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권순자
저녁이 되면 낯선 마을 처마 밑을 맴돌지요
달빛이 휘영청 길을 열어주지만
길도 추워서 바람이 머물지 않지요
한 몸 뉠 곳 없는 고양이
주뼛주뼛 처마 밑을 서성거리지요
흙에 묻힌 역사는 다시 살아 되풀이 되는데
창백한 꽃들이 달빛에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데
어둠이 왜 자꾸 짙어만 가는지
꽃들의 잔기침 소리, 목울대를 흔드는 소리 어느 새
길고 가늘게 뻗어 밤안개로 피고 있어요
안개끼리 기침하고 있어요
뿌연 고통의 뿌리들이 사방에 퍼지고 있어요
새 가슴 두드리는 넝쿨손, 허우적허우적
반짝이는 푸른빛들이 날카롭게 허공을 조각내는 한밤
앞서간 순례자들이 뼈를 이어
하늘로 다리 놓고 있어요
* 권순자 신작시집 『순례자』중에서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길고양이의 삶을 여성적 화자의 목소리로 5연으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1-5연의 중심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연- 주뼛주뼛 처마 밑을 서성거림
2연- 흙에 묻힌 역사, 추위
3연- 어둠, 안개, 기침
4연- 고통의 뿌리
5연- 앞서간 순례자들의 뼈를 이어 하늘로 다리를 놓음
위의 중심어를 합성하면 길고양이의 삶이 한눈에 그려진다. 화자인 시인이 측은지심을 가지고 관찰한 길고양이의 삶이 재현된다.
위의 시 제목에서 말하는 ‘순례자’는 삶의 순례자가 아니다. 죽음의 순례자다. 험난한 삶을 살다가 희생된 길고양이들의 뼈(주검)들이 이어진 순례자의 행렬인 것이다. ‘결’ 부분의 아이러니한 내용이 이 시의 제목이 되었으며, 매력 포인트다.
길고양이는 야생의 상태에서 먹이가 부족하고 영역다툼이 심하여 4년 이상 생존하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보통 2년 정도 사는데 음식쓰레기 봉투를 없앤 뒤로 그나마 썩은 밥이나 생선도 먹을 수 없게 된 현실이다. 야생에서 들쥐나 메뚜기, 비둘기를 잡아먹고 산다. 이러한 때에 권순자의 야생 길고양이를 향한 애정과 관심에 주목하게 된다.
사실 길고양이의 삶은 위의 시 제목「순례자」처럼 따뜻한 삶의 터전이나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다. 고양이는 영역을 지키며 사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순례를 떠나지 않는다. 고양이는 주인이 떠나도, 그 자리를 지킨다. 장소를 옮겨 살지 않는 이유는 다른 영역에 침입하면 기존에 살고 있던 다른 고양이로부터 테러를 당하기 때문이다.
들개, 들고양이, 야생동물로 분류되어 밀렵의 대상이던 야생동물을 인간이 길들이면서 애완견, 애완고양이라는 사랑스런 이름으로 불린다. 요즘 개와 고양이는 현대사회의 소외된 개인에게 반려동물로서, 가족의 자격으로 인정받으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사라져가는 아프리카 야생동물은 인간의 큰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동물과 인간은 영원히 대치된 관계에서 벗어나 밀접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야생동물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경외의 대상, 노동력,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 재미있는 구경거리, 인간과 다른 독특한 특성으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다.
위의 시는 사회부조리,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인 인간에게 향하던 시선을 동물에게로 확장시키고 있다. 야생동물에 대한 시는 인간에게 정서적 위안을 준다. 인간은 외로움과 소외를 동물에게 위로 받으며, 동물은 인간에게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는 것을 믿는다. 아직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고양이들을 가족으로 따듯하게 맞아들여 반려동물로 받아 줄 날을 기대해 본다. 야생동물에 대한 보호와 관심과 애정은 그 사회의 문화의 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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