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오 파스]이미지(1) 이미지라는 단어도 다른 말들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들면, 아폴로 신이나 성모 마리아의 조각처럼 상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 상상력을 통하여 상기하거나 만들어내는 실재적 혹은 비실재적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은 심리적 가치를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결과물들이 이미지가 갖는 유일한 의미도 아니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이미지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언어적 형태, 즉 시이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라는 것을 밝혀둔다. 수사학은 이러한 표현들을 분류하여 비교, 은유, 말의 유희, 유사어,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을 가르는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묶는 공통점은 구나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들오 이루어진 각각의 시편--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많은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그래서십자가의 성 요한은 "침묵의 음악"이라는 시적 구를 사용하여 겉으로보기에 화해 불가능한 두 단어를 걸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비극적영웅도 하나의 이미지이다. 가령, 안티고네라는인물은 선험적 가치인효와 사회적 가치인 인간 법 사이에서 고뇌하는비극적 영웅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사랑과 프리아모스에 대한 연민,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한 매혹과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의 대립이 얽혀 있다. 세히스문도에게서는 불면과 꿈이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이디수스에게는 자유와 운명이 얽혀 있고........이처럼 이미지는 인간조건의 표식이다. 서사적이거나 희극적 혹은 서정적이거나 간에, 하나의 구에 농축되어 있거나 혹은 천 페이지에 걸쳐 풀어 헤쳐져 있거나 간에, 모든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시 말해,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개념과 과학적 법칙이 의도하는 바도 이와다르지 않다.동일한 논리적 환원 덕분에 개체적 대상들--가벼운깃털과 무거운 돌--은 동질적인 단위로 변화된다.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돌 일 킬로그램은 깃털 일 킬로그램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돌과 깃털을 킬로그램이라는 추상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돌과 깃털이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속임수에 의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환원이 갖는 통일적 기능은 그러한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망가뜨리고 빈약하게 만든다. 시에서 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인은 이것은 깃털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느닷없이 돌이 깃털이고, 이것이저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돌은 여전히 거칠고, 딱딱하고, 불투명하고, 태양처럼 누렇거나, 이끼에 덮여 초록빛을 띄거나 간에 어쨌든 돌, 무거운 돌이다. 그리고 깃털은 여전히 가벼운깃털이다.이미지는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을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 중에서 [출처]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 이미지(1)|작성자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 이러한 반대되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 이지,'~이 될 수 있다' 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이미지는 존재를재창조한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서 어떤이들은 변증법적 논리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결국, 많은 이미지들은 변증법적 과정의 세 시기에 부합된다. 즉, 돌은 실재의 한 단계이며, 깃털은 또 다른 단계이고, 양자의 충돌에서 새로운 실재로서의 이미지가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나변증법이 모든 것에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미지들을 무한히 열거할 필요는 없다. 어느 때는 첫번째 용어가 두번째 용어를 삼켜버린다. 또 어느 때는 두번째가 첫번째를 중화한다. 혹은세번째 용어는 산출되지 않고 두 요소가 환원 불가능하고 적대적인상태로 마주서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유머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모순은 단지 현실이나 혹은 언어의 복구 불가능한 부조리한 특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쓰인다. 결국,많은 이미지들이 헤겔의 변증법적 질서에 의거하여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거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과 반의 진짜 동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함이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돌과 깃털은돌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제 3의 현실을 위하여 사라진다. 그러나어떤 어미지 정확히 말해 가장 높은 이미지에서는 돌과 깃털은 여전히 돌과 깃털이다. 즉,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리고동시에 이것이 저것이다. 돌은 돌이면서 깃털이다. 무거운 것이가벼운 것이다. 여기에는 과학이 요구하는 양적인 환원도 없고, 헤겔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질적인 변화도 없다. 요약하면, 변증볍의 입장에서 볼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키는 도전이며, 사유의 법칙을침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모습적인 성격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논리적 원리들, 특히 모순의 법칙(이것이 이것이지 저것이 될수 없다) 같은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소위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는 불충분한것이라고 보인다. 정은 반과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양자는 새로운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데, 새로운 긍정은 양자를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 세 단계들의 각각에는 모순의원리가 지배한다. 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시적인 실재로 주어지지않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암시하기때문이다. 모순의 법칙을 존중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그러한 법칙을뛰어넘는 이미지를 비난한다. 여타의 학문들처럼, 논리학도 모든 체계가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던져야만 하는 질문, 즉 자신들의 근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버틀란트 러셀의 역설이 의미하는 것과, 러셀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훗설의 연구가 의미하는것도 역시 논리의 근거에 대한 질문들이다.이렇게 새로운 논리적체계들이 출현해다. 어떤 시인들은 뤼파스크의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자신이 상보적 모순의 원리라고 부른 것에 기초한 일련의 명제들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뤼파스코는 대립되는 용어들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양자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였다. 각각의 개념을 상호 직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상대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즉, A는 B와의모순적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A에서 발생하는 하나하나의 변화는 겨로가적으로 B에게 상반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 부정과긍정,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출처]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작성자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3) 동양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앎은 공식이나 이성으로 전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 위험무릅쓰고 경험해야만 한다.가르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지만,아무도 우리 대신 그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명상의 기법들이중요하다.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명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 뒤에 우리는, 아는것을 감소하지만 더 가벼워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아찔하고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정중동이며 만중허, 헤겔이 절대의 무와 충만한 존재 사이의 최종적인 일치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우파니샤드는 범의 상태를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로 정의했다. "오감이 고요해지면서 정신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때, 그 안정된 정신을 통해 인간은 가장 높은 경지에이르게 된다."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고학과 종교,주술과 시의 뿌리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오래된 오솔길, 즉 양쪽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영감을 받은 탄트라불교의 체계는 육체를 우주의 은유 혹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육체의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이며, 별자리와 혈액과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다. 포옹하는 육체들이 취하고 있는 각각의 자세는 수액,혈액 그리고 빛의 삼중 리듬에 의하여 움직이는 점성술의 황도12궁에 해당한다. 남인도의 코나락 사원은 서로 위얽힌 현란한육체들이 밀림처럼 뒤덮여있다. 이 육체들은 화염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태양들이며, 서로 교미하는 별들이다. 돌은 불타오르고사랑에 빠진 사물들은 서로 결합한다. 연금술적 결합은 인간의결합과 다르지 않다. 백거이는 자전적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밤중에 나는 슬쩍 훔쳐보았다 음양이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한 자태로 아내와 남편처럼 껴안고 있었다.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칭칭 감은 체. 동양적 전통에서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다. 그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탐구는 각자 스스로해 나가는 것이다. 충만함에 도달했는지, 존재와의 동일함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체험적 앎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는너털웃음, 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러한 미소는 수행자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경전들은 자주이러한 모순적인 말을 한다. 가르침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도는 규정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길은 길이라 말하면 늘 그 러한 길이 아니고, 이름을 이름지으면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장자는 언어란 본래 절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상징 논리 학의 창시자들을 노심초사케 하는 난제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대림물들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언어의 무능력이 말의 근원적 한계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는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 결국, 의미하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4) 장자는 언어를 비판했지만, 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언어적 창조물인 연극 노오와 바쇼의 하이쿠는 역설과 침묵으로 용해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는 현자는"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확신한다. 기독교와 달 리 도교는 좋은 가르침도 나쁜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 면, 언어로 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장자가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 이란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되어 있으 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을 뜻한다.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언어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글은 이미지, 말의 유희, 그 밖의 시적 형태들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장자에게서 시와 사유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하나의 기막힌 천을 짜낸다. 다른 경전 들도 마찬가지이다.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대문이다. 장자가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 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때, 그 말은 말의 유희, 즉 시적 수수께끼를 암시하는 것이다.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경험은"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새들은 말을 의미하기에, 이 말은 결국 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여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것, 즉 " 이름이 필요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혹은이름과 사물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 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그래서"가벼운 깃털은 무거운 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가 어떻게 말하는 지 보기 위해서는 언어를살펴봐야 한다. [출처][옥타비오 파스]이미지 (3) (4)|작성자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5)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깃털은 가볍고 돌은 무겁다.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가벼운 것이며, 어두운 것 은 밝은 것에 비교해서 어두운 것이다.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그러므로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수의 경우에 왼쪽에 쓰인 영은 오른쪽에 쓰인 영과 같지 않다. 숫자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단지 기타의 의미화와 의사 소통 수단에 비해 가변성의폭이 더 넓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잇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낱말들의 다른 의미들은사라지거나 약화된다. 혹은 달리 말한다면,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산문에서 구의 통일성은 의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의미는 구를이루는 모든 낱말들을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방향을 겨냥하게 겨냥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을 거두어 고양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가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상반되는 여러 힘들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어떤 명제들은 문법적이며 논리적인 구문으로는 완벽하게 옳지만, 의미상으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가르시아 바카가 그의 책 [근대의 논리학 입문]에서 인용하는 있는것처럼 (" 숫자2는 두 개의 돌이다"). 논리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명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이미지는 모순도, 무의미도 아니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만일 다양하며서로 다른 의미들이 이미지의 내부에서 투쟁한다면, 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이미지는 시인이 본 것이며 들은 것이고, 세계에대한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 그 때문에 이미지는심리학적 차원의 진리를 다르는 것이며, 명백히 우리가 걱정하는 논리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로, 그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즉, 이미지들은 작품들이다. 공고라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경은 자연 풍경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지라도, 양자는 현실성과 확실성을 갖는다. 즉, 서로 병행하며 자율성을 갖는 현실의 두 질서이다. 이 경우에,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한다. 즉,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적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며, 시인이 '물은 유리이다'라고말하거나 혹은 '물오리는 수양버들의 사촌이다" (카를로스 페이세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안에서만 대해서 무엇인 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 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고 확신한다. 시적 이미지들에 관련된 이러한 주장은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 것일까? 시적 언어가 보여주는 외견상의 모순 혹은무의미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자각할 때, 이 대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성질들, 감각들, 의미들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합성은 접촉의 순간에 즉시 동일된 상태로 지각된다. 다양한 성질과 형태의모순적인 총체를 동일시키는 요소는 의미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갖는다. 현상학적인 분석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가장 단순하고 우연적이고 방심한 상태로 지작하는 경우에조차도 어떤 지향성이 주어진다. 이렇게 의미는 언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실재를 포착하는근거이다. 실제의 복합성과 모호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의미 속 에 녹아든다. 일상적인 지각과 비슷하게, 시적 이미지는 실재의 복합성을 살려내는 동시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시인이 하는 바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실재를표현하는 다른 형태들과 이미지를 구별시켜주는, 이미지의 통합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옥타비오 파스]이미지(6)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들 --삼단논법, 묘사, 과학적 공식, 실천적인 수준의 논평 등--은 표현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재창조하지 않고 그것을 표상하거나 혹은 묘사하는 데 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자를 본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의자의 색깔, 형태,재료 따위를 지각한다. 이러한 분산적이고 모순적인 특성들에 대한감지는 그것의 의미, 즉 의자가 기구이며 도구라는 것을 아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의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묘사하기를 원한다면, 세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맨 먼저, 의자의 형태, 그 다음에는 색깔 그리고 의미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야 한다. 묘사의 과정에서 대상의 총체성은 점점 상실되어간다. 처음에의자는 단지 형태였다가 나중에는 나무의 종류가 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추상적 의미 '의자는 앉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이다' 가 된다.시에서 의자는 느닷없이 우리의 주의를 자극하는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현존이 된다. 시인은 의자를 묘사하지 않고 대신 우리 앞에 의자를 보여준다. 지각의 순간에서처럼, 의자는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성질들을 지닌 채 우리 앞에 주어지며, 그 순간의 정점에는 의미가 자리잡는다. 이렇게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리듬을 갖는 구인 운문은 일깨우고, 되살려내고, 환기시키고, 재창조한다.혹은 마차도가 말했던 것처럼, 한 번 걸러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그대로 현시한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그러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의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이 된다. 앉기 위해서 사용하기도하지만 다른 쓰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이 자신의 충만함을 회복하자마자, 잃었던 의미들과가치들을 다시 획득 하게 된다. 지각의 순간에 감지할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복합성은 실재의 복합성과 다르지 않다. 즉각적이고모순적이며 복합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매우 충만한일치를 이룬다. 만일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미지 덕분에 그 언어가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회복하지 않는다면,그러한 의견의 일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맨 처음의 상태로, 다시 말해, 의미의 복합성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적 기능의 첫번째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시적 이미지의 의미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모든 구는 다른 구와 관련되며, 다른 구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기호의 가변성 덕분에, 말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있다. 뜻이 모호한 구문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나 혹은 저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 혹은 저것'을 말하기위해서 또 다른 말들에 의탁한다. 모든 구는 다른 구에 의해서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의미는 말하고자 함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언표이다.이와 반대로, 이미지의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 될수 없다.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의마흔 것을 말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의자를 볼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의 의미를 감지한다. 아무 말없이 우리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 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는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내게 "소리 얼음을 쌀쌀맞게 내뱉는다"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는 새하얀 것 혹은 교만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긴말이 필요 없이 직접 현실에 마주서게한다. 즉, 치아., 말, 얼음, 입술, 부조화한 실재가 느닷없이 우리 눈앞에 출현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석도, 지시체도, 설명도 필요치 않다. 시인은 의미하지 않고 말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이렇게 원초적인 복합성을 최복한 말은 이제 또 다른 당황스럽고 과격한 변형을 겪는다. 이것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중에서 [출처][옥타비오 파스]이미지 (5/6)|작성자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7) 언어의 중요한 성질로부터 파생된 두 가지 속성이 단어를 특징짓 는다. 첫째는 가변성 혹은 상호 교환 가능성이며, 둘째는 이러한 가 변성에 힘입어 한 단어는 다른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 리는 가장 간단한 관념도 여러 가지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혹은 의미를 심하게 손상시키기않고 텍스트나 구의 단어를 바꿀 수 있 다. 혹은 하나의 구문을 다른 구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이 이미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산문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지만, 시에서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발가벗은 채 빛나는 별"이 의미하는 바는 "별은 빛난다. 왜냐하면 발가벗고 있기 떄문이다"와는 다르다. 후자의 표현에서 의미는 약 화되었다. 직관은 천박한 설명으로 바뀌었다. 시적 흐름의 긴장이 약해졌다.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 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 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최종적인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원초의 본성으로 언어가 복귀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과격한 작 용을 위한 예비적 과정이 된다. 시심詩心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달리말하면 가변적이며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집합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제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말했던 것이 이해된다. 시는 산문이나 의사 소통에서 훼손된 언어 이전의 언어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어떤 것 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말에서 태어난 시는 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된다. 시적 경험은 말로 환원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다. 이미지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 시키지만, 이러한 화해는 언어이기를 그만둔 이미지의 언어를 제외 하고는 설명될 수 없다. 이렇게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 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 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이미지의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 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 미지 그 자체이다. 물론 모든 이미지들에서 상반되는 것들이 파괴되지 않은 채 화 해하는것은 아니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비교라고 정의 했다--을 발견한다. 르베르티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 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 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유머의 구사와, 시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재담들이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어 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 러낸다. 마지막으로, 언어학적으로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 이는 것, 즉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 러한 모든 이미지들-완전히 이루어지기도 어렵고 완전히 이해되 기도 어려운-에서 동일한 과정이 목격된다. 실재의 다양성을 구 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않은 채, 그 다 양성이 최종적인 동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이다. 깃털은 깃털이면서 돌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 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 한다. 장자가 말에 가했던 비판은 이미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엄격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언어적 기능이아니기 떄문이다. 결 국,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의미는 사물과 이름 사이의 연결이다. 이렇게 의미는 이름과 우리가 이름 붙이는 것 사이의 거 리를 암시한다. 우리가 "전화는 먹는 것이다", "마리아는 삼각형이 다"등의명제를 말할 때는 무의미가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말과 사물, 기호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즉 다리(의미)가 부서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에 갇혀 홀로 남는다. 그리고 현실은 언어없이 남겨지게 되는데, 왜냐 하면 뱉어내는 말들은 이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이 기 때문이다. 이미지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넓혀지는 대신에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 진다. 이름과이름 붙여진 것은 이제 같은 것이다. 다리 구실을 하는 의미 역시 사라진다. 이제 포착해야 할 것도 없고, 지시해야 할 것 도 없다. 그러나 이떄 만들어진 것은 무의미나 반의미가 아니라,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신이다. 언어는 이 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의미를 넘어, 말할 수 없는 것-돌은 깃털이 다, 이것은 저것이다-을 말한다. 언어를 가리키며 표상한다.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따 금씩 성취한다.고로,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자체이다. 시의 진리는 시적 경험에 의지하는데, 이러한 시적 경험은 동양 사상과 일부 서양 사상에 의해서 지적된 것처럼, 인간이 '현실의 현실'과 일치하는 경험과본질적으로 다르지않다.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러한 경험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의사 소통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속성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미지의 의사 소통 방법은 개념의 전달이 아니다-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는 좀더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않고 현실 을, 문자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 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 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 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변신이며, 변화이며, 연금술적 작용이다. 그래서 시는'이 사람'과 '저 사람' 을 변화시켜 자기자신인 '타자'로 만들기 위해 마법, 종교, 그리 고 그 밖의 체제들과접해왔다. 우주는 더 이상 이질적인 사물들이 쌓여 있는 거대한 창고가 아니다. 항성, 신발, 눈물,전차, 수양버 들, 여자, 사전, 이런 모든 것들은 광대한 가족이며, 서로 의사 소통 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든 형태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 인간 은 마침내 그의욕망- 그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시는 인간이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즉 그 자신이며 타자이다.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句를 통하여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한다. 시는'존재로들어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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