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최근 동시 논쟁을 읽고- 난해함을 주제로(어린이와문학. 2016.8) / 글쓴이 / 이야기밥
퍼온 글
[스크랩 ] 최근 동시 논쟁을 읽고- 난해함을 주제로(어린이와문학. 2016.8) / 글쓴이 / 이야기밥
최근 동시 논쟁을 읽고
-난해함을 주제로-
최근 동시단에서 벌어졌던 논쟁글들을 읽어보았다. 이 글들을 읽으며 든 생각을 몇 가지 글로 정리해 본다.
김제곤은 최근 10년간 나온 동시들이 난해함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런 난해함의 문제를 유발시킨 동시의 한 예로 이안의 뱀 연작시를 들고 있다. 김제곤이 예로 든 이안의 시를 우선 내 나름대로 감상을 해 보도록 하겠다.
참기름병에서나와콩기름병으로들어갔습니다.- <뱀1> 전문.
어떤날은마당에버려둔막대기가기어가기도합니다-<뱀2> 전문.
막대기를들고막대기를쫒아갑니다-<뱀 3> 전문.
땅군아저씨, 그 많은 막대기 주워다 뭣에 쓰게요?-<뱀 4> 전문 (고양이의 탄생. 문학동네. 2012)
이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먼저 긍정적인 시각으로 이 시를 한번 감상해보겠다.
위의 뱀 연작시는 은유의 비유법을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은유는 유사성에 의미를 두는 비유법의 하나이다. 저 위의 시를 보면 뱀은 길고, 막대기도 길다. 그러니까 길다라는 유사성에 감각을 집중하면 뱀은 곧 막대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당에서 막대기가 기어간다고 말을 한다. 일종의 말놀이의 하나이다.
참고로 환유라고 하는 비유법도 있는데, 이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를 둔 비유법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서 왕과 왕관은 늘 인접해 있으니, 왕관하면 왕을 뜻하는 것이고, 글을 쓰는 작가는 늘 펜을 들고 있으니, 글쓰는 직업을 펜 하나로 산다로 표현하는 식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은유나 비유의 말놀이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런 은유나 환유에 해당하는 말놀이를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저 위의 시는 일단 논리의 비약을 무릅쓰고 긍정적인 자리에서 본다면, 존재를 표현하는 다양한 관점의 하나인, 신화적인 언어 감각을 길러주는 구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각의 논리를 구사한다는 신화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은 은유와 환유의 말놀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언어의 마법사, 말놀이의 마법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신화에서 저런 은유와 환유의 말놀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번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네시아 포소족의 짧은 신화 한 편을 소개한다.
태초에 인간은 신이 새끼줄에 묶어 하늘에서 내려준 바나나 열매를 먹으며 영원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나나 대신에 돌이 내려오자 먹을 수 없는 돌 같은 건 필요없다며 신에게 화를 냈다. 그러자 신은 돌을 끌어올려 버리고 다시 바나나를 내려보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돌을 받아두었다면 인간의 수명은 돌처럼 단단하고 오래 지속되었을 텐데, 돌을 거부하고 바나나 열매만을 원했기 때문에 인간의 목숨은 앞으로 바나나 열매처럼 짧으며 썩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그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죽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신이치. 동아시아. 37쪽)
바나나는 말랑말랑하고 맛도 좋고, 부드럽긴 하지만, 오래두면 썩고 만다.돌은 딱딱하고 맛도 없지만,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나나와 돌이 이항대립을 하고, 이런 속성에 유사성을 두고, 죽음과 영생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화 한편을 두고 감상을 할 때에도, 위의 시가 담고 있는 비유의 말놀이가 담고 있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는 분명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단 이안의 뱀 연작시와 같은 작품이 담고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우리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제곤은 저 뱀 연작시를 예로 들며 최근 10년간의 동시가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난해함의 자리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제곤은 이안의 시에 대해 이런 비판을 하고 있다.
“이안이 쓴 위 시에서 보듯 짧은 길이의 동시라도 문장과 행간, 시어 하나하나가 갖춘 함축은 웬만한 시를 능가한다. 난해함의 요소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이안 자신의 표현대로 이런 시들은 독해를 지연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시에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를 오랫동안 골똘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독자란 대개 아이 독자이기보다는 이미 시를 골똘하게 읽은 경험이 있는 어른 독자들이 아닐까.”(<시의 자리, 동시의 자리>. 어린이와 문학. 2015년. 10월. 15쪽)
저 뱀 연작시는 감각의 논리로 볼 때는 전혀 난해한 시가 아니다. 그냥 직감으로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고 즐기면 되는 시이다. 저 시를 읽고, 이성의 합리적인 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왜 막대기가 기어가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성의 논리적인 생각보다 감각의 논리로 먼저 시를 느끼고 즐기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아이를 폄하하는 사람은 아마 적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아이의 감각을 보고 놀라는 사람 쪽이 더 많지 않을까.
뱀이 참기름병에서 나와 콩기름병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이 문장은 미끄럽다는 어떤 감각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해서 쓰였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유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워낙 다양해서 작가는 이런 미끄러짐 말고도, 또 다른 유사성을 발견하고, 저런 시를 썼을 것이다.
이안 시인 자신이 독자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킨다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의문이 간다. 독자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킨다는 말이 내게는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뱀 연작시는 감각의 논리로 볼 때는 독해를 지연시키는 작품이 아니다. 그냥 읽으면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시이다.
그런데 이 감각이 그냥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는다면, 그냥 하나의 텅빈 기호나, 아니면 외면의 풍경으로만 남는다면, 시가 갖고 있는 감정의 깊이는 아무래도 덜 느껴질 것이다. 맑은 풍경이 주는 수채화같은 아름다움도 물론 있지만, 위에 인용한 시들이 그런 느낌을 주는 건 또 아니다.
아래 시를 한번 감상해 보자.
송찬호의 <눈사람>이란 시이다.
내가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열차에 뛰어올랐을 때,내 옆자리 창가에눈사람이 앉아 있었다찌는 듯한 한여름 밤인데도 눈사람은 더워 보이지 않았다겨울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땀도 흘리지 않았다눈사람의 모습은 뭐랄까,기나긴 겨울전쟁에서 패하고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는상이군인 같았다지난 겨울전쟁에서 우리가 선거에 패했던 것처럼,눈사람은 나를 향해 한 번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찌는 듯 더위도그의 흰 피가 흘러내려의자의 시트를 더럽히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 이상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열차는 한여름 밤자정을 향해 끝없이 달렸다그새 내가 깜빡 졸았던 것일까어느덧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그는 어디쯤에서 내렸을까털모자나 목도리 하나 남겨두지 않고 (<분홍 나막신>. 송찬호. 문학과지성사)
나는 이 시를 이렇게도 감상해 본다. 시인은 이 시를 창작할 때 어디에서 힌트를 얻었을까. 아마도 실제 저 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어느날 헐레벌떡 시간에 쫒겨 열차에 뛰어 올랐을 때, 자기 옆 자리에 어떤 아저씨 한 사람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아저씨의 모습이 이 시인의 눈에는 영락없는 눈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감각의 논리를 작동하여, 유사성의 언어 감각인 은유의 언어 감각을 발휘하여, 아니 이런 은유니 유사성이니 할 것도 없이, 그냥 이 시인은 이렇게 한 사람의 존재가, 눈사람으로도 보이고, 장미로도 보이고, 호랑이로도 보이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사유 체계로 본다면, 일종의 모든 존재가 다양한 기호로 변환되고 전환되어 보이는 그런 언어 감각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저 눈사람이란 시의 맛은 일상의 한 존재를 눈사람으로 바꾸어내는 시인의 은유적인 언어 감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언어 감각이 무언가 삶의 내부, 삶의 내적인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데 까지 나아가고 있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의 언어 감각이 존재 내면의 섬세한 감정의 울림까지, 삶의 애환까지 건드린다.
눈사람이란 시는 독자인 나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키지는 않는다. 저 은유의 언어가 무슨 의미인 거지, 하고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직감으로 감각으로 느끼게 하면서, 또한 저 시는 독자의 감정선을 자극한다. 무언가 울림이 있다. 그래서 저 시는 시인이 억지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슴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일반 시와 동시를 직접 비교하는 것이 위험하긴 한데, 논의를 위해서 일단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이안의 뱀 연작시는 무언가, 사물과 사물이 우발적으로 마주쳐서 반짝 하는 삶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은유 특유의 언어 감각이 돋보이기는 한데, 존재와 존재가 무언가 기계적으로 일대일로 단순 대응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은유의 신화적인 언어 감각이, 독자의 내면 우주를 한번 크게 흔들어 어떤 깊은 무의식의 감정까지 건드리는 점이 미약한 것이다. 은유의 언어가 담고 있는 본질적인 에너지는 절대 개량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이렇게 단정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하여튼 나의 관점으로 볼 때는 무언가 뱀 연작시는 울림이 적다.
이안의 <모과나무 달>을 한번 더 감상해 보자.
모과나무에서
쿵!
달이 떨어졌어.
노오란,
바람에 긁힌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 향
노오란,
재미있게 읽힌다. 모과나무에 달린 모과를 보고 둥그런 달에 비유하였다. 역시 둥그런 모양의 유사성을 보고 시인의 감각이 작동을 하여, 달이 쿵 하고 떨어졌다고 가정할 때 무언가 이 시가 갖고 있는 언어 감각이 보이고, 독자인 나의 마음 속에도 따뜻한 풍경이 그려진다. 그런데 모과나무에서 달이 쿵 하고 떨어진 그 울림, 바람에 긁힌 달의 향내가 내 마음 속 풍경에서 은은하고 깊이있게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이 시 또한 일대일 대응 방식의 은유의 언어가 무언가 기계적인 느낌을 주어, 독해를 오히려 방해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건 난해해서 독해가 방해받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감정선의 흐름이나 여운을 깊이있게 느끼고 싶은데, 그런 독해의 과정에 몰입하고 싶은데 감정선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지는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안의 시는 이 정도로 하고, 이번에는 김제곤이 난해함의 또 한 예로 든 김륭의 시를 한번 보도록 하자.
604호 코흘리개 새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6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6층으로 코를 훌쩍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어요 훌쩍훌쩍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비스킷처럼 감아올린
코가 길을 잡아당기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흘깃흘깃 쳐다보지만
엄마가 타고 다니는 빨간 티코를 감아올릴 때까지
새봄이 코는 길을 잡아당길 거예요
집으로 오는 모든 차들이 빵빵
새봄이 콧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있어요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 김륭)
이 시는 관념적으로 인과관계를 따지는 사람의 자리에서 볼 때, 도대체 이게 뭐야 할 수도 있겠다. 그저 난해하기만 한 말장난의 시가 아닐까, 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감각의 논리로 이 시를 본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온갖 사물들을 일종의 기호로, 상징으로 가져와서 은유의 언어로 이 아이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감각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신화적인 언어의 흐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코끼리가 된 아이가 길을 다 빨아들이고 하는 장면들도 그렇고, 집으로 오는 차들을 다 빨아들이는 장면에 숨어 있는 아이의 내밀한 감정선의 변화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와 같은 시는 난해함의 관점보다는 이 시가 과연 다 읽고 났을 때, 어떤 절실한 감정선을 자극하느냐 하는 자리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위에 예로 든 이안의 시가 일대일 대응방식으로 은유의 기법을 사용하면서 무언가 말놀이의 재치나 흥미를 느끼게 하는 데 비해, 김륭의 시에 동원된 은유의 언어들은 사물들이 일대일 대응관계로 기계적으로 연결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김륭의 시에는 간절한 자기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의 감정선이 만들어내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의 언어들이 작동을 하고 있다. 이성의 논리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대일 대응 관계를 통해 이해가능한 언어 조합을 넘어 겉으로 보면 난해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간절한 주인공 아이의 내면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이러한 엉뚱한 존재들의 비유언어가 독자인 나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점도 있다.
아래 임길택의 <흔들리는 마음>이란 시를 한번 감상해보자.
공부를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할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이 시에는 아무도 난해하다는 말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무슨 은유니 유사성이니 하는 말도 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않았다 뿐이지, 시의 내면에는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그런 감정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해 내고있다. 그 곳에서 어떤 유사성의 감정 에너지가 발생하고 있다.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와 <흔들리는 마음>을 같이 이어 읽어볼 때, 두 시 모두 어떤 간절한 내면을 가진 아이가 존재한다. 그 아이의 내면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있는데 그 표현 방법은 서로 다르다.
만약에 난해하다는 이유로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와 같은 작품이 동시단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면 <흔들리는 마음>과 같은 리얼한 삶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시들도 자기와 개성이 다르지만 내면은 비슷한 색다른 시를 잃고 슬퍼하지 않을까.
풍부한 동시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데, 난해함이란 잣대로 본다면, 다양한 차이를 유발시키는 많은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가 있어서, 오히려 임길택의 <흔들리는 마음>이 더욱 소중해 보이고, 거꾸로 <흔들리는 마음>과 같은 시가 있어서,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는 색달라 보인다. 서로 다른 차이가 오히려 각각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 동시 논쟁관련 글들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여기서 그치기로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지난 <어린이와 문학> 여름 연수(2015년)에서 김제곤의 <황금시대는 도래했는가>란 글이 발표된 이후로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두고 좀 더 토론을 이어갈 계획이었으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토론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동문학판이 점점 김이 빠지며 시들해져간다고 하는데, 동시단 만큼은 오히려 열기가 식지 않고 뜨거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관점에서 시를 바라보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하는 비평의 자리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런 뜨거움은 작가들 자신의 친분이나 인맥관계의 내부적인 틀 내에 고착되어, 결국은 계모임으로 떨어져내릴 것이고, 독자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아동문학사를 아는 사람들은 일제시대 아동문단의 중심이 동요 동시에 있었다는 걸 다 알 것이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100여 년 만에 동시의 시대가 아동문학판에 살아 돌아온 느낌이다.
1920~1930년대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당시의 동요 동시 논쟁은 정말 치열하였다. 이런 치열함이 한 시대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지금 모처럼 맞이한 동시의 열기가 인맥이나 자본의 권력으로 재편되는 계모임으로 전락하지 말고, 부디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의 다름을 오히려 자극하는, 그래서 더욱 풍요로운 총체의 모습을 간직한 동시 세계를 이루어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써 보았다. 동시를 둘러싼 치열한 토론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기를, 그래서 지금의 동시단의 열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끝)
이미지를 클릭하면 다음이미지가 보여집니다.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