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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 제목 같은 / 이 승 하
2018년 12월 25일 15시 13분  조회:815  추천:0  작성자: 강려
옛날 영화 제목 같은
 
                                                  
이 승 하  
 
 
 
  화려한 영상매체의 시대에 나 참 무미건조하게 살고 있다네
  파격을 모르고 파국을 모르고 파탄을 모르고
  어제는 무사분주 오늘은 무사안일 내일은 무사태평
 
  그 시절에는 영화 수입 업체의 직원도 시인이었다
  ‘수영장’(La Piscine)을 ‘태양은 알고 있다’로 바꿀 줄 아는 감각을(태양이 알기는 뭘 아는가!)
  ‘여상속인’(The Heiress)을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로 바꿀 줄 아는 상상력을(신파의 극치가 사람을 울려!)
  소설가도 소설의 제목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붙이거늘
 
  나 어느새 산문의 시대에 산문 같은 시를 쓰고 있다네
  운율을 잃고서 좌충우돌
  압축미를 잊고서 횡설수설
  때로는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일삼았네
  시란 결국 말을 갖고 노는 말놀음인데
  나, 말을 학대하고 있었네 매질하고 있었네
  먹을 것 제대로 주지도 않고 잘 달리기만 바랐던 것
 
  ‘보니 앤 클라이드’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푸치 캐시디 앤 더 선댄스 키드’를 ‘내일을 향해 쏴라’로 바꿔 붙이는 실력
  나 이제부터라도 역설과 상징을, 아이러니와 알레고리를, 다의성과 모호성을!
  말을 잘 부릴 줄 모른다면 시는 이제 그만 쓸 것!!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한다. 짐짓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걸듯이, 내레이션을 하듯. 그러나 진지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한다. 반어적이고 역설적이며 아이러니한 기법이 이 시의 기교다.
 
먼저 제목을 살펴보자. 제목은 2음절로 된 4개의 단어로 조합되어 있다. 전혀 멋을 부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옛날영화처럼 말이다. 그것이 숨은 기교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제목에서 다 보여준다. <옛날 영화 제목 같은> 시에 대하여 역설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이승하의 시「옛날 영화 제목 같은」은 네 가지 관점으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1연은 현재적 관점, 잘 먹고 잘 사는 안일주의에 빠진 시인을 고발한다.
2연은 ‘옛날 영화 제목’을 내세운 사회적 관점, 시를 허투루 다루는 사회분위기를 고발한다.
3연은 ‘나’를 내세운 작가적 관점, 시창작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4연은 역설과 아이러니의 미래적 관점이다.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승하의 시는 시에 대한 반성적 국면을 갖게 한다. 시에 대한 자학적이고 니힐하며 시니컬한 접근법이, 반어적으로 시에 대하여 숙연함을 갖게 한다. 시를 가벼이 여겨온 것에 대한 미안함에 부끄러워진다.
 
처음 시를 쓸 때 ‘대중이 좋아하는 시를 쓸 것인지, 시인들이 좋아할 시를 쓸 것인지 결정하라’ 는 말을 선배 시인들에게서 듣는다. 마음속으로 시인도 좋아하고 대중도 좋아할 두 마리 토끼를 꼭 잡고야 말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면, 두 가지 다 놓쳐 버린 어정쩡한 시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승하가 시인으로서 이 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다만 수입영화의 제목을 원어와 달리 번안한 것에 대한 불평일까? 흥행을 앞세워 무지한 대중의 입맛에 맞춘 것에 대하여? 아니다. ‘기승전결’ 중 시의 ‘결’에 해당하는 부분은 4연이다. 결론적으로 ‘말을 잘 부릴 줄 모른다면 시는 이제 그만 쓸 것!!’ 이라고 시인들에게 경고한다.
3연을 살펴보자. ‘산문시, 운율을 무시한 시, 압축이 안 된 시, 설명 시, 내용과 알맹이가 없는 말놀음 시’를 고발하고 있다.
4연을 살펴보자. ‘역설과 상징, 아이러니와 알레고리, 다의성과 모호성’의 시를 이승하는 찬양하는 것일까? 진지하게 질문하여 볼 일이다.
 
21세기 한국은 시의 춘추전국시대다. 시의 범람과 시인의 범람시대에 살고 있다. 좋게 말하면 문화혁명이요, 나쁘게 말하면 시의 비전문가가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다. 다음 질문을 시인 자신에게 하여 보자.
 
나는 멜로영화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연애편지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일기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기록문이나 신문기사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연설문이나 논문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먼저 자족하는가?
 
자기가 쓴 시에 감동해서 먼저 울고 있는 시인을 자주 만난다
자기감정을 독자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하는 시인을 자주 만난다
동물, 꽃, 새, 물고기들의 생각을 다 아는 척하는 시인을 자주 만난다.
시인은 공감과 감동의 천재인가, 엄살꾸러기 거짓말쟁이인가?
시인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지고지순한 존재인가, 객관성을 잃은 변덕쟁이인가?
 
이승하 시인은 오늘의 시인들에게 질문한다. 정직하게 객관화된 대답을 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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