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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스크랩]
2018년 02월 19일 15시 19분  조회:2208  추천:0  작성자: 강려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1. 머리말

 쟈끄 데리다를 읽는 사람들은 데리다식의 글 읽기에 황당할 것이고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우리가 기존의-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것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우리가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이 의식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데리다적 읽기’는 우리의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진보라고 아니 적어도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조소이자 의식의 보수성을 따끔하게 꼬집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의 사유 방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고를 뒤엎고 새로운 사고로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작은 혁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혁명이라는 것이 행동의 변화이고, 사고의 변화가 행동을 낳는다면 데리다적 사고는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적 사고는 흔히 ‘해체’라고 일컬어진다. 해체라고 하는 이 난해한 용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사고는 좀 더 진보적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데리다는 이러한 용어들도, 우리의 사고의 변화에 대한 바람도 모두 해체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2. 형이상학 해체

  1)후설 해체
 현상작용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 말은 독일어로는 ‘Vorstellung, Präsentation, Gegenwärtigung’이다. 독일어로 ‘vorstellen’은 복합어로 ‘vor’는 ‘앞에’라는 뜻이고, ‘stellen’은 ‘자리에 놓인다, 위치시킨다’는 말이다. 이 ‘Vorstellung’은 서구철학에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용어였다. 서구전통철학은 이를 표상1)으로, 데카르트나 로크는 관념(ideas)으로, 밀은 표상과 개념 작용(conception)으로, 흄은 지각(perception)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이 말은 인식, 관념, 개념, 상상력, 현전, 재현(표상), 사상 등등 여러 가지 뜻으로 통용된다. 후설은 『논리적 고찰』 44장에서는 이 용어를 13가지 뜻으로 풀이했다. 데리다는 초기의 후설은 언어에서와 마찬가지로 표상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전제한다고 본다. 즉 지각을 통한 최초의 현전작용과, 그리고 이미지 기억 혹은 표지로서의 기호 혹은 기표는 지각을 통한 직접적인 현전작용이 아니라, 현전작용을 반복하는 표상작용(Vergengenwärtigung)이라 했으며, 이를 다시 기억에 의한 정립적(setenze) 표상과 상상적 표상(phantasievorstellung)으로 구분시켰다. 이것도 모자라, 후설은 『논리적 고찰』에서 현전과(Vorstellung)과 현전작용의 내용(Verstellungsinhalt)을 다시 구별했다.2)
 
 데리다는 우선 후설의 현상학적 직관주의를 비판한다. 후설은 표현적 지향과 지시를 엄밀히 구별한다. 지시되는 것은 나에게 완전히 제시되지 않는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에게 비가 오려 한다던가 어떤 결론이 어떤 전제로부터 논증된다던가 하는 것을 지적할 의도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의도하는 바가 나에게 명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의도가 나에게 명백함이 없이도 그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의 말은 다만 나로 하여금 그가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게 해줄 뿐이다. 지시는 개개의 사물들의 지칭과 함께 괄호 쳐 짐으로써, 표현의 장에는 이상적인 의미들과 이상적인 단어 유형들만이 남아있게 된다. 현상학적으로 연구되는 바, 말과 의미에 의한 효과적 의사소통이란 없다. 현상학적 환원 안에서 영혼이 지시적으로 자신에게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함의 방법일 뿐이다. 그러한 독백에 있어 영혼은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현전하므로 지시적 기호란 불필요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상상적 대화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3) 후설이 말하듯, 상상이나 허구는 현상학의 생명을 이루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에게 현상학이 추구하는 본질 직관이 하나의 원초적 부여작용이며 그 자체로서 지각과 유사하고 상상과는 유사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감추어서는 안 된다.4) 이것이 후설 스스로 『이념들Ⅰ』에서 현상학의 ‘원리중의 원리’라고 스스로 명명하고 있는 것으로 직관주의의 원리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가장 철저하고 가장 비판적으로 복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우리의 인식의 원천이 근본적으로 직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은 우리의 직관에 그렇게 주어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된 의미가 그 어떤 대상과 관계를 가지게 될 때, 그 관계를 완수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직관’이다.5)
 
 후설에게 있어서는 인식기능이 의지기능 및 정서기능보다 더 우선적이다. 모든 표현들이 다소 모호하고 흔들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 객관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주관적 표현들마저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모든 주관적 표현을 객관적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후설의 주장은 결국 모든 주관적 표현작용은 객관적 이상성을 대신할 뿐 그 자신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데리다는 모든 의사소통적 언어표현이 의미의 동일성을 가진다는 주장, 그리고 대상이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직관이야말로 인식의 원천이라는 주장, 나아가서 이처럼 존재를 현전으로서 사유하고 있는 점 등등을 현상학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감염되어 있는 징후들로 파악한 것이다.
 

 2)니체 해체

 니체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에는 은폐-유희(Schleier-Spiel) 즉 여성들이 취하듯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혹은 그 반대)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진리는 없다는 점이 진리가 된다. 또한 여성은 진리의 비진리성에 대한 명칭이다. 여성은 몰락적으로 역사하는데, 남성에 대해서,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여성은 스스로 굴복하면서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이러한 양의성에 전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뱉어 버리고 진리로 확정된 사태를 팽개쳐 버린다. 여성은 주고 헌신함으로써 여성이고, 남성은 취하고 소유함으로써 남성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성은 반대로 나타난다. 여성이 주고 헌신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그녀의 소유 주권을 가상화하고 자기 소유를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남성들의 지배권을 삼켜버린다. 이 ‘위하여(für)' 때문에 여성은 모든 남녀 대립이 바뀌는 유보 상황을 형성한다. 장소와 가면을 끊임없이 바꾸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교체 놀이에서 여성은 소유 주권을 보상받게 되는 바, 그래서 여성은 소유하는 자 즉 남성이 되고 남성은 소유를 잃어 굴종하여 여성으로 되는 이 교체놀이는 결국 여성은 남성이, 남성은 여성이 되지만 각각 부분적으로 스스로 겉치레적인 다른 편의 역할을 하는 데 이르게 되어 확정되는 것이 없다.6)
 
 여성들은 단지 변화무쌍하고 이중적인 기반의 양식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묘사될 수도 있다 함은 여성들이 지닌 내적인 다양함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니체는 여성과 여성의 작용을 서술하기 위해서 풍자, 조소, 조롱, 재치 등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Éperons이 배 밑에 감추어져 있는 칼 혹은 항구에 돌출된 바위를 뜻하고, stiletto가 아주 예리한 단도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문체는 어떤 남성적인 무기이다. 문체가 남성이라면 씌어진 글은 여성이어야 한다. 문체의 다양화는 남녀의 대립을 없앤다. 다양화함은 여성 명사이다. 또한 글은 말해진 언어의 고정된 의미를 해소시키듯, 여성은 문체의 다양화로 작용한다.7) 데리다는 문체의 다양함을 니체의 위대한 양식으로 여긴다. 이로부터 텍스트의 다양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변증법과 연결시키고 있다. 주고받는다든가 혹은 소유하고 소유되는 대립은 더 이상 두 지점에 배치되지 않는다. 그 여성 혹은 그 남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에서 볼 때 여성에게는 그 작용이 여성의 작용 이상이라는 점, 또한 남성에게는 그 역할이 남성의 그것 이상이라는 점이 허용된다. 그러나 동시에 두 개의 것이 각각 자신임도 타당하다. 이런 종류의 무결정성, 개방성은 실상 변증법적 사유로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데리다는 또한 이미 언급한 소유의 바뀜 관계를 ‘자기화 과정’이라고도 부르고, 우선 변증법은 다소간 도식적인 모델에 묶여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변증법은 존재론적 결정 가능성과 동치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교체 관계에서는 제멋대로의 구조들이 생겨나는데, 이 구조들은 단계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모든 변증법이나 모든 존재론적 결정성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어떤 변증법적 사유모델이 있는 이러한 변화들에 대해서 일정한 방향, 의미부여 등 목적론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논박하고 있는데 이 과정이 우연하고 잠정적인 결정/규정으로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 또한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언어해체
  1)소쉬르 해체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철학적 글쓰기 속에 있는 글쓰기의 평가 절하를 기록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글을 쓴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자들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글로 쓰고 있는 철학은 글쓰기를 기껏해야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사상과 무관하며 최악의 경우 그 사상에 방해가 되는 하나의 표현방식으로 취급하고 있다.8) 글쓰기는 외면적이며 물리적이고 비초월적이다. 글쓰기에 의해 제기되는 위협은 단순한 표현방법이어야만 하는 작업내용이 진술한다고 추정되는 의미에 영향을 끼치거나 오염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철학은 글쓰기를 초월하는 것으로 스스로 정의하며, 언어 기능의 일부를 글쓰기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말하기의 단순한 인위적 대체물이라고 글쓰기를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플라톤 등의 비난은 글쓰기를 말하기의 표현중의 하나로 취급하며 말하기로 하여금 의미와 직접적이고도 자연적인 관계를 갖게 하는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가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 즉 스스로 존재한다고 즉 기반이라고 여겨지는 사상, 진리, 이성, 논리, 말씀이란 의미의 질서를 향한 철학의 방향성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9) 데리다가 규정하는 문제점은 철학적 담론에서의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뿐만 아니라 경쟁하고 있는 철학들이 로고스 중심주의의 변형들이라는 주장을 포함하게 된다.10)
 『그라마톨로지』 속에서 데리다가 소쉬르를 읽는 부분에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더욱 검토되고 있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을 발흥시킨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는 한편으로는 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다른 한편으로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명확한 긍정과 피할 수 없는 연루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 질 수 있다. 따라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담론이 스스로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라고 정의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사상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데 도움이 될 때에만 소음은 언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기호의 본질 즉 기호의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 것과 기호가 기호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중심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호가 자의적이고 관습적이며 각자 본질적 특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기호와 구별시켜주는 차이에 의해서 정의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차이의체계라고 여겨지며, 이는 구조주의와 기호학이 의존하여 온 구분 체계의 발전으로 인도된다. 이는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langue)와 그 체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발언행위(parole), 어느 주어진 시대의 체계로서의 동시적 언어 연구와 상이한 역사적 시대의 요소 사이의 통시적 관계 연구, 체계 내에 있는 두 종류의 차이 즉 동시적 패러다임 관계와 통시적 패러다임 관계, 그리고 기호의 두 구성요소 즉 기의(signifie)와 기표(signifiant) 사이의 구분을 뜻한다. 이러한 기본적 구분체계가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 체계를 명확하게 만들면서 언어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학적이며 기호학적인 작업계획을 함께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소리 자체는 체계에 속해 있을 수 없다고 소쉬르는 주장한다. 소리는 발언 행위 속에서 체계 단위의 표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언어체계속에는 어떤한 실증적 용어도 없이 차이만 있을 뿐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다소 극단적인 공식화이다. 공통적인 견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언어가 단어 즉 실증적인 실재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단어들이 합쳐져서 체계를 형성하게 되며, 이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에 대한 소쉬르의 분석은 그와 반대로 기호가 차이 체계의 산물이라는 결론으로 유도되고 있다. 실제로 기호는 실증적인 실재물이 전혀 아니며 그저 차이의 결과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데리다가 설명하는 것처럼, 체계가 차이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발언 행위 속에서나 체계 속에서 현재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실증적인 실재물에 언어 이론이 기반을 두려는 시도를 훼손하게되기 때문이다. 언어 체계 속에 차이만 있을 뿐이라면,
 

차이들의 유희는 실제로 어떤 순간에,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단일한 요소가 그 자체로 현전하거나, 스스로 만을 참조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종합과 참조를 전제로 합니다. 말해진 담론의 영역이건 씌여진 담론의 영역이건 간에 어떤 요소도 그 역시 단순히 현전하지 않는 또 다른 요소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기호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은 각 ‘요소’가 -그것이 음소이건 문자소이건 간에- 그 자신 속에 있는 연쇄망 혹은 체계의 다른 요소들의 흔적에 의거해 구성되게 합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과 망의 구조가 텍스트이며 한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의 변형 속에서만 산출됩니다. 개별적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체계 내에서도 그 어떤것도 단순히 현전하거나 부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흔적들의 차이와 흔적들만이 도처에 있습니다.11)


라고 데리다는 기록하고 있다. 어떤 실증적 용어도 없는 기호와 체계의 자의적 본질은 흔적일 수도 있는 실재물 이전에 있던 흔적만 있는 일종의 무한 참조 구조인 ‘제도화된 흔적’이라는 역설적 개념을 제시해 주고 있다.12)
 그리고 소쉬르의 논리전개 속에는 로고스중심주의의 확인이 있다. 소쉬르가 시작하고 있는 기호 개념 자체가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의 구분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기표는 기의에 접근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따라서 자신이 전달하는 개념이나 의미에 종속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와 구별하기 위해서, 물질적 변화가 언제 의미 있는지 말하기 위해서, 언어학은 기의가 출발점이 되며 기의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하여야만 한다. 소쉬르는 로고스중심주의적 개념을 확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분석을 로고스 중심주의 안에서 기술하고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일이 소쉬르가 글쓰기를 언급하고 있을 때 발생한다고 한다. 소쉬르는 글쓰기를 제 2의 파생적인 지위로 추방해 버리고 있다. 소리를 언어체계에서 특별히 배제하면서 언어단위의 형식적 특성을 주장할  때에도 소쉬르는 언어분석의 대상은 문자단어와 음성단어의 조합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고 음성단어만이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글쓰기는 단순히 말하기를 표현하는 방법 즉 언어를 공부할 때 고려될 필요가 없는 기술적 도구 또는 외부장식인 것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말하기의 기생적이며 불완전한 표현이라고 글쓰기를 취급함으로써 말하기를 특권화한다는 것은 언어의 특정 양상이나 기능 작용의 양상을 배제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거리, 부재, 오해, 무성의와 모호함이 글쓰기의 특성이라면, 글쓰기를 말하기와 구분지음으로써 말하기와 연관되어 있는 이상을 기준으로 채택하는 의사소통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단어들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듣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소쉬르의 논의를 특징짓는 도덕적 열정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걸려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글쓰기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를 ‘변장시키며’ 때때로 말하기의 역할을 ‘찬탈하기’조차 한다. ‘글쓰기의 독재’는 강력하며 교활하여서, 자연스러운 말하기 형태의 부패나 감염이 있게 된다. 글쓰기의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언어학자는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기의 표현이라고 추정되고 있는 글쓰기는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체계의 순수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2)루소 해체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는 루소가 글쓰기에 적용했던 용어를 사용해서 ‘보충(supplement)’의 논리라고 명명하고 있는 하나의 구조를 제공해주고 있다. 언어는 말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글쓰기는 말하기에 대한 보충으로 사용될 따름이라고 루소는 규정한다. 보충은 본질적이지 않은 임시증대분이며, 자체로 완성적인 어떤 것에 추가된 것이지만, 보충은 완성되기 위해서 즉 그 자체 완성된 것이라고 추정되어오던 것 속에 있는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추가된 것이다. 이러한 ‘보충’의 두 가지 다른 의미는 강력한 논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두 의미 모두에 있어서 보충은 외부적인 것 즉 추가되거나 대체되는 것의 ‘본질적’ 성격에 이질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루소는 글쓰기를 말하기에 추가되는 즉 언어의 본성에 이질적인 기교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말하기가 자체충족적이며 자연적인 충만의 상태가 아닐 경우에만 즉 글쓰기가 보충해 줄 수 있는 결여나 부재가 말하기 속에 이미 있을 경우에만 글쓰기는 말하기에 첨부될 수 있는 것이다. 루소는 현존의 파괴와 말하기의 질병이라고 글쓰기를 비난하면서도 글쓰기의 부재를 통해서 말하기에 상실되어 있던 현존을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글쓰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아주 전통적인 입장을 제시한다.13)
 
 오직 부재와 오해 등 대개 글쓰기의 속성이라고 서술되는 특성에 의해 말하기가 이미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글쓰기는  보상 즉 말하기의 보충이 될 수 있다. 데리다는 루소의 논리전개에 대해 원천적이며 자연스러운 언어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코 원상보전되어 있지 않고 글쓰기에 의해 결코 만져질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언제나 하나의 글쓰기였다는 단 한 가지 조건하에서만 글쓰기는 이차적이며 파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에 있는 이러한 ‘위험한 보충’14)에 관해 데리다는 다양한 외부 보충은 정확히 보충되고 있는 것 속에 있는 부족 즉 원초적인 부족이 언제나 있기 때문에 보충을 하기 위해서 요청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글쓰기는 말하기의 보충이지만, 말하기도 이미 보충이다. 『에밀』에서 루소는 어린이들은 말하기를 자신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신속하게 학습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행동하고 그저 혀만 움직여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깨닫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한 보충’이란 연결 맥락을 따라가면 루소의 작품이라고 범주를 한정지을 수 있다고 믿는 바를 넘어서거나 그 후면에 있는 이러한 ‘피와 살’로 된 창조물의 실제 인생이라고 명명하는 것 속에는 글쓰기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결코 없었으며, 차이의 연쇄적 관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을 보충과 대체적 의미작용 외에 다른 어떤 것이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정 지속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러한 보충의 편재성은 ‘현존’과 그들의 ‘부재’ 또는 실제 사건과 허구적 사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과 역사적 현실의 결과는 내부에서 발생하며, 보충작용이나 차이에 의해 이러한 구조 특유의 결정과정으로서 가능해진다. ‘현존’은 일종의 부재의 형태이며, 실제 역사적 사건은 수많은 이론가들이 보여주려고 노력해 왔던 것처럼 허구의 특별한 형태인 것이다. 『글쓰기와 차이』에서 데리다는 말한다. 현존은 원칙이 아니라 재구성 된 것이다.


 4.해체전략
  1) 차연적 사유


 데리다 철학의 기저는 한 마디로 말해서 차연(différance)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해체』의 「차연」에서 알파벳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인은 첫 알파벳 a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a는 차이(différence)에 관한 본인의 글에서 필연적으로 암시되어왔다; 또한 문자에 대한 논문이나, 그리고 범위가 각기 다른 본인의 글에서도 매우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이(différence)와 엇갈려 나타나기도 했다. 이 때마다 철자법칙을 준수하는 많은 독자들에 의해 디페랑스(différance)의 a는 디페랑스(différence)의 엄청난 오자로 간주되면서, 글에 관한 본인의 글 속의 글, 즉 미궁과 같은 본인의 글에서 이미 필요에 의해 a가 뜻하는 바가 암시되어왔다.15)


라고 말하며 차연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연이라는 말이 가진 뜻과 의미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왜 a라는 철자의 차이를 들고 새로운 철자로 자신의 논의를 이끌어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글쓰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등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한다.
 
 그러면 ‘차연(différance)’은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이미 앞에서도 암시된 바이지만 차연이라는 이 생경한 조어는 문자 그대로 ‘차이(différence)’와 ‘연기(délai)'의 두 가지 개념이 동시적으로 복합된 관념을 지칭하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différe라는 동사 자체가 이미 ’차이나다‘와 ’연기하다‘의 두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데, 그런 동사의 양가적 의미를 명사화시킨 단어는 없었다. 그래서 데리다는 양가적 의미를 지닌 동사 différe의 명사화를 가리키기 위해 일반적으로 ‘차연’이라고 번역되는 'la différance'를 만들었다. 그런데 차연의 différance와 차이의 différence는 불어의 발음상에는 아무런 변별적 차이가 없고, 다지 글자상에서 a/e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16)
 
 단적으로 말하면 차연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있는 낱말도 개념도 아니다. 차연이라는 말을 구태여 분류하자면 데리다는 그것을 ‘다발(le faisceau)'과 같은 성질을 지닌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차연은 철자법상 하나의 변칙인데, 그런 변칙의 원인을 논리적 단계를 밟아 하나씩 하나씩 따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적 체계에 속하는 성빌을 지니고 있고, 둘째로 그것은 여러 가지 실이나 의미의 줄을 다시 출발시키고 다른 것들과으 매듭을 맺게 하는 짜깁기나 교차나 얽힘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묶음‘이나 ’다발‘의 뉘앙스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다발‘으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차연에서 ’a/e‘의 모음의 변별은 무슨 의미를 표시하는가. 이미 지적되었듯이 발음상 아무런 차이가 없기에, 다르게 적히고 다르게 보이지만, 발음만으로 전혀 구분이 안된다. 데리다는 무덤과 같은 ’a'를 피라미드에 비유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새로운 내세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하여 생명을 잠시 유예시키거나 연기시킨 죽음의 무덤, 사왕(死王)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 무덤은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피라미드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있는 곳이고, 동시에 죽음이 삶의 유예로 삶이 죽음의 연기로서 죽음 다음에 삶이 대기하고 있는 차연의 생각을 신화로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차연이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에서 이해되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데리다는 ‘a/e'의 문자적 변별이 소리로서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은 차연이 음성중심주의의 세계관에서 차이의 형식적 개념과 구분될 수 없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암시한다.17) 데리다는 그런 음운론적 배경을 지닌 차연을 어떤 순간에도 현존적이거나 표명될 수 있는 것만을, 하나의 현재로서 현재의 진리 속에 현존하고 있는 존재자 만을, 현재의 현존이나 현재의 진리만을 사람들이 개진할 수 있을 뿐, 차현은 결코 현재(현존)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고 서술한다.18)
 
 지금까지 차연의 문자가 지니는 특성을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차연의 성질 그 자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차연은 유예·위임·연기·이송·우회·지연·유보 등에 의하여 지연시키는 데 있는 움직임(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인)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차연은 내가 보류시키고자 하는 현전의 가능성의 원초적이며 공유된 통일성에 의해 선행되지 않는다. 현전을 지연시키는 것은 역으로 그로부터 현전이 그 표상·기호·흔적 속에서 알려지고 실현되는 것이다.19)
둘째로 차연의 움직임은 그것이 개별자들(Différents)을 생산하며 분화의 구조를 낳게 하는만큼 우리의 언어를 특징짓는 개념들의 모든 이항 대립 (예컨대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본다면 감성적/지성적/, 직관/의미, 자연/문화 등과 같은)의 공통된 근원이다. 공통된 근원으로서 차연은 또한 이러한 대립들이 알려지는 동일자(le même)의 요소이기도 하다.20)
셋째로 차연은 소쉬르로부터 생겨난 언어학과 그것을 모델로 삼았던 구조주의적 과학들이 모든 의미와 구조의 조건임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었던 차이(différence)들과 차별성(diacricité)의 생산이기도 하다.
넷째로 차연은 잠정적으로 차이, 혹은 존재-존재론적 차이의 이러한 전개를 명명할 것21)이다.22)


 차연은 공간적 개념인 차이(différence)와 시간적 개념인 연기(délai)의 결합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적인 현재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은 결국 차이가 낳은 부산물이요, 다른 것에 연기된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는 것이다. 그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에 연기된 그런 관계가 바로 ‘흔적’이다. 현재가 현존적이라면, 그 흔적들은 부재적인 것일까? 그러나 흔적은 현존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흔적은 무(無)가 아니다. 흔적은 양자택일(현존/부재)의 논리를 넘어서 있다. 대기로서의 차연은 시간적으로 차연이 흔적들의 연쇄성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함을 말한다. 즉 대기로서의 차연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이른바 의미라는 것이 그 자체에서 절대적으로 성립할 수도 없고, 그 자체에서 자기 영역을 통괄하고 통어할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닐 수가 없음을 가르쳐 준다. 그런 점에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차연은 한 시점이나 한 곳에서 요약될 수 없고 통일 될 수 없다. 교차점과 같은 차연은 그 자체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말해 온 하나의 ‘개념(le concept)’이 아니다. 데리다는 오히려 차연이 하나의 ‘반개념(le contre-concept)’이라고 규정한다. 구조주의는 통시적․역사적 성격을 등한히 하고, 공시적․구조적 성격을 가까이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이러한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차연은 시간적 흔적의 연기나 유예, 저장, 반송 등과 같은 관계의 흐름을 역동적으로 파악한다.23)
 
 차연은 흔적의 구조요, 흔적의 힘이기에, 그것이 선험성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선험은 아니다. 흔적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환영과 같은 것이기에 그런 환영으로서의 차연은 동의어가 아닌 무수한 반개념적인 대체개념들에 의하여 문맥의 필요에 따라 달라진다. 차연의 대체적 반개념들을 보면, 유보(la reśerve)-간격(l'espacement)-소모(la dépense)-원흔적(l'archi-trace)-원문자(l'archi-écriture)-지움(l'effancement)-대기(la temporisation)-연기(le délai)-어긋남(l'écart)-보충대리(le supplément)-파르마콘(치료제/독약, le parmakon)-파르마코스(희생양, le parmakos)-코라(la chora)-산종(산포, 흩뿌림,la dissémination)-처녀막과 파열(hymen)-이중회합(기)(la séance)-표시(la marque)-시작과 흠(l'entame)-고막(le tympan)-주름(le pli)-이전의 중용(le milieu antérieur)-중간태(la voix moyenne)등이 있다.24)
 
 흔적을 있다고 보면 그것은 ‘기념비’이고, 없다고 보면 그것은 ‘신기루’이다. 흔적은 흔적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지운다. 흔적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다. 그래서 흔적은 생명믈 기록속에 새겨두면서도 또한 피라미드처럼 죽음의 집이다. 그래서 흔적과 차연은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주장처럼, ‘차연은 있 X다’라고 기술할 수밖에 없다.


2) 데리다의 은유

  언어의 형성과정을 교환가치체계의 경제서으로 파악한 소쉬르의 통찰을 차용했던 데리다는 은유의 속성을 고리(高利)로 인한 ‘원금의 완전탕진’으로 규정한다. 지나치게 높은 이자 지불로 인한 원금의 완전 탕진과 이자가 원금에 가산됨으로 인한 원금의 무한 증식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뜻으로 파악했다. ‘원금의 완전탕진’ 즉 의미의 완전부재를 무한 의미로 간주해온 서양철학은 빈혈을 앓고 있는 신화라는 것이다.25) 백색신화26)


  ①은유와 명사중심주의
 ‘명사중심주의’라 할 때의 이 ‘명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정의(다른 사물에 속하는 명칭의 전용)에 나오는 그 명사이다. 명사중심주의의 명사는 원래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이 아니라 어떤 한 사물에 속하는 이름이며, 그래서 그 사물의 ‘고유한’ 명칭이다. 이 고유 명칭은 그러므로 다른 사물로부터 차용된 명칭에 불과한 은유적 명칭과 대비된다. 이때 고유 명칭(단순 명칭)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지칭하며, 논리적 일의성을 띠는 것으로 전제된다. 논리적 일의성을 띤다는 것은 그 의미가 언제나 자기 동일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고유 명칭은 명료하고 비오류적이다. 반면 차용된 명칭으로서의 은유는 다의적이고 때로 통제 불가능한 의미 산종(산포, 흩뿌림la dissémination)27) 가능성 안으로 떨어질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론은 고유명칭 이론과 그 이론을 떠받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체의 기본적 전제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아리스토테레스가 ‘좋은’은유와 ‘나쁜’은유를 구분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은유란 ‘다른 사물’로부터 차용된 명칭을 수단으로 해서 원래 지시하고자 하는 사물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리적 명칭으로서의 은유가 그 우회적 거리를 성공적으로 지나서 원래 의도되었던 의미를 명확히 지시하는 경우, 그 은유는 ‘좋은’은유라 한다. 좋은 은유란 의미의 성곡적인 자기 귀환이다. 반면 ‘나쁜’은유란 그런 의미의 자기 귀환이 실패하는 경우에 해당하거나 의도되지 않은 효과에 의하여 의미의 재현전이 방해되는 경우에 해당한다.28) 데리다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구분의 기저는 현전의 존재론이자 로고스중심주의의 이념이다. 따라서 은유론은 형이상학의 반복에 불과하며, 특히 형이상학에 의하여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진리 개념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계기이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적 은유 개념을 명사중심주의로 재구성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기호개념을 해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상응한다. 형이상학적 기호 개념의 해체는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되며, 이 기표와 기의의 이분법은 여타 형이상학적 사유를 조직하는 대립적 이분법(예를들어 정신/물질, 내면/외면, 동일성/차이성 등등) 전체를 대신하고 또 반복한다. 둘째, 형이상학적 기호 개념은 기의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운동 속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표의 물질성을 환원하고 배제하는 운동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형이상학적 사유 일반이 형성되는 과정, 즉 감성․우연성․특수성 등등을 배제하는 운동(가령 피타고라스의 정화, 데카르트의 회의,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 후설의 선험적 환원 등등)일반을 회집하고 반복한다. 형이상학의 본성에 내재하는 이 운동은 기호개념 안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이 정의하는 은유의 개념 안에서 재발견된다.
 
 감성적 대상으로부터 차용된 말로서의 은유는 의미의 직접적 현전을 대리한다. 의미의 현전을 대리하는 대신 은유는 의미를 일단 형이하학적 영역에 머물러 있게 하여야 한다. 초감성적 의미에 대하여 이것은 일종의 소외이다. 은유에 담길 때 의미는 자기의 고향이 아닌 타향에, 자기의 집이 아닌 타인의 집에 있다. 은유란 초감성적인 것에 감성적인 복장과 집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대와 전세의 처지는 임시적인 것이다. 철학에서 은유적으로 지시된 의미는 궁극적으로 다시 자신의 집으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운동 속에 놓여 있다. 그 복귀가 철학적 은유 개념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은 ‘형이상학’이 함축하는 ‘상’의 운동의 재반복에 불과하다. 이 운동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의 상승적 이행이며, 이 상승적 이행이란 감성적인 것이 관념적인 것으로 승화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철학 안에서 은유적 운동의 궤적은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감성적 언어의 관념적 이상화(idéalisation)이자 의미(혹은 진리)의 자기 재점유(réappropriation)과정이다.29) 


  ②은유와 태양중심주의
 철학적 은유의 추동성이 이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한에서, 그 은유적 성격을 서술할 때 우리가 돌아가게 마련인 은유는 ‘집’의 은유이다. 철학이 현전의 존재론과 로고스중심주의에 의하여 지배되는 한에서, 의미가 은유적 표현에 내맡겨진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임대된 집(은유)에서부터 다시 자신이 원래 속하던 집(고유 명칭)으로 돌아가기위한 여정에 놓인다는 것을 말한다. 일단 문제는 그 자기 복귀의 운동이 철학적 사유 자체의 본성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 추동성임을 탈구성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귀가 언제나 성공적일 수만은 없다. 의미가 은유에 내맡겨질 때부터 살게 되는 이방의 삶과 실낙원(혹은 소외)의 역사는 오히려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은유라는 수레, 의미를 태우고 있는 이 전차에는 처음부터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은유를 통하여 철학 혹은 로고스의 울타리를 논리적으로 상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한 때부터이다. 즉 은유라는 배는 고유의 항구에 정박할 수 있는 닻이 없다. 은유의 추동성이 일으키는 파동은 현전의 땅이 보이는 지점에서 다시 집안과 휴식을 방해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태양중심주의’에서 ‘태양’은 빛의 원천이다. 이 빛은 명료성/애매성, 밝음/어둠,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생명/죽음 등등의 다양한 표현을 파생시키면서 거의 모든 철학적 은유들과 결합된다. 그래서 태양은 진리를 말하는 모든 철학적 은유의 원천인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서 이 태양을 통한 진리 은유는 모든 '은유들 중의 은유'인 것처럼 보인다.30) 은유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비가시적이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나게하고 현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게 하고, 아직 드러날 수 없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은유이다. 아직 고유 명칭이 부재하는 의미를 가시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은유이다. 그런데 모든 나타남과 사라짐을 빛 속에서이다. 가장 자연스런 나타남과 사라짐은 일출과 일몰이며, 빛의 나타남과 사라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양 혹은 빛의 은유는 모든 은유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특권적인 은유이다. 진리를 말하는 철학적 은유는 많은 경울 태양의 은유에 속하거나 태양의 은유로 향한다. 그런 한에서 철학적 은유는 향일성(向日性) 식물이다.
 
 그러나 태양은 무엇보다 철학이 통제할 수 없는 마지막 감성적 요소를 말한다. 로고스는 어떤 방식으로도 태양과 빛의 은유를 배제하거나 말소할 수 없다. 그것은 빛의 은유가 철학에서 모든 은유적 운동이 수렴되는 중심인 동시에 나아가서 철학 자체의 개념31)들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이론(theoria)'라는 말 자체가 ’본다(theorein)'라는 감성적 행위에서 전융되어 굳어진 말인 것처럼, 철학의 초보적인 개념들은 많은 경우 빛의 은유로부터 태어났거나 빛의 은유로부터 자명성(自明性)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은유적 세계와 구분된 거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자마자 자신의 몸뚱이가 다른 비유적 언어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광합성을 통해서 형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은유와 마찬가지로 철학은 향일성 식물이다. 바로 그것이 탈구성된 철학의 정체이다. 따라서 철학의 순수 개념과 은유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사라진다기보다는 철학의 내면 여기저기를 지난다. 철학의 몸뚱어리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은유의 흔적은 어원적 탐구와 계보학적 연대기 구성을 통해서도 여전히 말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탐구와 재구성에 개입하는 어떠한 분류의 범주도 그것이 분류하고 재현전화 시키는 은유적 전용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소 불가능한 은유의 흔적은 분명히 어떤 역사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역사성은 단지 잊혀진, 그래서 로고스가 회상을 통해서 재현전화 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시간이 아니다. 그 역사성은 오히려 철학의 자기 의식과 정체성 자체를 조건짓는 어떤 구조적 시간에 해당한다. 나아가서 철학의 자기 의식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특정한 역사 개념 자체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다만 철학이 이 점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로고스 내면의 은유의 흔적과 이 흔적이 함축하는 역사성은 로고스의 무의식이다.32)
 
 데리다는 은유로 철학 개념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철학이 말하는 진리의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스런 음모를 꾸민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사적 양식으로 되어 있는 철학은 은유, 환유 등의 비유 장치들이 언어에 만연해 있어 진리의 전달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데리다는 이것을 은유는 항상 자체 내에서 죽음을 운반하고 이 죽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철학의 죽음이라고 하였다.33)


  5. 맺음말

 지금까지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개론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데리다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후설에 대한 데리다적 철학을 살펴보았고 데리다 철학에 기저가 될 수 있었으나 역시 전통적 서구철학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니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데리다 철학의 본격적 면모를 알 수 있었던 소시르와 루소의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철학을 알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데리다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었던 두 가지의 개념들 즉, 차연적 사유와 은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획일성,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던 모든 중심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던 기회가 되었으리라 본다. 데리다의 이 모든 작업이 형이상학 주체에 대한 비판이고 특히 그것이 경직되어있던 일반 사고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데리다적 사유에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데리다가 의도한 바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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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보현 편역,『해체』, 문예출판사, 1996
    ―   , 김성도 역,『그라마톨로지』, 민음사, 1996
    ―   , 김다은·황순희 공역, 『에쁘롱; 니체의 문체들』, 동문선, 1998
    ―   , 허정아 역,『시네퐁주』, 민음사, 1998
    ―   , 남수인 역,『글쓰기와 차이』, 동문선, 2001
J. 레웰린, 서우석·김세중 역, 『데리다의 해체주의』, 문학과 지성사, 1988
H. 키멜레, 박상선 편,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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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데리다의 해체실험과 철학적 단두대」,『한국논단』제 63권, 1994
배의용,「데리다와 형이상학 해체」, 『철학』제 43권, 1995
한상철,「데리다의 기호시학」,『철학』제 45권, 1995
허재영,「자크 데리다: 해체적 독해와 지배담론 허물기」,『철학의 탈주』,새길, 1995


 
각주 설명
 
1) 마음 또는 의식(意識)에 현전(現前)하는 것을 뜻하는 철학 ·심리학용어. 관념 일반을 나타내는 idea(영)의 역어(譯語)로 사용되는 수도 있으나 대개는 representation(영),  Vorstellung(독)의 역어로 사용된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어원(語源)인 라틴어 repraesentatio는 ‘다시(re) 현전케 하는 것(praesentatio)’을 의미하고, 독일어의 Vorstellung은 ‘앞에(vor) 세우는 것(stellu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표상이란 말은 적어도 근세 이후의 용법에서는 인간의식의 대상정립작용(對象定立作用) ․반성작용과 관계가 있는 대상의 측면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일체를 인간의식 안에 가두어 생각하려고 하는 근세 R.데카르트 이후의 의식내재주의적(意識內在主義的) ․주체주의적(主體主義的) 철학은 I.칸트를 이어받아 세계의 일체를 인간의식의 표상으로 해소시키는 A.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철학에서 하나의 정점(頂點)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근세의 인간중심적 주체주의철학 또는 형이상학은 바로 근세 서유럽의 합리주의적 기술문명을 낳게 한 근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체의 사물을 인간의식에의 반사(反射)나 반성(反省)의 양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기본적 약점과 문제성에 대한 반성이 현대철학의 최대 문제의 하나로서 다각도로 다루어진다.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2)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해체』, 문예출판사, 1996, p25.


3) 여기에서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혼란이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상상(력)은 중성화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미지는 중성화를 돕는 중요한 보조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이 가지는 중성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결과, 후설은 모든 실제적 통화도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혼자만의 독백이 갖는 비통화적인 비지시적인 순수표현이 있다고 간주한다. 여기에서 데리다의 날렵한 반론이 개입된다. 후설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표상과 위조적이라고 간주한 실제적 경험에 관한 의식이야말로 후설이 찾는 이상성이라른 것이다. 주체의 이상성이 주체가 지니는 감각적 경험적 개별성을 버리는 것이라면 언어로 표상되는 주체야말로 주체의 이상성이다.
-자끄 데리다, 앞의 책, p 26


4) 존 레웰린, 서우석․김세중 역, 『데리다의 해체주의』, 문학과 지성사, 1988, p39


5) 김용복, 「철학과 문학의 이음새-데리다의 후설 의미론 읽기」,『인문사회과학논문집』제 25권, 1996, p12


6)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한쪽은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강하고, 한쪽은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며 약하다는 남녀간의 전통적인 대립 관계는 아니다. 이것이 보여지고 있는 것은 예술가에서이다. 니체는 예술가를 “남성적인 어머니(männliche Mutter)”로 부르고 있다.
-H. 키멜레, 박상선 편역,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 p74


7) H.키멜레, 암의 책,  p74


8) 한 예로 헤겔을 들 수 있는데 데리다에 의하면 헤겔의 기호론은 말해진 언어를 문자적 기호보다 우위에 놓고 있다. 씌어진 글은 단지 말해진 언어의 보충으로서 후자를 대신할 뿐이라는 것이다. 말해진 언어는 씌어진 글보다 정신에 가까이 있는데, 그것은 말해진 언어의 경우 어떤 자연적인 기저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기의 파장운동은 영혼의 ‘내적인 떨림’을 직접 재현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헤겔이 초기 저술에서부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요한 복음을 애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H. 키멜레, 앞의 책, p60.


9) 데리다는 서구철학이 비이성에 대한 이성, 차이에 대한 동일성, 부재에 대한 현전을 진리의 근거로 주장해 왔다고 본다. 그런데 이처럼 동일성이 차이와의 관계에서 차이를 배체함으로써만 동일성이 될 수 있다면 동일성 자체는 그 속에 차이에 대한 배제, 억압을 지니고 있는 폭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성, 동일성, 현전에 대비되는 비이성, 차이 부재라는 그것의 타자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데리다는 서구철학의 근저가 되는 본질/현상의 이원적 대립구조에서 권력의 전략을 탐지한다. 여기에서 본질을 현상에 대해 우선적인 것, 근거로 보고 현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본질에 특권을 부여하고 그 특권의 그 대립항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대립구조는 가지적것/감각적인 것, 안/밖, 선/악, 진리/허위, 천상/지상, 자연/문화, 말하기/글쓰기, 자본/노동, 남성/여성, 백인/흑인 등의 이항적 대립의 짝을 만든다. 각 대립항의 한 측면은 원천적인 것이고 다른 측면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양운덕, 「데리다의 해체이론」,『사회평론』제 92권 7호, 1992, p190


10) 로고스중심주의는 헤겔에게서 잘 설명될 수 있다. 헤겔은 『예나 시절의 시도적 체계』와 『시도적 체계Ⅱ』에서 데리다는 에테르에 대한 헤겔의 이론을 찾았는데 이것은 데리다가 말한 서구철학의 음성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를 직접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테르는 저항 없는 질료로서 거의 정신-질료이다. 말해진 언어가 자연적 기저 없이 존재하듯이 여기서는 어떤 것이 그렇게 기저 없이도 있을 수 있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긴 스스로-듣고- 말함(Sich-hören-sprechen)이 여기서 완전히 실현되고 있다. ‘지상의 체계’에서 유한한 질료가 생기기 이전에-이러한 유한 질료에서는 이념이 어떤 자연적 기저에 묶여 있는 바-절대 정신 혹은 신은 스스로 자신과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직접 스스로 들었다.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사람에게 음파를 전해주는 공기를 통과하는 과정없이 절대자의 말은 동시에 스스로를-듣는-것(Sich-selbst-hören)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체계 속에 있는 모든 유한적 중개 현상에 깔려 있는 운동의 순수한 형식이다. 스스로-듣고-말함은 로고스의 구조 즉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H. 키멜레, 앞의 책,p62


11) 자끄 데리다, 박성찬 편역,『입장들』, 솔, 1992, p49~50


12) 조너던 킬러, 이만식 역, 『해체비평』, 현대미학사, 1998, p110~111


13) 조너던 킬러, 앞의 책, p115


14) 예를 들어 루소는 교육을 자연에 대한 보충이라고 논하고 있다. 자연은 원칙적으로 완성되어 있는데 교육은 외부 추가가가 되는 것이다. 또한 루소는 자위행위를 위험한 보충이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경우처럼 이는 정상적인 성에대한 그릇된 추가, 글쓰기가 말하기에 첨부되어 있는 것처럼 첨부된 실천이나 기교인 것이다.


15)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18


16)따라서 불어로 차연, 디페랑스(différance)는 차이 디페랑스(différence)와 똑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눈으로는 식별되지만, 소리로는 e와 다른 소리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리가 없는, 그래서 들리지 않는 a를 e에 대한 실수로 간주하고 무심히 지나가려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a를 지닌 차연(différance)에 의해 이미 사전에 기술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 차연 속에 갇혀 있다.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19


17)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3, p208


18) 차연은 현전인 동시에 부재라는 기묘한 활동이다. 그것은 현재 작용하는 동시에 숨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지우는 동시에 언젠가는 일체를 나타내려는 운동이다.
-이광래,「데리다의 해체실험과 철학적 단두대」,『한국논단』제 63권, 1994, p222


19) 그런 점에서 그런 연기하는 운동보다 더 이전에 근원적인 자기 일치의 그런 통일이 선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차연의 연기보다 더 앞선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하고 위임하고 우회하는 차연의 운동이 모든 현존보다 선행한다.
-김형효, 앞의 책, p209


20) 우리의 모든 언어활동이 구조주의적 발상에 따라 양가적인데, 그런 양가적 발상, 이분법의 논리를 가능케 하는 기본이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나에게 있어 타자다. 너는 타자나 이타자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는 동일자라는 생각을 데리다는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그런 사고는 말소리중심주의의 소산이다. 데리다에 의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기 동일성을 지닌 동일자가 아니고 나는 타인인 너의 타자에 지나지 않는다. 너의 타자로서의 내가 바로 데리다가 말한 <같은 것> <같음> le même이다. 그래서 <같은 것>과 <동일한 것>은 데리다의 철학논리에서 같은 뜻이 전혀 아니다. 이런 사고논리를 위의 인용에 대입하면 같은 것은 이미 그 자체 다른 것을 전제하고 있고, 같은 것은 곧 <다른 것의 다른 것>(타자의 타자)이기에 같은 것이 대립된 두 가지를 동시에 포괄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포괄하지만 같은 것이 어떤 실체나 존재나 기저나 현존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같은 것은 단지 다른 것의 다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형효, 앞의 책, p209~210 


21) 차연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렇게 씀으로써 시작되는 몇가지 노선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노선들은 느슨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묶음’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차연은 엄격하게 말해서 단어도 개념도 아니며, 단지 잠정적인 그래픽 흔적이다.
- H.키멜레, 앞의 책, p88~89


22) 자끄 데리다, 박성창 편역, 앞의 책, p31~34 요약정리.


23) 김형효, 앞의 책, p219~220


24) 김형효, 앞의 책, p227


25)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9


26) 형이상학을 가능케 한 이 우화는 자체적으로 스스로를 삭제하지만, 양피지 위에 눈에 보이지 않게 계획되어 백색 잉크로 기록되어, 여전히 우리를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71


27) 하나의 텍스트 속에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잠재된 의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포를 다의미적 개념이라고 명확하게 못을 박기는 어렵다. 겉으로 보면 산포와 다의성은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다의성은 한 단어에 그 의미가 아무리 다양하게 복수적이라 하더라도, 그 한 단어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해독된다는 생각과 연결되지만 종자를 흩뿌리는 산포는 하나의 정의나 또는 다원적 정의로 모여지지 않는다.
-허재영,『철학의 탈주』,「자크 데리다: 해체적 독해와 지배담론 허물기」,새길, 1995, p146


28) 김상환,「데리다와 은유」,『데리다 읽기』(이성원 엮음), 문학과지성사, 1997, p126


29) 김상환, 앞의 책, p129.


30) 주체를 규정한 현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던 것은 바로 태양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의 동굴과 대조되는 진리, 로고스, 이성이다. 화폐통화체계에서 금이 최고의 가치가 되듯, 철학(은유)체계에서는 태양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자끄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22


31) 철학이 은유를 정의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개념들, 그 밖에 철학을 떠받치는 진리·형상·이성 등등의 개념들을 말한다.


32) 김상환, 앞의 책, p131~132


33) 김형효, 앞의 책, p246~248

[출처]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 외 1편|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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