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가를 빙빙 돌다가 날아간 고추잠자리.
제트기가 손님을 실어 나르듯이, 고추잠자리는 꽃손님을 실어다 주는가 봅니다.
고추잠자리 날아간 뜰에 채송화가 하나 둘 피어납니다.
피어나는 채송화는 곧 새로 열리는 계절의 눈동자일 수도 있습니다. (신현득 김종상)
나무
권 영 상
나무가
한 잎 한 잎 날개를 단다.
가지마다 파랗게 단
나무의 날개.
그 많은 날개를 달고도
나무는 날지 않는다.
직박구리며 꿈이 많은 휘파람새.
푸른 하늘을 그리는 솔개.
그리고 어린 박새와 솔잣새들…….
나무는 오히려
푸근히 쉴 수 있는
새들의 집이 되었다.
누렁소는 말이 없다
권 영 상
오동나무 그늘에 엎드린
누렁소 잔등에
콩닥, 할미새가 날아 내려 까불댄다.
엉덩짝이며 잔등이며 목덜미며
까불까불 짓뛰다간 폴짝 날아간다.
봄날 참새란 놈은 또 어떻구.
누렁소 엉덩짝에 깡총 내려 뛰어선
제집 따뜻이 지으려고
쏙쏙쏙 볼이 터지도록 쇠털을 뽑는다.
그것도 모자라 똥 한 줄기 찔금 싸고
호로록 날아간다.
그런데도 누렁소는 아무 말이 없다.
까치가 날아와 콕콕콕 잔등을 쪼아도
암탉이 뱃구레 밑을 후벼 파도
누렁소는 말이 없다.
가끔씩 엉덩이를 덜썩, 들었다 놓을 뿐
그만한 일엔 관심이 없다.
담요 한 장 속에
권 영 상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 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짧은 한 편의 시에서 여러 이야기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를 읽는 독자가 갖는 즐거움이고 시를 쓰는 시인의 보람입니다.
이 시도 그런 정겹고 따스한 그림과 이야기가 되어 독자에게 다가왔습니다. 시는 아득한 곳에서 혹은 특별한 것에서 글감을 얻게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의 곳곳에서 아주 평범한 것들이 시가 되기 위해 감동의 씨앗을 품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이 시의 그림이 펼쳐집니다. 담요 한 장을 덮고 나란히 누운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누구도 먼저 잠들지 못합니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깊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담요 한 장이 중심이 된 이 동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훈훈한 그림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을 어렵게 표현하거나 멋을 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발을 덮어주고 아들이 깰까봐 다시 조용히 누우시는 아버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부르거나 대답하지 못하는 아들.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이 아버지도 우리들 아버지와 같이 손과 발이 조금은 거친 아버지일 것입니다. 이 시에는 말 수 적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고가는 도타운 마음이 정겹습니다. 그래서 담요 한 장은 세상을 따스하게 감싸줍니다. (정두리)
한밤중에 내 발을 덮어주시던 아버지…
아버지에게 아들은 '타자화된 자기"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느 뜻이겠다.
아버지가 묵은 가지라면 아들은 거기에서 뻗은 새 가지다. 아들은 침몰하는 배에 탄 아버지를 구하는 구조선이라고 생물학자는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제 생명으로 이음으로써 아버지를 구한다. 그 아버지와 아들이 한 담요 속에 누웠다. 한 담요를 덮고 나란히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고, 이들은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담요 바깥으로 빠져나온 아들의 발을 덮는다.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에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곡진한 사랑이 듬뿍 묻어 있다.
내 아버지는 1929년생이다. 전쟁 통에 양친을 다 잃었다. 그 뒤론 신산스런 삶이었다. 부모 잃고 가진 것 없이 험한 세파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외로움인지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아버지의 장남인 나는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천하의 정약용도 아버지 노릇은 쉽지 않았다. 끼닛거리가 떨어지자 옆집 호박을 따다 죽을 끓인 여종을 닥달하는 아내를 말리며, "아서라, 그 아이 죄 없다. 꾸짖지 마라" 했다. 식솔을 가난에 방치하고 책이나 읽고 벗들과 어울린 것을 크게 부끄러워하며, "나도 출세하는 날이 있겠지. 하다못해 안 되면 금광이라도 캐러 가리라" 했다. 뒷날 정약용은 "내가 남의 아비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이처럼 누를 끼치는 것이 부끄럽다"라고 썼다.
권영상(55)은 한 담요를 덮고 누운 아버지가 한밤중에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잠드는 광경을 그려낸다. 이렇듯 아버지는 평생을 아들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남몰래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거두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들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김현승의 <아버지 마음>)인 것을 모른다. 그 진실을 모르니, 늘 아버지에게 불만을 갖고 툴툴거린다. 나 역시 뒤늦게 깨닫는다. 내 불만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아버지는 세상에서 이룬 것과 상관없이 존경받아야 할 영웅인 것을. (장석주 시인)
들풀
권 영 상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파득파득
구겨진 잎을 편다.
길바닥에 돋아난 들풀의 운명은 참 기구하지요. 그 많은 삶의 터전을 놔두고 어쩌다 이런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는지요.
손수레가 무심히 들풀을 밟고 지나갑니다. 그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겨진 잎을 펴며 피득피득 몸을 일으키는 들풀의 모습에서 권영상 시인은 생명의 모짊을 읽어냅니다. (김용희)
민들레
권 영 상
해님이 주시는
빛살 중에서도
민들레는 노란 빛깔만 골라
옷을 지어 입는다.
담녘 따스한 곳에
물레를 걸어두고
노오란 실파람만 뽑아
옷을 지어 입는다.
바람이 피우는 꽃
권 영 상
산새가
지나가다 쉬어간
풀섶에
바람은
예쁜 표를 해 두었다.
길 잃은
산새가 오거든
보고 가라고 그랬겠지.
고운 꽃으로
표를 해 두었다.
반쪽
권 영 상
네가 주는
밤 한 톨의
반쪽
네 마음의 절반이
내게로 온다.
네게로 건네는
사과 한 알의
반쪽
내 마음의 절반이
네게로 간다.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
무엇을 나눠 갖는 일은 곧 마음을 나눠 갖는 일입니다. 모든 행동은 마음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한 개의 과일을 동무와 절반씩 나누어 먹는 일은 마음의 절반씩을 나눠 갖는 깊은 우정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우정(사랑)의 나눔은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김종상)
사과 깎기
권 영 상
엄마가
돌돌돌
사과를 깎는다.
사과 속에
감아 둔
사과 단내가
돌돌돌돌
풀려 나온다.
실 끝을 따라가면
권 영 상
실 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나?
실을 파는 실가게.
나무 의자에 앉아 낮잠 자는 곱슬머리,
곱슬머리 아저씨가 나올 테지.
아저씨네 가게 진열대에 놓인 그 많은 실뭉치들,
그 실뭉치를 풀어 실 끝을 찾아가면 뭐가 나오나?
실을 만드는 실공장.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일하는 실공장 아줌마,
아줌마가 나올 테지.
그 아줌마에게 물어 실 끝을 찾아가면 뭐가 나오나?
뽕나무 밭 사이로 오리를 키우는 집,
그 집 방안에서 실을 뽑는 누에들,
누에들이 나올 테지.
입으로 실을 뽑는 누에.
지금 내가 단추를 다는 실 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나?
착한 누에.
뽕나무 밭 사이로 오리를 키우는 집,
그 집 방안에서 실을 뽑는 누에가 나오겠다,
고마운.
마치 스무고개 넘는 식의 시적 진술 방식이 우선 어린이들의 흥미를 끌기에 족하다.
연쇄적으로 등장하는 사물들은 실이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의미망으로 연결되면서 정감어린 상관물로 재창조되고 있다.
새로움에의 도전은 아동문학의 영원한 화두이다. (문삼석)
종달새
권 영 상
맑은 하늘 층계에서
악기 소리가 난다.
요란히
건반을 두드리며
하늘 층계를
올라가는,
종다리,
그것은 네 가볍고도 빛나는
발자국의 무게이려니
발목을 놓을 때마다
건반 가득히 고인 음표들은 쏟아져
온통 보리밭 들판을
취하게 한다.
종달새 소리는 우리들 귀를 즐겁게 합니다. 보리밭 위에서 아무리 크게 지껄여대도 시끄럽지 않으며 똑같은 소리를 오래오래 내질러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종달새 소리를 악기 소리라 했습니다. 아니, 일반 악기보다도 한층 더 아름다운 소리를 연주해 내는 살아 움직이는 악기로 본 것입니다. (허동인)
쪼금만
권 영 상
햇살이 숲 위로 쏟아집니다.
쏟아지는 햇살이 아까워
참나무들이 잎을 펼쳐 햇살을 받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햇살이
참나무 아래로 떨어집니다.
―쪼금만.
거미줄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미가
꼭 필요한 만큼 햇살 조각을 떼어 냅니다.
거미가 떼어 내고 남은 햇살이
숲 아래 어린 풀잎 위에 내려앉습니다.
쪼금만, 이번엔 꼭 필요한 만큼
풀잎이 햇살을 덜어 냅니다.
―나도 쪼금만.
개미가 있군요, 풀잎 밑을 기는 개미.
개미까지 받을 수 있도록
숲은 꼭 맞게 햇살을 나눕니다.
해바라기와 아가
권 영 상
내 그늘 속에
들어오지 않을래?
해바라기가
동그란 그늘을 내밉니다.
아기가
해바라기 그늘 속에
콩 들어섭니다.
내 이파리로
모자를 만들어 쓰지 않을래?
아기가
깡충 뛰어
초록 모자를 만듭니다.
호박밭의 생쥐
권 영 상
호박밭에
호박이 큰다.
자꾸 자꾸 자꾸……
―정말
비좁아 못 살겠네!
생쥐가
이부자릴 싸들고
또 집을 옮긴다.
생쥐가 게으름을 피웠을 리는 없을 테지. 게다가 먹음직스러운 호박이 눈앞에 집채만하게 커졌는데.
그런데도 우리의 생쥐들은 살 땅이 없다. 먹어도 먹어도 나의 집. 내 몸집이 남을 위협할 정도가 못 되는구나.
그렇다면 남의 풍요를 인정하는 것도 살아가는 지혜가 되지. 나는 날렵해서 좁혀 사는 데는 이골이 나 있잖아.
그래도 가끔은 저 풍만한 호박들 귀를 깨물어 줘야지. 그렇게 불리는 데만 골몰하다가 제 몸 망치지 말고. 미리 좀 나눠주렴. (박덕규)
"호박이 크자 작은 생쥐가 비좁아서 이사를 간다고요? 거짓말이에요. 호박밭에서 호박이 크게 자란다 해도 생쥐 자리가 비좁아진다는 건 말도 안 돼요. 그리고 생쥐가 무슨 이사를 다 해요?"
시는 이렇게 사실을 따지면서 감상하는 게 아니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옛날 할아버지의 아버지 때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가 단간방에서 사는 집이 많았어요. 아기가 자라면 방이 비좁아서 걱정했고요. 그러고 보니 호박과 생쥐 관계와 비슷해요.
거짓말 같았는데, 그럴 듯한 거짓말이지요. 시는 사실을 따져서 짓는 게 아니랍니다. (박두순)
풀들은
권 영 상
흙바람이
풀들의 머리채를 쥐어 흔든다.
사납게
휘몰아칠 때도
풀들은 바람과 맞서지 않았다.
바람이 가면
가는 대로
허리를 낮추며 흔들렸다.
그런 때에도
가만히 풀섶을 뒤지면
풀섶 밑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자리에
숨겨 놓은
풀종다리의 귀여운 알들
오, 고놈들을
감추어 내려고
풀들은 바람에 순종했다.
표현이 직선적이고 굵으면서 서정성이 풍부한 이 작품은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표현하고 있지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주로 그렸다고 할 수 있다.
'흙바람'으로 상징되는 반사랑적 존재와 '풀들'로 나타난 부모들과 '풀종다리의 알'로 표현된 어린이가 이 작품의 중요한 세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시어는 바람과도 대결하지 않는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의 눈이 앞부분에서는 주어로 쓰인 '흙바람'에게 있다가 뒷부분에서는 '풀들'이나 '귀여운 알들'로 옮겨지고 있다.
이 작품과 김수영의 '풀'을 대비하여 동시도 일반적인 시 수준을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 작품이 동시적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이정석)
권 영 상(權寧相)
1953년 3월 1일 ∼
강원도 강릉시 초당에서 태어남.
관동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197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함.
1982년 소년중앙문학상 수상.
한국동시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새싹문학상, MBC동화대상 수상.
동시집 : 단풍을 몰고 오는 바람(창조의 샘, 1980)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아동문예사, 1985)
벙어리 장갑(계몽사, 1992)
밥풀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신발코 속에는 새앙쥐가 산다
실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국민서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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