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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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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리좀 '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 정리해보았어요. /이동현
2018년 10월 19일 20시 41분  조회:721  추천:0  작성자: 강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은 <앙띠-오이디푸스>와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후속작에 해당한다. 이 책은 총 1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장’이 아니라 날짜가 붙어 있는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론을 제외한 나머지 고원은 순서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첫 번째 고원, ‘리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뿌리, 수염뿌리, 리좀 - 책의 문제 - <하나>와 <여럿> - 나무와 리좀 - 지리적 방향들, 동양, 서양, 미국 - 나무의 폐해 - 고원이란 무엇인가?”
 
 
* 신승철 샘의 멘션
 
- 천 개의 고원은 가타리의 저작 중 가장 읽기 쉬운 책입니다. (여기저기서 비명 섞인 탄식이 터져나왔다.)
 
- 들뢰즈: '차이의 철학'을 역설하던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면서 '욕망과 접속'하게 되지요. "욕망하는 기계"
 
- 푸코: 푸코는 가타리와 공동으로 연구하기도, 또 배려해주는 관계였다고. 특히 권력의 미시적인 움직임에 집중.
 
- 리좀은 풀뿌리에서 나오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녹색당의 어휘) '생태적 지혜', 나무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진리, 분리된 진리는 아카데미의 방법론. (모든 의미화된 것에 의문을 가지세요!)
 
- 'n-1'은 유일 대신 다양성을 만드는 방법이다. 'n+1'은 초월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음.
 
- '고른판'은 모두가 다른 소리를 하지만 그러면서 결정을 내리는, 차이 속에서 공감을 하여 자발적인 의사수렴이 가능한 형태의 의사소통.
 
- 합일의 두 가지 층위 : 공통성과 보편성. 공통성은 우리 관계 속에서 찾아낸 합일점, 반면 보편성은 모든 상황에 적용가능한 진리 같은 합일점. 리좀의 사유로 얻어낸 합일점이 공통성에 기반한다면, 나무-아카데미 형태의 합일점은 보편성을 주장(또는 강제)한다.
 
 
* 참가자들의 멘션, 리좀 등에 대해
 
- 리좀은 구근, 덩이줄기, 땅밑줄기. 농사를 지어보니 알겠어요. 고구마가 바로 리좀이에요! // 담쟁이 넝쿨도 리좀.
 
- 기업 조직도는 전통적으로 수직적인 계층구조로 형상화되었지만, 구글 등 혁신적인 기업의 조직도는 네트워크 조직도의 형태, 방사형으로 뻗어나갑니다. 나무형태의 조직도와 리좀 조직도의 차이라고 봅니다. // 신쌤 코멘트, 가타리 曰, 생태계가 네트워크.
 
- IT쪽 용어로 텍소노미와 폭소노미 개념을 비교해보면 나무와 리좀 같습니다. 데이터가 개발자에 의해 카테고리화된 분류방식이 텍소노미, 수평적으로 검색어가 중복되는 분류방식이 폭소노미(클라우드 태그 같은 형태로),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데이터의 양이 많아지면서 폭소노미 방식이 효율적임.
 
-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지를 땅으로 전달하는 역할,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들고 땅으로 내려와 전달하듯이. 그러나 리좀은 수직적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도, 법, 영으로 거듭나는 것, "네가 나고, 나는 너다."
 
- 또 IT쪽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양체의 원리'는 '객체지향언어' 개념과 같음. (명쾌한 프로그래머의 설명을 들으며 한쪽에서 가타리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 새누리당이 리좀 형태로 움직이고 있는가?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의 점조직은 뿌리줄기 스타일 정도? 의사결정의 중추에는 여왕님-나무와 이권집단이 결탁해 있다고 본다.
 
 
 
--- 아래는 읽는 데 집중이 하도 안 돼서 본문을 필사하며 메모한 흔적입니다. (제가 임의로 첨부한 메모는 #표시로 파란색 표시해두었어요.)
 
1. 서론 : 리좀, 본문 발췌독
 
(전략)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빨려들어갔고 다양화되었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한 신을 꾸며낸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f: agencement, e: assemblage)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들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f: multiplicité)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la multiple)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實辭 #명사나 용언의 어간처럼 실질적인 뜻을 나타내는 형태소#)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f: signification)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corps sans organes: CsO)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 없는 몸체는 끊임 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환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의 기관 없는 몸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다. 고려되고 있는 선(線)들의 본성에 따라, 선들의 농도나 고유밀도에 따라, 선들을 선별해내는 “고른 판(plan de consistance)”에 선들이 수렴할 가능성에 따라 여러 기관 없는 몸체들이 있다.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이다. 글을 양화하라. #양화란 量化를 의미하나?# 책이 얘기하는 바와 책이 만들어지는 방식 차이에는 차이가 없다. 하물며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표든 기의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접속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를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원용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의 유일한 문제는 문학 기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다른 기계와 이어질 수 있고 또 이어져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 기계(#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von Kleist를 의미하는 듯, 괴테와 카프카를 연결하는 작가라는 평, 작품 찾아볼 것#),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주의 기계 ...... (그리고 설사 우리가 문학을 통해서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은 분명 문학적인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닌가?) #이 괄호 속의 문장은 무슨 소리인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데올로기는 있지도 않고 있어본 적도 없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단위들, 수렴의 CsO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signifier)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앞서 나온 ‘글을 양화하라.’는 지시문과 같은 맥락의 비유인 듯. 여기서 ‘미래의 나라들’이란 표현은 아직 그와 같은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 책의 세 가지 유형
 
(p.14.) 책의 첫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중략)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중략)
(p.16.)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겉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중략)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택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쪼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 (중략)
(pp.17~18.)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다양체 만세>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알듯말듯하지만 마음에 꽂히는 말이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l'unique)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 뭐가 좋고 뭐가 나쁘지?#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다. #갑자기 개밀이 왕바랭이가 됐다. 둘 다 외떡잎식물이며 벼과에 속하는 잡초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 하다. #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미궁에 빠져든다. 원예기술과 생물학과 정신분석과 언어학이 뒤섞인다. 리좀의 특성을 알려준대도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이 밀려온다.#
 
 
# 리좀의 특성 원리 1~6 (그러나 굳이 숫자로 분류해 설명한 이 원리들은 분절되지 않는 내용인 것 같다.)
 
(pp.19~20. :리좀의 특성)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계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고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초헤계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定言 #단정하여 말하기)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자으이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화행론: 1960년대 영국 언어학자들이 창시한 언어학 이론. 언어란 무엇인가보다 언어는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언어학의 한 유파. 언어의 의미를 ‘언어 행위 실천’에서 찾으려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실 언어 행위의 의미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명령어/질서어로 본다. 기존의 언어학과 언어철학이 가장 급진적으로 나아간 형태이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소쉬르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보편적이고 고정적인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바인라이히,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군대가 지지하는 사투리가 표준어가 된다.”라고 하는 오병헌씨의 인용문이 생각났다.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됨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pp.20~21. :리좀의 특성)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 다양은 사실상 실사로서, 다양체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주체나 객체, 자연적 실재나 정신적 실재, 이미지와 세계로서의 <하나>와 더 이상 관계 맺지 않게 된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나무 모양을 한 가짜 다양체들의 정체를 폭로한다.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 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양체의 본성이 변할 때에만 증가할 수 있다(따라서 조합의 법칙들은 다양체와 함께 증가한다). (중략, pp.22~23.)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고른판에 대해 말할 것이다. 비록 이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결접속들의 수에 따라 판의 차원 수가 커지기는 할 테지만. 디양체들은 <바깥>, 즉 추상적인 선, 도주선(ligne de fuiete)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거해 정의되며, 다양체들은 이 선에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연결접속하면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고른판(격자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그리고 나서 도주선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얽히고 섥힌 나무의 가는 뿌리들을 상상하다가 갑자기 고른 판 위에 선이 뻗어가는 모양을 상상하려니 과부하로 죽을 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한다.#
 
(p.24. :리좀의 특성)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 이것들은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개미떼를 죽여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놈들이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더라도 끊임없이 복구될 수 있는 동물 리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나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조악한 형식으로도 말이다. 우리는 끊어도 보고 도주선도 그려 본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다. 선 위에서 전체를 다시 지층화하는 조직들, 기표에 권력을 다시 부여하는 대형들, 주제를 다시 구성하는 귀속 작용들, 즉 오이디푸스의 부활에서 파시스트적인 응고물에 이르키까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에 직면할 집단들과 개인들은, 단지 결정화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 개밀 역시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선별의 소산일 뿐이며, 이 선별은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 (중략) # 그리고 탈영토화 운동과 재영토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서양란과 말벌이 인용되고, 비비와 고양이의 유전정보에 대한 비유까지 나오고, 악어와 카멜레온이 주변을 복제하지 않으며, 핑크팬더는 분홍 위에 분홍으로 자기 색깔로 세상을 그리는데 이것이 핑크 팬더의 세계-되기라는 미친 신들린 것 같은 설명이 나오고, 나는 눈물이 났다. 핑크팬더라니 핑크팬더라니 도대체 어쩌라고!# 
 
 
(p.29~30. :리좀의 특성)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제도)과 전사의 원리 :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주축뿌리이건 수염뿌리이건)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예컨대 촘스키의 “나무”는 기저 시퀀스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항 논리에 따라 그것의 발생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정신분성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結晶)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도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 나무와 반대되는 리좀, 나무가 뿌리 중심에서 뻗어나가 위계적 질서인 반면, 리좀은...? #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 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 리좀이 지형이 아니라 지도라는 설명은 납득할 수 있다. 어렴풋이 맥락이 좀 잡힌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제기가 나와버린다. #
 
 
(pp.31~33.)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지도와 사본을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대립시키면서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사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뿌리를 교차시키고 때로는 뿌리와 뒤섞인다는 것은 리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하나의 지도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사본들인 잉여 현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하지만 그 역 또한 참이며, 따라서 문제는 방법이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놓아야 한다. (중략) # 그리고 사본의 위험함을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예로 드는데, 프로이트의 꼬마 한스와 멜라니 클라인의 꼬마 리처드 연구에 대한 살벌한 비판이 이어진 뒤 단호하게 경고한다. # 리좀이 차단되어 나무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이제 욕망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을 좌절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작동한다. (중략)
 
 
(pp.35~37.)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내리거나 가지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다. 부당하게도 “수상돌기(化石樹 #화석수라니, 수상돌기의 다른 말인가, 아님 어떤 은유일까?#)”라 불리는 것은 뉴런들을 연속적인 조직 내에서 서로 연결접속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 있지만 뇌 자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중략) 우리가 비록 긴 개념들로 이루어진 긴 기억을 가지고서 읽고 또 다시 읽는다고 해도 글을 쓸 때는 짧은 기억을 가지고서, 따라서 짧은 관념들을 가지고서 쓴다. 짧은 기억은 망각을 과정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짧은 기억은 순간과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시간적이고 신경적인 리좀과 뒤섞인다. 긴 기억(가족, 인종, 사회, 또는 문명)은 복사하고 번역한다. 하지만 긴 기억이 번역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거리를 두고, 뜻하지 않게, “비시대적으로” 그러나 결코 동시적이지는 않게 계속해서 작용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뿌리-가지들의 집합을 고려한다면, 나무의 몸통은 밑에서 위까지 걸쳐있는 부분 집합들 중 하나에 대해 대립 절편의 역할을 한다. (중략) # 나무 모양과 뿌리 모양을 연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러나 뒤어어 나오는 세부적인 설명은, 아..... 몰라. 서양의 사고체계가 나무 같지만 동양은 아니라는 서술은, 정말로 모르겠다. 내가 아는 동양이 이미 서구화되어버린 또는 서구지향적인 동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오리엔탈리즘 또는 서양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동양문명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까? #
 
 
(pp.46~48.)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들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접속되는 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하나>로도 <여럿>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는 <하나>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셋, 넷, 다섯 등이 되는 <하나>도 아니다. 리좀은 <하나>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여럿도 아니고 <하나>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구조는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 사이의 이항 관계들과 이 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선들, 성층 작용의 선들이 여러 차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 차원인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도 있다. 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이 선을 따라가며 본성이 변하면서 변신한다. 우리는 그런 선들이나 윤곽선들을 나무 유형의 계통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나무 유형의 계통들은 연결된다 해도 단지 점들과 위치들 사이에서만 자리가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와는 달리 리좀은 복제 대상이 아니다. 즉 그것은 이미지-나무로서의 외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고, 나무-구조로서의 내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다. 리좀은 일종의 반(anti-)계보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기억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문자 표기법, 데셍, 사진과는 달리, 또한 사본과도 달리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지도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본이지, 역으로 지도를 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다.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 집중화되어 있는 체계(설사 여러 중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와는 달리, 리좀은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장군>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리좀 안에서 중요한 것은 성(性 #성별?#)과의 관계이며, 또한 동물, 식물, 세계, 정치, 책, 자연물 및 인공물과의 관계, 즉 나무 형태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 리좀은 나무 형태와 다르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너덜거리는 모양일 것 같다. 뒤이어서 고원에 대한 설명. #
 
 
(pp.48~50.) 고원은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다음과 같은 아주 특별한 것을 가리키기 위해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들이 연속되는 지역. (중략) “강렬함이 연속되는 일종의 고원이 오르가슴을 대체한다.” 또 그것은 전쟁이나 정점을 대체한다. 표현과 행위를 그것이 지닌 가치 자체에 따라 내재적인 판에서 평가하는 대신에 외부의 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에 관련시키는 것은 서양적 정신의 유감스런 특질이다. 예를 들어 장으로 이루어진 책은 정점과 종결지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뇌처럼 미세한 균열들을 가로질러 서로 소통하는 책,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접속되어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일종의 리좀으로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고원들로 구성했다. 우리는 이 책이 순환적 형식을 갖도록 했지만 그것은 웃자고 그랬던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우리는 각자 어떤 고원들을 선택할 것인지를 자문하고, 여기 다섯 줄, 저기 열 줄을 쓰곤 했다. 우리는 환각을 경험했으며, 작은 개미떼 대열 같은 선들이 한 고원을 단념하고는 다른 고원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수렴원들을 만들었다. 각각의 고원은 어느 지점부터든 읽을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고원과도 관계 맺을 수 있다. 다양을 만들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낼 방법이 필요하다. (중략) 우리는 단지 몇 단어를 골랐고, 그 단어들이 나름대로 고원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리좀학=분열분석=지층분석=화행론=미시정치. 이 단어들은 개념들이다. 하지만 개념들은 선들, 즉 다양체들의 이런저런 차원(지층들, 분자적 사슬들, 도주선들이나 단절선들, 수렴원들 등)에 부착되어 있는 수 체계들이다. 우리는 결코 과학의 지위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과학성도 알지 못하며 다만 배치물들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들이 있는 것처럼 욕망이라는 기계적인 배치물들이 있을 뿐이다. 의미생성도 없고 주체화도 없다. (중략)
 
 
(p.51.) 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정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물론이 빠져 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선 훌륭한 작품들의 예가 거론된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예시이기 때문에 넘어간다.#
 
 
(p.53.) 어쨌든 과학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과학은 완전히 미쳐버릴 것이다. 수학을 보라. 수학은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굉장한 은어이며 유목민적인 것이다. 이론적 영역에서조차, 아니 무엇보다도 이론적 영역에서, 아무리 암시적으로 화행론적인 발판일지라도 개념들의 복사나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개념들의 절단과 진보보다는 낫다. 기표작용을 하는 절단이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단절을 행하라. 유목민들은 국가 장치에 대항해서 전쟁 기계를 발명했다. 역사가 유목민을 이해한 적은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도 없다.
 
(pp.54~55.)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방법적, 교육학적, 통과제의적, 상징적인......)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운동에 대한 언급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시작과 끝을 상정하지 않고 중간을 통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어떤 의미일까?# 나아가 미국 문학은, 그리고 이미 영국 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sens)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영미문학은 화행론을 행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고원지대, 기차에서 만났던 시안 사람 왕선생이 자기 고향을 자랑하며 첫 마디로 시안은 ‘황토고원’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란저우도 간쑤성의 고원지대에 있으며, 쿤밍 역시 고원의 춘성이다. 중국영토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지는 망설여지지만 티벳고원도 빼놓을 수 없지. 독특한 문명이 꽃피었던 곳, 또는 한 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도시들. 들뢰즈와 가타리가 중국의 지형을 생각했을 것 같진 않지만, 나에게는 이런 고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개마고원과 백두고원이 있고, 남한에는 무주의 진안고원이 있지. 언젠가 마이산에 가보고 싶다.
 
 
# 기계의 비유, 하필이면 왜 기계일까? 뭔가 프랑스적인 감성이 있는 것 같다.
 
# forvo.com 프랑스어 발음이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보다 발견했다. 외국어가 녹음된 음원을 들을 수 있는 홈페이지. 각 지역의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올린다. 일테면 프랑스어의 경우, 프랑스 북부, 남부, 벨기에, 캐나다 등지의 사용자의 발음을 비교해 들을 수 있다. 그것도 전문적인 성우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자발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출처] '1. 서론 : 리좀 '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 정리해보았어요. /이동현|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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