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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창작 이론 / 이 관 희[한국]
2018년 03월 29일 14시 06분  조회:1716  추천:0  작성자: 강려
문학 창작 이론 / 이 관 희

 
2. ‘창작’이라는 말의 본질적인 뜻
 
1) 문학은 본질상 허구다
 
창작이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시(poet · poetry)’를 의미한다. ‘시인’ 즉 ‘poet’라는 말은 그리스어 포이에인(poiein)에서 온 말인데 그 원의는 ‘만들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 즉 포에트라는 말은 ‘만드는 사람’ 즉 작가(作家)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인을 만들어 내는 사람, 꾸며내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으로 보았던 모양이다.”([문학이론의 역사적 전재] 이상섭 135쪽)
 
시인이라는 말의 본래 뜻이 꾸며내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꾸며서 만들어 낸다는 그것은 어떤 것인가? 책상이나 의자 같은 현실적 용도의 어떤 물건인가? 말 할 것도 없이 문학창작이란 실용도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의 [poetica]를 日人들이 [詩學]이라 번역한 이래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도 [詩學]으로 통해있다. - 그러나 [poetica]의 원의나 내용은 ‘詩歌學’이나 ‘詩賦學’이 아니라 ‘創作學’ 또는 ‘創作論’으로 번역해야 할 성질의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김동리 상동)
 
문학이라는 말의 광의적인 뜻은 문자로 기록된 모든 저작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학인들이 말하는 문학이라는 용어의 뜻은 창작물을 의미한다.([문학개론] 조연연 정음사 30쪽) 문학예술이란 창작론에 의한, 창작을 위한, 창작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작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사실이 아닌 개연성(蓋然性), 즉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은 특수한 사실을 모방 또는 묘사하는 역사와는 달리 개연성을 모방한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개연성이 문학의 허구성을 정당화한다고 하였다.”(<문학의 이해> 이상섭 34쪽)
 
문학이론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부터 본질상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방법론에 관한 학문적 체계라는 뜻이다. 문학에 관한 이 같은 인식과 개념이 서 있지 않을 때는 문학에 관한 일체의 일이나 말들이 모두 무용한 것이 되거나 심각한 오류가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영역(領域)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지 않거나 왜곡(歪曲) 되었을 때는 문학적 기법에 의한 문학 본연의 미적 정신세계를 이해하거나, 연구를 할 수 없으며, 역사 · 철학이나 신화 등 문학의 외적 주변이나, 다른 예술과의 상오침투나 수용현상을 직시 할 수 없게 되어, 문학의 고유한 영역에서 이탈해서 문학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쉽다.” ([문학개론] 구인환 구창환 공저 삼영사 14쪽)
 
예술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상상적ㆍ허구적 창작을 의미하는 일이기 때문에 상상적ㆍ허구적 창작론에 근거하지 않은 음악론이나 회화론이 있을 수 없듯이 문학론 또한 창작론에 근거하지 않은 문학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근대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된 몽태뉴의 (비창작)에세이 문학도 창작론에 근거하여 비교한 결과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 같은 창작론에 근거한 현대적 수필문학의 개념이 다름 아닌 수필은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론과 관계가 없는 문학이론이란 성립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창작>도 아니고, <창작적>이지도 않은 글은 문학인들이 말하는 문학 권 밖의 광의적 의미의 문학에 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권 밖의, 즉 창작론적 비평대상이 되지 않는 광의적 문학의 대표적인 양식 가운데 하나가 <논픽션> 물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도 창작문학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논픽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러지 않아도 1백 년 동안이나 문학 이론적 혼란과 혼돈에 허덕여 온 수필문학의 숨통을 마저 조이는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이 같은 사태야 말로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이 문학적 가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다.
 
2) 창작 개념은 본질상 신적 창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을 흔히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고 이해한다. 사람 혹은 자연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서구 정신문명을 헬레니즘 시각에서 보든 헤브라이즘 시각에서 보든 그 배후에는 신(神) 사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헤브라이즘의 뿌리가 되는 성경은 명확하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적고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1절)
 
이렇게 볼 때 현대문학 이론의 시조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이 실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전개한 창작론적 모방론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학작품을 존재론적으로 처음 체계 있게 논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이상섭 상동 165쪽)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훗날 다른 문학학자들에 의해서 신적 창조론에까지 이르게 되는 새로운 해석을 낳게 된다.
 
“시인은 창조자라는 생각이 가장 명쾌하게 전개된 글은 필립 시드니의 <시의 변호>이다. 그는 시, 즉 포에시스(poesis)의 원의인 ‘만들다’는 말을 기독교적 창조의 의미로 굳힌다.” (이상섭 상동 135쪽)김동리 선생이 ‘우리에게 창작이란 고유한 개념이 없었다’라고 할 때의 그 창작개념이란 바로 신적 창조개념에 근거한 창작개념이 없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창작’이라는 단어의 신적 창조 개념에서 몰톤(R.G. Moulton 1848~1924)의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창조적인 문학”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개론] 조연현 정음사 46쪽) 그렇다면 문학적 창작개념은 분명해 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신적인 창조를 할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는 오직 상상력에 의한 상상(허구)적 창조뿐이다. 그렇다면 문학창작이란 ‘상상적 존재’, 즉 실체가 아닌 ‘형상적 존재’를 만들어 내는 예술작업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재현(representing), 꾸며냄(counterfeiting), 형상화(figuring forth)다.”라고 하였다. (이상섭 상동 42쪽)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고 꾸며서 형상화한단 말인가? “시는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능가하는 상상적 및 이상적 세계의 모방이다.”라는 것이다.(동상) 즉 문학창작이란 상상적 대상ㆍ사물ㆍ존재를 만들어 내는 예술작업이라는 뜻이다.
 
현대문학의 창작론은 서구 문학이론의 시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에서 부터 상상력의 형상적 존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예술 작업을 의미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학작품은 그 자체가 유기체적 구조를 갖춘 존재론적 구조물이어야 하고, 또한 그 작품 안에는 작가가 만들어낸 존재론적 사물ㆍ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창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구체적으로 형상이다.” (문학개론] 백철 신국문화사 61쪽)
 
“형상화란 모양을 지니지 못한 것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남을 가리킨다. 일정한 테두리를 이루고 형태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서 예술작품의 이름이 허용되지 않는다.” ([현대시 원론] 김용직 한연사 46쪽)
 
‘일정한 테두리를 이루고 형태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서 예술작품의 이름이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수필처럼 ‘이미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아 토의적 양식의 진술ㆍ서술을 하는 문학을 놓고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몰톤이 문학에는 특질을 달리한 두 개의 직능의 것이 있다고 지적하고, 하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詩)의 문학(창작문학-필자주)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한 것을 토의하는 산문문학이라고 설명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견해이다.” ([문학개론] 조연현 정음사 98쪽)
 
기존한 것, 즉 이미 있는 것에 관하여 토의하는 양식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이 수필(에세이)이다. (조연현 상동 100)
 
3. 창작 방법론
 
창작방법론에 관해서는 세 가지 대표적인 방법론을 생각 해 보고자 한다. 그 첫째는 구성론이고, 두 번째는 상상론, 세 번째는 문장창작론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문학창작 현장에서 각기 떨어져서 다른 기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성론이란 곧 상상론이자 문장창작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구성이라는 것은 자동차 조립 같은 기계적인 부품조립이 아니다. 자동차 조립은 각기 다른 공장에서 만들어낸 각기 다른 부품들을 제 자리에 맞추어 조립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창작의 구성작업이란 상상적 구성작업을 의미 하는 것이고, 상상적 구성이 유기체적 구조를 갖춘 작품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필히 “문장으로 창조된” (조연현 상동 46쪽)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 항에서는 창작론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세 가지 창작 방법론을 따로 항목을 나누어서 논하고자 한다.
 
창작 방법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은 ‘문장 구성론’과 ‘창작 구성론’은 전혀 다른 개념의 말이라는 사실이다. 문장 구성론이란 문장에 관한 학문, 즉 문장론에서 말하는 문장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작 구성론은 문장법에 맞는 문장 만들기가 아니다. 사실의 소재를 가지고 사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문장 세계를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서의 문예창작법인 것이다. 바로 그 같은 문예창작의 본질적 방법으로서의 구성법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본 항의 목적이다.
 
1) 구성적 창작론
 
(1)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
 
플라톤을 흔히 서구 학문의 시조라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문학 이론의 시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문학 이론의 시조라는 뜻은 곧 문학 창작론이 그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연 현대문학 창작론의 시조라면 당연히 그의 창작론에서부터 창작론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바른 공부가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과 플라톤의 모방론은 반대 되는 개념이다. 플라톤은 예술은 단순히 자연을 흉내 내는, 즉 모사(copy)일 뿐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예술무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모사가 아닌 ‘재현(representing)’을 넘어 ‘꾸며냄(counterfeiting)’이며, 꾸며냄이란 구체적 ‘형상화(figuring forth)’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창조적 모방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설명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고 이상섭 교수는 설명한다. (이상섭 상동 20쪽)
 
첫째, 창작이란 묘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리를 절름거리며 뛰어간다”는 식의 묘사는 창작이 아닌 묘사, 즉 copy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같은 묘사법이 창작 작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 창작방법의 본령은 아니라는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묘사만으로는 창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수필문학교실이라는 곳에서 가장 많이,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하고 있는 강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문장에 관한 언급인 줄로 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써 온 작품을 놓고, 제일 많이 지적하고, 문제 삼고,그리고 토의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이 문장은 이런 점이 이렇고, 저 문장은 저런 점이 저러하니, 이점은 저렇게, 저 점은 이렇게 고쳐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문장법’이 수필문학 교실에서 하는 공부의 전부가 아닌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문장법’은 문학공부의 보조수단은 될 수 있지만 문예창작법의 본령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이 잘 되었을 뿐 창작한 것도 없고, 창작적이지도 않은 글을 놓고 ‘창작’ 운운하는 것은 문학적 오류일 뿐인 것이다.
 
둘째, 창작이란 개념적ㆍ추상적 생각이나 사상의 진술ㆍ서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개념적 서술은 오히려 창작에 전적으로 대립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개념적 서술은 현대적 개념에 의하면 다름 아닌 몽테뉴의 (비창작)일반산문문학으로서의 에세이문학 양식인 것이다. 곧 조연현 교수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대로 “기존한 것을 토의하는 일반산문문학”인 것이다.
 
세 번째로, 창작이란 ‘하나의 독립된 전체적 형상’으로서의 구체적 형상 창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섭 상동 20, 169. 170쪽) 그렇다면 그 ‘구체적 형상’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 무엇이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라고 대답한다.
“유기체는 부분들의 특수한 결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전체를 말한다. 그런데 이 전체는 부분들이 하나로 결합되게 하는 원리인 까닭에, 개체의 부분은 전체에 속하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이러한 상보적 관계에서 파악해야 된다. - 그러니까 플롯은 부분들로 하여금 전체를 이루게 하는 근본원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섭 상동 166쪽)
여기서 말하는 부분들이란 한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사건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플롯이란 다름 아닌 그 사건들의 창조적인 배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건들이란 ‘무질서한 인간행위’ 즉 소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건들의 배열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배열은 어떤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기 위하여 부분들을 의미 있게 엮어 짜는 것을 뜻한다.” (이상섭 상동 21쪽)
소재의 부분들이 창조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려면 자연 사물로서의 유기적 관계가 아닌 문학작품으로서의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필연적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이 같은 문학작품으로서의 필연적 구조를 갖춘 하나의 전체로서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플롯이 곧 창작 구성론이라는 것이다. 즉 창작 구성론은 문법상의 문장법과 다른 작업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질서한 인간행위’, 즉 사실의 소재가 플롯에 의하여 새로운 세계로 탄생하게 되면 그 탄생한 작품세계와 사실의 소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 같은 의문이야 말로 특별히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창작문예수필 작법의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대답을 ‘개연성(蓋然性 · probability)’에 두고 있다. 개연성이라는 낱말의 국어사전 뜻풀이는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이라고 되어 있다.
문학에서 그럴 것이라는 가능성의 이야기라면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가? 허구적 상상력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문학작품이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거기에 허구(fiction)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문학개론] 정한모 김용직 23쪽-이상섭교수의 말을 인용)
따라서 플롯화란 곧 상상력화, 즉 허구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창작이란 사실의 소재를 가지고 사실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 즉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예술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라는 말의 뜻은 수필은 허구는 아니지만 <허구적 작법이 가능한 문학>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실제 행위(사실의 소재-필자주)를 재료로 삼고, 그것을 플롯화 한다는 것은 곧 이 개연성을 성립시키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이상섭 상동)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와 시를 구분해서, 전자가 사실의 세계, 또는 오직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들을 기술하는 데 반해서 시는 있을 수 있는 세계, 혹은 있음직한 것들을 그린다고 했다.” ([현대시원론] 김용직 학연사 27쪽)
따라서 사실의 소재가 플롯화 된 후에는 소재와 작품과의 관계는 1:1의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문학창작법의 본질적 방법은 문장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 구성법(플롯)에 있는 것이다. 문장은 문학창작의 재료이다. 재료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 창작물이 되는 것이지 재료 자체가 창작물은 아닌 것이다.
 
논픽션 문학으로 분류 할 수도 있는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 문학을 문학 권에 들여 놓게 된 이론적 근거는 에세이는 <창작 문학>은 아니지만, <창작적인 문학>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수필양식의 대표적 형식 중 하나인 비평문학을 가지켜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문학을 가리켜서 곧장 논픽션이라고 하는 것은 창작문학 권내에 어렵게 한 발을 들여놓은 수필문학을 문학 권 밖으로 도로 쫒아내는 격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 같은 현대수필 문학의 개념에 의하여 만약에 수필계의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이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발언이라면 굳이 문제 삼을 것 까지는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다만 <창작>과 <창작적>에 관한 이론적 정리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수필을 놓고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자신들의 문학이론적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기존의 수필 개념은 지금도 ‘붓 가는 대로’로 되어 있다.
 
(2) 포스터의 구성론
 
포스터(E.M. Forster 1879~1970)는 먼저 옛날이야기 식의 서술법과 소설 구성법의 다른 점부터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한 사건의 서술(敍述)이고, 구성 역시 사건의 서술이지만 인과관계에 중점을 둔 것이다.” ([소설의 양상] E.M. Forster 정병조 역 신양사 94쪽)
옛날이야기의 기본 형태는 사건을 시간적 순서에 의해서 진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작문학으로서의 소설은 시간적 순서보다 인과율에 의한 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터는 그 실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도 죽었다”는 것은 옛날이야기 식의 서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고 하면 이것은 기본적인 구성작업이 된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가 그대로 살아 있기는 하지만 왕의 죽음과 왕비의 죽음 사이에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인과율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고차원적인 구성법은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포스터의 구성론이다. 즉,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신비를 간직한 구성법이 된다는 것이다.
 
①옛날이야기 식의 서술에서는 왕의 죽음이 앞에 나왔고, ②기본적인 구성법에서도 왕의 죽음이 앞섰으나 인과율이 개입되었는데 ③신비를 간직한 구성법에서는 왕비의 죽음이 앞에 나서고, 왕의 죽음은 뒤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즉 옛날이야기 식 서술법에서는 사건과 사건이 시간적 순서에 의하여 진행 되었는데, 창조적 구성법에서는 시간적 순서가 깨어져 버리고, 그 대신에 사건과 사건 사이를 인과율이 개입하여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포스터는 자신의 구성론이 현대 문학의 대표적 형식인 소설 구성론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을 위한 플롯론과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포스터의 구성론이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고차원적인 구성법에 이를 수 있다는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있었던 사실’을 개연성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필히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된다. 이 지점에서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신비를 간직한 고도의 구성법이 가능하게 된다는 포스터의 구성론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비극의 플롯 중에서 그는 역전(逆轉)과 발견을 제일 좋다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그런 플롯이 가장 쾌감을 자아낸다고 본 까닭이다. (이상섭 상동 76쪽)
역전과 발견은 사실의 소재 속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리는 구성작업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식 수필의 서술법의 절대 다수는 옛날이야기 식의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으로 된 글이라는 것이다. 사건의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은 창조적 구성법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창조적 구성법은 소재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가능한 일임에도 한국식 수필에서는 이 같은 창조적 구성법은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반해서 거의 모두가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의 작품들이라는 것이 기존의 수필 작법의 문제라는 뜻일 뿐이다. 이는 무엇을 말 해 주는가? 한국식 수필은 지난 1세기 동안 현대문학 이론의 창작론에 접촉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 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계의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은 무슨 이론에 근거한 어떤 작품들에 대한 말인가?
 
2) 상상적 창작론
 
구성법이 문예창작의 본질적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야 말로 문학의 목적이며, 영혼이라고까지 하였다. (이상섭 동상 21쪽)
그러나 현시대의 창작론에서는 구성론과 함께 상상론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로 창작방법론으로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시는 오직 상상이다.” (해즐리트)
 
“시는 상상의 표현이다” (셸리 이상섭 상동 153, 154쪽)
 
“모방은 보이는 사물을 만들어내지만 상상은 보이지 않는 사실에까지 나아가서, 그것을 실재의 표준으로 삼는다.” (플라비우스 필로스트투스 -이상섭 상동 132쪽)
 
이 같은 상상력이 문예창작의 중요한 방법과 능력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워즈워드도 모방의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 -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방 위에다 ‘상상의 빛깔을 입힘으로써 비속한 사물이 특이하게 나타나도록’ 했다고 말한다. - 낭만주의자들이 이 괴력을 가진 상상을 최고로 존귀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상섭 상동 62,63쪽)
 
그렇다면 문학창작에서 말하는 상상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상상력은 현재의 직관에 과거의 경험을 이끌어 들여 고리로 연결시키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자연이 결합시켜 놓은 것을 해체하기도 하고, 해체시켜 놓은 것을 결합하기도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앞의 지적은 최재서의 견해이고, 뒤의 것은 베이컨의 지적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상상력은 무엇과 무엇을 관련지어 고리를 걸어 엮어내는 작용을 하는가 하면 해체와 결합을 동시적으로 하는 정신적 그리고 시적 능력이다. ([21C 시 창작법] 박진환 조선문학사 71쪽)
 
구성이란 사건들의 배열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건들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오직 이미 있었던 사실 즉 소재에서만 와야 하는가? 현대문학의 창작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현대문학의 창작론은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는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장편소설도 써 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는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장편 소설도 엮어 낼 수 있는 그 수많은 사건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대답이 바로 상상력에서 온다는 것이다.
 
“시인을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것을 만들어 내는 자인 까닭이다. 포에트(poet)라는 이름은 바로 ‘만드는 자’를 뜻한다. 운문을 지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시에 합당한 소재(상상적 사건-필자주)를 만들고 꾸며내기 때문에 그는 시인이라 불리운다. 만약 이미 만들어진 사실을 취급하고 새것을 꾸며내지 않는다면 시인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 (지랄디 친티오 -이상섭 상동 134쪽)
이미 만들어진 사실을 취급하고 새것을 꾸며내지 않는다면 시인, 즉 ‘作家’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에 해당하는 문학이 무엇인가? 논픽션 작가들인 것이다. 논픽션 작가들도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관습상의 일일 뿐이다. 문학 이론상으로는 논픽션 작가는 ‘poet’, 즉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作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의 ‘作家’가 아닌 문필가일 뿐인 것이다.
대한민국 수필가들은 작가인가 문필가일 뿐인가? 수필은 논픽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침묵으로 회피하여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수필과 인품은 일치’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대로 투명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1) 상상과 공상
 
상상은 공상, 망상, 환상, 몽상과는 다른 것이다. 흔히 환상이나 공상, 심지어 몽상조차도 상상력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학이론에서 말하는 상상론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공상(空想)이라는 말의 뜻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을 막연히 상상함.”이라고 되어 있다. 또 망상(妄想)은 ‘이치에 어그러진 생각’, 환상(幻想)은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느끼는 상념’, 몽상(夢想)은 ‘꿈같은 헛된 생각을 함’이고 되어 있다.
“공상은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되어 나온 기억의 한 형태에 불과할 뿐, 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코울리지 [공상과 상상력] R.L. Brett저 심명호 역 서울대학출판부 61쪽)
 
상상이란 시간과 공간의 질서, 즉 경험에 근거한 ‘있을 법한’ 개연성의 세계를 미루어 생각하는 정신작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상, 몽상 등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따라서 보편적 이치에 어그러진 막연한 생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문학이란 공상도, 망상도, 환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학이란 경험에 근거하여 있을 법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인 것이다. 즉 문학이란 인류의 영원한 실현 가능한 희망의 깃발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공상, 몽상 등이 상상력과 다른 것이라고 해서 문예창작과 관련이 없거나 배척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프로이드는 백일몽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문학의 이론과 실제> 이명재 김흥식 157쪽) 바슐라르는 몽상 혹은 상상력의 창조적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진형준 38쪽)
 
(2) 문예창작법의 상상력
 
박진환 교수는 상상력을 실제 시창작법에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① 1차적 상상 : 재생상상(기억의 단계)-경험에 근거한 예술적 상상력의 초기 단계(필자주) - 이미지를 성립시킨다.
 
② 2차적 상상 : 연합상상(연상상상)-본격적인 창작단계로의 진입(필자주) - 비유를 성립시킨다.
 
③ 3차적 상상 : 생산적 상상(창조적 상상)-완성적 창작 단계(필자주) - 마술적이고도 통합적으로 작용, 창조적 경로로 시를 성립시킨다. ([현대시론] 박진환 조선문학사 35쪽)
 
구성과 상상력의 관계를 뼈와 살의 관계로 예를 들어도 좋을 것이다. 어떤 동물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뼈의 생김새다. 뼈의 구조가 네 발로 기어가게 되어 있으면 아무리 살을 다른 모양으로 덮어보려 해도 결국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의 모양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 발로 직립하여 걷게끔 되어 있는 뼈 위에 아무리 네 발로 기는 짐승모양으로 살을 붙여도 결국은 직립하여 걷는 모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문학의 상상력과 소설문학의 상상력, 그리고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의 세계도 각기 다른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만약에 시와 소설과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면 이는 짐승의 구조로 되어 있는 뼈대 위에 사람의 맨살을 입히는 결과가 될 것이고, 반대로 사람의 뼈 구조로 되어 있는 구조물에 털이 부성한 짐승의 몸을 입히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장르 문학의 구성법이 그 문학의 특성을 따라 다소간에 다를 수밖에 없듯이 상상력의 세계도 각기 다를 것은 당연한 일이다.
 
① 시적 상상력의 세계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치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아서 모두가 정답이면서 또한 하나의 절대적인 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생이란 어떻게든 움직이며 생활하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고금동서를 불문하고 동일한 삶의 양상이듯 시란 본질상 노래라는 사실 또한 부정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를 노래라 할 때 우리는 즉시 노랫말과 일상어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노랫말은 언어 자체의 특수한 용법에 의하여 일상어와 다른 언어가 되기도 하지만 설사 일상어 그대로를 노랫말로 불러도 여전히 일상어가 아닌 노랫말이 되는 까닭은 노래에는 일상어에는 없는 음의 높고 낮음과 장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어가 과연 일상어가 아니라면 그 같은 시어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의 세계도 당연히 시만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시적 상상력의 세계는 창조적 언어 상상력의 세계라는 것이다.
 
시인들은 언어를 새로운 방법으로 요리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날마다 똑 같은 쌀밥을 먹고 사는데 시인들은 쌀을 가지고 나무도 만들어 먹고 별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나무도 만들어 먹고, 별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가?
 
정현종 시인은 ‘구름’이라는 시에서 “여러 해 전 새재 골짜기에서/구워먹은 구름 생각”을 했다고 쓰고 있다. 구름을 어떻게 구워 먹는가? 현실에서는 순 공갈빵일 뿐이다. 그러나 시에서는 가능한 일이다.왜? 시의 세계란 창조적 언어의 상상력 세계이기 때문인 것이다. 시어는 본질상 상상적 존재인 것이다.(사르트르)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언어의 상상력이 없이는 시를 창작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시를 감정의 표현이라고 알고 있는데 감정이나 정서만으로는 참 시 다운 시를 창작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문학의 창작론이다. 시의 본질은 창조적 언어로서의 존재론적 상상력에 있기 때문이다.
 
② 허구적 서사(소설) 상상력
 
포스터는 ‘소설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였다. 소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한다. 하나는 옛날이야기가 아닌 구성하여 얽어 짜서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은 반드시 허구적 이야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서사는 구상작업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허구적 서사 창작을 시작하게 된다. 필자의 작품 중에 만원전철에서 차가 기우뚱 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품에 안겼던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필자의 작품은 창작문예수필작품이므로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았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 소설가는 작품 집필에 들어가기 전 구상단계에서 ‘만원 전철 여인’이 아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 다른 이야기란 상상이 가능한 천태만상의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중에서 만약에 요즘 막장 방송극 욕을 먹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태생의 비밀 이야기를 또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면, 전철에서 품에 안겼던 여인은 이난성 쌍둥이의 기적적인 만남으로 설정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철에서 차가 기웃둥 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품에 안겼던 낯 선 여인에 대한 수필 문학적 감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적 상상력과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의 다른 점이다. 소설 서사는 사건 자체를 허구적으로 꾸며내는 상상력의 서사이고, 창작문예수필의 서사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교감이라는 상상력의 서사다.
 
③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 세계는 대상ㆍ사물과의 교감의 상상력 세계다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 세계는 시적 언어 창조의 상상력 세계도 아니고, 소설적 허구적 서사 상상력의 세계도 아니다.
소설적 서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이야기라는 것이 기본 창작 양상이다. 즉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나 생각이 창작발상이 되는 것이 기본 창작 양식인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도 있지만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기본 양식의 변형이지 동물과의 관계가 소설 서사의 본령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람뿐만이 아니고 삼라만상 모두를 대화의 상대로 삼는 창작발상의 문학예술이 있으니 곧 창작문예수필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우주 삼라만상하고도 대화를 나눈다. 삼라만상과 나누는 대화의 대표적인 형태가 무엇인가? 밤하늘의 별과, 숲속의 나무들과, 그리고 이른 아침의 새들과의 대화, 즉 사물ㆍ존재와의 교감인 것이다. 또 그 같은 외적 사물ㆍ존재와의 대화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내면하고도 대화를 나눈다.
 
필자가 자주 예로 들고 있는 망자와의 대화는 현실의 사실적인 대화가 아니다. 과학적으로는 부정 할 수 없는 상상력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망자와의 대화를 놓고 ‘소설 쓰고 있네’라고 하는가? 이것이 소설적 허구 서사 상상력과 창작문예수필의 사물과의 교감의 상상력 세계의 다른 점이다.
 
3) 문장 창작론
 
필자는 <문장 창작론>과 <문장론>을 구분하여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는 문장 창작론이란 위에서 말한 창작 구성론에 의한 창조적 문장 세계를 만들어 내기 위한 ‘창작론적 문장술(術)’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장론이란 학계일반이 말하고 있는 문장론 즉 문법상의 문장론을 의미한다.
 
(1) 창작론과 문장론의 관계
 
문학의 재료는 글로 된 언어다. 즉 문장이 문학의 재료다. 문장이 문학의 재료라는 말은 나무가 의자의 재료라는 말과 기본적으로 같은 뜻이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무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명확하게 분별하고 이해하여야 할 것은 아무리 나무를 매끈하게 잘 다듬어 놓아도 의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많은 경우 문장이 좋아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말 할 필요도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문학을 한다면서 오직 하나의 재료가 되는 문장을 잘 다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왜 수필문학교실이라는 곳마다 그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가? 필자는 수필문학교실에서 좋은 문장을 너무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문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는 사상에 필자는 백프로 동의한다. 필자가 불평하는 것은 수필문학교실에서 강조하는 것은 ‘좋은 문장론’ 뿐이기 때문에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다.
 
나무가 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의자가 될 수 있는 구조물로 짜서 맞추어야지만 비로소 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문장이라도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학작품으로서의 구조를 갖춘 문장세계가 되어야지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필문학 교실이라는 곳에서는 좋은 문장만 강조하고 있으니 1백년이 지나도 <창작ㆍ창작적인> 작품이 생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의자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나무를 잘 다듬을 줄 아는 솜씨는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의자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의자 만들 것을 포기 할 것인가? 필자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나무를 다듬는 솜씨는 아직 좀 거칠더라도 의자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게 하는 것이 백번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의자에는 몇 백만원짜리 고급 의자도 있지만 공원이나 등산길에서 쉬어 갈 수 있는 통나무 의자들도 있다. 통나무 의자는 자연 상태에서 크게 변형되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목재다. 그러나 의자로서의 구조를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설사 좋은 문장과 좋은 구조 둘 다를 갖출 수 없다 하더라도 필자는 끝까지 문학 창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1세기 동안 수필문학이라는 것은 좋은 문장만 강조하다가 문장도 놓치고 문학도 놓치는 그야말로 게도 구럭도 다 놓친 격이 되고 말았다.
 
창작론은 문장론이 아니다. 문장론은 창작론의 필수 항목일 수는 있지만 문장법이 곧 창작법일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많은 경우 문장법은 창작론에 치어 파괴 되거나 변형, 조작되거나 무시 될 때도 있다. 이상(李箱)의 시작법에서는 문장법의 기초가 되는 띄어쓰기조차 무시되고 있다. 그리고 숫자마저 거꾸로 박아 놓고 창작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이상의 이 같은 창작법이 문장법에 어긋난다고 해서 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문장법과 창작론의 다른 점인 것이다.
 
문장은 문학의 재료다. 그러므로 좋은 문장법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문장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곧 창작법인 것이다. 시 창작은 본질적으로 기존의 일상적 문장법을 파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현대 시의 창작론이다.
 
(2) 창조적 문장술

“창작문학은 시에 속하는 문학으로서 그 문장 형식 여하를 불구하고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창조적인 문학이 된다. 그것이 한 인물의 창조든 어떤 사건 하나의 창조든, 문장으로서 창조된 내용은 그것이 역사상의 그것에 일치하든 않든, 그것이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신의 창조에서 마련된 우주의 한 부분과 똑 같은 의의를 갖는 것이 된다.” (조연현 상동 46쪽)
 
조연현 교수가 말하고 있는 “문장으로 창조된”이라는 말의 ‘문장’ 자체는 말할 것도 없이 문장론에서 말하고 있는 문법상의 문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장으로 창조된> 문장 세계는 문법이 아닌 ‘문장으로 창조된 창조적 문장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창조적 문장론의 실체가 들어난 셈이 아닌가? 즉 창조적 문장이란 문학적 대상을 구체적인 모양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형상적 문장술’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반드시 ‘있을 법한 상상적 문장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 유명한 이상의 [烏瞰圖] 첫 행은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이다. 문장법의 기본이 되는 띄어쓰기조차 파괴하고 있다. 이상의 이 같은 문장법 파괴의 문장은 무슨 문장법인가?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문장법을 파괴해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적 문학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형상적 문장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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