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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명시선 ( 2 )
2017년 08월 09일 15시 14분  조회:3878  추천:0  작성자: 강려
프랑스 명시선 ( 2 )
 
유쾌한 죽은 (死者) / 샤를르 보들레르
 
 
달팽이 우굴대는 진흙 땅 속에
내 손으로 깊은 구멍을 파리라
그 곳에 내 늙은 뼈를 한가로이 눕히고
파도 아래 상어와 같이 망각 속에 잠을 자리라.
 
나는 유언과 묘석(墓石)을 싫어하나니
사람의 한 줄기 눈물을 청하기보다는
차라리 살아서 까마귀들을 불러
내 더러운 육체의 모든 끝에서 피를 빨게 하리라,
 
오, 땅의 벌레들아, 귀 없고 눈 없는 암흑의 친구들,
방탕의 철인(哲人)들, 부패의 자손들이여
보라, 그대들을 위하여 한 자유롭고 유쾌한 죽은 자가 보
  리니.
 
주저 말고 나의 잔해(殘骸) 속에 파고들어가
죽은 자 가운데 죽고 혼 없는 이 늙은 몸에
말해 다오, 아직도 무슨 고통이 남아 있는지를.
 
가을의 노래 / 샤를르 보들레르
 
멀쟎아 우리들 잠기리 차디찬 어둠 속에
잘 가거라 너무나 짧았던 여름의 강렬한 빛이여!
벌써 들리나니 안 마당 깔림돌 위에
음울한 소리내며 떨어지는 나무 토막들.
 
가슴 속에 온통 겨울이 되살아오리니
분노, 증오, 전율, 공포, 강요된 고된 일
나의 심장은 북극 지옥에 매달린 태양처럼
붉게 얼어 붙은 한 덩어리 혈괴(血塊)에 불과하리니.
 
몸서리치며 귀기울리며 툭툭 떨어지는 장작 소리
사형대 세우는 울림이 이보다 더 무딘걸까
내 마음은 무거운 파성목(破城木)의 연타 아래
무너져내리는 성탑과도 같아.
 
단조롭게 부딪치는 소리에 흔들리며 듣나니
어디선가 서둘러 관 뚜껑에 못박는 소리
누굴 위하여? ---어제는 여름; 어제는 가을
이 신비의 소리는 마치 출발인 양 울리네
 
 
명상 / 샤를르 보들레르
 
아, 나의 고통아, 떠들지 마라 그리고 좀더 조용히 하라
네가 저녁을 원했다; 저녁이 내린다; 자 황혼이다;
어떤 사람에겐 안식을, 어떤 사람에겐 근심을 가져다주며.
 
인간의 천한 무리들이 쾌락이라는
사정 없는 사형 집행인의 채찍 아래
노예의 잔치로 후회를 거두러 가는 동안
나의 고통아, 손을 내게 다오; 이리로 가까이 오라.
저들을 멀리하고 보라, 저 하늘의 난간 밖으로
해바랜 옷을 입은, 고인(故人)이 된 세월들이 몸을 굽히는
  모습을
웃음 띠운 회한이 깊은 물 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빈사(瀕死)의 석양이 다리의 아치 아래 잠드는 것을
그리고 동쪽에서 긴 수의(壽衣)가 옷자락을 끌며 오듯
들어라, 정다운 고통아, 걸어오는 따사로운 밤의 발소리를.
 
 
취하시오 / 샤를르 보들레르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대의 허리를 땅으
로 굽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게 하는 유일
한 과제이다. 쉬지 않고 취해야 한다.
무엇으로냐고? 술, 시, 혹은 도덕, 당신의 취함에
따라, 하여간 취하라.
그리하여 당신이 때로 고궁(古宮)의 계단이나 도랑의
푸른 잔디 위에서 또는 당신 방의 삭막한 고독 속에서 취기
가 이미 줄었든가 아주 가 버린 상태에서 깨어난다면 물으
시오.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벽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 탄식하는 모든 것, 구르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 물으시오. 지금 몇 시냐고; 그러면
바람은, 별은, 새는, 벽시계는 대답하리다. "지금이 취할 시
간이다!" 당신이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
하시오; 쉬지 않고 취하시오!
술로, 시로, 또는 도덕으로, 당신의 취향따라."
 
 
샤를르 보들레르(1821~1867): 이 세상에는 그 시대나 사회의 목소리나 조류를 잘 대변하는 천재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극히 개성적이며 특이한 천재가 있어서 당대에는 이해되지 않으나 후세에 가서야 이해되고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보들레르는 후자의 경우이다. 그가 이해되고, 진가가 알려지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고 많은 오해와 비난과 박해 뒤에 비로소 근대시의 원조(元祖)로 추앙되었다. 널리 알려진 그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넓은 이마, 빛나는 눈, 꼭 다문 입은 그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참고 이기려는 굳은 의지를 보는 듯 하다. 46세를 일기로 한 이 시인의 생애는 시종 비참과 불행의 늪을 헤매었다고 볼 수 있고 그의 시들도 우울과 슬픔과 절망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들레르는 7살 때 늙은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의 젊은 어머니는 1년도 못 되어 군인인 오피크라는 사람에게 개가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남달리 죽은 아버지를 사랑했던 소년은 의붓아버지인 이 장군과 뜻이 맞지 않았다. 질서와 규율을 숭상하는 아버지는 이 반항아를 정상적으로 교육시켜 훌륭한 외교관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유명한 파리의 루이 르 그랑 중고등학교에 입학시켜 성적도 좋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년은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이 학교를 퇴학해 버렸다. 개인 교사의 지도 아래 바카로레아(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통과, 법과 대학에 등록까지 해 주었으나 그는 학교에 나가는 일 없이 파리의 라킨 구역을 배회하며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즐겼다.
 이를 보다못해 장군은 묘안 하나를 짜냈다. 아들의 파리에서 무궤도한 생활 태도를 바꾸기 위해 상당 기간 동안 긴 항해 여행을 시키는 일이었다. 이로써 파리의 병적 생활을 청산하고 아울러 항해를 함으로써 호연지기를 기르고 외국의 풍물에도 접하게 하자는 뜻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보들레르는 1841년 5월 9일 보르도를 떠나 캘커타로 향하는 배를 탄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도중에 배는 큰 풍랑을 만나 동인도양의 모리스 섬에 기착하게 되었고 보들레르는 더 이상 항해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그해 11월 4일 프랑스로 오는 배를 타고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로써 일대 여행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이 수개월 동안의 항해와 남국 일대 열대 지방의 체재는 그에게 이국 풍물과 정서를 담은 많은 시를 남기게 하였다.
  항해에서 돌아온 보들레르는 건전하고 성실해진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욱 반사회적이며 부도덕하게 되었다. 21세의 성년이 된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하여 당시로는 막대한 75,000 프랑의 유산을 받게 되자 그가 동경하던 댄디(dandy,멋장이)의 호화 생활을 즐긴다. 유명한 피모당 호텔에 묵으면서 귀족 같은 시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음주-마약 복용 등을 일삼아 급기야는 성병-두뇌 동맥의 결함증이 생겨나고, 혼혈의 정부 쟌느 뒤발과의 파란 많은 치정 생활은 그의 정신과 육체를 차츰 마멸시킨다.  이에 당황한 그의 의부는 법정에 제소하여 그를 금치산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 결과 보들레르의 생활은 완전히 궁핍에 빠졌고, 이 고고한 시인은 병과 가난과 싸우며 미술 비평-음악론-번역 등으로 겨우 생활을 유지하여 가며 자존심을 달랬다.
 36세 때에 <악의 꽃>이라는 시집을 출판하였다. 당시 이미 문단의 대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 시집을 새로운 전율을 가져왔다고 격찬했는데, 경찰은 풍속 문란이라는 죄목으로 3백 프랑의 벌금과 6편의 시를 삭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그의 이름은 유명해졌으나 심한 생활고와 그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깊어만 갔다. 40세에 이미 그는 심신이 쇠잔한 노인이 되었다. 미국의 괴기 작가 에드가 알렌 포우의 작품 번역 등에 몰두하다 1864년 벨기에의 브뤼셀로 간다. 거기서 조용한 생활을 하며 문학 강의도 하고 자기 작품의 전집을 내기 위한 정리 작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신경 질환으로 쓰러지게 되어 급거 파리로 옮겨졌으나 전신 마비와 실어증으로 약 1년 동안 신음하다 1867년 여름 외로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생을 끝냈다.
 
<악의 꽃>
 보들레르는 그의 단 하나의 시집, <악의 꽃>으로 존재되고 기억된다. 이 시집은 출판되자 풍속 문란이란 죄명으로 기소 처벌되고 당시 비평계의 권위자인 브륀티에르는 "이 시집에서는 부도덕과 광기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시집은 후세에 전세계에서 읽혀지고 감동을 주어 시인들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무엇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고 공감하고 혹은 비난 혹은 감격하는가? 그것은 그가 근대 문학사상 처음으로 자기의 고백을 통하여 인간의 죄악, 비참, 슬픔, 외로움, 소망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나타내고 고발한 까닭이 아닐까? 그는 인간이 쓴 가면과 가식을 벗겨 버리고 적나나하게 인간 상황과 그 내면 세계를 깊이 파헤치고 조명한 까닭이 아닐까? 이런 뜻에서 그의 <악의 꽃>을 단테의 <신곡>에 비하는 사람도 있다. 단테가 내세의 지옥과 연옥을 탐색한 것과 같이, 보들레르는 인간 심중의 지옥으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뜻에서이다. 하여튼 그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사하기 위하여 인간의 숨겨진 심층과 치부, 사회 질서와 도덕의 터부를 파헤쳤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그들의 시상(詩想)을 자연이나 사랑-예술의 꽃동산에서 찾을 때 보들레르는 악의 늪에서 미를 얻으려고 했고 현실이라는 거름통에서 금을 캐내려고 했다. 이러한 시인의 기도는 당시의 사회와 시단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며 충격적이며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이 시집 가운데 타락하고 추잡하고 절망적인 인간 상황만을 담은 것은 아니다. 외롭고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무로부터의 탈출을 기도하는 노력, 동물로 떨어지려는 욕망에 항거하여 이상을 향해 올라가려는 인간의 본질적 갈구가 일면 청순한 샘물같이 흐르고 있다.
 보들레르는 그의 난맥과도 같고 오욕에 찬 생활 가운데서도 일생 높은 기품을 잃지 않았고, 영혼의 순결과 고매한 정신적 이상을 추구한 노력은 비장한 바가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 심정, 종교, 분노를, 그는 시인으로서 그의 독특한 감성과 풍부한 상상과 암시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가히 마술적이라고 할 언어와 음률로 새로운 세계, 신비로운 분위기, 전율적인 감각을 창조함으로써 그는 프랑스 시 가운데 깊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 점이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찾고 공감하게 하는 까닭이 아닌가 생각한다.
 <악의 꽃>은 초판에는 101편의 시가 들어 있었으나 후에는 151편으로 늘어났다. 이 시집은 6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1. 우수와 이상, 2. 파리 풍경, 3. 술, 4. 악의 꽃, 5. 반항, 6. 죽음 등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이 시집을 자신의 시학-철학-종교를 담는 하나의 체계적인 건축물을 구상한 듯 하나 그렇게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이지는 않다. <악의 꽃>에서는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가지각색의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질적인 시들이 섞여 있다.
 
앙트완느와 크레오파트르 / 에레미아
 
 
둘은 함께 높은 망루에서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집트는 숨막히는 하늘 아래 잠들고
나일 강은 검은 삼각주를 쪼개 가며
뷰바스트 혹은 사이스를 향해 기름 같은 물결을 굴려
   간다
 
이 로마인은 이제 어린애를 잠재우는 한낱 포로 병사
그가 두 손으로 포옹한 요염한 육체가
사랑의 승리자인 그의 가슴 위에 휘어져 쓰러짐을
무거운 갑옷 아래서도 느끼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돌려
그녀는 입술과 맑은 눈동자를
강렬한 향수에 도취된 남자에게 내맡겼다.
 
여인 위에 몸을 굽힌 열에 뜬 이 통수(統帥)는
금점(金點)들이 별같이 박힌 그녀의 두 큰 눈동자 속에
망망한 바다와 그 물 위를 달아나는 로마의 병선(兵船)들
  을 보았다.
 
*앙트완느는 유명한 로마의 장군 아토니우스의 불어 표기다. 시이저가 죽은 뒤 그는 옥타비우스와 함께 로마 제국을 삼등분하였다. 이 때 앙트완느는 도양 지방(지금의 중동)을 맡고 옥타비우스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동방으로 간 앙트완느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매혹되어 여왕의 야심에 좇아 이집트를 중심으로 동방 제국을 세우려 하였다. 이는 로마의 국익에 배반되는 일이므로 옥타비우스는 군선을 이끌고 동방 원정에 나서 악티움 해전에서 앙트완느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를 궤멸시킨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에 포위된 앙트완느는 자살하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리게 하여 자결한다는 역사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이 시는 다가오는 악티음 해전의 전야(前夜)를 나타내고 있다. 앙트완느 통수와 클레오파트라여왕은 지금 사랑의 절정에 있으나 그들의 앞날에 대하여 불안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로마의 통수는 사랑하는 여왕의 눈동자, 금점이 가득히 박힌 눈 속에서 망망한 바다 위를 도주하는 무수한 자신의 군선들을 봄으로써 자신의 패망과 사랑의 비극적 종말을 예견하고 있다.
 
 
정복자들 / 에레디아
 
거대한 매가 자라난 소굴을 떠나 날듯
이제 잔병(殘兵)들과 명장(名將)들은 도도하나 비참한 생
  활에 지쳐
영웅적이며 난폭한 꿈에 취하여
모게르의 팔로스*를 떠난다.
 
이들은 지팡고* 나라의 아득한 광맥 속에서 익고 있는
신기한 금속을 정복하러 가는 길
등에서 부는 계절풍은 서방 세계의
신비로운 해안을 향해 그들의 범선 돛대를 휘게 한다.
 
매일 저녁, 웅대한 다음 날을 바라는 이들의 꿈은,
열대 바닷물의 인광(燐光)을 발하는 하늘색 물빛을
금빛 신기루로 변화시켰다;
 
혹은 흰 카라벨 범선의 뱃머리에 기대어
이들은 대양(大洋) 깊은 곳으로부터 미지의 하늘로 오르는
새로운 별들을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팔로스: 콜롬버스는 1492년 그의 최초의 대륙 발견 항해를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 모세르
근처의 항구 팔로스에서 떠났다.
*지팡고: 일본에 대한 중국식 이름 Zippan Khou가 와전된 것.
 
 
호세-마리아 에레디아(1842~1905): 호세-마리 데 에레디아는 원래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레스의 후예로 스페인계
아버지와 프랑스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프랑스로 이주하여 상리스에서 중고등 학교를 마치고 파리에 올라와 고문서 대학(古文書大學)을 수료했다. 이때부터 시단의 고답파의 거장, 르콩트 드 릴르를 스승으로 또 친구로 삼고 그가 주제하는 문학 모임이나 그가 주관하는 잡지의 가장 열렬하고 성실한 지지자이며 협력자이었다. 또한 젊은 시인 앙리 드레니에의 장인(丈人)이 되기도 하였다.
 고문서 학교를 나온 그는 유명한 아르스날 도서관에서 일하며 옛날의 기록, 고서(古書), 판화, 유물 등을 관리하며 그 가운데 고대의 이국에 대한 풍부한 시상(詩想)을 얻었다.
 그는 극히 과작(寡作)의 시인으로 이따금 시 한 편씩을 잡지 등에 발표하였는데, 1893년 그가 51세 될 때 비로소 한 권의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이 시인의 시집은 이 한 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그의 사명과 명성은 이것만으로 족하였다.
<전승패>라는 이름의 이 시집에는 118편의 소네트가 들어 있다. 내용은 고대 그리스-로마-동양-스페인-브르타뉴 지방 등의 역사와 인물-풍물들을 주제로 한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주제들을 거의 완벽한 기교와 회화적인 수법으로 고대와 이국적인 정취를 간결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아름다운 또는 극적인 장면을 그림과 조각과 같이 완전히 재현시켰다. 이러한그림과 조각의 시는 풍부한 음률과 깎고 다듬은 형식과 잘 조화되어 그의 시집은 단 한 권이나 프랑스 문학의 하나의 빛나는 보석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새들의 죽음 / 프랑스와 코페
 
 
저녁, 난롯가에 앉아 나는 참으로 여러 번
지금 숲속 어느 곳에 있을 어떤 새의 죽음을 생각했다.
지루한 겨울, 구슬픈 날이 계속되는 동안
가엾은 빈 새 둥지들, 내버려진 둥지들은
무쇠 잿빛 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아, 얼마나 많은 새들이 겨울에 죽어갈 것인가!
그러나 오랑캐꽃 피는 계절이 돌아올 때
우리가 뛰어다닐 4월의 잔디 위에
새들의 가냘픈 뼈들은 볼 수 없으리라
새들은 죽기 위해 숨는 것일까?
 
 
향기 / 프랑스와 코페
 
 
향기의 쾌락! 그렇다, 모든 냄새는 마술사다.
내가 저녁때 뜨뜻해진 오렌지 껍질을 벗기면
나는 극장과 그 깊은 무대 장치를 상상한다;
내가 장작불을 지필 때면 나는 겨울 숲속에
사냥꾼들이 뿔나팔을 불며 멎는 모습을 본다.
심지어 악취나는 검은 아스팔트가
가마솥 주위에 내뿜는 연기 속을 지날 때
나는 마치 역청(瀝靑) 향기 나는 어느 부둣가에 서서
보라빛 바다의 금강석 물결 사이를 달려오는
흰 쌍돛배를 바라보는 착각이 든다.
 
 
영원히 / 프랑스와 코페
 
 
"영원히!"라고 그대는 말한다. 이마를 내 어깨 위에 대고,
그러나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이것이 운명이다.
우리들 중 하나가 먼저 죽음에 붙잡혀
주목(朱木)이나 버드나무 아래 잠자러 갈 것이다.
 
부두를 한가로이 거니는 이 늙은 수부(水夫)는 수십 번
쌍돛배가 깃발로 장식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빼는 북쪽을 향해 떠났다.
그 후 감감 무소식, 배는 북극 얼음장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봄바람이 불면 우리 집 처마 끝에
철새들이 돌아왔다. 수십 년 동안을;
그러나 이번 여름, 둥지에는 그 제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는 내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이별을 생각한다.
어찌 죽을 입술 위에 "영원히"라는 말을 올리는 가?
 
 
프랑스와 코페(1842~1898) : 프랑스와 코페는 프랑스 서민의 시인, 대중적 시인으로 꼽히어 한때 그의 시는 프랑스 시의 본보기로 교과서에 실리고 프랑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특히 일본이나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시인이다.
 그는 파리 변두리 태생으로 거의 한 번도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진짜 파리지엥(Parisien)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생활고로 학교도 중단하고 작은 회사의 사무원, 관청의 말단 직원, 후에는 국회 상원의 도서관 사서, 프랑스 국립 극장의 문서 보관원 등으로 이라며 시와 연극, 소설 등을 썼다.
 그도 처음에는 당시 유행하던 파르나스(고답적) 풍의 시를 써 보았으나 차츰 자기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에 애정과 애착을 가지게 되어 그 후부터는 이들의 생활을 주제로 한 시를 쓰게 되었다. 그는 시집 <친밀(1886)>, <서민들(1872)> 등에서 그 자신이나 서민들의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단순하고 평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그의 시의 매력은 일상다반사를 보는 그의 우아하고 따스한 눈, 소위 친밀한 사실주의에 있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신랄한 풍자 정신도 잊지 않는 골(Gaule) 정신에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가장 널리 읽혀지고 가장 광범한 독자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42세 때(1884)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된 것도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아나톨 프랑세즈는 그를 평하여 "코페는 참되고 자연스러운 시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주 독특한 시인이다. 그 까닭은 자연스러움은 예술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의 시는 통속시라는 평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진실되기 때문에 감동을 주었고 또 독자에게 사랑을 받았다.
 코페는 시인으로서뿐 아니라 극작가-소설가로서도 유명했다. 그의 만년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 때는 프랑스 조국 연맹이라는 극우 단체에 가담하여 반(反) 드레프스 파로 싸웠다. 당시의 문인-지식인들 대부분이 드레프스 옹호파였으므로 이로 인해 그는 많은 비방과 오해를 받았다. 그의 최후의 해는 고통스러운 병으로 고생했으나 친구 쟝 리시팽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시키기 위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나가 투표에 참가한 우정 깊은 친구이기도 하였다. 그 후 몇 주일 후에 그는 파리의 자택에서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소네트 / 말라르메
 
순결하고 생기 넘치며 아름다운 오늘이야말로
그의 취한 날개를 한 번 쳐서
달아나지 못한 비상(飛翔)들의 투명한 얼음 덩어리가
흰 서리 아래 배회하는 이 얼어 붙고, 잊혀진 호수를 깨
  뜨려 줄 것인가!
 
지난 날의 한 백조는 회상한다. 그가 바로
황량한 겨울의 우수(憂愁)가 찬란할 때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을 노래하지 않았기에
화려한 생물이지만 이 구속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 자임을.
 
그는 온 목을 흔들어 떨쳐 버릴 것이다.
공간이, 원치 않는 새에게 억지로 과하는 이 백색의 임
  종의 고뇌는,
그러나 그의 날개를 붙잡는 대지에 대한 공포는 없앨 수
  없다.
 
그는 순결한 빛이 이 장소에 부착시키는 환영(幻影)이
  되어
백조는 무익한 유배 속에서 그가 스스로 감싸는
경멸의 차가운 꿈을 안고 적연부동(寂然不動)이다.
 
* 백조는 그 아름다운 자태와 흰 빛깔로 예부터 많은 전설을 낳게 했다. 특히 그 새가 죽기 전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이야기는 백조와 순수한 시인을 동일시하는 풍조가 생기게 하였다. 이 소네트는 백조를 빌어 말라르메 시인 자신의 고뇌와 심경을 읊은 것이다.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 중 언어와 음악성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시일 뿐 아니라 그의 시풍(詩風)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의 하나로 꼽힌다.
 
 차가운 기운이 넘치는 청명한 겨울날, 우리 눈앞에는 흰 서리롸 얼음 덩어리가 배회하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얼어 붙은 호수에는 백조 한 마리가 얼음에 갇혀 이를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린다. 날개를 한 번 쳐서 천상(天上)으로 향하고 싶으나 이 구속에서 빠저나갈 희망이 없다. 또한 이미 여러 번 실패를 하였다. 그에게는 순결하고 고독한 이상만이 있을 뿐 현세나 현실과의 타협이 없기 때문이다. 현세(공간)가 그에게 부과하는 종말의 고뇌는 뿌리칠 수 있으나 결국 백조는 얼음의 호수 속에 하나의 하얀 환상이 되어 부동의 자세로 조용히 죽어 간다. 그의 마음 속에 현실과 자신에 대한 부정(否定)과 멸시를 품은 채---
 
 이것이 이 시의 내용이며 개요이다. 의미상, 백조는 물론 시인 자신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자주 시적 무력감에 빠졌고 백조가 얼음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 자신도 전혀 시를 쓰지 못하던 시기가 있어 자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순수하고 난삽한 시 정신은 백조와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나 일반 독자나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고, 그의 생활도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자연히 무익한 유배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유배를 죽어가는 백조와 같이 차가운 경멸감을 가지고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수시를 지향하는 말라르메는 이 시로 위와 같은 정경(情景)이나 시인의 심경-사상-도덕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상징-암시-연상을 통한 추상적 이미지와 순수한 언어가 가지는 음악성을 배치-조화시킴으로써 미적 세계와 시적인 미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에 언어는 그가 가지는 뜻이나 문법적 기능보다 악보와 같이 음(音) 부호의 구실을 많이 한다고 보겠다. 따라서 이 시의 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논리적 분석보다 음과 리듬의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우선 이 "소네트"는 전 14행이 모두 (i)나 (ui)음으로 끝나는 데 주목하여야 한다. 또한 이 (i)음은 마지막 3행시절의 끝 두 절 안에서도 반복된다. 그런데 알베르 티보데니 그 외의 여러 비평가에 의하면 (i)음은 이 시에서 방대하고 단조로운 흰 공간과 추위를 환기시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시를 장조(長調)의 소네트라고도 부른다. 그 외에도 첫쩨와 둘째 4행시절에서의 장중한 (v)음의 호응, 그리고 전체 시 위에 떠 있는 환상적인 신령스러운 기운, 추상적 언어에 의한 최후의 백조(Cygne)를 대문자로 써서 하늘의 백조 별자리를 환기시킨 점 등등으로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학의 표본을 이루고 있다.
 
() / 말라르메
 
음침한 병실과 허름한 흰색 커튼을 쫓아
향불 연기가 빈 벽에 지루하게 달린 큰 십자가상을 향해
올라가며 풍기는 빈사의 병자는 늙은 허리를 펴,
 
몸을 이끌고 썩은 육체를 따스하게 하려기보다
돌 위에 비치는 햇빛을 보기 위해 창가로 가
흰 수염과 여윈 얼굴의 뼈를
아름답고 맑은 햇살이 들이쬐는 유리창에 대고,
 
그리하여 열띠고 푸른 창공에 허기진 입으로
따스한 금빛 유리창에 오랫동안쓴 입술을 댐으로써 흔적을
  묻힌다.
마치 그의 입이 젊은 시절 그의 보물인양
옛날 한때 순결했던 한 살갗을 들이마시려 하였듯이,
 
도취 속에 그는 살았다. 임종시의 성유(聖油)의 두려움도
탕약(湯藥)도 벽시계도 피할 수 없는 병상도 기침도 잊고;
그리하여 저녁 노을이 기왓장 사이에서 피를 흘릴 때
그의 눈은 빛으로 가득 찬 지평선 위에,
 
백조같이 아름다운 황금색의 범선(帆船)들을 본다.
이들은 보라와 향기의 강 위에 떠서 추억 가득한 한가
  로움 속에
현란한 황갈색의 반짝이는 선(線)들을 본다.
이들은 보라와 향기의 강 위에 떠서 추억을 가득 실은 한가
  로움 속에
현란한 황갈색의 반짝이는 선(線)들을 흔들면서
잠자고 있었다.
 
이리하여 냉혹한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
단지 식욕만으로 먹는 행복 속에 뒹굴며
자기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는 아내에게 바치려고
이 오물(汚物)을 찾아 광분하는 인간이 끔찍해,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나는 생(生)에 등을 돌리는
모든 창문가에 매달린다. 그리하여
영원한 이슬에 씻기고 무한의 청결한 아침이 금빛
  으로 물들이는
창문 유리알 속에 축복받은 내가 비춰지고
 
내가 천사임을 본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
유리창이 예술이기를, 신비이기를-- 그리하여
나는 내 꿈을 면류관으로 삼고 미(美)가 꽃피는
전생의 하늘에서 재생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속세가 주인임을: 이 고정 관념은
때로 안전한 내 은신처까지 쫓아와 나를 메스껍게 하고
어리석음의 불결한 구토는
나로 하여금 창공 앞에서 코를 막게 한다.
 
오오, 인생의 고뇌를 아는 나는
괴물에게 멸시받는 수정문(水晶門)을 깨뜨리고 들어가
털 없는 내 두 날개를 펴 달아날 방법이 있는 건가?
-영원한 시간 동안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말라르메는 중등 학교 영어 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1862년 11월 부터 1년간 영국에 체재하였다. 이 시는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의 극히 초기의 것으로 그가 21세 때의 창작이다. 그는 이 시와 그 외 몇 편의 작품을 1863년 6월 영국 런던에서 그의 친구이자 후견인인 카잘리스에게 보냈다.
 그의 영국 체재는 불행한 것으로 그가 말한 바대로 고뇌-절망-가난에다 장차 그이 아내가 될 마리 제라르와의 사랑의 갈등이 뒤범벅이 된 시기였다. 또 그가 런던에 도착한 직후 발병하여 병상에 누운 일도 있다. 이 경험이 작품 "창"에 나타나는 음울한 병실과 빈사의 병자를 상상케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의 줄거리는 속세와 현실 세계를 혐오하는 병자가 병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창문 유리를 통해 빛나고 아름다운 바깥 세계를 몽상한다. 이 때 유리창은 그를 병실(현실)에 가두어 두는 벽인 동시에 열려진 세계(이상)로 통하는 문이요 길의 상징이다. 병자의 욕망은 일격으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열린 세계로 자유로이 비상하려고 하나 결국 자신의 무력(無力)으로 갇혀진 세계의 운명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과 자신의 무력감이라는 이 주제는 이후, "창공(1884)"과 위에 수록된 백조의 "소네트" 등으로 이어진다.
 
 
목신(牧神) 오후(발췌) / 말라르메
 
 
목가
 
목신:
나는 이 요정들을 영원하게 하고 싶다.
                               그녀들의 연분홍 살빛은
너무 깨끗하여, 무성한 잠에 졸고 있는
대기 속을 떠돈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꿈이었나?
옛 밤에 축적된 내 의혹은
많은 작은 나뭇가지 같이 끝나 버렸는데 이들이
그대로 진정한 숲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오호라!
나 혼자만이 장미꽃들에 대한 상상적 유린을 승리로 돌리
   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대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여인들이란
그대의 상상적 감각이 원한 것의 형상이라면!
목신이여, 그 환상은 가장 정숙한 여인의 푸르고
찬 눈에서 나오듯 울고 있는 샘물 소리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한숨에 싸인 다른 여인에 대해선 반대로
그대 가슴털에 스치는 낮의 더운 미풍에서라고 할 것인가?
아니다! 더위는 부동(不動)의 권태로운 무력감으로
살아나려는 신선한 아침의 목을 죄고
속삭이는 물이란 단지 화음(和音)으로 젖은 숲 위에
내리는 내 피리 소리뿐이요, 다만 한 줄기 바람이란
소리를 메마른 빗속으로 흩뜨려 버리기도 전에
피리의 두 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날라 버리는 숨결뿐,
이 바람은 주름 하나 없이 평평한 지평선상에
하늘로 되돌아가는 영감(靈感)의 눈에 보이는
평온하며 인공적인 숨결이다.
 
*
오, 태양빛과 겨루려는 내 헛된 욕망이 유린하는
섬광(閃光)의 꽃다발 아래 묵묵히 누운
고요한 늪의 시칠리아 기슭이여, 이야기하라
"나는 이 곳에서 숙련으로 길들인 빈 갈대를 꺾고 있었다.
이 때 포도 덩쿨을 샘들 위에 드리우고 있는
아득히 보이는 초록의 녹색 금빛 위에
쉬고 있는 생물(生物)의 흰 모습이 잔물결친다.
그리고 풀피리가 살아나는 느린 서곡(序曲)에
이 백조의 무리, 아니! 요정들의 무리는 혹은 달아나고
혹은 물 속으로 뛰어든다----"
 
              만물은 무력하게 황갈색 시간 속에 타고
'라'의 화음을 찾는 연주자가 바라던 너무나 많
    은 결혼이
어떠한 계략으로 일제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
그 때 나는 고대의 빛 물결 아래 홀로 우뚝 서
나의 첫 정열에 눈뜨리라
백합이여! 순결함에 있어 나는 너희 모두들 중 하나이다.
 
저들의 입술이 퍼뜨리는 이 달콤하고 실없는 일
속삭여 사랑의 배신자를 안심시키는 이 입맞춤과는 달리
완전무결하게 순결한 내 가슴은
어느 고귀한 이(齒)가 물어 생긴 신비로운 상처의 흔적을
    증언한다;
그러나 좋다! 이러한 신비로운 흔적은 그의 마음을 들어 줄
    친구로
창공 아래서 굵은 두 개의 갈대를 골랐다.
갈대는 빰의 동요를 자신에게 돌려
긴 독주(獨奏)로 주위의 아름다움과
우리들의 소박한 노래를 거짓 혼동케 함으로써
주위의 아름다움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꿈꾼다
또 갈대는 사랑의 노래를 힘껏 높여서
하나의 낭랑하고 공허하고 단조로운 선율이
내가 눈 감고 쫓는 등과 순결한 허리의 통상적인 환상을
사라져 흩어지게 한다고 꿈꾼다.
 
도주(挑走)의 악기여, 오 심술궂은 신(神)의 피리여.
네가 나를 기다리는 호수에서 다시 꽃피어나도록 하라;
나는 내 자랑스런 목소리로 여신들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말하리라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의 그림으로
저들의 어두운 부분에서 또 다시 허리끈을 풀리라;
그리하여 내가 거짓으로 위장에 물리쳤던 미련을 떨쳐 버
   리기 위해
포도알들의 광명을 빨았을 때
웃으며 나는 그 빈 포도 송이를 여름 하늘에 쳐들고
빛나는 껍질 속에 내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도취를 갈망하며 저녁때까지 나는 그 속을 투사한다.
 
* 위의 시는 "목신의 오후"의 일부 발췌시이다. 이 시는 그가 일생 탐구한 절대시(絶對詩)가 어떤 것인지 보이기 위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문학도들에게도 난해하고 신비로운 이 시의 감상은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시를 이해-감상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드뷔시의 교향시 "목신의 오후 서곡"을 듣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학자-연구가-시인들의 계속적인 연구와 해설, 주석들로 인해 과거보다는 훨씬 시에 대한 이해도 분명해지고 시인의 의도도 밝혀졌으나 시에 대한 해석과 주석도 너무 구구하여 어떤 것이 정통적이며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난해-난삽의 평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그의 대표작으로 통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그가 새롭고 아름다운 시를 얻기 위해 주야로 악전고투하여 쓴 것이며, 10년 동안 닦은 각고(刻䇢)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독창적인 시가 그의 시를 늘 게재해 오던 <현대 파르나스 총서> 제 3집에 편짐위원회, 특히 아나톨 프랑스로부터 거부를 당하였다. 그 이유는 "만일 이 작품이 게재되면 독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목신의 오후"는 그 다음 해 단행본으로 당대 유명한 화가 마네의 목판화를 곁들인 호화판으로 출판되어 다시금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마네에 이어 마티스-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시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1894년에는 말라르메 찬양가이던 드뷔시가 이 시를 주제로 한 교향시를 써 유명해졌다. 더우기 1912년에는 러시아의 무용가 니진스키가 발레로 안무-상연함으로써 이 시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목가는 18세기 프랑스 화단의 거장인 부셰의 그림에서, 또는 그의 선배 시인인 방빌의 한 연극에서 시상(詩想)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출발점, 대강의 줄거리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이나 분위기-상징은 전적으로 말라르메의 꿈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다. 그는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완전히 만들어 내야 한다. 꿈만이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 시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전반부: 목신이 잠에서 깨어난다. 간밤의 정사(情事)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스스로 묻는다. 그가 본 못가에서 미역을 감던 이 요정들은 실제의 인물이던가 혹은 그가 꿈을 꾸었던가? 그의 기억 속에 두 요정이 떠오른다. 하나는 정숙하고 차갑고, 다른 하나는 한숨만 쉬는 요정이었다. 그는 이 요정들의 육체를 범했던가?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자연 가운데 혼자 있었다. 그는 피리를 만들어 불며 기억을 더듬는다. 혹은 그들의 존재를 의심도 하고 혹은 사실을 낱낱이 회상도 하며--- 그러나 그는 피리를 불음으로써 사랑의 신비로운 잇자국을 잊어버리고 영감(靈感)의 기쁨을 맛본다.
  참고로 여기 싣지 않은 후반부의 개요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후반부: 이 영감은 다시 목신이 욕정을 일으킨 장면을 상세히 보여 준다. 몸이 얽힌 두 요정이 잠들어 있다. 목신은 이 들을 하나씩 겁탈한다. 그러자 두 요정은 서로 떨어져 도망쳐 버린다. 허망에 빠진 그에게 또 다른 요정 비너스가 에트나 산에 나타난다. 그는 사랑의 여신을 포옹한다. 그러나 이 또한 환상으로 그에게서 사라진다. 이제 목신은 뜨거운 오후의 열기 속에 굴복하여 목마른 모래 위에서 다시 잠이 든다. 꿈에서 님프들을 다시 만나 보기를 바라면서---
 이 시에 대한 해설도 구구하다. 말라르메에 대한 명쾌한 해설가 피튀로는 이 시는 우아한 상징 속에 격렬한 에로티시즘을 감추고 있다고 했고, 어떤 학자는 이 시는 말라르메의 집념인 사랑과 시, 욕정과 영감, 꿈과 현실의 갈등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시가 어떤 사상이나 도덕, 또는 감정을 전달하는데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단지 목신의 전설을 빌어 감각적이며 우아하고 몽환적인 세계의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짙은 육체의 향기와 원색적인 이미지, 추상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음악과 회화와 시의 종합적인 공예 작품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시의 길에서 이 시만큼 멀리 간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테판 말라르메(1842~1989): 말라르메는 문학 사조에서 상징파에 속하는 시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상징주의적인 시를 썼다기보다 순수시, 시의 이상적 형태를 위해 일생 생각하고 찾고 쓴, 시의 수도사(修道士)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의 양적으로 많지 않은(단 한 권의 시집) 시는 난해라는 장애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추앙자를 내었다.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된 지금에도 계속 많은 추종자들이 배출되어 그의 작품을 연구-해석하고 그의 교리에 따라 시를 짓고 있다.
 
말라르메는 파리 태생으로 하급 공무원 가정 출신이다. 5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재혼하여 일종의 고아와 같은 처지로 외할아버지-외할머니의 손 아래에서 자라났다. 학교 시절부터 심약한 그는 고독하였으며 야유하는 동료들을 피하여 혼자 몽상과 노트에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성인이 된 말라르메는 시골 중학교 영어 교사가 되어 이후 일생 동안 계속(약 30년 동안) 주로 지방 중고등 학교의 영어 교사로 빛 없는 평범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교사란 직업은 생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참다운 생은 시에 대한 사색과 탐구와 각고로 일관했다.
 그가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경부터인데 때때로 산문시나 소네트를 문학 잡지 등에 기고하였다. 1866년 <현대 파르나스 파>라는 문학지에 10편을 써서 발표한 것이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창문", "창공", "바다의 미풍" 등이 이 가운데 들어 있다. 이것은 그의 20대 때의 시이다. 그가 그의 온 정력을 다 쏟아 쓴 독창적인 시는 시극(詩劇) "에로디아드(1868)"와 "목신의 오후(1876)"이다. 이 2편의 시는 그가 오랜 시일에 결쳐 갈고 다듬은 것으로 특이한 사상과 정밀한 시적 언어를 구사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두번째 작품은 후일 드뷔시가 같은 이름의 교향시 서곡을 써서 더욱 유명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모두 극히 난해하여 전체적인 이해와 통일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난해성과 과작(寡作)으로 인하여 그는 1884년경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며 그의 작품은 경원시되어 왔다. 그의 유명한 "목신의 오후"는 원래 <파르나스 시집> 제 3집에 싣기로 되어 있었으나 심사 위원회에서 부결되어 게재되지 못하였다. 온화하고 누구에게도 친밀한 그도 이 일에는 격분하여 반대의 주동자 아나톨 프랑스에게 일생 원한을 가졌다 한다. 극소수의 시인들만이 그를 추앙했고 말라르메 자신 또한 대중적 명예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4년 베를렌느가 그의 시인론 <저주받은 시인들> 가운데 말라르메의 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게재하였고, 같은 해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 말라르메의 시 "에로디아"에 압도되었다는 대목이 널리 전파되어 그의 이름이 갑자기 유명해지고 이어서 젊은 상징파 시인들이 그를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다.
 그는 1871년 가을 파리로 올라와 계속 영어 교사로 지내면서 로마 가(街)의 작은 그의 아파트에서 '화요회'를 주재했다. 그의 탁월하고 깊이 있는 시와 예술론에 힘입어 1880년대에는 당신의 유명한 시인과, 문인 라포르그, 레니에, 바래스, 클로델, 지드, 발레리 등이 참석-경청하여 그의 작품 못지않게 시단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이름을 높이었다. 그가 파리에 정주한 시기는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로 창작에 있어서도 일종의 휴식 시기였다. 생활을 위해서인지 <영어 단어집>-<영어의 아름다움> 등의 어학 서적과, 그리스 신화의 해설팜인 <고대의 신들>을 출판하였고, "최신 유행"이라는 유행 잡지의 편집을 맡는 등 상당히 세속적인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말라르메가 또다시 난해무쌍한 장시(長詩)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85년 "데 제생트를 위한 산문"을 발표한 이후이다. 데 제생트란 앞서 나온 위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다. 이 시는 시인을 위한, 시인의 이상을 노래한 시의 본보기라고 하나 이 시의 해석은 난해한 일 중의 난해한 일로서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상징주의자와 그의 주석자(註釋者)들에게는 일종의 경서(經書)가 되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산문이나 소네트 형식으로 시인의 입장과 사명감 같은 것을 내용으로 한 시를 많이 썼고 또한 보들레르-베를렌느 등의 시인, 바그너-샤반느와 같은 예술가,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은 항해사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써서 그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이제 그의 이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퍼지고 그의 작품도 세계 각국에서 번역-출판되었다. 그의 화요회는 유럽의 가장 유명한 문인 인사들이 참가하는 모임이 되었고 1896년에는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베를렌느에 뒤이어 시왕(詩王)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방랑가인 베를렌느나 반항아인 랭보와는 정반대의 성품으로 우아하고 절제 있고 다른 불행한 시인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주는(베를렌느도 보호 받은 사람 중 한 사람) 인정 있고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시론에 있어서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97년 1월 그의 예술론인 <여담>과 같은 해 5월에 국제적인 잡지, <코스모폴리스>에 시 "한번의 주사위가 우연을 없앨 수는 없으리라"가 발표되어 소수의 그의 동조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다음 해 9월 8일, 파리 근교 발랑에 있는 시골 집 서재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후두 경련을 일으켜 다음 날 아침 절명했다. 그의 나의 56세였다.
 
달빛--- / 베를렌느
 
 
흰 달빛
숲속에 환하고;
가지가지마다
한 목소리 흘러나와
나무 그늘 아래로---
 
오, 사랑하는 이여,
 
연못은
깊은 거울,
그 속에 검은 버드나무
그림자 드리우고
그 위에 바람이 운다---
 
자, 지금은 꿈꿀 때,
 
크고도 부드러운
안식이
달무리진
창공에서
내려오는 듯---
 
지금은 더없이 그윽한 때.
 
 
가을 노래 / 베를렌느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외로운
가락으로
      내 마음 여이나니.
 
종소리 나면
가슴 꽉 막혀
      파리한 얼굴로
지난 날
돌이켜보며
      눈물 흘린다.
 
나도 가버리리라,
모진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떠도는
      낙엽과 같이
 
 
거리에 내리듯--- / 베를렌느
 
                   거리에 조용히 비가 내린다.
                        -아르튀르 랭보-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맘 속에 눈물 내린다.
가슴 속에 스며드는
이 외로움은 무엇이런가?
 
속삭이는 비 소리는
땅 위에, 지붕 위에!
울적한 이 가슴에는
아, 비의 노래 소리여!
 
역겨운 내 맘 속에
까닭 없는 눈물 흐른다.
무엇, 배반은 없다고?
이 슬픔은 까닭 없는 것.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 베를렌느
 
       1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나를 사랑하여
야 한다. 너는 보지 않는가?
창에 찔린 내 옆구리, 빛나며 피 흘리는 내 심장,
그리고 너의 죄로 무거운 내 아픈 팔을
 
그리고 내 두 손을! 그리고 너는 보지 않는가? 십자가와
못들과 담즙과 해면(海綿)1)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네게
육(肉)이 지배하는 이 괴로운 세상에서
내 살과 피, 내 말과 목소리만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나 자신도 너를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았던가?
오, 성부(聖父) 안의 내 형제여, 오, 성신(聖神)  가운데
내 아들이여
그리고 나는 기록된 바와 같이 고난을 받지 않았던가?
 
나는 너의 최후의 고뇌를 흐느껴 울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네가 밤마다 흘리는 땀을 흘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심한 친구여, 그대는 내가 있는 곳을 찾고 있다고?
 
                                                 1)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목 마르다고 하자
                                                               군사들은 담즙(혹은 초)로 적신 해면을
                                                               그의 입에 갖다 대었다는 성경 구절을 말함.
 
           8
 
아, 주님이시여, 어찌된 일입니까? 아아! 저는 지금 엄
청난 기쁨으로
온통 눈물에 젖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저에게 기쁨과 동시에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악(惡)과 선(善)은 똑같이 저를 끄는 힘을 가졌습
    니다.
 
저는 웃고, 웁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마치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나오라 부르는 나팔 소리와 같습니다.
저는 봅니다, 방패 위에 높이 실려가는
청백(靑白)의 천군 천사(天軍天使)들을
그러나 이 나팔 소리는 저를 자랑스러운 불안으로 이끌어
갑니다.
 
저는 당신이 저를 택하심에 황홀하여 또한 두렵습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관용을 압니다.
아! 얼마나 큰 노력이, 그러나 이 얼마나 뜨거운 열정(熱情)
입니까! 그리하여 저는
 
겸허한 기도에 가득 차 지금 여기 있습니다. 비록 이 크
나큰 심적 동요는
당신의 목소리가 저에게 알려 주신 소망을 아직은 혼동하
고 있어,
저는 떨면서 갈망하고 있습니다.
 
 
베를렌느(1844~1896): 베를렌느의 생애는 추문으로 얼룩지고 비참과 불행으로 연속되었다. 한 마디로 의지라는 것이 결여되어 음주와 방랑과 본능적 충동에 휘말려 아내에게는 동성애로 인해 이혼 당하고,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만년에는 가난과 병으로 계속 자선 병원의 신세를 져야만 했던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 추하게 생긴 용모와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알콜 중독자인 그에게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시가 흘러나왔다는 것은 기이한 신의 배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폴 베를렌느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도시 메츠에서 출생하였다. 외아들로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7세 때 부모와 함께 파리로 올라와 당시의 보나파르트 중고등 학교(지금의 콘돌세 중고등 학교)에 입학, 이를 졸업하고 바카로레아(대학 입학 자격 시험)도 합격하였다. 그러나 세상일에 별다른 야심이 없는 그는 대학 진학에는 뜻이 없어 얼마 후 그가 20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 친구의 주선으로 파리 시청의 하급 서기로 들어갔다.
 그 후 7년 동안 보불 전쟁이 일어나 그가 그 자리를 물러나기까지, 그는 줄곧 같은 과, 같은 자리, 같은 책상에 앉아 매일 똑같은 일을 되풀이 했다. 그렇다고 불평하거나 전직을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의 유일의 관심사, 유일의 노력은 마음이 내키면 시를 써 보는 일이었으며 유일의 즐거움은 퇴근 후 카페에 들러 압생트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문학과 세상일을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그의 음주벽은 이 때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그의 부모나 친구들도 걱정할 정도이었다.
 그는 시청 재직시 2권의 시집인 <토성인 시집 (1886)>과 <우아한 잔치(1869)>를 자비로 출판하였다. 이 두 시집이 나왔을 때 위고를 비롯, 일부 문인들의 형식적인 찬사와 격려도 없지 않았으나 그의 진가를 알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70년 보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마틸드 모테라는 16세 소녀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비록 전쟁의 위험과 불행이 예견되었으나 이로써 베를렌느는 오랜 외로움과 무위 끝에 그의 생애에 밝은 햇빛이 비추는 듯했다. 이 아름다운 심경을 노래한 얄팍한 시집이 <기쁜 노래(1871)>이다. 그러나 가정적 불행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결혼한 지 1년도 못 되어 랭보라는 소년이 나타났다. 베를렌느 보다 10년이나 아래인 17세의 폭풍 같은 이 천재는 그를 삽시간에 정복하고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신혼 가정을 산산이 부셔 버렸다. 드디어 베를렌느는 아내와 가정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벨기에-영국 등지를 방랑하며 동거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 두사람 사이에도 갈등이 생긴다. 부뤼셀에서 사소한 일로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총을 쏘아 부상케 하여 벨기에의 몽스 감옥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875년 1월 베를렌느는 어머니만이 홀로 기다리는 옥문을 나섰다. 그는 2년 동안의 옥중 생활로 참회하고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감방에서 <무언(無言)의 연가>를 써서 아내 마틸드에게 용서를 구하고, 출옥하기 얼마 전에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하여 열렬하고 눈물겨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이로부터 훨씬 뒤에(1881) 출판한 시집 <예지(叡知)>와 이외의 몇 편의 작품집은 이 때의 종교적 체험을 순수하고 솔직하게 담은 것이다.
 감옥을 나온 그는 새사람이 되어 자기 힘으로 살기 위하여 파리를 떠나 그 후 몇 해 동안 영국과 벨기에의 시골 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프랑스어 또는 영어를 가르쳤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선생으로 학생들과 학부형에게 사랑과 존경도 받았다. 한때는 농부가 되어 농원을 일으키려고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결심도 노력도 허사였다. 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사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로서 그가 내심 극진히 사랑하여 온 아내 마틸드가 그이 호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법적으로 헤어지게 된 사실을 든다. 여하튼 그는 다시 술을 마시게 되고 본능적 충동과 욕구가 그를 엄습해 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올라왔다. 파리에서의 그의 생활은 비참 그것이었다. 팔리지 않는 원고를 들고 떨리는 한 손에 단장을 짚고 한 쪽 다리를 끌려 두 눈을 반쯤 감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어려운 동안에도 시작(詩作)과 소설과 평론 등의 작품 활동은 계속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시학(詩學)이 들어 있는 <옛날과 지금(1884)>, 그리고 당시 문단에서 무시되거나 참다운 가치가 알려지지 않았던 코르비에르, 빌리에 드 릴르-아당, 말라르메, 랭보와 자기 등 불행한 시인들의 예술적 가치를 논한 그의 시론 <저주받은 시인들(1884)>은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잊혔던 이들 시인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1886년, 그를 사랑하고 돕고 보살펴 주던 유일의 보호자인 그의 어머니도 죽었다. 이 헌신적인 어머니를 그는 한 해 전에 목을 졸라 죽게 할 뻔하여 1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제 베를렌느는 혼자 살아가기 위해 더욱 많은 시. 소설, 수기, 잡문 등의 글을 써야 했다. 이 가운데는 그의 시 작품 가운데 걸작이라고 인정되는 "평행하여(1889)"도 들어 있다.
 그가 50세가 된 만년에는 그의 시가 차츰 알려지고 젊은 시인들 특히 상징주의와 데카당(퇴페주의)파의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에 대한 가치가 인정되고 이것은 또 그의 불행하고 파란 많은 생활과 겹쳐 그를 둘러싼 일종의 문학적 전설이 생겨났다. 이제 그는 카페나 병원으로 그를 찾는 많은 젊은 문인들에게 새로운 예술을 가르치는 시단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젊은 문인들의 추대로 르콩트 드 릴르의 뒤를 이어 '시의 왕'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896년 그는 52세로 빈민굴의 하숙방에서 청부의 팔에 안겨 쓸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운집한 시인, 화가, 문인, 배우 등 그의 숭배자들에 둘러싸여 성대하게 바티뇰 묘지로 갔다.
 
감각 / 아르튀르 랭보
 
 
여름날 푸른 석양 녘에 나는 샛길을 걸어가리라.
밀 이삭에 찔리며 여린 풀을 밟으며
꿈꾸듯 가는 나는 산뜻한 풀잎들을 발에 느끼며
들 바람이 나의 맨머리를 씻게 하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러나 맘 속에 솟아오르는 끝없는 사랑
나는 가리라, 멀리 더 멀리 보헤미안처럼
자연 속을 여인과 함께 가듯 행복에 젖어.
 
*자연스런 이 짧은 시는 그의 초기의 것이며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는 것이다. 이 시는 16세의 고등 학교 학생
랭보가 당시 그보다 30세나 위이며 시단의 중견인 방빌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었다. 그가 늘 좋아하며
마음껏 걸어다니던 들판을 생각하며 쓴 것일까? 혹은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은 마음의 충동을
느끼며 쓴 것일까? 여하튼 "나는 가리라 멀리 더 멀리"에서 방랑자 랭보의 앞날이 나타나 있다.
 우리 나라의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시이다.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모음(母音) / 아르튀르 랭보
 
 
A 검정색, E 백색, I 빨강색, U 초록색, O 파랑색; 모
   음들이여,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라;
A, 코를 찌르는 악취 주변에서 잉잉대는
빤짝거리는 파리 떼들의 털난 검은 조끼,
 
어둠의 만(灣);E, 안개와 텐트의 순진무구함,
오연(傲然)한 빙산(氷山)의 창(槍), 백발의 왕(王), 산형
   화(繖形花)의 떨림;
I, 붉은 색의 옷, 토한 피, 분노 가운데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오는 웃음 또는 참회의 도취;
U, 천체(天體)의 순환, 녹색 바다의 신비로운 진동
가축들이 널려 있는 목장의 평화, 넓은 학구적인 이마 위에
연금술이 새겨 놓은 주름살의 평화로움!
 
O, 이상한,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 찬 최후의 나팔
온 세상과 천군천사가 지나간 뒤의 침묵;
-오, 오메가, 그녀의 눈의 보라색 광채여!
 
* 이 시는 비평가, 문학사가 들로 하여금 그 설명에 가장 많은 잉크를 쏟게 하였고 지금도 논란과 다른 의견의
대상이 될리만큼 유명하다. 이미 보들레는 향기와 소리와 빛깔이 서로 응답하는 세계를 예견한 바 있는데 랭
보는 이를 좀더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탐구하고 실천한 점에 특색이 있다. 어떻게 랭보가 글자(모음 들)에서 빛
깔을 느끼게 되었는가에 대하여서도 여러 가지 연구와 설명이 있다. 보들레르의 '조응(照應) 이론' 외에도 그가
유년 시절 글자를 배울 때 색칠한 알파베트를 즐겨 본 기억이 무위식적으로 잠재해 있었다든가, 신체적 공감설,
신비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랭보는 우리들의 여러 감관(感官)이 파악하는 현상
뒤에 통일되고 서로 호응하며 어떠한 감관에도 파악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실재를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감
각의 조직적 착란과 의식적 환각 상태의 유지로서 이러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보기이다.
 그러나 그의 기도나 목적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이 시는 그 놀라운 연상력, 대담한 상상, 강렬한 인상과 환상
이 뒤섞인 특이한 시이다.
 
 
새벽 / 아르튀르 랭보
 
나는 여름 새벽을 가슴에 끌어 안았다.
 
궁전(宮殿)의 앞쪽은 아직 아무 기척 없이 고요했
다. 물도 죽은 듯 했다. 어둠의 진영(陳營)은 숲속의 길을
내놓지 않고 있다. 나는 생생하고 따스한 공기를 깨우며
걸어갔다. 이슬 보석들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밤의 날개
들은 소리 없이 일어났다.
 
나의 첫 사업은 이미 신선하고 푸른빛으로 가득 찬 오
솔길에서 나에게 자기 이름을 일러 주는 한 송이의 꽃을
만난 일이었다.
 
나는 전나무 사이로 머리칼을 풀어 헤치고 떨어지는
금발의 폭포에게 웃음지었다. 나는 은빛 나뭇가지 끝에
서 여신(女神)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나는 여신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겼다. 길
에서는 팔을 흔들어 대며, 들판에서는 수탉에게 그녀를
밀고(密告)했다. 그녀는 큰 도시의 종각들과 둥근 지붕
사이로 도망쳤다. 나는 거지처럼 대리석 부둣가를 달려
가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월계수 숲 근처의 언덕길 높은 곳에서 나는 주어 모은
그녀의 베일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방
대한 육체를 약간 느꼈다. 새벽과 어린아이는 숲 아래로
쓰러졌다.
 
깨어 보니 대낮이었다.
 
*시집 <알뤼미나시옹은 대부분 1874년에서 1875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랭보 자신은 이를 발표하거나
출판할 생각이 없이 원고로 남겨 두었다. 그 후 약 10 년이 지난 뒤 랭보의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의 종적조차 묘연한 1886년, 그의 친구이며 애인이었던 베를렌느에 의하여 그 중 37 편의 산문시가 랭보 모르
게 "라 보그"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폴 클로델은 이를 읽고 그의 전작룸의 방향을 가늠하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동시대인인 발레리는 모든 시는 각각 다른 세계의 빛을 발한다고 하였다. 나머지 시를 합쳐 50
편의 시집이 출판된 것은 1895년 랭보가 죽은 지 4 년 뒤였다. "일뤼미나시옹"이라는 제목은 신비적 계시와 채
색 판화의 두 가지 뜻이 합쳐 들어 있다고 해석된다. 이 산문시들이 다룬 제목은 어린 시절의 추억, 도시 풍경, 이
른 아침의 야외 산책, 항구와 배들 등 다양하다. 이 시집에서 랭보는 <지옥의 계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
미 1871년에 친구에게 편지로 피력하였던 그의 시론을 실천에 옮긴 셈이다. 특히 시 형식에 있어서 더욱 자유로운
형태를 취하여 보들레르의 <산문 소시집(1869)> 이후 가장 아름다운 산문시를 남겼다. 베를렌느는이 시집을 빛나
는 금강석의 산문이라고 평했다.
 시 "새벽"은 이 시집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가까이 하기 쉬운 것의 하나이다. 또한 밝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작품으로 티보테는 프랑스 문학 작품 중 우리 기억에 남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의 하나라고 평했다.
 
 여기서 새벽은 여신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서두부터 "나는 여름 새벽을 가
슴에 끌어 안았다"고 소리친다. 소년은 밤의 어두운 옷을 입은 이 여성을 참을 수 없는 욕정에 끌리어 쫓아가 그녀의 검
은 밤의 옷을 하나씩 벗긴다. 차츰 차츰 나체의 빛나는 육체가 나타난다. 새벽과 어린아이는 행복의 절정 속에 쓰
러진다. 깨어 보니 새벽은 간 데 없고 대낮이 되었다. "깨어보니 대낮이 되었다"는 서두의 "나는 여름 새벽을 끌어
안았다"와 조화-호응하고 있다.
 이 시에서 새벽만이 의인화된 것은 아니다. 모든 자연이 말하고 움직인다. 밤의 날개는 새벽을 위해 일어났고, 이슬
은 보석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꽃은 자기 이름을 대고, 폭포는 장난을 친다. 여기에서 이 시의 신화적인 또는 동화적인 분위
기가 생긴다. 그리스의 태양신 아폴론이 요정 다프네를 욕보이기 위해 뒤쫓아가자 다프네는 결국 월계수로 변모하여 이를
피하였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내가 갑자기 어린아이로 변모하는 것도 동화 같은 여운이다.
 
 아르튀르 랭보(1854~1891): 랭보는 그의 광란적 방랑, 몇 편의 파격적 시, 그리고 문학에 대한 그의 돌연한 단절이 너무나 기이하여 하나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인물이나 작품에 대하여서도 참으로 구구한 추측과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16세에서 20세 안팍까지 단지 3-4 년 동안에 문학으로 이루고자 했고, 우연히 남게 된 몇 편의 작품은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고 깊이가 있어서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작품 <지옥의 계절>, <일뤼미나시옹>에 접한 폴 클로델은 이를 참다운 계시라 했고 초현실주의의 총수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자기들의 운동의 가장 선구자로서 추앙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실존주의-사회주의에 대하여서도 그의 인간과 작품은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에 대한 관심은 계속 확산-성장하는 느낌이다.
 이르튀르 랭보는 북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소도시 샤를르빌에서 태어났다. 이 곳은 지극히 평범하고 변화 없고 보수적인 소도시로 어린 랭보는 이미 주위에 대한 강한 반항심을 느꼈으며, 그가 자란 가장에서도 카톨릭 교의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강요하는 어머니 아래 숨막힐 듯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잘 참았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여 그의 선생들은 그를 신동이니 천재니 하고 불렀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그의 마음 속에는 자기의 가정과 도시 또한 그가 처한 현실에 대한 혐오와 반항심을 누를 수 없어 여러 번 고향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했다. 어떤 때는 책을 팔아서, 어떤 때는 걸어서, 어떤 때는 무임 승차로 벨기에, 프랑스 등지를 방랑하였으나 그 때마다 체포-투옥되어 되돌아왔다. 그의 다른 곳으로의 탈출 기도와 방랑 생활에 대한 동경에는 일종의 숙명적 양상이 있다.
 1871년 가을, 네번째의 탈출로 파리로 오게 되었다. 여기서 랭보는 그의 친구의 권고로 베를렌느에게 자기의 시를 담은 편지를 보냈는데 이보다 1 년쯤 전에 결혼한 베를렌느는 당장 파리로 올라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리하여 이 소년 시인은 "술취한 배"라는 원고만 들고 파리로 올라오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이후 5년간 열정적이며 폭풍 같은 관계가 벌어진다. 이 비정상적 관계는 결국 1873 년 베를렌느의 랭보에 대한 권총 발사로 끝이 나고 랭보는 다음 해인 1874 년 그의 끝없는 방랑 생활의 길에 오른다. 이 때까지 그는 그의 두 개의 작품 <지옥의 계절>과 <일뤼미나시옹>을 끝냈는데, <지옥의 계절>은 그가 직접 브뤼셀 출판사에서 인쇄하게 하였으나 <일뤼미나시옹>은 원고로 갖고 있다가 배를렌느의 주선으로 인쇄되었다. 1874 년 이후부터 랭보는 문학을 버리고 일대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시나 문학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한 그는 이번에는 젤멘느 누보라는 새로운 친구와 함께 영국-독일-이탈리아-북 유럽의 여러 나라, 키프로스 등을 약 6 년 동안 전전하였다. 1880 년에는 완전히 유럽을 떠나 아라비아의 이든을 거쳐 아프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약 9 년 동안 이디오피아의 하라라에서 상사 대표로 있으면서 탐험과 무기 무역에 종사하였다. 1891 년 오른쪽 다리 정맥에 악성 혹이 생겨 이 해 5 월 프랑스로 돌아와 마르세이유 병원에서 다를 절단하였으나 같은 해 11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37세이었다. 죽기 전 그는 그의 친척에게 병이 나으면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청년 아르튀르 랭보는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였다. 고귀한 얼굴과 젊음이 넘치는 육체는 자연 그를 보는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밖으로 나타나는 그의 성격은 거칠고 난폭하고 모든 일에 조소적이며 반항적이었다. 이는 거의 고의적인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므로 베를렌느에 의해 그를 소개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일종의 공포와 반발심을 느꼈으며 동시에 그의 강력한 개성과 독창성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마음 속에는 누를 수 없는 자유에 대한 끝없는 갈망,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욕구가 용광로 같이 타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제약이나 구속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 미지의 것, 생명적인 것을 찾으려는 격렬한 충동과 욕구가 있었다. 그가 가정을 뛰쳐 나오고, 방랑을 일삼고, 종교를 모독하고, 일시적이나마 사회주의에 경도하고 동성애 빠지고, 스스로 조악한 행동을 한 것은 모두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로운 방랑 생활에서 초기의 청순한 몇 편의 방랑시와 또 전통과 현실에 매달린 인물들과 제도에 대한 경멸과 조소를 던지는 풍자시도 남겼다("음악에 맞추어" "교회의 빈민들" 등)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시인이 되고 문학을 통하여 이루고자 한 것은 그가 말하는 '보는 자'가 되어 미지의 세계, 진정한 생,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젊은 랭보는 스스로 보는 자가 되기 위햐여 진지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알콜, 환각제의 사용, 동성애, 무의식 세계의 탐구, 자발적 환상 상태의 조작, 심지어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미지의 세계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새로운 세계를 붙잡으려 하였다. 그의 말대로 큰 병자, 큰 죄인, 큰 저주받은 자가 됨으로써 최고의 지자(智者)가 되어 우주와 절대 세계를 붙잡으려고 했다. 또한 랭보는 이렇게 자기가 보는 미지의 세계,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감각에 통하는 시적 언어를 만들려고 하였다. "향기, 소리, 빛깔 등 모든 것을 요약하는" 언어이다. 그가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부른 이 기도(企圖)는 일찌기 보들레르가 시도한 바 있거니와 빛깔의 소리를 듣고 소리의 향내를 맡을 수 있는 감각적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다.
 랭보는 보들레르의 시도를 극단까지 추진했다, 그의 후기 작품 <지옥의 계절>과 <일뤼미나시옹>은 이러한 노력과 모험의 기록이다. 그가 이 기도에 성공했는지 못 했는지는 차치하고, 그가 이러한 미지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결사적 노력, 그리고 새로운 감각을 나타내는 새로운 시적 언어를 창출하려고 한 정신적 노력은 시에 대한 새로운 사명과 방식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스탕스 / 모아레스
 
 
*
나의 젊은 시절, 너의 격조 높은 현금(玄琴) 소리는
꽃 속을 흐르는 물같이 노래 불렀건만
이제는 오호라! 침울한 웅얼거림:
줄 튕기는 손가락에 피가 맺힌다.
 
*
빛이 드리우는 조용한 시냇물은
새들과 여름 하늘을 비추지만
오, 현금아, 바위를 뚫고 가는 물은
검은 굴 속에서 더욱 아름답다.
 
*
말하지 말라; 인생은 즐거운 향연이라고;
이는 어리석은 자, 저속한 인간의 말.
더욱 말하지 말라; 인생은 끝없는 고해(苦海)라고;
이는 용기 없는 자, 너무 빨리 낙심하는 사람.
 
웃어라 봄날에 나뭇가지 흔들리듯
울어라 북풍처럼, 바닷가의 파도처럼
모든 쾌락을 맛보고 모든 고통을 감내한 후;
말하라: 인생은 풍부하다고, 그리고 인생은 꿈 속의 꿈이
   라고.
 
*
비 머금은 이 저녁, 바시락 소리 내며
얼굴에 와 닿는 나뭇잎 하나,
무슨 징후인가?
비밀의 경고인가?
 
가을이 너를 시들게 하여 이제 너는
한 방울의 빗물도 무거워 떨어진다.
세월의 집에 눌려 무덤 쪽으로 굽어진
내 이마 위에 떨어지는구나.
 
아, 안때 뜰 위에 그늘을 내려 주던 쓸쓸한 낙엽이
너는 바람과 함께 지나가라!
이제 내 옇혼이 명상 속에 묻힐 때
꿈은 운명의 문들을 연다.
 
 
모레아스(1856~1910): 장 모레아스는 그리스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정통 그리스인이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법관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정 교사 아래 프랑스어를 배웠다. 고등 학교를 마치고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하여 독일의 본과 하이델베르크로 유학을 갔으나 공부보다는 방랑 생활을 즐겼다. 이후 이탈리아-프랑스를 여행하였는데 프랑스에서는 댄디(dandy) 생활을 하며 프랑스의 소위 전위 문학 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했다. 결국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어 프랑스인으로 귀화하고 이후 일생을 거기서 마쳤다.
 이렇게 문학 운동에 가담해 오던 그는 1884년 당시 시단에 유행하던 상징파 경향의 시집 <사구지대(沙丘地帶)스탕스>를 발간하였는데, 그 속의 시들은 보들레르, 베를렌느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있다.
 이어서 2년 위인 1886년에는 훨씬 독창적이며 새로운 양식의 <애가(哀歌)>를 출판하였고 같은 해 상징파 운동의 "선언문"을 "피가로"지에 발표하는 등 상징파 운동의 선구자이며 이론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 운동은 외면적일 뿐 그의 내면에는 시류(時流)에서 독립하여 참다운 개성적인 시가를 찾으려는 욕구가 있었다. 그리하여 1891년에는 급선회하여 젊은 모라스 등과 함께 소위 '로마파'라는 새로운 문학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프랑스 문학 정신의 원천을 이루는 그리스-로마의 고대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으로, 요컨대 낭만파-상징파 문학 등에서 프랑스 정신에 위배되는 이국적-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순수하고 건전한 뿌리를 고대(古代)에서 찾자는 전통주의, 복고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신과 운동에서 그는 그의 대표적이며 후세에 기억될 일련의 시가집을 남겼다. 총 7편으로 된(생전에 6편과 사후 출판된 1편) 소위 <절가(節歌)>라는 것으로 시인은 이 가운데 자연-인생-사랑 등의 고전적 주제를 현대적 감각과 감정으로 다루며 이를 고대풍의 간결-엄격한 시형 가운데 담고 있다. 비교적 짧은 정형시(定型詩)에다 자연의 묘사, 또 그 뒤에 숨은 인생의 뜻이나 도덕을 담은 점에서 우리 나라의 시조(時調), 시절가(時節歌)와 흡사하다. 아나톨 프랑스는 그를 가리켜 '상징주의의 롱사르'라고 했다.
 
저녁 / 알베르 사맹
 
 
이는 여인의 얼굴같이 부드러운 저녁
엄동설한 앞에 핀 기이한 저녁
박명(薄明) 위에 떠 있는 황혼의 그윽함은
상처입은 마음 위에 가는 실 되어 내린다.
 
정신적인 초록빛----핏기 잃은 장미화---
멀리 매끄러운 개선문은 윤곽을 잃고
푸른기 도는 서방(西方)에 내리는 밤은
아픈 신경에 더없이 부드러운 안식을 뿌려 준다.
 
검은 바람과 납빛 안개의 달에
만추(晩秋)의 꽃잎들은 떨어졌고
반음계의 아름다운 하늘 빛깔은 숨이 넘어간다.
 
옛 향기 감도는 오래된 건물 옆을 쫓아
나는 내 손가락에서 매혹적인 꽃 냄새를 들이마신다.
이는 여인의 얼굴같이 부드러운 저녁.
 
반주(伴奏) / 알베르 사맹
 
 
은색 사시나무, 보리수, 자작나무---
달빛은 물 위에 낙엽지고----
 
저녁 바람에 빗겨지는 긴 머리칼에서 오는 양,
여름밤의 내음은 검은 호수에 떠돌고
향기로운 넓은 호수는 거울같이 빛난다.
 
노(櫓)는 떨어졌다 다시 올라가고
내 배는 꿈 속을 흘러간다.
 
내 배는 하늘 속을 흘러간다
환상 같은 호수 위를 미끄러지며---
 
내가 양쪽에 내리는 두 개의 노는
한 쪽은 우울, 또 한 쪽은 침묵.
 
두 눈을 감고 장단 맞추어
아아, 내 가슴아, 무위(無爲)의 노를,
느리고 숨질 듯 저어라.
 
저 멀리 달은 언덕 위에 팔굽을 괴고
물 위를 스쳐 가는 침묵의 뱃소리에 귀 기울리며---
방금 꺾은 세 떨기 백합화는 내 옷 위에서 죽어 간다.
 
오, 창백하고 정욕적인 밤이여, 그대 입술을 향하여
떠오르는 것은 꽃들의 영혼인가 혹은 내 영혼인가?
긴 갈대잎 위에 빗겨지는 은색 밤의 머리칼---
 
물  위에 떨어지는 달과 같이
파도에 떨어지는 노와 같이
내 마음, 슬픔되어 낙엽진다!
 
알베르 사맹(1858~1900): 가을과 황혼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알베르 사맹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상징파 시인 중에서 일반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나 시 활동에 있어서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는 시인이다. 그 스스로 "나의 생애에는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했다
 알베르 사맹은 북부 지방 릴르 공장 지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학 시절 아버지가 죽자 공부를 중단하고 시골 은행 직원으로 취직하여 생계를 꾸려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1882년 파리로 올라와 지인의 추천으로 처음에는 파리 시청, 뒤에는 센느 현청의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미미한 자리는 그에게 생계 수단인 동시에 파리 문학 단체와 접촉하는 기회이기도 하였으나 적극적 참여는 하지 않았다.
 원래 내성적이며 허약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이렇다 할 열렬한 사랑이나 인생에 대한 도전도 없이 말단 공무원의 서기직 일에 자족하며 보들레르, 베를렌느, 포의 시를 읽고 시를 쓰는 것이 유일의 즐거움, 유일의 위로, 유일의 보수로 삼았다.
 그의 문학 활동으로서는 1889년 문예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창간에 참여한 일이 있고, 1893년 친구들의 권고로 처음으로 시집 <왕녀의 정원에서>를 출판하여 비로소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관능적이면서도 깊은 애수를 담은 정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음악적 시구로 잘 조화시킨 점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제2시집 <화병의 몸 언저리에>를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독특한 시풍은 더욱 세련되고 더욱 선명하고 성숙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감명을 주었다. 이 외에 그의 사후 출판된 시집 <황금마차>에는 그가 죽기 2년 전 어머니를 잃은 아픔, 행복을 알지 못한 우울과 후회, 가까와 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그는 1900년 지병인 폐병으로 파리 근교에서 사망했다.
 
겨울이 오다 / 라포르그
 
감정의 봉쇄! 근동(近東)에서 오는 우선(郵船)들!----
아아! 비가 내린다! 아아! 밤이 온다.
아아, 이 바람!----
만성절(萬聖節), 성탄절, 그리고는 새해,
아아, 안개 속의 이 모든 굴뚝들!---
공장들의---
 
모든 벤치가 젖어서 이젠 앉을 수가 없다;
정말, 내년까지는 모두 끝장이다.
벤치는 모두 젖어 있고 숲에는 저렇게 붉게 녹이 나고,
뿔나팔 소리는 저렇게 뚜뚜- 울렸다!----
 
아아, 영불(英佛)해협 바닷가에서 몰려온 구름들은
우리들의 마지막 일요일을 망쳐 버렸다.
 
안개비가 내린다;
젖은 숲속에 친 거미줄들은
물방울에 눌려서 휘어진다. 이야말로 저들의 파산이다.
 
농사 흥행극의 노다지 금판에서
놀던 노동의 전권(全權) 대사 태양들,
그대들은 지금 어디 묻혀 있는가?
오늘 저녁 숨넘어가는 해가 언덕 꼭대기 위에,
금작화 속에 외투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옆으로
  누워 있다.
목로 주점에 뱉은 가래처럼 해쓱한 해가
노란 금작화 자리 위에,
가을의 노란 금작화 자리 위에 누워 있다.
뿔나팔 소리가 그에게 소리친다!
정신을---
정신을 차리라!
타이오! 타이오! 알랄리1)
오, 슬픈 넋두리여, 좀 그만 두라!---
그리고 너무 떠들어 대지 말라!---
그런데 태양은 저기 목에서 떼낸 연주창처럼 누워 있다.
그리고 그는 떨고 있다. 아무도 없는데---
 
자아, 자아, 그리고 얄랄리!
이야말로 우리가 잘 아는 겨울이 온다;
아아! 큰 가로(街路)의 구부러진 길목에는
빨간 모자 아가씨2)도 다니지 않고---
아아! 지난 달에 생긴 달구지 바퀴 자리가
돈키호테처럼 어처구니없는 두 개의 거대한 줄이 되어
패주하는 구름의 순찰대 쪽을 향하여 올라간다.
그러면 바람은 그 구름들을 대서양의 품 안으로 몰아왔
  다!---
서두르자 서두르자, 이번이야말로 우리가 잘 아는 그 계
  절이다.
지난 밤, 바람은 정말 심하게 불었다!
오 그 파괴, 오 새둥지들, 오 자그마한 꽃 동산들!
나의 마음과 나의 잠; 오, 도끼 소리의 울림!---
 
이 모든 나뭇가지에 어제는 푸른 잎이 달려 있었는데
오늘, 나무 밑에는 단지 낙엽 더미만 쌓여 있을 뿐
큰 바람이 나뭇잎과 잔 잎들을
줄지어 연못가로 몰아간다.
혹은 사냥터지기의 모닥불감으로
혹은 프랑스에서 먼 곳에 있는 병사들의
구급차용 담요로 쓰이겠지,
 
겨울이다. 겨울이다, 겨울이란 녹은, 굳은 물체를 침공한다.
그 녹은 장장 수십 리 되는 우울증으로
아무도 안 다니는 대로(大路)의 전선줄을 침식한다.
 
뿔나팔, 뿔나팔, 뿔나팔, --슬프고---
슬픈! 뿔나팔 소리는
음색을 바꾸며 사라져 간다.
음색과 음조를 바꾸어 가며
북풍에 실려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 소리를 떠날 수가 없다; 아 그 여운!---
겨울이다. 겨울이다, 이제 포도 거두기도 그만!---
이제 무한히 참을성 많은 비가 오리라.
포도 거두기도 그만, 이제 모든 포도 바구니들도 안녕,
밤나무 아래서 춤추는 와토의 모든 둥근 치마3)들도
겨울이란 다시 개학한 학교 기숙사에서 나는 기침 소리요,
타향살이의 탕약이요,
서민가를 우울케 하는 폐렴과
중심가의 모든 비참이다.
 
단지 털옷, 고무 장화, 약방, 몽상
도시 변두리의 지붕의 대양(大洋) 앞에서 내려다보는
바닷가의 높은 발코니에 열어 젖힌 커튼들
램프, 판화, 차, 비스킷
그대들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 아닐 것인가!---
(오, 그리고 그대는 아는가? 피아노 외에
신문에 나는
주간 보건(保健) 통계 숫자의
엄숙한 저녁의 신비를)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젠 겨울, 그리고 이 못난 지구!
남풍이여, 남풍이여
시간 짜놓은 덧신의 실4)을 줄줄이 풀어 다오!
겨울이다, 오, 이 무참함! 겨울이다!
해마다 해마다
나는 목소리를 합쳐 겨울의 음(音)을 알리고자 한다.
 
1)타이오, 알랄리는 모두 사냥 용어로 타이오는 짐승이 목격되었을 때 개들에게 쫓아가라는 신호의
몰이 나팔이고, 알알리는 짐승이 몰려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라는 공격 나팔 소리이다.
2)빨간 모자 아가씨는 동화 작가 페롤의 이야기에 나오는 소녀 주인공.
3)와토 식 둥근 치마란 와토의 그림에서 춤추는 여성들의 둥글고 풍성한 치마. 아포르그는 panier가
바구니라는 뜻과 또 와토 당시의 치마를 뜻함으로써 일종의 말의 유희를 한 셈이다.
4)시간이 짜놓은 덧신의 실은 유명한 오딧세우스의 아내 페낼로페가 오딧세우스의 부재 중 많은 청
혼자들의 사랑을 거절하기 위해 낮에 짜놓았던 베틀의 천을 밤이면 풀었다는 전설에 연관시킨 표현.
 
* 이 시는 라포르그의 사후(死後) 출판된 시집인 <최후의 시> 안에 들어 있으며 그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또한 이 시는 그의 다른 시와 함께 시의 형식에 있어서 자유시를 향한 과감한 돌파구이었다는 점과 새로운 현대적 감각을 창시한 점에서 20세기 시가를 예고하고 있다.
 이 시는 겨울의 도래(到來)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보들레르의 "가을의 노래"나 "파리의 풍경"을 연상케 하나 라로르그의 시는 더욱 구체적, 사실적이며 더욱 절망적이다. 이 시는 역시 겨울이 가져오는 슬픔, 우울, 체념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라포르그는 시인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비애 또는 그로 인해 연상되는 어떤 상상이나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객관적이며 일상적인 때로는 너무나 통속적인 경험과 현상을 통하여 시인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병들고 가난하여 2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그대로 직시하기에는 너무나 슬프고 무의미하고 역겨웠다. 따라서 그는 조소와 우울한 야유, 익살로 대처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겨울은 엄숙한 죽음이나 머리 속에 그리는 환상적인 궁전이 아니라 감정의 봉쇄요 공원의 젖은 벤치, 망친 일요일, 숲속의 거미줄이나 새 둥지의 파산이다. 그리고 학교 기숙사의 기침, 탕약, 폐렴, 비참의 계절이다. 더구나 그는 태양의 죽음으로 그의 우주적인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외투를 입은 채 언덕 위에, 금작화 위에 모로 누워 죽어 가는 태양, 아무도 없이 떨고 있는 태양은 그 자신의 무력감과 고립무의(孤立無依)의 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심정을 그는 강력하고도 파격적인 언어와 이질적인 이미지로 연결하여 독특한 감동적 효과를 내고 있으며 같은 모티프와 음의 반복, 생생한 의인법, 의성어를 구사하여 친밀하고도 생기 있는 문체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인생과 우주에 대한 본질적인 절망감, 또한 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장중하고 미려한 시구나 고귀하고 음악적인 전통적 음률이 아니라 비근하고 통속적인 언어와 새로운 감각에 맞는 리듬과 새로운 조화음을 창시한 점에 이 시의 현대적 특성이 있다 하겠다.
 
 
회의주의자의 성탄(聖誕) / 라포르그
 
 
성탄절! 성탄절? 한밤중에 종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믿음 없는 종이 위에 펜을 놓았다:
오, 추억들이여, 노래 불러라! 나의 모든 허세는 사라지고
나는 또다시 쓰디쓴 슬픔에 사로잡힌다.
 
아아, 이 밤에 성탄! 성탄! 노래하는 이 목소리들은
저어기 불빛 번쩍이는 교회당 쪽에서 날아오는 것
마치 부드럽고 따스한 어머니의 책망 소리 같아
너무 벅찬 내 심장은 가슴 속에서 터지려 한다---
 
나는 이 한밤 오래오래 종소리에 귀를 기울린다---
나는 이제 인간 가족에게 버려진 낙오자인데
어찌 바람은 아득히 먼 명절의 가슴 아픈 이 소리를
나의 더러운 구석방까지 실어 오는가.
 
 
쥘르 라포르그(1860~1887) : 라포르그의 일생은 너무 짧고 가난하고 불행했다 아버지가 남미(南美) 우루과이에서 초등 학교 교사로 있던 관계로 그는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나 거기서 유년기를 지냈다. 그가 8세 때 온 가족이 프랑스로 돌아와 처음에는 피레네 산맥 근처의 타르브에서 지냈고 다음에 파리로 올라와 퐁텐느 중고등학교에서 겨우 공부를 마쳤다.
 그러나 바카로레아(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실패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이 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어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일정한 직업이 없고 가정과 떨어져 돌보아 줄 사람도 없는 젊은 시인은 빈민가에 방 하나를 얻어 살며 어느 미술 잡지나 인쇄소의 필경(筆耕)일을 해 가며 시를 썼다. 이 때에 몇 명 안 되는 상징파 시인과도 사귀었다. 이 때에 쓴 시들은 그가 죽은 뒤 발견되어 <지구의 오열>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원래 시인이 붙인 부제(副題)들을 보면
"람마 사박다니"(Lamma sabacthani,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였다. 고뇌, 죽음의 시, 무한한 단념, 우울 등으로 당시 병과 생활고와 싸우던 시인의 모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881년 친구인 폴 브르제의 주선으로 독일 황실의 황태후의 독서관(讀書官)이란 일자리를 겨우 얻어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서 약 5년 동안 지내게 되는데 그의 생전에 출판된 단 두 권의 시집은 대부분  여기서 쓴 것이다. 이 몇 해는 불행한 그의 일생 중 비교적 행복스러운 유일의 시기이다. 또한 독일 체재가 거의 끝나는 1886년 그는 여기서 한 영국 여자 리(Lee)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폐결핵은 너무 악화되었고 생활고는 여전하여 1년 동안 악전고투 끝에 라포르그는 다음 해 27세의 나이로 영국인 아내의 팔에 안겨 숨졌다. 이 부인도 다음 해 같은 병으로 죽었다.
 라포르그가  그의 생전에 발표한 시집은 그가 독일 체재시에 간행한 <넋두리 (1885)>와 <달님 성모(聖母)의 모방(1886)>의 두 권뿐이다.  <최후의 시> <지구의 오열> , 산문 단편집인 <전설적인 도덕국> 등은 그이 사후에 출간되었다.
 문학사가(文學史家)  랑송이 그의 <프랑스 문학사>에서 데카당의 선구자로 간단히 기술한 라포르그는 그 후 그의 현대적 가치가 인정되었고 그의 시에 대한 진정한 위치가 확정됨에 따라 현대에 와서 더욱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
 그는 그의 시 가운데 자주 환상적인 가면을 쓰고 익살꾼으로 자처하며 현실과 진실을 조소와 야유로 흩뜨려 버리고 있으나 이러한 가면과 장난 뒤에 괴로움과 슬픔에 지친 마음과 그의 절망적인 인생관이 짙게 나타나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우울한 성격에 당시 풍미한 쇼펜하우어와 하르트만의 염세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죽을 병을 안고 가난에 허덕이며 인생과 우주에 절망한 그가 이를 가벼운 환상과 슬픈 유머로 날려 버리려고 한 것은 그의 극단적 슬픔의 표현이었으나 또한 인간과 우주의 뜻과 운명에 절망한 많은 근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심정의 노래였다.
 어두운 현실과 절망 앞에 그가 눈물로 개척한 아이러니와 조소의 세계는 아폴리네르, 크노, 프레베르로 통하는 현대시의 출발점이 되었고 바다를 건너 영국에서는 엘리어트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닫혀진 / 클로델
 
  땅은 이제 몇 줄의 모래에 불과하며 당신이 지으신
하늘만이 항상 가림 없이 눈에 보이는 이 땅 끝으로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
 
  그들의 말도 모르는 제가, 이 미개한 백성들 가운
데서
 
  저의 처나 자식과 똑같은 모든 사람들, 저의 형제들
을 잊게 하지 마옵소서.
 
  천문학자가 뛰는 가슴으로, 마치 교태의 여인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듯,
 
  감동된 호기심으로 화성(火星)의 모습을 살피며 측성기(測星器)
앞에서 밤을 새는데,
 
 저에게는 작은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입니
까?
 
  가장 작은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입니
까?
 
  자비는 너무 많이 가진 것을 무심히 내주는 일이 아
니라 학문과 같은 정열입니다.
 
   자비는 학문과 같이 당신이 지으신 이 가슴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찾는 발견입니다.
 
  당신의 모든 성신(星辰)이 저에게 필요하다면 저의
모든 형제들은 얼마나 더욱 필요할 것입니까?
 
  당신은 저에게 먹여 살려야 할 빈자(貧者)도, 고쳐
주어야 할 병자도 주지 않았습니다.
 
  나누어야 할 빵을 주시지 않았고 저에게는 빵과 물로
다도 더욱 온전하게 받아들여진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
고 영혼 가운데에 용해(溶解)될 영혼을.
 
  제가 이 말씀을 저의 맘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열매 맺게 하소서, 땅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길 가운데
떨어진 이삭까지) 계속 자라게 하는 수확(收穫)과 같이.
 
  그리고 맺은 열매로부터 명예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가능한 열매를 내주는 성스러운 무지(無知) 속의
나무와 같이.
 
  각자는 자기가 가능한 것을 줍니다; 어떤 사람은 빵
을, 다른 사람은 빵의 씨앗을 줍니다.
 
 
우상들을 멀리하여 / 클로델
 
 
   축복받으소서, 나의 하나님이시여, 저를 우상들에게
서 구원하시고,
   이시스나 오시리스 신이 아니며
   정의나 진보, 진리나 성물(聖物) 또는 인류나
자연의 법칙 혹은 예술이나 미(美)가 아니라
   당신만을 경배하게 하신, 나의 하나님
   당신은 있지도 않은 이 모든 것들, 또는 당신의 부재(不在)
로 생긴 허무를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목선을 짓고 남은 목재로 아폴론 상(像)
을 만든 미개인(未開人)처럼
   이 모든, 말하기 위해 말하는 자들은 남아 도는 형용
사들로 실체 없는 괴물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괴물들은 어린애들을 잡아 먹는 몰로크 신보다도
더 실체가 없고 그 몰로크 신보다도 더 잔인하고 끔찍스
러운 것입니다.
   이들은 소리는 가지고 있으나 목소리는 없으며 이름
은 가졌으나 인격은 없습니다.
   그리고 불결한 정신이 거기 있으나 목소리는 없으며 이름은
가졌으나 인격은 없습니다.
   주여, 그대는 저를 책과 사상과 우상과 그것들의 사
제(司祭)들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자인 에페니메
족속의 속박 아래 당신을 섬기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자들의 신이 아니라 산 자들의 신
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결단코 유령들과 꼭둑가시들을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디아나 여신도 의무도 자유도 아피스 황소도
   그리고 그대들의 '천재들'과 그대들의 '영웅들', 그대
들의 위인들과 그대들의 초인들도.
   저는 이 모든 변형자(變形者)들에 대하여 똑같은 혐
오를 가집니다.
   그것은 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실재하는 사물 가운데 존재하며 이 사
물들로 하여금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를 갖도록 합
니다.
   저는 어떤 것보다 우월하길 원치 않으며 다만 바른
사람,
   그대 온전하심같이 따르기를, 다른 실재하는 정신
가운데서 바르고 생기 넘치기 원합니다.
   저들의 지어 낸 이야기가 무슨 소용입니까? 다만 저
로 하여금 창가로 가 밤을 열게 하시고 저희 두 눈에 하
나의 동시적(同時的)인 숫자가 나타나게 하소서
   저의 필요성이 계수(係數) 1의 수(數)뒤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0(零)의 숫자들을!
 
 
클로델(1868~1955): 폴 클로델은 일생을 거의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문학사에 남는 많은 시, 연극, 평론 등을 써낸 드문 외교관 작가이다. 그가 얻은 작가로서의 큰 영광은 대부분 그의 연극 작품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하고 종교적인 시들도 우주적인 깊은 뜻과 신비로운 사상-독창적인 시법으로 당대에도 시단의 거성(巨星)이었으며 현대의 저명한 몇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클로델은 샹파뉴 지방의 한 지방 공무원의 경건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사했으며 유명한 루이 드 그랑 중고등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때부터 이미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리 대학에서는 법학 공부를 정치학 대학에서는 정치학 공부를 했다. 1890년 그가 22세 때 프랑스 외무성 외교관 채용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이후 약 40년간 그는 미국-중국-일본-유럽-남미 등 거의 전세계에 걸쳐 영사-공사-대사로 일하며 외교적으로도 활약한 바 적지 않았으나 도리어 문학계에 있어서 그는 더욱 찬란한 작품들을 남기었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떨치었다.
  그의 작가로서의 창작 활동도 연극 작품과 시 작품으로 나뉘는데 그는 이미 1890년 이전 외교관이 되기 전부터 연극 <황금의 머리(1889)>, <도시(1890)> 등을 썼고, 외교관으로 유럽-남미 재국-일본-워싱턴에 근무하는 동안 그의 주요 작품을 완성하였다. <인질>,<마라아에게 주어진 계시> <굳은 빵>, 그리고 그의 대표작 <사탄 천의 신발(1920)> 등이 출판되고 상연됨으로써 그는 위대한 사상가-작가로 추앙받았다.
 시인으로서의 클로델의 창작 활동은 주로 그가 극동 지방에서 체재한 1895년에서 1909년에 이르는 14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는 이 동안 중국의 상해-복건-북경-천진 등과 일본에 영사로 있었는데 당시 이국 만리 타향에서 고독과 신앙의 명상 가운데 많은 중요한 시를 썼다. <5대송가>, "두 편의 여름의 시" "3성(聲) 칸타타" 등이다. 이 외에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쓴 "전쟁 시집"과 "성도의 나뭇잎" 등이 있다.
 1936년 주 벨기에 대사를 끝으로 40 여년의 외교관 생활을 은퇴한 그는 만년에는 시골에 있는 그의 소유지에서 주로 성경의 연구-해석과 주석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이 저작들은 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서정적이며 신비적인 것이었다. <현존과 예언>, <묵시록> 등이 있다.
 194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1952년에는 그의 <사탄 천의 신발>이 100회 공연이 있었다. 1955년에는 파리의 국립 극장에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늙은 시인-극작가에게 최후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 공화국 대통령 임석하에 <마리아에게 주어진 계시>의 특별 공연이 있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클로델은 86세를 일기로 영광과 추앙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시인으로서의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두 가지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886년 그가 20세 때 랭보를 발견한 일이며 또 하나는 같은 해 크리스머스 전날 밤 그가 우연히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경험한 신비로운 충격이었다.
 19세기 후반 사상계에서는 물질주의와 기계주의가, 문학계에서는 자연주의가 지배하던 때에 소년기의 신앙을 잃은 쿨로델은 허무적이며, 부도덕하고, 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였다. 이 때에 그는 랭보의 <일뤼미나시옹>과 <지옥의 계절>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진리의 빛을 보았고 물질주의의 수용소에서 벗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분명하고 거의 물리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또 한 가지는 이 해 크리스머스 전날 밤 그는 성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노트르담 성당에 갔다. 믿음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호기심에서였다. 교회 내진(內陳)에 다른 신도들과 함께 서 있었고 합창단 어린이들이 성모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그의 가슴은 무엇에 접촉되고 자기가 신의 영원한 아들이라은 것을 느꼈다. 자신의 전존재가 공중으로 실려 올라감을 경험했고, 이 순간 그는 믿음을 얻었다. 이 믿음은 확실하고 강력하여 그 후 일생 동안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마치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의 회심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클로델의 중심 사상은 현존한 사물 가운데 초자연적인 것을 보는 것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합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보이는 것 만으로는 혼돈과 우연의 연속뿐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받쳐질 때 비로소 현실성과 참뜻을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그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는 신으로서 신 없는 세계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그 때에 세계는 무산될 것이며 무의미하며 허무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시는 은총의 행위이며 신에 대한 기도, 우주를 창조한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끝없는 기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시형이나 운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리듬, 자연과 정신의 맥박과 호흡을 쫓아 세계와 인간과 신의 리듬을 기록하는 소위 클로델 시절(詩節)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와 믿음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으므로 그는 "시인은 신의 모방자이며 시는 창조의 모방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시는 시형의 단조로움-자기 도취-판단의 조잡하고 난폭함-저속한 취미 등 많은 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만이 가질수 있는 우주적인 통찰력, 강력하고 진실된 독창성, 지성이나 기교를 넘어선 천재적인 서정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많은 사람은 그를 프랑스 낭만파의 거성(巨星) 빅토르 위고와 견주고 있다.
 
식당 / 프랑시스
 
 
 
나의 식당에는 빛 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
그는 나의 고모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
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
   하면 잘못이지요,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 시계가 하나 있지요,
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
   어요.
그에게 물어 볼 생각도 없구요.
아마 용수철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
그저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
그 속에서는 밀랍, 잼,
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
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
어떤 물건도 훔쳐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리 집에 왔던 많은 남녀 손님들은
이 물건들의 작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손님이 집 안에 들어서면서
"잠 씨 어떠시오?" 하고 말할 때
그가 살아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웃음이 떠
   오르지요.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 프랑시즈
                             M.R. 양에게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방금 도살장에 끌려가며
싫다고 발버둥치는 불쌍한 송아지는
 
이 작은 쓸쓸한 마음의 잿빛 담장 위에 붙은
빗물 방울을 핥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 하나님이시여! 감탕나무 우거진 이 샛길들의 동무였
   던 그 송아지는
그렇게도 유순하고 그렇게도 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이시여! 무한히 자비로우신 당신,
말씀해 주십시요, 우리들 모두에게 용서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어느 날 금빛 찬란한 하늘 나라에 가면 거기
서는 귀여운 송아지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며
 
도리어 우리들은 더욱 착해져서
그들의 작은 뿔 위에 꽃을 걸어 줄 것이라고.
 
아, 하나님이시여! 송아지가 칼을 몸 속에 받을 때
너무 심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소서--
 
 
가을이 오면 우리는 본다---/ 프랑시스
 
 
가을이 오면 우리는 본다, 전깃줄 위에
길게 줄지어 제비들이 떨고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낀다, 그들의 추워하는 작은 가슴이 불안에 떨
   고 있는 것을.
이 가장 어린 새끼제비들마저, 본 적도 없는
저 아프리카의 덥고 구름 없는 하늘을 동경한다.
 
---한 번 본 적도 없이! 그렇다, 그것은 우리들이
불안 가운데 하늘 나라를 그리워함과 같은 것,
그들은 뾰족한 형상으로 줄 위에 앉아 기류를 살피
   든가
또는 공간 속에 유연한 원을 그리며 날았다가
다시 떠났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교회당 정문을 떠나가기란 어려운 일!
그 곳이 지난 몇 달같이 따스하지 않음은 괴로운 일---
아, 그들은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가! 아, 호두나무는
어찌하여 잎사귀를 모두 떨어뜨려 그들을 실망시켰는가?
올 태생의 새끼제비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가을이 상복으로 덮어 버린 그 봄을.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고난을 겪은 영혼도,
성스러운 대양(大洋)을 지나
영원한 장미꽃 피는 하늘 나라에 오르기까지는,
해 보고 주저하고 떠나려다 다시 되돌아온다.
 
 
 
프랑시스 (1868~1938): 은유-순박-겸손의 상징인 나귀를 사랑하고 자주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프랑시즈 잠은 일생을 남 프랑스의 피레네산록에서 살면서 자연과 동물과 농민과 신을 노래한 자연 시인이다.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인 오트-피레네의 투르네이에서 태어나 보르도에서 중학 공부를 마치고 오르테즈라는 작은 고을에 정착하여 여기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잠은 어느 공증인(公證人) 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며 간간이 시를 써 왔다. 23세 이후 두 편의 단행 시집을 인쇄하여 파리의 여러 시인에게 보냈는데, 이는 말라르메의 찬사를 얻었고, 앙드레 지드의 권고와 도움으로 출판되었다(1898).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은 그가 제 1시집 <새벽 기도 종부터 저녁 기도 종까지(1998)>와 제 2시집<앵초(櫻草)의 상(喪)(1901)>을 출간한 이후이다. 이 책들의 출현은 새로운 시와 시인의 탄생을 고하는 것이었다. 빈 내용과 난삽한 표현을 일삼던 상징주의 말기의 시에 대하여 그의 시는 프랑스 시의 청순하고 소박함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의 시 속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떠오르는 진실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천진스럽고 따스한 마음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제 1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 당신은 저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저는 괴로와하고 또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이 주신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가르치시고 그들이 저에게 준 말로 글을 썼습니다. 저는 길을 지나갑니다. 어린애들의 놀림을 받고 머리를 푹 숙이는 짐진 나귀와 같이 저는 당신이 부르시는 때에, 또 당신이 가라시는 곳에 흔연히 갈 것입니다. 저녁종이 울립니다.
 
 실제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위 잠주의(Jammisme)라는 문학 운동이 일기까지 하였다. 이는 당시 문학(특히 시)의 주류를 이루던 현학적이며 기교적이며 지나치게 지성적인 시가에 대하여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평이한 시를 주장한 것으로 문학상의 일종의 자연주의였다, 잠의 순진하고 단순한 시와 그의 민중적인 주장은 당시의 너무나 고답적이고 애매하고 난해한 시에 불만과 혐오를 느끼던 독자와 세대에게는 마치 청순한 샘물과 같이 앞을 다투어 그의 시와 글에 목 축였으며 오르테즈 마을에 은거하는 이 자연 시인에게 경이와 찬탄을 보냈다.
 이 동안 잠은 고향의 자연 속에 묻혀 동식물의 연구를 하는 한편, 작품도 써 <엘레뵈즈의 클라라(1899)> <에르트몽의 일마이드(1901)> 등의 아름다운 단편 소설도 썼다.
  그러나 그의 제 3시집 <하늘의 푸른 공간(1906)>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시는 차츰 정신화하고 기독교화 한다. 원래 잠의 시 세계는 전체적으로 천진난만하고 밝고 깨끗하나 그 배후에는 일말의 불안과 우수가 있었다. 고독의 비애와, 영원한 것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그리움이 있었다. 이러한 슬픔과 불안과 고민을 통하여 신앙으로 향하는 마음의 행로가 전기한 시집 가운데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선량하고 겸손하였고, 사랑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즉 신의 은총이 필요했다. 잠은 전깃줄 위에 앉은 제비들의 슬프고 불안한 모습 가운데, 그리고 그들의 남국에 대한 동경 가운데 자신의 불안과 신앙에 대한 욕구와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의 괴로운 영혼과 신과의 대화를 "시인은 영혼의 숲에서 단 혼자이다"에서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결국 평생 친구인 크로델의 정신적 도움과 어느 일요일 보르도의 대성당에서의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그는 카톨릭 교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무의식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잠은 이후부터 시와 신앙을 조화시킨 종교적인 신비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므로써 자연 가운데 있는 초자연적인 것을 깨달았으며 그의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에서 정신적인 종교적인 가치를 찾았다. 이리하여 잠은 1919년 "기독교 농사시(農事時)을 발표하여 계절에 따라 변하는 는 자연 가운데 대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농부의 삶을 그렸고, 그들의 일이 지닌 종교적 가치와 그들의 생활이 가지는 신비로운 뜻을 소박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르네 랄루가 그를 가리켜 '우아의 시인이며 은총의 시인'이라고 한 것은 잠이 자연을 사랑하는 시인으로부터 종교적인 세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시인은 차츰 늙어 갔다. 50이 넘자 그의 머리와 가슴까지 내려오는 수염은 눈같이 희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오르테즈의 백조'라고 했다. 1921년 그가 고향을 떠나 아스파랑으로 이주하자 이곳 사람들은 그를 '아스파랑의 양'이라고 했다. 그 동안 늦게나마 결혼을 하고 가정과 많은 어린애들을 거느린 그는 가장적인 풍모를 띠었고 종교적 회심과 더불어 안정과 안주의 심경을 찾았다. 이 동안에 그는 몇 권의 종교적 시집과 철학적인 4행시집, 그리고 몇 편의 소설도 썼다. 클로델은 그의 <4행 시집>을 잠의 최고 걸작이라고 했다.
 70년의 생을 피레네 산록에서 자연과 가축들과 소박한 시골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명상과 신앙과 시작(詩作)으로 지낸 이 시인은 1938년 11월 1일 5개월의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이 날은 그가 그의 시에서 기원하였듯이 아름답고 깨끗한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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