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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환상 ―시적 환상의 이해를 위해 / 이은봉 정리 [스크랩]
2018년 11월 13일 21시 01분  조회:1518  추천:0  작성자: 강려
상상과 환상
―시적 환상의 이해를 위해
 
 
이은봉 정리
 
 
1. 혼돈과 무질서1)
 
우주는 혼돈과 무질서로, 미지의 신비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거시의 세계만이 아니라 미시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우주물리학의 대상인 거시의 세계 역시 혼돈과 무질서로, 미지의 신비로 가득 차 있지만 양자역학의 대상인 미시의 세계 역시 혼돈과 무질서로, 미지의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거시의 공간도 텅 비어 있는 비의의 존재이지만 미시의 공간도 텅 비어 있는 비의의 존재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 공간이 무질서와 불확정성 그 자체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이들 공간이 환상성과 혼돈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환상성과 혼돈성을 토대로 하고 있기는 흔히 소우주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의 심리세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심리는 언어를 통해 현현되거니와, 언어의 밑바닥에 무의식이라는 혼돈이, 곧 환상(幻想)이 깊이 자리해 있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이 혼돈을, 즉 혼돈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환상(fantasy)은 언어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해 있는 무의식적 이미지의 표현, 곧 혼돈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을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프로이트나 융, 라캉의 연구대상도 이때의 무의식적 환상과 별로 멀지 않다. 무의식적 환상은 본래 주체가 받는 억압과 금지, 핍박을 통해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의 시가 거시의 세계보다는 미시의 세계에 좀 더 집착해 있다는 점이다. 지나칠 정도로 사적인 세계, 트리비얼한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시이지 않은가 싶다. 지나칠 정도로 사소한 공간, 곧 미시한 공간을 시적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시라는 것인데, 어쩌면 그래서 오늘의 시가 독자들과의 소통을 문제로 삼는지도 모른다.
 
2. 환상의 발생
 
환상이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렇다. 환상은 무의식에서 태어난다. 시에서의 환상, 곧 시적 환상은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을 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다.의식에 의해 질서의 안으로 들어온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시적 환상이다. 그럴 때 시적 환상은 소통과 공감을 만든다.
 
프로이트에게는 환상이 응축과 치환의 심리를 통해 일어난다. 응축은 은유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고, 치환은 환유의 형태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
라캉에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서 출현하는 환상, 곧 상상계적 환상이 있고, 타자에 대한 욕망이 금지되는 데서 출현하는 환상, 곧 상징계적 환상이 있다. 라캉에 의하면 거울단계에서의 어린 아이는 거울에 비친 환상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소문자 타자를 생성한다. 이 소문자 타자는 상징계에 들어서면서 대타자와 만나는데, 대타자는 절대적인 아버지와 언어, 법률 등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언어, 법률 등 엄중하고 위엄한 것인 대타자는 금지의 대상이기 쉽다. 이들 금지의 대상, 즉 대타자는 끊임없이 욕망을 발생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욕망이 주체에 의해 발생하지 않고 타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의 욕망이 주체의 정신 내면에 무의식적 환상으로 출현한다. 말하자면 환상이라는 것이 대타자에 의해 억압된 심리기제에서 발생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환상은 주체에 의한 욕망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욕망에서 비롯되거니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소외는 일어난다.
소외를 벗어나려면 타자에 의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 곧 타자에 따른 욕망과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흔히 이를 ‘환상가로지르기’라고 한다. 소외된 주체는 ‘환상가로지르기’를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성찰하는 가운데 진정한 욕망에 이르는데, 정신분석학에서는 바로 이것이 목표이다.
환상 자체는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보다 훨씬 더 절대적인 대타자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병리적인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이 아니다. 병리적인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을 주목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인간의 몸이 무의식적인 환상을 발생시키기 쉬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세 개의 이미지인 그림자, 영혼, 탈로 구분해 원형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또한 실제로는 환상과 다르지 않다.환상 자체가 대타자라면 원형 자체도 대타자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그렇다면 환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통적인 학습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으로 들어와 대타자로 구조화되어 있는 셈이 된다. 물론 시적 환상을 곧바로 여기서 말하는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가공되지 않은 무의식적 환상이 시적 환상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상상과 환상
 
자본주의적 근대가 진행되는 동안 환상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이 시기 동안 환상은 대부분 무가치한 대상으로 버려져 있었다고 해야 옳다. 그동안은 현실을 왜곡시키는 비주류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왔던 것이 환상이다. 중세와는 달리 근대에는 환상보다는 상상(想像)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의 중심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탈근대의 세계로 진압하면서 환상은 상상에 못지않은 중요한 이미지 사유로 재발견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환상의 시대에서 상상의 시대로, 상상의 시대에서 환상과 상상이 공존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상은 본래 설화의 세계, 곧 신화, 전설, 민담이나 원시예술, 종교적 세계의 주요내용을 이루어온 바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설화, 그리스 로마의 신화, 기독교의 바이블, 불교의 경전 등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탈근대의 시대는 환상의 회복을 통해 인류 초기의 시원성 혹은 원시성을 회복해가는 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원시예술이 지니고 있는 신화적 신비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이 인류의 단기적인 미래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환상에서 상상으로의 이행, 곧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확실성의 세계로의 이행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미지에서 기지로, 신비에서 현실로, 관념에서 구체로, 비합리에서 합리에로의 이행과정으로 이해해도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이로 미루어 보면 상상의 세계는 개연성의 세계를 가리킨다고 해도 무방하다. 있음직한 세계, 예측이 가능한 세계에 대한 전망을 담는 것이 개연성의 세계이고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상상이라는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 맨 처음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코울리지이지만 그것의 구조를 체계화시키고 집대성시킨 것은 바슐라르이다.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소로 세계의 모든 사물을 구조화시킨 바슐라르가 이미지의 사유의 하나인 ‘상상’을 가장 설득력 있게 체계화시킨 사람이라는 것은 덧붙여 강조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네 가지 원소와 그 변형을 중심으로 논문을 쓰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바슐라르의 상상에 대한 연구는 놀랄만하다. 그러나 상상이 오성,곧 이해력과 함께 사유의 중요한 두 축으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해력과 함께 상상력이 인식의 두 코드로 인정받는 데는 플라톤 이후 근대에 들어설 때까지 무려 2000년의 세월이 요구되었다는 뜻이다.
이해과 이성이 서로 다른 추상사유능력이듯이 상상과 환상도 서로 다른 구상사유(이미지사유)능력이다. 물론 그것들 사이의 변별성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도 여기서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상상과 환상이 각기 같으면서도 다른 심리상태, 곧 사유형태라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상상과 환상은 쉽게 대조, 비교될 수 있거니와, 우선 상상이 현실에 기초한 이미지 사유라면 환상은 비현실, 신비나 비의의 세계에 기초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환상에 대한 긍정은 비현실, 신비나 비의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 되기도 한다.많은 사람들이 탈근대, 후기근대, 자본주의 이후 등을 얘기하고 있거니와, 이 시기는 이제 상상보다는 환상을 상대적으로 더 필요로 한다. 오늘의 예술은, 곧 문학, 영화, 게임, TV드라마, 애니메이션은 이제 환상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창작되기 어렵다. 복잡한 환상의 개입이 없이 평범한 상상만으로 생산되는 오늘의 예술이 독자들의 구미를 맞추기는 힘들다.
 
현대예술이 불가피하게 환상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의 토대가 되는 불확정성, 혼돈 등 또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과도한 이성의 개입에 의해 주류를 형성해왔던 상상을 옆으로 좀 비켜 세우고, 그 자리에 신비나 비의로서의 원시적이고도 시원적인 시각을, 곧 환상의 시각을 불러 세우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환상의 수용은 원시의 상태로, 시원의 상태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노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해야 옳다.
 
4. 상상과 환상의 통합
 
상상과 환상의 차이는 결국 현실 중심의 이미지사유와 비현실 중심의 이미지사유의 차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상상이 모더니즘과 관계하며 ‘새로움의 유희’를 추구한다면,환상은 아방가르드와 관계하며 ‘다름의 유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상상이 상대적으로 형식이나 질서, 구체성을 소중히 여긴다면 환상은 무형식이나 혼돈, 관념성을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좋다. 상상이 알 수 있는 것(기지)에, 사실이나 진실에 기대고 있다면, 환상은 알 수 없는 것(미지)에, 신비나 비의에 기대고 있다고 해야 옳다. 상상이 이차원적인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인식능력이라면 환상은 이차원적인 이미지에 입체성을 부여하는 인식능력이라는 것이다. 상상이 대지와 현실,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미지 중심의 심리라면 환상은 하늘과 비현실, 관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미지 중심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사유, 곧 이미지심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실제적으로 구현되고 실현되는 과정이나 토대는 다른 것이 상상과 환상인 셈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상상과 환상의 충돌은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나날의 현실과 생활에 토대를 두고 있는 유교적 세계관과, 비현실적과 꿈에 토대를 두고 있는 불교적 세계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상상과 환상은 상호충돌의 측면으로 길항하거나 갈등하기보다는 상호공존의 측면으로 화합하거나 통합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상호공존, 현실과 꿈의 상호공존,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공존을 뜻하니 만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새로운 문학, 새로운 미래의 시는 상상과 환상이 행복하게 결합되고 통합되는 데서 가능해지리라는 자명하다.
상상과 환상을 행복하게 결합하고 통합하는 일은 일단 환상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환상에 대한 무분별한 도취가 소통의 어려움을 만들고,시의 난해성을 만든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 시단에 소통의 문제가 거듭 제기되었던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의 난해성에 대한 논의는 항용 시의 애매성에 대한 논의로 전이된다. 이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것은 시의 애매성이 정작의 시에서는 입체성과 깊이를 더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애매성과 다른 것이 시의 애매성이라는 것인데, 이는 일반적인 환상과 시적 환상이 다른 것도 이에 그대로 상응한다.
 
 
5. 시적 환상을 위하여
 
정신분석학에서는 보통 두 가지 환상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무의식적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적 환상이다. 무의식적 환상은 정신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환상을 가리키고, 의식적 환상은 백일몽 등처럼 정신의 표면에 나타난 환상을 가리킨다. 프로이트나 융, 라캉 등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때의 의식적 환상이다. 하지만 이때의 의식적 환상은 새로운 미래의 시의 창작과 관련해 여기서 말하는 의식적 환상과 많이 다르다. 여기서의 의식적 환상은 시적 환상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환상이 부정확함에 기초하고 있다면 의식적 환상은 비정확함에 기초하고 있다. 비정확함은 정확함을 위해 엄밀하게 의도된 것이고, 부정확함은 문자 그대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의식적인 환상의 토대가 되는 것이 비정확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 환상은 일반적 환상의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비정확성에 기초해 환상을 제어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의식적 환상이거니와, 이 의식적 환상에 의해 시적 환상이 발생한다. 일반적인 환상과는 달리 의식적 환상의 결과인 시적 환상은 들끓는 혼돈에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는 시인의 각성된 눈에 의해 태어난다. 말하자면 시적 환상은 환상의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각성된 정신행위라는 것이다.
환상과 상상이 만나 조화롭게 통합되는 자리에도 일반적 환상을 제어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의식적 환상은 존재한다. 환상과 상상이 만나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국시의 새로운 풍요를 얻기가 힘들다. 환상과 상상이 만나 조화롭게 통합될 때 한국시가 훨씬 더 찬란한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환상과 상상의 통합은 혼돈과 질서의 통합이거니와, 혼돈과 질서의 통합, 곧 카오스모스로서의 세계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의식적 환상은 실질적인 창작의 매개가 되는 정작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 환상이라는 도구를 가질 때 시인은 이차원적인 상상의 이미지에 입체성을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시의 표현영역이 엄청나게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한국시가 의식적 환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적 환상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환상과 상상의 통합, 곧 혼돈과 질서의 통합 한국현대시의 바른 활로를 틀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환상과 상상이 제대로 통합된 시가 어찌 소통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시가 어찌 소통을 걱정할 수 있겠는가.(2012. 8. 20 이 글은 『시와환상』 2011년 겨울호(통권 3호)에 수록된 원구식 시인과 김제욱 시인의 대담 「상상과 환상의 통합 2」의 내용을 필자가 첨삭, 정리한 것이다.)

1)  이 글은 『시와환상』 2011년 겨울호(통권 3호)에 수록된 원구식 시인과 김제욱 시인의 대담 「상상과 환상의 통합 2」의 내용을 필자가 첨삭,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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