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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미궁에 빠지다'
2018년 12월 25일 20시 44분  조회:1301  추천:0  작성자: 강려
미궁에 빠지다
                                  
                                            고경숙
 
 
 
악마가 뜯어낸 창살사이로
반년 치 달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당신이 만지작거리던 모자 끝에
깃털 하나를 꽂기 위해 죽었던 새는
목통을 펄떡이며 바다를 건너왔다
타로 점을 보던 인도여자가
친친 독사를 감고 손을 뻗는 이곳은
교교한 달빛이 점거한 차가운 밀실
떠나면 다신 못 돌아올 것 같은 
안개 속 기억은 꿈의 예감과 일치해서이다
여명까지 불과 얼마를 남겨두고
창백해지는 당신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이지러졌다 피어나고 
불같이 타다 사그라드는
달의 칼날에 베인 수많은 팔목에서
붉은 장미꽃잎이 떨어진다
탄탄한 밤을 건너오며 수없이 죽고
수없이 되살아날
피보다 진한 바람의 체액
아무도 거두어 갈 수 없는 여기,
지상에 존재하고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그대와 내가 미궁에 빠질 수 있는 
영원한 은닉처.
 
 
 
 
 
 
 
<이선의 시 읽기>
 
 
고경숙의 시는 에로틱한 환타지와 언어의 폭력성이 거칠고 대담하다. 거친 사내의 호흡과 여인의 애욕이 꿈틀대는 드라마틱한 남녀의 절정의 장면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가장 솔직하고, 가장 예민한 태초의 몸의 언어다. 보들레르와 릴케가 꿈결처럼 만난다. 무속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강렬한 문장들은 속도가 빠르다. 다음 장면으로 독자를 급박하게 끌어들인다. 
 
위의 시는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짧고 강렬한 시행 속에 긴 드라마가 함축되어 있다. 연극의 구성요소 중에서 ‘절정’부분만 잘라 놓은 영화 같다. 그러나 그 짧은 ‘절정’ 속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1부는 <모자-깃털-새-타로점-인도여자-독사>라는 중심단어로 집약되는 <마술>과 <점>의 강렬한 이국적 이미지다. ‘낯선 당신’과 자유와 호기심, 상상력은 무한대의 환타지적 사랑을 꿈꾸는 랑의 전개와 발단부분이다. 
 
2부는 <달빛-밀실-안개-당신의 창백한 이마-성호>라는 중심단어로 집약된다. ‘이곳’이라는 ‘밀실’이미지는 장소를 나타내며 ‘객관화’를 실현한다. 사랑의 과정이 그려진다. 그달빛사랑처럼 열정과 냉정, 상처와 배반을 반복한다. 화자는 사랑의 마무리로 ‘성호’라는 ‘종교의식’을 집행한다. 화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보자. 자신이 저지른 사랑에 후회없이 당당하고자 하는 화자의 심리는 자신의 사랑을 숭고하게 격상시키려고 하는 고자 심리적 특징을 보여준다. 
 
3부는 <바람의 체액-미궁-영원한 은닉처>라는 단어로 집약되는 ‘재인식’ 단계다. 사랑의 결론이다. 그 결론은 ‘미궁’과 ‘은닉’을 선택하였다. 화자의 선택을 심리분석 하여 보면 ‘미궁’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결론을 피하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인의 무의식도 결론을 회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회피’보다는 적극적인 ‘사유’와 ‘철학’에 접근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철학적이거나 깨달음을 도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사랑의 본질이며 생리일 것이다. 
 
연애시는 부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궁금증을 일으키고, 섹시해야 한다. 또한 슬프고 아파야 한다. 멜로 드라마처럼. 연애의 방정식은 본시 짧은 만남, 긴 고통이다. 사랑은 아픈 거다. 
 
연애시는 감정에 빠지기 쉬운데 고경숙의 시는 미사여구가 없다. 사족을 붙이지 않고 문장을 힘껏 집어던진다. 직선적이고 솔직하다. 구조와 문장에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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