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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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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예술과 삶(86-89)
2018년 10월 21일 15시 41분  조회:803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 Rhizoma *^^* | 뿌리줄기
원문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213
예술과 삶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는 세 가지 구성요소 - 즉 편지, 단편소설, 장편소설 - 를 가지고 있다. 카프카의 문제는 기계가 [계속] 작동하도록 유지하고, 욕망하는 생산의 결말-개방적인 순환들의 형성을 통해 운동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약혼녀에게 보내는 편지들의 흐름들을 영속화하는 것과 흐름들의 영속화에 대한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들을 쓰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에게는 예술과 삶 사이에 아무런 대립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카프카에게 삶과 글쓰기를 대립시키는 것이, 삶의 국면에서의 결핍, 약함, 불능 등을 통해 문학에서 도피처를 추구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너무나 기묘한 것임을”(K 74; 41) 발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편지들,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들이 다중적인 횡단 접속들을 통해, 즉 세 가지의 모든 구성요소들에서 나타나는 소송의 메커니즘을 통해, 편지들을 단편소설들에 연결시키는 펠리체의 개-되기를 통해, 장편소설로부터 단편소설의 기계 목록들을 알려주는 관료제적 장치 등등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이 단순히 작가의 의식 속에 있는 삶과 예술의 상호 영향을 보여준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요점은 결국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가 그 자체로, 그가 “실제의” 편지를 쓸 때에나 그가 허구를 쓸 때 모두, 그가 [그것의] 일부가 되는 확대된 사회적 기계 내부의 하나의 “기계화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카프카는 다양한 기계적 아쌍블라주들의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호연결들을 계획하면서(charting) 사회적 장을 관찰하고, “그는 모든 연결들이 그를 문학적인 표현 기계에, 즉 그가 동시에 톱니바퀴이고, 기계공이고, 작동자이고, 희생자인 문학적인 표현 기계에 부착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K 106; 58) 『소송』에서 모든 사람이 법에 연결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카프카 자신도 그렇게 모두 기계들의 아쌍블라주들로서 기능하는 - 사법적, 관료제적, 정치적, 상업적, 예술적, 가족적 등등의 - 관계들의 네트워크들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글쓰는 기계 역시, 그가 펠리체에게 편지를 쓰건 혹은 K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건, 그러한 사회적 기계들 내에 빠져 있다.
카프카가 글을 쓸 때, 그는 활동한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사회적 행위의 폭넓은 장 내부의 활동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장에서 산만한 것들[논증적인 것들]과 산만하지 않은 것들[비논증적인 것들]은 서로 실천, 운동, 변용의 양식들에 영향을 미치면서 뒤얽혀 있다. 따라서 카프카의 글쓰기는 단순히 외부 세계의 정신적 재현도 아닐 뿐만 아니라, 토대의 경제적 현실에 대한 상부구조적인 미학적 논평도 아니다. “이러한 [탈영토화의] 선이 오직 정신 안에만 현존한다고 말하게 하지 말자. 글쓰기가 마치 또 하나의 기계가 아닌 것처럼, 그것이 마치, 출판과 독립적일지라도, 하나의 행동이 아닌 것처럼. 마치 글쓰는 기계가 또한, 이제 자본주의적이거나, 관료제적이거나 혹은 파시즘적인 기계들 안에 포획되지만, 이제 알맞은 혁명적 선을 추적하는, (어느 것보다도 더 상부구조적이지 않은, 어느 것보다도 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기계가 아닌 것처럼.”(K 109; 60) 카프카가 글을 쓸 때, 그는 세계로부터 물러나지 않고 그 안에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방에 칩거하는 작가가 결코 아니며, 그의 방은 그에게 이중적 흐름을 제공한다. 스스로들을 형성하는 과정 중에 있는 실제적 아쌍블라주들 속에 끼워진,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위대한 미래의 관료제의 흐름. 그리고 가장 시대에 맞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탈주의 과정 중에 있는, 스스로를 사회주의, 아나키즘, 사회 운동들에 끼워넣는, 유목민의 흐름.”(K 75; 41)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하나의 기계로, 그것이 기능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실재물로 간주한다.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글쓰기를 기계들의 세계 내부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삼중적 기계로 생각한다. 그들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길게 주장한 것처럼, 기계의 본질은 연접적, 이접적, 통접적 종합들을 형성하는 것인바, 흐름들을 절단/연결하는 것이고, 포함적 이접들 속에서 흐름들을 중첩시키는 것이고, 강렬도의 유목적 파동들 속에서 흐름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기계들은 “기계화한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그 일부가 되는 순환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에게서 발견하는 기계들의 본질이다. 그들은 카프카의 천재성이 “남자와 여자가 그들이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인접한 활동들을 할 때에도, 쉴 때에도, 사랑을 할 때에도, 항의할 때에도, 분노할 때에도 역시, 기계의 일부라는 점을 숙고했다는 데에”(K 145; 81) 있다고 말한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욕망은 결코 기계 속에서 기계 만들기를 멈추지 않으며, 이전의 톱니바퀴 옆에 새로운 톱니바퀴를 만들어 내는 것을 - 비록 이러한 톱니바퀴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혹은 조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멈추지 않는다. 기계를 만드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연결들, 분해를 유도하는 모든 연결들이다.”(K 146; 82)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하나의 다양체(multiplicity)임을, 그것의 전체가 그것의 다른 부분들 옆에 추가된 부분으로서 생산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대성당에, 그리고 의복에 비유하지만, 들뢰즈는 대성당이 끝나지 않음을, 그리고 의복이 함께 꿰매지고 있는 과정 속에 영원히 놓인 쪽매붙임(patch-work)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양체의 “일자”는 발산하는 계열들과 막힌 관들을 서로의 소통 속에 놓는 횡단선들을 통해 형성된다. 카프카의 기계는, 비교해 보자면, 훨씬 더 명확한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의 작품들은 「동굴」의 몰적인(molelike) 생물의 주거환경과 같은, 하나의 동굴을 형성하고, 분명한 입구나 출구도 없는, 가능한 탈출의 다중적인 지점들을 갖춘 상호연결된 터널들의 미로를 형성한다. 동굴은 바랭이(crabgrass)처럼 하나의 뿌리줄기[리좀]이다. 어느 것이라도 다른 것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들의 무중심적 증식인 것이다. 카프카의 편지들, 단편소설들 그리고 장편소설들은 이 동굴의 터널들이며, 바랭이 뿌리줄기의 마디들이다. 그리고 일기들은 “뿌리줄기 그 자체”이며, “카프카가 물고기처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다고 밝힌 (환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요소”이다.(K 76; 96) 편지들, 단편소설들 그리고 장편소설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각각의 구성요소들은 연결들을 형성하고, 운동을 시작하고 계속함으로써 기능한다. 글쓰는 기계는 터널을 만드는 기계임과 동시에 그것이 파들어가는 터널들이며, “뿌리줄기를 만드는” 기계임과 동시에 그것이 형성하는 뿌리줄기이다. 그리고 기계가 더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그것은 더욱더 불완전해진다. 편지들의 흐름은 부부[관계의] 함정이 닫히면 멈춘다. 단편소설들에서 탈주선들은 봉쇄되고(「변신」), 특정되지 않은 기계의 목록들을 통해 모호하게 지시될 뿐이며(「어느 개의 연구」), 아니면 사회적 장으로부터 분리된 기계의 추상적 작동 속에서 고립된다(「유형지에서」). 그러나 장편소설들에서는 기계는 완전하게 기능하며, 연결들은 무한히 증가하고 확대된다. 「변신」과 같은 통일되고, “잘 만들어진” 단편소설들은 동굴 속에 너무나 많은 궁지들을 가지고 있는 반면, 끝나지 않은 장편소설들은 끝없이 계속해서 동굴을 파는 제대로 작동하는 굴 파는 기계들이다. 기계의 기능은 기계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계화하면서 필연적으로 개방적인 다양체를 창조한다. 충분하게 만들어진, 완전한 기계는 미완성의 엔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에 대해서 말한 바처럼, “누구도 완전히 중단되었지만 모두가 서로 소통하는 운동들로부터 그렇게 완전한 예술 작품을 결코 만든 적이 없다.”(K 74; 41)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는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기술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능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의 기능하기는 스스로에게서 개방적인 다양체를 만들어내고, 나선형의 동굴 혹은 확산하는 뿌리줄기를 만들어낸다. 글쓰는 기계는 사회적 기계들에 끼워 넣어지고, 그것들에 의해 횡단되며, 그것의 작동은 보편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들과 상호연결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며, 그것의 기능하기는 활동의 집단적 장 내부에서 발생한다. 특정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기계 내부에서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소수적 문학” - 언어가 탈영토화의 높은 단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언표의 집단적 아쌍블라주들을 통해 분절되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문학 - 의 개시자로 간주한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소수적 문학은 언어의 소수적 용법을 의미하며, 이러한 용법은 소수적인 글쓰는 기계의 기능하기에서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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