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추억
정 연 덕
종일토록 기다리다
돌아섰던 바닷가 나뭇가지에
당신을 묶어 놓습니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도요새처럼 휘잡던 날개를 접습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리움
가시처럼 꽂힌다 해도
더는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턱을 괴고 수평선을 보며
멈춰 섰던 오랜 날들 가슴속에 묻고
하나씩 하나씩 숨겨두고 가렵니다
아파하던 4월의 바람이
문득 떠오를 때쯤 흔들리던 나무도
키가 크고 숲을 이루겠지요
<이선의 시 일기>
정연덕의 「물렁한 추억」은, 잘 익은 홍시처럼 맛있게 숙성하였다. 관념을 완벽하게 배제한 시적 완성도를 본다. 위의 시에서 기승전결을 살펴보자. ‘당신을 기다리던 나무(1연)- 날개를 접는다(2연)- 가시처럼 돋는 그리움(3연)-가슴속에 숨겨둔다(4연)- 나무가 숲을 이룬다(5연)’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그 시적 정서는 그리움과 아픔이다. 그렇다면 1연의 ‘당신’은 ‘그리움’과 ‘아픔’이다. 그리움과 아픔은 ‘나무’와 ‘숲’을 이루도록 키워온 시인의 내면의 고뇌다. 고뇌와 불행감도 밖으로 꺼집어내서 분류하고 분석하면 모두 ‘이유’가 있다. 시인은 프로이드를 공부하지 않아도 프로이드적 정신기법의 시를 쓴다. 자신의 무의식에 숨어 있는 ‘그때 거기’의 과거상처를 자가치료한다. 전 과정의 과업을 완수한 시인과 화자에게 주는 수료증은 독자의 감동과 카타르시스다.
위의 시를 내용 중심으로 네 가지 방향에서 해석하여 본다. 1연 3행의 ‘당신’을 ‘어떤 대상’으로 치환하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시로 분류된다. 목적시, 연애시, 자유시, 성장시 등. 무한한 공간적, 시간적, 관념적 해석이 가능하다. 시가 확장되어 열린다.
첫째, 1연의 ‘당신’에 ‘이데올로기’를 대입하여 보자. 그 대상이 이데올로기라면, 관념을 모두 익힌 목적시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상’과 ‘상실한 꿈’을 이야기하면서 전혀 관념적이지 않다. 실망과 배반을 먹고 성장하는 나무와 숲.
둘째, 1연의 ‘당신’을 ‘학생 운동의 희생자’라고 생각하여 보자. 만약 그 대상이 장렬하게 전사한 학우라면. 그 잔인한 4월을 배경으로 하였다면 이보다 완성도 있는 참여시를 볼 수 없다. 비련의 젊은 학생들의 피 한 방울, 한 방울로 만든 오늘날 민주주의의 나무와 숲.
셋째, 1연의 ‘당신’을 연애의 대상인 ‘연인’으로 해석하여 보자. 성장시기에 통과의례처럼 겪던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를 벗어나서 성숙한 사랑의 완성과 미완의 사랑을 품는 40대 중년을 본다. 아픔과 슬픔도 승화시킨 사랑.
넷째, 1연의 ‘당신’을 ‘정신적 숭배대상’으로 해석하여 보자. ‘사르트르’나 ‘니이체’ 등 인물을 대입하여 보자. 인격체를 향한 니이체적 고뇌의 시작이다. 초인을 꿈꾸던 짜라투스트라의 꿈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직시하는 지식인의 고민이 시작된다. 정신의 선봉에서 지휘하던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들의 혼합체가 허물어진다.
위의 시에서 1연의 ‘나무’와 ‘당신’은 묶어버린 하나다. 혼연일체다.
위의 시에서 5연의 ‘바람’과 ‘나무’와 ‘숲’은 하나다. 혼연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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