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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옥타비오파스 시론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2018년 07월 25일 20시 23분  조회:1959  추천:0  작성자: 강려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1)
 
 
   이미지라는 단어도 다른 말들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예를 들면아폴로 신이나 성모 마리아의 조각처럼 상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상상력을 통하여 상기하거나 만들어내는 실재적 혹은 비실재적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이런 맥락에서말은 심리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결과물들이 이미지가 갖는 유일한 의미도 아니며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따라서 여기서 이미지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언어적 형태즉 시이이 말하는 구와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라는 것을 밝혀둔다. 
 
  수사학은 이러한 표현들을 분류하여 비교은유말의 유희,
유사어상징알레고리신화우화 등으로 부르고 있다이러한 용어들을 가르는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간에그것들을 묶는 공통점은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각각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들오 이루어진 각각의 시편--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침묵의 음악"이라는 시적 구를 사용하여 겉으로 보기에 화해 불가능한 두 단어를 걸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이다가령안티고네라는 인물은 선험적 가치인  효와 사회적 가치인 인간 법 사이에서 고뇌하는 비극적 영웅이다아킬레우스의 분노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사랑과 프리아모스에 대한 연민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한 매혹과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의 대립이 얽혀 있다세히스문도에게서는 불면과 꿈이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이디수스에게는 자유와 운명이 얽혀 있고........이처럼 이미지는 인간조건의 표식이다.
 
서사적이거나 희극적 혹은 서정적이거나 간에하나의 구에 농축 되어 있거나 혹은 천 페이지에 걸쳐 풀어 헤쳐져 있거나 간에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다시 말해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 과학적 법칙이 의도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일한 논리적 환원 덕분에 개체적 대상들--가벼운 깃털과 무거운 돌--은 동질적인 단위로 변화된다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돌 일 킬로그램은 깃털 일 킬로그램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돌과 깃털을 킬로그램이라는 추상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어린아이들은 돌과 깃털이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임수에 의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환원이 갖는 통일적 기능은 그러한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망가뜨리고 빈약하게 만든다시에서
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시인은 이것은 깃털이고저것은 돌이라고 이름붙인다그리고 느닷없이 돌이 깃털이고이것이 저것이라고 단언한다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돌은 여전히 거칠고딱딱하고불투명하고태양처럼 누렇거나이끼에 덮여 초록빛을 띄거나 간에 어쨌든 돌무거운 돌이다그리고 깃털은 여전히 가벼운 깃털이다.이미지는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을 일으킨다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이 때문에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중에서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 이미지(1)|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
 
이러한 반대되는 언급에도 불구하고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이지,'~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존재를  재창조한 다고 말한다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서 어떤 이들은 변증법적 논리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결국많은 이미지들은 변증법적 과정의 세 시기에 부합된다돌은 실재의 한 단계이며깃털은 또 다른 단계이고양자의 충돌에서 새로운 실재로서의 이미지가 솟아나는 것이다그러나 변증법이 모든 것에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미지들을 무한히 열거할 필요는 없다어느 때는 첫번째 용어가 두번째 용어를 삼켜버린다또 어느 때는 두번째가 첫번째를 중화한다혹은 세번째 용어는 산출되지 않고 두 요소가 환원 불가능하고 적대적인 상태로 마주서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유머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모순은 단지 현실이나 혹은 언어의 복구 불가능한 부조리한 특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쓰인다결국,많은 이미지들이 헤겔의 변증법적 질서에 의거하여 전개된다고 할지라도거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과 반의 진짜 동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함이다변증법적 과정에서 돌과 깃털은 돌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제 3의 현실을 위하여 사라진다그러나 어떤 어미지 정확히 말해 가장 높은 이미지에서는 돌과 깃털은 여전히 돌과 깃털이다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저것이다돌은 돌이면서 깃털이다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이다여기에는 과학이 요구하는 양적인 환원도 없고헤겔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질적인 변화도 없다요약하면변증볍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키는 도전이며사유의 법칙을 침해하는 것이다변증법은 현실의 모습적인 성격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논리적 원리들특히 모순의 법칙(이것이 이것이지 저것이 될 수 없다같은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따라서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소위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라고 보인다정은 반과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양자는 새로운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데새로운 긍정은 양자를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세 단계들의 각각에는 모순의 원리가 지배한다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시적인 실재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모순의 법칙을 존중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그러한 법칙을 뛰어넘는 이미지를 비난한다.
 
여타의 학문들처럼논리학도 모든 체계가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하는 질문즉 자신들의 근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버틀란트 러셀의 역설이 의미하는 것과러셀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훗설의 연구가 의미하는 것도 역시 논리의 근거에 대한 질문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논리적 체계들이 출현해다. 
어떤 시인들은 뤼파스크의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자신이 상보적 모순의 원리라고 부른 것에 기초한 일련의 명제들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뤼파스코는 대립되는 용어들을 그대로 존중하면서양자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였다각각의 개념을 상호 직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상대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A B와의  모순적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A에서 발생하는 하나하나의 변화는 겨로가적으로 B에게 상반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부정과 긍정이것과 저것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3)
 
 
  동양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앎은 공식이나 이성으로 전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 위험 무릅쓰고
경험해야만 한다.  가르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우리 대신
그 길을 갈 수는 없다그래서 명상의 기법들이 중요하다.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명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
하라는 것이다이러한 시험 뒤에 우리는아는 것을 감소하지만 더 가벼워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아찔하고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정중동이며 만중허헤겔이 절대의 무와 충만한 존재 사이의 최종적인 일치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우파니샤드는 범의 상태를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로 정의했다.  "오감이 고요해지면서 정신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때그 안정된 정신을 통해 인간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인간과 세계의식과 존재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고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이다우리의 모든 활동은 오래된 오솔길즉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이다이러한 원리에 영감을 받은 탄트라 불교의 체계는 육체를 우주의 은유 혹은 이미지로 인식한다육체의 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이며별자리와 혈액과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다포옹하는 육체들이 취하고 있는 각각의 자세는 수액, 혈액 그리고 빛의 삼중 리듬에 의하여 움직이는 점성술의 황도 12궁에 해당한다남인도의 코나락 사원은 서로 위얽힌 현란한 육체들이 밀림처럼 뒤덮여있다이 육체들은 화염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태양들이며서로 교미하는 별들이다돌은 불타오르고 사랑에 빠진 사물들은 서로 결합한다연금술적 결합은 인간의 결합과 다르지 않다.
백거이는 자전적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밤중에 나는 슬쩍 훔쳐보았다
음양이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한 자태로
아내와 남편처럼 껴안고 있었다.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칭칭 감은 체.
 
동양적 전통에서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다그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진리의 탐구는 각자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다충만함에 도달했는지존재와의 동일함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체험적 앎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이러한 '깨달음의 상태' 너털웃음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된다하지만 그러한 미소는 수행자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앎은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경전들은 자주  이러한 모순적인 말을 한다가르침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도는 규정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길은 길이라 말하면 늘 그
러한 길이 아니고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장자는 언어란 본래 절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이것이 상징 논리
학의 창시자들을 노심초사케 하는 난제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고로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대림물들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언어의
무능력이 말의 근원적 한계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는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
 
결국의미하는 사물들을 지향하고사물들을 가리키지만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4)
 
 
장자는 언어를 비판했지만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뛰어난 언어적 창조물인 연극 노오와 바쇼의 하이쿠는 역설과 침묵으로 용해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는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확신한다기독교와 달
리 도교는 좋은 가르침도 나쁜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간단히 말하
언어로 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장자가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
이란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언어로 되어 있으
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을
뜻한다. 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언어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그의 글은 이미지말의
유희그 밖의 시적 형태들과 떼어놓을 수 없다장자에게서 시와
사유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하나의 기막힌 천을 짜낸다다른 경전
들도 마찬가지이다도교힌두교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대문이다장자가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
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때그 말은 말의 유희즉 시적 수수께끼를
암시하는 것이다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새들은 말을 의미하기에이 말은 결국 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다시 말해 여여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 
이름이 필요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이름과 사물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벼운 깃털은 무거운 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가 어떻게 말하는 지 보기 위해서는 언어를 살펴봐야 한다.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3) (4)|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5)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깃털은 가볍고 돌은 무겁다.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가벼운 것이며어두운 것
은 밝은 것에 비교해서 어두운 것이다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예를 들어, 수의 경우에 왼쪽에
쓰인 영은 오른쪽에 쓰인 영과 같지 않다숫자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단지 기타의 의미화와 의사
소통 수단에 비해 가변성의  폭이 더 넓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잇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낱말들의 다른 의미들은 사라지거나 약화된다혹은 달리 말한다면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즉 언어로 변화될 때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산문에서 구의 통일성은 의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그 의미는 구를 이루는 모든 낱말들을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방향을 겨냥하게 겨냥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그러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을 거두어 고양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가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상반되는 여러 힘들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명제들은 문법적이며 논리적인 구문으로는 완벽하게 옳지만의미상으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가르시아 바카가 그의 책 [근대의 논리학 입문]에서 인용하는 있는 것처럼
(" 숫자2는 두 개의 돌이다"). 논리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명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그러나 이미지는 모순도무의미도 아니다이미지는 모순적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만일 다양하며 서로 다른 의미들이 이미지의 내부에서 투쟁한다면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첫째로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이미지는 시인이 본 것이며 들은 것이고세계에 대한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그 때문에 이미지는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를 다르는 것이며명백히 우리가 걱정하는 논리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둘째로그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이미지들은 작품들이다.
공고라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경은 자연 풍경과 동일하지 않다그러나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지라도양자는 현실성과 확실성을 갖는다.
서로 병행하며 자율성을 갖는 현실의 두 질서이다이 경우에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한다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창조한다시적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며,
 시인이 '물은 유리이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물오리는 수양버들의 사촌이다"
(카를로스 페이세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대해서 무엇인
가를 말하며그 무엇은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
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고 확신한다시적 이미지들에 관련된 이러한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 것일까시적 언어가 보여주는 외견상의 모순 혹은 무의미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자각할 때이 대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성질들감각들의미들의 복합체로 나타난다이러한 복합성은 접촉의 순간에 즉시 동일된 상태로 지각된다다양한 성질과 형태의 모순적인 총체를 동일시키는 요소는 의미이다사물들은 의미를 갖는다현상학적인 분석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가장 단순하고 우연적이고 방심한 상태로 지작하는 경우에조차도
어떤 지향성이 주어진다이렇게 의미는 언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실재를 포착하는 근거이다실제의 복합성과 모호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의미 속
에 녹아든다일상적인 지각과 비슷하게시적 이미지는 실재의 복합성을
살려내는 동시에 통일성을 부여한다여기까지는 시인이 하는 바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실재를 표현하는 다른 형태들과 이미지를 구별시켜주는이미지의 통합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옥타비오 파스]이미지(6)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들 --삼단논법묘사과학적 공식실천적인 수준의 논평 등--은 표현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재창조하지 않고 그것을 표상하거나 혹은 묘사하는 데 그친다예를 들어 우리가 의자를 본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의자의 색깔형태, 재료 따위를 지각한다이러한 분산적이고
모순적인 특성들에 대한 감지는 그것의 의미즉 의자가 기구이며 도구라는 것을 아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그러나 만일 의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묘사하기를 원한다면세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맨 먼저의자의 형태,
그 다음에는 색깔 그리고 의미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야 한다. 
묘사의 과정에서 대상의 총체성은 점점 상실되어간다처음에 의자는 단지 형태였다가 나중에는 나무의 종류가 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추상적 의미
'의자는 앉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이다가 된다. 시에서 의자는 느닷없이
우리의 주의를 자극하는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현존이 된다시인은 의자를 묘사하지 않고 대신 우리 앞에 의자를 보여준다지각의 순간에서처럼의자는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성질들을 지닌 채 우리 앞에 주어지며그 순간의 정점에는 의미가 자리잡는다이렇게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리듬을 갖는 구인 운문은 일깨우고되살려내고환기시키고,
재창조한다. 혹은 마차도가 말했던 것처럼한 번 걸러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현시한다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그러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우리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의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이 된다앉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쓰임을 가질 수도 있다그리고 이것은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이 자신의 충만함을 회복하자마자잃었던 의미들과 가치들을 다시 획득
하게 된다지각의 순간에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이미지의 복합성은 실재의 복합성과 다르지 않다즉각적이고 모순적이며 복합적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그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매우 충만한 일치를 이룬다만일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그리고 이미지 덕분에 그 언어가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견의 일치는 불가능할 것이다그러나 말이 맨 처음의 상태로다시 말해의미의 복합성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적 기능의 첫 번째 행위일 뿐이다우리는 아직 시적 이미지의 의미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모든 구는 다른 구와 관련되며다른 구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기호의 가변성 덕분에말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있다뜻이 모호한 구문에 부딪혔을 때우리는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 나 혹은 저것이다'라고 말한다그리고이것 혹은 저것'을 말하기 위해서 또 다른 말들에 의탁한다모든 구는 다른 구에 의해서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결과적으로의미는 말하고자 함이다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언표이다. 이와 반대로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
 수 없다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의마흔 것을 말할 수 없다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의자를 볼 때우리는 즉시 그것의 의미를 감지한다아무 말없이 우리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는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내게 "소리 얼음을 쌀쌀맞게 내뱉는다"라고 시인이 말할 때그는 새하얀 것 혹은 교만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긴말이 필요 없이 직접 현실에 마주서게 한다치아., 얼음입술부조화한 실재가 느닷없이 우리 눈 앞에 출현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주석도지시체도설명도 필요치 않다시인은 의미하지 않고 말한다문장과 구는 수단이다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이렇게 원초적인 복합성을 최복한 말은 이제 또 다른 당황스럽고 과격한 변형을 겪는다이것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중에서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5/6)|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7)
 
 
   언어의 중요한 성질로부터 파생된 두 가지 속성이 단어를 특징짓
는다첫째는 가변성 혹은 상호 교환 가능성이며둘째는 이러한 가
변성에 힘입어 한 단어는 다른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리는 가장 간단한 관념도 여러 가지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혹은
의미를 심하게 손상시키기않고 텍스트나 구의 단어를 바꿀 수 있
혹은 하나의 구문을 다른 구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이 모든 것
이 이미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산문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지만시에서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발가벗은 채 빛나는 별"이 의미하는 바는 "별은 빛난다왜냐하면
발가벗고 있기 떄문이다"와는 다르다후자의 표현에서 의미는 약
화되었다직관은 천박한 설명으로 바뀌었다시적 흐름의 긴장이
약해졌다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
게 한다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이미지의 최종적인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원초의 본성으로
언어가 복귀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과격한 작
용을 위한 예비적 과정이 된다시심詩心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달리말하면 가변적이며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집합이기를 그치는 것이다시는 언어를 초월한다이제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말했던 것이 이해된다시는 산문이나 의사
소통에서 훼손된 언어 이전의 언어이지만또한 그 이상의 어떤 것
이다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말에서 태어난
시는 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된다.
 
 
  시적 경험은 말로 환원 불가능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다이미지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
시키지만이러한 화해는 언어이기를 그만둔 이미지의 언어를 제외
하고는 설명될 수 없다이렇게 이미지는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
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이미지의이편에는 낱말설명역사의
세계가 있으며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의미화
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
미지 그 자체이다.
 
 
  물론 모든 이미지들에서 상반되는 것들이 파괴되지 않은 채 화
해하는것은 아니다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비교라고 정의
했다--을 발견한다르베르티가 말하는 것처럼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어떤 이
미지들은 세계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
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유머의 구사와,
시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재담들이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
러낸다마지막으로언어학적으로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
이는 것즉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러한 모든 이미지들-완전히 이루어지기도 어렵고 완전히 이해되
기도 어려운-에서 동일한 과정이 목격된다실재의 다양성을 구
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않은 채그 다
양성이 최종적인 동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이다깃털은
깃털이면서 돌이다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
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
한다.
 
 
  장자가 말에 가했던 비판은 이미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왜냐하
면 엄격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언어적 기능이아니기 떄문이다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의미는 사물과 이름 사이의
연결이다이렇게 의미는 이름과 우리가 이름 붙이는 것 사이의 거
리를 암시한다우리가 "전화는 먹는 것이다", "마리아는 삼각형이
"등의명제를 말할 때는 무의미가 발생하는데왜냐하면 말과
사물기호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즉 다리(의미)가 부서졌기 때문이다인간은 자신의 언어에
갇혀 홀로 남는다그리고 현실은 언어없이 남겨지게 되는데왜냐
하면 뱉어내는 말들은 이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이
기 때문이다이미지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넓혀지는 대신에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
진다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은 이제 같은 것이다다리 구실을 하는
의미 역시 사라진다이제 포착해야 할 것도 없고지시해야 할 것
도 없다그러나 이떄 만들어진 것은 무의미나 반의미가 아니라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이다다시 말하지만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신이다언어는 이
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의미를 넘어말할 수 없는 것-돌은 깃털이
이것은 저것이다-을 말한다언어를 가리키며 표상한다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뿐이다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그리고 이따
금씩 성취한다.고로,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것현실에
거주하는 것혹은 현실 자체이다.
 
 
  시의 진리는 시적 경험에 의지하는데이러한 시적 경험은 동양
사상과 일부 서양 사상에 의해서 지적된 것처럼인간이 '현실의
현실'과 일치하는 경험과본질적으로 다르지않다말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러한 경험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의사 소통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속성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미지의
의사 소통 방법은 개념의 전달이 아니다-과 마주치게 되는데
는 좀더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이미지는 설명하지않고 현실
문자그대로재생시킨다시인의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
는 공간즉 이미지로 만든다이미지로 될 때타자가 될 때태어
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시는 변신이며,
변화이며연금술적 작용이다그래서 시는'이 사람' '저 사람'
을 변화시켜 자기자신인 '타자'로 만들기 위해 마법종교그리
고 그 밖의 체제들과접해왔다우주는 더 이상 이질적인 사물들이
쌓여 있는 거대한 창고가 아니다항성신발눈물,전차수양버
여자사전이런 모든 것들은 광대한 가족이며서로 의사 소통
하고끊임없이 변화하며모든 형태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인간
은 마침내 그의욕망그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즉 그 자신이며 타자이다리듬이고
이미지인 구句를 통하여 인간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한다시는'존재로 들어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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