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는
정열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것을 빼냈다
이제 더 이상 내 가슴을 느낄 수 없다
시의 끝부분은 이렇다
내 노래가 다시 불평을 한다
“날카로운 금 가시여,
나 그대을 느끼고 싶구나
내 가슴속에 박힌 그대를.“
-안토니오 마차도-
날개 돋친 불꽃과 재, 죽고 다시 태어나는 불새에게 끌리는 매력
“낮에서 밤, 밤에서 낮 사이, 우리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피닉스는 몇 살인가? 인생의 만년(晩年)에 불사조적 몽상들은 노령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추억을 태우며 죽는다. 그렇지만 추억을 태우면서 추억을 더욱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체험한 사랑의 영원함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는다.”
피닉스.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종합’, 자웅동체의 새, 최후의 원대한 꿈 속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중개자.
“나의 불사조적 꿈들’, 부제는 ‘명암과 잿빛 삶’이 될 것이다. 나는, 내 존재의 책상 앞에 있기보다는, 나의 무(無)를 쓰다듬으면서 내 비존재의 책상 앞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씌어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사람을 늙게 한다. 언젠가는 결론을 맺고 끝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제한된 문학 이미지들의 문제는 그 어떤 철학적 도구의 도움없이 아주 단순하게 취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고를 연구해오던 방식처럼 될 수 있는대로 객관적으로 이미지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견치 않던 것을 언어에까지 부여하는 상상력의 비약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지 나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예들을 추가하다보면 어떤 법칙을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독서량을 늘린다면 글쓰기의 의지로 부각된 언어, 즉 시적 언어의 인문과학적 조감도가 그려지리라 기대했다.
내가 산책하고 있는 식물학자이며, 나의 독서가 이끄는 대로 ‘시적 꽃들’을 모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우주론의 상상력에 관한 기초 철학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4원소, 즉 불, 물, 공기, 대지는 우주론의 백과사전을 위한 책 제목으로 서두가 장식되었다. 많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4원소 중 하나의 기호 아래 세계를 ‘사고’했으므로, 우리는 시인들의 이미지가 우주론의 소박함을 되살리면서 매우 오래된 학설들을 다시 빛내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별 문제 없이 독서에 내 열정을 쏟아 부을 계획을 세웠다. 네 개의 자료. 네 개의 곳간이라니, 추수한 곡식과 수확한 포도를 저장하기에 얼마나 안전한 곳인가. 끊임없이 작업하기 이한 얼마나 멋진 상상 속의 시설인가!
시는, 그 자체로-시적 이미지 그 자체- 내게는 특별한 연구대상이 될 만한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상상력의 현상으로 간주된 시는 교감할 수 있는 현상이다. 상상하는 독자는 상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서 상상력의 충동을 받아들인다.
고전 심리학에서 상상력보다 더 막연하게 정의된 정신적 힘은 없다. 극도로 혼동하는 경우에는 상상력을 사라져버린 과거의 지각에 종속시키면서 ‘재생적 상상’과 혼합할 뿐 아니라, 가장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이 상상력을 모든 정신의 창조적 활동에 연결시키고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든 기발함에 결합시킨다. 사람들은 상상력을 학자에게, 정치가에게 부여한다.
사고 영역에서 창안하는 것과 이미지들을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정신적 행위이다. 게다가 사고 영역에서 작업할 때는 이미지들을 쫒아내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수정하지 않고는 사고를 창안하지 못한다. 수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진정한 사고를 끌어내리라 기대해볼 수 있다. 원초적인 진리란 없고, 단지 원초적인 오류들만 있을 뿐이다. 과학적 사고는 오류로 점철된 기나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시적 상상력, 그것에는 과거가 없다. 그것은 준비된 모든 것을 위반한다. 시적 이미지란 진정 말 paroled 의 한 순간으로, 베르그송적 의식의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성 상에 위치를 설정하려 할 때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순간이다. 시적 언어의 기습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만화경적인 의식에 내맡겨야 한다.
시적 이미지가 있으면 우리는 언어가 씌어지기를 원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글쓰기의 행복을 알 때는 거기에 몸과 마음, 손과 작품을 바쳐야 한다. 조르주 상드는 그점을 알고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생각과 말은 서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 글쓰기란, 이를테면 말 위로 불쑥 솟아오른 차원이다. 문학 이미지는 말해진 언어, 즉 의미에 종속된 언어 위로 올라온 진정한 돌출부이다. 돌출부라고? 지적 가치는 판타지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견고해지는 것을 체험하고, 유희적이었던 문학 이미지가 시적 이미지화할 때, 우리는 시란 언어의 세계라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존재의 철학가들은 세상을 말하고,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로 그들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항상 존재, 한존재, 여러 존재들은 말의 보증서이다. 말의 존재는 존재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말은 절대로 자율성을 지닐 수 없다. 그것은 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나아봤자 그것은 외침의 문명이다. 말의 존재 안에는 항상 말의 존재 이전의 존재가 있는것이며 말은 ‘표현한다’. 그 표현의 존재는 단지 위임받은 한 존재, 즉 말하는 존재의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에서 드러나는 초인간성의 분출이 위대한 서정적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조화롭게 맞춰지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살펴 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상은 이미지를 능가하길 원한다. 불은 그 유용성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지성주의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중요한 이미지들은 시초의 지배력을 잃지 않는다. 항상 어떻게 인간이, 초인간이, 반신이, 제우스의 아들이 태양 원반 속으로 불을 찾으러 갔다가 그것을 훔칠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를 보여주지만, 급히 만들어진 이 분명한 한 문장이 이 해괴한 이야기를 요약해준다. 특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쳤다는 것이다. 이미지들을 꿈꾸고 자신의 몽상 한가운데에 중심 이비지를 놓는, 이미지에 의한 분석만이 허황된 이야기의 모난 부분을 둥글게 할 수 있다. 그 어두운 구멍이 작은 태양, 태양 원반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주형에 뾰족한 도구를 돌리면서 많이 꿈꿔야 한다. 그러면 붗으로 넘치는 도가니에서 불을 훔치게 된다.
불 또는 빛, 작업 또는 지식, 이 양극 사이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광대한 영역이 돈개된다. 이 범위는 대단히 넓어 프로메테우스의 시학에서는 그 단일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허무에는 이미지들이 없다. 허무란 관념에 불과하다. 오로지 이미지들, 시적 이미지들만이 파괴적인 순간을 불멸화시킬 수 있다. 소멸의 미학은 엠페도클레스의 이미지에서 중요한 시적 이미지를 발견한다. 즉 그것은 미(美) 안에서의, 미를 위한 소멸인 것이다.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라는 부제 아래 씌어진 이 세장이 바로 아니무스로 씌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지배하는 존재들이다. 절대적인 아니무스의 이상형 속에서, 아니마의 온화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니무스의 힘의 의지에 몰두해야만 비로소 그들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삶은 순수하고 강인한 아니무스처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경험하고 자신 안에서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안다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체험의 의식을 이렇게 결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단 하나의 단어로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체험’이란 단어는 다른 모든 경험이 그렇듯 끊임없이 분석으로 정제되어야 하는 경험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
‘체험’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체험’을 다루지 않고 쉬운 추상 놀이에 만족하는 자들이라고 우리가 조금은 성급하게 판단해버리는 철학자들에 대립하여 씌어졌다.
사실 스쳐 지나가는 사건 속에서, 특별한 정신적 선택에 따라 느끼는 상대적인 강렬한 속에서, 사람들이 모든 삶을, 깊이 있는 모든 삶을 소중히 여긴다고 어떻게 믿을 것인가. 체험은 그것이 재체험될 수 없다면 덧없음을 나타내는 표시를 지닌다. 그리고 규율이 없는 것 중에 으뜸인 상상된 체험을 어떻게 체험과 융합하지 않겠는가? 인간적 체험, 인간 존재의 현실은 상상적인 것을 만드는 요인이다.
게다가, 누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 누가 본래의 삶의 풍부함과 다양함 속에서 그 삶을 살고 있는가? 본래의 삶은 우리 없이 우리 안에서 체험된다. 우리가 그 삶을 잘 산다면, 그와는 반대로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을 너무 능숙하게 표현한다면, 그 삶을 더 이상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기 한 존재로 결정될 수 있는 존재의 단위가 아니다. 인간 존재란 존재들이 밀집해 있는 벌집이다. 존재의 꿀을 만들고 시적 삶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아련히 먼 생각들이며 광적인 이미지들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중심이 없다. 삶은 어느 주변에서 생동하는가? 그런데 삶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면서 생동하는 것이니, 존재는 과연 어떤 이미지 부근에서, 어떤 시들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 넘치는 생명을 찾아내는 것일까? 인간 존재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이 그가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시간에, 또 스스로 자신이 살고 있다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시간에 살아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절대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파도에서 흘러나와 모든 존재를 존재의 일반적인 생성으로 데려가는 물줄기로 간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아니 거의 항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지나간 정체된 존재들이다. 우리 안에서 삶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베르그송은 체험의 경험 속에서 시간 측정기란 쓸모없거나 혹은 속아넘기는 도구라는 걸 별 어려움 없이 보여 주었다. 시간 측정기, 그것은 다른 이들의 시간이며, 우리의 체험시간, 즉 지속을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시간대’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은 잘 묶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시간들의 다발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들’은 우리의 체험 시간(지속)을 조절할 박자를 찾지 못한 채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이다. 우리 존재의 역동성, 우리 존재의 다양한 역동력을 강한 필치로 나타내줄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미지들만 바꾸면 된다. 불의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 존재로 형성된 불덩어리이다. 우리에게 에너지와 생명을 주는 우리의 불 속에 중심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내일의 불을 따뜻하게 지탱해주는 재의 시간인가?
불새가 탄생하는 그 결합에 의해 더 큰 가치가 부여된 두 단어의 매듭에서 다양한 현실이 연합한다. 즉 날아다니는 불길,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룻밤에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섬광의 날개, 알록달록한 몇 마리 새들이 여름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 불새들이 불의 특성들이다.
내가 불새를 처음으로 본 것은 불새가 나의 강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유년기에 더욱 커 보이는 강, 하늘처럼 고요하고 아주 푸르른 강, 그 강의 이름이 바로 오브였다. 창공으로 쏘아올린 화살처럼 불새가 솟아오른다. 날카로운 외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다. 새는, 아주 빨리, 수면을 흔들며, 아마 그의 유일한 노획물이었을 물방울을 뿌리면서 하늘을 향해 다시 떠났다. 불로 달궈진 쇠처럼 푸른 물총새였다. 새는 사라졌고 꿈이 시작된다. 그 새는 나무들 저편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온 것이다! 이 불새는 태양 속에, 유월의 태양 속에 자기 둥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토록 평화로운 물에 대한 얼마나 큰 침해이며 죄인가! 자연에서는 빨리 가버리는 모든 것이 범죄이다. 하늘에서 내려운 이 불길은 어째서 거울 같은 물에 살며시 자신을 비춰보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멋진 존재가 어떻게 그토록 탐욕스러울 수 있는가? 물총새와 은빛 잉어의 결합이라니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이런 푸르름의 잔혹함이 한 어린아이의 세계관을 뒤흔들 수 있을까?
한 어린아이의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은 그 어린아이의 세계의 사건이 아닌가. 그러니 곧 이 세계의 사건이 아니던가. 이러한 추억은 그것이 단일하다는 점에서 우주극cosmodrame이다. 하나의 추억이 이렇게 우주극으로 상승할 수 있을때는 그것이 역사의 한 점인지 아니면 하나의 전설의 출발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나의 물총새는 내 회상의 나라에서는 한 마리 피닉스이다.
신기한 일이 허무해져버렸을 때 경이로움은 우수로 바뀌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시절 나는 다시 한번 같은 강에서 그 물총새를 보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름날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날 우리 둘이 있었다! 나는 책에서 읽은 전설들과 연결시키면서 이미지들을 늘리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전설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며, 우리는 경이로운 이미지를 응시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섬광을 발하는 새는 피닉스의 근본 이미지이다.
그후로 피닉스-물총새는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사는 동안 중요한 것은 거의 못 본다. 망태기 속에 노획물을 집어 넣는 사냥꾼이 여름날의 하늘이나 서늘한 강물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그 지극한 영광 속에서 죽음을 맞는 새를 생각하고 또 꿈꿀 수 있겠는가? 찬란함에서 유용함으로 넘어가면서 사냥꾼은 ‘멋진 깃털은 맛없는 고깃살을 감추고 있다’는 식도락가들의 격언을 떠올리기나 할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멀리서 꿈꾸는 것을 금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몽상가는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멋진 대상이 있을 만한 세상을 보는 비율 속에서 본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화살, 불새, 타는 듯한 이미지는 한 세계의 중심이다.
T.S 엘리엇은 이 이미지를 빛의 순간으로 적고 있다.
물총새의 날개가 빛에 빛으로 화답하고 나서
......빛은 고요하다.
시인은 이 능동적인 빛의 순간을 진정한 시간의 부조relief 여 temps로 느낀다. 엘리엇은 다음 두 행으로 시를 끝맺는다.
우스꽝스럽구나 슬프고 헛된 시간이여
이전과 이후로 펼쳐지니.
우리는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서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라는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의 근본 이미지를 주시할 것이다. 이 시적 이미지가 시적 몽상들의 어떤 통합에서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시적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를 인간의 미학에 초대한다.
-태양 원반에서 프로메테우스이 불까지
-찔린 눈과 시선의 불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몽상이 솟아오르는가!
키플로페스 이마 한 가운데 외눈이라. 키클로페스의 눈이 회오리치는 불을 내던지지는 않는가? 눈의 둥근 윤곽을 따라 완전히 돌려가면서 그 눈을 후벼파야한다. 많이 돌려 후벼팔수록 많이 복수하는 것이다. 단검으로 잘라 다듬은 올리브 나뭇가지 끝이 투창처럼 뾰족해진다해도 충분치 않으리라. 오디세우스는 나무를 불태워 단단하게 만든다. 초록빛 나무가 검은 나무로 변한다. 나무는 뜨거운 쇠와 같은 것이리라. 키클로페스 눈 속에서 깊은 불이 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반(反)불이 있어야 한다. 이 흉기는 그의 불구멍 속에서 뾰족한 도구가 된다. 불을 끄려는 몽상이 불을 탄생시키는 몽상과 합류한다. 이 시선의 불을 끄기를 원할 때, 그 깊숙한 온상까지 불을 끄기를 원하면, 뽀족한 도구로 불을 창조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불의 탄생과 불의 죽음이 같은 인미지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언급하면서 가장 자주 덧붙이는 것이 불복종의 표시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콤플렉스의 시사성을 느낀다. 신화에서 사람들은 오로지 불복종의 매혹만 생각한다.
영웅 프로메테우스는 건설적인 불복종의 상징이다. 아버지보다 더 잘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불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불복종하는 것은 창조자의 신념이다. 불복종은 벌을 피할 만큼 미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매한 죄의식, 혼미한 죄의식이 남는다. 모든 지식에 활력을 주는 불복종의 역동성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불을 준비하는 것이 ‘더할 나위없는’의식의 행위이며, 불은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어두운 상태를 없앤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의 가족으로 제우스가 그들에게 가한 박해에 관련이 되었다. 그는 카프카스 산이 있는 스키티아에 은거해야 했고, 제우스가 통치하는 동안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황량한 고장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비애는 그의 간을 갉아먹는 독수리이다. 아니면 이 독수리가 한 철학자의 깊고 비통한 명상의 생생한 이미지는 아닐까? 스키티아 주민들은 극도로 야만스러웠으며 법도 관습도 없이 살고 있었다. 공손하고 학식있는 이 왕자는 그들에게 좀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가르쳤다. 어떠면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미네르바의 도움을 얻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그가 하늘에서 빌려온 이 불은 그가 스키티아에 세운 대장간들이다. 아마도 프로메테우스는 그 고장에서 불을 찾아내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며칠공안 불을 보존하기에 알맞은 식물인 큰 회향풀 줄기속에 불을 넣어 그곳에 가져왔을 것이다. 마침내 프로메테우스는 스키티아의 쓸쓸한 생활에 지루해져서 최후의 날을 맞으러 그리스로 온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에세 신들의 영예, 적어도 영웅의 영예를 되찾아 주었다. -이 항목은 Jaucourt가 작성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산꼭대기에서 불을 훔치고 카프카스 산 정상에서 신들의 복수를 감내한다. 프로메테우스는 한 새에게 고통받는다.
불, 새, 대담한 사람은 정상의 존재다.
에트나 화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불의 시학을 격상시킨다.
엠페도클레스는 소멸의 시학을 보여주는 가장 중대한 이미지들 중 하나다.
불에 헌신하는 것, 그것은 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는 불에 헌신한다는 것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닌가? 불길의 장엄함에서 무의 장엄함으로 가는 중요한 이행passage. 또는 이 중대한 불, 이 완전한 불은 총체적인 정화의 근거가 아닌가? 그런데, 정화된다는 것은 재탄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가? 피닉스에 대한 몇 가닥 희망이 철학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의 장은 열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다음과 같이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분명 탄생과 죽음은 두 가지 모두 순간의 영광이다. 그렇지만 탄생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전설에는 날짜가 없다. 전설은 머무는 것이며, 어떤 시인이 전설을 보여주기 위해서 새로운 이미지들을 발견하면 그 즉시 전설은 새로운 삶을 되찾기 때문이다. 정상의 전설들은 변하지 않는다. 카프카스 이에 못박힌 프로메테우스, 에트나 산의 불이 사방에 뿌리는 엠페도클레스, 이러한 전설에서 정상은 하나의 인물이다.
신세계의 주민,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같은 시인은 자신의 우주성에 대한 몽상들에 고 사고의 고귀함을 부여하기 위해 지중해를 필요로 한다. 포는 그의 『유레카』를 선포하기 ㅇ위해 불의 산 정상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정상에서 초인간적인 존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동과 서, 남과 북, 뜨고 지는 모든 것을 같은 시선 속에 , 원래의 시선 속에 통합시키기 위해 사방에서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에트나의 정상에서 한가로이 자기 주변을 두루 살펴보는 자는 무엇보다도 경관의 광활함과 다양함에 감동한다. 그는 발꿈치를 축으로 한 바퀴 재빨리 돌아야만 그 숭고한 단일성 속에서 파노라마를 포착한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우주(나는 가장 광범위하고 유일하게 합법적인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구상을 철회시키는 단 하나의 조약도 모른다. 그러니 에트나의 관념성은 영원히 찬양받지 않는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은 분명히 굴광성의 피해자이다. 이것이 동물심리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가 즉각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몽상가에게는 어떠한가? 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시인에게는 어떠한가?
“나는 어느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나는 라마 모양의 거대한 동물을 점토로 빚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동물은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불길이 그 괴물을 관통하며 그에게 조금씩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자줏빛 망이 파고 들어간 그 괴물은 동맥과 정맥을 형성하면서, 그리고 털 뭉치와 지느러미의 섬유질 부속체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식물의 모습을 띠고 있던, 말하자면 자동력이 없는 물질을 번식력이 있게 만들면서 몸을 비틀었다. 나는 이 걸작품을 감상하느라 걸음을 멈췄다. 뜻하지 않게 신의 창조의 비밀을 간파한 것 같았다.
질료에 활력을 넣어주는 프로메테우스적 행위를 꿈꾸자마자 그는 곧 금은 세공사들이 지상에 알려지지 않은 철강을 가지고 일하는 또다른 아틀리에로 들어간다.
“진사와 흡사한 붉은 철과 쪽빛 철. 장식들은 망치로 두드려져 단련되지도 않았고 끌로 조각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형태가 잡히고 착색되었으며 마치 어떤 화학적 혼합이 만들어내는 철제식물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적 행위의 서곡이 아니겠는가? 네르발이 한 직공에게 묻는다. “인간은 만들지 않나요?” 내가 한 직공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할 수 있겠소?”
“우리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의 공동 운명은 지적 기능의 발달과정이 더 조숙하고 폭넓은 자들에게 더욱 무거운 것이리라...... 결국, 인간은 항상 자신을 성찰하도록 강요당한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사람들은 가장 힘든 순간에 ‘의사여, 너 자신을 치료해라’ 라고 소리친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얼마나 여러 번 고통스러운 한숨을 지으며 ‘나는 혼자서 압착기를 압착한다’ 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 했던가. 나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방법을 생각할 때면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가진 풍요로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된 신화적 형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신들에게서 떨어져나와 자신의 아틀리에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온 세계를 채워 넣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였다. 나는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고는 주목할 만한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큰 성공을 거둔 내 작품들은 고독의 산물이었다. 내가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래도, 나에게는 힘도 창작적 열정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지만 작품 완성은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산문이나 시에서 내 고유의 문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도움을 차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던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본받아 신과 나를 분리했다. 왜냐하면 내 성격과 지적 습관에서는 늘 하나의 생각이 다른 것들을 매몰시키고 내쫒아버리기 때문이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내 안에서 활기를 띠었다. 나는 내 크기에 맞춰 티탄의 낡은 옷을 제작했다. 통치하고 있던 신들은 티탄과 인간 사이에 불법으로 개입한 존재로 간주될 수 있었으니 불평할 자격이 있었다. -괴테-
일신교에서 악마가 그렇듯이, 다신교에서는 티탄들이 이를테면 그림에서의 어둠과 같은 것이다.
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은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작은 화상 앞에서 벌써 망설인다. 애초부터 너무 뜨거운 것은 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적 방어현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안전하게 엠페도클레스적인 유혹을 즐길 수 있다. 결국 엠페도쿨레스는 한 번도 희생자를 만들지 않은 아주 희귀한 이미지들이다.
때로는,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은 육체 안에서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장작더미이다. 사람들은 불태워질 수 있다. “사람과 대등한 불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질 수 있다”고 시는 말한다.
명상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나에게 이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보여주는 자는 밝히지 않는다. 증명하는 자는 보여주기를 싫어한다.”
이미지가 빛날수록 그 모호성은 더욱 당혹스럽다. 그것은 깊이의 애매함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들은 이미지가 피상적이고 덧없기를 바란다. 움직이지 않는 모래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물, 그 흐름에 아득한 하늘을 반사하는 물…… 그러나 하늘과 대지는 모두 이미지에 수직성을 부여한다. 상승하는 모든 것은 깊이의 힘을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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