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Image)의 힘과 이미저리(Imagery)에 관해서
편집 : 등단문
이미지란 한 마디로 '말로 만들어진 그림'(C.Day Lewis)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에서 운율이 음악성과 관련해 논의 되었다면, 이미지는 대체로 회화성과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웰렉(Rene.Wellek)은 '이미지', '메타퍼', '상징' 등과 같은 용어가 의미론적으로 서로 겹친다는 점을 강조 한 바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심상'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 기억. 상상. 환상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되는 것이고, 이미저리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들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 박목월의 "불국사'에서>
이 시에서 '흰 달빛' '자운문' '달안개' '물소리' 등은 전부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들이 모여 이미저리를 이루고 있다. 여기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불국사'라는 핵심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불국사를 통해 시인의 기억과 상상을 볼 수 있다. 기억이나 상상이란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또한 이미지란 말은 특정 문학 운동의 명칭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다. 1910년 영미의 '이미지즘' 이 그러하며 1930년대 한국 시단에서도 이미지즘을 받아 들인 '주지주의'가 그러하다 할 것이다. 이미지스트 정지용은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언어미술이란 말은 두 말 할것 없이 시라고 할 수 있으며, 주지주의를 지향했던 김기림은 이미지즘의 시를 '조소성' 혹은 '회화성'에서 찾았다. 김기림은 감정을 음악성과 연결시키고(자연발생적인것) 지성을 회화성과 관련지으면서(제작되는 것),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결부시켰다.
1910 년대 영미 이미지즘을 이끈 에즈라 파운드는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 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고 까지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이미지스트란 대상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자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명확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저리(imagery)란 용어는 현대 문학비평에서 가장 일반적이고도 가장 애매한 용어 중 하나이다. 이의 적용 범위는 독자에 의해 경험되는 마음 속의 그림(mental picture)에서 부터 한 편의 시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라는 데까지 이르는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이것의 사용 범위를 보여주는 저서의 하나가 바로 루이스(C.D. Lewus)의 <시적 심상>(Poetic Image)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미저리란 낱말들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그림이며, 한 편의 시는 이미지들의 복합체로 구성된,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다음 세 가지 용법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이미저리는 시를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구체화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첫째, 이미저리<집합적으로 취해진 이미지들>란 시나 그밖의 문학작품 안에서 축어적 묘사나 인유 혹은 은유에 사용되는 유사물들(보조관념들인 매체)로 언급된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물이나 속성들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말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보자 . 워즈워드의 <그녀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에서 이 넓은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는 시가 언급하고 있는 축어적 대상들('길', '처녀', '무덤')뿐만 아니라 은유로 사용될 '오랑캐꽃'과 '돌', 그리고 둘째 연에서 직유로 사용된 '별'과 하늘 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 그녀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인적 없는 곳에 그녀는 살았다.
다브 강 샘솟는 곳 옆에
찬미할 이 하나 없고
사랑해 줄 이 없는 한 처녀.
사람들 눈에서 반쯤 가리어진
이끼 낀 바위 가의 한 송이 제비꽃!
하늘에 홀로 빛날 때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는 이 없이 살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루시가 언제 죽었는지를
하지만 그녀가 묻히자, 아,
온 세상 얼마나 달라졌는지!
She dwelt among the untrodden ways
Beside the springs of Dove,
A Maid whom there were none to praise
And very few to love;
A violet by a mossy stone
Half hidden from the eye!
Fair as a star, when only one
Is shining in the sky.
She lived unknown, few could know
When Lucy ceased to be;
But she is in her grave, and, oh,
The difference to me!
그러나 이미저리가 언급된 대상의 시각적 재생산만을 의미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같은 시구절을 가지고도 어떤 독자들은 시각적 이미지를 경험하는 데 비하여 다른 독자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경험하는 독자들이라 해도 그 이미지의 명확성과 세부적인 것에 있어서는 서로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저리는 시각적 속성뿐만 아니라 청각적(소리), 촉각적(촉감), 온도지각적(뜨거움과 차가움), 후각적(냄새), 미각적(맛), 기관감각적(맥박), 근육운동지각적(동작감각), 속성들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데 테니슨은 그의 시 <추모의 시>(In Memotiam)의 101번에서 시각적 속성뿐만 아니라 후각적 청각적 속성들도 언급하면서 아울러 '여름의'라는 형용사로 온도 지각적 속성인 따뜻함도 암시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사랑받지 못해, 저 너도 밤나무는 갈색으로 변해가리......
그리고 무수한 장미빛 카네이션들은 여름의 향기로
잉잉거리는 대기를 살찌우리......
(Unloved, that beech will gather brown......
And many a rose-carnation feed
With summer spice the humming air......)
둘째, 좀더 좁은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란, 코울리지의 <노신원의 노래>(An-cient Mariner)에서 보는 바 처럼,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들의 묘사만을, 특히 생생하고 특수화된 묘사만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 다음의 예가 그렇다.
바위가 눈부셨고, 그 바위 위에 서 있는
예배당도 그에 못지 않았네.
달빛은 멈춰 있는 바람개비를
고요로 적시고 있었네.
(The rock shone bright, the kirk no less
That stands above the rock:
The moonlight steeped in silentness
The steady weathercock.)
세째,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미저리란,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나 직유의 보조관념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의 문학비평, 특히 신비평에서는 이 세번째의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를 시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그리고 시의 의미, 구조, 효과들을 평가하는 주요한 단서로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스머어젼(Caroline Sourgeon)은 <세익스피어의 이미저리와 그것이 말해 주는 것>에서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이 유형의 이미저리의 수를 통계적으로 계산하여, 그 결과를 셰익스피어의 개인적 경험과 관심 및 기질을 알아내는 단서로 사용하였다. 그 이전의 몇몇 비평가들을 따라서 그녀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는 이미지군(image sluster : 반복되는 은유와 직유의 무리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또한 그박의 많은 그의 작품들이 독특한 이미지 모티프들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즉 <리어 왕>에서의 동물 이미지들, <행릿>에 나오는 질병과 타락과 죽음의 비유 등의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요소들이 한 작품의 전체적인 어조를 만들어 낻나고 보았다. 그후 많은 비평가들이 문학 작품 속에서의 이미지나 그 반복적 형태, 주제적 이미저리 등을 찾아내기 위하여 스퍼어젼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왔다. 어떤 비평가들은 명백한 진술이나 등장인물들의 ㅣ공개적인 대화와 행동보다도 오히려 함축적인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이 여러 극작품들과 시 그리고 소설들의 기본적 주제 혹은 주제를 찾아내는 데 더 관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예로는 <잘 빚어진 항아리>에서의 나이트(G. Wilson Knight)와 브룩스의 <맥버드>론과, 헤일먼(Robert B.Heilman)의 <이 위대한 무대:<리어왕)의 이미지와 구조> 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시가 리듬을 중시하고 그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던 청각적인 시였다면, 현대시는 이미지를 중요시하며 그 회화성이나 고도한 표현기교를 통해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시각적인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스트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흄(T.E.Hulme)은, 시인에 있어서 이미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언어의 정수 그 자체라고 했다. 루이스(C.D.Lewis)도 <시적 이미지>에서, '참신하고 대담하고 풍부한 이미지야말로 현대시의 장점이며 제일의 수호신이다'라고 하여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시는 주로 언어가 지닌 지시적 기능보다는 함축적 기능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에 시에서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자 수단이 된다. 무절제한 정서의 방출이나 생경한 사상 그 자체는 시가 아니다. 그것들은 시 속에 여과되어 순치된 형태로 용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문학적 장치가 바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 번만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라는 파운드(E.Pound)의 지적은 매우 시사적이라 하겠다.
시적 이미지는 다른 구성소들과 유기적인 의미체계를 구축하면서 주제에 기여하게 된다. 루이스는 좋은 이미지의 전제를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시의 이미지는
첫째 시의 주제와 조화되어야 하고
둘째 신선하고 독창적이어야 하며
셌째 감각적인 체험의 재생이어야 하고
넷째 비유나 상징 등의 표현 기교와 결합되어야 한다.
시의 이미저리는 일반적으로 지각적(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 비유적 이미지(figurative image), 그리고 상징적 이미지(symbolic image)로 그 유형 구분을 한다.
지각적(정신적, 심리적) 이미저리는 독서과정 중에 독자의 정신과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각적 경험에 의하여 형성되는 이미지이고, 비유적 이미저리는 비유된 형상에 의하여 형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작품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 이미지를 일컫는다. 상징적 이미저리란 '자기 마음의 감각적 영상을 문자화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시인의 관심사, 취향, 기질, 여러 가지의 기준, 환상 등을 이미저리로 나타나게 하며 이미저리들이 자꾸 시 속에서 반복되게 해서 , 다시 말해 패턴들이 시의 어조를 만들기 위해서도 발생되고 그 문맥의 구조나 상징의 방법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발생되어지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묘사에 의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각적 이미지의 사용 빈도가 가장 높다고 하겠다.
지각적 이미저리는 어느 사상이나 정서가 감각을 통하여 심리현상 속에서 독특한 인상체계를 형성하는 것으로써, 이는 다시 시각 이미지(visual image), 청각 이미지(auditory image), 후각이미지(olfactory image), 미각 이미지(gustatory image), 촉각 이미지(tactile image), 기관감각 이미지(organic image), 근육감각 이미지(kinesthetic image), 그리고 공감각 이미지(synaesthetic image)로 나뉘어 진다. 이중 기본이 되는 것은 시각 이미저리이며, 우리는 이미저리를 청각적 이미지, 심리적 이미지, 시각적 이미지로 나누고 있음이 보통이라고 하겠다.
시각 이미조라는 시각적인 감각형상을 바탕으로 한 , 즉 시각적 지각이 가능하도록 제시된 회화적 이미지이다. 흔히 말의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언어의 가시적 형상화를 통해 회와적 세계를 창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융이나 파운드, 로웰 등이 이끌었던 이미지즘 운동도 이 시각 이미지를 중요시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 시각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명도(brightness), 채색도(clarith), 질감(tone-color)등에 의하여 다양하고도 미묘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낙조 타는 강을
배 한 척
흘러 가고
먼 하늘
저녁 연기
대숲에 어렸는데
푸른 산
떨어진 머리
백로 외로 서 있다.
이호우의 <모강> 전문
위 시에서 보는 바처럼, 시각 이미지가 전편을 떠받치고 있다. '낙조 타는 강과 배 한 척'은 붉은 색과 흰색의 색채감을, '저녁 연기'와 대숲은 흰색과 초록색의 색채감을, '푸른 산과 '백로'는 푸른 색과 흰색의 색채감을 각각 부각시키면서 대조 및 조화를 이뤄 놓고 있어서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느낌은 시각 이미지를 통하여 독자에게 전달되도록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모란꽃 이우는 하양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선도산
수정 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박목월의 <모란 여정> 전문
위 시에서도 1연의 '하얀', 2연의 '청모시', 3연의 '수정 그늘 어려 보랏빛' 등이 어울려 4연의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을 모두 시각 이미지로 처리하여 황혼 무렵에 강을 건너는 여인을 시적 형상화로 잘 포착해 내고 있다. 특히 4연에서 시각적 촛점이 모아져 여러 색채가 한덩어리가 되게 하고 있으며 청모시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신비롭게까지 느껴지게 하고 있다.
가지마다 파아란 하늘을
받들었다.
파릇한 새순이 꽃보다 고옵다.
청송이라도 가을 되면
홀홀 낙엽진다 하느니
봄마다 새로 젊는
자랑이 사랑옵다.
낮에는 햇볕입고
밤에는 별이 소올솔 내리는
이슬 마시고
파릇한 새순이
여름으로 자란다.
박두진의 <낙엽송> 전문
여기서도 1연의 '파아란'과 '파릇한', 2연의 '청송', 3연의 '낮'과 '밤', 4연의 '파릇한' 등의 시각 이미지의 어울림이 이 시 전체의 의미구조를 떠받치고 있다. 즉, 자연의 세계를 관조하고 그 색채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그의 세계와 친화하면서 그 생명력과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사랑할 때 생명의 경이와 그 의지를 감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 시각 이미지의 역할이 지대함을 알게 된다.
청각 이미지는 리듬이나 의성어 등의 청각적 형상에 의존하는 이미지인데, 시에서의 청각 이미지란 그 이미지가 작품 속에서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인정된다.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도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그리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박두진의 <청산도> 중에서
이 시에서 1연의 '철철철 둥둥, 울어오는 뻐꾸기' , 2연의 '울어라, 흐르는, 스며드는 물소리, 줄줄줄' 등이 한자리에 어우러져, 산이 울고 뻐꾸기가 울고 골짜기가 울고 물소리가 울고 그리하여 볼이 고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나의 가슴이 울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연과 고향으로의 회복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됨을 시적 형상화로 이뤄내고 있다.
여자 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은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 정구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재거리고 있엇다.
김종길의 <춘니> 전문
위 시에서 '연식 정구 흔 공 퉁기는 소리',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재거리고 있었다'라는 청각 이미지의 활용이 현대감각을 잘 살려 놓으면서도 새봄의 활기와 의욕을 보다 실감있게 느끼게 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한하운의 <개구리>전문
이 시를 천천히 읊조리다보면, 개구리와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감칠 맛이 나게 되는데, 이게 청각 이미지의 효용 덕분이라 여겨진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최냥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설야> 중에서
이 시는 눈오는 정경을 청각 이미지로 형상화시켜 놓음으로써, 화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추억과 애상의 세계를 잘 구현해 놓고 있다 하겠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전문
여기서 우리는,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과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가 '선운사'라는 시어와 만나 수도자의 또다른 깨달음을 갖게 하는 청각 이미지의 효과를 만나볼 수 있게 된다.
후각 이미지는 냄새와 직접, 간접으로 연관성을 맺어 효과를 내고 있으며, 이는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와 어울려 작품의 총체적 의미구조를 돕게 된다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
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
중톳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
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
개평 돼지 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
끗발나던 금광시절 요리집 얘기끝에
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
벌써 예니레째 비가 쏟아져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
작업복과 뼈속까지 스미는 곰팡내
신경림의 <장마> 중에서
여기서 '퀴퀴한 돼지 비린내'와 '곰팡내'는 '사랑방', '헛간', '새우젓, '요리집', '비', '주머니',
' 작업복' 등과 같은 후각 이미지를 동반하는 시어들과 어울려 어딘가 퀴퀴하고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음산하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창출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어렵게 그날그날 살아가는 공사장 인부들의 심경이 비오는 날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떠오르게 하고 있다.
아카시아 나무들 사이 사이에
라디움의 여광보다도 진한
라사 같은 나의 체취와 같은
염산 냄새를 마시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나와 같은
수없는 나를 항거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껏......
노병인 채 살아야만 했습니다.
김종문의 <불안한 토요일> 중에서
위 시에서 '염산 냄시'는 '아카시아 나무들 사이', '라디움의 여광보다도 진한', '나사 같은 나의 체취와 같은' 등의 후각 이미지들과 어울려 인간의 정서나 감정보다도 기계적 문명을 더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맹점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로써 오늘의 정신이 예리하게 검증되고 있다.
미각 이미지는 맛을 보게 하거나 맛과 연관된 소재를 활용하여 마음의 그림을 그려가는 이미지인데, 이는 대개 후각 이미지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땅에 긴 긴 입맞춤을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이빨이 허어옇게
짐생스런 웃음은 달드라 달드라.
서정주의 <입맞춤> 중에서
이 시에서 '입맞춤'과 '쑥니풀'과 '짐생스런 웃음'은 '몸서리친','지근지근', '달드라 달드라'라는 다분히 미각을 자극하는 시어들을 통로로 하여 어딘지 가난하고 힘겨운 삶의 한 과정을 그림을 그려 설명하듯이 형상화해 놓고 있다.
은쟁반 속에
그 과수원은
싱그러운 가을 바람
사과 배 청포도
그것들은 포개 쌓인 피라미트 형의 자세로
피곤한 한숨을 잔다.
위대한 음악의 반주로
입체의 핵과 핵은
심연의 사상.
하나의 계시
원의 울타리 속
원숙한
발효
그리고
생명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사자의 치아 앞에서
돌과 같이 굳어져 있는
과일들의 인력.
그 하이얀 에프론
위에 과수원
아침
햇살에
난무하는
미각의 나이프
하나.
구경서의 <정물> 전문
위 시는 정물을 대하는 자세를 보다 날카롭게 보다 발랄하게 보다 풍요하게 보다 철학적으로 이끌어가면서 결국에는 미각 이미지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내일을 창조하는 철학관을 작품의 그릇 속에 담아놓고 있다.
눈여계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으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입술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한용운의 <여닌> 전문
위 시에서 3연 1행 '엷은 입술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라는 미각 이미지의 활가치와 그 효과는 이 시 전체 구조를 고려해 볼 때 아주 크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화자와 여인간의 시간과 운명을 밀착시켜 주고 있으며 어딘지 친근하고 정겨운 느낌을 수반해 주고 있어서, 작품 전반에 흐르는 "지난날에는 인식하지 못한 만유에의 진선미와 외경"이 느껴지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관감각 이미지는 가령 맥박이나 심장의 고동과 같은 호흡기나 순환기, 또는 소화기의 신체적 기관들을 통하여 느껴지게 하는 이미지인데, 이는 인간의 관능적, 본능적 분위기를 포착하는 시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픔 견딤이랴
이영도의 <황혼에 서서> 중에서
이 시는 '목메인 듯','숨죽이고' 등의 기관감각적 이미지를 밑거름으로 하는 시어를 동원하여, 사랑을 육성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고결한 영혼과 온몸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던져 주고 있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밭 사이 길이 있어
아편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쫒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닳아......
서정주의 <대낮> 전문
여기서는 '자는 듯이 죽는다는', '아편 먹은 듯 취해',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왼몸이 닳아' 등의 기관감각 이미지들을 각연마다 적절히 배치하여 관능적이고 원색적인 분위기를 이뤄 놓은데 성공하고 있다.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시향 방촛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쁨 숨결이야.
서정주의 <화사>중에서
여기서도 '석유 먹은 듯'(소화기)과 '가쁜 숨결'(호흡기)이라는 기관 감각 이미지들이 교묘히 결합되어 작품 전체에 관능적이고 원색적인 시적 분위기를 이뤄 놓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로써 이 시는 인간의 원죄와 그 업고를 담은 총체적 의미구조를 구축하는데 용이한 터전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촉각 이미지는 냉온감각이나 감촉을 통하여 시적 형상화를 이루는 이미지인데, 이는 보통 열감각 이미지(heat image),냉감각 이미지(cold image), 그리고 감촉 이미지(texture image)로 누뉘어 진다.
열감각 이미지는 온기를 느끼게 하는 이미지로써 정감어린 시구에 많이 쓰인다.
저녁 냄새가 번지는 미소
그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유난히 커다란
모나리자의 손을 느낀다.
두껍고 따듯하다.
..............................................
놀빛 속에 입술이 흐르는 구나
고원의 <모나리자의 손> 중에서
여기서 모나리자의 손이 화자에게 느껴지는 감각은 따뜻하다. 그리하여 '놀빛 속에 입술이 흐르는 구나'라는 3연의 의미를 떠받쳐 주는데 기여하고 있다.
냉감각 이미지는 냉기를 느끼게 하는 이미지로써 슬픔과 이별을 소재로 한 시구에 많이 쓰이고 있다.
오늘 아침엔 바람이 차왔어요.
밖에 나갔던 동생이 그랬어요.
웃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차운 두 손을 훌훌 불었어요.
벌써 그렇게 춥다고 하느냐고
놀려 줄래도 놀릴 수 없잖아요?
밤새에 내린 첫서리 시리다고
단풍잎새도 저렇게 붉었는데......
김종길의 <첫서리> 전문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김동명의 <파조> 중에서
위 두 시에서는 냉감각 이미지가 제시되어, 시의 흐름이 차갑게 느껴지고 있는데, 이는 시의 계절감 및 의미구조와 밀접한 상관성을 유지시켜 나가고 있다.
감촉 이미지는 직접 피부로 느끼는 듯한 감촉을 통하여 형상화되는 이미지인데, 이는 열감각 이미지나 냉감각 이미지, 또는 근육감각 이미지와 함께 어울려 쓰여 그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함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갈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의 <"育?위한 서시> 전문
물터에는 말이 없다.
물터에 모인 여인들의 피부엔
맑은 비늘이 돋힌다.
나도 어머니의 고향이 그리워
희어서 외로운 손을
샘 속에 담구어 본다.
해협에 빨간 태양이 뜨면
잠이 길어진 사나이들을 두고
마을 여인네들은 샘터로 나온다.
밤새 불은 유방에 해가 물든다.
꿈이 젖는다.
조병화의 <샘터> 중에서
위 두 시에서 주로 사용된 이미지는 감촉 이미지이다. 이는 시의 흐름과 화자의 말에 생명감과 신선함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주제 구현을 도와 주고 있다.
근육감각 이미지는 근육의 긴장과 이완, 또는 그 움직임을 나타내주는 역동적인 이미지를 말하는데, 이는 감촉 이미지와 함께 사용되기 쉽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에서
여기서 '쥐어다오'와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와 같은 어휘가 구축하는 이미지는 근육감각 이미지로써, 이는 이 시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금시 한 마리 벌레로 기어갈 듯이
발딱발딱 살아나는 슬픔.
문덕수의 <손수건> 전문
나를 떠나보내는 언덕엔
하늘과 강 사이를 거슬러
허우적이며 가슴을 딛고일어서는
내게만 들리는 저 소리는 무언가.
성춘복의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중에서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정희성의 <답청> 중에서
위 세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근육감각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근육의 움직임을 기저로 하여 때로는 소외감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때로는 의지로 그 역동적 세계를 형상화시켜 놓고 있다.
지각적 이미지 중 어느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어 표현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서로 상이한 감각이 공명현상을 일으켜 독특한 효과를 드러내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게 바로 공감각 이미지이다.
공감각(synesthesia)은 한 가지 감각이 자극되어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을 일컫는 용어이다. 문학에 있어서 이 용어는 한 가지 감각의 묘사로써 다른 감각을 묘사할 때, 즉 소리에 색채가 가미되거나. 색채에 냄새가 가미되거나, 혹은 냄새에 소리가 가미되는 경우에 적용되고 있다.
감각전이(sense transference), 또는 감각유추(sense analogy)등으로 불리우는 이 현상의 복잡한 예로 셸리의 <감각이 있는 나무>중 일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주빛, 하양빛, 파랑빛 히야신스,
그 꽃 속에서 달콤한 종소리가 새로이 울려 나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강령한 음악이 울려,
그 소리 속에 향내가 묻어나는 것 같네.
And the hyacinth purple, and white, and blue,
Which flung from its bells a sweet peal anew
Of music so delicate, soft, and intense,
It was felt like an odor within the sense.
여러가지 색깔을 띤 종이 모양의 꽃들이 음악소리 같은 종소리를 울려 내어 그것은 마치 히야신스의 향내인 양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 키이츠는 <나이팅게일의 노래>에서 서늘한 술 한 모금이
꽃의 여신 플로라와 푸른 들판
춤과 프로방스의 노래, 햇볕에 그을은 환락을 맛보게 하네
Tasting of Flora and the country green,
Dance, and Provencal song, and sunburnt mirth;
라고 노래하여, 술 한 모금이 정경, 색깔, 동작, 음향, 열기를 맛보게 한다고 했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는 호머 이래의 여러 문학 작품에 산재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19세기 중엽과 말엽의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에 의해 많이 활용되었다. 보들레르의 소네트,만물조응(Correspondences)과 랭보의 모음들의 색깔에 대한 소네트 중 "A는 검정색, E는 하양색, I는 빨강색, U는 초록색, O는 파랑색"을 보면 쉽게 공각각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된다
다음의 예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애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유치환의 <깃발> 중에서
이 시에서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깃발의 펄럭이는 시각 이미지를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청각 이미지로 전이시키고 있다 하겠다. 이로써 공감각 이미지가 그 효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그리하여 푸른 해원으로 가려 하지만 깃대 끝에 메달려 애타하는 깃발의 안타까움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게 하고 있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당이 꺼지는 소리
오탁변의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중에서
이 시에서 '나무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은 처음에는 촉각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시각 이미지로 전이의 통로를 거치는 동안 참신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아울러 이 시의 흐름에도 적절한 표현이 되고 있어서 공감각 이미지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 전문
여기서의 '붉은 울음'은 청각 이미지에서 시각 이미지로 전이시킨 공감각 이미지로써 좋은 예라 하겠다.
시간의 둔탁한 대문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선
밤이
어스름과 부딪쳐
기둥을 끌어 안고
누우런 밀밭을 밝고 온
그 밤의 신발 밑에서
향긋한 보리 냄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오규원의 <분명한 사건> 중에서
이 시에서의 '향긋한 보리 냄새가/어리둥절한 얼굴로/고개를 내밀고 있다'는 후각 이미지가 후각 이미지로 전이되어 있어서 매우 신선하고 참신한 표현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또한 공감각 이미지의 효용성을 맛보게 한다.
다음은 비유적 이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비유적 이미지란 비유에 힘입어 제시되는 이미지, 즉 직유나 은유나 의인화나 제유나 환유 등과 같은 비유에 의해 성립되는 이미지를 일컫는다. 이는 서로 이질적이거나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요소를 한 문맥이나 어휘 속에 수용하는 구실을 해냄으로써, 단순히 감각기관에 직선적으로 대응하는 지각적 이미지와 달리, 여러 경험적 요소를 다양하게 통합하고 포괄하고 응집하는 성격이 강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각적 이미지가 리처즈가 말하는 배제시(exclusive poetry : 그냥 느낀 광경, 본대로 쓴 것, 경험과 충동을 단순화 시킨 것을 말한다. 내용이 깊지 않고 가볍다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이질적인 것은 배제하고 동일한 경험만을 통합한 것이 그 특징이다에서 주로 쓰이고 있는 반면, 비유적 이미지는 포괄시(inclusive poetry : 함축적 의미를 가진 시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줄 수 잇는 여러가지 충동을 시가 두루 포괄해서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에 주로 쓰이고 있다.
비유적 이미지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다양한 결합을 통하여 가치의 다원성과 경험의 총체성 및 삶의 심원등 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언어는
꽃잎에 닿다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에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문덕수의 <꽃과 언어> 전문
이 시는 비유적 이미지 중 직유나 은유의 표현기법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언어와 꽃을 교묘히 결합시켜 놓고 있으며, 나아가 새로운 생명력의 탐구라는 주제에 걸맞게 이미지를 배치시켜 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재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ㅎ람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향수> 전문
이 시 전체에 줄곧 흐르고 있는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며, 이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고향의 이미지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질화로위 재' , '짚벼개를 돋아 고이는 곳', '풀섶 이슬', '귀밑머리', '발 벗은 아내', '서리 까마귀',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 등과 같은 비유적 이미지가 여타의 지각적 이미지와 손잡고 해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고향의 모습은 마치 독자가 직접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도 정겹게 떠오르고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
이번에는 상징적 이미지에 대해 살펴보자. 한 작품 속에서 되풀이 사용되는 이미지가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면서 점차 작품의 중심적 의미를 제시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상징적 이미지라고 한다. 이는 보통 한 시대나 한 종족과 민족집단의 여러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 작가의 전 작품 속에 되풀이 또는 패턴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이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되면, 무어라 확정짓기는 힘들지만 그 숨긴 뜻이 추상적이고도 함축적인 성격과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이 상징적 이미지는, 개인이나 어떤 유파의 정신 성향이나 기법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는 비유적 이미지에 비해, 그 뿌리가 좀더 원초적이고 집단적이며 원형적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하겠다. 그러기에 신화비평가들이 작품 속에서 신화, 집단무의식과 상징적 이미지와의 상관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작품의 의미구조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리라.
상징적 이미지의 외형적 특징은 반복적, 유형적, 원형적 이미지로 제시된다는데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형적 이미지가 가장 빈번히 활용되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사향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룬 하늘이다......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서정주의 <화사>중에서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은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절정> 전문
듣거라
너무 고와서 귀 간지러운
꾀꼬리 소리를
듣거라
구성지지만 푸념어린
뻐꾸기 소리를
듣거라
자지러지지만 연약한
종달새 소리를
듣거라
어둠 속에서만 연달아 우짖는
머슴새 소리를,
주인한테 맞아 죽은 머슴 혼백이
되살아나 주인 꾸짖는 듯한 저 소리를,
들판에서 소 모는 듯한
또렷또렷하고도 당당한 저 소리를,
숨돌릴 새도 없이 창문을 깨드릴 듯
단숨에 우짖는 저 소리를 ,
느슨해진 잠을 두들겨 깨우듯
꼭두새벽을 딛고 외치는 저 소리를,
듣거라
후다닥 무릎 고쳐 끓고 앉아
듣거라
현재보다는 미래를 응시하며
듣거라
겉보다는 실상을 투시하며
듣거라
감오 녹두새의 채찍 같은
푸르딩딩한 꾸짖음 소리로
듣거라
겨울나무의 차운 정한 같은
은빛 깨달음 소리로
듣거라 듣거라
박덕은의 <무등산 머슴새의 꾸짖음> 전문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함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지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지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전문
위 네 편의 시들은 그 핵심적인 이미지가 상징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화사.에서는 '배암'이 '사향 박하의 뒤안길, 커다란 슬픔, 징그러운 몸뚱아리, 꽃대님, 달변의 혓바닥,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 원통히 물어 뜽더, 저놈의 대가리' 등의 시어들과 연결되면서 점차 '존재의 모순성 또는 생명의 꿈틀거림'이라는 상징성을 구축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절정>에서는 '겨울'이 '매운 계절의 채찍,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 한 발 재겨 디딜 곳, 강철로 된 무지개' 등의 시어들의 부추김을 받아 점차 그 상징성을 강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겨울은 무엇에겐가 쫓기는 계절이 되고 억압받는 현실이 되어 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극한 상황을 표상하기에 이른다. 이는 자욘스럽게 일제치하의 비극적 민족 상황으로 이어지며, 더불어 의지어린 저항과 불굴의 상징성을 확보하는 이미지로 자리하게 된다. <무등산 머슴새의 꾸짖음>에서는 '머슴새 소리'가 '어둠 속에서만 연달아 우짖는, 주인한테맞아 죽은 머슴 혼백, 또력또렷하고도 당당한 저 소리, 꼭두새벽을 딛고 외치는 소리 푸르딩딩한 꾸짖는 소리, 은빛 깨달음 소리, 등의 시어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억압당한 민중들과 소외층들의 울분을 만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굳센 의지와 생명력에 의해 떳떳히 소생되어 결국에는 불의를 꾸짖는 위치에 서게 되는 삶의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또 다른 고향>에서는 '밤'이 '백골, 방, 우주, 바람, 어둠, 풍화 작용, 눈물, 울음, 혼, 개, 쫓기우는 사람' 등의 시어들에 의해 그 상징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골'과 화자인 '나'와의 끊임없는 회의와 몸부림, 육신은 고향에 왔으나 여전히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자의식, 그러는 과정에서 얻은 고뇌 등이 '밤'이라는 상징적 상황을 통하여 보다 음울하게 보다 암담하게 표상되고 있다. 이 '밤'은 나아가 일제치하의 지식인의 밤이 되고 있으며 그들이 부딪히는 고통스런 현실과 시대 상황을 아울러 상징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영미시의 이해>
영문학의 정수는 시이다. 시는 영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장르로 8세기 전반의 Beowulf에서 시작된다. 반면에 희곡은 14세기경에, 에세이는 16세기에, 소설은 17세기가 되어서야 시작된다. 사실 영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역사를 생각할 때에도 시는 문학의 근원적 양식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문학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원시부족의 제의(ritual) 형식에서 부족의 역사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전수하기 위하여 사용된 언어는 노래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족의 젊은이에게 암송시키기 위한 내용은 무미건조한 산문보다는 운문형식에 담기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 시대 이래로 보편화된 장르인 희곡도 운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Shakespeare의 희곡의 대사도 운문의 형식을 가지는 부분이 절대적이다. 실제로 문학의 언어로 산문만이 쓰인 것은 16, 17세기에 수필이나 소설과 같은 장르가 나타난 이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에 운문의 시대가 가고 산문의 시대가 온 것은 아니다. 보통 우리는 현대가 산문의 시대, 혹은 과학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꾸준하게 쓰여지고 있으며 이전 시대에 비해 결코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심성의 가장 심오한 곳에 대하여 시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더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시는 여전히 문학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예로 시학(Poetics)이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한 제목으로 책을 쓴 이래로 현재까지도 단지 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문학전반에 관한 이론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시를 공부하는 것은 지금도 문학의 핵심부에 접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시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시는 어떠한 내용을 전달하는가 하는 문제와 시는 어떠한 언어형식에 의해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먼저 워즈워드의 다음의 시를 통해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다음의 짧은 작품이 한 편의 시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She dwelt among the untrodden ways 인적 없는 곳에 그녀는 살았다.
Beside the springs of Dove, 다브 강 샘솟는 곳 옆에
A Maid whom there were none to praise 찬미할 이 하나 없고
And very few to love; 사랑해 줄 이 없는 한 처녀.
A violet by a mossy stone 사람들 눈에서 반쯤 가리어진
Half hidden from the eye! 이끼 낀 바위 가의 한 송이 제비꽃!
Fair as a star, when only one 하늘에 홀로 빛날 때의
Is shining in the sky. 별처럼 아름다웠다.
She lived unknown, few could know 그녀는 아는 이 없이 살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When Lucy ceased to be; 루시가 언제 죽었는지를
But she is in her grave, and, oh, 하지만 그녀가 묻히자, 아,
The difference to me! 온 세상 얼마나 달라졌는지!
※3행:whom은 A Maid를 선행사로 하고 praise와 love의 목적어
이 시는 머나먼 시골에 살았던 처녀에 관해 쓰고 있다. 다브(Dove)는 워즈워드의 시대에는 외부와 거의 접촉이 없던 산악지대인 다비쉬어의 피크 디스트릭트에 있는 강이다.
이제 우리가 이 작품을 시라고 정의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생각해 보자. 가장 먼저 이 시의 세 연중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시적으로 여겨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연이 가장 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에 2연과 3연은 어느 쪽이 더 시적인지를 평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3연을 선택한 사람은 3연의 마지막 부분이 가지는 감정적인 여운의 울림 때문에 시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울림은 3연에서 온 것은 아니다. 제2연에서 시인은 그녀를 향기롭고 화려한 색깔을 지녔지만 주제넘지는 않은 "제비꽃"이라고 부름으로써 처녀의 아름다움과 연약함을 암시한다. 그녀는 제비꽃이 이끼 낀 바위에 가려져 있듯이 사람들의 지식으로부터 반쯤 가려져 있다. 이끼는 제비꽃의 전형적인 서식지인 생울타리 밑과 삼림지의 축축함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 처녀가 살았던 자연의 배경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녀는 먼 지역에 있었지만 자연의 초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의 멀리 떨어짐, 외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은 별처럼 빛난다. 해가 빛날 때 별은 그 광휘에 가리우고 해가 지고 나면 하늘은 수많은 별들로 가득 차서 아름답지만 제비꽃처럼 연약한 별 하나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 어느 작은 별 하나가 이렇게 눈에 띄는 유일한 시간은 해가 지고 별이 아직 나오지 않은 황혼 무렵이다. 그러므로 별에 대한 비유는 어스름한 대기를 환기시키고, 이 시의 결말을 예시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2연을 읽으면서 이 시가 결코 happy ending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3연에서야 이 시인은 그 처녀가 죽었음을 말해주면서, 그녀의 죽음이 그에게 끼친 슬픔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시인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어떠한 감정도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녀가 죽음으로써 자신에게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고 지극히 사무적으로 언급할 뿐으로, 시인은 독자들의 느낌은 비유를 통해 그녀를 묘사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에 맡겨두고 있다. 즉 우리가 이 시에서 느끼는 감정상의 파장은 2연의 비유들에서 오는 효과이지 3연의 진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글을 시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를 비유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수학공식이나 화학공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화학자가 자신의 실험에서 사용된 물을 설명하기 위하여 100%의 H2O라고 말하지 "크리스탈 같은 물"이라든지, "깊은 하늘빛 물"따위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비록 실생활에서 그 구분이 모호하기는 하지만(실생활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비유를 사용하므로) 그 정도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유력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하나의 축에 단 한가지의 사물이나 사상을 지시하는 과학적 언어를 놓고 그 반대 축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시적 언어를 놓은 다음 그 사이에 무한히 다양한 정도의 언어들을 시적, 혹은 과학적이라고 분류해 나갈 수 있다. 하여간 우리는 대범하게 정의한다면 시의 언어, 혹은 문학의 언어는 비유어(figurative language)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비유어를 사용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앞의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루시라는 실제의 한 여성을 알았고 그녀의 죽음에 대한 감상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제2연을 읽고 옆의 다른 동료들에게 시인이 사랑했던 것임에 틀림이 없는 이 여인에 대한 인상이 어떠한지를 물어 보라. 아마도 그 대답은 "불쌍하다"에서 "보잘것 없다" "애처롭다", "갸냘프다", "수수하다", "소박하다", "어여쁘다", "아름답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 자신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연민의 정을 표현하는 용어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인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불쌍하다는 것, 혹은 보잘것 없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두 개의 진술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 사람들 눈에 뜨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아니 그토록 아름다운 소녀가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살다가 죽어갈 수 있는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화려한 아름다움은 큰 재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가? 혹시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목록 안에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은 없는지? 사람들간의 신의는 그 속에 포함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목록 안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들 수 있다.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은 혹시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아닐런지?
이제 우리는 이 시인이 산업화되는 시대에 사라져 가는 자연을 루시라는 이름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시인이 살았던 시기는 목가적인 전원이 사라져가고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시커먼 검댕이가 도시를 짓누르는 산업혁명의 시기로 전환되고있던 시점이었다. 자연은 이제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였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운 존재로 여겨졌다.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자연을 보면서 시인은 그 안타까움을 루시라는 소녀를 통해 표현한 것은 아닐까? 워즈워드가 호반시인이라고 불리웠으며 항상 자연을 노래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러한 해석이 더욱 무게를 가지게 된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워즈워드가 살던 이 시대는 르네상스 이래로 이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과학문명이 산업혁명이라는 기계문명의 꽃으로 피어나는 시기였다. 원래 그리스 시대에 플라톤이 인간의 이성을 강조했을 때 이 이성은 직관(Intuition)에 가까운 Intellect 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이성은 단지 수학적인 연역능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성은 밝은 태양처럼 불변의 진리(truth)를 명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낭만주의적인 정신은 진리를 울창한 숲 속에 순간 순간 다른 모습으로 반짝이는(glimmering)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는 혹시 워즈워드가 이성의 시대에 죽어 가는 어떠한 진리를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리란 제비꽃처럼 그렇게 인간의 눈에 반쯤은 가려진 채로 짧은 순간 창공에 홀로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하다가는 다음 순간 수많은 별들 같은 理論의 은하수속에 묻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고등학교시절에 읽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에서 그 님이란 연인인지, 조국인지, 구도자인지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서도 우리는 이 시의 그녀가 의미하는 것이 연인과 자연과 진리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고 결정할 수가 없다. 사실 이 하나의 의미로 결정할 수 없다(undecidable)는 사실이야말로 시가 가지는 본질적인 특징중의 하나이다. 시는 하나의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또한 독자들 나름대로의 서로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넓게 퍼져 있는 들판을 보며 농부는 어떤 작물을 결정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건축가는 새로운 도시를 꿈꾼다. 그러나 시인은 그 들판 속에 스며있는 역사와 농부들의 삶과 앞으로의 미래를 모두 생각한다. 시인은 사물의 어느 한 측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가능한 모든 측면을 언어 속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시인의 정신은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통합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문학, 혹은 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문화권에서 문학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왔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文之爲德也大矣 與天地竝生者何哉 유혁 [文心雕龍]
문의 덕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그것이 하늘과 땅과 생성을 같이 했음은 어찌된 일인가?
동양권의 최고의 문학이론서라 할 수 있는 [文心雕龍]은 그 처음 장에서 글월이 하늘과 땅과 인간이라는 天地人 三才와 그 기원을 같이하며 세상의 삼라만상이 모두 그 문채(文彩)를 가진다고 말하여, 문학과 이 세상의 원리가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인간은 만물을 형성하는 오행(五行)중에서도 그 정화여서 실로 천지의 마음이며, 이 천지의 마음에서 언어가 서게 되고 언어가 서게 되면 문장(文章)이 그 모습을 밝게 들어내고, 이는 바로 자연의 도리(道理)이다"라고 말한다.
문학, 혹은 언어에 대한 생각은 그 근본에 있어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 않다. Milton은 시를 통하여 "신의 길을 인간에게 정당화하려(to justify the ways of God to man)"하며 Pope는 "자주 생각되긴 했지만 결코 그처럼 잘 표현된 적이 없는 것(What oft was thought but ne'er so well expressed)"을 표현하려 했고, 보온의 경우처럼 "순수하고 무한한 빛의 커다란 반지 같은 (like a Great Ring of pure and endless light)" 영원을 보여주려 할 수도 있다. 엘리어트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정신적 불모의 황무지임을 말하며 존 단은 강렬한 정렬을 가지고 사랑의 엑스터시를 전달할 수도 있다. 시인은 온갖 다양성을 지닌 인간체험에 상응하며 또 인간체험을 해석한다.
사실 서양의 문학전통은 문학이 바로 이 세계의 모방이라고 말하며, 한 술 더 떠서 현대의 구조주의는 인간은 언어구조를 통하여 이 세계의 구조를 생성해낸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무지개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지개의 색채를 "빨주노초파남보"로 알고 있다. 그러나 비가 그친 후에 잠시 드러나는 무지개를 사심 없이 바라보라. 거기에는 빨강과 주황을 구별해주는 어떠한 경계도 없다. 무지개는 우리가 빨간 색이라고 알고 있는 색채로부터 보라로 인식하고 있는 색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구분도 없는 아름다운 색채들의 연속일 뿐이다. 세상사는 참으로 이러한 것이어서 실제로는 차갑고 따듯한 것을 명확하게 나눠주는 절대적인 기준도 없으며, 선함과 악함을 재는 절대적인 도덕관념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언어체계를 통해 이 세계를 구획지으며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문학이 추구하는 것이 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세계를 비연속적으로 구획짓는 과학적 언어를 넘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와는 다르다. 그렇지만 문학이 이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에 있어서 여전히 문학과 세계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이 문학 속에 반영되어 있건 아니면 우리의 언어구조가 세상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문학은 곧 우리의 삶이며 정신이다. 나아가서 우리의 정신 속에 반영되어 있는 이 세계이기도 하다.
시는 그러한 의미에서 다른 예술과도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소설을 쓰는 사람을 소설가, 희곡을 쓰는 사람을 극작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화가, 음악을 하는 사람을 음악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시를 짓는 사람은 詩家가 아니라 詩人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시에서만은 어떠한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인간의 내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詩家가 아니라 詩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 기술의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의 본질이 이 세계의 내적 존재와 교감하는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산 속 깊은 마을에서 일생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참다운 인간이 되었던 어느 농부가 자신의 깨달음을 언어를 통하여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을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물론 깨달음을 말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시는 아니다. 그러한 표현이 시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적인 요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인간이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는 한 형태이다. 아름다운 음악적 형식을 지니지만 언어로 표현하는 할 내용이 없는 스켈 송은 시가 될 수 없으며, 아무리 심오한 사상도 시적 형식에 담겨져 있지 않으면 시라고 불릴 수 없다.
여기서 시적 형식이란 운문을 의미한다. 운문은 산문과는 달리 미리 결정된 길이의 시행(line)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앞의 시의 7행과 8행 사이에서 볼 수 있듯이 구문론이나 의미론에 의해 요구되는 구분과는 무관하다. 이 두 시행에서 행의 구분은 주어와 술어사이에 있다. 더구나 두 시행은 규칙적인 리듬을 가진다. 즉 전체적으로 비강세음절과 강세음절이 교대로 일어난다. 물론 7행의 fair와 as처럼 분명한 이탈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단지 소규모의 변주처럼 느껴질 뿐으로 약강격의 리듬패턴은 강력한 형식적 통일을 이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약강격의 리듬은 각 4개의 연(stanza)에서 각기 1, 3행은 4개의 강세, 2, 4행은 3개의 강세를 가지는 반복된 패턴을 보여준다. 그밖에도 각 연에서 1, 3행과 2, 4행은 서로 압운하고 있다.(ways-praise, Dove-love/ stone-one, eye-sky/ know-oh, be-me) 이러한 규칙성은 시에 정형화된 형식을 주며 리듬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리듬감을 가지는 글을 우리는 운문이라고 부르며 시의 형식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시가 이러한 규칙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현대로 나오면서 시의 형식은 점점 자유화되는 경향을 가지며 심지어 산문시도 쓰이고 있고 기존의 시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가지는 특이한 형태의 시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완전한 규칙적 리듬을 가지면서도 전혀 시라고 불리지 못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 말의 구구단을 생각해보면 완전한 율격과 리듬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시로 인정하지 않는다. 혹은 역사를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운율에 맞추어 학생들에게 노래부르도록 시킨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그런 것들을 어떠한 문학의 장르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인가? 문학을 다른 종류의 글들과 구분시켜주는 특징은 무엇인가? 실제로 문학은 여러가지 다양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어떠한 특정한 기능을 문학의 특징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도리어 문학의 특징은 바로 문학이 허구이며 독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사용하게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은 그 진술이 사실이거나 문자그대로 진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점에서 허구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사건, 무드, 태도, 감정 따위를 우리에게 제공할 때, 그는 그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것을 傳寫(transcription)한 것으로 믿도록 청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우리가 그것들을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앞서의 시에서 우리는 루시라는 소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관없다고 밝힌바 있다.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루시라는 소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인이 "I"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허구적인 나레이터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시는 운문으로 쓰여진 상상문학이다.
<참고문헌>
이선우 (원주대학교) “이미저리 연구논문”
강우석 박제천 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진 김행숙 저 “문학의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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