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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단에 드리운 초현실주의의 그늘 / 김철교
2019년 01월 16일 13시 16분  조회:1416  추천:0  작성자: 강려
퍼온 글임 ^^


우리 시단에 드리운 초현실주의의 그늘
 
김철교
 
 
1. 현대사회를 들여다보는 한 방법
 
요즘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은 초현실주의라는 깃발을 들지 않더라고 여러 가지 초현실주의 기법들을 활용하여 시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한 수단으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특히 초현실주의가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자유와 부정성, 현실 개념의 확대, 표현 영역의 확장, 인습타파에 의한 시어와 상상력의 확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의 진보를 초래하였다.”(고명수, 「초현실주의와 한국 현대시」, 『문학사상』 제34권 제9호, 2005, 241-248쪽.)
21세기에 들어와서 사회가 분노와 광기가 여기저기서 화산처럼 분출하고 그 파편들이 사회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우려한다. 이러한 정신병리적 현상을 예술이 민감하게 담아내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고 있는 황병승, 김경주, 최치언 등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징후들을 강하게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제기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는 아도르노(T. Adorno)의 예술론의 시각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은 현실의 어둠과 고통을 표현함으로써 자율성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우선 본고에서는 맨 먼저 초현실주의 기법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우리나라 시사(詩史)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한 시인들의 족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시인들 중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시와 극을 쓰고 있다고 밝힌바 있는 최치언(『극작수업III』, 재단법인 국립극단, 2013, 17쪽.)의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수록 된 시들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고통들을 드러내기 위해 초현실주의 기법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2. 시에 활용되고 있는 초현실주의 기법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훼방하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함으로써, 논리적인 이성, 기존의 윤리, 사회·역사적인 관례와 규범 및 미리 이루어지는 예견과 의도 등에 의한 통제와 제약을 거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 모두는 자동기술, 꿈의 세계 — 반은 의식적이고 반은 무의식적인 세계 — 및 심오한 마음의 상태에 대한 제약없는 표현 등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수용하였다.”(고봉준 외, 『문예사조』, 시학, 2007, 212쪽.)
초현실주의자들이 작품을 쓸 때 사용하는 주요 기법에는 자동기술, 무의식의 탐색, 데페이즈망(depaysement), 블랙 유머, 콜라주 등이 있다. 자동기술은 초현실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완전히 수동적으로 듣고 받아쓰는 것이다.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사회적 규약의 통제아래 놓이기 때문에 구속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해방은 말의 올무를 벗어나야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동기술을 통해 정신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자동기술법은,「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정의를 내렸던 것처럼,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통제가 사라진 상태에서, 감춰진 욕망을 일깨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습에서 벗어나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오생근, 『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 문학과 지성사, 2010, 63쪽.)
초현실주의자들은 즐겨 사용하는 자동기술법을 통해 무의식을 탐색해 나간다. “예술가들에게 구원처럼 눈에 띤 것이 ‘무의식을 외부로 표현’하여 ‘진실’을 보는 눈을 확장시키고 자본주의와 과학주의에 획일적으로 물든 정신의 병리성을 직면·치료하는 ‘정신분석’이다. (······) 무의식을 언어로 표현하고 성찰하게 도와 치유하는 정신분석과, 무의식을 선·형·색·소리·단어로 드러내 감상자의 정신에 충격·쾌감·각성을 주는 예술 활동 사이에는 은유적 유사성이 있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적 표현활동이 무의식에 감춰진 문제들을 은유적으로 드러내 인류를 병리상태에서 구원하는 활동이라는 새로운 의미와 활력을 지닌다고 본다.”(이창재, 「예술작품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프로이드의 꿈 작업과 초현실주의의 창조 기법을 중심으로」,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2008 여름호, 35-62쪽.)
초현실주의의 또 다른 핵심기법은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다. 관습적 사고에 충격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미술에 흔히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낯익은 물체를 원래 있던 장소에서 떼어내 뜻밖의 장소에 위치시키거나, 현실에서 양립 불가능한 사물을 한 그림에 나란히 위치시켜 ‘이상한 만남’을 만들거나,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사물을 혼합시키는 방법이다.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하면 무의식을 활성화시켜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자각되는 초현실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블랙 유머는 잔혹한 현실 속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경직된 사회 관습과 질서를 희화하는 반항의 한 형태이다. 현실의 일상적인 모든 관계를 뒤집어엎고, 인간사회에 편만한 모순들을 고발하며, 죽음과 시간마저 조롱한다.
콜라주 기법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작품들의 여러 일화들, 이야기들을 무작위로 조합하여 기존의 의미와 확장된 의미가 중첩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려 한다. 콜라주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관습적인 시선에는 엉뚱하고 파괴적이고 아이러니컬하게 보이지만, 역으로 현실에 나타난 모습들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3. 한국시단에서의 초현실주의 흐름
 
장이지는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은 거의 초현실주의 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초현실주의에 대해 논의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초현실주의 시나 초현실주의 시인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장이지,『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파』, 보고사, 2011.)
서준섭에 의하면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대략 세 가지 형태의 초현실주의 시 내지 시정신이 단속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을 선구자로 하여 이승훈, 이성복의 시로 이어지는 전통이 그 첫 번째 흐름이라면, 다른 하나의 흐름은 『동천』을 전후한 시기의 서정주의 시에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이후의 정현종과 『산정묘지』의 조정권의 시로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그 중간에 『대설남』의 김지하와 『게 눈 속의 연꽃』의 황지우가 위치하고 있다.”(서준섭, 「한국현대시와 초현실주의」, 『文藝中央』, 중앙일보사, 1993년 2월호, 423-437쪽.)
고명수는 앞의 글에서 이상, 삼사문학 동인(이시우, 신백수, 정병호, 한천), 조향, 김수영, 전봉건, 김종삼, 김차영, 이봉래, 성찬경, 김구용, 고석규, 김영태, 김춘수, 이승훈, 이성복, 함기석, 김혜순, 성귀수, 박서원, 이수명 등 최근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에게까지 초현실주의 시인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21세기 우리 시의 미래』(실천문학사, 2008)에서 1998년 이후 등단하여 한권 이상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 49명의 자선(自選) 시편들을 모아 5개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그중에 소위 미래파라고 명명된 그룹의 시인들은 김경주, 김근, 이근화, 황병승, 김언, 최치언, 김행숙, 유형진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미래파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 속한 시인들의 작품은, 유성호가 권말 해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합리적 해독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소통 자체를 불편하게 하면서 파편화된 의식과,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시단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한 사례들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요약하면, 이상과 조향을 필두로 삼사문학 동인들을 초현실주의 시인들로 분류하는데 일치를 보고 있으며, 이승훈, 이성복 등의 작품에서도 초현실주의 기법들을 활용한 자취를 많이 찾아내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하여 등단한 시인들 중에서는 최치언, 김경주, 황병승 시인들이 초현실주의 흐름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최치언의 시에 나타난 초현실주의 기법
 
최치언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밝히고 있는 『극작수업 III』(재단법인 국립극단, 2013)의 시창작과 관련된 부분에서,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 의해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언어를 깎듯 조합하면서 시를 만들어 가는 시인과, 언어를 결이 흘러가는 대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데, 자신은 후자에 가까운 시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술에 있어서 영감이란 세상이 감춘 비밀과 의미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선택받은 촉수이며, 무속인에게 신이 내리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기술적인 기법을 선호하며, 작품을 쓸 때 의식적 언어 조합보다 무의식의 흐름에 내 맡긴다고 한다.
최치언은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와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라는 시집 제목에서부터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 기법을 연상케 한다. ‘설탕’과 ‘치료’, ‘선물’과 ‘피’의 조합이 당돌하고, ‘피를 요구한다’는 서술은 생경한 느낌을 준다. 전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모여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시집 제목뿐만 아니라,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실린 시의 제목들, 「몰래몰래 흘러들어와 잠든 얼굴에 손톱이 돋던 날」, 「내 상처는 0킬로그램」, 「슬픈 검지」, 「아비규환 로맨스」 등에도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현실에서 도저히 양립 불가능한 것을 함께 위치시키는 만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최치언은 시인이면서 극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시 뿐만 아니라 그의 희곡들도 역시 무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부조리극이 대부분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전체가 하나의 부조리극으로 볼 수 있으며, 등장인물은 폭력적 지배자 혹은 아버지, 피해를 입고 있는 어머니와 그 자식들이다. 중심 개념들은 폭력, 분노, 죽음, 피, 검은 섹스 등으로 엽기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으며, 블랙 유머도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검은 측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함으로써 현대사회를 고발하고 그 가운데 위안을 찾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부분)
 
 
이 시에서 좌측과 우측의 양립하는 두 세계의 대립 국면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죽음을 통해 현실의 참상을 드러내고, 체제나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육체와 내면을 얼마나 잔혹하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준다.
좌측은 연필의 힘, 의사당의 순결 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 위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듣지마라, 보지마라고 강요하고 있다. 좌측의 말에 우리는 순진해졌고 그래서 결국 선한 꿈을 꾸지 못하게 된다.
우측에 있는 우리는 귀도 눈도 없이 계속 걸었고 또 우리끼리 싸우다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좌측이 준 선물은 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측이 모두 죽고 좌측이 우측을 모두 차지한 것이다. 어쩌면 좌측의 기만과 환상에 현대에 사는 우리는 모두 희생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를 도려내어 들을 수 없고, 눈알을 파내어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계속 듣고 보려고 한다. 시인은 현실의식 속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싸움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
비둘기가 지구에서 가장 먼 은하계를 통과할 쯤
턱주가리가 한 자쯤 튀어나온 누런 이빨의 신들이 둥글게 웃으며
엄마와 나, 여동생을 마중 나왔다.
나는,
___엄마, 저 바보 같은 놈들은 누구죠?
여동생,
___졸라, 힙합처럼 생겼네.
엄마,
___너희들의 아버지란다. 짠짜라짜.
___닥쳐!
(「날아라 짠짜라짜」 부분)
 
시인은 용트림하는 무의식을 그대로 시로 토해냄으로써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신적인 위치에 있다. 아버지는 혈육의 아버지의 이미지 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해오고 있는 무자비한 폭군의 이미지다. 의식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우리 무의식에서는 자유롭게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다. 블랙 유머의 형식을 빌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면, 폭력스러운 면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를 찔렀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누군가를 사정없이 찔렀다 광장의 후미진 골목에서
나는 그 누군가를 만났다 그의 안경알은 분수대의 햇살처럼 튀어 올랐다
 
나는 중얼거린다?
비둘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엄마는 그네에 앉아
자꾸 아득한 허공으로 발을 차셨다 나는 그 발길에 차이면서
“엄마, 제가 죽여 드릴게요. 다 죽여 드릴게요.”
 
튀어 올랐던 햇살이 그 누군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오른손으로 그는 내 멱살을 움켜잡았고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의 왼손에 들려 있던 과도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불쑥 통과해 버렸다
 
엄마는 허공에 발목만 남겨 놓고
지상으로 내려와 검은 아스팔트 위를 한들한들 걷는다
나의 중얼거림은 끝이 없고
“엄마, 제가 죽였어요. 다 죽였어요.”
 
콸콸 쏟아지는 붉은 피. 나는 누군가를 들쳐 업고
시립 매립지로 간다 이곳에선 죽은 이들과 죽어갈 이들이
나와 함께 묻혀 있다
 
나는 중얼거린다, 끊임없이
 
“죽일 수 있을 때 까지 다 죽이고 죽을 수 있을 때 까지 죽겠어요.”
 
정오는 조용히 부패하기 시작한다.
(「매장된 아이」 전문)
 
 
정오가 조용히 부패할 때 증오와 복수심에 휩싸인 아이가 누군가를 살해한다. “엄마에게 상처의 주체였고 엄마의 삶에 폭력을 휘두르던 배후의 누군가를 살해한다. (······) ‘죽일 수 있을 때까지 다 죽이고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죽겠어요.’라고 말하는 행위가 섬뜩한 충격을 주면서도 짙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건 엄마와 아이가 받았을 핍박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 결국 시인에게 현대라는 시공간은 어른들(당신들)에 의해 살해되는 아이들, 살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모든 것이 은밀하게 베일 속으로 사라지는 비밀의 세계다.”(함기석 권말해설, 「통념과 금기를 파괴하는 위반의 시학」, 143쪽.)
소위 지배자들, 권력자들, 탐욕자들에 의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의 역사는, 가까이는 일제시대, 김일성에 의한 6·25 전쟁, 전두환정권에 의한 광주민주화운동, 구원파에 의한 세월호 사건으로 그 흐름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최치언은 전두환 정권의 만행인 광주민주화운동을 가까이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작품을 통해 권위에 대한 반항 혹은 전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부정과 반항의 욕망이 시라는 형식을 빌어서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위에 제시된 「매장된 아이」를 비롯하여 이 시집에는 죽음, 피, 검은 성적 이미지 들이 가득하다. 때로는 부조리극 혹은 블랙 유머를, 때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무의식의 자동기술이라는 수단을 빌려 그대로 전면에 표출하고 있다.
 
봄나물 같은 여자아이들이 나팔랑거리며
줄넘기를 하고 있다
 
아가미로 호흡을 하며 나는 수족관 속을 거닌다
(······)
지느러미로 물을 쓸면서, 나는 수족관의 벽에 코를 짓찧는다
 
아, 저 사과 같은 여자아이들 속에
조용히 부푼 성기를 빠닷 세운 흑인 하나만 있다면
흑인의 성기를 여자아이들이
난간처럼 붙잡고
어디로든 내달린다면, 나는 좋겠는데
내 코가 수족관 유리벽을 불쑥 통과하고
물은 허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햇살이 조금 더 필요한 봄날 오후에
(「일생에 단 한 번」중에서)
 
 
‘나는 수족관 속을 걷고’, ‘내 코가 수족관 유리벽을 통과하고’, ‘물은 허공에 떠다닌다’. 전형적인 자동기술법을 통해 전개시키고 있는 시적(詩的) 현장이다. 이 작품에서는 ‘부푼 성기를 빠닷 세운 흑인’이 등장하는데 현실의 추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어 등장하는 ‘여자 아이들’은 ‘봄나물’이나 ‘사과’에 대비되는 순결함을 지녔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함께 제시되면서, 특히 검은 성적 이미지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드(id)에는 두 가지 본능이 있는데 하나는 성적 본능인 에로스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드는 슈퍼에고 통제아래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다. 이 시에서는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지배적인 이미지로 활성화되고 있다. 맑고 밝은 섹스보다는 어둡고 침침한 흑인의 성기로 대변되는 소위 검은 섹스가 지배자의 이미지와 연합하여 우리에게 폭군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최치언의 시집에서는 이러한 암울한 세계가 질펀하게 널려 있다.
「나는 너로부터 왔다」에서는 부친을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들먹이며 억눌려 있는 내적 고통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우리의 짓눌린 무의식을 표면위로 끌어 올리고 있다.
 
 
(······)
---붙타는 집에서 식사를 했어요.
어미와 내 뻐드렁니처럼 귀엽게 소풍가고 싶
다던 오빠들이 아비의 집에
불을 질렀거든요.
식은 음식은 주인을 몰라본다던 어미가
고깃덩어리를 씹었는데 아비의 금니가 박혀 있
는 거예요.
그건 금니가 아니라 어미의 탐욕이었죠.
어미는 킁킁킁 웃으며 난 너희들의 털을 뽑
고 새 스웨터를 입혀줄 거다. 팔팔 끓는 물을
준비하고
발을 물지 않는 노란 장화와 귀가 없는 우산도
준비할 거라고 넋 빠진
소리를 해댔죠.
(······)
---불타는 집은 더럽게 더웠죠.
우린 옷을 벗고 서로 몸을 비비며 춤을 췄어요.
흐물거리던 오빠들의 자지가 구렁이처럼
어미의 입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오빠들은 킁킁킁 떨며 어미의 입에서
자지를 빼들곤
내 보지 속에 정액을 퉤퉤 뱉어댔죠.
어차피, 그곳은 더럽게 더웠으니까요.
어때, 꼴리나요.
(「나는 너로부터 왔다」중에서)
 
 
이 시는 본문 배열도 난장(亂場)을 연상케하여 자동기술법에 의해 써진 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종의 광기를 느낄 수 있는 시다. 이러한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실험한 기법이다. 우리 인간 무의식의 세계에는 억눌려 있는 검은 성적 광기가 의식의 수준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슈퍼에고가 있기에 이 사회가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슈퍼에고의 억눌림에 의해 현대 정신병이 만연되고 있다고 해서, 이를 백일하에 노출한다면 이 세계는 동물의 아비규환 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기야 차라리 동물처럼 생존본능을 마구 휘두르며 살면서 적자생존하는 사회도 꼭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가져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최치언의 시들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5. 보다 정제된 초현실주의의 필요성
 
최치언의 두 권의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들이 여러 가지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분석대상으로 한『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담긴 시들의 경우 억압된 분노와 공포스러운 혐오감을 섞어 놓은 성(sex)과 죽음, 비참한 현실과 현대 사회의 폭력에 억눌려 있는 무의식이 활보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해방을 꿈꾸며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담기 시 40편 중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시가 16편, ‘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가 10편이 된다. 이들 중에 4편에서 ‘죽음’과 ‘피’가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22편의 시에서 ‘죽음’ 혹은 ‘피’가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도 흑인의 성기를 비롯한 검은 섹스의 이미지와 폭력에 관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현대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펼쳐지는 온갖 추행과 사회의 검은 모습들이 가득 차있는 시집이라고 하겠다.
최치언의 시들은 그의 희곡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부조리극 혹은 블랙 유머를, 때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엽기 드라마처럼 그대로 노출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치언의 작품에서도 소위 미래파 시인들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가독성의 문제와 완결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현승은 소위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파괴가 재미가 되면서 오랜 시간을 통해 구출된 시의 전통 전체가 간단히 저울 위로 올라갔다. 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장광설로 독자를 잃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시장에서 들려오는 시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현승, 「현대시와 미래파」,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404쪽).
또한 홍용희는 황병승의 시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시의 형식적 길이는 여기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무한대로 늘려도 무방하다. 어차피 청자를 배려하지 않는 자폐적인 발화이기 때문에 시상의 형식과 전개 역시 화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따라 전개하면 그만이다.”고 지적하고 있는데(홍용희, 「내국 망명주의자의 화법과 언어」, 『한국대표시집 50권』, 2013, 386쪽), 이 또한 최치언의 시에도 해당하는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동호가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지적하고 있듯이 최치언의 시들에서도 “혼란스러운 감정의 토사물들이 얼크러져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최동호, 「극서정시의 기원과 소통」, 『유심』, 51호, 2011. 2-12쪽). 소통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시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아무리 자동기술법에 의존한 무의식의 표출이라 하더라도, 일단 작품의 형태로 제시될 때는 의식의 검열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면, 보다 정제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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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현상 저 너머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4) 김철교(시인, 평론가 2019-06-20 0 2012
102 음악의 옷을 입은 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3) 김철교(시인, 평론가) 2019-06-20 0 1995
101 춤과 색과 음의 불협화속에 있는 은근한 질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2) 김철교(시인, 평론가) 2019-06-20 0 1941
100 그림으로 쓴 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1) 김철교(시인, 평론가) 2019-06-20 0 1944
99 [스크랩] [시문학 2011.9월호]詩文學신인상/ 김이교,심우기,고현석 2019-03-15 0 2319
98 헤르만 헤세가 쓴 <샘>지의 글 -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2019-03-13 0 2187
97 말라르메 2019-03-13 0 1970
96 앙드레 브로통 - 2019-03-13 0 2005
95 평론: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2019-03-13 0 2121
94 폴 발레리 - 노고 2019-03-12 0 2309
93 스티븐슨 상상력 2019-03-12 0 2213
92 T.S 엘리어트 2019-03-12 0 2212
91 에즈라 파운드 2019-03-12 0 2035
90 김춘수 무의미시 2019-03-12 0 2078
89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 2019-03-12 0 2245
88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초월주의> 2019-03-10 0 2369
87 보르헤스와 카발라 2019-03-10 0 2007
86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2019-03-09 0 1952
85 스페인 시인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고독과 고독의 대화 2019-03-09 0 1767
84 표현의 광란 / 프랑시스 퐁주 2019-03-07 0 1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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