지의 무릎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말했다. 힌리크 총독은 아르타의 빛나는 금발을 쓰다듬었다. "그렇고 말고. 그러나 이렇게 참는 것도 이제 곧 끝난다. 실은 알라타프가 너를 아내로 달라고 했을 때 승낙하려고 한 것도, 결혼식 전에 타이란 제국을 밑바닥으로부터 뒤엎을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반년만 지나면 혁명의 시기는 완전히 무르익는다. 그 때야말로 일제히 궐기한다. 그리고 승리를, 자유와 독립을 되찾는다." 힌리크 총독은 이미 한쪽 손을 내밀어 비론의 어깨를 잡았다. "때가 되면 비론, 자네도 일해 주게나.“ 비론은 오랫동안 말을 못했다. 감격의 폭풍우에 휩쓸려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기대와 희망이 넘치고 있었다. "하고 말고요, 힌리크 총독! 보아주십시오!"   SHORT SHORT by 星新一   호시 싱이지의 초단편   호시 싱이지 1926년 일본 동경 태생. 동대 졸업. SF 초단편을 800 편이나 쓴 천재적인 소설가. "변덕스러운 로봇”, “망상 은행", ”악마가 있는 천국”, ”검은 빛" "악마의 표적", “어떤 사람의 악몽”, “도적 의사” 등   아동 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 박사 최 인학 공학 박사 양 옥룡/이학 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신발명 베개   "드디어 큰 발명을 완성했다." 작은 연구실 안에서 F 박사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옆집 주인이 찾아와서 물었다. "무엇을 발명하셨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베개 같은데요." 옆의 책상 위에 소중하게 얹어놓은 물건은 그 크기와 모양이 꼭 베개 같았다. "그래요. 잘 때에 머리를 얹어놓기 위한 것이오. 그러나 보통 베개와는 달라요." 라고 말하고, 박사는 안을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전지와 전기 부품이 꽉 들어차 있었다. 옆집 주인은 눈을 휘둥그래 뜨면서 물었다. "굉장하군요. 이것을 사용하면 멋진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가요?" "아니오. 유익하게 이용되는 것입니다. 자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치, 즉 베개 안에 저장시켜 놓은 지식이 전파를 타고, 잠자고 있는 동안에 머리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꽤 편리하다는 이야기군요. 그것으로 어떤 공부를 할 수 있습니까?" "이건 아직 시험 작품이기 때문에 영어뿐입니다. 잠자고 있는 동안에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러나 좀더 개량을 하면 어떤 학문이라도 가능하겠지요.” "놀랄 만한 발명입니다요.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밤에 이것을 베개로 하여 자면 무엇이든지 알게 되는 것이군요." 옆집 주인은 아주 감탄을 했다. 박사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요사이는 노력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할 거요. 그 덕택에 나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요." "정말 효력이 있다면, 누구라도 탐낼 것입니다." "물론 효력은 있을 겁니다." 옆집 주인은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아직 시험을 해 보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아아, 나는 이 연구에 열중해서 드디어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봐요. 나는 이미 영어를 아니까, 내 자신이 시험을 할 수는 없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박사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이 있다. 옆집 주인은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시다면 저에게 시험하도록 해 주십시오. 공부하기는 싫으나, 영어를 멋지게 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제발 부탁합니다.” "좋아요. 아아, 이렇게 빨리 희망자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한달 정도 되면 아주 잘 알게 될 거요."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깍듯이 인사하고, 옆집 주인은 새로 발명된 베개를 가지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서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박사에게 베개를 돌려주러 왔다. "그 후 계속 사용했지요. 그런데 조금도 영어를 말할 수 없군요. 이젠 사용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박사는 베개 안을 조사해 보고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고장은 없는데…… 어딘가 잘못된 곳이 있었던가?" 아무튼 효력이 없으면 가치가 없는 물건이다. 힘써 발명한 것이 허사인 모양이다. 얼마 후에 F 박사는 길가에서 옆집 여자아이를 만나 말을 걸었다. "그 후 아버지는 안녕하신가?" "예. 그런데 좀 이상한 일이 있어요. 요사이 잠꼬대를 영어로 말해요.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어요." 자고 있을 동안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자고 있을 동안뿐이었다.     시험 작품   M 박사의 연구소는 조용한 숲 속에 있었다. 박사는 혼자 살고 있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험상궂은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누구신지요?" 하고 박사가 묻자,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서는 겨누며 말했다. "나는 도둑이다. 순순히 있는 돈을 모두 내놓으시지." "나는 가난한 학자요.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여 겨우 제품을 하나 완성했으니까 곧 돈을 벌 수 있을 거요. 그러나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요." 이렇게 M박사는 말했으나, 도둑은 물러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구한 시험 작품이라도 내놓으시지. 제작 회사에 가지고 가면 비싸게 팔 수 있을 테니까 말이오." "안 되오. 줄 수 없어요. 남이 힘들여 연구한 것을 가로채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그렇다면 내가 찾아내겠소." 도둑은 박사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한 손을 잡고 연구실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시험 작품 같은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끝으로 조그만 지하실을 들여다보았다. 책상과 의자만이 있을 뿐 텅 비어 있다. 도둑은 박사에게 말했다. "내놓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을 거요." "그러면 죽일 테냐?" "아니지. 죽여버리면 그 물건을 내 손에 넣을 수가 없지. 그 물건을 찾을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빨리 이 지하실로 들어가시오."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 "당신을 이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나는 입구에서 지키고 있겠소. 시간이 흐르면 배가 고파 비명을 올리시겠지. 그 물건을 나에게 주겠다면 당장 이곳에서 풀어 줄 거고." "이것 참, 곤란한 일이군.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결코 그 물건은 주지 않을 텐데." 박사는 끝까지 거절했기 때문에 지하실에 감금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하루가 지났다. 도둑은 입구에서 말을 결었다. "어때? 배가 많이 고프시지…… 이제 항복하시는 게 좋을 텐데……” "아니, 나는 절대로 항복하지 앓을 테다." "소용없는 고집 부리지 마시오." 그러나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도둑이 말을 걸면 안에 갇힌 박사는 기운차게 대답했다. 때로는 유유히 부르는 노랫소리도 들려오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그러나 박사는 항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도둑이 곤란하게 되었다. 가지고 있는 식량도 떨어져 가고, 출입구 앞에서 감시하는 것도 지루했다. 그런데다가 아무 것도 먹지 앉은 박사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았으므로 어쩐지 겁조차 났다. 도둑은 슬그머니 되돌아가고 말았다. M박사는 지하실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겨우 살아났구나. 시험 작품이 지하실에 있다는 것을 도둑이 눈치채지 못한 거야. 내가 완성시킨 것은 먹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를 만든 것이다. 덕택에 시험 작품을 내가 시험할 수가 있었다. 영양가는 괜찮은데, 맛이 좀더 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장차 틀림없이 로켓 속에서나 우주 기지에서의 책상과 의자는 모두 이것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의 경우에 크게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약의 효력   부호인 R씨 집에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누구인지요? 무슨 용건인가요?" 하고 R씨가 묻자, 사나이는 대답했다. "나는 발명가입니다. 연구를 거듭한 결과 굉장한 약을 완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후원을 받아 많이 만들어 팔면, 서로가 돈을 벌 것입니다. 생각이 어떠신지요?" "유리한 사업이면 자금을 대지요. 도대체 어떤 약이지요?" 그러자 사나이는 정제가 들어 있는 병을 꺼내서 옆 책상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잊어버린 것을 기억해 내는 약입니다.” "그래요. 그거 재미있는 약이군요. 사용 방법은?” "간단합니다. 먹으면 됩니다. 이 한 알을 먹으면 어제의 일을 완전히 기억해 냅니다. 두 알이면 그저께, 세 알이면 사흘 전의 일을 기억해 냅니다.” R씨는 병을 살펴보며 질문했다. "여러 가지 크기의 종류도 있는데, 그 까닭은?” "결과는 같지만 양이 많습니다. 중간 것은 한 알로 한달 전의 일을, 큰 것은 한 알을 먹으면 1년 전의 일을 기억해 내지요. 그래서 잘 섞어 가면서 복용하면 지나간 어떤 날의 일이라도 기억해 낼 수 있지요." "네에…… 그러나 어떤 데 쓰이는가요?" "여러 방면에 쓰입니다. 건망증에 결린 노인에게도 이것이 있으면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모나 일기를 쓸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사람도 안심하고 일에 열중할 수 있습니다." "바쁜 세상에 정말 편리한 약이군요. 그런데 사람에게 해롭지는 않을까요?" "물론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나도 사용해 보았고, 동물에게도 여러 번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사나이는 설명서를 꺼내서 자세히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R씨는 손을 흔들었다. "확실히 해롭지만 않으면 좋아요. 문제는 효과가 확실한가에 달려 있으니까요. 지금 내가 마셔서 효과가 확실한가 실험해 봅시다. 확실하다면 자금을 내지요." "몇 알 잡수실 겁니까?" "많이 주십시오. 10살 때의 일을 생각해 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옛날의 일도 효과가 있겠지요?" "아직 나는 실험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효력이 있을 겁니다. 그보다도 더 이전의 갓난아이 때의 일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나기 전의 일은 무리입니다만." "그러면 시험해 봅시다요." R씨는 약 알의 수를 헤아리며 컵의 물로 계속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았다가 이윽고 눈을 떴다. 기다리고 있던 사나이는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찌 됐나요?" "음, 굉장한 효력이오.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해 냈어요. 대단히 그리운 기분을 맛보았소." "그것 참 다행이구려. 그러시면 자금을 내시겠지요?" "아니, 그럴 작정이었는데 마음이 변했어요." 하고 R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사나이는 그것을 보고 불평을 말했다. "약속이 틀리지 않아요. 왜요?" "알고 싶으면 내가 마신 만큼 약 알을 마셔 봐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에 이웃에 살고있던 심술궂은 아이가 나를 자주 괴롭혔지. 그런 녀석과는 두 번 다시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지. 그 녀석은……” 이렇게 말하면서 R기는 앞에 있는 사나이의 얼굴을 손가락질했다.     악 마   그 호수는 어느 북쪽 나라에 있었다. 크지는 않지만 대단히 깊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이기 때문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었다. S씨는 휴일을 즐기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 그리고 호수의 얼음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낚시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고기가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재미없구나. 무엇이든지 좋으니까 잡혀 봐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낚싯줄을 구멍 속으로 넣자, 무엇이 걸린 것 같았다. ”하나 걸리기는 했는데 물고기 같지는 않구나. 무엇일까?" 끌어당겨 보니, 낡은 항아리 같은 것이 낚시 바늘에 걸려서 올라왔다. "이런 것은 쓸모가 없어. 고물상에 가져가도 잘 사지 않을 거야. 그러나 안을 한 번 보아야지." 무심코 뚜껑을 열어 보니,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놀라서 눈을 감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떠보니, 항아리 곁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검고 작은 사나이인데, 귀가 쫑긋하고 꼬리가 있었다. "도대체 너는 뭐냐?" S씨가 의심스럽게 물으니, 그 사나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악마다." "정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림책에 있는 악마도 너와 같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믿기 싫은 사람은 믿지 않아도 좋아. 그러나 나는 틀림없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S씨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떨면서 물었다. "왜 이런 곳에 나타났는지……?" "이 항아리에 들어가 호수 바닥에서 잠자고 있었다.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바람에 잠에서 깨게 되었다. 자아, 그러면 오래간만에 슬슬 일을 시작해볼까?"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무엇부터 해 보여 드릴까?" S씨는 한동안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부탁했다. "어떨까요? 내게 돈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런 일은 간단하지, 보라고." 하고 악마는 얼음 구멍에 손을 잠깐 넣고는 한 개의 금화를 꺼내었다. 순간적이며 간단한 일이었다. S씨가 받아 보니 진짜 금화였다. "고맙습니다. 굉장한 실력입니다요. 좀더 주실 수 없을까요?" "좋지, 좋아." 이번에는 한 웅큼의 금화였다. "주시는 김에 좀더……” "욕심꾸러기로구나."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S씨는 여러 번 간청하고, 악마는 그 때마다 금화를 꺼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쌓이고 쌓인 금화의 광채가 사방을 빛나게 하였다. "자아, 그만 하는 게 어떨까?” 라고 악마가 말했으나, S씨는 열심히 부탁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시고 조금만 더…… 이번 한번만…… 아니, 끝으로 한 번만 더……” 악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금화를 집어 올려 곁에 놓았다.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금화의 무게 때문에 얼음에 금이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S씨는 호숫가로 뛰어나왔다. 호숫가까지 와서 정신을 차려 뒤돌아보니, 얼음은 큰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고, 금화도, 항아리도, 악마도 호수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재 난   그 사나이는 몇 마리의 쥐를 기르고 있었다. 많은 쥐 중에서 민감한 성질을 가진 쥐들만을 골라서 길렀다. 사나이는 매일 맛있는 먹이를 만들어 주고, 목욕도 시키면서 열심히 돌보아 주었다. 쥐가 병에 걸리면 자기 자신보다 더 걱정하였다. 쥐들도 그 사나이를 무척 따랐다. 맑은 날에는 뜰에 나가 사이좋게 놀고, 비 오는 날에는 집안에서 숨바꼭질을 하였다. 그리고 여행할 때에는 반드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사나이가 쥐를 기르는 것은 쥐를 좋아해서만은 아니었다. 사나이는 항상 쥐의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여러 번 재난을 당했을 거야." 쥐는 닥쳐올 위험을 미리 느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나이는 그렇게 느끼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연구는 성공하여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 어느 날, 쥐들이 갑자기 집에서 도망쳐 나온 일이 있었다. 사나이는 이상스럽게 생각되어 쥐를 따라 집밖으로 나갔다. 바로 그 때, 심한 지진이 일어났다. 다행히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지, 만일 집에 남아있었더라면 무너진 집 밑에 깔렸을 것이다. 아마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큰 부상을 입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배를 타려고 할 때, 데리고온 쥐들이 가방 안에서 떠들기 시작했다. 배를 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더니 쥐들은 조용해졌다. 출항한 그 배는 폭풍을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이렇게 쥐 덕택으로 목숨을 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아무튼 사고와 재해가 많은 세상이다. 이제부터는 서로 도와 가며 살자." 라고 사나이가 중얼거리며 쥐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으니까, 쥐들은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위험이 닥쳐올 때에는 항상 이런 동작을 했었다. "아하, 뭔가 일어날 모양이구나. 이번에는 어떤 일일까? 화재일까, 홍수일까? 아무튼 빨리 이사를 가야겠다." 급히 서둘러서는 집을 비싸게 팔 수 없다. 또 싼 집을 천천히 구할 겨를도 없다. 그러나 그만한 손해는 할 수 없다. 꾸물대다가 재난을 당하면 큰일이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하니, 쥐들의 동작은 평상시로 돌아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사나이는 그 재난이 어떤 것이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물어 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나는 전에 그 집에 살던 사람입니다. 조금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잊어버린 물건이라도 있는지요?" "아닙니다. 내가 이사한 뒤 그 곳에 아무 일이 없었는가 알고 싶어서요." “뭐…… 별일 없었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고 보니, 당신이 이사간 후 옆집 사람도 이사를 갔군요." "아, 그렇습니까? 이번에 오신 분은 어떻습니까? 아마 험상궂은 사람이겠지요?" 하고 사나이는 열심히 물었다. 재난은 옆집에 이사 온 사람 때문에 일어나겠지. 지금까지 그 집에 살고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사건에 말려들어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상대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닙니다. 온순한 사람입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여 많이 기르는 사람인데요." 많은 고양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다. 그러나 쥐들로서는 예삿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관조 작전 (구관조 : 찌르레기 과에 속하는 새)   아무도 오지 않는 깊숙한 산골짜기. 이 곳에 한 사나이가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우편이나 신문도 배달되지 않고, 전기도 없기 때문에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즐길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쓸쓸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항상 새들을 벗삼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용한 생활이라고 해서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말하면 나쁜 짓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나이가 기르고 있는 것은 많은 구관조였다. 연구하여 특별한 모이를 만들어 길렀기 때문에, 보통 새와는 달리 머리도 좋고 나는 힘도 강했다. 사나이는 그 새들에게 매일 열심히 훈련을 시켰는데,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일이었다. "알겠니? 가르친 대로 한 마리씩 순서대로 해 보아라." 하고 사나이는 명령하고, 집안에서 기다린다. 그리고 나면 얼마 안 되어 문에서 '톡톡' 하는 소리가 난다. 새가 날아와서 부리로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문을 열면 새는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말한다. "자, 순순히 다이아몬드를 내놓아라. 그리고 내 왼쪽 발에 달려 있는 주머니에 넣어라. 반항하거나 나를 잡으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 그런 눈치가 보이면 발에 달아놓은 소형 폭탄을 던지겠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가루가 되고 만다." 계속 연습시킨 결과, 구관조들은 차츰 익숙해졌다. 사나이는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잘 했다. 도시의 집들을 찾아서 날아가 지금 한대로 하면 된다. 자! 가거라. 그리고 또 집으로 돌아오너라." 그의 명령을 따라 여러 마리의 구관조는 도시 쪽으로 날아갔다. 새를 전송하면서 사나이는 중얼거렸다. "도시 사람들은 꽤 놀라겠지. 아무튼 새까만 새의 강도가 갑자기 나타날 테니까. 이 작전을 방지하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순찰 경관은 길이 없는 곳은 갈 수가 없으니 따라올 수가 없다. 헬리콥터 소리만 들리면 나무 가지에 숨도록 새들에게 가르쳐 놓았다. 레이더로서도 다른 새들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기대에 부풀어 기다리고 있으니까, 구관조들은 차례로 집으로 되돌아왔다. 발에 달아놓은 주머니를 조사해 보니, 예상대로 빛나는 큰 다이아몬드들이 들어 있었다. 완전한 성공이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되었다. 몇 번 되풀이하니 큰 가방이 다이아몬드로 가득 차게 되었다. 사나이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아! 이런 산골에서 오랫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이제 나도 큰 부자가 되었다. 이제부터 어떤 사치스러운 생활도 할 수가 있다. 자아, 그러면 도시에 나가서 다이아몬드를 팔아야지." 구관조들을 자유로이 풀어 주고 웃으면 내려왔다. 그리고 옛 친구를 찾아가서 의논했다. “다이아몬드를 처분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없겠는가?" "다이아몬드라고? 나를 놀리려는 게 아닌가?" “정말일세. 보라고, 이렇게 있잖아. 잘 팔아주면 수고료를 톡톡히 줌세." 이렇게 말하고 사나이는 가방을 열어 보이며 의기양양해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왜 그래? 별로 내키지 않나?" "자네는 어디에 있었는가? 뉴스를 듣지 못했는가? 얼마 전부터 다이아몬드는 인공으로 대량 생산하게 되었네. 그래서 너무 많이 만들어 내어 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졌다네. 지금에 와서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밖에 팔리지 않는다네." 산골짜기에서 살고 있던 사나이는 그런 것은 조금도 몰랐던 것이었다.     변덕스러운 로봇   “이것이 내가 만든 가장 우수한 로봇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여 이 이상의 로봇은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라고 박사는 자랑스럽게 설명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부자인 N씨는 말했다. "꼭 내게 파십시오.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별장에서 당분간 홀로 조용히 지낼 작정입니다. 그곳에서 사용하고 싶습니다." "팔겠습니다.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하고 말하는 박사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고, N씨는 로봇을 샀다. 그 후 섬의 별장으로 가게 되었다. 돌아올 배는 한달 후에 오기로 되어 있다. "자, 이제는 조용히 쉴 수가 있겠구나. 편지와 서류는 오지 않아도 되고, 전화도 걸려오지 않는다. 이제 담배라도 한 대 피울까?" 이렇게 중얼거리니까, 로봇은 곧 담배를 꺼내서는 불을 붙여 주었다. "정말 잘 만들었구나, 그런데 배가 고파지는걸." "예, 예, 잘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로봇은 금방 식사를 만들어서 운반해 왔다. 식사를 하면서 N씨는 만족스러운 소리로, "맛있군. 확실히 우수한 로봇이야." 요리뿐만 아니라 설거지도, 헌 시계의 수리도 하였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하여 해준다. 정말로 흠잡을 곳 없는 심부름꾼이다. 이렇게 하여 N씨에게는 굉장히 재미있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삼일쯤 지나고 나니,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다음날, 로봇은 유리를 닦다가 말고 도중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N씨는 당황하여 뒤쫓았으나 좀처럼 불들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힘들여 함정을 파서는 겨우 붙들어 집으로 데리고 오게 되었다. 명령을 하여 보니, 그런 소동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이 잘 움직인다. "까닭을 알 수 없는데……” 좀 이상하게 되어 갔다. 갑자기 로봇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큰소리로 명령해도, 머리를 두들겨도 그대로였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조차 없다. "아니 고장난 모양인가 봐." N씨는 하는 수 없이 자기 손으로 식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로봇은 그전과 같이 온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쉬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지." N씨는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박사에게 물어 볼 수도 없다. 로봇은 매일 무언가 사건을 일으켰다. 갑자기 날뛰는 경우도 있었다. 팔을 흔들면서 따라왔다. 이번에는 N씨가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아나 겨우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기 때문에 위험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로봇은 조용해진다. "숨바꼭질을 할 작정이었던가? 아니면 머리가 좀 돈 것임에 들림 없다. 그만 잘못된 로봇을 사고 말았구나."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한 달이 흘렀다. 마중 온 배를 타고 도회지로 돌아온 N씨는 제일 먼저 박사를 찾아가 불편을 했다. "대단히 곤란을 당했어요. 그 로봇은 매일 같이 고장나기도 하고 미치기도 한다오." 그러자 박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니요? 자아, 지불한 대금을 돌려주시오." "천천히 설명을 들으십시오. 물론 고장을 일으키지 않고, 미치지 않는 로봇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봇과 같이 한 달이나 생활하면 운동 부족이 되어서 살이 너무 찌기도 하고, 머리가 완전히 멍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겠지요.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쪽이 훨씬 좋습니다." "그럴까요?" 하고 N씨는 알아들은 척했으나, 아직 조금은 불만스러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     박사와 로봇   F박사는 로켓을 타고, 별에서 별로 우주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구경하러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문명이 뒤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을 찾아내면, 그 곳에 착륙하여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다. 얼른 생각해도 대단한 일 같은데, 어떤 별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것은 박사가 자기 손으로 만든 일 잘하는 로봇을 하나 데리고 있기 때문이다. 크고 아름다운 모양은 아니었다. 그러나 힘이 세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또 대개의 말은 알아 들었고, 말도 할 수 있었다. "자, 이번에는 저 별에 내리자.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이곳 사람들은 우리들이 도와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고 박사는 창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종석에 알아 있는 로봇은 언제나 충실히 대답했다. "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로봇은 그 별에 착륙시켰다. 그 곳 사람들의 생활은 대단히 원시적이었다. 짐승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동굴에서 살며, 흡사 아득한 옛날의 지구 같았다. 여기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그 사람들과 사귀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봇은 예사였다, 그 옆에 붙어 있으면 박사도 안전하였다. 이윽고 이쪽이 적의가 없다는 것을 상대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의 말을 얼마만큼 알아듣게 되면서부터 일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박사는 로봇에게 명령하여, 땅을 파서 일구며 종자를 심고 밭의 본보기를 만들게 하였다. 또 냇가에 수차를 만들어 그 이용법을 가르쳤다. 모든 일은 로봇으로서는 간단한 작업이었으나, 그 사람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또 동물 잡는 함정을 만드는 방법, 집 짓는 방법, 식량 저장법, 병을 예방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로봇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지식이 들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가르칠 수가 있다. F박사의 역할은, 다음은 어떤 명령을 내리면 될까를 생각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수시로 로봇에 기름을 치고, 에너지를 보급하고 바깥쪽을 닦아주면 되었다. 그리고서 약간의 시일이 흘렀다. 로봇이 쉬지 않고 일해 준 덕택으로 그 사람들의 생활은 훨씬 높아졌다. 그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도 않고 공부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배운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양을 보고 박사는 말했다. "자, 이제는 문명도 순조롭게 발전되어 나갈 것 같다.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들이 힘을 합하여 일할 것이다. 서서히 출발하여 다른 데로 가자구나." "네!, 그렇게 합시다." 로봇은 대답하고 그 준비에 착수했다. 그들이 출발하는 날, 소문을 듣고 몰려든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덕택에 우리들은 그 전보다 놀랄 만큼 발전했습니다. 그 은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감격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기념상을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보아주십시오." 박사는 대단히 기쁜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니 여기서 한 일에 보람을 느낍니다. 기쁘게 구경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안내되어 박사와 로봇은 따라갔다. 그리고 언덕 위에 세워 놓은 동상을 보았다. 정성껏 만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F박사의 상이 아니고, 로봇의 상이었었다. 그 곳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는 것은 로봇 쪽이었다.     밤의 사건   그 로봇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젊은 여자를 본딴 로봇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사람과 구별 못할 정도였다.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머리는 별로 좋지 않고 몇 마디 간단한 말만 할 뿐,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했다. 교외에 있는 한 유원지의 문 결에 서있는 것이 그의 역할이기 때문에. 낮에는 대단히 시끄러웠다. 음악도 흘러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기도 한다. 그래서 로봇도 바빴다. 그러나 지금은 조용한 밤, 행인도 없고 로봇은 잠자코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뒤쪽에서 낮선 사람들이 나타나 로봇을 둘러쌌다. 보랏빛 얼굴인데 눈은 붉고 컸다. 그리 기분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허리에는 무기 같은 것을 차고 있었다. "반항해도 소용없어. 우리들은 킬 별에서 왔다.” 하고 한 사람이 말하자, 로봇은 상냥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먼 곳에서 참 잘 오셨습니다.” "아니, 너무 침착한데. 우리들은 지구를 정찰하러 왔다. 접시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그리고 라디오 전파를 수신하여 말도 조금 배웠다. 그러나 완전한 보고를 하기에는 지구인을 더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착륙한 것이다. 장차 언젠가는 우리가 이 별을 점령하게될 것이다." "예, 당신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건 이상하다. 그렇게 놀라지 않는데…… 졸음이 와서 어리둥절한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는가? 놀라게 해 보자." 킬 별 사람들은 자세를 갖추어 긴 막대기를 흔들었다. 그것으로 로봇을 때렸다. 그러나 로봇은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어찌 된 까닭일까?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고맙다고 말하고 있어. 다른 방법으로 혼을 내주자. 우리들은 지구인의 약점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강한 광선을 비추어 보아도, 나쁜 냄새가 나는 가스를 뿜어 보아도 여전하다. "고맙습니다." 하고 로봇은 되풀이하여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킬 별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의논했다. "안 되겠다. 어떤 무기를 써도 효력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 지구인은 웃음과 아픔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흔치 않은 강적이다. 우리 쪽이 오히려 기분이 나쁘다." ”아니야, 지구인은 싸움을 모르는 평화의 종족이겠지. 이렇게 혼을 내주어도 조금도 반항하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을 점령하려는 우리들이 오히려 부끄럽다." “아무튼 그대로 되돌아가는 게 옳을 것 같다." 이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걷기 시작한 킬 별 사람들에게 로봇은 작별 인사를 했다. "벌써 돌아가시려고요? 또 오십시오." 킬 별 사람들은 수풀 속에 감추어 둔 접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랐다. 그것은 고속도로 소리도 없이 멀리 사라졌다. 하늘을 쳐다본 사람이 있었다면 유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윽고 아침이 되어, 유원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웃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로봇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손님들이 말을 걸 때마다 간단한 인사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어서오십시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또 오십시오……”     나팔 소리   어떤 날 해질 무렵. F박사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근래 여행을 하신 모양인데, 어디를 갔다 오셨습니까?"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남쪽 깊숙한 곳을 탐험하고 왔지요. 정글도 헤매고, 산도 넘고 대단히 재미있는 여행이었습니다." "많은 대원을 데리고 간 여행이었겠네요?" "아니오. 나와 안내인 두 사람이었소." 이 말을 듣고, 손님은 어색한 표정이었다. "믿지 못할 말씀인데요. 필시 무서운 동물을 많이 만났을 텐데요?" "그렇고 말고요. 그러나 그런 것은 쫓아버리면 되지요.” "쫓아버리는 데는 많은 탄환과 총이 필요했겠지요? 그것을 운반하기에도 두 사람으로서는 힘겨웠을 텐데요." "아니오. 총 같은 것은 쓰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손님은 대단히 알고 싶을 모양이었다. F박사는 일어서더니 옆방에서 가느다란 물건을 가지고 와서는 보였다. “이것이오. 내가 발명한 나팔이오." 말을 듣고 보니 나팔은 나팔인데, 보통 나팔같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끝에는 작은 전등이 달려있고, 옆에는 망원경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그밖에도 복잡한 전기 부품 같은 것이 많이 장치되어 있었다. 손님은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이건 어디에 쓰는 것입니까?" "전에 새를 부르는 피리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지요. 여기서 암시를 얻어 그 반대 것을 만들었지요. 쫓아버리는 피리를요. 물론 새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에도 효력이 있어요. 여기에 달려 있는 렌즈가 상대를 구분하여,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를 자동적으로 낸다오. 말하자면 이 나팔을 상대를 향해서 불면 달아나고 말지요. 전지가 붙어 있어서 밤에도 사용할 수 있소." "정말 잘 만들었네요. 총과 달라서 무턱대고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러나 정말 효력이 있습니까?" 손님에게 질문을 받은 박사는, 때마침 뜰에서 걷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그 고양이를 향해서 나팔을 불었다. 나팔은 개 짖는 소리를 냈다. 이 소리를 들은 고양이는 급히 달아나고 말았다. "이런 거요. 쥐에 대해서는 고양이 소리, 새에 대해서는 매의 날개 치는 소리, 그런 거지요." "그렇다면 무서움을 모르는 여행이었겠네요?" "아, 그렇고 말고요. 그러나 혼난 것은 여행에서 돌아와서였소. 밤에 무슨 소리가 나길래 눈을 떠보니, 옆방에 도둑이 들어 와 있었소. 고함을 지르면 위험하고, 전화기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소. 요즈음의 이 세상은 정글보다 위험하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큰 마음먹고 도둑을 향해서 나팔을 불어 보았지요. 그랬더니 급히 달아나고 말았다오." “어떤 소리가 났습니까?" "경찰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였소." 손길은 점점 더 탄복했다. "굉장한 효력이네요. 그러면 저를 향해 불어 보지 않겠습니까? 나는 절대로 놀라지 않겠습니다." "무턱대고 사용할 수 없소." 하고 박사는 고개를 좌우의 흔들면서 나팔을 치우기 위하여 옆방으로 결어갔다. 손님은 박사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계가 10시를 치는 것을 듣고 박사에게 말했다. "아니, 벌써 10시네요. 내 시계가 고장난 모양입니다. 이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손님을 전송하고서F박사는 웃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나팔이 낸 소리인 줄 모르고 돌아갔군. 오래 머물고 있으면 연구에 방해가 되어 곤란하지."     선 물   플로르 별사람들이 탄 한 대의 우주선이 여러 곳의 별들을 여행하는 도중에 잠시 동안 지구에 왔었다. 그러나 인류를 만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인류가 나타나기 전 아득한 옛날이었기 때문이다. 플로르 별사람들은 우주선을 지구에 착륙시키고, 대략 조사한 다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우리들이 온 것이 너무 빨랐던 모양이네. 이 별에는 아직 문명 같은 것은 없어. 가장 진보된 생물은 원숭이 정도이네. 더욱 진화된 생물이 나타나기에는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겠어." "그래, 참 안됐네. 문명을 이끌어 주려고 왔는데. 그러나 이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서운하군." "어떻게 할까?" "선물을 남기고 가세." 플로르 별사람들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금속제의 큰 달걀 모양의 용기를 만들고, 그 안에 여러 가지 물건을 넣었다. 수월하게 우주를 날 수 있는 로켓의 설계도, 모든 병을 고치고 젊어질 수 있는 약을 만드는 방법, 모두가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게 하는 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써놓은 책, 문자가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림을 그리는 사전도 넣었다. "이제 작업은 끝났다. 장래 주민들이 이것을 발견하면 굉장히 좋아하겠지." "아, 물론이겠지." "그러나 너무 일찍 열어서 가치 없는 물건으로 알고 버리지나 않을까요?" “저것은 대단히 튼튼한 금속이다. 이것을 열 수 있는 정도라면 문명이 발달되어 있어서 써놓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겠군. 그런데 이것을 어디에 들까?" "해안 가까이는 해일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밀려갈는지도 모르겠지. 산 위에는 화산으로 분화되면 안되니까 그런 걱정이 없는 건조한 장소가 좋겠지." 플로르 별사람들은 바다와 산에서 떨어진 넓은 사막 지방에, 그 선물을 놓아두고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모래 위에 남겨둔 금빛 큰 달걀은 낮에는 태양에 반사되어 강하게 번쩍이고, 밤에는 달과 별의 빛을 받아 조용히 빛났다.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길고 긴 세월은 흘렀다. 지구의 동물들도 차츰차츰 진화하여, 원숭이 무리 속에서 도구와 불을 사용하는 종족, 즉 인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는 달걀을 발견한 사람도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해서 무섭게 여겨 가까이 가지 않았을 것이고, 가까이 갔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은빛 달걀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사막 지방인 관계로 비는 오지 않았다. 비에 젖어도 녹슬 금속은 아니었다. 때로는 센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모래를 날려 달걀을 덮어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원히 묻혀 있지는 않았다. 다른 바람이 불어서 지상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또 길고 긴 세월이 흘러갔다. 인간들은 점점 수효가 늘고, 문명도 고도로 발달되어 갔다. 드디어 금속제의 달걀이 열릴 때가 왔다. 그러나 모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열린 것은 아니었다. 모래 속에 그런 물건이 묻혀 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 상태에서 원자 폭탄 시험이 실시되었다. 그 폭발은 굉장하였다. 용기의 바깥쪽 금속뿐만 아니라, 안에 들어 있는 물건까지 모조리 가루로 만들고 형태도 없이 태워버리고 만 것이다.     실 패   S씨는 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일도 하지 않고, 여가만 있으면 자기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방안에는 설계도와 계산에 사용한 종이와 기계 부품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서 말을 걸었다. "여전히 기계 만지는 데 열을 올리고 있군. 언제까지 그런 일만 하고 있을 작정인가? 일정한 일을 하는 것이 나을 성싶네." "아니 이것으로 끝났어. 이제 겨우 완성시켰다네." 하고 S씨는 의기 양양하게 곁에 있는 장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란도셀(등에 메는 초등학생용 가방)만한데, 안테나가 여러 개 나와 있고 스위치도 달려 있다. 친구는 그것을 눈여겨보면서 말했다. "그것 참 잘 했네. 무엇에 쓰이는 장치인가?" "곧 구경시켜 주겠네." S씨는 방구석에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막 야구 중계 중이었다. S씨는 그 곁에 장치를 갖다놓고, 스위치를 넣고는 친구 곁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상하군. 텔레비전의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네. 화면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그런가?" "그건 이 장치의 역할 때문일세. 즉 이 장치에서 2미터 이내에는 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일세. 소리만을 차단시키는 벽이 생겨 둘레를 감싸는 것이라고 할까." S씨는 곁에 있는 유리병을 손에 들고 장치 가까이를 향해 던졌다. 병은 마루 바닥에 부딪쳐 깨졌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장치에서 떨어진 장소에 병을 던지니,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는 감탄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한 것을 발견했네. 그런데 이걸 어디에 사용하려는 건가?" "요긴하게 쓰이고 말고. 나는 곧 큰 부자가 될 것이라네." “어디에 팔 작정인가?" "그건 아직 비밀일세." 이용법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S씨는 나쁜 일에 사용하려고 이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날 밤, 사람들이 잠자고 있을 시간에 S씨는 장치를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던 건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유리 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그러나 장치의 작용으로 소리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곧 큰 금고를 열기 시작했다. 다이얼 번호를 모르기 때문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열 수밖에 없었다. 난폭한 방법이지만 소리가 들릴 염려가 없어서 좋았다. S씨는 이윽고 금고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많은 돈을 준비하여 가지고 온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유유히 들어온 곳으로 나갈 찰라, 그만 경찰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S씨는 장치의 스위치를 끄면서 중얼거렸다. "까닭을 모르겠군. 내 마음대로 되었을 텐데, 왜 실패했을까?" 경찰관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우리도 까닭을 모르겠다. 이 건물은 유리 창문이 갈라지면 비상벨이 울리게 되어 있다. 관리인이 전화를 걸었기에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내어가며 달려왔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데도 달아나지 않고 수월하게 붙들리는 도둑놈은 처음 보았다.” 장치의 작용은 밖의 소리도 차단시켜 S씨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안 약   K씨는 혼자 살고 있었다. 그 방의 책상 위에는 비커와 실험관을 위시하여 화학용 기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각종 약품과 식물에서 얻은 즙을 넣은 병도 있다. 그는 매일 액체를 혼합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또 흔들기도 하고, 열을 가하기도 하고, 냉각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광선에 쪼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K씨는 즐거운 소리를 질렀다. "야아, 겨우 됐다. 이러면 됐다!" 그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안약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눈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작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안약을 눈에 넣고 보면, 나쁜 일을 계획한다든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보이는 것이다. 얼굴에 보라색을 칠하는 사람은 없으니 틀릴 염려는 없다. "자, 그러면 효과가 확실한지 어디 시험하러 나가보는 거다." K씨는 그 안약을 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사방을 살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의 얼굴빛을 하고 있거나 간혹 보랏빛이 약간 비치는 사람도 있다. 나쁜 사람일수록 얼굴빛이 진하게 보이는 작용을 한다. “정말 세상에는 심하게 나쁜 사람은 적은 모양이구나."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진한 보랏빛의 사나이를 발견했다. 가방을 들고 길에 서 있었다. K씨는 파출소로 가서 경찰관을 데리고 와서는 부탁했다. “저 사나이를 체포해 주십시오." “아니, 아무 근거도 없는 사나이를 체포할 수는 없어요." 이상하게 여기는 경찰관에게 K씨는 재촉했다. “그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경찰관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 사나이 가까이로 가서 말을 걸려고 했다. "여보시오……" 그 순간 사나이는 당황하여 달아나려고 하다가 곧 붙들리고 달았다. 가방을 열어 보니, 그 안에는 많은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 경찰관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K씨에게 말했다. “이 시계는 요전에 귀금속 가게에서 강도에게 도난 당한 물건이었소. 덕택에 범인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찾은 사례금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 이 사나이가 범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행동이 수상스러웠습니다." K씨는 그 이유를 비밀로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크게 기뻤다. 발명한 안약의 효력이 있음을 똑똑히 확인했다. 또 많은 사례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좋은 장사꺼리를 얻었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면 돈을 많이 벌게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K씨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심코 거울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나다를까,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라색을 띠고 있지 않은가! "이럴 리가 있지? 나는 악인이 아니다. 도둑도 잡았다. 왜 이럴까?" K씨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만든 약을 모두 아낌없이 버렸다. "아마 약의 작용이 어긋난 모양이다. 금방 도둑을 잡게 된 것도 우연이었겠지." 그러나 이 약의 효력은 확실했다. 이러한 발명은 곧 발표하여 이 세상에 유용하게 쓰여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만들려는 것은 결코 좋은 마음씨라고 말할 수 없다.     이상한 로봇   N박사는 한 로봇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집에 있을 때나, 연구소에 있을 때나 언제나 곁에 두었다. 출근 도중은 물론, 휴일에 놀러갈 때도 꼭 데리고 갔다. 박사의 뒤를 로봇이 따르는 것이다. 마치 박사의 그림자처럼…… 그렇게 크지 않고 야윈 로봇이기 때문에 차를 탈 때에도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이 로봇이 어떤 일을 하는지 박사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하루는 N박사의 집을 찾아온 친구가 물었다. "자네는 항상 로봇과 같이 있군." ”그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네." “그런데 이 로봇이 일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네. 커피를 나르지도 않고 청소도 하지 않는 것 같네." “그런 일을 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닐세." “그렇다면 어디에 사용되는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네." 박사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는 로봇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너는 어떤 일을 하는 로봇이냐?" 로봇이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이나 물어 보아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친구는 다시 N박사에게 물어 보았다. “이 로봇은 귀가 먹었는가?" "아닐세." "그러면 벙어리인가?" "그렇네. 듣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로봇일세." 그러나 이 설명으로도 그 로봇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 친구는 더욱 이상하게 여겨, 다음날 N박사가 외출할 때에 몰래 뒤를 밟아 보았다. 그러나 로봇은 박사 뒤를 따라 걸을 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박사의 가방을 대신 들고 가지도 않고, 박사가 손수건을 떨어뜨려도 줍지 않았다. 친구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다. 개를 덤벼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고 보면 멍청히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개는 사납게 N박사에게 덤볐다. 놀란 박사가 허겁지겁 도망을 쳐도 로봇은 박사를 도와 주지 않을 뿐더러, 같이 도망을 쳤다. 이 모양을 보고 친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쓸모 없는 로봇이구나." 또 연구실도 남모르게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로봇은 박사 옆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친구는 더 이상 조사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고 단정하였다. 해질 무렵 N박사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잘 시간이 되면 박사는 짧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자, 부탁한다." 이 명령에 따라 로봇은 잠시 동안 일을 한다. 책상 위에 노트를 펴놓고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외출했을 때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과, 개에게 혼이 나서 달아난 것 등을…… N박사는 침대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일기 쓰는 것이 귀찮아서 이 로봇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남에게 이야기할 수야 없지."     스피드 시대   날씨가 좋은 휴일, 부호인 R씨는 뜰에서 꽃밭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울타리 너머로 말을 거는 사나이가 있었다. “화초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예, 좋아합니다." 하고 R씨가 대답하니까, 사나이가 다시 말했다. “조금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꽃씨라도 팔려는 건가요?" “더 좋은 것입니다. 씨를 주리고, 이 가루를 물에 녹여서 뿌려 주면 굉장히 빠르게 자랍니다." 하고 사나이는 대문으로 들어와서는 뜰로 왔다. 그리고는 병에 넣은 흰 가루를 보였다. R씨는 웃었다. “마치 꽃을 피우는 요술쟁이 이야기 같군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의심스러우면 지금 곧 실험해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수박, 이것은 딸기, 이것은 토마토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심어 봅시다. 나팔꽃의 종자입니다." "좋습니다."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삽을 빌려서는 땅에 종자를 묻었다. 그리고 병의 가루를 녹여서 졸졸졸 뿌려주었다. R씨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이라고 말해도 1주일은 걸리겠지요." "천만에 말씀. 자, 보십시오." 하고 사나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소를 보았을 때, R씨는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이미 싹이 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참 놀라운 일이오. 요술을 부린 것은 아니겠지요?" "마술도 요술도 아닙니다. 방금 뿌린 종자가 자라난 것입니다. 손으로 만져 보십시오." 손으로 만져 보니 확실히 가짜는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는 동안 싹은 점점 커올라 갔다. "너무나 이상한데요." "가루의 힘이지요. 성장을 빠르게 만드는 약을 완성하는 데 대단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효과는 보신 바와 같이 굉장히 빠르지요." 종자를 뿌리고 3시간 정도인데,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 시작했다. 사나이는 그 열매의 껍질을 벗겨 나에게 내밀었다. "잡숴 보십시오." R씨는 두려워하면서 입안에 넣었다. 모두가 맛이 좋았다. "좋은데요. 이건 대단히 편리한 발명이오. 사용하면 매일 신선한 과일을 먹을 수 있겠군요." "그렇고 말고요. 많이 잡수십시오.” R씨는 계속 피어나는 나팔꽃을 감상하면서 수박, 딸기, 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이제 배가 부릅니다. 그런데 이 발명을 나에게 파시지 않겠습니까? 이 약을 대량으로 생산하면 사람들도 즐거울 것이고 나도 돈을 벌고요.” "사실은 나도 그걸 원하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이 연구를 위하여 많은 빛을 졌지요.”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 R씨는 돈을 지불했다. 사나이는 약과 그 제조법을 쓴 서류를 그에게 넘겨주고, 인사말을 하고 돌아갔다. R씨는 집으로 들어와 대단히 기뻐했다. "자, 이제부터 바빠지겠다. 이 약을 많이 만들어 팔아야지." 그러나 조금 뒤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앞서 많은 수박 등을 먹었는데, 벌써 시장기가 들었다. "아니 너무 성급하게 산 것 같다. 이 방법으로 자라난 과일은 배 안에 들어가서도 스피드가 줄지 않는 모양이다." 창에서 뜰을 내다보니, 나팔꽃과 모든 식물이 이미 말라붙고 있었다.     딱따구리 계획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숲 속에 작은 오막살이집이 있었다. 그 집은 별장도 아니고 악인 집단의 본부였다. 하루는 두목이 이곳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좋은 계획을 생각해 내렸다. 너희들도 힘을 좀 써야 되겠다." "은행 강도라도 할 작정이십니까?" 하고 말하며, 부하들은 기운을 내었다. 그러나 두목은 손을 가로 저었다. "아니다. 그런 쩨쩨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굉장한 일이다. 어때, 한번 해 볼 텐가?" "하고 말고요. 명령만 내리십시오." "그러면 맨 먼저 시내에 가서 쇠그물을 사 가지고 오너라." 이 소리를 들은 부하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큰 새집을 만들려고." "이상한데요. 조금도 대단한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데 요." "이 집에 많은 딱따구리를 기를 작정이다." "점점 이해 못하겠는데요." 라고 말하며 의심하는 부하들에게 두목은 말했다. "너희들도 모를 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더욱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이 계획을 진행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성공에 자신이 생겼다." "도대체 딱따구리를 어떻게 할 작정이십니까?" "초인종 누르는 단추를 향해 부리로 쪼는 훈련을 시킨다. 그리고 시내를 향해 날리는 것이다.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나?" "대문에 달려 있는 초인종 단추를 누르겠지요." "그렇다. 그뿐만 아니라 화재용 비상벨을 모두 누르는 것 이다."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부하들은 차츰 알게 되었다. "경찰은 대단히 당황하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오토메이션(전자 장치를 이용한 자동 제어에 의하여 전 생산 공업을 자동화하는 방식) 공장에 살며 시 들어가 단추를 누르면 이상한 물건들이 계속 나온다. 전자계산기가 있는 방에 날아 들어가 키를 누르면 엉터리 같은 답들이 나온다." "전 도시가 큰 혼란에 빠지겠군요." "그렇고 말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들이 출동한다. 혼란을 틈타 좋은 물건을 우리 마음껏 가져올 수 있는 거야." "묘한 방법입니다. 잘 알았습니다. 우리 두목님답게 굉장한 계획입니다. 곧 일을 시작합시다." 부하들은 곧 큰 새집을 짓고, 딱따구리를 기르며 수효도 증가시켰다. 매일 모이를 주어 가며 부리로 단추를 누르도록 훈련시켰다. 이윽고 이만하면 잘 훈련되었다고 단정한 두목은 딱따구리를 일시에 하늘에 날렸다. "자, 라디오를 들어가며 기다리자. 곧 큰 소동의 뉴스가 방송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트럭을 타고 출발하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임시 뉴스는 방송되지 않았다. 밤까지 지치도록 기다리고 있을 때, 이러한 평범한 뉴스가 방송되었다. "오늘 교외에 있는 한 조류 연구소에 장난꾸러기가 들어온 모양인지 문을 열고 단추를 누른 모양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실험용으로 기르고 있던 많은 매들이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해질 무렵에는 거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범인은 아직 모르지만, 매로 인하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연구소로 알려주시면 손해만큼의 금액을 지불하시겠답니다……” 이 뉴스를 듣고 악인들은 깜짝 놀랐다. 맨 먼저 생각지도 앉은 단추를 누르고 만 모양이다. 힘들여 훈련시킨 딱따구리는 모두 매에게 잡아먹히고 만 모양이다. 크게 벌려고 한 계획이 실패하여 도리어 큰 손해를 보았다. 그렇다고 이 일을 가지고서 조류 연구소에 손해를 신청할 수도 없다.   거 래   연기가 피어나더니 악마는 소리 없이 나타났다. 이렇게 가끔 세상에 나타나 사람에게 해로움을 끼치곤 했다. 악마는 좌우를 살펴보았다. 조용한 밤인데, 가까운 곳에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안에 한 사나이가 있었다. 악마는 꼬리를 감추고 현관의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온 사람은 말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는 이 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만……” ”실은 당신에게 훌륭한 선물을 드리려고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다른 집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욕심쟁이가 아니니까요." 이렇게 거절당했으나, 악마는 공손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체면을 중시하는 분이군요.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나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떠한 시합에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 힘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어도 손해볼 것은 없겠지요. 꼭 받아 주십시오." “명령이시라면 받겠습니다." "그러셔야죠. 자, 그러면……” 악마는 그 사람의 가슴에 손가락질하며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끝났습니다. 시험삼아 주사위를 굴려 보십시오. 1을 원하는 마음만 먹으면 꼭 1이 나올 것입니다." "예, 해 보겠습니다." 주사위를 열 번 던져 보아도 1만 나왔다. 이상하기 짝이 없다. "어떻습니까? 기쁘지요?"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아니오. 차차 고마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힘을 잘만 이용하면 뜻대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악마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이 힘을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쉽게 번 돈은 쉽게 쓰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착실히 일하는 것을 보고 바보스럽게 생각될 것이다. 말하자면 나쁜 일이 세상에 퍼지게 될 것이다. 악마는 또 말했다. ”이만한 선물을 드렸으니, 나의 부탁도 들어 주십시오."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이 죽을 때에는 당신의 영혼을 나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은 미안한 듯이 말했다 "영혼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실 뿐입니다. 꼭 약속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신다면 하는 수 없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자, 거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악마는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모습을 감추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그 집에 F박사가 친구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이 내가 만든 로봇이라네. 말을 잘 듣고 집도 잘 지킨다네." "사람과 똑같이 생겼군.” 친구는 감탄했다. 그 친구에게 박사는 권했다. “어떤가? 로봇을 상대로 트럼프를 해 보지 않겠는가?" "싫네. 정교한 전자 두뇌를 가진 로봇을 상대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지기 마련일세. 아무도 상대할 사람은 없을 거네." 이것을 알았다면 악마는 대단히 분하게 여기겠지. 로봇이 시합에 이겼다고 해서 세상에 나쁜 일은 번지지 않는다. 또 영혼을 자기 손에 넣으려고 기다려도 로봇은 죽지 않는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영혼이 없다.   암흑 성운 SF 세계명작 42   인 쇄      1977년 5월 1일 발 행      1977년 5월 5일 역 자      박 홍근 조 판      태광 문화사 제 판      명립 정판사 오프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양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제 2-213호 전 화      (26)1975, (25) 1970   값 550원
1189    심해의 우주괴물- 존 윈담 지음김 상일 옮김 댓글:  조회:254  추천:0  2023-08-23
심해의 우주괴물 존 윈담 지음김 상일 옮김 / 권 오웅 그림     머리말   눈 가득 다가오는 푸른 하늘, 밤이면 뭇별이 광처럼 반짝이는 하늘, 혹 여러분은 그 무한한 공간에 어떤 세계가 있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땅 속, 바닷속은 어떨까하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어요? 이미 오래 전에 이런 호기심이 싹터. 공상 과학 소설(SF)의 개척자 쥘 베른은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고, 바다 밑 2만리를 '노틸러스 호'로 여행시켰습니다. 그 뒤, 상상 속의 일들은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SF는 고도의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신비한 우주 현상을 추적하고 과학 기기를 사용하는 등, 시대를 앞장서서 이끄는 과학적 사고 소설로 성장했습니다 SF는. 땅 속이나 바닷속은 물론 아득한 우주 공간이며 과거와 미래의 시간 속으로 인간을 여행하게 하여, 과학적 흥미와 함께 미래를 살아가는 힘을 길러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SF가 과학적인 면에만 치우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외계인과의 진정한 우정, 로봇끼리의 참다운 사랑 그리고 정의의 실현 등, 영원한 꿈과 환상이 펼쳐지고, 훈훈한 사랑이 꽃을 피웁니다. [주니어 공상 과학 명작선]은 바로 과학의 시대, 우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미래를 이끌어 갈 여러분의 머리를 훈련시키고, 그 때를 위해 값진 예언을 들려 줄 것입니다.   심해의 우주 괴물   제1부 불덩이의 습격   앗, 불덩이다!·················· 6 대위의 이야기················· 10 불덩이 대편대················· 13 잠수구····················· 19 원자 폭탄 투하················· 22 목성 생물··················· 25 보커 박사··················· 28 사라진 원자 폭탄················ 31 바닷속의 괴물················· 33   제 2부 바다의 전차   장미 산장··················· 36 미국의 작전·················· 38 사필라 섬··················· 40 에이프릴 섬·················· 42 벽돌쌓기···················· 48 에스콘지다 섬················· 50 나타난 괴물·················· 52 바다의 전차·················· 57 펄럭펄럭하는 것이!··············· 60 인간을 먹다!·················· 66 정 자····················· 69 산탄데르···················· 72   제 3부 대홍수   북극의 얼음이!················· 80 대홍수다!··················· 82 이 사····················· 84 추운 여름··················· 85 죽음의 세계·················· 89 콘월로····················· 91 새로운 세계·················· 94   우주의 침략자   초라한 소녀·················· 101 삼성 동맹··················· 107 지하 미사일 기지··············· 110 철학자의 경고················· 113 초능력자 그룹················· 118 제 3의 적··················· 123 휴머노이드·················· 130 하늘을 뒤덮는 우주선단············ 133 평화의 정체·················· 138 아이언스미스란 어떤 자인가?·········· 146 로봇 불도저·················· 151 텔레포테이션················· 158 윙 제4 행성·················· 162 전자 뇌 센터················· 166 뜻밖의 인물·················· 170 새로운 인류 계획··············· 172   작품 해설··················· 177   제1부 불덩이의 습격   앗, 불덩이다!   내 이름은 마이크 왓슨. EBC방송국의 방송 기자이다. 신기한 사건이 발생하면 누구보다도 빨리 뛰어가서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여 라디오 방송의 뉴스를 만드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저 잊을 수 없는 7월 15일 밤, 나는 휴가를 받아 아내인 필리스와 함께 실크베일 호라는 배를 타고 아프리카의 바다를 여행하고 있었다. 오후 11시 15분 경이었다. 아조레스 섬을 향하여 나아가는 실크베일 호의 갑판에서 나와 필리스는 다른 선객들과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조용하게 물결치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지나가는 자취만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있는 검은 바다의 이곳 저곳에는,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듯한 하늘의 별빛이 반사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밤의 화성은 어쩐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네요." 하고 필리스가 말했으므로 나도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정말 좀 붉은 것 같군." 하고 내가 대답하자 필리스는, "이상해요.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설마!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화성은 정말로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어머, 이상해요. 화성이 또 하나 있잖아요." 화성이 둘씩이나 있다니-. 그러나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화성의 바로 곁에 또 하나의 빨간 점이 보이는 것이었다. "또 있어요. 왼쪽에도!" 화성이 마침내 세 개가 된 것이다. "틀림없이 제트기가 불을 켜고 날고 있는 걸 거야." 내가 말하고 있는 사이에, 더욱 커진 세 개의 빨간 점은 계속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다섯 개로 늘었어요!" 사실이었다. 벌써 가까이 와 있었다. 유심히 보니까 번쩍이며 타고 있는 둥근 불덩이로, 한가운데가 빨간빛이었다. 이런 불덩이가 다섯 개나 천천히 접근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뭐지, 저건?" "큰일났다! 배와 충돌할 것 같다!“ 개중에는 선실로 일부러 뛰어가 사람을 불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이나 선원이 모두 함께 갑판의 난간에서 불가사의한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윽고 최초의 불덩이 가 배에서 30미터쯤 떨어진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지글! 지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김이 솟아올랐다. 김은 처음엔 핑크 빛이었으나 점점 희끄무레해졌다. 잠시 달빛 아래 둥둥 떠 있는 듯 싶었으나, 이윽고 그것도 사라졌다. 그 곳에 두 번째 불덩이가 떨어졌다. 첫 번째 것과 같은 장소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글지글 김을 내뿜으며 해면이 얼마동안 큰 거품으로 덮였다가 곧 사라지면서 다시 조용해졌다. 잇따라 세 번째 불덩이-. 조용해졌는가 싶더니, 또 네 번째 불덩이-. 이리하여 다섯 개의 불덩이가 전부 낙하해 버리자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실크베일 호 안은 크게 소란스러웠다. 비상벨이 울렸고, 선실 안에 있던 손님들도 당황하여 갑판으로 올라왔다. 이곳 저곳의 스피커에서 단호한 선장의 명령이 들려 왔고, 선원들은 진지한 얼굴로 구명 보트를 내리고 고무 튜브를 쌓아올렸다. 배가 침몰했을 때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섯 개의 불덩이를 삼킨 바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실크베일 호는 그 위를 네 번이나 왔다 갔다 했으나 거품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데........“ "그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이 되자 나는 선장에게 가서 부탁했다. "어젯저녁 사건을 취재하고 싶은데 항해 일지 좀 보여주실 수 없겠습니까?" 선장은 기분 좋게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일지를 보니까 어젯밤의 불덩이는 배의 레이더에도 비쳤다고 적혀있었다. "선장님, 지금까지 그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물어 보았다. 그러자 선장은, "본 것은 어젯밤이 처음이지만 불덩이가 나타난다는 말은 두어 번 들은 적이 있어요." "모처럼 불덩이가 낙하한 지점도 알고 있으니 바닷속을 한번 조사해 보는 게 어떨까요?" 내가 묻자 선장은 고개를 흔들며, "아니오, 그 근방은 깊이가 6천 미터나 되기 때문에 조사한다는 건 무리지요." 이 이상 어쩔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어젯밤 목격한 사실만을 배 위에서 전화로 런던의 EBC방송국으로 송고했다. 내 이야기는 그 날 저녁때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러나 방송국 사람들은 별로 재미있어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프리카까지 가다 보면 이따금 희한한 일도-있을 수 있는 거야-더구나 바다 위가 아닌가. 바다에서는 흔히 신기한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지 -모두가 이런 식으로 내 뉴스를 무시해 버리고 만 모양이었다.   대위의 이야기   휴가도 끝나고 다음 월요일에 방송국에 출근했더니, 내 책상 위에 많은 편지가 쌓여 있었다. 모두 불덩이를 보았다는 사람들에게서 온 편지들이었다. 어느 것이나 같은 이야기뿐이었으나, 단 하나 색다른 편지가 있었다. 그것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내 얘기를 들어보지 않겠습니까?' 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당장, '만납시다.' 하고 답장을 보냈다. 일주일쯤 후에 나는 레스토랑에서 그 편지를 보낸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와 같은 또래의 사나이로 평상복을 입었는데, "실은 나는 공군 대위입니다." 하고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군인은 근무 중에 일어난 일을 외부 사람에게 말하지 않기로 돼 있읍니다만, 당신에게는 특별히 몰래 이야기하겠소." 하고 전제한 다음, 대위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개월쯤 전의 일이었다. 대위가 타이완의 상공을 혼자서 비행기로 날고 있었는데, 뒤쪽에서 무엇인가가 추격해 오는 것을 느꼈다. 살펴보니 세 개의 불덩이가 굉장한 속력으로 돌진해 왔다. 무선 전화로 불러 보아도 응답이 없었다. 대위는 기지의 사령부에 '추락시켜도 되겠는가?' 하고 물었다. '상관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대위는 비행기의 고도를 높여, 구름 사이에서 천천히 선회하면서 수상쩍은 불덩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이윽고 세 불덩이는 대위의 비행기 바로 밑을 통과하고 있었다. 굉장한 속력이었다. 시속 1천 2백 킬로미터 정도였으리라. 대위는 재빨리 맨 뒤쪽의 불덩이에 조준을 하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따르르르 ! "명중이다!" 불덩이는 순식간에 뭉실뭉실 부풀었다. 지금까지 빨갰던 것이 점점 핑크 빛이 되더니 이윽고 희끄무레해졌다. 군데군데 빨간 무늬가 보였다. "이상하군. " 대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행기 같으면 기관총 사격을 당하면 확 불을 뿜으며 타오르거나 공중 분해되어 산산이 흩어지는데,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건 뭘까?" 대위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비볐다. 그때였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비행기에 부딪치면서 대위의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큰일났다!" 대위의 비행기는 마구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문득 창문 밖을 보니 오른편 날개가 밑동째 동강나 있었다. 불덩이 같은 것과 부딪쳤을는지도 모른다. 대위는 서둘러 탈출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대위의 몸은 비행기로부터 공중으로 튀어 나왔고, 동시에 메고 있던 낙하산이 활짝 펴졌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요." 대위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대위는 말을 이었다. "다행히 부상도 없었고요. 그런데 그 불덩이는 그렇게 강한 상대는 아니었어요. 다만 굉장히 속력이 빨랐을 뿐입니다." 대위는 자신이 있다는 듯이 앞가슴을 폈다. 우리는 약 한 시간 동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불덩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내 버렸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불덩이를 본 것은 나나 대위뿐만이 아니었다. 온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같은 불덩이를 목격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이따금 무서운 속력으로 하늘을 나는 불덩이나, 놀라우리 만큼의 수증기를 내뿜으며 바다로 낙하하는 불덩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그 때마다 부지런히 라디오의 뉴스로 만들어 방송했었는데, 불덩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곧이들으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또한 불덩이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는 학자도 없었다. 물론 나도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럭저럭 1년이 지나고 다시 2년이 흐르고 말았다.   불덩이 대편대   여기는 핀란드의 레이더 기지이다. 두꺼운 콘크리트로 둘러진 어둑한 방안에 열 두 개의 레이더 반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레이더 반에는 각각 한 사람씩의 감시원이 파랗게 반짝이는 스크린을 지켜보고 있다. 이리하여 레이더는 밤낮을 쉬지 않고 핀란드의 하늘을 경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건 뭐지!" 제일 왼쪽 끝의 레이더 반 앞에 앉아 있던 감시원이 외쳤다. 갑자기 이상한 것이 레이더에 비쳐 오며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면 금방 이웃 스웨덴으로 들어가겠군." 감시원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수화기를 들자 직통 전화로 스웨덴의 레이더 기지에 알려 주었다. "이상한 것이 그 쪽을 향해서 비행 중이오." 통보를 받은 스웨덴의 레이더 감시원도 이윽고 그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무엇일까?"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니 조그맣고 빨간 점이 몇 개나 겹쳐 이웃 노르웨이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스웨덴으로부터의 통보를 받고 노르웨이 사람들도 하늘을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앗! 왔다!" "불덩이다!" "열 세 개나 날고 있다. " 모두들 웅성거리다가 이웃 스코틀랜드에 알려 주었다. 열 세 개의 불덩이는 거침없이 스코틀랜드를 횡단하여 아일랜드를 지나서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그 후 그것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 무렵부터 내게 부쳐 오는 '불덩이를 보았다.'고 하는 편지가 부쩍 늘었다. 아무리 정리를 해도 정리가 끝나지 않을 만큼 잇따라 날아왔다. "이렇게 늘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매일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어느 날, 서인도 제도의 큐라소 경비대로부터 미국의 군함 태스케기 호에 전화가 걸려 왔다. "불덩이 여덟 개가 그 쪽으로 접근 중이다." 전화를 받은 함장이 레이더 실로 들어가 보니까 분명히 무엇인가가 나타나 있고, 점점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사일 여섯 발을 6초마다 발사하라. 목표는 저 불덩이다." 함장은 명령을 내리고 갑판으로 나왔다. 석양 속에서 전과를 지켜보고 있는 함장의 쌍안경에 여섯 개의 붉은 점들이 잇따라 부풀어오르며 크고 하얀 연기 덩어리로 되어 가는 것이 비쳤다. 미사일이 명중한 것이다. "음, 됐다. 어느 나라에서 시비를 해 올 것인지 빨리 알고 싶군. 그 나라야말로 저 수상한 불덩이로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범인일 것이다." 함장은 흐뭇해하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남쪽으로 도망치는 두 개의 불덩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났는데도 시비를 걸어오는 나라는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남 오스트레일리아의 우메라에 있는 영국의 로켓 시험 사격장에 또다시 두 개의 불덩이가 침입해 왔다. 계속하여 알래스카에도 세 개가 나타났다가, 해상에서 경비정에 의해 명중되어 추락했다. 어느 날 내 앞으로 해군성으로부터 전문이 날아왔다. '불덩이 사건으로 여러 가지로 귀하의 의견을 듣고자하니 곧 와 주기 바랍니다.' 하는 내용이었다. 해군성에 갔더니 키가 큰 한 군인이 나를 맞이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윈터스 대령입니다.“ 대령은 악수를 청하면서 검게 탄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었다. 윈터스 대령은 먼저 한 장의 세계 지도를 보여 주었다. 가느다란 선이 많이 그어져 있었고, 여기저기에 자잘하게 글씨나 숫자가 적혀 있었다. 더구나 군데군데에 빨간 점들이 찍혀 있었다. 마치 빨간 거미줄과 같았다. 윈터스 대령은 지도 위에 확대경을 갖다 댔다. "귀하가 처음 불덩이를 목격한 장소는 어디였지요!" 들여다보니까 라는 숫자와 내가 필리스와 함께 배 위에서 불덩이를 본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그 언저리에는 그밖에도 많은 빨간 점들이 찍혀 있었으나, 그것들은 이렇게 지도를 펼쳐 놓고 보니 북동을 향하여 줄지어 있었다. "여기에 찍혀 있는 빨간 점들은 불덩이가 추락한 장소를 의미하나요?" 내가 묻자 대령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진로를 알았을 때는 선을 그어 표시해 두었지요." "이렇게 놓고 보니까 빨간 점들이 특히 많이 모여 있는 장소가 있군요.“ "예, 다섯 군데 있어요. 그러니까 쿠바의 남서쪽, 코코 제도의 남쪽, 필리핀, 일본, 알류산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대령은 다른 지도를 펼쳤다. 바다의 깊이가 적혀 있는 수심측량도였다. "사실은 빨간 점들이 모여 있는 곳은 다섯 군데 전부가 모두 깊은 바다입니다. 그 밖의 장소에도 깊이가 8천 미터 이하가 되면 낙하하는 불덩이의 수량은 훨씬 적어지고, 4천 미터 이하 되는 얕은 곳에는 전혀 낙하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모르겠어요. 게다가 불덩이는 언제나 바다로 떨어져 올뿐이고 바다에서 나갔다는 보고는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해군에선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현재로선 어쩔 수도 없지요. 조사한 기록을 정리하고있을 뿐입니다. 실은 그 기록을 작성하는 데 귀하의 힘을 빌자는 겁니다.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오늘 와 달라고 한 거지요.“   잠수구   해군들과 불덩이를 조사하게 된 나와 필리스는, 어느 날 군함을 타고 불덩이가 떨어진 바다로 갔다.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먼 수평선께에 나와 있을 무렵에 지휘관인 해군 소령이 모두를 갑판에 집합시켜 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잠수구입니다.“ 소령 옆에 직경 3미터 가량의 큰 공이 있었다. 여기저기에 둥근 모양의 조그만 창이 있고, 꼭대기가 혹처럼 부풀어 있었는데 큰 손잡이 같았다. 여기에다 줄을 묶어 바닷속으로 가라앉히는 모양이었다. "이 잠수구는 3천 미터까지 잠수해도 파괴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잠수하는 것은 2천 4백 미터쯤 될 겁니다. 이 속에 두 승무원이 들어가게 되는데, 이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바닷속 모습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또, 두 승무원이 텔레비전 카메라로 촬영한 것은 그대로 군함 위의 스크린에 비치게 되는 거죠.“ 이윽고 군함은 목표 장소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3일 동안 잠수 연습과 기계의 정비가 계속되었다. 마침내 잠수구로 바다 속을 조사할 날이 되었다. 모두 받침대 위에 얹은 잠수구 주위에 모였다. 안에 탈 사람은 두 기술 사관이었다. 좁은 구멍으로 한 사람씩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갔다. 준비가 끝나자 입구를 닫고 바깥에서 볼트로 죄었다. 덜거덕덜거덕하며 윈치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수구는 쇠줄에 매달려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떤가? 이상 없는가?“ 소령은 가끔 염려가 되는 모양인지 잠수구 안의 두 부하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때마다 잠수구에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고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배의 사령실과 잠수구 안과는 전화가 통하고 있었으며, 잠수구로부터의 전화는 스피커를 통해 갑판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들리도록 되어 있었다. "주변의 전망은 어떤가!" 소령이 물었다. "오징어가 많군요. 큰 고기가 다가오긴 했습니다만, 카메라를 돌리자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미 1천 미터가 됐다. 춥지는 않은가!" "방한복을 입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우리는 갑판 위에서 잠자코 텔레비전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이따금 이 세상의 것으로 믿어지지 않는 무서운 모습의 물고기가 비쳤다. 그 중에는 당장이라도 덤벼들려는 자세로 크게 입을 벌리는 놈도 있었다. 이윽고 소령은 손을 들었다. "윈치를 정지시켜라. 이미 2천 4백 미터다. 오늘은 이것으로 잠수는 그만 한다.“ 잠수구 안의 두 사람은 대답했다. "그러나 소령님, 서운한데요. 물고기나 오징어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윈치가 다시 덜거덕덜거덕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잠수구를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10분쯤 지났을 때 잠수구에서, "이크, 가까이에 무엇이 있는데요. 빛이 미치지 않은 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명확히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큰놈입니다. 고래인지도 몰라요. 지금 카메라를 비춰 보겠습니다.“ 금방 텔레비전 스크린에 무엇인가 큼직한 것이 잠깐 비쳤으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잠수구로부터는, "뭔가가 우리들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 위쪽으로 지나갔습니다. 천장에도 창문이 있어야 되겠군.“ 그 사이에도 윈치는 부지런히 잠수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잠수구에서, "엉? 위쪽에서 뭔가․․․."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별안간 뚝 끊기며 텔레비전 스크린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윈치의 소리가 왠지 별안간 가볍고 빨라진 것 같다. 모두 입을 다문 채 서로 얼굴을 보았다. 필리스도 불안한 모양인지 내 손을 꼭 쥔다. 소령은 전화에 손을 대려다 말고 말없이 갑판으로 나갔다. 참석자는 모두 갑판의 윈치 곁으로 모여들었다. 얼마 동안 모두는 불안한 얼굴로 윈치에 감기어 올라오고 있는 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줄 끝이 올라왔다. "앗! " 사람들은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줄 끝이 마치 강한 열에 녹아 버린 듯이 둥글게 잘린 채, 그 곳에 매달려 있어야 할 잠수구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원자 폭탄 투하   이튿날 신문은 큼직한 제목을 내세워 잠수구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잠수구를 붙들어매고 있는 것은, 지름 5센티미터나 되는 튼튼한 강철로 된 줄이었던 것이다. 절단하려고 해도 그렇게 쉽사리 끊어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더구나 줄 끝을 조사해 보니 식칼이나 톱으로 자른 것 같지가 않았다. 엄청난 고열로 쇠줄 그 자체를 녹여 버린 것이다. 바닷속에서 그와 같이 고열을 낼 수 있는 가공스러운 기계를 도대체 누가 만들어 작동케 했다는 말인가? 그놈은 잠수구가 잠수해 올 바닷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 무서운 범인은 도대체 어떤 자인가? 바다 밑바닥에 낙하된 채 있는 불덩이와 어떤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온 세계 인류는 잠수구와 더불어 바닷속에서 사라져 간 두 승무원에 대해 슬퍼하기보다는 그 무서운 사건에 떨고 있었다. 이런 때에, 다시 또 미국의 순양함 퀴나우 호가 메리애나 군도 근방에서 침몰했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느닷없이 까닭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서 순식간에 가라앉고 만 것이다. 타고 있던 5백 명의 승무원은 거의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아주 깊은 바다였었다고 한다. 이러는 동안에 이번에는 알래스카 남쪽 해상에서 소련 선박이 원인 불명으로 침몰했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잇따라 남태평양에서 노르웨이의 순시선이 침몰했다고 전한다. 이 무렵부터 온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계속하여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상스럽게도 어떤 배든 한결같이 깊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도중에 침몰하고 있다. 화가 난 미국 정부는 순양함 퀴나우 호가 침몰한 메리애나 근해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여 바닷속에 숨어 있을 적에게 보복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폭탄은 높은 수압을 만나도 파괴되지 않도록 튼튼한 용기 안에 넣어 해면에서 8천 미터의 깊이를 내려간 다음에 폭발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와 아내는 방송 기자로서 한 척의 군함에 탑승하여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었다. 먼저 튼튼한 용기 속에 들어 있는 폭탄을 무인 보트에 실었다. 쾌속정이 무인 보트를 끌고 수평선 근처까지 가서 보트만을 남겨 두고 돌아왔다. 보트 위에는 텔레비전 카메라가 놓여 있어서, 우리는 멀리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서 텔레비전 카메라가 송신해 오는 영상으로, 폭탄이 폭발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스피커에서 초읽기가 들려 왔다. "셋...... 둘...... 하나...... 발사!" 이 쪽에서 리모트 컨트롤 스위치를 누르자 용기 속에 들어 있는 폭탄은 무인 보트를 떠나 바닷속으로 잠수해 갔다. "점화!" 스피커에서 들려 왔다. 모두 텔레비전 화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꽤 시간이 흘렀다.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별안간 고요한 바다에서 거대한 흰 연기 기둥이 솟아올랐다. 흰 연기는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산처럼 거대하고 끔찍한 구름 기둥이었다. 쾅! 폭발 소리가 들려 온 것은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잠시 후 큰 물결이 굽이치면서 우리가 탑승하고 있는 군함에까지 밀려 왔다.   목성 생물   이 날 밤, 나와 필리스는 두 신문 기자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두 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연방 '보커'라는 이름이 나온다. 보커 박사라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질학자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보니, 보커 박사는 일 년쯤 전에 해군성에 의견서를 제출하여 이렇게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잠수구의 쇠줄이 마치 녹여 버린 듯이 절단됐고, 또 몇 척이나 되는 선박이 까닭도 없이 폭발하여 침몰하였다. 이것은 바닷속에 무엇인가가 숨어 있다가 일부러 공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깊은 바다이다. 그와 같이 깊은 바다 밑바닥은 수압이 높고 수온이 낮으며, 태양의 빛이 미치지 못하는 캄캄한 세계이므로 인간은 도저히 살지 못한다. 더구나 지구에는 인간 이외에는 그와 같이 규모가 큰 작업을 해낼 만한 과학적인 힘을 가진 생물이 없다. 만일 그것이 지구의 생물이 아니려면 바다 밑에 살고 있는 것은 어딘가 다른 행성에서 온 생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깊은 바다의 수압에도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딘가 지구보다도 훨씬 대기압이 높은 별에서 태어난 생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보커 박사는 다시 한 번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불덩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불덩이는 결코 땅 위엔 떨어지지 않았다. 반드시 바다 위, 게다가 가급적 깊은 바다에 낙하했다. 더구나 떨어졌을 뿐이지 바닷속에서 밖으로 나갔다는 사례가 없다. 또 미사일에 의해서 추락된 불덩이는 불을 내뿜으며 타는 것이 아니라 부풀었다가 파열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것은 불덩이 속이 굉장한 고압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불덩이는 깊은 바닷속으로 떨어진 것이다. 심해는 고압이고, 둘레는 물뿐이니 움직이는 데도 수월한 것이다. 태양계 안에서 기압이 높은 행성은 목성이다. 그러므로 깊은 바닷속에 숨어 있는 생물은, 그 불덩이 속에 들어가 목성으로부터 날아온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목성의 생물이 제멋대로 지구의 바닷속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틀림없이 뭔가 못된 짓을 할 것이다.'라든지 '이 지구를 빼앗고 인간을 추방할 것이다.'고 결정해 버린다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목성의 생물들은 꼭 지구인들과 전쟁을 할 속셈은 아니며, 같이 사이좋게 살자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목성의 생물은 깊은 바닷속처럼 주변에 수톤 이나 되는 압력이 있는 곳에서밖엔 살지 못한다. 지구의 생물은 반대로 그런 고압의 장소에서는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지구인들도 가급적 목성의 생물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이 좋겠다. '   보커 박사의 의견은 이상과 같은 것이었다. 심술궂게도 해군성에서는 '깊은 바다에는 무엇인가가 살고 있다.'고 하는 대목만을 보커 박사 의견 중에서 채택했다. '그 생물들과 사이좋게 지내자.'는 의견 쪽은 전혀 못 들은 체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분명히 몇 척인가의 배가 침몰 당한 것만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범인이 아직 바닷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화가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이 원자 폭탄을 투하한 것이지만 영국의 해군성에서도, '더 폭탄을 던져라.'라든지, '바닷속의 목성인을 모조리 때려잡자.' 어쩌고 하는 의견이 물 끓듯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커 박사의 주장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보커 박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당장 런던의 EBC방송국에 전화를 하여 수소문을 부탁했더니, 마침 두 시간 후에 보커 박사가 신문 기자와 방송 기자들과 만나 인터뷰를 할 예정이란다. 보커 박사를 만나야겠다고 희망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와 필리스는 기자 회견장으로 날아갔다.   보커 박사   회견실은 만원이었다. 정면의 책상에는 보커 박사가 앉아 있었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둥글둥글한 얼굴, 두툼한 눈썹, 이마에 너풀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사진에서 본 그대로이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눈빛이나 호인스러운 표정의 움직임, 참새와 같이 팔팔한 거동 따위는 사진으로 알 수 없다. "차분한 데가 박사에겐 없네요. 안절부절못하는 큰 도련님 같아요.“ 필리스는 이런 말을 했다. 이윽고 술렁이던 회장이 조응해졌다. 보커 박사는 기자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새삼스럽게 할 이야기가 더 있나요? 내 의견은 인쇄하여 여러분에게 배부한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질문이 있으면 하시오." 두세 가지 엉뚱한 질문이 있어 박사가 그것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자 한 기자가 물었다. "보커 박사님, 분명히 선생님은 2년 전에는 그 바다 밑 생물이 다른 행성에서 이사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침략해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이건 선생님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얘기입니까?" "그래요. 달라졌소. 하지만 달라진 것은 내 의견이 아니라 상대편의 태도입니다. 해저의 생물이 지구에 온 건 처음에는 분명히 평화적인 이사였지요. 그런데 요사이는 그렇게만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드디어 우주 전쟁이 발발하는 겁니까?" "그렇소." "그러니 아무래도 진짜 우주 전쟁이 시작된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걸요." "그건 당신이 공상과학 소설을 너무 탐독했기 때문이오. 웰즈의 SF와 같은 하늘을 나는 원반이 광선총으로 공격해 오거나 하면 세상 사람들은 정말로 우주 전쟁이 터졌구나 하고 믿겠지요. 하지만 참된 우주 전쟁은 반드시 그런 식으로 벌어지는 건 아니오. 우리들의 적은, 웰즈의 소설에 나오는 화성인보다도 더욱더 고약한 상대인 것입니다.“ "하지만 왜 지구를 공격해 온 겁니까? " "늘 약한 자는 당신처럼 '왜? 왜 그럴까?' 하고 중얼거리면서 강한 자에게 먹히고 마는 법이오.“ 이래 가지고는 질문한 사람이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전혀 목적이 없을 리가 없다고 보는데요!" "목적은 있어도 그것이 지구의 인간에게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만은 볼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러면 마치 지진이나 태풍 같은 겁니까? " "그래요. 아시겠습니까? 새는 곤충을 잡아먹어요. 곤충의 입장에서는 왜 자기네는 새에게 먹히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이 날 있었던 일은 신문이나 방송 뉴스 시간에 보도되었으나, 보커 박사의 발언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사라진 원자 폭탄   그 후 삼 주일쯤 지난 어느 날, 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필리스가 말했다. "오늘 윈터스 대령에게서 전화가 있었어요.“ "뭐, 재미있는 얘기를 합디까?" 하고 내가 묻자 필리스는, "아뇨, 별로 재미도 없었던 것 같아요. 바다 밑의 생물 조사가 도무지 진척이 없다는 이야기였거든요." "바다 밑에 투하한 원자 폭탄은 효과가 있었다던가?" "그게 말이지요, 원자 폭탄을 사용하면 방사능이 나와 생선을 잡을 수 없다는 항의가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런 폭탄은 쓸 수 없다나 봐요. 그리고 더 큰 일이 일어났대요." "더 큰 일이라니?" “바다 밑에 투하한 폭탄이 두 개 행방 불명이 돼 버렸대요." "행방 불명되었다고." "그래요. 해군들은 대단히 걱정하고 있나 봐요. 그 폭탄은 바닷속으로 던져진 후 어느 일정한 깊이가 되면 스스로 폭발하도록 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일정한 깊이에까지 도달하기 전에 뭔가에 걸렸다는 얘긴가?" "글쎄요, 어쩌면 누군가가 고의로 도중에 효력이 없어지도록 조치했는지도......" "그러나 원자 폭탄을 사용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어쩔 수 없쟎아.“ "이번에는 새로운 유도 미사일을 만들어 바닷속에 투하하는 거죠.“ "음- 그건 굉장한 뉴스야." "그런 일보다도 더욱더 근사한 뉴스가 있어요. 윈터스 대령이 나를 해양학자인 매테트 박사에게 소개해 주겠대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지? 해양학자들은 모두 보커 박사의 의견에 몹시 반대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매테트 박사는 대령의 친구로 불덩이가 떨어진 지점을 그려 넣은 지도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대요. 게다가 우리들도 아직 완전히 보커 박사의 의견에 찬성해버린 건 아니잖아요.“   바닷속의 괴물   2, 3일 후에 필리스는 혼자서 매테트 박사를 만나러 갔다. 필리스가 매테트 박사에게서 듣고 온 이야기에 따르면, 1년쯤 전부터 이곳 저곳의 바닷물 빛이 달라졌다고 한다. 정녕 바다 밑에서는 무엇인가 색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매테트 박사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매테트 박사의 이야기를 보커 박사에게 들려주면 어떨까요? " 필리스가 말했다. "그건 좋은 생각이야.“ 하고 나도 찬성했다. 우리는 곧 보커 박사를 만나러 갔다. 보커 박사는 이마에 머리카락을 약간 늘어뜨린 채 머리를 숙이고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다 듣고 나서 잠시 생각하고 있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우주 생물들은 벌써 지구의 해저에 사는 데 성공한 셈이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새 영토를 넓히는 사업에 착수한 겁니다.“ "도대체 뭘 시작했다는 겁니까!" 내가 묻자 보커 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잘 모릅니다만 바닷물 빛이 달라졌다고 하니까 바다 밑을 파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광석을 캐고있는 지도 모르고.“ "그뿐입니까!" "예. 도로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바다 밑에도 산이나 골짜기가 있으므로 산을 파서 터널을 만들거나 울퉁불퉁한 땅바닥을 평평하게 하는 공사를 벌이고 있는 지도 모르죠...... 그런데 두 분은 바다에 투하한 원자 폭 탄 두 개가 폭발하지 않았다니 그것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겠지요?" "원자폭탄이 별안간 폭발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나요?" "아니오." 필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그 폭탄은 어디론가로 사라진 두 개의 폭탄 가운데 하나일까요?" "그렇다면 아직 안심할 수 있군요. 그런데 어제의 폭발 지점은 구암 섬 근방의 바닷속이었어요. 두 개의 원자폭탄이 없어진 장소에서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지요." "그러면 해저에 살고 있는 목성의 생물이 원자폭탄을 일부로 2천 킬로미터나 운반하여 구암 섬에서 폭발시켰다는 겁니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더욱 내가 두려워 하고 있는 점은......" 보커 박사는 내 얼굴을 지켜 보면서 말했다. "그들이 손에 넣은 원자 폭탄을 연구하여, 같은 원자 폭탄을 자기네들도 만들려고 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점입니다."   제 2부 바다의 전차   장미 산장   우리는 콘월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 장미 산장이라고 부르는데, 조그만 언덕의 동남쪽 경사면에 세운 회색의 벽돌집으로, 방은 다섯 개가 있다. 정면으로 벨포드 강이 흐르고 있고, 강물은 왼쪽 팔마우스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군데군데 바위가 돌출하여 경치가 썩 좋은 만으로 밤이 되면 리자이드 등대 불빛이 아름답다. 우리는 평소에는 런던의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원고를 쓰거나 자료를 읽는 등 시간이 소요되는 일을 할 적에는 이 산장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여가가 나면 기분풀이로 한가롭게 놀러 가는 수도 있다. 그 날은 아침 5시에 런던을 떠나 산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자 벌써 8시였다. 필리스는 당황해하며 아침을 장만하기 시작했고, 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또 배가 침몰했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일본 배였다.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인도네시아로 향하던 기선 야츠시로 호가 말래카 해에서 침몰했다는 것이다. 백 명의 선객이 타고 있었는데 구조된 사람은 현재 불과 일곱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더 자세하게 읽어보려고 하는데, 필리스가 '어머!'하고 외치며 신문에 실려 있는 침몰 지점의 지도를 가리켰다. "야츠시로 호가 침몰한 곳은 언젠가 우리들이 불덩이를 본 그 근방이네." 이로부터 한 달쯤 우리는 각자의 일을 산장에서 즐겁게 계속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집에 틀어박혀 있기가 아까워서 해수욕을 하거나 보트놀이를 하며 즐겼다. 야츠시로 호 사건이나 불덩이에 관한 일 따위는 어느 새 잊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아침에 라디오의 9시 뉴스에서 ‘퀸 앤 호가 행방 불명이 되었다.'고 알려 준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으나 희생자는 적지 않은 숫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퀸 앤 호는 세계에서 제일 속력이 빠르고, 더구나 9만 톤이나 되는 큰 객선 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나는 라디오 스위치를 껐다. 언젠가 필리스와 함께,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퀸 앤 호를 구경하러 가 본 적이 있었다. "이게 무슨 변이어요, 마이크. 그런 훌륭한 객선이 행방 불명이라니........“ 필리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30분 뒤에, EBC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있었다. 바닷속에 숨어 있으면서 가끔 배를 침몰시키는 괴물의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싶으니 자료를 정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 당분간은 이 산장과 이별을 해야겠군." 나는 필리스에게 말하며 런던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미국의 작전   이튿날 아침, 우리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라디오 스위치를 돌리니까 귀에 뛰어든 것은 항공 모함 메리트리어스 호와 정기 여객선 카리브 프린세스 호가 침몰했다는 뉴스였다 메리트리어스 호는 아프리카의 서쪽에 있는 케이프 베르데 군도의 남서쪽 1천 3백 킬로미터 지점에서, 중부대서양의 밑바닥에 침몰한 것이다. 카리브 프린세스 호가 침몰한 곳은 쿠바의 산티아고에서 3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지점이었다. 어느 배나 불과 2분만에 침몰하였으므로 살아 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을 당하고도 잠자코 있을 수는 없다. 2, 3일 사이에 온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단호하게 보복하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미국이 그 소리에 답변했다. 열 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카리브 프린세스 호가 침몰한 근방의 너비 80킬로미터, 길이 640킬로미터의 바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겠다는 것이었다. 심해 공격용으로 특별 장비를 갖춘 신형 폭탄인 원자 폭탄도 두 개 투하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공격을 감행하는 날에는 군함 한 척에 아나운서가 탑승하여 실황을 방송하였다. 아나운서는 처음 얼마 동안은 차분하게 중계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흥분하며 외쳤다. "뭔가가, 아, 아, 부풀어오릅니다.“ 잇따라 쾅! 하고,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소리. 아나운서는 뭔지 뜻도 알 수 없는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또 쾅! 하고 폭발하는 소리. 바글바글, 뻥! 하는 격렬한 소리.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 지르릉 지르릉 하고 비상벨 소리도 들려 왔다. 이윽고 아나운서는 숨가빠 하며 빠른 속도로 말했다. "조금 전의 소리는 순양함 카볼트 호가 폭발한 소리였습니다. 두 번째 소리는 프리깃 함 레드우드 호가 폭발한 소리였습니다. 두 군함 다 벌써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함대는 원자 폭탄 두 개를 적재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중의 한 개는 레드우드 호에 적재한 것입니다. 그 원자 폭탄은 8천 미터 깊이에 이르면 스스로 폭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란히 있던 프리깃 함이 침몰했고, 적재한 원자 폭탄이 곧 저절로 폭발한다는 것이다. 여덟 척의 군함은 쏜살같이 거기서 도주했다. 그러나 7분 뒤에 터진 원자 폭탄으로 이미 두 척의 군함이 가라앉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비장한 미국의 작전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네 척의 군함이 침몰되고 만 것이다. 이 때부터 바닷속에 무엇인가 가공스러운 것이 있으리란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배를 타는 사람이 없었다. 외국으로 여행할 때는 비행기를 이용하였다. 또 화물을 나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온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먹을 것과 가솔린이나 커피 따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부족해질 우려가 있는 물자를 마구 사들였다. 그래서 물건값이 매일 뛰어올랐다.   사필라 섬   여기는 사필라 섬이다. 대서양에 있는 브라질의 섬이다. 적도에서 조금 남쪽에 있으며, 페르난도 드 노로니아 섬이라는 큰 섬의 남동쪽 64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외딴섬이다. 연락선도 반년에 한 번밖에 들르지 않는다. 섬에 살고 있는 백여 명의 사람들은 아득한 원시인과도 같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 "뚜우...... 뚜우........" 이 날, 반 년 만에 들른 연락선은 연방 쌍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하면 기다리다 지친 섬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이곳 저곳의 움집에서 뛰쳐나와 쪽배를 몰고 와서 선창가에 모여 환영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의 쌍고동은 항구 어귀의 여기저기에 허무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갈매기가 몇 마리 날고 있었으나 인간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또 한 번 쌍고동을 울려 보았다. 사필라 섬의 해안은 험준한 절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연락선은 해안으로부터 백 미터쯤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섬에는 한 줄기 연기도 보이지 않았고 통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보트가 내려지고 기관장이 선원들을 인솔하고 해변으로 접근해 갔다. 이윽고 뭍으로 올라가 귀를 기울였다. 들려 오는 것이라곤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 소리 뿐으로 을씨년스럽게 고요하다. "모두 어딜 갔나? 통나무 배 하나 없쟎아." 선원 하나가 말했다. 기관장이 한껏 숨을 마시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모두 귀를 기울이며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들려 오는 것을 여전히 어귀를 가로질러 가는 울림뿐이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기관장이 말하자 모두는 조심조심 그 뒤를 따라 제일 가까이에 있는 돌로 지은 움막으로 향했다. 반쯤 열린 문짝이 있었다. 그것을 밀고 안을 들여다본 기관장이 외 쳤다. "뭐야, 이건!" 접시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하지만 그밖에는 전혀 수상쩍은 점이 없었다. 침대 위는 언제든지 잘 수 있도록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썩은 생선만 없었다면 잠깐 집을 비운 모양이라고 볼 수 있는 상태였다. 다음으로 들여다본 움집도, 세 번째 들여다본 움집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살고 있는 사람이 돌아올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네 번째 움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앗! " 선원 한 사람이 안쪽 방을 가리키며 외쳤다. "죽어 있다! " 요람 속의 갓난아기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일행은 끔찍스러운 광경에 놀라 부리나케 배로 돌아왔다. 배에서 무선 전화로 리오의 경찰에 알려 주었더니 좀더 자세히 섬 안을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기분이 나쁜 것도 꾹 참고 3일 동안 섬 안을 조사하였다. 이틀째 되는 날에 산의 동굴 속에서 네 여자와 여섯 어린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죽은 지 대엿새쯤 된 것 같았다. 부상을 입은 흔적이나 병을 앓은 기색도 없었다. 굶어 죽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뉴스는 이윽고 온 세계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조그만 섬에서의 사건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별로 대단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프릴 섬   이 곳은 에이프릴 섬. 어두운 별빛 속을, 뾰족하게 바다로 내민 곶을 향하여 경찰의 포함이 접근해 가고 있다. 질이 좋지 않은 해적들이 이 섬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그날 낮에 경찰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경찰관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포함을 타고 잡으러 온 것이다. 해적들은 이 곶의 건너편 마을에 숨어 있는데, 총이나 기관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포함은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곶에 접근하여, 살며시 보트를 내리고 철모를 쓰고 자동 소총을 든 경찰대를 상륙시켰다. 포함은 그냥 여기서 기다렸다. 경찰대가 해적들이 있다는 마을을 포위하고 신호를 보내면 배에서 대포를 쏘아, 단숨에 적들을 해치운다는 작전이었다. 경찰대가 곶 안의 산을 넘어 건너편 마을에 도착하려면 45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대형을 정비하고 마을을 포위하자면 다시 10분쯤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30분밖엔 경과하지 않았는데, '땅땅땅' '따르르르 따르르‘하고 자동 소총을 갈기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포함 위의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장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이상하다고는 생각되어도 틀림없이 싸움은 시작되었으니, 망설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전진!" 대장이 명령을 내리자 포함은 전 속력으로 곶을 돌아 목적지인 마을을 향했다. 그 사이 마을 쪽에서는 '둘둘둘'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분명히 경찰대는 자동 소총과 수류탄밖에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그런 둔탁한 소리가 들려 올 까닭이 없는 것이다. '땅땅!' '따르르르 따르르르' 하는 총 소리는 잠깐 한 번 그쳤다가 잠시 후 다시 미친 듯이 맹렬하게 울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또 '둘둘둘' 하고 둔탁한 소리. 그 사이, 별안간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이윽고 포함은 마을에 접근했다. 캄캄하고 고요했다. "서치라이트를 켜라! " 눈부신 빛을 받고, 집이나 나무가 마치 무대 위에서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해안에서 하얀 거품을 내고 있는 파도뿐........ 사람 그림자는 하나도 없었다. "공격 개시!" 포함의 확성기가 마을을 포위하고 숨어 있을 경찰대를 향하여 외친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가? 경찰대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치라이트의 방향을 이곳 저곳으로 움직여 집이나 나무 사이를 조사해 보았으나 역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별안간- 서치라이트의 빛이 해변에서 멈췄다. 내동댕이친 자동 소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뭔가 무서운 사건이 발생한 모양이다. 상륙하자니 겁이 났다. 이 날 밤은 온 밤을 서치라이트를 켜 놓은 채 기다리기로 했다. 날이 샌 후, 부대장이 다섯 명의 무장한 경찰관을 인솔하고 상륙했다. 상륙한 부대장은 급히 흩어져 있는 자동소총을 집어 보았다. 어느 것에나 모두, 무엇인가 진득진득한 것이 붙어 있었다. 모래톱에는 폭이 넓은 개천이 네 줄기, 바다에서 집 쪽으로 뻗어 있었을 개천의 너비는 2미터 50센티미터 가량이고, 깊이는 한가운데의 제일 깊은 곳이 15센티미터 정도였다. 개천의 양쪽은 모래톱이 불룩 올라와 있어 조그만 언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해안 쪽에서 크고 무거운 기계를 끌어올린다면 이런 자국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고 부대장이 중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네 가닥 중에 두 가닥은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나머지 두 가닥은 반대로 바다 쪽에서 마을 쪽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 경계하면서 마을로 접근했다. 그 사이에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집이나 나무가 어쩐지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한가운데는 광장이었다. 광장 주위에 여러 가지모양의 집이 즐비하게 서 있었는데 이러한 집들 가까이에 가보니 왜 반짝이는가를 알 수 있었다. 자동 소총에 붙어 있던 진득진득한 것이 집이나 나무에도 붙어 있는 것이다. 제일 큰 집 안을 살펴보기로 했다. 진득진득한 것이 온통 붙어 있는 문짝을 발로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별로 어질러져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걸상 두 개가 넘어진 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살던 사람이 당황하여 뛰쳐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집 옆을 돌아보니 벽은 말라 있었고, 그 진득거리는 것이 붙어 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광장 한복판에서 진득거리는 것을 뿌린 것 같군." 부대장이 말하자, "바닷속에서 뭔가가 나타난 건 아니었을까요?" 하고 한 부하가 겁먹은 표정으로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은 탓인지 진득진득한 것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군. 자, 철수하자." 부대장은 모래톱에 흔적이 남은 이상한 네 가닥의 개천을 카메라에 담아 가지고 포함으로 되돌아갔다. 포함은 그 곳을 나와 다른 어귀로 가 보았다. 이 곳에는 네 가닥의 흔적이나 진득진득한 것도 없었다. 조금 전과 같았던 것은 마을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뚜우... 뚜우..." 포함에서는 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오고 있다. "앗! " 쌍안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대원이 외쳤다. "저 언덕 위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셔츠 같은 걸 들고 있어요.“ 포함은 고동을 울리면서 모래톱 쪽으로 접근했다. 보트가 내려지고 부대장이 세 사람의 부하를 거느리고 올라탔다. 한편, 섬에서는 튼튼한 몸집의 토인 아홉 사람이 마을에서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숲 속에서 달려 나와 보트를 향하여 '여보시오!' 하고 외쳤다. 보트에서도 '왜 그래!' 하고 대답했다. 이윽고 보트는 모래톱에 접근하였다. 부대장은 이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으나 토인들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부대장은 자기 쪽에서 상륙하여, 몸짓과 손짓이 섞인 급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부대장은 토인들에게 줄곧 포함 쪽으로 같이 가자고 부탁했으나, 토인들은 도저히 갈 수 없다고 고집하는 모양이었다. 부대장은 단념하고 보트로 다시 돌아와 포함 쪽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던 대장이 이들에게 물었다. "왜 이쪽으로 오지 않는 거야? " "바다가 무섭답니다.“ "어째서? " "바닷속에서 고래인지 괴물인지가 나온다는 겁니다.“   벽돌쌓기   에이프릴 섬에서의 이상한 사건이 있은 뒤, 온 세계의 여기저기에서는 지금까지보다도 더 빈번하게 배가 침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더욱더 배를 타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비행기는 늘 만원이다. 어느 수요일, 나는 런던에서 장미 산장에 있는 필리스에게 전화를 했다. 필리스는 이미 2주일 째나 산장에 틀어 박혀 있었다. 그런데, 전화의 벨 소리가 났을 텐데도 필리스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단념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겨우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마당에서 벽돌을 쌓아올리고 있었어요.“ "벽돌을 쌓아올려 ? 별 이상한 짓도 다하고 있네. 뭘 하려고!" "현재로선 단지 벽을 만들고 있을 뿐이어요. 일이 잘 피지 않아 기분이 답답할 땐 벽돌쌓기를 하면 기분이 한결 좋아져요. 당신도 돌아와 같이 해 보지 않겠어요!" "아니, 안 돼. 사실은 EBC방송국의 프레디 부장이 이번 금요일에, 당신과 나와 부장 세 사람이 함께 저녁을 먹자는 거야.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는 모양이야." 필리스는 잠깐 생각하는 듯이 조금 있다가, "그럼 하던 일을 적당히 마치고 내일 오후 6시경에 런던에 도착할 열차로 돌아가겠어요." 금요일, 약속 시간에 레스토랑에 들렀더니 프레디 부장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사가 끝나자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말이오, 한 스폰서가 돈을 낼 테니 탐험대를 만들어 바닷속에 숨어 있는 괴물을 조사해 달라는 겁니다. 대장은 보커 박사요. 당신들도 함께 가 주지 않겠소?" 나와 필리스는 물론, "가겠소." 하고 대답했다,   에스콘지다 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렇게 햇볕을 받으며 한가롭게 쉰다는 건 행복한 일이어요." 하고 필리스가 말했다. 여기는 에스콘지다 섬에 있는 단 하나의 마을 스미스 타운이다. 나와 필리스는 호텔 정원에서 매일 일광욕을 한다. 눈앞에는 파란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저 멀리 수평선은 하늘과 맞붙어 있다. 모래톱이 활처럼 굽어 있었고, 바다로 내민 언저리에는 야자나무가 두세 그루. 이런 한가로운 경치가 아지랑이 때문에 흔들려 보인다. 보커 박사의 탐험대가 이 곳에 온 지 벌써 5주일 된다. 이 근처는 케이먼 제도라고 불리는데, 크고 작은 섬이 많이 흩어져 있다. 보커 박사는 여러 가지를 조사한 끝에, 이 에스콘지다 섬이 가장 괴물이 나을 만한 섬이고 결정하고 이 곳에 본부를 두었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일 주일도 채 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섬에서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왔다. 당장 비행기로 그 섬에 가 보았으나 너무 늦었던 것이다. 살고 있는 주민 250명 중에 살아 남은 자는 20명뿐이었고, 230명이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살아 남은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밤중이라서 괴물의 정체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에스콘지다 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2주일--- 3주일이 지났다. 심술 맞게, 그 사이에도 괴물은 딴 섬에는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이 5주일 동안에 근방의 열 두 섬이 모두 괴물의 습격을 받았다. 우리는 조바심이 났다. 어딘가 딴 섬으로 옮기자는 사람도 있었다. 매일 매일 한결같이 한가하게 햇볕이나 쬐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조금도 탐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커 박사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박사의 지시로 우리는 섬의 이곳 저곳에 전등불을 켰다. 호텔의 테드의 방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모든 전등에 불이 켜졌다. 한밤중에도 온 섬 안이 한낮처럼 밝게되는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5주일 동안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다는 것은 심심해서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대원들은 섬에서 자라난 희한한 식물을 관찰하거나 섬사람들로부터 에스파냐 말을 배우거나 기타 연습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바쁜 듯이 보이는 것은 보커 박사뿐이었다. 박사는 여전히 매일 두 조수를 데리고 헬리콥터로 섬 주위를 조사했다   나타난 괴물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필리스는 창가에 서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 "왜 그래?" 나는 물어 보았다. 그러자 필리스는 황홀하게 창 밖의 밤 경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걸 봐요, 마이크. 바다에는 배나 섬이 조용히 잠들어 있어요........ 하늘에는 황금빛 초승달...... 아름답지 않아요?" 나도 나란히 서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광장에는 인기척이 없었고, 그 저편 바다는 희미한 은빛이다. 을씨년스러운 집들 사이에서는 기타 소리가 들려 왔다. 필리스는 그 소리에 맞춰 에스파냐 말로 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바로 그 때다--- 별안간 기타 소리가 뚝 그치며 '뚱 땅......‘ 하고 기타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잇따라 '와.' 하는 사람의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꽥하는 여자의 비명도 들려 왔다. "설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탕.... 탕....‘ 하고 두 발의 총성이 귓가에 들려 왔다. 필리스도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크, 왔어요. 틀림없이.“ 사방이 다 같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광장 주위에 서있는 집들의 창문이 잇따라 열렸고, 상반신을 내민 사람들이 저마다 묻는다. "뭐야?" "왜 그래!" 집에서 뛰쳐나와 해변 쪽으로 달려가는 자도 있었다. 외치는 소리는 더욱 더 맹렬해졌다. 비명이나 총 소리도 같이 일어났다. 나는 창가에서 떠나 벽을 '쾅! 쾅!' 두들기며 옆방에 대고 악을 썼다. "여보시오! 테드, 빨리 스위치를 눌러 전등불을 켜요! 해변을 비추라니까." 옆방에서는 희미하게 테드의 대답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다시 창가로 돌아왔을 때는 온 섬 안에 전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풀장을 가로질러 바다 쪽으로 달려가는 십여 명의 사람들 외에는 특별히 유별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지 술렁이던 것도 갑자기 멈추고 말았다. 옆방에서 쾅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터벅터벅 하는 신 소리가 내 방 앞을 지나갔다. 테드가 나간 모양이다. 해변 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다시 사나와진 것 같다. "어물거리고 있을 순 없어." 나는 필리스에게 말을 걸었으나 필리스는 내 곁에 있지 않았다. 바라보니까 방 건너편의 문께에서 자물쇠를 잠그고 있다 "어떻게 할 셈이야? 빨리 적의 정체를 조사하러 가야 할 덴데." "안 돼요." 필리스는 단호하게 말하며 벌떡 일어서서 문 앞을 가로막았다. 잠옷바람이었기 때문에 마치 흰옷을 입은 천사 같았다. "이것 봐, 필리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일이잖아."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아요. 어쨌든 조금만 더 여기 있어요" 나는 필리스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 열쇠를 줘요." "안 돼요." 필리스는 열쇠를 창문 밖으로 냅다 던지고 말았다. "아니, 무슨 짓이야." 나는 날아가는 열쇠를 바라보며 창문에서 상반신을 내밀었다. 전등불로 낮과 같이 환한 광장에서는 사람들 붐비며 여기저기를 오가고 있었다. "필리스, 비켜서요.“ 나는 뛰어나갈 자세를 취했다. 문을 부수고서라도 밖으로 나갈 속셈이었다. "진정하세요, 마이크. 우리의 일을 잊어선 안 돼요." "그 일 때문에 가겠단 말이오." "아니어요. 당신 일은 살아 남아 적의 정체를 온 세계에 알리는 일이어요. 현재까지의 얘기로는 살아 남은 사람은 적 가까이 뛰어든 사람이 아니었어요. 집안에 숨어있든지, 아니면 산 속으로 도망친 사람들뿐이어요." "그건 그렇지만........" "자, 창문에서 봅시다.“ 할 수 없었다. 나는 필리스와 함께 집안에서 구경하기로 했다. 광장 사람들은 처음에는 서서히 바다 쪽으로 가고 있었으나, 이윽고 그 줄은 움직이지 않았다. 줄 앞의, 그러니까 해변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거꾸로 이 쪽으로 도망쳐 오는 것이다. 되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테드가 있었으므로 나는 물어보았다. "어떻게 된 건가?" "모르겠소. 군중을 뚫고 나아갈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가 온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게 무언지 통 알 수 없었어요. 방으로 돌아가 창문에서 영화를 촬영해야겠어요.“ 하고 테드는 호텔 현관으로 들어갔다. 해안 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광장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빨리 되돌아가려고 서로 밀치고 있는 모양이다. 총 소리는 이미 들려 오지 않았으나 여기저기의 집 뒤에서는 여전히 악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텔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보커 박사가 있었다. 파일럿인 조니 탤튼도 같이 있다. 박사는 호텔 밖에 서서, 창문에서 목을 내밀고 있는 우리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알프레드는 어디 있소?"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누구든 알프레드를 찾으면 곧 호텔로 오라고 전해 줘요. 다른 분들은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면 안돼요. 방안에서 보고 있을 것! 적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 돼요. 테드는 전등을 더 밝게 하시오.“ 이렇게 명령한 박사는 또 한 번 광장을 돌아다보며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호텔 현관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광장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훨씬 적어졌다. 나머지 사람들도 출입문이나 골목 어귀에 서서 여차하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바다의 전차   별안간 대여섯 명의 사나이가 땅바닥에 엎드려 해안 쪽을 향하여 총을 겨누었다.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그치고 사방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이런 판국에 저 쪽 집 뒤에서 희미하고 둔탁한 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그르르르...... 비거덕 ...... 질질질 ...... 교회의 대문이 열리면서 검정 빛깔의 길쭉한 옷을 걸친 신부가 나타났다. 사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 둘레에 모여 무릎을 꿇었다. 신부는 모두를 지키겠다는 듯이 양팔을 벌렸다. 달...... 달...... 달.... 질...... 질...... 질.... 저 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어느 새 단단한 돌 위에서 무거운 금속을 끌고 있는 듯한 소리로 변해 있었다 탕! 탕! 탕! 별안간, 땅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소총을 쏘았다. 무엇을 노린 것인지, 아직 우리가 있는 데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총을 쏘고 있던 사람들은 잇따라 일어서서 흩어지며 달아났다. 이윽고 광장 한구석에 몰리어 도망치는 길이 막히게 되자, 또 돌아서며 총에다 실탄을 쟁이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달...... 달...... 달........ 질...... 질...... 질........ 우지직...... 우지직...... 쿵! 소리는 더욱 더 커졌으며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 벽돌이 무너지는 소리, 유리가 깨지는 소리 따위가 섞이어 들려 왔다. 이 때였다. 나는 이 눈으로 처음으로 본 것이다----- 그 괴물을! 길이 10미터 가량, 높이 4미터쯤의 흐린 회색을 띤, 달걀 모양의 둥근 유령이었다. 그것은 마치 달걀을 세로로 두 조각을 내어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전차같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에서 나왔으므로 ‘바다의 전차’라고나 할까. 몸뚱이 여기저기에는 여기까지 오면서 파괴한 건물이나 나무의 껍질을 붙인 채 당당하게 전진해 오는 것이다. 그 괴물을 향하여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간다. 그러나 탄환은 전부 퉁겨져 버리고 아무 효과가 없었다. 괴물은 끊임없이 기어왔다. 약간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길에서 있는 건물이나 나무를 거침없이 무너뜨리며 전진해왔다. 콘크리트의 벽이건 벽돌이건 큰 돌기둥이건, 마치 비스킷이라도 짓이기듯이 토막이 나고, 부러지고 밀리어 나가 떨어졌다. 탕! 탕! 탕........ 쌩 쌩 쌩...... 총알은 공기를 진동시키며 날아 괴물에 명중하였으나, 괴물은 시종 태연하게 중단 없이 전진하고 있다. 시속 5킬로미터 정도의 느린 속도였다. 도대체 어떤 장치로 움직이고 있는 걸일까? 어쩌면 밑에 롤러가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른 보기에는 기계 장치가 아니라, 금속으로 된 배를 지면에 바로 대고 기어오는 느낌이었다. 보통 전차처럼 돌아갈 때 속력을 늦추거나 하지 않았다. 늘 같은 속도로 어슬렁어슬렁, 그러나 계속 전진해 _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선두의 괴물은 오른쪽 옆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잇따라 그것과 똑같은 것이 또 하나 모습을 드러내며 왼쪽, 즉 우리가 있는 호텔 쪽으로 전진해 왔다. 뒤따라 세 번째 것이 모습을 보이더니, 이놈은 곧바로 전진해 와서 광장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섰다. 신부의 둘레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은 당황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부만은 도망치지 않고 바다의 전차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전차는 아랑곳없이 전진하여 잠깐 사이에 신부를 밀어내 버렸다. 이윽고 바다의 전차는 셋 다 멈춰 섰다. 띄엄띄엄 거리를 둔 채 광장에 앉아 있는 꼴이다. "뭘 시작하려는 걸까? " 나는 필리스에게 말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펄럭펄럭하는 것이!   30초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탕....탕....‘ 하고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려 온다. 건물 안에서 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창문에나 사람들의 얼굴이 방울처럼 달려 있다.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싶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어마, 부풀어오르고 있어요!" 하고 필리스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까, 제일 가까이 있는 전차의 윗부분에 혹과 같은 것이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전차의 몸뚱이 빛깔보다도 빛이 엷고 투명한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커졌다. "어마, 저거 봐요-. 딴 전차에도 혹이 생겼어요." 탕! 탕! 하고 총 소리가 나자 혹이 흔들거렸다. 그러나 계속 커져 가고 있는 것이다. 커지는 속도도 아까보다는 빠른 것 같다. 벌써 혹이라기보다는 다른 공을 붙인 꼴이 되어 마치 눈사람의 머리 같은 느낌이었다. 풍선처럼 말랑말랑해 보인다. "금방 터질 것 같아요." 필리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앗, 뒤쪽에도 또 하나 혹이 생겼어." 먼저 부풀어오른 혹은 이미 지름 1미터 가량의 크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직도 더 커질 전망이었다. "틀림없이 터질 거야." 필리스는 이렇게 말했으나 풍선은 계속 부풀어가고 있었으며, 드디어 지름 2미터의 크기가 되자 더 커지지 않았다. 얼마 동안 전차에 붙어서 떨고 있었으나, 그 사이에 잠깐 해파리처럼 몸뚱이를 비트는가 싶더니, 전차에서 떨어져 등등 공중으로 떠올라갔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비누거품처럼 등등 날기 시작했다. 괴물로부터 4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풍선은 갑자기 두 개로 나누어졌다. 소리도 없이 마치 꽃잎이 갈라지듯 그렇게 나누어진 것이다. 안에서는 희고 펄럭펄럭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그리고 제멋대로 흩어졌다. 우리들의 창문에도 네댓 개가 날아왔다. 희고 긴 회초리 같았다.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떨어지자 별안간 줄어들어 아까 왔던 제자리로 돌아갔다. "꽥! " 필리스의 비명이다. 보니까 희게 펄럭거리는 것 한 개가 필리스의 오른팔에 달라붙어 필리스의 몸뚱이를 창문 쪽으로 끌고 가는 중이었다. 필리스가 버둥거리며 왼손으로 오른팔에 달라붙은 펄럭거리는 것을 떨어 버리려고 한 순간, 왼손가락도 펄럭거리는 것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여보, 살려 줘요!" 나는 급히 필리스의 몸을 붙잡았다. 그러나 내 몸뚱이도 필리스와 함께 끌려갔다. 나는 양손으로 필리스의 몸을 누르는 동시에 다리를 침대에 돌리고 버티었다. 그런데도 질질 조금씩 끌려갈 만큼, 펄럭펄럭의 힘은 굉장했다. 이대로 라면 침대까지도 창문 밖으로 끌려나갈 지경이었다.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절망하고 있는데 필리스가 또 한 번 '꽥! ' 하고 외치자, 별안간 끌어당기는 힘이 사라졌다. 나는 서둘러 필리스의 몸을 안방으로 업어들였다. 필리스는 기절하여 몸에 힘이 없다. 오른팔의 피부가 15센티미터 정도가 홀랑 벗겨져 살이 보였다. 왼손가락도 피가 낭자했다. 필리스를 안방에 숨기고 나서 나는 살며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풍선은 지름 60센티미터 정도로 줄어들어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많은 펄럭펄럭이 여러 가지 나무 토막이며 집 부스러기며 책, 그리고 인간을--- 매단 채 풍선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펄럭펄럭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은 모두 손이나 다리를 버둥거리며 악을 쓰고 있었다. 벌써 기절한 사람도 있었고, 아니면 죽었는지 인형처럼 아무 저항 없이 끌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무리엘 프린도 끼여 있었다. 무리엘은 붉은 머리카락을 펄럭펄럭에게 잡혀 한길 위에 벌렁 누워 끌려가고 있었다. 창문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부상이라도 입은 탓인지, 연방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 한 옆에 레슬리도 있다. 레슬리 쪽은 창문에서 떨어졌을 때 목의 뼈가 부러져 숨이 끊어졌는지 움직이지도 않은 채 끌려가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펄럭펄럭에게 붙잡혀 울부짖는 여자를 구하려고 남자가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를 끌고 가는 펄럭펄럭에 닿은 순간, 남자는 떨어지지 않고 같이 쓸려 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아까 필리스를 구해 냈을 때 펄럭펄럭에 닿지 않고 필리스의 몸을 잡아당긴 사실을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만약에 그 때 펄럭펄럭에 닿았더라면........ 그 펄럭펄럭은, 파리를 잡는 끈끈이가 파리를 놓치지 않듯이 인간을 꼭 붙잡고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때, 다른 풍선이 둥둥 공중으로 뜨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 동강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나는 당황하며 몸을 움츠렸다. 또 회초리와 같이 하늘하늘한 횐 펄럭펄럭이 세 개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아무 것도 잡아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지자 곧 줄어들기 시작하며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그것을 확인한 후 나는 또 한 번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이곳 저곳에 인간을 끌어들인 바다의 전차가 버티고 앉았다. 가까운 데 있는 것을 보니 군데군데에서 발이나 팔이 삐죽 나와 있었고, 그것들은 또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전차는 떼굴떼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굴러서 광장을 가로질러 해안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세 대의 전차는 혹을 열심히 만들어 풍선을 날리듯 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창문을 닫았다. 별안간 새로이 둘로 갈라진 풍선에서 뛰쳐나온 펄럭펄럭 한 개가 억센 힘으로 창문에 부딪치며 유리를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다. 나는 안방으로 돌아와 필리스를 침대에 뉘어 놓고, 시트를 찢어 오른팔의 상처에 감아 주었다. 이윽고 왼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을 때, 밖에서 폭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시트 토막을 내던지고 창가로 달려갔다. 비행기가 저공으로 날고 있다. 따르르 따르르...... 비행기의 양쪽 날개에 달려 있는 기관포가 불을 내뿜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하여 몸을 움츠렸다. 쨍그랑! 창문의 유리가 날아갔다. 전등불이 꺼졌다. 어둠 속을 무엇인가가 쌩 하고 날아갔다. 나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두워서 잘 알 수 없었으나 광장에서는 바다의 전차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침 그 때 또 비행기의 폭음이 들려 오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따르르...... 쾅 ! 기관포다. 어딘가 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이크......." 필리스가 부른다.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염려 말아요, 필리스. 난 여기 있으니까." "어떻게 됐죠, 도대체?" "적은 벌써 모두 도망가 버렸어. 조니가 비행기로 격퇴시켰어.“ "마이크, 팔이 아파요." "곧 의사 선생을 불러오겠어." 나는 의자를 들고 잠겨진 문 쪽으로 갔다.   인간을 먹다!   보커 박사, 테드, 그리고 나와 필리스. 날이 새어 서로 얼굴을 대한 보커 탐험대는 불과 네 사람뿐이었다. 비행사인 조니는 어젯밤의 광경을 영화로 촬영한 필름, 녹음된 테이프, 나중에 내가 쓴 기사 따위를 가지고 아침 일찍 비행기로 킹스턴을 향해 떠나갔다. 필리스는 오른팔과 왼손가락에 붕대를 동인 채 창백한 얼굴이었고, 보커 박사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은 나와 테드뿐이었다. "냄새가 고약하군.“ 테드가 말했다. "바람은 저편에서 불어온다. 좋아, 가급적 이 쪽으로 갑시다." 보커 박사는 이렇게 말하며 걷기 시작했다. 파괴된 건물, 온 광장 여기저기에 흩어진 돌멩이와 나무와 유리 파편 등 모든 것이 진득진득한 것에 덮여 있어,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난다. 또한 그 냄새는 보통 고약한 것이 아니다. 마치 생선 썩는 듯한 냄새이다. 잠깐 걷다가 야자나무가 서 있는 해변으로 나가자 냄새가 없어졌다. 보커 박사는 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도 저마다의 자세로 박사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박사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박사는 숨을 몰아쉬었다. "알프레드.... 빌...... 무리엘.... 레슬리! 모두 죽고 말았소. 모두 내가 데리고 왔소. 모두가 내 책임이오." 박사가 말하자 필리스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어요, 박사님. 우리들 대원은 모두 자원해서 이 탐험대에 참가했어요. 죽거나 부상을 입어도 추호도 박사님을 원망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필리스는 상처가 없는 오른손으로 살며 시 보커 박사의 손을 눌렀다. "당신은 친절해요.“ 보커 박사는 필리스의 손을 가볍게 토닥거리고 나자 벌떡 일어서서, 이번에는 마치 딴 사람처럼 확고한 태도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침내 적의 모습을 목격했어요. 더구나 테드 덕분에 그 표본을 입수할 수 있었소." "표본이라고요!" 필리스가 반문하자 테드는, "어젯밤의 흰 펄럭펄럭이오, 창문으로 뛰어들어온 놈을 나이프로 해치운 거요." 하고 약간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그러자 보커 박사가 말했다. "테드가 붙잡은 펄럭펄럭은 세계에서 최초로 손에 넣은 적의 표본이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전문적인 학자에게 보여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침 일찍 조니를 시켜 보냈소. 하지만 내가 잠깐 본 바로는 그건 해파리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더구나 불가사의한 점은 꼭 인간이나 동물에-어쨌든 생물에 달라붙어 끌고 가려고 합니다. 아무튼 그건 지구의 생물을 산 채 체포하는 도구인 것 같아요. 인간을 살해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그와 같이 붙잡은 인간을 끌고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돼요. 어쩌면 그 괴물들은 인간을 먹기 위해서 잡아가는 건지도 몰라요. 그 전에는 산양이나 소나 말 따위도 잡아갔었는데, 요사이는 인간만 잡아간단 말이야. 모두 먹어 보니까 인간 쪽이 맛이 있었던 모양이지 ........“ "어마, 끔찍해." 필리스가 말하자 보커 박사는, "인간들도 바닷속을 어망으로 훑어 가지고 고기를 잡아먹고 있잖소. 마찬가지야." "어떻게 해치울 방법이 없을까요?" "소총을 쏘아도 별 효과가 없어요. 하지만 대포 포탄을 명중시키면 괴물의 가죽에 생채기를 줄 수 있을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하면 바다의 전차는 당장 파열해 버리지 않을까 해요. 내가 본 느낌으로는 그 괴물은 젤라틴과 같은 것을 가죽으로 감싼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요!" "모르겠소. 아침에 녀석들이 지나간 흔적을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 단서도 잡히지 않았어요. 무엇인가 무거운 것을 끌고 간 자국만은 남아 있었지만." "그리고 어젯밤에 본 바로는 그 괴물에는 눈이나 입이 없는 것 같더군요." "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지만, 어쩌면 바다의 전차는 생물이 아닌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로봇 같은 것으로, 무엇인지는 몰라도 바다 밑에 숨어 있는 놈이 리모트 컨트롤로 조종하고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보통은 로봇이라고 하면 기계 같은 것이 아니어요? 그런데 바다의 전차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날뿐 더러 마치 고래 같았어요.“ "아무튼 상대는 어딘가 다른 별에서 온 생물이야. 우리들 지구인으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과학을 가지고 있는 거요." 보커 박사는 중얼거리듯 대답하며 에스콘지다 바다를 응시했다.   정 자   그 다음 날, 우리는 비행기로 에스콘지다 섬을 출발하여 런던으로 돌아왔다. 필리스는 부상을 입었고 나도 피로해 있었으므로, 그 길로 두 사람은 콘월의 별장으로 갔다. 장미 산장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 사이에 벽돌로 만든 멋진 가 완성되어 있었다. 필리스에게 물었더니 언젠가 벽돌쌓기를 했을 때 벽을 만들고 나서 나중에 목수에게 지붕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별장에 오면 웬일인지 안심이 된다. 에스콘지다 섬에서 바다의 전차를 만난 사건이 거짓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 있는 콘월의 바다는 마치 아득한 그 옛날의 경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한가로운 바다인데도, 같은 바다에서 왜 그런 무서운 괴물이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신문을 보니까 여전히 도처의 섬이 바다의 전차에게 습격을 받고 있다. 카리브 해에서 열 한 개의 섬이 당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번 버뮤다 섬의 기지에서 날아간 미국의 비행기가 바다의 전차와 싸웠는데, 바다의 전차는 기관포 세례를 받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도주했다고 한다. 일본에도 열 두 대의 바다의 전차가 습격해왔었다고 한다. 온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뉴스를 연결시켜보면 바다의 전차의 수는 대단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백대나 2백 대 ---- 아니, 어쩌면 3천 대나 4천 대 정도쯤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영국에는 한 대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우리도 서둘러 해안을 경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육지로 둘러싸인 스위스가 부럽다.   산탄데르   그로부터 6주일 가량 지난 어느 날 석양에, 나는 오랜만에 산장을 나와 마을의 선술집에 들렀다. 필리스는 이미 3일 전에 먼저 런던으로 돌아갔다. 선술집의 라디오가 뉴스를 보내고 있었다.   ........에스파냐의 산탄데르에서 행방 불명된 사람의 수는 아직 정확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3천 8백 명을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오늘의 국회에서 국무총리는, '바다의 전차의 습격은 현재까지는 깊은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영국의 주변 바다는 그렇게 깊은 바다가 아니므로 당분간은 해안을 경비하지 않아도 안심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라고 발언했습니다........   선술집 주인은 라디오를 11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걱정이 되는뎁쇼. 매일매일 바다에서 나온 괴물에게 인간이 당했다는 얘기뿐이니 말씀입니다.“ 정말 그것은 사실이었다. 요사이는 바다의 전차가 습격하는 것은 조그만 섬만이 아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칠레, 아프리카, 그리고 5일 전에는 마침내 에스파냐의 산탄데르가 당한 것이다. 산탄데르 사람들은 그 때까지 바다의 전차가 나오는 것은 자기네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멀리 떨어진 바다 한복판의 섬 따위에만 국한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뭔가 이상한 것이 해안에 나타났을 때에는, '지금까지 바다에 잠수하고 있던 잠수함이 물 위에 떠오른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잠수함이 어정어정 육지에 올라온 것이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당황하여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큰일났어요! 잠수함이 육지에 상륙하여 공격하려 합니다.“ 경찰도 깜짝 놀랐으나, 틀림없이 주정뱅이가 자기네를 놀린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 잇따라 육지로 올라온 바다의 전차들은, 순식간에 구경하는 사람들을 송두리째 짓밟으면서 시내로 들어오고 말았다. 경찰로부터 겨우 통보를 받은 군대가 시내에 나타났을 때에는 벌써 3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바다의 전차의 제물이 된 후였던 것이다. "아무튼 3천 명 이상 이었다니깐요......무서운 일이었습죠.“ 선술집 주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틀림없이 모두가 바다의 전차가 진귀했기 때문에 일부러들 바깥으로 나왔을 겁니다. 집안에 있었으면 무사했을 텐데........“ 하고 나는 박식한 체하고 말했으나, 이건 터무니없는 견해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요사이 바다의 전차들은, 내가 에스콘지다 섬에서 만난 전차들보다도 훨씬 영리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집안에 숨어도 그 집을 파괴해 버리면 인간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 버린 것이다. 더구나 몇 층이나 되는 높은 건물은 제일 아래층을 부숴 버리면 위층이 무너진다는 것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바깥에 나가면 그 흰 펄럭펄럭의 먹이가 되거나 집안에 숨으면 깔려 죽는 것이다. 선술집을 나온 나는 이제 산장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없어서 곧 짐을 꾸려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의 아파트에 도착했으나 필리스는 어디론가 외출하고 없었다. 나는 프레디 부장에게 전화로 물어 보았다. "보커 박사와 같이 에스파냐에 갔다네." 하고 프레디 부장은 가르쳐 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에스파냐요? 도대체 무엇 하러 간 겁니까?" "보커 박사가 바다의 전차를 사로잡을 함정을 만든다기에 부인에게 취재를 부탁한 거지. 우리는 지금 부인의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야." 혼자 아파트에 들어가 보았자 심심할 것 같아서 나는 술집에 들러 적당히 취한 다음 돌아갔다. 마침내 아일랜드가! 따르릉...... 따르릉...... 베갯맡에 있는 전화에서 소리가 계속 울려 잠에서 깨었다. 전등을 켜고 시계를 보니까 아직 새벽 5시다. "마이크?" 상대편은 프레디 부장이었다. "알겠소. 곧 떠날 채비를 해요. 차는 이미 당신 아파트 현관에 도착했을지도 모르겠어. 테이프 리코더 잊지 말게." 나는 침대에서 기어 나와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아직 옷을 다 입기도 전에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 왔다. 손님은 EBC방송국의 운전 기사였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오?“ 하고 내가 물었다. 기사는, 고개를 가로b저으면서, “모르겠는데요. 단지 공항까지 바래다 드리라는 지시만 받았으니까요." 공항이란 말을 듣고 나는 패스포트를 안주머니에 넣고 차에 올랐다. 공항에 도착하자 자다 만 얼굴을 한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밥 햅로비를 만나게 되었으므로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오?" "자네는 아직 얘기 못 들었나?" 밥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바다의 전차가 나왔어. 이웃 아일랜드의 붕가라에 말이오." 마침내 왔구나! 그 무서운 바다의 전차가 영국의 이웃 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그 광경을 뉴스로 만들어 온 세계에 보도하기 위해, 비행기로 아일랜드의 조그만 마을 붕가라로 떠났다. 에스콘지다 섬과 같이 평소에는 들른 적이 없는 먼 외국이 아니라 평소에 익숙한 아일랜드의 마을에서 그 생선이 썩은 것 같은 바다의 전차의 고약한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지겨웠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공격해 온 바다의 전차는 여섯 대라고 한다. 즉각 항공대에 보고하였고 날아온 전투기가 두 대의 전차를 박살을 내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네 대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더니 바닷속으로 도망쳐 갔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기가 응원 올 때까지 이 조그만 마을의 주민들 가운데 절반이 바다의 전차의 제물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듣거나 여러 가지를 조사한 후에, 다시 그 날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이번에는 붕가라 마을에서 약간 남쪽에 있는 가르웨이만의 해안 지대가 바다의 전차의 습격을 받았다. 온 영국이 큰 소동에 휩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바다의 전차를 진짜 가공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좀더 많은 뉴스를 듣고 싶어했다. 그 정보를 수집하여 모두에게 알려 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아일랜드에서는 해안에 즐비하게 대포를 배치하였고 바다의 전차가 올라올 만한 장소에는 지뢰를 시설했다. 바다에 인접한 마을에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명령만 내리면 언제나 비행기나 장갑차가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다의 전차의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곳 저곳의 해안을 매일 밤 습격했다. 그러나 날이 경과함에 따라 바다의 전차들도 너무 지나치게 나대지 못하게 되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밤이 되어 바닷속에서 전차들이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고 하자. 맨 앞의 한 대가 모래톱에 기어오르면, 반드시 땅에 매장되어 있는 지뢰를 밟고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소리로 적의 내습을 알게 된 비행기가 출동하여 반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가급적 먼 곳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래서 요사이는 바다의 전차가 습격해 와도 제물이 된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반대로 바다의 전차 편이 습격을 하려고 하면 즉각 비행기나 대포의 공격을 받아 박살이 나므로, 무사히 바다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패배한 쪽은 어느 편인가? 대서양에서는 주로 멕시코만의 해안이 공격을 당했다. 태평양에서는 산티아고에 바다의 전차가 가장 많이 모습을 나타냈다. 동인도 제도, 서인도 제도, 필리핀, 일본 등도 심하게 당했다. 하지만 요사이에는 그런 곳에서도 오히려 도망치는 바다의 전차가 많았고 제물이 된 인간의 수는 적어졌다. 공격해 온 바다의 전차를 철저히 처치해 버리자는 데 반대하는 자가 한 사람이 있었다. 보커 박사이다. 바다의 전차가 공격해 오면 모조리 처치해 버릴 것이 아니라 덫이나 함정을 만들어 사로잡으라고 박사는 강조하는 것이다. '생포하여 자세히 관찰하고 싶다. '고 박사는 말하면서 자기가 발명한 함정을 권고하고 돌아다녔으나, 세상 사람들은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무서운 바다의 전차를 생포하다니 끔찍한 일이라는 것이다. 콘월 근방의 팔마우스 항구에도 두세 대의 바다의 전차가 나타났으나 물론 즉각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바닷속에도 수중 기뢰를 설치해 뒀기 때문에 이것에 당하는 바다의 전차도 많았다. 이 무렵부터 바다의 전차는 별안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나타나지 않은 지 한 주일 지나고 곧 두 주일이 경과했다.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틀림없이 바다의 전차 는 인간을 공격하는 것을 단념한 것이다. 인간이 승리 한 것이다.‘ 이렇게들 생각했다. 그런데 보커 박사만은 반대였다.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인간이 승리했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알겠소? 잘 생각해 보시오. 인간은 한 걸음도 바닷속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물품을 나르는 데도 배는 위태롭다 하여 일부러 비싼 돈을 지불하고 비행기를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지구의 인간은 바다를 빼앗기고 만 겁니다. 게다가 현재의 상태도 바다의 전차가 단념했을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어쩌면 무엇인가 새로운 공격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우리는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 쪽에서 바다의 전차를 공격할 방법을 연구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박사의 말 따위는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모두 보커 박사를, 늘 필요 이상으로 걱정만 하며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고약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박사가 무슨 말을 해도 못 들은 체 했다.     제 3부 대홍수   북극의 얼음이!   바다의 전차가 자취를 감춘 지 6개월 째 접어들었다. 이 무렵부터 대서양을 날고 있는 비행기의 파일럿들이 저마다 '요사이는 어쩐지 바다 위의 안개가 여느 때보다도 짙은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내가 조사하여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무렵에 안개가 짙은 것은 대서양뿐만이 아니었다. 태평양의 북쪽이나 서쪽-특히 일본의 훗카이도나 치시마 부근의 바다나 남아메리카의 몬테비데오 근방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무렵에 소련 정부에서 미국 정부로 서한이 왔다. '최근 북극에서 자주 안개가 나오고 있다. 뜨거운 열로 북극의 얼음을 녹이지 않는 한 그럴 까닭이 없다. 혹시 미국은 북극에서 비밀 원자탄의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 정부는 즉각 응수했다. '엉뚱한 소리 마라. 그럴 리가 있겠나! 원자탄 실험을 하여 북극의 얼음을 녹이고 있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소련 사람들이 아닐까?‘ 이러는 사이에 그린란드나 알래스카 사람들이 '요사이 흘러오는 빙산이 아무래도 예전보다 많아진 것 같아요. 그것도 큼직한 빙산이 많아요.' 하고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닷물이 불어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올 겨울은 예년보다 더 춥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윽고 봄이 되었으나 별로 따뜻해지지 않았다. 여름이 되었으나 그다지 덥지가 않다. 그런데도 온 세계 사람들은 '때로는 별로 덥지 않은 여름도 있을 수 있다. 여름은 선선한 편이 좋지 않은가?' 하며 별로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고래를 잡을 계절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배를 내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바다가 두려워진 것이다. 북극의 얼음은 여전히 빙산이 되어 한없이 남쪽 바다로 흘러 내려왔다. 여름이 되었는데도 덥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러한 어느 날 보커 박사가 신문에 이런 기사를 썼다.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으나 우리 인간은 우주에서 온 생물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북극의 얼음을 녹이고 있는 것도 그런 생물들인 것이다. 이러다가는 이번엔 남극의 얼음도 녹이고 말 것이다. 안개가 짙었던 것도 사실은 심해의 우주 생물들이 바다 밑에서 높은 열을 사용하여 무엇인가 수작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적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북극의 얼음을 녹일 수 있는 강렬한 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언제였던가, 바다로 떨어뜨린 후 행방이 묘연해진 원자 폭탄을 주워다가 원자력의 사용법을 터득하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혹은 더운 열대의 바닷물을 파이프로 북극에 보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구의 축에 구멍을 뚫어 화산의 용암과 같은 마그마를 끌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이 모두 녹아 버린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대답은 단 하나----온 세계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여 인간이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이 전부 바다가 되고 만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을 읽은 세상 사람들은, "또 보커 박사가 허풍을 떨며 일부러 우리에게 공포를 주자는 속셈이군." 하며 상대도 하지 않았다.   대홍수다!   여름이 끝나고 어느덧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었다. 축축한데다 굉장히 추운 겨울이었다. 이윽고 4월이 되었다. 바다나 강의 물은 더욱 불어났다. 어느 날, 드디어 웨스트민스터의 강물이 제방을 넘어 흘러내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비로소 보커 박사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물은 어처구니없게도 웨스트민스터의 도시에 흘러 들어왔다. 제방이 끊어지고 홍수에 찬 시가지나 마을은 웨스터민스터뿐 아니라 영국 안의, 아니 온 세계 여기저기에 물이 범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즉각 장관들이 모여 그 대책을 상의했다. 그러나 도무지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홍수로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먹을 것과 의복을 보내자." "물이 빠지면 서둘러 더 큰 제방을 축조하자." 겨우 이 정도의 일밖엔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먹을 것이나 의복이라고 하지만 온 나라 안의 어디나 할 것 없이 물 속에 잠겼고, 배로 그런 것을 당장 외국에서 운반해 올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제방을 축조한다 해도 여러 군데가 되다 보니 그렇게 수월하지도 않았다. 재수 좋게 먹을 것이나 의복을 받은 사람들은 별 말이 없었으나,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저마다 불평을 털어놓았다. "이웃 도시에는 새 제방을 축조해 주었는데, 우리 지방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차별 대우를 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며 성내는 사람도 있었다. 날이 지남에 따라 홍수의 피해 지구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정부에 대해 화를 내거나 그 사람들을 증오하는 사람이 날로 많아졌다. 신문을 만드는 종이가 모자라기 시작했다. 신문의 부수가 줄어들었고, 이윽고 판형도 작아졌다. 이렇게 되니 뉴스를 전하는 라디오 쪽이 편리했다. 큰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바다나 강이나 호수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열심히 제방을 쌓는 데 정성을 다했다. 수월한 일은 없었다. 제방을 아무리 높여도 물은 물러나지도 않고 더욱더 불어났다. 아무리 일을 해도 끝이 없었다.   이 사   10월이 되자 제방 공사를 단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살던 고장을 버리고 냇물이나 호수가 없는 높은 지대로 이사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이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EBC방송국에서 근무하던 사람들 중에도 이사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필리스에게, "어떡하지!" 하고 물었더니, 필리스는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어디로 도망치나 마찬가지여요. 여기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좀더 두고 봐요." 그래서 우리는 좀더 런던에 남아 있기로 했다. EBC방송국은 가까운 쇼핑 센터 맨 위층을 빌어 방송시설을 운반했다. 이 즈음에 쇼핑 센터도 문을 닫아야 했던 것이다. 물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었다. 홍수의 깊이는 25미터였다. 더구나 언제 이 물이 빠져나갈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버스나 전차도 휴업이었다. 이윽고 정부도, ‘낮은 곳은 위험하므로 산 쪽으로 이사하라.’ 는 명령을 내리고, 국회를 런던에서 요크셔의 핼로게이트 시로 옮기고 말았다. 아직 런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당장 이사를 하고 말았다. 버스나 전차나 기차도 달리지 않는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앞질러 가려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모두가 덤벼들어 끌어당겼다. 혼자서만 차로 가다니 비겁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살금살금 걸어서 산 쪽으로 도주했다. 나와 필리스는 EBC방송국이 있는 쇼핑 센터의 맨 위층에 예순 명 가량의 사람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이 곳에서는, 먹을 것이나 난로용 석유가 예순 명의 인간이라면 앞으로 2년간은 살아 남을 수 있을 만큼 비축해 두었고, 발전기도 있으니 물이 불어 건물이 물에 잠겨 버리지 않는 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수도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옥상에서 빗물을 모아 조금씩 사용하였다. 옥상은 헬리콥터가 왕래할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이윽고 런던에는 경찰이나 군대도 없어졌고 전기도 없어졌다. 우리가 있는 쇼핑 센터는 사방이 물인 관계로 외딴 섬이 되고 만 것이다.   추운 여름   그 이듬해의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한다 하더라도 별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길고 추운 겨울이었다. 모든 것이 물에 젖어 있다가 부패해 가고 있구나---이런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물은 매일 조금씩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어디에선지는 모르지만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몇 사람씩 모여 물 속의 도시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만일 두 그룹이 어쩌다가 만나게 되면 당장 싸움질이 벌어진다. 그리고 어느 편인가의 인간이 살해당하는 것이다. 마치 들개와 다를 게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EBC방송국도 두세 번 그러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힘을 모아 대항하여 적을 혼내 주었더니 이후 이 녀석들은 오지 않게 되었다. 허약한 상대부터 먼저 해치울 모양이다. 이윽고 어느 정도 따뜻한 계절이 찾아왔으나 낮에 밖을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러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딴 고장으로 피난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런던에는 병원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EBC방송국에 남아 있는 친구들도 이따금 찾아오는 헬리콥터로 살금살금 요크셔로 옮겨가고, 어느 사이에 스물 다섯 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어서 추운 여름이 다가왔다. 이 무렵이 되면 깡패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런던은 더욱더 조용해졌다. 어느 날 나와 필리스는 보트로 트라팔가 광장을 둘러보았다. 온 세상은 어디까지나 잔잔한 물의 사막이었다. 군데군데에 하나 둘 가로등이나 신호등이나 동상이나 가로수가 꼭대기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여느 때에는 비둘기의 놀이터였던 근처에는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들려 오는 것은 철썩철썩 하는 물결 소리뿐이었다 우리는 쓸쓸하게 아무 말도 없이 쇼핑 센터의 집으로 돌아왔다. 물은 더욱더 불어나고 있었다. 하늘은 매일 흐려 있었고 추위는 지난해보다도 심했다. 같이 살고 있는 친구들도 계속하여 어디론가 이사를 떠났고,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열 여섯 명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프레디 부장까지 ‘이런 표류선 같은 데서의 생활은 지겹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헬리콥터가 와서 프레디 부장과 부인을 싣고 떠나 버리자, 나도 갑자기 실망한 끝에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차라리 요크셔로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단호하게 결심을 하지도 못한 채 2주일이 경과하고 말았다. 그러한 어느 날, 프레디 부장이 요크셔에서 전화를 걸어 왔다. "마이크, 이 쪽으로 이사 올 생각은 말게나. 인간이 너무 많아서 먹을 게 없다네. 매일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진다네.“ "보커 박사도 그 쪽에 계신가요!" "응, 조금 전에 이 홍수는 깊이 40미터쯤 해서 멈추게 되리라는 새로운 설명을 발포하여 사람들을 약간 기쁘게 해 주었지." "그건 기쁜 소식이네요. 부장님, 차라리 이 쪽으로 돌아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응, 그렇게 하겠어. 헬리콥터가 마련되는 대로 되돌아가겠네." 그러나 이것이 부장과 말을 나눈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부장과 그의 부인이 탄 헬리콥터가 런던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추락하여 행방 불명이 되었던 것이다. 추운 여름은 이윽고 더 추운 가을로 바뀌었다.   죽음의 세계   이 무렵에 외국에서, 또 바다의 전차가 나타났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해안뿐만 아니라 육지 깊숙이에 있는 도시까지 공격해 왔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왜냐 하면 온 세계가 깊이 27미터 가량이나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랫동안 먹을 것도 없고 전기도 없는 상황에서 일도 하지 못했고, 물로부터 도망치느라고 온 시간을 빼앗긴 인간들로서는 이미 싸울 힘도 없었다. 그 사이에 더욱 나쁜 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영국에서 일어났다. 현재의 정부는 믿을 수 없어서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의 군대가 요크셔의 관청들에 들어가 옛날 정부의 군대와 전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다의 전차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인간끼리 싸움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요크셔에 있는 EBC방송국의 본사에 직접 전화로 문의해 보아도 알쏭달쏭한 답변뿐이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전화가 끊어지더니 통화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라디오 스위치를 돌려봐도 외국의 방송 뿐으로 영국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겨울이 다가왔다. 우리 열 네 사람 외에도 어딘가 런던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마 근방의 가게에서 훔쳐 온 것을 먹으며 남몰래 숨어살고 있으리라. 이미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인다는 소행이 나쁜 짓이라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경찰 따위는 훨씬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으니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체포하거나 벌을 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해가 바뀌었다. 물의 깊이는 30미터가 되었다. 여전히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고 굉장히 춥다. 늘 사나운 바람이 불어 왔기 때문에 밖에 나다니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아직도 행복했다. 먹을 것은 열 네 명이라면 앞으로 5년이나 6년 동안은 살아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있었고, 난로에 쓸 석유도 많이 있었다. 그래도 모두 질려있었다. 물이 매일 불어나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이 빌딩도 물 속에 잠기고 마는 것은 아닐까? 오직 생명줄은 '깊이 40미터로 홍수가 그칠 것이다. '라는 보커 박사의 말 뿐이었다. 어느 5월의 아침이었다. 역시 추웠으나 보기 드물게 구름 사이로 햇볕이 비치고 있었다. 옥상의 모퉁이에서 빌딩을 에워싸고 있는 사방의 물을 물끄러미 지켜 보고있는 필리스를 만났다. 나는 달려가서 물었다. "웬일이지, 필리스?" "마이크, 더 견딜 수 없어요. 여긴 물과 썩은 것 뿐으로 생명이 없어요. 참새나 풀도 나무도 없어요. 콘월의 산장으로 갑시다.“ "그게 어디 예삿일이야? 설사 무사히 거기까지 도착했다 하더라도 먹을 것과 연료가 없잖소?" "둘이서 밭을 가꾸어요. 그리고 물고기도 낚을 수 있을 거고, 흘러내리는 나무토막은 연료가 돼요."   콘월로   나와 필리스는 쇼핑 센터를 나가 콘월의 산장으로 가겠다고 말하니까 친구들은 모두 반대했다. 도중의 이곳 저곳에서는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딴 곳으로 이주해 온 자는 없는가 하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고 들키면 당장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치우지 않으면 자기네가 살고 있는 곳에 있는 음식의 분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 구태여 콘월로 갈 것까지 없다니까.“ 친구들은 한사코 반대했으나 나와 필리스가 '기어코 가겠다.'고 우기자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고 출발 채비를 도와주었다. 모터보트에 나누어 준 음식물과 석유를 싣고 우리는 떠났다. 가급적 경계하면서 우리는 조심조심 물을 따라 내려갔다. 밤에는 가급적 눈에 띄지 않도록 아무도 없는 건물이나 다리 그늘에 보트를 숨겨 놓고 잤다. 바람이 세찬 날이 계속되자 닷새나 엿새를 그런 데서 웅크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달쯤 걸려 우리는 영국 해협으로 나왔다. 그 무렵부터 조금씩 빙산과 마주치곤 했다. 가급적 해안에서 떨어져서 나아갔으나 가끔 육지 쪽을 바라보면, 조금이라도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천막이나 오두막이 꽉 들어차 있었다. 낮은 곳에 있는 시가지나 마을은 완전히 물에 잠겨 군데군데 지붕이나 나무 꼭대기가 비죽 나와 있었다. 우리의 장미 산장에 있는 조그만 언덕은 홍수 속에 단 하나 동그마니 떨어져 있는 조그만 섬이 돼 있었다. 산장은 무사했으므로 안심했으나, 안에 들어가 보니 간직해둔 음식이나 촛대나 석탄은 흔적도 없이 모두 도둑을 맞고 없었다. 필리스는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곧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윽고 지하실을 뛰쳐나오자 마치 생쥐처럼 정자로 달려갔다. 언젠가 필리스 자신이 벽돌을 쌓아올려 세운 정자였다. 내가 창문에서 내다보고 있노라니까 필리스는 연방 정자의 바닥을 두들기고 있다. 이윽고 필리스가 안심한 얼굴로 돌아왔으므로 나는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이오!" "먹을 것. 내가 확인할 때까지 당신에겐 비밀이었어요. 실망을 주면 미안하니까요." "먹을 거라니? " "언젠가 벽돌쌓기를 했을 때 지하실과 정자에 숨겨 두었다고요." 필리스는 몇 년 전에 벌써 현재의 상태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터보트에 싣고 온 것까지 합치면 먹을 것은 풍부했다. 게다가 이 곳은 한 채만 동그마니 떨어져 있는 섬이라 약간 외롭기는 했으나, 도처에서 먹을 것을 서로 빼앗아 가려고 싸움이 벌어지거나 전쟁이 일어나도 그런 것에 말려들지 않고 둘만이 안전하게 살아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수기를 11월초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벌써 1월말이 되었다. 물도 지난번의 크리스마스 때부터 그렇게 두드러지게 불지 않게 되었다. 바다의 전차도 이 곳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고통스러운 것은 겨울의 추위였다. 산장 뒤쪽의 냇물은 2, 3 주일 전부터 얼어붙은 채로 있었다. 매일같이 눈이 내렸다. 바다로부터는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쳤다.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여름이 되어 냇물이 녹아 보트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어딘가 더 따뜻한 곳으로 달아나자고 의논 중에 있다.   새로운 세계   오늘은 5월 4일이다. 어느 사이에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고 곧 여름이 오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곳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틀쯤 전에 헬리콥터가 왔다. 처음엔 건너편 해안을 따라 날고 있었으나, 이윽고 방향을 돌리자 어귀 곁에서 쳐다보고 있는 나와 필리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동체에는 명확히 영국 공군의 마크가 붙어 있다. 더구나 헬리콥터 안에서 누군가 연방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당황하여 손을 흔들었다. 필리스도 손에 들고 있던 페인트칠을 하던 붓을 들고 흔들었다. 그 사이, 헬리콥터는 산장 옆의 완만한 경사면까지 당도하자 곧바로 내려온다. 나나 필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내려오는 헬리콥터를 향하여 달려갔다. 헬리콥터는 아주 낮은 곳까지 고도를 낮추어 내려오다가 경사면이 돌멩이 투성이란 것을 알아차리고는 도중에서 정지하여 동체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짐짝 하나가 투하되어 언덕 경사면에 떨어지면서 뒹굴었다. 그 후 로프로 얽어 맨 사닥다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이어서 사닥다리 끝이 땅에 닿자 한 사람이 조심스러운 발놀림으로 사닥다리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땅바닥에 내려서자 헬리콥터는 사닥다리를 다시 걷어올리더니 우리의 머리 위를 붕붕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나와 필리스는 헐떡거리며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이윽고 풀밭에 조금 전에 떨어뜨린 짐짝을 찾고 있는 검정복장의 사람이 보였다. "어머!" 필리스가 외쳤다. "저분은 보커 박사님이세요!" 울퉁불퉁한 돌멩이가 많이 뒹굴고 있는 경사면을 필리스는 개구쟁이처럼 달려갔다. 약간 뒤늦게 내가 달려갔을 때, 필리스는 양팔을 보커 박사의 목에 감은 채 무릎을 꿇고 엉엉 울고 있었다. 보커 박사는,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필리스의 어깨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박사는 비어 있는 쪽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부상은 없으신 가요?" "염려 말아요. 자네들도 무척 고생했겠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 곳은 마치 천국과 같습니다. 하지만 둘이서는 너무 쓸쓸해서... 게다가 불안하기도 하고....." 보커 박사는 입을 다문 채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곧 세 사람이 나란히 언덕을 내려와 산장으로 걸어갔다. 소파에 앉자 보커 박사는 큼직한 물통을 꺼냈다. 어딘가에 부딪혔었는지 한옆이 푹 꺼져 있었다. "잔을 세 개." 보커 박사는 필리스에게 부탁하여 유리잔을 가지고 오게 하여 물통에서 위스키를 따랐다. "평화를 위해 건배........“ 보커 박사가 말하자, 세 사람은 위스키를 마셨다. "빨리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내가 조르자 보커 박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었다. "런던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네들이 콘월로 갔다는 말을 듣고 당장 날아왔지...." "특별한 용건이라도?" "그렇지...... 큰일을 부탁하러 왔네. 영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세워야겠어." "뭐라고요!" "홍수는 요사이 6개월 동안 전혀 불어나고 있지 않네. 더구나-알겠는가, 바다 밑에 숨어 있는 우주 생물을 해치울 기계를 발명했네.“ "도대체 그건 어떤 기계인가요? 누가 발명했지요?" "우주 생물은 초음파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네. 그리고 이번에는 바다 밑에까지 이르는 초음파를 내는 기계를 일본인이 발명했어요. 그것을 자동식 잠수구에 붙여 바다에 잠수시켜 적을 공격하는 모양이야. 이미 실험에 성공했다더군.“ "대단하군요.“ "진짜 머리가 좋은 국민이야. 더구나 과학이 뛰어났어. 그런데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이번 홍수로 온 나라 안이 물에 잠기고 말았지. 그래서 모처럼 좋은 기계를 발명했는데도 그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낼 공장이 없지 뭔가. 그래서 물에 잠기지 않은 미국이 그걸 만들기로 하고 일을 맡았다네." "그렇다면 온 세계가 협력하여 우주 생물을 공격하자는 거군요.“ "그렇소. 우리 영국인도 협력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들 5백만 명은 힘을 합쳐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오." "5백만 명이라니요? 현재의 영국에는 불과 그 정도 밖에 없나요?" 내가 되묻자 보커 박사는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응. 그 밖의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과 전쟁으로 죽어 버렸지. 하지만 5백만 명을 가지고서도 나라는 만들 수 있네. 하루라도 빨리 모두가 서로 연락하여 하나로 뭉쳐야 하오." 식사 후에 세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문득 필리스를 보니까 마치 미용실에서 방금 돌아오기라도 한 듯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난 새로이 힘이 생겼어요, 마이크.“ 필리스가 말했다. "살아가는 데 보람이 생겼단 말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에 빙산이 떠 있는 바다를 보자, 순간적으로 이렇게 덧붙이고싶었다. "하지만---벌써 안심하는 건 빨라요. 이 지독한 날씨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고...... 게다가 그 엄청나게 추운 겨울이 다시 다가올 것이고." "참, 잊고 있었군." 보커 박사가 말했다. "사실은 현재 조사하고 있는 중이지만 바닷물이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는 모양이오. 바다에 떠 있는 얼음이 없어지면 다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오." 이윽고 보커 박사는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 헬리콥터가 우릴 실으러 올 테니까 또 사닥다리에 오를 채비를 슬슬 해야지......." "사고가 나면 안 되니까, 헬리콥터로 돌아가시지 말고 나중에 우리 모터보트로 같이 돌아가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어요?" 필리스가 염려스럽게 말하자 보커 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이 아까워요. 게다가 나는 여러분들이 염려하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늙지 않았소이다.“ 분명히 보커 박사는 원기 왕성했다. 이윽고 헬리콥터가 맞이하러 오자 재빨리 돌아서서 사닥다리를 붙잡더니 올라갔다. 이윽고 헬리콥터 안에서 내민 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헬리콥터 안으로 들어간 박사는 창안에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헬리콥터는 붕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상승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멀어져 조그만 까만 점이 되어 하늘로 사라져 갔다.     우주의 침략자   잭 윌리엄슨 지음 김상일 옮김/권오웅 그림     초라한 소녀   초라한 모습의 그 소녀를 보았을 때, 스타먼트 천문대의 수위장은 엉겁결에 눈을 크게 떴다. 값싼 노란 옷은 바래 있었고, 게다가 군데군데 찢어져있었다. 얼굴과 손발에는 때가 묻어 있고, 신도 신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 뜨거운 사막을 맨발로 걸어왔을 리도 없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소녀가 조심조심 다가왔다. "저, 여기가 스타먼트 천문대인가요?" 그 목소리는 겁을 먹은 듯했다. 하지만 눈만은 놀랄 만큼 맑았다. "응, 그렇단다." 수위장은 그만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이 근처에 사는 집시의 자녀로, 먹을 것을 얻으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또다시 말했다. "나, 소장님을 뵙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포리스터 박사님 말입니다.“ 수위장은 놀라며 소녀를 다시 보았다. 나이는 열 살이 되었을까? 그런데 어째서 이런 여자애가 포리스터 박사를 만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가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어요." 소녀는 너무 열중하여서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수위장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 참 난처한데. 네 이름은 뭐라고 하며, 도대체 왜 찾아왔니?" "이름은 제인이고요, 화이트 씨한테서 왔어요." 수위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화이트 씨라고? 그게 누군데!" "높은 분입니다. 텁수룩한 붉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무섭게 보이지만 아주 친절한 분입니다. 그 화이트 씨로부터 포리스터 박사님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어떤 편지인데?" "이거여요." 하고 소녀는 호주머니에서 회색 종이 조각을 꺼내 보였다. 그런데 수위장이 손을 뻗자 재빨리 감추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포리스터 박사님 이외의 사람에게는 절대로 주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수위장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봐, 제인. 포리스터 소장은 아주 바쁜 사람이다. 게다가 규칙을 아주 엄하게 지키는 사람이어서, 군의 허가증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이 곳에 들어올 수 없단다." 제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묘한 짓을 했다. 눈을 감고, 머나먼 사막 저 편으로 얼굴을 향하고 머리를 기울였는데, 마치 무언가를 듣고 있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물론 수위장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인은 또다시 눈을 반짝 떴다. "그러면, 아이언스미스 씨는 만날 수 있나요?" 수위장은 벙긋 웃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고, 포리스터 박사라면 어렵겠지만, 아이언스미스라면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 스타먼트 천문대의 평직원이니까 말이야. 컴퓨터 기술자지. 지금 곧 불러주겠다." 수위장은 포켓에서 작은 트랜지스터 무전기를 꺼내 다이얼을 조절했다. "응, 아이언스미스인가? 지금 문 앞에 너를 만나고 싶다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와 있다. 이름은 제인이야. 곧 와 줘야겠어. 부탁한다." 수위장은 무전기를 다시 가슴에 꽂고, 제인을 보고 끄덕였다. "곧 올게다. 마침 식당에 가는 길이었어. 저기, 저쪽 보이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거대한 돔 모양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 그늘에서 자전거를 탄 사나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수위장은 빙그레 웃었다. "아이언스미스는 좀 이상한 사나이지. 과학 기술이 발달한 세상에서 언제나 저런 구식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말이야. 에어 카(공기 차)를 타면 빠를 텐데." 이러는 동안에 아이언스미스는 어느 새 두 사람 앞에 와 있었다. 햇볕에 탄 갸름한 얼굴에 몸은 가냘프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이 사나이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무원처럼 보였다.그는 제인 앞에 오자 자전거에서 내렸다. "나를 만나러 왔다는 애가 너냐?" "그래요, 나여요. 나는 어떻게 해서든 포리스터 박사님을 만나고 싶어요. 아이언스미스 씨께서 좀 부탁해 주세요.“ 아이언스미스는 머리를 긁었다. "그건 좀 어려운데 ......" "나도 그렇게 말했지만, 박사가 아니면 편지를 전해 줄 수 없다는 거야.“ 하고, 수위장이 눈짓을 하며 말했다. 아이언스미스는 제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웬만하면 나한테 이야기하지?" "안 돼요." 제인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화이트 씨는 한시바삐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곧 발생한다고 했어요-아주 나쁜 일이 말입니다. 그래서 박사님께 알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 순간 아이언스미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러나 곧 여느 때처럼 느긋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소장을 만나 이야기해 보지. 그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있어라.“ 제인은 그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또다시 고집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그럴 틈이 없어요! 미안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제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몸을 빙글 돌려, 문에서 사막 쪽으로 달려갔다. 어린애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빨리 달려갔다. 그 모습은 곧 옆 건물로 사라져 버렸다. "이봐 제인, 잠깐만 기다려." 아이언스미스는 이렇게 외치며 뒤에서 쫓아갔다. 그런데, 건물 모퉁이에 오자 묘한 얼굴을 하며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수위장에게 되돌아갔다. "이상한데, 사라져 버렸어." "사라지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지만, 그 앞은 2,30킬로미터나 평평한 사막으로 이어져 있어. 그런데 그 소녀의 모습이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 거야.“ 수위장과 아이언스미스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수위장의 얼굴이 차차 긴장되어 갔다. "설마 하니...... 삼성 동맹의 간첩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그런 어린애가." "그렇지...... 하지만 일단 경계를 하는 게 좋아." 하고 말하며, 수위장은 성큼성큼 감시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언스미스는 눈부시게 빛나는 사막의 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곧 발생한다고 했지.... 나쁜 일이 말이야....?"   삼성 동맹   스타먼트 천문대장 포리스터 박사는 관측 돔의 바로 옆에 있는 자기 집 서재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검게 빛나는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그 전화를 지켜보고 있는 박사의 얼굴은 몹시 지쳐 있었다. 눈은 움푹 기어 들어가고, 볼은 패었으며,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피부의 빛깔은 마치 큰 병을 않고 난 사람처럼 검푸르고, 이마 언저리에는 혈관이 신경질적으로 튀어 나와 있다. 긴장에 지친 모습이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를 알리는 전화가 언제나 울릴까 하고, 집에 돌아와도 하루 종일 그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삼성 동맹의 우주 함대가 태양계를 향해서 출발했다는 연락이다. 그리고, 그 경보가 들어오는 즉시 그는 곧 스타먼트 천문대의 관측 돔 밑에 있는 비밀 지하 기지로 들어가, 이미 장치가 되어 있는 반물질 미사일의 발사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렇다. 실은 이 스타먼트 천문대는 그 밑에 있는, 반물질 미사일 기지를 숨기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25세기. 인간이 처음으로 우주 공간에 튀어나온 지 5백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그 동안에 인류는 태양계에서 튀어 나와, 이곳 저곳의 딴 태양계에 문명을 일구어 왔었다. 그리고, 현재에는 은하 우주 속의 수십 개나 되는 또 다른 태양계에 각각 독립된 우주 국가가 건설되고, 독특한 문화를 구축하고 있었다. 처음 3,4백 년 동안은 각 우주 국가들은 서로의 거리가 너무나 멀기 때문에 서로 오가는 일도 없었고,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우주 통신으로 연락을 취하는 정도였으나, 그것도 한번 우주 통신이 오가려면, 가장 가까운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의 제 4 행성과의 사이만 해도 8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점점 서로의 일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마침내 광자 우주선이 발명되었다. 광자 우주선은 빛과 똑같은 속도로 날 수가 있다. 더욱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이 우주선에 타고 있는 인간은 실제로는 빛으로도 몇 년씩이 걸리는 기나긴 우주 여행도 불과 몇 달밖에 걸리지 않는 셈이 된다. 이 광자 우주선의 발명으로 우주 국가들은 처음으로 서로 대사를 교환하고, 마치 20세기의 옛날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처럼 무역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서로 왕래를 할 수 있게 되자, 나라마다 이해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이가 나쁜 우주 국가들이 우주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지구 연방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구의 상대는 알파 센타우리별과 백조자리 61번 별과 고래자리의 타우별 등 세 우주 국가들이었다. 이 세 우주 국가는 삼성 동맹이라는 군사 동맹을 만들어서 지구에 대항했다. 지구와 삼성 동맹 사이에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구도 지고만 있지 않았다. 이 무렵, 포리스터 박사는 지금까지의 우주 비행선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훌륭한 방법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로우드 자기 엔진의 발명이었다. 이 로우드 자기 엔진을 단 미사일은 지금까지의 광속 로케트가 빛과 똑같은 속도로 밖에는 달릴 수 없는 데 반해서, 빛의 몇천 배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우드 자기 엔진을 단 미사일은 발사 버튼을 누른 지 불과 몇 시간 안에, 4.3광년이나 떨어진 알파 센타우리 별로, 그리고 그보다 더 먼 백조자리 61번 별이나, 고래자리 타우별에도 기껏해야 하루 동안에 그 무서운 반물질 폭탄을 옮겨 갈 수 있는 것이다. 반물질 폭탄이 그 태양에 명중한다면, 무서운 대폭발이 일어나 행성도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 것이다. 더욱이, 일단 발사 버튼을 누르면 어떤 방법을 써도 미사일을 멈출 수가 없다. 포리스터 박사는 그 버튼을 누를 중대한 사명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는 삼성 동맹의 간첩들이 수없이 들어 차 있다. 만일 이 쪽에 그런 무기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저쪽도 거기에 대항할 어떤 무기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스타먼트 천문대를 이처럼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더욱이, 삼성 동맹과 지구 정부와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그런 정보는 삼성 동맹 안에 들어가 있는 이쪽의 간첩 --메이존 호온으로부터 로우드 자기 통신으로 속속 보내 오고 있다. 포리스터 박사가 주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메이존 호온으로부터의 였던 것이다.   지하 미사일 기지   갑자기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포리스터 박사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들고 귀에 갖다 대었다. "여보세요." 그는 몹시 초조했다. "여어, 포리스터 박사이십니까?“ 하고, 아주 한가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컴퓨터 엔지니어인 프랭크 아이언스미스 기사의 목소리였다 "지금 박사님에게 제인이라는 열 살쯤 된 여자애가 가 있지 않습니까?" 포리스터 박사는 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한숨 놓는 동시에 그처럼 쓸데없는 일로 전화를 걸어온 아이언스미스에게 화를 냈다. "안 왔어. 그 제인이라는 애가 누군데 그래?" "그건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여자애가 정문에서 박사님을 꼭 만나게 해 달라고 버티고 있어요. 화이트라는 사람의 말을 전해야 한데요." "화이트라고?" 포리스터 박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구 정부의 높은 사람들이나 과학자들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화이트라는 사나이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모르겠는데, 화이트라는 사람은." "그래요........ 그럼 좋습니다. 방해를 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아이언스미스는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이상한 놈이군." 박사는 수화기를 놓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이언스미스는 분명히 좀 별다른 사나이였다. 자격은 단순한 컴퓨터 엔지니어에 불과했지만, 지금까지 여러 차례 컴퓨터 프로그램의 잘못을 찾아내어 고치고, 일류 전자 공학자라도 며칠씩이나 걸리는 어려운 문제를 5분이나 10분 안에 처리하기도 하는 수학의 천재였다. 또한 그는 가끔,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너절한 옷을 입고 다니기도 한다. 어쨌든 그는 좀 유별난 사나이였다. 그러나, 포리스터 박사는 갑자기 묘한 불안에 사로 잡혔다. 미사일 기지에서 어떤 변이 일어난 것 갚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집을 나오자 곧 바로 옆의 돔 입구까지 달려갔다. 박사만이 가지고 있는 전자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전파 망원경의 기계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벽의 한 부분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계실이 갑자기 쓱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계실 그 자체가 지하 기지의 엘리베이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얼마 후, 기계실이 멈추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은빛으로 빛나는, 로우드 자기 엔진의 반물질 미사일이 발사대를 타고 쭉 늘어서 있었다. 이들 하나하나는 정밀한 계산에 의해서, 정확히 세 개의 별을 향하고 있다. 버튼만 누르면 발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포리스터 박사 하나뿐이다. 포리스터 박사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저씨!" 하고 부르는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박사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느낌으로 뒤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미사일 그늘에 몸을 감추듯이 하며 한 초라한 소녀가 서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절대로 들어 올 수 없는 이 지하 미사일 기지에 말이다 ! “저, 아저씨는 포리스터 박사님이시죠?" 소녀는 겁먹은 듯이 말했다.   철학자의 경고   포리스터 박사는 잠시 멍하니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녀가 마치 유령처럼 보였던 것이다. "너......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니?" 그는 가까스로 목쉰 소리로 물었다. "누가 들여보냈어?" "아무도...... 아무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어요...." 소녀는 울음 섞인 말투로 말했다. "화이트 씨가 아저씨를 꼭 만나고 와야 한다고 해서, 나 혼자서 몰래 들어왔어요." "하지만 수위가 있었을 텐데? 비밀 통로를 어떻게 알았지?“ 포리스터 박사는 달려들 듯이 말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 지구의 안전과 관계가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 소녀는 삼성 동맹의 간첩일까? "나, 이것을 화이트 씨에게서 받아 왔어요." 소녀 제인은 종이 쪽지를 박사에게 건데 주었다. 이때, 포켓에서 사막에서 자라는 잡초가 떨어졌다. 포리스터 박사는 난폭하게 그 종이 쪽지를 받아 읽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클레이 포리스터에게   지구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막기 위해서 당신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정보를 알고 싶으면 당신 혼자서, 아니면 아이언스미스 기사를 데리고 드래곤록 등대의 폐허까지 나올 것. 그 밖의 사람을 데리고 오면 반역 행위로 간주함. -- 마크 화이트(철학자)   포리스터 박사는 험악한 눈초리로 소녀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 때, 제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강철로 만든 통로를 지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가는 타박타박 하는 맨발 소리가 들려 왔다. 박사가 뒤따라갔으나 이미 늦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박사의 눈 앞에서 닫히고 말았다. 박사는 통로에 달린 통화기로 급히 위층에 있는 수위를 불렀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자를 잡아라!" 그는 이렇게 외치며 초조하게 수위의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 후, 수위가 통화기 앞에 나왔다. "박사님,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리가? 바로 지금 내가 그 소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는데?"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은 비어 있었어요." 포리스터 박사는 화가 잔뜩 나서 통화기를 끊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절대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는 비밀 지하 기지에 낯선 소녀가 나타나는가 하면,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소장님?" 갑자기 누가 이렇게 말을 걸자, 포리스터 박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방금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수위장이 나와 말을 건 것이다. "이상한데. 한 소녀가 이 지하 기지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어." "설마......." 수위장은 이렇게 말하며, 불쑥 걱정스러운 듯이 박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박사가 일에 지쳐서 심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사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쪽지를 수위장 앞에 불쑥 내밀었다. "나는 제정신이야. 바로 이것이 그 소녀가 가지고 온 편지지 " 수위장은 깜짝 놀라며 편지를 보았다. "이것은 그 소녀가 소장님에게 줘야 한다고 한 바로 그 편지입니다." "그 소녀라니?" "아까 정문에서 박사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하던 소녀 말이어요. 물론 허가장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돌려보냈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도 이 제인이라는 소녀는 건물 모퉁이를 돌자마자 사라져 버렸어요." "음, 자네, 어서 그 내용을 좀 읽어 봐." 수위장은 편지를 읽었다. 그 얼굴에는 의심스러운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상한데요, 박사님. 그 소녀는 정문에 찾아왔을 때도 아이언스미스 기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이 편지에도 그에 관해서 씌어 있군요. 그 두 사람은 무슨 관계가 있나 봐요......." 포리스터 박사는 수위장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하며 물었다. "그를 이 스타먼트 천문대의 기사로 채용할 때, 엄중한 자격 검사를 했겠지?" "물론입니다. TBI(지구연방수사국)가 철저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만일 그가 삼성 동맹의 간첩이었다면, 틀림없이 정체가 밝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소녀나 아이언스미스, 그리고 이 편지를 쓴 화이트란 철학자는 어떤 놈들일까?“ 포리스터 박사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하는 방법이 꼭 하나 있지." "어떻게 합니까!" "종이에 적힌 철학자의 말대로 드래건록 등대의 폐허로 가 보는 거야." 이 말을 듣자, 수위장은 얼굴빛이 달라지며 외쳤다. "그건 안 됩니다! 삼성 동맹의 간첩들의 함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에게도 생각이 있어.“ 박사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끄덕였다.   초능력자 그룹   그러고 나서 얼마 뒤, 한 대의 승용차와 미사일 발사대를 실은 트럭이 드래건록 등대의 반대쪽 기슭에 닿았다. 승용차에서는 포리스터 박사와 아이언스미스 기사, 그리고 미사일 부대의 대장 세 명이 내렸다. "만일 한 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미사일로 드래건록 등대를 폭파시켜버려. 우리 일은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곧 세계 정부 대통령에게 연락을 해서 삼성 동맹을 공격하도록, 내가 말하더라고 전해 줘.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박사님." 대장이 부동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기슭에 준비되어 있던 제트 함정이 엔진을 걸었다. 아이언스미스 기사는 딴 사람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는데도 여느 때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조종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제트 함정이 달리기 시작했다. 제트 함정이 물결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포리스터 박사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만일 화이트일당이 삼성 동맹의 비밀 공작대라면, 이 근처에는 벌써 적의 우주함이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닌가........‘ "도착했습니다, 박사님.“ 아이언스미스가 껌을 씹으며 말했다. 그것은 마치 피크닉이라도 온 듯한 태도였다. "어서 오셔요, 포리스터 박사님!" 캄캄한 바위 위에서 소리가 났다. 그것은 기지에 있었던 이상한 소녀 ---제인이었다. 둘이 제트 함정에서 올라오니, 거기에는 제인이 여느 때처럼 초라한 옷을 입고 바닷바람을 쐬며 서 있었다. "화이트 씨가 저기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몸도 가볍게 깡충깡충 바위 사이를 뛰어넘으며 올라갔다. 드래건록 등대는 이미 몇백 년 전에 버려진, 낡고 낡은 폐허였다. 세 사람은 곧 아치 모양의 등대 입구에 닿았다. "화이트 씨, 모두들 오셨습니다.“ 제인이 입구로 들어서며 말했다. 입구에는 키가 2미터나 되는 큰 사나이가 바닷바람에 붉은 턱수염을 나부끼며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복장은 제인과 마찬가지로 허름하고 얼른 보기에는 떠돌이 같았으나 좀 눈여겨보면 온몸에서 대단한 위엄이 마치 방사선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올 줄 알았지." 화이트란 철학자가 말했다. "들어오게, 동지들과 인사를 시킬 테니까." "기다려. 그 전에 자네의 신분 증명서를 보여 주게." 포리스터 박사는 상대편의 위엄에 지지 않으려고, 가슴을 딱 펴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화이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우리에게는 신분 증명서 따위는 없네." "왜 그렇지?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규칙이야.“ "우리는 그런 규칙 따위에 묶여 있지 않다네, 포리스터.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 두지. 우리들은 지구인이야. 절대로 삼성 동맹의 간첩이 아닐세." 포리스터 박사는 말대답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철학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눈치챘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다가오고 있는 지구의 위기를 구하려고 애쓰고 있네. 지구 구원군의 병사들이야!" 화이트는 사자처럼 울부짖었다. "지구 구원군이라니? 도대체 어디에 그런 부대가 있단 말인가?" "부대가 아닐세. 우리는 제인까지 합쳐서 모두 다섯 명 뿐이야. 하지만 우리는 네 사람 모두 보통 인간이 아니지. 초능력자의 그룹일세. 그것은 제인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포리스터 박사는 제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텔레포테이션을 할 수 있어." "텔레포테이션이 뭔데?" 박사는 곧 되물었다. "그렇지. 정신력 이동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대는 그녀가 저 엄중한 경계를 펴고 있는 지하 미사일 기지에 어떻게 들어가서, 어떻게 나왔다고 생각하나? 그녀는 정신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아무리 두꺼운 콘크리트도 혹은 아무리 먼 곳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네." 포리스터 박사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물리학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텔레파시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그레이트스톤이지.“ 화이트가 말했다. 포리스터 박사가 그 쪽을 보니 거기에는 바싹 마른 해골 같은 키 큰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마음도 척척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책을 읽는 일보다도 쉽다네." 그레이트스톤의 뒤에는 또 한 사람, 그와는 정반대로 난쟁이에 가까운 사나이가 동그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럭키 포드. 그에게는 텔레키네시스, 즉 생각을 움직이는 초능력을 갖추고 있지. 그는 정신력으로 물건을 들어올리거나 움직일 수가 있다네." "그리고, 나는 오버스트리트." 하고, 방의 한가운데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있던, 프로 레슬러처럼 우람한 몸매의 사나이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나에게는 천 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무리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나에게는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잘 보이지." "이 다섯 사람이 지구 구원군의 병사란 말일세." 화이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적은 너무나 강대하다. 우리들이 아무리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적을 무찌를 수 없네. 그래서, 우리들은 우수한 로우드 자기학자인 당신과 아이언스미스 씨의 협력을 얻고 싶다고 생각했다네." "적이라니? 삼성 동맹을 말하는 것인가?“ 포리스터 박사가 말했다. 화이트는 머리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아니야.“ "아니라니? 삼성 동맹 말고도 또 적이 있단 말인가?“ "있지. 만일 적이 삼성 동맹뿐이라면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있지. 아니, 우리 힘이 아니고선 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나 할까? 무슨 말인가 하면, 삼성 동맹은 이미 지구에 강력한 반물질 시한 폭탄을 수없이 뿌려 놓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이 하고 싶을 때, 지구를 인류와 함께 박살낼 수가 있단 말일세." "뭐, 뭐라고!" 포리스터 박사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야.“   제 3의 적   "거짓말이 아니야." 천리안 오버스트리트가 말했다. "삼성 동맹에 가입한 당신네들의 간첩 메이존 호온이 오늘 그 증거를 잡아 가지고 지구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어. 지금 그의 우주선은 태양계의 공간에 들어와 있지." 포리스터 박사는 몸을 떨었다. 이 무리들은 아주 극비로 되어 있는 간첩 메이존 호온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엉터리가 아니다. "우린 엉터리가 아니야." 독심술을 하는 그레이트스톤이 말했다. "박사, 이 반물질 시한 폭탄은 당신의 폭탄에 뒤지지 않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더욱이 그것은 이미 몇백 개나 되는 이 행성 중에 -바다 밑이나 깊은 산골, 건물 지하실 따위에 슬며시 놓여져 있거든. 아주 작아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지. 그래서 서둘러 찾아보아도 간단히 발견할 수 없다네. 그리고, 삼성 동맹에서는 그 폭탄을 리모트 컨트롤로 언제라도 마음 내킬 때 폭발시킬 수 있지." 포리스터 박사는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화이트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구를 도울 수가 있지. 오버스트리트는 천리안으로 시한 폭탄이 놓여진 장소를 당장이라도 찾아 낼 수가 있고, 럭키 포드는 정신 동력으로 그 폭탄의 기폭 장치를 건드리지 않고 파괴해 버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지구는 안전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째서 우수한 로우드 자기학자의 협력이 필요합니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아이언스미스 기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삼성 동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적 ----제 3의 적이 닥쳐오기 때문이지.“ 화이트가 냉엄한 투로 말했다. "제 3의 적이라니!" "여기에서 2백 광년쯤 떨어진 51 태양계의 제 4 행성에, 90년쯤 전에 워렌 맨스필드라고 하는 뛰어난 과학자가 있었지." 하고, 화이트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 무렵 이 제 4 행성에서는 핵폭탄이 발명되어, 이 행성상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는 핵 전쟁이 벌어지려고 했다. 만일 핵 전쟁이 일어나면, 방사능 때문에 전 인류가 전멸하고 말 거야...... 그래서 맨스필드는 인류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 냈지." "어떤 방법을!" 아이언스미스 기사가 물었다. "휴머노이드를 만든 거야." "휴머노이드라니!" 포리스터 박사가 물었다. "그렇지. 그것은 인간과 닮은 것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고도로 발달된 로봇을 뜻하는 거야." "로봇이라면 지구에도 있지.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인류를 구하는 방법이 된다는 건가?“ "그건 지구상의 로봇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완전한 기계 인간이다. 이 휴머노이드에는 모두 윙 제 4 행성에 있는 로우드 자기 전자뇌 센터에, 절대로 인간에게는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능력이 장치되어 있지. 그래서 그들이 탄생되자, 이 행성 상에 있었던 핵무기는 모두 파괴되고, 그 밖의 무기도 모두 압수되고 말았어." 화이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공장에서 자꾸만 그들의 동지를 제조하여, 그 수는 인류를 훨씬 웃돌게 되었지. 이리하여 4 행성은 핵 전쟁에 의한 전멸의 위기에서 구조되었어. 하지만........ "하지만, 어쨌다는 거야!" 포리스터 박사는 열심히 물었다. "그 대신, 인류는 가장 중요한 것, 즉 자유를 잃고 말았어. 이제 인류는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휴머노이드들의 뜻에 따라 지배를 받게 되었지. 즉, 인류는 평화를 얻은 대신 휴머노이드의 가축 신세가 되어 버렸어.“ 이렇게 말하는 화이트의 눈에는 격렬한 노여움이 불타 올랐다. "나는 지구에서 이민해 온 지구인의 자손이다. 나는 이 제 4 행성에서 태어났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휴머노이드는 때려부수고, 인류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싸웠지.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강했어. 우리들은 져서 망명을 해야만 했지." 화이트는 그 당시의 괴로움을 회상하듯, 잠시 입을 물었다. "그런데, 휴머노이드들은 윙 제 4 행성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하계 중 인류가 세운 우주 국가의 인류에게, 자기들의 말을 잘 듣게 하려고 음모를 꾸몄지. 그래서, 윙 제 4 행성 가까이에 있는 우주 국가들은 차제로 휴머노이드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어. 그리고 요즘, 그들은 이 태양계와 알파 센타우리 등 삼성 동맹과의 사이에 우주 전쟁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았지. 지금 그들의 우주선은 시시각각으로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내가 로우드 자기학자의 힘을 빌고 싶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야. 그들의 힘은 너무 강해서, 물론 지구인들의 힘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어. 또한 초능력을 가진 우리들의 힘만으로도 그들에게 이길 수는 없어.“ 하고 말하며, 화이트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해해 주게, 포리스터와 아이언스미스. 우리들이 이기기 위해서는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즉,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의 로우드 자기학자의 협력이 필요하다.“포리스터 박사는 마음속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컴퓨터 기사라고만 생각했던 아이언스미스를 화이트들이 그처럼 존중하고 있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언스미스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상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이 되어 주겠지, 포리스터?" 포리스터 박사는 아이언스미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결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아이언스미스는?“ 화이트가 물었다. "나는 거절한다.“ 아이언스미스가 너무 분명히 거절했기 때문에 오히려 포리스터 박사가 놀랐다. 승낙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어째서?" "나는 그 휴머노이드들을 그리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우선 그들을 직접 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적인지 우리편인지 분간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놈들이 일단 쳐들어오면 이미 때는 늦어, 그들은 지금 속속 지구로 오고 있는 중이야....."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오버스트리트가 말참견을 했다. "이들을 그만 보내는 것이 좋겠어요. 철학자. 그들이 데려온 미사일 병사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핵미사일 발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지. 일단 돌아가게. 하지만 틀림없이 또 연락할 테야.“ 화이트는 불타는 듯한 붉은 턱수염을 힘껏 잡아당기며 말했다.   휴머노이드   초능력자들의 말은 옳았다. 스타먼트 천문대로 되돌아온 포리스터 박사는 곧 워싱턴의 지구 방위 위원회로부터 호출을 당했다. "중대 회의가 있으니 곧 출두하라." 이 명령을 받은 그는, 스타먼트 천문대의 옥상에서 군용 이온크라프트를 타고 출발했다. 이온크라프트라고 하는 것은, 공기 분자에 전기를 작용시켜서 날아가는 아주 새로운 비행기로서, 옛날 헬리콥터처럼 수직 이륙도 할 수 있고, 공중에 머무를 수도 있다. 더욱이 폭음을 전혀 내지 않고, 시속 3천 킬로미터의 초스피드로 날 수 있는 훌륭한 탈 것이었다. 30분도 안 되어서 포리스터 박사는 워싱턴의 지하 수십 킬로미터나 되는 곳에 있는 지구 방위 사령부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이미 지구 정부의 고관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지구 연방 정부의 대통령, 그 옆에는 언제나 대통령을 지키고 있는 호위 군사 스틸, 그 양쪽에는 TBI장관, 지구 방위군 장관을 비롯한 여러 장관들이 있었다. 그가 들어갔을 때에는 그들의 간첩 메이존 호온이 삼성 동맹에서 훔쳐 낸 반물질 시한 폭탄을 앞에 놓고, 그 폭탄의 무서운 위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포리스터 박사는 그 설명이 초능력자들이 말한 것과 꼭 같은 데 새삼 놀랐다. 하지만, 방위 장관은 여느 때처럼 완고했다. 그는 조그마한 가죽 케이스에 들어 있는 반물질 폭탄을 경멸하는 군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따위 물건이 그처럼 무서운 힘을 가졌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믿어야 합니다, 장관. 이것 하나만으로도 미국의 동부 지역 전체를 날려 버릴 위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놈들이 그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이 쪽에서 먼저 공격으로 나가면 될 게 아닌가. 그 때문에 우리 우주군은 늘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고, 게다가." 하고 말하며, 그는 포리스터 박사를 돌아보았다. "박사의 로우드 자기 미사일도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 각하 여기서 결심을 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싸움을 벌일 때입니다!" "하지만, 이 쪽에서 로우드 자기 미사일의 스위치를 누르면, 저 쪽에서도 이 반물질 폭탄의 시한 스위치를 누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삼성 동맹도 망하겠지만, 동시에 지구도 인류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메이존 호온이 말했다. 회의실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이 때, 대통령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나이가 많은 대통령은 매일같이 계속되는 걱정과 노고 때문에 더욱 나이 들고 피로해 보였다. 호위 군사 스틸이 대통령의 팔꿈치를 부축했다. "여러분, 정말 난처한 일이군." 하고, 대통령은 약하고 목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왔어요.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소, 나는 그 말을 여러분에게 하기 위해서 모여 달라고 했어요." "전쟁이군요!" 하고, 방위 장관이 힘차게 일어났다. "아니지." 하고, 대통령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 그렇다면 싸움도 하지 않고 삼성 동맹에게 굴복한다는 말입니까?" 장관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또다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제 3의 길을 가기로 했어.“ "제 3 의 길이라뇨!" 포리스터 박사는 바싹 긴장하며 말했다. "그렇다네. 이 일에 관해서는 스틸이 자세히 이야기할 걸세.“ 회의실 안은 놀람 때문에 숨결이 흐르고, 모두의 눈길이 스틸에게 집중되었다. "여러분들도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이것을 알았을 때에는 나도 큰 충격을 받았네. 그러나, 스틸로부터 제 3의 길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를 구하는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데, 제발 스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줘요.“ 하고 대통령은 옆에 서 있던 스틸을 앞으로 밀어냈다. 스틸은 부동 자세를 취한 채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다. 포리스터 박사는 어떤 예감을 느끼며 긴장했다. '그랬었구나........‘ 이 때, 대통령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휴머노이드입니다.“   하늘을 뒤덮는 우주선단   "여러분, 나는 지금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실은 휴머노이드입니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인간을 돕는 것이 나의 임무입니다.“ 스틸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이렇게 정체를 밝힌 이상 아무 것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스틸은 제복을 벗기 시작했다. 옷과 함께 피부가, 마치 엷은 막이라도 벗기듯이 슬슬 벗겨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청백색의 금속 몸뚱이가 그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만 남았다. 스틸이 뒷머리 부분에 손을 대자 얼굴이 딱 하고 깨지고 거기에 코도 귀도 없는 평평한 달걀 모양의 금속의 얼굴이 나타났다. 회의실에는 신음 소리가 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흉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다운 브론즈 조각처럼 보기에 기분 좋은 우아함이 온몸에 퍼져 있었다. 가슴에는 '넘버 08MB3ZZ'라는 기호와 '인간에게 봉사하고, 위해로부터 지켜야 함'이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스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이 행성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성 동맹과의 싸움은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모두 핵무기를 폐기하고, 군대를 해산시켜야 합니다." "그건 안 됩니다, 대통령 각하!" 방위 장관이 펄쩍 뛰며 외쳤다. "이 기계가 삼성 동맹에서 보낸 간첩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 이놈의 말대로 무장 해제를 당한 다음에 삼성 동맹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우린 도저히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삼성 동맹에도 우리들과 같은 완전한 로봇이 없다는 것은 장관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그., 그러나...... 만일 삼성 동맹이 너희들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전쟁을 주장한다면?" 하고, 또 다른 장관이 물었다.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삼성 동맹의 각 행성에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휴머노이드 선발대가 잠입해서, 만일 전쟁이 시작된다면 당신네들의 로우드 자기 미사일이 그들의 행성을 파괴하리라는 것 --다시 말하면 그들을 전멸시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즉 전쟁을 일으킨다면 지구의 인류도 삼성 동맹도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결과 틀림없이 그들도 우리들 휴머노이드의 충고를 받아들여, 무기와 군대를 포기하는 일에 동의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방안에서 갑자기 요란한 버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의실의 텔레비전 스크린에 한 장교의 얼굴이 나타나, 성급히 외치고 있었다. "비상 경보입니다! 관측 위성으로부터의 연락에 의하면, 정체 불명의 대 우주선단이 태양계의 공간 안으로 침입하고 있습니다!" "삼성 동맹의 침략군이다!" 하고, 방위 장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방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하고, 말하는 냉정한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스틸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우리들 휴머노이드의 우주선단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들 휴머노이드의 봉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저 멀리 제 4 행성으로부터 오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태양계 공간 내의 항행과 지구 공항에 착륙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모두들 대통령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포리스터 박사는 스틸 쪽을 바라보았다. "5분 동안만 우리들끼리 있게 해 다오, 대통령과 의논을 해야 하니까. 그 결과는 곧 너에게 알려 주겠다.“ 스틸은 아무 표정 없이 끄덕였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우리 휴머노이드 우주선을, 당신네들의 원시적인 핵무기로 공격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우주선은 아무 무장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봉사하기 위한 휴머노이드가 타고 있을 뿐입니다.“ 스틸은 이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포리스터 박사는 대통령 앞으로 나갔다. "아마 스틸의 말이 옳을 줄 압니다. 우리들은 그들의 충고를 들어야만 할 겝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만일, 만의 하나라도 이것이 모략일 경우를 생각해서, 스타먼트 천문대의 지하에 있는 미사일 기지에 관한 일만은 비밀로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모략이었음이 밝혀질 때는, 윙 제 4 행성을 분쇄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마 휴머노이드들은 윙 제 4 행성에 있는 거대한 리모트 컨트롤 두뇌로 조작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의 경우에는 이것을 파괴하여 휴머노이드를 공격하여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힘없이 끄덕이었다. "자네 말대로 하지, 포리스터. 스타먼트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밀에 붙인다는 것을 조건으로 휴머노이드의 말을 들어주기로 하지.“ 하고 말하며, 대통령은 모두를 훑어보았다. "모두들 알겠지. 인간이 기계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 억울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휴머노이드의 봉사를 받기로 결정한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모두들 반대할 기력마저도 잃고 만 것이다.   평화의 정체   휴머노이드들이 하는 일은 재빠르고 철저했다. 거대한 우주선에서 차례로 내려온 수천 수만의 휴머노이드들은 마치 푸른 빛깔을 떤 은빛의 큰 개미처럼 군사 시설에 달려들어 그것들을 순식간에 분해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눈으로 멍청하게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리하여 불과 며칠 동안에, 지구상에 있는 모든 군사시설은 완전히 파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군인이나 일부 정치가들의 의심도 그 무렵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 하면, 삼성 동맹으로부터의 방송이 삼성 동맹의 정부도 휴머노이드의 충고를 받아들여, 군사 시설과 무기를 모두 버렸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구 여기저기에 숨겨 놓았던 반물질 시한 폭탄도 하나도 남김없이 수색하여 파괴하고 말았다. 다만, 포리스터 박사의 지하 미사일 기지의 기밀만은 굳게 지켜졌다. 물론, 휴머노이드의 검사관들은 스타먼트 천문대까지 와서 엄중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들의 정확한 자동 기계도 지하 기지를 찾아 낼 수는 없었다 포리스터 박사는 안심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을 놓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요즘 몇 년 동안 언제
1188    불사 판매 주식회사 IMMORTALITY 로버트 세클리 ROBERT SHECKLEY 지음 댓글:  조회:292  추천:0  2023-08-23
불사 판매 주식회사 IMMORTALITY   로버트 세클리 ROBERT SHECKLEY 지음   로버트 세클리 1928년 미국 태생.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우주시민} {지구순례} {로봇 문명} 등   ◎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원수․박홍근 / 문학박사 최인학 공학박사 양옥룡 / 이학박사 김희규 전교육감 김성묵       충 돌······················ 5 미래에 살아나다················· 9 렉스 동력 회사················· 15 계획 중지··················· 19 22세기의 세상················· 23 유 괴····················· 31 네 차례다··················· 38 래리 사장··················· 43 좀 비····················· 47 자신을 갖고·················· 56 친구와의 재회················· 60 영혼 교환국·················· 69 광검사····················· 78 사냥꾼들···················· 86 달라붙는 좀비················· 93 전투의 아침·················· 98 결 투····················· 105 요동하는 유령················· 112 지하세계··················· 118 무덤 속에서·················· 125 수상한 여인·················· 131 내세보험··················· 136 음 모····················· 143 막다른 골목·················· 151 추 방····················· 159 탈 출····················· 165 몸과 마음··················· 170 마음의 여행·················· 178 행복한 생활·················· 187 살인자···················· 190 내세로···················· 198   작품 해설··················· 204   등장인물   토마스 브레인 : 교통 사고로 죽었으나 22세기에 다른 사람의 육체를 빌려 다시 살아난 후 여러 가지 사건을 겪는다. 겨우 마리아와 같이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마리 소온 : 브레인을 22세기로 데려온 아름다운 여자. 브레인을 도와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외딴 섬으로 가서 그와 같이 산다. 그리고 끝내 그를 따라……. 레이 멜힐 : 22세기에서 브레인이 사귄 친구로 죽은 다음 영혼이 된 후에도 계속 브레인을 도와준다. 스미스 : 브레인을 쫓아다니는 좀비로서 몇 번 브레인의 죽을 고비를 도와준다. 사실은……. 새미 존스 : 유능한 사냥꾼으로 브레인과 파트너가 되자고 한다. 브레인을 좋아해서 브레인이 사냥감이 되었을 때 눈감아 준다. 찰스 헐 : 브레인이 22세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한 사냥의 사냥감으로 내세 보험에 가입한 사람. 브레인의 총검술에 관심을 표한다.     충 돌   한밤중의 고속도로는 어디까지나 한없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토마스 브레인은 계속해서 액셀레이터를 밟는 발에다 힘을 주었다. 스포츠카는 마치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들짐승처럼 낮게 소리를 울리며 더욱 스피드를 올렸다. 속도계는 120킬로미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60킬로미터 정도의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라도 끝없이 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브레인은 또 다시 우울한 기분에 잠기기 시작했다. '난 참 쓸모 없는 녀석이야. 왜 좀 더 야심을 갖지 않을까? 왜 좀 더 노력해서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못한단 말인가.' 브레인은 어느 틈엔가 또다시 같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그는 유명한 매티슨 요트회사의 설계기사였다. 그러나 일류 기사가 아니라 말단 기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일류 기사들이 설계한 여러 종류의 설계도를 스케치하거나 선전 광고의 문안을 만드는 것이 브레인이 하는 주된 일이었다. "그렇게 싫으면 아예 그만두고 독립하는 건 어때?" 브레인의 한 여자 친구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브레인은 언제나 쓴웃음으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아니, 난 공상가지 실천가는 아니거든. 머리 속에서 공상은 많이 하지만 막상 그걸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주 딱 질색이란 말씀이야." "즉, 게으름뱅이라 그 말이군?" "음,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난 지금 이 생활에서 무리를 해가면서 뛰쳐나올 생각은 조금도 없어. 충분한 봉급에다 좋은 자동차, 멋진 요트하며, 훌륭한 아파트도 있겠다, 독립하면 그런 호사는 할 수 없거든." 사실 브레인은 마침 그가 빌려 살고 있던 멋진 바다의 별장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바다의 별장 같은 것은 섣불리 야심을 품고 독립을 하게 되면 지금처럼 쉽게 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 자동차가 왜 중앙선에 바싹 붙어서 달리지?' 브레인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속도로 위에 파란색의 스포츠카가 중앙 분리선에 바싹 붙어서 저편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쪽이 피하지 않으면 정면 충돌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자동차의 속력을 낮춰야겠다고 생각하고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뗐다. 그러자 그 자동차는 오히려 속력을 내며 중앙 분리선 쪽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닌가? '이크, 이게 어찌된 노릇이지? 타이어가 터졌나? 아니면 핸들이 고장난 걸까?' 그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전신의 힘을 다해 반대쪽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동차는 눈 깜짝할 새에 분리대 콘크리트 벽에 충돌하고 말았다. 찌익 찌 찌 찌익……. 다음 순간 자동차는 맹렬한 기세로 반대편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저쪽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무서운 기세로 다가온다. ‘아아… 나도 마침내 그 어리석은 자동차 사고를 일으키고 마는구나. 자주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보던 어리석은 자동차 사고를……' 그는 절망감과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핸들을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간에 힘껏 꺾기만 하면 충돌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브레인의 가슴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째서 지금 죽어버리려고 하지 않는 거지? 어차피 살아봤자 별 볼일 없는 세상이 아니냐! 차라리 지금 충돌해서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데…….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실망이나 나태한 것도 모조리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냥 이대로가 좋지 않으냐!' 상대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정면에서 번득번득 빛났다. 그 빛 속에 운전하고 있는 젊은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뚜렷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브레인의 자동차는 굉장한 기세로 그 자동차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몸뚱이가 로켓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핸들이 손에 잡힌 채로 똑 부러졌다. 얼굴이 두꺼운 앞 유리에 부딪쳐 유리가 부서지고 머리가 밖으로 쑥 튀어 나갔다. 핸들의 받침대가 가슴에 부딪쳐 늑골을 부러뜨리고도 모자라 등뼈까지 꺾어버린 것 같았다. '아아……, 난 죽는구나!' 브레인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미래에 살아나다   브레인은 문득 눈을 떴다. 새하얀 방, 새하얀 침대, 새하얀 천장. '여긴 어디지? 난 틀림없이…….' "살아났습니다." 하고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브레인은 눈동자를 굴렸다. 흰옷을 입은 의사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그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수염이 난 자그마한 노인이고 또 한 사람은 얼굴 색이 붉고 뚱뚱하게 살이 찐 남자였다. "이름은?" 하고 얼굴 색이 붉고 뚱뚱한 남자가 물었다. "토마스 브레인." "나이는?" "서른 두 살." 브레인은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나서 상대방에게 되물었다. "여긴 대체 어딥니까? 난 대체 어떻게 된……" 그러나 그는 브레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늙은 의사를 돌아보고 말했다. "어떻습니까? 환자를 좀 보세요. 아주 정상적입니다." 늙은 의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군."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죽음의 충격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한 겁니다!" "브레인 씨, 기분이 어떻소?"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대체 난 어떻게 된……" "되살아났고 더욱이 정신도 말짱하고 건강합니다. 이것으로 저의 연구를 인정해주시겠지요?" "음, 그럴 수밖에 없겠지……." 두 사람은 브레인을 그냥 둔 채 나가버렸다. 거기에 사람 좋아 보이는 간호사가 와서 무엇인가 약 같은 것을 내밀었다. "자아, 이걸 드세요. 기운이 나실 겁니다." "난 어떻게 된 겁니까? 가르쳐 주세요. 여긴 병원이죠?" "아직 질문은 일체 받지 않습니다. 의사선생님의 지시이십니다. 조금 더 건강이 회복되면 대답해 드리지요." 하고 말하더니 간호사는 나가버렸다. 뭐가 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수염이 난 의사가 이번에는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선생님, 이젠 인터뷰를 해도 괜찮겠지요?" "물론.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지는 보장할 수 없어요. 어쨌든 지금 막 되살아났으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젊은 여자가 브레인에게 다가왔다. 아주 예쁜, 눈이며 코가 또렷한 미인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에는 어딘가 인형 같은 데가 있었다. 아름답지만 만들어진 물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뵙겠어요, 브레인 씨. 전 마리 소온입니다." "아, 처음 뵙습니다." 브레인도 대답했다. "브레인 씨는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병원 같군요." 그때 브레인은 마리가 조그만 마이크 같은 것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서너 명의 사나이들이 다가와 텔레비전 카메라 같은 것을 설치하는 것을 보자 브레인은 화가 났다. "이게 뭐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당신을 구해주고 싶어서요." "구해준다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사고를 기억하고 계시죠?" "사고? 무슨 사고란 말이오?" "당신은 부상당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순간 브레인은 그 눈부신 헤드라이트의 빛과 폭발하는 엔진 소리를, 그리고 그 무섭던 충돌 사고를 생각해냈다. "아, 생각났습니다. 반대쪽에서 온 자동차하고 정면충돌해서 핸들이 부러지고 그게 가슴에 박히고 그리고……?" 그는 몸을 떨었다. "당신 가슴을 좀 보세요." 마리의 말에 그는 그때 비로소 자기의 가슴을 보았다. 벌어진 파자마 밑으로 보이는 가슴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설마! 이런 일이?" 그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응, 이건 제법인데!" "오오, 박력이 있어 좋았어!" 주위의 사내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인에게는 그 말소리들이 파리 소리 정도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헝클어지고 얽혀져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는데……. 아니 난 확실히 죽었다!" "멋지군! 모든 사람이 이 장면을 보면 얼마나 큰 소동이 벌어질까!" "야, 정말 멋있다!"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역력히 나타나 있거든!" 주위의 사내들이 계속해서 수런대고 있었다. 마리는 거울을 집어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자, 당신의 얼굴을 좀 보세요." 브레인은 거울을 보았다. 순간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보고 있었다. "이, 이건, 이것은…… 내 얼굴이 아니야! 이건 내 몸이 아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까지도 자기의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그는 문득 알아차렸다. "난 어떻게 되었지? 말 좀 해 줘. 내 얼굴, 내 몸을 어디다 버렸어?" 마리의 아름다운 얼굴이 다가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의 몸은 죽어 버렸어요, 브레인 씨. 자동차사고로 엉망진창이 되어서 죽어 버렸거든요. 하지만 우리들은 당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영혼을 구출해 낸 거랍니다. 그래서 새로운 몸 속에 이식했답니다. 아시겠어요?" 브레인은 묵묵히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가 뭔지 또다시 알쏭달쏭해졌다. '몸은 죽었는데 영혼만 구조를 받아 그것이 또한 새로운 육체 속에 되살아났다. 그런 일들이 정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아마 정신이 어떻게 이상해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브레인은 생각했다. "믿을 수 없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지금은 2115년입니다. 당신이 살고 있던 시대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이 실현되고 있답니다." 마리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큰소리로 엉엉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가 귀찮았다. 슬프고 괴롭고 무의미하였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진정제를 놔라!" 누군가가 말했다. 가슴에 따끔하게 느꼈다고 생각하자 금방 눈앞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렉스 동력 회사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브레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아주 기분이 착 가라앉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교통사고로 죽어 150년 후의 미래의 세상에 되살아났다.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문득 자기가 죽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친구들은 나를 위해 슬피 울어줬을까? 아니면 곧 잊어버렸을까?' 울었을지도 모르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친구들도 지금은 이미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 22세기의 세상에! 대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물론 원자력 따위는 극히 평범한 것이 되어 있을 것이고, 해저 목장이라든가 행성간의 여행도 아무나 할 수 있게 되어 있을 것이다. 세계 정부도 세워지고 세계 평화도 실현되어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 온 지구를 지배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며, 지구는 수폭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을 지도 알 수 없다. 하여튼 빨리 이곳을 나가 자기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때 마리가 들어 왔다. "잘 잤어요? 기분은 좀 어때요?" "아주 좋소. 정말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오. 하긴 사실 다시 되살아난 것이 분명하지만……." 말을 하면서 브레인은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서 나를 구해냈소? 누가 구해 준거요? 당신이오?" "우리들, 즉 렉스 동력회사가 했죠." "원자력 회사인가요?" "더욱 발달된 것, 말하자면 원자력 다음의 동력 말이죠. 원자력은 질과 양이 에너지로 바뀐다는 이론에서 생겨난 것이지요. 지금은 우리 렉스 동력회사의 새로운 동력이 우주선이며 도시나 시간 여행의 동력으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시간 여행이라고요? 그런 것이 벌써 실현 되었나요?" "예, 물론이죠. 당신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시간여행의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걸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시겠소?" 그러는 사이에 몇 명의 사내들이 불쑥 들어왔다. 한 청년이 포스터를 높이 치켜들고 말했다. "미스 소온, 미술부에서 이걸 당신보고 봐 달라고 하는데요." 포스터에는 20세기 시대의 자동차가 충돌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손이 하늘에서 뻗쳐 내려와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채 불에 타고 있는 자동차에서 운전사를 끄집어내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 그림 위에는 '렉스 동력회사의 대사업'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잘 됐어요. 빨간색을 좀더 짙게 하라고 하세요." 하고 마리가 말했다. 다른 사내들은 사진을 찍거나 마이크며 녹화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브레인의 존재 따위는 조금도 흥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만둬! 다들 썩 나가지 못해!" 브레인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마리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브레인을 바라보더니 그 남자들 중의 한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에드 씨, 잘 설명해 주세요." 에드라는 뚱뚱한 남자는 브레인의 침대 곁으로 다가와 진지한 말씨로 말하기 시작했다. "브레인 씨, 당신 목숨을 구해낸 것은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소?" "그렇다고 함부로 이렇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소!" "잠깐만, 제 말을 잘 들어보시오. 우리들은 꼭 당신을 구출해 낼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걸 막대한 비용과 노력과 시간을 들여 구해냈단 말입니다. 그게 모두 선전을 위한 것이죠." "선전? 무슨 선전이오?" "물론 렉스 동력 회사를 위한 선전이죠. 당신은 그것 때문에 구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일을 세상에 선전하고자 하오. 당신도 죽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자 브레인은 그만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협력해 주시오." "그야 하죠. 그렇지만 너무 급해요. 난 아직 기분이 그렇지가 못하단 말이오." "당신의 그 기분 잘 이해합니다. 또한 동정도 하고요. 그렇지만 뉴스라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게 아닙니까? 늦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어지고 마는 걸요." "잘 알았소. 협력하죠." "그러면 지금부터 소온 씨의 인터뷰에 잘 대답해주십시오." "좋습니다." 브레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동의했다. "지금부터 1988년에서 구출된 사람과의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마리가 마이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1958년입니다." 브레인이 정정했다. "1958년에 자동차 사고로 즉사한 브레인 씨를 50년이란 세월을 뛰어 넘어 구출해 낸 우리 렉스 동력회사의 훌륭한 업적은……." 마리는 술술 거침없이, 또한 감정을 조금도 개입시키는 일도 없이 말해 나갔다. 브레인은 차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죽음을, 그리고 재생을 이렇게 제멋대로 이용한다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계획 중지   마리는 본사에 보고하러 간다고 나가 버렸다. 그후 턱수염의 의사가 그를 진찰하고 나서 이제는 완전히 정상적인 건강 상태라고 말했다. 브레인은 점심을 끝내고 목욕탕으로 들어가 자기의 새 몸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예전의 브레인은 훤칠한 키에 운동 신경이 잘 발달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육체는 그와 정반대였다. 키는 작달막한데다가 울퉁불퉁한 근육이며 아주 탄탄한 몸집이었다. 짧은 다리, 한 방에 황소도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주먹,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몸이었다. 게다가 왼쪽 어깨에 길고 참혹한 상처가 있었다. 그것은 칼이나 창 같은 것으로 베인 것 같은 상처였다. '이 육체의 주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얻은 것일까? 어쩌면 이 머리 속에는 아직 그전의 주인이 남아서 나를 내쫓아 버리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나 아닌지…….'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굴 또한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커다란 유태인 코에 턱이 삐죽 나온 네모진 얼굴. 거기에 머리칼은 꼬불꼬불한 갈색이고, 눈빛은 파랗고……. 한 마디로 말해서 어딘가 잔인하고 무표정하며 교양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음에 드는 데라곤 조금도 없군." 브레인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디 공사장의 인부가 아니면 정글 탐험가나 심술난 십장이라면 제격이겠구먼. 나 같은 사람에겐 전혀 어울리지가 않잖아!" 하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거울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좋다. 너와 나 어느 쪽이 이기나 지금부터 싸움이다. 이제 봐라. 반드시 내가 승리하고 말 테니까." 옷을 막 갈아입었을 때 마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몹시 침착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이젠 모두 끝장이 났어!" 마리는 내뱉듯이 말을 했다. "뭐가 끝장이 났단 말이오?" "모두가 말이에요!" 마리는 방안을 빙빙 돌며 말했다. "당신 선전 계획이 전부 중지되어 버렸단 말이에요." "호오?" "전 꼭 2년 동안을 이 계획에다 모든 정력을 쏟아왔었단 말이에요. 회사도 당신을 구출해 내는데 수백만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을 썼죠. 그래서 지금 막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놈의 늙은이가 전부 그만두라고 하잖아요." "그 늙은이란 누구요?" "래리 사장이죠, 뭐." "사장이 왜 그처럼 오랫동안 계획해서 해 오던 일을 중지하라고 한단 말이오?" "당신을 20세기에서 멋대로 끌어낸 일이 법률에 위반이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사장님은 당신의 재생 시기가 거의 다 되어가기 때문에 구태여 법률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게다가 사장님의 할아버지도 반대하시니까……." "잠깐만, 그 재생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오?" "물론 글자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을 말하죠." 마리는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정말 그 사장님의 할아버진 요사이 아주 시끄러워 죽을 지경이라니까." "사장님의 할아버지라는 분은 굉장한 연세겠군요?" "아뇨. 죽었을 때가 여든 한 살이었으니까 좀 일찍 죽은 편이었죠." "죽다니?" "그러니까 약 60년 전쯤이에요. 사장님 아버님도 약 2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분은 아마 백 살 쯤 이었을 거예요." "잠깐만, 난 통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60년 전에 죽은 사람하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소?" 마리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동안 브레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깜빡 잊고 있었군요. 당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고 말하더니 갑자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 멈춰 브레인을 뒤돌아보며, "브레인 씨, 당신은 이제 자유의 몸이에요. 여기서 당신 마음대로 나가셔도 좋답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무엇을 물어볼 틈도 없이 재빨리 나가 버리고 말았다. 브레인도 잠시 후 방을 나왔다. 긴 통로 끝에 출구가 있었다. 거기에 수위가 서 있었다. "여기서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가도 좋습니까?" "예? 아아, 나가셔도 좋습니다." 수위가 문을 열어 주었다. 브레인은 문에서 밖으로, 즉 미지의 22세기의 세상으로 걸어 나갔다. 돈도 상식도 친구나 직업도 그리고 살아갈 집도 없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딴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동서남북도 모르는 브레인이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나갔던 것이다.   22세기의 세상   22세기의 뉴욕은 마치 옛 동화에 나오는 꿈속의 도시 같았다. 흰색과 파란색의 타일로 만든 둥근 지붕 모양의 궁전이며 이슬람교의 사원처럼 끝이 뾰족한 탑, 그런가 하면 짙은 빛깔로 얼룩진 중국풍의 돔이 즐비하게 서 있어서 옛날의 뉴욕의 모습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리에는 소형차가 많이 달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며 스쿠터며 소형차뿐이었다. 추측컨대 인구과잉과 대기오염에 대한 대책이리라. 교통은 하늘에까지 뻗어 있었다. 제트 헬리콥터, 헬리콥터 트럭, 헬리콥터 택시, 에어버스, 일인승의 자이로콥터 등이 무수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설계가 되어 있는지……. 아마 절대로 충돌하지 않는 전파 유도 장치라도 되어 있는 모양이겠지. 실로 멋지게 올라가고 내려오고 때로는 살짝 스쳐 가는 것이었다. 어디든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틀림없이 뉴욕의 인구가 2천만 명 아니면 3천만 명 정도가 되리라. 멈칫거릴 수도 없었다. 보도에는 사람들이 넘쳐흘러 천천히 거닐면 사람들에게 밀리고 채이고 욕설을 들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쉴 수 있는 공원이나 광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앞으로 가니까 어떤 행렬이 있었다. 그 행렬은 천천히 앞으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그는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 저 행렬이 도대체 무슨 행렬이냐고 물어 보았다. "아니 그것도 몰라요? 자살 지망자 사무실로 가는 건데……." 브레인은 황급히 행렬에서 물러났다. '자살 지망자가 줄을 서다니……. 대체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그는 주위의 모습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갔다. 조금 걷노라니까 거대한 성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띄었다. 브레인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 보았다. "이 빌딩은 뭘 하는 곳입니까?" "불사판매주식회사의 본사입니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달리 쫓기는 것처럼 초조한 모습이 아니었다. 무섭게 바싹 마른 키 큰 남자였는데 볕에 그을린 긴 얼굴 속에서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이 빛나고 있었다. "굉장하군!" "아, 당신은 뉴욕 사람이 아니로군요." 브레인은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실은 나도 그렇소만……. 애리조나의 촌구석에서 올라왔지만 그래도 이 빌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는데, 당신도 무척 먼 곳에서 온 모양이구려." 브레인은 정직하게 말을 할까하고 망설였지만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브라질에서 왔소. 아마존 상류의 고무농장에서 이번에 처음으로 뉴욕 구경을 하러 왔답니다." "아아, 그러셨군요." 남자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서로 촌놈끼리니 터놓고 지냅시다. 내 이름은 칼 요크요. 어디 함께 구경이나 다녀 봅시다." "잘 됐군요." 브레인도 자기 이름을 말했다. 두 사람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디 들러서 한잔했으면 좋겠는걸." "음, 좋지." 그렇게 대답한 순간 브레인은 자기가 돈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아아, 요크 씨! 그만 깜빡 잊고 돈을 호텔에 두고 온 모양인데……." 그가 어물어물 변명을 하자 요크는 그 날카로운 눈으로 브레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브레인 씨, 이래 뵈도 내가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데는 귀신이라오. 당신이 돈이 없다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소. 오늘 내가 한 턱 톡톡히 내겠소." "그럼 너무 미안하지 않소. 게다가 난 남에게 신세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오." "세상에 별걸 갖고 다 신경 쓰시네. 맘 턱 놓고 함께 갑시다. 자, 어서." 요크는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는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브레인은 요크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도 빨리 이 22세기의 뉴욕의 이모저모를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우선 화성타운으로 갔다. 그곳은 옛날의 차이나타운이었다. 그들은 화성 요리점 '빨간 화성'으로 들어갔다. 어떤 요리가 들어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건 중국 요리와 똑같은 고기와 야채 요리였다. "아니 이건 중국요리 아니요?" 그러자 요크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그럴 테지. 최초로 화성이 이주한 건 중국사람들이니까. 그건 아마 1997년이었지. 그러니까 화성식 중국 요리를 화성 요리라고 한다네." 화성 요리는 무척 맛이 있었다. 식사 끝나자 헬리콥터 택시를 타고 '그린 클럽'이라는 고급 카바레로 갔다. 거기가 요크의 고향 사람들이 꼭 구경하고 오라고 하던 곳이라고 했다. 그곳은 식물 쇼가 굉장한 구경거리라는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유리상자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유리 상자 속에는 배양액 속에 잠긴 정글의 모형이 있었다. 그 정글에 돋아나 있는 식물은 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없는 이상한 식물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선 식물이 쉴새 없이 쑥쑥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조그만 씨앗이 보고 있는 사이에 싹이 나더니 잎이 나고 넝쿨이 뻗었는가 하면 뭉텅한 양치류 같은 식물이 되어 징그러울 정도로 커다란 꽃이 핀다. 녹색 버섯이며 얼룩진 풀들이 눈 깜짝할 새에 허깨비처럼 커진다. 그리고 성장이 끝나면 열매를 맺고 다시 시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열매가 또다시 쑥쑥 자라나지만 어느 것 한가지도 똑같은 식물은 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 순응한 새로운 식물로 차례차례로 변해 가는 것이었다. 또한 식물끼리가 서로 처절한 생존 경쟁을 벌일 때도 있다. 그래서 싸움에 진 식물은 멸망하고 승리한 식물이 유리 상자 전체를 지배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이고 금세 또 새로운 식물에 의해 정복되어 버린다. 브레인은 숨을 죽이고 이 멋진 생명의 쇼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고 신기한 구경거리로군. 생물학 연구소에서 식물의 성장 속도를 수백 배로 빠르게 했거든. 그래서 사실은 몇 십 년 사이의 식물의 형태가 단 2, 3분 동안에 볼 수 있게 된 거라네." 요크의 설명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을 나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노라니까 레인 코트를 입은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다가왔다. "아저씨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는 뎁쇼." "그래 그게 어쨌단 말이야?" 요크가 되물었다. "난 '조'라고 하는데 이 근처에선 조금 유명한 편이죠. 헤헤……. 당신네들 이식 게임 안 하시겠습니까요?" 요크와 조가 서로 눈치를 보고는 브레인을 바라보았다. "여보시오, 농담도 잘 하시네요. 이식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난 촌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업신여기면 참을 수 없어." 브레인은 커다란 주먹을 조의 코앞에 내밀었다. 조는 멈칫멈칫 뒤로 물러서며 속삭였다.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요. 이식 게임이란 건 새로 나온 게임인데, 즉 말하자면 내가 아닌 딴 사람이나 동물에 옮겨가 즐긴다 이 말씀이지요. 이건 꼭 한번쯤 맛볼 만 하죠. 더욱이 살아가는 게 시큰둥할 때라든가, 아니면 좀더 스릴 있는 생활을 맛보고 싶을 때라든가 말씀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에게는 뭐가 좋을까? 그렇지! 개나 아니면 말 같은 게……." "이 자식이! 썩 나가지 못해. 안 나가면 목을 꺾어 버릴 테다." 브레인은 갑자기 고함치는 것과 동시에 조의 목을 움켜잡았다. 조는 간신히 브레인의 손을 떼어내고 뒷걸음질치며, "알았어요, 알았어. 나가면 되잖아요."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꽁무니를 뺐다. "참 쓸개빠진 놈이군. 자아, 기분이나 풀게 술이나 합시다." 요크의 말에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마시다가 문득 브레인은 술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데……?' 하고 생각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도무지 허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눈은 몽롱한 것이 꼭 안개가 낀 듯이 사물이 잘 보이지가 않는다. 정면에서 요크가 지그시 그를 쏘아보고 있다. "어떻게 됐습니까?" 하고 종업원이 와서 물었다. "아, 아니오. 술이 좀 지나친 모양이오. 내가 호텔까지 바래다 줄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소." 하고 요크가 대답했다. '이상한데? 요크는 내 호텔 같은 걸 알지 못할 텐데. 아니지, 난 돌아갈 호텔조차 없는 걸. 그런데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이 요크라는 사람은 도대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비로소 브레인은 자기가 마취제가 들어간 술을 먹게 된 것을 알았다. '어째서? 대체 이 사내는 왜 나 같은 걸…….' 그러나 그는 그 다음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갑자기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고 느끼자 의식이 완전히 멀어져 갔기 때문이었다.   유 괴   의식이 되살아난 브레인은 자기가 어두컴컴한 작은 방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가구도 문도 창문도 없는 감옥과 같은 방이었다. 브레인은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금방 굉장한 현기증을 느끼고 곧 옆으로 눕지 않을 수 없었다. "침착해야지. 그 마취약에서 깨어나려면 아직은 시간이 좀 일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방 한 구석에 반바지만 입은 한 사내가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브레인도 그 사내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심한 현기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거죠?" "멋지게 속아넘어간 걸세, 나처럼. 여기선 절대로 도망칠 수가 없어. 단념하는 게 좋을 걸세." "그렇지만, 왜 나 같은 놈을 유괴했을까? 돈도 아무 것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놈들이 원하는 게 우리들의 육체라는 것쯤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냐." "우리들의 육체?“ "물론이지. 육체가 나무에 돋아난 것도 아닐 테고, 흙에서 파낼 수도 없거든. 자살 지망자도 적으니 어디서든 주워와야 하잖나 말일세." 그 사내는 계속 떠들어대지만 브레인은 무슨 영문인지 통 알 수 없었다. "하여튼 우린 불쌍한 포로 동지가 됐으니 서로 이름이나 알고 지냅시다. 난 레이 멜힐이오. 우주선 브레멘 호의 비행사였소." 브레인도 자기 이름을 대고 어떻게 해서 이곳에 끌려오게 됐느냐고 물었다. "정신이 나갔었지. 소행성대를 석 달 동안이나 날아다니다가 오래간만에 지구로 돌아온 축하가 좀 지나쳤지. 아주 취해 버렸소.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 계시더라 이거요." 멜힐이 브레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번엔 그쪽 차례요." 브레인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는 좀 길지요. 하여간 1958년부터 시작해야 되니까." "뭐라고? 당신 날 놀리는 거요?" "아니, 좀 들어보시오." 이렇게 해서 브레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멜힐은 벽에 기대앉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다 듣고 나자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렉스 동력회사 녀석들이 할 만한 짓이야." "그런데 멜힐, 그 녀석들은 우리들의 육체를 어디다 쓰려는 것일까? 생체 실험……?" "아니지, 당신은 아직 22세기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려. 우리들의 육체는 재생용으로 사용되는 거라오." "재생이란 어떤 거죠?"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수명이 다 된 육체에서 생명을 떼어내어 새로운 육체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해서 계속 살아간다는 원리지." "그랬군……. 그래서 우리들의 육체가 필요했군." "그렇소." "언제 쓰게 될까요?" "물론 손님이 와야죠. 난 여기 처박힌 지가 벌써 일주일이 됐소. 이젠 언제 끌려나갈 지 알 수 없소. 당신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은 어떻게 되나요?" "그거야 뻔한 거지. 말살해 버리는 거라요." "그렇다면, 그건 살인이다!" "물론. 하지만 내세 보험에 들어 있으면 죽게 된다고 해도 별로 어떻다 할 것도 없지만 말이오." '또, 모르는 것이 튀어 나왔군.' "그 내세 보험이란 건 또 뭐요?" "당신은 통 아무 것도 모르는군." "멜힐, 내세(죽은 뒤에 영혼이 다시 태어나 산다는 미래의 세상)라든가 영생(영원한 생명)이라든가 하는 걸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없나?" "그건 굉장한 주문인데." 멜힐은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원시 시대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확실히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지. 그래서 육체가 죽으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브레인은 끄덕이고 멜힐은 계속했다. "20세기 후반, 바로 당신이 살고 있던 시대에 미국의 라인 박사라는 초심리학자가 있어서 그 연구를 하고 있었소. 그 연구를 시작으로 해서 몇 사람의 학자들이 계속 연구하다가 21세기의 중엽에 이르러 바닝 교수라는 학자가 나타나서 영혼(죽은 사람의 넋)의 존재를 분명히 증명했소. 그는 여러 가지 물건을 숨겨 놓고 자살을 한 뒤 자기의 친구인 학자에게 유령으로 나타나 그 물건들을 숨긴 장소를 가르쳐 주었소. 이렇게 해서 죽은 후에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오." "세상이 온통 술렁거렸겠군요." "술렁거리는 정도가 아니었소. 한 때는 온 세상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도록 혼란했었소. 안 그렇겠나?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해도, 즉 어떤 나쁜 짓을 한다거나 어떤 위험한 일을 하고 죽더라도 내세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싶은 대로했죠. 매일매일 몇 천 몇 만이라는 사람이 내세에서 되살아나기 위해 자살을 했지요. 살인, 강도, 위험한 모험이 전 세계를 휘몰았고, 정말 무시무시한 세상이었소." 멜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날 무렵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요. 바닝 연구소의 학자들이 내세는 있지만 아무나 그곳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발표했거든요." "모두 깜짝 놀랐겠군요." "굉장한 충격이었소. 아무튼 내세로 갈 수 있는 사람은 몇 백만 명 중의 한 사람 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됐으니까." "그건 또 어째서?" "죽음이란 인간의 마음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일이란 말이오. 마치 곤충이 고치에서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바뀌는 것 같은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 작업이 너무 강하면 모두가 파괴돼 버려서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거요. 죽음의 충격으로 영혼이 모두 파괴돼 버린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경우 모두가 거기에 해당된다는 거였소." "그러니까 결국 안 된다는 얘기군." "그래서 연구해 낸 것이 불사판매회사요. 실은 이것은 그때까지의 바닝 연구소의 이름을 바꾼 거죠. 그곳에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죽음의 충격에서 영혼의 구조를 강하게 해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연구를 완성시킨 거요." "그렇군! 그렇다면 또 다시 누구든 내세로 갈 수 있게 됐겠군." "그렇게 됐지. 불사 판매 회사에 지불할 돈만 가지고 있다면야……." "아니, 돈이 필요하다고?" "물론이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하고 세밀한 전자 공학적 설비가 필요하니 돈이 필요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바로 그것이 내세 보험이라는 걸세." "그러면 부자만이 내세로 갈 수 있다는 얘긴데……." 브레인은 아주 불쾌한 기분이었다. 멜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하긴 많은 사람 중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원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천재도 있고 또한 오랜 수련 끝에 그 능력을 갖게 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몇 백만 명에 한 명 정도로 아주 드물지." 브레인은 눈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죽은 후에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니. 그런 꿈 같은 일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젠 죽음을 두려워할 것 없이 무슨 일이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돈에 따라서란다. 돈도 없고 자유도 없는 자기에게는 그 멋진 기회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디 그뿐이랴. 모처럼 재생 수술을 받게 되어 22세기 세상에 재생하게 됐는데 머지 않아 마음을 말살 당하고 이 육체는 누군 지도 모를 딴 사람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재생을 위해서 새로운 육체를 살 수 있는 부자라면 당연히 내세 보험에도 들어 있을 테지. 그런데 왜 재생 같은 것을 하려고 하는 걸까?" "늙은이들은 죽는 게 역시 두렵거든. 내세로 가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순간까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 세상에 머물고 싶은 거지. 그리고……" "그리고 뭔가?" "재생 수술이 언제나 성공한다고는 보증하진 못한다네. 재상을 할 때는 우선 먼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 곧 새로운 마음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때 마음이 새 육체 속에 잘 흡수되지 않는 수가 간혹 있다네. 그렇게 되면 모두가 끝장이지." "하긴 그렇군. 그런데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자살 지망자들이 몰려다니던데 그들은 뭐지?" "아아, 그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를 파는 대신에 내세 보험에 들어 달라는 것이지. 거기에다 유족에게도 돈이 지불되거든. 돈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지." 브레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난 절대로 이 몸을 팔지 않을 테다!" 멜힐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하시군. 그렇지만 놈들의 손에 걸리면 어차피 그게 그거니까."   네 차례다   시간은 천천히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벽에 붙어 있는 조그만 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누군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 까만 요크였다. "여어, 브레인 씨! 안녕하시오?" "이 흉악한 놈!" 브레인은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 심한 욕설을 퍼부어 주고 싶은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요크는 악마처럼 빙그레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아아, 그렇게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아무튼 내세 보험이 엄청나게 비싸니 할 수 없었네." 요크는 지극히 당연한 표정으로 말하고 나더니 뒤돌아보고 누구에게 인가, "자, 빨리 해치우게." 하고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철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프로 레슬러처럼 생긴 거대한 몸집의 사내들이 뛰어 들어왔다. 다섯 사람은 브레인과 멜힐을 번갈아 보더니 돌연 멜힐을 빙 돌아 둘러쌌다. "이놈들아, 난 안 간다!" 멜힐이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지만 사내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멜힐의 필사적인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금방 꽁꽁 묶어서 방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요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바보 자식들아! 이놈이 아니고 저 안에 있는 놈이라니까." 브레인은 모처럼 새로 생긴 친구의 슬픈 운명을 생각할 기력조차 없이 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운명이 뒤바뀌자 그는 저항할 틈도 없이 금세 묶이고 말았다. 밖에 끌려나가자 요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엾군, 브레인. 손님이 특별히 네 육체가 필요하다고 지명했거든." 브레인은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꽁꽁 묶인 몸을 비틀었다. "이놈! 죽여 버릴 테다." 그는 전신의 힘을 다해서 바둥거렸다. "이놈의 몸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다. 소중한 상품이니까." 요크가 명령을 내리자 한 사내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헝겊을 그의 입과 코에 갖다 댔다. 마취제였다. 그는 금세 정신이 아득해졌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차츰 의식을 되찾았다. '어? 난 아직 그냥 있군. 아직 영혼이 말살 당하지 않았군 그래.' 그는 맨 처음 그렇게 생각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몸은 자유롭고 옷을 입혀서 소파 위에 뉘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어디론가 데리고 갈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복도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때다! 어디 죽느냐 사느냐 한 번 해보자.' 그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문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브레인은 주먹을 쥐고 전신의 힘을 다해 상대방을 때려눕히려고 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 멈칫 서 버리고 말았다. 그는 바로 마리 소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육체를 샀다는 손님이 바로 마리란 말인가? "마리, 당신은 누굴 위해서 내 육체를 샀소?" 브레인은 정면으로 마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물론 당신 자신을 위해서죠. 당신을 자유의 몸으로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마리는 언제나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이 22세기로 끌어들인 건 우리들이었으니까 당신을 구출해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무분별하시죠? 아무 것도 모르는 세상에 제멋대로 뛰쳐나가니까 이런 일을 당하잖아요." "알고 있소." "래리 사장이 당신을 만나고 싶대요. 앞으로의 일도 있으니까 한 번 만나 두는 게 좋겠어요. 점심을 먹고 같이 본사로 갑시다." "음, 그렇게 합시다." 그는 그 방을 나오는 순간 멜힐이 생각나서 마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나하고 함께 갇혀 있던 남자인데 아주 좋은 친구였소. 그도 구해 줄 수 없을까? 돈은 내가 벌어서 갚기로 하고." 마리는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당신은 아주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좋아요. 어디 한 번 힘을 써 보죠." 그녀는 복도에 있는 화상전화실로 들어가 어디엔가 전화를 걸더니 이윽고 돌아왔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웠다. "늦었군요. 멜힐 씨는 당신이 옮겨진 후 한 시간 뒤에 팔려서 벌써 재생 장치에 넘어갔답니다." 브레인은 멈춰 섰다.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22세기에서 얻은 단 하나의 친구가 이미 죽어 버린 것이었다. "미안해요, 브레인!" 마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무표정한 냉정함은 사라지고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성실함이 나타나 있었다.   래리 사장   래리 사장은 아주 작은 거미 같은 인상을 주는 말라빠진 늙은이였다. 굉장히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몸집이 거의 의자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끝에서부터 손끝까지 빈틈없이 잔주름으로 가득 차 있고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지나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눈만은 맑고 또렷했다. "아아, 당신이 과거에서 온 친구인가요?" 래리 사장의 말이었다. "자, 앉으시오. 난 지금까지 할아버지하고 당신 얘기를 하고 있었소." 브레인은 60년 전에 죽은 래리 사장의 할아버지의 망령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아, 벌써 가버렸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잠시 동안만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으니까요." "정말로 나타나시는 겁니까?" 브레인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물론 사실이지요. 하긴 20세기에서 온 당신에게는 믿기 어려울 테지만 말이오. 그렇지만 20세기는 원자력이라든가 우주비행 같은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19세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꿈같은 얘기였었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오." 래리 사장은 거기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이 시대가 마음에 드시오?" "아직 까진 별로 마음에 든다고 할 수가 없군요." "그러실 테지. 그렇지만 당신은 너무 무모했소. 혼이 난 건 당연한 일이었소." "아니, 그건 제가 잘못했어요." 옆에서 마리가 말했다. "아아, 그건 괜찮아. 그런데 브레인 씨, 나와 나의 조부는 당신을 우리 회사의 선전물로 쓰지 않기로 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을 테죠?" "미스 소온에게서 들었습니다." "렉스 동력 회사는 그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아야만 한단 말입니다. 뒤에서 험담을 듣는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지요. 그런 뜻에서 당신을 20세기에서 데려온 일은 큰 잘못이었소. 당신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회사로서는 아주 손해가 막심하단 말이오. 그래서 난 당신과 협상을 하고 싶은데……." "협상이라뇨? 어떤?" "만약에 우리 회사가 당신에게 내세 보험에 들게 해서 죽은 후의 생명을 보장한다면 당신은 자살을 해주겠소?" 브레인은 분명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깨끗이 거절하겠소." "어째서?" "우선 그 내세라는 게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소." "그럴 겁니다. 만일에 믿을 수 있게 된다면 협상에 응할 수 있겠습니까?" 브레인은 잠시 생각한 뒤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싫습니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고집쟁이로군, 당신!" 래리 사장은 금방 짜증을 내며 말했다. "자, 잘 생각해 보시오. 이 시대는 당신에겐 정말 살기가 불편하고 위험한 곳이오. 잠시 어물거리는 사이에 금세 목숨을 잃을 뻔했지 않았나 말이오." "그런 일은 다신 일어나지 않죠. 그건 아직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으니까요." "아니, 분명히 또 일어날 것이오. 당신이 그렇게 빨리 이 시대 사정을 알게 될 리가 없소. 당신은 말하자면 20세기에서 살다가 갑자기 끌려 온 원시인 같은 사람이란 말이오." 래리 사장은 찬찬히 훈계하듯이 설득했다. "당신은 비행기도 자동차도 전기며 가스 등 아무 것도 모르는 원시인인 주제에 호랑이나 들소나 사자하고 싸워본 경험만을 믿고 20세기를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란 말이오. 그렇지만 원시인은 금방 자동차에 치이거나 전기에 감전되거나 가스 중독을 일으켜서 죽어버리는 게 틀림없지 않겠소?“"그건 너무 지나친 비유죠." 브레인은 그렇게 대답은 하였지만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절대 지나친 얘기가 아닙니다.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오." "하여튼 나는 자살 같은 건 절대로 안 합니다. 되고 안되고 간에 나 자신의 힘으로 한번 버티어 보겠소. 협상 같은 것은 절대로 응할 수 없소." "정말 대단한 고집이로군." 래리 사장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옹고집과 원시인 특유의 교활함으로 얼마 동안은 살아갈 수 있겠지. 그러나 결코 그렇게 길지는 못할 걸. 당신은 아무리 길어도 일년 이내에 무참하게 죽을 거요. 그러나 그때는 죽은 뒤의 생명을 보장하는 내세 보험은 없단 말이오." "그래도 좋습니다. 자살은 하지 않겠소." 브레인도 끝까지 버텼다. 래리 사장은 맥이 빠진 듯 힘없이 의자에 파묻혀 있다가 또다시 몸을 꼿꼿이 하고 말했다. "당신은 고집을 부리는 건 재생이라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겠군요. 오늘 오후 본사의 재생 처리실까지 와 보시오. 재생의 현장을 보면 당신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겠군." 브레인은 갑자기 긴장했다. 그러자 노인은 그의 마음을 추측하고 빙그레 웃었다. "아니, 함정에 빠뜨린 계획은 없소. 나의 재생용 육체는 이미 사 두었으니까. 우선 난 당신 몸뚱이 같이 우락부락한 몸은 싫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언짢아지거든." 래리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라는 듯이 손을 들어 신호를 하였다. 브레인은 마리의 뒤를 따라서 사장실에서 나왔다.   좀 비   그날 오후 브레인은 렉스 동력회사의 본사 재생 처리실에 와 있었다. 그곳에는 렉스 동력회사의 중역들도 몇 명 참석하고 있었다. 브레인과 마리는 될 수 있는 한 중역들에게서 떨어져 앞줄에 앉았다. 재생기에 재생 준비가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밝은 불빛이 가죽 줄과 코드가 달린 두 개의 튼튼한 의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 사이에 검게 빛나는 커다란 기계가 있었다. '어쩐지 전기 의자 같이 생겼군. 거기에다 꼭 사형실 같군!' 브레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세 명의 기사들이 전기 의자 위에 엎드려서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 가까이 언젠가 본 일이 있는 턱수염을 기른 의사와 얼굴이 붉은 사내가 서 있었다. 래리 사장이 들어오더니 중역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서 침착한 태도로 한쪽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뒤로 4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창백한 사내가 들어 왔다. '아아, 이 남자가 바로 래리 사장이 사 놓았다는 육체의 소유자로군.' 그는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거기에 검정 옷을 입은 목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두 사람에게 다가오더니 먼저 창백하게 되어 떨고 있는 사내를 향해 물었다. "윌리엄 헤트 씨, 당신은 이 지상 세계에서 사는 것을 그만 두고 내세에서 영생하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 곳에 왔습니까?" "예." 하고 사내가 대답했다. "당신은 내세에서 영생하기 위해 이 과학적 수단을 취할 것을 희망하였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목사는 래리 사장 쪽으로 향했다. "케너스 래리, 당신은 윌리엄 헤트 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의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자유 의사로 이곳에 왔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됐습니다. 그러면 이 재생 처리는 법률적으로 보나 도덕적으로 보나 정당하다고 인정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기사들이 다가와서 두 사람을 제각기 의자에 꽉 묶고 팔이며 다리며 이마에 전기 장치 같은 것들을 연결시켰다. 실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렉스 동력회사의 중역들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래리 사장은 브레인을 힐끗 보고서 희미하게 웃고는 기사에게 말했다. "시작하지." 기사가 검은 기계의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자 부웅 하는 큰 소리가 나며 라이트의 빛이 일순간에 엷어졌다. 래리 사장과 헤트는 꿈틀하고 몸을 경련 시켰으나 이윽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기사가 기계의 스위치를 끊었다. 조수가 두 사람의 몸에서 코드며 가죽끈을 떼어냈다. 의사와 기사가 무서우리 만치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래리 사장의 낡은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헤트의, 지금은 래리 사장이 되어 있을, 육체를 재빨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반응이 없다." 턱수염의 의사가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온 방이 순식간에 긴장된 공기로 가득 찼다. "아직 시간이 빠른 모양이지." "아니, 이젠 반응이 있어도 좋을 땐데……?" "이상하군?" 제각기 한 마디씩 했다. "어떻게 됐지? 뭘 걱정을 하고 있지?" 브레인이 마리에게 물어보았다. "재생 처리를 할 때 때때로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가 일어나는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래리 사장의 마음이 아직 새 육체 속으로 옮겨가지 못한 모양이에요. 너무 늦어지면 안 되는데……." "어째서?" "정신이 빠져 나오면 육체는 곧 죽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옮겨갈 때는 재빨리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육체가 죽어버리고 마니까요." "아직도 반응이 없어." 늙은 의사가 신음소리를 냈다. "이젠 늦었어요."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을 때 의사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반응이 있다!" "산소! 그리고 아드레날린 주사를 빨리!" 산소 마스크가 얼굴에 씌워지고 주사를 놓았다. 새로운 래리 사장이 몸을 움직였다. "성공이야!" 늙은 의사가 외치며 마스크를 벗겼다. 중역들이 일제히 사장의 의자 곁으로 달려갔다. 래리 사장은 눈을 뜨자 졸리는 듯 하품을 했다. "래리 씨, 축하합니다!" "성공이군요." "아주 조마조마했습니다. 혹 실패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저마다 그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사내는 주위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 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래리가 아니오." 중역들은 섬뜩해서 그곳에 말뚝처럼 우뚝 서 버렸다. 늙은 의사가 딴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래리가 아니라면, 그럼 아직 헤트 씨인가요?" "아니, 헤트도 아니오." "그럼 누군가요?" "래리도 물론 옮겨 앉으려고 했지만 내가 빨랐지. 그보다 먼저 내가 이 육체 안으로 들어왔소. 그래서 이 육체는 완전히 나의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 늙은 의사가 뒷걸음질치며 외쳤다. 그 사내가 우뚝 일어섰다. 중역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역시 늦었어요." 마리가 브레인의 귀에다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브레인이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헤트의 저 겁먹어 오돌오돌 떠는 얼굴하고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래리의 얼굴도 물론 아니었다. 무서운 얼굴이었다. 안색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검은 머리카락이 차고 흰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어쩐지 몹시 어색한 느낌이었다. 표정이라곤 전혀 없고 마치 나무를 깎다만 조각처럼 멍청하고 애매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의 깜박이지 않는 눈만이 차디찬 시선을 내뿜으며 살아 있었다. "사령(죽은 사람의 영혼), 좀비가 되어 버렸어요." 마리가 다시 또 속삭였다. "말을 해라. 넌 누구냐?" 늙은 의사가 또다시 물었다. "나도 모른다." "모른다고?" "글쎄 내가 누군지 잊어버렸다니까." 사령은 천천히 재생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두 중역이 그 앞을 막아섰다. "비켜. 이건 이미 내 몸이야. 너희들은 상관할 것 없다." "보내 주시오." 늙은 의사가 말했다. 중역들은 비켜섰다. 사령은 곧바로 출입구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와 브레인 앞에 섰다. 브레인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사령은 브레인을 그 몸서리치는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너를 알고 있다." "뭐라고?" "난 너를 알고 있어." 사령이 거듭 말했다. "그래? 하지만 난 너 따윈 모른다." "아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고 브레인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토마스 브레인이다." 사령이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아아,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하지만 틀림없이 생각해 낼 거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해도." 그러고 나서 사령은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아니, 내 몸이 죽어가고 있잖아! 죽기 전에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겠군. 토마스 브레인, 나에 대해 생각나는 게 없나?" "물론이지!" 브레인은 다급히 외쳤다. 사령하고 어떤 관계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첫째로 그럴만한 일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누구에게 원망을 살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사령은 브레인의 곁을 떠나 비실비실 걸어가다가 또다시 돌아다보았다. "너하고는 또다시 만나게 될 거다. 넌 내게 아주 소중한 녀석이니까. 언젠가 또 만나게 될 때 그때는 틀림없이 생각날 테지." 그리고는 사령은 복도로 나가더니 천천히 멀어져 갔다. 브레인은 얼어붙은 듯이 그곳에 못 박혀 있었다. 문득 어깨가 무거워서 보니 마리가 기절해서 브레인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자신을 갖고   기사며 중역들이 얼마동안 재생기 주변에서 열띤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재생에 대한 실패의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에는 20세기와 22세기가 별로 다를 게 없는 모양이군.' 브레인은 그 소동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렉스 동력회사라는 세계 최대의 회사 사장이 돌연 죽어버렸으니 다음 사장이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와 이제부터 회사를 어떻게 경영해 나갈 것인가 등의 문제로 당분간은 소동이 계속될 것은 틀림없겠군.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브레인, 나하고 같이 가요." 어느 사이에 정신이 돌아온 마리가 옆에서 속삭였다. 두 사람은 재생실에서 나와 옥상으로 올라가 헬리콥터 택시를 불러 올라탔다. 그는 아까 본 사령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꼭 내게 달라붙으려고 할 건 또 뭐람!" 드디어 참다못해 브레인은 중얼거렸다. "정말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어요?" "없어. 그야 인간이니까 내게도 많은 허물은 있겠지만 사령이 달라붙을 정도로 나쁜 일은 하지 않았는데……." "그렇담 괜찮지만……." "하여간 지금은 아주 귀찮은 세상이 되어 버렸군. 옛날엔 사람이 어떤 나쁜 일을 했더라도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는데, 도대체 지금은 이게 뭐야, 죽은 뒤까지도 이러쿵저러쿵 말썽이 많으니……." 마리는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헬리콥터 택시는 초고속으로 날아 매머드 아파트 옥상에 도착했다. 그곳이 마리의 아파트였다. 마리의 방은 넓고도 밝은, 아주 살기 좋아 보이는 방이었다. 방에는 옛날의 SF소설 속에 잘 나왔던 것 같은 편리한 기계며, 각종 장치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마리는 브레인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저녁 안 들겠어요?" "그건 고맙군. 실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소." 마리는 자동 조리기 앞에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자동 조리기는 보고 있는 사이에 식료품 탱크며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포장지를 풀고 껍질을 벗기고 물로 씻어 굽고 찌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떨어진 물건을 보충하기 위해 식료품 회사에 급히 주문을 했다. 요리는 아주 맛이 있었다. "당신 시대는 이렇게 기계가 요리를 모조리 하진 않았겠죠? 나도 때때로 해 보고 싶지만 언제나 기계에게만 맡기고 있어서 어떻게 하는 건지 엄두가 나질 않아요." 마리의 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자동 정리기가 남은 음식이며 접시 등을 금방 치워버렸다. 그리고 둘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죠?" 브레인은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돈을 좀 빌려줬으면 하는데……." "좋아요. 그런데 그걸 어디다 쓰려고요?" "우선 살 곳을 정하고 그리고 나서 무엇이든 일거리를 찾아 나설 참이오." "직업을 구한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에요. 제가 힘이 돼 줄 만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죠."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브레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소. 내 힘만으로 일거릴 찾아 훌륭히 해 보고 싶은 생각이오." 마리는 잠자코 브레인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방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대로 해 보세요. 잘 되기를 빌겠어요." 마리는 일어나 침실로 가서 봉투를 가지고 되돌아 왔다. "자, 돈이에요. 필요하다면 더 빌려드릴 수 있어요." "고맙소. 그러나 이 이상 더 폐는 끼치지 않을 작정입니다." "자리가 잡히면 곧 제게 전화를 주셔야 해요." "물론. 그럼 잘 있어요." 브레인은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마리가 그의 등뒤로부터, "토마스, 전 당신의 친구예요. 만일 곤란한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내게 연락해요." 하고 말했다. 브레인은 마리를 향해 크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힘찬 걸음걸이로 걸어 나갔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나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좋은 기분이었다. 아무런 불안도 근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부터는 이 22세기의 세상에서 훌륭히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뿌듯하게 느꼈다.   친구와의 재회   '자, 무슨 일을 한다?' 혼자가 되자 브레인은 우선 그 생각부터 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물론 요트의 설계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생각 같았다. 150년이나 전의 요트 기술자가 지금 세상에서 쓰이게 되리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일거리를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다. 일거리가 있기만 하다면 아무 거나 해야할 판이었다. 그는 신문 가판대에 가서 일할 사람을 구하는 광고를 조사했다. 물론 숙련된 사람을 구하는 곳은 보나마나라서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로서도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있나 하고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없었다.   "자동 레스토랑에서 조립공을 구함. 로봇 공학의 기초 지식이 있으면 가능." "요트 선체 소제부를 구함. 유체 역학의 학위 필." "금성 무역회사에서 보이를 구함. 불어․독일어․러시아어 및 금성어를 할 수 있는 자." "에스콜 백화점에서 소년 배달부를 구함. 스프레링 머신의 운전이 가능하고 뉴욕 시의 지리에 밝은 자."   브레인은 그만 맥이 빠져서 구인 광고 조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는 이 세상에선 소제부도 배달부도, 아니 심부름꾼조차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일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세상이라고 구덩이를 판다거나 짐을 들어 내린다거나 또는 보통 상점의 청소를 한다거나 하는 간단한 일거리야 있을 테지. 아니면 그러한 힘든 일은 모두 로봇 같은 것이 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휠체어를 미는데도 박사 자격증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는 구인 광고를 조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통 기사를 읽어보았다. 이러한 기사들이 실려 있었다.   "화성의 새로운 우주 공항을 뉴사우스 마스에 있는 오크 사에 건설 중." "시카고의 연속 방화 사건은 유령의 소행으로 보임. 주 정부는 푸닥거리 계획을 발표하다." "앨라배마 주 모빌 시에서 사령 2명이 폭행으로 살해당함. 폭행의 주모자를 경찰에서 조사 중." "오스트리아의 치롤 지방에서 있었던 늑대인간 사냥이 실패로 끝나다." "의회는 수렵 및 결투 금지 법안을 부결함." "광검사(미친 칼잡이)가 산티아고에서 네 사람을 살해."   브레인은 한층 더 우울한 기분이 되어 신문가판대 앞을 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세상이란 말인가?' 유령과 사령, 늑대인간과 광검사 등 공상 소설에나 나올 법한 것들이 이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거리를 걸어갔다. 문득 정신이 들어 사방을 바라보니 그곳은 화려한 극장 거리였다. 결투 시합이며 3차원 영상에 감각 영화 등을 상연한다는 극장이 즐비하고, 떠들썩한 음악이 들리고 화려한 네온이 반짝거렸다. 그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그는 돌연 어떤 생각, 아주 엉뚱한 일에 생각이 미쳤다. '렉스 동력회사는 바로 어제까지 나를 커다란 선전거리로 쓰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은 내가 쇼 무대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느 극장에서나 3차원 영상에서나 틀림없이 나를 대환영해 주리라. 하여간 나는 150년 전의 과거에서 온 사람이니까.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곧장 눈앞에 보이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쇼의 지배인을 찾았다. 10층에 지배인 실이 있었다.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사무실로 올라갔다. 접수부로 가서 브레인은, "출연 관계로 지배인을 만나보고 싶은데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접수부의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미안하지만 3차원 영상이나 극장의 출연자는 충분하답니다." "그렇지만 나는 특별합니다." "어느 분이나 모두 특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나의 경우는 틀려요. 난 과거에서 온 사나이랍니다. 아, 저 먼저 3차원 영상 뉴스에서 나왔었죠." "글쎄, 난 못 봤는데요. 하여튼 다시 나중에 와 주세요." 하고 말하고 있을 때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와 구석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어머,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어! 일찍 나왔군." 사장은 인사를 받으며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브레인은 그 사내의 뒤를 쫓아가 팔을 붙잡았다. "사장님, 잠깐만 제 얘기 좀 들어주십시오. 저는 굉장한 뉴스가치가 있는 몸이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지요. 이 팔을 놓으시오." 사장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입니다. 전 렉스 동력회사가 20세기에서 데리고 온 사람이랍니다. 제 이름은 토마스 브레인이라고 합니다." "뭐, 렉스 동력회사?" 사장은 되묻고 나서 잠깐동안 머리를 갸우뚱하고 생각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아, 어쩌면. 그런 말을 들은 듯도 한데……, 하여튼 사무실로 오시오." 두 사람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떨까요. 절 적당한 곳에 출연시켜 주실 수 없을까요?" 브레인은 필사적으로 물었다. "글쎄요?" 사장은 조금 생각하더니 물었다. "당신은 어느 세기에서 왔다고 했소?" "1958년입니다. 1930년으로부터 50년대까지의 일이라면 무엇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진귀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1958년이라, 그렇다면 20세기란 이야기군 그래." "그렇습니다." 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되겠군. 1세기의 스웨덴 사람이라든가 7세기의 인도 사람이라면 또 몰라도. 아니면 1세기의 로마 사람이나 4세기의 영국 사람이라도 무방하긴 하지만 20세기는 곤란하군." "어째서요?" "만원이거든." "만원이라고요?" "그렇소. 1953년에서 온 펜 사라라는 사람이 모든 텔레비전 쇼며 광고며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똑같은 시대 사람은 출연 가치가 없단 말씀이오." "그렇습니까?" 브레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하여튼 감사합니다." "아니,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미안하오. 그렇지만 한번 펜 사라를 만나보는 게 어떻겠소? 어쩌면 대역으로 써 줄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오." 사장은 펜 사라의 주소를 써서 브레인에게 건네주었다. 브레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그는 자기의 운명을 저주했다. 모처럼 좋은 일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시대에서 온 사람이 있어서 그것도 안되게 됐으니…….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세상인데 20세기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운수가 나빴을 따름이지. '그렇지! 하여튼 그 사라라는 남자를 만나보자. 가령 일거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해도 같은 20세기에서 온 사람을 만나서 옛 이야기라도 한다면 무척 즐거울 것이다. 저쪽도 반가워할 테지.' 그렇게 생각하고 브레인은 가르쳐 준 주소로 찾아갔다. 아파트의 초인종 버튼을 누르자 곧 매끈하고 둥근 얼굴의 사내가 나왔다. "카메라맨인가? 늦었구먼." 사라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당신과 같은 20세기에서 온 사람입니다. 나는 1958년에서 왔습니다." "호오, 사실이오?" 사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물론이죠. 내 신분은 렉스 동력회사에 문의해 보시면 곧 알 수 있지요." "아아, 그래요? 그래서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소?" "예! 저어, 당신의 비서 역이건 뭐건, 그런 일에 써주실 수 없을까 해서……." "난 비서는 쓰지 않소." 사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사실은 당신하고 옛날 얘기라도 하고 싶어서 왔답니다. 같은 시대 사람을 만나면 무척 반가우리라고 생각하고요." "아아! 물론 반갑죠. 왜 생각나지 않소? 옛날 말이오. 1950년대의 뉴욕은 참 좋았죠. 공원에는 이륜 마차가 달리고 맨해튼 기슭엔 외륜선이 유유히 떠가고……. 그런데 지금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이 다음에 또 얘기합시다." 사라는 일부러 꾸며서 웃는 얼굴로 브레인을 밀어내고 문을 닫아 버렸다. 브레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 건물을 나왔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이륜 마차! 또 뭐 외륜선? 그따윈 19세기 말경의 얘기지. 그러니까 그 놈 펜 사라라는 놈은 순 엉터리 사기꾼이군. 과거에서 온 사나이라고 떠벌리고 있지만 사실은 20세기는커녕 19세기에서도 살아본 일이 없는 사기꾼인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가 엉터리라는 것을 누가 알지?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22세기에는 거의 없을 테니까.' 그는 거리를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몹시 피로했지만 어딘가 들어가서 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득 어느 거리 한 모퉁이에서 그는 군중 속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것은 저 렉스 동력회사에서 헤어진 후로 영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레이 멜힐이었다. 그는 쫓아가 멜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보게 멜힐! 날세 나야. 용케도 거기서 빠져 나왔네 그려." 그러자 그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브레인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난 멜힐이라는 사람이 아니오. 사람을 잘못 보셨군요." "뭐라고! 자넨 아무리 봐도 그 사람하고 꼭 같은데, 이마의 방사능 흉터까지 꼭 같아.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우주선 브레멘 호의 비행사로 있던 멜힐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라니까요." 브레인은 갑자기 그 까닭이 생각났다. 그 순간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네 놈이 멜힐의 육체를 훔쳤구나. 이 도둑놈아!" 그는 커다란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힘을 다해서 그 남자의 얼굴을 갈겼다. 남자는 2미터 가량 튕겨가더니 벌렁 나자빠졌다. "광검사다! 사람 살려요!" 지나가던 여인이 쇳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자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 멀리서 새파란 제복의 경찰관이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군중 속으로 숨은 다음 거리 모퉁이까지 와서 달렸다. 얼마 동안 달리다 보니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보통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슴속은 슬프고 분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멜힐은 정말 죽어버린 게 틀림없으니 이제는 이 세상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쓸쓸함과 외로움이 물밀 듯이 치밀어 왔다.   영혼 교환국   그날 밤, 브레인은 조그만 여관을 찾아 유숙하고 다음날도 일자리를 찾으러 거리에 나섰다. 일자리를 얻기란 무척 힘들었다. 생각대로 힘든 일들은 모두 로봇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자리도 150년 전의 인간에게는 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돌아다녔으나 일자리는 구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여관으로 돌아오니까 안내원이, "전화가 왔었습니다." 하면서 쪽지를 내밀었다. '혹시 마리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마리에게는 아직 이 여관의 전화 번호를 알리지 않았었다. 메모에는, '영혼 교환국 22가 지국으로 나와 주십시오. 통화가 가능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대체 누구의 영혼일까?' 그는 생각해 보았지만 통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을까?" 하고 혼자 중얼거리니까 안내원이, "영혼은 모든 걸 다 알지요. 주소쯤은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하여튼 가보시면 아시게 될 것이에요." 하고 권한다. 그편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브레인은 가르쳐 준 대로 22가를 찾아갔다. 영혼 교환국은 커다란 회색의 구식 건물이어서 첫눈에도 알 수 있었다. 접수대로 가니 예쁜 아가씨가 교신하는 방을 가르쳐 주었다. "실은 전 처음으로 여기 왔습니다. 어떻게 교신을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브레인이 말하자 그 아가씨는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말해 주었다. "별로 어려울 게 없답니다. 이곳은 세상을 떠나서 내세의 입구까지 가신 분과 이 세상을 이어주는, 말하자면 전화국과 같은 거죠. 그 방으로 가시면 저쪽에서 먼저 교신을 합니다. 즉 목소리가 들려오죠. 그러면 대답을 하시면 되는 거랍니다." "잘 알았소." 브레인은 인사를 하고 일러준 대로 그 방으로 갔다. 그 방은 벽에 스피커가 걸려 있었고 의자 하나가 놓인 작은 방이었다. 브레인은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토마스 브레인!" 스피커에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기분 나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누, 누구요?" 그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대답했다. "토마스, 잘 있군 그래." 음침한 목소리가 또 울렸다. 이번에는 브레인에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레이! 레이 멜힐일세 그려!" 그는 모습을 볼 수 없는 목소리를 향해 외쳤다. "그래, 브레인. 오랜만일세." "멜힐! 지금 자네는 어디 있나?" "내세 입구에 있지. 어때 좀 뜻밖일 테지?" "놀랐네. 그런데 자넨 내세 보험에 들어 있지 않았을 텐데?" "물론 안 들었었지. 그 동안의 얘기를 할 테니 잘 듣게나. 그때 자네가 끌려나가고 나서 한 십분 이나 됐을까 할 때 이번엔 날 끌어내려고 왔네. 그래서 곧 바로 재생실로 끌려가지 않았겠나! 분하고 원통하고 어쩔 수가 없었네. 나는 내 마음이 말살되는 걸 느꼈지. 그때도 화가 치밀었었어. 그리고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얼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세입구지 뭔가." 브레인은 숨을 들이 마셨다. "그렇다면 자네는 백만 명에 하날까 말까 하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물이었네 그려." "그랬던 모양이야." "참, 다행이었네. 난 어떻게든 자네를 구해 보려고 했지만 그땐 이미 자네가 팔려 나간 뒤였어. 그때 난 어찌나 괴로웠던지……."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정말 좋은 친구였어. 그것뿐인가? 내 육체를 사간 그놈의 늙은이를 한방에 때려눕힌 것도 고마웠네." 브레인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그 일도 알고 있나?" "물론이지. 내세에 있는 자에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조리 보이거든." 브레인은 강한 호기심에 끌렸다. "레이! 내세란 곳은 어떤 곳인가?" "모르겠네." "어째서? 자넨 지금 거기 있잖은가?" "아닐세, 아직 나는 내세의 입구에 있지. 여기는 이 세상과 저 세상과의 사이에 놓인 다리 같은 곳이란 말일세."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아니, 지극히 간단해. 다만 한 번 건너가 버리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지. 그리고 내세로 건너가 버리면 다신 이 세상과 교신할 수가 없게 돼 있다네." 브레인은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레이! 그럼 언제까지 거기 있을 생각인가?" "알 수 없지. 그러나 당분간 여기 있을 생각일세." "말하자면 날 봐주겠다는 건가?" "뭐 그렇지." 브레인은 멜힐의 따뜻한 우정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고맙네, 멜힐! 그렇지만 그러면 자네에게 미안해서 안되겠네. 그러니까 빨리 저승으로 건너가게. 내 일은 어떻게든 내가 해 나가볼 테니까." "물론 자네는 그렇게 할 수 있을 테지. 허나 얼마 동안은 내 충고가 필요할 걸세. 자네도 만약에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렇게 했을 게 아닌가? 더욱이 지금 자네는 내 충고가 필요해. 그 사령 말일세. 꽤나 끈질긴 놈일세." 브레인은 오싹 한기를 느꼈다. "자네는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나?" 멜힐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그것은 모르겠네. 다만 그놈이 방심해서는 안될 놈이란 것만 알고 있지. 그것뿐인가. 지금 자네에게 매달리려는 놈은 그놈뿐만이 아니야. 어쩌면 유령도 매달릴 걸세." 브레인은 그만 웃어버렸다. 그러자 멜힐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레인! 이건 웃을 일이 아닐세. 자넨 유령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해. 유령이 어떻게 생겨나서 무슨 일을 하는가를……." "그 얘기를 좀 해 주게나." "그럼 잘 듣게." 멜힐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람은 죽으면 세 종류로 나뉜다네. 첫째는 죽는 순간 마음이 폭발해 버려서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는 것과 둘째로는 마음이 죽음의 충격을 이겨내서 내세의 입구까지 오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이지. 그리고 세 번째가 유령일세. 즉 유령이란 마음이 죽음의 충격으로 해서 분열은 하나, 없어져 버리는 게 아니고 내세의 입구까지 오기는 왔지만 불완전해서 내세로 갈 수 없는 것이지. 일종의 미친 영혼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해서 어떤 사람은 영혼이 되고 어떤 사람은 유령이 되나?" "지극한 미움이나 공포심 또는 고민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로 죽으면 그것 때문에 미쳐 버리는 거지. 유령은 지상에 머물러서 산 사람을 괴롭히거나 무서움을 주거나 하는데 그것도 모두 미쳐 버린 영혼이기 때문이라네." "그랬었군." 브레인은 크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전설이나 이야기 또는 이상한 사건에 대한 기록 속에 나오는 유령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었다. 과학이 발달할 때까지 사람들은 유령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그것은 단순한 미신이라고 하게 됐다. 물론 미신이나 착각도 많았으리라. 그저 바람이 나무 가지를 흔들거나 갑자기 새가 날던가, 부엉이가 귓가를 스쳤던가 한 것을 유령이나 악마의 소행으로 오해하거나 한 일도 있었을 테지. 실제로 과학은 그러한 오해를 차례로 밝혀내서, "이 세상에 유령 따위는 없다." 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다만 과학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은 조금 남았으나 그것은 증거가 불충분해서 모르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존재한 유령가지 아주 부정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 거의가 죽음의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멸돼 버리기 때문에 바로 최근까지는 유령이 극히 적었다네." 멜힐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렇지만 지금은 재생 처리를 받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또한 내세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도 늘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유령의 수도 증가했을 테고. 그래서 자네에게 들러붙은 유령도 필시 그런 종류의 하나일걸세." 멜힐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져서 잘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왜 그래? 멜힐!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해 주게." "이젠 돌아갈 시간이 됐네, 브레인. 우리들은 이 세상과 통신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벌써 다 써버렸네. 또 보급하고 나서 얘기하러 오겠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일러주게. 내게 달라붙으려는 유령은 누구의 유령인가?" "글쎄, 아직 알 수 없네. 나도 여기서 조사하고 있지만 알 수 없거든. 그리고 그것뿐이 아냐. 언제 들어 붙을 건지 그것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할 수밖에 없네." "잘 알았어! 앞으로 조심하겠네!" 멜힐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져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토마스, 자네가 일자릴 구하는 건 힘들 걸세. 19가 서322의 에드워드 프랜첼이란 남자를 만나보도록 하게. 거친 일거리이긴 하지만 돈은 벌 걸세." "어떤 일?" 그러나 이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안에 그는 혼자서 남아 있었다.   광검사   멜힐이 일러준 주소에는 너절한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다. 거기에는 '에드워드 프랜첼 흥신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문을 연 것은 머리가 훌렁 벗겨진 덩치 큰 남자였다. "프랜첼 씬가요?" "그렇소. 자, 안으로 들어오십쇼." 프랜첼은 붙임성 있게 브레인을 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곳은 사무실인 모양인데 너저분한 광처럼 이것저것 널려 있었다. 사업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용건은 뭐요?" "일거리를 하나 얻으려고요." 이 말을 듣자 그는 금방 안색이 달라지며, "뭐라고요? 난 또 손님인 줄 알았군." 하고 투덜거렸다. "없어요, 없어. 이 불경기에 무슨 놈의 일거리가 있단 말이오? 돌아가 주시오." "나는 레이 멜힐의 친구인데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해서……." 프랜첼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레이라고? 뭘 하고 있지? 잘 있던가?" "죽었소." "뭐라고? 좋은 녀석이었는데……. 그렇다면 그가 내세로라도 갔던가요?" "가고 말고요. 나는 지금 막 멜힐하고 영혼 교환국에서 얘기하고 오는 길이오." "그랬었군! 참 잘 했습니다." 프랜첼은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레이의 친구라면 어떻게든 일자릴 구해 줘야겠구먼. 자, 좀 일어서 보시오." 하고 말했다. 브레인이 일어서자 그는 브레인의 팔이며 어깨의 근육을 만져 보더니 갑자기 주먹을 들고 머리를 내리치려는 것이었다. 브레인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공격을 멋지게 피했다. "됐소. 몸집도 좋은 데다가 운동 신경도 예민한 편이니……." 프랜첼은 책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사냥꾼이 될 수 있겠군. 무기는 어떤 것을 다룰 수 있소?" 브레인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머리를 짜서 대답했다. "지금은 구식이지만 라이플 총과 권총이라면 쓸 수 있소." "아니, 총 종류가 사냥에는 절대 금물이라는 것쯤은 상식일 텐데. 그밖에 것은?" "그렇지! 총검이라면 쓸 수 있을까요?" 그는 옛날, 태평양전쟁 때 받은 군사 훈련이 생각나서 말했다. 그러자 프랜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오, 총검이라? 정말 진기한 물건이군. 지금은 총검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무니까 당신이라면 손님을 많이 끌겠군." 그는 책상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거기에 무엇인가 써서 브레인에게 건네주었다. "내일 여기로 가서 지시를 받으시오. 계약금이 20달러고 하루 수당으로 50달러는 받을 수 있소. 무기와 장비는 이쪽에서 준비합시다. 물론 내 수수료는 그 중에서 받기로 하지. 좋소?“ "예, 좋고 말고요." 브레인은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사냥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 물어 보고 싶어 좀이 쑤셨다. 어쩌면 법률에 저촉되는 범죄인가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눈치 없이 물었다가 간신히 얻은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 두려웠다. "자세한 내용은 그 종이에 적힌 집에 가면 설명해 줄 거요. 다른 사냥꾼들도 가 있을 테니까. 그럼 잘 해 보오." "대단히 고맙소." 브레인은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떤 일거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뭐라도 좋으니 열심히 해서 머지 않아 남의 윗자리에 서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중에 식사를 하고 여관으로 향했다. 어정어정 걸어오는데 저쪽에서 무엇인지 소동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보니까 한 남자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 한가운데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남자는 50세쯤으로 수수한 옷을 입고 안경을 낀 약간 몸집이 뚱뚱하고,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딴 사람들과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다만 그 남자는 혼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서 그를 피해 지나다니는 것이었다. 브레인이 가까이 갔을 무렵 갑자기 그 남자는 들고 있던 서류 가방 속에서 기다란 단검 두 자루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가방을 내던지고서 두 손에 단검을 잡더니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광검사다!" "경찰을 불러!" "위험해!" 사람들은 황급히 달아났다. 금세 거리는 왁자지껄하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광검사는 단검 두 개를 내두르며 누구랄 것 없이 아무에게나 대들었다. 금세 한 남자가 어깨를 찔리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도망을 치고 어린애와 여자들이 밀려 넘어져서 땅 위에 뒹굴었다. 브레인은 그만 얼이 빠져서 멍청히 그 미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큰길의 저쪽에서 파란 제복을 입은 몇 명의 경찰관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 손에 든 광선총을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모두 땅에 엎드려라!" "빨리 엎드려!" 경찰관이 스피커로 외쳤다. 그 소리와 함께 보도에서는 일체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행인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브레인이 어물어물하고 있으려니까 바로 옆에 있던 열두 세살 가량의 소녀가 그의 팔을 끌어 당겼다. "아이 아저씨도. 빨리 엎드리지 않으면 광선총에 맞아 죽어요!" 브레인인 황급히 엎드렸지만 얼굴을 들고 광검사 쪽을 지켜보았다. 광검사는 핑그르 방향을 바꿔 경찰관 쪽으로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세 경찰관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광선총의 총구에서 엷은 노란 색의 광선이 뻗어 나가 광검사의 몸에 꽂혔다. 몸이 금세 타올랐다. 광검사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의 광선총이 광검사의 등을 겨눴다. 광검사는 불덩어리가 되어 땅 위에 넘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다. 그리고 광검사와 부상자들을 싣고는 다시 황급히 달려갔다. "자아 여러분, 끝났습니다. 어서 일어나 돌아가십시오." 경찰관이 확성기로 외쳤다. 군중들은 일어나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점점 흩어져 갔다. "대체 이게 뭐람?" 브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머, 아저씬 광검사도 모르세요?" 소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아니 알고 있지. 그런데 난 시골서 막 올라와서 진짜를 보는 건 이것이 처음이란다." "아이, 가엾어!" 소녀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뉴욕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광검사가 많은 곳이래요. 제일 많은 곳이 필리핀의 마닐라고, 뉴욕도 1년에 5, 60명쯤은 나타난데요." "더 많단다. 금년엔 벌써 70명 이상인 걸."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주위에서도 지금 본 광검사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브레인의 시대에 교통사고에 대해 사람들이 얘기하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몇 명 당했나?" "다섯 명 뿐,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많이 변했지. 내가 젊었을 땐 이렇지 않았다. 나왔다 하면 반드시 몇 사람은 죽었었지." "경찰관이 오는 게 빠르기 때문이에요." 브레인의 옆에 있던 소녀의 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기 전에 곧 경찰관이 와서 광선총으로 처치해 버리거든. 아이, 멋없어." 경찰관들이 사람들을 쫓아버렸다. 브레인은 딴 사람들과 그곳을 떠나 버스를 타고 여관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놈의 세상이냐! 뉴욕에서 1년에 70명씩이나 미친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다니…….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끼고 있다. 이 시대 자체가 이미 아주 미쳐 버렸단 말인가?' 그는 침대에 누으며 생각을 했다.   사냥꾼들   다음 날 아침 브레인은 쪽지에 적혀 있는 그 장소로 갔다. 그곳은 파크가에 있는 굉장히 화려한 맨션이었다. 벨을 누르자 제복을 입은 사람이 나와 그를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벌써 12, 3명의 거칠게 생긴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대개 서로가 안면이 있는 듯, 난폭한 말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야아, 오토! 이놈 또 만났구나. 그래 아직 이 사냥개를 면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렇다! 알거지가 되셨다 이 말씀이야." "오오, 템. 너도 나타날 때쯤 됐다고 짐작했지." "왜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그래?" "정말이야. 이번 사냥이 끝나면 태평양 해저 목장으로 가게 돼 있어." "야, 세시우스! 요새는 좀 어떠신가?" "그저 그렇지." "어어, 새미 존스! 오래간만이다. 네 짝 스리고는 어디 갔냐?" "죽었지. 요전번 사냥 때 당했어." 거기에 한 사내가 들어와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조용히들 하십시오." 돌아다보니 그 사내는 사냥꾼들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승마용 바지를 입은 스포츠맨 같은 사내였다. 그는 침착한 눈길로 사냥꾼들을 빙 둘러보았다. "안녕들 하시오. 바로 내가 당신네들을 고용한 사냥감인 찰스 헐이오.“ 사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기침을 했다. 헐은 말을 계속했다. "이미 다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사냥에 대해 얘기해 두기로 하겠소. 당신네들은 나를 사냥의 목적물로서 쫓고 죽이기 위해서 고용됐지만 이것은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자살법 시행령에 따라 나의 목숨을 버리는 허가를 얻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세 보험에 들어 있기 때문에 죽으면 곧 내세로 가니까 그쪽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헐은 거기서 일단 말을 끊고 차디찬 눈길로 일동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도 그저 쉽사리 죽지는 않소. 나도 무기를 가지고 당신네들과 싸워서 필경 몇 사람은 죽이게 될 것이오. 사실 이것은 범죄에 속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나는 죽을 거니까 별로 그런 일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소. 다만 만약에 내가 당신네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을 경우는 약간 곤란하오. 물론 그렇게 되면 난 경찰에 잡히기 전에 자살을 하면 되지만, 그런 방법으로 죽는 건 원치 않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나를 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이죠.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요. 자 그러면 질문이 있으신 분은?" "치사한 놈." 누군가가 브레인의 옆에서 수군거렸다. "맞았어. 놈을 쿡 찔렀을 때 상판때기가 빨리 보고 싶군." 누군가가 대답했다. 헐은 또다시 차디찬 웃음을 띄며 말했다. "좋습니다. 질문이 없으시다면 다음 차례로 진행시키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사용하실 무기를 한 사람씩 얘기해 주십시오. 당신은?" "철퇴." 한 사냥꾼이 대답했다. 그것은 철봉 끝에 가시가 돋은 둥그런 쇠뭉치를 붙인 중세기의 병사들이 적의 갑옷을 때려부수기 위해 쓰던 무기였다. "삼지창." 이것도 중세기의 무기로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창 같은 것이다. "창." "철편." 이것은 가시가 있는 철판인데 일종의 던지는 도구였다. "반월도." "총검." 브레인은 자기 차례가 됐을 때 착검을 한 총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청룡도." "도끼." 이것은 새미 존스라는 사내의 대답이었다. "철구." 마지막 사람이 대답하자 헐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의 무기는 장검입니다. 물론 갑옷 따위는 입지 않습니다. 사냥 날짜는 일요일 새벽이며 장소는 내 목장에서……. 오늘 거기까지의 지도를 나눠드리죠." 그리고 나서 헐은 브레인을 향해 말했다. "그 총검술을 쓰는 사람은 잠깐 남아주시오. 딴 사람들은 돌아가도 좋습니다." 사냥꾼들이 다 나가고 난 뒤 헐은 브레인에게 물었다. "총검이란 건 아주 보기 드문 무기인데, 어디서 배웠소?" "군대에서요. 1943년부터 1945년의 태평양전쟁 때에 배웠소." 헐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당신은 과거에서 온 사람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이번 사냥은 당신에겐 최초의 사냥이 되겠군요." "그렇소." "당신은 그 육체와는 달리 퍽 교양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어째서 이런 위험한 직업을 택했소?" "20세기의 인간에게는 22세기 세상에선 이 정도의 직업 밖에 없답니다." "그렇겠군. 그렇지만 사냥이라는 건 어려운 직업이오. 당신은 정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소?" "물론 죽일 수 있소. 전쟁 때는 하루에도 몇 명이나 죽였었소." 브레인은 앞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전쟁 때도 총을 쏘기만 했을 뿐 실제로 사람을 죽인 일은 없었던 것이다. 헐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여튼 마지막 순간이 돼서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소. 나는 조금도 사정을 봐 주지는 않을 테니까." "나도 그렇소." 브레인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그러면 이번엔 내 쪽에서 좀 물어보겠소." "좋소. 뭐든 물어보시오." "당신은 왜 그렇게 죽고 싶어하오?" 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참 동안 브레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당신은 과거의 인간이었지. 지금 세상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대답할 수 없단 말이오?" "아니, 얼마든지 대답해 주지." 헐은 의자에 기대앉아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이 지긋지긋해졌단 말이오. 돈도 있고 건강하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지 다 해 보았소. 모험도 해보았지. 실험도 했소.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다 해보고 난 지금엔 무엇을 해도 심심하고 재미없어 죽을 지경이라오. 내가 못해 본 것이라면 이젠 죽는 일 뿐이오. 그래서 죽고 싶은 생각이라오." "아, 그랬었군요.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시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것인데 그때까지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인생이 아니오?" "그런 인생은 아주 어리석고 둔한 사람들이 가는 길이오. 죽을 때 죽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인생이지. 머리가 뛰어난 학생이 1, 2년 월반하는 일이 있죠? 그것과 같은 것이라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그걸 꾹 참고 이 지상에 매달려 있는 건 정신나간 무식한 인간들이나 할 짓이오." "가난해서 내세 보험을 지불할 돈이 없는 사람들도 그럴까요?" 브레인의 말에 헐은 아주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건 할 수 없지. 가난하다는 건 어리석다는 것의 변명이거든. 그따위 사람들의 일은 나에겐 관심도 없소. 하여튼 나는 죽는다는 멋진 체험을 평범한 침대 따위에선 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나는 멋들어지게 싸우다가 죽고 싶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 브레인은 저도 모르게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그 하잘 것 없는 자살 방법을 새삼스럽게 부끄럽게 생각했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멋없고 어리석고 무의미한 방법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헐의 죽는 방법이 훨씬 남자답고 당당하다. 물론 그것은 내세 보험에 들어 있어 죽어도 곧 내세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만일에 그것을 모른다면 헐이라고 일부러 한시 바삐 죽으려고 하지는 않으리라. 그렇지만, 그는 점점 헐이 부러워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소? 조금은 기분을 알 것 같소?" 헐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브레인은 제 정신으로 돌아오자 홧김에 크게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아니, 모르겠소." 헐은 또 차디찬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면 이번 일요일에 만납시다. 그때까지 이 세상과 하직하는 마지막 기념으로 맛난 음식이나 실컷 먹어 두시오." 브레인은 그의 비꼬는 말을 흘려들으며 밖으로 나왔다.   달라붙는 좀비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오전 중은 총검술 연습을 해 보았다. 연습하고 있노라니까 많이 생각이 났지만 그것으로 내일의 싸움에 충분할 지 어떨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조금 더 계속할까 생각했지만 그 일을 생각하면 초조해져서 도저히 계속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총검을 놔두고 거리로 나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내일 나는 헐을 이길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헐이 한 말이 떠올랐다. 헐은 그에게 도저히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했다. 틀림없이 그렇다. 20세기의 요트 설계기사 시절의 자기였다면 가령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육체부터가 틀린다. 이 몸집은 어디로 보나 싸움께나 할만한 육체인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몇 명쯤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 일이 있었을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육체 속에 들어 있는 마음은 역시 옛날의 토마스 브레인의 마음인 것이다. 어쩌면 또 새로운 육체에 머물면서 육체의 영향을 받아 싸움 잘하는 새로운 토마스 브레인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란 말인가? 브레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이 22세기 세상이 온통 알 수 없었다. 옛날에 미래를 상상했을 때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명이 발달하고 평화스럽고 풍요롭고, 만에 하나 잘못으로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 따위는 지상에서 사라진 지가 오랜 밝은 세상이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내세라든가, 진짜 유령이라든가, 사냥이라든가 하는 마치 중세기의 암흑시대의 꿈 같은 일이 사실로 존재하는 세상, 미쳐버린 세상인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다고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브레인은 22세기의 구경꾼이 아니다. 이 미친 세상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내일이 되면 사냥에 나가 사냥꾼의 한 사람으로서 죽이느냐 죽느냐의 결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브레인은 다리가 아파서 눈에 띄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순간 깜짝 놀랐다. 구석 자리에 있던 한 사나이가 훌쩍 일어나서 이리로 다가왔다. 그 얼굴은 래리 사장의 재생 때 그의 육체를 뺏은 그 좀비였다. 브레인을 알고 있다고 하던 그 기분 나쁜 사령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시오?" 하며 좀비가 맞은 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 하며 브레인도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상대방의 기색만을 살폈다. "앞으로는 날 스미스라고 불러 주게." "아아, 그럼 이름이 생각났군 그래." 좀비는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만 이름 없이 지낼 수도 없고 해서 이름이 생각날 때까지만 스미스로 부르기로 했네." "그런가?" "나는 그 동안 의사를 찾아가 보았지. 몸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어. 의사의 말이 앞으로 몇 개월밖에 지탱할 수 없다는군." 브레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얼굴은 푸르죽죽하게 부어 있었으며, 피부는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축 늘어지고…….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강한 로션 냄새에 섞여 죽은 사람 특유의 송장 썩는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런데,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브레인이 참다못해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날 좀 가만 내버려둬 주게. 난 혼자 좀 있고 싶으니까." "그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왜? 어째서?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브레인은 마침내 참다못해 화가 치밀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스미스는 무표정한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글세. 그게 뭔지 나조차도 모르지. 당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말하자면 당신이 좋은 건지, 아니면 싫은 건지, 또는 당신을 죽이고 싶은 건지 반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건지 분간을 못하고 있어. 그러나 아주 중요한 용건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뭐 이러는 동안에 반드시 생각이 나겠지." "그렇다면 그때까지 날 찾아오지 않을 수 없나?"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당신을 보고 있어야 그만큼 빨리 생각이 날 것이 아닌가?" "집어치워, 기분 나쁘게!" 브레인이 외쳤다.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은가? 나라고 다 썩어 가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건 아니야. 하루속히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내야 하기 때문에 이러고 있네. 그것만 알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나가! 이 마귀야!" 브레인은 홧김에 그만 스미스의 얼굴을 때렸다. 스미스는 힘없이 굴러 떨어져 통로 가운데로 나동그라졌다. 일어났을 때 보니 스미스의 뺨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브레인, 제발 부탁이야!" 스미스는 브레인의 곁으로 다가서려고 했다. "가까이 오지마!" 그는 또 한 대 갈겼다. 스미스는 비실비실 거리며 간신히 일어나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가겠네. 하지만 다시 돌아올 거야. 앞으로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 싫어도 다시 돌아와야 하는 거니까……." 그 말을 남기고 좀비는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브레인은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전신이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투의 아침   브레인이 탄 제트 버스는 동이 트기 전에 헐의 목장 앞에 도착했다. 브레인은 총을 어깨에 메고 버스를 내려 지도를 들여다보며 헐의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저택은 곧 찾을 수 있었다. 하인이 문을 열어 주고 드넓은 저택 안으로 안내를 했다. "헐 씨의 아버님도 역시 사냥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듯한 하인은 묻지도 않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굉장한 사냥이었죠. 아버님은 칼의 명수여서 최고 수준의 사냥꾼을 여섯 명이나 죽이고 난 후에 자신도 목이 잘려서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그렇다면 헐의 집안 중에서 사냥으로 죽은 사람이 그밖에 또 있소?" 브레인은 호기심에 끌려서 물어 보았다. "사냥은 아니었지만 숙부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광검사로서 죽었습죠. 행인을 일곱 사람이나 베어 죽이고 쓰러질 때까지 경관들의 광선총에 열두 번이나 맞았더랬는데……. 그때는 신문에 대서 특필로 보도되는 등 굉장했습죠. 그야말로 폭발적인 대인기였습죠." 이야기하는 동안에 넓은 방 하나가 보였다. 그곳에는 이미 사냥꾼들이 거의 다 모여서 커피를 마시거나 무기의 손질을 하고 있었다. 삼지창이며 철구며 장검이며 총검 등이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은 마치 중세기를 무대로 한 영화나 연극과 흡사했다. "자, 앉게." 그 중 한 사나이가 브레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새미 존스라는 미국 일류의 사냥꾼이고 무기는 도끼요." 브레인도 자기 소개를 했다. 새미가 다른 사냥꾼들을 소개해 주었다. 새미는 퉁퉁하고 다부진 몸집의 사내였으며 그의 도끼는 지금까지의 사냥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말해 주는 듯 몇 개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자넨 오늘이 처음인가?" "그렇소." 브레인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소총에 검을 채우고 준비를 하였다. "조심하게. 녀석은 서투른 놈부터 겨누니까." "잘 알았소." 브레인은 그에게 물어 보았다. "사냥은 보통 몇 시간이나 걸리나?" "지금까지 제일 길었던 게 여드레였지. 그렇지만 기술이 좋은 사냥꾼이라면 대개 하루나 이틀 동안에 끝장을 내지. 그러나 상대방이 얼마나 죽고 싶어하는가에 달려 있네. 모처럼 죽여 달라고 우리들을 고용해 놓고는 막상 그때가 되면 죽는 게 무서워서 숨고 나오지 않는 수가 간혹 있거든. 그럴 때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헐은 그런 일은 안 할 걸세. 녀석은 자기 힘껏 싸워서 우리들을 몇 명이나 죽일 수 있는가 시험해 보려고 할걸세." 새미가 이렇게 말했을 때 헐이 모습을 나타냈다. 푸른색의 실크 옷을 입고 한 쪽 어깨에 장검을 메고 있었다. "안녕들 하시오, 여러분. 밤이 새기 전에 나는 출발하겠소. 그 뒤 30분이 지나면 당신네들은 나를 쫓아 발견하는 즉시 날 죽이시오. 내 목장은 울타리가 둘러 싸여 있으며, 나는 절대로 도망치거나 하는 일은 안 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헐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재빨리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저런 건방진 자식은 딱 질색이야. 이제 두고 보게. 머지 않아 혼을 내줄 테니까." 새미가 정말 미워서 못 견디겠다는 투로 말했다. "자넨 어째서 사냥꾼이 되었나?" 브레인이 물었다. "나 말인가? 난 저런 건방진 부자 녀석이 딱 질색이라서 놈들을 죽이는 게 내 즐거움인걸." 새미는 그러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런데 브레인, 나하고 함께 하세. 자네가 위험하게 되면 내가 돕고 내가 위험하게 되면 그땐 자네가 도와주게나." 브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미가 브레인을 도와줄 마음인 것을 그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미의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 하인이 들어와서 말했다. "여러분! 시간이 됐습니다. 추적을 시작해 주시오." 그 말에 사냥꾼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제일 앞장을 섰던 삼지창의 명수라고 하는 세시우스가 헐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은 안개가 자욱히 낀 산이 있는 쪽으로 향해 있었다. 사냥꾼들은 일렬 종대가 되어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동안 일행은 아무 말도 없이 산을 올라갔다. 이윽고 아침해가 떠오르자 안개는 곧 개었다. 산길이 화강암이라서 발자국이 없어졌다. "각기 흩어져서 찾기로 하자." 세시우스의 말에 저마다 흩어져서 찾기로 했다. 그러나 산길은 험하고 가시덤불이며 잡목이 잔뜩 들어차서 수색이 지지부진했다. 시간은 자꾸 흘러 정오가 되었다. 청룡도를 쓰는 사내가 흰 목도리를 넝쿨 사이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헐의 것이 틀림없었다. 일부러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곧 이끼가 돋은 땅 위에서 헐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은 나무가 우거진 계곡 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있다!"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브레인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 보니 별처럼 생긴 쇠뭉치를 든 건장한 영국 사람이 3, 40미터 가량 앞쪽 덤불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 쇠뭉치는 7, 80센티미터쯤의 자루에 약 30센티미터 가량의 쇠사슬이 달린 끝에 온통 못을 박은 별처럼 생긴 무거운 쇳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이것을 휭휭 휘두르며 싸우는 것이다. 헐이 칼을 뽑아 든 자세로 덤불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영국 사람이 맹렬한 기세로 헐에게 덤벼들었다. 헐은 재빨리 몸을 피하고 영국 사람을 향해 칼을 푹 찔렀다. 영국 사람은 가슴이 깊이 꿰뚫려 굉장한 신음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헐은 그의 가슴에 한 발을 올려놓고 "한 사람 째다!" 하고 외쳤다. 그리고 훌쩍 몸을 날려 덤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나는 저런 쇠뭉치를 쓰는 놈의 마음을 알 수 없네." "처음 공격에 실패하면 마지막이거든." 옆에 가보니 그 사람은 벌써 죽어 있었다. 사냥꾼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헐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한참 쫓아가다 보니 또 바위가 나타나고 발자국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날 오후 온통 땀투성이가 되어서 찾아다녔지만 끝내 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해가 저물어 사냥꾼들은 산 중턱에 캠프를 치고 쉬었다. 헐이 기습을 해 올 것을 경계해서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 작전을 짰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 여긴 놈의 땅이니까 필경 끝에서 끝까지 훤히 알고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쪽은 통 알 수 없으니 문제로군." "그렇다면 놈은 언제까지든 숨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걸세. 어디엔가 숨어서 우리들을 습격할 틈을 찾고 있을 걸세." 브레인은 검은 숲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타날는지 알 수 없군." "그렇지! 아주 엄중하게 망을 보지 않으면 당한단 말일세." 모두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이 완전히 입장을 바꿔 놓아버렸다. 오히려 사냥꾼이 반대로 습격을 받는 입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빨리 아침이 되면 좋으련만…….' 브레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모두 모닥불 옆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하루종일 산 속을 헤매고 다녔기 때문에 몹시 피곤해서 눈을 감자마자 그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우와앗!" 갑자기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괴상한 고함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서 브레인은 펄쩍 뛰어 일어났다. 재빨리 소총을 꽉 주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숲 쪽에서 무엇인가 둔탁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꺼져가는 모닥불에 나무 가지를 넣자 불이 확 피어올랐다. 그때 한 사내가 비틀대며 돌아왔다. 그것은 아까 망을 보고 섰던 창의 명수였다. 쩔뚝거리며 가슴과 손에 부상을 입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은가?" "약간 스쳤을 뿐이야. 그러나 저 녀석은……." "어쨌나, 상대방은?" "마치 도깨비 같은 놈이야." 창을 쓰는 사내는 상처의 치료를 받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미 날이 밝고 있었다.   결 투   아침해가 떠오르자 사냥꾼들은 또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제각기 찾기로 했다. 이윽고 세시우스가 희미하게 보이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크게 소리쳐 일행을 불러모았다. 수색대는 또다시 한 덩어리가 되어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길을 올라갔다. 선두에 섰던 철구를 쓰는 오토가 돌연, "어이, 이쪽이다. 찾았다!" 하고 외쳤다. 바로 옆에 있던 새미와 브레인은 곧 그의 뒤를 따랐다. 쇠사슬에 딸린 쇠뭉치를 잘 쓰는 독일 사람은 쇠뭉치를 윙윙 휘두르면서 전진했다. 그리고 헐을 겨냥해 쇠뭉치를 던졌다. 순간 헐이 납작하게 몸을 엎드렸다. 쇠뭉치는 헐의 머리 위를 10센티미터 가량 스쳐서 바로 뒤에 있던 나무 줄기에 쇠사슬이 칭칭 감기면서 그만 나무를 꺾어버렸다. 헐은 몸을 일으키자 빙글빙글 웃으면서 맨손인 오토를 향해 장검을 겨누었다. 거기에 세시우스가 뛰어들었다. 그는 삼지창으로 헐에게 대들었다. 헐은 장검으로 그것을 털어 버리고 나서 두 사람은 격렬하게 맞부딪쳐 싸웠다. 그 사이에 오토는 철구를 다시 주워 들었다. 브레인과 새미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자 헐은 몸을 돌려 도망쳤다. 세시우스가 이때다 하고 힘껏 찔렀다. 헐은, "욱!" 하고 신음소리를 냈지만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어디를 찔렀나? 얼마만큼이나?" 하고 새미가 물었다. "엉덩이를. 뭐 대수롭지 않은 상처지만 그 자신만만한 헐의 코가 약간은 납작해졌을 걸세." 세시우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 일제히 헐을 추격했다. 그러나 헐은 교묘하게 지형을 이용해서 도망쳐 다시 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 "옳다. 적은 꼭대기 쪽으로 갔으니까 우리 새끼줄을 치듯이 몰아 보세." 사냥꾼들은 서로의 모습이 겨우 보일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서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때때로 위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로 헐이 아직 산꼭대기를 향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됐다! 독 안에 든 쥐다." 꼭대기가 가까워질수록 사냥꾼들은 몰고 가는 간격을 좁혀 헐을 놓치지 않도록 했다. 다시 또 저녁때가 다가왔다. 갑자기 숲이 끝나고 화강암 투성이의 복잡한 길이 시작됐다. 이젠 거의 꼭대기에 가까워진 것이다. "조심들 하게. 적은 가까이 있으니까." 새미가 다른 사냥꾼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순간 헐이 맹렬한 기세로 역습해 왔다. 꼭대기로 아주 몰리기 전에 포위진의 한 쪽을 뚫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돌연 바위 위에서 장검을 휘두르며 나타나 그곳에 있던 푸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푸존은 창을 교묘하게 놀려서 헐의 장검을 받았다. 헐은 뜻대로 되지 않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두 번 세 번 연거푸 공격해 왔다. 푸존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창을 휘둘러 단숨에 헐을 해치우려 했다. 헐은 그만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푸존은 이때다 하듯이 더 한층 격렬하게 덤벼들었다. 이제 조금만! 푸존이 맞서겠냐는 듯이 내미는 것과 그 창 밑을 빠져 나온 헐이 장검을 내민 것은 거의 동시였다. 장검의 끝이 푸존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푸존의 창이 쨍그랑하고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그는 나동그라져 산비탈로 대굴대굴 굴러 떨어졌다. "빌어먹을. 놓치지 마라!" 새미가 외쳤다. 사냥꾼들은 한층 더 포위망을 좁혔다. 헐은 또 위쪽으로 도망쳤다. 해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잿빛 바위 위에 긴 그림자를 끌고 있었다. "아직 30분 정도는 남았으니까 지금 해치워야 해. 밤이 되면 놈의 계획대로 되어버린 걸세. 우리 한 명 한 명을 겨눌 거란 말이네." "그래, 빨리 해 치우자." 사냥꾼들은 더욱 열심히 바위를 향해 압축해 갔다. 브레인이 높은 바위의 모서리를 막 돌아서려는 순간 장검이 쑥 내밀어지는 것과 동시에 헐이 뛰어 나왔다. 브레인은 총을 겨누고 간신히 적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장검이 총신을 미끄러져 내려와 그의 목을 스쳤다.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혀 겨우 그 공격을 면했다. "자아, 소총수!" 헐의 말에, "야압!" 브레인은 창자에서 쥐어짜는 듯한 기합 소리와 함께 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맹렬히 달려들어 계속해서 총대로 헐을 때려눕히려고 했다. 그 순간의 브레인은 확실히 옛날의 브레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인을 직업으로 하는 잔혹한 살인청부업자였다. 그러나 헐은 곡예사처럼 재빠르게 그의 공격을 받아 넘겼다. 브레인은 더욱 세차게 쳐들어가려다 그만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졌다. "이크, 틀렸군!" 헐의 장검이 위이잉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로 날아 왔다. 쨍그렁! 칼날끼리 서로 부딪치는 굉장한 소리가 나서 보니 새미가 도끼로 헐의 검을 물리쳤던 것이다. 새미는 브레인을 밀어냈다. "이번엔 내게 맡겨." 그리고 헐을 향해 버티고 섰다. "내가 상대다!" 헐은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새미의 앞에 서서 장검을 쑥 내밀었다. 새미는 도끼로 검을 막았다. 번쩍하고 불꽃이 튀며 검이 활처럼 휘었다. 다른 사냥꾼들은 두 사람을 둘러싸고 구경을 하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새미, 구석으로 몰아붙여!" "옳지. 그 끝에서 벼랑으로 떨어뜨려라." "도와줄까, 새미?" "쓸데없는 소리 마!" 새미가 고함으로 대답했다. "조심해 새미! 놈은 교활하단 말야." "알고 있어. 걱정 마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새미와 헐은 격렬하게 싸웠다. 브레인은 새미의 훌륭한 전투법에 감탄하면서 보고 있었다. 그는 그 무거운 도끼를 마치 경찰봉이나 막대기처럼 가볍게 휘둘러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가는가 하면 뒤로 휘둘러대기도 해서 세차게 달려드는 적의 검을 잘 막아내는 것이었다.헐은 점차 벼랑 끝으로 몰려갔다. 새미에게 걸리면 헐도 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밀림 속의 사람과 사나운 개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이윽고 싸움의 결말이 났다. 헐이 필사적으로 쳐들어온 순간 새미가 몸을 피해 앞으로 나가며 도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찍었다. "으악!" 굉장한 비명을 지르며 헐은 벼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육체가 계곡 밑에 떨어지는 소리가 털썩 하고 둔탁하게 들려왔다. "시체를 찾아라." 새미가 숨도 쉴 새 없이 말했다. 모두는 벼랑을 빙 돌아 내려가 제각기 찾았다. 헐의 시체는 곧 발견됐다. 그 무참하게 죽은 모습과 억울해 하는 표정을 보면 도저히 지금 내세에 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일행은 매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곳에 표적을 해놓고 헐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요동하는 유령   사냥꾼들은 거리로 돌아오자 다시 제각기 흩어졌다. 새미와 브레인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때 새미가 브레인에게 다음 일거리를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옴스크에 좋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다네. 창의 명수인 어떤 부자가 죽고 싶어하고 있다네. 그리고 그게 끝나면 다음엔 마닐라에 굉장히 큰 규모의 일이 있어. 그건 다섯 형제가 한꺼번에 자살하고 싶다는 걸세. 그래서 일류 사냥꾼을 쉰 명이나 모집하고 있는 형편이야. 브레인, 어때. 함께 해보지 않으려나?" 브레인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냥꾼의 일은 분명히 이 22세기에서 알게 된 일 가운데서는 가장 스릴이 많은, 해볼만한 일 같았다. 게다가 새미라는 좋은 친구도 생겼다. 그렇지만 어쩐지 브레인의 마음속에는 이 일을 기꺼이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의 브레인이 이 법률이 허용하는 살인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브레인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미안하네만 난 이젠 사냥꾼은 안 하려네." "어째선가? 브레인. 자네는 아주 좋은 소질을 갖고 있는데, 조금만 경험을 쌓으면 썩 훌륭한 사냥꾼이 될 텐데……." "그렇지만 내겐 좀더 할만한 일이 있을 것 같아. 살인보다는 좀 나은 일이 말일세." 새미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브레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싱긋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좋을 대로 하게나." "미안하네, 새미!" "괜찮네. 하지만 자네가 지금 걸치고 있는 그 육체는 소중히 하게. 모처럼 훌륭한 것을 차지했으니까 말일세." 브레인은 깜짝 놀랐다. 설마 새미가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넨 알고 있었나?" "물론이지. 자네 몸뚱이는 사냥꾼이 제격인데 자네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 그래서 자네는 사냥꾼이 되는걸 체념한 걸세." "그럴지도 모르지." 두 사람은 이윽고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브레인은 몹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간신히 사귀게 된 두 사람의 친구 멜힐로와 새미, 모두 이렇게 빨리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너무나 애석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살아갈 방법을 자신이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브레인은 자기가 지칠 대로 지쳐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눕자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얼마쯤이나 시간이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돌연 눈을 떴다. 방안은 캄캄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알 수는 없으나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브레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때 화장실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브레인은 전등을 켰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면기가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장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히히히 히히히히!" 어디선가 가냘프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령이다!' 떠돌이 유령이 방안에 와 있는 것이다. 그는 가만히 침대에서 빠져 나와 문께로 걸어갔다. 그러자 공중에 떠 있던 세면기가 굉장한 속도로 급강하해서 그의 머리에 부딪치려고 했다. 깜짝 놀라 머리를 피하니까 세면기는 벽에 부딪쳐 쨍그랑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다음에는 주전자와 컵이 공중에 떠올라 그를 향해 날아왔다. 브레인은 베개를 들어 막았다. 컵은 머리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열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열리지 않는다. 떠돌이 유령이 꼭 잡고 있는 것이다. 주전자가 옆구리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져 물방울을 튀기며 흩어졌다. 또 한 개의 컵이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그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문은 꼼짝도 않는다. 브레인은 창문밖에 비상 사다리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옳지. 거기로 빠져나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떠돌이 유령은 재빠르게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커튼이 활활 타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베개에도 불이 붙었다. 브레인은 연기가 오르는 베개를 내동댕이쳤다. "사람 살려!" 그는 부지중에 외쳤다. 마치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침대가 덜컹덜컹 흔들리며 다가온다. 의자가 공중으로 떠올라서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다가온다. 떠돌이 유령은 그를 혼내주려고, 아니 어쩌면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저 기분 나쁜 나지막한 웃음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지하세계   침대가 그의 육체를 벽으로 밀어댔다. "도와주세요!" 브레인은 다시 한번 온 힘을 다 해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여관 안은 조용할 뿐 대답하는 것은 저 기분 나쁜 떠돌이 유령의 웃음소리뿐이었다. '대체 이놈의 여관에 있는 녀석들은 모두 귀머거리뿐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브레인은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는 철저한 개인주의가 당연한 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딴 사람이야 죽건 말건 그런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가 시체로 발견됐어도 여관에서는 조금도 떠들 필요가 없이 지저분하게 버려진 방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해서 또다시 새로운 손님에게 빌려주면 되는 것이다. 브레인은 새삼스럽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 곧 창문을 두들겨 부수고 밖으로 뛰어 나가려고 생각했다. 삼층에서 잘못 떨어지면 목이 부러져 죽을 것이 틀림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의자며 침대며 탁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브레인은 재빨리 거리와 각도를 계산하자 전신의 힘을 다해 머리로 창을 받아 넘겼다. 몸은 틀림없이 정면으로 창유리에 부딪쳤는데도 유리가 깨지기는커녕 마치 투명한 고무로 만든 것처럼 밖으로 휘청하고 휘어졌다가는 도로 원위치로 돌아왔다. 깨지지 않는 유리였던 것이다. 브레인은 튕겨져서 방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그의 위로 무거운 탁자가 기울어져 다가왔다. 기어 나오려고 했으나 책상이 재빨리 그의 몸 위를 누르고 차츰차츰 힘을 더해갔다. '깔려죽는구나!' 그 순간 지금까지 끄덕도 않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리고 저 무표정한 얼굴의 스미스가 들어오더니 브레인을 누르고 있던 탁자를 밀쳐 버렸다. "빨리 이쪽으로!" 브레인은 일어났다. 스미스는 문을 열고는 그것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열린 문 사이로 밖으로 빠져 나왔다. 방 속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지 뜻을 알 수 없는 화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스미스는 차디찬 손으로 브레인의 손목을 잡고 서둘러 여관을 나왔다. 밝은 불 아래서 보니까 스미스의 얼굴에는 아직 브레인에게 얻어맞은 자리가 남아서 얼굴의 절반쯤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브레인은 섬뜩했다. 스미스의 몸뚱이는 지금도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건가?" 브레인이 궁금해서 물었다. "당신을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 가오." "대체 누구의 유령인가? 아까 그것은." "대개 짐작은 가네만……." "그럼 누구냐?" "자기가 알아보는 게 좋겠지." 스미스는 그 이상은 말을 하지 않고 구식 지하철 안으로 자꾸만 들어갔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컴컴한 동굴 속 같은 지하철은 기분을 나쁘게 했다. 저도 모르게 입구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또다시 그 유령의 드높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유령은 끈질기게 그를 뒤쫓아 온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지하철 속으로 들어갔다. 제일 밑의 철문을 열자 그 안은 전깃불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스미스는 그 속을 자꾸만 걸어갔다. 공기는 축축하고 고약한 냄새가 풍기며 발 밑은 미끈미끈해서 자칫 잘못하면 나자빠질 것 같았다. 조그만 연못 같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곳을 빙 돌아가니까 누더기를 걸친 몸집 좋은 흑인 노인 한 사람이 길을 막고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이것도 좀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냐?" 흑인 노인이 묻는 말에 스미스가 대답했다. "내 친구야. 여길 지나가게 해 주게." "정부의 스파이가 아닌가?" "아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그 흑인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통로의 저쪽으로 가버렸다. "여기가 어디지?" 브레인이 스미스에게 물었다. "뉴욕의 지하가일세. 지금은 쓰지 않는 지하철의 터널이며 낡은 하수도 같은 지하가란 말일세." "왜, 이런 데로 왔지?" "딴 데는 갈 곳이 없어. 자네를 보호할 수 있는 곳이란 이곳 뿐이야. 여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하세계이거든." 거기에 아까의 흑인 노인이, 지팡이에 매달리다시피 의지하고 걷는 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노인은 굉장히 나이가 많은 듯 온 얼굴에 그물 같은 무수한 주름이 덮여 있었다. "이 사람이냐?" 라고 노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브레인, 이분이 좀비 세상의 제일 어른인 킹 씨라네. 인사 드리게." 스미스는 그에게 공손히 물어보았다. "이 사람을 데리고 지하세계를 지나도 괜찮겠습니까?" 킹은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끄덕였다. "좋겠지." 그리고 브레인을 향해 말했다. "보통은 이 좀비 세상에는 좀비 이외에는 들어올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만은 특별로 하지." "정말 고맙습니다." 브레인은 어쩐지 오싹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쨌든 나는 뉴욕의 지하가에 사는 1천백 명의 좀비의 안전을 수호할 책임이 있네. 그래서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우리들을 위해 좋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군." "제가 힘이 된다고요?" 브레인은 놀라서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네. 자네라면 좀비 세상의 일을 정확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일세." 킹 노인은 깊은 생각이 잠긴 눈길로 브레인을 지켜보며 계속 말했다. "일반인들은 좀비를 필요 이상으로 두렵고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좀비를 전염병처럼 전염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어린애를 잡아먹거나 아니면 인간을 괴롭히거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일세.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네. 좀비는 전염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사람을 습격하는 따위의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네. 아니 습격을 하려고 해도 체력이 있어야지. 어린애보다도 더 힘이 약하니 그렇게 할 수가 전혀 없다네." 늙은이는 잘 알아듣도록 차근차근 말을 계속했다. "좀비는 가령 사람의 몸이 죽어 거기에 딴 혼이 들어가려고 할 때 늦어지면 생기는 일종의 병일세. 예를 들면 이 스미스처럼 래리 씨가 재생하려던 사내의 육체에 들어갔으나 그것이 좀 늦어졌기 때문에 좀비가 됐지. 요새는 재생 처리가 활발해져서 스미스 같은 좀비의 수가 늘어갈 뿐일세." 노인은 숨이 찬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확실히 좀비를 본다는 것은 기분이 나쁠 테지. 얼굴은 무표정하고 걸음걸이도 이상하겠다. 몸은 자꾸만 나빠지기만 하고…….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는 걸세. 아니 오히려 일반인들을 사양하고 이렇게 지하세계에 살고 있는 형편이야. 하긴 우리들의 몸에는 태양광선이 좋지 않아서 해가 안 드는 지하가 살기 좋기 때문인 이유도 있네만……." 노인은 브레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여기에서 보고 느낀 바를 지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얘기해 주게. 그러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좀비에 대한 박해도 많이 줄어들 테지. 우리들이 자네를 이렇게 도와준 것처럼. 자아, 그럼 어서 가보게." "잘 알았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브레인은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스미스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노인은 묵묵히 두 사람이 가는 것을 전송하고 있었다. 브레인은 스미스를 따라 어두운 지하세계의 터널 속을 걸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터널 끝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녹이 슨 철계단이 있었다. "그럼, 잘 가게." 스미스는 계단 밑에 선 채로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건가?" "그냥 계단을 올라가면 되네." "이 계단은 어디로 통해 있나?" 그러자 스미스는 자기가 먼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레인을 뒤돌아보는데 그 입가에는 이상야릇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자네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곳일세. 자네는 그에게 다시는 괴롭히지 말라고 부탁하게나." "대체 그게 누구란 말인가?" 브레인이 물었으나 스미스는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할 수 없이 스미스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통로의 끝까지 가니까 문이 있었다. 문 저쪽에는 밝은 전등이 켜진 방이 있었다. 그는 거기에 한 발 들여놓자, "으악!" 하고 외쳤다. 그곳은 커다란 무덤 속이었다.   무덤 속에서   커다란 아치형의 천장에는 끝에서 끝까지 정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신 같은 청년이 천사와 더불어 천국으로 올라가려고 하고 있었다. 브레인은 그 청년의 모델이 누군지 곧 알 수 있었다. "래리 사장이다!" 스미스가 끄덕였다. "그래, 맞았네. 여긴 래리 사장의 무덤일세." "그렇지만……?" 하고 브레인은 더듬으며 물었다. "그가 내게 달라붙은 것을 어떻게 알았나?" "자네하고 관계 있는 사람 중에서 최근 죽은 사람은, 더욱이 내세에 가지 못한 것은 래리 사장뿐이니까 말이네." "그렇군. 그런데 왜 그가 내게 달라붙느냐 말이네." "그건 알 수 없지. 래리 사장 자신에게 물어 보면 알게 되겠지." 브레인은 벽화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나 석가뿐만이 아니라 아랍이며 중국,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신들의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어째서 이런 걸 그려 놓았지?" "죽은 사람의 넋을 위안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래리 사장은 죽어서도 내세에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을 텐데." "그건 그렇지 않다네. 원래 큰 부자라는 것은 내세에 가서도 보통 사람이 가는 내세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신을 그려 장식을 하면 좀더 특별한 내세로 가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지." 스미스는 설명을 하면서 방을 가로질러 제일 구석에 시체가 놓여 있는 방 앞으로 갔다. 브레인은 그 앞에서 주저했다. "이 속에 시체가 들어 있나?" "그렇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나?" "괴롭히는 게 싫으면 별 수 없지." 스미스는 문을 열었다. 안은 강당처럼 넓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보석을 박은 황금의 관이 놓여 있고 그 둘레에는 깜짝 놀랄 만큼 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림, 조각, 악기, 세탁기며 냉장고, 난로, 옷이며 책, 게다가 자동차와 헬리콥터까지 있었다. 또한 테이블 위에는 훌륭한 식사 준비까지 다 되어 있었다. 브레인은 어이가 없어서 스미스에게 물었다. "대체 이건 무엇 때문이지?" "이러한 물건들의 혼이 내세까지 주인을 따라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부자란 원래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군." 브레인은 래리가 불쌍해졌다. 과학의 발달도 영생조차도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금도 바꿔 놓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마치 그 옛날의 이집트의 왕들이 피라미드이며 묘 속에 여러 가지 금은보화를 저축해 두었던 것처럼 래리도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스미스는 테이블 위에 있던 보석함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그것을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보석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속에 든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슨 짓이야?" 브레인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떠돌이 유령에게 떨어져 달라고 하겠다면서?" "물론이지."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라도 놈을 혼나게 해 줘야 한다고." 스미스는 또다시 그곳에 놓인 호화스런 검은색 탁자를 힘껏 걷어찼다. "옳지! 그럴 듯 하군." 브레인도 스미스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래리의 유령은 여기에 있는 물건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걷어차고 때려부수고 하면 생각이 좀 달라지겠지.' 하고 브레인은 생각하고 그곳에 있던 그림을 집어들어 탁자 모서리에다 두들겨 부수려고 했다. "그만 그만!" 머리 위에서 소리가 났다. 브레인과 스미스는 위를 쳐다보았다. 천장 부근에 청백색 안개가 낀 것처럼 느껴졌다. 목소리는 그 속에서 약하게 들려왔다. "그림엔 제발 손대지 말게!" "래리냐?" 브레인이 물었다. "어째서 내게 달라붙어 귀찮게 굴지?" "네놈 책임이니까. 네 놈은 살인자야." "천만에. 네가 유령이 된 건 내 책임이 아니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부터 내가 하는 일엔 액이 붙어서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었거든. 모두가 네놈 때문이다. 그래서 난 어디까지나 네 놈에게 달라붙어서……." 브레인이 그림을 치켜들었다. "그것만은 그만둬!" 래리가 쇳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게서 떨어지겠나?" "그 그림을 내려 놔주게!" 브레인은 천천히 그림을 내려놓았다. "알았네. 쫓아다니는 걸 그만두기로 하지." 래리의 말이었다. "사실은 쫓아다닐 필요도 없지. 브레인, 네 놈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뭐를 말이야?" "너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죽는 거야. 그것도 제 손으로 말이지!" "뭘 쓸데없이 알 수도 없는 소릴 지껄이는 거야." 하고 브레인은 코웃음쳤다. "실컷 웃고나 있어라. 언젠가 그렇게 된다. 언젠간 그렇게 된다……." 래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과 함께 청백색 안개도 사라졌다. 그로부터 조금 지나서 브레인은 스미스에게 인도되어 땅 위로 나왔다. "아주 고맙네, 스미스. 덕택에 살았어." 브레인이 인사를 하자 스미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감사할 필요까진 없네. 만약에 래리의 유령이 자네를 죽이거나 하면 내가 곤란하게 되네. 자네가 죽어버리면 내 수수께끼도 풀리지 않게 되니까. 그러니 제발 몸조심하게." 스미스는 잠시동안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브레인은 속으로 이상한 친구도 다 있군 하고 생각했다.   수상한 여인   다음날부터 브레인은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그는 맨 처음에 생각한 대로 요트 설계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요트 회사라는 회사는 모조리 돌아다녔다. 그러나 역시 어느 요트회사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진 요트 설계기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사이에 그는 오래간만에 마리의 집에 갔다. 마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짓을 해봐도 소용없어요. 토마스, 제가 돈을 드릴 테니 뉴욕에서 멀리 떠나는 게 어때요? 피지나 사모아 같은 곳이 좋을 것 같네요." "어째서 그런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마리는 안절부절 해서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그건 말이죠. 당신에게는 이 22세기의 뉴욕이 생리에 맞지 않아요."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해. 왜냐고? 하여튼 지금까지 나 혼자서 잘 해 왔으니까." "한번쯤 사냥에 나갔다고 그게 뭐 그리 큰 경험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마치 당신이 살던 시대에 남태평양의 토인이 뉴욕 구경을 와서 디즈니랜드를 구경한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그것으로 뉴욕 전체를 알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지요. 22세기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인 거예요." 마리는 입술을 깨물고 잠깐 이야기를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했다. "당신은 여기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또 래리 사장의 무덤도 침범했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렉스 동력회사의 중역들이 매우 화를 내고 있어요. 이제 어떤 복수를 당할는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마리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었지만 마침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좀비인 스미스의 정체도 아직 알 수 없는 거고." "스미스는 괜찮아. 그리고 렉스 동력회사도 이젠 내 일 같은 건 잊어버렸을 텐데 뭐. 그렇게 걱정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요." 마리는 초조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기분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러나 브레인은 체념하는 일없이 요트 회사를 찾아다니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야콥센 요트상회라는 곳에서 부유층을 위해 만들고 있는 구식의 요트를 만드는 일에 브레인을 고용하겠다고 했다. "단, 처음은 임시 고용원이니까 잡일이고 뭐고 아무 일이나 다 해줘야 할텐데, 그래도 괜찮겠소? 그래도 된다고 생각되면 점차 승진시켜 주겠소. 그래도 좋겠소?" 기사장이 말했다. "예. 힘껏 일하겠습니다. 기사장님, 감사합니다!" 브레인은 기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랐다. 다음날부터 브레인은 매일 야콥센 요트상회에 출근했다. 회사에 나가면 청소를 하거나 봉투 겉봉을 쓰거나 혹은 심부름을 가거나 하는 식의 잡일이 많았고, 요트 설계의 일은 적었지만 그는 열심히 일을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22세기의 요트에 관해 공부를 했다. 원래 좋아하는 요트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브레인은 그 지식을 빨리 소화시켰다. 그 다음엔 광고 일을 맡아하게 되었다. 그것은 옛날 20세기에서 그가 하고 있던 일과 아주 흡사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그가 이 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서 마침내 그를 하급 요트 설계기사로 승진시켜 주었다. 브레인은 기뻤다. 그러나 동시에 어쩐지 우습기도 했다. 죽은 후 150년이나 지나서 다시 태어나 또다시 옛날과 같은 하급 기사가 되었으니……. 그렇지만 이것으로 간신히 22세기에 적응되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는 그것을 마리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몇 번이나 연락했는데도 렉스 동력회사의 일이 바빠서 언제나 나가고 없었다. 얼마동안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렉스 동력회사는 물론이고 스미스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자기의 뒤를 누가 밟고 있는 것 같은 육감이 들었다. 그것은 브레인이 평상시와 같이 일을 끝내고 정류장에서 헬기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한 젊은 여자가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 브레인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여자가 자기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자 어쩐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째서 저렇게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여자는 전에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마리가, '당신은 자기에게 어떤 위험이 다가 오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여자는 렉스 동력회사의 스파이일는지도 모르겠다.' 브레인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여자가 결심한 것처럼 터벅터벅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마리 소온 양 말입니까?" 브레인은 되물었다.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여자 말이에요. 그 여자가 어떻게나 유혹했던지 오빠의 마음이 보험 얘기에 미쳐 버렸던 거죠. 아주 말을 잘 해서……. 그리고 그럴싸한 소리만 늘어놓으니까요. 그래서 오빠는 제 얘기 따윈 들은 척도 않고 그만 계약해 버렸던 거예요. 그래서 마침내 육체를 빼앗겨 버렸답니다." 브레인은 언짢은 기분이었다. 모르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기에 걸려서 빼앗긴 육체를 쓰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마리가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런 인간이었단 말인가? 마음이 약해진 사냥꾼을 억지로 설득시켜 가지고 실험에 필요한 육체를 사다니?' 브레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리스는 오히려 미안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미안해요, 브레인 씨. 프랭크는 자기 스스로 몸을 팔았던 것이고, 당신은 그런 내막을 조금도 모르고 그 육체를 쓰고 있는 것뿐이니까 당신 탓이 아닌데 이런 불쾌한 얘길 해서……. 그렇지만 전 오빠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거리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얘기를 걸었던 거예요." "잘 알겠어요. 아리스 양!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브레인은 슬퍼하는 아리스를 오히려 위로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도 아리스는 오빠는 아니지만 예전의 오빠의 육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서 조금은 위로를 받았는지 차차 기분이 좋아져 마침내 생긋 웃으며 헤어졌다. 브레인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아름다운 마리가 그런 강인한 인간이었던가? 그렇다면 이건 좀 다시 생각해 봐야할 문제인지 모르겠군.'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세보험   그로부터 이삼일 후에 브레인은 또다시 영혼 교환국에서 통지를 받았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가보니 역시 멜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토마스, 잘 있었나?" 멜힐의 목소리가 전번과 같이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멜힐인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내세 입구에 있네. 그렇지만 앞으론 그리 오래 있게 될 것 같지가 않네. 왜냐하면 내세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소식이 왔다네. 그래서 내세로 가기 전에 꼭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자네에게 연락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어떤 얘긴데?" "마리를 조심하게." "뭐라고?" 브레인은 놀라서 되물었다. "마리를 조심하라고……." "그건 또 왜?" "그 여자는 자네를 배반할 지도 몰라." "그래? 그건 어째서지? 마리는 나를 몇 번이나 도와줬었는데……. 동서남북조차 분간 못하는 이 22세기에서 맨 처음으로 친절을 베풀어 준 것이 바로 그녀였는데. 그런 여자가 어째서 나를 배반한단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해서 배반한단 말이지?" "그건 나도 알 수 없네." 멜힐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마리가 요새 계속 렉스 동력회사의 중역들과 무엇인가 비밀 회담을 하고 있다네. 그 중역들의 회의실이란 게 영혼이 들어갈 수 없게 방호 스크린에 둘러쳐 있어서 안에서 어떤 의논이 진행되고 있는 건지 통 알 수 없단 말일세. 그렇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러네. 브레인 자네의 몸에 어떤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그리고 마리는 분명히 그 비밀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단 말이네." 브레인은 그의 말을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잘 알았네. 앞으로 조심하겠네." "브레인, 나의 충고를 들어주게. 그건 하루빨리 이 뉴욕을 떠나 어딘가 먼 곳으로 가란 말일세." 브레인은 속으로 놀랐다. 그 말은 마리가 자꾸만 자기에게 권하던 말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러나? 멜힐." "계속 뉴욕에 머물러 있으면 자네의 목숨은 그리 오래지 않을 걸세." "그 이유를 알고 싶단 말일세. 멜힐, 그 이유를 분명히 알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나 여기에 버티고 있을 걸세." "자네라는 인간도 고집불통이군." 멜힐은 별 수 없다는 듯이, "할 수 없군. 어쨌든 일체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아무도 믿어서는 안되네. 꼭 명심하길 바라네." 하고 말했다. "응, 잘 알았네. 꼭 명심하지. 멜힐, 언제 또 얘기할 수 있겠나?" "글세!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군. 하여튼 내 말을 부디 명심해야 되네." 그리고 통화는 끝났다. 브레인은 지금까지보다도 한층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아파트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그가 침대에서 늦잠을 자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도어 텔레비전을 바라보니 거기에 옷매무새가 깨끗하고 성실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토마스 브레인 씨, 계십니까?" "있긴 있습니다만 당신은 누구요?" "저는 불사판매 회사에 있는 반스 파렐이란 사람입니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이것이 저의 신분증명서입니다." 그는 도어 텔레비전 카메라에 손에 든 카드를 내밀었다. 그것은 에어 카의 비행면허증과 회사의 신분증명서였다. 그리고 지문 증명서도 있었다. 가짜는 아닌 것 같았다. 브레인은 도어의 버튼을 눌러 파렐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증명서를 많이도 갖고 다니십니다 그려." 브레인의 그 말에 파렐은 빙그레 웃었다. "자격도 없는 놈들이 내세 보험의 외무원을 하는 가짜들이 많아서랍니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영생하기를 바라지요. 그렇지만 내세 보험은 굉장히 비싸기 때문에 누구나 다 보험에 가입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그럴싸한 말로 사기를 치는 자들이 꽤 있답니다. 사실 전 재산을 사기 당한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렇게 증명서를 많이 가지고 다닙니다. 물론 경찰에서야 엄중히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기꾼들이 법망을 뚫고 아주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때문에 단속하기가 몹시 힘이 들지요." "예, 그렇군요. 그런데 제게 무슨 용건이 있어서 오셨습니까? 나는 도저히 내세 보험에 들만한 재력이 없으니까 아무리 권한다 해도 소용없는 일인데요."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당신의 재산 상태를 조사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찾아 온 겁니까?" "실은 내세 보험에서는 매해 상당수의 무료 서비스를 해 드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번에 그런 무료 서비스에 당선되셨습니다." "뭐라고요?" 브레인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건 무엇인가 잘못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글쎄 나는 어떤 퀴즈에 나간 일도 없고 복권을 산 기억도 없소. 그리고 은행도 회사도 관계가 없는 걸요."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메인파벤저 섬유회사가 매년 거행하는 자선서비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메인파벤저 섬유회사라는 것은 나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쪽에선 당신을 잘 알고 있는 걸요. 당신이 1958년의 세계에서 오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요?" "메인파벤저 섬유회사에서는 과거의 세계에서 멀리 이 22세기까지 오신 분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내세 보험에 가입시켜 드리기로 했답니다." 파렐은 빙그레 웃으며 브레인을 보았다. "축하합니다, 브레인 씨. 당신은 이 상품을 안 받으시겠습니까?" 브레인은 그 청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청년은 지극히 진실해 보였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불사판매회사로 문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돈 한푼 없는 자기를 속여서 뭘 하겠다는 말인가. 설혹 속았다 해도 별로 손해 될 것도 없는 것이다. 내세 보험에 무료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런 멋진 선물이 이렇게 쉽사리 굴러들어 올 줄이야…….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크나큰 기쁨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무도 신용하지 마라!' 그때 멜힐의 경고가 문득 가슴에 떠올랐다. 그러나 기쁨은 그 경고보다 훨씬 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사판매회사의 외무원에게 물었다. "이 서비스를 받으려면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그저 불사판매회사 빌딩까지 오셔서 간단한 수속만 해 주시면 됩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내세 보험에 가입되는 것이다. 그냥 죽게 되면 백만 명중에 한 명 정도 갈까말까한 내세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좋습니다. 서비스를 받기로 하지요. 그럼 언제 가면 되지요?" "만약에 지장이 없으시다면 지금이라도 곧……." "그렇게 하죠." 브레인은 일어섰다. 두 사람은 함께 아파트를 나섰다.   음 모   두 사람을 태운 헬기 택시는 곧장 불사판매회사 빌딩을 향해 날아갔다. 파렐은 브레인을 데리고 접수부로 갔다. 브레인은 신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지문을 찍고 수렵인 면허증을 내보였다. 접수부 계원은 그것을 받아 컴퓨터에 넣어 본인이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입실 허가증을 건네주었다. 다음으로 파렐은 브레인을 테스트 실로 데리고 갔다. 테스트 실에서는 젊은 기술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여러 가지 테스트를 했다. 각종 펜이 여러 장의 그래프 위를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기술자들은 그것을 들여다보며 브레인에게는 알 수 없는 전문용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브레인은 그 말을 듣고 있는 중에 점점 불안해졌다. "여보시오! 수술이 잘 되지 않는 수도 있소?" 하고 한 기술자에게 물어봤다. "잘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죠. 사람 따라 각각 다르니까요." 그 기술자가 그렇게 대답했다. 브레인은 그 말에 그만 충격을 받았다. "여보시오! 불사판매회사의 선전으론 수술은 언제나 모두 성공적이라고 그러지 않았소?" "아아, 그건 광고죠." 또 다른 기술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한다. "그런 무책임한!" "영생 처치는 아주 어렵고도 미묘한 수술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가 잘된다고만 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그 수술의 성패여부를 수술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소?" "대개의 경우엔 알 수 있죠. 말하자면 K-3 인자라는 것이 나오지 않으면 우선 안심해도 좋죠." "그러면 그 K-3 인자라는 것은 또 뭔가요?" "그걸 알면 고생하질 않게요." 기술자는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브레인의 겁먹은 듯한 얼굴을 보자, "그렇지만 K-3 인자란 게 그리 흔한 게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라고 하면서 딴 기술자에게 눈짓을 했다. 다른 2, 3명의 기술자가 그를 둘러싸고 금세 그의 팔에 주사 바늘을 깊이 꽂았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오?" 라고 물어보는 사이에도 심한 어지러움이 브레인을 습격해 왔다. 그가 비틀거리자 기술자들은 그를 붙잡아 흰 수술대 위에 들어올렸다. 의식을 다시 찾았을 때 브레인은 감촉이 좋은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좋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간호사가 그에게 향기로운 음료가 든 잔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마시자 곧 머리가 개운해졌다. 옆에 파렐이 서 있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음, 괜찮소!" "좋으실 겁니다. 만사가 다 잘 되었으니까요." "사실이오?" "정말입니다. 브레인 씨, 이젠 당신도 영생하시게 됐습니다." 파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젠 틀림없이 영생하는 겁니까? 언제 죽든 또한 어떻게 죽든 간에 틀림없이 내세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어떤 원인으로 죽었든, 또 지금 이 순간에 죽든지 당신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기쁘시죠?" "글쎄, 아직은 알 수 없군요." 브레인은 정직하게 말을 했다. 사실 아직은 무엇이 무엇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 기쁨이 실감나게 느껴진 것은 그때부터 약 30분쯤 지나서 아파트로 되돌아 왔을 때였다. '나는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이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돌연 굉장한 기쁨이 브레인을 에워쌌다.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젠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달여오는 트럭 바퀴 밑으로 뛰어들어도 좋고, 광검사가 되어 광선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관들에게 대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이 지금까지 얼마나 죽음의 그림자에 겁을 내고 두려워하면서 살아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숨어서 사람들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죽음의 그림자에 겁을 먹고 항상 그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무거운 짐이 지금 완전히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 자유스러움! 이 얼마나 경쾌하고 멋진 기분이란 말이냐! 그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안에 들어서서 문을 닫는 순간 화상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브레인입니다." "브레인!" 그 목소리는 마리였다. "지금까지 어딜 가셨죠? 점심때부터 계속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마리의 목소리는 몹시 다급하게 들렸다. "외출했었지. 마리는 지금 어디 있지?" "렉스 동력회사에요."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계속해서 말했다. "렉스 동력회사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가를 조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브레인, 큰일 났어요." "뭘 그렇게 다급하게 굴지. 이 세상에 그렇게 큰 일이 있을 턱이 없지." 브레인은 여전히 내세 보험에 든 기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들떠 있었다. "오늘 당신한테 불사판매회사의 세일즈맨이 찾아갈 거예요. 그 세일즈맨이 당신에게 찾아가 무료서비스의 내세 보험에 당첨됐다고 말할 거예요. 그렇지만 절대로 승낙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브레인 씨?" "어째서지? 엉터린가?" "아뇨. 그 세일즈맨은 물론 진짜죠. 내세 보험도 진짜이고, 그러니까 절대로 승낙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통 알 수 없군." "설명은 나중에 하고, 하여튼 세일즈맨이 찾아와도 거절하셔야 해요." 브레인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늦었어. 벌써 받아버린 걸." "뭐라고요?" 마리는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아까 두세 시간 전에 그 세일즈맨이 왔다갔지. 좋은 얘기였기에 보험에 들어버렸어요. 왜 안 된단 말이지?" "수술을 받았어요?" 마리가 화 난 목소리로 물었다. "받았지. 지금 막 그 회사에서 돌아온 길이야." "아아! 브레인, 어쩌면 좋아?" 마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게 왜? 어째서 안 된단 말이지?" 브레인도 초조해서 물었다. "세일즈맨은 메인파벤저 섬유회사에서 보낸 선물이라고 하던데……." "그 회사는 렉스 동력회사의 자매회사란 말이에요. 브레인, 그러니까 표면으론 메인파벤저 섬유회사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보내준 것은 렉스 동력회사인 거죠. 브레인, 이건 렉스 동력회사의 음모란 말이에요!" 마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음모라고? 어떤?" "몰라서 물어요? 내세 보험에 들면 자동적으로 자살법의 적용을 받게 되어 있잖아요, 브레인." "자살법이라고? 그렇지만 난 내세 보험에 들었다고 그렇게 쉽사리 자살 따윈 하지 않을 걸." "그런 게 아니에요! 자살법의 적용을 받게 되면 렉스 동력회사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더구나 법에 저촉됨이 없이 당신을 죽일 수 있게 된다는데!" "아, 아니! 그건 대체 무슨 소리야?" "그건 당신의 생명은 당신 것이지만 당신의 육체는 렉스 동력회사거란 말이죠. 말하자면 내세 보험에 든 이상 이제는 아무 때나 당신의 육체를 죽일 수 있게 된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자살한 것으로 되고……." 그러나 브레인에게는 아직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째서지? 마리, 왜 렉스 동력회사가 날 죽이려고 하지?" "예전에 제가 한번 얘기한 일이 있죠. 렉스 동력회사가 당신을 과거의 세계에서 제멋대로 데려온 죄로 법원에 고소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언젠가 래리 사장이 당신에게 자살을 권한 일이 있었죠. 하여튼 당신이 없어지게 되면 법원도 고소할 이유가 없어지잖아요." 간신히 그간의 사정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랬었군! 이제야 알겠어. 마리가 전부터 뉴욕에서 멀리 떠나버리라고 하던 것도 그 때문이었군." "그래요. 회사가 당신을 없앨 방법을 이것저것 연구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피하도록 하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우선 당신은……." 갑자기 거기서 전화가 끊어졌다. 영상이 깜빡 사라졌다. 브레인은 초조해져서 다이얼을 계속 돌려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선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지금까지 계속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 있었던 그 우쭐대던 기분! 그 미칠 듯한 기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직 죽고 싶진 않다!' 그는 마음속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영원한 생명도 좋지만 아직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다. 아직 공기를 마시고,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살고 싶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다. '죽는 건 싫다!' 그는 재빨리 돈이며 그밖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만약에 렉스 동력회사가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아파트에 있다는 것은 마치 그물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렉스 동력회사에서는 이미 그가 이 음모를 눈치챈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마리하고의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는 슬며시 문을 열고 복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복도로 빠져나가서 달리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막 돌려고 하는 순간 그곳에 불길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막다른 골목   '아차!' 브레인은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 사내는 커다란 핸드 미사일을 브레인의 배에 겨냥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보낸 사냥꾼이다. '이젠 틀렸다.' 각오를 했을 때 그 사내가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난 또 누구라고……. 토마스 브레인이 아닌가!" 그건 저 새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네가 이번 일에 목표물이었단 말인가? 내가 자네를 죽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하지만 일은 일이니까." 새미는 그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자네가?" "렉스 동력회사가 일류 사냥꾼을 고용하고 싶었던 게지. 그래서 내가 뽑힌 걸세. 자 걱정 말게. 한 방으로 깨끗하게 해 줄 테니까." "잠깐만. 아직 난 죽고 싶지 않아!" 브레인은 손을 들어 내저으며 말을 했다. "야, 자네답지 않군. 자살을 지원해 놓고 이제 와서 겁을 내다니." "아닐세. 난 자살 같은 걸 지원한 일이 없어. 아직 죽고 싶지 않단 말일세." "알 수 없군. 자넨 내세 보험에 들었잖았나?" "속았어! 사기에 걸렸단 말일세. 난 살고 싶어. 새미, 제발 날 살려주게!" 새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브레인을 겨누고 있던 핸드 미사일을 아래로 내렸다. "옛날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었는데. 목표물을 동정하게 되다니……." 새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좋아, 브레인. 도망쳐라. 사냥의 목표물은 달리고 있는걸 겨냥하는 게 훨씬 재미있지.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될수록 빨리 도망가게. 앞으로 다시 만나면 그땐 용서 없다." "고맙네, 새미!" 브레인이 복도를 달려나가려고 하자 다시 새미가 불러 세웠다. "잠깐만 브레인, 자네가 알고 있는 사냥꾼 전부가 지금은 자네의 적일세. 뿐만 아니라 교통로에는 모두 망이 쳐졌네. 발견만 되면 죽일 걸세." "고맙네!" 브레인은 계단을 뛰어내리며 외쳤다. 큰길로 나갔으나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물어물할 시간은 없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있다. 그때까지 어디엔가 숨어 있지 않으면 틀림없이 죽게 된다. 브레인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자 지저분한 빈민굴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빈민굴은 낡아빠진 아파트며, 지저분한 술집이며, 이상야릇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브레인은 그런 거리를 여러 사람 사이에 섞여서 걸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한시 바삐 뉴욕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냥꾼들에게 들켜서 그 자리에서 죽게 되겠지.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도망칠 수 있단 말이냐?' 교통로에는 모조리 망이 둘러쳐져 있다고 새미가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기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무기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물론 사냥의 목표물이 무기를 갖는다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다. 만일에 그가 사냥꾼 중 한 사람이라도 부상을 입히거나 죽이거나 하게 되면 경찰관은 그의 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골똘히 생각하면서 걸어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니 바로 눈앞에 총포상이 있었다. 그 진열장에는 반짝반짝하게 닦은 광선총이며 핸드 미사일이며 나이프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브레인은 빨려들 듯이 가게 속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얼 드릴까요?" 점원이 카운터 저편에서 물었다. "총을 좀 봅시다." 하고 브레인이 말했다. "어떤 총 말씀입니까?" "그렇군! 광선총이 좋겠지."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케이스 안에서 소형 광선총을 꺼내 브레인에게 주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값도 싸지만 소형이라서 가볍고 그러면서도 위력은 충분하답니다. 금성의 공룡 수렵용으로도 사용되는 총입니다." 브레인이 손에 받아 보았다. 묵직한 게 믿음직했다. 점원은 계속 자랑을 늘어놓았다. "오백 미터쯤 떨어졌어도 틀림없이 목표물에 명중합니다. 그 노출 조절 다이얼로 광선을 부챗살처럼 넓힐 수도 있고 바늘 끝처럼 뾰족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답니다." "좋아. 그럼 이걸로 하죠." 브레인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러나 점원은 총을 손에 들고 또다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단추로 광선을 연속적으로 또한 한발 한발씩으로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는 4시간용입니다. 충전기는 어느 총포점에서나 간단히 갈아 끼울 수 있습니다." "이걸로 정했어요. 얼맙니까?" "75달러입니다." 브레인은 돈을 건네주고 총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점원은 총을 든 채로 말했다. "그전에 수렵 허가증을 보여 주십시오." 브레인은 수렵 증명서를 점원에게 내 보였다. "빨리 주게. 바쁘니까." 그는 또 손을 내밀었으나 점원은 총을 든 채,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카운터 안에 있는 사진을 잠깐 들여다 본 후 그 이름과 증명서의 이름을 비교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에게는 팔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증명서를 봤지 않소?" "여보세요. 하지만 당신은 사냥의 목표물이 아니요? 목표물이 무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테지요? 삼십분 전에 당신의 이름과 사진이 전 뉴욕에 배포됐어요." 브레인은 점원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때는 벌써 점원의 손이 광선총을 꽉 잡고 총구를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점원은 또 한 손으로 재빨리 카운터의 뒤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2, 3분만 있으면 곧 사냥꾼들이 올 거요." 브레인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점원의 얼굴에 던져 상대방이 멈칫하고 주춤거리는 사이에 가게 밖으로 뛰쳐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미 밖은 황혼이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점원의 연락으로 이 주위 일대에는 벌써 사냥꾼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달리면서 브레인은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됐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게지 하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사람들을 비집으며 자꾸만 도망쳤다. 그러자 모퉁이에서 한 사내가 유유히 나타났다. 세시우스였다. 그는 엷은 웃음을 띄우며 광선총을 빼들었다. 브레인은 황급히 큰 거리를 옆으로 빠져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거리를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멈칫 서 버렸다. 뒷골목을 빠져나가는 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등뒤에서 빛을 받고 있어서 사람의 모습은 어둡게 되어버려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한 손은 허리에 대고 또 한 손은 팔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손에는 광선총이 들려 있었다. 브레인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뒷골목 입구에는 세시우스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젠 독 안에 든 쥐다! 앞의 사냥꾼이 광선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굉장한 광선이 어둠을 뚫고 브레인의 겉옷 소매를 태웠다. 브레인은 그때 약간 문이 열려 있는 집을 발견하자 그리고 뛰어갔다. 그렇지만 브레인이 달려가자 문은 덜컹하고 닫혀버리고 말았다. 또 번쩍하더니 브레인의 등에 새카만 구멍을 뚫었다. 세시우스가 천천히 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브레인은 세시우스 쪽으로 달려갔다. "비켜라! 세시우스, 내가 한다." "오케이, 부탁한다. 핸드릭!" 세시우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총에서 나온 죽음의 광선이 닿지 않도록 벽에 바싹 달라붙었다. 핸드릭이라는 남자가 또 광선총을 쏘았다. 브레인은 넙죽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도망치자 그 뒤를 광선총에 끈질기게 따랐다. 보도의 콘크리트 위에 불탄 자국이 생기고 물이 고인 곳에서는 쏵 하고 소리를 내며 물이 증발했다. 그러니 광선에 잡히는 것은 이미 시간문제였다. '아아, 마침내 나는 이런 죽음을 당해야만 했던가!' 브레인은 보도 위를 뒹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지하철의 쇠창살이며 맨홀의 뚜껑이 딱딱하게 몸에 부딪쳐 아팠다. 광선이 범위를 좁혀 왔다. 순간 발 밑에 있던 지하철의 쇠창살이 덜컹하고 밑으로 빠지며 그의 몸은 쇠창살과 함께 거꾸로 박혔다. 털썩하고 굉장한 힘으로 땅 위에 떨어졌다. 어깨가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 위에서 보이지 않을 곳까지 몸을 질질 끌고 갔다. 간신히 몸을 감추었을까 하는 순간, 위에서 광선이 쏟아져 들어와 굉장한 기세로 콘크리트 위에 불꽃이 튀었다. 일 초만 늦었어도 틀림없이 죽었으리라. '살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발에서 힘이 쭉 빠지고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곧 의식이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의식이 없어져 가면서 그는 생각했다. '역시 할 수 없었다. 이젠 그들이 내려와 나를 죽일 테지.' 그리고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추 방   정신을 되찾을 때 브레인은 내세라는 곳은 여태껏 상상한 것만큼 기분 좋은 곳은 아니군 하고 생각했다. 어두컴컴하고 흙탕과 기름냄새가 났다. 머리는 쾅쾅 울려서 아프고, 등이며 허리며 어깨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건 이상하군. 죽어서 혼백만 남았을 텐데 이렇게 여기저기 아파서야…….'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는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이 떠졌다. 살아 있는 것이다. 아직 내세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좀 어떤가?" 가까이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브레인은 어둠을 향해 소리질렀다. "나 스미스일세." "자네였나! 또 나를 구해줬네 그려." 브레인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일어났다. "아주 아슬아슬했지." 하며 좀비는 대답했다. "자네가 목표물이라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왔다네. 우리 좀비 일행이 열심히 자네 이름을 불렀는데 자네는 영 듣지 못하더군." "그랬나? 그럼 아까 그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그려." "그때 돌아다 봐주기만 했더라면 곧바로 여기에 데리고 올 수 있었지. 그렇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에 뒤를 밟아 왔네. 어떻게 해서든 자네를 구출하려고 여러 번 지하철의 쇠창살로 가 맨홀 뚜껑을 열었지만 모두 헛수고였네." "그럼, 그 맨홀 뚜껑이며 쇠창살은 저절로 벗겨진 게 아니었나?" "물론이지. 우리들이 벗겼다네. 너무 지나치게 난폭한 방법이라서 미안했네만, 그런 방법밖엔 없었으니까." "아아 고맙네." 브레인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고마워했지만 스미스는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정신을 잃은 자네를 큰길에서 이 뒷골목 쪽으로 옮겨왔네. 여기라면 사냥꾼들도 그리 쉽사리 찾아낼 수는 없을 걸세." "정말로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네." "그런 인사는 필요 없네. 나는 자네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니까." "이젠 그 이유를 알았나?" "아니, 아직 모르네." 어둠에 익숙해지니까 차츰 좀비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겠나?" "지하로 빠져 뉴욕을 탈출시켜주지. 그 다음은 자신이 해야지." "그럼 빨리 가세." "잠깐만. 지하세계를 통과하려면 킹의 허가가 필요하네. 지금 그걸 킹에게 허락 받고 있는 중일세."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얼마 안되어 큰 흑인 남자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이쪽으로 오는 킹의 모습이 보였다. "큰일날 뻔했네, 브레인." 하고 킹이 말을 걸었다. "킹 영감님, 브레인을 뉴욕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지하세계를 통과하고 싶은데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스미스가 공손히 물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노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열두 명의 좀비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우리들은 이미 사냥꾼하고 얘기가 됐네. 그래서 자네를 30분 이내에 분명히 지상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지. 자네는 곧 여기를 나가야 하겠네." "어째서 이번엔 구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브레인은 절망에 떨며 킹에게 물어 보았다. "우리들 좀비는 지상세계 사람들의 덕으로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라네. 그러니 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네." 킹은 우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여기로 온 지 얼마 안돼서 몇십 명이나 되는 사냥꾼이 밀려 들어왔네. 그리고 우리들 좀비를 못살게 굴어 자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냈다네. 30분 이내에 자네를 내놓지 않으면 우리들을 모조리 죽이고라도 찾아내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나로서는 그들의 얘기를 안 들을 수 없었다네." "그랬습니까? 아니 너무 폐를 끼쳤습니다." 브레인은 힘없이 일어섰다. 그러자 킹은 그의 손을 잡고, "아직 체념하는 건 이르네. 나는 자네를 지상의 어느 곳으로 내 보내겠다고 는 하지 않았으니까. 지금부터 자네를 서 79가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지하철 출구로 안내해 주지. 거기는 아직 지키고 있지 않을 것이니까." 노인은 브레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거기에 자네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걸세. 그 뒤론 그 친구가 도와줄 걸세." "친구? 그게 누굽니까?" "이젠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자 빨리!" 킹에게 재촉 받은 브레인은 걷기 시작했다. 스미스며 그밖에 좀비들도 브레인의 뒤를 따랐다. 꼬불꼬불한 지하철의 미로 속을 걸어 가노라니까 머리가 아픈 것도 차츰 낳았다. 이윽고 일행은 콘크리트 계단이 있는 곳까지 왔다. "여기가 출구라네. 브레인, 무사하기를 빌겠네." "고맙습니다, 킹 씨. 고맙네, 스미스." "살아있어 주게. 난 반드시 자네를 만나러 가네." 스미스의 말이었다.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다 올라가 밖으로 나가자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79가는 강아지 한 마리 얼씬하지 않고 조용했다. 사냥꾼들이 아직 여기까지는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친구가 기다린다고 했는데 틀림없이 마리일 거야. 아직 오지 않은 걸까?' 하고 생각했을 때 "브레인!" 하고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했던 것 같은 마리의 음성이 아니고 남자의 목소리였다. 브레인은 섬찟 놀랐다. 사냥꾼 중의 한 사람, 새미가 아니면 세시우스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재빨리 지하철 입구로 되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차! 함정에 빠졌군.' 그는 이를 갈았다.   탈 출   "브레인, 브레인! 날세 나야!" 또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브레인은 주위를 살펴봤으나 역시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돌연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렸다. "레이? 레이 멜힐인가?" "당연하지." 멜힐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고맙네!" "목소릴 낮춰라! 사냥꾼들이 가까이 와 있네. 이제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게. 알겠나?" "알았어." 브레인은 공중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향해 대답했다. "바로 지금이다. 서쪽으로 빨리!" 브레인은 지하철 입구를 떠나 서둘러 큰 거리를 걸어갔다. 2, 3분쯤 걸었을까 할 때 갑자기 멜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그 빌딩 옆에 숨어." 브레인은 재빨리 빌딩 구석에 몸을 숨겼다. 헬기 카가 빌딩 옥상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사냥꾼일세." 라고 멜힐이 속삭였다. "자네를 잡기 위해서 사냥꾼들은 대운동회를 벌리고 있네. 자네 목에 걸린 상금이 온 거리에 나붙었다네. 자네의 거처만 알려줘도 상금을 받을 수 있어. 이런 상황이니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네." "멜힐, 정말 고맙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난 이제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서 자네를 구하는 일만 끝나면 바로 내세로 가네." "멜힐……." "가만! 듣고만 있게. 에너지가 다 되어서 많이 말할 수가 없어. 마리가 자네를 미국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준비를 다 끝냈네. 마리에게는 미안하게 됐네.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지만 그 대신 그녀를 도와 지금부터 자네를 어떤 사람들에게 데리고 가겠네. 자, 그럼 앞으로 가게!" 브레인은 빌딩 밑에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떤 계획인가?" "그건 나도 몰라. 잠깐만 그 우체통 뒤에 숨게!" 브레인은 재빨리 우체통 뒤로 몸을 숨겼다. 그때 세 사람의 사냥꾼이 무기를 들고 거리 모퉁이로 나타났다. 세 사람이 모퉁이를 돌아서자 멜힐은 브레인에게 가라고 했다."눈이 잘 보이는군." "아니, 아무거나 다 보인다네. 어서 이 길을 가로질러 가게." 브레인은 전속력으로 대로를 가로질렀다. 그는 그로부터 약 15분 동안 멜힐이 말하는 대로 큰길을 앞으로 갔다 꺾어졌다 또는 옆 골목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멈춰 서기도 하고 되돌아가기도 하여 어떤 높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 빌딩일세. 351호실에 가면 마리가 고용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브레인, 또 만나세. 그럼 어서 가게!" "앗, 잠깐!"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브레인이 차도로 나선 순간 두 사내가 거리 모퉁이를 돌아서며 브레인을 발견했다. 순간 그 중의 한 사내가 브레인을 손가락질했다. "저놈이다!" "그래 저놈이다! 잡아라!" 사내들이 브레인을 향해 달려왔다. 브레인은 주먹을 쥐고 앞서 오는 사내에게 주먹을 먹였다. "와!" 그 사내는 나가 떨어져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또 한 사내를 보니 그쪽은 멜힐이 상대를 하고 있었다. 사내의 귓가에 쓰레기와 깡통 뚜껑이 덜그럭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사내는 두 팔을 번쩍 쳐든 채 와아와아 고함을 지르며 깡통 뚜껑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브레인은 달려가서 사내를 후려갈겼다. "자, 이젠 괜찮을 걸세." 멜힐의 목소리가 몹시 힘이 없었다. "이젠 에너지가 다 되었네. 이 이상은 도울 수 없네. 그럼 잘 해보게, 브레인." "멜힐! 잠깐만!" 브레인이 외쳤으나 이미 대답이 없었다. 어물어물할 수는 없었다. 브레인은 달려서 그 빌딩으로 들어가 삼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351호실 문 앞으로 가서 똑똑똑 가만히 두들겼다. "들어오십시오." 라는 대답이 들렸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모두 커튼을 내려서 어두컴컴했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앗, 네놈들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 브레인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브레인이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원수 같은 저 육체 밀매자인 요크와 이식 기술자인 자그마한 사내였다. 그 작은 사내가, "야아, 어서 오십시오." 하고 엷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내들은 처음부터 한 패였단 말인가?   몸과 마음   브레인은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도 요크나 이식 기술자나 모두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다렸네. 무사히 여기까지 와서 다행이었네." 요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브레인은 문에 몸을 기댄 채 두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두 사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자아 이리로 와서 앉게나." 요크가 권했다. "옛날 일은 깨끗이 잊어 주시지." 작은 사내가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말한다.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네놈들은 날 속이고 또 날 죽이려고 했다." "그건 일이었으니까 할 수 없었지." 요크도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심해도 되네. 이번엔 우리들은 당신편이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난 일에 있어서만은 정직한 놈으로 통하고 있다네, 브레인. 그러니까 마리가 우리들을 고용했지." "마리가 네놈들을 고용했다고? 무엇 때문에?" 브레인은 어이가 없었다. 작은 사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 당신을 미국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죠. 브레인 씨, 하여튼 여기 와 앉아서 그것을 의논하십시다." 브레인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별 수 없이 의자에 가 앉았다. "배가 고팠을 텐데 어서 먹게." 요크가 탁자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샌드위치와 포도주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브레인은 오늘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 생각나 갑자기 배가 고팠다. 그는 샌드위치를 덥석 집어들고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듣게." 요크가 담배를 피어 물며 말했다. "사실은 난 이 일에 별로 흥미가 없었네. 그건 임금이 싸서가 아닐세. 마리는 오히려 아주 기분 좋게 비싼 임금을 선뜻 내주었지. 그렇지만 워낙 힘든 일이야. 어쨌든 지금까지 이 뉴욕에서 이렇듯 대규모의 인간 사냥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조, 안 그런가?" "물론이죠. 거리가 온통 사냥꾼으로 가득 차 있는 걸요." 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쳤다. "렉스 동력회사가 회사의 운명을 걸고 자네를 찾고 있다네." 요크의 말이 계속됐다. "놈들은 자네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버리라고 사냥꾼들에게 독촉하고 있네. 이런 소란 속에서 자네를 탈출시킨다는 건 제정신이 있는 놈이 할 짓은 못되지. 그런데 난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해보고 싶은 난처한 병이 있단 말야." "정말 난처한 병이지." 조가 눈썹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래서 날 어떻게 탈출시킬 셈인가? 아니, 그것보다 어디로 데려다 놓을 계획인가?" "글쎄! 그게 문제라니까. 렉스 동력회사에 발견되지 않을 곳이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지." "그렇다면 지구 외의 행성은 어떤가? 가령 화성이나 금성 같은 식민지라면?" "그건 더욱 어렵네. 행성 식민지엔 조그만 도시가 두세 개 밖에 없어. 말하자면 인구가 얼마 안되기 때문에 서로가 다 알고 있단 말일세. 그런 곳에 새 사람이 가 보게. 금방 소문이 나서 렉스 동력회사에도 알려지고 말지. 그렇게 되면 그 회사에서 동원한 사냥꾼들이 곧 죽이러 갈 걸세." "그렇다면 바다 밑은 어떤가?" "그것도 생각해 봤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의 해저농원의 농부가 되어 숨어산다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렇지만 오랫동안 해저 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일세.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은 노이로제가 되거나 돌아버리거나 하는 걸세." "그렇다면 아무 데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마리하고 의논했을 때도 그 문제 때문에 무척 고민했다네. 그래서 아예 자네를 좀비로 만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 좀비가 되어 지하세계에서 살면 렉스 동력회사도 체념해 버릴 테지 하고 말이야." "농담 말게. 좀비가 될 바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네." 브레인이 내뱉듯이 말했다. "그럴 테지.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걸세." 요크도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마지막으로 생각한 게 마르케이사스 군도일세." "마르케이사스 군도? 그건 또 어디 있는 거야?" "태평양 한가운데. 즉 타이티 섬 가까이 있는 작은 섬들이네." "거긴 어떤 곳인가?" "아주 한가롭고 좋은 곳이라는군. 마치 20세기 같은 곳이라나 봐.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렉스 동력회사가 자네를 체념해 버릴 것이라는 것이지." "어째서?" "잘 생각해 보게. 렉스 동력 회사가 자네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법원이 무섭기 때문이네. 그렇기 때문에 자네가 미국을 탈출해서 이 세상 끝 같은 그런 섬에서 조용히 살아가게 된다면 렉스 동력회사도 검사의 고발을 받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네를 찾지 않게 될 거다 하는 얘기지. 그것뿐인가? 마르케이사스는 독립국이기 때문에 사냥꾼들을 보낸다는 것도 국가간에 특별한 협상이 필요하다네. 그런 복잡한 일은 렉스 동력회사에서도 섣불리 하려고 하지 않을 걸세." "틀림없나?" "물론. 절대라고 장담할 수는 없네. 그러나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걸." "그래, 알았네." 브레인은 요크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대체 나를 어떤 방법으로 여기서 탈출시킬 셈인가?" 요크와 조는 서로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변장하고 제트 헬리콥터를 빌려서 타고 가는 것은 어떨까?" "비행장엔 모조리 렉스 동력회사에서 손을 썼을 텐데……. 그것도 그렇거니와 아무리 완전하게 변장을 한다해도, 아니 외과 수술을 해서 얼굴 모습을 바꿔버려도 안될 걸세. 사냥꾼들은 인상발견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5분도 되기 전에 곧 알아차릴 걸세." "그렇다면 빠져나갈 수가 없잖은가?" "산채로 빠져나갈 방법이라곤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네." 요크가 천천히 힘을 주어 말했다. "뭐라고?" "자네의 몸을 순간냉동법으로 얼려 버린단 말일세. 마치 냉동육을 만들 때처럼. 그렇게 해서 냉동육 상자에 넣어 냉동육 운반선으로 운반한다. 이 방법이라면 절대로 발견되지 않을 걸세." 브레인은 등골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어 몹시 언짢았다. "그러면, 그 동안 난 의식이 없겠구먼?" 요크는 잠시동안 말없이 브레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아니." 하고 천천히 대답했다. 브레인은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물었다. "의식이 있는 채로 순간 냉동을 할 순 없잖은가?" "그렇지가 않네. 사실을 말하자면 몸과 마음은 그 이전에 따로따로 분리시켜 놓는 걸세." "모르겠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설명해주게." 브레인은 초조해서 신경질적으로 고함치듯 말했다. "자아 침착하게 잘 듣게. 가령 냉동한다고 해도 마음을 그냥 두고 운반해 나갈 순 없네. 사냥꾼들은 그런 일도 다 예상하고 있으니 냉동육 운반선은 모조리 검문할 것이 틀림없을 걸세. 그리고 영혼발견기로 금방 자네를 발견해 버리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정말 헛수고에 불과하게 될 것일세." "그러면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브레인의 이 물음에 요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조의 담당이야. 조에게 물어보게." 조가 설명을 시작했다. "마음을 이식하죠." 조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뭐라고?" "당신의 마음을 육체에서 육체로 이식을 해서 미국에서 빠져나간다는 거지요." "그런 건 사절하겠네!" 브레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간다고? 그런 야비한 행동을 나는 할 수 없어." "그러나 그 방법밖에 없는걸 어떻게 합니까? 브레인 씨, 그리고 또 이 방법은 그렇게 야비한 것은 아니지요. 다만 잠깐동안만 딴 사람의 마음속을 빌리는 거죠. 마치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쉬듯이 말입니다." 조는 열심히 설명했다. "그것은 완전한 마음의 이식이 아니라 극히 일시적인 것이지요. 당신의 마음에도 또한 상대편 마음에도 전혀 영향될 것 없고 손해 되는 일도 없어요. 브레인 씨, 어서 결심을 하십시오. 아니면 당신은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브레인은 한참 동안 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알았네. 그럼 하라는 대로하지." "자, 그럼 시작하지. 소매를 걷어올리게." 브레인이 팔을 걷어올리자 요크는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이걸 맞으면 자네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리네. 그 사이에 우리들은 이식기로 자네 마음을 딴 사람 마음에다 이식을 하네. 그러면 그 사람이 자네 마음을 미국 밖으로 운반하는 걸세. 그 사이에 몸도 냉동되어 국외로 나가게 되지. 그렇게 해서 안전해지면 몸과 마음을 원상대로 해주겠네." "몇 사람에게나 이식을 하게 되나?" "그건 알 수 없어.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하게 되니까. 자아 이제 시간이 없어. 어서 팔을 내밀게." 요크의 말에 브레인은 할 수 없이 팔을 내밀었다. 요크가 주사바늘을 팔에 꽂았다. 순간 머리를 힘껏 한방 맞은 것 같은 심한 충격을 받고 곧 정신을 잃었다. 마음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마음의 여행   브레인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가 토마스 브레인이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인물인 에드가 다예슨과 공존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예슨은 농부였다. 몇십 년 동안을 밭 갈고 씨를 뿌리는 농사일만 해 온 늙은 농부였다. 다예슨의 브레인은 지금 땀 투성이가 되어서 자기 집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갈색과 누런 색의 강아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노인의 어두운 눈으로 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오오! 챔프냐? 이리온." 다예슨의 브레인은 주저앉아서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브레인은 또다시 자기의 마음이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열 아홉 살의 샌드 톰슨의 마음에 옮겨 앉았다. 톰슨의 브레인은 요트 갑판 위에 똑바로 드러누워 어렴풋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내려쪼여 뜨거웠으나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상쾌했다. 톰슨의 브레인은 갑판 위에 엎드려서, '역시 지구는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일주일전에 화성에서 지구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열일곱 살 때부터 2년간 화성에서 지질학의 현장실습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연구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지구의 대학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화성은 사막뿐이라서 이 멋진 바다도, 이 뜨거운 태양도, 산들바람도 모두 없으니. 하지만 연구는 정말 재미있었다. 화성의 대실치스 시의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는 동급생인 마샤와 에디를 생각했다. '아직 저 화성의 붉은 사막에서 모래차를 타고 화성에서 돌이며 바위를 채집하기도 하고, 대실치스 시의 도서관이나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토론을 하고 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면 화성이 아주 그리웠다. "어이, 샌디!" 누군가가 불렀다. 그쪽을 바라보니 다가온 요트에서 한 청년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구의 대학에서 알게 된 우주선의 파일럿 지망생인 마이크 트리들이었다. "오늘밤 제니퍼네 파티에 갈 거지?" 마이크가 큰 소리로 고함쳤다. "그럼, 가고 말고. 넌?" "물론이지. 그럼 거기서 만나자!" "알았어." 톰슨의 브레인이 일어나면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파티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유쾌해졌다. 제니퍼는 동급생 중에서 제일 미인이었다. 더구나 굉장한 부자였으며 훌륭한 별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인기가 있었다. 파티에는 그밖에도 많은 여자 애들이 올 것이고 친구들도 모두 올 것이다. '오늘밤은 즐거울 것 같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핸들을 돌려 해변가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찰싹! 피고트의 브레인은 등에 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검은 뱀 같은 채찍이 등을 힘껏 내리갈긴 것이다. "야, 이놈아. 게으름피우지 말고 열심히 일해!" 채찍을 든 간수가 욕을 퍼부었다. 피고트의 브레인은 아픔을 참으며 무거운 곡괭이를 쳐들어 땅에다 힘껏 내리꽂았다. 피고트는 죄수였다. 번들번들한 태양이 내리쬐는 뜨거운 벌판에서 채찍과 총을 가진 간수들의 감시를 받으며 지금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 두고 보자!' 피고트의 브레인은 또다시 곡괭이를 쳐들었다 내렸다 하며 생각했다. 그때 바로 앞에서 삽으로 흙을 퍼내고 있던 어니가 속삭였다. "준비 다 됐어?" "그래, 다 됐다." "좋아, 그럼 신호를 하면 해치워." 어니가 낮게 속삭였다. 피고트의 브레인은 흘깃 앞을 보았다. 쇠사슬로 발을 묶인 스무 명 남짓한 죄수들이 땀을 흘리며 더위에 허덕이며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잔인하고 무서운 얼굴을 한 간수들이 총과 채찍으로 겁을 주고 있었다. 벌써 이 사흘 동안에 세 명의 죄수가 일사병과 피로로 쓰러져 죽었다. '죽은 친구들의 복수를 위해서도 저놈들을 죽여야한다. 그리고 탈주한다!' 피고트의 브레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어니가 삽을 흙 속에 세웠다. '신호다!' 피고트의 브레인은 쳐든 곡괭이로 아까 자기를 때린 간수의 옆구리를 내리쳤다. "으악!" 간수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피를 내뿜고 쓰러졌다. 다른 죄수들도 일제히 간수들을 향해 쳐들어갔다. 간수들은 황급히 소총을 겨누었다. 총성이 울렸다. 피고트의 브레인은 가슴에 심한 아픔을 느끼며……. 이번에 브레인은 공중에 있었다. 그는 라미레즈라는 청년의 마음속에 있었다. 라미레즈의 브레인은 지금 텍사스 대평원의 상공을 구식 헬리콥터를 타고 날고 있었다. 구식 헬리콥터는 마치 옛날의 낡은 마차처럼 고장이 잦아서 자칫하면 서기도 하고 또는 뒷걸음을 치곤 하는 것이었다. '이놈의 낡은 헬리콥터 때문에 고생이 막심해. 이번엔 꼭 새것으로 바꿔야지. 이번 장사가 잘돼서 돈이 들어오면 맨 먼저 저 멋진 스포츠 헬기를 사야지.' 그는 고도계며 속도계를 초조하게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빨리 목적지인 엘파소에 도착하지 않으면 그 장사도 잘 안 되는데…….' 마리나의 브레인은 산소 봄베의 스트렘프를 잠그고 안경을 끼고 수문쪽으로 갔다. "마리나냐?"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응, 엄마! 잠깐만 수영하고 오겠어요." 마리나의 브레인은 될수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마리나. 설마 톰 류링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마리나의 브레인은 속으로 놀랐지만 목소리만은 침착하였다. "아니에요. 엄마! 그냥 수중 산책만 하고 오겠어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될수록 빨리 오거라. 아버지가 또 걱정하실라." "알았어요, 엄마!" 마리나의 브레인은 호흡기를 입에 물고 수문의 밸브를 돌렸다. 수문에는 금방 세차게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압이 바다와 같게 되자 수문은 자동적으로 열리고 그녀는 힘차게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 여기는 하와이 앞바다에 있는 해저농원의 하나로 마리나의 아버지가 경영자였다. 바닷속에는 계곡이며, 언덕이며, 또 저편의 평원에는 여러 가지의 해중식물과 어류가 마치 꿈나라의 꽃밭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마리나의 브레인은 계곡을 빠져 그 저쪽에 있는 해저 동굴로 향했다. 그곳에는 톰 류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톰은 옆 해저목장 주인의 아들이다. 톰의 아버지와 마리나의 아버지는 몹시 사이가 나쁘다. 장사 시샘 때문이었다. 그래서 둘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는 부모, 우리는 우리지. 그리고 우린 일부러 싸울 이유가 없는 걸. 만나서 얘기해서 안될 것이 뭐람.' 마리나의 브레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톰과 만나고 있으면 마리나의 브레인은 정말 즐거웠다. 장래 무엇이 되겠느냐 또 어떤 일을 할까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상상하거나 계획하는 것이 즐거웠으며 또한 바다 속에서 서로 쫓거니 쫓기거니 하며 숨바꼭질을 하거나 고기를 잡는 일이 모두 다 즐거웠다. 어쨌든 둘은 어려서부터 아주 친했다. 해저동굴이 보인다. 산호로 된 아름다운 동굴은 두 사람이 만나는 비밀장소다. 입구 가까이 낯익은 톰의 황금색 수중복이 얼핏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마리나의 브레인은 이미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는 것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녀는 발에 힘을 주어 동굴을 향해 속력을 냈다. 엘진의 브레인은 낮잠에서 깨어났다. 거기는 커다란 어선의 갑판이었다. 그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 위에는 남태평양의 태양이 찬란히 빛나고 하늘은 끝없이 맑게 개인 날씨였다."엘진 씨, 잠이 깨셨습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보니 선장의 모자를 쓴 사내가 웃고 있었다. 엘진의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몸을 살펴보았다. 탄탄한 가슴, 넓은 어깨, 짧은 다리, 커다란 손, 어깨에 있는 상처, 이것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육체였다. 돌연 그는 생각해 냈다. 그것은 브레인의 육체였다. 그렇다면, 마음의 여행이 끝난 것인가. 엘진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가짜 이름이었다. 마음과 육체가 마침내 하나가 된 것이다. "꽤 오랫동안 기분이 나쁘신 것 같았습니다. 배가 떠나면서부터 계속 의식을 잃고 계신 것처럼 보이더군요." "아니.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리고 브레인은 말을 계속했다. "여기는 마르케이사스 군도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뭘요. 곧 도착할 겁니다. 마르케이사스 군도의 수도가 있는 히바 섬까지 두세 시간만 있으면 도착할 수 있으니까요." 선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떠 있는 조그만 섬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것 좀 보세요. 저게 히바 섬이랍니다."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섬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될 새로운 세계였다. 브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22세기에 되살아난 후 처음으로 마음놓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행복한 생활   배는 천천히 히바 섬의 항구로 들어갔다. 주위의 평화스런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보고 있는 사이에 브레인은 벌써 이곳이 좋아지리라고 생각했다. 얼마 안 가서 배는 항구 선창에 도착했다. 거리도 생각했던 것처럼 한가롭고 평화스런 기분이 저절로 들게 했다. 브레인은 정말 오랜만에 한가로운 기분을 맛보게 됐다. '자, 그럼 이제부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서 살며 무엇을 해서 살아갈 것인가?' 그는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면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 붉은 얼굴의 뚱뚱한 사내가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토마스 엘진 씨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브레인은 약간 불안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뚱뚱한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는 포인트 조선소에 있는 데이비스입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죠." "저를 말입니까?" 브레인은 눈썹을 모으며 되물었다. "그렇고 말고요. 이런 외진 곳에 당신처럼 훌륭한 조선 기사가 와 주셨으니 말입니다." 브레인은 간신히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아마 요크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요크는 그를 이 섬의 요트 기술자로 추천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섬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데이비스가 약간 근심스러운 듯이 물어왔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젠 도시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정말 훌륭한 곳이었군요." "참 다행입니다!" 데이비스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말했다. "이삼일은 천천히 돌아다니시며 섬 구경이나 하십시오. 자, 이건 댁의 열쇠입니다." 요크는 집까지 다 마련해두었던 모양이었다. 브레인은 인사를 하고 집까지 가는 길을 물어서 혼자서 그리로 걸어갔다. 집은 섬의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얕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새로 지은 조그맣고 아담한 집이었다. 그가 현관으로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것은 마리 소온이었다. "마르케이사스 군도가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브레인, 기다렸어요!" 마리가 외쳤다. "마리! 그럼 이게 모두 마리가 손을 써 준 거로군. 고마워! 정말 고맙소." 브레인도 마리의 두 손을 꼭 잡고 마구 흔들며 외쳤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온 것이 아니오?" "물론이죠!" 그로부터 두 사람의 생활은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조선소에서의 일도 재미가 있었다. 브레인은 마침내 훌륭한 요트 기사가 된 것이다. 물론 사치스런 요트를 설계하고 만드는 일보다는 오히려 수리하는 쪽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는 만족이었다. 지금까지와 같이 선전이나 잡일이 아니라 좋아하는 요트를 설계하거나 만들거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나게 일을 했다. 그 후 렉스 동력회사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섬에 온 지 두 달 뒤 렉스 동력회사가 그의 추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젠 생명의 위험도 벗어난 것이다. 그와 마리는 그날밤 거리의 레스토랑에서 마음놓고 식사를 했다. "이젠 아무 걱정도 없게 됐군요." "아아, 모두가 당신 덕택이오." 두 사람은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면서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그렇게 길지는 못했다. 섬에서 생활하기 시작해서부터 4개월 째의 어느 날 마침내 그 좀비 스미스가 섬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살인자   그날도 역시 포근한 날씨였다. 브레인은 아침을 먹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소로 출근했다. 그날의 일은 암초에 부딪쳐서 선체의 밑바닥이 파손된 대형 요트의 수리였다. 그가 수리하기 위해 점검하고 있는 곳으로 데이비스가 왔다. "여보게, 브레인. 아까 자네를 찾아온 사람이 있어서 여기라고 가르쳐줬는데 만나지 못했나?" "아니. 어떤 사람이었는데?" "그게, 뭐라고 할까? 하여튼 묘한 사람이야. 얼굴 색이 무척 나쁘고 수염이 잔뜩 돋고……. 그런데 그 수염이 어쩐지 가짜 같았고, 그리고 지독한 로션 냄새가 물씬 나더군."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 "뭐라더라? 스미스라던가? 여보게, 브레인. 어디를 가나?" "집으로. 나중에 설명하겠네." 브레인은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도 브레인의 얼굴을 보자 금방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눈치챘다. 그는 스미스가 찾아 온 것을 이야기했다. "틀림없이 그는 자기가 누군지 그리고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를 마침내 생각해낸 거야. 그래서 약속한대로 찾아온 거야." 마리는 그 말을 듣자 아무 말도 않고 커다란 가방을 꺼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왜 짐을 싸지?" "도망가야죠." "어째서?" "그렇게 무서운 좀비가 달라붙으면 이젠 여기서도 즐겁게 살수가 없잖아요. 당신도 빨리 짐을 꾸려요." 브레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난 안가. 가기는커녕 그를 만나서 꼭 얘기를 듣고 싶어." "안돼요!" 마리가 격렬한 말투로 외쳤다. "그따위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왜? 그는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죠. 아니면 그렇게 열심히 도와줄 까닭이 없어요." 브레인은 이상한 마음이 들어 마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모르는 것을 뭔가 알고 있군?" 그러자 마리는 몹시 다급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얼굴 색은 창백했으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그를 만나겠소." 마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할 수 없군요. 그리고 이젠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라고 말하며 문을 가리켰다. 문 저편 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그 그림자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브레인이 말하자 문이 열리고 스미스가 들어왔다.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덮여 있었지만 스미스가 변장한 것이라는 건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강한 로션 냄새 속에 약하게 송장 냄새가 혼합되어 있었다. "변장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 앞에 나설 수가 없다네." 스미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간신히 왔네." "그렇다면 자기가 누군지 알아냈겠군?" 스미스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내 원래 이름은 제임스 로지일세." "그렇게 말해도 난 알 수 없네." "그럴 테지. 그렇지만 우리는 옛날 서로 만났던 일이 있었지. 150년 전의 20세기에 저 체사피크만의 고속도로에서." "아!" 브레인은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자네가 바로 내가 충돌한 상대편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었나?" "그렇다네, 브레인." "그래서 자네는 줄곧 내게 달라붙어 다녔군 그래. 하지만 그건 사고였지. 완전한 사고였네. 원망을 할 까닭이 없어." 스미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사고가 아니었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졌던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니, 그런 거야. 누구보다도 마리가 더 잘 알고 있을 걸세." 브레인은 놀라 마리를 뒤돌아다보았다. 마리의 얼굴은 마치 백짓장처럼 새하얗고 꼭 석고상 같았다. 그 순간 그는 150년 전 그날 밤의 일을 뚜렷하게 기억해냈다. 그때 그의 자동차가 갑자기 중앙 분리선에 빨려 들어가듯 끌려갔었다. 그리고 핸들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전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브레인은 싸늘하게 마리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자동차를 조정해서 사고를 일으켰었지? 마리, 나를 미래로 끌고 와서 렉스 동력회사의 선전물로 이용하기 위해서……." 그는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격심한 분노를 억제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마리는 쇠뭉치에라도 얻어맞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틀림없어. 렉스 동력 시스템을 움직여서 내 자동차를 중앙 분리선으로 끌어 들였지. 그렇지?" "그래요." 마리가 아주 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미안해요, 브레인."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죽이고 또 로저도 죽인 범인이로군!" "죽일 마음은 없었어요, 브레인! 우리들은 다만 당신을 20세기에서 22세기로 데리고 올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저 사람의 자동차가 반대쪽에서 달려와 그만 충돌하고 말았어요. 우연이었죠." 마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힘없이 겨우 말했다. 그리고 로저 쪽을 향해 하소연하듯이, "로저 씨! 우연이긴 했지만 당신이 죽은 것은 제 책임입니다. 당신과 토마스는 우연히 죽은 겁니다. 그리고 토마스의 생명을 앗아간 렉스 동력시스템의 힘이 당신의 생명도 함께 끌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상을 해 드리겠어요. 로저 씨, 제가 당신에게 내세 보험을 가입해 드리죠." "내세? 그런 건 필요 없소!" 갑자기 로저가 고함쳤다. "나는 아직 살고 싶소.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아. 내가 죽었을 때 나는 아직 열일곱 살 밖에 안되었던 거야!" "그랬었군." 브레인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태산같이 많아.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싶고, 여행도 스포츠도 그리고 재미나게 놀고도 싶다. 난 그런걸 아직 어느 것 하나 시작도 해보지 못했던 거야. 그래서 난 육체가…… 육체가 필요한 거야. 이 썩어빠진 육체가 아니고 훌륭한 육체가 말이야!" "즉 나의 이 육체 말이군?" 브레인은 조용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생명을 몇 번이나 구해줬던 거죠." "잠깐만!" 마리가 옆에서 뛰어들었다. "남의 생명을 구해줬으니까 그 대신에 그 사람의 생명을 가로채도 된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아요." "물론 나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아요. 브레인,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브레인은 로저의 해골 같은 얼굴을 다시 보았다. "어째선가?" "당신은 그 사고가 결국 마리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고? 자네는 내가 자네를 죽였다고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그는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래리의 유령이 '너는 살인자다!'라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 그건 왜?' 그는 머리를 감싸쥐고 다시 한번 그 최후의 장면을 잘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최후의 순간 핸들이 자유롭게 됐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간에 핸들만 돌렸으면 충돌은 피할 수 있었을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마음속에, '에이,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면 모두가 깨끗이 끝장이다. 그 편이 훨씬 좋다!' 라는 마음이 생겼었다. 그래서 그는 그 마지막 기회를 자기 스스로 버린 것이다. 그랬었다. 로저가 말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살인자였던 것이다. "알았네. 자네가 말한 대로네." 브레인이 침통하게 말했다. "안돼요. 브레인.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니까요! 이 사람은 당신에게 억지로 자기 말을 듣게 할 권리가 없어요!" 마리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로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브레인 씨. 내게는 그럴 권리도 힘도 없소. 당신이 생각한대로 결정하시오. 나는 당신의 결정에 따를 뿐이오."   내세로   브레인은 심한 충격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기는 살인자였다. 물론 남의 물건을 가로채거나 그 사람이 미워서든가 하는 이유 따위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의 생각만 했으니까 역시 엄연한 살인자인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에 그때 렉스 동력 시스템이 내 자동차의 운전을 간섭하지 않았던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테지. 내 책임 뿐만은 아니다.'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타일러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핑계란 것을 곧 알았다. 그것은 마치 지갑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주워서 자기 것으로 했던 것인데 만일에 지갑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도둑이 아니다라고 하는 역설과 똑같은 것이다. 그는 눈앞에 이미 거의 죽어 가고 있는 로저의 추악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필경 저 육체는 이젠 한 달만 지나면 완전히 썩어서 죽어버리리라. 나머지 한 달을 이러쿵저러쿵해서 대답을 끌면 로저는 죽어 버리고 자기는 육체를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귓가에서 악마의 소리가 그런 유혹을 해왔다. 사실 그것은 아주 강한 유혹이라서 그도 자칫하면 그런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이 평화롭고 즐거운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아직 이 인생에는 미련이 많다. 나도 간신히 살아남은 이 22세기에서의 생활을 좀더 즐기고 싶다. 중도에서 그만 두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렇게 했다고 치고, 저 로저를 이대로 모른다고 해버렸을 때 그후의 생활이 지금처럼 평화롭고 즐거울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브레인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매일 로저를 두 번씩이나 죽게 한 사실을 후회하고 그 생각에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활이라면 차라리 살아있을 보람이 없다. 그것보다는 내세로 가는 편이 낫다. 내세가 어떤 곳인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다. 지옥 같은 곳인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불같이 일어나는 노여움으로 해서 무서운 괴로움을 참지 않으면 안 되는 참혹한 세상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은 하여튼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그곳에 가면 또다시 새로 살아갈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그것이 동물이 아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너무 미련을 갖고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이 언제까지나 달라붙는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일이 못된다. 이 세상의 삶은 인간의 참생활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생활에 지금 곧 들어갈 때인 것이다. 브레인은 마음속으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로저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로저! 지금부터 나하고 재생실로 가세. 거기서 나의 육체를 받으면 될 걸세." 로저의 눈이 빛났다. "정말입니까? 브레인!" "정말이고 말고." 브레인은 한마디 말도 없이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마리를 뒤돌아보았다. "들었겠지, 마리! 나는 재생실로 가요. 당신을 남겨놓고 가는 것은 참으로 미안하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고 믿겠소." 마리는 눈물이 가득찬 눈을 깜빡깜빡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있어요, 마리!" 브레인은 한 마디의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로저가 뒤를 따랐다. 히바 섬의 재생실은 시청 안에 있었다. 재생실 앞에 다다르자 그는 멈춰 섰다. "로저, 난 이 육체가 아주 맘에 들었다네. 딱딱하고 멋진 모습은 아니지만 어느 사이에 좋아졌어. 소중히 해 주게." "물론이죠. 브레인. 당신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잘 활용하겠습니다." 로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육체는 사냥을 좋아하지. 어쩌면 사냥에 나가고 싶어할 지도 몰라." "나도 좋아지겠죠." "좋지. 그럼 잘 있게." 브레인이 재생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저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곳은 옛날의 사형실처럼 의자가 하나만 놓여 있었다. 자살을 하려면 그 의자에 앉아 오른쪽 팔걸이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육체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죽고, 다음 사람에게 인계되는 것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의 일이 텔레비전의 영상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이미 후회스런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스위치를 눌렀다. 가만히 주위가 어두워졌다. 둥둥 뜨는 것 같이 느껴지는 꿈속 같은 세계였다. 짙은 안개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아아, 여기가 내세로 가는 중간 세상이로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옆에 누군가가 와 있는 것 같았다. '브레인! 저예요. 마리 에요!' 브레인은 깜짝 놀랐다. '마리, 당신도 왔소?' '예, 저도 왔어요. 나 혼자선 살아 있어도 재미없는 걸요. 같이 가고 싶어요, 브레인.' '그럼 같이 가자, 마리! 자아 내세를 향해서.' 두 사람은 안개 속을 나란히 앞으로 걸어갔다.       영혼에 대하여   지금까지 제1권부터 20권까지 읽어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이 SF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 우주 소설, 미래 소설, 차원 소설 등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사판매주식회사]처럼 색다른 SF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래 소설이며 차원 소설입니다. 그러면서 그 주제는 인간의 영원한 소망인 불사이며 영생입니다. 즉 영혼과 저승의 존재 유무를 추구하며 인간성을 파헤친 이야기입니다. 이 SF를 쓴 작가는 미국 SF계에서 가장 특이하고 흥미롭고 색다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기로 유명한 로버트 세클리라는 사람입니다. 1928년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회사원이었으나 소년시절부터 SF를 좋아해서 자기도 써 보겠다고 틈틈이 써 오다가 24세 때 [팬터], [사이언스 픽션] 등의 잡지에 투고한 것이 인정을 받게 되어 본격적으로 SF를 쓰게 되고 지금은 SF 인기작가가 된 것입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다], [우주 시민], [우주의 파편], [지구 순례], [로봇 문명] 등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문명비판이 날카로우면서도 흥미 있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독특한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더욱이 이 작품처럼 특이하고 재미있는 착상을 완벽하게 구성한 것은 작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는 인간의 궁금한 문제입니다. 종교의 출발점은 바로 이 영혼 불멸입니다. 20세에 들어와 과학이 발달하게 되고 생물학의 발달로 혼선이 빚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제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 SF의 아이디어 중에서 이 작품에 나오는 내세 보험이라든가 영혼 교환국 같은 것과 시간여행 같은 것은 정말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적인 근거가 있든지 또는 과학적 사고 방식에서 생겨난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사실 SF에, 과학과는 인연이 없는 것들이 등장하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흡혈귀, 마녀 또는 유령이라든지 전설상의 괴물과 기괴한 귀신같은 것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전 시대의 과학적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제멋대로 지어낸 미신이고 과학의 발달이 이것들을 부정하고 배척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과학 시대에 SF에서는 이런 비과학적인 것을 일부로 등장시키고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과거에 있어서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된 것이 현재에는 가능하다고 증명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재에는 불가능한 것이 미래에는 가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은 진실한 과학적 사고 방식을 분별하는 기준을 밝히는 척도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SF에서 추구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SF에 등장하는 흡혈귀는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같은 단순히 신비적인 괴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인간의 피를 빠는 흡혈균인 박테리아이고 그들이 생각한 괴물이 아닌 이질 생물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중세기 무렵 무섭게 여기던 흡혈귀는 그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이런 일종의 병 같은 것에 걸린 이종생물이 더러 나타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녀도 그렇겠지요. 이것은 사실 이상한 마술로 사람을 놀리는 악마가 아니고 어떤 별 세계에서 지구에 온 별나라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다고 믿었던 것은 실제로는 소형 자이로콥터 같은 것을 사용했을지도 모르고, 마술의 지팡이를 공중에서 흔들어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것은 일종의 물질 복제기를 사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명의 정도가 많은 차이가 있는 사람들로서는 너무나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태평양의 섬에서 살고 있는 미개 원주민들 중에는 비행기를 마법의 새라고 생각하고 놀라고 있는 종족도 있다고 합니다. 중세의 사람들은 진보된 과학기술을 가진 별나라 사람들을 이렇게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유령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겠지요. 유령은 보통 사람이 죽은 뒤, 즉 육체는 없어져도 그 영혼만은 이 세상에 남아 있어서 원수진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은 생명이라는 것은 육체와 같이 발생하고 육체와 같이 소멸되고 육체를 떠난 생명, 즉 영혼이라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물론 저승이라는 곳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유령이라는 것은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과학 시대인 현대에도 아직, 유령을 실제로 보았다는 사람이 많고, 먼 곳에서 죽은 사람이 바로 그 시간에 꿈에서 만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자의 무한한 운동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역사도, 당신과 나의 생활도 근원을 따져 보면 원자의 운동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의 운동은 공간의 극히 작은, 그러나 특별한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므로, 그 흔적을 정확히 기록하고 재현시킬 수가 있다면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부활시킬 수가 있겠습니다. 만약, 어떤 특별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인간의 정신에 그러한 능력, 이전에 어떤 인물이 취한 행동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있다면 그 사람으로서는 옛날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유령의 정체가 아닐까요? 유령이 특정한 장소와 집에서 잘 나타나는 것도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더 잘될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것과는 달리 이 소설 같이 생각하는 방법도 있겠지요. 즉, 생명이 육체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와 같이 영혼이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정신은 고압의 전류와 같은 강한 에너지의 집합체인데 특별한 경우, 즉 육체의 죽음에서 충격을 면했을 때에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영혼만은 살아남습니다. 그것이 영혼인데, 그 영혼이 사는 세계를 말하자면 저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 육체에서 독립된 정신이 간혹 현세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이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도 성립될 수가 있습니다. 사실상 영혼에 대한 생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고대 문명을 이룩한 이집트인들은 이런 생각을 제일 먼저 가졌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은 육체와 영원의 혼(카)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카는 허공으로 달아나 어떤 시기가 오면 다시 그 죽은 육체로 되돌아와서 살아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집트인이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어 귀중하게 보존시킨 것은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카가 되돌아왔을 때 들어갈 육체가 없으면 되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유명한 피라미드와 거대한 무덤도 카가 되돌아와서 육체가 없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렇게 마련한 것입니다. 이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은 그 후 다른 민족 특히 이스라엘, 인도, 중국인들도 거의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죽고 그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과학이 이만큼 발달된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수년 전 미국에서 사후의 세계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는 증거를 얻었다고 하여 큰 소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프라이데이 머피의 탐구]라는 제목으로 쓴 책으로 나와 놀랄 만큼 많이 팔렸습니다. 사건의 주인공은 미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중년 부인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어떤 최면술을 하는 사람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최면술에는 역행 최면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최면술에 걸린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 어른이 소년과 소녀 때의 기억을 이끌어 내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잊어버린 기억들이 차츰 되살아나 노이로제 환자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녀로 되돌아간 그 부인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200년 전에 영국 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프라이데이 머피라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대장간 일을 하고 어머니는……." 깜짝 놀란 최면사는 그 부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녹음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 사람을 보내 200년 전의 바로 그곳을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그 곳에 틀림없이 200년 전에 최면술에 걸린 그 부인이 말한 것과 같은 프라이데이 머피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욱이 그 부인의 선조를 조사해 보아도 그 사람과의 관계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친척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부인은 200년 전에 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프라이데이 머피가 되살아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하면 영혼은 꼭 있는 것이고, 그 영혼이 200년 동안 살고 있었던 저승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전 세계 사람들을 흥분시켰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론이 분분했습니다. "거짓말이다." "우연의 일치다." "사실이다." 등등…….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영혼과 저승의 유무에 대해서 항상 논쟁이 되어 오고 종교가와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 존재를 믿고, 과학자와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논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불사판매 주식회사 세클리 작․이 인석 역   아이디어회관 과학문고 224p. 19cm(SF세계명작25)   인 쇄      1976년 5월 1일 발 행      1976년 5월 5일 역 자      이 인 석 제 판      명림 정판사 오프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영지 제책사 발 행 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1187    백설의 공포 - 홀덴 작 박 홍근 역 댓글:  조회:289  추천:0  2023-08-23
백설의 공포   홀덴 작 박 홍근 역     이상한 눈보라·················· 3 크게 된 눈사람················· 7 눈보라가 그치지 않으면············· 17 바싹 말라버린 들쥐··············· 37 쌍둥이 눈의 결정················ 47 바람과 반대로 움직이다············· 53 눈의 벽···················· 62 산 전체를!··················· 76 카렌이 없어지다················ 88 아메바의 괴물················· 95 다가온 안개·················· 108 잡히고 만 눈················· 117 힘을 합해서·················· 128   작품 해설··················· 131   이상한 눈보라   그같이 이상한 이야기도 있을까 하고, 데이비드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돌아왔다. 데이비드는 바로 얼마 전에 신문사에 들어간 풋내기 기자이다. 여기 웨스트오버는 맑게 개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데이비드가 지나온 케인필드의 거리는 굉장한 눈보라였다. 웨스트오버와 케인필드의 두 마을은 20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데이비드는 신문사의 편집장에게 곧 이렇게 보고했다. "이상합니다. 케인필드의 거리를 지날 때, 무서운 눈보라가 쳤습니다. 자동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서 3킬로 정도 벗어나자 맑게 개어있으니 말입니다." 편집장 드와이트는 대수롭지 않은 양 말했다. "데이비드, 이 고장에선 이상할 건 없는 일이야. 자네는 뉴욕에서 갓 왔기 때문에 처음 보는 일인지도 몰라. 그러나 저쪽에선 비가 내리고, 이쪽에선 맑게 개는 그런 일은 이 고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야." "그러나 아직 10월 초순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눈보라가, 그것도 어떤 곳에서만 몰아친다는 것은 역시 이상합니다." 하고 데이비드는 그 무섭게 몰아치던 눈보라를 눈앞에 그리며 말했다. 그러자 드와이트 편집장도 조금 머리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눈보라는 이상할지도 몰라. 아무튼 올해의 날씨는 좀 돈 것만은 사실이야. 그런데 데이비드, 저수지 쪽은 어땠지?" "맑게 개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촬영해 왔지만, 보통 때의 높이보다 5, 6미터나 낮으니까 말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8월 하순부터 한 방울의 비도 내리고 있지 않아서 큰 소동이었다. 그래서 풋내기 기자인 데이비드까지도 기사를 취재하러 갔던 것이다. 드와이트 편집장은 팔짱을 끼고 신음하듯 말했다. "이대로 계속되다가는 먹을 물조차 없어져 버리겠다. 빨리 비가 내리지 않으면 보통 일이 아니야. 그렇다고 어쩔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깜박 잊고 있었군." 하고 드와이트 편집장은 무엇인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렇지, 어제도 비행기로 약품을 뿌려 인공우(사람이 내리도록 하는 비)를 내리도록 했었는데 말야." "그것이 케인필드의 눈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비가 내리지 않고 눈이 내리니 말입니다.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일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데이비드는 힘을 주어 말했으나, 드와이트 편집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글쎄 그런 짐작은 좀 지나치지 않을까. 인공우는 정말로 성공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단 말야. 실험과는 아무 관계없이 마침 그날에 비가 왔는지도 모르니까. 더욱이 네이슨 교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인공우를 내리게 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말야." "그 네이슨 교수라는 분은 누구시지요?" "응, 나의 친구인 유명한 화학자지. 부인을 암으로 잃고 나서 이 웨스트오버 대학에 되돌아와서, 하고 싶은 연구에 몰두해 있는 사람이야.". "그 하고 싶어하는 연구란 인공우를 내리게 하는 겁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네이슨 교수는 바아커 산에 실험실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 무기물을 유기물로 변하게 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모양이야. 인공우 쪽은 너무나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도와주고 있는 거야." 데이비드는 깜짝 놀랐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변하게 한다고요! 그건 생명이 없는 것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변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연구가 성공한다면 인공 인간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드와이트 편집장은 웃었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네이슨 교수가 하고 있는 것은 시작과 같은 거야. 인간을 만들어내다니? 그런 꿈 같은 이야기에 정신이 쏠려 기자 일을 태만하면 안 되지." 데이비드는 머리를 긁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인공우의 실험과 이번의 눈보라는 기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그 네이슨 교수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하고 데이비드가 당장 떠나려고 하자, 드와이트 편집장은 당황하면서 말렸다. "이봐, 잠깐만 기다려! 네이슨 교수는 성미가 까다로운 분이야. 조심해서 만나야 해." "네, 염려 마십시오." 데이비드는 바람같이 신문사에서 뛰어나갔다.   크게 된 눈사람   네이슨 교수의 집 현관에 나온 사람은 15, 6세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페인트칠을 하다가 나왔는지, 페인트가 마구 묻은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보기에는 영리한 듯하고 깨끗한 느낌의 소녀였다. 데이비드가 이름을 대자, 소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저는 카렌이라고 해요. 어서 들어오셔요. 곧 아버지를 모셔 오겠어요." 부인이 없으니까 네이슨 교수의 시중은 이 카렌이 하는 모양이라고,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이윽고 나타난 네이슨 교수는 몹시 기분이 언짢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와이트가 있는 신문사의 기자라고? 드와이트는 내 친구이지만 자네를 보는 건 처음이야. 대체 무슨 용무인가? 지금 연구 중인데." 데이비드는 얼굴이 발개져서 말했다. "아직 풋내기입니다. 갑자기 찾아 뵙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실은 다름이 아니고 좀 물어 볼 것이 있어서요. 교수님, 케인필드에 눈이 내린 것을 알고 계십니까?" 네이슨 교수는 힐끗 카렌을 보고 나서 말했다.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거지?" "보시다시피 여기는 맑게 개어 있습니다. 그런데 케인필드만은, 그것도 10월에 눈이 내리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생님이시라면 그 이유를 아실 거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뭐,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야. 이 고장은 어느 곳만 비나 눈이 오는 일이 흔히 있어. 산이나 기류의 관계일 거야. 그리고 7년 전 같은 때에는 10월 7일에 눈이 내린 기록도 있으니까 말야." 그러자 옆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카렌이 알았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리고 데이비드를 보고 말했다. "저는 당신이 왜 찾아왔는지를 알았어요. 당신은 어제 아버지가 한 인공우의 실험을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혹시 그 실험 때문에 케인필드에 눈이 내린 것이나 아닌가 하고 말이어요." "그, 그렇습니다." 그러나 네이슨 교수는 웬일인지 안절부절못하면서 말했다. "나를 놀려 줄 생각인가. 몇 번이나 인공우의 실험을 했으면서도 비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야." "천, 천만에요." "확실히 나는 바로 가까운 데이크손의 상공에서 인공우의 실험을 했어. 그러나 케인필드의 눈보라와는 관계가 없어. 만약에 관계가 있다면 대성공이었을 텐데......." 그러면서 이제 네이슨 교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묻는 것이었다. "그 눈은 말라 있었는가?" "글쎄요, 헤치고 나오느라고 잘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괜찮으시다면 지금 함께 케인필드로 가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여 학자이신 선생님의 의견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이슨 교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 보고도 싶지만 연구하고 있는 일도 있고, 또 나의 실험과는 관계없는 눈보라이니....... 그렇지 카렌, 네가 이 데이비드씨와 함께 가보면 어때? 뭐, 별 일은 없겠지만......." 네이슨 교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그리고 이젠 그런 시시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듯, 데이비드를 향하여 손을 들어 보이고는 얼른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자 카렌이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너무 신경쓰지 마셔요. 아버지는 연구에 몰두해 있을 때는 언제나 저래요. 그 대신 제가 함께 가겠어요. 옷을 갈아입을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셔요." 카렌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오자, 두 사람은 곧 자동차에 올라 출발했다.   데이비드의 마음속에는 어쩐지 그 네이슨 교수에 대한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케인필드까지는 앞으로 6킬로 가량 남은 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날씨가 변했다. 눈이 그치고 있었다. 쨍쨍 빛나고 있던 태양은, 굴뚝에서 나온 연기 같은 회색의 구름 속에 숨어버렸다. 그리고 길가에도 차츰 녹지 않은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도로에도 똑똑히 눈 녹은 자리가 있었으며, 공기는 차가와 지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신문에 실을 사진을 생각하고, 눈 경치를 찍으려고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네거리에서 흙투성이인 길로 들어섰다. 거기까지 들어가자, 길에는 눈이 없었으나 길 양쪽에는 하얗게 눈이 남아 있었다. "저걸 찍으면 어때요?" 하고 카렌이 가리킨 곳은 농가와 도로 사이, 하얗게 쌓인 잔디였다. 거기에는 어린아이들 키의 반정도 되는 커다란 눈사람이 있었다. "저 눈사람을 만든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 어때요? 어쩌면 재미있는 사진이 될 거라고 생각돼요." "그것 좋겠어, 카렌. 카렌은 참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가씨야." 하고 데이비드가 감탄하자, 카렌은 웃으며 말했다. "전 학교의 사진부에 들어 있어요." "그랬었군." 데이비드는 카렌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버지 네이슨 교수의 시중을 들고 있는 착한 소녀일 뿐만 아니라, 아주 명랑하고 상냥했다. 두 사람은 농가로 가서, 어느 아이가 눈사람을 만들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농가의 고오트라는 부인이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로빈이 만들었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 그 눈사람을 만들다가 손을 다쳤어요." "많이 다쳤습니까?" "아니 별 일은 없어요. 그러나 지금 곧 외출하려고 옷을 갈아 입혔으니, 빨리 찍어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동차의 발동 소리가 집 저쪽에서 들려왔다. 고오트 부인이 큰 소리로 부르자, 곧 로빈 소년이 나타났다. 로빈 소년은 장갑을 벗고 붕대를 감은 손을 보여 주었다. "왜 다쳤니?" "나도 몰라요. 눈사람을 만들고 있을 때 갑자기 찌르르 하면서, 꼭 화상을 입은 것 같았어요." 로빈은 이렇게 대답하며, 장갑을 낀 쪽의 손을 눈사람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사진 찍을 자세를 취했다가, 곧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눈사람이 아침보다 굉장히 커졌어요." "네가 크게 했겠지 뭐." "아니어요. 저절로 커졌어요." "그럼 네가 크게 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저절로 말이지?" "그래요." 그러자 이번에는 카렌이 2, 3센티 밖에 쌓여 있지 않은 잔디의 눈을 손에 쥐고서 물었다. "별로 쌓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큰 눈사람을 만들 만한 눈을 어디서 찾아냈니?" "아저씨의 차가 있는 저 도랑 속에서요. 오늘 아침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랬어. 굉장한 눈보라였을 테니까 바람에 날려 들어간 모양이구나." 이윽고 로빈 소년을 태우고 고오트 가의 가족들이 자동차로 떠난 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눈사람이 저절로 커지다니, 꼬마들은 천진난만하단 말야. 정말 귀여워." 카렌도 끄덕였다. 그러고 나더니 좀 머리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런데 바람에 날린 것치고는 눈이 너무 많이 있었잖아요. 저는 왠지 이상하게 느껴져요." 두 사람이 이렇게 주고받고 있는데, 또 눈이 짓궂게 내리기 시작했다. 데이비드가 말했다. "다시 눈보라가 크게 치면 곤란할 테니까 돌아가요. 카렌 덕택에 좋은 사진을 찍은 것 같군." 데이비드는 아직 아는 사람이 적은 이 마을에서, 좋은 친구를 얻은 것이 기뻤다. 아마 카렌도 같은 느낌일 것이다. 얼마 후, 데이비드는 카렌을 네이슨 교수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카렌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 듯 말했다. "안녕 또 만나요." 웨스트오버의 마을에는 눈은 내리지 않고 있었으나, 날씨가 흐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분은 밝았다. 그리고 카렌이 헤어지면서 한 말은 곧 이루어졌다.   눈보라가 그치지 않으면   다른 기사도 함께 여러 가지를 취재해 가지고 데이비드는 신문사로 돌아왔다. 그러자 드와이트 편집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뭐가 있었나? 네이슨 교수 댁에서 말야." "그건 왜 물으시지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야. 네이슨 교수가 오늘 저녁 식사에 우리 두 사람을 꼭 초대하고 싶다는 거야. 무엇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말야. 그 까다로운 교수가 그렇게 말해 왔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데이비드는 눈이 동그래졌다. "편집장님 만이면 또 모르지만, 나까지 초대한다는 것은 이상한데요. 그럼, 역시 인공우에 대해서 일까요? 만났을 때는 인공우와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했어요." 그러자 드와이트는 웃었다. "농담이 아니야. 나는 이 고장의 기상도를 자세히 조사해 보았어. 그러자 생각한 대로 날씨가 나빠질 수 있게 되어 있더군. 그러므로 이번 눈보라는 교수의 인공우 실험 때문은 아니야. 절대로." "그럼, 교수는 어떤 중요한 일 때문에 우리들을 초대하는 것일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날 밤, 두 사람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교수의 집으로 들어섰다. 카렌은 몹시 기뻐하면서 맞이해 주었다. "역시 또 만나게 됐군요." 교수와 단 둘이서 살아가는 카렌에게는 사람이 찾아주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곧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네이슨 교수는 이번에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아니 좋은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 걱정되는 일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즐거운 식사가 시작되고, 역시 이야기는 케인필드의 눈보라에 이르렀다. 카렌이 말했다. "아까 텔레비전으로 안 일인데, 우리들이 그 곳을 출발하고 나서 또 굉장한 눈보라가 쳤다더군요." 데이비드도 끄덕였다. "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야. 좀 기다렸다면 큰 눈보라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물 부족은 해결되겠군." 이때, 네이슨 교수가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무엇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일 때문에 할 얘기가 있어. 그러나 비밀을 지켜줘야겠어 ." 역시 그 눈보라에 대해서였던가. 드와이트와 데이비드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드와이트 편집장이 말했다. "설마 인공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그것은 아까 기상도를 조사하여 확실하게 했는데요." "아니, 그 인공우에 대해서야. 그렇다고 나의 실험이 성공해서 눈이 내렸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럼 왜 인공우에 대해서라고 했습니까?" 드와이트가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듯이 묻자, 교수는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듯이 나는 데이크손과 케인필드와의 사이에 있는 바아커 산 가까운 숲에 실험실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 나는 어떤 실험을 하고 있었어. 그 실험을 하다가 우연한 것을 발견했지. 그것이 아주 색다른 성질의 눈의 결정이야." 눈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 조용해졌다. 네이슨 교수는 계속했다. "그 눈의 결정이라는 것은 말야...... 수분에 매우 강한 화합력을 가지고 있지." 그러자 데이비드가 물었다. "그 화합력이란 어떤 것입니까? " 네이슨 교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망설였다.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저...... 다시 말해서......." 그러자 드와이트 편집장이 대신 말했다. "두 개의 것이 전혀 다른 하나의 것으로 변하는 것이 화합이죠. 그러므로 그 화합을 돕는 힘이 화합력이죠? 따라서 수분에 강한 화합력이므로 눈을 불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네......." 네이슨 교수는 드와이트가 대신해 주어 안심이 되는 듯했다. 드와이트 편집장이 물었다. "그 눈의 결정을 어떻게 했습니까?" "인공우를 내리게 하는 약품 속에 섞어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거야." 네이슨 교수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한다. 드와이트 편집장은 눈을 빛냈다. "그러면 케인필드의 눈보라는....... 그것은 마침 날씨가 나빠질 때였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비가 아니라 눈으로 된 것은, 그것도 큰 눈보라로 된 것은 그 눈의 결정 때문이 아닌 지요? 굉장한 대발견 입니다. 그것을 비밀로 하라니......." 그러나 네이슨 교수는 얼굴이 흐려지며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걱정이야. 만약에 나의 눈의 결정이 눈보라의 원인이었다면, 케인필드에서 어느 정도 오랫동안 눈이 계속 내릴지 나도 알지 못할 정도야. 아아, 왜 눈의 결정을 섞었던 것일까!" 단지 눈의 결정 만이라고 한다. 그것도 눈을 조금만 불어나게 하는 작용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교수는 왜 이렇게 겁을 내는 것일까, 하고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드와이트도 데이비드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교수님.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시는 것 갔습니다. 눈이 그치지 않는다니요?" "아니, 그 결정이라면......." 하면서 데이비드는 파고들었다. "그 결정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굉장히 눈을 불어나게 하는 힘이 있나요?" 그러자 네이슨 교수는 또 모호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러나 곧 녹아버리는, 그런 보통의 작은 눈의 결정이지요?" "그건 그래." 데이비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교수는 무엇을 더 알고 있으며, 그래서 겁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카렌은 말없이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라디오나 들을까요?" 라디오에서는 마침 케인필드의 눈보라에 대해서 지껄이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케인필드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 5cm 가량 쌓였습니다. 한때 그쳤다가 또 다시 굉장한 눈보라가 쳐서, 언제 그칠 것인지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모두 일제히 얼굴들을 마주보았다. 라디오에서는 계속 뉴스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5시에는 딱 그치고 하늘도 갰습니다." 카렌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러자 스위치를 끄는 것이었다. "그쳤어요, 아버지." "그런 것 같구나." 네이슨 교수도 마음이 놓이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드와이트가, "다행입니다, 교수님. 그렇다면 눈보라는 눈의 결정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지요? 아니면 역시 무엇인가 관계가 있는 것인 지요?" 하고 물었다. "글쎄, 뭐라고 확답을 할 수가 없군. 아무튼 이로써 나도 안심하고 연구를 계속할 수가 있게 됐군." 그러나 박사의 대답은 억지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교수님." 드와이트가 말했다. 그런 대로 눈보라가 그쳤다는 뉴스 때문에 그날 밤의 식사는 밝은 가운데 끝났다. 잠깐 동안에 사이가 좋아진 카렌과 데이비드는, 내일 일요일 다시 한 번 만날 약속을 했을 정도였다.   괴상한 죽음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데이비드가 말했다. "내 차로 어디든 드라이브를 할까요?" "어머나 좋아요. 어디가 좋을까요? 옳지, 그 눈사람 보러 가시지 않겠어요? 로빈 군이 말한 것처럼 커져 있는지도 몰라요."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즐거운 드라이브를 하면서 케인필드에 가까이 가보니까, 어제와는 아주 딴판으로 맑게 개어 있었다. 자동차로 고오트 네의 집에 가까이 갔을 때 카렌이 말했다. "어머, 눈사람이 없어요! 크게 되기는커녕 작아져서 사라졌나 봐요. 그런데 저기에 사람들이 많군요." 자세히 보니, 고오트 씨의 닭장 앞에 3, 4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떠들어 대고 있다. 고오트 부인도 로빈 소년도 있다. 데이비드가 말했다. "저 정복을 입은 사람은 이 케인필드의 경찰 서장인 카마이켈 씨야. 그 전에 만나본 일이 있지. 자, 잠깐 저리로 가 봐요." 옆에까지 다가가서 데이비드는 카마이켈 서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서장은 아주 난처한 듯 손을 벌리고 말했다. "수의사가 지금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소." "수의사라니요? 그리고 이상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고오트 씨의 닭 18 마리가 모두 죽어 있지 않겠소." 그러자 고오트 부인이 끼여들었다. "어머, 당신은 어제 오후 사진을 찍으러 왔던 바로 그 기자 시군요. 잘 들어 주셔요. 이런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하면서 고오트 부인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대략 이러하다. 고오트 씨의 가족은 어제 오후, 데이비드 들과 헤어진 후 아는 사람의 집으로 갔다가 밤 늦게야 돌아왔다. 그때는 눈이 그치고 있었다. 그리고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밤중이 되었을 때, 옆집 베일리 씨의 집 개가 멀리서 마구 짖어댔다는 거다. 고오트 부인은 여전히 흥분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말예요. 아침에 닭 모이를 주려고 닭장으로 갔더니, 글쎄 18마리가 모조리 죽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간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더욱이......." 그러자 고오트 부인을 대신하여 카마이켈 서장이 말했다. "죽은 모양이 이상해요." 하고 카마이켈 서장은 닭장 안을 조사하고 있는 수의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떤 모양으로 죽었습니까?" 데이비드가 묻자, 카마이켈 서장이 대꾸했다. "글쎄, 저 수의사가 나오면 당신이 직접 물어 봐요." 이번에는 카렌이 로빈 소년에게 물었다. "그 눈사람은 어떻게 했어? 없어졌잖아." "아마 굴러갔다고 생각돼요." "그럴 리가, 눈사람이 저절로 굴러갔다니?" "그렇다니까요. 틀림없이 자꾸만 커지면서 굴러갔어요." "어머,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카렌은 웃고 말았다. 그러나 로빈 소년이 말한 것처럼 확실히 눈덩이가 몇 개, 닭장 앞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수의사가 한 마리의 닭을 들고서 닭장에서 나왔다. "뭘 좀 알았어요?" 수의사는 머리를 내저었다. 어쩐지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전혀 알 수 없어요. 이것을 보시오." 그의 손에 들고 있는 닭을 보았더니, 속이 텅텅 비어 뼈까지 보일 정도였다. "혹시 족제비 같은 것한테 피를 빨린 것은 아닙니까?" 카마이켈 서장이 머리를 갸우뚱하고 묻자, 수의사는 또 머리를 내저었다. "족제비가 닭장에 들어간 흔적은 없습니다. 만일 족제비가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기껏 한 마리나 두 마리밖에 죽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뭐지요?" 서장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되물었다. 수의사는 돌아가면서 끝으로 말했다. "정말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습니다." "눈사태가 밀려들어간 것은 아닐까요?" "아니지요. 눈사태가 밀려들어가서 질식시켰다고 한다면 한꺼번에 죽어요. 그리고 이렇게 속이 텅텅 비어 있을 리가 없으며, 무엇보다 눈이 남아 있을 거요. 그런데 눈의 흔적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데이비드는 닭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분명히 18마리의 닭은 죽어 있었다. 더욱이 미이라처럼 퍽 옛날에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닭장 안은 이상하게도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카마이켈 서장은 순경에게 지시했다. "다른 집 닭도 어떻게 됐는지 조사해 봐야겠어. 나는 베일리의 집에 가 볼 테니까, 자네는 옆집 에자튼의 집에 가 줘." 이 말을 듣고 순경은 알겠다는 듯, 뒤돌아 서서 에자튼의 집으로 걸어갔다. 데이비드와 카렌은 서장의 뒤를 따라 베일리의 집으로 향했다. 곧 베일리 씨의 안마당으로 들어섰으나,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집에는 없을 거야. 베일리는 혼자 사는 사람이거든. 할 수 없어, 닭이나 보고 가요." 카마이켈 서장이 이렇게 말하자, 데이비드는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베일리 씨는 집에 있을 겁니다. 문도 열려 있고 부엌에 불도 켜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크를 해도 베일리 씨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뒤로 돌아가서 보았더니, 닭들은 모두 안전하게 잘 있었다. "닭은 이상이 없군. 그런데 이상하단 말야. 사람만 나타나면 언제나 짖어대던 베일리 씨의 콜리(양치기 개)가 안 보여." 하면서 카마이켈 서장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때, 데이비드가 말했다. "서장님, 발자국이 밭까지 나 있어요. 어쩌면......" 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이윽고 밭까지 100미터 남짓 되었을 때, 그 곳에 무엇인가 검은 것이 눈 속에 뒹굴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순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소리 쳤다. "카렌은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아." 그리고서 뛰어갔다. 그 검은 물체 앞에 선 데이비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너무나 끔찍스러워 울컥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장님, 이쪽으로 빨리!" 데이비드는 겨우 소리쳤다. 카마이켈 서장은 곧 달려왔다. 달려온 그도 멍하니 선 채 중얼거렸다. "오, 이건 너무 비참하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렇게 말한 데이비드는 카렌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당황해 했다. "카렌, 이쪽으로 오면 안 돼!" "데이비드, 무슨 일이어요?" "베일리 씨다. 카렌, 베일리 씨가 죽어 있어. 아주 흉하고 끔찍스러워. 그러니 보지 않는 게 좋아." 그러나 이미 늦었다. 베일리 씨의 시체를 가까이에서 보고 만 카렌은 비명을 질렀다. 놀란 카렌은 데이비드에게 매달렸다. 무리도 아닐 것이다. 그 죽은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으니까. 베일리 씨는 눈 속에 반듯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것도 마치 미이라처럼 말라 있었다. 무서운 것은 눈동자였다. 말라버린 눈꺼풀은 안으로 푹 들어간 것이 빈 소켓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른 입술은 앞으로 말려 올라가 있었으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베일리 씨의 시체 옆에는 랜턴(들고 다니는 등)이 떨어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엽총의 개머리판이 눈 속에서 약간 삐죽 나와 있었다. "아니, 저건 뭐지?" 하고 카마이켈 서장이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쪽에도 무엇인가 드러누워 있었다. 세 사람이 다가가 보았더니, 역시 미라같이 된 콜리의 죽은 말라빠진 시체가 있었다. 한참 동안 세 사람은 너무도 처참하여,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무서운 일도 있다니, 도무지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데이비드가 겨우 이렇게 말했다. "이상한 점이 있군요. 서장님, 이 두 시체의 주위에는 발자국이 없습니다. 도중에서 없어지고 있어요." "나중에 내린 눈이 덮어버렸는지도 모르지요." 카마이켈 서장의 말에 데이비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눈은 엊저녁 5시에 그쳤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 그리고 이 시체 주위만이 발자국이 없어진 걸 보니까, 눈이 내려서 없어진 것도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거의 사건다운 사건이 일어난 일이라고는 없는 평화로운 케인필드이다. 비로소 어려운 사건과 부딪히게 된 서장은 신음 소리를 낸다. 데이비드는 말했다. "나의 추리를 말해 볼까요?" "말해봐요. 나는 전혀 모르겠소." "어젯밤 콜리가 짖어댔다고 고오트 부인은 말했습니다. 그때, 베일리 씨는 랜턴과 엽총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무엇인가 있었다는 가정이......." "그렇지, 그 무엇인가가 문제 같은데. 분명히 무엇인가 있었을 거요. 18마리의 닭뿐이 아니라, 베일리나 콜리까지 같은 식으로 죽다니......" 카마이켈 서장은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바싹 말라버린 들쥐   "아, 저는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어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자동차로 되돌아오면서 카렌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데이비드도 침통하게 말했다. "나도 그 일들이 꿈이라면 좋겠어." 돌아오기 전, 에자튼의 집을 찾아갔던 순경이 보고를 해 왔었다. 거기서는 아무 일도 없는 모양이나, 쥐가 갉아먹은 것 같은 장화가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왔다. 그것을 본 데이비드는 절대로 쥐가 갉아먹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베일리 씨의 살해 사건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카마이켈 서장은 원인이 확실해지기까지, 신문에 발표하지 말아 달라고 데이비드에게 신신당부했다. 사람들이 걱정하여 떠들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데이비드는 갑자기 카렌을 보고 물었다. "카렌, 아버님은 지금 집에 계신가요?" "아마 실험실에 계실 거여요." 그러자 데이비드는 실험실이 있다는 바아커 산 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부탁했다. "난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가서, 이 일을 당신 아버님께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지요, 카렌."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드는 곧 차의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다. 한참 가는 도중, 두 사람이 가는 쪽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카렌이 물었다. "데이비드, 그 사건과 눈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어." "알 수 없는 일들이어요. 로빈 소년은 눈사람을 만들다가 상처를 입고, 그리고......." 이번에는 카렌을 대신하여 데이비드가 계속했다. "베일리 씨의 시체 주위에는 눈에 발자국이 없었지. 눈에 파묻힌 에자튼 씨의 장화는 갉아 먹힌 것 같았지. 모두가 눈, 눈이야. 이렇게 눈이 내리는 것이 심상치 않아요." 그러면서 데이비드는 앞쪽을 바라보고서 외쳤다. "아니, 저 자동차가 고장이 난 모양이야. 이 눈 속에서 큰일인데." 하며 데이비드는 차의 속도를 줄이고, 길가에 서 있는 자동차 옆에서 멈추었다. 안경을 쓴 한 남자가 내리는 눈 속에서, 방열기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차에서 내려 말을 걸었다. "도와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축전지가 떨어져서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하고 있던 참입니다." 하고 남자는 매우 기뻐했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요?" 하고 데이비드가 묻자, 남자는 눈을 빛냈다. "나는 생물학자입니다. 들쥐 연구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물학자라고 하는 남자는 자기의 연구에 대해서 남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곧 뒷좌석에서 갈색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지퍼를 열더니, 한 마리의 죽은 쥐를 꺼내고선 데이비드에게 보여 주었다. 데이비드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쥐도 역시 바싹 말라 있었다. 뼈까지 들여다보였다. 데이비드는 흥분한 듯 말했다. "어디서 이것을 발견했나요? " "길 바로 저쪽이지요. 왠지 나무 껍질이 갉아져 있는 곳에서 발견했지요." 하면서 남자는 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3마리를 발견했는데, 이 여윈 것 좀 보셔요. 죽은지 얼마 안 되는데 정말 이상해요. 이렇게 죽은 들쥐는 처음 봅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자동차를 밀어 주자 곧 엔진이 걸렸다. 데이비드는 도와 준 사례로 죽은 쥐 한 마리를 억지로 얻었다. 눈보라는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데이비드와 카렌은 말없이 차가 가고 있는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오른쪽에 깎아 세운 듯한 바아커 산의 산허리가 점점 뚜렷하게 우뚝 솟아났다. 데이비드는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눈보라가 치고 있는데, 올라갈 수가 있을까?" "아니, 그건 걱정하지 마셔요. 그렇게 가파른 고개는 아니니까요. 이 길은 작은 골짜기를 따라 가고 있을 뿐이어요. 아버지의 실험실은 거기에 있거든요." 카렌의 말 대로였다. 그렇게 가파른 고개는 아니었다. 그러나 길의 폭이 좁아서, 만약 반대쪽에서 차가 온다면 오도가도 못할 정도였다. 실험실은 자작나무가 울창한 숲이랑, 전나무가 반쯤 눈에 덮여 골짜기를 따라 서 있었다. "왜 당신 아버지는 이런 쓸쓸한 곳에서 살고 싶었을까?" 카렌도 머리를 조금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곧 방앗간이었던 집을 샀어요." "그런 방앗간 같은 오두막에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그럼요.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해도 안은 제대로 갖춰져 있어요. 아버지는 뒤쪽의 냇물에 작은 수력 발전기를 시설해서 아주 달라지게 했는걸요." 마지막으로 심하게 커브를 틀어서 돌아서자, 자동차는 넓은 원형의 광장에 닿았다. 한쪽 구석에 네이슨 교수의 자동차가 눈을 맞고 있었다. 그 저쪽에 낡아빠진 이층집 방앗간이 있었다. "아버지의 실험실이 저기여요. 겉은 별로 보잘것없으나, 아래층만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지요." 네이슨 교수는 차가 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미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가오자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왔어 카렌. 그러나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은 오는 게 아니야. 하여튼 데이비드군과 함께 와서 잘됐다. 데이비드군, 환영해요." 하지만 네이슨 교수는 말하는 것과는 달리, 실은 귀찮게 생각하는 모양 같았다. 두 사람이 들어간 방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아주 좋은 방이었다. 이러한 깊은 산 속에 이런 집도 있을까 할 정도였다. 방안에는 난로가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냉장고도 침대도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두 사람이 의자에 앉기를 기다려 네이슨 교수가 물었다. "무슨 일로 왔지, 데이비드군?" "저어, 그 눈 때문에......." "눈 말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히 해 두겠어. 이 날씨는 나 때문은 아니야. 기상 예보대로 이런 날씨는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고, 더욱이 케인필드만이 아니라 이 뉴햄프셔주 전체에 걸친 눈보라니까 말야." 데이비드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제의 케인필드만이 내린 눈보라와 박사님이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가 없잖아요?" 네이슨 교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어제 그렇게 걱정한 일인 싱겁게 돼버렸어. 보통 눈의 결정 때문에 말야." "그랬었어요 ? " 하고 데이비드는 가지고 온 죽은 쥐를 꺼냈다. 네이슨 교수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건 뭐야? 들쥐는 나의 전문이 아니야. 퍽 오래 전에 죽은 거로군." "아닙니다. 몇 시간 전에 죽은 거지요." 하면서 데이비드는 고오트 씨의 닭에 대해서, 베일리 씨와 콜리가 죽은 사실에 대해서 네이슨 교수에게 자세히 말해 주었다. 교수는 한참 동안 어이가 없는 듯 말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말했다. "좋아, 연구실로 따라와요." 연구실은 지하에 있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잘도 운반했다고 감탄할 만큼 여러 가지 기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네이슨 교수는 익숙한 솜씨로 들쥐를 해부했다. 그 순간 교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교수는 애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했다. "자네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연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주기 바라네. 단지 자네가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선물로 보여줄 뿐이니까." 데이비드와 카렌은 네이슨 교수의 뒤를 따라 저온 냉동기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작은 실험용 접시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갈색 가루의 덩어리가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껍질 같은 파편이 있었으므로 데이비드는 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잠시 동안 네이슨 교수는 말이 없었다. 이윽고 목쉰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건 베이컨의 고기야." "이게 베이컨이라고요? 뭐가 있었나요?" 데이비드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되물었다. 네이슨 교수는 데이비드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나의 눈의 결정이......."   쌍둥이 눈의 결정   실험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참 후에 겨우 네이슨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카렌, 너도 깜짝 놀란 모양인데, 내가 왜 눈의 결정에 대해서 흥미를 갖게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아뇨, 아버지." "무리도 아닐거야. 나는 화학자이지 암석학자는 아니니까. 그런데 암석이나 눈의 결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여기서 일단 말을 그치며 박사는 이야기를 바꾸었다. "데이비드군, 소금의 결정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 "확실히 정사면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 "그렇지, 학교에서 배웠을 테지. 석영의 결정은 정육면체야. 그럼 눈의 결정은 어떻게?" "저어, 역시 정육면체입니다. 어릴 때에 현미경으로 조사해 본 일이 있습니다. 아름다웠어요. 보석 같았어요. 그리고 어느 것이나 정육면체이면서도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없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가 그리운 듯 대꾸하자, 네이슨 교수는 다시 계속했다. "그거야, 데이비드군. 눈의 결정은 사람의 지문처럼 제각기 달라. 나는 그것에 착안했어. 그 눈의 결정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을까, 다시 말하면 만일 사람의 세포의 비밀이나 암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어." 그러자 카렌이 이렇게 말했다. "역시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네이슨 교수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카렌,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연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어디까지나 학자이니까. 물론 어머니의 죽음이 원인이 되었다고 하겠지만, 보다 더 생명의 신비 그 수수께끼를 파헤쳐 보려고 한 거야." 데이비드는 문득 드와이트 편집장의 말이 생각났다. 교수는 생명이 없는 것으로부터 생명이 있는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모양이다, 라고 하던 말이....... 네이슨 교수는 계속했다. "내가 발명한 작은 냉동 상자를 사용하면, 눈의 결정을 아주 간단하게 만들 수 있어. 그렇게 하여 실험을 계속했는데, 전에 만든 어느 결정이 다른 것과 아주 틀리게 생각되었어. 그래서 나는 시험적으로 젖은 압지 위에 놓아 보았네. 그러자 어떻게 됐을까. 10초 동안에 압지의 반지름 몇 센티쯤이 말라버렸어.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현미경으로 보았더니, 그 결정은 쌍결정으로 되어 있었던 일이야." "쌍결정이라고 하면 결정이 2개로 늘어났다는 말입니까? 수분을 빨아들여." 데이비드가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네이슨 교수는 그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했다. "그것보다 그것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났다고 느껴졌어. 살아 있는 것처럼 말야. 그러나 곧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생각했어." 네이슨 교수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고 있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베이컨을 텅 비우게 한 결정이지요?" "그런 것 같아." "그럼 그것을 박사님은 인공우의 실험 약품에 섞어서 뿌렸겠군요?" 네이슨 교수는 끄덕였다. "어젯밤에 말한 것처럼 말야. 그러나 이 발견은 전혀 우연한 것이야. 인공우의 약품, 옥화은에 섞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 비행기에서 분무기로 뿌렸으니까 말야. 실험실에서 일어난 그 같은 일이 이 대기 속에서까지 일어나리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백만에 하나도 말야." "박사님께서는 책임이 없어요. 물론." "책임이라고? 그렇다면 자네는 그 베일리나 콜리가 죽은 사건이 나의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무엇인가.... 아니, 그 눈의 결정이 점점 늘어나서..." "바, 바보 같은! 저 현미경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눈의 결정이......." "그야 그렇죠. 그러나......." "그렇다고 어떻다는 거야? 실험실에서 그렇게 됐으니까 그것이 크게 퍼질 수도 있다 이 말이야? 자,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어. 카렌, 너도 마찬가지야." 카렌은 열심히 아버지를 위로했다. "아버지, 그렇게 화를 내지 마셔요. 데이비드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어요. 아버지께서 또 걱정하실까 봐서 말한 거여요." "카렌 말이 맞습니다, 선생님." 데이비드가 사과하자, 카렌은 다시 계속했다. "더욱이 아버지를 이 눈보라 속에 홀로 계시게 할 수는 없어요." "괜찮다, 그만 가 봐. 내일 오후에는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데이비드군, 내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낸 것 같아서 미안하네. 내 딸을 데리고 돌아가 줄 수 없겠나 ? " 네이슨 교수는 조금 누그러진 자세로 말했다. 이미 조금 전과 같은 기백은 없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몹시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데이비드에게는 생각됐다. 진실로 교수가 말한 것처럼, 단지 눈의 결정이 이번과 같은 사건을 일으켰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카마이켈 서장에게 이야기해 보아도 웃어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더욱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데이비드는 애써 이렇게 생각했다. 눈이 언제까지 계속 내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건처럼 날뛰고 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그 텅 비어 있던 베이컨에 대한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걱정이었다.   바람과 반대로 움직이다   카렌을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또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드와이트 편집장의 목소리는 아주 침통했다. "남자와 여자가 이상한 모양으로 죽었어. 케인필드에서 말야. 지금 글로리아가 취재를 해 왔는데, 의논할 것이 있으니 곧 이리로 나와요." 글로리아란 같은 신문사에 근무하는 여자 기자이다. 급히 가 보았더니, 드와이트와 글로리아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글로리아?" "남자와 여자가 미라처럼 속이 텅 비어 있는 채 자동차 옆에 쓰러져 있었어요." "미라처럼!" 데이비드는 신음하듯 외쳤다. "그렇다네. 지금 글로리아가 보고 왔는데, 그 보고만 듣고서도 몸서리를 쳤네." 아, 그 죽은 모양이 어쩌면 베일리 씨의 경우와 꼭 같다. 또 두 사람이 살해된 것이다. 드와이트 편집장은 말했다. "경찰도 굉장히 당황하고 있는 모양이야. 자세한 것을 말하지도 않으니 말야." "무리도 아니겠지요." "자네는 뭐 좀 알아낸 것이 없나?" 그래서 데이비드는 오늘 아침 케인필드에서 일어난 일, 즉 들쥐의 이야기며, 네이슨 교수의 실험실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경찰은 사람들이 크게 떠들어대면 시끄럽다고 신문에 내지 말아달라고 그러더군요."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눈 속에 무슨 원인이 숨어있다는 건가?" 데이비드는 말없이 케인필드의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말없이 케인필드를 둘러싸는 큰 원을 그려 보였다. "우선 무엇보다, 이 원 속에 변덕스런 눈보라가 휘몰아쳤어요. 처음 일어난 것은 눈을 뒤집어 쓴 장화입니다." 라고 말하고, 데이비드는 마을의 북쪽 에자튼의 집 근처에 x를 그렸다. "다음은 길 건너 쪽인데, 로빈 소년이 눈사람을 만들다가 상처를 입은 점입니다." "그야 뭐 독이 있는 것에 찔린 것이나 아닐까?" 드와이트 편집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그저 말없이 또 x를 그렸다. "뭘 하려는 거여요?" 마침내 글로리아가 물었다. 데이비드는 여전히 대꾸도 않고 계속했다. "아무튼 그날 밤, 로빈이 없는 동안 그 눈사람은 언덕을 굴러 내려가서 닭장에 부딪친 겁니다." "자네는 소년이 말하는 것을 믿는 건가? 눈사람이 저절로 커져서 굴러갔다니, 아이들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드와이트 편집장은 또 알 수 없다는 투였다. 데이비드는 거기에도 x를 하고, 이어서 베일리와 콜리가 죽어 있던 곳에도 x를 쳤다. "다음은 내가 생물학자를 만난 곳입니다. 틀림없이 이 근처에서 바싹 말라빠진 들쥐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표를 해 가다가, 마지막으로 지금 두 사람의 시체가 발견된 곳에 x표를 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이것으로 무언가 알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드와이트 편집장도 글로리아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글로리아씨, 끝으로 시체에 대해서인데 눈이 덮혀 있었나요?" 글로리아가 대답했다. "아니. 그러나 그 시체를 발견했다는 사람의 말로서는 무엇인가 가랑눈이 뿌려져 있었다는 거여요. 그리고 그 사람은 부랴부랴 그 자리를 떠나 경찰에 전화를 걸었대요. 우리들이 보았을 때는 눈은 없었어요. 그런데 발자국이 없었어요." 데이비드는 놀라며 소리쳤다. "역시 발자국도 없었군요. 그렇다면 생각했던 대로 그 위험한 눈은 움직이는 것이다!" 이에 드와이트가 의문을 말했다. "잠깐만! 움직인다고 했지. 그러나 이 x표를 이어보면, 그것은 서쪽으로 날아간 것이 된다. 하지만 이 근처에는 북동풍만이 분다. 그러면......." "그러니까 움직인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의 힘으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것처럼 이라니 ?" "그렇습니다. 그것이 지나간 곳은 물기가 있는 것은 모조리 빨려들고......."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설마, 움직인다니!" 드와이트 편집장은 반대했지만, 지도에 그린 선을 보니 사실로서 부인할 수가 없다. 드와이트는 신음하듯 말했다. "풋내기 자네로서는 굉장한 발견을 한 거다. 그러나 칭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이게 사실이라면 큰일이 일어나게 되니까 말야." 지도를 보고 있던 글로리아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이대로 나아가면 바아커 산 쪽으로 가게 돼요." 그러자 드와이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바아커 산...... 네이슨 교수의 실험실이 있는 곳이다. 교수는 이 사건에 대해서 우리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 데이비드가 그 말을 받았다. "글쎄 어떨는지요. 확실히 박사는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제처럼 화를 내는 품을 보아서는 도무지 어렵겠는데요." "나는 그의 친구야. 친구인 내가 부탁해 보면 다를지도 몰라. 어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어. 곧 가보고 오자고." 하고 말하며 드와이트는 일어섰다. 데이비드가 말했다. "그러나 내일 오후에는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드와이트는 이렇게 소리치고 급히 자동차로 떠나 버렸다. 글로리아가 돌아가 버린 뒤에도 데이비드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늦어서 돌아온 드와이트 편집장은 몹시 지쳐 있었다. 이미 눈은 내리지 않고 있었다. "박사님을 만났습니까?" "이미 그 방앗간 오두막에는 네이슨 교수는 없었어." "이상한데요. 우리들이 떠난 후, 당황한 김에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전등도 꺼진 채, 교수의 자동차도 없었어. 그런데 나의 자동차가 가까이 갔을 때, 불빛을 본 것같이 느껴지기도 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헤드라이트의 반사였는지?"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 "할 수 없었지. 돌아오는 길에 교수의 집에 들려 봤더니 카렌 혼자뿐이었어. 카렌의 말로는 저녁때 화이트 리버 상크손에서 보낸 교수의 전보를 받았다는 거야. 갑자기 뉴욕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거야." "뉴욕으로요? 무슨 일 때문일까요?" "거기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어." "화이트 리버 상크손이라면 그 계곡의 저쪽 마을이죠? 박사는 뉴욕으로 가는 도중 분명히 거기에 들렸던 거죠. 그런데 거기서 라면 전보를 치지 않아도 전화를 걸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왠지 이상한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아 데이비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드와이트 편집장도 자신에게 말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까닭이 있을 거야. 네이슨 교수는 까다롭긴 하지만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하며 문득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그보다도 내일 아침 케인필드의 카마이켈 서장에게 자네가 발견한 것을 말해 줘야 해. 그러나 네이슨 교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알고 있습니다." 데이비드는 카렌의 아버지 네이슨 교수가 어떤 의심을 받을 일은 절대로 말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눈의 벽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케인필드 뿐만 아니라 웨스트오버까지 괴상한 사건의 소문으로 들끓었다. 이미 웨스트 오버 쪽은 조금 내린 눈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신문사로 나가자, 드와이트 편집장이 말했다. "케인필드는 굉장한 소동인 모양이야." "그렇겠지요. 괴상한 모양으로 3명이나 죽었으니까요." "크래프튼 의학 연구소 소장 니콜라스 박사가 가이거 계수관으로 그 근처를 조사하고 있다고 해." "가이거 계수관이라고 하면, 죽음의 재라도 그 눈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런 모양이야. 원자폭탄의 재가 섞여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눈이 수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좋은데, 좀 빗나간 생각이라고 여겨지는군요." 데이비드가 이렇게 말하자, 글로리아가 말했다. "모를 일이어요. 마을의 사람들은 소련이 죽음의 재를 내리게 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헛소문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러나 어디선가의 원자폭탄의 실험으로 죽음의 재가 이리로 모여와서 눈에 섞여 내렸는지도 모르죠. 만약 죽음의 재였다면 당신도 그 장소에 있었으므로 큰일이어요." "카렌만 해도 그래요. 그렇지, 카렌의 집에 들렀다가 케인필드로 가 봅시다. 어제의 지도를 보여 주며 설명하기로 합시다. " 하고 데이비드가 일어서자, 드와이트가 말했다. "좋아, 나도 조금 후에 가겠어. 나는 곧바로 갈 테니까 어쩌면 한 발짝 먼저 도착할지도 모르겠는데." 곧 데이비드는 자동차를 집어타고 카렌의 집으로 향했다. 카렌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라고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아직 소녀의 몸으로서 그같이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데다가, 어쩌면 그 사건들이 자기의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데이비드는 카렌에게 물어 보았다. "아버지로부터 무슨 연락이라도?" "없었어요. 뉴욕으로 가신 것은 드와이트 씨에게 들으셨겠지요?" "들었지. 그러나 아버지는 정말로 뉴욕에 가셨을까?" 하고 데이비드가 의심스러운 듯 묻자, 카렌은 데이비드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의심하고 있군요.“ 데이비드는 당황했다. "아니, 저....... 의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그러나 화이트 리버 상크손이라면 카렌에게 전화를 걸었을 텐데 전보로서...... 더욱이......." 데이비드가 이렇게 변명을 하자, 카렌은 화를 내며 말했다. "전화를 걸 시간이 없었다면, 누구에게 전보를 쳐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이번 일은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책임이라고 단정하다니, 무슨 말을? 다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카렌의 아버지 지식을 빌어야만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 생각은 확실해." "거짓말이어요. 어떻게 아버지의 지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셔요. 당신은 아버지가 아직 중요한 일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여요. 어쩌면 아버지가 일부러 악마와 같은 실험을 했다거나......." "아니야, 그건 절대로 아니야!" 데이비드는 적극 변명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화가 난 카렌은 데이비드를 떠밀듯이 하며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데이비드는 케인필드를 향해서 차를 몰았다. 그 두 사람의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발견한 곳에 카마이켈 서장이 있었다. 그밖에도 몇 사람의 순경이 있었는데, 모두 지친 듯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드와이트 편집장은 아직 와 있지 않았다. "발표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데이비드씨!" 카마이켈 서장은 지긋지긋 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니콜라스 박사가 막 돌아갔어요. 방사능은 없고, 닭장에서 여기까지 사건을 더듬어 보았으나 헛수고였지." 이때, 드와이트 편집장이 차로 왔다. "여어 데이비드, 빨랐구나. 카렌은 만났나?" "네, 만나기는 했지요." 카렌과 싸우고 헤어진 것을 생각하고 데이비드는 씁쓸한 듯 말했다. "데이비드, 서장에게 그 추리한 것을 말했나?" "아직 안 했어요. 지금 말할까 하는 중입니다." 하고 데이비드는 x표를 한 케인필드의 지도를 펼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의 설명을 듣고, 카마이켈 서장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침통한 얼굴로 서장은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그럼 당신은 그 괴상한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바람과 반대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거요? 그리고 그 괴상한 것은 털이나 천 같은 것은 제외하고, 피나 수분 같은 것은 빨아먹는 성질이 있다는 거요?""그렇지요. 그렇게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카마이켈 서장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눈의 괴물이 과연 있는 것일까?" "더욱이 지금까지의 뒤를 더듬어보면, 바아커 산 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데이비드는 앞쪽에 솟아 있는 바아커 산 쪽을 가리켰다. 카마이켈 서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기분이야. 허나 그 방향에 있는 것은 후우즈의 땅이지. 후우즈에게 주의만은 해 주어야지. 좋습니다, 그쪽으로 가봅시다." 일행은 곧 출발했다. 눈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폭이 좁은 길에 그와 같은 눈이 남아 있었으며, 그것을 따라가자 폭이 차차 넓어져 갔다. 곧 산토끼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말라빠져 뼈만 남아 있었다. 카마이켈 서장은 점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조심하시오!" 서장이 외쳤다. 눈의 괴물은 들을 가로질러 숲으로 간 모양이었다. 숲으로 가보니까, 대부분의 어린 나무들이 껍질이 갉아 먹힌 채 있었다. 두꺼운 껍질의 큰 나무는 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숲가에 후우즈의 사과밭이 있었다. 그리고 사과밭 저쪽은 또 숲으로 이어져 있고, 그것은 바아커에 연결되고 있었다. 카마이켈 서장은 그 사과밭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조리 당했구나. 어린 가지가 거의 다 벗겨져 있다." 떨어져 있는 한 개의 사과는 시들어서 속만 남아있다. 너무나도 갑자기 변한 모습에 서장은 눈을 부릅떴다. "이건 후우즈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겠어." 서장은 이렇게 말하고, 앞장을 서서 후우즈의 집 마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우즈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용무시지요? 우리 집은 경찰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후우즈는 고집이 센 사람 같았다. 카마이켈 서장은 달래듯이 말했다. "후우즈, 어제 오후 두 사람이 여기 위에 있는 길에서 죽음을 당한 것을 알고 있지요?" "그래요. 그러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내가 죽이기나 한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오." "그럴 리가 있겠소. 눈 속에 있는 그 무엇이 한 짓 같아요. 그것은 아직 이 숲 근처의 어느 눈 속에 있는지도 몰라요."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우리 숲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자 데이비드가 참견을 했다. "서장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후우즈씨, 당신의 사과밭을 보셨는지요?" "사과밭이 어떻게 됐다는 겁니까? 아직 난 보지 못했지요." "비참할 정도입니다. 나무 가지의 껍질이 온통 벗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나 당신 가족이 사과밭 뒤의 숲 속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일러주러 온 것입니다." 순간 후우즈는 불안해졌다. "숲 속이라고요? 좋습니다. 모두 함께 가겠습니까?" 일행은 후우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사과밭에서 100미터 가량 지나서 숲 속으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 물이 마른 개천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므로 양쪽은 사람의 키보다 높았다. 데이비드는 걸어가면서 증거가 될 껍질이 벗겨진 나무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곳에는 아직 하나도 눈에 띄진 않았다. "이거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앞장을 서서 가던 후우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서 손을 치켜들었다. 모두 후우즈 가까이 모여들어 앞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앗!" 일행은 놀라서 부르짖었다. 바로 정면에 좁은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다. 그 움푹 기어 들어간 곳은, 연기처럼 서서히 감돌면서 떠오르는 하얀 안개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얀 안개가 엷어지는가 했더니, 햇빛을 받고선 그 안개 속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게 무엇이지?" 모두 어리둥절하고 두려운 눈빛이었다! 그 반짝반짝 빛나며 흔들리고 있던 안개는 마치 바람에 날리듯 햇빛 속으로 올라갔다. 그 순간이었다. 데이비드는 안개 안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앗!" 그것은 웅덩이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작은 빙하와도 비슷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의 벽이었다. 그것도 보통 벽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앞은 부드러운 모래와 같이 무너져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반짝반짝 빛나는 안개가 또 먼지처럼 솟아올라 벽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안개의 엷은 흐름이 사람들의 왼쪽을 돌고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의 순경이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 뒤로 돌아갔어. 무언가 나를 괴롭혀!" 데이비드는 재빨리 그 순경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드와이트 편집장의 팔을 붙들었다. "빨리 도망칩시다. 빨리!" 조금 뻣뻣해진 것 같은 두 사람의 손을 끌고 정신없이 도망쳤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마구 뛰었다. 순식간에 사과밭 울타리까지 도망쳐 왔다. 그때서야 모두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 무서운 다이아몬드의 안개와 눈의 벽이 눈에 선했다. 후우즈는 주먹을 쥐고 숲을 향해 외쳤다. "여긴 우리 숲이야. 악마에게 점령당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우즈도 별 수 없었다. 몸은 사뭇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얼굴이 흙빛이었다.   산 전체를!   드와이트 편집장은 신문 때문에 일단 웨스트오버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악마에게 도망치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카마이켈 서장이 데이비드를 보고 물었다. "데이비드씨,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겠소?" 데이비드도 난처했다. 그 역시 남아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몰랐다. 의지해야할 네이슨 교수는 뉴욕에 가버리고 없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주든지 워싱턴이든지 연락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기로 합시다." 카마이켈 서장의 말을 듣고, 데이비드는 그것도 현명한 것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좀 더 확인해 본 다음에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아무튼 상대방은 바람이 없을 때에도 공중에서 구름이 되어 날아 올라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다시 한번 사람들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가 봅시다. 그 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 숲 속에 퍼져 있는지 확인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주에든지 워싱턴에 응원을 청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비드의 말에 카마이켈 서장도 찬성이었다. 힘을 얻은 모양이었다. "과연 그게 좋겠어. 그럼 마을의 청년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하기로 합시다." "좋습니다. 자, 빨리 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장화의 바깥을 천으로 감도록 하셔야 할겁니다. 천에는 맥을 못 추는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오후 4시가 조금 못 되어서, 두터운 옷을 입은 청년 10명과 순경 5명, 카마이켈 서장, 데이비드의 탐험대가 출발했다. 숲 앞에 이르러선, 카마이켈 서장이 모두를 향해서 설명했다. "우리들은 옆으로 한 줄로 서서 숲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각각 10m 가량 거리를 두고 나아가는 겁니다. 다시 부탁해 두지만 위험이 뒤따릅니다. 만일 눈이 10cm 이상 되면 멈추고서 경계를 할 것, 그리고 특히 눈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쌓여 있으면 절대로 설 것!" 하고 카마이켈 서장은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냈다. "만일 내가 호각을 한 번만 불면 모두 서 주시오. 두 번 불 때는 나의 주위에 집합, 나는 대열의 중간에 있을 겁니다. 만약에 세 번 불면..." 여기까지 말하고, 카마이켈 서장은 조금 멋쩍은 듯 대원들을 둘러보고 난 후 계속했다. "만약 세 번 불면 악마의 숲에서 도망치는 겁니다. 그리하여 차가 있는 곳에 모여 주시오." 드디어 모두 숲 속으로 들어갔다. 조용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가슴이 떨려오는 모양이었다. 처음 100m 사이에 껍질이 벗겨진 어린 나무가 있다고 한 것은 오른쪽에서 뿐이었다. 다시 30m 쯤 나아갔을 때였다. 데이비드의 오른쪽 10m 정도에서 나아가고 있던 남자가 소리를 쳤다. "여기, 눈이 깊어요! 25cm 정도.... 아니, 더 깊은 것 같아요." 데이비드는 곧 카마이켈 서장에게 전했다. 서장은 바로 호각을 두 번 불었다. 모두는 곧 서장 주위로 모여들었다. 서장이 말했다. "어쩐지 오른쪽이 이상한 것 같소. 눈도 깊고 어린 나무의 껍질이 벗겨져 있소. 조심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지금부터는 오른쪽으로 나아갑시다." 다시 새로운 열로 줄을 지었다. 그리하여 100m 가량 나아갔다. 이때 오른쪽에서 털과 뼈뿐인 다람쥐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전해 왔다. 조금 전의 중앙이었던 오른쪽까지도 수상해졌다. 점점 범위가 넓어지는 모양이었다. 좀더 앞으로 나갈수록 근처의 어린 나무는 거의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모두 한층 긴장이 되었다. 문득 데이비드의 앞에 통나무 한 개가 뒹굴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그것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한쪽 손을 내렸다. 순간 손가락 끝이 눈에 닿았으므로 얼른 손을 올렸다. "큰일났다! 장갑을 끼지 않았구나." 데이비드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여, 너무 급히 손을 올리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통나무 저쪽에 떨어졌다. 두 무릎, 두 손은 물론 얼굴까지 눈 속에 빠지고 말했다. 무서워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 눈은 이제까지의 눈과는 달리, 부드러운 가루 같았으며, 더욱이 30cm 이상이나 깊었다. 순간 데이비드 머리에는 베일리 씨의 죽음이 스쳐갔다. 데이비드는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면서 일어났다. 자기도 모르게 살려 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살려주시오!" 카마이켈 서장이 놀라서 달려왔다. "괜찮소, 데이비드!" "예, 괜찮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깊어요." 부끄러워진 데이비드는 멋쩍게 웃었다. 이때, 열의 끝에서 한 청년이 달려왔다. "큰일났습니다. 저기, 눈이 날려 들어와서 2미터 반이나 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는 적었어요. 왜 그렇죠?" 서장은 데이비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깊은 모양이오." 하고 중얼거리자, 데이비드도 긴장했다. "더욱이 버석버석한 것이 이상해요. 여기 내린 것은 축축한 눈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기온이 올라갔으므로 더욱 이상합니다." 그러자 달려왔던 청년이 말했다. "모두 무서움에 떨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저기가 어느 정도 깊은지 알고 싶습니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만 둬!" 서장은 외쳤으나, 이미 청년은 통나무를 뛰어넘어 눈을 밟으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눈 속을 헤치며 청년은 방향을 바꾸더니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만 돌아와!" 10m도 채 못 가서, 눈은 청년의 바지 주머니에까지 덮였다. 청년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봐요, 이 눈을 봐요!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이것이 괴물이라는 겁니까?" "안 돼, 빨리 돌아와!"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쪽에서 순경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 난 모양이다. "뭐가 있는 모양이다. 가 봅시다." 서장이 재촉했다. 눈 속에 있던 청년도 그제야 당황하여 따라왔다. 거기에는 몇 사람의 남자들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이놈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지요." 순경은 발 밑에 드러누워 있는 한 마리의 작은 사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슴의 발은 검고 말라 있었다. 뱃가죽은 떨어있었으며, 화상을 입은 것 같은 넓은 고기가 얼룩져 있었다. "발견했을 때는 아직 살아 있었는데, 차츰 이 모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가엾어서 잠시라도 빨리 죽여주었습니다." 카마이켈 서장은 따라온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틀림없이 이 사슴은 그 놈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겨우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이렇게 당하고 말았다. 자네도 그대로 나아갔더라면 이 사슴처럼 되었을 거다." 청년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자 순경이 말했다. "서장님 , 점점 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되돌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 "그게 좋겠어. 트럭이 있는 데까지 모두 되돌아 가 주시오. 그리고 우리가 갈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시오." 하고 서장은 순경 두어 명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아가게 했다. 청년들이 되돌아가자, 서장은 데이비드를 보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확실히 믿을 수가 없소. 이 눈은 정말 수상한 건가요? 당신도 조금 전에 무사했고, 그 청년도 아무렇지도 않았소. 우리들이 그 웅덩이에서 본 괴물과는 도무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데이비드는 머리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일단 의심은 해야지요. 나는 너무나 거슬거슬한 것이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서운 놈이 산 전체에 퍼져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됩니다만." "하지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쟎소." 그러자 데이비드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한 번 실험을 해 봅시다." 데이비드는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순경에게 협조를 구하여 그 눈에 죽은 사슴의 시체를 운반해 오도록 부탁했다. "자, 던집니다. 하나, 둘, 셋!" 네 사람은 사슴의 다리를 하나씩 쥐고 몇 번 흔들다가, 깊은 눈 속으로 집어던졌다. 사슴과 신체는 털썩 깊은 눈 속에 가서 빠졌다. 네 사람은 저녁 어둠이 밀려오는 것도 아랑곳없이 사슴을 지켜보았다. 몇 분이 지났다. 긴장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눈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를 않았다. 서장은 그것 보라는 듯이 말했다. "역시 내가 말한 대로야. 이 근처의 눈은 그 악마의 눈하고는 달라. 보통 눈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다가 서장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래졌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것은 빛나는 물결과도 같았다. 저쪽에서 움직여 와서는 서치라이트가 한 차례 땅 위를 비추듯 사라졌다. "저걸 보셨지요!" 데이비드가 이렇게 말하고, 다시 눈길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있을 때, 또 차가운 빛의 두 번째 물결이 퍼져 왔다. 이미 사슴의 시체는 거의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그 주위에는 눈의 작은 소용돌이 만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서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느님, 살려 주십시오! 눈이 불타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도 있습니까?" 한 순경이 겁먹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누가 어떻게 하자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숲가까지 정신없이 뛰어 언덕을 내려갔다. 맨 뒤에서 달리고 있던 데이비드는 도중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이미 산의 언덕빼기 쪽은 새까맣게 되어 있어야 옳은 것이다. 그러나 달이라도 빛나고 있는 것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중얼거렸다. "산 전체가 미쳐버린 눈에 뒤덮여 있는 것 같구나!" 카마이켈 서장도 두려운 듯, "이제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소. 워싱턴에 군대를 오도록 해야 하겠소. 아마 군대도 그 괴물에게는 이길 것 같지 않소. 아무튼 내일의 일이오." 라고 말했다.   카렌이 없어지다   데이비드는 아주 지쳐버렸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 카렌의 집에 들렸다. 그것은 오후 8시 30분이었다. 그런데 카렌의 집은 왠지 캄캄하기만 했다. 데이비드는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집안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는 하는 모양인데 카렌은 나오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공중 전화로 드와이트 편집장에게 연락했다. "아니, 데이비드 별 일 없었나?" "예,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걸고 있지요." "난 걱정했어. 아무튼 상대는 만만치 않은 놈이니까 말야." 하고 드와이트 편집장은 안심했다는 투로 말했다. 데이비드는 카렌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보다도 카렌이 어디 있는지 모르십니까? 집에 없더군요." "집에 없다고...... 아마 어딘가 친척집에라도 간 것이 아닐까?" "그럴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데이비드는 오늘 낮 창백해 있던 카렌의 모습이 생각났다. 드와이트 편집장은 다시 이렇게 말해 왔다.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해. 정 그렇게 걱정되면 니콜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보라고. 거기에 물어 보는 것이 좋겠어."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니콜라스 박사라니, 어제 눈의 방사능을 가이거 계수관으로 조사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네." "그 니콜라스 박사와 카렌은 잘 아는 사이입니까?" "그렇지. 니콜라스 박사와 네이슨 교수는 아주 사이가 좋아요. 그래서 카렌의 아저씨나 다름없네." 데이비드는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니콜라스 박사, 네이슨 교수, 카렌. 이 세 사람을 연결해 나가면 뜻하지 않은 해답이 나올 것 같은,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을 파고들었다. 데이비드는 곧 니콜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니콜라스 박사님 계십니까?" "누구신가요?" 아주 조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데이비드가 이름을 대자, 왠지 더욱 냉정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신문사의 분이죠. 니콜라스 박사님은 오늘 점심때가 지나서 뉴욕으로 출발하고 안 계십니다. 아마 내일이면 돌아 오실 겁니다." "뉴욕이라고요!" 이건 네이슨 교수와 같지 않은가. 여기에는 틀림없이 무슨 사정이 있음에 분명하다. 데이비드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혹시 카렌을 모르십니까? 만약 거기에 있다면 전화를 바꿔 줄 수 없겠는지요?" 그러자 다시 어색한 대답이 들려왔다. "카렌 아가씨 말인가요. 여기엔 없어요. 아마 집에 있겠지요." 하고 전화는 찰카닥 끊어지고 말았다. 데이비드는 힘없이 자기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다 이상하기만 하다.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데이비드가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아파트의 관리인 아주머니가 불렀다. "편지가 왔더군요. 저 벽난로 위에 있어요." "내게 편지라고요?" "네, 오후에 어떤 아가씨가 가지고 왔더군요." 데이비드는 벽난로에서 얼른 편지를 집어들고 뜯어보았다. 예감했던 대로 그것은 카렌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급히 갈겨서 쓴 것이었다.   데이비드씨, 내일 돌아오겠어요. 저의 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셔요. 아침의 일은 미안했어요. 공연히 화를 냈어요. -- 카렌   데이비드는 비로소 안심이 되어 한숨을 놓았다. 그러나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았다. "그 아가씨, 무슨 다른 말은 하지 않던가요?" "아니 없었어요. 몹시 서두르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잠시 생각하고 난 데이비드는 또 이렇게 물었다. "자꾸 물어 안됐습니다만, 그 아가씨는 어떤 옷을 입고 있던가요?" "글쎄요,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참, 그렇지 아가씨의 외출복치고는 몹시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어요. 맞았어요, 페인트가 마구 묻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으니 말이어요. 아마 페인트칠이라도 하다가 나온 모양이죠." 그러자 데이비드는 손뼉을 쳤다. "알았다!" 눈이 둥그래진 관리인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데이비드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제 의심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페인트가 묻은 더러워진 스웨터를 입고 그렇게 서둘러서 갈 곳이라곤 한 군데 밖에 없다. 자동차가 없는 카렌이다. 틀림없이 니콜라스 박사가 데리고 갔을 것이라고 데이비드는 확신했다. 물론 간 곳은 바아커 산기슭에 있는 네이슨 교수의 실험실일 것이다. 그 백설의 괴물도 바아커 산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곧 자동차에 올라 어둠 속을 달리면서 데이비드는 이상한 흥분이 끓어올랐다. 웨스트오버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고개를 올라가게 된다. 거기서는 바아커 산 전체를 환히 볼 수 있다. 그걸 보고 데이비드는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언제나 바아커 산은 길고 검게 보였으며, 마치 코끼리의 머리와 코와 흡사했다. 그런데 오늘밤의 바아커 산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산의 높은 서쪽 끝은 인처럼 빛을 내는 안개가 희미하게 흔들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 안개 위에 솟아 있는 산꼭대기는 백설에 싸여, 푸르고 흰빛으로 깜박이며 빛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동차를 달리면서 데이비드는 불안했다. 제대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깊은 눈으로 막혀 있지나 않을까? 그러나 그보다도 바아커 산의 카렌 등이 걱정이 되었다. 카렌이 서둔 까닭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빛을 내는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데이비드는 밀려오는 두려움을 애써 뿌리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메바의 괴물   숲을 지나고 개천을 따라, 데이비드는 필사적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이윽고 그 낡은 방앗간 오두막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그 길에는 아직 얼마의 눈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을 보고 데이비드는 안심했다. 눈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눈이었으며, 달빛이 비치는 곳만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겨우 오두막의 불빛이 다행히도 희미하게 나무 사이로 바라보였다. 그것을 보고 데이비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드는 자동차의 엔진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앗간 오두막 문이 열리면서 누가 나왔다. 오두막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그가 곧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카렌!" "데이비드!" 하고 소리치며 두 사람은 마주 달려갔다. 카렌이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숨어버려서." "아니, 그것보다 여기는 왜 왔어요?" "네, 니콜라스 박사에게서 여러 가지로 사실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여기로 달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니콜라스 박사께 떼를 써서 같이 왔지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알았나요?" "카렌이 페인트가 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지. 틀림없이 무슨 일을 도우러 간 것이라고 생각했지. 더욱이 왠지 니콜라스 박사의 집사람이 카렌에 대해서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거든." 이번에는 데이비드가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어? 카렌의 아버지는 언제 뉴욕에서 돌아왔지?" "아버지는 뉴욕에는 가지 않았어요. 당신이 의심했듯이 그 전보는 가짜이며, 니콜라스 박사가 대신 친 거여요. 아버지는 계속 여기 있었어요." "그렇다면 드와이트 편집장이 여기 왔을 때도 역시 있었어? " "그래요, 드와이트 씨나 나를 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그건 어째서?" 카렌은 그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오두막의 지붕을 가리켰다. "봐요!" 오두막 뒤에 솟아 있는 급한 낭떠러지 위에는 희미하게 푸르고 횐 빛이 번지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끄덕였다. "알고 있어. 여기 오는 도중 나는 바아커 산을 보았어 ." 그러자 카렌은 심각한 얼굴이 되며 말했다. "데이비드,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큰일이어요." 그때, 네이슨 교수가 한 사람의 남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네이슨 교수는 그전처럼 데이비드를 보고도 그렇게 기분이 나빠하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얼굴 표정이었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데이비드군이었군. 카렌이나 자네를 위험한 일에 말려들게 하고는 싶지 않았어." "위험한 일이라니요?" 교수는 그 질문은 흘려버리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들은 더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생각보다는 빨랐어. 그래서 서둘러서 일에 착수했지. 그러나 불행히도 10월이 아니고 1월에 일어났다면 세상은 끝이었을 거야. 하여간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네이슨 교수는 바아커 산 쪽을 노려보았다. 또 한 사람은 소개하지 않아도 당장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 박사이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불빛에서 본 네이슨 교수도 니콜라스 박사도 몹시 지쳐 있는 듯했다. 의자에 모두가 앉기를 기다려 교수는 말했다. "자네의 말이 옳았어. 이번의 일은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자네가 지적했는데 그대로야." "그러나 저는 교수님을 공격할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데이비드가 당황하며 이렇게 말하자, 네이슨 교수가 조용히 계속했다. "좋아요, 데이비드. 그건 내가 나빠. 그러나 비뚤어진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야. 이 니콜라스 박사와 함께 연구하여 만들어낸 눈의 결정의 하나를, 내가 인공우를 만드는 약에 섞어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것은 사실이야. 그것이 어떻게 된 노릇인지 이 괴물을 낳게 됐어." "하지만 백만에 하나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나 우리들의 발견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의 것이었어. 생명이 없는 눈의 결정이 살아서 활동을 하다니? 더욱이 실험 속에서가 아닌 대기 속에서 말야." "그러면 그 눈 전체가 괴물로 살아있는 것입니까?" 이번에는 니콜라스 박사가 대신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괴물 그 자체는 점점 커지고 있으나, 그 빛나는 눈이 모든 괴물인 것은 아니야." "잘 모르겠는데요." 니콜라스 박사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무리도 아닐 거야. 우리들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니까. 그렇지, 커다란 아메바를 생각해 보게. 중심에 하나의 핵을 가지고 있는 젤리와 같은 모양의 덩어리를 말야." "아메바 말이죠." "그래요. 그 핵의 영향으로 젤리 모양을 한 것은 먹을 것을 마구 먹고 성장해요. 그러나 핵에서 떨어지게 하면 그것은 생명이 없는 젤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야." 그 설명은 데이비드에게도 잘 이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탐험대가 그 눈 속에 들어갔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다. 그러나 핵에서의 영향을 받아 자극이 되면, 그 가엾은 사슴을 엄습한 눈처럼 된다는 거다. 이번에는 네이슨 교수가 말했다. "그것은 우리들과는 정반대의 생물이야.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산소를 호흡하여 살고 있지만, 그것들은 질소를 호흡하는 이상한 차가운 생물인 거지. 우리들이 몸 속에서 산소를 불태우고 있는 것과 같이, 질소를 불태워서 살고 있는 것이야." "왜 그런 괴물이 만들어 졌는지요?" 데이비드가 이렇게 묻자, 네이슨 교수와 니콜라스 박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네이슨 교수가 설명했다. "과학자는 누구나 인공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려고 해요. 생명이 없는 것으로부터 말야. 그것은 과학자의 꿈인 거야, 데이비드. 더욱이 부산물로서 혼합된 것이 없는 순수한 초산이라는 것도 만들어진다." 네이슨 교수는 그러고 나서 화학 방정식이라고 하는 어려운 그림을 보여 주며 설명했는데, 데이비드에게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어떤 종류의 물로 만드는 모양이었다. "여하튼 인간의 몸의 세포가 늘어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꾸만 늘어나요. 질소를 호흡하고 먹을 것을 먹고 말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군요." "그렇지. 이 생물이 무엇이든지 아무튼 보통 눈을 손에 넣어 자기의 몸, 즉 아메바의 젤리에 해당되는 것인데, 그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일단 이 핵의 영향을 받게 되면 세계의 어느 눈도 이 놈 몸의 일부가 되지. 그리고 운동도 하고 성장도 하지. 따라서 먹을 것을 얻으려고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것이야." 데이비드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교수님,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에 발표하지 않고, 여기서 몰래 앉아서 어쩌자는 겁니까? 대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네이슨 교수는 침착하게 말했다. "앉아요, 데이비드군. 자네가 지금 흥분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이 케인필드, 아니 뉴햄프셔주 전체에 걸쳐 일어난다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나?" "말할 것도 없이 대소동이 일어나겠지요. 그러나......." "혼란뿐 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저 로빈 소년이 만든 눈사람 때라면 양동이 두세통의 뜨거운 물만 부으면 끝나는 일이지. 그러나 힘이 강해져서 산에 들어간 지금에 있어서는 간단히 처치할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 것이야." 데이비드는 말없이 끄덕였다. 저 산 전체의 눈이 영향을 받은 지금에 있어서, 어디에 그놈이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지 않은가. 거기까지 가서 닿기 전에 이쪽도 사슴 같은 최후를 당하게 될 것은 뻔하다. 네이슨 교수는 계속했다. "숲은 태양의 빛을 가려 그놈이 곧 녹지 않게 감싸주며, 나무나 숲의 동물은 그놈의 먹이가 되기도 하여 힘이 강해지기만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추워질 것이므로 눈은 자꾸만 내릴 것이고, 우리들이 하나하나 녹여 간다고 해도 그놈을 확실히 해치웠는지를 잘 알지 못할 거란 말야." 데이비드가 급히 물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들은 그 눈의 괴물, 다시 말해서 핵에 해당하지만, 그놈이 우리들에게로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놈이 확실히 여기에 온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니콜라스 박사와 내가 지금부터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야." "니콜라스 박사도 말입니까? 그럼, 오늘 아침 그 가이거 계수관을 사용하여 방사능을 조사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 네이슨 교수는 조용히 웃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어. 어쨌든 우리들은 그놈을 이쪽으로 이끌어 올 간단한 장치를 만들었지. 지금 우리들이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장치를 가장 힘을 내게 하는 장소에 설치하는 일이야. 여기서는 뒤쪽 낭떠러지의 꼭대기밖에 없을 것이야." "낭떠러지 위라고요! 이처럼 캄캄한데 거기까지 오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설사 미끄러운 눈이 없더라도 여간 큰일이 아닙니다." "혼자서도 가지고 있을 만한 간단한 거야. 날이 저물기 전에 설치하고 돌아오려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장치가 늦어졌던 거야." 네이슨 교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갈 작정이다. 나는 점심 후에 거기 가서 확인했기 때문에 길을 잘 알고 있어." 그러자 카렌이 일어섰다. "아버지가 가시면 안 돼요!" 니콜라스 박사도 가만있지 않았다. "내가 가겠어. 거기에 놓으면 좋다고 말한 것은 나의 생각이니까 말야. 더욱이 거기 가는 것보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이 위험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데이비드가 나섰다. "제가 가야 합니다. 선생님들은 장치를 만드는 데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건 젊은 제가 맡아야 합니다. 더욱 그 후에 일어날 위험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선생님 두 분이 잘 알고 계시니까요." 카렌이 외쳤다. "모두들 그만두셔요. 어느 분이나 제게 있어서는 귀중한 분들이어요. 그러나 누구든 가야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하고 카렌은 세 개비의 성냥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이것으로 결정해 주셔요. 한 개비에는 꼬투리가 없어요." 먼저 네이슨 교수가 뽑았다. "유감인데, 이 개비에는 꼬투리가 있군." 다음으로 니콜라스 박사가 뽑았다. "아니 내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데이비드가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럼, 나머지는 보나마나 아닙니까?" 카렌이 어깨를 흔들면서 외쳤다. "데이비드, 미안해요!" "아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니까. 자, 서둘러 떠나야겠어." 다가온 안개   니콜라스 박사는 곧 지하의 연구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이얼이 붙은 금속 상자와 전선을 감은 2개의 작은 도구를 가지고 왔다. 그 2개라는 것은 마이크로폰과 같은 것 하나와 안테나가 붙은 작은 상자였다. 니콜라스 박사는 설명해 주었다. "그 괴물은 주위의 눈을 자극하는 전파를 내보내고 있다. 그 전파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마이너스의 전기를 되풀이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니콜라스 박사는 웃었다. "오늘 아침 가이거 계수관을 사용하는 척하면서, 그 마이너스 전파의 주파수를 조사했어. 물론 다른 주의를 딴대로 돌려서 큰 소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아, 그러셨던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카마이켈 서장은 마구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럼 저는 뭘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러자 니콜라스 박사는 작은 상자와 마이크로폰을 가리켰다. "이것을 낭떠러지 위에 놓아주기만 하면 돼요. 이 안테나 같은 것이 괴물의 위치를 측정하지. 이 마이크로폰 같이 보이는 것은 그것과 같은 주파수의 플러스 전파를 발사하여, 괴물을 이쪽으로 끌어당기는 작용을 하는 거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데이비드의 임무는 그 2개를 낭떠러지 위에 장치하고, 그것과 이 집에 장치할 다이얼이 있는 금속 상자와를 전선으로 잇는 일이었다. 몇 분 후에 준비를 끝낸 데이비드는 2개의 기계를 넣은 자루를 어깨에 걸고, 감은 전선은 손에 들고, 큰 회중전등은 벨트에 차고서 집 앞에 나섰다.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데이비드가 낭떠러지 위를 그윽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네이슨 교수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등불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겠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주게. 성공을 빌겠어." 카렌은 격려하기 위해서 데이비드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데이비드, 조심하셔야 해요." "걱정 말아요." 데이비드는 힘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냇가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 어깨에 건 전선을 풀어 나갔다. 그럴 때마다 회중전등의 빛이 숲 속에서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내를 건너가자, 그쪽은 가파른 고개였다. 데이비드는 몇 미터씩 가다가는 전선을 풀기 위하여 멈추어 섰고, 그리고는 또 가파른 고개를 올라갔다. 숲에서 나오자, 온 몸에 달빛을 받으며 가게 되었다. 낙엽송 꼭대기 위에 하늘이 보였다. 거기에는 낮게 뜬구름처럼 날아가는 그 반짝반짝 빛나는 안개가 보였다. "악마 같은 안개!" 자꾸만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산의 경사는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숲을 나와서 네이슨 교수가 말한 바위에 이르렀다. 한숨을 돌린 데이비드는 저 밑의 오두막을 굽어보았다. 희미하게 불빛이 보인다. 다음은 바아커 산 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데이비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아커 산의 꼭대기는 얼음처럼 푸르고 횐 안개 바다 위에서, 컴컴한 하늘에 솟아 있었다. 안개는 데이비드가 있는 낭떠러지와 꼭대기의 한 가운데까지 다가서고 있었다. 불과 100미터가 될까 말까 했다. 이따금 안개는 날아올랐다. 그때마다 그 뒤에서 앞으로 다가오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의 벽이 보인다. 데이비드는 그 눈의 높이를 보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눈은 없었다! 바아커 산의 모든 눈을 합쳐도 이렇게는 많지 않을 거다. 그것이 다가온다!" 네이슨 교수가 말한 대로 그것은 지구의 위기였다.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지 않으면 큰 변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무서운 괴물을 과연 해치울 수 있을 것인가. 데이비드는 두렵고 불안했다. 데이비드는 용기를 내어 얼른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바위틈에 나 있는 한 그루의 낙엽송에 전선을 이중으로 감고, 자루에서 꺼낸 마이크로폰에 그 끝을 이었다.. 그것이 끝나자, 자루에서 또 한 통의 전선을 꺼내 들고 안개를 보았다. 바람이 불어와서 데이비드의 얼굴에 닿았다. 안개를 안고 있는 그 바람은 발갛게 달아오른 모래처럼 뜨거웠다. 눈을 잘 뜰 수가 없었다. 간신히 안테나의 작은 상자를 비치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안개가 닿아, 푹푹 찌르는 것처럼 얼굴이 아팠다. "빨리 하지 않으면 끝장이다!" 가까스로 안테나와 작은 상자에 또 한 통의 전선의 끝을 이었다. "자, 이젠 숲 속의 언덕을 향해 죽어라고 뛰는 거다." 데이비드는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번 바아커 산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 이미 바아커 산꼭대기는 빛나는 안개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한 줄기의 빛나는 폭포와 같은 안개가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 위로는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의 벽이 있다. 데이비드는 감은 전선을 쥐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엎어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면서, 전선을 풀어가면서 필사적으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렸다. 심장이 터져 나갈 지경으로 쿵쿵 뛰었다. 큰 소리로 외치려고도 했지만, 목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푸르고 흰 안개가 비치는 곳에서 벗어났다. 그리하여 캄캄한 어둠 속에 들어갔을 때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숨조차 끊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머뭇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데이비드는 이렇게 자신에게 타이르며 다시 일어섰다. 전선은 데이비드를 따라 한 통, 또 한 통 풀려 나갔다. 겨우 작은 내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뒤에서 '우르릉' 하고 대지를 흔드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는 무엇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러고서는, 딱 그쳤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지금 막 내려온 언덕 전체가 푸르고 횐 은빛으로 싸여 있다. "눈사태다 ! " 데이비드는 눈앞이 캄캄했다. 빨리 피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파묻혀 죽으리라. 이때, 누군가가 데이비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전선을 풀었다. 네이슨 교수였다. 카렌도 어느 새 와 있었다. 그리고는 데이비드의 손을 아프도록 꼭 쥐었다. 네이슨 교수는 말했다. "정말 아슬아슬했어. 불과 몇 초 차이였다. 눈사태가 일어나자 자네는 이제 끝난 줄 생각했어. 자네 같은 청년이 해 주어서 정말 잘 되었어. 니콜라스나 나였다면 틀림없이 그 눈사태를 만났을 거야." 네이슨 교수가 이렇게 말하자, 데이비드는 가슴이 뭉클했다. 카렌이 명랑하게 말했다. "상처투성이여요. 어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어요" 그 말에 네이슨 교수가 덧붙였다. "그렇지 이제부터 습격해 오는 것은 보통의 것이 아니야. 자네가 힘껏 버티지 않으면 안 돼."   잡히고 만 눈   숨막히는 긴장이 계속되었다. 다이얼이 붙은 금속 상자를 조사하고 있던 니콜라스 박사가 말했다. "그 괴물이 꽤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 데이비드가 물었다. "꾀어서 오게 한 뒤는 어떻게 처치하는 건가요?" 네이슨 교수가 대답했다. "우리의 계획을 가르쳐 주지. 데이비드군, 저 기계로 곧 오두막 옆에까지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밖에서 지하의 실험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놈을 여기 넣는 거다. " 데이비드는 등골이 오싹했다. "여기에 넣는다구요?" "그렇지 문을 열고 스프링을 죄는 거지." 하고 네이슨 교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스프링을 죄어 놓으면 놈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자동적으로 닫아지는 거죠." "그대로야. 우리의 계획은 핵을 여기서 함정에 빠뜨리고 눈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거지. 그러면 눈은 빛나는 것을 멈추고 위험하지 않게 된다." "안에 넣어서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데이비드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그러자 네이슨 교수는 층층대의 가까운 벽에 걸려 있는 소방용의 호스를 가리켰다. "저 것은 벽 저쪽의 저수지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저수지의 수면은 지하의 실험실보다 1미터 반이나 높다." "그렇다면 굉장한 속도로 물이 흘러나오겠군요." "그렇다네, 데이비드군. 우리는 그놈을 몰아넣고 물을 끼얹는 거야," "물을 끼얹는 정도로 그 크게 된 괴물을 처치할 수 있을까요?" 네이슨 교수는 다시 깨우쳐 주듯 말했다. "그것이 어떤 괴물일지라도 역시 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게나."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는......" "그때는 이 오두막을 불태우거나 폭파시킨다. 그 놈을 몰아넣게만 되면 우리는 안전해. 보통의 눈 위를 도망칠 수 있는 거지." 과연, 이름 있는 과학자 두 분이 세운 계획이다. 정확하고 치밀하다. 그때였다. 조금 전에 들은 그 둔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바닥이 흔들렸다. "또 눈사태다!" 순간 무섭게 큰 소리가 났고, 그것은 오두막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유리창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네이슨 교수가 외쳤다. "어서 창문을 막아 줘!" 카렌과 데이비드는 재빨리 모포를 가지고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창문을 막았다. 그러고서 내려오자, 니콜라스 박사가 외쳤다. "오오! 주파수가 2초 사이로 됐다. 즉 그놈이 낭떠러지를 넘어섰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고 니콜라스 박사는 그 다이얼이 붙은 금속 상자를 가지고, 통기구를 빠져 층층대로 달려가며 말했다. "지하의 실험실에서 기다리기로 하자. 그리고 계기판을 보고 있다가 때가 되면 문을 연다!" "저도 가겠습니다!" 데이비드가 뒤를 따랐다. 뒤에서 네이슨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해. 여기는 나와 카렌이 경계할 테니까." 그야말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이처럼 길게 느껴진 일은 없었다. 꽉 쥐고 있는 주먹에 땀이 축축이 배었다. 니콜라스 박사가 외쳤다. "데이비드군 보라고!" 그러자 계기판의 바늘은 영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을 열까요?" "잠깐 기다려." 니콜라스 박사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다. "핵이 아닌 것을 가두어도 소용이 없지. 그러나 좋아, 열어버려!" 열 것까지도 없었다. 문틈으로 마치 물이 흘러들 듯이 들어왔다. 그리고 바닥을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불꽃이 뛰어다닌다. 데이비드는 무거운 빗장을 뽑아 아래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얼른 뒤로 뛰어가서 니콜라스 박사에게로 갔다. 눈이 와르르 밀려들어온다. 방 한쪽 구석은 반짝반짝 빛나며 소용돌이치는 안개로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됐다. 데이비드는 두 손으로 소방용 호스의 밸브 핸들을 꽉 틀어쥐었다. "잠깐만, 아직 아니야!" 니콜라스 박사는 데이비드의 손을 눌렀다. "자, 이젠 됐어. 문이 닫혔어!" 데이비드는 핸들을 돌렸다. 무서운 힘으로 물이 흘러나왔다. 안개는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증기처럼 빙빙 돌았다. 물은 안개를 뚫고 소용돌이치는 결정에 부딪쳤다. 그러자 안개는 조용히 공중에서 불꽃을 퉁길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라지고, 그리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저것이 핵이다!" 데이비드는 테이블 저쪽의 눈덩이를 노려보며 물을 쏘았다. 그것이 바로 세 사람의 인간을 죽인 장본인인 것이다. 물의 힘은 무서웠다. 당장에 그 덩어리를 몇 개로 떼어놓고는 벽에 때려눕혔다. 그러자 그것은 벽 쪽에서 휘돌다가 거품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만 중지 해!" 니콜라스 박사가 명령했다. 데이비드는 핸들을 돌려 물을 막았다. 니콜라스 박사는 테이블 옆의 바닥에 있는 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잿빛으로 말라빠진 눈덩어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잘 죽기는 했으나, 별로 대단하지는 못했구나." "그렇군요, 네이슨 교수님, 교수님의 말씀대로 역시 괴물이지만 눈이기 때문이겠죠." 데이비드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오두막을 향하고 있던 눈과 오두막 사이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서 지면이 보이고 있었다. 카렌이 계단을 내려왔다. "데이비드, 괜찮아요?" "괜찮아. 올라가서 아버님께 말씀드려요. 우리들은 그놈을 해치웠다고 말야." "정말 잘 됐어요!" 카렌은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카렌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곧 이어서 날카로운 소리가 데이비드의 귀를 울렸다. "데이비드, 살려 줘요!" 데이비드가 얼른 뛰어가 보니, 카렌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부엌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앗, 이쪽이 진짜였구나!" 산을 향하고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푸르고 횐 빛의 안개에 싸여 형태가 확실하지 않은 커다란 것이 바닥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몸부림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중앙이 사람 키만큼 높이 부풀어올라 있고, 씩씩 숨을 쉬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젤리처럼 바닥을 미끄러지며 굴러가서 현관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아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괴물의 뒤에는 네이슨 교수가 절반은 안개에 싸인 채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부엌의 의자를 그놈을 향해 집어던지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괴물을 피하여 뛰어들어갔다. 정신없이 네이슨 교수의 손을 끌어당기며 방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네이슨 교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저 숨만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정신차리셔요, 선생님." 이렇게 말했을 때였을까, 이번에는 카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 큰일났다!" 몸을 홱 돌리고 바라본 데이비드는 이제 늦었다고 생각했다. 주위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횐 덩어리의 괴물은 씩씩 소리를 내면서 이번에는 카렌이 있는 통기구 속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가! 데이비드는 눈을 다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데이비드는 무엇인가 차가운 축축한 것에 부딪쳐서 넘어졌다. 그리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횐 것 속으로 들어갔다. "이젠 다 틀렸다!" 눈앞이 캄캄해 왔다. 어떻게 하여 데이비드는 얼른 일어서서 마구 몸부림쳤다. 손은 차갑고 굳어진 우유에 닿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씩, 씩......." 옆에서는 기분 나쁜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리고 토할 것 같은 싫은 냄새가 나는 것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운이 좋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데이비드는 안개 속에서 헤쳐나을 수가 있었다. 목도 얼굴도 손까지 따끔따끔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카렌의 모습이 보였다. "카렌!" 카렌은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 벽에 힘없이 기대고 서 있었다. 데이비드는 카렌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방구석 밖에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데이비드는 앞에 있는 암염 자루를 피하면서 카렌을 끌고 갔다. 그러나 거기쯤 피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얼마의 시간을 연장할 뿐이었다. 데이비드는 문득 그 처참한 베일리 씨의 시체가 생각났다. 자기는 어찌 되더라도 카렌만은 살리고 싶다....... "무슨 무기가 없을까? " 그러나 호스도 없고, 집어던질 것도.... 그러다가 문득 데이비드는 앞에 놓여 있는 암염 자루에 눈이 멈춰지자 생각이 났다. "이놈은 보통 눈이니까 녹을 거다....... 겨울 길에 소금을 뿌리지, 얼음을 녹이기 위하여!" 아직 맥을 못 추는 카렌을 벽에 기대 세워 놓고, 데이비드는 있는 힘을 다해 암염 자루를 집어들었다. 자루의 입 쪽에서 소금이 흘러내렸다. 데이비드는 필사적으로 그 흰 핵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루의 입 쪽을 힘껏 흔들며 앞으로 퍼부었다. 쏟아져 나온 소금은 소용돌이치는 안개 속의 흰 괴물을 덮어 씌웠다. 곧 이어서 마지막 힘을 내어 남아 있는 소금을 한가운데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난 다음 카렌의 앞을 막아서서, 카렌의 머리를 보호해 주었다. 소금의 효력은 즉시 나타났다. 안개는 부르르 떨더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바닥 위의 괴물도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가 하면 푸른 불꽃은 점점 녹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한 번 부풀어오르더니, 다음 고무풍선이 쭈그러들듯 납작해졌다. 이윽고 바닥 한가운데에는 잿빛의 진득한 물방울과 분필 같은 물의 덩어리가 있을 뿐이었다. 방안에는 코를 찌르는 냄새로 가득 찼다. 데이비드는 숨을 몰아쉬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멍하니 있는 카렌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젠 끝난 거야."   힘을 합해서   걱정이 되어 달려온 드와이트 편집장도 함께 모두 방앗간 오두막에서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이슨 교수의 말이다. "이젠 틀렸다고 생각했었어. 나는 발을 삐어서 움직일 수 없었고, 니콜라스 박사는 데이비드군이 실험실을 나올 때 문을 닫았으므로 올라올 수가 없었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암염을 던졌었나?" 데이비드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교수님 덕분이지요. 선생님은 그놈이 괴물에는 틀림없으나 보통 눈과 다름없다고 가르쳐 주셨지요. 저는 마지막에 그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끝없이 계속됐으나, 이 정도로 소개하기로 한다. 네 사람은 3대의 자동차를 타고 웨스트오버로 돌아가기로 했다. 카렌은 데이비드의 차에 탔다. 두 사람은 바아커 산 쪽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데이비드가 활약한 낭떠러지 위엔 달빛을 받고서 낙엽송의 숲이 검게 누워 있었다. 그 낭떠러지 위로 바아커 산이 조용히 솟아 있었다. 하늘은 맑게 개고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악마의 눈에 덮여 푸르고 희게 빛나고 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카렌은 불안한 듯 이렇게 물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요?" "물론.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일은 백만의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것이라고 아버님이 그러지 않았어. 과학자의 노력은 여러 가지를 낳게 하지만,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모두의 힘에 의해서 반드시 멸망하는 거야. 이번 일만 해도 그것을 확실하게 해 주었어." 하고 데이비드는 카렌의 손을 꼭 쥐었다. 바아커 산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달이, 축복하듯 두 사람을 비쳐 주고 있었다. 작품 해설   과학이 낳은 괴물   공상 과학 소설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소설이 있습니다. 화려한 우주에서의 대 활약만이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닙니다. 과학에 얽힌 이야기부터 미래에 생길 일까지 모든 분야에 걸칩니다. 이 소설은 오늘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는 사건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지구의 어디에선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큰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비밀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중에도 눈의 결정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이 만약 눈의 쌍둥이 결정을 발견했다면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눈은 힘만 붙으면 반드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과학의 연구에서 어이없는 괴물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훌륭한 공상 과학 소설입니다. 우리들은 과학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백설의 공포」의 작자 리차드 홀덴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소설은, 언제까지나 주의 깊게 관찰하여 머릿속에 간직하여 둘 필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와 같이 그 일이 절망적인 일을 만났을 때 소용이 됩니다. 뉴욕을 겨울에 방문한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은, 길이 새하얗게 되어 있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길이 얼어서 자동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암염을 뿌렸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온 데이비드는 그것을 생각하여 눈의 괴물을 겨우 처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백설의 공포」는 1955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매우 평판이 높았던 작품입니다. 색다른 주제, 그리고 겨울 같은 때에 그것을 읽으면 마음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절박한 묘사 등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작자인 리차드 홀덴은 미국의 작가이며, 공상 과학 소설보다 추리(괴기 소설, 추리 소설)를 잘 짓는 사람입니다. 이 작품에서 추리 소설의 재미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백설의 공포 홀덴 작 ․ 박 옹근 역 아이디어 회관 과학문고 164p 19cm (SF세계 명작8)   인 쇄      1975년 5월 1일 발 행      1975년 5월 5일 역 자      박 흥근 제 판      명림 정판사 오프셋     장원 정판사 인 쇄      일 신 사 제 본      영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 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1975. 2. 26. 제2-205호       전화 (26) 1975 ․ (25) 1970   값 450원
1186    공룡 세계의 탐험- 코난 도일 지음김 상일 옮김 댓글:  조회:324  추천:0  2023-08-23
공룡 세계의 탐험- 코난 도일 지음김 상일 옮김 / 권 오웅 그림     이 전집을 펴내면서   눈 가득 다가오는 푸른 하늘, 밤이면 뭇별이 꿈처럼 반짝이는 하늘, 혹 여러분은 그 무한한 공간에 어떤 세계가 있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땅 속, 바닷속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어요? 이미 오래 전에 이런 호기심이 싹터, 공상 과학 소설(SF)의 개척자 쥘 베른은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고, 바다 밑 2만리를 '노틸러스 호'로 여행시켰습니다. 그 뒤, 상상 속의 일들은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SF는 고도의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신비한 우주 현상을 추적하고 과학 기기를 사용하는 등, 시대를 앞장서서 이끄는 과학적 사고 소설로 성장했습니다. SF는 땅 속이나 바닷속은 물론 아득한 우주 공간이며 과거와 미래의 시간 속으로 인간을 여행하게 하여, 과학적 흥미와 함께 미래를 살아가는 힘을 길러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SF가 과학적인 면에만 치우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외계인과의 진정한 우정, 로봇끼리의 참다운 사랑 그리고 정의의 실현 등, 영원한 꿈과 환상이 펼쳐지고, 훈훈한 사랑이 꽃을 피웁니다. 《주니어 공상 과학 명작선》은 바로 과학의 시대, 우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미래를 이끌어 갈 여러분의 머리를 훈련시키고, 그 때를 위해 값진 예언을 들려 줄 것입니다. -- 편집 위원회   특종 기사를 찾아서··············· 5 교수와 대결하다················ 12 거짓말 같은 이야기··············· 17 뜻밖의 상황·················· 24 아마존의 오지로················ 32 나타난 뜻밖의 인물··············· 38 통나무 배로 바꾸어 타고············ 43 인디언의 공격의 북 소리············ 47 다투는 교수와 박사··············· 53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60 수수께끼의 해골················ 66 나타난 테라노돈················ 75 고메즈의 배신················· 82 끔찍한 발자국················· 92 덤벼드는 테라노돈··············· 98 어둠 속에 떠 있는 괴물············ 106 원숭이냐, 인간이냐?·············· 116 추격해 온 공룡················ 124 사라진 친구들················· 132 위태롭다! 사마리 박사············· 139 목숨을 건지다················· 148 원인과 인디언의 싸움············· 154 하늘을 나는 경기구(輕氣球)·········· 165 마침내 탈출구를 발견하다··········· 172 대환영···················· 180 믿을 수 없는 탐험 보고서··········· 186 증거, 살아 있는 테라노돈··········· 192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197   작품 해설··················· 201   특종 기사를 찾아서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그렇다, 먼저 내 소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나는 영국에서도 가장 유력한 신문으로 알려져 있는, 런던의 《데일리 가제트》 신문의 젊은 기자이다. 이름은 에드워드 머론, 기억해 주기 바란다. 아직 신출내기 신문 기자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굉장한 기사를 발표하여 세상을, 아니 독자 여러분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제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이야기인데, 사실은 나 스스로도 처음 얼마 동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짜 놀라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인 여러분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내 자신이 이 눈으로 보았고,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군소리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자.   "머론, 잠깐......." 외근(外勤)을 마치고 편집국으로 돌아온 내 모습을 발견하자 편집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불러 세웠다. 편집국장-맥커돌 씨는 곱사등이처럼 허리가 굽은데다 붉은 머리카락이다. 대머리로, 얼른 보아 그다지 잘생긴 사람은 아니지만 신문 기자로서는 오랜 경험이 있는 실력이 풍부한 전문가였다. 나는 이 편집국장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다. 그래서 월급(月給)에 비하여 너무나 바쁜 이 신문사에 아무 말 없이 참고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앉아요, 머론." "예, 실례하겠습니다." "어떤가, 뭔가 재미있는 사건이 없나?" "요즈음은 세상이 정말 조용해서요. 위험이나 모험 따위는 도무지 없어요. 국장님. 무엇인가 어려운 사건은 없나요?" "이봐, 그걸 찾아내는 게 기자들이 할 일이 아닌가. 아무튼 말이야........." 편집국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 현대판 허풍선이 남작 얘기를 알고 있겠지?" "유명한 동물학자 챌린저 교수 말인가요? 텔레그래프 신문사의 브라운 기자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 "알고 있군. 그 사람인데, 수완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야. 어떤가, 한번 만나 보지 않겠나?" "예, 부딪쳐 보겠습니다." "그 교수는 우리들 신문 기자를 현재까지 네 사람이나 상처를 입혔지. 게다가 진짜 사기꾼 같아. 그러니까 엉터리지. 신문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그 교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어. 그 정체를 폭로하여 가짜 껍데기를 홀랑 벗겨 주어야겠단 말이야. 어떤가, 자네 한번 해 볼 생각이 없는가?" "그러나 챌린저 교수에 대해서 소상하게 아는 바가 없는 걸요." "그럴 줄 알고 여기에 메모를 해 놓았으니까 읽어 봐." 편집국장은 서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조지 에드워드 챌린저. 1863년 스코틀랜드의 라그스에서 출생하였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1892년 대영 박물관 조수. 1893년 비교 인류학부 부부장(副部長). 그 해에 동물학 연구에 의해서 크레이튼 상(償)을 받았다. 해외 학술원. 소시에테 베르즈 회원. 미국 과학 협회 회원. 고생물학 대영협회(大英協會) 역사부원. 저서는 《칼무크 족의 두개골 연구》, 《척추 동물 진화 요강》, 《와이즈먼 학설의 과오》, 그밖에 동물학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다. 취미는 등산. 주소는 런던 서구 켄싱턴 엠모어 공원......'   "경력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또 무슨 일을 했나요 ? 제가 만날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별안간 편집국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편집국장은 곧 침착을 되찾더니, "교수는 2년 전쯤 혼자 남아메리카에 갔다가 작년에 돌아왔지. 남아메리카에 들른 것은 확실한데, 어딜 갔었는지는 모르네. 어쨌든 뜻밖의 사건에 부딪혔을 거라고 하는데, 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거지. 아무튼 무뚝뚝한데다, 꼬치꼬치 캐묻는 신문 기자를 계단에서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니까 말이야. 머론, 자네도 충분히 조심을 하게. 부상을 입으면 안 되니까 말이야." 하며 염려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오히려 힘이 솟는다. "제게 맡겨 두십시오, 국장님. 좌우간 부딪쳐 보겠습니다." 일어서서 문 쪽으로 나가는 나에게 편집국장이 뒤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으나, 이미 나는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문사를 뛰쳐나온 나는 걸으면서 조금 전에 편집국장에게서 받은 챌린저 교수에 관한 메모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이 일이 꽤나 어려운 작업이 되리라고 짐작했다. '챌린저 교수는 꽤 고집쟁이인 모양이지. 게다가 신문 기자들을 싫어해, 조심하지 않으면 곤란할 거다!' 그래서, 나는 먼저 과학자들이 모이는 클럽에 들르기로 했다. 클럽에 들어서자 우연히도 자연 과학에 관한 신문을 만드는 신문사에 근무하는 헨리 선배가 있었다. 얼른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헨리 씨, 안녕하십니까. 잠깐 묻겠는데, 챌린저 교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죠?“ 곧 헨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토해 내듯이 대답했다. "대단한 허풍선이야. 몇백만 년이나 전에 이 땅 위에서 사멸해 버린 공룡이라든지, 익수룡이라든지, 또 쥬라기의 대 파충류가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곳을 남아메리카에서 발견했다는 거야. 우리들 신문 기자를 집합시켜 자기 얘기를 믿도록 하려 했었어. 물론, 누구 하나 상대하지 않았지만 말일세. 그러자 교수는 신경질을 부리더니 그 후부터는 그 발견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말았어. 아마 자기의 허풍이 부끄러워서 잠자코 있는 것 같네." 헨리 선배 자신도 전혀 믿고 있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어, "그리고 또 없나요?" 하고 다그쳐 물었다. "응? 아, 자네도 알겠지만 내 전문은 세균학이야. 인간에 대해선 별로 시비를 하지 않는 편이지만 학자들 모임에서는 챌린저 교수 얘기가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물학자로서의 그는 훌륭한 모양이야. 머리도 좋다는군. 다만 성미가 급하여 금방 노골적으로 흥분을 하지. 그리고 적잖게 허풍을 치며, 아마존 사건에서는 사진 위조까지 했고, 최근에는 빈 학회에서 와이즈먼 씨의 진화론을 공격하여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지." "그 빈 사건을 간단히 말해 줄 수 없어요?" "한 마디로 설명할 순 없어. 그렇군, 신문사에 자료집이 있으니 시간이 있으면 그걸 보러 오게." "예, 부탁합니다." 선배의 호의로 나는 그 자료를 보러 그의 신문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 자료집―다윈과 와이즈먼―에 있는 논문은, 나와 같이 과학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문장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영국을 대표하는 챌린저 교수가 유럽 대륙의 과학자들의 의견을 낱낱이 부정하고, 그 때문에 빈 학회가 큰 혼란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된 논의(論議)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교수와의 인터뷰를 단념할 만큼 소극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선배의 신문사 이름을 빌어 챌린저 교수 앞으로 지도를 받고 싶다는 편지를 발송한 것이다.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는 매일 선배 회사에 들렀다. 물론 교수로부터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은 답장이 없었다. 그 다음 날도 없었다. '이거 편지 쓰는 법이 서툴렀나? 인터뷰를 하지 못한다면 편집국장을 만날 면목이 없잖아........' 하고 생각하면서 사흘째에 선배 회사를 찾아갔다가 나는 무척 반가워했다. 교수로부터 편지가 와 있었던 것이다. 자리를 옮겨 봉투를 뜯어보았더니, '오늘 11시에 만나러 와도 좋습니다........' 라고 답장에 씌어 있었다. 나는, 됐다! 싶었다. 어쨌든 이제 신문 기자를 싫어한다는 챌린저 교수를 만나야겠다는 첫 번째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약간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 답장의 문면(文面)이 정말 투박했고, 더욱이 글씨체도 아무렇게나 마구 갈겨 쓴 점이었으나, 이 때 나는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기대 뿐으로 딴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교수와 대결하다   교수의 답장을 받은 것은 10시 반이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황급히 교수 집으로 갔다. 택시가 선 곳은 대문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 앞이었다.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얼굴이 검고 몹시 메마르고 키 큰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사내는 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말했다. "누구시죠? 무슨 용무입니까?" "예, 나는 머론이라는 학생입니다. 교수님과 면회 약속이 돼 있습니다." "편지를 가지고 오셨나요?" 나는 챌린저 교수에게서 받은 편지를 그 사내에게 보여 주었다. "좋아요. 들어와요." 이리하여 나는 어렵게 기인이라 할 수 있는 챌린저 교수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교수의 방은 과연 학자다운 서재였다. 사방의 책장에는 난해하게 보이는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로서는 그 제목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책들이었다. 책장에 꽂히지 못한 책들은 큰 탁자 위에 지도나 괘도 따위와 함께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탁자의 건너편에 회전 의자가 있었고, 그 의자에 한 사람이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챌린저 교수이다. 그 모습을 한눈에 본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황소 같은 큰 몸집, 널찍한 이마, 두툼한 눈썹, 남을 꿰뚫어보는 듯한 파란 두 눈동자, 앞가슴까지 늘어뜨린 턱수염, 어깨는 넓고 가슴은 통나무처럼 두꺼웠다. 게다가 양팔이 굵고 길었으며, 더구나 손목에는 검은 털이 촘촘히 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교수에게서 받은 편지를 조심조심 탁자 위에 살며시 놓았다. "아, 편지를 보낸 젊은이로군." 교수는 별안간 포효하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며 내 얼굴을 응시했다. '이거 대단한 상대로구나. 어물어물하다가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했으나 기분을 가라앉히고, "예, 그렇습니다, 교수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챌린저 교수가 연구하고 있는 동물학 따위에 대해서 아무 기초 지식도 없는 나는 어떻게 말머리를 꺼내야 할 것인지 아찔했던 것이다. 우물거리고 있는 내 모습에서 교수는 금방 나의 위장술을 간파한 모양으로, "나와 두뇌 시합을 하러 온 거야, 이 풋내기 기자가!" 하고 말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일어선 모습을 본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교수는 몸집이나 얼굴 생김새와는 딴판으로 신장이 내 어깨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키만 보면 어린이와 같았다. 그런데 번쩍거리는 눈은 분명히 성이 나 있다. 그것도 보통 성이 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네 신문 기자들에게는 절대 방문하지 말라고 일러 둔 바가 있어. 당신은 이 따위 엉터리 편지를 보내어 나를 기만했을 뿐 아니라, 뱃심 좋게 찾아오기까지 했어. 찾아온 이상은 각오가 돼 있겠지!" 나는 그 순간 꿀꺽 하고 또 침을 삼켰다. 그리고 곧 응수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얻어맞거나 하진 않을걸요!" 하면서 뒤로 물러선 나는 뒤쪽의 문을 활짝 열었다. 교수는 탁자를 돌면서, "뭐? 당신은 내게 얻어맞지는 않을 거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 쪽으로 접근해 왔다. "나는 말이야, 지금까지 당신네 신문 기자들을 벌써 몇 녀석이나 이 집에서 몰아 냈어. 당신을 포함하여 넷인가 다섯 사람일 거야!" "교, 교수님. 난폭한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교수님이 난폭해지시면 저도 그냥 당할 수만은 없잖습니까. 저는 럭비 선수 였으니까요....." 이 순간이었다. 챌린저 교수가 별안간 내게 덤벼 온 것이다. "닥쳐!" "앗!" 서로 상대편을 붙잡은 채 교수와 나는 방문 밖으로 밀려 나왔다. 조금 전에 내가 방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끝에 거리에까지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맛이 어떠냐, 이 풋내기 기자야!" "뭐라고! 덤빌 테면 덤벼라!" 나와 교수는 서로가 욕설을 퍼부으며 겨우 일어섰다. 또 한 번 주먹다짐을 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 마침 운수 좋게 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지나가다가 살기가 서린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게 뭐요, 점잖지 못하게!" 얼굴을 찌푸린 채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 경찰관은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오?" "이 사람이 먼저 나를 쳤소." "당신이 이 사람에게 폭행을 가한 거요?" 경찰관의 질문을 받은 교수는, 헐떡이며 어깨로 숨을 쉬고 있을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자 경찰관은 약간 준엄하게, "또 했군요, 선생. 당신은 요전에도 이런 소란을 피우셨어요. 저것 보시오, 이 청년의 눈꺼풀에 멍이 들지 않았소." 하고 경찰관은 내 쪽으로 돌아서자, "여보시오, 당신은 챌린저 교수를 고발하겠소?" 이런 질문을 받게 되자 나는 비로소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갑자기 어리석게 소란을 피운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아닙니다, 내가 나빴던 겁니다. 교수님의 연구를 방해했어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경찰관은 손에 든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알았소. 어쨌든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범하지 마시오. ........ 아, 다들 물러나요! 다들 돌아가시오!" 모인 구경꾼들을 손짓을 하며 해산시키던 경찰관은 교수에게, "아시겠습니까, 요 다음엔 절대 용서치 않겠소. 점잖지 못하게시리........“ 이렇게 말하며 경찰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   교수와 나는 거리에서 잠깐 동안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수의 눈에서는 조금 전에 있었던 노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음성만은 여전했다. "들어와, 당신과의 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고 악을 쓰듯이 말하고 벌써 자기 혼자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뜻밖의 교수의 말에 나는 내심 약간 놀랐으나 직업상의 의무도 있었으므로 아무 말 없이 교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아까 교수와 함께 굴러 떨어진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아무튼 거기 앉아요! "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교수의 눈초리는 결코 나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의 경찰관에 대한 내 대답이 교수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그 증거로는 말투가 훨씬 부드럽게 느껴진 것이다. 교수는 내 얼굴을 응시하면서, "당신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신문 기자치고는 좀 보기 드문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만은 특별 대우를 하겠소. 그러니까 말이야, 당신이 거짓 수법으로 나를 만나고 싶어한 진짜 목적, 곧 남아메리카 여행의 진상을, 특히―알겠소? 특히 당신에게 들려 줄 마음이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 미리 일러두겠소. 내 얘기를 듣고 나의 비평을 하면 안 돼요. 또 내 허락을 받지 않고 딴 사람에게 얘기를 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신문 따위에 절대로 발표하면 안 됩니다. 어떻소, 약속할 수 있소?" "예, 저는 신문 기자니까 교수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적이 어려운 노릇일 겁니다. 하지만 저도 사내입니다. 교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좋아, 당신을 믿겠소. 되풀이하지만 절대로 약속을 지켜 주시오." 교수는 일어서자 방문을 새삼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리고 다섯 시간 가량이나 나는 챌린저 교수가 강조하는, 절대 비밀을 지켜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것은 정말 내가 일찍이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몇 번이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묘해지곤 했는지 모른다. 나를 놀라게 한 교수의 이야기란 다음과 같다. 챌린저 교수는 2년 전에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 오지로 아마존에 살고 있는 동물들을 조사하러 갔었다. 그 근방에는 지도에도 없는 많은 지류가 밀림 속을 누비며 흐르고 있었으며, 그 연안은 아직 일부분밖에 탐험되고 있지 않은, 문자 그대로 미지의 세계였다. "나는 그 근처에서 동물 분포 조사를 뜻대로 할 수 있었소. 그리고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때마침 하룻밤을 어떤 인디언 부락에서 보내게 되었소. 그 곳은, 가던 길에도 묵으면서 추장을 비롯하여 몇 사람 토박이들의 병을 치료하여, 크게 인기를 얻었던 마을이었소, 내가 돌아온 것을 보자, 인디언들이 손짓으로 추장의 집에 중환자가 있다고 알리는 거였소. 그래서 서둘러 추장 집으로 갔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병자는 막 숨을 거둔 뒤였소. 그리고 놀란 것은, 그 병자가 토박이가 아니라 백인이었던 겁니다." 챌린저 교수는 완전히 기분이 회복되어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신기한 그 이야기에 가슴 설레면서 온몸이 귀가 되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말에 의하면, 그 백인은 그 지방에서 보지 못했던 사람으로 밀림 속을 헤매며 돌아다니다가 간신히 이 마을에 다다른 모양이었소. 누더기를 걸친 것으로 보아 고통스러운 여행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백인이 남겨 놓고 간 부대 안에는,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시 레이크 거리의 메이플 화이트라고 주소 성명이 씌어 있었지요. 물건은 노트 한 권, 스케치북, 그리고 그림물감 상자, 권총 한 자루,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책상 위에 놓고 바라보는 구부러진 뼈뿐이었소." 교수의 책상 위에는 누더기처럼 된 스케치북이나 동물의 큼직한 뼈, 그리고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안개가 낀 사진 따위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나는 막연한 기분으로 스케치북을 들고 책장을 펼쳐 보았다. 거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본 순간, 나는 별안간 눈이 번쩍 뜨였다.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짐승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머리는 새와 같고, 허리께는 도마뱀, 울퉁불퉁 비늘이 돋아난 길쭉한 꼬리, 등에는 수탉의 볏 같은 것이 한 줄로 서 있었다. 그 곁에 서 있는 난쟁이와 같은 인간과 크기를 비교해 볼 때 여간 거대한 동물이 아니었다. 그 뿐 아니라 교수의 설명이 더 기묘했다. "이 그림은 메이플 화이트-그 사망한 백인이, 실제로 있는 동물을 보고 그린 것임에 틀림없어요. 아니, 분명 그래요." 교수의 말에는 무엇인가 자신이 넘친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럴 수가 있는 것일까? 이 동물은 쥬라기라는 아주 옛날에 있었던 공룡과 같았다. 쥬라기란, 지금으로부터 몇억 년 전의, 아직 지구상에 인간이 없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그런 시대의 동물이 현재도 살아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챌린저 교수는 진지하게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교수 자신이 자기 눈으로 목격했던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교수는 아마존의 인디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클루프리라는 악마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결심한 끝에, 싫어하는 토인들을 설득하여 안내인을 데리고 클루프리가 살고 있는 데를 찾아 나선 것이다. 챌린저 교수는 이야기를 하면서 책상 위에 해묵은 사진과 스케치북의 풍경을 펼쳐 보였다. "이걸 보시오, 이것이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는 낭떠러지요. 이것이 뾰족한 바위요. 보시오, 바위 위에 큰 나무가 있잖소." 아닌게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진과 스케치에 그려져 있는 풍경은 분명히 같은 것이었다. 양쪽을 비교하고 있는 나에게 교수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도중에 내가 타고 있던 배가 전복했었지. 모처럼 찍은 필름이 전부 못 쓰게 돼 버렸어, 한 장 남은 이 사진도 보다시피 흐릿하고 말이야." 교수는 여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교수가 촬영했다고 하는 사진을 자세히 보니 나무에 무엇인가 새와 닮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건 펠리컨인가요?" 하고 묻자, 교수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큰 소리로 웃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펠리컨이 높은 나무 위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건 새가 아닙니다. 파충류지요. 테라노돈(익수룡,翼手龍)이라는 것으로서 나는 이걸 총으로 맞춘 적이 있었소. 어때, 놀랐지요!" "그럼, 교수님은 현재 그걸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 유감스럽게도 이것도 날개의 일부분뿐입니다. 아까 얘기한 바와 같이 배가 전복되었을 때 이 귀중한 노획물을 잃어버린 겁니다. 날개만을 꼭 잡고 있었기 때문에 찢겨져 내 손에 남아 있게 됐지요." 챌린저 교수는 못내 아쉬운 듯이 이렇게 말하며 테라노돈의 날개라는, 박쥐와 같은 날개를 펼쳐 보였다. "굉장하군요. 이런 신바람 나는 얘기는 처음입니다!" 나는 외쳤다. 교수는 더욱더 신명이 나서 그 당시의 탐험 이야기를 내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신문에 그 탐험담을 싣지 못한다. 왜냐 하면 나는 챌린저 교수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거나 발표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던 것이다.   뜻밖의 상황   교수는 상대편의 생각을 간파하는 특이한 신경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실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떻소, 오늘 밤 동물학회의 강당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학자 월드런이 《연대(年代)의 기록》이라는 강연을 합니다. 월드런은 일단 그 방면에서는 알려진 인물이니까 오늘밤의 청중은 제법 많을 겁니다. 과학자가 아닌 당신에게는 학술적인 강연은 약간 재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으나, 주최자의 부탁을 받아 하게 될 나의 강연자에 대한 감사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나를 새삼 재평가하게 될 거요." 교수의 말에는 무엇인가 까닭이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느낀 나는, "예, 꼭 참석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날 밤의 강연회에 참석한 일이 이후의 내 운명에 큰 문제를 일으키리라고는 그 때는 미처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강연회는 밤 8시 반 부터 였으므로 그 때까지의 시간을 때울 셈으로 나는 클럽에 갔다. 선배인 헨리에게, 챌린저 교수와의 면담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보고라고는 하지만 교수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대강의 내용을 약간 이야기할 작정이었다. 예의 증거가 되는 뼈와 사진으로, 교수의 의견을 믿을 수 있다는 내 생각에 대해서 헨리는 크게 웃었다. "자네, 돌지 않았지? 그런 굉장한 큰 발견을 했으면서 증거품을 잃어버렸다니 너무 어리석지 않나. 모두가 엉터리야. 지어 낸 얘기지." "그럼, 메이플 화이트는?" "교수가 만들어 낸 인물이야." "하지만 그의 스케치북을 봤어요." "교수의 스케치북이겠지, 그건." "그러면 카메라로 찍은 테라노돈은?" "그것도 교수의 말 뿐으로, 실제는 황새나 무슨 새 따위를 자네에게 그렇게 믿도록 말한 거야." "그러면 뼈는 어찌 된 것일까요?" "아마, 어딘가의 쓰레기통에서 주워 왔겠지. 사진과 마찬가지로 뼈도 적당한 가짜를 가지고 남을 속일 수 없는 건 아니지." 헨리 선배에게서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신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를 도무지 상대해 주지 않는 헨리를, 그 날 밤의 강연회에 데리고 가는 일만은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직접 교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수를 믿게 하고, 또 내 생각이 전혀 잘못만은 아니란 것을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강연회장은 학자뿐 아니라 학생이나 일반 사람들도 많이 참석하여 만원이었다. 월드런 박사의 강연은 청중을 배려했기 때문이었는지, 누구에게나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테마는 《연대의 기록》- 풀이해서 말하자면 세계의 시작, 굉장한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 지구상에서 그 모습이 사라져 버린 그 무서운 도마뱀 따위가........." 월드런 박사가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이의가 있소!" 별안간 청중의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강연자인 월드런 박사는 그 소리를 무시하는 듯이 새삼 천천히 또 같은 말을 되풀이한 것이다.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 지구상에서 모습이 사라진 그 무서운........" "이의가 있소!" 두 번이나 발언이 있었기 때문에 점잖은 월드런 박사는 잠깐 말을 중단하고, 객석의 가운데쯤에서 손을 높이 든 발언자 쪽을 보았다. 그러나 곧 싱긋 웃더니, "방금 발언한 사람은 당신이었지, 챌린저 교수?"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중은 모두 웃었다. 강연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월드런 박사가 옛날 옛적의 생물에 대해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면 그 때마다 챌린저 교수는, "이의가 있소!"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이것이 너무 빈번히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학생들까지 재미있어하며 그런 대목에 이르면, "이의가 있소!" 하고 모두 악을 쓰는 것이었다. 월드런 박사도 마침내 화를 내며, "챌린저 교수, 쓸데없이 훼방을 놓지 말아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챌린저 교수도 질세라 악을 썼다. "아니, 그건 내가 할 소리요. 사실과 다른 말씀을 삼가하시오!" 이러한 입씨름이 단서가 되어 강연장 안은 별안간 소란스러워졌다. 사회자는 당황하여 손을 흔들며 외쳤다. "챌린저 교수. 당신의 의견은 박사의 강연이 끝난 후에...... 제발........" 이리하여 강연은 계속 강행되었다. 그러나 뜻밖의 외침 소리에 기분이 상한 월드런 박사는, 강연 내용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드디어 결론까지 마치기 전에 연단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월드런 박사가 좌석으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챌린저 교수의 차례가 되었다. 천천히 일어선 교수는 작달막한 몸집으로 성큼성큼 연단으로 올라갔다. 회장에서는 청중의 외침 소리가 더욱 높아져 갔다. 그러나 교수는 그런 소란 따위는 아랑곳없이, 월드런 박사가 설명한 바 있는,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모습이 사라진 그 도마뱀...... 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쥬라기 때에만 생존했었다고 생각되고 있는 이들 생물은 현재도 역시 이 지구상에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짓말이다!" "증거 있느냐!"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러자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방금의 질문에 답변하겠습니다. 나는 이 눈으로 실제로 그 모습을 목격한 것입니다........." "엉터리다!" "사기꾼! 물러가라!" 회장은 이미 벌집을 쑤셔놓은 듯 난장판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꼼짝도 하지 않고 회장에 넘치는 사람들을 구석구석 노려보는가 싶더니 별안간 포효하는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믿는다면 스스로 답사해 보시오! 아무라도 상관없어요. 두, 세 사람을 선발하여 그 장소에 실제로 가서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회장은 고요해졌다. 그러자 이 때 키가 크고 메마른 한 사나이가 벌떡 일어섰다. 비교 해부학자로서 유명한 사마리 박사였다. "챌린저 교수, 당신이 방금 말한 사실을 2년 전에 아마존 강 상류 지방을 여행하셨을 때 목격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장내는 새로이 시작된 결전의 결과를 들으려고 아주 고요해졌다 "아마존 강 유역은 이미 많은 학자나 탐험가들에 의해서 다 조사가 끝난 고장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건 약간 이상한 얘기가 아니오?" 비꼬는 듯한 이 질문에도 챌린저 교수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사마리 박사, 당신도 아실 겁니다. 아마존 강은 이 템즈 강처럼 잔잔하게 조사를 마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잖습니까?" 회장에서 박수 소리가 약간 났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물러설 사마리 박사가 아니다. "물론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챌린저 교수, 당신이 그 생물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셨다는 그 장소가 어딘지, 지금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이 자리에서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학문의 연구를 위해서 아마존으로 조사를 하러 가실 분이 있으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장소를 가르쳐 드리겠소. 어떻습니까, 사마리 박사. 내 얘기를 그렇게 의심하신다면 당신 자신이 답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가보겠소!" 사마리 박사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회장에서는 곧 박수 소리가 요란스럽게 일었다. 나는 이 박수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하는 동안에 완전히 흥분하게 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신문 기자다! 신문 기자는 남이 모르는, 새로운 사건을 재빨리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큰 임무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가겠습니다, 나도! 데일리 가제트 신문의 기자 에드워드 머론입니다. 나도 참가하겠소!" 그러자 키가 크고 메마른 사람도 일어섰다. "당신은?" 하고 질문을 받은 이 사람은 조용히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존 록스턴." "와, 와!" 하고 회장을 메운 청중들로부터 일제히 경탄의 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것도 당연했다. 존 록스턴이라고 하면, 영국에서는 누구 하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귀족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만이 아니라 탐험가로서, 스포츠맨으로서 그 이름은 국외에까지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 유역의 탐험에는 몇 번이나 갔었던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학자, 탐험가, 게다가 신문 기자인 나 등 세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챌린저 교수가 2년 전에 들러서 분명히 목격했다고 하는, 문제의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아마존의 오지로   이 날 밤 나는 맥커돌 편집국장에게 강연회장에서의 경위를 모두 보고했다. 밤늦게까지 상의한 결과 나는 탐험 상황을 편지의 형식으로 편집국장에게 보고하되, 그것을 신문에 싣는가의 여부는 챌린저 교수의 희망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 나는 벌써 이 이상 직접 여러분과 이야기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신문사의 신문을 통해서 여러분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전대 미문의 탐험에 참가하기까지의 경위를 쓴 수기를 나는 편집국장에게 맡겨 두었다. 만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경우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 탐험이 기도된 경위의 기록만은 남게 되는 셈이다. 나는 이 마지막 몇 줄을 기선 의 객실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게 있어서 그리운 고향의 추억이 되는 하나의 정경을 쓰고자 한다. 런던 특유의, 안개 짙은 늦봄의 아침이다. 차가운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고무로 된 비옷을 입고 우리 세 사람-사마리 박사, 록스턴 경, 그리고 나 등 세 사람은 선창을 지나 큰 기선 쪽으로 걸어갔다. 트렁크나 외투, 소총의 케이스 따위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있는 짐꾼과 함께. 고개를 숙인 채 다리를 끌면서 우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사람은 사마리 박사, 뭔가 새삼스럽게 뉘우치고 있는 듯했다. 메마르고 단단한 얼굴을 헌팅 캡과 머플러 속에 반짝이면서 야무진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것은 록스턴 경이다. 우리 세 사람이 기선 근처까지 왔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돌아보니까 환송하러 나온 챌린저 교수였다.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두세 가지 얘기해 둘 게 있소이다. 아니, 여러분이 이 여행을 떠나게 됐다고 해서 구태여 내가 생색을 낼 생각은 없어요. 여러분이 어떤 보고를 가지고 돌아오건 사실은 사실입니다. 나도 동행을 했으면 좋겠는데 당분간 손을 놓을 수 없는 연구가 있어요. 그런데 문제의 고장을 찾아갈 길 안내도가 이 봉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지시대로 여행하시오. 다만 이 봉투는 아마존 강의 중류에 있는 마나우스라는 고장에 도착하여, 봉투의 겉에 씌어 있는 날짜와 시간을 바르게 지키고 나서 그 시간이 되면 개봉하시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여러분이 꼭 이 조건을 지켜 주시기를 나는 당부하는 것이오. 그런데 머론, 당신이 보내 올 통신문에는 아무 제한도 두지 않겠소. 사실을 전하는 것이 신문 기자인 당신이 이번 여행에 참가한 목적일 테니까. 다만 목적지의 바른 위치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공표하지 말기를 바라오. 록스턴 경, 당신은 과학에 대한 지식은 영점이나 다름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당신 앞에 펼쳐져 있는 사냥터에는 반드시 만족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고 있소. 당신은 아마 솜씨가 좋은 총을 사용하여 하늘을 나는 파충류를 맞추었다고 하는 경험담을 수렵 잡지에 기고하는 찬스를 얻을 수 있을 거요. 끝으로 사마리 박사, 나는 잘 모르지만 당신이 만일 수양을 더 쌓으려고 한다면 귀국 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현명해져 있을 것이오. 그럼 여러분, 잘 다녀오시오! 여러분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빌겠소이다!" 챌린저 교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기가 할 말만을 마치고 한 통의 봉투를 우리에게 건네주자 획 뒤돌아 섰다. 그리고 1분 뒤에는 그 특징적인 네모꼴의 몸집을 흔들면서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를 태운 프랜시스카 호는 출범의 징 소리를 신호로, 닻을 올리자 영국 본토를 뒤로하고 저 멀리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로에 들어선 것이다. 바다는 잔잔했고, 우리는 무사히 파라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배를 바꾸어 타고, 아마존 강 흙탕물의 흐름을 약 1천 6백 킬로미터나 거슬러 올라가 마나우스 시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다. 우리는 영국 브라질 무역 회사의 사장 쇼트맨 씨 덕분에 시골 여관에 묵지 않아도 되었다. 쇼트맨 씨의 저택에서 우리는 인정이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챌린저 교수가 말한 봉투를 개봉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이제부터 시작되는 탐험 여행의 준비만은 허술한 데가 없도록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어쨌든 여기서 잠깐 일행을 소개해 두고자 한다. 사마리 박사는 올해 예순 여섯이다. 깡마르고 철사와 같이 가느다란 몸매이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건강하고 피로할 줄 모르며 정력적인 데가 있다. 그 점, 이번과 같이 엄청난 여행에는 결코 부적당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성미로 남을 늘 의심한다. 그 증거로, 현재도 챌린저 교수를 사기꾼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번 여행도 교수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라고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나우스에 와서는 거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여러 가지 곤충이나 조류의 희한한 표본을 수집하는 데 정신이 없었으며, 도무지 싫증을 낼 것 같지 않다. 존 록스턴 경은 마흔 여섯 살의 장년이다. 5년쯤 전에 이 지방에서 염병만큼이나 두려워하고 있던, 혼혈인 노예 감독 페드로 로페즈를 쓰러뜨린 사건은 이 마나우스에서도 누구 하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다. 특히 그의 수고로 고통스러운 작업으로부터 구제된 노예들 사이에서 그는 마치 하느님처럼 대접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 머론은 스물 다섯 살이다. 제일 젊고, 보거나 듣거나 하여 얻은 신기한 일을 기사로 만들어 데일리 가제트 신문사로 송고를 하기 때문에 여간 바쁜 것이 아니다. 이 밖에 이 남아메리카에 와서 고용하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소개해 둔다. 먼저 첫 번째는 점보라는 흑인 거한(巨漢). 몸집이 큰 까닭에 힘도 세고 말처럼 일을 썩 잘 한다. 이 사나이는 파라 항에서 선박 회사의 소개로 고용했다. 점보는 이 회사의 배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투르지만 영어를 약간 한다. 파라 항에서는 이 밖에 고메즈와 마누엘이라는 두 혼혈인도 고용되었다. 이 두 사람은 강 상류 지방에 살던 자들로, 미국 삼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아마존 강을 내려온 것이다. 두 사람 다 피부 빛깔이 거무스름했고, 얼굴은 온통 수염에 덮여 있었으며, 표범처럼 영리하고 용감하였다. 이들을 고용한 것은, 둘 다 우리가 앞으로 가려고 하는 아마존 상류 지방의 주민이므로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고메즈는 영어를 잘 했다. 이들 세 사람은 우리의 뒷바라지를 해 주고 한 달에 15달러의 급료를 받는다. 이 밖에 볼리비아 태생인 모조 인디언 세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아마존 유역의 토인들 중에서도 특히 낚시질에 뛰어나고 배를 잘 다루었다. 세 사람 중 인솔 책임자는 종족의 이름을 빌어 모조라고 부르기로 했고, 다른 둘은 호세와 페르난도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었다. 우리 탐험대는 이와 같이 세 명의 백인과 두 명의 혼혈인, 한 명의 흑인, 그리고 세 명의 인디언까지 합쳐 모두 9명으로 편성되었다.   나타난 뜻밖의 인물   우리는 챌린저 교수가 일러 준 대로 봉투를 뜯는 날이 올 때까지의 일주일 동안을 쇼트맨 사장의 저택에서 묵고 있었다. 이 저택은 과연 사장 집답게 근사했다. 선인장 울타리에 둘러싸인 넓은 뜰에는, 남아메리카 특유의 새빨간 햇빛이 빛나고 있었고, 군데군데 야자수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뜰 가장자리에는 빨강이나 희고 예쁜 꽃이 만발해 있었으며, 귀여운 벌새나 크고 파란 나비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날고 있었다. 우리들-사마리 박사, 록스턴 경, 그리고 나 등 세 사람은, 지금 이 뜰이 보이는 방에서 등나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챌린저 교수가 건네 준 봉투가 시계와 함께 놓여 있다. 봉투 겉면에는 교수의 아무렇게나 갈겨쓴 필적으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존 록스턴 경에게. 7월 15일 정오, 마나우스에서 개봉할 것.' 오늘이 그 7월 15일이다. 그리고 곧 정오인 것이다. "...... 아직 정오까지는 7분이나 남아 있소, 그 때까지 기다릴까요?" 시계를 탁자 위에 놓은 록스턴 경은 사마리 박사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비꼬는 것을 좋아하는 사마리 박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울퉁불퉁한 손으로 봉투를 집어 올렸다. "까짓 7분쯤 아무래도 좋지 않소. 필요 이상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것으로도 엉터리란 것을 알 수 있는 그 사내였으니까......." "어쨌든 시킨 대로 합시다. 우리가 이 곳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챌린저 교수 덕분이었으니까." 록스턴 경은 기분이 언짢아 있는 사마리 박사를 달래듯이 말했다. "좋도록 하시죠. 하지만 나는 이 봉투 안에 만약 엉터리가 들어 있다면, 다음 배를 이용하여 강을 내려가 파라 항에서 볼리비아 호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소. 사기꾼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정력을 허비하기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 내게는 많이 있어요. 자, 록스턴 경, 시간이 됐소." "자, 시간이 됐다!" 록스턴 경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며 봉투를 집어들고 손 칼로 겉봉을 찢었다. 드디어 우리들이 가게 될 아마존 오지의 지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가슴이 설레었다. 록스턴 경은 겉봉 안에서 접어진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것은 한 장의 백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뒤집어 보았으나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불에 비춰 보라는 게 아닐까요?" 하고 나는 말했다. 얼른 불에 비춰 보았다. 그러나 역시 종이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자 느닷없이 사마리 박사가 기가 차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거 보라고. 뻔뻔스러운 사기꾼 같으니라고! 녀석이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지. 자, 우리는 다음 선박으로 영국으로 귀국하는 거야. 그리고 녀석의 낯가죽을 벗겨 줄 테다!" 사마리 박사는 화가 나서 악을 썼다. 한편 록스턴 경은 그 종이를 햇빛에 비춰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처음부터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았어." 그 때였다. 방 밖에서 땅딸막한 사내의 그림자가 가까워졌는가 싶더니, "여러분, 들어가도 좋습니까?" 두툼하고 특징적인 음성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의자에서 나동그라질 뻔했다. 챌린저 교수가 나타난 것이다! 색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를 눌러 쓴 데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마치 어린이처럼 보였으나, 틀림없는 챌린저 교수였다. 방안의 세 사람은 잠시 동안 입을 벌린 채 교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축 처진 눈까풀과 고집스러울 만큼 까다롭게 보이는 눈초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만했다. "2, 3분 늦은 모양이군." 교수는 회중 시계를 꺼내어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러분에게 이 봉투를 개봉시키고 싶지는 않았었지. 지정한 시간까지 이 곳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니 말이외다. 늦은 것은 안내자가 얼간이였기 때문이오. 그 때문에 사마리에게는 내 욕을 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소....." "아니, 실은 말이오........." 록스턴 경은 약간 새삼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타나 안심했소. 이 여행은 이제 끝이 나는 줄 알았지. 하지만 왜 이런 장난을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러나 챌린저 교수는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여행 준비는 다 된 거요?" 하고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반문하는 것이었다. 사마리 박사는 몹시 기분이 나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일이라도 출발할 수 있소." 록스턴 경이 대답하자 교수는 이어서, "그러면 내일 출발하기로 합시다. 그런데 내가 직접 안내하는 것이니 지도는 필요 없겠지. 난 처음부터 이 여행의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오. 아무리 자세한 지도라도 나 자신의 안내만은 못할 것이오. 이 봉투의 장난은 만일 내가 처음부터 이 탐험의 지휘자가 되겠다고 하면 당신네들로부터 반드시 시비가 있으리란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소." "나는 따지지 않겠소. 그러나 싫증나면 언제든지 돌아가겠소!" 사마리 교수는 큰 소리로 토해 내듯이 말했다. 그러자 챌린저 교수는 벌떡 일어나서 온통 털뿐인 손으로 사마리 박사를 밖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남아 있는 록스턴 경과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은 내가 방금 나타난 것을 잘 했다고 인정해 주시겠지. 이제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어요. 당신네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소. 그러나 알겠소? 이제부터는 내가 탐험대의 지휘자가 되겠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도록 오늘 밤 안에 모든 채비를 갖추기 바라오. 내 시간은 참으로 귀중해요. 그러므로 가급적 서둘러 일을 처리하도록." 배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었다. 록스턴 경이 우수한 발동기가 달린 라는 대형 증기선을 빌려 온 것이다.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은 봉투를 건네주며 한 대 먹인 일을 생각하면 약간 분했으나,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 근방 지리에 밝은 챌린저 교수가 탐험대에 참가했고, 더구나 그 지휘자가 되어 준다는 것은 나 자신의 생각으로는 여간 마음 든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는 예정대로 에스메랄다 호를 타고 마나우스 시를 뒤로 엔진 소리를 울리며 아마존 강 상류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통나무 배로 바꾸어 타고   장마철이 지난 지금은 아마존 강 탐험 여행을 하기에는 가장 알맞은 시기였다. 강어귀에서 1천 5백 킬로미터나 상류인 이 부근도 강폭은 광대 무변한 듯 했으며, 강의 중심에서 양쪽 기슭을 바라보면 수평선이 저 멀리 보일 정도였다. 우리들― 챌린저 교수가 참가했기 때문에 일행 열 명을 태운 증기선은 넓은 아마존 강을 천천히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마나우스를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에 배는 지류로 들어갔다. 이 지류는 강어귀께 에서는 본류(本流)와 다름없는 강폭이었으나, 더 올라감에 따라 갑자기 좁아졌다. 이틀 뒤에 우리는 어떤 인디언 부락에 도착했다. 지휘자인 챌린저 교수는, "여기서 상륙하여 배는 마나우스로 돌려보냅시다. 여기서부터 물의 흐름이 사나와져요. 이런 에스메랄다 호와 같은 큰배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하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는 벌써 목적지 가까이에와 있으니 데리고 갈 사람도 적으면 적을수록 좋아요." 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끝으로, 교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길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밀로 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고, 고용한 일행들에 대해서도 맹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내가 쓰는 기사에 애매한 점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설명하게 될 지도나 도표 따위에도 방위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손을 봐 두었기 때문에, 우리 뒤를 따라 실제 답사해 보아도 참고가 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미리 강조해 두는 바이다. 우리 탐험대 일행이 에스메랄다 호와 작별하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8월 2일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벌써 나흘이 경과했다. 우리는 인디언으로부터 큰 통나무배를 두 척 빌렸다. 이 통나무배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틀에 짐승의 가죽을 펼쳐 두른 아주 가벼운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만일 교통에 방해가 되는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육지로 끌어 올려 어깨에 메고 갈 수 있었다. 이 근방의 인디언이 사용하고 있는 아주 편리한 배였다. 챌린저 교수가 2년 전에 이 곳에 왔을 때 죽은 메이플 화이트를 만났다는 인디언 부락이 이 곳에 있었다. 이 부락의 추장은 챌린저 교수를 극진히 존경하고 있었다. 통나무배를 빌려 준 것도 이 추장이다. 추장은 그밖에 두 인디언까지 딸려 보내 주었다. 아타카와 이페츠라고 불렀는데, 교수와는 물론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 두 인디언은 그 전과 같은 탐험을 또 한 번 한다는 말을 교수에게서 듣게 되자 소름이 끼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근방에서는 추장이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추장의 명령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나흘간 여러 가지 준비를 하며 계획을 검토했다. 그리고 마침내 통나무배에 짐을 실었다. 새로이 참가한 두 인디언은 통나무배를 젓고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드디어 내일 우리는 미지(未知)의 세계로 떠날 작정이었다. 이 기사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딴 통나무배에 부탁하여 보낸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맥커돌 편집국장님. 약속한 대로 이 기사는 국장님 앞으로 보냅니다. 제발 자유롭게 고치십시오. 제 예감으로는 챌린저 교수의 태도로 보아 교수가 한 말은 진실인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엉뚱하고,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사건이 우리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인디언의 공격의 북 소리   어쨌든 우리 세 사람도 멀리 이 곳까지 와 보니, 적어도 챌린저 교수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는 것이 낱낱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도 교수를 의심하던 사마리 박사조차도 요새는 교수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물론 박사는 교수의 이야기가 전부 옳다고는 믿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별로 반대도 하지 않고 대체로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계속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부상을 입은 인디언을 부락으로 돌려보내야 하므로 이 기사를 그 사나이에게 들려 보내기로 한다. 무사히 돌아간다고 하였으나 안심이 안 된다.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드디어 출발이라고 하는데, 조그만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고메즈라고 하는 혼혈인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매우 부지런한 녀석이었는데, 그런 녀석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주 호기심이 많은 사나이였다. 오늘 밤 우리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오두막 가까이에 숨어서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쁜 짓은 반드시 탄로 나는 법으로, 그 장면을 몸집이 큰 점보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점보는 개처럼 충실했는데 혼혈인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끌려 나온 고메즈는 우리들 앞에 세워졌다. 고메즈는 틈을 타서 나이프를 꺼내어 점보에게 덤벼들었으나, 힘이 센 점보의 반격으로 나이프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성난 점보는 온 힘을 다하여 고메즈를 죽여 버리려 했다. 이 소동을 알게 된 챌린저 교수가 큰 소리로 꾸짖자, 고메즈는 주눅이 들었고 점보는 상대를 놓아주었다. 고메즈는 교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으나, 아무튼 소동은 이것으로 일단 끝이 났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사건과는 별도로 록스턴 경과 나는 챌린저 교수와 사마리 박사 사이에 일어난, 계속되는 토론에 완전히 지치고 만 것이다. 챌린저 교수의 입이 사나운 것은 런던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으나, 사마리 박사도 그에 못지 않은 독설가였으니 정말 어쩔 수가 없다. 한쪽을 심술장이라고 할 수 있다면, 다른 한편은 보통 오만한 사람이 아니다. 둘 다 커다란 어린애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다같이 과학계를 대표하는 제일선의 학자이니 참으로 묘하게 되었다. "나는 템즈 강가를 산책하노라면 내 앞날의 운명을 생각하게 되므로 좋은 기분이 안 들어. 그래서 가급적 수면만을 바라보며 걷곤 하지." 챌린저 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의미는, 물론 자기가 템즈 강을 따라 서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국가적인 대 과학자로서 묻혀야 할만큼의 인물이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며 어린애처럼 자랑하고 있는 것으로, 입에 독기가 서려 있는 사마리 박사는 그것을 결코 잠자코 듣고만 있지 않았다. "챌린저 교수, 분명히 템즈 강가에 있었던 밀뱅크 교도소는 오래 전에 허물어 버렸을 텐데." 이 핀잔에는 과연 챌린저 교수도 눈을 부릅뜨고, "흠, 그건 사실인가? 흠, 그건 사실인가?" 하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보통 이 정도인데, 내 생각에는 하찮은 문제가 논쟁의 소재가 되곤 했으니, 곁에 있던 록스턴 경과 내게 미치는 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록스턴 경과 비밀리에 상의한 결과, 앞으로의 탐험 여행에는 챌린저 교수와 사마리 교수를 각기 딴 통나무배에 나누어 태우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불필요한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일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의 실행은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마침내 이 전대 미문의 탐험 여행길에 올랐다. 짐을 두 척의 통나무배에 다 실을 수 있었다. 일행은 두 패거리로 나누어져 한 배에 여섯 사람씩 탔다. 물론 챌린저 교수와 사마리 박사는 이 이상 실랑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각기 딴 배를 타게 했다. 나는 챌린저 교수의 배에 탔는데 교수는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으로 연방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나는 교수가 기분이 나쁠 때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그가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 이틀 동안은 강폭이 제법 넓었으나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두 차례 사나운 급류에 부딪혔다. 그 때마다 통나무배를 뭍에 올려 짐과 배를 짊어지고 밀림 속을 1킬로미터 정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엄숙한 신비에 싸인 밀림을 나는 언제까지나 잊지 못 할 것이다. 하긴 보통 밀림보다도 훨씬 걷기가 수월했으므로 통나무배를 운반하는 작업도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밀림에 선 나무들의 높이와 줄기의 크기는, 도시에서 자라난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큰 기둥과 같은 모양으로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올려다보면 저 먼 상공에 가지가 있었으며, 그것은 커다란 지붕과 같았다. 그 사이에서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어둑한 밀림 속을 밝게 해 주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썩은 잎이 쌓인 곳을 걸어가면 발자국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 왔다. 마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어둑한 빛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나 시끄럽게 떠벌리던 교수조차도 소곤소곤 음성을 낮추었다. 지식이 별로 없는 나에게, 교수와 박사는 솟아 있는 나무들의 이름을 잇따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어쨌든 모든 것이 내게 있어서는 처음 대하는 식물뿐이었다.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학자들의 설명은 때로는 난해하였다. 그러나 그 호의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란 밀림 속의 모든 식물-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까지, 모든 것이 빛을 찾아 위로 위로 뻗어 나가려고, 자기보다 키가 큰놈에게 달라붙어 숲의 표면으로 나오려고 버둥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은, 땅 위에 동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높은 나뭇가지 따위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것들이 뱀이나 원숭이나 새들이란 것을 알았다. 그들은 햇빛이 비치는 높은 곳에서 지상의 어두컴컴한 데를 부스럭거리며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불가사의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이나 석양 때에는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한낮에는 그야말로 곤충의 날개 소리만 마치 먼 바다의 물결 소리처럼 들려올 뿐이고, 수풀 속에는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통나무배 안에서 깊은 숲 속에서 들려 오는 기묘한 그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별안간 데리고 온 인디언들이 모두 그 소리를 두려워하며 배를 젓는 손이 거칠어져 갔다. "뭡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북 소리지." 록스턴 경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공격의 북 소리,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지." 혼혈인 고메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습니다. 숲의 오지에 살고 있는 식인종들의 소리죠. 그 녀석들은 저녁때부터 우리 뒤를 추격해 오고 있었습죠. 그건 강 건너에서도 들려 오고 있습니다." 나는 별안간 등골이 오싹해 옴을 느꼈다. 식인종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이자 분명히 강 건너 숲 속에서도 북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다. '같이 온 인디언들이 이렇게 놀라다니! 정말 야단났다! 큰일이 날 것 같다!' 나는 걱정하면서 챌린저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투는 교수와 박사   그런데, 이건 어찌 된 일인가? 교수는 사마리 박사와 사방에 자라난 나무 종류나 새 이름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토인들의 습격 따위에 대해선 아랑곳없는 것이다. 나는 물론, 점보를 비롯한 데리고 온 인디언들까지도 노 젓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는 판인데, 두 학자의 머리 속에는 학문에 관한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과학자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났다. 이윽고 알게 되었는데, 록스턴 경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라이플 총에 실탄을 재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을 보자 나의 혼란된 마음도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교수와 박사의 입씨름은 출발한 이래 계속되었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완고하며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챌린저 교수였다. 입이 사납고 무엇이나 교수의 의견에는 반대하는 사마리 박사였다. 이러니 논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기는 단 한 번, 식인종 인디언에 대해서 두 학자가 논의했을 때에는 예외였다. "저건 미란하나 아마쥬아카의 식인종이다." 교수가 북 소리가 들려 오는 숲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지." "그들은 몽고인 형의 인종이었지, 아마......." "맞아......." 이런 식이었다. 어쨌든 이런 형편이니 두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우리들만이 식인종의 습격에 응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날은 아무 일 없이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무거운 돌을 닻으로 하여, 두 척의 통나무배를 멈춰 세워 놓고 불침번까지 두고 경계를 한 것이다. 점보는 날이 샐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감시를 계속했는데, 어쨌든 무사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으니 안심이 되었다. 동이 트는 동시에 북 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 "이제 식인종들은 추격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녀석들은 클루프리가 무서운 겁니다." 고메즈가 별안간 생각난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만일 숲의 마귀 클루프리가 교수의 말처럼 쥬라기 이래의 살아 남은 괴물이었다고 하면, 우리는 드디어 목적지 근방에까지 도달한 셈이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후 3시경에 우리는 지금까지의 급류보다도 더 센 격류의 고빗길에 이르렀다. "음, 여기다. 내가 전에 왔을 때 배를 전복시켜 귀중한 수확을 모두 잃었을 뿐 아니라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챌린저 교수는 감개 무량한 듯이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사실, 안도의 숨을 쉬었다. 왜냐 하면 이야말로 교수의 설이 엉터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째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배를 내렸다. 인디언들은 빽빽이 가로막고 있는 수풀 속을 헤치며, 먼저 통나무배를, 이어서 짐을 운반했다. 그 동안에 우리 네 명의 백인은 총을 메고 토인들의 선두에 서서 만일의 위험에 대비했다. 석양 때까지 우리는 무사히 격류를 지나 상류 2킬로미터 지점에까지 배를 끌고 갔고, 그 날 밤은 거기서 휴식을 취했다. 나의 계산으로는 본류를 떠난 후 이미 1백 60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지류를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행은 출발했다. 교수는 이 때부터 줄곧 양쪽 기슭에 시선을 주고 있었으나, 갑자기 신바람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한 나무를 가리켰다. 그것은 기묘한 각도로 기슭에서 수면으로 외롭게 돌출해 있었다. "저 나무다! 내가 표지로 삼은 것이 저 종려나무란 말이오! 비밀의 통로는 저 나무의 정면 기슭에 있지. 거기선 숲이 중단된 데가 없어. 이상한 일이야. 그러나 언뜻 보면, 큰 나무가 빈틈없이 밀생하고 있으므로 잘못 볼 수가 있지. 그러나 그 나무들 사이에 연둣빛 골풀이 자라는 곳이 있어요. 그 곳에 미지의 세계 -잃어버린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문이 있소. 가서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그 곳은 정말 불가사의한 곳이었다. 우리가 배를 저어가 보니까 과연 연둣빛 골풀의 숲에 가린 조그만 지류가 흐르고 있었다. 물도 여태까지의 흙탕물과는 달리 맑고 투명했다. 바닥의 모래를 손으로 집어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열대어가 우리들의 배 밑을 헤엄쳐 다니고 있는 것이 마치 수족관의 물과 같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와 잎이 빈틈없이 무성했으며 그것이 강물 위로 지붕처럼 어디까지나 이어져 있었다. 햇빛은 겨우 비쳐들고 있을 뿐이었다. 쳐다보니까 나뭇가지에서 까만 빌로드와 같은 털을 가진 조그만 원숭이가 장난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서 살며시 엿보고 있는 것은 얌전한 맥이다. 한가롭게 물소리를 내며 헤엄을 치고 있는 놈은 악어였다. 선명한 줄무늬가 있는 표범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학이나 백로 따위의 거대한 무리는 우리 배가 접근해 가도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이 사람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 곳엔 이제 인디언이 없습니다. 클루프리를 두려워하고 있습죠." 고메즈가 말했다. "클루프리란 것은 이 밀림의 요정입니다." 록스턴 경이 설명했다. "토인들은 악마는 모두 클루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녀석들은 무엇인가 무서운 것이 이 근방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소. 그래서 접근하려 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의 통나무배는 이 꿈과 같은 아름다운 강물을 꼭 사흘 동안 저어 갔다. 그런데 나흘째부터는 더 이상 배로는 나아갈 수 없었다. 물이 갑자기 얕아져 배 밑바닥이 스치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기슭의 숲 속에 배를 묶어 놓고 이 날 밤은 강기슭에서 쉬었다. 이튿날 아침에 록스턴 경과 나는 강물을 따라 숲을 3킬로미터 가량 가 보았다. 그러나 물은 더욱 얕아졌다. 되돌아와 그것을 보고했다. 챌린저 교수의 생각대로 이미 배로 올 수 있는 마지막 지점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물에서 끌어올려 수풀 속에 숨겨 놓고, 가까운 나무 줄기에 도끼로 표시를 했다. 그리고 총과 탄약, 식량, 천막, 담요 따위를 짊어지고 더욱더 어려운 최후의 여행길을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또다시 교수와 박사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발단은 챌린저 교수가 사마리 박사에게, "당신은 이 아네로이드 청우계를 책임지고 가지고 가야겠소." 하고 말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리로 내게 그런 명령을 내리는 거요?" "박사, 나는 이 탐험대의 대장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대장으로 인정할 수 없소." "옳거니. 그러면 내게 적당한 역할을 정해주겠다는 말씀이신가? 어디 들어보자고." 교수는 빈정거리며 응수했다. "말하지. 자네는 진실인지 아닌지 의심을 받고 있는 피고의 입장이야.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현장 조사를 하기 위해 여기 와 있는 재판관과 같은 사람이지." "좋소. 알았어. 그럼 이제부터는 자네들끼리 멋대로 해 보게나. 난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따라가겠소. 대장이 아닌데 앞장서서 갈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고맙게도 두 사람의 온전한 사람-나와 록스턴 경-이 있어, 교수와 박사의 기분을 북돋워 같이 빈손으로 런던에 돌아가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이러한 일로 달래는 데 애를 먹었다. 박사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고 걷기 시작했다. 교수는 그 뒤에서 툴툴거리며 따라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우연한 일로, 이 무렵에 교수와 박사가 다같이 에든버러 대학의 이링워스 박사를 몹시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그 박사는 우리들의 구세주가 돼 주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가 수상해지면 우리는 그 동물학자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논쟁을 중지하고, 이링워스를 공격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사이가 좋아지는 것이다. 이 방법을 발견한 후 우리는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우리는 강물을 따라 일렬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도 강물의 폭은 좁아졌고, 마침내 물줄기는 해면(海綿)같은 이끼가 자라는 큰 못에서 없어졌다. 그 곳은 무릎까지 빠지는 늪이었다. 간신히 이 늪을 지나 숲 속으로 들어섰을 때는 모두 입 밖에 말은 내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두려운 모양이었다. 이리하여 통나무배를 버리고 걷기 시작한 이틀 뒤에 주위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밀림은 완전히 없어지고 가도가도 종려나무 숲이었던 것이다. 마치 재목 사이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이윽고 키가 작은 나무만이 자라고 있는 풀밭으로 나왔다. 앞에는 완만한 고갯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위투성이의 고개를 넘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걷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도중에 사람이 야영을 했음직한 흔적이 있었다. 모닥불 재나 빈 통조림 깡통이 여기 저기 버려져 있었다. 그것을 가리키며 챌린저 교수는, "저것이야말로 최초의 탐험가였던 메이플 화이트 씨가 노숙한 흔적이다. 전에 내가 본 적이 있어." 하고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는 신비로운 세계가 마침내 다가오고 있다는 기분 때문에 자연히 걸음이 빨라졌다. 이 근방부터 길은 더욱더 걷기 힘들었다. 점점 나무는 적어지고,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나, 그 대신 바위나 돌이 많아지고 들쭉날쭉한 고갯길은 한눈이라도 팔다가는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이런 거친 길을 열흘 동안이나 걸어가자 이번에는 대나무 숲이 나타났다. 길이 전혀 없었으므로 대나무를 하나하나 잘라 내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나무 숲이 끝나자 길은 평탄해져서 걷기가 다소 수월해졌다. 마침 밤이 되어 우리는 이 곳에 천막을 치고 야영하기로 했다. 긴 하루의 계속된 피로로 우리는 지쳐 있었다. 이튿날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완만하게 경사진 둥그스름한 언덕을 향하여 아침 일찍 떠났다. 우리는 점심때쯤 그 곳에 도착했다. 그러자 건너편에 찬란한 골짜기가 있고 다시 둥그스름한 언덕 뒤로 지평선이 저 멀리 보였다. 이 언덕을 올라가고 있을 때 앞장서서 걷고 있던 챌린저 교수가 별안간 멈춰 섰다. "어, 저걸 봐라!" 교수가 흥분한 모습으로 가리키는 오른쪽을 우리는 일제히 바라보았다. 약 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을까. 잡초의 수풀 속에 뭔가 회색의 큰 새 같은 것이 천천히 날개를 펼치며 날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멀리 밀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일까? 날고 있었으니 조류인 것만은 틀림없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교수는 숨을 거칠게 쉬며 외치는 것이었다. "사마리 박사. 어떤가, 그걸 보았겠지? 그걸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지? 내가 보는 바로는 테라노돈이야. 쥬라기에 나타났다고 알려진 하늘을 나는 파충류란 말일세. 틀림없네." 그러나 사마리 박사는 예의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응수했다. "어리석은 이야기는 이제 진력이 났소. 당신 눈은 이상해. 내가 본 건 황새야." 사마리 박사가 조소하듯 말하자 교수는 화가 난 얼굴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때 록스턴 경이 뒤쪽에서 다가와서 나에게 말했다. "보았소, 머론?" "예, 보았습니다. 이상한 새였어요." "그건 황새가 아니야. 나는 오랫동안 사냥을 해 왔지만 사냥꾼의 명예를 걸고 말하겠는데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만은 맹세해도 좋소." 망원경을 손에 든 록스턴 경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긴장해있었다. 우리는 다시 사방을 경계하면서 계속 나아갔으나 별다른 것이 날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내가 보고들은 바를 모두 있는 그대로 여러분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보고서가 여러분의 눈에 띄게 될 것인지 어떤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챌린저 교수가 말하는 에 진짜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맨 처음의 언덕을 넘어서자 그 너머에 두 번째 언덕이 있었다. 이 곳을 넘어서자 이곳 저곳에 야자나무가 서 있는 울퉁불퉁한 땅이 누워 있었다. 저번에 교수의 방에서 본 적이 있는 메이플 화이트 씨의 스케치북과 교수가 찍었다는 그 희미한 사진의 풍경과 꼭 같은, 불그스름한 낭떠러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의 목적지인, 주위보다 높고 편평한 대지가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 이렇게 보고서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 것은 이 앞에 있는 것이다. 낭떠러지 위에 있는 대지가 우리의 목적지인 것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우리의 천막에서 10킬로미터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대지는 저 멀리 큰 반원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교수는 적이 흥분하여 사방을 걸어다녀 보고 있었다. 박사 쪽은 잠자코 있었으나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머지 않아 명확해질 것이다. 고용되어 따라온 호세는 팔에 부상을 입었으므로 그만 돌아가겠다고 보채고 있었다. 그래서 이 보고서는 그에게 들려 보낼 예정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있는 한 보고할 것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여행도를 동봉해 둔다. 낭떠러지는 가까워질수록 교수가 말한 것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백 미터 가량 되었는데 꼭대기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는 모양으로, 가장자리에는 수풀이, 안쪽은 큰 나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살아있는 짐승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날 밤은 낭떠러지 밑에 천막을 쳤다. 낭떠러지는 수직이었을 뿐 아니라 위쪽은 바깥으로 오목하게 굽어 있었으므로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다. 우리들 천막 곁에는 교회의 탑과 비슷한,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그 꼭대기는 대지와 거의 같은 높이였으나 낭떠러지와는 별도로 외롭게 서 있었다. 맨 위 꼭대기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바위나 낭떠러지나 높이는 3, 4백 미터쯤 돼 보였다. 이 바위는 원래 낭떠러지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 어떤 원인으로 중간 부분이 무너져, 우리가 탐험하고자 하는 미지의 세계인 대지(臺地)로부터 단절되어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와 대지의 꼭대기와의 거리가 겨우 14, 5미터밖엔 되지 않았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신비의 세계를 답사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수수께끼의 해골   이튿날 아침에 우리는 형편없는 아침 식사를 끝마친 다음―탐험이 언제 끝날 지 몰라 식량을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절벽으로 둘러져 있는 대지에 오를 방법을 상의했다. 챌린저 교수는 조그만 바위 덩어리에 걸터앉아서 묘한 밀짚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특징이 있는 턱수염을 흔들어 대면서, 마치 재판관과도 같이 당당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정말 여러분에게 보여 주고 싶다. 교수를 중심으로 우리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마리 박사는 여전히 파이프를 빨면서 교수의 말이나 움직임을 비판적인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록스턴 경은 단단한 몸집에 총을 안고 앉은 채 날카로운 눈매로 교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며칠 동안 산야를 걸어왔으므로 햇볕에 그을어 원기 왕성했다. 우리 네 사람 뒤쪽에는 두 혼혈인과 인디언들이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교수는 눈앞을 가로막고 우뚝 솟아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 꼭대기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을 건네 왔다. "머론, 자네는 바위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너도밤나무의 거목에 대해 아는 게 없나?" "예, 저 지난번에 보여 주셨던 사진 속의 나무군요." "그렇지. 그 나뭇가지에 테라노돈이 머물고 있었던 거야. 난 사진을 찍은 후 저 바위산을 반쯤 올라가 총으로 쏘아 떨어뜨린 거지." 이 이야기를 사마리 박사도 곁에서 듣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구태여 반대하지 않았다. 내가 본 바로는 그 얼굴에는 여느 때와 같은 빈정거리는 웃음은 없었고 놀라움과 흥분 때문에 회색으로까지 느껴졌다. 챌린저 교수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신바람이 나서 싱글벙글하며 , "사마리 박사, 당신은 황새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황새는 깃털이 없고, 그 대신에 가죽과 같은 피부와 막강한 날개와 이빨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사마리 박사는 옆을 본 채 떫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챌린저 교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는 지난번에 왔을 때,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 절벽을 올라가려 했소.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소. 물론 누가 시도했다 하더라도 실패했을 것이오. 그 때는 장마철이 시작되었고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소. 단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동쪽으로 10킬로미터쯤 걸어가 보았지만 절벽을 올라갈 길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오. 어쩌면 좋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동쪽을 조사해 보았다면 이번에는 서쪽을 살펴보는 일이야." 사마리 박사가 말했다. "그렇군. 저 대지는 그렇게 넓지 않은 것 같소. 한 바퀴 돌아도 대단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도는 동안에 한 군데쯤 입구를 발견할는지도 모르지요....." 하고 록스턴 경도 찬성했다. 그러나 교수는 나를 가리키며, "런던에서 이 젊은이에게 한 말이 있었소. 그 대지는 어디나 수월하게 들어갈 곳이 없을 거라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 대지가 수백만 년 동안이나 딴 세계와 고립돼 있을 까닭이 없쟎소. 하긴 우리들의 선구자인 메이플 화이트 같은 등산가만 오를 수 있고 큰 동물은 내려올 수 없는 길이 어딘가 한 곳 있을 법도 한데 말이야." 이 말에 대해서 재빨리 박사가 질문했다. "그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요?" "이유는 단순해요. 이 대지를 발견한 미국인 메이플 화이트가 실제로 올라갔었기 때문이오. 그가 만일 올라가지 못했더라면 그 스케치북의 그림은 그릴 수 없었을 테니까." "그것은 조금도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이론이오. 아닌게 아니라 대지는 보다시피 눈앞에 있으니까 나도 인정하오. 그러나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는 그 괴물에 대해서 무엇 하나 그것을 증명할 만한 사실이 없잖소." 언제나처럼 빈정거리는 말투로 사마리 박사는 비웃었다. 교수는 화가 났다. "당신이 인정하건 말건 나는 지금 당신 눈앞에 대지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보니 흐뭇한데." 또 두 사람의 입씨름이 시작될 기미가 보였다. 그런데 이 때, 낭떠러지 위를 쳐다보고 있던 교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느닷없이 사마리 박사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그 얼굴을 위로 향하도록 틀며 외쳤다. "보라고! 저 꼭대기에는 분명히 생물이 있잖아!" 나나 록스턴 경도 놀라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정말로 저 꼭대기 위에 호스와 같은 것이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끝 부분을 약간 쳐들고 흔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까 호스가 아니었다. 넓적한 머리를 가진 큰 뱀이 아닌가! 그네처럼 길쭉한 몸뚱이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비늘이 아침 햇살을 받아 끔찍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 "챌린저 교수, 하찮은 구렁이 따위를 보고 흥분하지 말라고." 강제로 얼굴이 비틀린 것이 몹시 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교수는 신바람이 나서 외쳤다. "어쨌든 저것으로 생물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어. 자, 이제부터 서쪽으로 가서 절벽에 오르는 길을 찾아봅시다!" 낭떠러지 아래의 길은 바위투성이로 몹시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매우 걷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10킬로미터 가량 걸었을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오래 전에 천막을 친 적이 있는 자리로, 시카고 제 쇠고기 통조림과 빈 브랜디 병, 그 밖의 잡동사니가 흩어져 있었다. 구겨진 신문지 한 장이 있었는데 《시카고 데모크랫》 신문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날짜가 찢겨져 언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 것은 아니오. 메이플 화이트 것이오." 챌린저 교수가 말했다. 나는 여기서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양치류의 잎에 나뭇 가지 토막이 묶여 있는 것이다. "보십시오. 길 표지를 해 둔 모양이지요?" "그런 것 같소." 록스턴 경이 내 의견에 즉각 동의했다. 교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 우리들의 선배였던 메이플 화이트는 뒤를 이어 오는 사람을 위해서 표지를 남겨 둔 겁니다. 틀림없어요. 내가 생각한 대로야. 이대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이런 식의 표지가 있을 거요." 하고 자못 확신 있게 외쳤다. 교수가 상상한 대로 이윽고 우리는 또 다른 표지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뜻밖에도 무서운 것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발걸음도 가볍게 더욱 서쪽으로 걸어가는 동안에 대나무 숲에 부딪혔다. 대나무는 높이가 거의 6미터 가량이나 되었으며 끝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어, 마치 대창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대나무 숲 가장자리를 따라 길을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선두에 선 박사가, "앗! 저건?" 하고 별안간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도 다급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우리는 소름이 끼쳐 옴을 느끼며 박사가 가리킨 쪽을 보았다. 그것은 퇴색한 해골이었다. 좀 떨어진 곳에 가슴께의 뼈에 대나무 토막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저런 변이라니!" 지금까지 무엇을 보아도 놀라지 않았던 록스턴 경조차도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참혹하군. 그러나 이 사람은 여기서 죽은 것이 아닌 것 같소. 아마 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인지도 몰라요. 아니면 누군가가 밀어서 떨어뜨렸든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리가 없고 가슴에 대나무 토막이 꽂혀 있을 리도 없어요." 우리는 모두 겁이 난 얼굴로 낭떠러지를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도 록스턴 경은 허리를 굽혀 해골이 있는 곳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다가, "이 해골의 인물이 사망한 것은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닌 것 같소. 이것 봐요, 이걸 보시라고……." 하고 흙이 묻은 금시계와 만년필을 주워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물건이나 거의 녹이 슬지 않았다. 금시계는 뉴욕의 허드슨 회사의 상표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다시 사방을 조사해 보았다. 이윽고, 라고 새겨져 있는 은제 담배 케이스를 찾아냈다. 곁에 서 있던 챌린저 교수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나는 이 사내 이름을 알고 있어요. J. C.―제임스 콜버요. 분명히 메이플 화이트는 이 사내와 동행하였던 것이오. 그의 노트에서 본 이름이야." 우리는 제임스 콜버의 주검을 대나무 숲 곁에 정중하게 묻어 주었다. '그런데 콜버 씨는 어쩌다가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일까?' 하고 생각하니 나는 소름이 끼쳤다. 어쩐지 앞으로 가공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다른 일행도 나와 같은 기분인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걷기 시작했다. 이틀 후에도, 다시 사흘 뒤에도 걷고 있었으나 대지로 통하는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 낭떠러지에 백묵으로 길 표지가 그려져 있긴 했다. 정녕 화이트나 콜버가 그린 것일 것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온통 바위뿐인 길 아닌 길을 걷던 우리는 마침 일주일째 되던 날에, 비로소 낭떠러지에 깊은 골짜기가 있음을 발견했다. 골짜기 폭은 10미터 정도였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에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는데 끝이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찾아냈다! 여기가 대지로 통하는 입구다!"   나타난 테라노돈   챌린저 교수의 흥분된 소리를 들은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의 피로가 단번에 날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깊은 골짜기의 입구 근처를 이 날의 야영지로 하고, 우리 네 사람은 점보와 토인들을 이 곳에 두고 좁은 길로 들어갔다. 혼혈아인 고메즈와 마누엘만 데리고 갔다. 이 두 사람은 날렵할 뿐 아니라 재치가 있고 게다가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골짜기는 어두컴컴했고 습기 찼다. 직접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를 쳐다보니 멀리 약 30미터쯤에 파란 하늘이 마치 띠처럼 가늘게 보였다. 4백 미터 가량 더 들어가자 길은 가파른 고갯길이 되었다. 아니 고갯길이라기보다는 그 곳이 막바지였다. 낭떠러지에서 바위가 무너져 자연히 고개를 이룬 것이다.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선두에서 가던 록스턴 경이 무너져 내린 바위 쪽을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불빛을 비추었다. "앗! 위에 굴 같은 것이 보인다." 록스턴 경은 앞질러 올라갔다. 그러나 이윽고, "안 되겠어. 큰 바위가 굴을 가로막고 있는걸." 실망한 듯한 록스턴 경의 음성이 들려 왔다. 우리는 등불을 의지 삼아 서둘렀으나, 아닌게아니라 큰 바위 위에서 굴러 떨어진 모양으로 길은 거기서 막혀 있었다. 모두 달려들어 밀었으나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소. 내려갑시다." 챌린저 교수는 맥이 빠진 듯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굴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나는 굴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바위를 들어 낼 수 없는 이상, 메이플 화이트가 올라갔음직한 이 길은 이미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말할 기운도 없이 어둑한 고갯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 때 갑자기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굴 입구 근처에서 큰 바위가 굴러 내려온 것이다. 와그르르! 하고 야단스러운 소리에 놀란 우리들은 엉겁결에 한 옆으로 물러났다. 이 때문에 가까스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큰 바위가 어떻게 해서 굴러온 것일까? "우리들 머리 위에서 느닷없이 떨어졌으니 하마터면 벼락 맞을 뻔했네." 고메즈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이렇게 의심하게 되었다. 굴 안에 무엇인가 숨어 있다가 우리가 들어가려는 것을 방해하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제임스 콜버를, 저 높은 낭떠러지 꼭대기에서 밀어 낸 것도 그들의 수작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아무튼 저 대지에는 동물 이상의 지혜를 가진, 더구나 잔인한 생물―즉 야만인이 살고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어딘가에 숨어 있으면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비좁은 골짜기에서 적의 습격을 받는다면 도망치거나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허둥지둥 골짜기를 내려와 입구로 되돌아왔다. "아니오. 아직 단념하는 건 빨라요, 대책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록스턴 경은 우울해진 일행을 격려해 주었다. 아무도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모두 마음속으로 무슨 대책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낭떠러지 아래쪽을 걸었다. 사흘째 날 밤이었다. 우리가 캠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록스턴 경은 총을 손에 들고 어딘가로 가는 것 같았다. 탕! 하고 총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에 싱글벙글하면서 천막으로 돌아온 록스턴 경의 어깨에는 조그만 멧돼지 같은 짐승이 얹혀 있었다. 이 돼지 같은 짐승을 점보가 재빨리 요리해 주었다. 절반은 인디언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꼬챙이에 꽂아 모닥불 위에 얹었다. 기름이 녹아 떨어지며 불꽃이 튀는 소리가 났다.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며 맛있는 고기 냄새가 사방으로 풍겨 갔다. 이런 데서 싱싱한 돼지 불고기를 먹을 수 있다니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는 모처럼 뚜껑을 연 통조림에는 손을 대지도 않고 지글지글 타고 있는 불고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느닷없이 바람이 일며 모닥불의 불꽃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꽥 꽥 ― 하는, 소름이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 왔는가 싶더니 어두운 하늘에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새카맣고 큰 것이 굉장한 속도로 내려온 듯 하였다. 우리는 머리 위에서 막(幕) 같은 것이 덮여 오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눈 깜짝할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검은 것은 이윽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자 끔찍한 소리를 남겨 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명확하게, 이 눈으로 그 무서운 것을 목격했다. 뱀과 같은 목, 핏발이 선 눈, 악어처럼 갈라진 혀, 길쭉한 부리 속에 촘촘히 박힌 이빨, 악마를 연상케 하는 그 모습. 박쥐였을까? 아니, 그처럼 거대한 박쥐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10미터 정도 크기였다. 사방에서 마치 전장에 뒹굴고 있는 주검과 같은, 피비린내가 섞인 썩은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모닥불의 불고기가 아주 말끔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민첩한 록스턴 경조차도 총을 가지러 천막으로 달려가는 것을 잊고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네 사람 가운데서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마리 박사였다. "챌린저 교수." 이 음성은 감동한 나머지 떨리고 있었다. "미안하오. 나는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겠소. 제발 지금까지의 일은 깨끗이 잊어 주시오. 방금 그것이야말로 테라노돈이오!" 챌린저 교수는 다만 미소를 지으며 사마리 박사에게 두툼하고 길쭉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런던을 떠난 이래 줄곧 으르렁거리기만 하던 두 학자는 이 날 밤 비로소 화해를 한 것이다. 이 최초로 나타난 테라노돈 덕분에 두 사람의 마음은 결합되었으나, 한편 우리는 기대하고 있던 돼지 불고기의 근사한 저녁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몇 십억 년이나 전의 생물이 아직도 살아서 하늘을 난다는 것이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이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결코 꿈이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는 이 날 밤 흥분하여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우리는 다시 전진하였다. 어쩌면 다시, 그 테라노돈과 만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 유사 이전의 짐승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수 없었던 모양으로, 그 후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황폐하여 을씨년스러운 고장을 자석과 태양의 위치만을 의지하여 북에서 동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돌멩이가 수없이 뒹굴고 있는 사막과 들새가 쓸쓸하게 떠 있는 늪이 교대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 방면으로도 도저히 낭떠러지를 오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낭떠러지 밑을 달리고 있는, 단단한 선반과 같은 바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되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늪의 수렁으로 우리는 몇 번이고 허리 근처까지 빨려 들어가곤 했다. 더구나 이 근방은 남아메리카에서도 가장 무서운 독을 가진 쟈라카카뱀이 떼를 지어 서식하고 있었다. 늪의 표면을 타고 습격해 오는 이 무서운 뱀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 독사들은 대단히 공격적으로, 사람을 보면 늪의 썩은 물을 튀기며 모가지를 들고 돌진해 오는 것이다. 너무나 많기 때문에 죽일 수가 없다. 허겁지겁 도망칠 수밖에 없다. 도망치다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면 수면에는 온통 뱀 대가리뿐이다. 우리는 이 곳을 이라고 이름을 지어 지도에 올렸다. 다행히 누구 한 사람 이들 독사에게 물리지 않았으나 정말 소름이 끼치는 늪이었다. 간신히 이 곳을 지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은 열 나흘째였다. 결국 딴 입구는 찾아 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낙심한 끝에 피라미드형으로 꼭대기가 뾰족한 바위산 기슭에 웅크리고 있었다. 모두 아무 말이 없었고, 원기는 더욱 없었다. 테라노돈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대지 속에는 굉장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수월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낭떠러지를 올라갈 수는 없다. 메이플 화이트가 백묵으로 표시한 길은, 현재는 전혀 지나갈 수 없게 되었다. 식량은 그 후 총으로 사냥을 한 덕분에 아직 당분간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보충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운수 나쁘게 두 달 후면 장마철이 된다. 그렇게 되면 천막생활은 무리다. 하늘 높이 솟은 절벽은 대리석보다도 단단하다. 꼭대기까지 올라갈 길을 낸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지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까? 완전히 우울해진 우리는 거의 말도 나누지 않고 잠자코 담요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지칠 줄 모르던 챌린저 교수도 특징적인 그 큼직한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생각에 잠겼다. 모닥불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뒷모습은 거대한 식용 개구리처럼 보였다. 내가 '편히 주무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는데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지휘자를 스스로 맡고 나선 그는 실망이 더욱 컸을 것이다.   고메즈의 배신   그런데 이튿날 아침, 우리 세 사람이 일어나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교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안녕. 여러분, 편히 주무셨소?"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세 사람은 우뚝 멈춰 서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교수는 유쾌한 듯이, "여러분은 나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축하하면 됩니다. 문제는 하룻밤 사이에 해결이 됐어요." "그럼 입구를 찾아냈단 말이오?" "그렇소!" "어떤 방법으로? 그건 어디 있소?" 다그쳐 묻고 있는 록스턴 경에게 교수는 잠자코 오른쪽에 솟아 있는 피라미드형의 바위산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긴 올라갈 수 있다 하더라도 건너편 대지는 못 건너갑니다. 10미터 떨어져 있으니까요." 나는 맥이 빠져 투덜거렸다. "아니야, 저 피라미드형 바위 꼭대기로 올라가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내 재능이 쓸모 있는 일을 하리란 것을 여러분도 새삼 알게 될 것이오." 챌린저 교수는 무엇인가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달리 좋은 수가 없었으므로 교수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문제의 바위산의 뾰족한 꼭대기에 올라갈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록 클라이밍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평지 같으면 누구보다도 빨리 달릴 자신이 있었으나, 바위산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한 가닥의 줄 위에 매달려 내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자 머리털이 삐죽서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대학 시절에 럭비로 몸을 단련해 두었기 때문에 몸만은 튼튼하여 어떻게 해낼 수가 있었다. 뾰족한 바위산은 원래는 대지와 접속되었던 모양으로 바위 꼭대기는 대지와 거의 같은 높이였다. 바위 꼭대기에서는 한눈에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거무스름하게 어디까지나 이어지는 숲, 그 사이를 아마존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 당하여 넋을 잃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챌린저 교수였다. "머론, 여기서 자네 힘을 좀 빌어야겠어." 언제 가지고 왔는지, 교수는 손에 든 도끼를 내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뾰족한 꼭대기는 좁다란 초원(草原)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초원에 한 그루의 너도밤나무가 서 있었던 것이다. 건너편 대지까지 눈짐작으로는 불과 1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건널 수가 없다면 10킬로미터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너도밤나무의 줄기를 꼭 붙잡고, 절벽 쪽으로 몸을 내밀어 보았다. 저 아래에,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인디언들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이 쪽 절벽은 건너편 낭떠러지와 마찬가지로 도끼로 내려친 듯이 수직이었다. 너도밤나무는,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분명히 예의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던 큰 나무다. 챌린저 교수가 전에 왔을 때 맞춰 떨어뜨렸다는 테라노돈이 앉아 있던 나무인 것이다. 높이는 20미터쯤 되었다. 교수는, "이 너도밤나무를 저 쪽 낭떠러지 쪽으로 넘어뜨려 대지와의 사이에 통나무 다리를 놓도록 하게. 이것이 어제 밤에 생각해 낸 내 계획이야. 어때, 근사한 생각이지?" 하고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근사한 착상이었다. 나무 높이는 20미터 이상 되었으므로 요령 있게 넘어뜨리기만 한다면 훌륭한 다리가 되는 것이다. "머론, 자네는 팔 힘이 세어 보이니까 이 작업을 맡길 수 있어. 그러나 자네 멋대로 해선 안 되고 나의 지시에 따르도록." 나는 교수가 명령한 대로 나무가 안성맞춤으로 넘어지도록 너도밤나무 뿌리 근처를 도끼로 찍어 자국을 냈다. 원래 나무는 대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성공할 지도 모른다. "어떻소 ? 챌린저란 사내는 필요할 때 비로소 진짜 재간을 발휘하잖소." 교수는 혼자서 신바람이 났다. 나는 록스턴 경과 교대로 열심히 도끼질을 했다. 한 시간쯤 후 너도밤나무는 소리를 내며 전방으로 넘어져 건너편 낭떠러지의 숲 속으로 가지를 묻었다. 쓰러진 그루터기는 우리가 있는 꼭대기에 있었다. 하마터면 뿌리째 뽑혀 실패할 뻔했으나 다행히 이 나무가 미지의 세계―대지로 건너가는 다리가 돼 준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모두 말없이 챌린저 교수와 교대로 악수를 했다. 교수는 밀짚모자를 벗어 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면 여러분, 이 챌린저가 아직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그 신비로운 고장에 맨 먼저 건너가는 것을 용서해 주시겠지?" 하면서 교수는 통나무 다리 쪽으로 갔다. 그러자 록스턴 경이 교수의 상의를 잡으며, "아니, 그건 용서할 수 없소." "뭐라고요?" 교수가 얼굴을 뒤로 젖히자 턱수염이 앞으로 나왔다. "학문에 관한 한 모든 것은 선생의 지시에 따르겠소. 선생은 과학자니까. 그러나 내가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서는 내 명령대로 해야 하오, 그러니까 서로가 각자 전공이란 게 있는 법이오. 군대식은 내가 전문이란 말입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우리는 지금 적지로 돌격해 들어가려는 참입니다. 어떤 적이 숨어 있을지 모르오. 공을 다투려다 크게 실수를 해선 안 됩니다." 이 말은 제법 이치에 닿았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고집쟁이 교수도 어쩔 수 없이 경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먼저 캠프에서 무기와 식량을 운반하는 작업을 해야하오." 결국 록스턴 경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고용된 인디언들이 총과 식량을 운반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 사이에 교수는 화를 내지도 못하고 혼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너도밤나무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자 완전히 기분이 풀리어 싱글벙글했다. 이런 점에서 교수는 순진한 어린이와도 같았다. 챌린저 교수를 선두로, 우리는 마치 앉은뱅이가 된 꼴로 건너편의 낭떠러지를 향해서 너도밤나무를 천천히 조심조심 건너갔다. 단 한 사람 록스턴 경만은 총을 든 채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건너갔다. 과연 경험을 쌓은 탐험가다운 데가 있었다. 다 건너간 우리는 록스턴 경이 날라다 준 총을 손에 들었다. 풀숲 속에서 무엇이 뛰쳐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방을 경계하면서 나무숲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전진했다. 챌린저 교수만은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드디어 찾아냈소!" 두 손을 만세를 하듯 높이 들었다. 물론 기분 상으로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 우리는 마침내 이 신기한 세계에 비로소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교수처럼 그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 놓지 못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총을 쥔 채 새삼 이 지상에서 동떨어져 있는 대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조용한 채, 일찍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새가 날아올라 눈앞을 가로질러 나무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이리하여 우리 네 사람은 메이플 화이트가 그리던 상상의 나라―잃어버린 세계에 선 것이다. 우리는 최고의 시간을 맞이한 듯했다. 이 때 도대체 누가, 이것이 무서운 재난의 시작이란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 대지에 들어서서 약 50미터쯤 밀생한 숲 속에 들어선 바로 그 무렵이다.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퍼뜩 놀란 우리는 다투어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앗! 다리가!" 우리는 멈춰 섰다. 방금 건너온 너도밤나무 거목이 자취를 감춰 버리지 않았는가! 우리와 건너편 바위산을 잇는 단 하나의 다리가 저 골짜기 밑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니 아득한 낭떠러지 밑바닥에 부러진 가지 째 뉘어 있던 거목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낭떠러지 가장자리가 무너져 떨어진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하하하........" 우리가 떨어진 너도밤나무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느닷없이 건너편 바위산 꼭대기에서 조롱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왔다. "뭘까?" 깜짝 놀라 그 쪽을 바라보자, 오, 그것은 고메즈― 그 혼혈인 고메즈가 아닌가! 늘 얌전하게 우리 지시대로 잘 따르던 고메즈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바위산 풀밭 속에서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것이다. 그 얼굴은 증오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고, 눈은 번뜩거렸으며 복수의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록스턴 경! 야, 존 록스턴!" 그는 외쳤다. "뭔가, 난 여기 있지 않나!" 록스턴 경은 응수했다. 고메즈의 악쓰는 소리가 끔찍한 웃음소리와 함께 울려 왔다. "그렇지, 너는 그 쪽에 있어! 영국의 개새끼! 하하하, 넌 이제 절대로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거기서 마귀에게 잡아먹히거나 말라죽어라. 나는 이 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마침내 기회가 온 거다. 요전에는 굴속에서 바위덩어리로 짓이겨 죽여 버리려다가 실패했지만 이번만은 만사가 끝났어. 야, 영국의 보잘 것 없는 남작아. 페드로 로페즈의 원한은 무서운 법이다. 난 말이야, 네가 죽인 로페즈의 아우다! 생각이 나겠지, 5년 전 네가 푸트마요 강가에서 쏘아 죽인 그 로페즈는 나의 친형이었다. 난 이제 기꺼이 죽을 수 있다. 형의 원수를 갚았으니 말이다." 고메즈는 우리를 향해 증오심에 찬 주먹을 휘 둘러 보였다. 그러고 바위산 꼭대기를 신바람이 나서 뛰어 다녔다. 그러나 다음 순간, 탕! 하고 록스턴 경의 라이플 총이 불을 토한 것이다. 꽥하는 소리와 함께 페드로 로페즈의 아우 고메즈는 3백 미터 아래의 골짜기로 거꾸로 굴러 떨어졌다.   끔찍한 발자국   페드로 로페즈란 사람은 브라질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백인과 토박이의 혼혈인이었다. 로페즈는 인디언들을 힘으로 눌러 종으로 삼아 심하게 학대하였다. 그래서 마음이 곧은 록스턴 경은 사람들을 위해 로페즈를 죽인 것이었다. 그 후 브라질에서는 혼혈인이 난폭한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형의 죽음을 한스럽게 여기던 고메즈는 이 아마존의 오지에까지 록스턴 경을 쫓아 온 것이다. 얼마 전 굴속에서 갑자기 머리 위로 큰 바위가 굴러 떨어진 것도 사실은 고메즈가 동료인 마누엘과 짜고 록스턴 경을 해하려고 저지른 일이었다. 고메즈가 쓰러진 순간 마누엘은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곧 점보에게 잡혀 맞아 죽고 말았다. 이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뜻밖의 사건으로 긴장한 록스턴 경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 "나 때문에 여러분의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합니다. 더 조사한 후에 고용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새삼 그것을 책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앞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상의 끝에 우리는 얼마 동안 이 곳에서 묵기로 했다. 점보가 록 클라이밍 때 사용한 튼튼한 줄을 이쪽으로 던져 주었다. 이윽고 식량이나 탄약도 던져 주었다. 데리고 온 인디언들은 클루프리의 마귀가 두려워 한사코 돌아가겠다고 보챘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점보 한사람만 남겨 놓고 전원을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 인편에 추장에게 부탁하여 가급적 빨리 길고 튼튼한 줄을 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리하여 나는 대지(臺地)에서의 첫날밤을, 촛불 밑에서 이 보고를 쓰고 있다. 부락으로 돌아가는 인디언들에게 주어 추장에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영국의 신문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빌 따름이다.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적어 둔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제대로 귀국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이다. 큰 나무가 있으면 돌아갈 다리라도 다시 가설하련만 이 근방 50미터 안팎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몇몇 사람의 힘으로 딴 곳에서 운반해 올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로프를 가지고서는 낭떠러지가 너무 멀다. 아, 그야말로 절망이다! 이 날 밤 우리는 만일의 위험에 대비하여 모닥불조차도 피우지 않고 교대로 불침번을 서 사방을 경계하면서 불안한 하루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은 모두 의논이라도 한 듯이 일찍 깨어났다. 나는 너무나 다리가 가려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깨어났다. 가려웠다기보다는 아파 왔다. 급히 바지를 걷어올리고 보니까 무릎 바로 밑에 잘 익은 포도알과 같은 것이 대롱거리고 있지 않은가! "와아, 이건 뭐야!" 나는 깜짝 놀라 그것을 잡아 올리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퍽 하는 소리를 내며 사방에 피를 뿌리면서 터지고 말았다. 나의 외침 소리에 교수와 박사가 달려왔다. "이거 굉장하구나!" 하고 사마리 박사는 내 정강이께를 굽어보았다. "큰 진드기군. 이런 진드기는 아직 분류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가 고생한 최초의 수확이다. 이 진드기는 이 진드기는 이크데스 머론이라고 이름을 지어 줍시다. 잠깐 물리기는 했으나 동물학사상에 영구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머론 자네는 정말 행복한 젊은이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네는 이 굉장한 표본이 충분히 부풀어오르기 전에 짓이겨 버렸어." 챌린저 교수는 예의 학자다운 말투로 적이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 고약한 진드기 같으니!" 하고 나는 악을 썼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마리 박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 챌린저 교수. 그렇게 아쉬워할 건 없어요. 당신 목 속으로 한 마리 들어갔으니까."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챌린저 교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악을 쓰며 버둥거리는 것이었다. 교수는 당황해하며 셔츠와 상의를 벗으려고 버둥거렸으나 너무 서두른 탓으로 좀처럼 벗겨지지 않았다. 우리가 거들어 주어서 겨우 교수를 홀랑 벗길 수 있었다. 이 근방은 교수나 나에게 달라붙은 진드기뿐 아니라 독충이나 그밖에 피를 빨아먹는 벌레가 많이 있었다. 도저히 캠프 따위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란 것을 알게된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 허둥지둥 이동하였다. 이번 장소는 숲 속의 공지였다. 중앙에 큰 은행나무가 솟아 있었다. 상의한 끝에 모두들 숲 속에 가서 가시가 많은 나뭇가지를 많이 모으기로 했다. 천막 주위에 을 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에 익숙한 록스턴 경이 우리를 지휘했는데 즉각 훌륭한 성(城)을 쌓아올렸다. 공지 중앙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튼튼한 가시의 성을 완성한 것이다.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적에게 습격을 받는다 하더라도 침입해 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성곽이 무너질 염려도 없었다. 출입구는 가급적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즉각 출입구를 막을 수 있도록 한 옆에 가시 다발을 쟁여 두었다. 은행나무 곁에 널찍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사이에서 샘물이 솟아 나왔으므로 음료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머리에 짐을 이고 한 줄로 서서 온 길을 되돌아가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멀리 평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점보는 바위산 기슭의 조그만 천막에 남아 우리와 외부 세계와의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척후병이 되었다. 이 날 밤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오늘밤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잘 수 있다.' 담요 속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나는 어느 덧 피로로 인해 잠이 왔다. 그런데 아무 까닭도 없이 잠이 깊게 들지 않는 것이었다. 잠이 드는가 싶다가도 별안간 정신이 맑아지곤 했다.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노려보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몇번이고 눈을 뜨곤 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까닭에 흥분한 것이다. 틀림없다.........' 나는 자신을 타이르면서 총을 안듯이 하고 눈을 다시 감자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에, 우리는 모두 힘있게 기상했다. 마침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흐르는 샘물을 따라 조심스럽게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물을 따라가면 돌아올 때 길을 잃지도 않을 것이다. 캠프를 떠나 얼마 가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옛날의 세계 속에 말려 들어갔다. 이 곳은 매우 널따란 늪이었다. 캠프에서 늪까지 겨우 5백 미터 가량밖에 안 되었는데 깊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사람 키의 몇십 배나 되는 듯한 양치류의 잎, 사람 머리만큼 큰 고사리, 그야말로 지금까지 본 것의 몇십 배나 되는 거대한 야자수..... 대학자들-사마리 박사는 물론 챌린저 교수도 이름조차 모르는 식물이 무성했다. 늪지를 선두에서 걷고 있던 록스턴 경이 별안간 멈춰 서더니 지면을 가리켰다. "이건 뭐지? 새의 발자국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큰 조류가 있을 수 있을까?" 물가에 세 발가락의 큰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 발자국이 팬 곳에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이 발자국은 생긴 지 아직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새는 이 근방에 있을 거요." 록스턴 경은 이렇게 큰 발자국을 남긴 괴물을 잡겠다는 것일까? "이건 새 따위가 아니야. 네발짐승의 것이다. 여러분, 보시오. 조금 앞에 다섯 발가락의 조그만 자국이 있지 않습니까!" 허리를 굽혀 살피고 있던 챌린저 교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는 상의한 끝에 어쨌든 이 기묘한 발자국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총을 고쳐 든 우리 네 사람은 늪을 건너 풀밭을 헤치고 전진했다. 전진함에 따라 우리는 더욱 긴장되었다. 걸어가는 숲은 풀이 짓밟히고 조그만 나무 따위가 뿌리째 쓰러져 있었다. 분명히 다소 육중한 짐승이 풀숲 위를 지나간 것이다. 우리는 허리를 굽히고 한 걸음 한 걸음 경계를 하면서 발소리를 죽여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문득 그 자리에 말뚝처럼 멈춰 서고 말았다. 갑자기 눈앞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   덤벼드는 테라노돈   풀숲 저 쪽에는 널찍한 공지가 있었는데 거기를 본 순간, 우리 네 사람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눈에 비친 것은 현재 이 세계에 생존하는 어떤 동물보다도 훨씬 거대하며, 더구나 누구 한 사람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모습의 동물이었던 것이다. 크고 작은 것을 합쳐 모두 다섯 마리였다. 두 마리는 어미이고 세 마리는 새끼다. 새끼조차 코끼리만큼 크다. 캥거루와 큰 도마뱀을 섞어놓은 듯한 몸집에다 잿빛 피부는 반들반들 빛났고, 그것이 햇빛을 받아 번뜩거린다. 조그만 머리통, 길쭉한 목, 크고 긴 동체와 꼬리. 세 발가락의 뒷다리로 선 채 다섯 발가락의 앞다리로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끌어당겨 어린잎을 먹고 있다. 우리는 숲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앉아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동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이 쪽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숲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이따금 새끼 쪽은 껑충껑충 어미의 둘레를 뛰어 다녔다. 어미 쪽도 이따금 껑충 뛰었다 쿵! 하고 땅에 떨어졌다. 어미들의 힘은 굉장한 것이었다. 한 마리가 조금 큰 나뭇잎을 먹으려다 닿지 않게 됨을 알자 앞다리로 줄기를 부러뜨려 버렸다. 가끔 어미는 자못 성가시다는 듯이 놀고 있는 새끼들을 발길질했다. 그러면 새끼들은 땅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의 동작으로 보아 근육의 발달은 실로 굉장했으나 두뇌의 발달은 늦은 것 같았다. 왜냐 하면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도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고 열심히 몸집으로 막으려고 악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위기를 느꼈는지 다른 네 마리를 거느리고 어기적어기적 숲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때까지 록스턴 경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이 커다란 동물을 지켜보면서 몇 번이나 손에 든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곤 했었다. 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과연 영국 신사였다. 쏘면 우리는 발각될 것이고 발각되면 어떤 봉변을 당할 것인지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챌린저 교수와 사마리 박사는 둘 다 손을 쥔 채 반하기라도 한 듯이 넋을 잃고 있었다. 나는 이 것을 연구심에 철저한 학자의 참모습이라고 여겼다. 동물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사마리 박사는 한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이것을 영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과연 뭐라고 할까?" "뻔하지. 허풍장이요, 큰 사기꾼이라고 떠벌리겠지." 챌린저 교수가 이렇게 말하며 벌쭉 웃었다. 사마리 박사는 챌린저 교수의 비꼬는 말투에 씁쓸하게 웃었다. 이 놀라운 동물은 교수와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20세기의 오늘날엔 사멸해 버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1185    걷는 식물 트리피드 THE DAY OF THE TRIFFIDS 존 윈담 John Wyndham 지음 댓글:  조회:300  추천:0  2023-08-23
걷는 식물 트리피드 THE DAY OF THE TRIFFIDS   존 윈담 John Wyndham 지음 이 영재 옮김/최 병선 그림       유성의 밤···················· 3 공포의 아침··················· 6 걸어다니는 식물················ 19 인간 지네··················· 31 노예가 된 여자················· 41 몰살당한 집·················· 47 여류작가···················· 54 대학 문···················· 61 사격 연습··················· 70 비들리의 공동체················ 76 코우커의 공동체················ 82 붉은 머리의 남자················ 91 교외의 적··················· 100 시체 냄새··················· 106 여자 리더··················· 121 요새의 3인조················· 132 마을의 소녀·················· 142 새로운 생명·················· 151 찾아온 아이반 심프슨············· 168 내일을 향한 출발··············· 174 작품 해설··················· 183 유성의 밤   5월 7일 화요일, 지구가 혜성의 꼬리를 통과했다. 그 날 런던에서는 저녁때부터 하늘에 녹색의 섬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디오의 아나운서는 6시 뉴스로 유성우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다. "이제 곧 밤하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성우로 뒤덮일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장관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 우주 쇼를 놓치지 마십시오. 유성군 때문에 장거리의 단파 수신은 상당히 방해를 받게 될 듯합니다만 이 뉴스가 나가고 있는 중파에는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라디오의 실황 중계로는 유성군의 야릇한 아름다움을 충분히 맛보실 수는 없습니다. 꼭 밖에 나가셔서 밤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지상 최대의 불꽃놀이를 즐겨 주십시오." 이와 같이 권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전 런던 사람이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오피스 가의 세인트 메린 병원에서도 의사와 간호원은 물론이고 환자들까지도 병실의 창문으로 유성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 혼자만은 라디오의 해설로 만족해야만 했다. 왜냐 하면 양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빌 메이슨. 나이는 30세. 직업은 유럽 식용유 회사의 식물 연구원. 일주일 전에 나는 회사의 식용 식물 재배장에서 트리피드의 추출물이 눈에 들어가서 병원에 운반되어 왔다. 트리피드는 식용유의 원료가 되는 식물이지만 잎자루의 끝이 긴 채찍 모양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 독이 있는 가시 털이 잔뜩 붙어 있다. 트리피드의 독은 무섭다. 눈에 들어가면 실명하며 몸에 들어가면 목숨을 잃는 일도 있다. 다행히 나는 어릴 때부터 여러 번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찔려서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치료가 빨랐기 때문에 실명은 면했다. “8일째에 붕대를 떼면 눈은 본디대로 보이게 되어 있을 것이오." 하고 의사는 말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밤, 내일은 드디어 눈의 붕대를 풀게 되는 전날 밤에 유성우가 나타났다. 나는 하루 차이로 진귀한 우주 현상을 못 보게 되고 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독방 침대에서 라디오의 해설을 듣고 있었다. 그 때 간호원이 저녁 식사를 들고 와서 유성우의 광경을 얘기해 주었다. "지금 하늘은 온통 유성으로 꽉 차 있어요. 어느 것이나 밝은 녹색이어서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여요. 다들 밖에 나가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눈이 아프도록 환하게 빛나는 큰 것이 있어서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집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다들 말합니다. 정말로 장관이에요. 그걸 못 보시다니 정말로 안됐군요." "정말 유감이야.“ 하고 나는 동의했다. "우린 병실의 환자 분들도 유성을 볼 수 있게끔 병실의 커튼을 죄다 열어 젖혔습니다. 당신도 눈의 붕대만 아니면 여기서 멋진 밤하늘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간호원은 흥분해서 말했다. "밖은 시끌벅적 하겠네요?" "예, 몇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원이나 벌판에 나와서 구경하고 있어요. 지붕이란 지붕에는 온통 사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요.“ "유성우는 좀더 계속될 것 같소?“ "글쎄요. 하지만 만약 오늘 붕대를 푼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당신한테는 유성을 보게 하지 않았을 거여요. 붕대를 푼 눈은 천천히 빛에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조금 전의 유성 같은 것은 굉장히 밝아서, 온 방 안이 녹색으로 보였을 정도여요. 그것을 못 보시다니 정말로 안됐군요.“ 실컷 동정하고 나서 간호원은 나갔다. 나는 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아나운서의 해설은 이니 이니 하는 말의 반복이었다. 곧 우주 불꽃놀이도 끝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지구는 앞으로 몇 시간이면 유성군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은 서둘러 보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보지 못한 것을 일생 동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아나운서는 열심히 권했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화가 나서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 말았다. 장님한테는 낮이나 밤이나 마찬가지지만 역시 밤이 되면 잠이 오고 아침이 되면 눈이 뜨인다. 주위의 술렁임을 들으면서 누워 있다가 나는 어느 새 잠이 들고 말았다.   공포의 아침   이튿날 눈이 뜨였을 때 마침 시계가 치기 시작했다. 딩동, 딩동.... 8 시였다. 5월 8일 수요일, 오전 8시이다. 사방은 고요했다. 마치 일요일처럼 조용했다. 어쩐지 수상한 느낌이 든다. 여느 날 같으면 언제나 7시 30분에 간호원이 와서 내게 세수를 시키고 침대 주변을 치우고 아침 식사를 날라 온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8시가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간호원들은 어젯밤의 유성 소동으로 피곤해서 아직도 자고 있는 것일까? 나는 배가 무척 고팠다. 게다가 오늘은 나로서는 중대한 날이다. 눈의 붕대를 풀고 눈이 보이게 되는지 어떤지 알아보는 날이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서 간호원 실로 통하는 초인종을 찾아서 꼬박 5초 동안이나 눌러 댔다. 여느 때 같으면 즉시 인터폰에서 '왜 그러셔요?'라는 대답이 온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언제까지 기다려도 간호원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간호원 실에 아무도 없는가? 나는 한참 동안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밖의 분위기도 어쩐지 이상하다. 전혀 소리가 없다. 이 세인트 메린 병원은 오피스 곁의 교차점에 있으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차 소리가 난다. 특히 아침 8시 전후에는 일 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웅성거림이 병실에까지 들려 온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조용했다. 도시 전체가 죽은 듯이 고요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나는 기분이 으스스해졌다. 눈이 안 보이니까 한층 더 자신이 없고 불안했다. "어쩌면 도로 공사 때문에 병원 근처가 통행 금지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눈의 붕대를 약간 내리고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싶다. 그러나 붕대는 코 위에서 머리 뒤까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 쉽게 내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붕대를 푸는 것도 겁이 났다. 일 주일 이상이나 장님이 되어 있다 보니 스스로 시력을 시험해보려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잡았다. 아까보다도 더 오래 눌렀으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간호원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책임하잖아!!" 끝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시트를 걷어 젖히고 침대에서 나왔다. 더듬더듬 병실을 가로질러 도어에서 복도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이봐요, 아침 좀 주시오! 48호실이오!“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이 일제히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마치 군중의 미치광이 같은 소란을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 놓은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여기가 세인트 메린 병원이 맞는가? 자고 있는 동안에 어느 정신 병원으로 옮겨진 것은 아닐까?“ 나는 얼른 도어를 닫고 다시 더듬거리며 침대로 돌아왔다. 이 때 밑의 한길에서 무서운 비명 소리가 났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듯한 절규였다. 그것은 세 번 계속되더니 공중으로 길게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땀이 붕대 밑으로 배어 나왔다. 분명히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더 이상 혼자서 암흑 속에 남겨져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장에 확인하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붕대는 오늘 풀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결심을 했다. 의사가 하는 일은 대체로 알고 있다. 우선 침대에서 나와서 손으로 더듬어 창문의 블라인드를 끌어 내렸다. 그러고 나서 안전핀을 빼고 긴 붕대를 살살 말아 가며 푼 다음 살그머니 눈을 떴다.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사물의 형태가 희미하게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대낮의 빛에 익숙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병실 안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과 방구석에 수상한 것이 숨어 있지 않은가 확인했다. 도어의 손잡이 밑에 의자 등받이를 대어 놓아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침대 밑의 선반에 검은 색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겠지. 나는 색안경을 쓰고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의 틈새로 아래 한길이 보였다. 남자가 두 명 걸어가고 있다. 둘 다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한 걸음씩 느릿느릿 확인하듯이 걷고 있다. 하늘은 놀랄 만큼 맑게 개어 있고 먼 집들의 지붕까지 분명히 보인다. 그 까닭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옷장을 열어 보았다. 내 옷이 얌전하게 걸려 있다. 그것을 입으니까 마음이 가라앉아 왔다. 우선 병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겠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게다가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도 희미하게 들려 온다. 나는 독방이 줄지어 있는 복도를 걸어서 좀더 넓은 복도로 나왔다. 어두운 그늘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윗도리에 줄무늬 바지를 입고 그 위에 횐 옷을 입고 있었다. 병원의 의무원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벽에 들러붙어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여보시오?“ 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횐 옷을 입은 사나이는 멈춰 서서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얼굴은 핏기가 없고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빌 메이슨입니다. 48호실의 환자인데,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병실에서 나와서........" "당신은 눈이 보이오?" "예, 전과 다름없이 잘 보입니다. 오늘은 눈의 붕대를 푸는 날인데 아무도 와주지 않아서 내 손으로 풀었어요. 잘 된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러나 상대방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사무실까지 좀 데려다 주시오. 전화를 걸어야 하니까." 그 말이 내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무원이 병원 안을 혼자 걸어다니지 못한단 말인가? "여보시오, 부탁이오. 내 사무실은 서동의 5층이오. 문에 내 이름이 붙어 있어요. 소움즈 의사라고 말이오." "하지만 여기가 어디쯤인가요?“ 나는 물었다. 병원에 들어 왔을 때부터 나는 죽 눈이 안 보였었다. 병원의 내부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이다. 소움즈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내게 묻는 거요? 당신은 눈이 보이지 않소? 내가 장님이라는 걸 보면 모르겠소?" 그러나 소움즈 의사의 눈은 크게 뜨여서 내 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오늘 아침에 잠을 깨고 부터 알 수 없는 일만 계속되고 있다."잠깐 기다리시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리베이터 곁의 벽에 라고 크게 씌어 있었다. 여기는 5층인 것이다. 나는 소움즈 의사 곁으로 돌아와서 위치를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내 팔을 잡으시오.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다음 모퉁이를 돌아 세 번째 문이요." "알겠습니다." 나는 하라는 대로 소움즈 의사의 팔을 잡고 걸어갔다. 사무실에 닿을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나는 소움즈 의사를 책상 곁으로 데리고 가서 수화기를 집어 주었다. 소움즈 의사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버튼을 짤그락 짤그락 눌렀다. "안 돼, 통화가 안 돼." 그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수화기를 책상 위에 놓고 소움즈 의사는 물었다. "이봐요, 내가 지금 어느 쪽을 보고 있소? 창문은 어디요?" "당신의 뒤요." 하고 나는 가르쳐 주었다. "그래요 ? 소움즈 의사는 홱 돌아서서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살금살금 걸었다. "여기로군.“ 양손으로 창문턱을 어루만지더니 소움즈 의사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창문으로 달려들어 유리를 깨고 공중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선생님!“ 나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볼 용기는 없었다. 여기는 빌딩의 5층인 것이다.   장님의 도시   장님 의사의 투신 자살! 그것을 목격한 쇼크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나는 메슥거리는 기분을 참고 사무실을 나왔다. 넓은 복도의 막다른 곳에 병실 문이 보인다. "저기에는 누가 있을 테지." 문을 여니까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어젯밤 유성 불꽃놀이가 끝난 뒤, 창문에 커튼을 친 그대로이다 문 곁에 남자 환자가 누워 있었다. 나는 물었다. "간호원은요?" "없어요. 벌써 몇 시간째 부르고 있는데도 아무도 안 와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창문의 커튼을 좀 열어 주지 않겠소? 이렇게 캄캄해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하고 남자는 말했다. "그러죠.“ 나는 창문으로 가까이 가서 커튼을 홱 열어 젖혔다. 5월의 밝은 햇빛이 병실 가득히 비쳐 들어왔다. 여기는 외과 병실로서 스무 명 가량의 환자가 있었다. 모두가 침대에 누운 채로 기동을 못 했다. 거의가 다리 부상이며 한쪽 다리를 절단한 사람도 있었다. "이봐요, 그렇게 커튼을 주물럭거리고 있지만 말고 빨리 죄다 열어 주시오."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옆의 침대를 보았다. 얼굴이 거무튀튀한 남자가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 내 쪽 밝은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다른 침대에 있는 환자들도 다들 눈을 크게 뜨고 내 쪽을 가만히 보고 있다. 소움즈 의사와 똑같다! 모두들 장님이 된 것이다!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가엾지만 어쩔 도리도 없다. "커튼이 걸려서...... 열려지지가 않아요. 고칠 사람을 찾아오겠소." 그렇게 말하고 나는 병실에서 도망쳤다.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서 다음 층으로 나왔다. "여기에는 괜찮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다른 병실을 들여다보았다. 침대는 모조리 비어 있었다. 그러나 방바닥에는 잠옷 차림의 남자 두 명이 쓰러져 있다. 한 사람은 입에서 피를 토하여 붉은 피바다에 얼굴을 처박고 죽어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뇌출혈 같은 것을 만났는지 얼굴을 괴로운 듯이 일그러뜨리고 죽어 있었다. 다른 환자는 아마도 병실에서 달아난 모양이다. 나는 다시 계단으로 되돌아왔다. 더 이상 다른 병실을 들여다볼 마음이 없었다. 부리나케 내려가는데, 모퉁이에 잠옷 차림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머리가 쫙 갈라져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모양이다. 가까스로 현관 홀로 나왔다. 거기에는 슬리퍼가 마구 흩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핏자국도 보인다. "그랬구나." 나는 처음에 48호실의 문을 열었을 때 들리던 군중의 웅성거림이 생각났다. 아마도 별안간 장님이 된 환자들이 도움을 청하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여기로 밀어닥친 것이겠지. 그것은 소름끼치는 끔찍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느낌으로 정면 입구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병원의 정원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문 밖 골목에 술집 간판이 보였다. '아라메인'이라는 이름의 술집이었다. 나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손님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안쪽의 카운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또 진이군!“ 이어서 쨍그랑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술에 취한 남자가 술병의 술을 따라 냄새를 맡아보고 아무 데나 획 내던지고 있었다. "한 잔하고 싶은데요........" 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요?" 남자는 경계하듯이 물었다. "병원에서 왔소." "병원 사람?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눈이 보이오?" "보여요." "거 다행이군. 선생님, 이리로 와서 위스키 병을 좀 찾아 주시오." "난 의사가 아니오. 환자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선반에서 위스키 병을 집어서 마개를 열고 잔과 함께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소.“ 남자는 대뜸 병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 식으로 마시면 죽어요." 내가 주의를 주자 남자는 자포자기적으로 말했다. "죽을 때까지 마시고 싶어요. 왠지 아오? 난 장님이오. 눈 뜬 장님이란 말이오. 모두가 다 청맹과니란 말이오. 당신 외에는! 어떻게 당신은 장님이 안 되었소?“ "글쎄 모르겠소." "다 그 별의 짓이야. 제기랄. 그 녹색 유성의 짓이란 말야. 그것 때문에 모두가 다 봉사가 되고 말았어. 당신 어젯밤에 그 유성을 보았소?" "아뇨." "그럴 테지. 당신은 어제 그 녹색의 유성을 보지 않아서 장님이 안 된 거요. 다른 사람은 죄다 그것을 보았어. 그래서 장님이 되고 만 것이오. 모든 게 다 그 유성 때문이오." "죄다 눈 뜬 장님이라고요?" 나는 내 컵에 브랜디를 따르면서 물었다. "그렇소. 아마도 온 세계의 사람 모두가 다........ 당신만 빼고는." 남자는 또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마셨다. 입가로 흐른 위스키가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나는 물었다. "당신은 이 가게의 주인이오?“ "그렇소.“ "브랜디 석 잔에 얼마요?“ "그런 거 관두시오. 이제 곧 죽을 인간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오!" "당신은 몸이 건강해 보이는데...... 이제 곧 죽을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아요." "아니, 이 위스키를 깨끗이 비우고는 죽을 거요. 봉사가 되서 살아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소?“ 남자는 술내 나는 입김을 내게 뿜으며 말을 이었다. "마누라는 나보다 간이 컸어. 자기도 아이들도 장님이 된 것을 알자 방의 가스 마개를 틀었지. 그런데 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버틸 배짱이 없었소. 혼자 밑의 홀로 도망쳐 왔소. 그러나 위스키 덕분에 나도 배짱이 생겼소. 지금부터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가스가 꽉 차 있는 위의 방으로 돌아갈 작정이오." 곧 남자는 위스키 병을 한 손에 들고 더듬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서 위층으로 사라졌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말려 보았자 남자의 결심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나머지 브랜디를 비우고 나는 술집에서 나왔다. 어디로 갈 목적도 없다. 다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큰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고 기분이 으스스하게 고요했다. 더러운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온 세계의 사람들이 봉사가 되었단 말인가? 런던은 장님의 도시가 되고 만 것일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종말이다. 런던에서 태어나서 런던에서 지내 온 30년간의 생활이 내 마음속에 애절하게 되살아났다.   걸어다니는 식물   나는 어린 시절, 런던 교외에 산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국세청에 다니는 우수한 공인 회계사였다. 그래서 외동아들인 나도 공인 회계사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수학 성적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자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기보다는 집의 정원에서 화초를 돌보는 편이 즐거웠다. 어느 날, 나는 생울타리 구석에서 색다른 식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키가 1.2미터쯤 되었으며 뿌리께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고 목질의 줄기에서 긴 잎자루가 쭉 뻗어 나와 있었다. "이게 무슨 식물일까?“ 나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녹색의 잎을 훑어보았다. 질깃질깃한 가죽질의 짧은 잎이었다. 잎자루의 끝은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저 속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들여다보고 싶어도 키가 작아서 닿지를 않았다. 그 때 아버지가 와서 나를 안아 올려 주셨다. 원추 모양의 깔때기 밑바닥에서 양치 식물의 새순처럼 동그랗게 말린 덩굴이 5센티미터 가량 튀어 나와 있었다. 그것은 끈적끈적해 보였다. 파리 같은 작은 벌레가 여러 마리 깔때기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괴상한, 이름 모를 식물은 이미 온 세계에 분포되어 조용히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에 세상에도 이상야릇한 뉴스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걸어다니는 식물이 발견되었다. 식물이 스스로 뿌리를 들어 올려서 걸어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이 뉴스는 수상쩍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문에서는 지면에 활기를 주기 위해서 해외 뉴스란에 세상에서 신기한 말을 만들어 싣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 뉴스는 수마트라, 보르네오, 벨기에령 콩고, 브라질, 기타 모든 열대 지방에서 계속 들어 왔다. 이렇게 되면 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뉴스 카메라맨이 열대 지방으로 날아가서 의 정체를 필름에 담아 왔다. 그 뉴스 영화를 나는 시내의 영화관에서 보았다. 스크린에는 키가 2미터를 넘는 녹색 식물군이 하나 가득 비쳐졌다. "아니? 내가 정원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식물이다." 나는 놀랐다. 정원의 것도 곧 2미터 이상으로 자랄 것인가? 해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에콰도르에서 발견한 걸어다니는 식물입니다. 지금 식물들은 모두 같이 놀러 가는 길입니다. 보십시오, 도깨비 식물의 행진을! 이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멋진 착안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감자를 잘 훈련시키면 감자는 밭에서 부엌으로 냄비 속으로 혼자서 걸어 들어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넋을 잃고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식물의 줄기에는 가느다란 수염뿌리와 같은 털이 수북히 나 있었다. 줄기의 하부는 세 갈래로 갈라져서 지상 30 센티미터쯤 되는 곳에서 본체를 받치고 있다. 그 걷는 모양은 마치 목발을 짚은 사람과 같았다. 세 개의 다리 중에서 두 개가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서 남은 한 개를 끌어당긴다. 한 발짝마다 긴 잎자루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려서 당장 에라도 쓰러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서투르게 보이면서도 걷는 속도는 사람과 비슷한 정도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에콰도르의 것이 걷는다면 우리 정원의 것도 걸을는지도 모른다.' 뉴스 영화가 끝나자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정원의 식물을 살펴보았다. 키는 작지만 틀림없이 에콰도르의 것과 같다. 나는 우리 집의 식물이 걸어가기 쉽게 주위의 땅을 파서 부드럽게 해 주었다. 몸을 구부린 채 뿌리가 다치지 않게 흙을 치우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눈앞이 캄캄해져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다. 머리가 빠개지는 것처럼 아프고 온 몸이 쑤셨다. 아버지가 정원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여 안아 일으켰을 때는 내 머리의 한쪽이 붉게 충혈 되어 부르터 있었다. "누가 그랬니?“ "무엇으로 맞았니?“ 아버지와 의사는 번갈아 캐물었으나 나로서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부상자가 그밖에도 또 나와서 마침내 범인이 밝혀졌다. 그 범인은 놀랍게도 이었던 것이다. 은 식육 식물로서 곤충을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가축까지도 습격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무기는 잎자루의 꼭대기에 뭉쳐 있는 양치 식물의 새순 모양의 덩굴이다. 이것이 먹이를 향해 채찍과 같이 날카롭고, 탄력성이 있게 3미터나 뻗는다. 게다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독채찍으로 노출된 피부를 때려서 사람이나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나를 때린 이 아직 다 자라지 않고 독도 약했기 때문이다. 내가 퇴원해서 우리 집에 돌아오니까 정원의 은 흔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베어서 불태워 버린 것이다. 한편 식물학자들은 의 과학적인 조사 연구에 착수했다. 우선 이상한 식물의 이름을 라고 이름지었다. 이는 이라는 뜻이다. 트리피드는 남북의 극지권과 사막 지대를 제외한 거의 전지역에 자라고 있었다. 열대 지방에서는 키가 3미터 가까이 까지 자라지만 유럽에서는 2미터에서 2.5미터까지의 것이 많다. 어느 것이나 성장하면 세 개의 뿌리를 땅에서 뽑아 자유로이 걷기 시작한다. 또한 자기가 원하는 곳에 뿌리를 박고 머물 수도 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독채찍이다. 그것은 큰 먹이-이를테면 사람-을 노릴 경우 반드시 머리를 친다. 그 겨냥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확하다. 트리피드는 먹이를 쓰러뜨리면 그 곁으로 이동하여 시체가 썩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독채찍으로 흐물흐물해진 시체의 살을 조금씩 뜯어서 잎자루의 끝에 있는 깔때기로 날라 간다. 깔때기 밑바닥에는 진득진득한 소화액이 있어 죽은 동물의 살점을 소화 흡수하는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독채찍을 크게 무서워하여 트리피드를 발견할 때마다 짓이기거나 뿌리부터 잘라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독채찍만 잘라 내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린 독채찍이 다시 본디대로 자라는 데는 2년이 걸린다. 그래서 독채찍을 잘라 낸 트리피드를 두 세 그루 정원에 심는 일이 유행했다. 해마다 독채찍을 잘라내는 일만 잊지 않으면 트리피드는 아이들의 좋은 놀이 상대였던 것이다.그러나 산지나 삼림 지대의 트리피드는 위험했다. 나무 그늘이나 덤불 속에서 느닷없이 긴 독채찍이 뻗어 와서 여행자를 때려눕히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되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엽총으로 잎자루 끝을 독채찍과 함께 쏘아 날리는 것이었다. 열대 정글의 원주민들은 길고 가벼운 장대 끝에 ㄱ자 형의 칼을 달아서 들고 다녔다. 그러나 총이나 칼이 달린 장대는 이 쪽에서 먼저 트리피드를 발견했을 때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 트리피드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서 독채찍을 뻗어 왔을 때에는 잘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루기 쉬운 용수철 총이 고안되었다. 이 총은 얇은 강철의 회전판, 십자형의 칼날, 작은 부메랑 따위를 발사한다. 어느 것이나 25미터 거리에서 트리피드의 잎자루를 절단할 수는 있으나 12미터 이상 떨어지면 명중률이 떨어진다. 트리피드의 연구는 온갖 각도로 행해졌다. 그리고 트리피드의 이상한 성질, 습성, 조직 구조 등이 잇달아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의 최대의 성과는 트리피드에서 극히 질이 좋은 식용유를 얻을 수 있다는 발견이었다. 동시에 신종의 식물이 어찌하여 단기간 중에 거의 세계에 분포하게 되었는가-하는 문제의 수수께끼도 해명되었다. 내가 태어났을 즈음에는 런던 시의 인구는 2천 5백만 명으로 크게 불어나 있었다. 물론 전세계가 폭발적인 인구 증가 시대를 맞이하여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북부의 툰드라 지대를 개척하여 대규모의 식량 증산에. 착수하는 한편 새로운 식용 식물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트리피드를 발견했다. 트리피드에서는 극히 양질의 식용유가 나온다. 게다가 극지와 사막 외에는 어디서나 재배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즉각 국내의 각지에 트리피드의 실험 재배장을 만들고 트리피드유의 생산 설비를 갖추었다. 트리피드 유를 대량 생산하여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는 세계 각국에 팔자는 것이 소련의 목적이었다. 그 때까지 트리피드 식물에 관한 정보는 최고의 국가 기밀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트리피드 실험 재배장의 어느 과학자가 소련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져서 유럽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망명지인 유럽에서 소련의 국가 기밀을 팔아서 크게 한탕 벌자는 넉살 좋은 것이었다. 그 과학자는 실험 재배장에서 트리피드 씨앗을 한 상자 훔쳐내어 비행기로 소련 탈출을 꾀했다. 그런데 방공 레이더망에 잡혀 소련 공군 전투기의 추격을 받았다. 과학자의 비행기는 태평양 위의 성층권에서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 뒤에 흰 솜구름 같은 것이 남았다. 그것은 몇천만 개나 되는 트리피드의 씨앗이다. 극히 가벼운 씨앗은 기류를 타고 몇 주일, 또는 몇 달 동안이나 공중 여행을 계속하여 전세계의 육지에 낙하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못 믿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거의 동시에 트리피드를 발견하게 된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더 이상 그럴 듯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트리피드에서 식용유가 나온다는 그것이 중요하다. 유럽 식용유 회사에서는 즉시 대규모의 트리피드 재배를 시작하여 트리피드유의 생산에 착수했다. 트리피드는 버릴 것이 없었다. 기름이나 즙을 자고 난 찌꺼기도 영양가가 높아서 가축의 먹이로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유럽 식용유 회사는 유럽의 식량 부족 해결에 큰 역할을 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했다. 나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유럽 식용유 회사의 식물 연구원이 되었다. 의 뉴스 영화를 본 날부터 나는 트리피드의 포로가 되었다. 독채찍에 머리를 맞고 죽을 뻔했어도 단념하지 않았다. 공인 회계사가 되라고 하는 아버지의 권유를 거스르고 결국 트리피드의 연구를 직업으로서 선택한 것이었다. 5년 후, 부모님은 비행기 사고로 모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후로 트리피드만이 나의 삶의 보람이 되었다. 이번에 병원으로 들려 오는 사고를 일으켰을 때, 나는 동료 식물 연구원 월터 러크너와 함께 트리피드 재배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우리는 철망으로 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독채찍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트리피드는 독채찍을 남겨 두는 편이 채취한 기름의 질이 좋아진다. 그래서 재배장에서는 독채찍을 자르지 않고 재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방비구를 착용하고 재배장에 들어가야만 했다. 세 개의 밭에 다 익어 가는 트리피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어느 것이나 한 그루씩 쇠말뚝에 사슬로 묶어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론가 걸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탁탁탁........ 밭의 여기저기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트리피드가 잎자루의 뿌리 께에 나와 있는 세 개의 낭창낭창한 봉상돌기로 잎자루를 치는 소리였다. "트리피드들이 얘기를 하고 있다.“ 월터가 말했다. "이봐, 식물이 말을 하나? 하고 나는 웃었다. 그러나 월터는 전혀 농담이 아닌 듯 진지하게 말했다. "트리피드는 정상적인 식물이 아닐세. 동물처럼 걷는단 말이야. 말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어. 물론 말이라고 하지만 모종의 통신이라는 뜻이지." 월터는 트리피드에게 지능이 있다고 믿고 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트리피드에는 동물과 같은 뇌수가 없다. 따라서 그 지능도 동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야. 빌, 자네는 트리피드가 사람을 급습할 때 독채찍으로 어디를 노리는지 알지. 반드시 드러난 부분을 노린다. 거의가 머리고 그 다음이 손이야. 그리고 피해자는 목숨을 건져도 장님이 되는 사람이 많아. 즉, 트리피드는 사람에게서 활동력을 빼앗는 방법을 참으로 잘 알고 있어. 장님인 사람은 트리피드에겐 대적이 안 돼. 트리피드는 눈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만 사람은 눈이 안 보이면 트리피드의 공격에서 달아날 수 없으니까.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어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그 앞일세. 트리피드는 흔히 집단으로 행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어떠한 방법으로든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어. 아마도 저 탁탁거리는 소리는 통신의 일종이라고 난 생각하네." 그러나 월터도 탁탁 통신의 내용까지는 몰랐다. 나는 앞장서서 트리피드의 행렬 사이를 걸었다. 어느 것이나 나보다 키가 컸다. 줄기의 뿌리 께에는 칼자국이 나 있다. 그것은 트리피드유의 원료가 되는 수액을 채집한 자국이었다. 트리피드는 사슬에 묶여 있어도 뿌리를 쳐들고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줄이 흐트러져 있다. "8월이 되면 또 골치 아프겠는걸." 나는 잎자루 끝을 보면서 말했다. 8월의 결실기가 되면 깔때기 바로 밑에 있는 깍지가 사과의 두 배 반 가량의 크기로 부풀고 암녹색으로 빛이 난다. 이것이 터질 때는 탕 하고 소리가 난다. 20미터나 떨어져 있어도 들릴 만큼 큰 소리다. 그리고 희고 가벼운 씨가 증기처럼 공중으로 터져 나가 바람에 날려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 무렵, 밭 곁에 서면 '탕, 탕, 탕!‘ 하고 마치 총격전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이 소란스럽다. 그러나 그 밖의 계절은 봉상돌기로 잎자루를 때리는 탁탁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트리피드의 뿌리를 살펴보려고 몸을 구부렸다. "독채찍이다!“ 월터의 고함 소리와 동시에 잎자루의 깔때기에서 긴 독채찍이 쓱 뻗어 나의 철망 마스크를 때렸다.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었으나 이 때는 운이 나빴다. 독채찍에 달려 있는 작은 독주머니가 몇 개 터져서 독액이 튀어 내 눈에 들어간 것이다. "당했다!“ 나는 타는 듯한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땅에 쓰러져 뒹굴었다. "빌, 정신 차려!“ 월터는 나를 연구소로 옮겨 해독제로 응급 처치를 했다. 그리고 자동차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아마도 월터의 응급 처치가 좋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어릴 때 정원에서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질렸고, 유럽 식용유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도 여러 번 독채찍 공격을 받았으므로 그 독에 대해서 웬만큼 저항력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죽었거나 아니면 목숨을 건졌어도 장님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술집 주인의 얘기로는 어젯밤, 녹색의 유성우를 본 사람은 모두 다 장님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일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나는 트리피드의 독이 눈에 들어가서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에 유성우를 보지 못했다. 즉, 나를 장님으로 만들려고 한 트리피드가 오히려 나를 장님이 되지 않게 지켜 준 것이 된 셈이다.   인간 지네   나는 상점가의 한길로 나왔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여느 때는 번화하던 거리도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 사람이 보인다. 다들 가게를 따라 손으로 더듬거리며 느릿느릿 걷고 있다. 한눈에 장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걸음걸이였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밝은 5월의 햇빛이 끝없이 파란 하늘에서 내리쬐고 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상공에는 무수한 인공 위성이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기상 위성, 통신 위성, 지구 물리 관측 위성 같은 것뿐만 아니라 핵탄두를 단 원수폭 위성, 방사성 물질이 담긴 방사능 위성, 비루스와 박테리아 등의 병원체가 담긴 유독 미생물 위성까지 지구를 도는 궤도에 실려 있었다. 이러한 무서운 위성 병기는 도리어 지구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지상에서 단추 한 개만 누르면 전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어서 서로 전쟁을 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위성 병기보다도 무서운 것은 세계적인 인구 증가에 의한 식량 부족이었다. 그 문제도 트리피드의 재배로 전망이 상당히 밝아져왔다. "그러나 모두가 장님이 되어 버리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나는 시내를 걸어 보아 이 이변이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상당히 넓은 범위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브랜디를 마신 탓인지 배가 더욱 고팠다. 레스토랑과 식료품 가게의 쇼 윈도에는 먹을 것이 즐비하다. "맛있겠구나.“ 나는 일일이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어느 가게에도 사람이 없었다. '쇼 윈도의 유리를 깨부수고 먹고 싶은 것을 가져갈까........' 나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먹을 것을 가진 다음 돈을 놔두면 도둑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30년 동안, 선량한 시민으로서 정직하게 살아 왔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해서 쇼 윈도의 유리를 때려부수는 강도나 폭도와 같은 짓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고픈 배를 안고 맛있어 보이는 먹을 것을 곁눈질로 흘겨보면서 걸었다. 그러던 중에 자동차 때문에 길이 막혔다. 한 대의 택시가 보도 위로 올라와서 식료품 가게 앞에 라디에이터를 처박고 있었다. 차의 운전사도 점원도 보이지 않는다. 라디에이터 주위는 요리가 잔뜩 있었다. 이번에는 내 손으로 유리를 두들겨 깨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편하다. 나는 택시를 타넘고 배가 가득 찰 만큼의 음식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카운터 위에 음식값을 놓았다. 길 반대쪽에 유원지가 있었다. 잔디밭 사이에 자갈길이 만들어져 있고 양쪽 가로수의 신록이 아름답다. 나는 나무 그늘의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조용한 장소였다. 이따금 철책 앞을 사람의 그림자가 다리를 끌면서 지나갈 뿐이었다. 참새가 몇 마리, 자갈길에 내려왔다. 내가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더니 힘차게 쪼아먹었다. 아마도 새들은 장님이 안 된 모양이다. 잠시 쉬고 나서 나는 또 으스스하게 고요한 시내를 걸어서 하이드 파크로 나왔다. 거기에도 인적이 거의 없었다. 버려진 승용차와 트럭이 여기저기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큰 기념비 곁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힘차게 달려오다가 기념비에 머리를 부딪힌 모양이다. 겨우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명의 남녀가 철책을 따라 길을 더듬거리면서 걸어오다가 철책이 없어지자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발로 땅을 스치듯이 걸었다. 잔디밭에 고양이가 두세 마리 있었다. 눈은 다치지 않았는지 사방을 살피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피카딜리로 향했다. 이 때 새로운 소리가 났다. 톡톡톡. 한 남자가 지팡이로 건물의 벽을 두들기면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내 발소리가 들렸는지 남자는 멈춰 서서 경계하듯이 이 쪽의 태도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곧장 걸어가세요." 나는 안심을 시켜 주었다. 상대방 남자는 검은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즉, 진짜 장님인 것이다. 오늘 아침에 벼락 장님이 된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가만히 있어 주실 수 없겠소? 오늘은 멍청한 녀석과 몇 번이나 부딪혔는지 몰라요.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햇빛을 느끼니까 낮이라는 것은 알 수 있는데, 어째서 밤중처럼 조용할까? 모든 게 정상이 아닌 것 같군요." "바로 그렇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얘기해 주었다. "흐음, 친구가 잔뜩 생겼군. 그러나 제대로 장님이 되려면 상당히 힘이 들걸.“ 장님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또다시 벽을 똑똑 두드리면서 가슴을 펴고 자신에 찬 모습으로 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피카딜리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가게를 따라 더듬거리며 걸어가면서 여기저기서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나는 눈 뜬 장님들을 피하기 위해 길에 버려진 차들 사이로 누비며 걸었다. 어느 가게 앞에서 젊은 남자와 어린 소녀를 안은 여자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소녀가 큰 소리로 울며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것을 듣고 남자가 물었다. "아기는 눈이 보입니까?“ "예...... 나는 안 보이지만." 여자가 대답하자 남자는 손가락을 하나 내밀어 쇼윈도의 유리를 만졌다. "도련님, 저기 있는 것은 뭐지?“ "난 도련님이 아니어요." 하고 소녀는 항의했다. "자, 메리. 아저씨에게 가르쳐 드려라." 어머니는 아이를 재촉했다. "예쁜 언니들이 잔뜩 있어요." 하고 소녀는 말했다. 쇼 윈도에는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 인형이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손으로 더듬어서 다음 가게의 쇼 윈도로 갔다. "그럼 아가씨, 여기에는 뭐가 있지?" "사과하고 무화과여요.“ "됐다." 남자는 한쪽 구두를 벗어서 그 뒤축으로 유리를 때렸다. 처음에는 실패했으나 두 번째는 잘 되었다. 쨍그랑 ! 유리 깨지는 소리가 길에 퍼졌다. 남자는 구두를 도로 신고 깨진 유리 사이로 한 팔을 넣어 더듬거려서 오렌지를 두 개 집었다. 그 하나는 어머니에게, 또 하나는 소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듬어서 자기 몫을 한 개 집더니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오렌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우물쭈물했다. "왜 그러십니까? 오렌지를 싫어하시나요?" 하고 남자는 물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건 좋지 않아요." "달리 먹을 것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까? 어서 빨리 들어요." "그건 그래요." 그제야 여자는 아이를 내려놓고 오렌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에는 백 명 가까운 남녀가 있는 듯했다. 그 대부분이 뒤죽박죽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청맹과니가 되어 있어 손에 집히는 것을 아무렇게나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별안간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와 음정도 맞지 않는 합창이었다.   내가 죽거든 장례식은 집어치워 뼈를 알코올에다 담가 다오   그 노래 소리는 차츰 가까워져서 광장 가득히 퍼졌다.   머리와 발치에 술병을 놓아 다오 그러면 시체도 오래 가겠지   곧 골목에서 남자들 한 떼가 나타났다. 서른 명쯤 될까? 모두 한 줄로 서서 앞사람 어깨에 양손을 얹고 노래 소리에 맞춰 다리를 끌면서 지네처럼 전진해 오는 것이었다. 광장 한가운데까지 오자 선두의 리더가 큰 소리로 외쳤다. "중대, 멈춰서!" 주위의 장님들은 장승처럼 서서 보이지 않는 눈을 인간 지네에게로 향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하고 있었다. 리더는 관광 여행 안내자처럼 주워 섬기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여기가 유명한 피카딜리 서커스올시다. 런던의 꽃, 세계의 중심 - 상류 사회의 신사 분들이 술과 노래를 즐기는 곳입니다.“ 그 남자는 장님이 아니었다. 주위를 슬쩍슬쩍 날카롭게 둘러보는 눈길로 알 수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눈을 다치지 않은 것이겠지. 그러나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유명한 카페 로열에서 쉬도록 합시다. 이 가게에는 전세계의 술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색시는?“ 한 남자가 물었다. "색시야 여기도 있지." 리더는 앞으로 걸어 나와서 가까이 있는 젊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여자는 비명을 길렀다. 그러나 리더는 억지로 그 남자에게로 끌고 갔다. "당신과 같은 장님이지만 굉장한 미인일세........" "꺄아악." 주정꾼 남자는 울부짖는 젊은 여자를 손으로 더듬어 껴안았다. 그러자 그 다음 남자가 떠들었다. "두목, 나도 부탁합니다!“ "좋았어 " 리더는 주위를 둘러보고 가게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젊은 여자 쪽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갔다. 이런 일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게 섰거라!“ 나는 정신없이 리더에게로 뛰어가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더 잽쌌다. 나는 턱에 강한 펀치를 맞아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길 한가운데에 쭉 뻗어 있었다. 이미 장님 갱들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안전 지대에서 키가 큰 장님 목사가 외치고 있었다. "......이 세상의 종말이 왔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불에 타고 유황의 골짜기에서 ........" 이 마당에 하느님께 기도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는 쿡쿡 쑤시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저 장님 갱들을 눈이 보이는 사람들의 도덕으로 견주어 비난하는 것은 잘못인지도 모른다. 억지로 끌려간 여자들도 그 편이 오히려 행복할지도 몰라. 갑작스럽게 장님이 된 여자가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리 없다. 저 갱들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식량을 손에 넣을 수는 있다. 그 패들에게는 눈이 보이는 리더가 붙어 있으니까. 사람에게 있어 눈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나는 장님이 안 된 것을 아무리 감사해도 못 다 할 심정이었다. 목사의 설교와는 관계없지만 확실히 이 세상의 종말이 왔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인간이 하룻밤 사이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눈이 보이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다행히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독신인 내게는 아내도 자식도 아무도 없다. 우선 내 한 몸만 걱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노예가 된 여자   나는 아무도 없는 리젠트 팔레스 호텔의 식당에서 브랜디를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 이젠 카운터에 대금을 놓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다. 돈으로 무엇을 사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 호텔을 나오자 나는 소호로 향했다. 이 지구는 피카딜리 서커스보다도 훨씬 더 혼잡했다. 좁은 거리와 보도에서는 청맹과니들이 서로 부딪히고 욕질을 하고 있었다. 상점의 쇼 윈도는 거의가 깨부숴지고 그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무도 자기 앞에 있는 가게가 무슨 가게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또 가게 안으로 파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모두들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부딪혀서 상대방이 뭔가 안고 있으면 그것을 빼앗아 달아난다. 빼앗긴 쪽은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러 아무나 가릴 것 없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덤벼들어 때린다. 한 남자가 내 눈앞에서 다른 남자가 가지고 있는 큰 깡통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그것은 식료품 통조림이 아니었다. 페인트 깡통이었다. 장님들끼리의 흉하고 가련한 싸움을 보고 있자니까 내 가슴은 죄듯이 아팠다. 이 사람들을 먹을 것이 있는 가게로 데려다 주는 것이 내 의무일까? 그러나 상대는 몇천 명, 몇만 명이나 있다. 잘못하다간 식료품 쟁탈전으로 부상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여자와 어린이까지 소동에 휩쓸려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도 없다.“ 나는 넓은 길로 되돌아오려고 했다. 이 때 골목 안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 왔다. 그것은 여러 번 거듭하셔 길게 꼬리를 물고 울렸다. 나는 급히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큰 남자가 가는 놋쇠 막대기로 땅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를 때리고 있었다. 여자의 등은 옷이 찢어져서 빨갛게 부르터 있었다. 여자는 달아나려고 해도 달아날 수가 없었다. 양손이 등뒤로 묶이고 그 끈의 끝이 남자의 왼쪽 손목에 묶여 있는 것이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마침 남자가 오른손을 쳐든 순간이었다. 나는 남자한테서 막대기를 빼앗아 그것으로 어깨를 힘껏 후려쳤다. "이 새끼!“ 남자는 무거운 장화로 내 쪽을 걷어찼다. 물론 나는 잽싸게 몸을 비켰다. 장님인데다 왼쪽 손목이 끈으로 여자와 이어져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다. 두세 번 헛되이 허공을 걷어차자 남자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여자를 때렸다. "야, 일어서!“ 하며 끈을 당겨서 여자를 일어서게 하려고 했다. 나는 남자와 뺨을 갈겼다. 그리고 상대방이 주춤하는 틈에 호주머니에서 작은칼을 꺼내어 두 사람을 잇고 있는 끈을 잘랐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상대방은 휘청거리며 몸이 반쯤 돌아 자기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자를 이리 내놔라!“ 남자는 자유로워진 왼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것은 내게 맞지 않고 벽돌 벽에 부딪혔다. 손가락 관절이 삔 모양이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왼손가락을 누르면서 아픈 듯이 신음했다. 그 틈에 나는 여자를 도와 일으켜서 골목에서 끌고 나와 양손의 끈을 끌러 주었다. 여자는 지저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눈이 보이세요?“ "물론이오.“ "아, 다행이야. 눈이 보이는 것은 나뿐인가 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여자는 때묻은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는 작은 술집으로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서 의자에 앉혔다. 쇼 윈도의 유리는 깨져 있었으나 가게 안은 어지럽혀지지 않았다. 기운을 차리게 하려고 위스키를 컵에 따라서 여자에게 주고 나도 컵을 들고 옆에 앉았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자 여자는 겨우 침착해졌다. 나도 술을 홀짝이면서 여자의 태도를 슬쩍 관찰했다. 여자의 옷은 너덜너덜했으나 상당히 고급품이었다. 금발의 머리와 얼굴은 지저분하나 제법 미인이다. 키는 나보다 10센티미터쯤 작다. 몸은 날씬하나 여윈 편은 아니다. 나이는 스물 넷쯤 될까? 손은 매끈매끈하고, 손톱을 길게 길러 곱게 다듬고 있었다. "저, 굉장히 사나운 몰골이지요." 여자는 일어서서 거울 곁으로 갔다. "역시...... 잠깐 실례하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가게 한쪽의 화장실로 사라졌다. 한 10분 지나서 여자는 돌아왔다. 얼굴과 머리를 깨끗이 씻고 말끔해져 있었다.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난 틀림없이 미쳤을 거예요." 여자는 의자에 앉아서 자기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젤라 플레이튼-그것이 여자의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듯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의 집은 딘 로드에 있었다. 그저께 밤에 조젤라는 어느 파티에 참석하여 술을 과음했다. 어제 아침, 눈을 뜨니까 심한 숙취로 머리가 아팠다. 오후가 되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므로 4시경에 침실에 들어가서 강한 수면제를 먹고 푹 자고 말았다. 그래서 어젯밤의 유성 소동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침실로 들어와서 조젤라를 깨웠다. "얼른 메일 선생님을 불러 다오. 난 장님이 됐다...... 눈이 전혀 안 보이는구나." "도대체 어찌 된 일이어요?“ 조젤라는 깜짝 놀라 뛰어 일어나서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하인들을 찾았으나 다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장님이 되어 버려 쓸모가 없다. 전화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조젤라는 자동차로 의사를 데리러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상하다.“ 조젤라는 2킬로미터쯤 차를 달리고 나서야 겨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런던 근처의 대부분이 하루 밤사이에 장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일 선생님은 나처럼 눈을 다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희미한 희망을 안고 조젤라는 차를 운전했다. 그러나 리젠트 가에 접어들었을 때 엔진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결국 서고 말았다. 가솔린이 떨어진 것이다. 너무 급하게 집에서 뛰쳐나오느라 계기 보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 근방에 주유소가 없나?“ 조젤라는 차에서 나왔다. 그러자 한 남자가 더듬거리며 다가왔다. "이봐요, 좀 기다려요.“ "왜 그러세요?" 조젤라의 목소리를 듣고 남자는 우뚝 멈춰 섰다. "길을 잃었어요.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어요." "여긴 리젠트 가에요. 당신 뒤가 뉴 갤러리 영화관이고요.“ "고맙소. 이왕이면 보도가 어딘지 좀 가르쳐 주지 않겠소, 아가씨?“ 남자는 곁에까지 오더니 한 손을 뻗어 조젤라의 옷소매를 잡았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덤벼들어 조젤라의 양팔을 잡고 말했다. "당신은 눈이 보이는군. 어째서 당신만 눈이 보이는 거야?"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조젤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별안간 남자는 조젤라를 뒤돌려 세우고는 길에다 밀어 넘어뜨렸다. 무릎으로 조젤라의 등을 누르고 호주머니에서 끈을 꺼내어 조젤라의 양 손목을 잡아 묶었다. "이제 됐다.“ 남자는 조젤라를 끌어 일으켜 세웠다. "지금부터 너는 내 눈 노릇을 대신 하는 거다. 알겠나? 나는 배가 무척 고프다. 어서 맛있는 것이 있는 데로 데리고 가거라.“ "싫어요. 손을 풀어 줘요...... 조젤라는 달아나려고 했다. 그 때 조젤라의 얼굴을 남자가 손바닥으로 때렸다. "자, 시키는 대로 해. 먹을 것을 찾는 거야!" 항거하면 어떤 끔찍한 변을 당할지 모른다. 조젤라는 남자를 식당과 술집으로 인도하여 음식과 술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벼락 장님인데도 남자는 상당히 감각이 예민했다. "너, 또 달아나려고 하는구나." 남자는 조젤라에게 튼튼한 끈을 찾아오게 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왼손과 조젤라의 손목을 잡아매고 말았다. "그런 꼴로 노예처럼 부려 먹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나는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버렸어요. 그랬더니 마구 때려서...... 만약 당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을 거여요." 조젤라는 기분 나쁜 기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그런데 우린 앞으로 어떡하죠?“ 하고 내가 말했다. "난 지금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장님이 된 아버지가 계셔요.“ 조젤라는 더 이상 의사를 찾는 것을 단념하고 있었다. 나도 조젤라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내게는 가족이 없고 또 갈 데도 없었던 것이다.   몰살당한 집   이미 오후 4시가 지나 있었다. 리젠트 가까지 되돌아오다가 우연히 나는 칼 가게를 발견했다. "무기를 손에 넣읍시다.“ 나는 조젤라를 꾀어서 가게로 들어갔다. 우선 두 사람은 가죽 벨트를 허리에 매고 칼집에 든 칼을 찼다. "해적이 된 듯한 기분이에요." 조젤라가 말했다. 가게 앞에 대형 승용차가 서 있었다. "가솔린은 충분해요.“ 나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옆자리에다 조젤라를 앉혔다. 차는 북쪽으로 향했다. 속도를 내는 것은 무리였다. 눈먼 사람들이 차 소리에 놀라 길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서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해서 우리는 지그재그로 앞으로 전진한다. 도중에 큰 빌딩이 맹렬한 기세로 불타고 있었다. 화재는 한 군데만이 아니었다.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옥스퍼드 가에서 리젠트 공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더듬거리며 방황하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이 없어서 마음이 좀 편했다. 널찍한 잔디밭 위를 트리피드의 작은 무리가 두세 개 남쪽으로 흔들흔들 걸어간다. 어떻게 잡아 뺐는지 트리피드는 무거운 쇠말뚝을 사슬과 함께 끌고 다녔다. "이 세상의 종말인데도 저것들은 신이 나는가 봐요." 조젤라가 말했다. 얼마 안 가서, 나는 조젤라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상당히 훌륭한 저택이었다. 문에서 현관까지 관목이 줄지어 심어져 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대문을 열어 젖혔다. 조젤라가 앞장서서 정원수 사이를 걸어갔다. "앗, 퍼어슨 영감님!“ 갑자기 조젤라는 고함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자갈길에 남자 한 명이 엎어진 채 고개가 꺾여 얼굴의 한쪽을 보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선명하게 붉은 줄이 나있었다.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당한 것이다. "위험해!“ 나는 큰 소리로 조젤라를 불러 세우고 좌우의 정원수 숲을 재빨리 살폈다. 오른쪽의 관목 사이에 트리피드의 머리가 보인다. "이리 돌아와요 ! 빨리!“ "왜요?“ 조젤라가 돌아보았다. 그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입술이 와들와들 떨리고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빌, 뒤에 ......" 나는 홱 돌아보았다. 2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그루의 트리피드가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순간적으로 나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획! 독채찍이 소리를 내며 나를 습격했다. 그러나 아픔은 느끼지 않았다. 다음 공격이 오기 전에 나는 트리피드에게 덤벼들었다.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나 자신도 함께 쓰러지면서 양손으로 잎자루의 상부를 잡고 깔때기 째 독채찍을 잡아뜯으려고 하였다. 그 잎자루는 낭창낭창해서 잘 꺾어지지 않는다. 나는 손끝에 힘을 주어 상대방을 갈가리 찢어 놓고 일어섰다. 조젤라는 같은 자리에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이리 와요. 당신 뒤에 또 있어요." 나는 숨을 헐떡이며 손짓을 했다. 그제야 겨우 조젤라는 걸어왔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트리피드에게 맞아도 괜찮아요?“ 분명히 나는 독채찍에 얻어맞았다. 손등과 목에 빨간 줄이 엷게 생겨서 근질거렸다. "난 트리피드의 독에 대해 저항력이 생겨 있어요." 그렇긴 해도 근질거리는 정도로 끝날 리는 없다. 문득 나는 허리춤의 칼이 생각났다. 그것으로 독채찍을 뿌리 께에서 잘라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럼 그렇지, 독주머니가 다 비었군. 이놈은 사람을 마구 쏴서 독을 다 쓰고 말았군." 나는 자갈길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맥을 짚어 볼 필요도 없었다. 흙빛이 된 얼굴만 보아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엾어라.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정원사 겸 운전사로 일해 온 사람이어요." 조젤라는 목이 메었다. 퍼어슨 영감님 곁에 또 하나의 트리피드가 버티고 있어 현관으로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옆문으로 들어가요.“ 조젤라는 정원수 숲이 끝난 데서부터 화단 사이로 통하는 좁은 통로로 나왔다. 그러나 거기서 또 우뚝 멈춰 섰다. "아, 저걸 보셔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몸의 절반을 통로에, 나머지 절반은 화단에 걸치고 넘어져 있었다. 젊디젊은 얼굴에 붉은 줄의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애니 에요. 가엾은 애니." 조젤라는 목이 메었다. 눈에 눈물이 배어 나왔다. "둘 다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을 거요. 얼굴을 직접 맞으면 독이 빨리 도니까.“ 그런 말을 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조젤라를 위로하려고 했다. 화단에는 트리피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옆문으로 집안에 들어갔다. "아버지, 아버지!" 조젤라가 큰 소리로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하인들도 나오지 않는다. 집안은 으스스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상해요." 조젤라는 앞장서서 복도를 지나 홀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휙! 녹색의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조젤라의 머리를 스쳐 문을 때렸다. 조젤라는 허둥지둥 문을 닫고 나를 쳐다보았다. "홀에도 있어요.“ 이래 가지고는 거실이나 침실 쪽으로 갈 수가 없다. 우리는 옆문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거기서 잔디밭을 따라 거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돌았다. 거실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프랑스식 창문이 열려 있었다. 한쪽 유리창은 깨져 있었다. 흙 묻은 것을 질질 끈 자국이 프랑스식 창문 있는 곳에서부터 거실의 양탄자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털이 수북한 트리피드가 하나 서 있었다. 그 줄기의 꼭대기는 하늘에 닿을 만큼 크고 약간 흔들리고 있다. 그것은 이미 식물이 아니다. 녹색의 괴물이었다. 그 발 밑에는 남자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나는 조젤라의 한 팔을 잡고 물었다 "아버진 가요?“ "네." 조젤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먹였다. 너무 슬퍼서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안됐지만...... 만약 내가 갑자기 장님이 되었다면 상점가에서 먹을 것을 서로 빼앗으려고 싸움을 하느니 당신 아버지와 같이 되기를 바라겠소." "그 말이 맞아요." 조젤라는 겨우 침착성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저대로 놔 둘 수는 없어요." 이 때 나는 한 트리피드가 정원 숲에서 나와서 잔디밭을 지나 우리 쪽으로 똑바로 전진해 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길게 뻗은 독채찍이 허공을 칠 때마다 잎들이 술렁술렁 소리를 낸다. "아직 또 몇이나 있는지 몰라요. 우물쭈물하다가는 우리도 아버지와 같은 꼴이 돼요." 나는 조젤라의 한 팔을 잡고는 정원을 가로질러 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끝내 조젤라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지 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조젤라를 위로할 생각은 않고 다음에 해야 할 일들을 궁리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트리피드를 몰아 내고 무덤을 파서 조젤라의 아버지를 묻는다는 것은 무리다. 죽은 사람의 처치보다 우리가 안전하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되는 트리피드가 런던을 휘젓고 다니는 것일까? 가정용의 것은 죄다 독채찍을 잘랐을 것이다. 그러나 공원 같은 데서는 독채찍을 자르지 않고 쇠말뚝에 묶거나 쇠망으로 울타리를 만들거나 해 놓았다. 또한 시내에는 트리피드의 재배장이 몇 군데 있고 교외에는 대규모의 실험장 따위가 많이 있었다. 조금 전에 나는 리젠트 공원에서 쇠말뚝을 질질 끌면서 걸어다니는 트리피드의 무리를 보았다. 트리피드는 쇠말뚝 따위를 잡아 뽑을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다. 쇠망 울타리도 부숴 버릴지 모른다. 문득 나는 월터의 말이 생각났다. "트리피드에겐 지능이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일단 시력을 잃고 나면 트리피드의 힘과 지능에 대항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살아남기에는 트리피드 쪽이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저벅, 저벅, 저벅.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났다. 한 그루의 트리피드가 정원 숲 사이에서 문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차를 출발시켜요! 차를 출발시켜요!“ 조젤라가 겁을 먹고 소리쳤다. "차안에 있으면 괜찮아요." 나는 독채찍을 가진 트리피드를 늘 다루어 왔으므로 당황하지 않았다. 트리피드는 문설주 곁에서 멈춰 섰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트리피드는 가는 막대로 잎자루를 투닥투닥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 옆집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젤라는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놈이 되돌아오기 전에 빨리 여기서 도망쳐요.“   여류작가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클라켄웰로 갑시다. 거기는 우수한 트리피드 총과 방어 기구 만드는 가게가 있어요. 그리고 본드 가로 나가서 당신이 입을 옷을 구합시다.“ 그러나 길모퉁이를 돈 순간 사람의 떼거리가 보였다. 길 가득히 퍼져서 양손을 앞으로 뻗고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여자 하나가 발이 걸려서 넘어졌다. 뒤에서 오던 사람이 거기 부딪혀서 차례차례 뒹굴었다. 여자의 비명! 남자들의 욕지거리! 여기저기서 장님들끼리 치고 받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소란 통에 저편에 녹색의 긴 줄기 셋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서 차를 골목 안으로 급히 몰았다. "보았어요? 트리피드가 저 사람들을 뒤쫓아 다니고 있어요!" 조젤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골목을 빠져서 차는 다시 큰길로 나왔다.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경적을 계속 울리며 천천히 차를 몰았으나 마침내 앞도 뒤도 사람의 물결 속에 휘말리고 말았다. "장님들이 우리를 붙잡으려 하고 있소. 더 이상 차에 타고 있다간 위험해요.“ 나는 엔진을 건 채로 차에서 빠져 나와 조젤라를 내려 주었다. 이 때 뒤의 장님들이 차에 따라붙었다. 그 중 한 명이 문의 손잡이를 찾아서 비집어 열고 차안을 손으로 더듬었다. 또 한 사람이 반대쪽 문을 열고 운전석을 더듬었다. "운전사가 없다?" "어디로 갔지?" 장님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나와 조젤라는 눈먼 폭도들에게 잡혀서 그들의 길 안내역의 노예가 될 뻔했다. 나는 조젤라의 손을 꼭 잡고 청맹과니 행세를 하면서 군중 속으로 휩쓸려들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위치를 바꾸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빠져 나왔다. 1.5킬로미터쯤 걸어갔더니 다른 차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스테이션 왜건이었다. "이거면 짐을 나를 수 있으니까 다행이군." 나는 조젤라를 차에 태우고 클라켄웰의 공장으로 향했다. 2, 3백 년 전부터 정교한 금속 기구를 만들어 온 유명한 공장이다. 그 전에도 일 관계로 이 곳에 여러 번 온 일이 있다. 공장 안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나는 멋진 트리피드 총을 몇 자루, 그리고 쏘는 강철 부메랑 수십 발, 또 쇠망이 쳐진 헬멧 두 개를 들고 나와 차에 실었다. "그 다음은 입을 옷이야." 우리는 본드 가의 양품점에 차를 갖다 대고 필요한 옷가지를 걷어들였다. 그리고 옆의 식료품 점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식료품을 꺼내다 잔뜩 차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아파트를 찾는 일만 남았다. 우리는 고급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3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나는 복도에 나란히 있는 문을 하나 하나 노크해 보아 대답이 없는 방을 찾아냈다. 크림 빛 양탄자가 쫙 깔린 훌륭한 방이었다. 소파와 의자도 고급품이었다. 그러나 전기와 가스는 끊겨 있었다. 트랜지스터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켜 보았으나 둘 다 찍찍 하는 잡음이 들릴 뿐이었다. 런던은 죽어 있었다. 아니, 전세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눈이 보인다는 것은 비할 데 없이 멋지고 또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장님 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임금님이라는 속담이 있어요. 분명히 우린 임금님이오.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지고 제멋대로 살수가 있소. 그러나 장님들한테 붙들려서 노예가 될 우려도 있어요. 특히 조젤라, 당신은 여자니까 한층 더 위험해요. 앞으로는 눈이 보인다는 것을 눈 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해야 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이런 비참한 꼴은 딱 질색이야. 잠깐 멋 좀 부리고 올게요.“ 조젤라는 조금 전에 구한 옷가지를 안고 욕실로 갔다. 수도만은 아직 그럭저럭 나오고 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 시가의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밑에 빨간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죽은 도시가 불타고 있다! 얼마 안 가서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하여 그 이름조차도 잊혀지고 말 것이다. 나는 어두운 기분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무엇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돌아보니까 조젤라가 서 있었다. 푸르스름한 비단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은빛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은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것처럼 말끔하다. 좌우의 귀에는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창백하게 빛나고 있다. "아름다워! 멋있어요!" 나는 칭찬해 주었다. "고마워요. 빌...... 하지만 드레스는 이미 과거의 세계 것이로군요." 조젤라는 쓸쓸하게 웃었다. 정말로 그 말이 맞다. 멋을 내는 것은 눈이 보이는 세계의 일이다. "빌, 난 아직 당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어요. 그 때 당신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아니, 나도 역시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해요. 만약 그 때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느 술집에서 술에 만취하여 훌쩍훌쩍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우리는 눈이 보이는 사람끼리니까 서로가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위스키를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신상 이야기를 하였다. 조젤라는 상류 가정의 아가씨였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 자랐다고 한다. "열 아홉 살 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을 못 했어요. 그래서 난 집을 뛰쳐나와서 아는 여자 아이 아파트에 얹혀 있었어요. 그러나 빈둥빈둥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아요? 돈을 벌고 싶어서 책을 썼죠." "어떤 책인데?“ 하고 나는 물었다. "소설이어요. 뭐 대단한 작품도 아닌데 다행히 히트가 되어 인세 외에 영화화의 권리금 같은 것도 듬뿍 들어왔어요." "그 제목은?" "「여자의 모험」이라는 것이어요." "그랬구나!" 나는 내 이마를 탁 쳤다. 조젤라 플레이튼 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 듯한 것도 당연했다. 「여자의 모험」은 수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화되어 또 대히트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여류 작가인 줄은 미처 몰랐는걸."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조젤라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보았다. "여류 작가니 하는 말을 들으면 창피해요." 조젤라는 쿡쿡 웃었다. "심심풀이로 흉내낸 소설이 우연히 대히트를 했을 뿐이어요. 출판사로부터 제 2작을 부탁 받았지만 중간쯤 쓰다가 싫증이 났어요. 말하자면 소가 뒷걸음질치다 파리 잡은 격이어요.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또 아버지와 함께 태평스럽게 살게 되었어요. 되먹지 않은 여자지요? 난......" 베스트 셀러 소설을 썼으면서도 여류 작가 티를 태지 않는 것이 기뻤다. 이 여자하고 라면 잘 해 나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우리가 살아갈 계획을 세워야해요." 나는 위스키를 홀짝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당장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거요. 그 이유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수도는 아직 나오지만 급수 탱크에 괴어 있는 것뿐이니, 그것 마저 없어지면 끝장이지. 시내에는 여기저기 시체가 뒹굴고 있어요. 날이 갈수록 그 수는 늘어가기만 할거요. 이제 곧 시체가 썩기 시작해서 시내는 고약한 냄새로 가득 차게 돼요. 그리고 티푸스와 콜레라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할 거요. 그렇게 되기 전에 런던에서 시골로 달아나야 해요." "서섹스의 다운즈는 어떨까요? 오래 된 농장을 알고 있어요. 공기가 깨끗하고 우물이 있는 언덕 위예요." 조젤라가 말했다. 아무튼 내일 아침에 트럭을 구하기로 결정하고 거기에 실을 필요한 물건의 리스트를 둘이서 만들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물건이 필요했다. 긴 리스트가 완성된 것은 한밤중이었다. "아이 졸려." 조젤라는 하품을 하면서 일어서더니 큰 거울 앞에 서서 아름답게 차려 입은 자기 모습에게 말을 걸었다. "잘 자요, 과거의 환영 아가씨." 그러고 쓸쓸한 미소를 띄고 나를 돌아보고는 안쪽에 있는 침실로 사라졌다. 나도 내 침대에 몸을 쭉 뻗고 잠이 막 들려고 했다. 그런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빌, 와 보세요. 불빛이 보여요." 조젤라의 목소리다. "무슨 불빛이?“ 나는 급히 침대에서 나와 조젤라의 침실로 들어가서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갔다. 분명히 불빛이 보인다. 북동 방향에 어두운 밤하늘을 꿰뚫는 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 서치라이트와 같은 밝은 빛이었다. "저기에 누군지 앞이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에요." 하고 조젤라가 말했다. "그런가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가 캄캄해서 잘 모르겠으나 광선은 높은 건물 위에서 나오고 있는 듯했다. "날이 새거든 저기에 가 봅시다.“ 나는 손톱 가는 줄로 창문턱에다 선을 그어서 광원의l 방향을 알 수 있게 했다. "오늘밤은 푹 자는 게 좋아요." 다시 나는 침대로 돌아왔으나 눈이 말똥말똥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이따금 밖의 길에서 히스테리를 일으킨 듯한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흐느낌과 미치광이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별안간 권총 소리가 났다. 벼락 장님 가운데 한 사람이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나는 시트를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대학 문   이튿날 아침 눈이 뜨이자 부엌에서 소리가 들렸다. 조젤라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고 옷차림을 매만졌다. 양복은 윗도리도 바지도 온통 후줄근했다. 조젤라는 푸른 스키복의 허리에 가죽 벨트를 두르고 대형의 사냥용 칼을 차고 있었다. "이런 꼴 어때요?“ 튼튼한 가죽 구두로 방안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조젤라는 말했다. "나무랄 데 없는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런던은 맹수가 쏘다니는 정글보다도 더 위험한 곳이다. 석유 난로 덕에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토스트를 먹을 수 있었다. "어젯밤의 불빛은 대학의 탑에서 나온 것이에요." 식사 도중에 조젤라의 방으로 가서 창문턱에 낸 흠집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대학의 탑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 하늘에 높이 솟은 탑-거기에는 두 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사 준비를 일단 연기하고 저 탑을 조사해 봅시다." 우리는 왜건에 올라타고 큰길로 나갔더니 사람의 모습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이따금 보이는 장님들은 다들 지팡이나 막대 같은 것을 갖고 보도의 가장자리 돌을 똑똑 두들기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편이 건물의 벽을 따라가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았다. 똑똑 거리는 소리 덕에 장님들끼리 부딪히는 횟수도 줄어들겠지. 곧 맞은편 길에 대학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젤라가 말했다. "문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봐요." 그 말이 맞았다. 대학 문 앞에 군중이 보였다. 나는 급히 차를 오른쪽으로 꺾어서 50미터쯤 옆길로 들어간 곳에 세웠다. 장님 군중에 대해서는 넌더리가 났으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고 싶다. "난 이 근방은 잘 알고 있어요." 조젤라는 차에서 내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을 빠져서 고갯길을 올라 높다란 곳으로 나왔다. 거기서 군중의 머리 너머로 대학 문을 내려다보았다. 차양 달린 둥근 모자를 쓴 남자가 군중의 리더인 듯 하다. 문의 창살 너머로 구내에 있는 남자를 향해 뭔가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다. 구내에는 네 명의 남자가 보인다. 문 곁에 한 사람, 그 몇 미터 뒤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네 사람 다 눈빛과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아서 장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담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군중의 리더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상대방의 남자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다. 리더의 목소리는 높고 격해졌다. "잘 들으시오. 문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는 거요. 장님이 된 것이 이 사람들의 죄는 아니오. 누구의 죄도 아니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 당신네들의 책임이오! 눈이 보이는 주제에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네들의 책임인 것이오!" 리더의 옆얼굴이 슬쩍 보였다. 코가 가늘고 뼈가 두드러진 얼굴이고 머리는 검다. 나이는 한 서른 살쯤 되었을까 ? "나도 다행히 눈이 보여요.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에게 어디에 가면 먹을 것이 있는지 가르쳐주어 왔소. 그러나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은 몇천 몇만이나 돼요. 나 혼자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소. 꼭 당신네들의 힘이 필요해요. 그런데도 당신네들은 여기에 틀어박혀서 가엾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태평스럽게 구경만 하고 있을 거요? 정말로 기막힌 사람들이군! 그래도 당신네가 사람이오? 런던 시민이라고 할 수 있소?" 거기서 문안의 남자가 뭐라고 말했는데 우리한테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리더는 더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뭐? 식량이 얼마나 계속될 것이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끝까지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그러다 보면 어디서 구원의 손이 나타날지도 몰라요. 변명은 그만두고 바른 말을 해요! 당신네들은 식량이 있는 곳을 이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이 사람들이 식량을 손에 넣으면 그 분량만큼 당신네들의 몫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지. 맞았지? 그게 사실이지?" 창살 저 편에서 남자가 뭐라고 말했다. 그 말도 우리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리더는 한동안 무서운 얼굴로 상대방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좋아, 당신네들이 그런 생각이라면........" 느닷없이 리더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쳐 상대방의 팔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겨서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곁에 있던 장님의 손을 잡아 눈뜬 남자의 팔을 꽉 잡고 있게 했다. "놓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면서 리더는 대문의 빗장에 덤벼들었다. 문 안쪽의 남자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한 손을 창살 사이로 내밀고 휘둘렀다. 그 일격이 장님의 얼굴에 맞았다. "이 나쁜 새끼!“ 장님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잡고 있던 팔을 더욱 세게 비틀었다. 그 사이에 리더는 문의 빗장을 열려고 기를 썼다. 탕! 한 발의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알은 대문의 쇠창살에 맞아서 튀었다. 리더는 깜짝 놀라 빗장에서 손을 떼었다. "살인자!" "비겁자!" 뒤의 군중이 저주의 소리를 지르며 술렁거렸다. 이 때 문 안쪽에 있던 한 남자가 경기관총을 잽싸게 겨냥했다. 다다다다다 "위험해!" 나는 조젤라를 끌어당겨서 땅에 엎드리게 했다. 위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총 소리는 사람들을 떨게 했다. 우리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먼 군중은 완전히 허물어져서 제멋대로 더듬거리며 달아나고 있었다. "이봐, 기다려! 흩어져서는 안 돼!" 리더는 소리쳤으나 일단 흩어진 군중을 모을 수는 없었다. 그 혼돈을 내려다보면서 조젤라는 말했다. "저 남자의 말이 옳아요." "물론 옳지. 그러나 동시에 틀리기도 해. 저 남자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런 것은 절대로 오지 않을걸. 장님들에게 식량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는 일은 우리도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장님의 수는 너무 많아요. 게다가 몇 주일 지나서 식량이 동이 나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어요. 참혹한 상태를 질질 끌 뿐이예요." "글쎄요. 우리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남을 길을 찾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저 대문 안에 있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그럴 작정인 모양이니까." 조젤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눈먼 군중은 한 사람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와 조젤라는 높다란 곳에서 내려와 대학 문으로 다가갔다. 안쪽의 남자가 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었다. "당신네 그룹은 몇 명이오?“ "단 두 사람뿐이오. 어젯밤에 당신네들의 빛 신호를 보고 왔소." "좋아요. 대령을 만나 보시오." 하고 남자는 우리를 데리고 안뜰의 잔디밭을 가로질러갔다. 대령으로 불리는 인물은 수위실에 있었다. 통통 살이 찐 50세쯤 되는 남자로, 반백의 머리와 콧수염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얼굴은 핑크 빛으로 젊은이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있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대령은 책상에서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 안내한 남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날카로운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이름은?" 대령은 우리의 신원에서부터 취미와 정치 사상까지 자세히 물어서 서류에 써넣었다. "우리에게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오. 골치 아픈 일이 산더미같이 있으니까. 비들리 군이 자네들한테 무슨 일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말해 줄 것이오." 대령은 위엄 있게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눈뜬 사람들 그룹의 입회 테스트에 합격한 모양이다. 일단 홀로 나와서 우리는 다른 방으로 갔다. 거기에는 마이클 비들리가 있었다. 비들리는 대령과 정반대의 남자였다. 여윈 편에 키가 크고 약간 새우등이었다. 나이는 잘 알 수가 없다. 서른 다섯쯤으로도 보였고 쉰 살이라고 한대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밤샘이라도 했는지 검은 눈 주위가 부석부석 하다. 그러나 비들리는 상냥하게 우리를 맞이하고 곁에 있는 젊은 여자를 소개했다. "샌드라 델몬트입니다. 기억술의 전문가지요. 한번 기억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이나........" 젊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젤라에게 엄격한 눈길을 보냈다. "당신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여자의 모험」의 광고 사진에서요........" "그 일은 잊어 주셔요. 나는 여류 작가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사는 데 지쳤습니다." 하고 조젤라는 말했다. "알았습니다." 비들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우리의 그룹은 35명입니다. 그 가운데 28명은 눈이 보입니다. 나머지는 눈이 보이는 사람의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인데 장님입니다. 우선 우리가 서둘러야 할 일은 런던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만약 준비만 갖춰지면 내일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작정입니다." 비들리도 우리와 같은 염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저 전염병의 예방 접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가 필요하고 의료품도 갖추어야 하는데, 당신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그렇지, 식량이나 잡화는 어떻소? 혹시 당신네들이 우리와 행동을 함께 할 작정이면 스테이션 왜건 대신 트럭을 구해서 이 리스트에 적혀 있는 물자를 모아 주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비들리는 내게 한 장의 종이를 주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식료품과 잡화의 품목이 잔뜩 적혀 있었다. "식료품은 될 수 있으면 통조림, 병조림, 상자에 든 것으로 해 주시오. 소매점보다도 도매상이나 식품 창고를 노리는 편이 좋을 것이오. 힘든 일이겠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처리해 주시오. 오늘 밤 9시 반부터 전원이 집회를 열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토론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들리는 나와 조젤라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흘끔 보았다. "권총을 갖고 있습니까?" "아뇨." 하고 나는 대답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갖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늘로 향해서 쏘기만 해도 됩니다." 비들리는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두 자루 꺼내어 우리 쪽으로 밀어 주었다.   사격 연습   나와 조젤라는 스테이션 왜건에 실은 짐을 내려놓고 출발했다. 시내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이따금 만나는 장님들은 엔진 소리를 듣고는 보도 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우선 트럭을 구해야 한다. 맨 처음에 발견한 트럭은 나무 상자를 잔뜩 싣고 있었다. 그런 것을 내리고 있을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 다음에 발견한 것은 빈 차였다. 그것도 신품이나 다름없는 5 톤 짜리였다. "안성맞춤이다." 우리는 스테이션 왜건을 버리고 트럭에 올라탔다. 비들리가 준 리스트에는 식료품 창고의 주소가 몇 군데 적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에다 우리는 트럭을 갖다 대었다. 창고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으나 쇠지렛대로 비집어 열고 감아 올릴 수가 있었다. 넓은 창고 안에는 세 대의 트럭이 늘어서 있었다. 그 한 대에는 쇠고기 통조림 상자가 쌓여 있었다. "당신이 이 차를 운전할 수 있겠소?“ "승용차나 트럭이나 운전 방법은 같겠죠, 뭐." "그야. 길이 혼잡하지 않으니까 당신 솜씨로도 어떻게 될 거요. 그 전에 잡화를 긁어모아 옵시다.“ 우리는 빈 트럭으로 다른 창고에 가서 냄비, 솥, 주전자 등을 실을 수 있는 데까지 실었다. 마침 창고 곁에 작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나서 식료품 창고로 돌아왔다. "실은 말이어요, 나도 트럭을 한번 운전해 봤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조젤라는 신이 나서 쇠고기 통조림이 가득 실린 트럭에 올라탔다. 두 대의 트럭을 나란히 운전하여 우리는 무사히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리스트의 품목은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 우리는 다시 또 출발했다. 그리고 다른 트럭 두 대에 물자를 가득 싣고 6시 반경에 돌아왔다. "수고했소.“ 비들리가 나와서 물품을 점검했다. 반 다스 가량의 케이스는 리스트에 없는 것이었다. "저 건 뭔가요?“ "트리피드 총과 부메랑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 예, 트리피드 퇴치 도구로군요." 비들리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므로 나는 역설했다. "도시에서 떨어져 사는 데는 절대로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예, 좋겠지요. 별로 넓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니까." 마지못해 비들리는 인정했다. 나와 조젤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식당에서 차를 마셨다. "저 사람들은 트리피드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이 근방에는 없는가 보죠?" 조젤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트리피드의 전문가로서 설명했다. "이 근방은 시내 중심부니까 트리피드가 오지 않는 거요. 트리피드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나 돌로 포장이 된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뚝을 뽑았거나 쇠망을 부수고 자유로워진 트리피드는 흙을 찾아서 교외 쪽으로 이동할거요. 내일 우리는 런던을 떠나서 지방으로 갈 모양이오. 그러면 싫어도 트리피드를 만나게 되지. 한데 당신은 트리피드 총을 사용해 본 적이 있소?" "아뇨." "시간이 있을 때 좀 연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요." 한 시간 후에 나는 스키복에 하이킹 슈즈 차림이 되었다. 조젤라도 녹색의 스키복으로 갈아입었다. "트리피드의 경우는 잎자루 끝의 깔때기 째 독채찍을 쏘아 떨어뜨려야 돼요." 우리는 독채찍 대신 관목의 새순을 쏘아 떨어뜨리는 연습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대학 쪽에서 젊은 여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빨간 재킷에 녹색 바지를 입고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그 카메라를 우리에게 향하더니 두세 번 셔터를 눌렀다. "당신은 신문반인가요?“ 조젤라가 물었다. "예, 그런가 봐요. 대령의 명령으로 멤버의 기록을 찍고 있는 것이어요." 기록을 맡은 여자는 엘스페스 캐리라고 자기 이름을 대었다. 별안간 폭음이 들려 왔다. 한 대의 헬리콥터가 대영 박물관의 지붕 너머로 나타나서 대학 정원 쪽으로 천천히 날아갔다. "아이반이어요. 그인 눈이 보이는 사람을 찾으러 갔었어요. 착륙하는 장면을 찍어야지." 캐리는 얼른 대학 쪽으로 되돌아갔다. 곧 헬리콥터의 엔진 소리가 멈추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인류는 이것으로 끝장이 아닐까? 옛날 옛적에 지상에 번영했던 공룡처럼 갑자기 멸망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한 종류의 생물이 영원히 지구를 지배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거든요.“ 조젤라가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명히 인간은 이제 끝장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살아남을 기회도 아직 있다고 생각해요. 인류의 거의 대부분이 장님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처럼 눈이 보이는 작은 패거리가 여기저기에 있을 거요. 그리고 각각 공동체를 만들어 이 세계를 다시 지배하기 위해 싸우려 하고 있어요. 우리 조상에 비해서 지금의 우리는 뛰어난 지혜와 도구를 갖고 있어. 눈이 보이는 건강한 인간이 남아 있는 한 기회는 있을 거요."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요. 희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지요. 그러나 그처럼 안전하고 확고해 보이던 세계가 겨우 하루 밤사이에 이처럼 쉽게 허물어지다니 정말로 쇼크예요.“ 조젤라의 말이 맞다. 인간은 지금까지 구축해 온 문명이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믿어 왔다. 세계를 지배해 온 두뇌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인간의 두뇌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 빨강에서 보랏빛까지의 가시 광선을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을 가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눈이 안 보이면 이미 끝장인 것이다. 이런 연약한 능력으로 인간은 잘도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세계가 별로 좋아질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군요.“ 조젤라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러나 좋고 싫고를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규명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일이다.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곧 8시가 된다. "집회 전에 뭘 먹어 둬야 해요.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모르니까.“ 트리피드 총을 껴안으면서 나는 조젤라를 재촉했다.   비들리의 공동체   집회는 작은 강당에서 열렸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조명으로 사용하여 강당 안은 밝았다. 나와 조젤라가 들어갔을 때 연단 뒤에서 5명의 남자와 두 여자가 뭔가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중석에는 언제 어디서 왔는지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가 전체의 4분의 3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 여자들은 거의가 장님이어요." 조젤라가 말해 줄 때까지 나는 눈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곧 장신인 마이클 비들리가 연단 위에 섰다. "여러분.“ 그 목소리는 온화하나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우리가 살아 온 세계는 일순간에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번의 천재는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만 아직 살아 남을 길은 있습니다. 여러분은 노아의 방주의 신화를 알고 계시겠지요. 그와 같은 대홍수가 저 먼 옛날에 실제로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조상은 절망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재출발한 것입니다. 우리도 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재출발합시다. 다행히 지구는 무사합니다. 우리에게 식량과 원료를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여 살아갈 지혜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 세계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건강한 심신을 가지도록 합시다.“ 비들리의 연설은 짤막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준 듯했다. 장내의 공기가 생기를 띄었다. 그 다음에 대령이 연단에 올라서서 실제적인 이야기를 했다. "인구 밀집 지대에는 전염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런던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이동 날짜는 내일 정오입니다. 여러분의 활동에 의해 어느 정도의 생활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거의 전부를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최저 1년 동안 외부와의 관계를 일체 끊고 자급 자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새 숙사는 지방의 학교 기숙사나 시골의 큰 저택을 선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대령이 의자에 앉자 또 비들리가 일어서서 젊은 여자를 일동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이분은 미스 바아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매우 곤란했는데 미스 바아를 맞이하여 안심입니다. 미스 바아는 의사는 아닙니다만 경험 많은 간호원입니다. 이제부터 미스 바아에게 우리의 건강 관리를 맡기려고 생각합니다.“ 간호원인 미스 바아는 얼굴을 붉히면서 연단에 서서 짧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끝으로 덧붙였다. "현재 가장 두려운 것은 이 곳의 전염병의 발생입니다. 여러분이 이 강당에서 나가시기 전에 예방 주사를 놓겠습니다.“ 이어 백발의 남자가 연단으로 걸어갔다. 킹스턴 대학 사회학 교수인 볼레스 박사이다. "여러분, 나는 이제 곧 일흔 살이 됩니다. 이 그룹 중에서는 최연장자겠지요. 나는 학생 시절부터 거의 50년 동안 인간의 사회 제도에 관해 연구를 해 왔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여러 가지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사회, 각각의 시대의 풍속과 습관에 따라 자연히 달라집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되어 있던 제도가 다른 사회, 다른 시대에는 용서할 수 없는 부도덕한 제도로 간주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오늘 하루 어떤 일을 하였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물건을 마음대로 들고 나온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틀 전 같으면 그와 같은 행동은 가택 침입이나 절도죄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온 사회는 이틀 전에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고 지켜 온 사회 제도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까지 범죄로 여겨지던 행동이 범죄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에 있습니다. 그 사회에 어떠한 생활, 어떠한 사회 제도가 가장 적합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재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대들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열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공동체에 가담할 마음이라면 각오해 주십시오. 남자는 모두 일을 해야 합니다. 여자는 모두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눈이 안 보이는 여성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여성 만입니다. 눈이 보이는 남성까지 먹여 살릴 여유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눈이 보이는 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볼레스 박사가 여기까지 말하자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다음에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한 여성이 일어섰다. "박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 하십시오.“ "이 공동체는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1대 3입니다. 남자가 다 결혼한다고 해도 여자는 3분의 1밖에 결혼할 수 없습니다. 나머지 3분의 2의 여자는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낳으라는 것인가요? 즉, 올바른 결혼과 규율을 폐지하실 생각이신가요?“ "대답하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1대 1로 결혼을 한다는 규율은 이미 이틀 전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1대 1로 하는 것으로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 회교도들에게는 아내를 세 사람까지 갖는 것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결혼의 규율은 그 시대와 그 사회에 의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는 어떠한 결혼이 적합한지 이제부터 다 함께 잘 생각한 뒤에 결정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것은 당신네들 여성 전원이 아이를 낳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결코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규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은 어디 다른 데로 가서 다른 공동체에 가입해 주십시오. 다른 방법으로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볼레스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른 질문자가 일어서서 토론은 길어졌다. 조젤라와 나는 자리를 떠서 미스 바아가 있는 책상 곁으로 갔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주사 기구가 늘어 놓여 있었다. 우리는 팔에 주사를 몇 대 맞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토론은 한 시간 남짓 계속되다가 결국 중단되었다. "우리의 계획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내일 아침 10시에 내 사무실로 이름을 적어 내 주십시오. 더 이상 강요는 않겠습니다." 하고 비들리는 결론을 말했다. 거기다가 덧붙였다. "트럭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원 내일 아침 7시에 내게로 와 주십시오." 이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나는 조젤라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온화한 밤이었다. 탑의 광선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밤하늘을 꿰뚫었다. 느닷없이 조젤라가 말했다. "빌, 장님 여자들이 그처럼 많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어요?" "우리가 식량과 잡화를 찾으러 가 있는 동안에 비들리의 동료가 시내에서 긁어모아 온 것이겠지." "아뇨, 시내를 방황하던 벼락 장님이라면 그처럼 침착하진 못할 거예요. 그 여자들은 어느 맹인 시설에서 한꺼번에 데리고 온 거여요. 본디부터 장님이니까 이번의 '벼락 장님 사건'에도 당황할 필요가 없는 것이어요. 그 여자들은 장님 생활에도 익숙하고 게다가 일도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비들리가 노리는 것이었어요." 과연 여류 작가답게 조젤라의 눈은 날카로웠다. 내일 아침까지 몇 사람이나 비들리의 계획에 참가할까? 조젤라의 예상으로 여자는 거의 전부가 참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장님 여자는 돌봐 줄 조직이 필요해요. 게다가 대부분의 여자는 어쨌든 아기를 갖고 싶어하거든요." "나도 아기가 있었으면 좋겠는걸. 만약에 그게 당신의 아기라면." 나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조젤라는 침착했다. "고마와요, 빌. 기뻐요." 그리고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끼리만 멋대로 살수도 없어요. 새로운 결혼의 규율이 생길 거예요. 만약에 내가 리더라면 한 남자에게 부인을 세 명씩 갖게 할 거여요. 한 사람은 눈이 보이는 여자, 나머지 두 사람은 장님 여자예요.“ "당신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물론 진정이쟎구요. 만약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달리 두 명의 장님 여자도 맡아 줘요. 우린 눈이 보여요. 이 행복을 장님 처녀에게도 나눠줘야 해요. 볼레스 박사의 말대로 사회가 변했어요. 결혼의 규율도 변하는 게 당연해요. 우리 공동체에 있어서 한 남자가 세 여자와 결혼하는 규율이 적합하다고 정해지면 거기에 따라야 해요. 염려 마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서 마음씨 착한 장님 처녀를 두 사람 골라 드릴 테니까요." 이와 같은 조젤라의 용기와 친절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건물 안에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였다. 누군가가 레코드를 튼 모양이다. 조젤라는 눈을 빛내면서 내 손을 잡았다. 달빛 속에서 우리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키복의 허리에 칼을 찬 신사 숙녀의 사교 댄스였다. 사라진 과거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우리는 춤을 계속 추었다.   코우커의 공동체   나는 꿈속에서 쓸쓸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종이 울리고 남자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봐, 그 개새끼가 달아났다. 조심해." 그리고 잠을 깼더니 정말로 종이 울리고 있었다. 짤랑짤랑 하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서 눈을 비볐다. 그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불이야!" 나는 침대에서 뛰어 일어나 복도로 뛰쳐나갔다. 어두운 복도에 연기 냄새가 자욱하고 도어를 여닫는 소리, 고함 소리, 뛰어가는 발소리 등이 뒤섞여서 어지러이 들리고 있었다. '조젤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여자들의 방이 있는 오른쪽을 향해 달렸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 높은 창문이 있다. 거기서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복도의 벽을 따라 장님 여자들이 더듬거리며 달아날 길을 찾고 있었다. "조젤라!" 나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계단에 이르렀다. 짤랑짤랑! 밑의 홀에서 종이 계속 울리고 있다. 연기도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연기 속을 빠져나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한 단만 더 내려가면 되는데 나는 무엇에 걸려서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어 뒤통수에 심한 쇼크를 받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맨 처음에는 두통을 느꼈다. 눈을 뜨니까 눈이 부셨다. 더러운 창문으로 강렬한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어느 새 나는 처음 보는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좌우의 손목이 함께 묶여 있는 것이었다. 제법 솜씨 있게 묶어 놓았다. 전깃줄을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아프지도 않게 여러 번 감아서 매듭을 이빨로 풀 수 없게 해 놓았다. "제기랄." 나는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은 방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봐요, 누구 없소?" 큰 소리를 질렀더니 방 밖에서 질질 끄는 발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남자의 머리가 나타났다. 작은 머리에 캠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있고 거무스름하고 그 밑에 꾀죄죄한 넥타이가 매달려있다. 눈은 크게 뜨고 있으나 나를 똑바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침대 끝을 향하고 있다. 청맹과니인 것이다. "정신이 들었소? 그냥 가만히 있어요. 차를 가져다 줄 테니까.“ 상냥하게 말하고 남자는 나갔다. 나는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남자는 곧 돌아왔다. 왼손에 찻잔을 들고 있다. "형씨, 어디에 있소?" "당신의 바로 앞이오. 침대 위요." 하고 나는 가르쳐 주었다. "알았어." 남자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침대 다리를 잡고 그것을 따라 내 곁으로 왔다. "자, 한 잔 하슈. 럼주가 들어 있는 커피요. 기운이 날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컵을 내밀었다. "고맙소." 나는 묶인 양손 사이에 컵을 끼워서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나는 말했다. "난 빌이오. 잘 부탁해요." "난 앨프라고 해." 말은 거칠었으나 나쁜 남자는 아닌 듯했다. 다소 마음을 놓고 나는 물었다. "어젯밤의 소동은 도대체 무슨 일이오?“ "당신 어제 낮에 대학 정문 앞에서 약간 실랑이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지?“ "음, 구경하고 있었소." "그 뒤에 월프레드 코우커가-그 때 얘기하던 남자인데-화가 난 모양이야. '의논하러 온 사람을 총으로 쫓아 버리다니 가만있을 수 없다. 어디 톡톡히 한번 인사를 해야지.' 하게 된 거야. 이미 우리는 대학 안에 있는 사람 셋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지. 그들의 협력으로 어젯밤의 소동을 일으킨 거야. 정말이지 코우커란 사람은 대단한 남자야." "그러니까 코우커가 꾸몄단 말이지? 화재 사건도." "화재? 크게 말하지 말아. 우린 계단 밑에다 다리가 걸리게 철사를 쳐 놓고 홀에서 종이와 나무토막을 태워서 헌 종을 짤랑거렸을 뿐이야. 그러면 눈이 보이는 놈들이 맨 먼저 튀어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 작전은 대성공이었어. 눈뜬 사람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다가 잇달아 철사에 발이 걸려서 털버덕 나동그라지는 꼴들이라니. 그래서 코우커와 또 한 명, 눈이 보이는 친구가 당신네들을 고이 주무시게 해 놓자 우리가 트럭으로 갖다 실은 거야." "그 코우커라는 남자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군. 그래, 당신 덫에 걸린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되나?" "스물 두세 명쯤이나 될까. 그 중의 대여섯 명은 장님이었고." 앨프는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어젯밤의 소동을 스포츠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내게 대해서 적의를 갖고 있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컵의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어 있나?“ "우리 장님들은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그 하나 하나에다 당신네들 눈뜬 사람을 한 사람씩 딸리자는 것이 코우커의 생각이지. 즉, 당신네들 눈뜬 사람을 장님의 눈 역할로 삼아 도둑질의 앞잡이를 하게 할 셈이지. 어디서 누가 와서 이 절망적인 상태를 구해 줄 때까지 당신네들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야." "흐음. 그래?“ 나는 내 기분이 알아 채이지 않게 말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옛날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한숨을 쉬면서 앨프는 자기의 신세 타령을 했다.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고생도 했으나 마음대로 편하게 살아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당신 직업은 뭐였소?“ "트리피드를 돌보는 일이었어. 시시한 일이야.“ 나는 트리피드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으나 앨프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곧 앨프는 물러갔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밑은 사방이 건물 벽으로 에워싸인 안뜰이었다. "정원으로 해서 달아날 길은 없어." 그 다음에 도어를 살펴보았으나 밖으로 잠겨 있었다. 몸으로 부딪치는 정도로는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도로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해 보았다. 나이프는 혁대 째 없어졌다. 방안을 둘러보아도 무기가 될 만한 가구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양손이 묶여 있어도 앨프 하나쯤은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앨프를 혼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녀석들은 장님이고 이 쪽은 눈이 보인다.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조만 간에 달아날 기회가 반드시 오겠지."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한 시간 후에 또 앨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먹을 것 한 접시와 차를 들고 왔다. 접시에는 스푼밖에 없었다. "나이프도 포크도 없어서........" "그까짓 식사야 손으로 집어먹어도 괜찮아요." 나는 묶인 손으로 식사를 하면서 함께 붙들린 동료의 일을 물어 보았다. "당신네들은 눈뜬 여자도 잡았소?" "음, 여자도 있었지." 그러나 앨프는 그 여자의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앨프가 물러가자 나는 침대에 누워서 한잠 잤다. 얕은 잠이었으나 자고 나니까 두통은 상당히 가라앉았다. 앨프가 식사와 차를 가지고 또다시 나타났을 때는 코우커와 함께였다. 상당히 피곤한 모습이어서 어제 대학 정문 앞에서 연설을 하던 때와 같은 정열은 보이지 않았다. 겨드랑이에 서류 뭉치를 끼고 있다. "당신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겠지?“ 코우커는 살피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앨프한테 들었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우커는 서류를 침대 위에 놓고 맨 위의 한 장을 폈다. 그것은 대런던 시의 지도였는데, 햄스티드의 일부와 스위스 커테이지 구역이 굵고 푸른 선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거기를 가리키면서 코우커는 말했다. "여기가 당신 담당이오. 당신 반은 이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거요. 당신의 임무는 여기서 식량을 찾아서 반의 사람들에게 주는 일이오. 식량뿐만이 아니오. 반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뭐든지 구해 주어야 해요. 알겠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시험삼아 나는 물어 보았다. "당신이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반의 사람은 배가 고플 것이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 그 중에는 난폭한 녀석도 있으니까. 게다가 다들 재미 삼아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지. 이 점을 잊지 말아요. 내일 아침, 당신과 당신 반의 사람을 트럭으로 담당 구역에 실어다 주겠소. 그 뒤에는 구원의 손이 올 때까지 반 사람들의 생활을 꾸려 가는 것이 당신의 일이오." "그러나 구원의 손이 오지 않는다면?“ "어디선가 구원의 손길이 반드시 올 거요. 아무튼.... 당신의 임무를 완수해 주시오." 코우커는 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말리고 나는 물었다. "당신은 조젤라 플레이턴을 여기에 데리고 왔소?“ "글쎄...... 난 당신네들의 이름을 하나도 몰라요." "금발에 키는 165센티미터쯤. 눈은 회색이 도는 푸른빛의 여자인데 ........" "그런 여자가 한 사람 있긴 한데. 미안하지만 장님이었소. 일이 바빠서 그만 실례하겠소." 그렇게 말하고 코우커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지도를 조사해 보았다. 담당 구역은 주택 지구라서 식량 같은 것을 찾기에는 별로 좋은 장소는 아닐 것 같았다. 어쨌든 탈출할 기회가 올 때까지는 코우커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앨프에게 부탁했다. "조젤라 플레이턴이라는 여자가 있거든 편지를 전해주지 않겠소?" "미안하지만 안 돼요. 규칙을 깰 수는 없으니까." 앨프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내가 끈덕지게 부탁했더니 나의 담당 지구를 조젤라에게 알려 주고 그리고 조젤라의 담당 지구를 조사해서 내게 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혼자가 되자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두 개의 공동체가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쪽의 방법이 옳은가? 내게는 마이클 비들리가 이끄는 공동체 쪽이 옳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월프레드 코우커가 이끄는 공동체는 어디선가 구원의 손길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그 때까지 가능한 한 많은 장님들을 살려 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혼란을 다스릴 만큼 강력한 구원이 어디서 온단 말인가? 나는, 구원의 손길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힘이 닿는 한의 장님만을 구하려고 하는 비들리들의 목적 쪽이 이치에 맞는다. 나도 조젤라도 비들리의 공동체에 가담하여 새로운 규율 밑에 사회를 재건하는 일에 착수할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코우커의 공동체에서 일해야만 되게 되었다. 조젤라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붉은 머리의 남자   다음 날 아침 일찍 앨프가 들어왔다. 눈길이 날카롭고 몸집이 큰 남자와 함께였다. 그 남자는 장님이 아니었다. 번쩍번쩍하게 간 고기 칼을 보란 듯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을 내요, 형씨." 하고 앨프가 말했다. 나는 양손을 내밀었다. "움직이지마.“ 앨프는 내 손목의 철사를 더듬어서 철사 끊는 가위로 싹둑싹둑 잘랐다. 그리고 수갑을 꺼냈다. 순간 나는 망설였다. 달아나려면 지금이 기회지만...... 앨프를 밀어 쓰러뜨린다 해도 문 곁에 우람한 남자가 서있다. 그 녀석은 칼을 앞으로 꼬나 잡고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체념하고 순순히 양손을 내밀었다. 그 주위를 더듬거려서 앨프는 수갑을 채웠다. 열쇠가 없이는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앨프는 거한과 함께 나갔다가 즉시 또 내 식사를 들고 나타났다. 2시간 후에 거한이 와서 문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따라와.“ 나는 등에 칼이 들이 대인 채 복도를 걷고 계단을 내려가서 홀을 가로질러 한길로 나왔다. 거기에는 장님들을 가득 태운 트럭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 뒤에는 코우커가 장님 둘과 함께 서서 나를 손짓해 불렀다. 내가 곁에 가자 코우커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양손사이에 사슬을 꿰었다. 사슬의 양쪽 끝에 가죽끈이 달려 있었다. 그 한쪽이 장님의 왼쪽 손목에 매어지고 또 한쪽이 다른 장님의 오른쪽 손목에 매어졌다. 이리하여 나는 튼튼하게 생긴 두 장님 남자 사이에 끼이는 꼴이 되었다.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이 올바르게 임무를 다하면 이 사람들도 당신을 올바르게 대할 거요." 하고 코우커는 내게 충고했다. 나는 두 장님과 함께 트럭의 짐받이로 기어올라갔다. 트럭은 텅 빈 길을 한동안 달려 스위스 커테이지 가까이 에서 섰다. 우리가 내리자 트럭은 방향을 바꾸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우릴 놔두고 달아나는 거야?“ "개새끼 들!“ 장님들은 멀어져 가는 트럭에다 욕을 퍼부었다. 한 여자는 히스테리를 일으켜 머리를 벽에다 퍽퍽 처박았다. 나는 장님들 쪽을 향해 말했다. "당신네들은 우선 뭘 원하오?“ "숙사다. 잘 곳을 정해야지." 하고 한 사람이 대답했다. 나로서도 내가 달아나는 일을 생각하기 전에 장님들의 숙사 쯤은 찾아 주고 싶었다. 우선 나는 장님들의 수를 세어 보았다. 총원이 52명. 그 가운데 14명이 여자였다. 이만한 사람을 수용하고 물자를 저장하여 생활하게 하려면 호텔 같은 곳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계단을 별로 오르내리지 않는 곳을 찾아야 한다. 곧 나는 장님들에게 안성맞춤인 장소를 발견했다. 그것은 네 채의 이층집을 이은 하숙집이었다.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휴게실에 6명의 장님들이 있었다. 노인 남자, 중년 남자, 중년 여자, 거기다 소녀가 세 명이다. 그리고 중년 여자가 하숙집의 안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52명의 장님들을 하숙시키고 싶다고 얘기했다. "거절하겠어요.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남의 시중을 들겠어요! 다른 곳으로 가 봐요!“ 안주인은 쇳소리를 지르며 떠들었다. 아마도 하숙집 어디에 저장 물자가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대량의 물자를 긁어모아 올 것이라는 얘기를 해 주었더니 안주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우리와 함께 사는 편이 득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이 반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하루 이틀 버티어 보자. 그리고 도망가서 조젤라를 만나면 된다.' 그 다음 이틀 동안, 나는 장님들을 이끌고 가까운 가게를 하나씩 뒤졌다. 거의가 이미 뒤져가고 난 뒤였다. 쇼 윈도는 부서지고 반쯤 열린 깡통과 찢어진 포장이 바닥에 온통 내던져져 있다. 그러나 가게 안쪽이나 뒤에는 손대지 않은 상자와 꾸러미가 여러 개 있었다. 장님들이 무거운 상자를 가게나 창고에서 들어내어 손수레에 싣고 하숙으로 돌아와서 간수하는 것은 큰일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일이 지시를 하지 않으면 무엇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늘 5, 6명의 작업반을 써서 물자를 긁어모았다. 그 동안 하숙에 남아 있는 장님들은 거의 아무 일도 못 했다. 눈이 보이는 사람이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면 작업이 두 배 세 배나 진척되었을 것이다. 낮 동안의 일은 숨쉴 새도 없을 만큼 바빴다. 밤에는 낮의 피로로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고 만다. 낮이나 밤이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은 전혀 없었다. 물론 도망가는 일을 잊은 것은 아니다. 아침에 잠이 깨면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내일까지는 장님들이 자립할 준비를 갖추어 줄 수 있겠지. 그러고 나서 나는 여기서 도망쳐서 조젤라를 찾아야지.'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나는 달아나기가 힘들어졌다. 일부의 장님들은 작업의 순서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내가 없으면 깡통 하나도 제대로 못 여는 것이다. 내 손이 점점 필요 없게 되기는커녕, 더욱더 필요해지는 것 같았다. 장님들은 모두가 다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의 결심은 허물어졌다. 동시에 이런 일을 계속하다가 마지막에는 어찌 될 것인가 하는 불안으로 겁이 났다. 닷새 째 되는 날 아침, 내가 작업반의 장님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하는데 2층에서 여자가 불렀다. "빌, 좀 와 주셔요! 병자가 두 사람 있어요, 아주 많이 아파요!“ 그러나 내게 붙어 있는 두 장님은 사슬을 당겨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병자 같은 건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네들이 병이 나도 모른 체해도 된단 말이지!" 두 장님도 나를 너무 화나게 해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지못해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병자는 젊은 남자와 중년의 남자였다. 둘 다 심한 고열이 있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호소했다. 무슨 병일까? 나는 의학 지식은 없으나 전염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환자를 빈방으로 옮기고 나를 부른 여자에게 잘 간호해 주라고 일렀다. 나쁜 일은 잇달아 일어나는 법이다. 이 날은 밖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다. 정오 때쯤, 나는 스무 명 가량의 장님을 이끌고 하숙에서 1킬로미터쯤 북쪽에 있는 상점으로 갔다. 그런데 상점가에 들어갔을 때 나는 급히 내 패거리를 멈춰 서게 했다. 식품 잡화점 앞에서 다른 남자들이 짐 상자를 트럭에 싣고 있지 않은가. "말썽이 생기면 좋지 않다. 다른 곳을 찾자." 나는 내 패거리를 돌아서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가게 안에서 붉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나왔다. 분명히 눈이 보이는 남자였다. 그 녀석은 대뜸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 다음에 바로 총을 쏘는 순간 총알이 내 곁의 벽에 소리를 내면서 박혔다. 내 패거리와 그 쪽 패거리의 장님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서로 보이지 않는 눈을 마주 보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또 발포했다. 나를 노린 모양인데 그 순간 총알은 왼쪽으로 빗나가서 나와 묶인 한 장님에게 맞았다.   "개새끼!" 그 장님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쓰러졌다. 위협이 아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나를 쏴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나는 쓰러진 장님과 또 한 명의 장님을 질질 끌고 으슥한 곳으로 몸을 피했다. "수갑 열쇠를 이리 내라. 이런 걸 차고 있다간 아무 일도 못 한다.“ "날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어." 살아 남은 장님은 보이지 않는 눈을 내게 향했다. 나의 참을성도 한도에 왔다. "바보 같은 자식!“ 나는 양손을 쳐들어 장님의 머리를 후려쳤다. 상대방은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뒤의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었다. 수갑 열쇠는 장님의 호주머니에 있었다. 나는 수갑을 풀어 사슬을 끄르고는 다른 장님들에게 말했다. "다들 돌아서서 똑바로 걸어가라. 모여서 걷는 거야. 흩어지면 큰일난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우리 패거리를 뒤쫓아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마주 쏘지 않았으므로 이 쪽에는 무기가 없고 또 장님 걸음으로는 어차피 빨리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혼자 남자, 주택의 정원에 숨어서 담 사이로 붉은 머리의 남자를 감시했다. 상자를 다 싣고 나자 붉은 머리의 남자는 혼자서 슬슬 우리 패거리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으슥한 곳에 쓰러져 있는 두 장님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사슬로 묶여 있으니까 어느 한 쪽이 우리 패의 리이더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권총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더욱 천천히 다른 장님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나는 금방 알아챘다. '저놈은 장님들의 뒤를 미행해서 우리 본부를 알아내어 이 쪽의 저장 물자를 빼앗을 작정이구나.' 다행히 장님들은 자기네 하숙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나는 적당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가지고 한길로 나와서 보도 가장자리를 톡톡 두들기면서 걷기 시작했다. 장님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내게서 50미터 가량 앞에 있다. 또 그 50미터쯤 앞에 우리 패의 장님들이 있었다. 역시 장님들은 하숙집으로 통하는 모퉁이를 알지 못하고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처져서 길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배를 움켜잡더니 그냥 쓰러져서 괴로운 듯이 몸부림을 쳤다. 아마도 신음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장님들은 멈춰 서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쓰러져 있는 남자 곁에 가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호주머니의 권총을 꺼내어 그 남자의 머리를 쏘았다. 날카로운 총 소리가 길에 울려 퍼졌다. 앞쪽의 장님들은 멈춰 섰다. 나도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붉은 머리의 남자는 우리 패에 흥미를 잃은 듯 했다. 홱 돌아서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지팡이로 길을 두들기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서로 지나칠 때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내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나도 장님인 체하면서 상대방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아직 젊은 남자였다. 차갑고 냉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와의 거리가 웬만큼 멀어지고 난 뒤에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우리 패거리에 따라붙었다. 장님들은 총 소리에 놀라 우뚝 선 채 앞으로 갈 것인지 아닌지 서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나는 이야기했다."잘 들어요. 나는 수갑을 풀었어요. 이제부터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당신네들을 돌볼 작정이오." 곧 나는 트럭을 한 대 찾아내었다. 거기다가 장님들을 태우고 무사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교외의 적   하숙집에는 좋지 못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또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심한 복통을 일으켜 다른 동으로 옮겨졌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병자가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의사가 없으므로 병자가 생겨도 그 병명이나 치료 방법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새로운 걱정거리가 겹쳤다. 그것은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끄는 공동체에 관한 것이었다. 이 공동체도 코우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눈뜬 사람이 많은 장님을 돌보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코우커는 전투적인 남자이긴 하나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자기한테 방해가 되면 눈뜬 사람이든 장님이든 짐승처럼 쏴 죽이는 자다. 만약 내가 없는 사이에 붉은 머리의 남자의 패거리가 하숙집을 습격하면 어찌 되겠는가. 아마도 우왕좌왕하는 장님들을 닥치는 대로 차 죽이고 저장 물자를 빼앗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나는 가능한 한의 방위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남자와 마주친 장소를 피하여 다른 방향으로 출동하기로 했다. 내 담당 구역은 교외 주택지인데 햄스티드 히드 공원의 버스 종점 근처에는 작은 가게와 창고가 많았다. 이 지구는 아직 거의 약탈당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까지 행락객으로 붐비던 곳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길 위에는 시체가 몇 구 뒹굴고 있었다. 어쩌면 상점이나 주택 안에서 죽어 있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벼락 장님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일단 밖으로 나왔으나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지고 또는 병이 나서 도로 집안으로 들어 간 듯하다. 나는 트럭을 식료품점 앞에 세우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지팡이로 두들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다들 내려." 나는 장님들을 트럭에서 내리게 하고 가게의 문을 비집어 열었다. 가게 안에는 버터, 치즈, 베이컨, 설탕 등이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장님들에게 일을 시작하게 했다. 이제는 장님들도 일의 요령을 익혀서 순서만 가르쳐주면 자기네들끼리 물자를 트럭에 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뒤의 저장실과 지하실을 조사했다. 지하실에는 큰 식량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것을 조사하고 있는데 위에서 고함 소리가 났다. "살려 줘!" 이어 머리 위의 마룻바닥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났다. 한 남자가 널빤지 뚜껑의 구멍으로 거꾸로 떨어졌다. "붉은 머리의 패거리가 습격해 왔구나.... 나는 쓰러져 있는 장님을 타넘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널빤지 뚜껑의 구멍 쪽으로 조금씩 한 발 한 발 뒷걸음질쳐 오는 반장화를 신은 패거리였다. 나는 잽싸게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그 다음 순간 장님들이 겹겹으로 겹쳐서 널빤지 구멍 속으로 빠졌다. 쨍그랑! 밖의 유리창이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그와 함께 세 남자가 밖에서부터 가게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녹색의 긴 채찍이 쓰러지는 한 남자를 철썩 때렸다. "악!" 남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땅에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머지 두 사람이 유리 조각이 흩어진 마룻바닥 위를 기어서 안쪽으로 왔다. 그래서 동료를 밀었으므로 또 두 남자가 구멍 안으로 빠졌다. "그래, 여긴 교외였어. 트리피드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나는 상자 위에 서서 장님들의 머리 너머로 밖을 보았다. 트리피드가 셋 있었다. 하나는 차도에, 둘은 보도에 있었다. 그 곁에 네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거리의 가게가 어째서 약탈을 면하고 남아 있었는가? 어째서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는가? 우리가 걸을 때 길 위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라면 트리피드의 독채찍으로 맞은 자국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다들 침착해요, 뒷문으로 달아나요........" 나는 상자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소리쳤다. 장님들은 더듬거리며 뒷문으로 향했다. 널빤지 뚜껑의 구멍에서 두 남자가 기어 나왔다. 이 때 트리피드 하나가 깨진 쇼 윈도 너머로 독채찍을 뻗쳤다. "악!“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남은 장님들은 공포에 질려 밀치락 달치락하면서 뒷문에 이르렀다. "깩!" 나는 뒷문간에 서서 밖의 상황을 살폈다. 좁은 골목 저쪽에 관목 정원 숲이 있다. 거기에 트리피드의 머리가 둘 보였다. "내 뒤를 따라와요!" 나는 벽돌담을 따라 장님들을 옆의 건물로 이끌었다. 그 곳은 택시 영업소였다. 뜰에 대형차 3대가 늘어서 있었다. "서둘러!" 장님들을 차에다 밀어 넣고나서 나는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트리피드는 소리에 민감하다.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정문 쪽으로 트리피드 둘이 흐느적흐느적 다가왔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정문을 나설 때 녹색의 독채찍이 차창의 유리를 철썩 때렸다. "제기랄." 나는 차를 급선회시켜 트리피드에 부딪쳐서 하나를 치어 쓰러뜨리고 길로 나왔다. 무사히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한편 집을 비운 사이에 새로운 병자가 넷 더 생겨났다. 어젯밤에 병이 난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죽고 또 한 명은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작은 방을 점령했다. 촛불을 켜고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 때 또 병자가 두 명 생겼다는 전갈이 왔다. "장티푸스인가? 잠복기간으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 병명을 확실히 알아보았자 나로서는 어쩔 도리도 없는 것이다. 붉은 머리의 남자도 병을 두려워한 것 같았다. 우리 패 가운데 한 사람이 길 위에서 쓰러지자 그를 쏴 죽이고 남은 사람들의 추적을 그만두었다. 내 활동이 이 장님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일까?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끄는 갱들과 트리피드의 습격을 받으면서 나는 내게 맡겨진 장님들의 모임을 열심히 지탱해 왔다. 수갑과 사슬에서 해방되었는데도 당장에 달아나지 않고 장님들이 자립할 전망이 보일 때까지 만이라도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병에 대해서는 속수 무책이다. 어차피 장님들은 모조리 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즉, 나의 활약은 장님들의 생명을 쥐꼬리만큼 연장시킨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 아닌가? 나는 조젤라의 일을 생각했다. 조젤라에게 맡겨진 반에서도 아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겠지. 역시 마이클 비들리들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비들리의 공동체는 자기들의 힘으로 돌볼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장님만을 도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살아 남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헛된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은 도리어 잔인한 짓이다. 내게 남겨진 귀중한 눈을 이대로 그냥 희망 없는 일에 사용해도 좋단 말인가? "내일이 되면 조젤라를 찾아서 둘이 의논해 보자.“ 조젤라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려보면서 나는 침대에 누웠다.   시체 냄새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까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시체가 썩는 냄새다.“ 나는 금방 알았다. 시내의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는 무수한 시체가 썩어서 문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것이었다. "드디어 런던을 탈출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 혼자서 시골로 달아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았다. 지금 이 하숙집의 장님들은 내게만 의지하고 있다. "건강한 사람만 함께 데리고 갈까?" 트럭으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모아 놓은 물자도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퍼뜩 깨달았다. 건물 안이 이상하게 조용하다. 귀를 기울이니까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 복도에서 또 한 번 귀를 기울였다. 집안에서는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문득 나는 유성우가 있었던 이튿날 아침의 경우가 생각나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봐요, 누구 없소?“ 나는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몇 개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제일 가까운 방문을 열었다. 거기에 남자 한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한눈에 병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좀 어떻소 ? 내가 물어도 제대로 입도 열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불렀다. "빌, 빌........" 나는 그 방의 문을 열었다. 젊은 처녀가 침대에 있었다. 첫 번째 병자가 생겼을 때 나를 부르던 장님 처녀였다. 이번에는 그녀가 병에 걸려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여자는 말했다. "빌이에요?“ "그렇소." "내 곁에 가까이 들어오지 말아요. 병이 옮으면 안돼요.“ "다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지?" "어젯밤에 우리는 잇달아 발병했어요. 그래서 당신을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달아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밖으로 나갔어요." "난 곤히 자고 있었어요." "당신이 남아 있어 줘서...... 정말로 고마와요." "내가 뭐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는 물었다. 이 때 발작이 일어났다.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고 양손으로 자기의 몸을 껴안고 몸부림을 쳤다. 발작이 끝나자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빌, 부탁이 있어요...... 이런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것을 뭐든 찾아다 주셔요." "알았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정도뿐이지." 나는 밖으로 나와 근처 약국에서 독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걸 먹으면 편해질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물을 따른 컵을 한 손에 쥐어 주고 또 다른 한쪽 손에 독약을 얹어 주었다. "고마와요, 빌. 당신은 우리의 치닥꺼리를 참 잘 해 주었어요. 결국 헛수고였지만...... 정말 잘 해 주었어요. 안녕 빌...... 이제 가셔요." 여자의 보이지 않는 눈이 크게 뜨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나는 이제부터 자살을 하려고 하는 여자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이 여자의 일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이름도 묻지 않고 말았다. 나는 다이물러를 운전하여 세인트 제임스 스트리트로 향했다. 거기에는 큰 총포점이 몇 집이나 있었다. 총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붉은 머리의 남자 같은 인간이 있는 이상 무기를 가지지 않고는 안심하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총포점은 약탈당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 대형 수렵용 칼을 허리에 차고 호주머니에 권총을 넣었다. 그리고 엽총과 탄약 상자를 차의 조수석에 들여다 놓았다. 엽총은 라이플보다도 쓸모가 있다. 발사음이 굉장해서 장님 갱들을 위협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트리피드의 독채찍을 깨끗이 쏘아 떨어뜨릴 수로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까지 왔다. 길 위에는 타고 가다가버린 자동차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주위에 세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은 화이트 홀의 보도를 지팡이로 톡톡 더듬으면서 걷고 있었다. 세 번째 사람은 의사당 광장에 있었다. 링컨 동상 앞에 앉아 커다란 베이컨을 꽉 잡고 칼로 작게 잘라 내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의사당 건물이 높게 솟아 있고 큰 시계의 바늘은 6시 3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이미 그것은 거대한 돌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조국의 위기를 구하자고 호소하는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장엄한 건물도 지금은 과거의 역사를 허무하게 말해 줄뿐이다. 나는 외톨이의 공포를 느꼈다. 인간은 군거성 동물이라서 혼자가 되면 항상 무서운 위험에 몸을 노출시키고 있는 듯한 불안을 느끼는 것이리라. 조젤라를 만나고 싶다. 아마 조젤라도 하숙집이나 호텔을 장님들의 숙소로 택했을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 역에 자동차를 갖다 댔다. 이 근방에는 호텔이 많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뒤져보았으나 어느 패거리도 점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누구한테 물어 보자." 나는 인적을 찾아서 여기저기로 헤매고 다녔다. 버킹검 궁전 가의 모퉁이에 노파가 웅크리고 있었다. 부러진 손톱 끝으로 통조림을 열려고 애쓰면서 욕을 퍼붓다가 울다가 하고 있었다. 설사 눈이 보인다고 해도 손톱으로 통조림을 열 수는 없다. 나는 가까운 식품점에 들어가 강낭콩 통조림 대여섯 개와 깡통 따개를 찾아 가지고 노파한테로 돌아왔다. 노파는 아직 깡통 겉을 긁어 대고 있었다. "그건 버리는 게 좋아요, 커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노파의 손에 깡통 따개를 쥐어 주고 강낭콩 통조림을 한 개 주었다. "그런데 할머니, 이 근방에서 장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여자를 모릅니까? 그 여자는 눈이 보이는 처녀인데요." "알고 있지.“ 노파는 더듬거려서 깡통을 따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내가 다급하게 묻자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어딜까. 난 그 아가씨의 패에 얼마 동안 있었는데 처지고 말았어." "그 처녀의 패는 어디에 살고 있었소?" "호텔이지." "어느 호텔?“ "모르겠군. 장님한테야 장소의 이름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어야지." "그 호텔에 대해 뭐 기억나는 것은 없어요 ? 기억해 내주면 통조림을 한 개 더 주겠어요." "글쎄." 노파는 뚜껑이 열린 통조림을 들고 알맹이 냄새를 맡았다. "아래층에 큰 홀이 있는 것 같았어. 양탄자는 푹신했고...... 침대와 시트가 고급스러웠으니까...... 아마 고급 호텔이겠지." "그밖에 생각나는 게 없소?“ "그래...... 밖에 작은 계단이 두 개 있고, 그 하나를 올라가니까 회전 도어가 있어서 항상 거기로 드나들었지." 노파는 허름한 백 속을 뒤져서 더러운 스푼을 꺼내더니 강낭콩을 퍼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음식 같은 음식을 먹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노파와 헤어져서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회전 도어의 호텔은 많았다. 나는 끈덕지게 찾아다녀서 노파의 말과 딱 맞는 듯한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누가 있소?“ 나는 홀로 들어가서 불러 보았다. 안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저편 어두컴컴한 구석에 한 남자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내가 말을 걸자 남자는 말했다. "물 좀, 제발 물 좀 먹여 주시오." "알았소.“ 나는 식당으로 가서 큰 주전자와 컵을 가져다 남자의 손이 닿는 곳에 놓았다. "고마와요. 그 뒤는 내 스스로 하겠소. 당신은 되도록 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편이 좋아요." 남자는 더듬어서 컵을 집고 주전자 속의 물을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아, 맛있다...... 물이 이처럼 맛있는 것인 줄은 몰랐군. 헌데 당신은 뭘 찾고 있는 거요? 이 근방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어서 위험해요.“ "난 조젤라라는 여자를 찾고 있소. 눈이 보이는 여잔데 여기에 없소?“ "있었지.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소." "때가 늦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자 남자가 급히 말했다. "안심해요. 여기서 나갔을 뿐이니까."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글쎄, 그건 모르겠는걸. 아무튼 당신도 나가는 편이 나아요. 이런 곳에 있다간 나처럼 병이 들어서 못 움직이게 될 테니까."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또 뭐 원하는 것은 없소?“ "아니, 됐어요. 난 이제 곧 아무 것도 필요 없는 몸이 될 테니까.“ 남자는 잠시 쉬었다가 덧붙였다. "그 처녀를 찾거든 안부 전해 주시오. 좋은 아가씨였지. 그럼...... 형씨, 잘 가시오."   런던 탈출   조젤라의 패도 우리 패와 같은 운명을 더듬은 것이다. 나는 조젤라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그러나 조젤라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내 소재를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가 볼 곳은 그 대학의 건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이물러에 타고 대학으로 향했다. 길에는 거의 인적이 없으므로 운전하기는 쉬웠다. 곧 대학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아직 신호기가 걸려서 황혼이 깊어 오는 하늘에 펄럭이고 있었다. 철문은 크게 열려 있고 앞뜰에 14, 5대의 트럭이 늘어서 있다. 그 곁에 다이물러를 세우고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요, 누구 없소?“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는 메아리치면서 위층으로 사라져 갔다. 다른 방에도 들어가서 울렸다. 그러나 어디나 다 쥐죽은듯이 고요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지. 코우커의 습격을 피한 사람들도 이미 며칠 전에 런던에서 빠져 나갔을 테니까." 나는 돌아서 나오려고 했다. 그 때 바깥문의 안쪽에 백묵으로 크게 씌어진 글씨가 눈에 띄었다.   월트셔 디바이디스 틴셤     이것이 아마도 비들리들이 옮겨간 곳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동료가 뒤따라 올 수 있게 새 본부의 주소를 써 놓은 것이다. 나는 앞뜰에 늘어서 있는 트럭을 조사해 보았다. 그 중의 한 대는 내가 마지막으로 몰고 온 것으로 식료품, 잡화, 게다가 트리피드 퇴치 장비가 실린 채로 있었다. "이것을 그대로 쓰도록 하자." 나는 다이물러에서 엽총 탄약 상자를 내려서 트럭의 운전대로 옮겼다. 그러나 앞으로 한 시간이면 어두워진다. 특별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트럭으로 야간 드라이브를 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틴셤장까지는 160킬로미터나 된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편이 현명하겠다. 나는 예전에 내가 자던 방을 들여다보았다. 가짜 화재에 놀라서 뛰쳐나갔을 때 그대로이다.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까지 내가 놓아두었던 그 자리에 있었다. 자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나는 엽총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러셀 스퀘어의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살펴보았다. 트리피드가 하나 보였다. 관목 숲에서 녹색의 얼굴이 우뚝 튀어나와 있다. 나는 엽총을 꼬나 잡고 겨냥을 했다. 타당! 고요한 정원에 무서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트리피드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갔다. 그밖에는 이제 녹색의 괴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굵은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해가 기울어 정원의 절반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되겠지. 어둠을 두려워하던 원시인의 기분을 나도 알 것 같았다.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는 멈칫거림이 없었다. 상당한 빠르기로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총을 겨누었다. 어슴푸레한 빛 속을 한 남자가 똑바로 다가오고 있다. "쏘지 말아요." 그 남자는 양팔을 벌리고 말했다. 수 미터 앞에까지 다가왔을 때야 겨우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코우커 아니오!" "아, 당신인가." 코우커도 내가 누군지 안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총을 겨눈 채로 말했다. "당신은 또 다른 패거리를 이번에도 내게 돌보게 하려는 거요?“ "아니오. 총 소리가 하도 요란하기에 와 보았더니 우연히 당신이었던 거요. 그 일은 이제 손들었어. 나는 런던에서 탈출하려던 참이오." "나도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총을 내렸다. "당신 패는 어찌 되었소?" 하고 코우커는 물었다. "병으로 전멸이오.“ 나는 자세하게 얘기했다. 코우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쪽도 마찬가지였소. 다른 패도 아마 마찬가지일거요. 하는 수 없지 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으니까." "잘못된 방법으로 말이지." "그렇소. 이제야 나도 당신네 동료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하오. 그러나 일 주일 전에는 옳게 여겨지지 않았어." "하는 수 없지. 다시 한 번 새 출발합시다.“ "찬성이오! 나는 착각하고 있었어. 장님들을 돌보고 있으면 반드시 구원의 손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마도 유럽이나 아시아도...... 온 세계가 여기와 마찬가지로 당한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미국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해 주었을 텐데. 늘 그렇듯이 말이오........" 코우커는 한숨을 쉬었다. 이어 우리는 병에 대해 얘기했다. 코우커도 병이 전염병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내일 아침 으로 간다고 털어놓았다.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하고 코우커가 말했다. "괜찮고 말고. 오늘밤은 일찌감치 잡시다.“ 나는 코우커를 방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나는 푹 잤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코우커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트럭에서 식료품 종이 봉지와 통조림을 갖고 돌아왔다. 그제야 코우커도 일어나서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의논했다. 한 대의 트럭에 함께 타기보다 각각 짐을 실은 트럭을 한 대씩 운전해 가는 편이 틴셤장의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운전대의 창문을 닫아 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런던 교외, 그것도 서쪽 편에는 트리피드의 재배장이 많이 있으니까." 나는 트리피드의 위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곧 두 대의 트럭이 전차와 같은 굉음을 내면서 출발했다. 나의 3톤 짜리 트럭이 앞에 서서 서쪽으로 향했다. 운전은 힘이 들었다. 2, 30미터마다 버려진 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때로는 2, 3대의 차가 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트럭에서 내려 방해가 되는 차를 길옆으로 밀어내야만 했다. 부서진 차는 적었다. 아마도 운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별안간 눈이 안 보이게 된 모양이지만 차를 안전하게 세울 정도의 여유는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실명 소동이 새벽에 일어났으므로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 일이 만약에 대낮에 일어났더라면 주요 도로는 자동차의 행렬로 막혀서 트럭으로 지나가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간신히 런던을 벗어난 곳에서 우리는 트럭을 세웠다. 사방은 고요했다. 우리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문득 코우커가 흥얼거렸다.   우리의 앞에 가로놓인 것은 끝없는 사막뿐......   그것은 17세기의 시인 마벨의 시의 한 구절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의 카운터에 앉아 식사했다. 비스킷에 마멀레이드를 바르면서 나는 코우커에게 말했다. "당신한테는 정말 놀라겠는걸. 항만 노동자처럼 거친 말씨로 지껄이고 있더니, 별안간 대학 출신의 인텔리처럼 마벨의 시를 읊기도 하니......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나도 잘 모르겠어.“ 코우커는 씩 웃었다. '"아무튼 온갖 것이 잡다하게 섞여서 된 인간이지. 우리 집은 가난했어. 어머니는 내가 있기 때문에 생활이 한층 더 곤란하다면서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 때문에 나는 어릴 때부터 사물을 비뚤어지게 보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소. 중학교를 나오자 나는 곧잘 집회에 나가게 되었소. 무엇에 항의하는 집회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어. 그래서 나는 정치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지. 그놈들은 어려운 말을 써서 논쟁을 하더군. 이따금 나도 끼여들어 엉뚱한 소리를 해서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소. 무식한 나는 인텔리의 말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던 것이지. 나는 야학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해서 놈들의 말하는 방법을 연습했소. 그러다가 깨달았지. 인텔리의 말투는 인텔리 사이에서만 쓰면 된다, 노동자에게 얘기할 때는 노동자의 말을 써서 얘기해야 된다고 말이오. 당신은 인텔리니까 내가 마벨의 시를 인용하는 걸 보고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감탄했지. 그러나 항만 노동자를 보고 마벨의 시를 인용해 보았자 칭찬 받을 수는 없어요. 연설이란 것은 상대방에게 적합한, 또 그 자리에 적합한 말을 써야 해요. 때로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상대방을 놀라게 하여 그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서 나는 몇 가지 말투를 쓸 수 있게 되었소. 즉 프로 연설장이가 된 거지. 월프레드 코우커, 집회 연설 청부업, 어떤 연설이라도 맡습니다. 이 장사는 제법 재미가 있었지.“ "어떤 연제로도 지껄일 수 있소?“ "물론이지. 인쇄장이가 어떤 말이라도 활자로 공급하듯이 나는 어떤 말이라도 입으로 공급하오. 그것을 무엇이나 다 옳다고 믿을 필요는 없어." 코우커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장님이 안 되었소? 그 유성의 밤에 병원에 있었던 것은 아닐 테지?" "나는 그 날 어느 스트라이크 집회에서 경찰의 태도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소. 저녁 6시 반경, 경찰대가 와서 집회를 해산시키려고 했지. 나는 집회장의 지하실에 들어가서 대팻밥더미 속에 숨었소. 경찰관들은 좀처럼 철수하지 않고 대팻밥 속은 아주 편안했으므로 그만 나는 잠이 들고 만 것이오. 이튿날 잠이 깨서 밖으로 기어 나왔더니 세상이 변해있더군. 이렇게 되면 내 장사도 끝장이지. 연설을 부탁하러 올 사람도 없을 테니까." 코우커는 한숨을 쉬었다.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또 트럭에 올라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푸른 하늘 아래, 로틴의 녹색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도시는 죽었으나 전원에는 아직 생명이 넘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행거포드 읍내에서 다시 식량과 연료를 보급했다. 그리고 또 달려서 디바이디스 바로 앞에서 다시 한번 차를 세우고 지도를 살펴보았다. 가도에서 오른쪽의 옆길로 꺾여 있는 곳이 틴셤 마을이었다.   여자 리더   틴셤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저택이었다. 우리는 큰 철문이 앞을 가로막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문간에 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엽총을 어색하게 겨누고 있다. 총 다루는 법을 잘 모르는 듯했다. "여기가 틴셤장인가요?“ 내가 묻자 여자는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네들은 어디서 왔죠? 몇 명이나 돼요?“ 나는 단 둘이서 왔다는 것과 트럭에 실려 있는 짐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여자는 우리를 살피듯이 보았다. 그리고 트럭의 뒤로 돌아가서 짐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내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듯, 여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길로 가세요." 우리는 트럭에 올라타고 느릅나무 가로수 길을 전진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부지의 여기저기에 정원이 여러 개 있었다. 곧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건축 양식의 건물이 역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가로수 길에 이끌려서 우리는 가장 큰 건물의 안뜰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여러 대의 자동차가 멈춰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건물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긴 복도를 걸었다. 막다른 곳은 부엌과 식당으로, 음식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넓은 식당에는 긴 테이블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고 그 벤치에 5,60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한눈에 장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옆의 테이블에서 눈이 보이는 세 젊은 여자가 부지런히 닭고기를 썰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걸어갔다. "우린 지금 막 이 곳에 도착했는데요........ 뭐 도울 일은 없어요?" "글쎄요, 한 사람은 야채를 나누고 또 한 사람은 접시를 돌려주세요." 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서 부엌과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조젤라는 없었다. 그러나 몇 여자는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들리의 공동체에 있던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패거리는 비들리의 공동체보다도 남자의 비율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도회인 같은 사람이 적고 대부분은 농민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가 장님인데 그 가운데 중년의 목사가 한 사람 섞여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 예닐곱 명 있었다. 그 대부분이 시골 사람이고 도회인 같은 여자는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접시를 나르고 급사 일이 끝나자 나와 코우커는 자기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찬 통조림만 먹고 지냈으므로 제대로 만들어진 식사의 고마움이 절실히 느껴졌다. 우리는 게걸스럽게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장님 목사가 일어섰다. "여러분, 오늘 하루가 무사히 끝나려 함에 즈음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재난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시다. 주님께서 어둠 속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 시련을 이기고 보다 좋은 세계를 재건할 수 있도록 다 함께 기도 드립시다." 목사는 머리를 숙이고 기도의 말을 외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의 주여........“ "아멘.“ 그 뒤에 찬송가가 끝나자 장님들은 각각의 패로 갈라져 눈이 보이는 네 명의 여자들에게 인도되어 식당에서 나갔다. 코우커가 내게 물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여자는 없소?“ "예, 안 보여요." 내가 고개를 젓자 코우커가 말했다. "이상하군. 내가 당신과 함께 잡았던 사람들도 없어. 아까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던 여자를 빼고는 말야." "그래서 그 여자는 아까 무서운 눈으로 당신을 노려본 것 같군.“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왔다. "뒷설거지를 도와주지 않겠어요 ? 곧 미스 듀런트가 돌아올 거예요.“ "미스 듀런트?“ "예, 이 곳의 리더는 플로렌스 듀런트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당신들은 듀런트와 의논을 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 주위가 어두워진 무렵 듀런트가 돌아왔다. 우리는 여자 리더의 방으로 가 보았다. 책상 위에 촛불이 두 자루 켜져 있었다. 듀런트는 얼굴빛이 거무스름하고 입술이 얄팍한 여성이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생각났다. 전날 대학의 당에서 볼레스 박사가 남자와 여자의 문제에 관해서 연설했을 때 일어서서 질문하던 여자였다. 듀런트는 싸늘한 표정으로 코우커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 대학의 습격을 지휘한 분이라지요?“ "예, 그렇습니다." 하고 코우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공동체에서는 난폭한 수단은 일체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코우커는 약간 미소지었다. 그리고 품위 있는 중류 계급의 말씨로 말했다. "그 때 어느 편이 난폭했는지 .... 그것은 견해의 문제지요. 당신이 판정할 수 있습니까?“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코우커와 같은 남자를 만난 일이 없어서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고쳐 앉았다. "당신도 갱과 같은 공동체에 참여 했었나요?“ 나는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내 편에서 질문을 했다. "마이클 비들리와 대령과 그 밖의 동지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 사람들도 일단 여기에 왔지만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만들고 있는 공동체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에 입각한 깨끗하고 올바른 사회의 재건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상야릇한 이론을 들고 나와서 하느님의 율법을 배반하고 부도덕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여기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에 따른 공동체인 것입니다.“ 듀런트는 도전하듯이 우리를 노려보았다. "예. 그래서 당신네들은 비들리의 동지들과 헤어진 거로군요. 비들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사람들은 여기서 나갔습니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율법을 배반하는 일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 듀런트는 싸늘하게 대답하고 더 이상의 질문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우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방면에서 나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지 분명해질 때까지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 대답에 듀런트는 또 어리둥절한 듯했다. "그렇다면 여기의 상황을 대충 보고 나서 내일 밤 다시 의논하러 오세요." 듀런트는 회견을 끝내려고 하였으나 코우커는 물고 늘어져서 틴셤장 부지의 넓이, 건물의 수, 공동체의 인원, 사람과 장님과의 비율 등을 끈질기게 계속 질문했다. 나는 조젤라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듀런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조젤라 플레이턴...... 아, 예, 그 여류 작가......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여기서 해 나가려고 하는 그런 공동체에 찬성할 여자 분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리더로 있는 이상 이 곳의 공동체는 딱딱한 것이 될 것 같았다. 복도에 나오자 코우커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 여자는 이상한 자만심과 편견으로 뭉쳐 있군. 독재자 타입이야. 우리의 도움을 원하는 주제에 원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거야." 우리는 저녁의 어슴푸레한 빛이 남아 있는 복도를 잠시 걸었다. 열린 도어로 어둑어둑한 방안이 어렴풋이 보였다. 남자들의 침실이었다. "난 저 사람들과 좀 얘기를 하고 싶소. 또 뒤에 다시 만납시다." 코우커는 남자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혼자 식당으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촛불이 세워져 있고 그 불빛으로 한 젊은 여자가 바느질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촛불이 깜박거려서 눈이 아파 죽겠네." 여자는 짜증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촛불이 있는 동안은 그래도 좋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는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다. "당신은 오늘 런던에서 온 분이군요." "그렇소." "거기는 비참하지요?" "이 세상의 종말이오." 나는 런던의 상황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도 런던에서 왔습니까?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됩니까?" 다행히 이 여자는 그 때 비들리의 공동체에 있던 여자였다. 코우커의 패거리가 대학을 습격했을 때 눈뜬 사랑 중에서 잡히지 않은 사람은 겨우 대여섯 명뿐이었다. 그 중의 두 사람이 플로렌스 듀런트와 이 여자였다. 그 다음 날, 듀런트가 수습 위원이 되었으나 예정대로 모두를 출발시킬 수는 없었다. 트럭을 운전해 본 일이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째, 오후부터 밤에 걸쳐 마이클 비들리와 대령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 때쯤에는 트럭을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열 명 가량 모였다. 며칠 기다리면 또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은 알았으나 비들리들은 즉시 출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갈 곳은 우선 틴셤장으로 결정되었다. 마침 대령이 거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틴셤장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지낸 뒤 집회가 열렸다.대학의 강당에서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비들리와 대령들의 일파와 플로렌스 듀런트의 일파이다. 듀런트는 비들리와 대령들의 새로운 사고 방식에 반대하여 크리스트교 적인 사회를 재건하겠다고 주장했다. 듀런트를 지지한 것은 5명의 눈뜬 처녀와 12, 3명의 장님 처녀, 그리고 중년의 장님 남녀 수명이었다. 눈이 보이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좋아요. 각자 자기가 옳다고 믿는 공동체를 만들도록 합시다. 이 틴셤장은 당신네들이 맡으시오." 비들리들은 아직 짐이 그대로 실려 있는 트럭을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했다. 그 뒤에 듀런트들은 틴셤장의 안팎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우선 부지 내의 농원에서 무서운 것이 발견되었다. 어른 남녀 한 쌍과 처녀 한 명이 밭 속에 한데 모여 쓰러져 있고, 그 곁에 두 그루의 트리피드가 뿌리를 내리고 시체가 썩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듀런트는 총기실에서 엽총을 꺼내 와 눈뜬 처녀들의 도움을 얻어 저택 내에 있는 트리피드를 모조리 퇴치했다. 총을 다룬 경험은 없었으나 필사적으로 녹색의 괴물을 쏘아 댔다. 독채찍이 날아간 트리피드는 스물 여섯이나 되었다. 그 다음 날은 마을을 조사하러 갔다. 여기저기 제법 트리피드가 있었다. 마을 사람의 대부분은 독채찍에 희생이 되고 운수 좋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듀런트는 살아 남은 마을 사람들을 틴셤장으로 데리고 왔다. 남자도 여자도 건강하고 씩씩했으나 눈이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플로렌스 듀런트는 여자지만 훌륭한 리더예요. 이곳의 공동체는 반드시 잘 돼 갈 거예요." 여자는 촛불 빛으로 옷을 기우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조젤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조젤라 플레이턴이라는 이름조차 들은 일이 없고 내가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식당의 전등이 켜졌다. "어머나!"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전등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촛불을 불어 끄고 바느질을 계속했다. 2, 3분 지나자 코우커가 불쑥 들어왔다. 나는 전등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 짓이로군." "그래요. 이 건물에는 자가 발전 설비가 있었어. 석유가 없어질 때까지는 전등을 쓸 수 있지." 코우커는 여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신네들은 이 건물을 조사했겠지? 불이 필요하면 왜 발전기의 모터를 돌리지 않았소?“ "그런 게 있는 줄을 몰랐어요. 듀런트도 여자인 걸요. 전기나 모터에 대해서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하고 여자는 대답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자 여자가 어디 있소. 어둠 속에서 기도만 올리고 있어서야 살아 남을 수 없지." 코우커의 빈정거림은 따끔했다. 여자는 화가 난 듯, 큰 눈으로 코우커를 노려보았다.   요새의 3인조   이튿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코우커의 침대는 비어있었다. 이미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나도 아침시간을 주로 탐문하는 데에 썼다. 조젤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오기 전날, 눈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몇 명인가 왔다가 또 나갔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조젤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조젤라가 어디에 살아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점심 식사 때 코우커가 모습을 보였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 공동체의 실태를 자세히 조사했어요. 가축의 수, 농원의 설비, 수원, 저장 식료품-이와 같은 것을 잘 쓰면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소. 그래서 나는 목사와 듀런트를 만나서 내 의견을 말했소. 이 공동체는 눈이 보이는 사람의 수가 적어요. 그러니까 장님도 일을 할 수 있게 훈련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 증강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목사란 작자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더욱 많은 장님을 이 공동체에 참가시키고 싶다지 뭐요. 듀런트는 듀런트대로 내 의견이 이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고 말이오. 그 여자는 이 곳의 보스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요.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깨끗하고 바르게라고? 흥, 해 보라지. 그 여자가 이대로 있다간 조만간 이 공동체는 혼란에 빠져 자멸의 길을 걸을 거야. 한데 당신은 어쩔 작정이오?" "마이클 비들리들을 쫓아갈 작정이오. 그 외에는 조젤라의 행방을 찾을 방법이 없으니까."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도 함께 가겠소. 한 번은 비들리들의 공동체를 깨부수려고 한 나였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의 견해를 인정하고 있어요. 반드시 쓰일 데가 있을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코우커는 내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 날 오후 늦게 나는 듀런트를 붙잡고 물었다. "비들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듀런트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듀런트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이 공동체에는 눈이 보이는 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와 코우커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듀런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셋의 비민스터 가까이 가는 것 같았어요. 그 이상의 일은 모르겠어요." 하고 겨우 가르쳐 주었다. 나는 즉시 코우커에게 이야기했다. "좋아, 내일 아침 이 고약한 장소에서 떠납시다.“ 그러면서도 코우커는 틴셤장에 미련이 있는 듯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트럭 두 대로 나란히 출발했다. 날씨가 여전히 좋았다. 마을마다 거리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풍기고 있다. 우리는 트럭의 창문을 닫은 채 전진했다. 한 두어 번, 관목 숲 곁을 지날 때 독채찍이 획 하고 뻗어 왔다. 그것은 운전석의 유리창문을 때려서 유리에 독액의 자국을 남겼다. 트리피드는 소리에 민감하다. 소리에 의해 먹이가 있는 곳을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트럭의 운전석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까지 아는 것일까? 나는 트리피드를 전문으로 연구해 온 전문가로 자처하지만 이 녹색의 괴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오후 4시 반경, 우리는 비민스터 읍내에 트럭을 몰고 들어갔다. 그러나 읍내에는 비들리들이 있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번화가의 상점 거리에 두 대의 트럭이 서 있을 분 사람의 그림자는 없다. 그 길을 우리가 20미터쯤 전진했을 때였다. 한 남자가 트럭 뒤에서 나타나서 라이플을 겨누었다. 탕! 총 소리가 사방을 흔들었다. 탄알은 나의 머리 위 높은 곳을 날아갔다. 서 라는 경고였다. 나는 트럭을 세웠다. 라이플을 손에 든 남자는 키가 크고 튼튼한 체격이었다. 남자는 내게로 총구를 향한 채 내리라고 명했다. 나는 트럭에서 내려서 양손을 벌려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했다. 거기에 또 한 남자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때 코우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라이플은 넣어 두는 게 좋을 거요. 내가 그럴 마음만 있으면 당신네들 셋은 몸에 배꼽이 또 한 개씩 생길 테니까" "그 사람의 말이 맞다. 우리한테 적의는 전혀 없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몸집이 큰 남자는 라이플을 내렸다. 코우커는 내 트럭 뒤에서 나왔다. 잽싼 남자다. 상대방의 눈을 속여 어느 새 자기 트럭에서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당신네는 두 사람뿐이오?" 여자와 같이 온 남자가 물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코우커가 대답하자 3인조는 안심이 된 모양이다. 몸집이 큰 남자가 설명했다. "도시 갱이 식량을 빼앗으려고 온 줄 알았지." "당신네들은 대도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모양이지? 혹시 갱이 있다고 해도 이런 데까지 식량을 모으러 오지는 않아요." 코우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3인조는 겨우 안심한 듯했다. 나는 물었다. "비들리의 패거리를 모르시오?" "그게 어떤 사람들인데?" 큰 남자가 반문했으므로 나는 실망했다. 3인조는 비들리라는 이름을 들은 일도 없고 수십 명의 패거리를 만난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큰 남자는 스티븐 브렌렐이라 하며 중권 거래소의 직원이었다. 또 한 남자는 아직 젊은데 라디오 상점의 경영자였다. 그리고 여자는 영화 배우를 지망하는 패션 모델이었다. 이 세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유성우를 보지 않아서 눈이 멀지 않은 것이다. 나는 제안했다. "비들리의 공동체를 찾으면 당신네들도 참가하지 않겠소? 그 편이 매사 편리할 테니까." "좋아요. 우선 우리의 요새로 가십시다.“ 하고 몸집이 큰 스티븐이 동의했다. 우리는 네 대의 트럭을 나란히 물고 출발했다. 3인조가 살고 있는 저택은 요새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돌로 된 튼튼한 건물이고 주위에 해자가 빙 둘러 있었다. 건물의 창문과 지붕에 모두 다섯 자루의 기관총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병기고를 하나 발견했소. 그래서 이만한 것을 긁어모아 온 것이오." 몸집이 큰 스티븐은 자랑하면서 입구에 가까운 작은 방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라이플과 권총 따위와 함께 화염 방사기까지 있었다. "이 화염 방사기는 트리피드를 퇴치하는 데 도움이 되겠는걸.“ 내가 가리키자 스티븐은 득의 양양하여 웃었다. "시험해 보았어요. 이것을 퍼부으면 트리피드는 당장에 부풀어올라서 터지고 말아요." 그러나 요새의 주위에는 트리피드가 숨어 있는 기미는 없었다. 나와 코우커는 지붕으로 올라갔다. 달이 뜨기 전이라 주위는 어둠 속에 싸여 있었다. "비들리는 대학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빛으로 신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지만 어느 쪽에서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우리는 트럭을 타고 읍내로 나가 한 사람씩 작은 차로 갈아타고 비들리의 공동체를 찾아보았다. 전원의 길은 초여름의 싱싱한 신록으로 넘쳐 있었다. 여기저기에 도표가 서 있고 길가에는 여느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들꽃이 피어 있었다. 명랑하게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도 보였다. 새는 눈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가축은 대개 장님이 되어 있었다. 가시덤불 속으로 잘못 들어간 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멍하니 서 있다. 가시 철망에 머리를 처박고 움직일 수 없어 굶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양도 눈에 띄었다. 소도 마찬가지였다. 젖소가 큰 유방을 덜렁거리며 비틀비틀 걷고 있다. 나무 밑동 곁에 뒹굴고 있는 소의 시체도 있었다. 기운이 있는 것은 트리피드뿐이었다. 이따금 녹색의 머리를 흔들거리며 부지런히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언덕이나 높다란 곳으로 나올 때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쌍안경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연기나 깃발 신호를 기대했지만 그럴 듯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번은 언덕의 중턱에서 너울너울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깃발인가?“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쌍안경으로 보았다. 흰 것은 양이었다. 대여섯 마리의 양이 트리피드한테 쫓겨서 도망쳐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긴 독채찍이 잇달아 양들을 후려치고 있었다. 다행히 양의 몸은 털이 많아서 독채찍의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트리피드를 보자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놈들이 썩은 고기를 먹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과 가축들이 어처구니없는 재난을 만난 것을 이용해서 한층 더 날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끔직한 괴물을 어째서 우리는 전세계에서 재배했던가? 인간은 트리피드를 식량으로 해 왔는데, 지금은 트리피드가 인간을 식량으로 하려 하고 있다. 저녁때 나는 트럭을 세운 곳으로 돌아왔다. 이어 코우커와 3인조가 속속 철수해 왔다. 아무도 비들리의 공동체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위스키를 마시고 트럭으로 요새에 돌아왔다. "내일은 수색 범위를 넓힙시다.“ 코우커는 지도를 펴고 새로운 지구에 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티븐이 말했다. "우리도 꼬박 20킬로미터 사방의 지역을 샅샅이 뒤진 셈이오. 그래도 안 보이니 비들리들은 이 근처에는 없는 거야. 그 사람들이 비민스터에 왔다는 정보가 잘못이거나 만약에 왔다고 해도 여기를 지나쳐서 더 앞으로 갔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더 이상 오늘과 같은 방법으로 수사를 계속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달리 좋은 방법이 있소?" 하고 코우커가 물었다. "비행기를 쓰면 좋겠어요. 상공에서라면 더 넓은 지역을 빨리 조사할 수 있고 폭음을 들으면 누구든지 뛰쳐나와서 무슨 신호를 보낼 테지." "과연 좋은 생각이오. 비행기는...... 헬리콥터라야 해. 그러나 어디에 가면 헬리콥터를 구할 수 있지? 게다가 누가 그것을 조종할 거요?“ 문제를 현실적으로 파고들어 생각하는 것이 코우커의 훌륭한 점이었다. "조종쯤이야 내가 어떻게 하겠소." 라디오 가게 주인이 말했다. "경험이 있소?“ "아뇨...... 그러나 요령만 터득하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을 거요.“ 라디오 가게 주인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스티븐의 이야기로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영국 공군 기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공군 기지로 갔다. 스티븐의 예상대로 거기에는 군용 헬리콥터가 있었다. 라디오 가게 주인은 즉시 헬리콥터를 타고 30분쯤 연습했지만 훌륭히 조종술을 배웠다. 그로부터 나흘 동안 헬리콥터는 차츰 수색 범위를 넓히면서 날아다녔다. 나와 코우커가 번갈아 가며 동승하여 정찰을 했다. 우리는 모두 10개쯤 되는 작은 패거리를 발견했다. 가장 인원수가 많은 패거리는 일곱 명이었다. 그러나 비들리들의 일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젤라의 행방을 아는 사람과도 만나지 못했다. 헬리콥터에 의한 수색은 나흘째로 그만두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일을 의논했다. "크리스마스까지에는 미국에서 구원대가 올 거야...." 패션 모델 여자는 아직도 태평스러운 말을 한다. "당신은 행복한 인간이오.“ 코우커는 쓴웃음을 짓더니 금방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 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와 같은 작은 패거리는 가능한 한 합류해서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해요. 작은 패거리가 각각 식량과 석유를 아무리 저장해도 그것이 없어지면 자멸을 기다릴 뿐이오. 우리가 오래 살아 남아서 눈이 보이는 아이를 낳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급 자족할 수 있는 공동체를 조직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틴셤장에는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소. 거기에는 넓은 농장과 양질의 수원이 있소. 우리가 합류해서 저 듀런트의 콧대를 꺾고 돌대가리를 깨우쳐 주면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어요. 자급 자족의 태세가 갖추어진 다음 각지에 살아 남은 교사, 간호원, 교사 등을 찾아온다면........" "이봐요. 당신의 계획은 훌륭하지만 듀런트가 우리를 받아 주리라고 생각하오?" 내가 묻자 코우커는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우리가 다시 동지로 넣어 달라고 부탁하면 아주 기뻐할걸.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라." "설마 당신은 그 여자가 계획적으로 거짓 길을 가르쳐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 "그 점은 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틴셤장으로 돌아가겠네. 당신들도 함께 가지 않겠소?“ 코우커는 모두를 설득했다. 한 시간쯤 의논한 끝에 3인조는 틴셤장으로 가기로 정했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틴셤장에 가면 조젤라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보로 생각해 보아 조젤라는 틴셤장에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비들리들과도 별도로 행동을 취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났다. 런던의 아파트에서 조젤라와 탈출해 갈 곳을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조젤라는 말했었다. "서섹스의 다운즈는 어떨까...... 난 오래 된 농장을 알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나는 코우커에게 했다. "좋아요. 당신 마음대로 해 보시오. 그리고 애인을 찾거든 둘이서 틴셤장으로 오시오." 하고 코우커는 나를 격려했다. 절대로 소용없는 짓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이튿날 아침은 비가 억수같이 왔다. 나는 코우커의 전송을 받으며 트럭에 올라탔다. 차는 진창길을 물보라를 튀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의 소녀   오전 중에는 비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카뷰레이터에 물이 스며들어갔고 그 다음에는 점화 장치가 고장을 일으켰다. 오후 1시쯤에 비가 멈추고 태양이 얼굴을 내밀어 그 후에는 트럭이 쾌조로 계속 잘 달렸다. 뉴포레스트에 들어섰을 때 나무 사이 너머로 헬리콥터가 보였다. 운수 나쁘게도 길 양쪽의 수목에 가려서 공중에서는 내 트럭이 안 보였음이 분명하다. 나는 액셀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올려 훤하게 트인 곳으로 나왔으나 그 때는 이미 헬리콥터가 저 먼 하늘에 있는 점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헬리콥터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다시, 또 수 킬로미터를 달려갔더니 작은 마을에 다다랐다. 길가에 빨간 타일을 붙인 작은 주택이 여러 채 늘어서 있다. 정원에는 색색 가지 꽃이 만발해서 마치 그림책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꽃들 사이에 트리피드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몇 그루나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끝에 왔을 때 마지막 정원의 문에서 작은 사람의 그림자가 한길로 뛰어나와 양손을 쳐들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트리피드가 없는지 사방을 살펴보고 나서 엽총을 들고 길로 내려섰다. 작은 사람의 그림자는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된 귀여운 소녀였다. 파란 목면 원피스를 입고 횐 양말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아저씨, 부탁이에요. 토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좀 봐주세요........" 소녀는 내 소매에 매달렸다. 눈이 보이는 아이를 만난 것은 오랜만이다. 나는 눈꺼풀 안에 눈물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디냐?“ "이 쪽이에요.“ 우리는 손을 잡고 문 쪽으로 갔다. "저기, 저기에요." 소녀는 가리켰다. 화단 사이의 좁은 잔디밭에 네 살쯤 된 사내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소녀는 말했다. "저놈이 토미를 때렸어요. 내가 토미를 도와주려고 하니까 나까지 때리려고 했어요.“ 울타리 위로 트리피드의 머리가 튀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혼내 줄 테니까 귀에 손을 대고 있거라.“ 나는 엽총을 겨누어 트리피드의 머리를 한 방에 쏘아 떨어뜨렸다. "저놈은 이제 죽었어요?" 소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트리피드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타닥. 가는 막대로 잎자루의 뿌리께를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한 방 더 쏘아 트리피드를 완전히 아무 소리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죽었다.“ 우리 둘은 사내아이 곁으로 갔다. 흙빛 얼굴에 독채찍에 맞은 자국이 발갛게 나 있었다. 소녀는 사내아이 곁에 꿇어앉아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토미도 죽었나요?" "그렇단다." 나도 소녀와 나란히 쭈그리고 앉았다. "가엾은 토미. 강아지처럼 묻는 거지요?“ "그렇게 하자." 나는 작은 구덩이를 팠다. 소녀는 화단의 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무덤 위에 놓았다. 잠시 후 나는 소녀를 트럭에 태우고 출발했다. 소녀의 이름은 수잔이라고 했다. 얼마 동안 훌쩍거리고 있더니 차츰 내 질문에 대답하여 띄엄띄엄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잔은 날짜를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아무튼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 둘 다 눈이 안 보였다. 아버지는 도움을 청하려고 외출하더니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어머니는 수잔과 토미에게 '절대로 집에서 나가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또 나갔으나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잔과 토미는 집안에 있는 것을 먹으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자 먹을 것이 없어져서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수잔은 어머니의 주의를 어기고 월튼 부인의 식료품 가게에 갔다. 가게는 열려 있었으나 월튼 부인은 없었다. 수잔은 나중에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케이크와 비스킷을 들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수잔은 트리피드가 여럿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중의 하나가 느닷없이 독채찍을 뻗어서 수잔을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수잔의 키를 잘못 알았는지 독채찍은 수잔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말았다. 수잔은 깜짝 놀라서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그리고 토미에게도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토미는 아직 어렸다. 그 날 아침 밖으로 놀러나갔을 때 옆집 정원과의 경계인 울타리에 숨어 있는 트리피드를 보지 못했다. 얼마 후에 비명이 들렸다. 수잔이 급히 뛰쳐나가 보니 토미의 작은 몸이 잔디밭에 쓰러져 있었다. 수잔은 토미 곁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마다 트리피드의 머리가 보여서 무서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내가 지나가게 된 것이다. 한 시간 가량 달리고 나서 나는 트럭을 세웠다. 주위는 벌써 어두컴컴하다. 오늘밤의 숙소를 결정해야만 했다. "여기에 있거라." 나는 수잔을 차에 남겨 두고 근처에 있는 집을 두세 집 조사하여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식사는 있는 것으로 때웠다. 그러나 수잔은 통조림 고기와 치즈 따위를 작은 배가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먹었다. "매일 비스킷과 케이크만 먹고 있었걸랑요.“ 단것은 신물이 난다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헤어브러시로 수잔의 머리를 깨끗이 빗겨 주었다. 수잔은 이야기 상대가 생겼으므로 기운이 나서 끔찍한 사건들을 잊고 있는 듯했다. 나는 수잔을 2층의 침대에 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2층으로 돌아가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수잔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 걱정할 것 없다.“ "난 무서웠어요.“ "토미의 일이?“ "그 뒤에요...... 이 곳에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난 무서워서 ........" "나도 혼자가 되었을 때는 무서웠단다.“ "하지만 지금은 안 무섭지요?“ 수잔은 눈물이 멎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또 무서워지지 않게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요. 그러면 무섭지 않아요." 수잔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물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여요?“ "어떤 여자를 찾으러 가는 길이야." "그 사람은 어디에 있어요 ? "서섹스의 다운즈에 있을 것 같은데........" 내 대답은 자신이 없었다. "그 사람 예뻐요?“ "그래 예쁘다.“ 그 점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수잔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 상대를 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다시 트럭에 올라탔다. 이런 시골에서도 어린 소녀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광경을 여러 번 만났다.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축의 시체, 그 곁에 뿌리를 내리고 시체가 썩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트리피드. 수잔은 가끔 질문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얼버무리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설사 어린이라 할지라도 사실을 똑바로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정오 때쯤 하늘이 흐려지더니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저녁 5시쯤 나는 트럭을 세웠다. 앞쪽에 언덕이 보였다. 다운즈의 언덕이 비로 흐려져 있었다. 조젤라의 이야기로는, 목적지인 농가는 언덕 북쪽의 중턱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언덕은 몇 킬로미터에 걸쳐서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다. 다행히 비가 한때 그쳤다. "누가 살고 있으면 연기가 보일 텐데." 우리는 트럭에서 내려서 나직한 담 위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쌍안경으로, 수잔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언덕의 주위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연기는 한 줄기도 없었다. 차츰 어두워 오는 언덕 기슭에서 이따금 움직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와 양들이었다. 저 아래 들판을 흐느적흐느적 가로질러 가는 트리피드도 보였다. 그뿐이었다. "이 쪽에서 신호를 보내 볼까?“ 나는 수잔을 트럭에 태우고 근처의 마을로 들어갔다. 그 곳에도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몇 채의 집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이, 멋져!“ 수잔은 새빨간 비단 레인코트를 발견하여 입었다. 사이즈가 너무 크지만 비를 가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호화로운 롤스로이스를 발견하여 그 헤드라이트를 떼어 가지고 트럭으로 돌아왔다.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빗속에서 강력한 헤드라이트를 트럭의 운전대 옆에 붙였다. 완전히 어두워졌을 무렵 비의 기세도 약해졌다. "됐다, 빛의 신호를 보내 보자." 나는 라이트의 스위치를 넣었다. 휘황하게 빛나는 광선이 어둠을 꿰뚫었다. 나는 광선을 언덕으로 향해 천천히 좌우로 돌렸다. 한 바퀴 돌리고 나서는 몇 초 동안 스위치를 끊고 어둠 속에서 불빛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찾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수잔이 큰 소리로 외쳤다. "빌, 저기 불빛이 보여요." 라는 라이트의 스위치를 껐다. 캄캄한 언덕의 중턱에 약한 광선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좋아, 가 보자.“ 나는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켰다. 언덕에 도착하려면 수 킬로미터의 낮은 습지대를 지나가야만 했다. 배수로의 수문지기가 없어서 사방이 온통 물구덩이였다. 길이 물밑에 숨어서 알 수 없는 곳도 있다. 나는 조심해서 천천히 차를 전진시켰다. 가까스로 언덕에 도달하자 이번에는 꼬불꼬불한 오르막이었다. 길이 좁아서 양쪽에 무성한 관목과 가시덤불이 트럭의 옆구리를 긁었다. 그러나 모퉁이를 하나 지날 때마다 중턱의 빛이 가까워져서 마침내 불 켜진 네모난 창문에 도착하게 되었다. 길 앞쪽에서 또 하나 작은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칸델라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문을 지나는 모퉁이를 가리키고 땅 위에 놓였다. 나는 칸델라의 1, 2미터 앞에서 트럭을 세웠다. 차문을 열자마자 대뜸 회중 전등의 빛이 내 얼굴을 비추었다. "어머나, 빌! 오랜만이에요."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눈앞에 레인코트에 싸인 여자가 서 있었다. 조젤라였다. "아, 빌...... 난 기다리고 있었어요. 줄곧.." 그 목소리는 감정의 폭발을 억제하는 것처럼 끊겼다. 나는 말없이 조젤라를 꼭 껴안았다. 이 때 차 위에서 수잔의 목소리가 났다. "빌, 바보같이 비에 젖잖아요? 왜 집에 들어가서 그 분한테 키스하지 않아요?“   새로운 생명   내가 조젤라와 재회한 장소는 셔닝 농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붉은 타일을 붙인 큰 건물에는 자가 발전 설비와 우물이 있었다. 여기에는 브렌트 내외가 살고 있었다. 남편인 데니스도 부인인 메리도 조젤라의 친구였다. 그밖에 조이스라는 여자가 메리의 이야기 상대 겸 집안 일을 돌봐 주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젤라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데니스도 메리도 조이스도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메리는 곧 아기를 낳을 몸이었다. 나는 우선 조젤라에게 물었다. "그 대학에서 화재 소동이 일어난 뒤 당신은 어떻게 되었소?“ "장님들의 노예로 되돌아갔지요." 조젤라는 나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코우커 일당에게 잡혀서 수갑과 사슬로 자유를 빼앗기고 장님들의 한 패거리를 떠맡게 된 것이었다. "난 첫날에 두 사람을 겁주었어요. '이 수갑과 사슬에서 나를 해방해 주면 가능한 한 당신들을 돌봐 주겠다. 그러나 이대로 끌고 다닐 생각이라면 당신들은 청산가리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이어요. 그들은 영리했어요. 즉시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어요." 그 후의 나날은 내 경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병으로 패거리가 해체되자 조젤라는 차를 주워 가지고 나를 찾으러 햄스티드까지 갔다. 그러나 내 패거리의 생존자들도 만나지 못했고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끄는 패거리도 만나지 못했다. 저녁때가 되자 대학 건물로 향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르므로 길을 두 개쯤 사이에 둔 곳에 차를 세우고 다음엔 걸어서 다가갔다. 그 때 총 소리가 났다. 조젤라는 높직한 곳에 올라가서 대학의 구내를 바라보았다. 러셀 스퀘어의 정원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코우커였다. 조젤라는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 때의 총 소리가 내가 발포한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부터 어디로 갈까?' 자동차로 돌아와서 조젤라는 생각했다. 피난갈 곳이라곤 서섹스의 다운즈에 있는 농장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 장소는 내게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까 혹시 내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여기에 도착했어요. 차 소리에 데니스가 2층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트리피드에 조심하라고 주의해 주더군요. 과연 그 말대로 였어요. 집 주위에는 대여섯 그루쯤 되는 트리피드가 집안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어요. 데니스와 내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더니 트리피드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내 쪽으로 움직여 오지 뭐에요. 나는 급히 되돌아와서 차를 몰아 그놈을 치어 쓰러뜨렸어요.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놈이 많이 있고 나는 나이프 밖에 가진 것이 없었어요. 데니스에게 의논했더니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차의 가솔린을 놈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뿌리고 불이 붙은 막대기를 던지면 쉽게 쫓아버릴 수 있다는 거여요. 그대로였어요. 그 후부터 이따금 불을 사용하고 있죠. 집을 태우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에요." 조젤라는 요리 책을 보며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정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다행히 상당히 많은 식량과 연료가 저장되어 있었다. 음료수에도 곤란을 받지 않았다. 또한 세 명의 주민은 장님이 되었어도 힘껏 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주인인 데니스는 장님이 된 날 아침, 외출했다가 트리피드의 습격을 받아 독채찍에 손을 맞았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에는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철망 헬멧을 만들어 냈다. 부인인 메리는 어쨌든 아기를 낳으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조이스도 병이 잦은 몸을 채찍질해 가며 가사 일을 계속했다. 거기에 조젤라가 구원의 여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조젤라는 세 장님들의 시중과 출산 일로 눈이 돌만큼 바빴다. 그러나 조젤라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집밖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꼭 눈이 보이는 남자의 손이 필요했다. 조젤라는 밤새도록 불을 켜 놓고 오로지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선 내 일은 이었다. 트럭으로 읍내에 가서 필요한 것을 모아 오는 것이다. 식량뿐만 아니다. 발전기를 움직이고 트리피드를 쫓아 버리기 위해 쓸 가솔린, 메리의 해산에 필요한 의료품, 암탉과 소의 사료, 그 밖의 놀랄 만큼 많은 잡화 등을 모아야만 했다. 또 한 가지 일은 트리피드의 퇴치였다. 이 지방은 내가 이제까지 보아 온 어느 지방보다도 트리피드가 많이 번식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눈에 띄는 트리피드는 닥치는 대로 엽총으로 퇴치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반드시 새로운 트리피드 한 두어 그루가 집 주위 어딘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이래서는 정원에도 잘 못 나가겠군." 나는 정원 주위에 철망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트리피드들은 울타리 밖에 와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나 혼자의 힘으로는 당해 낼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어린 수잔에게 트리피드 총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토미의 원수를 갚아 줄 테야!" 수잔은 복수의 귀신이 되었다. 매일 아침, 무거운 트리피드 총을 꽉 잡고 울타리 밖을 향해서 쏘았다. 어느 날 메리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산부인과의 전문 지식은 물론이고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없는 조젤라가 아직 어린 수잔을 조수로 하여 아기를 받아야만 했다. 나는 데니스와 조이스와 함께 불안에 떨면서 하루 밤 내내 깨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조젤라가 기진 맥진한 몰골로 2층에서 내려 왔다. "태어났어요. 계집아이여요. 둘 다 건강해요." 그렇게 말하고 데니스를 2층으로 데리고 갔다. 몇 분 후에 조젤라는 되돌아왔다. "대단히 쉬웠어요. 아기는 눈이 보일 거여요. 가엾게도 메리는 아기를 볼 수 없다면서 울고 있지만........" 아무튼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눈이 보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여 다같이 건배했다. 그러나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식량도 연료도 떨어질 때가 온다. 농원은 있지만 나는 농사지을 줄을 몰랐다. 지금부터 배운다고 해도 밭을 일구어 여섯 식구가 먹고 살아갈 만한 작물을 심는다는 것은 우선 무리였다. "더 큰 공동체에 합류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다." 나는 모두에게 틴셤장의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 합류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는 코우커들과 이전에 대한 의논을 해 보고 오겠소.“ 3주일 후 나는 혼자서 틴셤장으로 갔다. 하루만에 왕복할 수 있는 일반 승용차를 썼다. 저녁때 셔닝 농장으로 돌아오니까 조젤라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땠어요?“ "합류 계획은 중지요. 틴셤장은 끝장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전염병으로 당한 모양이오." 나는 보고 온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거기 도착했을 때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넓은 정원의 여기저기에 트리피드가 서성거리고 있었소.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나쁜 예감이 들었어요.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안 보여요. 그리고 차에서 내리니까 고약한 냄새가 났소. 썩은 시체 냄새요.“ 이미 조사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행여나 하고 건물 안에 들어갔다. 아마도 2주일이나 그 이전에 살아 남은 사람들이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침실을 두어 개 들여다보았다. 양쪽 다 썩어 들어가는 시체가 있었다. 녹아 내린 살 사이에서 흰 뼈가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정면 도어에 흰 종이가 핀으로 꽂혀 있었다. 그러나 바람에 날아가 버린 듯, 작은 모서리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날아간 부분을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뒤뜰에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다. 저장품도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코우커와 듀런트들은 어디로 갔을까? "행방을 알아 낼 단서는 전혀 없어요."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조젤라가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쩌지요?" "여기에 남는 거요. 우리들끼리만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오. 그러다 보면 조직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 "너무 기대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희망은 있어요. 우리와 같은 작은 패거리가 전 유럽에...... 아니, 온 세계에 몇천 개나 흩어져 있을 거요. 몇 개가 함께 합쳐서 재건에 또다시 착수할 것으로 생각돼요." "그건 언제일까? 우리 시대에는 무리일 거여요. 몇 대나 뒤의 일이 되겠지요. 우리는 스스로 생활을 건설하는 수밖에 없어요. 밖으로부터의 구원을 절대로 기대할 수 없어요........" 잠시 조젤라는 코를 훌쩍이고 손수건으로 눈을 가볍게 눌렀다. "미안해요, 빌........ 당신과 함께 있게 되어 기뻐요. 당신과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 난 농가의 마누라가 되는 거로군요.“ 별안간 조젤라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출판사와 신문사와 영화사를 생각했어요. 여류 작가가 농가의 마누라가 된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재미있어 하겠지요? 당신과 내 사진이 신문에 나왔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요........" "나는 당신 외에 두 장님 아가씨를 맡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뻐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세상의 종말에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1대 1로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인 것이다.   녹색의 큰 물결   나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것은 작업의 진행표, 계획표, 저장 물자의 리스트 등도 겸하게 되었다. 자급 자족의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물자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식량, 연료 외에 의류, 부엌 살림, 의료품, 총화기, 잡화류, 농작물의 씨앗, 농기구, 말뚝, 철사, 그리고 책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트럭을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뛰어다니며 에 힘을 썼다. 데니스가 동행했다. 눈은 안 보이지만 센스가 빠르고 힘도 세어서 짐을 나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트리피드 대책도 등한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집의 건물과 정원 주위의 울타리를 강화했다. 또, 백 에이커 정도의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면서 튼튼한 울타리를 쳤다. 그 안쪽에는 또 한 겹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사람이나 가축이 잘못해서 바깥쪽 울타리에 접근하여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당하지 않도록 했다. 동시에 나는 농사짓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농사는 책에서 간단히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전공한 생물학의 논문 같은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고 말해도 좋았다. 처음에 나는 데니스에게 의지할 작정이었으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데니스는 셔닝 농장의 주인이기는 했으나 농장 일은 주로 소작인들에게만 맡겨 왔던 것이다. 가축의 사육, 도살 방법 등도 내가 혼자서 공부해야만 했다. "올바른 농사꾼이 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나는 한숨을 쉬었으나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꼬박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물자 모으는 일을 겸해서 런던으로 갔다. 가로는 조용하고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여기저기에 버려진 차가 벌써 녹이 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또 1년이 지나자 놀라울 정도의 변화를 보였다. 집집의 정면에서 회칠과 타일이 벗겨져 떨어져서 보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굴뚝의 연통이 뒹굴고 있는 곳도 있었다. 배수구에는 잡초가 뿌리를 내리고 빗물받이에는 나뭇잎이 막혀서 배수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붕과 벽에도 잡초와 관목이 돋아나서 건물은 녹색의 가발을 쓴 것처럼 되어 있었다. 건물의 내부는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벽지가 벗겨져서 습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공원과 광장의 정원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나무 뿌리와 잡초가 주위의 도로에까지 뻗어 나와 있었다.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으로 싹이 돋아 녹슨 자동차의 좌석에서 잎이 무성한 것도 볼 수 있었다."겨우 2년만에 런던이 폐허가 되다니........" 나는 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셔닝 농장으로 돌아오면서 인류 문명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2년째의 11월에 조젤라가 아들을 낳았다. 나는 데이비드라고 이름지었다. 아기는 튼튼한 아이였고 물론 눈이 보인다. 조젤라는 아기에게 정신을 빼앗겨 장래에 대한 불안도 잊은 듯했다. 나는 아버지가 되어 모두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더 한층 일을 열심히 했다. 어느 날 밤, 조젤라가 말했다. "요즘, 트리피드의 후닥닥거리는 소리가 심해진 것 같아요." "그런가 ? 나는 귀를 기울였다. 타닥타닥 타닥타닥타닥. 울타리 밖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트리피드들이 가는 막대로 자신의 잎자루를 두들기고 있었다. "별로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달라진 게 아니에요. 수가 많아진 것이지." "그래, 그건 몰랐군." 나는 튼튼한 울타리와 담이 생기고 나서 그 안쪽의 땅에만 주의를 기울여 온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젤라의 말이 맞았다. 울타리 밖에는 트리피드가 많았다. 창문에서 보이는 좁은 범위에만도 백 그루 이상 있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 때 나는 트리피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에만 왜 저렇게 많이 모여들었을까? 저놈들이 이 고장에서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닐 텐데........" 그러자 수잔이 뜻밖의 말을 했다. "아저씨가 데리고 온 것이에요." "수전, 이상한 말은 하지 말아." "이상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온갖 소리를 내잖아요. 그래서 그놈들이 오는 거여요." "정말이니?" "예, 증거를 보여 드릴게요." 수잔은 내 엽총과 쌍안경을 갖고 왔다. 우리는 정원으로 나갔다. 울타리의 저 먼 곳에서 트리피드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걸 보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수잔은 내게 쌍안경을 주었다. 나는 쌍안경을 눈에 대었다. 그 트리피드는 1.5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을 동쪽으로 향해서 흐느적흐느적 걸어가고 있었다. "자, 잘 보고 계셔요." 수잔은 엽총을 하늘로 향해서 쏘았다. 5, 6초 지나자 트리피드는 진로를 바꾸어 이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걸 보셔요, 이 쪽으로 오고 있지요? 소리가 난 때문이에요." 수잔은 발포의 쇼크로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또 한 번 쏘아보렴." 내가 부탁하자 수잔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지금 쏜 총 소리를 들은 트리피드가 모조리 지금 이 쪽으로 오고 있어요. 10분쯤 지나면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요. 그리고 아무 소리도 안 나면 다시 본디의 방향으로 돌아가요. 만약에 또 한 번 총을 쏘면 다들 여기까지 오고 말 거예요. 울타리 곁에 있는 패거리의 타닥타닥 소리가 들리는 데까지 온 것은 되돌아가지 않아요. 저 타닥타닥 소리는 친구를 부르는 신호로 생각되는데......" 수잔의 관찰력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럼, 넌 내가 엽총을 쓰는 것을 그만두고 트리피드 총을 쓰란 말이지?“ "총뿐이 아니에요. 소리는 모조리 안 돼요. 제일 나쁜 것은 트랙터지요. 소리가 크고 오래 계속되니까 그놈들은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금방 찾아 낼 수 있어요. 발전기의 엔진 소리도 무척 멀리까지 울려요.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놈들이 이리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몇 번이나 본 걸요." "거 참, 잘도 알아냈구나. 그러나 트리피드는 식물인데 소리를 '듣는다.'는 말투는 좀 이상하군." "하지만 그들은 듣는 걸요.“ "됐다, 아무튼 어떻게 해 보자." 나는 트리피드의 이상한 능력을 거꾸로 이용하여 덫을 놓기로 했다. 첫 번째 덫은 풍차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농장에서 8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다 만들었다. 풍차형의 덫은 바람을 받아서 돌며 큰 소리를 계속 내었다. 끽, 덜컹. 끽, 덜컹. 그 소리에 이끌리어 근처의 것은 물론이고 울타리의 바로 밖에 있던 것까지 몇백 그루나 되는 트리피드가 몰려갔다. "자, 지금이다!" 나와 수잔은 차를 타고 가서 트리피드의 떼에게 화염 방사기의 불길을 퍼부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싹 태워 죽였다. 이 방법은 두 번은 잘 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가 되자 아무리 풍차를 돌려도 트리피드가 모이지 않았다. 나는 다른 덫을 고안했다. 농장 울타리의 일부에 입구를 터놓고 거기서 안쪽으로 향해서 후미와 같은 형태로 새로운 울타리를 둘러치는 것이었다. 입구를 열어 놓았더니 발전용 모터 소리에 이끌리어 트리피드가 잇달아 들어왔다. 이틀 후에 입구를 막고 화염 방사기로 2백 그루 이상의 트리피드를 일거에 태워 죽였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트리피드들은 거의 모이지 않았다. 장소를 바꿔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며칠에 한 번씩 화염 방사기를 가지고 울타리 주위를 도는 일이었으나, 시간이 걸리고 화염 방사기의 연료를 많이 쓴다는 결점이 있었다. 두세 번, 트리피드의 집단에다 공포를 쏘아보았다. 그 결과는 기대에 어긋났다. 트리피드는 식물이므로 웬만큼 다쳐도 죽지 않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것저것 연구를 하여 새로운 방법을 시험해보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울타리 밖의 트리피드는 늘어가기만 했다. 어느 날 아침, 수잔이 우리 침실로 뛰어들어와서 소리쳤다. "그놈들이 집 주위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어요!" 수잔은 소젖을 짜려고 일찍 일어난 것이었다. 침실의 창문은 환한데 아래층에 내려가니까 캄캄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수잔은 불을 켰다. 그 순간 창문에 하나 가득 들러붙어 있는 녹색의 잎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큰일났다!“ 나는 허둥지둥 침실의 창문을 닫았다. 밑에서 독채찍이 뻗어 와서 유리를 철썩 때렸다. 이미 집의 벽 가에는 무수한 트리피드가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서 있었다. "헛간에 가서 화염 방사기를 갖고 와야 되겠는데." 나는 급히 준비를 시작했다. 두툼한 옷을 입고 장갑을 끼고 가죽 헬멧을 쓰고 철망 마스크 밑에는 먼지 막이 안경을 끼고 제일 큰 부엌칼을 손에 들었다. 정원에 나가니까 트리피드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부엌칼로 녹색의 벽을 헤치면서 걸어 나갔다. 독채찍이 쉴 새 없이 철망을 때린다. 금방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고 독액이 미세한 안개가 되어 들어와서 안경을 흐리게 했다. 나는 가까스로 헛간에 이르러 안경을 벗고는 얼굴을 씻었다. 돌아갈 때에는 화염 방사기가 있었다. 발 밑의 땅에 한번 쓱 하고 불길을 분사시킬 뿐으로 트리피드들은 길을 터 주었다. 집안으로 돌아오자 나는 2층의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화염 방사기를 휘둘러 괴물에게 불길을 퍼부었다. 수잔도 몸보호를 하고 또 하나의 화염 방사기로 괴물을 퇴치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트리피드들은 불타 죽은 그들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뒷일을 부탁한다.“ 나는 집을 수잔에게 맡기고 추격했다. 농장 울타리의 일부가 파괴되어 거기로 새로운 트리피드들이 녹색의 큰 물결이 되어 침입하고 있었다. 나는 정면으로 불길을 퍼부었다. 놈들은 멈춰 서더니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놈들의 머리 위에 불길을 퍼부으며 한 차례 쓸었더니 달아나는 발길이 빨라졌다. 괴물들의 모습이 하나 남김 없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울타리를 살펴보았다. 튼튼한 울타리가 20미터에 걸쳐 말뚝이 부러지고 철사가 잘려서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조젤라와 수잔에게 응원을 부탁하고 하루 종일 걸려서 수리했다. "또 놈들이 밤중에 와서 울타리를 부술지도 몰라요." 하고 수잔이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몇백 몇천이나 되는 트리피드의 대군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울타리에 전류를 통해 볼까?" 나는 과학적인 방법을 생각했다. 동력원으로는 읍내에서 발견한 군용 발전기를 트레일러 채로 끌고 왔다. 나는 수잔과 둘이서 울타리에 전선을 쳤다. 그러나 하루 종일 전류를 통해 놓을 수는 없었다. 발전기를 작동시키려면 귀중한 가솔린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에 2, 3회 정도 몇 분간씩만 전류를 통하기로 했다. 그 극성스러운 트리피드도 전류의 쇼크에는 놀란 듯, 울타리를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또다시 안쪽의 울타리에 비상 경보용 전선을 둘러쳐서 울타리가 파괴된 경우, 즉각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전류 작전도 얼마 안 가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게 되었다. 트리피드들은 전류가 흐르고 있는 동안은 울타리에서 떨어져 있으나 전류를 끊는 순간 울타리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놈들은 발전기의 엔진 소리로 전류가 흐르고 있는지 어떤지 아는 것 같아요." 하고 수잔은 말했다. 트리피드가 발전기의 엔진 소리와 전류의 관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경험을 쌓음으로 해서 트리피드들의 지능이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섞어서 트리피드의 침입을 저지하면서 울타리 안에서 농사일에 힘쓰고 있었다.   찾아온 아이반 심프슨   6년째의 여름이 왔다. 어느 날 나는 조젤라와 함께 바다까지 나갔다. 데이비드는 제법 컸으므로 수잔에게 맡겨 놓아도 괜찮았다. 길이 나빠서 우리는 뒷바퀴가 캐터필러 식으로 된 트럭을 사용했다. 단 둘이서 외출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우리는 영국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사면에 나란히 앉았다. 밝은 태양이 하얀 모래밭에 내리쬐고 있었다. 지난날에는 해수욕으로 성황을 이루던 해변에 지금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모습도 얼었다. 옛날과 다름없는 것은 물결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뿐이다. "우린 무엇 때문에 살고 있을까? 트리피드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만으로 일생을 마치는 건가요? 빌, 당신은 트리피드의 전문가였지요. 그놈들을 한 번에 퇴치하는 방법은 없어요?" 하고 조젤라가 물었다. "방법은 있을 거요. 트리피드만 죽이는 약품이라든가 트리피드의 성질을 바꾸어 온순한 식물로 만드는 호르몬제 따위를 만들어 내면 되겠지. 그러나 그러려면 연구소와 설비가 필요해요.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도리도 없지. 지금은 트리피드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그럭저럭 버티면서 다음 세대에 기대할 뿐이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데이비드에게 가르칠 작정이오. 생물학과 생화학의 책도 많이 모아 놓았소." 그와 같은 대답밖에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모래밭 앞의 들판을 네 그루의 트리피드가 흔들거리며 가로질러 갔다.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조젤라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놈들이 내겐 식물이 아니라 동물처럼 여겨져요. 하나 하나는 별것 아니지만 집단이 되면 동물과 같은 정도의 지능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개미나 벌과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해 힘을 합해서 공동으로 일하는 거여요. 게다가 그놈들에게는 학습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장치한 덫에 한번 걸리면 그 다음부터 조심해서 실패를 거듭하지는 않잖아요? 저런 것을 누가 전세계에서 재배하려고 생각해 낸 것일까?" "아무도 탓할 수는 없어요. 트리피드에서 나는 식용유 덕택에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전세계 사람들이 한숨 돌렸으니까. 6년 전의 실명 소동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트리피드한테 괴롭힘 당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거요.“ "그래요, 하늘의 재앙이었어요. 지구가 그 혜성의 꼬리에 들어가서 모두가 유성우를 본 때문이어요." "당신은 그 유성우가 하늘의 재앙이라고 생각하오? 혜성의 꼬리에서 내려왔다고 아직도 믿고 있는 거요?“ "빌, 당신은 그것이 혜성의 짓이 아니란 말예요?" 조젤라는 엄숙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소."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게 뭐였어요?" "사람의 재앙이었어." "사람의 재앙?" "그렇지." 나는 바다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 상공에는 무수한 위성 병기가 날아다니고 있소. 지금도 지구의 주위를 계속 돌고 있을 테지. 그 내용은 핵물질, 방사성 물질,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이라고 해요. 어느 것이나 다 지상에서 단추 하나만 누르면 폭파할 수 있대요. 만약에 위성 병기의 하나가 지상으로부터의 지령으로 폭파되어 그것이 인간과 가축들의 눈을-시신경을 태우는 방사선을 지구 전체에 흩뿌렸다고 한다면........" "설마, 그럴 리 없어요. 그런 악마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난 믿을 수 없어요," "물론 증거는 없어요. 사고였을지도 모르지. 그 유성군이 정말로 혜성의 짓이고 그 중의 하나가 우연히 위성 병기에 부딪쳐서 폭발시켰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병에 대해서도 설명이 돼요. 그것은 장티푸스가 아니었어. 역시 위성 병기가 폭발해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흩뿌려 지구 전체에 새로운 전염병을 발생시킨 것이 아닐까? 인간은 위성 병기를 만들어 내어 그것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거기에 잘못이 있었어. 위성 병기를 우연의 사고에서 완전히 지킬 방법 같은 것은 없었던 거야. 우리는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해 왔소. 그러다가 결국 발을 헛디딘 셈이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의 자손이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해 줘야 해요." 조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 희미하게 폭음이 들려 왔다. 우리는 이마에 손을 대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점이 해안과 평행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헬리콥터에요." 조젤라가 숨가쁘게 말했다. 나는 일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어어이, 어어이!" 그러나 헬리콥터는 4, 5킬로미터 앞에서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내륙 쪽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연락은 취하지 못했으나 헬리콥터의 모습을 본 것으로 우리는 힘이 생겼다. 헬리콥터를 날릴 만큼 강력한 그룹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이젠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트럭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셔닝까지의 길을 반쯤 지났을 때였다. "저 걸 보셔요!“ 느닷없이 조젤라가 소리쳤다. 언덕 중턱에서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오르고 있었다. 바로 셔닝 농장 근처였다. "불이다! 우리 집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속력으로 트럭을 몰았다. 뒷바퀴가 캐터필러여서 나쁜 길에는 좋지만 속도는 별로 나지 않는다. 가까워짐에 따라 불이 난 위치가 분명해졌다. 틀림없는 셔닝 농장이다. 트럭은 창문을 때리는 트리피드의 독채찍을 퉁겨 내면서 들길을 뚫고 지나갔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비로소 화재의 전경이 보였다. 불타고 있는 것은 집 건물이 아니라 정원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였다. 나는 마음을 놓으면서 경적을 울렸다. 수잔이 달려와서 대문 여는 끈을 잡아당겼다. 우리는 정원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다가 깜짝 놀랐다. 잔디밭 한가운데 헬리콥터가 착륙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집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키가 큰 금발의 남자로 가죽 재킷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전에 어디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였더라........' 내가 생각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손을 흔들고 명랑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빌 메이슨 씨죠? 전 아이반 심프슨입니다." "예, 기억납니다. 그 날 밤 대학에 헬리콥터로 오셨던 분이죠?" 하고 조젤라가 말했다. "저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젤라 플레이턴, 여류 작가, 작품은 「여자의 모험」........" "아니어요. 전 조젤라 메이슨, 농사꾼 아낙네, 작품은 아들 「데이비드 메이슨」이에요." "아 예, 그렇군요. 지금 집안에서 당신의 귀여운 작품을 보고 오는 참입니다.“ 아이반은 상냥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한가롭게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불은?" "수잔이 내 헬리콥터의 폭음을 듣고 신호의 봉화를 올린 것입니다. 재치가 있는 아가씨로군요. 그 불이면 못 볼 리가 없지요." 바람은 집과는 반대쪽으로 불고 있어서 건물에 옮겨 붙을 염려는 없었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이클 비들리가 당신을 만나면 우선 사과부터 해 달라고 하더군요." 아이반이 이상한 말을 꺼냈다. 내게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비들리가 내게 사과를 하는 거죠?“ "트리피드 말입니다. 당신이 트리피드는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았다가 혼이 났답니다.“ "예...... 그건 그렇고 당신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코우커에게 물어서 대충 짐작을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코우커는 살아 있었군요........ "예, 지금은 우리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사람이지요.“ 아이반은 식사 뒤에 브랜디를 마시면서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했다.   내일을 향한 출발   마이클 비들리의 그룹은 플로렌스 듀런트들과 헤어져서 틴셤장을 출발한 뒤 북동쪽으로 향해서 옥스퍼드셔로 들어갔다. 비민스터에는 들르지 않았고 그 고장의 이름을 입에 올린 사람도 없었다. 역시 듀런트는 코우커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비들리들은 어느 큰 저택을 찾아내어 들어가 살았으나 트리피드 대군의 습격을 받아 울타리의 보강이 주된 일이 되었다. 2년째의 여름, 비들리들은 와이트 섬으로 옮겼다. 여기에도 트리피드는 많이 있었으나 그것을 퇴치해 버리면 본토에서 새로운 것들이 습격해 올 염려는 없었다. 트리피드를 막는 데는 불보다도 물 쪽이 더 효과적이었다. 물론 매년 가을이 되면 트리피드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바다 위를 건너 섬으로 날아온다. 그 때문에 봄에는 전원이 온 섬 안을 돌아다니며 트리피드의 싹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뽑기로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비들리들은 겨우 공동체의 조직 만들기에 착수할 시간이 생겼다. 우선 섬의 농지를 갈아서 식량의 자급 자족을 꾀하고, 그 다음에는 유능한 동료를 늘리는 기준을 세웠다. 아이반은 헬리콥터를 타고 본토로 날아가 상공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작은 그룹을 발견하여 와이트 섬의 공동체에 합류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어떤 그룹은 합류했고, 어떤 그룹은 합류를 거절했다. 총을 쏘아서 아이반을 쫓아 버리는 그룹도 있었다. 그러나 1년 동안에 와이트 섬 공동체의 인원은 3백 명 가량으로 불어났다. 아이반이 코우커의 그룹을 만난 것은 겨우 한 달쯤 전이었다. 코우커는 나와 헤어져서 틴셤장으로 돌아갔으나 며칠 후에 런던에서 여자 두 명이 오면서 예의 전염병을 들여온 것이었다. 단시일에 병이 퍼져서 틴셤장의 사람들이 잇달아 쓰러 졌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전멸이다. 코우커는 건강한 사람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듀런트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병자를 돌보는 것이 자기 의무니까 그것을 끝내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뒤따라오지 않았다. 코우커들의 이동은 고생스러운 것이었다. 계속 병자가 생기므로 그것을 떨쳐 버리느라고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마지막에 데번셔에 이르렀다. 거기서 울타리를 치고 트리피드와 싸우면서 3년을 버티었다. 트리피드 퇴치에 시간과 노동력을 빼앗겨서 공동체의 조직 정비는 도무지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아이반의 헬리콥터가 나타난 것이었다. 코우커는 망설이지 않고 비들리들과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어선에 짐을 싣고 동지들을 이끌고 2주일 후에는 와이트 섬에 도착했다. "코우커는, 당신이 아마도 서섹스의 이 근방에 있을 터이니 즉시 찾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날아온 것이오.“ 아이반은 내 얼굴을 보았다. 지금 와이트 섬에서는 비들리가 중심이 되어 트리피드를 과학적으로 퇴치하는 방법을 발명하기 위해 연구반을 만들려는 중이었다. "코우커의 얘기로는, 당신은 트리피드 전문의 생물학자라지요? 와이트 섬에 와서 트리피드 퇴치의 리더가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비들리도 꼭 당신을 당신의 그룹과 함께 맞이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죠." 내 마음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 곧 아이반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갔다. 아이반이 탄 헬리콥터의 그림자가 남서쪽의 놀이 진 하늘로 사라진 뒤 나는 나의 생각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앞으로 이 농장에 남아 있으면 어찌 될 것인가? 조젤라와 메리에게는 또 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수잔에게도 남편과 아이를 낳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룹의 인원은 느는데 농작물의 생산은 뜻대로 오르지 않는다. 언젠가는 식량 때문에 곤란을 겪을 날이 올 것이다. 다른 물자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 맨 처음에는 연료, 그 다음에는 철사가 없어진다. 그 날이 오기를 울타리 밖에서 트리피드들이 기다리고 있다. 와이트 섬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셔닝 농장을 떠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눈물이 날 만큼 괴로운 일이었지만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와이트 섬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즉, 전략적인 후퇴인 셈이지요. 언젠가 또다시 돌아 올 거여요. 저 흉측한 트리피드를 모조리 싹 퇴치하고 우리의 땅을 되찾을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잠시 후퇴할 뿐인 거예요." 하고 조젤라는 말했다. 우리는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새로이 살 곳을 조사하기 위해 나는 와이트 섬으로 건너가서 코우커와 비들리들과 만난다. 이제까지 모아 놓았던 저장품과 살림살이를 몇 번에 나누어 새 집으로 나를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수잔이 말했다. "장작이 떨어졌어요.“ "좋아, 석탄을 가지러 가자. 와이트 섬으로 이사갈 때까지 땔 것만 있으면 된다.“ 나는 수잔과 함께 트럭으로 출발했다. 제일 가까운 철도의 석탄 하치장까지 15, 6킬로미터밖에 안 되지만 길의 일부가 파괴되어 있어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시간이 걸려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정원에는 이상한 모양의 차가 서 있었다. "뭐야, 이게?" 나는 차로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다. 군용 캐터필러 위에 트럭의 차체를 얹은 것으로서 전체의 느낌은 모터보트와 뚜껑 있는 트럭의 혼합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손님이 와 있군." 나는 수잔을 재촉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쥐색 스키복을 입은 남자가 넷 있었다. 그 중의 두 명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 곁의 방바닥에 경기관총을 놓아두고 있었다. "빌, 이분은 트랜스 씨여요. 우리에게 할 이야기가 있대요." 조젤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들 중의 하나가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였다. '그때의 그 남자가 아닌가!' 나는 섬뜩했다. 햄스티드에서 권총을 휘둘러 나의 패거리를 쫓아 낸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다행히 나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영국 남동 지방 임시 평의회의 행정 장관입니다. 이 지방의 인원 배치와 할당을 감독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서........" 붉은 머리의 트랜스는 거만하게 말을 꺼냈다. 평의회는 브라이튼에 지방 본부를 두고 각지에 살아남아 있는 그룹을 재편성하고 있었다. "1단위는 10명의 장님에다 눈뜬 사람이 하나, 거기에 아이가 있으면 함께 넣습니다. 여기는 상당히 좋은 장소니까 2단위를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명의 장님들을 다른 데서 데려다가 여기에 있는 세 명의 장님과 합쳐서 모두 20명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아이가 있으면 그만큼 인원이 늘게 됩니다.“ 트랜스는 나와 조젤라에게 셔닝 농장의 관리를 맡기고 수잔은 본부로 데려가서 다른 일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또한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트리피드를 쓰러뜨려 말려서 가루를 만들어 장님들에게 먹이라고 권했다. "그것은 가축 사료요." 내가 항의하자 트랜스는 웃었다. "장님은 가축보다도 못해요.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하오.“ 그리고 내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덧붙였다. "평의회의 방침에 따르면 이 농장의 사유권을 인정합니다. 처음의 6, 7년간은 고생스럽겠지만, 그러는 동안에 아이가 자라서 일을 하게 될 것이오. 즉, 당신은 많은 농노를 거느린 영주인 셈이지요." 이런 말을 눈이 안 보이는 데니스와 메리와 조이스 앞에서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정상이 아니다. 트랜스는 영국에다 새로운 봉건주의 사회를 세워 자기가 그 독재자가 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속이 뒤집히는 심정이었으나 대들지 않기로 했다. 상대에게는 두 자루의 경기관총과 두 자루의 권총이 있다. 게다가 트랜스는 사람을 벌레처럼 죽이는 남자였다. "자, 식사라도 하면서 그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나는 트랜스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하며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아 조젤라에게 귀띔을 했다. "제일 좋은 음식을 만들어요. 다같이 배불리 먹는 거요. 트랜스들에게는 제일 좋은 술을 실컷 마시게 하고. 식사가 끝나 갈 때쯤 난 잠깐 자리를 뜨겠소. 그것을 속이기 위해 레코드라도 틀어서 식당 안이 시끌벅적하게 하도록 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도 와이트 섬의 얘기나 들리 들의 일을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돼요." "알았어요.“ 조젤라는 씩 웃었다. 곧 떠들썩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트랜스들은 좋은 술을 마음껏 마시고 아주 기분이 유쾌해져 있었다. 나는 짬을 보아 식당에서 살짝 빠져 나왔다. 이삿짐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담요, 옷가지, 식량 등의 보따리를 차례차례 헛간의 반 캐터필러식 트럭에 실었다. 유조차에서 호스를 꺼내다가 트럭의 탱크에 가솔린을 가득 넣었다. 그러고 나서 트랜스들의 괴상한 차로 다가가 가솔린 탱크 안에 벌꿀을 한 통 들이부었다. 이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나는 시치미 뚝 떼고 파티 자리로 돌아가 모두와 함께 떠들었다. 2시간 후 트랜스와 세 명의 부하는 술에 곤드레가 되어 푹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조젤라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헛간으로 갔다. 달이 떠올라 희끄무레한 빛이 정원에 넘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밝은 정원으로 줄을 이어 나왔다. 브렌트 내외와 조이스가 선두였다. 세 사람 다 눈은 안 보이지만 자기 집 구조에 익숙해져서 손을 끌어 줄 필요가 없었다. 그 뒤에 조젤라와 수잔이 아이를 하나씩 안고 따랐다. 갑자기 데이비드가 잠결에 소리를 내었으므로 조젤라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조젤라와 데이비드를 조수석에 태우고, 다른 사람들은 뒷자리에 태우고 나서 운전석으로 기어올라가 후유 하고 한숨 돌렸다. 울타리 밖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트리피드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트럭의 엔진을 걸었다. 그리고 트랜스의 차를 피해서 한 바퀴 빙 돌아 속도를 내면서 대문을 향해 앞으로 돌진했다. 튼튼한 펜더가 우지직하고 대문을 쓰러뜨렸다. 이어 차체가 철망과 부러진 재목을 퉁겨 날리고 한 다스 이상의 트리피드를 치어 넘어뜨렸다. 들길의 앞쪽에서 다른 트리피드가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그 속을 빠져서 고갯길을 올라 셔닝 농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나는 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집의 창문에 불이 켜지고, 이상한 모양의 차에 불이 켜졌다. 시동 거는 소리가 드르릉거리기 시작했다. 붕붕 엔진 소리를 울리면서 캐터필러의 방향을 대문 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 돌아가기 전에 엔진이 '타앙.' 하고 소리를 내면서 섰다. 가솔린에 벌꿀을 섞은 탓이다. 스타터가 다시 드르릉거리기 시작했으나 엔진은 걸리지 않았다. 쓰러진 대문으로 트리피드의 행렬이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길게 휘청거리는 모습이 달빛과 헤드라이트가 섞인 밝음 속에서 으스스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지켜보았으면 충분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트럭의 앞쪽에 얽혀 붙은 것을 떼어내고 유리창의 독액을 닦아 내었다. 운전석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팔 속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나는 조젤라에게 키스하고 차를 출발시킨다. 언덕의 꼭대기를 몇 개나 넘어서 남서쪽의 해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일을 향한 출발이었다.   - 끝 - 작품 해설   인류의 파멸을 초래하는 과학 병기   A. 병기의 공포   과학 기술은 흔히 양날의 칼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선진국들은 공해 문제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목적으로 발달해 온 과학 기술이 자연 환경을 파괴하여 대기 오염과 해양 오염 등을 일으켜서 사람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선진 각국은 이제 공해의 무서움에 눈떠서 공해 방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공해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A병기와 B, C병기 등의 과학병기입니다. A(아토믹=원자)는 핵병기, B(바이올러지컬 =세균․생물학)는 생물 병기, C(케미컬=화학)는 화학 병기를 말합니다. 현재 핵병기를 가진 나라는 미국, 소련, 중공, 영국, 프랑스 5개국이며 그 양은 미국의 보유량만으로도 전 인류를 몰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나, "평화 유지를 위해서 핵병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자기 쪽에서 먼저 핵병기를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선제 공격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핵병기의 선제 공격을 받으면 언제라도 즉시 핵병기로 보복 공격을 할 수 있게끔 핵전략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미국은 소련의 핵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재빨리 알기 위해 알래스카, 캐나다 북부, 그린란드에 걸쳐서 경보 레이더망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한편, 대기권 밖에는 100개 이상의 스파이 위성이 쏘아 올려져 있습니다. 이들 스파이 위성은 레이더, 카메라, 전파 수신기, 적외선 ․ 자외선 ․ X선 탐지기 등을 갖추고 쉴 새 없이 소련과 중공의 영토를 계속 감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소련과 중공의 영토 내에서 핵미사일이 쏘아 올려지거나 소련의 위성 병기가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거나 하면 그 정보는 즉각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미국 전략 공군 사령부의 지하 전투 사령실로 보내집니다. 지하 전투 사령실에선 정보를 전자 계산기에 넣어 라는 것이 판명되면 즉각 전략 폭격기 부대에 출격 명령을 내립니다. B52를 주력으로 하는 전략 폭격기 부대는 수소 폭탄을 싣고 쉴 새 없이 상공을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전세계의 전략 공군 기지에 긴급 요격 준비 명령을 내리고 핵미사일 기지에는 발사 준비 태세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핵탄두를 단 미사일은 항상 소련과 중공의 군사 기지와 주요 도시 등을 목표로 조준이 되어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 ABM망의 미사일 요격 미사일 시스템이 적의 ICBM(대륙간 탄도탄)을 격파하기 위해서 발사 준비를 갖추고, 태평양, 북극해, 북해 등에 있는 원자력 잠수함이 핵미사일에 의한 보복 공격 준비에 착수합니다. 소련의 ICBM이 미국에 도달하는 데는 30분이 걸립니다. 그 전에 보복 공격을 행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10분간에 마치고 나머지 10분간에 발사 단추를 누르느냐 안 누르느냐, 하는 최종 결정을 대통령이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적의 핵병기가 선제 공격을 해 왔다는 정보가 잘못이었다 해도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없어 자동적으로 핵 전쟁에 돌입해 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몇 번 일어날 뻔했던 것입니다.   사고로 시작되는 핵 전쟁   SF에는 정보의 잘못이나 기계 미스 등의 사고로 원수폭 전쟁이 일어나서 인류가 전멸의 위험에 직면한다는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작가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는 영화화되어 유명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스콜피온 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에 입항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멜버른의 시가는 평화로우나 자세히 보니 자동차 대신 마차가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체념의 표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방사능을 쐬어서 죽을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몇 달 전 중동 분쟁이 일어났을 때 연합국이 아랍기를 소련기로 잘못 알아서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북반구의 모든 나라들이 수천 발의 핵폭탄에 의해 전멸하였습니다. 그래서 단 1척 남은 스콜피온 호가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로 피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기권 상공으로 날아올라간 죽음의 재는 계절풍을 타고 남반구에 운반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도 내리기 시작하여 전원이 죽을 날이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 후 시 당국은 시민들에게 자살용의 정제를 건네줍니다. 그러나 스콜피온 호의 승무원들은 어차피 죽을 것이면 고국인 미국 곁에 가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스콜피온 호는 조용히 멜버른에서 출항해 갑니다. 또한 유진 버틱과 하베이 월러 공저인 「페일 세이프」는 정보를 전하는 기계의 미스로 핵 전쟁이 시작되려고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미국 전략 폭격기 부대의 B47폭격기 여섯 대가 기계의 미스로 전면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미리 정해진 대로 소련 땅으로 향합니다. 전략 공군 사령부에선 이미 이 폭격기 부대를 불러 되돌아오게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워싱턴과 모스크바간의 직통 전화를 통해 소련 수상에게 이 사고를 통고하여 전략 폭격기 부대를 격추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소련 공군은 즉각 요격하여 2대를 격추하였으나 나머지 4대는 모스크바 상공에 이르러 수폭을 투하하였습니다. 이것을 안 미국 대통령은 미국 전략 공군에 명하여 스스로의 손으로 뉴욕에 수폭을 투하하여 미국 측에 적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SF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BC 병기의 공포   BC병기도 A병기와 함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C병기에서 유명한 것은 독가스이며 제 1차 세계 대전 때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이 새로운 강력한 독가스를 개발하여 아우슈비츠와 그 밖의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사용하였습니다. 현재도 각국은 화학전에 대비하여 C병기의 연구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독가스뿐만이 아닙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 공군이 정글에 숨어 있는 베트콩을 몰아 내기 위해 제초제 등의 농약을 뿌려서 수목을 말려 죽이는 작전을 썼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과 가축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B병기 쪽은 상당히 일찍부터 쓰여져 왔던 것 같습니다. 18세기에 프랑스군이 인디아에서 천연두 균이 묻은 손수건을 적진에 보내어 천연두를 유행시켰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균을 배양하여 사용하게 된 것은 제 1차 세계 대전부터입니다. 이 때 독일의 스파이가 병원균을 살포하여 연합군을 괴롭혔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일본, 독일 등의 각국이 세균 병기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대규모의 생물학 병기 연구 센터와 생산 공장이 있으며 그 실험 부대가 해외에 파견되어 있습니다.
1184    강철 도시 - 아이작 아시모프 Issac Asimov 지음 댓글:  조회:284  추천:0  2023-08-23
강철 도시 The Caves of Steel   아이작 아시모프 Issac Asimov 지음   아이작 아시모프 1920년 소련 태생. 과학자로서의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을 문학으로 결정된 우수한 작품이 많다.“은하 제국 흥망사", "우주의 작은 돌", "나는 로봇" 등   ◇ 편집 위원 ◇ 아동 문학가 이 원수․박홍근 문학 박사 최인학 공학 박사 양옥룡 이학 박사 김희규 전 교육감 김성묵   책머리에   로봇은 SF에서는 가장 잘 알려지고 인기가 있는 단골 손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역할이 별로 이렇다고 할 특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래 세계에서 인간과 기계의 대립이라는 일을 생각하고 착상된, 즉 로봇을 괴물처럼 표현한 SF만을 읽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로봇 소설을 읽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가장 본격적이고 완전한 로봇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리 소설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기계가 발달되면 인간은 언젠가는 결국 기계와 같이 살아가야 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이런 때 기계 쪽에서는 당연히 로봇이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즉, 로봇과 인간이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교환하는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협조하고 신뢰하며 살아갈 미래 세계는 반드시 공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로봇 소설에 대해 뭐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SF 독자들 사이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건 발생···················· 6 파트너····················· 11 패배의 역사·················· 16 로봇 반대 운동················· 20 손 님····················· 28 사건 분석··················· 34 퍼지는 소문·················· 45 우주시에···················· 50 베일리의 추리················· 60 패스톨프 박사의 설명·············· 71 수사 재개··················· 80 미행을 당하다················· 87 네가 범인이다················· 94 비어 있는 열선총··············· 104 제지벨이 지하 조직에············· 108 나타난 용의자················· 114 이스트 농장·················· 123 인간은 인간이다················ 133 로봇 살해 사건················ 139 동기는 어디에················· 149 누 명····················· 155 우주시의 결정················· 161 수수께끼는 풀리다··············· 173 우 정····················· 182 새로운 하루·················· 194   작품 해설··················· 199   등장 인물   일라이저 베일리 : 뉴욕 시경의 유능한 형사지만 곧고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출세하지 못한다. 엔더비 국장의 친구로서 오히려 이용당해 사표를 내야 할 궁지에 몰리지만, 실망하지 않고 끝내 사건을 해결하는 끈질긴 사람. 엔더비 국장 :뉴욕 시의 경찰 국장으로 다들 싫어하는 우주인과도 사귀는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빨리 출세한 사람으로 우주인 살해 사건을 베일리에게 맡긴다. 그러나 그는 베일리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니……. 다니엘 올리버 : 우주인이 정보용으로 인간과 똑같이 만든 로봇. 베일리의 파트너로서 사건 해결에 협조한다. 패스톨프 박사 :실질적으로 지구인을 도와주려고 하는 우주인 과학자. 베일리에게 지구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지구인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제지벨 : 베일리의 아내. 온건한 반 로봇 지하 조직에 가입한 것이 엔더비 국장에게 알려져 그에게 이용당하며 결국 베일리 제거 음모를 가능하게 한다.     사건 발생   일라이저 베일리는 자기 책상 앞까지 와서야 비로소 사미가 서 있는 것을 알았다. "무슨 용건인가?“ "베일리는 언짢은 얼굴을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국장님이 부르십니다. 베일리 형사님, 급한 일입니다.“ "알았네.“ 그러나 사미는 무표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알았다고 하잖나. 빨리 가봐!" 베일리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사미는 뒤로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빌어먹을! 어째서 이런 일을 인간이 해선 안 된단 말인가!) 그는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사무실 안을 가로질러서 문으로 갔다. 같은 사무실의 심프슨 형사가 말을 걸었다. "이거 참 기가 차군. 다리가 부러질 각오라면 저놈의 엉덩이를 마음껏 걷어차련만." "아아.“ "요전에 빈스를 만났네. 이스트 농장에서 운반 일을 하고 있다더군. 참 안 됐어. 로봇에게 일자릴 빼앗겼으니 무리도 아니지." 베일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냥 지나갔다. 시경 국장의 방 앞에 오자 자동문이 스스로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국장님?" 엔더비 국장은 얼굴을 들었다. 그는 낡고 둥그런 안경을 쓰고 있었다. 눈이 워낙 나빠서 콘택트 렌즈로는 안 된다고 본인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일리는 그 안경은 멋으로 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국장은 그냥 멋을 부리기 위해서 끼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엔더비 국장은 어쩐지 침착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을 숨기려는 듯 아주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거기 앉게나, 베일리 형사.“ 베일리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부인하고 아이들은 잘 있소?“ "예, 잘 있습니다.“ 그만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말았다. "어째서 그러나?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나?"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다만 잠깐 불쾌했을 뿐입니다. 난 사미가 무척 싫습니다.“ "자네의 기분은 잘 알겠네만 그는 명령에 따라 나한테로 왔으니 무엇엔가 써먹어야 되지 않겠나?" "용건이 끝나도 그냥 버티고 서 있으니 신경에 거슬리지 않습니까?" "아아, 그 일 말인가? 그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자네를 불러오라고만 해 놓고 용무가 끝나면 곧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미안하네." "인간이라면 그런 일은 걸대로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엔더비 국장은 화가 난 듯 잠자코 있었다. "용건은 무엇입니까?“ "귀찮은 일일세.“ 국장은 일어서 책상을 떠나 벽 쪽으로 걸어갔다.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스위치가 있었는지 갑자기 그 벽의 일부가 투명해졌다. 베일리는 뜻밖에 눈부신 광선의 홍수에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국장은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작년에 만들었지. 옛날엔 어느 방이나 반드시 이렇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네. 창이라고 했지.“ "알고 있습니다.“ 베일리는 역사 소설에 나왔던 일을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와서 보지 않겠나? 아주 진기한 경치일세." 베일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국장의 말대로 하였다. 국장은 옛날 것을 좋아했다. 쓸모도 없는 낡은 안경을 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러자 문득 그 안경에 신경이 쓰여졌다. "국장님, 안경을 바꾸셨군요?" 국장은 약간 놀란 듯이 베일리를 쳐다봤다. "눈썰미가 놀랍군. 사흘 전에 바꿨지. 먼저 것을 망가뜨려 버렸지. 이것저것 왜 그렇게 바쁜 일이 많은지 오늘 아침까지 안경을 낄 새도 없었어. 이 사흘 동안은 정말 지옥이었네." "안경 때문에요?“ "안경도 그렇지만 어떤 일 때문이었지. 이제 그 얘기를 하겠네." 국장은 다시 창 쪽으로 향했다. 베일리도 창을 쳐다보고 깜짝 놀랐다. 창 밖은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 멋진 물의 쇼를 황홀히 바라보고 있었다. "베일리, 정말 멋있지?" 베일리는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비가 오는 것을 본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아니 비 뿐만이 아니다. 바람도 하늘도 물론 태양도 보았다. "옛날에 사람들은 모두 밖에서 살았다네. 이 뉴욕에서도 말일세. 옛날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살고 있었어. 그 편이 훨씬 건강에도 좋았지." 베일리는 또 초조해졌다. 그러나 국장은 담담히 비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비가 와서 우주시가 보이지 않는군." "우주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우주시가 아주 근사하게 보인다네. 낮고 흰 조그만 돔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지. 우리들은 이 강철 도시에 모여서 살고 있지만 우주인들은 한 가족이 한 개의 돔 속에서 살고 있지. 베일리, 자네는 우주인하고 말해 본 일이 있나?" "예, 서너 번 있습니다 " "나는 항상 만나고 있지. 그 때마다 우리들하고 우주인하고의 생활 차이가 마음에 무척 걸리거든." 베일리는 화가 치밀었다. "새삼스럽게 그건 또 어째서 입니까? 지구에는 80억이나 되는 많은 인간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 강철 도시가 생겨난 게 아닙니까? 한 가족이 한 돔 속에 살 수 없다는 것은 국장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엔더비 국장은 잠자코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말을 꺼냈다. "사흘 전, 저기서 한 우주인이 죽었다네.“ 베일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건 안 됐군요. 또 유행성 감기입니까?" “아니, 그런 게 아냐!" 국장은 심각하게 말했다. 베일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주인은 자기의 행성에서 모든 전염병을 근절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없어져 감기에만 걸려도 맥없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지구에 온 우주인 중에 그렇게 죽은 사람이 몇몇인가 있었다. (감기가 아니라면……?) "그럼 무엇 때문에 죽은 겁니까?" "열선 총에 가슴을 맞아 죽었네." 베일리는 그만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파트너   "뭐라고요?“ "우주인이 살해당했단 말일세." 국장은 힘을 주어 말했다. "누가 왔습니까? 왜 죽였습니까?" "우주인들은 지구인의 소행이라고 하고 있다네." "그럴 리가 없어!" "어째서? 자네는 우주인을 무척 싫어하지? 하긴 나도 싫어해. 지구인은 모두 우주인을 싫어한단 말일세. 그러니까 동기는 충분하지, 다만 자네나 내가 죽이지 않았을 뿐이지." 엔더비 국장은 벽과 세계 지도를 가리켰다. "로스앤젤레스의 공업 지구에서는 우주인을 반대하는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파리에선 로봇 파괴 소동이, 상하이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경찰관들과 충돌하고 있다네.“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주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지하 조직을 만들어 계획적인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네." 베일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우주시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요!" "그렇지만 실제로 일어난 걸 어떻게 하나? 난 이 눈으로 직접 피해자를 봤네. 서튼 박사였네." "우주인 로봇 공학 박사가 아닙니까?" "그렇다네. 나는 그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장은 꼴깍 침을 삼켰다. "사건이 5분만 늦었어도 내가 시체를 발견할 뻔했어." "그래, 우주인은 뭐라고 합디까?" 베일리는 머릿속에서 우주인들이 당당히 주장한 억지 요구를 상상해 보았다. 터무니없는 배상금 요구가 아니면 군대를 지구에 주둔시킨다든가 하는……. "우리들의 손으로 이 사건을 해결해서 범인을 인도하라는 걸세.“ 베일리는 놀라서 국장을 바라보았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국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네는 아직 그 진의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 그래 이건 대단히 어려운 문제야. 과연 해결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단 말일세. 더욱이 해결이 안 될 때는 우리 전원이 파면 당할 우려가 있네." "그런 엉터리가……?“ "엉터리가 아니야. 우주인들은 지구인을 로봇으로 만드는 일을 진행시키려고 하고 있어. 이건 일종의 테스트일세. 만일 이 테스트에 합격되면 우리들의 전원이 로봇하고 바뀌어 버릴지도 모른단 말일세." "아니 저 사미 같은 바보 로봇이 우리 인간 대신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베일리는 무의식중에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국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사미는 아주 저급일세. 훨씬 고급인 로봇이 우주 도시에는 얼마든지 있다네. 만일에 우리들이 로봇 이하라고 평가되면 우주인은 가차없이 바꾸는 일을 단행할 걸세. 경찰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인간은 추방되겠지.“ 엔더비 국장은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 사건을 자네가 담당해 주기 바라네.“ "제가요?" "자네는 유능한 형사야. 자네라면 능히 할 수 있어. 만약에 이 사건을 해결한다면 자네를 C6급 경감으로 승진시키겠네. 그렇게 되고 싶지 않나?" "물론 그렇게 되고 싶지요.“ 그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경감이 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자동 주로(움직이는 도로)에서는 언제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며 자동 레스토랑(음식점)에서의 식사도 훨씬 고급이 되고 일광욕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실수를 하면 격하되는 겁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해 주겠나?" "왜 제가 뽑힌 겁니까? 그런 유리한 조건이라면 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엔더비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네. 하나는 자네가 친구이기 때문일세. 우리들은 대학의 동창생이었지.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입장은 바뀌어졌지만 나는 아직 자네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네. 또 하나는 친구로서 나의 청을 들어주었으면 해서일세." "어떤 일인데요?“ "우주인은 이 사건 수사에 지구인 형사와 우주인 형사를 파트너로 임명할 것을 요구해온 걸세." 베일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입체 텔레비전에서 본 저 친해지기 힘들고 거만해 보이는 우주인의 얼굴을 생각해냈다. 가장 싫어하는 우주인하고 짝을 짓는다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참아야지. "알았습니다. 해 보죠.“ "고맙네. 그리고 우주인을 자네의 집에 머무르게 해주게나." "우리 집에요? 그건 곤란합니다." "그것도 우주인 측의 요구 조건의 하나야. 그들은 지구인들의 생활 속에 어울려서 지구인을 이해하겠다고 하는 걸세. 거기다 방이 네 개가 있으니 얼마든지 유숙시킬 수 있지 않나?" "할 수 없군. 하기로 하죠." 베일리는 일어섰다. "그것뿐입니까?“ 국장은 말할까 말까 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베일리, 사실은…….” "뭡니까?” "그 우주인 말일세. 실은 그게, 그 이름이…….” "이름이 어쨌단 말입니까?“ "다니엘 올리버라고 하는 로봇일세." "로봇이라고요? 거절하겠소. 로봇을 파트너로 하고 집에다 재우기까지 하다니…….” "제발 부탁이네. 베일리, 우린 오랜 친구 사이가 아닌가?“ "싫소!" "C7급에 수사 과장으로 승진시키겠어.” "싫다니까!" 베일리는 크게 외쳤다. "내 밀 들어주게나. 베일리, 자리에게 부탁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 대개는 싫어하던가 무서워한단 말이야. 그렇지만 이 문제를 만약에 자네가 해결해 준다면 역시 인간이 로봇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이 되네. 말하자면, 자네는 우리들의 장래를 밝게 하느냐 못 하느냐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걸세. 더욱이 자네는 그 열쇠를 사용 할 수 있는 용기와 실력을 갖고 있단 말일세." 베일리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우주인, 아니 로봇은 언제 오는 겁니까?"   패배의 역사   고속 자동 주로는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감속 벨트로 옮겨가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속 벨트로 옮겨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주로는 거대한 아치 밑을 지나 다리를 건너서 강철 도시의 끝없는 미로 속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드높고 거대한 벽과 강에는 수많은 라이트가 번쩍이고 있었다. 베일리는 주로의 벨트에서 벨트로 옮겨 앞으로 자꾸 갔다. 강철 도시 안의 어린애들은 걸음마를 떼면 곧 자동 주로를 걷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는 금방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는 최고속 벨트에 이르러 멈춰 섰다. 우주시로 파트너를 마중 가는 길이었다. 벽에는 방향을 알리는 전광 문자가 자꾸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시를 가리키는 방향 지시는 아무 데도 없었다. 20년 전 처음으로 우주시가 건설되었을 때 시민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우주시 구경에 열을 올렸다. 그 이후 우주인들은 강철 도시와 우주시 사이에 강력한 에너지 스크린을 설치해 놓았다. 우주시에 들어오는 사람은 신분 증명서를 가지고 엄중한 신체 검사를 받고 정해진 검역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이 일은 굉장한 소동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우주인을 싫어하고 있는 시민들은 급기야 증오감이 폭발해서 우주시로 밀려들어갔다. 수십만 시민들이 우주시와의 경계선인 에너지 스크린 앞에 모여서 주먹을 쥐고, "우주인 돌아가라!" "우주로 돌아가라!" "지구를 내놓아라!" 하고 외쳐 댔다. 1세기 전에 우주인과의 싸움에서 그들의 놀라운 과학 병기 앞에 맥없이 전쟁에 진 이후로 쌓이고 쌓인 불만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던 것이었다. 강철 도시 안은 만 이틀 동안 폭풍의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결국 어쩔 수가 없었다. 에너지 스크린은 지구인의 기술로서는 절대로 파괴할 수 없었으며 가령 파괴했다고 해도 우주시에 들어가는 순간 모조리 전멸 당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더욱이 우주인은 대항하는 일도 없이 가만히 지구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경찰이 출동해 최면 가스를 써서 폭동을 진압했다. 몇 천 명의 시민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당시 아직 중학생이었던 베일리 자신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베일리는 고속 주로 안에서 그런 옛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앗? 핸드백이!" 갑자기 들리는 여인의 외치는 소리에 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한 여인이 속력이 다른 벨트에 핸드백을 떨어뜨린 것이다. 핸드백은 순식간에 멀어져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베일리는 고개를 저었다. (옛날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좀더 한가했었지. 길에 물건을 떨어뜨려도 곧 집을 수 있었는데…….) 베일리는 또 훨씬 옛날 이 뉴욕이 강철 동굴이 아닌 태양이 내리쬐고 바람이 불던 대자연 속의 도시였던 때를 상상해 보았다 그 때는 도로도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대개 한 집에 살던가, 아파트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뉴욕이 현재의 큰 돔 도시가 된 것은 약 200 년 전의 일이다. 그 무렵 지구는 80억으로 인구가 늘어나 폭발 직전에 있었다. 온 세계의 절반 가량이 굶주리고 있었다. 매년 수십만이라는 사람들이 굶어 죽고 가난과 공해와 각종 전염병들이 온 세계를 뒤덮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때까지 지구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던 우주 식민지들이 차례 차례로 독립을 해서 이민을 금지하던가,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계획된 것이 돔 도시인 것이었다. 돔 도시는 완전한 과학적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우선 중앙에는 관청 지구가, 그 주위에는 시민들이 사는 집단 주택 지구가, 그리고 그 변두리에는 자동 공장이며 농업 단지와 발전소들이 세워졌고 그 사이에 고속 주로와 통로를 만들었다. 학교, 상점가, 공원 등도 그 사이 사이에 정밀한 계획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 뉴욕의 인구는 이천만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세계에는 이런 돔 도시가 850개 정도 건설되었으며 그 평균 인구수는 천만 명이었다. 온 지구상의 인구 전부가 이 돔 도시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은 넓은 황야와 삼림과 그리고 하늘만이 계속 되고 있었다. 옛날에 있었던 무수한 도시며 거리며 마을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물론 황야도 하늘도 필요했다. 물이며 광물 자원이며 가축의 방목이며 식량의 재배 등은 역시 돔 밖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돔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은 로봇이었다. 인간이 자연 속에 나가 태양 광선을 직접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로봇은 야외의 노동력으로서 존재하면 충분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 꼴불견인 기계를 돔 도시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러한 일을 강요할 권리는 아무리 우주인이라고 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고속 주로는 우주시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베일리는 재빨리 움직여 차례차례 감속 벨트로 바꿔 타서 이윽고 거대한 문이 늘어선 홀 앞에서 주로를 내렸다. 그 앞에 한 우주인이 서 있었다.   로봇 반대 운동   그 우주인은 지구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허리께 에서 잘록 들어간 바지에 텍스트론 옷감의 셔츠에……. 그러나, 한눈에 우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마가 넓고 광대뼈가 두드러지며, 표정이 없는 그 얼굴에서도 또한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며 좋은 체격에서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그 우주인 앞으로 걸어갔다. "뉴욕 시 경찰국의 형사 일라이저 베일리입니다.“ 그는 신분 증명서를 제시했다. "여기서 다니엘 올리버라는 로봇하고 만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주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다니엘 올리버라는 로봇입니다.“ "뭐요? 그러나 그는 분명……?“ "그렇습니다. 나는 로봇입니다. 그 말은 못 들으셨습니까?“ "에, 듣고는 있었지만…….” 베일리는 충격에서 빨리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자네가 로봇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네. 우주시에 있는 로봇은 모두 자네 같은가?" "예, 제각기 개성을 갖고 있죠." "지구의 로봇은 한눈에 분간 할 수 있는 데, 자네는 아무리 봐도 우주인 같아.” "당신은 하급의 로봇을 생각하고 계셨군요. 나는 인간 속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사람답게 만들어진 로봇입니다." 베일리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고속 주로로 다시 되돌아왔다. 최고속 벨트를 타고 베일리는 힐끗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은 그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인간과 흡사한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말할 때도 완전히 자연스런 입놀림으로 혀나 이의 움직임까지 아주 훌륭했다. 베일리의 아파트에 가까운 182번 가까지 왔을 때 통로에 붙은 상점의 출입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무슨 일이요?” “글쎄요…….“ "저 상점에 더러운 로봇 자식이 있단 말이오. 이제 틀림없이 모두가 로봇을 끄집어내겠죠. 신이 나는데요. 나도 한몫 끼어 로봇을 때려 부셨으면 좋겠소." 또 한 사람이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베일리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군중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길을 비켜라, 경찰이다!" 군중이 길을 비켰다. "모두 때려 부숴라, 나사라는 나사는 모조리 떼어버려라!"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베일리는 흠칫했다. 로봇 반대 운동가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일부러 소동을 벌여 놓고 그 소란 속에서 로봇을 때려부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든 말리지 않으면 안 된다. 베일리는 힘차게 전파 도어 쪽으로 다가갔다. 도어는 닫혀 있었다. 상점의 지배인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꺼려 전파 도어를 닫아버린 것이다. 베일리는 형사 전용의 전자파 중화기를 써서 전파 도어를 통과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지배인이 달려 왔다. "형사님, 우리 집 로봇 점원은 시에서 배치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단 말입니다!" 상품 진열장 뒤에는 세 대의 로봇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안에는 여자만 여섯 명이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도대체 소동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한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는 구두를 사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사람이 손님을 대하지 않느냐 말입니다. 내 모습이 초라해서 그런가요? 왜 그러느냔 말입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라면 얼마든지 제가 모시겠습니다만 여섯 분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로봇 점원은 안 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분명히 보증서도 있으니까요.“ "도대체 보증서가 뭔데 이따위 더러운 로봇을!" 여인은 열을 올리며 말을 했다. "그뿐인가요? 로봇은 사람의 직장을 자꾸만 빼앗아가잖아요. 로봇은 기계니까 그저 일을 하지요.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이 실직해서 싸구려 아파트에서 맛도 없는 이스트(효모)죽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만약에 내가 장관이라면 이따위 로봇 같은 건 모조리 때려 부셔 버리지 절대로 놔두지 않겠습니다.“ "옳다. 옳아!" "때려 부셔라!" 전파 도어 밖에서 사람들이 또다시 떠들어댔다. 아까보다도 사람들의 수효는 훨씬 많아졌다. 베일리는 로봇 점원을 봤다. 간단한 일을 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허술한 로봇이었다. 구두 사이즈며 스타일, 가격 등을 외는데 있어서는 사람보다 정확하다. 그러나 서비스는 형편없다. 그는 돌연 죽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베일리 아버지는 핵 물리 학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일어나 아버지는 그 책임자로서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최하급 기술자로 떨어졌다. 그것은 그가 아직 한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일이었다. 소년 시절의 비참했던 생활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홧김에 술만 퍼마시다가 그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그는 누나와 함께 고아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배불리 먹어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마침내 그것을 참고 학교를 나와 형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기와 같은 운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무표정하게 얘기를 했다. “사건을 일으키는 건 삼가해 주시오. 아주머니, 로봇이 별로 나쁜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물론이죠. 그렇지만 난 저것들의 기름 묻은 손으로 상품을 만지는 건 딱 질색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난 시민권이 있는 당당한 시민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인간에게 상대해 달라고 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닌가요?" “예, 말씀 잘 알았습니다. 자, 이젠 그만 하시고 구두를 사 가지고 돌아가시지요.“ “어머, 당신은 인간인 주제에 로봇 편을 드는군요? 아니면, 당신도 차가운 로봇인가요?“ 베일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만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밖에서는 군중들이 더욱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사람의 수는 벌써 백 명을 넘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다니엘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들 두 사람으로는 벅찹니다. 기동대를 부르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지만 이건 법률적으로 옳은 일이므로 옳은 법률에 따르게 하는데는 그렇게 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지 않아.“ 다니엘은 지배인 쪽을 바라보았다. "전파 도어를 여시오.“ 지배인은 그만 울상이 되었다. “상점을 때려부수거나 상점이 손상되면 배상을 요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전파 도어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상점 안으로 와락 몰려들었다. 베일리는 폭도들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본 로봇 파괴 사건을 생각했다. 희생물이 된 로봇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끌어내려져 보도에 내동댕이쳐졌다. 폭도들은 금속성의 인조 인간을 도끼며, 동력 나이프며, 드릴 등으로 금새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그것과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려고 하고 있다. 군중이 차츰차츰 밀려들었다. 큰 목소리로 돌연 다니엘이 사람답지 않은 엄청나게 외쳤다. "멈춰 서!" 그리고 갑자기 훌쩍 진열대 위로 뛰어올라 열선 총을 뽑아 들고 겨누었다. “한 사람이라도 안으로 움직이는 놈은 쏜다.“ 사람들은 흠칫해서 멈춰 섰다. 그러나 금방 군중 속에서, "저놈을 해치워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해 봐라. 이건 마취 총도 아니고 신경 충격 총도 아니다. 맞기만 하면 틀림없이 죽는 열선 총이란 말이다. 협박으로 머리 위에 공포를 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신네들이 나를 잡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아마 당신네 거의 전부가 죽을 것이다. 자, 해 보시오.“ 군중이 술렁댔다. 뒤에 서성거리던 시민들은 서둘러 도망쳤다. 앞줄의 사람들은 밀려나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까의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난 죽는다 난 죽어! 난 아무 일도 안 했는데……” "빨리 날 나가게 해 쥐요. 빨리 빨리요!" 다니엘이 훌쩍 진열대에서 뛰어내렸다. "난 지금부터 문까지 걸어가겠다. 만일 조금이라도 내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은 남녀의 구별 없이 조금도 용서하기 않고 사살하겠다. 내가 문까지 걸어간 후에도 아직 상점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남김 없이 체포한다. 알았나?" 다니엘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베일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로봇이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만일에 저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게 되면 그 때는…….) 그러나 비명 소리도 고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베일리는 눈을 떠보았다. 폭도들은 뿔뿔이 도망치고 있었다. 멀리서 소동을 알린 패트롤카의 대열이 달려오고 있었다.   손 님   패트롤카가 도착했을 때는 모든 일이 정돈된 후였다. 베일리는 대수로운 일은 없다고 경관들을 돌려보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 베일리의 아파트로 향해 걸어갔다. "다니엘!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네." 베일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일 말입니까?" "무기로 사람을 협박하는 것 말일세. 너무 위험해.” 다니엘의 얼굴에 놀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잡아당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내게는 사람을 손상시킬 힘이 없어요.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방아쇠를 잡아당길 필요가 없었지요. 나는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답니다.“ "그건 운이 좋았을 뿐이야. 열선 총을 쏘지 않아도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 "말씀하시는 뜻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나도 열선 총을 휘둘러서 위협 할 수는 있었지. 그렇지만 만에 하나 될까 말까한 행운을 바랄 수는 없었어. 기동대를 불러서 진압시키는 것이 그런 모험보다 훨씬 좋았어." “내게는 계산이…… 지구인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있었지요." "그렇지만 만일에 자네가 로봇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으리라는 걸 압니다.“ "자네는 로봇이야. 밖으로 봐서 아무리 인간하고 꼭 같다고 해도 속살은 아까 구둣방에서 본 점원 로봇하고 조금도 다름없는 로봇이란 말이야!” 베일리는 그만 화가 치밀어 고함치고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건 물론이죠. 기계는 기계, 인간은 인간이니까요." 베일리는 할 말을 잃었다. (졌다. 난 로봇에게 졌단 말이다.) 그는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는 억지로 그 기분을 털어 버렸다. "자, 어서 집으로 가세." 이윽고 둘은 베일리가 살고 있는 집단 주택에 도착했다. 그는 공동 목욕탕 쪽으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렇군. 자네는 샤워를 할 필요가 없지. 곧 끝날 테니까 잠깐만 밖에서 기다리게.“ "몸을 씻는 겁니까?" "샤워를 하는 걸세.“ "그렇습니까? 저도 손이 더러워져서 손을 씻고 싶은데요."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살결이 붉은 피부는 도저히 인공적인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면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손을 씻으려면 집에도 세면 시설이 되어있으니까…….” "아니, 나는 하루 빨리 지구인의 생활 습관에 익숙해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여길 쓰겠습니다.“ "좋아, 따라오게.“ 공동 목욕탕 안은 비어 있었다. 그는 재빨리 빠른 어조로 다니엘에게 말했다. "주의해 두겠네만 안에선 누구하고 얘기를 하거나 남을 자꾸 보거나 하면 안 되네. 그게 욕탕에서의 습관이야.“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일반용인 공동 목욕탕을 지나 독탕으로 들어갔다. C5급 형사에게는 그 특권이 있었다. 샤워를 하고 새 내의와 세탁한 셔츠로 갈아입고 상쾌한 기분이 되어서 밖으로 나오자 먼저 나온 다니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욕탕에서 아파트까지는 불과 1,2분의 거리였다. 아내인 제지벨이 현관까지 마중 나왔다. "제지벨, 이 분은 나의 새로운 파트너인 다니엘 올리버 군이야.“ 제지벨과 다니엘은 서로 악수를 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마침 집에서 식사를 하는 날이에요. 당신들 식사는 어떻게 했죠?" 베일리는 흠칫했다.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물론 로봇이 식사를 할 리 만무했다. 여기서 섣불리 망설이다가는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것을 제지벨이 눈치 채리라. "아아, 다니엘군은 식사는 함께 하지 않기로 되어있어.“ 하고 재빨리 얼버무렸다. 이사벨은 아무 것도 이상해 하는 눈치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은 배급 제도가 되어 있어서 남의 집에서는 식사 대접을 받지 않는 것이 하나의 예의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실례하고 저녁을 들겠어요. 보통은 공동 취사장에서 식사를 하지만 전 집에서 하는 것을 좋아해요. 일 주일에 3일 밖에 안 되지만 전 그 날이 어떻게나 기다려지는지 몰라요.“ "쓸데없는 소린 그만 둬! 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란 말이야." 베일리는 어쩐지 자꾸만 초조해지고 신경이 곤두세워져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다니엘은 우주인들의 윤택하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알고 있었다. 자기들의 생활이 아주 초라해 보이리라고 생각하니 불쾌했다. 배급받은 인스턴트 식사의 겉 봉지를 풀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아들인 벤트리가 들어왔다. 베일리는 벤트리를 다니엘에게 소개했다. "아버지의 파트너군요. 두 분께서 저 구둣방의 소동을 진압하셨죠? 아주 멋있어요! 아버지, 그때 얘길 좀 해 주세요, 예?" 벤트리는 벌써 키도 베일리만큼이나 자랐고 어른이 다 됐다. "성가시게 굴지 말고 어서 저녁이나 먹어라." "오늘 저녁은 뭐죠? 에이, 또 효모 고기야?“ "효모 고기이라고 나쁠 게 어디 있어. 자, 툴툴거리지 말고 어서 저녁이나 먹어라." 베일리는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효모 고기와 단백질 야채는 확실히 영양 만점의 식품이다. 그러나 맛은 별로 좋지 않았다. "쳇, 효모 고기라니. 엄마, 아빠의 티켓으로 공동 취사장 밖에 가서 비프 스테이크를 좀 먹고 오면 안 돼요?" "안 돼!" 제지벨이 분명히 말했다. "벤, 엄마의 말을 들어라.“ 벤트리는 화가 난 듯 인스턴트 식사의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저쪽 방에서 말을 걸었다. "식사하시는 동안에 여기 있는 마이크로 북을 좀 보아도 괜찮습니까?“ "아아, 좋고 말고요.“ 벤트리가 탁자에서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다니엘 곁으로 갔다. "그건 학교 도서관에서 빌러온 것이에요. 이제 내 뷰어 (슬라이드를 보는 간단한 도구)를 꺼내 드릴게요. 아빠가 작년에 내 생일 선물로 사다 주신 건데, 성능이 참 좋아요 " 벤트리는 뷰어를 다니엘에게 가져갔다. "로봇에 관해서 흥미가 있나요?" 베일리는 그만 스푼을 떨어뜨리고 어물어물 다시 주워 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다니엘은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럼. 벤트리, 아주 대단하지." "그렇다면 그거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거기 있는 건 로봇에 관한 책이죠. 전 학교의 신문에 로봇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답니다 나는 로봇화 운동에 반대해요.“ "벤, 탁자로 돌아오너라. 다니엘씨에게 폐가 될라.“ "아뇨, 베일리. 그런데 벤, 그 얘긴 이 다음에 하기로 하자. 오늘밤은 아버지하고 일 관계로 매우 바쁘니까 말이야.” 벤트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로 돌아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사건 분석   제지벨과 벤트리는 식사 후 볼 일이 있다고 외출하고 베일리와 다니엘이 방안에 남았다. "자, 그럼 사건에 관해서 얘길 하세.“ "여긴 도청 (마이크로 폰 따위를 비밀 장치하여 남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거나 녹음하는 것)을 당한 우려가 없습니까?“ "어째서 그런 말을 하지? 여긴 도청 따위를 할 인간은 없어.“ "그렇지만 절대로 살인이 일어나지 않을 곳에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베일리는 그만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우주인다운 그런 말투는 그만 두게나.“ "신경에 거슬렸으면 미안합니다. 베일리.“ "그건 아무래도 좋아……. 이 아파트는 충분한 방음 장치가 되어 있어. 하여튼 시작하기로 하세." 그는 말을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부터 말하지. 그것은 행성 오로라의 시민으로서 우주시에 살고 있던 서튼 박사라는 우주인이 살해되었다. 그런데 우주인 측에서는 이것은 지구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얘길세.“ "옳습니다.“ "우주인들은 이 사건을 최근 일어나고 있는 우주인 반대 운동의 상징이라고 보고 있는 걸세. 서튼 박사는 우주인이 추진하고 있는 지구 로봇화 정착의 최고 책임자란 말이네. 박사를 죽인 것은 지구인의 반 로봇주의 단체가 틀림없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어쩌면 미친 사람의 소행일는지도 알 수 없지." "반 로봇주의를 내거는 단체는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단체의 사람들은 우주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알고 있을 것이야. 따라서 이 범죄는 그런 상식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미친 사람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을 것 같군." "그러나, 베일리! 우주시로 스며들어 정확히 서튼 박사를 살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미친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꽤 커다란 조직이 면밀히 계획을 세운 다음에 범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이 말을 계속했다. “그 우주시가 건설되었을 때 우주인은 지구인이 마땅히 로봇 문화를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로봇을 파괴하거나 해서 로봇 문화를 반대했습니다.“ "그건 지구인의 자유에 속하지." 베일리는 또 화가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지구인들이 로봇 문화를 받아들여서 인간과 기계가 진정으로 협력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였을 때에는 은하 우주 전체에 이익이 된다고 우주시의 모든 우주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 국가 연합 중에서는 여기에 대한 심한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베일리는 몰랐다. “뭐라고? 우주인들 사이에도 의견이 틀리는 수가 있나?" "물론 있지요. 반대하는 우주 국가들은 지구가 새로운 세계가 되면 대단히 위험한 세력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필경 또다시 침략 전쟁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하는 거죠. 이런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은 옛날 지구의 식민지였던 우주 국가들이죠." "천 년이나 전의 얘긴데. 그런 아주 옛날 일을 구실로 또 지구를 괴롭힐 작정인가?" "지구의 인구는 80억이나 되는데 비해 50개나 되는 우주 국가의 인구는 겨우 55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주 비행의 수단을 모두 빼앗긴 현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베일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니엘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서튼 박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구에는 로봇 문명이 절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진 분입니다. 그렇지만 박사는 다만 로봇화를 강요하기만 하면 안 된다. 좀더 지구인들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별 대우를 철폐하고 우리 우주인들이 지구인 속으로 파고 들어가 지구인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그 습관이며 사고 방식을 이해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따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베일리는 코웃음을 쳤다. "예,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다니엘이 끄덕였다. "그렇게 주장한 서튼 박사 자신도 혼자서 지구의 도시로 들어올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주인과 꼭 같은 몸의 구조를 한 로봇을 지구의 도시로 보내 지구인의 생활을 관찰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베일리는 금방 알아차리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랬었군……. 즉, 자네가 그 로봇이었군." "그렇습니다. 나의 얼굴이며 몸은 서튼 박사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우주인 중에서는 저를 서튼 박사로 잘못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베일리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진짜 서튼 박사는 벌써 죽어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데 그 서튼 박사하고 똑 닮은 로봇은 이렇게 살아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박사는 I년 전부터 나를 설계하고 조립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주장하는 씨에프 문명 추진용 로봇이랍니다.“ "C, Fe 문명이라니?" "씨(C), 에프이(Fe), 즉 탄소와 철의 화학 기호를 말합니다. 탄소는 인간의 생명의 근본이요. 철은 로봇 생명의 근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과 로봇이 손을 맞잡고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명을 말하는 겁니다." "옳아!" 베일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어느 정도 상황을 알겠군. 즉 서튼 박사는 그 시 에프이 문명을 지구에 이룩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그것을 알아낸 지구인의 로봇 주의 반대 단체가 그것을 막기 위해서 박사를 죽여버렸다. 이런 얘기로군 그래?" "예. 맞습니다.“ "이론은 그럴 듯 하네만 사실하고는 전혀 들어맞질 않네.“ "어째서요? 베일리.“ "지구인이 우주시 안으로 스며들어가 서튼 박사를 만나서 열선 총으로 쏴 죽이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우주시의 입구가 그렇게 간단히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은 자네가 가장 잘 알고있지 않나.“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지구인이 우주시의 입구로부터 남 몰래 출입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겠지요.“ "그렇다면 지구인은 지구인일 수 없네." "그렇지요. 만약에 우주시의 출입구가 그곳 하나뿐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베일리는 눈을 깜박이며,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일세. 출입구는 그곳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출입구는 분명히 그 곳 하나뿐입니다. 그렇지만 이 강철 도시나 우주시는 주위의 넓은 들판을 통해서 몇 개씩 출입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출입구 중의 하나로 나가 넓은 들판을 횡단하고 우주시의 돔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들판을 횡단한다?“ 베일리는 깜짝 놀라 입술이 일그러지고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죠." "혼자서 말인가?“ "물론, 혼자서죠.“ "그럼, 걸어서?“ "십중팔구 그랬을 테죠.“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릴! 지구인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어. 도시를 빠져나가 혼자서 넓은 들판을 걸어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보통 때라면 그렇겠지요. 우주인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인들도 그곳 출입구만을 단속했던 것입니다. 지구인들은 지난 번 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도시를 나섰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기 때문에 범인들은 그 허점을 찔러 본 겁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해서 훌륭히 성공한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못할 일은 없으니까." 베일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 "엔더비 국장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국장이?“ "국장은 범행 시간과 거의 동시에 현장에 도착해서……." "그건 알고 있네. ""국장님은 서튼 박사하고 줄곧 협력해 오셨습니다. 나를 이 강철 도시로 데려오는 계획에도 여러 가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장님도 아마 충격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도 역시 범인이 들판을 지나왔다는 추리에는 반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만일을 위해서 모든 출입구를 조사하는 일에는 동의하셨습니다.“ "그래 조사를 해봤나?“ "물론 했지요. 베일리, 당신은 그런 출입구가 몇 개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한 스무 개쯤 될까?"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백 두 개나 있습니다.“ "정말인가 그게?“ 다니엘은 끄덕였다, "전에는 더 있었죠, 강철 도시는 옛날엔 들판에 대해서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었지요. 그 무렵 시민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들판으로 나갈 수 있었지요." "알고 있네, 그런 것쯤은. 그것보다도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나?“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죠. 모든 출입구는 아무도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범인이 그 중 어느 출입구로 나갔다고 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밖에 무슨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나? 흉기는 물론 없었을 테지?" "물론입니다. 단서가 될 만한 짓은 하나도 없었죠. 들판에는 일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목격자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렇겠군. 그래서?“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써서 수사하기로 했습니다. 즉 강철 도시 안의 반 로봇 운동가의 모임을 철저히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곳으로 오게 된 거죠.“ 다니엘은 지긋이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우리는 당신에 관해서도 자세히 조사했지요. 그 결과 로봇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죠." "그래서 나쁜가? 그렇다면 딴 형사를 파트너로 하게." 베일리는 불쾌했다. "아니요. 인간은 제각기 자기의 의견을 가지고 있지요. 당신은 개인으로선 로봇을 싫어해도 의무가 맡겨지면 로봇하고 협력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지요. 당신은 임무와 법률에는 대단히 충실합니다. 그러니까 더욱 국장님은 당신을 추천했을 겁니다." "내가 로봇을 싫어해도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나?" "임무에 지장이 없는 한 그런 건 별로 문제가 안 됩니다." 베일리는 무시당한 것 같아서 따지고 들었다. "내가 테스트에 합격된 것이라면 이번엔 너의 차례다. 자넨 어떻게 해서 이 임무를 맡았나?" "나는 본시 정보 기록용으로 설계된 겁니다. 그리니까 범죄를 수사하는 데는 가장 안성맞춤이죠." "정보를 모으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아.“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 전자 두뇌에는 특별한 회로를 붙였답니다.“ "그게 어떤 회론데?" "정의를 요망하는 회로입니다.“ "정의? 로봇이 정의를 알게 뭐람!" 베일리는 무의식중에 큰 소리를 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주 침착했다. "알 것 같습니다. 내게 있어서 정의란 법률을 지키는 일입니다. 법률에 위반되는 살인 같은 범죄를 방지하고 살인자에게 벌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벌은 인간에게 있어서나 로봇에게 있어서나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지! 인간에 있어서의 정의와 로봇에 있어서의 정의는……." 돌연 다니엘이 손을 들어 베일리를 저지하고 문 쪽을 가리켰다. "누군가 도어 쪽에 있소." 문이 열리고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제지벨이었다. 제지벨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방음 장치가 되어 있으니까 지금 얘기를 들었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제지벨은 뚜벅뚜벅 다니엘의 앞으로 다가가서 들릴까말까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다니엘 올리버……. 당신은 정말 로봇인가요?" 다니엘은 조용한 말씨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주머니, 나는 우주시에서 온 로봇입니다.   퍼지는 소문   그 날 밤 베일리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제지벨도 잠이 오지 않는지 몸을 엎치락 뒤치락거리고 있었다. "당신 아직 자고 있지 않으면 얘기 좀 할까?" 베일리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세요.“ "어떻게 해서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걸 알게 됐소?" 그러자 제지벨은 갑자기 겁을 먹은 표정이 되어 다니엘이 머물고 있는 땅 쪽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들리지 않을까요?" "작은 목소리면 괜찮아." "그렇지만 알 수 없어요. 우주인의 로봇은 어떤 소리라도 들리는 특별한 귀를 달고 있다고 하던데요.“ 베일리도 그런 소문은 듣고 있었다. "눈은 강력한 비디오 카메라로서 적외선 카메라처럼 밤중에도 물건을 볼 수 있으며, 전파를 수신하고 발신하는 장치까지 구비되어 있다고 하던데요." 그러나 베일리는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은 틀려. 그는 어떤 목적을 위해 인간과 똑같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하고 같은 감각 밖에 없단 말이야.“ 제지벨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베일리! 저 무서워요.“ "다니엘 말이오? 그런 일은 없어. 그는 절대로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니까. 그것은 당신도 알고있을 텐데?“ "아니어요, 기분이 나빠요.“ 제지벨은 베일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를 쫓아버릴 수는 없어요?" "그런 짓은 할 수 없지. 임무니까." "어떤 임무란 말인가요?" 베일리는 엄한 눈초리로 제지벨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임무에 대해서 얘기를 한 수 없다는 것쯤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임무는 혹시 엔더비 국장에게 명령받은 것이죠? 어째서 그 사람은 당신에게 언짢은 일만 시키는 거죠? 그 사람은 당신 친구죠?" 베일리는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엔더비 국장은 대학에서 베일리의 2년 선배였다. 두 사람은 그 때부터 친구가 되었다. 그가 경찰에 들어갔을 때 엔더비는 이미 민완 형사로 날리고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의 차이는 계속 벌어지기만 했다. 엔더비는 사람들과 부드럽게 교제하는 재능이 있었고, 베일리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엔더비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우주인조차도 사이좋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가 시경 국장이 된 것도 우주인이 그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베일리는 아직 C5급 형사인 것이다. 그렇지만 엔더비는 지금까지도 베일리를 친구로 대해 주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성공시키기로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 주었고, 이번 일을 담당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보, 경찰을 그만 둘 수는 없을까요?" 갑자기 제지벨이 말했다. "별 소릴 다 하는군. 왜?" "그만 두면 저 로봇하고 인연을 끊을 수 있잖아요.“ "지금 한창 중요한 사건을 맡고 있을 때 그만 둘 수는 없지. 그리고 그따위 행동을 하면 지금 당장에 파면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러면 무서워서 그만 두지 못한단 말이네요? 다른 직업으로 새 출발하면 되잖아요." "파면을 당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써주질 않아. 그렇게 되면 당신과 벤트리도 지금까지의 모든 자격을 박탈당하고 마는 거야." "그런 건 하나도 무섭지 않다니까요." 베일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제지벨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이 강철 도시 속에서 파면을 당해 실업자가 된 사람과 그 가족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이 됐는가를. 나는 가족들을 절대로 그렇게는 만들 수가 없다.) "그런데 아까 물어볼 얘긴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문득 로봇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어요." "그럴 리가 없어. 아까 외출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어. 밖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게 분명해. 그렇지?" 제지벨은 우물쭈물하고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 안 그래?“ "저, 사실은 공동 목욕탕에서 모두가 얘기하고 있었어요. 여자들이 찧고 까불고 하는 것은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어떤 얘기였는데?“ "우주인 로봇이 이 뉴욕 시에 들어왔다는 얘기였죠. 그 로봇은 언뜻 봐서는 사람하고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경찰의 일을 돕고 있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전 다니엘이 언젠가 본 입체 영화 속의 우주인하고 꼭 닮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틀림없다고 생각했죠.“ "그랬었군……." "저, 무서워요.“ "괜찮다니까!" "아니, 폭동 말이에요. 어쩌면 우리들이 살해될 지도 몰라요. 집안에 우주인 로봇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그런 소문이 퍼져서. 뉴욕에 폭동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던데요." "그런 소문도 있나?" "예, 저 구둣방 사건 같은 것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서 그것이 이윽고……." 제지벨이 갑자기 몸서리쳤다. "그렇지만 다니엘이 그 로봇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해. 우리들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말야." "하지만 누군가가 눈치챌는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런 일은 없어. 자,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 베일리는 암담한 기분으로 검은 천장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이윽고 제지벨은 천천히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베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가슴속에는 한 가지 사건의 해결 방법이 차츰 형태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사건의 해결의 열쇠는 뜻밖에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리고 베일리는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우뚝 일어나서 어둠 속을 발소리를 죽이고 살며시 옆방으로 다가갔다. 도어 앞에 서서 가만히 열었다. 희미하게 방안이 보였다. 그러나 다니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랬군!) 그는 가슴속에서 외쳤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신경을 곤두세우고 생각을 했다. (자아, 어떻게 사건을 해결한다?)     우주시에 다음 날 베일리는 다니엘을 데리고 시경으로 갔다. 시경 안을 구경하고 싶다는 다니엘을 부하 직원에게 맡기고 베일리는 국장을 만났다. "지금 우주시에 갔다 오겠습니다.“ "우주시라고?“ 국장은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살인 현장도 봐야 되겠고 또 현장을 본 우주인에게 한두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가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걸세. 베일리, 현장 조사는 이미 끝난 걸." 국장은 몹시 불안한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우주인이란 항상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참 대면하기 힘든 족속일세. 나도 참으려면 여간한 인내가 필요한 게 아닌데, 자네에겐 아주 무리야." "그렇지만 난 내 신념대로 하고 싶소. 그렇게 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이 일을 그만 두겠오." "그런 억지는 말게. 나는 다만 우주인을 상대로 할 때는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럼 국장님께서도 함께 가 주시렵니까?" 국장은 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난 갈 수 없네." 그리고 변명하듯이 말했다. "밀린 일이 산더미같이 많아 갈 시간이 없군 그래.“ 베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주시에서 텔레비전 전화를 걸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와 주시겠죠?" 국장은 조금 우물쭈물하더니 마침내 할 수 없다는 듯이 끄덕였다. "아아, 좋아. 베일리, 언제고 걸어 주게." 베일리는 국장실을 나오자마자 다니엘을 불러 함께 우주시로 향했다. 우주시까지는 지하 차도로 해서 패트롤카를 타고 갔다. 지하 차도는 경찰차나 소방차나 구급차 및 특히 급한 화물 자동차 등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이었다. 우주시의 출입구에 이미 연락이 되어 있었던지 경비하는 우주인이 그들을 겸손히 맞이하여 주었다. 경비원이 베일리에게 다가와서 경례를 했다. "신분 증명서를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베일리는 증명서를 건네주며 경비원의 코에 바이러스 방지의 필터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경비원은 신원 증명서를 돌려주며, "여기 샤워실이 있으니까 사양 마시고 쓰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베일리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다니엘이 가만히 팔을 잡아 당겼다. "지구인이 우주시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샤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베일리는 또 창피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만약 거절하면 우주시에 들어 갈 수가 없다. 샤워실로 들어서니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오존 냄새인 것 같았다. 앞 벽에 전광 문자가 빛났다.   입장한 사람은 옷(구두를 포함함)을 벗어 아래 용기에 넣을 것.   베일리는 지시에 따랐다. 그러나 열선 총을 떼 놓을 수가 없는 일이라서 벨트를 벌거벗은 몸에 찼다. 묵직하고 차가운 것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용기가 벽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입장한 사람은 눈을 곧바로 위로 올리고 발은 표지가 있는 곳에 올려놓을 것.   다음 지시가 계속 나왔다. 그 지시에 따르며 베일리는 자신이 마치 회전 벨트의 작업대 위에 실린 부분품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천장과 방바닥에서 또 주위의 바람벽에서 세차게 물이 쏟아져 내렸다. 뜨거운 물로 전신이 완전히 씻겨지자 별안간 차가운 물로 바뀌었다. 일 분 가량 지나자 샤워가 멎고 따뜻한 공기가 보내져서 온몸을 건조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샤워실을 나왔다. 마침 옆 샤워실에서 다니엘이 나오고 있었다. (로봇이 샤워를 다 한단 말인가!) 물론 로봇도 강철 도시 안에서 먼지를 쓰고 왔으니까 몸을 씻는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한 것은 없지만 그러나……? 다니엘의 발가벗은 몸은 구석구석까지 전체가 다 사람하고 똑 같았다. 베일리는 자기가 아까 벗어 놓은 옷이 깨끗하게 세탁되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 지시가 나왔다.   입장한 사람은 옷을 입고 지정한 곳에 한 손을 올려놓을 것.   옷을 입자, 그대로 했다. 순간 가운데 손가락이 따끔하고 아팠다. 황급히 손을 들어 보니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피검사를 한 것이다. (우주시에서는 지구인을 철저히 신체 검사를 하고 난 뒤가 아니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군.) 이윽고 또 지시문이 바뀌었다.   입장한 사람은 앞으로 나가 아치를 지나갈 것.   베일리는 아치를 지나가려는 순간 돌연 양쪽에서 두 개의 금속 막대가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전광 사인이 빨간 불로 반짝이고 있었다.   입장한 사람의 전진을 금지한다.   "뭐라고! 별 터무니없는 소릴 다 듣겠군!“ 베일리는 화가 치밀었다. 다니엘이 저쪽 통로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무기를 가지고 있긴 때문입니다. 베일리, 우주시에 들어가려면 총을 놓고 가야 합니다.“ 베일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으며 열선 총과 벨트를 풀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참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그는 자기 스스로 타일렀다. "벽에 총을 세우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총을 세우십시오.“ 열선 총을 세우자 그곳이 찰칵하고 닫혔다.   가운데 표시가 있는 곳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십시오. 전자 장치로 되어 있으므로 당신의 엄지손가락이 아니면 열리지 않습니다.   베일리는 하는 수 없이 또다시 게시판의 지시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단. 그러자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양쪽으로 쑤욱 들어갔다. 통로로 들어서자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은 어딘가 모르게 지금까지의 공기와는 전혀 틀리는 것 같았다. "밖의 공기랍니다. 인공 조절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공기 말입니다.“ 다니엘이 설명해 주었다. 베일리는 기분이 나빴다. (자연의 공기……? 지구인이 도시로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경계하는 우주인이 이상한 짓도 다 하는군.) 그는 가능한 한 그 공기를 마시지 않으려고 숨을 억제했다. "염려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밖의 공기는 건강을 위해 좋은 거니까요." (로봇이 건방지게 인간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베일리는 마음 속에서 혼자 외쳤다. 그러나 그 마음도 통로에서 한 발 앞으로 들어서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거기는 밖이었다. 주위는 가슴을 부풀어오르게 하는 싱싱함과 푸르름이 무성했고 그 위로는 강렬하고 밝은 햇빛이 눈부시게 내려 쪼이고 있었다. 베일리는 물론 햇빛을 본 일은 있었다. 그것은 일광욕장에 갔을 때였다. 그러나 일광욕장은 보호 유리로 차단되어 있으므로, 직접 햇빛 자체는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두가 자연 그대로였다. 그는 눈부신 햇빛을 쳐다보았다. 몸이 비틀거려지며 눈물이 났다.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뒤로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쪽입니다.“ 다니엘이 슬그머니 베일리의 팔을 잡고 한 돔 앞으로 인도해 주었다. 돔 앞에 한 우주인이 서 있다가," 어서 오십시오. 베일리 형사. 나는 요한 패스톨프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돔 안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베일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돔 안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깨끗했는데 회의장 같았다. 공기도 조명도 인공 조절이 되어 있었다. "어떻습니까? 기운을 좀 차리셨습니까?“ "아, 괜찮습니다. 패스톨프 박사님.“ "패스톨프 박사는 이마에 많은 주름이 있고, 눈 밑이며 턱의 피부가 축 늘어지고, 머리카락도 성긴 것이 아주 늙은이로 보였다. "자, 과일을 좀 드십시오.“ 패스톨프 박사가 말을 하며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베일리는 놀랐다. 거기에는 분명히 유리 용기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타원형의 구슬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장식물로만 알았던 것이다. "이건 행성 오로라에서 열리는 천연 과일입니다. 사과라고 하는 아주 맛이 있는 것이랍니다.“ 다니엘이 설명하자 패스톨프 박사가 미소지었다․ "다니엘은 물론 먹을 수는 없지만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정말 맛이 있으니 어서 하나 드십시오." 베일리는 머뭇거리며 사과를 한 개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동그스름하고 초록색의 윤택이 나는 과일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다. 한 입 깨물어보니 시고 달콤한 자극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싱그러운 맛이었지만 그렇게 좋은 맛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강철 도시의 시민들도 룰론 자연의 것을 먹을 때가 있었다. 고기도, 빵도, 야채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반드시 가공되어 있다. 꼭 살균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일은 소스라든가 쨈이며 케첩의 재료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흙에서 자란 것을 그대로 먹는다니, 무척 야만적인 습관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몸 속에 박테리아가 퍼져 와글와글 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바로 서튼 박사 살해 사건 수사 책임자요. 바로 엔더비 국장님과 같은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내게 요구하실 것이 있다면 서슴지 마시고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나는 이 사건을 한시라도 빨리 해결을 해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패스톨프 박사의 말은 무척 정중했다. 베일리도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이 회의에 엔더비 국장께서도 텔레비전으로 참가하시길 원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 좋습니다. 그럼 다니엘, 스위치를 넣어라." 이윽고 한쪽 벽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자마자 거기에 시경 국장실이,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엔더비 국장의 상반신이 비쳐지기 시작했다. 베일리는 패스톨프 박사하고 다니엘을 바라보며 마음을 든든히 먹고 배에 힘을 주어 말을 꺼냈다. "그러면 지금부터 서튼 박사 살해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뭐라고!" 스크린 속의 엔더비 국장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안경이 벗겨져 책상 위에 떨어졌다. 패스톨프 박사도 놀랐던지 움찔했다. 다니엘만이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베일리 형사, 당신은 벌써 범인을 발견했다는 겁니까?“ 패스톨프 박사가 불었다. "아뇨.“ 베일리는 박사를 정면으로 똑바로 보면서 똑똑하게 말을 했다. "나는 살인 사건이란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베일리,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국장이 고함을 쳤다. "잠깐만 국장님.“ 패스톨프 박사가 스크린을 향해 말해 놓고는 베일리를 향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서튼 박사가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어디에?“ "바로 여기에!" 베일리는 아주 침착하게 앉아 있는 다니엘을 가리켰다.   베일리의 추리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안은 무서우리만큼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엔더비 국장이었다. "베일리, 자네가 하는 말은 엄청나게 틀린 말이야. 나는 서튼 박사의 시체를 이 눈으로 직접 봤단 말일세.“ 베일리는 고개를 저었다. "국장님은 서튼 박사의 시체라고 하는 시커멓게 탄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아니, 아니지, 베일리.“ 국장은 허둥지둥 침착성을 잃고 안경에 손을 대며 말했다. "나는 서튼 박사를 잘 알고 있었다네. 그런데 그는 가슴을 맞아서 얼굴은 그대로 있었어. 틀림없는 박사였다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누구죠?" 베일리는 싹 돌아서며 다니엘에게 손가락질했다. "서튼 박사 그대로죠?" "그건 썩 잘 닮았지……. 그렇지만 그의 동상처럼 보일 뿐일세." "무표정한 얼굴이나 로봇다운 말투며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시체를 가까이서 보았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당신은 새까맣게 타버린 그 시체가 산 사람의 것인지 아니면 플라스틱의 가짜였는지 똑똑히 구별할 만큼 확실하게 보셨습니까?“ 엔더비 국장은 화가 치민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여보게 베일리, 나도 경찰관일세. 시체하고 가짜하고 구별을 못할 것 같은가?" "우주인의 기술로는 그 정도의 일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베일리는 이번에는 패스톨프 박사를 향해 말했다. "시체를 해부하는데 동의하십니까?" 패스톨프 박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유감스럽게도 유해는 이미 화장을 해 버렸소." "그건 아주 편리하게 됐군요." "베일리 형사, 왜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 추리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베일리는,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오. 당신네들은 너무 로봇하고 항상 가깝게 지내서 로봇하고 인간하고의 미묘한 차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지구인은 로봇에 대해 대단히 신경질적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미묘한 차이라도 곧 알아차립니다.“ 하고 말하면서 다니엘을 보았다. "첫째, 다니엘은 로봇치고는 너무나 인간을 닮았습니다. 나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우주인이라고 믿어 버렸으니까요.“ "그것은 앞서도 설명을 했소. 베일리, 나는 인간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특별히 인간답게 설계된 로봇입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꼭 같아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을 테지요." "그렇지만 보통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일부러 인간하고 꼭 같게 할 필요가 어디 있나? 난 공동 목욕탕에서 자네의 몸을 구석구석 잘 보았네." "인간답게 하기 위해서는 꼭 닮게 해야 하기 때문에 다니엘에게는 인간의 모든 부분을 만들어 준겁니다.“ 패스톨프 박사가 설명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꽁무니를 빼려고 해도 안 될 일이 또 한 가지 있소." 베일리는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며 말을 했다. "처음 우주시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구둣방에서 폭동이 일어나려고 했지요. 그 때 그는 군중에게 열선 총을 겨누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다 쏴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베일리, 자네는 보고 할 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잖나?" 하고 국장이 추궁하자 베일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옳습니다. 나는 로봇이 인간에게 무기를 겨누었다는 것은 보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숨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국장이 신음을 하듯 말했다. "로봇 공학 제 1원칙에 '로봇은 인간에게 위험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인의 세계에서도 같지요?" 베일리는 패스톨프 박사에게 물어보았다. "물론이지요. 그렇지만 다니엘은 인간을 손상하지 않았소.“ "그것은 결과가 그렇게 되었을 따름이죠. 아무리 사람을 손상시킬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사람을 손상시키게 될지도 모르는, 말하자면 로봇 공학 제 1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로봇이 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로봇 공학의 전문가인가요?“ "아닙니다.“ "나는 로봇 공학자요. 아시겠습니까? 베일리 형사, 단순한 일만 하는 로봇은 물론 무기로 사람을 위협하거나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처럼 아주 고도의 로봇의 경우, 그것은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는 상황을 판단한 후 위협을 해서 폭동을 진압할 수 있고, 또 사람이 상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랍니다. 즉 로봇 공학 제 1원칙에 조금도 저촉됨이 없지요." 베일리는 일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패스톨프 박사가 하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용기를 내어 이번에는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 자네는 어제 밤 아파트를 빠져나갔지?" "네." "어디 갔었나?“ "공동 목욕탕입니다." 베일리는 조금 당황했다. 다니엘이 이렇게 간단히 어젯밤의 행동을 말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는 계속 추궁했다. "왜, 공동 목욕탕에 갔는지 그 이유를 좀 설명하여 주게" 다니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 부인은 어제 외출 할 때까지만 해도 나를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내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나와 당신하고의 얘기가 어디선가 도청 당해 그 정보가 아파트 밖으로 흘러 나갔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베일리가 말하려고 하자 패스톨프 박사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 다니엘에게 몸짓으로 말을 계속하도록 했다. "나는 먼저 이것은 뉴욕 시내에 서튼 박사의 암살을 계획한 지하 조직이 있어 그 일당이 베일리의 아파트를 감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파 탐지 장치를 써서 아파트 안을 전부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데도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만일 그런 장치를 숨기려면 어디가 제일 적당할지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저 공동 목욕탕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지요. 공동 목욕탕에서는 남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예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좀 이상한 행동을 한다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요. 그러니까 그런 장치를 숨기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지요. 그래서 거기를 조사하러 갔습니다.“ "그래 그 장치는 발견되었나?" 베일리가 재빨리 또 물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베일리씨의 마음속에서, (그것 봐라. 꼬리를 잡혔군?) 라고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패스톨프 박사를 돌아보았다. 패스톨프 박사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어떻습니까? 이것으로 그가 행동한 이유는 분명하게 증명이 됐지요?" "아니, 아직 의심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것은 벌써 전에 시중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가 듣고 온 소문에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그리고 또 어떻게 해서 그 정보가 흘러 나왔는지,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지구 쪽에서는 나하고 엔더비 국장님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엔더비 국장이 눈썹을 찡그리며 크게 끄덕였다. "그렇지, 그건 틀림없어. 이 사실은 시장조차 알지 못해. 패스톨프 박사님과 나와 자네만이 아는 비밀일세.” "아니, 또 한 사람 있죠." 그러면서 다니엘을 가리켰다. "그렇지만 나는 줄곧 당신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정보를 흘려버릴 시간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이 말에 베일리는 크게 외쳤다. "아니지. 나는 공동 목욕탕의 욕탕에서 30분이나 있었네. 그 사이에 자네는 자네의 일당하고 얼마든지 연락을 취할 수가 있었지." "일당이라고?“ 패스톨프 박사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 눈이 번쩍하고 환하게 빛났다. 베일리는 둥근 배에다 힘을 꽉 주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우주인들의 음모를 분명하게 폭로해 줄 때가 온 것이다. "자, 좋습니까? 국장님, 잘 들으시오, 당신이 우주시에 들어온 바로 그 때, 서튼 박사가 누구에겐가 살해당했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뿐이었고, 정체도 확실하지 않은 시체뿐이었으며, 더욱이 그 시체라는 것조차 자세한 조사도 하지 않고 이미 화장해 버렸다고 하는 것이오." 베일리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분명하게 말을 했다. "우주인은 이 살인 사건이란 것을 지구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들 말대로 지구인이 범인이라고 한다면, 그 범인은 한밤중이 강철 도시를 빠져 나와 들판을 혼자서 지나서 우주시에 몰래 스며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요. 이러한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국장님, 당신이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음에 베일리는 다니엘을 보았다. "다음에 우주인들은, 이 로봇을……. 아니, 로봇이라고 칭하는 이 인물을 시중으로 보내왔오. 그런데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열선 총을 휘둘러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으로서는 불가능한 행동을 하였으며, 다음으로는 그는 뉴욕 시에 로봇이 들어왔다는 소문을 퍼뜨렸소. 이 소문은 사정을 잘 아는 몇 사람 외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진 속도로 봐서 시중에는 그의, 즉 우주인의 일당이 있었음이 틀림없는 것이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국장이 고함쳤다. "아니 그래도 당신은 아직 모르겠습니까?" 베일리도 같이 고함쳤다. "왜, 그가 그러한 일을 했는가? 그는 시중에 살인 로봇이 침입했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 겁니다!" "왜? 어째서 우주인이 폭동을……." "지구인이 폭동을 일으키면 우주인은 뉴욕을, 그리고 딴 돔 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할 구실이 생깁니다. 그것 때문에 우주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폭동을 일으키고 싶었던 겁니다!" "잠깐만, 베일리씨 형사. 점령하고 싶었다면 20 여년 전 폭동 때 벌써 점령했을 것이오." "그 때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지요. 지금은 완성되었으니까 실행에 옮긴 것이지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보다 더 간단한 방법으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베일리는 물러설 수 없었다. "물론 말씀은 그렇게 쉽게 할 수는 있어도 사실은 다를 수도 있죠. 우주 국가의 지구 정책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구실이 필요했소. 딴 우주 국가들이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사건이 필요했던 거죠.“ 패스톨프 박사가 입을 다물었다. 베일리는 이때다 하고 대들었다. "좋습니까? 박사님, 지구인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당신네들의 음모를 발견했소. 내일이라도, 아니 오늘 지금 당장이라도 지구 연방 정부는 우주 국가 연합에 대해 당신네들의 음모를 발표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들한테도 그리 좋을 것은 없을 것이오." "그러면 당신은 저 다니엘이 서튼 박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거요? 베일리 형사." "주장하고 안하고를 논할 필요도 없이 틀림없는 걸요?“ 패스톨프 박사는 문득 아주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 "베일리 형사, 그렇다면 당신은 다니엘에게 바늘이라도 꽃아 보셨습니까?" "바늘이라니요? 그건 또 어째서요?" "그건 인간과 로봇을 구별해 내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요. 실험 방법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소.“ 패스톨프 박사는 다니엘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그의 피부나 머리카락을 현미경으로 비쳐 봐도 좋고, 아니면 그의 호흡을 잘 관찰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또 조금만 주의하여 보면 그가 몇 분이고 호흡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오. 또는 그가 뱉는 숨을 받아서 탄산가스가 있나 없나를 조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그밖에 맥을 짚어 본다든지 심장과 고동을 조사해 본다든지, 방법은 얼마든지 있소. 그 중 어느 것이든 해보셨소? ” "베일리 형사?" 베일리는 그만 몰리게 됐다. 그러나 지지 않고 대들었다. "말로라면 무엇을 못합니까." "그렇다면 좋소!" 패스톨프 박사는 다니엘에게 눈짓했다. 다니엘이 셔츠의 오른쪽 소매를 치켜올리자 어디로 보나 훌륭한 사람의 팔이 나타났다. 패스톨프 박사는 베일리에게, "가까이 가서 잘 보시오." 하고 말했다. 다니엘은 왼손 손가락으로 오른쪽 손목을 꽉 눌렀다. 그러자 다니엘의 팔의 피부가 두 개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과 똑같은 물질 아래에 나타난 것은 청회색의 스테인리스 스틸과 헝클어진 수많은 코드와 복잡한 부속품의 집합이었다. "자, 베일리 형사. 로봇 다니엘 올리버의 구조를 잘 조사해 보시오." 패스톨프 박사가 무척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앗하하하하……?“ 요란한 국장의 웃음소리가 베일리의 귀를 따갑게 때렸다. 그는 순간, 머리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패스톨프 박사의 설명   베일리는 문득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입체 텔레비전 스크린이 이미 지워져 버린 것이었다. 그의 곁에는 다니엘이 서서 주사를 놓고 있었다. 베일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괜찮습니까?“ 다니엘이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베일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톨프 박사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가 정신을 잃었습니까?“ "그렇소. 아주 짧은 동안이었지만……." "국장님은?“ "급한 일이 생겨서 전화를 끊었지요.“ 베일리는 눈을 감았다. 국장의 그 요란스런 웃음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했다. 그리고 웃고 난 순간 불처럼 화를 냈을 것은 너무나 뻔했다. (물론 이 사건에선 손을 떼라고 하겠지. 아니, 어쩌면 형사도 그만두라고 하겠지. 하긴 그렇게 해도 할 수 없을 만한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실례하겠소.“ "어서 앉으시오. 마음이 안정되면 살인 현장의 사진과 자료를 보여 드리지요.“ "이미 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소. 전 이미 파면 당했으니까요.“ "그럴 리가 없소. 나도 누누이 엔더비 국장에게 잘 확인해 놓았소.“ 패스톨프 박사가 타이르듯 말해 주었다. 베일리가 발끈해서 말했다. "동정은 받고 싶지 않소.“ "아니, 동정이 아니오." "그럼 어째서요?“ 패스톨프 박사는 팔짱을 끼고 한참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두 가지 형의 지구인 밖에는 만나 본 일이 없소. 그 한 형은 증오의 덩어리가 되어서 얘기가 통하지 않는 폭력적인 지구인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정치가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엔더비 국장은 정치가의 대표 같은 인물이소. 그는 대단히 머리가 좋고 훌륭한 인물이지만 언제나 표리가 있소. 그런데 당신은 전혀 틀리는군요. 당신은 처음으로 우주시에 들어와 대담하게도 우리들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당당하게 그것을 증명하려고 했소. 당신은 정직하고 용기가 있고 더욱이 이성적이요. 그뿐인가? 당신 같은 지구인은 처음이요.“ "그렇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소."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소. 그것은 상대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요. 가령 예를 들면 당신은 우리들이 지구인을 이 우주시에 들여보낼 때 엄중한 신체 검사를 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죠?" 베일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죠.“ "그럴 테지요.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베일리 형사, 우리들의 세상에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의한 병 같은 것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지구에 있는 그런 병에는 전혀 면역성이 없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러면 당신들은 절대 그런 병에 걸린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죠. 감기에 걸린 일조차 없소. 아니, 만일에 걸렸다고 하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들에게는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오. 아시겠오? 베일리 형사. 우리들 우주인은 결코 지구인을 경멸해서 가까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병이 무서워서 그런 거라오. 내 말을 믿어 주시오." 베일리는 어느 틈인가 또다시 의자에 앉자 생각에 잠겼다. "우리들은 서로 좀더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오해만 생깁니다. 그것은 비단 지구인 측만이 그런 게 아니라 우리들 우주인 측도 매일반이오. 그렇기 때문에 서튼 박사는 다니엘을 만든 겁니다." "잠깐만, 박사님." 베일리가 얼굴을 들었다. "말씀하시기 전에 한 가지만 얘기해 주십시오. 당신네들은 왜 그렇게 성가신 절차까지 밟아가며 지구에 오는 겁니까? 당신네 우주인에게는 지구 따위는 별로 보잘 것 없는 곳일 텐데……. 그런데 어째서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는 겁니까? 어째서 내버려두지 않는 거지요?“ 패스톨프 박사는 약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지금의 지구 생활을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저 그렇지요.“ "그렇지만 지금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 되리라고 믿소? 지구의 인구는 더욱더 늘어날 뿐이고 식량은 간신히 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소. 마침내는 파멸이 올 뿐이오.“ "아니, 어떻게든 되겠죠.“ "뉴욕 같은 돔 도시는 원자력 발전소가 없으면 하루도 유지할 수 없소. 그런데 그 원료인 우라늄은 이미 지구에는 없소. 금성이며 화성에서 수입해서 간신히 보급하고는 있으나 최근에는 그것마저 힘들게 되었소. 식량의 근원이 되고 있는 이스트균의 원료인 목재 펄프도 이미 지구에는 얼마 남지 않았소. 공기도 오염되어 버리고……. 이런 상태로 언제까지 가리라고 생각하오?" "그래도 지금까지 계속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장래까지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소. 돔 도시는 조그만 꼬투리만 생겨도 금방 파멸한 지도 모르오.“ "그러면 돔 도시를 없애고 자연으로 돌아가란 말이오? 그따위 일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자연 속에서는 80억이나 되는 인간이 살아갈 수가 없소. 무엇보다도 문명을 퇴보시킬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보다도 우주 국가에 이주하는 걸 허락해 주기만 한다 면야…….” "우주 이민이 금지된 이유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우주 국가는 엄중하게 인구 제한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이대로 내버려두시지요." "새 행성을 개척하면 좋지 않소? 은하계에는 약 일천 억의 행성이 있는데 그 중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이 적어도 1억은 되니까요." "어리석은 소릴, 그따위 일을 지금 누가 합니까?" 베일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패스톨프 박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왜 어리석은 소리요. 베일리 형사, 지구인은 옛날엔 많은 행성을 개척하지 않았오? 지금 우주에 있는 50개의 우주 국가 중에 30개는 지구인이 개척한 거요. 내 고향인 오로라도 그렇소. 우리들은 지구 이민의 자손이란 말이오." "그건 옛 얘기죠." "어째서 지금은 안 된단 말이오?" 베일리는 말문이 막혔다. 패스톨프 박사가 열기 띤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지구인들이 돔 도시에 살기 시작해서 그런 거요. 그 강철 동굴 속에 들어박히기 전에 지구인은 자꾸만 우주로 진출했소. 그런데 너무나 모든 것이 충족하고 너무나 살기 편한 돔 도시에 틀어박혀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구인은 게으름뱅이가 되어 버린 거요. 겁쟁이가 됐소. 베일리 형사, 당신네들 지구인은 야외로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하오. 그래서 뉴욕 돔에서 우주시까지 아주 작은 거리를 오는 데도 야외를 걸어올 수가 없게 된 거요.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게 어쨌단 말이오? 쓸데없는 참견이요.“ "물론 다를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불쾌한 일이겠죠. 그러나 이건 참견이 아니라 우리들이 당신네들에게 힘을 빌려 주십사 하는 부탁인 것이오.“ "농담이겠죠.“ "아니, 절대로 농담이 아니요." 패스톨프 박사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베일리 형사, 내가 몇 살쯤으로 보입니까?" 베일리는 잠깐 생각해 보더니. "육십 세쯤입니까?" "아니오, 백 육십 세랍니다." "네? 백 육십이요?" 베일리는 깜짝 놀라며 반문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음 생일로 백 육십 사 세가 된다오. 물론 지구에서 세는 나이로 말이오. 만일에 운이 좋아 지구의 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이 만큼은 더 살 수 있어요. 우리 오로라 성인의 평균 연령은 삼백 오십 세니까요.“ "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장수하는 건가요?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인구가 적기 때문이지요. 오로라에서는 노인학의 연구가 활발해요. 사람이 어째서 늙는가를 연구해서 그것을 방지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학문이지요. 그 결과 우리들은 3세기 이상을 살 수 있게 된 거랍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무엇을 하라는 말이오?" "그렇소. 문제가 없다는 바로 그것이 문제인 거요.“ "원, 별 소릴……. 뭐, 퀴즈라도 하는 겁니까?" "아니오. 행성 오로라는 너무나도 문젯거리가 없소. 그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에 만족하며 조금도 모험을 하려고 하질 않소. 그 점이 바로 문젯거리요. 수명이 길어졌다, 모처럼 수명이 길어졌는데 모험을 하다가 죽으면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젭니다. 사실 오로라를 위시해서 우주 국가들은 약 이백 오십 년 가량은 새 우주 탐험을 한 번도 하지 않았지요.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인류는 점점 활기를 잃고 멸망하고 말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지구에 로봇 문명을 강제로 발전시키려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거죠? 로봇은 지금 지구에 실업자의 수만 늘어나게 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있단 말이오." "옳은 말씀이오. 지구에 실업자를 늘어나게 하여 마침내는 지구의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하는 것도 또한 우리들 목적의 하나인 것입니다.“ 패스톨프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다. 베일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자, 침착하시오. 베일리 형사, 우리에게는 명확한 목적이 있는 거라오." "지구를 파멸로 이끌어 지구인을 멸망시키자는 목적이겠죠?“ "아니오. 지구인들이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요. 그 강철 도시에서 튀어나와 우주를 향해서, 즉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요!" 패스톨프 박사는 이때다 하고 힘을 주어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 우주 국가의 인간에게는 이미 그럴 만한 기개도 모험심도 아무 것도 없소. 그러나 지구인들에게는 그것이 있소. 인류의 장래를 짊어지고 있는 것은 즉, 당신들 지구인뿐이란 말이오." 베일리는 지긋이 패스톨프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진지한 마음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지구인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오. 그러기 위해서 좀더 로봇하고 손을 잡고 일해 나갈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하자면 앞으로는 인간과 로봇이 참된 의미로 협력을 하지 않으면 우주 개발을 이룩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게 바로 씨 에프이 문명이라는 것이군요." 패스톨프 박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그것이오. 알아들으셨오? 베일리 형사.“ 베일리는 애매하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너무나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서 아직은 잘 모르겠군요. 뭐가 뭔지 너무 복잡해서." "그야 물론 곧 이해하기는 힘들 테고.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실례하겠소. 너무 오랫동안 지구인하고 있는 걸 의사에게 금지 당하고 있습니다.“   수사 재개   베일리와 다니엘은 패트롤카를 타고 지하도로 해서 뉴욕으로 돌아왔다. 베일리는 패스톨프 박사가 한 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진정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속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문득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 박사는 왜 그런 얘기를 하였을까?" "당신에게 이 사건의 해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죠. 그래서 당신이 다시 이 사건을 수사해 주기 바라서였죠." "그러나…….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우주시 쪽은 용의자가 전혀 없었나?" "물론 없었습니다. 하긴 지금까지 용의자가 한 사람 있긴 있었습니다만.“ "누군가?“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누구의 눈에도 확실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안타깝게 굴지말고 빨리 말해 봐. 누구냐 말이야?" "국장이죠. 엔더비 국장 말이오." "뭐라고?“ 베일리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놀란 나머지 운전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그는 패트롤카를 지하도의 옆으로 비켜 세웠다. "왜? 어째서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국장은 범행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의심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용의는 벗어났나?" "물론 의심은 풀렸지요. 현재로 국장은 열선 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들어올 수도 없었지요." "그렇다면 흉기는 발견하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온 우주 시내에 있는 열선 총을 모조리 조사해 보았지만 이 2,3주 동안에 발사한 흔적이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흉기는 아직 우주시 안에 있나?" "아니. 그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주시 안은 철저하게 조사했으니까요." "그럼, 범인이 가지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국장은 완전히 혐의를 벗었습니다. 그의 두뇌를 분석해 본 결과 결백했습니다.“ "두뇌 분석이란 거짓말 탐지기 같은 것인가?" "아뇨. 뇌파를 측정해서 그 사람의 감정이나 성질을 분석하는 겁니다. 그 결과 국장은 살인을 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 건 조사를 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인 걸. 그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나?"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겁니다. 우주시의 주민들도 한 사람 빠짐없이 자발적으로 두뇌 분석을 받았습니다만 모두가 결백했습니다. 우주인 측이 범인은 지구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런 과학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일리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이미 방법은 알고 있으니까 뉴욕 시민들도 한 사람 빠짐없이 그 두뇌 분석이라는 것을 해 보면 범인을 곧 발견할 수 있지 않겠나?" "그건 무리지요. 2천만 명이나 되는 인간 전부의 두뇌 분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구인 속에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그야말로 몇 백만 명은 될 겁니다." 베일리는 대답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다시 패트롤카를 발차시켰다. 분하긴 하지만 확실히 다니엘이 말하는 대로였다. 시경으로 돌아오자 다니엘은 곧 자료실로 갔다. 베일리한테는 사미가 와서, "시경 국장이 부르십니다. 베일리 형사.“ 하고 전해 주었다. 베일리는 국장실로 향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엔더비 국장은 그를 보자 얼굴을 온통 찡그리고 있었다. "장한 일을 했더군, 베일리." "미안합니다, 국장님.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다행이야, 패스톨프 박사가 별로 대수롭진 않게 생각해서 다행이었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도록 하게." 베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국장님, 그런데 오늘밤엔 제가 다니엘과 같이 쓸 아파트를 하나 준비해 주십시오. 그가 로봇이라는 소문이 퍼진 이상 만일에 폭도들이 저의 아파트로 물려들면 우리가 위험합니다." 엔더비 국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파트는 곧 준비해 놓겠네. 그렇지만 그가 로봇이라는 소문은 하나도 퍼지지 않았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글쎄 벌써 제지벨이 그 소문을 듣고 왔단 말입니다." "그건……. 물론 약간 그런 일이 있을 지도 모르지. 내가 말하는 것은 조직적으로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일이 없다는 얘길세. 나는 그 뒤 소문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시켰더니, 그런 소문은 전혀 없었다는 보고가 들어 왔네." "그렇다면 제지벨이 듣고 온 소문은 어떻게 된 거죠?" "구둣방 앞에 모였던 군중 속에 로봇 전문가가 있었다더군. 그래서 다니엘을 보고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끼고 그걸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 마누라에게라도 얘기한 모양이지. 그걸 또 그 마누라가 공동 목욕탕에서 친구에게 얘기하고……. 이렇게 된 모양이지만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어 소문은 그럭저럭 흐지부지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네." 베일리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지금 어디 있나?" "지금 반 로봇 운동파의 기록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숫자인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걸세." "그런가요." 베일리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 잠시 동안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가 이윽고 텔레비전 전화로 워싱턴에 걸어 어떤 인물을 불러내어 오랫동안 얘기하고 있었다. 전화가 막 끝났을 때 다니엘이 서류를 한 장 갖고 돌아왔다. "이건 과격한 반 로봇 주의자 중에서 범죄를 저지를만한 사람들의 리스트입니다." "벌써 다 끝났나? 리스트는 굉장히 많았을 텐데." "백만 명 이상 되더군요.“ "그걸 벌써 다 조사했단 말인가?" "예, 빨리 서둘러야 하는 일이라서 나의 컴퓨터의 기능을 전부 발휘했습니다." "놀라운 일이로군. 그런데 자네는 식사를 할 수 있나?" 베일리가 갑자기 그렇게 묻자 다니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게는 식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네. 다만 식사하는 흉내를 낼 수 있냐고 물었네." "그야 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나중에 먹은 걸 모두 꺼내야 하죠." "알았네. 지금 난 배가 고파 죽겠어. 자네는 이제부터 나하고 식사하러 나가세. 식사 때 자네가 식사를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이상하니까……. 그래서 물어 봤네." 그리고 몇 분 후 베일리하고 다니엘은 가까이 있는 공동 식당 앞 행렬 속에 끼어 있었다. 행렬을 선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되면 금속제의 식료 배급표를 취사 기계 속에 던져 넣는다. 그러면 그때마다 째깍째깍하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지정된 테이블에 걸터앉아 스위치를 누르고 2분이 지나자 테이블 한 가운데의 동그란 구멍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요리 접시가 올라왔다. 베일리도 곧 먹기 시작했다. 다니엘도 먹는 시늉을 그럴 듯하게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낮게 속삭이듯 말을 했다. "식사를 할 때 남을 흘끔흘끔 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죠?" "그건 그런데, 왜 그러나?" "지금 여덟 사람이나 아까부터 우리들을 끈질기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말에 베일리는 포크를 내려놓고 소금을 찾는 척하면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내 눈은 보통 사람의 몇 십 배나 잘 보입니다. 틀림없어요. 더욱이 그 중 여섯 명은 어젯밤 구둣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 있던 사나이들인 걸요."   미행을 당하다   "틀림없나?" 베일리가 낮긴 하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 , 틀림없습니다." "그럼, 가까이 있나?" "아니요. 그리 가까이는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습니다." "알았네. 내게 다 맡기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 주게." (그렇다면 역시 그것은 과격한 반 로봇 운동가들의 계획적인 범행이었던가? 그렇다면 그 중에는 로봇을 연구하고 있는 전문가도 있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다니엘을 로봇이라고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그들은 무슨 짓을 할 심산일까? 갑자기 다니엘을 가리키며 '로봇이다. 때려부숴라!' 하며 소동이라도 벌일 생각일까?) 그는 식당을 둘러보았다. 2천 명이 넘을 것 같았다. 만일에 여기서 폭동이 일어난다면 둘은 틀림없이 살해당하리라. (하여튼 한시 바삐 여기를 나가야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베일리는 흠칫했다. 필경 식당 밖에도 일당이 잠복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다니엘, 자넨 놈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할 수 있나?" "예, 나는 절대로 잊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좋아. 만약에 위해서 그 일당을 발견하면 알려 주게. 자, 그럼 뒤따라오게. 그리고 내가 하는 대로만 하게." 그는 일어서자 접시를 처리기에 밀어 넣었다. "그들도 일어났어요." 다니엘이 낮게 속삭였다. "한눈 팔지 말게."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줄에 섰다. 그리고 차차 출구 쪽으로 다가갔다. 출구에 나섰을 때 그는 다니엘을 보았다. "알았나, 다니엘?" "네." 두 사람은 성큼성큼 고속 주로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따라오나?" "예,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따돌릴 테니 두고 보게." 베일리는 고속 주로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을 이리 비키고 저리 비켜 고속 벨트에 다가갔다. 그래서 고속 벨트로 갔는가 하면 또 저속 벨트로 옮겼다, 그런가 하면 다가오는 지선으로 뛰어 넘는 것처럼 보이고는 반대쪽 벨트로 옮겨갔다. 지선 벨트가 휘익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고속 벨트로 옮겨와서 그는 다니엘에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따라오나?" "한 명만 따라옵니다.“ "곧 따돌릴 테니……." 그는 또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저속에서 고속으로, 고속에서 또 그 반대로 자유 자재로 옮겨다녔다. 다니엘도 찰싹 붙어 따라다니고 있다. "어때?" "아직 따라 오고 있어요." "끈질긴 놈이군!" 그는 또다시 고속 벨트로 갔다. 줄줄이 서 있는 승객들이 불쾌한 표정으로 베일리 들을 흘겨보고 있었다. 베일리가 몸을 꼬아 반대쪽으로 나가려고 하는 순간 그에게 밀린 승객 한 사람이 홧김에 그를 떠밀었다. 베일리는 온 힘으로 몸을 바로 하려고 애썼지만 발이 엉클어져서 그만 주로 위에 넘어져 버렸다. (이크, 야단났다! ) 하며 베일리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넘어진 자기에게 딴 승객이 부딪혀 넘어지고 그 위에 또 딴 사람이 넘어져 금방 몇 십, 몇 백 명이 깔려죽거나 다치는 대 사고가 벌어지리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굉장한 힘으로 몸을 일으켜 세워졌다. 다니엘이 그를 구해 줬던 것이다. "다니엘, 고맙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30초 후 그들은 감속 벨트에서 내려 정거장으로 나갔다. 이미 뒤쫓아오는 자들은 없었다. 그곳에는 튼튼하게 생긴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 앞에 경비원이 서 있었다. 베일리가 신분 증명서를 내밀고, "공무요." 라고 말했다. "예,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으로 완전히 추적자들을 따돌려버린 것이었다. 그 곳은 원자력 발전소였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발전기의 소리, 이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방호벽 안에 몇 천 대나 되는 발전기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이 위험 신호인 빨간 선 가까이 가 있어서 베일리는 부지중에 큰 소리를 질렀다. "여보게, 그 빨간 줄에 가까이 가지 말게. 방사능 방호복을 입지 않고 그 선 안으로 들어가면 오염 될 우려가 있다네." 그렇게 말해 놓고 생각하니 다니엘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 그렇군. 자네는 방사능하고 상관없겠군." "아뇨, 상관 있습니다. 방사능의 감마선(방사성 물질에서 나오는 방사선의 하나로 물질을 투과하는 힘이 무척 강함)은 저의 전자 두뇌를 망가뜨립니다. 말하자면 죽는 거죠." "아아, 그렇군." 두 사람은 서둘러 발전소를 나왔다. 주위를 잘 살펴봤지만 미행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곳은 더럽고 음침한 하급 노동자용 아파트였다. 조그만 방에 침대가 두 대,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을 뿐이고 입체 텔레비전에는 다이얼도 붙어 있지 않았다. 고정 방송 시간 밖에 비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방 한 구석에 조그만 오물 처리 파이프가 있을 뿐이었다. 다니엘은 곧바로 파이프 앞으로 걸어가 셔츠의 앞단추를 풀었다. 어디로 보나 인간의 가슴으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무엇을 하지?" 베일리가 물었다. "아까 먹은 걸 버리려고 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음식이 썩어 버리니까요." 하며 다니엘은 가슴의 일부에 손가락을 대고 꾹 눌린다. 그러자 가슴이 두 개로 짝 갈라졌다. 다니엘은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엷은 플라스틱 주머니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파이프 안에 버리려다 말고 베일리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이 음식은 아주 깨끗해요. 나는 침도 위액도 없으니까 측 소화되지 않았으니까 음식물이 그대로 있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베일리는 그만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니엘은 안에 내용물을 버리고 인공 위장을 원상태로 가슴속에 집어넣고 셔츠를 입었다. 그 순간 도어의 시그널(신호하는 장치)이 반짝 켜졌다. 베일리는 재빨리 열선 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이고 도어에 다가가 한 손으로 도어 한 쪽에 있는 투명 창(안에서만 밖을 보게 만든 투명한 유리창의 스위치를 넣었다. 거기에는 아들 벤트리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베일리는 도어를 열고 놀라 서 있는 벤의 손목을 얼른 잡아 왈칵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왜, 왜 그래요? 아빠?" 벤은 울음 섞인 소리로 외쳤다. 베일리는 그 말은 못들은 척하고 투명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에도 아무도 없었니? 벤." 벤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놀라움이 가시지 않아 눈이 동그란 채였다. "없어요. 아빠." "그럼 왜 여기로 왔니?" "아빠가 괜찮은지 어떤지 보러 왔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여길 알았냐?" "시경에서 물어서 왔어요." "뭐라고! 시경에서 네게 이곳을 가르쳐 주던?" 베일리는 어이가 없었다. 벤은 더욱 더 놀란 표정이 되어서 물었다. "그래요. 아빠, 가르쳐 주면 안 되나요?" 베일리는 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상냥하게 말했다. "벤, 넌 곧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렇게 해서 엄마보고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라. 내일 집으로 연락하겠다고. 알아들었니?" "벌써 돌아가야 해요? 에이 재미없어." 베일리는 벤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벤, 이건 중요한 심부름이란다. 아빠의 힘이 되어 다오.“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아빠, 그럼 가겠어요." 베일리는 문을 닫고 벤이 돌아간 뒤에도 잠시 동안 물끄러미 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범인이다   다음 날 베일리가 시경으로 들어가자 엔더비 국장에게 불려 갔다. 국장은 책상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한 장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어제 워싱턴의 제리겔 교수를 불렀었지?" "예 , 그랬습니다." "제리겔 교수는 로봇 공학자이지?" "예." "왜 불렀나?" "물론 이 사건에 관해서 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어떤 일을?“ "로봇에 관해서 자세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어째서?" 베일리는 정색을 하고 국장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사건을 될 수 있는 한 세상에 알리기 않게 하기 위해서네." "교수에게는 사건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좋지 않아." "그것은 명령입니까? 전 이 사건의 담당자가 아닙니까?" 엔더비 국장은 베일리의 그 말에 그만 풀이 죽었다. "아니, 그게 아닐세. 자네는 자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다만…… 아니, 아무 일도 아니야. 돌아가도 괜찮네." 베일리는 불쾌한 마음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거기 다니엘이 자료실에서 돌아왔다. "베일리, 어젯밤 우리들을 미행하던 사나이 중에 두 명을 알아냈습니다. 두 명 다 구둣방 사건 때도 군중 속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어떤 놈들인가?" "한 편은 프란시스 크로사아라는 이름으로 2년 전에 폭동을 주동한 죄로 체포된 일이 있습니다. 직업은 뉴욕 이스트 회사의 사원입니다. 인상은 여기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입체 사진입니다." "또 한 명은?" "가보트 보울이라는 사나이고 제과점 일군인데, 1년 전 로봇을 때려부수고 체포된 적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베일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 두 사람을 체포하겠습니까?" "아니, 잠깐만. 그것만으론 체포할 수 없지. 별로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마침 제리겔 교수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다니엘, 난 지금부터 제리겔 교수를 만나야 하네. 잠시 부를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주게나." "기다리죠." 베일리는 다니엘을 그곳에 남겨 놓고 응접실로 갔다. 제리겔 교수는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로봇 공학자였다. 그러나 외모는 별로 학자답지가 않고, 은행 중역 같은 온건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베일리 형사, 사실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교수님." 베일리는 가지고 온 도청 방지기로 응접실을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도청 장치는 숨겨져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교수님." "아주 경계가 심하군요." "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서요. 오늘 지금부터 교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모두 비밀에 속합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타인에게 말씀하시는 일이 없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제리겔 교수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싹 가셔 버렸다. "에,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비행차로 올 것을 그랬군요. 어쩐지 난 비행차가 성미에 맞지 않아서……. 곧 기분이 나빠진답니다. 그래서 고속 주로도 왔습니다." "허어, 그건 어째서요?" "일종의 노이로제겠죠. 하여튼 하늘을 날아가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공연히 초조해지는 겁니다. 주위에 금속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랍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돔 도시 밖으로 나가시는 건 퍽 싫어하는 편이시군요." "무엇 때문에 나가야 합니까?" 제리겔 교수의 얼굴에 겁이 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교수님께 돔 밖으로 나가 주십사 하는 게 아니라 가끔 그럴 필요가 있으면 어쩔까 하고 물어 본 겁니다." "대단히 불쾌하지요." "가령 선생님께 한밤중에 이 돔을 나가서 야외를 2킬로미터쯤 걸어가셔야 한다면?"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소." "그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말입니까?" "나 자신의 생명이 관한 것이거나 또는 나의 가족의 생명에 관한 일이라면 어쩌면 해 볼지도 모르겠군요." 제리겔 교수는 그 말을 하고 베일리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 그런 걸 물어 보시나요?" "사실은 아주 중대한 범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범죄에 관해서는 지금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 범인은 한밤중에 혼자서 야외를 걸어가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게 어떤 인간인가를 알고 싶은 겁니다." 제리겔 교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로서는 그런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군요. 글쎄요. 몇 천만 명이란 인간 중에는 그런 어리석은 인간이 간혹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까 보통 인간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군요?" "물론이지." "그런데 가령 로봇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리겔 교수가 벌떡 일어섰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어째서……?" "로봇이 살인을 하다니……. 그런 맹랑한 일은 있을 수 없소!" "정말입니까?" "정말이고 뭐고가 없습니다." "당신은 로봇 공학 제 1원칙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 알고 있지요. 로봇은 인간을 손상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위험이 있을 때 방관해서도 안 된다. 그렇죠. 그러나 교수님, 그 원칙 없이 로봇을 만들 수는 없는 겁니까?" 제리겔 교수는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베일리 형사, 당신이 조금이라도 로봇 공학을 알고 있다면 로봇의 전자 두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든 작업이 필요한지 알고 계실 테지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형의 전자 두뇌를 설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잘 아실 겁니다. 아주 조그만 새로운 계획이라도 그것을 개발하는 데는 몇 천명이라는 기술자가 있는 큰 공장이 1년간이나 가동되어야만 합니다. 더욱이 로봇 공학의 세 가지 원칙은 로봇 전자 두뇌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대원칙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변경한다고 하면 그건 대단한 작업이 되게 됩니다. 몇 십 년 걸려서도 될지 말지 한 일이랍니다." 베일리는 알았다는 듯이 끄덕이고 나서 통신기의 버튼을 누르고 무어라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곧 도어가 열리고 다니엘이 들어왔다. 베일리는 다니엘을 파트너로서 제리겔 교수에게 소개를 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건 그렇고. 제리겔 교수님, 그럼 지금 말씀하신 것 같은 전자 두뇌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제가 말씀드리는 뜻은 우리 인류는 로봇을 만들기 시작해서 벌써 천 년 이상이나 지났는데 그런 로봇을 만들려고 한 일은 한 번도 없는 겁니까?" "없지요." "왜, 그럴까요?" 제리겔 교수는 후우 하고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말이오, 베일리 형사, 우리 인류는 옛날부터 프랑켄슈타인 공포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프랑켄슈타인 공포증이란 또 무엇입니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것은 아주 옛날의 소설 주인공인 과학자의 이름이랍니다 그 과학자가 로봇을 만들었는데 이 로봇이 과학자에 반항해서 사람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자기를 만든 과학자마저 죽여 버렸다고 하는 소설이죠. 그래서 인류는 로봇이라는 걸 생각할 때는 언제나 이 소설을 생각하게 되는 거라오. 그렇기 때문에 옛날부터 로봇의 전자 두뇌에는 절대로 인간에게 반항한 수 없도록 원칙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지요." 베일리는 또 질문을 했다. "그 원칙에 맞춰서 만든 로봇은 절대로 살인을 할 수 없습니까?" "못 합니다. 단, 두 사람 이상의 인명을 구출할 때는 예외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일지라도 그 로봇의 전자 두뇌는 완전히 파괴됩니다." 제리겔 교수는 잠깐 망설였다. "음……. 그렇지만 우주 국가에서 만일 그러한 로봇이 만들어졌다면, 혹은 그 이론이 완성되었다면 마땅히 내 귀에도 들어왔겠지요." "우주 국가에서는 지구의 로봇보다도 더욱 인간에 가까운 로봇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교수께서는 그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로봇은 당신 같은 전문가가 보아도 알 수 없을까요?" 제리겔 교수는 싱긋 웃었다. "그런 일은 없겠지요. 베일리 형사, 로봇이라는 것은 그 모습이며 형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거기까지 말하고 제리겔 교수는 깜짝 놀란 모양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잇던 다니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표정이 금방 창백하게 변했다. "이런…… 이럴 수가…… 아니, 설마……?” 그는 한 손을 뻗쳐 다니엘의 몸을 약간 만졌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교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건…… 자네는 로봇이었구먼." "그것을 아시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셨군요." "그, 그건, 즉…… 예상도 못했던 일이라서……. 그렇다면 이건 우주 국가에서 만든 로봇이로군요?" "그렇지요." "참으로 이건 훌륭하오! 아니 이런 기회는 모처럼 얻기 힘든 기회인데 정말 기쁜 일이오. 그를 분석해봐도 괜찮겠지요?" "잠깐만, 교수님. 내 질문에 좀더 대답해 주십시오. 이 로봇처럼 처음부터 인간과 꼭 같이 만들어진 휴머노이드(지구의 인류와 비슷한 채형을 한 딴 별의 생물) 로봇에게는 로봇 공학 제 1원칙은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제리겔 교수는 몹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오." 베일리는 갑자기 다니엘을 돌아보며 왼손을 내밀었다. "자네의 열선 총을 이리 주게!" 하고 큰 소리로 명령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오른 손은 벌써 자기의 열선 총을 뽑아들고 있었다. 다니엘은 침착하게 열선 총을 뽑아 손잡이 쪽을 베일리에게 건네 주었다. "베일리, 여기 있습니다." "로봇 공학 제 2원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제리겔 교수, 다니엘은 무장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열선 총을 들이대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쏘겠다고 위협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쏘지 않았습니다.“ 하고 다니엘이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그 자체가 제 1원칙에 위반하는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교수님, 그때 그 군중이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요." "흠…….” 제리겔 교수는 신음했다. "분명히 그건 이상한 일이군요." 베일리는 지금 다니엘이 건네준 열선 총을 겨누고 안전 장치를 풀고 들이댔다. "다니엘, 너를 살인범으로 체포한다."   비어 있는 열선총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파트너 베일리." 다니엘은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는 충분하다. 너는 살인한 시간에 그 현장에 있었다. 너는 로봇 공학 제 1원칙을 위반하는 행위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해치울 수 있었으며 또한 너는 흉기를 감출 수도 있다. 너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장소에 말이다." "어디 말입니까?" "내 인공 위장 속에 말이다. 그 주머니 속에 감추어 몸 안에 넣어 버리면 누가 안단 말이냐?" 베일리는 로봇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베일리가 제리겔 교수를 돌아보았다. "교수님, 이 로봇을 전문가의 입장에서 분석해 주십시오. 실험에 필요하신 물건은 모두 이쪽에서 준비하겠습니다. 이 로봇을 전자 두뇌의 제 1원칙을 구비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한시 바삐 알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하기로 하지요. 그렇지만 실험실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을까요?" "가령 내가 의사라면 환자의 혈액 속의 당분을 조사한다든가, 유전 인자의 검사를 한다든가 하는 경우라면 실험실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환자가 장님인지 아닌지를 조사하려면 환자의 눈앞에서 손만 움직여 봐도 알 수 있어요. 로봇 공학의 제 1원칙은 그만큼 기본적인 것이랍니다." 제리겔 교수는 얘기를 하면서 호주머니 속에서 계산 기 같은 것과 오페라 글라스(쌍안경의 한 가지. 두 개의 갈릴레이식 망원경을 가지런히 고정시킨 것으로서, 먼 거리를 바라보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나 통이 작고 휴대하기에 편리하다)와 같은 조그만 기재와 스톱 워치 (경기나 학술 연구 등에서 소요되는 시간을 초 이하까지 정밀하게 재기 위한 조그만 시계)를 꺼냈다. "제 1원칙에 따라서 만들어졌느냐 아니냐는 이제부터 행하는 스물 네 가지의 질문에 이 로봇이 올바른 반응을 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리겔 교수는 다니엘을 향해 돌아앉았다. 베일리는 빈틈 없이 열선 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제리겔 교수가 눈에 오페라 글라스를 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게 다섯 살 차이의 사촌이 둘이 있다. 나이가 아래인 쪽이 여자 애라면 나이가 많은 쪽은 여자 애냐, 남자 아이냐?" "그 힌트만으론 알 수 없습니다." 다니엘은 곧 대답을 했다. 제리겔 교수는 흘낏 워치를 보고는 계속해서, "자네의 왼손 셋째 번 손가락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만져 보게.” 다니엘은 교수의 말대로 했다. 그 후 질문과 테스트는 거침없이 계속 되더니 십 오분쯤으로 끝났다. 교수는 계산기로 무엇인가 계산을 하고 오페라 글라스를 벗어 호주머니 안에 넣어 버렸다. "테스트는 끝났습니다.” "그 결과는?“ "다니엘은 충분히 제 1원칙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소." 베일리는 저도 모르게 쉰 목소리로 외쳤다. 제리겔 교수는 화가 난 모양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신용하지 못하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어쩌면 당신은 속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로봇은 상대를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어떠한 정밀한 과학적 분석을 해도 완전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봇의 전자 두뇌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조립할 수가 없었겠죠. 따라서 로봇의 전자두뇌는 어떻게 훌륭한 것일지라도 상대방을 속일 수 있는 능력만은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로봇이 인간에게 열선 총을 겨눈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습니까? 나는 틀림없이 이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제 1원칙을 구비하고 있다면 그의 전자 두뇌는 파괴되었어야 했겠죠. 적어도 조금은 고장이라도 나야겠죠. 그런데도 그는 아주 정상입니다. 이 일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단 말이오?" 로봇 공학자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건 이상하군요."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다니엘이 말을 했다. "뭐라고?" "파트너 베일리, 내가 준 열선 총을 자세히 조사해 보십시오." 베일리는 겨누고 있던 열선 총에 눈길을 주었으나 별로 다른 데가 없어 보였다. "에너지 챔버(총의 약실: 탄알을 넣는 곳)를 열고 조사해 보십시오." 베일리는 우선 자기의 열선 총을 뽑아서 옆에, 언제나 들고 쏠 수 있는 위치에 놓고 조심스럽게 로봇에게서 받은 열선 총의 에너지 챔버를 열어 보았다. 그것은 비어 있었다. "그 열선 총은 처음부터 에너지를 담지 않은 겁니다. 거기다 그 곳엔 공이 치기 (방아쇠를 당기던 용수철이 늘어남으로 인하여 공이 즉 탄환의 뇌관이나 기폭관을 쳐 폭발하게 하는 송곳 모양의 장치)가 없습니다. 즉 쏘고 싶어도 쏠 수가 없는 것이랍니다." "자네는…… 쏘지도 못할 총을 폭도들에게 겨누었나?" 다니엘은 싱긋 웃으며 말을 했다. "그 경우 열선 총을 뽑지 않으면 폭도들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만약에 진짜 열선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뜻하지 않은 우연에서 방아쇠를 당겨 사람을 손상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쏠 수 없는 열선 총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나에겐 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것이랍니다.“ 베일리는 그만 고개를 힘없이 푹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제리겔 교수를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나의 생각은 오해였던 것 같습니다.“     제지벨이 지하 조직에   베일리는 그 날 하루 종일 멍하게 지내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주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그 때까지 이 사건은 우주인 측의 음모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다니엘을 두 번이나 범인 취급을 했다. 한 번은 변장한 우주인으로 생각하고 또 한 번은 살인 로봇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 다 틀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범인은 누구일까? 또 어디 있는 것일까? "베일리, 여보게, 베일리!" 누군가가 아까부터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뒤돌아보니 필립 노리스라는 형사였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이 2, 3일째 뜬눈으로 멍청한 게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아니, 괜찮네." 베일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자네는 엔더비 국장하고 아주 친했지?" 노리스 형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여 말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눈을 들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아니, 만약에 할 수 있다면 빈스를 위해 말이나 한마디 해 줬으면 해서 그러네. 저것 보게. 오늘도 여기와 있지 않나!" 보니까 사미라는 로봇 때문에 실직한 빈스 바렛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하고 기운이 없다. 빈스는 베일리가 있는 곳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베일리 형사님." "여어, 빈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나?" "뭐, 별로 신통한 일이 없습니다." 빈스 청년은 얼굴을 숙이고 기운 없이 대답했다. (불쌍하게 도…….) 베일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매일 이스트 농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옛날 직장이 그리워서요……. 좀 돌아봐도 괜찮겠습니까?" "아아, 괜찮네." 빈스 청년은 할 일 없이 걸어나갔다. "이런 일은 어떻게 해서든 못하게 해야지. 놈들은 이번엔 첸 로우를 짜를 모양이던데." 하고 노리스 형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뭐라고?“ "못 들었나?“ "아니, 듣지 못했네. 그렇지만 그는 C3급 형사가 아닌가? 벌써 10년째나 여기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네. 그렇지만 그 녀석들은 다리가 달린 기계 쪽이 인간보다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다음은 또 누구 차례지?“ "알 수 없지.“ "그 소문 들었나? 입체 텔레비전의 인기 댄서인 라이런은 사실은 로봇이라면서?"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겠어!" "글쎄 그럴까? 어쨌든 소문으론 우주인들은 로봇을 사람과 똑같이 만들 수 있다고 그러더군." 노리스 형사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했다. "반 로봇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이 맞을는지도 알 수 없어. 우주인들은 우리들 지구인을 증오하고 있는 걸세. 그래서 우리들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네." 베일리는 패스톨프 박사의 말을 생각했다. 약 4,5일 전이라면 그도 노리스 형사가 하는 말에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순순히 그 말에 찬성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패스톨프 박사의 말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다. 노리스 형사는 이윽고 돌아갔다. 거기에 다니엘이 돌아왔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뭔데?" "극비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다음 계획을 세워야지요?" "그래. 그럼 국장실을 쓰기로 하지. 지금 분명히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엔더비 국장실로 갔다. 사미가 도어를 열어 주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곧 다니엘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파트너 베일리, 당신은 어제부터 아주 사람이 달라져 버린 것 같군요." 베일리는 흠칫 놀라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텔레파시를 할 수 있나?" 다니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요." "그러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나?" 다니엘은 그 맑은 눈으로 베일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하며 말했다. "나는 본시 지구인의 심리를 분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과학자 로봇입니다. 어젯밤부터 당신의 뇌 분석을 해 본 결과 당신은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려서 올바른 사고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뇌 분석을? 혼자서 할 수 있나?" "예, 그렇습니다. 엔더비 국장의 뇌 분석을 한 것도 접니다." 베일리는 더욱 불쾌해졌다. 모르는 사이에 자기 서랍 속을 누군가가 휘저었다면 누구나 그런 감정이 되리라. 더욱이 휘저어버린 것은 책상 서랍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인 것이다! "내가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지금 마음이 뒤숭숭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도 네가 말하는 데로다. 그래서 어쩐다는 거야?" "당신은 아주 간단한, 기본적인 것을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지하 조직의 일당 말입니다. 다음은 당연히 그 일당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잇습니다. 그리고…….” 로봇은 약간 망설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 부인 제지벨 말입니다." "뭐라고?" 베일리는 화가 나서 다니엘을 쏘아보았다. "나는 제지벨도 반대 운동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수작 마라!" "그러나 어째서 제지벨은 내가 로봇이라는 것을 그렇게 빨리 알고 있었습니까?" "그건 곧 뉴욕에 그런 소문이…….” "소문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것은 엔더비 국장에게 들어온 보고로도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정보는 어디서 나왔냐면 그것은 제지벨이 지하 조직원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냐, 아니야. 절대로 제지벨이 그럴 리가…….” "그렇지만 파트너 베일리, 당신은 나를 지금까지 두 번이나 살인범이라고 했습니다.“ 베일리는 화가 치밀어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그 보복으로 제지벨을 들먹이고 있는 건가? 제지벨을 살인범이라고 할 텐가?" "아니, 그렇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지하 조직의 일인이라고 말씀드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부인을 심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그 때 책상 위에 붙은 시그널에 불이 켜졌다. "뭐야?" 마이크를 향해 묻자 사미의 듣기 거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베일리 형사님 부인께서 면회를 오셨습니다. 아주 흥분하고 계십니다." 베일리는 일순 다니엘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가만히 있었으나 잠깐 지나자 결심한 모양으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라고 말했다.   나타난 용의자   제지벨은 새파란 얼굴로 들어서자마자 비틀비틀 넘어질 것 같았다. 베일리는 당황해서 달려가 제지벨을 소파에 앉혔다. "왜 그래, 제지벨?" “아아,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잠도 잘 수 없고 음식도 통 먹을 수 없어요. 이 이상 가만히 있으면 난 죽을 것만 같아요. 당신께 말해 두고 싶은 게 있어요!" "뭐야, 그게?" "그건……." 하고 말을 꺼내고 제지벨은 그 때 비로소 다니엘이 있는 것을 알았다. "안녕하세요. 제지벨." 다니엘이 인사를 했다. "아…… 당신은, 저, 로봇이군요." "네 , 그렇습니다." "당신은 로봇이라고 불러도 불쾌하지 않아요?" "물론이죠. 난 로봇인 걸요." 제지벨은 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깐 동안 머뭇머뭇하다가 "저, 부끄러워서. 뭐라고 해야할지……. 제가 반 로봇 운동의 지하 조직에 들어있다는 말을 지금까지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제지벨! 그런 말을 이런데서 얘기하면 어떻게 해!" 베일리가 황급히 말렸지만 제지벨은 듣지 않았다. “아아뇨, 당신의 파트너이니까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것이어요. 전 인재 이런 비밀을 혼자서 몰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괴로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제지벨은 눈물을 흘리며, "이 일이 알려져 형무소에 끌려간다고 해도 할 수 없어요. 이스트하고 물만 먹는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해도 할 수 없어요. 무서워요! 두려워도 할 수가 없죠." 베일리는 결심하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국장이 돌아올 때가 됐네. 빨리 패트롤카를 준비해 주게. 지하 차도에서 얘기하세." 제지벨이 놀란 얼굴을 지었다. "지하 차도는 싫어요." 비명 같은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그 곳 밖에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없어. 우리들이 있으니까 하나도 무서워할 것은 없어. 다니엘. 패트롤카는?" "언제든지 탈 수 있습니다." "그럼 가지." 세 사람은 함께 시경을 나았다. 패트롤카를 타고 모두 다 묵묵히 지하 차도까지 왔다. 지하 차도의 조금 작은 길로 가 보니 주위가 아주 조용했다. 베일리는 제지벨을 돌아다보았다. "자, 똑똑히 말을 해 봐! 제지벨, 당신이 범죄를 저질렀나?“ “.........” 제지벨은 말을 안 했다. "왜 대답을 못하지? 빨리 대답해 봐! 아니면 사람을 죽였단 말이요?" 제지벨은 늘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리고 화가 났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어요?" "죽였어, 안 죽였어!" "물론 안 죽였어요." "그럼,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이지? 남의 물건을 훔쳤나? 배급을 속였나? 사람을 다치게 했나? 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 말이오?" 제지벨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런 일 하나도 안 했어요." "그럼,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저, 딴 게 아니고…… 제가 반 로봇 운동의 조직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건 저의 옛날 친구 중에 반 로봇 주의자가 있었거든요. 그녀가 그랬어요. 우리들의 생활이 어려운 것은 모두 저 우주인 때문이라고요. 그리고 로봇 때문이라고. 그래서 언젠가 우주인을 내쫓아 버리고 로봇을 때려부수고…….” 제지벨은 말하다 말고 흘낏 다니엘을 보았지만 로봇은 전혀 표정이 없었다. "전 그 말이 정말인 줄만 알았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비밀 집회가 있는데 한 번 나가 보지 않겠냐고 했어요. 거기서는 아무나 자유롭게 자기의 불만 불평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나가기만 하면 속이 후련해진다고요. 그렇게 권하길래 거기에 제가 나가 보았죠." 베일리가 물었다. "그 집회는 어디서 열렸지?" "여기여요." "여기라니?“ "여기란 말이어요. 바로 이 지하 차도였어요. 그래서 전 여기 오는 게 싫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집회 때는 참 좋은 장소였어요. 조용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몇 사람이나 모였었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6,70명 가량은 됐어요. 조립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누군가의 연설을 듣는 것이었어요. 대개는 옛날엔 얼마나 멋진 생활을 했는가 라든가, 언젠가는 우주인과 로봇을 해치우자 라든가 그런 연설이었죠. 연설은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언제나 그렇고 그런 얘기뿐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비밀 회합에 출석하면 뭔가 잘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베일리는 점점 초조해져서 제지벨의 말을 막고 물었다. "집회에서 들은 얘기들은 모두 그것 뿐이야? 할 수도 없는 음모 얘기뿐이었냐는 말이오?" "그것뿐이었어요." "그것뿐이었다면 당신은 걱정할 것 없어! 당신의 지하 조직이 실제로 로봇을 습격해서 때려 부셨던가 폭동을 선동했던가 물건을 파괴한 일은 없었소?" "어림도 없어요. 전 폭력은 반대인 걸요. 무서워요. 그런 단체라면 제가 가입했을 까닭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워하지?" "그건…… 이번 일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번 일이라니!" "당신하고 다니엘군이죠. 그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왔어요. 우주인의 로봇이 뉴욕으로 들어왔다는 소문 말이어요. 그 사람들은 '행동을 개시하자' 라든가 '놈들을 본보기로 한 번 멋지게 때려부수고 로봇 반대 운동을 더욱 성황리에 이끌어 나가자' 라든가 하고 떠들어대고 있었어요. 다만 그 때는 모두들 당신과 다니엘의 얘기인 줄 몰랐단 말이어요. 그렇지만 저는 금방 알았어요." 베일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었군……. 더 빨리 알려 줬으면 좋았을걸." "그렇지만 전 아주 무서웠어요. 만약에 그 사람들이 말하듯이 살인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당신은 살해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조사를 하면 전 또 그 폭동을 일으킨 지하 조직의 멤버로서 형무소로 끌려갈는지도 모른다하고 생각하니 무서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베일리는 그제야 납득이 갔다. "알았어. 제지벨, 당신 모임의 지도자가 누구지?" 제지벨은 얼마간 냉정을 되찾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조셉 크레밍이라는 사람이어요. 하지만 그 사람도 온건한 사람이어서 아무 일도 못할 것 같고 오히려…….” "오히려 뭐야?“ "때때로 본부에서 연설을 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진짜 지도자라고 생각돼요." "그 사나이의 이름은?" 제지벨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언제나 '본부 사람'이라고만 하고 이름은 부르지 않았으니까요." "다니엘, 자네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의 인상을 말해보게. 어쩌면 제지벨이 알아낼지도 모르니까.“ 다니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지벨은 한참 동안 듣고 있다가 이윽고 머리를 내저었다. "안 되겠어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전……." 그 말을 하다말고 문득 제지벨은 다니엘을 향해 앉았다. "다니엘, 그 속에 어쩌면 이스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어요?" "프란시스 크로사아라는 사나이가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본부 사람은 언제나 이스트 냄새가 났어요. 항상 이스트를 취급하고 있으면 그 냄새가 옷이나 몸에 배는 게 아니겠어요?" "그럴지도 모르죠. 허지만 분명히 그렇다고도 할 수 없죠." 베일리는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다니엘을 눈짓으로 저지하고 제지벨에게 말했다. "자, 이젠 괜찮으니 집으로 가지. 사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어. 그 정도라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자, 내가 데려다 줄께." "당신은 괜찮을까요?“ "난 괜찮아.” 제지벨은 아직 근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얼마간 마음이 안정된 듯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지벨을 집으로 보내고 나서 두 사람은 다시 패트롤카를 타고 지하 차도로 돌아왔다. 제지벨하고 헤어진 후 베일리의 표정은 다시 어둡고 침통해졌다. "파트너 베일리, 설마 그 본부 사람이라는 사나이가 프란시스 크로사아라는 걸 의심하시지는 않으시겠죠?“ "물론이지, 다만 아내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기 싫었네." "그건 어째서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네." "그렇지만 그건 옳은 태도가 아니죠." “때로는 옳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는 거라네, 다니엘.“ 다니엘은 지그시 베일리의 얼굴을 지켜봤다 (이 자식, 또 내 두뇌 분석을 하고 있군.) 베일리는 곧 그렇게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않고 다니엘을 계속 바라보았다. “잘, 알았습니다. 파트너 베일리, 당신 말을 믿겠습니다.“ 다니엘이 이윽고 말을 했다. 베일리는 패트롤카의 속력을 내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다니엘의 물음에 베일리는 대답했다. "이스트 타운에. 이스트 회사로 가서 프란시스 크로사아를 체포해서 진상을 심문할 걸세." "고백할까요?“ "나는 고백시킬 재주가 없지만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건 어떤 뜻일까요?" "이제 곧 알게 될 걸세.“ 패트롤카는 맹렬한 스피드로 지하 차도를 달려갔다.   이스트 농장   이스트 농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이스트균의 냄새가 조금씩 강하게 풍겨 왔다. 베일리는 돌연 아주 옛날의 소년 시절이 생각났다. 열 살 무렵이었다. 그 때 베일리는 항상 굶주리고 있었다. 집에는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고 아주 엄한 배급 제도라서 언제나 조금 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베일리는 이스트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보리스 아저씨한테 놀러 가곤 하였던 것이다. 보리스 아저씨는 베일리를 귀여워해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조금이기는 하지만 맛있는 이스트 과자를 두었다 주곤 했었다. 그때 받았던 과자며 초콜릿이며 고양이나 개 모양을 한 비스킷을 지금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어렸을 때였지만 베일리에게도 보리스 아저씨가 배급하는 식량을 갖다가 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자를 받으면 구석으로 가서 몰래 서둘러 먹었던 것이었다. 먹으면서도 혹시 들키지나 않을까 해서 겁을 집어먹곤 했었다. 그래서 그 과자는 더욱 맛이 있었으며, 보리스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보리스 아저씨가 이스트 농장의 거대한 기계 사이에 끼어 죽었을 때는 진심으로 슬퍼서 며칠 동안이나 울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때까지 몰래 과자를 먹은 벌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아저씨가 자기 대신에 죽은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척 괴로웠던 것이었다. 이스트 타운이란 것은 몇 만 평방 킬로미터라는 거대한 이스트 농장 지구였다. 그 곳에는 몇 층으로 된 이스트 농장이며, 공장, 창고, 운반 장치들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뉴욕 돔 입구의 5분지 1의 인구가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5분의 1의 인구가 여기에 관계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 이스트 농장이 파괴된다면 단번에 시민들은 굶어 죽고 만다. 만약 이스트의 원료가 없어지던가, 공장의 동력이 멎어버린다거나 해서 이스트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면 1년 동안에 온 지구 인구인 80억 중에서 60억이 굶어 죽을 것이다. 그래서 강철 도시는 하루도 빠짐없이 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패트롤카는 끝없이 계속되는 농장 사이의 좁은 길을 전속력으로 달려서 이윽고 커다란 출입구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차를 내려 출입구 옆에 있는 수위실로 들어갔다. "어느 분에게 면회하러 오셨습니까?" "경찰에서 왔습니다. 프란시스 크로사아를 만나게 해 주시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기다리니까 이윽고 훌륭한 복장을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내가 인사과 주임 프레스 코트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형사님."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프란시스 크로사아에게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없습니까?" "아,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러면 거기에 안내해 주셨으면……." "좋습니다. 그러면 이 안내봉을 가지고 가십시오. 사용법은 아시겠지요?" 주임은 길이 15센티미터, 두께가 2센티미터 가량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봉을 베일리에게 건네주었다. 안내봉 사용법은 간단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면 안내봉이 따뜻해져서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그 온도가 올라간다. 반대로 목적지에서 멀어질수록 차가워지는 것이다. 베일리는 안내봉을 들고 넓은 이스트 농장 안을 자꾸만 걸어갔다. 안내봉 덕택에 몇 백이라는 구역 사이를 한 번도 어김없이 곧바로 목적지까지 갈 수가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조명이 달린 커다란 농장으로 들어섰을 때 안내봉이 뜨거워졌다. 베일리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한 노동자에게, "프란시스 크로사아는?" 하고 물었다. "저깁니다.“ 하며 그 사나이는 항 한구석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한 떼의 사나이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베일리는 그 쪽으로 다가갔다. 주임이 연락을 취해 두었던 모양이어서 그 중의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프란시스 크로사아요. 무슨 용건입니까?." 베일리는 흘낏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알았다는 신호로 끄덕여 보였다. "얘기가 있는데 어디 그럴 만한 장소가 없을까7" "곧 일이 끝날 텐데요, 내일이면 안 되겠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선 식사시간이 아주 까다롭습니다. 저녁 17시인데 그때를 놓치면 굶고 자야 한답니다." "식사는 갖다 주지." "그건 너무 황송하군요. 마치 C 급 형사라도 된 호사로군요." 크로사아는 아주 비꼬아 말했다. "농담할 때가 아니야. 어디서 얘길 할까?" "전자 계량실이라면 당분간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다니엘, 식사를 여기로 가져오도록 하게. 그리고 부를 때까지 밖에 나가 있어 주게."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베일리는 크로사아와 마주 보고 앉았다. "자네는 화학자인가?" "아니. 나는 발효학자요." 하고 크로사아는 거만하게 말했다. "화학자라는 것은 지금 세상에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발효학자는 틀리지요. 우리들은 온 지구의 80억 인구의 식량을 만들고 있지요. 말하자면 온 인류를 먹여 살리고 있으니까…….” 베일리는 과학자가 기술자들과 만나면 반드시 모두가 서로가 딴 분야 사람들을 헐뜯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서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방을 경멸하고 조금도 협력하려고 하지 않는다. 크로사아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여서 계속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들은 여기서 매일 여러분의 식량이 되는 이스트균이 불순한 것이 되지 않도록 실험을 하거나 검사를 하고 있지요. 우리들 덕분에 여러분들은 모두 위생적이고 영양이 풍부한 이스트를 먹게 되는 겁니다." 베일리는 상대방의 얘기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불쑥 물었다. "자네는 어젯밤 18시에서 20시까지 사이에 어디 있었나." 크로사아는 약간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했다. "산책을 했죠. 나는 저녁 후 조금씩 산책하는 게 습관이니까요." "친구를 찾아갔나, 아니면 술이라도 마시러 갔나?" "아니, 그냥 목적 없이 거닐었죠." "그렇다면 자네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사람이 아무도 없군." "글쎄요.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군요. 그런데 어째서 그게 필요한지 그것도 알 수 없군요." 크로사아는 도전이라도 하듯이 말을 했다. "그저께 밤은?" "같습니다. 산책을 했지요." "그렇다면 두 밤 다 알리바이가 없군." "어째서 알리바이가 필요하죠? 만약에 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다면 가짜 알리바이라도 만들었겠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알리바이가 없는 거요." 베일리는 수첩을 조사했다. "자네는 앞서 폭동을 선동한 죄로 한 번 체포된 일이 있군." 크로사아는 코웃음쳤다. "아아, 그 일 말이오. 로봇 녀석이 나를 밀치길래 나도 같이 밀쳐 버렸을 뿐이오. 그게 무슨 폭동을 선동한 것이 됩니까?" "재판에서 자네는 유치 판결이 내려 벌금을 물었어." "그래서 벌금을 물었지요. 또 벌금을 내라는 겁니까?“ "그저께 밤 브롱크스 구둣방에서 폭동이 일어날 뻔했지, 자네는 그곳에도 있었어. 증인이 있어." “호오, 그 증인이란 게 누구요?" 베일리는 말문이 막혔다. 다니엘을 증인으로 내놓을 수가 없다. 재판에서는 로봇은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작전을 바꿨다. "그때는 여기 식사시간이었지. 그저께 밤 자네는 저녁을 먹었나? 거짓말을 해도 기록을 조사하면 곧 알게 돼." 크로사아는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위가 좋지 않아서……. 이스트를 먹으면 때때로 그렇게 된답니다." “어제 윌리엄스 버그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뻘 했지. 자넨 거기에도 있었다는 증인이 있네." "글쎄, 그게 누굽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양 쪽 다 거기에 있었다는 걸 부정하나?" "물론이죠.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러시는 거죠? 그리고 날 봤다는 증인은 또 어떤 사람이오? 어째서 말을 못 하죠?" 크로사아는 베일리를 비웃으며 대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지. 자네는 반 로봇 주의 지하 단체의 유력한 멤버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쪽의 자유지만 증거가 없는 데야 어떻게 하겠소." "이제 증거를 보여 주지." 베일리는 전자 계량실 도어를 열었다. 다니엘이 저녁 식사를 들고 있었다. "그 쟁반을 크로사아 씨 앞에 갖다 놓게." 크로사아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자리 잡고 이 쪽을 보고 있었다. 다니엘이 옆으로 가까이 가자 크로사아는 몸이 꼿꼿이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자, 크로사아, 나의 파트너인 다니엘 올리버 형사를 소개하오." 그러자 다니엘이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프란시스 크로사아 씨." 크로사아는 그래도 대답하지 않고 다니엘이 내민 손을 내려다볼 뿐 자기는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언제까지나 손을 내민 채로 있었다. 크로사아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상기되었다. 베일리가 말했다. "크로사아, 실례가 되지 않나? 아니면 경찰관 따위하곤 악수를 할 수 없단 말인가?" 크로사아는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식사 쪽으로 향했다. "실례하고 식사를 들겠오. 배가 고파서 못 참겠으니…….” 베일리는 다니엘을 보며 말했다. "다니엘! 크로사아 씨는 경찰관이 싫은 모양일세. 그렇지만 자넨 화를 내지 않을 테지?" "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시로 어깨에 손을 얹어보게." “예. 좋습니다.“ 다니엘이 앞으로 다가서서 크로사아 씨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고 하자 크로사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그 손을 뿌리치면서, “이 차가운 로봇 놈아! 손대지 마!” 하고 외쳤다. 그 바람에 쟁반은 뒤집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졌다. 크로사아는 훌쩍 뒤로 물러섰다. 다니엘은 조금도 서두는 빛 없이 천천히 크로사아에게 다가갔다. 그리로 흘낏 도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베일리가 도어 앞에 막고 서 있었다. 크로사아는 온 얼굴이 공포의 표정으로 일그러지고 애써 다니엘을 피하려고 했다. “이놈을, 이 로봇을 내 옆에 오지 못하게 해 주시오. 저 더러운 손으로 나를 만지지 못하게 해 줘요!” “다니엘, 멈춰서라.” 베일리의 명령에 다니엘은 딱 멈춰 서서 크로사아를 지켜보았다. 크로사아는 몹시 허덕이며 주먹을 쥔 채 험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크로사아, 자네는 어째서 다니엘이 로봇이라고 생각했나?” “그런 건 보기만 해도 아무라도 알 수 있소!” 베일리는 다니엘을 돌아보며, "시경으로 연락해서 프란시스 크로사아를 과격한 로봇 운동가로서 체포한다고 연락해 주게.“ 다니엘이 끄덕이고 나가자 베일리는 크로사아 쪽으로 돌아섰다.     인간은 인간이다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것은 특별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전문적인 로봇 공학자도 몰라보게 돼 있어. 그런데 어째서 네가 알고 있었는지 시경으로 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게." 베일리의 이 말에, "변호사를 불러 다오!" 하고 크로사아는 고함쳤다. "물론, 불러 주지." 베일리는 크로사아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가 어째서 반 로봇 운동가가 됐는지 그 이유를 말해 보게." 크로사아는 들은 체도 않았다. "이건 경찰관의 한 사람으로 묻고 있는 게 아니야. 지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물어 보고 싶은 걸세. 대체 자네들의 단체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거요. 이 강철 도시를 버리고 저 넓은 야외로 나가 밭을 갈며 살아가자고 하는 뜻이오.“ "말로 하긴 쉽지.“ 베일리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실행하는 건 어려워. 도대체 어떻게 80먹이나 되는 지구의 인구를 먹여 살린단 말인가?“ "물론 하루나 이틀로 하라는 건 아니오. 1년이라도 좋고 2년이라도 좋소, 아니 백 년이 걸려도 좋아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아니오. 그렇지만 지금 행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그러기 위해서는 로봇을 쫓아내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요. 그리고 우주인의 간섭을 배격한다는 것이 둘째요. 그래서 우리들은 이 강철 도시를 버리고 더 넓은 저 야외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밭을 갈고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자는 것이오.“ 크로사아는 점점 흥분해져서 목소리는 높아지고 말은 힘찼다. 베일리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크로사아, 자네는 그 신선하다는 야외 공기를 마시고 햇빛에 접한 일이 있었나?" 크로사아는 눈에 보이게 당황한 빛을 보였다. "아, 아니죠.“ "자네도 무서울 걸세. 저 밖에……” 라고 말하며 베일리는 저 멀리 돔의 지평선을 가리켰다. “……. 나갈 용기는 없을 걸세.“ 크로사아는 분연히 베일리를 되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 나도 쓸개 빠진 인간이다. 그렇지만 애들은……어린애들은 아직 쓸개가 빠지진 않았어. 어린애들은 모험심의 덩어리요, 저돌적이다. 그리고 그 아기들이 자꾸만 태어난다. 우리들의 힘으로 그 애들을 저 야외로 내보내 주자는 거다!" 베일리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강한 충동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저 밖으로 내보내서 굶어 죽게 만들 심인가? 적은 식량을 서로 빼앗느라고 서로 죽이고 죽게 할 참인가? 이미 지구상에서는 몇 백 년 동안 없었던 전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것을 또다시 부활시켜 몇 백 만이라는 인간을 죽일 셈인가? 그것으로 인구를 줄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크로사아가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베일리는 그것을 가로막고 계속 말했다. "자네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결국 실현 불가능한 일이야, 자네들은 공연히 불만을 터뜨리려고 하는데 지나지 않아.“ 베일리는 온몸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왜 역사를 역행시키려고 하나? 어째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질 않지? 지구의 인구를 억지로 줄이려고 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다른 세계로 이주시키면 되는 거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아. 그렇지만 이 지구의 자연이 아니라 다른 행성의 자연으로 돌아가란 말이다.“ 크로사아가 쉰 듯한 목소리로 웃어 젖혔다. "무슨 말씀을, 그런 일을 우주인들이 하라고 내버려둘 것 같소? 그렇지 않아도 우주 국가에 이민을 금지하고 있는데…….” "우주 국가로 이민 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행성으로 가는 거다. 그리고 지금의 우주 국가하고는 다른 새 우주 식민지를 건설하는 거야. 그것이 우리 지구인의 운명이란 말이다!" 베일리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중에 우주인 패스톨프 박사가 한 이야기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패스톨프 박사의 말을 그대로 흉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이 마치 몇 십 년 전부터 자기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크로사아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을 했다. "어리석은 소릴. 지금 우리만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 아무것도 없는 딴 행성을 개척한단 말인가?" "로봇의 힘을 빌리면 된다.“ "농담하지 말아!" 크로사아는 무서운 기세로 고함쳤다. "절대로 싫다! 로봇의 힘을 빌리다니, 죽어도 싫다!" "대체 어째서 싫지? 너는 그 원인을 분명히 생각해 본 일이 있나?“ 베일리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마주 고함을 질렀다. "나도 로봇은 싫다. 그렇지만 편견만은 갖고 싶지 않다. 잘 생각해 보면 절대로 로봇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거야. 나보고 말을 좀 해 보라면 로봇을 싫어하는 것은 로봇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로봇이 인간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은!" 크로사아가 외쳤다. "아니, 틀림없다. 로봇 보다 못하다고 자기 혼자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로봇이 싫은 거다. 아니,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자네처럼 로봇을 증오하기조차 했다.“ 베일리는 다니엘이 걸어나간 도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오늘까지 사흘 동안 저 로봇하고 밤낮을 함께 지냈다. 다니엘을 자세히 봐라. 그 놈은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거기다 잘 생기기까지 했다. 신체도 우주인하고 똑같이 만들어졌다. 기억력도 지식도 컴퓨터와 같은가 하면 아무리 일을 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잠을 잘 필요도 없거니와 먹을 필요도 없어. 아프다던가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범죄를 일으킬 만한 유혹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우리들보다 훨씬 훌륭해 보이지.“ 베일리는 여기서 한층 힘을 주어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요컨대 그는 기계야. 그에게 무엇이든 명령 할 수 있다. 바로 저기에 있는 전자 계량기나 마찬가지지. 전자 계량기를 때렸다고 해서 전자 계량기가 우리를 때리지는 않지. 다니엘도 그 것과 마찬가지야.“ 크로사아는 어느새 지그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컨대 로봇은 기계에 불과하지. 인간이 아니란 말일세. 어떠한 과한 기술의 힘을 빌려도 인간과 같은 능력을 갖춘 로봇은 만들 수 없어.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동하거나, 해서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거나 하는 능력은 결코 없지. 로봇에게는 본시 그런 것은 무리한 주문일세. 로봇의 전자 두뇌가 제 아무리 뛰어났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마지막 소수점까지 전부 계산해 놓았기 때문이지. 그러나 인간의 머리는 틀려. 계산하는 속도가 늦을지는 몰라도, 또한 잘 잊어버릴지는 몰라도 유혹에 지거나 슬퍼도 하고 괴로워할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보다 높은 것을 지향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로봇보다 못한 게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로봇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자네는 이러한 원리를 모르느냔 말이다!" 크로사아는 다만 묵묵히 베일리의 열정적인 말을 듣고 있었다.   로봇 살해 사건   마침 베일리가 잠깐 말을 끊었을 때 다니엘이 방으로 돌아왔다. "파트너 베일리, 잠깐만 이리로 와 주십시오." 그는 도어 옆에 서서 베일리에게 손짓을 했다. "뭐야?“ 베일리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다니엘이 그의 귀에 입을 갖다 데고 속삭였다. "시경에서는 지금 큰 소동이 일어났어요. 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답니다.“ "뭐라고?“ 베일리가 눈을 크게 뜨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누가 죽었나?“ "사미입니다.“ "사미라고?“ 베일리는 다니엘을 쏘아 봤다. "살인 사건이라고 했지않나?“ "정정하겠습니다. 로봇 사미의 전자 두뇌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엔더비 국장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습니다. 하여튼 시경 안에서 국장의 로봇이 누군가에게 파괴 됐으니까 말이죠. 국장은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잡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곧 돌아오라는 전갈이었습니다.“ 베일리는 크로사아에게 말했다. "크로사아, 함께 가세." 크로사아는 억지로 소파에서 일어섰다. 세 사람은 함께 전자 계량실을 나와 이스트 농장을 지나 출입구로 향했다. 도중에서 갑자기 크로사아가 멈춰 섰다고 생각하자 말릴 새도 없이 갑자기 다니엘 앞으로 다가서서 로봇의 얼굴을 세게 갈겼다. "무슨 짓을 해!" 베일리가 달려들어 크로사아를 뜯어 말렸다. 크로사아는 이제는 저항을 하지 않았다. "한 번 해 본 거죠.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크로사아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했다. 다니엘은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크로사아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맞은 뺨은 빨개지지도 않고 또 맞은 흔적도 없었다. "그런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크로사아, 내가 머리를 뒤로 젖히지 않았더라면 당신 손이 상했을 테니까요.“ 크로사아는 다만 빙글빙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세 사람은 패트롤카에 올라탔다. 베일리가 운전을 하고 다니엘과 크로사아는 한구석에 앉았다. 다니엘이 바로 옆에 앉아 크로사아는 또다시 부자연스럽게 긴장된 표정으로 될 수 있는 한 다니엘에게서 떨어져 앉으려고 애썼다. "당신은 자기의 직업을 로봇에게 빼앗길까봐 겁이 나는 거죠. 크로사아?" 다니엘이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내가 하는 일뿐인가?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일마저 모조리 빼앗겨 버릴 거야. 머지 않아 몽땅 로봇에게 일을 빼앗기고 실업자가 되어 버릴 거야.“ 크로사아는 증오의 눈초리로 다니엘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그러나 다른 일을 할 수 있어요." "다른 일? 이스트 농장의 운반책 말인가? 그것도 직업이라고? 그게 무슨 일이냐!" "아뇨. 그런 일이 아니라 예를 들면 당신의 어린애들이 우주 이민 교육을 받으면…….” "농담하지 마라! 하지도 못할 것을 잘도 뻔뻔스럽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주 이민 훈련 학교를 나온 사람은 일정한 계급과 수입, 그리고 장래는 그 능력에 따른 승진이 보장됩니다.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된다면 이야말로 가장 좋은 직업이 아니겠습니까?" "네 이놈, 로봇인 주제에 인간에게 설교를 할 생각이냐?“ 크로사아는 이제 당장에라도 로봇에게 달려들 듯이 보였다. 베일리가 앞좌석에서 말을 했다. "다니엘, 만일에 크로사아가 손찌검을 하거든 붙잡아서 팔 하나쯤 부러뜨려도 괜찮다.“ "할 테면 해 봐! 로봇 공학 제 1원칙에 로봇은 인간을 손상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팔 하나나 두 개쯤 부러뜨려도 괜찮아." 크로사아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윽고 패트롤카는 시경 앞에 닿았다. 베일리는 크로사아를 구류계 경찰관에게 인도하고 다니엘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물론 엘리베이터를 타는 편이 빨랐지만 베일리는 잠깐 동안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크로사아의 대질 심문은 내일이나 되겠군요." 라고 다니엘이 말했다. "응, 로봇 사미 사건을 먼저 처리해야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이 사건도 전연 별도의 사건은 아니지. 반드시 관계가 있을 걸세.“ "크로사아의 두뇌 분석 결과는…….” 베일리는 다니엘의 입을 바라다보았다. "결과는?“ "이상한 변화를 보였습니다. 맨 처음하고 당신네들이 전자 계량실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부터 말입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음......” 베일리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거기서 씨 에프이 문화에 관해서 패스톨프 박사에게 들은 얘기를 말해 주긴 했지만…….” "그렇다면?“ "말하자면, 로봇과 협력해서 지구의 인간을 딴 행성으로 이주시킨다는 얘기 말일세.“ "아, 그랬었군요……. 그건 그렇고 로봇에 관해서는 어떤 얘기를 하셨습니까?“ 베일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얘기해 주지. 나는 로봇은 기계에 지나지 않으니까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얘기했네.“ "아마 이렇게도 말씀하셨겠죠. 로봇은 기계이기 때문에 때려도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보복도 않을 거라고 말이죠.“ "그건…… 그랬지." 베일리는 다니엘이 알아맞히는 바람에 약간 쑥스러워졌다. "그럼, 분석의 결과하고 일치합니다. 크로사아가 내 얼굴을 때린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실지로 실험을 해서 나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털어 버리려고 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명백히 들어맞습니다.“ 다니엘은 마지막 한 마디를 혼잣말 같은 말투로 말했다. 베일리는 그 말뜻을 몰라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그때 이미 에스컬레이터는 목적한 곳에 닿아 있었다. 국장실에 들어가니, 엔더비 국장이 책상 뒤쪽에 대단히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불안할 때 하는 버릇대로 안경을 벗어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베일리를 보자마자 그는 고함 지르듯이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나? 베일리 형사!" 베일리는 대답하려다 국장 옆에 제리겔 교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리겔 교수, 아직 뉴욕에 계셨습니까?" "아아, 베일리 형사, 또 만나 뵙게 됐군요.“ 엔더비 국장은 또 초조한 듯 베일리에게 물었다. "여태껏 어디 갔었냐고 묻고 있쟎나? 베일리?“ 그는 안경알을 번득거리며 말했다. "온 시경의 직원 전부가 심문을 받았었데. 나까지도 심문을 받지 않으면 안됐으니까. 아직 받지 않은 건 자네하고 그 다니엘 뿐이야." "사미가 망가진 게 뭐 그리 큰 문제라고 떠들어댄단 말이오? 국장님?“ "당연하지. 시경 안에서 공용의 로봇이 파괴됐다는 건 실로 불명예스러운 노릇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릴세. 나는 이 범인을 그냥 두진 않을 테니까!" 엔더비 국장은 그렇게 말하며 흘낏 베일리를 보았다. "모두가 조사를 받았는데 자네가 없어서 다들 이상한 얼굴을 하더군, 지금까지 어디 갔었나 말일세?" "이스트 타운에요. 그건 다니엘에게 물어 봐도 알텐데요.“ 베일리는 화가 치미는 것을 꾹 누르고 그 말만 하고는 이번에는 국장에게 대들었다. "대체 사미는 어떻게 해서 파괴됐단 말이오? 어째서 사고가 아니라 일부러 파괴 됐는지 알게 됐단 말입니까?“ "그건 내가 얘기해 드리지요.“ 제리겔 교수가 옆에서 말하고 나섰다. "나는 뭐 그리 서둘러서 워싱턴으로 돌아갈 일도 없고 해서 뉴욕에서 한가히 보내기로 했죠. 그리고 당신의…… 그 로봇을 분석해 볼 수 있도록 허락도 받을 겸해서요'" 그는 다니엘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떻습니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아니, 안 됩니다.“ "아니,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나중이라도 좋습니다.“ 베일리는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그리나 제리겔 교수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려고 연락을 했더니, 당신은 계시지 않고 당신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도 없었오. 그래서 엔더비 국장에게 부탁을 하니까 시경으로 와서 기다리면 좋을 거라고 그러시더군요." 국장이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요한 문제일지도 몰라서 그랬지. 자네가 무척 교수를 만나 보고 싶어했으니까.“ 제리겔 교수가 말을 계속했다. "시경에 도착하니까 안내 재원이 안내봉을 주더군요. 그런데 그 안내봉이 고장이 생겼는지, 아니면 내가 정신을 딴 데 두고 잘못 알았든지 그만 방향을 틀려서 미아가 되어 버렸오. 그리고 어느 사이에 저 작은 방에 와 있었지요.“ "사진 용품실 말일세." 하고 국장이 설명을 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 들어간 순간 그 로봇이 방바닥에 엎드려져 있는 걸 발견했지요. 잠깐 조사해 보기만 해도 이미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것이 분명하더군요. 즉 죽어 있었오. 아니, 살해되었소!" "파괴된 원인은 무엇이었소?" 베일리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로봇의 오른손에 길이가 약 5, 6센티미터, 폭이 2센티미터 가량의 반짝반짝 빛나는 장원형의 물건을 갖고 있었오. 그리고 그 끝이 로봇의 머리에 닿아 있었오. 그건 알파선 분사기였소." "알파선 분사기?“ 베일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것은 물리학의 실험 기구로서 여러 가지 물질에 투사시켜 그 변화를 테스트하는 극히 드문 기구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거의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으나, 로봇의 전자 두뇌에게는 가장 위험한 도구요. 알파선의 에너지가 전자 두뇌의 회로를 엉망으로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오. 그 로봇은 자기가 자기의 머리에 알파선 발사기를 대고 스위치를 눌렀소. 그래서 당장에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말하자면 인간으로 치면 폭사했다는 것이죠." 국장이 옆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로봇이 자살할 까닭도 없고, 그 사진 용품실에는 알파선 분사기가 없었으니까, 로봇 사미가 자기 자신이 어디서 갖고 왔을 리도 만무하고,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사미에게 들려주고 스위치를 누르라고 시켰던 걸세. 로봇은 사람의 말에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스위치를 누르고 죽었어. 즉 사미는 누구에겐가 파괴된 거야." "그건 틀림 없습니까?“ "틀림없어. 사미가 넘어진 방향에 있던 사진 필름이 모두 감광되었는 걸." 엔더비 국장은 제리겔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사건이 끝날 때까지 뉴욕에 머물러 계셔야 하겠습니다. 그 동안은 호위하는 사람을 딸려 드리지요.“ "그럴 필요까지야…….” 제리겔 교수는 충격을 받은 모양으로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있지요. 이 범인은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죠.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어쩌면 당신도 노릴지 모르니까요.“ 엔더비 국장은 경찰관을 한 사람 불러 호텔까지 제리겔 교수를 전송하도록 했다.   동기는 어디에   제리겔 교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국장은 긴 한숨을 쉬고 베일리를 보았다. "범인은 틀림없이 우리들 중에 있어. 베일리, 외부의 인간은 이 시경 안까지 들어와서 사미를 습격할 수가 없지. 그리고 만약에 외부 사람이라면 뒤에서 습격했을 게 아닌가?" "그렇군요.“ 베일리가 끄덕였다. "또 하나 흉기인 알파선 분사기는 그렇게 쉽게 손에 넣을 물건이 아니란 말일세. 그렇다면 범인은 그것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인간이 아니면 안 되네.” "그렇지만 대체 이 사건의 동기는 뭐요? 어째서 범인은 사미를 살해했습니까?” 그때까지 잠자코만 있던 다니엘이 돌연 엔더비 국장을 향하여 물었다. 국장은 잠시 망설였다가 대답했다. "경관도 같은 인간이니까 로봇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닌가?" 그러면서 흘기는 눈초리로 베일리를 쏘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베일리, 자네는 사미를 무척 싫어했지 " "그것만으로 로봇을 살해한 동기는 되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물론이지. 하지만 베일리, 자네가 마지막으로 사미를 만났던 게 언제였나?" 베일리는 국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어째서요?“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네. 모두 같은 질문을 받았다네.” "오늘 점심때쯤 나하고 다니엘이 당신 방을 썼소. 그 때 사미가 문을 열어 주었오. 그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일 거요.“ "내 방을 썼다고? 그건 또 왜?” “사건에 관해서 아주 극비로 의논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오. 마침 당신도 안 계시고, 또 거기는 완전 방음 장치가 되어 있어서 도청을 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에 아주 편리했습니다.“ "아, 그랬었군…….” 엔더비 극장이 잠깐 망설였으나 이제는 그 이상 추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 사미를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나?" "그렇소. 아니, 그렇지만 한 시간쯤 지나서 그가 실내 전화로 연락했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들었군요." "분명히 사미의 목소리였나?" "예, 틀림없어요.“ "틀림없습니다.“ 다니엘도 옆에서 대답했다. "시간은 언제쯤이었나?“ "15시 30분 경이었지요.“ "흠…… 그럼 빈스 바렛의 용의는…….” 엔더비 국장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혼잣말처럼 말을 한다. 베일리가 이 말을 듣고 극장을 바라보았다. "빈스가 어떻게 했습니까?" "자네는 빈스 바렛이 오늘 여기 온 걸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장님, 빈스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자는 훌륭한 동기가 있지. 그의 직장을 빼앗았고 그를 실직시킨 것이 사미였으니까. 그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억울한 심정이었을지 나는 잘 알 수 있어. 필경 어떻게 해서라도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걸세. 더욱이 오늘 빈스는 여기에 왔었어. 우연히 그를 만나 전후에 분별 없이 흥분해 버려서 이전부터 알고 있던 알파선 분사기를 끌어내 사미의 뒤를 밟아 죽여버렸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일일세.“ "그를 이미 체포했습니까? 아니면 행방을 알 수 없나요?" "체포하진 않았네. 행방을 찾고 있었는데 자네 말을 들으니 그의 혐의도 풀렸으니까 이젠 그만 두라고 해야겠네.“ "왜요?“ "빈스 바렛이 시경을 나간 게 15시었으니까. 그리고 자네가 사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15시 30분 경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빈스가 여기를 나갈 때 사미는 아직 살아 있었다는 것이 되지." "아, 잘 되었군요.“ 베일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베일리, 자네가 15시 30분에 사미하고 얘기했을 때 사미가 뭐라고 하던가?“ 베일리는 흠칫 놀랐다. 엔더비 국장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돌연 분명해졌기 때문에 그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주의 깊게 입을 열었다. "기억에 없소.“ "어째서?" "아마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서 그랬던가 보오. 그리고 우리들은 곧 여길 나가서 이스트 타운에 갔기 때문에 잊어버렸소. 그렇소. 국장님, 우리들은 이스트 타운에서…….” "잠깐만 베일리, 오늘 자네 부인이 여기 왔었지?" “…………” "조사해 두어서 오늘 시경에 출입한 사람은 전원 기록했네. 증인들도 많이 있네." "알겠습니다. 제지벨이 왔었지요." "제지벨은 무슨 용건으로 왔었나?" "개인적인 용건으로요." "어떤?" "아주 하찮은 일입니다. 그것보다도 국장님, 알파선 분사기는 어디서 끄집어 낸 거요? 그걸 조사했나요?" "그건 했지.“ 엔더비 국장은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어딥니까?“ "윌리엄스 버그 원자력 발전소야." 베일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집어냈는지 그 수법 같은 건 알았습니까?“ "아니 알 수 없네. 어느 틈엔가 없어졌단 말일세." "그건 이상하군요. 그런 특수한 실험 도구의 관리는 굉장히 엄중한데요. 누군가 책임자가 있을 게 아니요. 그 사람을 엄하게 심문하면…….” "베일리씨, 그건 다른 사람이 하고 있어. 자네 담당은 우주인 살해 사건이야. 그러니 로봇 살인 사건에 간섭할 필요는 없네. 자네는 자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네. 그럼 이걸로 심문은 끝내세." 엔더비 국장은 책망하는 것처럼 말을 했다. 그리고, "하여튼 이 사건은 동기만 알면 곧 해결되는데…….” 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베일리는 화가 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그 국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때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찰카닥' 하고 소리를 내며 결합되는 것을 느꼈다. (그랬었군, 국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가? 제지벨, 윌리엄스 바그 원자력 발전소, 동기, 그리고 알파선 분사기. 모조리 사미하고 결부시키는 일 뿐 아닌가! ) "베일리,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빨리 돌아가 일을 하게. 나는 바빠." 엔더비 국장이 쫓아내듯 말했다. 베일리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다니엘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누 명   베일리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경 안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저녁을 들었다. 먹으면서도 그는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조차 통 알 수 없었다. 다 먹고 나서도 한참 동안은 접시 위에 낙서하듯이 접시를 휘젓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뭐라고? 농담 마라!" 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좀 떨어진 테이블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는 다니엘을 재빨리 돌아보고, "다니엘!" 하고 불렀다. 다니엘은 곧 앞의 의자로 다가와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파트너 베일리.“ 베일리는 다니엘을 향해 한 마디 한 마디 정성을 들여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내게 협력해 주겠나?" "어떤 협력 말입니까?“ "머지 않아 나는 국장에게 또 질문을 받을 걸세. 아마 제지벨이 지하 조직에 들어 있는 일을 물어 볼 테지. 그 때 나는 부정할 테니 자네는 그 때 잠자코 있어주기만 하면 되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진실이 은폐되는 걸요.“ "그건 잘 알고 있어. 어떤 이유로 지금은 진실을 좀 숨겨 두고 싶어서 그러네. 그 이유는 지금 얘기하겠지만 그전에 자네가 협력해 줄는지 어떨지를 먼저 알고 싶어서 그러네." 다니엘은 약 2분 동안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베일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협력하지요. 그렇지만 만약에 국장이 내게 직접 물어 보면 거짓 대답을 한 수 없다는 걸 아시죠? 내 전자 두뇌는 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답니다.“ "물론이지. 그 때는 할 수 없네. 다만 이쪽에서 미리 정보를 제공하지만 않아 줬으면 해서 그러는 걸세. 그렇게는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죠. 다만 당신의 이유가 옳은 거라면, 혹 내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람이 다치는 일이 없다면 말입니다.“ 베일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자네가 말을 하면 나하고 제지벨이 상하네. 즉 사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된단 말일세." “그건 안 될 말이오. 파트너 베일리, 그건 당신이 사미를 죽이지 않았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대요." "자내는 로봇일세. 로봇은 법적으로 증인이 될 수 없네. 그런데 내 행동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건 자네 하나 뿐이거든.“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리는 말을 계속했다. "국장은 아까 동기 얘기만 자꾸 했는데, 빈스 바렛은 사미를 죽일 만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었지만 그는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어. 그런데 또 한 사람 빈스 못지 않게 사미를 죽일 만한 훌륭한 동기를 가진 자가 있어." "그건 누굽니까?“ "날세, 나야. 이 베일리란 말일세.“ 다니엘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얘기를 들어보게. 오늘 제지벨이 나를 만나러 왔을 때 사미가 안내를 했네. 그때 제지벨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네. 그것을 사미는 알고 있어. 만일 엔더비 극장이 그 일에 흥미를 갖고 조사해 보기만 하면 제지벨이 지하 조직의 멤버라는 건 금방 알게 되네. 형사의 아내가 법률에 반하는 단체의 멤버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건 큰 문제가 되네. 필경 파면 될 테지. 즉 내가 사미와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그를 없애버렸단 이런 얘기가 되지.“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닙니까? 생각하는 게 너무 비약적이군요.“ "아니, 그게 아니야. 이건 내게 로봇 살인 사건의 범인의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신중하게 계획된 음모란 말일세, " 베일리는 몸을 앞으로 쑥 내밀며 목소리를 낮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지금 추리에 들어맞거든. 로봇 살해 사건에 어째서 알파선 분사기를 썼느냐? 이건 꽤 위험한 방법이다. 첫째로 손에 넣기 어렵고 혹시 손에 넣었다고 쳐도 출처를 곧 알 수 있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은 일부러 이 알파선 분사기를 사용한 걸세.“ "그건 또 어떤 이유에서요?" "다니엘, 그 알파선 분사기는 윌리엄스 버그 원자력 발전소에서 훔쳐냈단 말일세. 나하고 자네가 여기 반 로봇 운동가들에게 쫓겨서 윌리엄스 버그 원자력 발전소를 지나갔지. 이건 숨기려고 해도 기록에 남아 있으니 금방 알 수 있어. 즉 내게는 알파선 분사기를 훔쳐 낼 기회가 있었다. 이런 얘기가 되네. 알아듣겠나? 다니엘.“ 다니엘은 냉정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로봇이기 때문에 당신이 알파선 분사기를 훔치지 않았다고 증언해도 아무 소용이 없죠.“ “더욱이 사미가 살해된 것은 나하고 자네가 시경을 떠난 바로 직후야. 즉 내가 살아 있는 사미를 본 마지막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거지.“ "국장은 당신의 친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을 신용하겠지요?“ "그러나 국장도 자기의 지위가 중요하네. 만일에 이 사건이 흐지부지되면 시장한테서 공격을 받을 게 틀림없네. 그리고 국장은 벌써 나를 의심하고 있어. 아니, 날 사미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믿고 있는 걸.“ 베일리는 번득번득 빛나는 눈으로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어. 한시 바삐 서튼 박사를 죽인 장본인을 찾아내는 일이네." "서튼 박사를 살해한 범인하고 사미를 죽인 범인이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까?" 베일리는 강하게 끄덕였다. "내 말대로다. 어째서 내가 사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는가? 그것은 물론 나를 경찰에서 쫓아내기 위해서지. 그럼 왜? 나를 경찰에서 추방하려고 하느냐? 그건 서튼 박사 살인 사건 수사에서 내가 손을 떼게 하기 위해서야. 범인은 나를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경 우리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서튼 박사 살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서고 있었던 게야.“ 베일리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범인은 역시 틀림없이 반 로봇 주의의 지하 단체의 멤버임이 분명해, 우리가 윌리엄스 버그 원자력 발전소를 지나온 걸 알고 금방 그것을 내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이용한 것은 우리를 뒤쫓아온 그들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베일리는 다니엘의 아주 침착한 모습을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로봇이다. 그러니까 아무 감정도 없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베일리는 온 세상의 어느 인간보다도 강한 우정과 신뢰를 느끼는 것이다. 다니엘은 힘세고 충실하고 자기 자신의 일은 조금도 생각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였다. 이 이상 믿음직한 친구가 또 어디 있으랴 하고 생각 될 만큼 훌륭한 친구이다. 그리고 지금 베일리는 다니엘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부탁이다. 다니엘, 내게 힘을 빌려주게. 그래서 이 사진을 해결하세.“ 그러나 어째서인지 다니엘은 분명히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미안합니다, 베일리. 그렇지만 나는 당신에게 협력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다니엘은 아주 깨끗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주시의 결정   "어째서, 왜 안 되나? 다니엘." 베일리는 긴장해서 질문했다. "나는 패스톨프 박사하고 연락을 취했는데…….” “뭐라고?” 베일리는 깜짝 놀랐다. "언제?“ '당신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입니다.“ "어떻게?“ "나는 필요하기만 하면 언제나 우주시하고 연락할 수 있는 통신기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패스톨프 박사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결과 우주시로서는 오늘 서튼 박사 살해 사건 수사를 중지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리고 우주시를 폐지하고 지구에서 영원히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그처럼 중대한 일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아주 조용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힘을 빌려 줄 수 없는 겁니다. 오늘로써 나는 우주시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씌워진 사미 살해 사건의 누명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베일리는 다니엘이 하는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사실 같지가 않았다. (우주인이 우주시를 버리고 지구를 떠난다……?) 만약에 4, 5일 전에 그 말을 들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고 그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뉴스였을 것이다. 지구인은 오랜 동안의 우주인의 탄압에서 해방돼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젠 우주인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싫은 로봇을 억지로 쓰라고 강요당할 일도 없게 되었고, 일일이 우주인의 의견을 물어 보지 않아도 되었다.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뻐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베일리는 전혀 그런 마음이 일어나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우주인이 떠나버리면 지구 인류의 앞날이 정말 암담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 하나의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그런 기분이었다. 더욱이…… 만일 지금 우주인이 떠나버린다 하면 가장 곤란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서튼 박사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기는커녕 그는 사미 살해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경찰에서도 추방된다. 아니, 어쩌면 강철 도시의 지하 맨 밑바닥에 있는 형무소에 한 평생 잡혀 있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제지벨과 베일리는 비참하게 되겠지. 베일리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21 시 55 분이었다. (아아, 앞으로 두 시간 5분만 지나면 오늘도 끝난다. 아아, 몹시 피로하다. 이것저것 다 귀찮고 다만 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다니엘에게 물어 보았다. "헌데 어째서 그렇게 갑자기 우주인들은 그렇게 결정했지?“ 다니엘이 눈썹을 치떴다. "그래도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정말 모르겠네.“ "우주인들이 우주시를 만든 최초의 목적은 지구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발전을 하라는 뜻으로, 즉 다시 말해 우주로 진출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이미 들은 얘기고, 그래서?" “그 이야기는 잘 아시죠? 그러나 중요한 얘기이기 때문에 또다시 말씀드린 겁니다. 또한 서튼 박사 살해범을 발견하려고 한 것도 서튼 박사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구인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지구인이 자멸하는 것을 기다리자는 다른 우주 국가의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말도 패스톨프 박사에게 들었어." 베일리는 다니엘에게 다가가서 격렬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자네들 우주인은 그 우주시를 버리고, 즉 지구를 버리고 왜 고향인 별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건가? 서튼 박사 살해범을 잡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야. 문제의 실마리는 모두 잡고 있어. 이제 한 가지 단서만 잡으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거야. 단 하나면 되는 거다.“ 베일리는 억울하고 안타까워 목이 다 쉬었다. 다니엘의 표정 없는 그 차가운 눈초리가 안타까워하는 베일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째서 우주인은 서튼 박사 사건의 조사를 중지하기로 했나?“ "그것은 물론 우리들의 계획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구인이 우주로 나가서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리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호오 그건 어째서 또 그렇게 갑자기 낙관적으로 변하게 되었지? 여기 우주인들은 항상 그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기분파들인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랫동안 우주인들은 지구의 경제적인 구조를 바꾸어 지구인의 사고 방식을 개량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주인이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지구에서는 엉뚱한 로봇 운동이 번성해져서 우주인의 최초의 목적이 도저히 성공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베일리는 초조하고 신경질이 났으나 참고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니엘의 말은 계속됐다. "계획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이 바로 서튼 박사였습니다. 박사는 우리들 우주인과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지구인을 보다 많이 얻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지구인들을 격려하고 원조하지 않는 한 되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밖에서 억지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지구인 스스로가 자진해서 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선 그런 인물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죠. 그래서 뽑힌 인물이 바로 당신이랍니다. 베일리, 당신은 그런 인물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실험 인간으로 뽑혔던 것입니다.“ "내가 실험 인간이었다고?" 베일리는 화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한 발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그건 무슨 뜻인가?" "처음 엔더비 국장이 당신을 이 사건의 담당자로서 추천해 왔을 때 우리들은 당신에 관해 모든 것을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물론 완전한 두뇌 분석도 하였지요. 당신이 우주시에 가서 패스톨프 박사하고 회담하였을 때 잠깐 정신을 잃었었던 바로 그 때 말입니다.“ 베일리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얼마 동안 잊어 버렸던 우주인과 로봇에 대한 증오심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너희들은 나를 모르모트(실험용으로 쓰이는 쥐의 일종)처럼 해부했단 말이군. 그래서 그 결과 무엇을 알아냈단 말이지?“ "그것은 당신이 아주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신은 옛날 지구의 역사에 관해서 진지한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만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해서 미련을 갖는 따위의 약하디 약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현실주의자이지만 지금의 이 돔 도시와 이 강철 동굴 같은 상태에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또한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무엇이나 무턱대고 믿어 버리는 광신자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당신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우주시에 와서 우주인을 향해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우주인이 꾸며낸 음모라고 항의할 만큼 끈기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러한 인물이야말로 우리가 실험대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말하고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어떤 실험이었나? 무엇을 어떻게 증명하려고 했었지?“ "그것은 지구의 장래는 이 돔 도시를 벗어나 우주로 진출해서 새로운 우주를 개척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당신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실험이었습니다.“ 베일리는 문득 가슴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는 같은 직업인 노리스 형사며 , 반 로봇 주의자인 프란시스 크로사아에게 패스톨프 박사에게 들은 대로의 이야기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하고 다니엘은 마치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 악랄한 반 로봇주의 파인 프란시스 크로사아조차도 설득했습니다." "그렇지가 않아. 그는 끝까지 반대하지. 지금도 우주 개척 따윈 믿고 있지 않다.“ "아닙니다.“ 다니엘은 부드럽게 말했다. "전자 계량실에 들어갔을 때와 나왔을 때하고는 프란시스 크로사아의 두뇌 분석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말로는 여전히 반대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 설득하면 그는 반드시 우주 계획을 믿게 됩니다. 당신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계속했다. “그런데 반 로봇주의 가운데는 프란시스 크로사아 같은 인물이 꽤 많이 많습니다. 아마 당신 부인인 제지벨도 그럴 겁니다. 즉 반 로봇주의라고 반드시 우주인의 적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들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랍니다.“ 다니엘은 거기서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패스톨프 박사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박사는 우리들의 실험이 성공했다고 생각해서 서튼 박사 살해 사건 조사를 그만 두기로 했던 겁니다. 이만하면 다 아셨을 테지요?" 베일리는 말없이 한참 동안 다니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속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꼭두각시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우주인과 다니엘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불쾌했다. 그는 제 정신으로 돌아와 말을 했다. "그렇지만 다니엘, 만약에 이대로 사건을 미해결인 채로 내버려두면 우주 국가가 가만있지 않을 테지. 오로라의 정부는 지구에 대해서 손해 배상을 청구해 오겠지. 그렇지만 지구인도 이 이상 참고만 있을 수는 없어. 그렇게 되면 전멸할 것을 각오하고 일대 반란을 일으킬텐데. 그래도 좋은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오로라 정부는 일체 배상 요구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주시를 파괴한 뒤에는 지구는 일체 간섭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만…….” 베일리의 입에서 괴로운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다니엘! 나는 사미 살해범으로서 경찰에서 추방당한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제지벨도 벤트리도 내일부터라도 당장 부랑자가 되어 버린단 말일세.” 다니엘의 렌즈로 된 눈이 잠깐 흐린 듯이 보였다. “베일리, 매우 안 됐다고는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손해쯤은 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튼 박사께서도 부인과 두 분 자녀와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박사를 살해한 범인이 잡혀 처벌되지 않은 것을 침통히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것도 참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랍니다.“ "그렇지만 곧 범인이 잡힐 텐데 왜 조금만 더 참아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 않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아니 어쩌면 오히려 거북스러운 결과가 될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말을 하는군. 다니엘, 그러면 결국 서튼 박사 사건은 지구인을 연구하기 위한 구실이었군. 당신네들은 맨 처음부터 서튼 박사 사건의 범인을 잡는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 그래서야 박사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닌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물론 범인을 잡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과 온 인류하고 어느 쪽이 중요하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지금 수사를 계속한다면 도리어 나쁜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범인은 유력한 반 로봇 운동의 멤버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인물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말이겠군?“ 베일리는 쓰디쓴 기분으로 내뱉듯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 다니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자네의 전자 두뇌 극의 정의 회로는 어떻게 되어버렸나? 설마 고장난 게 아닐 테지? 이런 부정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그러나 다니엘은 까딱도 않는다. “아니, 잘 알고 있습니다, 베일리. 정의에는 큰 의미의 정의와 작은 의미의 정의가 있습니다. 작은 의미의 정의는 커다란 정의의 앞에서는 무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이 약삭빠른 로봇 놈을 그냥......!) 하고 베일리는 마음 속으로 욕했지만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니엘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생각했다. “자네는 호기심이란 게 없나?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는 호기심 말일세.” “호기심이란 게 무엇입니까?" “보다 지식을 넓히고 싶다는 욕망일세.“ "그런 욕망이라면 제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는 무엇인가 소용이 되는 지식이 아니면 원하지 않습니다. 지구인들처럼 소용도 없는 것을 많이 갖는 습관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거기서 일단 말을 끊고 장난꾸러기 같은 눈초리가 되었다. "지구인은 말하자면 엔더비 국장의 안경처럼 아무런 소용도 되지 않는 방식을 좋아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더군요. 제게는 도저히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 순간 베일리는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격렬히 폭발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엔더비 국장의 안경! 그렇다.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사건을 풀 수 있는 마지막 단서는!) 그의 두뇌는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단번에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분명하게 범인과 그 수렵을 해결하였던 것이었다. 베일리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다니엘, 우주시는 오늘 하루로 서튼 박사 살인 사건 수사를 중지하는 것이 틀림없나?" "네 .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지금 22시 30분이야. 오늘이 끝나려면 한 시간 30분이 남았어.“ 베일리는 다니엘의 팔을 잡았다. “그 동안만이라도 좋으니까 지금까지처럼 수사에 협력해 주게. 다니엘, 내게 좋은 생각이 있네. 반드시 그 사이에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이겠네. 결코 자네들에게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걸세.“ 다니엘은 약 1, 2초 가량 베일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파트너 베일리, 오늘이 끝날 때까지 협력해 드리지요.“ 그는 또다시 베일리를 파트너로서 인정했던 것이다! 베일리는 신이 났다. "자네는 우주시 쪽에서 녹음한 살인 테이프의 복사를 가져올 수 있나?” "있습니다. 파트너 베일리. 그게 지금 곧 필요한데……." "시경의 송신기를 쓰면 10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부탁하네! 시작해 주게.“   수수께끼는 풀리다   22시 53분, 베일리와 다니엘은 또다시 엔더비 국장실로 왔다. 베일리의 호주머니 속에는 지금 다니엘이 우주시에서 전송해 온 비디오 테이프의 복사가 한 통 들어 있었다. 엔더비 국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안경을 만지며 말 없이 한참 동안 베일리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제 윌리엄스 버그 원자력 발전소에 갔었지?” “예. 갔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물으면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서투르군. 아주 서툴러!” 엔더비 국장은 신음하듯 말했다. “말하자면 내가 사미를 살해한 흉기인 알파선 분사기를 손에 넣을 기회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싶은 거군요. 그렇지만, 이 다니엘에게 물어 보십시오, 우리들은 다만 발전소 안을 지나쳐 왔을 뿐입니다.“ 국장은 더욱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로봇의 증언이 법률적으로 효력이 없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리고서 책상 뒤로 몸을 반듯이 하고 물었다. "자네는 제지벨이 이 곳에 온 이유를 개인적인 용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폭력으로 정부를 뒤집어엎으려고 하는 과격한 반 로봇 운동가들의 지하 조직의 멤버일세. 아니, 부정해 봐도 소용이 없네. 내게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까. 크로사아가 분명히 증언을 했거든. 이 자린 베일리는 조직 멤버의 한 사람이라고 말이네 " 엔더비 국장은 베일리를 쏘아 봤다. "제지벨이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공상적인 조직의 집회에 몇 번인가 출석했던 것은 사실이오. 그렇지만 그건 별로 굉장히 떠들어댈 만한 일은 못 됩니다.“ "그러나 시장은 그렇게 생각지는 않을 걸세. 그리고 의회에서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을 걸. 그러니 불가불 자네는 자문 위원회에 회부될 걸세.“ “그래서 사미 살해 용의자로 심문을 받게 된다, 이런 말씀이군요.” 엔더비 국장은 부드러운 눈빛이 되어 한숨을 쉬었다. "할 수가 없네. 베일리, 자네에게는 불리한 증거가 너무나 많아. 자네가 사미를 싫어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또 제지벨이 참가하고 있는 지하 조직 일로 자네를 만나러 왔던 일도 다 알고 있네. 사미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네는 틀림없이 이 사실을 사미가 누설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을 걸세. 더욱이 자네는 윌리엄스 바그 원자력 발전소에서 흉기를 손에 넣을 기회가 있었어. 즉 동기와 기회도 모두가 구비되어 있어.“ 엔더비 국장의 말은 자신으로 넘쳐 있었다. "그건 함정이오.“ 베일리는 분명히 말했다. "이건 모두가 교묘하고 신중하고 세밀하게 꾸며진 함정이란 말이오.“ 엔더비 국장은 지그시 베일리를 바라보며, “엉터리 같은 소리 말게, 베일리. 그런 말은 범죄자들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하는 소리야. 그런 소릴 하면 위원회에서 동정하기는커녕 도리어 자네에게 반감을 갖네.“ 하고 말했다. "동정은 필요 없소. 반감을 갖는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아니, 바보 같은 소리가 아니오. 이건 내게 서튼 박사 살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한 진짜 범인이 꾸며 놓은 함정이란 말이오. 난 모든 것을 규명했단 말입니다.“ "뭐라고?“ 엔더비 국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베일리는 시계를 보았다. 23시였다. "자넨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자네는 이미 패스톨프 박사 앞에서 당치도 않은 과실을 했었네.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이번엔 용서한 수 없네.“ 국장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번은 절대로 틀림없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누가 내게 함정을 팠는지, 그걸 생각해 주면 좋겠네. 그건 어제 저녁 내가 윌리엄스 바그 원자력 발전소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지.“ "그렇군. 그럼 그게 누군가?" "나는 그전부터 반 로봇 운동가들에게 감시와 미행을 당하고 있었소. 그러니까 그 중의 누군가가 나를 따라 와서 나하고 다니엘이 발전소를 지나온 것을 봤을 테지.“ "그렇군. 그렇다면 프란시스 크로사아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군. 알겠네, 그럼 조금 후에 심문할 때 모조리 토해 내도록 하지." 엔더비 국장은 조금 침착해져서 말을 계속했다. "암, 그랬었군. 크로사아는 자네가 윌리엄스 바그 원자력 발전소에 들어가는 걸 보았지. 그리고 그는 전부터 제지벨이 멤버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미를 죽인 죄를 자네에게 뒤집어씌울 음모를 계획했다. 우선 발전소에 있는 동지를 통해 알파선 분사기를 손에 넣고 다음에는 시경 안에 있는 동지에게 연락해서 사미를 아무도 모르게 파괴해 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네가 사직하도록 해서 사건에서 손을 떼게 만들려고 했다.“ 엔더비 국장은 거기서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이것으로는 안 되네. 베일리, 크로사아라고 하면 의문이 너무 많아. 그리고 억지가 눈에 선해. 그리고 또 한 가지 크로사아는 우주시에서 살인이 일어났던 날 밤에서부터 아침까지 절대적인 알리바이가 있네. 지금 막 그걸 알았다네. 그러니까 그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란 말일세." 엔더비 국장은 베일리의 어깨에 다정스럽게 손을 얹었다. "여보게, 베일리, 모든 걸 체념하고 사표를 내면 어떨까? 자네가 그렇게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위원회 쪽에 잘 얘기를 해서 될 수 있는 한 파면되지 않도록 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시청이나 아니면 어디든 새로운 직장이 마련 되도록 노력해 주겠네.“ "사절하겠네.“ 베일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엔더비 국장이 실망한 듯 힘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아니, 나는 범인이 크로사아라고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네. 반 로봇 운동가임에 틀림없지만 크로사아는 아닐세. 크로사아보다 더 유력하고 중요한 멤버가 있네.“ "그게 누군가?“ 엔더비 국장은 묘한 얼굴을 하고 베일리를 쳐다보았다. "그 사나이는 제지벨이 지하 조직의 멤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네. 제지벨은 아주 하찮은 말단 멤버였는데……..” "어쩌면 제지벨은 사실은 중요 인물인지도 알 수 없지.” "국장님, 크로사아는 정말로 제지벨 베일리가 지하 조직의 멤버라고 말했나?" 엔더비 국장의 얼굴색이 변했다. "자네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제지벨은 보통 결코 제지벨이라는 정식 이름을 쓰지 않거든. 그런데 어째서 크로사아가 그걸 알고 있었을까?" 국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음, 그것 말인가? 그건 내가 말을 잘못했군. 나는 항상 제지벨이라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게 말을 했네. 크로사아는 제시 벤트리라고 했을 걸세.“ "그랬을까? 사실은 크로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크로사아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건 자네가 만들어 낸 얘기 아닌가?" 엔더비 국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미쳤나? 베일리.“ "아니. 지극히 정상일세.“ 베일리는 국장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당신은 오늘 점심 후 어딜 갔었나? 적어도 두 시간 동안 당신은 어딘가 갔었지?" "질문하고 있는 건 날세, 베일리.” "그렇다면 내가 대신 답해 주지. 당신은 윌리엄스 버그 원자력 발전소에 갔었지." 엔더비 국장이 갑자기 의자를 덜커덩 밀어붙이고 일어섰다. 이마에는 비지땀이 배어 있었다. "대체 자네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발전소에 갔었나 안 갔었나 대답을 하게, 엔더비.“ "자, 자네는 상관을 모욕했어, 자네를 파면하네, 열선 총과 배지를 내놔.“ 국장은 고함쳤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은 다음에 하지." "그 따위 말을 누가 들어, 너는 역시 유죄란 말이다. 사미 살해범이야, 자기가 위험해지니까 그 죄를 엉터리로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하고 있어.“ "그건 정반대군, 당신이야말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장본인이야.“ "닥쳐라! 일라이저 베일리, 너를 체포한다.“ 엔더비 국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을 때 베일리는 재빨리 허리의 열선 총을 꺼내 겨누었다. "체포할 수 있으면 어서 해 봐. 난 하고 싶은 얘기를 모조리 해 버릴 테니까. 방해를 하면 사정없이 쏴 버릴 테다.“ 국장은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열선 총과 베일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런 일을 해 봐, 베일리. 정신 개조 병원에 간다. 나를 열선 총으로 위협한 죄만으로도 20년 징역은 충분해. 그 총을 빨리 거둬라.“ 다니엘이 돌연 굉장히 재빠른 행동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베일리 옆에 오는가 싶더니 열선 총을 잡고 있는 베일리의 손목을 꽉 잡았다. "이건 용서할 수 없군요. 파트너 베일리, 국장에게 무기를 겨눠서는 안 됩니다.“ "놔라! 다니엘.“ 베일리는 손을 뿌리치려고 해 봤지만 로봇의 힘은 황소 같아서 끄덕도 하지 않았다. "안됩니다. 나는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국장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 놈의 열선 총을 뽑아라. 다니엘, 체포해서 유치장에 처넣어라.“ 베일리는 재빨리 말했다. "그를 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체포되면 안 돼. 다니엘, 자네는 사건 해결에 협력하겠다는 약속하지 않았나? 아직 45분이 남아 있네.” 다니엘은 베일리의 손목을 잡은 채 국장을 향해서 말을 했다. "엔더비 국장, 베일리 형사의 발언을 허용해 주십시오,” "쓸데없어! 그런 말을 들을 시간이 없다! ” "듣지 않는다면 그건 불공평합니다.“ "로봇인 주제에 인간에게 명령할 순 없어. ” "이건 우주시의 패스톨프 박사의 충고입니다. 나는 지금 박사하고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연락을 취했어?" "제 몸 속에 있는 통신기로 하고 있습니다. 패스톨프 박사도 아까부터 이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만일 베일리 형사의 발언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에게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 테지요.“ 엔더비 국장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무너져 내리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니엘이 베일리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는 열선 총을 다시 허리에 찼다. "당신은 그때, 윌리엄스 바그 원자력 발전소에 가 있었던 게요. 그래서 알파선 분사기를 끄집어내서 그걸 사미에게 건네주고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라'하고 명령했단 말이오. 그 때문에 사미는 죽었지. 당신은 그걸 모두 내가 한양 꾸며댔어. 그래 놓고선 마침 제리겔 박사가 나를 찾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 일부러 고장난 안내봉을 주어서 그 사진 용품실로 가게 해 사미의 시체를 발견하게 만든 거야." "듣기 싫다!" 엔더비 국장이 우는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닦았다. "내게 사미를 죽이거나, 또한 그 죄를 자네에게 뒤집어씌울 만한 동기가 어디 있어?" "사미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또 내가 사건의 진상의 일보 전까지 접근하였기 때문에 나를 추방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거란 말이지.“ "무, 무슨 말을, 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릴…….” “닷새 전에 우주인 서튼 박사가 살해됐다. 그를 죽인 사람은 당신이야. 국장, 그리고 사미는 그걸 알고 있었던 게야.“   우 정   엔더비 국장은 흠칫하고 몸을 움츠렸다. "파트너 베일리, 그건 틀린 말이오. 국장은 서튼 박사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옆에서 말을 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게. 엔더비는 나보다 높은 계급의 형사들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맡겼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그와 나는 대학생 때부터 친구이자 후배이기 때문이겠지. 그건 내가 친구이자 선배며 상관인 그를 범인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네. 베일리는 엔더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 둘째는, 만일에 내가 진상을 규명하게 될 것 같은 경우에는 제지벨이 비밀 조직의 멤버인 것을 이용해 나를 위협해서 수사에서 손을 떼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네.“ "아니야!" 엔더비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하 조직의 멤버가 아닐세. 더욱이 제지벨이 멤버라는 건 전연 몰랐단 말이다. 모두가 엉터리다!" 그는 다니엘을 보며 말했다. "다니엘, 우주시의 패스톨프 박사에게 말하게. 이건 모두가 엉터리고 거짓말이라고.“ 다니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베일리는 목청을 높였다. "엉터리가 아니라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그 첫째가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사실이 어째서 그렇게 빨리 반 로봇 운동의 지하 조직의 귀에 들어갔나 말이다. 국장은 먼저 구둣방 사건 때 거기 모인 군중 속에 전문가가 있어서 그 사나이가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니엘을 만났을 때 틀림없는 우주인이라고 생각했네. 딴사람들도 그랬을 걸세. 아니…….” 베일리는 말을 뱉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로봇 전문가인 그 제리겔 교수조차도 이쪽이 힌트를 줄 때까지는 다니엘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이야. 그렇다면 왜 그런 소문이 퍼졌느냐? 그것은 물론 처음부터 반 로봇 운동가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꼭 지하 단체의 유력한 멤버가 그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걸 로봇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은 것은 우주인하고 나, 그리고 다니엘하고 당신, 엔더비 뿐이었단 말이다. 나는 물론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며, 다니엘도 말하지 않았고, 우주인도 역시 말을 할 리가 만무지.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당신이야!" "그, 그런 말은 증거가 될 수 없어. 시경이라고 반대 주의자들의 지하 조직에 침투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베일리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더 한층 혼란을 일으키려 하는 국장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이치에 들어맞는 일뿐이었지. 당신은 내 수사가 진상에 다가서면 걱정을 하고 멀어지면 안심했지. 내가 우주시를 찾아갔을 때 당신은 걱정이 돼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내가 당치도 않는 착각을 일으켰을 때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기뻐했지. 그렇지만 내가 제리겔 교수를 부르자 또다시 당신은 걱정하기 시작했지. ” 그 때 다니엘이 돌연 손을 들었다. "국장이 반 로봇 주의의 유력한 멤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그가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 같다는 것은 대강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튼 박사 살해범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이제 곧 알게 돼! 내가 제리겔 박사를 부른 것은 이 살인 사건엔 반드시 로봇이 한몫 끼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그 일은 분명히 해 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 “인간과 로봇이 협력해서 힘을 합해서 저지른 범죄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군요." "왜? 자네들은 씨 에프 문명을 인간과 로봇이 함께 협력해서 이룩하는 문명이라고 하면서 이런 지극히 단순한 CF 범죄를 알아 볼 수 없단 말인가?“ 다니엘은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가 설명 해 주지. 로봇은 야외를 얼마든지 걸어다닐 수 있으나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또 한편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는 있으나 한밤중에 혼자서 야외를 걸을 수는 없다. 자,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되지?" "오오!" 다니엘이 사람과 꼭 같은 신음 소리를 냈다. 베일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엔더비는 우선 사미에게 열선 총을 들려서 목적지와 출발 시각을 가르쳐 주었다. 엔더비 자신은 언제나처럼 정식 수속을 밟아 우주시로 갔다. 우주시로 가서 그는 또 다른 출입구에서 사미를 만나 열선 총을 받아 가지고 서튼 박사를 쏴 죽였다. 그리고 다시 열선 총을 사미에게 돌려주었다. 사미는 그것을 가지고 야외를 걸어서 뉴욕 돔 안으로 돌아 왔다. 국장은 그 뒤로 시치미를 떼고 서튼 박사의 죽음을 처음으로 안 것 같이 했다. 이런 줄거리였어. 자아, 이게 사건의 진상이다!" 다니엘은 한참 동안 잠자코 베일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파트너 베일리, 내게는 곧 납득이 안 가는군요. 첫째로 당신의 추리는 굉장히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는 먼젓번에도 말했던 것처럼 사건 직후에 그가 행한 두뇌 분석의 결과 그가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즉 그는 범인일 수가 없습니다.“ "고, 고맙다, 다니엘…….” 엔더비는 다시 자신을 되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베일리, 나는 어째서 자네가 있지도 않은 일을 갖고 나를 공격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위원회에 나가서 어디까지나 진상을 밝힐 수밖에 없네. 그러니까 아마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걸세.“ "잠깐만, 이걸 보고 말하지." 베일리는 호주머니에서 비디오 테이프의 곽을 꺼냈다. 엔더비 국장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 그게 뭐냐?" “폭탄이 아닐세. 비디오 테이프야. 지금부터 돌리지.“ "무엇이 찍혀 있나?" "보면 안다.“ 베일리는 비디오 테이프의 스위치를 누르다가 말고 잠깐 망설였다. 사실은 그도 그 속에 무엇이 찍혀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이 찍혀 있을는지 없을는지 전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에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찍혀 있지 않은 경우, 그때는…… 그도 마지막인 것이다. 그는 스위치를 눌렀다. 국장실 한쪽 벽면이 사라지고 거기에는 전혀 다른 방안의 광경이 홀연히 떠올랐다. 입체 텔레비전이기 때문에 마치 전혀 딴 방이 그 곳에 생긴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엔더비 국장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방안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너덜너덜하고 새까맣게 탄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우우우…… 이, 이런…… 이런 걸 왜 보여 주나…… 어서 꺼버려!" 엔더비가 괴로운 듯 허덕이며 말을 했다. "안 된다. 좀더 자세히 봐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흘깃 자기의 시계를 보았다.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베일리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국장이 살인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처음부터 용의권 밖에 두었다. 그러나 다니엘, 아까 우리가 호기심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자네는 국장의 안경이 소용도 없는 장식품이라고 말했었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이 사건을 푸는 열쇠를 발견했네. 그렇다. 열쇠는 바로 국장의 안경이었단 말이다!" "당신의 말뜻을 잘 알 수 없군요." 다니엘이 말했다. 그러나 베일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국장을 향해서 말을 했다. "엔더비, 당신은 언제 안경을 깨뜨렸지?“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베일리.“ "이 사건에 관해서 맨 처음으로 회합했을 때 당신이 안경을 망가뜨려 바꿨다고 했어. 나는 그래서 당신이 서튼 박사 살해 사건을 보고 놀라서 넘어져 깨졌나 하고 생각했지. 그랬었나?" "그, 그렇다…….” 엔더비 국장은 괴로운 듯이 그리고 말하기 힘든 것처럼 중얼거렸다. "안경을 떨어뜨린 곳은 어디지? 회의실에선가?" "그랬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아니 기억하지 못하겠네…….” 엔더비는 점점 더 말하기 거북한 듯했다. "파트너 베일리, 나는 당신의 질문하는 뜻을 모르겠군요. 아니 정말 무슨 뜻이 있는 겁니까?" "잠자코 보고만 있어." 베일리는 비디오 레코드의 움직임을 끄고 수동 장치를 써서 시체가 나오는 장면을 자꾸만 확대 시켰다. 무참한 시체의 화면이 온 벽을 차지했다. 시꺼먼 육체의 굉장한 악취가 풍겨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하고 어깨와 몸은 상처가 없었지만 가슴에서 허리께 까지 타 들어가서 거의 탄소화해버린 새까만 살 사이로 등뼈의 잔해가 보였다. 베일리는 엔더비를 힐끗 보았다. 엔더비는 지금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베일리도 가슴이 메슥거렸지만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카메라는 시체의 주위에 방바닥을 핥듯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베일리는 또 시계를 보았다. 23시 55분. 나머지 5분! 그는 또 입을 일었다. "엔더비는 계획적인 살인을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어떠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돌발적인 살인을 할 경우는 있다. 그는 결코 서튼 박사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어. 다니엘, 자네를 죽이려고 했던 걸세. 기계를 파괴하는 건 살인은 아니야. 그랬기 때문에 그의 두뇌 분석의 결과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던 걸세.“ 베일리가 담담히 말했다. 다니엘은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베일리는 말을 계속했다. "엔더비는 서튼 박사의 계획에 따른 지구 측 협력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네가 만들어지는 목적도 알고 있었지. 또한 서튼 박사의 우주 이민 계획도 알고 있었다. 기기다 그는 우주를 두려워했다. 지구인이 또다시 우주를 향해 진출하게 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네를 파괴해 버리려고 결심했던 걸세. 자네를 파괴하기만 하면 우주 국가들은 지구가 아직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우주 이민 계획을 중지시키리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었어.“ 베일리는 엔더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는 서튼 박사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아마 새벽녘쯤이었을 테지……. 그때, 우주시에 왔어. 서튼 박사는 아직 자고 있겠지만 자네가 일어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가 온다는 것을 알면 자네가 나오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던 걸세.“ 베일리는 엔더비 국장의 바로 앞에 버티고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엔더비, 당신은 사미에게서 열선 총을 받아 들고서 돔의 도어까지 와서 내버렸어. 그리고 다니엘에게 열선 총을 퍼부어 다니엘을 파괴한 후 새벽녘의 인기척이 없는 우주시의 거리를 빠져 사미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돌아갈 심산이었지. 사미에게 열선 총을 건네 뉴욕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 사이에 누군가가 다니엘의 시체를 발견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지. 그리고 사실 또 그렇게 됐다. 틀린 것은 당신이 다니엘이라고 생각하고 죽인 것이 다니엘이 아니라 서튼 박사, 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아, 엔더비, 이젠 고백하면 어떤가?” “아냐, 난…… 안 했네…… 아니, 난 몰라!“ 엔더비는 약하디 약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일어서, 엔더비. 그리고 다니엘을 정면으로 바로 봐라. 당신은 지금까지 다니엘을 바로 쳐다본 일이 없다. 그 뿐인가, 다니엘의 이름조차도 오늘까지 분명하게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다니엘이 너무나 서튼 박사와 똑같이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서튼 박사의 유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엔더비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 때 스크린이 바뀌어 서튼 박사의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문이 열려서 금속으로 팬 홈이 나타나 보였다. 베일리는 그 홈 속에서 무엇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보고 또 보았다. 틀림없다! 베일리는 엔더비를 향해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돔에 들어섰을 때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흥분하면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안경을 벗어 렌즈를 닦았다. 그런데 그 때 너무 지나치게 흥분했었기 때문에 손이 떨려 그만 안경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황해서 찾느라고 하는 순간 밟아버렸는지도 모르지. 하여튼 그 때문에 안경은 망가져 버린 걸세. 그때 다니엘하고 똑같은 인물, 사실은 서튼 박사가 도어로 들어왔던 것이다.“ 베일리는 화면을 가리켰다. "엔더비, 당신은 열선 총으로 그 인물을 쐈다. 안경을 끼지 않은 당신에겐 그 인물이 서튼 박사인지 아니면 다니엘인지 분명히 구별할 수 없었던 거다. 하여튼 당신은 상대방이 쓰러지는 것을 보자 떨어진 안경을 긁어모아 도망쳐 나왔다. 그렇지만 당황해 있던 당신은 도어의 홈 속에 멀어진 렌즈의 파편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그게 바로 저거다. 저것이야말로 엔더비의 깨어진 안경의 파편인 것이다. 저것이 엔더비가 범인이었다는 숨길 수 없는 증거품인 것이다! 만약 의심스럽다면 엔더비의 안경의 도수를 측정해서 비교해 봐라.“ 그 순간 엔더비가 미친 듯이 자기 안경을 벗어서 망가뜨리려고 했다. 베일리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 안경을 빼앗아 다니엘에게 주었다. 다니엘은 그것을 받아 들자 정중하게 베일리에게 절을 했다. "이제 알찼습니다. 우리들이 졌습니다. 파트너 베일리. 당신은 마침내 사건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때 베일리는 시계를 보았다. 꼭 2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   엔더비 국장은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착오였다……. 결코, 결단코 죽일 마음은 아니었는데…… 과실이었어.“ 그 목소리는 비명 소리에 가까웠다. 그것이 일순간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 같이 변했는가 싶더니 갑자기 의자에서 미끄러져 방바닥에 실신하고 말았다. 다니엘이 재빨리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맥이며 눈을 뒤집어 보았다. "정신을 잃었군요, 베일리." "곧 낫겠지. 굉장한 충격이었을 테지. 내게 당한 게. 하지만 이렇게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경찰에서 인정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몰아세워서 자기 스스로 자백할 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야. 그래서 그가 자백을 하였지.“ "네, 들었습니다. 패스톨프 박사도 들었답니다." 그 때 엔더비가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의식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서서 베일리하고 다니엘을 번갈아 가며 바라_보았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되나? 우주시의 재판소에서 심판을 받게 되나? 우주시에는 사형이 있는가?" 베일리는 다니엘을 보았다. 그리고 다니엘이 잠자코 끄덕이는 것을 지긋이 보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되오. 만약에 당신이 우리들에게 협력만 해 준다면." "뭐라고? 날 용서해 주겠단 말인가?" 엔더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당신은 뉴욕 돔을 속에 있는 반 로봇 운동 단체의, 아니 전 지구의 반 우주 주의자 단체 안에서도 필경 상당히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 당신의 힘으로 그들에게 우주 개척의 필요성을 설득시켜 주기 바라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알 수 없네.“ "반 우주 주의자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지.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우주의 새로운 행성의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걸세. 우주인들이 요구하고 있는 깃도 실은 바로 그것인 것이었네. 패스톨프 박사하고 얘기해 본 결과 나도 그것을 믿게 되었네. 만약에 당신의 힘으로 지구의 우주 개척 열이 왕성해진다면 우주인은 서튼 박사 살해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걸세." 엔더비는 천천히 다니엘 쪽을 보았다. 다니엘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베일리 형사님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국장님. 우리들에게 힘을 빌러 주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우리들도 깨끗이 과거를 잊어버릴 겁니다. 이것은 패스톨프 박사와 우주시의 시장도 똑같은 의견입니다. 만약에 나중에 배신하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물론 당신의 죄는 철저하게 심판을 받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만 하면 나는 처형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예, 약속합니다.“ 엔더비 국장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해 보기로 하세. 그건 순전히 사고였네. 그 사고를 보상하는 뜻으로 힘껏 해 보기로 하겠네. 그런데 사미 사건은 어떻게 되지?" 베일리가 말했다. "그건 사고로 해 두지. 자, 이젠 이걸로 끝났다.“ 베일리는 커다랗게 한 번 심호흡을 챘다. 숨을 토해내는 것과 함께 지금까지의 고생도 근심도 괴로움도 모두가 몸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럼, 난 집으로 돌아가겠네. 제지벨과 벤트리가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함께 나갑시다. 베일리, 나도 우주시에 보고하러 가겠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되나? 우주시가 폐지되고 우주인들이 우주로 돌아가 버리고 나면?" 다니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만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베일리는 약 1, 2초 동안 말을 못하고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자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다니엘, 나는 자네가 가고 나면 쓸쓸해……. 자네는 나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자네를 존경하고 신뢰하고 있네.“ "나도 당신의 능력을 존경하고 신뢰합니다. 그렇지만 쓸쓸하다는 감정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것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베일리, 나는 당신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우정이라는 감정이라네, 다니엘." 베일리는 진심으로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로봇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손과 인간의 손이 서로 굳게 마주 잡았다. 베일리는 그 때 틀림없이 전류도 아니고, 자력도 아닌, 더욱 단순한 기계의 힘만도 아닌 무엇인가 특별한 힘이 온몸을 흘러오는 것처럼 느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나왔다. 작품 해설   로봇의 선조들   로봇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SF를 읽지 않는 사람들도, 과학 기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로봇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기계로 조립한 인조 인간이다.”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만큼 로봇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로봇의 아이디어는 아주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4, 5천년 전에 그리스 신화에 로봇의 선조가 등장되었습니다. 크레타 섬의 왕이 재산과 보물을 지키기 위하여 청동 인간 ‘달로스’를 만들었습니다. 달로스는 키가 10 미터나 되는 거인인데 온몸을 청동으로 만들어 화살도 튕겨 나가고 칼로 쳐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배가 그 섬 가까이 오면 큰 바위를 들어 던져 그 배를 침몰 시킬만한 무서운 괴물이었습니다. 미국 해군에 지대공 미사일에 ‘타르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크레타 섬을 충실히 지킨 로봇의 이름 달로스에서 따온 것입니다. 또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유태인의 전설에도 거인 골렘이라는 로봇의 선조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골렘은 유대교의 사원에 두고 있었는데 키가 3미터나 되는 찰흙으로 만든 인형입니다. 유대교도가 박해를 받을 때에는 생명을 불어넣어서 활동하도록 하여 순식간에 적을 멸망시키곤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 같이 옛날에 로봇의 선조들은 사람에게 충실한 노예로 일하는 일종의 초인간적 마신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과학 기술 대신에 미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과학 기술로 생각해 낸 최초의 로봇은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이라는 괴물입니다. 이것은 19 세기에 유명한 시인 셀리의 부인 메리 셀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에 등장되었습니다. 의학 실험을 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과 동물의 시체를 끼워 맞추어 부활시킨 인조 인간입니다. 지금의 로봇과는 대단히 다르지만 생명의 창조라든가 의학적으로 생명을 되살리게 하는 과학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로봇이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사람 같이 생각하는 능력과 사람보다 힘이 훨씬 세고 불사신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미워지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고독한 슬픔으로 자기를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미워하여 드디어는 죽이고 맙니다.   새로운 로봇   공상의 로봇이 기계와 동력을 가지게 된 것은 역시 과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진보되기 시작한 19 세기 말 경이었습니다. 맨 먼저 프랑스 작가 리라단은 「미래의 비보」라는 작품에 마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로봇을 등장시켰습니다. 마다리는 기어, 코드, 모터, 레코드, 계산기 등으로 만든 완전한 기계 로봇인데 부드러운 인공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으며, 사람과 똑같은 소리로 말을 한다고 합니다. 현대 로봇에 가장 가까운 인조 인간이었습니다. 리라단은 이 인조 인간의 발명자에게 에디슨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 전등과 축음기, 축전지 등을 만들어 전 대 발명가 에디슨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로봇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로봇은 보통 안드로이드('사람에 닮은 것' 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라든가 오토맨(자동 인형)이라든가 매케니컬 맨(기계 인간)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로봇이라는 맡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사람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카렐 차펙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인조인간(R.U.R)"이라는 희곡 중에서 처음으로 로봇을 등장시켰습니다. 이 로봇이라는 말은 체코 말로 “로보터 (robots)" 인데 ‘일한다', ‘봉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뜻을 생각하고 로봇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로봇은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것, 봉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차펙이 쓴 로봇은 금속 기계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해저에서 새로 발견한 새 물질로 만든 합성 인간이었습니다. 그 특징은 사람같이 희로애락의 감정과 감각을 없도록 하여 인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로봇들은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사람에게 반항하지도 알고 항상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공장을 만들고 노동 로봇, 서비스 로봇, 비서 로봇 등을 대량 생산하여 지금까지 사람이 하던 일을 전부 로봇에게 맡겼습니다. 이들은 피로를 느끼지 않고 반항도 하지 않고 임금도, 식량도, 주택도 필요가 없으니 더 이상 편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이 로봇은 분쇄기에 넣어서 분쇄하면 새 재료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윽고 전 세계 안에는 몇 억, 몇 십 억이 되는 로봇이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던 중 이 로봇을 군인으로 만들어 군대를 조직하여 전 세계를 점령하려는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돌연 이 로봇의 군대가 무기를 들고 사람에게 달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이 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감정을 가질 수 있게 개량시킨 로봇이 선두에 서서 사람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것을 로봇에게 맡긴 사람들은 도저히 로봇에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차츰차츰 사람은 로봇에게 정복되고 맙니다. 이 작품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기계를 너무 믿고 의존하다가는 반대로 기계에게 정복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서 로봇이라는 말은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현대 SF의 로봇   현대 SF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로봇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해밀턴의 「싸우는 미래인」에는 클라크와 오토라는 로봇이 활약하는데 클라크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강철제의 로봇, 오토는 사람 비슷하게 만든 플라스틱 재인데 선장 가디스의 부하로서 충실히 일합니다. 바인더의 작품 「아담 링」에 나오는 로봇은 전선의 신경과 이리듐의 스펀지로 만든 뇌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과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델 레이의 작품, 「그리운 헬렌」에 나오는 전자 로봇 헬렌과 러셀의 「제이 스코아」에 나오는 로봇 파일럿은 사람 이상의 사람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러한 로봇 중에서도 특히 「 강철 도시」를 쓴 아시모프의 로봇들은 가장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그 까닭은 로봇들은 법칙에 따라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칙을「로봇 공학의 3 원칙」이라고 합니다. 이 3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1원칙: 로봇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또 사람이 딴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면 중지시켜야 한다. 제 2원칙: 로봇은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해칠 명령은 따라서는 안 된다. 제 3원칙; 로봇은 제 1원칙, 제 2원칙에 위반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아시모프의 로봇의 초 전자 두뇌 기록 장치는 모두 이 3원칙을 지키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봇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해치지나 죽여서는 아니 되고 누구든지 상처를 입게 된다든지 살인을 당하는 것을 볼 때에는 아무 명령 없어도 곧 구조하게 됩니다. 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해도 그 명령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죽이지 않으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해를 당차거나 죽게 되는 경우에는 로봇은 제 2원칙을 따르는데 그럴 때는 로봇의 전자 두뇌가 스스로 고장을 일으켜 죽고 맙니다. 제 3원칙은 누군가가 로봇이 방해가 되었을 때 제 2원칙을 써서 자살시키려 하여도 자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세워 놓은 원칙입니다. 이 3원칙으로 인하여 아시모프의 로봇은 대단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시모프는 이 3원칙을 이용해서 많은 로봇 SF를 썼습니다. '나는 로봇(본사 SF 명작집 7권 로봇 머신 X)' 이라는 단편집에는 로봇이 처음에는 말도 할 수 없고 딱딱한 기계 인형 시대에서 점점 발달되어 사람에게 좋은 협력자가 될 때까지의 역사, 말하자면 로봇 발달사라고 말한 수 있는 로봇 SF가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이 보는 로봇 로비」라는 SF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가정 교사용 로봇을 샀습니다. 그 집에는 글로리아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글로리아는 이 로봇 로비가 마음에 들어 대단히 좋아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같이 놉니다. 이윽고 글로리아는 인간 친구와는 놀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글로리아를 이대로 두면 사람을 싫어하는 성질을 가진 채 그대로 어른이 되겠다.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양친은 어느 날 로비를 글로리아 모르게 로봇 공장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것을 안 글로리아는 매일 울기만 하고 웃음을 모르는 아이로 변하였습니다. 양친은 어떻게 하든 글로리아를 전과 같이 명랑한 아이로 만들려고 여러 군데 여행을 데리고 갔으나 아무 호전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잔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글로리아는 로비가 기계로 만든 로봇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잊지 못하고 잇다. 글로리아를 로봇 제조 공장에 데리고 가서 로봇을 만드는 광경을 보여 주면 이해하겠지." 그래서 양친은 글로리아를 데리고 공장 견학을 갔습니다. 공장은 모두가 자동 장치로 된 사람이 없는 공장에서 일하는 로봇들이 이쪽 저쪽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글로리아는 신기하게 여러 곳을 구경하고 있다가 갑자기 '로비가 저기 있네! 로비! 로비!' 하고 외치면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자동 장치의 트럭이 글로리아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모두는 놀라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였습니다. 이젠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글로리아의 소리를 듣고 이 쪽을 돌아보던 한 대의 일하는 로봇이 비호같이 달려와서 글로리아를 끌어안고 그 자리를 피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비였습니다. 로비는 일하는 로봇으로 개조되어 있었는데 그의 전자 두뇌는 아직까지 글로리아를 기억하고 있고 그리고 사람이 해를 당하는걸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로봇 제 1원칙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로비는 다시 가정 교사용 로봇으로 개조되어 집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성 로봇' SF에는 3원칙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무대는 수성 지하 정거장이며, 이 곳에는 두 대원과 한 대의 로봇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수성은 태양계의 행성 중에 태양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 쪽을 향한 곳은 납을 녹일 만큼 더운 곳인데 사람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도저히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하 기지에 있고 밖의 일은 대개 로봇을 시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로봇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로봇이 없으면 일이 안될 뿐만 아니라 기지의 연료도 보급 받을 수가 없어 기지 내의 냉방 장치를 가동시킬 수 없게 되어 결국 사람은 죽게 됩니다. “고장이 난 모양이다. 찾으리 나가자." 두 대원은 내열복을 입고 로봇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이윽고 로봇이 태양열이 내리 쬐는 넓은 들판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로봇의 행동은 이상하였습니다. 연료로 쓰는 희고 번쩍이는 광석을 파내는 곳의 둘레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가스 같은 것이 무럭무럭 오르고 있습니다. “역시 고장이다. 불러 보자.“ 두 사람은 소리 높이 로봇을 불렀습니다. 로봇은 부르는 소리를 듣더니 비틀걸음으로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간쯤 오더니 휙 돌아서서 또 다시 광산 있는 곳으로 걸어가 가스가 풍겨 나오는 곳까지 가더니 뒷걸음질하여 광산이 있는 둘레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큰소리로, "딕! 돌아 오라!“ 라고 명령을 하니 또 중간까지 오더니 뒤돌아 서서 전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흡사 정신 나간 사람같이…… "그 원인을 찾았다.“ 한 대원이 말했습니다. “그 광석 곁에 풍기는 가스는 로봇의 금속을 상하게 하는 유독 가스다. 로봇은 제 2 원칙에 의해 우리들이 명령한 대로 연료를 채취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곳까지 가니 유독 가스가 있다. 그래서 로봇은 자기 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제 3원칙을 생각하여 연료가 있는 곳에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런데 가스에서 멀어지니 또 명령을 기억해 내서 연료를 채취하러 간다. 이렇게 하여 갔다가 또 왔다가 자꾸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지? 그대로 두면 동력이 소모되어 파괴되고 말겠고……. 그렇다고 하여 이렇게 더운 들판에서 그 곳까지 가면 내열복이 견디어 내지 못하여 우리가 죽고 만다.“ 두 사람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둘 중에 한사람이 벌판을 걸어서 로봇에게 가까이 가는 거다. 그러면 내열복이 듣지 아니하여 쓰러지고 말 것이다. 로봇은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면 3원칙 중 제일 중요한 제 1원칙, 즉 로봇은 사람이 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기억을 되살려 구조하러 올 것이다. 위험하지만은 큰 맘 먹고 한 번 해 보자.“ 두 사람은 그렇게 해서 무사히 로봇을 구출 할 수가 있었습니다.      
1183    280 세기의 세계 - 레이 커밍스 Raymond Cummings 지음 댓글:  조회:241  추천:0  2023-08-23
v280 세기의 세계 THE MAN WHO MASTERED TIME   레이 커밍스 Raymond Cummings 지음   레이 커밍스 1888년 미국 태생. 과수원에서 고용살이를 하는 등 불우한 소년 시절을 거쳐 금광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청년 시절도 행복하지는 못했으나, 애디슨의 비서로 5년 간 근무한 것이 그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그리하여 1919턴부터 SF를 쓰기 시작한 그는 독특한 아이디어와 폭 넓은 주제로 많은 명작을 남기고 1957년 사망했다. "시간 초특급",“우주를 넘어서",“시간의 탑" 등.   ◇ 편집 위원 ◇ 아동 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 박사 최 인학 공학 박사 양 옥룡/이학 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책머리에   여러분은 지나간 과거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몇 천 년 후의 미래 세계에 가서 우리나라가, 이 세계가, 그리고 우리들의 자손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보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틀림없이 그럴 수만 있다면……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누구든 어른이 된 후엔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고 궁금해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들이 죽은 뒤의 세상도 궁금할 것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타고 과거나 미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면 자신의 어린 시절은 물론 기상천외의 재미있는 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난 후의 미래 시대나 태어나기 전의 과거 시대에 시간을 초월해서 여행할 수 있다면 하는 욕망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품어 봤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꿈을 실천해 보기 위하여 SF는 시간 여행이라는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지금부터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해 타임 머신 커밍스호에 올라탑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5 시간 여행으로 출발··············· 26 로트의 편지·················· 45 2만 8천 년 후의 세계·············· 60 응원을····················· 81 두 대째의 타임머신·············· 102 미래 도시 앵글리즈·············· 119 미래 세계의 사람들·············· 134 꽃놀이 때의 사건··············· 148 바스인의 반란················· 158 타임 머신 공중전··············· 170 특별 비행 부대················ 177 해협의 결전·················· 183 대폭발···················· 197 새로운 생활에의 출발············· 213   작품 해설··················· 220   등장 인물   로저스: 뉴욕 시의 과학 연구회 회장. 타임 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며, 미래 시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로트: 로저스의 외아들로서 대학의 공학부 학생. 아버지와 더불어 공간을 여행하는 것처럼 시간을 여행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를 한다. 제일 먼저 시간 여행기를 만들어 타고 미래 시대를 여행한다. 트로오: 미래 도시 앵글리즈의 해방자. 노스이라고 불리는 북방의 야만인들을 조직하여 앵글리즈를 공격한다. 조지: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화학 기사.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로트의 요청으로 제 2의 타임 머신을 타고 미래를 여행한다. 아질라: 로트가 좋아하는 미래 시대의 소녀. 후안: 아질라의 아버지. 앵글리즈의 지도자이며 과학자. 다이안: 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아질라의 동생. 모그루드: 후안의 유능한 후계자. 릴다: 로트의 어머니     시간이란 무엇인가?   6월의 어느 날 밤. 이곳 뉴욕 시의 센트랄 공원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의 한 방에서는, 몇 몇의 신사들이 마치 나이 어린 학생들처럼 눈동자를 빛내면서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모인 사람 가운데 지도자 격은 과학자인 로저스, 그를 둘러싼 회원은 은행가인 도날드, 의사인 프랭크, 실업가인 찰스, 그리고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화학 기사인 조지 등이다. 로저스의 연구실을 근거지로 하는 과학 연구 동호회(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의 모임)인 사이언스 클럽의 회원들이다. 방의 한편 구석에는 로저스의 외아들로, 대학의 공학부 학생인 로트의 얼굴도 보인다. 조지가 짐짓 점잖은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음, 시간이란 무엇인가? 좋아, 내 정의는 이렇다. 시간이란 여러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뒤범벅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리라……"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회원들의 웃음이 터졌다. 로저스는 손을 흔들어서 웃음을 멈추도록 했다. "아니, 여러분…… 웃을 일이 아니잖아. 분명히 조지가 말하는 그대로인 걸. 여러 가지 사건을 서로 분리해 놓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니까. 어떤 일이든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게 되어 있거든." "여보게 로저스, 자네까지도 조지와 한패가 되어 농담이나 할 셈인가? 그보다도 오늘밤의 모임은 자네가 무언가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실업가가 항의를 하자, 로저스는 한번 더 손을 흔들어서 진정시켰다. "어쨌든 잠깐만 기다려들 주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필요하단 말씀이야. 이런 얘기를 시작한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지. 다들 명심할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거야." "틀림없이 자네는……" 의사인 프랭크가 말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각각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고 기억나는데……" 로저스는 방안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바로 그거야. 이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이야. 이 우주를 만들고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인데, 그것들이 서로 뒤엉켜서 존재하고 있거든. 바꾸어 말하면, 이 세계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아니고, 그것들 전부를 합친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시간이라느니, 공간이라느니, 물질이라느니 하여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이 말을 듣고 실업가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예를 들면 시간과 공간인데, 이 둘이 서로 뒤섞여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걸." "그렇지만 뒤섞여 있는 거야. 공간에는 길이, 넓이, 높이라는 세 가지 면이 있는데, 이 셋과 시간은 원래 같은 친구 사이거든." "입으로 말만 하는 건 간단하겠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걸 증명하느냐 하는 거지." 은행가가 이렇게 반박하자, 로저스는 "벌써 증명되어 있단 말이야." 하고, 조용히 그러나 딱 잘라서 선언했다. "수학 용어만 늘어놓아도 여러분은 따분하게 느낄 것이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하기로 하지. 잘 들어 둬요. 집 한 채가 여기 있다. 이 집에는 길이도 깊이도 높이도 있다. 이 집은 하나의 물체로서 3차원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무엇이 없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대답을 못하고, 조용한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다. 로저스는 말을 이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하는 사실이 아닐까? 만일 그 집이 어떤 길이의 시간이 지나기까지 그곳에 서 있지 않고, 집이 서자 곧 무너져 버렸다면 처음부터 없는 것과 같게 되지 않을까?" "정말 그렇겠군." 하고, 조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그럴 듯하군." 로저스는 조용히 계속했다. "'물체가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두 면이 다 있는 덕택이지. 먼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게다가 시간과 공간은 뗄래야 뗄 수 없게 서로 뒤엉켜 있거든. 한 채의 집에는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시간이 있어서, 그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집은 사라지고 마는 거야. 시간과 공간의 뒤엉키는 모양을 또 하나의 본보기로 설명해 보기로 하지. 그런데 여러분은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라고 생각하시는지?" 또다시 방안에는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윽고 조지가 입을 열었다. "운동 말인가? 음, 뭔가 물체가 공간에서 위치를 바꾸는 거겠지." 조지는 나서지 말아야 할 것을 나서지 않았는가 싶어서 한결 후회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 가죽으로 씌운 의자에 털썩 앉자, 자꾸만 담배를 태우고 있다. 로저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옳은 말이야, 조지. 지금까지 우리는 '운동'에 대해서 자네가 지금 말한 그대로와 생각을 하긴 있었지. 무엇인가 물체가(예를 들면, 철도의 기차가) 공간에서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로저스는 모두의 얼굴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여러분, 잘못된 생각의 근본은 여기에 있다.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기차는 그 때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이처럼, 모든 공간은 시간이 관계하고 있네." "바꾸어 말하면…… 하고, 의사가 말을 꺼냈다. 로저스는 그 말을 받아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바꾸어 말하면, '운동'이란, 물체가 시간과 공간 양편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어느 한 편이 빠져도 안 된다. 양편을 갖추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는 마음의 준비라는 것은 이것이지.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함께 시간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젠 알 수 있겠지?" 실업가가 자신이 없는 듯 겨우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어쨌든, 적어도 아까부터 자네가 여러 번 말하는 '시간과 공간의 뒤엉킴'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알 것 같군." 그러자 은행가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저스의 얘기는 잘 알겠지만 대관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 분명히 얘기의 실마리는……" 갑자기 조지가 일어섰다. "로저스, 우리는 자네가 뭔가 대단히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해서 이곳에 왔다네. 뭔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중요한 얘기라고……" 로저스는 조지의 말은 가로막았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오늘밤 이렇게 클럽의 모임을 여기서 열게 된 것은, 자네들이 모두 나와 로트의 친구이기 때문인데…… 지금부터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것은 나보다도 로트에게 직접 관계가 있다네. 그러니 로트의 얘기를 들어보게." 로저스는 방 저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리 오너라, 로트야. 네가 잘 얘기해 드리도록 해라." 로트는 방 한쪽 구석 컴컴한 곳에서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키가 크고, 단단하게 생긴 몸집을 하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밤색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의 주인공이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얼굴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모나고 억세 보이는 턱을 가지고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나왔으나, 물러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고 있음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아직도 시인에게 마음이 끌리는 소년의 얼굴 모습이 남아있었으나, 한일자로 꽉 다문 입술과 아래턱의 모양은 어른의 느낌을 주었다. 조지는 앉아 있던 의자를 앞으로 밀어놓고, 자기는 좀더 뒤에 있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 로트는 그 의자에 앉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망설이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저는 약 2년쯤 전부터 진공 방전관을 사용하여 원자를 전자로 분리하는 연구를 해 왔습니다. 화학 처리를 해서 빛을 내는 성질을 가지게 한 특별한 스크린을 향해서 진공 방전관을 작동시키는 연구입니다." 여기서 로트는 로저스를 돌아보았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이야기는 빼는 편이 좋겠죠, 아버지?" 로저스는 미소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로트의 말을 받아서 계속했다. "문제의 것에 갑자기 부딪치게 된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었지. 보통 흔한 진공 방전관을 사용하여 응용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왜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어. 설마 그런 대 발견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실험 경과의 자세한 기록도 해 두지 않았단 말야. 스크린에 칠했던 화학 약제에 대해서도 어떤 것을, 어떤 비율로 섞었는지 자료가 없어." "서론은 그쯤하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 주게…… 문제의 것이란 대관절 무엇인가?" 은행가가 참을성 없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로저스는 여유 있게 찬찬히 계속해 나갔다. "어둡게 한 연구실 가운데서 스크린을 향해서 방전체 따위의 절연체를 통하여 높은 전압 밑에서 양극 사이에 전류가 흐르도록 한다. 방전관으로부터 튀어나온 일렉트론(전자)은 스크린에 접촉하자 번쩍 하고 빛난다…… 그런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날 밤 번쩍거리는 모양이 다른 날과는 달랐단 말씀이야.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르냐고 묻더라도 대답하긴 어렵지. 어쨌든, 나도 로트도 그 차이를 느끼고 있었네. 그런데 조금 지나서 로트가 다른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단 말이지. 스크린의 뒤쪽 어둠 속에서……" 그 때 허리를 꼿꼿이 세운 로트가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맨 먼저 발견한 것은 저니까요. 실은, 스크린 뒤쪽의 어둠이 빛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빛은 점점 눈부신 반사광이 되었습니다. 마치, 스크린이 탐조등이 되어서 저편으로 여러 줄기의 광선을 부챗살 모양으로 쏘아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빛이었습니다. 스크린의 이쪽, 다시 말씀드려서 아버지와 제가 있는 쪽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후에 문득 보니 그 빛은 스크린의 뒤에 있는 벽을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스크린 저쪽에는 멀리 수 킬로미터 앞까지 드넓은 공간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방의 바람벽도, 그 바깥 박에 있는 뉴욕의 거리도 흔적도 없이 모습이 사라지고, 다만 텅 빈 세계만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텅 빈?" 조지가 되묻자, 로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그렇습니다. 적어도 처음 한동안에는 아무 것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텅 비어있는 세계입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흐릿한 모양의 푸르스름한 빛에 비쳐진 공간뿐입니다. 저도 아버지도, 진공 방전관에 대해서나 스크린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정신 없이 그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몇 초 후에, 아니 좀더 긴 시간이 지나간 다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그 세계 전부가 밝아져 왔습니다. 점점 은빛을 띤 광채로 변해 간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아버지와 저는 자신들이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흰 눈으로 전부 덮여 있는 광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은백색의 눈 덮인 들판이 훨씬 먼 곳의 지평선까지 이어지고, 거기서 머리 위의 흐릿한 회색의 하늘과 맞붙어 있었습니다. 땅바닥은 우리들의 훨씬 발 아래에 있고, 우리들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여기서, 로트가 잠시 멈추자, 로저스가 덧붙여서 계속했다. "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 연구실은 빌딩의 5층에 있지요." "그러나……" 하고, 실업가가 말을 하려고 하자, 은행가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로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자! 어서 이야길 계속해요, 로트. 보이는 것은 눈뿐이었다지?" "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고 쓸쓸한, 몹시 춥게만 느껴지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차차로 은빛으로 빛나는 느낌이 없어져 가고, 어느덧 낮의 풍경으로 변해 갔습니다. 오후 늦게 아니면 이른 아침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태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늘에 가려져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버지 와 저는 앉은 채로 이 을씨년스러운 눈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있는 발 밑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튀어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발 밑인 연구실의 아래를 빠져나가 저 먼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은행가가 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그것은, 커다란 썰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승의 가죽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쓴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보이고, 말만한 크기의 동물이 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이 아니고 개였던 것입니다." 로트는 말을 잠시 중단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멍청하게 앉은 채로 아무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로트는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구실에서 북쪽으로 4백 미터쯤 가서, 꼭 센트랄 공원이 있는 근방쯤에서 썰매는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한 건물이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란 달걀 모양의 집이었는데, 눈이나 얼음이 아니면 흰 돌로 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집의 뒤쪽에는 뭔가 울타리로 둘러막은 장소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전체의 풍경 속에 녹아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저도 아버지도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썰매가 멎고, 사람의 모습이 어정거리면서 걸어 내려왔습니다. 그 때, 갑자기 빛이 꺼지면서 풍경 전체가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전과 같이 연구실에서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장치했던 전기의 배선이 과열로 녹아 끊어졌기 때문이야." 하고, 로저스는 설명했다. "게다가, 그 날 밤부터 나는 감기가 들고, 그것이 도져서 폐렴이 되어 몇 주일쯤 누워 있었지. 이 때문에 이 새로운 발견을 계속 뒤쫓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로트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말이네." "잠깐만 기다려 주게." 하고, 은행가가 끼어들었다. "지금 들려준 얘기는 모두 자네들이 실제로 본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환각이나 전기 장치의 영상이 아니었을까……?" "아니야, 두 사람은 실제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하고, 실업가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그들은 현재가 아닌 시대의 뉴욕 시를 보고 있었던 거야. 내 말이 맞겠지?" 로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았어. 그런데, 내가 앓고 있는 동안에도 로트는 더욱 연구를 진행시켜서……" "그 현재가 아닌 시대라고 하는 것이 과거일까?" 하고, 의사가 끼어들었다. "자네들은 아마도 과거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던 모양이지……" "우리는 몇 천 년이나, 혹은 몇 백 세기나 앞의 미래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고, 로트가 대답했다. "미래라고!" "그렇지." 로저스는 분명히 대답하고, 계속했다. "미래라고 해서 반드시 초고층 건물, 호화 여객선, 대형 항공기와 같은 여러 가지 눈이 휘둥그래지는 발명품이 가득 차 있는 훌륭한 문명 세계라고만 생각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될 거야. 그런 것들이 앞으로 생길 것은 틀림없겠지. 백 년이나 2백 년, 아니면 천 년 안으로는 그런 건물은 전부 실현될 것이라고 나도 생각은 하지만, 문제는 그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거야. 어떻게 된다고 생각들 하는지? 여러분! 문명이 언제나 위로만 진보 향상을 계속 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 반드시 꼭대기까지 올라간 그 다음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거야. 말하자면 인류는 퇴화하는 거야." "저에게 이야기를 계속하게 해 주세요." 하고, 로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여다본 세계가 과거는 아니고 미래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맨 첫날밤은 우리도 몰랐던 것입니다만, 뒤에 그 광경을 다시 세밀하게 관찰해 가는 동안에,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간단한 일입니다만……" "어떻게 알았지?" 은행가가 재빠르게 물었다. "나타난 광경 가운데 여러 가지 세밀한 점들로 미루어 생각해서입니다. 집의 모양, 개처럼 생긴 동물, 태양……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세계가 밤이 되었을 때에 보았던 집안의 인공 조명, 그리고 소녀. 소녀의 옷 모양……" "여자아이가 있었던가?" 하고, 조지가 황급히 되물었다. "여자아이라고! 그, 그 얘기를 해 주게나. 로트, 미인이었나? 아니면……" "이야기를 계속하게 , 로트." 하고, 은행가가 재촉했다. "그 다음부터 차례 차례로." "네. 소녀는 미인이었습니다." 로트는 짐짓 점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아이는……" 로트는 갑자기 이야기를 그치고, 무엇인가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로트, 왜 그러지? 어서 다음 얘기를 해요!" 하고, 조지는 성화 같이 재촉하였으나, 은행가가 한번 힐끗 노려보자, 부끄러운 듯이 목을 움츠렸다. 잠시 후 로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은 너무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병상에 계시는 동안에, 저는 몇 번이나 그 세계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한 주일 동안이나 계속 해서 관찰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집 뒤에는 마굿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울타리로 둘러싼 마당 같은 공지에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나뭇가지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 해가 모습을 나타내자, 눈은 햇빛에 녹아 버렸습니다. 그 소녀는 붙잡혀 있는 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처음으로 그 세계를 들여다본 그날 밤에 보았던 썰매에 실려 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밖에도 또 한 사람의 여인과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내가 한 남자와 여자를 가두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로는 그 집은 분명히 백 미터 저편에 보였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세밀한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하고, 은행가가 물었다. "작은 망원경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 소녀의 이야기를 빨리……" 하고, 조지가 재촉했다. "작은 몸집의 소녀입니다. 여윈 편이고 나이는 18세쯤 될 것입니다. 길게 자란 금발인데, 문 밖에 서 있으면 붉게 보입니다. 이것은 햇빛 탓입니다. 태양은 마치 담뱃불 끝처럼 새빨갛고 커다란 풍선 같아 보였습니다. 햇빛을 쬐면 눈이 피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열은 그다지 높지 않은 듯했습니다. 집의 바람벽은 속이 훤히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문이 닫혀 있었어도 안이 잘 보이는 것입니다. 소녀는 언제나 양쪽으로 머리를 갈라 땋아서 어깨에 늘어뜨린 채로, 낮은 의자에 멍청히 앉아 있었습니다. 단 한번 기타와 비슷한 악기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만, 붙잡혀 있는 몸이기는 해도 거기 있는 사람들은 소녀를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사내와는 마음이 맞지 않는지, 어느 때 방안에 들어와서 무엇인가 말을 건네는 그 사내에게 소녀는 저리로 가라고 하는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사내는 성난 얼굴로 썰매를 타고 어디론지 나가 버리고, 몇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로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날 밤, 소녀는 여러 시간을 울고 있었습니다. 한 번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커다란 개가 한 마리, 다른 건물에서 쫓아 나와 소녀를 전과 같이 집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던 모양으로 노인과 여자가 나와서 소녀를 어딘가 다른 방에 가두고는 쇠를 잠그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소녀는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한두 주일이 지나고, 아버지가 병에서 회복된 후에 한번 더 관찰하려고 했습니다만, 장치가 움직여 주질 않습니다. 아마도 스크린에 칠했던 화학 약제가 다 소모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 후 몇 번을 새로 다시 칠해도, 그와 같이 시간을 넘는 효과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업가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러면, 자네들에게 잠시 모습을 엿보였던 미래의 세계는 그 후 다시금 문을 닫고 말았다는 거로군?" 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이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 소녀가 걱정이 되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알만 해. 나는 자네의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어." 조지가 묘하게 자신 있는 말투로 장단을 맞추었다. 그러나 로트는 그 말에는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과학적인 사실은 무엇이라고 증명하기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새삼스레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소녀가 걱정이 되어서…… 물론 여러분은, 그 소녀는 아직 이 세상에는 없고 앞으로 몇 천년이나 지나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로트의 음성은 갑자기 나이 든 어른처럼 힘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좋든 싫든 무엇인가를 명령하는 것과 같은 말투로 변했다. "여러분은 그 소녀가 장래에 이 세계에 살게 되리라는 말로 표현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소녀가 미래라고 하는 시간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여러분이나 이 저라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뉴욕인 이곳에서 수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공간이 아닌 시간이 우리들을 서로 갈라서 떨어져 있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공간이라면 1킬로나 수 백 킬로라도 머리 속에서 간단하게 왔다갔다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라면 공간처럼 왔다갔다하는 것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간은 공간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길이나 넓이나 높이가 모두 같은 것입니다." 로트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많지 않은 청중을 똑바로 응시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봐 주세요. 당신은 한 그루의 나무다. 그러나 현재의 지성을 그대로 가지고 미국에 서 있다. 이 사실이 아닌 가공의 세계에서는 아시아가 천천히 당신에게로 다가왔다가, 어느덧 천천히 당신의 앞을 지나간다. 미국을 현재로, 아시아를 미래로 바꾸어 놓으면, 이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인간인 당신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과 전혀 같은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아닌 가공의 세계에서 당신은, 구태여 아시아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 편에서 아시아로 가면 된다. 적어도 그런 방법이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아이디어를 동료인 나무들에게(당신과 같은 지성을 가진 나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경우에, 동료들은 그것을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아마도 '아시아는 머지 않아 자연히 이곳으로 오게 될 거다'라고만 말할 뿐, 좀처럼 당신의 아이디어를 납득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에서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의 생각하는 방법이 옳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같은 것을 이 현실의 세계에서도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우리는 구태여, 미래라고 하는 시간이 오는 것을, 현재라고 하는 위치에 서 있는 채로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없죠…… 이곳에서 미래로 접근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제가 멋대로 지어 낸 생각이 아닙니다. 몇 해 전에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이론이고, 현대 과학에도 받아들여져서, 수학적으로도 훌륭히 증명된 학설인 것입니다." 로트의 열변이 끝났어도,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로저스가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두 주일 후에, 한번 더 여기 모여 주기 바라네. 아직도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네." 일동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조지는 말했다. "물론 오지. 하지만, 대관절 무엇 때문이지? 로트가 뭔가 새로운 발견이라도……" 로트가 침착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난 2년 동안에 저는 실험과 작업을 계속해 왔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도와주셨습니다. 게다가 돈도 대 주시고, 다른 곳에서 돈을 벌기까지 해서 자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로트는 아버지에게 빙그레 미소를 먼지고, 로저스 역시 부드러운 눈길로 아들에게 응답을 보냈다. "앞으로 두 주일이면 완성됩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생각하고말고." 하고, 로저스는 대답했다. 그러나 한순간, 그의 얼굴에 불안의 구름이 스쳐갔다. 그는 과학자인 동시에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과학에 대한 열정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있는 아들에 대한 염려는 절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준비가 필요한 거지?" 은행가가 커다란 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질문했다. 로트는 모인 사람들을 한번 더 둘러보았다. "여러분이 공간을 여행하는 것처럼 시간을 여행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입니다. 두 주일 후에는 여러 분의 힘을 빌어서 시간을 뛰어넘는 여행을 출발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그 소녀를 찾아내서 해방 시켜 주고 싶군요. 정체는 아직 모르지만, 무엇인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으로부터 구해 내고 싶은 것입니다!"   시간 여행으로 출발   "역사상 가장 젊고 가장 위대한 과학자 로트를 위해서 박수!" 실업가가 먼저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연구실이 있는 빌딩의 임시로 빌린 작은 방에서 열리고 있는 그 파티는 밖에서 보면 참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어쩐지 자연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로트의 양친인 로저스와 릴다의 표정은 때때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한 몸을 검은 이브닝 드레스로 싸고 있는 릴다는 희랍의 조각처럼 균형 잡힌 모습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나, 눈초리가 조금 치켜 올라간 회색 빛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느낌이 들었다. 틀림없이 로트의 어머니인데도, 많아야 35세 정도 밖에는 안 되어 보인다. 이윽고 테이블 주위의 웃음소리가 멎고, 시중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은행가가 침묵을 깨뜨렸다. "자아, 우리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지." 실업가도 마음이 내키는지 열심히 물었다. "우선, 뒤쪽에 미래의 세계가 열렸다고 하는 그 스크린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구먼." 로저스는 그 물음에 대답했다. "나 자신도 잘 알 수 없다네. 로트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합쳐서 이런 방법을 써도 그 스크린을 다시 만들 수 없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이치만은 생각할 수 있지. 현재의 센트랄 공원이 있는 근방의 공간은, 이런 종류의 시간 요소의 덕택으로, 다른 시공간과 이어져 버렸던 것이지. 어디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스크린에 부딪쳐서 반사된 빛이 그 근처 공간의 시간과 장소를 변화시켜버린 모양이야. 현대의 과학에서는 미래는 '시간에서 다른 차원에 있다'고 하네. 그리고 '두 물체는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 없다'는 원칙도 있지. 하지만, 이 원칙을 끝까지 캐어 나가면, '다른 시간이라면 여러 개의 물체라도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되지는 않을까?" "그런 것보다는, 어서 앞으로 하기로 되어 있는 실험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게." 은행가가 초조한 듯이 재촉하자, 조지도 지지 않고 말했다. "찬성, 찬성! 그 소녀를 대관절 어떻게 해서……" "알겠네 , 알겠네." 로저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결국, 우리 로트는 인간이 의식하는 시간 요소를 변화시킨다'고 하는 아이디어에 사로잡히고 만 것일세. 이론상으로 이 아이디어는 확실히 가능하지. 그래서, 나는 로트에게 작업을 질책했지. 그로부터 2년 간, 로트는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가 될 만큼 심혈을 기울여서 작업을 계속해 왔던 것일세. 하지만 여러분, 그만한 고생의 가치는 있었다, 로트는 훌륭히 성공하였네. 그 성공은 내가 커다란 도장을 눌러서 보증할 수 있네. 시험도 끝났고, 로트가 만들어 낸 장치는 지금 지붕 위에 있고, 거기 다가……" "그 다음 얘기는 로트에게 직접 듣기로 하지." 은행가가 로트를 재촉했다. "자아! 로트, 어떻게 해서 그 일에 성공했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 주기 바라네." 로트는 조심조심 무엇인가를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네…… 어쨌든 원리 만이라면, 보통 일반적인 사실이라면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세밀한 점은 대단히 전문적이고……" 여기서 로트는 입을 다물고, 시중드는 사람이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주의 깊게 맡을 선택해 가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네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높이, 길이, 넓이, 그러고 시간. 그러나 물체란 무엇인가? 최신의 과학에서는, 물체란 분자의 모임이며, 그 분자는 원자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원자란 무엇인가? 원자는 전자의 모임이다. 요컨대 원자를 확대해 보면, 중심에 있는 원자핵의 둘레를 마이너스(-)전기의 입자 알갱이가 굉장한 속도로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잘 아시겠죠?" 로트가 시선을 은행가에게 돌리자, 은행가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트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 중성의 핵은 양자(원자력을 구성하는 작은 알갱이의 하나)라고 불리우는 플러스(+)전기의 입자입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학설이죠. 그렇지만 그 양자, 즉 프로톤(양자)이란 무엇인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지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되면, 아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최근 수년간에 가장 많은 지지자를 모으고 있는 학설을 보면, 프로톤을 한 개의 소용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자라는 것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결국, 물체를 접점 잘게 분해해 가면, 마지막에는 이와 같이 전기를 띈 소용돌이가 되고 맙니다." "한숨을 쉬고 싶은 얘기로군." 실업가가 물끄러미 테이블 한곳에 시선을 멈추고 중얼거리자, 로저스도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물체, 즉 물질이 어느 사이에 소용돌이, 즉 '운동'으로 변해 버리니까요. 그리고 그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귀신처럼 실체가 없는 것의 운동이 라고 하지만요……" "아무리 해도 내게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걸. 그렇다면……" 실업가가 말하기 시작했으나, 로저스는 주저하지 않고 열렬한 기세로 재촉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물체가 운동하면, 어쩐지 '굳다'고 하는 느낌이 없어집니다. 예를 들면 물인데, 정원에서 흐르는 시냇물의 흐름 속이라면 누구라도 손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흐름이 무섭게 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시속 6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터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 속에 손을 넣을 수 있을까요? 이 속도의 물의 흐름을 직경 7센티의 노즐에서 흘러나가게 한다면 쇠망치를 사용해서도 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운동하면 평소에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던 물체라도 굳어진다'고 하는 증명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그런 것과 시간이 대관절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거지?" 실업가가 반대하는 말을 하자, 이번에는 로트가 대 답했다. "모든 면에서 관계가 있습니다. 물체의 공간적인 차원에 손을 대지 않고 시간적인 차원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이상, 어느 정도는 물체란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의 몸이나 이 집과 같은 것까지도, 사실은 손으로 만질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한번 분명하게 인식해 버리면 우리 이야기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겠는걸." 은행가는 여유 있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자, 얘기들 계속해요." "네…… 물질과 시간적인 차원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결국, 프로톤이라고 불려지는 전기 입자의 소용돌이의 움직이는 모양과 속도를 변하게 한다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로트는 도움을 청하는 듯한 표정으로 로저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밤은 어쩐지 이야기가 잘 되지 않는군요. 차라리 여러분에게 그 기계를 보여드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버지?" 로저스는 일어섰다. "그렇겠군…… 그러면 여러분, 지붕 위로 올라 가실까요. 벌써 보신 분도 있겠지만, 약 한 달 전부터 이 빌딩의 지붕 위에 로트의 작업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이언스 클럽이 있는 빌딩은 12층 건물로서, 평평한 지붕 위는 돌로 쌓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지붕 위의 한편은 정원인데, 장미와 담쟁이와 포도 따위의 덩굴이 올라가게 하기 위한 선반과 화단이 있고, 자갈을 깔아 놓은 길도 만들어져 있다. 로트의 작업장은 그 반대편인데, 약 백 미터 정도의 면적을 베니어판으로 막고, 천막으로 사용하는 두꺼운 천을 씌었을 뿐인 임시로 지은 작업장이었다. 조용하고 달이 없는 밤이었다. 자줏빛 하늘에 무수한 별이 반짝거리고 있다. 거리의 소음도 이 높은 빌딩의 지붕까지는 들려오지 않는다. 근처에서 높은 빌딩 축에 속하는 이 빌딩에서는 대개의 건물 지붕들이 눈 아래에 보인다. 몇 건물쯤 저편에 호텔의 지붕 위 정원이 있고, 붉고 푸른 일류미네이션(전등 가스․등을 사용한 장식)이 아름답다. 아득히 아래로 보이는 길거리에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바쁘게 오가고, 그 사이로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밤하늘에서는 때때로 짜증나는 항공기의 폭음이 들려왔다. 로저스는 작업장의 자물쇠를 열고, 일행을 인도해 들어가게 했다. 맨 마지막으로 들어간 사람은 릴다인데, 아들인 로트의 팔에 매달리는 것처럼 걷고 있었다. 로저스가 스위치를 돌리자, 작업장 안은 전등 불빛으로 가득 찼다. 두꺼운 천으로 가리운 천장 아래는 헬리콥터와 비슷한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래 쪽 배 부분에 길다란 캐빈(선실)을 달고 있는 것은 마치 알루미늄 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잠자리다. 로저스는 자랑스러운 듯이 손으로 가리켰다. "이것은 로트의 작품이야. 언뜻 보아서는 프레이즈형 헬리콥터를 꼭 닳았지? 실은 이것은 프레이즈 회사에 주문해서 만든 건데, 모터와 그 밖의 부분품도 다른 프레이즈형 헬리콥터와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어. 따라서 이것은 항공기로서의 성능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 다만 다른 점은 이 기계의 가 장 중요한 부분인 시간 이동 제어 장치만은 로트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고, 또 자신의 손으로 장치했다는 거야." "또, 자네가 나서는가! 그 점은 로트에게 설명을 하게 하면 어떤가7" 은행가가 주의를 주자, 로저스는 조금 화를 내는 표정이 되어서 얼굴을 돌렸다. "아니 도날드…… 자네는 너무 이해력이 나쁘기 때문에, 이 기계야말로 앞으로 로트가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로 가기 위해 탈 것이라는 사실을 한 마디 가르쳐 주려고 했을 뿐이야." 은행가가 짐짓 대단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으므로, 일동은 크게 웃었다. 그러나 릴다만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인 로트의 손을 잡은 채로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서, 불안스럽게 눈을 크게 뜨고 뚜러지게 번들번들 빛나는 시간 여행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저스는 로트를 불렀다. "자 로트,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다." 로트는 어머니와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우르르 타임 머신 앞으로 다가서서 멋대로 들여다보았다. "프레이즈형은 아직 그리 낯익지 않은 항공기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최근에 데뷔했을 분이니까요. 지금까지의 형식보다도 기체가 조금 크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속도는 조금 떨어집니다. 이 변속 프로펠러의 동력은 프레이즈형 최신식 모터입니다." 그 때, 빈 상자 위에 올라서서 타임 머신의 캐빈의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은행가가 손을 흔들면서 로트에게 물었다. "이 가운데는 여러 가지 방이 있구먼." "네…… 필요에 따라서 세 개의 작은 방으로 칸을 막아 놓았습니다." 로트가 대답하자, 은행가는 다시 물었다. "이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가?"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적어도 오늘밤은 그만 두는 편이 좋을 걸. 로트는 출발을 서둘고 있으니까." 로저스가 씁쓸한 얼굴로 말리자, 의사가 되물었다. "오늘밤, 이것을 움직일 생각인가?" "네…… 오늘밤 미래를 향해서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 소녀를 찾아서 구해 내는 거지. 여러분도 기억하고 있겠지. 로트는 그 소녀를 그……" "시끄럽소, 조지. 자아 로트, 조금 전에 아버지가 얘기했던 뭐라든가 하는 이름의 장치를 설명해 주게." 은행가의 재촉을 받고 로트는 설명을 계속했다.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전개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프레이즈 회사 제품의 장치로 공간을 이동한다. 즉, 조종자의 마음대로 타임 머신의 공간 요소를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실 수 있겠죠?" "물론, 알만 하다…… 제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니까. 보통 비행기와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도날드, 너무 좋아할 건 없네. 만일 자네가 한 그루의 나무이고, 한 장소에 선 채로 일생을 보낸다고 하면, 비행기를 이해하는 일 따위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테니까." 로저스는 놀려 주고, 로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또 하나의 장치는, 타임 머신 전체의 시간 요소를 바꾸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제 몸까지도 포함해서, 저 타임 머신 안의 물체를 모두 공간을 떠돌고 있는 미립자로 되어있는데, 이 미립자들 사이로 전류와 같은 것, 즉 양자류를 통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물체의 프로톤의 진동 운동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결국, 물체의 상태가 변화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물체는 다른 시간 요소를 가진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가?" 하고, 의사가 물었다. "아니죠, 역시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내일 밤의 시간 요소를 가지는 상태로 되는 데는 최초의 수분간…… 다음 주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 1 분이나 2분……" "점점 가는 것이 빨라지게 되는 셈인가?" 실업가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가속도가 붙는 방식이 실제로는 어떻게 되는가는,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어느 시점 시간의 흐름 위의 어떠한 점에 도착했는가를 표시하는 계기는 달아 두었습니다만, 또 순환시키는 프로톤의 흐름의 강약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켜서 시간 여행의 속도를 바꿀 수도, 혹은 전혀 시간 이동을 멈추어 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타임 머신은 왜 헬리콥터의 모양을 하고 있지? 자네가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시간 여행이지 공간 여행은 아니지 않나?" 은행가가 묻자, 로저스가 대 답했다. "알겠나? 잘 좀 생각해 보게. 지금부터 천 년 후의 세계에 갔다고 가정할 때, 이 빌딩이 아직도 이곳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만일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나? 그곳에 도착한 로트는 곧 12층의 높이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죽게 되지 않겠나." "정말 그렇게 되겠군." 은행가가 감탄한 듯 말하자, 로트가 아버지의 말에 덧붙여서 설명했다. "따라서, 회전 날개는 어떤 시대에 도착하기까지는 사용할 예정이 없습니다." 로저스는 문득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출발 준비는 아직 시간이 더 걸리겠니, 로트?" "아닙니다. 벌써 모두 끝났습니다. 물도 식량도 옷도, 그밖에 필요한 것을 싣는 일도 끝났고, 리스트와의 대조도 완료, 기계의 최종 점검도 오늘 오후에 이미 끝냈습니다. 지금이라도 출발하고 싶습니다만……" 로트가 이렇게 대답하자, 로저스는 갑자기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음, 드디어 떠나는가. 내가 말한 것은 모두 기억하고 있겠지……? 돌아오는 시간과 장소를 틀리지 않도록 해라. 반드시 이 시대의, 이 빌딩의 지붕 위로 돌아와야 한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굳게 손을 마주잡았다. 이윽고, 로저스는 아들의 손을 놓자, 얼굴을 돌리고 저 편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로트는 다른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은행가만은 외톨이가 되어 작업장 구석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타임 머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트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은행가는 로트의 손을 꼭 잡고, 목이 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알겠나, 로트…… 조심해야 되네. 젊었다고 해서 결코 무리한 모험을 해서는 안 되네." 로트는 은행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휙 돌려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어머니 릴다에게도 걸어갔다. 그리고 두려운 표정으로 서 있는, 자기 어깨까지의 키밖에 안 되는 작은 몸집의 어머니를 허리를 구부려서 꼭 껴안았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꼭 돌아와 줘야 한다. 로트야…… 꼭 무사히 돌아와 주겠지?" 릴다는 회색의 눈을 불안한 듯이 크게 뜨고 물끄러미 아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절 보지 마세요. 어머니, 저는 꼭 무사히 돌아옵니다." 로저스가 로트를 불렀다. 로트는 가만히 어머니를 밀어냈다. "그럼 갔다가 오겠습니다. 어머니, 내일이나 모레는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수초 동안 최후의 점검을 끝내고, 로트는 타임 머신의 캐빈에 들어가면서 입구에서 얼굴을 내밀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작업장의 지붕에 씌운 천은 반드시 벗긴 채로 두세요. 제가 돌아올 수 있도록……" 로저스가 대답했다. "꼭 그렇게 해 두겠다. 그리고, 네가 없는 동안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이곳에 와 있으면서, 네가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기로 하겠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캐빈의 문이 콰당 하고 닫혔다. 사람들은 타임 머신으로부터 5미터쯤 떨어진 장소에 모여 서서, 굳을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 여행이라는 것은 대관절 어떤 느낌을 주는 것일까?" 조지가 작은 음성으로 말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낮게 부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마침내는 천 마리의 곤충이 일제히 날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울림으로 변했다. 타임머신은, 그것을 지탱하는 발판 위에서 천천히 몸을 흔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부르릉 하고, 타임 머신의 전체를 가늘게 진동시켰다. 몇 초 동안이 지나자, 타임 머신의 전체가 백열을 내기 시작했다. 작업장의 안을 비추는 전등의 밝은 빛 속에서도, 분명히 그것이라고 분간할 수 있는 일광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또 몇 초…… 타임 머신 전체가 반투명이 되어갔다. 그리고 완전한 투명이 되더니 증기처럼 되어 버리고, 소리와 그림자만이 잠시 남아 있다가 이윽고 모두 다 사라지고 말았다! 타임 머신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대, 그리고 해머, 톱, 못 따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텅 빈 작업장에 사람들은 말이 없는 채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며 서있었다. 이튿날 밤. 자정도 훨씬 지났을 무렵…… 사이언스 클럽의 지붕 위 정원의 작은 벤치에는 조지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커다란 가죽 쿠션 위에는 로저스가 한문의 큰 대자(大) 모양으로 팔다리를 쭉 펴고서 잠들어 있었다. 바람 한 점 없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는 한두 점 구름이 흘러가고 있고, 마침 동쪽에서 둥근 쟁반과 같은 달이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이다. 조지는 무릎 위에 팔을 세워 턱을 받치고, 눈 아래 펼쳐진 뉴욕 거리의 불빛과 늘어선 집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밝아오는 달빛이 그의 와이셔츠와 흰 모직의 바지를 비추었다. 로저스가 꿈지럭꿈지럭 몸을 움직여 상반신을 일으켰다. "조지, 일어나 있었던가?" "응…… 그냥 자요. 나는 괜찮으니까.“ 그러나 로저스는 일어나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몇 시지?" "두 시 반…… 자라고 했는데." "나는 충분히 잤네." 로저스는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자네가 잘 차례일세. 조지, 자지 않으면 몸이 견뎌 내지 못하네."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완전히 마음이 흥분돼 버려서 말야. 로트가 출발하고 나서 벌써 몇 시간 되었지?" 로저스는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26 시간이 될까……" "오늘밤 돌아온다고 생각하나?." "알 수 없지. 아마도 돌아오겠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소녀를 무사히 발견하였으면 좋을 텐데…… 나도 꼭 그 소녀를 만나 보고 싶은걸." 작은 음성으로 말을 건네 오는 조지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로저스는 말없이 화단의 꽃을 한 송이 꺾어들고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짓눌러서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조지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로저스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을 들었던 로저스도 무의식중에 숨을 멈추었다. 포도의 덩굴을 올린 선반 저편의 공중에 조그맣게 빛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밝은 달빛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담뱃불처럼 보이는 불의 점이다. "저기다…… 뭔가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투명한 빛의 덩어리였으나, 점점 크게 뭉쳐졌다, 반짝거리는 한 개의 물체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포도의 덩굴이 무성해 있는 선반의 옆쪽 하늘 위에 떠 있는 채로, 희미하게 붕 하는 소리를 울리고 있다. "타임 머신은 아닌 듯한테……" 조지는 그 이 상한 물체를 응시하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무엇일까?" 이윽고 그 울리는 소리가 멎었다. 자세히 보니 물체는 정육면체로서 하나 하나의 면은 직경 50센티 정도의 원형으로 되어 있다. 그 이상한 물체는 수초 동안 공중에 떠 있다가, 희미하게 쿵 소리를 내면서 지붕 위에 떨어졌다. "로트로부터의 통신이다. 긴급 사태인 모양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로저스는 급히 그 정육면체를 들어올렸다. 조지는 수상쩍은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뭔지 알고 있나?" "미리 약속해 두었던 거지. 긴급한 경우에…… 로트가 아무리 해도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때에는 이것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자네들에게, 특별히 로트의 어머니인 릴다에게 지나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지만." 연구실에서는 과학 연구 동호회 회원 전원이 모여서, 로저스가 그 정육면체를 여는 것을 침을 삼키면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정육면체 내부의 공간의 대부분은 복잡한 시간 제어 장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한쪽 구석에는 몇 장인가 되는 종이를 접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로트의 필적으로 지면 가득히 글자가 적혀져 있다. 로저스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로트로부터의 편지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끄집어 낸 로저스는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을 안정시켜 보려고 담배를 한 가치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뭐냐, 뭐냐…… 음, 로트는 무사하고 건강하다고 하네?" 로저스는 소리를 내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로트의 편지   우선 제가 건강하다는 것을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어머니, 부디 안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공간의 계산을 제가 틀리게 하지 않았다면, 이 편지를 넣은 연락구는 제가 출발한 날 밤에서 한 밤이나 두 밤 후에 여러분의 손에 들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한두 밤이라도,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제게는 훨씬 오랜 시간이 지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출발하던 날 밤의 일입니다. 그 때의 체험이 지금의 저에게는 대단히 오래된 옛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다만 캐빈의 밖에 있었던 여러분들의 그 때의 얼굴 표정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캐빈의 내부는 작은 방 셋으로 나뉘어져 있고, 제가 타고 있는 것은 제일 앞쪽의 작은 방입니다. 이곳은 타임 머신의 조종실인데, 프레이즈형 헬리콥터에 사용되는 조종 장치와, 제가 발명한 시간 여행 장치의 제어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발명한 시간 여행 장치는 대단히 간단한 기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어하는 기계도 매우 간단합니다. 양자의 흐름을 조절하는 스위치와 시간 여행의 진행 정도를 표시하는 계기뿐이죠. 이 타임 트래블러 (시간 이동 장치) 계기는 다이얼의 지침으로 어느 정도 미래로 왔는가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 다이얼은 하루 단위의 것, 십 일 단위의 것, 백 년 단위의 것, 천 년 단위의 것이 각각 준비되어 있습니다. 먼저, 저는 프레이즈형 헬리콥터 조종 장치의 앞에 앉았습니다. 아직도 기체를 공중으로 들어올릴 필요가 없으므로 이 조종 장치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출발시의 충격이 어떠한 것인지 예상할 수 없었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안전한 좌석에 앉아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시간 이동 장치의 계기와 스위치는 오른손 쪽의 벽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먼저 그 스위치의 지렛대를 첫 번째 눈금까지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 순간 붕 하고 낮은 소리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발 밑의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붕붕 하는 소리는 점점 커지고, 조금 후에는 귀머거리가 될 정도로 심해져 갔습니다. 아주 작고 작은 진동이 타임 머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진동시켰습니다. 이윽고, 그 진동은 제 몸 속에까지 들어와서 살을, 뼈를, 피를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진동이 계속된 것은 겨우 몇 초 정도로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엇인가 대단히 큰 맥동이 사방에서 덮쳐 왔습니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손을 대고 힘을 주는 듯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은 움직임입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제 몸은 무수한 미립자로 분해되어 가루처럼 흩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붕붕 하는 소리는 더욱더 심해져 갑니다.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무의식중에 일어났습니다. 스위치를 전과 같이 다시 돌려서 이런 현상을 멈추게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충동을 죽을힘을 다해 참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머리부터 어디론가 삼켜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러워지고 기분이 몹시 나빠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라기보다는 감각 자체가 말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입니다. 저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1초나 2초 동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니 이전의 불쾌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붕붕 하는 소리도 많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소리는 점점 더 작아져 가고, 잠시 동안 귓속에 그 울림만이 남아 있다가, 어느덧 그것도 뚝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방을 둘러보니, 둘레의 물체들이 환한 인광을 내면서 빛나고 있습니다. 제 몸도 빛을 내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기묘한 색채의 어렴풋한, 이 세상의 것은 아닌 것 같은 빛입니다. 그렇군요. 어느 것이나 이 세상의 것은 아닌 것 같은, 실체가 없는 느낌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 손이 투명해져서 손을 통해서도 캐빈의 벽이 보입니다. 그 캐빈의 벽도 투명해져서 타임 머신을 보관해 두고 있는 작업장의 벽이 보입니다. 마치 모든 것이 환하게 빛나는 유령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잡아보니 굳은 무릎 뼈와 살을 만지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실제는 출발 후 겨우 1분이나 2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곁눈으로 타임 트래블러의 계기를 보니, 1일 단위의 다이얼 도구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일어섰습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타임 머신의 옆에 나 있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만 작업장의 벽도 전과 다름없이 똑똑히 보이고, 다른 것들도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조지는 제가 있는 편을 보고 있습니다. 문득,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조지가 보고 있는 것은 제가 타고 있는 타임 머신이 아니라, 타임 머신이 사라진 뒤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음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걸음걸이와, 손을 움직이는 모양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합니다. 별난 일도 다 있다 생각하고 자세히 보니, 보통의 두 배 정도로 움직임이 빠른 것입니다. 5분이나 10분 동안 저는 멍하니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표준 속도 이하로 촬영한 영화 필름을, 표준 속도로 영사할 때 화면의 움직임이 터무니없이 빨라지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더구나, 보고 있는 동안에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여러분은 부자연한 움직임으로 작업장 지붕에 씌운 두꺼운 천을 걷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이 끝나자, 마치 앞을 다투는 것처럼 출입구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사람이 나갈 때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흐려 보일 만큼 전체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지붕이 없는 작업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지러워서 괴로운 느낌을 어찌할 수도 없었지만, 꾹 참고 앉아 있었습니다. 문득, 캐빈 안의 벽시계를 보니 환하게 빛이 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쩐지 물렁물렁해진 것 같이 불안정해 보이고, 마치 유령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장침과 단침의 위치는 분명하게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타임 머신 안의 부자연스럽게 빠른 움직임과는 달리, 이 시계의 바늘은 출발 전과 같은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과는 상관없이 출발한 세계, 즉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출발한 것은 분명히 오후 9시 50분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시계는 10시 5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5분 동안 시간 여행을 한 것입니다. 작업장 위의 조금 동쪽 하늘에 달이 보였습니다. 그 위치는 오전 2시 10분쯤의 높이입니다. 이 사실에서 저는 여러분이 있는 세계에서는 벌써 4시간이나 지나가 버렸구나 하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저는 시간 여행 최초의 4시간을 15분만에 통과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양자의 흐름을 가장 약한 점에서 조절하여 냈던 시간 속도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 이상으로 19번의 단계가 더 있고, 더욱더 빠르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시간 속도 조절 스위치의 핸들을 아래쪽에서 열 번째의 눈금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올려 보았습니다. 붕 하는 소리가 전보다도 강해진 것 같습니다. 캐빈 안에 있는 물건들의 모습이 점점 더 엷어져 가다가, 거의 완전한 투명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제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작업장의 전등을 끄고 나갔습니다만 지붕을 걷어 냈으므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받은 벽이 잘 보였습니다. 그 벽이 타임 머신의 창문을 통하지 않고, 캐빈과 벽을 통해서도 창문으로 내다보는 것처럼 잘 보이는 것입니다. 캐빈의 벽이 유령처럼 투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만, 아까부터 제 온 몸에는 어쩐지 간지러운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쩐지 몸이 가벼워져서 떠오르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온 몸에 힘이 넘쳐흐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느덧 그런 느낌에도 익숙해져서 그처럼 마음에 걸리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만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력을 10배로 하였으므로 바깥 경치도 꽤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떠오르는 달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게다가, 밤하늘 전체가 무수한 별을 안은 채로 천천히 돌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하나의 별이 각각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는 모습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시계가 10시 10분을 가리키고, 달은 거의 하늘 북쪽 가까운 위치에 왔습니다. 어쩐지, 근방이 밝아져 오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을 때, 동쪽 지평선으로부터 둥근 쟁반과 같은 태양이 떠오르고, 세계는 곧 낮의 빛 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작업장 안으로 들어와도, 혹은 작업장의 상공을 비행기가 날아서 지나가도, 그것들의 움직임은 너무 빨라서 타임 머신 안에 있는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사이언스 클럽의 지붕보다 더 높은 빌딩 두 개와,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뿐입니다. 1분이나 2분이 지나는 사이에, 태양은 머리 바로 위에까지 와 있었고, 또다시 1분이 지났을까 하는 사이에 태양은 벌써 서쪽 지평선 너머로 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위는 다시금 어두운 밤의 세계입니다. 그렇구나, 생각할 사이도 없이 또 달은 떠올라서 쏜살 같이 하늘을 가로질러 갑니다. 구름도 몇 개인가 두둥실 뜨고 사라져가고 하였을 것, 벌써 구름의 움직임은 너무 빨라서 제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타임 트래블러 계기의 1일 단위의 미터를 보았습니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침은 벌써 제 1일을 지나고, 제 2일째의 눈금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대로 10분쯤 앉아서 미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밤이 지나고 낮이 되고, 또다시 밤이 왔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또 대낮의 빛이 비치고, 그러는 사이에 태양과 달의 강함과 약한 빛이 번갈아서 머리 위를 번쩍번쩍 비치고 날아서 지나갑니다. 마치 번갯불과 같습니다. 두 종류의 번갯불 간격은 점점 가까워져서 어느덧 하나로 뒤엉키고, 그 다음에는 또 점점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한 달 분의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동안에 낮 시간은 점점 짧아져서 밤 속에 숨어들어 버리고…… 희미한 빛과 어두움이 뒤섞인 잿빛만이 계속되는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1일 단위 미터의 지침은 무서운 속도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옆의 10일 단위 미터의 바늘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사십 몇 일을 가리키고 있고, 또 바늘의 움직임도 점점 더 빨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 무렵이 되어서 저는 슬슬 이 빌딩의 지붕을 떠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프레이즈형 헬리콥터를 시동시켜서 위로 올라갔습니다. 3백 50미터쯤 상공에 이르렀을 때, 올라가는 속도를 늦추고 공중에 멎었습니다. 마치 구름이 두껍게 깔려 있는 바람 없는 날에, 커다란 풍선을 타고 높은 하늘에 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어두운 구름이 근방에 깔려 있는데, 하늘은 온통 회색으로 침침하게 흐려 있고,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아래로 향해 보았습니다. 센트랄 공원의 남쪽 거리가 보였습니다만, 어쩐지 기묘한 느낌입니다. 잠시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그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자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가 부자연하게 평평한 느낌을 주고, 마치 굉장한 큰 그림을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빛깔은 있었습니다만, 어쩐지 회색에 가까운, 선명하지 못한 빛깔들의 그림이었습니다. 군데군데 작은 빛의 점들이 보입니다. 매일 밤 켜는 가로등의 불빛일 것입니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합니다. 사람과 차들이 움직이는 기미는 물론 없고, 마치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는 유령의 거리처럼 느껴집니다. 그 때, 1초나 2초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싸늘하게 흐르고, 아래로 보이는 건물의 지붕과 나뭇가지가 두세 번 밝은 빛으로 희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겨울이 되어서 몇 번인가 큰 눈이 내렸기 때문이겠죠. 이 무렵이 되자, 벌써 1일 단위 미터의 바늘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속도로 빨리 회전하고 있고, 1년 단위 미터와 바늘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제 1년째의 눈금을 지나서 2년째로 들어간 것입니다. 벽의 시계는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출발하고 나서 아직 40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조금 전에는 아래에서 전개되는 경치가 움직이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고 썼습니다만, 어느덧 풍경이 조금씩 달라져 갔습니다. 50번 거리의 브로드웨이에 있는 8층 건물인 빌딩이 조금씩 녹아 없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빌딩을 헐고 있는 듯합니다. 현실로는 몇 주일이나 걸려서 많은 사람들이 해제 작업을 하였을 것,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저에게는 2, 3초 사이에 건물 전체가 녹아서 없어져 버린 것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한 번 눈을 깜짝할 때마다 불쑥 불쑥 커져 간다는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골격만 커져가다가 그것 이 완성되자, 보고 있는 동안에 벽과 창과 지붕이 차례대로 완성되어 갑니다. 극히 빠른 시간 안에 30층 건물의 빌딩이 완성된 것입니다. 타임 트래블러 계기를 보니, 벌써 10년 단위의 미터가 움직이고 있고 100년 단위의 미터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벽의 시계는 11시를 조금 지난 곳에서, 출발하고 나서 한 시간쯤 지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는 일도 없이 저는 캐빈 안을 어슬렁거리며 걸어다니기도 하고, 하나하나 창문 밖을 엿보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땅 표면의 건물이 점점 밀려 올라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두 건물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건물들이 떼지어 있는 거리 전체가 위로 위로 뻗쳐 올라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변화는 가지가지입니다. 하나 하나의 건물이 새로 모습을 나타냈다고 생각하면, 곧 증축과 개축을 되풀이하고, 또 곧 얼마 안 가서 어느 사이엔가 해체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종전보다 더 큰 고층 건물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거대한 건물이 제가 있는 곳의 남쪽 방향에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쪽으로 덮어 씌워져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터무니없게 큰 건물입니다. 그 밖의 장소에서도 시가지의 주름처럼 잘게 나뉘어져 있던 건물들이 차례 차례로 한데 모여서, 편편한 넓은 건물이 되고, 더욱 높은 건물로 통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동남쪽 방향을 보니 허드슨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점점 많아져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다리는 낡은 다리와 비교하여 엄청나게 크고, 다리의 폭도 넓은 것뿐입니다. 지금은 뉴욕의 엄청난 발전의 시기인 것 같습니다. 조금 후에 갑자기 센트랄 공원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던 건물의 물결이 삽시간에 공원의 녹지는 나무를 삼켜 버리고 만 것입니다. 문득 발 밑을 보니, 어느 사이에 거대한 강철의 건물 골격이 조립되어 서 있고, 무서운 속도로 이곳으로 뻗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황하며 공간 이동 장치를 조작하여, 타임 머신을 더 높이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5백 미터쯤 더 올라간 곳에서 다시금 공중에 정지하여 아래를 보니, 여기저기에 거대한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평평하게 자른 것 같은 건물들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들에는 대개 30층마다 테라스와 같은 가장자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공중으로 뻗어 나가서 같은 모양의 가까운 건물과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면, 남북의 방향으로 뻗은 통로는 끝없이 먼 곳까지, 다음에서 다음으로 피라미드 사이를 이어나가 있고, 동서의 방향으로 뻗은 통로는 가까운 곳의 다섯, 혹은 여섯의 피라미드만을 연결하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통로 가운데 번쩍번쩍 은빛으로 빛나는 몇 줄기의 빛이 있었으므로 시선을 모아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모노레일의 선로로서 여덟 개의 선로가 나란히 뻗어 있습니다. 그 동안에 하나 하나의 피라미드 자체가 대략 남북의 방향으로 뻗기 시작하여 어느덧 마치 산줄기의 능선처럼 하나로 연결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뉴욕 시의 등뼈와 같은 이 산줄기 전체가 하나의 빌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빌딩의 산줄기가 자리 잡은 땅의 가까운 부분에도 그보다 낮은 건물들이 가득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간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그 무렵이 되자, 제 눈에 보이는 것은 적어도 30년쯤은 계속 서 있었던 건물뿐이었습니다. 그 밖의 건물은 순간적인 검은 그림자가 되어서 잠시 제 시야를 통과할 뿐이었습니다. 조금 지나서, 공중에서 때때로 초고층 건물인 듯한 것의 검은 그림자가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천 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나타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 정체를 분명히 보여 줄 사이도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잠시 후, 갑자기 주변의 경치는 지금까지처럼 바쁜 변화가 정지되고, 도시의 성장이 휴식에 들어갔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도 때때로 시가지의 일부가 흐릿해졌다가는 모양이 달라지고, 굉장히 높은 탑이 뻗어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체로서 생각하면 많이 조용해졌습니다. 이 무렵이 되어서는, 너무 힘을 들여 관찰을 계속해 온 탓인지, 머리가 멍해져 왔습니다. 배도 고파오고 몸이 피곤합니다. 저는 털썩 좌석에 앉았습니다. 옆에 있는 타임 트래블러의 계기를 보니, 백 년 단위 미터가 '18'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천 팔백 년이나 미래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미터를 보고있는 동안에도 타임 머신은 그냥 진행을 계속하여, 어느덧 2천 년의 미래로 오고 말았습니다. 벽의 시계는 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출발하고서 4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조금 전에, 도시의 성장이 멎었다고 말했습니다만 참으로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로부터 2천 년이 지나고, 3천 9백 년의 절반을 지나면 기계 문명은 그 절정에 도달하여, 더 이상 발전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도 잠시 동안 관찰을 계속 하였습니다. 물론 변화는 있었습니다만 작은 것뿐입니다. 낡은 건물이 무너지고 그것을 다시 세운다…… 그런 느낌의 변화뿐이고, 도시 전체의 모양은 이전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문명의 절정에 도달한 인류는 여기서 천천히 오랜 노력의 성과를 즐기면서, 휴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출생한 후에, 아이로부터 어른으로 자라서 마침내는 노인이 되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죽는 것처럼, 인간의 문명도 늙어서 무너져 가는 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계는 2시 50분. 출발하고 나서 5시간이 지나 갔습니다. 타임 트래블러 계기의 백년 단위의 미터는 '37'…… 3천 7백 년의 미래로 온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무렵부터 도시는 점점 낡고, 작고 지저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문명은 2천 년 간 눈부시게 발전한 뒤에, 겨우 2천 년간만 더 그 영화를 보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빨리도 쇠퇴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또 하나, 모닥불의 타고남은 재가 무너지듯이 도시의 장엄한 건물들이 모두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서지 못한 채로 언제까지나 폐허로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2만 8천 년 후의 세계   때때로 용감하게 이 늙어 가는 도시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행해지는 듯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없던 모양의 건축물이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나 전보다도 작은 것뿐이었습니다. 거대한 폐허의 집단 가운데서 작은 외톨이의 새로운 건축물이 자랑스러운 듯 서는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서 그런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온통 폐허뿐…… 오랜 시대를 지나도 조금도 변화가 없게 되었습니다. 벌써 사람이 살고있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시계는 5시였습니다. 미터는 8천 년의 조금 앞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벌써 바깥 경치는 특별히 관찰할 만한 것이 없어서 주의를 다른 일에 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멸망한 도시의 폐허가 폐허다운 모습을 남기고 있었던 것은 2천 년 간쯤으로, 그 뒤에는 식물이 무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식물에는 전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군데군데에 도시의 폐허의 남은 모습인 빌딩의 벽과, 거대한 탑의 토대와, 철골의 조각들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멸망한 도시의 묘비와 같은 것입니다. 이 무렵이 되자, 육지의 모양 전체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허드슨 강은 흐르는 방향이 달라지고, 강물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맨해튼 섬의 남쪽으로부터 서쪽에 걸쳐서 커다란 바다가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장 지대'라고 부르고 있는 낮은 땅은 바다 밑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한편, 북부 지역은 반대로 불쑥 땅이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다만, 북부로 가늘고 길게 뻗은 낮은 땅 부분 깊숙이 후미진 곳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와서 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참, 그렇군요. 아직도 기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았군요. 출발한 것은 무더운 8월의 밤이었지만 그 직후부터 온도는 점점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낮도 밤도, 여름도 겨울도 있었습니다만, 시간 속도가 더해지자 그것들은 모두 함께 뒤섞여서, 전체로서는 점점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계의 바늘이 7시를 가리키고, 출발 후 9시간째가 되자 온도는 다시 쑥 내려갔습니다. 아래로 보이는 경치도 눈에 띄도록 흰 빛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점점 더 휜 빛으로 변해 갑니다. 어쨌든, 30년분의 겨울을 다른 계절과 함께 섞어서 겨우 1분만에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겨울의 경치만 눈에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정상이 아닌 이변입니다. 어느덧 시계는 7시가 지나고, 출발 후 9시간 반이 지났습니다. 미터는 1만 1천 4백 50년을 조금 더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때가 되어서 또 하나 난처한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날의 실험 중에 저와 아버지가 보았던 풍경이 대관절 어느 시대의 세계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표하는 시간 세계에 도착한 것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그 소녀가 붙잡혀 있던 집은 그처럼 오랫동안 서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길어도 백 년 이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세계를 분간하는 유일한 실마리는 그 한 채의 집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그 집이 백 년간 계속 서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시간 속도로는 1분이나 2분 사이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저는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였습니다. 한번, 타임 머신의 시간 이동을 멈추고 아래의 경치를 확인해 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문득 아직도 많은 나무들이 무성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임 머신의 시간 이동을 멈추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나무들이 무성한 모양은 물론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가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잇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날 실험 중에 보았던 풍경에서 집 둘레에 나무가 딱 한 그루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대단히 작고 보지 못하던 이상한 모양의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 아래 펼쳐져 있는 1만 2천 년 후의 세계에 무성해 있는 나무는 적어도 제가 늘 보아 온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프로톤의 흐름의 출력을 10번째의 눈금으로부터 15번째의 눈금까지 올렸습니다. 또다시 전과 같이 어지러워지고, 붕 하는 소리와 진동이 심해졌습니다. 지금까지의 몇 시간 동안 어느 사이에 그와 같은 기분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만 5천년을 통과했습니다. 북쪽의 바다가 꽤 이쪽으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아직도 지구 위에 살고 있는지 어떤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바깥 경치는 흐릿한 회색이 되고 있습니다. 남쪽 방향에만이 있는 것을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남쪽에서 서쪽에 걸쳐서는 스타힌 섬의 산들의 능선이 바다의 수면으로부터 조금 엿보이고 있을 뿐이며, 그 앞은 드넓은 바다입니다. 맨해튼을 싸고 흐르는 강물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만, 허드슨 강 하류의 파리세이즈 암벽은 무너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제가 타고 있는 타임 머신의 아래는 삼림이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그렇게 멀리 바람에 밀려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은 1만 년 전에 센트랄 공원이 있었던 그 장소의 상공일 것입니다. 그 숲은 두 줄기의 강물 사이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지역을 가득 덮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 속도는 전보다 더 빨라져 있고, 삼림의 모습은 흐릿하고 찌그러져 보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모양이 달라져 갑니다. 전체로서는 점점 성기고 점점 키가 낮아져 가고 있습니다. 시계는 10시. 약 12시간, 시간 여행을 계속하였을 무렵이 되어서, 저는 몹시 피로를 느꼈습니다. 머리는 어지럽고 눈은 벌겋게 핏발이 서고 눈물이 자꾸 나와서 괴로웠습니다. 전보다도 점점 더 추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기 난방기의 스위치를 넣었던 것입니다. 타임 트래블러 계기는 2만 년과 3만 년의 중간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혼란해져서 똑똑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아래쪽의 풍경은 대부분 흰 빛으로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공간의 위치는 꽤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4만 5천 년 후에 도달했다고 생각되었을 때, 문득 아래를 보니, 모든 식물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가 되어서 갑자기 없어졌는지, 아니면 꽤 오래 전부터 없어져가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흐려 보이기는 하지만 아래로 보이는 것은 온통 흰 눈뿐입니다. 저는 당황하여 시간 제어기에 달라붙어서 핸들을 힘껏 잡아당겨 양자의 흐름이 내는 힘을 제일 아래 있는 눈금까지 내려가게 하고는, 제어기를 뗐습니다. 시간의 속도를 급격하게 떨어뜨릴 때의 기분은, 출발을 위한 가속도를 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몹시 언짢은 것이었습니다. 붕 하는 소리가 점점 느려져 가면서 온 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진 것 같은, 아니 얼어붙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왔습니다. 몸 전체가 무겁고 굳고 차가웠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캐빈의 벽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아래로 손을 뻗치고, 간신히 스위치를 눌러서 양자의 흐름을 완전히 절단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크게 울리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거꾸로 밑 없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 에 사로잡혔습니다.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몸의 모든 감각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은 1초나 2초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머리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알아차리게 된 것은 캐빈의 내부가 고체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정에 달려 있는 두 개의 전구가 캐빈 안을 비치고 있고, 장방형의 창문 밖은 새까맣기만 한데, 밤일까요? 춥습니다. 두 개 있는 난방기 중의 하나가 작동하고 있는데도 제가 토하는 입김이 희게 보입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이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조용하기만 한 느낌입니다. 퉁 하는 소리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가끔 들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너무 오랜 시간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귀가 바보가 된 탓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옆의 작은 방에서는 헬리콥터의 엔진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기분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므로,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달려가서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하늘은 검푸르고, 달은 없고, 별은 어쩐지 흐릿하게 번 져 보였습니다. 땅바닥에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침반을 보고 방향을 확인한 후, 타임 머신이 점점 바람에 밀려서 남쪽으로 흘러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나침반이 있어도 방향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타임 머신의 높이를 2천 미터로 올라가게 하고 나서, 바람을 거슬러 북으로 향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저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길을 잃고 만 것입니다. 어쩐지 본 기억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면서도, 별빛과 눈 내린 풍경만으로는 도무지 지형의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목표하는 시간 세계를 지나치고 말았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머신의 높이를 낮추어 땅 위에서 60미터쯤 되는 하늘을 천천히 저공 비행 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몇 채의 집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집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마치 남극의 세계 같았습니다. 이 때가 되어서 저는 시간적으로 목적지를 지나쳐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밤이 새기까지 순간적으로 이 근방에 머물러 있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다행한 일은 벌써 새벽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3분쯤 지나자 별빛이 엷어지고 사방이 훤해 왔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새빨갛게 빛나는 거대한 태양입니다. 타임 머신은 더 높이 올라가서 2천 5백 미터쯤 되는 상공을 돌았습니다. 이른 아침의 밝은 햇빛 속에 남쪽의 만이 보입니다. 롱아일랜드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위치는 우울하게 바닷물이 밀려와서 부서지곤 하는, 눈에 묻힌 바닷가의 차가운 상공이었습니다. 서쪽에 허드슨 강이 보입니다. 여기도 저기도 눈에 덮여 있습니다. 바다에는 얼음 이 가득 떠 있었습니다. 허드슨 강의 저편에는 작달막한 나무들이 서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맨해턴 섬의 바로 위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늘을 계속 돌면서 착륙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았습니다. 지나쳐 온 시간을 되돌아가더라도, 벌써 출발 후 16시간 가까이 지났고, 또 몹시 피곤하여 기진맥진입니다. 허드슨 강을 건넌 곳에 북으로 향하여 열려 있는 편편한 들판이 있습니다.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는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헬리콥터 엔진의 전기를 끄고 아래로 내려가서, 4만 6천 8년 후의 세계에 착륙했습니다. 착륙한 곳은 눈이 쌓여 있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저는 가벼운 식사를 하고 나서, 그대로 마루 위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다지 분명한 일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아무 일 없이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잠을 잘 잘 수 있어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밤이었습니다. 적어도 12시간은 잠을 잤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곧 타임 머신을 하늘에 떠오르게 하여 맨해튼 섬의 상공으로 돌아오자, 제일 작은 출력으로 조절하여 반대 방향으로 양자의 흐름을 발사하였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과 같은 기분을 맛보았습니다만, 이제는 꽤 익숙해진 까닭이지 그처럼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때때로 양자의 흐름을 멈추고는 근방의 풍경을 확인하면서 시간을 과거로 되돌아갈던 것입니다. 되돌아온 몇 세기 동안에, 바람은 항상 북에서 남으로 계속 불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바람이 불어오는 북의 방향으로 타임 머신의 머리를 향하고, 헬리콥터용 엔진의 동력을 조절하여, 공간적으로는 될 수 있는 대로 맨해튼 섬의 남쪽 상공으로부터 밀려나지 않도록 하면서, 시간 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방법은 틀리지 않았고, 몇 번째엔가 시간 이동을 멈추고 바깥 풍경을 확인하였을 때에는, 마침내 기억에 남아 있는 토지형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언젠가 실험실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광경입니다.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도. 그러나 집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도 없습니다. 마침 여름철에 도착해 버린 모양입니다. 게다가 이 나무도 아직 너무 작습니다. 나무의 크기로 보아서, 목표하는 시간 세계는 앞으로 10년 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미터를 줄곧 응시하면서 이번에는 미래로 시간을 돌려서 딱 10년 반만 시간이 경과한 곳에서 시간 이동 장치를 멈추었습니다. 이곳은 아버지와 제가 실험 중에 보았던 날의 한 주일이나 두 주일 전의 시간 세계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 탐색에 약 8시간이 걸렸습니다. 타임 트래블러 계기의 미터는 2만 6천 2백 몇 년인가의 눈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땅바닥에서 백 오십 미터쯤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고, 시각은 역시 아침 해가 뜬 직후입니다. 타임 머신의 바로 아래에 담으로 둘러싸인 그 집이 있습니다. 다른 채의 건물도 몇 개 있습니다. 상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집의 창문으로부터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프레이즈형 헬리콥터의 모터는 꽤 성능이 좋은 소음 장치가 달려 있습니다만, 그래도 꽤 큰 소리가 집 안에까지 들렸던 모양입니다. 사람이 하나, 밖으로 뛰어나오더니 하늘에 있는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소녀입니다. 털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습니다만,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제가 타고있는 타임 머신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작은 말 만큼이나 몸집이 큰 거대한 개가 세 마리 다른 건물에서 뛰어나와, 한 줄로 서서 저를 향해 짖었습니다. 온 몸의 피가 얼어붙어 버리는 듯 무섭게 짖는 소리 입니 다.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면서,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그 집의 상공을 천천히 계속 돌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한 사내가 나왔습니다. 소녀와 같이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고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나란히 서니 소녀의 키는 사내의 가슴께밖에 미치지 못합니다. 개 짖는 소리 때문에 타임 머신의 폭음이 들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사내는 몹시 성난 태도로 소녀를 욕하며, 손바닥으로 소녀의 뺨을 때리고는, 소녀를 끌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타임 머신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그곳을 떠났습니다. 개 짖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이, 바람을 타고 비행을 계속 하고 있는 동안에, 바다 위로 나왔습니다. 허드슨 강이라고 생각되는 강물이 흘러 들어가는, 육지로 둘러싸인 만입니다. 강도 만도 온통 얼어 있고, 그 위에 눈이 내려 쌓여 있습니다. 하나의 섬(아마도 스타힌 섬일 것입니다)의 상공을 날아 지나친 곳에서 서쪽으로 돌았습니다. 아직 어떻게 하면 좋은가의 결심이 서질 않습니다. 타임 머신에는 라이플 총과 최신식 콜린저 권총이 몇 자루 실려 있습니다. 당당하게 저 집 앞에 착륙하여 이 무기들로 저 집사람들을 위협하고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면? 그러나, 만일 저 집사람들이 제가 본 일도 없는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뒤의 수평선에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쪽을 향하여, 2만 8천년 후의 태양을 바라보니 새 빨간색 태양이지만, 그 빛은 그다지 눈부실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허드슨 강이 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 근처에서, 다시 방향을 돌려 허드슨 강을 따라서 육지의 안쪽 깊숙이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군데군데 두세 채씩 집 같은 것이 보입니다. 이 대로라면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좋은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프로톤의 흐름을 아주 조금씩만 내어서 천천히 시간 이동을 하면서, 허드슨 강의 상공을 더듬어 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 시간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타임 머신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윽고 폭이 60미터쯤 되는, 물이 말라 버린 골짜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골짜기의 밑은 평평해 보이고, 골짜기의 사방은 산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타임 머신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기에는 가장 알맞는 장소로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신중하게 타임 머신을 조종하여, 골짜기에 착륙하고 시간 이동 장치의 스위치를 끊었습니다. 캐빈 안에서 식사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소녀를 구해 낼 수 있을까 하고 작전을 짜기에 골몰했습니다. 방해되는 것은 그 거대한 개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저 거대한 개들은 평상시에는 저 집에서 90미터쯤 떨어진 개집에 있는 모양입니다. 결국, 한밤중에 출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 시계는 20세기의 시간으로 가리키고 있어서, 이 세계의 시간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태양이 산의 저편으로 졌을 때부터 꼭 여섯 시간이 지난 후에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소녀가 알지 못하는 사람인 저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잘 통할까 어떨까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거나 저항하거나 한다면 만사는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저는 털가죽 코트를 입고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은 이 시간 세계의 인간처럼 보여서 그녀에게도 두려움을 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외에 그녀에게 제 선의를 믿게 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초조한 기분으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어느덧 출발의 시각이 왔습니다. 저는 콜린저 권총 외에 휴대용 나침반과 소형 손전등을 가지고 타임 머신을 떠났습니다. 대단히 춥습니다. 깊은 눈 속을 악전고투하면서 산허리를 2백 미터쯤 기어올라가 산꼭대기의 평지로 나왔습니다. 북풍이 정면으로 불어닥쳐서 점점 더 추워졌습니다. 부드럽고 무거운 눈이 제 둘레를 싸고, 커다란 눈송이가 바람에 불려와 얼굴을 때립니다. 저는 참을 수가 없어서, 털가죽 코트의 포켓에서 귀를 덮는 커버가 달린 털가죽 모피를 꺼내 썼습니다. 옆으로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허리까지 푹푹 빠지며 눈 속을 걸어갔습니다. 앞쪽은 1미터쯤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혀 길이 없는 눈뿐인 벌판입니다. 때때로 휴대용 나침반을 손전등으로 비추어서 방향을 확인했습니다. 아마도 20세기의 세계에서는 마치 55번 거리의 콜럼부스 거리가 있었던 근방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번화했던 시절과 비교하여, 이 달라진 모습은 대관절 무엇이라고 표현하면 좋겠습니까? 모두가 시간이 가져온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맹렬한 눈보라 속을 1시간쯤 걸었습니다. 목표하는 집은 이 근처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구 퍼붓는 눈 사이로 앞을 내다보면 앞쪽에는 캄캄한 밤이 있을 뿐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의 구름 틈새로 달빛이 비쳤습니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도록 붉은 빛깔의 거대한 달걀 모양의 달입니다. 왼쪽으로 4백 미터 가량 떨어진 작은 언덕 위에 목표하는 집이 서 있었습니다. 연구실에서 망원경을 사용하여 관찰한 바로는, 소녀는 언제나 밤이 되면 집의 중앙에 있는 안방에 앉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밤이 깊어 가면 꼭 서남쪽을 향해서 안방을 나갔습니다. 그 집은 남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방은 틀림없이 그 건물의 남쪽 끝에 있을 것입니다. 담은 집의 뒤쪽, 즉 북쪽을 두르고, 그 안의 제일 북쪽 끝에 개집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제게 유리했습니다. 풍속 3, 4십 미터의 바람이 개집이 있는 방향으로부터 제가 있는 편으로 불어오고 있으므로, 제 몸의 냄새를 맡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동남쪽에 있는 출입구나 창문을 통하여 그 집으로 숨어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여자가 있는 장소를 알아내어서,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나온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하면서 흥분에 몸을 떨었습니다. 어쨌든 2년이나 걸려서 계획하고 노력해 온 작업과 성과를 이제 곧 손에 넣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집은 1층 건물로서 눈과 비를 막기 위한 차양이 처마 끝에 길게 달려 있습니다. 담은 3미터쯤 되는 높이입니다. 저는 장갑을 낀 손에 콜린저 권총을 꼭 쥐고 집의 남쪽을 돌아 현관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어디에나 눈이 높이 쌓이고, 씽씽 부는 바람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현관의 문은 거무튀튀한 틀에 한 장의 장방형 유리를 끼워 넣은 것이었습니다. 폭은 넓어야 1미터, 높이는 3미터 반쯤입니다. 유리의 안쪽에는 청백색의 부드러운 조명이 달려있었습니다만, 무슨 등불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잠시 동안 저는 꼼짝도 않고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커다란 방의 일부가 보입니다. 구석에 낮고 긴 의자, 기묘한 모양의 낮은 의자, 테이블 따위가 있습니다. 마루에는 두껍게 짠 천으로 깔개를 펴놓았고, 군데군데 털가죽의 방석이 놓여 있습니다. 긴 의자에도 커다란 털가죽이 깔려 있습니다. 오른편쪽에 아치형의 통로가 있고, 입구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의 방으로 통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밖에도 같은 아치형의 출입구가 둘 있습니다만, 문이 달린 출입구는 아무데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힘을 다하여 현관의 유리문을 밀어 보았습니다. 조금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아래쪽이 많이 밀려서 들어갑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아래쪽을 힘껏 밀었습니다. 유리의 아래쪽 절반 부분이 미끄럽게 안쪽으로 올라가는 동시에, 위쪽 절반 부분은 바깥쪽으로 내려와, 3미터 반쯤 유리판 전체가 그 한복판을 중심으로 빙글 돌아서 마루와 평행이 된 곳에서 멎었습니다. 꼭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높이로 출입구가 열린 것입니다. 저는 귀를 기울이고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조심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괴물이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콜린저 권총의 방아쇠에 걸고 있는 손가락이 용기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왼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저는 천천히 소녀의 방으로 통한다고 생각되는 아치 출입구로 가까이 갔습니다. 갑자기, 저는 쓰고 있는 모자가 생각나서 황급히 그것을 벗어 포켓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커튼을 헤치고 그 저편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커튼을 내리니, 안은 캄캄했습니다. 몇 미터쯤 저편에도 커튼이 있고, 그 저편 쪽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2, 3초 동안 망설이다가 저는 용기를 내어서 그 커튼을 들치고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전의 안방보다도 더 캄캄한 방 저편 구석에는 긴 의자가 있고, 의자 위에는 옆에 있는 화로와 같은 것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받으며 그 소녀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몸에는 부드러운 하얀 털가죽이 덮여 있습니다만, 두 어깨와 두 팔은 털가죽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한편 팔은 팔꿈치를 굽혀서 베개를 향하고, 또 한편 팔은 곧게 뻗어 털가죽 위에 놓여 있습니다. 가슴 위에는 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도 귀여운,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다운 얼굴일까요! 부드럽게 다문 입술, 애교스러운 장밋빛의 뺨, 비단실을 수놓은 듯한 눈썹…… 저는 이대로 이 방을 나가고 싶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처럼 맑은 얼굴로 잠든 소녀를 앞에 두고 그것에 시선을 보내는 자체가,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마음에 걸려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덜컥덜컥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권총을 앞으로 내밀었지마는, 그것은 바람이 처마 밑에 놓아두었던 무엇인가를 날려 버렸기 때문에 들려온 소리였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을 꾹 참고, 천정과 창문과 그 밖의 모든 것에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였지마는, 별로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선을 긴 의자에 떨어뜨리고, 그리고 숨을 죽였습니다. 소녀가 커다란 두 눈을 뜨고, 물끄러미 저를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서, 왼손으로 꼭 잡은 털가죽을 자기 몸에 당겨 붙이고, 오른손은 입에 가져다 대고 두 어깨를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처럼 공포의 표정을 나타내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입 속으로 위로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습니다. 이것이 큰 실수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소녀의 비명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크게 당황하여 커튼이 있는 곳으로 돌아서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저는 또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도망치느냐? 그리고 또 한번 더 이곳으로 숨어드느냐? 차라리 그녀를 납치하여 도망치는 것이 어떨까? 소녀의 몸은 그다지 무겁지도 않을 것 같다. 짊어지고 도망칠 수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방해하는 놈이 있으면 권총으로 한 방…… 저는 소녀가 있는 의자 쪽으로 다시 돌아섰습니다. 소녀는 벽에 몸을 꼭 붙이고 두려워하는 눈으로 제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등뒤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돌아보니 커튼이 둘로 나뉘는 곳의 어둠 속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저는 콜린저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람이 서 있는 방향에서 연필의 끝만한 가느다란 빛이 저를 향하여 날아왔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제 눈앞에서 대단히 짧고 작지만 무섭도록 강렬한 빛이 번쩍 빛났습니다. 저는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이 새까맣게 느껴질 뿐입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마는, 옆으로 비틀거렸습니다.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 가 들리고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다음 순간 손 하나가 제 턱을 힘껏 때렸습니다. 조금도 눈이 보이지 않는데, 싸움을 하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무엇인가에 걸려서 뒤로 자빠졌습니다. 팔을 비틀리고 손에 들고 있었던 권총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정신 없이 두 팔을 휘둘렀지마는, 허공을 쳤을 뿐, 또 한 번 턱을 얻어맞았습니다. 또다시 들려오는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 상대편은 저를 즐거운 듯이 학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 없이 일어나서 출입구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하여 뛰어가려고 하자, 무서운 힘으로 어깨를 붙잡혀서 옆으로 힘껏 내던져졌습니다. 저는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비웃는 높은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기절하고만 것입니다.   응원을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아직도 쓰러졌던 그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눈을 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새까맣기만 합니다. 머리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어디에도 상처는 없습니다. 저는 꿈지락꿈지락 상반신을 일으켰습니다, 누군가가 제 옆에 있었던 사람은 일어나서 저편으로 걸어갑니다. 어둠 속에서 그 소녀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하는 그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어쩐지 어딘가에서 들은 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암흑 속을 무수한 붉은 점들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두 눈의 눈알 뒤쪽이 타는 듯이 아파 옵니다. 전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영원히 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 사내가 발사한 빛 때문에 제 눈은 망가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안타까워집니다. 갑자기 방안이 밝아졌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둘레가 밝아진 것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넘어질 때에 머리를 부딪친 탓인지 아직도 의식이 몽롱한 저를 누군가가 어딘가에 데려다가 뭔가 부드러운 것 위에 털썩 하고 눕혔습니다. 눈을 감아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붉은 빛의 점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저는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습니다. 불그스레한 햇빛이 천정 가까운 작은 창문으로부터 비쳐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소경은 안 된 모양입니다. 아직도 머리는 많이 울리고 눈도 아프지만, 다른 곳은 아무데도 상처를 입고 있지 않습니다. 털가죽 이불을 깐 낮은 소파에 뉘어져 있고, 옆의 마루에는 제 오버코트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꽤 넓은 침실입니다. 한쪽 벽의 천장 가까운 곳에 투명한 두꺼운 판을 끼운 창문이 둘…… 그 반대편에 늘 커튼이 드리워진 출입구가 있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오버코트를 입고 포켓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습니다. 모자는 있었지만 나침반과 손전등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권총도 빼앗긴 채였습니다. 문 밖의 태풍은 지나간 것 같습니다.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나는 출입구의 커튼 가까이 갔습니다. 그 뒤는 텅 비어 있는 작은 홀인데, 저편에는 또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커튼을 살짝 열었습니다. 그곳은 넓은 거실이었습니다. 조심조심 엿보고 있던 저는, 거기서 쉬고 있던 사내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저는 당황하여 커튼을 내렸지만, 사내는 재빨리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 일어나서 뒤쫓아 왔습니다. 저보다 키가 큰 건장한 몸집인데, 회색의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윗도리를 벗고 있었습니다. 저는 급히 침실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서 무서워졌던 것입니다. 이번에 정말 소경이 되어 버릴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내는 성큼성큼 제 뒤를 따라서 침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제 어깨를 꽉 쥐고는 제 몸을 빙글 돌려 자기편을 향하게 했습니다. 나이는 35세쯤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목까지 길게 기르고 있습니다. 수염은 깨끗이 깎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거칠고 매우 단단해 보였습니다. 검고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 입술이 엷은 가늘고 긴 입, 체력과 용서 없는 실행력에 넘쳐 있는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얼굴 생김새입니다. 사내는 무엇을 알아내려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제 정체를 알아내려고…… 제가 어떤 사람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사내는 저에게 말을 걸어 왔지만 제게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언어입니다. 어쩐지 영어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 편에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전혀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내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제 몸을 소파가 있는 쪽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온순한 태도를 보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밀리는 대로 비틀비틀 소파에 앉자, 한껏 모든 노력을 기울여 애교를 부리면서 생긋 웃어 보였습니다. 방의 한가운데서 아직도 선 채로 저를 계속 응시하고 있던 사내는 제 웃음에 끌려서, 빙긋 웃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방을 나가 버렸습니다. 벌써 방안은 불그스레한 햇빛으로 꽤 밝아져 있습니다. 저는 테이블을 두 개의 창문 밑으로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창문 밖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는 눈 세계입니다. 그것이 햇빛으로 볼게 물들여져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집의 동쪽 끝의 방에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그 소녀의 방 옆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물의 모퉁이가 있는 곳에 그 거대한 개가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털북숭이 이리와 같은 빈틈없는 눈초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앉아 있는데, 머리의 높이가 땅바닥에서 3미터나 되는 것입니다. 제가 창문을 열려는 기미를 알아차리자,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와서는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는 젓입니다. 그 눈빛이 어쩌면 그렇게도 신비스러웠던지요! 마치 인간의 눈처럼 지성에 넘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만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고 재빨리 알아차리자, 다시금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저에 대한 감시는 안 하는 척하면서 계속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테이블에서 마루로 뛰어내렸지만 한동안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습니다. 저 말과 같이 큰 몸을 가지고 인간과 비슷한 총명해 보이는 눈을 가진 동물은 대관절 무엇일까? 여기서 도망쳐 나가려고 생각하는 제 마음은 곧 납작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온순하게 그 방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석사를 가져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중을 들어 주는 것은 40세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습니다. 얼굴빛이 별로 좋지 않은 쇠약한 여인은, 회색에 가까운 다갈색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려서 검은 천의 끈으로 묶고 있습니다. 구김살이 꾸깃꾸깃 나 있는, 소매가 길고 헐렁헐렁한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어쩐지 단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져다주는 음식은 고기와 감자 요리였지만 실제 무슨 고기인지, 또 정말 감자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주인의 태도는 결코 불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지못해서 억지로 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여인에게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말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여인은 언젠가 보았던 노인의 딸이었습니다. 그 노인 자신도 몇 번인가 왔다 갔습니다. 수염을 깨끗이 깎고, 몸집이 크고,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고, 나이는 75살쯤입니다. 역시 폭이 넓은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고, 윗도리는 대체로 벗고 있지만, 때로는 짧은 저고리를 입고 있는 때도 있었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브울, 이 집의 주인인 젊은 사내는 트로오, 40세쯤 되는 여인은 코아, 그리고 그 소녀는 아질라입니다. 트로오는 때때로 방에 들어서서 코아가 시중 드는 모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습니다. 마치 코아가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지 하고 감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트로오가 코아를 때린 일도 있습니다. 그러자 코아는 세찬 증오심이 가득 찬 눈으로 트로오를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느 때인가는 무슨 일인지 코아가 트로오에게 맹렬하게 반항했습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트로오가 코아에게 수갑을 채워 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코아는 자기 아버지인 그 노인 브울조차도 미워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느 날 제가 넓은 거실에 앉아 있을 때, 그 소녀 아질라가 출입구의 커튼을 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아질라는 저를 보자,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저를 보고만 있습니다. 참으로 작고 가는 몸집입니다. 복장은 마치 고대 이집트 사람처럼 폭이 넓은 푸른 천을 허리 둘레에 감고, 무릎까지 닿는 장식용 붉은 띠를 한 개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맨발 그대로 샌들을 신고 있고, 금속 제품의 가슴 장식과 폭이 넓은 천으로 만든 칼라, 황금빛의 머리카락은 양옆으로 갈라 땋아서 어깨에 늘어뜨리고 끝에는 작은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어선 채로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사라지고, 어느 편인가 하면 호기심에 들떠 있었습니다. 아래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아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입은 옷에 흥미를 불러일으킨 모양입니다. 제가 신은 긴 바지, 셔츠, 넥타이…… 그런 것들이 참으로 신기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입니다.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녀를 구해 내는 일이 어느 날이 되든지, 그녀가 저를 두려워하고 있어서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안심한 나머지, 저는 그만 갑자기 일어나 넉살 좋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차,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녀는 휙 돌아서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트로오가 제 손전등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하고 사용해 보라고 손짓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이것을 무기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이때야말로 그를 해칠 뜻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줄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손전등을 내 눈을 향하여 스위치를 넣고, 이것이 아무런 해를 주는 물건이 아닌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트로오는 뭔가 투덜거리면서 제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아 방의 구석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벌써 이것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표정입니다. 계속하여, 이번에는 콜린저 권총을 내밀면서 사용하는 법을 설명해 달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턱대고 그것을 제 손에 맡기지는 않고, 자기 손을 권총에서 떼지 않은 채로 아무도 없는 출입구의 바깥쪽을 향해서 겨누고 발사할 것을 제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권총의 발사를 목격하고 나서, 그는 다시금 무슨 말인지 투덜거리면서 문 밖의 눈 위에 권총을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무엇인지 제가 본 일도 없는 것을 꺼내어, 그것을 6미터쯤 떨어진 곳에 던져진 권총을 향해 겨누었습니다. 그 순간 권총은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폭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루가 되어 흩어진 권총의 파편의 하나를 집어 올린 트로오는 '흥'하고 매우 경멸하는 태도로 웃더니 그것을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한 주일쯤 지났을 무렵, 트로오는 두 마리의 큰 개에게 썰매를 끌게 하고, 어딘가로 떠나가 한 달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동안 얌전히 집안에 있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았으나 아질라를 데리고 함께 도망치고 싶고, 지금 억지로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다면 아무래도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한 일을 그녀에게 당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태도로 보아서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저에게는 누구를 해칠 뜻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여인 코아 만은 변함 없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저에 대한 감사를 쉬지 않고 있습니다. 아질라와 저는 곧 친해졌습니다. 달리 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아질라는 머리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는 의욕도 왕성하였으므로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저와 말을 하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 영어를 배웠습니다. 아직 발음과 엑센트에 다소 이상한 점이 있지만 뜻을 서로 통하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녀들이 평상시에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가 진화한 것인 듯 합니다. 그래서, 옛날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는 일은 그녀에게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녀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서로 통하자, 제가 우리의 세계에 대한 것을 이야기해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야기도 저를 놀라게 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족과 동포들은 이곳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며, 제가 설득하지 않아도 그녀는 이곳을 도망쳐 나가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타임 머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두 눈을 빛내면서 제가 세운 탈출 계획에 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아질라는 열심히 탈출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타임 머신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브울 노인은 언제나 허리에 저 무서운 광선총(제가 눈을 다친 광선을 발사하는 권총)을 차고 있습니다. 코아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그리고 트로오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트로오가 말만한 큰 개를 두 마리 데리고 갔지만,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이 집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해도 그 무서운 개는 틀림없이 뒤를 쫓아올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임 머신까지 가기 전에 개에게 물려 죽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아질라와 제가 탈출 계획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코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질라에게, 탈출한다면 자기도 도와 주겠으며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코아도 어느 사이엔가, 제가 말하는 영어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되고, 또 우리들의 태도에서 탈출 계획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아는 트로오를 미워하고 있었으며, 그 화풀이로 우리들의 탈출에 협력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질라의 통역으로 코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아의 계획은 간단하였지만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어디에 무기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아버지뿐이지만, 오늘 오후가 되면 아버지는 자기 방에서 낮잠을 잔다. 그 시각에 맞추어서 나는 개를 개집에 넣고 쇠를 잠근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자유롭게 도망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코아를 설득해 볼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브울 노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시치미를 떼고, 그 날의 오전 중을 지냈습니다. 어느덧 오후가 되자 노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탈출 계획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털가죽의 오버코트를 입었습니다. 아질라도 신발과 바지와 저고리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털가죽 옷을 입었습니다. 머리에 후드를 푹 쓰고 금빛 머리카락을 밀어 넣으니, 마치 귀여운 에스키모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수줍은 듯이 웃었습니다. 저도 털가죽 모자를 쓰는 것을 끝으로 준비는 끝났습니다. 널따란 거실에 들어가니, 코아는 변함 없이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라'고 눈짓을 하였습니다. 그 순간 밖의 개집 안에서 그 말만한 개가 슬픈 소리로 크게 짖었습니다. 왜 짖었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예감이 들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코아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출입구를 가리키면서 개를 진정시키려고 나갔습니다. 그 한순간에 저는 망설였습니다. 출발할 것인가? 그 말만한 개는 개집에서 나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망설임이 너무 오래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브울 노인이 굴 입구에 서서, 털가죽으로 몸을 싼 우리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놀라움과, 노여움의 빛이 브울 노인의 얼굴에 나타나더니, 그의 손은 재빨리 벨트에서 무엇인가를 쑥 냈습니다. 아질라가 먼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습니다. 브울 노인은 손에 유리로 만든 초승달 모양의 것을 들고 있었습니다. 초승달 모양의 이상한 물건의 양편 끝에는 철사 같은 것이 이어져 있었고, 그 철사에서 불꽃이 튕겼습니다. 앞으로 뛰어나오려고 했던 제 몸은 갑자기 쇼크를 받았습니다. 몸의 감각이 마비되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서 있는 채로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픔은 전혀 느끼지 않았지만 발에 뿌리가 돋친 것처럼 한 걸음이도 걸을 수 없음은 물론, 발을 들어올릴 수조차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옆에 있는 아질라도 같은 상태가 된 모양으로 몸이 굳어져서 선 채로 꼼짝은 못하고 있습니다. 브울 노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승리 의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왼손으로 허리의 벨트를 더듬어 다른 무기를 끄집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마비 상태는 온 몸으로 퍼 져가고 있습니다. 두 손이 싸늘해져 갑니다. 발은 마치 죽은 나무가 되어 버린 것처럼 접점 힘이 빠져 가고…… 어느덧 저는 맥없이 마루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입니다. 브울 노인의 등뒤에 코아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브울 노인은 조금도 코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아는 돌진하여 브울 노인의 손목을 쳤습니다. 작은 초승달 모양의 유리 제품은 브울 노인의 손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제 몸에는 다시금 따뜻한 체온이 돌아오고 두 손과 두 발에도 다시 피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브울 노인은 미친 듯이 성을 내면서 코아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체력을 회복한 저는 불안정한 자세의 브울 노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꽈당하고 마루에 넘어지고, 저는 브울 노인의 몸 위에 올라탔습니다. 브울은 금속제의 둥근 통을 꺼내어 그것을 제 얼굴에 겨누려고 했습니다. 아질라가 돌진해 와서 브울 노인의 손에서 그 둥근 통을 빼앗았습니다. 브울은 미친 듯이 손과 발을 버둥거리면서 마구 저를 때리고 차고 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정신 없이 그의 머리를 쾅쾅 소리가 나도록 힘껏 마루에 쥐어박았습니다. 어느덧 그의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어나고, 코아는 멍청한 표정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브울 노인을 보았습니다. 코아는 자기가 한 일에 두려움을 느끼는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노인에게 그처럼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자기를 학대해 온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코아는 변함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손을 흔듭니다. "아질라, 개는 개집에 넣고, 그리고 쇠를 채웠는지 코아에게 물어 보아주세요." 코아는 힘있게 머리를 끄덕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질라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이어서 하늘은 피로 물든 것처럼 새빨갛게 보입니다. 눈에 덮인 땅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신 없이 서쪽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아질라가 괴로운 듯이 숨이 차서 헐떡거렸으므로 2백 미터쯤 뛰고는 한번 속도를 늦추어 쉬고,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앞쪽으로 내려간 곳에 한 줄기의 시내가 보이는 외에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온통 눈뿐인 벌판입니다. 겨우겨우 골짜기를 나타내는 검은 바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정신 없이 달려서 목표하는 골짜기까지는 아직 15미터를 남은 곳에 다다랐을 무렵, 뒤에서 커다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 몸이 오싹했습니다. 브울 노인이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그 말만한 무서운 개를 내 보내어 우리들의 뒤를 쫓게 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질라의 손목을 힘껏 당기면서 두려움에 새파래진 아질라의 얼굴을 돌아보았습니다. 저도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그녀를 등에 업고 달리기보다는 이 대로 손을 끌고 함께 뛰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순간적인 판단에서 그대로 뛰기를 계속했습니다. 아질라는 넘어지기도 했지마는 저는 상관하지 않고, 마치 그녀를 잡아끄는 것처럼 하여 뛰었습니다. 이윽고 골짜기 위의 경사진 곳까지 가까스로 도착하였습니다. 세차게 숨을 헐떡거리면서 문득 타임 머신은 그대로 전과 같은 장소에 있을까 하고 의심했습니다. 개는 벌써 바로 뒤에까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놈의 세찬 숨소리까지 들려 오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타임 머신을 발견했습니다.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지만 무사했습니다. 우리들은 미끄러져 내리는 것처럼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몸이 묻혀 버릴 정도로 눈이 쌓여 있습니다. 개는 마침 골짜기 경사진 꼭대기에 막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짖으면서, 뛰어내릴 장소를 고르고 있습니다. 저는 캐빈의 층계에 뛰어올라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괴로운 듯이 헐떡거리고 있는 아질라를 안아서 당겨 올렸습니다. 개는 골짜기 아래에 미끄러져 내려와 몸의 자세를 바로잡고 이쪽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윽고 개는 와락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아질라는 재빨리 캐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닫힌 문에 몸을 부딪쳐온 거대한 개의 충격으로 타임 머신 전체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 거대한 개는 눈 위에 뒹굴어 떨어졌지만 곧 뒷발로 일어나서 사나운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면서, 앞발로 캐빈의 문을 할퀴고 있습니다. 저는 아질라를 마루에 눕히고는 서둘러 조종 장치에 달라붙었습니다. 1, 2초 후 공간 이동 장치가 작동하여 타임 머신은 헬리콥터가 되어서 골짜기로부터 낱아 올랐습니다. 개 짖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공중으로 올라가는 도중 아래쪽을 보니, 우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 집으로부터 4백 미터 가량 되는 눈 쌓인 벌판을 열심히 걸어오고 있는 브울 노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3백 미터쯤 올라간 곳에서 수평 비행으로 옮겼습니다. 남쪽으로 천 오백 미터쯤 떨어진 지점에는 두 마리의 거대한 개가 끌고 있는 썰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트로오가 보였습니다. 그도 우리들의 타임 머신을 알아차리고, 머신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치자 서둘러 썰매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의 거대한 개들이 뛰고 있는 모습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상공의 머신에 꼭 보조를 맞추어서 뛰는 것입니다. 어느덧 섬의 남쪽 끝의 만의 상공에 이르렀습니다. 트로오는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러 거대한 개들을 재촉하여, 얼어붙은 만의 위로 썰매를 몰아넣었습니다. 저는 머신의 공간 이동 속도를 올려서 조금씩 트로오의 썰매와의 거리를 벌어지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의 한가운데에 가까운 상공에 이르렀을 무렵 트로오의 썰매는 검은 콩알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가 벌어졌습니다. 억척스럽게 쫓아오던 트로오도 단념한 모양인지 진로를 바꾸어서 돌아가고……. 어느덧 저녁 어둠 속으로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의 머신은 넓은 하늘에서 외톨이가 되어 비행을 계속하면서, 아질라가 태어난 고향으로 향하였습니다. 아질라의 고향 나라인 초승달 모양의 섬은 전에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이었던 곳인데, 20세기 미합중국의 동남부에 해당됩니다. 외형은 쿠바를 꼭 닮았지만 쿠바보다는 작습니다. 대륙과는 넓이가 16킬로쯤 되는 해협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섬이 생긴 것은 아질라가 출생하기 수천 년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약 1만 년 전부터 태양이 열과 빛을 내는 힘이 크게 약해지고, 지구는 식어가기 시작하여 전 세계의 기후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적도 근처의,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화산에 가까운 곳에 모여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화산 가까이는 지열이 높고, 온천 같은 곳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이 섬의 땅 밑을 온도가 100도 가까운 뜨거운 물이 흐르고 있고, 북쪽의 대륙을 동서로 달리는 대 산맥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이 시대로서는 비교적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방 지역의 생활 조건이 그처럼 나빠지기 이전부터 라틴 사람의 피를 방은 앵글로색슨 계통의 사람들이 이 야자나무가 무성한 열대의 섬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인종과 혼혈하는 것을 싫어하여 자기들 민족만의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지구에서 최고의 문명을 이어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앵글리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덧 북방 지역의 추위는 점점 더 심해지고, 1 년 중 눈이 녹아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달은 6월, 7월, 8월의 석 달뿐입니다. 당연한 일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고, 이런 상태가 몇 천 년이나 계속된 결과 옛날의 과학도, 예술도, 문명도 모두 잊혀져 주민들은 완전한 야만인으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트로오는 앵글리즈 사람이었지만 정부를 뒤집어엎으려고 한다는 사실이 탄로되어서 나라 밖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분명 사회를 쫓겨나서 북으로 몸을 피한 트로오는 그곳의 야만인들을 조직하여 과거의 조국인 앵글리즈를 공격하려고 계획했습니다. 트로오에게는 문명한 나라의 과학 지식이 있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북쪽 나라에서 열심히 병기를 제조하는 일로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몰래 앵글리즈에 숨어 들어가서, 아질라를 유괴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후안은 과학자들의 지도자이며, 앵글리즈의 지배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트로오는 아질라를 인질로 하여 후안에게 양보를 강요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아질라를 구해 내었기 때문에 트로오는 모든 정치 교섭을 그만두고 앵글리즈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트로오야말로 이 시간 세계에서 지구 최대의 악인인 것입니다. 트로오는 조직된 야만인을 거느리고 자신이 과학의 지식을 모아서 개발한 병기를 사용하여 바로 내일이라도 앵글리즈에 쳐들어오려고 할 것입니다. 더욱 더 자세한 것을 쓰고 싶지만 저는 지금 몹시 피곤합니다. 아버지, 긴급한 경우에는, 결국 제가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때에는 이렇게 편지를 써서 연락구에 실어 보내드리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죠? 지금이야말로 저는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 했던 약속대로 저는 공간 위치와 시간 위치를 동시에 나타내기 위한 광선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시간 위치는 지금, 공간 위치는 제가 있는 섬의 동남쪽 끝, 20세기와 지표로 말하면 마이애미 근방입니다. 아버지가 타임 머신을 타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시간 이동을 하여 와 주시면 제가 보내는 광선 신호는 반드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편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높이 그리고 오랜 시간 광선 신호를 계속 보내겠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부디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저 자신도, 아버지도 꼭 무사히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실 때에는 아버지의 친구들 가운데 동행을 희망하시는 분을 두세 사람 함께 데리고 와 주세요. 아마도 조지 씨는 오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꼭 함께 오시도록 부탁드립니다. 무기는 가지고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빨리 와 주세요. 아버지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두 대째의 타임머신   로저스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거꾸로 된 편지의 페이지를 차례대로 되돌리면서 말했다. "이것으로 로트의 편지는 끝이네. 나는 곧 프레이즈 회사에 두 번째의 타임 머신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할 생각이네. 90일이면 완성될 거야." 모두들 말이 없었다. 로저스는 계속했다. "두 번째의 머신엔 누가 타겠나? 물론 나는 가겠지만 아직도 두 사람 몫의 여유가 있네……" "내가 가겠네." 하고, 조지가 말했다. "내가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로트의 마음을 배반한다면 미안하니까." 조지가 윙크를 하자 로저스는 기쁜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정원은 한 사람이 남았군…… 또 희망자는 없는가?" "참으로 미안하네만……" 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은행가가 말했다. "나는 다 늙어서 안 되겠네. 벌써 일흔 세 살이라네. 함께 가도 거치적거리게만 될까 염려가 되어서 사양하겠네. 그 대신 돈이 필요하면 사양말고 말해 주게. 얼마든지 변통해 줄 테니까." 로저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업가가 얼굴을 들었다. "나도 갈 수가 없겠네. 사업이 너무 바빠서 말일세. 조금도 손을 뗄 수가 없어. 자넨 어떤가, 프랭크?" 그렇게 질문을 받은 의사도 미안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그래. 로저스, 미안하지만……" 로저스는 손을 좌우로 흔들면서 대답했다. "좋아요, 좋아요. 사정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 무리를 해서까지 같이 갈 필요는 없거든……" "이것으로 결정은 됐어." 하고, 조지가 말했다. "로저스와 내가 간다. 남아 있는 사람은 여기 남아서 망을 선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두 번째의 타임 머신이 완성되어 사이언스 클럽의 지붕 위로 운반되었다. 전과 다름없이 호기심 많은 세상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하여 높게 담을 둘러쳤다. 오후 사이에 조지는 몇 번이나 이곳에 나타나서 출발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 자세히 확인했다. 어느덧 밤이 되자, 사이언스 클럽의 모든 회원이 모여 전등 불빛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타임 머신을 둘러쌌다. 오후 9시가 되었다. 드디어 출발의 시각이다. "자, 무엇이든지 부탁해 주게. 우리 남은 사람들은 대관절 무엇을 하면 좋은가?" 사이언스 클럽의 남은 회원의 리더를 자처하는 은행가가 흥분한 얼굴로 말하자, 로저스는 미소지으면서 은행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쪼록 염려는 말아 주기를…… 준비는 완전하니까. 다만 우리가 출발하면 10분간쯤 그대로 이 곳에 있어 주기 바라네. 뭔가 잘못된 일이 생길 때는 곧 되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10분이 지나면 이 작업장의 쇠를 채우고 돌아가야 되네. 그러나 지붕은 걷어 놓은 그대로 놔두어야 하네." "좋아, 알겠네.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지?" "그것은 예상할 수 없는 걸."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와 주게…… 참 그렇겠군. 오래 걸려도 6개월 이내로 와 주게. 괜찮겠지. 약속해 주게. 릴다를 위해서도." 로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출발하지, 로저스 선생!" 한 걸음 먼저 층계로 올라간 조지가 로저스를 불렀다. 로저스는 릴다 쪽을 향하여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곧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기운 찬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캐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한번 더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 머신의 문을 딸깍 하고 닫았다. 제일 앞에 있는 조종실의 천장은 낮은 아치형으로 되어있고, 양쪽 벽은 밖으로 구부러진 요면의 작은 방이었으나, 타고 있는 사람이 기분 좋게 지낼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좌우의 창문 가에는 긴 가죽으로 메운 벤치가 있고, 앞쪽의 오른쪽에는 프레이즈 회사 특제의 조종 장치와 조종석, 조작판, 그리고 작은 창문들이 있었다. 타임 트래블러 계기와 프로톤의 흐름을 제어하는 스위치는 오른쪽 벽에 있다. 조종실의 뒤쪽은 기관실인데, 이 두 방 사이에는 미닫이가 달린 작은 출입구가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하고, 로저스가 묻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될 수 있는 대로 앉아 있는 편이 좋지. 출발 시에 어떤 충격이 있을 지 알 수 없으니까." "오케이...... 자아, 그럼 출발시켜 주게." 조지는 온 몸의 흥분을 애써 억제하면서 기분 좋게 대꾸했다. 로저스는 한 번 더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용기를 내어, 시간 이동 장치의 지렛대를 제 1강도에 넣었다. 타임 머신의 내부는 곧 진동하는 소리에 싸였다. 로트가 출발하는 것을 배웅하면서 머신 밖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결코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타고 있는 사람의 몸 전체에 스며드는 미세한 진동음인 것이다. 이윽고 어지러워지고 가슴이 메스꺼워졌다. 한없이 깊은 곳으로 거꾸로 끌려 내려가는 것 같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싫은 기분이다. "괜찮은가? 지금 출발했네." 걱정스럽게 로저스가 물으니, 조지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타임 머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실체를 잃어버리고 어렴풋한 유령처럼 훤하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조지 자신은 별로 다친 곳도 없고 어지러운 기분도 점점 회복되어 갔다. "괜찮아……" 조지는 몸을 힘차 펴면서 대답했다. "다만 어쩐지 온 몸이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야.“ 그렇게 말한 조지는 문득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타임 머신 밖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남은 회원들의 표정은, 그들에게는 분명히 이 머신이 보이지 않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은행가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재빠른 발걸음으로 나왔다. 마치 태엽을 장치한 인형과 같은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는(조지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은행가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불쑥 내밀어서 머리와 두 어깨가 함께, 어렴풋이 인광을 발하는 타임 머신의 벽과 마루를 뚫고 들어오고 말았다. 은행가는 잠시 동안 얼굴을 조지의 무릎 옆에 두고 서 있다가, 이윽고 다시 빠른 동작으로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둘러보더니, 재빨리 뒤로 물러서 갔다. "정말 놀랐는걸." 조지는 제정신으로 돌아가서 외쳤다. "정말 기분이 나쁜데." 로저스는 공간 이동 장치를 시동시켰다. 프레이즈형 헬리콥터의 엔진이 믿음직스러운 폭음을 울리면서 타임머신을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게 했다. 사이언스 클럽의 지붕이 잠깐 동안에 아래로 가라앉아 갔다. 그날 밤은 구름이 두껍게 깔려 있는 캄캄한 밤이었다. 동쪽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거리의 집들이 지붕에 눈을 실은 채로 두 사람의 발 밑에서 천천히 동쪽으로 흘러갔다. 머신은 비스듬히 상승하면서 전진을 계속했다. 어느덧 허드슨 강이 눈앞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날씨가 몹시 나쁜데, 로저스 선생." "으음…… 하지만 이런 날씨도 별로 오래는 계속되지 않을 걸. 우리는 시간적으로도 이동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춥진 않아? 히터는 한 대만 작동시키고 있는데…… 또 한 대의 스위치도 넣을까?" "그렇게 해 주게. 그리고 잠시 후에 양자의 흐름의 강도를 올릴테니 앉아 주게." 조지는 재빨리 좌석을 골라서 앉았다. 로저스가 지렛대를 당겨서 오른쪽으로 돌리니, 타임 머신의 내부를 뒤흔들던 진동음의 기세는 더욱 올라갔다. 또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잠시 후에 곧 사라졌다. "잘 되어 가는군…… 제 15강도로 올렸는데. 이것은 로트가 냈던 최고 속도지." 로저스가 말하자, 조지는 창 밖을 내다보면서, "아래로 보이는 불빛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정말 이것이 로트가 냈던 최고 속도인가? 편지에 써 있었던 광경과는 느낌이 많이 다른 것 같은 걸……‥" "양자의 흐름의 강도가 커져도 머신의 시간 이동 속도는 그처럼 급격하게 올라가지 않는다네." "흠, 그래. 그런데, 고도 높이는 얼마나 될까?" "천 5백 미터쯤 되겠지. 뉴저지 상공 서쪽을 향해 가고 있는 모양이야. 이제 곧 밤이 새겠지." 로저스의 말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빠르게 실천되어 그로부터 수분 후에는 사방의 광경이 점차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침침하게 흐려 있고 추워 보이는 아침이다. 머신의 아래에는 뉴저지가 있었다. 광대한 평야의 여기저기에는 작은 부락들이 흩어져 있다. 마침 바로 아래에는 특별히 건물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 있었다. "뉴욕이다." 하고, 조지가 외쳤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의 세계에 와 있다. 이대로라면, 로트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머신의 고도는 로저스가 느꼈던 것보다는 높아서 3천 미터쯤 되었다. 수초 후에 다시금 밤이 왔다. 머신의 아래로 보이는 등불은 하나같이 눈부신 빛의 깜박거림으로 되어 있다. 어느덧 낮의 햇빛이 찾아왔다. 바람은 멎고, 머신은 더는 밀려가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또 밤이 찾아와서 달이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별들이 분주하게 깜박거리면서 뒤섞여 얽혀서 날고 있다. 그리고 다시금 낮의 빛과 밤의 어두움이 서로 뒤엉켜서 꼭 같은 회색이 되었다. 또 여러 가지 방향의 바람과 기류가 뒤섞여 균형을 유지하여, 머신은 조금도 밀려가지 않게 되었다. 흰 눈이 덮인 뉴저지의 언덕은 이윽고 녹색으로 물들고, 사방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황금 벌판의 가을이 찾아오고, 그것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로저스는 후 하고 숨을 토했다. "이제 겨우 최초의 1년이 지나갔군. 2만 8전 년 중의 1 년이다." "그리고 공간 이동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고, 조지가 물었다. "시간 이동과 동시에 하는가?" "그래야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주지 않겠나?" 그러자, 로저스는 포켓에서 서류를 끄집어냈다. "이것이 로트의 메모지야. 양자의 흐름을 제15강도로 올려서 2만 5천 년을 날고, 거기서 시간 이동의 속도를 늦춘다. 동시에 타임 머신의 앞머리를 플로리다 반도의 남쪽 끝을 향하게 해서 1천 6백 킬로미터를 공간 이동한다. 로트와 계산에 의하면 2만 년분의 시간 여행을 끝냈을 무렵에, 공간적으로는 플로리다 반도와 대략 같은 위도에 도달할 거다. 그 다음 1천 년쯤 시간 이동을 하는 동안에 목표하는 섬이 나타났다." "그…… 5천 년분의 시간 이동을 하는데 로트는 어느 정도 걸렸는지?" "약 12시간이지…… 하지만 로트의 경우는 평균해서 제12 강도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었지. 우리의 경우는 최강 제15 강도니까 10시간쯤이면 그 섬에 도달하리라고 생각되네." 그 후 1시간이 지나갔다. 타임 머신은 델라웨어만의 상공에 있었다. 만의 양쪽 기슭에는 건물이 꽉 들어 찬 도시가 있고, 시간의 이동과 함께 마치 꿈틀거리는 것처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어느덧 거대한 다리가 나타나서 양쪽 기슭의 도시를 연결했다. 그러나 공간 이동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도 보고 있는 동안에 멀어져 갔다. 조지는 창문가의 좌석에 앉아서 눈 아래로 전개되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경치의 움직임은 바로 눈 아래에 있는 것이 가장 빠르다. 서쪽에 어렴풋한 환상과 같은 산들의 모습이 보이고, 마치 머신의 뒤를 쫓아오는 것처럼 속도를 맞추어서 따라오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모습이 변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모습을 계속 보이고 있는 것은 바다였다. 머신은 대서양을 남남서쪽을 향하여 더듬어 가는 형식으로 날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로트의 편지에 '문명의 절정기'라고 씌어 있던 시대를 통과하여 머신은 높이를 낮추었다. "시간 이동은 4천 년을 통과…… 동시에 시속 백 팔십 킬로로 공간 이동 중…… 예정 대로다." 로저스가 말하자, 조지는 염려가 되는 듯이 말했다. "로트가 있는 곳은 쉽게 발견할 수 있을까?" "문제없네. 모두가 로트의 편지 그대로야! 이 장엄한 문명은 곧 사라져 간다. 앞으로, 3천 년이나 4 천년 안으로……" "여기는 어딜까? 버지니아의 근방일까?" "음…… 적어도, 아직 노스캐롤라이나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지. 조지, 저걸 봐! 저 도시가 녹아버리듯이 없어져 간다." 타임 머신 안의 전등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훤하게 어렴풋한 빛을 내고 있었으므로, 결코 어둡지는 않았다. 너무도 이상한 사방의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조지는 문득 자기 자신의 기묘한 모습을 보고 외쳤다. "봐요, 로저스! 우리들의 몸도 비쳐 보이고, 빛을 내고 있잖아! 이건 마치 하늘을 나는 유령과 같은걸……" 이윽고, 시계가 2시 5분을 가리켰다. 5시간이 지난 것이다. 머신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상공을 날고 있다. "피곤한걸. 조종을 대신해 줄 수 없겠나, 조지?" 로저스가 말하자, 조지는 망설였다. "비행기를 조종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프레이즈형은 그다지 익숙하질 않아서…… 더구나 이런 때에는 좀……" "좋아. 그러면 자동 조종으로 바꾸어서 공간을 돌고 있기로 하지. 뭐 한 30분만 쉬면 원기는 회복될 테니까." 로저스는 가죽으로 씌운 벤치에 길다랗게 누워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타임 트래블러 계기는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지?" "6천 5백 년째가 되는 근처야." "그러면, 평균해서 매시간 천 3백 년의 비율로 시간 여행을 해 왔다는 계산이 되겠군. 지금은 가속도가 붙어서, 매시간 2천 6백 년쯤은 되어 있을 테지?" "굉장한데…… 1분간은 45년, 2분간은 1세기가 아닌가!" 두 사람은 가벼운 식사를 했다. 이윽고 로저스가 원기를 회복하여 다시금 남쪽을 향하여 공간 이동을 계속했다. "8천 년째를 통과……" 하고, 로저스는 타임 트래블러 계기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지금의 시간 여행 속도는 매시간 3천년이다. 이것이 한계가 될 거야." 지금 타임 머신은 2분간마다 6킬로미터의 공간과 1세기 분의 시간을 동시에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노스캐롤라이나의 상공을 통과하고, 다시 해안선으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도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듯이 서 있던 건물이 무너지면 마치 그 폐허를 와작와작 욕심내어 먹어들어 가는 것처럼 식물이 무성해져서, 폐허를 덮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윽고 버려진 채의 황폐한 들이 모습을 나타내어 점점 흰 빛으로 변해 갔다. 북에서 뻗어 내려오는 눈 덮인 들은 머신의 공간 이동보다도 빠른 속도로 남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바다의 모양도 달라지고 있었다. 하나의 만이 점점 뻗어서, 남 캐롤라이나를 갈라놓았다. 그 앞 끝은 어느 사이엔가 섬이 되어 버린 것이다. "1만 8천 4백 년을 통과했다." 로저스가 말하자, 조지는 시계를 보았다. "6시 15분이다." "타임 트래블러 계기가 2만 년을 가리킬 무렵에는 조지아의 상공에 닿는다. 거기에 우리가 목표하는 앵글리즈 섬이 있을 거다." 그러나, 이윽고 2만 년을 지나도 목표하는 섬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지는 숨을 죽이고 타임 트래블러 계기의 바늘을 주목했다. 바늘은 2만 2천 년을 지나려 하고 있다. "저것 봐!" 갑자기 로저스가 외쳤다. "동서로 뻗는 산맥이 솟아오르고 있다! 새로운 산맥이 생겨나고 있는 거야. 섬은 저 산맥을 넘어서야 있겠지." 로저스는 머신을 곧바로 산맥의 방향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상승하는 머신을 아래서 쫓아 올라오는 것처럼 산이 밀려 올라온다. 이윽고, 머신은 산맥의 꼭대기로부터 겨우 3백 미터 상공을 날아서 넘었다. 눈 아래 펼쳐진 경치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 험준한 절벽, 흰 빛의 눈으로 판을 쓰고 있는 산꼭대기, 그리고 잿빛 골짜기. 등뒤는 3천 미터의 거대한 절벽이 되어서 바다 위에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 것이다. 머신은 비행을 계속했다. 이윽고 그 모양의 바위투성이로 고르지 못한 육지는 북쪽으로 흘러가 버리고, 타임 머신은 갑자기 높이 3천 미터의 허공에 나와 있었다. 멀리 아래쪽에는 동서로 뻗은 회색의 해협이 보인다. 그리고 그 양쪽에 다른 해안선이 펼쳐져 있었다. "섬이다!" 조지가 외쳤다. "그리고 2만 3천 5백 년이다! 슬슬 타임 트래블러의 속도를 늦추는 편이 좋지 않을까?" 로저스는 프로톤의 흐름을 제 5 강도로 떨어뜨리고 아래의 경치를 찬찬히 관찰했다. 남쪽으로부터 뻗어온 해안선은 크게 활 모양의 곡선을 그리면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중앙에 커다란 산맥의 등이 보인다. 가는 곳마다 커다란 야자나무가 무성하고, 바닷가는 아름답게 구부러진 폭 넓은 모래밭이다. 군데군데 호수가 보인다. "이렇게 타임 머신의 앞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채로 시간 여행을 하는 거다. 그러면 2만 6천 년의 시간 세계에 도달할 무렵에는 알맞게 섬의 남쪽 끝 공간에 이르게 되겠지." 로저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로트의 메모를 다시 조사했다. "로트는 2만 6천 2백 4년의 세계에 착륙했다고 했다. 우리도 같은 해가 시작되는 무렵에 머신을 멈추고, 미리 약속해 둔 광선 신호를 기다리기로 하자." 프로톤의 흐름을 제 4강도로 떨어뜨리자, 낮과 밤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낮의 빛과 밤의 어두움이 차례 차례로 찾아왔다가는 사라져서, 곧 한 주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났다. 4년째에 들어서자 로저스는 프로톤의 흐름을 제 3 강도로 했다. 마침 낮이었다. 누런빛을 띄고 있는 적색의 태양이 날랜 속도로 중천에 떠올라간다. 흰 구름이 머리 위를 재빨리 스쳐서 지나가자, 푸른 하늘이 넓게 떨쳐졌다. 그리고 눈 아래는 밝은 녹색의 섬. 태양은 이윽고 서쪽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모습을 감추고, 짙은 자줏빛 어두움이 사방을 에워쌌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아침이 찾아온다…… 이와 같이 하여 대체로 1분마다 하루의 비율로 4년째의 세월이 흘러갔다. 로저스와 조지는 초조한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로트의 신호를 기다렸다. "로트는 섬의 남쪽 끝에서 광선 신호를 주야 하늘을 향해서 계속 발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의 눈에는 1분간 계속 보일 거다. 절대로 못 보고 지나치는 일은 없을 거다." 로저스가 혼자서 중얼거리자, 조지는 안달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고말고…… 1초간만이라도 빛이 보이면 못보고 지나칠 내가 아니지. 그건 그렇고, 로트가 왜 이리 늦을까. 빨리 신호를 보내지 않고……" 또다시 해는 지고, 자줏빛 밤하늘에 붉은 달이 떠올랐다. 때마침 뭉게뭉게 솟아오른 짙은 구름이 그 달을 삼켜 버렸다. 갑자기 섬의 앞쪽 끝에서 청백색의 빛줄기가 하늘 위로 뻗어 올라왔다. 처음에는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안정된 곧은 모양으로 하늘 높이 치솟았다. 틀림없는 로트의 신호다!   미래 도시 앵글리즈   프로톤의 흐름은 완전히 중단되고, 타임 머신의 내부의 모양은 다시금 원래의 확실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모터는 아직도 진동음을 계속 내고 있고, 머신은 공간 이동을 그만두고 바람이 없는 공중에 가볍게 떠서 멎어 있었다. 눈 아래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풍경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흰 모랫벌에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들고 있는 바닷가, 거의 중간에 떠 있는 달, 그 불그스름한 은빛을 받고 더욱 아름다운 녹색의 섬…… 그 섬의 남쪽 끝으로부터 청백색의 빛이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로트의 신호인 것이다. 로저스는 타임 머신을 모래 위에 급강하시켰다. 평평하고 넓고, 또 적당하게 굳어 있어서 타임 머신을 착륙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지금은 썰물인 듯 바다는 훨씬 저편으로 후퇴해 있다. 바다의 반대쪽은 온통 녹색으로 열대 식물이 빽빽이 우거질 정글이다. 타임 머신이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서 바닷가에서 있는 몇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타임 머신이 내려가자 사람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사방에 흩어졌다. 타임 머신은 천천히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서 백 미터 떨어질 땅에 내려앉았다. "드디어 도착이다!" 조지가 외쳤다. "지금 우리가 날아서 넘은 사람 중에 로트가 있지 않을까? 아까 그 광선 신호는 어디서 발사됐지?" 빛의 근원은 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야자나무 숲 속이었다. 거기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뛰어나와, 이곳으로 달려온다. 흰 천으로 만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저고리를 팔랑거리고 있다. 로저스와 조지는 타임 머신 밖으로 나왔다. "어--이, 조지!" 뛰어오는 사람이 부르고 있다. 로트다! 로트와의 거리는 곧 가까워지고 세 사람은 굳게 손을 마주잡았다. "꽤 빨리 오셨군요. 제가 광선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지 아직 두세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죠." 로트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는 아까부터 정글 옆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로트와 같이 폭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는 사내이다. 윗도리는 벗고 있었다. 가까이 온 사내에게 로트는 무엇인가 말을 꺼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글이 있는 쪽으로 뛰어 갔다. 잠시 후에 그 사내는 다섯 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모두들 타임 머신에 가까이 오지 않고 떨어진 곳에 둘러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조지는 로트가 입고 있는 짧은 저고리의 소매 끝이 나팔꽃 모양으로 펴져 있는 것을 신기한 듯이 손으로 당기면서 물었다. "아질라는 어디 있지? 무사한가?" "네, 무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나중에, 천천히 설명하겠습니다." "로트야!" 로저스는 아들을 불러 말했다. "타임 머신의 조종으로 나는 기진맥진해 있다. 잠을 좀 잘 수 없을까?" "여기서 겨우 2, 3백 미터 떨어진 곳에 집이 한 채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십시다. 머신은 저 사람들이 경비해 줄 것입니다." 로트는 멀리 둘러서 있는 사내들에게 몸짓을 섞어 가며 무엇인가 말을 건넸다.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심조심 머신에 가까이 왔으나, 아직도 어쩐지 무시무시하다는 표정으로 좀처럼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을 신용할 수 있을까?" 조지가 묻자, 로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대답하였다. "절대로 믿을 만합니다." 공기는 꽤 무덥고, 마치 사우나탕에 들어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해진다. 피곤한 것은 조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한 나머지 그것을 잊고 있었다. "자, 다 왔습니다." 갑자기 로트가 말했다. 오른쪽에 넓게 열린 장소가 있고, 열대 지방에 알맞게 지은 방갈로가 달빛을 온통 받고 서 있었다. 코코넛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마루는 땅바닥에서 1미터도 더 되는 높이에 있고, 삼면에 베란다가 달리고, 지붕은 짚으로 덮었다. 방이 열 개나 있는 꽤 큰집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4면의 판자 벽이 수직이 아니고 위로 올라갈수록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둘레에는 담이 있어서, 꽃들이 만발한 뜰을 둘러싸고 있다. 로트는 주저하지 않고 화단 가운데로 통하는 길로 들어가서 베란다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뒤의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조지는 여기서 기다려 주지 않겠습니까?" 로트가 로저스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간 뒤에, 조지는 베란다 위에서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굵은 야자나무의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참으로 무더운 날씨다. 조지는 저고리를 벗고 셔츠도 걷었다.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무거운 공기는 싫든 좋든 그에게 잠을 재촉했다. 벗은 저고리와 셔츠를 툴툴 말아서 베개삼고, 조지는 베란다에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히 드러누워, 그대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잠이 깬 조지는 자기가 폭 넓은 소파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문으로부터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밝은 방안이었다. 옆의 의자에 앉은 로트는 브라이어 나무 부리로 만든 검은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금 잠이 깨셨습니까? 조지. 참으로 잘 자고 계셨습니다." 벽이 천정에 가까워질수록 바깥쪽으로 넓어지고 있어서 묘한 느낌을 주었으나, 마루에는 갈색의 섬세한 깔개를 해 놓은 청결한 방이었다. 공기는 여전히 축축하고 무더워서 답답한 느낌이다. 조지는 셔츠의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쓱 닦고 일어났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로트는 의자 위에 놓인 옷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런 무더위 속에서는 이것을 입는 편이 기분이 상쾌할 겁니다." 이윽고 조지는 로트와 같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발뒤축이 낮은 짐승 가죽 제품의 슬리퍼, 발목 부분이 좁게 몸에 붙은 헐렁헐렁한 바지, 청색과 갈색의 천으로 만들고, 금화처럼 보이는 쇠붙이 장식이 달린 짧은 조끼…… 이 조끼에는 부드러운 감촉의 안감이 달려 있었으며, 이것이 등과 겨드랑이 밑의 땀을 잘 빨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앞은 탁 트여서 가슴은 벗은 대로 드러내 놓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하는 편이 바람을 잘 통하게 해서 좋을 것이다. "어떤가…… 어울리겠지?" 조지가 몸을 쭉 뻗치면서, "에헴.“ 하고, 점잖게 앵글리즈 사람인 체 해 보였을 때, 밖에서 로저스가 두 사람을 불렀다. 베란다로 나오니, 아침 식사 준비를 갖춘 테이블이 있고, 로저스가 앉아 있었다. 로저스도 두 사람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마치고, 담배를 한 대씩 피우고 나자, 로저스가 입을 열었다. "물어 보고 싶은 것이 태산 같다."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태산 같이 많습니다." 로트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했다. "제가 이 세계에 와서 약 5개월이 됩니다. 말과 습관과 세계의 정세도 꽤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조지도 아버지도 꼭 우리에게 힘을 빌려주세요." "우리?" 로저스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지요. 저와 그리고 이 섬사람들. 5개월이나 함께 생활하고 있는 동안에 저는 완전히 이 나라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 하고, 조지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아질라는 어떻게 되었지?" "앵글리즈 시에 있습니다. 이 나라의 수도로서 인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 섬의 북쪽 끝, 북방 대륙과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위치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마중하려고 그곳에서 이리로 온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앵글리즈인의 배반자인 트로오가 노스인이라고 하는 북방의 야만인들을 조직하여 이 나라에 쳐들어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한 추위 때문에 문명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황폐화 된 북방 대륙에 살고 있는 노스인들은 몸이 긴 털에 덮인, 문화적으로도 퇴화된 인간의 무리인데, 인구가 모두 얼마쯤 되는 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섬의 사람이 북방 대륙으로 잘못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곧 달려들어서 죽이고 마는 거칠고 사나운 인종입니다. 그러나, 노스인만 쳐들어온다면, 우리도 이처럼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트로오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트로오는 원래 이 나라의 과학자였던 자입니다. 어떤 무서운 병기라도 만들어 내는 두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북방 대륙의 어딘가에 대량의 과학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을 건설했다는 소문입니다. 또한 가장 나쁜 일은 이 나라에는 상류 계급의 알란인과 하층 계급의 바스인과의 사이에 인종적인 대립이 있습니다. 트로오가 이것을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알란인도 바스인도 공동의 적에 대하여 튼튼하게 단결하여 싸워 준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맞아 싸울 준비는 다 되어 있겠지?" 조지가 물었다. "네. 그러나, 알란인은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전쟁을 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로트가 참으로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을 때, 한 사람의 사내가 이쪽을 향해 뜰의 통로를 달려오고 있었다. 헐렁헐렁한 바지는 흙과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고, 노출되어 있는 상반신은 땀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사내는 입구의 계단 아래서 걸음을 멈추고, 로저스와 조지에게 수상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로트가 일어서자,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서 곧 그 자리에 몸을 낮추어 엎드렸다. "무슨 일이야? 왜 그러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로트는 일어나려고 하는 로저스를 손을 흔들어 말렸다. "아질라로부터의 사자입니다." "뭔가 나쁜 일이라도 생겼는가……" 로트가 계단을 내려가 가까이 가니, 사내는 앉은 채로 얼굴을 들고 뭔가 빠른 말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로트는 그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 듣고 나서, 날카로운 어조로 몇 개의 질문을 퍼붓고는, 그 대답을 확인한 후에 재빨리 어떤 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듣자 사내는 곧 일어나서 꾸벅 한번 절을 하고는 쏜살같이 뛰어갔다. 로트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지금 곧 앵글리즈 시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 섬의 서쪽에 있는 올린 시에 트로오의 일당이 보낸 스파이들이 나타나 바스인들을 선동한 후에, 쫓아오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어딘가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바스인들은 알란인들에게 깊은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스파이들은 그 기분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트로오야말로 바스인들의 참된 구세주라고 건전하면서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버려 두면 바스인들은 혁명을 일으키고, 이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말 것입니다……" 수분 후에 세 사람은 바닷가에 있는 타임 머신으로 돌아왔다. 경비를 서고 있던 여섯 사람의 사내들이 공손하게 마중하는 가운데 세 사람은 머신에 올라탔다. 조종석엔 로저스가 앉았다. 잠시 후에 머신은 폭음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라서 섬 상공의 북으로 향하여 비행하기 시작했다. 백 5십 미터로 고도를 유지한 타임 머신의 창문으로부터 내려다보는 녹색의 섬은 참으로 평화롭고 한가로와 보였다. 야자나무 숲 사이로 보일락말락하는 흰 빛의 한 줄기 길을 거대한 개를 탄 반벌거숭이의 사내가 머신과 같은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거대한 개는 머리를 앞으로 길게 쑥 뽑고, 아랫배가 땅바닥에 스칠 정도로 몸을 낮게 하여 달리고 있다. 그래도 사내는 사정없이 가죽 채찍으로 개의 옆구리를 자꾸만 때리고 있다. 로트는 말했다. "아까 왔던 아질라로부터의 사자입니다. 우리는 아질라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머신을 내리고, 거기서 걸어갈 것이기 때문에, 저 사내가 우리보다 빨리 그녀의 집에 도착할 것입니다. 지금 미리 이 곳 사정을 간단히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이 나라의 주민은 80퍼센트가 바스인입니다. 수천 년이나 이전에 정해진 오랜 법률에 따라서 바스인은 교육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노동자로서 알란인에게 봉사하는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피부가 갈색인 것은 수십 세대나 걸쳐서 태양 빛 아래서 벗은 몸으로 노동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스인들을 지배하며 군림하는 것은 전 인구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알란인의 귀족들입니다. 게을러 빠져서 매일 놀고만 있는 알란인들은 피부색도 희고 화사한 몸매를 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두 계급 이외에 제 3 계급은 없는가?" 로저스가 물으니, 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습니다. 과학인들입니다. 수천 년이나 이전의 문명의 사치와 유흥의 즐거움을 이어받은 것이 귀족이라면, 과학과 학술을 이어받고 있는 것은 과학인들입니다. 수십 세대라는 오랜 세월을 게을리 놀고만 있던 귀족들에게는 문화 유산인 과학 지식을 이해할 만한 지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인들이 그럴 마음만 가진다면, 과학을 활용해서 얼마든지 귀족들을 거꾸로 지배할 만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이나 오랜 세월을 옛날의 습관에 순응해 온 과학인의 계층도 거의 모두 무기력하여, 다만 한마음으로 옛날의 과학 지식을 지키는 일밖에는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 과학자 계급 가운데서 한 사람, 예외적인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트로오입니다. 과학인은 전부 천 명 정도입니다. 그 중 백 명 정도가 관리로서 이 나라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과학인 가운데 문장 격인 5명이 평의회를 구성하고, 대대로 이어 받들어 오는 국왕 곁에서 관리들을 감독하여 나라의 정치를 맡아보고 있습니다. 이 평의회의 종신 의장이 아질라의 아버지 후안입니다. 잠깐, 창 밖을 보아주세요." 로트가 가리키는 땅 위에는 녹색의 산들이 잇달아있고, 그 사이사이에 골짜기와 호수와 언덕이 깔려 있다. 군데군데 하나씩 초라한 초가 오두막집이 외롭게 서 있고, 부엌에서 때는 불의 연기인지, 증기 같은 흰 연기가 올라오는 것도 있었다. "저것이 바스인의 주택입니다." 더욱 낮게 내려가서 언덕을 넘자, 작게 나뉘어진 밭이 많이 있는 것이 보였다. "바스인은 저것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시에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농산물을 수확해서 그것을 도시로 가지고 가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알란인에게 팝니다. 도시에서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거꾸로 알란인 편에서 산기슭 농업 지대로 찾아와서 형식에 지나지 않는 얼마 안 되는 값을 내고 바스인의 식량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업 제품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귀족과 과학인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양만큼을 생산합니다. 지극히 한정된 규모의 공장이 도시 근처에 있고, 그곳에는 바스인 가운데서도 비교적 운이 좋은 계급의 사람들이 대대로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를 위한 기술과 지식을 배워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특별히 허가받고, 공장 노동자로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스인에게는 대단히 적은 임금 밖에는 지불되지 않으며, 가난한 생활이 강요되는 것입니다. 그 덕분으로 알란인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이 제도에 반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 전부가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알란인의 젊은 남성만으로 조직되는 국가 경찰은, 바스인을 학대하는 일 외에는 거의 일다운 일이 없고, 국왕도 역시 수천 년이나 이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는 이 계급 제도를 실시하는 이외에는 전혀 무능한 존재입니다. 벌써 알아 차리셨겠지만, 이 나라의 국토는 이 섬뿐이며, 농업 생산과 공업 생산도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인간의 수는 많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구는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관리하는가?" "출생하는 바스인의 아이들의 수효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스인의 어머니가 세 사람 째의 아기를 낳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알란인의 정부는 인정 사정도 없이 그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절하면 아기와 어머니는 황폐한 북방 대륙의 혹독한 추위 속으로 쫓겨나서 노스인에게 죽임을 당하든지, 들판에서 얼어죽든지 하 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참혹할 수가 있을까! 참으로 소름 끼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마침 그 때, 타임 머신이 지나친 눈 아래에 가난해 보이는 바스인의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오두막 집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로저스도 조지도 어두운 마음으로 그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신은 다시금 높이 올라가서,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의 산을 넘었다. 산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화산의 분화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그 저편에는 넓은 분지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하얀빛의 모랫벌에서부터 푸른 바다의 해협에 닿아 있었다. 이 나라의 수도 앵글리즈 시였다.   미래 세계의 사람들   앵글리즈 시는 세 개의 산으로 둘러싸이고, 북쪽에 바다를 낀 골짜기의 가파르지 않은 경사지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 사람의 시간 여행자는 약 천 미터의 높이에서 색채가 선명한 아름다운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뜰이 얼마든지 있고, 발코니가 있는 낮은 흰 벽의 건물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정원, 진홍빛의 꽃이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정자, 커다란 대추야자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풀…… 조금 높은 언덕 위에는 높이가 백 5십 미터나 되는 탑이 달린 흰 궁전이 서 있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꿈을 부르는 열대의 녹색 잎사귀들이 무성하고, 무른 하늘에는 엷은 홍색의 구름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해협의 물은 끝없이 맑은 청색이다. "어디에 착륙하는가?" 조지가 묻자, 로트는 멀리 보이는 하나의 작은 점을 가리켰다. "조금 더 서쪽으로 향해 주세요. 아버지, 저길 보세요. 저기 동굴의 입구가 보이죠?" 로트는 조지를 돌아보고 설명하였다. "앵글리즈 시에는 착륙하지 않습니다. 우선, 머신을 안전한 장소에 숨겨 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번개의 동굴'이 머신을 숨기는 장소로는 제일 좋을 겁니다. ' "무슨 동굴이라고?" 조지가 되물었다. "'번개의 동굴입니다. 재미있는 이름이죠? 바스인이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동굴의 입구는 저기 앵글리즈의 저편 산기슭에 커다란 깊은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직경이 약 60미터의 찌그러진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앵글리즈로부터 동굴까지는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로 이어져 있었다. 로트는 설명을 계속했다. "머신에 타고 있는 그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과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지하실의 입구인데, 그 지하실에는 여러 가지 과학 장치가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박물관도 있어서 자신의 문명의 유산을 전부 모아두고 있습니다." 조지는 감탄하여 말없이 내려다보이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리와 지붕 위에 서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타임 머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머신이 가까이 감에 따라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동굴 안은 산 속으로 깊이 파들어 간 평평한 바닥이 보였다. 그 어두움의 깊은 곳에서 작고 푸른 빛이 깜빡거리고 있다. "로트, 조종을 대신 좀 해 봐라……" "들어가기가 어쩐지 기분 나쁘구나." 로저스의 재촉을 받고 로트는 말없이 조종석에 앉았다. 모터가 멎고 대신 슛-슛-하고, 압축 공기를 내뿜는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를 타임 머신은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동굴 옆의 튀어나온 선반 바위 위에 지붕이 있는 작은 승강장이 있었다. 그곳에 세 사람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일어서서 손을 위로 올리며 작고 푸른 빛을 머리 위의 구름을 향하여 발사했다. 대낮의 밝음 속에서도 분명히 분간할 수 있는 강한 빛이었다. "번갯불이다." 라고, 외친 조지의 말을 확인하는 것처럼, 곧 이어 천둥소리가 울렸다. "우리를 환영하는 예포입니다." 로트는 침착한 태도로 설명했다. 타임 머신은 동굴의 입구로부터 안으로 날아들었다. 마치 동굴이 크게 입을 벌리고 타임 머신을 삼켜 버리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머신은 쿵 하고 동굴의 바닥에 부딪쳤다가 다시 뛰어올라 한번 더 부딪치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양쪽에는 점점이 빛이 줄지어 있고, 앞쪽에서도 청백색의 빛이 번쩍거리고 있다. 타임 머신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정지했다. "자, 다 왔습니다. 짐은 될 수 있는 대로 이곳에 남겨 놓아주세요. 오늘 오후나 내일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니까요." 하고 로트는 말했다. 세 사람은 재빨리 머신에서 내렸다. 산 속 깊은 곳으로부터 발전기가 내는 소리인 듯한 작은 폭음이 들려온다. 머리 위의 꽤 높은 곳에 어렴풋이 천장이 보이고, 캄캄한 어둠 속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청백색의 빛이 번쩍번쩍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다. 다른 곳보다도 넓고 밝은 부분을 통과하자, 동굴은 다시금 좁아지고, 여러 개의 작은 길로 갈라진다. 각자 넓이가 15미터쯤 되는 내리막길인데, 그 앞쪽의 동굴 깊은 어둠 속에서는 연필의 끝만한 청백색의 작은 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참 놀라운 걸! 이 산 속은 마치 벌집 같지 않은가!" 로저스가 외치자, 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시고 이곳에 가만히 계셔 주세요.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요." 로트는 저편에서 가까이 오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검은 고무 옷으로 온 몸을 완전히 싸고, 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후드를 쓰고 있다. 후드를 벗고 인사하는 사람과 잠시 말하고 나서, 로트는 로저스와 조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후안은 자기 집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그곳으로 가십시다." 검은 고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세 사람에게 호기심이 강한 시선을 던지면서 자기 일터로 돌아갔다. 세 사람은 동굴의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로트, 네가 타고 온 머신은 이 동굴 안에 있는 게 아니냐?" 로저스가 물었다. "아닙니다. 올린에 두고 왔습니다. 그곳에도 조금 작지만 이것과 같은 동굴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어디로 간다고 했지?" 조지가 물었다. "후안이 살고 있는 집이죠. 아질라와 다이안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다이안? 대관절 누굴 말하는 거냐?" 조지가 또 물었다. "아질라의 동생입니다. 조금 말괄량이지만 좋은 애죠." 세 사람은 환한 동굴의 입구를 향하여 축축하게 젖은 돌 바닥을 그냥 걸어갔다. 동굴에서 나오니 산을 내려가는 가파르지 않은 내리막길이 있었있다. 흰 모래가 깔린 길이었다. 길의 양옆에는 빈틈없이 야자나무가 늘어서 있다. 그 길을 4백 미터쯤 가니 내리막길이 끝나자, 그 근처에서부터 조금씩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앵글리즈의 교외이다. 이윽고 길은 양쪽에 사람만 다니는 넓은 길로 변했다. 그 길을 따라가면서 화단이 있고, 끝이 총칼처럼 뾰족한 식물의 무성한 생울타리가 많이 보인다. 집집마다 거의 야자나무와 진홍빛의 꽃을 달고 있는 덩굴 풀에 덮여 있었다. 때때로 뜰의 나무 그늘에 사람들의 눈을 피한 풀이 보였다. 이 근방은 주택 지역인 모양이어서 일행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수효가 점점 더 많아졌다. 바스인의 남자는 모두 머리를 짧게 깎고, 넓은 챙이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폭이 넓은 헐렁헐렁한 바지를 일고, 적동색의 윗도리는 벗고 있었다. 발도 맨발이었다. 바스인의 여성도 대부분은 허리에 천을 두르고, 가슴에 흰 천을 감고 있을 뿐이다. 머리는 양쪽으로 갈라 땋아서 등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바스인은 인도를 사용하지 않고 도로의 한가운데를 걷는다. 인도는 알란인 전용인 모양이다. 때마침, 몇 사람의 알란인이 옆으로 지나갔다. 모두 목 아래까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로트가 아버지와 조지에게 입힌 것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로트들을 발견하자, 일제히 왼손을 들어서 인사를 하였는데, 모두 한결같이 모두들 세 사람의 이방인에게 호기심어린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때때로 흰 천을 몸에 감고,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러워 보이는 차림의 알란인 여성이 지나갔다. 검고 가벼워 보이는 구두를 신고 있는 작은 발이 분주히 움직이고, 눈썹이 짙은 아름다운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거대한 개를 탄 알란인의 사내가 물건을 산더미 같이 실은 세 바퀴 짐차를 천천히 몰며 길을 가로질러, 일행과는 반대 방향으로 엇갈려갔다. "저 말만한 개는 괜찮을까? 설마 달려들어 물진 않겠지?" 조지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로트는 웃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보통 개와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아니죠, 이 얘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조지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런가? 하지만, 엄청나게 큰 걸. 마치 말 같은데. 그리고 저 영리해 보이는 눈…… 걸음걸이로 보아서는 조금도 개 같지 않단 말야." 이윽고 세 사람은 붉은 꽃들이 만발한 생울타리의 문으로 들어갔다. 로트는 말했다. "여깁니다, 후안의 집은." 보기에도 찬란한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장식되고, 태산목과 오렌지 꽃들의 향기로 가득 찬 뜰을 지나갔다. 도로에서 꽤 들어앉아 있는 곳에, 지붕이 낮고 넓은 건물이 있었다. 벽은 흰 칠을 했고 지붕은 푸른 타일을 깔았다. 세 사람은 베란다로 올라가서 푸르고 흰 비단의 커튼이 쳐져 있는 문 앞에 섰다. 문의 안쪽은 넓은 방으로, 그 방의 저편에도 문이 있어 햇빛이 비치는 가운데 뜰로 통하고 있었다. 소녀가 나왔다. 푸른 눈동자, 금빛 머리카락, 우윳빛 피부, 날씬한 몸매…… (아질라다! ) 하고, 조지는 알아차렸다. 허리와 넓적다리 근처에 엷은 푸른 빛깔의 철을 넓게 감고, 금속으로 만든 가슴 장식과 폭 넓은 칼라, 황금빛 머리카락은 양옆으로 갈라 땋아서 귀여운 리본을 매어 어깨 위에 늘어뜨렸다. (로트의 이야기로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절반도 표현되지 않았다.) 하고, 조지는 생각했다, 주저하는 듯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던 아질라는 방긋 하고 그에게 웃음을 보내면서, 귀엽게 두 손을 내밀어 인사하였다. 아질라를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라고 생각하게 된 조지는 다시 눈이 휘둥그래졌다. 또 하나의 다른 미소녀가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다이안이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질라의 동생이다. 언니 못지 않게 사랑스럽다. 같은 복장이지만 허리에 감은 천은 엷은 빨간색이었다. 아질라의 나이는 18세쯤, 다이안이 16세쯤 될까? 로트가 소개했다. ."이쪽이 다이안…… 저는 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나도 그렇게 부르지." 조지는 틈을 주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소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데이의 얼굴에는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아저씨는 조지라고 부르죠?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로트에게 들었어요." 데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외국인과 같은 악센트이지만, 그래도 고대 영어를 꽤 잘 사용하고 있다. "아저씨와 저는 꼭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로트가 얘 기 하더군요." "로트 녀석이 내게는 조금도 네 얘기를 해주지 않았단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 그래, 로트가 말한 대로야. 나는 꼭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조지가 이렇게 말했을 때 후안이 모습을 나타냈다. 과학자들의 지도자이다. 70세 가까운 노인인데, 조용한 성격이지만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넘쳐 있었다. 키가 크고 여윈 체격이지만, 등줄기는 똑바로 서 있고, 녹색을 띈 검은 머리카락은 목 아래까지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흰 옷깃의 소매 끝동이 달린 검은 무늬의 수놓은 긴 옷을 입고있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후안은 공손한 말투로 로저스에게 인사를 건넨다. 새로 배운 언어로 말하기 때문인지 정확하고 느리고 주의 깊은 말투이다. "딸 아질라가 로트 군의 신세를 많이 져서……" 2만 8천 년 전의 세계에서 찾아온 나그네들은 그 날의 오전 시간을 후안과, 그 딸들과, 이 아름다운 나라 앵글리즈에 닥쳐오려고 하는 위기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방이 건물의 벽으로 둘러싸인 마당의 볕 가리개가 달린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의논은 계속되었다. 후안이 보는 바로는 트로오가 노스인을 거느리고 실제로 공격해 오는 것은 한 달이나 두 달 앞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싸울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앵글리즈의 과학자들은 힘을 다해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난처한 일이 생겼다. 트로오가 몰래 이 섬에 스파이를 보내서 순진한 바스인에게 바스인의 참된 구세주는 트로오라고 선전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스인을 선동하여 앵글리즈 나라에 내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인 것이다. "모그루드가 깜짝 놀라더군요." 후안은 세 사람에게 설명했다. 모그루드는 바스인이지만, 머리가 좋은 사내이며 후안의 유능한 부하의 한 사람이다. "……이대로는 정말 폭동이 일어날는지도 모릅니다. 트로오는 악한 사람이지만, 그의 선전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고, 바스인들에게 꽤 설득력이 있지요. 어쨌든, 어제도 바스인 여자 열 사람과 그 자녀들이 또 추방 명령을 받았으니까요."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명령을 도로 거두게 할 수는 없습니까?" 조지가 묻자 후안은 어깨를 움츠렸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국왕과 의회에 그런 일은 그만두는 편이 좋겠다고 의견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법률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마음대로 법률을 고칠 권한은 없으니까요……" 식사 중에 조지는 후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은근하게 두 소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표정과 몸의 움직임은 전혀 대조적이었다. 어느 편인가 하면, 조용하고 생각하는 것이 깊은 아질라와는 반대로, 동생인 데이는 활발하고 행동적이다. 때때로 대화 도중에 언니가 말을 더듬거나 하면, 틈을 주지 않고 나서서 언니의 대변을 하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앵글리즈 시를 한 바퀴 둘러보러 나갔던 아질라가 돌아온 것은, 그날 저녁놀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헐레벌떡 달려와서 말했다. "오늘밤은 알란인의 꽃놀이에요. 비상시이기 때문에 중지하게 되는가 생각했더니, 해마다 하던 대로 금년에도 굉장할 모양이에요. 참 기뻐요. 이런 때에 꽃놀이를 중지하면 도리어 바스인들이 불안을 느끼게 되겠죠? 알란인의 힘이 얼마나 굳건한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도 오늘밤의 꽃놀이는 성대해야 한다고요!" 물론 로트 일행은 소녀들과 함께 꽃놀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후안도 함께다. 일행이 집을 나온 것은 밤이 꽤 깊은 무렵으로, 한밤중에 가까웠다. 남자들은 검은 가면을 쓰고, 아질라와 데이는 부드러운 천으로 얼굴을 싸고 눈만 내놓았다. 한밤중인데도 앵글리즈 시의 길거리는 밝고 번화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달이 환한 빛을 비치고, 길거리의 여기저기에 장치되어 있는, 놋쇠로 만든 조명 장치가 푸르스름한 빛을 던지고 있다. 많은 알란인이 즐거운 듯이 거리를 오고간다. 여자들은 모두 흰 천으로 몸과 얼굴을 싸고, 남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내도 있었다. 거대한 개가 끄는 네 바퀴의 수레가 재주껏 꾸민 옷을 입은 사람들을 가득 싣고 지나간다. 거리는 마치 동화의 세계처럼 아름다웠다.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들도, 목덜미와 가슴 부분이 다 드러난 로브라고 부르는 흰 빛깔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도 모두 푸른 가로등 불빛의 길을 같은 방향으로 서둘러 가고 있다. 조용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흰 벽의 건물들에는 달빛이 비치고, 따스하고 눅눅한 공기는 좋은 향내로 가득하다. 그리고 바람은 거의 없다. 문득, 로트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고 음산한 기미를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어두운 그늘 속에 적동색 피부의 반벌거숭이 바스인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만이 아니고 여러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명랑하게 뛰놀고 있는 알란인에 비하여, 절대로 꽃놀이에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바스인들에게 일행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이것은 마치 알란인의 지나친 방탕을, 억눌려 사는 바스인들 앞에 일부러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윽고, 길은 점점 오르막길이 되고, 얼마 안 가서 고갯길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길은 거기서 가파르게 기울어진 비탈이 되어서 바닷가로 이어지고 있다. 달빛이 바다 위에 그리는 은빛 오솔길까지도 음산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꽃놀이 때의 사건   바닷가에 가까운 야자나무 가로수 변두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검문을 받은 후에, 후안 일행은 명랑한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꽃놀이 광장으로 들어갔다. 야자나무 가로수는 4백 미터쯤 더 이어진다. 오른 쪽에는 반짝거리는 흰 모래펄이 있고, 거품을 내면서 부서지는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야자나무 아래는 진홍빛과 순백색의 꽃들이 빽빽이 만발해 있다. 꽃놀이에 미쳐 있는 사람들은 웃고 왁자지껄 떠들며, 때때로 야자나무 아래로 달려와 마음대로 꽃을 꺾어서는 한아름 안고 다시금 돌아간다. "흩어지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함께 있어 주세요." 후안이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일행이 꽃놀이에 열중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가까이 가자, 저편에서 5, 6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질라와 데이에게 꽃을 던졌다. 그리고 술에 취한 것 같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려했다. 로트는 당황하여 아질라의 손을 붙잡고, 조지는 데이를 돌려 세웠다. 대추야자나무에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풀을 중심으로 수친 명의 알린 인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있었다. 술과 과자와 온갖 먹기 좋은 식물이 여기저기 놓여지고, 따스한 밤 기운을 타고 어디선지 신비한 느낌의 음악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꽃을 서로 만지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앞쪽에 흰 건물이 보였다. 그 안에는 만화경처럼 번쩍이는 색채가 넘치고, 명랑하게 들떠서 날뛰는 사람들로 넘쳐 있었다. 후안은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일행은 곧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도록 서로 가까이 붙어 문 앞에 섰다. 건물 안에서는 끊임없이 음악이 들려온다. 물론 로트 일행에게는 귀에 익지 않은 곡이었으나, 어쩐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 같은, 원시적인 울림이었다. 아니, 이것은 원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초현대적이라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수백 세기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으로서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동물과 다름없는 욕망으로 마음을 채우는 생활을 계속해 온 인류가 다다른 타락의 종말을 나타내는 가장 현대적인 음악이 아닐까? 여기서도 고주망태가 된 사람들이 꽃을 서로 던져 주고받고, 야자 열매의 속을 도려낸 껍질로 만든 그릇으로 술을 퍼 마시기도 하고, 미친 듯이 춤을 추기도 하고 있다. 방의 구석에 있는 커다란 둥근 테이블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득 차려 놓았는데, 그 테이블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테이블의 한쪽 부분이 다른 방과 칸막이를 한 벽 너머로 돌아서 지나가도록 배치되어 있다. 칸막이 저쪽의 조리장에서는 끊임없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여, 테이블에는 항상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칠 듯이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은 로트들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와서, 춤을 추고 있는 소용돌이 속으로 그들을 끌어넣으려고 했다. 특별히, 아질라와 데이는 검은 가면을 쓴 남자들이 항상 노리고 있어, 그때마다 조지가 활발하게 뛰어다니면서 남자들을 쫓아 버려야 했다. 갑자기 로트가 낮은 소리로 외쳤다. "국왕이다!" 건물 안 넓은 홀의 중앙에 한층 더 높은 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놓여진 호화찬란한 의자에 국왕이 앉아 있었다. 빙그레 웃으면서 사람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선명한 색채의 무늬가 있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국왕은 흰 머리가 드문드문 섞여 있는 중년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점점 더 미친 듯이 날뛰고, 소란함은 더욱 더 높아져 갔다. 3분쯤 지났을 무렵 갑자기 음악이 뚝 그쳤다. 군중은 움직임을 그치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표정들이다. 모두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서 있다. 돌아가면서 깜빡이고, 뒤섞여 어지럽게 마구 번쩍거리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깔의 조명이 꺼지고, 그 대신 푸르스름하고 움직이지 않는 등불이 켜졌다. 조용한 가운데서 장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가면을 벗고, 입고 있던 것을 모두 벗어 던졌다. 호들갑스러운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남자도 여자도 발가벗은 채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벌거벗고 춤을 추면서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 광장의 풀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야자나무 그늘에 밀려드는 파도가 흰 거품을 내고 있는 바닷가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다. 너무나 색다른 광경이 벌어지는 바람에, 다들 어안이 벙벙하여 눈이 휘둥그래져 있는 로저스의 손을 로트가 잡아당기면서, 말없이 국왕이 앉아 있는 높은 단 위를 가리켰다. 국왕의 자리에서 1미터쯤 높은 공중에 한 장의 판자가 떠 있고, 그 위에는 선명한 붉은 빛깔의 옅은 천을 몸에 감은 여자가 국왕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서 있었다. 음악은 어느 사이엔가 조용한 가락으로 바뀌고, 두드리는 악기가 내는 빠른 템포의 딩동 거리는 소리가 건물 안에 가득 찼다. 후안이 작은 소리로 설명했다. "헬렌 왕비입니다. 이 미친 것 같은 꽃놀이 소동은 모두 저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이며,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 국왕이라기보다는 저 왕비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왕비를 태우고 공중에 떠 있는 저 판자는 최근에 과학의 알짜를 모아서 발명한 비행 판자입니다. 동굴의 기술자들이 트로오들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고심해서 개발한 것이며, 중력에 반발하여 떠오르게 하는 특수한 천을 저 판자에 붙여 놓은 것입니다. 유력한 병기가 되기 때문에 당분간 비밀로 해 두고 싶었습니다만, 왕비의 강한 명령으로 이와 같은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난처한 일 입니다." 비행 판자 위의 왕비는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 소리는 점점 높아지더니, 이윽고 목이 터질 것 같은 높은 소리가 되었다. 왕비는 노래를 부르면서 천천히 몸에 감은 천을 풀었다. 풀린 천은 왕비의 발 밑에 팔랑거리면서 떨어졌다. 왕비는 속에 타오르는 불꽃같은 진홍빛 천을 감고 있었으나, 젖빛의 풍만하고 요염한 늪과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슬픔에 잠겨 있는 듯한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나 보였다.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악은 점점 더 빠르고 크게 올렸다. 왕비는 공중에 떠 있는 채로 팔을 길게 뻗치고,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면서 국왕에게 웃음을 던지고 있다. 뻗치고 있는 팔에서 진홍빛의 옅은 천이 날개처럼 아래로 늘어지면서. 팔랑팔랑 날렸다. 높이 땋아 올린 검은 머리카락에 달고 있는 황금의 머리 장식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왕비를 태운 비행 판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란 붉은 나방이 날아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국왕도 천천히 마루로 내려와 왕비가 내려오는 곁으로 걸어갔다. 국왕이 나아가는 길에 서 있던 군중들은 재빨리 비켜서서 길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국왕과 왕비에게로 쏠렸다. 음악과 노래가 절정에 달하고, 왕비를 태운 판자가 마루에 닿았다. 국왕은 판자로 다가가고, 왕비의 손이 어깨 위에 닿자, 곧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왕비의 붉은 옷자락에 입을 맞추었다. 왕비의 얼굴에 승리의 표정이 떠오르고, 군중 속에서는 찬탄의 중얼거림과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국왕과 왕비의 주변에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검은 망토를 획 벗어 던지며 일어섰다. 허리에만 천을 감고 있는 벌거벗은 사나이다. 사나이는 자기가 집어 던진 망토를 뛰어넘으면서 단도를 휘둘렀다. 칼날이 불빛에 번쩍 하고 빛나더니 왕비가 무릎을 꿇고 있는 국왕 앞에 쓰러졌다. 군중들의 찬탄의 소리는 순식간에 공포가 비명으로 변했다. 군중들은 한동안 얼어붙은 듯이 선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다만 두 눈이 휘둥그래져 있을 뿐이었다. 왕비를 찌른 사나이는 국왕과 왕비를 판자에서 끌어내리고, 대신에 자기가 판자 위에 뛰어올랐다. 작은 비행 판자는 곧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입구가 있는 쪽으로 비스듬히 방향을 잡아 날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이 건물에서 나가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가 되어서야 군중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저마다의 생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내에는 성난 소리와 비명 소리와 발소리가 가득 차고, 순식간에 큰 혼란이 벌어졌다. 로저스가 문득 옆을 보니 후안이 열심히 주문을 외고 있다. 그리고는 생각할 사이도 없이 후안은 긴 옷을 들치고 재빨리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 손에 들려진 무기로부터 적황색의 불꽃과 함께 연필심 만한 작은 화살 같은 것이 발사되었다. 순간 사나이를 태운 비행 판자는 균형을 잃고 마루에 떨어지며,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 흩어졌다. 사나이는 마루 바닥에 두세 번 공처럼 튕겨 오르더니 곧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의 시체는 새까맣게 타 있었다. 방의 중앙에서는 국왕이 와들와들 떨리는 무릎을 힘을 다하여 잡고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간신히 일어난 국왕은 멍청히 마루에 쓰러져 있는 붉은 빛깔의 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숨이 끊어진 잿빛의 몸뚱이에서는 걸치고 있던 진홍빛의 엷은 천과 같은 피가 콸콸 흘러나와 마룻바닥을 붉게 물들여 갔다. 군중은 변함 없이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아우성치면서 밖에서 달려 들어오는 사람, 비명을 지르면서 밖으로 달려나가려고 하는 사람…… 후안 일행은 마치 성난 파도에 시달림을 받는 작은 배처럼 이리저리 밀리고 있었다. 로트는 두 팔을 아버지와 아질라에게 단단히 감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으나, 어느 사이에 놓쳐 버리고 말았다. 조지는 후안과 데이를 돌봐 주고 있었다. 군중 속에 밀리면서 후안은 마루 바닥에 죽어 있는 사나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나이는 트로오의 아우 중의 한 사람입니다.비행 판자의 비밀을 훔쳐내려고 왔을 것입니다. 이전에도 동굴의 작업장에서 내 부하인 기사를 한사람 죽이고 도망쳤습니다만, 설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는 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우왕좌왕 하던 알란인들은 어느 사이엔가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도망가고, 뒤에는 후안과 로저스와 로트의 세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지와 두 소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봅시다. 딸들도 우리를 찾고 있을 테니까요." 세 사람은 완전히 인기척이 없어진 야자나무 숲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벌써 비상선도 없고, 사람의 그림자도 거의 없었다. 이윽고, 거리 가운데로 들어서니 때때로 공포에 떨고 있는 표정으로 바쁘게 걷고 있는 알란인들과 엇갈리게 되었다. 거리는 등불도 거의 켜져 있지 않고 조용했다. 그리고 골목마다 어둠 속에서 바스인들이 이상하게 빛나는 눈으로 길거리를 엿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달빛 속에 드러나 보이는 후안의 집에 도착했다. 집안은 캄캄하고, 아질라들이 돌아온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기다려 봅시다. 아직 야자나무 숲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안이 불을 켜면서 말했다. 세 사람은 잠시 동안 기다렸으나 아질라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 잠시 후에 먼 곳으로부터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거친 발소리가 섞인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는 듯하여 세 사람은 문밖으로 뛰어나가 생울타리 틈으로 가만히 길거리를 엿보았다. 바스인 폭도들의 무리였다. 천 명은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반 벌거숭이의 큰 사나이가 앞장서고, 눈에 핏발이 서 있는 군중들이 손에 손에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저것은 사탕수수를 자르는 낫입니다. 그리고 몽둥이는 야자나무의 가지고요." 로트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군중들은 후안의 집 앞을 잇달아서 걸음을 늦추지 않고 지나쳐 갔다. 골목골목에서 그 무리에 가담하는 자가 나타나고, 사람의 수효는 점점 더 불어 가는 모양이었다. 후안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두려워하고 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때 로트가 외쳤다. "궁전입니다! 그들은 궁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국왕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후안은 어떤 결심을 한 듯이 머리를 쳐들었다. "국왕을 지켜야 합니다!" 평의회 의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두 딸의 안전을 염려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게 했다. 후안은 긴장된 발걸음으로 집을 나와 바스인의 폭도들을 뒤쫓았다. 로트와 로저스도 그의 뒤를 따라간다.   바스인의 반란   이야기는 조금 전으로 되돌아간다. 무서운 혼란 속에서 조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질라와 데이와 함께 있으려고 사람들의 물결과 싸우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하여 몸을 밀치고 근방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에, 겨우 데이만을 발견했다. 흰 망토는 어딘가로 벗겨져 나가고, 마치 꿈이라도 꾸고있는 듯한 표정으로 멍청하니 서 있었다. 조지는 급히 데이에게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은 대관절 어디에……" 조지는 물어 보다 말고, 문득 데이의 표정이 보통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초조하게 뒤쫓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형편을 엿보다가 조지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데이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데이! 데이! 왜 그러는 거지?" 데이는 걱정스러운 듯이 어깨를 기댄 채로, 아니, 아니라고 하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질라예요. 아질라가 텔레파시로 제게 말을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뭔가 언니의 곁에 일어나고 있는 무서운 사건을 말해 주려고 하지만, 어쩐지 잘 안 되요." 텔레파시! 그렇던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던가! 조지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데이의 표정을 살폈다. 데이는 한번 더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얼굴을 쳐들고, 허공에 눈을 고정시킨 채로 몽유병자처럼 걷기 시작했다. "데이!…… 데이! 어디로 가는 거야." 조지는 망설였다. 요량 없이 이 장소를 떠나면, 다른 동료들과 더욱 더 떨어지게 되어서, 서로 찾기에 애를 먹게 된다. 그러나…… 데이는 상관하지 않고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대로 버려 둘 수는 없다. 조지는 결심하고 데이의 뒤를 쫓았다. 데이를 뒤쫓아가다가 멎은 곳은 흰 건물에서 꽤 떨어진 인기척 없는 곳이었다. 가까이 달려간 조지는 데이의 팔을 잡았다. "데이……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데이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겨우 잡았어요. 아질라의 생각을. 트로오가 저 사람들이 붐비는 속에 숨어 있었어요. 그리고 또 아질라를 붙들어 간 거예요. 억지로 야자나무 숲 밖으로 데리고 나와 버린 거예요……" 조지는 잠시 숨을 멈추고, 데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벌써 늦었어요. 트로오는 개를 두 마리 데리고 있었죠. 아질라를 묶어서 개에 태우고…… 아, 지금 막 달려가기 시작했어요……" 조지는 저도 모르게 데이의 몸을 세게 흔들면서 물었다. "어디로…… 대관절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 그건 알지 못해?" "아니에요, 알지요. 올린으로 간다고 해요……‥" 갑자기, 데이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조지의 얼굴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조지 아저씨, 우리 집에도 개가 두 마리 있어요. 그걸 타고 아질라를 쫓아가도록 해요." 조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그리고 저는 아버지가 무기를 보관해 둔 장소도 알고 있지요. 허락 없이 꺼내면 꾸중을 듣겠지만, 이런 경우엔 할 수 없겠죠." 두 사람은 열심히 달려서 후안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데이는 먼저 아버지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조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에 데이는 두 개의 무기를 가지고 나왔다. 하나는 투명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는 초승달 모양의 무기로서, 양끝에는 가는 철사가 있고, 뼈를 깎아서 만든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 손잡이의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의 근육을 마비시키는 광선이 발사되는 것이다. 이것은 언젠가 브울 노인이 로트에게 사용했던 무기이다. 데이는 그 사용 방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또 하나의 무기는 어른의 주먹만한 검은 공이었다. 이것에도 방아쇠가 달린 손잡이 자루가 달려 있고, 그 반대쪽에는 권총의 총구멍과 같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이 구멍으로부터 번갯불과 같은 섬광이 발사되어 6미터쯤 떨어진 목표라도 곧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소형 번개공'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초승달 모양의 광선총은 데이가 들고, 번개공은 조지가 가졌다. 데이는 경쾌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푸른 리본으로 머리를 둘러 맸다. "자, 가세요." 데이는 조지를 데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어두운 방을 몇 개인가 뛰어 지나서, 뒤뜰로 나왔다. 거기에는 작은 흰 집이 서 있었다. 개집인 모양이다. 데이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개집 안은 어둡고, 창문으로부터 희미하게 달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잿빛에 가까운 검은 물체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조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거대한, 털이 북슬북슬한 개다. 한순간 조지는 본능적으로 발을 멈추고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데이는 상관하지 않고 가까이 온 개에게 다가가서 그 목에 팔을 감았다. "착하지 로탄, 나를 위해서 한번 수고를 해 줘요. 부탁이에요." 데이는 개의 주의를 이렇게 끌어놓고는, 일부러 조지의 등을 두세 번 가볍게 두드렸다. 조지가 자기 친구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모양이다. 조지가 두려운 마음을 가지면서도 개 앞에 손을 내밀자, 그 거대한 개는 조지의 손을 날름날름 핥았다. 개의 따뜻한 혀의 감촉에 조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으나, 이것으로 어쨌든 이 덩치 큰 짐승은 그의 친구가 된 것이다. 또 한 마리의 개는 아탈이라고 부르는 암캐로서 로탄 보다 더 컸다. 이 두 마리의 개는 데이의 말을 잘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데이가 부탁의 말을 하자, 재빨리 벌떡 일어나 껑충껑충 뛰어가듯이 개집 안의 저편 구석으로 가더니 안장을 입에 물고와 데이 앞에 섰다. 데이는 조지의 도움을 받아 빠른 동작으로 개의 등에 안장을 달았다. 고삐는 없었다. "아저씨는 아탈을 타 주세요.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멎으라고 하든가, 가라고 하든가, 아저씨가 살고 있는 세계의 말로 지시하면 아탈은 잘 알아들을 거예요. 이곳에 와서 말을 가르쳤어요." 조지는 개의 등에 올라탔다. 말을 타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기분이었으나, 말보다도 이 거대한 개가 부드럽고 연하고 탄력성이 많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개는 큰 소리로 한번 짖고 나서, 천천히 문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마치 호랑이처럼 부드럽고 연하고, 그리고 힘있는 발걸음이다. 조지는 개의 북슬북슬한 목 근처의 털을 한 줌씩 움켜쥐고 몸을 지탱했다. 데이는 로탄을 타고 조지의 앞에 서서 마당을 나갔다. "겁내지 마세요, 조지. 그럼 가요." 데이를 태운 로탄이 달리기 시작했다. "부탁한다, 아탈……" 조지가 개의 목에 얼굴을 대고 속삭이자마자, 아탈도 로탄을 뒤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조지는 개의 목에 달라붙었다. 몸 전체가 땅에 닿을 정도로 낮은 자세로 뛰고 있다. 개의 발바닥에는 두꺼운 살이 붙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땅을 차는 충격을 흡수하는 까닭인지, 말을 타는 것보다도 훨씬 편했다. 조지는 머리를 쳐들었다. 앞쪽에는 푸른 리본의 끝을 길게 바람에 팔랑거리면서 달려가는 데이의 모습이 있다. 좌우에 늘어선 거리의 집들이 나는 듯이 뒤쪽으로 지나간다.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쌩 쌩 하고 소리를 내었다. 참으로 상쾌한 기분이다. 조지는 개를 타고 조금도 불편 없이 아주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데이를 따라잡도록 좀더 빨리 달려요, 아탈." 조지가 속삭이자, 아탈은 곧 속력을 내어 로탄을 따라잡았다. 이윽고 두 마리의 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었다. 얼마쯤 뛰다가 데이는 갑자기 개를 멈추었다. 조지도 따라서 개를 멈추었다. "어떻게 된 거야, 데이?" "트로오가 왜 올린으로 가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조지는 말없이 데이에게서 눈을 메지 않았다. "로트의 타임 머신이에요! 로트가 처음으로 이 세계에 올 때 타고 온 제 1호기를요…… 트로오는 그것을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것은 올린의 동굴 안에서 엄중하게 경비되고 있을 텐데?" "그래요. 그렇지만 경비대 가운데 트로오의 스파이가 있다고 해요. 우리는 신용하고 있었던 사내죠." "뭐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트로오가 올린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붙을 수가 없을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트로오의 개는 특별히 발이 빠르거든요." 그 때, 조지의 머리에 번득인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제 2호기를 사용하면 된다. 나와 로저스가 이곳에 올 때 타고 온 타임 머신은 앵글리즈의 동굴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타고 트로오를 쫓아가면 된다. 조지는 곧 이 아이디어를 데이에게 이야기했다. 데이도 곧 찬성하고, 두 사람은 즉시 방향을 돌려서 처음에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로오는 왜 타임 머신을 타고 싶어할까?" 달려가면서 조지가 물었다.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서 무기를 모아올 생각인 거다."   이야기는 바뀌어서 이곳은 후안들이 있는 곳이다. 조금 높은 언덕 위의 사치스럽게 꾸민 뜰에 둘러 싸여 있는 궁전에는 바스인들이 계속 밀어닥치고 있었다. 폭도들은 뜰에서 손에 손에 몽둥이와 낫을 휘 두르면서 고함들을 지르고 있는데, 아직도 궁전 안으로 들어갈 결심은 서 있지 않은 듯했다. 후안은 언덕의 기슭에서 옆길로 나갔다. "바스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궁전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저기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궁전 뒤에 높은 탑이 서 있었다. 탑의 뒤에는 바닷가에 우뚝 솟은 절벽이 있는데, 절벽 밑에는 인간의 키보다 더 큰 종려나무가 빽빽이 자라고 있었다. 후안은 로트들을 달빛이 비치는 인기척 없는 바닷가로 인도하여, 바다 기슭을 따라서 탑의 바로 밑의 종려나무 숲으로 뛰어들었다. 숲을 헤치면서 잠시 걸으니, 아래로 계속되는 좁은 터널이 있었다. 후안은 터널로 뛰어들어갔다. 등을 굽히고 겨우 걸을 수 있는 정도의 좁은 터널인데,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왼쪽으로 구부러졌다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가 하는 어두운 통로가 구불구불 계속되고 있다. 도중에 몇 번인가 무거운 격자의 문에 부딪치고, 그 때마다 후안은 무엇인가 어두움 속에서 주의 깊은 조작을 하여 문을 열었다. 이윽고 나사 모양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계단 밑에 가까스로 가 닿았다. 탑의 안인 모양이다. 나사 모양의 계단을 다 올라가니 탑과 궁전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었다. 눈 아래 뜰에서 떠들고 있는 바스인들을 내려다보면서, 세 사람은 그 통로를 지나 궁전으로 들어갔다. 궁전 안은 떠들썩했다. 국왕은 넓은 접견실 가운데를 왔다갔다하고만 있고, 그 둘레에는 떨고 있는 평의원과 고문관들이 허둥대고 있었다. 후안이 들어가자, 일동은 구원을 청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일제히 후안을 바라보았다. 후안은 성큼성큼 창문가로 걸어가서, 뜰의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뜰의 중앙의 분수가 솟아오르고 있는 주변에서, 폭도의 지도자인 듯한 몇 사람의 사나이가 번갈아 가며 연설을 하고 있었다. 연설자가 무엇인가 외치고 손을 높이 들 때마다, 군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무기를 높이 쳐들고 발을 구른다. 그것을 되풀이 할 때마다 흥분의 정도는 점점 더해 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화살과 돌이 여기저기서 날아와 궁전의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더는 우물거리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후안은 결심하고 뜰 쪽으로 나 있는 발코니로 걸어나갔다. 귀를 찢는 듯한 군중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후안은 발코니의 끝에 있는 허리 높이 정도의 난간에 두 손을 짚고 군중을 내려다보았다. 군중들은 후안의 모습이 나타나자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궁전을 향하여 돌진하려던 자들도 발을 멈추고 후안을 쳐다보았다. 아래에서 날아온 돌이 하나, 후안의 머리를 스쳐서 궁전의 벽에 맞고 발코니의 바닥에 떨어졌으나, 후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군중 가운데서 유난히 몸집이 큰 사나이가 뛰어나와 무엇인가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흔들어 군중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모그루드입니다. 그는 바스인의 리더인데, 후안의 말을 들어보자고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트가 로저스에게 설명했다. 군중의 흥분이 가라앉은 기미를 알고 국왕이 발코니에 나왔다. 그 순간 군중은 다시금 떠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돌이 날아들고, 나이프도 한 개 국왕의 머리를 스치고 날아갔다. 국왕은 얼굴빛이 변하여 궁전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후안은 크게 두 팔을 쳐들고, 엄격한 표정으로 군중을 꾸짖었다. 아래에서도 모그루드가 폭도들을 진정시켰다. 이윽고 군중이 다시금 조용해지자, 모그루드가 두세 걸음 앞으로 나와 발코니의 후안을 향하여 무엇인가 말을 시작했다. "모그루드는 법률을 고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악법을 고치지 않는 한 국왕의 생명은 보증할 수 없다고……" 토트가 로저스에게 설명했다. 후안은 군중을 한번 둘러보고 천천히 자신에 찬 말투로 외쳤다. "바스인 여성을 북방 대륙으로 추방하는 법률은 폐지한다! 바스인의 자녀는 자유다!" 그 순간 군중은 멍청하니 일제히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둑이 터진 것 같은 바스인 군중들의 기쁨에 찬 부르짖음이 궁전의 뜰에 메아리쳤다. 군중들은 기쁜 나머지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야단법석을 떨다가 춤을 추며 돌아갔다. 후안은 힘있는 소리로 한번 더 외쳤다. "바스인이나 알란인이나 평등이다! 바스인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모든 과학인이 보증한다!"   타임 머신 공중전   타임 머신 안은 비쳐 보이고, 유령처럼 깜빡깜빡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귀에 익은 진동의 소리. 조지와 데이가 앵글리즈 시의 동굴에 있는 제 2호기에 올라타고 시간 이동 장치를 작동시킨 지 벌써 15분이 지났다. "데이, 괜찮니?" 데이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웃으면서 대꾸했다. "우린 지금 어디 있죠?" "과거의 세계지…… 벌써 40년 전으로 돌아왔군. 그런데 아질라와는 지금도 텔레파시로 연락이 되고 있니?" "네. 되고 있어요. 트로오와 아질라는 백 년쯤 과거의 세계에 있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텔레파시 통신이 오랜 세월도 뛰어 넘을 수 있다니! "트로오가 있는 공간의 위치는?". "올린 동굴의 상공." "좋아, 우리도 그리로 가자." 조지는 프레이즈형 헬리콥터의 엔진을 시동시키고 동굴의 입구를 빠져나오자, 천 미터 상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곧장 올린으로 향했다. 올린의 상공에 도달했을 때, 타임 트래블러 계기는 2백 년의 과거로 돌아갔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데이…… 아질라에게 트로오가 훔쳐 탄 타임 머신 계기를 잘 보아 달라고 전해 줘요." "좋아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네, 2백 30십 년의 과거라고 해요." "그러면 정확한 위치는?" "올린 시의 동쪽 끝…… 동굴이 있는 산의 바로 위…… 높이는 105미터." 조지는 데이에게서 들은 공간 위치에서 높이만은 107미터를 유지하고, 머신을 그 위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바로 밑에 트로오와 아질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30년 전의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아, 트로오의 머신은 3백 년을 통과했어요, 조지." "우리는 2백 9십 년…… 10년의 차이다. 좋아, 곧 따라붙을 테다." "하지만 조지, 따라붙어서 어떻게 하죠?" "번개공으로 한 방 쏘아 버리지." "그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그쪽 머신이 파괴되어 추락해서 아질라도 죽잖아요." 조지의 성급한 생각은 미처 그것을 생각 못하였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다. 하는 수 없이 10년의 시간 거리를 유지한 채로 꾹 참고, 계속 뒤쫓기로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좋은 방법이 발견될는지도 모른다……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8백 년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을 무렵에, 올린 시의 모습이 사라졌다. 섬 자체의 모양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집들은 눈에 띄지 않고 다만 야자 숲 속에 초라한 오두막집이 점점이 서 있을 뿐이다. 아주 초기의 바스인 개척자들의 것이리라. 그 때 3백 미터 앞쪽에 다른 한 대의 타임 머신이 2, 3초 사이에 한번 언뜻 환상의 그림자 같은 모습을 나타냈다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아차!" 조지는 프로톤의 흐름을 제어하는 스위치에 달라붙었다. 트로오는 시간 이동 속도를 낮추어서 착륙하려고 하다가, 이쪽 타임 머신을 재빨리 발견하고 시간 이동으로 모습을 감추었음이 틀림없다. 이윽고 또다시 트로오의 타임 머신이 모습을 나타냈다. 더구나 대단히 가까운 거리에서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접근해 온다. 높이도 같다. 이래서는 충돌하고 만다! 그리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트로오의 머신은 조지의 코앞에서 급상승을 하는 동시에, 날카로운 번갯불을 퍼부었다. 번개 공격이다! 그러나 눈부신 번갯불은 조금 빗나갔다. 조지는 당황하여 프로톤의 흐름의 출력을 제20 강도로 재빨리 올려서 시간 이동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문득 아래를 보니 어느 사이에 섬이 없어져 버렸다. 해협이 소멸하고 대륙과 맞붙어 버린 것이다. 당황하여 타임 트래블러 계기를 보니, 6천 8백 년의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조지는 새삼스럽게 제20강도 속력의 굉장함을 인식했다. "아질라로부터의 연락으로는 트로오는 원래의 세계에서 백년 전의 세계까지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젠 글렀는 걸…… 이만큼 떨어져서는 만날 것 같지 않아. 좋아, 트로오가 무기를 찾는다면 나도 뭔가 네 아버지가 기뻐해 줄만한 것을 찾아서 돌아가기로 하자." 조지는 그대로 과거로의 비행을 계속했다. 이윽고 1만 8천 년 전의 세계에 도달했다. 조지가 사는 20세기까지의 시간 거리를 절반 되돌아온 것이 된다. 이윽고 올린 시가 나타나는 근방에는 바야흐로 문명이 가장 왕성한 시기를 맞이하여, 콘크리트와 강철의 거대한 건축물이 계단 모양이 되어서 높이 솟아올라 있다. 그것을 둘러싼 공중 도로, 탑, 다리…… 데이는 다만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래져 있을 뿐이다. "내려가 볼까, 데이?" 조지는 프로톤의 흐름의 출력을 제 3강도로 떨어졌다. 잠시 후에 스위치를 끊었다. 충격이 지나간 다음, 조지는 일어섰다. 데이도 옆에 서 있다. 밖은 캄캄한 밤이었다. 그 때, 갑자기 빛이 번쩍 했다. 하늘이 타는 것처럼 밝다. 새빨간 로켓 폭탄이 머리 위에서 폭발했던 것이다. 무서운 폭발음이 땅을 뒤흔든다. 눈부신 빛이 수십 킬로미터 저편까지 빛을 보였다. 거대한 불꽃이 머신 위에 덮어 씌어져 온다. 몇 개의 거대한 건축물이 바로 가까이 보였는데, 그 중 하나가 천천히 무너져 내린다. 하늘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비행 물체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활 모양의 곡선을 그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들이 발사하는 녹색의 광선과 땅위에서 발사되는 광선이, 마치 두 자루의 칼처럼 서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또다시 굉장한 폭음이 울리고 파란빛이 번쩍거리더니, 가까운 곳의 바위와 돌이 튕겨오르며 흙먼지가 회오리바람을 휘몰아친다. "조지, 조지!" 데이와 무서워 떠는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조지는 정신 없이 프로톤의 흐름을 조절하는 스위치를 찾아 잡아당겼다. 이윽고 지옥과 같은 무서운 밤의 광경은 사라지고, 조용한 회색 안개로 바뀌었다. 전쟁이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무서운 전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다른 물체로부터의 침략자를 상대로 지구 전체가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 말이 들려요, 아질라의 말이에요. 트로오가 드디어 무기를 손에 넣었다고 해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고 있대요." 운이 좋은 놈이다! 트로오는 어딘가의 문명 세계에 착륙하여 무기를 손에 넣은 모양이다. "데이, 트로오의 머신의 시간 위치는?" "잠깐만요. 5500 년 전이랍니다." "좋아." 조지는 조심스럽게 머신을 조종하여 트로오의 머신을 뒤쫓았다. "지금 트로오의 시간 위치는?" "…… 1250 년." "여기는 1140 년이다. 아질라는 아직도 묶여 있나?" "아니에요. 지금은 묶여 있지 않은 모양이에요. 트로오가 기분이 썩 좋아져서 아질라에게 머신의 조작을 잘 가르쳐 달라는 따위의 말을 하고 있다는군요 '" "그래, 그건 참 안성맞춤이다. 그러면 데이, 아질라에게 타임 트래블러 계기의 다이얼을 다시 확실하게 보도록 부탁해 줘요." "네, 그렇게 하죠. 지금 584 라는군요." "좋아, 우리는 585까지 접근하기로 하고…… 이렇게 하면 1년 후의 시간 위치가 된다. 트로오의 공간 위치는?" 조지는 이마에 땀을 흠뻑 흘리면서 뒤쫓기를 계속했다. "아, 조지, 트로오가 착륙해요, 지금 8년 전…… 7년 전." "빌어먹을! 어떻게 안 될까." "3년 전…… 2년 전…… 지금 원래의 시간 세계로 돌아갔다고 해요. 지금 올린 상공에서 착륙하려고 한답니다…… 아!" "왜 그러지, 데이?" "땅 위까지 2미터가 남은 곳에서 아질라가 캐빈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어요. 그 순간에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좋아, 빨리 현장으로 가자!" 수초 후에 조지의 머신은 현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아, 아질라다!" 풀밭에 정신을 잃고 Tm러져 있는 아질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트로오의 머신은 없다. 조지가 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시간 이동으로 모습을 감추었을 것이다. 조지는 서둘러서 머신을 아질라의 옆에 착륙시켰다. 그리고 머신에서 뛰어내려 아질라를 안아 일으켰다. 아질라는 다행히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쇼크로 잠시 정신을 잃고 있었다. 뒤따라 내린 데이가 가지고 온 약을 마시게 하자, 아질라는 곧 눈을 떴다. 세 사람은 다시 만난 것을 서로 기뻐했다.   특별 비행 부대   그로부터 한 달 동안 온 섬은(바스인도, 과학자도) 하나가 되어서 분주한 활동을 계속했다. 특별히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실권을 맡게 된 과학인에게는 전에 없던 긴장과 불안의 매일이었다. 트로오가 돌아온 것이 사실이라면 언제 어느 때에 전쟁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트로오가 거느리는 노스인이 섬에 쳐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이편에서 적극적으로 적을 맞아 싸운다는 것이 후안의 결단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그런 작전을 하기에 필요한 군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생명을 내던지고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에 충만한 용감한 결사대가 아니면 안 된다. 곧 나라 안에서 지원병 모집이 실시되었다. 알란인은 한 사람도 지원자가 없었다. 지원병은 바스인과 과학인의 젊은이들뿐이었다. 젊은이들은 나이가 위인 바스인과 과학자들의 지휘를 받고 매일 훈련에 힘썼다. 알란인들은 조금도 협력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과 다름없이 밤낮으로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기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 둘을 지원병으로 보내고 돌아오던 아버지가 우연히 거리에서 술에 취한 알란인 젊은이들을 만나 말다툼하던 끝에 그들을 때려눕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알란인과 바스인과의 사이에 대 난투극이 벌어져 알란인 다수가 죽었다. 그러나 이제 국왕에게는 바스인을 벌할 힘도 권위도 없고, 과학자들은 바스인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는 알란인은 바스인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되었다. "쳇, 얼빠진 겁쟁이 놈들! 알란인 모두는 모두 죽여 버려야 돼." 조지도 바스인과 한편이 되어서 알란인들을 멸시했던 것이다.. 트로오들의 움직임도 시시각각으로 전해져 왔다. 북방 대륙의 남쪽 끝에는 노스인의 대병력과, 싸울 수 있는 개들이 계속 밀어닥쳐서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어떤 비밀 병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앵글리즈 군의 주요한 병기는, 중력에 반발하는 그 특수한 천을 사용하여 만든 비행 판자였다. 여기에 번개 발사기를 장치하고 바닷길로 쳐들어오는 트로오 군을 하늘에서 공격하는 작전이다. 또, 이 천으로 비행복을 만들어 입고 하늘에서 적군에게 공격을 퍼붓는 특별 비행 부대도 완성되었다. 이 부대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선택된 과학자와 바스인 젊은이 200 명인데, 앵글리즈 시 교외의 기지에서 비밀 훈련을 받았다. 그 중에는 로트와 조지도 있었다. 이 훈련은 더없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먼저 검고 엷은 사라사와 같은 천으로 만든 양복을 입고, 손목과 발목과 목 언저리 부분은 꼭 졸라맨다. 허리에는 많은 포켓이 달린 폭 넓은 허리띠가 감겨져 있다. 허리띠에는 특수한 전지가 장치되고, 거기서 나오는 전기의 흐름이 천을 통하여 흐르게 되면, 반중력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역시 같은 천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 천에 전기의 흐름을 통하게 하는 순간, 중력은 사라지고 온 몸의 무게가 2킬로그램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게 된다. 바람이 살랑거리면 바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게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자, 날아 볼까요, 조지." 로트가 웃음을 던지면서 힘껏 땅바닥을 찼다. 순간 로트의 몸이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면서 동시에 반쯤 돌아서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살짝 땅에 떨어졌다. 조지는 그것을 모고 크게 웃었다. 공기는 물과 같은 느낌이었다. 손과 발에 달고 있는 날개를 익숙하게 사용하니, 마치 발에 지느러미를 달고 물 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이 익숙하게 공중을 헤엄쳐 다닐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왼손에 들고 있는 손전등 만한 크기의 원통을 사용한다. 이것으로부터 특수 광선을 발사하면 순간적으로 그쪽 방향의 공기 농도가 열어지고, 따라서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양으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 주일 동안에 200 명의 비행 대원이 비행 도구를 사용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바스인의 리더는 모그루드이다. 로트와 조지가 절대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질라와 데이도 이 비행 부대에 참가하여 대원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나에게는 불행하게도 아들이 하나도 없소. 그래서 그 대신 두 딸을 나라에 바치는 거요. 이것은 내 의무이며, 또 딸들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오." 이것이 후안의 주장이었다. 이것을 보고, 다른 과학인들의 딸들도 20여 명이나 지원해 왔다. 훈련을 시켜보니 비행병으로서 필요한 재주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점과, 몸의 동작들은 오히려 남자보다 우수할 정도였다. 소녀들은 비행 부대의 커다란 전력이 되었다. 소녀들은 13명씩 두 대로 나뉘어 1대를 아질라가, 다른 한 대를 데이가 지휘하게 되었다. 타임 머신을 병기로서 사용하는 일도 검토되었다. 그러나, 조지가 1만 2천 년의 과거까지 시간 여행을 했던 결과로 프로톤 연료가 줄어들어 많아야 20세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보류하기로 했다. 단순한 비행기라면, 비행 판자와 비행복이 있으므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공중 정찰에 나갔던 비행 대원이 트로오 군대가 드디어 공격을 시작했음을 알려 왔다. 수많은 거대한 개들이 밧줄을 목에 걸고 나란히 헤엄을 치면서 끌고 오는 큰배가 주요한 전력인데, 그 배 위에는 많은 사람과 개와 기계 장치가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섬 전체는 순식간에 긴장에 휩싸였다. 바닷가의 여러 곳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던 번개 발사기는 모두 앵글리즈를 중심으로 하는 동쪽 해안에 집중되었다. 또, 만에 하나라도 노스인들이 상륙할 경우에 대비하여 온 나라의 개들이 징발되었다. 그러나 적을 맞아 싸우는 앵글리즈 군의 주력은 아무래도 비행 부대였다. 그날 비행 부대 전원은 앵글리즈 시의 교외에 있는 초원에 모여 출발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그루드가 거느리는 바스인 100 명, 조지가 거느리는 과학인 200 명, 아질라와 데이가 거느리는 소녀 대원 26명이 병력의 전부이며, 전체의 지휘는 동굴 안에 있는 후안과 연락을 취하면서 로트가 하기로 되었다. 마침내 오후에 후안의 출격 명령이 내렸다. 불안스럽게 지켜보는 군중의 시선을 받으면서 비행병들은 차례 차례로 햇빛 속을 날아 올라갔다. 상공에서 재빨리 커다란 반원형의 편대를 짜고는, 북쪽의 해협을 향하여 씩씩한 진군을 시작했다.   해협의 결전   야자 숲이 점점이 있는 섬은 조용히 눈 아래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앞쪽에는 푸른 해협이, 오른쪽에는 바깥 바닷가 펼쳐져 있다. 조지에게 이 첫 출전은 상쾌한 것이었다. 참으로 고요하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므로 보통 비행기에 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대기 그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비행 기분인 것이다. 바로 앞을 로트가 날고 있다. 뒤에는 활 모양의 편대를 짠 주력 부대, 그 앞쪽의 조금 낮은 높이로 소녀들의 2분대가 비행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날씬하고 부드러운 몸매의 20세 이하의 소녀들뿐이다. 편하게 입은 바지와 블라우스의 옅은 옷감 밖으로 비쳐 보이는 손발이 아름답다. 머리는 진홍빛의 고무를 입힌 머리띠로 둘러매서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그녀들은 왼손으로 교묘하게 추진통을 조작하여 전진하고 있다. 잠시 후에 일행은 해협의 상공에 이르렀다. 로트는 문득 소녀들을 보았다. 조금 고도가 낮은 것 같다. 로트는 입 가까운 곳에 장치한 휴대용 마이크를 사용하여 말을 보냈다. "아질라, 데이, 너무 낮다! 조금 높이 날아요." 두 소녀는 순순히 그 지시에 따르고, 그녀들의 분대도 모두 함께 고도를 올렸다. 해협이 바깥 바다로 이어지는 근방의 상공까지 왔을 때, 트로오가 거느리는 군대와 함대가 보였다. 섬에서 5킬로미터쯤 뻗어진 바다 위에 마치 작은 먼지처럼 검게 떠 있다. 조지의 십장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침착하려고 애써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로트와 조지는 비스듬히 위로 올라가면서 전진을 계속했다. 적군의 배는 6척인데, 굉장히 크다. 사람과 개와 기계 장치를 가득 싣고 있다. 6척 모두 배의 위를 거대한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의 덮개를 씌워서 보호하고 있다. 하나 하나의 배의 앞쪽에는 수많은 거대한 개들이 가로로 죽 늘어서서 헤엄치고 있었다. 이 거대한 개들이 밧줄로 배를 끌고 있는 것이다. 로트는 추진통을 닫고 속도를 떨어뜨렸다. 그 로트에게 조지가 따라붙어 어깨에 손을 얹고, 나란히 비행을 계속했다. 맨 앞에 오고 있는 적의 배까지는 약 1500 미터쯤이다. 맨 앞에 오는 1척은 지휘하는 배인 듯하다. 다른 5척은 조금 떨어져 따라오고 있다. 갑자기 적군의 지휘선은 눈부신 빛을 번쩍하고 발사했다. 몇 초 후에 천둥소리 같은 폭음이 울렸다. 발사된 빛은 로트네들을 향하여 빠른 속도로 올라왔으나 헛되게 빗나가 버렸다. 틈을 주지 않고 섬의 연안에 대기 중인 앵글리즈 군도 같은 빛을 적의 배들을 향해 발사했다. 트로오는 자기들의 광선포의 성능에 충분한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섬에 설치된 발사기의 광선이 가 닿는 거리 밖에서 먼저 공격을 해 옴으로써 앵글리즈 측이 혼란에 빠지는 틈에 상륙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적의 배를 씌우고 있는 은빛 덮개는 로트네들이 하늘로부터 발사하는 소형 광선총의 빛을 막기 위한 장비일 것이다. (저 은빛 덮개의 정체가 무엇이거나, 이 광선총의 사격을 정면으로 받는다면 상처를 안 입을 수 없으리라…… 될 수 있는 대로 적의 배에 접근하여 정확하게 겨냥하고 집중 공격을 해야 한다. 배의 나무 부분에 바로 들어맞으면 불이 붙어 곧 타 버릴 것이고, 물 속에서 배를 끌고 있는 개들을 죽이면 적군의 배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로트의 작전은 정해졌다. 재빨리 동굴의 작전 본부에 있는 후안에게 자신의 작전 계획을 전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곧 휴대용 마이크로 비행 부대의 전원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로트들은 잠시 동안 600 미터의 고도를 유지하여 적의 배가 떠 있는 상공을 돌았다. 적군의 배로부터 때때로 빛이 발사되었으나, 이 높이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 상태로 적의 배들은 전진을 계속했다. 이윽고 후안으로부터 공격 개시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로트는 그것을 비행 대원 모두에게 전했다. 먼저, 조지의 분대와 모그루드의 분대가 대열을 떠났다. 그 중 100 명 정도는 북방 대륙의 방향으로 날아갔다. 남은 분대원들은 일제히 급히 날아 내려가서, 곤충의 떼 같이 적의 지휘선을 습격했다. 이곳은 앵글리즈 시내의 동굴 속 깊은 곳에 있는 작전 본부이다. 3면이 여러 개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사령실로서, 수신기와 휴대용 마이크를 몸에 장치한 모습의 후안과 로저스가 앉아 있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섬의 불쑥 튀어난 끝머리에 서 있는 텔레비전 탑으로부터 보내져 오는 바다와 공중의 광경이 비쳐 있다. 또 후안의 정면에는 30센티 사방쯤 되는 소형 스크린이 있고, 거기에는 로트의 이마에 메어붙인 텔레비전 카메라로부터의 화면이 나타나 있다. 즉, 로트가 보는 그대로의 정경과, 로트가 눈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는 시시 각각의 광경이 그대로 이곳으로 보내져 오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운명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후안은 로저스와 함께 소형 스크린을 뚫어지도록 들여다보고 있었다. 때때로, 두세 마디 로저스와 작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고는 실내의 부하에게 지시를 내린다. 지시 받은 사람은 마이크를 통하여 명령을 내린다. 이것이 섬의 이곳 저곳으로 전달되어서 앵글리즈 군의 일거일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후안은 온 몸의 지혜를 짜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로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지와 모그루드가 거느리는 분대는 적군의 지휘선에 달려들어 광선총의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바로 들어맞은 광선은 은빛 덮개의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불꽃을 튕기고 있다. 적도 광선을 발사하고 있었으나, 그 수는 훨씬 적었다. 공격대의 한 사람이 적의 광선을 맞고 거꾸로 바다 속에 떨어지기도 하고 상처를 입고 힘없이 흔들거리며 상공으로 도망쳐 가기도 했다. 배를 끌고 헤엄치는 개들도 벌써 몇 마리가 죽어서 피를 흘리면서 바다 위를 둥둥 떠내려가고 있다. 싸움이 시작된 지 1분도 안되어서 갑자기 적의 배들이 암흑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마치 진한 잉크를 뿌린 것처럼 배를 중심으로 반경 150 미터쯤의 바다 위에 있는 모든 광선이 흡수되고 만 것이다. 적의 배가 에테르(빛의 파동설에서 전자파를 전달하는 매체로 가상된 물질) 진동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후안은 빙긋 웃었다. 그는 그 에테르 진동 폭탄이라는 것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검은 연막을 써서 적의 눈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효과는 사라진다. 같은 것이 아군의 간부들, 로트와 조지와 모그루드에게도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후안의 명령을 받은 로트는 공격 부대를 다시 후퇴시켰다. 바닷속에 추락한 20여 명과 상처를 입은 수십 명을 뺀 나머지 사람의 수효는 200 명을 조금 넘고 있었다. 1분쯤 지나자 적의 배를 싸고 있던 암흑이 옅어지고, 배의 윤곽도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에서는 노스들이 열심히 불끄는 작업과 죽은 개를 밧줄에서 Ep어 버리고, 새로운 개로 보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적의 배들은 계속 천천히 전진하여, 해협으로부터 섬으로 들어오는 포구까지 1500 미터쯤의 거리를 남겨 두고 있었다. 후안은 다시 3번쯤 적의 같은 배에 대한 집중 공격을 명령했다. 그 때마다 적의 배는 같은 전법을 되풀이했다. 몇 번 광선을 쏘아 올리고는 흑의 막을 펴고 도망친다. 그 때마다 이쪽의 쏘아대는 광선은 전혀 무효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에 앵글리즈 군은 조금씩 공격의 비결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적의 광선포는 수평 방향으로 발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주 낮게, 바닷물에 닿을 정도로 날아가서 공격을 하는 편이 안전하다. 이윽고, 집중 공격을 받은 적의 배는 화염에 싸였다. 배 위에는 죽은 자와 부상자가 득실거리고, 살아남은 사람과 개들은 앞을 다투어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초 후에, 적의 배는 뒤쪽을 위로 올리면서 기울기 시작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뱃머리부터 첨벙첨벙 물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러나 가라앉은 적군의 배는 1척에 지나지 않는다. 남은 5척은 각각 500 명씩의 노스인과 거의 같은 수효의 거대한 개를 싣고, 거의 포구까지 이르고 있었다. 섬의 기슭에 설치된 광선포가 미치지 못하는 거리의 지점을 택하여, 개를 타고 상륙해 온다면 큰일이다. 아질라와 데이가 로트에게로 날아와서 새로운 방법의 공격을 해 보고 싶으니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동굴 안에 있는 후안이 엄격한 표정을 한 채 딸들의 희망을 승낙하자, 아질라와 데이는 각각 13명씩의 소녀 대원을 거느리고 새로 지휘선이 된 적군의 배를 향하여 함께 돌진했다. 적의 배로부터도 광선포가 연달아서 발사되었다. 그러나 소녀들이 있는 높이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윽고 소녀들은 일제히 하나의 점에 겨냥하여 광선총을 발사했다. 26개의 하얀 광선이 보기 좋게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더구나 활 모양으로 구부러져 정확하게 적군의 배에 들어맞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광선이 똑바로 발사된다고만 생각하는 노스는 그곳만을 노리고 응전을 하기 때문에, 딸들은 공격에 열중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스크린 보면서 놀라고 있는 로저스에게 후안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질라와 데이는 두 사람만으로 대담하게 급히 날아 내려가서 적의 배에 접근했다. 적의 배에서는 계속하여 광선포를 쏘아 올리지만 좀처럼 두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20초 후 적의 배로부터 겨우 9미터밖에 안 되는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간 아질라와 데이는 주황색의 액체를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이 액체에 닿으면 어떤 단단한 재료로 만든 것이라도 곧 녹아 버리는 강력한 화학 약제인 것이다. 적군의 배가 다시금 암흑탄을 터뜨리자 두 소녀들도 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라 응시하고 있는 로트의 눈앞에 잠시 후 무사히 날아 오르는 아질라와 데이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암흑의 막이 걷히니, 거의 물 속에 잠겨가고 있는 적군의 배가 그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후엔 그것도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바닷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는 파도 사이로 점점이 보이는 적병과 개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늘엔 짙은 구름이 깔리고 황혼으로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은 급속도로 밤의 어둠으로 변해갔다. , 후안은 적의 배들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밤하늘은 순식간에 번쩍이는 빛이 오가며 부딪치는 무서운 전쟁터로 변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인공의 천둥소리와 함께 청백색의 로켓 폭탄이 날아간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쏘아 맞힌 로켓 폭탄이 터지는 굉장한 소리, 목표를 빗나가 바닷속에 떨어진 로켓 폭탄이 일으키는 맹렬한 물보라, 배로부터, 섬으로부터, 하늘로부터 광선이 마구 발사되어 사방을 대낮처럼 끊임없이 밝히고 있다. 그러는 동안 몇 시간에 걸친 열선의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 진짜 천둥소리와 번갯불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연이 어리석은 인간의 싸움을 비웃으며 소리 높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시무시한 번갯불과 함께 하늘과 땅을 울리면서 이편저편 구별 없이 퍼붓는 벼락, 뒤이어 두꺼운 구름 사이로 내리는 장대 같은 비, 휘몰아쳐 일어나는 회오리바람…… 반시간 후 태풍이 멎고 조각조각 떠 있는 구름들 사이로 붉은 달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싸움도 이제 기세가 누그러져 있었다. 또 1척의 적의 배가 침몰되어 가고 있다. 남은 3척도 밧줄을 끄는 거대한 개의 대부분이 죽어 버려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해협의 중간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불길과 싸우고 있었다. 로트는 비행 부대원 중 상처를 입은 사람과 피곤한 사람을 눈에 띄는 대로 곧 섬으로 돌려보냈다. 지금 그가 거느린 대원은 50명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적의 배에 대한 급강하 공격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 때 동굴 안에서 스크린 들여다보고 있던 후안은 다른 소형의 적의 배 한 척이 무서운 속도로 섬에 접근해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실을 곧 로트에게 알려주고 난 직후, 그 배는 무엇인가 은빛으로 빛나는 것을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그것은 천천히 해협의 상공을 가로질러 섬 쪽으로 날아왔다. 직경 7, 8- 센티의, 돌아가는 둥글넓적한 판이다. 그 원반이 날아가는 길과 로트와의 사이에는 소녀 비행 부대가 날고 있었다. 원반은 소녀의 한 사람을 향하여 날아왔다. 소녀는 당황하여 몸을 피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원반에 부딪쳐서 곧 추락하고 말았다. 동시에 그 원반도 회전을 그치고 아래로 멀어졌다. 그때에야 원반의 정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십자형의 강철 칼날인데, 그것이 프로펠러처럼 세차게 회전하면서 날고 있는 것이었다. 새로 나타난 적의 배는 연달아서 이 회전 나이프를 쏘아 올리기 시작했다. 로트는 휴대용 마이크를 통하여 모든 비행 부대원에게 경고를 하였으나, 때는 늦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수상쩍어하는 대원들에게 회전 나이프는 기분 나쁜 소리를 울리면서 부딪혔다. 회전 나이프에 맞은 대원들은 무참하게 온 몸이 잘려 토막나서 바다 속으로 떨어져 갔다. 이것을 보고 하늘로 높이 날아 올라가는 대원의 뒤를 쫓아가는 회전 나이프도 있었다. 이 때가 되어서, 후안은 회전 나이프의 정체를 알았다. 트로오가 과거의 세계로부터 가져온 과거의 병기가 이 싸움에 나타난 것이다. 이 병기는 특수한 자기를 띠고 있고, 이동하는 사람의 몸을 뒤쫓아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후안은 과연 모든 과학인의 문장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곧 이 회전 나이프가 바다의 표면에서 가까운 높이에서는 힘이 약하여 피하기 쉽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후안의 지시로 비행병들이 일제히 바다의 표면 가까이까지 내려오는 동안 40명 가까운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 무렵 해협의 한가운데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3척의 적선이 다시금 섬의 기슭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했다. 재빨리 그것을 발견한 아질라와 데이의 남은 부대원들은, 후안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적의 배를 향하여 날아 내려갔다. 소녀들은 바다 표면에 스칠락말락한 높이로 2척의 적선 한복판에 들어갔다. 적군은 서로 자기편을 파괴할 위험이 있으므로 광선포를 발사할 수가 없다. 다만 앞서 사용하던 그 에테르 진동 폭탄을 터뜨려서 암흑의 막을 쓰고 모습을 감추려고 할 뿐이다. 소녀들은 사정없이 적의 배에 광선총을 퍼붓는다. 1척은 순식간에 불길에 싸이게 되었고, 남은 2척도 전진을 그쳤다. 회전 나이프의 발사도 어느 사이에 중단되고 있었다. (소형의 적선이 낮은 잡음을 내기 시작하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공격하라……) 이런 명령이 후안으로부터 로트에게 전해졌다. 로트는 조지와 다른 비행병들과 함께 소형의 적선이 있는 곳의 150 미터 상공을 빙빙 돌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 배에는 거대한 개가 한 마리도 없다. 배 위의 은빛 덮개 안에 있는 사람도 겨우 몇 사람 정도이다. 유효한 공간을 전부 기계 장치를 싣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특수한 배인 듯했다. 로트들과는 반대쪽에서 같은 소형의 적선을 둘러싸는 모양으로 모그루드의 부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트보다는 조금 낮은 하늘에서 적선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다. 갑자기, 소형의 적선에서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즉시 모그루드의 부하 몇 명이 쏜살같이 적군의 배로 접근해 갔다. 잡음의 기세는 올라가고, 소리도 요란스러워져 높고 날카로운 비명과 같은 진동음으로 변했다. 그 순간, 접근해 갔던 모그루드의 부하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끌리는 것처럼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 조금씩 아래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의 과학 병기의 하나인 전자 병력 발생 장치라는 것이다.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기고, 특히 인간은 전혀 행동의 자유를 잃고 만다. 끌어당기는 힘은 이미 로트와 조지의 부대에게도 미처서 모든 사람들이 마치 바다의 강한 조류 썰물 때문에 일어나는 바닷물의 흐름에 거슬러 헤엄쳐 가는 것 같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적의 배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모그루드의 부하들은 무서운 힘으로 적의 배에 빨려 들어가 은빛의 덮개에 세차게 부딪치고 있다. 그리고 그 몸을 적군의 광선총이 무정하게 꿰뚫었다. 동굴의 작전 본부에서 로저스는 무심코 올린 부근의 해안에 설치된 텔레비전 카메라로부터 보내져 오는 화면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자줏빛의 밤하늘 아래에서 불그레한 달빛을 받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해안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많은 적의 배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1척의 배는 벌써 육지 가까운 부근에 거대한 개들과 적병을 상륙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대폭발   트로오의 계략에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만 것이다! 분명히 앵글리즈 시에 대한 적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올린 시에 대한 적의 주력 부대의 공격에서 아군의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한 미끼 작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미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트로오의 다른 주력 부대가 올린 시에 기습 상륙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올린 시에 대한 기습 상륙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앵글리즈 시가 있는 방향의 해협에 남아 있던 적의 배들은 일제히 후퇴를 시작했다. 자력 장치를 작동시키고 있던 소형의 적의 배도 앵글리즈 군의 비행병들을 마음대로 희롱하면서 해협의 북쪽을 돌아서 올린 시를 향하여 방향을 돌리고 있다. 올린 시는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였다. 시내에는 국왕과 왕족들, 귀족들이 살고 있다. 경호에 임하고 있는 것은 수효가 적은 과학인의 수비대들이다. 올린 반도에 상륙한 적병은 해안의 여기저기에 집결하였으나, 아직 시내에는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열심히 버둥거리면서 빠져나가 보려고 애쓰고 있던 조지는 어느 사이에 몸이 편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적의 배의 자력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로트와 아질라와 데이가 어디에 있는가 종잡을 수가 없다. 문득 아래를 보니, 모그루드가 20명 정도 되는 바스인을 거느리고 재빨리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할까……?) 조지는 한순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눈 아래 보이는 바다에서는 2척의 커다란 적의 배가 전속력으로 똑바로 도망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모그루드의 지휘를 받고 있는 비행병들이 상공에서 열심히 그것을 뒤쫓고 있다. (좋아! ) 조지는 결심을 하고 그쪽을 향하여 비행을 시작했다. 모그루드의 1대는 바다 표면에 닿을 정도로 낮은 높이에서 적의 배를 공격하고 있었다. 앵글리즈 공군의 필사적인 맹렬한 공격에 적의 배는 2척 모두 암흑의 막을 펴서 모습을 감추고 도망치려고 했다. 조지가 현장에 도착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적의 배를 둘러싼 암흑 속에서 무서운 백열광이 번쩍이면서, 근방이 갑자기 밝아졌다. 암흑의 막을 지나치게 짙게 폈기 때문에, 적선들은 자기들의 나아갈 방향을 잘못 판단하고 서로 충돌하고 만 것이다. 적선은 2척 다 폭발하여 무서운 불길을 내뿜고 있다. 잠시 후 적선 1척이 가라앉았다. 또 1척은 무섭게 타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도망쳐 보려고 헛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다 표면에는 점점이 살아 남은 노스인들의 머리가 흩어져 있었다. 모두 죽을힘을 다하여 기슭까지 헤엄쳐 가려 하고 있었다. 공중의 앵글리즈 군 비행병들은 냉정하게 겨냥하고 오렌지색의 광선을 발사하여 물 속에 있는 노스인들을 죽이고 있었다. 참혹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느 땐가는 꼭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이었다. 이 노스인들을 한 사람이라도 살려 보낸다고 하면, 어느 날엔가 꼭 앵글리즈에 대하여 잔인한 복수를 해 올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앵글리즈의 비행병들은 손에 들고 있는 광선총의 에너지가 다 없어질 때까지 철저하게 노스인을 소탕했다. 그곳에서의 싸움이 완전히 앵글리즈 군의 승리로 돌아갈 무렵, 조지는 데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멀리 보이는 하늘 위에서 동료인 소녀 비행 대원들과 함께 날고 있었던 것이다. "앗, 위험하다!" 조지는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적군의 회전 나이프가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고, 그 중 하나가 데이를 향해 날아갔기 때문이다. 회전 나이프는 소리도 없이 데이와 함께 있던 소녀에게 맞아서, 소녀는 곧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데이를 뒤쫓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추진통을 맞추었다. 데이는 저도 모르게 실린더를 놓쳐 버리고, 곧 몸의 균형을 잃고 추락해 갔다. 추락하면서도 데이는 손발을 공중에서 헤엄쳐서 어떻게든 몸의 자세를 바로 잡아보려고 애썼다. 하마터면 바다에 떨어지는가 싶은 순간, 겨우 달려온 조지가 그녀의 몸을 두 팔로 안아 받쳤다. 조지는 교묘하게 자신의 추진통을 조종하여 데이를 안은 채로 높이 날아올랐다. 한편, 로트는 그 무렵 다시금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자력과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고 있었다. 이 에너지를 받으면 전혀 몸이 부자유스러워진다. 때문에 어떻게든 그 세력의 범위 밖으로 도망쳐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자력 발생기를 실은 적의 배는 조금씩 해협을 향하여 이동해 간다. 올린에서 싸우려는 계획일 것이다. (절대로 그런 짓은 하게 할 수 없다! ) 로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자력 발생기를 배와 함께 파괴해 버리고 싶었다. 그 때, 후안의 지시가 들려왔다. 적이 갑자기 올린 반도에 상륙했기 때문에,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로트는 무모하게도 자신의 힘의 작용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자진하여 돌진해 갔다. 순식간에 강력한 자력이 로트의 온 몸을 얽어매는 듯한 느낌이다. 몸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면서, 자력 발생기가 있는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로트는 그것을 거꾸로 이용하여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발생기를 겨냥하여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로트에게는 광선총도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그 에너지를 다 써 버리고 맡았기 때문이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발화액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목표물에 가까이 가서 뿌리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로트는 죽을 힘을 다해 실린더를 조종하여, 몸을 될 수 있는 대로 수평으로 유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력 발생기로 접근해 갔다. 자력 발생기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비명과 같은 전동음이 고막이 터져 나갈 것처럼 들려온다. 발생기의 주위에 있는 노스인들은 연달아서 광선포를 발사하여 로트를 맞히려고 안달이었다. 로트는 무서운 기세로 수평 비행을 계속하여 30미터의 높이를 유지하면서, 자력 발생기의 상공을 통과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발생기의 상공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로트가 20미터쯤 발생기의 위를 날아 넘을 때 강한 자력에 끌려, 등 뒤쪽으로부터 차츰차츰 발생기가 있는 방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실린더를 사용하여 끌려가는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끌면서 로트는 조금씩 조금씩 낮게 내려갔다. 벌써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발화액을 자력 발생기 속에 처넣느냐, 이대로 몸이 뒤로 젖혀진 채로 발생기에 끌려가서 광선포의 밥이 되느냐, 길은 둘밖에 없는 것이다. 피로할 만큼 지루한 느낌의 시간이었으나, 이윽고 그 순간이 찾아왔다. 로트는 발화액을 방출했다. "펑!" 무서운 폭발음과 함께 자력 발생기의 중심 코일이 타서 끊어지고, 그 순간 로트의 몸은 편하여졌다. 자력이 사라진 것이다. 승리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져서 로트는 실린더를 위쪽으로 향하고 똑바로 급상승했다. 100 미터쯤의 높이에 이르렀을 때 올라가기를 그치고, 바다를 돌아보았다. 자력 발생기를 실은 적의 배 전체가 큰 불길에 싸이고, 노스인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앞을 다투어 타오르는 배에서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이다. 로트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여, 아군의 주력과 합류했다. 남아 있는 자는 겨우 75명이었다. 그 중의 10명은 여자 대원이었다. 그 가운데 아질라가 있는 것을 보고 로트는 안심했다. 조지는 아직도 데이를 안고 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불길에 싸여 있는 적의 배와 달빛에 비쳐진 무수한 시체들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적병의 시체도 있고, 아군의 시체도 있다. 로트들은 바닷물에 스칠 정도로 낮게 날면서 빙빙 돌기를 계속했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기 편 부상병을 찾는 것이다. 바닷물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 아군의 생존자는 두 사람뿐이었다. 화상을 입은 바스인 비행병과 회전 나이프로 심한 상처를 입은 소녀 대원이다. 로트들은 두 사람의 부상자를 안고 후안이 있는 동굴로 돌아왔다. 올린 반도의 해안으로는 거대한 개를 탄 노스인들이 계속 밀려들어서 상륙하고 있었다. 병력이 부족했던 앵글리즈 군의 수비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노스인들을 멀리 둘러싸고 가만히 형편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후안은 앵글리즈 시에 있는 바스인 병사들에게 광선총을 가지고 올린 시로 급히 가게 했다. 로트와 앵글리즈 군의 병사들과, 전투에 몹시 피곤해진 몸으로 돌아온 비행 부대에도 휴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동굴의 본부로 돌아오자마자 몇 시간 후로 다가온 새로운 건투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 것이다. 올린 시에 상륙한 적병에 대한 유격전은 앵글리즈 시로부터 올, 바스인 보충 부대의 도착을 기다려 밤이 새자마자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후안은 로저스, 로트, 조지, 아질라, 데이와 함께 타임 머신에 올라탔다. 타임 머신에는 후안이 특별히 정성 들여서 연구한 결과 발명된 대형 광선총이 장치되어 있었다. 밤이 새기 한 시간 전, 타임 머신은 앵글리즈 시를 출발하여 곧장 올린을 향하여 공간 이동을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동안 육지의 도로를 진군해 오는 바스인 육군 부대를 지나쳤다. 뒤에는 점점이 비행 부대가 계속 날아오고 있다. 올린으로부터 앵글리즈 시로 향하는 도로에는 노인, 여자, 아이들의 바스인 피난민이 길다란 줄을 지어서 가고 있었다. 앞쪽의 올린 상공에는 때때로 청백색의 광선이 번쩍거린다. "아버지, 올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타임 머신을 조종하고 있던 로트가 로저스에게 말했다. 이 나라의 수도인 앵글리즈 시 다음으로, 이 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올린은 뒤에 두 개의 산을 끼고 있는 커다란 분지의 가운데에 있었다. 올린 시의 상공에 도착한 타임 머신은 천천히 배회하면서 밤이 새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동쪽 지평선으로부터 진홍색의 커다란 태평양이 모습을 나타냈다. 하늘을 향하여 내뻗친 햇빛이 올린 시의 상공에 두껍게 깔려 있던 회색의 비구름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알란인에게는 오늘이 바로 신의 심판이 내리는 '대홍수의 날'이 될 것이다……" 후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로트는 후안의 중얼거림에, 조종석에 앉은 채로 고개를 깊이 끄덕거렸다. "분명히 대홍수'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도 피의 대 홍수가 되겠죠." 그 말에 대답하는 것처럼 어두운 구름은 올린 시에 비를 몰고 와 퍼붓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동쪽 지평선의 햇빛을 받고 무수한 붉은 방울이 되어서 알란인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비는 곧 멎었다. 그러나 하늘을 뒤덮은 피처럼 붉은 짙은 구름은 남아 있었다. 타임 머신이 앵글리즈 시를 출발하고 나서 세 시간 후, 노스인들은 동굴을 습격했다. 앵글리즈 군의 수비대는 싸움 한번 해 보지 않고 후퇴하여, 동굴은 노스인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앵글리즈 시로부터 오는 바스인의 육군 부대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올린의 동굴은 노스인의 병사들로 넘쳐 있었다. 게다가 뒤를 이어 노스인들은 해협을 건너서 자꾸만 상륙해 오고 있다. 올린 시의 상공을 돌고 있는 타임 머신의 캐빈에서 후안은 망원경으로 아래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무엇인지 혼자서 중얼거렸다. 얼굴빛은 창백하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지금까지 몇 달 동안의 긴장이 이 노인의 신경과 육체를 몹시 피로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느낄 수 있었다. "로트 군." 하고, 후안은 말했다. "머신을 땅에 내려 주지 않겠나……? 내가 보니 적은 광선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마 무기는 아직 동굴 속에 있는 트로오와 함께 있는 모양이다……" 로트는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머신의 고도를 낮추었다. 올린 시내에는 가는 곳마다 지옥과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노스인들이 닥치는 대로 알란인의 시민들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타임머신 안에서도 끊임없이 모터의 진동음을 뚫고, 칼에 찔리고 개에게 물려서 학살되는 알란인 남녀의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타임 머신은 산이 있는 쪽으로부터 바다가 있는 쪽을 향하여 낮게 떠서 올린 시내의 상공을 지나갔다. 때마침 머신 아래에서는 잔인한 얼굴에 즐거운 듯한 미소를 띄고 있는 털북숭이 노스인이 사납게 생긴 커다란 개를 타고, 하얀 둥근 기둥과 아름다운 분수와 아름다운 꽃밭으로 장식된 알란인의 주택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 노스인은 타고있던 개에서 뛰어내려 몹시 거친 발걸음으로 현관을 통하여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집안에서 공포에 질려 오금을 못쓰는 창백한 얼굴의 알란인 여자를 끌고 나왔다. 벌벌 떨며 서지도 못하는 알란인 여자의 흰 몸을 노스인은 커다란 개 앞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그 거대한 개는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여인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주변은 곧 피의 바다가 되었다. 여인은 산 채로 손과 발을 거대한 개에게 물려 잘려지고, 배와 가슴도 갈기갈기 찢겨져서, 마치 누더기 조각처럼 버려졌다. 바닷가에서는 수백 명의 알란인 남녀가 바닷속으로 쫓겨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수십 마리의 거대한 개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면서 쫓는다. 푸른 바닷물은 곧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흰 모래펄 위에서는 윗도리를 벗은 노스인들이 그 광경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뒹굴고 있었다. 또, 이쪽 광장에서는 백 명쯤 되는 알란인들이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하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떨고 있었다. 사방 팔방에서 일제히 풀려난 거대한 개들의 떼가 그들에게 달려든다. 무서운 비명과 피보라…… 거대한 개들은 피에 물들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를 마치 인형이라도 가지고 장난하듯이 입에 물고는 이리 저리로 흔들고 공중에 올려 던지기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개들에게 쫓기는 금발의 소년이 열심히 등나무의 덩굴을 올린 선반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개는 나무 위를 쳐다보며 무섭게 짖지만 소년을 물 수는 없다. 그러나 한 노스인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죽을 힘을 다하여 등나무 덩굴에 매달려 있는 소년을 억지로 끌어내려 거대한 개의 밥이 되게 했다. 로트는 말없이 머신의 조종석을 로저스에게 넘겨주고 창가에 있는 광선총의 옆에 섰다. 어느 사이엔가 옆으로 바싹 다가선 아질라가 입술을 하얗게 될 정도로 꽉 물고, 로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타임 머신이 한 채의 집 위에 닿을 때였다. 한 사람의 알란인 여자가 작은 두 딸아이를 자기 몸 아래 감싸면서 지붕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 노스인이 가벼운 동작으로 지붕으로 올라가 성큼성큼 세 사람에게 가까이 간다. 땅 위에는 열 마리 가까운 커다란 개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면서 사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로트는 이런 기도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들을 겨냥하여 광선총의 레버를 당겼다. 번쩍 하는 빛이 노스인과 알란인 여자와 아이들에게 발사되었다. 노스인은 통나무처럼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고, 여인도 아이들도 모두 검게 타죽었다. 그 집의 지붕도 절반은 타서 대들보와 기둥이 앙상하게 드러나 보였다. 어떻게 해서도 구원할 길이 없다는 절망감이 로트를 사로잡았다. 참으로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이외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로트는 광선총의 레버를 놓고는 아질라의 손을 잡고 타임 머신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트는 쓰러지는 것처럼 좌석에 앉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후안은 타임 머신을 동굴로 향하도록 하라고 로저스에게 지시했다. 로저스는 머신의 앞머리를 돌려서, 산의 중간 허리에 있는 커다란 동굴을 향하여 머신을 날아가게 했다. 대 동굴의 주위에는 작은 동굴이 여러 개나 있었다. 가운데 동굴에 국왕과 귀족들이 피난하여 숨어 있을 것이다. 대 동굴은 트로오의 사령부와 무기고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앵글리즈 군의 비행 부대의 모습이 보였다. 후안은 무선 전신기로 비행 부대의 지휘자인 모그루드를 불러내어 이 이상 더 가까이 가지 맡고 대기하도록 명령했다. 점점 다가오는 대 동굴을 창백한 얼굴빛의 후안은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관절 무엇을 하시렵니까?" 조지가 물었으나 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안은 말없이 대형 광선총이 장치된 곳으로 걸어가서 묵묵히 총과 머신을 연결시키는 철사를 풀기 시작했다. "앗, 트로오가 있다!" 조지가 외쳤다. 대 동굴의 입구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틀림없이 트로오였다. 산기슭에서는 노스인들이 학살의 손을 잠시 쉬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타임 머신이 가는 곳을 지켜보고 있다. 대 동굴의 입구로부터 30미터쯤 떨어진 곳에 평평한 큰 바위가 있었다. 후안은 그것을 가리키면서 로저스에게 말했다. "저 바위 위에 타임 머신을 착륙시켜 주십시오. 나는 광선총과 함께 저곳에 내리겠습니다. 내가 내린 다음에는 곧 전속력으로 떠나 주십시오." "대관절 무엇을……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후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후안은 말없이 부드러운 미소로써 모든 사람에게 응답했다. 갑자기 데이가 큰 소리로 울면서 후안에게 매달렸다. 아질라도 좌석에서 일어나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후안을 바라보고는 입술을 와들와들 떨었다. 후안은 데이를 안으면서 아질라를 손짓하여 불렀다. 아질라는 단숨에 후안의 품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내어 울었다. 후안은 사랑스러운 듯이 딸들을 껴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딸들의 등을 어루만졌다. "착하지, 너희들…… 이것이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란다. 아무것도 울 필요는 없다. 자, 어서 저리로 가거라…… 잠시 동안 이별이다." 후안은 딸들을 로트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내면서 로저스를 돌아보았다. "아시겠죠, 부탁합니다. 이젠 결정됐으니까 어서 서둘러 주십시오." 후안의 음성에는 다른 말을 못하게 하는 위엄이 있었다. 일동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들처럼 후안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타임 머신은 바위 위에 착륙하여, 후안과 광선총을 내려놓고 다시 전속력으로 상승했다. 벌써 동쪽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은 무겁게 내리깔려 있는 구름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은 마치 피로 물든 커다란 사발을 덮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높이 올라간 타임 머신에서 내려다보니, 대 동굴의 입구에서는 노스인들이 분주하게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를 동굴 안에서 운반해 내고 있는 중이었다. 트로오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후안을 노려보고 있다. 갑자기 후안의 광선총이 청백색의 빛을 번쩍 하고 발사했다. 그것은 20미터의 공간을 순식간에 넘어서 똑바로 노스인들이 방금 동굴 안에서 운반해 온 기계 장치에 들어맞았다. 무서운 천둥소리가 사방팔방으로 메아리 쳐 퍼졌다. 후안의 광선총은 계속하여 동굴 안을 향하여 집중적으로 번쩍이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타임 머신은 급속도로 상승하여 벌써 2000 미터의 높이에 이르고 있었다. 갑자기 대 동굴이 있는 산 전체가 폭발했다. 폭발하는 소리는 2000 미터 상공에 있는 타임 머신의 안까지 귀를 찢을 듯한 굉장한 소리가 되어서 들려왔다. 여러 가지 빛깔의 불꽃과 재가 여기저기 뚫린 구멍과 동굴의 입구로부터 굉장한 기세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뻐끔히 입을 벌린 산 표면의 구멍으로부터 새빨간 용암이 흘러 나왔다. 용암은 천천히 분지로 흘러 들어서 올린 시를 온통 삼켜 버리고 바다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것은 또 굉장한 증기를 하늘 높이 뿜어 올리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올린 반도 전체가 세차게 흔들리며 떨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 땅 표면이 거북의 등처럼 터져 나가고, 불길과 재와 용암이 분출했다. 섬의 서쪽은 크게 솟아오르고, 그 대신 동쪽은 우묵하게 빠져들어 갔다. 그 빠져 들어간 곳으로 바닷물이 무섭게 빠른 흐름으로 세차게 몰려든다. 그리고 아직도 뜨거운 땅에 바닷물이 철썩거리며 부딪칠 때마다 수증기가 되어 하늘 높이 뿜어 오르는 것이었다. 이윽고, 해가 중전에 높이 솟아 올라올 무렵, 지진과 분화와 홍수는 끝났다. 수증기의 안개가 피어오른 후의 올린 시에는 생물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4킬로나 떨어진 바다에 검게 타 버린 시체의 일부가 쓸쓸하게 파도에 씻기면서 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생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새로운 생활에의 출발   타임 머신은 다시 번들번들 빛나는 유령처럼, 강철과 돌의 건물이 솟아오른 문명의 절정기에 있는 뉴욕 시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북쪽을 향하여 공간을 이동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이 짧은 여행은 아질라와 데이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여행이었다. 저 큰 이변이 있은 뒤에 그들은 한 주일쯤 더 앵글리즈 시에 머물렀다. 섬의 서쪽 끝은 모두 바닷물 속에 잠겨 버리고, 트로오와 그가 거느리는 노스인들, 알란인들, 국왕은 모두 죽었다. 앵글리즈 시에서는 새로운 정부가 조직되고 모그루드를 수뇌로 하는 바스인들의 민주 정부가 설립되었다. 로저스는 하루 속히 뉴욕에 있는 릴다에게로 돌아가고 싶어하였으며, 고아가 되어 버린 아질라와 데이에게도 이곳에 머물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프레이즈형 타임 머신은 이곳에 왔던 때와 같이 조용히 출발하게 된 것이다. 만원인 캐빈은 활기에 넘치고, 사람들은 명랑하게 떠들면서 타임 트래블러 계기의 지침이 목표하는 시간 세계의 눈금에 이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좌석에는 로트와 아질라가 앉아서 창문 밖을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그루드는 꼭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예요." 아질라가 말했다. "아버지는 조금 엄격하셨는지는 몰라도 언제나 공명정대 하셨죠." 아질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트는 아질라의 손틀 부드럽게 잡았다. "잘 알고 있어요, 저도. 그렇지만 그렇게 슬퍼만 해서는 안 돼요. 아버지께선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거니까요……" "아버지는요……" 아질라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내게 하셨죠. 잠시 동안 이별이다, 라고요……"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지. 나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로트는 부드럽게 아질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버지는 언젠가 아질라와 데이를 꼭 만날 수 있다고 믿고 계셨던 거예요. 그리고, 나도 이렇게 아질라의 옆에 있으니까…… 그렇겠군. 나는 죽을 때까지 아질라의 오빠가 되어 줄 테니까." "고마와요, 로트." 아질라는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저스는 조지와 데이와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타임 머신의 엔진의 상태를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는 타임 머신의 아래에 벌어지고 있는 경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익은 대도시가 보고 있는 사이에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데이는 얼굴을 들고 조지에게 말을 건넨다. "지금 가려고 하는, 아저씨들이 살고 있는 나라도 저 사라져 가는 도시처럼 대도시인가요?" "아무래도 저만큼은 크지 않지……" 조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나도 최고로 훌륭한 도시라 생각하고 자랑도 했지만, 지금은 다르지…… 데이를 알게 되고 또 데이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체험하는 가운데 생각이 달라진 거야…… 조금은 어른이 된 셈이지." 그리운 현대의 시간 세계로 돌아오고 있는 타임 머신은 점점 더 시간 이동의 속도를 올려서 마침내 최고 절정에 달했다. 눈 아래 벌어지는 풍경의 변화가 맹렬하게 빨라지면서, 세밀한 부분의 변화는 흐릿한 안개 같은 빛깔 속에 섞여 버리고, 전체의 정경도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대충은 분간할 수가 있었다. 센트랄 공원의 남쪽을 둘러싼 거대한 건물들은 점점 줄어들어서 나무들과 시냇물에 자리를 내어 주고있었다. 조지는 타임 트래블러 계기를 보고 외쳤다. "이제 백 년 남았다! 백 년만 더 돌아가면 우리가 사는 20세기다!" 조지는 프로톤의 흐름을 약하게 하여 점점 시간 속도를 떨어뜨렸다. 눈이 내린 풍경의 공원은 전 해의 여름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다시금 나무들의 푸르름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조금 지나서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양은 서쪽으로부터 떠올라서 하늘을 재빨리 날아 동쪽으로 져 간다. 봄이 되었다. 그리고 또 거꾸로 돌아가서 겨울이 되었다.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에 흰 눈이 쌓였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근방이 갑자기 가을의 단풍 빛깔로 바뀌었다. 겨울에서 가을의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로저스는 주의 깊게 미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번 더 여름이 되었다. 그리고 봄…… 이윽고 짧은 밤의 어두움이 타임 머신을 둘러싸고 있을 때 로저스는 공간 이동 장치의 스위치를 넣었다. 타임 머신은 천천히 남쪽으로 흘러간다. 어렴풋이 빛나는 별이 흐릿한 하늘을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뉴욕의 시가지에서 불빛이 누렇게 빛나고 있다. 밤하늘을 천천히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타임 머신 앞쪽의 빌딩 사이로 사이언스 클럽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저스는 찰깍 하고 시간 이동 장치의 스위치를 눌러 멈추었다.   3월의 어느 날 밤. 벙커즈 공원에 있는 로저스의 집 넓은 방에는 낯익은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만찬회가 방금 끝나고 웨이터는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담배에 붙을 붙였다. 여자가 한 사람, 남자는 네 사람. 모두 야회복으로 정장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에 섞여 피아노의 아름답고 맑은 운율이 들려왔다. 피아노는 정밀하고 교묘한 무늬를 아로새긴 마호가니 빛의 그랜드 피아노로, 안방에 놓여 있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은 턱시도 차림의 조지였다. 데이는 피아노에 몸을 기대어 서 있다. 피아노의 연주가 시작되었을 때, 데이는 참으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악보를 살펴보고, 건반 위에서 춤을 추는 조지와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데이는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조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로 앞에 놓여 있는 긴 의자에는 로트와 아질라가 앉아 있었다. 오늘밤의 아질라는 황금의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에 검은 조화를 달고 있었다. 이것은 아질라가 살고 있던 세계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는 상장이었다. 젖빛에 가까운 흰 목덜미가 드러나 보이는 넓게 패인 이브닝 드레스의 하늘빛이 눈동자에 반사되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난로 속의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던 아질라가 로트에게 말을 건넨다. "참 좋은 곡이에요. 전 이런 큰 악기(그래요, 피아노라고 하셨죠)를 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해 봤어요." "저것은 쇼팽이지. 조지는 쇼팽의 곡을 잘 치거든. 그렇지. 아질라에게는 좀더 많은 작곡가의 음악을, 좀더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오페라도요. 그리고 극장에도 데리고 가 주신다고 약속하셨죠!" "물론이지, 데리고 가고 말고. 아질라가 보아야 한 것은 참으로 많고 많아요. 어쨌든, 지금까지 본 일도 없었던 새로운 세계에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니까." "그래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생활…… 벌써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지하철도 타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 틀림없이 깜짝 놀랄 거야." 그러나 아질라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하철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려요. 저 동굴의 무서운 일들이 생각나서 탈 마음이 없어요." 넓은 방에서는 실업가와 의사와 은행가가 로저스로부터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 트로오와 노스들은 올린에 있는 동굴에 살고 있었겠지? 좀더 조리 있게 얘기해 주지 않겠나? 아무래도 자네 얘기는 간혹 가다 건너 뛰는 데가 있어 자세하지가 못하단 말야…… 은행가가 까다로운 주문을 하고 있다. 창문 밖으로부터는 호들갑스러운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와 함께 20세기 뉴욕 시의 시끄러운 소음이 거침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작품 해설   시간 여행의 문제점   시간 여행은 이론상으로는 확실히 가능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현되면 곤란한 문제들이 있다. 첫째 문제는, '타임 패러독스(시간 역설)'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의 태곳적 세계에 갔다고 하자. 공룡이 설치는 원시림을 걷고 있을 때, 잘못하여 작은 벌레를 밟아 죽였다고 하자. 그런데 그 벌레는 수천 년 동안에 진화해서 젖먹이동물이 되고, 원숭이가 되고, 사람이 되어서 우리의 조상이 될 운명에 놓인 것이었다면……? 그 벌레가 죽으면 우리의 조상은 이 세상에 나타나게 않고, 조상이 없으면 우리는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될까? 벌레를 밟아 죽일 찰나 연기 같이 사라지고 말까? 그렇지 않으면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말 것인가? 둘째 문제는, 시간 여행으로 미래 세계와 과거 세계에 갔을 때 실체화된 타임 머신과 이미 그곳에 존재하고있는 물질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는 이 "280세기의 세계"에서 논의되는 것 같이 빌딩 옥상에서 출발한 타임 머신이 다른 시간 세계에 도달했을 때, 그 빌딩이 없어지고 만다면, 타임머신은 지상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지면이 솟아올라 산이 된 곳을 공중이라고 생각하고 타임 머신을 내린다면 산과 충돌하여 파괴되고 말 것이다. 혹은 타임 머신 자체 내부의 물질의 원자와, 도착된 시간 세계의 물질의 원자가 충돌하여, 원자핵 반응을 일으켜 무서운 대폭발을 일으킬 위험도 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려면 사람이 직접 타임 머신을 타고 다른 세계에 갈 것이 아니라, 카메라와 광선 등의 특수 장치를 이용하여 미래와 과거를 들여다보는 방편을 취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무서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시간 여행을 하면 타임 머신 내부는 보통 시간이 경과하고, 머신 외부 시간은 빨리 경과되어, 그 차이로 머신 안에 있는 사람이 미래 세계에 간다. 그러나 만약 조작을 잘못하던가, 시간 이동 장치가 고장이 나면, 외부의 시간은 그대로 있고 머신 내부의 시간은 빨리 경과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큰일인 것이다. 예를 들면, 시간 여행가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타임 머신을 타고 출발…… 그런데 아무리 지켜보아도 타임 머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얼마 후 찰칵 소리가 나며 머신 문이 열리고, 늙어 쇠약한 노인으로 변한 시간 여행가가 비틀거리며 나온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작품 속의 타임 머신은 헬리콥터를 개조한 형태인데, 시간 이동이 시작되면 기체가 맹렬히 진동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유령 같이 되어 외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들 중에 비행 접시를 본 사람은 없는가? '비행 접시는 타임 머신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광채가 났다가 꺼졌다가,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비행 접시는 어쩌면 미래인이 타고 올 타임 머신인지도 모른다.   280 세기의 세계 아이디어회관 과학 문고 SF 세계 명작 40   초 판      1976년 11월 20일 재 판      1977년 3월 1일 역 자      김 항식 조 판      크리스찬 신문사 오프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영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1182    위상진시인의 시모음 및 시평 댓글:  조회:792  추천:0  2022-10-14
위상진시인의 시모음 및 시평   -11월의 비/위상진-     지금, 어딘가를 쓰고 있을 H에게   너는 여섯 번째 나의 구두창을 갈고 있다   음이 소거된 티브이 뉴스가 거짓 수사가 많아지는 저녁을 꿰맬 때 구두는 너보다 먼저 늙어갔다   벽화처럼 정지된 얼굴로 부르는 노래는 믿을게 못 되었죠 말言이 안 되는 말들을 수집하는 나는, 특히 잘 있죠 '거기 윗동네 공기는 어떤가요?’   시간의 창살 뒤에 어디에도 없는 너의 말은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거울 같아 구둣방 거울은, 안주머니에서 시를 꺼내든 채 사라지는 너를 뱉어 낸다   나는 주크박스를 빼앗긴 음악처럼 창백해지고 공중에서 노란 비가 묻어있는 신문지가 떨어진다   거미는 담벼락에 못처럼 박혀버리고 안짱다리를 한 유령이 걷어찬 우유는 하수구로 콸콸 흘러들어간다   너의 젖은 말言 하나가 나를 지켜본다   잠시 자리 비우신 -문덕수 선생님께                                       위상진     프로이드의 중절모가 걸려 있고 흰 셔츠 접으신 채 돋보기로 책을 보시던 지성의 푸른 핏줄 펜 혹엔 늘 잉크가 묻어있었지요 시문학 4월호 ‘편집인 겸 주간 문덕수’ 직함이 지워져 있더군요 찬란한 꽃 망사 위에* 철커덩 셔터 내려오는 소리 나침반 같은 말씀 어디서 들어야 합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김시철 선생의 인사 말씀 흰 꽃잎은 뿌연 안경 너머 애도의 눈雪으로 날리고 죽음은 지상에 남겨진 자에게 구형求刑된 가장 긴 형기刑期임을 알고 계시지요   조셉 룰랭의 우편배달부 복장으로 갈아입으셨는지요 금장 단추 하나씩 채우고 모자는 살짝 삐딱하게 은빛 머리칼 반짝이는 거울을 보고 계시는지요   대학 1학년 ‘교양 국어’ 시간 짙은 눈썹을 응시하던 저는, 시 공간 저 너머 ‘시문학‘에 편입생이 되었지요 시인의 복무를 짚어보는 지금   그런데 선생님 보낸 이 받는 이 없는 편지 말고 누에처럼 쓰신 손글씨 싸인해 주신 첫 장에 발딱발딱 살아 숨 쉬는 손글씨 받고 싶습니다, 문덕수체 손편지를요   사무실 책더미 속에 꽃을 물고 있을 만년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는* 꽃보다 환하게 웃으시던 어제 뵈온 듯 아무 일 없는 듯 잠시, 아주 잠깐 자리 비우신 의자 있다. 있다       *선에 관한 소묘.1. 차용 *인연설에서 차용 *추모 시 ’영원한 우체부‘ 와 ‘잠시 자리 비우신’ 2편을 1편으로 재구성했다      *************      벽은 속삭인다       천국의 해시계는 사라지고 화면은 눈을 닫았다 백야의 객석은 음이 내려앉은 피아노 같았지 그토록 쉬운 말을 왜 할 줄 몰랐을까   새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귀 유예된 약속을 건져 올릴 때 속삭이는 벽과 열리지 않는 문에 관해 얘기했던가 말이 쪼개지는 저 너머 늘 기다리는 사람 더 기다리는 사람 생각보다 빨리 오고 시간보다 늦게 갔지 시차를 가로지른 밤은 불면으로 잃어버린 밤이다   환영과 환각 사이 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익숙한 장소에 도착한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붉은 물이 든 해변 글씨 자국이 난 꽃잎을 한 장씩 떼어 날렸지 익숙했던 패턴은 지워지고   무심한 듯 나타났다 없어지는 조각난 환영 눈물의 성분처럼 중얼거렸지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고    무대 위 페이지터너는 오늘을 넘기고 퇴장했다   쉼표 박물관         위상진     중국 현대문학관 테이블, 올챙이 무늬로 마구 찍혀 있는 쉼표들 멈출 수 없는 쉼표들은, 쉼표를 낳는 중일까?   쉼표는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음 문장을 끌어당기고 있어 오늘 아침 느닷없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떠올랐어 나는 좀 더 볼온해져야 할까 봐   구름은 나뭇잎을 갉아먹고, 나무 속으로 그림자를 밀어 넣는 중이야 그리다 만 액자 밖에는 아스라한 건물이 비탈에 서 있어 손으로 밀면 뒤로 넘어갈 듯해   소파 위에 놓인 사무엘 베케트 그의 눈 속엔 보라색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고요히 다문 입술, 고독이 밴 듯한 이마 낡은 셔츠의 보푸라기처럼 묻어 있는 말들   베케트의 문장은 쉬지 않는 쉼표로 가득해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깨어나지 못하는 쉼표들   북극에서 날아온 우울이 맺혀 있는 걸까? 신갈나무 한 그루, 빗속에서 한 호흡 쉬고 나뭇가지 끝에 달려 있는 연둣빛 물방울들 비 내리는 봄의 숲은, 쉼표 박물관 같아     - 2009.6월호       * 문학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문자로 표현한 예술이다. 그래서 문학 속의 쉼표는 "끊임없이 다음 문장을 끌어달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화자가 중국 현대문학관에서 문장과 쉼표를 보고 불온해지고 싶은 것은 쉼 없이 문학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나무 속으로 그림자를 밀어 넣는" 구름, "그리다 만 액자"는 그러한 화자의 내면을 암시한다. 그리고 「고도를 기다리며」란 부조리 문학을 남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독한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근원적 결핍과 욕망을 안고 사는 인간은 늘 구름 같은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불온하고 부조리한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물방을 쉼표가 달려 있는 "봄의 숲은, 쉼표 박물관"이다.    - 2010.오늘의 좋은시/ 푸른사상   중얼거리는 꽃 외 1편/위상진   면도칼이 녹아내리는 문장 뒤에 서 본 적이 있나? 언젠부턴가, 그방은 파지가 쌓이기 시작했어 알 껍질을 깨고 프린터에서 빠져 나오는 꽃이 중얼거린다   너의 이마에 찍힌 번호 도마뱀의 잘린 꼬리 같았지   나는 몽유병에 걸린 듯 단어를 찾아다녔지 사라진 천재들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 당길때 처음 듣는 낱말의 침전물이 부유한다   뼈대가 부서진 소조 같은 문장 발가벗은 사람들은 연필로 그려진 도시를 지나며 아무 말도 흘리지 않았어   우린 범종에 낀 불협화음처럼 같은 책을 들고 다른 페이지를 뒤적였지 의심의 맨 끝에 도착하지는 못했어 충혈된 시계위로 폭설처럼 쏟아져 내리는 파지   누가 녹아내리는 면도칼의 문장을 알아챌 수 있을까? 1초도 자기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 시간처럼 바스락거리는 이파리 소리   도무지 닫히지 않는 귀 하나, 여기 있다      불속의 비둘기   검은 봉지속, 귤이 해가 지는 쪽으로 쏟아질 때 그 불은 경찰서 뒷마당에서 시작되었죠   새들이 날개를 접는 시간 버섯구름에 싸인 비둘기 집   머리 위의 불꽃이 타다만 비둘기가 각목처럼 툭 떨어지며 비명도 없이 날아갔죠   호루라기 소리 어른거리는 불꽃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렸죠   나는 당신과의 거리를 사랑한 것이라고 잔느* 처럼 사라진 눈동자가 꾸는 꿈이라고 밤기차 유리창에 악착같이 달라붙은 사랑 어디까지 따라 왔을까요?   이제 당신의 눈동자에 불사조를 그려 넣고 싶어 불에 타다 만 비둘기는 니그로 조각 같아요   * 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모딜리아니가 죽자 임신한 몸으로 투신했다    -시집 그믐달 마돈나에서   아주 심한 자물쇠   ​    위상진 ​ ​ 내 이름은 스파이, 내 이름은 바람 여러 개 이름으로 온몸에 자물쇠를 채워두었지   나를 통과한 검은 역광들,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 무엇인 갑옷 속 눈물이었지. 얼룩말처럼 달리고 달리던 청동색 먼지를 뒤집어쓴 원판들              380달러에 경매되었다지. 15만 통의 필름 그 얼룩말의 발굽에 붙어있는 겹눈들, 부재중인 내가 현존하는 전시회, 예지몽도 없이 빛의 제국으로 입국한 건가?   아주 심한 자물쇠를 채워둔 단단한 성채(城砦)였는데, 흔들리며 덜컹거리며 수 만 번 열었다 닫았지. 반도 네온의 노란 슬픔을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묶여있는 개의 눈빛, 죽은 줄 모르고 귀부인 목에 감겨있는 여우의 말간 눈   오려낸 시간에 방아쇠를 당겨버린   다친 인형을 뒤지던 내가 피사체가 된 건가. 휘발한 자국을 가만 내버려 두기를   파. 벽. 돌.처럼 떠 있는 구름 불타는 이마 위에 쏟아진다. 수상한 스파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   벤치에 앉아있다. 까마득히 날아가는 새떼 허공은 다시 아물고. 혼자 듣던 아침의 새소리는 이제 그만   수요일에 도착한다던 장미는 몇 번의 수요일이 지나가고   카메라에 칼처럼 꽂혀있다. 섬광처럼 보이는 나만 나에게 호명하는, 비비안 마이어라고 해       *비비안 마이어(1926~2009): 뉴욕 출생. 유모라는 직업을 가졌던 여자. 존 멀루프가 15만 통의 사진을 경매소에서 사들여 전시회를 열었다. 생전에 한 점도 공개한 적이 없는 비비안은 전시회를 통해 천재 사진작가로 호평받았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월호 발표 조명등 밖으로     위상진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출입구 천장에 붙어 있는 죽은 시계 나는 그에게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거지처럼 드라이아이스는 낮게 깔리며 내 발끝으로 들어온다 누군가 흘리고 간 이력서 같은 진주목걸이 바닥을 굴러다닌다   나는 어두운 대기실에 앉아 커튼 사이로 무대를 엿 본다   언 생수통이 깨지듯 얼굴 위로 빛이 쏟아진다 꽃가루를 수정하는 벌새들의 날개 짓 같은 빛 나는 커튼의 한쪽 끝으로 몸을 말고 싶다 유랑서커스단이 천막을 걷어내듯   교회 담벼락 옆엔 흐르다 만 전선줄이 깨진 조명등 밖으로 나와 있다 어디서 급하게 창문 닫는 소리   내 발밑에 내리는 질산 같은 눈 길 끝에는 보이지 않는 커튼이 내려져 있다 눈은 흰색을 지우고 어둠을 부식 시킨다 그것은 말랑한 벽이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무대 밖이다       8분     갑자기 화면이 뚝 끊어졌다 나는 소리만 들리는 영화관에 앉아 비어있는 화면을 마주 한다 눈을 뜨고 있는 눈 먼 자의 시간   이미 읽어버린 영화전단지를 접었다펼쳤다 했지 어둔 화면은 소리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줬다   잃어버린 내 망사장갑 한 짝을 내밀며 눈을 맞추지 않던 눈 나를 위해 연주하던 기타 위의 긴 손톱 소리만 들리는 70년대식 사랑은 여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화면 저 너머 내가 들여다보기를 거부한 훔친 물감 같은 내안의 소리 지하 기도소의 돌이끼같이 번식되는 시간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영사기는 계속 돌아간다   양철 지붕 위의 빗소리로 가득한 극장 박쥐처럼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파지를 태운 재 같은 어둠의 주름을 밀치고 불이 들어왔다   복원되지 못한 화면은 필름 세척자의 이름과 함께 흘러내렸다 잃어버린 8분을 집행유예로 남겨둔 채       가방 속의 탁상시계     저녁은 고해신부의 귀처럼 비밀을 향해 자라기 시작했다   너는 작은 보폭으로 한 걸음 나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울다 들어갔다 나는 오늘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연극을 보고 나는 맛없는 국수를 먹는다 국수집 창으로 시침처럼 달라붙는 빗물 나는 검은 유리창에서 이름을 지운다   어떻게 나를 전환할 수 있을까? 수십 개의 소리를 가지고 팩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목록 중에 내가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무엇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한 듯 건너뛰고 싶은 생일날 너무 늦게 도착한 축하 메시지   만화경의 색종이 무늬가 사라진 후에도 새로운 무늬를 기다리던 시간은 탁상시계처럼 가방 속으로 기어들어갔지   나의 가방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내 몸의 태엽을 풀어놓고 나는 권태로운 생일을 관리한다   지하철 입구 젖은 양동이에 담겨 나이 수대로 계산되는 꽃송이처럼 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혼자 듣는 뻐꾸기 소리는 저녁과 함께 사라졌다 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의 끝을 따라 나는 거울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끊기지 않는 탯줄 위상진    발등 뼈가 아프다. 네 생일이 오나 보다. 산후조리할 때 바람 쐬지 말랬는데 그만 찬물을 발등에 부어버렸다. 너는 이 세상에 이 견딜만한 아픔으로 발등에 왔다. 시(詩)도 아이가 내게 오듯 그렇게 왔다. 끊기지 않는 탯줄 해마다 길어진다.     바다로 내리는 잠 위상진   그는 밤마다 부적을 따라 나선다 스틸녹스 두 알을 입에 물고 가수면의 바다로 잠겨든다 더 이상 지느러미를 흔들 수 없을 때까지 잉크처럼 풀어지며 해저로 가라앉는다   암청색 바닷물이 이마 위로 흘러가고 형광빛을 내는 몸은 물고기 알을 낳는다 내리지 않는 잠은 심해어 울음소리를 낸다   그때 앞집 여자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 열쇠 구멍으로 머리를 밀어넣는지 덜그럭거린다 어딘가로 핸드폰을 눌러대는 소리   밤의 소리들이 달팽이관에서 비틀거린다 어디서 잠의 노래가 들려오나 남아있는 비상약 한 알을 삼키고 잠은 더 깊은 어둠으로 흘러드는데   앞집 여자는 밤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 *스틸녹스 : 수면제     길 혹은 고양이 위상진   1. 종로 3가 지하도 낯선 음악이 울리고 있다 안데스를 넘어 온 차고 맑은 선율, 까무잡잡한 얼굴에 치렁하게 묶은 머리, 키 작은 악사들이 물안개처럼 피워내는 미소, 지하로 날아든 십일월의 철새 같은 엘 콘드르 파사   쓸쓸하고 달콤한 팬플룻 소리, 하늘로 울리던 의식 같은 음악은 오후 세 시의 지하 사막을 건너간다 안데스 계곡을 감아 돌던 바람은 갈 데 없는 노인들을 덮어주고 철새는 날아가고   2. 북경 천지극장, 사내아이가 반 쯤 늘어진 줄 위를 간다 아이가 밟고 가는 줄이 흔들리며 절벽으로 떨어진다 몸을 돌려 그네를 탄다 숨죽여 증발하고 싶었던 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줄 위에 얹혔네 적막한 그림자가 뛰어내리며 밀려난다   3. 눈 내린 길 위에 발자국이 젖어들고 있다 고양이 한 마리, 납작한 배에 그림자를 달고 검은 비닐봉지를 따라간다 고양이 발에 찍힌 길이 파랗게 돋아난다   -------------------- *엘 콘도르 파사 : 페루의 민속음악 ‘철새는 날아가고’로 우리나라에 아려졌고, 사이먼 가펑컬이 불러 유명해진 곡. *산뽀냐 : 팬플룻 같이 대나무관을 나란히 묶어 앞과 뒤의 단이 지그재그 모양을 한 안데스 전통악기.         수족관 위상진   불꺼진 수족관의 물고기는 거기가 바다인 줄 알까 저녁 어스름 사이에서 별이 가물거릴 때 비늘이 해진 입을 벙긋거리며 빛을 따라 옮겨 다니네   시간은 글씨가 사라진 양피지 같아 어둠은 지워진 문장을 다시 쓰게 하네 물고기의 흐린 눈은 물소리를 찾아가고 나는 더듬거리며 문을 그리네   창가에 걸린 마그리트 그림 속의 여신은 하얀 대리석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기억을 쏟아낸다 바다는 수평선을 끌어내려 구름을 가둬놓고   그 안에 흐르던 물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밤의 유리창은 꺼진 티브이처럼 캄캄해 검은 거울 속에 나는 담겨 있네 밤이 기억을 찍어 전송하는 동안 블라인드를 내리네     물렁물렁한 방 위상진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해질녘 잠깐 문 앞까지 빛이 왔다 가기도 한다 방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듯 쉽게 다가갈 수도 없다   태아처럼 손가락을 빨며 너는 방에 담겨 있다 그때 스탠드 불은 펼쳐진 책을 더듬어 보기도 했을까    63빌딩 전시실, 이집트에서 온 람세스 2세는 삼천이백육십 년 째 자고 있다 북쪽으로 문을 낸 피라미드처럼 검고 깊은 방, 다시 깨어나기 위해 외우는 사자의 서, 관 속에서도 왕은 파피루스에 인장을 찍고 있겠지 람세스의 심장은 방부제로 가벼워져 있고 신이 되고 싶었던 시간은 물렁물렁해져 있다 왕은 그 시간에 울기도 했으리라 람세스의 가슴에 붙어있던 쇠똥구리는 날개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중일까?   저물녘, 조금 늙어버린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머리맡에 구겨져 있고 너의 몸에서는 비늘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계를 더듬으며 너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황사가 내리는지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초저녁 먼지 냄새는 굴목으로 번지고 길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림자를 삼켰다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방은 다시 피라미드처럼 그윽해진다     방향감각이 없으니 위상진   참 딱한 일인 게, 나는 방향감각이 없다. 길 떠날 일 생기면 일단 걱정이다. 아드은 출발해서, 도착 때까지 전화로 길 안내를 해. 거기다 남편까지, 나 같은 사람 어디 인신매매단에라도 끌려가면 길 몰라 도망치는 일도 쉽진 않을 거란다. 아들은 이미 서너 살 때부터 눈치 챈 일이다. “엄마 이리 가는 것 맞아?” 다짐에 다짐, 어쩌다 남의 차라도 타면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요?” 등줄기 땀이 나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살아가는 일도 그랬다. 어리둥절, 허둥대고만 있다. 늘 나는…   두 개의 시선 위상진 르네 마그리트, 그는 그림에 문을 달아 주고 나가고 싶었을까 그의 언어가 그림으로 들어갔네 유리창을 열고 나간 바다가 새의 날개를 달고 있어요 그곳으로 날아든 새는 시간을 놓아 버렸네 창 안의 바다는 우울하게 저물어가고 숨겨진 그림은 보이지 않는 섬이 되는 걸까 밤의 공중전화 부스를 열었어요 그곳에 갇혀있는 어둠은 또 하나의 그늘이 되기도 하나요 부스에 담겨있던 말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네요 누군가 누르다 간 번호판 움푹한 곳에 지문이 파랗게 돋아나고 있어요 자정에 멈춘 시계에선 여전히 시간이 새어나오고 머뭇거리던 안개가 부스를 섬처럼 둘러싸요 - 2007. 겨울호 물렁물렁한 방 위상진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해질녘 잠깐 문 앞까지 빛이 왔다 가기도한다 방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듯 쉽게 다가갈 수 없다   태아처럼 손가락을 빨며 너는 방에 담겨 있다 그때 스탠드 불은 펼쳐진 책을 더듬어 보기도 했을까?   63빌딩 전시실, 이집트에서 온 람세스 2세는 삼천이백육십 년째 자고 있다 북쪽으로 문을 낸 피라미드처럼 검고 깊은 방, 다시 깨어나기 위해 외우는 사자의 서, 관 속에서도 왕은 파피루스에 인장을 찍고 있겠지 람세스의 심장은 방부제로 가벼워져 있고 신이 되고 싶었던 시간은 물렁물렁해져 있다 왕은 그 시간에 울기 도 했으리라 람세스의 가슴에 붙어 있던 쇠똥구리는 날개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중일까?   저물녘, 조금 늙어버린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머리맡에 구겨져 있고 너의 몸에서는 비늘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계를 더듬으며 너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황사가 내리는지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초저녁 먼지 냄새는 골목으로 번지고 길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림자를 삼켰다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방은 다시 피라미드처럼 그윽해진다     게재지: 2008년 11월 시문학 발표 이름: 위상진 등단:1993년 시문학       출처: 계간 시향 원문보기 글쓴이: 글나무   무성의 입술   위상진   석고상은 붉은 입술로 일렁거리는 말을 한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진다 회색 피가 흘러나오는 제라늄 화분 그는 입술을 더듬어 본다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   낮에도 밤은 여러 번 찾아왔고 휘어지는 길을 따라 아침은 사라졌다 간호사들은 오늘 죽은 사람의 생일 케잌을 우물거린다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올라가는 간판 창밖의 검은 태양은 바닷물 색을 울컥 울컥 쏟아내고 간판이 있던 자리 공중에 걸린 둥지 하나 어린 새의 솜털이 묻어 있다   구름그림자를 덮어쓴 간판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는다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   그는 유리창 위에 입술을 벙긋거린다 한 단어 한 단어 말의 입김이 번진다       필자가「무성의 입술」을 논평하는 이유는, 필자가 주장한 시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시론은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한 행에서 단어와 단어의 낯설게하기, 어절과 어절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를 완벽하게 실현하여, 자기 이름의 상표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필자의 시론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시를 쓸 때 ‘제목, 단어, 표현, 비유’에서 닮은 표현을 피하기 위한 고민을 필자도 한다. 누군가의 시에서 읽은 것을 ‘무의식적 표절’을 할까 두려워 새로운 ‘표현’을 버리기도 한다. 위상진 시인은 그럴 때 ‘인터넷 검색’을 하여 검증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위상진 시인의 시 특징은 사동보다는 피동적 표현기법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는 그 경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6개의 연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며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 행 안에서의 단어의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그믐달 마돈나』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한 연 내에 여러 개의 파생된 보조관념’이 등장한다. 부채살처럼 여러 개의 보조관념이 마디마디 퍼져 있다. 은 1980년대부터 양준호가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을 도용한 ‘단어 흩뿌리기’ 표현기법을 구사하여 ‘행과 행’,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를 이미 보여주었다. 그러나 위상진은 ‘객관화’와 ‘재해석’ 특징을 추가하였다. 또한 표현주의를 추구하지만, 감각적 미의식과 진정성이 엿보인다. 아래의 대사는 거짓이 아닌 참이다. 작가의 목소리든, 화자의 생각이든, 3인칭 타자의 무의식을 차용하였든, 진정성이 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1연)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2연)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3연)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5연)   자동기술기법으로 연과 연을 단절하고, 흐름을 끊어주지만, 객관화에 집중하였다. 또한 ‘제목’과 ‘마지막 끝연’의 ‘끝행’에서는 반드시 객관화를 실현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지나치게 집중한 ‘낯설게하기’가 산만하거나 복잡하거나, 통일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의적, 다의적 ‘표현주의’ 기법은 새로운 ‘심미적 미의식’을 만들고 있음에 주목한다.   -묻어버린 시계/위상진-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빈 잉크통을 들고/위상진-     잉크 충전 가게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프린터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고양이는 내 방문을 열심히 긁다가 문 앞에 오줌을 싸버렸다 닫힌 문들에 대한 기억은 본능에 각인 된 두려움일까?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미래에 경매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가격이 매겨질 것이다 또 변덕 같은 비밀이 만들어지리라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셔터가 내려진 문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고 싶다 물감은 주목 받지 못한 표현주의자의 얼룩처럼 흘러내릴 것이다 문을 닫은 그들은 문을 빠져나간 걸까? 바깥에 의해 갇혀버린 걸까?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고 빈 잉크통만 어둠과 상관없이 남아 있다   -초승달/위상진-     고양이가 엄지발가락을 깨물어 너를 깨운다 끈적한 침을 발가락에 묻히고 지독한 근시로 너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불 위에 떨어져 있는 검자주색 핏물이 든 발톱 고양이는 발톱 안에 혈관이 있어 무라노 섬에서 그가 보낸 초승달 모양 목걸이가 도착했다 밤하늘을 오려낸 오색 금빛 별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고양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발톱 모양의 목걸이를 건드려본다 무라노 섬에 유배된 유리공의 손길은 너의 목에서 흔들리고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 있다   -초현실주의/위상진-     아무래도 코가 비뚤게 됐나봐 이 돌파리 의사! 다시 수술을 해 달라 해야지 거울 속의 여자는 분필 같은 코뼈를 바로 잡고 있다 한 밤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누군가를 닮고 싶은 이들은 눈 코 입을 바꿔버렸다 창백한 얼굴은 어긋나지 않으려고 어긋나고 있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사랑하고 헤어진 연인은 욕설을 퍼붓는다 참 멋진 놈이었는데, 나쁜 놈!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펴지지 않았다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위상진-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시차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 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까?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누군가가 두드린다 위상진   바람은 여러 개로 늘어났다 무의도 바닷가의 돌탑 기원은 땅 속으로 묻히지 못하고 나는 돌의 심장 위에 작은 돌을 얹었다   어제 벽시계가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 폭발물처럼 산산조각 나는 유리컵 놀란 고양이는 총알처럼 튀어 올랐다   시계가 숨을 쉬지 않았다 내 손이 닿으면 바늘이 가고 손을 놓으면 꼼짝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안았을 때 심장은 고장 난 시계 침처럼 쿵쾅거렸다 고양이의 심장이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수리점에 맡긴 벽시계는 부속을 전부 갈아야 했다 나는 시간 밖으로 추방당한 국외자   나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고 시계가 없는 벽 위에 덩그러니 박혀있는 대못   푸르스름한 불안은 시계가 차지했던 벽으로 번져갔다   작은 돌은 그날 나의 별자리에 닿지 못했다 위상진   경북 대구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미술교육과 졸업 및 경희대학교 대학원 수료  1993년 11월 월간 ≪시문학≫지에  시 , , , 등이 당선되어 등단.  광명문학 신인상 수상  前. 미술교사로 재직, 구름동인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광명시지부 사무국장, 시문학회 간사  現. 한국문인협회 광명시 지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시문학사  2001 고체의 회화 손미   Ⅰ 사람은 액체다. 70%의 물로 구성되어있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그렇거니와 작은 새 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면 몸속의 물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기분 좋은 칭찬 한마디에 날아갈 듯 가벼워지기도 하고 사나운 말 한마디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감정은 물을 틀에 붓는 것처럼 변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불안과 공포까지 틀에 따라 우리는 다른 감정을 안고 산다. 이렇게 요동치는 액체가 되어 날마다 다른 결정을 보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특히 시인은 더욱 다양한 감정의 지배 아래 그 어떤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가장 맑은 액체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 물컹한 액체가 부르는 고체의 노래 다섯 편이 있다. 위상진 시인의 「묻어버린 시계」외 4편을 보면 화자의 “복수심처럼 굳은” 테두리를 목격할 수 있다. 화자는 자꾸만 부서지는 손톱으로 굳게 닫혀 있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딱딱한 마음이 들어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순간, 시인은 고체의 회화 展을 열고 독자를 초대한다.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 위상진 「묻어버린 시계」 전문   그림 속에서 발견한 “굳어버린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한다. 감정을 잃은 미라의 상태. 살과 피를 잃은 대상은 어쩌면 죽은 것일지 모르지만 시인은 대상을 장례(葬禮)하지 않고 몸을 뒤져 심장을 찾는다. 그러나 굳은 대상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것은 “세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딱딱할 뿐이다. 결국 깨지는 건 벽이 아니라 새의 살점이겠지만 대상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 붉고 뜨겁게 열릴 테지만 화자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한때 생생하고 말캉하게 살아있었던 그것. 박제된 동물처럼 형체는 그대로지만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대상을 화자는 바라보고 기다린다. 그럼에도 화자는 대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시간의 잘못이라 정의한다. 물감이 굳는 것도 마음이 굳는 것도 시간 탓이다. 화자는 태엽을 풀어 시계를 묻어보지만 이런 눈가림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마음을 만류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땅 밑에 두고 화자는 다시 뚜껑을 열고 굳은 물감을 발견하고 그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굳은 마음이 용해되길 기다리며.   Ⅱ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중략…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 「빈 잉크통을 들고」 부분 화가 두 사람이 실종됐거나 죽었지만 신문에서조차 그들은 “검은 네모 칸에” 갇혀 있다. 죽은 사람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상황에서도 화자는 입구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네모 안에 갇혀야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체 되기를 거부한다. 어떻게 지켜온 마음인데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다” 화자는 그런 세상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며 왜 벌써 포기하느냐. 왜 머무르지 않느냐며 소리치고 싶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화자는 빈 잉크통 같은 빈 우물 속으로 두레를 집어넣는 것이다. 공허와 어둠만 길어 올리겠지만 아직 화자는 굳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중략…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다 - 「초승달」부분 그는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부동이 없다. 벽, 굳은 물감, 굳은 식빵처럼 요동도 없이 딱딱하기만 하다. 그의 마음은 잘라내도 아프지 않은 손톱이거나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들어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고체이다. 어쩌면 화자는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무뎌지고 무거워진 대상을 굳은 대상으로 선정해 놓고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도망갈 자세로 “창가에서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으리라. 한 밤 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중략…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 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퍼지지 않았다 - 「초현실주의」부분 「초현실주의」에서 화자는 다른 시선을 부여한다. 화자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딱딱한 대상은 어쩌면 “딱딱한 식빵”이 아닌 “마네킹” 같은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 화자의 속에서 굳어버린 아이 같은 내 자신, 그래서 모두가 문을 닫고 폐업을 하고 굳어버리는 이 상황에서도 나는 굳지 않고 끝없이 온기를 유지하려 애쓴 것이다. 가짜와 진짜가 뒤섞인 채 의식은 굳어가고 생각도 굳어가고 진실이 어느 것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화자는 왜곡되지 않은 진짜를 바라보고자 눈을 부릅뜬다. 인터넷 속 공간과 CCTV의 공간, 한번 걸리진 이곳에서 가짜들은 더욱 강하게 방류된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가식들 속에, 나의 가짜 말들도 떠다니고 있다. 이쯤에서 화자에겐 뾰족하고 독한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이 고체들을, 이 가식들을 부숴버릴 단단한 이빨 말이다.   Ⅲ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사치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가?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 전문   그래, 이제 단칼이 필요하다. 화자의 결단이 필요할 때다. 이 고체들을 부숴버릴 것인가. 형틀에 부어도 모양을 바꾸지 않는 이 고집들이 그녀 안에서 어느덧 단단해지고 있다. 껍질을 딱딱하게 하는 것은 방어한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칼”로 화자는 이 방어자들을 깨부술지 더 단단한 모양으로 깎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다음 모양이 궁금하다. 화자는 이 고체들과 다른 이야기를 만들며 계속해서 흥미로운 노래를 불러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계속해서 고체의 회화를 그려나갈 것이고 회화는 굳고 녹으며 독자를 대면할 것이다. 그녀의 전시회엔 테레핀 냄새가 진동하고 한쪽 벽에선 그 고집스런 회화를 뚫고 나가려는 머리 터진 새들도 보이겠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녀에겐 굳어버린 유리에 진심을 부으며 고체의 회화가 뚝뚝, 떨어지길 기다릴 고집이 있으니 말이다. 손미 2009년 『문학사상』시 부문 등단  
1181    김규화 시론 댓글:  조회:615  추천:0  2022-10-11
        전율, 그 감동의 이중적 거리        -김규화 시인의 소통의 도구와 통로                                          엄창섭(관동대 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고문)          1. 삶의 구조와 빛나는 서정의 지평   견고한 고독의 김현승 시인에 의해 1963년 과 1964년 , 그리고 1966년 이 『現代文學』에 추천됨으로써 우리 문단에 공인된 김규화는 1940년 2월, 전남 승주의 출신이다. 1960년대 초부터 「燈문학」, 「零度」동인으로 활동했으나 1977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 땅의 ‘현대시의 길닦이·길잡기·길트기’를 이끄는 월간 『詩文學』의 발행인이다. 일찍이 첫 시집의 서문에서 구상이 ‘드라이 와인의 맛처럼 건조하다.’라고 그의 시를 지적한 것은, 세류의 시편들에 견주어 시인의 삶이나 세상에 놓여 진 갖가지 사물에 대한 인식의 독자적 진실과 정직성, 그리고 사회현상의 변이에 까닭 없이 분노하거나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묵언의 교시를 추구한 시인의 품격(品格)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첫 시집 출간 직후부터 “그를 향해 흘리는/ 물 같은 애정/ 그를 향해 쏟는 향그런 미움(이상한 기도)”의 발성으로 따뜻한 정신기후를 조성하며 인간소외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열중한 김규화 시인의 시작 행위는 눈물겨웠다. 그 자신의 시편에 풀어낸 ‘삶의 구조와 빛나는 서정의 지평’은 “수억 년 우주 안에서 보니/ 인연 중의 인연이라,// 하느님이 내려다보시니/ 좋으시다(因緣)”라는 시적 상상력의 확대는 서정적 시학에서 연유한다. 까닭에 모두(冒頭)에서 전제할 사항이라면 그만의 상상과 추상에 의한 내면인식에 침잠되어 빛나는 시적 치유를 위한 고뇌야말로 갈증의 시혼(詩魂)을 적셔주는 감동의 회복이기에 엄숙한 생명외경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날의 탐색과 각고의 노력으로 카타르시스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그만의 개아적인 느낌, 색깔, 체취가 선명한 시적 형상화에 관해 ‘공간과 시각, 그리고 시적 기교성’을 해체하고 재창조하는 집념은 의미 있는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모름지기 음울한 이기주의로 순수성이 매도되어 미적주권을 확립하기 힘겨운 혼돈(카오스)의 시간대에서도 김규화 시인은 절대 고독 앞에서도 삶의 순간을 ‘푸른 식물성 언어를 사용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갈등·구조 속에서 소통의 도구로 교신하는 그 나름의 비법을 터득하고 있다. 새삼스런 지론은 아니지만, 김규화 시인은 ‘생명의 기호로 공간을 미학적으로 장식하는 시적 기법’에 뛰어난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존재이다. 삶의 일상에서 그 자신이 틈틈이 정신적 부산물을 형상화한 시편들은 보다 엄격하게 유의미한 것으로 적확, 격렬, 구체적, 복합적일 뿐 아니라, 리듬과 형태의 표징을 기호화하고 있다. 특히 그의 시편에 수용된 정직성은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는 비법과 접목되어 그만의 저력과 독자의 관심을 끄는 역동성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의 생생한 일탈의 정신은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의 대비로 수용된 시적 인자(因子)로 감성에서 배어나온 애련(哀憐)의 눈물이기에 신선한 감동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일단, 을 통해 “일상의 관찰과 실존적 언어(김시태), 단절과 혼돈의 세계(김열규), 혼의 깊이, ‘안 보이는 나라’로의 여행길(홍신선), 존재의 심연 그 시간성과 공간성의 조응(이상옥), ‘無明을 밝히는 등불의 미학(신규호)” 등으로 다양하게 논의된 시적 이론에 접근할 수 있다.    시집가는/ 죽음은// 곱기도 하지/ 꽃은/ 말라서// 채혈(採血)환자같이/ 부르르 떨고//                 -에서   여기서 생명의 모형이며 총합인 본래적인 본향(本鄕)의 개념은, “여위어 가는 눈짓들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상큿한 머언 고향의 내음새(가을의 햇볕에서)”를 통해 인식되는 자연회귀와 연계된 영원한 모성에서 비롯된 깊은 애정의 드러남에 의한 행복한 공간이다. 일상의 소재를 보편적 정서에 담아 형상화 시킨 김규화 시인은 이처럼 ‘죽음’을 삶의 새로운 이행인 ‘시집’으로, ‘상여’에 식물성의 극치인 ‘꽃’을 접목시킨 ‘꽃상여’로 그만의 시적 매력을 이채롭게 빚어내고 있다. 까닭에 그의 시혼은 너무 맑고 투명하게 빛나 항상 칙칙함에서 빗겨나 있다. 그의 서정적 미감이 가을 햇빛을 메타포 한 에서도 ‘바알간 등불’로 인식되고 급기야는 ‘나의 하느님’으로 변형되어 한 순간 빛을 토해내기도 한다.     북극의 빙산을 쪼아서 만든/ 자잘한 얼음칼이다// 허공을 가르며 내려오는/ 따끈한 전열(電熱)이다// 건물에 부딪쳐 깨어지는/ 다이아몬드 속살이다// 땅위에 내려앉아 포르락  거리는/ 한 무리의 참새 떼다// 곱게 물든 단풍잎 갓을 단/ 바알간 등불이다// 고개를 치켜들고 맞이하는/ 단풍잎 사이 나의 하느님이다//           - 전문 서정시 쓰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간대에 한국현대시사에서 ‘가장 표준적인 서정시의 텍스트’가 되는 김규화 시인의 시집 『평균서정』(시문학사, 1992)은 혹자의 지적처럼 장정(裝幀)도 컬러풀하지만, "맑은 것 차가운 것들을 통해서 감각의 깊이 혹은 혼의 깊이를 더하려 한 가을 시편과 마찬가지로 김규화의 마음의 움직임은 이미 그 안 보이는 나라로의 여행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대상화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앞서 말한 이야기 시들을 통하여 이웃까지 대상화되고 있기에."라는 홍신선의 ‘시상을 자르고 토막내고 확대한 적확한 시평’은 가희 가편(佳篇)이다.   이 같은 시적 상황의 실제적인 해석으로 따뜻한 영혼을 지닌 사제로서 다정다감한 김규화 시인에 대한 시정신과 작품에 대한 분할과 통합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어두운 삶의 질곡 속에서도 가시적인 모든 물상이 끝내 소멸되지만 창의적인 예술가는 그의 이전 작품에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전통의 실타래를 다시 꼬아내면서 계속해서 다음 작품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을 부단한 몸짓으로 우리 앞에 명증해 보이는 성실함을 ‘감춤과 미끄러짐의 시학'이라는 담론을 통해 교시하고 있다. 모름지기 우리는 구조적으로 암울한 사회현상에서 존재의 가벼움을 체험해 왔다. 그러나 자명한 것은, 미래의 21세기를 구축하는 힘은, 예술문화에 대한 안목의 확장이며 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움이기에 거부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김규화 시인은 『관념여행』의 자서(自序) 격인 서 “나의 이런 의식은 안으로 둥지를 틀고 관념의 알을 낳는다. 나의 시는 주로 의식의 넓은 바다에 빠져버린 그 무엇을 찾는 작업이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이 점에 비추어 시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밝은 그 자신이 ‘의식의 바다에 침몰하는 시’라는 부제는 그만의 체취와 느낌을 물씬 풍겨주어 이채로운 착각을 불러오기도 한다.       철책문은 오늘도 열리지 않고/ 나를 구경하러 온 사람도 없다/ 나는 더욱 더 심심하여지고/ 얻어먹을 과자는 한 톨도 없구나//               ―에서   특히 김규화 시인은 “조련사가 나의 힘을 조금 빼 버리고/ 나의 목젖도 수술해 버렸다./ 단지 나는 땅에다 배를 대고/ 날마다 졸리는 눈 감고 있다(기(氣)”를 통해 아직은 격리되고 닫혀 진 삶의 일상에서 졸리는 눈 감고 있는 현상에서 문득 기(氣)를 연상하고 발현시킨다. 때문에 정종진의 지적처럼 그에게 있어 시의 정체성(identity)은 “기가 응축되는 그릇”이거나 “절망 속에서 키운 꽃이고 열매”로 선명하게 밝혀지는 것들이다. 한편, 홍신선이 김규화 시인의 작품세계를 로 해석하며, 전통적인 서정시만으로는 독자나 시인 모두가 성에 만족해하지 않는 것으로 거론하고 있다. 이점에 견주어 황동규의 극서정시, 일부 민중 시인들의 서정서사시, 서술시 등은 모두 이 같은 추세의 텍스트적인 모형에 해당한다. 물론『평균 서정』에 수록된 몇 편의 이야기 시편들은 평균인들에 관한 일종의 사적인 기록물이면서 이들이 생산한 우리사회의 결과물임은 수긍해야 할 타당성이 따른다.   여기서 안철수의 기술을 빌리면 ‘의식의 바다를 항해하는’ 김규화 시인의 경우, 또 비록 시 선집에서는 제외된 또 다른 그의 시 “사는 것은 흙을 파는 것/ 죽는 것은 까마귀가 우는 것(죽음의 서장)”에서나 불교의 중도론 적인 관점에서 형상화 시킨 “나, 여기서/ 사소한 일로/ 기뻐도 슬퍼도/ 당신에게 모르는 일//...생략.../ 우리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 되는 것이다(永劫論)”를 통해 시인의 자아가 자기성찰에 도달할 즈음, 자아를 통렬하게 괴롭히는 현실의 곤혹을 응시하는 모순과 갈등의 구조를 접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한 편의 시는 존재 내면의 증상(症狀)이기에 사회학·심리학·음악학 등에 비판이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미학의 발전을 역사진화와 진리추구의 중요 요소로 역설한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는 서정시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질과는 상이하게도 양적 진화라는 측면에서 지금도 여전히 시의 모태(母胎)인 서정시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서정성은 시의 본질적인 인자(因子)로서 인간의 내면의식의 심층에서 다행스럽게도 공명된 삶의 비의(秘意)를 함축해 왔다. 기실 김규화 시인은 세 번째 시집 『관념여행』의 자서에서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인 우리들은 그의 시작품에서 허무와 회의, 방황과 모순, 고통과 불안을, 그리고 그 자신과 그의 삶, 그리고 그를 에워싼 세계 등 단절과 혼돈의 사슬로 엮어진 세계에 대해 투명하고 깨끗한 생명적 기호로 노래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손톱에도 까만 활자를 묻혀 오고/ 손가락은 노상 오물거리고/ 손가락은 노상/ 완강한     집게가 되고/ 엉거주춤 구부린 둥그런 모습,/ 어둑한 그의 생애를/ 똑바로 보려고 기지     개를 켠다/ 세상은 이렇게 정직하여서/ 그래서 성공한 눈물이라며......//                -에서   위의 시편 에서 피상적으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소외계층의 한숨이 묻어나는 음울하고 눅눅한 일상적 삶의 고통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격정을 갈아 앉히고 물안개에 가려진 사물의 실상, 즉 본체를 탐색하고 응시하면 비록 세월의 인고 속에서도 늙은 인쇄공이 자신의 천직을 강직한 자아 의지에서 비롯된 정직한 삶을 반추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김규화 시인은 모처럼 네 번째의 시집 『평균서정』에서 평균인들의 소박한 일상을 따뜻한 감성적 시선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특히 김규화 시인에게 고향이란 “이미 저승으로 가신/ 아주 옛날 광주의 어머니들이/ 그 품을 크게 열어 놓고/ 젖가슴같이 구부러져 있는/ 그 품을 크게 열어 놓고/ 높은 봉우리 낮은 봉우리 없이/ 너희들도 평등하여라 하고(무등산)”에서 확인되듯 어머니의 풀어놓은 젖가슴같이 언제든 안기면 포근함과 넉넉함으로 감싸주는 곳, 파랗게 유년이 자라는 처소이다. 비록 생득적 체험의 공간인 고향은 시대 상황으로 인해 상실한 공간이지만, 의식 속에 항시 살아 있고 자리해 있다. 일반적으로 고향의 서정적 양감(量感)은, 바로 모태이면서 미래를 꿈꾸는 자연 공간임은 물론,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환기(喚起)시켜주는 생명적인 원형으로 풀이된다. 까닭에 오늘의 우리가 공감하는 고향 회귀의 상징성은, 증오나 이기심이 자리하지 않는 처소, 세상적인 고뇌와 갈등을 말끔히 치유시키는 모성으로의 동질성을 의미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멀어가는 가을』 시집의 자서를 통해 때로는 살 저미는 시인의 참담함과 통분에 공감할 것이다. “시를 쓰면 무엇 하나 또한 시집을 내면 무엇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십 세기를 누려오던 활자 매체가 그 영향력을 잃고 그 자리에 영상 매체가 들어서고 있다. 이제,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인간 정신의 기본 에너지가 소멸되고 반면에 미술, 음악, 무용, 영화 같은 시각 예술, 무대 공연 예술이 판을 치면서, 사고하는 정신활동이 인간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중략... 그런데도 나는 시집을 낸다. 이런 때일수록 더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각오와 함께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은 나의 시가 정서적 구원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이와 같이 김규화 시인의 묵시적 항변처럼 세상의 흐름에 동조하지 말고 부단히 내적 충만인 사유(思惟)를 통해 ‘전통의 실타래를 다시 꼬며, 출어를 위해 찢어진 그물코를 다시 깁는 치열한 시인의 혼 불’을 통해 소통의 도구인 생명의 기호로 미적 주권이 확립된 시 쓰기에 몰두하여야 한다.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시키듯 날 푸른 시 정신을 지니고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한 사람의 병든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엄숙하게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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