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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 빠진 의자 / 유종인
2018년 12월 24일 17시 43분  조회:694  추천:0  작성자: 강려
저수지에 빠진 의자
 
유종인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 그림자를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이선의 시 읽기>
 
                  ‘시’의 의자에 앉은 ‘사유’의 물살
 
  ‘저수지에 빠진 처녀’ 이야기라면, 달콤한 사랑과 배반이 흥미를 끌 것이다.
  ‘저수지에 빠진 남자’ 이야기라면, 실직의 고달픔, 가장의 비애가 출렁일 것이다.
  ‘저수지에 빠진 할머니’ 이야기라면, 자식의 짐이 되기 싫어 택한 죽음의 방법으로 수면제보다 물이 더 안전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뜬금없이 ‘저수지에 빠진 의자’가 주인공이다?
  유종인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저수지에 둥둥 떠다니는 보잘 것 없는 의자에 집중하고 있다.
 1. 의자는 다리가 부러졌다
 2. 의자는 물속에 빠져있다
  저수지라는 갇힌 공간에서,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헤엄을 쳐서 저수지를 벗어날 수도 없다.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갈 힘도 없다. 그러나 평생 남의 엉덩이만 받아주던 의자는 누군가의 버팀목이었다. 누군가의 의지처였다. 지금,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의 양수같은 저수지에 첨벙 뛰어들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누군가의 뒤에서만 존재하던 다리병신 의자는 누워서 편히 쉬고 싶은데 편히 죽을 수도 없다. 그 힘없는 절름발이 의자에게 ‘물줄기가 기대고, 산 그림자가 앉고, 물고기들이 둥지로 삼으려 모여’든다. ‘제 울음에 기댈 수 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5연 1-2행)게는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이 있다. 죽음 이후에도 끝내지 못한 의자의 삶이 있다. 하늘과 땅, 물과 물고기들을 의자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아니 이미 죽었는데), 죽음 이후에도 부양하고 있다.
  아니, 의자는 영원히 타인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짊어진 능력자로, 긍정의 힘으로 해석하여야 할까?
  ‘의자’는 많은 시인들이 사랑한 시적 대상이다. 관념적 의자, 사물의 의자, 바닷가에 버려진 의자, 공사장에 버려진 의자, 삐걱거리는 의자, 필자의 ‘빨간 손바닥의자’까지. 그러나…
  유종인의 ‘의자’는 가장 성스러운 의자다
  유종인의 ‘의자’는 사유하는 의자다
  유종인의 ‘의자’는 봉사하는 의자다
  유종인의 ‘의자’는 유종인 자신이다
  유종인의 ‘의자’는 유종인의 삶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모든 우주와 자연, 인간을 앉히고도 넉넉한 그의 인품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질 것이다.
 
  ‘시’의 의자에 앉은 ‘사유’의 물살이 시원하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
  찌든 생활의 때를 말끔하게 씻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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