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블로그

나의카테고리 : 시학 /시론

발레리 시학 자료 두편 [스크랩]
2018년 10월 19일 16시 30분  조회:965  추천:0  작성자: 강려
자료 1
 
발레리의 시학
 
   발레리의 문학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에도 봉사치 않는 자유로운 창조적 지성의 훈련이고, 따라서 시적 영감·감상·정열·안일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테마에 규약·정형·통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싸늘한 순수지성의 미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고난 관능적인 감각에서 오는 풍부한 이미지와 절묘한 음악적 운율의 구사로 하여 그의 미학을 넘은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적 시론을 담고 있는 <시에 대한 담화론>에는 먼저 말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즉 말은 "복합적 실체로서, 실제로는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기능상 '독립'적인 고유성들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 연구가 음성학, 의미론, 통사론, 논리학, 수사학, 그리고 운율학, 어원학 등에 의하여 차례차레 검토되어야 하듯이, 시인도 소리와 의미에 대해 차례로 사색하여야 하며 인습적인 규칙들 외에도 화성과 악절 그리고 논리성, 문법, 시의 주제, 문채 및 온갖 부류의 장식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 문학예술의 불확실하고 치밀한 '조작'들이 시작되는데, 발레리는 그것을 다시 '산문'과 '운문'이라는 두 양식으로 나누고 아래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다.
 
산문을 보행에 비유하고 시를 무용에 비유했다 ...
 
   위의 비유는 단순한 외면상의 유사성 이상의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빌리면 시와 산문은 "동일한 요소, 동일한 메카니즘에 적용된 운동이나 기능의 순간적인 특정규칙 혹은 관습의 차이"데 의해 구별되기 때문이다. 산문을 다루듯 시를 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그의 비유를 좀 더 들어보자.
 
   산문처럼 보행에는 언제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입니다. ... 보행의 모든 특징들이 언제나 그때그때 특이하게 구성되는 이 즉각적인 조건들로부터 연역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이동에는 단 두 개의 동일한 이동도 존재할 수 없고, 매번 즉각 폐기되어 성취된 행위 속에 통합되어 버리는 각각의 특수한 창조가 있을 뿐입니다.
   무용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가 분명합니다. ... 그러나, 공리적인 운동과 아무리 다르다 해도, 무용은 보행 자체와 동일한 사지, 동일한 신체기관과 뼈대, 근육, 신경들을 사용한다는 이 극히 단순하면서 중요한 주석에 유의해 주십시오.
 
   위의 인용에서 보행은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이고 무용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아무리 "동일한 사지, 신체기관 등을 사용한다"손치더라도 그 나타난 결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과연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우선 산문이라는 언어의 실제적이거나 추상적인 사용에 있어서, 형식은 보존되지 않고 이해작용이 끝난 후까지 존속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명확성 속에 해소되어 영향을 미치고, 이해하게 해주었으며, 그리고 사라져버린다. 이와는 달리 시는 사용된 후에도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발레리는 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시는 자신의 형식 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영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도록 부추긴다, ... 산업기술에서 빌린 용어를 써서 표현하면, 시적 형식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회복시킨다.
 
   윗글은 시의 특징적인 고유성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형태와 내용 사이, 소리와 의미 사이, 한 편의 시와 시적 상태 사이에는 일종의 왕복운동이, 대칭이, 가치의 균등성과 힘의 균등성이 뚜렷이 나타나는데, 발레리에 의하면 인상과 표현 사이의 이 조화로운 교환작용은 시적 역학, 즉 언어에 의한 시적 창조의 주요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본업은 언어의 이 특이한 형식들을 행운에 의해 발견하고 직업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발레리는 이번에는 '소설독자'와 '시의 독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독자가 일종의 '정신착란'과 '경신의 발작'에 사로잡혀 "그의 본성을 분열시키고 순전히 허구적인 거짓 삶에 대한 환상을 부여함으로써"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시의 독자는 "영혼의 순종"과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함을 아래와 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리듬에 의해 그의 근육조직을 자극하고, 자신이 그 총체적 활동을 촉진시키는 언어기능을 해방 혹은 폭발시키며, 그를 심층적으로 조직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총동원하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나타나는 자아의 통일성과 조화, 놀라운 통일성을 환기시키거나 재창조하려는 까닭입니다.  
 
   요컨대, 시의 작용과 평범한 이야기의 작용간의 차이는 생리학적 目의 차이이다. 특히 후자가 "환각에 사로잡힌 꿈과 기능의 주체로 변모"되어버리는데 반해서 전자는 "완전한 행위에 보다 가까운 적극적 참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다시 초점을 시인의 조작 자체와 구성과 제작의 문제로 옮겨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시인의 작업을 세상에서 가장 불확실하고 고된 것으로 만드는 무한한 고뇌와 결코 끝날 수 없는 논쟁들, 시련, 수수께끼, 근심거리 심지어 절망까지 존재한다. 발레리는 시작이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시의 창조가 우연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거나 혹은 "초자연적 교섭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시인을 수동적인 역할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들은 노고로 얻어진 걸작들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열광이나 황홀경의 녹음기의 특성으로 환원되기엔 지나치게 다양한 특성들을 요구하는, 지성과 줄기찬 작업의 기념비들이요 의도와 분석의 산물입니다. ...
 
   윗글에서처럼 발레리는 시인에게 특별한 자질, 즉 고유한 개인적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시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만 가치 있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이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그대로의 경이들이 그 안에서 해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이들도 그에 의하면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열광과 섬광 속에서 번쩍거리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발레리는 자신이 해방시키는 자연발생적인 표현력에 의해 성격지워지는 감정이 시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문학사상 가장 지성적이었던 그의 시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정제된 어휘와 고양된 정신이 방사하는 광채로 가득 차있다. 바로 그러한 그의 시정신은 아래의 글 속에 잘 요약되어있다. 이 글을 음미해보며 그의 시론의 요약을 마치기로 한다.
 
   왜냐하면, 만약 시인이 자기 예술의 최상을 겨냥하고 있다면, 그의 욕망은 그의 조화된 삶의 숭고한 지속, 모든 형식의 구성, 측정되며 그의 온갖 감각적, 운율적 잠재력의 반응들이 교환되는 지속으로 낯선 영혼을 안내해 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료 2
 
폴 발레리의 시학 (1)
 
 
 젊은 파르크(1917) 및 매혹(1922)과 함께 시로 돌아온 폴 발레리는, 자기 자신과 남에 비추어, 시 창조의 메카니즘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 "나는 언제나 시를 쓰는 나를 관찰하면서 시를 써 왔다" 한 시인의 수첩, 이러한 체험, 이러한 성찰이, 콜레드 즈 프랑스에 시의 강의와, 바리에떼와 땡 껠에서 서술된 하나의 시학을 낳았다. 그의 시들에 대한 연구에의 정상적인 길잡이는 그러니, 시의 본질과 문학 창조의 조건들에 관한 그의 생각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발레리 자신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시란 무엇인가 ?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 이어 발레리도 산문에 딸린 불순한 요소를 시에서 몰아내려고 든다 ; 그래서 시의 우주의 개념을 구해냄으로써 순수시가 나타낸 이상을 밝혀낸다.
 
    1. 언어 속의 한 언어 시는 "특수한 한 악곡"과 합쳐진 "하나의 산문 이야기"가 되고 말 수는 없다 ; 시란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는커녕, "감각있는 존재 모두를 끌어넣는 하나의 시적 상태의 전달"인 것이다 ; 시는 죽지 않고서는 다른 표현들로 옮겨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산문에서는 내용만이 요구되는 데 반해, 시에서는 형식만이 정리하고 살아 남는다,
      일정한 뜻 하나로 소비된다는 낱말들의 특성을 희생시켜 가며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음이고, 바로 리듬이고, 바로 낱말들의 물리적인 접근이고, 낱말들의 귀납 효과 또는
      상호 영향인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에서는 뜻이 형식을 능가해 깨뜨려 버릴 수가
      없어야 한다 ; 반대로 그것은, 형식이 독자에게 방금 발생시킨 상태나 생각, 시의 힘의
      원동력인 상태나 생각의 재현이자 보존된 형식이며, 더 정확히는 필요한  유일한 표현
      으로써 재현된 형식인 것이다. 한 줄의 아름다운 싯귀는 제 잿더미에서 무한정 되
    살아나, 또다시 --- 마치 제 결과의 결과인양 --- 저 자신의 조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매혹의 주석)
  시란 그러니 "언어 속의 하나의 언어"인 것이다.
 
 
      2. 시의 우주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마치 소리들 중이 한 순수음이 넋더러 하나의 음악의 우주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듯이, 넋을 시의 우주로 끌어넣는 하나의 공명"을 일깨우는 데 있다.
 
        1. 어떤 다른 삶을 살기 일련의 파고든 분석들을 통해 발레리는 우리를, 진짜 시의 텍스트 하나가 우리 속에서 창조하는 이러한 "우주의 감동"을 안내한다 ; "그 텍스트는 우리 더러 어떤 다른 삶을 살며 그 제 2의 삶에 따라 호흡하도록 작용하며, 하나의 상태나 세계를 가정한다. 그 속에서는 저기 있는 대상들과 존재들이, 아니 그보다도 그것들이 이미지들이 실지 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자유들과 관계들을 갖는 그런 상태나 세계를 말이다, (---)
  이 모두가 하나의 홀린 본성을, 마치 어떤 마술에 걸린 듯 변덕과 현혹과 언어의 힘들에 굴복한 본성을  짐작케 해준다"  (영적인 찬가)
        2. 말과 정신의 밀접한 결합 이러한 마력은 인위적인 리듬을 붙임으로써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이 별난 말은 저를 지탱해 주는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이 말의 발생과 하도 밀접하게, 아니 하도 신비롭게조차 매어지게 마련이어서, 음과 뜻이 서로 갈라질 수도 없이 기억 속에서 무한정 서로 어울릴 정도인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제 이름을 대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말라르메의 작품이 이러한 시이 마력의 더없이 훌륭한 본보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교묘하게 부딪히거나 녹아들어, 하나의 광채로, 하나의 충만으로, 하나의 놀라운 공명으로 싯귀들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의미들과, 울려퍼짐들과, 심지어는 표정들과도 맞먹는 그런 가치들을 시는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놀라운 성과들을 통해 입증했다.  한편으로는 각운과 두운들이, 또 한편으로는 상징과 비유와 은유들이 여기서는, 이야기의 없어도 되는 디테일이나 장식들은 이미 아니고 ; 작품들의 실질적인 특성들인 것이다 ; "내용"은 이미 형식의 원인이 아니다 ; 그 결과들의 하나인 것이다."(말라르메)
 
 그러니 시는 낭독되는 순간에만 제 가치를 다 발휘하게 될 것이다. 즉 "작자의 창조 행위에 생명과 힘찬 현존을 주기 위해, 우리의 목소리와 지능 그리고 우리의 감성의 원동력들 모두가 합쳐지도록, 우리 자신이 그 쓰여진 것의 악기가 될 때에만 말이다", 그래서 "시작품의 연주가 바로 시작품인 것이다."
 
폴 발레리의 시학 (2)
 
(이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 ; 순수시
 
 
  폴 발레리는 1920년에 어느 시집의 머리말을 쓰다가 "순수시"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 버린 적이 있다. 이 용어가 곧 빚어내게 될 말썽은, 특히 브레몽 신부의 글을 통해 빚어내게 될 말썽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시와 기도의 유사성에 언급하던 이 신부는 드디어 발레리를 두고, 지적, 또는 감성적인 요소와는 상관 없는 시에 대한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순수시, 1926년 ; 라시느와 발레리.1930) 순수시에 관한 논쟁이 그래서 벌어지고, 발레리는 자기가 시의 우주의 감동에다 밀접하게 결합시키던 그 개념을 합리적인 한계들로 되돌려보낼 생각을 하게 된다.
 
감각 없는 것이라고 내가 부른 언어의 요소들과는 그토록 판이하게 뚜렷한 이 요소들에 힘입어 하나의 작품 전체를 구성할 수 있느냐는 것, ---따라서, 운문으로 씌여진 또는 그렇지 않은 하나의 작품에 힘입어,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념들과 이미지들,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표현수단들 사이의 상호 관계들의 완전한 조직, -- 넋의 민감한 상태 창조에 특히 부합되는 조직의 인상을 줄 수 있느냐는 것, 순수시의 문제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물리학자가 순수한 물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뜻에서 나는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적이 아닌 요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작품 하나를 구성해낼 수 있는냐의 여부를 아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거야말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 시란 언제나 이 순전히 이상적인 상태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고, 또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의 시작품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실지로, 한 이야기의 자료 속에 끼워 넣어진 순수시 조각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썩 아름다운 싯귀 하나는 시의 썩 순수한 요소의 하나인 것이다. 아름다운 싯귀를 흔히 금강석에다 비교한다는 사실이, 순수함의 이러한 특질에 대한 깨달음이 모든 사람 정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순수시 라는 용어의 단점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도 않는 어떤 정신적인 순수함을 생각케 한다는 데 있다. 순수시의 관념이 내게는 반대로 하나의 주로 분석적인 관념인데 말이다.  요컨대 순수시란 일반적인 사작품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어 준다, 언어와 언어가 사람들에게 내는 효과와의 갖가지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그토록 어렵고도 중요한 연구로 우리를 이끌어 주어야 하는, 관찰에서 연역된 하나의 픽션인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순수시라는 말 대신 절대적인 시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며 그 때는 이 말을, 낱말들의 관계들에서, 아니 그보다도 낱말들 서로 사이의 공명들의 관계들에서 말미암는 효과들의 탐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언어가 다스리는 이 감성의 영역 모두의 탐험을 암시하는 뜻으로 말이다. 이 텀험은 더듬어서 행해질 수가 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조직적으로 인도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역설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만 있다면, 말하자면, 산문에 딸린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게 되고 말 그런 작품들을, 음악적인 영속성이 말 그대로 중단되지 않고, 의미들의 관계들 자체가 화성의 관계들을 늘 닮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생각들 서로 사이의 변모가 생각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보이고, 말의 겉모습들의 활동이 주제의 알맹이를 지니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시인이 구성해내는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 때 우리는 마치 실존하는 사물에대해 그러듯이 순수시에 대해 말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데 사정을 그렇지가 못하니,--- 순수시의 개념은, 가 닿지 못할 어떤 전형의 개념이고, 시인의 욕망들과 노력들과 능력들에 가해진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의 개념인 것이다,(한 시인의 수첩, 순수시)
 
폴 발레리의 시학 (3)
 
(이어서)
 
영감과 작업  시인 발레리가 영감에는 등을 돌렸다고들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설사 그가 "흥분(영감)은 작가의 넋의 상태는 아니다" 라고 쓴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흥분만에 의해" 글을 쓰는 것을 그가 못난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시인 특유의 개인적인 일종의 정신력(에너지) 이, "보다 나은 정신력 ; 말하자면 다른 모든 인간 에너지들이 꾸미거나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에너지"가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1. 영감받은 시인의 신화 "꿈에 보물을 보는 것이, 깨어나 자기 침대 밑에 반짝이는 보물을 되찿기에 족하지는 않듯이", "영감받은" 것만으로는 딱하게도 시인 되기에 족하지는 않은 것이다. 시인의 구실이 "시적인 상태"를 느끼는 일이 아니고, 그 상태를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창조해내는 일. 독자를 "영감받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이 생긴 발레리는, 영감받는 시인이라는 신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어떤 길이의 한편의 아름다운 시 앞에서 우리가 곧잘 깨닫는 것은, 끊임없는 밑천들과 한결같은 조화및 늘 잘된 생각들을 지녀 유달리 자신만만한 이야기 하나를, 우연한 사고도 약함이나 무능력의 흔적도, 황홀을 깨뜨려 시의 우주를 망가뜨릴 그 딱한 말썽들도 없어 호리기를 그만두지 않는 그런 이야기 하나를, 한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쓰거나 진술하는 고생 말고는 다른 고생도 없이 그 자리서 곧장 꾸며낼 수 있기에는 아주 작은 찬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감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 다만 영감은 "짧고 우연한 표시들에 의해서"만 작용하며, 그래서 변덕스럽고 고르지가 못한 것이다 ; "이 한없이 값진 순간들, 제가 낳는 관계들과 직감들에 일종이 보편적인 품위를 주는 이 찰나들은, 허망하거나 전달되지 못할 가치들이 덜 많은 것이 아니다.--- 흥분의 고비에서는,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닌 것이다. (시에 관한 프로포)
 
  2. 의식적으로 창조하기 "마음 설레임에서 용솟음치는" 이 표현들은 이따금씩밖엔 순수하지 않으므로, 발레리는 "늘 영감없이 얻어지는 원리"라는 것을 시인할 줄은 모른다 ; 시란 하나의 선택의, 하나의 의식적인 노고의 열매일 것이다.
 
    a 작업의 필요성 "백개의 거룩한 순간도 한 편의 시를 구성하진 않는다. 성장의 한 지속이자 시간 속의 하나의 형상과도 같은 시를 말이다 ; 그래서 자연적인 시 현상이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음들의 혼란 속에서의 하나의 예외적인 만남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 이 예술에서 시는우리가 운수좋게만 이어진 일련의 시도 끝에만 나타날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면, 숱한 인내와 끈덕짐과 솜씨가 필요하다 ; 또한 우리의 시작품이, 심사숙고라는 문제들에 맞서 응수하는 것 못지않게 리듬과 음향과 이미지들의 마력으로 뜻들을 사로잡기를 우리가 바란다면, 우리는 이제 더없이 엉뚱한 내기들과 마주하게 되고 만다, (나는 가끔 스테파느 말라르메에게 말했었다 ---)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첫 싯귀를 우리에게 거저 준다 ; 그러나 그것과 화음을 이루어 초자연적인 재 형과 어울리지 않아서는 안 될 둘 째 싯귀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그것을 하나의 선물이던 첫 싯귀와 견줄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과 정신의 밑천들을 다해도 지나치지는 않는 것이다." (아도니스에 대해)
 
b 의식적인 창조의 고귀함 발레리는 영감받은 시인을, 제가 신비롭게 받아쓰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통 없는 그 "순간적인 영매"를 비웃는다, 매혹의 작자는 반대로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강조한다 ;" 정신적인 우연이 (10만 번의 시시한 시도 중에) 우리에게 엄겨 주는 흥미롭거나 쓸모있는  성과들과도 비슷한 어던 성과들을 의식적인 의지로 되찾아 보려고 애쓰기"가 그 공식이 될 그런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말이다. 그는 이렇게 언명하는 수조차 있었다 ; "나는 어떤 최면상태 덕분에 흥분해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 중의 하나를 낳기보다는 철저히 의식하고 온전히 맑은 정신으로 엉성한 그 무엇을 쓰는 편이 사뭇 더 낫겠다."고 (말라르메에 관한 편지). 그리고는 이런 모욕적인 말에 화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번갯불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번갯불은 나 자신에 감탄할 건덕지밖엔 내게 갖다주지 않는다, 아주 작은 불티를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줄 아는 데에 나는 사뭇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폴 발레리이 시학 (4)
 (이어서)
 
시의 솜씨  그러니 시의 솜씨 없이는 시도 없다. 발레레의 고찰들이 여기서는, 자신의 내적인 체험에 의지하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더욱 값지다 ; 이 솜씨란, 영감이 우리에게 "이따금씩"주는 불가사의들을 분간해 이용할 줄 아는 데 있고, 그래서 못나지도 않은 명석한 자발적 창조를 통해 그 불가사의들을 보충하는 데 있는 것이다,
 
     1. 기능중인 시인은 하나의 기다림이다 첫 특성은 참을성이다. 시작품을 낳아 줄 "씨눈"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 인간 속에서 깨어나는 것은, 어떤 뜻하지 않은 사건, 밖이나 안에서 생기는 어떤 우발적 사건에 의해서다 ; 즉 한 그루의 나무, 하나의 얼굴, 하나의 "테마" ,  하나의 감동, 하나의 낱말에 의해서인 것이다. 또 때로는, 내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표현 의지. 즉 자기가 느끼는 바를 나타내려는 욕구이다 ; 그러나 때로는 반대로, 하나의 형식 요소, 즉 제 원인을 찾는, 내 넋의 공간에 저를 위해 하나의 뜻을 찾는 그런 표현의 초안이기도 하다 --- 그 무엇이 자기 표현을 바라다가는, 어떤 수단이 쓸모있는 그 무엇을 바라기도 하는, 내기 시작이 가능한 이 2원성을 잘 관찰하도록 하라." (시의 추상적 사고) 이 문제에서는, 젊은 파르크, 아폴로 신전의 무녀, 바다의 묘지에 관한 발레리 자신의 속내 이야기들보다 더 교훈적인 것은 없다. 또한 매혹을 빚어낼 낱말들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뜻하지 않은 낱말을,  ----- 예측될 수는 없어도 기다려질 수 있는 낱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맨 먼저 그 낱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한 시인의 수첩)
 
    2. 능력의 바램과 대담 기다림, 명석한 선택, 자발적인 거부, 쉬운 것에 대한 저항, 의식적인 창조의 의사 표시들, " 어떤 사람의 능력과 바램과의 사정없는 대담, "시작품의 건축가"는 주로 표현 문재들과 드잡이한다 ; "사람들의 싯귀들을 만드는 것은 관념들을 가지고가 아니고, 낱말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 라고, 이미 말라르메가 말했었다. 그러니 시인이란 무엇보다도, 깊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언어의 밑천들을, "음과 뜻의 일치들"을, " 낱말들과 낱말들의 표정들의 집단들이 빚어내는 물리적 효과들"을 알아보는 사람인 것이다. ---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나는 여성형이고, 2음절로 된  P나 F를 포함한, 무음글자로 끝나는, 틈이나 분열의 동의어이고, 현학적이기도 드물지도 않은, 그런 낱말 하나를 찾고 있다. 7가지 조건  - 적어도 !" (나침판의 다른 각거리들), 끝없이 꼼꼼하고 복잡한 탐구 ! 그리고 이러한 뉘앙스들로 고생하는 예술가는 그러나, 자기 작 품이 그 속에서 느껴질 판이한 조건들도 고려해야 한다 ; "심지어는 아주 짧은 시 한 편의 제작 기간이 여러 해를 삼킬 수가 있는데도, 그 시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작용은 몇 분만에 끝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몇 분만에 그 독자는, 탐구와 기다림과 참을성과 조바심의 몇 달 동안에 쌓이고 쌓인 발견들과 비교 대조들과 표현의 섬광들의 쇼크를 받게 될 것이다" (시와 추상적 사고)
 
    3. 희한한 답답함들 의식적인 노고를 치러 흥분의 단계, 또는 낭만풍의 심정토로 단계를 넘어서기. 이게 바로 위대한 시인들의 비결이다. 그래서 발레리는 자기가 낭만주의 엉성함과 대응시키는 그 고전 예술의 완벽에 대해 자신의 감탄을 숨기지 않는다 ; "제 솜씨를 배운 낭만주의자는 고전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또는, "낭만주의는 다 앞선 하나의 낭만주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는 단일성들이나 고정된 형식들, 운율법적 규칙들, 어휘의 제한들에 항의하기는 커녕, 이러한 속박들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의 걸작들의 근원 자체를 본다. 그것은 이 모든 "희한한 답답함들"이 영감의 충동적이고 무정부적인 비약을 억누름으로써, 시작품의 제작을 명석하게 통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고전주의자란, 자기자신 속에 하나의 비평가를 지니고 있어, 마음 속으로 그 비평가를 자기 작업들에 가담시키는 그런 작가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4. 하나의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시작품은 다 "거의 언제나 손질해 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작업 상태" 다. 발레리에게는 하나의 "완성된 소네트"란 실지로, 노고에 의해 여전히 뜯어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버려 둔 소네트"인 것이다. ; "하나의 작품은 꼭 완성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가 거기서 끌어낸  능력이나 날쌤이 그것을 개선할 재능 등등을 바로 그에게 태워 주는 것이니까 --- 그는 거기서 그것을 지워 다시 만들 건덕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 (한 시인의 수첩), 발레리는 가능한 것들이 이러한 양성을 시 창조 중에 스스로 체험했다 ; 그는 익살스럽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같은 시의 다른 텍스트들을 발표하는 수도 있었다 ; 심지어는 서로 어긋나는 것들도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제로 영락없이 나를 비판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고쳐쓰기를 내가 삼갔어야 할 까닭을 내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이러한 객관적 고찰에들에서 우리는 발레리 - 텍스트를 알아보게 된다. 그는 드디어 시 창조를 하나의 "내기"로, 하나의 순수한 훈련으로, 그 가장 중요한 산물도 작품이 아니고 그 작자의 지능의 성장인 그런 훈련으로, 정신의 메카니즘에 대한 하나의 보다 깊은 인식으로, 여기게 되지 않았던가?
 
(이어서 마지막 회)
 
시의 난해성 마치 말라르메의 연금술 비밀에 대해 말하듯이 발레리의 난해성에 대해 말들을 한다. 그런데도 그는 젊은 파르크에 대해, 자신의 난해성은 말라르메의 그것처럼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언명한 적이 있다.
 
   1. 젊은 파르크의 모험 1913년에 예시 앨범 수록 작품들을 손질하다가 발레리는, 40행 가량의 시 한 편을, 이를테면 "그 청년기의 장난들에 대한 작별 인사와도 같은 것"을 거기에 덧붙이고 싶어졌다. 이게 바로 "그가 시인한 것보다는 백 배나 더 읽기 어려운"  412행의 시, 젊은 파르크의 시초였다. 이 별난 현상은, 4년(1913~1917)이나 끈 노고 동안의 "한 송이 조화의 자연적인 성장"으로 설명이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자기가 운문 예술을 이미 잊고만 것으로 알고 있던 발레리는, 시작품을 하나의 "훈련"으로 우선 생각했던 것이다. (앙드레 지드에의 헌시). 이어 전쟁이 왔고, 훈련은 불안 속에서 또 반은 불안과 맞서 가며" 계속되었다 ; 동원될 수 없었던 시인은, 겉보기에는 잔잔하면서도, 더없이 엄격한 운율법에 짐짓 굴복한 작품 하나에 자기 모두를 바침으로써 자신의 괴로움을 속였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위협받고 있는 프랑스어에다, "가장 순수한 낱말들과 그 가장 고상한 형태들로 된" 이 작품을 불러주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이 점점 더 벗어나 마지막의 크기로 부풀어나고 말았다고, 그는 1917년에 쓰고 있다. 이 512행의 싯귀를 위해 그는 100도 더 되는 초고들을, 옮겨 베끼면서 600페이지나 될 초고들을 작성했던 것이다 !
 
   2.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나는 결코 난해해지고 싶지 않으며, 그러나 내가 난해하다면 - 내 말은 : 교양 있고 피상적이 아닌 어느 독자에게 내가 난해하다면, - 난해하지 않을 능력이 없어 나는 난해한 것이다" (에메 라퐁에게, 1922). 이러한 난해성은 오래 전부터 자기 머리를 차지해 오던 관념적인 우리 말투가, 한 살아 있는 존재의 넋의 복잡한 상태들을 우리가 정확히 표현하려들 때는 극도로 빈약하며, 더구나 우리말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태반이 시의 음조와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것을 빈약하게 만들도록 강요 당하기도 한다. 어려움은 아닌게 아니라 시인에게 과해지는 조건들 때문에 갑절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 " 시인이 조화를, 이 조화의 연장을, 조형적인 효과들의 계속을, 생각 자체의 계속을, 구문의 멋과 유연성을, 충족시키려 들면, 그래서 고전적인 운율법의 뼈대 속에 전체가 포함되기를 바라면, 그의 노력의 복잡함이, 그가 스스로에게 과한 조건들의 독립성이 그를, 자기 문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위험에, 자기 작품의 소재를 너무 빽빽하게 만드는 위험에, 독자의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요약과 생략을 이용하는 위험에 빠져들게 하는 수가 있고, 또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프레데릭 르페르에게, 1917).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은, 그 푸짐한 밑천들, 그 뉘앙스들, "하나의 시 텍스트 이의 너무 오래 끈 작업의 축적" 덕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3. 고된 예술의 이론 이러한 설명들은, 매혹 속의 어떤 작품들의 일부러 그런 것만 같아 보이는 연금술 비빌 (난해성)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 한 시작품의 난해성은, 읽혀지는 사물과 읽는 존재라는 두 요인의 산물이다." 라고 발레리는 언명하고 있다. 여느 사람에게는 데카르트나 몽테스큐도 난해하다. 매혹의 작가는 엘리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고, 말라르메의 제자인 그는, 깨우침 받은 사람의 주의력을 부추기고, 그를 "적극적이게" 만들어 그의 시적인 감흥을 북돋우는 것이 능사인 고된 예술의 아론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때 시작품은, 독자의 넋과  정신이 연주하는 하나의 "악보"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 하나의 텍스트의 진짜 뜻이란 없다. 작자의 권위란 없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건, 그는 자기가 쓴 것만을 썼다. 하나의 텍스트란 한 번 발표되고 나면 저마다가 자기 방법에 따라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구와도 같은 것이다 ; 제작자가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사용한다는 말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바다의 묘지에 관해서).
 
끝.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5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55 김규화 시론 2022-10-11 0 620
54 상징과 기호학 / 침입과 항쟁 / 변의수 2022-02-21 0 705
53 글쓰기의 0도 - 롤랑 바르트 2020-01-04 0 1726
52 구조주의와 기호학/테렌스 호옥스 2019-12-21 0 1360
51 [공유] 구조주의 개관 2019-12-17 0 1148
50 [2018년 6월호] 문덕수의 장시『우체부』론: 공존의 미학, 그 시적 통찰 / 이덕주 2019-06-17 0 1323
49 문덕수 시인의 연작시 --선에 관한 소묘」에 대한 소고 2019-06-17 0 1614
48 새로운 시론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 사례 / 김철교 2019-06-17 0 1429
47 [2017년 6월호] 새로운 시론: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김철교 2019-06-17 0 1313
46 현실을 뛰어넘어 정신을 해방하라 - 앙드레 브르통 2019-05-19 0 1470
45 보르헤스 <하버드대 강의> 2019-03-10 0 1521
44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2019-03-09 0 1449
43 T. S. 엘리엇 비평의 대화적 상상력 2019-03-09 0 1412
42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2019-03-09 1 1445
41 이정문<세계문학사조의 흐름> 2019-03-09 0 1445
40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연구 / 이철(강릉대교수) 2019-03-07 0 1578
39 좋은 시에 대하여 / 정민 2019-03-07 0 1404
38 시 창작의 가장 핵심적 비법 2019-02-28 0 1572
37 생각 속의 여우 / T․휴즈 2019-02-04 0 1649
36 환유적으로 시 쓰기/윤석산 2019-02-04 0 1804
‹처음  이전 1 2 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